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막 차
장학규
해가 많이 길어지기는 길어진가 보다. 7월 중순에 접어들면서 일곱시가 넘어가도 하늘은 서운한 듯 한가닥 밝은 빛을 렴치없이 그대로 드리우고 있었다.
그러나 정호는 날이 곧 어두워지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느끗한 듯 하면서도 미처 의식도 하지 못하는 사이 순식간에 까막나라로 들어가는 것은 이 계절만의 특수이기도 했다.
어쩌면 세상사도 이 계절만큼 치렬하면서도 끝맛이 통쾌했으면 좋겠다. 지나간 모든 것을 찰라에 까맣게 까먹을 수만 있다면 행복은 행복대로 즐거움은 즐거움대로 남모르는 어딘가에 남아 있을테고 고통이나 후회 같은 것은 아예 온데간데 형체도 없을 것이 아닌가.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는 과거라는 이름의 물건에 얽매여 마치도 세계말일이나 다 된듯 껌뻑 죽었다 살아나면서 한바탕 홍역을 치르는 것은 정말로 사람이 할 노릇이 못되였다.
아직 한나절 달아오른 열기가 채 식지 않은 때이다. 거퍼 몇발작 걷지도 않았는데 온몸에 땀이 배이고 있었다. 정호는 어지러워오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고 휘청휘청 술취한 사람처럼 뻐스정류장으로 다가갔다.
그곳에는 벌써 적지 않은 사람들이 몰려서 있었다. 손에 든 싸구려 부채를 버럭버럭 소리내여 저으며 더위를 식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슈퍼 랭장고에서 갓 사온듯 찬 물방울이 데롱데롱 매달린 생수병을 이마에 대고 있는 젊은이도 있었다. 어떤 남정네는 웃통을 드러내놓은채 부끄러움도 잊고 녀인들 사이를 이리저리 빠져나갔고 무시당하기 한창 좋은 얍삽한 무리들은 그늘이 언녕 사라진 가로수밑으로 한걸음 물러나 피서하는 흉내를 내고 있었다.
정호는 멍하니 거리 건너편 뻐스정류소를 바라본다. 저기서 29번 뻐스를 타면 첫 역이 은정이가 살고 있는 아파트단지 부근이다. 지금 이대로 달려가 은정이를 불러내고픈 충동이 사뭇 강렬하다. 도대체 왜 그러냐고 따져 묻고 싶다. 떠나지 않으면 안되냐고 구걸이라도 할가부다. 그러나 은정이는 정호의 전화를 받지 않을게 분명하다. 문자도 씹을게 틀림없다. 그렇다고 저대로 훌쩍 떠나버리도록 내버려둬야 한단 말인가.
눈앞에 미연이의 득의양양한 얼굴이 동영상처럼 떠올랐다. 종래로 보여주지 않던 모습이였다. 인혜의 표정은 이상야릇하다. 갈피를 잡지 못하게 아리숭한 것은 그녀만의 디자인이다. 승원이는 소태 씹은 형상이다. 도대체가 왜들 그러는지 모르겠다.
그사이 뻐스가 여러대 지나간 모양이다. 주변이 갑자기 조용한 느낌이 들어 둘러보니 정류소에는 그 많던 사람들이 모두 증발해버리고 자기 혼자만 달랑 남아있었다.
시계를 보니 이제 막차가 남아있었다. 이 역에서 타면 반대방향으로 달리기에 은정이네 아파트는 제일 마지막 역전이 되는 셈이다. 29번은 환선으로 한바퀴 달리는데 대략 한시간 정도가 걸린다.
막차가 달려왔을 때 정호는 조금도 주저없이 뻐스에 올랐다. 스스로도 어떤 절박함에 쫓기는 느낌이였다. 하긴 그럴만도 했다. 모레면 은정이는 한국으로 떠난다. 명색이 류학이라고는 하지만 사실은 정호를 마음속으로부터 밀어내기 위해 그런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뻐스에 오르자마자 정호는 난제에 부딪쳤다. 주머니를 발칵 뒤집어도 1원짜리 동전이나 지폐가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정호는 돈관리를 제대로 할줄 모르는 편이다. 여유가 나지면 그때그때 다 술을 사먹는다. 그래서 종래로 지갑이란 것을 들고 다녀본 적이 없다. 원래 거기에 넣을 여유가 별로 없었지만 그거보다 뭐니뭐니해도 먼저 거추장스럽다. 몇푼 있으면 있는대로 바지주머니에 아무렇게나 구겨넣는다. 그게 훨씬 편하다. 그래서 동전은 거절이다. 주머니속에서 덜렁덜렁거리는 소리가 짜증나서이다. 1원짜리 지폐도 마찬가지이다. 가끔 그런 돈이 잔돈으로 나오면 그자리에서 기부함에 넣어버리거나 어떤 거리를 찾아 써버리고만다. 때문에 그의 주머니에는 1원짜리 돈이 들어있어본 적이 거의 없다.
