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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평화가 담긴 조각공원
한태익
지난 6.1국제아동절오전에 나는 홀로 연변과기대조각공원을 찾았다. 동북아의 명주로 급부상하는 연길시지만 정부차원에서 투자하여 만든 조각공원은 하나도 없다.도시건설을 관장하는 정부에서 아직 하지 못한것을 과학기술대학에서 조각공원을 만들었으니 선견지명이 있다고 할수 있다. 도시의 이미지를 살려주는데는 다양한 조각상이 한몫하는줄로 알고 있다. .
과기대교문을 들어서 소나무아래로 아느새 걸어 들어 가노라면 커다란 자연석 두개에다 YUST조각공원 글자를 새긴것이 한눈에 환히 안겨 온다. 열린 입구로 들어가다 오른쪽켠에 눈길을 주면 돌로 만든 두 녀인조각상을 볼수 있다. 곁에 다가가 찬찬히 살펴 보면 선명한 대비를 이루는 두개의 녀인조각상이다. 한 녀인의 조각상은 가슴에 손을 얹고 머리우에 비둘기가 비상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는 모습인데 조각상에서 사랑과 평화를 갈구하는 녀인의 진지한 모습이 감명깊게 다가 온다. 다른 한 녀인조각상은 가슴에 뱀이 있고 머리에는 금단의 사과가 얹혀져 있다. 가슴의 뱀은 무엇을 상징하고 머리에 얹은 금단의 사과는 무엇을 상징하는지 조각예술을 잘 알지 못하는 나로서는 아리송하기만하다.그러다 비너스님의 댓글에서 그 의미를 알고 다시 조각공원을 찾았다. 알고 찾았을 때의 감수는 몰랐을때보다 확연이 달랐다.비너스님에 따르면 이 녀인의 조각상은 밀톤의 장편서사시 실락원에 대한 이야기를 묘사한거란다. 실락원>의 저자인 존 밀톤은 소년 시절에 창세기 1-3장까지 읽고 충격을받았다. 그는 이것을 한편의 멋진 소설로 쓰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였다. 이것이 소년 밀톤의 꿈이되였다. 그러나 그는 좀처럼 자신의 꿈을 펼칠수 있는 마땅한 기회를 얻지 못햇다. 그는 어린 시절에 불우한 소년이었고 어른이 되어서는 정치 활동을 하다가 감옥에 갇히게 되였다.
그러나 그가 감옥에 갇혔을 때, 소년 시절의 찬란한 꿈이 부활하기 시작했다. 그는 감옥에 들어가 있는 자신을 념려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이 감옥이야말로 내 시어와 상상력을 키울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장소이다.>>
여기에서 그는 소년 시절에 품었던 <실락원>의 찬란한 꿈을 붓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이것이 위대한 장편서사시<실락원>의 탄생 동기이다.
녀인의 가슴에 있는 뱀은 이브를 유혹하기 위해 지옥에서 나온 사탄이 변한 모습이고 녀인이 사과를 머리에 이고 있는 모습은 금단인 선악과를 훔쳐먹고 락원에서 태초의 인간세상에 쫓겨난 이브의 모습이다. 실락원을 읽어보신 분이라면 인차 이 내용을 머리에 떠오를수 있다.과기대서 이 조각상을 세우게 된거는 인류의 기원을 설명하기위해서라 생각된다.또한 과기대가 에덴동산처럼 아름다운곳임을 표현한것이기도 하다. 소망과 평화 그리고 꿈과 사랑이 숨쉬는 배움의 전당임을 표현한것이라고 생각된다. 우리 조선민족은 아담과 이브가 아닌 웅녀를 태초의 어머니로 묘사하고 있지만 말이다.
