한국의 韩민족은 조선의 조선민족과 하나의 같은 겨례로서 韩(조선)반도에서 유구한 력사를 기록하여 왔다. 고조선, 고구려, 발해등 력사에 대하여 지금 중국학술계와 한국학술계에서 많은 쟁의점이 있기때문에 이 방면에 대하여서는 언급하지 않더라도 이미 확인된 반도내의 삼한의 력사부터 신라, 백제, 가락, 왕씨고려, 리씨조선을 경과하여 적어서 이미 2000여년의 력사를 가지고 있다.
리씨조선 말기에 와서 조정은 일본, 청조, 로씨야등 주변 대국들의 싸움에 부대끼다가 1910년에 《경술국치》를 당하여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35년간 망국노의 슬픈력사를 겪기도 하였다. 이기간 많은 애국투사들이 중국에 망명하여 여러가지 투쟁형식으로 광복운동을 활발히 벌린 반면에 반도 본토에서는 또 많은 친일분자들이 배출되기도 하였다.
1945년, 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일본이 전패하게 되자 잃었던 땅은 되찾았지만 미국과 쏘련의 세력범위 쟁탈에 말려들어 반도는 그만 《한국》과 《조선》이라는 두 나라로 갈라지게 되였다. 그때로부터 한국과 조선은 같은 겨례이면서도 민족의 공동한 리익을 돌볼사이 없이 서로 자기의 상전국의 리익을 위하여 원쑤가 되여야만 하였다. 민족이 약소했기때문에 어쩔수 없이 당하게 된 또 하나의 치욕의 력사였다.
1950년, 반도에서 6.25전쟁이 일어나게 되자 그 전해에 금방 건립된 새중국 정부에서는 나라의 동북변경이 미국의 엄중한 위협을 느끼게 되였다. 이런 상황에서 새중국 정부에서는 한창 열기를 띤 대만수복 전역을 단연히 중단하고 군대를 돌려 조선에 파병하여 세계 초대강국인 미국과 정면대결하게 되였다. 그당시 한국의 리승만정권은 미국의 부축을 받아 건립된 정권이였기 때문에 미국의 동맹국 련합군에 편입되여 중국군과 대전하게 되였다. 이때로부터 한국과 중국은 서로 적대국가로 되였던 것이다.
1953년 휴전이후 한국 내부에서는 그칠새 없는 당파싸움으로 나라경제가 억망진창으로 붕괴의 변두리에 몰리게 되였으며 그렇다고 미국 어른들은 자기들을 위하여 엄청난 희생을 낸 한국 국민들에게 별로 혜택을 주지도 않았다.
그와 대조적으로 그당시 조선에서는 구소련과 중국의 지지에 힘입어 절대적 권위를 수립한 김일성 주석이 이미 안정된 나라환경에서 《천리마 운동》이라는 나라적 경제운동을 벌려 조선의 경제를 《세상에 부럼 없어라》하고 자랑할 정도까지 발전시켰다.
1962년 한국에서 쿠테타에 성공한 박정희 대통령은 비록 정치상에서는 군사적 독재통치를 실시하였지만 장기간의 간고한 모색을 통하여 한국의 경제를 살려내는 길을 찾아냈으며 《새마을 운동》과 같은 전민적 경제살리기 운동을 발기하고 대담한 경제개혁을 실행하여 한국의 경제를 성공적으로 발전의 궤도에 올려 놓았다. 지난세기 70년대부터 한국의 경제는 비교적 빠른 속도로 발전하게 되였는데 그때로부터 한국 국민들의 민족정서는 점차 열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1980년 5.18광주사건을 계기로 한국에서는 선후하여 전두환, 로태우를 대표로 하는 극단적인 군사적 독재정권이 련속 집정하면서 정치상에서 한시기 심한 진통을 겪기도 하였지만 1988년 성공적으로 서울 올림픽을 개최하면서 한국의 경제는 일약 세계 선진국 행렬에 들어서게 되였다. 한국 국민들은 세계에 대하여 진일보 인식하게 되였으며 이때로부터 한국 국민들에게서는 군사적 독재통치를 반대하고 전민적 참여정치를 제창하는 한국식 민주의식이 산생하기 시작하였다.
