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창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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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촌스러운 너와 바보스러운 나 댓글:  조회:1780  추천:1  2016-09-19
촌스러운 너와 바보스러운 나 허창렬    어떤 언어학자가 나에게 "바보"란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사람"이라고 말한적이 있다. 북적대는 이 지구촌에 살며  대부분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만의 장단점을 갖고  있다.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이니만큼  밉상스럽고 아니꼬운 사람도 너무 많지만 마음 비우고 차분히 지켜보노라면 저마다 아름다운 풍경이 된다. 우리들이 취객이 되여, 유람객이 되여 매일 새롭게 바라볼수 있는 풍경은 이 세상에 그야말로 참말로 많다. 산에 올라 산아래를 굽어보면 파릇파릇한 수양버들 잎을 만져 보고도 싶고 들에 가면 또 어데론가 정처없이 흘러가는 강물소리에 공연히 마음이 솔깃해져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새소리 찾아 헤매는게 또한 인간의 지극히 호의적인 호기심이 아니던가? 그런데 그 언어학자는 여기서 한술 더 떠서 "그저 바라보는것만으로도 즐거운 사람"이라고 표현을 한다.얼마나 뼈가 있고 무게가 있는 말인가? 만사 다 제쳐놓고서라도 그의 높은 사상경지에 우선 머리 숙여 탄복하지 않을수가 없다. 둥글둥글한 세상 돌부리처럼 불쑥 솟아올라 나름대로 거침없이 살아가면서 나는 누군가의 그림이 되고 혹은 부담이나 되고 있지 않은지 이제는 곰곰히 생각해보아야 할 나이가 아닐가 생각해봐야 할때가 아닐가?   《로자(老子)》제15장에 《허회약곡(虛懷若谷)》란 고사성구가 있다. 깊은 골짜기처럼 크고 넓은 마음이라는 뜻으로, 매우 겸허한 마음이나 태도를 비유적으로 이른 말이다. 또한《서경(書經)》의 《대우모편(大禹謨篇)》에는 《만초손겸수익(滿招損謙受益)》이라는 너무 멋진 말도 있다. 풀이해보면 사물은 한껏 차면 자만심이 생기므로 손실을 초래하고, 겸손하면 이익을 받는다는 뜻으로, 교만하면 손해를 부르고 겸손하면 이익을 받는다는 의미라 해랴 되겠다. 참으로 멋진 말들임이 틀림 없다. 어디서나 꼿꼿이 고개를 치켜든 개돌피가 아니라 한껏 무르익어 조심스레 고개를 숙인 이삭처럼 살아야 한다는 선조들의 교훈이라고 보여진다.   일찍 "개 버릇" 이라는 수필집을 묶어 90년대 초엽 중국 조선족 문인치고 제일 먼저 한국 동아출판사에서 책까지 냈었던 나의 문학선배 한창선시인의 "바보"에 대한 관점은 또한 남들과는 달라도 너무나도 남다르다. 어느 날, 심양 서탑의 어느 좁은 골목의 조그마한 식당에서 나,  한창선 선배, 그리고 모 대학의 교수 셋이서 늦은 점심식사를 하게 되였는데 모두 술이 좀 거나해졌을 무렵 한선배가 손가락으로 그 교수님의 코끝을 딱 가르키면서 한다는 말이 " 너 밥 할줄 아니?"였다.하도 뜬금없이 묻는 바람에 조금 당황해난 교수가 "모른다"고 대답하자 "그럼 빨래 할줄은 아니?돈 꿀줄은 알고? 마누라 눈치 볼줄은 알고?" 련속되는 질문에 너무 어이가 없었던지 그 교수가 재차 "모른다"고 대답하자 너무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한선배가 하는 말이 (애가 얼마나 바보스러우면 미련하게 박사공부까지 했겠냐?)였다. 울지도 웃지도 못할 돌발상황, 지금 생각해봐도 웃음에 눈물 콧물이 절로 난다. 허나 뭔가 가슴을 쿡하고 쑤시는게 있어 마냥 석연한 그림만은 아닌것 같다. 조금 더 깊게 제 삶을 뒤돌아보게 하는 일침이 되여 생각할수록 숙연해지는 그런 느낌때문이 아닐가 생각해본다.    사람은 누구나 성격, 성품, 성징, 성정을 갖고 있다. 조금 속된 말로는 성깔, 밸, 밸머리가 더럽다 로 표현이 된다. 사전을 살펴보면 성격(性格) 근본적으로 타고난 마음 짜임새이며 성품(性品)은 근본적으로 갖춰진 마음 매무새이고 성질(性質) 은 근본적으로 깔려진 마음의 모양새이며, 성정(性情)  근본적으로 배어진 마음 쓰임새이다.《회남자·주술훈(淮南子·主術訓)》에 "성인지우선야, 무소이불거, 기우과야,무미이불개"(聖人之于善也, 無小而不擧; 其于過也,無微而不改)라는 구절이 있다. 그 뜻인즉 성인은 선한 일에 대하여 아무리 작은 일일지라도 행하지 아니함이 없고. 과오에 대하여 아무리 작은 일지라도 고치지 아니함이 없음을 이르는 말이다. 또《회남자·설림훈(淮南子·說林訓)》에 "태산지고, 배이불교, 추호지말, 시지가찰(泰山之高, 背而弗見, 秋毫之末, 視之可察)"이라는 구절이 있다. 뜻인즉 태산의 높이도 등지면 보이지 않고, 깃털끝도 살피면 눈에 들어온다는 말이다.    바보가 되여 행복해보기는 처음이다. 솔직히 내가 잘 알고 있는 학자들은 하나같이 전문 분야에서 모두 세심한 분들이다. 그리고 옷차림은 멋스러운것이 아니라 생각밖으로 수수하다못해 촌스럽다. 다 그런것은 아니겠지만 필자와 각별한 사이인 지기다운 지기, 형다운 형들은 대개 모두 그러한것 같다. 자칫 겉만 보면 순박한 농민으로 오해하기도 좋을상ㅡ 그런 그들과 막걸리라도 한잔 걸치고 거리를 활보할때면 나는 어김없이 바보가 되여버린다. 그 학자의 말처럼 "그저 바라만 봐도 즐거운 사람"이 되고 싶다 . 그리고 농경문화의 핏줄속에 다정다감한 시골인심이 무척 그리운 나역시 그들의 촌스러움에 차츰 익숙해져 간다. 2016.9.10
