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족 인생의례-혼인 3
제3절 20세기 50년대이전시기의혼인풍속
20세기 50년대 이전에 중국 조선족은 청나라와 민국 시기 봉건사회시기와 일제 강점시기―반봉건반식민지시기를 거쳤다. 이 기간의 조선족의 혼인풍속은 기본상 조선반도로부터 갖고온 전통적인 혼인풍속이였다. 이 시기의 혼인방식에는 “반친영”과 “친영” 두가지가 있었으며 특수한 혼인형태로는 지복혼(指腹婚), 민며느리혼, 데릴사위혼, 과부동이기혼 등이 있었다.
이 시기의 조선족혼인풍속에 대하여 1931년 “9.18”사변을 계기로 하여 1930년대 이전시기와 이후시기로 나누어 서술하고저 한다.
1. 20세기 30년대 이전시기
이 시기 조선족가운데서 실시된 혼인방식은 “반친영”과 “친영” 두가지였는데 “반친영”이 더 보편적이였다.
1) 반친영
이 시기의 반친영방식은 주로 의혼(議婚), 대례(大禮), 후례(後禮) 등 3개 절차로 나뉘여 진행되였다.
(1) 의혼
남녀지간의 혼사는 중매자를 통해 거론된다. 혼사가 제기되면 남녀 두집에서는 믿을만한 사람을 시켜 상대편의 인격, 품행, 가정형편 등을 알아보게 한다. 이것을 선을 본다고 한다. 이 시기에 혼인을 맺는것을 조사하여보면 첫째로 문벌을 보고 둘째로 당사자의 성격과 집안의 가풍을 본다.
남자나 녀자나 인물과 년령에 대해서는 크게 따지지 않는다. 때문에 11~12살이 되는 신랑이 17~18살 되는 신부를 얻는 경우가 적지 않다. 1920년대에 연변의 룡정일대에서는 로씨야사회주의10월혁명의 영향을 받아 자유련애사상이 전파되면서 지식청년계층에서는 자유련애를 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남녀 량가에서 혼인을 맺을것을 동의하면 남자집에서 중매자를 통해 녀자집에 청혼서를 보낸다. 청혼서는 한문으로 쓰는데 그 서식은 아래와 같다.
伏惟茲長
尊體動止萬重 仰溯區區之至 筍家兒親事 尚無指處 得聞宅閨養淑哲雲 此意通於彼宅 俾結秦晉之誼如何
不備伏惟
尊照 謹拜上狀
年 月 日 某貫後人 姓名
이것을 조선말로 번역하면 대체로 아래와 같다.
생각하옵건대 존귀하신 그대께서 귀체 안강하세온지 평소부터 사모해오던터이옵니다. 우리 집에서 아직 아들의 혼사를 이루지 못하고있던차에 귀댁에 현숙한 따님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혼인을 맺었으면 하는 의향을 권하는바입니다.
그닥 훌륭한 형편이 못되는 처지에서 삼가 절을 올립니다.
년 월 일 모 본관 후손 성명
녀자집에서 청혼서를 받고 동의하면 중매자를 통하여 허혼서(許婚書)를 보낸다. 허혼서 격식은 아래와 같다.
伏惟辰下
尊體震民萬護仰區之至 第親事勤導若是 敢不聽從 四星回示如何 不備伏惟
尊照謹拜上狀
年 月 日 某貫後人 姓名
이것을 조선말로 번역하면 대체로 아래와 같다.
생각하옵건대 존귀하신 그대께서 귀체 안강하시리라고 믿습니다. 댁에서 우리 집과 혼인을 맺을 의향을 전해왔으니 우리 어찌 그 반가운 의향에 따르지 않겠습니까? 이제 자제분의 사성을 보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년 월 일 모 본관 후손 성명
사성(四星)을 일명 사주(四柱)라고도 하는데 청혼자의 출생 년월일시(年月日時)를 말한다. 사성과 혼인에 관한 서식에서의 년도와 시간을 모두 천간(天幹)과 지지(地支)를 결합한 간지법(幹支法)으로 표기한다. 총각의 사주를 적은 사주단자(四柱單子)를 녀자측 세대주의 주소와 이름을 적은 봉투에 넣어 두겹으로 된 보자기(안은 붉은색, 겉은 남색)로 싸서 녀자집에 보낸다. 이때 간단한 감사편지를 첨부하는데 녀자측에서 연길(涓吉)을 알려줄것을 요구한다. 연길이란 잔치날로 선택한 길일을 말한다.
사주단자의 서식은 아래와 같다.
사주단자 봉투 띠
녀자집에서 남자의 사주단자를 받으면 음양오행설의 상극상생(相克相生)원리에 의하여 처녀의 사주와 맞춰보고 길흉화복을 판단한다. 이것을 궁합(宮合)을 맞춘다고 한다. 남녀 두사람의 출생 년월일시를 다 맞춰보는것을 속궁합이라고 하고 출생한 년도만 맞춰보는것을 겉궁합이라고 한다. 중국 조선족은 일반적으로 겉궁합을 맞춘다.
음양오행설에 의하면 60갑자가운데서 매 한쌍의 간지(幹支)는 모두 일정한 물질을 상징한다고 한다. 례컨대 경오(庚午)와 신미(辛未)는 로방토(路旁土)에 해당하며 무진(戊辰)과 기사(己巳)는 대림목(大林木)에 해당된다고 한다. 이런 원리에 의하여 만약 총각과 처녀가 모두 경오년이나 신미년에 출생하였다면 토성(土性)에 속하는것이다.
이제 이것을 가지고 궁합을 해석한 책을 펼쳐보면 남토녀토(男土女土)는 부귀장수(富貴長壽)이며 개화만지(開花滿枝)라고 풀이를 하였다. 이것은 길조(吉兆)이므로 남녀가 천상배필이 되는것이다. 만약 총각은 경오년이나 신미년에 출생하였고 처녀는 무진년이나 기사년에 출생하였다면 총각은 토성에 속하고 처녀는 목성(木性)에 속하는데 이에 대해 궁합책에서는 남토녀목(男土女木)은 단명반흉에 고목봉추(短命半凶, 枯木逢秋)라고 해석되여있다. 이런 경우면 절대 결혼못한다.
