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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학
2012년 09월 15일 14시 42분  조회:5706  추천:1  작성자: 백화상조
죽음학


문화에
있어서 <죽음> 수용
죽음을 의식하고 그것을 문화 중에 받아들이고 있는 점에서 인류는 특이한 생물이다. 모든 인류문화는 죽음에 대해서 어떤 대처법, 또는 죽음을 하나의 문제로 본 경우, 그의 해결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을 제시하고 있다. 죽음의 기원에 대한 신화적 설명, 사후 세계의 신앙 등은 이 해결을 관념과 공상의 영역으로 나타내고자 하는 것 이며, 인간의 죽음을 계기로서 행하여지는 의례 즉, 장제의 존재는 상징적ㆍ연극적 표현 영역에서 인류가 이루고자 한 죽음에 대한 해결을 시도를 나타내고 있다. 이런 문제의 설정과 해결의 시도를 일반화해서 <문화에서의 죽음의 수용>이라는 것도 생기는데, 그 깊은 곳에는 수용의 모습을 한 <죽음의 부인>이 숨겨져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죽음을 개인의 인격의 완전한 무화(無化)로 보고, 그 무화에 대한 대상(代償)을 전혀 준비를 하지 않고 있는 문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사후에도 존속하는 영혼과 타계에서의 제2의 생이라는 직접적인 형태를 취하는 경우도 있는 반면, 죽음 후에 이 세상에 남는 자손이나 명성, 또는 생전에 이룬 사적 등의 물상에 의지하는 경우도 있으며, 또한 살아남은 사람들이 사자를 위하여, 또한 살아남은 사람들이 사자를 위해서 행하는 기념행사인 경우도 있는데, 인간의 문화는 반드시 물리적 죽음을 초월하는 어떤 것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이 항에서는 미개라고 불리는 문화를 예를 들어서, 죽음의 대상이나 해결로서 여기에 든 세 가지의 방식에 대해서 언급하기로 한다.
 
영혼과 타계
E.B. 타일러에 의한 애니미즘설에서는, 인간이 신체와는 별도의 개성적 실체(영혼)를 가진다는 이원론적 관념이 꿈의 경험에 의해서 지지되며, 나아가서 꿈속에 이미 죽은 사람의 상을 봄으로서 이 실체는 사후의 존재(사령(死靈))와 결부된다. 즉, 사자가 꿈에 보이는 이상 그(의 영혼)는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설명이 성립하는 것이며, 따라서 이는 타계, 영계의 이미지의 성립으로 유도된다고 한다. 타일러의 설은 너무나 합리주의적인 설명이라는 비판을 받지만, 사후의 존재와 타계의 표상의 발생을 인간의 기억 능력과 심상의 외적투영에서 구한 것은 기본적으로 올바르다.
사령(死靈)으로서 사후에도 인간의 개성이 존속한다는 신앙은 그리스도교 등의 역사종교에서의 영혼불사의 사고방식에 가깝다고 할 수 있는데, 미개문화에서는 이 불사를 영원한 것으로 보는 경우는 드물다. 즉 대부분의 경우, 타계에서의 생은 이 세상의 생과 매우 유사한 것으로 이미지 되어 있으며, 그 때문에 영혼도 또한 저 세상에서 죽는다고 생각되고 있다. 이 경우 인간의 죽음에 대해서 불사(不死)를 대치시키는 것이 아니라, 제2의 생(재생)을 대치시킨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동남아시아의 산지민 사회에서 가끔 보이는 관념에 의하면, 영혼은 용해되어서 안개나 비가 되어 대지로 들어와서 곡물을 열매맺게 한다. 이를 먹음으로써 후의 인간은 생활을 계속하는 것이며, 여기에 일종의 윤회사상이 맹아, 죽음에서 생으로 복귀의 모티브를 볼 수 있다.
 
사회적 대상(代償)
타계에서의 제2의 생이라는 관념이 충분히 전개되어 있지 않은 문화(가령, 아프리카의 목축민사회)에서는 개인의 죽음은 자손의 번영이나 이름의 계승 등 사회적 대상(代償)으로서 일종의 구제를 받는다. 누엘족 사이에서 유령혼으로 알려진 관습은 결혼을 하지 않고 죽은 인물의 명의로 다른 자가 결혼함으로써 거기에서 태어난 아이를 사자의 아이로 보는 제도인데, 재산의 상속 등 경제적인 측면을 별로도 해도, 이로써 사자는 사회적 무화(無化)에서 피할 수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죽음이라는 문제를 사회제도 중에서 매우 교묘하게 순화하는 것 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웃의 딘카에서도 아이를 가지는 것은 불사를 달성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한다. 동남아시아 대륙부 부터 도서부에 걸쳐서 보이는 거석문화 하에서는 거석기념물의 건조가 그것을 세운자의 생(生)의 표시이며,사후 그의 존재가 사회 중에 영원히 남는 것을 보증한다. 이와 같이 사회적 달성으로 죽음을 극복하려는 심리는 세속화된 현대사회에도 해당될 것이다.
 
의례적 해결
인류에 보편적으로 보이는 현상중 하나에 죽음을 의례로 채색하는 것이 있다. 이중에는 가끔 죽음을 상징적으로 극복하는 생 또는 재생의 모티브가 나타나는데 그 극단적인 예는 멜라네시아의 몇 민족에서 행하여지고 있다. 유족이 사자의 육체의 전부 또는 일부를 먹는, 소위 족내식인(族內食人)의 의례이다. 이는 사자의 생자에 대한 직접적 동화에 의한 죽음의 극복인데, 그 이외에도 죽음의 의례는 성적 풍요의 표현(가령 난교)이나 유희의 과잉을 수반하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해서 의례는 죽음을 생으로 치환 하는 장치가 된다. 때로는 사후에 성대한 의례가 행하여지는 것 자체가 큰 의미를 가지는 경우도 있다. 슬라웨시에 사는 트라쟈족은 낭비적이라고 할 정도의 제사를 사자를 위해서 베푸는데, 이로써 개인의 죽음은 사회성원과의 광범위한 관계를 획득하는 것이며, 죽음을 생자의 삶 중에 적극적인 의의를 가진 것으로서 받아들이게 된다.
 
<죽음> 관념
인간의 죽음에는 자기의 죽음과 타자의 죽음의 양면이 포함되어 있는데, 현실적으로는 그중 한 쪽에 중점을 두어서 보는 것이 보통이다. 그리고 그 중점을 두는 방법의 차이에 따라서 죽음의 관념이나 죽음에 대한 태도에 여러 가지 변화가 나타난다. 일반적으로 타자의 죽음은 관찰할 수 있지만, 자기의 죽음 또는 그 관념은 일종의 극한적인 경험으로써 상상이나 표상의 영역에 결부되어 있다. 가령 죽음에 관한 과학적이며 객관적인 인식과 종교적ㆍ철학적 인식의 차이는 그와 같이 해서 발생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위의 두 가지 입장에 다리를 놓으려는 시도가 한쪽에서 행하여졌는데 그중에서 죽음에 관한 다양한 신화나 의례가 발생하고, 독특한 신체론이나 우주론이나 타계관이 형성된 것이다.
이어서 죽음의 현상은 이 지상에서 더러워진 육체의 소멸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있는 동시에, 죽음의 현상은 생의 현상과 표리의 관계를 유지해서 사후의 세계와도 상관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생각이 있다. 즉, 죽음을 생과의 절단을 상징하는 절대점 이라는 것이 전자이며, 이에 대해서 생의 세계를 사후의 세계로 접속하는 매개점이라는 것이 후자이다. 전자의 절대점을 강조한 것은 서구의 그리스도교 문화권이며, 그에 대해서 후자의 매개점을 강조한 것은 일본을 포함한 아시아의 불교문화권이다.
 
공자, 불타, 그리스도
그런데 중국의 공자는 죽음을 미경험의 영역으로 위치 지었는데, 인도의 불타는 죽음을 열반으로 보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기 위한 출발점으로 생각했다. 이에 대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 위에서 희생되고, 죽어서 다시 살아났다. 즉, 대략적으로 말해서 공자는 죽음을 불가지(不可知)의 대상으로 보고, 불타는 그것을 생의 충실로 생각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마지막은 죽음이 재생에 이르기 위한 단절로 보았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런 죽음에 대한 세 가지의 태도는 시대를 초월해서 지역을 초월해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특징이며, 신화나 예술, 문화이나 철학 등의 각종 관념이나 발상의 모태도 되었다.
 
