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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 대사기
2012년 08월 08일 11시 18분  조회:3611  추천:0  작성자: 백화상조
한국역사 대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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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해리 영해 선포:1978
대한 민국의 영해를 12해리로 한다고 널리 세계에 알린 일. 한국의 영해 범위는 1978년 4월 30일부터 발효된 영해법에 따라 12해리로 확정되었다. 그러나 제주 해협에서 만종전과 같이 3해리를 유지하기로 하였다. 따라서 제주 해협 및 모든 영해에 무해 통항(無害通航 : 외국의 배가 어떤 나라의 평화, 안전, 질서를 해치는 일이 없이 그 나라의 영해를 지나가거나 항구에 출입하기 위해 영해를 지나가는 일)원칙이 적용된다.
※ 2·8 독립 선언:1919
1919년 2월 8일에 일본의 도쿄에서 조선의 유학생들이 선포한 독립 선언. 일본의 도쿄에 있던 조선 기독 청년 회관에서 유학생 600여명이 친목회 명목으로 모여서 독립 선언서와 결의문을 채택하여, 그것을 일본 의회에 보내는 한편, 일본에 있던 외국 외교 기관과 언론 기관 등에 배포한 항일 투쟁 사건이다. 그 결과 대표자 60여 명은 일본 경찰에 붙잡혔으나, 국내외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2·8 독립 선언은 사전에 국내 각계 지도자들에게 은밀히 알려져 있었던 일로서 그 뒤에 일어난 3·1 운동의 촉진제가 되었다. 선언문을 기초한 사람은 이광수로 알려져 있다.
※ 3·1 운동:1919
1919년 3월 1일에 일본의 강압적인 식민 통치에 맞서서 일어난 온 겨레의 항일 민족 독립 운동. 기미 독립 운동이라고도 한다. 1910년 일본의 강압으로 주권을 빼앗긴 뒤 국민의 항일 감정이 고조되고 있을 즈음, 국내에서는 종교계, 교육계 지도자들 사이에 은밀히 구체적인 거사 계획이 진행되어 크리스트교 측 16명, 천도교 측 15명, 불교 측 2명의 33인이 민족 대표로 선정되고, 총대표로 손병희를 추대하였다. 마침 고종 황제의 인산(因山 : 국장)이 3월 3일로 결정되자, 많은 사람들이 모일 것을 예상하고 그 기회를 이용하려고 거사일을 3월 1일로 결정하였다.
드디어 3월 1일 학생과 시민들이 탑골 공원에 모여들었고, 하오 2시에 정재용이 팔각정에 올라가 선언문을 낭독하였다. 낭독이 끝나자 2만여 명의 학생과 시민들이 일제히 만세를 부르며 시위로 들어갔다. 파고다 공원에서 시작된 시위 운동은 3월과 4월에 걸쳐 절정에 이르렀으며, 중국 동북 지방과 하와이 등지로까지 퍼져 나가 이 운동이 시작된 지 3개월 동안 211곳에서 200여 만 명이 참가하였다.
※ 4·19 의거:1960
1960년 4월 19일에 자유당 정권의 독재와 부정 부패와 부정 선거에 항거하여 일으킨 전국 학생들의 대규모 시위. 자유당 정권은 이승만 대통령이 전쟁의 책임 문제 등으로 제2대 대통령으로 재선될 가능성이 희박해지자 ,국회를 통한 대통령의 간접 선거를 피하기 위하여 계엄령을 선포하고, 국회를 탄압하여 이른바 발췌 개헌안을 통과시키고 직접 선거를 통하여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그 뒤 1954년의 총선거와 1960년 3월 15일의 총선거에서도 자유당 정권은 부정 선거로 이승만과 이기붕을 대통령과 부통령에 당선시켜 민주 정치를 바라는 국민들의 기대를 저버렸다.
이와 같은 일당 독재와 부정 부패 및 부정 선거에 분노한 학생들과 시민들의 감정이 이 4·19 의거로 폭발하게 되었다. 학생과 시민의 시위는 곧 다른 지방에까지 확대되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자유 민주 정치의 발전을 기대하는 애국적인 학생과 시민들의 거센 시위는 부정 선거로 당선된 이승만을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고, 자유당 정권을 무너뜨렸다.
※ 5·16 군사 혁명, 민주당 정권 붕괴:1961
제2공화국을 맡은 민주당이 처음부터 신파와 구파의 세력 다툼으로 정치적, 사회적 혼란을 가져오자 군부 내의 일부 인사 중 박정희 육군 소장을 중심으로 하는 군부 내의 혁명 세력은 조직을 규합했다. 드디어 1961년 5월 16일 새벽을 기해 행동을 개시하여 무혈 혁명으로 장면의 민주당 정부를 무너뜨리고, 군사 혁명 위원회의 이름으로 서울 중앙 방송국을 통하여 혁명 공약 6개 조항을 국내외에 선포하였다. 혁명 정부는 6개 조항의 공약대로 군정을 펴나갔으며, 1963년에 접어들어 2년 7개월간의 군정을 끝내고 민정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박정희는 1963년 10월 3일에 실시한 총선거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이로써 ‘제3공화국’의 탄생을 보았다.
※ 6·10 만세 운동:1926
1926년 6월 10일 조선의 마지막 임금 순종의 인산일을 기해 일어난 항일 만세 운동. 본래 이 날은 전국적인 항일 만세 운동을 일으킬 계획이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하고, 그래도 학생들이 주동하여 황제의 상여가 종로를 지날 때 일제히 격문을 뿌리고 만세를 불렀다. 이에 민중들이 합세하여 시위 운동이 확대되었는데, 이 운동은 3·1 운동이래 주권 회복을 바라던 우리의 민족 정신을 다시 한번 불러일으킨 것으로 뒷날의 광주 학생 운동의 발판이 되었다.
※ 8·15 광복으로 주권 회복:1945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이 연합군에게 무조건 항복함으로써 전쟁이 연합군의 승리로 끝나자, 1910년 이래 일제의 지배를 받아 오던 우리 민족은 1945년 8월 15일에 주권을 되찾게 되었다. 광복의 직접적인 계기는 연합군의 승리에 있었다. 연합군은 1945년 7월의 포츠담 선언에서 일본에 대하여 무조건 항복을 권고하였다. 그런데 일본이 그 선언의 내용을 거부하고 항쟁을 계속하자 미국은 1945년 8월 6일과 9일에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각각 원자 폭탄을 떨어뜨리게 되었고, 그 결과 일본은 마침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게 되었다. 그러나 광복은 결코 연합군의 승리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간접적으로는 국내에서의 끈기 있는 독립 투쟁과 국외에서의 항일 무력 투쟁, 그리고 대한 민국 임시 정부의 활동이 뒤따랐던 것이다. 우리 민족의 오랜 독립 투쟁의 결과 연합국의 절대적인 후원을 받게 되었고, 1943년 11월의 카이로 회담과 1945년의 포츠담 선언에서 독립을 보장받기에 이른 것이다. 특히 중·일 전쟁 이후 중국의 적극적인 후원에 힘입은 바가 컸다.
※ 간도 참변:1920
1920년 간도에 사는 조선인들이 무차별 학살당한 사건. 경신참변이라고도 한다. 1920년 봉오동 청산리 전투에서 대패한 일본군은 독립군에 대한 보복을 하기 위해 조선 내의 일본군과 관동 지방에 파견된 일본군 및 연해주 지역에 주둔 중인 일본군을 동원하여 간도에 거주하던 한국인들을 무차별 학살하였다.
※ 급진 개화파 갑신정변 일으킴:1884
급진 개화파는 당시 세력을 잡고 있던 민씨 세력이 서양 문물을 서서히 받아들이자는 온건 개화파와 손을 잡고, 빨리 근대화를 이루려는 자신들의 주장에 반대하자 비상 수단을 쓸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때마침 청나라가 청·프 전쟁에서 패배하여 정국이 어수선하게 되자, 급진 개화파는 이 틈을 이용하기로 하고, 일본과 모의하여 정변을 일으켜 혁신 정부를 세우려 하였다. 1884년 10월에 새로 설치된 우정국 개설 축하연을 계기로 급진 개화파는 정변을 일으켜 반대 세력을 몰아내고, 고종을 경우궁으로 모신 뒤 새 내각을 조직하였다. 문벌 타파, 사민 평등, 재정의 일원화, 지조법(地租法)의 개정, 경찰제 실시, 행정 기구 개편 등 14개조로 된 개혁안을 선포하였으나 청나라의 간섭으로 사흘 만에 실패하고, 그 중심 인물들은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 갑오개혁 단행:1894
갑신정변의 실패로 세력이 꺾였던 개화 세력은 동학 운동의 반발을 계기로 다시금 내정 개혁의 필요성을 주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때, 동학군의 진압을 위해 조선에 들어온 일본은 동학군의 진압에 성공하자 조선 정부에 대해 내정 개혁을 요구하였다. 정부는 그들의 개혁 요구에 대해 이미 개혁을 추진하고 있다고 거절하며 일본 군대의 철수를 요구하였다. 그러자 일본은 군대를 출동시켜 경복궁을 포위하고, 대원군을 앞세워 민씨 세력을 몰아 낸 다음, 개화파로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여 개혁을 단행하였다. 1894년 7월, 새로 들어선 김홍집 내각은 개혁 추진 기관인 군국 기무처를 설치하고, 3개월 동안에 정치, 경제, 사회 등 각 분야에 걸친 208건의 개혁안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개혁의 기본 정신을 기록으로 남기고자 홍범 14조(洪範十四條)를 마련하여 그것을 고종이 공포하도록 하였다.
※ 일본과 강화도 조약 체결:1876
강화도 조약은 강화도에 침입한 일본의 군함 운요호에 대한 우리 포대의 발포 사건을 구실로 일본의 강요에 의해 1876년에 맺어졌다. 한국이 외국과 맺은 최초의 근대적 조약으로 불평등 조약이다. 이 조약을 맺음으로써 쇄국 정책을 버리고, 일본에게 부산, 인천, 원산의 세 항구를 개항하게 되었다. 이로써 일본은 침략의 손을 뻗치기 시작했고, 유럽 여러 나라들도 적극적으로 한국에 진출하는 계기가 되었다.
※ 경부 고속 도로 개통:1970
서울과 부산 사이를 잇는 경부 고속 도로는 1968년 2월 1일에 공사를 시작하여 1970년 7월 7일에 완공 개통되었다. 도로의 규모는 길이 428km, 너비 22.4m인 4차선 도로이다. 이후 이 도로는 수도권과 영남 공업 지역, 부산과 인천의 2대 수출입항을 잇는 산업의 대동맥구실을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서울과 부산 사이를 1일 생활권으로 만들어 지역 간의 균형 있는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고 있다.
※ 경인 고속 도로:1968
서울과 인천을 잇는 고속 도로. 정식 이름은 ‘서울∼인천 간 고속 국도’이다. 도로의 규모는 길이 29.5km, 너비 20.4m인 4차선 도로이다. 1967년 5월에 공사를 시작하여 1968년에 개통된 한국 최초의 고속 도로이다. 이 도로의 완성으로 서울과 인천의 산업 기능을 더욱 긴밀하게 묶어 하나의 큰 공업권으로 발전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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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인선 개통:1899
경인선은 서울(구로)과 인천을 잇는 길이 27km의 복선 철도로, 1899년 9월 18일에 먼저 제물포(인천)와 노량진 사이가 개통되었고, 이듬해에 한강 철교의 준공과 함께 나머지 구간이 연결되었다. 날로 늘어나는 교통량을 해결하기 위하여 1965년에 복선으로 만든 데 이어 1974년에는 전철로 바뀌었다. 1964년 11월에 경인선 개통일인 9월 18일을 ‘철도의 날’로 정하여 그 날을 기념하고 있다.
※ 고구려, 태조왕 즉위:53
고구려는 고대 왕국 중의 하나로, 압록강 중류 지역에서 일어나 한반도 북부와 남만주 일대를 다스렸다. 국민성이 억세고 날쌔어 중국과 끊임없이 투쟁하면서 민족의 방파제 구실을 하였다. 태조왕은 고구려의 제6대 왕(재위 53∼146년)이자 유리왕의 손자인데, 신하들이 추대하여 7세에 왕위에 올랐다. 56년(태조왕 4년)에 동옥저를 정벌하여 고구려 영토를 넓혔으며, 국가 체제를 부족국가 형태에서 중앙 집권 형태로 바꾸는 등 강력히 대외 발전을 꾀하여 고대 왕국의 기틀을 확립하였다.
※ 고려:918
중세의 통일 왕조. 왕건이 후삼국의 분열을 수습하여 세운 나라이다. 918년 태조 왕건이 나라를 세운 뒤로부터 1392년 이성계가 새 왕조를 세우기까지 34대 475년간 계속된 왕조이다. 태조 왕건은 본래 송악(지금의 개성)의 호족 출신으로 태봉(후고구려)의 왕인 궁예의 부하로 있다가, 궁예를 몰아 내고 왕위에 올라 나라 이름을 고려라 하였다(918년). 건국 후 후삼국을 통일한 태조는 통일 후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하여 호족 세력을 통합하고, 발해 유민을 흡수하였으며,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려는 북진 정책을 추진하였다. 초기에는 호족 세력이 강성하여 왕권이 위협당하기도 했으나, 광종 때에 이르러 신구 세력의 교체를 통해 왕권의 안정을 이루고, 성종은 안정된 왕권을 바탕으로 여러 제도를 정비하여 문종 때에는 최성기를 이루었다. 그러나 그 뒤 밖으로 여진의 압력을 받은 데다가 안으로 사회 모순이 격화되어 이자겸의 난, 묘청의 난, 무신의 난 같은 내란이 잇달아 일어났고, 내란이 수습되기도 전에 몽고의 침입을 받아 그 간섭을 받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공민왕은 원나라의 쇠약을 틈타 반원 자주 정책을 추진하였으나 권문 세가의 방해로 실패하고, 그 동안 지방에서 성장해 온 중소 지주층의 신진 사대부 세력은 이성계 등의 무인 세력과 연합하여 권문 세가의 세력을 꺾어 새 왕조 조선을 열게 되었다(1392년).
