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옛날과 지금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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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제3자의 사생아 남편의 피줄이 아니였다 댓글:  조회:4344  추천:0  2010-01-27
모 국장부인 최평은 남편에게 젊은 정부가 있고 그들사이에서 아들까지 태여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였다. 하지만 그녀는 분개할 대신 그 아이를  잘 키워주겠다고 자진해나섰다. 세상에 최평처럼 너그러운 안해가 있단 말인가? 남편도 기뻐했고 제3자도 기뻐했다. 하지만 그들은 모르고있었다. 이 모든것이 최평이 남편에게 보복하려는 심보였다는것을… 현장에서 바람피운 남편을 잡다 2007년 6월 7일 오전, 회의중에 최평은 이상한 메시지(短信)를 받았다.“당신의 남편이 지금 해방로 행복사회구역 2번지 3층 아빠트에서 젊은 녀자와 재미를 보고있다. 믿지 못하겠으면 빨리 찾아가 잡아라.” 최평의 남편 리명뢰는 하남성 모 시의 물자국 국장이고 나이가 50이 넘었지만 여전히 풍도가 있어보였다. 최평은 남편의 주변에 많은 녀자들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지만 대학에 다니는 딸한테 상처를 주지 않으려고 모든것을 꾹 참고 지내려 했다. 하지만 집주소까지 상세하게 알려준 메시지를 받고는 더는 참을수가 없어 회의실에서 뛰쳐나갔다. 그는 택시를 잡아타고 현장으로 달려갔다. 최평은 헐떡이면서 3층까지 올라왔지만 그래도 아니겠지 하면서 조용하게 문을 노크했다.“누구요? 수도세를 받으러 온 사람인가?”자신의 귀를 의심할 정도로 익숙한 남자의 목소리였다. 분명 남편이 틀림없었다. 집문을 열어준 사람은 바로 남편이였다. 남편은 잠옷을 입고있었는데 품속에 영아를 안고있었다.남편은 아주 당황해했다. “아니?! 당신이 어떻게 이곳을 알고 찾아왔소?” 최평은 남편을 밀치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침실에는 쌍침대가 있었는데 젊고 얼굴이 반반하게 생긴 녀자가 잠옷바람으로 그우에 누워있었다. 쌍침대옆에는 영아침대가 있었고 방안에 영아용품이 이리저리 널려있었다. 최평은 피가 꺼꾸로 흐르는것만 같았다. 남편이 밖에서 바람을 피우는것까지는 눈을 감아줄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살림을 차리고 애까지 낳아 키우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최평은 너무도 분하고 억울하여 그자리에서 까무러쳤다. “여보, 여보, 정신을 차리오. 당신에게 참 미안하오. 하지만 이는 돌이킬수 없는 사실이잖소? 당신의 요구를 다 들어주겠소. 하지만 저 녀자와 이 어린애만은 괴롭히지 마오. 내가 잘못했소.”정신을 차린 최평은 남편의 귀뺨을 후려치고는 휘청거리면서 자리를 떴다. 후에 최평은 남편이 사귄 녀자의 이름이 곽병병이고 올해 20살밖에 안되는 대학생이며 임신한후 1년간 휴학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였다. 한창 대학에 다니는 녀학생이 어떻게 50살이 넘은 남편을 만났으며 아들까지 낳게 되였는가? 사실 곽병병은 편벽한 농촌마을에서 대학에 입학했던것이다. 하지만 집이 너무 가난하여 부모들은 딸의 뒤바라지를 해줄 형편이 못되였다. 하여 곽병병은 아껴 먹고 아껴 쓰면서 대학공부를 견지했고 고학을 하면서 돈을 모아 학잡비를 마련했다. 그는 조금이라도 돈을 더 벌려고 저녁이면 안마원에서 일했다. 2006년 양력설날, 리명뢰는 친구들과 함께 술을 마신후 발안마를 했다. 그날 리명뢰는 곽병병한테서 발안마를 받았다. 하지만 솜씨가 서투른 곽병병의 안마가 하나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저리 썩 물러가. 이렇게 하고서도 돈을 받으려고? 이봐 주인, 안마사를 바꿔.”그러자 주인이 사정했다.“지금 다른 안마사가 없습니다. 이 녀자는 새로 온 안마사인데 대학생입니다.” 대학생이란 말에 리명뢰가 눈을 뜨고보니 곽병병이 구석에 서서 괴롭게 울고있었다. 리명뢰도 농촌에서 자랐으며 어려서 많은 고생을 했다. 동정심이 생긴 그는 곽병병더러 계속 안마를 하게 하면서 그녀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리명뢰는 갈 때 책을 사라면서 곽병병에게 따로 팁 100원을 주었다. 그후부터 리명뢰는 발안마를 할 때마다 곽병병을 요구했다. 하여 둘은 자연히 익숙해졌다. 이때 곽병병에게 남자친구 조붕이 있었지만 그는 집이 아주 가난했다. 곽병병은 학습과 생활에서 많은 도움을 주는 리명뢰국장이 고맙고 존경스러웠다. 나중에 둘은 끝내 넘지 말아야 할 최후방어선을 넘고말았다. 리명뢰는 곽병병한테서 자신의 20대의 격정을 되찾았다. 리명뢰는 10년간 안해몰래 저금한 돈으로 곽병병에게 침실 두개가 딸린 아빠트를 사주었고 그녀의 학잡비를 전부 책임졌다. 둘은 늘 “사랑방”에서 함께 생활했다. 헌데 생각밖에 곽병병이 임신을 했다. 곽병병은 처음에 배속의 애를 지워버리려 했다. 하지만 그는 애가 없으면 예전처럼 돈이 없는 거지생활로 돌아갈것 같아 아이를 꼭 낳으려고 마음먹었다. 리명뢰에게는 대학에 다니는 딸이 있었다. 그도 아들이 욕심나기에 배속의 태아가 아들이란 말을 듣고 반대하지 않았던것이다. 모든 사실을 알게 된 최평은 분통이 터졌다. 자신을 배반한 남편과 가정행복을 빼앗아간 곽병병을 죽이고싶었다. 하지만 최평이 곰곰히 생각해보니 떠들면 떠들수록 부부사이의 감정이 크게 상할것이고 나중에 리혼할지도 모를 일이니 손해볼 사람은 자신이 번연했다. 그는 남편과 곽병병에게 복수할 방법을 생각해냈다. 리명뢰가 안절부절 못하고 안해의 “판결”을 기다리고있을 때 뜻밖에 안해가 이런 말을 꺼냈다.“사생아가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 당신의 정치생명도 끝장이니 아이를 집에 데려와요.  곽병병도 어렵게 대학에 붙었는데 끝까지 공부를 해야 하지 않겠어요? 아이는 내가 키우겠어요. 우리 집에서 불쌍한 고아를 데려다 키운다고 말하세요.” 리명뢰는 너무도 감동되여 눈물을 흘렸다. “여보, 참 고맙소. 당신이 이렇게 도량이 넓을줄은 정말 생각지 못했소. 나 이후 당신을 꼭 잘 대해주겠소.” 복수하려고 아이를 팔아버리다 최평은 아이를 집에 데리고왔다. 곽병병은 수속을 밟고 다시 등교했다. 리명뢰는 모든일이 순조롭게 풀린줄 알고 너털웃음을 웃으면서 좋아했다. 동생 최균이 매형을 찾아가 한바탕 패주겠다면서 펄펄 뛰자 최평은 제지시켜면서 자기의 복수계획을 털어놓았다. “그러지 말고 누나의 말을 좀 들어. 너 지금 어린아이를 사갈 사람이나 물색하거라. 우리 저 아이를 팔아버리자. 멀고 형편없이 가난한 집안이면 더욱 좋다. 못난 매형과 그 쌍년의 속을 말리워서 고통스러워하는 꼴을 보자꾸나.”“그렇게 되면 일이 너무 커지지 않소?”“국가간부와 녀대학생이 바람피웠는데 그들이 감히 들고 일어나? 걱정마.” 최균이 나서서 조건이 부합되는 가정을 찾았다. 광서에서 온 한 농민공이 자기의 삼촌이 반신불수로 생육능력을 상실하여 아이를 사다 부양하려 하나 돈이 없어서 여직껏 그러지 못했다고 했다.최균은 200원에 아이를 광서 중국ㅡ웥남변경에 있는 그 농호에게 팔기로 협상했다. 3일후 리명뢰가 북경으로 출장을 떠났다. 이때라고 생각한 최균은 200원을 받고 아이를 팔아버렸다. 그날 저녁 곽병병은 아이를 보러 왔다가 아이가 없어진것을 보고 의심되여 물었다.“우리 보배둥이는 어디 갔어요? 왜 보이지 않아요?”“보배둥이? 오, 내가 팔았다. 걔를 보기만 하면 난 구역질이 나거든. 내가 죽이지 않은것만도 다행인줄 알아.” 곽병병은 아이를 내놓으라고 최평에게 달려들었다.“아이를 내놓으라고? 너 참 뻔뻔스럽구나. 남의 남편을 꼬시라고 네 에미애비가 널 키워 대학에 보냈어? 우리 집에서 썩 물러가지 못해?” 곽병병은 최평의 집에서 나오는 길로 파출소에 찾아가 두달밖에 안되는 영아가 팔려갔다고 제보했다. 공안국에서 이 사건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2007년 8월 23일, 최평과 최균은 영아판매죄로 형사구류되였다. 리명뢰는 정부를 둔 사실이 밝혀져 당적은 제명당하고 공직을 떼웠다.리명뢰는 간수소에 갇혀있는 안해에게 리혼협의서를 남겨두고 곽병병과 함께 아들을 찾으러 광서로 떠났다. 아들은 남편의 친혈육이 아니였다 2007년 9월 16일, 리명뢰와 곽병병은 당지 경찰들의 도움으로 끝내 아들을 찾았다.리명뢰와 곽병병은 아들을 데리고 공개적으로 동거했다. 2007년 10월 17일, 아들이 된감기로 병원에 입원했다. 검사에서 아들의 혈형은 O형이였다. 리명뢰는 자신의 혈형이 AB형이고 곽병병의 혈형은 A형이란것을 알고있었다. 부모의 혈형이 AB형과 A형이면 자식의 혈형이 절대 O형으로 될수 없는 일이다. 의심이 들어 아들을 데리고 DNA검사를 해본 결과 아들은 리명뢰의 친혈육이 아니였다. 리명뢰가 따지고들자 곽병병은 얼버무리기만 했다.“어찌 이런 일이…나도 몰라요.”사실 곽병병은 리명뢰와 사귀면서 이전의 남자친구 조붕과의 관계를 철저히 끊지 않았다. 지어 리명뢰가 사준 아빠트에서 그 남자와 두번 잔적이 있었는데 그때 임신되였던것이다. 곽병병은 그런줄도 모르도 리명뢰의 아이라고 생각했다. 후에 최평과 최균이 석방되였다. 리명뢰는 자신의 잘못을 뼈저리게 뉘우치면서 안해를 찾아가 용서를 빌었다. 곽병병은 아들을 데리고 이 도시를 떠났다.   연변라지오TV신문    
97    등소평생애의 마지막 5년 댓글:  조회:4776  추천:0  2010-01-25
1997년 2월 19일, 등소평이 세상을 떴다. 등소평이 우리 곁을 떠난지도 어느새 12년이 된다. 중국 개혁개방의 총설계사 등소평은 탁월한 지도력 및 과인한 용기와 모략으로 중국을 이끌어 전세계를 진동시킨 전대미문의 변혁을 가동했다. 30여년간의 개혁과 개방을 경과하여 지금 중국은 천지개벽의 변화를 가져왔다. ▶80고령에 다시 개혁을 호소 1992년 1월 2일, 등소평은 인민대회당 118대청에서 “계획과 건강”컵 로동지들의 브리지( 牌)시합에 참가했다. 이 시합은 등소평이 1984년에 발기하여 조직된것이다. 시합결과 등소평이 관군(6개 기술등급중 세번째 등급)을 획득했다. 대회에서는 등소평에게 “브리지대사”란 칭호를 수여했다. 등소평은 이때 88세였으나 몸은 여전히 건강했다. 반달이후 그는 남방으로 달리는 렬차에 몸을 실었다. 이번 격정이 넘쳐흐르는 개인려행은 중국의 “활력”을 회복시켰다. 당시 등소평의 강렬한 개혁결심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심수를 떠날 때 등소평은 심수시민들앞에서 심수시당위서기에게 “당신들은 다른 곳보다 좀 더 빨리 진행하십시오”라고 부탁했다. 당시 등소평의 남방순방“목표”는 개혁을 가속화하는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개혁을 담보하는것이였다. 등소평의 과거 일화와 마찬가지로 이번 려행도 전기적색채를 띠였다. 심수 선호식물원에서 그는 처음으로 “발재수”를 보았다. 그는 이 나무를 보고 “전국인민들이 다 이 나무를 심으면 좋겠소. 전국인민들이 다 부자로 되게 말이요.”라고 말했다. 그는 심수의 고층건물우에 올라 향항을 바라보았다. 주해에서 등산할 때 경호원은 등소평에게 원래의 등산길을 따라 하산할것을 건의했다. 그러나 등소평은 원래의 등산길을 선택한것이 아니라 새 길을 선택했다. 그는 “나는 되돌아가는 법이 없소”라는 의미심장한 말로 경호원의 건의에 대답했다. 심수, 주해, 광주와 상해에서 그는 가는 곳마다 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자본주의도 계획경제가 있고 사회주의도 시장경제가 있다는 말을 여러번 강조했다. 이번 려행은 비밀리에 진행되였다. 향항의 매체에서 일정한 보도를 하긴 했지만 등소평 본인은 신화사에서 자기의 려행소식을 내는것에 동의하지 않았다. 3월상순에 중공중앙 정치국에서 련속 이틀간이나 회의를 개최하여 등소평의 남방순찰시의 담화를 학습했다. 그해 6월 9일에 국가주석 강택민이 내부회의연설에서 처음으로 “사회주의시장경제”란 개념을 제출했다. 등소평은 이 개념을 정식으로 사용할것을 동의했으며 그해에 소집하는 중공14차 대표대회에서 이 개념을 도입할것을 제의했다. 그리하여 14차 당대표대회에서 “사회주의 시장체제”란 제기법을 더 선명하게 개혁성을 띤 “사회주의시장경제”로 대체했다. 1992년부터 1997년까지 등소평은 특수한 사명을 완수한후 점차 력사무대에서 물러났고 조용히 평범하게 인생의 마지막 세월을 보냈다. 그러나 새로운 시대, 새로운 규칙과 질서 역시 점차 정식으로 가동되였다. ▶ “나는 이미 답장을 바쳤다” “한 국가의 운명이 한두사람의 명망에 걸려있다면 그것은 건강하지 못한것이며 아주 위험한것이다.” 등소평은 1989년 6월 16일에 담화중에 이 말을 했다. 14차 당대표대회를 마칠 때 등소평은 딸 등용의 부축을 받으며 인민대회당으로 와서 대표대회에서 새로 당선된 중앙정치국 위원들을 접견했다. 이것은 등소평의 일생중에서 마지막으로 공공장소에 나타난 중요한 한차례 행사였다. 이로써 그의 “계획”은 기본상 결속되였다. 그는 진정한 평민백성으로 돌아왔다. “남방순찰”시 상해에서 보여준 모습처럼 진정한 평민백성으로 돌아온것이다. 그날은 정월 대보름이였다. 그는 거리에 가서 “물건을 구입”하려 했다. 신변일군이 그에게 상해제1백화상점을 선택해주었다. 그는 오방국한테서 10원을 꾸어 손자벌이 되는 맹맹과 양양에게 연필과 고무지우개를 사주었다. 그는 평민백성이 되여 매대에서 다른 사람과 함께 물건을 사는것이 아주 재미있다고 말했다. 숙소로 돌아오자 등림이 “오늘 상점에서 무엇을 보았습니까?”라고 물었다. “사람들을 보았다. 그러나 이후에는 상점에 가지 말아야 하겠다. 괜히 백성들을 떠들썩하게 만들어서는 안된다.”라고 대답했다. 그해 여름 그는 마지막으로 바다에서 수영했다. 북대하에서 그는 8번이나 바다물에 들어가 번마다 45분가량 수영했다. 미국의 어느 한 정치학교수는 근대중국을 총화하면서 “모택동, 류소기, 주은래, 등소평 그리고 손중산을 포함한 중국 지도자들은 다 중국에서 현대화를 실현하여 외래 제국주의의 통제에서 해방되려 했다”고 서술했다. 등소평은 주은래와 함께 “네가지 현대화”원칙을 기획하여 중국을 강대한 공업화국가로 건설할것을 추구하여왔다. 그후 개혁개방이후 그는 목표를 조절하여 아주 실제적인 “초요사회”를 건설하는것으로 항선을 바꾸었다. 1993년초 그는 중국공산당의 차기 령도집체에 “중국에 대한 책임문제에 한해 나는 이미 답장을 다 바친 사람이다. 이제부터 당신들이 잘해야 한다”라고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1994년 10월 1일, 북경 조어대 국빈관에서 등소평은 부축을 받으며 승용차에서 내린 다음 다시 밀차에 앉았다. 그는 국경불꽃을 관람한 다음 생전에 마지막 공개발표한 사진을 남겼다. 당시 그는 이미 90세고령이였다. 그날 밤, 등소평은 일생에서 마지막으로 영향력이 아주 큰 문장을 발표했다. 그는 국경만찬회에 출석한 박일파에게 위탁하여 축사를 대독하게 했다. 축사중 중앙정치국 성원과 전체 중국공산당 당원에게 “강택민동지를 핵심으로 하는 당중앙주위에 긴밀하게 단합하여야 한다”고 요구했다. 그후부터 등소평은 공개장소에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그가 국가책임을 새로운 령도층에 인수인계하는 작업은 끝났다. 국경불꽃이 북경의 밤하늘을 환하게 비추었다. 등소평은 중국개혁개방에 새로운 유전자요소를 주입했다. 