6    멈춰 세운 풍경 댓글:  조회:1630  추천:2  2015-08-14
수필 멈춰 세운 풍경              허창렬    가다가 멈춰선다. 멈춰서면 아름다운 풍경이 보인다. 차창밖의 풍경을 보고싶다면 멈춰 서라. 멈춰서면 자연이 보이고 또한 자신이 보인다. 500도 넘는 안경을 벗고 나의 신변을 곰곰히 살펴봐도 세상은 너무 밝지도 어둡지도 않다. 그리하여 이 세상에는 말이 있질 않던가?    불행하게도 나는 요즘 나름대로 너무나도 행복하게 고민한다. 왜냐하면 가진 자들이라면 누구 하나 함부로 가졌다고 자부할수조차 없는 포용과 관용, 인내심과 자비심이 가슴 한가득 자리잡고 새쌋처럼 무럭무럭 자라고 있기때문이다. 비록 석가의 깨달음이나 불교에서 흔히 말하는 깊은 도의 경지에 이르른것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자신의 조급한 심정을 스스로 멈춰 세울수 있는 그런 마력과 인내력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기실 내가 보건대 행복이란 이외로 너무나도 간단하다. 언제 어디서나 가던 길을 멈추고 을 사심없이 들여다 보면서 아무런 저애도 없이 믿을수 있는 그 누군가와 함께 웃고 떠들며 흔상하는것이다.그 풍경이 간혹 너무 초라하여 누군가의 발밑에서 나뒹구는 한잎의 작은 락엽이라 할지라도 나에게 더없이 소중한 추억이라면 목숨처럼 귀중하게 느껴지기 마련이며 또한 덧없는 세월속에서 누군가와 함께 공유하고 있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행복이 될수 있기때문이다     세계적인 명작 에 이런 구절이 하나 있다. (我只是想证明一件事,就是,那时魔鬼引诱我,后来又告诉我, 说我没有权利走那条路,因为我不过是个虱子,和所有其余的人) 많은 시간을 들여 자신을 미워하고 싫어하는 사람을 똑같이 싫어하고 미워 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그만큼 자신을 좋아하고 흠모하는 사람들과 교류할 시간마저 아쉽게 줄어들기 때문이다. 또한 옷깃을 스쳐도 인연이라고는 하지만 그중에는 악연도 있기 때문에 악연에 받은 크고 작은 상처들을 혼자 끙끙 앓으며 가슴 깊숙히 간직할 필요조차 없다. 왜냐하면 스스로 너그럽게 포용과 관용으로 그 상처들을 어루만지고 보다듬노라면 더욱 큰 성숙이 되기때문이다. 만약 한 사람이 남의 어려움을 아예 모른다면 그에게는 지극히 평범한 인내심이나 자비심마저 있을수가 없다. 《이 세상에서 가장 먼 거리는 사랑도 미움도 아닌 익숙했던 사람이 점차 낯설어가는것이다.》.(这世上最远的距离不是爱与恨,而熟悉的人渐渐变成陌生) 《나에게는 더 이상의 적은 없다. 있다면 그들이 나를 눈에 든 가시처럼 여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종래로 그들을 가슴에 담아두지 않기때문이다》(我没有敌人,有只能是把我当成眼中刺的一些人,但我从来不把他们放在我心上)      돌이켜 보면 고작 백년도 채 못살고 칠팝십년을 겨우 사는 우리네 인생, 우리가 날마다 노래로 부르싶은 아름다운 풍경은 곧바로 마음의 풍경뿐일다.우리 말 속담에도 이라는 구절이 있질 않던가.? 뜻인즉 아무리 아름다운 산천경개라도 마음이 조급하고 불안하면 한폭의 아름다운 그림으로 될수가 없다는 말로도 풀이가 가능할것 같다.    마음이 조급할수록 우리는 잠간 멈춰서서 자신의 지나온 발자취를 뒤돌아 볼줄도 알아야 한다. 자신을 뒤돌아본다는것은 자신을 자세히 알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어쩌면 날에 날마다 물에 물을 탄것만 같이 슴슴하기만 한 이 현실속에서 나름대로 행복하고 즐거워지고 싶다면 너무 총명한척 하지 마라. 왜냐하면 총명과 어리석음의 사이, 그 사이에 비로소 지혜가 자리잡고 있기때문이다. 너무 총명하면 많은 사람들이 꺼리기 마련이며 너무 어리석으면 또한 남에게 리용당하기 십상이다. 정판교의 난득호도(难得糊涂)가 오늘까지도 그처럼 유명한 리유는 무엇일가? 그것은 곧바로 알면서도 때로는 모르는척 남에게 져주고 양보할줄을 알아야 하는ㅡ 지혜이기때문일것이다.    진정한 고통은 누구 하나 나를 대신하여 분담할수조차 없다. 하루빨리 그 음영에서 헤쳐 나올수 있는것은 오직 자신의 꿋꿋한 의지뿐, 고독하다고 하여 아무나 제 멋대로 사랑하여서도 안된다. 더우기 잘못된 사랑때문에 평생을 적막하게 혼자 살아야 할 필요조차 없다. 어쩌면 인연은 언녕 정해져 있는것이며 래일은 알수조차 없는것이기에 아무리 좋다고 굳이 나를 싫어하는 사람을 추구하며 크나 큰 고통까지 줄 필요는 없다. 억울함을 말로 할수 있을때 그것은 더 이상의 억울함도 아니다. 억울함을 말하지 않는것이야 말로 자신을 더욱 억울하게 하는것이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당신이 가난할때 그래도 누군가가 당신을 믿고 굳게 따른다면 그것이 곧 행복이다. 당신이 아플때 누군가가 당신의 곁을 지켜주며 당신을 보살펴준다면 그것이 곧 행복이다. 당신이 추워할때 누군가가 선뜻이 옷을 벗어 덮어주고 포근히 감싸 안아준다면 그것이 곧 행복이다. 당신이 괴로워 할때 누군가가 함께 괴로워 하며 당신을 위로해 준다면 그것이 곧 행복이다. 당신이 힘들어 할때 누군가가 가슴 아파하며 함께 걱정하여준다면 그것이 곧 행복이다. 행복은 지키는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이다.    (如果你不知请讲,如果你已知请别讲,微笑会说明一切)진리편에 나와 있는 너무나도 의미심장한 말 한마디다.