서구에서의 <죽음의 사상>
그러나 일반적으로 죽음에 대한 자각이 심화된 것은 중세였다. 공자불타나 그리스도 등이 활약한 고대 세계에서는 죽음을 천체의 운행과 같은 불가피한 운명으로 보는 관념이 우세하였는데, 이에 대해서 중세 세계는 죽음에 대한 의식의 반성을 통해서〈죽음의 사상〉이라고도 할 수 있는 발전을 본 때였다. 즉 J. 호이징거의 『중세의 가을』에 의하면, 유럽의 중세를 특징짓는 죽음의 사상은 13세기 이후에 성행한 탁발수도회의 설교에서 주요한 테마 ㅡ <죽음의 기억하라(memento mori)>의 훈계와, 14~15세기에 유행한 <죽음의 무답>을 주제로 하는 목판화 의해서 상징된다고 한다. 당시의 그리스도 교회가 일상적인 설교에서 반복적으로 선전하였던 죽음의 사상은 육체의 부패라는 표상과 호응하였다. 육체의 멸시가 <죽음을 기억하라> 의 성스러운 합창으로 접속된 것이다.
 
죽음에 대한 태도의 유형
프랑스의 역사가 아리에스(Philippe Aries)의 『죽음과 역사』에 의하면, 유럽의 중세야마로 <나의 죽음>이 발견된 시대였다고 한다. 그의 저작은 죽음에 대한 인간의 태도를 역사적으로 개관한 것인데, 그것은 결국 현대에 이르러서 <죽음을 터부시하는> 태도로 바뀌었다고 한다. <왕생전(往生傳)이나 <왕생술(往生術)> 등의 중세적 세계관에 대해서, 죽음의 문제를 의학이나 병원에 위임해서 터부시하는 태도는 확실히 근ㆍ현대의 고유한 사생관(死生觀)에 유래한다고 생각된다. 여기에서는 그 문제를 인도인과 미국인을 예로 들어서 살펴보기로 한다.
인도의 베니레스는 간가(갠지스)강의 중류역에 위치하는 성지인데, 거기에는 의사로부터도 천명에서도 내팽겨쳐진 순례자들이 마지막의 사출(死出)의 여로를 구해서 모여든다. 그들은 사후 간가 강가에서 태워지고 뼈가루가 강을 흘러감으로써 승천한다고 믿고 있다. 강 근처에는 그들 죽음의 순례자들을 수용하는 집이 줄지어 있으며, <해탈의 집>, <휴식의 집> 이라고 불린다. 몇 명의 근친자만이 따라오고 의사도 간호사도 관리도 성직자도 출입하지 않는다. 조용한 침묵의 2~3주일이 지나고 마지막으로 유체가 갠지스강으로 운반된다. 거기에서는 불의 정화력이 육체를 처리하고(화장), 물의 정화력이 혼의 행방을 정한다(승천)는 관념이 살아있으며 인간의 혼은 사후에 우주와 자연 속을 순환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 미국인의 경우에는 어떨까. 최근, 죽음의 문제에 대해서 주목을 끌고 있는 것에 엠발밍(embalming)과 크라이오닉스(cryonics)가 있다. 엠발밍 이라는 것은 사후 유체를 아름답게 장식하는 것으로, 사고나 전장에서 유체가 조각난 경우에는 그것들을 모아서 봉합하여 살아있는 것처럼 그것을 만드는 것이다. 크라오닉스라는 것은 인간의 냉동화를 의미한다. 암과 같은 불치의 병에 걸린 경우, 그 사람을 몇 년인가 냉동화해서 치료법이 발견되었을 때 해동해서 치료한다는 것이다. 이상의 두 가지 문제에 공통되는 것은 육체의 중시와 혼의 경시라는 점이다 『죽음의 순간』의 저자로서 알려진 퀴블러 로스(Elisabeth Kubler-Ross)는 그의 호스피스 운동의 경험 중에서 하나의 가설을 이끌어냈다. 즉, 죽을병에 걸렸다는 것을 안 환자는 처음에는 충격, 부인, 분노, 억울한 상태를 경험하는데, 결국 수용사태로 추이해간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데카섹시스(decathexis)>의 심경으로 비약해서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데카섹시스라는 것은 현실세계와의 완전한 단절을 자각하는 것이며, 무(無)로의 진입에 몸을 맡기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다시 죽음의 순간에 혼의 작용을 인정한지 않는 정신태도가 현저하게 나타난다.
 
(), (肉), (骨)
다음에 죽음의 인식에 대해서 중요한 것은 영과 육의 문제이다. 그리스의 플라톤주의나 오르페우스교에서는 육체는 혼을 속박하는 것이며, 따라서 영혼을 육체에서 해방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영과 육의 일체를 강조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교도의 신조에서 사자는 육체를 가진 채로 승천한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으로, 신약성서에 의하면 골고다에 있는 승천후의 그리스도의 묘는 비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서양을 중심으로 <죽음> 도상표현
죽음의 도상표현은 각 민족이나 문명이 지닌 근원적인 사생관(死生觀)과 그 토대를 이루는 종교와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 그 민족 또는 문명에 전승되어 있는 장송의례의 총체에서 떼어내서 도상만을 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한 죽음의 표현은 생과 죽음의 풍속의 가장 사회학적인 현상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좁은 의미에서의 <예술> 표현으로 보는 것에도 문제가 있다.
 
피안(彼岸) 이미지
첫 번째 형태로서 대부분의 경우(특히 선사시대, 고대, 원시사회에서), 죽음의 표현은 사자의 영을 피안으로 이끌고 그 재생을 도모하려는 주술적인 제사의 프로세스 중에 나타났다. 사후 영의 여행과 재생에 대한 가장 체계적인 사상을 가진 것은 고대 이집트인이나 티벳인인데, 그것은 샤머니즘과 종교(불교, 힌두교, 이슬람교, 자이나교, 그리스도교)가 있는 곳에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묘나 <사자의서>에 그려진 사자나 죽음의 지배자 및 피안의 이미지는 조형적으로 독립한 <죽음>의 도상으로 보기는 어렵다. 이집트의 벽화에서 사자는 명계(冥界)의 신 오시리스나 태양신 아멘 라의 지배하에 있으며, 자신의 생전의 행위에 의해서 선악의 심판을 받고, 최종적으로는 혼이 축복받은 영생의 상태에 들어갈 것을 기념하는 과정이 그려져 있다.
여기에서 파괴적 요소를 가진 존재는 오시리스의 아우로서 그를 여덟 조각으로 갈기갈기 찢은 세트, 또는 아멘 라를 삼키려는 거대한 뱀 아포피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후세와 같은 전제군주적인 <죽음>의 독점권을 휘두르지는 않으며 죽음은 재생에 대한 하나의 계기로서 보고 있다. 그러나 이 이집트의 타계관에 보이는 세 가지요소, <천국과 지옥, 즉 빛의 나라와 어둠의 나라의 대립>, <사후의 신의 심판>, <영혼의 윤회전생>은 이상에 언급한 모든 종교에 공통된다. 따라서 이들은 순수하게 죽음의 표현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사후 세계의 이미지로서는 무수한 표현을 가지며, 종교미술의 가장 생산적인 주제가 되었다.
 
