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계전서(沙溪全書)제35권
의례문해(疑禮問解)-1
가례도(家禮圖)
복제도(服制圖)에 출계(出繼)한 아들을 위한 복(服)이 기년(期年)으로 강복(降服)되어 있는 문제에 대하여
[문] 오복도(五服圖)의 전면 아래쪽에 논한바, 본생부모(本生父母)도 역시 출계한 아들을 위하여 부장기(不杖期)로 강복한다 하였으니,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황종해(黃宗海)-
[답] 《의례(儀禮)》 상복(喪服)의 부장기 장에서 상고할 수 있으며, 가례도(家禮圖)와 정도가(鄭道可 정구(鄭逑))의 연혁도(沿革圖)도 다 이것에 근본하여 말한 것이다.
《의례》 상복의 부장기 장에 “남의 후계가 된 자가 본생부모를 위하여 입는다. 본생부모도 그를 위하여 같이 입어 갚는다.” 하였는데, 그 소(疏)에 “같이 입어 갚는다고 말하는 것은 이미 깊이 억제하여 본소(本疏)에 보인 ‘왕래하며 서로 갚는다[往來相報]’는 법과 같게 하였기 때문이다.” 하였다. -살피건대, 이미 왕래하며 서로 갚는다고 하였고 보면, 본생부모에게도 역시 형제의 아들에게와 같이 부장기로 입어야 할 것이다.
복제도의 잘못된 곳에 대하여
[문] 복제도에 아버지의 자매(姊妹)는 부장기를 입되 시집을 갔을 경우 소공(小功)으로 강복하고, 질녀 역시 부장기를 입되 시집을 갔을 경우 대공(大功)으로 강복한다고 하였습니다. 보복(報服)으로 말한다면 강복한 경중이 서로 같지 않고, 존비로 말한다면 높은 이가 낮은 이에게는 무겁게 되고 낮은 이가 높은 이에게는 도리어 가볍게 되었으니, 여기에 무슨 뜻이 있습니까? -정랑(正郞) 오윤해(吳允諧)-
[답] 무릇 시집을 간 자는 한 등급만을 강복할 뿐이므로, 가례도에 우선 두 등급을 강복하도록 되어 있는 것은 잘못이니, 이 한 조항뿐만이 아니다. 조고(祖姑)에 대한 소공도 시집을 갔을 경우 시마(緦麻)로 강복하게 되어 있으나 복제도에는 시집을 가면 복이 없는 것으로 되어 있고, 종자매(從姊妹)에 대한 대공도 시집을 갔을 경우 소공으로 강복하게 되어 있으나 복제도에는 시마로 되어 있으니, 이 두세 조항은 당연히 본문을 따라 한 등급씩 강복하는 것이 옳다. 복제도의 잘못된 곳은 이 밖에도 많다.
삽(翣) 제도의 잘못에 대하여
[문] 삽의 제도에서 부채와 같되 네모졌으며 두 개의 뿔이 높다고 한 것은 대강의 설명일 뿐입니다. 그 뿔이 둥그렇게 굽어져 내려온다는 말에 무슨 큰 의문이 있겠습니까. 비스듬하고 뾰족하여진 부분부터 뿔이라고 한 것도 꼬집어 말할 만한 일이기는 합니다만, 이처럼 대수롭지 않은 일을 가지고 ‘그른 것임을 알고 가짜를 만들었다.’라고 하며 배척하기까지 하시니, 형의 처사가 옳은지 모르겠습니다. 세상의 견해를 놀라게 할 것이 두려우니 아직 그냥 두고 보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지사(知事) 신식(申湜) ○ 신공(申公)이 《가례언해(家禮諺解)》 및 가례언해도(家禮諺解圖)를 편찬하고 있기 때문에 서로 정의(訂議)한 것이다.
[답] 이미 부채와 같되 네모졌다고 하였고 보면, 높이와 너비를 다 두 자로 하여 세로와 가로를 정사각으로 한 다음 두 뿔만 네 치의 높이로 하자는 것 뿐입니다. 이제 만약 둥그렇게 굽어져 내려와서 비스듬하고 뾰족하여진 부분부터 뿔이라고 한다면 과연 네모진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삽 제도의 잘못이 큰 사단은 아니므로 굳이 고집할 것은 없으나, 만약 세상의 견해를 놀라게 한다는 데 구애를 받는다면 그때마다 세상의 풍속을 따르겠다는 것입니까. 가례도 및 국조오례의도(國朝五禮儀圖)에도 다 세 개의 뿔로 되어 있어서 수십 년 전부터 온 세상이 다 세 뿔의 제도를 따랐는데, 이제 공이 편찬하고 있는 가례언해도에서만 두 개의 뿔로 고쳤으니, 여기에서는 어찌하여 세상이 놀라워할 것에 구애받지 않는 것입니까.
신주(神主)의 황(皇) 자와 현(顯) 자의 의미에 대하여
[문] 신주를 쓰는 법식이 예전에는 ‘황’ 자를 썼으나 지금은 ‘현’ 자를 쓴다고 하는데, ‘황’과 ‘현’은 무슨 뜻입니까? -송준길(宋浚吉)-
[답] 《통전(通典)》 및 구준(丘濬)의 설을 참고하면 될 것이다.
《통전》에서 이르기를 “주(周)나라의 제도에 제후(諸侯)는 오묘(五廟)이니, 고묘(考廟)ㆍ왕고묘(王考廟)ㆍ황고묘(皇考廟)ㆍ현고묘(顯考廟)ㆍ조고묘(祖考廟)이다.” 하였는데, 그 주에 “정현(鄭玄)이 말하기를 ‘왕(王)과 황(皇)은 모두 군(君)의 뜻이고, 현(顯)은 밝다[明]는 뜻이고, 조(祖)는 비롯한다[始]는 뜻이니, 군(君)ㆍ명(明)ㆍ시(始)의 뜻의 글자를 취한 것은 근본을 존숭하자는 의도에서이다.’ 하였다.” 하였다. ○ 경산(瓊山) 구준이 말하기를 “황과 현은 모두 밝다는 뜻으로 뜻이 서로 통한다.” 하였다.
도자(韜藉)에 대하여
[문] 도자의 제도가 《가례》의 본문에는 나오지 않고 도(圖)에만 나오니, 준용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이 말하기를, “이것은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제도가 아니고, 오늘날 가례도에 나오는 것은 바로 양복(楊復)이 만든 것이다.” 하였습니다. 경산의 《가례의절(家禮儀節)》에도 ‘꼭 쓸 필요는 없다’고 한 말로 볼 때, 이 설이 옳은 듯합니다. 어떻습니까? -송준길-
[답] 《주자대전(朱子大全)》의 ‘이요경에게 주는 편지[與李堯卿書]’에 이르기를, “고위(考位)에는 자주색 주머니를 쓰고 비위(妣位)에는 분홍색 주머니를 쓴다.”라고 하였다. 이것이 도(韜)의 제도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 제도가 본래는 사마온공(司馬溫公)의 《서의(書儀)》에 나왔다고 한다. 또 경임(景任)이 “가례도는 양복이 만든 것이다.” 하였는데, 이 말은 어느 책에서 나온 것인가. 양복은 바로 주자의 문인(門人)인데, 신주도(神主圖)에 보면 대덕(大德)이란 글자가 있으니, 대덕은 원(元)나라 성종(成宗)의 연호이다. 나의 생각으로는 이 도(圖)가 아마 원나라 말엽 또는 명(明)나라 사람이 만든 것인 듯하다.
도(韜)의 제도에 대하여
[문] 도자(韜藉)는 세상 사람들이 다 쓰는 것이지만 그 제도가 일치하지 않습니다. 더러는 주신(主身)과 가지런하기도 하고 더러는 부방(趺方)과 가지런하기도 하니, 어느 것이 옳은지 모르겠습니다. -송준길-
[답] 본문의 주석에 이미, “방식은 말[斗]과 같은데, 장정(帳頂)은 얇은 널빤지를 쓴다.”라고 하였으니, 그 제도를 상상할 수 있다. 부방도 함께 덮이도록 하는 것이 옳다. 본문 주석에 이른바 주신과 가지런하다는 것은 주신이 부방에 꽂히는 부분까지 통산하여 보아야 할 것이다. 도자의 방활(方闊)은 주독(主櫝)의 안과 똑같이 재단하여 삼베를 겹으로 씌운 다음 명주로 싸되, 고위의 것은 자주색, 비위의 것은 분홍색으로 한다는 것이다.
도자를 자주색과 분홍색으로 쓰는 의미에 대하여
[문] 도자를 고위의 것은 자주색으로 쓰고 비위의 것은 분홍색으로 쓰는 것은 무슨 의미에서입니까? -송준길-
[답] 집설(集說)에 논한 것이 있으니, 참고하면 될 것이다.
풍씨(馮氏)의 집설에 이르기를 “옛사람은 자주색을 중시하고 분홍색을 경시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구분이 있었으나, 오늘날 우리나라에서는 검정색ㆍ노랑색ㆍ자주색을 함부로 쓸 수 없으니, 도(韜)는 분홍색 비단으로 쓰는 것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 옳다.” 하였다. 또 이르기를 “송(宋)나라의 평상시 공복(公服)이 1품에서 3품까지는 자주색 옥대(玉帶)를 띠고 4품과 5품은 분홍색 금대(金帶)를 띠었다.” 하였다. ○ 《소학(小學)》의 주에 이르기를 “3품은 자주색을 띠어야 하고 5품은 분홍색을 띠어야 한다.” 하였다. -자주색을 숭상한 것이 예전의 제도가 아니고 바로 당(唐)나라의 풍속인데도 선유(先儒)들이 이를 준용한 것은 우선 시속(時俗)을 따른 것일 뿐이다.
부주(附註)
부주의 편입(編入)에 대하여
[문] 《가례》에 조항마다 그 밑에 해설을 붙였는데, 누가 편입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황종해-
[답] 주복(周復)이 논변한 것으로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나 주복은 어느 시대의 사람인지는 모르겠다.
주복이 말하기를 “주 문공(朱文公 주자)의 문인 양복(楊復)이 각 조항 밑에 주석을 붙인 것은 《가례》의 연구에 공로가 있다 할 만하다. 내가 이를 따로 뽑아 내어 본문 뒤에 붙인 것은 문공의 본문이 중간중간에 잘라질 성싶어서이다. 또한 문공의 이 글은 간편하고 이행하기 쉽도록 하고자 하였기 때문에 《의례》와는 간혹 같지 않은 부분 -이를테면 부인(婦人)은 오늘날의 최상(衰裳)을 입는다던가 조문을 하는 자가 속례(俗禮)에 구애받아서 답배(答拜)를 하는 따위이다.- 이 있고, 서로 같은 부분도 또 자세하고 소략한 차이 -이를테면 혼례(婚禮)의 육례(六禮)와 상례(喪禮)의 염습(殮襲)에 쓰는 옷의 다소(多少) 따위이다.- 가 없지 않아서, 양복이 이따금씩 불만의 뜻이 많았다. 내가 생각건대 《의례》는 고법(古法)을 보존하였고 《가례》는 금속(今俗)을 연관시켰으며, 《의례》는 상술(詳述)하였고 《가례》는 요약하였으므로, 이는 서로 병행하여 나쁠 것이 없다. 이 때문에 문공이 《가례》를 지었지만 《의례》의 글을 편집하는 데 더욱 정성을 기울였고 반드시 《의례》와 《서의》를 참작하여 상(喪)을 치르라고 유명(遺命)하였으니, 그 뜻을 여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고법을 좋아하여 예절을 다 지키고자 하는 경우라면 애당초 《의례》를 준용하면 될 것이니, 양복의 설은 다 기록하지 못한 점이 있다.” 하였다.