1991년 쏘련의 해체와 더불어 세계 사회주의 진영이 붕괴되고 랭전이 끝나면서 세계의 자본체제의 나라들에서는 전례없는 정치, 경제의 호황기를 맞이하게 되였다. 이런 세계적 대 기후에 힘입어 한국의 경제는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되였으며 한국 국민들의 민주의식과 민족정서는 전례없는 고조를 맞이하게 되였다. 세계의식이 크게 제고된 한국국민들은 자기민족의 약소함을 통절히 느끼게 되였으며 1990년의 독일통일에서 희망을 보아내고 반도의 남북통일에 대하여 더욱 관심을 가지게 되였다.
이와 반면에 조선에서는 엄중한 국제위기에 직면하게 되였다. 장기간 조선의 번영발전의 보장이였던 세계 사회주의 진영이 붕괴되면서 조선은 갑싼 에네르기와 생산자료 공급기지를 잃게 되였으며 조선산품을 수출할 국제 시장을 잃게 되였다. 1994년 김일성 주석의 서거를 계기로 조선에서는 암울하고 혹독한 《고난의 대행군》을 시작하게 되였다.
중국에서는 일찍 1966년부터 시작하여 10년을 지속된 문화 대혁명으로 하여 나라의 경제가 거의 붕괴의 변두리에 이르게 되였었다. 1976년 모택동 주석의 서거를 계기로 사인방이 잡혀 나오고 이미 타도되였던 등소평이 다시 복귀하게 되면서부터 1978년에는 정식으로 개혁개방 방침을 제출하고 나라의 대문을 세계에 향하여 서서히 열기에 이르렀다.
1989년에 천안문 학생사건이 일어나자 등소평은 중국 실정에 맞지않는 서방 민주사조를 과단하게 진압하면서 성공적으로 나라의 분렬을 방지하였고 성공적으로 세계적 사회주의 위기로부터 오는 거센 충격을 격퇴시켰다. 이리하여 이미 10년이나 탐색하여온 개혁개방의 대문을 더욱 자신있게 더욱 크게 열수있게 되였다. 효과적인 경제정책으로 10억 인구의 먹는 문제가 해결되자 중국에서는 더욱 대담하게 더욱 크게 경제개혁과 정치체제개혁을 동시에 진행하면서 경제비약의 고속도로를 수건하기 시작하였다.
랭전시기 중국과 한국은 40년간이나 서로 적대국가로 지내오면서 래왕이란 거의 없다싶이 되였었다. 랭전이 끝나고 중국에서 개혁개방을 실시하게 되면서부터 중국에서는 경제가 단시기내에 기적적으로 발전한 한국을 아주 신비하게 생각하였으며 그 발전비결을 몹시 알고싶어 하였다. 한편 한국인들은 여태까지 악몽과도 같은 존재였던 중공이 옆에서 서서히 부상하여 일어나는것이 두렵기도 하고 또 호기심도 나서 여러 방면으로 시탐하던 끝에 1992년 정식 수교하기에 이르렀다.
한중수교가 이뤄지면서 대량의 한국인들이 중국에 건너와 기업을 꾸리고 장사하게 되면서 중국에서 선진국 우대를 받으면서 재록신으로 떠받들기우는것이 한없이 즐거웠고 중국의 너무나 값싼 인건비에 한없이 즐거웠으며 중국의 너무나 방대한 시장에 한없이 즐거웠다. 그시기의 한국인들의 심정은 마치도 매장량을 가늠키 어려운 대형 금광이라도 발견한 심정이였을 것이다.
중국에 와서 자기민족의 우월감을 한껏 맛본 한국인들은 자연히 구세주의 안광으로 중국조선족 겨례들을 살펴보게 되였다. 자기들의 표준으로 대비해 보니 중국조선족 겨례들의 생활이 너무나 비참하다고 느낀 그들은 갖은 방법을 대여 중국조선족 겨례들을 한국에 건너가서 돈벌이 할수있게 조건을 마련하였다. 그때는 아직 중국이 WTO에 가입전이였으니깐 미국돈 한딸라에 인민페 10원까지 바꿀수 있었으므로 한국에 가서 일하여 가장 낮은표준으로 로임을 받는다 하여도 중국에서의 거의 10배에 해당되는 수입으로 될수있였다. 그후 중국조선족 겨례들의 한국에 건너갈수있는 정책성 제한이 많이 풀리고 기회가 많아짐에 따라 한국에 가서 일하는것이 중국조선족 겨례들의 가장 선호하는 치부도경의 하나로 되였다.