돌이켜 보면 우리네 인생은 얻는것보다 항상 잃는것이 더욱 많다.적어도 나를 놓고볼때 더욱 그러하다. 어떤 사람은 나보고 왜 지나간 옛일들에 한마디 변명조차 없이 바보처럼 시무룩히 사느냐고 묻는다. 또 어떤 사람은 남 부렵잖게 가졌던 모든것을 다 내려놓고 시 한수에 차 한잔 에 홀가분하게 사는것도 괜찮아 보인다고 우스개 삼아 익살스레 말을 한다.    그들이 여직 나도 잘 모르는 나 자신을 알고 있으면 또한 얼마나 잘 알고 있으랴? 이 세상의 긍정과 부정에는 수많은 가시와 사탕이 발려 있기 마련이다. 진한 아픔도 짱한 기쁨도 더 이상 나에게 정서화(情绪化)가 되질 않는다. 왜냐하면 내가 당신들과 다른 점이라면 당신들보다 못났거나 또한 잘나서가 아니라 나 스스로 나 자신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때문이다.. 사는게 뭐 별거 있더냐 욕 안 먹고 살면 되는거지 술 한잔에 시름을 털어 너털웃음 한번 웃어보자 세상아 시계바늘처럼 돌고 돌다가 가는 길을 잃은 사람아 미련따윈 없는거야 후회도 없는거야 아아 세상살이 뭐 다 그런거지 뭐    사람은 누구나 숱한 허울과 가식을 다 내려놓고나서야 비로소 누구라도 진실한 자아의 모습에 깜짝 놀라기 마련이다.한국의 인기가수 신유가 불러 히트 친 노래다. 내가 제일 즐겨 부르는 애창곡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 매일 아침 흥얼거리노라면 나의 눈앞에는 멈춰선 풍경들이 다시금 하나 둘씩 즐겁게 나타난다. 그속에서 나는 다시금 나름대로 울고 웃으며 일상속의 작은 세절속으로 긴 산책을 떠나간다
5    누나 댓글:  조회:1697  추천:2  2015-06-11
수필  누나              78.73만평방키로메터 되는 동북땅에는 아버지 어머니 다음으로 친숙한 이름이 하나 더 있다. 바로  다. 는 나에게 무엇이였고 내 인생의 어떤 존재였을가? 지금 와서 곰곰히 생각해보면 팔남매중 제일 막내인 나에게 있어서 누나들은 곧 부모였고 시도 때도 없이 잔소리를 늘어놓다가도 추호의 주저도 없이 선뜻이 바람막이가 되여주는 그런 소중한 존재였던것 같다. 또한 누나와 동생 사이는 결코 눈물이 없이는 읽을수조차 없는 인생의 소중한 교과서이기도 하다. 나에게 있어서 누나들이란 항상 이렇게 아련한 추억이기도 하며 또한 평생을 아파해야 할 기억이기도 한것 같다. 당신 기억속의 누나역시 그렇칠 않은가?        나에게 급한 일이 생기면 언제나 제일 먼저 맨발로 여기 저기 돈 꾸러 뛰여다니면서 아예 대가를 받을 생각조차도 하지 않는 사람, 궁색하게 , 라는 인사말에 도리여 노여움으로 잉크를 얼굴에 글로 새기는 사람, 티격태격 다툴때면 부지깽이로 후려치다가도 좋은것이 생기면 슬그머니 나에게로 다가와 나의 호주머니에 슬쩍 넣어주는 사람, 어려운 일이 생길때마다 언제나 앞장서서 그 가녀린 두 어깨에 모든 짐을 걸머지고 달밤이면 어느 버드나무아래에서 서럽게 혼자 우는 사람, 자다가도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엄마대신 당신이 차버린 이불을 조심스레 덮어주는 사람ㅡ 내 기억속의 누나는 대개 이러하다. 세상에 유령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분명히 천사를 본적이 있다. 당신은 본적이 없다고 하면 이제라도 한마디 권고하고 싶다. 멀리 눈에 보이지도 않는 천국의 천사들을 찾느라고 안타까운 정력을 랑비하지 말고 동생들에게 있어서 누나들이야 말로 천사였음을 잊질 말라고ㅡ        허다한 경우 사람들은 (等)ㅡ 혹은 그러한 요행심리와 무모한 기다림속에서 하루 또 하루를 허송세월하는 경우가 무척 많은것 같다. 앞으로(等将来)ㅡ 혹은 바쁘지 않을때(等不忙) ㅡ  혹은 다음번에 (等下次)ㅡ 혹은 조금 더 시간이 날때(等有时间) ㅡ혹은 조건이 더 좋아진 다음(等有条件) ㅡ 아니면 호주머니에 돈이 충족할때(等有钱)ㅡ 그렇게 기약도 없이 모험적이고 무모하다보면 청춘은 소리없이 사라져버리고 건강은 훌쩍 떠나버리고 기회마저 없어진 다음에야 정신을 다시 차리고 보면 너무나도 뒤늦은 후회뿐인것 같다. 기실 사람의 앞날은 누구도 예측하기 어려운것인데도 말이다.          7년전 나의 둘째 누님이47세에 아까운 나이에 유선암말기로 산동 연태에서 돌아가셨다. 그때 회사 일로 남방에 출장중이였던 나는 결국 둘째누나의 마지막 길인 장례식에조차 참여치 못하고야 말았다. 지금 와서 변명조차 무색하리만치 나는 지금도 둘째누님 생각만 하면 가슴이 너무 쓰리고 또한 얼얼하다. 죽는 그  순간까지도 이 못난 이 막내동생을 그처럼 보고싶다고 자주 외우시더라는 넷째누님 이야기를 전해 듣고서 왜 그때 조금만 더ㅡ 내 일을 마저 끝마친 다음에 ㅡ하는 요행심리를 떨쳐버리고 직접 찾아뵙지 못했을가 두고 두고 후회하며 혼자 가슴을 치며 울었던 적이 있다.       사기 회음후렬전(史记淮阴侯列传)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智者千虑 必有一失, 愚者千虑 必有一得)뜻인즉ㅡ 는것이다. 나는 지금도 그때 생각만 하여도 가슴이 미여지고 찢어지는듯하여 며칠씩 잠을 이루지 못할때가 허다하다. 옛날 성현들은 인간을 상ㅡ중ㅡ하ㅡ 세가지 부류로 나눠놓고 그 인간성을 평가하였다. 실례로 하등인(下等人)은 남이 즐거워 하는 모습을 보게 되면 질투심이 생겨 한평생을 배 아파하게 되고 중등인은 자신이 어려울때면 하루빨리 그 곤경에서 벗어나려고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온갖 모지름을 다 쓰고 상등인은 남에게 즐거운 일이 생기면 마치 제 일인것처럼 기뻐하고 남이 슬퍼 할때면 또한 제일처럼 슬퍼한다고 한다.   