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丽棒子》와 《떼놈》의 유래
중국의 汉族과 반도의 고려안민족(우리민족을 통칭하여 조선민족이라 하자니 한국인이 분노하고, 韩민족이라 하자니 조선인이 분노하고 하니, 차라리 국제관습에 따라 한국, 조선 그리고 세계각지에 분포되여 있는 우리계례들을 통칭하여 ‘Koreans고려안’민족이라고 부르는 것이 합리하겠다--필자)은 지리적으로 서로 이웃하고 살면서, 력사상에 평화합작의 시기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죽기 내기로 싸운적도 있었으며, 민간래왕에서는 서로 존경도 하고, 때로는 서로 욕질도 하면서 오늘까지 미운정, 고운정 키워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계는 결코 우리에게 완전무결한 세계가 아닙니다. 많은 결점과 불편이 존재하죠. 그리하여 때로는 우리 본의 아니게 분노와 불평이 폭발합니다. 욕설은 분노와 불평을 해소시켜 줄수 있는 일종의 렬성 “항생소”입니다. 람용해선 안되죠. 우리는 욕설이라는 이 렬성 “항생소”를 공제성 있게 사용하여, 분노와 불평을 조기 처리함으로써 진일보의 폭력적 행위를 피면할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두말없이 폭력부터 들이 댄다거나, 욕설을 전주곡으로 폭력에 돌입한다면 그것은 작은 모병에 큰 수술을 들이대듯이 천부당 만부당 합니다.
그 누구를 욕설한다는 것은 대방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대방의 명예를 훼손시키는 문명하지 못한 인권침해 행위로서, 엄중하면 법률적 책임까지 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어쩔수 없이 욕설이 터져나올 경우, 욕설의 대상을 구체적인 그 누구로 하지말고, 될수록 모 사건, 혹은 모 사물을 대상하여 빙자하여 욕설하는것이 비교적 안전합니다.
욕설도 일종의 문화입니다. 좀 거치른 문화지요. 욕설에는 서술식, 은유식, 성어식 …등 여러가지가 있는데, 한 민족의 습관, 특성, 기질을 나타냅니다. 특히 성어식 욕설일 경우, 그런 욕설의 유래에는 그 민족의 문화적, 력사적 사연이 내포되여 있습니다. 이런 유래를 밝히므로써 구체적으로 어떤 적극적 의의가 있겠는지는 아직 확실하게 잘 모르겠지만, 하여튼 장원한 견지에서 민족의 렬근성을 극복하고, 민족의 자강, 자존, 자애에 유익한 계시가 될수 있을것 같습니다.
1, “高丽棒子”의 유래
전번 한시기에 중국의 그 무슨“공정”으로 인하여 중한 민간에서 인테넷을 통하여 치렬한 쟁론이 있었습니다. 한국인들이 중국의 전통문화가 원래는 모두 자기들의 것이였다고 떼질을 쓰자, 중국의 누리꾼들은 너무나 어처구니 없고 분통이 터져서 한국인들을 “高丽棒子”라고 욕합니다. 중국인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조선인이나 한국인을 욕할때 “高丽棒子”라고 욕함으로써 가장 통쾌하게 욕했다고 여깁니다.
그럼 이 “高丽棒子”란 말이 도대체 무슨 뜻이며, 언제부터 어찌하여 중국인들이 조선인이나 한국인을 폄하하는 욕설이 되였는가에 대하여 알아 보겠습니다.
