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창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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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오늘의 단평 댓글:  조회:1821  추천:1  2016-09-19
诗---桥..          金星龙(苏州) 桥 搭在 两岸之间 睡成了 石头...... 桥影子 抓住 桥的大腿 不想 跟着 流水 走...... 因为 爱 还 没有 过 桥......。 2016年..️月..️..️日 다리 김성룡 다리는 량안에 다리를 걸치고 점잖게 돌로 잠들어 있다 그림자는 다리의 허리띠 붙 잡고 물살에 떠내려 가지 ㅡ 않으려고 하루종일 몸부림 친다 왜냐 사랑이 아직 다리를 채 건너지 않은 까닭... 오늘의 단평 허인    "회남자. 설산천" 《淮南子·说山训) 에 이런 구절이 하나 있다 . (미지소재, 비오욕, 세불능천, 악지소재, 비고륭, 세불능귀)"美之所在,虽污辱,世不能贱;恶之所在,虽高隆,世不能贵"。뜻풀이 해보면 " 아름다운 사물은 아무리 어지러운것에 매몰 되여도 결코 그 가치가 절대로 떨어지지 않는다. 추악한것은 아무리 올리 춰 보아야 결코 존귀한 신분으로 바뀔수 없다"인것 같다. 김성룡시인은 기실 80년대 말, 90년대 초엽, 우리 조선족문단에서 동시 창작으로 무척 유명했던 분이다. 흑룡강성 조선어방송국에서 사업하다가 90년대 중엽, 한국으로 건너가 박사학위를 획득한후 현재 강소성 소주시에서 의류제조업에 종사, 그런 그가 중문시에 도전하여 현재 시집을 준비중이며 중국당대 문화시대보 등등 국내에서 제일 착지가 굵직하고 영향력이 큰 신문,잡지에 륙속 시작품을 발표하고 있는줄로 알고 있다.   초기의 그의 중문시 작품들을 살펴보면 짜임새가 너무 좋고 더우기 간결하여 미학의 척도로 극치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듯 하여 읽기에 무척 편했고 거기에다 철리적인 관습까지 곁들여 놓아 (도대체 무엇을 말하려는것일가)하는 의욕심을 충분히 발동하여 끝까지 읽게 하는 그런 마력이 있은것 같다. 반면 너무 깊게 살을 저며 내여 뼈가 다 드러나는듯한 그런 단점도 있는것 같다. 물론 매일 모멘트에 올리는 대부분 작품들이 초고이고보니 그런 오해도 결국 모면키 어려웠던것은 사실로 보여진다. 그런 그가 요즘 큰 작심이라도 한듯이 륙속 내여놓는 수개작은 현란하다 못해 조금 독자들을 당황하게도 만드는것 같다.그만큼 무게감이 늘어났고 황금 비중도 늘어났고 순도가 더 높아 졌다는 그런 말이기도 하다."다리"(桥)의 경우 짧은 단시임에도 불구하고 압운의 철학적인 사물현상을 정중하면서도 이외로 너무나도 단순한 마음의 교묘한 그런 움직임 , 즉 사랑으로 련결시켜 놓아 (너무 아름다워 슬프듯이) 크나큰 공명감을 일으킨것 같다. 자세히 설명하자면 제1련에서 잠 들어버린 돌, 그리고 2련에서 다리의 허리띠 부여잡고 떠내려 가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는 형상, 다음 제 3련에서는 한술 더 깊게 푸욱 떠서 사랑이 오질 않는 한 다리는 결코 다리로 기다려야 하는 숙명적인 운명을 시인이라는 사명감으로 분석하여 한폭의 그림을 독자들의 머리속에 진한 묵향으로 심어놓아 더욱 공명감이 컸던것이 아닐가로 생각된다.    주역 권이(圈二) "겸괘"(谦卦)에 (겸존이광)"谦尊而光"이라는 구절이 하나 있다. 뜻 풀이 해보면 "존귀한 이는 겸손의 덕을 갖춰 빛을 발한다"는 뜻이다. 우리 말 속담에도 (순금은 불을 겁내지 않는다)는 구절이 있질 않던가? 부족점이라면 시어 배렬에서 길게 늘여놓아 동시적인 그런 경향이 여직 남아 있는것 같다. 매번 통화때마다 술 냄새를 심양에까지 스스럼없이 풍기는 김성룡시인님, 올해 년말에는 꼭 좋은 시집을 선물로 보내주시길 두손 모아 부탁 드립니다. 심양에서 2016년 8월30일 오늘의 단평       김연의 수필은 깔끔해서 읽기가 무척 편하다. 깔끔하다는것은 그만큼 군더더기가 없고 손댈 필요가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황향숙의 수필 "당신은 어떤 승냥이에게 먹이를 주는가?"가 철리적인 관성과 본능에 점철된 봉건 례의범절이라는 화자를 비판과 비교를 예리한 메스로  도입하여 결코 거창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결코 작지도 아니 한 큰 감명을 불러 일으켰다면 김연의 "담요를 덮으며"에서는 순수한 감성의 바다속에서 자연을 만나고 숲을 만나고 구름을 만나고 삶을 만나고 여름을 거쳐 가을을 만나게 되는듯 하여 줄곧 상큼한 기분속에서 비애같은것은 느낄수가 없고 상큼 발랄한 이미지가 완성이 되여 더욱 행복한 독자가 되여가는 그런 느낌이 드는것 같다. 회남자 설림훈 (淮南子,说林训)이런 구절이 하나 있다.(주복내견선유, 마번내견량어)"舟覆乃见善游,马奔乃见良御", 대개 그 뜻을 풀이해보면 "배가 뒤집혀질때에야 비로소 누가 진짜 수영을 할줄 아는 사람인가 알수를 있고 말이 달릴때에야 비로소 누가 진정한 기수인가를 알수가 있다" 뜻이다. 진정 재주가 있는 사람은 평시에 보아낼수가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허나 풍운변화, 위급한 상황이 닥치게 되면 진면모가 드러나게 된다는 그런 뜻이기도 하다. 필자는 황향숙씨나 김연씨를 그런 부류의 진정 재능을 갖춘 문인들이라고 말하고 싶다. "담요를 덮으면서 "에서 "보송보송한 체취","미소가 알른거린다"만져보고 부벼보고" 등등표현은 녀성 특유의 세밀한 관찰과 예리한 감성을 최대한으로 잘 표현한 구절들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담요를 덮으며 / 김 연   얼마만인가?  한쪽켠에 곱다라니 개여 두었던 요 아이를 꺼내 보송보송한 그의 속살에서 따뜻한 체취를 느껴본다. 늘 부끄러운듯 두눈을 수줍게 살풋이 내리까는 요 아이, 얼굴에서는 언제나 반가운 미소가 알른거린다. 만져도 보고 부벼도 보고 껴 안아도 보고 아주 잠간 깔고 앉아도 보고ㅡ언제봐도 늘쌍 심성이 부드럽고 고마운 아이다. 또한 마음 구석 한 구석으로는 벌써 요 아이의 도움을 받아야 할 계절이 왔나싶어 뭔가 를 잃어버린듯한 느낌에 리유없이 서운해기도 하다.    아직 숲속 나무 사이사이를 요리조리 숨박곡질 해대는 뭇새들의 노래소리를 채 듣지 못하였는데 , 다이어트하여 예쁜 치마 입고 한껏 멋도 더 부려보고 싶은데, 바닷가 백사장 모래위에 참새같은 내 발자국 톡톡 찍으며 손에는 신발 들고 시원한 파도소리에 묻혀도 보고 싶은데, 지지고 볶고 가사들을 다 챙겨가지고 도시의 소음을 벗어나 마음까지 훤히 들여다 보이는 계곡속의 맑은 물을 찾아 실컷 힐링도 더 하고 싶은데, 어느새 여름은 가버렸다.   가을이 접어든 길목에 서서 아쉽게 여름과 안녕을 부른다. 여름따라 가려고 애써 몸부림치는 파란 나뭇잎에 이 글들을 하나하나 적어 딸려보낸다. 여름아, 네가 있어서 즐거웠고 행복했어. 내년에 우리 또 만나는거지~ 그리고 가을아, 길을 잃어버리지 않고 올해에도 이렇게 찾아줘서 고마워.텅 빈 하늘이 벌써 자박자박 걸어와 솜 사탕같은 바람이며 얼음 사탕같은 구름을 우리들 곁에 부리워 놓는다. 이제 너와 함께 할 시간들에 벌써 마음이 들끓어 오른다. 짧지도 길지도 않게 우리 함께 잘 지내보자 가을아~ 담요, 니가 난 참 좋다... 2016. 8. 28 들 꽃/ 류설화 이름모를 비탈진 바위사이 그리고 논두렁 흙두렁사이 아련한 네 몸짓에 젖어 순간 멈춘 나는 에돌다 다시 널보러 간다 잎아리를 씻어주는 아침이슬로 잎사이를 메워주는 밤달빛으로 네한몸은 끝내 피여나는구나 그러나  어느 지는날 어느 바람이 불면 너는 피기 위해 더 깊이 눕는다 그러면 바람이 너를 일으키리 2016.09.11 오늘의 단평 원고지에 또박또박 제 이름 써가는 녀자 허인    독일이 낳은 저명한 시인 괴테는 (창작은 패러디이다)고 말한적이 있다. 이 말을 두고 몇몇 로 시인들이 맞는 말이네 틀린 말이네 한때 시야비야 한적이 있는데 필자가 보기에는 필요 없는 일이였던것 같다. 왜냐하면 패러다임은 언제, 어느때도 존재하기때문이다. 만약 초학자일 경우 패러다임이 되고 기성 시인일때 자신만의 개성으로 모방한다면 자기 패러디적이라고 말할수 있기 때문이다. 솔직히 팔자의 경우 작자의 개성쪽을 더 추구하다보니 패러디적인 사고방식을 그닥 제창하지 않는 그런쪽이다. 류설화의 들꽃이 자기 패러디식 작품이다. 회의 참석차 윤동주의 시고 아래 새까맣게 도배해가면서 자기 패러디적인 들꽃을 완성한 류설화씨는 초고 그대로 필자에게, 세상에 떳떳이 내여놓을수 있는 몇 안되는 솔직하고 용기있는 그런 사람인것 같다.  또한 시인의 재주를 타고 난듯이 재능이 있는 그런 젊은 시인으로 보인다. 작자의 거듭되는 수개요청에 여직 확답을 주지 않았던 원인이 곧바로 작자의 자기 패러디적인 정서를 파괴하고 싶지 않았던것이였음을 여기서 이제는 밝혀야 할것 같다.그럼 류설화가 그리려고 하는 "들꽃"의 형상은 어떤것이였을가 다 함께 살펴보도록 하자         /이름모를 비탈진 바위사이/그리고 논두렁 흙두렁사이/아련한 네 몸짓에 젖어/순간 멈춘 나는/에서 이름모름이라는 파생어가 들꽃이 아닌 듬직한 바위 앞에 붙어 있어 아련한 네 몸짓에 젖은 나의 사유는 바람과도 같은 형체로써 나의  강경한 태도를 대신하였으며 그러한 명확하게 구분된 사유, 혹은 사상이 있었기에 2련에서 자연스럽게/에돌다 다시/널보러 간다/가 완성된것 같다. 다음 "잎아리"라는 신생용어를 새롭게 창출해낸  녀류시인의 참으로 용기는 칭찬 받을만 신선한것이였다고 말하고싶다. 잎아리냐 이파리냐 고민한 흔적이 력력하지만 필자는 신생용어 창출 역시 시인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다음 아침이슬과 달빛을 꽃이 피여야 할 비옥한 몇줌의 자양분으로 사용한  작자의 슬기역시 칭찬받아 마땅할것 같다.  /너는 피기 위해 /더 깊이 눕는다/가 이 시의 포인트이며 축의 역활을 하고 있는데 얼마나 절묘하고 제대로 간결함의 극치인가?/그러면/바람이 너를 일으키리/로 역시 철리적인 사색을 가다듬어 깔끔하게 마무리하여 시적 여운이 더욱 길어지는듯 하다. 이 시의 장점이 바람과 마음의 상호 력칭관계, 그러하기 때문에 바람이 가는곳을 마음이 따라가 마음으로 느끼고 사색하고 고만하게 하는듯 하다. 깔끔하고 읽기 편한 좋은 시라고 생각된다.   부족한 점이라면 리좀(시어와 시어를 이음)이 너무 직설적인 "그리고", "그러나", "그러면"으로 되여 있어 읽기가 편한 반면  품위가 일반화 되여 자기 패러디적임이 너무 많이 드러나는듯 하다. 그리고 짜깁기의 흔적도 보이는것 같다. 한마디로 경험 부족인것 같다. 패러디와 자기 패러디 사이는  단순한 계발이나 모방 차이가 아니고 작자의 독특한 개성을 얼마나 많이 살리냐의 차이점인것 같다. 류설화시인은 아직 무척 젊고 앳돼 보이는데 독창적인 개성작품이 줄줄이 나오기를 기대해 보고 싶다. 2016.9.14   보슬비(외1수) 김기덕   하늘에도 세탁소가 있나보다 물에 젖은 흰 중고를 세탁하네 간판없이 물 새는 수도꼭지처럼 주르륵 주르륵 비가 내리는 하늘 해가 나면 해살이 걷어갈 이슬방울 다시 지상으로 돌려주는 손들 오늘도 바쁜 하루를 산과 들에 두네 금방 깨어난 어린 생명들을 거느리고 보슬비가 고향을 찾아가나보다 고향이 그리워 나무가지마다 새 편지를 조용히 읽으며 내려오는 들판은 깊은 감격에 푹 젖었다.      산다는 의미    가끔 창가에 앉아 밖을 내다보면 생명을 가지고 산다는 길이가 보인다 그 깊이는 보이지 않고 넓이는 어디로 묻혀 있는지 산다는 이미지가 파랗다 산새들이 마을로 내려와 우는 이유를 비우고싶은 숲은 잘 알겠지만 숲으로 지게를 지고 들어가는 한 사나이 멀어 질수록 작아지고 있다 지금 산다는 정의를 읽어보면 다른 세상을 향하여 간다는 이해가 된다 보리밭에 벼짚 사람 속은 비어도 보리고개 넘어가는 진실이 옷을 벗고 있다. 오늘의 단평 허인     솔직히 김기덕시인님의 이번 "보슬비"와 "산다는건"을 읽고서 필자는 깜짝 필자는 놀랐다. 말 그대로 한구절 한구절이 모두 명언이기때문 이였다. 백문불여일견이라고 잡담 모두 제쳐두고 시속으로 직행해보자/하늘에도 세탁소가 있나보다/물에 젖은 흰 중고를 세탁하네/에서 가상적인 서술, 즉 하늘과 세탁소는 시어와 시어사이 리좀(잇기)이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만큼 생소한 낱말이 어우러져 돋자들의 눈앞에 펼쳐놓은 그 시각효과는 그야말로 우리들의 상상력 이상으로 어마어마하다. 하늘과 세탁소가 너무나도 강력한 포인트로 독자들의 머리속에 떠오르다 보니 아래 시구에서 /물에 젖은 중고를 세탁하네/는 또한 자연스럽지 않을수가 없다. 이 시는 전부 이렇게 추석에 선물 한쪼각씩 건네주듯이 독자들에게 즐거움을 주고 있다. /간판없이 물 새는 수도꼭지처럼/에서 수도물꼭지와 /주르륵 주르륵 비가 내리는 하늘/에서 하늘의 미묘한 입맞춤은 마치 신혼부부의 애정행각처럼 상상만으로도 달큼하다. /해가 나면 해살이 걷어갈 이슬방울/에서 이슬방울과/다시 지상으로 돌려주는 손들/금방 깨어난 어린 생명들을 거느리고/보슬비가 고향을 찾아가나보다/에서는 로시인의 로련함과 기발함이 그대로 려과없이 투시되는듯 하다. 결구에서/고향이 그리워 나무가지마다/새 편지를 조용히 읽으며 내려오는/들판은 깊은 감격에 푹 젖었다./에서 젖었다의 황금비중이 어느만큼의 무게인가를 독자들은 상상만으라도 그저 행복할것 같다.   김기덕시인을 흔히 향토파, 전통파 시인으로 평가하는 평론인들이 더러 있는데 필자가 보건대 김기덕시인님은 단순한 향토파, 전통파 시인이 아닌 현대파시인인것 같다. 사유의 혁신에서 그는 언제나 소리없이 앞장서서 이미지 혁신에 꾸준히 심혈을 기울리고 있는듯 싶다. 그러한 끈질긴 노력은 그의 근래 근작시들에서 분명히 빛을 발하고 있으며 너무나도 선명하게 잘 드러나고 있는것 같다.  솔직히 공간적 시어 배렬이나 시간적 내러티브(narrative)를 중시한다는건 결코 아무나 할수 있는 일이 결코 아니다. 마치 즉흥이 구술형이라면 담화를 통해 인간과 사회를 탐구하고 자연에 인격을 부여하여 인간의 옷을 입고 인간적인 대화를 나눈다는건 얼마나 간거한 작업인지를 진정 시를 쓰고 아끼는 사람만이 그 엄청난 깊이를 알수 있을것 같다. 김기덕시인의 그러한 길이와 너비, 그리고 깊이를 우리는 "산다는건"에서 더욱 똑똑히 찾아볼수 있을것 같다.     /가끔 창가에 앉아 밖을 내다보면/생명을 가지고 산다는 길이가 보인다/에서 먼저 세상을 대하는 시인의 확고한 자세가 보이고 생명의 변 두리가 아닌 그 중심에 서서 철학적인 혜안으로 살펴본 "길이"가 먼저 등장한다. 길이가 있으면 넓이도 있기 마련이고 깊이도 있기 마련이다. /그 깊이는 보이지 않고 넓이는 어디로/묻혀 있는지 산다는 이미지가 파랗다/에서 파랗다는 여기서 얼마나 싱싱한 이미지로 다가오는가? 제일 마지막 결구에서는 삶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듯한 약간 허구프고 진실한 독백으로 이 세상에 던지는 야유로도 보인다. /지금 산다는 정의를 읽어보면 다른 세상을 향하여 간다는 이해가 된다/보리밭에 벼짚 사람 속은 비어도/보리고개 넘어가는 진실이 옷을 벗고 있다./.  이 두수의 시가 세상에 던져주는 멧세지는 무척 힌트적이여서 읽는 사람마다 몇번씩 머리속에 되새겨봐야 할것 같다    부족한점이라면 시어선택이 몇군데 모호하고 그 효과에 의문점을 주고 있는듯 하다. 이를테면 (흰 중고를 세탁한다)에서 중고, 도대체 뭘 말하려는지 조금 희미해 보인다. 다음 "산다는건"에서 갑작스레 등장한 길이와 넓이, 깊이에서 폭력적 조합에서의 맞춰 깁기식이 보이는듯 하고 련결이 다소 생소한 그런 느낌을 주고 있는것 같다."실례로 '생명을 가지고 산다는 길이가 보인다'에서 독자들은 '길이 보인다'를 먼저 떠올리게 되여 간혹 오타가 아니였을가 하는 생각을 먼저 하게 되는듯 하다. 그 다음 시구에서 넓이와 깊이가 등장하면서 비로소 오해가 풀린다) 아무쪼록 김시인님의 "보슬비"와 "산다는건" 두수의 시는 이 달의 아주 멋지고 좋은 시임을 인정한다. 필자가 알건대 김기덕시인님은 파킨스 병으로 타자가 어려울만큼 병마와 싸우는 중인것으로 안다. 좋은 시 잘 읽었습니다. 김기덕시인님 건강하시고 좋은 시 더 많이 쓰세요. 2016.9.15 차 (茶)           박춘월 빈 시간에 담백하고 단정한 널 부어 넣을 때가 있다 자정같은 네 속에서 엉켜있던 매듭들 풀려나가는 소리 곱다 한가로움과 평안함의 향기 익어터지는 빈 틈들 한잔의 넌 출렁이는 오아시스여라 화판에 널려있는 잡동사니 뽑아내고 여백의 령토 넓혀가는 네 귓속말 카텐 저쪽은 눈가루 잔잔히 내리는 오붓한 마을이다 풀꽃 가만히 웃고 있는 먼먼 언덕이다 오늘의 단평 그릇에 담아 올린 그윽한 차향기 허인   슈클로프스키는 (예술은 삶의 생동감을 복원하기 위해서 있다. 예술은 우리가 사물을 느끼게 하고 " 돌"은 돌로 느끼게 한다. 예술의 목적은 사물의 생동감을 인식되는대로가 아니고 감지되는대로 느끼게 하는데 있다. 예술의 기교는 사물을 낯설게 하는데 있다)고 말한적이 있다. 박춘월시인은 말 그대로 90년대 중엽 현대시의 광풍취우속에서 성장해온 그런 시인이다. 그만큼 그는 오늘까지도 조선족문단에서 독보적인 존재라는 그런 뜻이기도 하다.일찍  "록" , "찻잔"등 주옥같은 시들을 문단에 내놓아 시적인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기도 하였으며 그로 인해 시야비야 시끄러운 일들도 무척 많았던줄로 알고 있다. 필자의 몇번씩이나 되는 원고 독촉에도 어김없이 사양만 거듭하더니 자신의 모멘트에 슬쩍 올려놓은 "차"라는 시를 읽고 필자는 지금 흥분으로 이 글을 쓴다.예술은 예술일때만이 그 독보적인 존재 가치가 있다는 말이 있다. 만사 제쳐두고 우리 함께 시속으로 직행해 보도록 하자. /빈 시간들에/담백하고 단정한 널/부어 넣을 때가 있다/에서 가장 선명하게 눈에 띄이는것은 곧바로 시공을, 공간을 그릇으로 삼은 녀류시인의 로련함 침착성이다. 빈 시간은 공간을 이다. 시인에게 그 공간은 어떠한 모습일가? 상상과 기억의 쪼각들을 퍼즐처럼 주어 맞추노라면 결국 우리들의 감각에 와닿는건 마음의 공간이며 심미적인 효과는 한잔의 차가 배속으로 직행했을때의 그 여유로움이다. 들쑥날쑥한것 같지만 시인이 느낀 차 한잔의 모습은 과연 어떤것이일가?/자정같은 네 속에서/엉켜있던 매듭들/풀려나가는 소리 곱다/에서 자정의 함의는 오감을 죄다 동원하여야 감각으로 느낄수 있는 매듭 풀리는 소리가 곱다ㅡ로 마무리 된다. 여기서 곱다의 비중은 인간세상의 정화작용, 어쩌면 다이어트, 혹은 오래 묵은 체증이라도 말끔히 해소해가듯이 잘 된 표현이라고 생각된다.    다음 /한가로움과 평안함의 향기 /익어터지는 /빈 틈들/좋은것은 함께 즐기려는 시인의 배려심이 보인다. 한가로움도, 평안함의 향기도 빈틈으로 새여나가 공유할수 있는 그 높이는 놀라웁도록 오아시스와도 같은 파급효과ㅡ즉 /한잔의 넌/ 출렁이는 오아시스여라/에서 잘 나타난다. 결구에서 화판에 널려 있는 잡동사니, 여백의 령토 , 귓속말, 카텐 저쪽, 눈가루 ,오붓한 마을, 풀꽃, 먼먼 언덕은 숙련된 언어련금술로 동화같은 화폭에서  애잔한 동경이나 미래, 혹은 회귀본능의 자연섭리를 자연스레 펼쳐 보이는듯 하다.   실재의 언어만으로 씌여진 시는 실재를 아무런 려과없이 보여주려는것이 아니다. 언어로 만들어진 "하나의 비 실재의 세계를 보여주려는것이다".상상력은 단지 실재만을 나타내 주는 거울 같은것으로써 현실로부터 단절하고 력설의 효과에 도달하게 된다. 이것이 곧바로 상상력의 마력으로 보여진다. 암튼 베토벤의 교향곡이나 모자르트의 탈중심속에서의 있음의 미학을 읽는듯 하여 상쾌한 기분이다. 박춘월시인님, 좋은 시 많이 쓰시고 시를 함께 공유합시다 2016.9.17 행복에  대한  생각/유해금       해마다    꽃피는  봄이  오면  모멘트에서  흔히  다른  사람들이  공유하는  해자의  시    을  읽을  수  있다.  사실  나도  이  시를  무지  좋아하는데  읽을  때  마다  가슴이  아프다.  그건  시에  나타난  해자의  그  소박한  소원들이  오늘을  직시하지  못하고,  모두    ‘내일부터’라는  특정된  시간에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록  보잘  것  없는  인생을  살고  있지만  자신이  해자보다는  훨씬  행복하다는  느낌에  얼마만큼  위안이  되기도  한다.          나는  ‘내일부터’가  아닌  이미  진행중인  매일,  내  가족을  위해  밥하고  빨래하고  돈  벌러  뛰어  다닌다.  그리고  ‘량식과  채소를  관심’하지  않을  수  없다.    ‘내  집  한  채는  바다를  향해  있’지는  않지만  언제나  봄날같이  사랑으로  넘치고, 나는  또    매일  모멘트로  자신의  일상속에서  느끼는    잔잔한  행복과    감동을  모든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나눈다.        나는  언녕부터  모든  강과  모든  산이  다    따뜻한  이름과  존재의  가치를    가지고  있음을  알고  있기에  오늘도  세상을  느슨히  바라볼  수  있고  또  푸근히  대할  수  있다.          그리고  나도  해자가  바라던  것처럼  누구에게나    ‘  그대를  축복하네  /  그대에게  찬란한  앞날이  있기를  바라네  /  그대가  풍진  세상에서  행복하기를  바라네’  이런  말들을  해  줄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신선이  아닌만큼  살다보면  흔히  생계에  바쁘거나  어떤  목적를  달성하기  위하여  허겁지겁  달려가느라  많은  것을  소홀하게  된다.  중요하다고  여기는  큰일만  이루어  진다면  다른  소소한  것들을  희생하는  것  쯤은  당연하다고까지  생각할  때도  있다.  그러나  사실  그러는  사이에  우리는  가슴이  식어  가고,    주변이  차가워  지고  있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게  된다.              우리  애들도  이제는  훌쩍  커  버려서  내가  늘  입에  달고  있는    라는  말이  남듣기에  어색할  정도이다.  아파트  단지에서  애기를  데리고  노는  젊은  엄마들을  보면서  ‘우리  애들  저만  했을  때  난  어떻게  했던가?’하고  생각해  볼  때도  있는데  별로  떠오르는  게  많지  않다. 하루는  퇴근길에  슈퍼에  들렀다가  은이银耳버섯을  보고    은이연자탕银耳莲子汤을  안  한지도  참  오래다는  생각이  들어  재료를  사가지고  돌아와  끓이기  시작했다.  애들이  저녁자습  끝내고  돌아올  때는  이미  연자탕이  다  되어  온집안에  연자탕향이  그윽할  때였다.      애들은  고중을  다니면서부터  주말말고는  아침밥만  집에서  먹고  점심  저녁은  학교에서  먹는다.  그래서  저녁자습  끝나고  집에  오면  영양보충을  해줄까  싶어서  맛있는  음식을  몇번  준비해  보았었는데  매번  밤에  음식  먹으면  살찐다고  거절당하고  말았다.  아무리  꼬셔도  인생의  제일  아름다운  시절을  뚱보로  살  수  없다며  의지가  견결해서  매번  요지부동이었다.       그러나  그날,  집에  들어서자마자  애들은  은이연자탕  냄새에  흥분하기  시작했다.           ‘와,  은이연자탕이다!  참  오래간만이다…’     한  공기씩  담아주니  탈없이  받아  먹으며  재잘거렸다.     ‘엄마,  그  때는  왜  이거  자주  끓여줬어?’     ‘사스때문이었나?...’     성격이  덜덜한  아들은  게눈감추듯  후룩후룩  금방  먹어  버리는데,  얌전하고  꽤나  분위기  따지는  딸은  사기숟가락으로  여유작작  홀짝홀짝  마신다.  그  모습은  참  만족스럽고  아름다워서  바라보는  내  마음이  사뭇  즐거웠다. 사실  은이연자탕은  영양은  풍부해도  애들의  입맛에    별로  잘  맞는  것은  아니다.  옛날에  매번  이것을  먹일  때마다  예쁜  공기와  사기로  된  탕숟가락같은  것으로  분위기를  잘  짜  주어야만  애들이  거기에  홀려서  먹어  주곤  했다.  그러나  그랬던  것이  이제는  애들의  기억속에    따뜻한  추억으로  남았는가  보다.  마치  내가  옛날의  뽀얗게  김  서린  시골의  주방과  우리엄마가  쪄  주던  하얀  인절미를  그리워하듯이… 천하의  모든  부모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우리  애들이  언제나  꾸김없이  씩씩하게  잘  자라기를  원한다.  그러나  언제부터였는지  나도  애들의  공부성적에  관심이  더  커졌고,  바쁘다는  이유로  은이연자탕같은  소소한  일들을  소홀해  버렸다. 사실  행복이라는  것은  소소한  일들로  인하여  이루어지는  잔잔한  감동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큰일을  계획했다거나  리상의  실현을  위하여  노력한다는  핑게로  이런  것들을  다  희생해야  한다는  이유는  없는  것이다.   마치  우리가  등산을  할  때  만약  산을  오르는  목적이  단순이  정상에  도달하는  것이고,  등산  도중에도  풍경을  감상할  겨를도  없이  내쳐  달려만  간다면  정상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더  높은  산봉우리가  나타나서  한없이  맹랑하거나,  드넓은  땅과  하늘사이에  서서  자신의  묘소함을  한탄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반면에  열심히  느끼고  즐기며  오르다나면  어느  높이에서든지  우리는  자신이  흘린  매  한방울    땀의  가치를  잘    알수  있을  것이고  이루어진  만큼  만족할  줄  알게  될  것이다.      행복은  큰  일을  이루어야만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진주같이  잔잔한  감동들을  소중히  여길  줄  알고    그것들을  모아  꿰매어  자신의  인생을  아름답게  꾸밀  줄  아는데서  오는  것이  아닌가  싶다.  여자의  애수                           류해금 바람이  센  것  같아도  정작  이렇게  바닷가에  나와  보니까  별로  큰  바람이  아니었다.  해변가  벤취에  앉아서  불어오는  바다바람에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끝없이  밀려왔다  밀려가는  저  파도를  보느라니  마음이  무명의  애수에  젖어  오르고  또  웬지  할머니와  엄마  생각이  난다.  30여년전  할머니께서  돌아가시기  전날에  강변에  채소를  씻으러  나가셨다가  이렇게  하염없이  흘러가는  강물을  보셨다고  한다.  그리고  그  길로  머리가  아프시다고  누우신  것이  그  이튿날로  세상을  떠나셨다.     할머니께서는  그때  흘러가는  강물을  보시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어쩌면  지금의  나처럼  이렇게  애수에  젖어  계셨을  지도  모른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나는  할머니에  대해  아는  것이  너무  적다.  그때  분치고  드물게  한자까지  아는  학식이  있는  할머니께서  어떻게  중국에  나오시게  되었는지도  잘  모른다.  어려서  할머니한테  옛말을  해  달라고  많이  조르기는  했어도  이런  일을  여쭈어  본  기억은  없다.  그저  아버지한테서  할머니는  젊었을  때  자유를  위하여  중국에  오게  된  신여성이라는  말을  어렴풋이  들었을  뿐이다.      할머니께서  옛말을  해주시다가  당신이  살던  고향에  대해  이야기  하신  것이  아직도  머리  속에  그림처럼  남아있다.  겨울이면  눈이  꿈결처럼  쌓이는  강원도의  어느  동네,  양지쪽  산비탈의  눈이  녹다가  얼어서  애들이  썰매에  앉아서  엉덩이만  삐뚝하면  멀리까지  미끄러져  갈  수  있어서  미끄럼치기를  하기가  그렇게  좋았다는  그런  고장…   매번  고향  이야기를  하시고  나면  할머니는  망연해지신다.  그리고  한숨을  쉬면서  쓸쓸하게  하시는  말씀이 ‘그  난리  판에  다들  무사했는지?…’이  한마디였다 나는  그때  너무  어려서  할머니의  애수를  다  알  수  없었다.  광복전에  중국에서  살았으면  하고    찾아  온  하나  밖에  없는  남동생을  호랑이같은  시어머니가  무서워서  있으라  말도  못하고  돌려보내고  광복후에는  또  3.8선때문에  가족들의  소식조차  알  수  없게  되버린  그  세월에  할머니의  애수는  그  강물과  같이  세월속에    흐르고  또  흘렀으리라.  엄마,  풍으로  반신불수에  말문까지  막히신  우리  엄마,  그래도  정신만은  흐리지  않고  지탱하고  있는  엄마의  눈빛은  더없이  슬프고  아프다.  나의  생일날에  ‘엄마,  낳아주시고  잘  키워줘서  고마워요!’  라고  하면 ‘아니야,    너들이  씩씩하게  잘  커  주고  말썽없이  잘  살아서  내가  고맙다’ 하시던  엄마였는데,  이제는  전화를  하면  말  할  수  없다고  전화기를  밀면서  받기를  거부하신다.    엄마는  외할아버지가  일찍  병상에  드러눕는  바람에  그렇게  잘한  공부도  중학교까지밖에  못하고  또  그것이  일생의  한이  되어  억척같이  우리  형제들을  고중,  대학까지  뒤바라지  해주셨다.  그러시고도  지나간  옛날을  생각할  때마다  ‘그때는  왜  그렇게  돈이  벌어지지  않았는지,  옛날  애들은  정말  고생하면서  컸어…’ 하고  되러  우리한테  미안해  하셨다. 세월은  그처럼  아름답던  우리  엄마의  얼굴을  주름투성이로  만들어  더는  거울  보기  싫다는  할머니로  되게  하더니  이제는  정력과  기력마저  다  빼앗아  서지도  걷지도  못하고  말도  못하는  허물만  남겨  두었다.   고향을  두고도  돌아갈  수  없었던  할머니,  생계를  위해  억척같이  살아  오신  엄마,  그들의  애수가  나의  사색에  조수처럼  밀려온다.  나는  정녕  고향이  있는  것일가?  내가  고향으로  기억하고  있는  그  곳에서  할머니는  돌아가실  때  뼈  묻기를  거부하시고  화장하여  골회를  강물에  띄우시라  하셨다.  할머니는  어쩌면  강물따라  바다로  이미  당신의  고향을  찾아가셨을지도  모른다.  그  곳에  청춘도  피땀도  다  바치신  우리  엄마  아버지는  정든  땅  버리고  지금  동생  따라  낯선  해변도시로  가셨다.  그래서  내가  고향으로  그리워  해  온  그  곳은  이젠  가야  할  이유조차  사라지고  나의  동년의  추억은  부평초가  되고  말았다.  1년에  고작  한  두  번,  배번  길어야  1주일씩  내가  친정에  갔다올  때마다  말  못하시는  엄마는  눈물을  흘리시고  나는  또  ‘건강하셔야  되요,  다음  설에  또  올게요…’하고  엄마가  한해동안  눈빠지게  기다리실  말  한마디  달랑  남기고  떠나온다.  그러나  매번  크고작은  명절이나  부모님  생신이  다가올  때면  나는  또  며칠전부터  초조해진다.  종래로  우리에게  오라가라  말씀  없으셔도  외로운  부모님께  내가  어떻게  인사를  드리던지간에  그건  다  빈말에  지나지  않기때문이다.    그럴  때마다  누군가가  쓴  ‘출세는  고향을  버리는  것이였다’라는  말이  생각나서  더없이  쓸쓸하다.    여직껏  버둥거려  온  것이  고작  고향을  버리는  것이고  사랑하는  가족을  떠나는  것이고  부모님  외롭게  만드는  것이였구나하는  생각이  들어서  더구나  허무할  때도  많다. 나에게는  언제나  친정에  갈  수  없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그중에  제일  당당한  이유들로는  ‘출근해야  되서’,  ‘애들  공부  바빠서’,  ‘시집에  가야  해서’  …  등등이다.  몸은  언제나  이런저런  사슬에  얽매이고  령혼은  량심의  채찍에  얻어  맞으며  살아가야  하는  여자의  운명,    우리할머니  때나  지금  내  때나  별로  변함이  없는  것  같다.  가끔  50이면  지천명이라는  공자의  말에  나는  하늘이  나에게  내려준  사명이란  도대체  어떤  것일까  곰곰히  생각해  보기도  한다.  자식으로,  부모로,  형제로,  안해로,  사회인으로…나는  정녕  내  운명을  제대로  알기나  하며,  제노릇을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일까? 봄이면 새싹처럼 행복이 돋아나는 녀자 오늘의 단평 허인    한편의 좋은 수필은 더 긴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 공유 그 자체만으로도 즐겁다고 생각한다. 류해금시인의 수필 "행복에 대한 생각"과 "녀자의 애수"가 곧 그런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솔직히 류해금시인은 시보다 수필을 더 잘 쓰는것 같다. 시 창작에서 철학적인 사유와 다도의 짙은 향내음이 그의 시에서 주요 골격을 이루긴 하였지만 가끔 우왕좌왕 갈팡질팡하는 모습도 뚜렷하게  보인다는 그런 말이기도 하다. 헌데 몇번 보내온 수필들을 읽어보노라면 어느사이 감상의 차원을 넘어서서 공유와 함께 즐기게 된다." 행복에  대한  생각"의 경우 /해마다    꽃피는  봄이  오면  모멘트에서  흔히  다른  사람들이  공유하는  해자의  시    (面朝大海,春暖花开)을  읽을  수  있다.  /로 멋지게 캐릭터를 시작하여 애써 끌고 가려는것이 아니라 어느새 끌려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사실  나도  이  시를  무지  좋아하는데  읽을  때  마다  가슴이  아프다.  그건  시에  나타난  해자의  그  소박한  소원들이  오늘을  직시하지  못하고,  모두    ‘내일부터’라는  특정된  시간에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에서 시인 해자와의 공통점 내일이라는 익숙하면서도 무게있는 화자를 견인해냈다는게 곧바로 이 수필의 성공여부로 된것 같다. 허나 여러가지 차이점도 보이기도 한다.  /  그래서  비록  보잘  것  없는  인생을  살고  있지만  자신이  해자보다는  훨씬  행복하다는  느낌에  얼마만큼  위안이  되기도  한다. /에서 제  삶을 꿋꿋한 의지 하나로 서슴없이 펼쳐 보이는 작자의  적극적인 갊의 태도는  얼마나 자랑차고 긍지감이 넘치는가? 허나 이 세상은 음과 양으로 이루어진것이 분명하다. 하요 비교라는 진부한 상식과 함께 발전도 있는것이 아닐가?    /우리  애들도  이제는  훌쩍  커  버려서  내가  늘  입에  달고  있는    라는  말이  남듣기에  어색할  정도이다.  아파트  단지에서  애기를  데리고  노는  젊은  엄마들을  보면서  ‘우리  애들  저만  했을  때  난  어떻게  했던가?’하고  생각해  볼  때도  있는데  별로  떠오르는  게  많지  않다./에서 시작하여 들여다 본 작자의 일상생활은 모험이 아닌 자기반성의 조용한 목소리이며 행복이 된다./하루는  퇴근길에  슈퍼에  들렀다가  은이银耳버섯을  보고    은이연자탕银耳莲子汤을  안  한지도  참  오래다는  생각이  들어  재료를  사가지고  돌아와  끓이기  시작했다.  애들이  저녁자습  끝내고  돌아올  때는  이미  연자탕이  다  되어  온집안에  연자탕향이  그윽할  때였다.      애들은  고중을  다니면서부터  주말말고는  아침밥만  집에서  먹고  점심  저녁은  학교에서  먹는다.  그래서  저녁자습  끝나고  집에  오면  영양보충을  해줄까  싶어서  맛있는  음식을  몇번  준비해  보았었는데  매번  밤에  음식  먹으면  살찐다고  거절당하고  말았다.  아무리  꼬셔도  인생의  제일  아름다운  시절을  뚱보로  살  수  없다며  의지가  견결해서  매번  요지부동이었다. /에서 마지막 결구까지 읽어 보노라면 남자들 눈엔 어쩌면 사소한것 같은 행복 꾸러미가 된다. 그래서 이 수필은 룡머리에 구렁이 꼬리가 아닌 호랑이 꼬리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함께 즐기노라면 희노애락과 함께 달착지근함이 이 수필의 가장 큰 특징으로 보인다.    솔직히 필자는 /여자의 애수/를   류해금씨의 수작(秀作)으로 치고싶다. 말 그대로 스토리 묶음이며 감동의 물결이 찰랑이는가 하면 말 그대로 바이러스같은 정서적인 감정에 읽는 내내 가슴이 울렁 거리는것 같다. 작중의 할머니와 어머니의 형상은 나 자신의 삶의 행적을 되돌아 보게 됨에 충분한 리유가 되며 또한 깊은 감동이 되기도 하는것 같다. 인생은 누구의 그림자 아래에서 사는것이 아니라 상호의 거울이 된다. 여자의 애수는 그래서 공명감이 컸던것 같다. 실례로/양지쪽  산비탈의  눈이  녹다가  얼어서  애들이  썰매에  앉아서  엉덩이만  삐뚝하면  멀리까지  미끄러져  갈  수  있어서  미끄럼치기를  하기가  그렇게  좋았다는  그런  고장…/이라는 할머니의 고향에 대한 아련한 추억이라던가 /‘엄마,  낳아주시고  잘  키워줘서  고마워요!’  라고  하면 '아니야,    너들이  씩씩하게  잘  커  주고  말썽없이  잘  살아서  내가  고맙다’/라는 어머니에 대한 추억은 읽는 내내 감동이 아닐수가 없었다. 한마디로 스로리와 스토리 엮음이 좋았고  이 가을에 부모님 생각해보면서 읽으면 아주 좋은 수필이라고 생각한다.산동 청도문단은 수필 잘 쓰는 분들이 많은것 같다.