따지고보면 짧지도 길지도 않은 우리네 인생에서 오직 한 부모 한 형제라는 끈끈한 인연으로 이 세상에 태여나 길어봤자 고작 20여년을 한 지붕아래ㅡ 한 집안에서 한 가마밥을 지어 먹으며 티격태격 다투기도 하다가 오직 누나라는 그 리유 하나만으로 자신도 아닌 동생들을 위하여 아낌없이 사랑도 주고 빨래도 해주다가 어느덧 시집을 가서는 그래도 무엇인가 해준것이 너무 모자란것만 같아서 만날때마다 미안해 쩔쩔 매며 어쩔바를 몰라하다가도 잠 잘 때면 슬그머니 이마에 손도 얹어보는 누나, 은 그래도 호주머니 돈이 있어야 한다며 다 커가는 자식들 몰래 옷섶에서 꼬깃꼬깃한 지페 몇장 손에 꼬옥 쥐여주면서 태연한척 하다가도 돌아서면 어김없이 눈물을 옷깃에 눈굽을 찍는 누나ㅡ매년 이맘때쯤 나는 어김없이 멀리 계시는 누님들에게 투정 삼아 술 한잔에 그리움 한다발씩 전화로 전하군 한다. 그때마다 누님들은 이 막내동생의 응석을 묵묵히 받아주며 이런 누나들에게 나는 평생 불평도 많다. 올해도 어김없이 전화를 해야겠다 ! 래일 모레면 오십인데 나는 언제 제대로 철이 들련지ㅡ
4    량반도 굶어봐야 군자가 된다 댓글:  조회:2222  추천:4  2014-12-10
수필  량반도 굶어봐야 군자가 된다  허창렬      사람은 누구나 자신에게는 한없이 관대하고 남에게는 더없이 각박한듯하다. 눈만 한번 마주쳤다 하면 남의 잘잘못을 미주알고주알 하루종일 쉴새없이 종알거리는 사람, 그리고 엎친데 덮친격으로 뜻밖의 불행앞에 망연자실해 있는 사람을 앞에서는 동정을 하는척 뒤에서는 얼시구나 쾌재를 부르는 사람, 삼천대천세계에 천차만별 벼라별 사람이 다 있기 마련이다. 21세기 중국의 자랑 막언(莫言)은 고 말한다. 가재는 게편이라고 그러루한 사람들과 휩쓸리다보면 그러루한 사유에 물 젖기 마련이다. 나는 지금 군자는 못될지언정 량반은 되려 한다. 혹자는 이게 무슨 케케묵은 소리 줴치고 있느냐고 질타할지도 모르겠지만 사람은 분명 그릇의 크기에 따라 레벨이 다르고 인격이 다르기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래서 나는 나를 미워하거나 싫어하는 사람 모두를 용서하고 포용하기로 결심을 한다        유태인 명언에도 이런 말 한 구절이 더 있다. .참고로 도덕경에는 분명히 는 구절이 있다. 조금만 립장을 바꿔 생각해보노라면 누구의 인생도 순탄한것만은 아니다.그래서 세상은 도가 아니면 모라고 하지 않던가? 한컵의 깨끗한 물에 한방울의 오물을 떨구어 놓으면 그 한컵의 물은 마침내 마실수조차 없게 되며 반면에 한컵의 혼탁한 물에 한방울의 깨끗한 물을 희석해놓고서 그  한컵의 물이 깨끗해지기를 눈이 빠지게 기다린다는것은 또한 그것만큼 어리석은 짓도 없으리라 느껴진다.    요즘처럼 인심이 날로 각박해가는 세월에 제 수염이 석자씩이나 되는 내가 어쩌다 바른 소리 한마디 한다고 누구 하나 귀를 기울려 들어 줄리도 만무하겠지만 어쩌면 길지도 짧지도 않은 우리네 인생, 한번쯤 사람답게 살고프면 누구나 제 자리에 멈춰서서 지나온 발자취를 뒤 돌아보며 자신을 정리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털면 먼지뿐인 호주머니에 빵을 살 돈은 고사하고 엽전잔주 한푼 없을때 선뜻이 200원을 내여놓을수 있는 사람은 이웃일수도 있으며 2000원을 내여놓는 사람은 친구일수도 있으며 5000원을 내여놓는 사람은 지기일수도 있으며 20000원을 선뜻이 내여놓을수 있는 사람은 친척도 아닌 은인일수도 있다. 아는 이가 많다고 떠들지도 마라. 진정 당신을 도울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랴? 또한 친구가 많다고 자랑도 하지마라. 진정 당신이 어려울때 아느체 할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랴?    날마다 어울려 떠벌리며 먹고 마신다고 하여 당신이 어려울때 누구라도 선뜻이 나서서 도울거라고 오산도 하지마라. 한 트럭의 감자로 하나의 야명주를 바꿀수가 없듯이 한알의 사과라도 반쪽으로 나누어 먹을수 있는것이 우정, 나는 한입도 안 떼여먹고 통채로 줄수 있는것은 친정, 감춰두고 없다고 생떼질을 쓰는것은 몰인정이 아니던가?. 사람은 누구나 배가 고파봐야 어려운 사람의 사정을 알기 마련이다. 남자는 어려울때에야 비로소 어느 녀인이 자신을 지극히 사랑하고 있는지를 알수가 있고 녀자는 아파봐야 어느 남자가 자신의 곁을 영원히 지켜줄수 있는 사람인지를 알수가 있다. 우정은 네가 돈이 있기에 내가 따르는것이 아니고 사랑은 네가 아름답기에 내가 너를 주목하는것이 아니기에 사람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도를 지킬줄 알아야 하며 도를 넘어서는 행위는 누구라도 삼가해야 한다고 생각된다. 세월이 우리들에게 남겨 주는것은 재부도 아름다움도 아니라 오직 진정이며 진심뿐이 아니던가?    21세기는 영웅이 몰락해가는 시대라고 한다. 군자도 호인도 없는 글로벌시대라는 뜻이기도 하다. 반면에 호랑이 없는 곳에 삵이 왕질을 한다고 비리와 권세, 탐욕에 령혼까지 서슴없이 팔고 사는 시대라고도 할수 있는 뜻이기도 하다. 불교에서는 말세라고도 한다. 적어놓고보니 제법 그럴싸하여 내심 마음이 흐뭇하기도 하다. 오늘의 일이 아무리 다급하더라도 래일이면 과거가 되며 올해의 일이 아무리 중요하다 할지라도 래년이면 이야기가 되기 마련이다.나는 이제야 아픈 사람의 속사정을 조금은 알것만 같다. 나는 이제야 배고픈 사람의 어려움도 조금 더 알것만 같다.나는 이제야 조금씩 철이 드는가 싶다. 량반도 굶어봐야 비로소 군자가 된다.
