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옛날과 지금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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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장애자부부가 부른 사랑의 노래 댓글:  조회:4044  추천:0  2009-05-06
1962년 상해시 민행구 란평로에서 출생한 장가평은 2살때 부모가 리혼하여 아버지 장대군과 함께 살았다. 1979년 6월 18일 오후, 학교에서 조직한 수영활동에 참석한 장가평은 머리가 수영장의 단단한 세멘트바닥에 부딪쳤는데 선생님과 동학들이 건져서 상해민행구45병원(지금의 상해제5인민병원)에 실어갔다. 검사결과 의사는 “중추신경이 엄중하게 손상을 입었고 경부이하가 전부 마비되여 한평생 다시 일어설수 없게 될것입니다. 만약 회복이 잘 된다고 해도 손가락의 일부분 기능만 가능할뿐입니다”라고 알려주었다. 장가평이 페인이 된것을 보고 계모도 모른다고 달아나고 리혼한 생모도 관계하지 않았다. 장가평은 자살하고싶어도 머리만 움직일수 있을뿐 다른 부위는 지각이 없었기때문에 자살할수도 없는 처지였다. 부모도 없고 동무도 없이 장가평은 장장 6년을 입원해있었다. 1983년 5월, 라지오를 통해 중앙인민방송국의 영어학습프로를 듣던 장가평은 영어를 배우기로 마음먹었다. 그때로부터 그는 이를 악물고 영어를 자습했다. 1986년 7월, 장가평은 치료비용을 이어댈수 없어 퇴원하는수밖에 없었다. 계모가 그를 받아들이지 않는 바람에 그는 갈곳이 없었다. 다행히 민행구정부에서 장가평에게 30평방메터되는 집을 해결해주었다. 생존을 위해 장가평은 번역문장을 잡지사에 투고했는데 퇴고만 맞았다. 1993년 5월 15일, 장가평이 번역한 글이 《세계의 창문》에 발표되여 30원의 원고료를 받게 되였다. 1993년 10월 25일, 항주시장애자직업기술학교에서 공부하고있던 장애자처녀 오은교는 라지오방송에서 장가평의 사적을 듣고 감동되여 그에게 편지를 써보냈다. 편지거래를 통해 감정이 깊어진 오은교는 자신의 일생을 장가평에게 바치기로 결심하고 동생의 도움을 받아 장가평을 찾아갔다.오은교는 초기에 장가평과 한담을 하면서 불쌍한 남자를 위해 방안을 청소해주군 했다. 그녀는 3급장애자였기때문에 지팽이에 의지하여 간신히 걸을수 있었다. 이런 몸을 가지고 장가평을 도와준다는것은 실로 어려운 일이였다.  이는 오은교 자신도 알고있고 장가평도 알고있었다. 편지거래가 두 사람의 마음에 따뜻한 봄날의 희망을 안겨주었다면 현실은 그들에게 잔혹한 답안을 남겨놓은것이다. 오은교가 힘들게 방안을 청소하는것을 보면서 장가평은 침묵을 지켰다. 오은교도 마음이 몹시 괴로왔다. 그녀는 눈물을 참으면서 될수록 일손을 멈추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고 견지했다. 이튿날, 오은교는 장가평의 침대밑에서 두꺼운 원고를 들추어냈는데 이것은 장가평이 1년남짓한 시간을 들여 번역한 장편소설 《유리불뱀》이였다. 45만 5000자에 달하는 이 번역작품은 이미 여러 잡지에 투고했다가 퇴고된 “페지”였지만 한글자 한글자 알심들여 쓴것이였다. 오은교는 가슴이 아프기도 하고 장가평의 의력에 감동되기도 했다. 그녀는 “당신은 편지에서 모든것이 다른 사람의것이라고 했지만 그 말은 틀린거예요. 오늘부터 전 당신에게 속할것이예요”라고 말했다. 그 말에 장가평은 놀랍기도 하고 기쁘기도 했다. 온령에 돌아간 오은교는 부모한테 장가평과 결혼하겠다고 말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놀라서 “저절로 자기도 돌보기 힘든 네가 너보다 더 심한 장애자를 어떻게 돌본다고 그러냐”라고 하면서 견결히 반대했다. 그녀의 부모들은 그녀를 가둬놓고 나가지 못하게 했다. 그런데 6개월후 그녀의 어머니는 딸이 늘 남몰래 장가평이 이전에 보내온 편지를 보면서 눈물을 흘리고있는것을 발견했다. 그녀의 부모는 날마다 초췌해가는 딸의 모습을 그대로 보고만 있을수 없어 결국 장가평과 결혼하는것을 동의하고말았다. 1997년 9월말, 오은교는 동생의 부축을 받아 휠체어에 앉아서 장가평을 찾아갔다. 1997년 10월 1일, 장가평과 오은교는 결혼수속을 밟았다. 신혼부부는 음료 한병 앞에 놓고 사랑을 속삭였다. 그들이 결혼했다는 소식을 들은 이웃들은 “3급장애자가 어떻게 1급장애자를 돌볼수 있겠는가”고 의심했다. 오은교에게 있어서 이 문제는 확실하게 현실적으로 해결해야 할 어려운 문제였다. 집안일을 해보지 못했던 오은교는 남새를 사들이고 밥을 짓는 일부터 해결해나가야 했다. 처음 시장에 나간 오은교는 장사군에게 속히울가봐 지팽이를 짚고 온 시장을 돌아다니면서 남새가격을 알아보느라고 늦어졌다. 집에서 기다리던 장가평은 아무리 기다려도 안해가 오지 않자 무슨 일이 생긴것이 아닐가 하고 걱정하던 끝에 울음을 터뜨렸다. 울음소리를 듣고 달려온 이웃들이 그의 안해를 찾으러 가려고 할 때 오은교가 기분이 좋아서 한광주리의 남새를 사들고 들어섰다. 그녀는 장가평을 보고 “제가 오늘 시장에서 제일 눅은 남새를 샀어요”라고 말했다.   장가평에게 밥을 먹여주는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였다. 장가평은 하반신이 감각을 잃었기때문에 지탱물을 잃으면 뒤로 넘어지군 했다. 오은교는 헌이불로 20여개의 크고 작은 방석을 만들었다. 그리고 매번 남편을 부축하여 앉힐때마다 쉴새없이 그의 뒤에 방석을 밀어넣군 했다. 남편이 편안한 감각을 느낄 때까지 방석을 밀어넣은 다음 바줄로 그를 묶어놓군 했다. 장가평을 보살펴주기 위해 오은교는 나가서 일자리를 찾지 않았다. 이들 부부는 가두에서 내여주는 400여원의 최저생활보장금에 의해 생활했다. 어떤 때는 장가평의 원고료가 몇백원씩 생겼지만 소비가 높은 상해에서 고까짓 수입으로는 생계를 유지하기도 어려웠다. 1988년 2월의 어느날, 오은교는 50전에 만두 하나를 사왔는데 먹기 아까와 남편에게 주었다. 그러나 남편도 먹지 않고 안해에게 밀어주었다. 두 사람이 서로 권할 때 갑자기 문을 열고 들어온 오은교의 어머니 장계화가 이 정경을 목격하게 되였다. 원래부터 딸을 1급장애인에게 시집보내놓고 밤잠도 못자면서 걱정하고있던 장계화는 이 정경을 보고 울음을 터뜨렸다. 장계화는 한달음에 시장에 달려가서 먹을것을 사온 다음 다시 나가 옷궤, 랭장고, 세탁기 등 물건을 사들였다.   그날밤,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는것을 본 오은교는 “어머니, 울지 마세요.   우리는 힘들게 보내지만 매우 행복해요.이전에 저는 남에게 부담만 주는 사람이였지만 지금은 남편을 도와줄수 있는 사람이 되였으니 살아도 보람이 있어요”라고 말했다.   1988년 5월,그들의 정황을 알게 된 란평로주민위원회에서는 해당부문에 반영하여 그들에게 영업집이 차례지도록 알선해주었다. 그들은 이 집을 매달 800원씩 세를 주어 기본생활을 해결할수 있게 되였다.   2000년 6월 25일, 백가출판사의 책임자 강일청은 6명의 번역가를 청하여 미국계렬탐험소설을 번역하게 했는데 《운약》의 번역을 책임진 번역가가 사유가 있어 퇴출했다. 강일청은 번역에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장가평에게 이 책의 번역임무를 맡겼다.처음 탐험소설을 접촉한 장가평은 자료와 공구서적이 없어서 번역속도가 매우 늦었다. 오은교는 서점이란 서점은 다 돌아다니면서 남편이 적어준 서적을 사들였다. 그들은 또 아껴먹으면서 중고컴퓨터 한대를 샀다. 오은교는 장가평이 쓴 번역원고를 컴퓨터에 타자하는 중요한 임무를 맡았다. 날마다 장시간씩 글을 쓰고 타자한 그들은 신체가 쇠약해졌다.   2000년 11월, 장가평은 번역원고를 강일청에게 바쳤다. 2002년 12월, 장가평이 번역한 《운약》이 순조롭게 출판되였다. 책을 받아쥔 장가평부부는 포도주를 마시면서 웃기도 하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운약》이 출판되자 장가평은 1만원의 원고료를 받게 되였다. 2003년 1월 25일, 장가평은 정식으로 상해번역가협회에 가입했다. 그후 그는 여러 신문과 잡지에 륙속 많은 번역작품을 발표했다. 장가평은 외국영화의 번역도 맡아했다.   2008년 6월 14일, 제11기상해국제영화절에서 장가평은 또 영화의 번역을 완성했다. 갈수록 이름을 날린 그에게는 륙속 청탁원고가 날아들었다. 2009년 1월 15일,장가평은 5000원의 원고료를 받자 즉시 오은교에게 자동휠체어를 사주었다. 2009년 음력설전야, 상해영특송도서회사출판부 주임 염소청은 장가평의 사적을 알게 된후 탄복되여 장가평에게 《스티븐 호킹》이란 책의 번역을 맡겼다. 스티븐 호킹의 학생이 지은 이 영문전기는 분량이 큰 과학기술저작으로서 장가평이 처음 접촉하는 과학기술류의 번역작품이였다. 《스티븐호킹》의 번역을 체결한 날은 이미 음력 섣달 28일이였다. 그날 저녁, 오은교는 몇가지 료리를 볶아놓고 포도주 한병을 들고와서 축하해주었다. 장가평은 포도주를 마시면서 안해에게 “여보, 그동안 당신이 고생이란 고생은 다했는데 나를 만난것을 후회하지 않소?”라고 물었다. 오은교는 웃으면서 “만약 그때 제가 당신을 만나지 않았다면 어떻게 사랑의 가치를 실현할수 있었겠어요? 또 어떻게 사랑하는 사람에게 생명의 의의를 체험하게 할수 있었겠어요?”라고 대답했다. 장가평은 감격에 목이 메여 안해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나의 성공은 당신의 생명과 심혈로 바꿔온것이요.당신이 없었다면 나의 오늘이 있을수 없었을것이요!”   《지음》  
37    흉수를 추적하여 24년 댓글:  조회:4184  추천:0  2009-05-06
2009년 4월 12일,  임개명은 어머니의 무덤을 찾아가서 “어머니, 어머니를 살해한 흉수를 붙잡았으니 이제는 눈을 감고 고이 잠드십시오”라고 말하면서 세번 절을 한후 다시 녀동생의 무덤을 찾아가서 위안해주었다. 1985년 9월 9일은 임개명에게 있어서 가장 고통스러운 날이였다. 그날 오전 10시쯤 그의 어머니 장종란은 마당에 곡식을 너는 일때문에 이웃집 녀인 장종방과 다투다가 손찌검이 났는데 장종방의 남편 류이초가 쏜살같이 달려와 몽둥이로 장종란을 때려서 당장에서 숨지게 했다. 그때 장종란의 13살되는 딸 임개용이 산에서 일하다가 내려와서 어머니가 맞아죽은것을 보고 대성통곡하면서 류이초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류이초는 화가 나서 또 몽둥이를 들고 미친듯이 임개용에게 달려들었다. 임개용은 황급히 달아났지만 200메터도 못가서 류이초가 내리치는 몽둥이에 맞아 숨을 거두고야 말았다. 사건발생시 장종란의 남편은 마을밖에서 일하고있었고 장종란의 셋째아들 임개기는 집에 있었는데 어머니와 녀동생이 맞아죽은것을 보고 울면서 사건을 제보하러 향정부 치안실로 달려갔다. 산길이 험했기때문에 현공안국 형사경찰들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흉수 류이초가 이미 멀리 도망친 뒤였다. 경찰들은 세밀하게 조사한후 류이초를 인터넷에 도주범으로 전국에 통보하고 수배령을 내렸다. 사건발생시 피해자 장종란의 둘째아들 임개명은 어느 한 벽돌공장에 출근하고있었다. 이튿날 친척이 전화를 걸어 그에게 이 악몽과도 같은 소식을 알려주었다. 울면서 달려간 임개명은 관속에 누워있는 어머니와 녀동생을 보자 기절하고말았다. 얼마후 정신을 차린 그는 전국을 샅샅이 뒤져서라도 꼭 흉수를 찾아내고야 말겠다고 마음먹었다. 무슨 일이나 마음만 먹으면 꼭 해내고야 마는 성미인 임개명은 그때로부터 장장 24년동안이나 흉수의 종적을 따라 추적했다. 임개명이 흉수를 찾아 처음 쫓아간 곳은 파남구 안란진이였다. 당시 친구한테서 흉수 류이초가 안란진에 나타났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한달음에 그 곳으로 달려가서 한달동안이나 찾았지만 헛수고만 하고말았다. 그후 류이초가 귀주성의 준의시에 나타났다는 정보를 접한 그는 또 4개월동안이나 준의시를 골목골목 뒤지면서 찾았다. 그 시기 그는 인력삼륜차를 사서 넝마주이를 하면서 생계를 유지했다. 1992년의 어느 하루, 아는 사람이 성도와 면양에서 류이초를 보았다는 말을 듣고 밤도와 성도로 달려가 찾아보았으나 역시 헛고생만 하고말았다. 다시 면양에 가서 이잡듯이 뒤졌으나 흉수의 그림자도 찾지 못했다. 돈을 다 써버린 그는 한달동안 당지 농민의 밭일을 해주고 400원을 받게 되자 계속 흉수가 숨었으리라고 짐작되는 곳을 찾아다녔다. 임개명은 24년동안 호북성, 귀주성, 복건성, 광동성 등지의 근 20개 도시를 돌아다니면서 흉수의 종적을 추적했다. 그는 가는 곳마다 품팔이를 하면서 류이초가 나타났다는 소식만 들으면 사직하고 그 곳으로 달려가군 했다. 2008년 그가 파남구의 한 식료품공장에서 품팔이를 할 때 1년동안의 계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2개월만에 하문에 흉수가 나타났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주동적으로 사직하고 떠났기때문에 로임도 받지 못했다. 흉수를 찾기 위해 임개명은 록음기능이 있는 핸드폰을 사서 가는 곳마다 증거를 록음해둔후 당지 공안국에 제공해주군 했다. 2009년 2월말, 류이초가 준의시에 나타났다는 소식을 들은 임개명은 밤도와 준의로 달려가 조사한후 록음한 증거를 당지 공안국에 제공했다. 공안국에서는 그가 제공한 단서에 근거하여 포위망을 늘였다. 임개명은 2009년 3월 3일, 준의시 홍화강구 경찰들의 도움을 받아 수년간 당지에서 과일상점을 경영하던 류이초를 붙잡는데 성공했다. 임개명은 24년동안 혼자서 흉수를 추적하느라고 수많은 대가를 치러야 했다. 26살에 결혼한 그는 딸이 태여난지 얼마 안되여 흉수를 찾아다니기 시작했는데 딸이 3살되던 해에 집이 가난한 원인으로 안해가 리혼하고 다른 남자한테로 시집을 갔다. 그후 안해는 딸도 데리고갔다. 게다가 2001년에 고향에 있는 집까지 다른 사람이 불을 놓아 태워버렸기때문에 지금까지 돈이 없어서 집없는 나그네로 되고말았다. 임개명은 꼭 흉수를 붙잡고야 말겠다고 맹세했지만 수십차 추적하여 헛물만 켜자 맥을 잃고 포기하려고 마음먹은적이 있었다. 그러나 밤에 눈을 감으면 억울하게 살해된 어머니와 녀동생의 모습이 눈앞에 떠올라서 흉수를 꼭 잡고야 말겠다는 결심을 다시 다졌다. 현재 임개명은 가정이 파탄되고 돌아갈 집이 없게 되였지만 이런 방식으로 어머니와 녀동생의 원한을 풀어주었기때문에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사업과 생활을 다시 시작하겠다고 덧붙였다   《중경석간》  
36    세번 몸 맡기고 양할아버지를 랍치 댓글:  조회:4805  추천:0  2009-05-06
2008년 4월,  22살인 젊은 녀인 장모는 고향 강서성을 떠나 석사시에 와서 품팔이를 하면서 석사시구에 세집을 맡았는데 맞은켠에는 71세되는 할아버지 뢰모가 살고있었다. 뢰모는 영춘의 농장에서 일하다가 퇴직후 네 딸을 따라 석류에 왔는데 평소에는 혼자서 살고있었다. 집을 드나들 때마다 마주치면서 장모와 뢰모는 잠간사이에 친해졌다. 그 당시 독신이였던 장모는 로인이 혼자 사는것을 보고 밥도 지어주고 빨래도 해주면서 도와주었다. 그후 장모는 뢰모를 양할아버지라고 불렀다. 그런데 뢰모는 점차 젊은 양손녀에게 다른 마음을 품고 몸을 만지고 포옹하려고 했다. 그때마다 장모는 교묘하게 피하면서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 그후 장모는 혜안에 가서 품팔이를 하면서 난전장사를 하는 35살나는 남자 원모를 만나 서로 사랑하게 되였다. 품팔이가 매우 힘들었기때문에 장모는 자그마한 가게를 경영하려고 생각했다. 그런데 자금이 모자랐다. 자금을 마련하려고 여기저기 뛰여다니다가 헛물만 켠 그녀는 석류에 있는 양할아버지가 생각났다. 2009년 4월 9일, 장모는 혜안에서 석류로 달려가 양할아버지를 보고 2만원을 꿔달라고 했다. 원래 다른 마음을 품고있었던 뢰모는 장모를 보고 음험하게 웃으면서 “돈을 꿔줄수는 있지만 세상에 공것이 없다는 말을 너도 알겠지?”라고 말했다. 장모는 “리자를 넉넉하게 드릴테니 좀 도와주세요”라고 말했다. 뢰모는 “리자같은건 필요없어. 그 대신…”라고 하며 양손녀를 끌어안았다. 장모는 “이러면 안돼요”하면서도 돈을 꾸기게 급급했던지라 양할아버지에게 몸을 맡겼다. 일이 끝난후 뢰모는 “돈이 딸한테 있으니깐 딸과 상의한후에야 줄수 있다”고 말했다. 장모는 하는수없이 혜안으로 돌아갔다. 2009년 4월 11일,  장모는 또 석류로 가서 양할아버지에게 돈을 꿔달라고 독촉했다. 한번 젊은 녀인의 맛을 본 뢰모가 이런 기회를 놓칠리 없었다. 양할아버지가 또 끌어안고 요구하자 장모는 이번에도 “이러면 안돼요”하면서도 양할아버지한테 몸을 맡겼다. 그러나 이번에도 뢰모는 같은 리유로 돈을 주지 않았다. 장모는 다른 방법이 없게 되자 “2만원이 없으면 2000원만 주세요”라고 했다. 그러나 뢰모는 “2000원은커녕 200원도 없다”고 대답했다. 두번이나 몸을 맡기고도 2000원도 꾸지 못하게 되자 장모는 화가 치밀어 남자친구 원모를 찾아갔다. 그녀는 자신이 양할아버지와 성관계를 발생한 세부는 빼놓고 두번이나 돈을 꿔달라고 하니 양할아버지가 성관계를 요구하더라고 말했다. 그녀는 “차라리 우리 함께 양할아버지한테 가는게 어때요? 그 령감의 성요구를 들어준후 령감이 돈을 꿔주면 좋고 만약 사후에도 돈을 꿔주지 않으면 당신이 나서서 간통한 현장을 잡았다고 하면서 협박하여 돈을 요구하세요”라고 말했다. 장사에서 밑진 원모는 그녀의 제의를 동의하고 구체적인 방안을 상의했다. 2009년 4월 16일 밤 11시, 장모는 또 양할아버지를 찾아가 세번째로 몸을 맡겼다. 그런데 이번에도 뢰모는 여러가지 리유를 대면서 돈을 꿔주려고 하지 않았다. 장모는 슬그머니 일어나 문을 열고 나가 남자친구한테 통지했다. 그리고 다시 들어와서 침대에 누워있는 양할아버지를 끌어안았다. 그때 원모가 들어와서 “간통현장”을 잡는 연극을 놀았다. 원모가 배상을 요구하자 뢰모는 더는 다른 핑게를 대지 못하고 은행카드를 내놓았다. 원모가 은행카드의 돈을 모두 찾았으나 700원밖에 되지 않았다. 장모는 세번이나 늙은이한테 몸을 맡기고도 700원밖에 얻지 못하게 되자 화가 나서 원모와 함께 양할아버지를 혜안현의 한 려관으로 랍치해갔다. 이튿날, 장모와 원모는 뢰모를 발가벗겨놓고 사진을 찍은후 뢰모를 협박하여 편지를 쓰게 했다. 뢰모는 핍박에 못이겨 딸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다. “이 못난 애비가 술을 마신후 미혼인 양손녀의 정조를 짓밟았으니 정신손해비 6만원을 장모에게 주거라.” 2009년 4월 18일 오전, 원모는 편지와 뢰모의 모자를 뢰모의 딸에게 부쳐주었다. 그때에야 아버지가 실종된것을 알게 된 뢰모의 딸은 공안국에 사건을 제보했다. 공안국에서는 사건을 조사한후 장모에게 중대한 혐의가 있다고 인정했다. 2009년 4월 19일 저녁 6시, 장모와 원모는 뢰모의 핸드폰으로 뢰모의 딸에게 전화를 걸어 래일 점심전으로 돈을 부쳐보내라고 통지했다. 공안국에서는 주밀한 방안을 세운후 2009년 4월 20일 오후 2시에 공원에서 전화를 걸고있는 원모를 붙잡았고 성공적으로 인질인 뢰모를 구해냈으며 장모도 붙잡았다. 현재 장모와 원모는 형사구류되였는데 이 사건은 진일보 심사중에 있다.                                                           《법제일보》    
