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카테고리 : 블로그문서카테고리 -> 블로그 -> 생활
나의카테고리 : 결혼환갑
출생에서부터 사망에 이르기까지 개인은 한 종류의 집단에서부터 다른 집단으로 옮겨가 지위가 바뀌거나 생의 중요한 사건이 되풀이될 때 인간이 치르는 일정한 집단적 의례를 통과의례라 한다. 개인은 가족, 친족, 촌락의 구성원으로서 그 개인의 사건은 사회집단 전체의 것으로 인식되었기에 한 사회집단의 성원은 그 사회가 규정한 일정한 시기에 모두 동일한 형태의 의례를 치르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통과의례는 모든 사회에 존재하지만 사회구조나 문화의 차에 따라 강조하는 의례가 다르고 절차 또한 다르기 마련이다. 우리 사회도 역사에 따라 각기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규범과 절차가 진행되었는데, 현재까지 우리 생활에 반영되어 있는 통과의례는 조선시대의 잔영이 많다.
조선은 주자의 가례 를 충실히 따른 유교의 이념적 사회였으며 효를 그 근본으로 하였다. 따라서 출산과 관례, 혼례 외에도 상례와 제례를 중시하는데 모든 통과의례가 자손이 대대로 번성하고 조상을 받드는 데 집중되어 있다. 현재 우리나라의 통과의례 중에도 관례를 제외한 다른 부분은 모두 일반에서도 가정의례로 행해지고 있으며, 관례는 의식으로서 공공의 기관이나 장소에서 행사로 치르는 경향이 있다.
출산의례
기자의례
출산의례는 한 개인의 생이 시작되는 의례로써 통과의례의 첫번째 과정이다.
아들이 대를 계승해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던 전통사회에서 자녀를 낳지 못한 여인들은 각종의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기자(祈子,아이를 갖도록 비는 행위)를 하였다.
자식이 없는 여자들은 산천이나 명승지 혹은 절을 찾아다니며 자식을 갖게 해달라고 정성을 드렸다. 그 치성의 대상물은 대부분 돌과 바위인데, 그 중에는 남자의 성기를 도작한 것이 많았다.
또 금줄을 훔치거나 금줄에 달렸던 고추를 몰래 훔쳐다 다려 먹거나 삼신상에 올려 놓았던 쌀을 훔쳐다 밥을 지어 먹기도 하였다.
기자행위는 정해진 절차나 의례가 있는 것이 아니기에 무한히 많은 사례를 들 수 있다. 기자신앙에 담긴 여인들의 자식에 대한 간절한 정성과 생명체에 대하여 지녔던 존엄성은 오늘날까지도 우리의 중요한 정신적 맥락으로 이어지고 있다.
해산의례
삼신할멈
오래 전부터 우리나라에서는 아기 낳는 일을 맡고 있다는 신을 삼신할멈이라 불렀다. 갓 태어난 아기의 엉덩이에 파란 멍이 있는 것도 삼신할멈이 얼른 세상에 나가라고 엉덩이를 밀어내서 그렇다고 믿었다. 해산 때에는 우선 아기를 낳기 전에 짚을 깔고 아기의 안전한 탄생을 빌며 삼신할멈을 위한 삼신상을 차려 놓는다. 아기를 낳은 후에는 고마움의 표시로 흰 쌀밥과 미역국을 먼저 올리는 습속이 있는데 이는 21일(삼칠일) 동안 계속된다.
이러한 습속은 인간능력으로는 어렵다고 생각되는 불행을 절대적 존재에 귀의해서 미리 막을 수 있다는 자기 암시의 효과가 있다. 그리고 우리 민족 고유의 하늘 숭배 사상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샤머니즘의 유습이다.
금줄
금줄은 마을사람과 외부 사람에게 성스러운 산고에 접근해서 아이와 산모에게 해를 끼치지 않도록 대문 기둥 윗부분에 쳐 두었던 신호의 줄이다. 같은 식구가 아닌 경우 금줄 쳐진 집안에는 발을 들여놓을 수가 없었다. 아들이 태어나면 새끼줄에 고추, 숯, 짚 등을 달고 딸의 경우에는 숯, 미역, 솔잎, 종이 등을 달아두어 아기의 성별을 알렸는데 금줄은 보통 21일 동안 쳐 두었다. 이는 가족 외에 다른 사람이 들락거리면 삼신할멈이 노해서 아이에게 해를 끼친다고 믿기 때문이었으나 면역능력이 없는 아기의 보호기능을 하는 매우 과학적인 풍습이다.
