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창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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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검려기궁【黔驴技穷】 댓글:  조회:1780  추천:1  2016-09-19
검려기궁【黔驴技穷】 허인    검려기궁【黔驴技穷】이라는 고사성어가 하나 있다. 검주에 사는 당나귀의 재주가 다했다는 뜻으로 쥐꼬리만한 재간마저 바닥이 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옛날) 나귀가 없던 귀주성(貴州省)에 누군가가 외지에서 당나귀를 데려와 산에 매 놓았는데 호랑이가 그 소리나 몸체가 굉장한것을 보고 감히 달려들지 못했다고 한다. 결국은 뒷발질 하는 한가지 재주밖에 없음을 간파하고 손 쉽게 잡아 먹었다는 고사에서 유래된것인데 "당. 류종원'류하동집.검지려'"에 (唐・柳宗元《柳河东集・黔之驴》)] 실려 있다. 비슷한 말로 또 검려지기【黔驴之技】가 하나 더 있는데 즉 쥐꼬리만한 재주나 보잘것없는 꾀, 혹은 하찮은 재주를 이르는 말이다. 이 말은 꼭 나를 두고 하는 말인것 같아 공연히 허탈할때가 많다. 모 신문사에서 몇년간 기자, 편집으로 사업하다가 소심하고 위대한 분의 눈밖에 나 쫓겨난 후 , 8년간 한국 합자기업에서 통역, 부총경리로 사업, 그것마저 여의치 않아 때려 치우고 글밖에 모르는 내가 글쎄 큰돈 벌어보겠다고 어벌차게 한족친구와 함께 석탄장사에 50여만원을 투자, 그 손실을 공정쪽에서 다시 만회 해보려고 청도, 북경, 내몽고 전국 각지를 눈 먼 소경이 바람따라 가듯이 동분서주ㅡ 결과는 더욱 참혹했다. 족 떼우고 불 떼 운다더니 허울 좋게 좋은 사람이라는 이름만 번지르르ㅡ 그것마저 요즘은 어처구니없이 바보로 더 잘 통한다. 그래서 나는 가끔 난 정말 바보가 아닐가 의심해보기도 한다. 헌데 빚 진놈은 발 편 잠 못 자도 떼운 놈은 오히려 발 편잠을 잘수 있다는 말처럼 다 잊고 훌훌 털어버리니 속이 편안함은 또  무엇때문일가?     검루는 (黔婁) 전국시대 제(齊)나라의 은사(隱士)이다. 제나라의 유명한 도가학자이기도 하다 . 저서로 "검루자"가 있지만 이미 실전, 일찍  로국공이 재상으로 청했지만 단번에 거절, 제위왕(齐威王)이 다시금 국사로 봉했지만 역시 거절,  후에 제나라의 남산, 즉 현재의 제남 천불산에 은거하여 평생 산을 한번도 내려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한 그에게서 제일 배우고 싶은것이 불의의 세상에 서슴없이 등 돌리고 제 갈길을 꿋꿋이 걸어갈수 있었던 그런 용기이다. 검루야 워낙 유명한 학자니깐 그 절개 대쪽 같았겠지만 잡풀같은 인생을 사는 나는 이제는 누군가의 구두발에 짓밟히지만 않아도 맑은 하늘이 푸르청청 보일것만 같다.    많은 사람들은 동곽선생과 뱀 이야기 하면 인츰 알겠지만 "중산랑"【中山狼】이라고 하면 아마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인것 같다.명나라  마중석(馬中錫)의 《동전집・중산랑전(東田集·中山狼傳)》에 있는 말인데 전국 시대에 조간자(趙簡子)가 중산(中山)에서 늑대 한 마리를 쏘았는데 늑대가 도망가는 도중에 동곽(東郭)이 구해 주자 오히려 동곽(東郭)을 잡아먹으려고 했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말이다. 배은망덕한 자, 은혜를 원수로 갚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오십여성상을 제딴에는 충직하게 살아왔노라 자부도 해왔지만 나는 남에게 도대체 어떤 존재일가ㅡ여직껏 참답게 생각해본적이 적은것 같다. 누구나 살며 생각하며 지나온 로정들을 돌이켜 보노라면 진정 인간답게 사람답게 살았다고 떳떳이  말할 수 있을지 가슴에 두손을 얹고 량심적으로 곰곰히 생각해봐야 할때라고 생각한다.
9    일본인 시각에서 바라 본 중국인과 한국인 댓글:  조회:2370  추천:2  2016-07-19
일본인 시각에서 바라 본 중국인과 한국인    중국 고사성어에 이런 구절이 하나 있다.  "以铜为镜,可以正衣冠;以古为镜,可以知兴衰;以人为镜,可以明得失。" 뜻을 풀이해 보면 동을 거울로 삼으면 옷차림을 옳바로 할수가 있고 과거를 거울로 삼으면 흥망성쇠를 알수가 있고 사람을 거울로 삼으면 득실을 가늠할수 있다)로 해석할수가 있다. 그럼 일본인 시각에서 본 중국인과 한국인의  모습에서 우리는 구경 무엇을 깨우칠수가 있는가?   일본 2ch론단(日本2ch论坛)에서는 경상적으로 중국인과 한국인의 구별점을 열의하고 있는데 아래 몇가지 그들의 관점중ㅡ 어느 대목에서 우리는 어이없어 웃을수가 있고  또한 어느 대목에서 얼굴이 붉어질것 같은가? 일본인의 시각에 비춰진 중국인과 한국인의 닮은듯이 서로 다른 모습을 그럼 우리 함께 여기서 살펴보며 가도록 하자! 1,중국인은 경제범죄가 비교적 많고 한국인은 성범죄가 비교적 많다. 2, 중국인은 필요 없을 때면 범죄를 저지르지 않고 한국인은 필요 없을 때도 범죄를 저지른다. 3, 중국인은 3k의 사업일지라도 서슴없이 하고 한국인은 아예 하려고 하지 않는다 (3k란 힘들고 더럽고 위험한것을 가르킴) 4,중국인은 검소하고 소박하고 불편한 생활일지라도 별로 개의치 않고 한국인은 전 재산을 토막 내서라도 호화롭고 사치한 생활을 하려 한다. 5, 중국인들은 유럽보다 더욱 남녀평등사회에 접근했고 한국은 극단적인 남존녀비사회이다. 6, 중국인은 좌절을 받을수록 용감해지고 한국인은 그와 정 반대이다. 7,중국인은 교활하고 한국인은 단순하고 바보스럽다 8, 중국인은 앞에서 직접 누구를 욕하거나 욕을 먹어도 성을 내지 않고 한국인은 자신이 남을 훈계하는데는 매우 관대하지만 남이 자신의 앞에서 뭐라하면 몹시 성을 낸다. 9, 일단 증거를 찾아 내밀면 중국인은 무조건 승인한다. 허나 한국인은 증거를 내밀어도 죽어도 승인하지 않는다. 10,중국인은 자신과 타인의 무지에 대해 관용적이다. 한국인은 자신의 무지에 대해서만 언제나 관용적이다. 11,중국의 백성들은 거의 성형을 하지 않는다. 간혹 스타들이 성형에 참여할뿐, 허나 한국은 전 국민이 성형을 열애, 심지어 대통령마저 례외가 아니여서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도 한다. 12,중국인은 모방으로 생산한 물품(山寨品)에 대하여 아무런 꺼리낌없이 승인한다. 