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종점과 저승의 시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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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현 신툰 진남순 할머니 상례와 제례 실기—
<조선족 전통장례>세미나 문건집에 수록
리 광 평
(연변중국조선족생태문화발전회)
조선반도의 우수한 조선민족문화를 간직한대로 중국에 이주하여온 중국조선민족은 반만년의 풍부한 문화유산을 바탕으로 하고 그 전통을 계승, 발양하면서 중국문화의 테두리 속에서 화하(華夏)문화의 자양분을 부단히 섭취하여 점차 자기의 주체적인 나름새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중국 조선민족문화는 중국 다민족문화의 구성부분인 동시에 세계적 범위에서의 조선민족정체(整體)문화의 일부분이다. 이처럼 이중성격을 지닌 중국 조선민족문화는 조선민족의 전통문화에 깊이 뿌리박고 중국 및 주변 국가 여러 민족 문화들과의 상호교류와 영향속에서 자기의 좌표를 한결 뚜렷이 하였으며 광활한 중국의 동북지대를 활무대로 독자적인 발전의 길을 걸어오면서 고유한 민족적 정기와 향기를 무르익혀 왔다. (중국조선민족문화사대계7 《민속사》의 간행사에서 인용 함)
한개 민족의 풍속은 그 민족의 력사의 일부분이며 문화의 일부분이기도 하다.
연변조선족의 력사와 문화유산에 대한 조사를 하느라고 줄기차게 뛰여다니던 나는 2001년 7월 27일 한국 사진가 강위원과 동행하여 안도현 장흥향 신툰(安圖縣長興鄕新屯)에 다녀갔다가 뜻밖에도 이 마을에서 치르는 진남순(陳南順) 할머니 상례와 제례에 참가할수 있어 인생의 종점과 저승의 시점에서 거행되는 전통적인 의례를 직접 기록할수 있는 행운을 얻게 되였다.
지성으로 꾸미는 상여
2001년 7월 26일과 27일, 나는 연변대학 예술학원 객좌교수로 계시던 한국사진가 강위원과 함께 안도현 장흥향 신툰에 다녀와 이 마을의 이민사도 조사하고 강교수님이 쓴 《조선족의 오늘》의 사진설명문에 대한 이 마을 로인님들의 의견들도 수집했다.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중국 동북(만주)전역을 점령한 일제는 1936년에 이른바 《재만조선인지도요강 (在滿朝鮮人 指導要綱)》을 제정하여 매년 조선으로부터 1만 세대, 5만여 명의 이주민을 연변과 동변도(東邊道)지역의 23개 현에 이주시키고자 계획하고 1938년에 39개 현(길장지구 포함)으로 확대하였다. 그 결과 1937년부터 1939년까지 만주지역에 이민한 조선인 집단이민(集團移民)은 무려 125개 촌에 9,226세대, 49,600명에 이르렀다.
오늘날 신툰의 전신은 바로 일제의 계획에 따라 1938년 3월 25일에 설립된 연길현 명월촌 도안구 집단이민부락 (延吉縣明月村島安溝集團移民部落)이다. 한국 경상도 합천군의 30세대, 밀양군의 30세대와 거창군의 40세대가 1938년 3월 25일 도안구에 60세대, 주가툰에 40세대로 나뉘여서 집단이민부락을 꾸리기 시작했단다. 그들은 이미 조선으로부터 완전한 민족풍속을 지니고 와서 연변이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면서 자기 민족풍속습관을 고스란히 지켜왔다.
당시 만척은 유화정책으로 흥농회를 통하여 조선인들의 민속적인 행사를 보급하였는바 1941년에는 관혼상제례를 위한 상여와 가마, 사모관대, 활옷 등과 명절이나 행사 농악놀이에 필요한 북이나 장구, 매구, 징, 꽹과리 등을 보급했다.