개인의 명성의 기억
죽음의 표현의 두 번째 형은 개인의 장례 기념으로서의 모니멘트로, 고대 그리스와 로마를 전형으로 한다. 첫 번째 형이 사후의 영의 주술적 재생을 기도하는 것인데 반해서, 두 번째 형은 과거에 살았던 생을 기념해서 존경하는 목적을 지니는데 고대의 묘는 바로 그런 것을 위해서 만들어졌다. 사자는 항해를 해서 피안으로 간다고 생각되었으며, 석관은 배의 형태를 취한 것이 많았다. 그러나 그리스ㆍ로마인들도 영웅 또는 반신(半神)은 한 번 죽은 후 재생, 부활한다고 믿었다. 따라서 이들 영웅이나 이 세상과 저 세상을 왕복하는 인간이나 신 등은 죽음과 재생의 비의(秘儀)를 지배하는 자로서 신앙이 되었기 때문에,이들 신들의 표현은 강령이나 명계로 부터의 소생의 비의를 나타내는 것으로 생각되는데 페르시아의 미트라신앙도 로마에 들어와서 동일하게 표현되었다.
첫 번째 형도 두 번째 형도 각각 피안 사상이 있는 점과 인문주의적 사상이 있는 점에서는 병행하거나 독립적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이는 한 시대,한 문명에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요약하면 첫 번째 형은 사후의 재생에 의해서 죽음의 공포에서 도망가려는 것, 두 번째 형은 명성과 기억에 의해서 이 지상에 생명을 오래 유지하려는 것이다. 독일 출신의 미술사가 E. 파노프스키는 전자를 <사후지향형>, 후자를<생지향형>이라고 하였는데, 궁극적으로는 모두 얼마나 인류가 죽음과 화해하려고 했는지를 나타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생과 죽음의 대면
세 번째 형은 위의 두 가지 형과는 달리, 살아있는 중에 이를 위협하고 파괴하는 두려운 사신으로서의 <죽음>의 표현이다. 이에 대해서는 유럽 전 인구의 4분의 1이 죽었다고 하는 14세기 중 반의 페스트의 유행이 큰 계기가 되었다고 하는데, 그 배경으로서 그리스도교적 세계관의 쇠퇴와 현세의 생(生)의 향상이라는 중세 말기 사회상황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세 번째 형은 죽음과 생의 양극을 가진 긴장으로서 인생을 파악하는 의식에서 발생한 것으로, 유럽 근세의 사생관(死生觀)을 대표한다. 이 이미지는 14세기에 발생해서 18세기까지 계속되는데, 가장 왕성 하게 표현된 것은 중세 말기부터 르네상스의 예술에 포함된다. 먼저 그것은 <죽음> 그 자체의 의인적 표현으로서 등장했다. 이는 풀베기용의 낫이나 목발이나 모래시계를 손에 쥔 해골이다. 고전 고대에는 해골로 서의 <죽음>의 의인상은 보이지 않았다. 또한 이 낫은 로마의 농경신 사트루누스나 그리스의 크로노스의 아트리비트(지물)이다. 켈트인의 신앙 속에 있었던 사신 오그미오스(Ogmios)가 그리스도교의 심층부에 잔존하며, 이것이 아트리비트로서 독립된 이미지를 형성했다고 생각되는데 이는 중세의 타로트의 13번째에 등장 하고 있다. <죽음>의 의인상이 왕성하게 묘사된 계기의 하나는 페트라르카의 『트리온피(개선)』의 유행이며, 15세기에는 승리를 자랑하는 <죽음>이 사체를 타넘고 개선하는 판화가 각국에서 만들어지고 있다.
이보다 오래된, 해골의 모습을 한 사자가 묘에서 나와서 춤춘다는 전승이 중부 유럽에 있었는데, 이것이 <죽음의 무답>의 도상을 형성한 것은 14세기 이후이다. 이<죽음의 무답>은 교황, 황제, 추기경, 농부 등 상대방을 선택하지 않고 <죽음>이 방문해서 손을 잡는 도상으로, 원래 종교극에서의 전례의 무답으로서 시작되어서 이것이 도상화된 것이다. 다음에 <3인의 생자와 3인의 사자>등의 <생자와 사자의 만남>의 주제도 많이 묘사되었는데 모두 <죽음은 모든 인간을 찾아온다>라는 관념을 표현한 것이다. 나아가서 14~15 세기를 통해서 <알스 모리엔디>가 확산되었고, 이 텍스트에 붙여진 판화에는 사자의 혼을 서로 빼앗는 천사와 악마나 천국 및 지옥의 광경이 리얼하게 묘사되어 있다.
15~16세기의 독일에는 젊은 미녀가 화장하는 중에 죽음이 나타나는 <바니타스(vanitas, 허무함)>의 도상이 유행하였다. 이 중에서 가장 특징적인 예로서, 높은 자리에 있는 인물의 묘에 그 고인의 사체의 부식과 붕괴의 모습을 리얼하게 표현하는 <트랜지(transi)>의 도상이 있는데 프랑스, 영국, 독일에 예가 많다. 한편 이탈리아에서는 가면, 베일, 거꾸로 든 횃불, 뱀, 두개골 등으로 <죽음>을 상징하는 경우가 많으며, 사체나 해골은 많이 표현되지 않는다. 16세기 말부터 17세기에 걸쳐서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네덜란드에서 두개골을 꽃이나 과일과 조합해서 묘사하는 정물화 형식을 취한 <바니타스>의 도상이 많이 표현하며, 또한 시든 꽃 또는 썩은 과일, 개구리, 뱀 등 땅에 사는 것 등도 <죽음>의 메타파로 해석된다. 16세기 중반의 반종교개혁기는 다시 죽음에 대한 사상을 심각화 시켰기 때문에, 17세기에는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등 예수회의 세력이 강한 지역에 가혹한 해골에 의한 <죽음>의 표현이 강화되었다. 죽음에 대한 민중의 공포가 근원적인 구제를 요구해서 다시 신으로 향하도록 한 것이다.
현세 긍정적인 18세기에도 분묘는 해골의 상으로 장식되었다. 그러나 총체적인 예술표현 영역에서 <죽음>의 표현은 스페인의 고야, 스위스 출신의 휘슬리, 영국의 W. 브레이크가 나올 때까지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18세기 말의 사회적 대격변중에서 다시 악의있는 죽음, 트리비얼한 생의 초월로서의 죽음이라는 두 가지 이미지가 상징주의적인 표현으로 부활한다. 특히 낭만주의와 상진주의 예술가들은 죽음을 생의 극복으로서 표현하거나 생의 부정면, 부조리 영역의 확대로서 표현하게 되었다. 다시 낫을 진 사신이나 『죽음과 처녀』, 『사신과의 합주』의 주제가 형태를 바꾸어 출현한다. 또한 성(에로스)과 죽음의 결합도 세기말 예술의 주제의 하나가 되었다.
 
현대의 <죽음> 표현
현대에는 한편으로는 과학적 세계관에 의해서, 다른 한편으로는 물질주의적 인생관에 의해서 죽음의 표현이 현저하게 쇠퇴였다. 앞에서 언급한 첫 번째의 형은 피안의 사상을 근저로 하였는데, 현대인은 이를 상실했다. 두 번째의 형은 영웅적인 개인의 생애를 토대로 하였는데, 현대의 대중사회는 한 개인이 생도 죽음도 무의미화 하고 있다. 세 번째의 형은 죽음에 대결하는 생자의 철학에서 발생하였는데, 현대인은 죽음을 단순한 물질적인 종식으로만 감수하기 때문에 그것은 긍정적 의의를 가지지 않는다. 이처럼 현대는 가장 화해하기 어려운 죽음, 구원받지 못하는 죽음을 가지고 있다. 현대의학은 예술에서의 죽음 표현의 중요한 구성요소였던 임사자(臨死者)의 인간적 드라마를 빼앗아갔다. 이로써 항상 인간적인 주제만을 나타내는 <예술>은 현대의 <죽음>에 아직 형태를 부여할 수 없었다. 히로시마의 쌓인 사체나 아우슈비츠의 해골의 산, 즉 <죽음의 승리>의 도상을 나타낸 것은 조형예술이 아니라 사진이라는 것이 현대의 상황을 암시하고 있다.


죽음학 연구
 
정의
죽음이란 무엇인가? 역사의 새벽, 인류는 ‘생각’의 첫머리에서 이 문제와 맞닥뜨렸을 것이다. 종교와 철학 그리고 모든 문명의 시발점에 이 문제는 참여하고 있다. 그러나 과학적 지식이 극대화되고 분초를 다투어 정보가 쏟아지는 오늘날에 와서도 이 문제는 분명하고도 확실한 결말을 짓지 못하고 있다.
 