※ 팔만 대장경 완성:1251
팔만 대장경은 1011년(고려 현종 2년)에 거란의 침입을 받아 나라가 어려움에 빠지자, 부처의 힘을 빌려 나라의 안전을 꾀하려고 만든 것이다.
처음 만들기 시작한 때부터 무려 240년이라는 오랜 세월에 걸쳐 이루어졌는데, 제1차로 처음으로 펴낸 대장경은 <초판 고본 대장경>과 <속대장경> 두 가지이다. 제2차는 몽고군의 침입으로 강화도에 피란한 고려 조정이 또다시 부처의 힘을 빌려 몽고 세력을 물리치려고 대장경판을 만든 것이다. 1236년(고종 23년)에 강화도에 장경 도감(대장경을 펴내기 위한 임시 관청)을 두어 대장경을 만들기 시작하여 1251년(고종 38년)에 완성하였다. 이것이 곧 오늘날 남아 전하는 <팔만대장경>이다. <팔만대장경>의 경판수는 모두 8만 1,258판인데, 앞뒤로 새겨져 있어서 면수로는 모두 16만여 면에 이른다. 판목의 크기는 세로 24cm 안팎, 가로 69.6cm 안팎, 두께 2.6∼3.9cm로 후박나무에 새겨져 있다. 이는 해인사 대장경판이라 하여 국보 제32호로 지정되어 있다.
※ 한나라의 침입으로 고조선 멸망:BC108
고조선은 청동기 문화를 배경으로 일어난 조선반도 최초의 국가로, 단군 왕검이 세웠다고 한다. 주위의 부족을 정복하면서 강대해져, 기원전 4세기경에는 중국의 연(燕)나라와 맞설 수 있는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동방 사회의 중심 세력으로 만주 남서부 일대와 요서, 조선반도 북부 지방에서 그 세력을 떨치다가 기원전 2세기경 이주민인 위만에게 왕위를 빼앗겼다. 위만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지배 계급은 토착 세력과 연맹을 맺고, 중국과 조선반도 남방 사회와의 중계 무역을 통해 강성해졌다. 그러나 요동 지역에 대해 위협을 느낀, 한(漢)나라의 침입을 받아 왕검성이 함락되면서 멸망하였다(기원전 108년).
※ 고종 퇴위:1907
조선의 제26대 왕이자 대한 제국의 초대 황제(재위 1863∼1907년) 고종은 흥선 대원군의 둘째 아들로, 세자가 없던 철종의 뒤를 이었다.
가장 혼란한 시기에 왕위에 올라 명성 황후(민비)와 대원군의 정치 싸움과 임오군란, 갑신정변, 갑오개혁, 을미사변, 동학 운동, 을사조약 등 큰 사건이 잇달았다. 1907년에 일본의 압력으로 제위에서 물러났으며, 1910년 조선 주권을 일본에게 빼앗긴 뒤에는 이태왕으로 불리었다.
1919년에 일본의 음모로 독살당하였다.
※ 광주 학생 운동:1929
1929년 11월에 전라 남도 광주에서 일어난 학생들의 항일 운동. 광주에서 나주로 가는 통학 열차 안에서 일본인 학생이 한국 여학생을 희롱한 사건이 일어났는데, 그것을 본 한국 남학생이 일본인 학생을 때림으로써 두 나라 학생들 사이에는 편싸움이 벌어졌다. 처음에는 단순한 학생들끼리의 싸움이었던 것이, 광주 일보의 공정하지 못한 보도와 일본 경찰의 일방적인 한국 학생의 탄압을 계기로 차차 민족 감정으로 번져 항일 운동으로 발전하게 되었다(1929년 11월 3일). 당시의 민족 단체였던 신간회는 그 운동이 전국적으로 퍼져 나가게 하는 데 힘썼으며, 그에 따라 학생들도 스스로 그들의 운동을 한 단계 높여 민족 운동화시킬 것을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마침 광주 장날인 11월 12일을 기하여 일제히 시위 운동에 들어가, 독립 의지를 행동으로 보여 주었다.
※ 구석기 시대:BC500000년경
조선반도에서의 구석기 시대는 약 50만 년 이전부터 시작되었다. 구석기 시대의 유적이 한반도의 전국 각지에서 발굴되는 것으로 보아 이 시대의 구석기인들이 전국에 넓게 퍼져 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전기 구석기의 유물은 평남 상원군 검은모루, 경기도 연천군 전곡리, 충남 공주군 석장리, 충북 제천군 점말 동굴과 청원군 두루봉 동굴 등지에서 출토되었고, 후기 구석기의 유물은 충남 공주군 석장리와 함북 웅기군 굴포리에서 출토되었다. 당시 사람들은 옮겨 다니면서 사냥과 고기잡이로 생활하였고, 불을 사용했으며, 소박한 원시 미술도 남겼다.
※ 국채 보상 운동:1907
일본에 진 빚을 국민의 힘으로 갚아 경제적으로 독립하자는 운동. 1907년에 서상돈, 김광제 등이 대구에서 금주와 금연으로 나라의 빚을 갚자는 국채 보상회를 조직함으로써 비롯되었다.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 등 언론 기관의 협조로 일반 민중의 호응을 얻어 전국적으로 펴 나갔으나, 일진회의 방해와 일본의 탄압으로 실패하였다. 우리 민족의 강렬하고 자발적인 애국 정신을 발휘한 구국 운동이었다.
※ 귀주 대첩 승리:1019
1019년(현종 10년) 거란의 장수 소배압이 3차로 침입해 오자 고려군은 곳곳에서 그들을 잘 막아 싸웠다. 이에 소배압은 사잇길로 개경으로 진격했으나 강민첨의 군사에게 패하여 후퇴하게 되었다. 이 길목을 지키던 강감찬이 귀주에서 그들을 맞아 싸워 거의 전멸시켰는데 이를 귀주 대첩이라 하며, 이 때 살아 돌아간 자는 수천 명에 지나지 않았다 한다.
※ 김구(암살):1949
백범(白凡) 김구는 1893년 18세에 동학당에 가입해, 접주가 되어 이듬해 해주에서 동학군을 지휘하였다. 1896년에 일본군 중위 쓰치다를 죽이고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고종의 특명으로 감형된 뒤에 탈옥하였다. 3·1 운동 후에는 상하이로 망명하여 임시 정부 조직에 참여, 경무국장, 국무령, 주석으로 있으면서 이봉창, 윤봉길 의사의 의거 등을 지휘하였다. 한편 장개석[蔣介石]의 국민 정부와 긴밀한 유대를 맺고, 광복군을 조직하여 항일 투쟁에 온 힘을 기울이던 중 8·15 광복을 맞았다. 귀국 후 분단된 조국을 통일하기 위하여 애쓰던 중 1949년에 암살당하였다. 저서에 <백범일지>가 있다. 1962년에 대한 민국 건국 공로 훈장 중장을 받았다.
※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영삼 당선:1992
김영삼은 경남 거제군 장목면 외포리에서 태어나, 1947년 경남 고등 학교를 거쳐 1952년 서울 대학교 문리대 철학과를 졸업하였다. 1954년 제3대 총선 때 26세로 최연소 국회 의원에 당선되었고, 1960년 제5대 국회 의원에 재선된 이래 제14대까지 모두 9차례 국회 의원에 당선되었다. 1984년에 민주화 추진 협의회 공동 의장, 1986년에 신민당 상임 고문을 역임하고87년에 민주당을 창당, 총재가 되어 12월의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당선되지 못하였다. 1990년에 민정당, 민주당, 공화당의 3당이 통합되어 민주 자유당이 창당되자 민주 자유당 대표 최고 위원이 되었고, 1992년 8월에 민주 자유당 총재에 취임하였다. 이어 같은 해 12월에 제14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 7·4 남북 공동 성명:1972
1972년 7월 4일 한국과 조선 당국은 남북 조절 위원회를 구성 운영할 것을 합의하고 발표한 공동 성명. 7·4 남북 공동 성명이라고도 한다.
평화적 통일을 전제로 한 여러 문제를 민족 주체성에 입각한 남북 간의 직접 대화로 해결하고자 박정희 대통령의 주도하에 남북 간 사전 교섭을 거쳐 이루어졌다. 통일 원칙으로서 외세의 간섭이 없는 자주적이며 평화적인 해결을 들고 있다. 또한 상대방을 중상 비방하지 않을 것과 군사적 충돌을 방지할 것 등 여러 가지가 나타나 있다.
※ 남북 상호 불가침 협정 체결 제의:1974
1974년 1월 18일,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한 한국 정부의 조선에 대한 제의. 주요 골자는 ① 통일 수단으로 무력이나 폭력을 상호 포기할 것 ② 남북은 서로 내정 간섭을 하지 않을 것 ③ 현행 휴전 협정의 효력을 유지할 것 등이다.
※ 남북 적십자 회담:1971
남북간 이산 가족 찾기를 목적으로 열린 남북의 적십자사 대표자 회담. 1971년 8월 대한 적십자사의 ‘1천만 이산 가족 찾기 운동’제의에 따라 남북 적십자 대표가 서울과 평양에서 여러 차례 회담을 가졌다.
※ 노량 해전 이순신 전사:1598
노량 해전은 이순신 장군이 왜군과 싸운 마지막 해전으로, 1598년 (선조 31년)에 노량 바다에서 왜적을 무찌른 싸움을 이른다. 이 싸움에서 왜적의 전함 400여 척을 쳐부수고 적군을 물리쳤으나, 이순신 장군은 적의 유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이 싸움을 마지막으로 조선과 왜국 사이에 벌어진 7년간의 전쟁은 끝이 났다.
 
3
※ 목판 인쇄물 다라니경:751
경주 불국사의 석가탑에서 나온 불경. 본래의 이름은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이다. 1966년에 불국사 3층 석탑(석가탑)을 복원 공사하던 중 탑 안에서 발견되었다.이것은 8세기 중엽(751년) 이전에 인쇄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목판 인쇄물로서 신라 시대에 이미 인쇄술이 발달하였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 단군(고조선 건국):BC2333
<삼국유사>에 따르면, 단군은 천제(天帝:하느님)인 환인의 아들, 환웅과 웅녀(熊女 : 곰이 변하여 된 여자)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다. 단군 왕검은 기원전 2333년에 평양성을 도읍으로 정하여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 하였다. 이후 다시 백악산 아사달로 도읍을 옮겨 1,500년 동안 조선을 다스리다가 기자(箕子)를 임금으로 삼은 다음, 장당경으로 옮겼다가 뒤에 아사달로 돌아와 산신이 되었다. 그 때 단군의 나이가 1,908세였다 한다. 이후 오늘날까지 단군을 겨레의 시조로 받들고, 환인이 환웅을 인간 세상에 보낼 때 ‘널리 인간 세상을 이롭게 할 만하다(弘益人間)’고 판단한 것을 건국 이념으로 새기며, 오늘날 교육의 기본 정신으로 삼고 있다.
※ 대동여지도:1861
조선 말기에 고산자(古山子) 김정호(金正浩)가 만든 조선반도의 지도. 1861년(철종 2년)에 김정호 자신이 판목에 새겨 초판을 펴내었고, 1864년(고종 원년)에 다시 펴내었다. 특히 누구나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전도를 22첩으로 나누어 각 첩을 책처럼 접을 수 있게 만들었다. 사용할 때는 2개 또는 3개씩 펴 놓고 볼 수도 있고, 모두 다 펴 놓고 전도를 한눈에 볼 수도 있다. 각 첩은 가로 8, 세로 12로 나눈 모눈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그 모눈 하나가 사방 10리가 되게 하였으므로, 각 첩은 가로가 80리(32km)로 결국 축척 16만분의 1지도가 되는 셈이다. 대동여지도는 김정호가 청구도를 만든 다음, 다시 27년 동안 조선반도를 몸소 걸어다니면서 실제로 측량하여 만든 지도로서 그 정확함이 오늘날의 지도와 큰 차이가 없을 정도라고 한다.
※ 대한 광복군 정부 수립:1914
러·일 전쟁 10주년을 맞은 1914년에 러시아인들의 반일 감정이 높아지자, 블라디보스토크의 한국인들은 러시아인들과 연합하여 항일 운동을 전개할 것을 계획하였다. 이에 따라 이상설, 이동휘, 이종호, 정재관 등은 대한 광복군 정부를 수립하고 정통령에 이상설을 추대하였다. 그리고 만주에 사관 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 간부를 양성하였다.
※ 대한 민국 정부 수립:1948
광복 후 미군과 소련군에 의해 북위 38°선을 경계로 국토가 남북으로 분단되었다가, 1948년 8월 15일에 조선반도의 합법 정부로서 대한 민국이 수립되었다. 대통령에 선출된 이승만은 이범석을 국무 총리로 하는 내각을 구성하였으며, 그 동안 남한을 통치했던 미 군정은 새 정부에 통치권을 이양하였다. 대한 민국 정부는 그 해 12월 12일에 유엔 총회에서 승인을 받았고, 다음해 1월 1일에 미국의 공식 승인을 받았다. 이 땅에 세워진 첫 민주 공화국이었다.
※ 대한 민국 임시 정부:1919
1919년 4월 13일에 중국 상해에서 수립된 조국 광복을 위한 대한민국 임시 정부. 민족의 지도자 수십 명이 임시 정부를 세우기로 약속한 뒤 상하이 보창로에 임시 독립 사무소를 설치하고, 각 도의 대의원 29명이 의정원에 모여 헌법적인 임시 헌장 10 개조를 초안, 심의하여 민주 공화 정부임을 국내외에 선포하였다. 이에 따라 헌장(헌법)과 나라의 국호, 연호가 선포되어 1919년 정식으로 임시 정부가 세워졌다. 원칙적으로 임시 정부는 행정, 입법, 사법의 3권 분립 형태의 민주 공화 정부임을 분명히 밝히고, 1945년까지 27년 동안 유지되었다. 임시 정부는 중경[重慶]까지 여덟 번이나 옮겨다니면서도 나라의 정통성을 이어 1948년의 대한 민국으로 연결되었다.