한국인은 짜가 상품을 무조건 한국산이라고 우기고 판매시 짜가 임을 계속 속인다. 13,중국인은 이외로 쉽게 현실을 접수한다. 한국인은 자신의 불만스러운 현실을 절대로 접수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현실을 감추고 포장하기도ㅡ 하여 해외의 중국인은 노벨상도 받을수 있지만 한국인은 심지어 해외 이주민까지 포함하여 단 한 사람도 노벨상을 받은적이 없다. 14,중국인은 일본에서도 떳떳이 자기 이름을 사용한다. 일본사람 인척하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 한국사람은 일본에서 저절로 한국 이름을 감추고 일본 이름을 사용하며 아예 일본사람인척 한다. 그러다도 십여년이 지나면 핍박에 의하여 일본이름을 사용하였다고 거잣말 하며 사과와 배상을 요구한다. 15, 중국인은 비록 온 세상 사람들이 모두 싫어하고 바보 취급하지만 뜻밖으로 저주하지는 않는다. 한국인은 온 세상 사람들이 모두 싫어하고 바보취급을 하고 또한 온 세상 사람들의 미움의 대상이다. 16,중국인은 기실 매우 친일적이다. 정치상에서만 반일적일뿐, ㅡ반일감정은 처세지술에 불과하지 않다. 허나 한국인들은 정치상에서뿐만이 아니라 아주 철저한 반일주의 완고파이다. 17, 재일 중국인은 대부분이 친일적이고 일본국적에 가입할것을 희망한다. 재일 한국인은 절대 부분이 반일적이며 일본국적에 누구나 가입하려 하질 않는다. 18,중국에서 상급이 녀자이여서 사직하려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한국에서는 상급이 녀성으로 바뀌우면 사직하는 사람이 끊임없이 나타난다.   이상으로 일본인 시각에서 바라본 중국인과 한국인에서 우리 모두 살펴 볼수 있는것은 일본인은 중국인을 조롱도 하고 때로는 바보취급도 하지만 무시할수 없는 그 엄청난 존재감에 다소 구걸적인 낮은 자세임을 알수가 있고 한국인에 대해서는 저주하고 더우기 무시하고픈 라이벌 상대임을 알수가 있다. 몰락해가는 일본이 언제까지 군국주의 명목으로 타인앞에 자존심을 내세울지는 세인이 조금 더 주시해봐야 할 긴 과정인것 같다. 료녕신문에서
8    오직 당나귀만이 아무런 말이 없었다 댓글:  조회:1341  추천:3  2016-06-21
오직 당나귀만이 아무런 말이 없었다    십여년전, 필자가 모 신문사에서 편집 기자로 있을 때였다. 어느 날 점심식사를 마친후 그 당시 사회면 담당편집이였던 운룡선생이 나의 손에 원고 한편을 쥐여주며 한번 읽어보라면서 혼자 키득키득 계속 웃는것이였다. 점잖은 분이 실 없는 장난을 할리 만무하고 뭔가 수상쩍은 나는 조심스레 원고를 받아 들고 읽기 시작하였다. 그때 길림성 안도현 모 통신원이 써보낸 원고 제목이 바로 (오직 당나귀만이 아무런 말이 없었다)였다. 그 사연인즉 이러하다.   개혁개방 이후, 대부분 젊은이들이 대도시로 외국으로 떠나가다 보니 한산한 시골마을의 수많은 홀애비, 늙은 총각이 짝을 짓지 못하고 장가 들기 어려웠던것은 결코 어제 오늘의 일만이 아니였다. 길림성 모 조선족촌에서 발생한 일이다. 조금 외딴 곳에 떨어져 사는 ***씨는 집안의 유일한  재산인 비술나무 아래에 매여놓은 당나귀가 하루 하루 여위여가는것을 발견하게 되였다. 원인을 알수 없어 부쩍 속을 태우던 그가 어느 날 저녁무렵 여물을 주러 나갔다가 한마을의 한 로총각이 제 집 당나귀와 흘레하는 모습을 벌견하게 되였다. 면바로 목덜미 잡힌 로총각은 손이야 발이야 빌었고 당시 당나귀가 부쩍 여윈것이 로총각때문이라고 판단한 ***씨는 법에 송사를 걸었고 법원에서는 이런 경우 어떻게 판결을 내려야 한다는 우리 나라 법률상 명확한 조목이 아직 없어 결과는 흐지부지하게 되여 내용이 ( 오직 당나귀만이 아무런 말이 없었다 )였다.    지금 생각해봐도 어처구니 없어 저절로 웃음이 터져 나오고 뭔가 찝찝해 나는 그런 기분이다.  헌데 그런 기분을 나는 이 며칠사이 몇번 더 실감하게 되였다. 지난 6월 12일, 진황도 올림픽경기장에서 있은 하북 화하행복팀과 연변 부덕팀간의 축구 경기 중 명백한 오프사이드가 심판의 오판으로 연변부덕팀이 한꼴을 먹게 되였고 결국 중국축구협회가 연변축구 구락부와 수많은 연변팬들에게 사과,  이제는 좀 괜찮아 지려나 하니 지난 6월18일, 잔류를 목표으로 매번 경기마다 몸부림치는 연변부덕팀과 대부분 선수들이 우리 나라 국가대표 임원,  중국프로 축구계의 진정한 왕자로 군림한 광주 헝다팀과의 경기에서 투혼을 발휘한 연변팀이 줄곧 1:0으로 앞 선 가운데 경기종료 88여분만에 연변부덕팀의 오영춘선수가 부상으로 쓰러져 있는 가운데 헝다팀 우한초선수가 꼴을 넣어 동점이 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또다시 재 발생하였다.     사후 몇백명 연변축구팬들이 축구장밖에서 심판에게 강력히 항의ㅡ물론 그중에는 비신사적인 언어들이 포함돼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는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그야말로 각양각색이다. 제 편이 쓰러져 있는데 연변팀이  공을 장외로 쳐내질 않았기에 심판의 잘못이 아니라는 둥, 무방비 상태에서 차 넣은 꼴이 세계적인 수준이라는둥, 시간을 끌기 위하여 오영춘선수가 일부로 넘어져 시간을 벌려다가 어이없이 당했다는 둥, 벼라별 억측들이 란무하고 있는듯 하다. 필자가 보건대 장내에 운동원이 쓰러져 있다면 그 어떤 상황에서도 경기를 중단시키고 운동원의 건강상태를 먼저 살피는것이야 말로 진정 합격적인 심판의 모습이 아닐가 생각해본다.     사기 회음후렬전(史记淮阴侯列传)에 이런 구절이 하나 있다。(智者千虑 必有一失, 愚者千虑 必有一得)뜻인즉ㅡ 는것이다. 일찍 성현들은 안간의 성품을 상ㅡ중ㅡ하ㅡ 세 부류로 나눠놓았다. 례로 그 해석을 꼼꼼히 살펴보면 하등인(下等人)은 남이 즐거워 하는 모습을 보게 되면 질투심이 생겨 배 아파 하고 중등인은 자신이 어려울때 곤경에서 벗어나려고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모지름을 쓰고 상등인은 남에게 즐거운 일이 생기면 마치 제 일인것처럼 기뻐한다는 뜻이다. 결국 이 모든것을 따지고 보면 각근한 인간성이야 말로 모든것을 지배할수 있는 강력한 동력이 될수 있는 것으로 해석 할수가 있다. 오직 당나귀만이 아무런 말이 없다.더는 어처구니 없는 일들이 우리들의 신변에서 일어나지 말기를 바란다.