사당(祠堂)
전옥(殿屋)과 하옥(廈屋)의 제도에 대하여
[문] 전옥과 하옥에 대한 설은 보내온 견해가 옳으므로, 이제 다 고치겠습니다. 다만 《가례집람(家禮集覽)》의 도(圖) 중 오가(五架)의 제도는 어느 책에서 나온 것입니까? 만약 경전(經典)의 근거가 없다면 이 도를 빼버리고 전옥과 하옥을 두 장으로 나누어 넣을까 합니다. 어떠하겠습니까? -지사(知事) 신식(申湜)-
[답] 《가례집람》 중의 하옥과 전옥의 전도(全圖)는 신의경(申義慶)에게서 나온 것으로, 대개는 의례도해(儀禮圖解) 및 하씨(何氏)의 소학도(小學圖)에 근거한 것입니다. 두 책에는 하우(下宇 서까래 및 처마)의 제도만 있고 상동(上棟 들보 및 도리)의 제도는 없었는데, 신의경이 《주자대전》의 석궁설(釋宮說)을 가지고 그 미비한 점을 보완한 것입니다. 경전의 근거가 없지 않으므로 기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도는 《가례집람》에 나온다.
후침(後寢)에 대하여
[문] 후침의 제도를 만약 왼쪽 방과 오른쪽 방으로 한다면 세 칸의 제도가 분명하겠으나, 지금 동쪽 방과 서쪽 방으로 한 이상 아마도 두 칸으로 하는 것이 옳을 듯하며, 사당의 제도 역시 그러합니다. 이제 기둥을 세울 곳에 점을 찍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그리고 양영(兩楹)이라고 한 것은 마루 한가운데 두 기둥 사이를 가리켜 말한 것인데, 도리[楣]를 받친 두 기둥 사이라고 한다면 앞 중방[前庋]을 받치는 두 기둥 역시 없어서는 안 됩니다.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하옥의 제도는 동서로 다섯 칸에 남북으로 네 칸으로 하여, 방은 뒷도리[後楣]와 뒷 중방[後庋]의 사이에 있어야 하고, 뒷도리에서 들보[棟]까지와 들보에서 앞도리[前楣]까지에 걸쳐 놓는 두 개의 대들보[大栿]가 있어야 하니, 이 두 대들보의 머리가 곧 두 기둥을 세우는 곳입니다. 앞도리에서 앞 중방까지의 한 칸에 어찌 기둥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역시 구부정한 들보[曲栿]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기둥은 모두 네 개가 됩니다. 이것이 의문스럽다는 것입니다. 만약 네 개의 기둥을 세우는 것이 근거가 없어서 마땅히 세 칸을 걸쳐 놓는 두 개의 대들보를 앞 중방의 밑에 세워야 한다고 한다면, 무릇 양영의 사이는 행사가 매우 많고 또 영(楹)은 내영과 외영의 구별이 있으니, 그렇게 할 경우 영의 안은 있고 영의 밖은 없다는 것 역시 부당할 듯합니다. 자세히 상고하여 답신을 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지사 신식-
[답] 후침의 제도는 앞서 공이 만든 언해도(諺解圖)에 보였거니와, 두 칸으로 하는 것은 잘못인 듯하므로, 이제 아래와 같이 도를 부칩니다.
전옥과 하옥의 제도는 뒷 중방에서 앞 중방까지 통틀어 다섯 칸에 하나의 큰대들보[樑]를 올려놓고, 대들보 위에는 남북으로 각각 짧은 기둥을 세워서 앞뒤의 도리[架]를 받치게 되어 있고 보면, 두 기둥만을 세우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것은 《의례》 및 하씨도(河氏圖)와 《주자대전》의 석궁(釋宮)에도 보이므로 다시 의심할 것이 없거니와, 영(楹) 밖의 처마와 계단 위의 남은 땅은 행사에 쓸 수도 있을 것입니다.
네 감실(龕室)에 신주를 모시는 일
앞뒤의 감실에 제사를 배치하는 일에 대하여
[문] 앞뒤의 감실에 제사를 배치하는 일에 대하여 묻습니다.
[답] 운운(云云)하였다. -아래의 ‘전후처(前後妻)의 합장’ 조항에 나온다.
서인(庶人)도 고조(高祖)까지 제사를 지내는 일에 대하여
[문] 예전에 서인은 부모의 제사만을 지내었고, 국제(國制)에도 그러합니다. 이른바 서인이라는 말이 만약 이처럼 벼슬하지 않은 사람의 통칭이라면, 부모의 제사만을 지내는 것은 너무 간략한 듯합니다.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송준길-
[답]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비록 삼묘(三廟)와 일묘(一廟)에서 제침(祭寢)에까지도 반드시 고조까지 미친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비록 서인이라 하더라도 제사는 반드시 고조에까지 미친다.” 하였으니, 지금 세상에서 이 예(禮)를 따르는 것이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종법(宗法)
나이 일흔이 되면 늙어서 제사를 자손에게 물려주는 일에 대하여
[문] 몸이 늙었다 하여 상제(喪祭) 등의 중대사를 자손에게 물려준다는 것은 정리상 미안할 듯합니다. 어떻게 하면 변고에 대처하는 예법을 지킬 수 있겠습니까? -송준길-
[답] 《주자어류(朱子語類)》에도 이것은 시행하기 어렵다고 하였다. 그러나 《주자대전》에 ‘사당에 고유하고 상제 등의 중대사를 자손에게 물려준다’는 글이 있으니, 상고해 볼 수 있다.
《주자어류》에서 어떤 사람이 묻기를 “나이 일흔이 되어 늙어서 제사를 자식에게 물려주면 적자(適子)나 적손(適孫)이 제사를 주관하게 되는데, 이렇게 한다면 사당의 신주를 모두 바꾸어 써서 적자나 적손의 이름으로 제사를 받들어야 합니다. 하지만 부모가 아직 살아 있는데, 이렇게 하고도 마음이 편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주자가 대답하기를 “그러하다. 이러한 것들이 시행하기 어려운 일이니, 자손에게 물려주고 나서도 직접 주관할 수가 있는 것이다.” 하였다. ○ 《주자대전》에 실려 있는 ‘치사(致仕)하고 가묘(家廟)에 고유하는 글’에서 이르기를 “나이 일흔이 되면서 몸이 늙어 병이 들고 근력이 쇠진하여 벌써 성은(聖恩)을 입어 벼슬을 그만둘 것을 허락받았으므로, 집안일 역시 당연히 자손에게 물려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맏아들은 이미 죽고 어린 손자 감(鑑)이 차례상 이어받아야 하는데, 이 또한 어려서 아직 제사를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이제 이미 가족의 의논을 거쳐 제사를 받들도록 하였으므로, 두 아들 야(埜)와 재(在)로 하여금 함께 도와주도록 하였습니다.……” 하였다.
장자(長子)가 후사(後嗣) 없이 죽어서 차자(次子)의 아들이 제사를 물려받는 일에 대하여
[문] 장자는 후사 없이 죽어서 그 후사를 세우지 못하였고, 차자는 죽기는 하였어도 아들이 있으며, 또 막내아들이 살아 있을 경우, 누가 제사를 받들어야 합니까? -황종해-
[답] 차자의 아들이 제사를 받들어야 한다.
후사를 세울 경우 반드시 관가에 보고하는 일에 대하여
[문] 지금의 법에 후사를 세울 경우 반드시 관가에 보고하고 나서 부자(父子)의 관계를 설정하게 되어 있으나, 오늘날 더러 이 절차를 빠뜨리는 자가 있습니다. 이럴 경우 후사라고 할 수 없습니까? 그리고 부모가 모두 죽은 경우에는 후사를 세울 수 없습니까? -황종해-
[답] 후사를 세울 경우 반드시 임금의 명령을 듣는 것이 바로 법이다. 부모가 모두 죽었을 경우 더러는 문장(門長)이 건의하기도 한다.
후사를 세운 뒤에 아들이 태어난 경우에 대하여
[문] 아들이 없어서 후사를 세웠는데 아들이 태어났을 경우 어떻게 처리하여야 합니까? -송준길-
[답] 옛사람들이 시행한 경우도 역시 각기 다르므로, 예율(禮律)과 사세(事勢)를 참작하여 처리하여야 한다. 그러나 호 문정공(胡文定公 호안국(胡安國))이 시행한 사례가 필경 옳은 듯하다.
《통전》에 의하면, 한(漢)나라 제갈량(諸葛亮)이 아들이 없어서 형 제갈근(諸葛瑾)의 아들 교(喬)를 데려다 아들을 삼았는데, 교의 본래 자(字)는 중신(仲愼)이었다. 그 뒤 제갈량이 아들 첨(瞻)을 두었으나 교로 적자를 삼았다. 이 때문에 교의 자를 백송(伯松)으로 고쳤다. 교가 죽은 뒤에 제갈각(諸葛恪)은 사형을 받아 죽어서 후사가 끊어지고 제갈량은 이미 후사를 두었으므로 교의 아들 거(擧)를 보내어 다시 제갈근의 제사를 받들도록 하였다. ○ 진(晉)나라 하순(賀循)은 조카 굉(紘)을 데려다 아들을 삼았다가 뒤늦게 아들을 낳자 굉을 본가로 돌려보냈다. ○ 《송조명신언행록(宋朝名臣言行錄)》의 호인전(胡寅傳)에는 문정공(文定公)의 장자(長子)로 되어 있고, 《주자대전》에는 시랑(侍郞) 호명중(胡明仲) 공이 계부(季父)의 후사로 출계(出系)한 것으로 되어 있다. -살피건대, 호 문정공이 형의 아들 인(寅)을 데려다 아들로 삼았는데, 뒤에 아들 영(寧)과 굉(宏)을 낳았지만 끝까지 인으로 후사를 삼았다. ○ 우리나라의 경우, 가정(嘉靖) 계축년(1553, 명종8)의 수교(受敎)에, 후사를 세운 뒤에 친아들이 태어난 경우 친아들이 제사를 받들고 입후(立後)한 아들은 중자(衆子)로 논하여 입후를 파의(罷議)하는 혼란이 없도록 하였는데, 이듬해인 갑인년(1554, 명종9)에 대신(大臣)의 건의로 남의 후사로 나갔던 자가 본생부모의 후사가 끊어졌을 경우 법대로 본가로 돌려보내고 입후하였던 집에서는 후사를 다시 세우도록 허락하여 주며, 만약 그 부모가 이미 다 죽어서 다시 입후할 수 없는 경우라면 방친(旁親)의 예(例)에 따라 반부(班祔)하도록 하였다. -인조(仁祖) 때 완성군(完城君) 최명길(崔鳴吉)이 입후하였다가 뒤에 아들을 낳았는데, 호 문정공의 고사에 따라 입후한 아들로 장자를 삼을 것을 계청(啓請)하자 윤허하였다. 이 사실은 선군자(先君子)가 세상을 마친 뒤의 일이지만 《수교집록(受敎輯錄)》에 이처럼 되어 있기 때문에 첨부하는 것이다. 아래 조항도 마찬가지이다.
