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계전서(沙溪全書)제37권
의례문해(疑禮問解)-3
대렴(大斂)
관(棺) 속에는 요[褥]와 자리[席]를 쓴다.
[문] 지금 세속에서 관 속에 요와 자리를 펴는 것은 어디에 근거한 것입니까? 예경(禮經)에서는 상고할 수 없습니다. -이유태(李惟泰)-
[답] 《개원례(開元禮)》에 나오며,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의 대상조(大喪條)에도 나오네. 이것은 참람되거나 핍박하는 혐의스러움은 없는 것이니, 써도 괜찮을 듯하네.
○ 《개원례》의 대부사서인상대렴조(大夫士庶人喪大斂條)에 이르기를,
“관 속에 쓰는 도구 가운데 회(灰), 탄(炭), 침(枕), 석(席) 따위는 모두 미리 관 안에 설치한다.”
하였다.
관 속에서 대렴을 하는 것은 옛 제도가 아니다.
[문] 세상 사람들이 모두 관 속에서 대렴을 하는데, 이것이 과연 예경의 뜻입니까? -송시열(宋時烈)-
[답] 예경 및 구씨(丘氏)의 설에서 상고해 볼 수 있네. 관 속에서 대렴을 하는 것은 고례(古禮)가 아닐 뿐만 아니라, 관 속은 비좁아서 끈을 묶을 즈음에 공경스럽지 못한 일이 많게 되니, 결단코 해서는 안 되네. 다만 민가(民家)의 당실(堂室)은 항상 협소한 것이 걱정인바, 당의 서쪽에 관을 놓아두고서 또다시 동쪽에 염상(斂床)을 설치할 경우, 혹 비좁아서 놓기 어려울 수도 있네. 이와 같은 경우에는 부득이 관 속에서 대렴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네.
○ 《예기(禮記)》 상대기(喪大記)에 이르기를,
“임금의 상에 대렴을 하고자 할 때에는 소신(小臣)이 자리를 펴고, 상축(商祝)이 효(絞), 금(衾), 의(衣)를 펴 놓는다. 사(士)가 반(盤) 위에서 손을 씻는다. 사가 시신을 들어서 염할 곳 위에 옮겨 놓는다.[君將大斂 小臣鋪席 商祝鋪絞衾衣 士盥于盤上 士擧遷尸于斂上]”
하였는데, 이에 대한 소에 이르기를,
“‘소신이 자리를 편다’는 것은, 아래에는 왕골자리를 펴고 위에는 대자리를 펴되 조계(阼階) 위에 함께 펴 놓는 것으로, 대렴을 하는 데 쓰기 위한 것이다. 효, 금, 의 등을 펴 놓는 것은 소신이 펴 놓은 자리 위에 펴 놓아서 시신을 옮겨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사(士)’는 상축(商祝)과 같은 사람이다. 장차 시신을 들 것이므로 먼저 반(盤) 위에서 손을 씻는 것이다. ‘염상(斂上)’은 염하는 곳을 이른다.”
하였다.
○ 구씨(丘氏)가 이르기를,
“살펴보건대 이것을 보면 대렴을 관 속에서 하지 않는 것임을 잘 알 수 있다. 그런데 세속에서는 《가례(家禮)》의 권수(卷首)에 나오는 도(圖)가 주자(朱子)의 본뜻이 아님을 잘 모르고서 왕왕 그 설에 근거해서 관 속에서 대렴을 하는 경우가 있다. 이는 옛 예가 전혀 아니다. 생각해 보건대, 《가례》는 본디 《서의(書儀)》에 근본해서 지었는바, 대개 소렴과 대렴을 합하여 하나로 만들었다. 소렴 때에는 효를 펴기는 하나 묶지는 않는다. 그러다가 장차 관에 넣을 때에 이르러서야 묶는다. 사마온공(司馬溫公)이 옛사람들이 하는 대렴과 소렴의 제도에 대해서 알지 못한 것은 아니다. 이는 간편함을 따라 함으로써 재력이 없는 자들이 상을 치르기에 편하게 하고자 하여 이렇게 한 것일 뿐이다. 그러나 군자는 부모의 상(喪)을 검소하게 치러 온 천하 사람들이 모두 이롭게 되더라도 그렇게 하지 않는 법이다. 그러니 재력이 있는 자는 마땅히 《의례》에서 말한 것과 같이 하여야 한다.”
하였다.
막 죽었을 때 덮었던 금(衾)은 대렴을 할 때까지 쓴다.
[문] 복(復)하는 데 쓴 옷은 습렴(襲斂)을 할 때에는 쓰지 않는 것에 대해서 이미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막 죽었을 때 시신을 덮었던 금(衾)도 염습을 할 때 쓰지 않습니까? -송준길(宋浚吉)-
[답] 사마온공의 설에서 상고해 볼 수 있네.
○ 사마온공이 이르기를,
“살펴보건대, 《의례(儀禮)》 사상례(士喪禮)의 소(疏)에 이르기를, ‘대렴을 할 때에는 두 금(衾)을 모두 쓰는데, 하나는 아래에 깔고 하나는 시신을 덮는 데에 쓴다.’ 하였다. 그러니 막 죽었을 때 썼던 금을 대렴 때에 이르러서는 바로 아래에 까는 데 쓰는바, 치워 버리고서 쓰지 않는 것이 아니다.”
하였다.
대렴 때에는 변복(變服)을 한다.
[문] 대렴 때에 변복하는 절차가 《가례》에는 없는데, 분상조(奔喪條)에 이르기를, “또다시 대렴과 소렴을 할 때와 같이 변복한다.[又變服如大小斂]”고 한 것은 어째서입니까? 혹자는 ‘대(大)’ 자는 연문(衍文)이라고 의심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송준길-
[답] 《의례》 사상례에 의거하여 보면, 대렴과 소렴 때에는 모두 변복하는 절차가 있는바, 《가례》의 본조(本條)에서는 빠진 것이네. 분상조의 글은 연문이 아니네.
○ 《의례》 사상례에 이르기를,
“소렴을 할 때 주인은 단(袒)을 한다. 시신을 받들어서 당(堂)에 안치한다. 빈객에게 절을 한다. 자리로 나아가 염습을 한다. 대렴을 하려 할 때에는 주인 및 친한 자가 단을 한다. -정씨(鄭氏)의 주(註)에서는 대렴을 할 때에는 변복을 한다고 하였다.- 진흙을 바르기를 마치고 주인이 자리로 돌아와 염습을 한다.[主人袒奉尸侇于堂 拜賓 卽位襲 將大斂 主人及親者袒 卒塗 主人復位襲]”
하였다.
대렴을 마친 뒤에는 빈객에게 사례한다.
[문] 대렴을 마친 뒤에 빈객에게 사례를 합니까?
[답] 운운하였다. -위의 소렴조(小斂條)에 상세하게 나온다.-
대렴을 마친 뒤에는 영좌(靈座)를 고처(故處)에 설치한다.
[문] 대렴을 마친 뒤에 영좌를 고처에 설치하는데, 이른바 고처라는 곳은 어디를 가리키는 것입니까? -송준길-
[답] 대렴을 하려고 할 적에는 먼저 관 곁으로 영좌를 옮겨 놓으며, 대렴을 마친 뒤에는 다시 고처에 영좌를 설치하는데, 이른바 고처라는 것은 당(堂)의 한가운데를 가리켜 말한 것이지, 관(棺)의 앞을 이르는 것은 아니네. 당의 가운데에서 조금 서쪽에 관을 놓고 당의 가운데에 영좌를 설치하는 것이 올바른 예이네. 《가례회성(家禮會成)》의 ‘복령좌(復靈座)’ 주에 이르기를, “관 앞에 설치한다.”고 한 것과 《가례의절(家禮儀節)》에서 “관 앞에 놓는다.”고 한 것은 모두 옛 예의 뜻을 잃은 것이네. 이미 당의 서쪽에 관을 놓아두었는데, 영좌를 관의 앞에 설치한다면, 이것이 과연 고처에 영좌를 설치하는 것이겠는가.
성빈(成殯)을 할 적에는 모래를 덮거나 진흙을 바른다.
[문] 일반 사람들의 집에서는 빈궁(殯宮)에 화재가 발생할까 몹시 겁내어 사빈(沙殯)을 하거나 도빈(塗殯)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송준길-
[답] 예경을 보면, 군(君)과 대부(大夫)와 사(士)는 빈(殯)을 할 적에 모두 진흙을 쓰는데, 이는 화재에 대비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네. 사마온공은 칠관(漆棺)이 마르지 않았고, 또 남방의 땅속에는 개미가 많으므로 이 제도를 폐하고 쓰지 않으면서 편리한 데에 따라서 하였네. 지금 만약 화재가 날 것이 염려스럽다면 진흙을 칠하거나 모래로 덮거나 하되 편의에 따라서 하면 될 것이네.
○ 《예기》 상대기에 이르기를,
“임금의 빈에는 순(輴)을 사용하는데, 사방에 나무를 쌓되 관보다 높게 쌓고 모두 진흙으로 싸 바른다. 대부의 빈에는 관을 도(幬)로 덮어 서쪽 서(序)의 벽에 바짝 당겨 놓고 나머지 세 군데에 나무를 쌓아 흙으로 싸 바르되, 흙으로 싸 바른 것이 관에 겨우 미치지 못하게 한다. 사의 빈에는 관을 땅속에 넣고 임(袵)을 땅 위로 나오게 하며, 그 위에 나무를 쌓고 진흙을 싸 바른 다음 장막으로 덮는다.[君殯用輴 欑至于上 畢塗屋 大夫殯 以幬 欑至于西序 塗不曁于棺 士殯 見袵 塗上帷之]”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순(輴)’은 상구(喪柩)를 놓아두는 수레이다. 빈(殯)을 할 적에 상구를 순 위에 놓아둔다. ‘찬(欑)’은 모은다는 뜻인 총(䕺)과 같다. 순의 사면에 나무를 쌓아서 관의 위에까지 이르게 하고 진흙으로 모두 다 싸 바르는데, 나무를 쌓은 것이 집의 형태와 비슷하므로 ‘필도옥(畢塗屋)’이라고 한 것이다. 대부의 빈에는 순(輴)을 쓰지 않으며, 관의 한쪽 면을 서쪽 서(序)의 벽에 바짝 붙여 놓고서 나머지 세 면을 나무로 쌓되, 위쪽은 지붕의 형태로 만들지 않고 단지 관의(棺衣)로 덮기만 한다. ‘흙으로 싸 바른 것이 관에 겨우 미치지 못하게 한다.[塗不曁于棺]’는 것은, 천자와 제후의 경우에는 나무를 쌓은 것이 넓어서 관과의 거리가 먼 데 비해 대부의 경우에는 나무를 쌓은 안쪽이 협소하여 관과의 거리가 가까워서 싸 바른 것이 관에 겨우 미치지 못한다는 말이다. 사(士)는 빈을 할 적에 사(肂)를 파고서 관을 넣는데, 사(肂)는 바로 구덩이이다. 관을 구덩이 속에 넣되, 임(袵)을 써서 뚜껑을 봉합한 부분은 파묻히지 않고 오히려 밖에 있게 하는데, 임 이상의 윗부분은 역시 나무로 덮은 다음 진흙으로 싸 바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귀천(貴賤)을 따질 것 없이 모두 휘장인 유(帷)를 치며, 오직 조석(朝夕)으로 곡을 할 때에만 이 휘장을 걷는다. 휘장을 치는 것은, 귀신은 그윽하고 어두운 곳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하였다.
○ 《주자어류(朱子語類)》에 이르기를,
“선생께서 큰아들 숙(塾)을 빈(殯)할 적에 한천암(寒泉庵)의 서쪽에 하였는데, 땅속을 2척가량 파고 너비를 3, 4척으로 하였다. 구덩이 안에는 불에 구운 벽돌을 깔았고, 석회(石灰)로 겹겹이 발랐으며, 관목(棺木)의 바깥쪽에는 흙벽돌을 차곡차곡 쌓아 올렸다.”
하였다.
○ 《주자어류》에 이르기를,
“호백량(胡伯量)이 묻기를, ‘빈례(殯禮)를 행해야 합니까, 행하지 말아야 합니까?’ 하니, 주자가 답하기를, ‘이것은 다른 사람에게 물어볼 필요 없이 스스로 그 마땅함을 보아서 하면 되는 것이다. 지금 칠(漆)도 칠하지 않고 회(灰)도 바르지 않은 관을 쓰면서 벽돌이나 흙으로 에워싸려고 하는 것은 반드시 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하였다.
빈(殯)을 한 뒤에 주인의 자리는 북쪽을 상석(上席)으로 한다.
[문] 《가례》 위위조(爲位條)의 주에 이르기를, “주인은 상(牀)의 동쪽 전(奠)의 북쪽에 앉는다. 삼년복을 입는 여러 남자들은 그 아래에 앉고, 기년복과 대공복, 소공복 이하를 입는 사람들은 모두 남쪽을 상석으로 삼는다.”고 하였는데, 빈을 한 뒤에는 위차(位次)에 대해 말해 놓지 않았습니다. 이에 지금 사람들은 그대로 전(奠)의 북쪽 자리에 있으면서 남쪽을 상석으로 삼기도 하고, 동쪽 계단 아래로 가 있으면서 북쪽을 상석을 삼기도 합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제대로 된 것입니까?
[답] 빈을 한 뒤에는 시신을 넣은 상구(喪柩)가 있는 곳을 상석으로 삼아야 하네. 주인의 자리는 북쪽을 상석으로 삼고, 중주인(衆主人)의 자리는 북쪽으로부터 남쪽으로 차례로 앉는 것은 옛 예가 그런 것인데, 《가례》에서는 분명하게 말하지 않았으니 의심스럽네.
○ 《의례》 사상례에 이르기를,
“조석으로 곡을 한다. 부인은 당에서 자리로 나아가는데, 남쪽을 상석으로 하여 곡한다. 장부는 문밖에서 자리로 나아가는데, 서쪽을 바라보며 북쪽을 상석으로 한다. 외형제(外兄弟)는 그 남쪽에 있는데, 남쪽을 상석으로 한다.[朝夕哭 婦人卽位于堂 南上 丈夫卽位于門外西面北上 外兄弟在其南 南上]”
하였다.
○ 《격몽요결(擊蒙要訣)》에 이르기를,
“시신이 염상(斂床)에 있으면서 빈을 하지 않았는데 남자와 여자가 시신의 곁에 자리할 경우, 그 자리는 남쪽을 상석으로 삼는다. 이는 시신의 머리가 있는 곳이 상석이 되기 때문이다. 이미 빈을 한 뒤에는 여자의 경우에는 전과 같이 당 위에 자리하되 남쪽을 상석으로 삼으며, 남자의 경우에는 계단 아래에 자리하되 그 자리는 북쪽을 상석으로 삼는다. 이는 빈이 있는 곳이 상석이 되기 때문이다. 발인을 할 때의 남자와 여자의 자리는 다시 남쪽을 상석으로 삼는다. 이는 영구(靈柩)가 있는 곳이 상석이 되기 때문이다. 때에 따라서 자리가 변하는데, 여기에는 각각 예의 뜻이 있는 것이다.”
하였다.
영상(靈牀)에서 머리를 동쪽으로 두는 것은 잘못이다.
[문] 영상에 대해 《가례의절》에서 머리를 동쪽으로 둔다고 한 것은 어디에 근거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삼재도회(三才圖會)》에도 머리를 동쪽으로 두는 것으로 그려져 있는데, 모르겠습니다만 중국의 풍속이 으레 그런 것입니까? 아니면 《삼재도회》가 단지 《가례의절》에 의거해서 그려서 그렇게 된 것입니까? 이에 대해 잘 모르겠습니다. -지사(知事) 신식(申湜)-
[답] 영상에서 머리를 동쪽으로 두는 것은 옳지 않은 듯하네. 병이 들었을 때 머리를 동쪽으로 두는 것은 생기(生氣)를 받고자 해서 그러는 것이네. 죽은 뒤에는 염습할 때부터 모두 머리를 남쪽으로 두는데, 유독 영상에서만 머리를 동쪽으로 둔다는 것은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이네.
빈청(殯廳)에 오래도록 등(燈)을 걸어 놓는 것은 올바른 예가 아니다.
[문] 지금 세속에서는 초상 때부터 장사 지내기 전까지 모두 밤새도록 빈궁에 등을 매달아 놓는데, 모르겠습니다만, 예의 뜻이 그런 것입니까?
[답] 예경에 의거하여 본다면, 염습 때부터 대렴에 이르기까지와 계빈(啓殯)에서부터 발인에 이르기까지는 단지 행사(行事)하는 곳에서만 횃불을 붙여 밝혔다가 그다음 날 날이 밝으면 끄네. 빈궁에 오래도록 등을 걸어 놓는 것은 올바른 예가 아닐 듯하네.
○ 《의례》 사상례의 기(記)에 이르기를,
“이미 염습을 한 다음에는 밤이 되면 중정(中庭)에 횃불을 밝힌다. 그다음 날 날이 밝으면 횃불을 끈다.[旣襲 宵爲燎于中庭 厥明滅燎]”
하였다.
○ 《의례》 사상례에 이르기를,
“소렴을 할 때에는 밤이 되면 중정에 횃불을 밝힌다. 그다음 날 날이 밝으면 횃불을 끈다[小斂 宵爲燎于中庭 厥明滅燎]”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요(燎)’는 대초(大燋)이다.”
하였으며, 이에 대한 소에 이르기를,
“옛날에는 형초(荊燋)로 촉(燭)을 삼았다. 손으로 잡는 것과 대비하여 더 큰 것을 말한 것이다.”
하였다.
○ 《의례》 사상례에 이르기를,
“대렴에는 촉(燭)을 잡은 자가 찬(饌)의 동쪽에서 기다린다.[大斂燭俟于饌東]”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촉(燭)’은 초(燋)이다. 찬(饌)을 진설한 데 촉(燭)이 있는 것은, 당(堂)은 비록 밝더라도 실(室)은 오히려 어두우므로 쓰는 것이다. 횃불이 땅에 있는 것은 요(燎)라고 하고, 손으로 잡은 것은 촉(燭)이라고 한다.”
하였다.
○ 《의례》 기석례에 이르기를,
“조조를 할 때에는 밤이 되면 문안의 오른쪽에 요를 피운다.[朝祖 宵爲燎于門內之右]”
하였는데, 이에 대한 소에 이르기를,
“귀신은 어두운 것을 좋아하므로 밝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상구를 실은 수레의 동쪽에는 주인이 있고, 그 사이에는 부인이 있다. 그러므로 문의 오른쪽에 횃불을 피워 밝게 해 놓고서 곡을 하는 것이다.”
하였다.
[주D-001]이유태(李惟泰) : 1607~1684.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학자이다.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자는 태지(泰之), 호는 초려(草廬)이며, 유학 이서(李曙)의 아들이다. 본래 한미한 출신으로서 처음에는 민재문(閔在汶)에게 배우다가 김장생(金長生)과 김집(金集) 부자를 사사, 그 문하의 송시열(宋時烈)ㆍ송준길(宋浚吉)ㆍ윤선거(尹宣擧)ㆍ유계(兪棨)와 더불어 호서산림(湖西山林) 오현(五賢)의 한 사람으로 손꼽혔다. 김집이 천거하여 희릉 참봉(禧陵參奉)이 되었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뒤에 송시열과 송준길 등의 천거로 지평이 되고, 이후 집의, 공조 참의, 동부승지를 역임하였다. 현종 1년(1660)에 일어난 복제시비(服制是非) 때에는 송시열의 기년설(朞年說)을 옹호하였다. 그 뒤 1674년에 일어난 갑인예송(甲寅禮訟) 때 남인(南人)의 탄핵을 받아 영변(寧邊)에 유배되었다. 숙종 6년(1680)에 일어난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죄가 풀려 호군에 서용되었으나 숙종 초부터 사이가 벌어진 송시열과 그 계통 사람들의 미움을 받아 유현(儒賢)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한 채 불만 끝에 죽었다. 예학(禮學)에 뛰어나 김집과 함께 《상례비요(喪禮備要)》, 《의례문해(疑禮問解)》 등을 교감(校勘)하였다. 뒤에 소론(少論)에 의하여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으며, 문인들이 고향에 금산서원(錦山書院)을 세워 제향하였다. 저서로는 《초려집(草廬集)》이 있다.
[주D-002]개원례(開元禮) : 당(唐)나라 현종(玄宗) 개원(開元) 19년에 장열(張說)이 《현경례주(顯慶禮註)》의 내용이 앞부분과 뒷부분이 서로 달라 이를 절충하여 당례(唐禮)로 삼아야 한다고 아뢰자, 황제가 조서를 내려 소숭(蕭嵩) 등으로 하여금 찬정(撰定)하게 한 책이다. 원명(原名)은 《대당개원례(大唐開元禮)》이다.
[주D-003]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조선 세종(世宗) 때 허조(許稠) 등이 편찬에 착수해 세조(世祖) 때 강희맹(姜希孟) 등의 수정을 거쳐 성종(成宗) 5년(1474)에 신숙주(申叔舟) 등이 완성한 예서(禮書)로, 길례(吉禮), 가례(嘉禮), 빈례(賓禮), 군례(軍禮), 흉례(凶禮)의 다섯 예 가운데에서 실행해야 할 것을 뽑아 도식(圖式)을 붙여 기술하였다.
