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창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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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장군'과 '광개토대왕비'
2014년 01월 23일 12시 46분  조회:2435  추천:8  작성자: 허창렬
<< 백두장군>> <<광개토대왕비>>
           
 잡문  허인
 
  그는 성이 김씨이고 이름은 무엇인지 아무도 모른다. 내가 아주 어렸을때 주옥같은 옛이야기들을 너무나도 구수하고 재미있게 들려주시던 아버지의 무르팍에 쪼크리고 앉아 매일밤 귀동냥삼아 들었던 이야기가 어쩌면 다재다난한 우리 조선족근대사에 조그마한 보탬이라도 되지 않을가 하는 생각에 두서없이 이 글을 적는다 . 나의 이런 소견이 더없이 어리석고 또한 부질없는 짓일지라도 독자 여러분들이 재미삼아 읽어봐주시고 그냥 예쁘게 봐 주었으면 감사하겠다 .
 
  이 이야기를 시작하려면 우선먼저 나의 할아버지와 나의 아버지, 그리고 우리집 가족사를 간단히 소개하지 않을수가 없다. 양천 허씨가문 허준의 제12대손인 나의  할아버지 허관세(현재 살아계시면 130세좌우)는 조선 함경북도  무산군 계룡면 어디선가 사시다가 1920년, 즉 지금으로부터 90여년전 일곱살 난 나의 아버지 허기선(현재 살아계시면 100세)씨를 등에 업고 년로하신 할머니와 일가식솔 모두 이끌고 첨벙첨벙 두만강을 건너 지금의 연변자치주 화룡시 서성진 합신마을에 은둔, 일본 간도성정부시절 연변지방에서는 유명한 한의사인것으로 알고 있다 .일찍 나의 아버님과 아직 건재해 계시는 막내고모 (허선옥84세)님의 이야기에 따르면 나의 할아버지와 간도성 제일헌병사령관 김일로(조선인 일본륙군사관학교졸업)씨는 작형제관계 , 김일로씨의 모친이나 그의 가족성원들에게 병이 나면 언제나 김일로가 직접 찦차를 몰고 합신산골까지 찾아와 나의 할아버지를 모셔다 진맥, 처방하고서야 한시름을 놓군 하였다고 한다.
 
  그외에도 풍수지리와 점술에도 능하셨던 나의 할아버지는 돈 없고 가난한 사람들의 병과 풍수지리를 수도 없이 많이 봐주셨으며 <<술주정뱅이>>이신 우리 할아버지가 화룡시가지에 과음으로 길거리에 쓰러져있으면 언제나 일본헌병들이 짚차로 어김없이 집까지 모셔다 드렸다고 한다 . 일찍 나의 둘째고모님의 생전 말씀에 따르면 나의 부친님의 첫번째 부인도 김일로가 중신, 후에 난산으로 사망 ,이렇게 따지고 보면 나의 어머님은 후처인셈이다 .아버지와 나의 어머니의 년령은 18세차이, 1968년생인 나는 8남매중 막내, 나의 아버지가 55세때에 내가 태여났으니 나와 나의 외조카는 아이러니하게도 원숭이 띠동갑 ,  시대적인 말로 하면 정말 웃지도 울지도 못할 희극적인 상황이 아닐수가 없었다
 
  유식한 할아버지와는 달리 나의 아버지는 야장쟁이, 그 당시 화룡시가지에서는 제법  알아주는 기술일군이셨다고 한다, 조금 불편한 몸이심에도 불구하고 한창 젊었을때 화룡시가지에 내려가 일본순사의 귀뺨을 후려칠 정도로 성격이 올곧고 강인하셨던 나의 아버님은 말그대로 산전수전을 다 겪으신 분이였으며 늙으막에는 제 자식만이 아니라 동네집 코흘리개들까지 마주치면 어김없이 이쁘다고 두볼을 쪽쪽 빨아주시곤 하는 무척 인자한 분이셨다 .
 