장자가 후사를 세웠을 경우 차자는 제사를 받들지 않아야 하는 일에 대하여
[문] 장자가 후사가 없어서 종형제나 재종형제의 아들을 데려다 후사로 삼았을 경우, 국전(國典)에 보이기를 단지 장자의 후사만을 삼고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제사는 친아들에게로 물려준다고 하였습니다. 이것도 예경(禮經)에 근거가 있는 것입니까? -송준길-
[답] 장자의 후사만을 삼고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제사는 받들 수 없게 한다면 예법이 크게 훼손된다. 이 법이 근세 어느 한 상신(相臣)의 건의에서 나온 것인데, 그만 구실거리가 되어 바꿀 수 없는 예경의 법을 버리게 되었으니, 안타까운 노릇이다. 《율곡집》 속의 ‘입후의(立後議)’를 참고하면 될 것이다.
안빈(安嬪) -중종(中宗)의 후궁- 의 장자는 익양군(益陽君)이고 차자는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인데, 익양군이 아들이 없어서 흥녕군(興寧君)으로 후사를 삼자, 선조(宣祖) 때의 상신 심수경(沈守慶)이 건의하기를, 대원군의 장자 하원군(河原君)으로 안빈의 제사를 받들도록 해야 한다고 한 것이 그 뒤에 마침내 잘못된 선례가 되었다고 한다. -인조 때 예조 판서 최명길이 예경을 근거로 하여 입후한 아들도 조상의 제사를 생가의 제사처럼 받들도록 할 것을 건의하였는데, 이를 윤허하므로 드디어 정식(定式)이 되었다.
형이 아들 없이 죽어 아우가 제사를 받들게 되었는데, 나중에 형의 아내가 후사를 세우는 일에 대하여
[문] 고애(孤哀)가 불행하여 부모가 세상을 마치기 전에 백형과 중형이 먼저 죽고 4년 뒤에 선군께서 세상을 뜨셨습니다. 친구들이 모두 고애가 주상(主喪)을 하고 신주의 방제(旁題)도 고애의 이름을 쓰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3년 뒤에 조비(祖妣)께서 세상을 마치셔서 고애가 또 상복을 입고 신주에 쓰는 이름 역시 그렇게 썼습니다. 지금 큰형수가 고애의 아들이나 아우의 아들을 데려다 후사를 삼아서 대종(大宗)을 받들려고 하니, 고애와 아우로서는 당연히 그 말을 들어야 하겠습니다. 그럼에도 줄곧 원혐(遠嫌)을 내세워 주저하고만 있을 수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가르쳐주십시오. -정랑(正郞) 조희일(趙希逸)-
[답] 고례(古禮)에는 반드시 장손(長孫)으로 승중(承重)을 하게 되어 있으나, 송(宋)나라 때에 와서 장자가 죽을 경우 조카를 쓰지 않고 차자를 썼으니, 이는 고례가 아니다. 명도(明道 정호(程顥))가 죽은 뒤에 이천(伊川 정이(程頤))이 태중대부(太中大夫 명도ㆍ이천의 아버지 정향(程珦))의 제사를 주관한 것도 당시의 제도이기는 하나, 예법에는 맞지 않는 일이다. 그 뒤에 명도의 손자 앙(昻)과 제자 후사성(侯師聖) 등이 종사(宗祀)를 논의한 사실이 《이정전서(二程全書)》에 보인다. 우리나라는 예전의 종법만을 썼으니, 장자의 아내가 후사를 세울 경우 이는 아들이 없다가 아들을 둔 것이므로 제사를 받들어야 한다. 또다시 생각하여 보면 장자의 아내가 아들이 없어서 이미 차자에게로 종사(宗祀)를 옮긴 이상, 이제 와서 후사를 세운다면 반드시 분쟁의 소지가 있을 터인데, 국전(國典)의 구례(舊禮)는 어떻게 되어 있는지 모르겠다.
《이정전서》에 이르기를 “이천 선생이 숨을 거두기 직전에 단중(端中)을 돌아보며, ‘아들을 세우라.’ 하였으니, 이는 적자(適子) 단언(端彦)을 가리킨 것이었다. 말이 끝나자 숨을 거두었는데, 탈상(脫喪)을 하고 나서 명도의 장손 앙이 자신이 후사가 되어야 한다고 하는 것을 후사성이 안 된다고 하자, 앙이 ‘명도는 사당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인가?’라고 반문하니, 후사성이 답하기를 ‘내가 감히 사심을 가진 것이 아니다. 명도 선생께서 태중대부보다 먼저 세상을 마치셨으므로, 태중대부의 제사를 주관하신 분은 이천이신데, 지금 이천을 계승한 자가 단언이 아니고 누구이겠는가.’ 하였다. 의논이 비로소 결정되자, 어떤 이가 후사성에게 말하기를 ‘명도 선생이 이미 죽었는데도 그의 장자가 입후하지 못한다는 말인가?’ 하니, 후사성이 답하기를 ‘사당을 세운 것은 이천에게서 시작되었고, 또 명도의 장자는 죽은 지가 이미 오래다. 더구나 예전에 제후(諸侯)가 적통을 빼앗고 서성(庶姓)이 적통을 빼앗었다는 설도 있으니, 시의(時宜)에 맞추어 예(禮)를 적용할 수도 있다. 또 더구나 사당을 세운 것이 이천에게서 시작된 경우이겠는가.’ 하였다.” 하였다. -윤자(尹子)가 직접 주석하기를 “이 한 단락은 착오이다.” 하였다. ○ 《주자어류》에서 어떤 사람이 묻기를 “이천이 적통을 빼앗었다는 말은 예경(禮經)에 맞지 않습니다. 이것이 당시에 유명(遺命)이 있어서입니까, 아니면 후인들이 그렇게 한 것입니까?” 하니, 주자가 대답하기를 “그것이 어떻게 된 것인지 나 역시 모르겠으나, 다만 후사성이 그렇게 말한 것이라고 한다.” 하였고, 또 묻기를 “그 말이 맞습니까?” 하니, 대답하기를 “역시 어떻게 된 것인지 모르겠다.” 하였다. ○ 유정부(游定夫 유작(游酢))가 지은 ‘명도선생행장후(明道先生行狀後)’에 이르기를 “호주 종사(鄠州從事)가 아버지를 먼저 여의고 나서 할머니의 상을 당하였는데, 자신이 적손(適孫)이면서도 승중(承重)을 하지 못하자, 선생이 국전(國典)을 유추하여 알려 주었다. 이것이 비로소 천하의 상습(常習)이 되었다.” 하였다. -살피건대, 명도가 이미 고법(古法)을 준행하였는데도 이천이 이행하지 않았다는 것도 의문스럽다. 태중대부가 어찌 국제(國制)가 그렇다 하여 이천에게 제사를 주관하도록 유명(遺命)을 하였겠는가.
독자(獨子)가 대종(大宗)의 후사가 되는 일에 대하여
[문] 속설에 장자가 후사가 없을 경우 차자는 비록 독자를 두었더라도 장자의 후사를 이어 주어야 한다고 하나, 이것이 예경이나 국법에 모두 없으니 너무 동떨어진 말이 아니겠습니까? -황종해-
[답] 장자가 후사가 없을 경우 《의례》 및 국전에 모두 동종(同宗)의 지자(支子)로 후사를 삼게 되어 있기 때문에 이전부터 반드시 지자로 후사를 삼아 왔던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 어느 재신(宰臣)이 《통전》의 설을 인용하여 그의 아우의 독자로 후사를 삼아 줄 것을 진소(陳訴)한 뒤로 그만 규례가 된 것이다.
《통전》에 이르기를 “한(漢)나라 석거(石渠)의 논의에 ‘대종이 후사가 없고 종족 중 서자(庶子)도 없을 경우 자신이 하나의 적자(適子)를 두었더라도 마땅히 아버지의 제사를 끊고 대종의 후사를 이어 주어야 하는가?’ 하니, 대성(戴聖)이 말하기를 ‘대종의 후사는 끊을 수 없으니, 적자가 남의 후사가 될 수 없다는 말은 서자를 제쳐 두고 후사로 갈 수 없다는 말이다. 종족 중 서자도 없다면 당연히 아버지의 제사를 끊고서라도 대종의 후사로 가야 한다.’ 하였고, 위전경(魏田瓊)이 말하기를 ‘장자가 대종의 후사가 될 경우 종자(宗子)의 예가 성립되므로, 제부(諸父)에게 후사가 없으면 종가에서 제사를 지내다가 나중에 그의 서자로 제부의 후사를 삼아서 다시 그 아버지의 제사를 받들도록 한다.’ 하였다.” 하였다. ○ 정숙자(程叔子 정이(程頤))가 말하기를 “예에 비록 장자는 남의 후사가 될 수 없으나, 만약 형제가 없고 또 할아버지의 종계(宗系)가 끊어질 형편이라면 역시 할아버지의 후사를 이어야 한다. 예전(禮典)에 비록 언급하지 않았더라도 시의에 맞추어 예를 적용할 수 있는 것이다.” 하였다. -이상은 바로 장자로 후사를 삼을 수 있다는 증거이다. 그러나 예경(禮經)과는 같지 않다.
차손(次孫)이 승중(承重)을 하고 죽은 뒤에 적손의 아내 및 차손의 아내가 모두 후사를 세우는 일에 대하여
[문] 적손은 할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에 먼저 죽어서 아들이 없고 그의 아우는 할아버지의 복(服)을 입고 나서 또 아들 없이 죽었는데, 지금 두 아내가 각기 후사를 세우려고 합니다. 누가 승중을 하여야 합니까? -지사 신식-
[답] 지난해 조희일(趙希逸)이 물어왔기에 답한 것이 있습니다. -앞에 나온 ‘형이 아들 없이 죽어 아우가 제사를 받들게 되었는데, 나중에 형의 아내가 후사를 세우는 일’ 조항에 나온다.
본종(本宗)으로 되돌아가는 일에 대하여
[문] 남의 후사로 나간 자가 본생형제(本生兄弟)가 모두 후사가 없을 경우 후사를 파기하고 본종으로 되돌아가야 합니까?
[답] 후사로 나간 자가 본생친(本生親)이 후사가 없을 경우 두 집안의 아버지가 서로 상의하여 본종으로 돌려보내는 것은 예전에도 그러한 예가 있으나, 두 집안의 아버지가 먼저 죽었을 경우는 아들이 마음대로 후사를 파기할 수 없기 때문에 본생친을 반부(班祔)해야 한다.
양첩(良妾)의 아들이 제사를 받드는 일에 대하여
[문] 적자가 없는 경우에 천첩(賤妾)의 아들이 비록 나이가 더 많고 또 이미 양인(良人)의 신분이 되었더라도 굳이 양첩의 아들로 제사를 받들어야 합니까? -황종해-
[답] 예율(禮律)에는 그러하다.
본생친(本生親)의 칭호(稱號)에 대하여
[문] 남의 후사로 나간 자가 본생부모의 상(喪)에 있어 부득이 제사를 주관할 경우 축사(祝辭)에 칭호를 무어라고 써야 합니까? -강석기(姜碩期)-
[답] 당연히 정자와 주자의 말에 의거하여 부모는 ‘현백숙부(顯伯叔父)’로 쓰고 자신은 종자(從子)로 일컬어야 한다.
