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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조선족력사
2012년 07월 16일 16시 01분  조회:2806  추천:0  작성자: 백화상조
연변조선족력사

조선민족은 5천여년의 유구한 력사를 갖고 있다. 현재 연변에 살고 있는 조선족은19세기중엽부터 조선반도에서 이 지역으로 들어오기 시작하였다.련속되는 자연재해와 봉건폭정통치, 그리고 일제침략폭행에 못이겨 해마다 수천수만세대가 북으로 타향살이를 떠났다. 어떤 사람들은 로씨아 프리모르스크변구일대에서 떠돌이 생활을 했고 어떤 사람들은 또 두만강과 압록강 북안일대에서 숨어 살았다.

두만강북안에서 대대손손 일하며 살아 온 연변지역의 조선족은 한세기 남짓한 동안 갖은 풍상고초를 다 겪었다. 그들은 피와 땀으로 이 땅을 개척하고 삶의 터전을 마련했다. 또한 항일 및 해방전쟁에서 마멸할 수 없는 기여를 했다. 1949년 새 중국이 창건된후1952년에 연변조선민족자치구(후에 연변조션족자치주로 고쳤음) 가 창립되고 연변의 조선족은 민족구역자치권리를 행사하기 시작하였다.

아래에 네개 부분으로 나눠 연변조선족의 백여년간 력사를 알아 본다.


제1부분
19세기 중엽부터 1910년까지


력대로 두 나라 변경지대백성들의 상호래왕은 잦았다. 더우기 조선변강백성들은 초기에 중국땅에서 <<아침에 와서 농사하고 저녁에 돌아가면서>> 계절적으로 거주하다가 후에는 가족을 데리고 와서 집을 짓고 장기적으로 정착 거주하는데로 발전하였다.

1860년이래 조선 북부에 해마다 흉년이 들었으며 1869년에는 재해가 더구나 심하였다. 살길이 막힌 조선기민들은 온 가정, 지어 온 마을이 고향을 등지고 몰래 국경을 넘어서 농사를 지었다. 하여 조선이민이 날로 늘어났는데 조선족거주구역은 두만강북안으로부터 부르하통하, 가야하 류역에로 확대되였다. 1883년9월, 청나라정부는 조선이민들을 회유해 짜리로씨야의 침략세력과 싸우게 하기 위해 특히 <<길림조선상인무역지방규약>>을 제정하였다.이 규약에 근거해 1885년에 화룡욕에 통상국을 앉혔으며 광제욕(오늘의 광개향 광소툰)과 서보강(지금의 훈춘시 삼가자향 고성촌)에 통상분국을 앉히고 조선의 회령, 종성, 경원 등지와의 통상사무를 처리하게 하였다. 같은 해 두만강이북 길이가 7백여리이고 너비가 40~50리인 지역을 조선이민특별개간구로 정하고 월간국(越垦局)을 설치해 전문 조선이민의 개간사무를 관리하게 함으로써 조선이민들이 농사를 짓는데 편리를 조성해주었다.

이 시기 연변의 조선족들은 주로 황무지를 일구고 밭농사를 하였다. 1894년도에 조선족들이 모여사는 4개 보 (堡) 에만도 한전 25,501정보(1정보는 약 15무에 해당함)가 있었다. 1900년도에 조선족들이 룡정 동북부의 세전이벌과 룡정남부의 대교동에서 벼농사를 하는데 성공한후로부터 연변에서 벼농사가 보급되였다.

1905년 일본이 조선을 강박해 <<을사보호조약>>을 맺고 조선을 이른바 일본의 <<보호를 받는 국가>>로 만든데서 광범한 조선족인민들의 강렬한 의분을 자아내였다. 일본제국주의가 수천수만에 달하는 반일의병과 애국문화운동에 뛰여든 지식인들을 피비리게 탄압한데서 많은 반일의병과 애국지사 그리고 봉건통치를 반대하는 농민들이 망국의 비분을 안고 분분히 고향을 떠나 북으로 연변 등 중국의 동북삼성으로 들어왔다. 하여 1909년에 이르러 연변의 조선족이 9만8,000여명으로 늘아나 연변 인구의 76.6%를 차지하였다.

