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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 인생의례-혼인 4
2012년 09월 22일 15시 30분  조회:3431  추천:0  작성자: 회장
조선족 인생의례-혼인 4

4 20세기 50년대 이후시기의 혼인풍속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이 창건된후 반봉건, 반식민지 사회제도가 뒤엎어지고 새로운 사회주의제도가 건립되면서 사상관념, 도덕표준 등 의식형태령역에서 커다란 변화가 생기였다. 따라서 혼인풍속에도 새로운 변화가 나타났다.
10년 동란시기(1966년 10월—1976년 10월)에 이르러 극“좌”적인 사조가 전국에서 극도로 팽창, 범람하면서 조선족풍속의 허다한 행사 역시 “낡은것” 혹은 “미신적인것”으로 간주되여 비난받거나 페지되였다. 혼인풍속도 이러한 사조의 세례를 받게 되여 “혁명적”으로 행하였으므로 민족적인 전통과 특징은 깡그리 말살되고 오로지 앙상한 줄거리 정도로만 남게 되였으며 여러가지 기괴한 현상들이 나타났다.
1978년말, 당중앙위원회 제11기 제3차 전원회의가 열린후 중국은 개혁개방의 새로운 력사시기에 들어서게 되였다. 사상이 해방되고 인민들의 물질생활이 눈에 뜨이게 향상되면서 조선족의 혼인풍속도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10년 동란시기에 페지되였던 일부 행사들이 회복되는 한편 시대의 변화에 따라 새로운 풍속들이 나타났다. 이 시기의 혼인풍속에 대하여 건국초기, 10년 동란시기, 1980년대 이후시기 등 몇개 시기로 나누어 서술하고저 한다.
1. 건국초기
1) 건국초기 혼속의 변화
혼인형태에서 이 시기에는 친영방식으로 통일되였다. 또한 혼인의 기타 여러가지 행사에서도 현저한 변화가 생겼는데 주로 아래와 같은 몇가지 면에서 체현된다.
이전에는 주로 중매자와 부모의 의향에 따라 남녀간의 혼약이 맺어졌지만 이때에는 청년남녀가 직접 만나고 사귀면서 애정을 키운 기초에서 부모의 동의를 얻는 자유혼인방식이 주류로 되였다.
잔치날에 신랑이 말을 타고 신부가 가마를 타거나 신랑신부가 모두 가마를 타던것이 이때에는 신랑신부가 대부분 가마를 설치한 마차나 우차를 리용하였다.
사모관대를 하는 신랑이 극히 적고 중산복이나 양복을 입는 신랑이 많아졌다. 신부는 한복을 입고 너울을 썼으며 큰머리, 한삼 같은것은 소실되였다.
남녀 량가에서 혼약을 맺을 때 궁합을 맞추고 청혼서, 허혼서 같은것을 쓰는 현상이 압록강류역의 일부 지방에만 잔존하고 대부분 지방에서는 페지되였다. 남녀의 혼약을 법적으로 확인하는 혼인등록증이 허혼서를 대체하였다.
신부의 가마가 신랑집 마당으로 들어갈 때 공중에 대고 총을 쏘거나 교군들이 불을 넘으며 들어가는 미신적인 행사가 없어지고 연변일대에서는 신랑의 부모가 춤을 추며 신부를 영접하는 풍속이 나타났다.
또한 교배례, 합근례 등이 없어지고 전안례도 간소화되였다. 이전에는 신랑일행이 혼행할 때 안부가 나무기러기를 안고 가서 전안례를 행하였으나 이때에는 신부측에서 나무기러기를 마련해놓았다가 신랑이 도착한 뒤 그것을 쟁반우에 놓고 신랑더러 슬쩍 밀게 하였다.
신랑다루기풍속이 페지되고 신랑신부가 손님들과 함께 오락활동을 벌리는 풍속이 나타났다.
지복혼, 민며느리혼, 과부동이기혼 등이 사라졌으며 11~12살에 결혼하는 조혼현상도 없어졌다.