[주D-004]송시열(宋時烈) : 1607~1689.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학자이다. 본관은 은진(恩津)이고 아명은 성뢰(聖賚)이며, 자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尤菴) 또는 우재(尤齋)이다. 아버지는 사옹원 봉사(司饔院奉事) 송갑조(宋甲祚)이다. 8세 때부터 친척인 송준길(宋浚吉)의 집에서 함께 공부하게 되어, 훗날 양송(兩宋)으로 불리는 특별한 교분을 맺게 되었다. 김장생(金長生)에게 나아가 성리학(性理學)과 예학(禮學)을 배웠고, 김장생이 죽은 뒤에는 그의 아들 김집(金集)의 문하에서 학업을 마쳤다. 효종조 이후 주요 관직을 두루 거치면서 정국을 주도적으로 이끌다가 기사환국(己巳換局)이 일어나 서인이 축출되고 남인이 재집권할 때 세자책봉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제주도(濟州道)로 유배되었으며, 다시 서울로 압송되어 오던 중 정읍(井邑)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는데, 조선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인물로 손꼽힌다. 저서로는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 《주자어류소분(朱子語類小分)》, 《이정서분류(二程書分類)》, 《논맹문의통고(論孟問義通攷)》, 《경례의의(經禮疑義)》, 《심경석의(心經釋義)》, 《찬정소학언해(纂定小學諺解)》, 《주문초선(朱文抄選)》, 《계녀서(戒女書)》 등이 있으며, 개인 문집으로는 전체 215권이나 되는 방대한 분량의 《송자대전(宋子大全)》이 있다.
[주D-005]구씨(丘氏) : 구준(丘濬)으로, 명(明)나라 사람이며, 호가 경산(瓊山)이고, 시호는 문장(文莊)이다. 주자(朱子)의 학설에 정통하여 《대학연의보(大學衍義補)》, 《가례의절(家禮儀節)》 등을 저술하였다.
[주D-006]상축(商祝) : 예를 익숙하게 잘 알아서 예식의 절차를 돕는 사람이다.
[주D-007]복(復) : 초혼(招魂)하는 것으로, 사람이 죽으면 곧바로 그의 옷을 공중에 내저으면서 ‘아무개 복’ 하고 세 번 부르는 것을 말한다. 혼이 옷을 보고 돌아와서 몸에 다시 붙어 살아나기를 바라는 뜻에서 행하는 절차라고 한다.
[주D-008]송준길(宋浚吉) : 1606~1672.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학자이다. 본관은 은진(恩津)이고, 자는 명보(明甫)이며, 호는 동춘당(同春堂)이다. 영천 군수(榮川郡守) 송이창(宋爾昌)의 아들이며,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의 사위이다. 어려서부터 이이(李珥)를 사숙(私淑)하였고, 20세 때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생이 되었다. 일생 동안 여러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대부분 관직에 나가지 않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송시열과 동종(同宗)이면서 학문 경향을 같이한 성리학자로 이이의 학설을 지지하였고, 특히 예학(禮學)에 밝아 일찍이 김장생이 예학의 종장(宗匠)이 될 것을 예언하기도 하였다. 문장과 글씨에도 능하였다. 숭현서원(崇賢書院) 등 여러 서원에 제향되고 문정(文正)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문묘(文廟)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어록해(語錄解)》, 《동춘당집(同春堂集)》이 있다. 특히 이 의례문해(疑禮問解)에는 송준길의 질문이 가장 많이 들어 있다.
[주D-009]정씨(鄭氏) : 후한(後漢) 때의 학자인 정현(鄭玄)을 가리킨다. 정현은 자가 강성(康成)이고, 고밀(高密) 출신이다. 마융(馬融)의 제자로, 《모시전(毛詩箋)》, 《삼례주(三禮註)》, 《주역주(周易註)》 등을 저술하여 한대(漢代) 경학(經學)의 집성자로 불린다. 특히 그가 낸 삼례 전체에 대한 주석은 일가의 학문을 이루었으므로, 당(唐)나라의 공영달(孔穎達)은 “예(禮)는 바로 정학(鄭學)이다.”라고까지 하였다.
[주D-010]순(輴) : 상구를 싣는 수레이다.
[주D-011]도(幬) : 관을 덮는 천을 말한다.
[주D-012]임(袵) : 관과 관 뚜껑의 모서리를 이어 붙이는 도구로, 나무를 나비 모양으로 깎아 끼울 수 있게 한 것이다. 옛날에는 관에 못을 사용하지 않고 임과 가죽끈으로 묶었다. 임의 모양새는 양쪽 끝은 크고 가운데는 가늘어서 나비 모양으로 생겼는데, 한(漢)나라 때에는 소요(小要)라고 했으며, 우리말로는 나비은장이음이라고 한다.
[주D-013]외형제(外兄弟) : 이성(異姓)의 형제를 말한다.
[주D-014]남쪽 : 이 부분이 원문에는 ‘面’으로 되어 있는데, 뜻이 통하지 않기에 중국 북경대학출판사에서 나온 이학근(李學勤) 주편(主編)의 《의례주소(儀禮注疏)》에 의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15]격몽요결(擊蒙要訣) : 1577년(선조10)에 율곡(栗谷) 이이(李珥)가 편찬한 책으로, 2권 1책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입지(立志)ㆍ혁구습(革舊習)ㆍ지신(持身)ㆍ독서(讀書)ㆍ사친(事親)ㆍ상제(喪制)ㆍ제례(祭禮)ㆍ거가(居家)ㆍ접인(接人)ㆍ처세(處世)의 10장으로 나누고, 사당도(祠堂圖)ㆍ시제도(時祭圖)ㆍ설찬도(設饌圖)와 제의(祭儀)의 출입의(出入儀)ㆍ참례의(參禮儀)ㆍ천헌의(薦獻儀)ㆍ고사의(告事儀)ㆍ시제의(時祭儀)ㆍ기제의(忌祭儀)ㆍ묘제의(墓祭儀)ㆍ상복중행제의(喪服中行祭儀) 등을 첨부하였다.
[주D-016]삼재도회(三才圖會) : 명(明)나라 왕기(王圻)가 찬한 것으로, 총 106권이다. 천문(天文), 지리(地理), 인물(人物), 시령(時令), 궁실(宮室), 기용(器用), 신체(身體), 의복(衣服), 인사(人事), 의제(儀制), 진보(珍寶), 문사(文史), 조수(鳥獸), 초목(草木) 등에 대해 도해(圖解)한 일종의 백과사전이다.
[주D-017]신식(申湜) : 1551~1623.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고령(高靈)이고, 자는 숙지(叔止)이며, 호는 용졸재(用拙齋)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며, 사헌부 집의, 경상도 안무어사(慶尙道按撫御史), 승지, 대사간, 대사헌, 충청도 관찰사, 강원도 관찰사를 역임하였다. 말년에는 지중추부사로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청주의 쌍천서원(雙泉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는 《의례고증(疑禮攷證)》, 《가례언해(家禮諺解)》 등이 있다.
[주D-018]사상례 : 이 내용은 기석례(旣夕禮)의 기(記)에 나오는바, 기석례의 잘못인 듯하다.
[주D-019]요(燎)는 대초(大燋)이다. : 이 부분이 원문에는 ‘燎火燋’로 되어 있는데, 중국 북경대학출판사에서 나온 《의례주소》를 보면, 화(火) 자는 대(大) 자의 잘못이라고 하였으므로 이에 의거하여 ‘燎大燋’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상상(殤喪)
삼상(三殤)에 치상(治喪)하는 예
[문] 《개원례》에 이르기를, “삼상(三殤)의 상(喪)에는 죽은 처음에 목욕시키는 것과 대렴(大斂)과 소렴(小斂)을 하기를 성인이 죽었을 때와 똑같이 한다. 장상(長殤)에는 관(棺)과 대관(大棺)이 있고, 중상(中殤)과 하상(下殤)에는 관이 있다. 영연(靈筵), 제전(祭奠), 진식(進食), 장송(葬送), 곡읍(哭泣)을 하는 자리[位]는 성인을 장사 지낼 때와 똑같이 한다. 그 포생(苞牲)과 명기(明器)는, 장상의 경우에는 성인의 상에 비해 3분의 2를 감하여 한다. 오직 복혼(復魂)을 하지 않으며, 반함(飯含)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절차를 밟아 장사를 치르고 난 다음에는 신주(神主)를 세우지 않는다. 우제(虞祭)를 지내고 나서는 영좌(靈座)를 제거한다.” 하였습니다. 이 예는 오늘날 세상에서 쓰지 않습니까? 아니면 혹 달리 근거할 만한 예가 있는 것입니까? -승지(承旨) 홍방(洪霶)-
[답] 모든 상상(殤喪)에 대해서 신주를 세우지 않는 것은 정자(程子)와 주자(朱子) 이전의 일이네. 《가례》를 보면, 8세부터는 모두 신주를 세웠네. 조석으로 전을 올리고 상식을 올리는 것과 우제를 지낸 뒤에 궤연(几筵)을 철거하는 것은 모두 《개원례》에 의거하여 하고서 조묘(祖廟)에 부묘(祔廟)하는 것이 마땅할 듯하네.
[주D-001]삼상(三殤) : 장성하기 전에 일찍 죽는 것을 상(殤)이라고 하는데, 16세부터 19세 사이에 죽은 경우에는 장상(長殤)이라고 하고, 12세부터 15세 사이에 죽은 경우에는 중상(中殤)이라고 하고, 8세부터 11세 사이에 죽은 경우에는 하상(下殤)이라고 한다. 이 삼상에 따라서 각각 상복과 상기가 달라지며, 8세 이전에 죽은 사람에 대해서는 복을 입지 않는다.
[주D-002]대관(大棺) : 관 가운데 가장 바깥쪽에 있는 관을 말한다. 임금의 관은 세 겹으로 되어 있는데, 가장 바깥쪽에 있는 관을 대관이라 하고, 그 안쪽에 있는 것을 촉(屬)이라 하고, 가장 안쪽에 있는 것을 벽(椑)이라고 한다. 《예기》 상대기(喪大記)에 “군(君)의 관(棺)은 대관(大棺)이 8촌(寸)이고, 촉(屬)이 6촌이고, 벽(椑)이 4촌이다. 상대부(上大夫)의 관은 대관이 8촌, 촉이 6촌이다. 하대부(下大夫)의 관은 대관이 6촌, 촉이 4촌이다. 사(士)의 관은 관이 6촌이다.” 하였다.
[주D-003]포생(苞牲) : 포(苞)는 갈대로 엮은, 어육(魚肉) 등을 담아 두는 데 쓰는 용구다. 포생은 희생(犧牲)을 포에다 담아 두는 것을 말한다.
[주D-004]명기(明器) : 명기(冥器)로, 장사 지낼 적에 함께 묻기 위하여 만든 기물이다. 일반적으로 나무나 대나무, 흙 등으로 만든다. 송(宋)나라 이후로는 종이로 만든 명기를 많이 썼다.
[주D-005]복혼(復魂) : 죽은 사람의 혼백을 부르는 것으로, 사람이 죽으면 곧바로 그의 옷을 공중에 내저으면서 ‘아무개 복’ 하고 세 번 부르는 것을 말한다. 혼이 옷을 보고 돌아와서 몸에 다시 붙어 살아나기를 바라는 뜻에서 행하는 절차라고 한다.
[주D-006]반함(飯含) : 죽은 사람의 입속에 염을 하면서 보옥이나 돈, 쌀 등을 채워 넣는 것을 말한다.
[주D-007]홍방(洪霶) : 선조(宣祖) 때의 문신이다. 본관은 풍산(豐山)이고, 자는 경망(景望)이며, 호는 지계(芝溪)이다.
성복(成服)
대렴이 이미 지나갔더라도 그날 곧바로 성복해서는 안 된다.
[문] 지금 세속에서는 혹 4, 5일째 되는 날에 비로소 입관(入棺)을 하고서 그날 바로 성복하는데, 이것은 온편치 못한 듯합니다. 혹자는 말하기를, “성복한 뒤에 비로소 상식을 올리니, 만약 다시금 그다음 날이 되기를 기다린다면 상식을 올리는 것이 점차 지연되게 된다. 이 때문에 급하게 성복하는 것이다.” 하는데, 이 설이 어떻습니까? -정랑(正郞) 오윤해(吳允諧)-
[답] 양씨(楊氏)가 이르기를, “3일 만에 대렴을 하고서는 성복할 수 있으나, 차마 그 어버이를 죽은 사람으로 대우할 수 없으므로 반드시 4일째가 되어서야 성복하는 것이네. 비록 4일이나 5일이 지나서 대렴을 했다고 하더라도 남의 자식 된 자로서 차마 곧바로 성복하지 못하는 뜻은 3일이 지나서 대렴을 한 경우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반드시 그다음 날이 되기를 기다려서 성복하는 것이 인정과 예에 있어서 합당하네. 그러니 상식이 조금 지연된다는 이유로 갑작스럽게 성복해서는 안 되네.
상포(喪布)는 폭(幅)을 잇대어서 쓴다.
[문] 옛날에는 포(布)의 너비가 2척 2촌이었으나 지금은 포의 폭이 아주 좁은바, 반드시 폭을 잇대어서 써야 합니까? -강석기(姜碩期)-
[답] 옛날에는 포의 넓고 좁음과 승수(升數)에 모두 정해진 법이 있어서 그 너비는 반드시 2척 2촌으로 하였네. 그러므로 최의(衰衣)와 몌(袂)의 가로와 세로는 모두 2척 2촌으로 하였는바, 이는 반듯한 모양새를 취한 것이네. 우리나라의 포는 그 너비가 아주 좁아 1척 5, 6촌이 되는 것도 있고 1척 2, 3촌밖에 안 되는 것도 있어서 만약 폭을 잇대어 붙이지 않으면 상복을 입을 사람의 몸이 비대할 경우에는 입을 수가 없게 되며, 옷소매 역시 짧아서 모양새를 이루지 못하게 되네. 그러므로 반드시 폭을 잇대어서 쓴 다음에야 옷이 몸에 맞게 되고 소매가 손을 가릴 수 있게 되어서 가로와 세로를 반듯하게 하는 제도에 합당하게 되네. 혹자는 말하기를, “폭을 잇대는 것은 옛 제도가 아니니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데, 이는 꽉 막힌 의론이네.
모든 최복(衰服)은 밖으로 폭을 줄인다.
[문] 《의례》 상복(喪服)의 기(記)에 이르기를, “모든 최의(衰衣)는 밖으로 폭을 줄인다.[凡衰 外削幅]”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단지 삼년상의 상복에서만 밖으로 폭을 줄이고, 기년복이나 대공복 이하의 상복에서는 모두 안쪽으로 꿰매는 것입니까? -강석기-
[답] 최의는 밖으로 폭을 줄이고 하상(下裳)은 안으로 폭을 줄이는 것이네. 애당초 삼년복과 기년복과 대공복의 차이를 말하지 않았으니, 최복은 모두 밖으로 폭을 줄인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네.
참최복(斬衰服)의 중의(中衣)는 가를 깁는다.
[문] 최복의 안에는 베로 만든 심의(深衣)를 받쳐서 입는 것이 예입니다. 다만 심의의 제도는 마땅히 가를 기워야 하는데, 이것은 참복에 마땅치 않습니다. 어떻습니까? -송준길-
[답] 중의는 최복의 안에 있으니 비록 가를 깁더라도 괜찮네. 예경을 어찌 어겨서야 되겠는가.
관(冠)의 양(梁)에는 깃을 만든다.
[문] 관의 양에 먼저 종이로 만든 재료를 베로 싼 다음에 깃을 만드는 것입니까? 아니면 베로 깃을 만든 다음에 종이로 만든 재료에 싸는 것입니까?
[답] 종이에 풀을 먹여 재료를 만든 다음 5촌 2푼 반 너비로 재단하여 베로 싸고, 이어 그 위에다 접어서 세 개의 깃을 만들되 너비가 3촌이 되게 하고서 실로 꿰매어 붙이는 것이네. 세속에서는 이런 제도를 잘 몰라서 먼저 재료를 3촌 너비로 재단한 다음에 베로 깃을 만들어 그 위에 싸는데, 이것은 잘못된 것이네. 살펴보건대 치관(緇冠) 역시 종이에 풀을 먹여 재료를 만들어 8촌 너비로 재단한 다음, 그 윗부분에 길게 주름을 잡아 다섯 개의 양(梁)을 만드는데, 너비가 4촌이 되게 하는바, 여기에서도 그렇게 한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네. 또 《가례》의 본문에 의거하면, ‘베로 깃을 만들고서 싼다.’고 하지 않고 ‘베로 싸고서 세 개의 깃을 만든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먼저 베로 싸고 난 다음에 깃을 만드는 것임을 알 수 있네.
수질(首絰)
[문] 수질에 대해서 구준(丘濬)의 《가례의절》 및 《가례》의 보주(補註)를 보면, 모두 한 가닥의 끈으로 만든 것을 썼는데, 옳은 것입니까?
[답] 예경 및 주자의 주를 근거로 하여 보면, 소렴(小斂) 때의 수질은 한 가닥의 끈으로 만든 것을 쓰는 것이 마땅하며, 성복(成服)할 때의 수질은 두 가닥의 끈으로 만든 것을 쓰는 것이 마땅하네. 그런데도 구준의 《가례의절》 및 《가례》의 보주에서는 소렴 때와 성복 때에 모두 한 가닥의 끈으로 만든 것을 통용해서 썼는바, 이것은 아마도 따라 해서는 안 될 듯하네.
○ 《예기》 잡기(雜記)에 이르기를,
“소렴에는 환질을 한다.[小斂環絰]”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환질은 한 가닥으로 한다.”
하였으며, 이에 대한 소에 이르기를,
“어버이가 막 죽었을 때에는 효자가 관(冠)을 벗는데, 소렴을 할 때까지 머리에 꾸밈이 없어서는 안 되므로 이 환질을 두르는 것이다.”
하였다.
○ 《예기》 단궁(檀弓)에 이르기를,
“자최복을 입고 머리에 규질을 둘렀다.[衣衰而繆絰] -‘衣’는 음이 자(咨)이다.-”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규(繆)’는 맨다는 뜻인 교(絞)이니, 마(麻) 두 가닥을 서로 교차하여 묶는 것을 말한다. 오복(五服)에 매는 질은 모두 그러하다. 다만 조복(弔服)에 두르는 환질(環絰)은 한 가닥으로 한다.”
하였다.
○ 어떤 사람이 주자에게 묻기를,
“《삼례도(三禮圖)》에 그려져 있는 저질(苴絰)의 제도를 보면, 환질과 서로 비슷한 듯합니다. 근래에 요장(寥丈)이 그린 그림을 얻어 보았는데, 삼을 꼬아서 만든 새끼를 구부려서 하나의 둥근 테두리를 만들고는 서로 교차하는 부분을 가는 새끼로 묶어 고정시켰으며, 밑동 부분은 왼쪽에 드리우고 끝 부분은 안으로 접어 넣은 것 같았는바, 왼쪽으로 드리운 밑동 부분이 아래에 있는 제도와 서로 부합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니, 주자가 답하기를,
“말한 바를 다 이해하지는 못하겠으나, 아마도 요씨(寥氏)의 설이 근사한 듯하다.”
하였다.
참최복의 수질과 요질(腰絰)의 촌수(寸數) 차이
[문] 《가례》를 보면 참최복의 수질은 9촌으로 하고 요질은 7촌으로 하였는데, 무슨 뜻입니까? 그 상세한 내용을 들었으면 합니다. -송준길-
[답] 이것은 《의례》의 글과 다르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같은 것이니, 서로 참고해서 보는 것이 마땅하네.
○ 《의례》 상복(喪服)의 전(傳)에 이르기를,
“참최복의 저질(苴絰)은 삼을 한 움큼 잡아서 만드는데, 여기에서 5분의 1을 감하여 참최복의 대(帶)를 만든다. 자최복의 저질은 참최복의 대와 같은 분량의 삼으로 하며, 여기에서 5분의 1을 감하여 자최복의 대를 만든다. 대공복의 저질은 자최복의 대와 같은 분량의 삼으로 하며, 여기에서 5분의 1을 감하여 대를 만든다. 소공복의 저질은 대공복의 대와 같은 분량의 삼으로 하며, 여기에서 5분의 1을 감하여 대를 만든다. 시마복의 저질은 소공복의 대와 같은 분량의 삼으로 하며, 여기에서 5분의 1을 감하여 대를 만든다.[苴絰大搹去五分一以爲帶 齊衰之絰 斬衰之帶也 去五分一以爲帶 大功之絰 齊衰之帶也 去五分一以爲帶 小功之絰 大功之帶也 去五分一以爲帶 緦麻之絰 小功之帶也 去五分一以爲帶]”
하였는데, 이에 대한 소에 이르기를,
“저(苴)는 씨가 있는 삼이다. 색깔로 말하면 저라고 하고, 열매로 말하면 분(蕡)이라고 한다. 참최복은 모양새가 삼인 저와 같고, 자최복은 모양새가 모시인 시(枲)와 같다.”
하였다.
