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계전서(沙溪全書)제34권
상례비요(喪禮備要)-4
대상(大祥)
대상의 제구(諸具) -앞에서와 같다.
사당(祠堂) : 세 칸을 정침(正寢) 동쪽에 세우는데, 땅이 좁을 경우 한 칸을 세우며, 만약 선세(先世)에 이미 세워 놓았다면 세우지 않는다.
교의(交椅)
탁자(卓子)
평상[牀]
돗자리[席]
향로(香爐)
향합(香盒) : 향을 갖춘다.
초[燭] : 촛대를 갖춘다.
모사(茅沙)
축판(祝版)
환교(環珓) : 점을 치는 도구로, 대나무 뿌리를 쓰기도 하는데, 길이는 2치이며, 쪼개어 쓴다.
술주전자[酒注]
술잔과 잔대[盞盤]
중발[椀]
대접[楪子]
수저[匙箸]
술통[酒樽]
현주통[玄酒樽]
국자[勺]
세숫대야[盥盆] : 대야받침대를 갖춘다.
수건[帨巾] : 수건걸이를 갖춘다.
화로(火爐) : 부젓가락을 갖춘다. ○ 이상의 기물들은 꼭 써야 할 수량에 따라 모두 갖추어서 곳간에 저장한 다음 자물쇠로 잠가두고 다른 용도로 쓰지 않는다. 저장할 곳간이 없을 경우 외문(外門) 안에 벌여 놓으며, 재력이 없어서 갖추지 못할 경우 그때 가서 평상시에 쓰던 그릇으로 대용한다.
관(冠) : 검정색[黲色].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는 백립(白笠)이다.
복(服) : 참포삼(黲布衫). 부인은 아황색(鵝黃色)과 청벽색(靑碧色)의 옷을 입는다.
신[屨] : 《국조오례의》에는 백의(白衣)에 백화(白靴)을 쓰는데, 부인은 순수한 소의(素衣)와 소구(素屨)를 쓰는 것으로 되어 있다. ○ 구준(丘濬)이 말하기를 “벼슬이 있을 경우 백포(白布)로 모자[帽]를 싸고 백포반령포(白布盤領袍)에 포대(布帶)를 쓰고, 벼슬이 없을 경우 포건(布巾)과 백직령의(白直領衣)에 포대를 쓰며, 부인은 순수한 소의와 소구를 쓴다.” 하였다. ○ 《예기(禮記)》 상복소기(喪服小記)에 “성인(成人)의 상복을 벗을 경우 그 제사에 조복(朝服)에 호관(縞冠)을 한다.” 하고, 그 소(疏)에 “대상에서 슬퍼하는 감정을 줄이기 때문에 조복을 입는 것이니, 조복은 치의(緇衣)에 소상(素裳)으로 곧 길복(吉服)으로 돌아오는 정제복(正祭服)이며, 길복을 하고도 호관을 하는 것은 아직 순수한 길복은 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하였다. -소관(素冠)이란 흰 천으로 선을 두른 것이고, 검정색 씨줄에 흰색 날줄을 넣어 짠 것을 호(縞)라 한다. -《예기》 간전(間傳)에 “대상에 소호 마의(素縞麻衣)를 입는다.” 하고, 그 소에 “대상은 비록 끝났더라도 애정(哀情)은 아직 가시지 않았기 때문에 호관(縞冠)을 쓰고 흰 선을 두른[素紕] 마의를 입는 것이다.” 하였다. -비(紕)란 가장자리의 선으로, 삼베로 만든 심의(深衣)에 삼베로 선을 두른 것을 마의(麻衣)라 한다.- 또 간전에 “담제를 지내고 나서야 고운 옷[纖]을 입는다.” 하고, 그 소에 “담제에는 현의(玄衣)에 현관(玄冠)을 쓰나, 길제에는 마땅히 현의(玄衣)에 소상(素裳)을 입어야 한다. 지금 황상(黃裳)을 입는 것은 아직 대길이 아니기 때문이다. 길제를 지내고 나서는 침관(綅冠)을 쓰니 역시 변제(變除)하는 예이다.” 하였다. -침관에는 채색 갓끈을 단다. 《운회(韻會)》에 의하면, 흰색의 씨줄에 검정색의 날줄을 넣은 것을 침(綅)이라 하는데, 침은 섬(纖)이라고도 쓴다.-소뢰(少牢)에서 ‘길제(吉祭)와 조복(朝服)’이라 하고, 그 소에 “만약 길제가 담제를 지낸 그달에 있다면 담제는 비록 마쳤더라도 아직 순수한 길복은 입지 않으며, 담제의 다음달에야 평상으로 되돌아가고 찰 것도 다 찰 수 있다.” 하였다. ○ 살피건대, 《예기》 잡기(雜記)의 소에 “경대부(卿大夫)를 근거로 하여 말하자면, 대상에서 길제까지 무려 여섯 가지의 복이 있으니, 대상에서의 조복(朝服)과 호관(縞冠)이 그 첫 번째 복이고, 대상을 마치고 나서의 소호 마의(素縞麻衣)가 두 번째 복이고, 담제에서의 현관(玄冠)과 황상(黃裳)이 세 번째 복이고, 담제를 마치고 나서의 조복(朝服)과 침관(綅冠)이 네 번째 복이고, 길제에서의 현관과 조복이 다섯 번째 복이고, 길제를 지내고 나서 현단복(玄端服)으로 거처하는 것이 여섯 번째 복이다.” 하였다. 오늘날 이 예(禮)를 본받을 경우 대상에는 미길(微吉)의 옷을 입었다가 대상 제사를 지내고 나서는 도로 미흉(微凶)의 옷을 입고, 담제에는 길복을 입었다가 담제를 지내고 나서는 미길의 옷을 입으며, 길제를 지내고 난 뒤에 가서 평상복을 입는 것이 예의 본뜻에 맞을 듯하다.
축문 : ‘초우(初虞)’에 나온다.
◆ 부묘(祔廟)할 때의 고사(告辭) -살피건대, 구준이 말하기를 “아직 제주(題主)를 고쳐 쓰지 않았을 경우 관직과 봉작 및 칭호만 쓰고, 고(高)ㆍ증(曾)ㆍ조(祖)ㆍ고비(考妣)는 쓰지 않는다.” 하였다. 그러나 나의 생각으로는 자손으로서 존속의 칭호를 쓰지 않는다는 것은 미안할 듯하다. 부제(祔祭)의 축사(祝辭)에도 오히려 ‘모고(某考) 모관(某官) 부군(府君)께 가다’라고 쓰는데, 어떻게 제주를 고쳐 쓰지 않았다 하여 존속의 칭호를 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지금 아래와 같이 고친다. ○ 5대(代)를 한 위판에 쓸 경우 자칭(自稱)은 가장 높은 사람 위주로 한다. 뒤에도 같다.
유(維) 연호(年號) 몇년 세차(歲次) 간지(干支), 몇월 간지삭(干支朔) 며칠 간지에 5대손 아무개는 감히 현오대조고(顯五代祖考) 아무 벼슬 부군 및 현오대조비(顯五代祖妣) 아무 봉작 아무 성씨와 -만약 3대만 제사한다면 5대는 없다.- 현고조고 아무 벼슬 부군 및 현고조비 아무 봉작 아무 성씨와 현증조고 아무 벼슬 부군 및 현증조비 아무 봉작 아무 성씨와 현조고 아무 벼슬 부군 및 현조비 아무 봉작 아무 성씨께 분명히 고합니다. 이제 선고(先考) 아무 벼슬의 대상이 벌써 다가와서 예법상 마땅히 현증조고 아무 벼슬 부군께 제부(隮祔)해야 하므로, 감회와 슬픔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삼가 술과 과일로 경건히 고합니다.
구준(丘濬)이 말하기를 “만약 아버지는 살아 있고 어머니가 먼저 죽었다면 이는 아버지가 상주가 되므로, 오직 할머니의 주독(主櫝)에 제부해 두었다가 아버지가 죽고 난 뒤에 천봉(遷奉)을 고하고, 만약 아버지가 먼저 죽어서 이미 사당에 들어가고 나서 어머니가 죽었다면 그 축문에 ‘이에 선비(先妣) 아무 봉작 아무 성씨의 대상이 벌써 다가와서 예법상 마땅히 선고(先考)께 제부해야 하므로’로 쓴다. 나머지는 같다.” 하였다. 살피건대, 아버지가 먼저 죽은 어머니의 상에는 대상을 마치고 나서 구준의 예설대로 고위(考位)의 감실에다 제부해 두었다가 협사(祫祀) 때에 가서 주독을 합치는 것이 옳다. 대저 《의례》에 “담제를 지내는 달에 길제를 지내되 아직 배향은 하지 않는다.” 하였으니, 이로 미루어 볼 때 어머니의 상을 마치자마자 곧바로 아버지의 주독과 합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 어떤 이는 말하기를 “아버지가 비록 먼저 사당에 들어갔더라도 어머니의 상을 마치고는 곧바로 증조비에게 제부하였다가 협사 때에 아버지에게 배향하는 것이 고의(古意)에 가까울 듯하다.” 하였다. 다시 상고해 볼 일이다.
두 번째 기년(朞年)이 되어 대상(大祥)을 지낸다.
초상에서 이때까지는 윤달을 세지 않고 모두 25개월이며, 두 번째 기일(忌日)이다. -《예기》 잡기 하에 “기년복(朞年服)의 상은 13개월 만에 대상을 지낸다.” 하고, 그 주에 “이는 아버지가 살아 있는 경우의 어머니 상을 말하는 것이다.” 하였다.[아내에게도 같다.] ○ 아버지와 어머니의 상이 겹쳤을 경우는 앞의 소상조(小祥條)에 나온다.
하루 전날에 목욕을 하고 기구(器具)와 찬품(饌品)을 진설한다.
모두 소상과 같다.
상차(喪次)를 설치하고 담복(禫服)을 진열한다. 이튿날 아침의 행사는 모두 소상의 의식과 같다. -살피건대, 사정(事情)이 있으면 고한다. 지금 새 신주를 부묘(祔廟)하게 되었으니, 먼저 사당에 고하지 않을 수 없다.[고사(告辭)는 앞에 나온다.]
마치고 나서 축이 신주를 받들고 사당으로 들어간다. -축이 꿇어앉아서 ‘사당으로 드시기를 청합니다.’라고 고한다.
주인 이하가 모두 부제(祔祭) 때의 차례와 같이 서서 곡을 하며 뒤따라가서 사당 앞에 다다라 곡을 그친다. -《주자대전(朱子大全)》에 의하면, 대상을 지내고 나서는 궤연(几筵)을 철거하고 그 신주는 또 할아버지의 사당에 제부해야 하나, 아직은 동쪽 가에 서쪽을 향하게 제부하였다가, 협사를 마치고 난 뒤에 천봉(遷奉)한다.
영좌(靈座)를 철거하고 상장(喪杖)을 부러뜨려 보이지 않는 곳에 버린다. -《예기》 상대기(喪大記)에 “대상에는 나물을 먹되, 혜장(醯醬)으로써 먹는다.” 하였다. ○ 장자(張子)가 말하기를 “상복은 반드시 벗는 날에 헐어서 여러 가난한 사람들이나 묘소를 지키는 사람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좋다. 옛사람은 흉사(凶事)를 혐오하지 않았으나, 지금 사람들은 불살라서 묻어버리니, 또한 상복을 혐오하는 듯하다.” 하였다. ○ 《예기》 상복소기에 “3년이 지난 뒤에 장사를 지낼 경우 반드시 제사를 두 번 지내는데, 재차 제사를 지내는 동안 같은 때에 상복을 벗지는 못한다.” 하고, 그 주에 “장사를 마치고 나서는 반드시 연제(練祭)와 대상을 거행하기 때문에 재차 제사를 지낸다고 하는 것이다. 다만 이 두 제사는 연거푸 두 번 거행하는데, 이를테면 이달에 연제에서는 남자는 수질(首絰)을 벗고 부인은 요대(腰帶)를 벗고, 다음 달 대상에 가서야 최복(衰服)을 벗는다.” 하였다. ○ 《개원례(開元禮)》에 “부모의 상에 1주년이 되어서 장사를 지낼 경우 장사를 지낸 다음 달에 소상을 지내고, 2주년이 되어서 장사를 지낼 경우 장사를 지낸 다음 달에 연제(練祭)를 지내고, 연제를 지낸 다음 달에 대상을 지내며, 대상을 지내고 나서는 길제(吉祭)를 지내고 다시 담제(禫祭)는 없다. 또 2주년이 되지 않아서 장사를 지낼 경우는 25개월에 연제를 지내고, 26개월에 대상을 지내고, 27개월에 담제를 지낸다.” 하였다. ○ 《예기》 잡기 하에 “아버지의 상을 마치기 전에 어머니가 죽은 경우 아버지의 상복을 벗을 적에는 아버지에 대한 대상(大祥)의 복을 입고 대상을 지낸 다음, 다시 어머니의 복을 입는다.” 하고, 그 주에 “제복(除服)이라는 것은 대상의 상복을 말함이니, 앞의 상이 끝났음을 보이기 위한 것이다.” 하였다. ○ 《예기》 증자문(曾子問)에 “‘대부(大夫)와 사(士)가 부모의 상을 입고 있으면서 곧 제상(除喪)하게 되었을 때 임금의 상을 당하면 부모의 상을 어떻게 제상해야 합니까?’라고 물으니, 공자가 대답하기를 ‘임금의 상복을 입고 있을 경우 부모의 상복은 감히 입지 못하는데, 또 어찌 감히 벗을 수 있겠는가. 이리하여 때가 지나도록 제복(除服)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임금의 복을 벗고 난 뒤에는 성대하게 제사를 지내는 것이 예(禮)이다.’ 하였다. 또 ‘부모의 상복을 벗지 않아도 됩니까?’라고 물으니, 공자가 대답하기를 ‘선왕(先王)이 제정한 예에는 때가 지나고 나면 거행하지 않는 것이 예이다.’ 하였다.” 하고, 그 주에 “가령 이달에 임금의 복을 벗었을 경우, 다음 달에 소상 제사를 거행하고 또 다음 달에 대상 제사를 거행한다. 만약 친상(親喪)의 소상을 지내고 난 뒤에 임금의 복을 입게 되었다면 뒷날 임금의 복을 벗은 뒤에 대상 제사만을 거행한다. 그러나 이는 다 제사를 주관하는 적자(嫡子)로서 벼슬자리에 있는 경우를 말하는 것이고, 만약 서자(庶子)로서 벼슬자리에 있다가 임금의 복을 입은 경우라면 적자는 집에서 그 스스로 친상(親喪)의 예를 거행하고, 뒷날 서자가 비록 임금의 복을 벗었더라도 소급하여 제사를 지내지는 않는다.” 하였다. 살피건대, 국제(國制)에 의하면 국상(國喪)의 졸곡 뒤에는 크고 작은 제사를 다 허락하고 있으나, 부모의 대상과 소상은 기어코 거행하지 못하는 것인지 아직 모르겠다. 일단 고례(古禮)를 실어두어서 참고할 수 있게 하였다.
[주D-001]그 소(疏)에 …… 하였다 : ‘제성복자기제야조복호관(除成服者其祭也祖服縞冠)’ 조에 대한 공영달(孔穎達)의 소에는 이 내용이 나오지 않는다.
[주D-002]그 소에 …… 하였다 : 공영달의 소에는 이 내용이 나오지 않는다.
[주D-003]그 소에 …… 하였다 : 공영달의 소에는 이 내용이 나오지 않는다.
[주D-004]소뢰(少牢)에서 …… 하고 : 원문의 ‘소뢰(少牢)’는《의례》소뢰궤식례(小牢饋食禮)를 지칭하는 듯하나, 이 내용은 나오지 않는다. 또 본문의 ‘길제(吉祭)와 조복(朝服)’이라는 말도 어디에서 나온 말인지 상고하지 못하였다.
[주D-005]그 소에 …… 하였다 : 소에 대한 원문을 상고하지 못하였다.