2) 이 시기 혼인의 일반과정
이 시기에 보편적으로 행해진 친영방식은 의혼, 잔치, 후례 등 세가지 단계로 나뉘여진다. 이러한 과정에서 진행되는 행사에 대하여 1950년대 이전시기와 같은것은 생략하고 부동한것만 기술한다.
(1) 의혼
의혼단계에는 말떼기와 사돈보기가 있다.
① 말떼기
남자집에서 녀자집에 가서 청혼하여 동의여부를 받는것을 말떼기라 한다. 이 행사에는 당사자와 당사자의 아버지 혹은 삼촌, 형님 등 근친 한사람이 가며 돈을 다소 갖고간다. 녀자의 부모를 만나서 혼인을 맺을 의향을 정식으로 제출하여 녀자의 부모가 동의하면 총각이 처녀의 부모님께 절을 하여 사의를 표한다. 그리고는 남자집에서 갖고온 돈으로 간단히 음식을 마련하여 함께 나눈다. 만약 처녀의 부모들이 시원한 대답을 주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서로 헤여진다.
② 사돈보기
남자집에서 말떼기를 거쳐 녀자집의 동의를 얻게 되면 후에 다시 날자를 정하여 음식과 례물을 갖춰가지고 녀자집에 가서 혼사에 관한 문제를 상세히 의논한다. 이때 갖고가는 례물로는 주로 처녀의 옷감과 화장품이다. 이날 녀자집에서는 가까운 친척들과 동네 로인들을 청하여 남자집에서 가져온 음식을 대접한다. 이것으로 자기 집 딸의 혼사가 이미 결정되였음을 공개한다. 이날 량가 부모들이 의논하여 잔치날을 결정한다.
(2) 잔치
잔치날이 되면 신랑이 수레가마에 앉아 신부를 모시러 떠난다. 상객으로는 신랑의 삼촌이나 형님 한사람이 따른다. 경상도사람들은 아버지가 간다. 례장함에는 신부의 첫날옷, 너울, 신부와 신부측 상객이 달 꽃, 결혼증명서 같은것을 넣는다.
신랑일행이 신부집 마당에 도착하면 신부측에서 지정한 신랑측 대반이 출입문밖에 서서 기다리고있다가 신랑을 안내한다. 신랑은 수레가마에서 내릴 때 도복섬(가마니나 마대안에 량곡을 넣은것.)을 딛고 내린다.
신랑측 상객이 례장함을 드리면 신부의 녀성친척 한사람이 허망치마를 입고 문턱안에 서서 치마폭으로 받아 정주에 놓고 그안의 물건을 녀자측 친척들에게 구경시킨다.
례장함을 드린후 신랑이 디딜페를 딛고 방안에 들어가 큰상을 받는다. 큰상을 받을 때 먼저 단자놀이를 한다. 그다음 점심식사를 한다. 큰상과 점심상의 차림, 단자놀이방식 등은 모두 1950년대 이전시기와 같다.
신랑이 식사를 끝마치면 신부와 함께 신부의 부모님께 작별인사로 절을 한번 한다. 그리고는 신랑신부가 함께 수레가마에 앉아서 신랑집으로 떠난다. 이때 신부가 갖고가는 물품으로는 례단, 이부자리, 베개, 농짝 같은것이다. 이러한 물건들은 다른 수레에 싣고 간다. 례단은 트렁크에 넣어서 가지고 간다. 연변일대에서는 찹쌀 20~30근 정도를 베개속에 넣고 가는데 그것을 “베개쌀”이라 한다. 신부가 본가집에 귀녕을 갖다온 뒤 그것으로 찰떡을 쳐서 신랑의 친척들을 청하여 함께 먹는다.
신부일행이 신랑집 마을에 도착하면 먼저 결혼식을 거행한다. 결혼식은 흔히 신랑집 마당이나 학교 교실에서 거행한다. 결혼식장 정면에 “신랑×××, 신부×××화혼식”이라고 쓴 프랑카드를 걸어놓는다. 결혼식순은 아래와 같다.
