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은 시인으로서의 인격이 있고 또한 독특한 개성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한 시인의 인격은 시에서 주로 튼튼한 골격을 이루며 남달리 독특한 개성은 또한 피와 살과도 같은 시적인 언어들을 창출해내기도 한다.] 일찍 미셀 푸코는 <<말과 사물>>이라는 저서에서 <<인문적 사실주의는 새로운 방식이 아니다. 그것은 현대적 지식에 대해 깨여있는 불안한 의식이다>>고 설파한적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살펴볼때 우리 이 시대의 시인들은 <<위대한 무당>>들임이 틀림없다 .어찌보면 지극히 단순한 자신의 은밀한 아픔마저도 가끔 시대적인 아픔으로, 영위되여 가고 있는 삶의 지혜와 그러한 끊임없는 모험, 자아해탈과 자아 모순속에서도 악착스레 갈구해가는 영구불멸적인 정신적 해탈, 어쩌면 한낱 허무와 공허의 불안함, 그러한 요소마저도 시인자체의것만이 아닌 시대적인 것으로 가끔 승화시켜놓고 거기에 쟁쟁한 공명을 이끌어내여 치유의 엔돌핀으로 증오와 사랑을 나름대로 담담하게 노래 부르고 서슴없이 고백하여가는 ㅡ 솔직히 한영남시인의 근작시들을 십여일전 이메일로 받아놓고 무엇을 쓸가? 어떻게 쓸가? 여러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중 오늘에야 비로소 필을 든다. 그럼 여기서 우리 함께 한영남시인의 탈변을 시도로 굵직한 몸부림이 돋보이는 근작시들을 차례대로 하나하나씩 읽어보기로 하자
절충을강요하는무형(无形)속의새로운이중관념
묻지 않으리
상처를 찢는 또 다른 상처가 될가봐
바라만 보리
그저 말없이 이 세상 가장 아름다운 눈빛으로
<<상처를 들고 상처를 찾지 않으리>>전문이다
일찍 프로이드는 해결되지 못한 상처를 꺼내 승화하여 치유하는 과정을 문학창작의 전반 과정으로 보았다. <<나는 물이다 내게 무슨 상처랴>> <<내게 꽃멀미나 시켜라>> <<수선화는 굳이 이름 불러주지않아도 스스로 아름답다>> <<나는 조선토종이외다>> 등등 주옥같은 작품들을 륙속 출품시켜 한때 조선족시단을 나름대로 풍미했고 심플하게 러시 아워까지 이끌어 냈던 한영남시인의 전반 시적 풍격을 꼼꼼히 살펴보면 리드미컬하게, 혹은 한결같이ㅡ 세찬 파도나 거친 풍랑, 외재적인 그러한 바다와는 거리가 멀게 항상 내재적인 미가 더욱 돋보이도록 돌돌돌 맑고 깨끗한 시내물 과도 같이 잔잔하게 흘러오다가도 불쑥 시적 공명을 크게 울리는 그런 특징이 있었다 . 그런 한시인이 요즘 들어 근작시에서 절충에 절충을 강요해가면서 이중관념적인 여러가지 단시들로 지금 필자를 깜짝 놀래우고 있다. 