○ 《예기》 단궁의 주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질(絰)은 충실하다는 뜻으로 효자에게 충실한 마음이 있음을 밝히는 것이다. 마(麻)가 머리에 있거나 허리에 있는 것을 모두 질이라고 하는데, 그것을 구분하여 말하면 머리에 두르는 것은 질이라 하고, 허리에 두르는 것은 대(帶)라고 한다. 수질(首絰)은 치포관(緇布冠)의 규항(頍項)을 형상한 것이고, 요질(腰絰)은 대대(大帶)를 형상한 것이다.”
하였다.
○ 《의례》 상복의 주에 이르기를,
“정씨(鄭氏)가 이르기를 ‘한 움큼에 가득 차는 것을 격(搹)이라고 한다. 격은 손으로 잡는 것이다. 보통 사람의 손의 둘레는 9촌이다. -대무지(大拇指)와 대거지(大巨指)로 잡는 데에 의거한 것이다.- 5분의 1씩 감하여 줄여 나가는 것은 오복(五服)의 수를 나타낸 것이다.’ 하였다.”
하였으며, 이에 대한 소에 이르기를,
“수질의 둘레를 9촌으로 하는 것은, 머리는 양(陽)에 해당되므로 양수(陽數)가 9에서 극(極)에 이르는 것을 취하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 자최 이하부터는 강쇄(降殺)하는 뜻을 취한 것일 뿐 형상하는 바는 없다.”
하였다.
참최복의 수질에서 삼의 뿌리 부분이 머리의 왼쪽으로 오고 오른쪽으로 오게 하는 데 대한 변(辨)
[문] 《가례》를 보면 참최복의 수질은 삼의 뿌리 부분이 이마의 왼쪽에 있으면서 끝 부분이 뿌리 부분의 위에 가해지고, 자최복의 수질은 삼의 뿌리 부분이 이마의 오른쪽에 있으면서 끝 부분을 뿌리 부분의 아래에 매도록 되어 있는 것은 무슨 뜻에서 그런 것입니까? -송준길-
[답] 《의례》의 주소(注疏)에 상세하게 논해 놓았으니 상고해 볼 수 있을 것이네.
○ 《의례》 사상례에 이르기를,
“저질(苴絰)은 삼의 뿌리 부분이 아래에 있으면서 이마의 왼쪽에 오도록 한다. 모마질(牡麻絰)은 삼의 뿌리 부분이 이마의 오른쪽에 오도록 하면서 위에 있게 한다.[苴絰 下本在左 牡麻絰 右本在上]”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저질’은 참최복을 입는 자가 두르는 질(絰)이다. 삼의 뿌리 부분이 아래에 있으면서 이마의 왼쪽에 오도록 하는 것은, 중한 상복의 경우에는 안에서 통할(統轄)되며 양에 근본해서이다. ‘모마질’은 자최복 이하를 입는 자가 두르는 질이다. 삼의 뿌리 부분이 이마의 오른쪽에 오도록 하면서 위에 있게 하는 것은, 가벼운 상복의 경우에는 음에서 근본하며 바깥에서 통할되어서이다.”
하였으며, 이에 대한 소에 이르기를,
“살펴보건대 《예기》 잡기에 이르기를, ‘어버이의 상에는 겉으로는 상복을 벗으나 안으로는 상복을 벗지 않는다.[親喪外除]’ 하였는데, 이에 대한 정씨(鄭氏)의 주에 이르기를, ‘상복을 입을 날짜가 이미 끝났으나 슬픔을 잊지 못하는 것이다.’ 하였으며, ‘형제의 상에는 겉으로는 상복을 입고 있으나 안으로는 상복을 벗는다.[兄弟之喪 內除]’ 하였는데, 이에 대한 정씨의 주에 이르기를, ‘상복을 입을 날짜가 아직 끝나지 않았으나 슬픔은 이미 줄어든 것이다.’ 하였다. 여기에서 안에서 통할되고 바깥에서 통할된다고 말한 것은, 역시 슬픔이 안에 있고 겉에 있는 데에 의거해서 말한 것이다. 그리고 양에서 근본하고 음에서 근본한다고 말한 것은, 역시 아버지는 아들에게 있어 하늘로서 양이 되고, 어머니는 아들에게 있어 땅으로서 음이 되는 데에 의거하여 말한 것이다.”
하였다.
○ 《의례》 상복의 소에 이르기를,
“삼의 뿌리 부분이 아래에 있으면서 이마의 왼쪽에 오도록 하는 것은, 아버지는 양(陽)이며 왼쪽도 양이며 아래는 안으로, 말하자면 애통함이 마음 안으로부터 발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머니를 위해 두르는 질의 경우에는 삼의 뿌리 부분이 이마의 오른쪽에 오도록 하면서 위에 있게 한 것과 상대적인 것이 된다.”
하였다.
수질에 갓끈을 매지 않는 것은 잘못이다.
[문] 지금 세속에서는 수질의 갓끈을 혹 매지 않고 드리우는데,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송준길-
[답] 갓끈을 매지 않는 것은 잘못으로, 예경의 뜻을 보면 분명하게 알 수 있네.
○ 《의례》 상복의 전에 이르기를,
“장상자(長殤者)를 위해서는 모두 대공 구월복을 입는데, 수질에 갓끈을 달며, 중상자(中殤者)를 위해서 대공 칠월복을 입는데, 수질에 갓끈을 달지 않는다.[長殤九月纓絰 中殤七月 不纓絰]”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수질에 갓끈이 있는 것이 중한 것이 된다. 대공 이상의 복에는 수질에 갓끈을 달고 소공 이하의 복에는 수질에 갓끈을 달지 않는다.”
하였으며, 이에 대한 소에 이르기를,
“수질에 갓끈이 있는 것은 수질을 단단히 붙들어 매기 위한 것이니, 관에 갓끈을 달아 관을 고정시키는 것과 같으며 역시 턱 아래에서 붙들어 맨다.”
하였다.
○ 《가례》에 이르기를,
“상관(喪冠)은 갓끈을 턱 아래에서 붙들어 매며, 수질의 갓끈은 관의 제도와 같이 만든다.”
하였다.
요질을 흩어서 늘어뜨리는 제도
[문] 요질은, 옛날에는 소렴을 마친 뒤에 3척을 흩어서 늘어뜨렸다가 성복을 한 뒤에 이르러서야 묶었습니다. 그런데 《가례》 성복조(成服條)에서 비로소 3척을 흩어서 늘어뜨린다고 말하였으며, 묶는 때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어째서입니까? -송준길-
[답] 일찍이 그것에 대해서 정도가(鄭道可)에게 물으니 그가 답하기를, “《가례》에서는 질(絰)의 제도를 말함을 인하여 흩어서 늘어뜨린다는 설을 추가로 기록한 것이 아니겠는가. 반드시 묶는 날에 흩어서 늘어뜨리지는 않을 것이니, 보는 자가 마땅히 상세히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예를 좋아하는 집에서는 한결같이 옛 예를 따라서 하는 것이 안 될 것이 없을 듯하다. 그런데 하필 묶으려고 할 때에 뒤늦게 흩어서 늘어뜨려서 《가례》의 본뜻을 어긴단 말인가.” 하였는데, 이 말이 옳은 듯하네.
효대(絞帶)의 제도
[문] 효대의 제도에 대해서는 각자가 자신들의 소견을 고집하여 어느 한 쪽을 따를 수 없습니다. 절충(折衷)하는 설을 들려주시기 바랍니다. -이유태-
[답] 이에 대해서는 《의례》와 《가례》에 상세하게 나와 있네. 그 제도는 긴 끈의 가운데를 접어서 고리를 만든 다음에 그 나머지 끈을 합하는 것이네. 이는 전체의 띠를 통틀어서 모두 끈으로 만드는 것이네. 그러므로 승대(繩帶)라고 하는 것으로, 바로 삼중사고(三重四股)이네. 정도가가 ‘단지 고리 부분만 끈으로 만든다.’고 한 것은 잘못이네.
○ 《의례》 상복 참최장(斬衰章)의 전에 이르기를,
“효대라는 것은 승대이다.[絞帶者 繩帶也]”
하였는데, 이에 대한 소에 이르기를,
“삼을 꼬아서 만든 끈으로 대를 만든다. 그러므로 효대라고 한다.”
하였다.
○ 또 《가례》에 이르기를,
“효대는 삼끈 한 가닥으로 만드는데, 크기는 요질의 반이다. 가운데를 구부려서 두 갈래로 만드는데, 각각 1척 남짓 되게 만든 다음 합한다. 그 크기는 요질과 같다.”
하였다.
○ 구씨(丘氏)가 말하기를,
“살펴보건대 주 문공(朱文公)의 어록(語錄)을 보면, 효대는 요질에 비해서 조금 작다고 하였으며, 《가례》에서는 크기가 요질과 같다고 하였다. 이제 조금 작은 것을 올바른 것으로 삼는다.”
하였다.
참최복과 자최복에 임(袵)을 붙이는 것이 다르다.
[문] 상복에 임을 붙이는 제도는 자최복이나 참최복을 모두 똑같이 합니까? -송준길-
[답] 《의례》 상복의 소에서 상고해 볼 수 있네.
○ 《의례》 상복의 소에 이르기를,
“참최복의 임(袵)은 앞쪽 임이 뒤쪽 임을 가리고, 자최복의 임은 뒤쪽 임이 앞쪽 임을 가린다.”
하였다.
부판(負版)과 벽령(辟領)과 최(衰)에 대한 양씨(楊氏)의 의절(儀節)은 잘못이다.
[문] 최와 부판과 벽령은 혹 방친(傍親)의 경우에는 쓰지 않는다는 말이 있는데, 과연 이것에 어떤 설이 있는 것입니까? -송준길-
[답] 양씨는, 방친에 대해서는 최와 부판과 벽령을 쓰지 않는 것은 주자 이후에 의논하여 정한 것이라고 여겼네. 이에 대해서 내가 살펴보건대, 《의례》에 나오는 최상(衰裳)의 제도는 오복(五服)이 모두 같고, 단지 승수(升數)의 많고 적음만을 가지고 중복(重服)과 경복(輕服)으로 나누었는데, 부모는 중하므로 승수가 적고, 아버지로부터 위로 올라갈수록 친연(親緣)이 감해지고 아들로부터 아래로 내려갈수록 친연이 감해지며, 형제로부터 옆으로 갈수록 친연이 감해져서 가벼워지므로 승수가 많다고 운운하였네. 《의례》에는 비록 경복에 대해서도 모두 최와 부판과 벽령을 제거한다는 글이 없으나, 《가례》를 보면 대공복에 이르러서 비로소 이를 제거하는데, 이는 후대의 현인이 더하고 줄인 뜻이네. 《가례》에 이르기를, “최와 부판과 벽령은 오직 아들이 부모를 섬기는 데에만 쓴다. 이외에는 모두 쓰지 않는다.”고 한 것은, 바로 양씨의 설이네. 지금 예를 행하는 자가 양씨의 설에 구애되어서 비록 조부모(祖父母) 및 처(妻)의 상이라고 하더라도 역시 이를 쓰지 않고 있는데, 이는 옛 예의 뜻을 크게 잃은 것이네. 정씨의 주에 이르기를, “앞에는 최가 있고 뒤에는 부판이 있고 좌우에는 벽령이 있으니, 효자는 애통해하고 슬퍼함이 있지 않은 곳이 없다.” 하였네. 그리고 구씨는 말하기를, “효자는 애통해하고 슬퍼함이 있지 않은 곳이 없다는 것은 단지 가장 중한 것만을 들어서 말한 것일 뿐이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자최 삼년복 이하에서 부장기복(不杖期服)에 이르기까지 모두 자최라고 이름하면서 그 제도를 달리하지 않았으니, 《가례》의 본주에서 말한 것을 따라야 함이 옳다.” 하였는데, 구씨의 설이 아마도 제대로 말한 것인 듯하네.
기년 이하의 최복에서 활중(闊中)을 재단하지 않는 것은 잘못이다.
[문] 《가례》의 권수(卷首)에 나오는 도(圖)에 이르기를, “최와 부판과 적(適)은 오직 자식이 부모를 위해서만 쓴다. 그 나머지 이를 쓰지 않는 상복의 경우에는 활중을 재단하지 않는다.” 하였는데, 이것을 따르는 것이 마땅합니까? -송준길-
[답] 살펴보건대 공복(功服)과 시복(緦服) 이하의 최복은 비록 부판과 벽령과 최를 제거하지만 활중은 자최복이나 참최복과 차이가 없네. 그러므로 양씨가 말하기를, “의복에 있어서는 길복(吉服)과 흉복(凶服)의 제도가 다르니, 최복의 영(領)은 길복의 영과 같지 않다.” 하였네. 도설(圖說)은 잘못된 것으로, 따라서는 안 되네.
장(杖)
[문] 상장(喪杖)을 짚거나 드는 의절에 대해 묻습니다.
[답] 예경에서 잘 갖추어 논해 놓았으니 상고해 볼 수 있을 것이네.
○ 《예기》 상대기에 이르기를,
“대부의 상에는, 대부는 임금의 명이 있으면 지팡이를 버리고 다른 대부의 명이 있으면 지팡이를 든다. 대부의 아내는 임금 부인으로부터 명이 있을 때에는 지팡이를 버리고 세부의 명이 있을 때에는 지팡이를 남에게 맡긴다.[大夫之喪 大夫 有君命則去杖大夫之命則輯杖 內子 爲夫人之命去杖 爲世婦之命授人杖]”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대부는 임금의 명이 있으면’이라고 한 곳에서의 대부는 다른 사람의 후사가 된 아들을 가리켜서 말한 것이다.”
하였다.
○ 상대기에 또 이르기를,
“죽은 자의 아들은 모두 지팡이를 사용하지만 지팡이를 짚고 자리로 나아가지는 않는다. 대부와 사는 빈(殯)에 대해서 곡을 할 적에는 지팡이를 짚고, 구(柩)에 대해서 곡을 할 적에는 지팡이를 든다.[子皆杖 不以卽位 大夫士哭殯則杖 哭柩則輯杖]”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자(子)’는 모든 서자(庶子)로, 대부와 사의 서자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지팡이를 짚고 자리로 나아가지 않는다’는 것은, 적자(嫡子)가 하는 일을 피하기 위한 것이다. 빈(殯)에 대해서 곡할 적에 지팡이를 짚는 것은 슬픔이 공경보다 승(勝)하기 때문이다. 구(柩)에 대해서 곡하는 것은 계빈(啓殯)한 뒤에 하는 것이며, 지팡이를 드는 것은 공경이 슬픔보다 승하기 때문이다.”
하였다.
○ 《예기》 상복소기에 이르기를,
“서자는 지팡이를 짚고 자리에 나아가지 않는다.[庶子不以杖卽位]”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이것은 적자나 서자나 모두 부모의 상이 있을 경우를 두고 말한 것이다. 적자는 지팡이를 들고 조계(阼階)에 있는 곡하는 자리로 나아갈 수 있으나, 서자의 경우에는 중문(中門) 밖에 이르면 지팡이를 놓는다.”
하였다.
○ 상복소기에 또 이르기를,
“아버지가 살아 계실 경우에는 서자가 아내를 위해서 지팡이를 짚고 자리에 나아가도 괜찮다.[父在 庶子爲妻 以杖卽位可也]”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시아버지는 적부(嫡婦)를 위해서는 상주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적자는 아내의 상에 지팡이를 짚고 자리에 나아갈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시아버지는 서부(庶婦)를 위해서는 상주가 될 수 없으므로 서자는 아내의 상에 지팡이를 짚고서 자리에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자리에 나아가는 것으로써 말한 것은, 대개 서자는 부모에 대해서 눌려서 비록 지팡이가 있더라도 이를 가지고 자리에 나아갈 수 없기 때문에 분명하게 말해 놓은 것이다.”
하였다.
○ 《예기》 상복소기에 이르기를,
“상주는 우제(虞祭)에는 방에 들어갈 때 상장을 짚지 않는다. 부제(祔祭)에는 당에 오를 때 상장을 짚지 않는다.[虞 杖不入於室 祔 杖不升於堂]”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우제는 침문(寢門) 안에서 지내므로 제사 지낸 뒤에 상장을 짚고서 방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 것이다. 부제는 조묘(祖廟)에서 지내므로 제사 지낸 뒤에 상장을 짚고서 당에 올라가지 않는 것이다. 이는 모두가 슬픔을 줄여 가는 절차이다.”
하였다.
○ 《예기》 잡기에 이르기를,
“장자의 상에 아버지가 지팡이를 사용하면 장자의 아들은 그의 위치에 설 때 지팡이를 사용하지 않는다.[爲長子杖 則其子不以杖卽位]”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기자(其子)’는 장자의 아들이다. 할아버지는 손자를 억누르지 않는다. 이는 장자의 아들 역시 지팡이를 사용할 수 있으나, 다만 할아버지와 같이 있는 곳에서는 지팡이를 잡고 혼자 자기의 자리로 나아가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하였다.
○ 잡기에 또 이르기를,
“남편이 아내를 위해서는 부모가 살아 계시면 지팡이를 짚지 않으며 빈객에게 계상(稽顙)하지 않는다.[爲妻 父母在 不杖 不稽顙]”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이것은 적자(嫡子)의 아내가 죽은 경우를 두고 이른 것이다. 부모님이 모두 살아 계시므로 그 예가 이와 같은 것이다. 만약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만 살아 계실 경우 어머니가 주상(主喪)이 될 수 없으면 아들은 아내를 위해서 지팡이를 짚을 수는 있으나, 다만 빈객에게 계상할 수는 없다.”
하였다.
○ 《개원례》에 이르기를,
“상장을 짚을 적에는 오른손으로 짚고 절을 할 경우에는 양손을 땅바닥 위에 나누어 놓고 무릎을 꿇은 다음 머리가 땅에 닿도록 한다. 절을 마치고 나서는 오른손으로 상장을 짚고서 일어난다. 지금 양손으로 아울러 상장을 들고서 절하여 마치 돈수(頓首)하는 것처럼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하였다.
저장(苴杖)을 여섯 마디로 하는 것은 잘못이다.
[문] 저장에 대해서 《가례》의 도를 보면 여섯 마디로 되어 있고, 《국조오례의》에도 여섯 마디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지금도 따라야만 합니까?
[답] 예경에 의거하면 단지 가슴 부위와 나란하게 할 뿐이지 여섯 마디로 한다는 글은 없네.
○ 《의례》 상복의 전에 이르기를,
“장(杖)의 높이는 복상(服喪)하는 자의 가슴과 나란하게 하며, 두 장은 모두 뿌리 부분을 아래로 한다.[杖各齊其心皆下本]”
하였는데, 이에 대한 소에 이르기를,
“살펴보건대, 《예기》 상복소기에 이르기를, ‘상장의 길이는 요질(腰絰)과 똑같이 한다.[杖大如絰]’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요질과 똑같이 한다는 것은, 상장은 가슴으로부터 아래에 있는바, 요질과 같은 곳에 있기 때문이다. 지팡이는 병든 몸을 부축하기 위한 것인데, 병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팡이의 높고 낮음을 가슴으로써 판단하는 것이다.’ 하였다. 뿌리 부분을 아래로 하는 것은 그 본성에 순응한 것이다.”
하였다.
부인(婦人)의 복제(服制)
[문] 부인의 복제는, 만약 예경에 따른다면 최의(衰衣)는 남자의 최의와 같고, 아래는 심의(深衣)와 같아 대하척(帶下尺)도 없고 임(袵)도 없습니다. 그런데 질대(絰帶)의 대소는 한결같이 남자와 같이 해야 합니까? 아니면 《가례》를 따라서 대수(大袖)와 장군(長裙)의 제도로 해야 합니까? 주자가 이른바 “부인의 상복은 남자의 최의와 같이 해서는 안 된다.”고 한 것은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강석기-
[답] 부인의 복제에 대해서는 《의례경전통해(儀禮經傳通解)》와 상복도식(喪服圖式)에 최의와 하상(下裳)을 잇대고 질(絰)과 장(杖)을 갖추는 제도가 아주 잘 갖추어져 있는데, 이는 필시 주자가 만년에 정한 정론(正論)으로, 《가례》와는 같지 않으나, 예를 좋아하는 집안에서는 이를 준행하는 것이 아주 좋네. 일찍이 정도가(鄭道可)에게 물어보았더니, 그의 뜻도 그러하였네. 《상례비요(喪禮備要)》에 갖추어 실려 있으니, 쓰는 자가 채택해 쓰는 데 달려 있을 뿐이네.
동자(童子)의 복제
[문] 동자의 복제도 마땅히 효건(孝巾)과 관(冠)이 있어야만 합니까? -송준길-
[답] 동자는 관을 쓰지 않으니, 어찌 효건 및 관이 있겠는가.
동자는 수질(首絰)이 없다.
[문] 동자 역시 수질이 있습니까? -송준길-
[답] 수질은 치포(緇布)의 규항(頍項)을 형상한 것이네. 동자는 관을 쓰지 않는데 어찌 규항이 있을 리가 있겠는가. 신의경(申義慶)이 말하기를, “부인은 비록 관을 쓰지 않지만 수질이 있으니, 동자 역시 있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는데, 부인의 수질에 대해서는 참으로 분명하게 말해 놓은 글이 있으나, 동자의 경우에는 서책에 드러나 있지 않으니, 신씨의 설은 의심스럽네. 정경임(鄭景任)은 말하기를, “동자의 수질에 대해서는 예경에서 상고할 바가 없다. 보내온 편지에서 이른바 ‘동자는 관을 쓰지 않는데 어찌 규항이 있을 리가 있겠는가.’라고 한 것은 간이하고도 명백하니, 공격하여 깨뜨릴 수 없을 듯하다.” 하였네.