① 주례(사회자)가 결혼식 시작을 선포.
② 좌석 정돈.
③ 신랑측 친척들은 혼례식장 정면을 향하여 오른켠에 앉고 신부측 친척들은 왼쪽켠에 앉는다.
④ 한쌍의 어린 남자애와 녀자애가 앞에 서서 뒤로 꽃보라를 뿌리며 안내한다. 이때 신랑은 신부의 왼쪽에 서서 걸어들어간다. 프랑카드앞에 이르러 손님들을 향하여 돌아선 뒤에도 신랑은 여전히 신부의 왼쪽에 선다.
⑤ 주례사—오늘은 누구와 누구의 결혼식이라는것을 소개한다.
⑥ 결혼증서 발급.
⑦ 신랑신부 례물교환—신랑은 흔히 신부에게 반지(구리반지나 백철반지)를 선사하고 신부는 신랑에게 만년필을 선사한다.
⑧ 신랑신부 상견례.
⑨ 량가 친척 상견례.
⑩ 래빈축사 및 기념품 증정—일반적으로 결혼을 기념하는 글을 쓴 거울을 선물한다.
⑪ 신랑신부 답사.
⑫ 기타.
⑬ 신랑측의 대표가 손님들에게 감사를 표시한다.
⑭ 신랑신부 퇴장.
⑮ 페식 선포.
결혼식이 끝나면 신부가 신랑집 웃방문으로 들어가 큰상을 받는다. 연변일대에서는 신부가 방안에 들어가기전에 신랑이 먼저 정주간에 들어가면 숙모나 아주머니가 신부의 큰상에 놓을 음식(사과쪽 등)을 바가지에 조금 담아준다. 신랑이 한발로 부뚜막을 딛고 그것을 받아 먹은후 빈 바가지를 정주간 온돌바닥에 활 던진다. 바가지가 엎어지면 아들, 반듯이 누우면 딸을 낳는다고 한다. 경상도사람들이 많이 사는 지방에서는 신부가 방에 들어가기전에 신부에게 사탕물을 대접하는데 그것은 신혼생활이 사탕처럼 달콤하라는 뜻을 상징하는것이다.
밤이 되여 신랑이 신방에 들어갈 때 신부는 너울을 쓴채로 신방에서 기다린다. 신랑이 신부의 너울을 벗겨주면 신부는 신랑의 모자를 벗겨준다.
이튿날 아침식사를 마친 뒤 현구고례(연변에서는 집안잔치라고 함.)를 행한다. 신부는 첫날옷차림을 하며 신부앞에 도리상 하나를 놓고 그우에 마른명태, 사탕 같은것을 놓고 술 한병, 술잔 하나를 놓는다. 신랑의 근친들이 술상을 사이두고 신부 맞은켠에 앉는다. 신부곁에는 신랑의 누님이나 아주머니가 앉는다.(연변일대에서는 이런 녀자를 “둘러리”라 함.) 둘러리가 신부에게 신랑의 근친들을 시아버지부터 일일이 소개하면 신부가 술을 한잔 따라 드리고 절을 한번 하고나서 례물을 선사한다. 례물을 받은 사람은 절값으로 돈 같은것을 내놓는다.
(3) 후례
잔치한 3일날 아침, 신부가 일찍 일어나 부엌에 내려가 불을 지핀다. 아침식사를 마친후 신부가 신랑과 함께 귀녕을 간다. 본가의 친척들과 동네사람들이 신랑신부와 함께 오락을 즐긴다. 3일만에 신랑집으로 돌아오면 반살미(연변일대에서 말하는 “집보기”)를 한다.
2. 10 동란시기(1966 6—1976 10)
10년 동란시기에 실시된 혼인방식은 대체로 아래와 같다.