차후에 중국에서 발생한 모든 변화에는 그의 영향이 깃들어있다. ▶생애 마지막의 청정함 북경 경산후가의 미량고 골목거리 3호에 검은 벽돌에 회색기와를 이은 집에 록음이 흘러넘치는 뜨락이 있다. 이곳에서 살고있는 등소평은 국가를 위한 일에 더는 참여하지 않고 만년을 보냈다.신화사 보도중에 이 뜨락은 자연계의 생기가 넘치는 곳이라고 쓰고있다. “석류과일이 주렁주렁 달렸고 맑고 밝은 록음이 2층집을 가리고있다. 뜨락 복판에 작은 련꽃못이 있다. 여름의 련꽃이 찬란하게 피였다. 못 중앙의 태호석을 타고 물이 졸졸 흐르고있었으며 반공중에 흐느적이는 나무가지에는 간혹 매미가 울고있었다.” 만년의 등소평은 취침전에 꼭 무협소설을 읽는것으로 잠을 청했다. 그러나 그는 많은 사람들의 인상과는 상반되게 평가했다. “무협소설의 가장 좋은 점은 다음에 또 읽을수 있게 쓴것이다. 깊이 생각하고 읽을 필요가 없다.” 이는 등소평이 등용에게 한 무협소설에 관한 평가다. 등소평생애의 마지막 3년간의 내용은 “등소평년보”중 얼마 안된다. 국가를 위해 일을 하지 않기로 한이상 등소평의 생활은 아주 평범하고 별로 기이한 내용이 없다. 등림은 텔레비죤기록편으로 “등소평의 하루”라는 내용을 찍으려고 했는데 몇번이나 시도해보았지만 끝내 실패하고말았다고 소개했다. 등소평의 일상생활이 너무 규칙적이며 평범해서 별로 남길만한 장면이 없었다는것이다.   “희극적인 장면을 찾고 아주 재미가 있는 장면을 고르려고 했지만 그만 실패하고말았다.”이렇게 말하는 그는 “몇번이나 시험해보았지만 종내 성사하지 못했다”고 이실직고했다. 등소평은 여전히 담배를 피웠다. 그해 12월 22일, 페부가 감염되여 중국인민해방군 총병원에 입원하게 되였다. 그리고 이듬해 2월 7일에 퇴원했다. 미국 한 방송회사의 주최자 메크 화래이스가 발견한것과 마찬가지로 등소평은 담배려과부분이 담배부분보다 긴 특제담배를 피웠다. 1996년 12월 22일, 등소평은 병이 도져 또다시 해방군 총병원에 입원했다. 이때 그의 생명은 최후의 두달밖에 남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다 하지 못한 사업은 아직도 많고 많았다. 작은것은 중국의 축구문제이고 큰것은 정체체제개혁이였다. 등소평은 입원했을 때 텔레비죤에서 “등소평”이란 기록편을 보았다. 간호원들은 후에 등소평이 자기에 관한 기록편을 보고 얼굴이 붉어졌다고 피로했다. 두달후 등소평은 서거했다. 그해 여름 중국정부는 향항의 주권을 행사하는것을 회복했다.많은 사람들은 텔레비죤에 나오는 등소평의 거처에 있는 울창한 록음을 자랑하는 청송, 해당화와 앵두의 싱싱함을 잊지 않을것이다. 여기서 위대하면서도 평범한 한 로인이 일생의 마지막 5년이란 세월을 보냈다.   연변라지오TV신문    
96    해하의 랑만적인 사랑이야기 댓글:  조회:3709  추천:0  2010-01-21
95    10년만에 “원쑤”를 만난 뒤 댓글:  조회:4114  추천:2  2010-01-18
10년전에 나어린 리청청은 성소재지에서 가정보모로 일했다. 그녀는 녀주인의 학대를 받다못해 분연히 뛰쳐나왔다. 10년이 지난후 녀사장으로 된 리청청은 가정보모를 구하려고 로무시장에 나갔다가 당년의 녀주인 동춘교를 만났다… ▲ 주인의 학대를 받다못해 뛰쳐나가다 1997년 음력설, 16살도 안되는 리청청은 부모들이 리혼하자 갈곳이 없어 외할머니집에 얹혀살게 되였다. 그녀는 공부를 하고싶어도 계속할수 없는 처지여서 일자리를 찾으려고 강서성 상률현에서 남창시로 갔다. 처음에 그녀는 사촌오빠 양정호를 따라 장식회사에서 일했다. 하지만 일이 너무 힘들어 가정보모일자리를 찾아나섰다. 로무시장에 나가 구직패쪽을 들고 서있는데 30살쯤 되여보이는 한 녀자가 다가오더니 그녀를 보고 말했다. “너 집안일을 하고 아이를 돌볼수 있겠니? 너 이름이 뭐지?”“난 리청청이라 불러요. 아지미, 난 뭐든지 다 할수 있어요.”녀주인은 온순하고 령리해보이는 리청청을 마음에 들어했다. “먹여주고 재워주겠으니 매달 400원이면 어때? 할수 있겠니?”“좋아요. 할수 있어요.” 동춘교라고 부르는 이 녀주인은 아동복장도매상으로서 남편 범성방은 택시를 몰고 아들 범매는 세살이였다. 리청청은 날마다 아이를 유치원에 데려가고 데려오고 남새를 사들이고 집안을 청소하고 밥을 지어야 했다. 때로는 장사일때문에에 몸뺄새가 없는 녀주인에게 점심밥을 날라가기도 했다. 비록 매일 집안일을 하느라고 지칠대로 지쳤지만 조금도 원망하지 않았다. 범성방은 날마다 아침일찍 나갔다가 저녁늦게야 들어왔는데 집안이 환하고 청청이가 아이와 잘 놀아주는것을 보고 늘 엄지손가락을 내들었지만 녀주인은 칭찬 한마디 없이 항상 굳은 얼굴로 청청을 대했다. 어느날 저녁식사후 청청이 범매를 데리고 밖에 나가 산책을 했다. 광장에서 많은 애들이 뛰놀고있었다. 갑자기 범매가 미끄럼대를 타고 내려오는 한 아이에게 부딪쳐 넘어졌는데 이마가 다치여 멍이 들었다. 당황해난 청청은 아이를 안고 집으로 돌아와 약을 발라주었다. 동춘교는 아들애가 다친것을 보고 다짜고짜 청청의 귀쌈을 때리면서 욕설을 퍼부었다. “빌어먹을년, 아이를 어떻게 굴었기에?!”여태껏 가난하게 살았어도 청청은 누구한테 매를 맞아본적이 없었다. 그날은 바로 그녀의 16살되는 생일날이였다. 서러워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어느날 동춘교는 청청을 보고 고기와 남새를 사오라고 했다. 그런데 그녀는 물고기가 너무 작다느니 근수가 모자란다거니 하면서 가탈을 부렸다. 청청은 미안해하며 사정했다.“미안해요. 오늘 비가 너무 많이 내려 좀 늦게 시장에 갔댔어요.”“오, 일부러 눅거리를 사오고 중간에서 내 돈을 떼먹은 모양이구나?”“뭐요? 전 여직껏 남새를 사고 남은 돈은 일전도 빠짐없이 돌려드렸어요.”“네가 내 돈을 떼먹은게 틀림없다. 거지같은년, 큰돈이 욕심나면 그만두고 아예 거리에 나가 몸이나 팔아!” 이 한마디는 비수처럼 청청의 가슴을 찔렀다. 극심한 인격모독을 더는 견딜수 없었다. 청청은 분연히 동춘교네 집을 뛰쳐나와 장대같이 쏟아지는 비속으로 사라졌다. ▲ 10년후 가정보모가 녀보스로 되다 리청청은 비오는 거리를 정처없이 걸었다. 갑자기 배가 고파 한 간이음식점에 들어가 칼국수 한그릇을 먹고있는데 공교롭게도 양정호네가 들어섰다. 청청이가 울면서 하소연하니 양정호의 친구들은 분해서 펄펄 뛰였다. 청청은 다시 사촌오빠를 따라 장식회사에 들어가 일하기 시작했다. 양정호는 그녀더러 친구인 장파한테서 기술을 배우라고 했다. 이를 악물고 버텨냈더니 몸은 휠씬 야위고 얼굴색이 검어졌지만 되려 더 건강하고 예뻐지는것이였다. 청청은 모든 장식기술을 배워냈을뿐만아니라 장식재료의 종류와 가격까지 척척 외울수 있게 되였다. 2000년, 양정호와 장파는 자체로 장식회사를 꾸렸다. 그들은 품질제일의 경영원칙을 지켰기에 남창의 장식시장에 발을 튼튼히 붙일수 있었다. 회사를 더욱 크게 발전시키려고 양정호와 장파는 2005년에 회사를 가르기로 했다. 양정호가 원래의 회사를 관리하고 장파는 장식재료공급회사를 새로 내오기로 했다. 이때에 와서 청청과 장파는 련애하는 사이였다. 장파는 청청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청청은 꼼꼼하고 령리한 사람이요. 당신이 경영하오. 난 옆에서 거들어줄게.”리청청은 사양하지 않고 회사의 일을 조리정연하게 밀고나갔다. 장파는 주동적으로 영업허가증에 있는 법인대표의 이름을 리청청으로 고쳐놓았다. 2002년에 장파와 청청이는 결혼식을 올렸다. 2년후 아들 장공이 태여났다. 몇년간 분발한 보람으로 그들은 자기의 회사는 물론 아빠트를 마련하고 자가용차까지 사놓았다. 2005년초, 장식일에 더욱 바빠진 청청은 가정보모를 찾아 아들애를 돌보게 하려고 로무시장으로 갔다. 그런데 구직패쪽을 들고 서있는 동춘교와 마주칠줄이야 어찌 알았으랴! 동춘교는 그녀를 보자 피하려고 했다. 청청은 웃음을 담뿍 담고 뒤쫓아가 물었다. “동아지미, 아지미가 여긴 웬일이죠?”동춘교는 대답대신 눈물부터 흘렸다.“청청이, 난 팔자가 사나운 녀자라오…”“나중에 천천히 이야기합시다. 내가 가정보모를 찾고있는중인데 마침 잘됐네요. 우리 집으로 가자요.”동춘교가 우물쭈물하자 청청은 열정적으로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 10년후 신분이 엇바뀌다 청청의 집에 들어선 동춘교는 자기 눈을 의심할 지경이였다. 당년의 애어린 가정보모가 지금은 으리으리하게 사는 녀주인이 되였던것이다. 그녀는 차물을 마시면서 청청에게 그동안 어떻게 지내왔는가고 물었다. 청청은 자기가 지나온 세월들을 숨김없이 들려주고나서 동춘교의 처지를 물었다. 동춘교는 눈물범벅이 되여 “청청이, 내가 그때 청청을 못되게 굴었더니 벌받았나보오…”라고 말하면서 자기의 신세를 하소연했다. 당년에 청청이 집을 뛰쳐나간후 동춘교는 파출부를 청하여 아이를 데려가고 데려오게 하면서 자기는 그냥 도매시장에서 바삐 돌아쳤다. 어느날 점심때 남편 범성방은 손님을 싣고 공항으로 갔다. 그런데 라지오에서 갑자기 놀라운 뉴스가 방송되였다. 한 파출부가 유치원에서 아이 셋을 데리고 도망쳤는데 그중에는 범씨성을 가진 아이도 들어있다는것이였다. 범성방은 30킬로메터 떨어진 공항에서 나는듯이 시내로 달려와 동춘교를 태운후 유치원쪽으로 불이 펄 나게 차를 몰았다. 그런데 알아보니 유괴된 아이는 자기 집 아이가 아니였고 범인은 경찰에게 덜미를 잡힌 뒤였다. 공연히 놀란 동춘교는 갑자기 부랴부랴 달려오느라고 가게문을 걸지 않은것이 생각났다. 그들 부부는 아이를 유치원에서 데려내온후 다시 도매시장쪽으로 나는듯이 달렸다. 그날 비가 퍼부어 길이 아주 미끄러웠다. 범성방의 택시는 갈림길어구에서 큰 화물차의 뒤꽁무니를 들이박았다. 조수석에 앉았던 아들애는 당장에서 죽고 범성방은 중상을 입었으며 뒤좌석에 앉은 동춘교가 경상을 입었다. 범성방은 병원에서 20여일간 구급치료를 받았으나 끝내 사망되고말았다. 동춘교는 남편을 구하려고 모든 가산을 다 팔아 치료비로 밀어넣었는데 결국 사람도 재산도 다 잃고말았다. 청청은 범씨네 부자가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 동정의 눈물을 금치 못했다. 그녀는 동춘교에게 현실을 받아들이고 굳세게 살아가라고 권고했다. 그러면서 연분이 있어 다시 만났으니 자기 집에서 일하면 절대 섭섭하게 굴지 않겠다고 위안했다. 2007년 9월에 장공은 집부근에 있는 갓 개업한 전탁유치원에 가게 되였다. 일자리를 잃게 된 동춘교가 수심에 잠겨있었다. 이때 청청은 그녀를 보고 자기네 회사에서 일하지 않겠는가고 물었다. “10년전에 난 청청을 때리고 욕했댔소. 너무 인정머리없이 굴었댔소. 그런데 내가 이 모양이 되였는데 청청은 앙갚음을 할 대신 이렇게 잘 대해주니 도무지 그 뜻을 알수 없단 말이요.” “사실 나도 한동안 아지미를 미워했댔어요. 그런데 그건 10년전의 일이예요. 그리고 만일 당시 아지미집에서 뛰쳐나오지 않았다면 오늘날 내가 있을지도 모르죠. 10년후에 이렇게 또 만나니 연분이 아닌가요? 더군다나 아지미가 혈육들을 잃고 가정까지 파탄되였는데 어찌 계속 미워할수 있겠어요?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는 연분이 가장 소중하지요.”   “맞는 말인가보오. 사람의 연분은 하늘이 정해주는거지.”청청은 호탕하게 웃으면서 말했다.“그래요. 동아지미, 오늘부터 우리 절대 지난 일을 꺼내지 말자요. 그렇게 할수 있겠죠?”청청은 손을 내밀어 동춘교와 따뜻한 악수를 나누었다. 선량하고 너그러운 청청의 앞에서 동춘교는 더는 솟구치는 눈물을 걷잡을수 없었다… 연변라지오TV신문    
94    제갈량과 못생긴 안해 황월영 댓글:  조회:4013  추천:0  2010-01-14
랑재녀모, 즉 남자는 재능, 녀자는 용모가 중요하다는 말이다. 하지만 삼국시대 촉한의 정치가이자 전략가인 제갈량은 못생긴 안해를 얻은것으로 력사에 유명하다. 제갈량의 안해 황월영은 면남(沔南)의 이름난 명사 황승언의 딸이였다. 황월영은 어려서부터 령리하고 학문에 능했지만 키가 작고 머리가 노란데다가 얼굴이 검어 생김새가 매우 추했다. 하여 18살이 되였으나 혼사말이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황승언은 일찍부터 제갈량이 마음에 들었지만 외모나 기량이 더없이 출중했던 그에게 차마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러던차 하루는 제갈량을 만나서 그의 의중을 떠보았다. “군이 안해를 고른다면 몸은 루추하고 머리는 노란색이며 얼굴은 검지만 재능이 있는 녀자를 배필로 맞을수 있겠는가?” 제갈량은 좋다 싫다 대답을 하지 않았다. 황승언이 찾아온 사실을 안 제갈량의 형수는 시동생에게 황월영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넌지시 물었다. “생원도 인젠 장가갈 나이가 되였잖아요? 황승언이 자기 딸을 주고싶어하는데 생원은 어떻게 생각해요?” 그러자 제갈량은 형수를 보고 이렇게 대답했다. “모두들 누런 머리에 얼굴은 검어 추하기 이를데 없다고 합디다. 저도 직접 만나보지 못해서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가 쓴 시들을 본적이 있는데 그 뛰여남에 놀랐습니다.” “그가 쓴 시가 마음에 들면 사람을 한번 직접 만나보는것이 어때요? 시를 잘 쓰면 학문도 있어야 하겠는데 안그래요?” “형수님이 그렇게 생각하면 한번 만나보겠습니다.” 제갈량이 월영의 지혜와 용기에 탄복하다 형수의 권고로 제갈량은 황승언의 집에 한번 다녀오기로 했다. 그 당시 류비, 관우, 장비가 여러번이나 제갈량을 찾아와 힘을 합쳐 천하를 바로잡기를 원했는데 제갈량은 동의할지 말지 고민중이였다. 제갈량은 황승언을 찾아 상의도 할겸 겸사겸사해서 그의 집을 찾아갔다. 황승언의 안내로 집에 들어간 제갈량이 집안을 살펴보니 벽에 화법이 뛰여난 그림 한점이 걸려있었다. 제갈량이 벽화를 감상하고있는데 황승언이 딸이 그린것이라고 소개했다. “딸이 제멋대로 그린것이니 비웃지 말게.”황승언은 또 창밖에 탐스럽게 피여난 꽃들을 가리키며 자랑했다.“저것도 내 딸이 심고 가꾼것일세. 어떤가? 꽃들이 아름다운가?”제갈량은 황월영의 재능에 감탄하고있었다. “따님이 재간이 많은가 봅니다. 그림도 잘 그리고 꽃도 잘 가꾸니 말입니다.”“내 딸의 자랑은 아니지만 그런 재주가 있는가 보오.”이때 황월영이 방에서 나왔다. 제갈량은 그의 추한 외모에 대해서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제갈량은 황승언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류비, 관우와 장비가 와룡산으로 여러번 저를 찾아온적이 있습니다. 그들을 따라 세상을 다스리는데 나서야 할지 말아야 할지 결정을 내릴수가 없습니다. 선생님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저에게 방향을 가리켜주십시오.”황승언은 기뻐하며 되물었다.“류비가 과연 자네를 찾았었군. 사람보는 안목은 있단 말이야. 먼저 자네생각부터 들어보고싶네.”그러자 제갈량은 자기생각을 털어놓았다. “저는 사실은 조용한 시골에서 농사나 짓고 글이나 읽으면서 세상이 돌아가는것을 지켜보고싶습니다. 복잡한 이 세상에서 이름이 알려지기를 바라지도 않고 그냥 목숨이나 부지하면서 평화로운 삶을 살가 합니다.”이때 옆에서 듣고있던 황월영이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지금은 님이 이름을 날리려는것이 아니라 세상이 당신을 필요로 하고있습니다. 이는 완전히 다릅니다. 그리고 복잡한 세상에서 개인목숨이나 유지하려는것은 잘못된 생각이라고 봅니다. 또 쉬운 일도 아닙니다. 공용(孔融)이나 양수( 修)를 막론하고 예로부터 이런 생각을 품었던 문인들을 보면 결국에는 감금되지 않으면 살해당하고 아니면 류배를 떠나고…평화롭고 자유로운 생활을 하신분이 계십니까?” 황월영의 권고로 세상에 나가다 황승언은 딸이 자신의 마음속말을 하는지라 연신 머리를 끄덕였다. 