이천(伊川)이 중승(中丞) 팽사영(彭思永)을 대신하여 복왕(濮王 송나라 영종(英宗)의 아버지)의 칭호를 논한 상소(上疏)에서 말하기를 “복왕은 폐하를 낳으신 아버지로서 친속으로 치면 폐하께 백부가 되고 폐하는 양자를 나간 복왕의 아들로서 친속으로 치면 조카가 되니, 이는 천지(天地)의 대의(大義)이자 사람의 대륜(大倫)이며, 마치 하늘과 땅의 위치와 같아서 고치거나 바꿀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하였다. ○ 어떤 사람이 선유(先儒)들도 복왕의 칭호를 두고 논쟁한 점에 대해 질문하자, 주자가 대답하기를 “이는 단지 어버이로 일컬은 것만을 가지고 이해한 것인데, 당시에도 여 태자(戾太子 한 무제(漢武帝)의 아들)의 고사를 인용하여 황고(皇考)로 일컫고자 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하였다. 또 묻기를 “그럼 황고로 일컫는 것이 옳습니까?” 하니, 주자가 답하기를 “옳지는 않다.” 하였다. -《주자어류》- ○ 주자가 유평(劉玶)을 대신하여 지은 유평의 형 유공(劉珙)의 행장(行狀) 맨 끝에 이르기를 “종제(從弟) 평(玶)은 삼가 행장을 씁니다.” 하였다. 이는 공과 평은 곧 자우(子羽)의 아들인데도 평이 자우의 아우 자휘(子翬)의 후사로 나갔기 때문에 주자가 종제로 일컬은 것이다.
[문] 후사로 나간 자가 본생친에게 생시에 이미 백ㆍ숙부로 대접하지 않았는데 유독 죽은 뒤에 와서 어떻게 백ㆍ숙부로 일컬을 수 있겠습니까. 비록 정자가 복왕의 칭호를 논한 글에 근거할 만한 말이 있기는 하나, 오늘날에 시행하기는 온당치 못한 듯합니다. -강석기-
[답] 명칭이 없을 수도 없고 또 아버지로 일컬을 수도 없고 보면, 예법상 당연히 그렇게 하여야 한다. 다시 다른 의논은 용납되지 않는다.
반부(班祔)
승중(承重)을 한 장자가 후사가 없어서 반부하는 일에 대하여
[문] 장자가 후사가 없어서 차자의 아들이 제사를 받들 경우, 장자는 제사를 받들 사람이 없게 되어 동벽(東壁)의 부위(祔位)에 앉히는데, 이는 장자가 곧 지난날 제사를 받든 종자(宗子)로서 오늘은 동벽위 부위에 앉은 것입니다. 만약 노(魯)나라 민공(閔公)과 희공(僖公)의 위차(位次)로 말한다면 정통을 먼저 이어받은 자는 비록 아우라 하더라도 위차가 형의 위가 될 수 있는데, 더구나 형으로서 종자가 된 자가 도리어 제사도 받들어 보지 않은 아우의 밑에 있다는 것은 너무도 정리(情理)에 거리끼는 일입니다. 만약 이로 인하여 후사가 없는 형을 제사를 받들고 있는 자의 아버지의 위에 올려놓는다면, 사(士)의 예가 제후(諸侯)의 예와 다르게 됩니다. 어떻게 하여야 정의와 예법에 어긋나지 않겠습니까? -황종해-
[답] 보내 준 질문 내용은 매우 좋다. 그러나 장자가 후사가 없이 죽어서 차자(次子)가 승중(承重)을 하였을 경우, 장자가 승중을 한 적이 있더라도 반부하여야 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만약 제왕(帝王)의 집이라면 비록 숙부로서 조카를 계승하고 형으로서 아우를 계승하여도 역시 부자(父子)의 도(道 명분)가 있겠으나, 오늘날 사삿집에서 이런 사례를 끌어다 증거를 삼을 수는 없다.
반부의 배치에 대하여
[문] 아내의 상(喪)에는 신주를 별실(別室)에 간직해야 된다고 한 고씨(高氏)의 설을 호씨(胡氏)가 비난하면서 주자(朱子)가 내자(內子)의 상에 신주를 조비(祖妣)의 신주 곁에 붙여 놓기만 한 것을 증거로 끌어대었습니다. 주자가 만인걸(萬人傑)의 아내의 상 문목(問目)에 답한 편지에서도 “조모의 감실(龕室)에 붙여 놓고 계절에 따라 동상(東廂)에서 제사한다.” 하였고, 또 《가례》 반부 조항 소주(小註)에서도 선생께서 말하기를 “형수와 제수, 아내와 며느리는 조모의 곁에 붙여 놓는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큰 명절을 만날 경우 조선(祖先)에게 청하여 마루에서 제사를 지내되, 방친(旁親)을 부제(祔祭)할 경우 남자는 오른쪽에 모시고 여자는 왼쪽에 모시어 소목(昭穆)의 차례를 따르지 않으며, 사당에 모실 적에는 각기 소목에 따라 붙인다.” 하였습니다. 이상의 몇 조항을 근거로 할 때 모든 부위(祔位)는 다 본 감실 안에 붙여 모신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없는 사실입니다. 다만 거리끼지 않을 수 없는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이를테면 본위(本位)에 붙여야 할 후손이 어쩌다 서너 위라도 될 경우 그 많은 신주가 한 감실에 같이 들어가려면 반드시 감실이 좁아서 수용하기 어려울 우려가 있고, 또 주인의 망처(亡妻)가 있어서 이미 조비의 곁에 붙여 놓았는 데다 또 형제가 있어서 조고(祖考)의 곁에 붙인다면 이는 형수와 시동생이 한 감실에 같이 들어가게 됩니다. 아무리 동쪽과 서쪽으로 따로 앉힌다 하더라도 살아 있는 사람의 사리로 말한다면 필경 미안할 것입니다. 그리고 주자가 진돈(陳焞)의 아내의 상 문목에 답한 편지에도 “아내가 먼저 죽은 경우 별묘(別廟)를 하고 아우가 죽어 후사가 없는 경우도 별묘를 하여 각각 한 감실을 만들어야 하지 한데 섞여서는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가례》의 반부 조항과 같지 않아서 의심스럽습니다. 그러나 아우와 아내는 같은 감실에 붙일 수 없다는 뜻만은 분명합니다. 또 말하기를 “반부를 마치고 나서는 가묘(家廟) 곁에다 작은 신위를 설치하여 그 신주를 모시지, 사당 안에다 별도로 신위를 설치할 수는 없다.” 하였는데, 또 《가례》의 대종(大宗)ㆍ소종(小宗) 도식 아래 소주(小註)에 주자가 말하기를 “형수의 경우 딴 곳에 설치한 뒤 그 아들이 사사로이 제사한다.” 하였습니다. 이상의 몇 조항을 근거로 할 때 이 또한 별실에 신주를 간직한다는 논의입니다. 장차 어느 것을 따라야 하겠습니까? -송준길-
[답] 인용한 몇몇 조항은 과연 서로 같지 않다. 그러나 전자의 몇 가지 설이 정론(定論)일 듯하니, 조선(祖先)에게 반부해야만 한다. 비록 형수와 시동생이 같은 감실에 들어가더라도 무슨 혐의가 되겠는가. 이른바 ‘각각 한 감실로 하여야지 한데 섞여서는 안 된다’는 말은 애당초 반부를 일컬은 것은 아니다.
반부의 위차(位次)에 대하여
[문] 부위(祔位)의 제사에 대하여 유씨(劉氏)는 주자의 설을 인용하여 “남자는 왼쪽, 여자는 오른쪽에 신위를 설치한다.” 하였습니다. 시제(時祭)의 경우 부위의 신위는 모두 동서(東序) 또는 양서(兩序)에다 마주 보도록 설치하되, 높은 이가 서쪽에 위치하도록 한다고 하니, 이럴 경우 남녀는 구분되지 않고 다만 높은 이가 서쪽에 위치하는 것뿐입니다. 두 설이 같지 않으니, 지금 어느 설을 따라야 하겠습니까? -송준길-
[답] 과연 두 설이 있기는 하지만 오른쪽에 위치한다는 것은 역시 서쪽을 상위로 삼는다는 뜻이다. 그러나 부부(夫婦)의 신주를 서로 갈라놓는다는 것도 온당치 않으므로 우리 집에서는 뒤의 설을 따른다.
조카의 아버지가 사당을 따로 세우는 일에 대하여
[문] 조카의 아버지가 사당을 따로 세울 경우 조천(祧遷)하여 따라갑니까? 그 뜻을 잘 모르겠습니다. -송준길-
[답] 일찍이 정도가(鄭道可)에게 질문하였더니 운운하여 답하였고, 송구봉(宋龜峯 송익필(宋翼弼))의 설도 상고할 만하다.
정도가가 말하기를 “반부에 있어 조카의 아버지가 살아 있을 경우 조카의 아버지의 집에는 사당이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우선 종자(宗子)의 아버지에게 붙여 두니, 이는 역시 소목(昭穆)의 순서를 따른 것이다. 그러나 조카의 아버지가 죽어서 사당을 세울 경우 조카는 또 제집 사당을 놓아두고 종자의 사당에 붙일 수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의 아버지의 사당으로 돌아가 붙이는 것이니, 이는 인정상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인 듯하다.” 하였다. ○ 송구봉이 말하기를 “조카의 아버지는 형제의 항렬이므로, 조카가 후사가 없을 경우 당연히 할아버지에게 붙여야 하나, 할아버지가 아직 살아 있어서 반부할 수 없기 때문에 종가(宗家)의 할아버지 신위에 붙여 놓았다가 할아버지가 죽고 나면 그 아버지가 사당을 세우고서 조천(祧遷)하여 친할아버지를 따르는 것이다. 여기에서 말한 조카의 아버지는 종형제 및 재종형제인데, 만약 친형제라면 자기의 집에 이미 사당이 세워져 있으므로 의당 그 조카를 반부하여야 하니, 어떻게 조천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살피건대, 《가례》의 정형(正衡)의 설도 역시 이러하다.
삼상(三殤)에 신주를 만들어 세우는 일에 대하여
[문] 삼상에도 신주를 만들어 세웁니까?
상상(殤喪)에 우제(虞祭)를 마치고 나서 반부하는 일에 대하여
[문] 상상에 우제를 마치고 나서 반부합니까?
[답] 운운하였다. -모두 뒤의 상례(喪禮)의 상상 조항에 나온다.
삼상(三殤)의 제사에 대하여
[문]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하상(下殤)의 제사는 부모가 세상을 마칠 때까지 지낸다.”라고 하였으나, 지금 세상에서 비록 예를 아는 집이라 하더라도 상상에 신주를 만들어서 반부하는 자가 적습니다. 정자의 말은 끝내 시행할 수 없는 것입니까? -강석기-
[답] 삼상에 신주를 만들어 반부하는 것은 《가례》에 실려 있으나 오늘날 사람들이 스스로 시행하지 않는 것이다. 어찌 시행할 수 없는 것이겠는가.
본생친(本生親)의 신주를, 제사를 주관할 사람이 없을 경우에는 우선 할아버지의 사당에 붙여 두는 일에 대하여
[문] 저의 생부(生父)의 대상(大祥)이 다가왔습니다. 그러나 형수는 후사가 없고 또 먼 곳에 살고 있어서 제사를 받들 수 없습니다. 이를테면 할아버지의 사당에 반부하고서 후사를 세울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어쩌면 옳을 듯합니다. 그러나 이미 후사가 없는 방친(傍親)에 비길 수 없는 일이고 보면 반부한다는 것도 미안한 점이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강석기-
[답] 우선 반부하는 것이 괜찮겠다.
[주D-001]삼상(三殤) : 성년(成年)에 이르지 못하고 죽은 세 가지의 경우, 즉 장상(長殤)ㆍ중상(中殤)ㆍ하상(下殤)을 이른다. 장상은 19세부터 16세까지, 중상은 15세부터 12세까지, 하상은 11세부터 8세까지의 죽음이다.