※ 대한 제국 성립:1897
1897년에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으로 돌아온 고종은 국호를 대한 제국으로 고치고, 연호를 광무, 자신을 황제라 일컬어 자주 독립국임을 내외에 선포하였다. 근대 국가로의 발전을 기약하여 관제를 개혁하고, 사회, 경제적인 자강 운동을 펴는 한편 민의가 반영되는 개혁 정치를 이루고자 하였으나, 끝내 자체 내의 모순과 일제의 침략을 물리치지 못한 채 해체되고 말았다.
※ 대한 항공 여객기 피격 사건:1983
1983년 9월 1일 승객 269명을 태운 대한 항공(KAL) 여객기가 소련 공군 전투기의 공격을 받아 사할린 해역에 추락한 사건. 이 사건으로 승객 269명(15개국 국민)이 모두 사망하였다. 소련은 아무런 방비가 없는 민간 여객기를 미사일로 격추한 야만적인 행동에 대하여 세계의 모든 자유민들로부터 크게 규탄을 받았다. 피격된 지 1주년이 되는 1984년 9월 1일, 충남 천안군에 있는 망향의 동산에 위령탑이 세워졌다.
※ 독립 신문 발간:1896
1896년 4월에 독립 협회에서 발행한 독립 신문은 처음으로 발행한 현대식 일간지로서, 국문판과 영문판으로 발행되었다. 서재필이 주동이 된 독립 협회의 기관지로서 자유 민권의 성장과 국민 계몽을 목표로 하여 국민들에게 근대 사상을 일깨우는 데 이바지하였으나, 정부의 독립 협회 탄압으로 유명 무실화하였다.
※ 독립 협회 성립:1896
독립 협회는 1896년 7월 서재필, 윤치호, 이상재, 남궁억 등 서구 근대 사상과 개혁 사상을 가진 인사들에 의해 조직되어, 민중을 계몽하고 온 겨레의 자주적 노력으로 자주 독립과 자유 민권의 성장을 이룩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정부가 독립 협회의 급진적 개혁 요구와 세력의 신장에 점차 위협을 느껴, 오히려 독립 협회를 비난하면서 보부상을 중심으로 조직된 황국 협회를 앞세워 그 활동을 탄압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두 단체 대립과 충돌이 일어나자, 그것을 핑계로 독립 협회를 모함하여 해산시키고 그 간부를 투옥시켰다(1898년 11월).
※ 동의보감:1610
1613년에 한의학자이며 전의이던 허준이 엮은 동양 의학서. 1596년(선조 29년)에 선조의 명에 따라 엮은 것으로 1610년(광해군 2년)에 완성하여 1613년에 펴내었다. 모두 25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내용은 내과학인 내경편 4편, 외과학인 외형편 4편, 유행병과 부인병·소아병 등을 다룬 잡편 11편, 탕액편 3편, 침구편 1편, 목록 2편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각 병마다 처방을 풀이해 놓았다. 이 책은 동양 의학의 기본 이론에다 풍부한 임상 경험을 더하여 체계적이며 실용적으로 엮은 것으로, 오늘날까지도 세계 여러 나라에서 그 의학술적인 가치를 높이 평가받고 있다.
※ 최제우가 동학 일으킴:1860
동학은 1860년(철종 11년)에 최제우(崔濟愚)가 일으킨 종교이다. 당시 세도 정치로 말미암아 사회가 매우 어지러웠고, 외국 세력이 들어와 민심이 흔들리게 되었다. 이에 최제우가 서양으로부터 들어온 서학(천주교)에 반대하고, 예부터 내려 오던 하느님 숭배 사상과 유교, 불교, 도교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하여 이룩한 것이 동학이다. 인내천(人乃天 :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생각)을 기본 교리로 하는 이 동학이 삼남 지방을 비롯하여 경기, 황해도 지방까지 크게 퍼지자 나라에서는 이를 사교(邪敎)로 규정, 교조 최제우를 처형하였다. 이어 최시형(崔時亨)이 다시 교조가 되어 교세를 크게 넓혔다. 동학은 1894년(고종 31년)에 발생한 동학 운동의 주체가 되었고, 이 때 사형당한 최시형의 뒤를 이은 3세 교조 손병희는 동학을 천도교로 이름을 고쳐 계속 교세를 넓히기에 힘썼다. 한편, 동학은 이 때부터 시천교(侍天敎)라는 또 하나의 교파로 갈리었다.
※ 동학 운동:1894
1894년에 전라도 고부군에서 동학 교도들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민중 운동. 갑오 농민 전쟁 또는 동학 혁명이라고도 한다. 역사상 외국의 세력에 대한 항쟁과 내정 개혁을 주장하면서 편 가장 큰 민중 운동이다. 동학 운동의 핵심은 악정(惡政)에 대한 항거, 내정 개혁 요구, 외국 세력의 배척 등으로 요약될 수 있다. 그러나 공주 우금치의 싸움에서 동학군이 패전하고, 전봉준 등 지도자들이 체포되면서 동학 운동은 끝나고 말았다. 동학 운동의 의의는 부패한 지배 계급에게 정치 개혁을 주장하고 나섬으로써 민중의 자각을 크게 높인 데 있다. 그리고 외국 세력에 저항함으로써 민족의 자주 독립 정신을 굳건히 심어 놓은 데 있다.
※ 마라난타, 백제에 불교 전함:384
<삼국사기>에 따르면 인도의 스님이었던 마라난타는 384년(백제 침류왕 1년)에 중국의 진(晋)나라를 거쳐 백제에 와서 처음으로 불교를 전했다고 한다. 그 후로 백제에 불교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 마산 3·15 의거:1960
1960년에 자유당 정부의 3·15 부정 선거를 규탄하여 일어났던 의거. 1960년 3월 15일에 마산 시민과 학생들은 규탄 시위를 벌였고, 경찰은 발포하여 사태를 진압하였다. 같은 해 4월 11일, 앞서 희생된 김주열(金朱烈) 학생의 시체가 바닷가에 떠오르자, 이에 흥분한 학생들과 시민들이 다시 궐기함으로써 4·19 의거를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 대전 엑스포 개막:1993
산업 발달을 촉진시키기 위하여 각 나라의 생산품을 한데 모아 전시하는 만국 박람회(엑스포)는 1851년에는 런던의 하이드 파크에서 처음으로 열렸다. 한국이 최초로 국제 박람회에 참가한 것은 1889년(고종 26년)의 파리 만국 박람회였다. 그 때 출품한 것은 갓, 모시, 돗자리, 가마 등이었다. 1993년에는 사상 최대 규모의 대전 엑스포가 8월 7일 개막하여 11월 7일까지 93일 동안 성황리에 계속되었다.
※ 만적의 난:1198
고려 신종 1년(1198년)에 만적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노비 해방 운동. 만적은 개성의 북산에 공사 노비가 모인 자리에서 “왕후 장상의 씨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때가 오면 누구든지 할 수 있다. 우리네도 상전 밑에서 고생만 할 것이 아니다.”라고 역설하면서 난을 일으킬 것을 의논했다. 이에 여러 노비가 찬동하여 관노는 관청에서, 사노는 성내에서 들고일어나 권신과 상전들을 죽이고, 노비 문서를 불살라 버린 뒤에 정권을 잡기로 계획했다. 그런데 한 사노의 밀고로 계획이 사전에 드러나, 노비 해방을 위한 운동은 실패로 돌아갔다.
※ 망이·망소이난:1176
1176년 고려 명종 때 충청 남도 공주의 명학소에서 일어난 천민의 난. 천민 수공업자의 집단 거주 지역인 명학소에 살던 천민들이 망이·망소이의 주도 아래 일으킨 신분 해방 운동이다. 고려 무신 정권하에서 일어난 천민의 저항 운동 가운데 가장 규모가 컸다. 이들은 공주를 점령한 후 북진하여 1년 반 동안 청주와 아산 등 충청도 일대와 경기도 남부까지 휩쓸었다. 정세유가 이끄는 토벌군에 의해 진압되었지만, 이 난을 계기로 정부는 향·소·부곡 등 천민 거주 지역을 군현으로 승격시키는 등 천민의 요구를 정치에 반영하게 되었다.
※ 명량 해전:1597
1597년(선조 30년) 9월 16일에 이순신 장군이 명량에서 왜군 함대를 크게 쳐부순 싸움. 적의 함대 133척이 조수(潮水)의 흐름을 따라 명량으로 쳐들어온 것을, 12척의 병선으로 맞아 격전 끝에 적선 31척을 쳐부순 싸움이다. 그 싸움으로 우리 수군이 빼앗겼던 제해권(制海權)을
다시 장악하게 되었고, 왜적의 기세를 크게 꺾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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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청의 난:1135
고려 인종 때(1135년) 묘청이 일으킨 난. 당시 이자겸의 난으로 민심이 흉흉한 데다 밖으로는 새로 일어난 금나라가 고려에 압력을 가해와 사회가 크게 불안하였다. 이에 서경 출신 귀족들은 개경파 귀족을 몰아 내고 개혁 정치를 실시하고자 서경 천도와 금나라 정벌, 독자적인 연호의 사용 등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김부식 등 보수적인 개경파 귀족들이 이에 적극 반대하므로, 묘청은 서경에서 난을 일으켜 국호를 대위, 연호를 천개라 하였다. 묘청의 무리는 한때 자비령 이북의 여러 고을을 점령하고 기세를 떨쳤으나, 김부식의 토벌로 1년 만에 진압되었다. 이 난이 있은 뒤 고려 지배층의 보수화가 더욱 심해져 북진 정책은 좌절되고 말았다.
※ 무신의 난:1170
고려 때 무신들이 일으킨 변란. 문(文)을 숭상하고 무(武)를 천시하는 풍조와 무신에 대한 여러 가지 차별 대우에 대한 불만에서 일어났다. 좁은 뜻으로는 정중부의 난(1170년)을 말하나, 넓은 뜻으로는 고려 시대에 있었던 무신의 난 모두를 가리킨다. 무신의 난이 처음 일어난 것은 현종 때의 김훈, 최질의 난이며, 그 뒤 정중부의 난으로 본격화하여 경대승, 이의민, 최충헌 등이 잇달아 집권자를 죽이고 정권을 장악하여 무신 정권 시대를 이루었다.
※ 문익점 원나라에서 목화씨 가져옴:1363
고려 말기의 학자, 문신인 문익점은 1363년에 사신의 한 사람으로 원나라에 갔다가 그 곳에서 처음으로 목화밭을 보았고, 솜에서 실을 뽑아 무명 옷감을 만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당시 원나라에서는 목화를 인도에서 들여온 지 오래지 않은 터여서, 목화씨나 그 재배 방법이 나라 밖으로 흘러나가지 못하도록 국법으로 막고 있었다. 그런데 문익점은 위험을 무릅쓰고 목화씨를 붓두껍에 숨겨 가지고 돌아와, 정성껏 심어 가꾸어 그 재배에 성공하였다. 세상을 떠난 뒤 세종 22년에 영의정 벼슬이 내려졌다.
※ 물산 장려 운동:1923
1923년부터 물산 장려회가 중심이 되어 펼친 우리 민족 경제 자립 운동. 일본에 빼앗긴 경제권을 회복하려는 경제 자립 운동으로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다. “입어라, 먹어라, 써라. 조선 사람 조선 것.”이라는 구호 아래 자급 자족, 국산품 애용, 소비 절약, 금주, 금연 등의 실천 요강을 마련하고 추진하였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중단되었다.
※ 발해 멸망:926
발해는 고구려의 장군이었던 대조영이 말갈족을 이끌고 지금의 만주 지방 부근인 길림성돈화현 동모산에서 자립하여 세운 나라이다(698년). 처음에는 나라 이름을 진(震)이라 하였는데 뒤에 발해로 고쳤다. 국력을 크게 떨쳐 한때는 해동성국이라고 불리기도 하였으나, 중기 이후 계속된 왕위계승을 둘러싼 지배층의 내분이 피지배층인 말갈족을 자극하여, 그들이 차차 발해의 지배를 벗어나게 되면서 힘이 약해져 228년 만인 926년에 거란족에게 멸망당하고 말았다(926년).
※ 백제, 16관등과 공복 제정:260
백제는 고구려·신라와 더불어 삼국 시대를 이룬 조선반도 고대 왕국 중의 하나이다. 고구려의 한 갈래인 위례 부락에서 시작하여 3세기 말인 고이왕 때 고대 왕국의 기틀을 마련, 260년에는 왕 아래에 16등급의 관리를 두고 등급에 따라 옷 색깔을 달리 하기도 하였다. 이후 4세기부터 크게 발전하여 경기도·충청도·전라도와 황해도·강원도의 일부까지 차지하는 등 세력을 뻗쳤으나, 계속되는 고구려의 압력과 신라와의 투쟁에 밀려 660년에 소정방과 김유신이 이끄는 나·당 연합군에게 서울이던 사비가 함락됨으로써 멸망하였다.
※ 베를린 올림픽 손기정 마라톤 우승:1936
베를린 올림픽은 1936년에 독일의 베를린에서 열렸던 제11회 올림픽 대회로, 49개 나라에서 4,308명의 선수가 참가하였다. 특히 올림픽의 꽃이라고 불리는 마라톤 경기에서 손기정 선수가 세계 신기록으로 우승하였고, 남승룡 선수가 3위를 차지하여 우리 민족의 장한 기상을 온 세계에 떨쳤다.
※ 병인양요:1866
1866년(고종 3년)에 프랑스의 함대가 강화도에 침입한 사건. 병인양요가 일어나기 전에 대원군이 카톨릭 교도들을 박해한 일이 있었는데, 그 때 9명의 프랑스 신부가 죽임을 당하였다. 프랑스는 이를 구실로 조선의 문호를 열고자 로스(Ross)가 이끄는 함대를 파견하여 강화도를 점령하고, 일부는 서울로 쳐들어왔으나 문수 산성과 정족 산성에서 한성근, 양헌수 부대에 패하여 한 달 만에 물러갔다. 그 결과 프랑스의 위신은 크게 떨어지고, 이에 자신을 얻은 대원군은 더욱 쇄국 정책을 강화하게 되었다.