[주D-006]예기 잡기(雜記)의 소 : 소에 대한 원문을 상고하지 못하였다.
담제(禫祭)
《예기》 상복소기에 “부모와 아내와 장자를 위해 담제를 지낸다.” 하고, 그 주에 “아내가 남편에게도 담제를 지내며, 어머니의 상에도 아버지가 없을 경우 담제를 지낸다.” 하였다. ○ “종자(宗子)는 어머니가 살아 있어도 아내를 위해 담제를 지낸다.” 하고, 그 주에 “아버지가 살아 있을 경우 적자(嫡子)는 아내를 위해 부장기복(不杖朞服)을 입는데 부장기복을 입을 경우 담제는 지내지 않으며, 아버지는 죽고 어머니만 살아 있을 경우에는 장기복(杖朞服)을 입고 담제도 지낸다.” 하였다. 하순(賀循)에 의하면 “종자가 아닌데 어머니가 살아 있을 경우 장기복은 입되 담제는 지내지 않는다.” 하였다. ○ “서자(庶子)는 아버지의 집에 살더라도 그 어머니를 위해 담제를 지내지 못한다.” 하고, 그 주에 “이는 벼슬하지 않은 선비를 두고 말하는 것이다.” 하였다. ○ 《예기》 단궁(檀弓)의 주에 “쫓겨난 어머니에게는 담제가 없다.” 하였다. ○ “여자가 이미 시집을 가고 나서도 부모에게 담제를 지냅니까?” 하고 물으니, 주자가 대답하기를 “아버지가 살아 있는 경우 어머니에게 담제를 지낸다는 것은 다만 남자를 위주로 하는 말이다.” 하였다.
담제의 제구 -앞에서와 같다.
길복(吉服) : 아버지가 살아 있어서 어머니에게 심상(心喪)을 할 경우 백포직령의(白布直領衣)에 참포립(黲布笠)을 쓰고 흑대(黑帶)를 띤다.
환교(環珓)
축문(祝文) : ‘초우(初虞)’에 나온다.
대상 후 한 달을 건너뛰어 담제를 지낸다.
한 달을 건너서이다. 초상에서 이때까지 윤달을 세지 않고 모두 27개월이다. -《주자어류(朱子語類)》에 “25개월이 되어 대상을 지낸 뒤에 곧 담제를 지내서 왕숙(王肅)의 설을 따르는 것이 마땅하나, 지금은 정현(鄭玄)의 설을 따른다. 이것이 비록 예(禮)는 후한 쪽을 따라야 하는 도리이기는 하나, 타당하지는 않다.” 하였다. ○ 장자(張子)가 말하기를 “삼년상의 대상ㆍ소상과 담제는 윤달도 센다.” 하였다. ○ 《예기》 잡기 하에 “기년상은 15개월 만에 담제를 지낸다.” 하고, 그 주에 “이는 아버지가 살아 있는 경우 어머니를 위해서이다. 아내를 위해서도 같다.” 하였다. ○ 《주자어류》에 “어떤 사람이 묻기를 ‘《예기》 상복소기에 「3년이 지난 뒤 장사를 지낼 경우 반드시 재차 제사를 지낸다.」 하였는데, 정현(鄭玄)의 주에 이는 연제(練祭)와 대상(大祥)만을 말한 것이라고 하고, 담제라는 말이 없습니다.’ 하니, 주자가 대답하기를 ‘살펴보면 또한 그와 같다.’ 하였다.” 하였다. ○ 살피건대, 앞뒤로 연이어 상을 당한 경우 앞 상의 담제를 뒤 상의 상중에 지낼 수 없는 것은 역시 차마 흉사 중에 길례를 거행하지 못해서이다. 또 뒤 상을 마치고 난 뒤에 소급하여 지내지 않는 것은 때를 넘기면 제사를 지내지 않는 도리에서이다. 주자의 뜻과 정현의 주와 《개원례》가 다 그러하다.
전달 하순에 제사 지낼 날짜를 잡아 둔다.
하순의 초에 다음 달의 3순(旬) 중에서 각 1일로 정일(丁日)이나 해일(亥日)을 택한다. 사당문 밖에 탁자를 설치한 다음, 향로(香爐)ㆍ향합(香盒)ㆍ환교(環珓)ㆍ반자(盤子)를 그 위에 서쪽을 향하게 올려놓는다. 이에 주인이 담복(禫服)을 입고서 서쪽을 향하여 서면 뭇 주인이 그다음으로 서되 뒤로 조금 물러나 북쪽을 윗자리로 하며, 자손들이 그 뒤에 두 줄로 서되 역시 북쪽을 윗자리로 한다. 집사자는 북쪽을 향하여 서되 동쪽을 윗자리로 한다. 주인이 향불을 피워 환교를 데운 다음, 상순(上旬)의 날짜로 명(命)하기를 “아무개는 내달 아무 날로 선고 아무 벼슬 부군께 삼가 담사(禫事)를 올리려 하오니, 흠향하시기 바랍니다.” 하고는 곧장 환교를 반자에 던져서 길(吉)과 불길(不吉)을 점치는데, 환교가 하나는 엎어지고 하나는 자빠지면 길하다. 불길할 경우 다시 중순의 날짜로 명하고 또 불길할 경우 하순의 날짜를 쓴다. 주인이 이에 사당에 들어가서 해당 감실 앞에 두 번 절하면 위치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두 번 절한다. 주인이 향불을 피우면 축(祝)이 축사(祝辭)를 가지고 주인 왼쪽에 꿇어앉아서 고하기를 “효자 아무개는 내달 아무 날로 선고 아무 벼슬 부군께 삼가 담사를 올리려고 날짜를 점친바 길일을 얻었으므로, 감히 고합니다.” 한다. 주인이 두 번 절하고 내려가면 위치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두 번 절하며, 축은 문을 닫고 물러난다. 만약 길일을 얻지 못했을 경우는 ‘날짜를 점친바 길일을 얻었으므로’의 구절은 쓰지 않는다.
하루 전날 목욕을 하고 신위(神位)를 설치한 다음 제기(祭器)를 벌여 놓고 제찬(祭粲)을 차린다.
신위를 영좌(靈座)가 있던 곳에 설치한다. 그 외에 다른 것은 대상의 의식과 똑같다.
[제차(祭次)를 설치하고 길복(吉服)을 진열한다.] -살피건대, 《가례》에 제차를 설치하고 옷을 진열하는 절차가 없으니, 의문스럽다. 퇴계가 말하기를 “소상과 대상 때에 옷을 진열하고 바꾸어 입는 절차를 따르지 않을 경우, 담복은 어느 때에 벗고 길복은 어느 날에 입어야 할지 모르겠다.” 하였다.
이튿날에 행사를 하는데, 의식은 모두 대상 때와 같다.
다만 주인 이하가 모두 사당에 나아가서, 축이 주독(主櫝)을 받들어 서쪽 계단 탁자 위에 올려놓고서 신주를 모셔내어 영좌에 놓으면, 주인 이하가 모두 슬피 곡을 하되, 삼헌(三獻)에는 곡을 하지 않고 사신(辭神)에 가서 또 슬피 곡을 하며, 신주를 사당까지 보낼 적에는 곡을 하지 않는다. -신주는 아직도 할아버지의 감실에 제부한다.
【간전】 비로소 술을 마시고, -술은 먼저 단술을 마신다.- 고기를 먹는다. -고기는 먼저 마른 고기를 먹는다. 살피건대, 이 조항은 《가례》의 대상조 아래에 있는 것인데, 지금 고례(古禮) 및 《가례의절》에 의거하여 여기로 옮긴 것이다.
길제(吉祭)
주자가 말하기를 “장횡거(張橫渠)의 설에 삼년상을 마치고 난 뒤 태묘(太廟)에 협사(祫祀)를 지내고 나서 ‘제사를 마치고 신주를 환봉(還奉)한다.’는 것을 고유하는 기회를 통하여 드디어 조묘(祧廟)로 옮길 신주는 받들어 협실(夾室)로 돌려보내고 자리를 옮길 신주와 새 신주는 사당으로 돌려보낸다고 하였는데, 이것이 예에 잘 맞는 듯하다.” 하였다. ○ 양씨(楊氏)가 말하기를 “세대가 차례로 옮겨지고 소목(昭穆)의 서열이 서로 이어진다는 것은 그 일이 아주 중대하니, 어떻게 고유제가 없을 수 있겠는가. 예법에 삼년상 동안에는 제사를 지내지 않기 때문에, 횡거의 설에 삼년상을 마치고 나서 협사를 지낼 적에 번갈아 옮겨 모시면 된다고 한 것이니, 발상이 완곡하고 은근하다. 이 점이 예에 잘 맞아서 선생께서 이 설을 따른 것이다.” 하였다. ○ 《의례》 사우례(士虞禮)의 기(記)에 “이달에 길제는 지내되 아직 배향은 하지 않는다.” 하였는데, 그 주에 “이달이란 담제를 지내는 달을 말한다. 사시(四時) 정제(正祭)의 달을 당할 경우 제사를 지낸다.” 하고, 그 소(疏)에 “한 달이 넘어가기를 기다리지 않는다.” 하였다. 웅씨(熊氏)가 말하기를 “사시 정제의 달을 당하지 않았을 경우는 한 달이 넘어가기를 기다린다.” 하였다. 또 소에 “담제를 지내는 달에 사시의 정제를 지내기는 하되 아직도 아무 비위(妣位)를 배향한다고 하지 못하는 것은 아직 슬픔이 가시지 않아서 마치 상중(喪中)의 기분 같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며, 아직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를테면 대상 이전에는 비위(妣位)를 배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였다. 또 소에 “담제를 지내는 달의 길제에도 배향하지 못하는 것으로 볼 때 다음 달의 길제에서 《의례》 소뢰궤식례(少牢饋食禮)에 나오는 경우처럼 배향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였다. 살피건대, 한 달을 건너서 제사를 지내는 것이 통상적인 제도이기는 하나, 담제가 만약 사시 정제의 달을 당하게 된다면 곧바로 이달에 담제를 지내니, 이는 3년 동안 제사를 폐지한 나머지 정제가 더 급하기 때문이다. 제사를 지낼 때에는 고위(考位)와 비위(妣位)의 자리를 달리하고 축도 딴 축판을 쓰며, 제사를 지내고 난 뒤에 합독(合櫝)을 한다. 만약 달을 건넌 경우라면 제사 때에 합위(合位)를 하는데, 의식은 시제(時祭)와 같이 하는 것이 예의 본뜻에 맞을 듯하다. ○ 또 살피건대, 아버지가 먼저 죽어서 이미 사당에 들어갔을 경우에는 어머니의 상을 마친 뒤에 본디 길제를 지내고 체천(遞遷)을 하는 절차가 없다. 그러나 그 정제(正祭)는 이를 따라 지내는 것이 옳을 듯하다.
길제의 제구 -앞에서와 같다.
축문(祝文)
벼루
붓
먹
분(粉)
녹각교(鹿角膠)
솔[刷子]
맑은 물[淨水]
목적(木賊)
○ 살피건대, 《가례》에는 길제와 개장(改葬) 두 조항이 없으나, 지금 고례(古禮) 및 《가례의절》에서 채록하여 보충해 넣은 것이다.
◆ 신주를 개제(改題)할 때의 고사(告辭) -어머니가 먼저 죽었을 경우 아버지의 상을 마치고 난 뒤에 또 개제한다. ○ 살피건대, 3대의 제사를 지내는 것이 비록 당시 왕의 제도이기는 하나, 정자(程子)와 주자(朱子)가 다 고조(高祖)에게도 복(服)이 있으므로 제사를 지내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고, 우리 제현(諸賢)들 역시 4대의 제사는 지내야 한다고 하였다.
유(維) 연호 몇년 세차 간지, 몇월 간지삭 며칠 간지에 5대손 아무개는 감히 현오대조고 아무 벼슬 부군 및 현오대조비 아무 봉작 아무 성씨와 현고조고 아무 벼슬 부군 및 현고조비 아무 봉작 아무 성씨와 현증조고 아무 벼슬 부군 및 현증조비 아무 봉작 아무 성씨와 현조고 아무 벼슬 부군 및 현조비 아무 봉작 아무 성씨께 분명히 고합니다. 이에 선고 아무 벼슬 부군의 대수(代數)가 벌써 다하여 예법상 신주를 옮겨 사당으로 모셔야 하므로, 현오대조고 아무 벼슬 부군 및 현오대조비 아무 봉작 아무 성씨께서는 친속이 다하셔서 신주를 조천(祧遷)하게 되었고, 현고조고 아무 벼슬 부군 및 현고조비 아무 봉작 아무 성씨와 현증조고 아무 벼슬 부군 및 현증조비 아무 봉작 아무 성씨와 현조고 아무 벼슬 부군 및 현조비 아무 봉작 아무 성씨의 신주를 지금 고쳐 쓰려고 하니, 세대의 차례가 차례대로 옮겨지게 되어 감회와 슬픔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삼가 술과 과일로 경건히 고합니다.
◆ 신주를 모셔 내올 때의 고사
5대손 아무개는 지금 체천(遞遷)하는 일로 -만약 아버지가 먼저 죽은 경우의 어머니 상이라면 ‘지금 상복을 벗었기에’라고 한다.- 현오대조고 아무 벼슬 부군 및 현오대조비 아무 봉작 아무 성씨 -만약 3대만을 제사한다면 ‘고조고비(高祖考妣)’라고 쓴다. 이 이하에는 각 위를 열서한다.- 에게 일이 있습니다. 아무의 친속인 아무 벼슬 부군 및 아무 봉작 아무 성씨를 부식(祔食)하려고 신주를 정침(正寢)으로 모시고 나갈 것을 감히 청하며, 삼가 제전을 올립니다.
◆ 합제(合祭)를 지내고 신주를 묻을 때의 축문 -《가례의절》에 나온다.
유 연호 몇년 세차 간지, 몇월 간지삭 며칠 간지에 5대손 아무개는 감히 현오대조고 아무 벼슬 부군 및 현오대조비 아무 봉작 아무 성씨 -만약 3대의 제사만 지낸다면 ‘고조고비’라고 쓴다.- 에게 분명히 고합니다. 이제 선고 아무 벼슬 부군의 대수가 이미 다하여 예법상 신주를 옮겨 사당으로 모셔야 하온데, 선왕이 제정한 예법에 제사는 4대에서 그치게 되어 있으므로, -만약 3대의 제사만 지낸다면 ‘3대’라고 쓴다.- 마음은 비록 끝이 없으나 분수에는 한계가 있어 신주를 마땅히 조천(祧遷)하여 묘소에 묻어야 합니다. -만약 4대손 중에 아직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자가 있어서 그 집으로 옮겨 모시려 한다면 이 아래에 마땅히 ‘장차 아무 관계 아무개의 집’이라고 써야 한다.- 감회와 슬픔을 견디지 못하여 삼가 청작(淸酌) 서수(庶羞)로 백배(百拜) 고사하오니, -만약 본 감실에 아직 부위(祔位)가 있다면 이 아래에 마땅히 ‘아무 관계 아무 벼슬 부군 및 아무 관계 아무 봉작 아무 성씨의 신주를 함께 묻어야 합니다.’라고 써야 한다.- 흠향하시기 바랍니다.
◆ 조고(祖考) 이상을 합제(合祭)할 때의 축문 -고의(高儀)에 나온다. ○ 대마다 축판을 각각 달리한다.
유 연호 몇년 세차 간지, 몇월 간지삭 며칠 간지에 효현손 -증조할아버지의 경우 ‘효증손’, 할아버지의 경우 ‘효손’이라고 쓴다.- 아무개는 감히 현고조고 아무 벼슬 부군 및 현고조비 아무 봉작 아무 성씨 -증조위(曾祖位)와 조위(祖位)에 대한 축판도 이와 같다.- 께 분명히 고합니다. 아무개는 죄역(罪逆)은 다 가시지 않아도 세월은 상을 벗을 날이 다가와서, -만약 아버지가 먼저 죽은 경우의 어머니 상이라면 이 아래의, ‘세대가 차례로[世次]……감히 따르지 않을 수 없으므로[不敢不至]’를 빼버리고 시제(時祭) 축문의 ‘시유(時維)’ 이하의 말을 쓴다.- 세대가 차례로 체천(遞遷)되고 소목(昭穆)이 서로 이어지매, 선왕이 제정한 예법을 감히 따르지 않을 수 없으므로, 삼가 청작 서수로 공손히 제사를 올리며, 아무 관계 아무 벼슬 부군과 아무 관계 아무 봉작 아무 성씨를 부식(祔食)하오니, 흠향하시기 바랍니다.
