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변방송)이밤을 함께 합니다.
연변인민방송국
《이밤을 함께 합니다.》
2013 년4월4일 저녘9시
프로기획:한태익 아나운서:윤련월
출연연사: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 회장 현룡수
안녕하십니까? 윤련월입니다.
오늘이 바로 청명절이네요. 24절기의 하나인 청명은 음력설, 단오명절, 추석명절과 함께 우리 민족의 4대 전통명절로 되고 있습니다. 청명에는 조상이나 돌아가신 친인들의 산소에 가서 가토를 하면서 고인들을 기립니다.
청명절을 맞으며 오늘밤은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 현룡수 회장을 모셨는데요. 우리 조선족 전통장례문화를 전승 발전시키는데 여생을 바쳐가는 그의 인생 이야기를 들어 보겠습니다.
오늘 방송사연 들으시고 전화참여 하시려는 분들은 생방송실 전화 2561111번이 열려 있으니 눌러 주시기 바랍니다.
간주곡___
인사나누고
(1) ;아나운서:
어느 민족에게나 다 자기 민족특색에 맞는 장례문화가 있지요. 현회장께서는 어떤 특수한 인생기회에 의하여 우리 조선족 장례문화에 접근했고, 어떻게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 회장사업을 맡게 되였는지요?
현회장: 저의 고향은 화룡 팔가자 약암동이란 곳인데, 가정의 제 11번째 아이로 태여났습니다. 저의 앞에서 이미 열명의 형님, 누나들이 홍역에 걸려 요절되였습니다. 제가 태여나게 되자 자식을 이미 열이나 잃고 붕괴의 변두리에 처한 아버지께서는 당지의 용한 의원을 찾아 방토를 실시하였습니다. 하여 제가 태여나자마자 어머니에게는 보이지 않고, 포대기에 싸서 이미 약정되여 있는 양모에게 가져갑니다. 그리고는 그집 소 외양간에 가서 포대기에 소똥을 묻히면서 소똥을 밀어내는 구멍으로 빼 내오고 “쇄지야! 음매!”하고 부릅니다. 쇄지란 송아지란 뜻이죠. 그때부터 모두들 저의 이름을 쇄지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며칠전의 력서장을 한장 뜯어서 포대기에 넣어 줍니다. 저의 출생부란 뜻이랍니다.
그당시에 전문 아이들만 업어가는 “어베”라는 귀신이 있었는데, 우리집에서 이미 아이 열이나 업어 가서 재미를 붙였으니, 그 귀신이 저를 가만 놔둘리 없지요. 그리하여 제가 태여났다는 소식을 듣고, 그 귀신이 그날 저녁에 또 저를 업어가려고 옵니다. 그런데 이번에 와서는 그 귀신이 갈피를 잡을수 없게 됩니다: 이름을 들어보니 짐승 이름이고, 또 확실히 소똥냄새도 나고, 생일을 보니 이미 며칠전에 태여난 송아지인지라, 결단내리지 못하고 이리저리 유예하는 사이에, 어느덧 새벽이 되여 수탉이 울면 그 귀신도 돌아 가야 합니다. 이렇게 백날을 속이니, 귀신도 단념하고 다시는 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참으로 황당한 방토였지만, 다행히도 그후부터 우리집에서는 다시는 아이들이 요절되는 일이 없었으며, 제아래에 또 두 누이동생이 있었는데 모두 성공적으로 살아나서 오늘까지 왔습니다. 물론 시대가 발전한 혜택이였지요.
그 당시 마을밖에는 도가집란것이 있었는데 사람이 죽으면 들어 내가는 상여를 넣어두는 집이였습니다. 그런데 어른들은 어베라는 귀신이 그집에서 산다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도가집을 상당히 무서워 하였죠.
그러던 1967년도 문화혁명이 일어나면서 저는 소학교 마당복판에서 상여가 불에 활활 타는것을 보았습니다. 어디서 온 반란파들인지 마차에 상여를 실어와서 태웠습니다. 그무슨 네가지 낡은것을 타파한다고 하였습니다. 개팔이라는 한 얼치기가 상여가 타는 불속에서 무엇을 건져내려 하다가, 덜미를 잡혀 교단에 끌려 올라가, 머리가 땅에 닿게 허리 굽히고 벌을 받다가, “개팔이를 타도하자!”고 열번 웨치고 나서야 겨우 풀려났습니다.