1907년8월, 일본이 공공연히 헌병대를 룡정에 파견하고 청정부가 연변지역에 설치한 행정기구를 무시하고 비법적으로 이른바 <<통감부간도파출소>>를 설치하였으며 이른바 <<도사장>제를 실시하고 각지에서 이른바 <<도사장>>과 <<사장>>들을 임명하였다. 그리하여 개산툰, 평강 등 간도 각지의 조선족인민들이 일떠나 괴뢰<<도사장>>제를 반대하고 당지의 일본놈앞잡이들을 처단하였다. 하여 <<도사장>>과 <<사장>>들은 소문을 듣고 간담이 서늘하여 분분히 사직을 선포하였으면 일본침략자가 비법적으로 설치한 괴뢰행정기구가 미비상태에 빠지였다.

1909년, 일본침락자는 청정부를 핍박하여 <<두만강중한계무조항>>즉 <<간도조약>>을 체결하고 연변에서의 령사관설치권, 경찰서설치권과 조선족에 대한 실제상의 령사재판권을 빼앗아 조선족인민들의강렬한 반일정서를 불러일으키였다. 조선족반일인사들은 련명으로 길림변무공서에 서한을 보내여 <<백성은 나라의 근본으로서 백성을 얻으면 나라가 강성해지고 잃으면 나라가 쇠약해질것이며 지금 간도의 땅은 중화의 땅이고 간도의 백성은 중화의 백성임>>을 천명하였다. 1910년3월 길림성 동남로관찰사서의 조선족 관원 리동춘은 일본이 조선족에 대한 <<령사재판권>>을 실시하는것을 배격하고 나아가 조선족입적운동을 추진시키고 중국의 공민권을 얻으며 일본통치의 멍에에서 벗어나기 위해 <간민교육회>>를 건립하도록 발기하고 <<월보를 발행해 민중의 의지를 불러일으키는>>활동을 전개하였으며 각지의 조선족사립학교들을 위해 교과서를 편찬하고 반일사상을 주입하였다.

1906년도에 조선족반일지사 리상설이 룡정에서 반일사립학교인 서전서숙을 꾸리고 철저한 민족주의교육과 반일계몽교육을 실시한 이래 조선족반일사립학교는 연변 각지에 우후죽순마냥 건립되였다. 선후로 창립된 명동, 창동, 정동, 광성 등 많은 반일학교들은 모두 당지에서 반일인재를 양성하는 요람으로, 반일투쟁전개의 여론진지로, 행도중심으로 되였다. 거의 40년에 달하는 조선족인민의 곡절적인 반일투쟁이 이때로부터 서막을 열었다.


제2부분
1910년부터 1931년<<9.18사변>>까지


1910년8월, 일본이 조선을 합병한후 연변에 이주한 조선인들은 거의 모두 일본제국주의 파쑈폭행에 견디지 못해 두만강을 넘어 중국에 이주했다. 1910년부터 1926년까지 도합 126,964명이 이주해왔고 1931년에 이르러 연변조선족인구는 406,341명으로서 동삼성 조선족 총인구의 64.6%를 점하였다.

조선인의 대량적인 이주는 연변지구 대면적수전개발에 인력 및 기술면의 담보를 제공하였다. 1926년에는 이미 155개소의 사립학교가 있었는데 재학생수가 3,829명에 달해 연변은 동삼성에서 학교밀도가 제일 높은 지방으로 되였다. 각 사립학교들에서는 반일<<철혈정신>>으로 대량의 반일군정인재들을 양성했다. 1912년, 반일인사 서일은 왕청현에서 <<중광단>>을 조직하고 반일민족주의를 전파했다. 1913년 지장훈, 강수희, 등 반일인사들은 동성용에서 <<사우계>>를 건립했다. 같은 해 김약연, 리동춘, 백옥정, 김립 등 사람들은 <<간민교육회>>의 토대우에서 <<간민회>>를 창립하고 반일문화계몽운동을 광범위하게 벌렸다.