중국경제의 발전질량이 높아감에 따라 중국에서는 점차 외국 투자인들에 대한 요구가 높아졌으며 시장관리가 보다 엄격하여졌다. 그리하여 적은 투자로 또는 총명한 머리만 가지고 중국에 와서 크게 부자되여 보자던 많은 한국인들의 꿈은 박살나기 시작하였다. 중국은 필경 한국이 아니니깐 한국인들은 중국에 와서 많은 제한을 받아야만 하였던 것이다. 꿈이 깨진 한국인들은 자기들에게는 이렇게 큰 나라가 없는것이 한없이 원통하였을 것이다.
전례없이 팽창되여가는 민족의 정서에 만족을 주기 위하여 한국의 일부 소장파 학자들은 민족의 력사에서 가장 강성했던 시대를 찾게되였다. 당연히 고구려가 지목되였다. 그들은 갖은 방법을 다하여 고구려의 력사를 위대하게 부각하고 신비하게 미화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민족에게도 일찍 이렇게 강성한 시대가 있었다.》하고 민족의 자부심을 가질수 있었으리라. 심지어 일부 극단적인 한국인들은 앞으로 방법을 대여 옛고구려 땅을 중국으로 부터 되찾아와야 한다고 주장하기까지 하였다.
1999년 좌우, 원래 한국에 대하여 료해가 깊지못했던 중국의 일부 학자들은 한국의 급속히 팽창되여 가는 민족정서에 깜짝 놀라면서 부랴부랴 고구려사 연구를 시작하게 되였다. 이렇게되자 한국의 학자들은 더욱 긴장해 하면서 락후하던 중국이 놀라운 속도로 강대하게 부상해 일어나는데 대한 우려로부터 《중국이 이제 강대하게 되니까 자기의 전략적 수요에 의하여 동북아의 력사를 다시 쓰려 하는것이다.》라고 추측하게 되였던 것이다.
2002년, 한국학자들이 우려하던 일이 끝내 발생하였다. 그해 6월24일 중국 지식계의 주류신문인 《光明日报》에서는 《边众》이란 필명으로 《고구려 력사연구에서의 몇가지 문제에 대한 시론》이라는 제목의 문장을 발표하여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고구려 정권의 성질은 반드시 중원왕조의 제약과 지방정권의 관할을 받은 고대 변강민족 정권이라고 해야한다》. 그러면서 문장은 반도력사에서 왕씨고려의 국명은 전략적 목적으로 중국 고대 변강력사상의 고구려의 국명을 도용한것이며 그후의 리씨조선의 국명은 역시 전략적 목적으로 중국 고대 변강력사상의 기자조선의 국명을 도용한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관점은 즉시 한국 학술계의 드센 반발을 일으켰다. 서울대학의 이성규 교수는 강한 분개를 표시하면서 문장을 발표하여 제출하기를 《만약 고조선, 부여, 고구려와 발해등 력사가 모두 중국 소수민족 력사가 되여 <중화민족> 력사의 일부분에 편입된다면 가능하게 한국사는 중국에 흡수되지 못한 한갈래의 지류에 불과하게 되며 <중화문명>에 참여할 자격이 없는 야만적이고 락후한 군체의 력사로밖에 될수없다》. 심지어 한양대학의 한 교수는 문장을 발표하여 중국의 행위는《력사 제국주의》행위라고 질책하기까지 하였다.
한국 학술계의 반발에 대하여 가장 먼저 성원을 보낸 매체는 한국의 《조선일보》였는데 그들은 사설을 발표하여 중국을 직접적으로 공격하기를 《중국이 이렇게 하는 목적은 조선족이 거주하는 동북지구와의 관계를 다시 확정하고 거기에 근거하여 북한 지구에 들어갈 리유를 조작하려는 것으로서 고도의 전략의도가 숨겨져 있다》.
2003년 12월9일 한국고대사학회, 한국고고학회, 한국근현대사학회 등 17개의 학회에서는 서울 력사박물관에서 집회를 가지고 련합성명을 발표하여 중국에 엄정히 요구를 제출하였다; 《중국에서는 고구려사를 중국력사에 편입해 넣는 력사를 왜곡하는 행위를 즉각 중지해야 한다》.
