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변인민방송국 사회교육생방송
2013 추석특집
《우리민족 장례문화》
출연연사: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 현룡수회장
김동선 기자: 현회장님, 안녕하십니까? (현룡수 회장: 답례)
2013년 추석이 갓 지나고 이제 오래지 않아 우리 민족의 이묘같은 많은 장례문화가 집중되여 진행되는 중양절이라고 불리우는 음력 9월 9일을 맞게 되었습니다. 하여 이것을 계기로 해서 우리 민족 장례문화를 깊이있게 조명해보고자 우리 민족 장례문화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현회장님을 이 자리에 모셨습니다. 현회장께서는 우리 중국조선족 장례문화에 현존하는 문제점은 어떤것들이 있다고 보십니까?
현룡수 회장:
현재 우리 중국조선족 장례문화에 존재하는 문제점들로는
첫쩨; 우리민족 장례규범에 대하여 익숙히 알고 계시던 분들은 이미 모두 사망하시고 계시지 않기 때문에, 가문에 상사가 나도 구체적으로 장례를 지도하여 줄 분들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장례는 문화적 색채가 없어지고, 단순히 부패되여 가는 유체를 처리해 버리는 《환경위생》사무로 전락되였습니다.
둘째; 출국 로무인원이 많아지고 대성시에 간 분들이 많아 지면서 빈집을 지키고 있는 노인들이 많아 졌습니다. 그리하여 고독사, 임자없는 주검, 사망후 며칠후에 발견 등 현상들이 자주 발생합니다. 우리 민족은 전통적으로 장례를 한개 군체의 집단적인 행사로 인정하고, 서로 도우며 처리하여 왔으며, 종래로 사적인 개인일이라고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현재 조선족 장례는 완전히 사적인 개인일로 되여 버렸으며, 친척이나 친구들이 대부분 외국에 나가있는 형편에서 가문에서 장례 치르기가 상당히 딱하게 되여, 부득불 민간의 도움 인원을 찾아 대충처리해 버릴수 밖에 없습니다.
세째; 우리 연변을 전국에서 유일한 조선족 자치주라고는 하지만 현재 연변경내에는 병원부터 빈의관까지 조선족 장례를 대상으로 한 복무항목이 한가지도 없으며, 조선족 풍속으로 장례를 치를수 있는 장소나 시설이 한곳도 없습니다.
김동선 기자: 이제부터는 우리민족 전통 장례문화의 뿌리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지요?
현룡수 회장: 조선족 전통 장례풍속의 뿌리를 찾아보면 바로 중국 송조(기원960~1279)때의 《朱子家禮》이며 원시조는 곧바로 朱熹(기원1130~1200)가 되는 것입니다.
14세기말 고려국(기원918~1392)에서는 중국으로부터 유교의 례의서 《朱子家禮》(家禮혹은 文公家禮라고도 함)를 들여 왔습니다.
그후 조선왕조 (기원1392~1910)가 성립되여 태종12년 (기원1412)에 조정에서는 전국에 령을 내려 백성들의 일상 생활에서 모두 중국 유교의 례의서 《朱子家禮》 를 따르도록 하였습니다. 조선왕조 성종16년(기원1485)에 《經國大典》이 정식 출범하면서 조선왕조의 조정과 민간에서는 장례와 제사를 포함한 일체 행위표준과 례의규범이 모두 중국 유교의 례법에 기준하게 되였습니다.
조선족 전통 장례풍속은 중국고대의 유교문화 원고유존들을 비교적 완정하게 보존하고 있는데, 이런 원고유존들은 바로 오늘의 중국 중원문화에서는 이미 거의 찾아 볼수 없는 것들입니다.
조선왕조 중기의 학자인 申義慶(기원1557~1648)은 《喪禮備要》라는 책을 써서 《朱子家禮》의 상례에 상관되는 부분들에 상세하게 주석을 달았으며, 조선왕조 말기의 학자인 李縡(기원1680~1746)는 《朱子家禮》에 기초하여 거기에 또 조선민족의 전통적인 가례 풍속과 리념을 보태여 넣으면서 《四禮便覽》이란 책을 써서 조선민족의 《冠婚喪祭》례의 규범들을 전면적으로 저술하였습니다. 이것으로 《朱子家禮》의 우리 민족화가 최종으로 완성된 것입니다.
조선족 전통 장례풍속의 기본리념은 유가의 사상으로서 그 핵심은 “효도”이고 그 주체는 “례의”입니다. 조선족 전통 장례풍속에서는 “효도”와 “례의”의 리념이 집중적으로 표현됩니다. 조선족 전통 장례활동은 문화적 의미에서 “효도”와 “례의”를 원만히 하고 계승하는 과정으로 됩니다.
중국 조선족 선민들 대부분은 1850년 이후에 조선반도로 부터 중국 동북지구에 들어와 정착하게 되였는데 100여년 력사의 연혁을 거쳐 점차 당대 중국의 한갈래 소수민족으로 발전하였습니다.