이리하여 신툰에서는 부락이 서서부터 지금까지도 사람이 세상 뜨면 조선민족민속전통을 바탕으로 하고 시대와 지역의 변천에 적응하면서 상례와 제례를 실시하고있다. 그 무서운 문화대혁명시기에 상여와 상여당이 무작정 부셔졌다만 1년 좀 지나 다시 만들어져 오늘날까지도 사용되고있다.
7월 26일 점심 저들이 한창 이 마을 로인님들을 모시고 취재를 하고있는데 이 마을 진남순(1923년 합천군 출생) 할머니께서 안도현병원에 입원하셨다가 사망했으므로 27일 상례와 제례를 치려달라는 진남순의 맏아들 정도영(鄭道永)의 기별이 전해왔다. 이 마을 로인회 회장 리상준(李相俊, 합천군 출생)은 골간들을 모아놓고 구체적배치를 하는것이였다.
상례(喪禮)란 좁은 의미에서 말하면 사람이 죽어서부터 장사를 지내기전에 진행하는 행사를 말하고 넓은 의미에서 말하면 부모가 사망한 후 자식들이 상제로 있는 동안에 행하는 모든 례절을 말한다.
제례(祭禮)는 죽은 사람의 넋에 음식을 차려놓고 일정한 의식(儀式)을 치르는것을 말한다.
언녕부터 전통적인 상례와 제례를 기록하려고 벼르고 벼르던 나는 우연하게 이 절호의 기회를 만난지라 충분한 준비를 하였다.
27일 아침, 로인회장의 인솔밑에 10여명 로인들이 문화실 마당에서 홍송나무로 관을 짜서 안도현병원에 실어 보냈다.
아침식사를 마친 나는 로인님들한테 물으면서 상여당을 촬영하려갔다. 상여(행두라고도 부름)란 령구를 인공적으로 메여 운송하는 도구를 말하고 상여당이란 상여와 상례, 제례에 쓰는 제구, 식기들을 보관하는 집을 가리킨다. 일반적으로 상여당은 마을 밖 500∼600m 되는 곳에 짓는다. 마을의 동남쪽 골짜기 수레길을 따라 500여m 걸어가니 귀틀막에 벼짚이영을 이은 상여당이 보였다. 방금 상여를 실어갔으므로 텅 비였는데 주먹만한 자물쇠가 잠겨져 있었다.
객사한 사람의 령구를 집안이나 마을 안에 들여오지 않으므로 다이야수레에 실어온 상여를 마을 북쪽출구 길옆에 내려 놓았다. 강영운(姜永云), 곽인영(郭仁永) 등 마을의 좌상어른들이 리덕순(李德淳) 촌당지부서기와 촌장 등 10여명 중년들을 이끌고 지성을 다해 상여를 꾸미였다. 먼저 6대의 가름대를 놓고 그우에 2대의 대채대를 올려놓았다. 그리고 령구에 씌울 집을 따로 만들었다. 먼저 벽널 4쪽을 비녀로 서로 물려 조립하고 붉은 천에 흰 무늬를 새긴 천을 둘러치고 수탉대가리조각 8개를 꼽고 둥그스럼한 덮개를 덮었다. 그리고는 청천대 4대를 세워서 동여매고 가운데는 흰색이고 변두리는 붉은 색인 청천을 치고 청천대 웃끝에 헝겊방울을 각각 하나씩 단다. 령구집 정면에 직경이 반메터 될 흰 꽃을 달고 옆과 뒷면에 흰색, 분홍색, 록색의 꽃을 달아놓았다. 이어서 검은 천으로 만든 바땋이줄을 대채대 량옆의 가름대에 두줄씩 매여놓았고 령구를 동이는 새끼줄도 다 매여놓았다. 바로 이렇게 담배쉼도 없이 10여명이 한시간 남짓이 부지런히 일한 보람으로 상여는 다 준비되였다.
이 마을 사람들이 꾸며놓은 멋들어지고 아름다운 상여에는 우리 민족인민들의 인생과 죽음에 대한 인식과 태도, 조선민족풍속의 풍요로움과 숭고함, 그리고 우리 민족 선배님들의 지혜와 슬기가 슴배여있음이 분명하였다.