제갈량도 처녀의 대담함과 슬기로움에 또한번 놀라게 되였다. 황월영은 계속 말을 이었다. “그건 마치 보석이 흙속에 파묻힌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을 깊이 감추려 하실 필요가 있습니까?” 듣고있던 제갈량의 얼굴에 미소가 비꼈다. 흥분의 기색이 력력했다. 그는 황월영을 한번 바라보고는 이렇게 말했다. “월영처녀의 말씀을 들으니 느끼는바가 많습니다. 사실은 저도 뜻을 펼쳐 크게 해보려고 했으나 험난한 과정과 실패가 두려웠습니다. 평생 밭과 씨름하자니 그것도 내키지 않았습니다. 처녀의 몸으로 이런 깊은 생각을 하시다니 정말 탄복됩니다. 저도 생각을 고쳐 다음에 류비 등이 다시 찾아오면 얘기를 나누어보고 생각이 같다면 기꺼이 따라서 가리다. 흥망성쇠는 제 개인의 의지로 좌우지되는것이 아니기때문에 신경쓰지 않으렵니다.” 와룡산에 돌아온 제갈량은 황월영을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했다. 그들의 혼인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결혼후 얼마 안되여 제갈량은 뜻을 이루기 위해 류비를 따라나섰다. 남편이 항상 전쟁터에 나가있었지만 황씨부인은 근면한 생활을 하면서 내조를 잘해 제갈량의 걱정을 덜어주고 훌륭한 원군이 되였다. 제갈량의 친구들과 이웃들의 어려움을 만사를 제쳐놓고 도와주었으며 성품이 따뜻하고 친절해 “공명이 마누라 고르는것을 배우지 말아야 한다. 황승언의 딸과 같은 추녀를 얻을지도 모르니깐”라고 말하며 비웃던 사람들도 후에는 모두가 그녀를 따르고 존경했다고 한다. 제갈량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던 현모량처 황씨부인은 재주가 비상했다. 후날 사마의와 싸울 때 군량운반장치인 “목우류마가 등장하는데 제갈량의 발명품으로 알려져있지만 사실은 제갈량의 안해가 개발한것이였다고 한다. 제갈량이 싸움터에까지 가지고다니던 부채에는 안해가 가르쳐준 전략이 적혀있었고 병사들의 병을 “치료하기 위한 “제갈행군산”과 “와룡단”도 황씨부인이 만든것이라고 한다. 제갈량과 그의 부인은 금슬이 매우 좋았다. 그들은 슬하에 아들 둘, 딸 하나를 두었는데 모두 머리가 비상하였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46세에 낳은 늦둥이 제갈첨은 후에 나라의 공주와 결혼하였는데 용감무쌍한 장군으로서 전쟁터에서 불행히 목숨을 거두었다. 황씨부인에 대해 일부 야사에서는 절세미인으로도 소개하고있다. 시국이 어지러울 때라 황월영은 얼굴에 진흙을 발라 자기의 미모를 감추었다고 한다. 그리고 제갈량의 앞에서만 경국지색의 미모를 드러냈다고 한다. 어찌됐건 지모가 뛰여난 제갈량과 탁월한 현모량처 황월영은 그야말로 천하에 길이 빛날 천생배필임에는 의심할바가 없다.   《상해경제》    
93    강청의 일생 댓글:  조회:2617  추천:0  2009-12-08
강청의 어린시절 강청(1914~1991년)은 문화대혁명기간에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던 “4인방”의 핵심인물로서 본명은 리운학(李云 )이고 산동성 제성( 城)출신의 녀자였다. 제성은 산동남부의 회하(淮河)상류에 위치한 현으로 밀, 고구마, 콩, 수수, 옥수수 등의 주산지이다.강청의 할아버지는 원래 2만여평의 토지를 소유한 지주였으나 아버지 리덕문(李德文)대에 이르러 파산하였다. 리덕문의 본처는 원래 지주집안의 딸이였으나 늙고 못생겼다는 리유로 리덕문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 그래서 리덕문은 50세에 다시 결혼하여 20여세의 젊고 예쁜 란씨를 첩으로 삼았다. 1914년 3월, 란씨는 딸을 낳았는데 그녀가 바로 몇십년후 중국대륙을 떠들썩하게 흔들었던 리운학(강청)이다. 당시 산동지역에는 여전히 전족이라는 악습이 성행하고있었다. 리운학은 6살때 전족한 발이 너무도 아파서 밖에서 놀 때는 몰래 전족을 풀어버리고 집에 올 때 다시 전족을 하군 했다. 이러한 일은 당시로서는 감히 상상도 할수 없는 대담한 행동이였다. 리덕문은 성미가 급하고 거칠어 걸핏하면 자기 안해에게 손찌검을 하군 했다. 어느해 정월 대보름에 리운학의 어머니 란씨는 실수로 넘어져 그릇을 깨뜨렸다. 이에 화가 난 리덕문이 삽으로 마구 때리는 바람에 란씨는 손가락이 부러졌고 놀라서 울던 리운학은 따귀를 얻어맞아 이가 부러졌다. 더이상 고통과 멸시를 당할수 없다고 생각한 란씨는 딸을 데리고 그 집을 나왔다. 그러나 아무것도 가진게 없었던 란씨는 생계를 위하여 남의 집 종살이라도 해야 했다. 그녀는 리운학을 친척집에 맡겼는데 이로부터 리운학에게는 가난하고 힘든 생활이 계속되였다.   영화배우 람평에서 모택동의 안해 강청으로 1926년, 12살의 리운학은 어머니와 함께 천진의 언니네 집으로 가서 살았다. 1929년 봄 리운학은 형부 왕극명(王克 : 당시 봉계군벌의 군관)이 제남으로 전근되여 그녀도 언니식구를 따라 제남으로 갔다. 15살되는 해에 리운학은 산동실험극원에 들어가 연극과 고전음악을 배웠다. 실험극원 입학은 그녀의 인생을 바꾸는 첫번째 전환점으로 되였다. 연극배우 리운학이 없었다면 후날 영화배우 란평이 있을수 없었기때문이다. 1930년, 실험극원은 정국의 변화로 문을 닫게 되였다. 1931년 봄, 리운학은 청도에 있는 스승 조태모(당시 청도대학교 교장)를 찾아갔다. 그의 배려로 리운학은 청도대학 도서관에서 일했다. 당시에 그녀는 조태모의 처남 황경과 사랑에 빠져 동거생활을 하였으며 조태모의 안해이자 황경의 누나인 류산을 따라서 전한이 창설한 극단 남국사(南 社)에 들어갔다. 1933년 2월, 19살의 리운학은 황경의 소개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그해 7월, 반역자의 밀고로 황경이 체포되자 리운학은 상해로 피신했다. 상해에서 그녀는 전한과 그의 동생 전원의 도움으로 서명청이 책임자로 있는 “신경공학단"에서 교편을 잡았다. 1933년 겨울, 체포되였던 황경이 석방되여 상해로 돌아왔다. 그러나 황경의 부모님의 반대로 그들은 결혼식을 올리지 못하고 따로 집을 구하여 다시 동거를 시작하였다. 1934년 1월 28일, 상해에서 “1.28” 항전2돐을 기념하는 시위에 참가했던 리운학과 황경은 체포될 위기에 처해 북경으로 피신했다. 북경에서도 그들은 계속 동거했다. 황경의 부모가 둘이 같이 있는것을 반대하면서 생활비를 보내주지 않았다. 리운학은 황경의 곁을 떠나기로 결심하고 1934년 5월중순에 상해로 돌아갔다. 1934년 10월말, 리운학은 상해시경찰국에 약 1개월간 수감되였다가 기독교 상해녀성청년회의 도움을 받아 보석으로 풀려나왔다. 이때 마침 황경이 상해로 돌아왔다. 갈곳이 없었던 리운학은 황경의 큰어머니네 집에서 황경과 동거했다. 1935년 봄, 그녀는 상해과외극인협회에 들어가 유명한 희곡 《인형의 집》의 녀자주인공 노라역을 맡게 되였다. 이것은 그녀의 인생을 또다시 바꾸는 중대한 전환점이 되였다. 이때로부터 리운학은 예명을 람평이라 하였다. 그녀는 당시 상해영화계에서 영향력이 있는 영화평론가 당납과 사랑에 빠졌다. 1936년 4월 21일, 두 사람은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으나 결혼등록을 하지 않았다. 1937년 5월, 리운학은 당납과 헤여지고 상해 연극계에서 매우 명망이 높던 연출가 장민(章泯)과 동거했다. 1937년 7월, 상해에서 더이상 발붙일 곳이 없게 된 리운학은 명배우의 꿈을 접고 도망치듯 상해를 떠났다. 이때 그녀는 황경이 연안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연안으로 갈 결심을 하고 서안에 있는 서명청을 찾아갔다. 서명청은 엽검영의 부인과 친분이 깊었다. 엽검영부인의 소개로 리운학은 서안팔로군사무소에서 사업하는 주은래의 부인 등영초를 만났다. 등영초는 리운학이 연안으로 갈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1937년 8월말, 리운학은 연안에 도착하여 제3초대소에 투숙하였다. 그녀는 숙박부에 이름을 적을 때 “람평” 대신 “강청”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강청은 연안에 도착한후 곧장 심사를 받았다. 2개월간의 심의를 거친후 강청은 황경의 도움으로 다시 당적을 회복하고 1937년 11월에 중국공산당 중앙당교에 입학하여 6개월간의 교육을 받았다.1938년 7월 7일, “7.7항전” 1돐기념행사가 연안에서 열렸다. 이날 오전에는 모택동의 보고가 있었고 오후에는 문화행사가 있었는데 이 문화행사에서 강청은 경극 《타어살가》의 주역을 맡아 관중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공연을 끝까지 관람한 모택동은 배우들을 격려하기 위해 분장실로 들어가서 강청과 악수를 하고 담소를 나누었다. 이로써 강청과 모택동의 력사적인 만남이 이루어졌다. 강청이 연안으로 갔을 때 모택동의 두번째 부인 하자진은 서안에 있었다. 당시 강청은 다른 사람에 비해 용모가 출중한편이였으며 연기도 뛰여났다. 지금은 그녀를 삼류배우라 폄하하는 사람도 많지만 그 당시의 상황에서 그녀는 분명 연안과 섬북지역의 인기배우였다. 그녀는 연기뿐만아니라 노래도 잘 불렀으며 모택동은 그녀가 공연한 《타어살가》를 좋아했다. 1938년 8월, 강청은 군위원회사무실 비서로 발령받아 모택동과 함께 일할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였다. 모택동과 강청의 련애설이 퍼져나가자 반대하는 사람이 많았다.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에서는 모택동의 결혼문제를 토론에 붙여 모택동의 뜻에 따르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강청에 대해서는  “약법3장( 法三章)”을 규정했다. 첫째, 모택동과 하자진의 부부관계가 공식적으로 정리되지 않고 그대로 존재하는한 강청은 모택동의 부인으로 행세할수 없다. 둘째, 강청은 모택동의 일상생활과 건강을 책임지고 돌보아야 하며 차후 그 누구도 당중앙에 이와 류사한 요구를 제기할 권리가 없다. 셋째, 강청은 모택동의 사적인 업무와 생활에만 관여해야 하며 20년동안 당내의 어떠한 직무도 맡는것을 금한다. 당내의 인사문제와 정치활동에도 절대 참여할수 없다. 강청은 이 규정에 묶여 문화대혁명이 일어나기전까지는 어떠한 정치활동에도 참여하지 못했다. 1938년 11월, 강청은 24살에 자기보다 21살이나 많은 모택동(당시 45살)과 결혼식을 올렸다. 강청은 모택동과 결혼하기전에 이미 네번의 결혼경험이 있었으며 황경과 동거할 때는 임신도 하였으나 상해에서 수술로 락태시켰다. 그때 그녀는 배우활동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있었기때문에 아이를 원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모택동과 결혼한후에 그녀는 빨리 아이를 갖고싶어했다. 아이가 있으면 무료한 시간을 달랠수도 있고 더우기 “모택동의 정실”자격을 확실히 다질수 있다고 생각했기때문이다. 1940년 8월, 그녀는 마침내 딸 리눌을 낳아 모택동의 사랑을 받았다. 그후 그녀는 재차 임신을 하였으나 더 이상 아이를 갖지 않겠다는 생각에서 락태수술을 한후 다시 임신중절수술을 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창립된후 강청은 일을 하고싶다면서 공식적인 직책을 요구했다. 당에서는 신중한 상의를 거쳐 그녀에게 중국공산당 중앙선전부 영화처 부처장이라는 직함을 주었다.   잃어버린 황제의 꿈 1966년, 문화대혁명이 일어나자 강청은 “중앙문화혁명소조” 제1부조장 겸 대리조장을 맡아 실권을 장악했다. 그후 “중앙문화혁명소조”는 조직과 권한이 비대해져 중공중앙서기처와 중공중앙정치국을 압도했다.  1969년 4월 28일에 거행된 중국공산당 9기 1중전회에서 강청은 중공중앙정치국 위원으로 되였다. 1971년 9월 13일, 모택동의 후계자로 지목되였던 부주석 림표가 반란사건으로 사망되자 강청은 모택동, 주은래, 강생에 이어 서렬 4위에 올랐으며 1972년 1월에 강생이 병으로 은퇴한후 다시 서렬 3위로 올랐다. 림표사건이후 건강상태가 점점 악화된 모택동은 자신의 뒤를 이을 후계문제에 부딪치게 되였다. 당내에서 서렬 3위인 강청은 내심 자기가 후계자로 될수있다는 기대를 하였지만 모택동은 그녀를 안중에 두지 않았다. 1973년 3월, 강청은 서렬에서 한참 뒤로 밀려나고 모택동의 총애를 받는 왕홍문이 강력한 후계자로 부상되였다. 강청은 왕홍문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장춘교, 요문원과 함께 “4인방”을 결성하여 정치적주도권을 잡아나갔다. 1974년 6월, 암진단을 받았던 주은래의 병세가 위중해져 병원에 입원하였다.모택동과 주은래의 운명이 눈앞에 다가와있다는것을 감지한 강청은 그들의 사후에 정권을 장악할 새 내각을 구상하고 그것을 실행에 옮길 준비를 했다. 1974년 7월, 모택동은 중앙정치국회의를 소집한 자리에서 강청과 “4인방”의 정치적행동에 대하여 엄중히 경고하였다. 1975년 9월, 모택동의 병세가 더욱 위중해져 말을 잘 못할 정도였으며 주은래도 4차 수술을 받았다. 이때 모택동은 조카 모원신을 곁에 두고 자기와 중앙정치국사이의 특수련락원으로 삼았다. 모택동의 지시가 모두 모원신을 통해서 전달되게 된것이였다. 그러나 모원신은 강청을 어머니라고 부를 정도로 그녀와 아주 각별한 사이였다. 이 기회를 리용하여 강청은 모원신과 결탁하고 잠간동안 “최고지시”를 반포하는 대권을 장악했다. 1976년 1월 8일, 중국공산당 중앙부주석, 국무원총리, 전국정협주석인 주은래가 서거했다. 강청은 요문원을 시켜 전국언론에 주은래의 애도를 축소보도하라고 지시하며 “황제의 꿈”을 꾸었다. 화국봉은 모택동의 후계자로서 정국을 수습하면서 강청을 견제하였지만 강청은 그러한 화국봉을 안중에 두지 않고 모택동사후의 정권장악을 위한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1976년 9월 9일 새벽, 모택동이 서거한지 얼마 안되여 “4인방”이 타도되였다.1977년 7월, 중국공산당 10기 3중전회에서 강청의 당적을 영원히 박탈하고 당내외의 모든 직무를 해임한다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1981년 1월 25일, 중화인민공화국 최고인민법원 특별법정은 강청에게 반혁명집단 주범으로 사형을 선고하고 2년후에 집행하도록 하였다. 1983년 1월, 최고인민법원 형사법정은 판결문에서 그녀에게 내린 사형판결을 무기징역으로 감하고 모든 정치적권리를 종신토록 박탈한다고 선고하였다. 1991년 5월 14일에 강청은 감옥에서 자살했다. (중국의 어제와 오늘《주요인물》)
92    복수의 "꽃뱀 아줌마"로 된 41세 여인 댓글:  조회:3750  추천:0  2009-11-16
91    가족을 비춰주는 사랑의 별 댓글:  조회:3632  추천:0  2009-11-03