내용
대개의 학자는 죽음이란 “한 생명체의 모든 기능이 완전히 정지되어 원형대로 회복될 수 없는 상태”라는 데에 동의하지만, 단서를 붙이는 것을 잊지 않는다.
“삶이란 무엇인가를 규명하지 않고는 죽음에 대한 완전한 해답은 있을 수 없다”고도 하고, “죽음의 세계란 인간의 경험 영역, 지각 영역을 넘어서는 차원의 문제에 속하기 때문에 그 본체를 파악하기란 불가능하다”고도 한다.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해석에 특히 자기 식의 독단을 많이 개입시킨다. 각자 자신의 안경을 통해 죽음을 보는 것이다. 죽음에 대한 통일된 답변을 들을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죽음이라는 것이 그만큼 인생에서 중대 문제이고, 누구나 한번은 겪어야 하는 피할 수 없는 사실이며, 또 그것으로 모든 것이 종말을 맞기 때문이다.
생물학자들은 삶과 죽음의 구분에 고심한다. 생물계에는 단세포 생물도 있고 다세포 생물도 있어서, 생사를 가름하는 기준을 일정하게 말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의사들은 고등 동물인 인간의 죽음을 판정하는 데도 어려움을 겪는다. 일반적으로 심장 고동과 호흡 운동의 정지를 표준으로 삼지만 가사상태(假死狀態)인 경우도 있고, 한 때 멈추었다가 기적적으로 다시 살아나는 경우도 없지 않기 때문이다.
죽음의 형태도 가지각색이다. 천수를 누리고 기력이 쇠진하여 저절로 여러 기능이 멈추는 자연사가 있는가 하면, 아직 창창한 나이에 뜻하지 않은 원인이 생겨 죽음을 맞는 우연사도 있다.
우리 나라 사람은 예로부터 오래 사는 것[壽]을 가장 큰 행복으로 삼았고, 제명대로 살다가 편안히 죽는 것[考終命]을 오복의 하나로 꼽았다.
인간을 “죽음으로 향하는 존재”라 규정한 철학자도 있고, “산다는 것은 무덤을 향하여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다가가는 과정”이라고 말한 소설가도 있다.
“가끔 죽음에 대해 생각을 돌려라. 그리고 미구에 죽을 것이라 생각하라. 어떠한 행동을 할 것인가를 그대가 아무리 번민할 때라도 밤이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면 그 번민은 곧 해결될 것이다. 그리하여 의무란 무엇인가, 인간의 소원이란 어떤 것이어야 할 것인가가 곧 명백해질 것이다. 아아, 명성을 떨쳤던 사람도 죽고 나면 이렇게 빨리 잊혀지는 것일까!” 그리스의 비극 시인인 소포클레스(Sophokles)의 말이다.
이를 받듯이 몽테뉴(Montaigne, M.)는 그의 ≪수상록 隨想錄≫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어디에서 죽음이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는지 모른다. 곳곳에서 기다리지 않겠는가! 죽음을 예측하는 것은 자유를 예측하는 일이다. 죽음을 배운 자는 굴종을 잊고, 죽음의 깨달음은 온갖 예속과 구속에서 우리들을 해방시킨다.”
어쨌든 사람은 죽지 않으면 안 되고 단 한번 혼자서 죽는다. 그리고 그것은 삶의 끝막음이다. 누구도 피하지 못하고 거부하지 못하며 전신으로 맞아들여야 한다. 이러한 죽음이란 과연 무엇인가? 의문은 다시 되풀이된다.
 
우선, 종교에게 물어본다.
 