돌
아기가 태어난 지 만 1년이 되는 생일에 행하는 의례이다. 의학이 발달하지 못하였던 옛날에는 아기들의 사망률도 높았으므로 1년 동안 아무 탈없이 성장하여 첫돌을 맞는 일은 특별히 중요하여 잔치를 크게 베풀었는데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풍습이다.
돌에는 백설기와 수수경단, 송편과 국수 그리고 대추와 각양각색의 과일로 돌상을 차려주는데 의미가 담긴 상차림이다. 백설기는 깨끗하고 순수한 정신을, 붉은 빛의 수수경단은 액운을 면하라고, 배가 볼록하게 빚은 송편은 식복이 있으라고, 대추와 각양각색의 과일은 열매를 맺듯이 자손이 번영하라는 축복의 뜻으로, 국수와 타래실은 수명장수를 비는 뜻으로 준비했다.
또 돌잡히기를 하는데 돌상 위에 돈과 활,화살과 붓,벼루 먹을 놓고 아이가 첫번째 잡는 것으로 아기의 장래를 점치며 기뻐하는 풍습이다. 이때 돈은 부귀를, 붓은 학문을, 활은 용맹을 상징하며 여아일 경우에는 색지, 자, 실을 놓는데 이는 바느질 솜씨를 여성 기예의 으뜸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성년의례
소년 소녀가 성장한 어른으로 진입하는 사회적인 의미를 가지는 통과의례로 관례(冠禮)와 계례라는 성년의례가 있었다.관례는 남자에게 상투를 틀고 어른의 평상복을 입히고 관을 씌우고 술마시는 예법을 가르치며 별호를 지어주는 의례로 남자 나이 15세에서 20세 사이에 행한다고 되어 있으나 조혼의 습속이 있었던 조선시대에는 실제로 12세나 13세에 관례를 치루었다.
계례는 여자에게 비녀를 찌르게 하는 의례로 비교적 간단한 절차다. 처녀나 총각은 머리를 땋아서 늘어뜨리고 다니다가 관례와 계례를 치를 때 머리를 걷어서 얹게 되는데 근세에 와서 혼례와 혼합되어 부수적으로 행해지다가 개화기 이후에 사라지고 1973년부터 20세가 되는 5월 세번째 월요일을 성년의날로 제정하게 되었다.
혼례
함보내기
혼례는 혼인 또는 결혼이라 하며,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부부로 결합하는 의례로 일생 의례 가운데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서 혼례를 대례 혹은 인륜지대사라고 불렀다. 혼례는 가족이라는 새로운 사회집단을 형성하는 의의를 갖는다. 우리나라에서는 예로부터 장가가기 혹은 장가들기라 하여, 신랑이 신부집으로 가서 혼례를 치르고 최소한 3일을 지낸 후에 신부를 데리고 자기집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혼인이 이루어졌다.
양가에서 혼담이 오가고 대례를 치르기 전까지의 과정을 의혼이라고 한다. 먼저 신랑측에서 신부측으로 혼인을 청하는 이른바 사주단자라 칭하는 납채를 보내면 신부측에서 이를 허락하는 내용의 택일단자를 보내는 연길을 보내면 혼례날이 합의된다.
이를 받은 신랑집에서 다시 송복이라 하여 신부옷감, 이불, 패물, 술, 떡을 싸서 신부짐에 보내는 것인데 지방에 따라 행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한다.
하지만 납폐라 하여 납폐서와 폐백을 신부집에 보내면 신부집에서는 이를 받고 신랑집에 답서를 보내는 행사는 대례 전의 중요한 일로 여긴다. 함에 넣는 물건은 지방과 계층, 빈부에 따라 다르지만 신부의 상,하의 두 벌과 패물, 혼서지는 반드시 넣는다.
함은 흔히 함진애비라 하여 하인에게 짊어지게 하거나 지방에 따라서는 동네에서 첫아들을 낳은 복많은 사람이 짊어지게 하였는데 요즘은 신랑 친구들이 함을 지는 풍속이 생겼다. 함은 신부어머니나 복많은 여인네가 상을 펴고 그 위에 받거나 시루를 놓고 받기도 한다.