도합 2련으로 나뉘여진 이 시의 제1련 /묻지 않으리/상처를 찢는 또 다른 상처가 될가봐/ 에서 볼수 있다싶이 누구나 쉽게 직시할수 있는 피크(顶峰)된 시인의 상처, 즉 유형(有形)과 무형(无形)의 비좁은 삶의 공간을 비집고 나와 어마어마한 전률로 독자들에게 다가서려 하는 클로즈업된 시인의 아픔과 그러한 상처자국들ㅡ어쩌면 필자나 독자들로써는 감히 그 깊이나 너비마저 예측할수 없는 삶속의 희노애락과 애환이 절절히 느껴지게끔 하며 특히 제 2련은 객관적인 태도로 /바라만 보리/그저 말없이 이 세상 가장 아름다운 눈빛으로/ 결속되여 이 시는 곱씹어 읽을수록 꼭 무엇이라 이름할수는 없지만 잔잔한 울림이 변두에서서부터 시작되여 점차 중심으로 모아지는 그런 특징이 있는것 같다. 그럼 아래에 어쩌면 모험을 시도로 하는 다른 두수의 단시도 조심스레 더 살펴보고 가도록 하자
저녁황혼
놀
타네
늘
붉네
인생
울어라 바다가 넘쳐나도록
웃어라 하늘이 흔들리도록
여기서 <<저녁황혼>>은 도합 여섯글자로 그나마 1, 2련으로 나뉘여졌지만 <<인생>>은 고작 두개 련뿐이다. 꼼꼼히 살펴보면 <<저녁황혼>>은 보다싶이 제목자체가 그냥 <<황혼>>이여도 무방하려만 특별히 <<황혼>>앞에 <<저녁>>을 덧붙여 시간적인 개념이나 강조의 뜻을 강하게 크게 나타내려고 하였음이 엿보이고 <<인생>>은 어쩌면 아무렇치도 않게ㅡ 혹은 대수롭지도 않게 쉽게 씌여진듯 하지만 자세히 따져보면 <<울음>>과 <<웃음>>, <<바다>>와 <<하늘>>, 그리고 재치있게 형용사 <<넘쳐나도록>> <<흔들리도록>>이 존속적인 결속어로 붙어있어 곱씹을수록 만만찮은 이미지즘을 이루고 있음을 알수가 있다. 어쩌면 한영남시인이 자신의 한계라고 느껴지는 시적탈출구를 이번 근작시들에서 절충과 이률배반적인 모험으로 새롭게 헤쳐나가가려 하는 그런 과감한 행보가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일찍 <<진리란 존재하지 않는것임>>을 보여주고저 철학가이며 정치가였던 폴 미셀 푸코는 전생을 끊임없는 노력을 통하여 결국 <<지식을 팔아먹는 사람>>이라는 온갖 비난과 모욕까지 다 들어가면서도 끝까지 아주 겸손한 하나의 사고방식만을 우리들에게 제시하여 준적이 있다. 그러한 장인정신이 돋보이는 까닭은 오늘도 개혁의 행보는 매 한발자국마저 조심스럽다는 그런 이야기로도 될수 있을것 같다 . 예술의 소외는 억압이 아닌 승화라고 말한 학자가 있다. 이렇듯 한영남시인의 새로운 행보, 즉 새로운 시도는 지속적일지 아니면 계획적인 잠시적 은페일지는 우리모두 조금 더 시간을 두고 조심스레 지켜보아야 할것만 같다.
지성의씨앗, 그리고균열의사고속에서건져보는자연과삶의찡한감동
<<천재는 모든 사람을 닮아 있지만 아무도 그를 닮을수 없다>>는 말이 있다. 비범한 자질은 시인으로 하여금 몸담그고 있는 사회나 어떤 현상에대하여 가끔 강렬하게 반응하게 하고 또한 기대 이상으로 자신만의 새로운 세계를 꿈꾸게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공상들은 시인으로 하여금 불쑥 사회로부터 완전히 소외시되는듯한 그러한 고통을 안겨주기도 하며 가끔 병적인 상태로 몰아가기도 한다. 여기에서부터 해방되기 위하여 시인들은 작품을 창조하고 산고(产苦)하는 세월을 보내야 하는 그런 운명이기도 하다. 