  림소영은 21살전까지는 용모가 매우 아름다운 처녀였다. 그리고 그녀에게는 잘 생기고 돈많은 남자친구도 있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22살에 들어선 1993년 봄에 그 모든것이 꿈처럼 사라져버렸다. 그것은 정말로 뜻밖의 재난이였다. 그날 림소영은 남자친구 방모와 함께 저녁을 먹었는데 방모가 2차로 춤추러 가자는것을 몸이 피곤하여 거절하고 집으로 돌아오려고 했다.   그런데 방모가 자가용차의 뒤쪽 화물칸문을 열고 꽃묶음을 꺼내들고와서 그녀에게 선사했다. 그리고 보석반지를 꺼내서 그녀한테 주면서 “난 소영이를 사무치게 사랑하오. 내가 소영이를 사랑하는 마음은 영원히 변하지 않을거요. 나는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기든지 소영이를 목숨처럼 사랑하며 아껴줄것이요.  소영이, 나한테 시집오라구”라고 열띤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그의 진정한 사랑에 감동되여 그가 끼워주는 반지를 말없이 받았다. 그후 방모는 자가용차로 림소영을 그녀의 세집까지 데려다주었다. 방모가 돌아간후 림소영은 미래에 대한 희망과 행복으로 가슴이 한껏 부풀어서 좀처럼 잠들수 없었다. 이리 뒤척 저리 뒤척하다가 새벽녘에야 잠이 들었다. 그러다가 비몽사건에 “불이야!”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정신이 몽롱하여 일어날수가 없었다.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일어나려고 했지만 몸이 생각처럼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밖에서 “저 집안에 사람이 있소”라고 소리치는 소리가 들리는듯했다.  그러나 그녀는 정신이 혼미해져 더이상 아무것도 모르는채 쓰러져있었다… 그녀가 정신을 차렸을 때 얼마나 한심한 일이 벌어졌는가?  그녀의 몸은 남경서흠화상병원에 누워있었다.   원래는 그녀의 옆집에 정신병환자가 살고있었는데 그날 새벽에 자신의 집에 불을 질렀던것이다.   그 불길이 재빨리 그녀의 집에까지 번져졌고 그 뜻밖의 화재로 그녀는 얼굴에 화상을 입어 아름다움을 잃고말았다. 림소영은 입원하여 처음 치료를 받을 때에는 육체의 고통에 모대기느라고 자신의 얼굴모습에 대해서는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점차 상처가 아물어가고 얼굴을 감은 붕대를 풀었을 때 그녀는 자신의 모습을 거울에 비춰보고 기절할번 했다.  의사와 부모가 사전에 사상준비를 시켰지만 그녀는 흉측하게 변해버린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일수 없어 자살하려고 하다가 어머니한테 발각되여 성사하지 못했다.  그녀의 유일한 희망은 방모였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방모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녀가 누구를 기다린다는것을 눈치챈 어머니는 “네가 혼수상태에 처했을 때 방모가 왔다갔다. 그는 네 얼굴이 화상을 입은것을 알고는 아무말도 없이 가버렸다”고 알려주었다.    그녀는 믿을수 없어 방모한테 전화를 걸었다. 방모는 “난 지금 출국준비를 하느라고 바쁘오”라고 한마디 하고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녀가 다시 전화를 걸었으나 전화는 이미 꺼져있었다.   절망한 그녀는 그날밤 아무도 몰래 남경장강대교로 나갔다. 그녀는 방모가 준 반지를 강물에 던져버리고나서 망망한 장강에 몸을 던지려고 했다. 그러다가 거기서 운명의 남자를 만났다.   그녀가 자살하려는것을 눈치챈 그 남자가 다리아래로 뛰여내리려는 그녀를 붙잡았던것이다. 사도준이라고 하는 그 남자는 1991년에 남경대학을 졸업하고 지금은 남경시의 어느 회사에 출근하고있었다.   그날 친구와 장강대교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그는 시간전에 먼저 와서 기다리다가 림소영이 자살하려는것을 발견했던것이다.  워낙 마음이 뜨겁고 남을 도와주기 좋아하는 그는 그녀가 얼굴에 화상을 입은것을 보고 자살원인을 대개 알아챘다. 림소영은 평소에 낯선 남자하고는 말도 하지 않았는데 처음 보는 사도준에게는 귀신에게라도 홀린듯 자신이 당한 불행에 대해 모두 털어놓았다. 사도준의 부드러운 말씨때문인지 그의 사람좋은 인상때문인지 그에게 무조건 믿음이 가면서 자신의 고통을 털어놓고 하소연하고싶었던것이다. 사도준은 그녀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처럼 생각하면서 친구와의 약속도 미루고 그녀를 한시간동안이나 위로해주고나서 그녀를 남경서흠화상병원에까지 데려다주었다. 그후 사도준은 매일 림소영의 병실로 찾아와서 그녀를 보살펴주고 위로해주면서 그녀에게 삶의 희망을 안겨주었다.   그리고 그녀가 퇴원하는 날에도 미리 세집을 맡아놓고 그녀를 세집에 데려다주었다.   림소영은 사흘후 부모가 고향으로 돌아고 혼자 남게 되자 갑자기 울고싶었다.   그러나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속세가 싫어졌다. 비록 사도준처럼 따뜻한 남자도 있지만 그는 필경 자신의 남자로는 될수 없지 않은가.   그녀는 출가하여 녀승이 되려고 마음먹고 퇴원하여 나흘째되는 날 아침에 문을 나섰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집에서 나가자마자 사도준과 마주쳤다. “아니, 어디로 가는 길이요?” 그녀는 사도준에게 거짓말을 할수 없었다. 그녀는 아무런 미련도 없는 속세를 떠나 녀승이 되고싶다고 했다.   사도준은 깜짝 놀라더니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집으로 들어가서 말했다. “왜 미련이 없는거요? 부모는 생각하지 않소? 그리고 나는… 나를 버리고가면 난 어떻게 하오?” “버리고가다니?  제가 어찌 도준씨를…” “난 소영이를 사랑하오! 소영이와 결혼하려고 마음먹고 반지까지 샀단 말이요.” 사도준은 림소영에게 금반지를 끼워주려고 했다.   림소영은 “이러지 마세요.   전 누구를 사랑할 자격도 없고 누구의 사랑을 받을 자격도 없는 녀자예요”라고 말하면서 뿌리쳐버렸다. “아니요.   소영이는 누구보다도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 녀자요!” “전 추한 녀자예요.   제 얼굴은…” “내 눈에 소영이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녀자요! 난 소영이를 놓아주지 않을거요.” “도준씨…” 림소영은 더는 자신을 억제하지 못하고 사도준의 품에 안겨 흐느꼈다. 1995년 10월 22일, 림소영과 사도준은 결혼식을 올렸다.   첫날밤 림소영은 남편의 품에 안겨 “당신은 녀승이 되려 했던 저에게 사랑한다는것이 얼마나 좋은것이고 얼마나 아름다운것인지 알게 해준 남자예요”라고 달콤하게 속삭였다. 결혼한 이듬해 림소영은 딸을 낳았고 2년후 또 아들을 낳았다.  그녀는 이제부터 정말로 아름다운 나날이 시작된다고 믿었다.   그런데 1999년에 사도준이 대장암진단을 받을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수술로 한쪽 대장을 잘라낸 사도준은 그후 기적적으로 건강한 생활을 했다.   그러나 몇년이 지나 다시 대장암이 발병하여 남은 한쪽마저 절제하는 수술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그런 수술을 받고도 사도준은 밝게 웃었다. 그는 자신의 상태가 호전되고있다고 굳게 믿고있는것 같았다.    그는 이제 병원신세를 더이상 질수 없다면서 퇴원하겠다고 고집했다. 몇개월만에 아이들을 만나서 기뻐하던 사도준은 이틀만에 고통을 못이겨 다시 병원으로 들어갔다. 검사결과 의사는 림소영에게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알려주었다.   앞으로 1년을 더 살기 힘들다는것이였다. 암세포가 온 내장에 퍼져서 암치료도 필요없으니깐 그냥 환자의 몸을 편하게 해주라고 했다. 림소영은 남편 몰래 병원복도에 나가 통곡했다.   하느님도 무심하지. 어떻게 이렇게 좋은 사람을 데려간단 말인가. 너무나 젊은 나이에 가는 남편이 불쌍하고 아빠없이 자라나게 될 아이들이 또 불쌍했다. 림소영은 더이상 남편에게 해줄것이 없었다.   다만 사랑하는 남편에게 그간 못했던 사랑을 표현하는것밖에 할것이 없었다. 그녀는 혼자의 힘으로 집에서는 아이들을 부양하고 병원에 가서는 남편을 보살펴주군 했다.   힘든 내색을 감추고 밝은 모습으로…하지만 사도준의 병세는 자꾸만 악화되여 이제 혼자서는 걸을수도 없고 배변도 혼자 힘으로 할수 없게 되였다.   하루가 다르게 고통속에 위축되여가는 남편을 옆에서 보고만 있어야 하는 림소영은 위로와 포옹외에는 해줄것이 없었다. 사도준은 림종을 앞둔 환자에게 해주는 신경절제수술의 힘으로 겨우 버텨갔다. 사도준도 림소영도 내색하지 않지만 너무나 슬펐다.   사도준은 림소영을 보면서 “미안하오.  아이들을 당신에게 혼자 맡겨놓고 가게 되여…”라고 겨우 알릴락말락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도준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이들의 울음에 가슴이 찢어지는것만 같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집에 아빠가 왔다고 발을 씻겨주던 딸아이,   손이 아빠만큼 컸다고 으쓱해하던 아들의 웃음이 먼 일만 같았다.   사도준은 안해의 손을 꼭 잡고있다가 갔다. 림소영은 아빠를 찾는 아이들에게 아빠는 하늘나라로 가서 별이 됐다고 알려주었다.   어느날 밤, 아이들은 하늘의 별을 쳐다보면서 물었다. “엄마,   하늘나라로 가서 별이 된 아빠,  어느 별이 아빠별일가?” “어느 별이 아빠별인지 알수 없지만 아빠는 틀림없이 우리를 보고계실거야. 그러니깐 우리는 아빠보기 부끄럽지 않게 잘 살아야 해.” 림소영은 아들과 딸의 손을 꼭 잡고 오래도록 하늘의 별을 바라보고있었다. 《품팔이》  
90    억만장자와 천만장자의 겨룸 댓글:  조회:3588  추천:0  2009-10-29
89    쵸몰랑마봉에 오른 신혼부부 댓글:  조회:4108  추천:0  2009-10-27
복건성 하포현에서 출생한 림도는 1995년에 상해의료기계고등전문과학교를 졸업한후 북경대학에 들어가 석사공부를 마치고 친구와 함께 북경에 회사를 세우고 의료기계를 경영했다. 그후 돈을 많이 벌어 집도 마련하고 자가용차도 갖추었지만 어쩐지 가슴속이 텅 빈것 같았다.   그는 울적한 가슴을 달래기 위해 등산도 하고 격검운동도 했다. 그는 서장등산학교에서 등산활동을 조직한다는 소식을 듣고 선참으로 등록했다. 2007년 10월 3일, 33살인 림도는 등산대원들을 따라 서장의 한 녀승암까지 왔다. 여기는 당구라산으로 오르는 해발 4700메터 되는 곳이였다. 림도가 풍막앞에서 쉬고있는데 갑자기 누군가 그를 부르는것이였다. “림도씨,    과일씨를 좀 줄수 없나요?”림도가 머리를 들고보니 조양이란 녀인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를 부르고있었다.   다시 보니 어디서 날아왔는지 입이 빨간 작은 새 한마리가 조양의 머리에 앉아 뭐라고 지저귀고있었는데 여간 귀엽지 않았다. 림도는 몇알의 과일씨를 조양의 손에 쥐여주었다.    조양이 웃으면서 과일씨를 쥔 손을 펼쳐들자 입이 빨간 작은 새는 그녀의 손바닥에 내려앉아 과일씨를 쪼아먹더니 그녀의 주위를 날아갔다 날아왔다 하면서 재롱을 부렸다. “정말 신기하오.   그 새는 조양이를 사랑하는 사람의 화신이 조양에게 청혼하러 온것이 아닐가?”그 말에 조양은 방그레 웃었다. 1972년에 출생한 조양은 대련시체육운동학교를 졸업한후 증권회사에 들어가 행정경리직을 맡았다.  온화하면서도 모험을 즐기는 그녀는 2006년 9월에 산악회의 회원들과 함께 해발 6178메터되는 청해옥주봉에 오르려고 했다.   그러나 해발 5350메터까지 올라갔을 때 폭풍우를 만나서 포기하고말았던것이다.  그후 등산꿈을 실현하기 위해 그녀는 사직한후 전문가를 모시고 정규적인 유산소훈련과 근력훈련을 받았다.“이번엔 꼭 성공할거예요!” 조양은 림도를 보고 힘있게 말했다. 그러자 림도는 두손가락으로 “V”자를 만들어보였다.이튿날,   등산대원들은 계속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림도와 조양은 다른 등산대원들을 멀리 뒤로 떨궈놓고 맨앞에서 올라갔다. 그들은 다른 등산대원들이 6시간만에 오를수 있는 거리를 4시간만에 올랐다.   그들은 풍막을 쳐놓고 해빛에 반짝이는 천연설산을 바라보면서 다른 등산대원들을 기다렸다. 갑자기 자그마한 물체가 길게 호선을 그으며 날아오더니 조양의 머리우에서 빙빙 돌기 시작했다. 바로 입이 빨간 새였다. 그 새는 해발 4700메터되는 곳에서부터 해발 5400메터되는 이곳까지 따라온것이였다. “허허, 조양의 친구가 따라왔구만!”림도는 흥분하여 소리치면서 재빨리 과일씨를 조양의 손에 쥐여주었다. 조양이 손바닥을 펼쳐들자 그 새는 그녀의 손바닥에 포르르 날아와서 과일씨를 쪼아먹기 시작했다. 조양은 너무도 기뻐서 방그레 웃었다.   그녀의 밝게 웃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는 순간 림도는 마음이 설레였다. 2007년 10월 5일, 등산대원들은 정상을 향해 오르기 시작했다.  해발 6000메터를 넘어서자 산체의 곳곳에 많은 균렬이 나타나 등산대원들은 간신히 한발작씩 오르기 시작했다. 림도는 주동적으로 조양에게 안전바줄을 매주면서 보살펴주었다. 두 사람은 먼저 해발 6206메터되는 곳까지 올랐다.   산의 정상에 오른 등산대원들은 너무도 기뻐 두손을 높이 쳐들고 환호했다. 북경에 돌아간 림도는 조양의 모습이 자꾸만 눈앞에 삼삼거리면서 아무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는 조양에게 여러통의 편지를 써보냈다.   조양도 역시 키크고 멋진 림도를 잊지 못하고있었다. 그녀는 번마다 회답편지를 써보내면서 그리운 정을 표시했다. 2008년 2월 16일, 림도와 조양은 또 함께 탄자니아와 케니아의 변경에 위치한 해발 5895메터되는 치리마짜로산에 올랐다. 그번 등산이 있은후 림도는 회사를 그만두고 집을 판후 차를 몰고 대련으로 와서 조양과 함께 동거했다. 그들은 손잡고 함께 “세계의 지붕”으로 불리우는 쵸몰랑마봉에 오르기로 약속했다.  이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그들은 날마다 빈해로로 달리면서 체능훈련에 열을 올렸다. 2008년 10월 1일,  림도와 조양은 쵸몰랑마봉에 오르기전의 준비로 기후가 쵸몰랑마봉과 비슷하고 해발 8201메터되는 세계에서 여섯번째로 높은 중국네팔변경에 위치한 탁오유봉에 오르기 시작했다.  조양은 신체소질이 좋고 등산경험이 있기때문에 길잡이의 안내하에 제일 먼저 정상에 올랐다. 림도는 4번째로 정상에 올랐는데 그가 거의 정상에 오를 때 조양은 내려오기 시작했다. 얼마후 내려올 때 날이 밝았다. 해빛이 얼음을 비추자 눈을 자극하는 바람에 림도는 갑자기 앞을 볼수 없었다. 그가 안보인다고 하자 길잡이는 “이는 고원반응이니 별일 없을거라”고 하면서 등산안경을 끼워주었다.   그리고 자신의 발자국을 보고 따라오라고 했다. 림도는 아래로 내려오다가 눈앞이 보이지 않아 발을 허공에 딛는 바람에 몸이 벼랑에서 미끌어져내려왔다.  아래는 몇천메터되는 벼랑으로서 떨어지면 분신쇄골이 될판이였다. 다행히 안전바줄이 지탱해주었지만 그의 몸은 허공에 떠있게 되였다.   그가 있는 곳은 얼음이 뒤덮였기때문에 발을 벼랑에 딛고설수가 없었다. 길잡이는 얼마쯤 내려갔기때문에 다시 올라올수 없었다. 그가 사신과 박투하면서 절망할 때 미국등산객과 그의 길잡이가 바줄을 당겨주어 그는 구원될수 있었다. 림도는 산을 거의 내려갔으나 조양이 보이지 않았다. 원래 조양은 림도를 기다리려고 했으나 그녀의 길잡이가 등산시 산소호흡을 하느라 에네르기를 많이 소모했는데 또 해발고도가 높은 곳에 오래 머물러있으면 생명이 위험하다고 해서 마지못해 내려왔던것이다.   그때문에 림도는 그녀와 다투고 곧장 부모의 집으로 돌아갔다. 조양과 헤여진지 3개월이 넘어되는 2009년 1월 29일, 림도는 용기를 내여 핸드폰메시지(短信)로 자신의 잘못을 빌었다. 조양도 자책하면서 이번에 쵸몰랑마봉에 함께 오르자고 약속했다. 