일설에서는 동북에서 “棒子“란 옥수수를 뜻하니, ”高丽棒子”란 바로 “고려 옥수수”라는 해석도 있지만, 그것이 아니라는 리유는 아주 명백합니다. 왜냐하면 력사상에 고려에서는 옥수수를 심지 않았고, 주로 벼와 조를 심었기 때문입니다. 또 일설에서는 “만주국” 왜정때 많은 조선인들에 일본군대에 편입되여 들어 왔는데, 그들은 왜놈들의 권세를 등에 업고 조선 녀인들의 빨래방치 비슷한 방망이를 허리에 차고 다니며, 걸핏하면 중국인들은 두들겨 팼다는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중국인들이 조선인들을 특별히 미워하여 ”高丽棒子”라고 욕하게 되였다는 해석입니다. 그런데 이 해석도 성립될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高丽棒子” 의미를 가진말이 이미 “만주국”전의 청나라의 문헌에서 나타나 있기 때문입니다.
청나라의 王一元이라는 사람이 康熙五十年(公元1711年)전후에 쓴것으로 짐작되는 《辽左见闻录》이라는 문헌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한단락의 기록을 볼수 있습니다: “朝鲜贡使从者之外,其奔走服役者,谓之’棒子’。其国妇女有淫行,即没入为官妓,所生之子曰’ 棒子’,不齿于齐民。鬓发蓬松,不得裹网巾;徒行万里,不得乘骑;藉草卧地,不得寝处火炕。盖国中之贱而劳者。” 우리말로 번역하면 대체로 다음과 같은 내용입니다: “조선에서 조공 바치려 온 사종자 외에, 뛰여 다니며 복역하는 자들이 있었는데 ‘방자’라고 부르더라. 그 나라에서는 여자가 음란한 행위를 하여, 즉 관기로 들어가지 않고 낳은 자식을 ‘방자’라고 부르는데 제민들과 같은 대우를 받지 못한다. 머리가 헝클어 져도 망건을 써선 안되고, 만리를 걸어 가도 수레나 말을 타선 안되며, 맨봉당에 짚을 깔고 자면서도 온돌에서 자선 안된다. 나라에서 비천하고 일만 하는 자들이다.”
여기에서 “방자”라는 말이 나오는데, 고려안들은 이 “방자”라는 말이 너무나 익숙합니다. 《춘향전》에서 이도령의 시중군이 바로 “방자”가 아닙니까? 조선의 옛문헌에서는 “방자”를 한자로 “房子” “帮子”, “膀子”,등으로 표기가 되여 있으며, 한국 《두산백과》에서는 “방자”라는 관직은 고려시대에서는 “관청이나 관인에게 분급되여 잡직에 종사하는 말단의 이속”이였고, 조선시대에서는 “지방관아에서 심부름하던 남자 종, 또는 조선 초기 각사(各司)에 있던 비녀(婢女)중에서 뽑아 궁중의 작은 일을 보살피게 하던 시녀”라고 해석이 되여 있습니다. 이상에서 알수 있는바 “방자”는 일종 관직의 이름이였는데 관청, 혹은 관인의 심부름꾼 직급이였습니다.
王一元의 《辽左见闻录》에서 우리는 조공 바치려 중국에 온 조선 사절단 중에는 “棒子”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바로 사절단 양반들의 시중을 들기 위하여 따라 온 “방자”들이란 것을 알수있습니다. 비록 “방자”에 대하여 조선 옛문헌과 한자 표기법이 서로 다르지만, 王一元의 문헌에 있는 “棒子”와 같은 뜻임은 틀림이 없습니다. 《辽左见闻录》은 오늘까지 중국에서 발견한 “朝鲜棒子”기록이 있는 가장 이른 문헌이며, 여기에서 나오는 “朝鲜棒子”가 곧바로 “高丽棒子”의 원형이라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朝鲜과 高丽는 종래로 중국인들에게 있어서 동의어였기 때문입니다.
그럼 어찌하여 “高丽棒子”가 조선인들을 욕하는 말로 되였는가?