2003년12월12일 한국의 25명의 국회의원들이 국회에 《중국을 돈촉하여 력사의 왜곡을 정지시킬 결의안》을 제출하면서 한국정부는 반드시 중국정부에 강력한 항의를 제출하여야 하며 조선과 손잡고 공동히 대응방안을 내와야 한다고 인정였다. 이 결의안은 기본상에서 한국 정부측의 긍정적 답복을 받았다.
2003년 12월13일 당시의 한국 국무총리 고건은 회의를 소집하고 중국이 동북지구의 고대사를 다시 연구하는 실정에 대처하여 한국에서도 《고구려사 연구센터》를 성립하여 고구려사에 대한 연구공작을 가강할것을 결정지었다.
이기간 한국 각지의 여러계층에서도 여러가지 형식으로 집회를 가지고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을 성토하였으며 인테넷에서는 두나라 누리꾼들의 쟁론이 갈수록 치렬하고 거칠어만 갔다. 그리하여 2007년에 와서는 중국 창춘에서 열린 제6회 창춘 동계아시안게임 쇼트트랙 여자 5000m 계주 경기에서 은메달을 딴 한국팀이 시상대에 《백두산은 우리땅》이라는 문구를 들고 올라서기에 이른것이다.
이것이 바로 전한시기 한국인들을 엄중하게 자극했던 중국《동북공정》사건이다. 소위의 《동북공정》이란 중국의 한 학술연구 항목인 《동북 변강력사와 현상황에 대한 계렬연구 공정》의 간칭이였다. 《중국 사회과학원》과 동북 3성에서 공동으로 련합하여 진행하였는데 17명의 전문가들로 령도기구를 구성하고 2002년 2월에 시작하여 5년이 걸렸으며 연구자금이 인민페로 약 1500만원이 투입되였었다. 기본종지는 《중국 동북변강 력사상의 의심되는 문제와 리론상의 어려운 문제를 연구》하는 것이였었다.
중국의 동북지구는 그 지리적 위치가 특수하고 자원이 풍부하여 자고로 중요한 전략적 의의를 가지고 있는 지구였다. 1949년 새중국 성립 초기에 중국의 동북 지구는 중요한 공업기지로서 중국의 경제건설을 포함한 여러 방면에서 극히 중요한 역활을 하였다.
그런데 중국의 개혁개방이 시작된이래 전반 나라경제의 급속한 발전속에서 중국 동북지구에서는 새로운 문제들이 잇따라 발생하였다. 례하면 광업도시의 자원고갈, 대량의 기업파산, 대량의 로동자실업, 경제장성속도 침체 … … 등이다. 이러한 형세하에서 중국정부에서는 《동북 로 공업기지 우대정책》을 제정하고 동북 로 공업기지를 신속히 부축하기 위한 효과적인 조치들을 전면적으로 연구하게 되였다.
《현실문제를 철저히 해결하려면 력사문제도 반드시 명확히 해야 한다.》는 많은 학자들의 의견에 의하여 중국정부에서는 여러부문의 론증을 거쳐 방대한 계렬 연구항목인 《동북 변강력사와 현상황에 대한 계렬연구 공정》을 비준하였다. 그당시 동북의 어려운 경제상황에서 연구경비를 자체로 해결한다는것은 많은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에 국무원의 비준을 받고 중앙재정에서 그 연구경비를 해결하여 주었던 것이다.
소위의 《동북공정》은 방대한 계렬 연구항목으로서 그의 연구범위는 중국 동북지구의 원시사회로 부터 시작하여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전반 력사였다. 많은 한국학자들은 중국의 소위의 《동북공정》은 주요하게 고구려의 력사를 대상하는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기실 고구려의 력사는 전반 《동북공정》의 한 부분일 따름이였다.
중국의 《동북공정》의 주요 책임자의 한사람이며 《중국 사회과학원 중국 변강사지 연구중심》주임인 厉声은 고구려사에 대한 중국 학자들의 최근 연구에 근거하여 다음과 같은 일련의 관점을 발표하였다:
고구려는 대략 기원전 37년 좌우에 건국되였는데 초기의 수도가 지금의 중국 辽宁省桓仁县五女山城이였다. 고구려 본신은 원래 유목민족이였는데 싸움에 능하였으며 력대의 중원정권과 조선반도 남부의 정권과 싸움이 빈번하였다. 강성기에는 동쪽으로 료동까지, 남쪽으로 지금의 조선 평양까지 지역을 넓혔다. 기원427년에 수도를 평양 대성산으로 옮겼다.