부(附) 별실 장주(別室藏主)
3대를 제사 지내는 집에서 현손(玄孫)이 승중(承重)을 하고 고조모(高祖母)가 살아 있을 경우 별실에서 고조(高祖)를 제사하는 일에 대하여
[문] 현손이 고조의 승중을 하였어도 국제(國制)를 따라 3대만을 제사할 경우 고조의 상을 마치고 나면 당연히 신주를 묻어야 하나, 고조모가 살아 있을 경우 정리상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송준길-
[답] 정리상 차마 묻지 못한다면 별실에 봉안하는 것이 옳을 듯하다.
후사가 없는 고자매(姑姊妹)의 신주를 별실에서 제사하는 일에 대하여
[문] 고자매로서 후사가 없이 죽어 그 남편 집에 반부할 곳이 없을 경우 형편상 어쩔 수 없이 본종(本宗)에 반부하여야 되겠으나, 남편의 신주는 같이 반부할 수 없을 듯합니다. 어디에서 제사해야 합니까? -송준길-
[답] 별실에서 제사하는 것이 옳을 듯하다.
첩모(妾母)의 제소(祭所) 및 칭호에 대하여
[문] 서자가 제 어머니의 제사를 지낼 때 무슨 칭호를 써서 어느 곳에서 지내야 합니까? 구준(丘濬)의 설에 의하면 “만약 적모(嫡母)가 아들이 없어서 서모의 아들이 제사를 주관한다면 역시 제 어머니를 적모의 곁에 붙여야 한다.”고 합니다. 이 설을 준행하여도 됩니까? -송준길-
[답] 정자와 주자의 설을 참고하면 된다. 첩모와 적모를 어떻게 같이 모실 수 있겠는가. 구준의 설은 예(禮)에 크게 어긋나므로 따를 수 없다.
정자가 말하기를 “서모는 사당에 들어갈 수 없으므로 아들이 사실(私室)에서 제사하여야 한다.” 하였다. -《정씨외서(程氏外書)》- ○ 누가 묻기를 “첩모에 대한 칭호는 어떻게 써야 합니까?” 하니, 주자가 대답하기를 “조심스럽기는 하나, 어머니라 일컬을 수 있을 뿐이지 달리 일컬을 만한 칭호가 없다. 경전(經典)에서 첩모라고만 일컬은 것은 그렇지 않고서는 다른 어머니와 구별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였다. 또 묻기를 “남의 첩모의 상을 조문할 때에는 무어라고 칭하여야 합니까?” 하니, 주자가 대답하기를 “조심스럽기는 하나, 그의 아들이 평소 일컫던 대로 일컬을 수 있을 뿐이다. 어떤 이는 ‘오봉(五峯 호굉(胡宏))이 첩모를 소모(小母)라 일컬었었고 남헌(南軒 장식(張栻))도 그렇게 하였다.’고 하는데, 《이아(爾雅)》에도 소고(小姑)라는 글귀가 있으니, 오봉도 아마 여기에 근본하였을 것이다.” 하였다. -《주자어류》- ○ 누가 묻기를 “아들의 생모(生母)가 죽었을 경우 신주는 무어라 일컬어야 하며, 제사는 어디에서 지내야 합니까?” 하니, 주자가 대답하기를 “오늘날 법의 오복연월편(五服年月篇)에서 모(母) 자 아래의 주에 이르기를 ‘자기를 낳은 자일 경우 다만 어머니라 일컫고 만약 적모를 피하려 한다면 다만 망모(亡母)라 일컫고 비(妣)라고는 일컫지 않아서 구별하는 것이 옳다.’ 하였고, 이천(伊川)은 말하기를 ‘사실(私室)에서 제사한다.’고 하였다.” 하였다. -《주자대전》. 아래도 같다.- ○ 누가 묻기를 “첩모에게 만약 대를 이어 제사를 지낸다면 그 손자는 무어라 일컬어야 하며, 자신은 어떻게 일컬어야 합니까?” 하니, 주자가 대답하기를 “대를 이어 제사를 지내야 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만약 제사를 지낸다면 첩모는 조모라 일컫고 자신은 손자라 일컬어야 함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였다.
신알(晨謁)
주인이 없으면 그 밖의 사람이 혼자서 신알을 할 수 없는 일에 대하여
[문] 신알할 때 만약 자제(子弟)나 질손(姪孫)이 같이 살고 있다면 함께 거행할 수 있습니까? 만약 주인이 유고(有故)하다면 혼자서는 신알을 거행할 수 없습니까? -강석기-
[답] 신알은 주인이 거행하는 예(禮)이므로 주인과 함께 거행하는 것은 괜찮지만, 주인이 없는데 혼자서 거행한다는 것은 안 될 일이다.
출입할 때 반드시 하는 고유
첨례(瞻禮) 때의 창야(唱喏)에 대하여
[문] 첨례의 의식에서 구준의 말에 의하면, 남자는 창야를 하고 여자는 사배(四拜)를 한다고 하는데, 오늘날도 이같이 해야 합니까? 어떤 이는 창야를 읍(揖)하는 것으로 혹은 읍하는 소리로 훈을 달았습니다. 어느 것이 옳습니까? -황종해-
[답] 첨례는 오늘날의 읍이고, 창야는 읍을 할 때 내는 소리이다.
중국 사신 허국(許國)이 말하기를 “야(喏) 자는 《한서(漢書)》에 나오는데, 두 손을 아래로 드리우고 읍을 하는 모양이다.” 하였다. ○ 김하서(金河西 김인후(金麟厚))가 말하기를 “喏는 음이 야인데, 읍하는 것이다.” 하였다. 하연천(河燕泉)이 말하기를 “읍을 하면서 ‘창야’라고 서로 외치는 것은 아마 옛사람이 서로 읍을 할 적에 반드시 이 소리를 내어야 하지, 참회(參會)하는 자리에서 아무 말도 없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니, 창야란 헛기침을 길게 내는 소리이다. 송나라 사람이 오랑캐 나라의 사실을 기록하면서, 오랑캐의 읍은 소리를 내지 않는다 하여 ‘벙어리 읍[啞揖]’이라고 이름하므로 뭇사람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거란(契丹) 사람도 손을 가슴 앞으로 올리고 소리는 내지 않는데, 이를 일러 상읍(相揖)이라 하며, 송나라 사람들이 괴이쩍게 여겼으니, 송나라 이전에는 중국 사람들이 읍을 할 때 소리를 내었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 명나라가 원나라를 이은 이후로 읍을 할 적에 소리를 내지 않은 지가 오래이다. 그러나 창야라는 명칭만은 그래도 남아 있어서 관부(官府)에서 공좌(公座)에 오르고 하례(下隸)들이 아문(衙門)에 배열해 설 때 여전히 소리를 길게 뽑으며 읍이라고 한다. 이것이 어찌 창야를 이름이 아니겠는가. 이는 참으로 근본이 있는 것이다.” 하였다. -《가례회성(家禮會成)》-
참례(參禮)
두 줄로 늘어서는 일에 대하여
[문] 사당서립도(祠堂序立圖)는 《가례》의 구도(舊圖)에만 의거하여 그린 것인데, 존형(尊兄)께서 잘못되었다고 하니,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설과 동지의 참알 조항의 주를 상고해 보니, 주인이 제부(諸父)와 제형(諸兄)이 있을 경우 특별히 주인의 오른쪽에 제위(祭位)를 마련하되 조금 앞으로 나오게 하여 두 줄로 한다고 하였습니다. 존형의 소견은 조금 앞이라는 말에 무게를 두고 두 줄에 대한 뜻은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처럼 본 것입니다. 두 줄이란 두 줄로 제위를 마련하는 것을 말하는데, 주인이 아무리 높기로서니 어찌 감히 제형의 위에 설 수 있겠습니까. 결코 감히 그럴 수는 없기 때문에 특별히 두 줄의 제도를 만든 것입니다. 주부(主婦)가 시고모와 시누이에게 있어서도 역시 이와 같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인의 뒤이니 주부의 뒤이니 하는 것이 어찌 꼭 배와 등이 서로 닿고 나서야 뒤라고 말하겠습니까. 무릇 뒷줄에 있는 것은 다 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가례》의 구도에도 이와 같이 되어 있고 《가례의절》의 서립도(序立圖)에도 역시 이와 같이 되어 있습니다. 어찌 꼭 다 잘못되었겠습니까. 《가례의절》의 도에 형과 아우 두 줄의 사이 서쪽에 따로 주인의 제위를 만든 것이 바로 조금 앞, 조금 뒤의 뜻에 꼭 들어맞는 것입니다. 형의 생각에는 형과 아우는 당연히 한 줄로 만들어야지 두 줄로 나누어서 만드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보기 때문에 이런 말씀을 한 것이나, 두 줄로 만드는 것은 형편상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입니다. 다시 한번 상고하여 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지사 신식-
[답] 이른바 두 줄이란 제부(諸父)는 딴 줄로 하고 형제의 경우 조금 앞과 조금 뒤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두 줄로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영공(令公)의 말과 같이 여러 형들을 한 줄로 잡고 주인을 한 줄로 잡고, 여러 아우들을 또 한 줄로 잡는다면 주인과 형제 사이에 어떻게 세 줄을 만들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렇지 않을 듯하니, 《격몽요결(擊蒙要訣)》 서립도를 다시 자세히 상고하여 보십시오.
신주를 모셔 내는 일에 대하여
[문] 무릇 신주를 모셔 낸다는 것은 주신(主身)을 제위(祭位)를 설치한 곳으로 모셔 내는 것인데, 세속에서 제사를 지낼 때에 주독(主櫝)만을 열고 주신은 꺼내지 않으니, 이는 잘못된 풍습에서 그렇게 된 것입니까? -강석기-
[답] 신주를 모셔 냄이란 주독 밖으로 모셔 내는 것이다. 부제(祔祭)와 시제(時祭) 조항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가례의절》의 사배(四拜)에 대하여
[문] 《가례의절》에 배례(拜禮)는 네 번을 법도로 하였는데, 그 뜻은 어디에 근거한 것입니까? -강석기-
[답] 구준이 주장하는 사배는 혹시 그 고장의 풍속에 시행한 예인지도 모르겠다. 마땅히 《가례》의 재배(再拜)를 따라야 할 것이다.
퇴계가 말하기를 “《정씨유서(程氏遺書)》에 ‘가제(家祭)에는 모두 재배하는 것으로 예를 삼아야 한다. 오늘날 사람들이 산 사람을 섬김에 있어 사배를 할 것을 재배하는 것으로 예를 삼고 있는 것은 아마 중간에 문안하는 일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죽은 사람도 산 사람처럼 섬겨야 하는만큼, 성의로 보아서는 당연히 이렇게 해야 하지만, 이를테면 죽은 이에게 문안을 드린다는 것은 도리어 신(神)을 번거롭히는 결과가 된다. 만약 제사에서처럼 축(祝)ㆍ고유(告由)ㆍ사신(辭神) 등의 절차가 있다면 당연히 사배ㆍ육배(六拜)의 예가 있어야 한다.’ 하였다. 이를 근거로 미루어 본다면 사배ㆍ육배의 의리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지금 《가례》에 축ㆍ고유 등의 절차를 막론하고 모두 재배로 되어 있는데, 경산(瓊山)은 또 모두 사배를 해야 한다고 하니, 그것이 또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하였다.