오전 10시 반 되여 령구를 실은 자동차와 상제, 복인 빈객들이 도착되였다. 마을 장년 넷이 굵직한 바줄로 관을 들어 상여의 대채대우에 올려놓자 여러 사람들이 새끼로 령구와 대채대를
十자형으로 두곳이나 묶었다. 이어서 다 준비한 령구집을 천천히 들어 령구를 덮어주었다.
이어서 발인제를 행했다.
상여가 집을 떠나 묘소로 가는것을 발인이라고 한다. 상여앞에 돗자리를 펴고 제사상을 차려놓은후 맏상제인 정도영이 제사상앞에 꿇어앉아 자기절로 술을 한잔 부어서 제사상우에 올려놓고 절을 두번 드리고 물러섰다. 그러자 집사가 《령이기가 왕즉유택 재진견례 영결종천(靈輀旣駕 往卽幽宅 載陳遣禮 永訣終天: 령여에 모셔 발인차비를 다 했으니 가시는 곳은 유택입니다. 견례를 행하여 영원히 작별 하고자 합니다.)》라고 발인축을 고했다.
《영결종천》하는 소리가 끝나자 상여군들이 일제히 상여를 메고 일어서서 묘지를 향해 출발하기 시작했다. 한쪽 가름대 어간에 상여군 2명씩 들어서서 바땋이줄을 어깨에 걸었다. 그러니 한쪽에 10명씩, 모두 20명 상여군들이 상여를 멘것이다.
애달픈 상여소리
출상할 때 명정을 든 사람이 앞에 서고 그다음 공포(功布)를 든 사람, 종구쟁이와 상여군들이 서고 그뒤에 상여 맨뒤의 가름대를 붙잡은 상제들이 따르고 복인, 빈객들이 따라섰다. 상제인 녀인들을 제외한 다른 녀인들은 묘지로 가지 않고 마을에서 제사에 참가한 사람들을 대접할 음식을 준비하였다.
상여소리는 령구를 상여에 싣고 묘지로 갈 때에 부르는 노래이다. 상여소리는 보통 호상(好喪―늙은 로인이 사망된 경우)에만 내고 액상(厄喪―젊은 사람이 사망된 경우)에는 내지 않는다. 이 부락의 상여소리는 고정적인 가사가 없고 흔히 즉흥적으로 엮어댄다.
이 마을에선 리교영(李交榮, 원 이름은 리범룡) 로인님이 제일 처음으로 종구쟁이를 맡으셨댔는데 오늘엔 안영춘(安永春, 50세)이 제3임 종구쟁이로 나섰다.
상여앞에서 왼손으론 대채대를 잡고 오른손엔 구리종을 쥔 종구쟁이가 종을 흔들면서 상여군들을 향해 구슬프고도 애절한 목소리로 선소리를 먹인다. 그러면 상여군들이 그 소리를 받아 일치하고도 우렁차게 후렴을 부르면서 맞추어 나간다.
어허 어허요
어허람마 어허요
에헤요 에헤요 어허럼마 데헤요.
간다 간다 나는 간다
영영 리별 나는 간다
에헤요 에헤요 어허럼마 데헤요.
인간 세상 하직하고
북망산천 찾아간다.
에헤요 에헤요 어허럼마 데헤요.
천년 집을 하직하고
만년 집을 찾아간다
에헤요 에헤요 어허럼마 데헤요.
어허 어허요
어허람마 어허요
에헤요 에헤요 어허럼마 데헤요.
부모님께 효성하고
자식을랑 다 키웠다.
에헤요 에헤요 어허럼마 데헤요.
좋은 세상 더 살자니
요놈 병에 끝장났다.
에헤요 에헤요 어허럼마 데헤요.
내가 비록 떠났어도
너희들은 잘 살아라.