죽음에 대한 인식
한국인은 무척 죽음을 외면하려 든다. 그래서 말한다. “개똥 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 가난에 찌들어도 천대를 받아도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이 좋다. 죽음은 싫다. 삶에 강렬한 애착을 지닌다.
죽음을 재난으로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두렵다. 죽음은 휴식이 아니라 새로운 공포이고 재앙이다. 이 세상에서 누리는 오복 가운데 ‘오래 사는 것[壽]’을 으뜸으로 친다. 그저 오래 살고 싶어한다.
아기를 낳았을 때 금줄을 치는 것이나, 돌을 맞았을 때 실을 안겨 주는 것이나, 모두 인생의 마디마디에 ‘오래 살아라’ 하고 기원하는 뜻을 담는 것이다.
새해를 맞아 세배를 드려도 “만수무강하십시오” 하고, 젊은이의 이러한 축수(祝壽)에 어른은 “명복(命福) 많이 받아라” 하고 덕담을 내린다. 모두 오래 살고 싶은 심정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죽음을 피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굳이 외면하고 싶지만 가까이 있음을 안다. ‘저승 백년보다 이승 일년이 낫다’고는 하지만 사실은 ‘저승 길이 대문 밖’인 것이다. 죽음은 늘 가까이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오복의 마지막은 ‘제명대로 살다가 편안하게 죽는 것’이다.
사실, 이 세상에서 가장 억울한 것은 ‘제명대로 못 살고 원통하게 죽는 것’이다. 일찍 죽는 것[夭死], 객지에서 죽는 것[客死], 횡액으로 죽는 것[橫死], 원통하게 죽는 것[寃死], 분하게 죽는 것[憤死], 모두 억울한 죽음이다.
하늘에서 받은 수명대로 오래 살다가 자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편안하게 자리에 누워 죽는 것[臥席終身]이 바람직하고, 억울하게 죽으면 원귀(寃鬼)가 된다.
이들은 ‘왕신’·‘몽달귀신’·‘손각시’·‘영산’·‘객귀(客鬼)’·‘여귀(厲鬼)’가 되어 저승에서도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구천을 떠돌게 된다. 무속 신앙에서는 죽음이란 다름 아니라 저승사자를 따라가는 일이다.
너이들을 길을 적에
불면 날까 쥐면 꺼질까
금지옥엽 갓치 길러내어 생전영화 보잿든이
천명이 다 지나고 조물이 시긔하야 두번 다시 돌아오지 못할 영별의 객이 되니
죽은 혼이라도 설고 넉시라도 설다.
<巫歌의 일부>
병사(病死)는 대개 천명이 다하고 조물주가 시기하여 영별의 객이 되는 것으로 알았다. 무속에서는 일반적으로 저승사자를 보내는 것은 명부(冥府)에 있는 최 판관(崔判官)이라 생각한다. 최 판관이 체포 영장인지 소환 영장인지를 발부하면 저승사자가 이것을 들고 사자(死者)를 찾아 오는 것이다.
“활등같이 굽은 길을 설대같이 다다라서 닫은 대문 박차 여니 수문장이 설난하고 마당간에 들어서니 원당지신 설난하고 마루 대청 떼구르니 성주왕신 설난허구.” 저승사자는 이토록 시퍼렇게 위세를 부리며 방안으로 들어 와서는 잡아갈 사람을 무자비하게 나꿔 챈다.
“실날같은 목에다가 오라사실 걸어 놓고, 한번 잡어 나우치니 맑은 정신 간 곳 없고, 두번 잡어 나우치니 열손 열발 맥이 없고, 삼세번을 나우치니 혼비백산 간 곳 없고, ……” 죽음의 장면은 이렇게 참혹하다. 그러니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겠는가!
죽음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저승길을 가야 하는 것이다. 어떤 때는 혼자 가기도 하고 저승사자의 인도를 받아 가기도 한다. 어쨌든 서러운 길이다.
“가다 가다가 저물거던 길에도 앉지 마오, 길신이 아니 놓소, 또 가시다 저물거던 산에도 앉지 마오, 산신이 아니 놓소, 또 가시다 저물거든 못가에도 앉지 마오, 용신이 아니 놓네, 또 가시다 저물거든 독에도 앉지 마오, 독신이 아니 놓네.”
명부로 가는 여행 길은 험난하기 이를 데 없고 함정도 많다. 황천강(黃泉江)을 건너면 비로소 득달하게 되는데, 거기에서는 시왕[十王, 또는 十大王]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
생전의 잘잘못에 대하여 엄한 문초를 받게 되는 것이다. 염라대왕이나 최 판관의 재량에 따라서는 드물게 이승으로 환생하는 수도 있다. 민간 신앙이나 무속은 죽음에 관한 한 불교의 영향이 짙게 깔려 있음을 본다.
≪반야심경≫에는 “낳지 않고 사그라지지 않고(不生不滅)”, “더럽혀지지 않고 깨끗해지지 않고(不垢不淨)”, “더해지지 않고 덜해지지 않고(不增不减)”라 하였고, “드디어 늙음도 죽음도 없고 또한 늙음과 죽음이 없어지지도 않게 되는 데 이르는 것이다(乃至 無老死 亦無老死盡)”라 하였다.
말하자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실체(實體)가 없으며, 따라서 낳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없고, 사그라져 없어졌다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없으며, 그러므로 더럽혀진 것도 깨끗한 것도, 더해졌느니 덜해졌느니 따질 것도 없다는 것이다.
실체가 없으니 물질적 현상이나 감각이나 표상이나 의지·지식 같은 것이 있을 리 없고, 눈도 코도 귀도 혀도 몸뚱이도 없다. 늙음과 죽음이 있을 수가 없다. 따라서, 삶이 곧 죽음이요, 죽음이 곧 삶이라, 처음부터 구별이 없다.
서산대사(西山大師)는 말한다. “중생이 낳는 것 없는 중에서 망녕되이 삶과 죽음과 열반을 보는 것이 마치 허공에서 꽃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것을 보는 것과 같으니라.”
이를 풀이한 글은 다음과 같다. “성품에는 본래 낳음이 없으므로 삶과 죽음과 열반이 없는 것이고, 허공에는 본래 꽃이 없으므로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것이 없는 것이다. 삶과 죽음이 있는 줄로 아는 것은 허공에 꽃이 나타나는 것을 보는 것과 같은 것이고, 열반이 있는 줄로 아는 것은 허공에 꽃이 사라지는 것을 보는 것과 같은 것이다.”
죽음이 무엇인가를 다시 말하고 있다. “사람이 죽을 때는 단지 오온(五蘊)이 다 공(空)이고 사대(四大)가 내가 아님을 볼 것이다. 참 마음은 모습이 없어서 가는 것도 아니고 오는 것도 아니며, 살았을 때도 성품은 또한 살지 않았고 죽을 때도 성품은 또한 떠나가지 않는다.”
죽음은 어쩌면 이 티끌 세상을 탈출해서 영원한 자유인이 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다만, 마음가짐을 거울처럼 맑고 호수 같이 고요하게 지닐 수 있어야 하며, 그렇게 되면 삼세인과(三世因果)에 이끌리거나 얽매이지 않게 되어 출세자유인(出世自由人)이 된다는 것이다.
서산대사에 의하면, 인간은 사대(四大)로 이루어지고 오온으로 살아간다. 사대는 지(地)·수(水)·화(火)·풍(風)으로 사람의 몸은 이 네 가지에 의하여 성립이 되어 있다. 오온은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의 다섯 가지인데, 색은 물질로서 육체이며, 수는 감각, 상은 개념 구성, 행은 의지, 식은 의식이라 간단하게 설명될 수 있다.
죽음에 다달아 사대 곧 육신이 진정한 ‘나’가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오온 곧 살아 움직인 활동 그것이 모두 공(空)이라는 것을 알아차려야 비로소 세간을 벗어난 자유인으로 해방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이 세상에서 익힌 매듭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다시 얽매임으로 굴러다니게 된다.
≪선가귀감≫의 다음 구절을 보자. “사람이 죽을 때 만약 털끝만큼이라도 범부(凡夫)니 성인(聖人)이니 하는 감정이 끊어지지 않거나 생각을 잊지 못한다면 나귀의 태(胎)나 말의 뱃속으로 향해 의탁하게 되며, 지옥의 끓는 가마 속에 처박혔다가 전과 같이 다시 개미나 모기 등으로 되고 말 것이다.” 극락과 지옥의 구분이 바로 이것이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무(無)로 되는 것이 아니다. 매미가 허물을 벗듯이(蟬脫) 훨훨 벗어 던지고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는 것이다. 낡은 허물을 벗는 것이 죽음이며,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는 것이 윤회(輪廻)다. 새로운 옷이 무슨 빛깔이 되고 어떤 모습이 될지는 이승의 업(業)에 따라 결정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은 무가 아닌 동시에 두려워할 일도 슬퍼할 일도 아니다. 도리어 웃으며 새 옷으로 갈아입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다만, 이승에서 살아 움직이며 맺은 인연이 있고, 주고 받은 정이 있기에 아쉬운 느낌이 들 수는 있다. 이것이 다름 아닌 망집(妄執)이다.