아마도 장학규씨의 영향을 적잖게 받은것이 아닐가 조심스레 생각한다. 2016년.9.16 사람들이 그렇다고 말하네 (외2수)                박은화 산은 저기 있었는데 옛날부터 거기 있었는데 언젠부턴가 불러지기 시작한 이름 산 저쪽의 사람들은 남산이라 우기고 산 이쪽의 사람들은 북산이라 우기네 저 강은 그 강인데 옛날부터 흐르던 그 강인데 저 산을 에돌아 잘만 흐르는데 남산을 흐르면 남강이라 부르고 북산기슭 스쳐가면 북강이 되네 사람들이 그렇다고 말하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제사상 저승과 이승의 만남이 여기서 이뤄지는가 은하교 건너온 늙은 량주를 반기는 "홍동백서","좌포우혜","조률이시" 돼지고기,물고기,제철과일들 제사상앞에 모인이들 차례로 술을 붓고 절한다 "부디 살펴주소서" 한마디씩 건네고 저마다 제사 음식 맛있게 먹는다 이들을 바라보는 액자속의 늙은 량주 두눈에 이슬이 반짝이는가 해빛이 눈에 비쳐와 눈물이 돈다 지나가던 바람이 머물다 하늘로 간다 지금은 한창 음복중인데...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무지개 무지개 하늘에 걸려 일깨워주더라 세상의 그 어떤 아름다움도 혼자서는 이룰수 없다는걸 무지개 하늘에 걸려 일깨워주더라 세상에서 가장 고운 그림은 서로 어울려 그려진다는걸 무지개 하늘에 걸려 일깨워주더라 세상의 그 어떤 사랑도 가고 오는 다리가 필요하다는걸 무지개 하늘에 걸려 일깨워주더라 세상의 그 어떤 아름다움도 한순간에 지나지 않는다는걸 오늘의 단평 의식의 흐름속에서 둘러보는 인간세태 허인   의식의 흐름은 마치 강물의 흐름과도 같은것이여서 막을수 조차 없다 . 의식류(意思流)라는 말은 90년대 중엽, 한족문단에서부터 흥행하여 차츰 조선족문단에까지 그 령역을 넓혀 왔으며 대부분의 작품들이 몽롱미를 무척 선호하였던것 같다. 헌데 탤렌트 박은화씨의 "사람들이 그렇다고 말하네" 외 2수는 재밌고 구수하게 이야기식으로 차곡차곡 엮어져 읽기에 무척 편하고 구조주의 립장에 서서 살펴보면 기승전합이 분명하여 울림이 더욱 큰듯 하다.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끊임없이 부서지는 불확정속 삶의 단편들이야 말로 가장 실사적이다는 말이 있다. 사람들의 말을 빌어 자연스레 자연으로 접근하여 친근함을 이끌어낸 박은화씨의 (사람들이 그렇다고 말하네)에는 어떤 아집의 영악스러움과 관습이 슴배여 있고 지혜와 슬기도 있는지를 다함께 곰곰히 살펴보도록 하자!                 /산은 저기 있었는데 /옛날부터 거기 있었는데/언젠부턴가 불러지기 시작한 이름/산 저쪽의 사람들은 남산이라 우기고/산 이쪽의 사람들은 북산이라 우기네/에서 살펴볼수 있는것은 인간 위주로의 인식차이에서 오는 아집과 그러한 고집덩어리이다. 산을 민둥산, 혹은 푸른 산, 칼산이라 부른다고 하여 산이 대답하는것도 아니건만 사람들은 자신들의 편리를 위하여 굳이 남산, 북산으로 이름지어 부르며 옥신각신한다. 이 시의 흐름은  전부 이러하다. 강도 남강, 북강 ㅡ 지나가는 말처럼 서술된 이 한수의 시에 자꾸 눈길이 끌리고 공명감이 커져가는 원인은 무엇때문일가? 필자가 살펴보건대 그건 아무래도 나, 즉 자아가 아닌 제3자의 립장에 서서 실재의 인간세태를 살펴보면서 보고 느낀 그대로 이야기식으로 서술하였기때문이 아닐가 싶다.    (제사상)과 (무지개)의 경우도 같은 실례이다. /저승과 이승의 만남이 /여기서 이뤄지는가/로 멋지게 캐릭터를 시작하였갈래 늙은 량주가 등장할수가 있었고 "홍동백서","좌포우혜", "조률이시"돼지고기,물고기,제철과일들도 등장이 자영스러울수밖에 없었다고 지적하고 싶다. 마치 제사차례를 눈에 보아는듯이 묘사한것이 이 시의 특징인것으로 보인다.(무지개)의 경우 눈에 보이는것만 같고 사물의 모든 현상을 판단하지 말라는ㅡ 즉 자연의 륜곽에서 인간적인 사유를 건져 올려놓고서 교훈으로 삼으려는 리정표로 보인다.   십오륙년간 문학과 담을 쌓고 살아왔던 필자에게 있어서 박은화, 김연, 강려, 등등은 생소한 이름이 아닐수가 없다. 그런 이들의 성숙한 작품을 읽을때면 감회가 새롭고 확 트인 사유에 감탄하지 않을수가 없다. 부족한 점이라면 시인 자체의 창작이 굴곡이 너무 심한것 같다. 좋은 시가 나올때면 이것 정말 박은화가 쓴 시가 맞나 의심스러울 정도로ㅡ 어떤 시들은 사유의 폭이 너무 좁아 또한 안타까울 정도로ㅡ 암튼 박은화씨 좋은 시 잘 봤고요. 한번 또 한번 좋은 시 많이 쓰세요. 2016.9.19 나의 집은 김철호 나의 집은 서울 도심에 있다 갈래갈래 수만갈래 골목길 중에 대단한구 사소한로 천만호다 지은지 60~70년된 청기와집 안에는 서발 막대 휘둘러도 거칠 것 없고 인간 또한 달랑 하나 소외되고 약자인 병들고 늙고 못생긴 나 뿐이다 한들 어떠랴? 내 덕에 내가 먹고 사는 나는 내 노래에 내가 흥겨워 춤을 추기도 한다 남의 나라에서 쫓겨온 새 한마리처럼 첫 둥지를 틀었을 때는 그까짓 쪽박만한 꿈 하나 때문에 눈만 뜨면 서러웠지만 전기 자격증  따고부터는 나의 집은 비로소 사람 사는 꼴을 갖추기 시작했다 아직 옛말하기에는 멀었지만 배짱하나만은 두둑하라고 나는 날마다 젊어지는 기분이다 어슬렁 다가온 봄, 나의 집은 내 웃고 사는 모습에 내가 고마워 과연 거꾸로 흐르는 세월에 메달렸나보다... 오늘의 단평 지천명의 고개에서 휘두르는 항변의 용기 허인    김철호시인님의 근작시 "나의 집"은 약소군체를 위한 대변이며 불가항력적인 조롱같은 운명에 대한 무언의 항변으로 보인다. 또한 리산의 아픔과 디아스포라의 영악한 삶을 영위해나갈수 있는 질감이 살아 꿈틀거리는 고독과 향수를 살갗이 아닌 피부로ㅡ 육성이 아닌 감성으로 온몸에 식은 땀이 바질바질 흐르듯이 실감나게 공명으로 인도하는것 같다.모두 잘 알겠지만 김철호시인님은 중국조선족문단의 저명한 동시인이자 현재 국내치고 몇이 안되는 포스트리스트로 생각한다. 수련은 과정이지 결과는 결코 아니다. 이러한 깊이 있는 수련의 과정이 있었길래 "나의 집"은 리얼을 베이스로 서울ㅡ 즉 고국을 크나 큰 구리종으로,  인간 또한 달랑 나뿐을 ㅡ큰 방망이로 둥둥 두드려 그 공명감이 읽는이들의 가슴을 더욱 트게 울리는듯 하다.제2인생을 허구가 아닌 진실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재한 조선족동포들의 꿈뿐인 참혹한 현지생활을 이처럼 잘 반영한 시를 솔직히 이 시 외에 필자는 아직 본적이 없다. 그럼 잡담 그난두고 다 함께 김철호시인님의 (나의 집)으로 나들이를 다녀와 보자!   /서울 도심에 있다/갈래갈래 수만갈래 골목길 중에/대단한구 사소한로 천만호다/지은지 60~70년된 청기와집 안에는/서발 막대 휘둘러도 거칠 것 없고/인간 또한 달랑 하나/여기서 갈래갈래 수만갈래 골목길은ㅡ 인생길이며ㅡ 또한 리얼리즘이 아닌 형상의 비유가 된다. 한마디로 가로 가도 세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속담이 있듯이 직접 가본 서울은 상상외로 험악하다. 밝고 아름다운 반면 어두운 곳에서는 어떤  이들이 살고 있을가?/소외되고 약자인/병들고 늙고 못생긴 나 뿐이다/한들 어떠랴?/내 덕에 내가 먹고 사는 나는/내 노래에 내가 흥겨워 춤을 추기도 한다/로 생의 의지와 의욕을 재 충전해가는듯한 그런 느낌과 홀로 술상에 마주앉아 맞은편 술잔에다 술을 부어놓고 대작하는듯한 자아위안이 가슴이 뭉클하게 하며 그 다음 /남의 나라에서 쫓겨온 새 한마리처럼/첫 둥지를 틀었을 때는/그까짓 쪽박만한 꿈 하나 때문에 /눈만 뜨면 서러웠지만/에서는 디아스포라들의 자꾸만 가물가물해져 가는 정체성에 불쑥 밝은 전등불을 들이대여 반디불같은 희망이라도 주고 싶듯이/전기 자격증  따고부터는/나의 집은/비로소 사람 사는 꼴을 갖추기 시작했다/로 빈 둥지에 날아든 뻐꾹새의 울음소리에 읽는 사람들을 감동하게도 하는것 같다. 이야기 서술식으로 화자를 이끌어낸 이 시에는 작자의 멘트나 모멘트는 없다. 있다면 객관적인 력설뿐이다. /아직 옛말하기에는 멀었지만/배짱 하나만은 두둑하라고/나는 날마다 젊어지는 기분이다/어슬렁 다가온 봄,/나의 집은/ /내 웃고 사는 모습에 내가 고마워/과연 거꾸로 흐르는 세월에 메달렸나보다.../로 까끔하게 마무리 맺은 제일 마지막 결구에서 살펴볼수 있는것은 첫 비행에 성공한 새끼제비들의 신난 모습이 아니라 착지에 성공한 개구리들의 더 멀리 뛰기 위한 점프로 보인다. 한수의 시가 독자의 뇌에 전파하는 영향력은 참으로 엄청나다고 생각한다.    이 시의 장점은 작자의 정서적이 개괄이 아닌 객관적인 서술 자체이며 부족한 점이라면 서울이라는 무대에 올라 선 나의 형상, 말 그대로 디아스포라들의 진정한 신분이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아 아쉬운것 같다. 조선족 동포이라는 특수한 명함을 독자들의 손에 한장씩 쥐여줬더라면 좋지 않았을가 하는 필자 혼자만의 생각일수도 있다. 암튼 오랜만에 김철호시인님의 시 한수에 단평을 붙여 끝마치면서 김철호시인님께 좋은 시 있으시면  함께 공유할것을 부탁 드리고 싶다. 2016.9.17 확인 결과 "나의 집"의 작자는 연변 김철호시인님과는 동명이인임을 알게 되였습니다. 시가 좋아 그냥 이대로 올립니다. 김철호시인님의 량해를 이미 얻었고 다른 분들 역시 오해가 없기를 바랍니다. 그리운 코스모스소녀          맹영수 건강엔 누구도 장담없다더니 그처럼 무병하던 장모가 병원침상에 호구를 붙히게 되였다. 사위도 반자식이라 나는 여러가지 과일과 위문금을 갖고 병실을 노크했다. 비록 편치 않은 몸이긴 했지만 아직은 정신만은 맑은 장모는 눈길이 마주치자 몹시 미안한 표정을 지으셨다 자식들에게 부담을 끼치고 더우기는 누구에겐가 간호를 맡긴다는것이 퍽 불안하고 미안스러웠던것이다. 장모는 오금을 변변히 쓰지 못하면서도 기어히 화장실출입만 자신 스스로 하려했다. 이제는 인생의 막고개에 접어들었어도 우리앞에서 장모는 여전히 자신이 녀자란것만은 고집하고있었다.   나는 자주 병문안을 하는것으로써 나의 “부족함”을 메꾸기에 노력했다. 어느날 음식을 사들고 병실에 들어서던 나는 장모의 마준쪽에 왠 소녀가 누워있는것을 보게 되였다. 열서너살되여 보이는 소녀는 눈망울이 퍼그나 컸는데 그 동그란 눈동자에는 그 어떤 수집음이 골똑 넘쳐있었다. 여느 동년배 아이들같으면 침상에 누워서도 귀에 레시바를 걸고 음악을 감상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제엄마와 투정이라도 부리려만 소녀는 그냥 조용한 시선으로 벽이나 창밖을 응시하군해서 금방 까난 병아리를 보듯 측은지심이 드는걸 스스로도 주체할수 없었다. 알고보니 소녀는 교통사고로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엄마와 함께 살고있었다. 그만큼 일찍  철이 든 소녀는 조용한 환경에 퍽 더 익숙해졌다.   . 나는 병실을 찾을 때마다 소녀에게 과실같은것을 쥐여주고 잡지같은것을 같다주어 소녀의 무료함을 달래주었다. 소녀는 나를 아저씨라고 부르면서 살짝 이를 보이면서 고맙다고 웃어주었다. 웃는 모습이 조용하긴 해도 초롱꽃같아 참으로 보기좋았다. 그때면 나는 네 웃는 모습이 참으로 이뻐서 이다음 연예인이 되였으면 좋겠다고 하면 소녀는 잠간이라도 기분에 들뜨군 했다… 그사이 우리는 부쩍 가까워져서 소녀는 모름지기 무척히도 나를 기다리군했다. 그러나 그냥 그쯤이였다.   어느날 소녀와 나사이에 무언의 담벽이 쌓여졌다. 소녀가 실수를 아니, 내가 무의식중 실수를 했던것이다. 그날 점심 병실문을 열고 들어서던 나는 소녀의 엄마가 그애에게 속적삼을 바꿔 입히는것을 보게 되였다. 순간이였으나 나는 그애의 하얀 가슴살을 피끗 보게 되였다. 소녀의 얼굴은 무르익은 앵두처럼 막 터질듯 했다. 더불어 눈가엔 금시 이슬같은것이 막 떨어질듯싶었다. 소녀는 쥐구멍이라도 찾아 들어갈듯 감히 나를 쳐다보지 못하고 얼굴을 벽쪽으로 돌리고 누워버렸다. 싸늘한 랭기가 병실안을 꽉 채우고있었다. 소녀는 무언의 침묵으로 나에게 항의를 하고있었다. 소녀는 사춘기를 앓고있었고 부끄러움을 타고있었다…결국 싱거운 놈이 되여버린 나는 그날 소녀를 별로 지껄이지 못하고 병실을 나오고말았다.   얼마후 장모가 퇴원하게 되였다. 이제는 소녀와도 마지막 만남이였다. 나는 잡지 두개를 소녀의 침상에 놓고 그 애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고 천천히 물러났다. 링겔을 맞고 있던 그 애는 가볍게 머리를 돌리고 나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러나 정작 눈길이 마주치자 그 애는 그날처럼 또 나를 정시하지 못하였다. 마치도 자기가 되려 내께 죄라도 진듯 그 모양이 참으로 안쓰러웠다. 소녀는 아직도 그날의 부끄럼에서 철저히 헤여나오지 못하고있었다. 그 순간 문뜩 나의 머리엔 언제 들어도 소박한 코스모스 그 이름이 떠올랐다.    코스모스소녀! 나는 소녀에게 그런 이름을 붙혀주고싶다. 코스모스는 여름과 가을사이에 피는 체격이 훤칠한 꽃으로서 그 색갈도 진분홍,연분홍, 흰색…등으로 아롱다롱하다. 하지만 코스모스는 여느 꽃과 달리 늘 소박하고 수집음을 곧잘 타면서 사람들을 반긴다. 어쩜 소녀야말로 그런 꽃이 아니겠는가?   기실 나는 소녀의 이름은 알아도 학교나 주소마저도 모른다. 허나  몇달이  지나도록 소녀의 그 수집은 모습은 여전히 눈가에 삼삼해서 가슴이 아련하다. 솔직히 모든것이 개방되여 벗을수록 환성이 터지는  요즘 세상에서 소녀처럼 부끄러움과 수집음을 아는 애들이 얼마나 있을가?…   어쩌면 소녀와의 만남은 나에게  감사하고 행운스런 일이다. 그만큼 나를 포함하여 지금 이 세상에서 부끄럼앞에서 진정 당당한 사람들이 얼마나 될가?   오-그리운 코스모스소녀여! 오늘의 단평 잔잔한 감동의 하모니 허인   맹영수 수필가의  (그리운 코스모스여)는 제목이 시사하는 바와 같이 잔잔한 감동의 물결이다. 좌충우돌 거창하고 씩씩한 남자들의 그러한 파워나 파괴력보다 오히려 녀성들보다 더욱 녀성스러운 세심한 관찰이 마치 조리졸졸 흘러가는 천만갈래 시냇물이 모이고 모여 큰 호수를 이루는듯 하다. 아름다운 풍경은 결국 하모니가 되여 무척 흥미로운 감동의 파도를 일으키기도 한다.   /건강엔 누구도 장담 없다더니 그처럼 무병하던 장모가 병원침상에 호구를 붙히게 되였다. 사위도 반자식이라 나는 여러가지 과일과 위문금을 갖고 병실을 노크했다. 비록 편치 않은 몸이긴 했지만 아직은 정신만은 맑은 장모는 눈길이 마주치자 몹시 미안한 표정을 지으셨다./에서 살펴볼수 있는것은 생로병사를 대하는  가장 인간적인 담담한 태도이다. 왜내 하면 작중에서 이미 설명했다싶이 /자식들에게 부담을 끼치고 더우기는 누구에겐가 간호를 맡긴다는것이 퍽 불안하고 미안스러웠던것이다. 장모는 오금을 변변히 쓰지 못하면서도 기어히 화장실출입만 자신 스스로 하려했다./에서 찾아 볼수가 있다 싶이 스스로 추한것을 알고 아무리 자식일지라 하더라도 남녀의 선을 굳이 넘어서려 하지 않는 지극히 현실적인 도덕개념이 환자의 머리속에 각인되여 있었기때문이 아닐가 싶다.   그러한 의지와 의력은 결국 병마마저 이겨내게 한다. 만약 여기서 수필이 끝났더라면 이 수필 역시 신변잡기에 불과했을것이다.  허나 작중의 중요한 스토리는 필살기처럼 사춘기 병을 앓고 있는 소녀와의 부지런한 접촉, 그리고 조그마한 오해에 있다.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에서 그러한 오해는 자연스러운것이며 또한 악의가 아닌 호상의 배려로, 그리고 묵언의 지지로도 받아 들여지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들의 이 세상은 더욱 살맛이 나지 않을가도 싶다.     /어느날 음식을 사들고 병실에 들어서던 나는 장모의 마준쪽에 왠 소녀가 누워있는것을 보게 되였다. 열서너살되여 보이는 소녀는 눈망울이 퍼그나 컸는데 그 동그란 눈동자에는 그 어떤 수집음이 골똑 넘쳐있었다. /에서 시작하여 /소녀와 나사이에 무언의 담벽이 쌓여졌다. 소녀가 실수를 아니, 내가 무의식중 실수를 했던것이다. 그날 점심 병실문을 열고 들어서던 나는 소녀의 엄마가 그애에게 속적삼을 바꿔 입히는것을 보게 되였다. 순간이였으나 나는 그애의 하얀 가슴살을 피끗 보게 되였다. 소녀의 얼굴은 무르익은 앵두처럼 막 터질듯 했다. 더불어 눈가엔 금시 이슬같은것이 막 떨어 질듯싶었다./에서 찾아볼수 있는것은 누구나 무의식중에 한번쯤 아름다운 실수를 할수 있다는 계시이기도 하며  /얼마후 장모가 퇴원하게 되였다. 이제는 소녀와도 마지막 만남이였다. 나는 잡지 두개를 소녀의 침상에 놓고 그 애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고 천천히 물러났다. 링겔을 맞고 있던 그 애는 가볍게 머리를 돌리고 나에게 손을 흔들었다. /에서 찾아볼수 있는것은 천진란만한 동심의 움직임이며 이제는 더는 나의것이 아닌 아늑하고 아득한 추억, 그러했기에 작자의 머리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것이 늘 그리운 교정의 코스모스가 아니였을가 생각된다.   사람이 이세상을 살면서 굳이 성이며 이름을 죄다 기억해야 할 아무런 필요가 없다. 허나 한오리 또 한오리 스토리들을 글속에 꼬박꼬박 박아넣어 독자들의 심금을 울려준다는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수필의 경우 아무리 아름다운  경물묘사라 할지라도 스토리가 없고 세심한 심리묘사가 없다면 결국 미사구려로밖에 볼수 없을것으로 보여잔다. 맹영수의 (그리운 코스모스)는 사건의 발단, 발전, 결말이 선명하고 로인과 사춘기를 앓는 소녀의 미묘한 심리묘사를 독특하게 그려내여 공면감이 더욱 큰듯하다. 맹영수님 좋은 수필 잘 봤습니다. 방송국 성철이 형과 각별한 사이라고 들었는데 쭈욱 좋은 글들을 더 많이 쓰십세요 2016.9.19
19    오늘의 단평 댓글:  조회:2194  추천:4  2016-09-14
오늘의 단평 "변형의 자유"   허인   변형의 자유ㅡ라고 적어놓고 보니 마음에 쏙 드는 글귀가 된것 같다. 변창렬시인을 다정하게 형이라 부를수 있는 속칭 "변형"도 되고 또한 변화의 조짐이나 그러한 형상을 통 털어 일컬을수 있는 변이상학적이 이미지도 되니깐 말이다ㅡ 변창렬시인의 자유의 무변에는 언제나 시인이 속사로 스케치하는 한폭의 민속화ㅡ 즉 우리들이 이 세상을 오손도손ㅡ 대대손손ㅡ 살아가는 모습이 생동한 그림으로 그려져 있는것이 특징이 된다.   "별의 가게"는 시제가 시사하는 바와 같이 자연과 우주를 폭 넓게 우리들의 인생관,  자연관, 우주관을 통 털어 말 그대로 삶의 터전으로 삼고서 별을 장터에 내여놓고 값도 정하여 놓고 팔고 사려 하는 시인의 지극히 완결한 장인정신이 매우 돋보이게 하는 한수의 좋은 시임이 틀림없다고 보여진다. 시속의 화자는 하늘의 수많은 별들을 가게의 난전에 올려놓고 무더운 여름밤에 수박 팔듯이 팔고 계시는 아버지의 익숙하면서도 노련한 장사꾼 형상이다. 왜서 시인의 이러한 구상이 저처럼 스스럼없고 거침없이 가능하였던것일가? 필자가 살펴 보건대 그것은 곧 달관의 경지에 올라선 자들만이 누릴수 있는 그러한 특권으로 보여진다.불교에 하늘이 아무리 크고 넓은듯 하나 결국 마음보다 작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상상의 폭도 넓은것이 이 시의 제일 큰 특징이 된다. 다 함께 조심스레 본문을 배우는 마음으로 읽어보도록 하자! /북극성이 간판을 걸었다/아버지는 별을 팔고 계신다/에서는 긴장하지도 조급하지도 않게 더우기 느긋하나 군더더기 한마디 없이 직설적인듯이 은유의 극치로 시작한 시인의 첫 스케치에서 독자들이 자연스레 머리속에 떠올릴수 있는것은 번잡한듯이 번화한 우리들의 생활 그 자체이다. 다만 이렇게 다정다감한 모습이 실생활 우리들의 근처에서 벌어지는것이 아니라 만지면 말랑말랑한 인정이 금방 손에 묻어날듯이 하늘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즉 작자는 우리네 인생을 달관의 경지로 우주관에 더욱 큰 무대를 설정하였기에 신비롭고 익숙하고 또한 자연스레 독자들의 눈길을 끌어 모은것이 가장 큰 성공의 비결이였던것 같다.그리고 2련에서 /익는족족 팔려 나간다/와 3련에서 /한뼘 밫은 천냥/두팔 빛은 만냥/ 이라는 구체적인 별들의 가격에서 빛을 내려주시는 어버지의 형상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보다도 그 모습이 더욱 거룩하심을 우연이 아닌 자각적으로 발견할수가 있다. 절에 부처가 있는것이 아니라 사람 사는 마을에 부처가 있다는 말이 있다. 이렇듯 작자의 천인합일의 인문주의적 사상, 즉 휴머니즘 정신은 더욱 돋보이기도 하다.   ( 포스턴 미국시)를 저술한적이 있는 마자로( Mazzarro)교수는 언어문제에 있어서 모더니즘은 서정시 형식속에서 언어를 다시 만들거나 정화시키는 반면 언어의 타락성과 우연성도 수용한다고 말한적이 있다. 초기의 농경시, 경물시와는 달리 너무나도 능수능란하게 언어련금술을 다루어가는 변시인의 모습은 말 그대로 그야말로 눈부시다 못해 경이로울 지경이다. 오직 나만이 쓸수 있고 오직 내가 써야  완성이 가능한 오늘의 좋은 시 한수 "별의 가게" 오늘도 한국 어디 건설현장에서 사람좋게 웃고 계실 변시인님, 변형ㅡ좋은 글 더 많이 쓰세요. 2016.9.11 우산 / 김 연 * 누구의것일까 고독과 외로움이 파르르 떨린다 * 저 비속에서 또 얼마나 많은 초점 잃은 눈동자들이 파르르 떨려야 할가 * 모른다 모르겠다 오늘은 진짜 모를것 같다 * 고독이 내몸에서 한뼘씩 자란다 * 내 안의 흐느낌소리를 저 어둠속의 귀뚜람소리가 덮어주기엔 더 외로울것 * 우산을 들고 있은들 젖지 않을소냐 마음이 우산을 잃어버렸는데 2016.9.10  오늘의 단평 허인   김연의 시는 깔끔하고 항상 마무리가 좋다. 이번에 보내온 "우산"의 경우 자칫하면 군락을 이룬 고독속에서 갈길을 잃고 우왕좌왕 허덕이지나 않을가 읽는 순간 조금 근심스러웠는데 이외로 마지막 련 ㅡ 마무리에서 우산이라는 큰 그릇에 눈망울이 초롱초롱한 세상을 담고 서서히 시흥이 부풀어 오르는 자신도 담아 공명감이  큰것 같다.    고백시에 속하는 이 시는 작자의 의문도 긍정도,  부정도 해학적으로 풀이해가면서 심층 저변에 깔려 있음직한 심리묘사를 단순히 토로한것이 아니라 색감을 조절해가듯이 어두운것 같지만 발랄하게, 부정적인것 같지만 아주 긍정적인 삶의 태도가 돋보이는것 같다. 한수의 시가 갖는 의미는 이외로 너무나도 크다. 그래서 시인은 시에 미쳐 사는 인생의 고달픈 길을 서슴없이 선택하고 거침없이 혼자라도 걸어가는것이 아닐가?   시어의 선택은 흔히 접사와 부사, 그리고 형용사가 명사의 뒤에 따라붙는 경우가 허다한것 같다. 이 시에서도 곰곰히 살펴보면 /고독과 외로움/뒤에 /파르르/라는 형용사가 붙어 있다. /눈동자/뒤에 또 /파르르, 그리고 제 3련에서/모른다/모르겠다/오늘은 진짜 모를것 같다/는 참 미묘한 태도표시로써 전번 이 시를 은닉하듯이 처음으로 명확한 태도를 표시하여 오히려 당당한 느낌을 주는듯한 힌트로 보인다. 이러한 교대가 있었길래 고독이 한뼘씩 자라고, 귀뚜라미 울음소리도 등장하고 제일 마지막 련에서 /우산을 들고 있은들/젖지 않을소냐/마음이 우산을 잃어버렸는데/라는 리듬감이 있고 탄탄한 철리적인 구조물에 새롭게 페인트칠을 올려 더욱 생신하게 느껴지는 시어들을 견인해내여 전반 시의 흐름이 조금 어두운듯이 보이지만 곰곰히 수판알 튕겨가며 계산하듯이 따지고 보면 이외로 작자가 세상을 대하는  발랄한 모습이 보이는듯 싶다.     예술가는 경험을 판단하는 재판관도, 삶을 가르치는 훈장도 아니며, 삶과 예술에 담겨 있는 경이로운 불확실성을 우리들에게 상기시켜주는 길잡이라는 말이 있다. 또한 환상을 버릴수 있다는 환상도 다른 그 어떤 환상과 마찬가지로 환상에 불과하다는 말이 있다.시인이 한수의 시를 세상에 내여놓는 순간 판단은 독자의 몫이 된다. 김연씨의 "우산"은 담담한 가을에 담담하게 읽기 쉬운 좋은 시라고 생각된다.  사랑하는 그대에게 / 최문수   내가 그대를 사랑함은 그대의 조용함이 좋아서 입니다. 말없이 옆에서 지켜주는 조용함이 좋아서 입니다.   그대를 사랑함은 그대의 눈빛이 좋아서 입니다. 담담한 웃음으로 가득찬 눈빛이 좋아서 입니다.   그대를 사랑함은 그대의 선량함이 좋아서 입니다. 저보다 남을 더 생각해주는 선량함이 좋아서 입니다.   내가 그대를 사랑하기에 무더운 날 서늘한 그늘이 되여주고 싶고 비오는 날 쥐여진 우산이 되여주고 싶고 눈오는 날 따끈한 화로가 되여주고 싶습니다.   그대를 사랑하기에 웃음이 가득한 사람이 되였습니다. 그대와 있었던 때를 생각하면 행복의 웃음이 저절로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대를 사랑하기에 자신의 부족함을 알게 되였고 자신의 책임을 알게 되였고 자신의 인생을 다시 알게 되였습니다.   우리의 사랑은 설레임과 끌림으로 뿌린 종자를 편안함과 선량함으로 싹을 틔우고 믿음과 신임으로 정히 키워서 양보와 인내로 결실을 맺게하는 과정입니다.   그대를 사랑하는 나와 나를 사랑하는 그대가 걸어야 할 길은 이제 시작입니다. 너무 느리지도 않고 너무 빠르지도 않고 한발작 한발작씩 이 길의 끝까지 걸어가겠습니다.   ===   시를 보내며: 저는 현재 북경의 모 미국IT회사에서 컨설턴트로 있는 최문수 입니다. 2004년 어느날, 홀몸으로 트렁크 하나 끌고 북경역에 내려서 시작된 저의 북경표류(北漂)가 지금 북경에 뿌리를 박고 사랑스런 안해, 귀여운 아들, 존경스러운 부모님, 든든한 동생까지 모두 함께하는 북경생활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 글은 제가 결혼 10주년을 맞으면서 저와 함께 북경에서 분투해온 사랑하는 안해에게 바치는 시입니다.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오늘의 단평 최민수는 시인인가? 허인    최민수가 누구이지? 시인인가? 기업인인가? 아니면 샐러리맨? 솔직히 필자도 아직 잘 모른다. 다만 익숙한 지인의 모멘트에 들어갔다가 이외로 그의 옹달샘처럼 시원 달콤하고 정갈한 사랑시 한수 읽고서 지금 이 글을 쓴다.     60년대 기성의 모더니즘 시학을 해체하고 그것에 대비하여 또 하나의 대안을 찾았던 시 동인들, 그들이 곧바로 "뉴욕파 시인"들이다. 그러나 올슨의 투사시, 긴수버그의 비트시, 블라이의 심상시는 명쾌한 시적 프로그램ㅡ즉 자신들만의 완정한 시학을 채 갖추지를 못하였다. 공통성의 결여라는 어려움이 있었기때문이였다. 허나 그들이 끈끈히 한시대 어울릴수 있었던 까닭을 필자는 비록 맡은바 분야는 다르지만 호상 상대를 존중하고 호상 배우려는 진지한 태도가 있었기때문에 가능한 일이 아니였을가 생각한다.   말 그대로 최민수는 문단에서 아직 무척 생소한 그런 이름이다. 그런 그의 시를 살펴보면 한결같이 진지한 사랑이야기를 한줄로 엮어 차츰 무르익어 가는 꽃향기에 누구나 콧구멍을 벌름거릴 정도로  시샘이 날만한 시를 써내고 있다  ./ 내가/ 그대를 사랑함은 /그대의 조용함이 좋아서 입니다./에서의 조용함, 다음 2련에서의 눈빛과 웃음, 3련에서의 선량함에 대한 정확한 태도표시를 4련에서/무더운 날 서늘한 그늘이 되여주고 싶고 /비오는 날 쥐여진 우산이 되여주고 싶고/ 눈오는 날 따끈한 화로가 되여주고 싶습니다./로 명확하게 전달한다. 누구나 알고 있다싶이 사랑은 받는것만이 아니고 또한 돌려 줘야 하는것이기에/그대를 사랑하기에 /웃음이 가득한 사람이 되였습니다./그대와 있었던 때를 생각하면 행복의 웃음이 저절로 나오기 때문입니다./로 받은 것보다 몇배로 돌려주려 하는 작자의 진지한 삶의 태도가 감동의 하모니를 불러 일으키는듯 하다. 순수한 한편의 전통적 고백시에 속하는 이 시는 기승전결에 힘 입어 시의 구조가 뚜렷하고 주제가 더욱 뚜렷한것이 특징이 된다. 부족한 점이라면 전통에 너무 얽매여 새로운 기법이 전혀 보이지 않는것이 좀 아쉬운것 같다.   스티븐스의 (삶을 발견하려는 시도)라는 포스트모더니즘 시에 이런 구절이 한 대목 있다. /초록색 장미꽃들이 연기처럼 아련히 식탁에서 떠올랐다. /노란색의 광채를 띠고 부풀어 올랐다. /검은 꽃이 피는 속에서 흰 꽃이 피는 속에서ㅡ/같은 내용일지라도 표현하고저 하는 작자의 심미효과는 무척 다를수 있다는 그런 말이 된다. 암튼 최문수님의 사랑시 "사랑하는 그대에게"를 읽으면서 다시 한번 강한 사랑의 충동에 빠져 보고싶은 이 느낌은 무엇이지? 최민수는 시인이 맞다. 이처럼 훌륭한 시를 써낼수 있는 사람이라면 시인이 틀림없으리라 믿는다. 최민수의 "사랑하는 그대에게"는 이 가을에 읽기 아주 딱 좋은 한수의 좋은 사랑시라고 생각한다. 수필 비를 부탁해/청도 전향미 비가 오려나보다. 쿰쿰한 흙냄새를 앞세우고 땅의 기운이 올라온다. 풀들은 살랑살랑, 나무들은 으쓱으쓱 목을 뺀다. 말라비틀어졌던 공기는 촉촉하게 살아나고, 촐싹대던 먼지는 몸을 잔뜩 움츠린다. 비가 오려나? 쌀뜨물을 확 뿌려놓은듯한 하늘에는 먹구름이 푹 퍼져있다. 비 오기 전 고요함과 어둑어둑함, 낮인지 밤인지 아리송해지는 공간에서, 내 신경세포가 흥분하기 시작한다. 날씨가 꾸리꾸리하면 굳어지는 얼굴들 사이로 유독 내 얼굴만 흐물흐물 빛나는거 같아 은근히 눈치가 보인다. 그러나 내 좋은걸 어찌하리. 툭! 첫 빗방울이 볼을 친다.   비가 오나?  고개를 한껏 젖히고 하늘을 본다.   툭툭! 올려 쳐다보는 면상을 제법 친다. 이마를 갈기고 코밑에 콧물처럼 매달린다. 두 뺨에, 관자놀이에, 입가에도 똘랑똘랑 떨어진다. 수분팩이 따로 없고 물안마가 따로 없다. 하늘이 베풀어주는 은총을 받지 않을 이유가 없다. 툭툭툭! 빗방울이 흙바닥에 부딪치면 놀란 먼지가 해뜩 까뒤집히며 폴싹 날아오른다. 사람들 발뒤축에서 설치던 먼지도 간만에 흙을 깔고 앉아 목을 추기며 여유를 부릴 수 있게 됐다. 이제 나는 젖을랑 말랑 하는 땅을 밟으며 가슴 한편에 고이 간직해준 할머니의 풍경을 꺼내든다.     꽃비가 방울방울 내리꽂히며 늘쩡늘쩡 수작을 부릴 즈음이면 할머니가 날 부르는 소리가 노래처럼  빗속에 울려 퍼진다. “향미야~ 비 온다. 비 온다! ” “빨리 거둬야겠다.”  타닥 타닥~ 아버지가 땔감으로 베어 말려놓은 풀들사이로 빗방울이 비집고 들어오면서 맑고 경쾌한 소리를 낸다. “다 말라가는데 비꼬치질하네.” 온 동네가 비설거지하느라 올리뛰고 내리뛰고 하는 풍경에는 꼭 할머니가 계셨다. 싸리나무로 만든 발을 둘둘 감고, 널어논 빨래를 걷어들이고, 마른 땔감들을 긴 갈쿠리로 쓱쓱 긁어모은다. 그럴 때면 한참을 내려다보던 먹구름이 맞춤하게 시간을 잡아 쏴~하고 빗줄기를 쏟아붓는다. 기관총 쏘아대듯 따따따따 장독 뚜껑을 두드려대면 할머니는 급기야 아이구야 어이구야 소리질르시며 집안으로 뛰어들어오셨다. 그리고는 그린 듯이 방에 앉아계셨다. 비안개 가득한 앞 논밭을 하염없이 내다보고 계시는 할머니는 18세 소녀보다 더 아름다웠다. 지금까지 나는 그 어디에서도 우리 할머니보다 더 예쁜 할머니를 본 적이 없다고 감히 지껄이고 싶다. 갸름하고 아담한 얼굴에는 미국 사람처럼 오뚝 솟은 코가 한자리를 크게 차지했고, 머리는 항상 곱게 틀어올려 옆 사람 눈을 찌를 듯 기다란 비녀를 꼽았다. 여덟 살때 민며느리로 시집와서 두만강 건너 만주 땅에 정착한 할머니는 비 오는 날이면 무슨 상념에 잠기시는 걸까? “할매 비 오는게 좋아?” “어. 그래.” 할머니 입속에서 맴도는 소리 분명히 들었다.  개학하여 장춘학교로 떠나는 날 새벽, 짐을 챙기는 나를 바라보면서 할머니는 갑자기 통곡하셨다. “향미야. 너 학교 안 다니면 안 돼? 선생한테 한번 말해보렴.” 그날 길림을 거쳐 장춘으로 가는 길에는 무슨 비인지 모를 비가 오락가락 내렸고, 나는 비보다도 더 많은 눈물을 쏟았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나는 꽤 오래동안 거의 페인이 되어 지냈다. 아침에 눈을 뜨면 할머니를 볼 수 없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고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졌다. 그리고 꽤 오래동안 비 오기전 적막을 무서워했고, 비꼬치질 시작할 때의 그 빗소리를 무서워했다.   그러나 이제 이 불굴의 아줌마는 비 오는 날이 기다려진다. 좋아진다. 인생의 절반을 훌쩍 지나오면서 비가 주는 미학을 느껴가기 시작한 때문이다. 비오는 날은 비를 사랑한 할머니처럼 한없이 아름답기 때문이다.   소녀 같은 감수성에 젖어 비가 오는 창밖을 넔 잃고 바라보던 할머니, 그러한 당신의 아름다운 모습 뒤에는 쏟아져내리는 비를 넔 잃고 바라보는 내가 있었다. 이슬비, 보슬비, 소낙비, 비 소식은 항상 눈에 착착 들어온다. 간혹 오보가 되는 날에는 슬그머니 화가 난다. 비 오는 흉내를 내다가 어정쩡하게 해가 나면 또 화가 난다. 비가 오기나 하려나? 정말 오시려나? 오-이런 날 이런 때에는 그리움에 싹을 틔울 비다운 비나 쏟아져라- 빈다. "비를 부탁해"  오늘의 단평    허인    비 온뒤의 그 청신함을 잘 알고 있는 수필가 전향미씨는 맑은 날이 아닌 비 오는 날마저 녀성 특유의 섬세한 감성으로 즐기려 한다. 지어는 비 오는 날을 싫어하거나 회피하려는것이 아니라 깁스가 없고 기스도 아직 나지 않은 아주 순수한 소녀의 마음으로  오히려 간절히 바라기도 하며 즐기려 하는것 같다. 왜서 이처럼 미묘한 심리적 갈등과도 같은 컨트롤에  독자들응 끌리듯이 동감이 가는걸가? 가만히 살펴보면 함께 공유할수 있다는 그 상상 하나만으로도 다 함께 가슴이 뻐근해지도록 후련해지고 싶은 간절한 소망때문이 아닐가 싶다. 마치 흙탕물이 튀여 올라 어지러워 지면 구겨진 옷, 혹은 인생일지라도 깨끗이 빨아 얼키고 설킨 빨래줄에 훌훌 널어 말리우고 싶은 세탁물처럼 다듬이질이 너무 필요한 우리들의 삶의 태도에 공명감이 더욱 커지고 있기 때문이 아닐가고 생각도 해본다. 우리네 인생은  알고보면 더하기도 덜기도 아니다. 오직 오늘뿐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가진것이 점전 많아지고 추억도 점차 많아지는것은 시실이지만 인간은 태여난 그 순간부터 덜기 인생이 시작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인생도리를 너무나도 잘 알기에 전향미씨의 비를 기다리는 마음을 독자들은 함께 공유할수도 있고  또한 파편적인 아픈 기억으로 함께 실감할수가 있었던것 같다.그럼 여기서부터 우리 다 함께 전향미씨의 수필 "비를 부탁해"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쿰쿰(여기서 쿨쿨하다는 표현을 썼으면 더욱 좋을것 같은 느낀)한 흙냄새를 앞세우고 땅의 기운이 올라온다. /풀들은 살랑살랑, 나무들은 으쓱으쓱 목을 뺀다. /말라비틀어졌던 공기는 촉촉하게 살아나고, /촐싹대던 먼지는 몸을 잔뜩 움츠린다. /비가 오려나?/ 이러한 표현들은 너무 좋아 보인다./툭! 첫 빗방울이 볼을 친다.  / 비가 오나?  고개를 한껏 젖히고 하늘을 본다.  / 툭툭! 올려 쳐다보는 면상을 제법 친다. /이마를 갈기고 코밑에 콧물처럼 매달린다./ 두 뺨에, 관자놀이에, 입가에도 똘랑똘랑 떨어진다./ 수분팩이 따로 없고 물안마가 따로 없다./ 하늘이 베풀어주는 은총을 받지 않을 이유가 없다./이러한 구체적인 서술묘사에서는 순리를 거슬리려는것이 아니라 오히려 즐기려는 작자의 성숙된 모습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듯 하다./이제 나는 젖을랑 말랑 하는 땅을 밟으며 /가슴 한편에 고이 간직해준 할머니의 풍경을 꺼내든다. /짜깁기식이 아닌 작자의 이런 아주 자연스런 표현은 독자들을 할머니와 나, 그리고 아버지의 세계로 단번에 끌어들여 추억의 한 자락에 돛자리를 정히 펴놓은듯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향미야~ 비 온다. 비 온다! ”/“빨리 거둬야겠다.”  /에서부터 시작된 동년의 파아란 기억이 비를 기다리게 되는 작자의 가장 기본적인 스토리로 되고 있는듯 하다.    한마디로 전향미의 수필  "비를 부탁해"는 물질문명의 충격으로 인정이 차츰 말라가는 요즘 시대 추억과 더불어 읽어볼만한 좋은 수필이라고 생각된다. 부족한 점이라면 거의 절반 정도 경물묘사에 치우치다 보니 할머니의 갑작스런 사망을 너무 간결하게 묘사하게 충격이 독자들에게 진한 아픔으로 잘 전달되지 않은듯 하다. 백문불여 일견이라고 한번쯤 읽어보고 함께 토의하여도 괜찮을 상 싶다. 전향미님, 더욱 좋은 글을 더 많이 쓰세요. 2016. 9.12 오늘의 단평 동시인 강려 허인    동시인 강려씨는 몸이 좀 불편한줄로 안다. 그러한 그의 시적인 구상과 순발력은 참으로 대단하다. 간혹 누가 즉석에서 즉흥시 한수라도 읊을라 치면 그 자리에서 계발을 받고 깔끔한 동시를 척척 만들어내는 그런 재주가 있는것 같다. 실지로 며칠전 필자의 "악어의 눈물"이라는 시를 보고 단숨에 적어보낸 그의 "악어의 소리"라는 동시를 여기서 잠간 올려놓고 함께 살펴보도록 하자. 악어소리 / 강려 무엇에 놀랐니 왜 놀랐니 악ㅡ 악ㅡ    잡음 하나 없는 맑은 라디오 소리가 귓가에 챙챙하게 들려오는 그런 느낌이 든다. 또한 군더더기 하나 없이 산들바람이 딲아놓은 가을 하늘처럼 깨끗해 보인다. 깔끔하면서도 여운이 큰것이 이 동시의 가장 큰 특징인것으로 보인다. 솔직히 동시를 필자는 아직 써본적이 없다. 허나 시적인 운률이나 률동, 그리고 리듬감이나 울림이 남겨주는 여운은 성인시와 별반 다름이 없는것으로 보여진다. 제일 중요한것이 동심을 사로잡고 누구나 입에 쉽게 올릴수 있고 암기할수 있는 그런것이 동시가 아닐가 싶다. 이 방면에서 필자는 누가 뭐라해도 김철호, 림금산, 그리고 현재 소주에서 복장공장을 운영하고 있눈 김성룡씨를 첫손에 꼽고싶다. 그럼 여기서 다 함께 강려씨의 근작시들을 살펴보며 가도록 하자 나비 (외 2수 )  / 강려     들꽃이 개여놓은 하얀 이불에 하늘 층계 도 르 르   바람이 노란 필통 살짝 열면 햇살같은 연필이 도 르 르     실국화     요기에선 노란 수세미 ( 清洁球) 꼬불꼬불     조기에선 노란 라면이 꾸불꾸불     이슬     빨강 노랑 하양 눈귀에 눈꼽재 방울 방울 매달렸네     봄바람이 꽃 잎 으 로 솔솔 닦아주네     한폭의 그림을 보는듯한 아름다운 선경과도 같은 절경이라 말을 해야 할것 같다. 말 그대로 작자의  창의력에 감탄이 나올뿐이다. 아직도 동심이 파릇파릇 싹 트고 있는 시인의 순진하고 해맑은 세상에서 불쑥 눈망울이 올롱한 사슴 한마리 만난듯이 동시를 읽으면서 함께 가슴 벅천 그런 느낌이 스며든다.들꽃, 하늘 층계, 그리고 실국화에서 꼬불꼬불과 꾸불꾸불은 완벽하리만치 나비와 실국화의 형상을 읽는이들의 눈앞에 재현하여 한폭의 아름다운 수묵화를 마주섰을때의 진한 감동과 공명감을 독자들에게 한꺼번에 선물하는듯한 그런 느낌이 든다.     