에헤요 에헤요 어허럼마 데헤요.
……
검은 구름이 낮게 드린 하늘에선 비가 담방 쏟아질듯 하고 산골짜기사이로 뻗은 달구지길은 지난밤에 내린 비로 하여 즐벅즐벅하였다. 붉은 천에 흰색으로《孺人麗陽陳氏之柩》라고 쓴 명정을 앞세우고 말도 없고 웃음도 없이 고개를 숙인채 느릿느릿 걸어가는 비장한 출상행렬. 애처롭고 거치른 종구쟁이의 먹이는 소리와 둔탁하고 처량한 상여군들 남성저음의 특유한 받음소리. 그리고 상제들의 애짭잘하고 목 메인 흐느낌소리와 터벅터벅 흙탕길을 짓밟는 흐트러진 발자국소리. 이 모든것이 한 덩어리가 되어 사람들의 마음을 괴롭히고 눈물을 흘리게 한다. 이 모든것에 초목도 떨고 산천도 울부짖고 하늘도 흐느낀다.
이 마을의 상여소리가사에 대하여 리교영 로인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알려줬다. 가사내용은 일반적으로 사망한 로인님의 인생경력과 업적, 자식들과 친척들에 대한 간절한 부탁과 희망, 그리고 상제와 복인, 빈객들이 사망자에게 바치는 효성과 바램, 출상행렬이 지나는 과정 등 내용들을 즉흥적으로 엮어서 부른단다. 때문에 종구쟁이로 나서는 사람은 일반적으로 학식이 높고 사망자와 그 가정에 대해 잘 알아야 하며 강한 호소력, 령활한 조직능력과 변화무쌍한 환경에 임기응변을 하는 재간을 가져야 한단다.
출상행렬이 울퉁불퉁한 자그마한 둔덕길에 이르자 종구쟁이가 멈춰 서서 종을 요란하게 울리면서 선소리를 먹이고 상여군들도 그 소리에 맞추어 노래를 부른다.
어허 어허요 어허람마 어허요
에헤요 에헤요 어허럼마 데헤요
가기는 가겠는데 길이 험해 어쩌겠소
에헤요 에헤요 어허럼마 데헤요
맞상제 맞상제여 로자 없어 못 가겠소
에헤요 에헤요 어허럼마 데헤요
종구쟁이가 대채대를 뒤로 밀자 상여군들이 뒤걸음을 친다. 맞상제인 정도영 부부가 술병을 들고 상여앞에 나와 먼저 령구에 절을 두번 올린후 술을 부어 종구쟁이와 상여군들에게 권하고 상여 맨앞 왼쪽 가름대에 선 상여군에게 부의금을 맡긴다. 상제가 절을 올리면 상여군들이 일치하게 허리를 굽혀 답례하고서 권하는 술도 마이고 한참 노래를 부르면서 멈춰 섰다가 다시 앞으로 나간다.
출상행렬이 작은 물도랑앞에 이르자 종구쟁이가 멈춰 서서 노래부른다.
어허 어허요 어허람마 어허요
에헤요 에헤요 어허럼마 데헤요
대강이 가로 놓여 다리 없어 못 건너오
에헤요 에헤요 어허럼마 데헤요
둘째상제 어데 있소 빨리 나와 다리 놓소
에헤요 에헤요 어허럼마 데헤요
둘째상제 정순영(鄭淳永) 부부가 상여앞에 나와 절을 두번 올리고 상여군들에게 술과 담배를 권하고 부의금도 낸다.
출상행렬이 길 복판의 자그마한 물웅덩이앞에 이르자 종구쟁이가 또 멈춰 서서 노래를 부른다.
어허 어허요 어허람마 어허요
에헤요 에헤요 어허럼마 데헤요
대해가 망망하여 배가 없어 못건너오
에헤요 에헤요 어허럼마 데헤요
큰사돈 어데 있소 돛배 하나 갖춰주오
에헤요 에헤요 어허럼마 데헤요
큰사돈 부부가 상여앞에 나오자 종구쟁이가 상여군들을 이끌어 물구덩이에 딱 붙어섰다. 큰사돈부부는 막무가내로 물구덩이에 엎드려 옷을 적시면서 절을 올린후 부의금을 낸다.