이 문제의 답안을 얻기 위하여 우리는 유관 력사문헌들을 찾아 그 당시 조선 사절단을 따라 중국에 들어온 “방자”들의 정황에 대하여 료해하여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마침 조선 사절단의 청조 방문견문들로 수집된 《燕行录》이라는 책이 있는데, 거기에서 가장 대표적인 문헌으로는 《老稼斋燕行日记》이며 작자는 金昌业이란 사람입니다. 그는 일기에서 자기가 康熙五十一年(公元1712年)에 자제군관 신분으로 조선 조공 사절단에 편입되여 중국에 왔다간 견문들을 상세하게 적었습니다. 우리는 《燕行录》에서 다음과 같은 정황들을 료해할수 있습니다:
1, 당시 조선에서는 중국에 한번 오는것을 큰 횡재의 기회로 보았기 때문에 량반들이나 ”방자”들은 갖은 수단을 다하여 조공 사절단에 편입되여 들었갔다. 그리하여 金昌业의 그번에는 량반이 43명에, “방자”무리는 무려 498명이나 되였다. 이렇게 방대한 “방자”무리들을 몇십명의 량반들이 미처 관리해 낼수가 없을 정도였다.
2, 당시 청조 조정에서는 주변 번속국에서 사절단을 파견하여 조공 바치려 올때, 연도의 지방관청에서는 사절단에게 주숙과 식사 등 방면에서 여러모로 편리를 제공하라고 명을 내렸다. “조선방자”들은 이 유리한 조건을 리용하여 량반들의 눈을 피해 민가와 여인숙, 술집, 점포 등에 들어가 도적질에 혈안이 되였다. 심지어 강탈하고 살인하는 자들까지 있었다.
3, 백성들이 피해를 보고 관청에 가서 고소하면 관청에서는 조정의 명이 있는지라 “조선방자”들을 처분하지 못하고 조선 사절단에 넘겨 주었다. 그러면 조선 사절단에서는 륭중한 의식을 열고 그 “방자”들을 처벌하는데, 많은 중국 백성들 앞에서 그 “방자”들을 형틀에 묶어놓고 엉덩이를 노출시킨후 특별한 조선식 방망이(棒子)로 엉덩이를 묵사발이 되게 때려준다. 이런일로 하여 중국의 백성들은 조선식 방망이(棒子)에 대하여 특별한 인상을 가지게 되였으며, 폄하의 뜻으로 시중꾼 “방자”들의 중국호칭을 방망이 “棒子”로 한것 같다.
4, 그런데 이런일이 자주 발생하게 되면서, 조선 사절단이 지나가는 연도의 중국 백성들이 원래는 “조선방자”들만 미워하던 데로부터, 점차 조선 사절단 본신을 싫어하게 되였으며, 그 루명을 결국 전반 고리안민족이 쓰게 되였다.
이상의 자료에서 알수 있는바, 옛날 “조선방자”들의 그 문명하지 못했던 행실에 의하여 “朝鲜棒子”, 혹은 “高丽棒子”가 점차 중국인들이 조선인들을 가장 폄하하여 욕하는 말로 되여 버렸던 것입니다.
2, “떼놈”의 유래
중한 민간관계가 그리 우호롭지 못했던 전한 시기에 인테넷에서 중국 누리꾼들이 한국인을 “高丽棒子”라고 욕하면, 한국 누리꾼들은 중국인을 “떼놈새끼”, 혹은 “똥떼놈”이라고 욕합니다. 한국 인테넷에 들어가 두루 살펴 보니, 한국인들이 중국인을 “떼놈”이라고 욕하는 데는 사람에 따라 여러가지 의미가 있었습니다.
ㄱ; 얼굴을 씻지 않고 때투성이로 다니는 놈
ㄴ; 떼를 지어 쓸어 다니는 놈
ㄷ; 똥같이 더러운 놈
ㄹ; 지저분한 놈
ㅁ; 미개한 놈
ㅂ; 망할 놈
… … … … … …
하여튼 이러루한 의미였습니다.
“떼놈”의 유래에 대하여 검색하여 보았더니 “위키백과”에 다음과 같은 해설이 나옵니다;
되놈은 중국인을 낮잡아 부르는 한국어 명칭 중의 하나이다. 한국인들 사이에서는 떼놈이라는 변형된 표현도 쓰이나, 되놈이 공식 표준어이다.