1919년 3월 1일에 일어난 조선 <<3.1>>반일독립운동의 추동하에 이미 상해와 로씨야연해주의 반일독립운동자들과 밀접한 련계를 확보하고 또 났들의 영향을 받은 연변의 반일인사들은 즉시 호응하여 반일대폭풍을 일으킬 준비를 하였다. 그해 3월13일, 연변각지에서 온 30,000여명의 조선족농민과 사립학교사생들은 일본총령사관소재지 룡정에 모여 연변력사에서 규모가 전례없는 반일집회를 갖고 반일독립선언서를 읽고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죄행을 성토했다. 일부 한족학생도 시위행진대오에 가담했다. 일제의 압력하에 지방당국은 조선족인민의 평화시위를 잔혹하게 탄압했는데 당장에서10명이 숨지고 40명이 상했으며7명의 중상자가 병원에서 숨을 거두었다. 3월17일, 1,500명의 조선족군중은 수난자들의 시체를 들고 항의시위행진을 단행했다. 4월말까지 도합86,670여명의 연변조선족군중이 다지에서 반일집회와 시위행진에 함가했다. 관준언 등 형제민족반일인사들은 천방백계로 체포당하게 된 조선족반일인사들을 엄호하고 피신시킴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일제군경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했다.

1920년 여름, 연변조선족반일부대 <<독립군>>은 이미 2,900여명의 장병들과 2,600여자루의 보총을 소유하고있었다. 그중 홍범도, 박경철이 거느린 명월구의 의군단, 구춘선과 안무가 지휘하는 의란구의 국민회군, 최명록이 창립한 봉오동의 <<군무독군부>>군대, 서일과 김좌진이 거느린 왕청현 서대파의 <<북로군정서>>부대 등이 있었다.

1920년 6월7일, 홍범도와 최명록이 지휘한 반일부대는 봉오동에서 조선주둔 일본군제19사단에서 파견한 <<월강추격대>>(260여명)를 매복습격하였고 수십명을 섬멸하였다. <<봉오동전투>> 는 조선족반일무력이 동북경내에서 일본정규군을 대량으로 소멸한 첫 전투였다.

봉오동에서 참패를 당한 일본침략자들은 연변의 조선족반일부대를 소멸하기 위하여1920년10월2일에 <<훈춘사건>>을 꺼리낌없이 도발하고 2만명에 달하는 일본정규군을 무어 피비린 <<경신년토벌>>을 발동했다. 그들은 2,285명에 달하는 조선족민중을 살해했고 2,507세대에 달하는 민가를 불살라버렸다. 10월하순 홍범도와 김좌진이 거느린 반일부대는 화룡현 삼도구의 청산리, 이도구의완루구, 어랑촌 874고지 등 곳에서 일본군을 련속 전승하여 근 천명에 달하는 적을 섬멸함으로써 일본침략자들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고 연변지구조선족인민들의 반일민족해방투쟁의 영웅적기개를 과시하였다. 이 <<청산리전역>>은 연변지구에서의 반일민족주의운동의 최고봉을 표징하였다.

1920년초에 조기 공산주의자인 리동휘 등이 상해에서 조선문인쇄공장을 세워 <<공산당선언>>을 비롯한 많은 진보적 서적과 간행물을 번역출판하였다. 이런 서적과 간행물들은 곡절을 거쳐 연변에 전해와 갈수록 많은 청년학생과 농민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사회과학연구회>>, <<맑스주의 연구회>>, <<독서회>>등 진보적 단체를 내와 맑스주의를 전파하고 로씨야10월혁명을 선전하였다. 1921년12월, 돈화에서 <<고려공산당중앙총감부>>를 세웠는데 그 산하에 1,300여명의 당원이 소속되여있었다. 1923년에 또 고려공산당간도지방회 및 그 <<행동조직>>인 <<적기단>>을 세웠다. 1924년12월에 박윤서를 위수로 하는 <<만주고려공산청년회>도 나타났다.