오늘날의 안광으로 볼 때 궁합을 맞춘다는것은 아무런 과학적근거가 없는 허황한것에 불과하지만 옛날사람들가운데는 그것을 천칙같이 믿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녀자측에서 궁합을 맞춰보고 별문제가 없으면 잔치날을 확정하여 종이에 적어서 봉투에 넣어 남자측에 보내는데 이것을 연길서(涓吉書)라 한다. 연길서의 서식은 아래와 같다.
奠雁某年某月某時 納幣同日先行
이것을 조선말로 번역하면 아래와 같다.
전안례는 모년 모월 모일 모시에 진행하고 납페도 같은날에 먼저 진행하면 되겠습니다.
만일 남자측에서 잔치날을 택하여 녀자측에 알리는 경우면 상술한 연길서가 다음과 같이 번역된다.
전안례는 모년 모월 모일 모시에 진행하고 납페도 같은날에 먼저 진행하겠습니다.
여기에서 전안례는 잔치날을 말하고 납페는 신랑측에서 신부측에 드리는 대장함을 말한다.
남자측에서 연길서를 받거나 연길서를 녀자측에 보낸후 혼서(婚書)를 작성한다. 혼서는 전통적혼인에서의 약혼증명서인데 지금의 결혼증서와 같다. 혼서는 대장함에 넣어서 잔치하기 반달전 혹은 잔치날에 녀자집에 준다. 그러면 신부가 그것을 잘 간직하여 두었다가 결혼한후 부부가 사망될 때 그것을 반으로 갈라서 제각기 관속에 넣어간다. 혼서의 격식은 아래와 같다.
時維孟春(隨時稱) 尊體百福 仆之長子(隨稱)某 年既長成 未有伉儷 伏蒙尊慈許以令愛貺室 茲有先人之禮 謹行納幣之儀 不備伏惟
尊照 謹行上狀
年 月 日 某貫後人 姓名 拜
이것을 조선말로 번역하면 대체로 아래와 같다.
맹춘시절(계절에 따라 칭함)에 림하시여 귀체 건강하시리라 믿습니다. 저의 맏아들(정황에 따라 칭함) 아무개가 이미 성년이 되였으나 배필을 얻지 못하고 있던차에 존귀하신 당신께서 귀한 따님을 우리 가문에 주셔서 감사하기 이를데 없습니다. 선인들의 례의에 쫓아 약소한 례물이나마 성의를 표하고저 하오니 받아주시기 바라면서 삼가 절을 올립니다.
년 월 일 모 본관 후손 성명 배
혼인을 맺은 두집의 거리가 가까우면 혼서를 쓰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일단 혼약을 맺게 되면 총각이 처녀집에 가서 3년동안 무상으로 일을 해야 한다.
조선반도 남반부에서 온 사람들과 평안도 사람들은 잔치날을 반달가량 앞두고 신부측에 대장함(례장이라고도 함.)을 보내고 연변일대의 함경도사람들은 잔치날에 대장함을 드린다. 이 시기 연변의 룡정일대에서 납채를 한 정황을 보면 흔히 목천 20필을 주며 비녀, 귀걸이 같은것은 일정한 규정이 없이 생활형편에 따라 주었으며 은전을 납페로 주기도 하였는데 적어서 10냥, 많아서 160냥 정도로 주었다. 연변의 훈춘일대에서는 생활형편에 따라 베천, 목천, 비단 같은것으로 이부자리감을 주었다.
잔치날자가 일단 확정되면 남자측에서는 총각의 관례(冠禮)를 행하고 녀자측에서는 처녀의 계례(笄禮)를 행한다.(관례와 계례 방식은 제6장 제1절에서 서술하였음.)
(2) 대례
잔치날에 행하는 행사를 대례라 한다.
잔치날이 되면 신랑의 아버지가 먼저 사당에 가서 오늘 아무개가 누구 집의 딸과 결혼하게 된다는것을 조상들의 위패(位牌)를 향해 아뢴다. 이것을 고사당(告祠堂) 혹은 고묘(告廟)라고 한다. 그리고는 방에 들어와 신랑복을 차려입은 아들을 앞에 꿇어앉히고 술을 한잔 권하여 마시게 한다. 이것을 초라고 한다. 이것은 사대부계층에서 행하던 방식이고 중국 조선족은 일반적으로 사당이 따로 없었으므로 집안에서 조상제사를 간단히 지낸다. 제사상을 차리고 지방(紙榜)을 세운 다음 술을 한잔 따르고 오늘 아무개가 잔치를 하게 된다는 소식을 아뢰고는 절을 한번 한다.
지방의 서식은 아래와 같다.
顯曾祖考學生府君之位
顯曾祖妣孺人某氏之位
여기에서 두번째줄의 “某”자에 성(姓)을 쓴다.
이 시기 신랑의 옷차림은 통일적인것이 없었다. 사모관대는 얻기 힘들므로 명주로 만든 한복을 착용하는자가 다수였다.
문헌기록에 의하면 연변의 훈춘일대에서는 잔치날에 신랑은 연한 남색명주바지저고리에 검은색 배자(背子)를 입고 미투리를 신으며 머리에는 상투를 틀고 망건을 띠고 검은 갓을 쓰며 손에는 기름종이로 만든 큰 부채를 쥔다고 하였다.
평안도사람들이 거주하고있는 압록강일대에서는 잔치날에 신랑이 두루마기를 입고 갓을 쓰고 총배기신을 신으며 손에는 채색비단으로 만든 차선(遮扇)을 든다. 연길에서는 겨울철에 신랑이 흰색 한복바지저고리우에 검은 “제매기(두루마기)”를 입으며 머리에는 상투를 틀고 망건을 맨 다음 휘항을 쓰고 그우에 검은 갓을 썼다.