최복(衰服)은 깁지 않고 고치지 않는다.
[문] 최복이 떨어지거나 혹 만든 제도가 잘못되었을 경우에 고치고자 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송준길-
[답] 예경 및 주자의 설에서 상고해 볼 수 있네.
○ 《예기》 상복사제(喪服四制)에 이르기를,
“저마(苴麻)의 최복은 깁지 않는다.[苴衰不補]”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불보(不補)’는 비록 떨어져도 꿰매지 않는다는 뜻이다.”
하였다.
○ 《주자대전》에 이르기를,
“이계선(李繼善)이 묻기를, ‘어제 상사를 만난 처음에 복제(服制)를 단지 세속의 풍습에 따라서 하였는데, 구차스럽고 간단하여 올바르지 않기에 몹시 마땅찮게 여겼습니다. 이제 옛 예에 의거하여 고쳐 입고자 하는데, 어떻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상복이 이미 다 만들어졌는데 중간에 고치는 것은 온당치 않을 듯하다. 그대로 입는 것이 더 낫다.’ 하였다.”
하였다.
조부모와 부모의 상이 한꺼번에 있을 경우 성복(成服)하는 순서
[문] 조부모와 부모가 함께 죽었을 경우에 염습하는 등의 제반 일은 할아버지를 먼저 하고 아버지를 나중에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성복하는 한 가지 절차만은 《통전(通典)》에 나오는 ‘아버지를 미처 빈(殯)하지 못하였는데 할아버지가 죽었을 경우에는 할아버지를 위해서는 기년복을 입는다.’는 설을 따라서 한다면, 아버지 상에 삼년복을 입는 제도가 중한 것이 되는바, 설령 할아버지가 먼저 돌아가셨다고 하더라도 할아버지에 대한 상복을 먼저 입어서는 안 될 듯합니다. 다만 제부(諸父)가 살아 계실 경우에는 결단코 그 부모상에 성복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4일째 되는 날의 뒤로 물려서 성복할 수는 없습니다. 그 사이의 예절은 실로 난처한 바가 있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강석기-
[답] 두 상이 하루 안에 발생하였다면 습렴(襲斂)하는 것은 마땅히 할아버지를 먼저 하고 아버지를 나중에 하여야 하네. 만약 아버지의 상이 하루나 이틀이라도 먼저 발생했을 경우에는 마땅히 먼저 돌아가신 분을 먼저 습렴해야 하네. 성복하는 것도 그러하네. 만약 할아버지의 상이 먼저 발생했다면 제부나 제형, 제손들은 승중(承重)한 손자에 구애되어 날짜를 물려서 성복해서는 안 되네. 그러나 종손(宗孫)은 부모상을 당하여 머리카락을 풀어헤치거나 머리카락을 묶을 때에 갑작스럽게 조부모의 복을 성복해서 부모에 대한 슬픔을 줄여서는 안 되는바, 아버지에 대해 성복하는 날이 되기를 기다려서 먼저 할아버지에 대해 성복하고 나중에 아버지에 대해 성복하는 것이 올바른 예일 듯하네. 그러나 이러한 예는 모두가 억설(臆說)로, 옳은지의 여부는 잘 모르겠네.
상복을 입었을 때의 자리는 상복의 경중(輕重)으로 차서(次序)를 삼는다.
[문] 《가례》 습후위위조(襲後爲位條)를 보면, “동성(同姓)으로 기년복과 대공복과 소공복 이하의 친족은 각각 상복의 차례대로 그 뒤에 앉는다.”고 하였는데, 우제(虞祭)를 지낼 때에는 ‘중한 복을 입은 사람이 앞에 있고 가벼운 복을 입은 사람이 뒤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할 경우 백부와 숙부가 그 뒤에 있게 되는데, 온당치 못한 듯합니다. 사당(祠堂)에서 서립(序立)하는 차서와 같지 않은 것은 어째서입니까? -황종해(黃宗海)-
[답] 사당에서 서립하는 것은 상례(常禮)이네. 염습한 뒤 및 상제(祥祭)와 담제(禫祭)를 지낼 때에는 모두 상복의 경중으로써 차서를 삼네. 그러니 비록 제부(諸父)들이 상주(喪主)의 뒤에 있더라도 무슨 온당치 못한 점이 있겠는가.
오복(五服)을 입은 사람이 서로 조문하는 예절
[문] 오복을 입은 사람이 서로 조문하는 의식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황종해-
[답] 구준의 《가례의절》에 따라서 행하면 될 것이네.
○ 《가례의절》에 이르기를,
“-이날은 일찍 일어난다.- 복을 갖추어 입는다. -오복(五服)을 입는 사람들이 각자 자신이 입을 상복을 입고 지팡이를 짚는다. 요질(腰絰)을 착용하는 자는 아래로 드리웠던 삼 밑동을 묶는다.- 각자 자신의 자리로 나아간다. -남자는 상구(喪柩)의 동쪽에서 서쪽을 바라보고 자리하고, 여자는 상구의 서쪽에서 동쪽을 바라보고 자리하되, 각자의 상복으로써 차서를 삼아 늘어선다.- 거애(擧哀)하면서 서로 간에 조상(弔喪)한다. -여러 자손들이 조부(祖父)와 제부(諸父) 앞에 가서 무릎 꿇고 곡을 하여 슬픔을 다한다. 그런 다음 다시 조모(祖母)와 제모(諸母) 앞에 가서도 앞에서와 같이 곡을 한다. 여자들은 조모와 제모 앞에 나아가서 곡하며 조부와 제부 앞에 가서 곡하는데, 남자들이 한 예법대로 한다. 주부(主婦) 이하는 백숙모(伯叔母) 앞에 나아가서 곡하기를 역시 위와 같이 한다.- 자리로 돌아온다. -이것은 《대명집례(大明集禮)》에서 나왔다.-”
하였다.
[주D-001]오윤해(吳允諧) : 1562~?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해주(海州)이고, 자는 여화(汝和), 호는 만운(晩雲)이다. 문사(文詞)에 뛰어나 시(詩)와 표(表)에 능하였다.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 수찬, 교리, 응교, 예조 정랑, 여주 목사(驪州牧使)를 역임하였다. 인조 14년(1636)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서 강화가 성립되자 이것을 부끄럽게 여겨 벼슬을 버리고 산중에 은거하였다.
[주D-002]양씨(楊氏) : 송(宋)나라 장계(長溪) 사람인 양복(楊復)으로, 자는 지인(志仁)이며, 주희의 제자이다. 신재 선생(信齋先生)이라고 불렸으며, 저서로는 《가례의례도(家禮儀禮圖)》, 《가례잡설부주(家禮雜說附註)》가 있다.
[주D-003]강석기(姜碩期) : 1580~1643.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금천(衿川)이고, 자는 복이(復而)이며, 호는 월당(月塘) 또는 삼당(三塘)이다. 김장생의 제자로 대사간, 대사성, 도승지, 이조 판서, 우의정 등을 역임하였다. 딸이 소현세자빈(昭顯世子嬪)이 되었는데, 죽은 뒤에 강빈(姜嬪)의 옥사(獄事)가 일어나 관작을 추탈당하였고, 그의 부인은 처형되었으며, 아들은 장살(杖殺)당하여 멸문(滅門)되었다가 숙종 때 복관(復官)되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주D-004]양(梁) : 관(冠)의 이마에 골이 지게 하여 세로로 잡은 줄을 말하는데, 이 줄의 숫자에 따라서 오량관(五梁冠), 사량관(四梁冠), 삼량관(三梁冠) 등으로 명칭을 달리한다.
[주D-005]오복(五服) : 상복(喪服)을 입음에 있어서 다섯 가지로 차등을 두는 제도를 말한다. 이것은 가족과 친척 사이에 친소와 원근이 있기 때문에 차등을 두는 것으로, 상복의 경중을 나타내고 상기(喪期)의 장단을 결정하는 것이다. 오복에는 참최(斬衰), 자최(齊衰), 대공(大功), 소공(小功), 시마(緦麻)가 있는데, 대공 이상은 친(親), 소공 이하는 소(疎)가 된다. 친소에 따라서 복을 입는 기간이 각각 다르며, 상복의 재료도 달라진다.
[주D-006]삼례도(三禮圖) : 후한(後漢) 사람인 완심(阮諶)이 그린 도(圖)이다. 《수서(隋書)》 경적지(經籍志)에 정현(鄭玄)과 완심 등이 그린 《삼례도》가 있고, 《당서(唐書)》 예문지에 하후복랑(夏侯伏朗)과 장일(張鎰) 등이 그린 《삼례도》가 있으나 모두 전해지지 않는다. 지금 전해지는 《삼례도》는 송나라 섭숭의(聶崇義)가 찬한 것으로 20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정식 명칭은 《삼례도집주(三禮圖集注)》이다.
[주D-007]요장(寥丈) : 송나라의 학자인 요경(寥庚)으로, 자가 서중(西仲)이다.
[주D-008]예기 …… 이르기를 : 원문에는 빠져 있는데, 보충하여 번역하였다.
[주D-009]규항(頍項) : 규항(缺項)이라고도 하는데, 치포관을 쓸 적에 비녀로 고정시키지 않고 규(頍)라는 장식으로 머리를 둘러싸서 목덜미 중앙에서 매듭을 지어 묶는 것을 말한다.
[주D-010]저질(苴絰) : 씨가 있는 삼인 암삼[苴麻]으로 만든 머리띠를 말한다. 암삼은 모양이 추하여 보기에 나쁘기 때문에 참최복을 입는 자가 두르는 것이다.
[주D-011]모마질(牡麻絰) : 씨가 없는 삼인 수삼[牡麻]으로 만든 머리띠를 말한다. 이것은 암삼으로 만든 것보다는 보기에 좋으므로 자최복을 입는 자가 두르는 것이다.
[주D-012]정도가(鄭道可) : 정구(鄭逑 1543~1620)로, 도가는 그의 자이다. 본관은 청주(淸州)이고, 호는 한강(寒岡)이며, 시호는 문목(文穆)이다. 저서로는 《한강집(寒岡集)》이 있고, 편서(編書)로는 《태극문변(太極問辨)》, 《고금충모(古今忠謨)》, 《수사언인록(洙泗言仁錄)》, 《무이지(武夷志)》 등이 있으며, 특히 예설(禮說)에 밝아 《오복연혁도(五服沿革圖)》, 《심의제도(深衣制度)》, 《관의(冠儀)》, 《혼의(昏儀)》, 《장의(葬儀)》 등을 편찬하였다.
[주D-013]효대(絞帶) : 상복의 제도에 있어서 참최복을 입는 자가 띠는 허리띠로, 삼을 꼬아서 만든 것이다.
[주D-014]부판(負版) : 상복(喪服)의 등 쪽에 붙어 있는 너비 1척 8촌의 네모진 베 조각을 말한다. 부(負)라고도 한다.
[주D-015]벽령(辟領) : 상복의 부판 양쪽 옆 깃 아래에 댄 베 조각으로, 슬퍼하는 정을 표시하기 위한 것이다. 가령(加領)의 양쪽 옆과 연결되어 있으며, 각각 사방 8촌의 베를 사용하여 그 양쪽 머리를 접어 서로 붙여서 너비가 4촌이 되게 만들어 붙이는 것이다. 적(適)이라고도 한다.
[주D-016]최(衰) : 참최복과 자최복에서 길이가 6촌이고 너비가 4촌이 되도록 베 한 조각을 잘라서 가슴 부위에 붙인 것을 말한다.
[주D-017]적(適) : 상복의 옷깃 양쪽의 어깨 부위에 붙어 있는 너비가 4촌인 네모진 베 조각을 말한다. 벽령(辟領)이라고도 한다.
[주D-018]계상(稽顙) : 두 무릎을 꿇은 다음 이마가 바닥에 닿도록 구부려서 하는 절로, 극도의 경건함을 나타낼 때 하는 절이다.
[주D-019]이계선(李繼善) : 송나라 때 사람으로, 주자의 제자인 이효술(李孝述)을 가리킨다. 계선은 그의 자(字)이다.
[주D-020]황종해(黃宗海) : 1579~1642. 인조 때의 학자이다. 본관은 회덕(懷德)이고, 자는 대진(大進)이며, 호는 후천(朽淺)이다. 정구(鄭逑)의 문인이다. 광해군 때 유생들과 함께 정인홍(鄭仁弘)을 배척하는 상소를 올렸고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과거를 단념하고 김장생에게 나아가 예학(禮學)을 배웠다. 인조반정(仁祖反正) 뒤에 동몽교관(童蒙敎官), 후릉 참봉(厚陵參奉)에 천거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저서로는 《후천집(朽淺集)》이 있다.
[주D-021]대명집례(大明集禮) : 명(明)나라 서일기(徐一夔)가 명을 받들어서 찬한 것으로, 53권이다. 홍무(洪武) 3년(1370, 공민왕19)에 완성하였으며, 길례(吉禮), 흉례(凶禮), 군례(軍禮), 빈례(賓禮), 가례(嘉禮) 5례를 강(綱)으로 하고 그 아래에 26조목으로 나누어 기술하였다.
참최(斬衰)
참최 삼년(斬衰三年)
[문] 참최복을 3년 동안 입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답] 예경에서 상고해 볼 수 있네.
○ 《의례》 상복의 소에 이르기를,
“3승포(升布)를 썰어서 최(衰)를 만든다. ‘재단하여 자른다[裁割]’고 하지 않고 ‘썬다[斬]’고 말한 것은, 애통함이 아주 심한 뜻을 취한 것이다.”
하였다.
○ 《의례》 상복 기(記)의 소에 이르기를,
“최(衰)는 가슴 부위에 대는 것이다. 너비를 4촌으로 한 것은 그 애통함이 몸 전체에 두루 있는 것을 취한 것이다. 그러므로 상복의 상의(上衣) 역시 그 이름을 최(衰)라고 하는 것이다.”
하였다.
○ 《예기》 단궁의 주에 이르기를,
“최(衰)는 효자에게 애통한 뜻이 있음을 밝히는 것이다.”
하였다.
○ 《예기》 삼년문(三年問)에 이르기를,
“저들은 삼년상이 25개월에 끝나는 것을 사마(駟馬)가 문틈을 지나가는 것처럼 빠르게 여긴다. 그런데도 저들을 따른다면, 이는 상을 마칠 때가 없게 된다. 그러므로 선왕(先王)이 이를 위해서 중도(中道)를 세우고 예를 제정한 것이다.[二十五月而畢若駟之過隙 然而遂之則是無窮也 故先王爲之立中制節]”
하였다.
○ 삼년문에 또 이르기를,
“그렇다면 어째서 기년(期年)으로 정하였는가? -주에 이르기를, ‘기년 만에 상복을 벗는 뜻을 물은 것이다.’ 하였다.- 지친(至親)은 기년으로 끊은 것이다. 천지가 이미 바뀌고 사시도 이미 변하였는바, 천지 사이에 있는 모든 것은 다시 시작하지 않음이 없다. 이것을 형상한 것이다.[何以至期也 至親以期斷 天地則已易矣 四時則已變矣 其在天地之中者 莫不更始焉 以是象之也]”
하였다.
○ 삼년문에 또 이르기를,
“어째서 3년으로 정하였는가? 융후(隆厚)함을 보태어 그렇게 한 것이다.[何以三年也 曰加隆焉爾也]”
하였는데, 이에 대한 소에 이르기를,
“성인께서 처음에는 부모상을 기년으로 하고자 하였는데, 융숭함을 보태었다. 그러므로 3년으로 한 것이다.”
하였다.
○ 삼년문에 또 이르기를,
“위로는 하늘에서 형상(形象)을 취하고, 아래로는 땅에서 법(法)을 취하고, 중간으로는 사람에게서 법칙(法則)을 취하였다.[上取象於天 下取法於地 中取則於人]”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3년은 윤년(閏年)을 형상하고, 기년은 한 해를 형상하고, 9개월은 사물이 세 계절[時]에 이루어지는 것을 형상하고, 5개월은 오행(五行)을 형상하고, 3개월은 한 계절을 형상한 것이다. ‘사람에게서 법칙을 취하였다’는 것은, 처음 태어나서 3개월이 되면 머리를 자르고 3년이 되면 부모의 품을 떠나는 것을 말한다.”
하였다.
첩(妾)이 남편의 부모를 위하여 입는 복
[문] 첩이 남편의 부모에 대하여 입는 상복에 대해서 우복(愚伏)에게 물으니, 이르기를, “《의례》를 보면, ‘며느리가 시부모를 위하여 기년복을 입는다. 첩이 남편의 친족을 위해서 여군(女君 남편의 적처(嫡妻))과 같은 복을 입는다.’ 하였으니, 역시 기년복을 입는 것이네. 그런데 후당(後唐)의 유악(劉岳)이 지은 《서의(書儀)》에는 ‘며느리가 시부모를 위해서 삼년복을 입는다.’ 하였네. 그리고 송(宋)나라 건덕(乾德) 연간에 좌복야(左僕射) 위인포(魏仁浦) 등이 상주하여 《서의》의 글이 예에 있어서 마땅하다고 하니, 조서를 내려 그대로 따랐네. 지금 시부모를 위해서 참최복과 자최복을 입는 것은 실로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네. 이것으로 미루어 본다면, 첩은 마땅히 여군과 같은 복을 입을 수 있는 것이네. 그런데 구준(丘濬)의 《가례의절》에 나오는 첩위부당복도(妾爲夫黨服圖)를 보면 ‘시부모를 위해서는 기년복을 입는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여전히 《의례》의 옛글을 근거로 삼은 것이네. 그러니 지금도 억견을 가지고 삼년복을 입기는 어렵네. 이는 오직 예를 좋아하는 군자가 정례(情禮)를 참작해서 잘 상량하여 대처하는 데에 달려 있을 뿐이네. 비록 삼년복을 입는다고 하더라도 오히려 《의례》에서 말한 ‘여군과 같은 복을 입는다.’고 한 글을 따르는 것이 되니, 의(義)로써 새로운 예를 일으키는 것이 되지는 않을 것이네.” 하였습니다. 이 설이 어떻습니까? -송준길-
[답] 정경임(鄭景任)의 설이 맞네.
연제(練祭)를 지낸 뒤에 비로소 그의 후사(後嗣)가 된 자가 뒤늦게 상복을 입는 경우
[문] 어떤 사람이 아들이 없는데 미처 후사를 세우기도 전에 죽은 상황에서 그의 아내가 동종(同宗) 가운데 복(服)이 없는 사람을 취하여 장사 지내기 전후나 연제를 지내기 전후에 후사로 세웠을 경우, 뒤늦게 상복을 입는 절차는 마땅히 분상(奔喪)하는 자가 하는 예와 같이 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변복(變服)을 하고 단(袒)을 하고 괄발(括髮)을 하고 성복(成服)을 하는 등의 일을 모두 초상 때의 예와 같이 합니까? 그리고 제사 지내 그 사유를 고하고, 개제(改題)하고 방제(傍題)하는 등의 일 역시 그만둘 수 없습니다. 이것은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마땅합니까? 상고하여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지사 신식-
[답] 단을 하고 괄발을 하고 성복을 하는 것은 한결같이 초상 때와 같이 해야 하네. 제사 지내 그 사유를 고하는 것과 후사가 된 바의 신주 역시 개제(改題)하여야 하네. 이에 대해서는 《통전(通典)》에 상세하게 나오기에 아래에 기록하였는데, 사마조(司馬操)가 한 말이 맞네.
○ 《통전》에 이르기를,
“송(宋)나라 하승천(何承天)이 묻기를, ‘어떤 부인이 남편이 먼저 죽었는데 아들은 없고 시집간 딸이 있다. 이에 그 부인이, 남편이 죽은 지 1주년이 안 되어 종종(宗從)의 아이를 남편의 후사로 삼아 이제 이미 여차(廬次)와 상장(喪杖)을 다시 만들었는데, 죽은 달로부터 1주년이 되는 날에 문득 연제(練祭)를 지내는 것이 마땅한지, 아니면 후사가 되어 나간 날을 상복을 만들어 입은 처음으로 삼아야 마땅한지를 모르겠다.’ 하니, 순백자(荀伯子)가 답하기를, ‘뒤늦게 후사가 되어 나간 것은 상(喪)을 당했다는 소식을 나중에 듣고 뒤늦게 상복을 입는 것과는 다르다. 그러니 응당 죽은 달을 1주년으로 삼아야지, 후사가 되어 나간 날을 상복을 지어 입은 처음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가령 갑(甲)에게 아내와 아들과 딸이 있는데, 갑이 죽어서 갑의 아들이 중복(重服)을 입고 있다가 연제를 지내고 나서 갑의 아들이 또 죽어, 갑의 동생인 을(乙)이 자기 아들인 병(丙)을 갑의 후사로 삼았을 경우, 병은 이미 갑을 백부(伯父)로 여겨 기년복(朞年服)을 입고 상제를 마쳤는데 다시 25개월복을 지어서 입는다면, 갑의 아내와 딸은 병보다 먼저 상복을 벗는 것은 합당치 않은데, 어떻게 3주년이나 상복을 입고 있게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에 대해 사마조가 힐난하기를, ‘다른 사람의 후사가 된 자는 후사가 된 분에 대해서 예를 다해 삼년복을 입고, 소생부모(所生父母)에 대해서는 복을 낮추어서 강복(降服)을 입는다. 이것이 중함을 받은 도(道)를 온전히 하고 자식이 된 의리를 이루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부자(父子)의 이름이 후사의 명을 받은 날에 정해지는 것이 아니겠으며, 높임을 더하는 은혜가 친부모를 하직하는 날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 대의는 아주 분명하여 억눌러서 빼앗는 변례(變禮)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하였다.