정호가 난처해서 손을 비비고 있는 것을 곁눈질로 본 기사가 위챗페이로 지불 가능하다고 퉁겨준다.
(아, 그렇지.)
정호는 무안하여 저도모르게 차안을 돌아보았다. 다행히 승객은 네댓명밖에 되지 않았고 그나마 더위에 질렸는지 아니면 하루 일에 지쳤는지 누구라없이 활 열어젖힌 차창에 머리를 박고 지그시 눈을 감고 있었다.
정호도 창문이 열려있는 자리를 찾아 앉았다. 한여름인데도 에어컨이 없다. 기사 바로 머리 우로 선풍기 한대가 달랑 달려있을뿐이였다. 뻐스가 달리기 시작하자 선선한 바람이 얼굴을 스쳐지나갔다. 정호는 될수록 머리를 차창밖으로 많이 내놓으려고 애썼다. 그러다가 차가 주춤 역에 멈춰서면 살인적인 열기가 확 얼굴을 덮쳐 냉큼 차안으로 움츠러들군 했다.
그렇게 몇 역전을 달렸는지 알바 없다. 차츰 정호는 썰물과 밀물이 륜회하듯 하는 공기의 조화에 적응되여 바깥 풍경을 내다볼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도시의 밤은 폭염에도 움츠러들지 않았다. 네온등이 명멸하는 가운데 도처에서 스피커가 고아대고 있었고 음식점 식탁들이 가게밖으로 몰려나와 맥주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느닷없이 정호의 눈에 “소주실크”라는 간판이 들어왔다. 전에는 본적이 없는 자그마한 옷가게였다. 마네킹에 불륨이 선명한 치파오를 입힌 그 가게를 보노라니 1년 전 소주에서 은정이와 만나던 일이 떠올랐다.
그날 정호는 패키지관광으로 소주 졸정원을 돌고 있는 중이였다. 바캉스의 계절이라고는 하나 관광따위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정호였다. 인혜만 아니였어도 이번 길을 나서지 않았을 것이다.
“요사이 짬내서 한번 왔다가. 긴히 할 말이 있어.”
인혜가 이런 전화를 걸어왔을 때 정호는 갸우뚱했었다.
“무슨 일이여? 전화로 하면 안돼?”
“글쎄 전화로 될 수 있는 일이면 굳이 왔다 가라겠어?”
“돈 없어. 시간은 가득 남아돌아도…”
“그럴 줄 알았어. 항상 그랬지.”
인혜는 정호의 대학 동창이자 첫사랑이였다. 대학 4년간 줄창 붙어다니면서 매일이다싶이 투계처럼 치렬하게 싸웠었다. 정호는 인혜한테 완전히 오픈된 상황이였다. 정호가 코숨을 내쉬여도 왜서 그런다는 원인을 한시간 정도 쉽게 분석해낼 수 있는 사람이 인혜였다.
“인터넷을 통해 청도중국여행사에서 패키지상품을 예약했어. 첫코스가 소주이니 그때 만나서 얘기해.”
인혜의 말대로 하면 인혜도 항상 그랬다. 뭐나 일방통행식으로 결정해놓고 통보하면 그만이였다. 산만하고 자유분방한 정호를 언제나 자기 뜻에 맞는 어떤 프레임에 가두어두려고 무지 애썼었다.
정호는 이번까지 소주가 세번째 행이였다. 청도에 있는 대학을 졸업하고 인혜가 소주 삼성전자에 취직하자 짐을 들어다주느라고 따라왔었다. 둘은 힘든줄도 모르고 사흘동안 소주의 곳곳을 누볐다. 서로 까놓고 밝히지는 않았으나 두사람은 이번이 어쩌면 마지막으로 되는 데이트일지도 모른다는 핍박감에 시달렸었다.
당나라 시인 장계의 “풍교야박”으로 인해 유명해진 한산사와 춘추전국시대 오나라 왕 합려가 파묻혔다는 호구산도 그때 둘러보았다. 물론 중국4대명원에 속하는 졸정원에서는 벌려진 입을 다물지 못했었다. 일개인이 만든 정원이 감히 나라 임금의 후원과 어깨를 견줄 정도였으니 그 규모가 어마어마한 것은 말할나위도 없었다.
그로부터 2년 후 인혜가 결혼을 하면서 정호는 축하차 다시 소주를 찾았다. 인혜와 한회사에서 일하는 남편은 김장우라고 불렀는데 훤칠한 체격에 인물도 멀쑥했다. 정호는 결혼식 이틑날로 청도에 돌아오려고 했었으나 오래간만에 모인 동창들이 한사코 놔주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졸정원을 찾았으나 웬일인지 그번에는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했다.