◆ 새 신주를 합제할 때의 축문 -《가례의절》에 나온다. ○ 만약 담제를 지내는 달에 제사를 지낸다면 고위(考位)와 비위(妣位)는 축판을 달리한다.
유 연호 몇년 세차 간지, 몇월 간지삭 며칠 간지에 효자 아무개는 감히 현고 아무 벼슬 부군께 분명히 고합니다. 상제(喪制)란 기한이 있어서 추념(追念)의 정을 펴려 하나 미칠 수 없는 것이므로, 이제 좋은 날짜에 삼가 전례(典禮)를 따라 사당에 제부(隮祔)하려고, -만약 어머니가 먼저 죽었다면 ‘현비 아무 봉작 아무 성씨’를 열서(列書)하며, 만약 아버지가 먼저 죽은 경우의 어머니 상이라면 역시 고위(考位)와 비위(妣位)를 열서하고, ‘아무 관계의 상기(喪期)가 이미 다하여 예법상 마땅히 배향해야 하므로’라고 쓰고서 시제(時祭) 축문의 ‘시유(時維)’ 이하의 말을 쓴다. ○ 만약 아버지가 먼저 죽은 경우의 어머니 상으로서 담제를 지내는 달에 제사를 지내서 고비(考妣)의 위(位)가 다른 경우라면, 비위에는 ‘상제란 기한이 있어서 추념의 정을 펴려 하나 미칠 수 없는 것이므로, 이제 좋은 날짜에 삼가 전례를 따라 선고께 배향하려고’로 쓰고, 고위에는 ‘아무개는 죄역은 다 가시지 않아도 세월은 상을 벗을 날이 다가와서 삼가 전례를 따라 선비(先妣)를 배향하려고’로 쓰고서 시제 축문의 ‘시유’ 이하의 말을 쓴다. ○ 만약 어머니가 먼저 죽은 경우의 아버지 상으로서 담제를 지내는 달에 제사를 지내는 경우라면, 비위에는 ‘아무개는 죄역은 다 가시지 않아도 세월은 상을 벗을 날이 다가와서 이제 좋은 날짜에 삼가 전례를 따라 선고께 배향하려고’로 쓴다.- 삼가 청작 서수로 공손히 제사를 올리오니, 흠향하시기 바랍니다.
담제 이튿날에 날짜를 잡아 둔다. -
《의례》 사우례의 소에 “길사(吉事)는 가까운 날을 우선으로 하므로, 상순에 정침(正寢)에서 담제를 지내고서 그달에 곧장 사당에서 사시(四時)의 시제(時祭)를 뒤따라 지내는데, 역시 상순의 날을 쓴다.” 하였다. 달을 넘길 경우에도 상순의 날을 쓰되 정일(丁日)이나 해일(亥日)에 지낸다. 나머지는 아래 시제의 날짜를 잡는 의식과 같다.
사흘 전에 재계를 한다. -시제의 의식과 같다.
하루 전날 신주를 옮길 것을 사당에 고한다. -술과 과실을 차려 고유하는데, 아래 삭망(朔望)의 의식과 같다. 다만 탁자 하나를 향탁(香卓) 동쪽에 따로 설치하고 맑은 물[淨水]ㆍ분그릇[粉盞]ㆍ솔[刷子]ㆍ목적(木賊)ㆍ벼루ㆍ붓ㆍ먹을 그 위에 갖다 놓는다. 주인이 술을 쳐 올리고 두 번 절한 다음 향탁 남쪽에 서 있으면, 축이 축판을 가지고 주인의 왼쪽에 서 있다가 꿇어앉아 축문을 읽어서 신주를 옮김을 고한다.[축문은 앞에 나온다.] 고유를 마치고 두 번 절한다. 주인이 앞으로 나아가 고쳐 쓸 신주를 가장 높은 위(位)부터 받들어 내려서 탁자 위에 눕히면, 집사자가 옛 글씨를 씻어낸다. 다시 분을 발라서 분이 다 마르면, 글씨 잘 쓰는 사람에게 명하여 손을 씻고 서쪽을 향하여 서서 고쳐 쓰도록 하는데, 함중(陷中)의 글자는 고쳐 쓰지 않는다. 분을 씻은 물은 사당의 네 벽에 뿌리고, 주인이 신주를 받들어다 본래의 자리에 모신다. 모든 위(位)를 앞서와 같이 고쳐 쓰는데, 이를테면 증조고비(曾祖考妣)는 고조고비(高祖考妣)로 고쳐 쓴다. 조고비위(祖考妣位)와 고비위(考妣位)와 부위(祔位)도 이와 같다. 이에 아래로 내려와 제 위치로 돌아가서 위치에 있는 모든 이와 함께 두 번 절한 다음 사신(辭神)을 하고 물러난다.
신위(神位)를 설치한다. -만약 담제를 지내는 달에 제사를 지낸다면 고위와 비위의 신위를 달리한다. ○ 《정자제의(程子祭儀)》에 “무릇 배향(配享)은 정처(正妻)로 그치는 것이나, 더러 제사를 받드는 사람이 재취의 소생인 경우는 자기의 생모를 배향하기도 한다.” 하였다. ○ 장자(張子)가 말하기를 “인정(人情)으로 본다면 한집안에 어찌 두 아내가 있을 수 있겠는가. 모름지기 정처를 배향하고 계실(繼室)은 따로 한곳을 만들어 모시는 것이 옳다.” 하였다. 주자가 말하기를 “정 선생의 이 말은 잘못인 듯하다. 《당회요(唐會要)》에 논하기를 ‘무릇 적모(嫡母)는 선후를 가리지 않고 모두 함께 배부(配祔)하여 합제(合祭)해야 한다.’ 하였다. 이것이 옛날 제후(諸侯)의 예와는 다르지만, 이는 후세에 계실도 예를 갖추어서 아내로 맞아들였을 경우 저절로 정처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고, 또 말하기를 “횡거의 설은 추상(推想)이 너무 지나친 듯하다.” 하였다.
제기를 진열한다. -시제의 의식과 같다.
희생을 살펴보고, 제기를 씻은 다음 제찬을 갖춘다. 이튿날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소과(蔬果)와 주찬(酒饌)을 차리고, 날이 밝으면 신주를 받들어다 신위에 모신다. -시제의 의식과 같다. 고사(告辭)는 앞에 나온다.
참신(參神)을 하고 강신(降神)을 하고 진찬(進饌)을 하고 초헌(初獻)을 한다. -축문은 앞에 나온다.
아헌(亞獻)을 하고 종헌(終獻)을 하고 유식(侑食)을 하고 합문(闔門)을 하고 계문(啓門)을 하고 수조(受胙)를 하고 사신(辭神)을 한다. -모두 시제와 같다.
신주를 들여다 모신다. -주인과 주부가 모두 올라가서 각기 신주를 받들어 주독(主櫝)에 넣어서 상자에 담은 다음, 사당으로 받들고 돌아가서 차례차례 올려놓는데, 새 신주도 정위치에 들여 모신다. 살피건대, 고비(考妣) 중 먼저 죽은 이가 있을 경우 이때에 와서 주독을 합친다. 대수(代數)가 다한 신주는 묘소에 갖다 묻는데, 만약 족인(族人) 가운데 아직 대수가 다하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그 중 항렬과 나이가 가장 높은 사람의 집으로 옮겨 모시고 그가 제사를 주관하도록 하되, 신주는 마땅히 제사를 주관하는 사람에 맞추어서 고쳐 써야 하며, 방제(旁題)에 ‘효(孝)’ 자는 쓰지 않는다. 만약 대수가 다한 조상으로서 처음 공신(功臣)이 된 이가 있다면, 마땅히 《가례》에서 “별자(別子)로서 친진(親盡)된 조상이 있을 경우 그 신주를 묘소로 옮겨 모시고 묻지는 않는다.”고 한 것을 따라야 한다. 그러나 다만 국가의 공신에 대한 대우가 매우 후하여 그 자손으로 하여금 신주를 옮기지 못하도록 할 경우, 4대의 제사를 받드는 집에서는 옮기지 못하는 신주와 함께 5대를 받들게 된다. 그런데 예법에 의거하면 신하는 5대의 제사를 받들 수 없으니, 어쩔 수 없이 고조(高祖)를 모셔내어 별실에서 제사를 받들어야 한다는 말인지 모르겠다. 다시 상고해 볼 일이다. ○ 무릇 부위(祔位)의 신주는 본위(本位)가 사당에서 나갈 경우 역시 묘소에 묻어야 한다.
음복을 마치고, -모두 시제와 같다.
정침(正寢)으로 되돌아간다. -《예기》 상대기에 “길제를 지내고 나서 정침으로 되돌아간다.” 하였다.
[주D-001]의례 사우례의 소 : ‘시월야길제유미배(是月也吉齊猶未配)’ 조에 대한 가공언(賈公彦)의 소이다.
[개장(改葬)]
살피건대, 예전의 개장은 분묘가 다른 연고로 무너져서 시구(屍柩)를 망실하게 될 경우에나 하였는데, 세속이 풍수설에 현혹되어 아무 이유 없이 천장(遷葬)을 하는 경우도 있으니, 아주 잘못된 것이다.
개장의 제구 -모두 처음 장례 때의 의식과 같다.
개장을 하려면 먼저 천장할 만한 땅을 가려 잡고 나서 관(棺)을 마련하고 염상(殮牀)ㆍ포효(布絞)ㆍ금의(衾衣)를 갖춘다. -대렴의 의식과 같다.
장례를 치를 적에는 제복(制服)을 갖춘다. -《의례》 상복(喪服)의 기(記)에 “개장 때에는 시마복(緦麻服)을 입는다.” 하였는데, 그 주에 “신하가 임금을 위하여, 아들이 아버지를 위하여, 아내가 남편을 위하여 입는다.” 하고, 그 소에 “아버지가 장자(長子)에게와 아들이 어머니에게도 같다.” 하였다. 《통전(通典)》에 의하면, 손자가 조부모의 후사가 된 경우에도 역시 시마복이며, 전모(前母)의 개장에는 중자(衆子)의 제도를 따른다. 왕숙(王肅)은 말하기를 “복(服)이 없을 경우 조복(弔服)에다 마대(麻帶)를 더 띤다.” 하였고, 구준(丘濬)은 말하기를 “나머지는 모두 소복(素服)에 포건(布巾)을 쓴다.” 하였다. ○ 살피건대, 예(禮)의 본뜻대로라면 삼년복을 입는 자는 모두 시마복을 입어야 할 것이다.
◆ 영역(塋域)을 열고 토지신(土地神)에게 제사하는 축문
유(維) 연호 몇년 세차 간지, 몇월 간지삭 며칠 간지에 아무 벼슬 성명 아무개는 감히 토지신께 분명히 고합니다. 지금 아무 관계 아무 벼슬 성명 -주인이 스스로 고할 경우, ‘아무 관계 아무 벼슬 또는 아무 관계 아무 봉작 아무 성씨’라 한다.- 의 택조(宅兆)가 불리하여 이곳에 개장을 하려고 하오니, 신께서는 보우하시어 후환이 없도록 해 주십시오. 삼가 청작(淸酌)과 포해(脯醢)로 공손히 제사드리오니, 흠향하시기 바랍니다.
날을 가려서 영역을 열고 토지신에게 제사를 올린 다음, 드디어 광중(壙中)을 파고 회격(灰隔)을 짓는데, 의식은 모두 처음 장례 때와 같다.
◆ 사당(祠堂)의 고사(告辭)
유 연호 몇년 세차 간지, 몇월 간지삭 며칠 간지에 효자 -효손 또는 효증손이나 효현손이라고 쓴다.- 아무 벼슬 아무개는 이에 현 아무 관계 아무 벼슬 부군 -또는 아무 관계 아무 봉작 아무 성씨- 의 체백(體魄)이 제자리가 아닌 곳에 의탁한바, 뜻밖의 환란으로 선령(先靈)을 놀라게 하는 일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 걱정되고 두려운 마음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장차 아무 달 아무 날로 날짜를 잡아 아무 곳으로 개장하려고 삼가 술과 과실로 경건히 고합니다.
하루 전날 사당에 고유한다. -차례대로 선 다음 주독(主櫝)을 열고 천장(遷葬)할 신주를 모셔내어 참신(參神)을 하고 두 번 절한다. 주인이 손을 씻고 향탁(香卓) 앞으로 나아가 꿇어앉아서 강신(降神)을 하고 향불을 올린 다음 두 번 절하고 술잔의 술을 땅바닥에 붓고 엎드렸다가 일어나서 두 번 절한다. 주인이 술을 치면 주부는 점다(點茶)를 한다. 주인 이하가 모두 꿇어앉고 나서 ‘운운(云云)’ 하는 고사(告辭)를 고한다. 주인이 엎드렸다가 일어나서 두 번 절하고는 제 위치로 돌아와서 사신(辭神)을 한다. 모두 두 번 절하고 신주를 모셔들인다. 나머지의 절차는 같다.
집사자가 구 묘소에 흰 삼베 장막을 치고, -문은 남쪽을 향하게 내고 그 밑에 돗자리를 깐다.
남녀의 위차(位次)를 마련한다. 그 이튿날 아침에 내외의 모든 친척이 다 모여 각기 제 위치로 나아간다. 주인은 시마복을 입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소복을 한다. -남자는 묘소 동쪽에 서쪽을 향해 부인은 묘소 서쪽에 동쪽을 향해 서되, 다 북쪽을 윗자리로 삼는다. 부인은 삼베 장막으로 가린다. ○ 살피건대, 아버지의 상중에 어머니를 개장할 경우는 《예기》 상복소기의 ‘부모가 함께 죽었을 경우[父母之喪偕]’라는 구절의 소에 “아버지를 아직 장사 지내지 않았다면 감히 변복(變服)하지 못한다.”고 한 말을 따르겠지만, 만약 아버지를 이미 장사 지냈다면 마땅히 ‘중상(重喪)을 아직 벗지 않은 상태에서 경상(輕喪)을 당한 예(例)’에 의거하여 어머니의 개장에 시마복을 입고서 일을 마치는 것이 옳을 듯하다. 다시 상고해 볼 일이다.
위치에 나아가서 슬피 곡한다.
◆ 토지신에게 제사하는 축문
유 연호 몇년 세차 간지, 몇월 간지삭 며칠 간지에 아무 벼슬 성명 아무개는 감히 토지신께 분명히 고합니다. 종전에 아무 관계 아무 벼슬 성명 -나머지는 앞과 같다.- 의 택조(宅兆)를 이곳에 자리를 잡아 모셨는데, 다른 환란이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장차 광중을 열어 다른 곳으로 옮기려고, 삼가 청작과 포해로 신께 경건히 제사드리오니, 신께서는 보우해 주시고 흠향하시기 바랍니다.
축(祝)이 토지신에게 제사를 올린다. -묘소를 열기 직전에 축이 먼저 술과 과실로 토지신에게 앞서의 의식과 같이 제사를 올린다. 축문은 운운한다.
◆ 묘소를 열 때의 고사
유 연호 몇년 세차 간지, 몇월 간지삭 며칠 간지에 효자 -앞에서와 같다.- 아무 벼슬 아무개는 감히 현 아무 관계 아무 벼슬 부군 -또는 아무 봉작 아무 성씨- 께 분명히 고합니다. 이곳에 장례를 모신바, 세월이 오래되면서 체백(體魄)이 편안하지 않으셔서 이제 개장을 하려고 하오니, 삼가 바라건대 존령(尊靈)께서는 너무 놀라지 마십시오.