신랑이 신부집으로 초례를 치르러 갈 때에는 말을 타거나 가마에 앉는다. 가마에는 마차나 우차에 가마모양으로 장식한 수레가마와 사람이 메고가는 가마가 있다. 사람이 메는 가마에는 신랑가마와 신부가마가 있다. 신랑일행이 신부집으로 갈 때 신부가마를 마련해가지고 간다. 20세기 20년대부터 연변의 룡정일대에서는 쏘련문화의 영향을 받게 되면서 쏘련식 네바퀴마차를 신랑신부의 승용도구로 사용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신랑이 신부집으로 갈 때의 혼행(婚行)행렬에는 마부(혹은 교군), 안부(雁夫), 함진아비, 등롱군(燈籠君), 상객 등이 있다. 마부는 신랑이 탄 말의 고삐를 잡고 가는 사람이고 교군은 가마를 메는 사람이고 안부는 나무기러기(경상도사람들은 나무오리를 갖고간다.)를 안고가는 사람이고 함진아비는 대장함을 지고가는 사람이며 등롱군은 초롱불을 들고가는 사람이고 상객(연변일대에서는 “생빈”, “새인”이라 한다.)은 신랑가문의 대표자이다.
상객은 남성어른 한사람이 가는데 함경도사람은 아버지를 제외한 기타 근친이 가고 다른 도(道)의 사람들은 아버지가 직접 간다. 잔치날에 초롱을 들고가는것은 고대 혼속의 유습으로서 초롱불을 상징하는것이다. “婚”자를 본래는 “昏”으로 썼는데 그것은 고대에는 황혼때에 결혼잔치를 치렀기때문이다.
그러므로 신랑일행이 신부를 맞으러 가자면 홰불을 들고가야 했다. 이것이 후세에 와서 초롱불이나 초롱을 들고가는것으로 변하였다. 조선왕조시기에 잔치날에 홰불을 들고가는 수효는 품계(品階)에 따라 달랐는데 2품 이상의 관리는 10병(柄), 3품 이하의 관리는 6병을 들고 갈수 있도록 규정하였다.
이 시기 중국 조선족이 잔치날에 들고가는 등롱은 빨간 종이와 흰 종이로 만들었는데 먼저 빨간 종이를 안에 바르고 흰 종이를 드문드문 구멍을 내여 겉에 바른다. 그러면 마치 붉은 빛이 비쳐나오는것처럼 보인다. 등롱의 수효는 알수 없으나 6개를 넘지 않았으리라 생각된다.
신랑이 신부네 마을근처에 이르면 신랑이 부채나 차선으로 얼굴의 눈아래부분을 가리운다. 신랑일행은 신부집으로 직접 들어가지 않고 신부집 근처에 정해놓은 사처집(반장집이라고도 함.)에 들려 잠간 휴식하면서 초례를 거행하기를 기다린다.
초례를 거행할 시간이 되면 신랑일행은 “사처”를 떠나 신부집으로 간다. 신랑이 대문어구에 이르러 말에서 내릴 때 노죽섬(지방 사투리—가마니나 마대안에 량곡을 넣은것.)을 딛고 내린다. 그리고 마당안으로 들어갈 때에는 부채나 차선으로 얼굴의 눈아래부분을 가리고 디딜페(지방 사투리—신랑이 신부집 마당으로 들어갈 때 길에 펴는 도구.)를 딛고 들어간다. 디딜페는 베천을 펴기도 하고 돗자리를 펴기도 한다.
초례는 신부집 마당에서 거행하는데 전반 과정을 사회자가 홀기(笏記)에 적은 식순에 의하여 집행한다. 전통적인 초례식순에는 신랑하마(新郎下馬), 주인영서문(主人迎婿門), 봉안치어탁상(奉雁置於桌上), 교배석전(交拜席前), 신랑신부교배(新郎新婦交拜), 근배례재행여지(巹杯禮再行如之) 등 10여가지가 있다. 중국 조선족은 이러한 식순대로 하는 사람이 희소하고 아래와 같은 절차로 간단히 진행한다.
혼례가 시작되면 신랑이 입장한다. 이때 장인이 출입문앞에 나서서 대기하고있는다. 신랑일행이 신부집 마당으로 들어갈 때 안부가 기러기를 안고 제일 앞에 서고 그뒤에 대장함을 안은 짐군과 상객이 따르며 그뒤에 신랑이 따른다. 안부가 기러기를 신부측에 넘겨주면 신부의 숙모나 형님이 받아서 마당에 놓은 전안상(奠雁床, 상우에 백지를 편다.)우에 놓는다.
그러면 신랑이 그앞에 꿇어앉아 두손으로 부채를 가로쥐고 기러기를 세번 민다. 첫 두번은 살짝 밀고 세번째는 좀 길게 민다. 이어서 전안상을 사이에 두고 방안에 앉아있는 신부와 맞절을 하는 경우도 있고 전안상을 놓지 않고 기러기를 디딜페우에 놓고 한손으로 세번 미는 경우도 있다.
례장함은 상객이 짐군에게서 받아 신부측에 드리면 신부측의 녀자친척 한명이 신부의 치마를 겉에 입고(이 치마를 “허망치마”라 한다.) 치마폭으로 받아서 두어번 굴린다. 그런 뒤 방안으로 안고 들어가 쌀독우에 놨다가 내려놓은 다음 펼쳐놓고 녀자친척들이 구경한다. 대장함안에는 혼서와 신부옷감을 넣는다.
그외에 쌀을 두세줌 종이봉투에 넣어서 놓는데 그것은 후에 신랑신부가 사망될 때 입안에 넣는 반함미(飯含米)로 사용한다. 그리고 신혼후에 생활이 잘 피여나라고 채당콩을 넣기도 하고 첫아이는 아들을 낳으라고 대장함 안 네귀에 빨간 고추(길고 끝이 뾰족한것.)를 넣기도 한다.