※ 보장왕 때 고구려 멸망:668
보장왕은 고구려의 제28대 왕(재위 642∼668년)으로, 영류왕의 아우였는데,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죽이고 그를 왕위에 앉혔다. 그러나 연개소문이 죽은 뒤 668년에 나·당 연합군의 공격을 받고 평양성이 함락되자, 대신들과 함께 항복하여 고구려는 705년 만에 망하고 말았다. 그 뒤 당나라에 잡혀 갔으나 사평대제백원외동정(司平大帝伯員外同正)에 책봉되고, 677년에 요동주 도독으로 조선왕에 봉해졌으나 말갈족과 함께 고구려의 부흥을 꾀하다가 귀양가 여생을 마쳤다.
※ 봉오동 전투:1920
1920년에 조선 독립군이 일본군을 크게 무찌른 싸움. 홍범도가 지휘하는 간도의 대한 독립군이 국내에 들어와 큰 전과를 올리자, 일본군은 이를 보복하려고 대한 독립군의 본부를 공격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를 미리 알고 대비하고 있던 독립군은 최진동의 군무 도독부와 합세하여 일본군을 간도 왕청현 봉오동으로 유인, 포위 공격하여 크게 무찔렀다. 이것은 독립군이 조직된 이래 첫번째로 거둔 통쾌한 승리로서, 이에 대한 보복으로 출동한 일본군을 다시 크게 무찌른 전투가 청산리 대첩이다.
※ 부여 멸망:346
기원전 1세기경 부여족이 세운 나라인 부여는 지금의 중국 동북 지방 북부의 눙안과 장춘 지방 일대를 차지하고 있던 5부족 연맹체로서, 일찍부터 정착하여 농업과 목축을 겸한 생활을 했다. 풍습에는 영고라는 제천 의식이 있었고 정치는 왕 아래에 가축의 이름을 따서 지은 마가, 저가, 구가, 우가라 불리는 부족장들로 구성된 귀족들이 맡아 보았다. 뒷날 부여 왕 해모수의 아들 해부루가 가섭원으로 도읍을 옮기고 나서 국호를 동부여라 고쳤다. 346년에 전연의 모용황에게 멸망하였고, 그 후 전연이 전진에게 멸망되자 고구려 영토가 되었다.
※ 사사오입 개헌:1954
1954년 11월 29일에 사사오입 원칙을 적용하여 헌법 개정안을 국회에서 불법으로 통과시킨 사건. 이승만의 영구 집권을 위해 ‘초대 대통령에 한해 중임 제한을 철폐한다’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한 헌법 개정안이었는데, 국회의 표결에서 재적 의원 203명 중 찬성 135표, 반대 60표, 기권 7표로 헌법 개정에 필요한 재적 의원 3분의 2인 136표에 1표가 모자라 부결이 선포되었다. 그러나 자유당은 이틀 후에 203명의 3분의 2는 사사오입하면 135명으로 충분하다는 이론을 내세워 가결되었음을 다시 선포하였다. 그 표결 과정은 물론 이승만 대통령에 한해 영구 집권을 가능하게 한 내용 모두가 헌법 정신에 어긋나는 것으로서 우리 헌정사상 큰 오점을 남긴 개헌이었다.
※ 살수 대첩:612
612년에 고구려의 을지문덕 장군이 수나라 양제의 침입을 맞아 살수(지금의 청천강)에서 크게 무찌른 싸움.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는 북방을 안정시키기 위해 고구려를 누르려 했으나, 고구려가 먼저 돌궐을 몰아 요서 지방을 공격하자 양제가 몸소 100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왔다. 양제는 먼저 요동성을 공격하는 한편, 따로 30만의 별동대를 이끌고 직접 평양으로 쳐들어왔는데, 이를 맞은 을지문덕은 거짓으로 물러나는 척하여 그들을 평양성 부근까지 유인한 다음, 그들이 속은 것을 알고 후퇴할 때 살수에서 공격하여 크게 무찔렀다. 그 때 살아 돌아간 수나라 군사는 불과 2,700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 하며, 그 비참한 패전으로 수나라는 내란이 일어나서 마침내 망하고 말았다.
※ 김부식, 삼국사기 편찬:1145
삼국사기는 1145년(고려 인종 23년)에 김부식이 임금의 명을 받아 엮은 신라, 고구려, 백제의 역사책으로, 오늘날 남아 전하는 우리 민족 역사책 가운데서 가장 오래 된 것이다. 기전체로 된 것으로 내용은 본기(本紀), 연표(年表), 지류(志類), 열전(列傳)으로 이루어져 있고,
모두 50권 10책으로 되어 있다. 고려 때 간행된 것 가운데서 7권만이 성암 고서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으며, 1512년(조선 중종 7년)에 이계복이 간행한 목판본이 경주의 옥산 서원에 보존되어 있다.
※ 삼국유사:1285
고려 충렬왕 때 승려 일연(一然)이 엮은 역사책. 지은 연대는 대개 1281∼1283년(충렬왕 7∼9년) 사이로 보고 있다. 그 내용은 고조선, 대방, 부여 등의 역사를 간략히 기록한 후, 신라, 고구려, 백제의 역사를 기록하였다. <삼국사기>가 정사(正史)인데 대해 <삼국유사>는
야사(野史)의 성격을 지니고 있어서, 정사에 빠진 사실들을 많이 수록하고 있다. 특히 단군 신화를 비롯하여 전설, 설화 및 불교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실려 있고, 또한 신라 향가 14수가 실려 있어서 고대 어문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오늘날 고려 때의 원본은 전하지 않으나, 1512년(조선 중종 7년)에 이계복이 다시 펴낸 것이 전한다.
※ 신라, 삼국 통일:676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켜 우리 민족을 통일한 일. 화랑도 정신으로 국민 정신을 통일하고 한강 유역 점령으로 경제적인 힘을 갖춘 신라는 660년(무열왕 7년)에 당나라의 힘을 빌려 백제를 멸망시키고, 이어 668년(문무왕 8년)에는 고구려마저 멸망시킨 다음, 당나라 세력을 이 땅에서 몰아 내어 3국 통일을 완성하였다. 그러나 이 때의 신라는 대동강과 원산만 이남만 차지하게 되어 고구려 영토이던 중국 동북 지방이 떨어져 나가게 되었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하여 그 전까지 정치, 사회, 문화를 달리했던 우리 민족이 하나의 테두리 안에서 발전할 수 있게 되었고, 고구려와 백제 문화를 받아들임으로써 민족 문화의 기틀을 확립하게 되었다.
※ 삼별초의 난:1270
강화도에 있던 삼별초가 몽고의 세력에 저항하여 일으킨 반란. 몽고의 침략 아래서의 조정에 대한 반란이자 항몽의 싸움이었다. 최씨의 무인 정권이 무너지자 강화도에 피란해 있던 조정은 환도 문제로 논란이 심했다. 개경환도(開京還都)는 몽고에 굴복하는 일이라 하여 삼별초에 속하는 무신들은 환도를 주장하는 문신들과 맞서게 되었다. 몽고에서 굴욕적인 약속을 하고 돌아온 왕이 삼별초를 설득하였으나 그들은 응하지 않았다. 결국 환도가 결정되고 삼별초를 해체시키자는 조정의 결의가 있었다. 이에 삼별초는 몽고의 공격을 예상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1,000여 척의 배로 강화에 있는 가족들과 재물을 싣고 남으로 내려가 진도를 대몽 항쟁의 근거지로 삼았다. 배중손이 지휘하는 삼별초군은 남해 일대의 제해권을 잡았으나, 관군과 몽고군에 밀려 일부는 달아나고 일부는 탐라(제주도)로 들어가 저항하였다. 조정에서 회유책을 써 보았지만 그들은 끝내 응하지 않았다. 그러나 연합군의 탐라 공격으로 결국 삼별초는 항몽 정신만 남긴 채 저항하다가 진압되고 말았다.
※ 금속 활자로 상정고금예문 인쇄:1234
상정고금예문은 고려 인종 때 최윤의(崔允儀)가 국가나 사삿집의 예문(예법을 밝힌 글)들을 모아 엮었다는 책으로, <고금상정예문>이라고도 한다.
이규보의 문집인 <동국이상국집>에 이 책을 1234년(고종 21년)에 금속 활자로 28부를 인쇄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뿐 책은 전하지 않는다.
※ 새마을 운동:1970
지역 주민들의 생산 기반과 생산 능력을 개발하여 소득 수준을 높이고, 의식 개혁으로 인간 정신의 계발과 사회 개발을 촉진하는 국민 대중 운동. ‘새마을 만들기 운동’, 또는 ‘잘 살기 운동’이라고도 한다. 새마을 운동은 한국에서 1970년 4월,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제창하여 이듬해인 1971년부터 범국민 운동으로 전개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으며, 세계 여러 나라에 널리 알려져 운동의 이념과 전개 방법을 직접 배워 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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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아시아 경기 대회 개최:1986
1981년 11월 26일 인도의 뉴델리에서 열린 아시아 경기 연맹(AGF) 임시 총회에서는 제10회 아시아 경기 대회를 서울에서 개최할 것을 만장 일치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1986년 서울에서 제10회 아시아 경기 대회인 서울 아시아 경기 대회가 열렸다. 86 아시안 게임이라고도 한다.
※ 서울 올림픽 대회:1988
1988년에 서울에서 개최된 제24회 올림픽 경기 대회. 1981년 9월 30일에 독일의 바덴바덴시에서 열린 제84차 국제 올림픽 위원회(IOC) 총회에서 일본의 나고야를 52대 27의 압도적인 표차로 물리치고, 제24회 올림픽 대회를 서울로 유치하게 되었다. 한국은 아시아에서는 두 번째로, 그리고 세계에서는 열여섯 번째로 올림픽 대회를 여는 영예를 차지한 것이다. 대회는 1988년 9월 17일부터 10월 2일까지 16일 동안 서울을 비롯하여 수원, 부산, 대전, 대구, 광주, 성남시 등의 여러 경기장에서 열렸다. 운동 경기 외에도 국제 회의, 한국 도자기전, 한국 복식전, 한국 회화전, 민속놀이 등 27종의 각종 문예 행사가 개최되었다.
※ 세종 즉위:1418
세종은 조선의 제4대 왕(재위 1418∼1450년)으로, 이름은 도, 시호는 장헌(莊憲)이다. 태종의 셋째 아들로 충녕 대군으로 있다가 22세 때 왕세자로 책봉되고 곧 이어 왕위에 올랐다. 1420년에 집현전(集賢殿)을 설치하고, 청렴한 인재를 등용하여 정치에 대한 자문과 왕실의 교육을 맡아 보게 하였다. 그리고 궁중에 정음청(正音廳)을 두어 1443년에는 성삼문, 신숙주, 최항 등과 훈민정음을 창제하여 1446년에 반포하였다.
한편 관습도감을 두어 박연으로 하여금 아악을 정리하게 하였다. 과학 기술 부문에도 관심을 가져 장영실로 하여금 측우기를 만들게 하고, 궁중에 흠경각을 세워 과학 기구들을 비치하게 했다. 그 밖에 혼천의, 해시계, 물시계 등을 발명 제작하여 천체를 관측하고, 역서를 만들기도 하였다.
경제면에서는 전제 상정소를 두어 전제와 세제를 정비했고, 농업을 장려하였다. 대외적으로는 북방 변경 지방을 개척하여 6진을 설치하고, 압록강 상류에는 4군을 설치하여 국방을 튼튼히 하였다. 일본과는 제포, 염포, 부산포의 3포를 열어 무역을 허락하는 등 회유책을 써서 국교를 지속하였다. 능은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에 있는 영릉(英陵)이다.
※ 항일 운동, 소작 쟁의:1921
소작 쟁의는 일제 시대에 한국인 소작인들이 일본인 지주들에 대해 벌였던 쟁의이다. 노동 쟁의와 더불어 항일 운동의 하나를 이루었으며, 1921년 이후에 발생해서 1930년에 절정에 달하였다. 토지 조사 사업으로 한국인에게 강제로 토지를 빼앗은 일본인은 소작권 박탈과 소작료의 부당 징수를 요구했다. 이에 항거하여 소작 쟁의가 발생하였다.
※ 순도, 고구려에 불교 전함:372
순도는 고구려 소수림왕 때 중국에서 귀화한 승려로, 372년에 전진(前秦)의 왕 부견의 명령으로 사신을 따라 불상과 불경을 가지고 고구려로 들어왔다. 그것이 조선반도에 불교가 들어온 시초였다. 고구려에서는 그에게 초문사(肖門寺)라는 절을 지어 주었다.
※ 시월 유신 선포:1972
시월 유신은 1972년 10월 17일을 기하여 단행된 일종의 자체 혁명으로서, 이를 계기로 ‘제4공화국’이 시작되었다. 이 체제는 유신 헌법에 따라 박정희 대통령이 제8대 대통령에 취임한 1972년 12월 27일부터 시작되어 1981년 3월 1일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1979년 10월 26일에 박정희 대통령이 세상을 떠나자 끝이 난 셈이다.
※ 항일 운동 단체, 신간회 조직:1927
신간회는 1927년에 조직된 민족 최대의 항일 운동 단체로, 민족의 단결과 정치, 경제적 각성을 촉구하고, 기회주의를 배격하는 등 비타협적이고 투쟁적인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에 앞서 1920년대에 사회주의 사상이 들어와 이를 따르는 여러 단체가 조직되면서 민족주의자들과 서로 다투게 되었는데, 민족주의자들이 이러한 대립을 피하기 위해 민족 단일 조직을 갖기로 하고 이상재를 회장으로 조직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교묘한 탄압과 사회주의 계열의 중상 모략으로 만주 사변이 일어나던 1931년에 해산되었다.