묘소를 연다. -술ㆍ과실ㆍ포해를 묘소 앞에 차려 놓고 주인 이하가 차례로 서서 슬피 곡한 다음 두 번 절한다. 주인이 꿇어앉아서 향불을 피우고 술을 쳐서 땅에 붓고 잔을 올린 다음 엎드렸다가 일어나서 두 번 절하고는 제 위치로 돌아온다. 축이 세 번 헛기침을 하고 운운하는 고사(告辭)를 읽고 나면, 슬피 곡하고 나서 두 번 절한다.
역부(役夫)가 분묘를 연다. -분묘를 다 열고 나면 남녀가 각각 나아가서 처음과 같이 곡을 한다.
관(棺)을 들어내어 장막 안의 돗자리 위에 놓는다. -남녀가 모두 곡을 하며 장막까지 따라가서 남자는 동쪽에 서고 여자는 서쪽에 선다.
축이 공포(功布)로 관을 닦고 이불을 덮는다. -이불은 이금(侇衾)이다. 아래에서도 같다.
시구(尸柩) 앞에 전물(奠物)을 차린다. -탁자에 보통의 의식과 같이 술잔ㆍ술주전자ㆍ향로 및 소과(蔬果)와 반갱(飯羹)을 차려 놓는다. 주인 이하가 슬피 곡하고 두 번 절한 다음 향안(香案) 앞으로 나아간다. 꿇어앉아 향불을 피우고 술을 쳐서 땅바닥에 부은 다음 다시 술을 쳐 올린다. 엎드렸다가 일어나 슬피 곡한 다음 두 번 절한다. 한참 있다가 술과 과실만 남겨 두고 철상한다. ○ 퇴계가 말하기를 “영좌(靈座)를 설치하고 아침저녁으로 상식(上食)을 한다.” 하였다. 살피건대, 아침저녁의 곡전(哭奠)은 역시 초상 때와 같이 해야 할 것이다.
역부가 새 관을 장막문 밖에 들어다 놓는다. -남쪽을 향하게 한다.
드디어 장막으로 나아가면 집사자가 새 관의 서쪽에 염상(殮牀)을 설치한다. -관을 바꾸지 않을 경우 설치하지 않는다.
집사자가 관을 열고 시신을 염상 위에 들어다 놓고 드디어 대렴 때의 의식과 같이 염을 한다. -퇴계가 말하기를 “개장은 옛사람이 다 상례(喪禮)로 처리하였으므로, 만약 부모를 동시에 개장한다면 염과 폄(窆)의 선후도 부모의 상을 함께 당한 예(例)에 견주어 하는 것이 옳을 듯하다.” 하였다.
시구를 옮겨 상여에 싣는다. -집사자가 전물(奠物)을 치우면 축이 꿇어앉아서 고하기를 “오늘 시구를 옮겨 상여로 모시기에 감히 고합니다.” 한다. 이에 전물을 차려 제위(祭位)로 나아가서 슬피 곡하면, 축이 손을 씻고 향불을 피우고 술을 친 다음, 꿇어앉아서 고하기를 “영이(靈輀)를 이미 메웠으니, 가시면 곧 새 유택입니다.” 한다. 엎드렸다가 일어나 두 번 절한다.
발인은 처음 장사 지낼 적의 의식과 같다. 도착하기 전에 집사자가 먼저 영악(靈幄)과 영좌를 설치하고 남녀의 위차(位次)를 만든다. 시구가 도착하면 주인 남녀가 각기 제 위치로 나아가 곡을 하고 나서 묻는데, 일체 처음 장사 지낼 적의 의식과 같다.
◆ 토지신에게 제사하는 축문
유 연호 몇년 세차 간지, 몇월 간지삭 며칠 간지에 아무 벼슬 성명 아무개는 감히 토지신께 분명히 고합니다. 지금 아무 관계 아무 벼슬 성명 -나머지는 앞과 같다.- 의 택조(宅兆)를 이곳에 만드오니, 신께서는 보우하시어 후환이 없도록 해 주소서. 삼가 청작과 포해로 경건히 제사드리오니, 흠향하시기 바랍니다.
묘소의 왼쪽에서 토지신에게 제사 지낸다. -의식은 여느 의식과 같다. 축문은 운운한다.
◆ 우제(虞祭)의 축문
유 연호 몇년 세차 간지, 몇월 간지삭 며칠 간지에 효자 -앞에서와 같다.- 아무개는 감히 현 아무 관계 아무 벼슬 부군 -나머지는 앞과 같다.- 께 분명히 고합니다. 유택을 새로 개장하여 마지막 우제를 마치고 나니, 밤낮으로 마음이 편치 않아 울부짖어 보아도 끝이 없습니다. -처자 이하는 다른 말로 고친다.- 삼가 청작(淸酌) 서수(庶羞)로 경건히 우제를 드리오니, 흠향하시기 바랍니다. -나머지 관계에 대하여 고치는 말은 초상 우제의 축문에 나온다.
장사를 지내고 나서는 장막의 영좌 앞으로 나아가서 우제를 지내는데, 의식은 초우 때와 같다. -다만 차례대로 서서 슬피 곡한 다음 곡을 그치고, 삼헌(三獻)과 사신(辭神)에는 모두 곡하지 않는다.
제사를 마치고 나서는 영좌를 철수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살피건대, 《주자어류》에 “어떤 사람이 ‘왕숙(王肅)은 우제를 지내고 나서 상복을 벗는다고 하였으나, 이와 같은 개장에 있어서는 신(神)이 이미 사당에 있은 지가 오래인데, 어떻게 우제를 지낼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묻자, 주자가 대답하기를 ‘그렇기는 하나, 지금으로서는 도무지 상고할 도리가 없다. 모름지기 사당에 가서 반곡(反哭)을 하는 것이 마땅하나, 구준의 《가례의절》에 묘소에서 우제를 지낸다고 하여 세속에서 다 그것을 준행하고 있으니, 폐지할 수는 없을 듯하다.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다.’ 하였다.” 하였다.
◆ 사당의 고사
유 연호 몇년 세차 간지, 몇월 간지삭 며칠 간지에 효자 -앞에서와 같다.- 아무개는 이제 현 아무 관계 아무 벼슬 부군 -또는 아무 관계 아무 봉작 아무 성씨- 의 체백(體魄)을 제자리가 아닌 곳에 모셨던 것을 이미 이달 아무 날 아무 곳에 개장하여 일을 끝마쳤으므로, 삼가 술과 과실로 경건히 고합니다.
사당에 고유하고, -의식은 앞에서와 같다. 고사(告辭)는 운운한다. ○ 《주자어류》에 “개장 때에는 모름지기 사당에 고유한 뒤에 또 묘소에 고유하고, 비로소 묘소를 열고 장례를 치른다. 이장하는 예를 마치고 나서는 제전(祭奠)을 올리고, 집에 돌아와서는 또 사당에 고유한 다음 곡을 한 뒤에 일을 마쳐야만 비로소 온당하다. 이장을 거행할 때에는 다시 신주를 모셔낼 필요가 없고, 고유와 제사 때에는 역시 신주를 정침(正寢)으로 모셔낸다.” 하였다.
석 달 만에 복을 벗는다. -자사(子思)가 말하기를 “부모의 개장에는 시마복을 입었다가 장사를 지내고 나서 벗는다.” 하였다. ○ 《주자어류》에 “어떤 사람이 ‘정현(鄭玄)은 시마복의 달수가 끝난 뒤에 복을 벗는다고 하였고, 왕숙(王肅)은 상을 마치면 그만 벗는다고 하였으니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하고 묻자, 주자가 대답하기를 ‘지금에 와서 상고할 수가 없다. 예는 의당 후한 쪽을 따라야 하니, 정씨의 주장을 좇는 것이 마땅하겠다.’ 하였다.” 하였다. ○ 살피건대, 복을 벗을 적에 허위(虛位)를 설치하여 곡을 하고 나서 벗는 것이 마땅하다. ○ 《통전》에서 두이(杜夷)가 의론하기를 “묘소가 도적에 의해 도굴을 당하였을 경우 개장의 예에 의하여 시마복을 입는다.” 하였고, 하수지(何修之)는 의론하기를 “곽(槨)에까지 미치지 않았을 경우 신궁(新宮)에 불이 난 예에 의하여 사흘 동안 곡을 할 뿐이다.” 하였다.
[사당의 의절(儀節)] -살피건대, 장사를 잘 모시고 제사를 오래도록 받드는 두 가지의 일은 다 가정을 두고 사는 일상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므로, 이에 《가례》의 제례(祭禮) 몇 조항을 취하여 편말(篇末)에 붙인다.
정침(正寢) 동쪽에 사당을 세운다. -제도는 도(圖)에 나온다.
사당이 있는 집은 종자(宗子)가 대대로 수호하고, 자손들이 나누어 가지지 못한다. ○ 무릇 집의 제도는 향배(向背)는 불문하고 다만 앞은 남쪽, 뒤는 북쪽, 좌는 동쪽, 우는 서쪽으로 친다.
감실(龕室)은 넷을 만들어서 선대의 신주를 모시며, 후손이 없는 방친(傍親)은 그 반차(班次)에 따라 합사(合祀)한다.
백숙조부모는 고조에게 합사하고 백숙부모는 증조에게 합사하며, 아내와 형제 및 형제의 아내는 조부에게 합사하고, 자질(子姪)은 아버지에게 합사하되, 모두 서쪽을 향하게 한다. 주독(主櫝)은 모두 정위(正位)와 같다. ○ 정자가 말하기를 “복이 없는 상(殤) -7세 이하이다.- 은 제사를 지내지 않고, 하상(下殤) -11세에서 8세까지이다.- 의 제사는 부모가 살아 있을 때까지만 지내고, 중상(中殤) -15세에서 12세까지이다.- 의 제사는 형제가 살아 있을 때까지만 지내고, 장상(長殤) -19세에서 16세까지이다.- 의 제사는 형제의 아들이 살아 있을 때까지만 지내며, 성인(成人) -남자는 관례(冠禮)를 한 경우, 여자는 시집을 간 경우이다.- 으로서 후손이 없는 자는 형제의 손자가 살아 있을 때까지만 제사를 지낸다.” 하였다.
제전(祭田)을 두고,
현재의 전지를 계산하여 20분의 1을 취하여 제전으로 세웠다가, 대수가 다할 경우 묘전(墓田)으로 삼는데, -묘사는 1년에 한 번씩 지낸다.- 부위(祔位)도 이와 같이 한다. 모두 규약을 세워서 관가에 보고하고 저당을 잡히거나 팔지 못하도록 한다.
제기(祭器)를 갖춘다.
제상ㆍ돗자리ㆍ교의ㆍ탁자ㆍ세숫대야ㆍ화로ㆍ술그릇ㆍ밥그릇을 곳간 안에 간직해 둔다. 곳간이 없을 경우 궤짝에 넣어 두며, 간직해 둘 수가 없을 경우 바깥문 안에 벌여 둔다.
주인은 사당 대문 안에서 새벽 알현(謁見)을 하고,
주인이 새벽 알현을 할 때에는 심의를 입고 분향한 다음, 두 번 절한다. -율곡이 말하기를 “비록 주인이 아니더라도 주인을 따라 같이 알현하는 것도 괜찮다.” 하였다.
출입할 때에는 반드시 고한다.
주인과 주부는 가까운 곳에 외출할 경우 대문 안에 들어가서 첨례(瞻禮)를 하고 떠날 것이며, 돌아와서도 그렇게 한다. 하룻밤을 자고 돌아올 경우 분향한 다음 두 번 절하며, 열흘 이상의 먼 길을 나설 경우는 두 번 절하고 분향한 다음 “아무개가 장차 아무 곳으로 가려고 하여 감히 고합니다.” 하고는 또 두 번 절하고 길을 떠나며, 돌아와서도 역시 그렇게 하는데, 다만 “아무개가 오늘 아무 곳에서 돌아왔으므로 감히 뵈옵니다.” 한다. 달을 넘겨서 돌아올 경우는 중문(中門)을 열고 계단 아래에 서서 두 번 절하고 동쪽 계단으로 올라가서 분향한 다음 고하고 두 번 절하며, 내려와 제 위치로 돌아가서 두 번 절한다. 나머지 사람들 역시 그렇게 하는데, 다만 중문은 열지 않는다. ○ 무릇 오르내릴 적에는 주인은 동쪽 계단으로 하고, 주부 및 나머지 사람들은 비록 존장(尊長)이라도 서쪽 계단으로 한다. ○ 모든 절은 남자는 두 번, 부인은 네 번이다.
[참례(參禮)]
참례의 제구(諸具)
햇과일[新果]
술주전자[酒注]
술잔과 잔대[盞盤]
술병[酒甁]
찻잔과 받침대
향탁(香卓)
향로(香爐)
향합(香盒)
모사(茅沙)
세숫대야[盥盆]
수건[帨巾]
설ㆍ동지ㆍ초하루ㆍ보름에 참례한다.
설ㆍ동지ㆍ초하루ㆍ보름의 하루 전날 청소를 하고 나서 재숙(齋宿)한다. 이튿날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문을 열고 주렴을 걷어올린 다음 감실(龕室)마다 햇과일 한 대반(大盤)씩을 탁자 위에 차려 놓고, 위(位)마다 찻잔과 받침대, 술잔과 잔대를 하나씩 신주독 앞에 갖다 놓는다. 모사 그릇을 향탁 앞에 놓고, 별도로 탁자 하나를 동쪽 계단 위에 갖다 놓은 다음, 술주전자와 술잔, 잔대를 그 위에 갖다 놓고, 술 한 병을 그 서쪽에 갖다 놓고, 세숫대야와 수건 둘씩을 동쪽 계단 아래 동남쪽에 갖다 놓되 받침대와 수건걸이가 있는 것은 서쪽에 두어서 주인과 친속(親屬)이 손을 씻도록 하고, 받침대와 수건걸이가 없는 것은 동쪽에 두어서 집사자가 손을 씻도록 한다. 수건은 모두 북쪽에 놓는다.