그리고 이번이 세번째이다. 패키지라 별수 없이 팀을 따라 이동하다가 졸정원의 중부화원 견산루에서 그만 물가를 따라 세운 낮다란 돌란간에 주저앉아버렸다. 앞으로 가봤자 마냥 먼저번에 보아온 그대로일게 분명했다.
정호는 미지세계의 유혹이나 예측불가의 신비로움이란 것이 알고보면 허황한 것이란 것을 새삼스레 돈오했다. 사실 세상사란 종이 한장에 불과한 것이였다. 툭 뚫어놓고 들여다보면 세상은 거기서 거기요 별로 희한한 것도 아니였다. 몇년간 죽자살자했던 인혜가 덜렁 다른 남자의 품에 안기리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그리고 그것이 현실로 다가왔는데도 정호는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생생하게 감지하고 있는 현재이다.
물속에서는 짙은 노란색을 띤 금붕어들이 하느작거리며 헤염치고 있었다. 가끔 한뺌 크기의 피라미나 송어들도 보였다. 물곬이 오불꼬불하고 깊숙한 걸 미루어보아 자칫 붕어나 또는 잉어도 있음직했다. 정호는 어렸을 적 시골 강가에서 반두로 송어를 건져내여 매운탕을 제법 맛있게 끓였었다. 여기서는 반두질은 무리겠으나 낚시 정도는 괜찮지 않을가싶다.
견산루 1층 바닥에 돗자리를 펴놓고 낚시대를 척 물에 드리우면 신선 부럽지 않을 거 같았다. 정호는 청도에서 매일 휩쓸려 다니는 친구들이 생각났다. 고기를 낚아채여 휴대용 가스레인지로 보글보글 매운탕을 끓인다면 시 쓴다고 너벌대는 홍철이넘은 완전히 미쳐날뛰지 않을가. 술깨면 자기도 기억하지 못하는 시라는 물건을 지벌지벌 씹어대겠지 아마. 친구보다 녀자를 더 좋아하는 영철이는 못하는 술 둬잔 먹이고 바로 2층으로 올려보내면 그만이다. 견산루 구조는 좀 특이하다. 1층에서 2층으로 바로 올라갈 수 없다. 계단 자체가 없다. 꼭 1층 옆구리에 붙은 산허리를 타고 빙 돌아서 올라가야 한다. 그 2층 입구에다 역시 주색잡이인 영남이를 파수꾼삼아 세워두면 다른 넘은 올라갈 궁리도 못할 터이다. 아무래도 둘이 피박나게 싸울지도 모른다.
태평천국때 충왕 리수성이 견산루에서 주로 사무를 보았던 리유가 바로 이곳이 요지경같고 은밀하고 방어가 쉽기 때문이 아니였던가.
“저 혹시 청도에서 관광팀 따라 오신 분 아니세요?”
정호가 한창 백일몽에서 헤매는데 웬 녀자가 뒤에서 챙챙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아직도 환각에서 완전히 깨여나지 못한채 돌아보는데 녀인이 반갑다는듯 다시 말을 이었다.
“아유, 맞네요. 우리 같은 팀이예요. 후, 이제 살았네요.”
20대 후반의 발랄하게 생긴 처녀였다. 목소리도 컸고 어투도 꺼리낌 없었다. 블랙 투피스 차림인 걸 보니 직업녀성같았다. 관광을 나서서도 유니폼을 입은 사람은 별로 없을듯 싶었으나 눈앞의 처녀는 오히려 그 옷이 퍽 어울렸다. 불륨이 선명했고 한결 정숙해보였다. 특히 주름 한점 보이지 않는 생생한 얼굴이였다. 정호는 저도모르게 주눅이 들었다. 그러고보니 정호는 어느덧 30대로 업되여있었다.
“팀에서 떨어졌지 뭐예요. 태평천국 어쩌구 해서 기념사진을 남기려고 2층으로 에돌아서 올라갔다가 내려오니 일행이 어디로 갔는지 알수 있어야 말이죠. 길도 모르겠고요. 저 오불꼬불한 다리가 귀신을 물에 빠지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저를 물귀신 만들려고 준비한거 같았어요. 호호”
가이드가 뻥친 말을 그대로 고지식하게 믿는 푼수떼기였다. 정호도 이곳으로 들어올 때 거기까지는 들었었다. ㄱ자형으로 꺾어지게 다리를 만든 건 귀신은 곧은 걸음밖에 걸을줄 모르기 때문이라고 가이드가 말했었다. 사람을 해치려고 뒤를 따르던 귀신이 곧추 걸으면서 물에 빠져 죽는다는 어처구니없는 시나리오였다. 정호는 처녀가 귀엽다는 생각에 피씩 웃고말았다.
“홀로 남아서 여유작작하시는 걸 보니 이곳이 첫걸음이 아니네요. 우리 빨리 나가요. 일행이 떠나면 큰일이예요.”