예술분야에서, 특히 언어예술부문에서 시인의 경우 그런 비극적인 음영은 더욱 짙으며, 그러한 비극의 중심에는 항상 광기의 그림자가 손을 드리우고 있다…p 브르노의 말 한마디를 개조하여 인용해본다. 한영남시인의 이번 근작시를 살펴보면 한마디로 <<지성의 씨앗을 근본으로 균열이 불러온 한(恨)과 상처문학의 계승이고 전승>>이라고 하여도 아마도 무방할것 같다. 조금 더 진부하게 첨부되였고 나름대로 더욱 깊이 있게 느껴지는것은 삶과 자연속의 새로운 마찰속에서 느껴지는 시인의 그 애절하고도 가슴이 찡한 감동, 즉 뼈에 맺혀 아픔으로 여린 가슴에 되 돌아 울려오는 그런 공명감이 더욱 커진듯한 느낌이 든다. ㅡ 그럼 아래에 잔잔한 서정을 배경으로 하여 인문적 휴머니즘품격을 고차원으로 승화시켜 놓은 한영남시인의 시 몇수를 우리 함께 더 살펴보고 가도록 하자
오월
오후
해가 줄 볕 다 주며
느릿느릿 서산가 머물고
멀리
저리
하느작이는 풀잎들은
연초록 아니라도 좋으련만
하필
하얀
구름들이 또
푸른 하늘 걸려 시름없고
휘이
휘이
바람 부드런 손
내 땀이마 쓸어주는데
이일
저일
고향 옛일들 떠올라
울어버리고 싶네
<<오늘은 울고싶어라>>전문이다
이 시의 제1련에서 텍스트의 모티브로 추정이 되는 /오월/오후/해가 줄 볕 다 주며/느릿느릿 서산가 머물고/는 재치있고 간결하게 설정한 환경묘사가 남달리 돋보이며 <<해와 볕>>이 시적화자로 대두된 이 시의 잔잔한 흐름을 따라가노라면 제2련에서 별로 큰 소망도 아닌 어쩌면 너무나도 소박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하느작이는 풀잎은/연초록이 아니여도 좋으련만/에서는 여리고 깨끗한 시인의 고백이 읽는이들의 가슴을 뭉클하게도 하며 특히 3련에서 /하필/ 하얀/ 구름들이 또/푸른 하늘에 걸려 시름없고/에서 <<해 볕>>은 잠시 전략적으로 굴절되여 있고 /구름들이 또/푸른 하늘에 걸려 시름없고/로 다시금 이미지를 집중시키였다가 마침내 제 4련에서는 벌써 눈물이 보이기 시작하는 /휘이/휘이/바람 부드러운 손/내 땀이마 쓸어주는데/로 단단히 초점을 모아놓고서 마침내 제5련에서 /이일/저일/고향 옛일들 떠올라/울어버리고 싶네/로 <<울고싶은 심정>>을 극대화시킨다. 모두 알다싶이 제목자체가 <<오늘은 울고싶어라>>이고보니 시적화자가 견인해낸 <<고향의 이런저런 옛일들>>은 시인을 울리기에 너무나도 충족하며 더불어 읽는이들의 가슴까지도 툭툭 건드려 공명감을 생성해가는 그런 효과음이 큰것 같다. 부킹된 휴먼드라마는 아니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군더더기 하나없이 간결하면서도 운치가 철철 넘쳐 흐르는 이 시는 아마도 필자로써는 오랜간만에 읽어보는 좋은 시라는 생각이 든다. 1967년도생인 한영남시인은 양띠, 필자보다는 한살 이상 , 한영남시인에게는 아마도 남들이 아직 알지못하고 있는ㅡ 어쩌면 시인 혼자 평생을 울어도 결국 다 울어버릴수 없는 그런 가슴 아픈 옛이야기들과 아직도 굴벰이 죽죽하도록 아리고 쓰린 상처가 고스란히 남아있는듯한 그런 느낌이 들기도 한다.