다시 논하기를, ‘갑이 죽어서 갑의 아들이 상복을 입고 있다가 연제를 지내고 나서 갑의 아들이 죽는 바람에 갑의 동생인 을이 자신의 아들인 병을 갑의 후사로 삼았을 경우, 병은 갑을 백부로 여겨 기년복을 입고서 상을 마쳤으니 다시 25개월복을 지어 입을 수 없다.’ 하니, 다시 힐난하기를, ‘병이 갑의 연제를 지낸 뒤에 바야흐로 와서 갑의 후사가 되었으니, 그의 상에 대해서는 비록 강쇄(降殺)한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중복(重服)은 이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니 다시금 원월(遠月)로 상복을 지어 입는 것이 의리에 있어서 뭐가 손상되겠는가. 그리고 예전에는 갑을 방존(旁尊)으로 보았으므로 상복이 자최복(齊衰服)을 뛰어넘을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의 아들이 되었는데도 예를 행함에 있어서 제도에 궁한 탓에 일이 어그러지고 의리가 이상하게 되어 깊고 얕음이 현격하게 달라지게 되었다. 그러니 어찌 서로 이어서 똑같이 삼년복을 입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다시 논하기를, ‘갑의 아내와 딸은 3주년 동안 상복을 입고 있을 길이 없으며, 또 병보다 먼저 상복을 벗는 것도 합당치 않다.’ 하니, 이에 대해 다시 힐난하기를, ‘갑의 아내와 딸은 2주년 동안 복을 입고서 상을 마쳐야지 어찌 3주년 동안 복을 입고 있을 수 있겠는가. 길사(吉事)와 흉사(凶事)는 각각 날짜가 있는 법인데, 어찌 반드시 병의 입장을 고려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였다.
다시 논하기를, ‘혹자는 「갑의 상복을 벗을 때가 다 되어서 병이 후사가 되어 갔으면 병은 응당 참최복(斬衰服)을 입었다가 열흘 정도 지난 뒤에 상복을 벗으면 될 것이다.」 하는데, 나의 뜻으로는 상복을 벗기를 기다렸다가 후사로 가면 될 것으로 여겨진다.’ 하니, 이에 대해 다시 힐난하기를, ‘병이 갑의 상이 처음 시작된 때에 미쳐서 후사가 되지 못한 것은, 어떤 일로 말미암아서였다. 그리고 상을 치르는 자리에 상주(喪主)가 없어서 골육의 친족들이 애달픈 마음에 이미 후사를 앉혀 놓았으니 의당 삼년상 안에 미쳐서 후사로 가야지, 어찌 예가 의심스럽다는 이유로 길일(吉日)이 되기를 기다림으로써 2주년이 그냥 지나가는 것을 뻔히 보고만 있어서야 되겠는가.’ 하였다.
다시 논하기를, ‘갑이 죽어서 아내와 딸이 상복을 입고 있은 지 2주년이 되었는데, 갑의 동생인 을의 두 아들이 먼 곳에 가 있다가 돌아온 뒤에 병을 갑의 후사로 삼았을 경우, 병의 동생인 정(丁)은 백부(伯父)를 위하여 뒤늦게 기년복을 입는데, 병은 후사로 나갔기 때문에 다시 침호(綅縞)를 입고서 열흘 정도 있다가 상복을 벗어야 한다면, 얕고 깊음이 어그러지는바, 이런 잘못을 다시 해서는 안 된다.’ 하니, 이에 대해 힐난하기를, ‘을의 아들인 병이 지금 와서 갑의 후사가 되었으니, 이미 동생인 정과 똑같이 뒤늦게 기년복을 입어서는 안 된다. 또 침호를 입고서 잠시 동안 있다가 열흘 정도 지난 뒤에 제복하는 것도 안 된다. 그럴 경우에 병은 갑의 상에 있어서 끝내 하찮은 복조차도 입을 수 없어 복을 빠뜨리게 된다. 자신이 직접 갑의 아들이 되었는데도 도리어 정에게 죽은 달이 다시 돌아올 때까지 상복을 입는 제도가 있는 것만도 못하게 하고, 삼년복을 입을 자리에 처해 있는데도 하루 동안의 슬퍼함조차도 끊게 한다면, 길일이 되기를 기다리는 뜻이 여기에서 어긋나게 될 것이다.’ 하였다.
다시 논하기를, ‘갑의 아내와 딸은 흉사(凶事)가 있는 이 집을 피해 별도로 길한 집을 정해 나갈 길이 없으며, 또 아내와 딸은 안채에서 노래하고 후사가 된 아들은 바깥채에서 곡해서는 안 된다.’ 하니, 이에 대해 다시 힐난하기를, ‘갑의 아내는 비록 더는 최마(縗麻)를 입지 않고 호곡(號哭)하는 소리를 내지 않지만, 소복(素服)을 입고 홀로 거처하면서 후사가 된 자와 길이 슬퍼해야지, 어찌 길한 집을 정해 나가기를 도모해서야 되겠으며, 또 어찌 노래하기를 일삼아서야 되겠는가.’ 하였다.”
하였다.
서자(庶子)는 장자(長子)를 위하여 삼년복을 입지 않는다.
아버지가 살아 계실 경우에는 장자를 위하여 삼년복을 입지 않는다.
장자를 위하여 삼년복을 입지 않는 데에는 네 가지 경우가 있다.
[문] 《주자어류(朱子語類)》를 보면 “서자의 장자가 죽었을 경우에도 삼년복을 입는다.[庶子之長子死 亦服三年]”고 되어 있습니다. 이 예를 역시 행할 수 있는 것입니까? 그리고 아버지가 살아 계실 경우에는 장자를 위하여 삼년복을 입지 못하는 것입니까? 《상례비요(喪禮備要)》에 이르기를, “장자를 위하여 삼년복을 입지 못하는 데에는 네 가지 경우가 있다.”고 하였는데, 그에 대한 설을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송준길-
[답] 예경 및 제유(諸儒)가 논한 바를 가지고 주자가 말한 다른 설들과 참조해서 보면, 《주자어류》에서 말한 이 조항은 분명히 기록한 자가 잘못 기록한 것으로, ‘역(亦)’ 자는 ‘불(不)’ 자의 오자가 아니겠는가. 잘은 모르겠네. 아버지가 살아 계실 경우에는 장자를 위하여 삼년복을 입지 못한다는 것과 삼년복을 입지 않는 데에는 네 가지 경우가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소가(疏家)의 설에 상세하게 나와 있네.
○ 《의례》 상복의 전(傳)에 이르기를,
“자신이 서자일 경우에는 장자를 위하여 삼년복을 입지 못하니, 할아버지를 이은 정체(正體)가 아니기 때문이다.[庶子不得爲長子三年 不繼祖也]”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아버지의 후사가 된 다음에야 장자를 위하여 삼년복을 입는다.”
하였으며, 이에 대한 소에 이르기를,
“경(經)에서 말한 ‘계조(繼祖)’는 바로 할아버지의 후사가 된 자이다. 그런데 정씨(鄭氏)는 말하기를, ‘아버지의 후사가 된 다음에야 장자를 위하여 삼년복을 입는다.’고 하여 서로 같지 않은데, 서로 같지 않게 된 것은, 주(周)나라의 도에는 적자(適子)는 있어도 적손(適孫)은 없어 적손은 서손(庶孫)의 예(例)와 같아서이다. 이것은 아버지의 후사가 된 다음에야 장자를 위하여 삼년복을 입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정현(鄭玄)은 처음에 의거하여 말한 것으로, 사실은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이어 자신이 3세(世)가 되고 장자가 4세가 되어야만 삼년복을 입을 수 있는 것이다. 마융(馬融) 등은 5세가 되어야만 삼년복을 입을 수 있는 것이라고 해석하였는데, 정현은 의(義)로써 미루어 나가 4세가 되면 되지 5세가 되기를 기다릴 필요는 없다고 한 것이다. 비록 승중(承重)을 하였더라도 삼년복을 입지 못하는 데에는 네 가지 경우가 있다. 첫 번째는 정체이기는 하나 전중(傳重)하지 않았을 경우로, 적자가 폐질(廢疾)이 있어서 종묘(宗廟)의 주인 역할을 감당해 내지 못하는 경우를 말한다. 두 번째는 전중하기는 하였으나 정체가 아닐 경우로, 서손(庶孫)이 후사가 된 경우가 바로 그것이다. 세 번째는 체(體)를 잇기는 하였으나 바르지 않은 경우로, 서자를 세워서 후사로 삼은 경우가 바로 그것이다. 네 번째는 바르기는 하나 체를 잇지 않은 경우로, 적손을 세워서 후사로 삼은 경우가 바로 그것이다.”
하였다. 소에서 또 이르기를,
“다른 사람의 아들을 길러 후사로 삼은 경우에도 삼년복을 입지 못한다.”
하였다.
○ 《예기》 상복소기에 이르기를,
“서자는 장자를 위하여 참최복을 입지 못하는 것은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이은 정체가 아니기 때문이다.[庶子不爲長子斬 不繼祖與禰故也]”
하였다.
○ 《예기》 대전(大傳)에 이르기를,
“서자는 자신의 장자를 위하여 삼년복을 입지 못하니, 할아버지를 이은 정체가 아니기 때문이다.[庶子不得爲長子三年 不繼祖也]”
하였다.
○ 《통전》에서 유울지(庾蔚之)가 말하기를,
“은혜로 볼 적에는 아버지가 중하고, 의리로 볼 적에는 할아버지가 중한바,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각각 하나씩의 중한 뜻이 있다. 그러므로 성인께서 예를 제정함에 있어서는 할아버지의 복을 지친(至親)의 복으로 하였으며, 전(傳)에서는 똑같이 지존(至尊)이라고 하였다. 이미 중한 두 분의 뒤를 이었더라도 장자가 위에 대해서 정체(正體)가 되어 장차 종묘의 중함을 전해 받게 된 다음에야 장자를 위한 보복(報服)으로 참최복을 입을 수 있다. 그러므로 전(傳)과 기(記)에서는 모두 할아버지에 의거하여 말한 것이다. 만약 아버지만을 이었을 경우에도 장자를 위하여 참최복을 입을 수 있다면 ‘불계조(不繼祖)’라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의례》 상복의 전 및 《예기》 대전에서는 모두 불계조라고 하여, 서자는 비록 자신이 아버지의 뒤를 이었더라도 할아버지의 뒤를 잇지 않았을 경우에는 장자를 위하여 참최복을 입을 수 없다는 것을 밝혔다.”
하였다.
○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무릇 정체(正體)라는 것은 위에 있는 것이니, 하정(下正)은 오히려 서(庶)가 됨을 말한 것이다. 정체는 할아버지의 적손임을 이른 것이고, 하정은 아버지의 적자를 이른 것이다. 비록 아버지에게는 적자가 되었더라도 할아버지에 대해서는 오히려 서손(庶孫)이 되므로, 아버지의 적자를 서(庶)가 된다고 말한 것이다.”
하였다.
○ 어떤 사람이 주자에게 묻기를,
“주(周)나라의 제도에는 대종(大宗)의 예가 있어서 적통(嫡統)을 세워 후사로 삼습니다. 그러므로 아버지가 장자를 위해서 삼년복을 입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대종의 예가 폐해지고 적통을 세우는 법이 없어져서 아들이면 각자 후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즉 장자(長子)와 소자(少子)가 서로 다르지 않은바, 서자가 자신의 장자를 위하여 삼년복을 입지 못한다는 것은 반드시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아버지가 장자를 위하여 삼년복을 입는 것 역시 적서(嫡庶)를 가지고 논해서는 안 됩니다.”
하니, 주자가 답하기를,
“종법(宗法)은 비록 다시 세울 수 없으나, 복제(服制)는 마땅히 옛 예를 따라야 한다. 이것 역시 예를 아껴서 양을 보존해 두는 뜻이니, 망녕되이 고쳐서는 안 될 것이다.”
하였다.
상복도식에서 할아버지가 적손(嫡孫)을 위해서는 삼년복을 입는다고 한 것은 잘못이다.
[문] 상복도식의 제복경중지의조(制服輕重之義條) 아래에 나오는 소주(小註)에 이르기를, “할아버지가 손자를 위해서는 대공복을 입는다. 만약 전중(傳重)한 경우에는 역시 삼년복을 입는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주소(注疏)에 나오는 여러 설과 합치되지 않은 듯합니다. 모르겠습니다만, 어떻습니까? -송준길-
[답] 위의 글에서 인용한 소(疏)에 나오는 설과 《의례》 상복의 부장기(不杖期)에 대한 소 및 《가례》에서 말한 뜻으로 추론해 보면, 양씨(楊氏)의 설이 잘못된 것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네.
○ 《의례》 상복의 부장기조에 이르기를,
“할아버지가 적손을 위해서 입는 복이다.[爲嫡孫]”
하였으며, 이에 대한 소에 이르기를,
“적자가 죽어서 적손이 승중(承重)하였을 경우에는 할아버지는 적손을 위하여 기년복을 입는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장자는 아버지를 위해서 참최복을 입으며, 아버지 역시 참최복을 입는다. 적손이 승중하였을 경우에는 할아버지를 위해서 참최복을 입으나, 할아버지는 그를 위해 기년복을 입는다. 보복(報服)으로 참최복을 입지 않는 것은 부자간의 관계는 일체(一體)이나 할아버지는 손자에 대해서 본디 일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이것에 의거하여 본다면, 할아버지는 손자를 위해서 본디 대공복을 입으나, 전중을 하였기 때문에 가복(加服)하여 기년복을 입는 것이다. 주자의 《가례》에도 그렇게 되어 있다. 그런즉 양씨가 이른바 ‘역시 삼년복을 입는다.[亦三年]’고 한 것은 필시 글자가 잘못된 것이다.-
후사가 된 바의 증조와 고조를 위해서는 승중복(承重服)을 입는다.
[문] 《가례》의 참최조(斬衰條)에는 단지 “다른 사람의 후사가 된 자가 후사가 된 바의 아버지를 위해서 입는 것이요, 후사가 된 바의 할아버지를 승중한 자가 할아버지를 위해서 입는 것이다.”라고만 나오고, 증조와 고조에는 미치지 않은 것은 어째서입니까? 어떤 사람이 불행하여 다른 사람의 후사가 되어 증조와 고조를 승중하게 되었을 경우에는 어떻게 조처하여야 합니까? 양씨의 주에서도 이런 경우를 보충해 넣지 않은 것은 어째서입니까? 다른 사람의 후사가 된 자는 후사가 된 바에 대해서는 자식과 같이 하는 법이니, 오복(五服)의 친족에 대해서는 모두 똑같이 복을 입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런데도 혹 나오기도 하고 나오지 않기도 하니, 혹 미루어 나가지 못하는 의리가 있는 것입니까? 상고하여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자최삼년조(齊衰三年條)에 대해서 양씨가 주를 보충해 넣으면서 단지 ‘후사가 된 바의 처에 대해서는 자식과 같이 한다.’고만 하고, 후사가 된 바의 조모에 대해서 승중복을 입는 것은 빠뜨렸습니다. 그런데 더구나 후사가 된 바의 증조와 고조에 대한 복을 보충해 넣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이미 본주에서 빠뜨렸는데 또 양씨가 주를 보충해 넣으면서도 빠뜨렸으니, 참으로 괴이합니다. -지사 신식-
[답] 《가례》의 참최조를 보면 “다른 사람의 후사가 된 자가 후사가 된 바의 아버지를 위해서 입는 것이요, 후사가 된 바의 할아버지를 승중한 자가 할아버지를 위해서 입는 것이다.”라고 하였네. 이미 그의 아들이 되었으면 비록 증조와 고조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더라도 이것으로 미루어서 올라가야지, 무슨 의심할 것이 있겠는가. 증조와 고조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오복의 친족에 대해서는 모두 복이 있는 것이 마땅하네. 어찌 미루어 나가지 못하는 의리가 있겠는가.
승중한 손자의 아내가 조부모를 위하여 입는 복 및 현손(玄孫)으로서 승중한 손자의 아내와 증손으로서 승중한 손자의 아내가 입는 복
[문] 승중한 손자가 조부모의 상을 당하였을 경우에 그의 아내는 종복(從服)을 입어 삼년복을 입습니까? 혹자는 말하기를, “그의 어머니가 주부(主婦)가 되어 삼년복을 입으니, 그의 아내는 본복(本服)을 입어야 한다.”고 하는데,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증손과 현손이 증조와 고조의 상에 승중하였을 경우, 그의 어머니와 할머니는 어떤 복을 입어야 합니까? 혹자는 말하기를, “승중한 자의 아내가 종복을 입어 삼년복을 입으니, 어머니와 할머니는 각자 본복을 입어야 한다.” 하는데, 이 설 역시 어떻습니까? -강석기-
[답] 선유(先儒)들이 논해 놓은 바가 자못 많기에 아래에 상세하게 적어 놓았네.
○ 《통전》에 이르기를,
“진(晉)나라의 하순(賀循)이 이르기를, ‘그 남편이 조와 증조와 고조의 후사가 된 경우에는 그 아내는 종복을 입기를 시부모에 대해서와 같이 한다.’ -자최기년복을 입는다.- 하였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의례》 상복을 보면 “며느리는 시부모를 위하여 부장기(不杖期)를 입는다.”고 하였는데, 송조(宋朝)에 이르러서 비로소 가복(加服)을 입었으므로 하순이 ‘자최기년복을 입는다.’고 한 것이다.-
○ 《통전》에 이르기를,
“공호(孔瑚)가 우희(虞喜)에게 묻기를, ‘가령 현손이 후사가 되었을 경우에 현손의 아내는 종복을 입어 기년복을 입는데, 증손의 아내가 아직 살아 있으면서 겨우 시마복(緦麻服)만 입는다면, 가까운 자는 가벼운 복을 입고 먼 자는 중한 복을 입게 되는바, 정실(情實)에 있어서 의심스러운 점이 있다.’ 하니, 우희가 답하기를, ‘적자(嫡子)가 있는 경우에는 적손(嫡孫)이 없는 법이다. 또 만약 종자(宗子)의 어머니가 복을 입을 경우에는 종자의 아내는 복을 입지 않는 법이다. -살펴보건대, ‘종자의 어머니가 살아 있을 경우에는 종자의 아내를 위해서는 복을 입지 않는다.’는 것은 《의례》 상복의 전에 나오는 글이다. 장자(張子)가 말하기를, “종자의 어머니가 살아 있으면 종자의 아내를 위해서 복을 입지 않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종자의 아내는 종자와 함께 종묘의 제사를 올리는 자이다. 그런데 어찌 부부간에 복을 달리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종자는 비록 어머니가 살아 있더라도 마땅히 종자의 아내를 위해서 복을 입어야 하는 법이다. 동쪽에서는 희상(犠象)에 술을 따르고 서쪽에서는 뇌준(罍尊)에 술을 따르는 것은 모름지기 부부가 함께 하여야 하는 일이다. 그런데 어찌 모자간에 함께할 수 있겠는가.” 하였는바, 이것과 서로 같지 않으니 다시금 상세히 살펴보아야 한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현손이 후사가 되었는데, 만약 그 어머니가 아직 살아 있다면, 현손의 아내는 오히려 서부(庶婦)가 되어 전중(傳重)할 수가 없다. 그러니 전중한 데 대한 복은 이치상 시어머니에게 있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하였다.
○ 《통전》에 이르기를,
“송(宋)나라 유울지(庾蔚之)가 이르기를, ‘시아버지가 죽었을 경우에는 시어머니가 늙었으니, 이는 제사 지내는 일을 자부(子婦)에게 넘겨준 것이다. 할아버지의 복을 입는 데 이르러서는, 자연 시어머니가 적부(嫡婦)가 되니, 이른바 적부가 있으면 적손부(嫡孫婦)는 없다는 것이다. 할아버지는 적통(嫡統)으로서 오직 한 분뿐이므로 자부가 아직 살아 있으면 손부 이하는 적부가 될 수 없어서 서부(庶婦)로서의 복을 입는 것이다. 손부 및 증손부와 현손부는 당연히 남편의 복을 따라 할아버지를 위해서는 한 등급을 낮추어 입어야 하므로 기년복(朞年服)을 입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하였다.