바로 이렇게 종구쟁이가 즉흥적으로 노래를 엮어 부르면서 상제들은 물론 복인과 빈객들도 불러내여 령구에 절을 올리고 부의금을 내게 한단다. 때문에 이 마을에서는 호상일 경우엔 부의금을 별도로 내지 않고 상여가 나갈 때에 낸다.
이날 출상행렬은 상여소리에 맞추어 앞으로 걷기도 하고 멈추기도 하고 뒤걸음도 하면서 두공리 되는 길을 한시간 반동안 걸었다.
저승의 새집들이
사람들은 흔히 사람이 죽으면 저승으로 간다고 한다. 저승에 가면 새집에 들기 마련이 아닐가? 하여 나는 령구를 매장하는 것을 저승의 새집들이라고 말한다.
25년전에 사망된 진남순의 남편 정현태(鄭鉉泰)를 이 마을 공동묘지에 모신 정황에서 상제들은 진남순의 묘소는 별도로 쓰지 않고 그의 남편묘소에 합장하기로 했다. 로인회에서는 이미 동네사람들을 보내 아침 일찍 정현태 묘소중간 왼쪽에 합장할 묘혈을 파놓았다. 정현태 묘소에 후토가 있기에 진남순은 후토를 따로 두지 않는다.
상여가 묘소에 이르자 령구집을 벗겨내고 령구를 동이였던 새끼줄들을 풀어낸 다음 네 사람이 참바로 령구를 들어 묘혈에 가져다 하관(下棺)하였다. 하관할 때 령구의 머리쪽을 산꼭대기로 향하게 했다. 이때 상제들이 몰려들어 관을 붙잡고 통곡을 한다. 그 처절한 곡소리에 가슴이 찢어지는듯하고 눈물이 흐르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굴심을 책임졌던 김태호(金泰浩) 로인과 종구쟁이를 맡았던 안영춘이 손을 맞추어 묘혈에 들어가 령구를 바로 잡아놓고 동네사람들더러 령구 변두리에만 흙을 채우게 한다. 그런 다음 안영춘이 장판을 닦는 아낙네처럼 관을 가로 타고 엎드려 공포로 관우의 흙을 말끔히 닦아냈다. 홍송으로 된 관 널판자가 새하얀 빛을 반사한다. 이어서 김태호와 안영춘이 《孺人麗陽陳氏之柩》 라고 쓴 명정을 관우에 바르게 덮었다. 그리고 김태호 로인께서 참대젓가락 2대를 령구의 머리쪽 위치의 정현태 령구 흙벽에 꽂아 주면서 부드럽게 여쭌다.
《오작교를 놓았으니 서로 련애하러 밤낮으로 잘 다니시소.》
이 참대젓가락은 부부의 령혼이 서로 오가는 오작교를 상징한다.
김태호가 묘혈에서 나오자 맏상제와 둘째상제가 저마다 옷섶에 묘혈에서 파낸 흙을 담아서 령구의 머리쪽, 중간, 아래쪽 세곳에 쏟아놓는다. 이것을 《사방토를 놓는다.》고 한다. 그다음 상여군들이 통곡하는 상제들을 물리치고 부지런히 삽질하여 령구를 묻고 봉분한다. 이 마을사람들은 봉분한 흙우에 풀뿌리 떼짱을 큼직큼직하게 떠서 차례로 덮으면서 공기가 통하지 않도록 삽으로 힘주어 두들겨준다. 그러면서 또 낫으로 떼짱우의 풀들을 말끔히 베여버린다. 이러고보니 합장한 큼직한 묘소엔 파아란 풀들이 잔디처럼 붙어있어 이미 있던 묘소나 새로 만든 묘소가 한데 서로 어울려 분간하기도 힘들었다.