1) 의혼
이 시기의 의혼방식은 동북해방 이후시기와 마찬가지로 자유련애와 중매혼인이 결합된 방식이였다. 하지만 혼약을 맺는 구체적인 방법에 있어서는 조선민족의 전통적인 방법과 다르고 동북해방직후와도 달랐다. 이 시기의 의혼방식은 동북해방이후의 20세기 50년대처럼 말떼기와 사돈보기 2개 절차로 나누어 행하는것이 아니라 이 두가지 절차를 한데 합치여 진행하였다. 총각의 삼촌이나 형님이 되는 근친이 총각을 데리고 녀자집에 가서 청혼하는 한편 결혼날자까지 토론하여 결정하였다. 약혼하러 갈 때 례물도 사지 않고 녀자집의 동의를 얻은후에도 총각이 처녀집에 놀러다닐뿐 사돈보기라는것을 하지 않는다.
2) 잔치
이 시기의 결혼잔치는 아래와 같은 몇가지 면에서 시대적특징을 보여주고있다.
(1) 신랑의 옷차림을 보면 사모관대는 봉건시대의 옷이라 하여 입지 못하고 양복은 서양옷이라 하여 입지 못하다보니 천편일률로 중산복을 입었으며 또한 혁명적기풍을 나타내기 위하여 의복의 색상도 국방색(군복색)을 택하여야 했다. 신부의 옷차림은 한복 혹은 등산복이였다. 너울을 쓰는것은 서양식이라 하여 금지되였다.
(2) 신랑이 신부를 데리러가거나 신부를 데리고 자기 집으로 돌아올 때 가마에 앉거나 말을 타는것이 아니라 먼거리면 공공뻐스를 타거나 장식하지 않은 수레에 앉았다. 가까운 거리면 도보로 오가야 했다.
(3) 례장함에는 신부옷이나 장식품을 넣는것이 아니라 모택동저작, 맑스, 레닌의 저작과 호미 같은 생산도구를 넣었다.
(4) 전안례, 교배례, 합근례 등 구식혼례식은 더 말할나위도 없고 1950년대에 행하였던 신식혼례식도 없어졌다.
(5) 신랑이 큰상을 받을 때 진행하던 단자놀이도 이 시기에 이르러 없어졌다.
(6) 신방에 초불을 켜거나 신랑신부가 서로 상대방의 머리쓰개나 겉옷을 벗겨주는 습속이 없어지고 때가 되면 불을 끄고 동침하였다.
3) 후례
(1) 잔치한 3일만에 신부가 신랑과 함께 귀녕을 가서는 본가집 친척들과 함께 음식을 나눌뿐 오락을 벌리고 즐겁게 놀던 습속이 페지되였다.
(2) 신부는 신랑과 함게 본가집에 귀녕을 갔다가 시간을 절약하기 위하여 그날로 신랑집으로 돌아와야 했으며 신랑집에 돌아와서는 그날 혹은 이튿날부터 집체생산로동에 참가해야 하였다.
3. 10 동란 이후시기
1) 이 시기 혼속의 새로운 변화발전
(1) 배우자선택
동북해방(1945년 8월)이전에는 대체로 부모들의 의향에 의하여 혼사가 결정되였으므로 당사들이 배우자를 선택할 권리가 거의 없었다. 동북해방이후 봉건적인 혼인풍습이 파괴되면서 자유련애의 성행과 더불어 비로소 자기의 념원에 의하여 배우자를 선택할수 있게 되였다. 그전에는 혼사에서 문벌과 가풍을 중시하였지만 20세기 40~50년대에는 전쟁이 빈번하고 계급투쟁을 강조하던 년대였으므로 사람들은 배우자를 선택하는데 있어서 상대방의 정치면모, 계급출신, 로동표현 등을 가장 중요시하였다.
10년 동란시기에는 전국 각지의 정부기관, 공장, 기업, 학교 등이 모두 마비상태에 빠져있고 오직 군대만이 질서가 잡혀있었으며 또 지방의 “문화대혁명”은 그 지방의 무장부와 해방군이 령도하게 되였으므로 녀자들이 배우자를 선택하는데 있어서 군인들이 각별한 총애를 받았다. 개혁개방의 새로운 력사시기에 들어선후 경제체제가 계획경제로부터 시장경제로 전변되고 무엇보다도 경제발전을 앞자리에 세우고 과학기술발전을 중요시하게 되면서 기업가들과 과학기술인재들의 사회적지위가 높아졌다. 하여 이 시기에는 경제생활이 좋은 사람, 지식수준이 높은 사람, 좋은 직장에 다니는 사람들이 녀자들이 선호하는 배우자감이였다.