○ 《의례경전통해》 상복도식에 이르기를,
“본조(本朝) 건덕(乾德) 3년에 좌복야(左僕射) 위인포(魏仁浦) 등이 주의(奏議)를 올려 아뢰기를, ‘삼가 《예기》 내칙(內則)을 살펴보건대, 며느리가 시부모를 섬기는 것은 친부모를 섬기는 것과 같이 한다고 하였는바, 바로 시부모와 친부모는 똑같은 것입니다. 고례를 보면 기년복을 입는다는 설이 있는데, 비록 의리에 있어서는 상고할 수 있으나, 후당(後唐)의 유악(劉岳)이 지은 《신서의(新書儀)》를 보면 삼년복을 입어야 한다는 글이 있습니다. 이는 실로 예에 있어서 마땅한 것입니다. 대개 오복(五服)의 제도는 전 시대에서 보태거나 줄인 것이 이미 많습니다. 더구나 삼년상을 마치는 동안에는 궤연(几筵)이 그대로 남아 있는바, 어찌 남편은 거친 참최복을 입고 있는데 아내가 비단옷을 입을 수 있겠습니까. 부부는 일심동체인데 슬픔과 즐거움을 같이하지 않는다는 것은, 인정상으로 따져 볼 적에 실로 지극한 다스림을 손상시키는 것입니다. 더구나 부인이 남편을 위하여서는 삼년복을 입는데, 시부모에 대해서는 기년복만 입고 만다면, 이는 남편은 높이면서 시부모는 낮추는 것이 됩니다.’ 하였다. 그 뒤 정유년에 이르러서 비로소 며느리가 시부모를 위하여 한결같이 남편을 따라서 참최 삼년복과 자최 삼년복을 입도록 하였다.”
하였다.
○ 장자(張子)가 말하기를,
“옛날에는 며느리가 시부모를 위해서는 자최기년복이 정복(正服)이었다. 지금 참최 삼년복을 입는 것은 남편을 따라서 입는 것이다.”
하였다. -《이굴(理窟)》에 나온다. 아래도 같다.-
○ 장자가 또 말하기를,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위해서는 자최 삼년복을 입는다. 적손이 할아버지와 증조와 고조의 후사가 되었을 경우에는 그 아내가 종복을 입는 것도 그와 같다.”
하였다.
○ 《가례》에 이르기를,
“며느리가 시아버지를 위해서는 참최 삼년복을 입고, 시어머니를 위해서는 자최 삼년복을 입으며, 남편이 승중(承重)하였으면 종복을 입는다.”
하였다. 《대명률(大明律)》과 본조(本朝)의 《경국대전(經國大典)》에도 같게 되어 있다.
○ 퇴계(退溪) 선생이 정도가(鄭道可)에게 답하기를,
“예경을 보면, 증손이 증조를 위하여 승중복(承重服)을 입을 경우에는 자기의 조모나 자신의 어머니가 살아 계시면 그 조모나 어머니가 승중복을 입고, 자기의 아내는 승중복을 입지 못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였다.
○ 또 김이정(金而精)에게 답하기를,
“죽은 자의 아내가 이미 복을 입었으니, 그 어머니와 할머니는 복을 입어서는 안 될 듯합니다. 보내온 편지에서는 《가례》 소공조(小功條)에 나오는 ‘적손이나 증손, 현손으로서 마땅히 후계자가 되어야 할 자의 아내는, 그 시어머니가 살아 계시면 복을 입지 않는다.’고 한 말을 인용하면서 ‘이것은 그 시어머니가 당연히 복을 입어야 하는 것이므로 그 며느리는 복을 입지 않는다고 말한 것이 분명하다.’라고 하였는데, 그대의 말이 그럴듯합니다. 이는 아마도 그 남편은 비록 중복(重服)을 입었다고 하더라도 시어머니나 시할머니가 맏며느리가 입을 복을 입었으면 그 며느리는 복을 입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예법의 뜻이 그러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손자의 아내와 증손자의 아내도 함께 입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은, 아마도 그렇지 않은 듯합니다. 내 생각으로는, 손자의 아내와 증손자의 아내가 모두 살아 있으면 손자의 아내가 입어야 할 것 같으며, 두 아내 가운데 한 사람만 살아 있다면 살아 있는 사람이 입어야 할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역시 아주 중대한 것이니, 경솔한 생각으로 가벼이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였다.
○ 또 정도가에게 답하기를,
“부인이 남편의 조부모에 대해서는, 남편이 승중하였으면 남편을 따라서 종복을 입습니다. 지금 증손과 현손이 증조와 고조를 위해서 복을 입었으니 그 아내는 종복을 입어야만 할 것입니다. 그의 어머니의 경우에는 아마도 이른바 ‘시아버지가 돌아가셨으면 시어머니가 늙었다.’는 것이어서 이미 주부(主婦)의 일을 며느리에게 넘겼을 것이니, 의심컨대 그럴 경우에는 복을 입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기》 상복소기에는 이르기를, ‘종복이면서 친속의 관계에 있을 경우에는 따를 사람이 죽었어도 상복을 입는다.[屬從者 所從雖沒也 服]’ 하였는데, 이에 대한 소에 이르기를, ‘속종(屬從)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아내가 남편을 따라서 남편의 친족에 대해서 복을 입는 것이 그 가운데 하나이다.’ 하였습니다. 이것에 의거하면, 그 남편이 이미 죽었더라도 그 아내는 역시 복을 입어야 합니다. 대개 전중을 하였더라도 증손과 현손의 복에 이르러서는, 그 이상의 윗대가 죽었을 경우에는 복을 입지 않는 것은 더불어 복이 같아서입니다. 다시금 상세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고례를 보면, 아내가 남편의 족속을 위하여 입는 상복은 모두 한 등급을 낮추어서 입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시부모를 위해서도 기년복을 입는다. 그런데 송조(宋朝)에 이르러서 위인포(魏仁浦) 등이 주의(奏議)를 올림으로 인하여 비로소 며느리가 시부모를 위해서 한결같이 남편을 따라서 참최 삼년복과 자최 삼년복을 입도록 하였으며, 승중(承重)한 자도 모두 똑같이 입도록 하였다. 《통전》에 나오는 여러 유신(儒臣)들은 모두 송대(宋代) 이전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며느리가 시부모를 위해서 기년복을 입는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고례(古禮)에 근거하여 말한 것이다. 승중한 손자의 아내는 시어머니가 살아 있을 경우 종복을 입지 않는다는 것은, 아마도 그렇지 않은 듯하다. 장횡거(張橫渠)의 《이굴(理窟)》과 주자의 《가례》 및 시왕(時王)의 제도에는 모두 “남편이 승중하였을 경우에는 아내는 종복을 입어 삼년복을 입는다.”고 하였으며, 다시 ‘시어머니가 살아 있으면 그렇게 입지 않는다.’는 설이 없다. 예율(禮律)이 아주 분명하니 지금 어찌 주자와 장자가 이미 정해 놓은 설을 버리고서 제가(諸家)들이 끌어대어 보충한 설을 따를 수 있겠는가. 더구나 위인포 등이 논한 바는 실로 지극한 이치가 있으니, 아마도 여기저기서 끌어대어 인용하고 잘못 증명함으로써 대의(大義)를 어지럽혀서는 안 될 듯하다. 지난해에 시회(時晦) 정엽(鄭曄)이, 나만갑(羅萬甲)의 아내인 자신의 딸이 시할머니의 상을 당하였는데, 시어머니가 살아 있어서 삼년복을 입지 않게 하고자 하였다. 이에 내가 반복해서 논하여 끝내는 삼년복을 입게 하였다. 그리고 열지(說之) 박동열(朴東說)이 어머니의 상을 당하였는데, 그의 형인 박동윤(朴東尹)의 며느리 역시 삼년복을 입지 않았다. 이에 내가 송조(宋朝)에서 가복(加服)한 뜻과 예율의 뜻을 가지고 말하자, 열지가 추복(追服)하게 하고자 했다고 한다. 현손이 승중한 것과 같은 경우에 이르러서는, 그 사이의 손자의 아내와 증손자의 아내의 복은 참으로 역시 의심스럽다. 퇴계가 앞뒤로 말한 세 가지의 설이 각각 달라서 어느 하나를 따를 수 없으니, 마땅히 예를 아는 자에게 질정해 보아야 한다.
○ 혹자가 말하기를, “현손으로서 승중하였을 경우에는 손자의 아내와 증손자의 아내 역시 모두 삼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하는데, 이것은 옳은 말인 듯하다. 대개 남편이 살아 있을 때 이미 조부나 증조부를 위해 승중하였으니, 그들의 아내 역시 종복을 입어 삼년복을 입어야 한다. 남편이 죽은 뒤에 그 조모와 증조모가 죽었을 경우에는 그 아내는 남편이 이미 죽었다는 이유로 중함을 며느리나 손자며느리에게 떠넘기고서 자신은 단지 본복(本服)만 입는다면, 이는 한 사람의 몸이면서도 자최복과 참최복의 상에 대해서 먼저는 중복(重服)을 입었는데 나중에는 경복(輕服)을 입는 것이다. 따라서 한갓 인정에 있어서 차마 하지 못할 점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남편이 비록 죽었더라도 전중(傳重)한 의리는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니, 이와 같이 해서는 마땅치 않을 듯하다. 설령 비록 지난날에 종복을 입는 아내가 아닐지라도 만약 세대를 잇고 전중을 하는 의리가 없었다면 중간의 대서(代序)가 끊겨 연속되지 않았을 것이니, 그 증손과 현손이 어찌 스스로 승중할 수 있었겠는가. 그 손자와 증손이 비록 이미 죽어서 복을 입지 않았더라도 오히려 복을 입어야 하는 것이다. 반드시 손자의 아내와 증손자의 아내가 모두 정통복(正統服)을 입은 다음에야 세대의 차서가 비로소 이어져서 전중한 것이 근본이 있게 된다. 퇴계 선생께서 인용한 “종복이면서 친속의 관계에 있을 경우에는 따를 바의 사람이 죽었어도 상복을 입는다.”고 한 것은 실로 정확하고도 분명한 증거가 있는 것이니, 아마도 다른 의론을 용납할 수 없을 듯한데 어떨지 모르겠다. 다시금 상세히 상고해 보아야 한다.
임금과 아버지를 잃어버리고서 죽었는지를 알지 못할 경우의 예
[문] 임금과 아버지를 잃어버리고서 종신토록 찾지 못하였을 경우에 변고(變故)에 대처하는 예를 어떻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까? -송시열-
[답] 《통전》에서 이미 논하여 놓았으니, 상고해 볼 수 있을 것이네.
○ 《통전》에 이르기를,
“위(魏)나라 유덕(劉德)이 전경(田瓊)에게 묻기를, ‘임금과 아버지를 잃어버리고서 종신토록 찾지 못하였을 경우에 그 신하나 자식 된 자가 혼인을 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하니, 전경이 답하기를, ‘옛날에 허숙중(許叔重)이 이미 이런 가정을 해 놓고 의심하자, 정현(鄭玄)이 논박하여 이르기를, 「만약 종신토록 상복을 벗지 않는다면 이는 후사를 끊어지게 하는 것이다. 상복을 벗고서 혼인하는 것이 예를 어기는 것이기는 하나 권도(權道)를 따르는 것이다.」 하였다.’ 하였다.”
하였다.
○ 《통전》에 또 이르기를,
“진(晉)나라의 서선유(徐宣瑜)가 이르기를, ‘정현이 이르기를, 「임금과 아버지가 죽었는데 신하나 자식으로 하여금 종신토록 심상(心喪)을 입게 하는 것은 아주 의혹스러운 것이다. 심상을 입는 것은 옳지만, 종신토록 입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하였다.’ 하였으며, 순조(荀組)는 이르기를, ‘아버지의 나이가 수한(壽限) -중수(中壽)는 100세이다.- 에 미치면 상을 치르면서 복을 입고, 종묘를 세우는 등 모든 일에 있어서 자신이 어른 역할을 한다. 예에 있어서는 종신토록 상복을 입는 제도는 없는 법이다.’ 하였다.”
하였다.
○ 《통전》에 또 이르기를,
“환제(環濟)가 의논하기를, ‘《춘추(春秋)》의 의리에는 「아내를 맞아들여 어머니를 봉양하고, 후사를 이어서 종묘의 제사를 지낸다.」고 하였다. 혼인하여 아내를 들이는 일은 허락해 줄 수 있으나 벼슬을 하는 것은 모름지기 시대가 맑아지기를 기다리게 해야 한다.’ 하였다.”
하였다.
적손(嫡孫)이 상중에 있다가 후사가 없이 죽었을 경우 서손(庶孫)이 대신 입는 복
[문] 적손이 지중(持重)을 하고 있다가 상중에 죽었는데 후사가 없어서 서손이 대신 복을 입는 것은 예에 있어서 어긋나지 않습니까? -송준길-
[답] 《통전》에 논해 놓은 것이 자못 상세하여 상고해 볼 수 있네. 다만 유울지(庾蔚之)가 이르기를, “아버지가 적자(嫡子)로서 상중에 있다가 죽었을 경우에는 손자가 전중(傳重)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분명하게 옛일을 인용하여 오늘날을 증험한 말일 것이네. 그러나 그 내력이 상세하지 않아 의심스러운바, 다시금 상세히 살펴보아야 하네. 상복도식에서 논한 바는 유울지의 설과 같지 않은데, 조상부사대복조(祖喪父死代服條)에 나오네. 그것을 준행하는 것이 마땅할 듯하네.
○ 《통전》에 이르기를,
“서막(徐邈)이 말하기를, ‘지금 보건대 여러 손자가 있으면서도 할아버지의 후사가 없다는 것은 전혀 예의 뜻이 아니다. 예경을 보면, 「종자(宗子)가 외국에 나가 있을 경우에는 서자(庶子)가 대신 제사를 지낸다.」고 하였으니, 이에 의거하여 한 손자를 섭주(攝主)가 되게 하면 될 것이다. 섭주의 경우에는 본복(本服)이 예전 그대로이다. 예경을 보면, 「대공복을 입어야 할 자가 다른 사람의 상을 주관할 경우에도 오히려 연제(練祭)와 상제(祥祭)를 지낼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더구나 여러 손자의 경우이겠는가. 만약 기년(朞年)이 되어서 이미 상복을 벗었다면 마땅히 소복(素服)을 입고서 제사에 임하며, 심상(心喪)을 입는 제도에 의거해 3년의 상기를 마치면 된다.’ 하였다.
송(宋)나라 강씨(江氏)가 하승천(何承天)에게 묻기를, ‘갑이란 사람의 아들이 먼저 죽고 갑이 나중에 죽어 갑의 적손(嫡孫)이 전중하였는데, 미처 중상(中祥 소상(小祥))이 되기 전에 적손이 또 죽었을 경우, 차손(次孫)이 있으니 이제 응당 그가 삼년복을 입어야 합니까?’ 하니, 하승천이 답하기를, ‘갑에게 이미 손자가 있으니 삼년복을 입는 자가 없게 할 수는 없다. 내 생각으로는 차손이 의당 지중(持重)하여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다만 차손은 이보다 앞서 이미 자최복을 지어서 입었으니, 지금 바로 삼년복으로 바꾸어 입을 수 없는바, 중상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연복(練服)을 입고 악실(堊室)에 거처하여야 할 것이다. 옛날에 어떤 사람이 범선(范宣)에게 묻기를,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큰아들은 아들이 없고 작은아들은 아들이 있는바, 누구에게 전중하여야 할지 의심스럽다.」 하니, 범선이 답하기를, 「작은아들의 아들이 응당 삼년복을 입어야 한다.」 하였다. 이 역시 대략 의거할 만한 것이다.’ 하였다.
배송지(裴松之)가 하승천에게 답하기를, ‘예경을 보면, 「적자이면서 전중하지 않았거나 전중을 하였으나 적자가 아닐 경우에는 모두 가복(加服)을 입지 못한다.」고 하였으니, 적자를 둘이 되게 할 수 없는 것이 분명하다. 범선이 말한 차손(次孫)은 본디 삼년복을 입는 도리가 없다. 그러니 갑작스럽게 중상(中祥)에 응당 후사가 되어야 할 자처럼 중복(重服)을 입을 수는 없다. 차손이 상주가 되어 3년을 마치는 것은 마땅하지만 삼년복을 입을 수는 없다.’ 하였다.
하승천이 사마조(司馬操)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일에 대해 논하자, 사마조가 이르기를, ‘손자가 현재 살아 있는데도 소원한 친족을 데려다가 후계자로 삼는다는 것은 통하지 않는 의론이다. 이미 소원한 자를 세울 수 없다면 어찌 끝내 지중하는 자가 없게 할 수 있겠는가. 이 손자가 어찌 삼년복을 입을 수가 없겠는가. 적자이면서 전중하지 않았거나 전중을 하였으나 적자가 아닐 경우라는 것은 원래 존속친(尊屬親)이 비속친(卑屬親)을 위해 입는 복에 해당되는 것이니, 손자가 할아버지를 위해서 입는 상복에는 관련이 없는 것이다.’ 하였다.
유울지가 말하기를, ‘적손이 죽어서 후계자로 삼을 자가 없는 상황에서 지금 할아버지에게 여러 손자가 있을 경우 전중할 주인이 없어서는 안 되므로 차자의 아들이 거연히 지중을 하는 것은, 범선의 의론이 옳다. 적손이 이미 할아버지를 위한 상복을 입었다가 3년의 상기를 마치지 못하고 죽었다면 이것은 중한 의론이 이미 선 것이다. 반드시 이는 그 복을 마칠 수가 없는 것이다. 오히려 아버지가 적자가 되어 상중에 있다가 죽었을 경우에 손자가 전중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차손이 섭제(攝祭)하는 것은 서막이 답한 바와 같이 하고, 하승천과 사마조가 모두 「이어서 3년 동안 복을 입는다.」고 한 것은 그 근거를 찾아볼 수 없다.’ 하였다.”
하였다.
[주D-001]유악(劉岳) : 후당(後唐) 사람으로, 문장에 능하고 전례(典禮)에 밝아서 명제(明帝)의 명으로 《신서의(新書儀)》 1부를 지었다.
[주D-002]위인포(魏仁浦) : 후진(後晉)의 소사(小史)로 시작하여 후한(後漢)의 병방 주사(兵房主事)와 후주(後周)의 정승이 되었고, 송(宋)나라 초기에 우복야(右僕射)까지 되었다.
[주D-003]하승천(何承天) : 남조(南朝) 송(宋)나라 사람으로, 성품이 강퍅하였고, 유사백가(儒史百家)의 서책에 통달하였으며, 많은 저술을 남겼다.
[주D-004]종종(宗從) : 같은 종족의 사람을 말하는데, 대부분 종조(從祖)나 백숙(伯叔)이나 형제(兄弟)를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주D-005]순백자(荀伯子) : 남조 송나라 사람으로, 진(晉)나라에서 벼슬하여 서광(徐廣)과 함께 국사(國史)를 찬수하였으며, 송나라에서는 동양 태수(東陽太守)를 지냈다. 문집(文集)이 있다.
[주D-006]병(丙) : 원문에는 ‘景’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병(丙) 자를 휘(諱)하여 쓴 것이므로 병으로 번역하였다. 이하도 같다.
[주D-007]침호(綅縞) : 침(綅)은 검은색의 날줄과 흰색의 씨줄로 짠 천을 말하고, 호(縞)는 흰색의 천을 말한다.
[주D-008]정체(正體) : 종통(宗統)을 이은 적장자(嫡長子)를 말한다.
[주D-009]전중(傳重) : 상제(喪祭)나 종묘(宗廟)의 중한 책임을 손자에게 전한다는 뜻이다. 옛날에는 종법(宗法)에 있어서 적서(嫡庶)의 구별이 아주 엄하여 적자(嫡子)가 죽었을 경우 다른 서자에게 종통을 전하지 않고 바로 손자에게 전하였는데, 이를 할아버지의 입장에서는 전중(傳重)이라 하고, 손자의 입장에서는 승중(承重)이라고 하였다.
[주D-010]유울지(庾蔚之) : 남조(南朝) 송(宋)나라 때의 사람으로, 《예론초(禮論鈔)》를 저술하였다.
[주D-011]예를 …… 뜻 : 자공(子貢)이 초하룻날 사당에 고유하면서 희생으로 바치는 양을 없애려고 하자, 공자가 이르기를 “사(賜)야, 너는 그 양을 아끼느냐? 나는 그 예를 아끼노라.” 하였는데, 이는 예가 비록 폐지되었더라도 희생을 바치는 형식이나마 남아 있으면 오히려 기억할 수 있어서 복고될 수 있거니와, 만약 그 형식마저 없애 버린다면 이 예가 마침내 없어질까 걱정하고 아깝게 여긴 것이다. 《論語 八佾》
[주D-012]하순(賀循) : 진(晉)나라 산음(山陰) 사람으로, 자가 언광(彦光)이다. 수재(秀才)로 천거되어 관직에 진출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후장(厚葬)을 좋아한 나머지 심지어 음양(陰陽)의 구기(拘忌)를 이유로 상을 치르지 않고 오래도록 방치해 두기까지 하였는데, 하순이 무강 영(武康令)으로 있으면서 이를 모두 금지한 결과 정교(政敎)가 크게 행해졌다. 그 뒤에 태자 태부(太子太傅)와 태상(太常)을 지냈다. 시호는 목공(穆公)이다. 《晉書 卷68 賀循傳》
[주D-013]우희(虞喜) : 진(晉)나라 여조(餘兆) 사람으로, 자가 중녕(仲寧)이다. 박학다식(博學多識)하고, 옛것을 좋아하였으므로, 조정에서 의심나는 예(禮)가 있을 경우에는 사신을 파견하여 자문하곤 하였다. 《안천론(安天論)》을 찬술하고 《효경(孝經)》을 해석하였으며 《모시(毛詩)》를 주석하고 《지림(志林)》 30권을 저술하였다.