전안례와 대장함(례장함)드리기가 끝나면 초례를 시작한다. 교배상(교배상 차림은 본장 제2절 초례부분에서 상세히 설명하였음.) 동쪽에 신랑과 신랑대반(남성)이 서고 서쪽에 신부와 신부대반(녀성, 두명)이 선다. 이 시기 신부와 혼례복은 통일된것이 없고 비단으로 만든 한복치마저고리면 훌륭한것이였다.
연변일대에서는 소매에 한삼이 달린 빨간 비단반회장저고리에 빨간 비단치마를 입고 외태를 풀어 달비를 섞어서 큰머리를 얹거나 낭자를 틀고 족두리를 쓴다. 낭자에 꽂은 큰비녀 량쪽에 도투락댕기를 달며 신발은 미투리를 신는다. 압록강일대에 거주하고있는 평안도사람들은 신부가 잔치날에 붉은 비단치마저고리를 입고 쪽진 머리에 미투리를 쓴다. 생활이 빈궁하여 비단옷을 못입는 경우에는 홍화꽃(민간에서는 호얘꽃이라 한다.)즙으로 베천에 물감을 들여 첫날옷을 해입는다.
신랑신부가 교배례를 할 때 조선반도 서울 이남에서 이주하여온 사람들은 교배를 시작하기전에 먼저 “북향재배(北向再拜)”를 한다. 지난날 서울 이남에서 살던 사람들은 초례를 행할 때 먼저 북쪽에 있는 임금에게 절을 두번 올렸는데 그들이 중국에 온 뒤에도 그 풍속을 그대로 전승하였다.
교배를 할 때 신부는 4배, 신랑은 2배를 한다. 신부가 먼저 신랑에게 절을 두번 하면 신랑이 무릎을 꿇고앉아 받는다. 신랑이 한번 답배를 하면 신부가 역시 무릎을 꿇고앉아 받는다. 이런 식으로 재차 반복한다. 이런 방식으로 절하는것을 협배라 한다.
합근례를 행할 때 조롱박 술잔의 꼬리부분에 구멍을 뚫고 청실홍실을 달아맨것을 접시에 2개 담아서 교배상우에 놓는다. 합근례가 시작되면 신랑측 대반이 술잔에 술을 따라 신랑에게 준다. 신랑이 받아서 신부측 대반에게 넘겨준다. 신부측 대반이 그것을 신부에게 주면 신부는 받아서 입술을 댔다가 도로 대반에게 준다. 대반은 그것을 받아 퇴주(退酒)하고 빈잔을 상우에 놓는다.
신부가 음주할 때 신랑은 읍을 하며 감사를 표시한다. 이어서 신부가 다른 술잔에 술을 부어 신부측 대반에게 주면 대반이 그것을 신랑측 대반에게 넘겨준다. 대반이 받아서 신랑에게 주면 신랑이 받아서 쭉 들이마신다. 이때 신부도 허리를 굽혀 국궁을 하며 감사를 표시한다. 초례에서 합근례만 마치면 신부가 신랑집의 식구가 되는것이다. 이것은 중국 조선족초례의 특징이다. ≪가례≫의 규정에 의하면 신부는 신랑집에 온 3일만에 고사당(告祠堂)을 해야 신랑가문의 식구로 인정받는다.
이 시기에 어떤 지방에서는 초례를 할 때 신부가 붉은 비단으로 된 두건을 머리우에 덮어쓰고 얼굴을 가리우는데 이것은 한족들의 풍속에서 온것이다.
연변의 훈춘일대에서는 혼례를 행할 때 정안례를 하기전에 신랑측 상객이 례장함에서 혼서를 꺼내여 신부측에 주면 신부의 아버지가 그것을 받아서 갖고있다가 례장함을 받은후 도로 그안에 넣는다. 후에 신부가 우귀(於歸)하여 신랑집 마당에 이르러 가마에서 내리면 신랑측에서 그것을 대장함에서 꺼내여 읽는다.
큰상은 웃방에 차린다.(큰상에 관하여 본장 제2절 “큰상” 부분에서 상세히 기술하였음.) 신랑이 큰상을 받을 때 먼저 단자(單子)놀이를 한다. 이것은 신부측의 친척이나 손님들이 종이에 간단한 시구나 수수께끼를 써서 신랑더러 화답하거나 풀이를 하게 하여 신랑의 학식과 총명 정도를 알아보는 놀이이다.
서당이 있는 마을에서는 서당훈장이 시구를 한구 써서 필묵까지 갖추어 학도를 시켜 잔치집에 보내면 신랑이나 상객이 답구를 써서 돌려보내는데 음식도 푸짐히 보낸다. 그 시기에 대다수 사람들의 문화정도가 극히 낮았으므로 단자놀이에서 시구를 화답할수 있는 형편은 못되고 해학적인 글자유희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례컨대 단자에 “馬上平安來(말을 타고 무사히 오셨습니까?)”라고 쓰면 “念德平安來(념려해주신 덕분에 무사히 왔습니다.)”라고 회답한다.
만약 단자에 “鳥郎”이라고 쓰면 얼핏 보면 “새신랑”이란 뜻을 갖고있는듯 하지만 실제로는 새 “조”자에 남편 “랑”자를 합한것이니 새의 남편이란 뜻으로서 신랑을 희롱하는 어구인것이다. 이 때에는 “黃口滿庭”이라고 회답하는데 그것은 “부리에 아직 누른 빛을 가시지 못한 새새끼들”이란 뜻인것이다.
단자놀이가 끝나면 신랑측 대반이 신랑에게 술을 석잔 권한다. 신랑은 석잔 술을 마시고나서 큰상의 음식을 어떻게 처리했으면 좋겠다는 의향을 말한다. 보통 집에 부모가 계시니 큰상의 음식을 좀 대접하고싶다고 말한다. 그러면 여러가지 음식을 조금씩 덜어내여 종이에 싸서 신랑측 상객에게 맡기여 가져가게 한다. 이것을 “봉을 싼다.(경상도)”고 하거나 “큰상을 친다.(함경도)”고 한다.