부족한 점이라면 김철호시인님의 "줄말"이나 "경비원 아저씨"처럼 인성화가 완성된 신선한 충격이 아직은 약해 보이는듯하다. 암튼 많지 않은 동시인중 강려씨의 동시는 항상 자신만의 특색이 있는것만은 분명하다. 첫술에 배 부를수는 없다. 강려씨 더 좋은 동시 더 많이 창작하여 중국 조선족문단을 짊어지고 나갈 동시인이 되세요. 2016. 9.12 수필 담담해지고 싶다  (광동) 김금단   요즘 들어 웬지 담담한것들에 마음이 끌리기 시작한다. 담담히 하늘을 맴돌고있는 하얀 구름, 담담한 향기를 뿜는 계화꽃 향기, 담담한 미소…담담한것들을 보노라면 나도 웬지 담담해지고싶다.   엘리베이터안에서 전자감응 부위에 손을 내밀어 엘리베이터를 안전하게 탈수 있도록 하는 그 담담한 동작 하나에 타인을 배려하는 이웃의 너그러운 마음이 엿보인다.   부엌에서 행주치마를 두른 엄마의 담담한 모습에는 한 가정의 음식과 건강을 챙기는 엄마의 정성이 엿보인다.   남편의 손이 내 손을 잡아줄 때 나의 오른손이 왼손을 잡는것처럼 담담하게 느껴지는것은 남편과 내가 둘 아닌 일심일체가 되였다는 뜻이다.   어렸을적 새옷을 사입은 기억이 나에겐 별로 없다. 언니에게는 늘 새옷이 차례졌지만 둘째인 나는 항상 언니에게서 옷을 물려 입었고 내가 물려 입은 옷은 대물림 보배마냥 동생들에게로 물려졌다. 나의 동년은 언제나 날고 색이 바랜 옷들이 나를 동반하였다. 그 세월이 비록 빨강, 노랑, 파랑, 분홍, 연두빛이 아닌 색바랜 담담한 나날들의 지속이였지만 집안에는 봄 아지랑이마냥 웃음이 가물가물 피여올랐다.   현시대는 동년과 달리 물질이 란무하는 풍요로운 시대다. 견물생심이라고 이쁜 옷을 보면 사입고 싶은것은 누구나가 가질수 있는 마음이 아닐가. 욕심, 사치, 허영, 진실, 용기, 어리석은 거짓말, 아첨 등 단어를 떠올리는 안데르쎈의 동화 "황제의 새옷", 권력 앞에서 진실을 말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어른의 모습을 꼬집어서 보여주지만 다른 한 측면으로 새옷을 입기 좋아하는 인간의 천성을 그대로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딸애가 유치원을 다닐 때인 다섯살적 일로 기억된다. 어느 한번 명절을 앞두고 일찍 유치원에 딸애를 데리러 갔을 때 마침 정장에 넥타이를 맨 아저씨가 마침 아들을 데리러 왔었다. 내가 보기에도 그 아저씨는 너무나 품위 있어보이고 멋졌다. 딸애가 그 아저씨를 보더니 나를 잡아당기면서 내 귀에 대고 귀속말로“엄마, 나 저 아저씨랑 결혼할래.”라고 하는것이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얼마나 웃음이 나왔는지 모른다. 딸애의 눈에도 그 아저씨가 너무나 멋져보였던 모양이다. 옷이 날개란 말을 그대로 보여준 한단락 이야기다.   아빠트 1-3층에 백화점이 입주해있다보니 소금 한봉지를 사러 내려갈 때도 있고 무우 한뿌리를 사러 내려갈 때도 있다. 편리하다보니 자주 드나들게 된다. 백화점안에 발을 디디면 명품 가방이며 명품 신발, 명품 옷들이 눈길만 주어도 나를 향해 손짓하며 유혹한다. 특히도 신데렐라의 유리구두같은 구두며, 마네킹에 이쁘게 입혀진 연한 색상 계렬의 원피스며 블라우스며 자연스레 조화된 멋진 디자인의 이쁜 옷들은 더욱 자석처럼 나를 끌어당긴다. 주머니 사정이 넉넉치 못해서인가? 아니면 적당한 크기가 없어서인가? 그 어느쪽이든 백화점의 그 진한 명품 유혹에 빠져들기 전에 내가 담담해지고 마음을 비울수 있는것은 우리 집 옷장과 신발장에 명품 옷과 명품 신발들이 가득 차면 그만큼 남편의 어깨가 무거워진다는 도리를 잘 알고 있기때문이다. 그 진한 유혹에 담담해지는것이 내 가정을 지키는 비결임을 난 잘 알고있다. 못생긴 나무가 산을 지키듯 나는 명품 아닌 “못난 옷”을 입고 나의 가정을 지키련다.   한달전에 남편은 한국에서 나와 딸이 입을 옷을 20여견지 부쳐왔다. 한동안은 입을만한 옷들이다. 그런데도 남편은 자주 더 필요한 옷이 없는가 하고 문의한다. 나에겐 필요한 몇컬레의 옷만 있으면 된다. 날마다 새옷을 바꿔입는다 해도 그건 잠깐의 기쁨이지 행복이 아님을 안다. 그래서 나는 담담하게 거절한다.   남편이 급여를 남들보다 많게 받든 적게 받든 나는 종래로 남들과 비교한적이 없다. 욕심을 버리고 담담해져야만 내 마음이 편해지고 내 마음이 편해져야만 가정도 편해지기때문이다.   가정에서 부부는 부엌아궁이의 석탄불처럼 처음에는 뜨거운 사랑으로 활활 불타오르다가 나중에 오른손이 왼손을 잡는 담담한 느낌으로 인생의 기나긴 려정을 함께 걸어가는 삶의 동반자다. 담담한 느낌으로 서로 이마의 늘어나는 주름살도 보면서, 한올 두올 늘어나는 흰머리도 보면서 인생을 수놓아가는것이 행복이 아닐가.   얼마전 신문에서 비오는 날 교통사고로 길가에 쓰러진 할머니에게 우산을 받쳐 비를 막아주면서 구급차를 기다린 9살 어린이의 이야기를 실은 기사를 본적이 있다. 갈수록 살벌하고 인정이 삭막해지는 사회에서 9살 어린이는 여린 손으로 담담하게 우산을 들어 온 세상에 훈훈한 사랑을 과시하였다.   빈손으로 태여났다 빈손으로 이 세상을 떠나면서 인간은 남보다 더 가지려고 하는 욕망이라는 보이지 않는 바줄에 목매여 의기소침해지고 기쁨을 상실하며 세상살이가 행복하지 못하다고들 한다. 타인과의 무의미한 비교, 완전완미하게 살아보겠다는 덫이 행복을 야금야금 좀 먹고있음을 망각하고있는것 같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가 좋아하는것은 신기하다고 하고 싫어하는것은 썩었다고 한다. 그러나 썩은것이 다시 변하여 신기한것이 되고 신기한것이 변하여 썩은것이 된다.”는 장자의 말처럼 세상에는 어쩌면 영원한 진리나 진실은 없는것 같다. 내가 오늘 굳게 믿는 신념이 래일에는 허영일지도 모른다. 너무 오늘의 모든것에 집착할 필요는 없다. 욕심을 버리고 담담하게 살아야만 인간 본연의 모습대로 살아갈수 있는것이 아닐가.   비록 사치스런 소비가 없고 큰일을 해내지 못했고 뭔가 남들보다 부족해도 마시는 물처럼 담담한것이 생활이고 또 행복인것이다. 그래서 내 인생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을 담담한 마음으로 마주할수 있는 용기를 갖기를 소망한다 오늘의 단평     김금단의 수필은 말 그대로 담담하다. 담담하다 못해 조금 지루할 정도로ㅡ 헌데 읽다보면 애써 담담해지려는 작자의 노력이 더욱 가상하게 느껴지며 수풀을 이룬 물방울들의 즐거운 환성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단지 둘째라는 피면치 못할 리유에서 오는 피해의식은 평생을 가는가 보다. 어려서 부터 언니의 퇴물림 옷을 고스란히 이어받아 이 세상의 알록달록 고운 색깔에 둔감한척 너무 민감한 자신의 본능을 일깨워 가며 현시대의 금전만능, 물질주의 현상에 슬며시 비판의 자대를 대여도 보고 담담해져야 하는 리유를 독특한 개인의식으로 설파하려는 김금단씨ㅡ 그래서 독자들도 담담한 기분으로 차 한잔에 아련한 추억에 빠져들게 드는듯 하다.    수필의 매력은 단순한 신변잡기가 아닌 자유분방한 필치, 울림이 있고 재차 울림이 더 있고 예상치 못한 파멸 효과, 즉 일반적인 인식에 관한 파괴력이 있어야 공명감이 큰것으로 짐작된다. 이 방면에서 청도 장학규형의 (인성을 석방하라), (머리 잃은 곤혹)을 필자는 비교적 높은 좀수를 주고 싶다. 제목이 시사하는바와 같이 울림이 크기때문이다. 마치 읽기도전에 제목만 보고서도 공명감이 산생하는 그렁 마력적인 파급효과가 있기때문이 아니였을가 필자 너름대로 생각해본다. 솔직히 김금단 님의 담담하고싶다는 그런 공명감이 좀 많이 약해 보인다.    허나 깔끔한 문필이 성숙한 작자의 운치를 한결 돋보이게 하는듯 하다. 어디 한구석도 빈틈이 없이 자신의 넓은 세상을 비교로, 대조로 밝은 해빛으로 꽉 채워 보려하는 진보적인 인생모습, 그리고 잘 짜여진 인생극본을 담담하게 읽어 내려가듯한 한결 완숙한 녀인의 세계에서 작자의 일상 생활이 두눈에 또렷이 보이는것이 특장이라 해야 할것 같다. 공자는 일찍 논어에서 배움은 끝이 없다고 말을 한적이 있다. 김금단씨 덕분에 수필 잘 읽었구요, 좋은 글 더 많이 쓰세요
18    무지개 싣고 황금마차 달린다 댓글:  조회:1049  추천:2  2016-08-21
무지개 싣고 황금마차 달린다 작가 인상기 허인   박일형의 어렸을적 이름이 박태완이다.  박일형을 알기 썩 이전에 필자는 기실 일찍 (술 두병)이라는 단편소설을 써서 흑룡강신문 진갈래부간에 발표한적이 있는 박일형의 친아우 박태빈씨와 먼저 인연이 닿았던것 같다. 그래서인지 필자는 80-90년대 가목사시 주재기자ㅡ후에는 흑룡강신문사 고급편집, 부총편집, 현재 흑룡강신문사 론설위원으로  사업하고 있는 벽소설계의 태두, 고급 엘리트를 지금까지 스스럼없이 형이라고 부른다. 그만큼 필자로서는 박일형을 작가로서나 선배,  형으로서나 모두 인정한다는 그런 말이기도 하다. 필자가 보건대 작가로서의 박일형은 언제나 리성적이고 인간으로서의 박일형은 인정이 깊고 무척 다정다감한 그런 분이시다. 솔직히 필자는 작가로서의 박일형과 인간으로서의 박일형을 모두 좋아 한다.유태인 인생 지혜편에 이런 말이 있다.( 그 사람의 입장에 서기 전에는 절대로 그 사람을 욕하거나 책망하지 말라. 거짓말쟁이에게 주어지는 최대의 벌은 그가 진실을 말 했을 때에도 다른 사람들이 믿지 않는 것이다. 남에게 자기를 칭찬하게 해도 좋으나 자기입으로 자기를 칭찬하지 말라!) 모두어 해석해보면 공자의 중용(中庸)사상에 가까움을 우리는 알수가 있다. 오래동안 소식이 끊겨 련락조차 없던 차에 친구의 모멘트에서부터 대화가 시작이 되여 어저께 박일형이 두툼한 벽소설집 ( 얼굴없는 녀자)를 우편으로 보내왔고 필자는 지금 흥분으로 이 글을 쓴다. 개념의 철학 ㅡ 캉길럼의 종자적 역할    머리글에서 평론가 김몽선생은 (벽소설계의 "왕관" 아직도 박일의것")이라고 썼다. 왜서 박일형의 작가적 위치가 어제 오늘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이 한결 두터워질수가 그 원인을 필자는 개념적인 철학, 그리고 캉길럼의 종자적 역할에서 찾아 보려 한다. (공개재판)에서 남궁호, 리말숙 부부의 리혼판결은 진 법정이 아닌 살구꽃 마을 촌사무소에서 진행이 된다. 남궁호의 동생인 남궁진장과 법관, 촌장 그리고 지서, 마을 사람들 ㅡ 개념이상으로 상식의 그릇을 시원히 깨여버린 이런 황당한 장소 설정에 독자들은 잠시 어리둥절하고 당황하기도 하지만 법관이 묻는 리혼 사유에서부터 그러한 의혹은 곧바로 말끔하게 가셔진다. 남궁호의 리혼 사유는 기껏해야 잔 소리를 바가지로 긁어대고 돈을 함부로 못 쓰게 한다는것, 이에 맞서는 리말숙의 리혼 사유는 그야말로 기하학적인 수학문제보다 그 답이 더욱 명쾌하다. 그럼 여기서 그녀의  리혼사유를 다 함께 살펴 보도록 하자!  (여러분, 저 길 건너 동쪽으로 보이는 첫집이 우리 집이래요. 저 뜨락의 남새밭을 좀 보세요! 저게 어디 남새밭인가요? 쑥대밭이지...돈은 한푼도 벌지 않고 구멍난 항아리처럼 쓰기만 하지. 게을러 빠져서 농촌에 살면서 여름철에 풋고추, 풋마늘마저 사 먹는 이런 량반하고 어떻게 같이 삽니까?)  두팔을 내 젓는 말숙이는 도리머리를 달달떤다.  (남편이 어떻게 돈을 망탕 쓰는지 좀 더 상세하게 설명하시죠?) ( 우리 집 논이 3 헥타르나 되여요. 그 논을 한족사람에게 양도하였는데 거기서 나오는 수입이 해마다 3만원이 되여요. 이 량반이 그것만 쓴다면 제가 아무 말도 하지 않겠어요. 제가 한국에서 딸애 학비와 시어머니 양로비용을 대주는밖에 해마다 남편한테 2만원씩 보내주었어요. 어린 아이 젖을 달라 보채듯이 전화만 하면 돈타령이니 할수 없어서 보냈죠. 그 돈을 술 마시고 마작 노는데 다 써버렸습니다 ...제가 한국에서 돌아오니 갈매기 음식점에서 빚 문서를 들고 찾아왔더군요. 이 량반이 최근 2년사이 음식점에 빚진 돈이 얼만지 아세요? 8000원하고 꼬리가 달려요...) 말숙이는 호주머니에서 종이 한장 꺼낸다. (제가 한국에서 부쳐 보낸 돈을 어디에 어떻게 썼는가고 따졌더니 이 량반이 이런 종이 한장 내놓은거래요. 변소청소 매달 2번, 매차 30원 혹은 50원...제가 왜 어떤 때에는 30원이고 어떤 때에는 50원이냐고 물었더니 겨울에는 30원이고 여름에는 50원...글쎄 겨울철 변소청소는 곡괭이 몇번 휘두르면 될일인데... 그 다음 울바자...)     이때다 안해와 얼마쯤 사이두고 앉았던 남편이 몸을 날려 안해가 들고 있던 종이를 후닥닥 나꿔챈다. 마치영화에서 지하공작자가 비밀 암호를 적은 메모지를 입에 넣고 삼켜버리듯이 볼이 미여지게 우물 우물 씹는것이였다... (얼굴없는 녀인)속의 절대 부분 소설이 이렇게 반전에 반전을 거쳐 상식의 한계를 훌쩍 뛰여넘는다. 바슐라르가 왕성한 활력으로 가득한 농부같은 사람이라면 캉길럼은 강한 내적 긴장감을 지닌 수도승같이 유머적이고 엄숙한 사람이라고 할수 있다. 해서 필자는 박일형의 많은 작품을 캉길럼의 종자적 역할로 분석하고 싶다 인식론적인 가치와 현대적인 그 답변   야콥슨이 인류학에 관심을 갖게 된것이 레비 스트로스와의 만남때문이라고 한다. 필자다 벽소설에 관심을 갖고 재미있게 읽어보기까지는 아마도 박일형때문이 아닐가 싶다. 카바예스가 소망했던 개념의 철학에서 미셜 세르는 (신화는 지식으로 가득하고 지식은 꿈과 환상으로 가득하다)고 말한적이 있다. "사랑 가정 이야기 ",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요즘 이야기", "유머 풍자 이야기 "속에 실린 46편의 짧은 벽소설, 그중에서 필자는 살아가는 이야기편의 " 눈 먼 개"와 유머 풍자편의 "장가 잘 가는 달수"를 압권으로 친다." 눈 먼 개"의 경우 어떤 못된 인간의 극악무도한 못된 짓으로 두 눈이 멀어버린 개와 독거로인이여서는 아니 될 떡할머니와 그리고 인간으로써의 책임감마저 회피하고 아주 리기적인 그의 아들 며느리와 손녀의 이야기, 그리고 반전의 주인공인 마을사람들의 아름다운 소행에서 독자들은 다소 무거운 가슴을 쓸어 내리게도 되며 인간으로서는 최소한 해서는 아니될 그의 아들과 며느리, 손녀의 야비한 소행에서 우리는 현대적인 그 답변에 대한 사고를 깊숙히 하게 되며 반성도 하게 되는듯 싶다. " 장가 잘 간 달수"의 경우ㅡ 우리들의 관념적인 인식론을 사정없이 뒤엎어버리는 달수의 그 어이 없는 모습에 다소  불안하고 의아하다가도 불쑥 부려움도 이끌어 내여 화제로 삼고 싶은 자신의 모습에 또한 당황한 자신을 발견하게도 된다. 작자가 고중 다닐때 달수는 장가 가고 작자가 장가 갈때 ( 자식, 조금만 더 기다리지? 내가 너의 장인이 돼 줄수 있을텐데 ㅡ ) 하는 달수, 그리고 자신의 배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배도 불룩하게 만들줄 아는것이 남자라며 련속 리혼하고 련속 장가 드는 달수ㅡ  이 모든것은 오직 인식론적인 가치와 현대적인 그 답변에서만이 해답을 찾을수 있지 않을가 조심스레 생각해본다. 이외에도 " 프레임의 법칙"," 저팔계 자손들의 납함", " 누나와의 전쟁" , "뛰라령감", "얼굴없는 녀인, "천재", "모녀의 세계, 등등은 사회학적인 범주와 도덕, 량심적 범주가 뒤 섞인 여러 복합적인 우리들의 삶의 문제들을 풍자, 비판, 아이러니로ㅡ 굳어져 버려  딱딱해지는것이 아니라 오직 소설가 박일만의 방법론으로 알뜰하고도 살겹게 인성으로 풀이하였길래 반전에 반전이 가능했던것이 아니였을가 필자 나름대로 조심스럽게 생각해본다. 북송시기 저명한 도가학자(道教学者) 진희이(陈希夷),그가 바로 전설중의 진전로조 “陈抟老祖”이다. 그가 남겨놓은 저작이 곧 '심상편'" 心相编", 거기에 이런 구절이 하나 있다. '지기선이수지, 금상첨화; 지기악이 불위, 화전위복'"知其善而守之,锦上添花;知其恶而弗为,祸转为福" 뜻을 풀이해보면 ' 선을 알고 선을 지킨다면 금상첨화와도 같고 악을 깨닫고 행하지 않는다면 마침내 화가 되려 복이 된다' 는 말이다. 다산작가 박일형의 제3 벽소설집" 얼굴없는 녀인"이 곧바로 이렇듯 인성을 석방하여 지성으로 망각되여가는 우리들의 삶과 리성을 깨우치려 한것 같다. 마무리 하면서   광음이 류수라더니 팔팔했던 박일형은 이미 정년 퇴직하였고 필자도 래일 모레면 오십줄에 들어서게 된다. 십여년전, 필자가 모 신문사를 그만두고 박일형에게 전화하여 심양에 지사를 둘 의향이 없냐고 건의하였더니 기꺼이 한번 와 보라며 반기던 박일형의 사람 좋은 모습이 또 불쑥 생각난다. 그 당시 부총편이였던 한광천, 박일형의 아낌없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비록 성사 안되였지만 흑룡강 할빈이 생각나면 제일 먼저 필자의 머리속에 떠오르는 분이 곧바로 이 두분이시다. 사람 좋고 박식한 다산작가 박일형님, 진심으로 새책 출간을 축하 드립니다. 그리고 요즘은 륙십도 청춘이 되는 시절, 건강하시고 더 좋은 작품들을 또 기대해 보겠습니다. 2016년7월27일  심양에서
17    우리의 력사는 학자들의 량심이고 거울이여야 댓글:  조회:1315  추천:5  2016-07-04
우리의  력사는 학자들의  량심이고 거울이여야               ㅡ리광인교수님의 “무정장군”을 읽고                          허  인      요즘은 평전시대인것  같다. 눈만 뜨면 여기 저기에서 수 많은 평전들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온다. 픽션이냐 논픽션이냐를 떠나서 일부 이름 있는 작가들의 손끝을 거쳐 탄생된 이러한 평전들은 위인들의 일대기를 마치 한눈에 들여다 볼수 있을것처럼 생생하게 묘사하여 무척 인기를 끌고 있는듯 싶다. 헌데 필자가 알건대 평전은 한  인물,  한  인물의  일생 발자취를  기록하며  평론을  깃들이는 것이기에  력사에 길이  남을수 있는 진실한 력사자료 모음이여야지 결코 독자의 구미에 알맞게 편찬된 허구와  상상이  가미된 순수한 문학창작이여서는 안된다는것이다.        절강월수외국어대학 동방언어학원 한국어 교수로  근무한적이 있는  리광인씨를 필자는 기실 잘 모른다. 워이씬에서 가끔 서로 안부나 전할 정도, 그리고 몇번의 전화통화가 전부다.  그런데 며칠전 리광인교수가 정성스레 우편으로 보내온 두툼한  “무정장군”평전을 읽고 필자는 깜짝 놀라지 않을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처럼 방대한 자료수집과 조그마한 허구 한점마저 절대 용허하지 않으려 하는 그의 지극히 학자적인 저술 태도에 탄복했고 더 나아가 감탄하지 않을수가 없었기때문이였다.  필자가 보건대  “무정장군”은 딱딱하고  메마른 자료집인것이  아니라  생동하면서도  구수하게 진술되여  독자들이 심취있게 읽어볼수  있도록  씌여졌으며 그 매  구절구절에  이르기까지  오직 진실 하나에 의거한 충실한  평전이기에  우리 겨레 력사의 발자취에 길이 남을수 있는 력사문헌으로 되기에도 결코 아무런 손색이 없을것으로 보인다.    소개에 따르면 진공목,  박근만, 박근수, 최석천, 반경유,  리계동,  리용, 마천목,  신춘, 장세걸, 최정무, 최음파 등등 겨레의  쟁쟁한  남녁땅  황포군관학교 졸업생이 허다함을  우리는 이 책에서 발견할수가  있다.  그 중 중공 상해조선인 지부를  거쳐  동북으로  파견된  황포군관학교 출신들만  하여도 20여명, 강서  중앙 혁명근거지로  파견된 다음  2만5천리장정에 참가한 조선족장병이 무려 10여명, 특히 장세걸은 홍22군 참모장으로 활동하다 1933년 젊은 나이로 희생되여  많은 아쉬움을  남기였고 홍군의 첫 작곡가이자  바이올린수인  최음파는 1935년 봄 중앙혁명근거지 포위돌파전에서 불행히  희생( 또다른 일설에는 상해에서 일본령사관  놈들에게    체포되여  조선 신의주 감옥에 넘겨져 이른바  재판 받은후 일체 소식이 두절되였다고 함)  이러한 기록은 너무나도 충격적이며 또한 우리 겨레 력사에 더없이 소중한 자료들이 아닐가고 생각된다. 이외에도 홍1군단  참모장  양림,  중공하북성위  서기  겸  천진시위  서기  리철부,  중공기동지위서기  주문빈 등 수많은 영령들의 이야기가 있지만 여기서 깊이 있게 언급하지 않으려 한다.    무려 28장이나 되는 무정장군의 젊은 시절 생전 사진과 저자가 현지답사때 남긴 사진들(실제  현지답사사진은  많고도  많다고 함.)은 저자가 매번 소중한 현장에서 귀중하게 남긴 기념사진임이 분명하며 그 곳곳에는 저자의 피타는 노력과 오랜 기간의 심혈이 깃들어 있음을 우리는 쉽게 알수가 있다. 특히 무정장군은 중국 조선족, 더 나아가서는  전체  우리 겨레들에 있어서 극히 전설적이며 영웅적인 인물이 아닐수가 없다. 더구나 그 만큼 무게가 있고 아직도 신비의 베일에 쌓여 있는 장군의 일대기를 소설이나 픽션이 아닌 소중한 력사적인 자료들을 수집하여 문학형식으로 진술한다는것은 저자로서는 아마도 무척 심리적인 부담도 컸을것이고 사업량이 또한 자못 방대하였음을 우리는 피부로 절실하게 느낄수가 있다.       이 책의 첫시작 “밝혀지는 장군의 신상”에서 리광인씨는 무정장군의 고향이 함경북도 경성군이라는 일설과 새롭게 제기되는 청진시 근동리설을 아주 명쾌하게 해설한다. 또한 상해 로동자폭동 총지휘, 별명이   “사꾸라몽둥이”인 조선인혁명가, 중국공산당 수령들인 모택동-주덕, 더우기  팽덕회와의 절친한 관계, 조선ㅡ보정ㅡ상해ㅡ중앙혁명근거지ㅡ홍군장정ㅡ태항산ㅡ연안ㅡ동북ㅡ다시금 조선으로의  장군의 발자취를 따라 가노라면 우리는 이 평전에서 수많은 력사인물들을 더 만나게 된다. 실례로 양림장군이 희생된후 팽덕회의 연설을 우리 여기서 잠간 다 함께 살펴보도록 하자.   ㅡ양림이 희생된후 팽덕회는 당위원회 회의에서 다음과 같은 발언을 하였다.   “많고 많은 외국 혁명가들이 중국혁명을 위하여 희생되였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들을 계속 중국에서 희생되게 한다면 누가 남아 그들 조국의 혁명사업을 위하여 싸우겠습니까? 이미 목숨을 잃은 동지들은 어쩔수가 없지만 이제부터라도 외국동지들의 생명을 아껴야 합니다”  팽덕회의  호소로  군위에서는  나에게  휴식명령을  내리였으며  나를  학습연구에  종사하게  하였다. ㅡ그때 나는 위장병악화로 시달리고 있었다. 팽덕회의 발언은 나로 하여금 싸움터를 떠나게 하였고 나의 목숨을 보호해 주었다. 그때로부터 우리 두 사람은 평생의 친구와 동지로 되였다.”     무정장군의 회고록에  나오는  생생한  회고문,  이처럼 많은 실제 사실을 통하여 우리가 조심스레 살펴볼수 있는것은 이러한 귀중한 자료들을 얻기 위하여 리광인씨는 결코 안일하게 컴퓨터 검색만이 아니라 두발로 중국 혁명의 성지인 서금,  연안을 비롯하여 2만5천리  장정길,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고 다녔음을 대뜸 알수가 있다.     또한 무정이 팽덕회가 이끄는 홍군 제3군단 포병지휘관으로 있을 때의 중앙 혁명근거지  홍군시절,  주덕은 모택동, 주은래, 팽덕회와 토론끝에 무정을 군위직속 홍군포병퇀 퇀장으로 제발시켰으며 중앙홍군의 장정이 시작될무렵 무정을 다시금 군사위원회 제1야전종대 제3제대 사령원 겸 정치위원으로 임명하였다, 더구나 설산과 초지를 지날  때 무정이 팽덕회사령원을 받들어 장국도와의 투쟁에서 불멸의 기여를 하였다는것을 알게 된 주덕(1935년  6월,  사천  무공에서의  홍1방면군과  홍4방면군  회합후  주덕은  홍4방면군에서  활동)은 이 조선혁명가에 대하여 탄복해 마지 않았었다,  홍군주력이 팔로군으로 개편된 전후과정 (홍군총부  작전과장과  팔로군총부  작전과장에 대하여...) 이러한 자료들은 이 평전에 하도 많아 필자는 여기서 일일히 소개하지 않으려 한다.     길림성 화룡시태생. 1982년 연변대학 조문학부 졸업,    선후로 연변일보사, 연변력사연구소 절강월수외국어대학 한국어과 교수로 근무ㅡ이런  경력의  소유자인  리광인씨는 지난  10여년  기간에만도  “겨레  항일지사들” (전4권), “조선족력사문학연구문집”(전  2권), “광복전 겨레 작가론”, “시인 윤동주 인생려정 연구”,   평전  “홍군장령 양림”, 평전  “백포 서일장군”  등  20여부의  력작으로 펴내였으며 이제  홍군음악가  “최음파평전”이  곧  출판되고  현재 “송몽규평전”  집필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줄로 알고 있다.        매번 통화  때마다 마치 지기를 만난듯이 친절하게만 느껴지는 형 다운 형ㅡ새삼 막역지교로  느껴지는 리광인교수ㅡ앞으로도  머나먼 삶의  려정에서 건강에  더 류의해가면서  소설이나 픽션이 아닌 우리  겨레들의  귀중한 력사사료들을 후대들에게 더욱 많이 남겨줄수 있는 력작들을 펴내시길 다시 한번 기대해본다                                                                           2016년 6월30일 심양에서    .qmbox style, .qmbox script, .qmbox head, .qmbox link, .qmbox meta {display: none !important;} #mailContentContainer .txt {height:auto;}          
16    자연속에 그려보는 우리들의 민속도 댓글:  조회:1401  추천:5  2016-06-09
저 작은것들의 수런 거림에서 강효삼 사람의 고향에 사람이 그리워 오늘도 내 막연한 기대랄가 낮익은 언덕길 내려가는데 맑은 이슬 입에 문 풀잎들이 나를 반기여 고운 손을 흔든다 오늘따라 마을 길섶 민들레꽃 얼굴이 더 곱고 화 ㅡ안하고 이제 막 연두빛 이파리들 뽐내는 호박잎의 거동이 례사롭지 않다 그 어떤 암시인가 그러나 마을은 아직 고요지경 꿈속같은데 그래도 조금 위안을 받을수있는것 지붕마저 덮을듯 키 높이 자란 곡식들 그저 묵혀 둔 터밭은 한 뙈기도 없다 손바닥만한 땅도 아까와 터전밭 울바자를 감고 오른 오이며 당콩 넉줄들 벼짚더미 딛고 오른 박넝굴은 어디가 목표여서 그냥 손을 내젓느냐 헌데 이런 반가운 정경쯤 아직은 어디가도 심심찮게 볼수있어 그닥 신비롭지 않는데 오늘 문득 나를 사로잡는 유혹이 있다 갑자기 들려오는 낮은 목소리의 수런거림 무슨 소릴가 귀기울이니 아, 푸른 곡식포기 사이 요리조리 누비는 노란 병아리들의 모이 찾는 소리로구나 이따금 눈에 번뜩이는 노란 색갈이 나에겐 마치 금덩이가 뒹구는것 같았다. 닭우는 소리 들어본지 오래인 마을인데 아직 그 어느 열심하는 이가 남아서 “하찮은” 병아리까지 품들여 깨우는 만만한 여유를 보이고 있는가 생각하면 흘러간 어제 우리들의 마을이 이러했었지 여름이면 곡식들 무장무장 자라 마을을 덮고 발가벗고 뛰노는 아이들과 함께 성가실만큼 뜰에 널려 촐랑이는 병아리떼 어디서나 흔히 보는 농가의 민속도여 이제 그런날이 다시 올 징조인듯 저 작은 것들의 수럼거림 아름다운 시작이 될듯싶구나 송곳같은 부리로 시방 열심이 쫓는것은 흙만아닌 구석구석 웅크렸던 적막 부지런히 톱질하며 희망의 메이라인듯 내 마음 위안하나니 부풀어 오르는 기대감 저 수런거리는 소리에 이끌려 왁자하니 벅석이던 그 옛날 고향마을 풍요가 다시금 회복될수도 있을 터 저 작은 것들의 수런거림 아직 내 고향에 가난해도 열심했던 어제의 알뜰솜씨가 남아있다는거다 겨레와 더불어 흙을 만지며 잘살아보려는 꿈 그기대와 소망이 아직 빛바래지 않았다는거다 아,고향상실이 늘 가슴 아파 비애의 시를 쓰던 나에게 저 작은것들의 수런거림은 청량한 시내물소리인듯 마른 가슴 촉촉히 적셔줄 밝고 명랑한 시를 빚게 한다 이제 저것들 무럭무럭 자라 엄지닭되면 그 속엔 볏빨간 수탉도 있어 ㅡ” 꼬끼요ㅡ” 제법 아침마다 “꼬끼요 ㅡ”목놓아 려명을 부르면 시골은 어두움과 외로움의 옷을 벗고 해돋는 고향 색동의 아침을 활짝 창문열린 뜨락에 맞아들이려니 오늘따라 내 걸음이 무척 가볍다. 자연속에 그려보는 우리들의 민속도 (저 작은것들의 수런거림)에는 무엇이 있나 뚜껑을 열어보면ㅡ 문학비평 허인     시에 있어서 (대상)이란 무엇일가? 수 많은 작자들은 아직까지도 상대(相对)적인 개념을 깊이 생각 해보지도 않고 흔히 혼동해서 쓰는 경우가 허다한것 같다. 물론 뉴톤의 상대론(相对论)이나 아인슈탄의 물리학적인 변증법(辩证法)역시 모두 상대적으로 대상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오늘까지도 이데올리기식의 경험주의로 시를 쓰거나 파격적인 모험으로 험난한 몽롱시 시대를 거쳐 요즘 포스트모더니즘의 시험단계에서 와서는 잠시 어리둥절하여 갈길을 잃고 많은 이들이 갈팡질팡 우왕좌왕하고 있는것 같기도 하다. 그렇다면 강효삼시인님의 시적 대상은 도대체 무엇일가? 뚜껑을 열어보면 마침내 우리들의 고단했던 삶이 보이고 미래가 보이고 아련한 추억속의 동경(憧憬)이 마치 푸른 보리밭속의 새싹처럼 똑똑히 보이는것 같다. 그럼 여기서 우리 다 함께 강효삼시인님의 근작시 (저 작은것들의 수런거림에서)를 조심스레 살펴보며 가도록 하자     제 1련 / 사람의 고향에 사람이 그리워 /오늘도 내 막연한 기대랄가 /...중략... /이제 막 연두빛 이파리들 뽐내는 /호박잎의 거동이 례사롭지 않다/그 어떤 암시인가?/에서는 리유가 아닌 리유, 또한 리유가 될만큼한 내가 살아가는 리유ㅡ즉 /사람의 고향에서 사람이 그리워/오늘도 내 막연한 기대랄가/로 설정적, 압도적, 어쩌면 투시적으로 멋지게 캐릭터를 시작으로 한 이 서경묘사는 그야말로 가히 압권이라 해야 할것 같다. 특히 /호박잎의 거동이 례사롭지 않다/ 그 어떤 암시인가?/에서 뽑아 든 파워플한 내레이션, 아무런 꾸밈도 없이 끊임없이 변화에로 몰아가려 하는 시인의 그 시적인 태도가 매우 돋보이기도 하며 그러한 시적인 배렬은ㅡ작자와 독자 사이를 교섭과 타협이 아닌 소통을 먼저 고려하였기때문에 더욱 효과적이였으며 결과는 제2련에서 시작부터 순탄하고 더욱 자연스럽게 하고 있다고 생각이 된다.      /그러나 마을은 아직 고요지경 꿈속같은데 / 그래도 조금 위안을 받을수있는것 /지붕마저 덮을듯 키 높이 자란 곡식들/그저 묵혀 둔 터밭은 한 뙈기도 없다/손바닥만한 땅도 아까와/터전밭 울바자를 감고 오른 /오이며 당콩 넉줄들 /벼짚더미 딛고 오른 박넝굴은 / 어디가 목표여서 그냥 손을 내젓느냐/에서 /그저 묵혀 둔 터밭은 한뙈기도 없다/손바닥만한 땅도 아까와 / 터전밭 울바자를 감고 오른 / 오이며 당콩 넉줄.../은 필자로서는 오랜간만에 읽어보는 혼자 읽어 보기가 너무나도 아깝도록ㅡ 텅 비여 있는듯이 항상 꽉 차 있는 우리들의 농촌현상을 한 눈에 잘 보이도록 화공이 정성들여 한번 또 한번 속사로 그려놓은 한폭의 풍경화와도 같은 절묘한 묘사였다고 아낌없이 박수를 보내 드리고 싶다.      흔히 대상의 붕괴는 트릭(trickㅡ책략. 계략.혹은 속임수라는 뜻)과도 같은것으로써 필자로서는 절대로 제창할바는 못된다고 생각한다. 일찍 공자도 인이불인 여례하. 인이불인 여락하(人而不仁 如礼何 人而不仁 如乐何)라고 말한적이 있다. 뜻인즉 ㅡ 사람이 자애롭지 못하면 례절이 있어 무엇하며 사람이 인자하지 않으면 웃음이 가득한들 무엇하랴ㅡ이며 또한 행유여력 즉이학문(行有余力 即以学问*)이라고 말씀한적이 있다. 그 뜻인즉 인간적인 모든 행실을 중시하고 남음이 있을때 더욱 학문에 전력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모든것은 보시다싶이 말 그대로 인(仁)을 지팡이로 삼고 있다. 시인의 경우ㅡ어떤 년대, 어느 시기이든간에 대상(对象)을 상대(相对)로 비교의 메스가 아니라 스스로의 자질제고와 상대적인 압축을 통하여 시적인 화자ㅡ 즉 오직 시인들만의 그 독특한 시어들을 나름대로 완성해 나갈수 있는 동기가 되여야 한다고 생각된다. 시적인 화자는 흔히 시적인 대상를 상대로 비(悲)와 애(哀), 흥(兴)과 락(乐)을 즉 희노애락을 견인해 내기도 하며 또한 전률같은 공명감을 시줄기마다 차곡차곡 곡식처런 심어놓고서 수확의 계절에는 마침내 자타 모두 공인하는 감수로 오직 한가지에만 올인할수 있는 그 무언가를(주제ㅡ 중심사상) 모두 함께 고민하게끔 하고 있는듯 싶다.     이처럼 시어 배렬에서나 익숙한것들을 낯설게 하기, 낯선것을 익숙하개 만들기ㅡ이 면에서 강효삼선배님은 항상 사실주의를 기초로 끊임없이 초현실주의적인 시적 실험을 거듭하고 계시는듯 하며 남보다 발 빠른 그 움직임이 돋보이기도 하다. 제 3련에서/ 헌데 이런 반가운 정경쯤/아직은 어디가도 심심찮게 볼수있어/그닥 신비롭지 않는데/에서부터 시작하여 그 마무리에서 발견할수 있는것은 어쩌면 하찮치만 귀찮치 않은 유혹 ㅡ 즉 이제는 너무나도 익숙하면서도 생소한 두 얼굴의 농촌풍경 ㅡ 즉 /푸른 곡식포기 사이 요리조리 누비는/노란 병아리들의 모이 찾는 소리/를 찾아 나서는 시인의 모습이며 그 노란 병아리들의 앙증맞게 생기발랄한 모습에서 시인은 다시금 황금 덩어리를 련상하여ㅡ 잃어버린것과 잃어가고 있는것에 대한 애착으로 가슴이 뭉클하게끔 다시금 /닭 우는 소리 들어본지 오래인데/ 아직 그 어느 열심하는 이가 남아서 /"하찮은” 병아리까지 품들여 깨우는 / 만만한 여유를 보이고 있는가? /로 케뮤네이션을 잘 표현하고 있는것 같다.     그 다음 제4련에서부터 5련, 마지막련까지는 하늘과 바람, 구름과 산, 아련한 추억속에 떠올리는 우리 삶의 민속도(民俗图)로써ㅡ 바램이고ㅡ 동경이며ㅡ 아픔이며ㅡ갈증과 갈망 그 자체인것 같다. /여름이면 곡식들 무장무장 자라 마을을 덮고/흙만 아닌 구석구석 웅크렸던 적막/ 은 잃어버린것에 대한 날로 조급해져가는 본능적인 삶의 의식인것 같다. 이렇듯 강효삼선배님의 시속에는 언제나 겨레가 있고 삶이 있고 나가 있고 나 외에 또한 너가 있다. 바꾸어 말하면 강효삼선배님은 항상 시적 대상을 가장 익숙한 곳에서 찾고 계시다는 말이기도 하다.    아직도 많은 이들은 대상에 대한 지(知)는 보통 대상에 대한 인식의 결과에서 생긴것으로 보고 있지만 필자가 보건대 꼭 그렇치도 않다. 지(知)는 결코 대상에 대하여 그 어떤 작용도 하지 않으며 다만 그 대상과 너무 상사한것뿐, 이러한 견해를 유대상상설(有对象象说)이라고 하질 않던가?냇물이 모여 강물을 이루고 강물이 모여 호수를 이루고 호수가 모이면 바다가 되듯이 결국 작은것의 수런거림에서 살펴본 모습은 우리들의 가장 익숙한 민속도이다. 아련한 추억과 함께 읽어본 (저 작은것들의 수런거림에서)는 오랜간만에 읽어 본 좋은 시라고 생각된다. 끝으로 올 한해 도 강효삼선배님이 더욱 많은 시작품들을 써내시길 진심으로 축원한다 2016년6월8일 심양에서
15    명작이 계란장수보다 많은 시대 댓글:  조회:1381  추천:1  2016-05-16
