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옛날과 지금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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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중국인민해방군 군가》 작곡가 정률성 댓글:  조회:3942  추천:1  2009-07-22
  《중국인민해방군 군가》의 작곡가인 정률성은 1914년 7월 한국 전라남도 광주의 한 혁명가정에서 태여났다. 1933년 5월에 그는 중국에 와서 “의렬단”이 남경에다 꾸린 “조선혁명간부학교”에 들어가 학습하면서 반일비밀사업에 종사하는 한편 로씨야의 이름난 음악가 크리노아를 만나 음악을 배우기 시작했다. 부친 정해업과 모친 최영은 사이의 5남 3녀중 5남인 정률성은 원명이 부은이였는데 음악에서 성공한다는 뜻에서 음률과 이룰성을 따 률성으로 고쳤다. 1937년, 일본침략전쟁이 발발하면서 정률성은 항일근거지인 연안으로 갔고 여기서 로신예술학원 음악학부에 입학했다.  그는 문학학부의 동창생인 막야더러 혁명의 정열로 넘치는 가사 《연안송》을 쓰게 하고 거기에 곡을 달았다.  이렇게 불멸의 송가인 《연안송》이 세상에 고고성을 울렸다.  이 노래는 연안으로부터 각 항일전선에,  지어 멀리 동남아시아나라에까지 보급되였으며 수천수만의 청년들을 항일투쟁에로 불러모았다.  1938년 8월에 로신예술학원을 졸업한 그는 연안항일군정대학 정치부 선전과에 배치되여 사업하게 되였다. 1939년  1월에 정률성은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이때 그는 생각지도 못했던 일에 말려들어 정치생명에 새로운 시련을 겪었야 했다.  해당부문에서는 “조선인들의 사회배경이 복잡하므로 더는 그들을 중국공산당에 가입시키지 않는다.  이미 가입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당적을 정지시켜야 한다.”는 통지를 받았다. 당시 해당부문의 지도자는 “정률성은 《연안송》 등 혁명가사를 창작했고 표현도 좋으므로 잠시 당적을 보류한다. 하지만 정률성은 연안에 오기전의 상세한 정활을 조직에 회보해야 한다.  특히 남경에 있을 때 어떻게 일본사람의 정보를 수집했는가?  수집한 정보를 어디에 보냈으며 누구에게 주었는가…등 사실을 진실하게 밝혀야 한다.”고 명확히 표시했다. 정률성은 남경에 있을 때 조선인들로 뭉쳐진 “의렬단”에 가입하여 반일비밀사업에 종사했다.  이 조직은 극비에 속하는 조직이여서 단선련계를 맺었다. 그의 직접적인 지도자는 김약산이였는데 김약산은 “대한민국림시정부”를 따라 대후방인 중경으로 갔다. 조국을 떠나 타향에서 친인들이 그립고 동지들이 그리웠다. 당시 정률성은 연안녀자대학 학생회 부주석인 정설송(丁雪松)과 련애를 했다. 정률성은 녀자친구를 찾아가 자신의 고독한 심정을 털어놓았다. 정설송도 남자친구의 일에 애간장을 태울뿐 그로서는 어찌할 힘이 없었다. 정설송은 정률성을 보고 이렇게 위안했다. “동무, 너무 실망하지 마세요. 당조직을 믿어요. 난 동무를 어띠까지나 사랑해요.” 사랑하는 녀자친구의 고무격려하에 정률성은 혁명에 대한 신심을 굳게 다지였다.  다행히 당시 팔로군포병퇀 퇀장 무정(장정중에서 생존한 조선인)이 선뜻이 나서서 “정률성은 정치상에서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증명을 섰다.  또 진운 등 동지들의 신임으로 모든 사실이 밝혀지고 정률성도 해방되였다. 정률성은 자신의 일생을 중국인민의 혁명과 건설 사업에 바쳤다. 정률성은 한침실에 있는 전우 공목(시인)과 함께 한가마밥을 먹으면서 손잡고 《팔로군군가》, 《팔로군행진곡》, 《팔로군과 신사군》등 8수의 가사로 된 《팔로군대합창》가사를 창작하고 자신이 직접 작곡하였다. 