(2) 초혼(初婚)년령
20세기 30년대까지 조선민족에게는 조혼현상이 많이 존재했다. 이때 남자들의 보통 초혼년령은 16~20세였는데 그중에서 19세가 다수였다. 녀자들의 초혼년령은 보통 16~19세였는데 그중에서 18세가 다수였다. 1949년 이후 연변일대 조선족의 초혼년령 변화상황은 다음과 같다. 1949년에는 17.87세, 1958년에는 20.42세, 1969년에는 22.19세, 1979년에는 23.84세, 1988년에는 24.49세이다. 제3차 전국인구보편조사자료에 따르면 연변지구에서 27~39세의 미혼남녀가 같은 년령의 남녀가운데서 3.37%를 차지하였는데 이 비례는 길림성에서 장춘시와 길림시 다음으로 가며 길림성의 몇개 지역가운데서 가장 높았다.
(3) 결혼비용과 부조돈
1987년 8월에 연변일보사 곽철권기자가 연길시의 128쌍 청년 남녀의 결혼비용상황을 조사한데 따르면 1985년 이전에는 평균 3,250원(사돈보기를 포함.)이였고 1985년에서 1987년까지는 평균 5,310원(사돈보기를 포함.)으로 늘어났으며 최고로는 8,980원에 달하였고 최저로는 1,870원이였다. 1993년에 필자가 료녕성 동구현일대의 조선족 결혼비용상황을 조사한데 따르면 1만5,000원이 없이는 잔치를 치르지 못하는 형편이였으며 결혼할 때 천연색텔레비죤, 전기랭장고, 세탁기 등 세가지 물건은 반드시 갖춰야 하는것으로 되였다.
동시기 흑룡강성 탕원현일대 조선족의 결혼비용상황을 조사한데 의하면 딸을 시집보내는데 3,000원 이상 있어야 하고 며느리를 맞으려면 적어도 5,000원이 있어야 했다. 1998년에 연변일대 조선족의 결혼비용상황을 보면 농촌에서는 만원 좌우, 도시에서는 1만~2만원에 달하였다. 다른 한편 이 시기에 이르러 결혼부조돈의 표준은 전에 비해 많이 늘어났다. 즉 1980년대초에는 5~10원이였으나 1993년에는 50~100원으로 늘어났다.
(4) 새로 나타난 풍속 몇가지
이 시기에 조선족의 전통적인 혼인풍속에서 찾아볼수 없는 새로운 풍속들이 나타났다. 그중 일부 풍속은 한족풍속에서 온것이다.
① 흑룡강성 치치할시일대의 조선족들은 잔치날 신랑이 신부를 데려오려고 신부집 마당에 도착하면 신부집에서 출입문을 안으로 걸어놓는다. 신랑이 한족말로 “어머님, 제가 왔습니다. 문을 열어주십시오!” 하고 소리치면 안에서 돈을 내야 문을 열어준다고 대답한다. 신랑이 큰상을 받고 신부를 데리고 떠날무렵이 되면 신부댁 친척들이 신부의 신발을 감추어둔다. 신랑이 돈을 내놓아야 신부의 신발을 내놓는다. 이런 풍속은 금전만능사상의 영향하에서 새로 나타난 한족들의 풍속을 따라배운것이다.
② 지금 많은 지방에서 잔치때 신랑측에서 신부의 부모에게 신부를 키워준 “젖값”이라는것을 준다.
③ 도시에서 살고있는 조선족들은 결혼식을 치르기전에 식당에서 손님을 대접할 때 신부와 신랑이 손님들에게 일일이 담배불을 붙여준다.