중국 조선족은 조선반도의 여러지역에서 들어왔는데 그들이 중국에 가지고 들어온 장례풍속도 지역에 따라 정도 부동하게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중국의 특정된 환경에서 장기간 공동히 생활하는 가운데서 점차 중국특색의 조선족 장례문화가 형성되였습니다.
문화혁명 이전까지 중국의 조선족들은 그래도 기본상에서 조선반도에서 가지고 들어온 전통 장례제도를 실행하였는데 마을마다 丧舆契와 같은 민간 상조 조직들이 있었으며 집체로 자금을 내여 丧舆(조선족 전통장례에서 썼던 운구 공구, 香徒, 灵輀라고도 함)를 만들어서는 마을에서 떨어진 편벽한 곳에 상두막을 지어놓고 보관하였으며 도감을 한 사람 선발하여 마을의 장례행사를 관리하게 함으로써 일단 마을에서 사람이 죽게되면 굴심을 할 사람과 상여, 그리고 상여를 멜 사람들까지 통일적으로 배치하였습니다. 마을에서 제일 나이가 많고 덕망이 높은 좌상어른은 마을에서 진행되는 매차례의 장례의식을 엄격히 감독하였으며 집집의 제사에 대하여서도 구체적으로 지도하여 주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가풍을 다스리고 족풍을 단정히 하고 민족의 우량한 전통이 대대로 전해지도록 보증 하였습니다.
문화혁명이 시작되면서 조선족 전통장례문화는 훼멸성적인 타격을 받았으며, 장례제도를 극도로 간단하게 하였으며 일체 소위의 미신색채를 띤 장례 절차를 일률로 금지하였습니다. 그후로 부터 조선족 전통 장례문화는 점차 빛을 잃게 되였습니다.
문화혁명이 결속된후, 80년대부터 시작하여 나라에서는 조건이 되는 지방에서는 모두 유체를 화장 할것을 제창하였습니다. 1997년에 이르러 정식으로 국무원의 《빈장관리 조례》를 출범 시키면서 성시를 중심으로 조건이 되는 지방에서는 일률로 유체를 화장한다고 규정하였습니다.
나라에서《조례》를 제정하여 화장제도를 실시하게 된것은 시대가 발전했다는 상징으로서 자손만대에 덕을 쌓는 좋은 일이며 조선족 전통 장례문화의 기본리념과 모순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정부의 관심을 받지 못하고 사회의 자연발생적 힘에 의하여 간신히 지탱해 오던 조선족 전통 장례문화는 더는 사회의 충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점점 암담해져 가면서 오늘에 와서는 거의 사라질 위기에 처하게 되였습니다. 만일 시급히 조치를 대여 구급하지 않는다면 조선족 전통 장례문화는 시대의 소용돌이에 철저히 매몰되고 말것입니다.
김동선 기자: 우리민족 상제문화의 기본내용에는 어떤것들이 있습니까?
현룡수 회장: 우리민족 상제문화의 기본내용에는 초상, 안장, 제사, 이렇게 세가지가 있습니다. 초상이란 사람이 사망하여서부터 안장하기까지의 과정을 말하며, 안장이란 사망한 유체를 매장, 혹은 화장하는 과정을 말하며, 제사란 유체를 안장한후에 진행되는 일련의 의식들과 기념행사들을 말합니다. 우리민족의 전통적인 관혼상제 문화에서 상례문화는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문화입니다. 우리민족의 전통 가례 지침서인 “사례편현(四禮便覽)”은 모두 8권으로 되여 있는데 상례부분만으로 5권을 차지합니다. 우리민족의 선인들은 우리민족의 전통습속과 전통리념을 정리하여 상례에서 집중적으로 표현시켰는데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상례문화는 우리민족의 대표성 문화였다고 할수 있습니다.
우리민족 상제문화의 핵심은 효도사상입니다. 효도사상은 유교의 대표성 사상으로서 천백년래 사회질서와 가정관계를 유지시킨 기본적인 도덕 준칙이였습니다. 그러므로 옛사람들은 “孝为百行首” 라고까지 하였는데 그 뜻인즉 효도가 모든 행위중에서 첫번째로 지켜야 할 준칙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민족의 전통 상제문화에서는 효도사상이 집중적으로 표현되는데 조심스럽게 술을 붓고 무릎꿇고 절을 하는 등의 동작은 바로 효도의 대표성적인 표현동작입니다. 우리의 선인들은 바로 장례를 통하여 효도사상을 전수하고 민족전통을 계승하여 왔습니다. 오늘날 우리 민족의 젊은이들이 효심이 부족하고 민족의식이 담박하게 된것이 어찌보면 우리 민족의 장례문화가 쇠퇴된것과 관련이 있을수도 있습니다. 효도라는 “孝”자는 아들이 늙으신 아버지를 업고 있는 형태로 이루어 졌는데 그 뜻인즉 부모를 공경하고 잘 받들어 모시라는 뜻입니다. 젊은이들은 평소에 자기 인생의 개척을 위하여 분투하면서 부모에게 많은 미안한 일들을 하게 됩니다. 자기 인생에서 일정하게 성공을 거둔후 다시 부모를 생각하게 될때에는 부모는 어느덧 늙어서 사망하게 되거나 언녕 사망하여 존재하지 않습니다. 장례와 제사는 부모 생전에 효도를 다하지 못한 미안한 마음을 부모한테 전달하고 반성하며 용서를 비는 역활을 합니다. 효도사상은 동방사상의 정수이며 우리민족의 보귀한 정신 유산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조선족 전통 장례문화를 보호하고 발양시켜려는 기본 목적이 바로 효도사상을 보호하고 발양시키려는 것입니다.