3    '백두장군'과 '광개토대왕비' 댓글:  조회:2442  추천:8  2014-01-23
>과              잡문  허인     그는 성이 김씨이고 이름은 무엇인지 아무도 모른다. 내가 아주 어렸을때 주옥같은 옛이야기들을 너무나도 구수하고 재미있게 들려주시던 아버지의 무르팍에 쪼크리고 앉아 매일밤 귀동냥삼아 들었던 이야기가 어쩌면 다재다난한 우리 조선족근대사에 조그마한 보탬이라도 되지 않을가 하는 생각에 두서없이 이 글을 적는다 . 나의 이런 소견이 더없이 어리석고 또한 부질없는 짓일지라도 독자 여러분들이 재미삼아 읽어봐주시고 그냥 예쁘게 봐 주었으면 감사하겠다 .     이 이야기를 시작하려면 우선먼저 나의 할아버지와 나의 아버지, 그리고 우리집 가족사를 간단히 소개하지 않을수가 없다. 양천 허씨가문 허준의 제12대손인 나의  할아버지 허관세(현재 살아계시면 130세좌우)는 조선 함경북도  무산군 계룡면 어디선가 사시다가 1920년, 즉 지금으로부터 90여년전 일곱살 난 나의 아버지 허기선(현재 살아계시면 100세)씨를 등에 업고 년로하신 할머니와 일가식솔 모두 이끌고 첨벙첨벙 두만강을 건너 지금의 연변자치주 화룡시 서성진 합신마을에 은둔, 일본 간도성정부시절 연변지방에서는 유명한 한의사인것으로 알고 있다 .일찍 나의 아버님과 아직 건재해 계시는 막내고모 (허선옥84세)님의 이야기에 따르면 나의 할아버지와 간도성 제일헌병사령관 김일로(조선인 일본륙군사관학교졸업)씨는 작형제관계 , 김일로씨의 모친이나 그의 가족성원들에게 병이 나면 언제나 김일로가 직접 찦차를 몰고 합신산골까지 찾아와 나의 할아버지를 모셔다 진맥, 처방하고서야 한시름을 놓군 하였다고 한다.     그외에도 풍수지리와 점술에도 능하셨던 나의 할아버지는 돈 없고 가난한 사람들의 병과 풍수지리를 수도 없이 많이 봐주셨으며 이신 우리 할아버지가 화룡시가지에 과음으로 길거리에 쓰러져있으면 언제나 일본헌병들이 짚차로 어김없이 집까지 모셔다 드렸다고 한다 . 일찍 나의 둘째고모님의 생전 말씀에 따르면 나의 부친님의 첫번째 부인도 김일로가 중신, 후에 난산으로 사망 ,이렇게 따지고 보면 나의 어머님은 후처인셈이다 .아버지와 나의 어머니의 년령은 18세차이, 1968년생인 나는 8남매중 막내, 나의 아버지가 55세때에 내가 태여났으니 나와 나의 외조카는 아이러니하게도 원숭이 띠동갑 ,  시대적인 말로 하면 정말 웃지도 울지도 못할 희극적인 상황이 아닐수가 없었다     유식한 할아버지와는 달리 나의 아버지는 야장쟁이, 그 당시 화룡시가지에서는 제법  알아주는 기술일군이셨다고 한다, 조금 불편한 몸이심에도 불구하고 한창 젊었을때 화룡시가지에 내려가 일본순사의 귀뺨을 후려칠 정도로 성격이 올곧고 강인하셨던 나의 아버님은 말그대로 산전수전을 다 겪으신 분이였으며 늙으막에는 제 자식만이 아니라 동네집 코흘리개들까지 마주치면 어김없이 이쁘다고 두볼을 쪽쪽 빨아주시곤 하는 무척 인자한 분이셨다 .     하도 어릴적 일이라 지금은 조금 기억이 아리숭하긴 하지만 아버님 말씀에 따르면 김씨는 백두산 근처 어느 두메산골에서 늙으신 로모를 한분을 모시고 산다고 해서 붙여진 별칭ㅡ 지금으로 따지면 아마도 안도현경내가 아닐가 싶다. 그가 묵직한 지게에 땔나무를 한가득 해지고 화룡시가지로 내려올라치면 마치 작은 산이 움찔움찔 움직이는듯하였다고 하니 상상을 훨씬 초과하는 굉장한 완력이였다고 보여진다 .     구척의 키가 지금의 센치로 따지면 어느정도인지 알수가 없지만 그는 남자중의 상남자 , 또한 호걸중의 호걸 ㅡ완강하게 거항하는 그를 붙잡는데 일본헌병 몇개 소분대를 동원하여야 하였으며 전신무장한 장정이 적수공권인 그와 맞서 싸우다가 절반이상이나 거덜이 났엇다고 하니 아마도 수호지에서나 볼수있는 로지심이나 무송이 아닌 무송이였다고 해도 조금도 과언이 아닐것이라고 생각된다 .     간신히 을 생포후 그의 탈옥을 방지하기 위하여 일본오랑캐들은 의 손목, 발목 힘줄을 칼로 모두 잘라놓았으며 마분지에 그의 솥뚜껑같은 손도장을 찍어서 그 당시 돈 오전에 판매 , 그 무슨 괴물인양 간도성 곳곳을 돌며 전시를 하다가 유전자연구를 목적으로 일본에로 후송 , 그후 그에 관한 소식은 아무도 들은적이 없다고 한다 . 지금 생각해봐도 너무나도 가슴이 아프고 슬픈 이야기가 아닐수가 없다.     그외에도 아버님은 자주 허씨유래와 2000여년전 김수로왕이 세운 가야국은 부처님의 자비로 세워진 불교국가였다것과 지금의 집안시 광개토대왕비의 원래 비문과 그 탁본에 관해서도 여러차례 이야기하신적이 있으시다 . 지금 생각해보면 일찍 소학교문조차 가보신적이 없고 겨우 떠듬떠듬 제 이름자나 쓰시는 아버님께서 어떻게 그 많은 이야기들을 머리속에 꽁꽁 기억해두셨을지 절로 감탄니 나올뿐이다 .     아버님의 말씀에 따르면 일제가 중화를 대거 침략하기직전인 일본 간도성정부시절, 치안을 빌미로 간도땅에 발을 들이 민 일제가 제일 처음 착수한 일이 곧바로 광개토대왕비비문을 뜯어고친것이란다. 정확히 어느 년대인지는 알수가 없지만 어느 해 겨울 수많은 일본헌병을 파견하여 근 일년간 광개토대왕비를 물샐틈없이 에워쌌으며 일체 민간인과 중국인은 모두 접근금지,  공사가 끝난후 곧바로 진짜 탁본은 일본으로 보내졌으며 이 모든것은 극비중에서도 극비에 붙여졌다고 한다.     일본 헌병사령관인 김일로가 어느날 술김에 할아버지께 한 말이라고 하니 실속이 있지 않을가 생각해본다 .     력사는 발굴만이 아닌 발견일수도 있으며 또한 가슴 따뜻한 기억일수도 있다 . 한장의 완벽한 그림을 그리려면 질 좋은 종이와 붓이 필요하고 또한 훌륭한 화공이 있어야 완성이 되질 않겠는가? 나는 력사학자도 화공도 아닌 일개 문학인일뿐이다 .오직 진실을 말하고 또한 진실만을 알고 싶고 그리고  오늘날 너무나도 창백한 우리네 력사에 자그마한 단서라도 되였으면 좋겠다고 나름대로 생각해본다.   2013년11월3일   심양에서