35    쌍둥이아들을 구하기 위해 댓글:  조회:4000  추천:0  2009-05-06
1998년 5월 29일, 단오절 전날이였다. 무한시 강하구 오리계진 라립촌에서는 경사가 났다고 폭죽을 터뜨리고 노래하며 춤을 추었다. 원래 농민 리공부와 채려평부부가 쌍둥이아들을 보았던것이다. 이날 리공부와 그의 안해 채려평은 쌍둥이아들 리남삼과 리남빈을 안고 너무 좋아서 입을 다물줄을 몰랐다. 채려평과 리공부는 광동성에서 품팔이를 할 때 서로 알게 되여 사랑을 나누다가 1997년 5월에 결혼했다. 이번에 쌍둥이아들을 보게 되자 그들은 하늘이 준 선물이라고 생각하면서 매우 기뻐했다.1999년 5월, 채려평은 첫돌이 된 쌍둥이를 아이의 할머니와 고모에게 맡기고 광동성으로 가서 남편과 함께 품팔이를 하면서 음력설에 한번씩 아이를 보러 왔다. 2003년 5월 29일은 리남삼과 리남빈의 5살 생일이였는데 채려평은 아이들에게 전화를 걸어서 생일을 축하해주면서 얼마후 돌아가서 집을 사놓고 다시는 외지로 떠나지 않겠다고 말했다. 아이들은 그 말을 듣고 몹시 기뻐했다.그때 아이들의 고모가 전화를 바꿔가지고 “올케, 빨리 돌아와요. 쌍둥이가 자꾸 넘어지는데 내가 보살피기 매우 힘들어요”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채려평은 그 길로 휴가를 맡고 밤도와 집으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그런데 집에 와보니 쌍둥이가 여러번이나 절룩거리면서 걷다가 넘어지는것이였다. 무한아동병원에 가서 검사해보니 의사가 “두 아이는 ‘진행성근육영양불량’이란 병에 걸렸는데 쌍둥이가 동시에 이 병에 걸릴 확률은 억만분의 하나입니다. 그리고 이런 병은 세계적으로 불치의 병인데 10살정도가 되면 완전히 전신마비가 되고 18살전에 죽게 됩니다”라고 알려주는것이였다. 그 말을 들은 채려평은 눈앞이 캄캄해났다. 광동성에서 품팔이를 하고있던 리공부는 이 기막힌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기차를 타고 집으로 달려왔다. 그는 쌍둥이아들을 안고 아무말도 못하고 눈물만 흘렸다. 채려평은 비통에 싸여있는 남편을 위안해주고나서 “앞으로 아이들을 치료해주려면 많은 돈이 있어야 할거예요. 그러니 당신은 돌아가 츨근하세요. 내가 아이들을 데리고다니면서 치료해주겠어요. 어찌 이 큰 중국에 우리 아들을 치료해줄 병원이 없겠어요”라고 말했다. 채려평은 오진이였으면 하는 희망을 품고 아이들을 데리고 호남성 장사시의 상아병원에 가서 다시 검사해보았는데 무한아등병원에서 내린 진단과 똑 같은 결과가 나왔다. 의사는 이런 병은 치료할 가망이 없으니 아까운 치료비만 허비하지 말고 일찌감치 포기하라고 권고했다. 그러나 채려평은 쌍둥이의 병을 꼭 치료해주고야 말겠다고 마음먹었다. 2004년 봄, 채려평은 광서의 계림에 있는 로중의가 이런 병을 치료할수 있다는 소문을 듣고 쌍둥이를 데리고 그 로중의를 찾아갔다. 로중의는 비방이라면서 이름모를 약을 끓는 물에 넣은후 그 약물로 두 아이의 관절부위를 찜질해주었다. 그런데 아이들이 따가움을 참지 못해 울고 몸에 물집이 생기는것을 보고 가슴이 아파서 “이런 방법은 너무 잔인해요. 치료하지 않겠어요”라고 말한후 아이들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채려평은 크고 작은 병원은 다 돌아다니고 용하다는 의사는 다 찾아보았으나 쌍둥이의 병은 하루하루 더 엄중해질뿐이였다. 2006년 3월, 쌍둥이는 완전히 마비되여 침대에 누워있어야 했다. 저금한 돈을 몽땅 써버린 채려평은 친정에 가서 돈을 꿔다가 아이의 약비를 대는수밖에 없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며칠동안 내린 소낙비로 집이 무너져서 채려평은 위급한 병에 걸린 두 아이를 데리고 남의 헐망한 집을 빌려서 생활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어느날, 남편한테 돈을 부쳐달라는 전화를 걸고 돌아와서 아이들에게 밥을 지어주려고 하는데 침대에 누워있던 쌍둥이중 형이 갑자기 “엄마, 엄마는 우리더러 웃으면 이쁘다고 했는데 난 아무리 웃으려고 애써도 웃을수가 없어요.이러다가 우리가 곧 죽게 되는것이 아닌가요?”라고 물었다. 그 말을 들은 채려평은 가슴이 덜컥했다. 그녀는 큰 소리로 “이후엔 죽는다는 말을 입밖에 내서는 안되다”고 말했다. 일찍 셈이 든 8살된 리남삼은 인차 “엄마, 미안해요. 그런데 웃을수 없으니깐 가슴이 답답해요”라고 말했다. 채려평은 “아이들이 10살이 되면 전신이 마비되고 18살이 되면 죽게 됩니다”라고 하던 의사의 말이 생각나자 눈앞이 캄캄했다. 아이들이 2년 앞당겨 마비되였는데 이러다간 정말로 18살이 되기전에 죽는건 아닐가? 아니야. 우리 쌍둥이는 절대 죽을수 없어. 어떻게 하나 꼭 살려내야 해! 2006년 7월 5일, 채려평은 쌍둥이를 데리고 북경병원에 가보기로 결정했다. 그녀는 자신과 남편이 꿔온 돈 2만여원을 가지고 북경행 렬차에 몸을 실었다. 북경에 도착한 채려평은 돈을 절약하기 위해 60원을 내고 지하실려관의 침대 하나를 빌렸다. 너비가 1메터밖에 안되는 침대에 두 아이를 눕힌후 그녀는 침대곁에 엎드려 잠을 잤다. 려관주인이 그녀에게 침대 하나를 더 놓으라고 하자 그녀는 돈을 더 팔지 않기 위해 다른 곳에 주숙하려고 자리를 떴다. 쌍둥이를 하나는 업고 하나는 안고서 북경의 거리에 나선 채려평은 가로세로 뻗은 립체교와 쉴새없이 질주하는 차량들을 보노라니 머리가 어지럽고 눈앞이 핑글핑글 돌아가는것만 같았다. 그녀는 달리는 차앞으로 막 뛰여들어가고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몸에 두 아이의 무게가 느껴지자 그녀는 정신을 바짝 차렸다. 이때 거리에서 음료를 파는 로인이 그녀에게 한 려관을 알려주었다. 그 려관의 주인은 그녀를 매우 동정하여 30원을 받고 침대 2개가 있는 방을 내여주었다. 주숙할 곳이 있게 되자 그녀는 쌍둥이를 데리고 병원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돈을 아끼기 위해 그녀는 두 아이를 하나는 업고 하나는 안고 걸어서 북경의 여러 큰 병원을 찾아다녔다. 그리고 매일 5원어치의 밥을 사서는 아이들에게 먹이고는 나머지가 있으면 먹고 나머지가 없으면 굶군 했다.엄마가 가끔씩 머리가 어지러워하는것을 본 쌍둥이는 엄마더러 먼저 밥을 들라고 권했다. 엄마가 먹으려고 하지 않으니 두 아이는 울면서 “엄마, 엄마가 자시지 않으면 힘이 없어 우리를 업고가지 못할거예요”라고 말했다. 채려평은 할수 없이 몇입 먹는체했다. 4개월이 지났으나 아이들의 병세는 조금도 호전되지 않았다. 그때는 가지고간 돈도 다 써버렸다. 다행히 중국적십자총회 아동중병소조에서 쌍둥이의 정황을 알고 《북경석간》의 기자를 통해 쌍둥이의 이야기를 발표하게 했다. 마음씨 고운 시민이 500원을 기부했지만 그 돈으로는 며칠밖에 더 지탱할수 없었다. 중국적십자총회 아동중병소조의 만주임은 채려평을 보고 “먼저 집에 돌아가 소식을 기다리시오. 우리는 이미 쌍둥이의 정황을 서류에 기록해두었으니깐 새로운 의료소식이 있으면 꼭 당신한테 전해주겠습니다”라고 말했다. 2006년 10월, 채려평은 아이들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해 겨울 그녀는 북경에서 언제면 소식이 올가 하고 기다리면서 하루하루를 힘겹게 보냈다. 하지만 북경에서는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2007년 3월, 쌍둥이는 몸이 굳어지기 시작했는데 온종일 한가지 자세로 있으면서 눈도 뜨려고 하지 않는것이 조각을 해놓은것만 같았다. 말할수 없는 공포에 휩싸인 채려평은 두 아들에게 큰소리로 “지금은 대낮인데 잠을 자선 안된다! 빨리 눈을 뜨거라. 너희들이 잠을 자면 다시는 이 어머니를 볼수 없단다. 엄마가 부탁한다. 엄마 말을 들어다오”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녀는 집의 텔레비죤의 음량을 가장 큰 소리로 높여놓았다. 두 아들은 맥없이 말했다. “엄마, 우리도 눈을 뜨고 엄마를 보고싶지만 너무 졸려요.” “졸려도 눈을 감아선 안된다. 너희들은 굳세야 한다!”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시간은 하루하루 흘러가서 2007년 4월에 들어섰다. 어느날 채려평은 심양해방군463병원 세포치료중심의 양효봉주임이 간세포이식수술로 혈전페쇄성맥관염환자를 치료했다는 소식을 듣고 두 아이를 데리고 심양해방군463병원으로 찾아갔다. 양효봉은 직접 심양기차역에 나가 채려평과 두 아이를 맞이했다. 지금까지 세계적으로 진행성근육영양불량환자를 치료한 사례가 없었다. 양효봉과 그의 연구소조에서는 10여년래 줄곧 흰쥐와 토끼의 몸에 독특한 간세포쌍이식방법을 시험하여 모두 성공했다. 양효봉은 채려평의 동의를 얻은후 자체간세포쌍이식방법으로 쌍둥이를 치료해주기로 결정했다.쌍둥이의 생명이 위급했기때문에 병원에서는 빠른 시일내에 수술방안을 확정했다. 양효봉은 먼저 두 아이의 체내에서 일정한 량의 골수간세포를 채취한후 세포분리, 배양, 유도분화를 하여 세포가 다른 일종의 세포로 변화되게 한후 두 아이의 체내에 이식하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이 기술은 치료비가 36만원에 달하며 2년내에 적어도 세번 간세포이식을 해야 하는데 매우 큰 고통을 견뎌내야 한다. 채려평이 1전도 낼수 없다는것을 안 해방군463병원에서는 수술비용을 줄이는 한편 보도매체를 통해 사회의 기부를 받게 하였다. 2007년 5월 4일, 쌍둥이에게 처음 간세포이식수술을 해주었는데 수술후 20일도 안되여 기적이 나타났다. 두 아이는 물건을 잡고 몇분씩 일어설수 있었고 눈도 맑아졌다. 2007년 10월, 전문가소조에서는 쌍둥이에게 두번재 간세포이식수술을 해주었다. 1개월후 두 아이는 자연스럽게 웃을수 있게 되였다. 리남삼과 리남빈은 너무도 격동되여 큰소리로 “어머니, 어서 보세요. 우리는 웃을수 있게 되였어요”라고 말했다. 옆에서 지켜보고있던 채려평은 쏟아지는 눈물을 참으면서 머리만 끄덕였다. 2008년 7월,양효봉은 쌍둥이에게 세번째 간세포이식수술을 해주었다. 2개월후 기타의 보조치료를 거쳐 거의 정상인처럼 회복되였다. 리남삼은 기계에 의해 일어서 걸을수 있었고 리남빈은 자유롭게 걸어다닐수 있게 되였다.                                                                      《지음》      
34    인질 랍치범과 녀간호원의 대결 댓글:  조회:4026  추천:0  2009-05-05
곤명시 동인신화병원 수술실의 간호원 주일단은 연분이 그렇게 빨리 맺어질줄은 몰랐다.2007년 국경절휴가를 앞두고 그녀는 친구와 상의한후 인터넷에 “함께 려행갈 낯선 친구들을 찾는데 남자들은 자가용차를 가지고오면 좋겠다”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 글을 올리자마자 련계인인 주일단의 핸드폰은 불이 날 지경이였다. 그날밤에 그녀의 핸드폰이 또 울렸다. 어떤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손운천이라고 하는데 남자이고 29살입니다. 나도 당신들의 려행에 참석하려고 하는데 자가용차가 없습니다. 그래도 괜찮은지요?” 낯선 남자의 솔직한 고백에 그녀는 웃음이 나오는것을 참으면서 장난기어린 목소리로 말했다.“네바퀴차가 없으면 11호차가 있잖아요. 거기에 생활을 사랑하고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까지 있는데 안될게 뭐예요.” 이렇게 되여 려행을 함께 간 두 사람은 서로 아름다운 연분을 맺고 사랑하는 사이가 되였다.2008년 11월 29일 오전 10시, 룡천로 가락복에서 인질랍치사건이 발생했는데 인질이 심하게 상했다는 전화를 받고 주일단은 의사들과 함께 구급차에 앉아 현장으로 달려갔다. 리장룡의사가 집안으로 들어가 사람을 구하려고 문을 두드렸는데 안에서 “녀자만 들어와!”하는 흉악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일단은 더 생각할 사이도 없이 약상자를 들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들어가자마자 문이 안으로 잠궈졌다.   이 집은 안과 밖이 격리되여있는 자그마한 물건저장실이였다. 주일단에게 문을 열어준 남자가 비수를 들고 흉악한 몰골로 쏘아보자 주일단은 순식간에 온몸이 떨려났다.   그녀가 호흡을 가다듬고 살펴보니 피투성이된 녀자가 누워있는것이 보였다. 주일단은 앉으면서 “어디를 상했어요?”라고 물었다. 그때 그 남자는 비수를 부상당한 녀자의 목에 들이댔다. 주일단은 무서워서 도망치고싶었지만 방바닥에 누워있는 부상자를 보자 차마 외면할수 없어 떨리는 두손을 꽉 잡고 주저앉았다. 인질로 된 녀인은 피를 너무 많이 흘린 탓으로 잠간 혼미상태에 빠졌다가도 다시 정신을 차리군 했다. 주일단은 인질의 상처를 살펴보고나서 옅은 상처는 처치해주었지만 깊은 상처는 조건이 허락되지 않아서 처지할수가 없었다. 그때 랍치범이 눈을 부릅뜨고 물었다. “이 녀인이 죽게 되는거냐?”   “피를 많이 흘려서 병원에 호송하지 않으면 생명이 위험합니다.”   그 말을 들은 랍치범은 주일단의 앞으로 다가와서 말했다.   “그럼 이 녀인을 나가게 하고 네가 인질로 남아라!”   주일단은 위험이 다가온것을 느꼈다. 랍치범은 주일단의 목에 비수를 들이댔다. 랍치범은 주일단에게 문을 열고 부상당한 녀인을 내보라고 호령했다. 주일단이 문을 열자 부상당한 녀인은 결사적으로 기여서 밖으로 나갔다. 그녀가 나가자 다시 문이 닫겼다. 부상당한 녀인은 안전하게 마귀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혼자서 랍치범앞에 선 주일단은 너무도 무서워 울기 시작했다.   시간은 일초일초 흘러갔다. 시간이 흘러갈수록 주일단의 생명은 더욱 위험할수 있었다. 11시쯤 공안국에서 제일 경험이 풍부한 담판전문가가 현장에 도착하여 랍치범과 대화를 시작했다.   주일단은 이때에야 인질랍치사건의 전후과정을 알게 되였다.원래 이 랍치범은 륙지문이라고 하는데 39살이고 상해사람이였다. 륙지문은 2003년에 살인미수죄로 감옥살이를 했는데 만기석방된후 상해의 집을 팔고 곤명으로 들어왔다. 그는 곤명에서 뢰씨성을 가진 녀인을 알게 되여 동거했는데 나중에 뢰씨가 다른 남자와도 성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였다.   2008년 10월 23일, 륙지문은 뢰씨와 다투다가 그녀를 인질로 삼고 주동적으로 공안국에 전화를 걸었다. 결과 그는 한달남짓이 구류되였다가 사흘전에야 석방되였다. 구류소에서 나온 그는 사처로 수소문하면서 뢰씨를 찾아다니다가 못찾게 되자 인질랍치사건을 저질렀던것이다.그는 인질의 목숨을 위협하는것으로 경찰을 핍박하여 뢰씨를 찾아달라고 요구했던것이다.   경찰들은 강탈자가 후과를 돌보지 않고 주일단을 해칠가봐 벽에 물을 뿌린후 될수록 소리를 가볍게 내면서 벽을 뚫기 시작했다. 륙지문은 벽을 허무는 소리가 들려오자 깜짝 놀라서 큰소리로 고함쳤다.   “내 경고한다. 너희들이 속히 나의 녀자친구 뢰씨를 찾아서 내앞에 데리고오지 않으면 이 녀인을 죽여버리겠다! 그리고 벽을 뚫고 들어오려는 생각은 꿈도 꾸지 말라. 지금부터 벽을 뚫는 소리가 들려오면 이 녀인을 찔러 죽이겠다!”   벽을 뚫는 소리가 멎고 주위는 잠시 쥐죽은듯 조용해졌다. 륙지문은 안도의 숨을 내쉬였다. 정신이 고도로 긴장했던 그는 지쳐있었다. 그는 한손으로 주일단의 몸을 안고 다른 한손에 든 비수로 그녀의 목을 겨누었다. 그리고 잠시후 그녀의 어깨에 기대여 졸기 시작했다. 주일단은 도망칠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가 몸을 빼려고 할 때 륙지문이 깨여났다. 륙지문은 비수를 주일단의 목에 바싹 들이대면서 “네가 움직이기만 하면 이 칼로 네 목을 베여버리겠다!”라고 위협했다. 주일단은 너무도 무서워 부들부들 떨면서 울기 시작했다.   녀인의 울음소리가 들려오자 밖에서 지키고있던 경찰들은 몹시 근심되였다. 인질이 놀라면 강탈자를 자극하여 더욱 미쳐날뛰게 할수 있고 인질이 침착하면 생존의 기회를 얻을수 있다. 그러나 경찰들은 문밖에서 지켜보면서 아무일도 할수 없었다.그때 주일단의 핸드폰이 울렸다. 그녀가 호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보니 익숙한 전화번호였다. 그녀는 아무것도 고려하지 않고 전화를 받았다. 전화는 손운천이 걸어온것이였다. 원래 주일단이 인질로 잡혔을 때 손운천은 해구파출소에서 당직을 서고있었다. 파출소는 사건현장과 멀리 떨어져있었기때문에 그는 가락복에서 발생된 일을 감감 모르고있었다. 점심 12시에 주일단의 친구 라사사가 주일단이 인질로 잡힌 소식을 듣고 다시 전화로 손운천에게 전해주었다. 손운천은 녀자친구가 인질로 잡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깜짝 놀라서 사건현장으로 달려가면서 전화를 걸었던것이다.   “어떻게 된 일이요? 괜찮소?”   주일단이 대답을 하지 못하고 울먹거리자 손운천은 더 급해나서 “울지말고 랭정해야 하오. 절대 강탈자를 자극해서는 안되오”라고 부탁했다. 주일단은 륙지문이 쏘아보자 급히 핸드폰에 대고 “류정을 찾는가요? 120구급중심에 걸어 물어보세요. 우리 부모한테는 말하지 마세요”라고 말하고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손운천은 마음이 몹시 무거웠다. 보아하니 녀자친구의 정황은 매우 위급한것 같았다. 평소에 벌레마저 무서워하던 녀인이 흉악한 랍치범의 앞에서 어떻게 견뎌내겠는가? 그의 마음은 돌아가는 차바퀴보다 더 급했다.   남자친구의 전화는 주일단에게 힘을 주었다. 한참후 손운천은 또 전화를 걸어 “급해하지 말고 떨지도 마오. 더구나 그 사람을 화나게 해서는 안되오. 무슨 일이 생기든지 절대 울어서는 안되오. 내가 도착했으니 마음을 놓소”라고 말했다.   륙지문은 배가 고파서 밖에 있는 경찰들에게 라면을 끓여오라고 소리쳤다.   기회가 왔다고 생각한 경찰들은 주일단에게 전화를 걸어 “그자가 당신더러 문을 열라고 하면 문이 열리는 순간 엎드려야 하오”라고 말했다.   경찰들이 라면을 끓여왔다고 소리치자 륙지문은 주일단에게 비수를 들이대면서 문을 열라고 했다. 주일단은 떨리는 손으로 문을 열었다. 그리고 번개같이 방바닥에 넘어지는것처럼 하면서 엎드렸다. 순간 “땅!”하는 총소리와 함께 륙지문은 쓰러졌다.륙지문은 쓰러지면서 비수로 주일단의 목부위를 긁어놓았다.   “일단이!”   손운천은 첫사람으로 방안에 뛰여들어가서 피가 흐르는 사랑하는 사람을 꼭 껴안았다.   주일단은 그때에야 정신을 차리고 울기 시작했다. 의사들이 달려들어와 주일단을 안아서 구급차에 실어갔다. 손운천은 달리는 구급차안에서 주일단의 손을 꼭 잡고있었다.   구급을 거쳐 주일단의 몸은 완전히 회복되였다.주일단에 의해 구원된 녀인질은 가락복의 22살되는 직원 왕려화였다. 왕려화는 주일단이 제때에 인질로 되여 몸을 바꿔주었기때문에 구원될수 있었다.   2008년 12월 5일, 운남성위생청에서는 주일단에게 “운남성위생계통공청단원기준병”이란 칭호를 수여하였고 운남성총공회에서는 주일단에게 “운남성5.1로동훈장”을 수여하였다. 《춘성석간》에서 선발한 “2008년운남성10대뉴스인물”평선이 방금 결속되였는데 주일단은 서렬 5위에 올랐다. 하지만 주일단은 이 모든 영예를 매우 담담하게 여겼다. 그녀는 기자의 취재를 접수할 때 이렇게 말했다.   “저는 보통사람입니다. 그 당시 저는 마음속으로는 몹시 무서웠습니다. 정황이 급했기때문에 의료일군으로서 보고만 있을수 없어 자신의 책임을 다 하려고 한것뿐입니다.저는 이런 기회가 있었기때문에 진정한 사랑이란 달콤한 말에 있는것이 아니라 두 사람이 서로 배려하면서 잘 살아가는것이라는것을 알게 되였습니다. 손운천씨는 제가 퇴원한 이튿날에 저를 데리고 취호에 가서 갈매기에게 먹이를 뿌려주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갈매기에게 먹이를 뿌려주는 느낌이란 정말 달콤하고 랑만적이였습니다.”               《법제일보》      
