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력사는 학자들의 량심이고 거울이여야
ㅡ리광인교수님의 “무정장군”을 읽고
허 인
요즘은 평전시대인것 같다. 눈만 뜨면 여기 저기에서 수 많은 평전들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온다. 픽션이냐 논픽션이냐를 떠나서 일부 이름 있는 작가들의 손끝을 거쳐 탄생된 이러한 평전들은 위인들의 일대기를 마치 한눈에 들여다 볼수 있을것처럼 생생하게 묘사하여 무척 인기를 끌고 있는듯 싶다. 헌데 필자가 알건대 평전은 한 인물, 한 인물의 일생 발자취를 기록하며 평론을 깃들이는 것이기에 력사에 길이 남을수 있는 진실한 력사자료 모음이여야지 결코 독자의 구미에 알맞게 편찬된 허구와 상상이 가미된 순수한 문학창작이여서는 안된다는것이다.
절강월수외국어대학 동방언어학원 한국어 교수로 근무한적이 있는 리광인씨를 필자는 기실 잘 모른다. 워이씬에서 가끔 서로 안부나 전할 정도, 그리고 몇번의 전화통화가 전부다. 그런데 며칠전 리광인교수가 정성스레 우편으로 보내온 두툼한 “무정장군”평전을 읽고 필자는 깜짝 놀라지 않을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처럼 방대한 자료수집과 조그마한 허구 한점마저 절대 용허하지 않으려 하는 그의 지극히 학자적인 저술 태도에 탄복했고 더 나아가 감탄하지 않을수가 없었기때문이였다. 필자가 보건대 “무정장군”은 딱딱하고 메마른 자료집인것이 아니라 생동하면서도 구수하게 진술되여 독자들이 심취있게 읽어볼수 있도록 씌여졌으며 그 매 구절구절에 이르기까지 오직 진실 하나에 의거한 충실한 평전이기에 우리 겨레 력사의 발자취에 길이 남을수 있는 력사문헌으로 되기에도 결코 아무런 손색이 없을것으로 보인다.
소개에 따르면 진공목, 박근만, 박근수, 최석천, 반경유, 리계동, 리용, 마천목, 신춘, 장세걸, 최정무, 최음파 등등 겨레의 쟁쟁한 남녁땅 황포군관학교 졸업생이 허다함을 우리는 이 책에서 발견할수가 있다. 그 중 중공 상해조선인 지부를 거쳐 동북으로 파견된 황포군관학교 출신들만 하여도 20여명, 강서 중앙 혁명근거지로 파견된 다음 2만5천리장정에 참가한 조선족장병이 무려 10여명, 특히 장세걸은 홍22군 참모장으로 활동하다 1933년 젊은 나이로 희생되여 많은 아쉬움을 남기였고 홍군의 첫 작곡가이자 바이올린수인 최음파는 1935년 봄 중앙혁명근거지 포위돌파전에서 불행히 희생( 또다른 일설에는 상해에서 일본령사관 놈들에게 체포되여 조선 신의주 감옥에 넘겨져 이른바 재판 받은후 일체 소식이 두절되였다고 함) 이러한 기록은 너무나도 충격적이며 또한 우리 겨레 력사에 더없이 소중한 자료들이 아닐가고 생각된다. 이외에도 홍1군단 참모장 양림, 중공하북성위 서기 겸 천진시위 서기 리철부, 중공기동지위서기 주문빈 등 수많은 영령들의 이야기가 있지만 여기서 깊이 있게 언급하지 않으려 한다.
무려 28장이나 되는 무정장군의 젊은 시절 생전 사진과 저자가 현지답사때 남긴 사진들(실제 현지답사사진은 많고도 많다고 함.)은 저자가 매번 소중한 현장에서 귀중하게 남긴 기념사진임이 분명하며 그 곳곳에는 저자의 피타는 노력과 오랜 기간의 심혈이 깃들어 있음을 우리는 쉽게 알수가 있다. 특히 무정장군은 중국 조선족, 더 나아가서는 전체 우리 겨레들에 있어서 극히 전설적이며 영웅적인 인물이 아닐수가 없다. 더구나 그 만큼 무게가 있고 아직도 신비의 베일에 쌓여 있는 장군의 일대기를 소설이나 픽션이 아닌 소중한 력사적인 자료들을 수집하여 문학형식으로 진술한다는것은 저자로서는 아마도 무척 심리적인 부담도 컸을것이고 사업량이 또한 자못 방대하였음을 우리는 피부로 절실하게 느낄수가 있다.