문화혁명전까지만 하여도 마을에서 명정과 만장을 앞세우고, 호호탕탕한 상여행열은 민속놀이 못지않은 경관이였습니다. 숱한 아이들이 따라가며 구경했죠. 그 상여군들속에서 저는 저의 아버지도 여러번 보았습니다.
저의 고모의 말씀에 의하면 저의 할아버지가 바로 집사였는데, 목단강 지역에서 장례제사를 맡아 주지하시던 분이셨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1916병진년에 일본 보안대원들한테 집단폭행을 당하고 억울하게 사망하셨습니다.
제가 늙으막에 와서 역시 장례문화를 다루게 되였는데, 아마도 우리 가문의 숙명인가 봅니다. 제가 할아버지의 의발을 이어 받았죠.
(2);아나운서:
어떤방면의 것을 깊이 연구하고 성과를 내자면 연구학자들의 가르침도 중요하지만 가정의 지지도 매우 주요합니다. 남편이 전문 조선족 장례문화를 다루니 안해는 어떤 태도였습니까? 뭐라 안 하던가요?
현회장: 다행스러운것은 그당시 저의 안해는 한국에 가고 저의 옆에 없었습니다. 많은 시끄러움을 덜었죠. 제가 하고싶은 대로 할수 있었으니깐요. 지금도 그 사람은 제가 하는 노릇이 도대체 무엇인지 잘 모릅니다. 캐여 물어면 이것 저것 얼버무려서 관을 넘지요. 실상을 알고나면 앞으로 무서워서 저의 옆에 오지 않을가봐 걱정입니다. 그래서 안해를 파악있게 설복시킬 묘한 방안을 한창 연구중인데, 이미 효과가 있음직한 방안을 몇가지 연구해 냈습니다.
(3);아나운서:
자제분들은 아버지의 사업에 어떤 태도를 보였습니까?
현회장; 저는 딸이 없고, 아들놈이 둘입니다. 두번째 놈이 또 고추를 달고 나오자 정신을 바싹 차리게 되였습니다. 아들이 둘이란 것은, 잘 키우면 룡 두마리, 잘못 키우면 승냥이 두마리를 의미합니다. 그리하여 저는 휘초리를 휘두르며 두놈을 공부에 몰아 넣었습니다. 이미 두놈 모두 대학필업 시켰고, 큰놈은 중국과대 연구생까지 마쳤습니다. 많은 풍파가 있었지만 결국 저의 뜻을 따라 주었으니 고맙죠. 저의 안해는 아들난 죄로 그들을 공부시키고, 결혼시키고, 또 북경에 집까지 사 주다나니 죽을 고생을 했습니다. 물론 저도 조금은 고생을 했지만도.
아이들이 크면서 세대차이가 있다나니 사회에 대한 관념상에서 자주 충돌이 생깁니다. 저는 전통적인 사유이고, 아이들은 현대적인 사유이니 조화가 잘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제가 이 사업에 너무 집착하니깐 아이들도 인젠 리해를 표시하면서 여러방면으로 관심하고 협조합니다.
(4);아나운서:
조선족례의연구회를 조직한 초기에는 여러가지 애로사항들이 매우 많았겠는데 어떻게 헤쳐 나갔는지요?
연구회 성립초기에 가장 어려운 것은 자금 문제였습니다. 연구회를 하기전에 기술개발유한회사를 꾸리고 “종합제설기”라는 설비를 자체로 설계하여 특허을 받은후, 결국 자금이 모자라 개발을 못하고, 헐값으로 양도하다나니, 많은 자금을 손실 보았습니다. 다행히 친구들이 도와주고, 정부의 지지에 힘 입어서 무형문화재 등록신청에도 성공하였고, 성공적으로 유관 세미나를 개최하여 주민정국, 주위생국, 등20여개 부문대표가 참석하였으며, 이름있는 민속학자들이 참석하여 8편의 무게가 있는 론문을 발표하여 연변 민속보호 사업의 합리성과 가능성을 론증하였습니다. 연변 문화사에서 조선족 장례풍속 세미나는 처음이였죠. 지금은 정력을 집중하여 《조선족 장례제사 편람》을 편찬하고 있는데, 바야흐로 완미중에 있습니다.