림도는 너무도 기뻐서 이튿날 기차를 타고 대련으로 달려갔다. 대련역에 마중나온 조양을 만난 림도는 그녀를 꼭 껴안고 “우리 다시는 헤여지지 말자,   결혼하자”라고 말했다.   그들은 2009년 2월 12일에 결혼등록수속을 밟았다. 2009년 4월초,  쵸몰랑마봉에 오르기 위해 그들은 라싸로 왔다.   그들은 먼저 고원적응훈련을 했다. 산에 오르기전에 림도는 등산대 대장에게 “우리 신혼부부는 손잡고 동시에 쵸몰랑마봉에 오르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대장은 동의하면서 림도와 조양을 같은 소조에 넣어주었다. 2009년 5월 17일 새벽, 그들은 북쪽에서부터 오르기 시작했다.   림도가 앞에 서고 조양이 뒤에 섰다. 림도는 몸상태가 매우 좋아서 제일 먼저 제2단계에 올랐다. 여기는 해발 8700메터인데 지세가 험준하고 아래는 깎아지른듯한 절벽이였다. 림도가 뒤에서 오는 조양을 기다리고있는데 길잡이인 장족사나이가 “빨리 갑시다!  여기는 사람을 기다릴 곳이 아닙니다”라고 재촉했다. 림도는 할수없이 계속 우로 올라갔다. 제2단계를 지나자 달이 눈앞에 보였는데 순식간에 해가 솟아르면서 색갈이 아름답게 빛나고 산과 구름이 모두 발밑에 놓여있었다. 이때 림도는 갑자기 눈앞이 보이지 않았다. 길잡이가 길을 재촉했지만 림도는 해발 8800메터되는 3단계까지 올라오자 멈춰서서 안해를 기다려 함께 오르겠다고 고집했다. 림도의 길잡이는 대화기로 조양의 길잡이와 련계한후 기다리는데 동의했다.    림도는 바위뒤에서 뼈속까지 스며드는 칼바람을 피하면서 길잡이를 보고 “뉴질랜드등산가 뤄싸얼은 ‘누구도 쵸몰랑마봉을 정복하지 못한다.    쵸몰랑마봉이 그를 받아들일뿐이다.   쵸몰랑마봉이 받아들인 사람은 모두 이후의 생활이 행복할것이다’라고 말했는데 정말 쵸몰랑마봉이 나와 나의 안해를 받아들일가요?”라고 물었다. 길잡이는 힘있게 머리를 끄덕였다. 40분동안 기다리느라고 림도와 길잡이는 추위를 견딜수 없어 서로 끌어안고 체온과 체온을 맞대였다. 림도는 “안해여, 안해여, 난 당신을 사랑하오.   쵸몰랑마봉이 당신을 기다리고있소”라는 노래를 불렀다. 그들의 노래소리를 듣고 조양이 마침내 그들앞에 나타났다.   조양은 격동되여 림도의 품에 안겨들면서 “어떤가요”라고 물었다.   림도가 또 눈앞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자 조양은 “두려워 마세요. 제가 당신의 눈이 되여드릴게요”라고 말했다. 2009년 5월 17일 오전 10시,  림도와 조양은 마침내 지구의 최고봉에 올랐다.   얼음과 눈으로 뒤덮힌 웅위롭고 장엄한 쵸몰랑마봉의 모습을 바라보는 그들의 마음은 몹시 설레였다.   그들은 서로를 꼭 껴안고 그들을 받아들이고 그들에게 행복을 준 쵸몰랑마봉에 감사를 드렸다.   《지음》  
88    인터넷사랑에 목숨을 빼앗긴 녀인 댓글:  조회:3941  추천:0  2009-10-26
1974년에 산서성 진성시에서 출생한 류효용은 고중을 졸업한후 어느 복장공장에 들어가 품팔이를 하다가 한살 년상인 왕회우를 알게 되여 1997년에 결혼했고 이듬해에 아들을 낳았다. 1999년, 왕회우는 진성시에 석탄판매회사를 꾸렸는데 석탄가격이 오름에 따라 장사도 잘되여 몇년사이에 2000여만원의 수입을 올리게 되였다. 남편이 남들이 부러워하는 갑부경리로 되자 류효용은 품팔이를 그만두고 가정주부로 되였다. 2005년 여름에 두번째 아들까지 낳은 그녀는 행복에 겨워 어쩔줄을 몰랐다. 그러나 좋은 날은 오래가지 못했다. 왕회우는 점점 돈을 더 많이 벌게 되자 밤마다 오락장소를 출입하면서 돈을 물쓰듯했다.  얼마후 류효용은 남편이 오월이라고 하는 처녀와 늘 붙어다니는것을 발견했다. 오월은 석탄중개인인데 왕회우에게 석탄구매인들을 소개해주고 거기서 중개비를 받아먹군 했다.  오월은 예쁘게 생긴데다가 말재주까지 좋아서 왕회우에게 오른팔이나 다름없었다. 류효용은 녀인의 감각으로 남편과 오월의 관계가 애매하다는것을 느꼈다. 그녀는 남편에게 드러내놓고 오월이와 래왕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왕회우는 화를 내며 말했다. “내 장사에서 오월이가 소개해주는 손님들이 대부분인데 그 좋은 장사를 하지 말라구? 말이나 되는 소리를 하오. 난 오월이와 장사로 만날뿐 다른 일은 없으니 괜히 신경쓰지 마오!”“난 그녀가 싫어요. 그녀가 금산을 실어다준다고 해도 난 당신이 가지지 못하게 할테예요!” 그들 부부는 크게 다투다가 서로 피해버렸다. 남편이 외도를 한다고 의심한 류효용은 늘 남편과 다투었고 왕회우도 화를 내면서 아예 바깥에서 지내며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왕회우는 류효용이 회사로 찾아와도 경비일군에게 부탁하여 대문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그일로 크게 다투자 왕회우는 안해를 보고 리혼할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리혼할 생각이 없었던 류효용은 동의하지 않았다.   2006년 8월, 왕회우는 안해에게 30만원을 주면서 말했다. “당신이 리혼하고싶지 않다면 이렇게 하지. 당신은 내 안해라는 이름만 가지고있소. 하지만 우리는 서로 상대방이 하는 일을 간섭하지 말아야 하오. 이 돈 30만원은 먼저 가지고 쓰오. 다 쓰면 내가 또 줄테니깐.” 남편이 짐을 꾸려가지고 나가자 류효용은 혼자 남게 되였다. 막내아들을 부모한테 맡긴 류효용은 상심의 눈물을 흘리면서 한달동안 바깥출입을 하지 않았다. 그후 그녀는 자가용차 한대를 사서 비법택시업에 나섰다. 다른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해 택시를 몰았지만 그녀는 무료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 택시를 몰았다. 남자운전수들도 밤중에 외지로 뛰기 무서워했지만 그녀는 아무리 깊은 밤이고 아무리 먼곳이라고 해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녀를 아는 사람들이 “너는 젊고 예쁘게 생겼는데 나쁜놈이 덮치기라도 하면 어쩌자구 그래?”라고 물으면 그녀는 “차라리 나쁜놈을 만났으면 좋겠어요. 사는게 멋이 없는데 한번 당하는것도 좋잖아요.”라고 대답했다. 2007년 가을, 류효용은 컴퓨터 한대를 샀는데 그때로부터 채팅에 미치게 되였다. 얼마후 그녀는 인터넷에서 닉네임( 名)이 “설원의 늑대”라는 남자를 만났다. 그 남자는 몇마디만에 단도직입적으로 “우리 하루밤 사랑을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물었다. 깜짝 놀란 그녀는 궁금해서 그에 대한 정황을 물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양극력이라고 하는데 1973년에 하남성 확가현에서 출생했소. 2년전에 안해와 리혼한 나는 다섯살되는 아들을 부모한테 맡겨놓고 정주에 와서 일자리를 찾고있는중이요.” 양극력의 소개를 들은 그녀는 친근감이 들어 그에게 자신의 신세를 털어놓았다. 양극력은 그녀를 위로해주고나서 화상채팅을 하자고 요구했다. 그녀는 화면에 영준하고 매력있는 남자가 나타나자 저도 몰래 입가에 웃음이 떠올랐다. 그날밤 그들은 날이 샐 때까지 대화를 나누었다. 2008년 3월초, 양극력이 한달동안이나 인터넷에 나타나지 않고 핸드폰까지 꺼버리자 류효용은 애가 바질바질 탔다. 한달후의 어느날 저녁, 갑자기 인터넷에 나타난 양극력은 류효용을 보고 “내가 그동안 효용이를 관심하지 않은것이 아니라 일이 좀 있었기때문이요. 그동안 일자리를 찾느라고 돈을 다 써버리고 핸드폰비용과 PC방비용까지 지불할 돈이 없어서 효용이와 련계하지 못했소.”라고 해석했다. 류효용은 그에게 은행구좌번호를 알려주면 1천원을 넣어주겠다고 말했다. 그는 두번 사양하다가 자신의 은행구좌번호를 알려주었고 그녀는 돈 1천원을 넣어주었다. 류효용은 양극력의 고육계에 걸린줄을 모르고있었다. 그는 8년전에 비법총기매매죄로 감옥살이를 했고 그때문에 안해와 리혼했던것이다. 출옥후 일하기 싫었던 양극력은 도박으로 나날을 보내다가도 사냥물을 노리기 위해 채팅을 즐겼다. 그는 이미 자신의 미모로 10여명의 돈 많은 녀자를 꼬셔 하루밤사랑을 나눈후 장사에 투자한다는 명의로 녀자한테서 돈을 꾸군 했었다. 그는 녀자가 더는 돈을 꿔주지 않으면 차버리고 새로운 목표물을 찾군 했다. 그러다가 이번에 그의 사냥물로 류효용이 걸려든것이다. 2008년 5월초, 양극력은 류효용을 보러 진성시로 오겠다고 했다. 류효용은 너무 기뻐서 곱게 화장하고 약속한 려관에서 양극력과 만났다. 류효용은 그날밤 미남자에게 기꺼이 몸을 맡긴후 양극력이 떠날 때 차비와 용돈으로 쓰라고 1천원을 주었다. 그녀는 처음 만난 미남자와 떨어지기 아쉬워서 오래도록 껴안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후부터 두 남녀는 일주일이 멀다하게 만나서 불륜을 즐겼다. 류효용은 양극력이 일주일만 오지 않아도 참을수 없어서 차를 몰고 100여킬로메터 되는 정주가 아니면 확가현으로 달려가서 양극력의 품에 안기군 했다. 미남자에게 넋을 빼앗긴 류효용은 밤새도록 사랑을 나눈후에는 번마다 꼭꼭 양극력에게 몇천원씩 쥐여주군 했다. 하지만 지나치게 돈을 탐했던 양극력은 그것도 만족되지 않아서 이런저런 리유를 대면서 류효용에게서 돈을 꾸었다. 그렇게 돈을 꾸는 차수가 점점 늘어나고 액수도 몇만원으로 늘어나자 류효용은 양극력에게 실망을 느꼈다. 게다가 그녀의 남편도 그녀가 경상적으로 외지로 다니는것을 눈치챘던지 “네가 다른 남자와 외도하는것을 발견하기만 하면 너에게 1전한푼도 주지 않겠다”고 경고했다. 그후부터 그녀는 조심해서 양극력을 만났고 그를 만나러 정주로 달려갔다가도 하루밤사랑을 나눈후에는 밥도 먹지 않고 즉시 달려오군 했다. 2008년 8월, 양극력은 장사에 투자한다는 명의로 5만원을 꿔달라고 요구했다. 류효용이 거절하자 그는 사랑도 채 나누지 않고 옷을 도로 입고 가려고 했다. 급해난 류효용은 돈 1만원을 내놓았고 양극력은 그녀를 다시 안고 사랑을 나누었다. 그후에도 양극력이 계속 돈을 요구하자 류효용은 그와 관계를 끊어버리고 남편과 잘 지내려고 마음먹었다. 양극력은 도박에서 빚을 지자 도박친구 류회와 함께 류효용을 랍치하려고 마음먹었다. 2009년 4월 28일 점심, 양극력은 류효용에게 전화를 걸어 만나자고 꼬셨다. 류효용이 자가용차를 몰고 오자 양극력은 거짓말로 그녀를 꼬셔가지고 시골에 있는 류회의 어머니집으로 데리고갔다. 류회는 사전에 어머니를 자신의 집에 데려가고 빈집에서 사냥물이 오기를 기다렸다. 양극력이 류효용을 데리고오자 류회는 류효용을 묶어놓고 그녀의 은행카드비밀번호를 알려달라고 위협하여 현금 1900원을 찾아냈다. 류효용은 “제가 자가용차까지 주겠으니 절 돌려보내주세요. 절대 공안국에 제보하지 않겠어요”라고 애걸했지만 살인하여 입을 봉하려고 마음먹은 두 사내는 전기줄로 그녀의 목을 졸라서 죽여버렸다. 2009년 4월 28일 저녁, 류효용의 아버지는 여러번이나 딸의 핸드폰에 전화를 걸었으나 통하지 않게 되자 이튿날 공안국에 사건을 제보했다. 공안국에서는 즉시 사건조사에 나섰는데 류효용의 핸드폰통화에서 하남성에 있는 남자와 관계가 밀접하다는것을 발견했고 하남성의 모든 고속도로의 감시카메라를 검사하다가 마침내 양극력에게 중대한 혐의가 있다는것을 발견했다. 2009년 6월 8일 오전, 진성시공안국에서는 양극력의 집에 가서 양극력을 붙잡았다. 양극력은 자신이 저지른 범죄사실을 그대로 털어놓았다. 며칠후 류회도 법망에 걸려들었다. 안해가 살해된후 왕회우는 후회하면서 말했다.“나와 안해는 다년간 힘들게 일해서 부유한 생활을 하게 되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돈이 있게 되자 안해를 소홀하게 대했습니다. 만약 내가 시간을 짜내여 안해와 함께 있었더라면 가정모순도 없었을것이고 그녀가 이런 봉변을 당하지도 않았을것입니다.”                                            《지음》    
87    녀간호원 주사로 남자친구를 살해 댓글:  조회:3842  추천:0  2009-10-22
서장인들의 성지순례에서 최종 목적지 대소사(大昭寺) 인간세상의 어디로 가나 여성의 힘이 대단한 것 같다. 서장의 제일 중심사원이 바로 여성의 힘과 관련된다. 이 대조사는 당나라의 문성공주(文成公主)와 네팔의 브리쿠티공주(尺尊公主)가 송첸감포(松贊干布)왕에게 시집올 때 함께 가져온 불상을 앉히기 위해 지은 사원이라 한다. 때가 바로  7세기 중엽인데 이들 여인들이 가져온 불상을 모시기 위해 역사적 유물로 남을 대소사와 소소사(大·小昭寺)를 지었던 것이다. 대조사란 라싸언어로 석가모니 불사란 뜻인데 서장의 크고 작은 1천7백여개의 사원 중에 물론 대소사가 으뜸이라 한다. 이 대소사는 티베트에 현존하는 가장 이른 목석구조의 건축물로 기원 647년에 착공했는데, 당나라 문성공주가 설계, 건조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대소사는 라싸시 중심구내에 있어 교통이 편리하고 관람시간 정하기가 쉬운 곳이라 나는 먼 곳 단체팀 여행을 마치며 돈 팔며 지루하기 짝이 없는 기념품 상점으로 가지 않고 빠져서 곧장 이곳을 찾아왔다. 큰 종교 행사들이 진행된다는 보통 축구장의 2배 크기의 대소사 서쪽 마당인 큰 광장을 지나 대소사 주변에 이르니 짖은 향내가 벌써 코를 찌른다. 주변에는 기도하는 남녀로소 불교 신자들로 북적됐다.           라사의 중심 사원인  대소사 건물위로는 항상 관광객들이 붐빈다. 지금도 서장인이 98%가 불교를 믿는데 가장 성스러움의 극치를 누리는 사원이 바로 대소사(大昭寺. 조캉사원)이다. 대소사는 라싸시의 중심 팔각거리에 위치해 있는데 서장인들의  시대를 넘어 끊임없이 이어지는 성지순례의 최종 목적지로도 대조사가 각광을 받고 있다.   매년 티벳 각지의 선남선녀가 6개월 길게는 1-2년에 걸쳐서 불원천리(不遠千里) 산을 넘고 강을 건너, 한 걸음 가고 한 번 절하고 또 3 걸음 가고 절하기 (오체투지:五體投地)를 반복해서 어렵게 라싸(拉薩)에 도착한다. 그리하면 가장 먼저 찾아가는 곳이 이 대조사(大昭寺) 즉 조캉 사원이다.  그래서 이곳은 1년 내내 향 불과 향 연기가 사라질 새 없다. 총면적이 2만5천여 평방메터에 달하는 조캉사원(大昭寺)은 4층건물로 되었는데 당대(唐代)의 건축양식에 네팔과 인도의 건축 특색이 라싸의 지방 특색과 어울려 과 관이다. 건물 지붕에 오르면 크고 작은 활금 종들로 온통 황금빛이다. 문성공주(文成公主)는 독실한 불교 신자였기에, 조캉사원(大昭寺)의 문을 서방불교성지(인도)쪽을 향하게 서쪽으로 만들어, 일반 사찰의 문 방향이 남쪽인 것과 구별하였다고 한다. 사원 내에 들어서면 가장 안쪽의 성전에 문성공주가 장안(지금의 서안-시안에서 가져온 석가모니상이 안치되어있다. 사원 바깥의 작은 광장에는 기원 823년에 새긴 당ㆍ번(唐ㆍ蕃)회맹비와 문성공주가 손수 심은 버드나무가 있다. 소개사가 이를 1000여년에 걸쳐 맺어진 한족과 장족간의 단결과 우호의 역사적 증거물이라고 소개한다.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입구 쪽의 지붕에는 휴식을 위한 간의 의자와 탁자가 마련되어 있고, 기념품을 사며 간단한 음료수도 사서 마실 수 있게 되어있다. 그곳에서 내려다보면 라싸 시내의 정경과 함께 조캉을 향해 오체투지로 절을 하는 신자들의 모습도 볼수있다. 저녁 무렵에는 멋진 일몰을 볼 수 있고, 서쪾 켠으로 포탈라궁을 배경으로 한 멋진 추억거리도 남길 수 있어 그 곳에 올라간 관광객들이 사진기 사타를 끊임없이 눌러대는 곳이기도 하다. 지금으로부터 1천5백여년 전 중국의 나어린 문성공주가 이런 볼모의 땅에 시집가 후세 사람들에게 이와 같이 굉장한 볼거리를 남겨준 것이 오늘 바라보는 이들에게 깊은 사색거리를 남기며 경건을 넘어 이채로움 마져 던져주는 것이 아닌가?      