김동선 기자: 현회장께서는 현재 우리들이 지킬수 있는 조선족 전통장례로는 어떤것들이 있다고 보십니까?
현룡수 회장: 병원에서 사망하여 화장하는 경우를 기준하여 설명 드리겠습니다. 1, 친인이 사망하면 인차 혼을 부르고 염습을 해야 하는데 이 절차는 될수록 전문인원이 하도록 하십시요. 우리 장례 복무열선에 련락하면 됩니다. 2, 염습이 끝나고 령구를 차에 싣기전에 고인한테 영결례를 합니다. 그 자리의 사람들이 다 함께 고인의 명복을 빌어 세번 허리굽혀 인사합니다. 3, 령구를 장의관 랭동상에 보관시키고 객실, 혹은 례당에 작은 령좌를 차려 놓습니다. 조문객이 와서는 먼저 그 령좌앞에 가서 술을 붓고 세번 인사합니다. 상주는 하루밤 령좌를 지키면서 夕奠、夜奠、朝奠만은 간단히 올리는 것이 기본 례의입니다. 4, 장례날 장의관에 가서 고별식을 할때 상주는 머리에 상모를 쓰고 주부 (主妇)는 머리에 베천오리를 동이여 자기들의 특수신분을 나타냅니다. 유가속 기타의 녀성들은 머리에 몽상을 달고 남성들은 팔에 상장을 두르는데 사망자가 남성일 경우 왼쪽에 달고, 사망자가 녀성일 경우 오른쪽에 답니다.장례에 손님으로 참석할때 녀성분들은 될수록 꽃무늬 없는 단색옷을 입고 남성분들은 될수록 검은색 양복을 입습니다. 5, 고별식이 끝나고 화장이 끝나면 골회함 보관여부 상관없이 안신제를 지냅니다. 전통적으로 안신제는 유가족들만 지냈으나 지금은 제한하지 않습니다. 안신제에서는 제사상 차리고 술을 붓고 절을 세번씩 하는데, 상주와 주부, 가속(상제), 친속(복인), 사돈, 단위조문객, 친구조문객, 기타 조문객, 이런 순서로 합니다. 마지막에 기름냄새를 피우는데 기름떡 아홉개를 상징적으로 구운 다음 제단의 제물들을 치우고 기름떡만 올려놓고 술도 붓지말고 상주와 주부가 절을 세번하면 됩니다. 제사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면 불길하므로 모았다가 지정한 소각로에 가져다 태웁니다. 6, 골회함을 보관시킬 경우, 보관처에 안치하고 물러가면서 세번 허리굽혀 고별인사 하는것을 잊지 마십시요. 고혼의 안정을 바라는 의미에서 제사때마다 번번히 골회함을 움직일 필요가 없으며, 꼭 움직일 경우에는 먼저 세번 허리굽혀 인사한 다음 움직이는것이 례의입니다.
김동선 기자: 계속해서 우리 민족 전통장례의 하나의 중요한 내용인 염습의 기본 절차를 알아보지요?
현룡수 회장: 조선족 장례 - 염습(연변에서는 매시라고도 함)은 현재까지 보유되고 있는 조선족 장례 습속에서 가장 중요한 습속의 하나입니다. 전통적으로 염습은 동네의 덕망이 높은 분이 와서 하게 되였는데 가속에서도 협조할수 있습니다. 현재 병원에서 염습할시에는 극히 제한된 시간내에 질량을 보장해야 하기 때문에 염습 실시 인원이 반드시 두사람 이상이여야 하며 먼저 소독을 하고 고인한테 한번 허리굽혀 인사한 다음 엽습을 시작합니다. 1, 皋復: 혼을 부르는 절차입니다. 고인의 웃옷을 두손에 받혀들고 서북쪽을 향하여 흔들면서 먼저 고인의 시호와 성명을 부르고 “복-, 복-, 복-”하고 웨침니다. 혼을 부른 옷은 개여서 령침에 넣어 고인의 머리밑에 베여 줍니다. 2, 下袭: 먼저 고인의 아래몸을 더운물로 깨끗이 닦습니다. 그다음 아래벌을 세벌 입히고 제쪽씩 발톱을 깎아서 종이봉지에 담아 접었다가 버선을 신긴다음 그 종이봉지를 버선목에 넣어 줍니다. 3, 上袭: 고인의 웃몸을 더운물로 깨끗이 닦습니다. 수의를 세벌 입히고 고름은 매지 않으며 옷깃은 반대로 여밉니다. 그 다음 제쪽씩 손톱을 깎아서 종이봉지에 담아 접었다가 악수를 끼우고 그 안에 넣어 줍니다. 그리고는 한태의 무명실을 헝클어서 고인의 손에 감아 주는데 녀성의 경우에는 오른쪽에, 남성의 경우에는 왼쪽에 감습니다. 4, 饭含: 고인의 얼굴을 더운물로 깨끗이 닦고 입안에 쌀알을 넣어 줍니다. 버드나무 숟가락으로 쌀알을 적당히 떠서 세번 넣어 주는데 차례로 “백석이요!”, “천석이요!”, “만석이요!”하고 외침니다. 전통적으로는 구슬이나 은전같은 것도 넣었댔으나 지금은 넣지 않습니다. 5, 面袭: 고인의 코구멍과 귀구멍을 약솜으로 막고 고인의 입에도 약솜으로 채운다음 잘 다물겨 줍니다. 그리고는 약솜편으로 고인의 얼굴을 가리우고 면백으로 머리와 얼굴을 싸서 동입니다. 6, 小殓: 전폭의 염포로 유체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빈틈없이 쌉니다. 그리고는 포끈으로 발목부위, 허리부위, 어깨부위, 이렇게 세 부위로 나우어 동입니다. 다섯곳 동일수도 있고 일곱곳 동일수도 있는데 매듭은 옭매지 않으며 비틀어서 끼우는 방법으로 풀어지지 않도로 단단히 동입니다. 