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명과 한식
청명은 전통적으로 한식이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기실 청명과 한식은 계산하는 방법이 서로 다릅니다. 한식은 동지날 부터 계산하여 105일이 되는 날입니다. 그런데 청명은 24절기의 하나로서 립춘으로부터, 다섯번째 절기가 됩니다. 지구가 태양을 에워싸고 15도씩 움직이면 한절기가 드는데, 청명이면 지구가 립춘을 원점으로 이미 60도 움직였고, 동지를 원점으로 하면 바로 105도 움직인 위치입니다. 그런데 일년 365일을 지구가 태양을 에워싸고 한회 공전한 360도로 나누면, 공전1도가 실제로 하루의 24시간을 조금 초월하므로 한식은 청명과 같은날이 아닐수 있습니다.
한식을 기념하게 된 유래
한식을 기념하게 된 유래에 대하여 몇가지 설이 있는데, 그중에서 개자추(介子推) 설이 비교적 대표적입니다.
중국 춘추시기에 진문공(晉文公)이라는 임금이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력사상 유명한 춘추 7패중의 두번째 패왕이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아직 임금이 되기전에 한번은 내란을 당하여 심복신하들을 데리고 국외로 탈출하여 방랑하게 되였습니다. 하루는 방랑길에서 굶고 지치여 쓰러진 진문공을 개자추라는 한 신하가 자기 허벅지 살을 썩- 베어내여 구워먹여서 살려냈습니다.
그후 고난이 끝나고 임금자리에 오른 진문공이 개자추에게 벼슬을 주려고 불렀지만, 개자추는 벼슬에 뜻이 없어 이미 어머니를 모시고 면산(지금의 山西綿山)에 들어 갔으므로 찾을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를 나오게 할 목적으로 진문공은 산에 불을 질렀으나 개자추는 끝내 나오지 않고 어머니와 함께 불에 타 죽었습니다. 그 옆에는 헝겊에 피로 쓴 한수의 시구가 있었습니다; “… 나는 구천에서도 부끄러움 없으니, 임금께선 나라일에 청명하시고 또 청명하시라.”
진문공은 개자추를 기념하기 위하여 사당을 짓고 해마다 제사 지내게 하였으며, 산에 불을 놓은 그날을 한식날로 하고, 전국적으로 이날에는 불을 금하고 찬 음식을 먹도록 하였으며, 개자추의 시구에 근거하여 이날을 청명절로 부르도록 하였다고 합니다.
언제부터 청명에 성묘하는 풍속이 생겨났는가?
청명풍속은 중국 춘추시기부터 있었다고 하는데, 청명에 성묘하는 풍속은 공자에 의하여 시작되였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미 2500여년이 되지요. 그러다가 당나라 개원년간 당현종때에 와서 청명성묘를 한식성묘로 공식적으로 고쳤습니다. 당시의 조선반도는 통일신라시기였는데, 당나라와의 밀접한 관계에 의하여 한식성묘 문화가 신라에까지 받아 들여진것으로 추정됩니다. 그후 송나라때에 와서 중국에서는 한식성묘가 다시 청명성묘로 복귀되였지만, 조선반도에서는 조선왕조가 시작되면서 한식은 이미 설, 단오, 추석과 함께 우리민족의 4대명절로 확고히 고정되여 있었습니다.
우리민족은 한식날에 주로 조상의 산소를 돌보고 제사를 지내며 성묘를 합니다. 우리 조선족이 중국에 건너온 초기에만 하여도 여전히 한식을 쇠였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중국에서 장기적인 정착생활을 하게 되면서, 점차 한족들의 영향을 받아, 지금 와서는 한식의 개념은 거의 없어지고, 청명개념으로 일반화 되였습니다.
청명에 왜 성묘하는가?
성묘는 우리민족 전통家禮인 冠婚喪祭 四禮중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祭禮의 일종이며, 墓祭에 해당합니다. 전통적으로 제례는, 조상에게 감사드리고 사망한 부모를 추모하는, 죽은 사람들을 위한 문화라고 하지만, 기실 제례는 철두철미 산 사람들을 위한 문화입니다. 사람이 사망한후에 저승이나 천국이 실제로 있는지 그 누구도 모릅니다. 공자왈; ”未知生 焉知死”(사는 일도 아직 잘 모르겠는데 죽은후의 일을 어찌 알겠느냐?)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몇천년을 내려 오면서, 자기조상이나 사망한 부모에게 줄곧 정성 들여 게으름 없이 제사 지내여 왔습니다. 무엇때문이였겠습니까? 우리의 생명은 결코 쉽게 온것이 아닙니다. 시작을 알수없이 아득히 먼 옛날부터 우리의 조상들은 파란만장 헤치시며, 이루 헤아릴수 없이 많은 희생을 내면서 생명인자를 한세대 한세대 어렵게 이으시여 오늘 우리에게까지 전달되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조상과 부모에 대한 숭배는 결국 자기 생명에 대한 숭배로 됩니다. 제사는 조상이나 사망한 부모에게 감사의 마음을 표달하는것으로 사람으로서의 기본도리와 의무를 지키는 것이고, 자기의 근본을 잊지않고, 거기에 근거하여 자기 삶의 태도를 바로잡기 위한 것이며, 신앙의 힘을 얻기 위한 것입니다.