1921년7월과 10월 룡정에 선후하여 대성 중학과 동흥중학을 세웠는데 조선족조기공산주의자들이 <<사회과학연구회>>, <<맑스주의연구회>>, <<독서회>>등 진보적 단체를 내와 맑스주의를 전파하고 로씨야10월혁명을 선전하였다. 1921년12월, 돈화에서 <<고려공산당중앙총감부>>를 세웠는데 그 산하에 1,300여명의 당원이 소속되여있었다. 1923년에 또 고려공산당간도지방회 및 그 <<행동조직>>인 <<적기단>>을 세웠다. 1924년12월에 박윤서를 위수로 하는 <<만주고려공산청년회>도 나타났다. 김사국이 대성중학에 세운 <<동양학원>은 한때 공산주의를 선전하는 사상진지로 되였다. 1926년1월에 이르러 57개 청년단체들로 구성된 <<동만청년총련맹>이 룡정에 세워저 수천수만명에 달하는 연변청년들이 점차 혁명의 길에 들어서게끔 하였다.

1927년10월 중국공산당만주성림시위원회가 성립됨에 따라 1928년2월에 성위에서 사람을 연변지구에 파견하여 룡정에서 <<민성보>>를 꾸린다는 명의르르내걸고 당사업을 저개하였으면 룡정촌당지부를 창립하였다. 이것이 연변의 첫 당지부이다.

1930년초에 이르러 공산국제의 <<일국일당>>의 지시에 좇아 조선공산당은 해산을 선포했고 당원들은 개인의 신분으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이로부터 조선족인민들은 중국공산당의 령도하에 반일투쟁을 전개하게 되였다.

1930년5월 연변의 조선족인민들은 중국공산당의 령도하에 <<붉은오월투쟁>>을 발동하였다. <<5.30폭동>>을 일으킨 폭동대오는 일본주구의 주택 19채를 불살라버렸다. 룡정의 폭동대오는 대흥전 등 회사를 습격파괴하였고 <<동척간도출장소>>를 습격하였으며 철교 한곳을 파괴하였다. <<붉은오월투쟁>>에서 강학제 등 50여명이 피살되였고 김철 등 85명이 체포당했다.

<<붉은 오월투쟁>>과 이후에 일어난 일련의 <<지방폭동>>에서 건립된 신춘을 대장으로 하는 평강유격대, 김세훈이 거느리는 라자구유격대, 김명균이 지휘하는 돈화유격대 등 홍색유격대는 중국공산당이 동북지구에서 로농무력을 건립하는 첫시험으로서 <<9.18>>사변후 중국공산당령도하에서의 반일유격대창건에 일정한 경험을 쌓았다.


제3부분
1931년<<9.18>>사변으로부터 1945년<<8.15>>광복에 이르기까지


비록 1931년도에 일본침략자들이 <<9.18>>사변을 발동하여 무력으로 동삼성을 점령하였지만 그들은 조선에서의 저들의 파쑈통치를 결코 쇠약시키지 않았다. 하여 한패 또 한패의 조선인들이 그자들의 유린에 못이겨 조선반도로부터 연변에 이주하게 되였다. 이로 인하여 연변 5개 현의 조선족인수는 1933년의 405,953명, 1934년의 421,941명으로부터 1935년의 453,345명으로 점차 늘어났다. 1936년 8월, 일본관동군사령부에서 <<재만조선인지도요강>>을 조작해가지고 해마다 만세대 5만명의 <<조선이주민>>들을 연변과 동변도의 23개 현에 이주시켜 <<기아수출>>로 조선의 <<식민위기>>를 완화하며 조선족의 피땀을 일층 착취하려 시도했다. 1937년부터 1941년 사이에 강박에 의해 연변에 이주한 <<집단적이주민>>과 <<집합이주민>>은 32,176명에 달한다. 1941년12월에 일본파쑈가 태평양전쟁을 발동했다. 동북에서 더욱 많은 논밭을 개발하여 동북을 <<대동아전쟁>>의 <<량곡기지>>로 만들기 위하여 <<조선이주민>>을 <<개척민>>으로 탈바꿈하였다. 1941년부터 1944년사이에 동북에 이주한 조선족은 64,887명에 달한다. 1944년에 이르러 연변의 조선족인구는 631,733명에 달하여 동북3성조선족인구 총수의 38%를 점했다.