이 책의 첫시작 “밝혀지는 장군의 신상”에서 리광인씨는 무정장군의 고향이 함경북도 경성군이라는 일설과 새롭게 제기되는 청진시 근동리설을 아주 명쾌하게 해설한다. 또한 상해 로동자폭동 총지휘, 별명이 “사꾸라몽둥이”인 조선인혁명가, 중국공산당 수령들인 모택동-주덕, 더우기 팽덕회와의 절친한 관계, 조선ㅡ보정ㅡ상해ㅡ중앙혁명근거지ㅡ홍군장정ㅡ태항산ㅡ연안ㅡ동북ㅡ다시금 조선으로의 장군의 발자취를 따라 가노라면 우리는 이 평전에서 수많은 력사인물들을 더 만나게 된다. 실례로 양림장군이 희생된후 팽덕회의 연설을 우리 여기서 잠간 다 함께 살펴보도록 하자.
ㅡ양림이 희생된후 팽덕회는 당위원회 회의에서 다음과 같은 발언을 하였다. “많고 많은 외국 혁명가들이 중국혁명을 위하여 희생되였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들을 계속 중국에서 희생되게 한다면 누가 남아 그들 조국의 혁명사업을 위하여 싸우겠습니까? 이미 목숨을 잃은 동지들은 어쩔수가 없지만 이제부터라도 외국동지들의 생명을 아껴야 합니다” 팽덕회의 호소로 군위에서는 나에게 휴식명령을 내리였으며 나를 학습연구에 종사하게 하였다. ㅡ그때 나는 위장병악화로 시달리고 있었다. 팽덕회의 발언은 나로 하여금 싸움터를 떠나게 하였고 나의 목숨을 보호해 주었다. 그때로부터 우리 두 사람은 평생의 친구와 동지로 되였다.”
무정장군의 회고록에 나오는 생생한 회고문, 이처럼 많은 실제 사실을 통하여 우리가 조심스레 살펴볼수 있는것은 이러한 귀중한 자료들을 얻기 위하여 리광인씨는 결코 안일하게 컴퓨터 검색만이 아니라 두발로 중국 혁명의 성지인 서금, 연안을 비롯하여 2만5천리 장정길,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고 다녔음을 대뜸 알수가 있다.
또한 무정이 팽덕회가 이끄는 홍군 제3군단 포병지휘관으로 있을 때의 중앙 혁명근거지 홍군시절, 주덕은 모택동, 주은래, 팽덕회와 토론끝에 무정을 군위직속 홍군포병퇀 퇀장으로 제발시켰으며 중앙홍군의 장정이 시작될무렵 무정을 다시금 군사위원회 제1야전종대 제3제대 사령원 겸 정치위원으로 임명하였다, 더구나 설산과 초지를 지날 때 무정이 팽덕회사령원을 받들어 장국도와의 투쟁에서 불멸의 기여를 하였다는것을 알게 된 주덕(1935년 6월, 사천 무공에서의 홍1방면군과 홍4방면군 회합후 주덕은 홍4방면군에서 활동)은 이 조선혁명가에 대하여 탄복해 마지 않았었다, 홍군주력이 팔로군으로 개편된 전후과정 (홍군총부 작전과장과 팔로군총부 작전과장에 대하여...) 이러한 자료들은 이 평전에 하도 많아 필자는 여기서 일일히 소개하지 않으려 한다.
길림성 화룡시태생. 1982년 연변대학 조문학부 졸업, 선후로 연변일보사, 연변력사연구소 절강월수외국어대학 한국어과 교수로 근무ㅡ이런 경력의 소유자인 리광인씨는 지난 10여년 기간에만도 “겨레 항일지사들” (전4권), “조선족력사문학연구문집”(전 2권), “광복전 겨레 작가론”, “시인 윤동주 인생려정 연구”, 평전 “홍군장령 양림”, 평전 “백포 서일장군” 등 20여부의 력작으로 펴내였으며 이제 홍군음악가 “최음파평전”이 곧 출판되고 현재 “송몽규평전” 집필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줄로 알고 있다.
매번 통화 때마다 마치 지기를 만난듯이 친절하게만 느껴지는 형 다운 형ㅡ새삼 막역지교로 느껴지는 리광인교수ㅡ앞으로도 머나먼 삶의 려정에서 건강에 더 류의해가면서 소설이나 픽션이 아닌 우리 겨레들의 귀중한 력사사료들을 후대들에게 더욱 많이 남겨줄수 있는 력작들을 펴내시길 다시 한번 기대해본다
2016년 6월30일 심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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