《팔로군행진곡》은 해방전쟁시기에 《중국인민해방군행진곡》으로 되였다.  1988년 7월 25일,  중공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이였던 등소평이 서명한 명령에 의해 《중국인민해방군 군가》로 지정되여 모든 군내의 행사나 의식에서 의식곡으로 널리 불리우게 되였다. 1941년, 정률성은 정설송과 결혼했다. 부인 정설송과는 슬하에 딸 정소제를 두었는데 현재 정소제는 북경 모 합창단의 단장으로 일하고있으며 사위 김인섭은 중국인민해방군 소장으로 있다. 정률성이 1941년에 작곡한 “《조선의용군행진곡》은 2000년 “6ㆍ15 남북정상회담”때 평양공항에 내린 한국 김대중대통령을 맞으며 환영곡으로 연주되였었다. 1942년 8월,  정률성은 화북조선혁명군정학교의 교무장으로 임명되여 태항산근거지로 갔다.  1945년 8월, 일제가 투항한후 정률성은 조직의 결정에 따라 한때 조선에 가서 사업하였다.  그는 조선인민군협주단 단장책임을 맡았다.  그는 인민군장병들을 승리와 영광의 한길로 고무하는 영생불멸의 노래인 《조선인민군행진곡》을 작곡하였다.  이 노래는 후에 《조선인민군 군가》로 되였다. 1950년 10월에 중국에 다시 온 정률성은 1951년에 또다시 가렬처절한 조선전선에 나가 “중국인민지원군행진곡”을 창작하였다. 전투기백으로 차넘치는 이 노래는 중조 두 나라 인민들을 승리에로 고무하였다. 해방후 정률성은 1952년부터 1966년까지 중국가무단, 중국음악가협회 창작조, 중앙악단 등 중국 최고의 음악단체들에서 음악활동에 종사했다.  그는 새생활창조와 생기가 들끓고있는 공장,  농촌과 부대로 다니며 수십수의 노래를 지었다.  1959년 반우파운동때 “반당분자”라는 루명을 쓰고 1966년 “문화대혁명”초기에는 “특무”로 몰려 옥고를 치렀다. “4인무리”의 압제와 타격을 받을 때에도 그는 송백같은 굳은 절개로 모택동의 시사에 곡을 다는 작곡사업을 계속하였다. 1976년, “4인무리”가 거꾸러진후 음악창작활동을 재개했지만 고혈압으로 돌아갔다. 그의 유체는 북경 팔보산혁명공동묘지에 안장되였다.  팔보산 정률성묘지앞에는 부인 정설송의 위탁을 받고 친구 교우가 쓴 글이 새겨져있고 묘비뒤편에는 그의 리력이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정률성동지는 1914년 음력 7월 7일에 한국 전라남도 광주의 한 혁명가정에서 태여났다. 소년시절에 반일애국독립활동에 참가했고 1933년 중국에 와서 선후로 남경과 상해 일대에서 항일구국활동에 종사했으며 1937년 10월 연안으로 갔고 1939년 1월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으며 일생을 중국인민의 혁명과 건설 사업에 바쳤다. 그는 충성스러운 국제주의전사이다.  1976년 12월 7일 북경에서 세상을 떴고 향년 62세였다.” 중화인민공화국 부주석이였던 왕진은 “정률성동지를 추모하여”란 글에서 “정률성동지는 현대중국에서 섭이,  선성해의 뒤를 이어 나온 걸출하고 우수한 작곡가이며 중국무산계급혁명음악사업의 개척자의 한사람”이라고 하였다. 정률성은 일생동안에 서정가곡을 포함해 군가, 합창, 동요, 영화음악, 기악곡을 망라해 360여편의 음악작품을 창작하였다. 그중 대표적인 곡으로는 《연안송》과 《팔로군행진곡》 즉 《중국인민해방군 군가》를 들수 있는데 이 두곡은 중국인민들에게 널리 알려진 사랑받는 노래로 중국현대음악사에서 대체할수 없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있다. 이로써 정률성은 섭이, 선성해와 더불어 중국근대음악사의 3대 음악가로 불리우기에 손색이 없다.  1990년 북경아시아경기대회에서 개막식 첫 프로그램으로 그의 대표곡인 《중국인민해방군 군가》가 연주된바 있고 2001년 가을에 북경에서는 그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태양을 향하여》가 개봉된바 있다.    