나는 여직껏 명작을 본적이 없다 흑룡강신문 진달래부간 한국특집에 부치는 편지 문학비평 허인    작년 이맘때부터 시작하여 (시의 향기에 빠지다)로 국내 조선족 20여명 중견시인들의 시작품들을 매기 단평과 함께 꾸준히 실어오다가 며칠전 채복숙편집님이 대담하게 한국 5명 당대 시인님들의 시작품과 작자략력을 야무지게 소개한적이 있다. 덕분에 한수 배우는 자세로 착실히 읽을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여 필자로서는 너무 다행스러웠다고 말을 해야 할것 같다. 중국 조선족 중견시인님들과 한국 기성시인님들의 시 작품 비교,  어불성설,- 어쩌면 너무 재미나고 어마어마한 화제가 될지도 모를 이 비교 , 언젠가면 누구라도 꼭 파 헤쳐야 할 이 과제 , 그만큼 건드리기조차 너무 민감하고 실력 차이도 많이 나는 만큼 우리의 문학 지성인들이나 평론가들은 툭 까놓고 말하면 욕을 먹기가 싫어 언감생심 감히 평론조차 시도해본적이 없는 줄로 알고 있다. 손자병법에 ( 지피지기는 백전백승(知彼知己 百战百胜)이라는 구절이 있다. 분명 한 피줄이면서도 너무 오래도록 떨어져 지내다 보니 저희들은 저희들 식으로, 우리들은 우리들의 식으로 제각기 험난한 문학의 가시밭길을 걸어 온것만은 사실이다. 백문불여일견이(百闻不如一见)라고 그럼 여기서 우리 다 함께 우선 먼저 흑룡강신문 진달래부간에 실린 한국인특집부터 조심스레 살펴보며 가도록 하자 사랑은 오밀조밀한 다정함이 아니라    꽃장식과 톡톡 튀는 빛갈이 아니라    저 무변의 강물, 선으로 온다    산등성    그 아픈 허리를    오래도록    만지는    달  이지엽 시인의 ( 달 항아리) 전문 /직선의 힘으로/남자는 일어서고/곡선의 힘으로/녀자는 휘여진다/직선과 곡선이 만나/ 면이 되고 집이 된다/직선은 길을 바꾸고/지도를 바꾸지만/곡선은 그 길우에/물 뿌리고 꽃을 피운다/서로가 만나지 않으면 길은 길이 아니다/ 사랑의 이미지ㅡ(직선과 곡선의 힘) 전문  이 두수의 시를 살펴보면 형이 상학적인 그 은근함과 섬세한 부드러움이 생기를 발산하고 있으며 크나 큰 힘의 원천이 되고 있는것을 발견할수가 있다. 물론 거창하지도 또한 거론적이지도 않다. 확실한것은 실용주의적인 그 오밀조밀한 구조, 더우기 측면적으로 살펴볼때 단재적인 그 립각 효과때문에 더욱 눈이 부시도록 황홀한것 같다.( 사랑의 이미지)에서 /직선의 힘으로/남자는 일어서고/곡선의 힘으로/녀자는 휘여진다/는 이제 하루를 더 살지라도 하늘아래 자존심 하나로 꿋꿋이 우뚝 서야 하는 남자들의 강인하고 근엄한 형상과 산에 막히면 넌짓이 에돌아 흘러가는 강물처럼 부드러운 녀자의 지혜로운 그 형상을 한눈에 들여다 보이듯이 생동한 한폭의 그림으로 그려놓은것 같다. 시란 이렇게 미사구려식이 아니라 간결함의 극치일수록 더욱 좋다. 서지월시인님은 조선족 문인이라면 누구나 그닥 낯선 분은 아닌줄로 알고 있다. 중한 수교전이던가 그 이후이던가 중국을 첫 방문하고 사실주의 시와 초현실주의 시들을 흑룡강신문에 발표하신적이 있는 줄로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다.      좌우간 산에 가면 산 노래, 들에 가면 들노래, 바람을 만나면 바람을 읊고, 구름을 만지면 구름으로 집을 짓고 또 어데론가 정처없이 흘러가는 강물을 하염없이 바라보면서 세상을 읊고, 삶을 읊고, 령혼을 읊는것이 시인들의 공통한 운명인가 본다.이번에 한국시인특집에 실린 서지월시인의 근작시 3수를 살펴보면 하나같이 일상 생활에서 보고 듣고 느낀것과 감각적인것과 직감적인것에 별도로 추억을 가미시켜 희미한것이 아니라 직접 살갗이 만져지고 호흡이 서로 느껴지도록 오직 나만의것, 오직 내것으로 독특하게 매수의 시작품을 완성시킨것 같다 美人이 많다는    할빈에 와서    내 프리지아 꽃향기 같은    이국정서 느끼네    中央大街에는    青石으로 바닥을 깔아    구두발자국 소리뿐만아니라    날씬한 종아리 탄력의 소리까지    들리는것 같아    할빈에는 아마    송화강이 그 美人들을 날마다 비추며 심심하지 않을테니    오늘은松花江에 나가    100미터 간격으로    美人이 걸어가는것 볼수 있다는    그녀들 종아리 따라 나설가 흩날리는 머리결 따라 나설가    *처음 할빈에 왔을 때, 고 한춘시인께서 송화강변에 가면 100미터 간격으로美人이 걸어가는것 볼수 있다고 풍자적으로 말한적 있음. (미인의 고장) 전문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추억이 있다. 추억과 회억은 쌍둥이 근친, 분명 동의어(同义词)이면서도 시나브로 가슴에 와 맺히는 그 함의는 시와 때가 다르게 무척 감미롭기도 하다. 사실주의를 기초로 나들이 길위에 튼튼히 정석으로 깔고 또한 그 위에 초현실주의 현란한 옷을 입혀놓고 한점의 산들바람처럼 5월의 이 속살이 간지러운 봄속을 무심히 행객이 지나가듯이 불쑥 운치를 알고 읊는 풍류는 과히 일품이라고 하여도 과언은 아닐상 싶다. (흑룡강련가) 역시 첫련에서/천년을 님 그리며 살아온/복사꽃 한 그루/로 아늑하게 서정적인 운률로 담담하게 시작하여 / 누가 버리고 간 무수한 돌멩이들의 웅성거림/여의주/ 달/ 등등으로 살아 천년의 그 길고도 험난한 풍상을 말이 아닌 뜨거운 가슴으로, 시인의 아량으로 표현하려고 한것 같다. 모두다   알다싶이 6.25전쟁이후 한국은 미국의 영향과 참여, 호상 상호교류로 문학, 경제 및 다 방면에서 모더니즘시대를 가장 일찍 맞이하였고 그러한 격변시대의 모진 진통끝에 또한 유럽(구라파)의 심미주의자들의 심상주의 사상ㅡ 즉 포스트모더니즘의 씨앗을 억척스레 자신들의 터밭에 뿌려놓고서 무궁화와 함께 울금향도 지극 정성으로 조심스레 오래동안 가꿔왔음을 누구나 쉽게 알수가 있다. 그것이 모미니즘이든, 포스트모더니즘이든 혹은 리얼리즘이든간에 이제는 자신들의 한개 쟝르로 말끔히 소화해내였으며 저 어두운 밤 하늘에서 뭇별이 반짝이듯이 제 각기 자신의 넓은 령역에서 푸른 빛을 발산하고 있는 상황이기도 하다. 그 반면 우리들은 어떠한가? 전례없는 십년 동란으로 마음에도 없는 정치적인, 구호적인ㅡ 시들을 겁없이 써내대가 개혁개방이후에야 비로소 현대적인 시 실험, 즉 몽롱시 고개를 가까스로 넘어 천신만고끝에서야 오늘에 이른 실정이기도 하다. 혹자는 간혹 환경의 차이와 그 렬악성을 말할수도 있을것이다. 곰곰히 살펴보면 환경이 렬악성은 그 당시 한국이나 중국이나 거의 똑 같은 상황, 비굴한 변명보다는 이제는 착실한 자기성찰과 뼈 저린 자기 반성이 더욱 시급하지 아닐가?     /그는 신간서적 하나를 건네주기 위해/낡은 쏘나타를 끌고 120킬로를 달려왔다/나는 기절할번했다 하기야 오늘뿐인가/사람들속에서도 나만 보고 걷는 아버지 곁에/나는 아이만 지켜보며 걷는다/떨어진 아이의 장갑을 주워주는/이 겸손한 남자의 사랑/그가 건네준 책은 다시 나의 램프다/당신이 사랑하던 책들은 내 책장에 꽂혀있다/당신의 언어는 나의 말속에 흐르고있다/혼곤한 아이가 잠들어 있는 침대맡에 기대여/성탄의 기적처럼 새 작품을 생각한다/별이 빛나고 있다/   허혜정시인님의 (아버지의 선물) 심상시(心像诗)의 각도에서 살펴볼때 이 시는 엄격히 따지면 전형적인 고백시다. 시속의 화자인 아버지의 딸에 대한 사랑 이야기를 마치 소설을 읽고 집필하듯이 주관적인 개인 정서가 아니라 항상 객관적인 립장에 서서 담담하게 나, 아버지, 그리고 내 아이와 삼자관계속에서 지펴 올린 생명의 촛불, 세상과 마주서서 두런두런 소근소근 이야기하듯이 력설이 아닌 진실한 생활속의 한개 단면을 절단하여 색채를 올리고 작은것으로부터 시작하여 마침내 커져버린 잔잔한 감동을 산사의 새벽 종소리처럼 떵떵 크게 울려 독자들의 심금을 바로잡고 있는듯 싶다     /우리가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을 때/옷 없는 짐승들처럼 골목 깊은 곳에 단둘이 살 때/우리는 가난했지만 슬픔을 몰랐다가을이 오면 양철 지붕우로 감나무 주홍 락엽이 쌓이고/겨울이 와서 비가 내리면 나 당신 위해 파뿌리를 삶았다/그때 당신은 내 세상에 하나뿐인 이슬 진주/하지만 행복은 석양처럼 짧았다/내가 흐느적거리는 도시 불빛에 익숙해지자/당신은 페에 독한 병이 들어 내 가슴속에 누웠다/지금 나는 거울에 비친 내 얼굴에 침을 뱉는다/시간이 물살처럼 흐르는 사이/당신을 잃어버린 내게 남은건/상한 간과 후회뿐/그때 우린 얼마나 젊고 아름다웠나/우리가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을 때/백열등 하나가 우리 캄캄한 밤을 지켜주던 나날/    방민호시인님의 (행복)역시 신변잡기가 아닌 일상생활속에서 힌트를 잡고 소재가공을 익숙한것을 낯설게 하고 낯선것들을 차츰 익숙하게 만들어 성공한 작품이라고 말해야 할것 같다. 그만큼 낯설은 익숙함과 그 친근함이 (행복)이라는 이 시제를 더욱 돋보이게 하지 않았나 조심스레 생각해본다. 여기서 마지막으로 양지예시인님의 (항아리)를 더 살펴보자    내 너를 들여다본다    고여있는 물속    어디선가 본듯한 모습    흔들리는 미간과 턱    바람속을 해메이던    겹쳐진 얼굴 하나 어둠속에 웅크리고 앉아 있다    오랜 세월 고여있던 생각    그深渊의 끝    멀리서 빛이 달려오는 소리 들리고    푸른 날개 풀어놓은 잡히지 않는 꿈들 서서히 떠올리기 시작한다    한마디로 우리들이 흔히 자주 쓰고 있는 관념적인 시들은 거의 하나도 없다.어쩌면 사냥감을 마주섰을 때 주저없이 정확하게 예리한 비수를 들이대듯이 간결함이 극치를 이룬다. 군더더기들을 쏙 빼고 알맹이들만 밤상위에 차려놓은 진수성찬이라고나 할가? /내 너를 들여다 본다/어디선가 본듯한 모습/모두 다 알다싶이 무슨 일이나 첫 단추가 잘 끼워지면 순조롭기 마련이다./흔들이는 미간과 턱/어둠속에 웅크리고 앉은 얼굴/멀리서 달려오는 꿈/속에서 더 더욱 확고하게 완성이 된 인성화는 눈물이 어린 강인한 한 녀자의 형상을 견인해 내였으며 어쩌면 어쩌면 그 모습이 어머니의 모습일수도 있다는 예감을 주기도 하며 그만큼 시제 (항아리)를 통하여 거울에 비춰 본 어렴풋하고도 싱싱한 그 모습은 살갗을 만지면 만질수록 새록새록 추억이 파랗게 봄풀처럼 돋아나듯이 인간적인 모습으로 더욱 친근하고 익숙하게 하는것 같다.   지난해부터 지금까지 흑룡강신문 진달래부간에 실린 20여명 조선족 중견시인들의 시작품은 심숙씨가 매기마다 촌평을 달아 놓았기에 여기서 길게 설명하지 않으련다. 허나 대조해보면 확연히 그 차이점이 드러난다. 우리는 지금 명작이 계란장수보다 많은 시대를 살고 있다. 허나 무엇인가를 써야 겠기에 급급히 써낸것들과 알심들여 소재를 잡고 기획적인 시도끝에 령혼으로 혼불을 지펴올려 피와 살, 땀과 뼈를 깎는 각근한 노력으로 소중하게 이루어낸것과 어느 날 길가에서 문득 흥분으로 주어든 지폐와도 같은 차이점이라고나 할가? 솔직히 필자는 여직껏 그처럼 흔해 빠졌다는 조선족 시인들의 명작들을 읽어본 기억이 없다. 거의 모두가 틀에 박힌듯이 관념적인 형이 상학과 그 섣부른 미사구려로써의 글 장난, 더우기 독자들을 혹사시키는 명사 라렬,미처 채 읽기도전에 이마살부터 찌프려지게 하는 강조에 재 강조에 시린 한숨끝에 마시던 오차물마저 내려놓게 되는것을 어쩔수가 없다. 특히 이번 여기 한국시인특집에 실린 시인님들의 략력을 잠간 살펴보니 모두가 하나같이 대학교수님, 시인님, 평론가들, 많이 배워야겠고 열심히 더욱 노력해야 할것 같다.   언젠가 연변의 시우 리성철시인님이 우편으로 보내온 (당대 조선족 명시 작품집)을 읽고 허구프게 웃었던 기억이 또 난다. 읽어도 그만, 안 읽어도 그만, 북데기속에서 낟알을 줏듯이 읽어야 하는 그 번거로움, 아예 몰라버려도 그만인 시들이 대부분, 언제부터 우리 주변에 그렇게도 저명한 시인들이 많아졌는지 ? 아무리 생각해봐도 기억에조차 아리숭할 정도ㅡ 장엄한 력사 앞에 언젠가면 너도 나도 스스로 부끄러워 저절로 깊숙히 고개 숙일 그런 날들이 그리 멀지도 않으리라 믿는다. 필자가 보건대 중국 조선족 시인들의 작품 중 명작은 아직 없다. 그래 김소월의 (진달래), (초혼),김영랑의 (모란이 피기까지), 김춘수의 (꽃), 김수영의 (풀)과 같은 작품들이 우리들에게 정말 있단 말인가? 백년이 흘러도 피와 땀의 향기로 살갗이 아닌 령혼에 와닿는 작품이 정말 우리들에게 있단 말인가?    매번 강효삼선배과 전화통화 할때마다 (난 죽기전에 꼭 한수의 시, 제발 딱 한 구절만이라도 제대로 된 시를 쓰고싶다...)는 그의 말씀이 항상 너무나도 인상적이였던것 같다. 선배로서의 충언같은 그 허심함에 또한 고개가 숙여지질 않을수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하여 여기에 실린 한국인특집중의 시가 명작이라는것은 절대 아니다. 허나 좋은 작품들인것은 틀림 없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지지자 오야 知知者悟也) 남을 제대로 알아야 승산도 큰 법, 멀지 않는 앞날, 여생에 제대로 된 조선족 중견시인님의 명작을 읽을수 있는 기회가 있기를 간절히 다시 한번 기도해본다. 2016년5월9일 심양에서
14    송구하고 영신하며 부끄럼없는 삶을 사는 시인 댓글:  조회:1839  추천:2  2016-01-22
송구하고 영신하며   외 2수   (할빈) 한영남   질항아리같이 잘 다듬어진 앙증맞은 슬픔을 선사해주고 너는 세월의 어디쯤에서 행복을 엿처럼 빨고 있니   소식 없어 주소를 몰라버리듯이 내 기억의 빨래줄에서 색바랜 친구야   오늘만큼은 너를 떠올려 어깨 나란히 오이라도 아삭이고 싶구나   우리를 위한 단 한줄의 위안이여 다급해진 요즘을 아닌보살하고 살아가는 우리   행여 길을 가다가 만나도 모르는 사람들처럼 스치지는 말자   우리의 진실을 질투하는자를 우리의 터전에서 추방하여 우리 서로 다가서서 서로의 눈동자속에서 진심을 심어보자   아아 저무는 통증이여 아아 다가오는 황홀함이여   상처도 비명을 지른다면   사람은 누구나 상처가 있지   크든 작든 깊든 옅든 많든 적든   상처들을 가지고 있지   상처들은 그것이 크든 작든 깊든 옅든 많든 적든   몸밖 또는 몸속에서 일제히 입을 다물고   아픔만 전달해주지   진저리치도록 아픈 감각이   신경줄 타고 흘러   마침내 전달받은 대뇌가 분노하게 되지   만일 우리의 상처들이   어느 날 그 상처들이 일제히 비명을 지른다면   상처의 비명소리는 얼마나 클가   찢고 발기고 찟찧이고 비틀며   생겨난 상처들이 그 괜찮게깊은 상처들이   일제히 비명을 지름다면   내 심장이 찢어지는 소리만큼 클거야   지금 그대를 보낸 내 심장이 찢어지며   내는 소리만큼   기쎄 길더라   기쎄 길더라 내사 아니   걍 남들 하는 소리 들었지 지난 바람 사납던 날 밤 새벽까지   그 집에서 울리던 소리가   방아찧는 소리엿다구   내사 아니   걍 남들 그러니 그런갑다 하는거지   아니라구   아닐수도 있지무   하긴 애들 있는데 단칸방에서   방아 어떻게 찧니   큰일날 소리지   해괴망측한 소리두 많지   내사 아니 걍 남들 그러니 그런갑다 했지   나두 믿지 않지   내가 그걸 왜 믿니   진짜라구   정말 그랬다구   애들 친척집 보내고 그랬다구   기쎄 내 말이 기쎄 다들 길더라   내 길줄 알앗다   와늘 띤따라 쿤바빠 와장창이구나   옆집 철수 못잤겠다   철수 부실한게   각시두 한국 가구 보토린게   그 소리 듣구 가만잇엇다더니   그랬겠지   나같았음 없다   그저 왕바단이다   티비소리였다구   그게 야동 보는 소리였다구   기쎄 내사 모르지   다들 길더라   그땜에 공안에서두 왔댔다구   기쎄 길더라   기쎄 길더라니까 송구하고 영신하며 부끄럼 없는 삶을 사는 시인 문학비평 허인       다산작가 한영남시인의 근작시 (송구하고 영신하며), (상처도 비명을 지른다면),, (기쎄 길더라)는 인성을 심플하게 통제 가능하게끔 자기패러디적인 감오를 심상(心相)으로 업그레이드시켰으며 또한 마인드 컨트롤로 전반 시적인 흐름과 그 의식이 맑은 하늘아래 하얀 돌다리아래를 조리졸졸 흘러가는 정갈한 시내물과도 같이 오직 우리 민족만의 그 독특한 가락과 정서들을 억수로 기 막히고 순수하게 한폭의 그림으로 완성해놓고서 질박한 삶의 근원을 예리하게 송두리째 파헤쳐놓고 관용(宽容)으로 조심스레 고스란히 가슴에 껴안은듯 하여 흥분으로 설레이는 우리들의 삶의 바다가 한눈에 훤히 너무나도 잘 보이는듯 싶다. 어쩌면 꿈속에서라도 찾고픈 몽경(梦境)같은 삶의 원천 인 그 바다는 또한 자연순산이라는 우리들의 회심의 미소와 함께 가끔 회색구름도 보이고 또한 흰 갈매기도 불쑥 보이며 조심스레 옷깃을 여미는 바람과 우중충한 산그림자와 자연이 그대로 선명하게 보이는듯 하여 더욱 심오한 각광을 받는듯 하다.        어쩌면 적막강산에서 홀로 똑딱거리던 발걸음소리를 문득 멈추고 발뒤축까지 죽여가며 침묵으로 나눌수 있는 대화, 력설보다는 독백을 위주로 줄곧 일관되게 삶이라는 넓고도 좁은 그 울타리에서 예감과 직감적으로 모드것을 느끼게 할수있는 세월의 그윽한 그 향기는 봉선화나 라이락처럼 담담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생활의 고민과 고초에서 오는 그 비릿함에 조미료를 살짝 섞어놓아 인지상정(人之常情)인 희노애락을 쓰고 달고 맵고 신맛이 그대로 혀끝에 감돌아지도록 사골처럼 고스란히 잘 우려낸듯 하다.        /질항아리같이 /잘 다듬어진/앙증맞은 슬픔을/선사해주고/너는 세월의/어디쯤에서/행복을 엿처럼/빨고 있니/에서 질항아리, 앙증맞은 슬픔, 세월의 어디서쯤에서ㅡ행복을 엿가락처럼ㅡ이 표현은 지루하고 구질구질한 삶의 한 단락이 한꺼번에 달콤함에 초점이 맞춰지면서 / 소식 없어 주소를/몰라버리듯이/내 기억의 빨래줄에서/색바랜 친구야/를 파도가 송사리를 뭍에 떠밀어 올리듯이 친근하고 익숙하게 견인해내여 전반 시적 흐름을 두 눈을 아예 감고서도 절대적인 감각만으로도 피부에까지 절실히 느낄수 있도록이 설정이 된듯 하며 /오이라도/아삭이고 싶구나/단 한줄의 위안/다급해진 요즘을/아닌보살하고/살아가는 우리/ 그리고 질투, 터전, 추방, 눈동자 진심이라는 익숙하고도 친근한 낱말들을 /저무는 통증/다가오는 황홀함/으로 송구영신을 깁스하여 또 한해의 번거로움과 싱그러운 감촉을 단 한마디 시원섭섭으로 재치있게 속사를 마무리한듯 하다         한영남시인의 근작시에서도 언어 마술 효과에 대한 실험을 꾸준히 이어오고 있는듯 싶다   사람은 누구나 상처가 있지 크든 작든 깊든 옅든 많든 적든       (상처가 비명소리를 낸다면)에서 독자들이 눈으로 귀로 피부로 보고 듣고 느낄수 있는것은 아마도 감각적인 경험에 의한 소리의 균형이며 그 조합인듯 싶다. 그렇기때문에/크든 작든 깊든 옅든/많든 적든/이라는 아주 섬세하고 조심스러울만치 예감, 직감, 촉감, 감각에 의한 그 심령의 고요한 목소리는 어쩌면 잠시 삶의 모종 현장에서 산뜻하게 징소리, 꽹과리, 새납소리로 성큼 바람에 란무하는것이 아니라 허심하고 절주있게 리듬이 류창해져가는 익숙한 삶의 장단에 나란히 줄을 맞춰가면서 흥겨운 한 마당의 농악무를 질서정연하게 연출시키는듯 하며 어쩌면 깊고 큰 상처와 비명소리일지도 모를 그 모든것을 빨갛고 파랗고 노랗고 하얀 종이로 알락달락 포장하여 누구에게나 귀중한 선물로 될수 있게끔 품위를 한 단단계 더 높은 차원으로 끌어 올린듯 싶다.     이렇듯 각본이 잘 짜여지고 사유가 잘 다듬어진 아픔이고 상처다보니 /몸밖 또는 몸속에서/일제히 입을 다물고/아픔만 전달해주지/ 또한 혼자 슬그머니 /진저리치도록 아픈/ 감각이/신경줄 타고 흘러/마침내 전달받은/대뇌가 분노하게 /되며 그렇게 아픔보다 치유를 목적으로 한 상처들이 내지르는 비명소리는/찢고 발기고 짓찧이고/비틀며/내 심장이 찢어지는 소리만큼 클거야/와 비교를 적극적으로 시작해가면서 결국 제일 마지막 련에서는/지금 그대를 보낸 내/심장이 찢어지며/내는 소리만큼/이라는 독백과 력설의 색채뿐만이 아니라 본능적이고 적극적인 진지한 삶의 태도로 인고와 인내의 번거로운 련습끝에 마침내 상처의 구멍들을 한뜸 두뜸 바늘로 기워 치유의 효과에 발렌스를 맞춰가면서 투철한 인생감오에 경험이라는 성숙되고 한결 더 승화된 령혼의 울부짖음을 편승시켜 세상에서 제일 고요하면서도 우렁찬 목소리는 오직 침묵으로 일깨워주는 시와 자연, 그리고 인간의 만남임을 차원높은 각오로 독자들을 일깨워주려 한것 같다       (기쎄 길더라)의 경우 함경도, 경상도, 평안도식의 사투리와 지방방언들이 순차적으로 라렬되여 있어 익숙하면서도 생소하고 거친듯하면서도 세련미가 돋보여 혼자말과도 같은 중얼거림을 랩을 듣듯이 록음기의 재생버튼을 여러차례 눌러 놓은듯 하여 점차 귓가에 쟁쟁해지는듯한 그런 특징이 있는것 같다. (기쎄 ),(내사), (걍), (와늘)은 아직도 시골에서는 어렵잖게 들을수 있는 지방방언들이여서 읽을수록 중독성이 강하여 반갑기도 하며 (띤따라 쿤바빠 와장창이구나)는 오늘날의 현대음조에 각성이 타령을 접목시킨듯하여 류행효과를 띌것도 같다는 예감이 들기도 한다. 그외 누구나 살아가면서 한번쯤은 내뱉었을직한 부실한게와 우습광스레 직역된 (왕바단)이라는 단어는 묘하게 서로 눈맞춤을 하여 그 희곡적인 효과가 한층 더 가미되는듯 싶다.        이상에서 살펴본 한영남시인의 근작시 3수에서는 고정된 삶의 틀에 랭보의 옷을 입히고 말라르메의 장갑을 끼워 언어 마술의 매력을 나름대로 구사하고 재현해보려고 하는 각근한 노력이 엿보이기도 한다. 미숙한 점이라면 독백과 력설이 주류이다보니 강조의 뜻으로 반복된 구절이 있어 잘된 점과 함께 조금 미흡한 점도 존재하는듯 하다. 현대사상으로 씌여진 시들을 모두 현대시라고 불러도 무탈할것 같다. 한영남시인의 변화는 그 조짐이 날로 한박자 빠르게 진행이 되는듯 하여 더욱 매력적이라고 생각한다. 끝으로 송구영신하며 기쎄 래년에는 상처가 내는 비명소리보다 더욱 우렁찬 웃음소리가 신문, 잡지에 따뜻한 묵향으로 오래 남기를 진심으로 기대해본다 2014년12월27일 심양에서
13    영원을 기약하는 삶의 조용한 발자국소리 댓글:  조회:2204  추천:6  2015-11-09
영원을 기약하는 삶의 조용한 발자국소리    한영남근작시 5수를 평함          [평론] 허인      영원이라는 말은 아마도 불교에서 비롯된줄로 알고 있다. 기세경[起世经]이나 구사경[具舍经], 십륜금강[十轮金刚]을 살펴보면 한겁(一劫)은 대략 12억79840000여년정도,그러니깐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 즉 하나의 대천세계에는 1000개의 소천세계가 들어 있으니 어찌보면 영원은 끝이 없을듯도 하다. 하지만 짧다면 손가락으로 먼지를 훌쩍 털어내듯이《弹指一挥间》 결국 하나의 찰나(刹那)에 지나지 않는 셈이기도 하다. 시인이 시인으로서 자신만의 절제되고 함축된 시어들을 세상에 내여놓고 오래도록 남으려 하는것은 무엇때문일가?   그것은 어쩌면 시인 그 자신의것만이 아닌 이 세상의 모든 령혼의 스펙터클(壮观)한 울부짖음, 즉 자연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리고 천인합일
사상과 령혼의 화려한 불꽃놀이, 그리고 점차 무르익어가는 김철호주의                                      평론 허인            머리글      시가 아프다. 우리 시대의 시가 이래 저래 여러모로 너무나도 아프다. 그런데 이러한 병페적인 시의 치유를 목적으로 근근히 짧디짧은 몇년사이 파격적인 화려한 변신을 꿈꿔왔고 또한 근래에 보기 드문 성과를 이룩한 시인이 있으니 그가 바로 작년 이맘때쯤 장백산잡지사에 포스트모더니즘시 7수를 발표한적이 있고 올해 200만 중국조선족을 대표하여 호미곶문학상에서 본상을 수상한 김철호시인님이시다. 필자가 보건대 김철호시인만큼 적극적으로 파격적인 변화를 시도해왔고 또한 그 거창한 행로에 걸맞게 주렁주렁한 성과를 이룩한 시인은 극히 드문줄로 안다. 아니 미안하지만 대낮에 등불을 켜둘고 찾아헤매도 결코 몇이 안되는줄로 알고 있다. 시에서의 화려한 변신이나 파격적인 변화를 두고서 평론가들은 한단계 더 높여 도약, 혹은 비약이 크다거나 의경【意境】이 새롭다고 표현한다. 필자가 보건대 시의 핵심은 이제 더는 조촐한 이미지와 이미지즘의 강박적인 조합, 구조주의적인 서두, 발전, 내용, 결과 그 따분한 의경속에 있는것이 아니라 폭넓게 령혼과 사상, 더 나아가서는 확고한 리념과 개인주의【主义】적인 품격과 풍격, 관용과 포용에 있는듯 하다。례를 들면 시체에 아무리 좋은 수의를 입혀봐야 결국 시체이듯이 시에서의 시인의 언행은 곧바로 그 시인의 풍격이 되기도 한다. 알기 쉽게 바꾸어 말하자면 아무리 겉이 화려하더라도 곃국 사상이 없는 시들은 시체에 불과하다는 그런 말이기도 한다. 며칠전 남방에 출장중, 리상학주필님의 전화를 받고서 조금도 주저없이 청탁을 흔쾌히 받아드릴수 있었던 용기는 아무래도 김철호시인님은 평소 필자가 좋아하고 내심 나름대로 무척 따르고싶었던 그런 시인님이였기때문이 아닐가 생각해본다. 그럼 여기서 김철호시인님의 주옥같은 근작시 8수를 조심스레 살펴보며 가도록 하자   포스트모더니스트의 글쓰기에 나타나는 창발적 경향의 한 특징   고궁   해시계의 음특한 그림자가 몸을 뻗어 담장에 기여오른다 굵고 주름 깊은 고목이 나이테에 묶여 숨을 헐떡인다 개미떼들이 백두봉을 지고왔다 개미떼들이 고비사막 날라왔다 붉은 물결 붉은 구호 발자국에 고인 붉은 구토물의 납함 천년을 살아 피를 먹은 거인 쿵쿵쿵 쿵쿵쿵 걷는다   광장엔 황금의 금자탑이 있다   걷는다 쿵쿵쿵 쿵쿵쿵 만년후에도  살질 거인 …  전문이다    지금까지 우리의 시들은 단일성, 동일성의 원리에만 의존하여 구성되여 왔다. 현재의 시들도 대부분이 그러하다.이를테면 꽃이면 꽃, 들이면 들, 별이면 별 ㅡ 더 상세히 례를 들면 대상, 주제, 내용, 정서, 기타 등등 모두가 동일성 원리에 의거하여 발상되여 왔었고 효과면에서도 지나치게 단일성을 강조해온것이 사실이다. 헌데 여기서 필자는 포스트모더니스트의 글쓰기에 나타나는 창발적 경향의 한 특징과 불쑥 맞닥뜨리게 되며 킨넬이 말했듯이 와 마찬가지로 심상[心相]시에서의 의식과 무의식을 훌쩍 뛰여넘어 또한 인간적인것을 굳이 무나뜨리려는것이 아니라 너무나도 자연스레 자연과 결부시켜 새롭게 령혼과 사상을 탄생시키려 하는 하나의 개인주의 표현방식을 즐감하게 된다. /해시계의 음특한 그림자가/몸을 뻗어 담장에 기여오른다/에서 쉽게 살펴볼수 있는것이 곧바로 한점의 오차도 용허치 않는 해시계의 작용이며 시제가 이고보니 눈앞에 자연스레 펼쳐지는 첫번째 그림이 곧바로 , 높다란 담장을 슬금슬금 기여오르려고 아득바득 몸부림치는 아직은 가물가물한 어느 조그마한 그늘의 작은 모습이다. 그 그늘이 있었기에 우리들 눈앞에 펼쳐진 고궁의 모습은 더욱 고색찬연한것이 아닐가도 싶다 . 다음 / 굵고 주름 깊은 고목이 / 나이테에 묶여 숨을 헐떡인다 /에서 어느사이 에서 으로 모습이 되바뀌운 고궁의 모습은 이제 아름찬 나이테에 저절로 숨이 차 헐떡이기도 한다. 허나 그 모습은 비참한 결과가 아니라 어딘가 긍지에 찬 모습이기도 하다 . 이렇듯 거창하고 주렁진 성과들은 어디에서 오게 됐을가? 제3절 /개미떼들이 백두봉을 지고왔다 /개미떼들이 고비사막 날라왔다/에서와 제 4절/ 붉은 물결 /붉은 구호/에서 눈여겨 살펴볼수 있다싶이 이 세상 한낱 미물인 개미떼들마저 어기영차 어김없이 이곳으로 지고온 그 백두봉과 그 고비사막에서는 현란하게 눈이 부신 그 력사의 그 한 장면을 백문불여일견이라고 피부로 직접 부딪치고 엿볼수 있도록 시인은 독자 배려적으로 조심스레 설정해놓으듯 싶다. 이러한 배려심이 있었기에 /발자국에 고인 붉은 구토물의 납함/천년을 살아 피를 먹은 거인/에서 발자국에 고인 력사는 구토물마저 결국 붉은색일수밖에 없으며 또한 아우성도 아닌 이 세상의 납함으로써 그 영향력을 더욱 뚜럿하게 상징시킨듯 싶다. 그렇게 오랜 세월 밝고 조금 어눌한 그늘속에서 싱싱한 피를 꿀꺽꿀꺽 삼켜가며 배불리 먹고 천년을 살아온 이였기에 / 쿵쿵쿵 / 쿵쿵쿵 / 걷는다 / 광장엔 황금의 금자탑이 있다 / 걷는다 / 쿵쿵쿵 / 쿵쿵쿵 / 만년후에도 / 살질 거인/…/에서 다시금 조심스레 살펴 볼수있는것은 황금금자탑도 무색할 / 만년후에도 / 살질 거인/…/은 여기서 다선을 목적으로 단순한 한두개의 이미지나 이미지즘의 라렬이 아니라 특정된 한 사물에 공간과 시공【时空】을 아예 훌쩍 뛰여넘으려는 풍격, 품격, 인격, 그리고 사상, 력사, 언행, 령혼을 시인의 재치있는 솜씨로 아낌없이 투영시켜놓은듯 싶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 시는 사상과 령혼의 화려한 불꽃놀이, 그리고 점차 무르익어가는 김철호주의가 뚜렷이 한눈에 잘 엿보여 필자로서는 마치 한편의 방대한 시리즈를 읽는듯한 그러한 느낌에 저도몰래 감탄을 련발하게 된다. 포스트모던 시가운데서 가장 많은 논의가 이루어져 왔던것이 곧바로 고백시이다. 뢰트키, 로월, 플라스, 섹스톤, 베리만 등이 모더니즘의 전통을 무너뜨렸던것은 브레슬린이 지적한대로 고 생각되기도 하다, 이 시를 알아보기 쉽게 옮겨놓으면 다음과 같다. /이제는 해질무렵/천년의 고궁에서/느티나무 한그루/닭살같은 나이테 세여가며/ 가쁜 숨 거창하게 몰아쉰다/바람이 어제날 전설을 시로 읊는다/구름이 경이로운 력사를 념불로 중얼중얼 외운다/구토물의 납함속에 어지럽게 깨여나는 고요한 발자국소리/천년의 거인이 쿵쿵쿵 걷는다/쿵쿵쿵 심장이 다시 힘있게 뛴다/광장에는 항금의 금자탑이 아직 우뚝 서있다/젊고 싱싱한 피를 동이채로 떠 마시고/이제 만년을 더욱 거뜬히 서있을/동방의 거인이여/ 김철호시인의 시는 자기 패러디적이고 자기 파괴적이라는 점에서 상징주의 시와는 확연히 중요한 차이점을 보이기도 한다. 그럼 아래에서 감성과 리성,의식과 무의식중의 발로에서 김철호시인은  어느곳에 더욱 비중을 두었는지 우리 다 함께 , , 를 조심스레 살펴보면서 가도록 하자   바다   묽은 재채기가 슬프다 말라버린 숨 하늘에 어둡고 덮쳐오는 고함 검푸르다 길고 긴 그림자 물에 꽂혀서 뿔뿔히 도망치는 비늘 꿰인다 일몰은 죽음이 아니다 서서히 오는 탄생은 어둠 새로운 생명이 숨어있다 설(雪) ㅡ시라는 괴물   은혜간은 초설(初雪) 뼈다귀가 생기고 살이 붙고 피가 돌고 하더니   나무가지 꺾는다 길을 막는다 지붕을 허문다 바람과 동무해 하늘을 끌어내린다   입김으로 씻은 창안의 순한 눈(眼)들 폭력에 놀라 잃은 평화   일기   숨소리는 속으로 흐른다 생명은 공간에서 만나 서로를 끌어안는다   불타는 어제가 되돌아 온대도 력사는 다시 쓸수가 없다네 승자가 없는 영광 부끄럽다네 맹인가수가 노래부른다   한자깊이의 땅속에서 녹쓴 철갑모들이 해볕보기 싫다면서 삼질을 멈추라고 눈짓한다        이 세수 시의 공통점은 시인자체의 적극적인 참여의식이 아니라 객관적이고 더욱 세심한 관찰을 통하여 조준이 된 랭철한 사유끝에 명중이 된 가장 인간적인 즉 인격적인 근로한 사상을 부여시켜 그 공명감이 더욱 큰듯싶다. 의 경우 제일 마지막 세소절 /일몰은 죽음이 아니다/서서히 오는 탄생은 어둠/새로운 생명이 숨어있다/에서 시인은 어쩌면 예언에 가까운 미래 지향적이고 긍정적인 인간의 지혜로운 자세로 포용의 자세를 멋진 모습으로  보여주는가 하면 설(雪)의 경우 첫련 /은혜같은 초설(初雪)/뼈다귀가 생기고/살이 붙고/피가 돌고/하더니/에서도 슬그머니 인격화를 완성시켜놓았으며 의 경우 제일 마지막 련에서도/한자깊이의 땅속에서/녹쓴 철갑모들이/해볕보기 싫다면서/삼질을 멈추라고 눈짓한다/로 인간대 인간, 인격대 인격, 사상으로 소통을 시도하려고 하는 그러한 지혜가 엿보이기도 한다. 이 세수의 시 한수 한수가 모두 걸작이며 또한 이 세상 그 어디에 내놓아도 결코 한점의 부끄럼조차 없을 훌륭한 우수작풀임은 틀림없을듯 하다.    삶 자체에 대한 우울한 반항과 기술복제적 인간에 대한 자각      이번에 발표된 김철호시인의 대부분 시들은 시에서의 새로운 문법을 나침판처럼 뚜렷하게 보여주는듯 싶다. 여기서 필자는 간단히 문법이라고는 했지만 그것은 결코 단순히 문법의 범주로만 끝나는것이 결코 아니다. 즉 리성보다는 본능, 질서보다는 충동, 의식보다는 무의식의 찬연한 그 세계, 이제까지 우리가 보아왔던 전통적인 시문법을 사정없이 파괴함으로써 시인이 노리는것은 과연 무엇일가? 쉽게 말하면 시인은 시의 화자가  핏줄에 와닿는 초감각적인 리성적인 세계를 의식과 무의식적으로 피와 살, 령혼을 불어넣고 지혜롭게 노래하고 있는듯 싶다. 그러한 시니피앙들은 읽는이들 마음속의 커다란 흔들림과 함께 어쩌면 뼈속까지 오싹오싹해날 정도의 크나 큰 공명감과 함께 공감속의 그 짜릿짜릿한 전률들을 독자들에게 핫이슈로 선물하고 있는듯 싶다. 그럼 시니피앙이란 무엇인가? 소쉬르의 견해에 따르면 그것은 언어기호를 형성하는 또 하나의 요소이다. 즉 흔히 말하는 소리심상이나 기표ㅡ시니피앙과 시니피에[ 개념,혹은 기의]는 마치 동전의 앞뒤 관계처럼 짝을 이루면서 존재하는것이라고 여기에서 말을 해야 할것 같다.   설레임1   18층 빌딩에서 커다란 새 한마리가 뛰여내린다 콩크르트바닥과 만나춤추는 피아노파편들   명예란 공중루각이라고 소리친다   자판기 우에서 혈흔들이 날뛴다 불바람이 어슬렁거린다 스마폰이 사람들 얼굴을 뭉청뭉청 뜯어먹는다 머리없는 그림자들이 활처럼 휘여졌다   검은 새, 흰새들이 서로를 찾아 부르짖고   설레임 2   산은 파도를 멈추었다 산은 출렁이기를 그만두었다   황혼이 아닌데 벌써 어둠이 태머리를 땋고 있었다   찢어진 기와 물구나무선 미소 만족한 빛 도망친 숨…   산위에 산이요 산밑에 산이다 야호   백두의 큰 잔으로 동해물 푹 떠 음부에 뿌렸다   먼지 낀 먼지가 빛속으로 사라지다 우주를 삼킨 우주가 점속으로 들어가다      동서양 고금을 막론하고 어느 조대, 어느 시대에서나ㅡ 시인의 사상의식은 항상 미래 지향적이였으며 또한 드레시(漂亮, 幽雅)하게 자신만의 독특한 시어들을 창출,  랜덤하고도 더욱 디테일하게 드라이브코스(自驾游线路)를 스스로 구축해왔으며 더우기 새로운 언어조합속에서의 자률, 또한 지극히 러브 시(示好)한 이률배반속에서도 마스터피스(杰作)와 함께 항상 개혁이 동일시되여 왔었다는것을 누구나 쉽게 알수가 있다. 그리하여 그러한 미래 지향적인 행보는 오늘도 조심스러울수밖에 없으며 또한 과감한 개혁의 리론과 그 기능을 불러오는 중요한 단서가 곧바로 시인의 더없이 정확한 의사전달로써 길게 설명자면 멘트(话语, 台词)가 필요없는 기획적인 자아도전과 저돌적인 돌파, 즉 새로운 시어창출과 함께 변화한 자신의 모습을 여러모로 독자들앞에서 검증 받아야 하는 그런 데스트가 아닐가 필자 나름대로 조심스럽게 생각해본다. 어쩌면 련작시의 서두이고 시작일지도 모르는  를 읽고나면 하이퍼시의 방향인 현실과 초월을 불쑥 머리속에 떠올리게 되며 데리다의 해체개념가운데서 는 그 말이 떠오르기도 한다. 에서 제 1련 /18층 빌딩에서/커다란 새 한마리가 뛰여내린다/콩크르트바닥과 만나 춤추는 피아노파편들/중에서 와 은 언어기호학적인 척도에서 살펴보면 마음의 흔적들에 불과하며 그러하기때문에 이라는 특정된 장소와 만났을때 자연스럽게 인격화를 완성하여 제2 단독련에서 로 그제야 사상을 납함할수 있었던것 같다. 다음 제 3련에서 / 자판기 우에서 혈흔들이 날뛴다 / 불바람이 어슬렁거린다 / 스마폰이 사람들 얼굴을 / 뭉청뭉청 뜯어먹는다 / 머리없는 그림자들이 활처럼 휘여졌다/에서 볼수 있는것은 그 어떤 외계인이나 괴물의 모습이 아니라 곧바로 과거와 현실을 외계인이나 괴물처럼 살아가는 인간들의 실제 모습들이며 결국 삶의 울타리는 너무 좁아 제일 마지막 련에서 /검은 새, 흰새들이 서로를 찾아 부르짖고/로 삶의 설레임은 부딪치고 부대끼며 가끔 아우성치더라도 흩어지면 죽고 모여야만 살수 있음을 설파한듯 하다.  역시 같은 도리로써 여기서 길게 설명하지 않으려 한다. 재밌는것은 /찢어진 기와/역시 /물구나무선 미소/로 인격화를 완성해가면서 진보적인 사상 즉 /만족한 빛/도망친 숨…/으로부터 민족적인 색채가 다분한 /백두의 큰 잔으로 동해물 푹 떠 음부/에 뿌렸다/를 견인해 내였으며 /먼지 낀 먼지가 빛속으로 사라지다/우주를 삼킨 우주가 점속으로 들어가다/로 세상사는 새옹지마와 같은것이며 그처럼 호한한 우주마저도 작다면 결국 한개의 점에 불과한것이다고 시인의 높은 경지를 종교도 철학도 아닌 사상과 령혼으로 지혜롭게 드러낸듯 하다. 아직 필자의 좁은 소견일지도 모르겠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을 정석으로, 또는 기초로 하여 단단히 밟고 더욱 높이 올라서려고 하는 기획적인 발전이지 결코 지극히 이률배반적이지는 않다는것이다. 그럼 우리 함께 김철호시인은 링크와 네트워크구축으로 어떻게 이미지즘을 완성해 가고 있는가를 더 살펴보기로 하자   뇌출혈 1   기적소리 들린다 환승 탈선한 기차 시골에서 불던 바람이 도시로 왔다 눈빛이 깊다 투명한 사유는 더 려과될것 없다 파도의 섬모 두꺼운 기억 길 잃은 날개 각도가 삐뚤어진 명 새로운 바다 ㅡ바람아 미안하다 먼 곳에서 걸어오는 목소리 시간의 멀미가 멈추려나봐 탄생은 아픈것이다   뇌출혈 2   이 한수의 시를 위해 태풍은 먼 바다서 찾아왔다   살점을 뜯는 바람   밤바다는 더욱 크게 운다 돌아갈 길 필요없다고 한다 암수들이 부둥켜 안는다   콩크리트바닥에서 피아노가 탄생했다   피아니스트는 칠십년 묵은 할망구다 흰 머리카락들이 강선이 되여 땡땡 소리친다 음악이 나 봐라 얼굴 내밀었다가 너 죽는다 주먹질이다   석간신문이 벽돌장이 되여 웃는 얼굴에 가 박힌다   독자는 한명도 없다      의 경우 /기적소리 들린다/는 환각장애인들의 병적인 신호음을 간결함의 극치ㅡ즉 기적소리로 표현하여 그 묘미를 더해주고 있으며 /환승/탈선한 기차/시골에서 불던 바람이 도시로 왔다/로 더 이상 안전지대가 없음을 하이브리드로 집결시킨듯 하다. /눈빛이 깊다/투명한 사유는 더 려과될것 없다/에서 살펴볼수 있는것은 삶의 우수(忧愁)이며 그 다음 /파도의 섬모/두꺼운 기억…/탄생은 아픈것이다/등등은 여기서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독자들이 리해하는데 별다른 장애가 없을듯 하다.역시 기적소리가 한수의 시로 바뀌였을뿐 의식과 무의식만이 아닌 감각, 초감각적으로 령혼이 부르는대로 따라 읽노라면 리해하는데 별다른 장애가 없을줄로 알고 있다. 재밌는것은 한수의 시로부터 시작하여 바람, 바다, 암수 , 콩크리트, 피아노, 할망구, /흰 머리카락들이 강선이 되여/땡땡 소리친다/음악이 나 봐라 얼굴 내밀었다가/너 죽는다 주먹질이다/석간신문이 벽돌장이 되여/웃는 얼굴에 가 박힌다/는 기 막힌 표현들이며 결구에서 /독자는 한명도 없다/역시 시제 뇌출혈과 미묘한 입맞춤을 하면서 싱싱한 사람이라면 마주서기가 저도몰래 아연해도록 머쓱하게 하는듯 싶다. 시행은 박자와 강약의 음절로 이루어지는것이 아니라 시인의 숨결로 이루어진다. 즉 주관과 객관의 구별이나 내면세계와 외면세계의 구분이 없는 세계에서 약동하는 생명의 이미지를 찾아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마무리하면서      이상으로 살펴본 김철호시인님의 근작시 8수에서는 포스트모더니스트다운 시인의 더욱 적극적이고 더욱 확고해진 창작자세와 점점히 맑은 령혼속에서 사상으로 무르익어가는 시인의 새로운 풍격, 품격, 그리고 아주 깔끔하게 새롭게 완성이 된 김철호주의가 피와 살, 얼과 넋이 하아얀 뼈짬으로 시퍼런 소금처럼 뚜렷이 엿보여 김시인의 초기의 정지용문학상 당선작 에서 볼수 있었던 정확한 목표조차 없이 갈팡질팡하였던 그런 분주하고 산만한 정서를 말끔히 떨쳐내여 읽는이들로 하여금 더욱 감탄을 련발케 하는듯 싶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을 부정하는것도, 그렇다고 계승하는것도 아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을 수용하면서도 동시에 비판한다는 모순적인 특성을 보여준다. 끝으로 김철호시인님이 새로운 한해 더욱 큰 정진이 있으시길 두손 모아 진심으로 기대해본다       심양에서 2015년7월24일
11    우리는 무엇을 잊고 무엇을 잃어가고 있는가? 댓글:  조회:2645  추천:12  2015-08-27