처녀는 무람없이 정호의 팔짱을 꼈다. 팔뚝에 가슴이 뭉클하고 맞혀왔다. 반갑고 믿는다는 표현이였겠으나 정호는 오히려 요즘 애들은 참 당돌하다는 생각과 더불어 얼굴이 저절로 붉어왔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는 전혀 어색함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이 동원(东园)을 거쳐 정문으로 빠져나오는데 저만치에서 인혜가 손을 흔들어보였다. 흰팔이 드러나고 속옷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캐미솔에 미니스커트를 받쳐입었고 발에는 조리샌들을 걸고 있었다. 결혼하더니 성숙미가 한결 돋보였고 나젊은 부인다운 기품도 엿보였다.
“이분은?”
그들앞으로 다가온 인혜가 적의에 가득찬 눈길로 그때까지도 정호의 팔짱을 어정쩡 끼고 있는 처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바로 저 눈길이였다. 대학졸업 1년전부터 미연이를 보는 인혜의 눈길이 바로 저랬었다. 우연히 정호와 미연이가 한 회사에 실습을 가면서부터였다. 두 련인사이가 삐걱거린 것도 그 무렵부터였다. 그리고 인혜의 거침없는 저주의 화법도 날따라 레벨을 더해갔다.
“그 더러운 손을 제몸에 대지 말아요. 징그럽고 구역질나요.”
인혜는 전혀 컨트롤되지 않은 언어폭력을 사랑이라는 미사려구로 포장하면서 정호를 시도때도없이 공격해왔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신창을 만들어놓고서도 기고만장해서 모든 잘못은 정호가 자신을 절제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물론 단짝이였던 미연이에게는 더욱 험악하게 굴었다. 결국 함께 청도에 남기로 했던 인혜가 난데없는 소주를 선택하면서 둘의 사랑은 사실상 금이 가버린 것이였다.
“갓 사귄 친구야.”
정호의 입에서 느닷없이 이런 대답이 흘러나갔다. 순간 정호는 스스로도 대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리숭한 중국식 표현이 어떨 때는 정말 좋았다. “사귀다”는 말이 경우에 따라서 뉴앙스가 다르게 들린다. “친구”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노는 친구가 있고 련애하는 친구가 또 따로 있다. 어떤 친구와 어떻게 사귀냐에 따라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서로 달리 해석이 되고 리해가 되는 법이다. 그런데 옆에 처녀가 더 당돌한데가 있었다.
“저 은정이라고 불러요. 이렇게 뵙게 되여 반갑습니다.”
또렷한 조선말이였다. 정호는 속으로 흠칫 놀랐지만 내색않고 가만히 잠자코 있었다.
“네, 반가워요. 참 예쁜 아가씨네요.”
인혜는 대범하게 은정이의 손을 잡고 둬번 흔든 후 정호를 돌아보면서 어꺠를 으쓱해보이며 미안하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갑자기 중요한 바이어가 오게 되여서 회사에서 호출이 왔어. 오라 해놓고 내가 시간을 맞출 수 없어 죄송하다고 알리려고 나왔어. 얼굴 이렇게 봤으니 너무 실례는 아니겠지. 나중 다시봐.”
돌아서는 인혜의 뒤모습이 그렇게 처량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틑날 팀을 따라 항주에서 령은사를 돌고 있는데 누군가 어깨를 툭 쳐왔다. 인혜였다. 어제와 달리 얼굴에 웃음이 찰랑찰랑 맺혀있었다.
“어떻게 왔어? 바이어는 어쩌구?”
놀라는 정호와 달리 인혜는 차분했다.
“제공처럼 날아왔지.”
령은사가 저 유명한 제공스님이 출가한 사찰이란 사실을 빗대고 하는 말이였다. 그러면서 슬그머니 정호의 옆에 따라붙는 은정이를 전혀 모르는 사람인듯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어제와 판이하게 도고한 태도였다. 뭔가 낌새를 챈 모양이였다. 어쩌면 멀리 청도에 있는 미연이에게 확인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인혜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였다. 그러면 당연히 은정이란 형체가 바로 들통날 수밖에 없을 것이였다. 그리고 오늘 아침 자가용을 몰고 관광차 뒤를 바싹 뒤따라왔을 터이다. 보지 않아도 비디오였다.
그런데 미연이는 왜 아무런 말도 없을가? 애당초 정호가 강남으로 내려온다는 사실을 미연이는 모르고 있었다. 잔꾀가 많은 인혜가 빙 에둘러 미연이의 입을 털었을 가능성이 컸다.
미연이는 남한테 쉽게 당하는 캐릭터이다. 졸업을 일년 앞두고 뜻하지 않게 정호와 같은 회사에 실습을 가서 몇달간 함께 있었지만 사실 둘 사이는 어쩌다가라도 손 한번 잡아본 적이 없었다. 동창끼리는 가끔 어깨동무도 할법 했으나 미연이는 언제나 정호를 피하는 눈치였다. 딱친구인 인혜와 련애하는 사이라고 그러는지 항상 정호와 거리를 두고 지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습 문제로 인혜한테 날벼락을 맞은 미연이였다.