7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아무런 리유가 필요하질 않다 댓글:  조회:1904  추천:3  2015-12-31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아무런 리유가 필요하질 않다          한족 속담에 (개는 배불리 먹이면 안되고 사람은 너무 잘 대해줘도 안된다. 왜냐하면 모두 원숭이가 변한것이기때문이다..." 狗不能喂太饱,人不能对太好,因为都是猴变的……")는 말이 있다. 얼핏 보면 모순이 되고 누구나 조금은 거부감이 들듯도 하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노라면 그 철리적인 함의에 저도몰래 고개를 끄떡이게 된다 . 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는 귀천이 따로 없다. 잘 나고 못 생기고, 한평생 잘 먹고 잘 살아도, 못 먹고 못 살아도 저마다 각자의 삶을 열심히 살아가면서 운명이라는 이름앞에 사랑과 근심의 멍에를 숙명적으로 자연스레 받아드리고 있을뿐이다. 논어(论语)에서 공자는 (성상근야, 습상원야"性相近也,习相远也")라고 말한적이 있다. 뜻인즉 이 세상에 갓 태여난 모든 사람은 그 본성이 선량하고 심성이 맑기가 모두 비슷하지만 살아가노라면 각 자가 처한 환경이나 그 위치에 따라 부동한 영향과 많은 변화를 겪게 되여 사람마다 각자 생활습성에 많은 차이점을 보이게 된다는 말이다.    우리 속담에도 (참을수록 머리꼭데기에 올라 앉아 똥까지 싸려 든다)는 구절이 있다. 그리하여 성인 공자도 (도청도설, 덕지기야"道听涂说,德之弃也")라는 한마디를 논어에 더 덧붙이질 않았던가? 뜻인즉 (길에서 들은 말을 도처에 퍼뜨리는것은 자신의 덕행에 침을 뱉고 량심을 버리는것과 같다)는 말이다 여기서 재미나는 이야기 하나쯤 짚고 넘어가야 할것 같다. 십년전 필자가 한국부동산회사에서 부총경리로 있었을때 식사후면 전신 맛사지를 무척 즐기는 한국손님들을 배동하여 맛사지방을 하루에도 몇번씩 드나든적이 있다. 마침 그 맛사지 방 사장역시 흑룡강 치이여서 더욱 무랍없었다.    헌데 그 익숙함이 문제였다고나 할가? 허물없이 다니다보니 (ㅡ지금 손님이 너무 많아 조금 기다려야 할것 같아요. 오빠들은 손님이 아니잖아요ㅡ)로부터 시작하여 팁에 더욱 관심을 두었으며 팁이 없는 날이면 안마가 아닌 입으로 재잘재잘 시간을 에떼우기가 일상이였다.   2년간 부지런히 그 집 매상을 올려주다가 한국손님들의 제의로 그 집으로는 아예 발길을 딱 끊게 되였다. 그런데 몇년이 지난 어느날 우연히 큰길에서 면바로 마주친 그 집 아가씨가 두눈이 휘둥그레 갖고 (오빠, 죽지 않았었어요? 소문에 오빠 죽은지 오래다고 하던데ㅡ 이게 웬일이세요?)하면서 몹시 놀라워 하는것이였다.    세상인심은 이렇게 산 사람을 한꺼번에 입으로 죽이기도 한다. 살아 있는 내가 누군가의 부담으로 된것일가? 왜서 아직 살아 있는 나의 존재를 그들은 죽음으로까지 련상이 하였을가? 부처님은 륜회의 근원을 곧 인연때문이라고도 하였다. 헌데 인연이 없는 삶은 죽음 그자체와도 같은 삶이 분명하며 인정이 없는 인생은 무덤같은 삶임이 분명하다. 그 무덤속위에서 우리는 매일 촛불을 켜들고 춤을 추고 있고, 또한 봄이 오면 파릇파릇 새싹이 돋아나고 나무며 꽃으로 오래 남고싶듯이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는 결코 아무런 리유조차 필요 없다.그렇게 리유조차 없는 삶을  나름대로 살아가면서 바람으로 구름으로 사노라면 마침내다 누군가의 그림이 되고 풍경이 되는것이 우리네 길고도 짧은 인생이 아닐가?    나는 매일 하루 또 하루 좋은이, 나쁜이, 싱거운 이, 지랄같이 성격이 너무 괴퍅한 이들괴 더불어 살아가는 내가 너무 대견스럽다.