33    처녀의 넋이 담긴 물망초 댓글:  조회:4098  추천:0  2009-05-05
2007년 10월의 어느날, 절강과학기술학원 4학년생인 대군이는 거처에서 나와 도시 중심에 있는 누나의 집으로 가려고 정류소에서 차를 기다렸다. 그때 대군이와 가까운 곳에서 한 처녀가 길을 건너고있었는데 갑자기 자동차 한대가 쏜살같이 질주해왔다. 처녀가 차에 치이려는 위기일발의 시각에 대군이는 죽음도 아랑곳하지 않고 번개같이 달려가서 처녀를 밀치면서 땅바닥에 뒹굴었다. 그 순간 자동차는 지나갔고 처녀와 대군이는 모두 무사하게 되였다.   너무 놀라 어안이 벙벙해있던 처녀는 정신을 차리고 놀란 가슴이 진정되자 주위를 살펴보았다. 그녀는 대군이보다 7~8살이나 어려보이는 애된 처녀였다.   “어디 다친데 없소?”   대군이가 관심조로 묻자 그녀는 일어서서 걸어보았다. 아무데도 상한 곳은 없었다. 주위의 사람들이 대군이를 가리키면서 “이 젊은이가 아니면 처녀는 잘못될번 했소”하면서 대군이가 처녀를 구한 과정을 이야기해주었다. 처녀는 연신 “감사해요”라고 대군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고나서 련계전화를 물었다.   대군이는 처음에는 알려주려고 하지 않았지만 처녀가 하도 간절하게 묻는 바람에 결국 알려주고말았다.   이튿날 처녀한테서 전화가 와서 만났는데 처녀는 “집에 돌아가 오빠이야기를 했더니 엄마와 아버지는 구명은인에게 저녁이나 한끼를 대접하겠으니 꼭 데리고오래요”라고 말했다. 대군이는 몇번 사양하다가 처녀의 간절한 청을 물리칠수 없어서 따라갔다. 처녀의 부모들은 아주 열정적으로 대군이를 맞아주면서 딸에게 “넌 한평생 너의 생명을 구해준 이 구명은인을 잊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처녀의 이름은 척소연인데 항주의 어느 중학교에 다니고있었다. 대군이는 학교기숙사에 들지 않고 어느 큰회사의 총경리로 있는 누나가 마련해준 집에 들어있었다. 그후 소연이는 주말마다 찾아와서 온종일 밥도 짓고 빨래도 하고 집안청소도 하군 했다. 소연이는 온통 귀여움으로 만들어진 처녀같았다. 소연이는 대군이의 동학들보다 더 자주 들렀지만 동학들과는 달리 어지럽히는 대신에 청소를 했고 꼭꼭 맛있는 음식을 차려놓군 했다. 대군이가 하려고 했지만 소연이는 자기가 있는 날에는 주방근처에 얼씬도 못하게 했다. 사실 대군이가 만든 음식은 맛이 없었다. 혼자 있을 때라면 몰라도 누구와 함께 식사를 할 땐 대군이가 만든 음식으로 상을 차리기는 멋적었다. 대군이는 라면을 끓여먹는 때가 많았다. 소연이는 집에서 짠지를 가져다주기도 하고 밑반찬을 만들어 가지고 오기도 했다. 17살 처녀가 냄새를 풍기며 짠지통을 들고 뻐스에 오른다는것이 부끄럽기도 했으련만 소연이는 짠지가 떨어지기 무섭게 가져오군 했다. 가끔 빨래를 해주기도 했는데 그건 너무 미안해서 대군이는 빨래가 밀리지 않도록 그날그날 빨아 입게 되였다. 빨래를 하다가 들키게 되면 소연이의 눈이 곱지 않았다. 가끔 대군이가 집에 늦게 들어가는 날에도 소연이가 왔다간 흔적이 있었다. 어지럽히고 나간 방안이 잘 정돈되여있었고 물만두가 아니면 밥과 반찬이 만들어져있었다.   소연이와 대군이는 함께 공부를 하기도 하고 서로 학교에서 있은 일을 얘기하기도 하면서 방에서 시간을 보냈다. 대군이는 소연이가 오기 시작한후 동학들이 집에 오는걸 좀 삼가하게 했다. 동학들이 귀찮아서 그런것은 아니였다. 소연이에게 미안해서였다. 동학들이 어지럽힌 방을 청소해야 하는 소연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되도록 동학들을 방에 들이지 않았다. 대군이에게는 또 련애를 시작한지 얼마 안되는 기해라는 녀학생이 있었는데 기해한테도 소연이와의 관계를 숨겨두었다. 대군이는 늘 소연이를 집에까지 바래다주었다. 늦은 날에는 인사를 드리지 못했지만 그렇지 않은 날엔 소연이의 부모님께 반드시 인사를 드리고왔다. 소연이의 가정은 어떤 가정보다 평화롭고 정이 넘쳐보였다. 그렇게 대군이는 소연이와 우정을 쌓아갔다.   그러던 어느날 오랜만에 대군이는 녀자친구 기해와 함께 집으로 향했다. 사실 대군이는 당시 기해와 소연이가 만나게 될가봐 조심했다. 오해를 받기가 싫었다.아무리 소연이가 어리다지만 소연이는 녀자였고 대군이는 남자였다. 더구나 거의 매일 집에 와서 함께 살다싶이 하는걸 알게 된다면 누구라도 오해할게 빤했다. 하지만 그의 그런 노력은 얼마 안되여 기해에게 들통나는 바람에 헛되게 되고말았다.   소연이가 집에 있을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하고 기해와 둘이서 오랜만에 집에 들어갔는데 어찌된 일인지 한창 수업을 받고있어야 할 소연이가 와있었다. 소연이를 녀동생이라고 소개했지만 대군에게 친녀동생이 없다는것을 알고있는 기해는 대군이와 소연이의 관계를 의심했다.   그러나 대군이의 자세한 설명을 듣고는 인차 의심을 풀었고 소연이와 친해졌다. 기해도 가끔 대군의 집에 왔는데 소연이는 그런 기해한테 매달리며 물었다.   “언니 우리 오빠 사랑해?”   “응, 넌? ”   “나도 오빨 사랑해. 그러나 언니가 생각하는 그런 사랑은 아니야. 언닌 이후 내가 없더라도 오빨 잘 돌봐줘야 해. 밥도 지어주고 빨래도 해주고 집안청소도 해주고…그런데 대학생인 언니가 이런 일을 할수 있겠어? 안되겠다. 아무래도 내가 배워줘야지.”   소연이는 한동안 기해한테 료리하는 법과 집안일을 배워주느라고 바삐 돌아쳤다. 대군에게 소연이는 너무 사랑스러운 녀동생이였다. 이성의 감정을 느끼기엔 나이차이가 너무 많았다. 나이차이보다는 소연이의 나이가 너무 어렸다. 하지만 대군이는 만약에 녀자친구가 생긴다 해도 지금 소연이와의 정보다는 깊지 않을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두 녀자를 놓고 한 녀자를 선택하라고 하면 대군이는 당연히 소연이를 선택할것이였다. 소연이를 향한 지금의 감정도 분명 사랑의 일종이였다. 사랑이라 해서 반드시 이성의 감정이 깃들어야 하는건 아닐테니깐. 그렇다. 대군이는 소연이를 사랑했다. 대군이는 소연이를 사랑하고있었다. 단지 이성의 감정만 없을뿐이였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는 소연이에게서 이성의 감정을 느끼게 될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아니였다. 지금은 그저 사랑스러운 녀동생일뿐이였다.   2008년 5월, 소연이는 물망초(勿忘草) 한묶음을 들고와서 대군이한테 건네주며 “오빠,이 꽃이 이뻐?”라고 물었다. 대군이는 꽃향기를 맡아보면서 “너무 이쁘진 않지만 사연이 깊은 꽃이지”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소연이는 두눈을 반짝 빛내더니 말했다.   “오빠도 이 꽃에 깃든 사연을 아세요? 한 청년이 섬에서 자라는 이 꽃을 사랑하는 녀인에게 꺾어주기 위해 그 섬까지 헤염을 쳐서 갔다고 해요. 그런데 그 청년은 꽃을 꺾어가지고 오다가 급류에 휘말리자 가지고있던 꽃을 사랑하는 녀인에게 던져주고는 ‘나를 잊지 말라’는 한마디를 남기고 사라졌다고 해요. 녀인은 사라진 남자를 생각하면서 일생동안 이 꽃을 몸에 지니고 살았대요. 그래서 이 꽃의 이름이 ‘나를 잊지 마세요’란 뜻으로 물망초가 되였대요. 오빠도 어느날 갑자기 내가 사라지면 날 잊지 마세요.”   “너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네가 왜 사라져? 출국이라도 하는거야?”   “아니, 만약에 그렇다는거죠.”   “만약이라도 그런 말을 하면 못써.”   대군이는 손으로 소연이의 코를 눌러주면서 나무람했다. 소연이는 막 까불다가도 갑자기 심각해져서 대군이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울기도 했다. 사춘기소녀의 변덕이라 하기엔 좀 심했다. 하지만 그에겐 소연이의 그런 모습마저도 귀엽고 사랑스러워보였다.   그후 소연이는 한달에 두번정도 오더니 얼마 안가 한달에 한번정도 찾아왔다. 대군이 또한 취업문제로 바빠져 소연이를 찾아가기가 힘들었고 가끔 찾아가도 학교에서 돌아오지 않아 만나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대군이가 졸업식을 하는 날 소연이는 꼭 오겠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졸업식날 소연이는 오지 않았다. 집에 전화를 했지만 받지 않았다. 전화를 기다렸지만 전화도 오지 않았다. 집에 찾아갔지만 아무도 없었다. 며칠동안 계속 전화를 했지만 받지 않았다. 갑자기 불안감이 습격해왔다. 아무것도 할수 없을것 같았다. 열흘후 소연의 집에 찾아갔더니 소연의 아버지가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그렇지 않아도 오늘쯤 련락을 하려던참이였네. 소연이 갔네.”   “네? 가디니요?!”   “하늘나라로 갔네.”   소연이의 엄마가 울먹이며 모든것을 말해줬다. 소연이는 대군이를 만나기전에 이미 사형선고를 받은 말기암환자였다. 그날도 죽음을 앞두고 고민하다가 자동차가 오는것도 보지 못하고 하마트면 교통사고로 죽을번했던것이다. 대군이의 구원을 받아 죽음에서 구원된 소연이는 남은 삶을 구명은인에게 감사를 드리면서 살려고 마음먹었다.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숨기고 맑게 살아온 처녀, 대군이는 가슴이 찢기는 아픔에 통곡하면서 물망초 한묶음을 들고 소연이의 묘지를 찾아갔다. 소연이와의 추억이 떠오르며 이젠 소연이를 추억할수밖에 없는 사실이 가슴을 저리게 했다.                      《현대도시보》    
32    강간살인의 억울한 루명을 벗기까지 댓글:  조회:4329  추천:0  2009-05-05
황신은 1970년에 정주시의 한 고급지식분자가정에서 태여났다. 아버지 황소량은 신화사 하남성분사의 기자였고 어머니 리해방은 하남성인민검찰원의 정처급간부였다. 황신은 1992년에 상해복단대학 전자공정학부를 졸업한후 북경의 어느 한 중일합자기업에 높은 로임으로 초빙되였다. 황신은 1997년 가을에 정주의 부모집에 놀러왔다가 리맹이란 예쁘게 생긴 처녀를 알게 되였는데 두 사람은 첫눈에 반하여 서로 사랑하게 되였다. 1년후 황신은 카나다의 한 회사에 초빙되였다. 두 사람은 부모들과 상의를 거쳐 황신이 먼저 카나다로 이민가서 자리잡은후 리맹을 카나다로 이민시키고 거기서 두 사람이 결혼하여 함께 살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이민을 며칠 앞두고 뜻밖의 사건이 발생하여 황신의 운명을 개변해놓았다. 1997년 10월 23일 저녁, 황신과 리맹은 친구들과 함께 트럼프를 놀았는데 황신은 리맹이 패를 잘못 던졌다고 나무람했다. 밤 11시 30분에 놀음이 끝난후 황신과 리맹은 리맹의 거처인 3층에 들어가 함께 잠을 잤다. 10월 24일 아침 8시 40분쯤 황신은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입으면서 그때까지 누워있는 리맹에게 입을 맞춘후 외출하려고 했다. 그때 리맹은 잠에서 덜깬 목소리로 “나갈 때 빈 가스통을 들고 내려가세요. 내려다놓으면 아버지가 사람을 불러 가스를 넣어올거예요”라고 부탁했다. 황신이 가스통을 들고 아래층으로 내려가니 리맹의 어머니가 그를 보고 점심을 먹으러 오는가고 물었다. 그는 일이 있어 밖에서 먹고온다고 대답했다. 장모와 작별인사를 한후 황신은 장인이 사준 승용차를 몰고 누나를 불러 컴퓨터부속품을 사가지고 집으로 돌아갔다. 1997년 10월 24일 오전 10시 30분, 누군가 리맹의 부모가 꾸린 공용전화를 치려고 했으나 통하지 않았다. 1층에 있는 전화선이 3층에 있는 리맹의 침실전화와 련계되여있었기때문에 리맹의 아버지는 딸이 통화를 한후 전화기를 잘못 내려놓은것이라고 생각되여 3층으로 올라갔다.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간 그는 깜짝 놀랐다. 전화기가 침대머리궤우에 떨어져있고 피투성이가 된 딸이 방바닥에 누워있었는데 목에 전기술이 매여져있고 가슴에는 칼이 박혀있었다. 현장에 달려온 경찰들은 리맹이 이미 사망된것을 확인했다. 창문은 잠겨진 그대로 있었고 낯선 사람의 지문도 없었다. 법의가 리맹의 사체를 검사해보니 그녀의 체내에는 두 남자의 정액이 들어있었는데 하나는 황신의것이였고 다른 하나는 누가 어느 시간에 남겨놓은것인지 알수 없었다. 법의는 리맹이 1997년 10월 24일 새벽 1시부터 2시사이에 피살된것이라고 판단했다. 현장을 분석한 결과 리맹이 피살된 시간에 현장에 있은 사람은 황신밖에 없었다. 현장에 남은 지문도 황신의것이였고 리맹의 체내에 남은 정액도 황신의것이였다. 이렇게 되여 황신은 혐의범으로 잡혀 간수소에 들어가게 되였다.황신은 입이 열개라도 변명할 방법이 없었다. 1년남짓한 동안 그는 선후로 6개의 간수소로 옮겨졌는데 새로운 간수소에 갈 때마다 장시간에 달하는 심문을 받아야 했다. 그가 아무리 억울하다고 말해도 경찰들은 그의 말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아들이 간수소에 갇히게 된 원인을 알게 된 황신의 부모는 아들이 살인범이라고 믿지 않았다. 그들은 관계를 통하여 아들이 간수소에서 보내온 편지를 본후 더욱 아들의 결백을 믿게 되였다. 황신은 편지에 이렇게 썼다.   “아버지, 어머니! 이 아들을 믿으십시오. 법의의 감정이 틀린겁니다. 리맹이 그날 아침 8시가 지나서까지 살아있었는데 어떻게 새벽 1시부터 2시사이에 살해될수 있습니까? 리맹은 내가 떠난후에 살해된것이 틀림없는데 말입니다. 난 억울합니다. 나는 죽는것은 두렵지 않지만 억울하게 죽는것이 두렵습니다. 내가 정말로 리맹을 살해했다면 백번 죽어도 마땅할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리맹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오래동안 검찰관사업을 해왔던 황신의 어머니 리해방은 살인하려면 동기가 있어야 하는데 아들에게는 살인동기가 없다는것을 발견했다. 단지 트럼프를 놀다가 다툰 일때문에 아들이 리맹을 살해했다는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되였다. 리해방은 아들이 리맹과도 감정이 매우 깊고 처가집 사람들과 매우 화목하다는것을 알고있었다. 리해방은 남편과 함께 아들의 억울함을 풀어주려고 사처로 뛰여다녔다. 하지만 어디서나 퇴직한 그들을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시에서나 성에서나 모두 마찬가지였다. 이때 거듭되는 심문에 정신과 육체상에서 말할수 없는 고통을 받은 황신은 여러번이나 자살하려고 마음먹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그의 부모는 억울한 루명이 벗겨질 날이 꼭 있을것이니깐 절대 다른 마음을 먹지 말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이름있는 변호사를 청하면서 아들의 억울한 루명을 벗겨주기 위해 사처로 뛰여다녔다. 2002년 7월 30일, 법원에서는 “황신이 리맹을 살해했다는 증거가 부족하기때문에 죄명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리유로 무죄판결을 내렸다. 그후 공안국에서는 리맹의 체내에 정액을 남긴 다른 한 남자를 찾기 위해 100여만원의 거액을 써가면서 수사했지만 범인을 잡지 못했다. 2008년 3월말, 상해시공안국에서는 모든 범인들의 혈액을 채취하여 검사했는데 방순이라고 하는 범인이 혈액유전자가 10년전 정주에서 피살된 녀자의 체내에 있던 무명남자의 정액유전자와 완전히 일치했다. 이렇게 되여 절도죄로 곧 풀려나게 될번했던 방순에게서 련속 4명이나 살해한 죄행이 드러나게 되였다. 금년에 32살인 방순은 내몽골에서 출생했는데 어릴 때 재가한 모친을 따라 하남성으로 이사갔다. 부모가 리혼한 가정에서 자란 그는 심성이 비뚤어지고 보복심이 강했다. 