기원 668년에 당조군대와 신라군대가 남북협공하여 고구려를 멸망시켰는데 그후 전체 고구려 민족은 점차 중원의 당인이나 지방의 다른 민족에 융합되여 버렸다. 이것이 중국 력사상 유명한 “薛仁贵东征” 이다. 당조에서는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립하고 원래의 고구려 지역을 관리하게 되였다.
고구려의 옹근 700년 력사에서 400여년은 수도가 지금의 중국 경내에 있었던 것이다. 지금 중국의 많은 학자들은 여전히 고구려를 중국 고대 변강의 한 소수민족 정권으로 인정하는데 적어서 기원 427년에 수도를 평양에 옮기기 전까지는 론쟁할 나위도 없이 중국 변강력사의 일부분이라고 인정한다.
그런데 중국 송조때에 편찬된 《旧五代史·高丽传》이후의 많은 사서들 중에서는 고구려와 고려가 정확히 구분되여 있지 않으며 고구려와 200년후의 고려를 서로 혼돈한 경우가 많다. 비록 《明史》이후에 와서 다시 구분되여 있기는 하지만 근대에 와서 한국의 많은 학자들은 이런 혼돈된 중국사서의 기록들을 근거로 삼고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한 정권이라고 론증하면서 고구려는 고려와 마찬가지로 한국력사의 한부분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중국의 학자들은 대량의 력사자료들을 종합적으로 연구 분석한 기초상에서 지리위치, 가족, 성씨, 혈연관계 등 그 어느방면으로부터 찾아 보아도 고려왕과 고구려왕과의 그 어떤 계승관계를 찾아 볼수 없으며 원래 조선반도 남부의 신라의 장군이였던 고려태조 왕씨가 200여년 전의 중국 동북지구의 고구려를 계승할수 있었다는 그 어떤 합리성도 찾아볼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지금 중국 학자들을 가장 피동에 빠지게 하는 문제는 새중국이 건립된 초기에 중조 두나라의 특수한 정치관계로부터 출발하여 필요한 학술연구도 없이 전통인식에 의하여 고구려가 당연히 조선의 력사라고 인정되여 왔으며 그후 곽말약이나 범문란과 같은 주류 력사학자들의 저서에서도 고구려의 력사가 줄곧 세계사의 일부분에 편입되여 있었다. 그 당시에는 정치인소가 일체를 결정하였으므로 그 어떤 다른관점이 있을수 없었다. 그리하여 지난세기 60년대에 중조 두나라가 공동히 중국 동북지역에서 련합 고고발굴을 두번이나 진행하였었는데 발굴된 고구려의 문물을 모두 조선측에 넘겨 주었던 것이다.
고구려사 문제에 들어가서 조선과 한국은 언제나 고도로 통일된 태도를 취하였다, 그리하여 이번 고구려사 쟁론도 원래는 중국과 조선간의 력사문제로서 한국과는 나라적으로 아무런 상관도 없었지만 한국이 도리여 주인공으로 나서서 중국 학술계와 정면대결을 취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력사상 고구려사 문제를 가지고 제일먼저 중국과 시비를 건 나라는 한국이 아니라 지난세기 20년대 전후의 일본이였다. 그당시 일본은 조선반도를 성공적으로 병탄하고는 진일보로 중국의 동북지역을 넘겨 보면서 고구려사 문제를 가지고 영구점령의 리유를 만들려 하였던 것이다.
이상의 고구려사에 대한 관점은 중국의 《동북공정》의 주요 책임자의 한사람이며 《중국 사회과학원 중국 변강사지 연구중심》주임인 厉声이 중국 학자들의 고구려사에 대한 최신연구에 근거하여 발표한 관점이다.
고구려사에 대한 쟁론에 관하여 厉声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는 그들(한국의 유관 학자들)과 쟁론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원래의 학술연구 부서에 따라 연구를 진행해 나갈것이다》. 그는 비교적 락관하는 태도를 보이면서 이번 쟁론이 진일보 엄중해 지지는 않을것이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한방면으로 중국 학술계에서는 절때 주동적으로 쟁론을 일으키지 않기로 결정지었고 다른 한방면으로 한국의 대다수 학자들도 보편적으로 랭정을 지키고 있는 형편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비교적 영향력 있는 몇개 주류 학술단체에서는 고구려사문제 항의행사에 참여하지 않았던 것이다. 최근 《조선일보》의 한 기자는 한국측에서도 고구려사 문제에 대하여 반드시 랭정한 태도가 필요하다고 하였다.