④ 잔치날 신부가 신랑집 마당에 도착하면 신랑집에서 폭죽을 터쳐 환영과 축하의 뜻을 나타낸다. 료녕성일대에서는 이것을 “오독도기”를 터친다고 한다.
⑤ 길림, 장춘 일대의 조선족들은 잔치날을 택할 때 흔히 양력과 음력이 모두 짝수로 되는 날을 택하며 그중에서도 뒤의 수자가 “8”자로 된 날자를 길(吉)한 날로 인정한다. 한어에서 “发”자는 운이 트인다는 뜻을 갖고있는데 “8”자의 한어음이 “发”자와 비슷하므로 길한 수자로 인정하는것이다.
⑥ 조선족풍속에는 잔치날에 상객이 한사람만 간다. 그러나 지금은 상객이 몇명 지어는 10여명씩이나 가며 신부측의 상객은 신랑측의 상객보다 배나 되는 경우도 있다. 이것 역시 한족풍속을 배운것이다.
⑦ 20세기 80년대에 이르러 많은 지방에서는 신랑이 큰상을 받을 때 단자놀이 대신 신부댁 친척이나 마을손님들이 큰 종이에 구멍을 몇개 뚫어서 신랑앞에 놓고 돈으로 그 구멍을 메우라고 한다. 그리고 신랑과 상객이 신부를 데리고 떠나면서 문턱을 넘을 때에는 “문턱세”를 내야 하고 승용차에 앉아 길을 떠날 때에는 “길세”를 내야 한다.
(5) 혼인에서의 몇가지 관념의 변화
인류의 혼인발전과정을 대체로 다음과 같은 3개 단계로 나눌수 있다. 첫번째 단계는 원시사회의 자유혼인단계이고 두번째 단계는 노예사회와 봉건사회의 페쇄적혼인단계이며 세번째 단계는 자본주의사회의 개방식혼인단계이다.
첫번째 단계인 자유혼인의 주요목적은 경제적리익을 얻는것이고 두번째 단계인 페쇄식혼인의 주요목적은 가계계승(家系繼承)을 위한것이며 세번째 단계인 개방식혼인은 진지한 사랑을 위한것이다. 중국 조선족의 혼인은 줄곧 페쇄적혼인단계에서 가계계승을 주요목적으로 하여왔다. 그러다가 새로운 력사시기에 들어서면서 자본주의 개방식혼인관념의 영향과 기타 여러가지 요소의 영향으로 혼인에서의 일부 전통적관념들이 새로운 변화를 가져오게 되였다.
① 가계계승관념의 변화
“혼례란 성이 같지 않은 두 남녀가 합치여 우로는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고 아래로는 가계를 이어나가는것이다.(婚禮者將合二姓之好, 上以事宗廟,而下以繼後世。)” 혼인에서의 이러한 가계계승관념은 수천년동안 중국사람들의 혼인의 주요목적으로 되였을뿐만아니라 조선민족도 전반 봉건사회단계에서 이것을 혼인의 주요목적으로 간주하였던것이다. 새로운 력사시기에 들어서면서 사람들은 자아가치의식이 점차 높아지고 혈통계승관념이 점차 모호해짐에 따라 혼인의 근본목적을 가계계승에 두는것이 아니라 부부간의 힘과 마음을 합쳐 행복한 생활을 꾸려나가는데 두고있다.
② 정조관념의 변화
인류의 혼인력사는 모계사회의 군혼제도로부터 부계사회의 일부일처제로 전환되면서 정조관념을 강요하게 되였다. 조선왕조시기에 이르러 정조관념은 녀성들에게 있어서 최고의 도덕표준으로 되였다. 세종왕 28년 6월 계묘일에 세종왕이 의정부에 글을 써서 지시하기를 “녀자가 정조를 지키지 못하는것은 남편을 배반한것과 같다. 남편을 배반한 녀자는 천지간에 용납할수 없으니 마땅히 죽여야 한다.”고 하였다.