[주D-014]본조(本朝) 건덕(乾德) 3년 : 건덕은 송(宋)나라 태조(太祖)의 연호로, 본조는 송나라를 가리킨다.
[주D-015]서막(徐邈) : 진(晉)나라 고막(姑幕) 사람으로, 휘장을 드리우고 글을 읽으면서 성읍(城邑)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사안(謝安)이 천거하여 중서 사인(中書舍人)이 되었으며, 《오경훈의(五經訓義)》를 찬정하였다.
[주D-016]악실(堊室) : 상을 당하여 중문(中門) 밖의 추녀 밑에 흙벽돌로 만든 상막(喪幕)으로, 회칠한 채 아무 장식도 하지 않는다.
[주D-017]범선(范宣) : 진(晉)나라 사람으로, 자는 선자(宣子)이다. 젊어서부터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은둔 생활을 하였는데, 여러 책들을 많이 읽어서 박식하였으며, 특히 예에 밝았다. 《예역논란(禮易論難)》을 저술하였다.
자최(齊衰)
아내가 남편의 계모(繼母)와 적모(嫡母)와 양모(養母)와 자모(慈母)를 위해서 입는 복은 남편의 복을 따라서 입는다.
[문] 아내가 남편의 계모와 적모와 양모와 자모를 위해서와 남편이 아내의 적모 등을 위해서 입는 복에 대해서는 예경에 분명한 글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국전(國典)의 횡간도(橫看圖)에도 빠뜨리고서 기록해 놓지 않았는데, 몹시 의심스럽습니다. -강석기-
[답] 계모와 적모는 생모(生母)와 차이가 없으므로 별도로 말해 놓지 않은 것이네. 그리고 양모와 자모 역시 남편을 따라서 복을 입는 것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네. 지난날에 의정(議政) 홍섬(洪暹)의 부인(夫人) 상에 정승 심수경(沈守慶)이 “서자의 아내는 적모에 대해서 복을 입지 않는 법이다.”라고 하면서 복을 입지 못하게 하였네. 그러나 어찌 적모가 죽었는데 서자의 아내가 복을 입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머니가 적자(嫡子)를 위하여 입는 복은 압존(壓尊)되어 낮추는 법이 없다.
[문] 어머니가 장자를 위해서 자최 삼년복을 입는 것은 보복(報服)으로 입는 것입니다. 아들이 어머니를 위해서 입는 복은 아버지가 살아 계실 경우에는 기년복을 입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장자(長子)를 위해서 입는 복은 남편이 살아 있어도 오히려 삼년복을 그대로 입으니, 과중한 점은 없습니까? 의심스럽습니다. -강석기-
[답] 《의례》의 소에서 상고해 볼 수 있네.
○ 《의례》 상복의 소에 이르기를,
“어머니가 장자를 위하여 입는 상복은 남편이 살아 있는가의 여부를 따지지 않고 모두 삼년복을 입는다. 이것은 아들이 어머니를 위하여 입는 상복은 압강(壓降)되어 굽히는 의리가 있지만, 부모가 장자를 위하여 입는 상복의 경우는, 장자는 본디 선조(先祖)의 정체(正體)이므로 압존되어 강복한다는 의리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버지가 살아 있다고 해서 굽힐 수 없는 것이다.”
하였다.
수양아들이 입는 복
[문] 이른바 수양(收養)이라는 것은 바로 세 살이 되기 전에 거두어서 기른 자를 이르는 것입니까? 이미 장성하여 데려왔을 경우에는 수양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까? 비록 아무런 혈통 관계가 없는 사람이더라도 이미 거두어서 길렀으면 그 복은 역시 삼년복을 입어야 하는 것입니까? -황종해-
[답] 이른바 수양이라는 것은 바로 세 살이 되기 전에 거두어서 기른 자를 이르네. 이미 장성한 자를 데려왔을 경우에는 수양이라고 할 수가 없네. 세 살이 되기 전에 거두어서 길렀을 경우에는 비록 아무런 혈통 관계가 없는 사람이더라도 3년간 복을 입어야 하네. 《통전》에도 이에 대해 말해 놓았네. 중원(中原)의 각로(閣老)인 신시행(申時行)이 다른 사람의 손에 길러졌으므로 삼년상을 하였네.
족속(族屬)은 비록 은혜와 의리가 있더라도 가복(加服)을 입을 수 없다.
[문] 족속에게 은혜와 의리가 있을 경우에는 혹 가복을 입어 보답하는 것이, 모르겠습니다만 어떻습니까? -송준길-
[답] 장자(張子)의 《이굴(理窟)》에 상세하게 논해 놓았네. 은혜와 의리의 경중을 헤아려서 심상을 입으면 될 것이네.
○ 장자가 말하기를,
“한퇴지(韓退之)가 어려서 고아가 되어 형수에 의해 길러졌으므로 형수를 위하여 복의 등급을 높여서 더 입었다. 대개 족속의 상에 대해서는 등급을 더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만약 형수의 손에 길러졌을 경우, 은혜가 있다는 이유로 가복을 입는다면, 이는 형을 대우하는 은혜가 지극히 박하게 되는 것이다. 어머니가 없는데 형수에게서 길러지지 않는다면 다시 어느 곳에서 길러지겠는가. 만약 족속의 친족을 위하여 상복을 입으면서 은혜가 있다 하여 등급을 더해 입는다면, 자기에게 은혜가 없는 자에 대해서는 복을 입지 않아도 된단 말인가. 옛날에 어떤 선비가 어려서 형수의 손에 길러졌는데, 형수가 살아 있을 때 어머니처럼 섬겼으므로 죽어서 스스로 조처하여 자최복(齊衰服)을 입었다. 그러자 혹자가 선왕(先王)이 제정한 예가 아니라고 고해 주니, 그 말을 듣고는 마침내 그 상복을 벗었다. 그러고는 오직 심상만을 입었으며, 다시는 과거 시험에 응시하지 않으니, 사람들이 예에 맞다고 하였다.”
하였다.
[주D-001]계모(繼母)와 …… 자모(慈母) : 모(母)에는 팔모(八母)가 있는데, 첩의 아들이 아버지의 정처(正妻)를 일컫는 적모(嫡母), 아버지의 후처(後妻)인 계모(繼母), 생모는 아니면서 자신을 길러 준 자인 양모(養母), 서자(庶子)에게 어머니가 없을 경우 아버지가 아들이 없는 다른 첩에게 자기를 길러 주도록 명한 자인 자모(慈母), 친어머니가 아버지가 죽음으로 인하여 다른 사람에게 재가한 자인 가모(嫁母), 아버지와 이혼하여 집을 나간 친어머니인 출모(出母), 아버지의 첩으로서 아들이 있는 자인 서모(庶母), 어려서 자신에게 젖을 먹여 준 자인 유모(乳母)이다.
[주D-002]신시행(申時行) : 명(明)나라 사람으로 《대명회전(大明會典)》을 편찬하였다.
부(附) 한꺼번에 상을 당하였을 경우
임금의 상과 아버지의 상을 한꺼번에 당하였을 경우
[문] 국휼(國恤) 중에 사상(私喪)을 당하였을 경우에는 어떻게 합니까? -이유태-
[답] 예경을 보면 자못 이러한 경우의 예에 대해서 조처해 놓은 것이 있으나 옛날과 지금은 마땅함이 다르니, 오직 어떻게 잘 참작해서 준행하느냐에 달려 있을 뿐이네.
○ 《예기》 증자문(曾子問)에 이르기를,
“증자가 묻기를, ‘임금이 훙(薨)하여 아직 설빈(設殯)하기 전에 신하가 부모의 상을 당하였을 경우에 어떻게 합니까?’ 하니, 공자가 답하기를, ‘집에 돌아가 부모의 시신을 빈(殯)한 뒤에 군소(君所)로 돌아오며, 부모의 상은 은사(殷事)가 있을 때에만 집에 돌아가고 조석(朝夕)의 상식(上食)에는 가지 않는다. 그동안 대부(大夫)의 경우에는 실로(室老)가 조석전(朝夕奠) 등의 일을 섭행(攝行)하고, 사(士)의 경우에는 자손이 섭행한다.’ 하였다.[曾子問曰 君未殯而臣有父母之喪 則如之何 孔子曰 歸殯 反于君所 有殷事則歸 朝夕否 大夫室老行事 士則子孫行事]”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은성(殷盛)의 일’이란 삭망(朔望)의 전(奠)을 올리는 것과 천신(薦新)의 전을 올리는 것을 이른다. ‘실로(室老)’는 가상(家相) 가운데에서 나이가 가장 많은 사람이다. 대부나 사가 임금이 있는 곳에서 은사(殷事)를 할 때나 조석으로 항상 임금이 있는 곳에 있을 경우, 친상(親喪)의 조석으로 올리는 전은 대부의 경우에는 실로로 하여금 그 일을 대신 행하게 하고, 사의 경우에는 자손으로 하여금 대신 행하게 한다.”
하였으며, 소주(小註)에 이르기를,
“노씨(盧氏)가 이르기를, ‘임금은 5일 있다가 빈(殯)을 한다. 그러므로 돌아가서 부모를 빈한 다음 다시 와서 임금을 빈할 수 있다. 만약 임금의 빈이 임박하였으면, 돌아가서 부모의 상에 곡하고 다시 와서 임금을 빈하며, 임금을 빈하는 것을 마치면 돌아가서 부모를 빈하는 것이다.’ 하였다.”
하였다.
○ 《예기》 증자문에 이르기를,
“증자가 묻기를, ‘임금이 훙하여 이미 설빈하였는데 신하가 부모의 상을 당하였을 경우에는 어떻게 합니까?’ 하니, 공자가 답하기를, ‘조정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가 상복을 입고 있으면서, 삭망이나 천신의 전(奠)과 같은 은사(殷事)가 있을 때에만 군소(君所)에 가고, 조석(朝夕)의 전을 올릴 때에는 가지 않는다.’ 하였다. 증자가 다시 묻기를, ‘이미 임금의 빈(殯)을 열었을 때에 신하에게 부모의 상이 있을 경우에는 어떻게 합니까?’ 하니, 공자가 답하기를, ‘집에 돌아가서 곡(哭)하고 다시 돌아와서 임금의 장행(葬行)을 보내야 한다.’ 하였다.[曾子問曰君薨旣殯 而臣有父母之喪 則如之何 孔子曰 歸居于家 有殷事則之君所 朝夕否 曰 君旣啓 而臣有父母之喪 則如之何 孔子曰 歸哭而反送君]”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은성(殷盛)의 일이 있을 경우에는 임금이 있는 곳으로 나아가고 조석으로 전을 올리는 데에는 가서 곡하지 않는 것이다. ‘계(啓)’는 계빈(啓殯)이다. ‘귀곡(歸哭)’은 어버이의 상에 곡하는 것이다. ‘반송군(反送君)’은 돌아와서 임금의 장사를 전송하는 것이다.”
하였다.
○ 《예기》 증자문에 이르기를,
“증자가 묻기를, ‘임금의 상에 이미 발인(發引)하였는데 부모의 상이 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경우에는 어떻게 합니까?’ 하니, 공자가 답하기를, ‘임금의 영구(靈柩)를 장지로 보내는 일을 계속 수행한다. 그리고 임금의 영구를 봉(封) -폄(窆)하는 것이다.- 한 뒤에 곧바로 돌아오고, 그 아들이 돌아가는 것을 기다리지 않는다.’ 하였다.[曾子問曰君之喪旣引 聞父母之喪 如之何 孔子曰 遂 旣封 窆 而歸 不俟子]”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수(遂)’는 임금의 상구를 전송하는 일을 수행하는 것이다. ‘불사자(不俟子)’는 효자가 돌아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자기가 먼저 돌아오는 것이다.”
하였다.
○ 《예기》 증자문에 이르기를,
“증자가 묻기를, ‘부모의 상에 이미 발인하여 장지로 가는 길에 올랐을 때 임금이 훙하였다는 소식을 들으면 어떻게 합니까?’ 하니, 공자가 답하기를, ‘어버이의 영구를 장지로 보내는 일을 계속 수행한다. 그리하여 하관(下棺)을 마치고 나면 곧바로 옷을 갈아입고 임금의 상에 달려간다.’ 하였다.[曾子問曰父母之喪旣引及塗 聞君薨 如之何 孔子曰 遂 旣封 改服而往]”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잡기(雜記)에 이르기를, ‘영구를 따라 매장하러 갈 때와 끝내고 반곡(反哭)하기 위해 돌아올 때가 아니면 길에서 관을 벗고 문(免)을 하는 경우는 없다.[非從柩與反哭 無免於堩]’고 하였다. 이때에는 효자가 머리에 문을 하고 있다가 문을 제거하고 괄발(括髮)을 하고 맨발 차림을 하고 베로 된 심의(深衣)를 입고서 가며, 감히 사상(私喪)의 복으로 임금의 상에 가지 못하는 법이다.”
하였다.
○ 《예기》 증자문에 이르기를,
“증자가 묻기를, ‘대부나 사가 부모의 상복을 입고 있으나 곧 제상(除喪)하게 되었을 때 임금의 상을 당하면 부모의 상을 어떻게 제상해야 합니까?’ 하니, 공자가 답하기를, ‘임금의 상복을 자신의 몸에 입고 있으면 감히 사복(私服)을 입지 못하니, 어찌 부모의 상을 제상할 수 있겠는가. 이런 경우에는 때가 지나도 제상하지 못하는 법이다. 임금의 상을 제상한 뒤에 부모를 위한 소상(小祥)과 대상(大祥)은 은제(殷祭)로 거행하는 것이 예이다.’ 하였다. 증자가 다시 묻기를, ‘부모의 상을 제상하지 않고 있다가 나머지 기간 동안 복을 입는 것은 괜찮습니까?’ 하니, 공자가 답하기를, ‘선왕께서 예법을 제정함에 있어서는 때가 지나간 뒤에는 제사 지내지 않는 것을 올바른 예로 정하였다.’ 하였다.[曾子問曰大夫士有私喪 可以除之矣 而有君服焉 其除之也如之何 孔子曰 有君喪服於身 不敢私服 又何除焉 於是乎有過時 而不除也 君之喪服除 而後殷祭 禮也 曾子曰 父母之喪不除可乎 孔子曰 先王制禮 過時不擧 禮也]”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임금의 상이 중하고 어버이의 상이 가벼운 것은 의(義)로써 은혜를 끊은 것이다. 임금의 상을 제복(除服)해야만 어버이를 위하여 소상(小祥)과 대상(大祥) 두 제사를 지내 효심(孝心)을 펼 수 있는데, 그 예가 크므로 ‘은(殷)’이라고 한 것이다. 가령 이달에 임금의 상을 제복하였으면 바로 다음 달에 어버이의 소상의 제사를 지내고, 또 그다음 달에 대상의 제사를 지낸다. 만약 친상(親喪)의 소상을 지낸 뒤에 바야흐로 임금의 상을 당하였을 경우에는, 뒷날에 임금의 상을 제복한 뒤에야 어버이 상의 대상 제사를 지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제사를 주관하여야 하는 적자(適子)로서 관직에 있는 자의 경우를 두고 말한 것이다. 서자(庶子)로서 관직에 있을 경우에는 임금의 상을 복상(服喪)하고 적자가 집에 있으면서 스스로 때에 의거하여 친상에 따른 예를 행하는 것이다. 뒷날에 서자가 비록 임금의 상을 제복하였더라도 뒤늦게 제사 지내는 법은 없는 것이다.”
하였다.
부모의 상을 한꺼번에 당하였을 경우에는 궤연(几筵)은 달리하고 중한 복을 입고 지낸다.
[문] 먼저 당한 상의 연제(練祭)를 지낸 뒤에 나중의 상을 당하였을 경우에는 궤연을 마땅히 한곳에 설치하여야 합니까? 그리고 상복은 어떤 상복을 항상 입고 있어야 합니까? -송준길-
[답] 예경에 분명하게 근거로 삼을 만한 것이 있으니, 상고해서 행하면 될 것이네.
○ 《예기》 증자문에 이르기를,
“증자(曾子)가 묻기를, ‘아버지의 상과 어머니의 상이 한꺼번에 있게 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니, 공자가 답하기를, ‘빈궁(殯宮)을 열 때부터 장사를 지낼 때까지는 전을 올리지 않으며, 장사를 마치고 돌아와서는 빈소로 가서 전을 올린 뒤 손님들에게 빈궁을 열겠다고 고한다.’ 하였다.[曾子問曰幷有喪 孔子曰 自啓及葬不奠 反葬 奠而後 辭於賓]”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어머니의 빈궁을 연 뒤로부터 장사 지내기 위해 상구(喪柩)를 내가려고 하기 전까지는 오직 어머니에게만 계빈(啓殯)에 따른 전을 올릴 뿐으로, 빈궁에서는 아버지를 위하여 설전(設奠)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장사 지낼 때까지는 전을 올리지 않는다.’고 한 것으로, 이는 아버지에 대한 전을 올리지 않는 것을 이른 것이다. 어머니를 장사 지내고 돌아옴에 미쳐서는 곧바로 아버지의 빈궁에 설전하고 빈객에게 내일이 아버지의 빈궁을 열 날짜임을 고하는 것이다.”
하였다.
○ 《의례》 사우례(士虞禮)에 이르기를,
“남자는 남자 시동을 쓰고 여자는 여자 시동을 쓴다.[男男尸 女女尸]”
하였는데, 이에 대한 소에 이르기를,
“우제와 졸곡제에는 남자와 여자는 시동을 구별한다.”
하였다.
○ 《주례》 춘관종백(春官宗伯) 사궤연(司几筵)에 이르기를,
“돈(敦)마다 한 궤(几)를 쓴다.[每敦一几]”
하였는데, 이에 대한 정현(鄭玄)의 주에 이르기를,
“비록 합장(合葬)하거나 동시에 빈소(殯所)에 있는 경우라도 모두 궤를 달리하여 체실(體實)을 같지 않게 한다. 묘(廟)에서 제사 지낼 적에는 궤를 같이하여 정기(精氣)가 합해지게 한다.”
하였다. -이상은 궤연을 달리하는 것에 대해서 말한 것이다.-
○ 《예기》 상복소기에 이르기를,
“부모의 상을 함께 당하였을 경우에는 어머니를 먼저 장사 지내고 그 우제(虞祭)와 부제(祔祭)는 지내지 않고서 뒤에 장사 지내는 일을 마치기를 기다린다. 또 어머니를 먼저 장사 지낼 때에도 참최복을 입는다.[父母之喪偕先葬者不虞祔 待後事 其葬 服斬衰]”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어머니를 먼저 장사 지낼 때에도 참최복을 입는 것은 중한 상복을 따른 것으로, 아버지를 장사 지내지 않았기 때문에 감히 변복(變服)할 수 없는 것이다.”
하였다.
○ 상복소기에 또 이르기를,
“참최복의 갈질(葛絰)은 자최복의 마질(麻絰)과 같다. 같은 경우에는 모두 겸하여 입는다.[斬衰之葛與齊衰之麻同 皆兼服之]”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질을 줄여 가는 것은 모두 5분의 1씩 줄여 간다. 참최복의 상에 졸곡이 지난 뒤에 받는 갈질은 자최복의 상에 처음 죽었을 때 착용하는 마질과 크기가 같다. ‘겸하여 입는다.’는 것은, 중한 상에 거상하다가 가벼운 상을 만났을 경우에는 마질을 칙용하고 또 갈질을 착용하는 것을 이른다.”
하였다.
○ 《예기》 간전(間傳)에 이르기를,
“참최의 상에 이미 우제와 졸곡을 지내고 나서 자최의 상을 당하였을 경우에는 가벼운 것은 감싸고 무거운 것은 특별히 남겨 둔다.[斬衰之喪旣虞卒哭 遭齊衰之喪 輕者包 重者特]”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낮은 것은 양쪽에 다 시행할 수 있으나, 존귀한 것은 두 가지로 해서는 안 된다.”
하였으며, 이에 대한 소에 이르기를,
“참최의 상을 수복(受服)할 때 자최의 초상(初喪)을 만났을 경우, 남자는 허리가 가벼우므로 자최의 요대(腰帶)를 착용하고서 이것으로 참최의 요대까지 겸하여 감싼다. 부인의 경우에는 머리가 가벼우므로 자최의 수질(首絰)을 착용하고서 참최의 수질까지 겸하여 감싼다. 그러므로 ‘가벼운 것은 감싼다.’고 한 것이다. 또 남자는 머리가 중하므로 참최의 수질을 특별히 남겨 두고, 부인은 허리가 중하므로 참최의 요대를 특별히 남겨 둔다. 이것이 무거운 것은 특별히 남겨 두는 것이다.”
하였다.
○ 《통전》에 이르기를, “두원개(杜元凱)가 운운하였다.” 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아래의 적손조모상중모망조(嫡孫祖母喪中母亡條)에 나온다. ○ 이상은 지중복(持重服)이다.-
아버지의 상중에 어머니가 죽은 경우와 어머니의 상중에 아버지가 죽은 경우의 복
[문] 아버지가 죽어 아직 빈(殯)을 하지 않았는데 어머니가 죽었을 경우, 그런 경우에도 아버지의 시신이 아직 그대로 있다는 이유로 삼년복을 입지 않습니까? 어머니의 상이 장차 1주년이 되어 가는데 아버지가 죽었을 경우 여전히 어머니를 위하여 삼년복을 다 입지 못하는 것입니까? -송준길-
[답] 선유(先儒)들의 설을 참고해서 짐작하여 조처할 수 있을 것이네.