중공 중앙당교의 张琏瑰교수는 이번에 고구려사 문제가 또다시 쟁론이 일게 된것은 주요하게 일부 한국학자들의 오해와 의심, 그리고 근거없는 추측때문이였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면서 张琏瑰교수는 계속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고구려의 력사문제는 순수한 학술문제이며 력사문제이다. 그런데 만약 이 문제가 고대 중조 변경문제로 번지여 가면서 오늘의 변경문제로까지 발전한다면 문제는 상당히 복잡해 지게된다》. 즉 고구려사 문제를 영원히 학술문제의 차원에 국한시키며 절대로 정치문제로 승급시키지 않는다는 립장이다.
张琏瑰교수의 관점에 의하면 고구려사 문제의 쟁론이 학술령역에서는 아주 정상적인 일이다. 그런데 만약 이 쟁론이 정치령역에까지 확대된다면 그때가서는 아주 위험하게 된다. 만약 지금 쌍방에서 모두 억제하지 못하여 일단 이 문제가 정치 층면에까지 올라가는 날에는 중한 량국관계에 극히 불리하게 된다. 그러면서 张琏瑰교수는 《동북아의 큰 국세에서 이미 조선의 핵문제, 일본의 군국주의 부활징조 등 아주 불온정한 인소들이 존재하였지만 중한 량국관계에는 아직까지 원칙적인 큰 분기가 없었으므로 많은 문제상에서 능히 호상 리해하고 서로 합작할수 있으리라고 확신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런데 한국과 조선에서는 일찍부터 고구려를 자기들의 옛조상의 나라로 숭배하여 왔으며 국제상에서도 이미 보편적으로 공인하고 있는 형편이였다. 력사의 진상이야 어떻던지간에 한국은 인젠 고구려와 절때 갈라질수 없는 존재로 되여 있었다. 만약 한국이 고구려를 잃는다면 그것은 세계에 향하여 자기는 조상이 누군지도 모르는 야만민족이라는것을 승인하는 것으로 되기때문에 이미 세계의 선진민족으로 자부하고 있는 한국으로서는 이런 수치를 절때 받아들일수 없었던 것이다.
이때로부터 한국사람들의 마음에서는 중국의 신화가 깨여지고 중국에 대한 적대감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먼저 인테넷에서 중한두나라 누리꾼들 사이에서부터 치렬한 쟁론이 벌어지게 되면서 한국사람들의 반중국 정서는 점차 전국의 범위에로 확대되여 나갔다. 사태의 엄중성을 느낀 중국의 학자들은 분분히 담화를 발표하여 중국이 고구려 력사를 다시 연구하게 된것은 순수한 학술문제로서 절때로 정치문제가 아니고 절때로 현실문제가 아니며 절때로 쟁론을 일으키지 않는다고 재삼 천명하게 된것이다.
그러나 이미 지대한 모욕감을 느낀 한국사람들은 중국에 대한 혐오감이 쉽게 없어지지 않았으며 중국이 력사가 길고 나라가 크다는 턱을 대고 한국을 업신본다고 인정하였다. 한국사람들은 갖은 방법을 대여 소위의 “중화문명”에 대하여 험담하기 시작하던 데로부터 점차“중화문명”의 뿌리가 원래는 한국이라고 억지부리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그무슨 한국에서 연구해본결과 공자도 알고보니 원래는 한국혈통이였고 리시진도 한국혈통이였으며 천문의는 한국에서 발명하였으며 활판 인쇄술도 한국에서 먼저 발명하였으며 심지어 갑골문도 기실 한국혈통의 사람에 의하여 만들어 졌다고 하면서 소위의 “중화문명”을 송두리채 몽땅 빼앗을 태세였다.
일이 이쯤 되자 장난치기 좋아하는 일부 중국 누리꾼들은 인테넷에 댓글을 발표하여 “한국에서 연구 고증한데 의하면 중국의 손중산도 원래는 한국혈통이였고 장개석도 원래는 한국혈통이였으며 모택동도 원래는 한국혈통이였다. 그리고 인류가 살고있는 이 지구도 알고보니 기실 한국에서 만든것이였다.” 하고 날조하면서 한국을 비꼬았다.