<<9.18>>사변후 중공만주성위에서 제정한, 조선족에 대한 기본정책은 전적으로 조선족인민들의 리익과 념원에 부합되였다. 이리하여 조선족당원간부와 군중들의 반일적극성을 전례없이 불러일으키였다. 연길, 화룡, 왕청, 안도 등지의 현위 및 각 구위 서기는 모두 조선족이 담임하였다. 연변조선족인민들은 중국공산당의 령도하에서 한차례 또 한차례의 반일무장투쟁을 발동하였다. 1931년 가을에 있은 <<추수투쟁>>과 1932년 봄에 있는 <<춘황투쟁>>은 모두 앞으로의 무장반일투쟁에 군중적토대를 닦아놓았다. 이어 김철을 대장으로 하는 왕청반일유격대, 박동근을 대장으로 하는 연길반일유격대, 김세를 대장으로 하는 화룡반일유격대, 공헌침(한족)을 대장으로 하는 훈춘반일유격총대를 세웠다. 이런 유격대를 모두 <<동만유격대>>라 불렀는데 4백여명의 장병이 있었다. 그중 조선족이 90%이상을 점했고 당원, 단원이 80%이상을 점했다.

1932년 4월부터 일본군<<간도림시파견대>.가 연변지구를 전면적으로 <<소탕>>하기 시작하였다. 1932년11월부터 중공동만특별위원회와 각 현위에서는 선후하여연길현 왕우구, 석인구, 왕청현, 가야하, 훈춘현 대황구, 연통라즈에서 구일굽의 쏘베트정부를 건립했고 또 의란구의 남양촌 등 여섯곳에서 <<혁명위원회>>를 건립했다. 이를 일컬어 <<동만유격근거지>>라 하였는데 20,000여명의 민중을 소유하고있었다. 그중 조선족이 95%이상을 점하였다. 이는 <<만주에서 가장 큰 유격구>>였다.

1932년 11월부터 1933년 봄까지 일본침략자들은 일위군경, 자위단수천명을 출동기켜 동만반일유격근거지에 대한 <<토벌>>을 발동하여 잔포하게 모조리 불사르고 모조리 빼앗고 모조리 죽여버리는 <<3광>>정책을 실시하였다. 1932년2월12일 <<어랑촌보위전>>에서 13명 조선족유격대원들이 400명이나 되는 적들과 피어린 전투를 벌렸다. 하여 그들을 <<어랑촌13용사>>라고 부른다. 1933년, 동만반일유격대는 토벌하러 온 적들과 150여차 혈전을 벌려 적들의 제1차<<대토벌>>을 분쇄하였다.

1933년11월부터 1934년 봄 사이 일본침략자들은 6천여명을 모아가지고 동만유격근거지에 대한 제2차<<토벌>>을 발동했다. 동만유격대는 백여차의 혈전을 벌려 적들의 진공을 물리치였고 대오를 부단히 장성, 강화하였다. 대오는 1933년10월의 700여명으로부터 1934년초의 900여명으로 늘어났다.1934년3월, 중공동만특별위원회는 연길현 삼도만 능지영에서 각현 유격대 책임자회의를 소집했다. 회의에서는 종공만주성위의지시에 좇아 동만유격대를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로 개편했는데 주진이 사장을 맡고 왕덕태가 정위를 담당했다. 1935년5월30일, 정식으로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군부를 왕덕태가 군장직을 맡고 위등민이 정위직을 맡았으며 산하에 4개 퇀, 한개 유격대를 두었으며 모두 1,200여명이였는데 조선족이 3분의2를 차지했다.