주인 이하가 모두 옷을 차려입고 문 안으로 들어가 제 위치로 나아가서 주인은 동쪽 계단 밑에 북쪽을 향하여 서고 주부는 서쪽 계단 밑에 북쪽을 향하여 선다. 주인에게 어머니가 있으면 특별히 주부의 앞에 자리잡는다. 주인에게 제부(諸父)ㆍ제형(諸兄)이 있을 경우 특별히 주인의 오른쪽 조금 앞에 자리잡아 서쪽을 윗자리로 하여 두 줄로 서고, 제모(諸母)와 고모ㆍ형수ㆍ누이[姊]가 있을 경우 특별히 주부의 왼쪽 조금 앞에 동쪽을 윗자리로 하여 두 줄로 선다. 또 여러 아우들은 주인의 오른쪽에 조금 물러나 서고, 자손과 외집사자는 주인의 뒤에 서쪽을 윗자리로 하여 두 줄로 서며, 주인의 제수 및 여러 누이[妹]들은 주부의 왼쪽에 조금 물러나 서며, 자손과 부녀와 내집사자는 주부의 뒤쪽에 동쪽을 윗자리로 하여 두 줄로 선다. 모두 제 위치에 서고 나면 주인은 손을 씻고 올라가서 홀(笏)을 꽂고 주독을 연 다음 여러 고위(考位)의 신주를 받들어다 주독 앞에 놓고, 주부는 손을 씻고 올라가 여러 비위(妣位)의 신주를 받들어다 고위의 동쪽에 놓는다. 다음에 반차에 따라 합사한 신주를 모셔내되 절차는 마찬가지이며, 맏아들과 맏며느리 또는 맏딸에게 명하여 손을 씻고 올라가서 나누어서 모셔내도록 한다. 항렬이 낮은 합사한 신주도 마찬가지이다. 신주를 모셔내고 나면 주부 이하는 먼저 내려와서 제 위치로 돌아가고, 주인은 향탁 앞에 나아가서 강신(降神)을 한 다음 홀(笏)을 꽂고 분향하고 두 번 절하고서 뒤로 조금 물러나 선다. 집사자가 손을 씻고 올라가서 병뚜껑을 열고 술을 주전자에 채운 다음, 한 사람은 주전자를 받들고 주인의 오른쪽으로 나아가고 한 사람은 술잔을 잡고 주인의 왼쪽으로 나아간다. 주인이 꿇어앉으면 집사자도 모두 꿇어앉는다. 주인이 주전자를 받아 술을 술잔에 치고 나서 주전자를 돌려준 다음, 술잔과 잔대를 받들되 왼손으로는 잔대를 잡고 오른손으로는 술잔을 잡는다. 모사(茅沙) 위에 술을 부은 다음, 술잔과 잔대를 집사자에게 건네주고는 홀을 꺼내어 잡고 엎드렸다가 일어나서 뒤로 조금 물러나 두 번 절하고 내려와서 제 위치로 돌아온다. 위치에 서 있는 여러 사람들과 함께 두 번 절하여 참신(參神)을 한다. 주인이 올라가서 홀을 꽂은 다음 주전자를 잡고 술잔에 술을 치되, 정위(正位)에 먼저 치고 다음에 부위(祔位)에 친다. 그다음에는 맏아들에게 명하여 항렬이 낮은 여러 부위에 친다. 주부가 올라가서 찻그릇을 잡으면 집사자가 탕병(湯甁)을 잡고 따라가서 앞에서와 같이 점다(點茶)를 한다. -차를 쓰지 않을 경우는 하지 않는다.- 맏며느리나 맏딸에게 명하는 것도 앞에서와 같다. 며느리와 집사자가 먼저 내려와서 제 위치로 돌아오면, 주인이 홀을 꺼내어 잡고 주부와 함께 향탁 앞에 동서로 갈라 서서 두 번 절하고 내려와 제 위치로 돌아온다. 위치에 있는 여러 사람과 함께 모두 두 번 절하여 사신(辭神)을 하고 물러난다. ○ 보름날에는 술도 마련하지 않고 신주도 모셔내지 않으며, 주인이 점다를 하면 맏아들이 이를 돕고 먼저 내려온다. 주인은 향탁 남쪽에 서서 두 번 절하고 이에 내려온다. 나머지의 의식은 앞서의 의식과 같다. ○ 무릇 성복(盛服)이라 함은 벼슬이 있을 경우 복두(㡤頭)ㆍ공복(公服)ㆍ대(帶)ㆍ화(靴)ㆍ홀을, 진사(進士)일 경우 복두ㆍ난삼(襴衫)ㆍ대를, 처사(處士)일 경우 복두ㆍ조삼(皂衫)ㆍ대를 갖추는 것이고, 벼슬이 없는 자는 통상 모자(帽子)ㆍ삼(衫)ㆍ대를 쓴다. 또 이를 갖추지 못할 경우 심의(深衣)나 양삼(涼衫)을 입으며, 벼슬이 있는 자도 통상 모자 이하를 착용하지만, 이는 성복이 되지 못한다. 부인의 경우 가계(假髻)ㆍ대의(大衣)ㆍ장군(長裙)을 쓰며, 딸로서 집에 있는 자는 관자(冠子)ㆍ배자(背子)를 쓰고, 중첩(衆妾)은 가계ㆍ배자를 쓴다.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의 《봉선잡의(奉先雜儀)》에 “무릇 성복이란 벼슬이 있을 경우 공복ㆍ대ㆍ홀을 말하는데, 공복이 없을 경우 흑단령(黑團領)ㆍ사모(紗帽)ㆍ품대(品帶)를 쓰고, 벼슬이 없는 자는 흑단령ㆍ흑대(黑帶)를 쓰며, 부인의 경우 대의(大衣)ㆍ장군(長裙)을 쓴다.” 하였다.
속절(俗節)의 경우 시식(時食)을 올린다.
속절이란 이를테면 청명(淸明)ㆍ한식(寒食)ㆍ단오(端午)ㆍ백중(百中)ㆍ중양(重陽) 따위인데, 무릇 향속(鄕俗)에서 숭상하는 명절이다. 시식이란 이를테면 주악[角黍] 따위가 있다. 무릇 그 속절에 즐겨 먹는 것을 큰 소반에 담고 간혹 나물과 과실도 담아서 올리는데, 예절은 설날ㆍ동지ㆍ초하룻날의 의식과 같다. -율곡의 《격몽요결(擊蒙要訣)》에 “속절이란 1월 15일, 3월 3일, 5월 5일, 6월 15일, 7월 7일, 8월 15일, 9월 9일, 섣달의 납일(臘日)을 말하며, 시식이란 이를테면 약밥ㆍ쑥떡ㆍ수제비 따위를 말한다. 만약 풍속에서 숭상하는 음식물이 없을 경우에는 마땅히 떡ㆍ과실 따위의 몇 품목으로 갖추어서 삭망 참배의 의식과 같이 올려야 하며, 새로운 음식물이 있을 경우에는 모름지기 삭망이나 속절에 모두 차려 놓는다. 만약 오곡(五穀)으로 밥을 지을 수 있을 경우 마땅히 반찬 몇 가지를 갖추어서 같이 차린다. 비록 보름날이더라도 신주는 역시 모셔내며, 술도 올린다. 만약 고기나 과실 따위일 경우 새벽 알현 때에 신주독을 열고서 단헌(單獻)을 한 다음, 분향하고 두 번 절한다. 단헌의 전물(奠物)은 무엇이든 생기는 대로 올리며, 모든 음식물은 사당에 올리기 전에는 먼저 먹을 수 없다. 만약 타향에 나가 있을 경우는 꼭 이렇게 할 필요는 없다.” 하였다.
◆ 일이 있을 때 고하는 고사(告辭) -관례와 혼례에 관한 고사는 《가례》의 본편(本篇)에 나온다.
유(維) 연호 몇년 세차 간지, 몇월 간지삭 며칠 간지에 효현손 -정위(正位)에만 고하고 부위(祔位)에는 고하지 않는다.- 아무 벼슬 아무개는 감히 현고조고 아무 벼슬 부군 및 현고조비 아무 봉작 아무 성씨 -증조 이하는 모두 열서(列書)한다.- 께 분명히 고합니다. 아무개 -만약 자제 이하의 경우 아무개의 아들 아무개라고 쓴다.- 가 아무 달 아무 날에, 임금님의 은전(恩典)을 입어서 아무 벼슬을 제수(除授)받았습니다. 이는 선조의 가르침을 잘 받들어서 얻은 녹위(祿位)로서, 선조의 남은 복을 누리게 되매 감격하고 사모하는 마음 견딜 수 없어서 삼가 술과 과실로 경건히 고유합니다. -이상은 벼슬을 제수받았을 때의 고사이다. ○ 급제(及第)하였을 때의 고사는 “임금님의 은전을 입어서 아무 과(科)에 몇 등급으로 급제하였습니다. 이는 선조의 가르침을 잘 받들어서 출신(出身)에 참여한 것이니”라 하고, 생진시(生進試)에 입격(入格)한 경우는 “임금님의 은전을 입어 생원시(生員試) 또는 진사시(進士試)에 몇 등급으로 입격하였습니다. 이는 선조의 가르침을 잘 받들어서 국학(國學)에 오른 것이므로”라 한다.[《격몽요결》에 나온다.]
“-앞부분은 앞에서와 같다.- 아무 벼슬이 폄강(貶降)되어 선조의 가르침을 실추시켰으므로 황공하여 몸 둘 곳이 없습니다. -만약 제부(諸父)ㆍ제형(諸兄)의 경우라면 ‘선조의 가르침을 실추시켰으므로’ 이하를 다른 말로 고친다.-” 한다. ‘삼가[謹以]’ 이후는 앞에서와 같다. -이상은 폄관(貶官)의 고사이다.
“-앞부분은 앞에서와 같다.- 아무 달 아무 날의 제서(制書) -살피건대, ‘제(制)’ 자는 우리나라에서는 감히 쓰지 못하므로 ‘교(敎)’ 자로 바꾸는 것이 옳다.- 를 받든바, 현 아무 관계께는 아무 벼슬이, 현 아무 관계께는 아무 봉작(封爵)이 추증(追贈)되었습니다. 아무개 -자제의 경우는 앞에 나온다.- 는 선조의 가르침을 잘 받들어서 조정의 벼슬자리를 차지하고 은혜로운 경사를 공손히 받들어서 이처럼 포증(褒贈)까지 내려졌습니다만, 녹봉(祿俸)으로 공양(供養)해 보지 못하여 가슴이 무너지고 목이 메이는 슬픔 견디기 어렵습니다.” 한다. ‘삼가[謹以]’ 이후는 앞에서와 같다. -만약 어떤 일로 인하여 특별히 추증되었다면 별도로 고유문을 지어서 그 내용을 서술한다.
《가례의절》에 의하면 “선조의 가르침을 받들어서 조정의 녹봉을 받게 되었습니다. 우러러 황은(皇恩)을 입고서 조상에게 추은(推恩)하게 되었는데”라고 한다. 《주자대전》에 의하면 “은혜로운 경사를 입은바 영광이 조상의 사당에까지 미치어 아무 달 아무 날의 고(誥) [살피건대, ‘고(誥)’ 자는 우리나라에서는 감히 쓰지 못하므로, ‘교지(旨)’로 바꾸어 쓰는 것이 옳다.] 에서, 고위(考位)를 추증하여 아무 벼슬을 삼고 비위(妣位)를 추증하여 아무 봉작을 삼았습니다만, 오직 음용(音容)이 날로 멀어져가서 추후의 봉양은 따라잡을 길이 없습니다. 명서(命書)를 공손히 받들매 기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여 공손히 기록하고 분황(焚黃)을 하니 슬픔만 더하여집니다.” 하였다. ‘삼가’ 이후는 앞에서와 같다. ○ 만약 구준(丘濬)의 삼헌례(三獻禮)를 행한다면, 신주를 모셔내려 할 때 고하기를 “지금 자식 아무개가 조정에 벼슬하여 돌아가신 부모님께 벼슬과 작위를 추증하게 되었으므로, 휴가를 청하여 분황하려 합니다. 이에 감히 현고 아무 벼슬 부군 및 현비 아무 봉작 아무 성씨의 신주를 모셔내어 정침으로 나아가서 공손히 제사를 드릴 것을 청합니다.” 한다. ○ 이상은 추증의 고사이다.
일이 있을 경우 고유한다.
의식은 설ㆍ동지ㆍ초하루ㆍ보름 때와 같다. 다만 차나 술을 올리고, -부위(祔位)도 함께 진설한다.- 두 번 절한다. 주부가 먼저 내려와서 제 위치로 돌아가고 주인이 향탁(香卓)의 남쪽에 서면, 축(祝)이 축판을 잡고 주인의 왼쪽에 선 다음 꿇어앉아서 축문을 읽고 일어난다. 이에 주인이 두 번 절하고 내려와서 제 위치로 돌아간다. 나머지는 모두 같다. ○ 벼슬을 제수받거나 벼슬이 폄강되었음을 고유할 때 -고사는 앞에 나온다.- 에도 나머지는 같다. ○ 추증을 고유할 경우 추증받는 감실에만 고유한다. 추증된 벼슬과 봉작으로 고쳐 쓴 다음, -고쳐 쓰는 의식은 길제(吉祭) 조에 나온다.- 주인이 신주를 제자리에 받들어다 안치하고 이에 내려와서 제 위치로 돌아간다. 그 이후는 같다. -《가례의절》에 “하루 전날 재숙하고 당일날 이른 아침에 일어나서 찻잔ㆍ술잔ㆍ과실ㆍ포를 추증받은 주독(主櫝) 앞에 차린다. 먼저 글씨를 잘 쓰는 사람에게 명하여 누런 종이에 제서(制書) 한 통을 베껴 쓰게 해서 소반에 담아 향안(香案) 한가운데에 올려놓고 차례대로 늘어선다. 손을 씻은 다음 독을 열고 신주를 모셔내어 제자리로 돌아온다. 향안 앞에 나아가 꿇어앉아 분향한다. 주인이 스스로 고유하기를 ‘효남(孝男) 아무개는 삼가 제서를 받든바, 현고 아무 벼슬 부군께는 아무 벼슬이 추증되고 현비 아무 봉작 아무 성씨께는 아무 봉작이 추증되었으므로, 감히 신주를 고쳐 쓸 것을 청합니다.’ 하고는 두 번 절한다. 이어 글씨를 잘 쓰는 사람에게 명하여 신주를 고쳐 쓰게 한 다음 주인이 받들어다 주독 앞에 놓고 제 위치로 돌아온다. 강신(降神)을 하여 두 번 절하고 제 위치로 돌아와 참신(參神)을 하면, 주인 이하가 모두 두 번 절한다. 주인이 신위(神位) 앞에 나아가 술을 쳐 올리고 두 번 절한다. 주인 이하가 모두 꿇어앉고 축문을 읽는다. 주인이 제 위치로 돌아와 꿇어앉으면 그 이하가 모두 꿇어앉는다. 축이 동쪽을 향하여 서서 제서를 펼친 다음 엎드렸다가 일어나면 집사자가 베껴 쓴 누런 종이의 제서를 받들고 향안 앞으로 나아가서 축문과 함께 불사른다. 그러고 나서는 사신(辭神)을 하고 모두 두 번 절한 다음 주인이 신주를 받들어 주독에 넣는다. 이것은 벼슬자리에 있는 사람으로서 행하는 절차이다. 만약 휴가를 청하여 분황하는 것이라면, 은명(恩命)을 공손히 받들어 천리 밖에서 고향으로 돌아와 그 영광이 부모에게 미친 것인데, 거행하는 예수(禮數)가 단헌(單獻)에 그칠 경우 너무 간촐한 것이 아니겠는가. 시제(時祭)의 예에 준하여 거행해야 한다.” 하였다. 살피건대, 구준의 《가례의절》이 자세한 듯하여 이에 함께 기록해 둔다. ○ 주인이 맏아들을 낳았을 경우 한 달 만에 알현시킨다. 의식은 위와 같은데, 다만 축문을 쓰지 않는다. 주인이 향탁 앞에 서서 고유하기를 “아무개의 며느리 아무 성씨가 아무 달 아무 날에 아들 아무개를 낳았으므로, 감히 알현시킵니다.” 한다. 고유를 마치고 나서 향탁 동남쪽에 서쪽을 향하여 서면 주부가 아들을 안고 나아가서 양쪽 계단 사이에 서서 두 번 절한다. 주인이 이에 내려와 제 위치로 돌아온다. 이후는 같다. ○ 관례나 혼례의 경우는 《가례》의 본편에 나온다. ○ 축판의 모든 자칭(自稱)은 종자(宗子)가 아닐 경우 ‘효’ 자를 쓰지 않는다. -살피건대, 집안에 상이 나도 고유하여야 한다. 《예기》 증자문에 “임금이 죽으면 축이 여러 사당의 신주를 모아다 선조의 사당에 간직한다.” 하고, 그 주에 “이는 살아 있는 사람들이 흉사를 위하여 한곳으로 모이는 것을 상징한 것이다.” 하였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상에도 반드시 고유하는 것이다.
혹시 수화(水火)의 재해를 당하거나 도둑이 들었을 경우 먼저 사당을 구호(救護)하여 신주와 유서(遺書)를 옮기고, 그다음에 제기를 옮기며, 그런 다음에 가재(家財)에 손을 쓴다. -《예기》 단궁 하에 “선인(先人)의 방 [종묘를 뜻한다.] 에 화재가 났을 경우에는 3일 동안 곡한다.” 하였다. ○ 퇴계가 말하기를 “신주가 불에 탔을 경우 곧바로 지난날 신주를 모셨던 곳에 허위(虛位)를 설치하고 신주를 다시 쓴 다음, 분향을 하고 제사를 지낸다. 어떤 이는 정침(正寢)에서 하는 것이 옳다고도 한다.” 하였다.