57    친누나에게 칼부림한 내막 댓글:  조회:3710  추천:0  2009-07-21
2009년 3월 23일 오후 3시 20분경, 북경시 해정구 모 아빠트층계에서 30살되는 한 남자가 과일칼로 누나를 여러번 찌른후 층계에 밀어뜨려 장애자로 되게 한 놀라운 사건이 발생했다.   오누이가 왜 원쑤로 되였으며 동생은 무엇때문에 이처럼 잔인한 일을 저질렀을가?   사실은 누나가 돈에 미쳐 올케더러 녀색으로 한 관계자와 판매계약을 체결하게 한후 돈을 챙기였고 올케는 그 남자와 눈이 맞아 남편과 리혼을 했으며 내막을 알게 된 동생은 누나를 용서할수 없어 칼부림을 했던것이다.   올케를 내세워 1000만원 판매계약을 체결   2006년 11월초, 북경시 모 열공급회사 업무경리인 소효운(35살)은 한 부동산회사에서 해정구 원명원부근에 부동산을 개발하면서 대량의 난방설비를 구입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소효운은 부동산회사와 판매계약을 체결하게 되면 공제금(提成)을 최소한 50만원 챙길수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11월 10일 오전, 소효운은 이번 항목을 책임진 부동산회사 부총경리인 왕강의 사무실을 찾아갔지만 거절을 당했다. 소효운은 “곡선사교”로 공략해야 한다고 생각되여 왕강과 친분이 있는 사람을 통해 그의 애호와 가정배경을 알아냈다. 사실 왕강(40살)은 안해와 감정이 좋지 않아 따로 살고있었다.   어느날, 소효운은 왕강과 친분이 있는 사람을 앞세워 왕강을 술집에 청했다. 소효운은 의식적으로 왕강에게 달라붙으면서 술도 권하고 웃음도 던져주었지만 왕강의 태도는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술에 취한 소효운은 돌아갈 때 올케인 정정에게 전화하여 마중오게 했다. 금방 요가(瑜伽)운동을 끝낸 정정이 하얀 운동복을 입고 자가용차를 몰고 20분후에 도착했다. 소효운은 올케의 출현으로 얼굴표정이 변한 왕강의 속심을 대번에 들여다보았다.   이튿날 소효운은 왕강에게 전화했다. “왕경리, 지난 밤 잘 주무셨나요?  이번 장사를 나에게 줘요, 네?”   “전번에도 말했지만 절대 안되오.  헌데 어제 당신을 마중온 그 녀자는 누구요? 참 이쁘던데…”   “그 녀자요? 아, 외사촌동생인데 명문대학을 졸업했어요.”   “그래요? 참 이쁘고 귀엽던데…흐흐흐”   사회에 물젖은 소효운은 올케를 내세워 왕강을 공략하면 꼭 성공할것이라고 생각했다. 올케 정정(27살)은 북경 모 명문대학을 졸업하고 한 장식회사에서 비서로 일하고있었다. 2년전 정정은 소효운의 동생 소건군과 결혼했다.  소건군도 명문대학에서 연구생공부를 마치고 해정구의 한 생물공정회사에서 기술원으로 있다가 1년전에 카나다로 해외연수를 떠났다. 아직 아이도 없기에 정정은 독신귀족생활을 하고있었다.   저녁에 소효운은 올케를 찾아가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다. 그러자 정정은 정색해서 이렇게 말했다. “뭐래요? 언니, 난 언니의 친올케입니다. 어찌 이럴수가?…”   “올케, 언니말 들어봐.  언니가 어찌 올케를 불속에 밀어넣겠어.  다만 그자와 차나 마시고 춤이나 추고 말동무나 해주라는거지.  더이상 깊숙이 빠지라는것도 아니야. 우리 목적이 성사되면 발을 빼면 되는거야.”   “정말 그 정도면 되는거예요?”   “되구말구, 그리고 이번 일이 성사되면 수고비로 올케에게 10만원을 줄게.”   “10만원이나?  