2    수필 잠깐 올려다보기와 잠깐 내려다보기 댓글:  조회:2157  추천:7  2014-01-23
수필   잠깐 올려다보기와 잠깐 내려다보기              심양 허창렬   (好的人生,好的人格来完成) 이 말은 지난달 나의 계몽스승인 아왕단지활불(阿旺旦智活佛)이 순례차로 심양에 왔을때 남긴 말이다. 덤으로 그는 우리들에게 고 하셨다(活在世上没有一个人能回避恐惧, 我们能走多久, 靠的不是双脚而是意志. 我们能登多久, 靠的不是身躯而是志向. 我们能做什么, 靠的不是双手而是智慧. 我们能看多远, 靠的不是双眼而是远见)     그야말로 부정할래야 부정할수가 없고 저절로 깊숙히 고개가 숙여지는 명언이라고 하지 않을수가 없다. 따지고보면 이 세상의 세가지 물건은 한번가면 두번 다시는 오지를 않는다 . 그것은 곧바로 시간과 효도와 그리고 기회ㅡ 또한 이 세상의 세가지 물건은 족히 한사람을 완전히 훼멸시킬수도 있다 . 그것은 곧바로 분노와 질투 그리고 자만이리라!!     일찍 성현들이 이르기를 인생은 삼지가립세(三知可立世) ㅡ 즉 지천(知天), 지명(知命), 지리(知理), ㅡ하늘을 알고 제명을 알고 도리를 안다면야 이 세상에 무엇이 더 두려우랴? 그만큼 중요한것이 삼득(三得), 즉ㅡ첫째, 침착하고(沉锝住气) ㅡ둘째, 부러지지않고 휘여들줄도 알며(弯锝起腰) ㅡ셋째, 부끄럽지않게 떳떳할수 있는 자신감일것이다(抬得起头).   내 인생의 사전에는 결코 일견종정(一见钟情)같은것은 없다. 그만큼 불교의 중도(中道)사상ㅡ즉 인연에 너무 연연하지 않겠다는 말이라고 해야겠다 . 조엘 오스턴이 한 말이다 .따지고보면 우리네 인생의 최대결함은 자꾸 남과 비교하는데서부터 불행이 시작되는것 같다 .이를테면 부부사이 밖에서는 꼭마치 너구리같고 밥상머리에 마주앉기만하면 어느사이 암펌이 되여버리는 마누라가 시비조로 시도 때도없이       하면 그 집안이 풍지박산이 나는것은 시간문제일것이고 또한 개인차가 성행인 요즘 시대 거리에 게딱지같이 잔뜩 널린것이 자가용인데도 정작 내것은 왜 한대도 없을가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노라면 제명을 다 못살것은 둘째치고 일찌감치 번대머리가 되기가 또한 일쑤이질 않겠는가?   일찍 공자가 황하에 이르러 계몽스승인 로자와 나눈 대담이 퍼그나 인상적이다.   모두다 알다싶이 전국시대 유교사상의 례의범절은 그 당시 군주와 통치배들에게 잔뜩 리용만 당했을뿐 정작 공자는 각근한 푸대접끝에 언제 어디서나 하루 세끼 끼니마저 변변치 못한 어려운 상황이였다, 그런 공자의 심리적 고통을 그 누구보다도 손금보듯이 꿰뚫어 잘 알고있는 로자가 공자에게 어느날 황하가에 이르러 고 권유, 하고 되묻는 공자의 질문에 로자가 대답하기를고 력설 , 크게 깨닫는바가 있어 그때로부터 공자는 주변7국을 물 흐르듯이ㅡ 메주 밟듯이 하였다는 이야기가다, 우리도 항상 이처럼 심성이 맑디 맑은 물처럼 섭리를 알고 순리를 좇아 조용히 흐르고 또 흐르노라면 언젠가면 우리네 지향도 저 큰 바다처럼 더욱 넓고 더욱 깊은 큰 그릇이 되질 않겠는가?   계수천중천 (稽首天中天) 호광조대천 (毫光照大千) 팔풍취불동 (八风吹不动) 단좌자금련 (端坐紫金莲)   송대(宋代)의 대사인(大词人) 소동파(苏东坡)가 지은 시 한구절이다. 여기에는 더욱 재미나는 이야기 하나가 있다. 팔풍(八风)이란 즉 불교에서 말하는 (称, 讥, 毁, 誉, 利, 哀, 苦, 乐) ㅡ평소에 불교에 남달리 관심이 많았던 소동파가 어느날 시흥이 도도한 나머지 일필휘지로 시를 적은후  즉시 서동을 불러 강건너에 살고있는 불인선사(佛印禅师)에게로 전달, 동자가 건네주는 시첩을 받아 읽어본 불인선사는 총망히 몇글자를 적어 넣은후 다시금 동자를 강 건너로 돌려 보냈다 . 소동파가 받아보니 오직 두 글자ㅡ 곧 (放屁)였다. 화가 상투끝까지 치밀어 오른 소동파가 직접 배를 타고 강을 건너서니 벌써 불인선사가 강변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소동파의 칼날같이 예리한 꾸지람임에도 불과하고 불인선사 기분좋게 하하 크게 웃으면서 대답하기를 순간 소동파는 창피하여 얼굴이 수수떡처럼 붉어졋다고 한다.   이 세상에 살아있는 모든 생명은 오직 살아있는 리유만으로도 그 누구에게나 존중받아 마땅하다. 그것이 무엇이였든간에 ㅡ초라하면 초라한대로 구질구질하면 구질구질한대로 찌질하면 찌질한대로 구차하면 또 구차한대로 자기한테 허용되고 주어진 삶을 열심히 살아가면 그뿐이 아닐가? 먼 훗날 아무도 우리를 기억해주를 않겠지만 그것이 삶이고 그것이 우리네 력사인것을 어찌하겠는가?   현실을 살면서 소중함을 모른다면 금산을 끼고 앉아있어도 기쁠수가 없고 관용(宽容)을 모르면 아무리 친구가 많다 하더라도 조만간 모두 곁을 떠날것이며 감은지심이 없으면 또한 성공이 있을수 없고 만족을 모르면 제 아무리 부유하다해도 행복이 따로 있을수가 없다.   (本来没有我, 生死皆可抛) 대만삼대불교령수(台湾三大佛教领袖)중의 한사람인 법고산(法鼓山创办者) 창시자 성엄법사(圣严法师)의 말이다. 일설에 성엄법사께서 어느 해 가을 려행도중 무척이나 자신을 싫어하는 어떤 수행자와 우연히 동행, 그 수행자는 련 며칠간이나 성엄법사의 인격을 우롱하고 모함하는 말들도 서슴치 않았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성엄법사님께서 조용히 그 수행자에게 묻기를그러자 그 수행자가 대답하기를 고 답변, 그때 성엄법사가 고 껄껄껄 웃으셨다는 이야기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인생좌우명이다! 어쩌면 내가 남을 한번 부정할때 남은 열번도 더 나를 부정할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노라면 인생은 이외로 너무나도 편안하고 또한 간단하다ㅡ따지고보면 이 세상의 잘난 사람  못난 사람ㅡ 그 누구의 인생에도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이나 소유권(所有权)같은것은 절대로 없다. 오직 승차권이나 티켓같은 사용권(使用权)만이 있을뿐ㅡ한번 가면 그뿐인 우리들의 인생이라 하지만 오늘도 희미해진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고 하루에도 수없이 자신에게 수많은 질문을  퍼 부어보아도 답은 오직 하나 ㅡ십삼억팔천만명중 또 이백만명, 그중의 한 성원인 나는 중국조선족ㅡ이것이 주어진 운명이고 숙명이라면 이제 이 세상 그 어데를 가더라도 떳떳할수밖에 없는 좋은 리유가 되질 않겠는가?   어느새 락엽이 버석이는 인생의 산중턱에 우뚝 하늘을 떠받치고 선 천년바위가 되여 마음보다 더 넓고 아득히 높은 하늘을 잠깐 올려다보고 또 잠깐 내 지나온 발자취를 유심히 살펴보노라면 멀리 허리띠같은 시내물이 오늘도 예이제없이 구비구비 허다한 산굽이를 에돌아 천천히 내 발굽을 적시며 잽싼 발걸음으로 미래에 다가서고 있다
1    2000여년전 가야국은 불교나라였다 댓글:  조회:3264  추천:25  2014-01-22
2000여년전 가야국은 부처님의 자비로 세워진 불교나라였다          잡문       허인   가야산(伽耶山) 가야성(伽耶城) 보리수(菩提树)나무아래 칠칠에 사십구 간고한 명상끝에서야 마침내 소중한 그 깨달음을 얻으시고   구시나(拘尸那)성외곽 싸라나무(莎罗树)숲에서 (이하 생략…)   필자의 졸작 중의 첫시구절이다. 불교에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모두 알수 있는 사실 ㅡ2600여년전 석가모니부처님께서 6년간의 고행끝에 드디여 양몰이처녀의 공양을 받으시며 가야산 가야성 보리수나무아래에서 사투와 같은 사십구일간의 명상(冥想)끝에서야 비로소 깨달음을 얻으시고 그로부터 장장45년간 넓고 넓은 인도(구인도ㅡ지금의 네팔 , 파키스탄 ,방글라데슈 ,모두 포함) 의 방방곡곡을 돌면서  보도중생과 함께 불교를 널리 전파하셨다는 사실을 ㅡ 일전 인터넷에 올라 력사스페셜을 관람하던 중 섬나라인 일본이 후안무치하게도 2000여년전 가야국을 로 추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다 . 억지라도 이런 생억지가 또 어디에 있겠는가 ? 그야말로 무덤속의 김수로왕이 벌떡 일어나 호통을 칠만한 코맨틱한 일이 아니겠는가 ? 공교롭게도 이 세상엔 가야국은 오직 하나ㅡ가야산은 두곳뿐ㅡ 지금의 네팔경내에 있음직한 가야산과 한국의 가야산 ㅡ 우연인가? 그렇치를 않다.   그럼 여기서 양천 허씨(阳川许氏)의 략력을 잠깐 보자 .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에서 출판한 에서는 이렇게 적고 있다 . 는 내용이다 . 대한민국 허씨종친회에 문의하여 봐도 허씨의 시조는 틀림없이 인도의 허왕후로 되여 있다 .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점은 허왕후이다. 왜서 김수로왕이 해변가에서 만난 사람이 인도의 일개 평범한 보통 녀인이 아닌 허왕후라고 분명하게 적고 있는가이다. 혹자는 혹시 아무런 력사적 근거가 없는 전설이 아닌가고 의문점을 제기할수도 있지만 그렇치도 않다 . 그것은 자칫하면 허씨의 시조를 의심하고 우롱하는것과 조금도 다를바가 없기때문이다 . 례를 들면 박씨의 시조 박혁거세가 우물에서 태여났고 김씨의 시조 김알지가 알에서 태여났다는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인것처럼처럼 봉건사회적인 신격미화가 아니였을가 생각해본다 . 김수로왕   공원 42년, 락동강을 위주로 지금 한국의 부산, 김해일대에 세워진 가야국은 종교 , 문화 , 군사력이 제법 막강한 련합국가ㅡ 일설에 허왕후가 인도에서 건너올때 600여명의 수종과 측근들을 데리고 왔으며 그들이 조선반도 남해안 일대에 불교교리와 농경문화를 보급하는데 마멸할수 없이 크나 큰 공적을 남겼다고 한다 . 이로부터 대담하게 추축해볼수 있는바 가야국은 인도의 허왕후가 데리고 온 600여명의 추종자들과 당지의 토착민이 통혼,  련합하여 부처님의 자비로 반도땅에 이 설립한것이  분명하다 . 