어느날 흐르는 눈물이 말라
내 앞에 놓인 접시에
한줌의 소금으로 고스란히 놓인다면
아직은 짠맛 모르는 당신에게 공짜로 드리겠습니다
상처의 이름뿐이 아닌
사랑의 이름뿐이 아닌
긴 세월 그 이름으로 모두 드리겠습니다
살아가면서 이제 더는 바보처럼 울지 아니하도록
혼자 아프지도 아니하도록
두 손 모아 매일 기도하며
내 앞에 놓인 소금 한접시
내 눈물이 말라비틀어진 소금 한접시를 당신께 그냥 드리겠습니다
하얀 소금으로 당신곁에 남겠습니다
<<마른 눈물 한접시>>전문이다
눈물이 말라 한접시의 소금을 완성하려면 얼마만큼의 시간이 소요되고 또한 얼마만큼 애간장을 태워야 할지 필자로서는 알수조차 없지만 그렇게 완성이 된 눈물의 소금 한접시를 시인은 결국 /아직은 짠맛 모르는 당신에게 꽁짜로 그냥 드리겠다/고 고백한다. 특히 5행과 11행사이에서 /상처의 이름뿐이 아닌/사랑의 이름뿐이 아닌/긴 세월 그 이름으로 모두 드리겠습니다/로 재강조하여놓고 /살아가면서 더는 바보처럼 울지 아니하도록/환자처럼 /아프지도 아니하도록/두 손 모아 기도하며/내앞에 놓인 소금 한접시/를 /결속구인 제일 마지막 두련에서 /내 눈물이 말라비틀어진 소금 한접시를 당신께 다 드리겠습니다/하얀 소금으로 그냥 당신곁에 남겠습니다/고담담히 마무리한다. 여기서 하얀 소금은 말그대로 쓰나미처럼 하얗게 가슴에 다가와 읽는이의 가슴마저 너무 쓰리고 아프게 한다. 한수의 시에 왜 이처럼 많은 독자들이 웃고 또 우는지 한영남시인의 이번 시를 읽으면서 조금 알것도 같다는 그런 느낌이 들기도 한다.
가면
세상 열리나
오면
세상 닫히나
열흘
열사흘
한해
두세해
맨날
그리다
행여
만나도
말도
못하고
손도
못잡고
그냥
그리움밖에
끝내
서글픔밖에
가면
세상 깨지나
오면
세상 터지나
<<미웁다가 그리웁다가>>전문이다
간다고 허망 열릴 세상이 아니고 온다고 쉽게 닫힐 그런 세상이 아님을 번연히 알면서도 시인의 각도로 살펴보는 허무와 공허의 불안한 요소들, 즉 가상적인 현실속에서 어찌보면 어젯날 이룰수 없었던 열련과의 뜻깊은 상봉, 혹은 그러한 갈구를 특히 3,4,5련에서 /맨날/그리다/행여/만나도/말도/ 못하고/손도/못잡고/그냥 /그리움밖에/끝내/서긑픔밖에/에서 시인의 특수한 애증표달을 표면만이 아닌 내면속의 진지한 감정으로 곧바로 승화시켜놓고서 제목자체에서 이미 독자들의 머리속에 미리 각인시켜놓은 <<미웁다가 그리웁다가>>을 자연스럽게 떠올려가면서 결국 /세상이 깨지나/세상이 터지나/로 이미지 총집합을 시도한듯한 그런 느낌이 들기도 한다.
마무리하면서
력사는 련속적이면서 동시에 불련속적인 특성을 띤다 . 이번 한영남시인의 근작시중에는 이외에도 <<너의 고통에 소금을 뿌리면, 그러면 용서가 될가>> <<고향은 내가 울바자에 오줌을 싸도 나무라지 않았네>> <<거기에 추억은 울바자처럼 서있었네>> <<물덩이들의 반란>> << 래일에 눈길 걸어두고>> 등등 여러수의 시가 더 있지만 시간상 관계로 여기서 필자는 더 언급하지 않겠다. 이상 몇수의 시에서 살펴볼수 있는바 한영남시인의 근작시는 어쩌면 모험을 시도로 점층법과 겹쳐그리기 기법으로 완성 된것이 많으며 대부분 시들이 또한 한폭의 작은 우주를 손바닥우에 올려놓고 오래도록 음미와 감상의 긴 여운으로 길게 남기려하는 시인의 대담한 시도가 엿보이기도 한다. 더불어 오래도록 지속되여 온 구조주의적 모더니즘 사색에서 새롭게 탈출해보려는 시인의 굵직한 몸부림을 읽을수가 있어 무척 고무적이라는 그런 생각이 든다. 그럼 우리 다 함께 여기서 모더니즘 특성과 그 일곱가지 개념을 조심스럽게 잠깐 살펴보도록 하자.