인혜가 소주로 떠난다는 소식이 퍼졌을 때 누구보다 얼굴에 화색을 띄운 사람이 미연이였다. 그날로 미연이는 결연히 청도에 잔류하기로 결정했다. 누구도 그 리유를 알수 없었다. 오래동안 미연이의 꽁무니를 쫓아다닌 승원이가 아무리 함께 광주로 내려가자고 구슬려도 미연이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결국 승원이가 손을 들고 광주행을 포기하고 말았다. 그러나 웬일인지 대학을 졸업한지도 5,6년이 지났지만 그들 둘은 더이상 진전이 없었다.
은정이는 저녁때까지 내내 풀이 죽은 모습이였다. 심상치 않았다. 무슨 속상한 일이라도 있냐 물었지만 막무가내로 머리만 저어댔다. 그러나 인혜가 저녁을 별도로 사주겠다고 정호를 단체식사장에서 끌어내자 은정이도 주밋주밋 따라나섰다.
“우리 동창사이 긴히 할 말도 있고하니 오늘저녁 피해주면 안될가?”
정호가 인혜의 눈치를 살피며 민망해하자 은정이는 오히려 자기가 억울한 듯 눈물까지 글썽여보였다.
“단체에 제가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어요. 이렇게 떠나버리면 저는 어떡하라구요. 가서 한마디도 삐치지 않고 입을 닥치고 있을테니 데리고 가주세요.”
“괜찮아요. 같이 가요.”
인혜는 대수롭지 않다는듯 정호보다 앞질러 대답하고는 그들을 끌고 거리에 나와 택시를 잡았다.
“루외루”
조수석에 앉아 외마디 단창을 뽑고 눈을 지그시 감고 있는 인혜를 건너다보며 정호는 오리무중에 빠졌다. 한번 내려오라고 닥달해놓고 루외루에서 밥 한때 먹이려고 한건 아닐 것이다. 팀은 래일 상해를 거쳐 귀로에 오른다. 이야기를 나눌 시간은 오늘 저녁밖에 없다. 그런데도 인혜는 은정이를 그대로 끌고 나온 것이다.
항주는 처음이지만 루외루는 낯설지 않았다. 남송 시인 림승의 “산 너머 청산이요 루각 건너 루각이네”로 널리 알려진 루외루이다.
낮에 서호를 유람할 때 눈으로 현물을 확인하기도 했었다. 한때 임금의 행궁으로도 역할을 했던 고산에 우뚝 솟아있는 루각이다. 산밑에 자리 잡으면서 서호와 엇비슷 수평을 다투는 루외루는 기세도 기세려니와 풍류도 이만저만이 아닌 듯 싶었다. 그속에서 질탕하게 흘러나오는 노래가락이 유람선까지 은은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그때 정호는 대형 유람선보다 쪽배가 더 운치있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탁한 서호물이 향기 넘치는 막걸리로 보이는 건 정호뿐일가. 영남이는 아예 한입에 다 마셔버릴듯 풍덩 뛰여내릴터이지. 홍철이는 너울너울 춤을 출가? 판소리 한마당 펼칠 것이다. 영철이는 한달음에 서씨같은 미녀의 품에 쓰러지렷다. 어화둥둥, 소동파님 반갑나이다, 백락천님 인사 올립니다 쿵당쿵당쿵쿵당…
그렇지만 궁전같이 으리으리한 루외루에서 내다보는 서호는 더욱 선경에 다름 아니였다. 루외루가 호화로운 왕궁이라면 서호는 여유작작한 천궁이다. 금빛의 석양이 뒤덮힌 서호는 도처에 일엽편주로 알록달록 장식되여 있었다.
정호는 술을 얼마 들이켰는지 모른다. 요염한 인혜가 아양을 떨면서 부어주는대로 마셔버렸다. 은정이가 쑥스러운듯 숙녀처럼 가장하며 따르는 잔도 몽땅 비웠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서로 빼앗아 먹기 시작했다.
누가 먼저 취했는지는 모를 일이다. 정호가 뇨기가 동해 비칠거리며 화장실로 가니 입구에 은정이가 쪼크리고 앉아 얼굴을 무릎사이에 파묻고 있었다. 잠든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어깨를 치며 부르는데 느닷없이 은정이가 벌떡 일어서면서 정호에게 안겨왔다. 피하면 그대로 땅바닥에 엎어질 기세여서 정호는 어쩔 수 없이 은정이를 받아안았다.
“키스해줘요.”