자고로 근본을 중시하면 흥하였고, 근본을 무시하면 망하였습니다. 오늘날 경제발전과 더불어 한국인들과 중국한족들의 제사의식은 점점 짙어가는 반면에, 우리 조선족들의 제사의식은 점점 해이해져 가는데, 심히 우려되는 부분입니다.
청명 성묘방법
우리민족의 청명 성묘방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산소에 도착하면 먼저 후토를 찾아 후토제를 간단히 지냅니다. 묘제를 지낼때마다 먼저 후토에 제를 지내는데, 이것은 땅을 파고 초목을 베기 전에 묘를 지켜준 산신령한테 례를 올리고 허가를 받는다는 상징적 절차로서 자연에 대한 존중를 표시합니다. 그다음 삽으로 가볍게 묘소를 손질하면서 잔디를 입히기도 하는데, 속칭 가토 혹은 개사초(盖莎草)라고 합니다. 가토가 끝나면 제단에 제물을 차려놓고 묘제를 지냅니다. 먼저 사회자가 술을 따르고 다함께 절를 세번 하는데 降神이라고 합니다. 즉 이미 신령으로 되신 고인께서 제사받으려 내려오신다는 뜻이 되겠죠. 그다음 제주로부터 차례로 나와 술을 따르고 절을 세번씩 하는데, 獻酌이라고 합니다. 헌작에는 初獻, 亞獻, 終獻, 添酌 등 절차가 있습니다. 소유의 사람들이 모두 헌작이 끝난후, 사회자가 숟가락으로 메밥을 조금 떠서 물그릇에 넣고, 저를 옮겨 놓으면서 신령의 식사를 시중드는 시늉을 하는데, 侑食이라고 합니다. 유식을 끝내고는, 숙주(냉수) 한잔 따르고, 모두 다 함께 절을 세번 올리는데, 이것을 辭神이라고 하며, 이것으로 성묘가 끝납니다. 성묘가 끝나면 자리를 정하고 모여앉아, 갖고간 제물들을 음복하면서 덕담들을 나눕니다.
한곳에 조상들의 묘가 여러자리 있을 경우에는, 부모묘에 먼저 성묘하고, 그다음 윗대 순서에 따라 성묘하는데, 후토제는 부모묘에서 한번만 지냅니다. 제물은 여러자리 성묘에서 련속 쓸수 있지만, 메밥과 수저만은 묘자리에 따라 각기 갖추어야 합니다.
상업성 현대식 능묘에 가서 성묘할 경우에는 능묘를 포함하여 주위를 깨끗이 하는 것으로 가토를 대신하고, 제사 지내는 방법은 위의 절차를 참조하면서 조절하여 지내면 되겠습니다. 현대에 와서 제사상을 꽃으로 대신하는 분들도 있는데, 제창할 바입니다.
골회함을 납골당에 보관하였을 경우에는 이날에 골회함을 찾아내와 적당한 자리를 정하고, 위의 제사지내는 방법을 참조하면서 조절하여 간단하게 지내면 되겠습니다.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것은 골회함을 꺼내 올때나 제사 끝내고 다시 넣을때 물건취급 하지말고, 산사람처럼 공경하면서 자리를 옮길때마다 반드시 경견히 인사의 말씀을 올려야 합니다.
제사상 차리는 방법
1,준비할 제물종류
필수품; 메밥, 수저, 물, 물그릇, 술, 술잔,
과일류; 대추, 밤, 감 각기 얼마간, 사과배 사과 오렌지 등 과일 각기 세알,
어육류; 명태 낙지 각기 세꼬리, 익은 돼지고기 적당량…
이외에 자기 마음에 물어보아 봉공하고 싶은 물품으로 갖추되, 개수는 홀수로 하고 짝수로 하지 않습니다.
제물은 많이 갖추기 보다, 간단하면서도 정성들여 갖추는 것이 원칙입니다. 사과한알을 골라도 가장 크고 고운걸로 고르고, 허물이 없는지를 자세히 살피며, 종이에 싸서 상하지 않도록 조심히 다룹니다.
금기로는 전통적으로 복숭아, 개고기, 칼치, 멸치 등은 제물로 쓰지 않습니다.
2,제사상 차리는 방법
진설규칙; 紅東白西, 生東熟西, 魚東肉西, 頭東尾西, 左脯右醯, 棗栗李枾.
구체적으로 제사상 좌향이 어떠하든 상관없이 제사상 마주하여 오른손편을 동으로 취급합니다.