1934년9월부터 1935년봄사이 일본놈들은 동만유격근거지에 대한 제3차<<토벌>.을 발동했다. 이른바 <<반<민생단>투쟁>>중에서 엄중한 손실을 입은 연변 각 현의 당, 단, 군중조직 및 인민혁명군은 준엄한 시련에 직면했다. 연길, 화룡, 안도 각 현의 당조직,근거지정부 및 부대는 안도현 처창즈(지금의 화룡현 와룡향 화안툰일대), 왕청, 훈춘 두개 현 근거지 정부 및 부대들은 라자구에 전이하여 각기 새로운 유격구를 개척하여 간고한 무력투쟁을 견지했다. 1935년6월, 라자구유격근거지의 부대는 북만에로 진군하여 주보중장군이 령도하는 동북반일련합군 제5군과 승리적으로 회사했다. 1935년11월, 처창즈유격근거지의 군민들은 내두산에로 전이하여 적들의 두차례 진공을 물리치고 1936년2월 호호탕탕하게 남만으로 진군하여 양정우장군이 인솔하는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과 승리적으로 회사했다.

1936년 3월초, 동만 당 및 인민혁명군간부회의가 안도현 미혼진에서 소집되였다. 회의에서는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을 동북항일련군 제2군으로 확충했는데 왕덕태가 군장을 맡고 위증민이 정위를 맡았으며 안보학, 사충항(진한장동지가 대리), 김일성이 각기 제1,2,3,사 사장직을 맡았다. 전군은 2쳔여명으로서 조선족이 절반이상을 차지했다.

1936년6월 무송현 동강에서 가진 동북항일련군 제2군 군, 사급간부회의 즉 <<동강회의>>와 같은해 7월 금천현 하리에서 가진 동만, 남만당 및 제1, 2군 주요지도간부련석회의 즉 <<하리회의>>에서는 조선족들가운데서 극히 비밀적인 <<조국광복회>>를 건립하기로 결정하였다. 하리회의에서는 동, 남만당위를 중공남만성위로 합병하기로 결정짓고 위증민을 서기로 입명했으며 동북항일련군 제1, 제2군을 동북항일련군제1로군으로 편성하고 양정우를 총사령관으로, 왕덕태를 부총사령으로 임명하였다. 이때부터 제2군 제1, 2, 3사는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제2군 제4, 5, 6사로 되였다.

항일련군 제2군의 제4사와 6사는 주로 남만에서 싸우고 제5사는 주로 북만에서 싸웠다. 1939년부터 1940년 봄까지 각 사는 연변각지에서 종횡무진으로 싸우면서 적들의 기염을 꺾어놓았다. 1939년에 제4사, 5사로 개편된 제3방면군은 안도현 대사하전투, 돈화현 한총령전투 등 규모가 비교적 크고 전과가 뚜렷한 전투를 진행하였다. 1940년3월5일, 제6사를 개편한 제2방면군은 김일성의 지휘하에 화룡현 홍기하부근에서 일본 <<마에다경찰토벌대>>를 매복습격해 140여명을 격사하거나 생포했는데 력사상 이를 <<홍기하전투>>라 부른다. 이 전투는 <<공산군이 몰살되였다>>는 거짓말을 발가놓았다.

1940년도에 이르러 일본관동군 70만명으로 늘어났지만 워낙 30,000여명에 달했던 동북항일련군은 다년간의 혈전을 거쳐 병력이 날로 감소돼 1,000여명밖에 남지 않았다. 1940년 가을, 연변인민의 자제들로 구성된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의 제2,제3방면군은 혁명력량을 보존하고 항일전쟁의 최후승리를 맞이하기 위해 선후로 쏘련경내로 이동해 야영훈련과 소부대활동을 벌리는 새로운 단계에 들어섰다. 1941년부터 1945년 8월까지 항일련군소부대는 수차 라자구, 천보산, 개산툰, 차조구, 연길, 훈춘, 도문 등지에 와서 적정을 정찰하고 할일군중단체를 건립하거나 회복하고 적의 초소거나 군사기지를 습격하였다. 간고한 소부대활동에서 려영준, 김명주를 비롯한 로전사들이 전공을 여러번 세우고 1로군부관 곽지산을 비롯한 일부 조선족동지들이 목숨을 바쳤다. 항일련군의 소부대활동은 쏘련홍군이 재빨리 일본관동군울 소멸하는데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고 특수 기여를 하였다.