시초 압록강반에서    량안 풍경   압록강은 두 기슭이 서로 마주보는 풍경 이쪽은 저쪽 저쪽은 이쪽 강줄기따라 풍경들이 줄을 이었다. 하나의 젖줄물고 태여난 그 날부터 한 강물 마시며 함께 커온  풍경 때론 세월쫓아  물결은 높고 낮지만 같은 강 사이둔 두 풍경 서로가 외면한적은 없다 외면할래야 외면할수 없는 풍경 좋든 궂든 화려하든 초라하든 2위동체가 되여 지금까지 굽이굽이 압록강을 누벼왔다 허지만 새월따라 그 모습 너무 달리하면 강의 무게조차 어느 한쪽으로 푹 기을어질가 두렵구나   외곬 “진달래”   압록강 철교 아래 펼쳐진 유보도 심심찮게 볼수 있는 우리 민족 치마저고리 그 옷 몸에 두르고 왁자지끌 떠들며 사진 찍는 모습 . 누구는 난생 처음 입어보는지 그리 좋아 깔갈 누가 내놓은 아이디어인가? 압록강에오면 치마저고리가 인기끌것을 강건너는 바로 치마저고리 고향이여서 이렇게 하면 상대방의 호감도 이목도 끌수있고 압록강을 다녀간 좋은 기념이 되겠다. 하여 내 흐믓한 기분으로 늘어가는 “우리민족”녀인들을 바라보다가 불쑥 강건너를 눈여겨보니  그곳은 아니구나 남에게만 즐거움 주자고 곱게만든 치마저고리 아니거늘 이런 날은 다투듯 강 이쪽저쪽 모두가 진달래꽃밭이였으면 압록강 물새들   이른 아침 압록강반에 이르니 때마침 하야니 물새떼들 내 서 있는 기슭에 내려와 앉는다 이쪽의 물새들 벌써 저쪽에 날아갔다 돌아 오는것이냐? 저쪽의 물새들이 이쪽으로 훨훨 날아온것이냐? 주둥이 길죽하고 점잖은 압록강의 물새들은 이쪽 저쪽 와 살아도 자유롭다 하고싶은 말 또한 자유로워 저쪽에 가서는 여기 말 하고 이곳에 와서는  저쪽 말 하고 오늘도 우죽부죽 어깨 드러낸 바위우에 비릿한 입술 쓱쓱 닦으며 저희들끼리 주고 받는 말 내 비록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해도 나는 안다,본대로 들은 대로 너희들이 지금 압록강에서 주고 받는 말엔 조금도 거짓마저 없으리란걸… 강건너 사는 까치둥지   거룡인양 압록강을 날아넘은 대교아래 유보도에서 강물을 거슬려 동쪽으로 걷다보면 아직도 이쪽은 도시인데 저쪽은 어느덧 도시가 끝나고 허허로운 들판 마을 하나가 불쑥 드러난다 동구밖엔  외로운 나무 한 그루 나무우엔 달랑 까치둥지 하나 기쁜소식 전해주는 길조가 사는 나무라서 그대로 두었는가 까치들 몇마리 아침부터 즐거움을 물어나르네 까악깍 ㅡ내 고향 동구밖에서 보던 그 까치들과 다를바없건만 저들은 조선에 살아서 조선의 까치들  그러나 통행증이 필요없어 얼마든지 강을 넘어 올수있지만 말못하는 저들에게도 나라사랑 고향사랑 따로 있는가? 그냥   외로운 저 나무에 기대여 사네 오래인 가난속에서도 “내 나라가 제일좋아” 노래하며 사는 사람들처럼… 아,그래서인가 나에겐 저  까치들 깃을 내린  나무가 외롭게 그어놓은 하나의 감탄부호같다   만나고 싶다   압록강반에 서면 가보고싶다 새처럼 훨훨 날아가서 저 땅에 두 발 내려놓고 누구라도 만나고싶다 한번도 만난적 없지만 켤코 낯설지 않을 더구나 같은 평안도라서 말이 잘 통할 아무리 어쩌구저쩌구해도 저 곳엔 나와 한피 나눈 형제들이 살고있지 않느냐 하여 저 땅은 그 누가 머라해도 우리 외면할수 없는 땅 더구나 혐오하거나 미워해선 안될 사람들 좋은 술과 안주와 선물 가지고 가서 “반갑습니다!”노래와 더불어  “헝님,적은이 ㅡ” 구면처럼 나누며 머지 않아 쨍 ㅡ하고 해뜰날 있으니 ㅡ힘을 내라고 용기를 북돋우라고 시린 마음 작은 위안이고싶다 2013,5 우리는 무엇을 잊고 무엇을 잃어가고 있는가?          강효삼선배님의 압록강시초에 부치는 편지                                                        평론                               허인     인디언 속담에 이런 구절이 있다.. 과불기연(果不其然)이라고 북방시단의 원로시인이며 사실주의 창작거장이신 강효삼선배님이 또 하나의 력작 [시초 압록강반에서]를 완성시켰다. 로요지마력 일구견인심(路遥知马力 日久见人心)ㅡ 먼길을 달리는 말은 마침내 그 힘을 알게 하고 오랜 시간은 사람의 마음을 보여 준다는 뜻이다. 명심보감에 있는 한 구절이다. 왜서인지 이 말이 강효삼선배님에게 꼭 알맞을것만 같아서 여기에 잠시 적어둔다. 한마디로 이번에 보내온 강효삼선배님의 를 한번 또 한번 읽어보면서 필자는 글로벌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지금 깊은 고민을 거듭하지 않을수가 없었다    피 한방울 섞이지 않은 타민족이라면 어쩌면 그냥 무심하게 바라 보았을수도 있었을 브로마이드(放大相片)된 익숙하면서도 생소한 풍경을 스톱모션(静止长镜头)으로 정확하게 잘 보여준 ,그리고 반세기 넘게 끊어진 압록강 철교아래 유보도에서 타민족 녀성들이 우리 민족 녀성들의 전통 의상인 치마저고리를 몸에 살짝 두르고서 깔깔대며 사진을 찍는 모습에서 깊은 회의(回意)를 느끼게 하는 ,이쪽은 중국, 저쪽은 조선ㅡ엄연히 국경으로 나뉘여져 있는 량안을 날마다 거침없이 자유로이 오가는 물새떼들을 바라보면서 보이콧(排斥)이나 브레이크도 없이 단 하나 진실이라는 넓은 아량으로 한치 깊이 가슴속을 다시 한번 새삼스레 재여보게 하는 , 그리고 나라사랑 고향사랑에 강 건너 동구밖에 허름한 둥지를 틀고 길조로 살아가고 있는 강 저쪽 까치들의 까치둥지를 시인의 독특한 시각으로 센스있게 커다란 하나의 감탄부호를 련상시킨 , 그리고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부르면 언제던지 한 걸음에 마주 달려가 서로를 얼싸안고 구수한 함경도 ,평안도 사투리로 끈임없이 동족애를 나누고 싶어지게 하는 에서는 동포애, 민족애, 혈육의 깊은 정을 미움과 대칭되는 사랑으로 더 많이 표현하고 있는듯 싶다 그럼 여기서 우리 다 함께 강효삼선배님의 를 조심스레 살펴보며서 가도록 하자    /압록강은 두 기슭이 서로 마주보는 풍경/이쪽은 저쪽 저쪽은 이쪽/ 강줄기따라 풍경들이 줄 지어 서 있다./에서 우리 모두 쉽게 살펴볼수 있는것은 이 시는 압록강이라는 특정된 무대에서 부킹된 절대적인 령역과 다소 디자인이 된듯한 시인의 간결한 시어들로 여기서 서로가 서로를 만날수 있는 유일한 장소이고자 한것 같다. 그러하기때문에 그 뒤에 너무나도 자연스레 믿고 따를수가 있도록 /하나의 젖줄물고 태여난 그 날부터/한 강물 마시며 함께 커온  풍경/은 또한 경험적이고 존재적이고 어쩌면 독자적인 보편성으로 /때론 세월쫓아 물결은 높고 낮지만 /같은 강 사이둔 두 풍경 서로가 서로를 한번도 외면한적이 없다/외면할래야 외면할수 없는 풍경/좋든 궂든 화려하든 초라하든 2위동체가 되여/ 지금까지 굽이굽이 압록강을 끊임없이 누벼왔다/로 상세하게 획분되면서 모노톤이 아닌 마인드컨트롤로 재테크해가면서 결코 둘로 나눌래야 나뉠수조차 없는 나는 너 ㅡ 너는 나 ㅡ오직 하나임을 특별히 각인시켰고 또한 그 모든 실재를 애써 절멸시켜 가려는것이 아니라 더욱 강력하게 형상의 이미지로 전환시켰으며 /허지만 세월따라 그 모습 너무 달리하면/ 강의 무게조차 어느 한쪽으로 푹 /기을어질가 두렵구나/로 왠지 모를 착잡한 심정으로 허니문(新婚)의 대문을 아쉽게 살짝 닫으면서도 한숨이 새여나갈수 있는 곳을 슬며시 열어놓아 읽는 이들로 하여금 사색의 긴 여운이 오래도록 가슴속에서 맴돌아치게 한다.     일찍 미셜 푸코는 [말과 사물]이라는 저서에서 고 설파한적이 있다.또한 메를로 퐁티도 다음과 같이 상당히 장래성이 있는 전망을 우리들에게 일찍 제시한적이 있다. 이처럼 본격적인 포스트모더니즘이나 모더니즘(현대사상), 다다이즘(허무주의), 모미즘(모친중심주의), 리얼리즘은 어디까지나 단순한 이데올리기식의 자기성찰이나 직감적인 화려한 관찰이 아니라 더욱 객관적인 현실, 즉 도덕적인 삶을 초월하려는 상상력의 넓은 세계에 똑같은 관점을 두기도 하며 또한 자률성의 공통된 세계라는 립장에 와서는 결국 하나의 외적 현실적인 재난들을 정신력으로 극복해보려는 각근한 노력이기도 하다.    꼼꼼히 살펴보면 강효삼선배님의 경우 60-70년대 초기의 시작품들은 제한된 삶을 풀뿌리 인생으로 나름대로 꿋꿋이 살아오면서 탈현실적인 리념속에서 현실을 바탕으로 하여 고독과 삶, 랑만과 슬픔, 즉 흔히 말하는 희로애락을 정석으로 미래 지향적이고 랑만적인 서정,서사를 서술적으로 완성시킨 작품들이 많은듯 하며 80년대 중엽부터 2000년 중엽까지는 민들레, 진달래 등등 서민적이고도 예리한 시인의 독특한 시각으로 인문주의적인 휴머니즘, 즉 동포애, 동족애, 민족애를 집요하게 파헤쳐가면서 이 땅에 감사해 하고 이웃에 감사해 하며 고향에 감사해 하고 꿋꿋이 산재지구 백의동포로 태여난것조차 감사해 하며 향토적이고 철리적인 시들을 많이 완성시켰으며 현재는 년장자다운 너그러움과 그 푸근함으로 포용(包容)과 관용(宽容)의 철학을 체험과 언어연구의 조직자로서 시 창작에 더 많은 정신력을 각인시키고 있는듯 싶다.            더욱 깊이있게 파 헤쳐보면 강효삼선배님은 시 창작에서 많은 경우 의경(意境)창출과 변조적인 조응들을 특히 현실이라는 삶의 질박한 터전에서 시간적, 공간적 ,객관적, 등 여러가지 복잡다단한 질서들로 수없이 되풀이해 가면서 어쩌면 남들 보기에는 너무나도 볼품이 없고 초라해 보일 수도 있는 민들레, 진달래 등등 풀뿌리 인생을 작게는 동족애, 크게는 민족애로 승화시켜놓고 그릇된것은 제때에 귀띔을 해주려 하고 옳바른것은 두 손 들어 찬미해가면서 다른 시인들에게서는 쉽게 찾아 볼수조차 없는 겨레에 대한 남다른 애착과 열정이 많은 경우 시적인 소재가 되여 리사이클링 드라마가 다시금 연출되는듯한 그러한 특징이 있다. 시란 애초부터 대상에 대한 극진히 간결하면서도  서정, 서사적인 진술이 아니라 자유자재한 직유와 은유를 더불어 자신을 극단속으로 내던질수 있도록 허용된 용감한 감정운동일지도 모르겠다. 그럼 아래에 강효삼선배님의 근작시들을 다시 함께 더 살펴보도록 하자    /압록강 철교 아래 펼쳐진 유보도/ 심심찮게 볼수 있는 우리 민족 치마저고리/ 그 옷 몸에 두르고 왁자지끌 떠들며 사진 찍는 모습 /. 누구는 난생 처음 입어보는지 그리 좋아 깔갈/누가 내놓은 아이디어인가?/ 압록강에 오면 치마저고리가 인기끌것을 /강건너는 바로 치마저고리 고향이여서/ 이렇게 하면 상대방의 호감도 이목도 끌수있고/압록강을 다녀간 좋은 기념이 되겠다./하여 내 흐믓한 기분으로/ 늘어가는 “우리민족”녀인들을 바라보다가/불쑥 강건너를 눈여겨보니  그곳은 아니구나 /남에게만 즐거움 주자고/ 곱게 만든 치마저고리 아니거늘/ 이런 날은 다투듯 강 이쪽저쪽/ 모두가 진달래꽃밭이였으면/ 전문이다.이 시는 더 이상의 그 어떤 해설도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된다.오늘날 분명 내것이면서도 남에게 즐거움을 주는 이 비릿한  감동과 갈등, 이 시는 구상이나 창작방향이 어떻게 변화되였든간에 끈기있게 시인 자신의 옳바른 독백을 줄곧 행복한 고민과 조금은 어눌하고 침착한 고민으로 심도 있게 두 갈래로 진행시켜 어쩌면 시인이 이 작품에 쏟은 로고가 도덕적 훈육에 바친 로고 그 이상의 것일거라고 필자로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일찍 강효삼선배님은 라는 회고록에서 고 설파하신적이 있다. 그 결속구에서 강효삼선배님은 ㅡ나에게 있어서 문학은 열번 넘어지면 스무번을 더 일어서게 하는 내 신념의 쌍지팽이이다. 어쩌면 문학은 나에게 있어서 항상 시발점에 불과하다. 시인에게 있어서 창작이란 곧 자신을 만들어 가는 과정인데 한편의 글이 완성되여 발표된다는것은 또 하나의 자신을 탄생시켜 더 넓은 사회로 내보내는것과 같다ㅡ고 가슴에 쾅쾅 와닿는 말들을 하신적이 있다. 이렇듯 시에 대한 남다른 집념과 각오가 있었기에 이번에 완성시킨 들은 가히 력작이 아니라고 누구 하나 감히 나서서 반박할수 없을것 같다. 이른 아침 압록강반에 이르니 때마침 하야니 물새떼들 내 서 있는 기슭에 내려와 앉는다 이쪽의 물새들 벌써 저쪽에 날아갔다 돌아 오는것이냐? 저쪽의 물새들이 이쪽으로 훨훨 날아온것이냐? 주둥이 길죽하고 점잖은 압록강의 물새들은 이쪽 저쪽 와 살아도 자유롭다 하고싶은 말 또한 자유로워 저쪽에 가서는 여기 말 하고 이곳에 와서는  저쪽 말 하고 오늘도 우죽부죽 어깨 드러낸 바위우에 비릿한 입술 쓱쓱 닦으며 저희들끼리 주고 받는 말 내 비록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해도 나는 안다,본대로 들은 대로 너희들이 지금 압록강에서 주고 받는 말엔 조금도 거짓마저 없으리란걸…    어떤 책에선가 이런 글을 읽었던 기억이 잠시 난다. .  꼭 짚어 무어라고 해명하기보다는 이 시는 질서정연하고 엄격한 양식에 따라 에러(失误)없이 솔로모션(慢动作)으로 구축된 신객관주의 모더니즘이 분명하다.또한 너무나도 아름다운 한폭의 그림이기도 하다. 일찍 피카소는 고 말한적이 있다. 그와 반대로 이 시는 예술적 상상력의 본질을 이미지로 총집합시킨 결정체인것 같다.필자가 보건대 이렇듯 시의 주체가 초개인적인 중립성으로 나아가는 길은 계속 쭈욱 이어져 가야 한다고 나름대로 생각해본다. 여기에 이르러서 필자는 우리들에게 현대시란 무엇인가 고민해보지 않을수가 없다고 생각해 본다. 필자는 여기서 성급한 정의를 함부로 내리고 싶지도 않다.또한 그럴 자격조차 없다고 생각되기때문이다. 다만 분명한건 굴레나 바퀴는 굴릴수록 더욱 힘차게 앞으로 나가기 마련이다는것뿐이다.우리는 지금 전통과 현대의 아스라한 갈림길에 덩그랗게 서 있다.어쩌면 일보 전진도 일보 후퇴도 아닌 반 쇼크상태ㅡ어떤이들은 주정, 서정, 서사로 맥락을 이룬 우리네 백년 전통시를 이제는 한창 때 지난 것이라고 비웃는다. 또 어떤이들은 해체와 건너뛰기,이미지와 이미지 사이를 단절로 위주로 하는 포스트모더니즘시를 사이비시로, 글장난에 불과하다고 손가락질을 해댄다.그렇다면 과연 우리 조선족시단의 백년 전통양식의 계승자이고 이슈가 될만한 새로운 정점은 도대체 무엇일가? 필자가 보건대 정답은 강효삼선배님처럼 제 갈길을 꿋꿋이 가면서 곁눈 한번 팔지 않는것이라고 생각된다.어리석은 질문일지도 모르겠지만 세계적인 문호 게오르게와 호프만슈탈같은 위대한 시인이 아직까지 살아 있다면 필자로서는 그들에게라도 꼭 한번쯤은 속시원히 답변을 들어보고 싶은 간절한 심정이기도 하다.      /거룡인양 압록강을 날아넘은/ 대교아래 유보도에서/강물을 거슬려 동쪽으로 걷다보면/ 아직도 이쪽은 도시인데/저쪽은 어느덧 도시가 끝나고/허허로운 들판에 마을 하나가 불쑥 나타나네 /동구밖엔  외로운 나무 한 그루/그 나무가지우엔 달랑 까치둥지 하나/기쁜소식 전해주는/ 길조가 사는 나무라서 그대로 두었는가/까치들 몇마리 아침부터 즐거움을 물어나르네/까악깍 ㅡ내 고향 동구밖에서 보던/ 그 까치들과 다를바 없건만/ 저들은 조선에 살아서 조선의 까치들/그러나 통행증이 필요 없어/얼마든지 강을 넘어 올수 있지만/ 말 못하는 저들에게도 나라사랑 고향사랑 따로 있는가?/그냥 외로운 저 나무에 기대여 사네/ 오래인 가난속에서도/“내 나라가 제일 좋아”/노래하며 사는 사람들…/아,그래서인가 나에겐 저  까치들 깃을 내린  나무가/외롭게 그어놓은 하나의 감탄부호 같다/ 전문이다. 결코 풍자나 조소가 아닌 현실적인 직유, 그리고 비교를 메스로 시작된 이 시에는 결코 아이러니는 없다. 보다 훨씬 적극적이고 활발한것은 사랑에 대칭되는 비판의식, 그러하기때문에 이 시는 읽을수록 왜서인지 가슴 한구석이 알짜지근해지고 숙연해지며 뜨거운 동포애ㅡ민족애에 착잡하기도 하다. 어쩌면 분명 남보다 자신에게 더 많은 질문을 던져주고 있는 이 시에서 너무나도 인상적인것은 곧 나무와 까치둥지를 하나의 커다란 감탄부호로 보았다는 로시인의 그 로련함에 저절로 감탄이 나갈뿐이다.    /압록강반에 서면 가보고싶다/ 새처럼 훨훨 날아가서/ 저 땅에 두 발 내려놓고 /누구라도 만나고싶다/에서 이미 찾아 볼수 있다싶이 동포라면 누구라도 그러고 싶었을 다소 소박하고 경건한 심정을 시인은 에서 시작부터 그대로 극대화시킨다. /한번도 만난적 없지만 켤코 낯설지 않을 /더구나 같은 평안도라서 말이 잘 통할/아무리 어쩌구저쩌구해도 저 곳엔/나와 한피 나눈 형제들이 살고있지 않느냐/이 세상에 혈육보다 더 무서운 정이 또 어디에 있으랴? 티격태격 다툼이 있더라도 떨어져 있으면 너무나도 보고싶고 만나면 서로가 서로를 어루만져 주고 무작정 사랑을 주고픈것이 형육의 정이 아닐가? /하여 저 땅은 그 누가 머라해도/우리 외면할수 없는 땅ㅡ /혐오하거나 미워해선 안될 사람들/좋은 술과 안주와 선물 가지고 가서 /“반갑습니다!”노래와 더불어/“헝님,적은이 ㅡ” 구면처럼 나누며/ 머지 않아 쨍 ㅡ하고 해뜰날 있으니 ㅡ힘을 내라고 용기를 북돋우라고/시린 마음 작은 위안이고싶다/는 익숙한 느낌의 온기로 는 우리 모두의 용기를 북돋아주고 있는것 같다.삶은 과정보다 어쩌면 세절이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 살아 있기에 살아가는 사람과 살아서 무엇을 이루려는 사람은 삶의 차원이 너무 다르지 않을수밖에 없다    마디 마디가 좋은 잠언들이라고 필자 나름대로 생각해 본다. 끝으로 강효삼선배님이 새로운 한해에 더욱 많은 작품ㅡ 더욱 좋은 작품들을 더 많이 써내시길 부탁 드리면서 다시 한번 건강을 축원하고 싶다   2014년11월24일 심양에서  
10    북방의 시혼, 사실주의 창작거장 강효삼 댓글:  조회:1764  추천:6  2015-07-07
북방의 , 사실주의 창작거장 강효삼                    시인 강효삼과 인간 강효삼을 론함                허인                                                           하고싶은 말       대개 북방시단하면 필자의 머리속에 제일 자연스럽게 먼저 떠오르시는 분이 곧바로 강효삼선배님이시다. 한평생 민초의 삶을 꿋꿋히 살아오시면서 결코 곁눈조차  한번 팔지 않으시고 오직 현실주의와 사실주의 창작기법으로 외곬인생을 묵묵히 살아오신 북방의 ㅡ사실주의 창작거장 강효삼선배님ㅡ 매번 신문, 잡지에서 이제는 70고령임에도 불구하고 항상 로익장을 과시하고 계시는 강효삼선배님의 주옥같은 시 한수 또 한수를 읽을적마다 필자는 마치 잃어버린 고향소식을 어느 날 문득 인편에 다시 전해 듣는듯한 그런 느낌에 저도몰래 가슴 짜릿한 전률을 느꼈었던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1944년 흑룡강성 연수현태생인 강효삼선배님은 1962년부터 벌써 처녀작을 발표, 근 50여년간 시, 수필, 에세이, 아동문학작품 등을 무려 300여만자 신문, 잡지에 발표, 고 담담히 이야기하시는 강효삼선배님은 필자가 보건대 아마도 래생에 다시 태여나신다 하셔도 시만 쓰실 분 ㅡ 윤동주님의 서시처럼 성격이 대나무처럼 곧고 개성이 뚜렷한 시인님이시다.    1980년대초엽 , 북방시단의 첫 동인시집ㅡ 중 한분이셨던 강효삼선배님은 누가 뭐라해도 우리들의 본보기로 되시기에 조금도 손색이 없으신 분이시다. 모두 알다싶이 80년대 초엽은 인터넷이 없었고 교통마저 몹시 락후한 시대였던 만큼 각지 문단상황은 지극히 국한시 되다싶이 하여 타성 문인들의 작품을 읽는다는것은 마치 하늘의 별따기와도 다름이 없었다. 그러한 시기에 북방시단에서  민초들의 애닲은 삶과 희노애락을 시로 , 희망으로 줄줄이 엮어 오신 분이 곧바로 강효삼선배님이시다. 여기서 조금 미안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80년대말, 90년대초엽, 그토록 날마다 목이 터져라 , 를 노래로 부르면서도 솔직히 작자가 누구인지조차 알지를 못하였으며 필자의 경우 썩후에 본격적으로 문학공부를 시작하면서부터야 비로소  김성휘, 리상각선배님들의 시들을 점차 접할수가 있었다    박철준, 리삼월, 한춘, 한병국, 강효삼, 김동진(현재 훈춘에 거주), 리명재, 특히 리삼월, 박철준, 한춘, 리명재시인마저 타계하신 이 시점에서  현재까지 북방의 시단ㅡ완달산맥에 오롯히 작은 거목으로 우뚝 서셔서 현재까지 아낌없이 꾸준히 한수 또 한수의 현실주의, 초현질주의, 사실주의 시작품들을 한점 부끄럼도 없이 세상에 떳떳히 내여놓고 계시는 강효삼시인님은 북방조선족시단의 이심이 분명하다. 그럼 여기서 우리 다 함께 강효삼선배님의 주옥같은 시 한수 또 한수를 조심스레 살펴보며 가도록 하자.   기억에 생생히 살로 돋아나는 참신한 이미지   고향시초   실바람 어서 가자 길잡이 해주고 시내물 목청 돋궈 반갑다 노래하네 잘 있었냐 고향아 어머니 품이여 아 동구밖 배나무 한 그루 어머님 모습인듯 두 팔 벌려 나를 맞아주네   꿈 많던 소년시절 그때를 잊으랴 나는야 고향 떠나 학창으로 달렸지 생각나냐 고향아 석별의 그 날을 아 흰 저고리 고름에 매였던 빨각돈 쥐여주던 어머님 그 사랑 나를 울리네   …  … … (1980년 흑룡강신문에 발표)      강효삼선배님의 50년 창작성과를 필자는 단 한마디로 이라고 비유하고 싶다 .시인 은 언제나 민초들 삶속의 크나 큰 희로애락을 항상 가장 가까이에서 직접 피로, 살로 경험하시면서 때로는 웃음으로 , 때로는 눈물로 한수 또 한수의 사실주의 시를 쓰시는 -사실주의, 현실주의 시인이시며 인간 은 함경도, 평안도 사투리를 구수하게 엮어가면서 언변이 청산류수이신ㅡ어쩌면 그 자그마한 체구와는 달리 너무나도 호방하신 분이시다. 특히 특정된 년대에 특정된 시, 즉 정치적인 구호시들을 써내여 명리에 눈이 어두웠던 그런 시인들과는 달리 과 의 70여성상 인생궤적을 아무리 낱낱이 살펴보아도 부끄럼없이ㅡ 와도 같이 청백하신 분이시다.     이 시는 지금 읽어도 감수가 새롭고 또한 가슴이 순간 뭉클하기도 한다. 어드바이스나 그 어떤 멘트조차 필요없이 필자가 알건대 강효삼선배님은 절대로 남이 알지 못하는 시들은 쓰시지를 않으신다. 시 창작에 있어서 강효삼선배님은 항상 이미지화를 극대화하면서도 또한 괴상한 이미지 조합이나 폭력적인 조합같은것은 아예 쓰질 않으시다. 거의 40여년전에 씌여진 시라고는 지금도 믿겨지지 않을만큼 여기서 실바람, 길잡이, 시내물, 목청, 노래소리는 자연스럽게 를 견인해 내여 구체적인 형상화까지 깔끔히 마무리해가면서 언제 ㅡ 어느때 ㅡ 어디에서나ㅡ멀리에서부터 마주서기만 하여도 벌써 듯한 배나무를 한폭의 그림으로 그려내여 읽는 이들로 하여금 가슴이 저도 모르게 뭉클해지게 한다. 특히 제 2련에서 이라는 이 참신한 이미지는 오늘까지 조금도 녹 슬지 않은 반짝반짝 빛나는 하나의 거대한 보석이 되여 마치 꿈 많았던 학창시절을 생각만 하여도 눈시울이 먼저 붉어지고야 마는 을 극대화 시켜놓아 시의 매력을 한껏 증폭시킨듯 하다. 알수가 있듯이 강효삼선배님의 시속에는 언제나 파워플한 패러다임 전환을 굳이 약속치 않으시면서도 꼭 우리들만의 방식, 우리들만의 정서, 우리들만의 비분, 그리고 강개와 긍지를 표현 그대로 과 으로 풋풋한 휴머니즘정신, 즉 인문정신이 그 밑바탕에 든든히 안받침 되여 있어 마치 개운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 그럼 아래에서 겨레에 대한 다함없는 사랑과 애증, 그리고 자신을 낮추어 민족을 부각시키고 있는 강효삼선배님의 어쩌면 자화상일지도 모를 와 를 다 함께 잠간 더 살펴보도록 하자   늘 거기 있기때문이다 가장 낮은 곳에 너른 세상 갈 곳 많아도 민들레는 아예 흙에 자신을 맡겨버리고 제 본래 태여난 땅 그 한구석에서 순하고 천해도 항상 밝게 살기로 했다   누굴 닮았나 묻지 말자 무심히 보기엔 너무 고상한 꽃 그렇게 많이 모여있어도 서로 헐뜯는것 보지 못했다 그렇게 가혹하게 짓밟혀도 신음소리 한마디 듣지 못했다 흘리는 눈물은 더구나 없는 아, 우리 겨레 녀인들 같은 꽃이여 전문이다       사실주의 창작기법은 아마도 러시아 언어학자 로만 야꼽슨, 카르세프스키, 트루베츠코이와도 같은 이들의 상징주의 형식론에서부터 시작된듯하다. 구체적으로 정확히 짚고 넘어가자면 1928년 헤이그에서 열린 제1차 국제언어학회에서 라는 용어를 프랑스에 망명중이던 러시아 언어학자 로만 야콥슨이 처음으로 사용하면서부터 사실주의창작기법은 빠른 급물살을 탄것으로 알고있다. 그럼 구조주의란 무엇인가? 구조(라틴어 동사 struere에서 온 stuctura)란 알기 쉽게 을 가르키는 낱말이다. 보줄라나 베르노가 언어를 하나의 건물이라고 파악한것과 마찬가지로 퐁트넬은 인간의 육체마저 하나의 건축물로 보았으며 시에서의 사실주의는 상징주의를 기초로 그렇게 탄생이 된다. 사실주의 창작기법이 오늘날 우리 조선족시단에 현실주의, 초현실주의와 더불어 모더니즘 점토우에 마침내 한떨기의 아름다운 꽃으로 활짝 피여 날수 있었던 까닭은 아마도 수많은 선배님들과 50여년간 결코 곁눈 한번 팔지 않고 꾸준히 외곬 인생을 열심히 살아오신 강효삼선배님과도 같은 선배님들이 계셨기때문에 가능한 일이 아니였을가 생각해본다.    /늘 거기 있기때문이다 가장 낮은 곳에/너른 세상 갈 곳 많아도/민들레는 아예 흙에 자신을 맡겨버리고/제 본래 태여난 땅 그 한구석에서/순하고 천해도 항상 밝게 살기로 했다/에서 볼수 있다싶이 독백성이 강한 제1련은 어쩌면 시인 자신의 자화상일수도 있으며 또한 풀뿌리와도 같이 얽히고 설킨  이 세상 민초들의 애잔한 삶을 직접 한눈에 들여다 볼수 있듯이 그려놓아 결코 낯설거나 거리감이 전혀 없으며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또한 친숙하기도 하다 . 바꾸어 말하면 어쩌면 시인자신의 옹근 삶 전체를 그대로 표현한것이 아닐가 싶을 정도로 이 구절은 읽을수록 무어라고 형언할수도 없이 단단한것이 문득 가슴에 맺혀와 저도 모르게 마음이 알짜지근해나는것을 어쩔수가 없다. 특히 /누굴 닮았나 묻지를 말자/무심히 보기엔 너무 고상한 꽃/으로 다시금 멋지게 캐릭터를 시작한 제 2련에서 /모여 있어도 서로 헐 뜯는것을 보지 못했고/, /짓밟혀도 신음소리 한마디 없으며/./흐르는 눈물은 더구나 없는/우리 겨레의 녀인들/의 강인한 모습에 초점을 모아 공명감이 더욱 큰듯 싶다. 이렇듯 시란 회화성으로 뜻을 전해야 시 예술법칙에 부합되는 것으로 영구불멸적인 요구이기도 하다. 누가 저렇게 이글거리는 화로불을 황홀하게 지펴놓았는가 때가 되면 봄은 절로 익는줄 알았지 이렇게 누구인가 지성이 뜨거운 입김되여 지펴야 하는줄을 진달래꽃 타는 불길의 흐드러짐 알겠다 화로불에 잘 익은 고구마 같이 물씬 풍겨날 구수한 봄내음새… 진달래는 봄의 구미를 돋구려 산이 훌훌 입김불어 피워올린 숯불이 아니냐 아 봄은 이렇게 빨간 진달래 그 원초의 숯불에서 맛스레 익혀진 《불고기》여라   전문    아마도 강효삼선배님에게 있어서 는 영원한 시제이기도 하며ㅡ 수많은 시속의 이 되기도 하며 또한 그러한 겨레에 대한 사랑과 정서, 애착은 신선한 에너지가 되여 수많은 창작 동기가 되는것이 아닌가 싶다.>  제1련중에서 /누가 저렇게/이글거리는 화로불을/황홀하게 지펴놓았는가/에서 은 벌써 읽는들의 마음을 한꺼번에 사로잡기에 너무나도 충분하며 그 다음 제2련에서 과 은 마침내 제3련에서 /알겠다 화로불에 잘 익은 고구마 같이/물씬 풍겨날 구수한 봄내음새…/를 견인해 내여 로 시적 분위기를 무르익히고 한껏 고조시켜놓았으며 특히 제4련에서/산이 훌훌 입김 불어 피워올린 숯불/은ㅡ 제일 마지막 련에서 마침내 / 아 봄은 이렇게 /빨간 진달래 그 원초의 숯불에서/맛스레 익혀진 《불고기》여라/로 참신한 이미지를 등장시켜 시의 진수가 무엇인지 아낌없이 보여주는듯 싶다.   시인 강효삼과 인간 강효삼, 그리고 환유와 은유ㅡ직유와 비유ㅡ    력사는 련속적이면서도 동시에 불련속적인 특성을 띤다.시를 쓴다는것은 어쩌면 전통적인 시각에서 살펴볼때 을 기록하는 일에 지나지 않을수도 있다. 바꾸어 말하면 이기도 하다. 사실주의와 모더니즘은 현실에서 오는 이러한 소외를 항상 의식하면서도 또한 늘쌍 새롭게 시작이 된다. 즉 리성(理性)이 보여주는 반리성적인 특성, 그리고 엄연한 사실과 그 가치의 분리와의 재조합, 더 나아가서는 구도적 효률성이 항상 시에서 각종 소외의 조건으로 인식되기도 하며 그러한 리성의 종착역은 곧 바로 죽음일수도 있다는 그러한 가 가슴을 치기도 하는 실례들이 현실적으로 적지 않다. 인간은 이 세상에 태여난 이상 누구나 을 외면할수 없으며 또한 언젠가면 너나없이 받아 들여야 할 중요한 과업이기도 하다 .그럼 강효삼선배님은 이러한 삶의 자세를 어떻게 표현하셨을까? 여기서 강효삼선배님의 을 또 살펴보도록 하자   십자길에 앉아있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온통 하얀 로인 한분 지금 로인이 앉아있는 곳으로 두갈래 길이 나 있다 죽음과 삶의 길이 로인은 가고싶지 않다 그래도 죽음의 길로는 로인은 부득부득 앉아버틴다 제자리를 뭉개며 얼마를 더 버티려고 정녕 고집부리지 마시고 어서 가시라해도 로인은 거절하며 오히려 자신의 낡은 철학을 푼다 ㅡ날 그대로 두게 죽음을 앞에 둔 늙은일수록 더 살고싶다네.   전문이다      강효삼선배님의 시는 언제봐도 항상 질서 정연하고 일목료연하다. 질서 정연하고 일목료연하다고 할수 있는것은 그만큼 강효삼선배님의 삶 자체가 신의로 가득 넘쳐나기 때문이다. 에서 공자는 라고 하였다. 뜻인즉 신과 의는 아주 근접한것으로써 신(信)은 의의 범수와도 같다는 뜻이기도 하다.시인 강효삼을 80점 이상이라고 할수 있다면 인간 강효삼은 90점 이상이다. 왜냐하면 시인 강효삼에게는 가 있고 인간 강효삼선배님은 거짓없이 너무나도  진솔하기때문이다 . /십자길에 앉아있다/머리에서 발끝까지 온통 하얀 로인 한분/에서 볼수 있는것은 역시 자화상이라 하여도 과언은 아닐듯 싶다. 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이 /지금 로인이 앉아있는 곳으로/두갈래 길이 나 있다/ 죽음과 삶의 길이/ 로인은 가고싶지 않다/ 그래도 죽음의 길로는/ 로인은 부득부득/ 앉아버틴다 제자리를 뭉개며 /얼마를 더 버티려고/ 정녕 고집부리지 마시고 어서 가시라해도/ 로인은 거절하며 오히려 자신의 낡은 철학을 푼다/로 삶에 대한 애착을 남김없이 표현하였으며 제일 마지막 련 /ㅡ날 그대로 두게 /죽음을 앞에 둔 늙은일수록 더 살고싶다네./에서는 인생에 대한 회유와 허전함, 공허함ㅡ그러한 인생에 대한 반추에서 오는 삶에 대한 끊임없는 집착을 즉 . , 사실주의 그대로 표현하여 어쩌면 쓸쓸하게  인생을 다시한번 되돌아보게끔 하는듯 하다. 필자가 알건대 강효삼선배님은 얼마전 사경에서 벗어나신줄로 알고 있는데 모쪼록 건강에 더욱 류의해가시면서 주옥같은 시작품들을 계속 써내시길 삼가 부탁 드리고 싶다.     모스 페컴(morse pekham)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고 설파한적이 있다. 이여야 한다. 그럼 아래에 강효삼선배님의 를 조심스레 더 살펴보고 가도록 하자   한평생 락을 바라고 허위 허위 쫓았지만 그건 꿈에 본 신기루 쫓고 쫓아도 그냥 그만큼 멀리 있어 가다가다 지쳐누운 나지막한 산비탈에 허리 착 꼬부라진 늙은 비술나무 한구루 삼밭처럼 숨막히는 오두막 찢어진 문풍지를 비집고 젓가락처럼 새여드는 빛을 거친 피부에 바르던 못난 사나이였다 산해진미는 평생 팔자에 없어 다마토리 술 석잔 그것에도 취해서 목침베고 뽑는 가락은 그나마 앞에선 노래도 못 넘기고 가파론 산을 톱는 초부처럼 암벽을 쪼아대는 석공처럼 힘들고 아프게 흙을 뚜져 참께 기름같은 땀을 동이로 짜냈던 누렇게 말라도 독한 잎담배였던걸 그래도 때묻은 동저고리 옷고름 잡아 풀면 장작개비처럼 말라가는 가슴에도 남은 것은 비취색 하늘같이 깨끗한 마음  젖은 장작같이 바른 금 쫙쫙 서는 참나무였다 옹배기는 숭늉같이 근심과 걱정을 증발시키며 인내를 연덩이로 굳혀들고 굴종을 담배로 말아피우며 근로와 선을 새끼처럼 꼬아서 뒤로뒤로 넘겨주고 태여날 때처럼 맨주먹 저세상을 가시였다 아 흙을 앗기고 흙에 미쳐 흙을 찾아 지구를 류랑한 나그네 그때문에 고향도 혈육도 다 잃는 눈물에 젖은 무명수건아 무지와 순박 근로와 인내를 한데 버무려 소여물처럼 새김질한 늙은 황소여   전문이다     필자는 나름대로 강효삼선배님의 를 수작(秀作)으로 생각한다.여기서/한평생 락을 바라고 허위 허위 쫓았지만 그건 꿈에 본 신기루 쫓고 쫓아도 그냥 그만큼 멀리 있어 가다가다 지쳐누운 나지막한 산비탈에 허리 착 꼬부라진 늙은 비술나무 한구루 /로 멋지게 베이스를 깔고 /산해진미는 평생 팔자에 없어 다마토리 술 석잔 그것에도 취해서 목침 베고 뽑은 가락은 그나마 앞에선 노래도 못넘기고/를 포인트로 단단히 골격을 이룬 이 시에서/옹배기는 숭늉같이 근심과 걱정을 증발시키며 인내를 연덩이로 굳혀들고 굴종을 담배로 말아피우며 근로와 선을 새끼처럼 꼬아서 뒤로뒤로 넘겨주고 태여날 때처럼 맨주먹 저세상을 가시였다/는 환유(欢喻)와 은유(隐喻)의  절정을 이루며 /아 흙을 앗기고 흙에 미쳐 흙을 찾아 지구를 류랑한 나그네/고향도 혈육도 다 잃은 눈물에 젖은 무명수건아/ 무지와 순박 근로와 인내를 한데 버무려 소여물처럼 새김질한 늙은 황소여/는 직유(直喻)와 비유(比喻)의 신기를 아낌없이 보여주는듯 하다. 조금 아쉬운 점이라면 도합 7련으로 나뉘였지만 산문시에 가까워 읽기에 조금 어려운 감이 드는듯하다.이외에도 강효삼선배님은 북방시단의 원로답게 북방의 산하(山河)와 향토문화, 고향에 대한 다함없는 사랑을 시리즈로 무려 37수나 련작시를 쓰신적이 있으시고 또한 수많은 주옥같은 작품들도 많고도 많지만 여기서 시간상 관계로 일일히 말하지 않으려고 한다.   마무리하면서      북방시단에는 강효삼선배님과도 같으신 든든한 거목들이 계셨기에 문학기초는 상대적으로 다른 산재지방에 비해 많이 튼튼하였다고 나름대로 생각해본다. 어쩌면 망조가 들기 시작한 조선족문단 ㅡ이제 으로 찾아가면 웬 낯모를 타민족이 고 되묻는 세상 ㅡ 가령 40ㅡ50년후에도 조선족문단이 계속 존속하여 있다면 그때 가서 강효삼선배님의 현실주의, 사실주의기법으로 씌여진 주옥같은 시작품들은 그 어디에 내놓아도 조금도 손색이 없었을 명시였음을 아마 후세에 새롭게 재 평가될것 같다. 인심이 야박해서가 아니라 흔하면 누구나 수월하게 대하기 마련이고 금싸락같이 귀할때일수록 귀중한 보석이였음을 뼈저리게 실감하게 된다고  생각해 본다. 끝으로 강효삼선배님께서 여생에 더욱 큰 와 가 있으시길   두손 모아 빌면서 후배된 도리로 시 한수를 증정하려 한다. 필자의 수준상 관계로 간혹 서툴지라도 그냥 이쁘게 봐주시고 성의로 받아주셨으면 한다   시인 강효삼   머나 먼 북방 완달산기슭에 버섯같이 아담한 초가집 짓고 한일평생 흰 저고리에 흰 고무신 신고 백발이 성성한 시인 한분이 해마다 봄마다 민들레를 읊고 있습니다 그가 바로 입니다 그가 바로 입니다 그가 바로 조선민족시인 강효삼입니다 시인은 오늘도 노래를 부르네 2015년7월3일 흑룡강신문 발표
9    어깨 흔들며 깨여나는 파아란 추억 댓글:  조회:3426  추천:8  2014-12-16
어깨 흔들며 깨여나는 파아란 추억   리성철 근작시 5수를 읽고 부치는 편지   [평론] 허인         리성철 ㅡ 리성철이 누구이지? 시인인가 소설가인가? 아직 모르고 있는 사람은 잘 모르고 있겠지만 알고 있는 사람은 모두 잘 알고 있는듯 싶다. 일찍 흑룡강성 상지시 야부리조선족중학교에서 조선어문교원으로 사업한적이 있는 리성철시인님은 현재 연변텔레비죤방송국 드라마제작부에서 고급편집으로 사업, 1987년 전국 중국어단시(中国语短诗) 3등상, KBS한국방송 체험수기 특별상, 압록강문학상을 획득, 거의 20여년을 문학과 쭈욱 담을 쌓고 살아오다가 요즘 들어 다시금 금쪽같은 시작품들을 신문, 잡지에 부지런히 발표하고 있는줄로 알고 있다. 그의 시는 뼈와 살과도 같이 아픈 경험들을 고운 심성, 정성으로 살살 녹여 사실주의를 기초로 어쩌면 맑은 우물에서 갓 길어 올린듯한 싱싱한 령혼들을 글줄기마다 직유와 은유로 심어놓아 읽는 이들로  하여금 시인과 함께 울고 웃게도 하며 또한 자기성찰을 기본주축으로 사색과 반성을 거듭 반복해 나가면서 이제 더는 낯설지도 슬프지도 않는 현실을 나름대로 참답게 살아가는 인간들의 럭셔리한 모습을 두툼한 화첩이 아닌 현실근처에서 찾아볼수 있도록 설정하여 공명감이 더욱 큰듯싶다.       일찍 호프만 슈탈은 들이라고 말한적이 있다. 우리는 언제나 시인과의 만남에서 어김없이 전제적 상상력이라는 개념을 항상 먼저 만나게 된다. 시인의 그러한 전제적 상상력은 실재 세계에 대한 모든 변형과 파괴력의 원천이기도 한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개성 있는 시인만이 살아남을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시인들의 사유적인 변형과 파괴력은 대단하여 전제적 상상력에 의거하여 생겨난 그 모든 산물들은 현실과 인간규범화의 인식에도 매우 큰 도움을 주기도 한다. 시는 인간 령혼의 자연스런 목소리이며 또한 그 목소리는 속삭이고 노래한다.때문에 . 시는  ㅡ이것이다ㅡ와 ㅡ그렇게 보인다ㅡ 그 사이의 애매모호한 구분만을 확실하게 없애면 모든 소재들을 창작정신에 결부시킬수 있다는 점을 우리는 쉽게 발견할수도 있다.       에서 /동물원이나 TV에서/우리에 갇힌 호랑이를 보면/ 아버지가 생각난다/는 표현은 어쩌면 은페적이고 소극적인 그런 조심스런 접근이나 방식이 아니라 감성적, 노골적, 직접적인 태도로 직유와 은유를 참조하여가면서 파란만장한 아버지의 한 많은 일생을 한편의 진실한 휴먼드라마ㅡ즉 눈물로 찍어가면서 조심스레 찰칵찰칵 시각과 감각 , 촉각과 후각의 렌즈를 발 빠르게 여러 장면으로 옮겨가고 있는듯 싶다. 특히 /산중의 왕이라는 맹호가/ 갇힌 운명에 체념하고 길들여지며/ 빼앗긴 자유생명의 왕국을/ 꿈속에서나 그리며/가끔 구경꾼들앞에 꿇어앉아 / 무기력히 꾸벅꾸벅 졸기도 하다가/ 쉼없이 불안히 좁은 우리안을 맴도는/호랑이를 보노라면/30여년전 철창속에 갇혔던/ 아버지가 생각난다/ 로 호랑이같던 아버지의 호매로운 형상을 누구 봐도 측은하리만치 안타깝고 실감나게 잘 보여주기도 하며. 이런 호랑이같은 아버지였기에 이제는 아득한 기억속의 새파란 추억들을 스멀스멀 어깨 흔들주어 다시 일깨워주어 /우물같이 깊은 우수/ 60도 고량주를 사발떼기로 마시군 하여/ 술 원수라는 별호를 가졌던 아버지/등등 아버지의 형상을 익숙하면서도 이제는 조금 낯설어가는듯한 표현들로 콘셉트가 아닌 리얼한 커뮤니케이션으로 아무런 려과없이 스크린과도 같이 그 시대적 삶의 불우한 단면을 아무런 설명조차 필요없이 한폭의 생동한 그림으로 잘 보여주기도 하며 또한 그처럼 억울한 루명을 쓰고서도/당신을 물어먹고 때린/ 사람조차 미워할줄 모르는 밸도 없는 바보/ 이기도 하지만 /십여년간 농촌에서 /의료봉사로 호인/으로 명성이 높았던 아버지의 모습을 제일 마지막련에서 다시금 /우리안에 갇힌 / 호랑이를 볼때면/ 아버지가 생각난다/로 결속지어 시대적 사명감과 함께 사색의 긴 여운이 오래도록 읽는 이들의 가슴속에서 맴돌아칠수 있게끔 특별히 설정해놓은것 같다. 이 시는 사실주의를 기초우에 수많은 독백과 력설을 반복으로 구사하여 참으로 오랜간만에 읽어보는 좋은 시라는 생각이 든다         이렇듯 남다른 각오가 있었기에 리성철시인의 두번째 근작시 또한 하나의 걸작이 아닐수가 없다. /어머님을 고통이 없는/머나 먼 하늘나라로 떠나보내던 날/어머님 골회속에 웬 불에 탄 못 하나/ 독침같이 슬픈 내 눈과/ 아픈 가슴을 찌르고 또 찌른다/그 못은ㅡ /죄없이 끌려가 22년간 옥살이 하신/아버지가 못이 되고/이라는 락인과 함께 받은/인간차별이 못이 되고/네살 난 어린 자식 유치원에서조차/받아 주지 않아 빈 집에 가둬놓고/고된 일 나가시며 홀로 키워낸/어린 새끼들의 그 울음이 못이 되고/[혁명건설]의 대들보에 머리 치여/피못에 쓰러진 열 세살 난 맏아들의/죽음이 대못이 되여/ 있엇길래 천하의 명의도 제거할수조차 없으며 더구나 자식들로서는 도저히 빼 드릴수가 없었기에 /오늘은 내 가슴에 박혀/ 나를 다시 울리기도 한다/고 어머니에 대한 추모를 마무리한다 .자신의 삶이 갈망하는것이 무엇인지 잊지를 마라. 상처와 아픔으로 날기를 거부하는 한 마리의 새도 되지를 마라. 자신이 살아온 삶이 자신의 삶이 아니였음을 리성철시인은 어머니의 형상을 통하여 우리 모두에게 단순히 한수의 시만이 아닌 령혼으로 금전 만능주의가 팽배한 오늘의 이 사회에 무엇인가 말을 하려 한것 같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리성철시인은 팔자가 보건대 노력파시인이시다. 한편의 시를 근 2년간 20여차례나 수개할수 있는 그의 집념에 필자로서는 감복하지 않을래야 않을수가 없다. . 얼마전 를 읽고 조금 실망했던적이 있다. 차라리 이런 시들을 발굴하여 단 한편만이라도 더 실었더라면 효과가 무척 좋지 않았을가 조심스럽게 생각해본다.       한때 연길시내에서 ,  로 소문이 자자했던 리성철시인은 심성이 맑고 자타가 공인하는 호인임이 틀림없다. 그의 말대로 하면 어려운 친구 대신 빚보증을 선뜻이 서주어- 그 선심 베풀어준 대가로 오늘까지 끊임없는 미열로 안해와 자식에게마저 차츰 미안하여 눈치를 볼때가 많아지고 있다고 한다. 이런 시인이 그린 은 어떤 모습일가? 필자로서는 그 모습이 궁금하지 않을수가 없다. 그럼 여기서 우리 함께 리성철시인의 을 조심스레 살펴보면서 가도록 하자     나는 여직 철이 채 못 들어 몸에 철분이 부족하고 뼈마저 심약하여 비바람 세찬 이 세상에 홀로 똑바로 서 있지를 못한다   누구의 요구나 거침없이 받아주고 거절을 못해 호인으로 살다보니 나는 그만 자신을 잃고 말았다 중심을 잃고 말았다 오로지 나 자신을 지켜주는 욕심과 리기심이라는 철분이 너무 부족하여 의리남아인양 항상 호기 먼저 부리며 가난한 친구에게는 혼자 도맡아 술을 사주고 찾아오는 고향친구 먹여주고 재워주고 유흥업소 아가씨도 사주고   빚에 쫓긴 친구들의 피난처가 되여 통도 크게 돈도 세집도 모두 대여 주고 빚 보증까지 서슴치 않고 서 주며 피 같은 내 돈과 시간, 정력마저 깡그리 다 퍼주었다 그렇게 통이 크게 남에게 나를 다 퍼부어 주고나서 나는 드디여 빈 자루로 무너지고 말아 사랑하는 내 아내와 금쪽같은 내 아들에게는   부끄럽고 죄스런 남편으로 힘 없고 무능한 미안한 아빠로 전략되였다 또한 사랑하는 내 가족과 형제자매들에게는 죄 없는 으로 락인 찍혔다 단단한 알맹이로 속이 꽉 찬듯이 부족하게 태여난 나는 아무래도 죽을 때까지 평생 제대로 철이 한번  들것 같지 못하다…       해학과 풍자로 어느덧 낯설어진 자신을 한번 또 한번 생활이라는 맑은 거울에 반추해가면서 럭셔리하게 사회현상에 거침없이 메스를 들이대여 리성을 일깨우려고 한것 같다. 이외에도 리성철시인은 장시만 아니라 단시도 함축성 있게 너무너도 잘 쓰시는것 같다. 우리는 그가 전국 중국어단시(中国语短诗) 3등상을 받은 경력이 있다는것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된다.와 중 는 이사키와 다쿠보크의 와 맞먹을 정도로 정교하며 또한 인간의 정신적 사고 구조와 그 본질을 명쾌하게 해석하고 해명하고 있다는데서 점수를 조금 후하게 쳐주고도 싶다   누군가를 미워하면 내 눈에는 가시가 돋는다   내가 키운 가시에 나는 항상 내가 찔려 내가 더욱 아프다       의 전문이다. 아메리칸 퀼트중의 한 말이다. 시를 흔히 감상적인 문학쟝르로 많이 치부하지만 시는 감상이 아니라 불가사의한 삶에 대해 인간의 가슴에 던지는 큼직한 질문이기도 하다. 제일 마지막 시 의 경우 란무하는 우리 이 시대의 아슬아슬한 현상을 /사랑방 아궁이에서만 피던/황홀한 불꽃이/몸을 간질이는 봄바람에 /불똥이 튀고/세월의 강풍에 날려 붙어/걷잡을수가 없이 /집안공기를 태우고/인화물질에도 옮겨 붙어 /온몸을 불 사르는 쾌락의/ 광열에 넋이 나가/ 긴급요청/에 /소방차/로도 진화가 안될만큼 /동에방네/숱한 집들이 불에 타 무너져 /집을 잃은 미성년자들이 인생의 사거리에서 /방황하고 있다고 표현하고 있다./로 표현하고 있다. 참으로 재치 있는 시인이라고 밖에 달리 더 많은 말들은 하고싶지를 않다.       맹자는 (存乎人者,莫良於眸子)라고 말한적이 있다. 뜻인즉 사람이 가진것중에서 눈동자보다 더 좋은것은 없다는 것이다. 심성이 시내물처럼 맑고 걸걸한 성격의 소유자인 리성철시인님께도 세월의 거친 파도는 피해 가질 않는다. 는 리성철시인님의 회의(回意)짙게 하는 말씀에서 필자는 을 의경(意境)과 함께 정성으로 가공하여 반짝반짝 빛이 나는 새파란 보석으로 세상에 내여놓는 간거한 작업이라는 곧바로 시 쓰기가 아닐가 하는  생각을 다시 한번 조심스레 가져본다. 이상으로 살펴본 리성철시인의 근작시 5수에서는 절절한 사고방식, 어쩌면 막장 드라마속에서나 볼수 있음직한 심플한 인성을 센서티브하게 깨우쳐가려 하는 강한 집념과 그리고 사회참여의식을 강하게 읽을수가 있어 무척 고무적이라고 생각된다. 끝으로 리성철시인님이 늦깎이로 시공부를 다시 시작한만큼 새로운 한해 더욱 좋은 결실이 있으시길 두손 모아 기대해보면서 따뜻한 인사말이라도 한마디 전하려고 한다. 리성철시인님, 보내주신 책들을 잘 읽고 있고요.  2015년, 쨍하고 해 뜰날 멀지 않았으니- 힘 내세요!   2014년12월 12일 심양에서