큰상의 나머지 음식은 신랑과 손님들의 술안주로 한다. “남도사람”들은 큰상을 하나도 다치지 않고 몽땅 따로 싸서 신랑집에 보낸다. 신랑앞에 큰상을 차릴 때 신랑측 대반의 앞에도 음식상을 따로 차려준다. 그러나 통닭을 놓지 않는다. 음주가 끝나면 신랑이 점심을 먹는다. 이때 밥과 국을 한그릇씩 놓는데 밥그릇안에 껍질을 벗긴 통닭알을 3개 묻는다.
신랑은 그것을 한두개만 파먹고 나머지는 신부에게 주어(밥과 함께) 먹게 한다. 신랑이나 신부의 밥그릇에 닭알을 묻는것은 자손이 번성함을 상징한다. 평안도와 경상도 사람들은 이와 달리 신랑신부 음식상에 모두 국수를 놓는데 그것은 신랑신부의 장수를 기원하는것이라 한다.
신랑이 큰상을 받을 때 신랑측 상객은 먼저 큰상을 구경하고있다가 단자놀이가 시작되면 신랑곁에 앉아서 신랑을 도와 단자풀이를 한다. 단자놀이가 끝나면 상객은 상객방에 가서 상객상을 받는다. 이때 신랑을 따라온 수행인원들은 다른 방에 모시여 식사를 마치면 상객과 함께 그날로 집으로 돌아간다.
신랑신부가 첫날밤을 지내는 신방은 신랑이 큰상을 받던 웃방에 정한다. 방안에 자그마한 상을 하나 놓고 그우에 초불을 켜놓는다. 함경도사람들은 초를 한토막 끊어서 불을 달아 상우에 세우고 평안도사람들은 초 두대에 불을 달아 각기 쌀을 담은 그릇에 꽂아서 상우에 놓는데 동쪽의것은 “신랑불”, 서쪽의것은 “신부불”이라고 한다.
밤이 되면 신부는 결혼례복을 입은채로 신방에 앉아서 신랑이 들어오기를 기다린다. 신랑이 신방에 들어가면 신부의 숙모나 형님이 간단한 동뢰상을 차려 들여간다. 동뢰상에는 술과 신랑의 큰상에 차렸던 음식을 두세가지 놓는다. 연변일대의 함경도사람들은 이때 큰상에 놓았던 음식 한두가지를 채에 담아서 신랑신부에게 주는데 그것은 신혼생활에 행복이 떡가루 쏟아지듯 하라는 의미가 내포되여있다.
신랑은 신부가 술잔에 술을 따라주면 받아마시고 술을 권하지 않으면 신부의 손목을 쥐여 술을 따르게 하여 받아마신다. 그리고나서 먼저 신부의 큰머리나 족두리를 벗기고 옷고름을 풀어준다. 그러면 신부도 신랑의 모자와 저고리를 벗겨준다. 압록강과 훈강 일대에 사는 평안도녀성들은 결혼하기전에 외태를 땋고 또 량쪽 귀의 웃쪽에 각기 두가닥씩 머리를 가느다랗게 땋아서 뒤통수에 가져다가 태머리와 합친다. 이것을 귀밑머리라고 한다.
결혼잔치를 하는 전날 뒤의 태머리는 풀어서 쪽지고 귀밑머리는 그대로 놔두었다가 첫날밤 신랑이 풀어준다. 그리하여 평안도녀성들은 자기의 남편을 “귀밑머리 풀어준 사람”이라고 한다. 초불을 끌 때 한토막을 켰을 경우에는 저절로 꺼질 때까지 놔두고 두대를 켰을 경우에는 쌍초불은 동시에 끄는것이 좋다 하여 신랑이 한손에 초불을 한대씩 쥐고 량손으로 마주 비벼끄거나 초불을 거꾸로 쌀그릇에 꽂아서 끈다.
신랑신부가 자리에 누울 때 먼저 눕는 사람이 먼저 죽는다 하여 신랑신부가 동시에 눕는다. 신랑신부의 이러한 거동을 신부의 친척들이 문창호지를 뚫고 몰래 엿보는데 이것을 “신방엿보기”라고 한다. 이러한 풍속은 옛날에 조혼(早婚)으로 인하여 어떤 신랑이 잘못되는 경우가 있으므로 신랑신부를 보호하기 위한데로부터 산생된것이라고 한다.
이튿날 낮에 마을의 젊은이들이 신부집에 놀러와서 신랑에게 “형벌”을 주는 동상례를 한다. 이것을 원래는 람침연이라고 하였는데 주로 사위와 관련되는 놀이였으므로 동상례로 개칭하게 되였다. 동상은 사위라는 뜻이다. 때문에 민간에서는 동상례를 “신랑다루기”라고 한다. 바줄로 신랑의 두발목을 동여매여 대들보에 거꾸로 달아매거나 한쪽 발목을 동여매서 바줄을 바싹 당긴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이 나무막대기나 회초리로 신랑의 볼기를 치거나 발바닥을 치면서 “이놈, 너는 왜 남의 마을에 와서 처녀를 도둑질해가느냐?” 하고 “심문”을 들이댄다. 신랑이 아픔을 참지 못해 소리를 지르면 장모가 들어와서 청년들에게 요구되는것이 있으면 만족시켜드리겠으니 신랑을 때리지 말라고 애걸한다. 그러면 청년들이 “돼지잡아”, “닭잡아” 하면서 음식을 요구한다. 이때 신부집에서는 닭을 잡고 다른 음식도 풍성하게 차려서 청년들을 대접한다. 그러면 청년들은 신랑의 배동하에 실컷 먹고 마시고는 집으로 돌아간다.
(3) 후례
후례에는 우귀(於歸)와 귀녕(歸寧)이 포괄된다.