○ 《의례경전통해(儀禮經傳通解)》에 이르기를,
“‘아버지가 졸하였으면 어머니를 위해서 입는다.[父卒則爲母]’라고 한 데 대한 소(疏)를 보면, 곧장 ‘아버지가 졸하고 어머니를 위해서 입는다.[父卒爲母]’고만 하면 충분할 것인데도 ‘즉(則)’ 자를 써서 말하였다. 이것은 아버지가 졸한 지 3년 이내에 어머니가 졸하였을 경우 그대로 기년복을 입는 것을 드러내 보이고자 해서이다. 요컨대 아버지를 위한 상복을 벗은 뒤 어머니가 죽었을 경우라야 3년의 상기를 다 펼 수 있으므로, ‘즉(則)’ 자를 써서 그 뜻을 차이 나게 한 것이다.”
하였다.
○ 《통전》에 이르기를,
“유씨(庾氏)가 서광(徐廣)에게 묻기를, ‘어머니의 상에 이미 소상(小祥)을 지내고 나서 아버지가 죽었을 경우 어머니의 상이 13개월에 이르렀을 때에는 삼년복을 다 펴서 입어야 하는데, 오히려 압굴(壓屈)이 되어 상제(祥祭)를 지냅니까?’ 하니, 서광이 답하기를, ‘살펴보건대, 하순(賀循)이 이르기를, 「아버지가 죽어 빈(殯)을 하지 못하였는데 할아버지가 죽었을 경우에는 승중(承重)한 적손은 여전히 기년복을 입는다. 이것은 차마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와 다르게 할 수 없어서이다.」 하였다. 그러므로 당연히 아버지가 살아 계시는데 어머니를 위한 복을 입는 예를 적용하여 삼년상을 마칠 때까지 영연(靈筵)을 설치해 두지 못하는 것이다.’ 하였다.”
하였다.
○ 《통전》에 이르기를,
“유울지(庾蔚之)가 말하기를, ‘제유(諸儒)들이 말한 설과 태시(太始) 연간의 제도에는 모두 「아버지가 죽어 아직 빈을 하지 않았는데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경우에는 할아버지의 뒤를 이은 적손(嫡孫)은 감히 할아버지를 위하여 중한 복을 입지 못한다. 이는 차마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와 다르게 할 수 없어서이다.」 하였다. 그런데 더구나 아버지가 살아 계시는 날에 어머니가 죽은 지 이미 오래되었으니, 어찌 아버지가 죽었다고 해서 변경시킬 수 있겠는가.’ 하였다.”
하였다.
○ 《통전》에 이르기를, “두원개가 운운하였다.” 하였다. -아래의 적손조모상중모망조(嫡孫祖母喪中母亡條)에 나온다. ○ 살펴보건대, 소(疏)에서 말한 설은 비록 이와 같지만, 정례(情禮)로 헤아려 보건대 끝내는 온당치 못한 바가 있다. 만약 아버지가 죽어 아직 빈을 하지 못하였는데 어머니가 죽었을 경우에는 차마 살아 계실 때와 다르게 할 수 없는바, 그래도 ‘아버지가 죽어 아직 빈을 하지 못하였을 경우에는 할아버지를 위해 기년복을 입는다.’는 설로써 미루어 나가, 어머니를 위하여 기년복을 입을 수 있다. 그러나 아버지의 상이 장차 끝나게 되었는데 또 어머니의 상을 당하였을 경우에도 아버지 상의 상기인 3년 이내라는 이유로 그대로 기년복을 입는 것이 과연 정리(情理)에 있어서 합당한 것이겠는가. 두원개의 설은 기년복을 입는다는 뜻이 없는 것 같다. 어떨지 모르겠다.-
아버지의 상을 장사 지내지 않았을 경우에는 참최복을 그대로 입은 채 일을 하여 어머니의 빈을 행한다.
[문] 아버지와 어머니의 상을 함께 당하였을 경우에 어머니를 먼저 장사 지내되 반드시 참최복을 입고서 지내는 것은, 아버지를 장사 지내지 않았기 때문에 변복(變服)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머니의 빈을 비록 각각 설치하였더라도 아버지의 상을 장사 지내기 전에는 어머니를 위한 상복을 입고서 곡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까? -황종해-
[답] 《예기》 상복소기의 설이 분명한바, 이제 그것을 어겨서는 안 되네.
○ 《예기》 상복소기에 이르기를,
“부모의 상을 함께 당하였을 경우에는 어머니를 먼저 장사 지내고 그 우제와 부제는 지내지 않고서 뒤에 장사 지내는 일을 마치기를 기다린다. 또 어머니를 먼저 장사 지낼 때에도 참최복을 입고 지낸다.[父母之喪偕 先葬者不虞祔 待後事 其葬 服斬衰]”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장사는 가벼운 상을 먼저 지내고 중한 상을 나중에 지낸다. ‘선장(先葬)’은 어머니를 장사 지내는 것이다. ‘우제와 부제를 지내지 않는다’는 것은, 어머니를 위한 우제와 부제를 지내지 않는 것이다. 대개 어머니를 장사 지낸 다음 날에 곧바로 아버지를 장사 지내고, 아버지를 장사 지내기를 마치고서 아버지에 대한 우제와 부제를 지낸 뒤에 어머니를 위한 우제와 부제를 지낸다. 그러므로 ‘뒤에 장사 지내는 일을 마치기를 기다린다.’고 한 것이다. 제사는 중한 상을 먼저 지내고 가벼운 상을 나중에 지낸다. 어머니를 장사 지낼 때에도 참최복을 입는 것은 중한 상복을 따른 것으로, 아버지를 장사 지내지 않았기 때문에 감히 변복할 수 없는 것이다.”
하였다.
부모의 상을 함께 당하였을 경우에는 길을 가면서는 아버지의 상구가 앞서 가고 하관(下棺)할 적에는 어머니의 상구를 먼저 하관한다.
[문] 부모의 상을 한꺼번에 당하였을 경우, 길을 갈 때와 하관할 때에 장차 어느 분을 먼저 하고 어느 분을 나중에 해야 합니까? -송준길-
[답] 운운하였다. -아래의 발인급폄조(發引及窆條)에 나온다.-
아버지의 상중에 조부모가 죽었을 경우에는 대신 복을 입는다.
[문] 아버지의 상에 아직 빈을 하지 않았는데 조부모의 상을 당하였을 경우에는 어떤 복을 입어야 마땅합니까? -송준길-
[답] 《통전》을 보면, 아버지의 상에 아직 빈을 하지 않았을 경우에는 할아버지를 위하여 기년복을 입는다고 되어 있네. 그러나 나의 생각으로는, 단지 기년복만을 입는다면 이는 상제(祥祭)와 담제(禫祭)가 없게 되는데, 그래서야 되겠는가 싶네. 그렇지만 옛사람의 말이 이와 같으니 감히 경솔하게 의논하지는 못하겠네.
○ 《통전》에 이르기를,
“하순(賀循)의 상복기에 이르기를, ‘아버지가 죽어서 아직 빈을 하지 않았는데 할아버지가 죽었을 경우에는 할아버지를 위해서 기년복을 입는다. 이미 빈을 한 뒤에 할아버지가 죽었을 경우에는 삼년복을 입는다. 이것은 적자로서 아버지의 후사가 된 자를 두고 이른 것이다. 아버지를 빈하지 않았을 경우에 할아버지를 위하여 기년복을 입는 것은, 아버지의 시신이 아직 있으므로 자식 된 자의 의리에 있어서 아직 중한 일을 대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였다.”
하였다.
○ 《통전》에 이르기를,
“유울지가 이르기를, ‘아버지의 상을 치르는 동안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경우, 두 상의 상주(喪主)를 겸하여서 해야 한다. 두 개의 여막(廬幕)을 따로 설치하고서 아버지의 상을 위하여 조문하러 왔을 경우에는 아버지의 상을 위해 설치한 여막으로 가서 조문을 받고, 할아버지의 상을 위하여 조문하러 왔을 경우에는 할아버지의 상을 위해 설치한 여막으로 가서 조문을 받아야 한다.’ 하였다.”
하였다.
○ 《통전》에 이르기를,
“우희(虞喜)가 이르기를, ‘할아버지를 위한 복을 단지 기년복만 입는다면, 전중(傳重)함이 누구에게 있게 되겠는가.’ 하였으며, 유울지가 이르기를, ‘아버지가 죽어 아직 빈을 하지 않았으면, 이는 평소에 살아 계신 때와 같은 만큼, 이는 아버지가 전중한 정식 주인이 되고 자기는 일을 섭행하는 것이 되어, 일에 있어서 빠뜨려진 것이 없게 된다.’ 하였다.”
하였다.
○ 《통전》에 이르기를,
“서막(徐邈)이 이르기를, ‘대공복(大功服)을 입는 자는 주인(主人)의 상(喪)에 오히려 주인을 위하여 연제(練祭)와 상제(祥祭)를 지낼 수 있는 법이다. 그런데 더구나 여러 손자들이겠는가. 만약 1주년이 되어서 이미 제복(除服)하였다면 소복(素服)을 입고 제사에 임하고, 심상(心喪)의 제도에 의거하여 3년의 상기를 마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하였다.
할아버지의 상중에 아버지가 죽으면 아버지 대신 복을 입는다.
[문] 할아버지의 상을 아직 장사 지내지 않았는데 또다시 아버지의 상을 당하였을 경우에는 장손(長孫)은 마땅히 할아버지를 위해 추복(追服)을 입어 삼년복을 입습니까? -송준길-
[답] 《의례경전통해》의 설을 근거로 삼을 수 있네. 다만 ‘연제를 지낸 뒤에 죽었으면 심상만을 편다.’고 한 것은, 꼭 맞는 것인가의 여부는 모르겠네.
○ 《의례경전통해》에 이르기를,
“본조(本朝)의 석조인(石祖仁)이 말하기를, ‘조부 중립(中立)이 죽었는데, 숙부인 종간(從簡)이 성복(成服)한 뒤에 또 죽고 말았습니다. 저 조인이 적장손(嫡長孫)이니 할아버지를 이어받은 중복(重服)을 입게 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그러자 박사(博士) 송민구(宋敏求)가 의론을 올리기를, ‘아들이 아버지의 상중에 있다가 죽었을 경우에 적손(嫡孫)이 승중(承重)하는 것은 예령(禮令)에 나와 있는 글이 없습니다. 《통전》을 보면, 진(晉)나라 사람이 묻기를, 「적손이 상중에 죽었을 경우에 제사 지내는 일이 의심스럽다.」 하자, 서막(徐邈)이 말하기를, 「가령 한 손자로 하여금 섭주(攝主)가 되게 하고서 본복(本服)인 기년복(朞年服)을 입게 하면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하승천(何承天)은 말하기를, 「이미 차손(次孫)이 있으니 복(服)이 없게 할 수는 없다. 다만 차손은 이미 이에 앞서 자최복을 제복(制服)해 입었다. 그런즉 이제 와서 바로 복을 바꾸어 입을 수는 없다. 그러니 모름지기 중상(中祥)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연복(練服)을 입게 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배송지(裴松之)는 말하기를, 「차손은 본디 삼년복을 입는 도리가 없는 법이다. 그러니 의당 상주(喪主)가 되어 3년의 상기를 마쳐야 하지만, 삼년복을 입을 수는 없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사마조(司馬操)가 논박하여 이르기를, 「두 설은 분명한 근거가 없다. 그러니 그 복은 삼년복을 입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습니다. 대저 밖으로 장사를 치르고 안으로 영석(靈席)을 받들면서 연제(練祭)와 상제(祥祭)와 담제(禫祭)를 지내는 데 있어서 주관하는 자가 없어서야 되겠습니까. 석조인은 명색이 적손(嫡孫)인데 그 중함을 이어받지 않고서 도리어 「종간이 이미 할아버지의 상복을 입었다.」고 해서야 되겠습니까. 살펴보건대, 《의례》를 보면, 「딸이 시집을 갔다가 쫓겨나 집으로 돌아와 아버지의 집에 있을 경우에는 아버지를 위해서 삼년복을 입는다.[女子嫁反在父之室 爲父三年]」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상을 만나고서 쫓겨난 경우에는 처음에는 자최기년복을 입었으므로, 쫓겨나고서 우제를 지낼 때가 되었을 경우에는 삼년복에 대한 복으로 수복(受服)한다. 이미 우제를 지내고서 쫓겨났을 경우에는 소상(小祥) 때에 역시 그와 같이 한다. 이미 제상(除喪)하고서 쫓겨났을 경우에는 복을 입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두우(杜佑)는 통달한 유학자라고 불리는 사람인데, 그 뜻을 이끌어다가 앞의 문답(問答)한 말 다음에 붙였습니다. 그리고 더구나 서막과 배송지의 설은 이미 사마조가 논박하였습니다. 그러니 이런 경우의 복은 재차 제복(制服)해야 함이 분명합니다. 또 상에는 반드시 그에 따른 상복이 있는 법입니다. 이제 석조인은 의당 관직에서 물러나 장사 지냄을 인하여 참최복을 제복해 삼년복을 입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리고 이 뒤로 이와 비슷한 경우이면서 이미 장사 지낸 경우에는 재차 제복하게 하여 역대(歷代)의 빠뜨린 제도를 통하게 하소서.’ 하니, 조서(詔書)를 내려 송민구의 의견대로 하게 하였다.”
하였다.
○ 《의례경전통해》에 또 이르기를,
“오늘날의 복제령(服制令)을 보면, 적자(嫡子)가 상을 다 마치지 못하고 죽어서 적손(嫡孫)이 승중(承重)할 경우, 죽은 것이 소상(小祥)을 지내기 전이면 소상 때 수복(受服)하고, 소상을 지낸 후면 심상(心喪)으로 정을 펴는데, 모두 3년 동안 입고서 제복(除服)한다.”
하였다. -적손이 할머니를 위해 입는 상복과 증조나 고조의 후사가 된 자가 증조모와 고조모를 위해 입는 상복은 이에 준한다.-
조부모 및 부모의 상이 함께 있을 경우에 습렴(襲斂)하는 선후(先後)
[문] 조부모 및 부모의 상이 함께 있을 경우에는 어떤 분을 먼저 습렴하고 어떤 분을 나중에 습렴합니까?
조부모 및 부모의 상이 함께 있을 경우에 성복(成服)하는 선후
[문] 조부모 및 부모의 상이 함께 있을 경우에는 어떤 분을 먼저 성복하고 어떤 분을 나중에 성복합니까?
[답] 운운하였다. -두 조항에 대해서는 앞의 습조(襲條) 및 성복조(成服條)에 이미 나왔다.-
적손(嫡孫)이 조모의 상중에 어머니가 죽었을 경우에 지복(持服)하는 것과 칭호(稱號)
[문] 승중(承重)한 자가 할머니의 상에 거상(居喪)하고 있는데, 얼마 뒤에 어머니가 죽었을 경우에는 어떤 복이 중한 복이 됩니까? 그리고 서소(書疏)를 쓸 적에 자신의 칭호를 뭐라고 씁니까? -송준길-
[답] 《통전》에 논해 놓은 바가 있으니 상고해서 행할 수 있을 것이네.
○ 《통전》에 이르기를,
“진(晉)나라 뇌효청(雷孝淸)이 묻기를, ‘조모를 위하여 지중(持重)하고 있는데 이미 장사를 지낸 뒤에 어머니가 또 죽었을 경우, 복제(服制)를 어떻게 합니까? 별도로 문(門)을 내고 다시 여묘(廬墓)를 세워야 합니까? 그리고 고손(孤孫)이라고 칭하지 않고 고자(孤子)라고 칭해야 합니까?’ 하니, 범선(范宣)이 답하기를, ‘예경을 살펴보건대, 응당 후상(後喪)의 복을 입어야만 하며, 적통을 계승하였으면 제부(諸父)의 위에 있는 만큼, 한 몸으로 양쪽 상의 상주가 될 수 있다. 그러니 다시금 별도로 문을 내고 여묘를 세워서 바른 장소에 거처하는 뜻을 잃을 필요는 없다. 조모의 상에 연제(練祭)를 지낼 날짜가 되면 변제(變除)하고 악실(堊室)에 거처하며, 제사를 마친 뒤에 후상의 복을 도로 입으면 된다. 그리고 예경에는 서소(書疏)에서 고자나 고손이라고 칭한다는 글이 없고, 오늘날 행해지는 것이 인정에 있어서 합당하다. 고손이라고 칭하는 것은 전중(傳重)한 명목을 보존하는 것이다. 그러니 조모의 복을 다 입은 뒤에 고자라고 칭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하였다.
○ 《통전》에 이르기를,
“유울지(庾蔚之)가 말하기를, ‘두 상의 자리를 같이하여 여차(廬次)와 악실(堊室)을 오가면서 거처하는 것은 아마도 때에 맞추어 하는 예가 아닐 듯하다. 그러니 후상(後喪)이 처음 발생하였을 때에는 별실(別室)을 여차로 만들고서 두 상의 상주를 겸하는 것이 마땅할 듯하다.’ 하였다.”
하였다.
○ 《통전》에 이르기를,
“두원개(杜元凱)가 이르기를, ‘만약 아버지를 이미 장사 지냈는데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경우에는, 어머니를 위한 상복을 입고 우제(虞祭) 때에 이르러서 그만 입고, 아버지를 위해 입는 상복을 도로 입는다. 이미 연제(練祭)를 마쳤으면 어머니를 위해 입는 상복을 입는다. 아버지의 상을 제상(除喪)할 수 있으면 아버지를 위해 입는 상복을 입고서 제상한다. 제상을 마치고는 어머니를 위해 입는 상복을 입는다.’ 하였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할머니를 이미 장사 지내고서 어머니를 아직 장사 지내지 못했을 경우에는 마땅히 어머니를 위한 상복을 입고, 어머니 상을 이미 장사 지냈으면 도로 할머니를 위한 상복을 입는다. 할머니를 위한 상복이 이미 연제를 지냈으면 도로 어머니를 위한 상복을 입는다. 어머니를 위한 상복이 이미 연제를 지냈으면 도로 할머니를 위한 상복을 입는다. 할머니를 위한 상복을 이미 벗었으면 도로 어머니를 위한 상복을 입고서 상을 마친다. 《통전》에 나오는 ‘부모해상지중복조(父母偕喪持重服條)’를 참고해 보면, 칭호(稱號)는 입고 있는 복에 따라서 변경해 고쳐서는 안 될 것으로 생각되는바, 할머니 상에 대한 담제(禫祭)를 지내기 전에는 애손(哀孫)이라고 칭하는 것이 마땅하다.
한꺼번에 상을 당하였을 경우에는 전상(前喪)의 대상 때에는 그에 대한 상복을 입고서 제사 지내는 것이 마땅하다.
[문] 한꺼번에 상을 당하였을 경우에는 전상의 대상을 지낼 때 그 상에 대한 상복을 입고서 제사 지내는 것이 마땅합니까? -송준길-
[답] 운운하였다. -아래의 대상조(大祥條)에 나온다.-
아버지의 상을 마치지 못하였으면 조모상의 담제(禫祭)와 길제(吉祭)를 지낼 수 없다.
[문] 할머니의 상과 아버지의 상을 한꺼번에 당하였을 경우, 아버지의 상을 끝마치지 못하고서도 할머니 상의 담제와 길제를 지낼 수 있는 것입니까?
한꺼번에 상을 당하였을 경우에 전상(前喪)의 담제는 때가 지나간 다음에는 제사 지내지 않는다.
[문] 한꺼번에 상을 당하였을 경우에 전상의 담제를 때가 지나간 뒤에는 어떻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까?
[답] 운운하였다.
두 조항에 대해서는 아래의 담제조(禫祭條)와 길제조(吉祭條)에 나온다.
아버지가 죽어 상중에 있는데 적손(嫡孫)으로서 승중(承重)하였을 경우에는 의당 상을 마친 뒤에 신주(神主)를 개제(改題)해야 한다.
[문] 할아버지의 상을 치르는 3년의 상기 안에 아버지가 죽었을 경우에는 손자가 제사를 대신 주관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다만 신주를 예전에 제(題)한 것을 그대로 쓸 수 없습니다. 언제 개제하는 것이 마땅합니까? -강석기-
[답] 아마도 의당 상을 마친 뒤에 개제해야 할 듯하다. 이는 감히 그 어버이를 죽은 것으로 여기지 못하는 뜻이다. 그러나 예경에 근거로 삼을 만한 것이 없으니, 감히 옳다고는 하지 못하겠다.
[주D-001]은사(殷事) :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지내는 큰 제사를 말한다.
[주D-002]돈(敦) : 기장밥이나 쌀밥, 조밥 등을 담아 두는 기물이다. 세발솥인 정(鼎)과 궤(簋)가 합쳐진 형태로 만들었다.
[주D-003]고손이라고 …… 것이다 : 이 부분이 원문에는 ‘稱孤孫 存傳重之日’로 되어 있는데, 《통전》에 의거하여 ‘稱孤孫 存傳重之目’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