※ 신라:356
고대 왕국 중의 하나. 고구려, 백제와 더불어 삼국 시대를 이루었다. 진한의 한 나라였던 경주 평야의 사로(斯盧)가 발전한 나라로서, 사로는 초기에는 박, 석, 김씨의 세 부족이 연맹하여 지도자인 이사금을 선출하였으나, 이들이 주체가 되어 점차 사로 6촌이라는 6부족 연맹체를 이루고, 1세기경에는 기마 전투 기술을 도입하여 주변의 부족들을 통합하면서 큰 세력으로 등장하였다. 삼국 중 가장 늦게 고대 왕국의 체제를 갖추었으나, 내물왕 즉위 해인 356년부터 마립간이라는 칭호를 쓰는 등 왕권을 강화해 나갔고, 중국을 통해 들어온 새로운 문화와 토착 문화를 잘 융합시킴으로써 힘을 길러 삼국을 통일하였다. 통일 후 찬란한 불교 문화를 꽃피워 평화와 번영을 누리다가 8세기 후반부터 여러 가지 사회 제도의 모순이 드러나, 그것을 근본적으로 뜯어 고치지 못하고 10세기에 이르러 마침내 고려에게 나라를 넘겨 줌으로써 신라 천 년의 영화는 끝이 났다.
※ 신미양요:1871
1871년(고종 8년)에 미국 군함이 강화도 일대에 쳐들어온 사건. 1866년(고종 3년)에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무역을 하자고 대동강으로 와 소란을 피우자 평양 군민이 배를 불태워 버린 사건이 있었다. 그 사건에 대하여 미국은 조선을 책망하고 통상 조약을 맺으려고 북경에 있던 미국 공사에게 아시아 함대를 출동, 강화도 일대를 공격하게 하였다. 미국의 군함은 강화도의 초지진, 덕진진, 광성진 등을 공격하였다. 그 때 조선은 무장 어재연(魚在淵) 등이 나서서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양쪽 군사 수십 명의 사상자를 내고 미군은 물러갔다. 그 결과 흥선 대원군은 의기 양양하여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세워 적개심을 불러일으키고 쇄국 정책을 더욱 굳게 폈다.
※ 일본에 신사 유람단 파견:1881
강화도 조약 체결 후 수신사로 일본에 다녀온 김기수와 김홍집 등이 일본의 근대 문물 제도를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여 정부에서는 박정양, 어윤중, 홍영식 등으로 신사 유람단을 조직, 1881년(고종 18년)에 일본에 파견하였다. 이들은 약 4개월 간 일본에 머무르면서 근대 시설과 여러 가지 제도 및 산업 시설까지 두루 살피고 돌아와 보고 들은 것을 소개함으로써 개화 정책의 추진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 신석기 시대:BC4000년경
우리 민족은 대체로 기원전 4000년경부터 신석기 시대가 시작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빗살무늬 토기를 사용한 사람들이 초기에는 주로 해안이나 강변에서 어로, 수렵, 채집으로 생활하였으며, 말기에 이르러 조, 피, 수수 등의 곡식을 생산하는 농경 생활을 영위하게 되었다
※ 신재효:1812
1812∼1884 조선 말기의 가인(歌人). 호는 동리(桐里)이다. 전북 고창에서 태어나, 중년 이후의 여생을 판소리 연구에 바쳐 많은 판소리 사설을 썼다. 고종 때에는 그 때까지 계통 없이 불려 오던 소리를 통일하여 <춘향가> <심청가> <박타령> <가루지기 타령> <토끼 타령>
<적벽가> 등의 여섯 마당으로 체계를 세우고, 그 대화 어구도 고쳐 독특한 판소리 문학을 이룩하였다. 그의 작품 <광대가>는 광대의 경전이라 일컬어지며 많은 제자를 길러 냈다.
※ 아관 파천 사건:1896
고종 황제가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겨 1년을 지낸 사건. 일본은 청·일 전쟁이 끝난 후 명성 황후가 침략적인 태도를 취하자, 1895년에 명성 황후를 시해하고 친일적인 김홍집 내각을 세웠다.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 황제는 일본의 만행을 피해 1896년에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겨 가 1년을 머무르면서 그 곳에서 모든 정치를 행하였다. 그 동안 많은 이권이 러시아를 비롯한 열강에 넘어갔다.
※ 황영조, 히로시마에서 마라톤 우승:1945
아시아 경기 대회는 아시아 지역 국가 간의 우호와 친선 및 평화를 목적으로 4년마다 올림픽 대회의 중간 해에 열리는 것으로, 한국은 6·25 전쟁으로 제1회에는 참가하지 못하고, 제2회 마닐라 대회부터 참가하였으며, 특히 1986년에 열린 제10회 대회는 서울에서 개최되었다.
한편 1994년에 일본에서 열린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에서는 마라톤에서 황영조 선수가 우승을 하기도 하였다.
※ 안익태, 애국가 작곡:1937
작곡가이자 지휘자인 안익태는 일본 구니타치 음악 학교를 졸업한 뒤 1936년에 유럽에 건너가 작곡을 공부하였고, 1937년에 <애국가>를 작곡하였다. 그 뒤 세계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이름 있는 교향악단을 지휘하는 등 큰 활약을 보였으며, 결혼한 뒤에는 마드리드 마요르카 교향악단의 상임 지휘자가 되었다. 여러 번 귀국하였고, 3회에 걸쳐 서울에서 국제 음악제를 개최하였다. 생전에 그는 영국의 로열 필하모닉 등 세계의 200여 교향악단을 지휘함으로써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지휘자로 이름을 떨쳤다. 1965년 문화 훈장 대통령장을 받았다. <한국 환상곡> <강천성악> 등의 작품이 있다.
※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 저격:1909
안중근은 1905년에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자신이 경영하던 상점을 팔아 남포에 돈의 학교를 세우고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여 의병 운동에 참가하였다. 1908년에 대한 의군 참모장이 되어 의병을 이끌고 함경 북도 경흥까지 쳐들어가 일본군과 싸웠다. 1909년 일제 침략자의 우두머리인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의 재무상과 회담하기 위하여 만주 하얼빈역에 내리자, 그를 쏘아 죽이고 이듬해 려순 감옥에서 사형당하였다. 글씨에 뛰어나 많은 유묵을 남겼다. 1962년에 대한 민국 건국 공로 훈장 중장을 받았다.
※ 옥포 해전:1592
임진왜란 때 옥포 앞바다에서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함대가 일본 함대를 무찌른 해전. 옥포 싸움이라고도 한다. 1592년(선조 25년) 5월, 경상 남도 장승포의 옥포 앞바다에서 우리 함대는 옥포 포구에 정박하고 있는 적함 50여 척을 발견하고, 이를 동서로 포위하여 포구를 빠져나오려는 적함들에게 맹렬히 포격을 가하여 격렬한 싸움이 벌어졌다. 이 싸움에서 적함 26척을 격침시키는 큰 전과를 올림으로써 최초의 해전을 승리로 이끌었으며, 이 날 하오에는 합포(合浦) 앞바다에서도 적의 대형함 5척을 발견하고, 이를 모두 불태우는 전과를 올렸다.
※ 운요호 사건:1875
1875년(고종 12년)에 일본의 군함 운요호가 경기만에 불법으로 침입함으로써 일어난, 강화 수비군과 일본군과의 충돌 사건. 강화도 사건이라고도 한다. 조선이 쇄국 정책을 굳게 지키자 일본은 무력으로라도 문호를 열게 하려고, 계획적으로 군함을 보내어 먹을 물을 구한다는 구실로 강화도 물길을 따라 초지진 포대에까지 거슬러 올라왔다. 이에 강화도 수비군이 포를 쏘아 위협하자, 그들도 맞서 포를 쏘면서 초지진을 부수고 영종진까지 부순 다음, 군사와 주민들을 죽이고 무기와 그 밖의 물자를 빼앗아 돌아갔다. 일본은 이듬해 이 사건의 책임을 묻는다는 구실로 군함을 앞세우고 나타나 통상을 강요하였다. 이로써 조선은 결국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맺고 문호를 열게 되었다.
※ 최초의 근대적 학교 원산 학사 설립:1883
원산 학사는 최초의 근대적 학교로, 1883년에 함경 남도 덕원 주민들이 원산에 세웠다. 문예반 50명, 무예반 200명으로, 산수, 물리, 양잠, 외국어, 법률, 지리, 국제법 등 근대 학술과 무술을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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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만 조선 건국:BC194
위만은 부하 1,000여 명을 이끌고 고조선으로 망명한 중국 연나라 사람이다. 고조선의 준왕은 그를 믿고 후대하여 북방을 수비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기원전 194년에 위만은 유민(流民)들의 세력을 기반으로 하여 반란을 일으켜 왕을 쫓아 내고 스스로 왕위에 올라 위만 조선을 세웠다.
※ 위화도 회군:1388
고려 말에 요동 정벌에 나섰던 이성계 등이 위화도에서 군사를 돌이킨 사건. 우왕이 즉위한 뒤 고려가 친원 정책으로 기울자, 명나라는 원나라가 다스리던 쌍성총관부 자리에 철령위를 설치하겠다고 통고해 왔다. 이에 분개한 고려에서는 최영을 중심으로 요동 정벌론이 일어나 이성계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출정하게 하였는데, 처음부터 이에 반대하던 이성계는 압록강의 위화도에 이르러 진군을 멈추고 회군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최영과 우왕이 이를 허락하지 않자, 스스로 회군을 단행하여 개경으로 돌아와 최영을 귀양보내어 죽이고 정권을 잡았다. 이어 우왕을 내쫓고 창왕을 세우면서 신흥 사대부들이 세력을 얻어 조선을 여는 정치적 기반을 마련했다.
※ 윤봉길(폭탄 투척):1932
항일 의사인 윤봉길은 1930년에 중국 상해로 망명하여 ‘한인 애국단’에 가입하였다. 1932년 4월 29일에 상하이의 홍구(紅口) 공원에서 열린 일본 천황의 생일 경축식장에 폭탄을 던져서 일본군 최고 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 대장, 상해 일본 거류민단장 등을 죽이고, 노무라 해군 대장과 시게미쓰 공사 등 많은 일본군 병사들을 부상하게 하여 온 세계를 놀라게 하였다. 그는 그 자리에서 체포되어 오사카로 붙잡혀 간 뒤, 결국 군법 회의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처형당하였다. 1962년에 대한 민국 건국 공로 훈장 중장을 받았다.
※ 을미개혁:1895
을미사변 후 일제에 의해 수립된 친일 내각에서 추진한 개혁. 갑오개혁의 정신을 이은 것으로 그 내용은 양력 사용, 종두법 실시, 소학교 설립, 우편 제도 실시, 연호 사용, 군제 개편과 단발령 시행 등이다. 그러나 을미사변 후 크게 악화된 배일 감정으로 국민으로부터 환영받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특히 단발령은 국민의 자존심을 크게 해쳐 그 때문에 의병이 일어나게 되었다.
※ 을미사변:1895
1895년(고종 32년)에 일제가 명성 황후를 살해하고 일본 세력의 강화를 꾀했던 정변. 삼국 간섭 후 조선에서의 정치적 세력이 크게 줄어든 일본은 갖은 방법으로 그것을 만회하려 했으나, 명성 황후 등 민씨 세력이 침략 정책을 고집하자 최후의 수단을 쓰기로 작정하였다. 그리하여 일본 공사 미우라는 일본인 자객들을 앞세우고 경복궁에 침입하여 명성 황후 등 침략 세력을 죽인 다음, 친일파 인물들로 내각을 꾸며 갑오개혁 후 중단되었던 개혁을 다시 단행하였다. 을미사변으로 잔인 무도한 일본의 행동은 국제적으로 여론을 크게 불러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우리 국민들의 배일 감정을 극도로 자극하여 의병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그러한 배일 감정을 틈타 침략 세력을 더욱 키우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 을사사화:1545
1545년(명종 1년)에 왕실 외척 간의 대립으로 일어난 사화. 중종은 장경 왕후 윤씨에게서 인종을 낳고, 문정 왕후 윤씨에게서 명종을 낳았는데, 두 왕후에게 모두 동생이 있어 그들이 서로 정권을 잡으려고 다투었다. 그러다가 중종이 세상을 떠나고 인종이 즉위하자 그 외숙인 윤임이 득세하여 사림을 많이 등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때 뜻을 이루지 못한 사림들은 명종의 외숙 윤원형의 밑에 모여 기회를 엿보다가, 인종이 즉위 8개월 만에 세상을 떠나고 명종이 즉위하여 윤원형이 득세하게 되자 윤임 일파를 모함하여 모두 제거하였다. 그것이 곧 을사사화로 사림이 크게 화를 입었는데, 윤원형 일파의 모함으로 그 여파는 그 후에도 수년 동안 계속되었다.
※ 의자왕 백제 멸망:660
백제의 마지막(제31대) 왕(재위 641∼660년) 의자왕은 무왕의 맏아들로서, 무왕 33년(632년)에 태자로 책봉되고 641년에 왕위에 올랐다. 642년에 신라를 공격하여 미추성 등 40여 성을 빼앗고, 윤충을 시켜 대야성(지금의 합천)을 쳐서 성주인 품석(品釋) 등을 죽였다.
그 뒤에도 당항성, 요차성(지금의 상주)을 쳐서 신라에 큰 타격을 주었다. 그러나 늘그막에 사치와 방탕한 생활을 하였으며, 성충과 같은 충신의 말을 듣지 않다가 660년에 나·당 연합군의 공격을 받고 계백 장군으로 하여금 황산벌에서 싸우게 하였으나 패하였다. 그 뒤 의자왕은 당나라로 끌려가 그 곳에서 병으로 일생을 마쳤다.
※ 이봉창이 일본 국왕에게 폭탄 투척:1932
서울에서 태어난 이봉창은 가정이 어려워 국민 학교를 중퇴하고 점원과 기관차 운전 수습생 등으로 일하다가, 1924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철공소 직공이 되었다. 그는 일본 사람 밑에서 고용살이를 하며 그들의 횡포와 압박을 뼈에 사무치게 느꼈다. 1931년에 중국 상해로 건너가 김구가 지도하는 ‘한인 애국단’에 가입, 일본 천황 암살을 결심하고 다시 일본으로 갔다. 1932년에 일본 천황이 관병식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목에서 폭탄을 던졌으나, 실패로 끝나고 붙잡혀 사형당했다. 1962년에 대한 민국 건국 공로 훈장 복장을 받았다.