그는 정주시 금수로에 위치한 어느 대형오락성에서 보안일군으로 있으면서 단골손님인 리봉이란 녀인과 약혼했다. 그는 리봉과 사귀면서부터 리봉과 함께 춤추러 오는 리맹을 알게 되였다. 그런데 몇달후 리봉은 그와 헤여지자고 했다. 방순은 리봉이 자신을 가난한 보안일군이라고 꺼리는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처음에는 왜 꺼리지 않고 나와 약혼까지 했을가? 리봉의 마음이 변한것은 리맹때문일거야. 리봉은 친구인 리맹이 나보다 나은 남자친구를 사귄것을 보고 마음이 변한거야.) 이렇게 판단한 방순은 가슴에서 복수의 불길이 타올랐다. 실련의 고통에 모대기던 방순은 리맹을 죽여버리기로 마음먹었다. 방순은 이전에 리봉을 따라 리맹의 집으로 가본적이 있었고 거기서 리맹의 남자친구 황신을 만나기도 했다. 그러나 황신은 그를 몰랐다.   1997년 10월 24일 오전 8시 30분, 방순은 리맹의 집부근에 숨어서 집안동정을 살펴보았다. 얼마 안되여 황신이 리맹의 집에서 나와 승용차를 몰고가고 리맹의 어머니가 계단쪽에 엎드려있는것을 보고 방순은 슬그머니 3층으로 올라가서 리맹의 방문을 두드렸다. 리맹이 안에서 “누구세요?”라고 묻자 그는 “나는 방순이요”라고 대답했다. 리맹은 귀에 익은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어주었다. 집으로 들어간 방순은 신속히 안으로 문을 잠그고 번개같이 달려가 리맹의 목을 졸라서 혼수상태에 빠지게 했다. 리맹이 잠옷을 입고있는것을 본 방순은 욕정을 참을수 없어 리맹의 잠옷을 벗기고 강간하려고 했다. 이때 혼미상태에서 깨여난 리맹은 결사적으로 반항했다. 방순은 침대머리에 있는 전기줄로 리맹의 목을 꽉 졸랐다. 그리고 계속 강간했다. 그런데도 리맹이가 다리로 자기를 걷어차는것을 본 그는 몸에 품고다니던 칼을 꺼내여 리맹의 가슴을 찔렀다. 교활한 방순은 리맹의 집에 들어갈 때부터 장갑을 끼고들어가서 범행을 저질렀기때문에 현장에 지문이 남지 않았던것이다.   방순은 리맹을 살해한후에도 악행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자신은 아무때든 붙잡히면 죽는 목숨이기때문에 붙잡히기전에 더 “멋지게” 살아보겠다고 마음먹었다. 1999년 가을, 방순은 정주의 한 산장에 가서 23살의 처녀를 강간한후 살해했다. 그리고 1년후 또 14살의 소녀를 “살해”한후 강간했는데 그가 간후 목이 졸려 혼미상태에 빠졌던 소녀는 다시 살아났다. 소녀의 부모는 제보전화를 건후 광주로 이사갔다. 련속 세 사람을 살해한후 도망치느라고 굶은 그는 빌어먹는 도중에 또 한 농촌녀인을 잔인하게 살해했다. 2003년, 상해에 기여든 그는 주머니에 돈이 없자 도적질을 하다가 경찰에 붙잡혀서 5년동안 감옥살이를 했다. 2008년초, 방순은 이제 감방에서 나가 활개를 치고 다닐 날이 곧 다가온다고 손을 꼽으면서 기뻐했다. 그런데 경찰이 그의 혈액을 채취하여 10년전의 살인사건을 들춰낼줄이야 어찌 알았겠는가. 2008년 11월,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고 진짜범인이 붙잡혔다는 소식을 들은 황신은 매우 격동되였다. 그는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수년래 나는 창업에 모든 힘을 다 바쳤지만 이 미해결사건이 줄곧 마음에 걸려있었습니다. 진짜범인이 잡히지 않았기때문에 그냥 나를 의심하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지금은 모든것이 밝혀졌습니다. 나는 그 방순이란 살인악마가 재판받는 날 꼭 정주에 가서 그자의 낯짝을 볼 작정입니다. 그리고 억울하게 살해된 리맹에게 위안의 꽃다발이라도 드리고싶습니다.” 진짜범인이 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황신의 부모나 리맹의 부모나 모두 기뻐했다. 방순의 살인사건은 현재 진일보 심사중에 있는데 살인악마는 마땅한 징벌을 받게 될것이다.                       《북방법제보》    
31    조본산 억대 재산 어디서 왔나? 댓글:  조회:4055  추천:0  2009-04-30
절강성 운화현에서 각종 명의로 소녀들을 협박하여 매음하게 한 29명의 조직범죄집단이 일망타진됐다. 이번 사건은 당지에서 큰 파문을 일으켰다. 절강성공안청에서는 깊은 중시를 돌리고 속히 이 사건을 조사처리하도록 운화현공안국에 지시했다. 운화현공안국에서는 4개월동안 호남, 중경 등지를 돌아다니며 간고한 수사끝에 끝내 협박공갈 등 수단으로 소녀들을 매음하게 한 특대사건을 성공적으로 해명했다.   소녀가 지혜롭게 탈출하여 제보   올해 15살밖에 안되는 정정과 리리는 2008년 3월 8일을 영원히 잊지 못할것이다. 그날 저녁 품팔이를 하는 부모와 함께 생활하고있던 리리는 함께 PC방에 나가 놀자는 친구 호동승의 전화를 받았다. 평소 인테넷에 올라 QQ를 즐겨온 리리는 전화를 받자마자 집에서 뛰쳐나와 친구 정정이를 끌고 호동승을 찾아갔다. 정정과 리리가 약속한 지점에 도착하니 그곳에는 호동승뿐만아니라 낯모를 두 남자애도 함께 있었다. 호동승은 녀자애들이 긴장해하는것을 보고 이자들은 자기 친구인 왕수와 지원이라고 소개했다. 호동승의 친구라고 하니 정정과 리리는 안심하고 그들의 뒤를 따라 PC방으로 갔다. 정정과 리리는 인테넷에 올라 재미나게 놀면서 위험이 한발자국씩 자기들에게 다가오는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있었다. 지원은 정정과 리리가 주의하지 않는 틈을 타 공범 장달유에게 2명 녀자애가 덫에 걸려들었다고 전화했다. 장달유는 “반가운 소식”을 받자마자 승용차를 몰고 지원이 알려준 PC방으로 달려왔다.새벽이 되여서야 정정과 리리는 집으로 돌아가겠다며 PC방에서 나왔다. 지원은 집으로 데려다주겠으니 차에 오르라고 했다. 정정과 리리는 자기절로 가겠으니 걱정하지 말라면서 거절했다. 정정과 리리가 견결히 차에 오르지 않으려 하자 지원 등은 때리고 욕하면서 강박적으로 그녀들을 차에 밀어넣었다. 장달유와 지원, 호동승은 두 녀자애를 모 호텔로 끌고가 매음하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고 위협했다. 이때에야 정정과 리리는 잘못 걸려들었다는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련 며칠동안 장달유 등은 정정과 리리를 여러 호텔과 미용원으로 끌고다니며 매음하게 하고 오입쟁이한테서 돈을 받아먹었다. 3월 15일 아침, 호동승이 정정이를 데리고 아침을 먹으러 밖으로 나왔다. 정정이 공안기관에 꼭 제보하겠다고 하자 호동승은 겁을 먹고 그녀를 데리고 타현으로 피신했다. 장달유 등은 호동승과 정정이 감쪽같이 사라진것을 보고 상서롭지 못함을 느끼고 리리를 놓아주었다. 정정은 기회를 타 호동승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당지 파출소를 찾아가 제보했다. 경찰들은 즉시 행동하여 호동승을 체포했으며 이 사건을 운화현경찰측에 통보했다.   야밤에 행동하여 소녀를 구원   통보를 받은 운하현경찰들은 그날 저녁으로 즉시 행동하여 장달유가 숨어있는 미용원과 세집에서 장달유, 후목림, 장림 등 7명 주요혐의자들을 체포했다. 경찰들은 그자들의 몸에서 식칼과 비수, 노트북 등 범죄용도구와 몇만원의 돈을 사출해냈다. 그리고 귀주, 사천, 호남 등지에서 강박으로 끌려온 10여명 소녀를 구해냈다. 경찰들은 조사가운데서 구원된 소녀들의 경력은 서로 부동하나 결론은 동일함을 료해했다. 2008년 2월, 장달유의 공범 지명은 자기의 녀자친구 매매를 기만하여 온주에서 운화현으로 끌고와 장달유에게 넘겨주고 소개비 2200원을 받아먹었다. 그후부터 매매는 장달유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매음을 했다.  2008년 3월 2일, 장달유의 또 다른 공범 등명무는 온주 기차역부근에서 령령, 화화, 총총 3명 녀자애를 얼려서 운화현으로 데리다 장달유에게 넘겨주었다. 장달유는 세 녀자애를 세집에 가두어넣고 장림더러 집을 지키게 했다. 밤중에 화화와 총총은 가만히 세집에서 빠져나와 도망하다가 발각되여 다시 잡혀갔다. 장달유는 화화와 총총에게 다시 도주하면 죽여버리겠다고 을러메며 때리였고 2만원의 빚을 졌다는 쪽지에 싸인하라고 협박했다. 화화는 물매를 이겨내지 못해 놓아달라고 빌고 또 빌었으며 집식구들에게 돈 5000원을 보내달라고 요구했다. 화화는 돈 5000원을 팔고 장달유의 손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령령이는 장달유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매음하다가 경찰들에 의해 구원되였다.   강도집단 분공이 명확하고 수단이 잔혹   경찰들은 4개월간 호남, 중경, 태주, 온주 등지를 돌아다니면서 세심한 조사를 거쳐 법죄집단성원 29명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전부 체포했다. 운화현에 들어박혀 강박적으로 소녀들을 매음하게 한 법죄집단의 우두머리는 장달유(호북사람)이다. 이 법죄집단은 내부조직이 엄밀하고 분공이 명확했다. 전문 호텔에서 망을 보는자가 있는가 하면 전화련계를 맡아보는자가 있고 매음녀를 호텔까지 데려가고 데려오는자가 있으며 또 전문 돈과 재물을 관리하는자가 있고 외지에 나가 소녀를 물색하는자도 있었다. 두목 장달유는 련계전화번호를 운화현의 여러 호텔과 미용원에 널어놓아 “업무련계”를 하는외 매음녀들이 도망치는것을 방지하기 위해 매음녀들의 각종 증권을 압수했고 또 위협공갈 등 수단으로 고분고분 말을 듣게 했다. 그는 또 비법적으로 긁어모은 돈을 소개인에게 소개비용으로 준외에 나머지 돈은 전부 자신이 독점했다. 말을 듣지 않거나 달아나는 녀자애가 있으면 장달유는 순종할 때까지 때리라고 부하들에게 지시했으며 또 협박으로 집주소와 친인들의 이름을 알아냈다. 만약 누가 공안기관에 제보하면 그집의 친인들에게 꼭 보복할것이라고 위협했다. 법원에서는 주요성원인 장달유와 등명무가 공갈협박매음죄, 랍치죄, 강탈죄가 구성되므로 사형 집행유예 2년으로 언도하고 정치권리를 종신박탈한다고 판결했다. 또 다른 주요성원인 후목림을 무기도형에 언도하고 정치권리를 종신박탈했으며 정대송, 장림, 왕수 등 10명에게는 징역 2년부터 5년 등 부동하게 언도했다. 소녀들에게 해를 주고 사회질서를 어지럽힌 범죄자들은 응당 받아야 할 징벌을 받았다.   권력을 람용한 대가 장사시중급인민법원에서는 하남성 략양시 원 시장조리 고원지의 회뢰사건을 심사처리했다. 공소에 의하면 2000년부터 2007년사이에 고원지는 직무의 편리를 리용하여 7명 부동산업주한테서 10여차에 거쳐 인민페 158만원과  2만딸라를 수뢰했다. 또한 고원지는 시장조리에 만족하지 않고 더 높이 벼슬하려고 2002년부터 2005년사이에 여러번 시당위서기 손희무(따로 조사처리함)에게 회뢰하였는데 그 가치가 39만원에 달했다.   부동산업주한테서 100만원을 수뢰 1950년 4월에 태여난 고원지는 교원출신이다. 그는 1999년부터 2003년까지 략양시건설위원회 주임 겸 당조서기로 있었다. 후에 그는 략양시인민정부 당조성원 겸 시장조리, 략양시정치협상회 부주석으로 사업했다. 검찰기관의 공소에 의하면 고원지는 2003년부터 2005년까지 직무의 편리를 리용하여 략양시캐서부동산유한회사 리사장 왕신립한테서 9차나 수뢰했는데 도합 인민페 40만원과 1만딸라였다. 2000년부터 2006년초까지 고원지는 략양시대지부동산유산회사 리사장 진치공한테서 14차 수뢰했는데 도합 41만원이였다. 2002년부터 2005년초까지 고원지는 략양시윤봉집단유한회사 리사장 왕약봉에게서 4차나 수뢰했는데 20만원에 달했다. 고원지에게 회뢰한 7명 사람들은 모두 당지에서 부동산을 경영하는 리사장이였다. 고원지는 많은 돈을 받아먹은후 손에 쥔 권리를 람용하여 개발상인들에게 편리를 도모해주고 많은 수고비를 받아먹었고 또 세금을 감소해줌으로써 나라에서 큰 손실을 보게 했다.   시당위서기에게 38만원을 회뢰 고원지는 략양시건설위원회 주임으로 승급한후 이에 만족하지 않고 더 높은 벼슬자리가 욕심나서 2002년부터 2005년사이에 여러번 시당위서기 손희무에게 39만원을 회뢰했다. 이런 관계로 하여  2005년부터 고원지는 선후하여 략양시 시장조리, 략양시정치협상회 부주석자리에 오르게 되였다.2002년 5월의 어느날, 하남성당위에서는 략양시에 내려와 시당위 지도자들에 대한 고찰을 진행했다. 고원지는 이번 기회를 잘 리용하면 벼슬하기 좋은 때라고 생각하고 시당위서기 판공실에 10만원을 보내주었으며 여러번에 거쳐 시당위서기 손희무에게 돈을 가져다주었다. 2003년, 손희무의 제발로 고원지는 략양시정부 시장조리로 임명되였고 략양시도시건설을 주관했다. 후에 그는 략양시정치협상회의 부주석으로 승급했다. 고윈지의 사건은 진일보 심사중에 있다.   (사진: 일심에서 심사를 받고있는 고원지)      
30    지혜롭게 마귀소굴에서 탈출한 소녀 댓글:  조회:4274  추천:0  2009-04-28
림선생은 하루의 피곤을 풀려고 온주룡만구에 위치한 한 족부안마원을 찾아갔다.  안마를 받은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어쩐지 발이 불편하여 신을 벗고 검사해보니 신바닥에 꼬깃꼬깃 감은 쪽지가 들어있었다. 림선생이 쪽지를 펼쳐보니 소운이라고 하는 안마원아가씨가 자신을 구해달라는 구원편지였다. 림선생은 즉시 구원편지를 들고 부근의 파출소를 찾아가 이 정황을 제보했다. 경찰들은 소운아가씨가 제공한 단서로 한무리 매음집단을 짓부시고 소운아가씨를 구해냈다. 위협공갈수단으로 소운아가씨를 강제적으로 매음하게 한 범죄협의자 리모는 위협공갈죄, 강박매음죄로 룡만구검찰원에 의해 기소되였다.   하남소녀 속히워 온주로 가다   소운은 사회물정을 모르는 순박한 하남성 편벽한 농촌마을의 소녀이다. 그는 일자리를 찾으러 집을 떠나 상해로 왔다. 하지만 배운것이 없어 일자리를 찾는다는것이 여간만 힘들지 않았다. 작년 9월의 어느날 그는 전선대에 나붙은  “본 미용원에서 아가씨를 모집함. 대우가 좋으니 의향이 있는분은 면접하기 바람”이라는 광보문을 보고 그 미용원을 찾아갔다. 미용원의 책임자라고 자칭하는 일남일녀가 찾아온 소운을 보더니 두말없이 초빙되였으니 온주로 함께 가야 한다면서 소운을 온주로 데리고갔다. 두 사람은 길에서 소운에게 미용원은 어떻게 좋고 보수도 높다면서 자랑을 늘여놓았다. 그동안 일자리를 찾지 못해 많은 고생을 했는데 이렇게 쉽게 풀리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소운은 자신을 받아준 이들이 얼마나 고마운지 몰랐다. 소운은 이렇게 되여 낯선 온주로 오게 되였다. 일남일녀는 소운을 “형님”이라고 하는 온주사람에게 넘겨주었다. “형님”은 소운을 룡만구 영흥거리의 한 족부안마원으로 데리고갔다. 소운은 “형님”을 보고 자기는 미용원에 초빙되였으니 미용원으로 보내달라고 애원했다. 그러자 “형님”은 “뭐? 미용원? 소웃다 꾸레미 터지겠네.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입을 여는거야? 너 고분고분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을줄 알아. 알았어?”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이때에야 소운은 자신이 잘못 걸려들었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하루도 빠짐없이 도망칠 생각을 하다   소운은 이곳에 와서야 소위 안마라는것은 가짜이고 매음이 진짜라는것을 알게 되였다. 소운은 죽어도 매음은 할수 없으니 자신을 놓아달라고 사정했다. 그러자 족부안마원 주인인 리모와 그의 녀자친구는 “뭐? 못하겠다고? 이년이 매맛을 보아야겠네.”하고 욕하더니 소운을 어두운 단칸방에 가두었다. 소운은 제발 놓아달라고 애원했다. 이때에 와서 그는 아빠, 엄마가 그리웠으며 집이 생각나 통곡했다. 그러나 리모는 노기등등하여 소운의 귀뺨을 후려치고는 다시 소리치면 때려죽이겠노라고 위협했다. 그날 저녁 소운은 족부안마원 지하실에 갇혀있었다. 이튿날 리모는 소운더러 손님을 접대하라고 했다. 소운이 견결히 거절하자 리모는 “이년이 죽고싶어 환장했구나”하고 화를 내면서 사정없이 주먹질, 발길질을 해댔다. 리모는 또 경찰에 제보하면 때려죽이겠다고 위협했다. 소운은 핍박에 못이겨 하는수없이 죽부안마원에서 손님들에게 안마도 해주고 매음도 해야 했다.저녁이면 소운은 지하실에 갇혀 나오지도 못했다. 평소에 소운이 일용품을 사러 밖에 나가도 리모가 뒤를 따르면서 감시했다. 소운은 겉으로는 고분고분 말을 잘 듣는것 같았지만 사실 한시도 도망칠 생각을 잊지 않았다. 소운은 조사를 받을 때 경찰에게 이렇게 말했다. “난 꼭 기회를 타 이 소굴에서 벗어나려 했습니다. 도망치려면 돈이 있어야 했는데 나에겐 일전한푼도 없었습니다. 평소 나는 손님들한테서 팁을 더 요구하여 도망칠 로비로 모았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리모에게 발각되여 매도 맞고 겨우 모은 돈 50원도 빼앗기고말았습니다.”   구원편지를 손님의 신발에 감추다   그번 일이 있은후 소운에 대한 리모의 감시가 더욱 심했으며 일전한푼도 주지 않았다. 소운은 이 방법으로는 도망칠수 없다고 생각되여 다른 방법이 없을가고 생각해보았다. 나중에 생각한것이 안마를 받으러 온 손님들에게 도움을 구하는것이였다. 첫번째, 소운은 구원편지를 썼지만 감히 손님에게 주지 못하고 찢어버리였다. 두번째, 소운은 용기를 내여 리모의 눈치를 피해 손님의 손에 쥐여주고 경찰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했지만 거절당했다. 두번이나 실패했지만 소운은 락심하지 않고 한번 더 시도해보려 했다. 작년 10월 28일 저녁, 소운은 세번째 구원편지를 썼다. “난 나쁜놈들의 속임수에 넘어가 이곳에 오게 되였어요. 고마운 분들, 불쌍한 나를 제발 구해주세요.” 이튿날, 소운은 강서에서 온 림선생에게 족부안마를 해주었다. 소운은 림선생이 착한분이라고 생각되여 남들이 주의하지 않는 틈을 타 미리 준비한 구원편지를 그의 신안에 쑤셔넣었다. 소운은 긴장하여 가슴이 쿵쿵 뛰였으나 이번에 꼭 성공하였으면 하고 빌고 또 빌었다. 소운은 말없이 정성을 다해 림선생을 안마해주었다. 안마가 끝나자 림선생은 아주 만족해하면서 신을 신고 문을 나섰다. 문을 나선 림선생이 신안에 무엇이 들어있는 느낌이 들어 신을 벗고 살펴보니 구원편지가 들어있었다. 이름은 소운이라고 적혀있었는데 아까 안마를 해준 그 아가씨가 틀림없었다.   경찰들이 소녀를 구해내다   림선생은 소운이 보낸 구원편지를 부근에 있는 파출소에 바치였고 자신이 알고있는 정황을 제공해주었다. 경찰들은 즉시 행동하여 리모가 경영하는 족부안마원을 불의습격했다. 리모는 자신은 불법행위를 하지 않았다고 딱 잡아뗐다. 경찰들은 족부안마원에 대한 조사를 진행했다. 지하에 철문으로 된 단칸방이 있었는데 큰 자물쇠로 잠그어져있었다. 경찰들은 어서 철문을 열라고 재촉했다. 그러자 리모는 낡은 창고라고 하면서 열려 하지 않았다. 경찰들은 더욱 의심스러워 즉시 문을 열라고 명령했다. 리모는 손을 떨면서 호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자물쇠를 열었다. 지하실 침대에 한 녀자가 누워있었는데 그 녀자가 바로 소운이였다. 인증, 물증앞에서 리모는 자신의 범죄행위를 탄백했다. 2008년 9월, 리모는 녀자친구와 함께 영흥거리에게 족부안마보건원을 꾸리고 경영했다. 하지만 장사가 잘 되지 않았다. 리모는 손님을 끌기 위해 아가씨를 “초빙”하여 색정봉사를 하게 했다. 리모는 “형님”을 찾아가 아가씨를 물색해달라고 청을 들었다. “형님”은 기만수단으로 소운을 리모에게 넘겨주었고 소개비 3000원을 받아먹었던것이다. 이번 사건을 책임진 경찰은 이렇게 말했다. “지금 농촌녀자애들이 일자리를 찾으러 도시에 몰려들고있다. 하지만 대부분 배운것이 없어 일자리를 찾기가 쉽지 않다. 그들은 왕왕 거리에 나붙은 비법적인 광고에 속히울 때가 많은데 각별히 주의하길 바란다. 정규적인 광고회사를 통해 자신에게 알맞는 일자리를 알아보고 또 여러사람들과 많이 상론하여 결정하는것이 바람직하다. 또한 나쁜 사람에게 속히웠을 때 제때에 공안기관에 제보하여 자신을 보호할줄 알아야 한다.”             《법률과생활》    