세대가 바뀌면 신주를 고쳐 쓰고 체천(遞遷)을 한다. -신주를 고쳐 쓰고 체천을 하는 예절은 길제 조에 나온다.
[시제(時祭)]
시제의 제구 -모두 우제와 같다.
수조반(受胙盤) : 한 개
숟가락[匙] : 한 개
효손 아무개는 이번 중춘(仲春) -중하(仲夏)ㆍ중추(仲秋)ㆍ중동(仲冬)으로 계절에 따라 쓴다.- 의 달에, 현고조고 아무 벼슬 부군과 현고조비 아무 봉작 아무 성씨께 -증조 이하는 모두 함께 열서(列書)한다.- 제사를 지내고, 아무 관계 아무 벼슬 부군 및 아무 관계 아무 봉작 아무 성씨를 부식(祔食)하려 하므로, 감히 신주를 정침(正寢)으로 모셔낼 것을 청하오며, 공손히 전헌(奠獻)하는 바입니다. -이상은 신주를 모셔내는 고사이다.
유(維) 연호 몇년 세차 간지, 몇월 간지삭 며칠 간지에 효현손 -증조할아버지의 경우 ‘효증손’, 할아버지의 경우 ‘효손’, 아버지의 경우 ‘효자’라고 쓴다.- 아무 벼슬 아무개는 감히 현고조고 아무 벼슬 부군 및 현고조비 아무 봉작 아무 성씨 -증조할아버지의 경우 ‘현증조고 아무 벼슬 부군 및 현증조비 아무 봉작 아무 성씨’라고 쓴다. 조고비(祖考妣)와 고비(考妣)도 다 이와 같다.- 께 분명히 고합니다. 계절이 흘러서 바뀌어 중춘 -계절에 따라 쓴다.- 이 돌아오니, 계절에 따른 감회에 영원히 사모하는 마음 견딜 수 없어서, -고비의 경우 ‘영원히 사모하는 마음 견딜 수 없어’를 ‘드넓은 하늘처럼 끝이 없어서’로 고친다.- 감히 청작(淸酌) 서수(庶羞)로 공손히 제사를 올리고 아무 관계 아무 벼슬 부군 및 아무 관계 아무 봉작 아무 성씨를 부식하오니, 흠향하시기 바랍니다. -이상은 각위(各位)의 축문이다.
조고(祖考)께서 공축(工祝)에게 명하시어 너희 효손에게 많은 복을 받아 이르도록 하고 너희 효손에게 복을 나누어 주어서, 너희로 하여금 하늘로부터 녹을 받아 논밭에서 농사가 잘 되게 하고 장수하며 오래도록 살게 하는 것이니, 이 복이 그치지 않고 오래 계속될 것이다. -이상은 음복을 받을 때의 하사(嘏辭)이다.
◆ 웃어른들에게 음복을 보내는 글 -사마온공의 《제의(祭儀)》에 나온다.
아무개는 황공히 아룁니다. -평교 이하의 경우 ‘황공’ 두 글자를 뺀다.- 아무개가 이달 아무 날에 조고께 공손히 제사를 올렸으므로, -강등(降等)의 경우 ‘아무개가……에[某以] 두 글자를 뺀다.- 집사(執事)께 삼가 음복을 보내오니, -평교의 경우 ‘집사께[于執事]’ 세 글자를 빼고, 강등의 경우 ‘삼가’를 ‘이제’로 고친다.- 존자(尊慈)께서는 굽어 받아 주시기를 삼가 바랍니다. -평교의 경우 ‘존자께서는 굽어’를 빼고 ‘받아 주시기를’을 ‘받으시오’로 고치며, 강등의 경우 이상의 말들을 모두 뺀다.- 아무개는 황공히 두 번 절합니다. -평교의 경우 ‘황공’을 빼며, 강등의 경우 ‘두 번 절합니다’를 빼고 ‘아룁니다’만 쓴다.
◆ 웃어른이 답하는 글
아무개는 아룁니다. -강등의 경우 ‘황공히 아룁니다’로 쓴다.- 그대가 효성으로 조고(祖考)께 제향을 하고서, -평교의 경우 ‘삼가 받든바 아무개가 효성으로 조고께 제향을 하고서’로 쓴다.- 그 복을 혼자만이 차지하지 않고 이 늙은이에게까지 베푸니, -평교의 경우 ‘천교(賤交)에게까지’로 쓰고, 강등의 경우 ‘천자(賤子)에게까지’로 쓴다.- 감사하고 위로되는 마음 참으로 깊습니다. -평교의 경우 ‘감사한 마음 이기지 못하겠습니다’로 쓰고, 강등의 경우 ‘사은(私恩)의 과분한 영광에 고마운 마음 이기지 못하겠습니다’로 쓴다.- 아무개는 아무 사람에게 아룁니다. -평교의 경우 ‘아무개는 아무 사람의 좌우(左右)에게 두 번 절하고’로 쓰고, 강등의 경우 ‘아무개는 아무 사람의 집사에게 황공히 두 번 절하고’로 쓴다.
제사를 이미 다 올리매 조고께서 잘 흠향하셨으니, 바라건대 아무 관계는 오복(五福)을 갖추 받아서 가족을 잘 보존하고 집안이 잘 될지어다. -이상은 음복할 때의 축사이다.
제사를 이미 다 올렸으니 오복의 경사를 너희들은 함께 누릴지어다. -이상은 웃어른이 제사에 보답하여 어른과 아이들에게 하는 축사이다.
중월(仲月)의 초순으로 날을 잡아서,
맹춘(孟春) 하순의 초에 중월의 3순 중 각기 하루를 가리되 정일(丁日)이나 해일(亥日)로 잡는다. 주인은 옷을 차려입고 사당 중문 밖에 서쪽을 향하여 서고, 형제들은 주인의 남쪽에 조금 뒤로 물러나 서되 북쪽을 윗자리로 삼으며, 자손들은 주인의 뒤에 두 줄로 서되 서쪽을 향하여 북쪽을 윗자리로 삼는다. 주인의 앞에 탁자를 가져다 놓고 향로ㆍ향합ㆍ환교(環珓) 및 소반을 그 위에 벌여 놓고, 주인이 홀(笏)을 꽂고 향불을 피워 환교를 훈증(薰蒸)한 다음, -《가례의절》에 의하면, 향불의 연기를 쐰다.- 상순의 날짜로 명하기를 “아무개는 장차 다음 달 아무 날로써 제삿날을 골라 조고(祖考)께 나아가 제사를 올리려 하니, 흠향하시기 바랍니다.” 하고는 곧장 환교를 소반에 던져서 하나가 엎어지고 하나가 젖혀지면 길하다. 길하지 않을 경우 다시 중순의 날짜로 점치는데, 여기서 또 길하지 않으면 다시 점치지 않고 바로 하순의 날을 쓴다. 날을 얻고 나면 축이 중문을 열고, 주인 이하가 삭망 때의 위치와 같이 북쪽을 향하여 서서 모두 두 번 절한다. 주인이 올라가서 분향하고 두 번 절하면 축이 고사(告辭)를 가지고 주인 왼쪽에 꿇어앉아서 읽기를 “효손 아무개는 장차 다음 달 아무 날로 조고께 삼가 제사를 올리려고 점을 쳐서 이미 좋은 날을 얻었으므로 감히 고유합니다.” 한다. -하순의 날을 쓸 경우 ‘점을 쳐서 이미 좋은 날을 얻었으므로’는 쓰지 않는다.- 주인이 두 번 절하고 내려와 위치로 돌아와서 위치에 서 있는 모든 사람과 함께 두 번 절한다. 축이 문을 닫으면 주인 이하가 다시 서쪽을 향한 위치로 돌아온다. 집사자는 대문 서쪽에 서되 모두 동쪽을 향하여 북쪽을 윗자리로 삼고, 축은 주인의 오른쪽에 선다. 축이 집사자에게 명하기를 “효손 아무개는 장차 다음 달 아무 날로 조고께 삼가 제사를 올리려고 하니, 유사(有司)는 제물을 갖추고 주위를 소제하라.” 하면, 집사자가 “예”라고 응답하고 이에 물러난다. -주자가 말하기를 “사마온공은 춘분(春分)ㆍ추분(秋分)ㆍ하지(夏至)ㆍ동지(冬至)만 쓴다고 하였는데, 역시 좋다.” 하였다. 살피건대, 예서(禮書)의 주에 봄 제사는 봄철이 지나면 지내지 않고 여름 제사는 여름철이 지나면 지내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를 근거로 할 때 중월(仲月)에 만약 연고가 있을 경우, 계월(季月)에도 제사를 지낼 수 있다.
사흘 전부터 재계를 하고,
사흘 전부터 주인은 뭇 남자들을 거느리고 밖에서 치재(致齋)를 하고, 주부는 뭇 부녀들을 거느리고 안에서 치재한다.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으며, 술을 마시더라도 취하도록 마시지 않으며, 고기를 먹더라도 양념을 하지 않는다. 또 초상에 조문을 가지 않고 음악을 듣지 않으며, 모든 나쁘고 궂은 일에는 다 참여하지 않는다. -《격몽요결》에 “시제(時祭)의 경우 산재(散齋) 4일에 치재 3일, 기제(忌祭)의 경우 산재 2일에 치재 1일, 참례(參禮)의 경우 재숙(齋宿) 1일을 한다. 이른바 ‘산재’란 문상(問喪)을 가지 않고 문병(問病)을 하지 않고 양념을 먹지 않고 술을 취하도록 마시지 않고 모든 나쁘고 궂은 일에는 다 참여하지 않는 것이며, 이른바 ‘치재’란 음악을 듣지 않고 출입을 하지 않고 마음을 한데 모아 제사 지내는 선조를 생각하면서 평소의 거처를 생각하고 평소의 웃음소리와 말소리를 생각하고 즐거워하던 것을 생각하고 맛있어 하던 것을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하였다.
하루 전날 제위(祭位)를 설치하고 제기(祭器)를 벌여 놓는다.
주인이 뭇 남자들을 거느리고 심의(深衣)를 입고서 집사(執事)와 함께 정침(正寢)을 쓸고 의탁(倚卓)을 닦되, 아주 정결하도록 힘쓴다. 고조고비(高祖考妣)의 신위를 마루서 북쪽 벽 밑에 남쪽을 향하게 설치하되 고위(考位)는 서쪽이고 비위(妣位)는 동쪽이다. 각기 교의(交椅) 하나, 탁자 하나로써 합설(合設)을 한다. 증조고비와 조고비, 고비를 차례차례 동쪽으로 나가며 모두 고조고비의 신위와 같이 설치하되 세대마다 각각 자리를 만듦으로써 한데 붙어 있지 않게 한다. 부위(祔位)는 모두 동서(東序)에서 서쪽을 향하게 하되 북쪽을 윗자리로 삼아 설치한다. 더러는 양서(兩序)에서 서로 마주 보도록 하여 윗사람은 서쪽으로 가도록 설치하기도 한다. 아내 이하의 경우 계단 아래에 설치한다. 향안(香案)을 마루 한가운데에 설치한 다음 향로와 향합을 그 위에 올려놓고 띠를 묶고 모래를 담아서 향안 앞 및 각 신위 앞의 땅 위에 놓는다. 동쪽 계단 위에 주가(酒架)를 설치하고 별도의 탁자를 그 동쪽에 놓은 다음, 술주전자 한 개, 퇴주그릇 한 개, 소반 한 개, 수조반(受胙盤) 한 개, 수저 한 벌, 수건 한 개, 다합(茶盒)ㆍ다선(茶筅)ㆍ다잔(茶盞)ㆍ탁염접(托鹽楪)ㆍ초병(醋甁)을 그 위에 올려놓고, 화로(火爐)ㆍ탕병(湯甁)ㆍ향시(香匙)ㆍ향저(香筯)를 서쪽 계단 위에 벌여 놓는다. 별도로 탁자를 그 서쪽에 놓은 다음 축판을 그 위에 올려놓는다. 세숫대야와 수건 두 개씩을 동쪽 계단 아래의 동쪽에 설치하되, 서쪽의 것은 대야받침대와 수건걸이를 갖춘다. 또 제찬(祭饌)을 차릴 큰 상(牀)을 그 동쪽에 설치한다.
희생을 살피고 제기를 씻고 제찬을 갖춘다.
주인은 뭇 남자를 거느리고 심의를 입고 도살하는 곳에 가서 희생을 살피고 주부는 뭇 부녀들을 거느리고 배자(背子)를 입고 제기를 세척하고 가마솥을 깨끗이 닦아 제찬을 갖춘다. 제찬은 각 위마다 과실 여섯 가지, 소채(蔬菜)와 포해(脯醢) 각각 세 가지, 어육(魚肉)과 만두ㆍ흰떡 각각 한 소반, 국과 밥 각각 한 그릇, 간(肝) 각각 한 꼬치, 살코기 각각 두 꼬치를 마련하되, 아주 정결히 장만한다. 제사를 지내기 전에 사람들이 먼저 먹지 않도록 하고 고양이나 개, 벌레나 쥐에 의해 더럽혀지지 않도록 한다.
이튿날 아침 일찍 일어나서 소과(蔬果)와 주찬(酒饌)을 차려 놓고,
주인 이하가 심의를 입고 집사자와 함께 제소(祭所)에 나아가서 손을 씻고 각 위의 탁자 남쪽 끝줄에 과실 그릇을 차리고, 소채와 포해를 서로 사이사이에 섞어 다음 줄에 차린다. 술잔과 초그릇은 북쪽 끝줄에 차리되, 술잔은 서쪽에 놓고 초그릇은 동쪽에 놓으며, 수저는 가운데에 놓는다. 현주(玄酒)와 술은 각각 한 병씩을 병걸이에 걸어놓되, 현주는 그날 정화수(井華水)를 떠다 채워서 술병 서쪽에 걸어둔다. 화로에는 숯불을 피우고 병에는 물을 담아둔다. 주부는 배자를 입고 불을 때어 제찬을 데우되, 모두 아주 뜨겁게 데워서 찬합에 담아 내와서 동쪽 계단 아래 큰 상에 올려놓는다.
날이 밝으면 신주를 제위(祭位)로 받들어낸다.
주인 이하가 각각 옷을 차려입고 손을 씻고 닦은 다음 사당 앞으로 나아가면 뭇 남자들은 고유하던 날의 의식과 같이 차례로 서고, 주부는 서쪽 계단 아래에 북쪽을 향하여 선다. 주인의 어머니가 살아 있을 경우 주부의 앞에 특별히 자리를 마련하고, 여러 백숙모와 여러 고모들이 그 뒤에 선다. 형수 및 제수와 누이는 주부의 왼쪽에 서되 주모(主母)와 주부보다 어른인 자는 모두 조금씩 나와서 서며, 자손과 부녀와 내집사자는 주부의 뒤에 두 줄로 서되 모두 북쪽을 향하여 동쪽을 윗자리로 삼는다. 자리가 정해지면 주인이 동쪽 계단으로 올라가서 홀을 꽂고 향을 피운 다음, 홀을 꺼내어 손에 쥐고 고유한다. -고사(告辭)는 앞에 나온다.- 고유를 마치고 나서는 홀을 꽂고 주독(主櫝)을 거두어 정위(正位)와 부위(祔位)를 각각 상자 하나씩에 담아서 상자마다 집사자 한 사람씩을 시켜서 받들게 한다. 주인은 홀을 꺼내어 쥐고 앞에서 인도하고 주부는 뒤를 따르며, 항렬이 낮거나 어린 사람들은 주부의 뒤를 따른다. 정침에 와서는 서쪽 계단 탁자 위에 올려놓는다. 주인은 홀을 꽂고 주독을 열어 여러 고위(考位)의 신주를 받들어 내어 제위로 나아가고, 주부는 손을 씻은 다음 여러 비위(妣位)의 신주를 받들어 제위로 나아간다. 부위(祔位)의 경우 자제(子弟) 한 사람이 받들고 간다. 이 절차를 마치고 나면 주인 이하가 모두 내려와서 위치로 돌아온다.
참신(參神)을 한다.