8    정갈한 샘물은 갈한 목을 제때에 추겨준다 댓글:  조회:3597  추천:10  2014-12-13
정갈한 샘물은 갈한 목을 제때에 추겨준다   스케치로 그려보는 인간 장학규와 작가 장학규의 생활 몬타쥬   [평론] 허인      요즘 신문, 잡지를 펼쳐들면 심심찮게 장학규선생의 수필을 접하게 된다. 거의 십오륙년간의 잠수끝에 목표물들을 거의 한방에 명중시키듯이 쾅쾅 터치우는 그 위력은 가히 장관이라고 말하고 싶다. 여기서 잠간 우리 함께 장학규선생의 인생경력인 그의 직업을 상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료녕조선문보 신문사 기자, 흑룡강성조선민족출판사 문예담당편집, 항주국제려행사 가이드, 현재 다시금 흑룡강신문사 청도지사 책임편집 및 책임기자, 그의 말대로 하면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제격인듯 싶다. 지난 1980년대중엽부터 1990년대중엽까지 흑룡강신문, 잡지, 잡지를 펼쳐들면 거의 매기마다 장학규선생의 소설, 수필 평론을 발견할수가 있다. 그만큼 그는 글재주가 뛰여나 이런 저런 문학상도 적잖게 수상한줄로 알고 있다. 왜소한 체구와는 달리 애주가인 그는 성격이 또한 대못같아서 휘거나 부러지는것이 아니라 끝까지 파고들어 어쩌면 웃어르신들을 조금 귀찮게 하는 그런 고약한 버릇도 있는듯 하다.       에피소드로 그가 XX신문사에 있을때 총편이 쓴 톱기사를 무슨 연유에서였던지 새까맣게 연필로 도배해가면서 어휘사용에서의 부적절함, 문장구성에서의 여러가지 착오점, 그리고 바다의 밀물과 썰물현상을 상세히 분석해놓아 결국 그 위대(胃大的)한 총편님은 밀물과 썰물조차 구별 못하는 한심한 총편으로 락인 찍혔던적이 있었던것 같다. 평소 다소 꼬장꼬장하고 거짓말을 전혀 못하는 학규형이지만 술 한잔 들어가면 또한 호인이 되기도 한다. 인생에 15년이 몇이나 되랴? 세월 이기는 장사가 없다고 요즘 머리까지 허연 그의 모습을 보면서 인생은 결국 승자도 패자도 없다는 명언이 떠올라 라는 따뜻한 인사말 한마디라도 먼저 건네고서 평론을 시작하려 한다      일찍 벤은 고 말한적이 있다. 떨림이란 곧 전률이기도 하며 작품에서는 공명감을 일컬으는 말이기도 하다.. 이번에 보내온 장학규선생의 ,, 를 곰곰히 살펴보면 바로 그러한 암시가 있고 떨림도 있으며 반드시 깊숙히 사고하고 사색하여야만 하는 인간본능을 주저없이 흔들어 일깨워주려고 하는 진실과 섭리, 자연순리주의가 항상 그 중심에 튼튼히 자리를 잡고 있어 서민적인 천착과 함께 더욱 큰 애착이 가는듯  하기도 하다. 로 태릭터를 시작한 에서는 로서의 아키데믹한 력설만이 아니라 스릴 있고 진부하게 살아온 자신의 두툼한 경험과 삶의 법칙을 딸애와의 자연스럽고 컬러풀한 소통으로 딱딱하거나 거부적인것이 아니라 다정다감하게 이야기식으로 전개하고 있다 . 에서 찾아 볼수 있는것은 홍익인간이며 또한 인문정신의 력점이기도 하다. 어쩌면 길지도 짧지도 않은 인생을 자연섭리 그대로만 무탈하게 잘 살아주었으면 하는 아버지의 착실한 바램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다음ㅡ       의 경우 여직 식지 않는 한류ㅡ 한국 드라마현상을 두고 비교의 메스를 인성에 과감히 들이대여 선과 악의 본질적인 구별을 인간 모두의 중성적인 면에서 그 해법을 찾으려 한것 같으며 그 실례로 로 어쩌면 자연스럽게 너무나도 어색한 몬따쥬나 슈제트 앞에 오래된 찰떡처럼 꿋꿋하게 말라 비틀어진 인생에 빵점조차 주기 싫지만 때만 되면 이런 저런 리유를 만들어  스스로 똑똑한척 도고한척 해야 하는ㅡ 그래서 로 자기 합리주의를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를 누구에게서나 제일 가까운 인성을 통하여 가차없이 자기성찰하도록 비판의 메스를 한번 또 한번 침착하게 들이대고 있는것 같다.       스페인 사람 R고메스 데라 세르나는 1943년 평론집 를 집필하면서 입수할수 있었던 모든 현대적인 경향들을 주의에 따라 분류, 집합시킨적이 있다. 필자의 경우 장학규선생의 이런 모멘트식 중점발언을 방법주의에 의한 새로운 고찰이라고 말하고 싶다 . 인간해부학적으로 그 인간의 렬근성과 한심한 리기주의적인 행위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의 척도는 에서도 고스란히 이어진다. 에서 볼수 있는것 역시 자기중심과 끝없이 팽배해가는 그 징글한 리기심에 대한 철저한 투시를 작자는 목표로 한다. 에서 살펴 볼수 있는것은  비교적인 상사점(像似点)을 렬거해가면서 인성이나 감성을 벗어내치면 인간 역시 개나 소나 양, 동물과 아무런 차이가 없음을 비교, 력설, 독백, 공간 메우기, 등등 직감적인 으로 풍자와 해학의 령역을 한층 더 업그레이드 시킨듯 하다.       이외에도 , , 등등은 필자로서는 오랜간만에 읽어보는 수필다운 수필, 즉 정갈한 샘물에 갈한 목을 추겨가듯이 속이 개운해지는듯한 느낌이 들며 특히 수필 은 김학철 사망이래 필자로서는 처음으로 읽어보는 잡문형식의 패러독스로 최고의 점수를 주고싶다. 장학규선생의 허다한 수필은 언제나 생활속의 진실한 면을 소재로 철리적인 인습과 사색을 곁들여 놓아 읽고 나면 몇년 묵은 체증이 한꺼번에 내려가듯이 속이 개운해나면서도 또한 알짜지끈하여 누구나 자신을 한번쯤 되돌아보게 하는 그런 매력이 있는것 같다. 또한 누구 하나 감히 흉내조차 낼수가 없는 방법론중의 하나인 직유와 은유ㅡ패러독스ㅡ독설이 일품이기도 하며 그로 인하여 긴장감을 조성해가는것이 아니라 오히려 긴장감을 완화시켜가면서 타협을 평행으로 이루어놓아 성숙해가는 딸애를 부성애로 흐뭇하게 바라보는 그러한 여유도 가끔 느껴지기도 하여 투철하고 명랑한 프로의 솜씨 아직 조금도 녹슬지 않았구나 하는 강렬한 느낌을 주기도 있다.     또 어딘가에는 아직도 꼬장꼬장한 그젯날 성격이 불쑥불쑥 느껴지기도 하여 친근감이 들기도 하며 워이씬에서 번마다 멧시지를 주고 받을때면 어김없이 라는 뒤늦은 회답에 이제는 까마아득한 기억에 혼자 슬며시 기분좋게 웃었던 일도 한두번이 아니다. 장학규선생의 수필의 경우 최대의 장점은 첫째도 개성이고 둘째도 개성이며 셋째도 개성이다.. 이런 개성은 작품에서 작자의 카리스마로 나타나기도 한다 .아무튼 십여년만에 다시 시작한 문학인만큼 새로운 한해 장학규형이 더욱 알찬 수확이 있기를 기원해본다. 학규형 화이팅 ㅡ                                            2014년 12월 13일   
7    [ 평론 ] 꿈틀거리는 욕망 꿈틀거리는 몸짓 깨여나는 심상 댓글:  조회:3791  추천:15  2014-09-29
 꿈틀거리는 욕망 꿈틀거리는 몸짓 깨여나는 심상    한영남근작시에서 살펴본 미래 지향적인 새로운 탐구정신                                          [ 평론 ] 허인   이니셜 내가 본 한영남ㅡ해학의 달인 통속언어창출의 놀라운 괴재                6월, 파겁을 시작한 뭇꽃이 앞 다투어 조잔한 열매를 두 손에 받아들고 어느새 초하(初夏)의 문턱- 높은  담너머로 고개를 기웃거리는 계절, 필자는 며칠전 할빈에서 이메일로 보내온 한영남시인의 근작시 10여수를 앞에 놓고 흥분으로 읽는다.  범상찮은 조짐 ㅡ 사실주의를 기초로 모더니즘의 싱싱한 점토우에 새롭게 포스트모더니즘을 접목시켜 탈변을 목적으로 하려는 굵직한 몸부림 ㅡ 어찌보면 너무나도 익숙하고도 생소한 비유(比拟)와 은유(隐喻)를 단순히 형식적인 모험만이 아닌 형이상학적으로 변이ㅡ 변형시켜 이미지와 이미지사이를 직결로 링크, 꿀맛나는 이미지확장(扩张)을 하이브리드로 완성해보려 하는 대담한 착상, 그리고 언제봐도 심성이 항상 맑고 깨끗한 ㅡ 오직 한영남시인만이 완성시킬수 있는 독특한 시적인 질서와 그러한 조밀한 언어구조속에서 항상 가슴 따뜻하게 느낄수 있는 풋풋한 휴머니즘과 인문정신을 ㅡ추상적, 계기적, 구체적, 병치적ㅡ즉 리성보다는 본능, 질서보다는 충동, 의식보다는 무의식의 더욱 폭 넓은 세계로 이어가려 하는 과감한 도전ㅡ 한마디로 꿈틀거리는 욕망, 꿈틀거리는 맥박, 깨여나는 심상(心象)을 함께 읽을수가 있어 무척 고무적이라고 총괄하고 싶다.   길림성 안도현 태생인 한영남시인은 일찍 초, 고중시절부터 벌써 신문잡지에 주옥같은 시작품들을 튝속 발표, 현재까지 '갈대는 저렇게 싱거워가지고', '환절기에 건강을 주문받습니다', ‘굳이 네가 불러주지 않아도 수선화는 꽃으로 아름답다’, '무깍지동네', '우리 서로 얘기 좀 합시다', '보리밭은 바람 아니더라도 설레이는것을' 등 시, 수필, 소설, 평론 등을 무려 300여만자 발표, 연변일보 제일제당상, 두만강여울소리 시탐구상, 연변문학 윤동주문학상, 중국조선족동시탐구상, 중국조선족수필상, 도라지장락주문학상, 연변일보 해란강문학상 다수 수상, 2006년 시집 를 출간ㅡ현재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에서 편집으로 사업중인것으로 알고 있다 . 필자가 알건대 한영남시인이 오늘날 개성이 뚜렷하고 유망한 문인으로 성장하기까지는 적잖은 아픔과 홀로서기의 나날이 있었던줄로 안다. 시를 써야하는 백공한번째 리유에서 한영남시인은 철없었던 문학도시절 량친부모를  잃고 억이 막혀 혼자 쿨쩍일 힘마저 없었을때 가슴 따뜻한 긍정적인 말 한마디 하여준 고마운 선배문인과 인정에 너무나도 시린 손발을 늘쌍 친동기처럼 어루만져주고 다독여주었던 고마운 동우시인들이 있었기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늦게야 늙은 총각딱지를 마침내 떼고 늦장가 들어 득남까지 한줄로 알고 있는데 여기서 늦게나마 행복의 메신저로 축하의 박수를 열심히 보내드린다.    문여기인(文如其人)이라는 말이 있다. 즉 는 뜻 ㅡ어쩌면 요즘처럼 독지층이 얇아져 가는 조선족 시단에서 읽어볼만한 시가 없기로는 시인이나 독자나 매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시기에 한영남시인의 이번 해학, 독백, 역설을 위주로  포스트모더니즘을 접목시킨 근작시들은 독자들로 하여금 오랜간만에 가슴 설레도록 할것이며 또한 오래도록  긴 여운을 가슴속에 깊이 아로새기게 되리라 필자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 그럼 아래에 우리 함께 한영남시인의 이번에 보내온 주옥같은 근작시 12수를 차례대로 살펴보기로 하자 질서와 의식ㅡ그리고 무의식속에서 이끌어낸 해학의 즐거운 잔치 한 마당     시의 혁신은 곧 사유의 혁신이며 또한 언어의 혁신이기도 하다. 시인은 시를 쓸때 우선 먼저 미학적인 고려를 하여야 하며 또한 감수성의 노예가 되지 말아야 한다. 한마디로 누구에게나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말이라 해야겠다 . 일찍 리요다르는 총체성에 대한 갈망이 이 시대에 오면 곧 하나의 환상이거나 지적인 테러에 지나지 않는다고도 말한적이 있다. 총체성에 대한 갈망이란 현실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들의 모순을 하나의 지적인 체계로 종합하려는 그러한 태도를 말하는것이다.그런 갈망이 환상이거나 테러에 지나지 않는다고 함은 결국 모든 종합주의적 사고가 허구라는 사실이기때문이다. 이렇듯 탈구성적인 리념은 형식주의적인 이데올리기의 억압에 대한 미적인 저항이며 또한 구성이 아니라 충동을 강조하는 태도이기도 하다. 구성의 파괴가 아닌 구성속의 자연 분만된 여러가지 복잡성, 그리고 얽히고 섥힌 여러가지 겹치기 구조, 이런 태도는 시 ,소설ㅡ 더 나아가서는 세계가 하나의 구속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인식론을 전제로 하기도 한다. 특히 포스트모더니즘 시대, 해체시의 경우 주체적인 생산을 위해서는 탈구성 혹은 해체 개념에 대한 정확한 리해가 따라가야 한다고 생각된다. 그럼 여기서 우리 함께 한영남시인의 이번 근작시 중ㅡ 질서와 해학의 즐거운 잔치마당중에서도 수작으로 꼽을 수 있는 부터 다 함께 잠깐 살펴보도록 하자   발가락 하나 감기 걸렸소 머리카락 한오리 발기불능증이오 귀지 한숟가락 당뇨병이라오 눈썹 한 대 좌골신경통을 앓는다오 이빨 한 대 정신분렬증을 치르오 코털 한 대 페암인 듯 하오 손톱 하나 에이즈와 사귀었다오 배꼽 절반이 알콜중독쯤이라오 자지 가운데가 중풍을 맞았다오 겨드랑이털 서너이랑이 백전풍과 담판중이라오 발가락사이 때 한줌이 배 두드리며 만포식이라오   이상 간추린 소식이였습니다   거울속의 나는 싱싱하기만 했다     전문이다.     시는 구조적 통일성보다 오히려 단편적인 앙상블로 인식되기도 한다. 앞서 평론에서도 이미 여러번 말한적이 있지만 시는 엄격히 따지면 독백의 양식에 속한다. 을 읽고나면 시인의 놀라운 재치에 저도몰래 즐거운 탄성이 터져 나오는것을 어쩔수 없다 . 즉 인체의 각 기관들로 온갖 병적인 현상들을 직결시켜 완성시킨 이 한 수의 시는 읽을수록 쿡쿡 저도몰래 웃음이 나오기도 하고 또한 시인의 기이한 발상과 착상이 새롭고 신선한 충격으로 와닿아 그야말로 가관이라 해야 할것 같다. 꼭마치 라캉식 행동, 칸트식 발언 , 미셜 푸코식 사유인것처럼 ㅡ/발가락과 감기/, 머리카락 한오리와 발기불능증/, 귀지 한숟가락과 당뇨병/, /눈썹 한대와 좌골신경통/, 이빨 한대와 정신분렬증/, 코털 한대와 페암/, 손톱 하나와 에이즈/, 배꼽 절반이 올콜중독/, 자지 가운데와 중풍/, /겨드랑이털 서너이랑과 백전풍/, 발가락 사이 때 한줌과 만포식/은 어찌보면 단순하면서도 시인의 의도적인 변이, 변형을 통하여 우리 이 사회의 여러가지 병페적인 현상들을 아이러니컬하게 해학적으로ㅡ 즉 유머 있게 풍자 비판하고 있으며 더우기 시인은 줄곧 작자가 아닌 편집자의 립장에 서서 어쩌면 앵커다운 앵커가 되여 차분한 목소리로 뉴스를 진행하듯이 패러독스를 펼쳐가고 있지만 그 효과음은 분명 공명이라는 전환 리듬을 타고서  읽는 이의 가슴에서 가슴으로  전파와도 같이 ㅡ둥둥 웅굴진 북소리가 되여 오래도록 메아리치고 있는듯 싶다. 특히 제일 마지막 련ㅡ /이상 간추린소식이였습니다/ 거울속의 나는 싱싱하기만 했다/에서 살펴볼수 있듯이 시인은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결코 는 그런 병적인 현상에는 쉽사리 끌려가지 않으리라는 강한 의지를 비추어 보여주기도 하면서 참된 인간의 성실한 모습을 조심스레 독자들에게 펼쳐 보이는듯 싶다. 필자는 웬만하면 누구를 함부로 칭찬하는 스타일이 아닌데 여기서는 꼭 한마디 해야 겠다 . 한영남시인은 우리 이 시대의  해학의 달인임이 틀림없으며 통속언어창출의 괴재(怪才)임이 분명하다. 여기서 귀지, 자지, 그리고 /겨드랑이털 서너이랑이 백전풍과 담판중이라오/라는 표현은 지방적인 방언색채마저 다분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더없이 친근감을 느끼게 하며 또한 이라는 익숙하고 지성적인 간결한 사유를 통하여 독자들은 이 시의 매력에 저도몰래 푹 빠지게도 된다. 그럼 아래에 해학의 또다른 작품을 살펴보기로 하자   개구리 주저앉는 뜻은 멀리 뛰기 위한데 있다고 하오 개구리도 너무 오래 주저앉아있으면 오금 저려 더 멀리 뛰지 못한다 하오   그런건 아무래도 좋소 뛰기 위한 개구리는 눈은 없어도 좋소 다리가 부러져도 좋소 허리가 부러져도 좋소 몸뚱이가 부러져도 좋소   밸은 없는게 낫소 뛰기로 작정한 놈 뛰기만 하면 그만이오 배꼽은 뛰기에 차라리 거추장스럽다 하오   허리 부러진 개구리는 마침내 뛰지 않아도 좋소     -이상의 ‘오감도’에 부쳐ㅡ전문이다.     의인화 수법으로 씌여진 이 시속의 주인공, 즉 ㅡ개구리는 멀리 뛰기 위하여 의 형상으로부터 시작하여 결국 안일한 삶속의 리유ㅡ 즉 무승자박(无绳自搏) 이라는 단단한 포승에 꽁꽁 묶이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인간상을  마치 두눈에 생생히 보이는듯이 그려놓은듯 싶다 . 제1련에서부터 력설적인 어투로 시작된 이 시는 거의 아무런 휘핑도 없이 오직 헤드라인과 초감각적으로 /개구리 주저앉는 뜻은 /멀리 뛰기 위한데 있다고 하오/개구리도 너무 오래 주저앉아있으면 /오금 저려 더 멀리 뛰지 못한다 하오/로 최저한도의 상황제시를 하여놓고서  다시금 제2련에서 /그런건 아무래도 좋소 /뛰기 위한 개구리는/눈은 없어도 좋소…/로 >, , 마저 부려져도 무작정 뛰여야만 하는 강한 충동을 야유적으로 고조시켜놓은듯 싶으며 특히 제3련에서는 아예/밸은 없는게 낫소/뛰기로 작정한 놈 뛰기만 하면 그만이오/배꼽은 뛰기에 차라리 거추장스럽다 하오/로 한술 더 푸욱 떠서 이 없고 이 없어야 어쩌면 살아가는데 적응할수도 있으며 결국 제 4련에서는 /허리 부러진 개구리는 /마침내 뛰지 않아도 좋소/로 깔끔하게 마무리한다. 부제에서부터 이미 살펴 볼수 있다싶이 편지이고보니 아무리 어찌해 보아도 넘을수 없는 장벽같은것을 마주선 인간의 여러가지 형태를 적라라하게 풍자적으로 그려놓은듯 싶다. 그럼 아래에 포스트모더니즘을 접목하여 완성시킨 몇수의 시를 더 살펴보기로 하자   별이 차마 섬뜩했다 걸음마 익히지 못한 포플러 다행히 속으로 울 권리 있었고 언제나 다정한 얼음조각 팔불출이어서 싱거웁다 깊은 재채기는 차라리 갈대의 웃음파편 끝내 누가 고운 비자루로 쓸어놓은 서슬푸른 밤하늘이 조용히 발정한다     /별이 차마 섬뜩했다/로 멋지게 캐릭터를 시작한 이 시에서 필자는 마치 파트 타임이 아닌 터닝 포인트, 어쩌면 긴 타월로 철철 흐르고 있는 식은 땀을 홀로 게면쩍게 슬쩍슬쩍 딲고 있는  이상하게 관심이 쏠리는 별 하나를 만나게 된다. 그 별이 시인에게 주는 섬뜩함이란 도대체 무엇이였을가ㅡ시제가 인것만큼 시인이 말하는 별이 도대체 무엇일가 하는 핀트는 독자 나름대로 설정하여도 무방하다고 생각이 된다. 특히 제2련 /걸음마 익히지 못한 포플러/에서 포플러ㅡ 즉 백양나무는 모두 다 잘 알다싶이 포플러나무는 이 세상에 태여난 그 순간부터 오직 한 자리에만 서 있어야 할 운명임이 분명한데도 시인은 여기서  /걸음마 익히지 못하였다/고 재치있게 표현하여 인생의 허다한 막무가내와 그러한 속박에 저항해보려는 역반심리, 즉 어디론가다 툭툭 털어내치고 훨훨 떠나버리고 싶어지는 그러한 강한 충동, 즉 된 령혼의 가슴 시린 간절한 바램을 은유적으로 표현한듯 하며 그 다음 자연스럽게 줄 지어 다가서는 /다행히 속으로 울 권리/는 또한 과 이라는 재밌고도 어깨 단단한 이지미를 멋스럽게 견인해 내여 단 한마디 / 싱거웁다/로 현실에 대한 불안, 혹은 그러한 불만정서를 담담하게 토로하고 있는듯 하며 특히 제6련에서 /깊은 재채기/는 시인의 세심한 배려와 지성적인 사유끝에 변이, 변형을 통하여 /차라리 갈대의 웃음파편/이라는 너무나도 궁색하고 허무한 결과ㅡ 즉 자다가도 다시금 벌떡 일어나 초불을 켜들고 찾아 읽고 싶어지도록 간결함의 극치로 보여주고 있으며 또한 그러한 결과마저도 시린 가슴에 포옹으로 끌어안으려는 시인의 각근한 태도에 읽는 이마저 가슴이 뭉클해지기도 하며  특히 제 8련에서 10련까지 /끝내 누군가가 고운 비자루로 쓸어놓은/서슬푸른 하늘이/조용히 발정한다/는 그물에 걸지리 않는 바람처럼  리상적인 자유와 지향을 향하여 달려가려 하는 끊임없는 추구와 변함없는 생명운동을 지성적인 사유를 통하여 실천해보려는 시인의 소박하고도 간절한 소망을 암시해주는듯 싶다. 여기서 걸음마 익히지 못한 포플러, 다정한 얼음쪼각, 갈대의 웃음파편은 폭력적조합을 이루면서도 전혀 이상하거나 낯선 감이 없어 한영남시인이 언어련금술을 얼마나 자유자재로 잘 다루고 있는지를 아낌없이 잘 보여주는 좋은 증거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분명한 질서와 구조속에서 생명운동이 진행중이다. 그럼 아래에 수학 매트르식이 아닌 속사로 생명구조와 분명한 질서속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생명운동을 마치 눈앞에 생생히 보이는듯이 그려놓은 을 잠간 함께 살펴보기로 하자     마당에 전차 버스 트럭 차들이 서있다 곤하게 전차 버스 트럭 차들이 서있다   새벽같이 전차가 빠져나간다   마당에     버스 트럭 차들이 서있다 곤하게     버스 트럭 차들이 서있다   아침이면 버스도 빠져나간다   마당에          트럭 차들이 서있다 아직도          트럭 차들이 서있다   여보게 시작들 합세   마당에                차들이 없다 마당에                차들이 없다   하루가 도르르 말려 저쪽으로 사라지고 하루일에 지친 차들이 다시 들어온다   마당에 전차 버스 트럭 차들이 서있다 곤하게 전차 버스 트럭 차들이 잠잔다     전문이다   은유에 기대여 직조된 이미지 그 자체를 통해 많은 자유련상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이 한수의 시는 없이도 매일 진행되는 생명과정에 대한 한차례의 미적감수를 경유했다는데서 그 의미가 더욱 크다고 보여진다. 어쩌면 삶과 분리된 구성물이 아닌 진행속에 있는 구성물, 즉 제1련에서 볼수 있다싶이 을 바라는 시인의 시선은 정지된것이 아니라 인간의 창조물인 전차, 버스, 차, 트럭을 따라 움직이는것, 또한 혼자서는 절대로 저절로 움직일수조차 없는 피창조물들의 기계적인 움직임속에서 창조자인 인간이 기계에 기계적으로 매달려 살아가는 곤한 모습을 머리속에 떠올리게 하는듯 싶다. 꼼꼼히 살펴보면 새벽같이 전차가 빠져 나가고 나면 그 자리는 잠시 비게 되며 다음은 버스ㅡ 차들 ㅡ여기서 시인은 분명 원유의 질서를 해체하려는것이 아니라 새로운 질서들을 재발견, 즉 차들의 움직임을 통하여 현대인의 바쁜 일상과 희노애락을 엿볼수 있게끔 하고 있는듯 싶다. 시의 언어는 의미전달의 언어구조가 아닌 의미형성의 새로운 이미지구조여야 한다. 특히 문체는 작품 자체가 가지고있는 세부의 기능이기때문에 결국 세계를 바라보는 특별한 태도라고 해야 할것 같다.그럼 아래에 남달리 시각 효과가 뛰여난 와,를 살펴보기로 하자      탐미주의적 경향  시대적 발현의 새로운 심상   나비   풀- 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 나 풀    나도 한수의 시로 남을수 있다면   나는 나를 위해 나의 누드를 버린다 나는 나를 위해 나의 정조를 버린다 나는 나를 위해 나의 사랑을 버린다 나는 나를 위해 나의 아픔을 버린다 나는 나를 위해 나의 행복을 버린다 나는 나를 위해 나의 심장을 버린다 나는 나를 위해 나의 령혼을 버린다 나는 나를 위해 나의 무덤을 버린다 나는 나를 위해 나의 의미를 버린다 나는 나를 위해 나의 이름을 버린다 나는 나를 위해 나의 용서를 버린다 나는 나를 위해 나의 가나다라마바사아자차카타파하...를 버린다 나를 위해 나의 모든것을 버린 나는 내가 모든것을 버려서 비여버린 나는 드디여 한수의 시로 남는다   길은 길에 미안하오   길은 어디로 어떻게 뚫린거라도 괜찮소 길은 걸어주는것이 도리요 길은 자주 걸어줄수록 길이요 길은 혼자만의 길이 있듯이 길은 여러 사람의 길도 있소 길은 혼자만 걷고 싶은 길임에도 길은 여러 사람이 자꾸 기웃거리오 길은 혼자 걸어도 길이요 길은 여럿이 걸어도 길이요 길은 길이기에 길들었다고 생각하면 위험하오 길은 아무렇게나 밟아도 된다고 생각하면 더욱 위험하오 길은 저만치 길다운데 길은 길일뿐이오     시인이 굳이 언어의 질서를 파괴하려 하지 않고 지극히 일상적인 시어로 접근하려는 것은 어쩌면 어떤 사물에 대한 인습적인 사고를 단단히 긍정하면서도 또한 끊임없이 전복해보려는 시인의 각근한 노력과도 관계되는상 싶다. 이러한 각근한 노력끝에 한영남시인이 를 바라본 시각현상은 과연 어떤 모습일가? 필자가 보건대 그건 아마도 단순히 한 사물을 바라보기 위한 수단인것이 아니라 사물의 전체적인 내용을 좀 더 구체적으로 즉 한가지 측면만 통하여 깊이 료해하고 결정해보려는 심리를 폭죽효과로 삶의 공간에 터뜨리려 한것 같다.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여기서 은 어쩌면 바람앞에 흔들리는 일수도 있고 또한 의 줄임자일수도 있으며 무려 500여개의 은 마치 수천 수만마리의 나비가 동시에 하늘을 날아오르는듯한 환각을 주어 시각효과가 뛰여나며 다음 결속어 은 시인의 생명에 대한 무한한 열애와 환희를 나타내려 한것 같다. 반복구사법, 겹치기기법, 절충법으로 씌여진 ,역시 같은 실례라고 생각이 된다./ 나는 나를 위해 나의 누드를 버린다/로 시작하여 정조, 사랑, 아픔, 행복, 심장 ,령혼 , 무덤, 의미 , 이름 , 용서, 훈민정음 ㅡ 그리고 무려 13차례나 되는 라는 고도로 집중이 되는 비움속에서 평생을 한수의 시로만 남고싶은 시인의 간절한 욕망, 그리고 동업자가 일수도 혹은 일수도 있기에 거기에서 오는 미안함을 길로 간결히 표현한 는 첫째, 시각효과가 뛰여나며 둘째, 군더더기 하나없이 주체의식이 명확하며 셋째, 시의 또다른 가능성마저 제시해주는듯 싶다. 다만 프로의 경우   탐미주의적 경향, 즉 시대적 발현의 새로운 심상으로 받아들여 지겠지만 아마추어의 경우 자칫하면 문자유희에 빠질 그런 우려가 있음을 모두 류의해야 할것 같다.   물덩이들의 반란   물들이 물덩이들이 왈칵왈칵 내 목구멍을 헤집는다 내 목의 겨불내를 닦아주기 위해서 얼마쯤 머뭇거리거나 서성거려주어야 하는데 녀석들은 추호의 주저도 없이 살겠다는듯이 내 위장속으로 란폭하게 쓸려들어간다 내 목구멍을 한껏 벌려버리고는 잘 줴기진 물덩이들이 제법 단단해가지고 한사코 아우성치며 빨리듯 들어간다 물은 물들은 이런것이 아니겠는데 부드러운 물들이여야 하는데 물덩이들이 서로 손을 잡고 힘을 자랑한다   분명 나를 아프게 한 물덩이들이 사랑스럽다      리얼리즘이 세계성을 강조하고 모더니즘이 자율성을 강조한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은 상호 텍스트성을 강조로 한다 . 무릇 이 시대의 모든 문화현상과 사회현상은 지극히 단순한 상호 반영의 관계가 아니라 서로 동일시되며 더 나아가서는 가끔 사회현상이 문화현상으로 둔갑하기도 한다. 더불어 문화현상이 사회현상을 시의 심층 구조속으로 끌어들이기도 한다는 말이라고 해야 할것 같다 . 은 제목자체에서부터 이미 엿볼수가 있다싶이 지극히 익숙하고 자연스럽고 단순하였던것들이 가 되여 잘 줴기지고 때론 제법 이 단단해져 간혹 할수도 있지만 결국 사랑스럽다는 표현으로 상호 의존된 력학관계와 애잔한 관용의 미학을 섬세하게 그림으로 그려낸듯 싶다. 여기서
6    (평론)한폭의 작은 우주를 손바닥우에 올려놓으려는 시 댓글:  조회:3903  추천:18  2014-05-28
  한폭의 작은 우주를 손바닥우에 올려놓으려는 시           한영남근작시에서 살펴본 관념적 의식의 새로운 탈출                                                평론 허인         [시인은 시인으로서의 인격이 있고 또한 독특한 개성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한 시인의 인격은 시에서 주로 튼튼한 골격을 이루며 남달리 독특한 개성은 또한 피와 살과도 같은 시적인 언어들을 창출해내기도 한다.] 일찍 미셀 푸코는 이라는 저서에서 고 설파한적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살펴볼때 우리 이 시대의  시인들은 들임이 틀림없다 .어찌보면 지극히 단순한 자신의 은밀한 아픔마저도 가끔 시대적인 아픔으로, 영위되여 가고 있는 삶의 지혜와 그러한 끊임없는 모험, 자아해탈과 자아 모순속에서도 악착스레 갈구해가는 영구불멸적인 정신적 해탈, 어쩌면 한낱 허무와 공허의 불안함, 그러한 요소마저도 시인자체의것만이 아닌 시대적인 것으로 가끔 승화시켜놓고 거기에 쟁쟁한 공명을 이끌어내여 치유의 엔돌핀으로 증오와 사랑을 나름대로 담담하게 노래 부르고 서슴없이 고백하여가는 ㅡ 솔직히 한영남시인의 근작시들을 십여일전 이메일로 받아놓고 무엇을 쓸가? 어떻게 쓸가? 여러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중 오늘에야 비로소 필을 든다. 그럼 여기서 우리 함께 한영남시인의 탈변을 시도로 굵직한 몸부림이 돋보이는 근작시들을 차례대로 하나하나씩 읽어보기로 하자   절충을 강요하는 무형(无形)속의 새로운 이중관념   묻지 않으리 상처를 찢는 또 다른 상처가 될가봐   바라만 보리 그저 말없이 이 세상 가장 아름다운 눈빛으로   전문이다         일찍 프로이드는 해결되지 못한 상처를 꺼내 승화하여 치유하는 과정을 문학창작의 전반 과정으로 보았다. 등등 주옥같은 작품들을 륙속 출품시켜 한때 조선족시단을 나름대로 풍미했고 심플하게 러시 아워까지 이끌어 냈던 한영남시인의 전반 시적 풍격을 꼼꼼히 살펴보면 리드미컬하게, 혹은 한결같이ㅡ 세찬 파도나 거친 풍랑, 외재적인 그러한 바다와는 거리가 멀게 항상 내재적인 미가 더욱 돋보이도록 돌돌돌 맑고 깨끗한 시내물 과도 같이  잔잔하게 흘러오다가도 불쑥 시적 공명을 크게 울리는 그런 특징이 있었다 . 그런 한시인이 요즘 들어 근작시에서 절충에 절충을 강요해가면서 이중관념적인 여러가지 단시들로 지금 필자를 깜짝 놀래우고 있다. 도합 2련으로 나뉘여진 이 시의 제1련 /묻지 않으리/상처를 찢는 또 다른 상처가 될가봐/ 에서 볼수 있다싶이 누구나 쉽게 직시할수 있는 피크(顶峰)된 시인의 상처, 즉 유형(有形)과 무형(无形)의 비좁은 삶의 공간을 비집고 나와 어마어마한 전률로 독자들에게 다가서려 하는 클로즈업된 시인의 아픔과 그러한 상처자국들ㅡ어쩌면 필자나 독자들로써는 감히 그 깊이나 너비마저 예측할수 없는 삶속의 희노애락과 애환이 절절히 느껴지게끔 하며 특히 제 2련은 객관적인 태도로 /바라만 보리/그저 말없이 이 세상 가장 아름다운 눈빛으로/ 결속되여 이 시는  곱씹어 읽을수록 꼭 무엇이라 이름할수는 없지만 잔잔한 울림이 변두에서서부터 시작되여 점차 중심으로 모아지는 그런 특징이 있는것 같다. 그럼 아래에 어쩌면 모험을 시도로 하는 다른 두수의 단시도 조심스레 더 살펴보고 가도록 하자   저녁 황혼   놀 타네   늘 붉네       인생   울어라 바다가 넘쳐나도록 웃어라 하늘이 흔들리도록        여기서 은 도합 여섯글자로 그나마 1, 2련으로 나뉘여졌지만 은 고작 두개 련뿐이다. 꼼꼼히 살펴보면 은 보다싶이 제목자체가 그냥 이여도 무방하려만 특별히 앞에 을 덧붙여 시간적인 개념이나 강조의 뜻을 강하게 크게 나타내려고 하였음이 엿보이고 은 어쩌면 아무렇치도 않게ㅡ 혹은 대수롭지도 않게 쉽게 씌여진듯 하지만 자세히 따져보면 과 , 와 , 그리고 재치있게 형용사 이 존속적인 결속어로 붙어있어 곱씹을수록 만만찮은 이미지즘을 이루고 있음을 알수가 있다. 어쩌면 한영남시인이 자신의 한계라고 느껴지는 시적탈출구를 이번 근작시들에서 절충과 이률배반적인 모험으로 새롭게 헤쳐나가가려 하는 그런 과감한 행보가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일찍  을 보여주고저 철학가이며 정치가였던 폴 미셀 푸코는 전생을 끊임없는 노력을 통하여 결국 이라는 온갖 비난과 모욕까지 다 들어가면서도 끝까지 아주 겸손한 하나의 사고방식만을 우리들에게 제시하여 준적이 있다. 그러한 장인정신이 돋보이는 까닭은 오늘도 개혁의 행보는 매 한발자국마저 조심스럽다는 그런 이야기로도 될수 있을것 같다 . 예술의 소외는 억압이 아닌 승화라고 말한 학자가 있다. 이렇듯 한영남시인의 새로운 행보, 즉 새로운 시도는 지속적일지 아니면 계획적인 잠시적 은페일지는 우리모두 조금 더 시간을 두고 조심스레 지켜보아야 할것만 같다.   지성의 씨앗, 그리고 균열의 사고속에서 건져보는 자연과 삶의 찡한 감동          는 말이 있다. 비범한 자질은 시인으로 하여금 몸담그고 있는 사회나 어떤 현상에대하여 가끔 강렬하게 반응하게 하고 또한 기대 이상으로 자신만의 새로운 세계를 꿈꾸게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공상들은 시인으로 하여금 불쑥 사회로부터 완전히 소외시되는듯한 그러한 고통을 안겨주기도 하며 가끔 병적인 상태로 몰아가기도 한다. 여기에서부터 해방되기 위하여 시인들은 작품을 창조하고 산고(产苦)하는 세월을 보내야 하는 그런 운명이기도 하다. 예술분야에서, 특히 언어예술부문에서 시인의 경우 그런 비극적인 음영은 더욱 짙으며, 그러한 비극의 중심에는 항상 광기의 그림자가 손을 드리우고 있다…p 브르노의 말 한마디를 개조하여 인용해본다. 한영남시인의 이번 근작시를 살펴보면 한마디로 이라고 하여도 아마도 무방할것 같다. 조금 더 진부하게 첨부되였고 나름대로 더욱 깊이 있게 느껴지는것은 삶과 자연속의 새로운 마찰속에서 느껴지는 시인의 그 애절하고도 가슴이 찡한 감동, 즉 뼈에 맺혀 아픔으로 여린 가슴에 되 돌아 울려오는 그런 공명감이 더욱 커진듯한 느낌이 든다. ㅡ 그럼 아래에 잔잔한 서정을 배경으로 하여 인문적 휴머니즘품격을 고차원으로 승화시켜 놓은  한영남시인의 시 몇수를 우리 함께 더 살펴보고 가도록 하자   오월 오후 해가 줄 볕 다 주며 느릿느릿 서산가 머물고   멀리 저리 하느작이는 풀잎들은 연초록 아니라도 좋으련만   하필 하얀 구름들이 또 푸른 하늘 걸려 시름없고   휘이 휘이 바람 부드런 손 내 땀이마 쓸어주는데   이일 저일 고향 옛일들 떠올라 울어버리고 싶네 전문이다          이 시의 제1련에서  텍스트의 모티브로 추정이 되는 /오월/오후/해가 줄 볕 다 주며/느릿느릿 서산가 머물고/는 재치있고 간결하게 설정한 환경묘사가 남달리 돋보이며  이 시적화자로 대두된 이 시의 잔잔한 흐름을 따라가노라면 제2련에서 별로 큰 소망도 아닌 어쩌면 너무나도 소박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하느작이는 풀잎은/연초록이 아니여도 좋으련만/에서는 여리고 깨끗한 시인의 고백이 읽는이들의 가슴을 뭉클하게도 하며 특히 3련에서 /하필/ 하얀/ 구름들이 또/푸른 하늘에 걸려 시름없고/에서 은 잠시 전략적으로 굴절되여 있고 /구름들이 또/푸른 하늘에 걸려 시름없고/로 다시금 이미지를 집중시키였다가  마침내 제 4련에서는 벌써 눈물이 보이기 시작하는 /휘이/휘이/바람 부드러운 손/내 땀이마 쓸어주는데/로 단단히 초점을 모아놓고서 마침내 제5련에서 /이일/저일/고향 옛일들 떠올라/울어버리고 싶네/로 을 극대화시킨다.  모두 알다싶이 제목자체가 이고보니 시적화자가 견인해낸 은 시인을 울리기에 너무나도 충족하며 더불어 읽는이들의 가슴까지도 툭툭 건드려 공명감을 생성해가는 그런 효과음이 큰것 같다. 부킹된 휴먼드라마는 아니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군더더기 하나없이 간결하면서도 운치가 철철 넘쳐 흐르는 이 시는 아마도 필자로써는 오랜간만에 읽어보는 좋은 시라는 생각이 든다. 1967년도생인 한영남시인은 양띠, 필자보다는 한살 이상 , 한영남시인에게는 아마도 남들이 아직 알지못하고 있는ㅡ 어쩌면 시인 혼자 평생을 울어도 결국 다 울어버릴수 없는 그런 가슴 아픈 옛이야기들과 아직도 굴벰이 죽죽하도록 아리고 쓰린 상처가 고스란히 남아있는듯한 그런 느낌이 들기도 한다.   어느날 흐르는 눈물이 말라 내 앞에 놓인 접시에 한줌의 소금으로 고스란히 놓인다면 아직은 짠맛 모르는 당신에게 공짜로 드리겠습니다 상처의 이름뿐이 아닌 사랑의 이름뿐이 아닌 긴 세월 그 이름으로 모두 드리겠습니다 살아가면서 이제 더는 바보처럼 울지 아니하도록 혼자 아프지도 아니하도록 두 손 모아 매일 기도하며 내 앞에 놓인 소금 한접시   내 눈물이 말라비틀어진 소금 한접시를 당신께 그냥 드리겠습니다 하얀 소금으로 당신곁에  남겠습니다   전문이다         눈물이 말라 한접시의 소금을 완성하려면 얼마만큼의 시간이 소요되고 또한 얼마만큼 애간장을 태워야 할지 필자로서는 알수조차 없지만 그렇게 완성이 된 눈물의 소금 한접시를 시인은 결국 /아직은 짠맛 모르는 당신에게 꽁짜로 그냥 드리겠다/고 고백한다. 특히 5행과 11행사이에서 /상처의 이름뿐이 아닌/사랑의 이름뿐이 아닌/긴 세월 그 이름으로 모두 드리겠습니다/로 재강조하여놓고 /살아가면서 더는 바보처럼 울지 아니하도록/환자처럼 /아프지도 아니하도록/두 손 모아 기도하며/내앞에 놓인 소금 한접시/를 /결속구인 제일 마지막 두련에서 /내 눈물이 말라비틀어진 소금 한접시를 당신께 다 드리겠습니다/하얀 소금으로 그냥 당신곁에 남겠습니다/고담담히 마무리한다. 여기서 하얀 소금은 말그대로 쓰나미처럼 하얗게 가슴에 다가와 읽는이의 가슴마저 너무 쓰리고 아프게 한다. 한수의 시에 왜 이처럼 많은 독자들이 웃고 또 우는지 한영남시인의 이번 시를 읽으면서 조금 알것도 같다는 그런 느낌이 들기도 한다.   가면 세상 열리나 오면 세상 닫히나   열흘 열사흘 한해 두세해   맨날 그리다 행여 만나도   말도 못하고 손도 못잡고   그냥 그리움밖에 끝내 서글픔밖에   가면 세상 깨지나 오면 세상 터지나 전문이다          간다고 허망 열릴 세상이 아니고 온다고 쉽게 닫힐 그런 세상이 아님을 번연히 알면서도 시인의 각도로 살펴보는 허무와 공허의 불안한 요소들, 즉 가상적인 현실속에서 어찌보면 어젯날 이룰수 없었던 열련과의 뜻깊은 상봉, 혹은 그러한 갈구를 특히 3,4,5련에서 /맨날/그리다/행여/만나도/말도/ 못하고/손도/못잡고/그냥 /그리움밖에/끝내/서긑픔밖에/에서 시인의 특수한 애증표달을 표면만이 아닌 내면속의 진지한 감정으로 곧바로 승화시켜놓고서 제목자체에서 이미 독자들의 머리속에 미리 각인시켜놓은 을 자연스럽게 떠올려가면서 결국 /세상이 깨지나/세상이 터지나/로 이미지 총집합을 시도한듯한 그런 느낌이 들기도 한다.   마무리하면서         력사는 련속적이면서 동시에 불련속적인 특성을 띤다 . 이번 한영남시인의 근작시중에는 이외에도 > 등등 여러수의 시가 더 있지만 시간상 관계로 여기서 필자는 더 언급하지 않겠다. 이상 몇수의 시에서 살펴볼수 있는바 한영남시인의 근작시는 어쩌면 모험을 시도로 점층법과 겹쳐그리기 기법으로 완성 된것이 많으며 대부분 시들이 또한 한폭의 작은 우주를 손바닥우에 올려놓고 오래도록 음미와 감상의 긴 여운으로 길게 남기려하는 시인의 대담한 시도가 엿보이기도 한다. 더불어 오래도록 지속되여 온 구조주의적 모더니즘 사색에서 새롭게 탈출해보려는  시인의 굵직한 몸부림을 읽을수가 있어 무척 고무적이라는 그런 생각이 든다.  그럼 우리 다 함께 여기서 모더니즘 특성과 그 일곱가지 개념을 조심스럽게 잠깐 살펴보도록 하자. 첫째, 모더니즘은 도시주의를 지향한다. 보들레르의 파리, 조이스의 더블린, 엘리어트의 런던, 도스패소스의 뉴욕 등등은 대체로 모든 모더니스트들은 자연이 아닌 도시적 삶의 문제를 형상화로 하였다. 둘째, 모더니즘은 공업기술주의를 지향한다. 기술세계란 도시적 삶의 토대라고도 할수 있다. 특히 립체파, 미래파, 다다이스트들이 무엇보다 강조한것이 기술성이다. 셋째, 모더니즘은 기술세계가 보여주는 그런 특성과 관계가 있는 비인간화를 지향한다. 비인간화는 오르테가 익가세트에 의해 현대예술의 기본개념으로 리론화된적이 있다. 넷째, 모더니즘은 원시주의를 지향한다. 원시주의란 추상화 된 삶,  현대시의 기본원리로 나타나는 은유나 상징 등도 이런 맥락우에 서 있다. 다섯째, 모더니즘은 에로티시즘을 지향한다. 따라서 모더니스트들의 과제는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갈등을 해결함에 있었다 여섯째, 모더니즘에서 읽을수 있는것으로는 반도덕성을 들수 있다. 이른바 도덕률을 페기하는것은 현대미학이 삶의 도덕적 기초의 와해에서 출발하기때문이다. 일곱째, 모더니즘은 실험주의를 지향한다. 시간적 질서에 대한 회의, 따라서 모든 시간성을 공간으로 인식하려는 동시성의 개념이기도 하다.   시는 엄격히 말해서 독백의 양식에 속한다. 따라서 시에 대화의 양식을 활용하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필자로서는 궁금하기도 하다. 시에서 이중적구조법과 다성적 언어를 사용하면 곧바로 전통적인 시 쟝르의 해체라는 문제와 우리는 맞닥뜨리게 된다.아무튼 한영남시인의 실험적이고 모험적인 이번 시적 행로가  좋은 결실을 맺기를 두 손 모아 기원해 본다.                                                              심양에서 2014년4월26일 发表于黑龙江新闻 7月11日第2版