6    살아보니 저절로 욕이 나가더라 댓글:  조회:2707  추천:2  2015-12-25
   살아보니 저절로 욕이 나가더라.     (입을 다물라. 그 입만 굳게 닫으면 수행은 이미 절반쯤은 완성한 셈이다"闭上你的嘴,修行已经成功了一半") 얼마전 안휘성 구화산에서 60여년간 수행을 견지해온 106세에 나는 한 비구니의 진언을 읽고 깨닫는바가 있어 이글을 쓴다. 입 간수를 제대로 못하면 누구나 그 봉변을 면키 어렵다.    20여년전 백팔십여호 되는 우리 조선족동네에는 한족들도 네호 섞여 살고 있었는데 그들은 장(张)가, 멍(孟)가, 쟈(贾)가, 관(关)가였다. 관씨는 본계 어디선가 이주해온 목공이였고 장가와 멍가네는 우리 마을 옆 큰 늪에다 진주조개를 사양하면서 외지에서 기술자로 모셔온 사람들이였으며 쟈가는 몇십마리 되는 되는 양돈장의 사육원이였다.    관씨나 장씨, 멍씨는 지금 생각해봐도 말쑤 적고 점잖은 편이였지만 마을로인들이 흔히 (짜개)라고 업수이 여기는 쟈씨는 입만 열면 상욕이 봇물처럼 터져나오는 그런 사람이였다. 제 자식들을 욕해도 꼭 개잡털(狗杂毛), 네 에미를 할ㅡ놈이라고 서슴치 않는 그의 개에 대한 사랑은 참으로 대단였다. 그가 가는 마을 어느곳에나 싯누런 황둥개가 항상 따라 다녔으며 누가 장난삼아 개배때기를 찰라싶으면 어김없이 네에미를 할 ㅡ개잡털같은 놈이라고 상욕을 퍼붓군 하였다      농망기가 끝나고 한가한 여름이면 동네 중심 커다란 비술나무 그 그늘아래 모여앉아 로인들이 가끔 우스개삼아 하던 이야기에 따르면 쟈가는 문화혁명때 그 걸죽한 입과 그가 기르던 개때문에 결국 큰 봉변을 당하고 말았다고 한다    .그 연유는 지금 생각해도 저절로 웃음이 배꼽을 뚫고 슬슬 흘러나오고 어이 없어 쓴 입을 쩝쩝 다시게도 된다. 모두 알다싶이 대부분 수전뿐인 조선족동네에는 한족동네와는 달리 한전이 극히 드물었다. 돼지사료를 해결하기 위하여 마을에서는 강폭이 100여메터 되는 왜긍하를 건너 불모지 땅을 개간하여 한전 몇십무를 일구었는데 봄이면 마을에 한척밖에 없는 배를 타고 강을 건너군 하였다.         그날따라 생일이라 아침술을 얼큰히 마신 쟈가가 배를 기다리다가 마누라가 탄 배를 따라 서슴없이 강을 헤염쳐 건너는 제 집 개가 너무 대견스러웠던지 마치 콜룸부스가 신대륙을 발견이라도 한듯이 아주 정색을 해서 높은 소리로 (마치 모주석이 장강을 헤염쳐 건너는것 같다"像毛主席游过长江") 고 하여 면바로 네가지를 타파하고 낡을것을 숙청하러 마을에 내려온 공사 공작조에 덜미를 잡혀 현행반혁명으로 파출소에 직행하였던것이다.    그런데 살다보니 나 역시 요즘 상욕이라도 퍼붓고 싶은 이 강력한 충동은 무엇일가? 불교신도인 내가 이러할진대 남들은 그런것이 아니고 나 혼자 이상한 증세에 빠져버린걸가? 기실 우리는 남을 함부로 욕해야 할 아무런 리유조차 없다. 헌데 뒷골목에 납죽 숨어 남의 흉 보기를 일 삼고 있는 인간들이 어디 한둘인가? 살다보면 욕도 저절로 나가더라.그래도 참고 참노라면 그제야 비로소 인간이 되는듯 싶다 . 산다는건 평생 입건사 제대로 해야 하는 간거한 과업임을 굳게 믿는다
5    군자 화이부동(君子和而不同) 댓글:  조회:2012  추천:6  2015-08-27
군자 화이부동(君子和而不同)      북송시기에 유명한 재상(宰相)둘이 있었는데 하나는 사마광(司马光)이고 하나는 곧바로 왕안석(王安石)이다ㅡ 하나는 보수파이고 또 하나는 개혁파ㅡ사마천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기로 소문이 자자하였는데 어린 시절 함께 놀던 친구가 독에 빠져 목숨이 위태롭게 되자 체질이 허약한 그는 혼자 힘으로는 도저히 구해낼수가 없음을 깨닫고 큰 돌을 들어 독을 깨부시고 마침내 친구를 구해내고야 말았다. 이것이 오늘까지 미담으로 전하여 내려오는 의 래력이기도 하다. 그는 성정이 온화하고 사람을 대함이 관후하였으며 , 언사유도(言辞有道) 즉 말과 행동을 중시하였으며 옷차림을 걸맞게 하여 군자라고 소문이 자자하였다    그와 반대로 왕안석은 어려서부터 책을 읽고 깨우치기를 무척 좋아하였는바 에서 시동(持童)으로 자주 일하군 하였다。그는 어려서부터 구속스러운것을 매우 싫어했고 어디서나 친구들과 어울려 함께 웃고 떠들기를 좋아하였으며 썩 훗날 조정의 대권을 장악한후 엄기률속(严己律属)으로 역시 군자로 소문난 인물이다. 그는 씻기를 무척 싫어하고 옷을 되는대로 걸치고 다녔으며 봉두란발 그대로 황제 알현도 서슴치 않는 지금으로 말하면 어지럽고 겉보기에 속되고 어딘가 한없이 모자라 보이는 와도 같은 인물이였다. 그런 그가 일조편(一条鞭)법으로 나라를 위하여 많은 세금을 징수하기도 하였다.    사마광과 왕안석은 성격도 판이하게 달랐을뿐만 아니라 두 사람의 정치주장역시 그야말로 십만팔천리로써 둘은 세력다툼에 사활을 건 앙숙이였으며 또한 제일 큰 정적이기도 하였다. 현시대 말로 표현하자면 하나는 귀족이고 다른 하나는 서민대표라고나 할가? 사마광을 몰아내고 재상자리에 오른 왕안석은 가차없이 개혁의 물꼬를 틀어 민부국강의 새 정책을 실시하였다. 왕안석의 세도가 하늘을 찌를즈음 어느 날 황제가 왕안석에게 사마광에 대한 견해를 묻자 왕안석은 조금도 주저없이 고 높이 평가하였다. 왕안석의 이러한 넓은 흉금에 힘 입어 사마광은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가 시를 읊고 화전을 다루며 행복하게 살수가 있게 되였다.    삼십년 하동(三十年喝东) 삼십년 하서(三十年喝西)라고 왕안석의 강력한 개혁정책은 수많은 황족들고 지방세력의 강렬한 반박을 초래하게 되여 조정은 그야말로 고소와 탄핵의 비바람이 끊이질 않게 되였다. 압력에 못이겨 하는수 없이 황제는 왕안석을 봉고파직시키고 그 자리에 다시금 사마광을 재상의 자리에 올려놓게 되였다. 바람벽이 무너지면 그 우에 올라서서 싱겁게 오줌을 내갈기는 사람들이 어데 한둘이던가? 왕안석의 죄행을 고소하는 자들이 하도 많게 되자 황제도 사실로 받아들여 사마광에게 왕안석을 어찌 처리하면 좋을가고 묻게 되였다. 