차나 마시고 말동무나 해줄 정도라면 한번 해보죠 뭐.”   2006년 12월의 어느날, 소효운은 올케를 데리고 왕강의 사무실을 찾아가 밖에 나가 차를 마시고싶으니 사양하지 말아달라고 청들었다. 왕강은 소효운과 함께 나타난 정정을 보고 아주 흥분해하면서 두말없이 따라나섰다.   소효운은 그들과 함께 차를 마시다가 일이 있다는 핑게를 대고 자리를 떴다. 정정과 왕강은 차를 마시면서 아주 재미나게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날 저녁 정정은 돌아오자마자 시누이에게 이렇게 말했다. “언니, 왕강이 돈이 많아보이지만 참 불쌍도 해요. 마누라와 감정이 안좋다나. 크게 상처받았나봐요.  그리고 나와 같은 녀자를 사모한대요. 재미나죠?”   “올케, 왕강에게 희망과 환상을 주되 도를 넘지 말아야 하오. 우리 건군도 있는데 안그렇소?”   “참 언니도 걱정이 과분하시네. 날 바보취급하시네. 랑군님에게 미안한 일은 절대 없을거예요.”   그번 일이 있은후 정정은 시누이의 지시를 받고 여러번 왕강을 찾아갔다. 나중에 둘의 관계는 점점 좋아지기 시작했다…   2007년 2월, 정정의 열정적인 공세하에 왕강은 소효운과 판매계약을 체결했다. 소효운은 53만원 공제금을 받아쥐고 정정을 찾아갔다.   “올케, 기쁜 소식이야. 이번 장사에 올케의 힘이 컸어. 이 돈은 10만원인데 올케의 몫이요. 올케와 왕강의 유희도 인젠 끝난셈이지. 이쯤에서 끝내야 하오.”   하지만 두달후의 어느날 소효운은 외국손님을 모시고 쇼핑하러 갔다가 뜻밖에도 정정이 왕강의 허리를 잡고 다정하게 쇼핑을 하는것을 보고 크게 놀랐다.   “어찌 저럴수가?!”   시누이와 올케가 비밀을 지키기로 약속   그날 저녁 소효운은 정정을 찾아가 얼굴을 붉히면서 화를 냈다.   “왕강과 관계를 끊으라고 했는데 왜 계속 그자와 래왕하오?”    “그런 일이 없어요.”   “올케는 참 뻔뻔스럽구만. 나 오늘 올케가 왕강과 함께 쇼핑하는것을 내눈으로 똑똑히 보았소. 건군에게 미안하지도 않소? 그자와 당장 관계를 끊어야 하오. 그렇지 않으면 건군에게 알리겠소.”   “언니가 날 질책할 자격이 있어요? 당초 언니가 다리를 놓아주지 않았더라면 내가 어찌 왕강을 만날수가 있어요? 모든것은 언니가 저지른 일이니 동생도 누나를 용서하지 않을걸요.” 소효운은 동생이 모든것을 눈치차릴가봐 두려워 카나다에 전화를 했다.   “건군아, 그동안 잘 보내고있겠지? 올케를 많이 생각해주고 종종 전화를 해주렴.”    “누나,  알았소. 젊은 나이에 그도 많이 불쌍하오. 내가 없는동안 누나가 정정을 많이 보살펴주오.”   이틀후 소효운은 과일을 사가지고 정정을 찾아갔다.   “올케, 건군이 올케를 많이 생각하더구만.  이 과일은 건군이 보낸것이요. 건군이 곧 귀국한다더구만.”    “언니, 난 왕강을 만나서부터 눈을 뜨기 시작했어요. 그는 나에게 많은것을 주었어요. 이러면 안된다고 생각했지만 거절할수가 없었어요…”   곧 귀국하게 될 소건군을 응부하기 위해 시누이와 올케는 서로 비밀을 지키기로 약속했다. 소효운은 올케와 왕강의 관계를 동생에게 말하지 않을것이고 정정도 시누이가 올케를 부추겨 녀색으로 왕강을 공략하게 한 사실을 건군에게 알려주어선 안되며 그렇지 않을 경우 10만원을 게워내야 했다.   2007년 10월, 소건군은 귀국했다. 젊은 부부가 1년만에 서로 만났지만 안해는 어쩐지 긴장해하면서 불안해했다.  그러던 어느날 소건군은 우연히 서랍에서 콘돔을 발견하고 안해에 대한 의심이 들었다. 하여 퇴근해 집으로 돌아온 안해를 불러서 따지고들었다.   “나 없는 동안에 바람을 피운거야?”   “그래요. 난 딴 남자를 사랑해요.”   