은정이가 빨갛게 립스틱을 바른 입술을 내밀었다. 정말이지 정호는 여직 그렇게 탐스러운 입술을 본 적이 없었다. 인혜는 섹시한 입술을 가졌고 미연이는 예쁜 입술을 가졌었다. 그러나 둘다 탐스럽다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러나 은정이는 정말 앵두처럼 먹고싶다는 충동을 느낄 정도로 탐스러운 입술을 가지고 있었다. 몽롱한 의식속에서도 이러면 안된다는 자아와 정말 못 참겠다는 본능이 맞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나 결국 두 입술은 맞붙고 말았다. 걸탐스레 정호를 빨아들이는 은정이의 입에서 연신 신음소리가 줄이어지더니 불시에 정호의 손을 잡아 언녕 풀어진 가슴 속으로 집어넣어주었다. 앑다란 천 한쪼박에 감싸여진 가슴은 겉보기와 다르게 엄청 풍성했다.
“이만 하자. 여긴 아니여.”
지궂게 매달리는 은정이를 겨우 떼여놓고 자리에 돌아오니 인혜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황급히 카운터로 내려가보니 인혜가 홀 경리인듯한 녀자와 오랜 친구인양 살갑게 인사하고 있었다. 이미 결산을 맞추었는지 그들이 문밖에 나서도 뒤쫓아나오는 사람이 없었다. 이 식당에 들어설 때는 먼저 련락을 받은 듯 한무리 사람들이 마중 나오고 자리를 안내하고 했었다. 먹고나니 배설물밖에 나올게 없어서 배웅도 하지 않나 그런 얼토당토않는 궁리를 하는데 저 앞서 나가던 인혜가 정말로 풀밭에 엉뎅이를 까고 앉는 것이였다.
“이…제부터 노…노상…방뇨하기다 ㅎㅎㅎ”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던지 정호도 꿰춤을 끌어내렸다.
“나간다 나간다 앞으로 나간다…”
그런데 한번 앉아버린 인혜가 다시 일어날념을 않는다. 가까이 다가가보니 어느새 잠들어있었다. 두둥실 떠오른 만월에 하얀 엉덩이가 눈부시게 반짝거렸다. 정호가 급히 은정이를 불렀다.
“얘, 여기 와서 이 친구 좀 일으켜줘.”
“싫어요. 나 그런 시다바리할 사람 아니거든요.”
정호는 울며 겨자먹기로 인혜의 치마를 올려 입히고 둘쳐 업었다. 4년간 련애를 했던 녀자라 쑥스러움같은 것은 없었다. 인혜가 다른 사람의 와이프가 되였을망정 두사람의 몸에 잦아든 흔적까지 없어질리 만무했다.
은정이는 택시로 호텔에 가는 내내 웬일인지 물티슈로 입술을 닦고 또 닦고 있었다.
그로부터 한달이 지난 어느날 느닷없이 은정이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솔직히 관광팀이 해단될 때까지도 정호는 자기의 전화번호를 은정이에게 알려주지 않았었다.
“어떻게 내 남를 알았지?”
“그건 알바 아니고요. 우리 이제 어떻게 할 셈이예요?”
“무얼 어떻게 한단 말이야?”
“그럼 우린 아무 사이도 아니였나요? 항주에서 있었던 일은 아무일도 아니였어요?”
“우리 만나.”
두사람은 란카페점에서 조용히 만났다. 그 사이 은정이는 많이 야위여있었다. 은정이는 눈에 확 띄이는 미인은 아니였으나 어딘가 끌어당기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리고 생김새도 어느 구석이나 비례에 딱 맞게 붙어있었다. 인혜는 눈이 기막히게 요염했다. 눈길을 한번 부딪치면 절대 이동불가다. 미연이는 허리가 섹시하다. 그대로 감겨들것 같다. 하지만 은정이는 좋은 곳도 나쁜 곳도 가려낼 방법이 없다. 어디나 평범해보이면서도 또 모두가 남달리 특이했다.
“제가 이렇게 연락하지 않았다면 계속 모른체 했을 거죠?”
“글쎄 알은체 해야 할 일이 뭔가 말이야.”
“그날 저도 많이 취했지만 어슴푸레 기억은 있어요. 우리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잖아요.”
“네가 내 손을 당겨갔어.”
“그런 핑계는 말고요. 양심대로 말씀해줘요. 옷우로요 아니면 옷속으로요?”
“그게 의미가 다른가? 형식에 따라 내용도 달라지는가.”
“그렇잖구요. 저에게는 엄청난 차이가 있걸랑요.”
“시끄러. 사귀면 되잖아.”
은정이는 불시에 눈알이 데꾼해졌다. 그제야 보니 은정이의 눈도 인혜 못지 않게 매력이 있었다. 커다란 눈에 쌍거플을 떠이고 있었다. 특히 그 밑에 깊게 패이는 보조개는 사람을 취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정호와 은정이가 사귄다는 소문이 어느새 날개를 뻗쳐 친구바닥에 쫙 퍼졌다. 서른 넘은 덜먹총각이 마침내 외토리를 벗어나게 되였다면서 기뻐하는 사람이 많았다. 특히 승원이가 신바람이 나서 야단이였다. 사실 그들둘사이는 미연이가 가운데 끼여있어서 시종 껄끄러웠었다.