첫째, 모더니즘은 도시주의를 지향한다. 보들레르의 파리, 조이스의 더블린, 엘리어트의 런던, 도스패소스의 뉴욕 등등은 대체로 모든 모더니스트들은 자연이 아닌 도시적 삶의 문제를 형상화로 하였다.
둘째, 모더니즘은 공업기술주의를 지향한다. 기술세계란 도시적 삶의 토대라고도 할수 있다. 특히 립체파, 미래파, 다다이스트들이 무엇보다 강조한것이 기술성이다.
셋째, 모더니즘은 기술세계가 보여주는 그런 특성과 관계가 있는 비인간화를 지향한다. 비인간화는 오르테가 익가세트에 의해 현대예술의 기본개념으로 리론화된적이 있다.
넷째, 모더니즘은 원시주의를 지향한다. 원시주의란 추상화 된 삶, 현대시의 기본원리로 나타나는 은유나 상징 등도 이런 맥락우에 서 있다.
다섯째, 모더니즘은 에로티시즘을 지향한다. 따라서 모더니스트들의 과제는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갈등을 해결함에 있었다
여섯째, 모더니즘에서 읽을수 있는것으로는 반도덕성을 들수 있다. 이른바 도덕률을 페기하는것은 현대미학이 삶의 도덕적 기초의 와해에서 출발하기때문이다.
일곱째, 모더니즘은 실험주의를 지향한다. 시간적 질서에 대한 회의, 따라서 모든 시간성을 공간으로 인식하려는 동시성의 개념이기도 하다.
시는 엄격히 말해서 독백의 양식에 속한다. 따라서 시에 대화의 양식을 활용하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필자로서는 궁금하기도 하다. 시에서 이중적구조법과 다성적 언어를 사용하면 곧바로 전통적인 시 쟝르의 해체라는 문제와 우리는 맞닥뜨리게 된다.아무튼 한영남시인의 실험적이고 모험적인 이번 시적 행로가 좋은 결실을 맺기를 두 손 모아 기원해 본다.
심양에서 2014년4월26일
发表于黑龙江新闻 7月11日第2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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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 9 ]
9 작성자 : 철리
날자:2014-06-10 09:58:33
창렬선생님의 진정 어린 <답신>에 감사합니다
님이 거론하신 시인들, 특히는 중년시인들, 조선족시단에서는 다 이름 있는 분들이 맞습니다, 저도 그들의 재능을 인정합니다.
사실 저는 근년에 나이 들어 시공부를 다시 좀 하면서도 문학에 정진하지는 못하고 취미로 좀 써보는 시애호자로서, 그저 그런 수준에 누구를 어떻다 말할 자격도 없으며 남들이 다 보는 댓글에다 남을 내리깎는 그런 못난 짓은 안합니다.
아무리 익명으로 쓰는 댓글이지만 누구를 마음 아프게 비하하거나 헐뜯고 인신공격하는 못된 짓을 말입니다...