썩 훗날 중국의 당태종이 량국의 화친을 도모하고저 문성공주를 송짠감보에게 시집을 보냈을때 문성공주가 이끌고 간 천여명의 측근과 추종자들이 씨앗이며 농경문화를 토번 , 즉 지금의 서장지역에 널리 보급한것과 똑 같은 실례라고 보면 쉽사리 리해가 될 부분이다 . 근300여년간 존속한 가야국 , 오늘날 누구나 잘 알고 있는 가야금이 곧바로 가야국말기에 제조된다것이라고 하면 또한 어느 누구라도 쉽게 리해가 되리라 믿는다 . 후에 가야국(6가야ㅡ금관가야, 대 가야 ,성산가야, 아라가야 ,고녕가야 , 소가야) 은 신라에 의해 통합된다 . 드라마 을 보신 분들은 모두 다 알고 있겠지만 김유신이 바로 가야국 출신  ㅡ 그후 천년의 력사를 자랑하는 신라는 법흥왕 즉위시기( 공원514년)에 불교가 엄연히 국교(国教)인 통일국가이다 .당태종 리세민시기보다도 100년을 썩 앞선 일이다. 중국에서 나서 자란 필자이지만 어느 조대 , 어느 력사기록에도 불교가 국교였다는 기록은 아예 없는것으로 안다 . 이것 또한 그냥 우연일가?   중국전임불교협회 회장 조박초(赵朴初)의 말에 따르면 불교가 중국대륙에 처음으로 전해지기는 동한영평년간 한명제때(东汉永平年间汉明帝) , 한명제가 어느 날 꿈속에서 온몸에 금칠을 한 사람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날아오는 괴이한 꿈을 꾸고서 하도 의아하게 생각되여 뭇신하들에게 이야기하였더니 傅奕라는 대신이 조만간 이 나라에 현인이 나타나고 경사스러운 일이 있을것이라고 하자 한명제가 대월씨를 파견하여 을 베껴오게하였으며 석실에 보관, 대부분의 주장은 한명제(68년 ㅡ 지금으로부터 약 1980여년전 ㅡ)에 불교가 대륙에 들어왔으며 그 근거를 락양 백마사에두고있다.(东汉永平年间汉明帝夜梦金人,问何臣,傅奕答;听说西方有号称为佛的得道者.能飞行虚空,身有日光.帝所梦见的就是佛 )   가야국 허왕후와 김수로왕의 통혼보다 거의 20여년 늦어진 기록이다 . 어찌됐건 서유기를 읽어본 사람이면 누구나 다 알수가 있는 사실 진정 대륙에 불교가 성행되기는 당태종시기ㅡ정관3년(贞观3年)에 현장법사가 당태종의 명으로 불경을 얻기 위하여 서천으로 떠나면서부터였다 . 그로부터 80년후인 천원 719년 (天元719年) 당고종시기 , 신라의 스물네살나는 왕자 김교각(金乔觉)이 신견 선청(善听)을 데리고 안휘 구화산에 정착, 불교에 전념 , 육신불(肉身佛)로 처음에는 유명교교주(幽冥教教主)라고 불리웠다가 후에 불교 4대보살중의 한사람인 지장왕보살(低藏王菩萨)로 된다.  불교에 조금만 더 관심이 있고 연구가 깊은 분들이라면 누구라도 쉽게 발견할수 있는 사실, 불교에서 왕자출신은 오직 두사람 , 불교를 창설하신 석가모니부처님과 지장와보살 김교각이다 . 이것 또한 우연중의 우연일가 ?   그럼 여기서 잠시 중국의 불교4대성지(四大圣地)를 살펴보자 . 문수보살(文殊菩萨)의 도장(道场)인 사천(四川) 아미산(峨眉山), 관세음보살(观世音菩萨)의 절강(浙江) 보타산(菩陀山), 산서(山西) 보현보살(普贤菩萨)의 오대산(五台山), 지장왕보살(地藏王菩萨)의 안휘 (安徽)구화산(九华山)ㅡ 이렇듯 아미산 , 보타산, 오대산에는 오늘까지 이러저러한 여러갈래 전설들이 많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긴 하지만 필자가 알건대 구화산의 지장왕보살님처럼 실존인물은 아예 없는줄로 안다 .  이것 또한 그냥 우연이라고만 할수 있을가? 아이러니하게도 불교가 중국에서 한국으로 전파되였다는것은 허씨략력이나 가야국의 김수로왕과 허황후의 통혼, ㅡ1300여년전 신라의 왕자 김교각 ㅡ지장왕보살이 중국에서 이룬 불교적 성과를 조명해보나 아무런 근거가 없는것이며 또한 신라의 왕자 김교각은 불교를 배우기 위하여 당나라에 들어 간것이 아니라 보도중생을 목적으로 구화산에 정착한것이 분명하다 . 일설에 그가 민공(闵公)에게서 구화산을 얻기 위하여 가사만큼한 땅을 요구, 민공의 동의를 얻고은 후 몸에 걸치고 있던 가사를 하늘에 높이 날려 옹근 구화산을 몽땅 뒤덮게 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물론 불교신도들은 신통력같은것을 과시하거나 뽐내지도 않지만 얼마나 큰 법력인가? 흔히 잘 알고있겠지만 고승(高僧)이나 훌륭한 고덕(高德)이 아니고서는 어림도 없는 일이라고 생각된다     필자는 불교신도이며 일개 문학인일뿐 력사학가도 고고학가도 아니다 .오직 진실한 력사를 알고싶고 제대로 된 진실한 력사를 후대들에게 말하고 싶을뿐이다 따지고보면 우리민족의 력사가 이처럼 많이 오전되고 또한 오보가 속출되고 있는것은 타민족의 끊임없는 침입과 침략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진실한 력사자료들이  훼손되였거나 훼멸되였으며 빼앗겼기때문이라고 생각된다 . 2000여년전 ㅡ허황후가 배를 타고 진정 가야국으로 들어온것이 분명하다면 2000여년전에 벌써 고인도와 가야국은 이미 해상통로가 열렸으며 교류가 활발하였다고 볼수밖에 없질 않겠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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