선강 후참(先降後參)과 선참 후강(先參後降)의 구별에 대하여
[문] 《가례》에 참례(參禮)의 경우 강신(降神)을 먼저 하고 일반 제사의 경우 참신(參神)을 먼저 한다고 하였으니, 그 뜻을 모르겠습니다. 《가례》 및 《상례비요(喪禮備要)》의 묘제(墓祭)에는 모두 참신을 먼저 하고 강신을 나중에 하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격몽요결》에는 강신을 먼저 하고 참신을 나중에 하는 것으로 되어 있으니, 또한 무슨 의미입니까? 우제(虞祭)에는 참신의 절차가 없는데, 과연 늘상 궤연(几筵)을 모시고 있기 때문에 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면 사신(辭神) 역시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니,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담제(禫祭)에서는 이미 부묘(祔廟)를 한 이상 참신의 절차가 있어야 할 듯한데 역시 빠져 있으니, 어째서입니까? -송준길-
[답] 무릇 신주를 모셔 내지 않고 본래의 곳에 그대로 두었다면 강신을 먼저 하고 참신을 나중에 하니, 이를테면 삭망(朔望)의 참례(參禮) 따위가 바로 이것이다. 신위는 설치하되 신주가 없을 경우에는 역시 강신을 먼저 하고 참신을 나중에 하니, 이를테면 시조(始祖)와 선조(先祖)를 제사할 때와 지방(紙榜)을 쓸 경우가 바로 이것이다. 만약 신주를 바깥으로 모셔 낸다면 아무 의식도 없이 신주를 볼 수 없는만큼, 반드시 절을 하고 엄숙히 해야 하니, 이를테면 시제(時祭)와 기제(忌祭)의 경우가 바로 이것이다. 묘제와 담제에서는 과연 그대의 의견과 같이 참신을 한다면, 이는 의심스러운 일이다. 상중(喪中)에는 비록 늘 모시고 있다는 의리가 있다 하더라도 제사를 마치고 나서의 사신(辭神)은 하지 않을 수 없다. 《상례비요》의 묘제 제도는 《격몽요결》에 의거하여 강신을 먼저 하고 참신을 나중에 하도록 하려다가 《가례》를 고치기가 미안스러워서 그대로 쓴 것이다. 퇴계가 말하기를 “참례의 경우 본래 참신을 하기 위하여 설정한 것인데, 만약 참신을 먼저 한다면 강신 후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게 되기 때문에 강신을 먼저 하는 것이다. 제사의 경우 강신을 한 뒤에도 헌작(獻爵) 등의 허다한 예절이 있으므로 참신을 먼저 하는 것이다.” 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과연 옳은지는 알지 못하겠다. 송구봉(宋龜峯)이 율곡(栗谷)에게 답한 편지에 “묘제에서의 참신과 강신은 이미 주자의 《가례》에 설정되어 있는 것이므로 갑자기 고치려 한다는 것은 합당치 않을 듯하다. 또 더구나 예의 본뜻을 알기 어려운 경우이겠는가.” 하였다.
난삼(襴衫)에 대하여
[문] 난삼에 대하여 묻습니다.
[답] 지난해 선군(先君)을 따라 북경(北京)에 갔다가 국자감(國子監)의 유생(儒生)이 유복(儒服)을 입고 있는 것을 본바, 남색 견(絹)으로 상의를 만들고 너비 네다섯 치의 청흑색 견으로 옷깃 및 소매끝과 자락끝을 장식하고 깃은 둥글었는데, 이를 난삼이라고 하였다.
《사물기원(事物記原)》 당지(唐志)에 이르기를 “마주(馬周)가 삼대(三代)의 삼베 심의(深衣)에다 난(襴)과 거(裾)를 달아서 난삼이라고 이름하여 상사(上士)들이 입는 옷을 삼았는데, 지금 거자(擧子)들이 입는 옷이다.” 하였다. ○ 《천중기(天中記)》에 이르기를 “당(唐)나라 태위(太尉) 장손무기(長孫無忌)가 의론하기를 ‘포(袍)를 입을 경우 아랫단에 난(襴)을 대되 분홍색ㆍ자주색ㆍ녹색은 모두 품계에 맞도록 하고, 서인(庶人)은 흰색으로 대도록 하소서.’ 하였다.” 하였다. ○ 명도(明道)가 말하기를 “소요부(卲堯夫 소옹(邵雍))가 처음에 이정지(李挺之)에게서 글을 배웠는데, 사도(師道)가 하도 엄하여 비록 어느 야점(野店)에서라도 밥을 먹을 적에는 반드시 난삼을 입고, 앉을 적에는 반드시 절을 하였다.” 하였다. ○ 주자의 ‘군신복의(君臣服議)’에 이르기를 “직령(直領)을 하는 것은 고례(古禮)인데, 위에 의(衣)가 있고 아래에 상(裳)이 있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상령(上領)에 난(襴)이 있는 것은 금례(今禮)인데, 오늘날의 공복(公服)에서 상의(上衣)와 하난(下襴)이 서로 연결되어 옷깃과 떨어지지 않는 것도 바로 이것이다.” 하였다. ○ 《대명집례(大明集禮)》에 이르기를 “송나라의 공복은 곡령(曲領)과 대수(大袖)에다 아래에 횡란(橫襴)을 달았는데, 홍무(洪武) 24년에 생원(生員)의 건복(巾服)을 제정하면서 옥색 견포(絹布)로 소매가 넓은 난삼(襴衫)을 만들어 입었다.” 하였다.
모자(帽子)에 대하여
[문] 모자에 대하여 묻습니다.
[답] 제가(諸家)의 설을 상고하면 될 것이다.
《천중기》 석명(釋名)에 이르기를 “모(帽)란 씌우는 것이다.” 하였다. ○ 구경산(丘瓊山)이 말하기를 “지금 세상의 모자가 두 등급이 있는데, 이른바 대모(大帽)란 곧 입자(笠子)로, 비와 해를 가리는 데 쓰는 것이고, 이른바 소모(小帽)란 사(紗)나 나(羅), 또는 단(緞)으로 만든다. 이 두 모자 외에 별도로 딴 모자는 없다.” 하였다.
가계(假髻)와 특계(特髻)에 대하여
[문] 가계와 특계에 대하여 묻습니다.
[답] 가계란 머리를 땋아서 만드는 것으로, 고시(古詩)에 이르기를 “동쪽 집 부인의 머리는 땅바닥에 닿는데, 가계를 한 미인이 도리어 사랑을 받네.[東家婦人髮委地假髻美人還承寵]”라고 하였다. 가계에 수식(首飾)이 없는 것을 특계라 한다.
《이의실록(二儀實錄)》에 이르기를 “수인씨(燧人氏)의 부인이 머리를 묶어 상투[髻]를 만들었다. 계(髻)란 잇는다는 뜻으로, 여자는 반드시 남을 잇는 바가 있다는 말이다.” 하였다. ○ 《주례(周禮)》 ‘부편차(副編次)’의 주에 이르기를 “부(副)란 머리를 덮어서 꾸미는 것으로 오늘날의 보요(步搖)와 같은데, 이것을 하고는 왕제(王祭)에 종사하며, 편(編)이란 머리를 땋아서 만드는 것으로 오늘날의 가계(假紒)와 같은데, 이것을 하고는 양잠(養蠶)을 하며, 차(次)란 머리를 장단(長短)의 차례대로 땋아서 만드는 것으로 오늘날의 피체(髲鬄)와 같은데, 이것을 하고는 왕을 뵙는다.” 하였다. -모두 왕후(王后)의 수복(首服)이다.
속절(俗節)
사시(四時)의 묘제 때에 가묘(家廟)에도 함께 참례(參禮)하는 일에 대하여
[문] 사시의 묘제 때에 가묘에도 참배를 합니까? -송준길-
[답] 묘제와 가묘는 장소가 이미 다르므로 비록 병행하여 거행하더라도 괜찮을 것이다.
회재(晦齋)가 말하기를 “세속에서 정조(正朝)ㆍ한식(寒食)ㆍ단오(端午)ㆍ추석(秋夕)에 모두 묘소에 나아가 참배를 하고 청소를 하니, 오늘날 일방적으로 폐지할 수는 없다. 이날 새벽에 사당에 나아가 음식물을 올리고 이어 묘소에 나아가 절을 올리면 될 것이다.” 하였다.
생신(生辰)에 대하여
[문] 《가례집설(家禮集說)》에 생신ㆍ기신(忌辰)의 설이 있습니다. 시행하는 것이 예(禮)에 맞습니까? 번거로운 것이 될 성도 싶은데,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강석기-
[답] 생신과 기신의 제사는 풍선(馮善)이 창시한 것으로, 퇴계가 잘못이라고 하였는데, 옳은 견해이다.
퇴계가 정도가(鄭道可)에게 답한 편지에 “맹자(孟子)께서 이른바 예 아닌 예라는 것이 이런 유(類)를 두고 한 말인 듯하다.” 하였다.
일이 있을 경우 고유하는 일
증직(贈職)을 뒤에 써야 하는 일에 대하여
[문] 신주에 더러는 증직을 먼저 쓰고 나서 실직(實職)을 쓰고 더러는 실직을 먼저 쓰고 나서 증직을 쓰는데, 어느 것이 옳습니까? -강석기-
[답] 송나라 때에는 실직을 먼저 쓰고 증직을 뒤에 썼으나, 우리나라의 경우 증직을 먼저 쓰고 실직을 뒤에 썼다. 우리 집 선대에서도 그렇게 하였으니, 갑자기 고칠 수는 없다.
노소재(盧蘇齋 노수신(盧守愼))가 묻기를 “증직을 먼저 쓰는 것은 우리나라의 풍속인데, 괜찮겠습니까?” 하니, 퇴계가 대답하기를 “우리나라의 풍속에서 증직을 먼저 쓰는 것은 나라의 은전(恩典)을 우선으로 하는 뜻에서이다. 그러나 벼슬의 고하(高下)와 일의 선후(先後)가 모두 도치되었으므로, 이를 고쳐서 옛 법을 따르려 하면서도 아직 실행하지 못하고 있다.” 하였다.
분황(焚黃)에 대하여
[문] 분황에 황지(黃紙)를 쓰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강석기-
[답] 옛날 제도에 직첩(職牒)을 황지에 썼기 때문에 황지에 등사하여 대신 불사르는 것이나, 지금은 교지(敎旨)를 이미 백지에 쓰고 있으니 비록 백지에 써서 불사르더라도 괜찮을 듯하다.
《쇄쇄록(瑣碎錄)》에 이르기를 “당(唐)나라 상원(上元) 3년 이전에는 칙서(勅書)를 모두 백지에 썼는데, 좀이 많이 먹어서 그 뒤부터는 황지에 썼다.” 하였다. ○ 주자가 이르기를 “황지에 조명(詔命)을 등사하여 펴서 읽고 나서는 불사른다.” 하였다.
고사(告事)에 축문을 쓰지 않기도 하는 일에 대하여
[문] 아들을 낳아서 알현하거나 납채(納采)를 하고 나서 신랑 집에서 왕복한 혼서(婚書)를 사당에 고유할 때 모두 축문을 쓰지 않고 주인이 스스로 고유하니, 이는 말로써 고유를 하는 것입니다. 무슨 뜻에서입니까? -황종해-
[답] 고유할 말이 많을 경우 축판을 쓰고 적을 경우는 말만으로 고유한다. 우리 집은 축판을 함께 쓴다.
효(孝) 자와 현(玄) 자의 뜻에 대하여
[문] 《가례》에서 자칭할 때 효 자를 쓴 것은 무슨 뜻이며, 고사(告事) 조항에 원손(元孫)이라고 일컬은 것과 시제(時祭) 조항에 현손(玄孫)이라고 일컬은 것은 또 무슨 뜻입니까?
[답] 경사(經史)와 구준의 설을 참고하면 될 것이다.