소렴이 끝난 유체밑에 지요(地褥)을 깔고 유체우에 천금(天衾)을 덮습니다. 7, 铭旌: 흰 분필로 붉은천에 고인의 시호, 본관, 성씨를 쓰는데 한자(汉字)로 씁니다. 남성 사망자 경우 시호를 일반적으로 “學生”으로 쓰는데(시호만은 반드시 번체자 그대로 씁니다.) 례를 들어 남성 사망자가 본관이 安东이였고 성이 金씨 였다면 그의 명정에는 “學生安东金公之柩” 라고 쓰며 다른 본관에 다른 성씨이면 위의 격식에 맞추어 바꾸어 써 넣으면 됩니다. 녀성 사망자 경우 시호를 일반적으로 “孺人”이라고 씁니다. 례를 들어 녀성 사망자의 본관이 全州였고 성이 李씨 였다면 그의 명정에는 “孺人全州李氏之柩” 라고 쓰며 다른 본관에 다른 성씨이면 이 격식에 맞추어 바꾸어 써 넣으면 됩니다. 써 놓은 명정을 고인의 유체우에 덮습니다. 8, 永決礼: 염습이 기본상 끝나면 령구차가 오기전에 그 자리에 있는 가속들을 모두 불러 고인의 유체옆에 모이게 하고는 함께 세번 허리굽혀 영결례를 시킵니다. 9, 大殓: 전통적으로는 입관하는 절차였으나 지금은 성시에서 일률로 화장을 하기 때문에 관을 쓰지 않으므로 유체를 주머니에 넣는 절차로 됩니다. 유체를 주머니에 넣은후 주머니를 보기좋게 여며 놓아야 하며 담가에 담고 반드시 머리로 부터 바깥으로 나가며 담가를 든 사람들이 문설주와 문턱을 다치지 않도록 주의를 줍니다.
김동선 기자: 현재 중국조선족 장례에서 존재하는 문제점들로는 어떤것을 짚을수가 있을까요?
현룡수 회장:추도식에 대해서는 별로 언급할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현재 류행되는 조선족들의 장례에 대하여 몇가지 지적할것이 있습니다. 1, 부모상의 경우 령구를 장의관 랭동상에 보관시킨후 상주는 부모님의 마지막 하루밤만은 곁에서 지켜드리면서 夕奠、夜奠、朝奠만은 정성들여 올리는것이 자식된 기본의 도리입니다. 이 방면에서 한족분들은 비교적 잘 지키고 있는데 우리 조선족들은 대부분 지키지 않고 있습니다. 민족적으로 부끄러운 일이라고 느껴집니다. 2, 장례의 매개 절차마다에서 고인의 명복을 빌어 인사를 올리는 것이 우리의 례의입니다. 염습이 끝나면 세번 인사를 올려야 하고, 랭동상에 령구를 보관하고서도 세번 인사를 올려야 하며 골회함을 납골당에 보관하고서도 세번 인사를 올려야 합니다. 이렇게 고인한테 매번 인사를 올릴때마다 당신의 령혼은 한층 깨끗하게 되며 숭고하게 되는 것입니다. 3, 우리민족의 전통 장례에서 유가속들은 모두 상복 차림을 하였었습니다. 이것은 우리민족의 우량한 전통입니다. 지금과 같은 번개식 장례에서 상복제도를 전부 회복한다는것은 어려움이 많겠지만 앞으로의 조선족식 장례에서는 그래도 상주는 머리에 상모를 쓰고, 주부는 머리에 베천오리를 동이여 자신들의 특수신분을 똑똑히 나타내는것이 바람직 합니다. 우리 연구회는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여러방면으로 조건을 창조할것입니다. 4, 아직까지 우리 연변에는 우리 조선족식의 고별청이 없는것이 큰 유감입니다. 우리민족의 전통장례에서는 친인의 유체를 남들한테 보이는것을 제일 꺼려 왔는데 지금 우리는 통일식 고별청에서 장례를 치르다 나니 어쩔수없이 친인의 유체를 많은 사람들 앞에 전람시키게 됩니다. 우리 연구회는 이미 연길장의관에 조선족식 고별청을 설치할데 관한 건의를 주 민정국 유관부문에 제출하였는데 주 민정국에서는 이미 문건을 내여 우리의 건의를 동의하였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건의가 하루속히 현실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5, 사회적 장례복무 체제를 건립하고 건전히 해야 합니다. 장례복무 체제를 장기적으로 견지해 나간다면 우리의 다음 세대에 가서도 우리민족의 장례문화는 장기적으로 보전될수 있게 됩니다. 지금 가문에서 상사가 나면 가속에서는 몹시 당황하고 조급하게 됩니다. 지금은 시장경제 시대인데 계속 이렇게 어렵게 장례를 치룰순 없습니다. 유가속에서 장례복무 기구에 전화 한통만 걸면 모든 장례 행사가 OK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 연구회에서는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이미 시대상조 장례복무 중심을 설립하였는데 도움이 필요한 노인과 환자들을 등록하고 매일 문안전화 형식으로 추적봉사를 하여 드리며, 사망하였을 경우 회원의 우혜표준으로 장례를 치려 드립니다.