여러 사람들이 무덤의 아래머리에 묘제를 지내는 너비가 약 반메터, 길이가 약 2메터되는 제단을 흙으로 만들었다.
효성을 바치는 추모
사람들은 제례를 통하여 사망된이를 추모하면서 못 다한 효성을 바치는 한편 사망된 이의 관심과 조력을 받아보려는 심리를 가지고있다.
성분제례는 로인회 리상준 회장께서 집사를 맡았다.
먼저 상제들이 후토자리에 종이를 펴고 음식을 간단히 차려놓은후 맏상제가 술을 한잔 붓고 절을 두번 하였다.
후토제를 지낸 다음 묘제(성분제)를 지냈다. 상제들이 집사의 지도하에 제단우에 흰 종이를 펴고 음식을 차린다. 앞줄(무덤과 가까운 곳)에는 밥그릇, 물그릇 같은것을 놓고 뒤줄에는 반찬을 놓는다. 돼지고기, 소고기 같은 육류는 서쪽에 놓고 물고기는 동쪽에 놓는다. 그리고 검은 액틀에 넣은 진남순의 사진을 앞줄 한복판에 놓았다.
집사의 안내로 상제와 복인들이 제단의 오른쪽에 모여서고 빈객들이 제단 왼쪽에 모여 섰다.
집사께서 고 진남순의 제사를 시작한다고 선포하자 상제와 복인들이 일제히 곡을 하다가 그치고 제단앞에서 술을 붓고 절을 올렸다. 먼저 맏상제부부가 술을 한잔 부어 제단우에 놓고 절을 두번 하고 헌작한 술을 제단 변두리에 부어버리고 음식들을 조금씩 무덤 앞부분에 던져 주면서 고인들께서 많이 잡수시라고 알린다. 이어서 상제와 복인들이 사망자와의 직계, 방계 등 친척관계순서로 제단앞에 나와 상술한 방법대로 헌작, 배례한다. 상제와 복인들의 헌작, 배례가 끝나자 빈객들도 나와서 헌작하고 무덤을 향해 세번 경례를 올리고 상제와 복인들에게도 경례를 한번 올린다. 그러면 상제와 복인들도 답례로 빈객을 향해 경례를 한번 한다.
헌작, 배례가 끝나자 상제와 복인들이 제단앞에 가로섰다. 맏상제가 상제와 복인들을 대표하여 마지막 술을 한잔 부어 제단우에 놓았다. 그러자 상제와 복인들이 일제히 허리 굽혀 절을 두번 했다. 바로 이렇게 《하직절》을 마치자 맏상제 정도영이 천천히 걸어서 부모님의 무덤 머리쪽에 쪼크리고 앉아 눈물을 훔치면서 말한다.
《아버지, 25년만에 어머니를 모셔왔습니다. 언제든 한국 고향에 가 보시겠다던 소원을 이루게 못하여 죄송합니다. 이젠 부모님께서 서로 잘 지내시면서 계속 자손들과 친척들이 잘 되게끔 보살펴주옵서소. 다음날 다시 다녀오겠습니다.》
땅이 꺼질 듯 한숨을 쉰 정도영은 제단앞에 다시 돌아와 전체 사람들더러 제사상에 놓았던 음식을 조금씩이라도 음복(飮福)하게 권한다.
정도영의 안해도 여러 사람들이 음복하도록 하고는 제단앞에 놓인 시어머니사진을 보면서 나지막하게 말한다.
《어머니, 이젠 모든 근심을 버리고 잘 계십시오. 내일 안신제를 지내려 오겠습니다.》
제사에 참가한 사람들은 조금씩 음복하고는 모두 마을로 돌아왔다. 로인회에서 녀성들을 동원하여 촌문화실과 몇집에 음식을 차려놓고 산소에 다녀갔던 사람들은 물론 온 마을 사람들을 청하여 음복하게 했다.