86    녀석사와 장애자청년의 사랑 댓글:  조회:3737  추천:0  2009-10-20
    1982년 5월,   백경호는 천진시 화평구의 한 교원가정에서 태여났다.1999년,   천진사범대학 영어학부에 입학한 백경호는 아버지가 병으로 사망된 해인 2003년에 천진대학교육심리학전업 석사연구생으로 되였고 2006년에 석사학위를 따냈다.   그후 그녀는 천진의 어느 중학교 영어교원으로 사업하면서 천진대학교육심리학전업 재직박사시험에 참가했다. 사업이 바쁘고 아버지까지 사망되는 바람에 그녀는 련애도 해보지 못했다.   그러다가 그녀는 인터넷에서 노래를 부르는 안준위를 발견했다.  그후 그녀는 안준위와 QQ로 채팅을 하면서 그가 학식이 깊은것을 보고 어느 대학을 졸업했는가고 물었다. 안준위는 “난 정규적인 대학을 나오지 못했소.   당신은 나같은 사람을 업신여기겠지?”라고 대답했다. 그녀는 그런것이 아니라고 대답했다. 안준위는 31살되는 총각인데 태원시에서 컴퓨터수리부를 경영하고있었다. 안준위는 백경호가 자신과 대화를 나누기를 좋아하자 “나는 어릴 때 소아마비에 걸려 지금은 쌍지팽이신세를 지고다니는 처지요.   만약 나같은 사람과 대화하기 싫다면 내 이름을 지워주오”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를 장애자라고 업신여기지 않았다. 그후 화상채팅으로 대화를 나누면서 그들은 서로 상대방을 사랑하게 되였다. 한번은 화상채팅을 하다가 그녀가 머리가 어지러워하는것을 본 안준위는 태원에서 천진으로 달려왔다. 안준위는 천진에서 나흘을 묵었다. 백경호는 직접 눈앞에서 안준위를 보자 그와 결혼하겠다는 마음을 더욱 굳게 먹었다. 몸이 장애인 외에 그는 어디에 내놓아도 부끄러울 곳이 없는 진정한 사내대장부였다. 어느날,  백경호의 어머니가 물건을 구매하러 간 틈을 타서 사랑하는 두 사람은 서로 꼭 끌어안고 뜨겁게 포옹하였다… 안준위는 백경호의 건강이 완전히 회복되여서야 마음을 놓고 태원시로 돌아갔다. 백경호의 어머니는 의심이 들어 “네가 안준위와 사귀는게 아니냐”고 물었다.   백경호는 안준위와 결혼하겠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그녀의 어머니는 거의 혼절할번 했다. 딸이 장애자와 결혼하겠다는 말을 들은 어머니는 그녀를 설복하다가 안되니 친척들을 모두 동원했다. 친척들도 당당한 석사생이 문화수준이 낮은 장애자와 결혼하는것은 잘못된 일이라면서 그녀를 설복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총각을 소개해주기도 했다. 하지만 안준위를 사랑하는 백경호의 마음은 변함이 없었다. 2008년 3월 23일, 이날은 일요일이였다.   점심 11시가 좀 지나서 백경호는 친구의 생일모임에 참석하려고 오토바이를 몰고 거리에 나섰다. 친구가 자꾸만 독촉하였기때문에 그녀는 속도를 가해 오토바이를 몰았다. 홍교구부근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삼륜모터차가 몇메터앞에 나타났다. 그녀는 황망히 그 삼륜차를 피하려고 오른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그와 동시에 가속페달을 잘못 밟았기때문에 오토바이는 길옆 가로수에 부딪치고 그녀는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이튿날 오후에야 깨여난 백경호는 자신의 허리아래부위가 아무런 지각도 없는것을 발견하고 공포에 질려 곁에 있는 어머니한테 물었다. “어머니,  제 몸이 마비된건가요?” 어머니는 말없이 울기만 했다.의사는 그녀의 증세를 보아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한 영원히 일어날수 없을것이라고 했다. 절망한 그녀는 울려고 했으나 이젠 눈물도 말라서 나오지 않았다. 병문안을 온 동료들과 학생들을 보면서 그녀는 하반신마비가 된 자신의 처지가 한스러워 자살하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발각되여 자살할수도 없었다. 그녀는 안준위를 생각했다.   그한테 이 일을 알릴가? 그녀는 그의 위안이 수요되였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 자신이 처한 처지를 생각하니 무서웠다. 앞으로 이보다 더 엄중해질수도 있는데 그가 이런 자신을 보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장애자가 혼자서 생활하는것도 매우 힘든 일인데 두 사람이 모두 장애자라면 어떻게 할것인가? 그녀는 앞으로의 일을 상상하기가 두려웠다. 결국 그녀는 안준위에게 “제가 지금 교육국통일시험에 참가하러 왔으니 당분간은 련계할수 없다”는 내용의 핸드폰메시지(短信)를 보냈다. 15일후 백경호는 머리와 손발의 외상은 모두 나았지만 허리아래부위만은 여전히 지각이 없었다. 갈수록 절망한 백경호는 어쨌든 이 소식을 안준위한테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친척들한테 부탁하여 집의 노트북을 가져오게 했다.   그녀는 인테넷에 접속하여 안준위와 화상채팅을 했다.    안준위의 익숙한 모습이 화면에 나타났다.   그녀는 안준위의 얼굴에서 조금이라도 실망하거나 망설이는 모습이 보이면 즉시 그와 련계를 끊고 헤여지리라고 마음먹었다.    그녀는 자신이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다행히 목숨은 건졌으나 하반신이 모두 마비되였다고 알려주었다.   그 소식을 듣자마자 안준위는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급해마오. 내 곧 그곳으로 가겠소”라고 했다. 2008년 4월 10일,  병원에 도착한 안준위는 병상에 누워있는 백경호한테 다가가서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살았으니 됐소!  무서워마오. 내가 있잖소”라고 위안했다. 안준위는 천진에서 한달남짓이 거주하면서 밥을 짓는다, 빨래를 한다, 백경호의 다리를 안마해준다 하면서 바삐 보냈다.   그는 또 백경호에게 휠체어를 사주었다.  한 장애자가 그처럼 날파람 있고 그처럼 세심한것을 보고 백경호의 어머니와 백경호의 일가친척들은 모두 놀라고 감동되여 이전에 그들의 결합을 반대한 일을 부끄럽게 생각했다. 안준위의 살뜰한 보살핌을 받으면서 백경호는 더는 자포자기하지 않았으며 애써 휠체어의 운전법을 익혔다. 백경호는 2008년 5월 2일에 퇴원했다. 20일후 안준위는 백경호의 어머니를 보고 “전 태원에 가서 장사를 돌봐야 하는데 이번에 갈 때 경호를 데리고갈가 하는데 허락해주십시오”라고 말했다. 안준위는 백경호의 어머니가 장애자인 자신한테 딸을 맡기는것이 마음이 놓이지 않아하는 눈치를 알아차리고 “전 얼마든지 경호를 잘 보살펴줄수 있습니다.  어머니가 동의한다면 전 곧 경호와 결혼하려고 합니다. 경호도 저를 사랑하고 저도 경호를 몹시 사랑합니다.   저는 앞으로 경호가 어떻게 되든지 경호를 사랑하는 마음이 영원히 변치 않을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백경호의 어머니도 눈물을 흘리면서 “나도 자네한테 딸을 맡기면 마음이 놓이네”라고 말했다. 2008년 5월 27일, 안준위는 백경호를 데리고 태원시로 돌아갔다. 그리고 2개월후 안준위는 백경호의 어머니를 태원으로 모셔왔다. 2008년 10월 12일에 결혼등록을 하고 간단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후 백경호는 집에서 영어강습반을 꾸렸다.  초기에는 휠체어에 앉아있는 그녀를 보고 학생들과 학부형들은 모두 그녀의 능력을 의심스러워했다.   하지만 대학시험에서 미끌어져 다시 시험을 치려는 학생들이 그녀의 강의를 들어본후로 그녀를 다시 보게 되였다. 학생들이 많아지자 백경호는 집을 세맡아 교실로 삼았다. 사랑의 따사로움을 맛본 안준위는 장사도 잘되여 수리부를 더욱 크게 확장했다.  안준위는 장사도 장사였지만 안해를 공주처럼 떠받들었다.  회복기간에 반드시  호르몬치료를 받아야 했기때문에 백경호는 몸이 뚱뚱해졌다.   그때문에 백경호가 고민하자 그는 몸이 나니 보기가 더 좋다면서 안해를 위안했다. 그는 안해가 어릴 때부터 물고기를 좋아한다는것을 알고 30여가지 물고기료리를 만드는 방법을 배워서 직접 안해에게 료리를 만들어 대접했다.   또 안해가 음악을 듣기 좋아하는것을 알고는 직접 초대음향설비를 조합하여 안해가 립체감이 나는 음악을 감상할수 있게 해주었다. 안준위의 살뜰한 보살핌을 받으면서 부지런히 재활운동을 한 결과 백경호의 하지는 점차 회복되여 혼자서 걸을수 있게 되였다. 돌연적인 부상때문에 박사과정을 채 마치지 못한 백경호는 시간을 짜내여 계속 공부하여 박사학위를 따내겠다고 마음먹었다. 안준위는 안해가 무슨 근심에 싸여있는것을 발견하고 따져물었다. 백경호는 아이를 가지고싶은데 두 사람이 모두 장애자여서 아이를 가질수 없을가봐 근심했던것이다.   안준위는 안해를 위로하면서 한번 병원에 가서 검사해보자고 건의했다. 2009년 4월, 그들은 함께 산서성인민병원에 가서 검사했는데 안준위의 생리능력은 정상적이였고 백경호도 임신하는데는 문제가 없었다. 집에 돌아온 두 사람은 너무도 기뻐서 서로 꼭 껴안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그날 컴퓨터앞에 마주앉은 백경호는 남편을 보고 말했다. “저는 우리가 힘들게 걸어온 사랑의 이야기를 써서 책으로 출판하겠어요. 이것은 앞으로 태여날 우리 아이에게 가장 좋은 선물이 될것이예요!”     《지음》  
85    배우 주걸의 교통사고사건 시말 댓글:  조회:6381  추천:0  2009-10-19
  2009년 6월 3일, 배우 주걸이 교통사고를 빚어냈다는 기사가 여러 보도매체들의 톱기사로 실리면서 물의를 일으켰다.  2009년 6월 2일 새벽 4시, 북경시 고비점로에서 검은색 벤츠승용차와 택시가 부딪치는 사고가 발생했는데 택시운전기사와 택시에 탔던 녀자손님 류암이 부상을 입었다.  그러나 교통경찰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 벤츠승용차와 벤츠승용차의 주인은 보이지 않았다. 현장에 있던 목격자들의 말에 의하면 벤츠승용차의 주인은 배우 주걸이라고 했다. 주걸은 어떤 정황에서 교통사고를 빚어냈고 왜서 사고현장을 떠난것일가? 부상당한 류아가씨는 사고현장에서 있은 진실한 정황을 알려주었다. “그날 나는 동료 왕선생과 함께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도중 당가구의 굽인돌이를 돌아 경통보로에 들어서려고 할 때 남쪽에서 오는 벤츠승용차와 부딪쳤습니다. 택시차는 충격에 번저졌는데 왕선생은 경상을 입어서 저절로 밖으로 나왔지만 나와 택시운전기사는 차안에 갇혀서 움직일수 없었습니다.구조원들이 와서야 나는 구원되였습니다.” 첫사람으로 이 사건을 목격한 사선생은 벤츠차의 주인이 텔레비죤련속극 《환주공주》에서 남자주인공역을 맡은 주걸이 틀림없다고 증명했다. 병원검사결과 류아가씨는 여러곳이 골절되였고 택시운전기사는 머리가 터지고 경한 뇌진탕이 나타났다. 류아가씨의 동료 왕선생은 주걸의 몸에서 온통 술냄새가 났다고 했고 소식을 듣고 사고현장에 달려온 택시회사의 주경리도 사람들한테서 주걸이 술을 마셨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주걸은 사고현장을 떠났다가 12시간후에야 교통부문에 가서 처리를 받았다고 했다. 비록 그날 음주검사에서 “0”으로 나타났지만 보도매체에서는 주걸이 사고현장을 떠난것은 음주운전사실을 숨기기 위한것이라고 의심했다. 보도매체의 의심에 대해 주걸은 나중에 이렇게 해석했다. “당시 나는 사람들이 이런 방면으로 생각할줄을 몰랐습니다. 내가 음주운전을 했다고 했는데 정말 유감입니다. 나는 원래 병원으로 가서 치료를 받으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후에 그렇게 아프지 않은 느낌이 들어서 집으로 갔습니다.” 당시 보도매체의 거듭되는 의문이 있었지만 주걸은 침묵을 지키다가 사건발생후 8일만에 자신의 블로그(博客)에 처음 이 사건에 대해 언급했다. 주걸은 《구경 누가 약세군체인가》라는 제목으로 된 글에서 “새벽 4시가 좀 지났을 때 나는 온몸이 몹시 아팠는데 나에게 병원과 집으로 갈 권리도 없단말인가?”라고 언급했다. 문장에서 주걸은 이번 교통사고에서 자신도 피해자라고 했다. 그의 이 글은 사람들의 분노를 더욱 야기시켰다. 류아가씨는 이렇게 말했다. “주걸은 자신이 아프다고 했는데 그럼 왜서 번저진 차안에 갇힌 사람을 생각하지 않았단 말입니까?  차안의 사람은 그보다 더 큰 부상을 입은게 아니겠습니까?  그는 자기자신만 생각하고 남은 생각지도 않았습니다.”   사건발생당시 주걸은 정말 음주운전을 한것일가? 이에 대해 주걸은 이렇게 말했다. “사건이 발생하기전에 나는 친구들과 함께 어느 KTV에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친구들에게는 술이 있었습니다. 포도주인것 같았습니다. 나는 그곳이 혼란하고 어지러워서 그들의 물건을 다치지 않았습니다. 나는 술을 한모금도 입에 대지 않았습니다.” 조사를 거쳐 기자는 주걸과 함게 모임을 가졌던 동선생을 찾았는데 그는 전화를 통하여 주걸이 술을 마시지 않았다는것을 증명했다.  사고차에 앉았던 왕선생이 주걸의 몸에서 술냄새를 맡았다는데 대해 주걸은 이렇게 반박했다 . “그건 불가능합니다. 왕선생은 나와 접촉한적이 없었습니다.   그는 나와 줄곧 4~5메터의 거리에 떨어져있었기때문에 술냄새를 맡았을리 없습니다.” 왕선생이 기자의 취재를 거절했기때문에 이 세부에 대해 실증할 방법이 없었다. 2009년 7월 1일, 북경시 조양교통지대에서는 이 교통사고에 대한 감정결과를 발표했다. 다방면의 조사와 증명을 거쳐 주걸이 음주운전을 했다는 충분한 증거가 없지만 다시 그의 행위는 차를 몰고 도망친 행위로 구성된다고 인정했다. 동시에 주걸은 사건발생당시에 속도위반했고 차번호도 달지 않았기때문에 이 사고에서 주요한 책임을 져야 하며 택시차는 왼쪽으로 꺾어들 때 직행차를 먼저 지나가게 하지 않았기때문에 택시운전기사인 고선생이 차요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인정했다.  교통부문에서 발표한 이 결과에 대해 서로 다른 의견이 있었다.  류아가씨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주걸이 사고현장을 떠난것은 음주운전사실을 숨기기 위한것이라고 생각합니다. 12시간후에는 아무것도 검사해낼수 없는것이 아니겠습니까?” 택시회사의 주경리는 이렇게 말했다. “주걸은 마땅히 실사구시적으로 말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의 신분에 부합됩니다.” 차를 몰고 도망쳤다고 인정한 교통부문의 결과에 대해 주걸은 억울하다고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사고현장에서 도망쳤다는것은 100%로 불가능합니다.나는 몸이 아파서 사고현장을 떠났을뿐입니다. 더욱 중요한것은 사고현장에서 사람들이 카메라로 나의 얼굴을 찍고있었기때문입니다. 나는 그들이 나를 찍어서는 안되고 나는 이 자리를 빨리 떠나야 되겠다고 생각되여 전화를 거는척했습니다. 나는 즉시 사고현장을 떠난것이 아니라 사고가 발생한 사실을 교통부문에 알린후 길에 서서 교통경찰이 오기를 기다리려고 했는데 주위의 사람들이 나에게 카메라를 들이대기에 사고현장을 떠나야 한다는 의식이 들었습니다. 이는 명배우들의 본능적인 자아보호행위입니다.  우리는 모두 다른 사람들이 사진찍는것을 두려워합니다.  교통사고가 아니라 생활중에서도 우리는 다른 사람이 사진을 찍는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거리를 가거나 식사를 하거나 할 때도 사진을 찍는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나는 이런 사실이 조작되지 말고 확대되지 말것을 바라서입니다. 이것은 정상적인 교통사고라고 생각되였기때문에 교통경찰이 와서 처리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주걸의 행위가 차를 몰고 도망친 행위로 인정되는가 하는데 대해서도 서로 의견이 달랐다. 대부분 사람들은 교통사고가 발생했을 때에는 명배우와 일반인의 구별이 없다고 하면서 명배우도 운전기사일따름이라고 인정했다. 그리고 사람들이 어떻게 사진을 찍었든간에 그것은 모두 사고현장을 떠나려고 하는 리유로는 될수 없다고 인정했다. 2009년 7월 28일, 북경시교통국에서는 주걸에게 행정처벌을 주고 5일동안의 행정구류처분을 내렸으며 점수 21점을 깎고 2200원을 벌금시켰다. 이에 주걸은 불복하여 해당부문에 행정의논을 신청했다. 주걸은 자신이 사건발생후 선참으로 구급전화를 걸었고 사고현장에서 구급일군들이 오기를 기다렸다고 했다. 구급차를 기다리고있는 10여분이 되는 시간내에 몰려드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사진찍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자아보호의식으로 길 저쪽에 가서 기다리다가 교통경찰과 구급일군들이 도착한후에 사고현장을 떠났는데 이는 더욱 큰 소란을 피면하기 위한것이였다고 말했다. 주걸의 대리인도 주걸이 당시에 고의적으로 도망치려는 의도가 없었기때문에 차를 몰고 도망친 행위라고 할수 없다고 말했다. “진정한 법률규정으로 놓고 말할 때 차를 몰고 사고현장에서 도망쳤다고 하는것은 사고발생시 즉시 차를 몰고 도망친 행위를 말합니다. 주걸은 이미 구급전화를 걸었고 구급일군들과 교통경찰이 오기를 기다렸기때문에 이는 도망친것과는 다른 개념입니다.” 2009년 8월 5일, 중앙텔레비죤방송국 기자들의 노력하에 류아가씨는 주걸의 사과를 접수했고 주걸은 직접 류암의 댁으로 찾아가서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 중국정법대학의 홍도덕교수는 이렇게 분석했다. “아무리 의심이 되더라도 증거가 없는 정황에서 음주운전을 했다고 인정할수 없는것입니다.  교통부문에서 음주운전을 하지 않았다고 인정한 결론은 완전히 정확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법률상에서 현장을 떠나지 말아야 한다고 규정했으면 현장을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상황이든간에 현장을 떠났다면 이는 차를 몰고 사고현장에서 도망친 행위입니다. 동기가 어떠했든간에 동기는 조사해낼 방법이 없는것입니다. 주걸은 사람들이 사진을 찍었기때문에 현장을 떠났다고 했는데 이는 증명할 방법이 없는것입니다. 원인은 현장을 떠난 이 사실의 인정에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나중에 주걸이 사과한것은 잘된 일이지만 사람들은 여론의 핍박에 못이겨 그가 사과한것이라고 생각할수 있습니다.  택시운전기사의 잘못도 있었다고 하지만 택시에 앉았던 손님은 무고한것이 아니겠습니까?  사고당시 즉시 상대방에 대해 사과하고 그들에 대해 반드시 책임을 지겠다고 해야 했습니다. 나중에 사과한것처럼 처음부터 이렇게 사과했더라면 사람들의 질책도 없었을것입니다.” 보도매체가 주걸의 교통사고에 대해 톱기사로 다루고 많은 사람들이 이 일에 대해 의논한것은 대중들이 공중인물에 대해 기대를 가지고있다는것을 말해준다. 이 사건에서 사람들은 결과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있는데 우리는 법률앞에서 사람마다 평등하다는것을 믿어의심치 않는다.     《신화넷》   생활백과    
