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청의 어린시절
강청(1914~1991년)은 문화대혁명기간에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던 “4인방”의 핵심인물로서 본명은 리운학(李云 )이고 산동성 제성( 城)출신의 녀자였다.
제성은 산동남부의 회하(淮河)상류에 위치한 현으로 밀, 고구마, 콩, 수수, 옥수수 등의 주산지이다.강청의 할아버지는 원래 2만여평의 토지를 소유한 지주였으나 아버지 리덕문(李德文)대에 이르러 파산하였다.
리덕문의 본처는 원래 지주집안의 딸이였으나 늙고 못생겼다는 리유로 리덕문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 그래서 리덕문은 50세에 다시 결혼하여 20여세의 젊고 예쁜 란씨를 첩으로 삼았다. 1914년 3월, 란씨는 딸을 낳았는데 그녀가 바로 몇십년후 중국대륙을 떠들썩하게 흔들었던 리운학(강청)이다.
당시 산동지역에는 여전히 전족이라는 악습이 성행하고있었다. 리운학은 6살때 전족한 발이 너무도 아파서 밖에서 놀 때는 몰래 전족을 풀어버리고 집에 올 때 다시 전족을 하군 했다. 이러한 일은 당시로서는 감히 상상도 할수 없는 대담한 행동이였다.
리덕문은 성미가 급하고 거칠어 걸핏하면 자기 안해에게 손찌검을 하군 했다. 어느해 정월 대보름에 리운학의 어머니 란씨는 실수로 넘어져 그릇을 깨뜨렸다. 이에 화가 난 리덕문이 삽으로 마구 때리는 바람에 란씨는 손가락이 부러졌고 놀라서 울던 리운학은 따귀를 얻어맞아 이가 부러졌다. 더이상 고통과 멸시를 당할수 없다고 생각한 란씨는 딸을 데리고 그 집을 나왔다. 그러나 아무것도 가진게 없었던 란씨는 생계를 위하여 남의 집 종살이라도 해야 했다. 그녀는 리운학을 친척집에 맡겼는데 이로부터 리운학에게는 가난하고 힘든 생활이 계속되였다.
영화배우 람평에서 모택동의 안해 강청으로
1926년, 12살의 리운학은 어머니와 함께 천진의 언니네 집으로 가서 살았다. 1929년 봄 리운학은 형부 왕극명(王克 : 당시 봉계군벌의 군관)이 제남으로 전근되여 그녀도 언니식구를 따라 제남으로 갔다. 15살되는 해에 리운학은 산동실험극원에 들어가 연극과 고전음악을 배웠다.
실험극원 입학은 그녀의 인생을 바꾸는 첫번째 전환점으로 되였다. 연극배우 리운학이 없었다면 후날 영화배우 란평이 있을수 없었기때문이다.
1930년, 실험극원은 정국의 변화로 문을 닫게 되였다. 1931년 봄, 리운학은 청도에 있는 스승 조태모(당시 청도대학교 교장)를 찾아갔다. 그의 배려로 리운학은 청도대학 도서관에서 일했다. 당시에 그녀는 조태모의 처남 황경과 사랑에 빠져 동거생활을 하였으며 조태모의 안해이자 황경의 누나인 류산을 따라서 전한이 창설한 극단 남국사(南 社)에 들어갔다. 1933년 2월, 19살의 리운학은 황경의 소개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그해 7월, 반역자의 밀고로 황경이 체포되자 리운학은 상해로 피신했다.
상해에서 그녀는 전한과 그의 동생 전원의 도움으로 서명청이 책임자로 있는 “신경공학단"에서 교편을 잡았다. 1933년 겨울, 체포되였던 황경이 석방되여 상해로 돌아왔다. 그러나 황경의 부모님의 반대로 그들은 결혼식을 올리지 못하고 따로 집을 구하여 다시 동거를 시작하였다.
1934년 1월 28일, 상해에서 “1.28” 항전2돐을 기념하는 시위에 참가했던 리운학과 황경은 체포될 위기에 처해 북경으로 피신했다. 북경에서도 그들은 계속 동거했다. 황경의 부모가 둘이 같이 있는것을 반대하면서 생활비를 보내주지 않았다. 리운학은 황경의 곁을 떠나기로 결심하고 1934년 5월중순에 상해로 돌아갔다.