(5);아나운서:
요즘 조선족들이 출국이 많아지면서 독거로인들이 많게 되였지요. 그리고 가문에 상사가 나면 조선족들은 여러방면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이런 실정에 비추어 장례대행 기구도 내왔다면서요?
현회장:그렇습니다. 조선족 장례문화가 쇄퇴된것이 큰 문제일 뿐만 아니라, 조선족들이 장례치르기 어려운 문제도 시대적 난제로 나서고 있습니다. 시대가 발전하면서 현대 로인들의 가장 큰 특점은 자식들과 갈라져 사는 것인데, 반려가 함께 있는 로인들은 그런대로 서로 등이라도 긁어줄수 있지만 독거로인들은 감기에 걸려도 물 한컵 떠다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집에서 고독사 한 로인들, 사망되여 며칠후 발견된 망령들을 자주 접촉하게 됩니다. 지금 시대에서는 돈을 많이 벌어야 하니까 젊은이들이 부모를 옆에 모시고 있으면서 보살필 사이가 없습니다. 그리하여 자리가 어려운 로인들은 보통 경로원에 맡겨지는데 정부에서 꾸린 경로원은 그런대로 사람 사는곳 비슷하지만 개인적으로 꾸린 경로원은 그 정황이 상당히 복잡합하다. 시대는 21세기에 들어와서도 이미 한참 왔지만, 우리들의 현재 장례봉사체제는 고대보다도 더 락후합니다. 그리하여 연구회 산하에 “시대상조(장례)복무중심”을 설립하게 되였습니다.
(6);아나운서:
조선족 장례에 대하여 연구하고, 또 장례대행사를 경영하면서 여러가지 안타까운 현상들을 보았다는데 어떤일들이 가장 인상적이였습니까?
현회장: 인상에 남는 일들이 많지요. 한번은 서른살 좌우의 젊은 색시가 아이를 업고 와서 자기 아버지가 사망하셨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장례치를 사람은 자기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이런 경우는 괜찮은 형편이죠. 한번은 철남의 한 사회구역에서 련락이 왔는데,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썩은내가 코를 찌르고, 사처에 마이고 버린 술병과 먹다남은 명태낙지가 널려있었으며, 시체는 이미 며칠전에 사망한 망령이였습니다. 참 딱한 일이죠. 이런 망칙한 꼴을 피면하기 위하여, 한 불치병 독거로인은 자기 죽을 시간을 미리 계산하고는 절로 병원에 입원하였습니다. 그후 시간에 맞춰 불시에 죽으니 가속을 찾을 길이 없었습니다. 현재 우리의 장례봉사체제가 이 꼴입니다. 장례문화를 살리려면 먼저 장례 어려움부터 해결해야 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7);아나운서:
조선족 장례문화를 어떻게 계승,발전시켜야 한다고 생각하는지요?
현회장: 우에서 이미 말씀 드렸다 싶이 우리의 장례문화를 계승발전시키려면 먼저 조선족들의 장례치르기 어려운 시대난제부터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죽어도 장례치를 사람조차 변변치 못한데 장례문화 발전이란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죠. 현재 우리 연변에는 병원으로 부터 빈의관까지 조서족 장례풍속을 존중하여 설치한 설비나 항목은 한가지도 없습니다. 장례봉사체제는 고대보다도 더 락후합니다. 고대에는 마을마다 상여계, 황두월이라는 민간 상조 조직이 있어서 집에 상사가 나도 별로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제집 장례는 제가 책임져야 하니, 주위에 친척, 친구가 없는 분들의 경우 참으로 딱한 사정입니다. 부득불 한족수의상점에서 일을 보는 조선족 직원들을 고용하여 쓰는데, 비용이 비싸고 복무가 규범적이지 못하며, 질량 보장이 어렵습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이미 주민정국, 주위생국, 연변병원 등 유관부문에 제출하였는데 이제 곧 해결방안이 나올겁니다.