그때 사마광역시 추호의 주저도 없이 고 황제께 간청을 한다.    군자화이부동 ㅡ 서로의 인품을 존중하지만 주장까지 똑 같을수는 없기 마련이다. 의견이 다르다고 하여 상대방의 도덕과 품행까지 비난하고 부정한다면 그것은 인간이라고 할수도 없으며 망종임이 틀림이 없으며 군자하고는 십만 팔천리쯤 먼줄로 알고 있다.    죠지 워싱턴(乔治。华盛顿)은 미국독립전쟁시기의 영웅이며 개국원로이기도 하며 아메리칸 아버지이기도 하다. 그가 북식민지 민병을 이끌고 영국군을 물리쳐 독립을 맞이하게 된후 그의 개인 위망은 하늘을 찌를듯 하였으며 그를 애대하는 수많은 부하들은 국왕으로 추대하기도 하였다. 그때 워싱턴은 추호의 주저도 없이 왕관에 대한 유혹을 떨쳐버렸으며 그에 감동된 부하들은 일제히 그를 아메리칸합중국 대통령으로 추천하게 되였다. 그때 그와 제일 가까운 동료이자 막료였던 토마스. 제퍼슨(托马斯。 杰斐森)도 찬성을 하면서도 반드시 대통령임기를 제정할것을 요구한다.    워싱턴이 대통령임직기간 국회 수령이였던 제퍼슨은 경상적으로 대통령의 시정방침에 브레이크를 걸었으며 어떤때에는 다툼끝에 분노로 상대방을 질책하다가 한동안 소 닭보듯이 하였으며 시간이 지나면 서로 상대방에게 사과하고 화해를 요구하면서도 자신의 정치적인 립장을 다시금 강하게 내세우군 하였다. 나라를 다스려가는 방면에서 두 사람은 단합이 아니라 모종 의미에서 말하자면 원쑤이기도 하였다. 4년후 퇴직을 앞두고 워싱턴은 제퍼슨을 대통령후보로 추천하면서 라고 평가한다. 이 한가지 사실만 보아도 우리는 워싱턴이야 말로 진정 신사다운 신사이며 군자임을 알수가 있다. 철학가 보르테(尔伏泰)는 이런 말을 한적이 있다. 세상에 이런 군자들이 더 많았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4    량심으로 흔들어보는 심경(心境)의 조용한 방울소리 댓글:  조회:1973  추천:3  2015-06-11
량심으로 흔들어보는 심경(心境)의 조용한 방울소리                                                                                                                허신       일전 중국 최대 인터넷 블로그인 통찰망(洞察网)에서 아주 재미나는 이야기 하나를 읽고서 이 글을 쓴다. 인성(人性)이 미덕을 기준으로 인품이 감지되여야 하는 우리들의 길지도 짧지도 않은 삶에는 확실히 황금정률(黄金定律)이 있고 또한 그 반면에는 살아가는데 아무런 도움조차 되질 못하는 부적절한 에너지도 함께 존재하고 있는듯 하다. 언제, 어디서나 먼나면 싱글벙글 반가운 미소를 황홀하게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겨주는 점잖은 사람들, 그 반면에 질투와 시기에 눈이 어두워 밤낮으로 암전에 독화살까지 란발해가는 사람들, 인생은 어찌보면 결말보다도 그 과정이나 세절이 더욱 중요한 우리들의 삶에 중요한 거울이 되여도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읽고나면 짧지만 왠지 웃음이 쿡쿡 터지고 또한 탐탁찮은 그 뭔가 불쑥 가슴에 맺혀와 더욱 큰것을 깨닫게 하는 문장, 그럼 우리 다 함께 아래에서 읽어보도록 하자.  북경 228버스정거장, 머리가 허옇고 조금 행동이 불편해 보이는 한 로인이 버스에 오르자 로약자 좌석을 차지하고 앉은 한 예쁘장하게 생긴 녀자애는 끝까지 못본척 아예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다고 한다. 얼마후 휴대폰소리가 요란하게 울리자 그 녀자애는 애교스레 (사랑하는 이,나 지금 버스에 있어요. 왜 믿지 못하세요? 나 진짜 버스에 있다니깐요) 그때 그 곁에 서있던 그 할아버지가 불쑥 건가래를 떼고서 목청을 돋구어 “ 804호 2남1녀 퇴방(退房)이요” 다른 한 아야기는 장소역시 북경, 838버스 정거장ㅡ 한 로파가 버스에 오르자 마음씨 착해보이는 한 젊은이가 제꺽 자리를 양보해 주었다고 한다. 얼마후 휴대폰이 울리자 그 젊은이는 "사랑하는 이,  나 지금 기차 타고 있어, 림시결정이 되여 출장을 떠나게 되였는데 왜 나의 말을 믿지 않지?" 그때 자리에 앉아 있던 그 로파가 갑자기 목청을 돋궈 “맥주 사세요.! 음료수, 생수, 과일 , 담배를 사세요, ㅡ젊은이 좀 길을 좀 비켜주세요!” 서로 돕고 호상 배려해주려는 인생 황금정률과 그 반면 부정적인 부적절한 에너지효과를 확실하게 보여주는 좋은 실례인것 같다. 사람이 이 세상에 오게 된데는 오직 두가지인데 곧  생과 사일뿐ㅡ생은 이미 누구나 완성이 되였고 나머지 하나는 오직 사뿐인데 누구 하나 조급해 서두를 사람은 아무도 이 세상에 하나도 없는듯 하다. 행복이냐 불행이냐   사람마다 정해놓은 목표가 다르겠지만 일찍 로자는 "행복은 간단하면서도 자연스러운것"(幸福就是简单自然)이라고 말한적이 있다.그만큼 자신을 알고 본분을 지켜가며 남을 선뜻이 배려하고 도와가며 산다는것이 얼마나 간단해 보이면서도 어려운 일인가 알게하는 좋은 대목이라고 생각된다. 고양이는 물고기를 좋아하지만 헤염을 칠줄을 모른다. 물고기는 지렁이를 무척 좋아하지만 또한 뭍에 저절로 오를수조차 없다. 이렇듯 하늘은 우리들에게 허다한 욕망과 유혹도 주었지만 쉽게 이룰수 있는것은 결코 아무것도 없다.   현등법사(玄灯师傅) 일지를 살펴보면 이런 말 한구절이 적혀 있다.“성공하고 싶으면 좋은 친구를 사귀라. 그리고 더 크게 장성하고싶으면 적을 찾으라."(要成功,需要朋友 ,要取得巨大的成功,需要敌人) 왜냐하면 경쟁이 있어야 발전이 있을수 있고 합당한 적이 있어야 결코 지고 싶지 않고 또한 지여서는 절대 안될 생존리념과 존재감을 떳떳이 나타낼수 있다는 그런 뜻으로 필자는 조신스레 받아드리고 있다.이렇듯 우리들의 마음은 하나의 커다란 면경과도 같은것이며 또한 담을수 있는 그릇의 크기에 따라서 사람마다 마음속에 간직한 그 풍경이 수시로 달라지기도 하는것 같다.   량심을 버리거나 망각하여서는 누구 하나 편안히 살수 있고 나름대로 행복할수 있는 인생이 절대로 아니다.누구나 울면서  태여났다가 다른 사람의 눈물속에서 끝마치는것이 길지도 짧지도 않은 우리들의 삶이 아니던가? 심경에 자그마한 방울을 달아놓고 시시때때 경종으로 삼아야 할때가 아닐가 생각된다      #mailContentContainer .txt {height:auto;}