84    점쟁이녀인의 사기행각 댓글:  조회:4041  추천:0  2009-10-15
83    가수 만문군 안해 마약흡입 시말 댓글:  조회:6828  추천:2  2009-10-08
  가수의 안해가 범한 마약흡입사건 시말 2009년 5월 12일,   가수 만문군의 안해 리리는 자신의 명의로 호텔식당을 예약하고 5월 18일 밤 10시에 친구들을 청하여 생일을 쇠였다. 그날 그녀의  생일에 참석한 사람들은 약 40명정도 되였는데 여럿이 모여 요두환 등 마약 을 흡입했다는 혐의로 그들은 모두 현장에 달려온 경찰들에게 붙잡혀갔다.  북경 조양경찰들은 생일을 쇠는 현장에서 요두환 등 마약을 발견했기때문에  그날 모임에 참석했던 사람들을 모두 소변검사를 받게 했다.  결과 12명이 나 마약을 흡입한 사실이 드러났다.   2009년 5월 20일, 만문군부부는 경찰의 조사를 받을 때 마약을 흡입한 사실 을 승인하였다. 만문군은 마약을 흡입한 행위로 14일의 행정구류처벌을 받았 고 그의 안해 리리는 다른 사람을 청해놓고 마약을 흡입하게 했다는 혐의로  형사구류되였다. 2009년 6월 3일, 검찰원에서는 타인을 청해놓고 마약을 흡 입하게 했다는 혐의로 리리를 체포했다.  5일후 만문군은 자신이 마약을 흡 입한 사실에 대하여 처음 사회에 공개적으로 사과했다. 2009년 8월 3일 오전 9시,  북경 조양법원에서는 법정을 열고 리리가 타인을  청해놓고 마약을 흡입하게 한 사건을 공개심리했는데 만문군의 가족과 친구 들은 한사람도 참석하지 않았다.  하지만 현장은 초만원을 이루어 좌석을 림 시로 증가하기까지 했다.   피고석에 선 리리는 죄를 승인하는 태도가 비교적 좋았다.  그녀는 “저를 만회해준 공안기관에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징벌을 받을것입니다. 죄수복을  입고 쇠고랑을 찬 지금 저의 모습은 매우 추합니다”라고 말했다. 법정에서 리리는 이렇게 말했다. “생일모임을 가졌던 그날밤,   저는 10여알의 요두환을 휴대했습니다.  저 는 주량이 약한데 술을 많이 마셔야 했기때문에 저 혼자 먹자고 요두환을 가 져갔던것입니다.  제가 요두환을 12명에게 공급했다고 하는데 저는 다만 모 새남 등 두 사람에게만 공급했을뿐입니다.  저는 금년 4월초부터 마약을 접 촉했는데 당시 술을 많이 마신 상태에서 친구가 권하기에 흡입했던것입니다 .  생일모임을 가졌던 그날 제가 가져갔던 요두환은 친구 왕빙양이 저를 도 와 사준것입니다.50여알을 샀는데 모두 제가 가졌습니다.   그날 10여알만 가지고가서 제가 1알을 먹고 나머지는 모두 술상우에 놓았는데 12명이나 먹 었을줄은 몰랐습니다.  40명이 붙잡혀간후 모두 소변검사를 받았지 않습니까 ?  저는 그들의 소변검사결과를 보고서야 그 사실을 알게 되였습니다.”   리리가 생일모임을 가졌던 그날밤에 현장에는 “happy물”이라고 하는 신형 의 마약이 있었는데 이는 히로뽕과 콜라를 섞어서 만든것이였다. 이에 대해  리리는 “저는 그것이 무슨 물건인지 몰랐습니다.   그날 콜라 두병을 마셨 는데 맛이 약간 쓰고 마신후 머리가 빙빙 돌아가는 느낌이 들어서야 그것이  마약을 탄 콜라인줄 알았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녀는 또 “저는 마약을 접촉한걸 몹시 후회합니다.  마약은 자신을 해치고  가족을 해치고 사회를 해치는 물건이기때문에 모두 마약을 멀리하기 바랍니 다”라고 말했다. 법정에서 공소인은 리리가 국법을 무시하고 하남성영화촬영소의 감독 모새남 , 가수 왕빙양 등 많은 사람을 모임에 청해놓고 마약을 흡입하게 했기때문에  엄하게 형사책임을 추궁해야 한다고 인정했다.  그러나 리리의 변호사는 리 리가 “6.26”마약금지일에 자진 신청하여 마약의 위해성에 대해 말하고 법 을 지킬것을 선전하였기때문에 경하게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리 리가 공공장소에서 많은 사람들을 청해놓고 마약을 흡입하게 했지만 죄를 승 인하고 죄를 뉘우치는 태도가 좋기때문에 경하게 처벌하자는데 의견을 모았 다. 북경시 조양법원에서는 리리가 타인을 청해놓고 마약을 흡입하게 한 죄명이  성립되기에 피고인 리리를 유기도형 1년에 처하며 벌금 2000원을 안긴다고  판결했다. 이 사건을 심리했던 조양검찰원 마약범죄수사소조의 검찰관 마운성은 리리가  심사중에 다음과 같은 말을 털어놓았다고 알려주었다.   “저는 장기간 남편과 아이의 뒤시중을 하는 생활이 너무 단조롭다고 생각되 였습니다.  친구가 조직한 어느 모임에 참석했다가 우연한 기회에 요두환을  접촉하였습니다.”   마운성은 또 리리가 간수소에 있을 때 9살 되는 아들과 심장병을 앓고있는 아버지에 대해 언급하기만 하면 눈물을 흘리면서 참회한다는 사실도 알려주 었다.  판결을 받은후 리리는 보도매체에서 다시는 “누구의 안해”란 말을  쓰지 말고 직접 자신의 이름을 써줄것을 부탁했다.   《중경조보》/연변라지오TV 제공  
82    고전명작 댓글:  조회:3770  추천:0  2009-10-01
  조설근   청나라 소설가 조설근은 어릴적 대관료 지주가정에서 생활했다. 그의 증조할아버지는 강희황제와 짝이 되어 함께 공부하는 "시독(侍讀)"이었고 증조할머니는 강희황제의 유모였으므로 조설근 가족과 황실의 관계는 매우 밀접했으며 소년시대까지 조설근은 재벌 후계자의 사치한 생활을 누리게 되었다. 옹정 5년(1727년)때, 조설근의 아버지는 옹정제의 황위계승문제에 얽혀 연좌를 당했고 온 가족의 권세와 재산은 하루새에 사라져 조설근은 친척과 친구들에 의지하며 모욕받는 생활을 시작했다. 금의옥식으로부터 빈곤한 백성의 생활을 경과한 조설근은 봉건통치계급의 몰락성을 피부로 느끼게 되었으며 사회의 암흑과 죄악에 대해 전면적인 깊은 인식을 갖게 되었다.   건륭 15년, 조설근은 베이징 서쪽의 한 농촌에서 생활했다. 그는 비참하고 처량한 노후를 거쳤으며 병에 시달려도 의사를 찾지 못하는 어려운 생활 속에 허덕였다. 결국 그는 장편소설 "홍루몽"을 끝까지 완성하지 못한채 별세하여 후세인들에게 많은 아쉬움을 남겼다.   조설근은 어릴적부터 문학과 예술의 훈도를 받았으며 당시 저명한 서법가이며 장서가였던 할아버지의 영향하에 여러 방면의 재능을 갖추게 되었다. 노후의 조설근은 베이징 서쪽 교외에서 생활하면서 10년간 심혈을 기울여 불후의 명작- "홍루몽"을 창작했다. 오늘날 전해지고 있는 "홍루몽"은 총 120회로 되어 있으며 그중 후 40회는 고악이 완성한 것이다.   "홍루몽"은 귀족 봉건가정생활을 소재로 가보옥과 임대옥의 사랑비극 및 가보옥과 설보채의 혼인비극을 주선으로 이러한 비극을 조성한 사회적 근원을 종적으로 분석했다. 동시에 가씨 가문의 흥망성쇠를 이야기하면서 가씨, 사씨, 왕씨, 설씨의 정통사상 옹호자와 배신자 사이의 모순충돌을 통해 수많은 인물로 구성된 광활한 사회생활환경을 횡적으로 보여주었다. "홍루몽"은 봉건사회의 각종 죄악과 내적 모순을 폭로했고 당시 중국의 사회현실을 심각하게 반영함으로서 봉건제도의 붕괴와 멸망은 필연적인 역사적 추세임을 제시하고 있다.   "홍루몽"은 중국 고대문학사상 사상성과 예술성이 결합된 최고의 작품으로서 세계문학사에서도 중요한 위치에 놓여 있다.
81    거금을 팔아 “안해”위치를 차지했건만 댓글:  조회:3766  추천:0  2009-09-22
    1 2005년 7월의 어느날, 중경시 고신구중학교 교원 조효령이 빨래를 하다가 남편 왕동의 옷호주머니에서 이런 글쪽지를 발견했다. “왕동씨, 사랑해요. 우리의 사랑이 영원하기를 바랍니다.” 어느날, 조효령이 밤낮 근심하던 일이 끝내 발생했다. 영영이라고 부르는 녀자한터서 전화가 왔다. 영영은 반년전부터 왕동을 알게 되였는데 지금은 떨어질수 없는 관계로 발전하였다고 하면서 조효령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자고 제의했다. 그날 오후 두 사람은 한 커피점에서 만났다. 조효령은 남편이 새로 사귄 녀자가 아주 이쁘고 멋진 젊은 녀자일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작 만나고보니 별로 이쁘지도 않은 리혼한 녀자였다. 영영은 왕동에 대한 사랑에 대해 남김없이 털어놓았다. 반년전에 영영과 왕동은 서로 눈이 맞았던것이다. 조효령은 화가 나서 따지고 들었다. “두 사람의 관계가 대체 어느 정도인가요?” 그러자 영영이 웃으면서 말했다. “우린 서로 못하는 말이 없어요. 왕동씨는 나를 만난후부터는 부인을 건드릴 생각도 없다고 하던데요…” 조효령은 그날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남편과 대판싸움을 벌렸다. 결혼한지 14년이 되지만 처음으로 되는 부부싸움이였다. 왕동은 이후 다시는 그녀와 만나지 않을것이라고 다짐했다. 사실 조효령은 보기 드문 현모량처였다. 결혼해서 14년동안 조효령은 혼자서 모든 가정일을 담당했다. 왕동은 이런 안해가 좋았으며 안해를 버릴 생각은 꼬물만치도 없었다. 영영은 왕동을 차지하려고 하루에 한번씩 조효령에게 전화를 걸어와 리혼하라고 재촉했다. 조효령은 계속 남의 가정을 파괴하려 한다면 단위에 반영하겠다고 경고했다. 그제야 영영은 조금 수그러들었다. 조효령은 남편을 용서해주고 밤 10시전에 꼭 집에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어느날 왕동이 출장을 떠나면서 10일내에 집으로 돌아오게 될것이라고 했다. 닷새후에 조효령은 집을 거두다가 벽장에서 남편의 출장용트렁크를 발견하고 의심스러워 남편에게 전화를 했다. 남편은 래일 오후에 돌아갈것이라고 전했다. 조효령이 저녁에 퇴근하여 집에 돌아오니 남편이 쏘파에 앉아 책을 보고있었는데 옆에는 벽장에서 보았던 트렁크가 놓여있었다. 조효령은 참을래야 참을수가 없었다. “날 바보취급하세요? 어리석은 연극을 그만해요. 이 출장용트렁크는 어제저녁까지 벽장에 있었어요. 당신 참 뻔뻔스럽네요.” 왕동은 자신이 꾸민 사실이 드러난것을 알아차리고 머리를 푹 숙이고말았다. 조효령은 눈물을 흘리면서 어떻게 할 생각인가고 따졌다. 왕동은 안해를 위안했다. “여보, 사실 난 당신을 더 사랑하오. 그러니 나에게 시간을 주오. 그 녀자와 철저히 관계를 끊겠소.” 하지만 영영의 열렬한 “사랑”공세에 왕동은 안해에게 했던 맹세를 까맣게 잊고 자주 그녀와 밀회를 가지였다. 비밀스러운 생활에 싫증을 느낀 영영은 왕동을 보고 안해와 리혼하고 자신과 결혼할것을 강요했다. 하지만 왕동은 안해와 리혼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2  2005년 1월중순, 영영은 자신이 임심했다고 왕동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자 왕동은 당황해서 말했다. “여보, 우리 다 아이가 있소. 결혼을 해도 정책에 따라 아이를 더는 키우지 못하오. 그러니 당신이 이이를 지워버린후 내가 리혼하고 그다음 우리 결혼하자구.” 하지만 영영은 왕동의 말을 믿을수 없다면서 먼저 결혼한후 인공류산을 하겠다고 고집했다. 왕동이 그럴수는 없다고 우기자 영영은 왕동을 위협했다. “뭐요? 그럼 여직껏 난 당신의 놀이개였어요? 정 그러면 난 아이를 낳아서 당신의 단위를 찾아가 모든것을 공개하겠어요. 그리고 당신을 중혼죄로 신고하겠어요.” 영영의 위협에 겁을 먹은 왕동은 안해와 꼭 리혼하고 그녀와 결혼하겠으니 그런 생각을 버리라고 구슬렸다. 왕동은 안해앞에서 무릎을 꿇고 빌었다. “여보, 난 죽을 죄를 졌소. 그 녀자가 임신했소. 당신의 요구를 다 들어줄테니 우리 리혼하기요.” 하지만 조효령은 남편이 아무리 빌고들어도 절대 리혼하지 못하겠다고 잘라말했다. 왕동은 리혼을 목적으로 안해를 못살게 굴었다. 조효령은 하는수 없이 주동적으로 리혼을 제기했다. 하지만 그녀는 가옥사용권을 전부 자신의 개인소유로 하고 왕동이 달마다 딸의 부양비 1000원을 지불하며 영영은 자신에게 정신손해비를 배상해야 한다는 조건을 제기했다. 조효령과 영영이 다방에서 만났다. 조효령이 정신손해비 100만원을 제기하자 영영은 그만 아연해졌다. “뭐요? 100만원? 나한테 남편을 팔려는거예요?” “그래요. 팔겠어요. 사겠으면 사고 싫으면 그만두세요.” 두 사람은 흥정을 하다가 아무런 결과도 없이 갈라졌다. 영영은 밤이 길면 꿈이 많아진다는 생각이 들어 이튿날 아침에 조효령에게 전화를 걸어 만나자고 했다. 조효령도 이런 정신적시달림을 받기 싫어 거절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만나서 격렬한 흥정을 했다. 나중에 40만원으로 정하고 지불방식과 쌍방의 의무와 권리 등에 대한 계약서에 손도장을 찍었다. 영영은 병원에 가서 배속의 아이를 지워버리고 일주일후 사처로 뛰여다니며 돈을 모았다. 영영은 40만원을 조효령에게 직접 넘겨주었다. 협의리혼이 효과를 발생하는 마지막날에 왕동은 안해보고 이렇게 말했다. “당신도 좋고 그 녀자도 좋소. 옛날같으면 난 당신 둘을 다 안해로 두고싶소. 하나는 안해로 하고 하나는 첩으로 하고…” 왕동은 리혼한후 경제적으로 꼭 조효령과 딸을 잘 돌봐주겠다고 다짐했다. 조효령은 정작 리혼하게 되자 눈물이 흘러나왔다. 남편이 바람을 피웠다 하지만 그래도 10여년간 함께 살아온 부부이고 귀여운 딸까지 있으니 어쩐지 기분이 쓸쓸했다. 이튿날, 두 사람은 함께 민정국에 리혼수속을 하러 갔다. 왕동은 갑자기 안해를 끌어안고 눈물을 흘렸다. “정말 당신에게 미안하오. 정말 미안하오.” “그래요? 그럼 이 일이 없었던걸로 해요. 리혼수속을 그만두는게 어때요?” “이미 늦었소. 난 당신에게 너무 많은 피해를 주었소. 또 다른 녀자에게까지 피해를 주고싶지 않소.”   3  영영과 왕동은 “번개식”결혼을 했다. 영영은 40만원으로 사들인 남편을 각별히 사랑했다. 영영은 그다지 이쁘지 않았지만 그녀의 뜨거운 사랑에 왕동은 도취되였다. 하지만 이런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조효령에게 남겨준 집은 화려했지만 영영이 마련한 세집은 수도물마저 제대로 공급되지 않는 집이였다. 그리고 영영의 료리재간이 너무 차해 밥맛이 다 없어졌다. 얼마 안가서 영영에 대한 왕동의 감정은 점점 식어졌다. 정신이 공허해진 왕동은 마작을 배웠고 마작판에서 돈을 잃었거나 내키지 않는 일이 있으면 영영에게 화풀이를 했다. 영영은 녀자의 직감으로 왕동의 감정이 식어가고있다는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남편에게 제3자가 나타날가봐 두려워 남편의 비위를 맞추느라 신경을 썼으며 남편을 감시하기 시작했다. 어느날, 왕동이 리혼한후 처음으로 친딸을 보러 갔다. 영영도 함께 가겠다고 나섰다. 안해의 불신에 왕동은 화를 내면서 혼자 집을 떠났다. 사실 영영이 부질없는 근심을 한것은 아니였다. 왕동은 전처의 집에 들어서자마자 곧 오래동안 느껴보지 못했던 따스하고 포근함을 느꼈다. 집안의 모든것이 자기가 있을 때보다도 한결 더 아름다와보였다. 왕동은 딸에게 공부를 가르쳐준후 조효령을 끌어안고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리혼한후 더 이뻐졌소. 재혼을 서둘지 말라고 부탁하고싶소. 나를 포함한 지금의 남자들은 믿을수 없어서 하는 소리요…” 점심에 왕동은 전처가 해주는 밥을 먹으면서 이런 말을 했다. “그래도 당신이 해준 밥이 맛있구만.” 철없는 딸애가 종알거렸다. “엄마가 해준 밥이 제일 맛있어. 아빠, 리혼하지 말고 우리와 함께 살자. 그럼 매일 엄마가 해준 밥을 먹을수 있는거야.” 딸의 말에 왕동은 슬그머니 화장실에 들어가 한참동안 울었다. 오후 4시가 되자 왕동은 아쉬워하면서 전처의 집을 나섰다. 그는 떠나면서 조효령에게 돈 1200원을 주었다. 이때 영영은 밖에서 남편을 기다리고있었다. 반나절이나 남편을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자 마음이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왕동은 풀이 죽어 이렇게 말했다. “이 더운 날씨에 왜 이래? 내가 나쁜짓하고 다니는것도 아닌데 한심하군…” 조효령의 생일날에 왕동은 영영에게 단위에 급한 용무가 있으니 밥을 집에서 먹지 않겠다고 전했다. 영영은 밤이 늦었는데도 남편이 돌아오지 않으니 남편에게 전화를 했다. 그러자 남편이 화를 내는것이였다. “당신 남편을 의심해? 솔직히 말해주지. 난 지금 전처네 집에 와있어. 딸의 공부성적때문에 지금 전처집에 와 있소. 왜 귀찮게 구오.” 남편이 화를 내자 영영은 다급히 말했다. “물론 아빠가 딸을 책임져야죠. 하지만 날 속일 필요는 없잖아요?” 영영은 시름이 놓이지 않아 친딸을 집에 데려다가 공부를 시키라고 했다. 하지만 왕동은 딸이 엄마를 떠나기 싫어한다는 구실로 거절했다. 그후 왕동은 늘 딸의 공부를 구실삼아 전처집으로 자주 드나들었다. 지어 단위에서 나누어주는 복리물품들을 모두 전처집으로 날라갔다. 조효령은 전남편이 자주 집에 드나드는것을 거절하지 않았다. 그녀는 지난날 자존심때문에 남편을 잡지 못한것을 후회했다. 영영은 남편이 전처집에 자주 드나든다는 사실을 알고 조효령에게 전화했다. “당신들은 이미 리혼을 했어요. 남의 남편을 더는 유혹하지 마세요.” 조효령은 웃으면서 비꼬았다. “뭐라구요? 남의 남편을 유혹하지 말라고? 누가 먼저 남의 남편을 유혹했어요? 당신은 그 사람의 몸은 얻었지만 영원히 그의 마음은 얻지 못할거예요.” 영영은 화가 나서 울었다. 이것이 그가 40만원을 팔아 정부의 위치에서 안해의 자리를 찾은 행복이란 말인가? 영영은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출처:지음/ 제공: 연변라지오TV신문  