1934년 10월말, 리운학은 상해시경찰국에 약 1개월간 수감되였다가 기독교 상해녀성청년회의 도움을 받아 보석으로 풀려나왔다. 이때 마침 황경이 상해로 돌아왔다. 갈곳이 없었던 리운학은 황경의 큰어머니네 집에서 황경과 동거했다.
1935년 봄, 그녀는 상해과외극인협회에 들어가 유명한 희곡 《인형의 집》의 녀자주인공 노라역을 맡게 되였다. 이것은 그녀의 인생을 또다시 바꾸는 중대한 전환점이 되였다.
이때로부터 리운학은 예명을 람평이라 하였다. 그녀는 당시 상해영화계에서 영향력이 있는 영화평론가 당납과 사랑에 빠졌다. 1936년 4월 21일, 두 사람은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으나 결혼등록을 하지 않았다.
1937년 5월, 리운학은 당납과 헤여지고 상해 연극계에서 매우 명망이 높던 연출가 장민(章泯)과 동거했다. 1937년 7월, 상해에서 더이상 발붙일 곳이 없게 된 리운학은 명배우의 꿈을 접고 도망치듯 상해를 떠났다.
이때 그녀는 황경이 연안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연안으로 갈 결심을 하고 서안에 있는 서명청을 찾아갔다. 서명청은 엽검영의 부인과 친분이 깊었다. 엽검영부인의 소개로 리운학은 서안팔로군사무소에서 사업하는 주은래의 부인 등영초를 만났다. 등영초는 리운학이 연안으로 갈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1937년 8월말, 리운학은 연안에 도착하여 제3초대소에 투숙하였다. 그녀는 숙박부에 이름을 적을 때 “람평” 대신 “강청”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강청은 연안에 도착한후 곧장 심사를 받았다. 2개월간의 심의를 거친후 강청은 황경의 도움으로 다시 당적을 회복하고 1937년 11월에 중국공산당 중앙당교에 입학하여 6개월간의 교육을 받았다.1938년 7월 7일, “7.7항전” 1돐기념행사가 연안에서 열렸다. 이날 오전에는 모택동의 보고가 있었고 오후에는 문화행사가 있었는데 이 문화행사에서 강청은 경극 《타어살가》의 주역을 맡아 관중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공연을 끝까지 관람한 모택동은 배우들을 격려하기 위해 분장실로 들어가서 강청과 악수를 하고 담소를 나누었다. 이로써 강청과 모택동의 력사적인 만남이 이루어졌다.
강청이 연안으로 갔을 때 모택동의 두번째 부인 하자진은 서안에 있었다.
당시 강청은 다른 사람에 비해 용모가 출중한편이였으며 연기도 뛰여났다. 지금은 그녀를 삼류배우라 폄하하는 사람도 많지만 그 당시의 상황에서 그녀는 분명 연안과 섬북지역의 인기배우였다. 그녀는 연기뿐만아니라 노래도 잘 불렀으며 모택동은 그녀가 공연한 《타어살가》를 좋아했다. 1938년 8월, 강청은 군위원회사무실 비서로 발령받아 모택동과 함께 일할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였다. 모택동과 강청의 련애설이 퍼져나가자 반대하는 사람이 많았다.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에서는 모택동의 결혼문제를 토론에 붙여 모택동의 뜻에 따르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강청에 대해서는 “약법3장( 法三章)”을 규정했다.
첫째, 모택동과 하자진의 부부관계가 공식적으로 정리되지 않고 그대로 존재하는한 강청은 모택동의 부인으로 행세할수 없다.
둘째, 강청은 모택동의 일상생활과 건강을 책임지고 돌보아야 하며 차후 그 누구도 당중앙에 이와 류사한 요구를 제기할 권리가 없다.
셋째, 강청은 모택동의 사적인 업무와 생활에만 관여해야 하며 20년동안 당내의 어떠한 직무도 맡는것을 금한다. 당내의 인사문제와 정치활동에도 절대 참여할수 없다.
강청은 이 규정에 묶여 문화대혁명이 일어나기전까지는 어떠한 정치활동에도 참여하지 못했다. 1938년 11월, 강청은 24살에 자기보다 21살이나 많은 모택동(당시 45살)과 결혼식을 올렸다.