그리고 상여가 나갈 때 받아들인 부의금을 로인회에서 점검한후 로인회에서 조직하면서 쓴 모든 경비를 지불한 외에 나머지는 몽땅 상주집에 넘겨주었다. 이 부의금은 절대로 상여군 등 개인들에게 나누어주거나 기념품 사는데 쓰지 않으며 로인회거나 촌에서도 한푼도 점하지 않는다. 혹시 경제형편이 괜찮은 상주집들에서 고맙다고 로인회에 돈을 좀 주면 그 돈은 상여나 상례, 제례에 쓰는 제구, 식기들을 갖추는데만 쓴다.
나는 이 마을 진남순 할머님의 상례와 제례에 참가하여 많은것들을 배웠고 또 많은것들도 생각해보았다.
이 마을 사람들은 이러한 상례와 제례를 통하여 사망자의 평생공적을 찬송하고 참다운 인생비결을 찾고 인생도리를 밝힘으로써 살고있는 사람들이 자기의 인생길과 인생가치를 재인식하고 참답게 살아갈 용기와 힘을 얻게 한다.
이 마을 사람들은 이러한 상례와 제례를 통하여 조상전래의 조선민족미풍량속을 연변이란 특정된 자연환경, 사회환경, 력사환경에 알맞게 계승, 발전시키고있으며 이런 미풍량속을 후세들이 이어가도록 본을 보여준다.
이 마을 사람들은 이러한 상례와 제례를 통하여 서로간의 믿음과 친선을 늘이고 마을공동체사상을 수립함으로써 제반사업을 내미는 원동력을 키운다. 이런 행사에선 참가자가 간부이든 평민이든, 시가지사람이든 촌민이든, 친척이든 이웃이든 모두가 평등하고 모두가 행사지휘에 복종한다. 이런 행사에 참가한 사람들은 모두가 자진하여 자기가 해야할 일을 찾으며 또 에누리없이 완성한다. 그리고 서로 잘 도와준다.
이 마을 사람들은 이 마을에 정착한지 66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어찌하여 이처럼 자기민족 미풍량속을 잘 지켜갈수 있을가? 나는 그 리유가 다음과 같지 않겠는가 제나름대로 생각해본다.
그것은 중국공산당의 옳바른 민족정책이 있기때문이다. 하여 그들은 중화민족대가정속에서 다른 형제민족들과 마찬가지로 나라의 떳떳한 주인이 되어 자기 민족문화를 이어가고 발전시켜가고있는것이다. 지구촌 140여개 나라와 지구에 널려 사는 조선민족들가운데서 중국에서처럼 민족자치제도를 실시하는 곳이 또 어디에 있단 말인가?
이 마을에서 간직하고 있는 미풍량속은 반만년의 풍부한 민족문화유산을 토대로 하고 중국 및 주변국가 여러 민족문화의 자양분을 섭취하면서 시대의 발전에 맞게 계승되고 발전되였기에 다른 문화가 대신할수 없는 강대한 생명력을 가지고있다.
그리고 자기 민족문화를 지켜가고 발전시켜 가는 훌륭한 선줄군과 지도자가 있고 이들을 받들고 따르는 훌륭한 조선민족 군중들이 있으며 한족을 비롯한 여러 민족인민들의 도움과 성원이 있었기때문이다.
지금 새로운 시대에 들어서면서 이 마을에서도 많은 변화가 생기고 조선민족의식과 인구, 교육, 그리고 농촌체제개혁 등 여러 면에서 심각한 도전을 겪고있다. 특히 녀성들과 젊은이들의 도시진출로 하여 이런 미풍량속을 이어갈 사람들이 점점 적어지는것이 뚜렷한 문제로 나서고있는 현실이다.
때문에 앞으로 당과 정부와 관계기관, 단체 및 전문가, 학자들,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이 이런 문제를 더 관심하시길 바라는것이 나의 소원이다.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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