29    소녀매음집단 훼멸 댓글:  조회:4015  추천:0  2009-04-20
절강성 운화현에서 각종 명의로 소녀들을 협박하여 매음하게 한 29명의 조직범죄집단이 일망타진됐다. 이번 사건은 당지에서 큰 파문을 일으켰다. 절강성공안청에서는 깊은 중시를 돌리고 속히 이 사건을 조사처리하도록 운화현공안국에 지시했다. 운화현공안국에서는 4개월동안 호남, 중경 등지를 돌아다니며 간고한 수사끝에 끝내 협박공갈 등 수단으로 소녀들을 매음하게 한 특대사건을 성공적으로 해명했다.   소녀가 지혜롭게 탈출하여 제보   올해 15살밖에 안되는 정정과 리리는 2008년 3월 8일을 영원히 잊지 못할것이다. 그날 저녁 품팔이를 하는 부모와 함께 생활하고있던 리리는 함께 PC방에 나가 놀자는 친구 호동승의 전화를 받았다. 평소 인테넷에 올라 QQ를 즐겨온 리리는 전화를 받자마자 집에서 뛰쳐나와 친구 정정이를 끌고 호동승을 찾아갔다. 정정과 리리가 약속한 지점에 도착하니 그곳에는 호동승뿐만아니라 낯모를 두 남자애도 함께 있었다. 호동승은 녀자애들이 긴장해하는것을 보고 이자들은 자기 친구인 왕수와 지원이라고 소개했다. 호동승의 친구라고 하니 정정과 리리는 안심하고 그들의 뒤를 따라 PC방으로 갔다. 정정과 리리는 인테넷에 올라 재미나게 놀면서 위험이 한발자국씩 자기들에게 다가오는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있었다. 지원은 정정과 리리가 주의하지 않는 틈을 타 공범 장달유에게 2명 녀자애가 덫에 걸려들었다고 전화했다. 장달유는 “반가운 소식”을 받자마자 승용차를 몰고 지원이 알려준 PC방으로 달려왔다.새벽이 되여서야 정정과 리리는 집으로 돌아가겠다며 PC방에서 나왔다. 지원은 집으로 데려다주겠으니 차에 오르라고 했다. 정정과 리리는 자기절로 가겠으니 걱정하지 말라면서 거절했다. 정정과 리리가 견결히 차에 오르지 않으려 하자 지원 등은 때리고 욕하면서 강박적으로 그녀들을 차에 밀어넣었다. 장달유와 지원, 호동승은 두 녀자애를 모 호텔로 끌고가 매음하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고 위협했다. 이때에야 정정과 리리는 잘못 걸려들었다는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련 며칠동안 장달유 등은 정정과 리리를 여러 호텔과 미용원으로 끌고다니며 매음하게 하고 오입쟁이한테서 돈을 받아먹었다. 3월 15일 아침, 호동승이 정정이를 데리고 아침을 먹으러 밖으로 나왔다. 정정이 공안기관에 꼭 제보하겠다고 하자 호동승은 겁을 먹고 그녀를 데리고 타현으로 피신했다. 장달유 등은 호동승과 정정이 감쪽같이 사라진것을 보고 상서롭지 못함을 느끼고 리리를 놓아주었다. 정정은 기회를 타 호동승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당지 파출소를 찾아가 제보했다. 경찰들은 즉시 행동하여 호동승을 체포했으며 이 사건을 운화현경찰측에 통보했다.   야밤에 행동하여 소녀를 구원   통보를 받은 운하현경찰들은 그날 저녁으로 즉시 행동하여 장달유가 숨어있는 미용원과 세집에서 장달유, 후목림, 장림 등 7명 주요혐의자들을 체포했다. 경찰들은 그자들의 몸에서 식칼과 비수, 노트북 등 범죄용도구와 몇만원의 돈을 사출해냈다. 그리고 귀주, 사천, 호남 등지에서 강박으로 끌려온 10여명 소녀를 구해냈다. 경찰들은 조사가운데서 구원된 소녀들의 경력은 서로 부동하나 결론은 동일함을 료해했다. 2008년 2월, 장달유의 공범 지명은 자기의 녀자친구 매매를 기만하여 온주에서 운화현으로 끌고와 장달유에게 넘겨주고 소개비 2200원을 받아먹었다. 그후부터 매매는 장달유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매음을 했다.  2008년 3월 2일, 장달유의 또 다른 공범 등명무는 온주 기차역부근에서 령령, 화화, 총총 3명 녀자애를 얼려서 운화현으로 데리다 장달유에게 넘겨주었다. 장달유는 세 녀자애를 세집에 가두어넣고 장림더러 집을 지키게 했다. 밤중에 화화와 총총은 가만히 세집에서 빠져나와 도망하다가 발각되여 다시 잡혀갔다. 장달유는 화화와 총총에게 다시 도주하면 죽여버리겠다고 을러메며 때리였고 2만원의 빚을 졌다는 쪽지에 싸인하라고 협박했다. 화화는 물매를 이겨내지 못해 놓아달라고 빌고 또 빌었으며 집식구들에게 돈 5000원을 보내달라고 요구했다. 화화는 돈 5000원을 팔고 장달유의 손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령령이는 장달유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매음하다가 경찰들에 의해 구원되였다.   강도집단 분공이 명확하고 수단이 잔혹   경찰들은 4개월간 호남, 중경, 태주, 온주 등지를 돌아다니면서 세심한 조사를 거쳐 법죄집단성원 29명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전부 체포했다. 운화현에 들어박혀 강박적으로 소녀들을 매음하게 한 법죄집단의 우두머리는 장달유(호북사람)이다. 이 법죄집단은 내부조직이 엄밀하고 분공이 명확했다. 전문 호텔에서 망을 보는자가 있는가 하면 전화련계를 맡아보는자가 있고 매음녀를 호텔까지 데려가고 데려오는자가 있으며 또 전문 돈과 재물을 관리하는자가 있고 외지에 나가 소녀를 물색하는자도 있었다. 두목 장달유는 련계전화번호를 운화현의 여러 호텔과 미용원에 널어놓아 “업무련계”를 하는외 매음녀들이 도망치는것을 방지하기 위해 매음녀들의 각종 증권을 압수했고 또 위협공갈 등 수단으로 고분고분 말을 듣게 했다. 그는 또 비법적으로 긁어모은 돈을 소개인에게 소개비용으로 준외에 나머지 돈은 전부 자신이 독점했다. 말을 듣지 않거나 달아나는 녀자애가 있으면 장달유는 순종할 때까지 때리라고 부하들에게 지시했으며 또 협박으로 집주소와 친인들의 이름을 알아냈다. 만약 누가 공안기관에 제보하면 그집의 친인들에게 꼭 보복할것이라고 위협했다. 법원에서는 주요성원인 장달유와 등명무가 공갈협박매음죄, 랍치죄, 강탈죄가 구성되므로 사형 집행유예 2년으로 언도하고 정치권리를 종신박탈한다고 판결했다. 또 다른 주요성원인 후목림을 무기도형에 언도하고 정치권리를 종신박탈했으며 정대송, 장림, 왕수 등 10명에게는 징역 2년부터 5년 등 부동하게 언도했다. 소녀들에게 해를 주고 사회질서를 어지럽힌 범죄자들은 응당 받아야 할 징벌을 받았다.   권력을 람용한 대가 장사시중급인민법원에서는 하남성 략양시 원 시장조리 고원지의 회뢰사건을 심사처리했다. 공소에 의하면 2000년부터 2007년사이에 고원지는 직무의 편리를 리용하여 7명 부동산업주한테서 10여차에 거쳐 인민페 158만원과  2만딸라를 수뢰했다. 또한 고원지는 시장조리에 만족하지 않고 더 높이 벼슬하려고 2002년부터 2005년사이에 여러번 시당위서기 손희무(따로 조사처리함)에게 회뢰하였는데 그 가치가 39만원에 달했다.   부동산업주한테서 100만원을 수뢰 1950년 4월에 태여난 고원지는 교원출신이다. 그는 1999년부터 2003년까지 략양시건설위원회 주임 겸 당조서기로 있었다. 후에 그는 략양시인민정부 당조성원 겸 시장조리, 략양시정치협상회 부주석으로 사업했다. 검찰기관의 공소에 의하면 고원지는 2003년부터 2005년까지 직무의 편리를 리용하여 략양시캐서부동산유한회사 리사장 왕신립한테서 9차나 수뢰했는데 도합 인민페 40만원과 1만딸라였다. 2000년부터 2006년초까지 고원지는 략양시대지부동산유산회사 리사장 진치공한테서 14차 수뢰했는데 도합 41만원이였다. 2002년부터 2005년초까지 고원지는 략양시윤봉집단유한회사 리사장 왕약봉에게서 4차나 수뢰했는데 20만원에 달했다. 고원지에게 회뢰한 7명 사람들은 모두 당지에서 부동산을 경영하는 리사장이였다. 고원지는 많은 돈을 받아먹은후 손에 쥔 권리를 람용하여 개발상인들에게 편리를 도모해주고 많은 수고비를 받아먹었고 또 세금을 감소해줌으로써 나라에서 큰 손실을 보게 했다.   시당위서기에게 38만원을 회뢰 고원지는 략양시건설위원회 주임으로 승급한후 이에 만족하지 않고 더 높은 벼슬자리가 욕심나서 2002년부터 2005년사이에 여러번 시당위서기 손희무에게 39만원을 회뢰했다. 이런 관계로 하여  2005년부터 고원지는 선후하여 략양시 시장조리, 략양시정치협상회 부주석자리에 오르게 되였다.2002년 5월의 어느날, 하남성당위에서는 략양시에 내려와 시당위 지도자들에 대한 고찰을 진행했다. 고원지는 이번 기회를 잘 리용하면 벼슬하기 좋은 때라고 생각하고 시당위서기 판공실에 10만원을 보내주었으며 여러번에 거쳐 시당위서기 손희무에게 돈을 가져다주었다. 2003년, 손희무의 제발로 고원지는 략양시정부 시장조리로 임명되였고 략양시도시건설을 주관했다. 후에 그는 략양시정치협상회의 부주석으로 승급했다. 고윈지의 사건은 진일보 심사중에 있다.   (사진: 일심에서 심사를 받고있는 고원지)      
28    성선회와 청나라의 멸망 댓글:  조회:5564  추천:0  2009-04-20
한 제국의 멸망을 두고 많은 사람들은 정치가와 군인들에게서 원인을 찾는다. 그러나 우리가 력사의 세부적인 사항들을 깊이있게 살펴보면 놀랍게도 200여년간 존속했던 청나라제국은 철도국유화의 과정에서 순식간에 붕괴되여버렸다는것을 알수 있다. 1911년 1월, 성선회는 우전부상서로 임명되였다. 이때는 사회갈등이 극단적으로 격화되고있을 때였다. 혁명당이 곳곳에서 폭동을 일으키고 각 성의 군벌들은 모두 딴마음을 품고있었다. 대청제국은 마치 일촉즉발의 화약통과 같았다. 력사의 역설에는 이 화약통에 불을 붙인 사람이 바로 과거 40년간 조정을 위해 실업의 기초를 쌓고 이를 통해서 이름을 후대에 남기고싶어했던 성선회로 밝혀져있다. 갑오청일전쟁이후 철도를 부설하는것이 열기를 띠였다. 조정은 이를 국책으로 삼았고 민간에서도 거대한 리익을 보고 뛰여들었으며 외국에서도  기회를 놓치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철도는 각측이 서로 쟁탈하고 싸우는 최대의 관심사로 되였다. 성선회는 철도는 국가의 명맥에 관련되는 경제사업이기에 반드시 국유화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투자형식에서 국고에 돈이 있으면 나라에서 투자해야 하지만 만일 국고에 돈이 없으면 외부자금을 끌어들여야 한다.   1897년, 영국공사는 광주에서 한구에 이르는 월한철도의 부설을 제안했다. 성선회는 이 철도는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만일 철도부설권을 영국인이 가지게 되면 “중화민족은 독립할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성선회에게는 철도를 부설할 돈이 없었다. 그리하여 성선회는 미국기금에서 차관을 도입하여 철도를 부설하고자 생각했다. 성선회가 이끄는 중국철도총공사는 미국합흥회사와 “월한철도자차관계약”을 체결하여 400만파운드를 빌리였다. 당시 철도재산을 담보로 하였고 상환기한은 30년으로 정했다. 1899년 합흥회사의 대표는 중국으로 와서 계약을 체결하고 항주, 소주 등지에서 탄광을 개발할수 있도록 요구했다. 이리하여 호북, 호남, 광동의 3개 성에서는 불만이 많았다. 미국의 주중공사인 Conger가 나서서 간섭하였다. 그는 월한철도는 “미국이 반드시 해야 하며 다른 사람에게 양보할수 없다”고 큰소리쳤다. 그리하여 1900년 7월, 성선회는 다시 “월한철도차관보충계약”을 체결하여 차관금액을 4000만딸라로 증가시켰다. 민간에서는 성선회의 이 결정을 “국가리익을 팔어먹는것”으로 취급했다. 그러나 그는 죽을 때까지도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경한(북경-한구), 호녕(상해-남경)철도 등 간선철도를 만들 때 그가 계속하여 시도한것은 미국, 영국 등 국제기금으로부터 외채의 도입이였다. 그의 생각은 먼저 외채를 받아서 철도를 하루빨리 부설하고나서 외채를 갚으려는것이며 그 과정이 30년이면 충족할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형식으로 철도부설이 성공되면 국가에서 철도의 소유권을 완전히 장악할수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그가 생각한것처럼 진행되지 않았다. 국내 민족주의정서가 팽배해지면서 철도권을 회수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끊이지를 않았다. 민간자본과 국유자본이 철도사업을 놓고 심하게 대립됐다. 성선회의 국영독점리념은 심각한 도전을 받았다. 1903년 사천총독인 석량은 외채를 빌리지 말고 민간자본에 의지하여 천한(사전-한구)철도를 부설하자고 제안했다. 전국에 철도운영의 붐이 일어났다. 1904년부터 1907년까지 각 성에는 모두 18개의 철도회사가 생겨났다. 중국의 백년기업사상 에네르기(탄광, 철광 및 나중의 전력, 석유)와 자원성기업(철도, 은행 및 나중의 항공, 전신업)은 리익이 가장 집중되는 분야였다. 이에 대한 쟁탈과 리익분배는 국가경제정책의 중요한 표지이다. 이 특징은 청나라말기에 이미 아주 분명히 드러났다. 양무운동이후에 다국적기업이 가장 먼저 이 분야에 투입했고 국영자본이 그 뒤를 이었다. 1904년이후 새로운 법령이 반포된후 기업운영과 지분권리가 상대적으로 명확해졌다. 특히 주식회사제도의 출현은 민간자본이 대담하게 에네르기와 자원성산업에 뛰여들게 해주었다. 호북, 호남, 사천 등 성에서는 전 인민이 자본참여하여 철도회사를 세우는것이 열기를 띄였다. 심지어 “거지들까지도 앞다투어 지분투자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처럼 거지들까지도 지분참여하여 철도를 부설하는 현상은 성선회가 보기에 좋은 일만은 아니였다. 그는 철도를 부설하려면 대량의 자본이 투입되고 투자회수기간이 아주 길며 또 자본이 분산되여 해내기 힘들다고 생각했다. 결국 상황은 그의 생각처럼 돌아갔다. 제대로 된 경영능력을 갖추지 못하고 철도부설기술이 부족함에 따라 많은 철도건설속도가 늦어졌다. 이 단계에 철도가 민영이든 국영이든 민간자본을 쓰든 외국자본을 빌려오든 이미 민감한 정치문제와 민족감정문제로 변했다. 1909년 장지동이 호광철도를 건설할 때 성선회의 유세하에 4년전에 민간자본으로 철도를 부설하는것을 지지하는 립장에서 상인들에게서 자금을 모으려고 했다. 하지만 자금을 모으기가 어려워 그는 독일, 영국, 프랑스의 3국은행과 “호광철도차관계약”을 체결하여 550만파운드를 빌리였다. 이 일이 공개된후 즉시 대규모의 반대운동이 일어났다. 한때 명성을 날렸던 장지동은 이 풍파에 휘말려 피를 토하고 죽었다. 성선회는 장지동과 달리 철도국유화를 주장했다. 바로 이 문제에서 타협하지 않았기때문에 민간의 기업가집단과 조정이 철저히 결렬되였다. 1911년 5월, 우전부상서에 오른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성선회는 주청을 올려 이미 민영화된 “월한”, “천하” 철도를 국영으로 수용하자고 주장했다. 조정은 그 주청을 허락하고 직예총독을 지낸바있는 양무파의 대신 단방을 내려보내 이 일을 처리하게 했다. 성선회는 영국, 독일, 프랑스, 미국 4개 나라와 긴밀하게 차관건을 협의하고있었다. 력사를 돌이켜보면 성선회는 철도사업에 있어서 국유리념에 있어서 민간과 중대한 의견차이가 있었던 외에 두가지 심각한 잘못을 저질렀다. 하나는 민영자본과 솔직하게 의사소통을 하지 않았다는것이다. 둘째는 지분회수에 있어서 확실히 민영지분에 야박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철도권회수령이 반포된후 각 성의 상인과 백성들이 집단적으로 반대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1911년 5월 14일, 장사에서 만인군중집회가 개최되였다. 이어서 장사에서 주주(株洲)까지 만여명의 철도로동자가 길거리로 나와서 시위를 했다. 사천에서는 보로동지회를 조직하여 포전준과 라륜을 회장으로 선거하여 “죽기를 각오하고 철도를 지키겠다”고 선언했다. 9월 7일, 사천총독 조이풍은 라륜과 포전준 등을 체포하고 수백명의 항의군중을 학살했으며 보로동지회를 해산하라는 령을 내리였다. 격노한 사천민중들은 각지의 전선을 파괴하고 도로에 장애물을 설치하여 정부간의 문서왕래를 중단시켰다. 청나라조정은 긴급히 호북의 신군을 사천으로 지원보냈다. 10월 10일, 수백명에 달하는 신군병사들이 무한이 비여있는 기회를 리용하여 봉기를 일으켰다. 조정에서는 성선회의 모든 직위를 삭탈하고 영원히 다시 기용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성선회는 황급히 독일화물선에 올라 일본으로 도망쳤다. “청사고”에서 마지막에 내린 결론은 “성선회는 권리를 침해하여 법에 어긋났고 황제를 속히고 정책을 마음대로 집행하여 란리를 불러왔으니 나라를 망친 첫번째 원흉이다”고 하였다.  