강청은 모택동과 결혼하기전에 이미 네번의 결혼경험이 있었으며 황경과 동거할 때는 임신도 하였으나 상해에서 수술로 락태시켰다. 그때 그녀는 배우활동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있었기때문에 아이를 원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모택동과 결혼한후에 그녀는 빨리 아이를 갖고싶어했다. 아이가 있으면 무료한 시간을 달랠수도 있고 더우기 “모택동의 정실”자격을 확실히 다질수 있다고 생각했기때문이다. 1940년 8월, 그녀는 마침내 딸 리눌을 낳아 모택동의 사랑을 받았다. 그후 그녀는 재차 임신을 하였으나 더 이상 아이를 갖지 않겠다는 생각에서 락태수술을 한후 다시 임신중절수술을 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창립된후 강청은 일을 하고싶다면서 공식적인 직책을 요구했다. 당에서는 신중한 상의를 거쳐 그녀에게 중국공산당 중앙선전부 영화처 부처장이라는 직함을 주었다.
잃어버린 황제의 꿈
1966년, 문화대혁명이 일어나자 강청은 “중앙문화혁명소조” 제1부조장 겸 대리조장을 맡아 실권을 장악했다. 그후 “중앙문화혁명소조”는 조직과 권한이 비대해져 중공중앙서기처와 중공중앙정치국을 압도했다. 1969년 4월 28일에 거행된 중국공산당 9기 1중전회에서 강청은 중공중앙정치국 위원으로 되였다.
1971년 9월 13일, 모택동의 후계자로 지목되였던 부주석 림표가 반란사건으로 사망되자 강청은 모택동, 주은래, 강생에 이어 서렬 4위에 올랐으며 1972년 1월에 강생이 병으로 은퇴한후 다시 서렬 3위로 올랐다. 림표사건이후 건강상태가 점점 악화된 모택동은 자신의 뒤를 이을 후계문제에 부딪치게 되였다. 당내에서 서렬 3위인 강청은 내심 자기가 후계자로 될수있다는 기대를 하였지만 모택동은 그녀를 안중에 두지 않았다.
1973년 3월, 강청은 서렬에서 한참 뒤로 밀려나고 모택동의 총애를 받는 왕홍문이 강력한 후계자로 부상되였다. 강청은 왕홍문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장춘교, 요문원과 함께 “4인방”을 결성하여 정치적주도권을 잡아나갔다.
1974년 6월, 암진단을 받았던 주은래의 병세가 위중해져 병원에 입원하였다.모택동과 주은래의 운명이 눈앞에 다가와있다는것을 감지한 강청은 그들의 사후에 정권을 장악할 새 내각을 구상하고 그것을 실행에 옮길 준비를 했다.
1974년 7월, 모택동은 중앙정치국회의를 소집한 자리에서 강청과 “4인방”의 정치적행동에 대하여 엄중히 경고하였다. 1975년 9월, 모택동의 병세가 더욱 위중해져 말을 잘 못할 정도였으며 주은래도 4차 수술을 받았다. 이때 모택동은 조카 모원신을 곁에 두고 자기와 중앙정치국사이의 특수련락원으로 삼았다. 모택동의 지시가 모두 모원신을 통해서 전달되게 된것이였다. 그러나 모원신은 강청을 어머니라고 부를 정도로 그녀와 아주 각별한 사이였다. 이 기회를 리용하여 강청은 모원신과 결탁하고 잠간동안 “최고지시”를 반포하는 대권을 장악했다.
1976년 1월 8일, 중국공산당 중앙부주석, 국무원총리, 전국정협주석인 주은래가 서거했다. 강청은 요문원을 시켜 전국언론에 주은래의 애도를 축소보도하라고 지시하며 “황제의 꿈”을 꾸었다.
화국봉은 모택동의 후계자로서 정국을 수습하면서 강청을 견제하였지만 강청은 그러한 화국봉을 안중에 두지 않고 모택동사후의 정권장악을 위한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1976년 9월 9일 새벽, 모택동이 서거한지 얼마 안되여 “4인방”이 타도되였다.1977년 7월, 중국공산당 10기 3중전회에서 강청의 당적을 영원히 박탈하고 당내외의 모든 직무를 해임한다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1981년 1월 25일, 중화인민공화국 최고인민법원 특별법정은 강청에게 반혁명집단 주범으로 사형을 선고하고 2년후에 집행하도록 하였다. 1983년 1월, 최고인민법원 형사법정은 판결문에서 그녀에게 내린 사형판결을 무기징역으로 감하고 모든 정치적권리를 종신토록 박탈한다고 선고하였다. 1991년 5월 14일에 강청은 감옥에서 자살했다.
(중국의 어제와 오늘《주요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