주인 이하가 사당 앞에서의 의식과 같이 차례로 선다. 서는 자리가 정해지면 두 번 절한다. 만약 늙고 병든 존장이 있을 경우 다른 곳에서 쉬게 한다.
강신(降神)을 한다.
주인이 올라가서 홀을 꽂고 향을 피우고 -두 번 절한다.- 홀을 꺼내어 쥐고 뒤로 조금 물러나 선다. 집사자 한 사람은 술병을 열고 수건으로 입구를 닦은 다음 술을 주전자에 담고, 한 사람은 동쪽 계단 탁자 위의 잔대와 술잔을 가져와 주인의 왼쪽에 서고, 또 한 사람은 주전자를 들고 주인의 오른쪽에 선다. 주인이 홀을 꽂고 꿇어앉으면 잔대와 술잔을 받든 자도 꿇어앉아서 주인에게 잔대와 술잔을 올린다. 주인이 받아 들면 주전자를 들고 있던 자도 꿇어앉아서 술잔에 술을 친다. 주인이 왼손으로는 잔대를, 오른손으로는 잔을 잡고 모사(茅沙) 위에다 술을 부은 다음 잔대와 술잔을 집사자에게 건네주고, 홀을 꺼내어 쥐고 엎드렸다가 일어나 두 번 절하고 내려와서 위치로 돌아온다.
제찬을 올린다.
주인이 올라가고 주부가 뒤를 따라 올라가면, 집사자 한 사람은 소반으로 어물(魚物)과 육물(肉物)을 받들고, 한 사람은 소반으로 미식(米食)과 면식(麫食)을 받들고, 또 한 사람은 소반으로 국과 밥을 받들고 따라 올라간다. 고조의 신위 앞에 이르면, 주인은 홀을 꽂고 육물을 받들어 술잔의 남쪽에 올리며, 주부는 면식을 받들어 육물의 서쪽에 올린다. 주인은 어물을 받들어 초그릇의 남쪽에 올리며, 주부는 미식을 받들어 어물의 동쪽에 올린다. 주인이 국을 받들어 초그릇의 동쪽에 올리며, 주부는 밥을 받들어 술잔의 서쪽에 올린다. 주인이 홀을 꺼내어 쥐고 차례로 여러 정위(正位)의 것을 차린 다음, 여러 자제와 부녀들로 하여금 각기 부위(祔位)의 것을 차리도록 한다. 진설이 다 끝나면 주인 이하가 모두 내려와서 위치로 돌아온다.
초헌(初獻)을 한다.
주인이 올라가 고조의 신위 앞으로 나아가면 집사자 한 사람이 술주전자를 들고 그 오른쪽에 선다. -겨울철에는 술을 먼저 데운다.- 주인이 홀을 꽂은 다음 고조고(高祖考)의 잔대와 술잔을 받들고 신위 앞에 동쪽을 향하여 서면 집사자가 서쪽을 향하여 서서 술잔에 술을 친다. 주인이 술잔을 받들어 본래의 곳에 올린다. 그다음에 고조비(高祖妣)의 잔대와 술잔을 그처럼 받들고 홀을 꺼내어 쥐고 신위 앞에 북쪽을 향하여 서면 집사자 두 사람이 고조고비(高祖考妣)의 잔대와 술잔을 받들고 주인의 왼쪽과 오른쪽에 선다. 주인이 홀을 꽂고 꿇어앉으면 집사자도 꿇어앉는다. 주인이 고조고의 잔대와 술잔을 받아 오른손으로 술잔을 들어 모사 위에 부은 다음, 잔대와 술잔을 집사자에게 건네주어 본래의 곳에 도로 갖다 놓는다. 고조비의 잔대와 술잔을 받아서 또 그처럼 한다. 홀을 꺼내어 쥐고 엎드렸다가 일어나 뒤로 조금 물러나 서면, 집사자가 간(肝)을 화로에 구워서 접시에 담는다. -《의례》 소뢰궤식례(少牢饋食禮)에 “소뢰의 간을 쓸 경우 소금은 오른쪽에 놓는다.” 하였고, 《의례》 특생궤식례(特牲饋食禮)에 “간으로써 주인을 따른다.” 하고, 그 소에 “역시 소뢰궤식례와 같이 소금은 오른쪽에 있어야 옳으나, 여기에서 언급하지 않은 것은 글을 갖추 쓰지 않아서이다.” 하였다. 살피건대, 여기에 근거할 때 시제(時祭)에도 마땅히 소금을 써야 한다.- 형제 중 나이 많은 한 사람이 간 그릇을 받들어 고조고비의 앞 수저 남쪽에 올린다. -이에 밥그릇 덮개를 열어 그 남쪽에 놓는다. 다른 각 위의 것도 같이 한다.- 축이 축판을 들고 주인 왼쪽에 서 있다가 꿇어앉아서 읽는다. -축문은 앞에 나온다.- 축문을 다 읽고 일어나면 주인이 두 번 절하고 물러나서 다른 여러 신위 앞으로 나아가 처음과 같이 헌작(獻爵)을 하고 축문을 읽는다. 각 위의 축문을 다 읽고 나면, 곧 형제나 뭇 남자로서 아헌ㆍ종헌을 하지 못할 자들이 차례로 나뉘어 본위(本位)에 속한 부위(祔位)에 나아가 의식대로 헌작을 하는데, 다만 축문은 읽지 않는다. 헌작을 마치고 나서는 모두 내려와서 위치로 돌아온다. 집사자가 다른 그릇으로 술과 간을 거두어 본래 진설했던 곳에 갖다 놓는다. ○ 무릇 부위(祔位)는 백숙조부는 고조고에게 제부(隮祔)하고, 백숙부는 증조고에게 제부하고, 형제는 조고에게 제부하고, 자질(子姪)은 고에게 제부한다. 나머지도 다 이와 같다.
아헌(亞獻)을 한다.
주부가 하는데, 모든 부녀자가 산적을 받들어다 드리는 절차나 차례로 나뉘어 부위에 헌작하는 의식은 초헌의 의식과 같다. 다만 축문을 읽지 않는 것이 다르다.
종헌(終獻)을 한다.
형제 중의 나이 많은 사람이나 장남 또는 가까운 손님이 하는데, 뭇 자제들이 산적을 받들어다 드리는 절차나 차례로 나뉘어 부위에 헌작하는 의식은 아헌의 의식과 같다.
유식(侑食)을 한다.
주인이 올라가서 홀을 꽂고 주전자를 들고 나아가 모든 신위의 술잔에 술이 가득 차도록 첨작(添酌)을 하고 나서 향안(香案)의 동남쪽에 서면, 주부가 올라가서 숟가락을 밥 한가운데에 자루가 서쪽으로 가도록 꽂고 젓가락을 올려놓은 다음 향안의 서남쪽에 선다. 모두 북쪽을 향하여 두 번 절하고 내려와 위치로 돌아온다.
합문(闔門)을 한다.
주인 이하가 모두 나오면 축이 합문을 하는데, 문이 없는 곳에서는 발을 내려도 된다. 주인이 문 동쪽에 서쪽을 향하여 서고 뭇 남자들은 그 뒤에 서며, 주부가 문 서쪽에 동쪽을 향하여 서면 뭇 부녀자들은 그 뒤에 선다. 존장이 있을 경우 다른 곳에서 조금 쉬도록 한다. 이것이 이른바 ‘배부르게 흠향한다[厭]’는 것이다.
계문(啓門)을 한다.
축이 세 번 ‘어흠’ 하고는 계문을 하면 주인 이하가 모두 들어가는데, 먼저 다른 곳에서 쉬고 있던 존장도 들어가서 위치로 나아간다. 주인과 주부가 차를 받들고 -국속(國俗)에는 물로 대신한다.- 고위와 비위의 앞으로 나뉘어 나아가 올린다. 부위에 대해서는 여러 자제와 부녀자들로 하여금 올리도록 한다.
음복(飮福)을 받는다.
집사자가 향안 앞에 자리를 깔면 주인은 자리로 나아가 북쪽을 향하고, 축은 고조고위 앞으로 나아가 잔대와 술잔을 들고 주인의 오른쪽으로 돌아온다. 주인이 꿇어앉으면 축도 꿇어앉는다. 주인이 홀을 꽂고 잔대와 술잔을 받아 술을 모사 그릇에 조금 붓고 술을 조금 마시면, 축이 숟가락과 접시를 가지고 모든 위(位)의 밥을 조금씩 떠서 받들고 주인의 왼쪽으로 돌아와서 주인에게 복[嘏]을 빈다. -하사(嘏辭)는 앞에 나온다.- 주인이 술을 자리 앞에 놓고 홀을 꺼내어 쥐고 엎드렸다가 일어나 두 번 절하고는 홀을 꽂고 꿇어앉아서 밥을 받아 맛을 본다. 밥을 왼쪽 옷소매에 담은 다음 소매를 새끼손가락에 걸고는 술을 가져다 다 마신다. 집사자가 술잔을 오른쪽에서 받아 주전자 옆에 놓고, 밥도 왼쪽에서 받아 이와 같이 한다. 주인이 홀을 쥐고 엎드렸다가 일어나 동쪽 계단 위에 서쪽을 향하여 서면, 축이 서쪽 계단 위에 동쪽을 향하여 서서 이성(利成)을 고한다. 내려와 위치로 돌아와서 위치에 서 있던 여러 사람과 함께 모두 두 번 절한다. 주인은 절을 하지 않고 내려와 위치로 돌아온다.
사신(辭神)을 한다.
주인 이하가 모두 두 번 절한다.
신주를 모셔 들인다.
주인과 주부가 모두 올라가서 각기 신주를 받들어 주독 안에 넣는다. 주인이 상자로 주독을 거두어 담아서 모셔낼 때와 같이 사당으로 모시고 돌아간다.
철상(徹床)을 한다.
주부가 돌아와서 철상을 감독한다. 술잔과 주전자 및 다른 그릇에 담긴 술을 모두 병에 옮겨 담아서 입구를 봉하는데, 이른바 복주(福酒)이다. 과실과 소채, 육식(肉食) 따위는 모두 평소 쓰는 그릇에 옮겨 담는다. 제기는 주부의 감독하에 깨끗이 씻어서 간직한다.
음복을 나눈다.
이날 주인의 감독하에 제물 고기를 조금씩 나누어 찬합에 담고 술과 함께 봉한 다음, 종을 시켜서 편지를 가지고 제물을 친구들에게 돌리도록 한다. 드디어 자리를 깔고 남녀가 다른 곳에서 음복을 하는데, 항렬이 높은 사람은 따로 한 줄을 만들어 남향으로 마루 한가운데에 동서로 나누어 앉는다. 만약 한 사람뿐일 경우에는 마루 한가운데에 앉는다. 그 나머지 사람들은 차례로 동쪽과 서쪽에서 마주 보며 앉는다. 웃어른 한 사람이 먼저 나아가 앉으면 뭇 남자들이 차례로 서서는 한 세대로 한 줄을 만들고 동쪽을 윗자리로 삼아 모두 두 번 절한다. 자제(子弟)의 연장자(年長者) 한 사람이 조금 앞으로 나아가 서고, 집사자 한 사람은 주전자를 들고 그 오른쪽에 서고 한 사람은 술잔을 들고 그 왼쪽에 선다. 헌자(獻者)가 홀(笏)을 꽂고 꿇어앉아서 -아우가 헌작을 하였을 경우 연장자가 일어서고 자질(子姪)이 헌작을 하였을 경우 연장자가 앉아 있는다.- 주전자를 받아 술을 친 다음 주전자는 돌려주고 잔을 받아 들고 축사를 한 뒤에, -축사는 앞에 나온다.- 잔을 가지고 있던 자에게 건네주면 항렬이 높은 사람 앞에 갖다 놓는다. 연장자가 홀을 꺼내어 쥐고 항렬이 높은 사람은 술잔을 들어 술을 마신다. 술을 다 마시고 나면 연장자가 엎드렸다가 일어나 뒤로 물러나서 위치로 돌아와 뭇 남자들과 함께 두 번 절한다. 항렬이 높은 사람이 주전자와 연장자의 잔을 가져오도록 명하여 앞에 놓고 스스로 술을 치고 축사한다. -축사는 앞에 나온다.- 집사자에게 명하여 차례대로 위치에 나아가 술을 두루 다 치도록 한다. 술을 치고 나면 연장자가 앞으로 나아와 꿇어앉아서 술을 받아 다 마신 다음 엎드렸다가 일어나 뒤로 물러나 선다. 뭇 남자들이 앞으로 나아가 읍(揖)을 하고 뒤로 물러나 서서 마시고 나면, 연장자가 뭇 남자들과 함께 모두 두 번 절한다. 여러 부녀자들은 안에서 여자 존장자에게 음복을 올리는데, 의식은 남자와 같다. 다만 꿇어앉지 않는 것이 다르다. 음복을 마치고 나서는 자리에 나아가 앉으면 육식(肉食)을 올리는데, 여러 부녀자들이 당 앞으로 나아가서 남자 존장에게 헌수(獻壽)를 하면 남자 존장은 의식대로 답배(答杯)한다. 뭇 남자들은 안마루로 나아가 여자 존장에게 헌수를 하면 여자 존장은 의식대로 답배한다. 이에 자리에 나아가 앉으면 면식(麫食)을 올리는데, 안팎의 집사자가 각기 안팎의 존장에게 의식대로 헌수를 하며, 답배는 하지 않는다. 드디어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들 앞에 나아가 두루 술을 치고는 다 마실 때까지 기다렸다가 두 번 절하고 물러난다. 드디어 미식(米食)을 올리는데, 미식을 올리고 나서는 자연스럽게 술을 돌리고 간간이 제찬(祭饌)도 더 돌린다. 술과 제찬이 모자랄 경우 다른 술과 다른 찬을 보탠다. 자리를 파할 무렵에 주인은 바깥 종들에게 음복을 나누어 주고 주부는 안에 있는 집사자들에게 음복을 나누어 주며, 미천한 사람들에게까지 고루 나누어 주어서 그날로 음식을 다 없앤다. 음복을 받은 자는 모두 두 번 절하고, 곧 자리를 거둔다.
무릇 제사는 사랑과 공경의 성의를 다하는 것을 주로 할 뿐이므로, 집이 가난할 경우 가산(家産)의 유무(有無)에 맞게 지내고 질병이 있을 경우 근력을 감안하여 지낸다. 그러나 재산과 조력이 가능한 자는 마땅히 의식대로 지내야 한다. -《주자대전》에 “형제가 따로 살더라도 애당초 사당은 달리하지 않으므로, 단지 형이 제사를 주관하고 동생이 집사로 참여할 수밖에 없는데, 혹 제물 따위로 돕는 것도 마땅하다. 서로 거리가 멀 경우, 제사 때에 곧바로 제위(祭位)를 설치하고 지방(紙榜)을 써서 신위마다 표기를 하여 제사를 지내고 제사를 다 지낸 뒤에는 지방을 사르는 것도 하나의 변례(變禮)일 듯하다.” 하였다. ○ 《예기》 증자문에 “증자가 ‘대부(大夫)의 제사에 정조(鼎俎)를 이미 벌여 놓고 변두(籩豆)를 이미 진설한 상태에서 갑작스런 일로 예를 이룰 수 없어서 제사를 폐지하는 경우는 몇 가지입니까?’ 하고 물으니, 공자가 대답하기를 ‘무릇 천자(天子)가 죽거나, 황후(皇后)가 죽거나, 왕이 죽거나, 왕비가 죽거나, 임금의 사당에 불이 났거나, 일식(日食)이 있거나, 삼년상을 당하거나, 자최(齊衰)나 대공(大功)의 상을 당하였을 경우에는 모두 폐지한다. 외상(外喪)의 경우 자최 이하에는 지낼 수 있으나, 자최 중의 제사에서는 시동(尸童)이 들어가서 밥을 세 숟가락만 떠 먹게 하고는 더 먹도록 권하지 않고, 술로 입을 가시는 의식도 입을 가시게만 할 뿐 답배하지 않으며, 대공 중의 제사에서는 술로 답배만 하고 그친다. 소공(小功)과 시마(緦麻) 중의 제사에서는 방 안에서 헌수하는 것으로 그칠 따름이다. 사(士)가 대부와 다른 점은 시마의 상중에도 제사를 지내지 못하는 것이다. 제사를 받을 자가 복(服)이 없는 경우는 지낸다.’ 하였다.” 하였는데, 그 주에 “외상이란 대문 밖에서 난 상을 말한다. 사는 대부보다 지체가 낮기 때문에 비록 시마복이라 하더라도 제사를 지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제사를 받을 자가 복이 없는 경우란 아내의 부모와 어머니의 형제자매를 말하는 것인데, 자기는 비록 복이 있더라도 제사를 받을 자가 복이 없을 경우는 제사를 지낼 수 있다는 것이다.” 하였다. ○ 살피건대,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나의 집은 시제(時祭) 외에 동지(冬至)ㆍ입춘(立春)ㆍ계추(季秋)의 세 제사가 있었는데, 뒤에 동지와 입춘의 두 제사는 참람한 듯하여 불안을 느낀 나머지 그만 폐지하였다. 계추의 제사는 종전대로 아버지의 사당에 지내는데, 나의 생일날 지내니, 이는 마침 나의 생일이 계추에 있기 때문이다.” 하였고, 《주자대전》에 또 “네 계절에 토지신에게 지내는 집안의 제사가 있다.”는 말이 있다. 《가례의절》 및 《격몽요결》에도 다 이런 말이 있으니, 예를 좋아하는 집에서 채택하여 쓰면 좋을 것이다.