사대가 내가 아니고 오온이 다 공인 바에야 어찌 망집에 사로잡혀야 하는가! 매섭게 끊어 버려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삼세(三世)의 인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웃으며 훨훨 낡은 허물을 벗어 버려야 한다. 이것이 죽음에 대한 불가(佛家)의 인식이다.
공자는 제자인 자로(子路)가 죽음에 대해 묻자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삶에 대해서도 모르거늘 어찌 죽음에 관하여 알겠는가(未知生 焉知死)!” 아직 삶에 대해서도 모르면서 어찌하여 죽음까지 알려 하느냐며 제자가 차근차근 공부하지 않고 덤벙대는 것을 꾸짖는 말일 수도 있고, 삶을 알게 되면 죽음은 저절로 알게 된다며 타이르는 말일 수도 있다.
아무튼 이 말에서 공자는 죽음보다 삶을 더 중시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중시했다기보다 더 절실하게 생각했다고 고쳐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죽음에 이르기 전에 삶이 앞서 있다. 당장 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공자는 살아 있는 사람들끼리의 질서, 곧 윤리 도덕에 더 관심을 가졌다.
인(仁)을 말하여 사랑을 가르쳤고[仁愛人也], 효(孝)를 강조해 사람은 이 세상에 단독자(單獨者)로 오는 것이 아니라, 무수한 조상을 뿌리로 해 태어나는 것이며, ‘나’를 출발점으로 해 또 무수한 자손이 뻗어 나간다는 것을 가르쳤다.
알고 보면 사람은 죽음으로 하여 삶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손의 모습으로 영원히 이어져 간다는 것을 효에서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죽음이나 내세에 대하여 직설적으로 말한 바는 없지만, 삶을 알면 죽음은 저절로 알게 되며, 현세의 연장이 곧 내세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공자는 죽음에 대해 각별한 경의를 지니고 있으며 언제나 죽음에 대비하고 있었다.
≪논어≫에 “공자께서는 상(喪)을 당한 사람 곁에서 식사하는 경우 배부르도록 먹는 일이 없었으며, 상가에 가서 곡을 한 날에는 종일토록 노래 부르는 일이 없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병이 났을 때 자로가 기도 드리자고 제의하자 물었다. “그런 선례가 있느냐?” “있습니다. 뇌(誄)에 위로 천신에게 빌고 아래로는 지기(地祇)에게 빈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자로의 대답에 공자는 말한다. “나는 기도한 지 이미 오래다.” 항상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아 왔다는 뜻이다.
공자의 제자인 증자(曾子)는 임종에 제자들을 불러 놓고 말한다. “내 발을 펴 보아라, 내 손을 펴 보아라, ≪시≫에 이르기를 ‘전전긍긍 조심하기를 깊은 못 가에 서 있듯 얇은 얼음 판을 밟고 가듯 한다’ 하였지만, 이제부터는 나도 걱정을 면하게 되었음을 알겠구나! 얘들아.”
죽음에 임해서 자기 신체의 각 부분을 점검시키고 있다. 행여 상처난 곳은 없는가, 흉터는 없는가, 잘못된 뼈마디는 없는가, 면밀히 살펴보는 것이다. 내 몸은 부모한테서 받은 것, 한 평생 고이 지니고 있어야 효도를 다한 것이 된다. 곧, 저승에 가면 부모를 뵙게 될 것이고 그래서 새삼 되돌아 보는 것이다.
사실, 유교에서는 조상이 늘 자기와 함께 있다고 생각한다. 생사의 구분이 확연하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증자는 임종에 또 말한다. “새가 죽어갈 적에는 그 울음소리가 애처롭고 사람이 죽으려 할 때는 그 말이 착하다.” 사람은 마지막 죽음을 앞두면 순선(純善)한 본성으로 돌아오게 되고, 따라서 그 말도 착하게 된다는 것이다.
요컨대, 죽음은 모든 것을 귀결시키는 동시에 새로운 출발이기도 하다. ≪중용≫에 “성실한 것은 하늘의 도이고 성실해지려는 것은 사람의 도다(誠者 天之道也 誠之者 人之道也)”라고 하였지만, 인간이란 하늘을 배우고 따르고 드디어는 합일(合一)하는 존재다.
천도(天道)에 기(氣)의 모이고 흩어짐(聚散)과 음양(陰陽)의 성쇠(盛衰)가 있어 네 계절이 있듯이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다.
봄에 싹이 트고 여름에 자라고 가을에 열매 맺으며 겨울에 땅속으로 사그라진다. 여름에 극성하던 양은 가을이 되면 차차 쇠하였다가 겨울에는 거의 없어진다. 그와 반면에 음이 극성을 누린다. 그렇지만 동지(冬至)날에 거의 없어졌던 양이 다시 살아나기 시작한다(一陽始生). 그리고는 봄이 되면 싹을 틔게 하여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것이다.
소우주인 사람도 마찬가지다. 죽음은 새로운 싹을 트이기 위한 사그라짐(消)이다. 천도도 인도도 사그라짐(消)과 자라남(長)의 순환인 것이다. 둥그런 보름달이 차차 사그라져 들다가 그믐이 되면 거의 없어지고 다시 초승달로 되살아나며, 이것이 돌고 도는 것(循環)과 같다.
≪성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러므로 한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로마서≫ 제5장 12절).” 요컨대, 죽음은 죄에 대한 벌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죄는 원죄이다. 물론, 낱낱의 인간이 자의식으로, 개별적으로 범하는 죄도 있지만, 그것보다 더 크고 공통적인 죄가 원죄이다. 인류의 조상인 아담이 범한 죄로 인해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토 죄를 지니게 되며, 그것이 원죄인 것이다. 죽음은 이 원죄로 인해 신으로부터 받는 벌이다.
따라서, 기독교에서의 죽음은 육신의 죽음과 영혼의 죽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육신의 죽음은 그저 생물학적으로 한 생명체의 모든 기능이 정지되어 다시 원상대로 회복될 수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고, 영혼의 죽음은 생명의 원천인 영혼이 육체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을 뜻한다.
그러면 육체에서 분리되어 떨어져 나간 영혼은 어디로 가는가? 두말할 것도 없이 하느님 앞으로 간다. 이 세상의 창조자이고 구원자이고 심판자인 하느님 앞에 가서 시험대에 올라 일생 동안의 일을 심판받게 되는 것이다. 죽음은 말하자면 심판자의 앞으로 나아가는 일이다. 누구나 피할 수도 면할 수도 없는 필연적인 사항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의 죄를 대신해 죽음을 당했다. 신자들도 육신의 삶에 연연하지 말고 이 거룩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동참해야 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부활을 통한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한국인의 죽음
신라 제19대 왕인 눌지왕은 어느 날 여러 신하와 나라 안의 호방하고 의협심 있는 사람들을 궁중으로 불러 성대한 잔치를 베풀었다. 풍악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술이 서너 순배 돌고 나자 왕은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였다.
“내 큰 아우 복호(卜好)는 고구려에 인질로 가 있고, 작은 아우 미사흔(未斯欣)은 왜국에 인질로 가 있다. 두 나라에서 억류해 놓고 돌려보내 주지 않으니 내 비록 부귀를 누리고는 있지만 하루도 울지 않는 날이 없다. 누구든지 두 아우를 데려와서 함께 아버님 사당에 뵈옵게 해준다면 그 은혜를 잊지 않고 갚겠다. 누가 이 일을 해낼 수 있겠는가?”
이에 모든 사람들이 입을 모아 아뢰기를, “이 일은 아주 어려운 일입니다. 지혜와 용맹이 겸비해야 해낼 수 있습니다. 삽량주(歃良州) 태수 박제상(朴堤上)이면 해낼 수 있을 것입니다”라 하였다. 이에 왕은 박제상을 불러 간곡히 분부했다.
제상은 두 번 절하고 말하였다. “신이 듣기로는 임금에게 근심이 있으면 신하가 욕을 당하며,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는다고 합니다.” 그 길로 그는 고구려로 가서 왕과 담판을 하고 계교를 써서 복호를 신라로 데려오는 데 성공하였다. 그리고는 선걸음에 다시 왜국으로 향하였다.
이 소식을 듣고 그의 아내가 달려 갔지만, 이미 율포(栗浦) 갯가에서 배를 탄 뒤였다. 아내는 울부짖었으나 그는 손을 흔들어 보일 뿐 배를 멈추지 않았다.
왜국에 이르자 거짓 망명해온 것처럼 가장하였다. 왜왕은 처음에는 의심했으나 곧 믿었다. 그는 미사흔을 만나 자주 바닷가에 나가 노닐었다. 어느 날 새벽 마침 안개가 자욱하게 끼었다. 미사흔을 배에 태워 빨리 떠나기를 권하였다.