정호와 은정이는 가끔 친구들 모임에 초대되여 가서 커플 대접을 받기가 일쑤였다. 은정이의 얼굴에는 하루종일 웃음이 떠날새가 없었다. 물론 정호도 이제는 좀 안정된 생활을 해야겠다는 마음을 굳히고 있었다.
시답지 않게 대하는 사람도 없지 않았다. 우선 인혜였다. 멀리 소주에서 시끄러움도 마다하고 며칠에 한번씩 전화를 걸어오거나 위챗으로 문자를 보내왔다. 은정이 정체가 뭐냐? 전번에 왔을 때 보니 별로 임전한 녀자는 아니더라. 배운 바탕이 있냐? 경제적으로 여유있냐? 며느리를 차문하는 시엄마같았다.
그리고 또 한사람이 있었다. 미연이였다. 원래 말수가 적은 미연이는 아예 입을 다물어버렸다. 친구들 모임에도 나오지 않았다. 정호의 모든 것이 자신과는 하등의 상관도 없다는 듯 일체 련락을 끊고 잠수를 타버린 것이다.
그러건말건 정호와 은정이의 관계는 일사불란하게 진척되여갔다. 달포전에 정호는 은정이네 집을 방문하여 은정이 부모에게 인사를 올렸다. 정호쪽에는 량친이 모두 없는 터여서 은정이 부모의 허락만 받으면 혼사가 가능했다. 은정이 부모는 은정이 본인보다 더 좋아했다. 하루종일 벌려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마도 과년한 딸을 시집 보내는 게 급선무였던 모양인지 지금 당장 짐을 사들고 집으로 들어오라고 재촉했다. 그러나 정호는 점잖게 사절했다.
며칠후 정호는 회사 숙소에서 나와 은정이네 아파트가 비스듬히 보이는 단지에 집을 세맡았다. 둘이 살기에 무난한 두칸짜리 아파트였다. 집주인이 조선족이라 집안이 알뜰하게 거두어져 있었다. 벽지만 바꾸면 그대로 입주할 수 있었다.
정호가 은정이를 데리고 장식시장을 돌며 벽지를 고르고 있는데 몇달간 종무소식이던 미연이가 문뜩 전화를 걸어왔다. 지금 당장 만나야겠다는 것이였다. 정호는 은정이를 힐끔 건너다보았다. 은정이는 고도로 민감해진 듯 신경질적으로 내뱉었다.
“저도 함께 가요.”
검은 색 점퍼 스커트를 입고 나온 미연이는 여전히 그렇게 아름다웠으나 어딘가 모르게 구겨진 모습이였다. 높다란 회전의자에 앉아 데이불우의 맥주잔을 달락이던 미연이가 그들이 호프바에 들어서는 것을 보고도 일어서지 않고 그저 고개만 까닥였다.
“넌 잠간 빠지면 안되겠니?”
미연이가 찬 어조로 은정이에게 내뱉었다.
“언니…”
“입 닥쳐!”
미연이가 히스테리적으로 소리 질렀다. 그바람에 정호는 초풍할 지경으로 놀랐다.
“둘이 아는 사이였어?”
“좋아, 자리 안내줄거면 여기서 다 까발리자구.”
미연이가 다시 차분한 자세로 돌아왔다. 그녀는 립서비스인양 미리 준비한 대사를 한글자한글자 토박토박 내뱉었다.
“저 애 잘 알지. 승원이 회사에 사무직원이야. 너희들 항주 인연도 승원이가 감독한 거였지. 조연은 인혜이구.”
“언니…”
“나를 너한테서 떼놓으려고 승원이가 기획한 거야. 그런데 너희들이 정말로 맞붙었잖아. 물론 승원이는 당연히 한시름 덜었겠지. 그런데 인혜는 아니였어. 그저 테스트해본 것뿐인데 니 마인드가 그 정도로 지저분할 줄 누가 알았겠어. 후회막급이였을 거야. 너희들 갈라놓으려고 뒤에서 벼라별 짓거리를 다 했어. 아니면 은정이한테 물어봐. 너를 여자들을 돌아가면서 퍼먹는 물방아쯤으로 생각하는 파렴치한으로 묘사했을 거야. 너희들 결혼한다는 소식을 듣고 안달이 나서 지금 청도로 날아왔어.”
“언니는 저주 받을 거야.”
은정이는 얼굴을 싸쥐고 호프바를 빠져나갔다.
잔잔한 음악이 흐르던 실내에 까닭없이 침묵이 흘렀다. 한낮이라 손님이 적은 원인도 있었지만 배려심 깊은 주인이 그들간의 심상찮은 분위기를 감안하여 슬그머니 음악을 꺼버린 것이였다.