초례를 마치고 신부가 처음으로 신랑을 따라 시집으로 가는것을 우귀라 한다. 민간에서는 첫길을 간다고 한다. “반친영”법의 우귀는 초례를 치른 3일만에 하기에 3일우귀라 한다. 이날 신랑신부는 모두 혼례복을 차려입으며 신랑은 여전히 말을 타고 신부는 가마를 타고 간다.
신랑이 말을 탈줄 모르면 가마에 앉아간다. 일반적으로 신부가마는 두사람이 메고 신랑가마는 네사람이 메며 신부가마는 창문을 닫고 신랑가마는 창문을 열고 간다. 우귀를 가는 도중에 요귀의 침습을 막기 위해 가마우에 호랑이가죽을 덮는데 신랑도 가마를 타고가는 경우엔 신랑가마우에 호랑이가죽을 덮고 앞에서 간다.
신부의 가마안에는 요강과 바가지가 놓여있는데 바가지는 신부가 멀미가 나서 구토할 때 사용하는것이고 요강은 신부가 도중에 내리지 못하므로 가마안에서 소변을 보도록 마련해놓는것이다. 신부가 집에서 나올 때 남도사람들은 오빠나 사촌오빠가 업고나와 가마에 앉힌다. 신부가 자기 집 마당을 밟으면 시집갔다가 도루 쫓겨올수 있다 하여 땅을 밟지 못하게 하는것이다. 신부가 시집갈 때 신랑의 근친들에게 드릴 례물을 례단이라 한다. 그외에 이부자리, 옷농 같은것도 가지고 가며 돗자리도 몇잎 가져가서 신랑신부가 잠자는 방에 편다.
신부측 상객으로는 신부의 아버지 혹은 삼촌 한사람이 간다. 함경도사람들은 아버지가 가지 않고 삼촌이나 오빠가 간다. 기타 수행자들로는 교군(혹은 마부), 짐군, 마부 등이 있다.
신부일행이 신랑집 대문어구에 이르면 신랑측 사람들이 잡귀와 액을 물리치기 위해 공중에 대고 사냥총을 쏘며 대문어구에 짚을 놓고 불을 달아놓는다. 신부가마와 수행자들은 모두 불우를 넘어서 마당안으로 들어간다. 그러면 신랑측에서 배치한 녀성대반 2명이 마중나와 신부를 부축해 내린다.
이때 연변일대의 풍속은 신부측 상객이 혼서를 신랑의 아버지에게 드리고 그자리에서 그것을 읽는다. 경상도사람들의 풍속은 신랑의 부모가 이때 신부를 보지 못하므로 집안에 들어가 있어야 하며 평안도사람들은 이때 근친들이 처마밑에 서는것을 엄금하며 시어머니와 신부가 서로 마주보는것을 꺼리므로 시어머니는 굴뚝뒤에 서서 가만히 본다.
만약 추운 계절이면 신부를 방안에 모시고 따뜻한 계절이면 마당에 돗자리를 펴고 병풍을 둘러놓고 그앞에 신부를 모신다. 신부의 량옆에는 녀자대반이 한명씩 배동하여 앉고 그옆에 신부가 가져온 베개, 이불, 례단 같은것을 놓는다.
이날 신부가 큰상을 받는것을 평안도사람들은 “색시잔치”라 한다. 신부가 받은 큰상차림은 신랑의 큰상차림과 같다. 만일 신부가 잔치날에 신랑이 큰상을 받을 때 함께 받았으면 다시 받지 않는다. 신부의 큰상음식은 신부가 점심식사를 마친 뒤 몽땅 따로 싸서 신부측 상객이 갈 때 보낸다.
신부가 큰상을 받을 때 신부측 상객과 기타 수행인원들은 따로 모시여 음식을 대접한다. 일반적으로 신부측 상객에게는 신랑측 상객보다 음식을 더 잘 차려준다. 식사가 끝나면 신랑측 남성근친들이 신부측 상객과 일일이 절을 하며 면목을 익힌다. 이어서 신부측 상객들이 신랑신부를 곁에 불러놓고 앞으로 서로 관심하고 시부모를 잘 모시며 행복하게 살것을 부탁하고는 집으로 돌아간다. 이러한 인사가 끝나면 신부가 대반의 부축을 받으며 신랑과 함께 먼저 신랑의 조부모를 배알하고 이어서 신랑의 부모와 근친들을 배알한다.
그리고나서 손님들에게 음식을 대접한다. 연변일대에서는 손님들이 잔치집에 올 때 녀자들은 술, 떡, 엿 같은 음식을 갖고와서 부조하고 남자들은 돈으로 부조한다. 이날 손님들에게 음식을 대접할 때 남자손님들은 모두 방안에 모시는데 식사가 끝나면 인차 자리에서 일어나 집으로 돌아간다. 그리고는 또 다음 손님들이 앉는다. 녀자손님들은 식사를 마치고 돌아갈 때 모두 음식을 조금씩 갖고간다.
손님들이 다 간 뒤 신랑의 친척들이 한자리에 앉아 중참을 먹는다. 이것을 가족연이라 한다.
이튿날 아침식사를 마친 뒤 현구고례를 행한다. 구(舅)는 시아버지, 고(姑)는 시어머니를 말한다. 아래방에서 웃방으로 들어가는 사이문어구의 바깥쪽에 비단이나 종이를 편 상을 하나 놓고 신부는 웃방에 앉고 신랑의 근친들은 아래방에 앉는다. 신랑의 아주머니나 누님이 신부곁에 앉아서 시아버지부터 모든 근친들을 신부에게 일일이 소개한다.
이때 신부가 소개받는 사람들에게 술을 한잔 따라드리고 절을 한번 하고는 갖고온 례물을 드린다. 시부모에게는 흔히 베천옷을 한벌 그리고 다른 친척들에게는 흔히 베천으로 만든 저고리, 치마, 적삼 같은것을 한견지씩 선사한다.