27    가짜경찰한테 심신을 유린당한 처녀 댓글:  조회:4111  추천:0  2009-04-17
“공안국 부국장” 장무강이 미녀경리를 꼬시여 랑만적인 사랑을 해오다가 한달만에 모든것이 들통나 공안기관에 잡혀갔다. 장무강은 일찍 보안일군으로 있다가 정리실업당한 무직업자였다. 그는 가짜경찰복을 입고 시장에서 팔리고있는 놀이감권총과 놀이감수갑을 마련한 뒤 “공안국 부국장”으로 가장하고 미녀경리의 환심을 샀던것이다. 만일 녀자집의 사람들이 제때에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둘은 10일후에 결혼했을지도 모른다… 3월 29일 저녁, 기만당한 녀자집 사람들은 공안기관에 제보를 했으며 경찰들이 달려와 “동료”인 범죄협의자 장무강을 나포했다.   “공안국 부국장”이 미녀경리와 사랑 하남성 농촌마을에서 태여난 리정은 올해 26살인데 아주 이쁘게 생긴데다 말주변도 좋아 정주시 모 자동차판매부에 취직했다. 리정은 얼마 지나지 않아 부경리로 승진했다. 올해 2월말의 어느날, 리정이 아침 일찍 출근했을 때 회색경찰복을 입은 중년남자가 전시청에 나타났다. 그 남자는 새로 전시된 “동남패”상무용차를 살펴보고있었다. 리정은 웃으면서 다가가 그 손님에게 승용차에 대해 자세히 소개해주었다. 중년남자는 이 차가 딱 마음에 든다고 말하면서 값이 얼마인가고 물었다. 나중에 쌍방은 15만원으로 값을 흥정했다. 하지만 그후 남자는 일이 바쁘다면서 승용차를 찾아가지 않았다. 리정은 핸드폰으로 전화를 해서야 그 남자의 이름이 류과이고 올해 35살이며 모 시공안국에서 사업하고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였다. 그날 저녁 류과는 리정에게 전화를 했다. 그는 전화에서 자기는 시공안국의 형사경찰대장이며 하남성 개봉경찰학교를 졸업했고 리혼한후 혼자 지내고있다고 소개했다. 그는 또 전시청에서 리정을 만자자마자 첫눈에 정이 들어 사모하고있다고 했다. 류과의 돌연적인 사랑고백에 리정의 마음은 평온하지 못했다. 이튿날 아침 리정은 또 류과의 전화를 받았다. “나 지금 경찰들을 거느리고 도주범을 잡으러 료녕으로 떠나오. 떠나기전에 리정과 하고싶은 말이 있소. 이번 추적행동이 아주 위험하니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겠소. 난 상관없는데 리정이 걱정되는구만.” 류과의 전화를 받은 리정은 너무도 감동되여 꼭 안전에 주의하라고 신신당부했다. 헌데 료녕으로 갔다던 류과가 이튿날 생각밖에 리정의 앞에 나타났다. “료녕에서 우린 아주 성공적으로 단꺼번에 8명 도주자들을 붙잡았소. 상급에서는 나의 지휘능력을 인정해주었소. 이제 곧 현급시로 내려가 공안국 부국장으로 부임될것이요. 엄하게 타격하는 사업을 주관할것 같소.” 류과는 재차 리정에게 사랑를 고백했다. 리정은 류과가 마음에 들었다. 그날 저녁 둘은 함께 밤을 지냈다. 이틀후 류과는 리정에게 “성공안청에서 60명 경찰을 뽑아 서장지원을 보내는데 그속에 나도 들어있소. 서장에 가면 고생이 많다는것도 리정이 잘 알고있으리라 믿소. 만약 결혼하면 신청하여 서장에 가지 않을수도 있소. 그러니 우리 속히 결혼하기요. 그리고 이 기회에 리정을 공안국에 출근할수 있도록 전근시켜줄수도 있소.” 리정은 자신도 남들이 우러러보는 경찰제복을 입고 다닐수 있다고 생각하니 기쁨을 금할수 없었다. 하여 의견이 없으니 결혼날자를 속히 정하라고 했다. 류과는 점쟁이를 통해 알아보았는데 4월 11일 좋다면서 이날을 결혼날자로 정했다고 전했다.   빌려온 승용차를 타고 “장인장모”를 만나뵙다 리정은 류과에게 시간을 짜내여 부모님들을 만나러 가자고 제의했다. 며칠후 류과는 검은색 승용차에 앉아 리정의 집으로 찾아갔다. 사실 이 승용차는 류과가 빌려온것인데 운전수까지 포함하여 하루 세값은 200원이였다. 류과는 리정의 부모님들에게 이 승용차는 상급에서 자기에게 배치해준것이며 함께 따라온 두 젊은이중 한명은 전직운전수이고 다른 한명은 자신의 뒤를 물려받을 형사경찰대장이라고 거짓말을 꾸미였다. 한담중에서 리정의 아버지는 누군가가 자기 돈 1만원을 꿔간지 오래되는데 아직 돌려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러자 류과는 이런 사소한 일은 자신이 나설 필요가 없다면서 옆에 있는 “형사경찰대장”에게 시급히 해결하라고 지시했다. 그러자 “형사경찰대장”은 “네, 명심하겠습니다. 류국장님 안심하십시오. 꼭 임무를 잘 완수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리정의 일가에서는 좋은 사위감이 생기였다고 아주 만족해하면서 고급술과 고급담배로 손님을 초대했다. 류과는 리정의 부모님들에게 결혼한후 리정을 정주시공안국에 전근시켜 호적부를 관리하는 경찰로 배치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리정의 남동생 리강은 지체장애자이다.  류과는 돌아가 즉시 리강에게 지체장애자증을 신청하여 달마다 660원의 생활보장금을 받을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했다. 리강은 “2.7기념탑”광장에서 차입닭알장사를 하고싶다고 말했다. 류과는 그자리에서 누군가에게 전화를 했다. “나 류과요. 동무 즉시 ‘2.7기념탑’광장에 가서 가게로 하기에 알맞는 집을 알아보오. 돈걱정은 하지 마오.” 류과는 또 리정의 부모에게 집이 너무 낡아보이니 새로 수리하자고 제의했다. 집을 새로 수리할 때 류과는 리정과 “장인”한테서 돈을 홀려냈다. 류과는 리정과 돈을 요구할 때는 “장인”에게 절대 알려서는 안된다고 신신당부했고 또 “장인”한테서 돈을 요구할 때 딸에게 말하지 말라고 부탁했다. 꼼꼼하고 세심한 리강은 그사이에 어쩐지 류과에게서 의심되는 점을 많이 발견했다. 명분이 “공안국 부국장”인데 왜 남한테서 돈을 요구할가? 이 사람이 진짜 공안국 부국장이 옳은지? 리강은 의심되는 점을 부모와 누나에게 말해주면서 그자에 대해 경각성을 높이라고 일깨워주었다. 류과가 집에 없는 사이에 리정은 그가 근무한다는 공안국에 전화하여 문의했다. 상대방은 류과라고 부르는 부국장이 근본 없으니 그런 사기군에게 절대 넘어가지 말라고 경고했다. 이때에야 리정의 집에서는 류과가 사기군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였다. 약점이 많았는데 왜 보아내지 못했을가? 리정의 일가는 화가 나고 억울하기도 했다. 3월 29일 오전, 류과는 리정에게 전화하여 집을 장식할 예산금이 나왔으니 돈을 준비하라고 부탁했다. 리정은 전화로 말하기 불편하니 집으로 오라고 말했다. 그날 저녁, 류과는 리정의 집으로 왔다. 리정은 류과를 집에 앉혀놓고 가만히 공안기관에 제보했다. 등봉시공안국 형사경찰들이 즉시 달려왔다. 형사경찰중대장 왕국정이 류과에게 자신의 신분을 밝힌후 즉시 형사경찰대에 가서 심문을 받아야 하니 따라오라고 했다. 그러자 류과는 “보잘것 없는 중대장이 감히 부국장을 보고 오라가라고 마음대로 호령하는거야? 누가 너에게 이런 권력을 주었나?”라고 소리를 쳐댔다. 그러자 옆에 있던 지도원 원소룡은 너무도 어처구니가 없어 “개자식, 연극을 그만 놀아”하고 말하고는 단매에 류과를 꺼꾸러뜨리였다. 형사경찰대에 끌려간 류과는 모든것을 탄백했다. 사실 류과의 진짜이름은 장무강이고 올해 43살이며 등주시 라장진의 사람으로서 소학교문화정도였다. 그는 일찍 외지에서 보안일군으로 일하다가 정리실업당해 정주로 왔던것이다. 장무강은 정주에서 여직껏 일자리를 찾지 못했다. 올해 2월, 할일없이 한가하게 거리를 쏘다니던 류과는 리정이 출근하는 자동차판매부를 지나다가 이쁘게 생긴 리정을 한눈에 보아냈다. 장무강은 자동차판매부 부경리로 있는 리정의 환심을 얻을 방법이 없을가 고민하던끝에 나중에 생각한것이 가짜경찰극이였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인민경찰을 신임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리용해 가짜 “공안국 부국장”연극을 놀았던것이다. 리정은 “지금 생각해보면 후회되는것이 많습니다. 꼼꼼히 생각해보면 그자에게서 많은 약점이 드러났죠. 하지만 당시 나는 상대방을 너무 경솔하게 믿었습니다. 공안부문에 전화 한통이면 모든것이 밝혀지겠는데 참…자매들에게 이런 말을 하고싶습니다. 모든 일에서 너무 경솔하게 남을 믿지 말고 경각성을 높이세요. 그리고 사기군을 만나면 나처럼 봉변을 당하지 말고 경각성을 높여 즉시 공안기관에 제보하여 잡아들이도록 협조하세요.”                                                《하남일보》    
26    중국 열병식-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댓글:  조회:3459  추천:0  2009-04-14
열병식, 제천의식에서 시위로 변화   팔기열진도(八旗閱陣圖)의 일부분 올해 10월 1일이면 새중국 탄생 60주년을 맞이하게 된다. 때가 되면 베이징 천안문광장에서는 성대한 열병식이 진행되어 민족정신을 진작시키고 국민들의 민족자호감과 애국열정을 불러일으키며 세인들의 시선을 집중시킬 것이다. 그렇다면 중국 고대 열병식은 어떻게 진행되었을까?   역사 기재에 의하면 중국 최초의 열병식은 약 4천여년 전 하조(夏朝) 건립시기에 발생되었다고 한다. 당시 중국 북방의 화하부락 두령 하우(禹)는 강남으로 발전하기 위해 오늘의 하남성 숭현 경내에서 남방의 각 부락 두령들과 회맹하게 되었다. 성회에서 병사들은 손에 갖가지 병기들을 쥐고 음악속에서 춤추며 노래했는데 이는 일종의 제천의식이었을뿐만 아니라 먼 곳에서 온 손님에 대한 열렬한 환영의 뜻이기도 했다.   춘추시기에 이르러 열병식 행사는 빈번하게 진행되었으며 최초 사냥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군대들이 대열을 선 후 최고 통치자 혹은 장관이 대열 맨 앞에 서서 활로 짐승을 쏘면 검열이 시작된다. 당시 사람들은 이와같은 활동을 "수(搜, 봄사냥을 뜻함)"라고 불렀으며 "수"는 점차 정기적인 군대 검열 혹은 작전차량 검열로 발전되었다.   봉건통치자들이 정기적으로 열병식을 가지는 것은 병사들의 무장상황을 검사하는 외 백성들앞에서 위세를 과시하기 위한 것도 있다.   "열병(閱兵)"이란 명칭은 정확하게 중국 한조시기로부터 시작되었다. 한조때 정기적인 열병식 행사는 입추(立秋)날에 진행되는 "짐승제사"활동과 늘 함께 진행되었으며 그중에는 일부 싸우는 내용도 추가되어 있다. 그뒤로 통치기간이 비교적 긴 왕조마다 한조때의 검열식과 비슷한 정기적 혹은 비정기적인 행사가 진행되었다.   청조의 궁중 화가 김곤 등 사람들이 그린 "팔기열진도(八旗閱陣圖)"는 건륭황제의 남원 대열병에 관한 성황을 생동하게 기록하고 있다. 팔기 병사들이 홍, 황, 남, 백 등 본기의 열병 예복을 입고 하늘을 찌를듯한 기세로 대열을 이루고 있는 모습은 세인들에게 건륭 열병도의 어마어마한 장면을 전시했다.   현대에 이르러 열병식 행사는 각 국가에서 성행하고 있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때 아이젠하워, 처칠, 드골 등 동맹군 사령관은 모두 열병식을 중시했다. 소련 지도자 스탈린은 늘 열병식을 병사들의 기세를 북돋아주는 중요한 수단으로 여겼으며 1945년 6월 모스크바에서 진행된 승리의 대검열은 소련의 국제적 지위와 영향력을 크게 제고했다.   고금왕래 국내에서나 해외에서나 사람들의 의식형태와 민족전통문화가 어떤 차이를 갖고 있는지를 막론하고 열병식 의의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은 거의 비슷하다. 바로 열병식은 한 국가의 위력과 종합적 국력을 구현하고 있으며 군심과 민심을 축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열병식은 국가와 민족이 긍지감과 자호감을 느끼고 가장 신성하고 장엄한 성전이라 할 수 있다.    
25    올림픽우승이 걸어온 사랑의 고개길 댓글:  조회:4101  추천:0  2009-04-10
1996년은 왕군하에게 있어서 가장 자랑할만한 한해였다. 미국 아틀란타올림픽경기대회에서 그녀는14분 59초 88의 성적으로 녀자장거리달리기 5000메터 우승을 하여 금메달을 따낸 뒤를 이어 31분 02초 58의 성적으로 녀자장거리달리기 1만메터 준우승을 하여 은메달을 더 따냈다. 그녀가 오성붉은기를 들고 경기장을 돌 때 전세계의 시선이 그녀를 주목했다. 그녀는 삽시간에 중국뿐만아니라 미국인들도 숭배하는 영웅으로 되였고 “동방신록( 方神鹿)”으로 세상에 이름을 날리게 되였다. 1973년 1월 19일에 길림성 교하시에서 출생한 왕군하는 1988년에 대련체육학교에 입학했고 1991년에 료녕성륙상팀에 들어갔으며 1995년에 국가륙상팀 선수로 되였다. 1999년, 주용기총리가 미국을 방문했을 때 왕군하도 대표단의 일원으로 미국땅을 다시 밟았다. 미국인들은 왕군하를 열렬하게 환영했다. 왕군하는 하나 또 하나의 도시를 넘나들면서 마침내 이번 미국행에서의 마지막 역인 꿈의 도시 덴버(丹佛)에 도착했다. 덴버에서는 왕군하를 위해 환영연회를 베풀었는데 연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대부분이 화교들이였다. 같은 민족이였기때문에 자연스럽게 어울려 즐겁게 놀았는데 사회자의 요청에 의해 왕군하는 무대에 올랐다. 그녀가 밤례복을 입고 무대에 오를 때 치마가 살짝 들렸는데 “동방신록”의 다른 한 모습이 드러나는 순간 숱한 사람들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집중되였다. 그녀를 숭배의 눈길로 바라보고있는 사람들속에는 황천문이란 화교도 있었는데 그의 눈길이 제일 오래도록 왕군하의 몸에 가서 멎으면서 떠날줄을 몰랐다. 상해출신인 황천문은 1983년에 미국 덴버대학에 입학했다. 그후 음악석사학위를 따내고 미국에 남아서 몇년간 분투한 결과 이름난 “편직주머니대왕”으로 되였고 덴버화교들의 존경을 받는 령수급인물중의 하나로 되였다. 황천문은 왕군하의 날씬한 뒤모습을 보는 순간 3년전 올림픽경기장에서 달리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 그는 현장에서 소리치면서 응원했는데 검고 건장한 몸매를 가진 그녀가 번개같이 달리는 모습에 자호감을 느꼈던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는 어깨가 드러난 밤례복을 입고 옅은 화장을 한 왕군하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는 경기장에서 남자처럼 달리던 “동방신록”이 녀자라는것을 이때에야 느꼈다. 그것도 매우 아름다운 녀자라는것을 발견했다. 그는 약간 마른 몸매인 그녀에게 애틋한 감정까지 품었다. 연회가 끝난후 황천문은 왕군하의 앞에 가서 함께 사진을 찍자고 청을 들었다. 왕군하는 황천문을 처음 보았을 때 이상한 감을 느꼈다. 미국사람들은 옷차림에 대해 매우 중시했다. 특히 정규적인 연회에는 정장을 입고 나오는데 황천문은 반소매적삼에 청바지차림이였던것이다. 곁사람이 황천문을 덴버화교의 령수인물이라고 소개하자 왕군하는 눈앞의 남자에게 흥미를 느끼게 되였다. 사진을 다 찍은후 성격이 직방배기인 왕군하는 웃으면서 “전 처음로 당신같은 령수를 봅니다. 반소매적삼을 입고 산보하러 나왔습니까?”라고 물었다. 황천문은 구속을 원하지 않는 예술가의 특징이 몸에 배여서 편안한대로 입는 성격이였다. 왕군하가 그렇게 말해서야 그는 주위사람들이 모두 정장을 입고 나온것을 알고 계면쩍게 웃으면서 “아, 이거 실례했소”라고 말했다.며칠후 황천문은 왕군하에게 사진을 부쳐주려고 하다가 그녀의 주소를 물어보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그 사진을 벽에 붙여놓고 오는 사람에게마다 자랑을 했다. 그는 대륙의 신문과 인터넷에서 왕군하의 소식을 알아보면서 그녀가 경기에 나가면 응원해줄 준비를 하고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왕군하가 결혼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한창 운동선수로 활약할 황금시기인데 이렇게 포기하다니? 그는 몹시 아쉬워했다. 2001년, 황천문은 중국의 환경오염문제가 매우 엄중한것을 보고 자금과 기술을 가지고 상해로 찾아가서 락기산환경보호기술유한회사를 세운후 전문 환경보호사업에 몰두했다. 그때 안해와 리혼한 그는 자녀의 정상적인 생활에 영향을 주지 않기 위해 아들과 딸을 잠시 미국에 남겨놓았다.왕군하는 미국에서 돌아온후 얼마 안되여 전우라는 남자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다. 그러나 2006년에 왕군하는 성격차이로 남편 전우와 리혼했다. 2008년 3월, 왕군하는 어느 은행의 년말야회에 참석했는데 뜻밖에도 한 남자가 다가와 웃으면서 인사하는것이였다. “당신은 왕군하지? 날 기억할만하오?” 왕군하가 머리를 가로 젖자 그 남자는 돈지갑에서 한장의 사진을 꺼내여 그녀에게 보이면서 말했다. “이건 9년전에 당신이 미국 덴버에 왔을 때 나와 함께 찍은 사진이요.” 그 사진을 보고서야 왕군하는 생각났다. “아, 당신은 덴버의 화교령수이죠. 성함은 황씨 맞죠? 그땐 반소매적삼을 입었는데 지금은 달라진 모습이군요.” 이튿날, 황천문은 왕군하를 청해 저녁식사를 함께 하면서 말했다. “시간이 정말 빨리 흘러가는군. 9년전에 미국에서 당신과 함께 식사한적이 있는데 지금은 상해에서 이렇게 함께 식사하게 되다니.” 왕군하가 리혼한후 상해에 왔다는 말을 들은 황천문은 자신도 혼자 상해에 와서 창업을 하게 된 경력을 이야기했다. 많은 이야기를 함께 나누면서 황천문은 왕군하에 대해 더 많은것을 료해하게 되였다. 그는 인생에서도 경기장에서와 마찬가지로 영원히 포기하지 않는 왕군하의 정신에 탄복되였으며 그녀에게 사랑의 감정을 품게 되였다. 왕군하도 황천문을 지기라고 생각하면서 매우 친근한 감을 느꼈다. 어릴 때부터 운동선수로 뽑혀 훈련하느라고 정규적인 공부를 하지 못한 그녀는 학식이 있고 사업과 생활에서 가르침을 받을수 있는 선생을 모시고싶었다. 그런데 황천문과 같은 적임자가 눈앞에 나타났던것이다. 그때로부터 왕군하는 시간만 있으면 황천문을 찾아가서 가르침을 받았다. 황천문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녀를 세심하게 돌봐주었다. 왕군하는 매일 아침 달리기를 하는 습관을 버리지 못했다. 황천문은 이 기회를 리용하여 그녀에게 접근했다. 그는 왕군하가 달리기를 하는 곳을 알아두었다가 일찌감치 그 곳에 나가서 그녀를 기다리면서 우연히 만난척했다. 이러한 “우연”이 여러번 반복되자 왕군하는 알아차리고 황천문이 먼곳에서부터 보이면 일부러 피해서 다른 길로 달렸다. 그런데 뒤에서 황천문이 숨을 헐떡거리면서 쫓아오는것이였다. 왕군하가 “왜서 나를 따라다니면서 달리기를 합니까?”라고 물어보자 황천문은 단도직입적으로 “나는 당신을 사랑하오”라고 대답했다. 황천문의 고백에 왕군하는 깜짝 놀랐다. 2008년 8월, 왕군하와 황천문은 상해의 어느 한 고전식의 차집에서 함께 차를 마셨다. 두 사람은 모두 핸드폰을 꺼버리고 둘만의 행복을 만끽했다. 황천문은 행복한 미소를 지으면서 왕군하의 손을 꼭 잡고 “나의 안해가 되여주오. 우리 영원히 함께 살아가는것이 어떻소?”라고 청혼했다. 순간 왕군하는 가슴이 활랑거렸다. 한번 혼인에서 실패한 그녀는 다시 결혼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황천문의 고백을 듣는 순간 그녀는 자신도 이 남자를 사랑하고있다는것을 느꼈다. 왕군하는 결혼은 두 사람의 일만이 아니라는것을 느꼈다. 황천문에게도 두 아이가 있고 자신에게도 아들이 있지 않는가. 쌍방의 아이들을 생각하자 그녀는 이런저런 근심을 하지 않을수 없었다. 황천문은 총명한 사람인지라 왕군하의 심정을 알수 있었다. 그는 “군하는 계모노릇을 잘하지 못할가봐 두려운거지? 나의 두 아이는 미국에서 태여나서 관념이 서구화되였기때문에 어울리기도 쉬울거요”라고 왕군하를 위안했으며 아들을 중국에 데려오기도 했다. 황천문의 아들은 왕군하를 만나자마자 그녀를 좋아했다. 아이는 왕군하를 보고 “난 아지미를 알아요. 아지미는 올림픽우승을 한 녀영웅이죠. 우리 학교에는 아지미의 그림이 붙어있어요”라고 말했다. 그는 아빠가 왕군하와 결혼한다는것을 알고는 “아이, 좋아라! 올림픽우승이 나의 엄마가 된다니”라고 박수를 치더니 즉시 미국에 있는 누나한테 이 기쁜 소식을 알려주었다. 왕군하가 리혼한후 아들은 줄곧 전 남편과 함께 있었다. 황천문은 왕군하가 두고온 아들때문에 가슴아파한다는것을 알고는 아들이 미국에서 가져온 놀이감을 왕군하의 아들에게 부쳐주었다. 그리고 왕군하의 아들에게 전화를 걸어 “명년여름방학에 널 데리고 미국구경을 시켜주겠다”고 약속했다. 전화에서 들려오는 아들의 환성을 듣자 왕군하는 자신이 이 길을 선택해도 된다는것을 느꼈다.2008년 10월, 단풍이 곱게 물든 아름다운 계절에 왕군하는 또 한번 행복한 신부로 되였다. 아름다운 혼례복도 없고 성대한 혼례식도 없었지만 파란만장한 곡절을 겪어온 두 사람은 함께 술을 마시면서 소원을 이루었다. 이는 왕군하가 바라는 생활이였다. 좌절을 겪어온 사람일수록 행복의 의의와 안정된 생활의 소중함을 아는것이다. 왕군하,  그녀의 앞날은 행복할것이다.                                                                              《지음》  
24    계부는 마귀인가 천사인가 댓글:  조회:3992  추천:0  2009-04-10