리지를 잃은 소건군을 화를 내면서 정정을 패주기 시작했고 정정은 매를 맞고 집에서 뛰쳐나갔다.  소건군은 누나를 찾아가 자신이 너무도 억울하다고 하소연했다.    “건군아, 젊고 이쁜 녀자가 하루도 아니고 어찌 1년을 참고 견딜수 있겠니?  너 올케의 처지를 리해해줘라. 한번 용서해주렴.”   그날 밤 정정은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이튿날 소건군은 안해에게 할말이 있으니 속히 돌아오라고 전화를 했다.  그러자 정정은 “할말이 없어요, 우리 리혼해요”라고 랭정하게 대답했다.   내막을 알게 된 동생이 누나에게 칼부림   2007년 11월, 소건군과 정정은 리혼을 했다. 2008년 12월 8일, 소건군은 친구의 결혼식에서 우연하게 정정을 만났다. 헤여진지 1년도 안되는데 정정은 많이 초췌해보이였다.   “정정이 잘 보내고있소?”   “그럭저럭 살아요. 첫발을 잘못 디디면 인생을 망치나 다름없겠죠? 그자가 안해와 리혼하려 하지 않으니 우린 갈라졌어요. 당초 당신의 누나가 아니였으면 나도 이런 신세가 아닐턴데…”   “우리의 리혼이 누나와 무슨 상관인데?”   왕강은 명예와 자식을 위해 안해와 리혼하지 않고 그냥 정정과 정부의 관계를 유지하려고 하였던것이다. 정정은 정부로 되고싶지 않아 그와 갈라졌으며 이 모든 책임이 시누이에게 있다고 생각하였던것이다. 하여 그는 시누이와 한 약속을 깨고 사실의 진상을 소건군에게 털어놓았다.   소건군은 남도 아닌 친누나가 올케를 팔아먹은데 대해 전혀 리해되지 않았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소건군은 펄펄 뛰면서 누나를 찾아갔다.   “누나가 어찌 이럴수 있단말이요? 돈이 그렇게도 욕심나서 올케를 팔아먹었소?” “뭐야? 누가 널 공부시켰는데? 그리고 당초에 돈만 벌면 더는 래왕하지 못하게 노력했어.  이렇게 되는걸 나도 원하지 않았어.  자기 안해도 단속하지 못하는 주제에 어디와서 행패를 부려?”   이 말에 소건군은 더욱 화가 났다. 완전히 리지를 잃은 소건군은 손에 닥치는대로 과일칼을 주어들고 누나의 뒤잔등에 칼부림을 해댔다. 그리고 누나를 층계에서 밀어뜨렸다.  소효운은 층계에서 굴러떨어져 심한 중상을 입고 병원에 실려갔다…   심한 중상으로 장애자가 된 소효운은 병석에 누워서 눈물을 흘렸다. 이런 결과가 있을줄을 알았더라면 금산을 준다고 하여도 절대 올케를 “교역”에 내몰지 않았을것이다.   소건군은 심문을 받을 때 리지를 잃고 누나를 해친 자신의 과분한 행위를 몹시 후회했다.                                                                                                      《지음》        
56    우수생이 매음녀로 타락되기기까지 댓글:  조회:4159  추천:0  2009-06-16
산동성 하택시의 한 시골마을에서 태여난 올해 28살의 소매는 매음죄로 철창속에 갇히였다. 소매는 비록 시골에서 태여났지만 백설같이 하얀 살결, 짙은 눈섭아래 물기를 머금은 어글어글한 눈, 미끈한 체격에 탄력있고 풍만한 몸매 등은 아주 성감적이여서 이전에 뭇사내들의 마음을 사로잡을만한 녀인이였다는것이 엿보였다. 소매는 고중시절에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해 학생회 문예부장으로 활약했다. 아름답고 정파다왔던 소매가 매음을 한 죄로 철창속에 갇히였다니 동창생들은 믿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였고 그에게는 기막힌 사연이 있었다… 소매가 18살되는 해에 한 날강도가 그의 운명을 완전히 돌려놓았다. 