'되놈'에서 '되'라는 말은 본래 두만강 인근의 만주에 살던 민족(여진족)을 이르는 말이었다. 한국어원학회에서는 사람을 뜻하는 '돌'과 '이'가 결합되어 '돌이'라고 하던 것이 도리 → 도이 → 되로 변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1]. 이 말이 사람을 낮잡아 일컫는 '놈'과 결합되어 여진족을 비하하는 말로 쓰였고, 여진족이 세운 청나라에 의하여 명나라가 멸망하고 조선왕 인조가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에 굴욕을 당하는 사건이 일어난 이후 청나라를 비하하는 말로 널리 쓰이면서 중국인 전체를 비하하는 표현으로 정착되었다. 사람이 많아 집단 행동을 잘 한다고 하여 "떼놈"에서 유래했다거나, 큰나라(大國) 사람이라고 해서 "대(大)놈"에서 유래했다는 이야기는 근거가 없는 민간 어원설에 해당한다.
이상의 해석은 “떼놈”에 대한 여러가지 해석중에서 가장 정연하게 정리된 해석입니다. 그런데 이상의 해석에서도 이 해석을 증명할만한 확실한 근거를 내놓지 못하고 있으며 근근히 “추정하고 있다”는 정도입니다. 직접근거가 없으면 간접 근거라도 찾아야 어느정도 설복력이 있게 됩니다.
그리하여 계속 인테넷에서 바다 바늘찾기를 하다가 서울 북쪽에 “되너미고개”라는 곳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검색하여 보았습니다. 한국《문화일보》에 게재일자가 “2010년 11월 22일”로 된 ”미아리고개, 왜 ‘되너미고개’라 불렸나?”하는 제목의 문화기사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었습니다;
서울 성북구 돈암동 미아리고개는 조선시대 고지도에 되너미고개(적유현·狄踰峴)라고 표기돼 있다. 여진족 또는 중국인을 낮잡아 부르는 말인 되놈이 이곳을 넘어 서울에 침입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돈암동(敦岩洞)은 순우리말 이름인 ‘되너미’를 한자 소리를 따서 표기한 것이다.
다행으로 “떼놈”의 유래에 대하여 간접적으로 증명할만한 근거라도 찾은셈이 되였는데, 그 근거가 바로 “되너미고개”입니다.
이상의 자료들을 종합분석한 기초에서 “떼놈”의 유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정리합니다;
1, “떼놈”이란 말은 전통적으로 여진족(만족의 전신) 또는 중국인을 낮잡아 부르던 “되놈”이란 말에서 온 것이다.
2, 조선 고지도의 서울 “되너미고개”는 워낙 “되놈고개”를 문명한 어구로 다듬은 것이고, 그것이 한자로 “狄踰峴”으로 표기된것은 한자의 뜻글 공능을 충분히 발휘하여 한스러웠던
병자호란 력사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狄踰峴”을 뜻풀이 하면 “오랑캐가 넘어온 고개”라는 뜻이다. 이로부터 확실하게 알수 있는바, “되놈”에서의 “되”는 곧바로 한자”狄(di)”의 발음을 본딴 것이며, 북방 오랑캐란 뜻으로 력사상에서 주로 여진족을 가리켰었다.
3, “되놈”이란 말은 원래 여진족을 비하하는 말로 씌였고, 여진족이 세운
청나라에 의하여 조선의 종주국이였던
명나라가 망하고, 또
조선왕 인조가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 군대에 굴욕을 당하는 사건이 일어난 이후, 청나라 군대가 서울로 넘어 왔던 고개를 “되놈고개”라고 이름을 부치면서 청나라를 비하하는 말로 널리 쓰이다가 점차 중국의 전체를 비하하는 말로 확대되여 고착되었다. (끝)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
현성원정리
2013-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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