김동선 기자: 현재 보유되고 있는 전통제사로는 어떤것이 있습니까?
현룡수 회장: 제사란 원래 조상과 부모의 은덕을 칭송하고 근본을 되새기며 고인을 추모하고 기념하는 의식으로서 자손 된 도리와 살아있는 사람의 도리를 다 하는 것입니다. 우리민족은 전통적으로 사대봉사(四代奉祀)를 조금도 소홀함이 없이 지내 왔으며 근본을 잊고 조상의 제사를 소홀히 하면 가문이 망한다고 철칙으로 믿어 왔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민족의 전통제사는 특별히 엄격하였으며 우선 목욕제계를 하고 냄새가 나거나 자극성 있는 음식을 삼가 하면서 제사를 위하여 정성것 준비하였습니다. 제사는 크게 1,기제(忌祭); 2,시제(時祭); 3,묘제(墓祭). 이렇게 세가지 부류로 나뉩니다. 그 구체적인 분류에는 또 많은 종류들이 포함되여 있었으나 지금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현재 연변지구에서 보유되고 있는 제사 행사들로는 다음과 같은 몇가지가 있습니다:
기제(忌祭)에 소상(돐제); 대상(삼년제)이 남았고, 시제(時祭)에 청명제; 추석제; 환갑제가 있으며, 묘제(墓祭)에 면례; 합장; 비석제, 등이 있습니다.
김동선 기자: 우리 민족이 제사상을 차리고 제사 지내는 법에는 어떤 순서나 절차가 필요합니까?
현룡수 회장: 제사를 지냄에 있어서 먼저 제사상을 차리게 되는데 전통적으로 제사상 차릴때에도 많은 규칙들이 있었습니다. 지금 그 많은 번쇄한 규칙들을 일일히 따를 필요는 없지만 총체적인 분포 규칙에 대하여서는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기왕에 제사상 차릴 바에는 형식에만 그치지 말고 정성을 넣어 제물을 차리며 제물 종류가 합리하고 제물이 놓인 위치가 합리하며 미관상에서 어색하지 않게 정연하게 차립니다. 제사상은 보통 장방형으로 된 네모상에 차립니다. a, 상우에 먼저 흰 종이를 한벌 펴 놓습니다. b, 령좌 안쪽 중간에 지방과 유상을 놓습니다. c, 령좌 량옆에 그릇을 놓고 초불을 달아 각기 그 안에 세워 놓습니다. d, 유상 앞 첫줄에는 각기 메밥, 국, 수저, 술잔, 등을 놓습니다. e, 중간에는 고기류, 생선류와 기타 반찬들을 놓습니다. f, 바깥줄에 과일류, 과자류와 기타 부식품들을 놓습니다. g, 령좌 아래에 술병과 퇴주 그릇을 놓습니다. 제물의 개수는 짝을 지우지 않고 기수로 합니다. 제사 종류에 따라 이 기본방법을 참조하면서 적당하게 조절하여 차리면 됩니다. 첫돐제사나 삼년제사와 같이 집에서 올리는 제사는 출입문을 조금 열어놓고 그 제사와 상관되는 축문을 읽은 다음 효자(상주가 제사에서는 효자)와 주부로부터 차례로 나와 술을 붓고 절을 세번씩 하는데 가속(상제), 친속(복인), 사돈, 단위조문객, 친구조문객, 기타조문객, 이런 순서로 합니다. 마지막에 술 한잔 다시 붓고 다 함께 절을 세번 하고는 제사를 끝냅니다. 청명제나 추석제와 같이 산에 가서 올리는 제사는 먼저 후토를 찾아 간단한 제물을 놓고 후토제를 올립니다. 이것은 땅을 파 헤치고 초목을 움직이기 전에 먼저 산신한테 통보하여 허가를 받는다는 상징적 절차입니다, 그다음 봉분을 조심스레 정리하는데 청명때는 삽으로 흙을 올리니 가토라고 하고, 추석때는 낫으로 풀들을 베니 벌초라고 합니다. 봉분을 잘 정리한 다음 가지고 간 제물들을 제단에 차려놓고 가문의 항렬 순서에 따라 술을 붓고 세번씩 절을 올립니다. 마지막에 술한잔 다시 붓고 다 함께 절을 세번 하고는 제사를 끝냅니다. 제사가 끝난후 자리를 찾아 일동이 둘러 앉아서 제물을 음복하면서 아름다운 덕담들을 나눕니다.