그해 가을의 어느날, 소매가 교실에서 늦게까지 공부를 하고 저녁무렵에 집으로 돌아갈 때였다. 갑자기 수수밭에서 한 날강도가 뛰쳐나와 그녀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허허, 참 이쁘구나. 우리 한번 놀아보자.”이렇게 말을 던진 날강도는 소매를 수수밭으로 끌고갔다. 소매는 힘껏 두손으로 떠밀고 허비고 발버둥질치면서 반항해보았으나 짐승같은 야성이 발작한 그놈을 당할수 없어 끝내는 강간당하고말았다. 사건제보를 받은 공안기관에서 강간혐의자를 나포하고 마땅한 징벌을 주었다. 소매가 수수밭에서 강간당했다는 소문이 동네에 퍼지기 시작했다. “교정의 꽃”으로 불리우던 소매는 학교에서 강간당한 “녀건달”이라고 놀림을 당하였고 마을에 돌아와서는 “녀요귀”라고 욕을 먹었다. 지어 부모들마저 가문의 망신이라면서 소매를 랭대했다. 육체적고통과 심리적압력으로 소매는 더는 머리를 들고 학교를 다닐수 없게 되여 책가방을 벗어던지고 집에서 뛰쳐나왔다. 그녀는 일자리를 찾으려고 뻐스를 타고 하택시로 왔다. 하지만 고중도 채 다니지 못한 그녀가 일자리를 찾기는 여간만 힘들지 않았다. 그녀는 식당복무원일이라도 하려고  여기저기 찾아다니였다.  하지만 복무원을 구하려던 식당아줌마들은 너무 이쁘고 어린 소매가 자기 남편을 꼬실가봐 걱정되여서인지 그녀를 받아주지 않았다. 어떤 식당아줌마들은 입을 비쭉거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뭐? 식당복무원은 아무나 하는줄 알아요? 너무 이쁘면 안되는거지. 그 얼굴이면 노래방이나 안마원에서 아가씨노릇이나 해봐요. 사내들의 간을 잘 녹이겠네.” 소매는 바람둥이들의 노리개나 다름없는 아가씨노릇을 하기는 싫었다. 일자리를 찾느라고 이곳저곳을 헤매다보니 해는 져가는데 호주머니에 돈도 없어 먹지도 못해 배가 고팠다. 더구나 오늘밤에는 어데서 잘가고 근심되자 더럭 겁이 났다. 그녀는 기차역에 나가 대합실에서라도 자려고 기차역앞광장으로 갔다. 그녀가 식료품매대옆으로 지나가면서 너무도 배가 고파 군침을 흘릴 때였다.  어떤 중년녀성이 다가와 그녀의 옆구리를 살짝 건드렸다. “얘, 차림새를 보니 너 시골에서 왔지?  아직도 저녁을 먹지 못했지?” 소매는 아무런 고려도 없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 왕씨라는 중년녀성이 소매를 데리고 역전앞광장옆에 늘어선 한 음식점에 가서 료리에 국밥을 사주었다. 그리고나서 왕씨는 자아소개했다. “얘, 난 려관방 주인이다.  우리 려관에서 복무원일을 할 생각이 없니? 밥도 공짜고 잠자리도 공짜야. 나 지금 복무원을 모집하는중이야.” 소매는 오늘 참 좋은분을 만났다고 생각하면서 두말없이 그 주인녀인을 따라갔다.려관에 도착하자 녀주인 왕씨는 소매더러 입던 옷을 벗어던지고 옷을 갈아입으라면서 옷꾸레미를 던져주었다.  소매가 옷꾸레미를 헤쳐보니 짧은 팔소매적삼에 짧은 치마였는데 아주 성감적이였다. “아니? 내가 어찌 이런 옷을 입어요? 난 이런 옷을 입지 못하겠어요. 싫어요.” 그러자 왕씨는 이렇게 말했다. “뭐?!  여긴 너의 집인줄로 생각하느냐? 여긴 영업집이야. 촌티나는 그 옷을 벗어던지고 이런 옷을 갈아입어야 해.  살결이 보이는 하얀 팔로 사내들의 팔이나 몸을 툭툭 건드리거나 팔을 끼면서 아양을 부리면서라도 려관에 끌어들여야 한다. 그래야 우리도 밥을 먹고 살수 있단 말이다.” 