※ 이승만 대통령 취임:1948
이승만은 황해도 평산에서 태어나 배재 학당에서 신학문을 배우고 영어 교사가 되었다가, 1897년에 서재필이 조직한 ‘독립 협회’의 간부로 활약하였다. 무능한 정부를 비판하고 개혁을 주장하다가 체포되어 종신형을 선고받았으나, 민영환의 도움으로 1904년에 7년 만에 풀려나 미국으로 건너가 워싱턴 대학 등에서 배우고, 1910년 프린스턴 대학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19년에 상해에 임시 정부가 세워지자 초대 대통령에 추대되었고, 1933년에는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 연맹 회의에 참석하여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8·15 광복을 맞아 귀국하여 독립 촉성 중앙 협의회 총재와 민주 의원 의장 등을 지냈으며, 1948년에 제헌 의회 의장에 뽑히고, 이어 초대 대통령에 당선되어 그 해 광복절에 취임하였다. 제2대, 제3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장기 집권과 자유당 정권의 부패로 국민의 신망을 잃었다. 1960년 3·15 부정 선거로 제4대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4·19 의거가 일어나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고, 하와이에 망명중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 이차돈(순교):527
이차돈은 신라 법흥왕의 가까운 신하로 일찍부터 불교를 믿었다. 법흥왕이 불교를 공인하려 하였으나, 고유 신앙과 고유 습속에 젖은 뭇 신하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에 이차돈만이 불교를 받들 것을 주장하면서 스스로 순교할 것을 자청하여, 부처가 있다면 자기가 죽은 뒤에 반드시 기적이 있을 것이라 예언하고 형장으로 끌려갔다. 목이 잘리자 과연 그의 예언대로 젖빛같은 흰 피가 솟구치고 천지가 캄캄해지더니 꽃비가 쏟아져 내리는 기적이 일어났다 한다. 이에 모두 놀라고 감동했으며, 527년에 불교를 국가적으로 공인하게 되었다고 한다. 백률사의 석당(石幢)은 그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것이며, 그 곳에 자세한 사실이 적혀 있다.
※ 인조 반정:1623
조선 인조 1년인 1623년에 서인(西人) 일파가 광해군과 집권당인 대북파(大北派)를 몰아 내고 능양군(綾陽君) 종(倧)을 왕(인조)으로 모신 사건. 광해군의 실정으로 비롯된 서인들의 무력 정변이다. 선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선정을 베풀려고 노력했으나 당론을 수습하지 못하고, 자신을 옹립한 대북파들의 문란한 정사에 말려들어 자포 자기 상태가 되었다. 이이, 정인홍 등의 모함으로 형 임해군과 동생 영창 대군을 죽이고, 계모인 인목 대비마저 유폐시키는 패륜을 저질렀다. 이로 인해 기강이 문란해지자 서인의 이귀, 김자점, 김유, 이괄 등이 반정을 모의 거사하여 성공하고, 인목 대비의 윤허를 얻어 능양군을 왕으로 받들었다.
※ 임오군란:1882
1882년(조선 고종 19년) 6월에 일본식 군제(軍制)와 민씨 정권에 반항하여 일어난 구식 군대의 병란. 신식 군대의 양성과 군제 개혁에 불만을 품던 차에 급료가 13개월이나 밀린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그 결과 청나라 군대와 일본 군대가 와서 난을 간섭하게 되고, 일본과 강제로 제물포 조약을 맺기에 이르렀다.
※ 임진왜란:92
1592년(선조 25년)에서 1598년(선조 31년)까지 2차에 걸쳐 왜군이 조선에 쳐들어온 싸움. 임진년에 일어났다 하여 임진왜란이라 하며, 정유년에 또다시 쳐들어온 싸움을 따로 정유재란이라고 한다. 조선은 선조 때에 접어들어 양반들이 당파 싸움을 일삼으면서 국방을 소홀히 하였는데, 이처럼 조선이 안일한 생활을 하고 있을 때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나와 대륙 침략을 꿈꾸고 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원정군을 편성하여 1592년(선조 25년) 4월에 15만 대군으로 조선을 침공했다. 5월 2일에 서울이 함락되고 6월에 평양을 빼앗겼으나, 해상에서는 전라 좌수사 이순신의 등장으로 전세가 역전되었다. 특히 거북선으로 많은 전공을 세웠다. 내륙에서는 각계 각층의 의병이 일어나 왜군에 항전하였다.
그러나 7년 동안 계속된 전란으로 조선은 황폐화되고 백성은 도탄에 빠졌다. 이에 조정은 유비 무환을 깨닫고 훈련 도감을 만들어 무예를 닦게 했고, 각 지방에도 교관을 두어 무예를 가르쳤다. 무기도 재래식에서 개량, 발명하여 대비하게 되었다.
※ 고려 중기에 전주 관노들의 난:1182
전주 관노들의 난은 고려 중기에 일어난 천민의 난이다. 명종 12년(1182년) 경대승 집권시 전주의 사록(司錄) 진대유와 상호장(上戶長) 이택민이 백성을 수탈하자, 기두(旗頭)였던 죽동 등이 중심이 된 전주 관노들이 난을 일으켜 한때 전주를 점령하였다. 정부에서는 박유보에게 군사를 주어 토벌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일품군과 승병들이 이를 진압하였다.
※ 정묘호란:1627
1627년(조선 인조 5년)에 후금의 침입으로 일어난 싸움. 광해군을 몰아 내고 즉위한 인조가 친명 배금 정책을 쓰고, 명나라 장군 모문룡이 철산의 가도에 진을 치고 요동 회복을 꾀하자, 중국 대륙으로의 진출을 꾀하던 후금이 그들의 배후를 위협하는 조선을 먼저 침입했다. 후금의 태종은 광해군의 폐위를 구실로 군사를 일으켜 의주, 정주, 곽산을 거쳐 황해도 평산에까지 이르렀다. 그 사이에 정봉수와 이입 등이 의병을 조직하여 용골 산성과 의주 지방에서 적과 싸웠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인조는 강화로 피하게 되었다. 그러나 후금은 본래 중국 대륙을 차지하는 것이 목적이었으므로 조선과 쉽게 화약이 이루어져 형제의 맹약을 맺고 군대를 철수하였다.
※ 정유재란:1597
1597년(선조 30년)에 조선에 다시 쳐들어온 왜군과의 싸움. 임진왜란의 3년여에 걸친 화의가 깨지자 왜군이 다시 침입하였는데, 이 때에는 이미 조선 관군과 의병이 방비 태세를 갖추고 있었고, 명나라의 원군도 곳곳에 와 있어서 쉽게 막을 수 있었다. 다시 기용된 이순신의 활약으로 본국과의 연락이 어렵게 된 왜군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유언을 핑계로 달아남으로써 7년에 걸친 왜란이 끝나게 되었다.
※ 제5공화국 성립:1980
1979년 10월의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 후, 1980년 10월 27일 공포된 새 헌법의 발효로 제5공화국이 성립되었다. 1981년 2월 25일에 제11대 전두환 대통령이 제12대 대통령에 당선되어 3월 3일에 취임하고, 그 해 3월 25일의 총선거로 제11대 국회가 구성됨으로써 출범하였다. 대통령 선거인단 선출에 의한 대통령의 임기를 7년으로 하여 중임을 금하였다. 주요 정책은 민주주의의 토착화, 복지 사회 건설, 정의 사회 구현, 교육 혁신과 문화 창달로 집약될 수 있다.
※ 일본과 제물포 조약 체결:1882
임오군란으로 공사관이 불타고 10여 명의 사상자를 낸 일본은 군란 후 군함과 병력을 보내어 제물포에 상륙시킨 다음, 조선에 대하여 임오군란의 책임을 묻고 협상을 요구했다. 이에 조선에서는 이유원을 보내어 협상을 하고 제물포 조약을 체결(1882년)하게 하였는데, 이 조약에 따라 조선은 배상금을 지불하고, 일본 공사관에 일본 경비병을 주둔시키도록 하는 한편, 일본에 수신사를 파견하게 되었다. 이 조약에 따라 박영효가 수신사로 일본에 가면서 처음으로 태극기를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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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암리 학살 사건:1919
3·1 운동 때 일본 군대가 경기도 화성군 향남면 제암리에서 주민을 집단 학살한 사건. 수원 제암리 무차별 학살 사건 또는 수원 예배당 사건이라고도 한다. 1919년 4월 15일에 아리타라는 육군 중위가 이끄는 일본 군경이 제암리에 몰려와서 크리스트교인, 천도교인 약 30명을 제암리 교회에 모이게 한 뒤 문을 잠그고 집중 사격을 퍼부었다. 또한 일제는 증거를 없애기 위해 교회에 불을 질렀으며, 인근 교회와 민가 등 31호에 불을 질러 또다시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상처를 입었다. 일제의 이러한 만행은 선교사들의 분노를 사게 하였으며, 스코필드는 현장의 참상을 사진에 담아 미국에 보내어 여론을 불러일으켰다. 1982년에 당시 문화 공보부(현재의 문화부)에서는 제암리 학살 현장의 유물 발굴과 조사에 나섰으며, 같은 해 10월에 이 지역을 사적 제299호로 지정하였다.
※ 고려 멸망, 조선 건국:1392
고려 말 위화도 회군으로 정권을 잡은 이성계는 사대부 세력의 도움을 받아 반대 세력을 물리친 다음, 왕위에 올라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 하였다(1392년). 마지막 왕조였던 조선은 성리학을 중심으로 하는 양반 관료 사회를 이룩하였으나, 중기 이후의 정치적, 경제적 모순을 극복하지 못한 채 서유럽 열강의 문호 개방 요구에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함으로써 건국 후 519년 만에 일본에게 국권을 빼앗기고 말았다(1910년).
※ 조선어 학회 사건:1942
1942년 10월에 우리말의 말살을 꾀하던 일제가 조선어 학회의 회원을 민족주의자로 몰아 검거 투옥한 사건. 일제는 조선어 학회를, 학술 단체임을 가장한 비밀 결사라고 거짓으로 사건을 꾸며 회원들에게 혹독한 고문을 하다가, 8·15 광복을 이틀 앞두고 공소를 기각했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학회는 해체되고, 편찬하려던 <큰사전> 원고의 많은 부분이 없어졌다.
※ 중종 반정:1506
1506년(연산군 12년)에 성희안, 박원종 등이 연산군을 내쫓고 중종을 왕으로 세운 사건. 연산군이 여러 번의 사화를 일으켜 선비들을 죽이고 나라를 어지럽혀 백성들의 원망이 높아지자, 연산군의 비위를 상하게 하여 관직에서 쫓겨났던 성희안은, 박원종, 유순성 등의 도움을 얻어 연산군을 내쫓고 진성 대군을 새 임금으로 세울 것을 꾀하였다. 그리하여 훈련원에 장사들을 모은 후 먼저 왕의 외척인 신수근 형제를 죽이고, 궁중으로 들어가 대비의 명을 받아 연산군을 폐하고 진성 대군을 왕으로 세웠다. 이 왕이 곧 중종이며, 이로써 연산군은 강화도의 교동으로 쫓겨났다.
※ 진주 민란:1862
1862년(철종 13년)에 진주에서 일어난 민란. 삼정의 문란으로 고통을 겪던 농민들은 새로 부임한 진주 병사(兵使) 백낙신이 가혹한 탄압과 착취를 일삼자, 양반 출신의 농민인 유계춘을 중심으로 난을 일으켜 관아를 습격하고 환곡을 불태우는 등 과격한 행동을 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박규수를 보내어 사태 수습에 나섰다. 그러나 이 난을 계기로 이후 전국 곳곳에서 민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 진주성 싸움:1592
임진왜란 때에 진주에서 벌어졌던 두 차례의 큰 싸움. 제1차 싸움은 1592년(선조 25년) 10월 5일에 일어난 싸움으로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로 꼽히며, 진주성 대첩이라고도 한다. 약 3만의 왜군이 대나무 사다리를 만들어 진주성을 공격하자, 진주 목사 김시민은 성을 타고 오르는 왜군에게 화약, 끓는 물, 돌 등을 퍼부어 6일간의 대접전 끝에 왜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고 달아났다. 이 싸움에는 의병 대장 곽재우의 응원의 힘이 컸다. 이 싸움의 승리는 적으로 하여금 다른 지역을 넘보지 못하게 하였다. 제2차 싸움은 논개(論介)의 죽음으로써 잘 알려진 싸움이다.
제1차 싸움에 크게 패한 왜군은 이를 복수하려고 1593년 6월에 가토 기요마사와 고니시 유키나가 등에 명하여 5만의 왜군을 이끌고 다시 쳐들어왔다. 왜군은 귀갑차 등 특수한 병기로 물밀듯이 쳐들어와 치열한 공방전 끝에 거의 모든 장병이 전사하고, 진주성은 왜적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그러자 김천일을 비롯한 수십 명의 의병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의로운 논개는 적장을 안고 남강에 빠져 죽었다. 이 싸움은 임진왜란 중 가장 치열했던 싸움으로 성 안에 있던 군인과 백성 등 약 6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 천리 장성 축조:642
천리 장성은 고구려 시대에 당나라의 침입에 대비하여 쌓은 성이다. 당은 초기에는 고구려와의 충돌을 피하였으나, 태종이 즉위한 뒤 고구려에 침입하려는 야심을 보이자, 고구려에서는 이에 대비하여 천리 장성을 쌓기 시작했다. 이 장성은 북부의 부여성(지금의 승안 지역)과 남부의 비사성(지금의 뤼다 지역)을 잇는 방어선으로서 연개소문이 총책임자가 되어 다스렸다.
※ 철기 시대:BC400년경
한반도에는 기원전 400∼기원전 300년경에 중국 계통의 청동기와 더불어 철기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기원전 2세기 초기에는 대동강 유역 지방에서 청동기와 철기가 함께 쓰였으며, 기원전 1세기 말에 한사군이 설치되고부터는 본격적으로 철기가 발달하여 북방 군장 국가로부터 남방 군장 국가로 퍼져 나갔다. 철기 시대를 엿볼 수 있는 유물은 옛 돌무덤이나 널무덤 따위에서 나온 것들이 대부분이다.