나중에 허선생님에게 꼭 련계를 하겠습니다. 건강하시고 좋은 하루 되세요
8 작성자 : 허창렬
날자:2014-06-09 13:04:07
두분께먼저감사하다는말씀올려야할것같습니다.제가보건대중국조선족제1대로시인들로는(해방전을포함하지않음)아마도김성휘,조룡남,리상각,리삼월등이런시인분들인것같습니다.특정된시대의아주특징적인오묘한시들을써오신분들ㅡ허나개혁개방과더불어제일먼저개혁에앞장섰던분들로는김정호한춘최룡관시인님-이들중에서특히최룡관시인님은<<이미지시창작리론>>을완성시켜적잖은센세이숀을불러일으켰으며개혁파거장으로우뚝자리매김을한것같습니다.제2대시인(여기서는 주로 개혁개방이후 가장 영향력이 있는 시인들을 말하려 합니다)들로는 아마도 석화, 김학송, 리임원, 리성비 등등 시인들인것 같습니다 . 석화시인의 <<나의 장례식>> 감학송시인의 <<예감의 새>> <<사람의 숲에서 사람이 그립다>> <<하늘에게>> 그리고 리임원시인의 <<바람에 길을 물어 >> 리성비시인의 <<이슬 꿰는 빛>>이 이 모든것을 충분히 설명하여 준다고 생각합니다. 제3대 시인들로는 김영건 , 김승종, 한영남, 조광명, 등등 이런 시인들이 아닐가 생각됩니다. 김영건시인의 경우 시를 아우르는 령역이 넓고 거창하며 김승종시인의 경우 실험적인 모험정신이 누구보다 돋보이며 한영남시인의 경우 한과 상처문학을 계승 발전시켜 대표작이 제일 많으며 조광명시인의 경우 불교문화를 시속에 접목시켜 시적인 령역을 넓혔다고 할가요 . 허나 이들의 근작시들을 살펴보면 한결같이 한계가 느껴집니다. 왜 그럴가요? 그 답안을 저는 김철호시인의 포스트모더니즘 접목에서 찾을수 있을것 같다고 확신합니다. 즉 하이퍼텍스트ㅡ아직 허다한 학자, 시인들이 하이퍼시하면 반대하는 양상이 있는듯 하신데 그럼 여기서 노벨상 수상자인 토마스 트란스 트뢰메르의 <<기상도>>와 조향의 <<바다의 층계>>를 잠간 살펴 봅시다
기상도
시월 바다가 신기루 등지느러미를 달고
차갑게 반짝인다.
아무것도 요트경기의
백색 현기증을 기억하지 않는다
어슴프레한 호박빛이 마을위를 비추고
온갖 음향들이 천천히 날아다닌다
개가 짖는 소리는 정원위의
대기중에 그려진 상형문자다
정원에는 노란 과일이 나무를
바보 만들며 제 멋대로 떨어진다.
바다의 층계
낡은 아코오뎡은 대화를 관뒀습니다
--여보세요!
<<뽄 뽄 다리야>>
<<마주르카>>
<<디젤엔징에 피는 들국화>>
왜 그러십니까?
모래밭에서
手话机
녀인의 허벅지
낚지 까만 눈동자
비둘기와 소녀들의 랑데부우
그우에 손을 흔드는 하얀 기폭들
나비는
기중기의
허리끝에서
푸른 바다의 층계를 헤아린다
이것이 시가 아니라면 토마스 트란스 트뢰메르가 어떻게 노벨상까지 받았을가요 ? 이번 평론에서 저는 한영남시인의 모험정신을 긍정적으로 보았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평론중에 <<이렇듯 한영남시인의 새로운 행보, 즉 새로운 시도는 지속적일지 아니면 계획적인 잠시적 은페일지는 우리모두 조금 더 시간을 두고 조심스레 지켜보아야 할것만 같다.>>고 하였고 <<저녁황혼>>은 좋다 나쁘다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합시다. 여기 댓글에서는 여러모로 이야기하기가 불편한듯 합니다.<< 598219950 日光普照>> 저의 qq입니다. 앞으로 우편함에 두 분의 고귀한 의견 엽서로 보내주시면 더욱 고맙겠습니다. 그때 가서 저의 전화번호도 알려 드리겠습니다. 선배들로서ㅡ 형다운 형들로서ㅡ 따끔한 귀띔을 자주 부탁 드리겠습니다. 그럼 내내 행복하시고 오래오래 건필하세요 심양에서 허창렬 올림
7 작성자 : 힘내세요
날자:2014-06-08 13:27:49
6번님의 말이 좋은 같습니다. 우리 의 견해를 동감해주니 기분 또한 좋습니다.허창렬님은 아주 대바르고 정직한 면이 있어보여서 호감이 많습니다.보건대 허창렬님은 시를 아주 사랑하고 시에 아주 집착하고 있는 같습니다. 연변에 이런 분 아주 드물지요. 두루두루 보니 시에 집착하는 분을 헤여보니 거퍼 10명두 되나마나합니다.어떤 분들을 시에 집착한다고 하는가 하면 십몇년 수십년 하루도 빠짐없이 시만 생각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입니다.이런 분들을 제가 직접목격해봤으니깐요 ㅎㅎㅎ .허창렬님은 앞으로 위대한 시인은 되지 못할지라도 저명한 시인정도는 될같습니다(절대 풍자가 아닙니다).왜냐하면 마음 바르고 시에 아주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시에 끈질긴노력에 집착하면 이제 아무때건 하느님의 보살핌을 꼭 받을겁니다.허창렬님! 발전하려면 고집은 금물이란걸 미리 귀띔해주고 싶습니다(물론 님은 고집부릴사람 같지 않구요 ㅎㅎㅎ)힘을 내십시오!
