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창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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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여년전 가야국은 불교나라였다
2014년 01월 22일 15시 17분  조회:3255  추천:25  작성자: 허창렬
2000여년전 가야국은 부처님의 자비로 세워진 불교나라였다
       
 잡문       허인
 
가야산(伽耶山)
가야성(伽耶城)
보리수(菩提树)나무아래
칠칠에
사십구
간고한 명상끝에서야
마침내
소중한 그 깨달음을
얻으시고
 
구시나(拘尸那)성외곽
싸라나무(莎罗树)숲에서
(이하 생략…)
 
필자의 졸작 <<명상55>>중의 첫시구절이다. 불교에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모두 알수 있는 사실 ㅡ2600여년전 석가모니부처님께서 6년간의 고행끝에 드디여 양몰이처녀의 공양을 받으시며 가야산 가야성 보리수나무아래에서 사투와 같은 사십구일간의 명상(冥想)끝에서야 비로소 깨달음을 얻으시고 그로부터 장장45년간 넓고 넓은 인도(구인도ㅡ지금의 네팔 , 파키스탄 ,방글라데슈 ,모두 포함) 의 방방곡곡을 돌면서  보도중생과 함께 불교를 널리 전파하셨다는 사실을 ㅡ 일전 인터넷에 올라 력사스페셜을 관람하던 중 섬나라인 일본이 후안무치하게도 2000여년전 가야국을 <<임나일본부>>로 추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다 . 억지라도 이런 생억지가 또 어디에 있겠는가 ? 그야말로 무덤속의 김수로왕이 벌떡 일어나 호통을 칠만한 코맨틱한 일이 아니겠는가 ? 공교롭게도 이 세상엔 가야국은 오직 하나ㅡ가야산은 두곳뿐ㅡ 지금의 네팔경내에 있음직한 가야산과 한국의 가야산 ㅡ 우연인가? 그렇치를 않다.
 
그럼 여기서 양천 허씨(阳川许氏)의 략력을 잠깐 보자 .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에서 출판한 <<조선민족의 성씨와 본>>에서는 이렇게 적고 있다 . <<가야 6부락을 통일한 김수로왕이 어느 날 해변가에 나갔다가 우연히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온 인도 허왕후와 상봉 , 혼례후 그들에게는 여러 자식이 있었는데 장자는 김수로왕의 뒤를 이어 김해 김씨로, 차자들은 머나 먼 타국에서 온 허왕후의 성을 이어 허씨 성을 하사받았다>> 는 내용이다 . 대한민국 허씨종친회에 문의하여 봐도 허씨의 시조는 틀림없이 인도의 허왕후로 되여 있다 .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점은 허왕후이다. 왜서 김수로왕이 해변가에서 만난 사람이 인도의 일개 평범한 보통 녀인이 아닌 허왕후라고 분명하게 적고 있는가이다. 혹자는 혹시 아무런 력사적 근거가 없는 전설이 아닌가고 의문점을 제기할수도 있지만 그렇치도 않다 . 그것은 자칫하면 허씨의 시조를 의심하고 우롱하는것과 조금도 다를바가 없기때문이다 . 례를 들면 박씨의 시조 박혁거세가 우물에서 태여났고 김씨의 시조 김알지가 알에서 태여났다는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인것처럼처럼 봉건사회적인 신격미화가 아니였을가 생각해본다 .