미사흔은 제상의 목을 껴안고 같이 도망치기를 애원하였지만 제상은 고개를 저었다. “같이 떠난다면 왜인들이 알고 뒤를 따를 것이오. 나는 여기 남아 뒤쫓는 것을 막겠소.” 할 수 없이 미사흔은 혼자 도망을 쳤다. 제상은 미사흔의 방에 들어 다음 날 아침 늦도록 나오지 않았다. 미사흔이 멀리 갔을 무렵에야 그는 실토했다.
왜왕은 크게 노했다. 발을 구르며 닥달하는 왜왕에게 그는 태연히 말했다. “나는 신라왕의 신하지 왜국 신하가 아니오. 우리 왕자를 구했을 뿐이오.”. 왜왕은 더욱 분이 치밀어 고함쳤다. “너는 이미 내 신하가 되지 않았느냐?” “차라리 신라의 개나 돼지가 될지언정 왜국의 신하는 되지 않겠다!”.
왜왕은 제상의 발 가죽을 벗기고 갈대를 벤 위를 걷게 하였다. “너는 어느 나라 신하냐?” “신라의 신하다.” 또, 불[薪火]로 사지를 지지며 물었다. “어느 나라 신하냐?” “신라의 신하다.” 왜왕은 목도(木島)라는 섬에 귀양 보내어 온 몸을 불로 태운 뒤 목베어 죽였다.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그의 아내는 세 딸을 데리고 치술령(鵄述嶺)에 올라가 왜국을 바라보고 통곡을 하다가 종내 죽고 말았다. 그 지아비는 충(忠)에 목숨을 던졌고, 그 지어미는 열(烈)에 목숨을 던졌다.
신라 법흥왕은 불교에 독실하였다. 그리하여 불법을 일으켜 이를 널리 펴고 여러 곳에 절도 세우고 싶었지만 신하들이 이를 가로막았다. 오랜 세월을 두고 내려오는 토착신앙이 있었고, 유교가 있었고, 선도(仙道)가 이미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왕은 탄식하였다. “아아, 나는 덕이 없는 사람으로 왕업을 이어받아 위로는 음양의 조화가 이지러지고, 아래로는 백성들을 기쁘게 할 일이 없구나! 정사를 보는 여가에 부처에 마음을 두었으니, 그 누가 나와 일을 함께 할 것인가?”
사인(舍人)이라는 하잘 것 없는 벼슬에 있는 이차돈(異次頓)이라는 신하가 있었는데 왕족으로 장래가 촉망되는 사람이었다. 나이 불과 22세인 이 젊은이가 왕의 심중을 헤아리고서 아뢰었다. “소신이 비록 비천하오나 불법을 위하여 계교를 써 보겠나이다.” “네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왕은 허락하지 않았다.
이차돈도 굽히지 않았다. “나라를 위하여 몸을 죽이는 것은 신하의 큰 절개이옵고, 임금을 위하여 목숨을 던지는 것은 백성된 곧은 의리입니다. 거짓으로 말씀을 전하였다고 해서 신의 목을 베시면 백성들이 굴복하여 감히 어명을 어기지 못할 것이 옵니다.”
“이 세상에 자비를 베풀고 아무리 하찮은 목숨이라도 고이 보전하게 하는 것이 부처의 가르침이며, 나의 뜻은 사람을 이롭게 하려는 것이거늘 어찌 죄 없는 사람을 죽이겠느냐?” 왕은 고개를 저었지만 이차돈도 물러서지 않았다.
“모든 것은 버리기 어려우나 신명(身命)은 더욱 어렵사옵니다. 그러나 소신이 저녁에 죽어서 불교가 아침에 행해진다면 불일(佛日)이 찬란해질 것이고 성주(聖主)께서는 길이 편안하실 것입니다.” “내가 네 큰 뜻을 이미 짐작은 하고 있었다만 참으로 대견스러운 일이로구나!” 왕도 허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이차돈은 조정으로 나가 여러 신하들에게 절을 세우라는 왕명이 내렸다고 거짓말을 전하였다. 놀란 신하들이 왕에게 달려가 간하였고 왕은 짐짓 크게 노하여 이차돈을 잡아 들이라 명하였다. 형구(刑具)를 벌여 놓고 왕의 추궁이 추상같았지만, 이차돈은 한 마디 변명도 하지 않았다.
결국, 참형을 당하게 되어 형장으로 끌려갔다. 옥리(獄吏)가 그 목을 베자 흰 젖이 한 길이나 솟아 올랐으며, 갑자기 하늘이 칠흑으로 어두워지면서 땅이 진동하고 비가 뚝뚝 떨어졌다.
다른 기록에는 참형을 당하기 직전 이차돈이 다음과 같이 맹세하였다고 전한다. “대성법왕(大聖法王)께서 불교를 일으키려 하시므로 내가 신명을 돌아보지 않고 세상 인연을 버리니, 하늘에서는 상서를 내려 두루 사람들에게 보여주십시오.” 그의 머리는 날아가 금강산(金剛山 : 경주 북쪽에 있는 산) 마루에 떨어졌다. 믿음을 위한 최초의 순교였다. 믿음은 죽음을 넘어선다.
우리 나라 유학 사상 가장 높은 봉우리를 점한 이황(李滉)은 70생애가 바로 ‘배움의 나날’이었다. 자신에게 엄격하고 남에게 너그러웠던 그는 죽는 날까지 구도(求道)의 자세를 흐트리지 않았다. 그의 고종기(考終記)를 현대문으로 옮겨 본다.
“경오년(庚午年, 1570) 섣달 초8일, 아침 햇살이 눈부시게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 왔다. 병석에 누우신 선생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이 찬란한 광명을 맞이하셨다. 다음 순간 선생은 옆에 모시고 있는 이를 향하여 나직이 말씀하셨다. ‘저 매화에 물을 주어라.’ 방안 윗목에 매화분이 있었고, 금방 향기를 터뜨릴 듯이 두 세 개의 꽃망울이 부풀어 있었다.
바깥 날씨는 쌀쌀하였지만 하늘은 맑게 개었고 바람도 일지 않았다. 그러나 저녁 5시쯤이 되자 갑자기 흰 구름이 지붕 위로 모여들더니만 눈이 펄펄 내리기 시작하였다. 순식간에 한 치 가량이나 쌓였다. 지붕도 마당도 앞산도 순백의 세계로 변하였다.
자리에 누워 계시던 선생께서 창문을 잠시 바라보시더니 조용한 어조로 이르셨다. ‘자리를 정돈하여라.’ 자제와 제자가 가까이 다가와 일으켜 드렸다. 선생은 꼿꼿이 앉아 자세를 가다듬더니 이내 숨을 거두었다. 그러자 하늘에 서렸던 구름이 흩어지고 흩날리던 눈도 개었다.”
휴정(休靜)은 조선 불교의 높이 솟구친 묏부리이자 호국 불교를 몸소 실천한 걸승(傑僧)이기도 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왕(선조)이 의주로 파천하는 난국을 당하자 대사는 감연히 묘향산(妙香山) 깊숙한 암자에서 칼을 짚고 의주 행재소(行在所)로 달려갔다. 대사의 나이 73세였다.
선조는 팔도십륙종도총섭(八道十六宗都總攝)이라는 일컬음을 대사에게 내려주었다. 전국의 승병 대장이 된 것이다. 이후 7년 동안 대사는 남북의 피비린내 나는 전장을 전전하였다. 전쟁이 끝났을 때는 나이 79세였다. 뒷일은 제자인 유정(惟政)과 처영(處英)에게 맡기고 홀연히 묘향산으로 들어갔다.
“갑진년(甲辰年, 1604) 정월 23일, 묘향산 원적암(圓寂庵). 아침 일찍 일어난 대사는 목욕을 한 뒤 새 옷으로 갈아 입었다. 옷 매무새를 가다듬은 뒤 창문을 열자 눈앞에 하얀 은세계가 펼쳐졌다. 간밤에 눈이 내린 것이다.
눈부시게 쏟아져 들어 오는 햇빛을 받으며 대사는 큰 소리로 분부를 내렸다. ‘남여(藍輿: 의자 비슷하고 위를 덮지 않은 가마)를 가져 오너라.’ 행자들이 남여를 뜰 아래 대령하자 대사는 올라타고서 눈길을 가리켰다. ‘가자!’ 두텁게 쌓인 눈을 헤치며 남여는 앞으로 나아갔다.
묘향산 주름마다 박힌 암자를 낱낱이 돌아 보았다. 그리고는 원적암으로 돌아와 손을 씻고 위의(威儀)를 갖춘 뒤 불전으로 들어가 분향을 하였다.
조실로 다시 돌아와서 벼루에다 스스로 먹을 갈더니 붓끝에 듬뿍 먹물을 찍었다. 벽에 자화상이 걸려 있었다. 대사는 자화상 여백에 이렇게 적었다.
‘팔십 년 전에는 네가 내더니 팔십 년 후에는 내가 너로다(八十年前渠是我 八十年後我是渠).’ 다시 먹을 찍어 임종게(臨終偈)를 썼다. ‘천만 가지 온갖 생각들 벌겋게 타는 화로에 한 송이 흰 눈, 진흙 황소는 물 위로 가고 대지와 허공이 찢어지네(千計萬思量 紅爐一點雪 泥牛水上行 大地虛空裂).’ 쓰기를 다하자 단정히 부좌(趺坐)하고서 입적하였다. 방안에 이향(異香)이 서렸다.”
황현(黃玹)은 꼿꼿한 선비이다. 천성이 강직하여 악을 미워하기를 원수 같이 하고, 가난을 즐길지언정 뜻을 굽히면서 벗어나려고 하지 않았다. 권력 있는 사람을 대하면 당당하게 정도(正道)로 타이르고, 혹 잘못이 있으면 즉석에서 면박해 마지 않았다.
시에 뛰어나고 문장에 능했으며, 고향 구례(求禮)에 들어 앉아 동서고금의 학문을 깨치느라 골몰하더니 부모의 권유에 못 이겨 할 수 없이 과거를 보아 장원을 하였다.
때는 조선조 말엽, 임오군란·갑신정변의 뒤를 이어 청·일 양국이 우리 나라를 두고 서로 으르렁거리고 있었고, 조정은 극도의 문란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는 벼슬에 뜻이 없어 고향으로 내려가 문을 닫고 공부에 열중하였다.
서울에 있는 여러 친구들이 함께 벼슬길에 나아갈 것을 여러 번 권하였지만 그는 그때마다 거절하였다. “그대들이 어찌 나를 귀신 나라, 미친 사람 가운데로 끌어 들여, 같은 귀신이 되게 하고 미친 사람을 만들려고 하는냐?”
그는 틈틈이 문란한 나라 사정을 춘추필법으로 기술하였다. 그 결과가 후일의 ≪매천야록 梅泉野錄≫이다. 정치의 부패상, 조정 상하의 탐욕상을 한 점 거리낌 없이 엄정하게 기록하였다.
1910년 8월 종내 나라는 망하고 말아 경술국치를 당하였다. 이 소식이 구례 시골에도 닿았다. 그는 우선 ≪매천야록≫을 정리하여 상자에 넣고 자물쇠를 채웠다. “어떤 일이 있어도 이 상자는 열지 말라.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말라. 먼 훗날 햇볕을 볼 날이 있을 것”이라고 기록하였다. 팔월 8일(양력 9월 10일) 황현은 아편을 먹고 자결을 하였다. 향년 56세.
네 수의 시를 남겼다. 그 가운데 이런 구절이 있다. “가을 등불 아래 읽던 책 덮고 천고의 역사를 되돌아 보니, 사람으로 글자 아는 사람 되기가 이토록 어렵구나(秋燈掩卷懷千古 難作人間識字人.)”
먼 시골에 묻혀 살던 선비에게 나라가 망한 책임이 돌아올 리 없다. 그러나 어찌 책임이 없다 하겠는가! 머리 속에 먹물이 들어 있지 않는가! 지식인은 그 시대의 아픔에 대하여 어떤 형태로든 책임이 있다.
 