(8); 아나운서:조선족 전통장례풍속이 주급, 성급 문형문화재로 지정되게 하기 위하여 어떤면에서 노력을 기울였는지요?
현회장: 조선족 전통장례가 주급 성급 무형문화재로 되였는데, 제 혼자의 노력으로 된것이 아닙니다. 수선 정부 유관부문에서 지지하고, 유관 학자들이 협조한 결과입니다. 2009년은 나라에서 무형문화재 등록을 시작한지 이제금방 두기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한족을 포함하여 전국의 57개 민족중에서 장례문화를 무형문화재로 신청한것은 우리 조선족이 유일하였습니다. 장례문화는 좀 특수한 문화지요. 그리하여 그 신청의 합리성에 대하여 주의 주관부문 주요령도자들까지도 의심을 표시하게 되였습니다. 저는 합리한 도리와 충분한 리유를 찾아 가지고 그이들과 내심하게 교섭하여 끝내는 정부측의 지지를 쟁취하였습니다. 제가 주장한 리유라면 우리 조선족 장례문화는 중국의 그 어느 다른 민족의 장례풍속과는 달리, 고대중국 유가문화의 원고유존으로서, 원래는 중국에서 기원하였는데, 현재의 중국에선 이미 오래전에 사라져 찾아 볼수 없는 아주 보귀한것들이라는 것입니다. 즉 우리민족의 가례문화가 고대중국의 유교문화를 오늘까지 보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조선족 장례문화가 중국의 무형문화재로 되기에 조금도 손색이 없었지요. 그런데 아직 성급에 그쳤는데, 앞으로 더 노력하여 나라급으로 승급시킬 타산입니다.
(9);아나운서:
현회장님께서는 우리 민족 전통 장례제사문화를 계승,발전시키는데 이미 많은 노력을 하였는데요. 이방면에서 앞으로 어떤 바램과 타산들이 있는지요?
현회장: 수선먼저 조선족 장례문화를 현재의 락후한 민간차원으로 부터, 시대적이고, 전업적이고, 민족적인 고급차원으로 승급시켜야 하겠습니다.
우리에게는 금후의 계획과 목표가 있습니다:
첫째; 시대상조를 효과적으로 운영하여, 조선족 장례봉사 사회적 기제를 건립하고, 조선족 장례 봉사인원 배양기지를 건립한다.
둘째; 《조선족 장례제사 편람》을 완성한다.
셋째; “조선족 장례풍속”을 나라급 무형문화재로 승급시킨다.
넷째; 조선족 장례풍속 전승기지를 건립한다.
다섯째; 여섯째; 일곱째… 아직은 비밀입니다.
여기의 일곱가지 계획과 목표만 완성하자 하여도, 아마 백년은 걸려야 할것 같습니다. 제가 죽을때까지 죽을힘을 다 하여 분투하여도 다 완성할수 없는 아름참 계획과 목표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 백년의 목표를 바라고 매일매일 열심히 출근하며 노력할 것입니다. 그러다가 그 어느날에 염라왕님께서 “이번에는 당신이 죽을 차례요!”하고 통지를 보내오면, 저는 “예! 알겠습니다!”하고는 흔쾌히 사신을 따라서 저승에 가겠습니다.
간주곡----
아나운서: 우리 조선족 전통 장례제사문화를 계승,발전시키기 위하여 여생을 바쳐가고 계시는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 현룡수회장님의 사연을 들었습니다.
청취자 여러분은 오늘 방송을 들으시고 어떤 감수가 있는지요? 전화참여 하시려는 분들은 생방송실 전화 2561111번을 눌러 주시길 바랍니다.
아나운서 맺음말; 해마다 청멸절이 돌아오면 혁명렬사들을 추모하고, 조상들을 기리는것은 우리민족의 우량한 전통이고, 미덕입니다. 오늘날 조선족례의연구회 현룡수회장님과 같은 분들이 있어, 우리 조선족 장례문화가 대를 이어 계승,발전할수 있을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어느덧 약속된 시간이 다 되였습니다. 계속 이어지는 방속 기대하여 주십시요. 안녕히 계십시요.
2011년4월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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