기일(忌日)
기일제(忌日祭)의 제구(諸具) -앞에서와 같다. ○ 회재(晦齋) 이 선생(李先生)이 말하기를 “주 문공(朱文公)의 《가례》에서는 기일제에 한 위(位)만을 차리고 정자(程子)의 제례(祭禮)에서는 고비(考妣)를 함께 제사하여서, 두 분의 설이 같지 않다. 대개 한 위만을 차리는 것은 예의 정상이고 고비를 함께 제사하는 것은 예가 정에 근본을 두었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 죽은 사람 섬기기를 산 사람과 같이 하고 잔치를 벌일 때 같은 상을 차리는 뜻으로 본다면, 예가 정에 근본을 둔 것인만큼 함께 지내는 것도 그만두지 못할 일일 것이다.” 하였다.
이제 현고 아무 벼슬 부군 -어머니의 경우 ‘현비 아무 봉작 아무 성씨’로 쓴다. 조고비ㆍ증조고비ㆍ고조고비도 이와 같다.- 께서 영면하신 날 -처(妻)ㆍ제(弟) 이하는 ‘죽은 날’로 쓴다.- 에 감히 -처ㆍ제 이하는 ‘감히’를 쓰지 않는다.- 신주 -고비를 함께 지낼 경우 ‘현고와 현비의 신주’로 쓴다. 조고비ㆍ증조고비ㆍ고조고비도 이와 같다.- 를 정침(正寢)으로 모셔내어 -혹은 대청으로 모신다.- 공손히 추모의 정성을 펼 것을 -처ㆍ제 이하는 ‘멀리 정례(情禮)를 펼 것을’로 쓴다.- 청합니다. -이상은 신주를 모셔낼 때의 고사(告辭)이다.
유(維) 연호 몇년 세차 간지, 몇월 간지삭 며칠 간지에 효자 -조고비의 경우 ‘효손’으로, 증조고비의 경우 ‘효증손’으로, 고조고비의 경우 ‘효현손’으로 쓴다. ○ 방친(傍親)과 형제, 처자의 경우는 제주(題主)ㆍ우제(虞祭) 등의 축문을 참고하면 된다.- 아무 벼슬 아무개는 감히 현고 아무 벼슬 부군 -어머니의 경우 ‘현비 아무 봉작 아무 성씨’로 쓴다. 조고비, 증조고비, 고조고비도 이와 같다. 만약 고비를 함께 제사할 경우 고비를 열서한다.- 께 분명히 고합니다. 계절이 옮겨져 바뀌어 휘일(諱日)이 다시 다가오니, -만약 고비를 함께 제사할 경우에는 ‘아무 관계의 휘일’로 쓴다. ○ 처ㆍ제 이하는 ‘망일(亡日)이 다시 돌아오니’로 쓴다.- 선인을 추모하고 계절에 감개하여 깊은 은혜 끝이 없습니다.[追遠感時 昊天罔極] - 조고비의 경우 ‘깊은 은혜 끝이 없습니다’를 ‘영원한 사모의 심정 견디지 못하겠습니다[不勝永慕]’로 고치고, 방친의 경우 이 여덟 글자를 빼고 다만 ‘감회와 슬픔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不勝感愴]’로 쓴다.- 삼가 청작(淸酌) 서수(庶羞)로 경건히 제사 올리오니, -처ㆍ제 이하는 ‘이처럼 제전(祭奠)을 올립니다[伸此奠儀]’로 쓴다.- 흠향하시기 바랍니다. -이상은 기제사의 축문이다.
하루 전날 재계하고 제위(祭位)를 설치한다.
의식대로 설치하되, 한 위만 설치한다. -만약 고비를 함께 지낼 경우 두 위를 설치한다.
제기를 벌여 놓고 제찬을 갖춘다. -퇴계가 말하기를 “자손의 죽음이 마침 선조의 제삿날일 경우 그 기제사에 고기를 쓴다는 것은 죽은 사람을 산 사람과 같이 섬기는 의리로 미루어 볼 때 미안할 듯하다. 그러나 신도(神道)는 산 사람과 다르므로 고기를 쓰는 것도 괜찮을 듯하다. 만약 사리상 좋지 않다면 고인(古人)이 벌써 언급하였을 것이다.” 하였다.
이튿날 아침 일찍 일어나서 소과(蔬果)와 주찬(酒饌)을 차린다.
모두 의식대로 차린다.
날이 밝으면 주인 이하가 변복(變服)을 하고,
아버지의 사당인 경우 주인 형제가 참사복두(黲紗幞頭)에 참포삼(黲布衫)을 입고 포과각대(布裹角帶)를 띤다. 할아버지 이상의 경우 참사삼(黲紗衫)을, 방친의 경우 조사삼(皂紗衫)을 입으며, 주부는 특계(特髻)의 수식(首飾)을 제거하고 백대의(白大衣)에 담황피(淡黃帔)를 입는다.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화려한 옷을 제거한다.
사당에 나아가서, -차례대로 서서 두 번 절하고 향을 피우고 고유하는 의식은 모두 시제 때와 같으며, 고사는 앞에 나온다.
신주를 받들고 정침(正寢)으로 나아온다.
의식대로 한다.
참신(參神)을 하고, -지방(紙榜)을 쓸 경우 강신(降神)을 먼저 하고 나서 참신을 한다.
강신을 하고, 진찬(進饌)을 하고, 초헌(初獻)을 한다.
의식대로 하되, -축문은 앞에 나온다.- 축문을 읽고 나서 축이 일어나면 주인 이하가 슬피 곡을 한다. -조고비까지 섬기는 경우도 같다. 《가례의절》에 나온다.- 나머지는 모두 같다.
아헌(亞獻)을 하고, 종헌(終獻)을 하고, 유식(侑食)을 하고, 합문(闔門)을 하고, 계문(啓門)을 하고, 사신(辭神)을 하고, 납주(納主)를 하고, 철상(徹床)을 한다.
모두 의식대로 하는데, 다만 음복을 받지 않고 음복을 나누지 않는 것이 다르다.
이날 술을 마시지 않고 고기를 먹지 않으며, 음악을 듣지 않고, 참건(黲巾)ㆍ소복(素服)ㆍ소대(素帶) 차림으로 지내다가 밤에 바깥채에서 잠을 잔다. ○ 장자(張子)의 문집에 “기일(忌日)의 변복(變服)은 증조고와 조고에게는 모두 포관(布冠)에 소대(素帶)ㆍ마의(麻衣)를 하고, 증조비와 조비에게는 모두 소관(素冠)ㆍ포대(布帶)ㆍ마의를 하며, 아버지에게는 포관ㆍ포대ㆍ마의ㆍ마구(麻屨)를 하고, 어머니에게는 소관ㆍ포대ㆍ마의ㆍ마구를 하고, 백숙부(伯叔父)에게는 소관ㆍ소대ㆍ마의를 하고, 백숙모에게는 마의ㆍ소대를 하고, 형에게는 마의ㆍ소대를 하고, 아우와 조카에게는 갈옷[褐]으로 갈아입고 고기를 먹지 않고, 서모(庶母) 및 형수에게는 똑같이 고기를 먹지 않는다.” 하였다. ○ 《격몽요결》에 “부모의 기제의 경우 벼슬이 있는 자는 관은 호색모(縞色帽)에 술을 드리우거나 참포모(黲布帽)에 술을 드리우고, 옷은 옥색 단령(玉色團領)에 백포로 싼 각대(角帶)를 착용하며, 벼슬이 없는 자는 호색립(縞色笠)이나 참색립(黲色笠)에 옥색 단령, 백대(白帶)를 착용하고, 신은 모두 백화(白靴)를 신는다. 부인의 경우 호색피(縞色帔)에 백의(白衣)와 백상(白裳)을 착용한다. 조부모 이상의 기일인 경우 벼슬이 있는 자는 오사모(烏紗帽)에 옥색 단령, 백포로 싼 각대를 착용하고, 벼슬이 없는 자는 흑립(黑笠)에 옥색 단령, 백대를 착용한다. 부인의 경우 현피(玄帔)에 백의와 옥색상(玉色裳)을 착용한다. 방친(傍親)의 기일인 경우 벼슬이 있는 자는 오사모에 옥색 단령, 오각대(烏角帶)를 착용하고, 벼슬이 없는 자는 흑립에 옥색 단령, 흑대(黑帶)를 착용한다. 부인은 화려한 옷을 제거하기만 한다.” 하였다. ○ 호(縞)는 흰색과 검은색의 혼합색이고, 참(黲)은 담청흑색으로 곧 오늘날의 옥색이다.
묘제(墓祭)
묘제의 제구 -앞에서와 같다.
유(維) 연호 몇년 세차 간지, 몇월 간지삭 며칠 간지에 효자 -조고비의 경우 ‘효손’으로 쓰고, 증조고비의 경우 ‘효증손’으로 쓰고, 고조고비의 경우 ‘효현손’으로 쓴다.- 아무 벼슬 아무개는 감히 현고 아무 벼슬 부군 -어머니의 경우 ‘현비 아무 봉작 아무 성씨’로 쓴다. 조고비, 증조고비, 고조고비에게도 이와 같다. 고비를 합장한 경우는 쌍행으로 쓴다.- 의 묘소에 분명히 고합니다. 세월이 흘러 계절이 바뀌어 우로(雨露)가 벌써 내리니, -한식(寒食)의 경우 세시(歲時)를 일컫고 나서 이 구절을 ‘세율(歲律)이 벌써 바뀌니’로 고치고, 단오(端午)의 경우 ‘시물(時物)이 창무(暢茂)하니’로 고치며, 추석(秋夕)의 경우 ‘흰 서리가 벌써 내리니’로 고친다.- 봉영(封塋)을 우러르며 전소(奠掃)를 하매 깊은 은혜 끝이 없습니다. -조고비의 경우 ‘깊은 은혜 끝이 없습니다’를 ‘느꺼워하고 사모하는 마음 견딜 수 없습니다’로 고친다.- 삼가 청작(淸酌) 서수(庶羞)로 공손히 세사를 올리오니, 흠향하시기 바랍니다. -이상은 묘소 앞에서의 축문이다.
유 연호 몇년 세차 간지, 몇월 간지삭 며칠 간지에 아무 벼슬 성명 아무개는 감히 토지신(土地神)께 분명히 고합니다. 아무개는 아무 관계 아무 벼슬 부군의 묘소에 공손히 세사(歲事)를 올립니다만, 이 보우(保佑)는 실로 신의 미덕에 힘입었습니다. 감히 주찬(酒饌)으로써 경건히 제사 올리오니, 흠향하시기 바랍니다. -이상은 토지신에게 고하는 축문이다.
3월 상순에 날을 가린다. -정자(程子)와 장자(張子)와 한 위공(韓魏公)은 다 같이 한식(寒食) 및 10월 1일에 묘소에 절하고 제사를 지냈다. ○ 회재(晦齋)가 이르기를 “《가례》를 상고해 보니 묘제는 3월 상순에 날을 가려서 거행하였으나, 오늘날 풍속이 정조(正朝)ㆍ한식ㆍ단오(端午)ㆍ추석(秋夕)에 다 같이 묘소에 나아가 절하고 전소(奠掃)를 하니, 이제 풍속을 따르는 것이 옳다.” 하였다. ○ 율곡이 이르기를 “묘제는 사계절에 다 지낼 경우 가묘(家廟)와 차등이 없어서는 미안할 듯하다. 마땅히 한식과 추석 두 절후에는 제찬(祭饌)을 잘 마련하여 가지고 가서 축문을 읽고 토지신에게 제사하는 등의 의식을 일체 《가례》 묘제의 의식대로 하고, 정조와 단오 두 절후의 경우 찬물(饌物)을 약간 마련하여 가지고 가서 축문과 토지신에 대한 제사도 없이 단헌(單獻)을 하는 것이 옳다. 대저 이렇게 할 경우 고례(古禮)를 참작하고 금례(今禮)를 통함에 있어 타당하게 될 듯하다.” 하였다.
하루 전날 재계를 하고,
의식은 가제(家祭)와 같다.
제찬(祭饌)을 마련한다.
묘소의 매 분(分)에 대한 제품(祭品)은 시제(時祭)와 같이 한다. ○ 다시 어육(魚肉)과 미면(米麫)을 각각 한 대반(大盤)씩 차려서 토지신에게 제사한다.
이튿날 이른 아침에 청소를 하고,
주인이 심의(深衣)를 입고 집사자를 거느리고 묘소로 나아가 두 번 절하고 나서 묘역의 안팎을 돌되, 슬퍼하며 세 바퀴를 돌아 살펴본다. 풀이나 가시나무가 돋아난 것이 있으면 즉시 날연장으로 베어내고 청소를 한다. 청소를 마치고 나서는 다시 위치로 돌아와 두 번 절한다. ○ 또 묘역 왼쪽에 땅바닥을 쓸어내고 토지신에게 제사를 지낸다.
돗자리를 깔고 제찬을 진설한다.
깨끗한 새 돗자리를 묘소 앞에 깔고 가제의 의식과 같이 제찬을 진설한다.
참신(參神)ㆍ강신(降神)ㆍ초헌(初獻)을 한다. -축문은 앞에 나온다.
아헌(亞獻)과 종헌(終獻)을 한다.
모두 자제(子弟)와 친붕(親朋)이 올린다.
사신(辭神)을 하고 나서 철상을 한다.
[드디어 토지신에게 제사를 올린다.]
돗자리를 깔고 제찬을 진설한 다음, -땅바닥을 쓸어낸 곳에 돗자리를 깔고 제찬 네 가지를 대반에 각각 담아서 진설한다.- 돗자리 남쪽 끝에 또 잔대와 술잔을 놓고 그 북쪽에 수저를 놓는다. 나머지는 모두 앞에서와 같다.
강신을 하고, 참신을 하고, 삼헌(三獻)을 한다.
앞에서와 같다. -축문은 앞에 나온다.
사신을 하고 나서 철상을 하여 물러난다. -주자가 말하기를 “토지신에게 제사하는 예는 묘 앞의 제사와 똑같게 하는 것이 옳다. 채소ㆍ과실ㆍ젓[鮓]ㆍ포(脯)ㆍ밥ㆍ차(茶)ㆍ탕(湯)을 각각 한 그릇씩 담아서 어버이를 모시고 신을 섬기는 도리를 다하고, 차별을 두지는 말아야 한다.” 하였다. 살피건대, 이는 《가례》에 나오는 찬품과 같지 않으므로, 일단 기록해 두어서 참고에 대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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