김수로왕
 
공원 42년, 락동강을 위주로 지금 한국의 부산, 김해일대에 세워진 가야국은 종교 , 문화 , 군사력이 제법 막강한 련합국가ㅡ 일설에 허왕후가 인도에서 건너올때 600여명의 수종과 측근들을 데리고 왔으며 그들이 조선반도 남해안 일대에 불교교리와 농경문화를 보급하는데 마멸할수 없이 크나 큰 공적을 남겼다고 한다 . 이로부터 대담하게 추축해볼수 있는바 가야국은 인도의 허왕후가 데리고 온 600여명의 추종자들과 당지의 토착민이 통혼,  련합하여 부처님의 자비로 반도땅에 <<가야국>>이 설립한것이  분명하다 . 썩 훗날 중국의 당태종이 량국의 화친을 도모하고저 문성공주를 송짠감보에게 시집을 보냈을때 문성공주가 이끌고 간 천여명의 측근과 추종자들이 씨앗이며 농경문화를 토번 , 즉 지금의 서장지역에 널리 보급한것과 똑 같은 실례라고 보면 쉽사리 리해가 될 부분이다 . 근300여년간 존속한 가야국 , 오늘날 누구나 잘 알고 있는 가야금<<伽耶琴>>이 곧바로 가야국말기에 제조된다것이라고 하면 또한 어느 누구라도 쉽게 리해가 되리라 믿는다 . 후에 가야국(6가야ㅡ금관가야, 대 가야 ,성산가야, 아라가야 ,고녕가야 , 소가야) 은 신라에 의해 통합된다 . 드라마 <<선덕녀왕>>을 보신 분들은 모두 다 알고 있겠지만 김유신이 바로 가야국 출신  ㅡ 그후 천년의 력사를 자랑하는 신라는 법흥왕 즉위시기( 공원514년)에 불교가 엄연히 국교(国教)인 통일국가이다 .당태종 리세민시기보다도 100년을 썩 앞선 일이다. 중국에서 나서 자란 필자이지만 어느 조대 , 어느 력사기록에도 불교가 국교였다는 기록은 아예 없는것으로 안다 . 이것 또한 그냥 우연일가?
 
중국전임불교협회 회장 조박초(赵朴初)의 말에 따르면 불교가 중국대륙에 처음으로 전해지기는 동한영평년간 한명제때(东汉永平年间汉明帝) , 한명제가 어느 날 꿈속에서 온몸에 금칠을 한 사람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날아오는 괴이한 꿈을 꾸고서 하도 의아하게 생각되여 뭇신하들에게 이야기하였더니 傅奕라는 대신이 <<듣건대 서역에 이미 득도하여 하늘을 새처럼 날아다니며 온몸에 태양의 금빛이 찬란한 부처님이 계신다고 하시던데 페하께서 보신것이 부처님이 분명합니다 >> 조만간 이 나라에 현인이 나타나고 경사스러운 일이 있을것이라고 하자 한명제가 대월씨를 파견하여 <<42장경>>을 베껴오게하였으며 석실에 보관, 대부분의 주장은 한명제(68년 ㅡ 지금으로부터 약 1980여년전 ㅡ)에 불교가 대륙에 들어왔으며 그 근거를 락양 백마사에두고있다.(东汉永平年间汉明帝夜梦金人,问何臣,傅奕答;听说西方有号称为佛的得道者.能飞行虚空,身有日光.帝所梦见的就是佛 )
 
가야국 허왕후와 김수로왕의 통혼보다 거의 20여년 늦어진 기록이다 . 어찌됐건 서유기를 읽어본 사람이면 누구나 다 알수가 있는 사실 진정 대륙에 불교가 성행되기는 당태종시기ㅡ정관3년(贞观3年)에 현장법사가 당태종의 명으로 불경을 얻기 위하여 서천으로 떠나면서부터였다 . 그로부터 80년후인 천원 719년 (天元719年) 당고종시기 , 신라의 스물네살나는 왕자 김교각(金乔觉)이 신견 선청(善听)을 데리고 안휘 구화산에 정착, 불교에 전념 , 육신불(肉身佛)로 처음에는 유명교교주(幽冥教教主)라고 불리웠다가 후에 불교 4대보살중의 한사람인 지장왕보살(低藏王菩萨)로 된다.  불교에 조금만 더 관심이 있고 연구가 깊은 분들이라면 누구라도 쉽게 발견할수 있는 사실, 불교에서 왕자출신은 오직 두사람 , 불교를 창설하신 석가모니부처님과 지장와보살 김교각이다 . 이것 또한 우연중의 우연일가 ?
 