※ 청동기 시대:BC1000년경
한반도에서 청동으로 무기와 도구를 만들어 쓴 시기는 기원전 1000년경에 해당한다. 청동기 시대라 하여 생활 도구를 모두 쇠붙이로 만들어 쓴 것은 아니고, 농사에는 여전히 나무로 만든 도구, 석기 등을 쓰고 있었다. 다만 청동기 시대에는 토기나 석기가 많이 발달되어 그 모양이 청동기의 모양과 비슷해져 간 것이 특색이다.
※ 청산리 싸움:1920
1920년 10월에 만주 지방에 있던 북로 군정서(北路軍政署)의 독립군이 화룡현 청산리계곡에서 5만의 일본군을 맞아 크게 쳐부순 싸움. <청산리 대첩>이라고도 한다. 1920년 8월 하순에 왕청현 서대파에 주둔하고 있던 북로 군정서의 주력 부대가, 일본군이 독립군에 대해서 협공 작전을 펴기 시작했다는 정보를 얻었다. 이에 독립군은 김좌진 장군을 총사령으로 삼아 화룡현 청산리 백운평 삼림 속에 잠복하고 있다가, 3면으로 청산리를 포위한 일본군의 일부가 백운평 삼림으로 들어섬으로써 첫 전투가 벌어졌다. 이 싸움에서 500여 명의 일본군을 전멸시킨 독립군은 그 날 밤으로 포위망을 뚫고 갑산촌에 이르러 다시 천수평을 공격하여 일본군을 거의 섬멸하였다. 이어 일본군의 사단 사령부가 있던 어랑촌을 전격적으로 공격하여 일대 혈전을 벌인 끝에 대승리를 거두었다. 그 청산리 싸움에서 일본군의 사상자는 3,300여 명에 이르렀고, 우리 독립군도 100여 명의 희생자를 냈다. 이 싸움에서 참패를 당한 일본군은 그 뒤 그 곳의 우리 동포에게 무자비한 보복을 해 왔다.
※ 최씨 무신 정권 시작:1196
무신의 난 이후 서로 정권을 다투던 무신들 가운데서 최충헌이 1196년(명종 26년)에 아우 최충수와 함께 권신 이의민 일당을 죽이고 정권을 잡았다. 그 뒤 그는 민중의 저항 운동과 사원 세력을 억누르고 최씨 일문의 독재 정치의 기틀을 닦았다. 이후 4대 60여 년 간 최씨 일가는 교정도감을 설치하고 그 장관이 되어 정치 권력을 휘잡고, 도방과 삼별초 등 사병 집단을 키워 세력을 넓히면서 정치 권력을 마음대로 휘둘렀다.
그러나 몽고의 침입을 받아 강화로 서울을 옮기고 독재를 행하다가, 1258년(고종 45년) 최의가 유경, 김인준 등에게 살해됨으로써 몰락하게 되었다.
※ 측우기:1441
비가 내린 양을 재는 기구. 조선 세종 23년(1441년)에 세계에서 가장 먼저 발명했고, 그 뒤 개량에 힘써 세종 24년(1442년)에 측우기라고 이름하였다. 이 측우기는 무쇠를 써서 깊이 42.5cm, 지름 17cm의 둥근 통 모양으로 만든 것인데, 천문 관계 일을 맡아 보던 관상감(觀象監)에 대를 만들고, 그 위에 올려놓아 비가 그친 다음에 그 둥근 통에 담긴 빗물의 깊이를 재었다. 이 측우기는 이탈리아의 카스텔리가 만든 측우기보다 200년이나 앞선 것으로, 자연 조건을 통계적으로 파악하여 농업 생산에 이용하는 한편, 자연 재해를 이겨 내려고 애쓴 조선 시대 과학자들의 노력의 결실이다.
※ 태극기(국기 반포):1883
한국 국기인 태극기가 언제 처음으로 만들어졌는가에 대해서는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고종 19년(1882년)에 박영효가 수신사로 일본에 건너갈 때 처음으로 사용한것만은 확실하다. 따라서 한국 국기로서 태극 도형을 사용하기로 한 것은 그 이전에 이미 정해졌을 것이다.
태극기를 국가에서 공식적인 국기로 반포한 것은 고종20년(1883년) 음력 1월 27일인데, 이 때는 오늘날과 같이 그 규격과 도식이 분명하지 않았고, 다만 태극을 가운데 두고 네 귀에 건(乾), 곤(坤), 감(坎), 이(離)의 4괘를 배치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 뒤 조국이 광복되면서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로 1949년에 국기 제정 위원회가 구성되어, 여러 번의 회의 끝에 그 해 3월 25일에 음양과 4괘의 배치안을 확정했다. 이어 국기봉도 한국의 꽃인 무궁화 봉오리를 상징한 것으로 하고, 색깔은 국기 깃면의 색깔과 조화를 이루 도록 금색으로 하였다.
※ 판문점 휴전 회담:1953
6·25 전쟁을 마무리짓기 위하여 판문점에서 유엔군측 대표와 조선측 대표가 만난 회담. 휴전 회담은 처음 1951년 7월에 개성에서 열린 회담을 시작으로 하여 같은 해 10월에 회담장소를 판문점으로 옮겼으며, 1953년 7월 27일에 판문점에서 휴전 협정이 조인되었다.
※ 평화 통일 외교 정책 선언:1973
평화 통일을 위한 한국 정부의 외교 정책을 밝힌 선언. 6·23선언이라고도 한다. 곧 1973년 6월 23일에 한국 정부가 ①남북조선은 서로 상대방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고 도발 행위를 하지 않는다. ② 통일에 장애가 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북한이 국제 연합을 비롯한 국제 기구에 가입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는다. ③ 이념과 체제를 달리하는 국가라 하더라도 호혜평등의 원칙하에 문호를 개방한다고 밝힌 선언이다.
※ 한·미 수호 통상 조약 체결:1882
미국은 1880년에 슈펠트 제독을 부산에 보내어 일본 영사를 중개자로 하여 수교 요청을 하였으나 조선쪽의 거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자 조선에 영향력이 있던 청나라의 이홍장(李鴻章)에게 수호 통상을 알선해 주도록 요청하여 1882년(고종 19년) 3월에 슈펠트는 청나라 사신 마건충, 정여창과 함께 인천에 들어와 조선 정부의 전권 대관 신헌, 부관 김홍집과 4월 4일에 전문 14관으로 이루어진 한·미 수호 통상 조약을 체결하였다. 조약에 따라 1883년 5월에 초대미국 전권 공사 푸드가 입국하여 비준서를 교환하였고, 조선 정부에서도 전권 대신 민영익, 부관 홍영식을 미국에 보내어 양국의 역사적 교류가 시작되었다. 이로써 서양 여러 나라들 중 미국은 한국과 국교를 맺은 최초의 국가가 되었다.
※ 한·영 수호 통상 조약 체결:1883
1882년에 한·미 수호 통상 조약이 청나라의 알선으로 체결되자 청나라 주재 영국 공사 웨이드가 청나라 북양 대신 이홍장에게 한·영 수호를 청탁하여 한·영 회담이 열렸다. 그 결과 량국은 앞서 체결한 한·미 수호통상 조약과 같이 14개조로 작성하여 양국이 조인했으나,영국 정부는 이 조약이 한·일 수호 통상 장정(章程)과 차이가있다는 이유로 비준을 보류하고, 청나라 주재 공사 파크스를 전권 대신으로 보내어 조선 정부의 전권 대신 민영목과 더불어 수정을 가하여 전문 13관의 한·영 수호 통상 조약과 그 부속 통상 장정 3항목을 작성, 조인하였다. 이에 따라 1883년(고종 20년) 4월에 파크스가 다시 와서 비준 교환을 마치고, 총영사로 애스턴을 상주하게 함으로써 양국의 국교가 시작되었다.
※ 한·일 신협약:1907
1907년(융희 1년)에 일본이 한국의 주권을 빼앗기 위한 마지막조처로서 강제로 맺은 조약. 정미 칠조약(丁未七條約)이라고도 한다. 헤이그 특사 사건을 구실 삼아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킨 일본이 통감의 권한을 강화하여 국권을 완전히 빼앗으려고 맺은 조약이다. 조약은 전문 7조로 되어 있는데, 곧 법령 제정권, 관리 임명권, 행정권 및 일본 관리의 임명 등을 내용으로 하여 통감의 권력을 강화하였다. 그리고 거기에 뒤따르는 조처로 대신 아래에 일본인 차관을 임명하였고, 경찰권을 빼앗았으며, 경비 절약을 구실로 한국군을 해산하기까지했다. 또 언론을 탄압하고 집회, 결사의 자유권마저 빼앗는 등 국권을 완전히 빼앗음으로써 사실상 한국을 식민지화하고 말았다.
※ 한·일 의정서:1904
1904년 2월 23일에 한국은 일본의 강압에 못 이겨 합의한 외교 문서. 러·일 전쟁이 일어났을 당시 한국은 엄정중립을 선언하였는데, 일본은 그것을 무시하고 한반도를 그들의 세력권으로 확보하기 위하여 억지로 합의하게 한 약정이다.
6개조로 된 의정서의 내용은, ① 한국 정부는 일본의 시정 개선에 관한 충고를 받아들여야 한다. ② 일본 정부는 한국 황실의 안전을 꾀해야 한다.
③ 일본은 한국의 독립과 영토 보전을 보장한다. ④ 제3국의 침략으로 한국에 위험 사태가발생할 경우 일본은 이에 곧 대처하며, 한국 정부는 충분한 편의를 제공하고, 일본은 그 목적 달성을 위해 전략상 필요한 지역을 언제나 사용할 수 있다. ⑤ 한국은 일본의 승인없이 제3국과 이 협약에 위배되는 협약을 맺을 수 없다는 등이다. 이 의정서에 따라 1904년 5월에 러시아사이에 맺었던 모든 조약을 폐기시켰고, 경인선, 경의선철도 부설과 통신망 가설 등의 이권을 그들이 차지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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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일 합방:1910
1910년 8월 29일에 일본이 이른바 한일 합방 조약을 강압적으로 맺게 하여 대한 제국의 통치권을 빼앗은 일. 경술국치(庚戌國恥)라고도 한다.
일본이 한반도에 침략의 손길을 뻗치기 시작한 것은 1876년에 불평등한 강화도 조약을 맺은 데서 비롯되었다. 이후 일본이 청·일 전쟁, 러·일 전쟁에서 잇달아 승리하자 1904년에는 한·일 의정서를 억지로 약정하여 고문 정치로써 한반도를 자기네 세력권으로 확보하였다. 그리고 1905년에는 다시 을사조약을 맺어 외교권을 빼앗고, 통감부를 두어 보호 정치로써 침략에 박차를 가하였다. 1907년에는 헤이그 특사 사건을 계기로 정미 7조약을 맺게 하여 통감의 권한을 강화함으로써 사실상 식민지화하고 말았다. 그러던 중 1909년 10월에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의사에게 암살당하자 일본의 침략 정책은 더욱 구체화하고 가속화해 갔다. 먼저 송병준이 이끄는 친일 단체 일진회를 앞잡이로 내세워 한일 합방 공작을 적극적으로 펼치기 시작하였다.
마침내는 1910년에 3대 통감 데라우치가 ‘합방 후의 대한 통치 방안’을 가지고 부임하여 총리 대신 이완용 등과 비밀리에 합방 공작을 서둘렀다.
그리하여 그 해 8월 22일에 형식적인 어전 회의를 거쳐 그 날로 이완용과 데라우치가 조인하고, 8월 29일에 합방 조약을 공포함으로써 조선은 개국 519년 만에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말았다.
※ 한산 대첩:1592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한산도에서 왜군을 무찔러 크게 이긴싸움. 임진왜란 3대첩 중의 하나이다. 1592년 7월 8일 당시전라 좌수사 이순신은, 좁은 견내량(통영 수도)에 정박중인왜군의 함대를 유도 작전에 의해 외해(外海)로 끌어내었다. 이것은 견내량이 좁아서 큰 싸움을 하기에 적당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왜군이 모두 외해로 나왔을 때 이순신은 공격명령을 내려 학익진(학이 날개를 펴듯이 진을 치는 전법)으로 적을 포위하는 한편, 거북선을 앞세우고 각종 포를 발사하여 적선 60여 척을 격파하였다. 이 싸움의 승리로 조선수군은 제해권을 장악했으며, 왜군이 남해를 돌아 황해로 나가 황해도와 평안도에 상륙하려는 것을 막을 수 있었던 중요한 싸움이었다.
※ 행주 대첩:1593
임진왜란 때 권율 장군이 행주산성에서 왜군을 크게 무찌른 싸움. 전라도 순찰사로 있던 권율은 한성을 되찾기 위해 1593년(선조26년) 2,00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행주로 들어갔다. 그러자 차차 퇴각하여 한성으로 모이고 있던 왜군은 3만여 명의 군사로 9차례에 걸쳐 맹공을 가해 왔다. 그러나 권율은 몸소 물을 떠 나르며 군사들을 격려하고, 부녀자들까지 치마에 돌을 담아 날라 군사들을 도움으로써 왜군을 크게 무찌를 수 있었다. 이 때 부녀자들이 긴 치마를 짧게 잘라 돌을 담아 나른 데서 행주치마라는 이름이 비롯되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의 3대첩의 하나이다.
※ 헤이그 특사 사건:1907
1907년(광무 11년)에 고종 황제가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 평화회의에 이상설, 이위종, 이준을 비밀리에 보내어 을사조약의 불법성과 일본의 무력적 침략의 부당성을 주장하려던 사건. 헤이그 밀사 사건이라고도 한다. 1905년에 일제는 강제로 을사조약을 맺고 외교권을 빼앗았다. 이럴 즈음인 1907년에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제2회 만국 평화 회의가 열린다는 정보가 들어와, 4월에 고종 황제는 이상설과 이준에게 회의에 참석할 신임장과 러시아 황제에게 보내는 친서를 가지고 가서 만국 회의에 나가 실상을 알리도록 하였다. 이들은 러시아로 가서 러시아 황제에게 회의 참석의 주선을 부탁하는 친서를 전하고, 그 곳에서 러시아 공사관서기였던 이위종과 함께 6월에 헤이그에 도착했다. 이들은 의장인 러시아 대표를 만나 고종의 신임장을 제시하고, 한국의 전권 위원으로 회의에 참석할 것과 일본의 협박으로 강제로 맺은 을사조약의 파기를 회의 의제로 삼아 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방해로 회의 참석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이에 이준은 울분을 참지 못해 그 곳에서 자결하였다. 이 사건의 결과로 일제에 의한 고종의 강제 퇴위, 한·일신협약의 강요, 구한국 군대의 해산이 잇달았다.