3    나 없이도 세상은 잘 돌아간다 댓글:  조회:4079  추천:5  2015-03-09
나 없이도 세상은 잘 돌아간다           나는 누구인가?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야 하며 또한 어느 위치에 서 있어야 제일 적합한가? 세상을 살면서 누구나 한번쯤은 이런 생각을 가져보았으리라 믿는다. "나"없는 세상을 한번쯤이라도 감히 생각해본적은 있는가? 아마 평생을 소박한 꿈 하나만 갖고 평범하고 안일하게 살아온 사람이라면  이 질문은  마치 맑은 하늘에 청천벽력과도 같은 그런 괴성으로 들릴지도 모를 일이다. 그만큼 사람들은 저마다 자아 중심형이며 "나 없이는 절대로 안된다"는 그런 안일한 생각이 틀에 박힌듯이 너무 깊게 뼈와 살에 각인되여 있어 때와 장소도 가리지 않고 내가 살아온 경험, 경력, 내가 본 모든것으로 남을 설득하려 하며 지어는 배척과 배반에마저 갖은 리유를 다 대여 결국 "내가 없이는 절대로 안된다"는것을 진실이 아닌 현실속에서 굳이 실감나게 증명하려 하며 가끔 자아흔상에 빠져 자신의 존재감을 여러 사람들 앞에 끝까지 나타내려 하는 그런 양상이 있는것 같다. 그와 반대로 이 세상은 나 하나쯤 없어도 이외로 너무나도 잘 돌아가는데도 말이다.   기실 "나"라는 낱말은 "너"라는 상대성을  만나서야 비로소 그  선험성을  띄게 된다. 한마디로 툭 까놓고 말하면 "너"라는 낱말이 없으면 "나"는 결국 있으나 마나 한 존재에 불과하며  없는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말이다. 우리 민족 고유어에서 필자는 항상 "우리"라는 어원에서 가장 묘한 분위기를 느낄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어음에서 살펴보면 "우리"는 울타리 "울"에서 발전하여 독립된 낱말이 아닐가 생각된다. 이렇듯이 "나"와 "너"외에도 또 "우리"라는 이 다정다감하고 여러 단체나 그룹을 나타낼수 있는 낱말이 하나 더 있어 여러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가는데 얼마나 다행인가? 적어도 "나"밖의 "너"를 모르고 살다가도 필요할때가 되면 비로소 서슴없이 "우리"로 둔갑하고 위장할줄 아는 그런 인간들에게는 말이다. ㅡ일전 인터넷에서 "엉터리 전문가들이 시를 망친다" 기사를 읽고 씩 허구픈 웃음을 웃었던적이 있다. 그렇다면 우리 조선족군체는 과연 어떠한가? 사업단위, 그룹, 문단에서 엉터리 시인 , 엉터리 작가, 엉터리 전문가들이 어디 한둘뿐인가?   "결코 나 없이는 절대로 안된다"고 자신만만하게 어디서나 안하무안격으로 포장되고 위장된 소위 그런 고급 엘리트들이나 다산전문가들이 어디 한둘뿐인가?   직장에서나 어떤 단체, 혹은 자그마한 술자리에서마저 우리는 항상 목소리를 높이거나 혹은 점잖게 나를 내세우고 내 경험 , 내 경력으로 상대방을 눌러가며 자신의 위치를 뚜렷이 나타내려 하는 그런 인간들을 누구나 심심찮게 자주 마주치게 된다.공자는 일찍 "호도" (糊涂)를 발견한후 중용(中庸)이라고 하였으며 로자는 무위(无为)라고 하였고 장자는 소요(逍遥)라고 하였으며 여래는 한술 더 떠서 무아(无我)라고 불렀다고 한다. 불교 립장에서 살펴보면 이외에도 물아(勿我), 망아(忘我),기아(弃我) 등등 여러설이 더 있지만 필자로서는 그러한 경지가 어느 정도인지 알수조차 없고 그냥 보기좋게  단순히 한발자국 더 물러서서 누구나 자신의 주위를 세심히 살펴보노라면 드디여 내가 아닌 남도 보이고 단체도 보이며 세상이 더욱 뚜렷하게 한눈에 보이는것이 아닐가 생각해 본다.   전하는데 의하면 마크.트원(马克·吐温)은 출생시 쌍둥이였다고 한다. 무륵무륵 잘도 자라던 그들 형제는 얼마나 신통히 닮았던지 그의 어머니마저 미처 분별못할 지경이였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날, 목욕을 하던중 그중 하나가 큰 물통에 빠져 숨졌는데 사람들은 둘중의 누가 죽었는지 도무지 알수가 없었다고 한다. "가장 괴로운 일은 그때부터 시작되였습니다" 마크.트원은 이렇게 말한다.“사람들은 모두 살아남은 아이가 나인줄로 알고 있지만 기실 내가 아니였습니다.살아 남은 이는 내가 아닌 바로 동생이였고 물에 빠져죽은 이가 곧바로 나였습니다"고ㅡ바꾸어 말하면 동생이 평생 마크.트원으로 부모와 여러 사람들의 기대속에 서 마크.트원으로 살아야만 했기에 후세에 비로소 대문호가 탄생되지 않았을가 또한 필자 나름대로 생각해본다.   누구나 어렸을때 어머니나 누나들로부터 가장 많이 들은 말이아마도 곧 "나만 없으면 집안 꼴이 정말 말이 아니다" 였을것이 다. 어릴때 필자로서는 정말이지 어머니가 없는 랭랭한 집안 분위기가 너무 싫어 또한 어머니의 존재가 더없이 소중하고 귀중하였기때문에 순응의 열렬한 박수를 진심으로 쳐드렸다. 헌데 요즘 세상은 "나 하나쯤 없이도 너무나도 잘 돌아가고 있다"는것을 누구나 너무나도  쉽게 발견할수 있을것 같다. 어쩌면 이것이야 말로 무거운 나를 드디여 내려놓고 자신도 남도 함께 돋보이게 할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아닐련지? 나 없이는 절대로 안된다고 착각하고 남의 세상을 빌려 살며 흥청망청 제 멋대로 인기를 누리며 낯설게 살고 있는 낯 익은 사람들ㅡ 그들이 이제라도 "나"라는 무거운 짐을 잠시 내려놓고 뒤늦게나마 자신을 뒤돌아볼 그러한 시간이 필요한건 아닐가?    아무리 잘나고 못난 사람도 결국 시간의 과객에 불과하며 인생은 어쩌면 자그마한 무덤앞에서 춤을 추는 가물거리는 촛불에 불과할지도 모를 일이다. 짧지도 길지도 않은 인생에서   "나"밖의 "너"마저 차마 모르고 필요할때마다 "우리"라는 허울로 항상 꼭두각시처럼 위장으로 허울을 서슴없이 뒤집어 쓰고서 보석도 아닌 뾰족한 돌멩이로 갯벌에 불쑥 솟아 자꾸만 아프게 남의 발을 찌르며 자신을 과시하려고만 드는 귀찮은 그런 인간들, 남을  존중할줄 아는 자만이 비로소 진실한 자아을 다시 완성해 가게 된다.나는 살아서 누구에게 부담이 되고 있지나 않은지? 스스로  초라할수도 있겠지만 이제는 한발자국 물러나서 포옹과 관용으로 이 세상을 지켜보는 그런 용기가 누구에게나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허신 #mailContentContainer .txt {height:auto;}