조선왕조시기 녀성들은 비단 남편이 살아있을 때에 정조를 지켜야 할뿐만아니라 남편이 죽은후에도 정조를 지켜 재가를 하지 말아야 하였다. 봉건통치자들과 유교학자들의 이러한 설교로 하여 봉건시대에 조선민족녀성들은 정조를 생명처럼 중히 여겼다. 그리하여 녀성들은 중매자와 부모의 의사에 따라 일단 면목 모르는 남자와 결혼만 하면 남자가 그 어떤 결함이 있더라도 녀자가 주동적으로 리혼할수 없었으며 남편이 죽은후에도 재가를 하지 못하고 수절을 해야 하였다.
20세기 중엽까지 중국 조선족녀성들중에는 이러한 정조관념이 상당히 농후하게 존재하였다. 하지만 1980년대에 들어와서는 이러한 정조관념이 완전히 타파되여 과부재가는 아주 보편적인 일로 되였다. 하여 이 시기에 이르러 리혼률과 중로년재혼률이 그 어느 시기보다도 높아졌다. 집계에 따르면 1995년에 전국적으로 재혼등록을 한 사람이 50여만명이였는데 1996년에는 86만 2,000명으로 늘어났다. 조선족들의 확실한 재혼수자는 알수 없으나 전국적인 상승비률보다 높으면 높았지 낮지 않았으리라 생각된다.
(6) 섭외혼인
개혁개방의 새로운 력사시기에 들어서면서 조선족 혼인풍속에서의 또 하나의 큰 변화는 섭외혼인현상이 대폭적으로 늘어난것이다. 1950년대 초기(1950년—1953년)에 중국인민해방군에 참가하였고 항미원조전쟁에 참가하였던 일부 사람들이 조선녀자들과 결혼하였다가 귀국시 중국으로 함께 온 사례들이 있었다. 그외에는 1980년대 이전시기에 특수한 정황을 제외하고 중국인이 외국인과 결혼하는것을 허용하지 않았기에 섭외혼인현상이 극히 희소하였다. 1992년에 중, 한 두 나라가 수교하고 수년후에 또 중국 조선족과 한국인의 결혼이 허용되면서 중국 조선족녀성들이 한국으로 시집가는 현상이 급증하게 되였다. 한국의 집계에 따르면 한국으로 시집간 중국 조선족녀성이 1992년에는 1,000여명이였는데 1995년에는 7,700여명으로 급증하였으며 1999년에는 2만명 좌우로 추산되였다.
1999년 3월과 4월에 한국 관계 부문에서 한국 강원도지방으로 시집간 중국 조선족녀성 300명을 대상으로 그들이 한국남자와 결혼하게 된 동기에 대하여 설문조사를 한데 따르면 “경제적안정을 얻기 위해서”가 81%, “부모의 권유”가 6%, “직업을 얻기 위해서”가 2%였다. 설문에 응한 중국 조선족녀성들의 평균나이는 28.9세였다.
연변일대에서 한국으로 시집간 조선족녀성들가운데서 미혼녀성은 25%밖에 안되였다. 1990년대 초기에 중국 조선족의 섭외혼인 대상국은 최초에는 한국뿐이였는데 불과 몇년사이에 오스트랄리아, 미국, 일본, 조선, 로씨야, 홍콩, 마카오, 대만 등 국가와 지역으로 확장되였다. 중국 조선족의 섭외혼인의 특징은 남자의 외국녀자와의 결혼이 아니라 녀자의 외국인과의 결혼이 절대다수였다는것이다.
약 130년전인 기사년(1869년)과 경오년(1870년)에 조선에 큰 흉년이 들어 수많은 조선사람들이 기근을 참지 못해 압록강, 두만강을 건너 동북에 와서 살길을 찾아 헤맬 때 많은 사람들이 만족들에게 안해와 딸을 빼앗겼다.