소매는 이런 옷을 입기 싫었지만 갈곳도 없는지라 왕씨네 려관에 남게 되였다. 소매는 팔소매 짧은 적삼에 짧은 치마를 입고 기차역에 나가 손님들을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애나게 끌어들여보았자 숙바료 10원에서 소매에게는 2원밖에 차례지지 않았다. 어떤 손님들은 소매가 아가씨인줄로 알고 흐뭇하게 따라왔다가 흥이 깨져 돌아갈 때도 있었다. 소매는 며칠동안 애나게 손님을 끌어들이면서 달아다니다가 맥이 풀려 물앉고말았다. 이때라고 생각한 왕씨는 소매를 불러놓고 이렇게 구슬렸다. “애, 그동안 애를 썼다. 하지만 더 많은 돈을 벌겠으면 모셔온 손님방에 들어가 말동무라도 하렴. 손님들이 흥이 나면 많은 팁을 줄것이야. 팁을 벌어야 큰돈을 벌수있다. 지금처럼 손님만 끌어들여서야 얼마나 벌겠니. 안그래?” 아직 세상물정을 모르는 소매는 손님의 말동무나 하고 돈을 버는것이 꿩먹고 알먹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튿날 소매는 기차역광장에서 아주 우연히 한 대만손님을 만났다. 대만손님은 그녀를 보고 지껄이기 시작했다. “아가씨, 참말 이쁘군요.  그 려관에 아가씨처럼 이쁜 아가씨가 많은가요?” 소매는 돈냄새나는 큰 고기를 놓쳐버릴수 없다고 생각하고 생글생글 웃으면서 추파를 보냈다. “아저씨, 참 눈치 빠르네요. 있고말고요. 이쁜 아가씨도 있고 우아하고 조용한 단칸방도 있어요.”그러자 대만손님은 마른침을 삼키면서 그녀를 따라 려관에 왔다. 대만손님은 려관방에 들어서기 바쁘게 소매를 와닥닥 안아 쓰러눕히더니 겁탈하려고 달려들었다. 생각지 못했던 대만손님의 행동에 소매는 와뜰 놀랐다. “왜 이래요? 난 복무원이지 몸파는 기생이 아니예요.” 소매는 음탐한 눈길로 자기를 노려보는 이자와 수수밭에서 자기를 강간한 날강도가 겹쳐보이면서 몸이 으스스 떨렸다. 이때 문이 열리더니 왕씨와 몇몇 남자들이 뛰쳐들어왔다. 왕씨는 노기등등하여 이렇게 입을 열었다. “옳지, 잘하는구나. 손님과 말동무를 하라고 하였지 누가 이런짓을 하라고 했어? 이게 무슨짓이냐? 그리고 손님은 대만에서 왔다죠? 꼴보기 좋네. 대륙에 놀러 왔다가 감옥생활까지 하게 되여서. 당장 공안기관에 적발하겠어.” 이때 대만손님은 눈치를 차리고 딸라 몇장을 왕씨의 손에 찔러주고는 귀에 대고 뭐라고 쑤군덕거리였다. 그러자 왕씨는 당금 해시시해서 소매를 불러내여 돈 200원을 꺼내주면서 이렇게 말했다.“저 손님은 참 좋은분이야.  통이 크고 돈도 있어보여. 계속 ‘말동무’나 해주렴, 팁을 넉넉히 줄거야.” “저 손님이 날 겁탈하려고 드는데? 난 무서워요. 그리고 난 그런 일은 절대 안해요.” “뭐? 니가 감히 거절해? 고분고분 말을 듣지 않으면 매음했다고 경찰에 알리겠다.” 세상물정을 모르는 소매는 경찰에 알리는것이 무서웠다. “제발 경찰에 알리지 말아요. 난 아직 어려서 무서워요.” 소매는 울며 겨자먹기로 다시 손님방에 들어가 이말저말 하면서 말동무를 하였다. 대만손님은 아까와는 달리 아주 점잖게 행동했다. 그는 커피를 한잔 마시자면서 자기 가방에서 손수 커피를 꺼내 타서 그녀에게 권했다. 소매는 그것이 함정인줄도 모르고 대만손님과 함께 이야기꽃을 피우면서 어느사이에  커피잔을 굽냈다. 순간 머리가 뗑해나고 눈앞이 아찔해나더니 저도 몰래 스르르 쓰러졌다. 대만손님은 쓰러진 소매를 안고 침대로 올라갔다. 소매가 밤중에 깨여나보니 자기가 글쎄 대만손님의 품에 안겨있었다. 소매가 흐느껴 울자 대만손님은 소매를 보고 빈정거리며 달래였다.“울긴 왜 울어? 보아하니 숫처녀도 아니던데? 뭘 그리 슬프게 울어. 