80    자색 팔아 부청장까지 된 녀경찰 댓글:  조회:3835  추천:0  2009-09-18
      초중문화정도밖에 안되는 녀성로동자가 행운스럽게 공안계통의 “한떨기 꽃”으로 되였다. 뛰여난 “교제”능력과 자색으로 그녀는 두 성급고관인물과 “인연”을 맺은후 련이어 부양시중급인민법원 부원장, 부양시 부시장, 부양시당위 부서기, 안휘성위생청 부청장 등 승진가도를 거침없이 달렸다. 6년도 채 안되는 사이에 성급부청장으로 바라오른 그녀를 두고 사람들은 “직승비행기청장”이란 별호까지 달아주었다. 하지만 이처럼 “전기적색채”가 농후한 상군은 90만원을 회뢰하고 출처가 불명확한 100여만원이란 거액의 재산때문에 안휘성 안경시검찰원에 의하여 기소되였다. 경찰의 “꽃” 2005년 9월, 상군이 면직되였다는 소식이 부양시로 전해지자 사람들은 조금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녀자의 추문들은 삼척동자마저 다 알고있었기때문이였다. 1957년 1월에 출생한 상군은 안휘성 태화현 성관진태생이였다. 그녀는 초중을 졸업한후 현소재지의 한 식료품공장에 들어가 로동자로 되였다. 후에 그녀는 공안국 수상파출소에 전근하여 녀경찰로 되였다. 그녀는 예쁘게 생기지는 않았지만 1.68메터나 되는 키에 높은 코마루와 커다란 눈망울을 가진데다 늘 웃음을 머금고있었고 말주변도 좋았다. 특히 경찰복을 입은후 사람들은 모두 그녀를 공안계통의 “한떨기 꽃”이라고 춰주었다. 내막을 아는 사람의 회억에 의하면 어느 한번 현공안국의 리모가 파출소로 와서 사업을 검사하게 되였다. 그녀가 마침 적임자로 지목되여 리모를 안내하여 술대접을 하게 되였다. 술자리를 파했을 때 리모는 곤드레 만드레 취하였다. 파출소 소장은 그녀를 시켜 호텔로 가서 리모를 보살피게 하였다. 호텔방에서 리모가 와락 그녀의 손을 잡아당기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래도 진짜로 나를 아끼는건 상아가씨구만…” 리모는 체신을 잃고 마구 그녀의 몸을 주물러대기 시작하였다… 그녀는 거절하는체하면서 슬쩍 이렇게 속내를 내비쳤다. “참, 내가 마음이 들어요? 듣자니 파출소에 부소장자리가 비였다던데요?” 리모는 인차 그녀의 뜻을 알아차렸다. “걱정마, 그 자리는 조만간 상아가씨거야.” 그러자 그녀는 대뜸 리모의 품에 기대였다. 나중에 그녀는 파출소의 부소장으로 되였고 얼마 안되여 또 지도원으로 승진되였다. 그후 리모의 추대로 그녀는 또 순조롭게 현법원으로 전근되였을뿐만아니라 자기의 육체를 “밑천”으로 현의 주요한 책임자의 호감을 샀다. 결과 그녀는 3년도 안되는 사이에 현법원의 부원장으로 제발되였다.   고관대작도 구워삶아 1990년 봄의 어느날, 현임 부양지구당위 서기 왕조요가 법원으로 와서 사업을 검사하였다. 상군은 크게 기댈수 있는 보호자가 왔다고 여기고 갖은 방법을 다 써서 그한테 달라붙으려고 하였다. 그녀는 사업을 회보하는데로부터 함께 식사하는데에 이르기까지 갖은 아양을 다 떨면서 자기를 충분하게 과시하여 인차 자기보다 여덟살우인 왕조요와 “한몸”으로 되였다. 미구하여 그녀는 태화현인민법원 원장이란 자리에 앉게 되였다. 왕조요의 가족은 200킬로메터밖에 있는 숙주시에 살고있었다. 그래서 상군은 왕조요와 뒹굴기 편리하도록 부양시에 살림집 한채를 마련하였다. 그녀는 주말마다 정정당당하게 “집”으로 돌아갔는데 그 “남자세대주”란 자연히 왕조요였다. 얼마 안되여 왕조요는 성으로 전근되여 취임하게 되였다. 상군은 시기가 이미 성숙된것을 보고 이렇게 부탁했다. “나으리, 제가 부양으로 전근되여 일한다면 나중에 합비로 가서 당신을 만나기가 훨씬 편리할것 같은데요?” 왕조요는 즉석에서 그녀를 부양시중급인민법원 부원장으로 제발시키겠다고 승낙하였다. “허허, 부양으로 가고싶다고? 그러면 우리 합비에서 만나기 편리하다? 좋아 내가 올라가면 힘을 써야지.” 과연 왕조요가 안휘성 부성장으로 취임된지 4개월만에 상군은 소원대로 부양지구중급인민법원 부원장으로 승진하였다. 왕조요가 높은 관직에 오른후 조회충이 신임서기로 되였다. 상군은 또 천방백계로 조회충에게 달라붙으려고 수단을 가리지 않았다. 조회충은 진작부터 그녀와 왕조요의 관계를 알고있었으며 또 한창 왕부성장과 인연을 맺을 방법을 찾지 못해 골머리를 앓고있었다. 어느 한번 조회충이 부양지구중급인민법원으로 사업시찰을 왔다. 점심에 식사를 같이 할 때 상군은 주동적으로 조회충의 옆자리에 앉았다. 두 사람은 숱한 사람들앞에서 거리낌없이 서로 추파를 보냈다. 뒤미처 상군은 부양시 국제호텔에 체류하고있는 조회충의 단골손님으로 되였다. “두 나으리”의 보살핌을 받아 상군은 인차 부양지구중급인민법원 원장으로 승급하였다.   믿던 나무가 거꾸러진후 관직이 높아지면서 상군의 권력은 점점 더 막강하게 되였다. 그녀는 자기가 거머쥔 권력을 리용하여 각종 인사배치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만약 자신의 능력으로 할수 없는 일이라면 즉시 “두 나으리”와의 특수한 관계를 리용하여 해결하였는데 나중에는 사법기관의 저지를 받을 정도에까지 이르렀다. “두 나으리”가 선후하여 나떨어지자 상군은 당황한 나머지 하루도 시름을 놓을수 없었다. 2005년 5월, 일찍 그녀가 관할한적이 있는 부양시중급인민법원에서 여직껏 덮어감추고있던 법관이 죄를 지은 사건이 폭로되였다. 부원장으로부터 형사법정과 집행정의 정, 부 정장 그리고 일반법관에 이르기까지 사건에 련루된 사람들이 줄줄이 걸려나왔다. 직무에서 떨어진 법관들은 관대한 처리를 받으려고 법원 고위층지도자들을 적발하였다. 게다가 안휘성당위 부서기 왕조요가 요직에서 나떨어진후 상군 등 사람들이 련루되였다. 심사를 받는 기간에 상군은 자기와 “두 나으리”의 특수한 관계를 자백했고 자기가 “자색으로 권력을 도모”한 사실을 승인하였다. 검찰기관에서는 그녀를 기소하면서 다음과 같은 죄상들을 렬거하였다. 1992년부터 2005년까지의 사이에 상군은 공사를 도급주거나 간부를 제발하고 전근시키고 배치하는 등 과정에서 관련인 41명으로부터 선후로 인민페 90여만원, 200딸라를 회뢰하였다. 뿐더러 타인에게도 리익을 도모해주었다. 그녀에게는 또 합법적인 출처를 밝힐수 없는 100여만원에 달하는 거액의 가정재산이 있었다.                           《검찰일보》/연변라지오TV신문  
79    30년대 중국의 “영화황제” 김염 댓글:  조회:6859  추천:0  2009-09-18
  부인 진이와 함께 1932년 5월 1일,  상해 《전성일보》의 제1면 첫머리에는 독자들이 투표로 선출한 중국 10대 영화배우들의 소식이 눈에 띄게 발표되였다. 이번 선거는 10개 항목에 따라 제각각 선거하는 방식을 취했는데 호접이 “영화황후”로 뽑히고 영사막에 오른지 얼마 안되는 22살 젊은 남자배우가 가장 많은 득표로 3개의 “제일”을 쟁취했는데 “관중들이 제일 좋아하는 남자배우”, “제일 멋있는 남자배우”,”관중들이 제일 사귀고싶은 남자배우”로 되였으며 매체와 관중들은 모두 그를 “영화황제”라고 불렀다. 이 “영화황제”가 바로 조선족인 김염(金焰)이였다. 김염의 원명은 김덕린(金德麟)으로서 1910년 4월 8일 조선 서울의 한 애국자가정에서 태여났다. 아버지 김필순(金弼淳)은 세브란스에서 류학한 조선 최초의 서의이며 병원에서 원장직을 맡는 한편 신민회에 참가한 항일투사였다. 지금도 서울의과대학병원에 가면 그의 동상이 있다고 한다. 1927년에 초중을 졸업한 김염은 상해로 가 일자리를 구하려 하였다. 처음 그는 로신처럼 작가로 되여 소설을 쓰려고 작심하고 글을 써 투고했으나 퇴자를 맞군 했다. 그가 생활난으로 모대기고있을 때 마침 당시 향항에 있던 민신영화회사가 상해로 이주하게 되였는데 이 회사에서 잡일을 할수 있는 사람을 모집하자 그곳에 입사하여 매일 1원씩 받으며 극무, 기록원 등 일을 맡아하였다.  그러던중 민신영화회사에서 《목란종군》, 《철혈남아》 영화를 찍는 과정에 배우가 모자라자 보잘것없는 보조역을 김염에게 맡겼다. 이때로부터 그는 영화를 사랑하게 되였고 배우가 되려는 꿈을 꾸게 되였다.  김염이 영화배우로 되려는 아름다운 꿈을 꾸고있을 때 민신영화회사는 경영이 잘 되지 않아 파산을 선고했다. 또다시 생활난에 부대끼고있을 때 민신영화회사의 감독 만뢰천의 소개로 김염은 중국의 저명한 감독이자 배우인 전한을 만나게 되였다. 당시 전한은 상해에 남국사를 꾸렸댔는데 주로 연극을 위주로 하였다. 저명한 배우 전한선생을 만난것은 김염의 예술생애에 전환점이라고 볼수 있었다. 전한은 김염이 연기기질이 있고 마음씨가 고운것을 보고 세심하게 지도하기 시작했다. 김염 역시 전한을 스승으로 모시고 꾸준히 노력하여 연기실력이 크게 늘었으며 전한이 감독을 맡은 연극에서 주요배우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영화의 한 장면  1927년, 김염은 미국 꼴롬비아대학과 뉴욕연구소에서 류학한 실력파감독 손유와 만났다. 손유는 미국에서 귀국하여 영화 《풍류검객》을 찍으려고 주요배우를 물색하던중 김염을 만나게 된것이였다. 영준하면서도 건강하고 활발하면서도 순박한 19살 생기넘치는 김염의 형상은 손유가 바라던 주인공이였다. 이렇게 되여 김염은 주요배역을 맡게 되였다. 무술영화인 《풍류검객》에서 김염은 천부적인 재질과 손유의 지도하에 대성공을 거두었다.  1930년, 김염은 손유의  《련화》에 들어가 손유와 합작하여 《야초한화》의 남주역을 맡았다. 김염과 하층계급 처녀역을 잘 연기한 완영옥은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며 일약 최고의 배우로 등극하게 되였다. 진보적인 내용에다 배우들의 신선한 연기가 조화를 이루며 관중들을 열광시켰다. 이렇게 김염은 《야초한화》에서 역시 대성공을 거두면서 자신의 황금시대의 전성기를 맞았다.  그후 김염은 저명한 감독 만뢰천의《련애와 의무》, 《도화읍혈기》 등 련화회사의 조기영화를 찍음으로써 당시 제일 환영받는 남주역으로 되였다. 영화 《련애와 의무》에서 김염은 주인공인 가난한 대학생 리조의의 역을 맡았는데 표현이 어찌나 자연스러운지 감독도 놀랐다고 한다. 감독이 김염을 보고 “령감이 어디에서 왔는가”고 묻자 김염은 “이는 내가 겪은 사실이며 나의 과거생활이였다”고 대답했다.  1931년부터 상해에 있는 여러 회사의 초청으로 김염은 선후하여 《일전매》, 《은한쌍별》, 《황금시대》, 《모성의 빛》, 《새도화부채》, 《도시의 밤》, 《랑도사》 등 영화에서 주역을 맡았다. 1932년에는 좌익희곡가련맹에 가입했다.  1932년, 김염은 관중평의에서 일약 “영화황제”의 보좌에 오르게 되였다. 김염의 매력적인 외모와 튼튼히 단련된 몸매는 당시 중국젊은이들이 선망하는 대상으로 되였다. 1930년대에는 그야말로 김염의 말, 행동과 그의 모든것이 류행되였다. 그때 얻은 “영화황제”라는 칭호는 그후 그와 비교되는 배우가 없어 지금까지도 유일한 호칭으로 되고있다.  1934년 1월 1일,  “영화황제” 김염은 영화 《들장미》에서 함께 출연했던 녀주역 왕인미(王人美)와 결혼했다. 이 시기는 김염의 인생과 사업에서 휘황한 시기라 말할수 있다. 이 해에 손유감독이 항일전쟁을 묘사한 《큰길》이라는 극본을 썼는데 김염은 극본을 받아쥐자마자 흥분에 빠져들었다. 자기가 그렇게도 갈망하던 소재로 엮은 작품이였던것이다. 영화 《큰길》에서의 김염의 형상은 일대 큰 전변을 가져왔다. 영사막에서 김염의 형상은 중국로동자의 형상이였는바 그는 영준한 모습과 진실한 연기로 암흑한 사회에서 강의하고도 락관적인 도로건축로동자 김형님의 형상을 관중들에게 보여주었다. 《큰길》에서의 출중한 연기는 나라를 사랑하고 용감하며 강직하고 악세력에 고개를 숙이지 않는 그의 성격에서 온것이였다.  김염은 영화계에서 활약했을뿐만아니라 항일활동에도 적극 참가했다. 일찍 일제가 상해에서 일으킨 “1, 28사변”때에 그는 포화를 무릅쓰고 전선구호대에 참가하여 일제와 싸웠다. 그는 예술을 무기로 일제와 싸웠다. 그는 자기가 주역을 맡은 영화 《기개가 하늘을 찌른다》에서 격앙된 목소리로 “우리는 일제에 저항해야 합니다”고 웨쳤다.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김염은 1941년 12월 8일 향항에서 중경으로 들어갔다. 중경에서 그는 중국 최초의 공군생활을 반영한 영화  《만리창공》의 촬영에 참가하였는데 중국공군병사들의 항일전쟁에서의 애국심과 용감성을 충분히 표현했다.  1944년, 성도에서 무대극에 출연하여 《로미오와 쥴리에트》 등 연극을 하였는데 당시 연극을 본 사람들은 로미오의 역을 완벽하게 창조한 김염의 연기력에 감탄을 금치 못했고 지금까지 중국력사에서 로미오역을 가장 잘 연기해냈다고 평가했다.  1944년, 그는 생활난과 성격차이로 왕인미와  헤여지게 되였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투항하자 김염은 상해로 돌아와 계속하여 영화사업에 종사했다. 이 기간 그는 《영춘곡》, 《승룡쾌서》, 《잃어버린 사랑》 3부작의 주인공을 맡았다. 영화 《잃어버린 사랑》을 찍는 과정에 김염은 녀주인공역을 맡았던 진이(秦怡)를 알게 되고 그들은 서로 사랑하며 1948년에 행복한 가정을 이루었다. 당시 김염의 나이는 36살이였고 진이의 나이는 24살이였다.   멋쟁이 김염  김염의 부인 진이의 회상에 의하면 김염은 주은래총리와 두터운 감정을 지니고있으며 해방후에 여러번 만났다고 한다. 남개중학시절 김염이 주은래의 후배인 까닭도 있겠지만 김염이 30년대 중국의 “영화황제”였기때문일수도 있다. 김염이 조선사람인것을 안 주은래총리는 우스개로 “당신은 우리의 부마입니다”라고 했다고 한다. 김염이 집에 와 “내가 부마로 되였으니 당신은 공주로 되였구려”라고 우스개소리를 했다고 한다. 그만큼 주은래총리와 김염은 허물없이 지냈고 서로간에 좋은 영향을 주었다는것을 알수 있다.  1957년, 김염은 청해에서 영화 《폭풍우속의 용감한 매》를 찍게 되였다. 이 작품은 마을사람들을 착취하고 압박하는 국민당 악세력에 맞서서 싸우는 혁명가들의 형상을 반영한 영화로서 마을사람들과 홍군이 힘을 합쳐 항쟁에서 승리하는 내용의 사실주의적작품이였다. 영화에서 김염은 성숙되고도 믿음직한 연기를 잘 보여주었다. 그러나 영화를 찍던중 고원의 무서운 추위속에서 장기간 찬음식을 먹은탓으로 위병에 걸리고말았다. 1958년, 김염은 독일에 가 영화를 찍고 금방 북경으로 돌아오자 장기간의 피로로 인해 대형위출혈로 병석에 눕게 되였다. 이때로부터 그는 병석생활을 하게 되였다.  1983년 12월, 진이는 영화 《뢰우》를 찍느라고 분주히 보내던중 김염의 옛병이 도져 위험하다는 소식을 듣고 총망히 병원에 갔을 때 김염은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있었다. 이렇게 아쉽게도 일대 “영화황제” 김염은 세상을 하직했다.  일생동안 그는 42편의 영화에서 주인공역을 맡았다. 그는 영화를 함부로 찍지 않았다. 그는 영화황제로서, 참다운 예술가로서 자신이 어떻게 행동하고 살아야 하는지 깊이 터득한 사람이였다.  김염의 부인 진이는 사랑하는 남편 김염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김염은 평소에 말수가 적고 자기의 견해를 잘 발표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진정으로 따뜻한 마음을 갖고있는분이였다. 나는 마음속으로부터 그의 인품에 탄복했다. 련애하기전 그는 나의 우상이였기에 나는 그의 결함을 자세히 생각해보지 않았으나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는 외모가 영준했을뿐만아니라 마음도 선량했다. 진정 그는 완벽한 남자였다.”         절강넷/연변라지오TV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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