그때에는 녀자들이 남편과 자식 혹은 부모와 형제들을 살리기 위하여 타민족에게 원치 않는 시집을 갔지만 지금은 많은 녀성들이 자진하여 외국으로 시집가고있다. 중국의 적지 않은 사람들은 순전히 돈에 반하여 남에게 기편당하기도 하고 남을 기편하기도 하였으며 심지어 일부 녀자들은 남편과 “가짜리혼”을 한후 한국인과 “위장결혼”을 한다. 이런것들은 지난 시기 중국 조선족의 혼인력사에서 찾아볼수 없는 현상들이다. 이것은 시장경제시대에 금전제일관념이 혼인생활에서 빚어낸 일종의 피면키 어려운 현상이라 하겠다.
(7) 농촌총각 장가들기 어려운 현상
20세기 80년대 이전에 조선족들은 생활형편이 아무리 구차해도 장가를 못가는 총각은 없었으며 안해를 얻지 못하는 홀아비도 희소했다. 우리 속담에 “헌신짝도 짝이 있다.”고 한것처럼 그 시기의 사람들은 아무리 궁핍한 산골에서 사는 사람들이라 하여도 배필을 얻는것이 문제로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시기에 한족들가운데는 홀아비가 많았다. 그러다가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사정은 완전히 거꾸로 되였다.
한족과 기타 민족들은 농촌의 농민이라 하여도 총각들이 장가못가는 현상이 별로 없지만 농촌의 조선족총각들가운데는 장가못가는 사람이 절대다수였던것이다. 연길시에 속하는 어느 한 조선족마을에 인구가 500여명 되는데 23살부터 35살까지 장가 못든 남성수가 40여명이나 되였다. 흑룡강성 상지시 하동향의 여러 조선족마을마다 장가갈 나이가 되여도 장가를 가지 못하고있는 총각들이 수십명씩 되며 오상시 민락향 홍광촌의 300여호에서 25~30살 사이의 총각중 약 60%가 결혼을 못하고있다.
료녕성 환인현 아하조선족향 아하촌에는 조선족이 126호 있는데 20여명 처녀와 30여명의 젊은 색시들이 도시로 들어가는 바람에 로총각이 20여명이나 된다고 하였다. 이러한 현상들은 일부 지방의 부분적농촌에만 존재하는것이 아니라 전반 조선족 농촌마을의 보편적현상으로 되고있다. 그리하여 조선족농촌의 총각들이 한족녀자와 결혼하는 현상이 늘어나고있다. 농촌총각들이 장가를 못가는 현상이 나타나게 된 주요한 원인은 다음과 같은 몇가지 면에 있다.
① 녀자들이 한국으로 시집가는 바람과 도시진출의 바람이 젊은 녀자들로 하여금 농촌에 마음을 붙이지 않게 했다. 농촌의 처녀들은 한국으로 시집가지 않으면 시내의 나이트클럽이나 노래방, 음식업체와 같은 곳으로 들어간다. 그러다보니 농촌에는 젊은 녀자가 희소하다.
② 1970년대 초기부터 우리 나라에서 계획출산정책을 실시하여 한쌍의 부부가 한족은 어린애를 하나, 소수민족은 둘밖에 낳지 못하도록 규정하였다. 조선족들은 남존녀비관념으로 다수 가정에서 아들만 낳다보니 20~30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 처녀보다 총각이 훨씬 더 많아진 결과를 초래하였다.
③ 다른 민족에 비하여 조선족남자들이 녀자를 천대하는 페습이 있다. 이런 상황은 도시보다 농촌이 더욱 심하다. 남녀평등사상의 영향으로 하여 농촌녀성들도 이제는 더는 남편의 구속과 천대를 받으며 살려고 하지 않는다.
④ 새로운 력사시기에 이르러 물질생활수준이 현저하게 높아짐에 따라 사람들의 문화생활에 대한 추구도 강화되였다. 그러나 현재 농촌의 상황을 보면 문화생활시설이 결핍하여 청년들이 만족하지 않는다. 하여 다소 지식이 있는 청년들은 농촌을 벗어나 시내로 들어가려 한다. 그런데 당면 도시의 상황을 볼 때 젊은 녀성들은 일자리를 얻기 쉬우나 남자들은 일자리를 얻기 매우 힘들다. 그래서 농촌에는 처녀들보다 총각들이 더 많이 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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