3일날 아침, 신부는 일찍 일어나 시누이 혹은 동서의 안내하에 외양간(혹은 마구간)에 들어가 소나 말에게 여물을 주고 나와 돼지뜨물독에 손을 담궜다가 물에 헹군다. 이렇게 함으로써 가축이 잘될것을 바란다. 그다음 신부가 부엌에 나가 손수 불을 지피고 밥을 지어 처음으로 작식솜씨를 보여준다. 그러나 신부가 밥을 다 짓지 않고 부엌아궁이에 불만 지피고 솥에 쌀만 앉히는 경우가 많다.
아침식사를 마친 뒤 신랑신부가 음식을 마련해가지고 신부의 본가집으로 간다. 이것을 귀녕, 근친(謹親) 혹은 “3일을 간다.”라고 한다. 만약 3일만에 귀녕을 못하면 3달만에 귀녕해야 한다. 신부가 귀녕할 때 미리 본가집에서 마련해준 한복 치마저고리를 입고 가는데 이것을 “삼일옷”이라 한다.
신랑신부는 신부의 본가집에서 약 이틀동안 놀다가 자기 집으로 돌아온다. 만약 신부집에서 혼례를 치른 이튿날에 신랑다루기를 안하였으면 신부가 귀녕하였을 때에 한다. 연변일대의 함경도사람들은 신랑신부가 자기 집으로 돌아온 뒤 신부가 시집올 때 베개속에 넣어온 쌀(베개쌀이라 한다.)로 찰떡을 친다. 베개떡(베개쌀로 친 떡)은 문턱을 넘지 못한다 하여 친척들을 신랑집에 청하여 함께 먹는다. 신부가 귀녕을 갔다온후 신랑친척들이 일일이 신랑신부를 청하여 음식을 대접한다. 이것을 반살미(연변일대에서는 “집보기”라고 함.)라고 한다.
2) 친영방식
전통적인 친영방식에는 납채(納采),문명(問名),납길(納吉),납징(納征),청기(請期),친영(親迎) 등 6례가 있다. 후에 중국의 유학자들도 이것이 너무 번다함을 느끼고 납채, 납페, 청기, 친영 등 네가지 내용과 단계만 포괄한 4례로 개변시켰다. 조선의 유학자들도 친영방식에서의 6례를 그대로 실시하지 않고 의혼, 납채, 납페, 친영 등 네가지 내용만 포괄한 4례로 개변시켰다.
여기에서 “의혼”은 중매자를 통해 혼사를 제기하는것이고 “납채”는 일정한 례물을 갖추어 혼약을 맺는것이며 “납페”는 일단 혼약이 맺어지면 신랑집에서 신부집에 례물을 보내는것이고 “친영”은 결혼잔치날에 신랑이 신부를 자기 집으로 모셔오는것이다. 중국 조선족의 친영방식에는 그 내용과 단계가 “반친영”과 마찬가지로 의혼, 대례, 후례 등 3례가 있다.
반친영과 친영의 근본적구별을 보면 반친영은 신랑이 신부집에서 혼례를 행한후 2일간 신부집에 있다가 3일만에 신부를 데리고 신랑집으로 가는것인데 이것을 3일우귀라 하고, 친영은 신랑이 신부집에 가서 전안례를 치르고 큰상을 받은후 그날로 신부를 모시고 신랑집으로 돌아오는것인데 이것을 당일우귀라 하는것이다. 이외에도 아래와 같은 몇가지 구별이 있다.
반친영방식은 신부집에서 초례를 거행할 때 전안례, 교배례, 합근례 등 례식을 행하지만 친영방식은 흔히 신부집에서 전안례만 행하고 큰상을 받으며 신랑집에 돌아와서는 신부가 큰상을 받는 례식만 행한다.
반친영방식은 일반적으로 신랑이 신부집에서 초례를 행한 이튿날에 동상례를 하지만 친영방식은 초례를 치른 3일만에 신랑신부가 함께 신부집으로 귀녕을 갔을 때 한다.
2. 20세기 30~40년대
이 시기의 혼인형태는 1931년 “9.18”사변 이전시기와 마찬가지로 반친영과 친영 두가지가 실시되였다. 혼인형식은 별로 변하지 않았으나 사람들의 과학문화수준이 높아지고 자본주의 물질문명과 정신문명의 영향을 받아 봉건적인 사상관념에서 점차 해방됨에 따라 혼인관념과 혼인의 세부면에서 새로운 변화가 생기게 되였다. 이것은 주로 아래와 같은 몇가지 방면에서 찾아볼수 있다.
1) 20세기 20년대까지는 남자가 11~12살이 되면 결혼하는 조혼현상이 적지 않았으며 11~12살 되는 신랑이 17~18살 되는 신부를 얻는 현상도 존재하였다. 1930년대에 이르러서는 11~12살에 결혼하는 현상이 존재하기는 하였으나 극히 적었고 일반적인 결혼년령은 16세부터 20세사이였다.
2) 전에는 청년남녀가 약혼할 때 당사자들은 상대방의 얼굴을 볼수 없었지만 이 시기에 와서는 중매자가 당사자들의 사진을 갖고다니며 소개하여 결혼전에 상대방의 얼굴모양이라도 볼수 있게 되였다. 또한 이 시기에 들어와서는 청년남녀들중 학교에 들어가 공부하는 사람이 점점 많아지고 남녀간의 접촉이 많아짐에 따라 자유련애현상도 현저히 늘어났다.
3) 이 시기에 와서는 남녀의 사주로 궁합을 맞춰보고 혼사를 결정하는 현상이 점차 적어졌다.
4) 남자들의 상투머리는 점차 페지되고 하이칼라머리가 류행되였으며 결혼잔치때에 사모관대를 세내여 사용할수 있게 되여 사모관대차림을 하는 사람이 많아졌으며 양복에 넥타이를 매는 현상도 나타났다. 신발도 미투리가 적어지고 구두를 신기 시작하였다.