김동선 기자: 조선족 장례 제사에서 금기시해야 할 사항들로는 어떤것이 있습니까?
현룡수 회장:
A, 도시의 병원이나 아빠트에서 친인이 사망하였을 경우 크게 소리내여 울지 않습니다. B, 어린 아이들은 죽은 시신을 보지 못하게 하며 염습할때 다른 곳에 피신 시킵니다. C. 농촌의 경우, 상가집에서는 초상기에 부엌 아궁이를 막아 놓고 불을 지피지 않습니다.
D, 령구를 내 갈때 문턱이나 문설주를 다치지 않습니다. E, 가문에 상사가 났을 때 임신한 며느리나 딸은 장례에 참석 시키지 않습니다. F, 사망한 사람이 생전에 입던 옷과 덮던 이불, 그리고 평소에 쓰던 일용품들은 남기지 않고 모두 태웁니다. G, 장례나 제사에 가서는 불길한 말을 하지 않으며 누구와 다투거나 싸우지 않습니다. H, 장례 용품이나 제사 소물을 살때는 흥정을 하지 않습니다.
I, 장례나 제사가 지난후에는 보충 부조금을 받지 않습니다. J, 장례나 제사에 참석할때 화려한 옷과 진한 치장은 삼가 합니다. K, 친인이 객사 하였다면 사망한 지역에 가서 장사 지내고 시신을 집으로 옮겨오지 않습니다.
L, 제사상 제물은 짝을 지우지 않으며 홀수로 합니다. M, 제사상에 개고기와 이름에 “치”자가 붙은 물고기, 그리고 고사리, 복숭아는 제물로 쓰지 않습니다. N, 상주와 주부는 장례를 치른 해에 자기 생일을 쇠지 않으며 친척이나 친구집의 희사 잔치에도 가지 않습니다. O, 자기의 배우자가 사망하였을 경우 삼년제 지나기 전에는 재차 혼인을 고려하지 않습니다. P, 가정에서 큰 희사를 치른 해(결혼잔치를 치렀거나, 새집을 샀거나, 아이가 태여난 해)에는 보통 장례집에 조문을 가지 않으며 제사집에도 가지 않으며 청명이나 추석에 자기집 산소에도 가지 않습니다(특별한 경우 제외).
김동선 기자: 현재 우리민족 장례문화에서 민족특색이 사라져 가는 현상을 어떤 면에서 찾아볼수 있을까요?
현룡수 회장: 우선, 지금 우리민족의 많은 젊은이들은 부모가 사망하면 장례개념은 별로 없고 한시 급히 화장하여 시름을 놓으려 하며 이듬해 부모의 제사날이 돌아와도 자식으로서 반드시 부모의 제사를 지내야 한다는 도리를 모릅니다. 다음, 우리민족은 성씨앞에는 모두 본이 붙습니다. 례를 들면 “김해김씨요”, “전주리씨요” 할때의 “김해”요 “전주”요 하는 그 부분들입니다. 전통적으로 우리민족은 성씨보다 본을 더욱 중시하여 왔습니다. 중국의 호적부에서는 성씨만 다루고 본은 다루지 않지만 조선족 성씨에서는 본이 있으므로 하여 같은 성씨의 여러가지 혈통을 구분할수 있습니다. 조선족 성씨의 본은 한족 성씨제도보다 우월한 부분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망자의 명정을 쓰면서 보노라니 지금의 많은 젊은이들은 자기 성씨의 본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자기 성씨의 본을 모른다는것은 자기 가문의 근본을 잊었다는 것으로 풀이되며 자기의 민족특성을 버리기 시작한 첫번째 행동입니다. 셋째:
우리민족의 전통 장례에서 유가속들은 모두 상복 차림을 하였었습니다. 이것은 우리민족의 우량한 전통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장례에서는 상복차림은 근본 찾아볼수 없고 상주도 일반 조문객들과 마찬가지로 겨우 상장이나 두르는 정도이고 많은 경우에는 심지어 상장도 두르지 않습니다. 네번째:
우리민족의 전통장례에서는 친인의 유체를 남들한테 보이는것을 제일 꺼려 왔습니다. 그리하여 초상이 나면 유체를 인차 염습한후 이불로 덮어 놓고 병풍이나 만장으로 가리워 놓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통일식 고별청에서 통일식 장례를 치르다 나니 어쩔수없이 친인의 유체를 많은 사람들 앞에 전람시키게 됩니다.