《예기》 교특생(郊特牲)에 이르기를 “제사에서 효자(孝子)ㆍ효손(孝孫)이라 일컫는 것은 그 뜻으로써 일컫는 것이다.” 하고, 그 주에 “제사란 효를 주로 하는 것이므로, 선비의 제사에서 효자ㆍ효손이라 일컫는 것은 제사의 뜻으로써 일컬은 것이다.” 하였다. ○ 송나라 진종(眞宗) 대중상부(大中祥符) 5년 10월에 성조(聖祖)가 연은전(延恩殿)에서 탄강하자 조명(詔命)을 내려 성조의 이름을 현(玄)이라 하고는 곧장 현(玄) 자를 쓰지 못하도록 하였다. 또 이보다 앞서 공자(孔子)를 현성문선왕(玄聖文宣王)에 추봉(追封)한 일이 있는데, 이때에 와서 지성문선왕(至聖文宣王)으로 고쳤으니, 이는 현(玄) 자가 성조의 어휘(御諱)를 범하였기 때문이다. ○ 구준이 말하기를 “송나라 때 현(玄) 자를 피휘하여 모든 경전(經傳) 중의 현(玄) 자를 다 원(元) 자로 고쳤다. 때문에 《가례》에 원손(元孫)이라고 일컬은 것이다. 지금은 다 고쳐서 현(玄) 자를 따랐다.” 하였다. -현(玄)은 친속(親屬)이 분명치 않다는 뜻이고, 손(孫)은 후손이라는 뜻이다.
사당에 불이 났을 때
가묘(家廟)에 불이 나서 신주(神主)를 개조하는 일에 대하여
[문] 가묘에 불이 났을 경우 예법상 어떻게 해야 하며, 신주를 개조할 경우 어느 곳에서 써야 합니까? 어떤 이는 묘소에서 써야 한다고도 하는데, 이 말이 어떠합니까?
[답] 경사(經史)와 퇴계의 설을 상고하면 될 것이다.
《예기》 단궁 하(檀弓下)에 이르기를 “선인의 집에 불이 났을 경우 사흘 동안 곡을 한다. 그러므로 ‘신궁에 불이 났을 때에도 사흘 동안 곡을 하였다.[有焚其先人之室 則三日哭 故曰 新宮火 亦三日哭]’고 한 것이다.” 하였는데, 그 주에 “선인의 집이란 종묘를 말한다. 노(魯)나라 성공(成公) 3년에 선공(宣公)의 사당이 불에 탔으니, 신주가 처음 들어갔기 때문에 신궁이라고 쓴 것이다. 《춘추》에 ‘성공 3년 2월 갑자(甲子)에 신궁에 불이 나니 사흘 동안 곡을 하였다.’고 기록하였는데, 그 주에 ‘예에 들어맞음을 쓴 것이다.’ 하였다. 여기에서 ‘고왈(故曰)’이라 함은 《춘추》의 글을 말한 것이다.” 하였다. ○ 한(漢)나라 선제(宣帝) 감로(甘露) 원년에 태상왕(太上王) 태종(太宗)의 사당에 불이 났는데, 황제가 닷새 동안 소복(素服)을 입었다. ○ 퇴계가 말하기를 “사람이 죽으면 산야(山野)에 매장을 하고 제주(題主)가 끝나면 곧장 서둘러 반혼(返魂)을 하는 것은 신(神)이 생존하던 곳에서 편안히 있도록 하자는 의도에서이다. 하루아침에 신주가 불에 탈 경우 신과 혼이 날려 흩어져서 의지할 곳이 없이 떠돌 것이니, 곧장 전일 신을 모셨던 곳에 허위(虛位)를 설치하고 신주를 고쳐 쓴 다음, 향불을 피우고 제사를 지내어 날려 흩어진 신으로 하여금 다시 신주에 의지하도록 하는 것이 옳다. 전일 이미 집으로 되돌아온 혼이 어떻게 체백(體魄)이 있는 묘소로 다시 가서 의지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체천(遞遷)
최장방(最長房)의 아들이 비록 조천(祧遷)할 대수가 다하지 않았더라도 차장방(次長房)에게로 조천하는 일에 대하여
[문] 무릇 조주(祧主)는 당연히 최장방에게로 옮겨야 하나, 최장방인 자가 죽었을 경우 그의 아들이 비록 조천할 대수가 다하지 않았더라도 문중(門中)에 또 제부(諸父)ㆍ제형(諸兄)이 있으면 그 집으로 천봉(遷奉)하여야 합니까? -황종해-
[답] 그러하다.
최장방에서 조주(祧主)를 고쳐 쓰는 일에 대하여
[문] 조주를 최장방에게로 옮기고 나면 신주도 제사를 주관하는 사람에 맞는 칭호로 고쳐 써야 합니까? 만약 그렇다면 그 절차는 신주를 천봉하는 날에 있어야 하는데, 방제(旁題)에 효증현손(孝曾玄孫)이라 일컫지 않고 증현손이라고만 일컫습니까? -황종해-
[답] 그러하다.
최장방이 조주를 천봉할 수 없을 경우 종자(宗子)가 그대로 별실에 안치하는 일에 대하여
[문] 5대조(代祖)의 신주는 예법상 최장방에게 천봉하여야 하나, 어쩌다 사세가 그렇지 못할 경우 종자의 사당에 그대로 봉안하는 것은 어떠합니까? 만약 5대를 봉사하는 것이 참람하다 하여 감히 그렇게 하지 못할 경우 별실에 봉안하고 제사 때에는 최장방이 제사를 주관하며 제자(諸子)가 대행하도록 하는 것은 어떠합니까? 퇴계는 별실에 봉안하고 봄가을로 제사를 지내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습니다. 이 설이 예에 합당합니까? -강석기-
[답] 최장방이 신주를 천봉할 수 없다면 우선 별실에 봉안하여야 한다. 4대 이후에 가서 다시 가묘(家廟)에 봉안하는 일은 참람하므로 행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를테면 퇴계의 봄가을로 제사를 지낸다는 설은 괜찮을 듯하나, 최장방이 이미 제사를 받들지 않고 있다면 이 사람으로 제사를 주관하도록 하는 것은 옳지 못할 듯하다.
종자가 죽어서 숙부(叔父)가 제사를 받들 경우 조주를 도로 사당으로 모셔 들여야 하는 일에 대하여
[문] 종자가 죽고 적손(嫡孫)이 승중(承重)을 할 경우 조주는 이미 최장방에게로 천봉하였습니다. 적손이 또 죽고 후사가 없어서 종자의 아우가 그 제사를 대신 받들 경우 그 조주는 다시 사당으로 모셔 들여야 합니까? 어떤 이는 이미 조천한 신주는 다시 사당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강석기-
[답] 도로 모셔 들여야 하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최장방이 조주를 제사할 때에 대수가 다한 종자의 위차(位次)에 대하여
[문] 조주를 최장방에게 천봉할 경우 대수가 다한 종자는 중자손(衆子孫)의 반열에 서야 하고 사당에서 서립(序立)하는 차례대로 서지는 못합니까? -황종해-
[답] 대수가 끝나서 사당이 훼철되고 나면 종가(宗家)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원래 있어 온 설이기는 하나, 만약 대종자(大宗子)의 경우라면 같은 예로 볼 수 없을 듯하다. -어떤 이가 “《정씨유서(程氏遺書)》에, ‘무릇 소종(小宗)은 5세(世)를 법을 삼아서 대수가 다하면 분산하나, 만약 고조(高祖)의 아들이 아직 살아 있어서 그 아버지 제사를 지내고자 한다면 현재 종자인 자가 비록 6, 7세가 되더라도 역시 오늘날의 종자를 헤아려 본 뒤에 그 아버지의 제사를 지내니, 종자는 군도(君道)가 있다.’라는 말이 있다.” 하니, 상고해 보아야 한다.
최장방의 뜻에 대하여
[문] 최장방의 방 자는 무슨 뜻입니까?
[답] 주자의 설로 볼 때, 옛사람이 여러 대(代)가 한 대문 안에 같이 살 경우 자손들이 각각 사방(私房)을 두는데, 역시 《의례》에 이른바 남궁(南宮)ㆍ북궁(北宮)과 같은 것이다. 사당에 만약 대수가 다한 신주가 있다면 당연히 조천(祧遷)하여야 하나, 가족 중에 아직 대수가 다하지 않은 자가 있을 경우 그중 최장방인 자에게로 조천하여 제사를 지낸다는 것이다.
《주자어류》에서 주자가 말하기를 “하주(賀州)의 어떤 가문의 경우이다. 대문은 하나를 내어 같이 쓰고 대문 안에 두 채의 행랑을 두어서 이 행랑은 모두 아들이 거처하도록 하였으니, 마치 학사(學舍)나 승방(僧房) 같았다. 사방마다 손님이 찾아올 적이면 각기 음식을 마련하여 가지고 대청으로 올라와서 존장(尊長)을 청하여 술 다섯 잔을 같이 들도록 한 다음, 곧장 사방으로 돌아가서 술자리를 따로 마련하였다고 한다.” 하였다.
서얼(庶孼)이 최장방이 되는 일에 대하여
[문] 서인(庶人)은 고비(考妣)만을 제사 지내는 법이고 보면, 조천(祧遷)할 신주의 자손 중에 서얼이 있어도 최장방으로 볼 수 없습니까? -송준길-
[답] 서얼은 지위가 비록 낮더라도 조선(祖先)에게는 똑같은 자손이다. 정자(程子)의 설에 의거하면 당초 제사를 받들지 못할 의리는 없으나, 다만 적형제(嫡兄弟)가 다 죽고 난 뒤에 제사를 받드는 것은 괜찮을 듯하다.
부(附) 불천위(不遷位)
대수가 다한 조상을 봉훈(封勳)으로 인하여 조천하지 못할 경우 고조(高祖)를 체천해야 하는 일에 대하여
[문] 불천위가 있을 경우 고조는 비록 대수가 다하지 않았더라도 체천해야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는 불천위는 당연히 네 감실 외에 특별히 설치하여야 한다고 하니,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 -강석기-
[답] 네 감실 외에 또 특별히 감실을 설치할 경우 다섯 감실이 되므로, 참람하여 그렇게 할 수 없다. 어떤 이가 묻기를 “시기(始基)의 선조를 네 감실 외에 따로 사당을 세워서 모시고자 하는데 어떠합니까?” 하자, 주자가 답하기를 “오늘날처럼 4대를 제사 지내는 것도 벌써 참람하다.” 하였고, 또 왕 상서(汪尙書)에게 답한 편지에서 “천자(天子)의 삼공(三公)과 주목(州牧)은 외방으로 나가 봉함을 받고 난 뒤에 제후(諸侯)의 예를 써서 다섯 사당을 세울 수 있으므로, 왕조(王朝)에 벼슬한 사람은 그 예가 도리어 압존(壓尊)당하여 시행할 수 없게 됩니다.” 하였다. 오늘날 다섯 사당을 세울 경우 이는 곧 제후의 예를 쓰는 것인데,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우리 종가의 5대 할아버지가 불천위이기 때문에 4대 할아버지는 아직 대수가 다하지 않았는데도 신주를 모셔 내어 별실에 봉안한 것이다. 근래에 듣자니 최백진(崔伯進)이 그의 아버지가 공훈(功勳)에 참여하였다는 이유로 미리 다섯 감실을 세웠다고 하는데, 이는 아주 잘못된 것이다.