6 작성자 : 철리
날자:2014-06-08 09:40:53
저 역시 조글로 글까페에서 허창렬선생님의 글을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시에 대한 연구가 깊고 사람이 대바르고 베짱이 있어보여 좋은 인상을 갖고 있습니다(저와는 일면식도 없는 분이지만)
아래 분과, 두분의 시에 대한 토론분위기가 좋습니다
저는 그 누구와 시에 대한 쟁론에는 참여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나의 관점을 말할뿐.
저는 전통시와 현대시 그 중간을 좋아합니다.
그 중간을 일컬어 문학적으로 무어라 명명하는지는 몰라도. (어느 분이 알려주시죠)
그래서 두분의 주장에 다 수긍이 갑니다.
저는 너무 난해한 시는 거부합니다.
시는 그래도 읽고서 그 뜻을 감지할수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하지만 최룡관선생의 사람신체에 대한 시를 읽고는 탄복하였습니다...)
저는 철학이 깔려있는 시를 좋아합니다.
시속에 철리가 있다는 말 역시 시적발견이라는 말과도 통하겠지요
그래서 저 역시 리삼월의 시를 좋아합니다.
손 쉽게 리삼월의 단시 한수를 올립니다.
<인상파 예술가의 녀조각상>
그녀는 라체조각상/ 말썽 많은 세상/
호수가에 큰 엉덩이 내놓고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녀는 머리가 있었지만/ 얼굴은 없었다.
5 작성자 : ㅎㅎㅎ
날자:2014-06-08 06:48:06
리상각선생님의 시 리삼월선생님의 시 등 좋은 시들이 많다봅니다. 그리고 리욱의 시 등 저는 이런 분들의 시를 좋아합니다.
발견이란 한마디로 일반사람들이 미처생각해내지 못한 생각을 해내는것이 발견이 아니겠습니까?