2    "쓰레기" 소감 " 댓글:  조회:2512  추천:3  2015-03-02
           쓰레기 "소감"      세상에 아무리 소중하고 귀중한 물건일지라도 때가 지나면 등한시되기 마련이고 등한시되면 차츰 필요하던데로부터 불필요하게 되여 나중에는 망각과 함께 버림까지 받게 된다. 그 리유야 어찌되였건 버림을 받았다는건 이미 누군가의 관심밖으로 밀려났다는 의미이다.   쓰레기는 자신이 어느사이 쓰레기가 되여버린줄 아예 모른다. 버려졌기에, 단순히 누군가가 아무곳에나 아무렇지 않게 그냥  내버려두었기에, 더구나 아무도 유용한 물건으로 취급하지 않고 무참히 짓밟았기에, 거치장스레 잔뜩 널려있다가 청소부에 의해 어느 한곳에 모아진다.   대개 쓰레기의 공통점을 곰곰히 살펴보면 몇가지 근사점이 있는듯 하다. 첫째, 누군가가 버렸다는것, 둘째, 자신이 버림받았다는 사실조차 아예 모른다는것, 셋째, 누구하나 거들떠보지도 않고 마음대로 짓밟고 발길로 걷어차며 귀찮아 한다는것, 넷째, 한곳에 모여야 재활용이 가능하다는것, 다섯째, 오래동안 쌓아두면 악취가 난다는것, 여섯째, 남에게 귀찮은 존재라는것을 자신은 영원히 모르고있다는것이다. 이외에도 쓰레기와 인간의 근사치는 너무 놀라울 정도로 많이 닮았다는 점 또 그러하다.   서로 마음이 맞고 지향이 같은 동인들끼리는 언어소통도 원활하기 마련이고 삶의 질이나 격이 너무 다른 사람들일수록 생소하여 소닭보듯 거리감이 생긴다. 도를 넘어서면 결과는 불보듯 뻔하다. 굳이 쓰레기와 비교하면 있어도 그만 없어도 또한 그만, 오히려 존재감마저 불편해지거나 귀찮으니 쓰레기보다 더한 버림이 아닌 배척까지 받게 되는가부다. 헌데 쓰레기는 인간의 알뜰한 정성으로 한곳에 모여 재활용이나 재차 제 갈곳을 찾을수 있지만 인간의 경우 좋으나 싫으나 사상에서 악취가 나고 곰팡이냄새까지 진동하더라도 좁은 울타리안에서 직접적 혹은 간접적으로 자꾸만 부딪치게 되며 걸리적거린다는 점이 흡사하면서도 너무나도 많이 다른점이기도 한것 같다.   신문이나 인터넷에서 "인간쓰레기"라는 말들도 거침없이 등장하고있다. "인간쓰레기"의 기준을 도덕수준 이하로 대개 금을 그을수 있다면 쓰레기의 기준과 또한 너무 흡사하다. 오래 쌓아두면 모두 악취가 코를 진동하여 정상적인 생활이 어렵다는것이다. 헌데 진정한 쓰레기의 악취는 제거하면 그만이지만 인간이 풍기는 악취는 사상적인것이다보니 언어행위에 직접 관계되여 법에 저촉되지 않는한 누구하나 선뜻이 나서서 지울수조차  없이 오래도록 곰팡이냄새까지 풍기게 된 다.   요즘  인터넷에 올라보면 그야말로 할말마저 잃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쓰레기작품들이 너무 많고 쓰레기댓글이 너무 많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어떤이들은 자신이 쓴 글이 보석인지 돌멩이인지 쓰레기인지조차 아무런 분별능력조차 없이 제 마음이 내키는대로 지어 오리 똥물 내갈기듯 "배설"하고있는것 같다.   문학작품의 경우 그나마 수준미달로, 보기 싫으면 두번 다시 보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공연히 권고랍시고 댓글로 인신공격까지 서슴치 않는 그런 쓰레기더미에서 풍겨나는 악취에 맞닥뜨리게 되면 마치 제집마당에 웬 도적놈이 한무데기의 오물을 배설해놓은듯 하여 누구라도 그 마음이 개운치를 못하다. 사람이 사노라면 좋아하고 흔상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면에  질투하고 시기하며 싫어하는 사람이 있기마련이다.   아무리 열린 세상이고 나름대로 사는 삶이라고는 하지만 인터넷에 작품을 올릴 때면 혹시 남에게 쓰레기취급은 받지 않을가 고민해보고 얼굴이나 이름없이 댓글을 달더라도 도덕이하, 즉 인간이하의 령혼에서 풍기는 악취는 스스로 삼가할줄 알아야 하지 않을가?   허신
1    사성제 。팔정도 (四圣谛。八正道) 댓글:  조회:3465  추천:4  2015-01-07
 사성제 。팔정도 (四圣谛。八正道)      허창렬       1950년대 노벨상 수상자 라소(罗素)는 《내가 알고 있는 이 세상의 과학 즉 수학, 물리, 자연과학 그외 모든 종교중에서 불교만큼 나의 의혹과 미혹에 정확한 답안을 제공해준 종교는 여직 없었다>>고 말한적이 있다. 또 스리랑카 전임총리 판다라나이크(班达拉奈克)는 고 설파한적이 있다. 더우기 현대과학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아인슈탄(爱因斯坦) 역시 자신의  저명한 평론에서《미래의 종교는 오직 우주의 종교일뿐이다. 그것은 개인화된 모든 종교현상을 초월하고 교조주의와 신학을 피면할수 있는 자연과 인류정신의 힘이 될것이다. 이러한 의식은 이 세상 모든 사물과 인류의 고독하고 호매로운 정신, 즉 사물들을 더욱 의미있게 전체적으로 경험하고 체험할수 있는 그런 장소를 마련해 주기도 한다. 불교야 말로 이 세상에서 묘사할수 있는 그런 종교이다 》고 대성질호한적도 있다. 그럼 왜서 이처럼 많은 정치가, 과학가, 철학가들이 불교에 감탄하고 숭상하는지 그 원인을 우리 잠간 살펴보도록 하자.       필자가 알건대 불교는 종교가 아니라 우주학이며 부처님의 교육이시다. 