두 녀인의 조각상이 있는 곳에서 조금 나와 조각공원내에 낸 오솔길을 건너 봉분같은 자그마한 언덕에 이르면 부부와 애조각상이 정답게 사람들의 눈길을 끈다. 다정한 부부가 나란히 걷고 있는데 아이는 엄마품에 안기여 행복해하는 모습이 정겹기만 하다. 아이를 안은 어머니 얼굴에는 모정의 미소가 찰랑찰랑 넘친다. 아이와 함께 하는 부부의 모습은 그대로 사랑이 꽃피는 화목한 가정을 대변해주고있다. 가정은 사회의 뿌리이고 꽃이며 열매이다. 그아래 우리조선족의 이민사를 담은 대형나무조형물이 눈길을 끌었다. 피뜻 보아도 알수 잇는 삼각조형물이지만 천년자란 아름드리 나무 세개를 삼각으로 세우고 거기에 녹쓴 꺽쇠를 박은것이 상징하는 의미가 여사롭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멀 상징하는지 나로서는 몰라 고개를 갸우뚱하는데 그 해답을 연변과기대 교양학부 박영자교수가 친절히 안내하며 알려 주었다. 세그루 아름드리고목나무로 된 삼각조형은 조선족이민사의 쓰라린 상처와 아픔을 반영한것이라 한다. 삼각은 건축학적으로 볼 때 온정성이 매우 좋다고 한다. 그래서 상처를 치유하고 굴기하는 조선족의 응집력을 반영하기도 했단다.
그아래 우리 조선족들이 연변에 와 이 땅을 개척할 때 쓰던 쟁기를 주체로 하여 꽉지. 낫,곡갱이,살깍재 두개,차재 등 농기구를 원모습처럼 크게 재현하여 쟁기우에다 걸쳐 놓은것이 우리 선조들의 농경생활의 한 모습을 생생하게 재현하였다.
조각공원의 중심에는 YST라고 쓴 오석기단에 립체조각석조물이 에술적 상징으로 과기대의 어제 오늘 그리고 미래를 반영해주고 있었다. 조각물에서 북쪽으로 좀 가니 건축학부의 학생들이 설계하고 지었다는 그림같은 축소형초가집이 한채 댕그라니 자리하고있다.길이 2.5메터,너비 1.5메터 가량되는 축소형초가집은 우리 선조들이 살아 오던 집모습 그대로였다. 나도 어릴때 저런 집에서 태여났고 동년시절을 보냈다. 장가갈 때도 저런 집에서 장가가고 말이다. 우리 애들에게는 잊혀져 가고 잇는 초가집이지만 보면 볼수록 정겹게 안겨온다.초가집마당에서 물레방아 도는 모습을 재현한 곳을 내려다 보다 천천히 물레방아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물방아도는 내력 >>노래가 떠오른다.벼슬도 싫다만은 명예도 싫어/정든 땅 언덕위에 초가집 짓고/낮이면 밭에 나가 길쌈을 하고/밤이면 사랑방에 새끼 꼬면서/새들이 우는 속을 알아 보련다/
나의 집은 작은 도랑물이 흐르는 옆에 있엇다. 거기에 다리 놓이고 물레 방아있어 어릴적에 그곳에서 해종일 놀던 기억이 난다. 달뜨는 저녘에 물레방아 도는가운데 구슬픈 어머니의 사향가가 들려 오는것 같다. 내가살던 고향과 어머님을 떠올리다 매돌을 쌓아 올린 조각물을 찾아 자리를 옮겻다.우리 선조들이 즐겨 쓰던 매돌 20개를 차곡차곡 쌓아 올린 꼭대기에 방아호박을 놓은것이 조선족의 민족특색을 가장 잘 반영한 조형물이였다. 력사학자들은 고고발굴때 방아호박만 발굴되여 나와도 우리 선조들이 거주하던 곳이라 단정한단다. 선조들이 애용하던 물건이 그대로 아름다운 조형물로 될수 있다는것을 조각공원을 돌아보며 예술가들의 창작을 통해 잘 알았다. 그 언제인가는 아들딸과 함께 연변과기대조각공원에 오고 싶다.
토요일만 되면 산이 그리워난다
3주채 병상에 있을라니 산이 그리워 못살겠다.
자신을 위로삼아 옛날 사진들을 둘춰본다.
아직도 정리하지못한 사진들이 많으니 그것또한 별 재미이다.
전번 마반산산행시 과기대를 슬쩍 지나면서 찍은 사진이다.
이렇게 사진으로보니 언제 저렇게 멋졌나 생각되였다.
하기야 학교정원치고 가장 멋진 풍경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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