대례
신부집에 도착한 신랑은 신부의 어머니에게 나무로 만든 기러기를 전하는데 쌍을 지어 사는 기러기를 신의, 화목, 정절의 상징으로 믿는 것과 관련된 풍습이다. 신부집에서 미리 차려놓은 대례상 앞에서 신랑과 신부는 맞절을 나누고는 술을 한 모금씩 세 번 나누어 마신다. 이는 술을 교환하면서 하나가 된다는 부부결합의 표식이었다.
그리고 밤이 되면 부부가 일심동체가 되는 의식인 첫날밤을 치룬다. 이때 가까운 친척들이 신방의 창호지를 뚫고 엿보는 신방엿보기의 풍습이 있는데 옛날에는 나이 어린 신랑과 성숙한 신부의 결합이 많았기에 신부가 신랑의 연소함을 비관해서 도망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이러한 풍습이 생겨났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신랑과 신부에게 아쉬움과 조바심의 마음을 갖게 하는 하나의 놀리기 풍습이다.
신행
신부집에서 치루는 대례를 마치고 몇달, 몇년 만에 가기도 한다. 신부가 시댁으로 들어가는 일을 우귀 또는 신행이라 하고 신부가 시집에서 처음으로 시부모에게 인사를 올리는 예를 견구고례, 폐백이라고 한다. 신부 가마가 신랑집 가까이 오면 사람들이 나아가 목화씨, 소금, 콩, 팥 등을 뿌려 잡귀를 쫓는다. 또한 신부가 처음으로 시집에 들어설 때 대문간에다 짚불을 놓고, 곡식 가마니를 갖다 두어서 이를 타넘게 하는 것은 혹시 신부를 따라 올지도 모르는 귀신을 막고 또 새식구를 맞이하여 재수가 좋아 풍년이 들라는 뜻에서였다.
회갑례
평균 수명이 짧았던 시절에 60을 넘긴다는 것은 크게 복받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자녀들은 잔치를 준비하여 일간친척과 친지들을 초대하고 큰 잔치상을 마련하며 좋은 옷을 해드려 잔치날 회갑의 주인공은 이 옷을 입고 마련한 자리에 앉는다. 자녀들은 만수무강하시라는 헌수배례를 올리고 장성한 자녀일지라도 색동옷을 입고 재롱을 피워 주인공께 효도를 다한다. 잔치는 보통 당일에 한하지만 예전에는 3일 동안 광대 등을 불러 놀게 하며 지나는 이들에게도 음식을 대접하는 등 온동네가 잔치를 벌이기도 했다.
회갑상은 큰상차림으로 편, 숙실과, 생실과, 유과 등을 높이 괴어 색을 맞추어 놓는다. 정성껏 높이 쌓은 음식은 헐어서 먹기 어려우므로 따로 큰상 앞에 입맷상을 차려 회갑주가 시장하지 않도록 한다. 큰상의 괴는 높이와 음식의 종류는 홀수로 하는데 유밀과, 강정, 다식, 당속, 생실과, 건과, 정과, 편, 건어물, 편육, 전유어, 적 등을 놓으며 입맷상은 주로 면상을 차리는데 김치, 나물, 편육, 찜, 전유어, 숙과류, 생실과, 음료를 올린다.
상례
상례절차
한 개인으로서는 삶과 죽음을 가르는 통과의례이며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는 산 자와 죽은 자가 영원히 이별하는 분리의례가 된다. 상례는 상중에 행하는 모든 의례를 말하는 것이다. 상례를 중시하는 태도는 죽음을 단절로 보지 않고 또 다른 연장이라고 보는 우리 민족의 인생관에서 비롯되었다. 우리 선조들은 죽음이 아주 가버리는 것이 아니라 본래 왔던 곳으로 되돌아간다고 인식하여 사람이 죽었을 때 '돌아가셨다' 는 표현을 쓴다. 돌아가신 어른은 아주 떠나간 것이 아니라 항상 주변에 머물면서 후손의 일을 돌보고 간섭하며 이끌어 준다고 믿는다. 그래서 살아 있을 때나 죽었을 때나 한가지로 공경하고 섬기는 것이 효도라고 생각했다.
죽음이 확인되면 임종을 지켜보던 가족들은 곡을 시작하고, 지붕에 올라가서 죽은 이의 옷을 들고 죽은 이의 이름을 세번 부르며 '복(復)'을 외치는 고복의례를 행한다. 이는 떠난 혼을 다시 돌아오라고 부르는 의례로 곡과 고복은 마을 사람들에게 죽음을 알리는 구실을 한다. 고복의식이 끝나면 미련을 끊고 죽은 이를 반듯하게 해서 목욕시키고 죽은 이와의 관계에 따라 상복을 입게 되는데 이를 '성복'이라고 한다.