2008년 2월 1일, 산동성 평도시 장과장진에 살고있는 송씨네 집에서 뜻밖의 재난이 벌어졌다. 12살되는 주병이 부엌에서 불을 때다가 조심하지 않아 방바닥에 불이 붙었다. 집에 돌아온 송명성은 온 집안에 검은 연기천지인것을 보고 급히 불을 끈후 화가 나서 주병을 불러놓고 “내가 조금만 더 늦게 왔더라면 집이 싹 탈번했잖아? 너 집을 싹 태워버리려고 작정했잖아?!”라고 한바탕 욕설을 퍼부었다. 그후 일보러 밖에 나갔다가 15분후에 돌아온 그는 주병이 창살에 목을 매고있는것을 발견하고 깜짝 놀라서 목을 맨 목수건을 풀어던진후 아이를 안아다가 침대에 눕혔다.  그리고 촌위생소와 120구급중심에 전화를 걸었다… 주병은 구급을 거쳐 생명의 위험에서 벗어났지만 식물인으로 되고말았다. 주병의 어머니인 주원향은 당시 12킬로메터밖에 있는 청도흠풍가구유한회사에 출근하고있었다. 이 기막힌 소식을 듣고 달려온 주원향은 아들이 자살한것이 아니라 남편이 아들을 살해한것이라고 의심했다. 1973년에 출생한 송명성은 2004년에 아는 사람의 중매로 한살 년하인 주원향을 만났다. 주원향은 약혼할 때 송명성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나의 오빠와 올케가 일찍 사망되여 내가 오빠의 아이를 키우고있어요. 난 시집갈 때 이 의지가지없는 아이도 함께 데리고가려고 하는데 동의하나요?” “동의하오!” 선량한 송명성은 주저없이 통쾌하게 대답했다. 송명성은 처녀의 몸으로 오빠의 아이까지 키워주고있는 주원향을 정이 깊은 녀인이라고 존중했다. 2004년 봄, 송명성과 주원향은 결혼했는데 그때 8살된 주병도 그들과 함께 살게 되였다. 결혼후 송명성은 주병이 주원향을 “고모”라고 부르는것이 아니라 “엄마”라고 부르는것을 보고 의심이 들었다. 이에 대해 주원향은 “부모를 잃은 아이에게 엄마의 사랑을 주기 위해 그렇게 부르라고 했어요”라고 설명했다. 송명성도 그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서 더는 의심하지 않았다. 이듬해에 딸까지 본 그들 부부는 행복하게 살았다. 2006년 7월, 주원향은 흑룡강에 있는 조카 주병의 호적을 산동성 평도시로 옮겨오려고 했다. 아이가 학교에 다니는데 유익한 일이였기때문에 송명성은 주병의 호적을 수속하러 바삐 뛰여다녔다. 그런데 원 호적부에는 주병이 주원향의 조카인것이 아니라 친아들이라고 적혀있었다. 송명성이 깜짝 놀라서 따져묻자 주원향은 사실을 털어놓았다. 1994년, 20살인 그녀는 산동성 명수시의 한 가구점에서 판매원으로 있을 때 총경리 축강의 눈에 들었다. 축강은 그녀보다 18살이나 년상이였는데 “나는 원향처럼 예쁘고 현숙한 녀자를 안해로 맞아들이려고 다른 녀자들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여태껏 기다렸소”라고 하면서 그녀를 꼬셨다. 그녀는 축강의 달콤한 말에 넘어가 그와 동거하여 임신까지 했다. 주원향이 결혼등록을 하자고 했으나 축강은 이런저런 핑게를 대면서 거절하고 간단하게 결혼식만 올렸다. 1996년 5월 1일, 주병이 태여난후 축강은 주원향을 보고 “나는 안해도 있고 딸도 있소. 그런데 딸이 바보여서 원향의 배를 빌려서 아들을 보려 한것이요. 내가 대가를 돈으로 보상해줄테니 아이를 나한테 두고 다른 남자를 찾아 시집을 가오”라고 말했다. 하지만 주원향은 법원에 기소하여 아들의 부양권을 쟁취했다. 주원향은 나중에 송명성을 만났을 때 그가 아이까지 있는 녀자를 받아들이지 않을가봐 이런 사실을 숨겼던것이다. 주병이 안해의 조카가 아니라 안해의 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송명성은 마음에 상처를 입고 정서가 저락되여 우울한 나날을 보냈다. 송명성은 이때로부터 주병을 대하는 태도에 약간한 변화가 일어났다. 이때문에 주원향은 남편이 옹졸하여 아이를 잘 대해주지 않는다고 의심했다. 한번은 주병이 랭장고에서 도마도를 꺼내먹으려고 했는데 송명성은 찬음식을 먹으면 위에 해롭다면서 먹지 못하게 했고 또 한번은 주병이 발을 씻지 않았다고 침대에 올라오지 못하게 했다. 그때마다 그들 부부는 한바탕 다투었는데 주병도 엄마의 영향을 받아서 송명성을 “아빠”라고 부르던데로부터 “아저씨”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바로 이때 주병이 화재를 일으킨 일로 계부한테 욕을 얻어먹은후 자살하려고 한 사건이 벌어졌던것이다. 오후 3시 40분, 구급이 끝난후에야 송명성은 안해한테 전화를 걸어 주병이 목을 매여 자살하려고 한 일을 알려주었다. 소식을 듣고 정신없이 달려온 주원향은 아들이 자살하려고 했던것이라고 믿지 않았다. 아이를 눈에 든 가시처럼 미워하고있는 남편이 아이의 목을 매여 죽인것이라고 의심했다. 송명성이 억울하다고 가슴을 쳤으나 주원향은 아들이 아무런 반응도 없이 병상에 누워있는것을 보고 통곡하면서 따져물었다. “당신은 왜서 아이한테 일이 생긴후 나한테 인차 알리지 않고 몇시간이 지나서야 알렸어요?” “아이를 구급하느라고 정신이 없어서 미처 생각을 못했소.” 주원향은 또 아이의 목에 난 상처를 가리키면서 물었다. “당신은 아이가 목수건으로 자살을 하려고 했다고했는데 아이의 목에 난 상처는 왜 이리 가는가요?” 송명성이 보니 과연 주병의 목에 난 상처는 목수건으로 인한 상처같지 않고 전기줄이나 가는 바줄 같은데 매인 상처같았다. 주원향은 송명성이 “나도 똑똑히 모르겠소”라고 대답하자 더욱 의심이 들었다. 송명성은 “무턱대고 의심하지 말고 아이가 깨여나면 물어보는것이 어떻소? 이제부터 우리가 아이의 의식이 하루 빨리 회복되게 하기 위해 잠시 다투지 말고 힘을 합쳐 아이를 치료하기요”라고 말했다. 그때로부터 송명성은 안해와 함께 아이를 돌보는데 정력을 다 쏟아부었다. 그는 매일 아이에게 전신안마를 해주었고 몸을 씻어주었으며 대소변을 받아냈다. 2008년 7월부터 송명성은 척추에 극통을 느끼기 시작했는데 병원게 가서 검사해보니 골질증식이였다. 한달후 그는 오토바이를 몰고 출근하다가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났다. 간신히 오토바이를 급정거했으나 넘어져서 상하고말았다. 2008년 8월 21일, 주병이 갑자기 열이 40도로 올랐는데 송명성은 아이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아끼던 오토바이를 300원에 팔았다. 주병의 병세는 점점 호전되여 우유를 마시던데로부터 닭알도 먹고 밥도 먹을수 있게 되였다. 식사량도 정상으로 회복되였다. 주병이 매일 닭알 9개와 우유 2봉지를 먹었기때문에 송명성은 매달 몇백원의 생활비를 더 지불해야 했다. 하지만 그는 아이의 병세가 호전되였기때문에 몹시 기뻐했다. 2008년 10월 15일, 송명성은 비닐주머니로 아이의 오줌을 받아낼 때 주병의 입이 약간 움직이는것을 발견했다. 그후 텔레비죤에서 조본산의 소품을 시청할 때 주병은 듣기도 하고 입을 꿈틀거리기도 했다. 평도시제2병원에 가서 검사해보니 아이의 의식이 회복되고있는 중이였다. 아이의 의식이 점점 회복되여가는것을 보고 송명성부부는 모두 아이에게 사건의 진실을 물어보아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008년 11월 2일 저녁, 송명성이 먼저 안해을 보고 말했다. “내가 그동안 얼마나 억울했는지 아오? 이젠 해명할 때가 된것 같소.”   “그래요. 응당 사실을 밝혀야죠.” 그들 부부는 모두 아이의 침대곁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주원향은 아이의 귀에 입을 대고 나직하게 물었다. “주병아, 엄마가 너에게 한가지 일을 물어보려고 한다. 금년 2월 1일의 그날에 아저씨가 너의 목을 졸라 죽이려고 했느냐?” 그 말을 들은 주병은 말없이 눈물을 흘리는것이였다. 그후 여러번이나 반복하여 물어보았으나 주병은 말없이 눈물만 흘릴뿐이였다. 그 정경을 보고 주원향은 화가 나서 남편의 옷깃을 잡아당기면서 소리쳤다. “아이가 이렇게 속상해하는것을 보면 당신이 해친것이 분명해요!” 아이의 눈물은 무엇을 말해주는것일가? 피해를 입은 자신이 슬퍼서일가, 아니면 계부가 억울함을 당하고있는것이 속상해서일가? 그 답을 알려면 아이가 완전히 의식을 회복하기를 기다리는수밖에 없었다. 2008년 12월 1일, 주원향은 기자의 취재를 접수할 때 “송명성은 거짓말을 하고있습니다. 그가 주병을 살뜰하게 돌봐준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단지 자책감때문입니다”라고 하면서 새로운 의문까지 제기했다. “당시 사건을 기록한 그 쪽지에는 주병이 목을 맬 때 수건이 매우 짧아서 동그랗게 올가미를 만들었을 경우 주병의 머리가 들어갈수 없다고 했습니다. 유감스러운것은 이웃의 태선생이 그 수건을 남기면 불길하다고 하면서 태워버려야 아이의 병이 낫는다고 했기때문에 급한김에 그 수건을 태워버린것입니다. 이것도 사전에 미리 짜고든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주원향이 이토록 송명성을 불신임하는것은 송명성이 주병의 출생비밀을 알게 된후 아이를 잘 대해주지 않고 암암리에 보복하려고 했기때문이라고 말했다. 조사를 받을 때 어떤 사람들은 량심에 물어 부끄러울게 없는 사람은 떳떳하다고 했다. 송명성이 발벗고 나서서 아이를 치료해주면서 아이가 깨여나기를 기대하고있는것을 보면 모든것을 알수 있다는것이였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자책감으로 그럴수도 있는것이라고 말했다. 자책감으로 출발한것이든 자신의 청백을 증명하기 위한것이든 아이를 구하기 위한 길에서 송명성부부는 함께 애써왔으며 아이가 하루 빨리 회복되기를 바라는것은 그들의 공동한 소망이였다. 송명성은 기자의 취재를 접수할 때 이렇게 말했다.  “있는 힘과 정성을 다 한다면 주병은 깨여날것입니다. 그때면 내가 마귀인지 인자한 아버지인지 하는것은 자연히 밝혀질것입니다!”                  《법제일보》  
23    생명의 기적을 창조한 첫사랑의 입김 댓글:  조회:4223  추천:0  2009-04-09
1989년, 호국과는 우수한 성적으로 호북성 경산현 2중에 입학하여 반장으로 되였고 가무에 능한 좌홍연은 문체위원이 되였다. 반에서 골간간부로 있으면서 접촉이 잦게 된 그들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감정이 깊어져 서로 사랑하게 되였다. 1992년, 대학입학에서 좌홍연은 화중사범대학에 입학했지만 호국과는 보통 전문과대학에 겨우 붙었다. 좌홍연이 찾아와서 “네가 어느 대학에 붙었건 난 널 끝까지 사랑할거야”라고 위안했지만 호국과는 스스로 그녀와 짝이 기운다는 생각을 떨쳐버릴수 없었다. 대학에 입학한후 좌홍연이 끊임없이 편지를 보내왔지만 그는 마음을 모질게 먹고 회답하지 않았다. 1993년 양력설에 호국과는 좌홍연에게 자신은 이미 새 녀자친구를 사귀였다고 거짓말을 하면서 절교신을 써보냈다. 그 편지를 받은후 좌홍연은 상심의 눈물을 흘리면서 며칠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호국과는 대학전문과를 졸업한후 경산현전신국에 취직했다. 몇년후 결혼한 그는 아들까지 보고 전신분국의 국장으로 승진했다. 2005년 8월의 어느날, 호국과는 10여년만에 고중동창생 리용을 만났는데 리용은 그에게 “좌홍연이 식물인이 되여 집에 누워있는다오. 돈이 없어 치료도 못받고있는데 오래 살지 못할거요”라고 알려주었다.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란 호국과는 즉시 경산현 송하진 파초사촌에 있는 좌홍연의 집으로 찾아갔다. 좌홍연의 어머니는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고 식물인처럼 누워있는 딸을 가리키면서 일의 자초지종을 이야기해주었다. 좌홍연은 대학을 졸업한후 중국생명보험 무창분회사에 취직했다. 호국과가 이미 결혼했다는 소식을 들은 그녀는 2001년에 호국과를 닮은 남자와 결혼했다. 2003년, 임신 6개월인 좌홍연은 구토와 밥을 먹지 못하는 증상이 나타났다. 남편은 그녀를 무한동제병원에 호송했는데 의사는 인산(引 )해야 생명을 보장할수 있다고 알려주었다. 당시 좌홍연은 30살이였는데 아이를 낳으려는 욕망에 인산을 하지 않았다. 그후 40여일동안 좌홍연은 고열에 시달렸는데 이를 악물고 약물에 의지해 생명을 유지했다. 갈수록 병세가 엄중해지는것을 본 남편은 주사를 놓아 열을 내리우는데 동의했다. 그런데 열이 내린후 좌홍연은 혼미상태에 빠졌고 하복부출혈로 복중태아도 요절되고말았다. 그후 그녀는 줄곧 혼미상태에 빠져있었으며 지각을 잃었다. 2년남짓한 동안 로인들은 딸을 업고 무한의 여러 큰병원을 돌아다녔지만 모두 치료할수 없다는 대답뿐이였다. 그들은 딸의 병을 치료하지도 못하고 도리여 딸이 저금한 돈을 모두 써버리고말았다. 이때 좌홍연의 남편은 일이 있다는 핑게를 대고 가버린후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들은 다른 해결책이 없어서 딸을 업고 집으로 돌아오는수밖에 없었다. 좌홍연의 아버지는 재작년에 암세포제거수술을 받아서 의사가 중로동을 하지 말라고 당부했지만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매일 밭일을 나갔다. 이런 상황에서 딸을 치료하려고 해도 치료할 돈이 없었던것이다. 이런 사연을 들은 호국과는 가슴이 터지는것 같았으며 마음이 몹시 무거웠다. 그는 집에 돌아온후 안해를 불러놓고 좌홍연이 당한 전후사연을 털어놓고 그녀가 자신의 첫사랑이였다는 사실도 숨기지 않으면서 “지금 난 그녀를 도와주려고 하오. 이후 그녀한테 가서 있는 시간이 많을수도 있는데 오해하지 말고 량해하여주기를 바라오”라고 말했다. 그의 안해는 생각밖에도 조용한 어조로 “당신은 나의 남편인데 내가 어찌 당신을 믿지 않을수 있겠어요. 난 당신이 동창생을 도와주는것을 지지해요”라고 말했다. 호국과는 로임이 높지 않았기때문에 좌홍연을 도와주려면 반드시 많은 사람들의 힘에 의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전화번호책을 펼쳐들고 경산현 2중 89년급의 부분적 고중동창생과 련계했는데 동창생들이 신속히 호응해나섰다. 2005년 9월 7일, 호국과, 단선군, 리용, 황성 등 10여명의 동창생들이 4000여원을 모아가지고 좌홍연의 집을 찾아갔다. 동창생들이 공부할 때의 재미나는 이야기를 하면서 그녀를 불렀지만 그녀는 알아듣지 못했고 그녀의 어머니가 그녀의 귀에 입을 대고 “네 동창생들이 널 보러 왔다”고 말했지만 역시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2006년 음력설이 다가오자 호국과의 안해는 이쁜 저고리와 속옷 그리고 선물꾸레미를 가득 사가지고와서 현금 1000원과 함께 남편에게 주면서 좌홍연에게 가져다주라고 했다. 음력 섣달 그믐날, 호국과가 좌홍연의 집을 찾아가자 좌홍연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감동되여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그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딸에게 새옷을 갈아입혔다. 호국과는 새옷을 갈아입고 누워있는 좌홍연의 침대앞에 다가앉아 그녀의 창백하고 붓긴 손을 꼭 잡고 “홍연이, 난 오늘 홍연의 집에서 명절을 쇠오. 홍연이는 생각도 못했겠지? 홍연이, 이렇게 오래 잠들어있지 말고 어서 깨여나오. 이젠 깨여날 때가 되였소”라고 안타깝께 속삭였다. 그는 좌홍연의 입을 주시하면서 기적이 나타나기를 바랐다. 그가 1시간 30분이나 다정한 이야기를 하면서 깨여나라고 호소했지만 좌홍연은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좌홍연의 어머니는 호국과를 보고 “자네가 왔다가면서부터 우리 홍연이는 비록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지만 왜서인지 이전보다 더 안정되고 호흡도 더 고르롭게 쉬고있네. 자네는 사업도 바쁘고 가정도 있어 늘 올수는 없겠지만 짬이 있으면 자주 와주었으면 좋겠네”라고 말했다. 호국과는 이후 늘 좌홍연을 보러 오겠다고 대답했다. 그후 1년동안 호국과는 주말마다 찾아와서 의식이 없는 좌홍연을 동무해주었다. 그는 그녀와 함께 공부할 때 있었던 재미나는 이야기들을 해주었고 그들이 즐겨 부르던 노래도 들려주었으며 신문과 방송에서 들은 새로운 정보도 알려주었다. 이 기간 그는 몇번이나 안해와 함께 오기도 했다. 2007년초의 어느날, 호국과의 안해가 불쑥 호국과를 보고 “이전에 당신이 좌홍연과 련애할 때 그녀를 뭐라고 불렀는가요?”라고 물었다. 호국과는 안해가 무슨 의심을 갖고있는가 해서 “그건 다 지나간 일인데 물어선 뭘하오”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의 안해가 그의 어깨를 툭 치면서 이렇게 말하는것이였다.  “내가 인터넷에서 자료를 찾아보았는데 사랑하는 사람이 식물인의 귀가에다가 이전에 가장 즐겨듣던 다정한 이름을 끊임없이 부르면 식물인의 신경을 자극하여 점차 깨여날수 있다고 하더군요. 당신이 이전에 꼭 그녀를 다정하게 부르던 이름이 있을것이예요. 한번 시험해보세요. 꼭 효과가 있을것이예요.” 호국과는 자신이 이전에 좌홍연을 “좌좌”라고 부르던 생각이 났다. 그후 그는 좌홍연의 귀가에 입을 대고 깊은 정이 담긴 다정한 어조로 “좌좌, 좌좌!…”라고 속삭이기도 하고 “좌좌, 나 국과요. 좌좌, 좌좌…”라고 애타게 부르기도 했다. 옹근 두달동안 그렇게 부르자 기적이 일어났다. 2007년 2월 6일, 호국과가 또 한번 애타게 부르자 좌홍연의 눈섭이 갑자기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입에서 무슨 소리가 몇마디 나왔다. 호국과는 자신의 눈과 귀를 의심하면서 다시 “좌좌! 좌좌!…”라고 몇번 불렀다. 그러자 또 그녀의 입에서 무슨 소리가 새여나왔다. 그 소식을 듣고 달려온 그녀의 부모들도 그녀를 애타게 불렀다. 그러자 그녀는 천천히 머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호국과는 이 기쁜 소식을 안해한테 알린후 매일 와서 좌홍연의 귀가에 “좌좌, 좌좌…”라고 속삭였다. 2007년 2월 16일,좌홍연은 입을 열어 말할수 있게 되였다. 그녀의 부모들은 “엄마”, “아버지”라고 부르는 딸의 목소리를 듣고 너무도 기뻐서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좌홍연은 목을 돌려 호국과를 오래오래 바라보더니 “고마와요”라고 말하면서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호국과는 좌홍연을 일어설수 있도록 하기 위해 무한의 여러 병원을 돌아다니기도 하고 인터넷을 통해 자료를 찾아보기도 하다가 그녀의 병에 특효가 있다는 약을 발견했다. 그런데 그 약을 쓰려면 달마다 880원이란 비용을 이어대야 했다. 호국과부부가 7000원을 내놓고 동창생들이 1만여원을 기부하여 그 약을 구매했다. 그 약을 복용한후 그녀의 병세는 현저하게 호전되였다. 2008년 음력설, 좌홍연은 휠체어에 앉아 물만두를 빚을수 있었고 점차 땅바닥을 딛고 발걸음을 옮길수 있게 되였다. 5년만에 그녀는 혼자서 실외에서 신선한 공기를 마시면서 걸을수 있었다. 2008년 11월초, 기자가 찾아갔을 때 호국과는 이렇게 말했다.  “좌홍연은 현재 계단을 오르내릴수 있는 정도가 되였는데 병을 완치하려면 아직도 거액의 돈이 수요됩니다. 병이 호전되면 그녀의 능력으로 취업하는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나와 동학들은 그녀에게 알맞는 남자를 소개해주려고 합니다. 그녀가 그렇게 많은 고난의 세월을 겪어왔는데 이제는 행복한 생활을 누려야 될게 아니겠습니까?”                                                                                                     《지음》    
22    잊을수 없는 결혼식 댓글:  조회:4203  추천:0  2009-04-09
나는 얼마전에 장선생의 결혼식에 친구와 함께 참석하게 되였다. 장선생은 어느 중학교의 교원인데 친구를 통해 몇번 만난적이 있었다. 나는 친한 사람이 아니면 그의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는 성질이지만 장선생이 하도 사람이 좋아서 그의 결혼식에 두말없이 참석했던것이다. 그런데 친구의 말에 의하면 장선생이 이렇게 결혼을 하게 되기까지는 마치 한편의 련애소설을 방불케 할 정도로 사연이 많았다고 한다. 장선생의 부모들이 어찌나 심하게 반대했는지 상상도 할수 없었다고 한다. 신부는 선녀처럼 아름다왔다. 내가 보기에는 반대할 리유가 전혀 없어보였다. 주례자는 장선생의 대학선생님이라고 한다. 머리카락이 몇오리 남지 않은 주례자의 머리는 불빛을 받아 잘 닦아놓은 거울처럼 반짝이고있었다. 이윽고 주례사가 시작되였다. “검은 머리 파뿌리가 될 때까지 서로 사랑하는것도 좋지만 검은 머리가 저처럼 대머리가 될 때까지 변함없이 서로 사랑하는것도 좋습니다.” 그 순간 결혼식장안의 여기저기서 폭소가 터져나왔다. 이어지는 주례사는 신랑신부와 하객들에게 재차 웃음을 던져주었다. “제 대머리는 반들반들 빛이 납니다. 신랑신부가 백년해로 하려면 빛이 나는 말을 아끼지 말고 해주어야 합니다.”하객들은 모두들 진지한 눈빛으로 주례자를 바라보면서 그의 말을 듣고있었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례의를 지키라는 빛같은 말이 있습니다. ‘여보, 사랑해. 당신이 최고야!’라는 말은 빛나는 말이기때문에 검은 머리가 대머리가 될 때까지 계속해도 좋은것입니다.” 그런데 그 순간 하얀 장갑을 낀 장선생의 손이 부지런히 움직이고있는것이 눈에 들어왔다. 장선생은 신부에게 수화(벙어리말)로 주례내용을 알려주고있었던것이다. 아, 원래 신부는 벙어리였구나. 나는 코끝이 찡해나는 감동을 느꼈다. 장선생의 그 모습에 눈물을 흘린것은 나뿐이 아니였다. 주례자의 말이 계속 들려왔다. “여기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신랑이 가장 아름다운 신부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을 해주고있습니다. 군자는 행위로써 말하고 소인은 혀로써 말한다고 합니다. 오늘 저는 혀로써 말하고있고 신랑은 행위로써 말하고있습니다. 신랑신부 모두 군자의 자격이 있는것입니다. 두 군자님의 제2의 인생에 축복이 가득하길 빌면서 이만 소인의 주례를 마치겠습니다.”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신랑신부를 보며 힘껏 박수를 쳤다. 혼례식장은 하객들의 박수소리에 떠나갈듯했다.    《가정백과보》    
21    내 삶에 빛이 되여준 부부 댓글:  조회:4354  추천:0  2009-04-09