누구나 모두 알고 있다싶이 주문(咒文)의 본뜻은 진언(真言)이며 인과설(因果)이 불교의 기본 주축으로 되고 있다. 례를 들면 비옥한 땅에 감자를 심으면 감자가 나고 호박을 심으면 호박이 자라나는것과 마찬가지 도리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로반앞에서 주제도 모르고 도끼를 휘두르는 꼴이 아닐지 모르겠지만 여기서 사성제 팔정도를 다 함께 잠간 살펴보도록 하자. 사성제(四圣谛)는 그야말로 성현의 도를 넘어서는 체험의 바탕으로 되는바 그 순서를 그대로 라렬하면 다음과 같다. 1, 고제(苦谛) 2,집제(集谛) 3, 멸제(灭谛) 4, 도제(道谛),팔정도(八正道)역시 정직한 에너지를 발산하는 정신적 기둥과도 같은것인데 차례대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정견(正见), 2,정사유(正思维), 3,정어 (正语), 4,정업( 正业), 5,정명(正命) , 6,정정진( 正精进)。 7,정념( 正念), 8,정정 (正定),이외에도 주시해야 할것이 곧바로 십이인연설(十二因缘)이다 불교 지식이 아직 옅은 필자로서는 여기서 일일히 조목조목 짚고 해석하기에는 너무 지루한것 같고 간단히 짚고 넘어가자면 사성제 팔정도는 무상한 인생의 끝없는 번뇌와 고통, 그리고 륜회, 희노애락을 정지정견(正知正见)으로 극복하여 즉 우주관, 사회관, 인생관을 정립하고 지혜롭게 살아가자는 우주인생진리(宇宙人生真理)인것 같다 。조금 더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하늘이 제 아무리 변화무쌍하고 끝없이 넓은듯 하여도 결국 가슴에 담으면 마음 한 구석도 제대로 채울수 없다는 호매로운 기상이기도 한것 같다       일전 인터넷에서 아주 재미나는 글 한편을 읽었는데 우리 여기서 다 함께 살펴보도록 하자. 어느날 억만장자 장삼(张三)은 교외에 유람을 나갔다가 차사고를 당하게 되였다. 다행히 차가 좀 망가졌을뿐 다친데가 별로 없게 된 장삼은 문득 근처에 부모님이 살아 계시고 오랫동안 찾아 뵈옵지 못했다는 생각에 차를 수리부에 맡기고 고향집으로 찾아가 하루밤을 지내게 되였다. 이튿날 떠나기 직전 어머니가 건네주는 옷을 받아든 장삼은 찢어진 옷을 밤새 어머니가 한뜸 두뜸 정성스레 기운것을 발견하고 다소 감동하게 되였으나 집으로 돌아가는 즉시 새옷으로 바꿔입으리라 생각하였다. 그런데 장삼은 워낙 바쁜 사람인지라 그날 옷을 갈아 입는 일을 깜빡 잊고 기운 옷을 입고 여러 장소를 드나들게 되였으며 격렬한 경쟁끝에 한건의 큰 업무를 이튿날 정식계약 체결하기로 약속하였다. 그날 저녁 늦게까지 바삐 보내다가 집으로 돌아간 장삼은 낡은 옷을 벗어 주저없이 쓰레기통에 던져 버렸다.      이튿날 계약직전 상대방 대표가 하고 묻자 장삼이 게면쩍게 대답하자 상대방이 그의 어깨를 툭툭 다독이면서 .집으로 돌아온 장삼은 쓰레기통에서 기운 옷을 다시 꺼내여 깨끗이 세탁하여 눈에 잘 띄우지 않는 곳에 잠시 걸어 두었다. 한주일후의 어느 날 아침, 장삼이 한창 출근 준비를 서두르고 있는데 문득 두명의 경찰 찾아와 한 주일전 린근의 억만장자가 랍치되여 살해되였는데 유괴범을 조사, 심문하던 중 원래의 목표가 장삼이였다 실토하였다면서 특별히 신변안전에 주의 돌릴것을 부탁하였다. 깜짝 놀란 장삼이 하고 되 묻자 경찰들은 고 알려 주었다. 너무나도 뜻밖의 사실에 장삼은 어안이 벙벙하기만 하였다. 어머님이 정성스레 기운 옷 한벌이 그에게 그처럼 큰 행운을 가져다 주었고 또한 불행을 막아 막아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질 못했던 장삼은 경찰들이 돌아간후 결국 기운 옷을 꺼내들고 더는 터져나오는 울음을 참을수가 없었다.       우리 말 속담에 는 구절이 있다. 당신이 얼마나 부자이고 또한 지위가 얼마나 높든간에 어디서나 잊지를 마시라. 자식에게 부모는 영원한 부처이며 이 세상에서 둘도 없는 자상한 보살님이라는것을 ㅡ효는 불교의 근본이며 또한 기본이기도 하다. 중국 통찰망(洞察网)에 오른 를 살펴보면 심히 걱정스럽지 않을 수가 없다 . 첫째가 바로 감사할줄을 모르는것이며 둘째가 곧바로 이제는 누구의 기억에서조차 희미해져버린 잃어버린 신앙문제이다. 그로 인하여 그 뒤에 자연스레 뒤따르는것이 도덕상실과 신용상실문제이며 또한 맹목적인 자신감, 날로 못해가는 체질저하, 그리고 리기적인 사랑, 관건이 효를 잃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집집마다 하나뿐인 자식들이 할아버지가 되고 할아버지는 손자가 된지가 이제는 까마아득한 일이기도 하다.       사성제 팔정도는 고사하고 공자의 제자규(弟子规)를 제대로 알고 있는 자가 현재 몇이나 되랴? 제자규를 읽어보면 최소한의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기본원칙을 상세히 적은것뿐이다. 어떤 자들은 돌이나 나무로 만든 부처님께 큰 절을 올리는것을 미신이며 어리석은 짓들이라고 비웃는다. 마치 자신은 뭘 좀 제대로 알고 있기나 한듯이ㅡ 돌이나 나무에게조차 스스로 자신을 낮춰 무릎을 꿇는 그 겸손을 그들은 알고나 하는 말인지? 속담에 는 말이 있다. 사촌이 땅을 사도 배 아파하고 공연히 시야비야 뒤에서 남을 헐뜯고 손가락질해대는 그런 어리석고 스스로 제 무덤을 파는 렬근성은 하루빨리 개변되여야 하며 부처는 아니더라도 조금만 건드려면 인차 발톱을 드러내는 그런 악마가 아닌 야성으로 남을 해치고 자신마저 해치고 마는  그릇된 삶의 방식은 이제라도 조금씩 개변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성제 팔정도는 불교신도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가슴에 심고 있어야 할 푸르른 소나무가 아닐가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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