연변인민의 자제병들이 14년에 달하는 간고한 항일무장투쟁을 견지할 수 있은 것은 연변의 여러 민족 인민의 지지, 배합과 갈라놓을 수 없다. 이를테면 팔도금광의 광부들은 항일유격대에 의복, 신발과 화약, 뢰관을 가져다주었고 해마다 추수계절이 되면 각지의 농민들이 량식을 밭머리거나 산기슭에 묻어두어 자제병들이 가져가게 했으며 각지의<<지하당원>>들은 갖은 방법으로 정보거나 무기탄약을 자제병들에게 자져다주었다. 1942년부터 1944년까지 공청단원 최봉선은 라자구에서 <<경성사진관>>을 꾸린다는 명의를 내걸고 적들의 정보를 끊임없이 항일련군소부대에 제공했으며 공산당원 김명주, 리영춘은 연길감옥에서 탈옥투쟁을 조직해 성공하여 수십명 동지를 유격근거지에 데려갔다. 각지의 광부들은 파업을 단행해 적들의 전쟁시기경제계획을 파탄시켰으며 각지의 학교의 교원과 학생들은 동맹휴학을 단행하여 적들의 <<황민화>>운동을 반대하였다. ….

총적으로 말하여 위대한 항일전쟁가운데서 조선족인민과 형제민족인민들은 어깨겯고 피어린 싸움을 벌여 나라를 위해 생명을 바치고 항일전쟁의 승리를 위해 거대한 대가를 치르고 불후의 공헌을 하였는바 무려 3,125명의 렬사가 나타났다. 그중 조선족이 3,026명이나 된다.


제4부분
1945년<<8.15>>광복으부터 1952년9월3일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까지


1945년8월8일에 쏘련은 대일선전포고를 하였다. 8월14일에 쏘련홍군은 훈춘, 왕청 두 곳으로부터 연변에 들어왔으며 8월18일에 연길을 해방하였다. 19일에 연변 각족 인민들은 룡정에서 성대한 쏘련홍군환영대회를 가지고 항일전쟁의 승리를 열렬히 경축하였다. 연길, 룡졍, 조양천 등 연변각지의 인민들은 로동자, 농민, 청년, 부녀 동맹을 비롯한 혁명군중단체와 별동대, 보안대 등 자위무장을 조직하여 당지의 왜놈잔여세력과 결사적인 투쟁을 진행하였다.   

1945년9월18일에 중공동북위원회연변사업위원회 즉 동북항일련군연변분견대의 강신태를 비롯한 이들이 연길에 진주하였다. 중공연변지위, 연변전원공서와 연변군부가 잇달아 창립되여 공고한 동만근거지를 건립하기 위하여 정치적 및 조직적토대를 닦아놓았다.   
  
광복후 연변에 잠입한 국민당분자는 만여명의 왜놈잔여세력을 긁어모아 토비무력을 조직하여 완강히 대항하였다. 라자구일대의 토비무력은 단번에 무고한 조선족군중 100여명을 살해하였다. 토비를 숙청하고 공고한 동만근거지를 창립하기 위해 연변경비대에서는 다섯달동안의 전투를 거쳐 5개 현의 토비 4,000여명을 소멸하고 보총 1,431자루, 기관총 76정, 화포23문을 로획하였다. 1946년7월에 돈화에 둥지를 틀고있던 토비들도 기본상에서 숙청되였다.   
  
일본제국주의주구를 청산하는 투쟁은 왜놈잔여세력을 숙청하는 중요한 구성부분이기도 하였다. 1946년4월에 룡정에서 만명군중이 참가한 왜놈주구청산대회를 열고 정사빈을 비롯한 일본제국주의의 주구와 특무를 처단하였다. 같은해 10월 연길에서 1만명 군중이 참가한 <<해란강참안청산대회>>를 소집했는데 대회는 련속 7일간 계속되였다. 동북과 조선 각지에서 온 피해자와 그들의 가족 600여명이 대회에 참가했으며 30여명의 피해자와 그의 육친들이 일본놈 및 그의 주구들의 하늘에 사무치는 죄행을 공소하였다. 대회에서는 두 손에 선혈이 가득 묻은 흉수 7명을 처단하였다.     