2008년3월14일 중국서장에서 분렬주의 폭도들을 진압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일찍부터 중국을 곱지않은 눈으로 보아온 서방의 매체들에서는 또다시 인권무기를 들고나와 중국을 맹렬히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의식형태 방면에서 언제나 서방과 고도의 일치성을 확보하여온 한국이였기에 중국에 대하여 통쾌히 보복할수 있겠다고 인정한 이런 절호의 기회를 놓힐 리유가 없었다. 한국의 여러 매체들에서는 일제히 중국에서 군대를 풀어 티벳 민주주의자들의 평화시위를 류혈진압했다고 보도하면서 여러가지 형식으로 중국의 소위의 독재주의 행위에 대하여 강력히 비난하였다.
2008년4월27일 북경 올림픽 성화봉송이 한국 서울구간을 지나는 기회를 타서 한국 각 계층에서는 제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으며 심지어 대통령까지 나서서 이번 기회에 중국에 대하여 한국의 일부 정치적 주장을 제출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그날 한국 서울에서는 올림픽 성화봉송을 에워싸고 중국의 감정을 크게 상하게 하는 사건들이 발생하였던 것이다.
2008년5월12일 중국사천문천에서는 8급의 대지진이 일어났다. 중국정부는 전국에 호소하여 전면 재해복구와 지원에 나섰으며 재해지구에 대한 채방과 보도에 대하여 세계에 완전개방을 실시하였다. 뒤이어 세계적으로 중국을 위문하고 중국을 지원하는 열조가 일게 되였다. 한국에서도 대통령을 포함하여 여러 지명인사들이 직접 지진피해지역을 찾아 위문하고 거금을 기부하였으며 한국의 지원봉사대도 지진피해지역에 파견되여 중국의 지진재해 구조를 돕게 되였다. 이렇게 되여 중국사람들은 국난속에서 한국의 선량함을 보아내고 한국에 대하여 아주 고맙게 생각하게 되였으며 한국에 대한 감정이 많이 좋아지게 되였다. 그런데 이렇게 가장 기본적인 인간성을 고험하는 관건시각에 책임지지 못하는 일부 한국의 누리꾼들은 인테넷에 또 가증스러운 댓글을 올려 “중국이 서장문제로 하여 천벌을 받았다”고 절규함으로써 많은 중국사람들의 지대한 분노를 야기시켰다.
2008년8월 북경 올림픽 개막식을 앞두고 한국의 SBS텔레비 방송에서는 국제 규례를 어기고 올림픽 개막식에 있게될 성황들을 앞당겨 일부 공개함으로써 또 한차례 중국사람들의 분노를 야기시켰는데 중국사람들 중에서는 신의없는 한국매체의 올림픽대회 중계권을 취소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목소리가 높아갔다. 이렇게 되여 8월8일에 정식 개막된 북경 올림픽대회 기간에 중국의 관중들은 한국의 관중들이나 한국의 운동원들에 대하여 어느정도 혐오를 느끼게 된것이다. 중국사람들은 한국사람들을 언제나 자고자대 할줄밖에 모르는 실속과 신용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인정하였다.
한국이 중국 민심으로부터 랭대를 받게 되면서 중국의 광대한 시장을 대상하고 중국에 와서 자리잡은 한국의 적지않은 대형기업들까지 그 영향을 받게되였다. 그리하여 중국에 와서 기업하면서 중국의 실정에 대하여 비교적 료해하고 있는 한국의 기업인들은 분분히 국내에 여러가지 형식으로 멧세지를 보내여 한국에게 있어서 중국이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가를 설명하면서 한국의 민중들과 누리꾼들에게 좀 자제해 줄것을 간곡히 요구하였다.
2008년8월25일 중국의 국가주석 호금도는 북경올림픽을 결속짔자마자 한국을 방문하게 되였는데 두나라 정상들은 두나라 관계를 “전략적 협조동반자 관계”로 부상시키기로 합의하였다. 이로부터 볼수있는바 한중 두나라 정부차원에서는 관계가 여전히 아주 정상적으로 발전하고 있는것이다.
전략적 차원에서 중국은 한국에게 있어서 기실 미국과 못지않게 중요한 존재이다. 한국도 중국에게 있어서 지구 안정을 유지하는데 아주 중요한 존재이다. 중한 민간에서 벌어진 어처구니 없는 일들이 인젠 막을 내렸으면 좋겠고 두나라의 정상관계에까지 영향주는 일은 절대로 없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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