※ 홍경래의 난:1811
조선 순조 11년(1811년)에 평안도 출신인 홍경래가 일으킨 반란. 홍경래는 평안도 가산의 우군칙 등과 더불어 서북 지방에 대한 정부의 차별을 구실로 난을 일으켜 스스로 평서 대 원수라 일컬었다. 4개월 동안 계속된 홍경래의 난으로 한때 청천강 이북의 땅이 그의 손에 들어가기도 했으나, 마침내 관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이 난은 하층 양반과 중소 상인 및 유랑 농민이 합세하여 부패한 조정에 항거한 사건으로, 그 뒤 여러 곳에서 일어난 민란에 영향을 끼쳤다. 홍경래의 난은 비록 실패했지만, 19세기 초에 서북 지방을 뒤흔들어 놓은 대규모의 농민 항거 운동이었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 황산 대첩 이성계:1380
1376년에 침입했다가 홍산싸움에서 최영에게 크게 패하고 물러난 왜구가, 1380년에는 500여 척의 함선을 이끌고 진포(금강 하구)에 침입, 충청·전라·경상3도의 연안 지방을 마구 약탈 살육하여 그 참상이 극도에 이르렀다. 이 때 최무선 등의 장수가 화통, 화포로써 왜선을 격파하여 모두 불태워 버리자, 퇴로를 잃은 왜구는 더욱 발악하여 그 피해가 매우 컸다. 조정에서는 이를 토벌하기 위하여 이성계를 양광, 전라, 경상도 순찰사로 임명하여 이 지방의 방위를 맡겼다. 이성계는 여러 장수를 이끌고 남원에서 배극렴 등과 합류하여 황산 북쪽에서 적을 크게 무찔러 승리를 거두었다. 이 싸움은 최영의 홍산 대첩과 더불어 왜구 격파에 길이 빛날 만한 싸움으로, 이 싸움을 계기로 왜구의 침입이 뜸해졌다.
※ 황산벌 싸움:660
660년에 백제의 계백 장군이 신라의 군대를 맞아 싸운 싸움. 신라의 군대가 탄현(지금의 대전 동쪽)을 넘어 황산(연산)을 공격하자, 백제의 계백 장군은 결사대 5,000명을 거느리고 황산을 지키면서 신라군을 4차례나 무찔렀으나, 끝내 패하여 죽고 말았다. 이 싸움의 패배로 백제의 수도 사비성은 함락되고 백제는 멸망하였다.
※ 후고구려:901
신라 말기에 궁예가 세운 나라. 신라·후백제와 함께 후삼국을 이루었다. 북원의 호족 양길에게 의지하던 궁예가 세력을 길러 양길을 물리치고 901년에 세운 나라로, 904년에는 나라 이름을‘마진’이라 하였다가, 911년에는 ‘태봉’으로 고쳐 부르기도 하였다. 고구려의 부흥을 외치고 경기도·강원도·황해도의 대부분과 평안도·충청도의 일부까지 아울러 후삼국중 가장 큰 세력을 이루었으나, 궁예의 성격이 포악하여 부하에게 쫓겨나고, 왕건이 왕으로 추대되어 고려를 세웠다(918년).
※ 후백제 건국:900
후백제는 신라 말기(900년)에 남서 해안을 지키던 장군 견훤이 신라의 혼란을 틈타 완산주(지금의 전주)에서 독립한 나라로, 신라·후고구려와 함께 후삼국을 이루었다. 중국의 오나라·월 나라와 통교하면서 영토를 넓혀 고려와 패권을 다투었으나, 935년에 내분이 일어나 견훤은 고려에 투항하고, 이듬해 아들 신검이 선산과 황산 싸움에서 고려에 크게 패함으로써 멸망하였다.
※ 훈민정음:1443
조선 제4대 세종이 집현전의 여러 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1446년(세종28년)에 창제 반포한 글자(한글), 또는 그것을 해설한 원본 이름. 줄여서 ‘정음’이라고도 한다. 훈민정음이란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으로, 이에는 ① 우리말을 적기에 알맞은 글자가 있어야 하겠다는 자주 정신 ② 일반 백성이 다 쓸 수 있게 해야겠다는 민본·애민 정신 ③ 누구든지 일상생활에 쉽게 쓸 수 있게 해야 겠다는 실용 정신이 담겨져 있다. 초성(자음)은 발음 기관을 본떠 ‘ㄱ,ㄴ,ㅁ,ㅅ,ㅇ’과 같은 기본 글자를 만들고, 이에 획을 더하여 모두 17자를 만들 었고,중성(모음)은 하늘, 땅, 사람의 3재(三才)를 기본으로 하여 ‘촵,ㅡ,ㅣ’를 만들고, 이를 위아래와 좌우로 어울러 모두 11자를 만들었다.
※ 흥선 대원군:1863
조선 왕조 고종 때의 왕족, 정치가. 이름은 이하응(李昰應)이고, 고종의 아버지이며, 시호는 헌의(獻懿)이다. 철종이 아들이 없이 세상을 떠나게 되어 자기의 둘째 아들 명복(命福 : 고종의 어릴 때 이름)이 왕위에 오르자, 1863년 대원군이 되어 실권을 잡고 대신 정치를 보살폈다. 그는 우선 안동 김씨의 세력을 몰아 내고, 부패한 관리들을 처벌하였으며, 신분의 귀천을 가리지 않고 인재를 뽑아 썼다. 그리고 귀족과 평민을 가리지 않고 세금을 내게 하며, 사치와 낭비를 금하여 백성들의 생활 안정을 꾀하였다. 그의 과감한 개혁정치는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어 국민 생활의 안정에 이바지하기는 했다. 그러나 경복궁의 재건으로 재정을 무리하게 지출했고, 서원의 철폐로 유생들로부터 반발을 사기도 했다. 그리고 병인양요와 신미양요가 일어나게 되어 카톨릭교를 박해하는 등, 쇄국 정치를 고집하다가 며느리인 명성 황후에게 정권을 빼앗겼다. 1907년(광무 11년)에 대원왕(大院王)에 봉해졌다.
※ 최초의 통신 방송 위성, 무궁화 1호 발사:1995
무궁화 1호는 한국 최초의 방송·통신 복합 위성으로, 크기는14.2×17.4×19.6cm이고, 무게는 발사 중량 1,463.3kg, 위성체 635kg의 최첨단 디지털 방송·통신 위성이다. 정부가 국내 최초의 방송·통신 복합 위성을 발사하기로 하고 지난 1990년 7월 한국 통신에 위성 사업단을 설치, 맥도널 더글라스, 록히드 마틴 등 발사팀과 공통으로 설계, 제작했으며 5년만인 1995년 8월5일 미국 플로리다 케이프 커내버럴 공군 기지에서 델타2호 로켓에 실려 발사되었다. 무궁화 위성은 동경 116°, 적도 상공 3만 6,000km에서 정지 궤도로 위치하고 있고, 형태는 3축 자세 제어 방식의 날개형이며, 4∼5개월 간의 궤도 시험을 거쳐 1996년 초부터 통신 및 방송 분야의 서비스가 이루어진다. 수명은 10년으로 예상하고 있지만, 발사체 책임 회사인 맥도널 더글라스사가 정상적인 발사에 실패함으로써 그보다 훨씬 짧아질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무궁화 위성의 위성 방송 시청 지역은 조선반도, 중국 연변, 산동 반도, 일본 오키나와, 러시아 연해주에 이르러 중국, 러시아 등지의 동포들에게 한국 방송을 보내 줄 수 있기도 하다. 이로써 한국은 세계에서 22번째로 방송·통신 위성 보유국의 대열에 들어섰다.
※ 최초의 인공 위성, 우리별 1호 발사:1992
우리별 1호는 한국 최초의 인공 위성으로, 정식 명칭은 킷샛(KITSAT)이고, 크기 50×80cm, 무게 50kg의 소형 과학 위성이다. 1989년부터 한국 과학 기술원 인공 위성 연구 센터가 영국의 대학과 공동으로 설계, 제작했으며, 1992년 8월 11일 중남미의 프랑스령 기아나의 쿠루 우주 과학 기지에서 위성 발사체인 아리안 42P로켓에 실려 발사되었다. 우리별 1호는 지구 상공 1,325km에서 적도면과 66도 기울어져 원에 가까운 궤도를 그리며 110분에 지구를 한 바퀴씩 도는데, 하루에 6번, 한 번에 15분 정도 우리 지구국과 통신이 가능하다. 지구 표면 촬영, 우주선 측정, 음성 데이터, 화상 정보 교신 등의 실험을 하게 된다. 수명은 5년이며, 수명이 다 하면 낙하하면서 소각되어 사라진다. 한편, 1993년 9월 26일에는 순수 한국 기술로 설계, 제작된 우리별 2호가 아리안 V59로켓에 실려 쿠루 기지에서 발사되었다. 이것은 지구 궤도에 5년간 머물며 101분 만에 지구를 한 바퀴씩, 하루 14번 돈다.
※ 남북한이 한반도 비핵화 공동 선언:1991
남북한은 1991년 12월 31일, 한반도를 비핵화 함으로써 핵전쟁 위험을 제거하고 한반도의 평화와 평화 통일에 유리한 조건과 환경을 조성하며, 아시아와 세계의 평화와 안전에 이바지하기 위해 한반도 비핵화 공동 선언을 하였다. 비핵화 공동 선언의 주요 내용은 ① 핵무기의 시험, 제조, 생산, 접수, 보유, 저장, 배비(配備), 사용의 금지 ② 핵에너지의 평화적 이용 ③ 핵 재처리 시설 및 우라늄 농축 시설 보유 금지 ④ 비핵화를 검증하기 위해 상대측이 선정하고, 쌍방이 합의하는 대상에 대한 상호 사찰 ⑤ 공동 선언 발효 후 1개월 이내에 남북 핵 통제 공동위 구성 등이다. 이 공동 선언은 남북이 각기 발효에 필요한 내부 절차를 거쳐 1992년 2월 평양에서 열린 제6차 남북 고위급 회담에서 문서를 교환했다.
※ 제1차 남북 고위급 회담, 서울 개최:1990
남북 고위급 회담은 1988년 조선의 연형묵 총리가 정치 군사 문제에 대한 협의를 하기 위해 제안한 것으로, 1990년 7월 남북 고위급 회담에 대한 의제와 시기 등이 합의되어 마침내 남북 총리를 단장으로 하는 제1차 남북 고위급 회담이 서울에서 개최되었다. 이후 제2차(1990.10 평양), 제3차(1990.12 서울), 제4차(1991.10 평양) 회담을 거쳐 제5차(1991.12 서울) 회담에서는 남북 합의서를 채택, 서명했고 제6차(1992.2 평양) 회담에서는 합의서 문건을 정식 교환하여 발효시켰다. 이 회담은 제7차(1992.5 서울) 회담을 거쳐 현재 제8차(1992.9) 회담까지 이루어진 상태이다.
※ 경부선 개통:1905
경부선은 1901년(광무 5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1905년에 개통되었다.
일제 때에는 부산과 선양, 부산과 베이징까지 연장 운행되어 일제의 대륙 침략에 이용되었다. 지금은 서울과 부산을 잇는 간선 철도로서 수도권과 영남 공업 지역간의 대량 수송을 맡고 있으며, 길이는 444.5km이다. 1974년에는 서울과 수원 사이가 복복선 전철로 바뀌었다.
※ 대조영, 발해 건국:698
대조영은 발해의 시조(재위 699∼719년)로, 왕호는 고왕(高王)이다. 668년에 고구려가 망한 뒤 당나라의 대장군이 해고의 군사를 천문령에서 크게 쳐부수고, 고구려와 말갈의 유민들을 모아 읍루의 동모산에 홀한성을 쌓고 나라를 세웠다(699년). 스스로 왕이 되어 국호를 진(震)이라 하였으며, 후에 발해로 고쳤다. 발해는 북쪽에 있는 돌궐과 손을 잡고 당나라를 견제하면서 안으로 말갈족의 통합에 힘써, 옛 고구려 땅의 대부분과 지금의 연해주 지방에 걸치는 커다란 나라를 이루었다.
※ 신한 청년단 조직:1919
신한 청년단은 1919년 상하이에서 서병호, 여운형, 김구 등을 중심으로 조직된, 가장 오래 된 해외 독립 운동 단체로서 ‘신한 청년보’를 발행하여 교포들에게 독립 정신을 불어넣어 주었다. 또한 김규식을 파리 강화 회의에 파견하여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게 하는 등 외교 활동에도 힘썼다.
※ 안시성 싸움:645
645년 당나라 태종이 고구려에 침입했을 때 안시성에서 벌어졌던 당나라와의 싸움. 당 태종은 고구려의 요충지인 안시성을 함락시키고자 하루 5∼6회씩 60여 일에 걸쳐서 포위, 공격했으나, 안시성 성주 양만춘과 성 주민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 실패하였다. 당나라 군사가 후퇴할 때 당태종은 양만춘에게 송별의 예를 다 했다고 야사에 전해내려 온다.
※ 이괄의 난:1624
조선 인조 2년인 1624년에 일어난 난. 이괄은 인조 반정에 공이 컸음에도 불구하고 2등 공신에 봉해지고, 그 뒤 평안도병마 절도사로 좌천되어 불만을 가지고 있었는데, 거기다 반역을 꾀한다는 모함을 받아 아들이 잡혀 가자 부하인 기익헌 등과 함께 난을 일으켰다. 반란군은 한때 서울을 점령하고, 인조는 공주로 피난했으나 서울 점령 하루만에 정부군에 패하여 이괄은 부하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그러나 그 잔당들이 후금으로 달아나 선동함으로써 정묘호란이 일어나는 계기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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