그럼 여기서 잠시 중국의 불교4대성지(四大圣地)를 살펴보자 . 문수보살(文殊菩萨)의 도장(道场)인 사천(四川) 아미산(峨眉山), 관세음보살(观世音菩萨)의 절강(浙江) 보타산(菩陀山), 산서(山西) 보현보살(普贤菩萨)의 오대산(五台山), 지장왕보살(地藏王菩萨)의 안휘 (安徽)구화산(九华山)ㅡ 이렇듯 아미산 , 보타산, 오대산에는 오늘까지 이러저러한 여러갈래 전설들이 많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긴 하지만 필자가 알건대 구화산의 지장왕보살님처럼 실존인물은 아예 없는줄로 안다 .  이것 또한 그냥 우연이라고만 할수 있을가? 아이러니하게도 불교가 중국에서 한국으로 전파되였다는것은 허씨략력이나 가야국의 김수로왕과 허황후의 통혼, ㅡ1300여년전 신라의 왕자 김교각 ㅡ지장왕보살이 중국에서 이룬 불교적 성과를 조명해보나 아무런 근거가 없는것이며 또한 신라의 왕자 김교각은 불교를 배우기 위하여 당나라에 들어 간것이 아니라 보도중생을 목적으로 구화산에 정착한것이 분명하다 . 일설에 그가 민공(闵公)에게서 구화산을 얻기 위하여 가사만큼한 땅을 요구, 민공의 동의를 얻고은 후 몸에 걸치고 있던 가사를 하늘에 높이 날려 옹근 구화산을 몽땅 뒤덮게 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물론 불교신도들은 신통력같은것을 과시하거나 뽐내지도 않지만 얼마나 큰 법력인가? 흔히 잘 알고있겠지만 고승(高僧)이나 훌륭한 고덕(高德)이 아니고서는 어림도 없는 일이라고 생각된다
 
  필자는 불교신도이며 일개 문학인일뿐 력사학가도 고고학가도 아니다 .오직 진실한 력사를 알고싶고 제대로 된 진실한 력사를 후대들에게 말하고 싶을뿐이다 따지고보면 우리민족의 력사가 이처럼 많이 오전되고 또한 오보가 속출되고 있는것은 타민족의 끊임없는 침입과 침략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진실한 력사자료들이  훼손되였거나 훼멸되였으며 빼앗겼기때문이라고 생각된다 . 2000여년전 ㅡ허황후가 배를 타고 진정 가야국으로 들어온것이 분명하다면 2000여년전에 벌써 고인도와 가야국은 이미 해상통로가 열렸으며 교류가 활발하였다고 볼수밖에 없질 않겠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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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작성자 : 허인
날자:2014-01-23 12:11:06
감사합니다. 보잘것없는 저의 글을 높이 평가해주셔서ㅡ십여년을 문학과는 쭉 담을 쌓고 살아오다가 무언가 가장 쓰고싶은것을 쓰다보니 허씨략력과 관련이 깊은 가야국 시조 김수로왕과 허왕후의 이야기였습니다. 중앙일보나 조선일보에는 여직 투고해본적이 없고 련계주소나 이메일같은것을 잘 모르고 있습니다 .하여간 귀띔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 새해에 복 많이 받으시고 내내 옥체건강하세요
1   작성자 : 참 좋은 글
날자:2014-01-22 16:02:30
참으로 좋은 글입니다. 한국의 주요 신문사에서는 이메일로 기사투고를 받으며 원하면 티비출연도 가능합니다. 예를 들면 조선 중앙 동아 신문사에 이메일로 투고를 하고 또 "쾌도난마"에 이메일로 선생님의 의견을 밝힐 수 있고 프로에 출연도 가능할 수 있습니다. 이 좋은 선생님의 글이 소수만 읽는 이 곳에만 머물러 있기엔 아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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