5    [평론]기수(旗手)는 바람이 없으면 달려간다 댓글:  조회:3885  추천:16  2014-04-06
  [평론]기수(旗手)는 바람이 없으면 달려간다            2014년 장백산 제2기  김철호시인의 근작시를 읽고                                          평론 허인                                      머리글      요즘 신문잡지를 펼쳐들면 심상찮게 자주 마주치는것이 아마도 김철호시인님의 주옥같은 시작품들인것 같다. 어찌보면 오늘날 줄거리가 없고 한낱 표백된 아픔마저 버젓이 상품이라는 브랜드 마크를 달고서 콩나물이나 숙취나물처럼 슈퍼에 나란히 진렬되는 그런 무병신음의 가짜시가 아니라 읽을수록 알맹이가 꽉 차서 마침내 읽는 이 혼자서는 그 모든것을 감당하고 만끽하기엔 너무 아름차고 또한 즐겁기도 한 ㅡ 그래서 누구라도 상관없이 독자들과 함께 조금이라도 나누고싶은 심정에서 이 글을 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필자가 알건대 김철호시인님은 저명한 아동문학작가님이시다. 그런 그가 최근 들어 이 몇년사이 우리 조선족시단치고는 제일 먼저ㅡ 어쩌면 남들보다는 한발 앞서 파편문체와 포스트모더니즘을 깊이있게 연구를 끝마치고서 마침내 자신의 깔끔한 성미에 알맞게 개성있게 현대시를 쓰고 있는 그런 시인이 아닐가 필자 나름대로 생각해본다. 매번 김시인이 자신있게 내여놓는 한수 또 한수의 무게감이 있고 테마가 굵직한 시작품앞에서는 오래동안 외곬인생을 고집하면서 수십년째 시를 써온 허다한 시인들마저도 손발을 내밀기가 저어되여가고 있는 그런 느낌이 들며 그 신비한 마력은 아마도 앞으로도 계속 쭈욱 이어질것만 같다. 그럼 여기서 2014년 잡지 제2기에 실린 김철호시인님의 주옥같은 시 7수를 우리함께 손에 손잡고 잠간 즐거운 려행을 다녀와보자   링크와 네트워크구축으로 스스로 아름답고 좋은 시      동서양 고금을 막론하고 어느 조대, 어느 시대에서나ㅡ 시인의 사상의식은 항상 미래 지향적이였으며 또한 드레시(漂亮, 幽雅)하게 자신만의 독특한 시어들을 창출,  랜덤하고도 더욱 디테일하게 드라이브코스(自驾游线路)를 스스로 구축해왔으며 더우기 새로운 언어조합속에서의 자률, 또한 지극히 러브 시(示好)한 이률배반속에서도 마스터피스(杰作)와 함께 항상 개혁이 동일시되여 왔었다는것을 누구나 쉽게 알수가 있다. 그리하여 그러한 미래 지향적인 행보는 오늘도 조심스러울수밖에 없으며 또한 과감한 개혁의 리론과 그 기능을 불러오는 중요한 단서가 곧바로 시인의 더없이 정확한 의사전달로써 길게 설명자면 멘트(话语, 台词)가 필요없는 기획적인 자아도전과 저돌적인 돌파, 즉 새로운 시어창출과 함께 변화한 자신의 모습을 여러모로 독자들앞에서 검증 받아야 하는 그런 데스트가 아닐가 필자 나름대로 조심스럽게 생각해본다. 아직 필자의 좁은 소견일지도 모르겠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을 정석으로, 또는 기초로 하여 단단히 밟고 더욱 높이 올라서려고 하는 기획적인 발전이지 결코 지극히 이률배반적이지는 않다는것이다. 그럼 우리 함께 김철호시인은 링크와 네트워크구축으로 어떻게 이미지즘을 완성해 가고 있는가를 살펴보기로 하자   그건 흠결이 아니였다 이중로출도 아니였다 틀림없는 유령의 그림자였다   물앉는다 요즘 그녀는 자주 물앉는다 복도에서도 거리에서도 벌렁벌렁 물앉는다   회사청사를 어깨에 메였다 19층청사가 어깨를 누른다 벌렁 물앉는다 8촌사진은 하나의 세상이다 그속에 19층청사,그녀의 어깨… 그녀는 어떤 유령에게 업혀있었다 그녀가 어떤 유령을 업고 있었다   이승너머에 숨은 삶이 보였다 그곳으로 가는 문이 보였다   새들은 보이지않는곳에 가서 죽는다 고 했다   전문이다      이 시를 읽고나면 김철호시인님은 남달리 수판알을 튕겨가면서 계산적으로ㅡ 혹은 의도적로 독자들을 위한 배려심이 크다는 것을 인츰 알수가 있다. 란 우리 말로 직역하면 귀혼(鬼魂), 혹은 유령(幽灵)인데 ㅡ 즉 을 읽고나면 마치 산 사람이 허다한 스트레스, 콜플렉스, 혹은 무수한 폴더, 아건강(亚健康)에 짓눌리워 유령처럼 이 세상을 허우적거리면서 살아가는 모습을 방불히 우리들 눈앞에 보이는듯이 그려놓고 있기때문이다. 첫련에서 과 이라는 단단한 부정뒤에 더욱 단단해져가는 긍정어 즉 /틀림없는 유령의 로출이였다/를 재치있게 등장시킨 이 시에서는 이미 전반 시적 흐름의 또렷한 륜곽을 벌써 독자들에게 명확히 잡아주고 있는 그런 특징이 있다. 그리하여 제 2련에서는 마침내 /물앉는다/요즘 그녀는 자주 물앉는다/복도에서도 거리에서도/벌렁벌렁 물앉는다/로 독자들에게 다시한번 암시의 태도를 슬쩍 더 보태주었으며 여기서부터 가 시적화두로 대두된 이 시의 흐름 즉 그 루트를ㅡ 의식과 무의식의 딸깍거리는 구두소리를 따라서 조심스레 걸어가노라면 더욱 큰 의식세계와 무의식세계의 이중구조속으로 독자들은 저도모르게 냉큼 빨려 들어가게 된다.      왜냐하면 뒤에 더욱 큰 이미지즘이 독자들을 기다리고 있기때문이다. 제3련에서 /회사청사를 어깨에 메였다/19층청사가 어깨를 누른다/에서 볼수 있다싶이 새로운 이미지로 등장한 , 정확히 를 어깨에 메였고ㅡ또한 /어깨를 누르고 있기때문에/그녀는 벌렁 물앉는다/는것을 누구나 쉽게 알수가 있다. 다음 가상현실속(혹은 영정사진과도 같은)의 클로즈업된 또 다른 하나의 색다른 세계ㅡ 즉 /8촌사진은 하나의 세상이다/그속에 19층청사, 그녀의 어깨…/가 있고 여기에서 다시금 첫련에서부터 강한 힌트를 주었던 그 유령을 재치있게 재등장시키면서 /그녀는 어떤 유령에게 업혀있었다/그녀는 어떤 유령을 업고 있었다/면서 어딘가 19층청사를 소유하고 있음직한 정도면 그냥 보통 인물이 아닌듯한 어떤 녀인의 전쟁과도 같은 치렬한 삶의 한장면뿐만 아니라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인간들의 본능적인 도전정신, 또는 그러한 삶의 애환을 반복구사법, 겹쳐 그리기기법을 동원하여 시어와 시어사이를 재치있게 링크(련결), 또는 의식과 무의식의 조용한 흐름을 통하여 자의도 타의도 아닌 늘쌍 객관적인 립장에서 시종여일하게 한폭ㅡ 또 한폭의 그림을 완성해왔음을 우리는 비로소 알수가 있다.      특히 제4련과 제5련에서는 한술을 더 떠서/이승너머에 숨은 삶이 보였다/그곳으로 가는 문이 보였다/새들은 보이지 않는곳에 가서 죽는다/고 했다/면서 결국 삶과 죽음의 사이는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것이며 또한 종이 한장 차이일뿐ㅡ 어쩌면 죽음마저도 삶의 또다른 연장선일수도 있다는것과 현시대 삶의 치렬한 경쟁의식을 시인은 비관도 긍정도, 부정도 아닌 제3자의 립장에 서서 담담하게 토로하고 있는 그런 양상 보여주고 있다. 이 시의 특징은 다선이 고리이기때문에 시인의 의식은 그 어떠한 관념에도 묶이지 않고 있으며 또한 시인은 연출자인 동시에 제작자이기때문에 읽을수록 호흡이 자유로운  그런 장점이 있는것 같다. 아무튼 김철호시인님의 은 오랜간만에 읽어볼수 있는 속이 꽉 차고 통통 잘 여문 좋은 시라고 필자 나름대로 생각해본다.   그럼 아래에 은유의 상징으로 이미지집성을  완성시킨 이라는 시 한수 더 보고 가자.   벽에 기대앉았는데 벽이 무너진다 벽체에 깔려 납죽해진 그를 잡아당긴다 납죽한 다리가 뽑혀나오고 납죽한 팔이 뽑혀나오고 납죽한 가슴, 배 ,머리는 그냥 벽체밑에 깔려있다 두렵지도 않은가보다 누군가 또 벽에 기대인다 벽이 쿵 무너진다 누가 또 벽에 기대인다 벽이 쿵 무너진다 누가 또 벽에 기대인다 벽이 쿵 무너진다 무너진 벽체에 그가 깔려있다 잊어졌던 그가 있다 나도 있다 납죽 깔려 납죽해져 있다   의 전문이다.      여기서 은 무엇을 의미할가? 필자가 보건대 그건  아마도 어디엔가에 자꾸 기대고싶어하는 인간의 나약한 요행심리와 껌딱지처럼 다닥다닥 심장에 와붙는 상표도 아닌 무정한 들을 은유적으로 상징한것이라고 생각된다. 특히 첫련에서 /벽에 기대앉았는데 벽이 무너진다/로부터 시작하여 이 시는 줄곧 /벽이 쿵 무너진다/를 여러차례 반복해가면서 나역시도 피해자가 될수 있임을, 결국 이 세상 그 누구라도 자칫하면 똑같은 피해자가 될수 있음을 깔끔하고 간결하게 표현한것 같다. 조지p 란도의 《하이퍼텍스트3.0>> 말씀중에서의 한마디다. 댓글을 받아본 사람이면 아마 누구라도 쉽게 동감이 가는 그런 좋은시 라는 생각이 저절로 첨부되여가고 있는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예술이란 한 대상이 예술적임을 의식적으로 경험하기 위한 수단일수록 더욱 아름답다.   너는 왜 하늘 향해 누워있니? 너는 왜 땅을 보며 누워있니?   하늘엔 뭐가 있니? 별이 있다 세상에서 가장 밝은 별 하 나 있다 그럼 땅엔 뭐가 있니? 별이 있다 세상에서 가장 은근한 별 하 나 있다   하늘의 별과 땅의 별이 만나려고 무지개 통로로 마주 달려간다 너무 빨리 달리다보니 그만 서로 부딪 쳐 산산조각난다   별의 파편 수많은 별이 되여 흩날린다 하늘과 땅 사이에 은하수가 펼쳐진다 별들의 원무가 시작된다      전문이다. 이 시는 브레인스토밍과도 같은 자문자답과 럭셔리한 역설로써 수많은 새로운 들의 탄생과정을 그림으로 그려놓고 있으며 더불어 우주의 진면목 즉 시인의 세계관을 독자들로 하여금 엿볼수 있게끔 하고 있는것 같다. 특히 제1련에서 /너는 왜 하늘을 향해 누워있니?/로부터 시작하여 와 가 서로 만나려고 마주 달려가다가 그만 부딪치면서 산산조각이 나며 드디여 별의 아름다운 원무를 연출자가 아닌 관중이 되여 희망으로 지켜보고 있는 작자의 성숙된 모습을 엿볼수가 있게끔 시야를 넓혀주고 있는상 싶다. 그럼 여기서 은 도대체 무엇일가? 그건 희망이래도 좋고 또한 미래라도 좋고 아무튼 독자가 선정하기 나름이니깐 구태여 더 길게 설명하지 않으려고 한다      다음 (秀吟)과 는 맥락을 같이하는 그런 파워플한 시라고 해도 아마도 무방할것 같다./정글엔 길이 없다/그러나 그녀는 그곳에 발을 내디뎠다/로부터 시작하여 제일 마지막 결구에서 볼수 있다싶이 /정글에 그녀의 길이 생겼다/로 마무리되였고 에서는 /이제는 녀자가 없는 그, 바다로 간다/로 멋지게 캐릭터를 시작하여 제1련 4행에서 다시금 자연스럽게 /수평선을 베고 누워있는 붉은 녀인/즉 언덕 ,혹은 사막을 떠올리게 하였으며 /그러나 이제는 녀자보다 높은 바다가 있다/그는, 바다는 실패를 모를것이라고 생각했다/로 인생행로의 이러저러한 고달픔과 또한 각근한 노력은 반드시 리상적인 결실을 맺기 마련이라는 작자의 독특한 진리를 이 두수의 시에서는 펼쳐 보이고 있는듯 싶다   남자라고 생각해도 틀린다 녀자라고 생각해도 틀린다   누에고치가 퍼렇게 익어 헐벗은 떡갈나무 그늘 잃은 큰 나무,뿌리 살아숨쉬는데 태양은 구름우에 숨어 찬 입김 뱉는구나   밤, 그 힘찬 몸부림 새벽, 그 벅찬 울부짖음 한낮, 그 거창한 춤…   파도는 저 거창한 바다를 만난다 파도는 높은 하늘을 만난다   절름발이 양잠인 50원에 황성옛터 잘 팔아 먹고 누에고치줏는  계집들의 웃음소리 언덕 허무는데 대석하에 비낀 장수의 그림자파도따라 춤 추누나 강물은 날 선 칼이 되여 력사를 두쪽으로 가 르누나   태양은 언제나 동쪽에서 뜬것만이 아니다 별은 어두운 하늘에서만 반짝인것이 아니다 하늘 만리서 무지개 나래펴고 바람은 손가락 튕기는 사이에 천리땅을 씻는구나   그러니 남자라고 생각해도 된다 녀자라고 생각해도 된다 힘과 힘의 만남 숨과 숨의 겨룸   푸른 누에 기여온다      전문이다. 다시 봐도 거대하게 느껴지는 아름찬 몸집, 제1련에서 단단한 부정과 함께ㅡ 정물화기법, 모자이크기법으로 씌여진 이 한수의 시가 갖는 함의는 참으로 방대하다는 그런 느낌이 든다. 그럼 우리함께  이 한수의 시에서 링크(련결)와 네트워크(리좀)가 어떻게 이미지즘을 형성하고 있으며 또한 텍스트를 어떻게 조성해가고있는가를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첫련에서 이미/ 남자라고 생각해도 틀린다/녀자라고 생각해도 틀린다/는 단단한 부정으로 시작된 이 시에서는 남자, 녀자, 누에고치, 떡갈나무, 그늘, 나무, 뿌리, 태양, 구름, 입김, 밤, 몸부림, 새벽, 울부짖음, 한낮, 거창한 춤, 파도,바다, 하늘, 절름발이, 양잠인, 황성옛터, 계집, 웃음소리, 대석하, 그림자, 강물, 칼, 력사, 동쪽, 별, 무지개, 바람, 손가락, 천리땅, 힘, 만남, 숨, 푸른 누에 등 40여개의 명사뒤에 접사 혹은 동사를 붙여 력사속의 을 현실속의 과 그 해학적인 50원, 그리고 로 조금은 익살스럽게 완성시킨 그런 느낌이 든다. 앞에서도 이미 말을 했지만 제 1련에서 단단한 부정어/남자라고 생각해도 틀린다/녀자라고 생각해도 틀린다/로 시작된 이 시의 제일 마지막 결구에서는 /그러니 남자라고 생각해도 된다/ 녀자라고 생각해도 된다/로 다시금 재치있게 부정했던것들을 다시금 재긍정해가면서 /힘과 힘의 만남 숨과 숨의 겨룸/ 을/푸른 누에가 기여온다/는 자연현상으로 아이러니하게 마무리하고 있다. 모두 알수가 있듯이 시제가 이고보니 력사와 현실을 하나 또 하나의 참조물로 관조해가면서 객관적으로 이미지완성을 집대성시킨 한폭의 좋은 그림, 방대한 이미지즘이라는 생각이  든다      제일 마지막 시인 (冬至)에서 /하늘에 /수만개의 달/뜨는 날/슬픈 이에겐 /너무너무 긴/기쁜이에게는/길어도 짧은/이런 표현은 참으로 특이하고 기발한 착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김철호시인님의 근작시들을 읽노라면 마치 화면이 깨끗한 고화질의 티비를 보는듯한 느낌이 들어서 너무 좋다    마무리하면서      오래동안 우리 시단을 지배해온 단선구조의 틀을 과감히 벗어나 다선구조의 틀로, 어젯날 시인의 독백적인 서술을 객관적인 이미지로, 정적인 이미지를 또한 동적인 이미지로, 시의 주체에서 시인자체를 이미지의 편집자로 바꾸어보려는 김철호시인님의 개혁성(改革性)은 그야말로 놀라울만큼 계획적이고 또한 그 기초가 믿음직하게 단단한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우리 이 시대의 개혁은 누가 뭐라해도 언제나 소수의 사람들이 앞장서기 마련이다. 그럼으로 하여 기수는 바람이 없으면 앞장서 달려 가야 하는것이 오늘날 현실이기도 하다. 그래야만 그 기치가 더욱 선명하지 않을가 나름대로 조심스럽게 생각해본다. 아무튼 이번 2014년 제2기에 실린 김철호시인의 7수의 시작품은 마치 방대한 시리즈가 되여 거대한 이미지즘을 이루고 있는듯한 그런 느낌을 주며 또한 난해한듯하면서도 읽을수록 가슴에 와닿는 그런 공명감이 크고 한수 또 한수의 시가 꼭마치 통통 잘 여문 볍씨와도 같다는 그런 느낌을 주고 있다. 미숙한 점이라면 지나치게 완전무결을 추구하는 느낌이 들며 또한 무엇을 강조하려고 하는데서 부피가 커져가는듯한 그런 양상이 더러 있는것 같다. 아무튼 새로운 한해 새로운 시점에서 김철호시인님이 더욱 좋은 성과를 이룩하여 가시길 심양에서 두손 모아 진심으로 축원해본다    2014년4월5일 심양에서
4    [평론]사랑의 북채로 별을 두드리는 시인 댓글:  조회:3423  추천:10  2014-04-01
사랑의 북채로 별을 두드리는 시인   ㅡ홍순범시집에 부치는 편지ㅡ                                         [평론]허인                    들어가면서      우리 속담에 는 말이 있다. 대개 북방시단 시인들의 시를 꼼꼼히 살펴보면 어딘가 진솔하거나 혹은 조금은 난해한 그런 특징이 있는것 같다. 그 뿌리를 끝까지 파 헤쳐보면 아마도 우리 중국조선족시단에서 평생을 현대시보급에 투혼을 발휘해온 고 한춘선배님과 현재까지 사실주의, 초현실주의 창작기법으로 로익장을 과시하고 계시는 강효삼선배님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가 아닐가 필자나름대로 조심스럽게 생각해본다. 초, 고중시절부터 줄곧 좋은 시작품들을 신문잡지에 발표해온 홍순범시인이 드디여 재작년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시집 를 출판하였다. 주옥같은 한수 또 한수의 격정에 차 넘치는 좋은 시들, 본의 아니게 십여년을 문학과 쭈욱 담을 쌓고 살아온 필자는 오늘에야 비로소 흥분된 마음으로 그의 시집을 펼쳐든다. 1970년생인 홍순범시인은 흑룔강성 화천현 성화조선족향출신, 책을 내면서 시인은 이렇게 적고 있다.      이러한 독백은 독자들이 홍순범시인을 리해하는데 좋은 스토리가 되고 있으며 더불어 시인과 독자간의 소통에 장애물이 없을을 표명해주는 좋은 근거라고 생각해 본다. 그럼 우리 함께 홍순범시인의 시세계로 함께 즐거운 유람을 잠시 다녀와 보자   은유의 상징성과 하이브리드의 새로운 구현   세상에서 가장 큰 북이 목청을 앗긴채 서서히 죽어간다   유서도 없이 청산에 틔우던 목소리를 도회지에 잃으며   네가 박고 내가 치고 울릴것만 같지만 소용없는 북은 한스러운 가슴만 쥐여뜯는다   아픔으로 꼬집을수 있다면 그런데 손이 닿치 못한다   굶은 북은 날이 갈수록 여위여간다 살창없는 감방에서 죽음을 숙명같이 읊조리며 내용 없는 소리를 뜻없이 연주한다     의 전문이다     상징주의적 거장 보들레르는 통속적인 언어는 무릇 일차적이야 하고 예술적인 언어는 그 반면에 더욱 다차원적이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은유의 상징과 하이브리드(이미지의 집합적 결합)의 새로운 구현을 시도로 하는 홍순범시인의 시론적 립각점을 잘 보여준 이 시에서ㅡ 은유의 상징이 된 ㅡ“북”은 이상하리만치 천개도 만개도 아닌 /세상에서 가장 큰 북이 되여 /청산에서 목청 틔우던 목소리/를 /도회지에서 잃어가며/결국 /굶은 북이 되여 /살창없는 감방/이라는 너무나도 비좁은 삶의 공간에서 마침내 /내용 없는 소리를 읊조리며/뜻없는 연주소리/라는 다소 본격적인 이미지를 통하여 현실속의 삶의 음영을 자연스럽게 절망만이 아닌 성스러운 죽음에 련결시켜 관조해가면서 생의 애달픔과 그러한 생활속의 절실한 갈증들을 누구나 조심스레 다시한번 되돌아보게 하고 있는것 같다.그럼 여기서 이라는 상징물, 즉 ㅡ 하나의 주제를 둘러싸고 직조되여 있는 홍순범시인의 역설적인 언어와 또한 여러갈래 이미지조합을 통해서 우리는 쉽게 시적 화자가 전달하려고 하는 짙은  삶의 의미를 추적해 낼수 있으며 시인의 뜨거운 숨결과 함께 상상의 나래를 마음껏 펼칠수도 있다. /청산에 목청 틔우던 목소리/를 /도회지에서 잃어/버린 북소리는 과연 무엇일가? 필자가 생각하건대 그건 아마도 시인의 젊었을적의 크나 큰 포부였으며 또한 잃어버린 어제날에 대한 애틋한 동경이 아닐가 싶다. 이 시는 조금 직설적이기는 하지만 읽을수록 아름다움을 영위하기 위한 북소리가 둥둥 가슴에까지 울려퍼져 공명감이 커지는 좋은 시인것 같다 . 그럼 여기서 사실주의 창작기법을 기초로 한 다른 한수의 시 를 우리 함께 더 살펴보자     사랑만 메고 지구촌에 온 날 하루에 애모쁨을 몽땅 심는다더니 그만 진토에 정이 들어 발목이 잡히여 여기 저기 혼이 된 생명   나와 님이 불어 올린 송이송이에 꿈처럼 하얗게 피여나 멀리 전한 메아리로 봄노래에 지친 정   잔정에 진정마저 몽땅 바치여 파란 하늘을 덮을때 진심을 더 못 준듯이 오늘도 이 산 저 산 헤맨다   전문이다      민초의 삶을 노래하기엔 , , 만큼 우리들의 심금을 깊게 울려주는 시제는 아마도 그리 흔치를 않을것도 같다. 어찌보면 이제는 조금 식상하지 않을가 하는 우려심이 들기도 하지만 홍순범시인의 시 는 그렇치도 않다 . 조금 미흡한 견해일지도 모르겠지만 필자가 생각하건대 무릇 시는 시에서의 옹근  주제를 너무 로골적으로 드러내지 말아야 하며 또한 시인의 깊이 있는 사유와 그러한 잠재의식, 즉 꿈틀거리는 시적 욕망들을 모두 이미지로 바꾸어 움직이는 그림으로 표현하여 한다고 생각된다. 바꾸어 말하면 이미지속에 자신의 그러한 생각들을 깡그리 녹여버릴줄 아는 사람이 곧바로  시인이라는 말이라 해두겠다. 이 시에서 /사랑만 메고/지구촌에 온 날/은 표현이 산뜻하고 심성이 맑아 읽는 이들의 심금을 한꺼번에 사로잡는 좋은 시구인것 같다. 즉 끌려가는것이 아니라 끌고 갈줄 아는 홍순범시인의 재치ㅡ 그럼으로 하여 그 뒤에 자연스럽게 팔짱 끼고 달려오는 애모쁨, 진토, 정, 등등은 을 이루고 있어/이 산 저 산 /헤매여도/ 결국 만이 아닌 인생에 대한 찬가(赞歌)로 깔끔하게 막을 내린다 . 조금 아쉬운 점이라면 제일 마지막 련 /이 산 저 산을/헤맨다/에서/이 산 저산을/헤매는 작은 손/혹은/노란 입술/로 바꾸어 표현하였더라면 더욱 좋지 않았을가 생각해본다. 필자와 홍순범시인의 상봉은 아마도 20여년전,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러니깐 흑룡강성조선족작가창작위원회 설립대회때 할빈에서였던것 같다. 무상한것이 세월이라더니 어느덧 중년의 문턱에 올라서서야 다시금 인터넷에서의 뜻깊은 상봉, 새삼스레 어제날이 그립고 또한 감개무량해남을 어쩔수 없다. 그럼 아래에 홍순범시인의 시 를 조심스레 잠간 더 살펴보자     세월의 황이 든 흔적조차 모르고 사랑을 얼기설기 그리던 어미거미   어느새 타오르던 화독은 꺼지고 고목의 뿌리로 흔드는데   (그대가 업고 온 꿈싹은 따스한 해비에 거목으로 키 넘었어요)   지금에 와서 아름드리 거목들에 열매들이 주렁졌는데   그것조차 떨어질가 또다시 숨죽여 드리는 깡깡 마른 껍질의 기도   전문이다      여기서 어머니의 형상은 제1련에서/세월의 황이 든/흔적조차 모르고/사랑을 얼기설기 그리던/어미거미/로 잠간 원형을 나타냈다가 제 2련에서는 인차 /어느새 타오르던/화독은 꺼지고/고목의 뿌리/로 변형되여 동사 로 잠시 결속되였고 제3련에서는 독백으로 살그머니/그대가 업고 온 꿈싹은/따스한 해비에/거목으로 키 넘었어요/라고 조심스레 귀띔해주고나서 제 4련에서는 /주렁진 열매/로 자식들의 성장을 은유적으로 표현하였으며/ 여기서 존속적인 결구가 된 제5련에서/그것조차 떨어질가/또다시 숨죽여 드리는/깡깡 마른 껍질의/기도/로 어머님의 자식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애정을 생동하게 묘사하였다. 이 시의 장점은 가상현실의 소설적인 서사를 통하여 어머님의 형상을 꼭마치 보는듯이 그려놓아 읽는이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고 있으며 또한 인지상정과 더불어 모성애의 위대함에 다시한번 숙연해지게 머리 숙여지는것을 어쩔수가 없는것 같다. 필자가 생각하건대 홍순범시인의 시에서는 창작기법은 그닥 중요하지 않은것 같다. 그보다 더욱 중요한것은 숙련된 필체나 글자유희가 아니라 독자와의 공명감이 아니였을가 필자 나름대로 조심스레 생각해 본다. 이상 몇수의 시들에서 볼수 있는바 홍순범시인은 은유의 상징성에 남달리 독특한 시각적 견해를 갖고 있으며 또한 하이브리드의 새로운 구현 즉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많지 않은 시인중의 한사람이라고 필자 나름대로 생각해본다. 그럼 여기서 홍순범시인의 이번 시집에서 주축을 이루고 있는 를 잠간 더 보고 가자   바다는 마치 속삭이는것 같다 행복해야 할 내가 슬퍼해야 한다고 바다는 나에게 속심을 터놓는다   또렷한 목소리가 없지만 나는 큰 귀가 되여 꿈씨앗을 심는 이랑에 젖어간다   나는 그래서 바다가에 가면 말을 배운다 싫지만 산다는것을 다시다시 시작한다 기억에 희미한 너에게   전문       독백성이 강한 이 시는 주제의식이 명확하고 그 태도가 더욱 진솔하다. 진솔하기에 그만큼 울림이 크고 또한 진취적이 아닐가 생각해 본다./바다는 마치 속삭이는것 같다/행복해야 할 내가/슬퍼하여 한다고/왜서 /슬퍼해야할가/가 시적화자로 대두된 제1련에서 시인은 벌써 진솔하게 자신의 속심을 아낌없이 터놓고 있으며 제2련에서는 다시 /또렷한 목소리가 없지만/나는 큰 귀로/변형이 되여가고 /제 3련에서 /나는 그래서 바다가에 가면/말을 배운다/싫지만 산다는것을/다시다시 시작한다/ 한다고 인생의 허다한 무가내와 희노애락을 노래처럼 설파하여 간다/그러면서도 마지막까지/기억에 희미한 너/이기에 이 세상의 진지한 사랑은 결국 랑만만이 아닌 아픔일수도 있다는것을 독자들의 가슴속에 깊이 심어놓고 또한 귀띔하여 주고 있다. 아무튼 늦게나마 홍순범시인이 통통 잘 여문 시들로 이번 시집을 묶어낸데 대하여 심양에서 아낌없는 박수갈채를 보낸다.   이 세상 아름다운것의 탄생에는 무릇 그 신비함과 무한한 마력이 있다        시란 독자들에게 어떤 통일적인 해석을 요구하는것이 아니라 시인자신의 의식의 흐름을 아름답고 생동한 그림 그대로 그려가는것이다. 마치 화가는 속사와 스케치를 통하여 아름다운 한폭의 그림을 완성해가듯이 시인은 령혼속의 랭혹한 의식과 무의식을 령감으로 총동원하여 한폭의 아름다운 그림을 글로써 완성해가는것이라고 말해야 할것 같다. 그래서 현대시는 이미지를 기본으로 하는 표현예술이라고도 한다. 영국의 비평가 시드니(Sir Philip Sidney, 1554-1586)는‘시를 비유적으로 말하면 가르치고 즐겁게 할 목적을 가진 “말하는 그림”(speaking picture)이다.’라고도 지적하였다. 도합 91수의 시로 [유몽계절]. [사랑은 파도처럼 나를 적시고], [밤별의 언어], [보고싶은 사람], [그리움],  [뜨거운 련인] 등 총6부로 엮은 홍순범시인의 이번 시집은 독자층이 얇은 오늘날 시를 사랑하고 아끼는 독자들이면 누구나 한번쯤 읽어보라고 권고하고싶은 좋은 책이다.      이 세상 아름다운것의 탄생에는 무릇 그 신비함과 함께 무한한 마력이 있기 마련이다. 중의/념불처럼 되뇌이던/열망의 추억/파랗던 어제가/사무치게 그립다/중에서 /봄이 오면 /내가 봄이 되여/파란 풀 같다/걸어봐도/아지랑이 있는것 같다/불러봐도/봄노래만 흐를것 같다/중에서 /나에겐/눈물이 나도록 고마운 /불멸의 길이 있습니다/중의 /님을 바라볼수 있는 좋은 날은/티끌 하나 부끄럽지않게/파란 하늘을 여는 날/닫힐듯한 보름달에/억수로 내리는 눈물을/석삼년 채워도/한이 없이 /기쁜 날/ 중의 /나의 시는 다시는/나의 시가 되지 말아야지/나를 죽여 나를 노래할수 있는/나의 시가 아닌 당신의 시가 되여야지/ 중의 /주소는 얼지 않았다/거짓말같은 태양에 홀려/하얀 이미지에 감격을 깨워/숙명으로 노래 부르는 /꽃잎이 싱싱한 집/ 등등은 간결한 표현에 숙련미가 돋보이는 좋은 시구절들임이 틀림없다. 그럼 여기서 반복구사법과 사실주의창작기법으로 재치있게 씌여진 홍순범시인의 시 한수를 더 살펴보고 가자   내 인생의 반쪽은 벼농사였는데 내 인생의 반쪽은 콩크리트가 되였소 내 인생의 반쪽은 반디불이였는데 내 인생의 반쪽은 네온등이 되였소   삼십년 하동 삼십년 하서 어쩌면 내 인생은 반쪽구름 저 재빛구름이 바람에 쫓기는 두서없는 하늘그림자   지금 나는 내가 농군인지 장사군인지 알수가 없소 어느 순간에 고무신을 벗고 뾰족구두를 투닥거리면서 명멸하는 불빛의 상해 네거리에서 요염한 향수에 취해 사는 주정뱅이   자신조차 모르면서 내 인생이… 어쩌면 놓쳐버린 밤중의 막차같고 차표는 뗐는데 플래트홈은 어딘지 눈길이 아물거려 역전은 보이지않고 취객진담의 에피소드같소   전문      예술이란 한 대상이 예술임을 의식적으로 경험하기 위한 좋은 수단일수록 더욱 좋다. 내 인생의 반쪽= 벼농사 내 인생의 반쪽= 콩크리트 내 인생의 반쪽= 반디불 내 인생의 반쪽= 네온등       여기서 누구나 쉽게 알아볼수 있듯이 정체성의 혼란에도 시인은 단단한 긍정도 부정도 아닌 객관적인 태도로 자신의 처지를 개괄하고 있으며 특히 제2련에서 /삼십년 하동/삼십년 하서/(十年喝东, 十年喝西)에 뒤이어/어쩌면 내 인생은 반쪽구름/저 재빛구름이 바람에 쫓기는/두서없는 하늘그림자/라고 마침내 개탄해가면서/3련에서 그러한 정체성의 혼돈끝에 마침내 /명멸하는 불빛의 상해 네거리에서/요염한 향수에 취해 사는 주정뱅이/로 자신을 다시 변형시켜가면서 /더이상 갈곳조차 없이 갑갑한 삶과 그러한 사회적 병증현상을/취중진담 에피소드같다/고 가슴 알알하게 마무리해간다/이 시를 읽고나면 시인의 체험은 단순한 개인적인것만이 아니라 사회적인 병페임을 잘 그려내고 있다. 이외에도 홍시인의 시집에는 ,. , ,, ,. 등 여덟수의 산문시들이 실려있는데 시간상 관계로 여기서는 더 언급하지 않으려 한다.   마무리하면서       이 세상을 아무런 욕심없이 시인으로만 살아간다면 과연 그 모습은 도대체 어떠할가? 요새 필자도 싱그러운 봄바람에 싱숭생숭해나는 얇은 마음때문인지 아침저녁으로 법글을 열심히 읽으면서도 고요하던 마음이 리유없이 번거로울때가 많아지고 있다. 이러한 정서파동마저도 시인에게는 창작에피소드가 되여야 함을  문득 깨닫고 나면 시인은 참으로 아무나 될수 있는것이 절대 아니라는 착잡한 생각이 갈마든다. 홍순범시인의 이번 시집 를 읽고나면 첫째 시인의 진솔한 창작태도가 돋보이고 둘째 사실주의 창작기법과 초현실주의 창작기법을 기초로 미사구려는 접근을 허용치 않았으며 셋째 매 한수의 시마다 사랑, 아픔, 갈등, 갈망, 그리고 현실적 생활속의 추구와 시에 대한 무한한 열애가 피부에 느껴져서 참으로 좋았다고 말할수 있을것 같다. 부족한 점이라면 이미지즘이 주축을 이루는 요즘 현대시폭풍속에서도 변화가 없는것이며 적잖은 시들이 머리는 큰데 비해 꼬리가 너무 짧은듯한 그런 아쉬움이 갈마드는것을 어쩔수가 없다. 아무튼 홍시인의 에 즉흥시 한수 증송하면서 마무리하려 한다. 새로운 한해, 새로운 시점에서 또다른 새로운 좋은 시작이 되기를 홍순범시인에게 진심으로 축원해본다   별이 바다물에 깨끗이 몸을 씻고 하나 둘씩 눈을 뜨네 사랑의 갈비뼈 한토막 파도에 꺼내들고 달빛속에 회전하는 목마 꺼질줄 모르는 달콤한 술 한잔에 더욱 숙명으로 목이 말라가는 기린 한마리   살다보면 이 밤도 너무 길지도 짧지도 않더라 사랑의 북채 신념으로 높이 추켜들고 오늘도 허허 그렇게 사람좋게 웃어가며 멋스럽게 둥둥둥 생활의 북을 두르려가는 사람이여   2014년3월31일 심양에서
3    [평론] 달빛은 무지개가 아닌 뿌리를 바위에 내린다 댓글:  조회:4483  추천:12  2014-03-11