사후 세계
민간 신앙에 의하면, 사람은 죽으면 저승으로 간다. 구천(九泉)·황천(黃泉)이라고도 하고 음부(陰府)·유도(幽都)·염라국(閻羅國)이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죽은 사람은 저승에 가면 먼저 최 판관 또는 시왕 앞으로 끌려가 심판을 받는다. 생전의 잘잘못을 꼬치꼬치 캐묻고 따져서 극락으로 갈 것인지 지옥으로 갈 것인지 판결을 내린다. 이런 대목은 불교의 영향으로 엇비슷하다. 그런데 따지는 조목을 보면 효 또는 집안의 화목에 중점을 둔다. 유교의 영향일 수밖에 없다.
부모한테 회성하고
동승한테 화목하고
일가친척한테 우애하였느냐고 문초하니
그 망제 할 수 없어 절얼적이는
부모한테 회성하고
동승함께 화목, 일가친척 화목헌
저런 망제는
좋은 꽃밭으로 모세라
여기 또 죄목으로 다슬적
저런 여자 풍두옥에 가둘
저런 죄 많은 여자는
여봐라 이 년 들어라
네 부모한테 불효하고
가장께 눈 세기고
동승함께 우애 못한 이는 화목도 못하고
일가친척 우애 못한 저런 년은
풍두옥에다 가두어라
……. <巫歌의 일부>
회성은 효성(孝誠)이고 동승은 동성(同姓), 망제는 망자(亡者)이다. 말하자면, 죽어 저승에 가서 심판을 받을 때 살아 생전의 효성이 으뜸으로 도마 위에 오르는 것이다.
그런데 억울하게 죽은 원귀는 구천의 암흑 속을 떠돌아다니며 안정을 찾지 못하는 수도 있으며, 자기를 해친 자에게 앙갚음을 하러 이승에 나타나는 수도 있다. 어쨌든 저승에는 극락과 지옥이 있으며, 때로는 그런 구별이 없이 그저 이승과 같은 모습으로 사령(死靈)들이 모여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죽으면 저승으로 가서 먼저 죽은 자들을 만나 보게 된다. 조상도 만나 보고 일가친척 친구들도 다시 해후한다. 이승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 다만, 해마다 죽은 날이 되면, 꼬박꼬박 이승으로 와서 자손이 차려 주는 제사 밥을 얻어 먹고 간다. 그래서 무자귀신(無子鬼神)이 서럽다고 하였다.
불교의 생사는 무수한 삶과 죽음이 되풀이되는 윤회이며, 선은 선을 낳고 악은 악을 낳는 인과응보의 반복이기도 하다. 삶과 죽음은 인과응보에 따라 육도(六道)를 돌고 돌게 된다. 육도란 지옥·아귀(餓鬼)·축생(畜生)·수라(修羅)·인간·천상(天上)이다.
지옥은 두말할 것도 없이 생전에 죄를 많이 지어 악업(惡業)이 많은 사람이 가는 곳으로 고통의 업보를 받는 곳이다. 지옥은 아주 다양하여 근본 지옥으로 팔열(八熱)·팔한(八寒) 지옥이 있고, 팔열 지옥의 주변에는 각각 십육유증(十六遊增) 지옥이 있다. 그뿐만도 아니다. 산간·광야·나무 밑·공중에 고독(孤獨) 지옥이 있기도 하다.
이런 지옥에서 전생에 저지른 죄값을 받느라 별의별 고통을 다 당한다. 죄인끼리 치고 받고 죽이다가 다시 살아나면 다시 죽이는 형벌이 있는가 하면, 시뻘건 쇳물이 끓는 솥 속에 내던져지기도 한다.
어떤 곳에서는 전신을 밧줄로 묶어 죄기도 하고, 수족을 자르기도 하고, 견딜 수 없는 고통으로 고함만 짖어대기도 한다. 생각만 하여도 몸이 오싹한다.
아귀는 목구멍이 바늘 구멍 같아 음식이 넘어가지 않는 세계이다. 그래서 늘 굶주리고 몸이 낙엽처럼 바싹 말라 있다. 음식을 보면 불로 변하는 곳도 있으니 어차피 항상 굶주림에 허덕여야 한다. 역시 생전에 악업(惡業)을 저지른 자가 가는 곳이다.
축생은 짐승이다. 인간이 생전에 죄를 지으면 죽어 개나 돼지·소로 태어나는 수가 있다. 역시 고보이다. 괴로움을 당하는 형벌인 것이다. 이상, 지옥·아귀·축생을 삼악도(三惡道)라 한다.
수라는 아수라도(阿修羅道)로 생전에 남에게 교만하고 남 잘되는 것을 시기하며 나보다 나은 사람을 질투하던 사람이 죽어서 가는 악귀의 세계다. 좋은 곳일 수 없다.
인간은 바로 이승이다. 죽어서 다시 이승의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다. 이승 인간과의 인연이 끊어지지 않아 새로이 새 모습으로 태어난 것이다. 행운이라 할 수 있을까? 알 수 없다.
천상은 곧 천상계(天上界)다. 생전에 착한 일을 많이 한 사람이 간다. 이곳에 극락이 있는 지도 모른다. 극락 세계는 아미타불이 살며 설법하는 곳이다. 서방으로 십만억의 불국토(佛國土)를 지나야 다다를 수 있다 하였으니 까마득하게 멀어 보인다. 이곳에 태어나는 자는 줄거움만 누리게 된다. 일체의 고통이 없다.
공자는 괴이(怪異)한 것, 폭력, 어지러운 일, 귀신에 대하여 별로 말을 하지 않았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며 실용적인, 그리고 도덕적인 것이 아니면 즐겨 이야기하지 않았던 것이다.
제자인 번지(樊遲)가 슬기로움(知)에 대하여 물었을 때 그의 대답은 이러하였다. “사람이 지켜나갈 의로움(道義)에 힘쓰고 귀신을 공경하되 멀리하면 슬기롭다 하겠다.” ‘공경하되 멀리하라(敬而遠之).’ 그것이 귀신에 대한 공자의 자세이다. 자로가 귀신 섬기는 일에 대하여 물었을 때도 그의 대답은 단호하다. “사람도 제대로 섬기지 못하는데, 어찌 귀신을 섬길 수 있겠느냐?” 철저한 인간 중심, 인본주의다.
그렇다고 귀신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귀신을 초월적이거나 절대적인 존재로 올려 놓고 인간이 그 앞에서 자기를 부정하거나 굴종하는 견해를 철저하게 배제하고, 귀신은 귀신의 영역에서, 인간은 인간의 영역에서 각각의 위치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귀신과 인간의 관계는 제사로 맺어진다. 그래서 “제사는 거기 계시듯 지낸다(祭如在)”고 하였다. ≪중용≫에서도 “죽은 이 섬기기를 살아 있는 이 섬기듯이 한다(事死如事生)”고 하였다.
국가나 가정에서나 가장 큰 일(大事)이 제사다. 엄격하고 경건한 의식으로 귀신을 받든다. 특히, 가정에서는 4대 조상의 신위를 봉안하고 있는 가묘(家廟)가 있어 기제(忌祭)를 받들 뿐만 아니라 계절이 바뀔 때마다 제사를 지낸다.
집안에 일이 있으면 고유(告由)를 한다. 먼 여행을 떠날 때 아뢰고, 돌아오면 아뢰며, 맛있는 음식이 생기면 우선 조상의 신위 앞에 올리고 먹으며, 계절의 신미(新味)도 빠뜨리지 않고 첫물을 올린다. 조상은 돌아가셔도 늘 집안에 함께 계신다.
그런데 성리학에서는 귀신을 철학적으로 풀이한다. 귀신은 기(氣)의 굴신(屈伸)·왕래(往來)이며 음양의 소장(消長)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귀(鬼)는 굴(屈)로서 돌아가는 것(歸)이며, 음(陰)이므로 사람의 백(魄)이다. 따라서, 죽으면 혼(魂)과 분리되어 땅으로 돌아간다.
신(神)은 신(伸)으로서 뻗어나는 것이며, 양(陽)이므로 사람의 혼이다. 따라서, 죽으면 백과 분리되어 하늘로 올라간다. 혼도 백도 그 기가 점차 흩어지고 사그라져 종내는 없어지고 만다.
사람이 죽은 다음 귀신으로 존재하는가 아니면 전혀 없어지고 마는가 하는 문제는 객관적 실체로 가름하지 않는다. 오직 인간 내면의 성(誠)에 가능 근거를 가질 뿐이다.
유교에 있어서 귀신은 절대적 존재도 아니고 초월적 존재도 아니며 객관적 실체도 아니다. 오직, 우주 자연의 이기론적(理氣論的) 바탕에서 인간의 합리적 인식일 뿐이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분이며 그래서 인간 내면의 성이 그 매듭을 쥐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결국 자연에서 나서 자연으로 돌아 간다.
일생 동안 시험 기간을 치르고 죽어서 하느님 앞에 선 사자(死者)는 준엄한 심판을 받는다. 하느님의 계명을 독실하게 믿고 실천하며 착하게 산 사람은 하느님이 지배하는 은총과 축복의 나라 천국(天國, 天堂)으로 가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구원 받지 못한 채 영겁(永劫)의 벌책을 받는 지옥으로 떨어지게 된다.
특히, 두려워 하는 자들과 믿지 않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그들의 죄 가운데에서 죽게 되고, 하느님의 진노 아래 머무르게 되며, ‘불못’·‘진노의 포도주 틀’·‘어두운 곳’에 던져진 채 영원한 죽음의 상태에 놓이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구원을 받게 되어, 이 세상이 끝나는 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여 영생을 얻게 된다. 따라서, 믿는 자의 머리가 되는 그리스도 안에서 믿는 자들은 다가올 세계의 생명을 지니게 되었으므로 그들에게 육체적인 죽음은 한낱 잠자는 상태에 불과하다. 죽음은 두려워 할 바가 아니라 오히려 바라야 할 바인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죽음 [死]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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