맨 처음 공훈에 책봉된 이를 불천위로 할 경우 그다음 공훈에 책봉된 이는 체천하는 일에 대하여
[문] 가묘(家廟)에 다섯 감실을 설치하는 것이 참람되다는 것은 이미 가르침을 들었습니다. 다만 근세의 예를 말한다면 이광악(李光岳)의 3대가 공훈에 책봉되어 모두 불천위가 되었습니다. 세대수가 자꾸 바뀌어 이광악의 증손자에게 이르게 되면 장차 그의 할아버지 제사를 지내지 못할 것이며, 4대가 공훈에 책봉된다고 가정할 경우 또 그의 아버지 제사를 지내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갑(甲)은 말하기를, 맨 처음 공훈에 책봉된 이만 불천위를 하고 그 나머지는 비록 공훈이 있더라도 체천해야 한다고 하고, 을(乙)은 말하기를 국가가 훈신(勳臣)을 우대하여 이미 상제(常制)를 둔 이상 그의 자손된 자로서 감히 마음대로 체천할 수는 없으므로, 불천위는 아무리 많더라도 모두 네 감실 외에 특별히 감실을 설치해야 한다고 합니다. 어느 말이 옳습니까?
[답] 갑의 말이 옳다. 만약 4대가 연달아 공훈에 책봉된 것을 모두 체천하지 않는다면 할아버지와 아버지 역시 사당에 들어갈 수 없을 것이다. 어디에 이런 이치가 있단 말인가.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도 맨 처음 공신이 된 자라고 말하였고 보면, 그 이하는 체천한다는 것을 미루어 알 수 있다. 어떤 이는 《경국대전》의 “별도로 한 실(室)을 세운다.[別立一室]”라는 문구를 가지고 별도로 하나의 사당을 세우고자 하기도 하는데, 묘(廟)와 실(室)이 과연 똑같다는 말인가. 무지망작(無知妄作)하여 7, 8대의 감실을 세우고자 하는 저런 무리들은 말할 것이 못 된다.
《경국대전》의 봉사(奉祀) 조항에 이르기를 “맨 처음 공신이 된 자는 비록 대수가 다하더라도 체천하지 않고 따로 하나의 실을 세운다.” 하였다.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대상(大祥) 조항에도 나온다.
대수가 먼 불천위의 칭호에 대하여
[문] 불천위에 더러는 몇대조라고 쓰고 더러는 시조(始祖)라고 씁니다. 어느 것이 옳습니까? -송준길-
[답] 선조(先祖)라고 쓰는 것이 옳다. 아니면 몇대조라고 써도 좋다. 시조라는 칭호는 태초에 사람을 탄생시킨 시조로 오해할 소지가 있으므로 타당하지 않을 듯하다.
심의(深衣)
심의의 제도에 대하여
[문] 정한강(鄭寒岡 정구(鄭逑))의 편지에 “일찍이 한명길(韓鳴吉)이 보내 준 심의의 제도를 받은바, 내가 만든 변변치 못한 것과 퍽 달랐습니다. 이제 보내 주신 세 벌을 받아 보니 존좌(尊座)께서 만든 것이 비생(鄙生)의 소견과 맞는 듯합니다. 그리고 비생이 만든 하나의 옷은 위아래의 모든 규격이 다 고명(高明)의 것과 일치하지는 않은 듯합니다. 대개 비생이 만든 것은 《가례의절》과 《가례》, 그리고 백운 주씨(白雲朱氏 주자(朱子))의 설을 많이 원용하였는데, 반드시 그렇게 하고 나서야 옷이 심수(深邃)한 뜻을 지니고 입기에도 편리합니다. 주소(註疏)와 제가(諸家)의 설들은 모두 원용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퇴계 선생의 문집 중 김이정(金而精 김취려(金就礪))이 만든 것 역시 의심스러운 데가 없지 않으니, 백세포(白細布)란 삼을 익혀서 짠 것이 맞을 듯하고, 면포(綿布)는 부드럽고 질겨서 옷을 짓기에 적합하므로, 꼭 삼으로 짠 것만을 베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이는 베틀로 짜서 옷을 지을 수 있는 피륙이라면 명주와 비단을 제외하고는 모두 베라고 이름하여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실을 짜서 베를 만든 경우에는 그 가부를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답] 제가 살펴보건대, 정도가(鄭道可)가 논한 심의의 제도는 백운 주씨의 설에서 나온 것이므로, 그 제도가 꼭 옳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가례》 본문의 심의를 마르는 제도가 《예기》 옥조(玉藻) 및 심의(深衣) 편의 것과 틀리지 않아서 역시 심수의 뜻을 잃지 않았는데, 무엇하러 꼭 새로운 해석을 하여 《가례》의 것과 차이를 두려고 하십니까.
상(裳)을 마르는 제도에 대하여
[문] 《예기보주(禮記補註)》의 심의의 상(裳)을 마르는 제도에 이르기를 “베 여섯 폭(幅)이면 너비가 한 발[丈] 석 자 세 치인데, 이를 한 폭씩 대각선으로 엇갈리게 쪼개어 열두 폭으로 만들면, 위로 가는 좁은 끝은 폭마다 일곱 치 서푼 남짓으로 열두 폭의 너비가 도합 여덟 자 여덟 치가 되고, 아래로 가는 넓은 끝은 폭마다 한 자 네 치 여섯 푼 남짓으로 열두 폭의 너비가 도합 한 발 일곱 자 여섯 치가 된다. 여기서 상(裳) 열두 폭의 합봉(合縫) 부분 및 앞자락의 접는 부분 한 치씩을 제하고 나면 허리는 일곱 자 다섯 치가 되고 아랫단은 한 발 여섯 자 세 치가 된다. 이러고 나면 위끝은 세 치가 더 많고 아래끝은 한 자 아홉 치가 더 많은데, 바로 잘라 버린다.” 하였는데, 이 설이 어떠합니까? 그리고 《가례》에 보인 곡거(曲裾)를 마르는 제도도 만약 《가례》의 본 조항 주에 이른바, “좁은 끝은 넓은 끝의 절반이 되어야 한다.”라는 설로 본다면 이는 3분의 1로 좁은 끝을 만들고 3분의 2로 넓은 끝을 만든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좁은 끝은 일곱 치 서 푼 남짓이 되고 넓은 끝은 한 자 네 치 여섯 푼 남짓이 되어서 《예기보주》에 나오는 상(裳)을 마르는 제도와 같습니다. 그러나 이 도(圖)의 주를 보면, “넓은 끝의 너비는 한 자 네 치, 좁은 끝의 너비는 여덟 치이다.”라고 하였으니,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이유태(李惟泰)-
[답] 상(裳) 여섯 폭은 폭마다의 베 너비가 두 자 두 치이므로, 처음 마를 적에 넓은 끝은 한 자 네 치씩 되고 좁은 끝은 여덟 치씩이 된다. 폭마다 양쪽 가장자리 한 치씩을 봉합하는 몫과 잘려 나가는 몫으로 제하고 나면, 넓은 끝은 꼭 한 자 두 치가 되고 좁은 끝은 꼭 여섯 치가 되어 3분의 1이 흡사하다. 여기서 여섯 치가 되는 열두 폭을 위로 허리에 붙이면 꼭 일곱 자 두 치가 되고 한 자 두 치가 되는 열두 폭을 아랫단으로 보내면 꼭 열넉 자 네 치가 되니, 남는 것도 모자라는 것도 없게 되기에 족하다. 《예기》 옥조에 이른바, “심의의 너비는 소매끝의 세 배로 하고 아랫단은 허리의 두 배로 한다.”라고 한 말과 심의 편에 이른바, “허리의 봉합처는 아랫단의 절반으로 한다.”라는 말은 모두 번갈아 제시하여 서로 대비시킨 것이다. 《예기보주》의 천착됨을 말할 것이 무어 있겠는가. 곡거를 마르는 제도의 도(圖) 밑의 주에 심의의 상(裳)을 마르는 제도를 상세히 갖추어 둔 것도 바로 이와 같다.
복건(幅巾)에 대하여
[문] 복건의 제도는 상이(相異)한 데가 많이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옛 제도의 본뜻을 잃지 않겠습니까? -이유태-
[답] 《주자대전(朱子大全)》과 《성리대전(性理大全)》, 《예기보주》에 나오는 설로 볼 때 이미 건액(巾額)이 있고 또 깃[㡇子]이 있다는 것이 분명하나, 국속(國俗)이 《가례》의 권수(卷首)에 나오는 도(圖)에 집착하여 바로 건액을 깃으로 보고 또 한쪽을 접어서 꿰매어 마치 옷깃[衣裾]의 제도와 같이 하였을 뿐이다. 한가운데를 접어서 깃을 만드는 제도를 버리고 쓰지 않았다는 것이 무슨 제도인지는 《가례의절》에 나오는 도(圖)를 상고하면 될 것이고 《상례비요(喪禮備要)》에도 자세히 나온다.
《주자대전》에 의하면, 복건은 한쪽을 꿰매어 건액을 만들고 한가운데를 접어서 깃을 만든다. ○ 《성리대전》과 《예기보주》에 의하면, 검정색 견(絹) 여섯 자 남짓으로 한가운데를 접어서 두 쪽을 만든 다음, 오른쪽 접힌 부분을 또 접어서 작은 가로깃을 만든다.
거가잡의(居家雜儀)
자신의 이름을 부르도록 가르쳐 주는 일에 대하여
[문] 자신의 이름을 부르도록 가르친다는 말씀은 비록 경전(經典)의 전거 -《예기》 곡례(曲禮)에 “자식은 부모에게 자신의 이름을 부른다.” 하고, 그 주에 “스스로 제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하였다.- 가 있기는 하나, 말을 배우고 있는 어린아이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먼저 이름을 가르쳐 주고 나서야 스스로 부를 줄을 알므로, 문자(文字)가 우연히 같다는 것만으로 견강부회하여 훈고를 내어서는 아니 될 듯합니다. -지사 신식-
[답] 이미 경전의 전거가 있는 이상 다른 말을 지어낼 수는 없습니다. 말을 할 수 있는 아이가 어떻게 자신의 이름을 일컫지 못할 리가 있겠습니까. 더구나 어른에게 읍하고 경의를 표하며 문안 인사드리는 예절 같은 것도 역시 말을 배우는 어린아이로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처부모(妻父母)에 대한 칭호 및 자칭(自稱)에 대하여
[문] 세속에서 아내의 아버지를 범범하게는 장인(丈人)이라 부르고 서간문(書簡文)에서는 빙군(聘君) 또는 빙부(聘父)로 씁니다. 빙군이란 징군(徵君)인데, 사람들은 주자가 부옹(婦翁)을 빙군이라고 말한 것을 잘못 알아서, 비록 식자라 하더라도 흔히들 잘못 쓰고 있으니, 참으로 웃을 노릇입니다. 이를테면 빙부의 경우는 더욱 근거가 없으니, 오늘날 예경(禮經)에 의거하여 외구(外舅) 두 글자를 서간문에 쓰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어떤 이는 구(舅) 자 밑에 주(主) 자를 쓰는 것도 좋다고 합니다. 이 설이 어떠합니까? 이미 외구라고 일컬은 이상 사위의 자칭도 당연히 생(甥) 자를 써야 합니까? 구(舅)ㆍ고(姑)ㆍ생(甥) 등의 글자는 쓰이는 곳이 한두 곳이 아니어서 혼동이 될 듯도 합니다. 그러나 각기 당연히 쓸 곳에 쓴다면 혐의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황종해-
[답] 빙군의 칭호는 세속에서 잘못 알고 쓴 지가 오래다. 편지에서 보여 준 칭호는 안 될 것은 없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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