달빛은 무지개가 아닌 뿌리를 바위에 내린다       2013년 도라지잡지 제5기 14인 하이퍼시특집에 부치는 편지                            평론 허인                               ㅡ 들어가면서ㅡ      지난 2013년은 조선족시단에 있어서 다재다난(多灾多难), 다희다흥(多喜多兴) 조금은 시비가 엇갈리는 그런 한해인것 같다. 다재다난하다고 하는것은 오래동안 북방시단을 리드해왔던 한춘선생이 안타깝게 타계하신것이고 다희다흥하다고 말할수 있는것은 우리 문단에도 드디여 하이퍼시가 상륙하여 적잖은 센세이숀을 불러 일으키고 있기때문이다. 일전 필자는 조선문서점에 갔다가 우연히 2013년 도라지잡지 제5기에 실린 최룡관, 박장길, 김철호, 김견, 심예란, 방순애, 허옥진, 정두민, 최려나, 황희숙, 려순희, 신금화, 방산옥, 김동한 14인 선배시인님과 동우시인들의 하이퍼시 32수를 읽고 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과 한께 마침내 국내의 독자들도 이제는 굳이 한국 시단이 아닌 우리 조선족문단에서도 하이퍼시를 마음껏 감상할수 있게 되였구나 하는 생각에 공연히 마음이 설레이는것을 어쩔수가 없었다.    아직 필자의 좁은 소견일지도 모르겠지만 전통시 감상은 항상 뜨거운 가슴이 있어야 했고 현대시 감상은 특히 사유가 랭철해야 하였으며 하이퍼시 감상은 의식의 흐름, 즉 공유의 무의식을 대동하는것이 더욱 중요하지 않을가 나름대로 생각해본다. 백문불여일견이라고 그럼 아래에 우리 조선족시단의 개혁파 거장이고 현대시보급에 오늘도 아낌없이 투혼을 발휘하고 있는 최룡관선배님의 부터 조심스레 살펴보자. 나에게 있어서 대선배이고보니 평론마저 조심스럽지 않을수가 없음을 사전에 미리 말씀 드리면서 본문으로 들어가 보자   ㅡ달고 가며 달려 가고 끌고 가며 끌려 가며ㅡ   기발   조의의 기발이 구름을 휘감아치고 태산도 천군의 발바닥을 핥으러 달려오네   청마는 소리없는 아우성이라 하고 마야꼬브스끼는 회의 꾸러기라고 하고 룡관이는 나붓기는 절망이라고 한다   제비들은 봄자와 가을이라는 글자를 쓰며 북으로 남으로 날아오르고 송어들은 죽음의 굽이를 돌고돌아 물방아도 그림자를 남길수 없는 삼도천의 자갈밭을 찾는다     (조의;고구려애국랑도명칭)      전문이다        하이퍼시의 특징은 다선, 다시점, 다초점이 기본 주축으로 된다 . 따라서 단순한 의식의 흐름만이 아닌 무의식이 배동 되여있기에 이 한수의 시를 읽고나면 마치 한폭의 거대한 그림이 우리들 눈앞에 불쑥 펼쳐지는듯한 그런 느낌이 든다. 또한  거창한 자아발로마저도 자연스럽게 자연에 다시 결부시켜가면서 그러한 의식의 흐름과 무의식속의 뜨거운 자아를 때로는 독자들의 판단에 맡기도 하며 인간 본능주의적인 호매로움과 그러한 경계(境界)ㅡ 즉 리상적인 갈구는 어디까지나 어깨가 단단하고 든든한 바위가 되여 오늘도 지향에는 아무런 구속(拘束)이 없음을 말이 아닌 생동한 그림으로 차근차근 설명해 나가고 있다. 특히 3련으로 된 구성된 이 시의 제일 마지막 련 / 제비들은 봄자와 가을이라는 글자를 쓰며/ 북으로 남으로 날아오르고/ 송어들은 죽음의 굽이를 돌고돌아/ 물방아도 그림자를 남길수 없는/삼도천의 자갈밭을 찾는다/로 이미지를 총집합시킨 이 시의 텍스트는 줄곧 고구려 애국랑도 조의의 기발로부터 시작하여 어마어마한 그림으로만이 완성이 가능한 태산, 천군, 발바닥, 아우성, 회의, 꾸러기, 절망 ,제비, 봄, 가을 , 북 남, 송어, 죽음, 물방아, 그림자, 삼도천, 자갈밭 등 다양하고 저항적인 그러한 양상들을 심도있게 한층 또 한층 거침없이 독자들에게 펼쳐보이면서 심의(深意)의 을 독자들의 살갗만이 아닌 깊은 뼈속에까지 새기게끔 조심스레 인도한다. 그리고 삼도천이란 아마도 불교용어인듯한데 그렇다면 이는 또한 달인의 도를 넘어서는 엄청난 결과ㅡ무상한것이 인생이라는 깨우침과 함께 를 누구나 다시한번 뒤돌아보게끔 하는 그런 효과를 창출하고 있는것 같다. 로시인의 솜씨는 참으로 칼날같이 매서웁다는 생각이 든다.이렇듯 시인은 시로써 모든것을 말을 한다. 시외의 그 어떠한것조차 론한다는것은 아무런 가치조차 없음을 설명한다. 그럼 여기서 시각효과가 남달리 뛰여난 와 을 잠깐 더 살펴보자.   가시북채들   바이올린이 연주를 하고 있다 폴란드 타트라산골짜기가 마신다 사품치며 쏟아져내리는 안개의 강물을 강물에 새벽이 빠져서 허우적거리고 검은 곰이 물속을 헤염치고 있다 벌새가 날개를 펄럭거리며 가는 주둥이로 꽃에 키스를 퍼붓고 앞뜨락의 오이밭에서 파란 부채들 바람을 일으키고 가시북채들 바람북을 두드린다   전문 ㅡ      이 시를 의식과 무의식의 흐름이 아닌 다른 그 어떤것으로 해석한다는것은 아마도 어느것 하나 제대로 통하는것이 없으리라 생각이 된다. 왜냐하면 모두 열행으로 나뉘여진 이 시는 한행ㅡ 혹은 두행이 서로 어울려가면서 무의식속의 자신만의 독특한 생동한 그림을 정적이 아닌 동적인 속사로 펼치고 있기때문이다. 우아한 바이올린소리ㅡ안개의 강 ㅡ 검은 곰 ㅡ 벌새 ㅡ파란 부채와 가시북채 바람북를 떠올리면서 다시한번 이 시를 음미해보노라면 확연히 무의식중의 엄청난 이미지즘이 되고 있음을 누구나 알수가 있다. 그럼 우리 함께 여기서 꼼꼼히 다시 한번 자세히 이 시를 살펴보자     /바이올린이 연주를 한다/ 누구나 쉽게 떠올릴수 있는 바이올린의 우아한  연주소리ㅡ그 곡은 모자르트의것이든 베토벤의것이든 아무런 상관이 없다. 독자들이 선택하기 나름이니깐 ㅡ /폴란드 타트라 산골짜기가 마신다ㅡ사품치며 쏟아져 내리는 안개의 강물을/ 그림이 바뀌면서 ㅡ이국적인 색채를 연출, 동시에 바이올린소리는 타트라 산골짜기가 들이마시는 안개의 강물로 잠시 변형이 된다 ㅡ/강물에 새벽이 빠져서 허우적거리고ㅡ검은 곰이 물속을 헤염치고 있다/무의식의 첫번째 발로, 또다시 그림이 바뀌면서 바이올린 소리가 살아 움직이고 있는 검은 곰의 헤염치는 소리로 재차 변형이 된다ㅡ/벌새가 날개를 펄럭거리며ㅡ가는 주둥이로 꽃에 키스를 퍼붓고ㅡ 무의식의 련속발로ㅡ 처음 우아했고 웅장했던 소리가 이제는 조금 둔탁한 생명의 소리로 바뀌였다가 다시금 벌새의 가는 키스소리로 변형이 되여가고ㅡ/앞뜨락 오이밭에서ㅡ 파란 부채들 바람을 일으키고/결국 그림이 다시 바뀌면서 바이올린소리는 오이밭의 파란 부채가 바람을 일으키는 소리와도 같다고 다시 설정한다 . 다음 존속적인 결구가 된 /가시부채들 바람북을 두드린다/는 눈으로만 아닌 감각과 가시(可视)적인 효과 ㅡ즉 가시북채에 맞으면 아프기 마련이지만 여기서 이라는 아플래야 아플수 없는 새로운 이미지가 등장되면서 바이올린소리는 그 효과음을 타고 마침내 모든  변형을 끝마치고서 북소리와 함께 사방으로 멀리 려행을 떠난다. 이 시를 처음 봤을때 필자는 엄청난 시각효과에 눈이 즐거웠고 둘째 꿈틀거리는 의식속에 자신이 용해되여가는듯한 그런 느낌을 받았다. 그림은 그림으로 읽어야만 소통이 된다.    이 시의 장점은 첫째 시각효과가 남달리 뛰여나고 둘째 무엇일가 자꾸만 곱씹게하는 의식의 흐름이 참으로 독특하고 돋보이며 셋째 독자들의 시적 음미의 가치관을 새롭게 정립시켜준다는것이다. 단점이라면 혹시 아직 독자들에게는 너무 난해하지않을가 하는 근심도 든다 . 그외 중에서 제일 마지막 련 /뫼들은 바다를 향하여 뛰여가고/강들은 하늘우에 누워 헐떡인다/ 등은 읽을수록 감탄이 가는 너무 좋은 구절이라고 생각된다.      시가 예술이라면 인간은 창조자인 동시에 해설자이며 또한 감수자들이다. 동방종교학자 마이거스 뮤러(麦克斯. 缪勒1823ㅡ1900)는 에서 고 설파하였다. 난해하다고 시가 좋으니 나쁘니 시야비야하는것은 진정한 문인으로써는 바람직한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된다. 그럼 여기서 자신만의 독특한 시어들로 신비한 매력을 발산하고 있는 신금화씨의 와 방순애씨의 을 더 살펴보자   비   바람은 빛발치는 가야금선을 튕긴다 한폭한폭 하늘을 재는 거미이다가 돌돌돌 지구를 감싸는 강물이다가 나는 구름위를 덤벙덤벙 걷는다 쌩쌩 땅은 하늘우를 달리고 흐물흐물 가로등은 윙크하는데 225호 신을 신고 교통질서를 유지하던 모기가 냉큼 수용소로 집어넣는다 광란하는 바퀴벌레 광란하는 진드기떼 밤은 구슬마냥 툭 끊기여 또르르 또르르 굴러 다닌다 잠속을 달리는 1호 환자 잠속을 달리는 2호 환자 잠속을 달리는 3호 환자   … 뉴스타트병원 정형외과 504호 병실은 꿈나라      반복구사법으로 씌여진 이 한수의 시가 담는 함의는 참으로 거대하다. 바람, 가야금, 하늘 ,거미, 지구 ,강물, 구름, 땅, 가로등, 윙크, 225호 신, 교통질서, 모기, 수용소, 바퀴벌레, 진드기떼, 밤, 구슬,1호환자, 2호환자, 3호환자, 뉴스타트병원, 정형외과, 504호 병실, 꿈나라ㅡ 무려 25개의 명사끝에 동사가 매달려 거대한 한폭의 그림을 형성한것이 특징이다. 그런데 생종 페르스의 나 오남구의 를 자세히 살펴보면 한개의 명사뒤에 몇개의 동사를 붙여서 한구절 한구절씩 한폭의 생동한 그림을 펼쳐놓은것이 특징인데 이 시는 거대한 몸집에 비해 조금 살이 메말랐다는 아쉬움이 든다. 살이 메말랐다고 하는것은 그만큼 군더더기를 깨끗이 취소하였다는 얘기로도 통하는데 시가 매끈하고 군더더기가 없다고 하여 다 좋은 시는 아니라고 필자 나름대로 생각해본다. 이 시의 중점은 /광란하는 바퀴벌레/광란하는 진드기떼/들로부터 시작이 되는데 /밤은 구슬마냥 툭 끊기여/ 또르르 또르르 굴러 다난다/에서ㅡ /밤은 구슬이 툭 끊기여/또르르 또르르 시내 구석구석까지 굴러다닌다/로 표현하였더라면 더욱 좋지 않았을가 싶다. 왜냐하면 시제가 이고 보니 여기서 이라는 표현은 적절치가 않고 /시내 구석구석까지 굴러다닌다/로 표현했더라면 그만큼 시적 령역이 많이 넓어지기때문이다. 를 아무튼 이 한수의 시가 갖는 의미는 크다고 생각해본다. 다음 방순애시인의 을 보자   보름달   달의 껍데기를 뚫고 한마리 새가 나온다 또 한마리 새가 나온다 또 한마리의 새가 나오려고 한다   바다와 달이 살놀이 하여 머리도 팔도 없는 흰 조약돌을 낳는다 심장 하나만 가지고 바다를 품은 가슴이여   하늘 호수가 눈을 깜빡인다 세찬 바람이 손을 뻗치면 눈물이 찔금찔금      전문이다        방순애시인은 아무리 봐도 참으로 재치있는 시인인것 같다. 군더더기 하나없이 첫 시작부터 시에 끌려가는것이 아니라 시를 확 끌고 갈줄을 알고 있는것 같다/ 달의 껍데기를 뚫고/ 한마리 새가 나온다/또 한마리 새가 나온다/ 또 한마리 새가 나오려고 한다/  시제가 인데 고 하였으니 암시와 예언성이 짙은 이 시구는 독자들로 하여금 도대체 무엇일가 아래 시구를 읽지 않을래야 안 읽을수 없게 만든다. 2련에서 바다와 달의 산생물이 흰 조약돌이라 뚜렷이 초점을 모아놓고 심장 하나로 바다를 품을수 있는 가슴을 또 노래한다. 그런데 달은 어디에 있는가? 3련에서 /하늘 호수가 눈을 깜빡인다/세찬 바람이 손을 뻗치면/ 눈물이 찔금찔금/ㅡ 날때에야 비로소 달이 다시 보인다. 필자의 짧은 소견으로는 좋은 시인것이 틀림없다. 조금 부족한 점이라면 시적인 공명 ,즉 울림이 독자들에게 전달되는것이 약한것 같다. 참고로 받아드렸으면 좋겠다.   탈변의 몸부림 그 끝은 어디일가?       박장길시인, 심예란시인, 김철호시인, 허옥진시인의 작품은 신문잡지에서  필자가 많이 본 기억이 있다. 참으로 다재다능한 시인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번기에 실린 박장길시인의 5수의 하이퍼시중에서 필자보고 뽑아보라면 단연히 이라고 말하고 싶다 /또 버린다/나를 위하여 끝마친 노예여/나를 따라/나의 오십년을 보고있는 눈이 되였다/나의 오십년을 듣고 있는 귀가 되였다/가장 낮은 곳에서 /나를 받들어 세월을 차며 온 하루하루에/해와 달이 알을 낳아/새들이 부화되여 푸릉푸릉 나래쳐 올랐다/ 이하 생략…간결한 표현에 깊은 음미의 멋이 있어 읽을수록 감수가 새롭다. 이외의 4수 은 탈변의 굵직한 몸부림이 돋보이긴 하지만 어쩐지 자신만의 독특한 시어가 보이질 않고 너무 자아심취에 빠져 평범하다는 생각에 아쉬움이 갈마든다.    김철호시인의 는 혼자만의 독특한 이야기식으로 시적화자를 이끌어가면서 고속도로에서의 핸들, 칭키스칸의 룡차, 북경대합실, 감숙 막고, 류방의 대부대, 맑스가 태운 담배연기, 출렁이는 잠꼬대 등 살아 움직이는 싱싱한 이미지들로 구수한 이야기들을 전개하고 가끔 능청스레 뫼르쇠도 대고 있지만 무엇인가 강조하려 하고 또한 강요하려는데서 되려 독자와의 친근성이 떨어지는듯한 느낌이 든다. 얼마전 연변일보 해란강 문예부간에 실린 김철호시인의 와 이라는 너무나도 좋은 시를 읽고 많이 감탄했던적이 있는데 이번의 는 해란강문예부간에 실린 와 보다는 약한듯한 느낌이 들어 많이 아쉽다 .    심예란시인의 에서 /이성의 접근이 불가능한 토리노수의/신전이 된 매돌은 바위를 읽기도전에/몸속에서 계절을 기꺼이 꺼낸다/ 등은 표현이 독특하고 깊은 맛이 있는 좋은 시어들이라고 생각된다. 허옥진시인의 에서도 /가마속의 만두가 다 익어갈무렵/우리도 함께 익어 둥둥 떠올랐다> 역시 마찬가지 실례라고 생각된다. 이외 김견, 정두민, 최려나, 황희숙, 려순희, 방산옥, 김동한시인의 시는 첫째 시자체가 너무 길고 지루한감이 들어 꼭마치 몇시간째 고속도로를 주행하노라면 지치고 힘이 드는듯한 그런 느낌이 들고 둘째 필경은 새로운 령역에 새롭게 도전하는 자세이고보니 조심스러운 면이 많이 엿보여 어딘가 서툰감이 느껴지며 셋째 하이퍼시의 특징이 낯설게하기와(옴니버스기법처리) 폭력적인 조합이 많이 사용되고 있긴 하지만 이들의 많은 시적조합에서는 명사들이 그대로 라렬되고 있어 읽을 재미가 떨어지고 있는상 싶다. 아깝더라도 뻐를 깎고 살을 저미는 심정으로 앞으로 더욱  좋은 시 한수, 또 한수 만들어냈으면 하는 그런 바램을 간절히 가져본다   마무리하면서      언젠가 한 시인의 시집에서 라는 글을 읽고 깜짝 놀란적이 있다. 무엇을 믿고 이런 얘기를 주저없이 하는지 모르겠지만 시는 변해야 한다. 시가 변하지 않으면 독자가 없다. 가령 아무리 좋은 시라도 십여년째 똑같은 방식으로 시를 쓴다고 생각해보자. 시를 쓰는 그 자신도 언젠가면 싱겁고 지칠것이 뻔한 노릇이며 독자들 역시 맨날 왕금년에 이밥 먹던 지질구레한 소리에 차츰 싫증을 느끼게 되며 또 언젠가면 멀리 떠나버릴것이 불 보듯이 너무 뻔한 일이다. 시가 변하려면 배움이 필수다. 만약 어느 초학자가 전통시를 배운다고 생각해보자. 전통시의 특징인 주제의식ㅡ자신의 의식세계와 자신의 그러한 현실적인 새로운 감수, 그리고 자신의 이색적인 감정표출을 한 분출구에서부터 시작하여 마치 저수지물이 한곬으로 쏟아지듯이 전반 시적인 계기, 즉 서두ㅡ 발전ㅡ전개ㅡ결말마저 모른다면 초학자가 정말 한편의 시를 제대로 완성할수 있을가? 또 이미지즘이 주축을 이루는 현대시, 포스터모더니즘이 매 한수의 시와 한 구절, 지어는 한 행,  또 한 단락마다 생동한 한폭의 동(动)적인 그림으로 완성이 되여가는 하이퍼시에서ㅡ 기교를 버린다면 과연 시가 옳바로 완성이 될가? 마치 수학에서 답을 알면 공식은 필요하지 않다는 이야기로 들리는데 어떻게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어느새 천재가 되여 버젓이 현대시며 하이퍼시를 써낼수 있다는것인지?    최룡관선배님은  10여년전 정확히 15년전ㅡ 필자가 료년조선문보에서 편집, 기자로 사업하고 있었을때 그 당시 생전이셨던 박화선배님과 함께 잠깐 심양에서 만나뵌적이 있다. 1999년도에 필자의 첫시집을 출판한후 여러가지 사정으로 말미암아 십여년을 아예 문학과는 쭈욱 담을 쌓고 살아온 필자에겐 이 13인 시인들마저 아직 서로 한번 얼굴마저 마주 쳐다본적이 없는 진짜 생판 초면들이다. 개혁은 언제나 소수의 사람들이 앞장서기 마련이다.  필자는 나름대로 이들의 과감한 행보가 너무 돋보인다고 생각된다. 이런 시인들이라면 언젠가면 한번쯤 꼭 만나보고싶다는 그런 생각도 가져본다. 끝으로 시작이 절반이라고 언제나 후배양성에 최선을 다하는 최룡관선배님과 이들 13인 동우시인들이 앞으로 더욱 좋은 시들을 더 많이 창작하여 새로운 한해 더욱 큰 성과를 이루어가시길 진정 충심으로 심양에서 두손 모아 기대해본다       2014년3월11일
2    단평ㅡ<전통시> <현대시> <하이퍼시> 상호비교ㅡ 댓글:  조회:3002  추천:6  2014-03-05
     나의 시    (1,전통시)   나의 시는 때시걱이 언녕 지났어도 언제 어디서 그 어느 누구라도 쉽게 찾을수 있는 누룽지ㅡ 아픈 피 아픈 살 아픈 뼈를 갈고 갈아 래일의 쪽빛문 랑만으로 열어제치는 이른 새벽 봄풀처럼 아직 기억이 생생한 우리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삶의 이야기ㅡ   찾는 이 적어도 읊는 이 없어도 때로는 고요한 호수 때로는 성난 파도가 되여 이 세상의 가장 성스럽고 이 세상의 가장 더러운것마저 깡그리 가슴속에 담고 담았다가 마스고 부스고 그렇게 나만이 황제 노예 하나 없는 자유의 세계ㅡ   꽃같은 너를 들같은 너를 뜰같은 너를 숲같은 너를 풀같은 너를 새같은 너를 때로는 산수화 때로는 인물화 때로는 수묵화 한폭의 생동한 그림으로 그려놓고서   시이기에 그냥 시시한 그런 시가 아니라 좋으면 좋고 싫으면 싫고 미우면 또한 밉고 성이 나면 분명 분노도 터뜨릴줄 아는 더불어 함께 생각하는 피 생각하는 살 생각하는 뼈가 되여야 하리!   나의 시는 거품이 많대도 좋다 아무렴 삼떼처럼 쓰러지는 무상한 세월앞에 강기슭 핥는 저 흰거품이면 또 어떠하리? 나의 시에는 오늘도 초불이 파랗게 살아 숨을 쉬고 있다              2012년 7월4일  나의 시( 2,현대시)   손발이 따로 있고 팔다리가 따로 있고 분명 이목구비가 제법 또렷하다 허나 사상은 절름발이 텅 비워버린 머리를 스마트폰에 꽁꽁 저장하여 매일 조심스레 손에 들고 다닌다 사색은 누워서 식은 죽 먹기 아침마다 새벽이 내 몸속으로 붕붕 날아들어와 감기며 스트레스와 같이 옆꾸리를 쿡쿡 찌르고 가끔 빨갛게 피 칠갑을 한 감동의 에밀레종소리가 고장난 내 심장을 문고리 삼아 내 가슴을 동동 잡아두드리면 나는 손발이 따로ㅡ 팔다리 따로ㅡ 코끝으로 묵향이 찡한 그런 그림을 그리고, 귀뿌리로 쨍하니 독한 술 꿀꺽꿀꺽 떠 마시고, 눈은 즐겁게 이 꽃향기 저 꽃향기를 킁킁 맡아가면서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하고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그런 사람이 된다 단떼의 지옥은 주저없이 허물어버린다 생종 페르스의 는 파란색으로 다시 염색한다 마음이 가난한 자들이여ㅡ 보이는가 부드러운 접사ㅡ저 부처님의 무위의 깨우침을ㅡ 생소한 얼굴이 반기를 들고 초조하고 경이로운 내 얼굴에 마구 손가락질할때 나는 달과 별의 한숨소리 호주머니에 슬쩍 다시 넣고 왔던 길로 털썩털썩 집으로 돌아간다 나의 시는 매일 열두번을 죽었다가도 열두번 다시 태여난다…     나의 시( 3,하이퍼시)   드르륵ㅡ 지옥의 뜨거운 문이 바람에 스르르 열린다 수천개의 태양이 우리 집 마당에 벽돌집을 짓는다 목 마른 은하수에 잔뼈마디 굵직한 성난 짐승이 되여 순진한 양을 몰고 달려드는 칼을 찬 개미떼들 수모의 피난길에 아담은 언녕 아무런 말조차 없다   컴퓨터 창을 활짝 열고 허공에서 허우적거리는 아버지의 그 구부정한 허리를 입술이 뾰족한 돌이 싱싱한 묘목과 부드러운   칼라활로 그래픽하여 옛노래를 다시 부른다 이슬비가 똑똑똑 누군가의 잔등을 두드리는 엇비스듬한 박자속에는 왠지 어릴적 풀내음새가 코끝을 찌른다   유통기한이 훨씬 지난 병마개를 이발로 뽁ㅡ따본다 술에 취한 달이 짐짓 하늘의 멱살을 잡고 마구 흔들어댄다 시가 와르르 화려한 옷을 죄다 벗고 반디불을 찾아 이리저리 뛰여 다닌다 길섶의 허름한 돌이 마침내 아픈 기억을 깨끗이 씻고 미래의 새김질속에서 반질반질한 새 자갈돌이 된다…     2014년3월4일   ㅡ 상호비교ㅡ 단평 들어가면서     전통시의 특징은 주제가 뚜렷하고 끝까지 한 사물의 움직임과 그러한 변화를 주의깊게 관찰해가면서 자신의 의식세계와 자신의 현실적인 감수, 그리고 자신의 이색적인 감정표출을 한 분출구에서부터 시작하여 가시(可视点)적인 효과와 전반 시적인 계기, 즉 서두ㅡ 발전ㅡ 결말ㅡ 등 그러한 시적 흐름들이 명쾌하게 한곬으로만 쏟아지는 저수지의 물과도 같다고 생각된다. 더불어 사실주의와 레알리즘이 전통시의 큰 주축이 되고 또한 상호작용하고 있음을 누구나 쉽게 알수가 있다 .      반면 현대시는 이미지즘이며 모종 의미로 말하면 언어의 조합이지 사상의 발현은 아닌상싶다 . 작자의 임의로 되는 섬세한 가공을 거쳐 보석으로 새롭게 탄생한 이미지와 이미지즘들은 어제날 판에 박힌듯한 그 틀, 고정관념의 단단한 쇠그릇을 말끔히 깨고 의식의 거대한 흐름에 발맞춰가며 새롭게 한층 또 한층 자아의 중심세계에다 독특한 리상의 생동한 새 그림들을 형상의 이미지로 배렬해가면서 일체 추상어들은 극력 자제하려 하는 그런 특징이 있다. 쉽게 말하면 현대시는 전통시의 넓은 울타리와 기초우에 세워진 탑우의 탑이다 .     그런데 하이퍼시는 > 최룡관시인의 말을 잠간 인용해본다.      시는 한행에서 명사+동사를 중심으로 써야 하고 규정어를 쓸려면 꼭 한번 이상은 쓰지 말아야 한다. 이렇듯 시어는 시인마다의 독특한 개성을 갖고 있으며 또한 창조력이 있기때문에 더욱 매력적이고 더욱 빛이 난다고 필자는 나름대로 생각해본다. 그럼 시어란 도대체 무엇인가? 이 문제를 해답하려면 우선먼저 시란 무엇인가부터 살펴보아야 하는데 오늘까지도 시에 대한 해석이 천차만별이긴 하지만 가장 설득력이 있으면서도 간단한 것이 곧바로 [신과의 대화]이라는것 같다. 이렇듯 “시는 예술이다.”라는 가장 기본적인 명제를 우리 모두 인정을 한다면 전통시든 현대시든 또한 하이퍼시든 이제 공존에는 그늘이 없다고 필자 나름대로 생각해본다.      불교에 아집을 버려라는 말이 있다. 어쩌면 꼭 내것이 맞고 내것이 제일 좋고 내가 아니면 안된다는 고집은 이제는 존재의 가치마저 상실된다. 세상은 더불어 살아가는것이며 또한 부대끼면서 배신과 배격마저 관용으로 보듬어안는것이다. 모르면 배워야 하고 배우고나면 항상 즐거운것이 우리네 인생이 아닌가? 오죽하면 공자마저 배움에는 끝이 없다고 하였겠는가?   나오면서   십여년을 문학과 쭈욱 담을 쌓고 살아오다가 이제 겨우 시에 어섯눈을 뜨기 시작한 내가 주제넘게 너무 많은것을 지껄이고 있지 않는지도 모르겠다. 필자의 세수의 시가 발표작도 아니고 다소 어설픈 곳이 있더라도 독자들이 관심있게 읽어주면 그것으로 이제 만족하겠다. 끝으로 새로운 한해 여러 동우시인들도 새로운 출발로 새로운 자아의 길을 새롭게 열어가길 진심으로 축원해본다       심양에서  2014년3월 5일  
언어련금술의 화려한 탈변 그리고 무아의 기저에서 펼치는 환상의 랩들                       방순애 첫하이퍼시집에 부치는 편지                              평론 허인           이모저모 살펴보면서ㅡ      십여년을 문학과는 쭈욱 담을 쌓고 지내오다가 요즘들어 조심스레 살펴본 조선족시단은 말그대로 변해도 너무 많이 변해있었다. 아직 생소하고 낯선 얼굴들도 더러 있긴 하지만 특히 중견시인으로 어엿이 자리매김을 하고서 맹활약중인 김승종 ,김영건 ,조광명 , 한영남 등 시인의 변화는 가히 눈이 부실 지경이며 또한 놀라움 그 자체이기도 하다. 시란 구경 무엇인가 ? 이 세상 그 누구도 가볍게 단 한마디로 정의(定义)를 내릴수 없는 이 간거한 작업을 그들은 나름대로 소화해냈으며 또한 어느 누구도 감히 흉내 낼수 없는 자신만의 독특한 필치로 한폭ㅡ 또 한폭의 아름다운 산수화며 립체화며 수묵화를 개성있게 그려내고 있다. 는 말이 있다. 어쩌면 아직도 제 자리매김에 집착하고있는 여러 동우시인들에게 좋은 귀감이 되지않을가 나름대로 생각해본다.      며칠전 필자는 연길에서 부쳐온 조선족시단의 첫하이퍼시집 방순애시인의 를 읽으면서 또 한번 크나 큰 충격을 느끼지 않을수가 없었다 . 언어련금술의 화려한 탈변, 그리고 단순구조로부터 다선구조로의 힘찬 도약, 과거의 대아(对我), 자아(自我)의 뿌리깊은 관습으로부터 당당하게 해탈을 웨치며 한결 숨결이 자유로와지고 시야가 맑아진 무아(无我)의 새로운 경지(境界)ㅡ 겸손이 철철 넘쳐나는 그녀와의 짧은 통화에서 필자는 하고 다시 한번 자신의 지나온 행보를 뒤돌아보지 않을수가 없었으며 늦게나마 새로운 변화를 결심하지 않을수가 없었다. 필자가 알건대 방시인은 시공부를 시작한지 이제겨우 일년이 조금 지난 늦둥이시인이다. 평생을 경찰직에 몸담그고 살아온 그녀가 퇴직후 문학공부를 시작한데는 그녀만의 새로운 이야기가 있다. 책을 내면서 그녀는 머리글에 이렇게 쓰고있다          시란 이미지를 기본으로 하는 표현예술이다. 이미지는 사물성과 회화성을 추구하며 관념을 배척한다. 영국의 비평가 시드니(Sir Philip Sidney, 1554-1586)는‘시를 비유적으로 말한다면 가르치고 즐겁게 할 목적을 가진 “말하는 그림”(speaking picture)이다.’라고 하였다. 그럼 여기서 알알이 통통 잘 여무른 88수로 엮여진 방순애시인의 금싸락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주옥같은 하이퍼시들을 잠깐 함께 살펴보자   단순구조로부터 다선구조로의 힘찬 도약, 그리고 무아(无我)의 새로운 경지에서 펼치는 환상의 바이브   수천개의 태양이 나무가지사이로 들어온다 태양줄에 거꾸로 매달려있는 잎새들 땅구멍마다 숨어있는 진실을 본다   개미가 떡함지무대에서 댄스를 쳐댄다 무대등 달덩이는 가슴을 헤치며 내려오고 베짱이들은 악기들고 연주에 여념이 없는데 엿장수가 지나다 멍하니 보며 중얼거린다   태고의 텅 빈 배속에 희미한 생명의 맥박이 널뛰기하고 시간의 등에 업혀 굴러나온 생명이 따가운 태양을 마주하느라 시물거리는 눈     의 전문이다. 수천개의 태양과 거꾸로 매달려있는 잎새들이 땅구멍의 숨어있는 진실을 살펴보고 있다고 시작된 이 시의 텍스트는 단순구조가 아닌 다선구조로 이루어졌으며 제목이 이지만 마치 한폭의 자연을 무아(无我)와 무의식(无意识) 그대로 그려놓은듯하여 독자들은 대나무숲사이로 수많은 해살이 폭포처럼 쏟아져 들어오느듯한 느낌을 받을수도 있으며 또한 한폭의 생동한 오감도(鸟感图)를 보는듯한 새로운 느낌을 준다. 여기서 다시점(多视点), 다초점(多瞧点)의 역할이 된 수천개의 태양, 개미 , 떡함지 , 댄스 ,달덩이 , 베짱이 , 엿장수 , 악기 , 널뛰기, 시물거리는 눈은 방시인의 숙련된 언어련금술을 통하여 서로 묘하게 새로운 조화를 이루면서 현시대 단순구조적 동화(同化)에 거부와 강한 저항의식이 깔린 다선구조로의 화려한 탈변을 선포하면서 환상적인 바이브와 랩을 펼치고 있다. 이외에도 이 시는 최소한의 상황제시를 하면서 시적 분위기를 나름대로 고조시키려는 작자의 의도가 최소한의 개입이 되여 냉정한 지적 사색과 그런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그럼 하이퍼시란 도대체 무엇인가? 여기서 잠간 하이퍼시에 대하여 좀더 구체적으로 우리 함께 료해하여 보자! ‘하이퍼텍스트 문학’(Hypertext literature)은 하이퍼와 텍스트를 조합한 단어로서 1960년대 컴퓨터 개척자 테드 넬슨(Ted Nelson)이 만든 말이다. 단순구조가 아닌 다선구조시를 일종 하이퍼시라고도 하는데 이에 대한 한국의 문학평론가 문덕수선생의 해석에 귀를 기울이면 꽤도가 올것같다. 문덕수는 [하이퍼(hyper)란‘과도(过渡)한’, ‘과다(过多)한’, ‘초월하여’, ‘넘어서’,‘3차원보다 높은’등의 의미로서 본래 그리스어에서의 일종의 련결어]라고 밝히면서 이렇게 해석하고있다.     [하이퍼는 본의의 세계에서 유의의 세계로 뛰여넘는(초월해서), 현실세계의 상식을 초과할 때 일컫는 일종의 하이퍼적특징이다. 이 사실을 부정 하는것은 시의 본질적구조자체를 부정하는것과 같다… 더불어 하이퍼시는 ‘’현실세계’’의 경계를 넘어서 불연속성적 균열을 초월하여 ‘’상상세계’’와 연결하는 작시에서 얻어진것이라고 본다… 그리하여 하이퍼시는 초월세계와 연속하려고 하는 정신적, 언어적 운동이라고 할수가 있다.]     무릇 모더니즘이든 포스터니즘이든 레알리즘이든 휴머니즘이든 필자가 알건대 시는 시인의 체험을 고스란히 독자들에게 진술, 전달하는것이 절대로 아니다. 더불어 시인과 독자 사이에는 시적언어라는 매개물이 있으며 이 매개물 역시 의미전달의 구조가 또한 아니여야 한다. 바꾸어 말하면 의미형성을 위한 언어구조일뿐이다. 어디까지나“시는 예술이다.”라는 가장 기본적인 명제를 인정한다면 전통시든 현대시든 또한 하이퍼시든 시는 단순히 시를 통하여 의미를 전달하려 하거나 전달받으려고 하는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렇듯 시는 우리의 삶을 새롭게 말함으로써 독자들에게 삶을 체험하게 하는 언어예술이 되여야 한다고 나름대로 생각해본다. 그럼 여기서 방순애시인의 하이퍼시를 한수 더 보자   지구가 점을 본다 너무 커서 보면 볼수록 어지럽다 지구가 지레대로 점을 앞으로 민다 요지부동이다 지구가  등으로 점을 굴려본다 꿈적거리는것 같더니 또 굳어버린다   바람이 쇠스랑 들고 은하수를 긁어어본다 표피가 떨어졌다가도 또 새살이 나온다 태양이 은하수를 바줄로 묶어 던진다 뒤로 번져지는 시늉만 하고 다시 원래 자리에 온다   컴퓨터 불이 켜진다 하나하나 또 하나가 켜진다 반짝이들이 세계표면을 덮는다 지구가 들린다 지구가 달린다   전문이다       보다싶이 전례의 자의였던 타의였던 아니면 피의였던간에 우리들에게 너무나도 익숙하고 오랜 세월동안 주류를 이어온 대아(对我), 자아(自我)의 흔적은 꼬리마저 찾아볼수조차 없고 불교에서 달관의 경지에서나 찾아봄직한 무주(无住) , 무득(无得) , 무소위(无所谓), 무아(无我)의 새로운 경계(境界)에서 작자는 마치 우주와 자연과 자연스럽게 남의 이야기하듯이 녀성특유의 섬세한 감성으로 펼쳐진 이 시적화자는 우리들에게 으로부터 시작하여 현대문명의 산물인 로 깔끔하게 마무리되면서 로 현실적인 직시, 미래에 대한 불안정과 또한 불안함과 그러한 갈구, 생명운동을 다차원적으로 간결하게 표현하고 있다 . 꼼꼼히 살펴보면 누구나 쉽게 알수 있듯이 지구 , 지레대 , 잔등 , 바람 , 쇠스랑이 , 은하수 ,태양 , 바줄 , 컴퓨터ㅡ 등등 달라도 너무 다른 실물들이 이 시에서 직접 만나 방시인의 섬세한 가공을 거쳐 마침내 하이퍼시의 특유의 새로운 개성을 완성해나가면서 시적인 울림, 즉 허다한 공명과 긴 여운을 독자들에게 안겨주고 있다 .      재래로 시를 쓴다면 시적계기요 서두요 발전이요 결말이요 조응이요 하는 말들을 잘 살펴보아야 했다 오늘 시의 현주소도 그런 시가 무더기로 쏟아지고 있다. 그런데 방순애시인이 쓴 시는 이런 언어들에 대한 기억을 지워버리고 있다. 또 기, 승, 전 ,결이라는 언어로 방시인의 시를 살펴본다는것은 아마 통하지 않을것이라고 생각한다. 방시인의 시는 이런 용어들과는 무관하다.방시인의 시는 대가리도 꼬리도 없는 시라고 함이 타당할것 같다. 이 시집의 시들은 이미지 토막과 토막의 배렬로서 그 토막과 토막들은 시작이자 결말이고 결말이자 시작이라 하겠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한것처럼 시작과 끝이 없고 항상 중간뿐이다…       최룡관시인이 평론에서 한 말이다. 달인의 경지에 이른 옳바른 지적이라고 생각된다. 크다면 크고 작다면 너무나도 작은 우리 조선족시단에서 내노라하는 시인들과 평론가들이 많지만 진정 후배양성과 현대시보급에서 서슴없이 자신의 마저 선뜻이 문학도들에게 내여줄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을가? 이 점에서 나는 최룡관선배의 로고에 나름대로 큰 긍정을 하고 싶다.  /시간이 우리를 버리고 간다/칼바람이 심장을 찢고 그늘들이 모여 몸의 골수를 빼먹는다/흐르는 피는 왜 저토록 푸른걸가?/바이올린 현줄을 켜면 떠나간 아픔이 다시 와서 신경을 켜댄다/노을이 머리를 빠끔히 내밀며 흩어진 가슴을 몰아세운다/바라보는 한순간 두눈길은 멈추고 얼어붙은 등뼈에서 시린 정이 빠져나간다/메마른 가슴에서 백양나무가 다시 잎사귀를 키울수 있을가?/어둠 저편에서 빤히 쳐다볼때 진달래 흐드러진 젊은 산이 내게로 와서 옷소매를 잡는다/문득 가슴이 부푸는 이 시각/초록빛하늘을 들이 마신다/   의 전문이다.       이 시에서는 특히 /어둠 저편에서 빤히 쳐다볼때 진달래 흐드러진 젊은 산이 내게로 와서 옷소매를 잡는다/와 /초록빛하늘을 들이 마신다/라는 이처럼 단단한 긍정어로 부재의 세상속에서 현실적 존재의 충일성을 노래하는것은 부재의 그 아픈 현실을 직시하고 그것을 극복해나갈수 있는 시인의 강한 힘, 그것은 곧바로 시인의 맘속에 포근한 휴머니즘정신이 자리하고있기때문이 아닐가 생각된다. 따라서 시인의 그러한 휴머니즘정신은 더없이 랭철하고 명석한것이며 또한 자성(自醒)이 밑거름으로 안받침되여있다고도 생각된다. 제목이 이지만 보시다싶이 결말에서는 부푸는 가슴이며 초록색하늘이여서 희망이 보여서 좋다. 이 시 역시 최룡관시인이 말한것처럼 시작도 끝도 없는것이 특징이라면 또한 특징으로 될것도 같다   파란 하늘에 둥둥 달려 있는 커다란 바위우에 번화한 도시가 앉아 있다               >   상아는 검은 색 옷을 입고 호화로운 요트에 앉아 입술에 노래를 담고 있다   멍청한 후렴은 고해의 값을 벌거벗은 자연에 치르고…               돌은 하늘이 버렸을때 침묵의 깃발을 든다               스님이 되여 앉아 있다 얼굴부터 새겨진 법글이 쭉 내려오고 몸의 구석진 곳들은 전설쪼각이다…구름이 펜을 들고 쉬고 있다 눈아래 서있는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입은 닫겨있다         이러한 시구들은 방시인이 얼마나 언어련금술을 자유자재로 잘 다루고 있으며 또한 숙련되여 있는지를 유감없이 보여주는 좋은 근거라는 생각이 든다. 첫째 보는이의 시각이 다 즐거워지고 둘째 촉각이 스스로 감미로와지고 셋째 미각이 어느새 시원해지는ㅡ더불어 이러한 시구들은 단순구조로부터 다선구조로의 힘찬 도약의 새로운 상징이며 또한 무아의 경지에서 오직 방순애시인만이 마음껏 펼칠수 있는 화려한 바이브이고 환상적인 랩이라고 한마디로 총괄하고싶다. 그럼 여기서 늦게나마 방순애시인이 이처럼 짧은 시간내에 크나 큰 성과를 이루어낸데 대하여 아낌없는 치하의 박수를 보내 드린다.   폭력적조합과 옴니버스기법처리       시에서의 회화성은 추상적 관념을 구체적으로 감각화하여 객관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더불어 옴니버스(낯설게 하기)기법은 여러개의 이야기를 배치하여 시의 새로운 구조를 선보이는 하이퍼시창작기법이다. ‘낯설게 하기’는 로만야콥슨 등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이 사물, 언어, 사건을 충돌하여 낯선 구조와 낯선 의미의 새로운 감각과 미의식을 추구하였던 리론이다. 옴니버스기법은 제목과 내용, 련과 련의 연결고리를 끊어 낯설게 하기를 최대화한다. 즉 낯설게 하기를 최대화하면 구조의 새로움, 의미의 새로움, 감각의 새로움이라는 하퍼시성립조건을 충족시킬수 있기깨문이였다. 그럼 여기서 방순애시인은 폭력적조합과 옴니버스기법을 어떻게 처리하였는가 잠깐 다시 살펴보고 가자     스님이 되여 앉아있다 얼굴부터 새겨진 법글이 쭉 내 려오고 몸의 구석진 곳들은 전설쪼각이다 마음속에서 지줄대는 이야기는 강을 따라 흘러가고 무성한 이파리 매달려있는 줄거리들 줄줄 타래진다   구름이 펜을 들고 쉬고 있다 눈아래 서있는 사람들을 내려다 보며 입은 닫겨 있다 무거운 입술을 열면 하늘중 심에서 우는 천둥소리 지심까지 들썩인다   작은 귀뿌리는 점점 커진다 열쇠를 가지고 떠나는 사 람들 갇히운 마음을 연다 진펄에 빠지는 발걸음은 한결 가볍다                            >전문       여기서 1련과 2련ㅡ 그리고 3련은 제각기 생판 다른 세 얼굴이다 , 달라도 서로 너무 다른 불협화음을 조성하는듯하지만(옴니버스기법처리) 마지막련의 제일 끝부분에서 /열쇠를 가지고 떠나는 사람들 갇히운 마음을 연다/ 진펄에 빠지는 발걸음은 한결 가볍다/와 절묘하게 어울려 돌아가면서 뜻밖의 아어효과(雅语效果)까지 창출해낸다. 흔히 진펄에 빠진 발걸음이 한결 무겁다로 표현하지만 방시인은 여기서 로 시를 느긋하게 마무리하면서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진펄속에서도 발걸음이 자유로운 바람과 바람을 타고 둥둥 떠가는 마음을 엿볼수 있게끔 한다. 얼핏 보면 상호 모순이 되는 어구이면서도 또한 얼마나 희망적인 메세지를 독자들에게 안겨주고있는가? 이것이 방시인의 놀라운 재치가 아닐가 필자 나름대로 생각해본다. 그럼 여기서 폭력적조합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잠깐 더 살펴보자 . 스님 ㅡ 법글 ㅡ전설 ㅡ 강 ㅡ이파리 ㅡ 구름 ㅡ펜 ㅡ 입술 ㅡ 천둥 ㅡ귀뿌리 ㅡ열쇠 ㅡ진펄ㅡ 어찌면 제법 글깨나 쓴다하는 이름있는 시인들마저도 제대로 잇기가 쉽지 않을것이라는 걱정이 슬그머니 든다 . 이렇듯 언어련금술은 아무나 자유자재로 사용할수 있는것은 아니다 . 언어련금술은 제대로 장악한 자들만이 누릴수 있는 특권이기때문이다      돌은 하늘이 버렸을때 침묵의 기발을 든다 갈대숲은 겨울의 어둠속에서 하얀 불을 지펴 지가 낳은 뿌리를 지킨다    울창한 숲과 새들 그리고 나의 집    창가의 벽이 피를 흘리고 달은 구름속으로 숨어버린다 창백한 손은 이곳에서 떠다니는 거품을 거둬내고 무지개의 현에 맞춰 밤의 찬가를 부른다    날개가 없고 얼굴이 없어도 심연의 사색은 새벽 입김우에 가는 발자취를 한뜸한뜸 수놓는다              전문      “돌은 하늘이 버렸을때 침묵의 기발을 든다”라고 서두를 뗀 이 작품은 마지막 련에서 “날개가 없고 얼굴이 없어도 심연의 사색은 새벽 입김우에  가는 발자취를 한뜸한뜸 수놓는다”고 마감하고 있다. 이는 자유의 혼이 구속의 쇠사슬을 박차고 아무런 구애없이 천애지각을 나름대로 미화해보려는 시인의 조심스런 양상인것 같다. 또 어딘가 모르게 본능에로 끌려가는 생명의 충동 그대로일지도 모르겠다. 하여간 제목이나 작중에 등장하는 여러 이미지가 암시해주는것은 과연 무엇일가는 독자마다 견해가 다를수도 있겠으나 이 시는 곱씹을수록 무언의 암시와 그런 색깔이 다분히 짙다고 필자는 나름대로 생각해본다. 총체적으로 방순애시인의 많은 하이퍼시는 한수 한수가 거의 환상적이라고 하여도 과언은 아닐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이 시집에 수록된 모든 시가 완전무결하다는것은 절대 아니다./손에 들려 호강을 받을때/ 중에서/시베리아 풍차가 /장거리 려행을 떠난다/ 중에서 이러한 시구들은 표현이 너무 단순하고 형상적인 이미지보다 추상적인 이미지가 더욱 짙어 방순애시인의 특유의 시맛을 많이 떨어뜨리고 있다. 또 일부 시편이 주제가 모호하고 어디로 튈지 몰라 읽기에 불안한것도 더러 있다. 첫술에 배 부를수는 없다. 아무튼 다시한번 방순애시인이 짧은 시간내에 이룬 성과에 다함없는 성원의 박수갈채를 보낸다   마무리하면서      조선족시단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연변시단이나 북방시단(흑룡강)에 비해 료심시단은 아직도 개간중인 에 불과한것만 같다. 료녕조선문보 문예부간, 심양조선족문학회 기관지라고 할수 있는 잡지에서 가끔 생소한 얼굴들이 때때로 나타나긴 하지만 별로 읽을만한것이 적고 새로운 시도를 꿈꾸는 시인이 아직 보이지 않고 있다. 하는 말이 있다 . 두꺼비 한번 눈섭을 찡그렸다 하여 금방 하늘이 흐려지는것도 아니건만 요즘 많은 사람들은 바른 말 하기를 꺼려하며 또한 너무 회피하려고만 드는것은 아닐가?  혹시 가슴 깊숙히 간직한것이 향긋한 파인애플이 아니라 겉이 속보다 더 싱싱한 한알의 진렬된 사과알처럼 자신의 이미지에 기스라도 갈가봐 너무 전전긍긍하고 있는것은 아닌지? 아픈 매가 어쩌면 문인이 성장하는데 꼭 필요한 촉매제가 되고 필연적인 파스효과가 되지 않을가 ? 그럼 여기서 료심시단 중견시인이라고 할수 있으며 십여년간 심양조선족문학회 회장으로 있다가 지금 다시 료녕조선문보 기자부주임으로 사업하고 있는 김창영시인의 시집 과 을 잠간 살펴보자   산은 나보고 산이 되라 하네 물은 나보고 물이 되라 하네   산앞에 산처럼 물앞에 물처럼   말을 버리네 고개 숙이네   전문   물은 나보고 흐르라고 하고 산은 나보고 거기, 서라고 하네 산속에 물이 흐르고 물속에 산이 있으니 나, 여기 오도 가도 못하고 뜬구름 더불어 바장임이여    김학송시인의 전문     김창영시인은 아마도 도를 딲고 있는상싶다. 시인지 감오문(感悟文)인지 잘 모르겠지만 너무 닮았다는 느낌이 든다. 다음ㅡ 장춘식연구원이 김창영시인의 련작시 평론중에 한 말이다.      그럼 여기서 료동문학 호롱불금상 수상자와 대상수상자인 서정순씨와 편도현씨의 근작시도 살펴보자. 본문에서는 이들의 수상작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이 근작시만을 다루고 있음을 분명히 밝혀두며 더불어 아무런 폄하나 저의도 없음을 명백히 밝혀둔다    맨드라미(鸡冠花)     (심양)  서정순   올망졸망 장독대사이로   빠알간 벼슬만 내여놓은   수탉 한마리   사위오면 닭 잡아준다는   집주인 말에   제 먼저 놀라   장독사이에 숨죽이고   간이 달랑   빠끔히 내다보네 .시. 숙명   ㅡ어머니의 83세 생신을 맞으며    (심양)  편도현 그 흔하디 흔했던 밭머리의 흙도 아니였소이다 무너진 돌담밑에 얼기설기 그것도 아니였소이다 바위돌 틈새에 가는 실뿌리 훅€?불면 쓰러질듯 가냘픈 신세 그러나 질기디 질긴 그 힘은 쇠사슬처럼 강파르게 살았소이다 헐벗어 드러난 하얀 속살 눈물겹게 가슴 시린데 바위에 매달려 안간힘 쓰며 여린 새싹들을 키우는 크나큰 사랑 어설픈 삶 시작할 때 이른봄 서리찬 새벽하늘은 그리도 차거웠고 밤하늘에 우뢰 울고 비바람도 사나웠소이다 걸음걸음 피눈물 나도록 세상살이 너무도 고달팠소이다 밤이나 낮이나 따로없이 푸름을 이고지고 보듬으며 언제나 분주했던 그 세월 몸에 푹 배인 그 땀이 이슬되여 축축이 젖어왔소이다 그렇소이다 모진 세파 그속에서 죽을 힘을 다하여 살아왔소이다 한잎 두잎 푸름을 받들며 한송이 꽃을 피우기 위해.     이 두편의 시 모두가 작년에 료녕조선문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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