“이제 와서 그걸 깨트리는 이유가 뭐야? 왜 꼭 이래야 하지?”
정호는 갑자기 남편 잃은 미망인처럼 거멓게 보이는 미연이를 넋잃고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너가 장기쪽처럼 남들에 의해 이리저리 움직이는게 참 싫었다.”
“그건 내가 원하는 거였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해본 적 없니? 내가 정말로 은정이를 좋아할 수 있잖아. 그렇다면 축복해줘야 하는게 아니야.”
“그런 이유로 너의 불량을 위안받으려니 기대하지마.”
미연이의 온몸에 찬기운이 씽씽 감돌았다.
“그래, 니가 바라는대로 승원이한테로 돌아갈게. 어떤 것이 사랑이란 걸 생생하게 보여줄테다. 개념을 라면국물에 말아먹은 자식같으니라구.”
그후로 은정이도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전화를 해도 받지를 않았고 문자를 보내도 회답이 없었다. 은정이는아마 많이 난처했을 듯 싶다, 승원이가 감독한 영화에 남주연을 꼬시기 위해 자청하여 녀주연으로 선뜻 나섰다는 사실이 미연이를 통해 남주연한테 알려졌으니 민망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사실 정호는 인혜가 진짜로 패키지 여행상품을 보내주리라 생각지 못했다. 아무리 승원이가 부탁했더라도, 그리고 정호 홀몸이 미안했더라도 그렇게 은정이와의 미팅을 만들어줄만큼 흉금 넓은 인혜가 아니였다. 인혜와는 몸을 섞으면서 치렬하게 사랑하고 닭처럼 지궂게도 싸우면서 살아와서 그녀가 눈 한번 굴려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수 있는 처지였다.
인혜가 결혼해서부터 둘 사이는 안부 인사외에 거의 연락을 하지 않았었다. 보고싶다는 생각이 사무칠 때가 많았지만 정작 할 말은 없었기 때문이였다.
그런데 인혜가 선뜻 패키지 여행상품을 보내준 것이다. 정호도 인혜가 자기를 잊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만큼 그들은 깊게 사랑했었다.
소주 졸정원에서 정호와 은정이가 팔짱 끼고 나오는 장면을 보고 인혜가 눈썹이 꼿꼿이 살아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조연이였던 인혜로서도 단 하루만에 살을 맞댈 지경으로 가까워진 그들이 쉽게 접수되지 않았던 모양이였다.
그렇다면 질투때문에 소주에서 항주까지 달려왔단 말인가. 그때까지 외롭게 홀로 사는 정호가 안스러워 나름 멋진 시나리오를 구상했으면 그대로 달리도록 내버려뒀어야 하는게 아닌가. 정호가 새로운 역전을 향해 달리도록 밀어줬어야 하지 않는가.
미연이도 그랬다. 정호의 마음이 자신한테 머물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새차를 막차로 밀어붙힐 까닭이 뭐란 말인가. 처음부터 차가 떠나게 된다는 사실을 감지하고 있었으면서도 정호를 말리지도 않아놓고 기어코 사랑이란 미명으로 막차로 정거시킨 그 심보야말로 구역질이 났다.
그런데 그 구역질나는 미연이가 엊그제 뜻하지 않게 위챗문자를 보내와 은정이가 곧 한국으로 유학을 떠날 것이라고 알려온 것이다. 아무리 잘못을 구하고 만류해도 소용이 없었다면서 은정이를 붙잡아두지 않으면 정말로 막차는 떠난다고 경고삼아 부연했다. 물론 승원이의 부탁을 받고 전하는 것이라는 핑계를 댔었다. 그리고 승원이와 결혼하게 된다고 덧붙혀 통보했다.
“알았어.”
정호는 한마디만 대꾸했다. 그리고 긴 시간을 고민했다. 은정이와는 오래 사귄 것도 별로 없었는데 석별앞에서 살이 에이는 아픔이 있었다. 사랑은 시간이 문제가 아닌 거 같았다.
말려야 한다. 잡아야 한다. 막차의 뒤모습을 쳐다보는 바보가 되여서는 안된다.
정호는자기때문에 한국행을 택한 은정이를 오늘은 기어코 만나서 잡아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29번 뻐스는 점차 식어가는 더위를 뚫고 갑자기 속력을 내여 달리기 시작했다. 저 앞으로 은정이네 아파트가 륜관을 서서히 드러내고 있었다.
정호는 그 역에서 내리기로 마음을 다잡았다. 오늘은 무작정 은정이네 집으로 찾아들어갈 것이다.
그리고 은정이에게 사실은 자기가 승원이에게 감독을 위임했던 장본인이라고 고백할 생각이였다. 승원이네 회사를 들락거리면서 한눈에 은정이를 발견하고 특별히 부탁해서 각색한 시나리오라고 밝힐 것이다.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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