신부의 차림을 보면 큰머리 대신 낭자를 트는 현상이 많아지고 혼례복 옷소매에 한삼을 다는 습속이 없어졌으며 너울을 쓰는 현상이 새로 나타나고 버선에 미투리를 신던것이 갓신, 코신, 구두 같은 신발로 대체하였다.
5) 이 시기에는 관례와 계례가 점차 페기되였고 연변일대와 흑룡강성 목단강일대에서는 “친영”방식이 점차 보급되면서 혼례식에서 전안례만 치르고 큰상을 받는 현상이 점차 많아졌으며 신식혼례식이 나타나게 되였다. 신식혼례식에는 주로 다음과 같은 절차가 포괄된다.
(1) 신랑신부 입장.
(2) 신랑신부 례물 교환.(신랑은 신부에게 반지를, 신부는 신랑에게 시계나 만년필을 선사한다.)
(3) 래빈 축사.
(4) 친척 답사.
3. 혼인에서의 몇가지 특수형태
20세기 50년대 이전시기의 혼인풍속에는 일반적인 풍속과 다른 특수한 풍속이 있었는데 주로 아래와 같은것들이다.
1) 지복혼(指腹婚)
어린애가 아직 출생하기도전에 부모들이 어린애의 장래혼사를 결정하는것을 지복혼이라고 한다. 사이가 친근한 두집에서 녀주인이 모두 임신했을 때 앞으로 한집에서 아들을 낳고 한집에서 딸을 낳으면 두 아이를 부부로 정하도록 약속한다. 일단 이렇게 약속해 놓으면 두 아이가 세상에 태여나서 성장하는 과정에 그 어떤 일이 있더라도 절대 언약을 어기지 못한다. 청나라시기 선통원년(宣統元年, 1909년)에 편찬한 ≪장백회정록(長白滙征錄)≫의 조선족풍속에 관한 기재에 의하면 조선족은 “녀자가 임심하였을 때에 벌써 혼약을 맺는다.”고 하였다. 이로부터 20세기초까지 조선족가운데는 지복혼현상이 존재하였음을 알수 있다.
2) 민며느리를 두는 풍속
남의 집의 나이어린 녀자애를 데려다가 키워서 며느리로 삼는것을 민며느리라고 한다. 남자집에서 가난한 집의 녀자애를 10살 좌우에 데려다가 한집식구처럼 키운다. 녀자애가 커서 결혼할 나이가 되면 결혼잔치를 하기전에 녀자를 자기 집으로 보내여 일반적인 결혼방식으로 결혼잔치를 간단히 하여 녀자를 남자집으로 다시 데려온다. 이 시기에 생활이 매우 구차한 집들에서 이런 방식으로 자식을 결혼시켰다. 이러한 결혼방식은 그 유래가 아주 오래된것으로서 일찍 조선반도의 고대국가 동옥저(東沃沮)에 이런 풍속이 있었다고 ≪삼국지(三國志)≫에 기재되여있다.
3) 데릴사위를 얻는 풍속
남자가 녀자집에 사위로 들어가 녀자집의 성원으로 되는것을 데릴사위라 한다. 부부가 나이가 많고 아들이 없거나 아들의 나이가 아직 어려서 남성로동력이 결핍한 경우에 데릴사위를 얻는다. 데릴사위를 얻는 혼인형태에는 다음과 같은 두가지가 있다. 한가지는 혼약을 맺을 때 남자가 데릴사위로 들어갈것을 결정하고 결혼잔치를 한다.
결혼한후 신랑은 계속 신부집에 머물러있으면서 처가집 식구들과 함께 일하고 생활하며 처가 부모를 봉양하는 의무를 감당한다. 다른 한가지는 딸의 나이가 아직 어려서 결혼을 못할 경우에 먼저 한 청년남자와 혼약을 맺는다. 그러면 약혼한 남자가 그때로부터 녀자집에 들어가 처가집 식구들과 함께 일하고 생활하다가 딸애가 16~17세 정도 되면 결혼례식을 행하여 부부를 맺는다. 데릴사위를 삼는 풍속은 20세기 60년대 이후에도 개별적으로 존재하였다.
4) 과부동이기 풍속
녀자들은 한평생 남편을 한사람밖에 모시지 못한다는 유교관념으로 말미암아 조선왕조시기에 과부의 재가는 오래동안 엄금되였다. 19세기 후기에 이르러 과부의 재가가 점차 허용되기는 하였으나 과부가 재가하는것은 정조를 지키지 못하는 행실로 간주되여 여전히 여론의 비난을 받았다. 과부를 동여가는 혼인풍속은 바로 이러한 시대적배경하에서 산생된것이다.
과부가 주동적으로 재가하면 비난을 받지만 강박적으로 동여가게 되면 비난을 받지 않는다. 과부를 동여가는 혼인에는 두가지 경우가 있다. 한가지는 과부를 돌연습격하여 강박적으로 동여가는것이고 다른 한가지는 미리 과부와 상론하여 과부의 동의를 얻은후 과부를 강탈하는척하며 동여가는것이다. 과부를 동여가는 방식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홀아비집에서 힘이 센 남자를 몇명 청하여 밤에 소수레를 몰고 과부가 있는 마을로 간다. 소수레는 마을밖에 세워놓고 사람들만 과부집 안에 뛰여들어가 과부를 랍치한후 녀자와 남자가 서로 등을 맞대게 하여 업고 마을밖으로 도망친다. 마을밖에 이르러서는 소수레에 싣고 간다. 홀아비집에서는 음식을 푸짐히 마련해놓고 기다리다가 과부를 업어오면 그들에게 대접한다.
이런식으로 강탈해온 과부는 그가 동의했건 동의하지 않았건 일단 홀아비집에서 하루밤만 자면 과부의 시집에서는 그녀가 이미 남의 집 사람이 된것으로 인정하며 강탈자들에 대해서도 문책하지 않았다. 이러한 풍속은 20세기 40년대까지 존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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