1945년 11월 미국의 부추김밑에서 장개석의 국민당군대는 동북에 대한 대규모적인 진공을 발동하였다. 국민당군대는 금주, 심양, 사평, 장춘 교하를 점령한후 <<한주일내에 두만강까지 점령하겠다>>고 떠들어대였다. 연변경비려의 용사들은 교하?라법---신참 등 지대에서 국민당군대와 완강한 전투를 진행하여 그들의 진공을 물리치고 연변대지를 보위하였다.     

토비숙청과 왜놈주구청산투쟁의 승리는 국민당의 사회토대를 짓부셔 놓았으며 각족 인민의 계급적각오를 제고시켰고 토지개혁에 유력한 군중토대를 닦아놓았다.     

1946년7월부터 1948년4월까지 연변 각족 인민들은 중국공산당의 령도하에서 만강의 혁명열정으로 토지개혁에 뛰여들었다. 조선족농민들은 진정으로 토지의 주인으로 되였다. 토지를 분여받고 각급 정권을 장악한 연변조선족인민들은 전례없는 참군참전열정을 보여주었다. 부자, 부부, 형제 사이에 앞다투어 참군하는 감동적인 장면을 어디에서나 볼 수 있었다. 1946년부터 1948년까지 연변에서 5만2,000여명의 청장년이 용약 참군했는데 그중 85%가 조선족이였다. 그들은 대부분 동만독립사, 동북민주련군 제10종대 제28사, 29사,30사에 편입되였다. 그들은 선후로 동북해방전쟁, 평진전역, 도강전역에 참가했으며 후에 또 광서, 해남도 전역에 참가하였다. 그들중에서 동만경비려 1퇀의 퇀장 박락권을 비롯한 4,313명의 렬사가 용솟음쳐 나왔는데 그중 3,713명은 조선족이였다. 또 <<김성범전투모범련>>, <<강철8련>>, <<로농영웅련>> 등 많은 영웅집단과 특등공신 한국화, <<1급인민영웅>> 김천덕을 비롯한 290여명의 전투영웅이 나타났다.     

연변 여러 민족 인민들의 전선지원열정도 대단하게 높았다. 그들은 담가 3,720대와 수레 19.000대를 동원했으며 전선지원에 참가한 민부수는 연인수로 302,300여명에 달하였다. 민부들중에서 3,434명의 립공자가 나타났다. 대다수 청장년들이 참군참전했기에 후방의 농업생산, 전선지원, 렬군속무휼사업, 반간첩투쟁 등은 모두 녀성과 로인들이 감당하였다. 그들은 사심없이 13,563세대 렬사유가족과 군인가족의 농사일을 도와줌으로써 해방전쟁의 승리에 기여하였다.     

1949년10월1일 중화인민공화국이 창건되였다. 연변각족인민들은 당과 정부의 령도하에 농업, 공업과 교통운수, 우전, 상업, 무억, 교육, 문화 등 여러 사업을 회복발전시켰다.     

1950년6년 조선전쟁이 일어났다. 미군을 위수로 하는 <<련합국군>>은 인천으로부터 상륙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대거진공하였다. 연변 각족 인민들은 당과 정부의 호소를 받들고 전국인민들과 한길에서 <<항미원조 보가위국>>의 기치를 높이 들고 적극적으로 참군참전하였다.     

1952년9월3일, 중국공산당의 민족정책의 빛발아래 연변조선민족자치구가 정식으로 창립되였다. 조선족의 다년간의 숙원이 마침내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새 중국에서 현실로 되였다. 1955년 12월에 열린 연변조선족자치주 제1기인민대표대회 제2차회의에서는 1954년9월에 반포한 중화인민공화국헌법규정에 좇아 연변조선죽민족자치구를 연변조선족자치주로 고치였다.     

총체적으로 백여년래 시종 민족압박에 시달리던 조선족 인민들은 끝끝내 중국 소수민족의 일원으로 자치지방의 주체민족으로 되였고 나라의 주인공적 권리를 갖게 되였으며 참된 나라의 주인이 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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