  하도 어릴적 일이라 지금은 조금 기억이 아리숭하긴 하지만 아버님 말씀에 따르면 <<백두장군>> 김씨는 백두산 근처 어느 두메산골에서 늙으신 로모를 한분을 모시고 산다고 해서 붙여진 별칭ㅡ 지금으로 따지면 아마도 안도현경내가 아닐가 싶다. 그가 묵직한 지게에 땔나무를 한가득 해지고 화룡시가지로 내려올라치면 마치 작은 산이 움찔움찔 움직이는듯하였다고 하니 상상을 훨씬 초과하는 굉장한 완력이였다고 보여진다 .
 
  구척의 키가 지금의 센치로 따지면 어느정도인지 알수가 없지만 그는 남자중의 상남자 , 또한 호걸중의 호걸 ㅡ완강하게 거항하는 그를 붙잡는데 일본헌병 몇개 소분대를 동원하여야 하였으며 전신무장한 장정이 적수공권인 그와 맞서 싸우다가 절반이상이나 거덜이 났엇다고 하니 아마도 수호지에서나 볼수있는 로지심이나 무송이 아닌 무송이였다고 해도 조금도 과언이 아닐것이라고 생각된다 .
 
  간신히 <<백두장군>>을 생포후 그의 탈옥을 방지하기 위하여 일본오랑캐들은 <<백두장군>>의 손목, 발목 힘줄을 칼로 모두 잘라놓았으며 마분지에 그의 솥뚜껑같은 손도장을 찍어서 그 당시 돈 오전에 판매 , 그 무슨 괴물인양 간도성 곳곳을 돌며 전시를 하다가 유전자연구를 목적으로 일본에로 후송 , 그후 그에 관한 소식은 아무도 들은적이 없다고 한다 . 지금 생각해봐도 너무나도 가슴이 아프고 슬픈 이야기가 아닐수가 없다.
 
  그외에도 아버님은 자주 허씨유래와 2000여년전 김수로왕이 세운 가야국은 부처님의 자비로 세워진 불교국가였다것과 지금의 집안시 광개토대왕비의 원래 비문과 그 탁본에 관해서도 여러차례 이야기하신적이 있으시다 . 지금 생각해보면 일찍 소학교문조차 가보신적이 없고 겨우 떠듬떠듬 제 이름자나 쓰시는 아버님께서 어떻게 그 많은 이야기들을 머리속에 꽁꽁 기억해두셨을지 절로 감탄니 나올뿐이다 .
 
  아버님의 말씀에 따르면 일제가 중화를 대거 침략하기직전인 일본 간도성정부시절, 치안을 빌미로 간도땅에 발을 들이 민 일제가 제일 처음 착수한 일이 곧바로 광개토대왕비비문을 뜯어고친것이란다. 정확히 어느 년대인지는 알수가 없지만 어느 해 겨울 수많은 일본헌병을 파견하여 근 일년간 광개토대왕비를 물샐틈없이 에워쌌으며 일체 민간인과 중국인은 모두 접근금지,  공사가 끝난후 곧바로 진짜 탁본은 일본으로 보내졌으며 이 모든것은 극비중에서도 극비에 붙여졌다고 한다.     일본 헌병사령관인 김일로가 어느날 술김에 할아버지께 한 말이라고 하니 실속이 있지 않을가 생각해본다 .
 
  력사는 발굴만이 아닌 발견일수도 있으며 또한 가슴 따뜻한 기억일수도 있다 . 한장의 완벽한 그림을 그리려면 질 좋은 종이와 붓이 필요하고 또한 훌륭한 화공이 있어야 완성이 되질 않겠는가? 나는 력사학자도 화공도 아닌 일개 문학인일뿐이다 .오직 진실을 말하고 또한 진실만을 알고 싶고 그리고  오늘날 너무나도 창백한 우리네 력사에 자그마한 단서라도 되였으면 좋겠다고 나름대로 생각해본다.
 
2013년11월3일
 
심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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