김동선 기자: 현회장께서는 우리민족 장례문화에서 민족특색이 사라지는 원인을 어떤 면에서 찾아보고 계십니까?
현룡수 회장: 사회가 발전하는 과정에 변혁기에 접어들면 필연코 많은 전통 문화들이 충격을 받고 매몰되게 됩니다. 5.4운동에서는 공자의 사상이 충격을 받았고 문화혁명 동란 시기에는 “전통”이란 수사가 붙은 모든 문화들이 충격을 받았으며 그후의 개혁개방, 역시 사회의 대변혁이라고 할수 있는데 사상위주의 사회가 경제위주의 사회로 바뀌여지면서 또 많은 전통 문화들이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사라진 전통문화를 사람들의 노력에 의하여 회복시킬수 있습니다. 가치가 있고 쓸모가 있는 전통문화들은 다시 발굴하여 찌꺼기를 버리고 알맹이를 취하여 회복시키고 보호하고 발양시킴으로써 우리의 현실을 위하여 더욱 훌륭히 복무하게 할수 있습니다. 문화혁명이 끝나고 나라에서 개혁개방을 하면서 우리의 전통 장례문화도 우리의 혼례문화나 회갑문화와 마찬가지로 회복될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그당시 우리의 전통 장례문화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민족의 상층계층과 지식계층에서는 우리민족 전통 장례문화의 운명에 대하여 관심하는 사람조차 없게 되였으며 중국의 유일한 조선족 자치주로서의 연변에서, 4대 장의관중의 그 어느 한곳에서도 조선족 유가족들을 대상하여 조선족식 고별청을 설치한곳이 없습니다. 개혁개방을 실시하여 십년이 지난후 우리민족은 다시금 우리의 전통장례문화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의식하게 되였으며 지난해에는 조선족 전통장례가 주급과 성급의 무형 문화재로 지정되기까지에 이르렀습니다.
김동선 기자: 우리민족 장례문화에서 민족특색이 사라진다면 그 위해성이 참으로 클줄로 압니다.
현룡수 회장:
민족이라는 것은 인류의 장기간의 력사 과정에서 형성된 공동한 언어, 공동한 지역, 공동한 경제생활, 그리고 공동한 문화에서 표현되는 공동한 심리소질을 소유한 온정된 공동체입니다. 사회가 발전하고 인구 류동이 가속화 되면서 지금 와서는 공동한 언어, 공동한 지역, 공동한 경제생활이라는 조건은 많이 파괴되기 때문에 이 조건만을 가지고 한개 민족을 평가할수 없게 되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말하는 한 민족의 특색이라는것은 주요하게 공동한 문화, 그리고 이 문화에서 표현되는 공동한 민족습관, 공동한 민족심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회주의 시기는 민족의 대 융합을 촉진하는 시기가 아니라 각 민족의 발전을 촉진하는 시기입니다. 그 어느때 가서는 일부 비슷한 민족들끼리 융합될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중국에는 56개 민족이 있는데 모두가 중국 경내에서 생활하고 있고 모두가 중국 공민의 신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한개 민족이 자기의 존재를 나라에 선전하고 다른 민족들과 단결하고 합작하고 경쟁할수 있는 자격이 주요하게는 문화입니다. 한 민족이 자기의 문화, 즉 자기이 특색을 잃는다면 다른 민족들과 단결하고 합작하고 경쟁할수 있는 자격을 잃게 됩니다. 우리 조선족 전통 장례문화는 우리민족의 기본문화인 “관혼상제” 문화에서 없어서는 안되는 중요한 문화인데 우리민족이 첫돐생일문화, 결혼문화, 회갑문화, 등에서 이미 확고한 특색적인 문화체계를 수립하였다면 이제부터는 상제문화에서 자기의 체계를 수립해야 할 때입니다. 우리민족이 상제방면에서 자기의 확고한 특색적인 문화체계를 수립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민족문화는 자기의 완미성을 잃게 됩니다.
김동선 기자: 현회장께서는 우리민족 장례에 민족 특색을 부여할 필요성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십니까?
현룡수 회장:
우리민족 장례에 민족 특색을 부여할 필요성은 두개 방면으로 보아낼수 있습니다, 한 개 방면은 민족의 발전의 수요로 부터 우리민족 장례에 민족 특색을 부여하여 우리민족의 장례를 우리식으로 치르는 것은 민족의 특색을 보호하고 민족의 자존심을 증강하며 민족의 동일성을 가강하는데 적극적인 의의가 있습니다. 다른 한 방면으로 민족의 소질제고의 수요로 부터 우리민족의 장례를 우리식으로 치르는 것은 우리민족의 전통적 효도문화를 발양하여 우리민족의 사회를 화목하고 질서있는 사회로 건설하는데 적극적인 의의가 있습니다.
김동선 기자: 우리민족 장례문화에 민족특색을 부여하려면 어떤 과제들이 우선돼야 할까요?