몇년전 나는 고향을 떠나 광주의 어느 음식점에서 품팔이를 했다. 어디로 가나 키가 작다고 업신여김을 당할가봐 첫날부터 주인아주머니가 시키는대로 수걱수걱 일만 했다.   새벽부터 힘들게 일하면서도 고되다는 생각을 못했는데 그건 마음씨가 뜨거운 주인아주머니의 덕분이였다. 복장모델을 해도 손색이 없는 키에 영화배우 못지 않은 미모를 겸비한 주인아주머니를 처음 보았을 때 나는 (저분의 남편은 얼마나 멋진 분일가) 하고 상상했다.그러나 물건구입을 나갔다가 이튿날에 돌아온 주인아저씨를 본 순간 너무 놀라서 하루종일 멍해있었다. 키가 1.52메터인 나보다도 더 작은 “난쟁이”였기때문이다. 외모 역시 잘난축이 아닌 주인이 어떻게 주인아줌마같은 미인을 안해로 맞아들였을가. 나는 겉모습만 보고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된다는것을 깨우쳤다. 주인아저씨와 주인아주머니는 고향에서 이웃으로 지내던 사이였다. 주인아저씨는 재간도 많고 일도 잘했지만 키때문에 중매군도 나타나지 않아 로총각으로 되였다. 하지만 비관하지 않고 부모와 동생들을 도와 부지런히 농사일을 했다. 주인아주머니는 그런 아저씨를 사랑하게 되였는데 부모들의 극심한 반대로 결국 두사람은 결혼식도 못올리고 집에서 나와 품팔이를 하면서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그런데 계획에도 없던 아이가 덜컥 생기고보니 주인아저씨는 임신한 안해를 돌보다가도 가끔씩 문밖에 나가 애꿎은 담배만 피우군 했다.   남편의 근심을 알아차린 아주머니는 “당신을 닮은 아이를 낳을가봐 걱정이 되나보죠? 외모는 나를 닮고 재간은 당신을 닮은 아이를 낳을테니 근심하지 마세요”라고 남편을 위안했다. 주인아저씨는 물론 그 말을 믿지 않았지만 소중한 생명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사랑의 결실인 아들이 태여났을 때 그들은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지금 아이는 18살인데 키가 1.80메터가 넘어된다고 한다. “다른 사람들은 남편을 난쟁이라고 하면서 우리를 짝이 기운다고 했지만 난 남편을 믿었소. 열심히 일하는 남편이기때문에 꼭 성공할것이라고 믿었소. ”사랑으로 어려움을 극복하고 지금에 이르렀다며 행복한 미소를 짓는 아주머니를 보니 가슴이 뭉클해졌다.지금도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변함없는 그분들의 삶은 내 가슴속에서 항상 빛이 되여주고있다.                                                                                                                  《도시생활보》  
20    일시적인 욕망과 충동의 대가 댓글:  조회:4349  추천:0  2009-04-09
1973년 6월에 산서성 농촌에서 태여난 조화동은 북경외국어대학 연구생공부를 마친후 북경중관촌의 한 회사에 취직했다. 2002년 5월, 조화동은 북경처녀 류아와 결혼하여 이듬해 딸 조첨첨을 보았다. 류아의 아버지 류극례는 북경십리하건축재료성에 6개의 상점을 경영하고있었는데 자산이 수천만원에 달했다. 2004년 12월 5일 저녁, 류아는 한국에서 온 동창생을 맞이하러 수도공항으로 가다가 얼음길에 자가용차가 미끌면서 교통사고로 사망되였다. 안해를 잃은 조화동이 어린 딸을 안고 대성통곡하자 딸을 잃은 류극례는 “류아는 이미 갔지만 자네와 첨첨이는 나의 가장 가까운 친인이요. 이후 내가 자네를 아들처럼 대해주겠소”라고 사위를 위안했다. 딸이 사망된후 류극례는 딸에 대한 사랑을 모두 외손녀에게 몰부었다.   2006년 4월, 조화동이 어린 딸을 데리고 살아가기 힘들어하는것을 보고 친구들이 손매라는 내몽골처녀를 소개해주었다. 서로 호감을 가지게 된 두 사람은 얼마후 동거했다. 2006년 6월의 어느날, 손녀를 보러 조화동의 집으로 갔던 류극례부부는 손매라는 녀인이 집에 있는것을 보고 딸이 생각나서 몹시 가슴이 아팠다. 더구나 시체옷을 입고 멋만 따는 손매를 보자 “저런 녀자가 어떻게 우리 손녀의 계모노릇을 잘할수 있겠는가”라는 생각이 들면서 몹시 걱정되였다.저녁에 집에 돌아온 류극례는 조화동한테 전화를 걸어 “난 자네가 재혼하는것을 반대하진 않네. 하지만 녀자의 인품이 중요해. 자네들이 결혼한후 첨첨이를 잘 대해주지 않는다면 우린 가만있지 않을거네. 지금 나와 자네 장모는 점점 늙어가고있네. 앞으로 이 집 재산은 모두 자네와 첨첨의것이 아니겠나?”라고 말했다. 장인의 말뜻을 알아차린 조화동은 손매가 첨첨이를 친딸처럼 대해주지 않으면 그녀와 결혼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장인의 귀띔이 아니더라도 조화동은 그런 뜻을 가지고있었다. 그가 손매를 보고 첨첨이를 친딸처럼 대해줄수 있느냐고 물어보자 손매는 “내가 처녀로서 어떻게 계모노릇을 하겠어요. 우리가 결혼하려면 첨첨이를 외가집에 줘야 해요”라고 말했다. 그 말에 조화동은 화가 나서 그 즉시로 그녀와 헤여졌다. 그 소식을 들은 류극례는 몹시 감동되였다.그후 조화동은 몇몇 녀자를 만나보았지만 모두 첨첨이를 키우지 않겠다고 했다. 이때문에 조화동은 번뇌에 쌓여있었는데 마침 그때 류극례에게도 골치 아픈 일이 생겼다. 3년전부터 딴살림을 차리고 같이 동거하던 주산이란 처녀가 그를 보고 리혼하라고 핍박했던것이다. 원래부터 안해를 버릴 생각이 없었던 류극례는 주산을 보고 계속 “첩”으로 살든지 얼마간의 돈을 줄테니 다른 남자를 찾아 시집을 가든지 량단간에 결정을 하라고 말했다. 하지만 주산은 그의 정식부인의 자리를 차지하겠다고 고집했다. 류극례는 주산과 관계를 끊고싶었지만 북경사범대학을 졸업한 재녀인데다가 젊고 아름답고 성감적인 그녀의 몸매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있었다. 류극례는 생각하다못해 그녀를 전 사위 조화동에게 소개해주려고 생각했다. 그는 주산에게 조화동의 정황을 사실대로 말해주고나서 조화동한테 시집을 가라고 했다. 처음에는 펄쩍 뛰면서 거절하던 주산은 류극례가 “나와 나의 안해가 죽은후에는 나의 모든 재산이 조화동과 첨첨이가 차지하게 되는데 주산이가 첨첨의 계모가 되면 그 재산은 곧 주산의것이 될게 아니겠소”라고 하는 말에 귀가 솔깃해서 조화동을 만나보겠다고 했다. 2007년 양력설에 류극례는 조화동에게 주산을 아는 사람이라고 하면서 소개해주었다. 조화동은 예쁘고 성감적인 주산에게 반했고 그녀가 첨첨이를 잘 대해주는것을 보고 그녀를 안해로 맞아들이기로 마음먹었다. 2007년 5월 1일, 조화동과 주산은 북경신세기호텔에서 결혼식을 올렸다.하지만 류극례는 정부를 전 사위한테 시집을 보낸후에도 가끔씩 주산을 불러다가 정욕의 밤을 불태웠다. 그러다가 결국 조화동에게 꼬리를 잡히게 되였다. 조화동은 놀랍기도 하고 화가 나서 견딜수 없었다. 그때로부터 그는 날마다 안해한테 몇시간씩 “화냥년”이라고 줄욕을 퍼부었다.   2008년 6월 27일, 주산은 더는 견딜수가 없어 조화동의 앞에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면서 “난 이렇게 더는 못살겠어요. 우리 리혼합시다!”라고 애원했다. 조화동은 주산을 발길로 차던지면서 “난 리혼하지 않을테야. 난 널 죽지도 모하고 살지도 못하게 할테야!”라고 소리쳤다.   그날밤, 조화동은 바깥에서 집으로 들어오다가 딸이 객실에서 혼자 노는것을 보고 “아지미는 어디로 갔느냐?”라고 물었다. 첨첨이는 “아빠, 이후엔 아지미와 싸우지 말아요. 아지미는 오늘 온 오후 울었어요. 지금 침실에서 주무셔요”라고 가냘픈 목소리로 말했다. 조화동이 침실문을 열고 보니 주산이 침대에 조용히 누워있는데 낯색이 창백하고 곁에는 빈 수면제병이 놓여있는것이 보였다. 조화동은 급히 그녀를 자가용차에 실어 부근의 공군병원으로 호송했다. 구급을 거쳐 그녀는 생명의 위험에서 벗어났다. 의사는 조화동을 보고 “당신의 안해는 적어도 70여그람의 수면제를 삼켰습니다. 조금만 더 늦게 왔더라면 목숨을 잃을번했습니다”라고 알려주었다. 주산은 깨여난후 눈물을 흘리면서 조화동을 보고 “미안해요. 모두 내가 잘못했기때문에 당신에게 이렇게 큰 치욕을 가져다주었어요. 당신이 날 어떻게 대하든지 나는 절대 당신을 나무람하지 않을거예요. 하지만 당신은 꼭 믿어주세요. 그와 난 지금은 아무런 관계도 없어요. 나의 마음은 이 집에 있고 당신과 첨첨이만 위해서 살것이예요”라고 말했다. 안해의 고백에 조화동은 가책감을 느끼면서 “주산이, 나는 당신을 이렇게 못살게 굴지 말아야 했소. 잘못은 그놈한테 있소!”라고 말했다. 다음 순간 그들 부부는 서로 껴안고 울었다.   얼마후 주산의 일은 소문이 나서 그들을 아는 사람들은 모두 알게 되였다. 조화동은 안해와 상의한후 북경을 떠나 상해로 가서 살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새로운 고장에 가서 산다는것이 말은 쉽지만 실천에 옮기기엔 매우 어려운 일이였다. 주택 한채를 구매하자고 해도 몇백만원이 있어야 했다. 조화동은 류극례가 자신의 가정에 이처럼 해를 끼쳤으니 응당 돈으로 보상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2009년 9월 5일, 조화동은 류극례의 회사로 찾아가서 단도직입적으로 300만원의 손해배상을 내라고 요구했다. 류극례는 그 말을 듣자마자 화가 나서 “너 사내대장부로서 안해의 사생활을 내걸고 협잡을 하려고 하다니. 창피하지도 않느냐?”라고 욕했다. 이렇게 되여 두 사람은 싸우게 되였는데 류극례는 보안일군을 불러 조화동을 쫓아내게 했다. 류극례는 문밖으로 쫓겨나가는 조화동을 보고 “지금부터 너와 나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다시 날 찾아와 시끄럽게 굴지 말아”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조화동은 몸을 돌리면서 “좋습니다. 그럼 난 이 일을 장모님께 알려주겠습니다. 당신이 보상해주지 않으면 난 장모님을 찾아가서 달라고 할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류극례는 겁이 나서 “그렇게 서두르지 말아. 내가 생각해볼테니”라고 말했다.   이튿날 오후, 류극례는 조화동의 집으로 찾아갔다. 조화동은 사전에 안해와 딸을 밖으로 내보내고 두 남자끼리 배상문제를 상의했다. 류극례가 “나의 재산이 천만원이 된다고만 생각하지 말아. 지금 장사가 잘 되지 않아 현금을 빼낼수 없어. 내가 상점 하나를 주면 안되겠느냐”라고 물었지만 조화동은 기어코 현금 300만원을 내라고 고집했다. 류극례는 조화동을 보고 “안해의 사생활을 팔아서 밥을 먹는 못난이”라고 욕했고 조화동은 화가 나서 류극례의 귀쌈을 힘껏 후려쳤다. 두 사람은 싸우기 시작했는데 힘이 약한 류극례는 밀리고 밀려서 객실밖의 베란다쪽으로 밀려갔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조화동은 리지를 잃고 류극례를 번쩍 들어서 6층아래로 던져버렸다. 류극례는 처참하게 부르짖으며 마당의 승용차우에 떨어졌다…   소구역의 보안일군은 일이 생긴것을 보고 급히 120구급중심에 전화를 한후 공안국에 제보전화를 걸었다. 몇분후 류극례는 구급차에 실려 공군병원에 갔고 조화동은 현장에 달려온 경찰들에게 붙잡혀갔다. 류극례는 구급을 거쳐 생명의 위험에서 벗어났지만 척추가 골절되여 한평생 휠체어 신세를 지면서 살아가야 했다. 조화동은 타인을 고의상해했기때문에 해정구검찰원에 의해 체포되였으며 차디찬 철창속에서 긴 세월을 보내야 했다. 사건이 발생한후 조화동은 일시적인 충동때문에 자신을 망치고 가정을 망쳐놓았다고 후회막급이였으나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류극례의 안해는 이 사건을 알게 된후 이 기막힌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딸이 사망된데다가 남편까지 장애자가 되였으니 그녀는 미칠것만 같았다. 그녀는 류극례를 증오했다. 하지만 지금 그는 자신이 의지해야 할 유일한 친인이 아닌가. 가장 가슴이 아픈 일은 어린 첨첨이가 날마다 울면서 아버지를 찾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이였다.                                                                        《중국법제보》  
19    빈민산골에 넘치는 사랑 댓글:  조회:3810  추천:0  2009-04-08
2008년 4월 2일, 호남성 침주시 북호구 영춘향 재수구촌에 살고있는 류문영은 골치아픈 문제에 봉착했다. 아들 류시중이 며칠후에 결혼한다는 소식을 전해왔던것이다. 아들이 결혼하는것은 원래 기쁜 일이였지만 류문영에게는 골치아픈 일이 아닐수 없었다. 류시중은 호남학원 계산기학부 2학년생이였다. 방금 대학입학통지서를 받았을 때 어머니가 앓아서 1만원을 쓰고 2000여원의 빚까지 지는 바람에 류시중은 공부를 그만두고 품팔이를 하여 집살림에 보탤 생각을 했다. 그때 이 정황을 알게 된 그의 고중동창생이며 친구인 황은화가 발벗고 나서서 그를 도와주었다. 그녀는 직업전문학교에 갈 기회를 포기하고 광주의 어느 전자공장에 들어가 품팔이를 하면서 그의 대학공부뒤바라지를 해주었다. 그때로부터 두 사람의 감정은 신속히 발전하여 서로 떨어질수 없는 사이가 되였다. 2007년 8월, 황은화는 몸에 이상한 증상이 나타나서 병원에 가서 검사해봤더니 급성림파세포백혈병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류시중은 즉시 대학공부를 그만두고 품팔이를 하면서 입원치료를 받고있는 황은화를 돌봐주었다. 녀자친구가 학교에 돌아가 공부를 하지 않으면 치료를 거부하겠다고 핍박했지만 류시중은 고집스레 자기의 선택을 견지하면서 하늘을 감동시켜 녀자친구의 젊은 생명을 구할수 있기만을 고대했다. 소식을 들은 류시중의 아버지 류문영과 어머니 왕초래는 침주시로 달려와서 아들더러 대학으로 돌아가라고 권고했다. “널 대학공부시키는것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느냐?  네 공부뒤바라지를 하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많은 돼지를 길렀고 얼마나 많은 닭알을 팔았는지 아느냐?  우리 촌에서 어쩌다 너같은 대학생이 나왔는데 너는 이 기회가 얼마나 소중한걸 알아야 하지 않겠느냐? 네가 대학을 졸업하고 이곳에 취업하면 이후 대대손손 가난한 산골에서 고생하지 않아도 될게 아니겠냐?  넌 부모의 기대를 저버리고 아름다운 미래를 포기해서는 안된다!” 류시중은 실망하여 한숨을 쉬는 부모의 손을 잡고 말했다.   “나도 그런 도리를 압니다. 그러나 은화가 없었다면 난 대학문에도 들어갈 기회가 없었을것입니다. 은화가 날 위해 힘든 일을 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병에 걸리지 않았을수도 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자신을 희생하면서 나를 대학에 가게 한 녀자친구가 병원의 침대에 누워 죽기를 기다리고있는데 내가 어찌 마음놓고 공부할수 있겠습니까?  아버지, 어머니는 내가 어릴 때부터 남의 은혜를 입었으면 꼭 보답을 해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았습니까?” 왕초래는 화가 나고 조급해서 비자루로 아들을 때리려고 했다. 류문영은 막아나서면서 “시중의 말에도 도리가 있소. 우리가 시중을 핍박하여 대학교에 가게 한다고 해도 이 아이의 마음은 은화한테 가있을것이니깐 이 아이의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두는것이 좋겠소”라고 말했다. 2008년 3월말, 황은화의 병세는 악화되였다. 의사는 골수이식수술을 하든지 환자가 이루고싶어하는 마지막 소원을 이루게 해주든지 빨리 선택하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류시중은 급해났다. 골수도 찾기 어렵지만 40만원에 달하는 수술비용을 마련한다는것도 오르지 못할 큰 산을 바라보는것과 같았다.류시중은 두 사람이 나란히 손을 잡고 혼인의 전당으로 걸어들어가는것이 은화의 마음속의 가장 간절한 소원일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 내가 그녀에게 유일하게 해줄수 있는것은 그녀에게 혼례복을 입혀 아름다운 신부로 되게 해주는것이야.) 병상에 누운 황은화는 머리가 빠지고 얼굴이 부었는데 혈색이라곤 보아낼수 없었다. 황은화의 병문안을 왔던 류문영은 그녀의 가엾은 모습을 보고 그날밤으로 아들을 데리고 황은화의 부모를 찾아가서 결혼날자를 잡았다. 2008년 4월 8일 오전 11시 30분, 침주시 북호구 영춘향 재수구촌의 농가에서 류시중과 황은화의 간단한 결혼식이 거행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마을사람들은 일하던 맵시로 류씨네 집마당에 모여들어 신랑신부를 축하해주었다.   주례자가 류시중을 보고 “신랑은 정말로 중병환자를 안해로 맞아들이기를 원합니까? 만약 신부의 병이 치료될수 없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라고 묻자 류시중은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나는 종래로 은화의 병이 치료될수 없다고 생각해본적이 없습니다.나의 가장 큰 소망은 은화의 병이 하루 속히 낫는것입니다. 나는 우리의 사랑이 하늘을 감동시키리라고 믿습니다. 우리는 검은 머리가 백발이 될 때까지 한평생을 함께 살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주례자가 또 류문영을 보고 “아들이 대학공부를 포기하고 중병환자를 안해로 맞아들이는것을 동의합니까?”라고 묻자 류문영은 “처음에는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은화는 시중의 은인이고 시중이 또한 생명처럼 사랑하고있는것을 보고 마음을 고쳐먹었습니다. 오늘부터 은화는 우리 가족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결혼후 황은화의 건강상태는 괜찮아 매일 시어머니를 도와 집안일을 할수 있었다. 시어머니는 며느리에게 몸보신하라고 닭곰을 해주었지만 며느리는 한술도 먹지 않고 시아버지와 남편에게 드렸다. 그러나 좋은 날은 오래가지 못했다. 2008년 6월 26일 오전,황은화는 갑자기 방바닥에 쓰려졌는데 코와 입에서 피가 터져나왔다. 류시중은 결혼식때 부조로 받았던 5000원과 3000원의 저금을 몽땅 찾아가지고 안해를 데리고 침주시제1인민병원으로 갔다. 검사결과를 본 의사는 매우 놀라면서 “환자의 정황이 아주 나쁩니다. 골수이식수술을 하지 않으면 3~4개월밖에 더 살지 못합니다”라고 알려주었다. 급해난 류시중은 사처로 뛰여다니면서 백혈병치료에 대한 정보를 수소문했다. 2008년 7월 3일, 류시중은 안해를 데리고 광주시중산대학부속제2병원에 가서 검사했는데 역시 3개월밖에 더 살수 없다는 진단이 나왔다. 5일후 황은화의 세 언니와 동생이 와서 골수를 검사받았는데 셋째언니 황동화의 골수가 황은화의 골수와 딱 맞았다. 하지만 이미 13만원이나 써버린 빈민산골의 가정에서 이제 골수이식에 수요될 비용 40만원을 모은다는것은 천방야담이나 다름없었다.재수구촌은 매인당 년평균수입이 3000원도 되지 않았다. 류문영은 가까운 사람들을 모두 집에 청해놓고 며느리의 정황을 말하면서 도움을 청했다. 황은화의 처지를 동정한 마을사람들과 친척들은 집을 저당잡히고 대부금을 맡아서 2만 5000원, 3만원, 3만5000원, 5만원씩 지원했고 그외 사처로 다니면서 1만원, 2만원씩 꾼 돈을 모으니 5일만에 40여만원이 되였다. 한달남짓한 강화화학치료를 받은 황은화는 골수이식을 받을 준비가 되였다.  2008년 10월 8일, 황은화는 무균창에 들어가 소독처리를 받았다. 그와 동시에 황동화도 병원에 들어가 100리터의 조혈간세포를 기증했다.2008년 10월 10일 10시 30분, 이식수술이 시작되였다. 1시간 30분후 황동화의 조혈간세포가 성공적으로 황은화의 체내에 주입되였다. 두주일이 지난후 황은화의 조혈기능은 성공적으로 회복되였다. 보통병실로 들어가 두주일동안의 재활치료를 받은 황은화는 퇴원하여 집에 돌아가 료양할수 있게 되였다. 이 기간의 치료비는 53만여원에 달했는데 이는 가난하지만 선량한 사람들이 창조한 생명의 기적이였다. 11월 15일 오후 5시, 류시중은 안해를 부축하여 침주시에 있는 집으로 데리고왔다. 이 기쁜 소식을 들은 전 촌의 남녀로소들은 모두 동구밖에 모여와 폭죽을 터뜨리면서 그들을 맞이했다. 자신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사랑의 손길을 내밀어준 마을사람들을 바라보면서 황은화는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집에 돌아온 황은화는 남편의 품에 얼굴을 묻고 대성통곡했다. “시중씨, 난 마을사람들에게 너무 큰 부담을 주었어요. 이렇게 많은 대부금을 우리가 어떻게 다 갚겠어요? 어느 친척이 못갚으면 집을 내줘야 하는데 우린 어떻게 살아가겠어요?” 그 말을 들은 친척들은 “대부금은 근심하지 마오. 우리는 꼭 품팔이를 하여 갚을거요. 우리의 소원은 은화의 건강이 빨리 회복되는것이요.”라고 그녀를 위로해주었고 류시중도 “우린 이미 엄청난 기적을 창조했는데 이만큼한 대부금을 갚지 못할가봐 근심할게 뭐요?”라고 용기를 북돋아주었다. 이 감동적인 이야기가 전해지자 침주시공청단위원회 부서기 왕홍찬은 직접 류시중의 집으로 달려와 1000원을 기부했고 2008년 11월 18일, 침주시공청단위원회에서도 의연금을 모아 보내왔다. 침주시 제1인민병원에 입원한 환자들도 크나큰 고무를 받았다.우리는 이처럼 불가사의한 기적을 창조한 선량한 사람들의 힘에 감동되면서도 그들의 앞으로의 생활을 걱정하지 않을수 없다. 그들이 대부금을 갚지 못할 때 어떻게 할것인가? 더구나 황은화는 계속 매달 1000여원의 비용이 드는 치료를 받아야 하는데 아무래도 그들이 대부금을 갚을 희망이 묘망했다. 빈곤한 농민들에게 사랑을 주는것도 중요하지만 의료보장이 있게 하는것이 더욱 중요하지 않겠는가?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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