일반사람들이 다 아는 상식적인 생각을 시로 적는다면 시를 쓰나마나합니다. 그리고 발견없이 시를 쓰는 이들의 대채적인 공통점은 자기시를 암송하지못한다는것입니다.심지어 자기가 어떤 구절을 어떻게 되여 썼던지 도무지 기억도 안되는이들이 수두룩합니다. 이상각선생님은 저기의 수많은 시들을 왕왕 암송내여 읊습니다.그래서 탄복하는겁니다.발견도 없이 황당하게 쓰는 이 뚱단지말로 홍두깨를 내미는 이 몽롱하게만 쓰는이 이런분들께 한번 시험해보시라요 , 자기시를 암송할수 있는지 ? 남의 시라면 더더욱 암송하지도 않거니와 기억도 안 될겁니다.그러길래 발견이 중요하거니와 발견이란 신성시해보이기 합니다. 발견은 하늘이 주시는 겁니다.우리 시인들 발견없이 시쓰기에 습관된 이들 불알떼여놓고 장가드는격이 아닐가요?ㅎㅎㅎ
4 작성자 : 허창렬
날자:2014-06-07 14:02:59
선생님이이야기하시려는뜻은알만합니다만무엇이<<발견>>이고무엇이<<태산>이라는건지너무애매모호하시군요. 이상은 29세에 요절하였지만 지금도 그 깊이를 가늠할수 없는 좋은 시들을 후세에 남겨놓았습니다. 시란 전통시든 현대시든 <<누구나 읽고나면 쉽게 알것만도 같으면서도 좀체로 그 깊이를 가늠할수 없는것이 좋은 시>>라고 생각됩니다 . 한영남시인의 시가 선생님께 스트레스를 준다? 그럼 이렇게 합시다. 선생님의 시 두편 여기에 올려 주십시요. 어떤 시가 << 발견>>이 있고 <<태산>>을 넘어서려 하는 시인지 무척 궁금하고 감상하고 싶어집니다. 그럼 부탁 드릴게요. 기다리겠습니다 허창렬 올림
3 작성자 : 태산이 험난해도
날자:2014-06-06 21:17:47
우의 시들을 비롯해서 한해에 조선족시인들이 발표하는 시들을 죽 보십시오.거이 99%가 발견이 없거나 발견이 미미한 작품들입니다.우리 조선족시인들의 앞에는 발견이란 이런 태산이 앞을 가로 막고있습니다.그 태산이 험난해도 톺아 넘아가야 합니다. 넘어가자면 몇년 혹은 몇십년 혹은 한평생 의 시간이 걸릴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허다한 시인들은 그 태산을 넘기 싫으니깐 에돌아 갑니다.에돌아 간다는것이 왕왕 왜지밭으로 가기가 일쑤입니다. 례하면 황당한 비유라든가 몽롱한 표현들이거나 아니면 뚱단지같은 말로 불쑥 홍두깨를 내민다든가 하여튼 벼라별 지랄을 다 쓰고 있습니다.그래서 읽어보면 기억이 안되고 읽고난후엔 마음이 개운하지도 않고 오히려 왁작 스트레스가 오기까지 합니다.시를 써서 독자들을 흥분시키기는 커녕 작자자신마저도 슴슴해하는 시는 아예 쓰지 않는게 좋을 같습니다.
우선 허창렬님의 끈질긴 시 탐구정신에 탐복합니다.우에서 여러 시들을 평했는데 필자가 보건대 잘 된작품이라 말하기엔 좀 그렇습니다. 시란 몇십초사이에 읽어보고 그 짧은 순간에 그 형상이 독자의 머리속에 남아야합니다. 이러길래 시를 성곡시키는데 어려움이 있다는겁니다.허창렬님한테 묻겠지만 우의 시들을 보자마자 돌아서서 암송은 말고 그 내용이 도무지 앚혀지지않은 형상으로 기억할수 있는지요? 그저 수수한 사유에 머물면 그것이 관습니돼버려서 돌파적사유를 하지 못한다봅니다.짧은시의 단점장점을 보면 단점이란 바로 꼬리대가리없은 시로 되기 십상입니다.시의 성공의 여부는 그 시가 독자더러 기억하지 말래도 자연히 기억되게하는데 그 성곡의 비결이 있습니다. 우의 시들은 그 셩지에 미치는지? 우주 크나큰 의문부호를 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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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이 거론하신 시인들, 특히는 중년시인들, 조선족시단에서는 다 이름 있는 분들이 맞습니다, 저도 그들의 재능을 인정합니다.
사실 저는 근년에 나이 들어 시공부를 다시 좀 하면서도 문학에 정진하지는 못하고 취미로 좀 써보는 시애호자로서, 그저 그런 수준에 누구를 어떻다 말할 자격도 없으며 남들이 다 보는 댓글에다 남을 내리깎는 그런 못난 짓은 안합니다.
아무리 익명으로 쓰는 댓글이지만 누구를 마음 아프게 비하하거나 헐뜯고 인신공격하는 못된 짓을 말입니다...
나중에 허선생님에게 꼭 련계를 하겠습니다. 건강하시고 좋은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