현룡수 회장:
목전의 우선적인 과제로는 우리민족식의 장례시설을 설치하고 우리민족 장례복무 체제를 건립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연구회는 이미 연길장의관에 조선족식 고별청을 설치할데 관한 건의를 주 민정국 유관부문에 제출하였습니다. 주 민정국에서는 이미 문건을 내여 우리의 건의에 동의하였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건의가 하루속히 현실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그리고 사회적 장례복무체제를 건립하고 건전히 해야 합니다. 장례복무 체제를 건립하면 조선족 유가족에서 조선족 장례규범에 대하여 잘 모른다 하여도 자기 민족식으로 장례를 치르겠다는 의향만 있으면 장례복무 기구에 전화 한통을 걸어 모든 장례행사가 우리 민족식으로 OK가 될수 있습니다. 장례복무 체제를 건립하고 내부건설을 가강하면서 장기적으로 견지해 나간다면 우리의 다음 세대에 가서도 우리민족의 장례문화는 장기적으로 보전될수 있게 됩니다. 우리 연구회에서는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이미 백화상조 (장례) 복무중심을 설립하였는데 정부와 사회 각 계층의 다함없는 지지와 참여가 필요합니다.
김동선 기자: 조선족 장례문화를 보호하려면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요?
현룡수 회장: 2009년 6월, 연변 조선족 자치주 정부와 길림성 정부에서는 《조선족 전통 상제례의》와 《조선족 전통장례》을 각각 주급과 성급의 무형 문화재(非物质文化遗产)로 지정하였으며 연변주 문화국이 주관부문으로 되고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가 구체적인 보호사업을 책임진 보호단위로 되였습니다. 이로부터 조선족 전통 상제문화는 보호가치와 발양의의가 있는 민속 문화라는 합법적 지위를 얻게 되였습니다.그러나
조선족 전통장례문화를 보호하는 사업은 전사회적인 사업으로서 우리 연구회의 노력만으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반드시 정부의 유관부분에서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사회의 상관 계통에서 적극적으로 협조하며 전사회적인 참여가 실현되여야만 기정한 목적에 도달할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 연구회는 사회의 상관 계통, 특히는 의료계통의 협조를 이끌어 내기 위하여 상당히 힘들게 공작하고 있습니다. 의료계통의 많은 분들, 특히는 주요 책임자들이 우리의 공작에 대하여 리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공작은 더욱 힘들게 되며 우리 공작의 진전은 더욱 꿈뜨게 됩니다. 나라에 아직 정식으로 무형문화재 보호법이 나오지 못한 조건하에서 우리들의 공작은 부득불 많은 길을 에돌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 연구회는 이미 내부적으로 “조선족 장례와 제사 실용편람”을 정리해 냈습니다. 우리의 장례복무 중심에서는 지금 이 실용편람에 근거하여 복무활동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우리는 충분한 실천을 통하여 고칠것은 고치고 보충할것은 보충하면서 연변의 민속연구 학자나 전문가들과 함께 “조선족 장례와 제사 규범”을 편찬해 낼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우리 조선족의 상제문화도 자기의 체계를 확고하게 수립하게 되며 우리민족의 문화재부가 더욱 묵직하게, 더욱 찬란하게, 더욱 완벽하게 될것입니다.
김동선 기자: 현회장님,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현룡수 회장: 감사합니다.
김동선 기자: 맺는말 본 민족의 특색과 전통을 버리는것을 현시대의 개방사상이라고 여기는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우리 당과 정부에서는 소수민족들의 특색문화을 보호하기 위하여 많은 우대정책과 사업조례들을 제정하여 실행하고 있지만, 우리 민족 자신이 도리여 자기민족 특색문화의 보귀함을 인식하지 못하고 아무 꺼리낌 없이 하나, 둘, 버리고 있습니다. 민족특색이 없이는 민족 대단결이 있을수 없으며 자기의 민족특색을 버릴수록 점점 시대에 뒤떨어지게 됩니다. 민족특색이 짙을수록 자기의 합법성이 더욱 완벽하게 되며 세계적 경쟁력이 더욱 강해지게 됩니다. 우리 조선족의 전통적 상제문화는 우리민족의 전통적 관혼상제 문화에서 없어서는 안되는 중요한 구성부분의 하나입니다. 만일 조선족 민속문화에서 상제문화가 빠진다면 조선족의 전반 민속문화는 자기의 정체성을 잃게 되며 잔페문화로 전락할수밖에 없을것입니다. 조선족 상제문화를 보호하고 계승하는 사업은 전 사회적인 사업으로서 어느 한 부문이나 어느 한 단체의 노력만으로는 해결할수 없는 계통공정입니다. 반드시 전 사회적인 적극적인 참여와 관심이 필요합니다. 우리민족은 위대한 민족입니다. 우리가 계속 자기의 우량한 전통을 발양하고 시종 자기의 민족 특색을 확보한다면 우리 민족의 앞날은 더욱 밝을것입니다.
방송사명: 연변인민방송국
방송부서: 사회교육부
코 너 명: 《우리 방송 한마당》-《클릭, 우리 사는 세상》
방송일시: 2013년 9월 23일 월요일 아침 7시 20분
련 계 인: 김동선 부장 (주임)
2013년 9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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