상복을 갖추어 입으면 정식으로 문상객을 받고 제사상을 차려 놓고 혼을 모시는 제사를 지내며 다음날 묘에 운반할 상여를 준비한다. 상여를 메는 상두꾼들은 상여의 상태를 확인하고 상주들의 슬픔을 달래며, 죽음을 또 다른 태어남으로 인식해서 마을 사람들과 함께 상여놀이를 벌인다. 다음날 날이 밝으면 관을 상여에 안치하고 상여 앞에서 마지막 제사인 '발인제'를 지낸다. 제사가 끝나면 상여가 미리 잡아놓은 묘역에 도착하고, 입관한 후 봉분을 다지고 돌아온다.
상여놀이
상여가 나가기 전날에는 상두꾼들이 모여 상여 점검을 하고 상가에서 마련한 술과 음식을 나누어 먹는다. 그리고 빈 상여를 메고 놀이판을 벌이는 상여놀이를 하는데 전남 지역에서는 최근까지 다시래기라는 상여놀이가 이어지고 있다.
상두꾼들은 빈 상여를 메고 실제 상여가 나가듯 운구 시늉을 그대로 하는데 이때 죽은 이의 사위를 상여에 태우고 논다. 이때부터 앞소리꾼이 상엿소리를 메기고 상두꾼들이 뒷소리를 받고 마을 사람들은 상여 주위에 모여들어 춤을 추고 상엿소리를 함께 따라 부르며 흥겨운 놀이판을 벌인다. 상두꾼들은 판소리를 비롯하여 북춤과 병신춤을 추면서 개인 장기를 선보이고 거짓 상주놀이나 굿을 하면서 마을사람들의 신명을 돋군다.
이러한 상여놀이는 사별의 슬픔을 웃음과 신명으로 바꾸어 놓아 산 사람들이 현실의 삶에 복귀할 수 있도록 하는 슬기이며, 이승에서의 죽음을 저승에서의 새로운 태어남으로 보고 죽은 이의 저승길을 축복해 주는 우리 민족의 내세관이 반영된 관습이다.
묘다지기
묘터의 산역꾼과 상두꾼들은 흙을 무덤 위에 쌓고서 흙이 단단하게 다져지기까지 여러 차례 땅을 다지는데 이를 덜구찧는다고 한다.
덜구꾼들이 흙을 다지는 동작은 마치 춤을 추는 듯하다. 흙을 다질 때는 "에에에 달공" 하면서 요령잽이 선소리에 맞춰 노래를 부르면서 일제히 오른발을 앞으로 내며 두 손도 역시 앞으로 뻗어 손뼉을 치는데 짝을 맞추어 무용을 하듯이 동작을 취한다. 이러한 덜구동작은 아주 숙달된 사람들에 의해서만 가능한 정교한 동작이다.
이는 힘든 노동을 쉽게 돕는 노동요의 기능을 하며, 산중에 홀로 남겨진 외로운 시신을 위한 축제이며 슬픔을 극복하려는 사람들의 슬기이기도 하다. 덜구질이 끝나면 잔디를 입히고 봉분 앞에 비석과 망두석을 설치한다.
상장례 용구
방상씨 탈은 눈이 네 개 달린 가면으로 악귀를 쫓는 상징적인 기능이 있다. 방상씨는 영구 앞에서 묘지까지의 길을 인도하는 역할을 하며 묘지에 도착해서는 먼저 광내에 들어가 사방 모퉁이를 창으로 쳐 광내의 잡귀를 없앤다. 그리고 하관할 때가 되면 방상씨 탈을 썼던 사람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오던 길이 아닌 다른 길로 달아난다. 그러지 않으면 잡귀들의 훼방에 죽을 수도 있다고 여겼다. 방상씨 가면은 조선시대 초기부터 장례행렬에 사용되었으며 지금은 영구차의 도입으로 그 풍습은 사라졌다. 그러나 지금도 상여를 사용하는 전남 나주와 진도 지방에서는 바가지 또는 무서운 가면을 꽃상여 앞에 두고 이를 방장이라 부르고 있어 방상씨의 유습이 전해오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