진설방법; 맨앞 첫줄에는 메밥과 물그릇 술잔을 놓고, 제사 시작하여 강신이 끝나면 메밥뚜껑을 열고 숟가락을 꽂아놓고, 물그릇에 저가락을 얹어 놓습니다. 두번째줄에는 반찬류와 어육류를, 세번째 바깥줄에는 과일류와 부식품류를 놓습니다.
전통적으로 제사상 차릴때 많은 규칙들이 있었는데, 지금 그 많은 번거로운 규칙들을 일일히 모두 따를 수는 없습니다. 총체적인 분포규칙을 지키고, 신위와 제물이 놓인 위치가 합리하고, 제물 종류가 합리하며, 미관상에서 어색하지 않고, 정연하게 차리면 되겠습니다.
명시감상
《淸明》(唐)杜牧
清明时节雨纷纷,
路上行人欲断魂。
借问酒家何处有,
牧童遥指杏花村。
청명절날 구질구질 비가 내리니,
길손들 저마다 혼줄이 났습니다.
술집은 어디쯤 있는냐 물었더니,
목동은 멀리 행화촌 가리킵니다.
《조선족 상례풍속》과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
조선민족은 자고로 자기의 찬란한 상례문화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력사적 원인으로 하여 중국조선족은 자기의 전통상례문화의 전수와 통일을 완성하지 못하였습니다. 나라에서 장례개혁을 시작하면서, 회족, 위그르족 등 이슬람 종교를 신앙하는 소수민족들의 장례풍속은 국가적 존중대우를 받았지만, 조선족 전통장례풍속은 인정받지 못하고 무시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연변이 비록 조선족자치주였지만, 연변경내의 병원이나 빈의관에서는 특별히 조선족 상가를 대상으로 하는 써비스 항목이나 시설을 따로 설치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30여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장기간 조선족 전통상례가 필요없게 된 상황에서, 조선족 전통상례풍속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점점 사라지게 되였으며, 가정에서 효도가 약화되고, 전통이 끊어지고, 사명감이 없어졌으며, 민족의 퇴화가 놀라울 정도로 가속화 되였습니다.
이런 사회배경에서, 2009년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에서는 《조선족 상례풍속》을 발굴정리하여, 나라에 비물질문화유산으로 신청하였으며, 많은 노력을 거쳐 끝내는 길림성 비물질문화유산 등록에 성공하였고, 전수인 대표로 지정되였습니다. 이리하여 중국 조선족들도 나라로 부터 자기 상례문화의 합법적 권익을 초보적으로 인정받게 되였습니다.
몇년간 이 연구회에서는 사회상의 많은 오해와 기시를 감수하면서, 우리 민속문화의 공백을 미봉하여, 민족을 위하여 실질적인 일을 한가지 하겠다는 일념만으로, 머리숙이고 꾸준히 노력하여 왔고, 지금도 노력하고 있으며, 또 계속 노력할 것입니다.
이 연구회에서는 일찍 《조선족 상례풍속》3단계 발전전략을 확정하였습니다:
1단계; 《조선족 상례풍속》을 발굴하고 정리하여, 이 문화에 대한 원래의 고고학적 문화연구를 현실적 문화연구로 전환시킨다.
2단계; 《조선족 상례풍속》을 사람들의 의념상에서 죽은사람을 위한 문화로 부터, 산사람을 위한 문화로 전환시킨다.
3단계; 《조선족 상례풍속》을 문명하고 현대적인 조선족 특색 브랜드문화로 발전시킨다.
제1단계는 2009년에 《조선족 상례풍속》이 길림성 무형문화재로 지정 되였고, 2010년에 제1차 학술세미나가 개최되면서 이미 초보적으로 완성되였습니다.
제2단계는 지금 한창 진행중입니다.
1, 2011년 한국장례관리협회의 요청으로 한국에 가서 전통장례를 연수하고 “전통장례 일급지도사”영예를 가졌습니다.
2, 연구회 산하에 “시대상조 복무중심”을 설립하고, 가장 저렴한 가격으로 조선족들의 상례치르기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여 드리고 있습니다.
3, 2014년에 한국의 동국대학과 나라얼연구소의 초청으로 장례문화 국제학술 세미나에 두번 참석하여 논문을 발표하였습니다.
4, 《조선족 상례풍속》전수기지를 건립하기 위하여, 2015년3월30일에 연변대한 과학기술홀에서 제2차 세미나가 개최됩니다….
우리민족은 우수한 민족입니다. 지금 시대의 대변혁속에서 이런저런 진통을 겪고 있지만, 우리가 시종 자기 뿌리를 잊지않고, 자기 문화를 버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필연코 더욱 성숙된 민족으로 탈바꿈 되여, 중화대지 곳곳에서 뿌리박고 꽃을 피우게 될것입니다.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 현용수 작성
2015년3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