그까짓 정조가 다 뭐야? 이 세상에 돈이 최고지. 나 마님 몰래 너에게 팁을 넉넉히 줄거야.” 소매는 처음으로 대만손님이 던져준 100원짜리 돈을 쥐여보았다. 소매는 이미 몸을 더럽힌바하고는 이튿날부터 기차역광장에 나가 사내들을 려관에 끌어들여 더러운 교역을 벌려 돈을 챙기기 시작했다. 하얀 살결, 미끈한 체격에 용모까지 예뻐서 소매에게 달려드는 사내들이 많았다. 하지만 꼬리가 길면 밟히기 마련이라고 소매가 어느날 밤에 한창 손님과 한침대에서 뒹굴고있을 때 경찰들이 뛰여들어왔다. 녀주인 왕씨는 자기는 말동무를 하라고 하였지 매음하라고 한적이 없다고 발뺌을 하였다. 한때 이쁜 용모에 공부도 잘해 뭇사람들의 사랑을 받던 소매는 돈의 유혹을 이기지 못해 법을 어기고 더러운 돈을 번 매음녀로 전락되여 사람들의 질책과 비난을 받게 되였다. 철창속에 갇힌 소매는 자신의 지난날을 돌이켜보면서 슬프게 울었다. 그녀는 녀자들이 아무리 힘들어도 품을 팔아 한푼두푼 모아야지 절대 자기처럼 법을 어기고 몸을 팔아 더러운 돈을 벌지 말라고 자매들에게 충고했다.                                                    《법제일보》    
55    호요방의 자녀들 4자녀 3개 성 댓글:  조회:3653  추천:0  2009-06-15
  호요방의 자녀들은 모두 성공한 인사들이다. 장남 호덕평은 중앙통전부 부부장, 전국공상련합회 부주석이였으며 차남 류호는 화윤그룹 상무리사, 부총경리이였고 삼남 호덕화는 1990년대에 중국과학원 소프트웨어중심에서 나와 사업을 시작했는데 과학기술개발, 조림식수 등 사업을 벌렸다. 딸 리항은 중화의학회 부비서장이고 모 외국계기업의 고위관리직으로 있었다.   “부모는 전형적인 일벌레”   “나는 여러번 모친에게 나의 출생지를 물어봤습니다. 모친의 대답은 ‘기억나지 않는다’는것이였습니다.” 호덕화는 지금도 이것을 유감으로 생각하고있다. 1948년 11월, 병퇀정치부 주임을 맡고있던 호요방은 태원전투의 전선에 나가있었고 부인 리소는 후방의 석가장에 있었는데 출산이 림박했다. 석가장이 국민당의 기습을 받게 되자 리소는 경비원의 도움을 받아 전이했다.   “모친은 겨우 석탄운수차에 올라탔는데 대략 하루이틀 달려가서 도중에 나를 낳았답니다.” 호덕화는 스스로 추산해보고서는 하북성 정형일것이라고 했다.   집안에는 이미 아들 둘이 있었으므로 부모는 모두 딸을 원했다.  그가 출생한후 부친 호요방이 가있는 전선에서 전갈이 왔다. “남자아이라면 돌아가서 볼것도 없겠다”는것이였다. 부모의 실망속에 인간세상에 태여난 호덕화는 출생지도 없었거니와 다른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애명만 있고 정식이름은 없었다.   “저의 부모는 전형적인 일벌레였습니다.  아이를 낳자마자 팽개치고 신경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호덕화와 형제들은 외할머니손에서 자랐다.   1950년 봄, 사천 북부지역이 해방되였다. 호요방은 식구를 데리고 사천으로 갔다.  온 가족이 만났을 때 호요방의 부친은 애명만 가지고 정식이름을 갖지 못한 아이들을 보고는 가보를 정중하게 끄집어냈다.  할아버지는 부친의 항렬이 요(耀)자 돌림이고 그 아래는 덕(德)자 돌림이라고 했다. 그리하여 차례로 평(平), 안(安), 발, 재로 불렀다. 장남 호덕평, 차남 호덕안, 삼남 호덕발로 되였는데 덕발은 후에 유치원에 들어갈 때 “발”자가 번체자로 쓰기 너무 힘들다고 유치원선생이 호덕화로 바꿔주었다.   1952년, 호요방부부는 사천 남충에서 딸을 낳았다. 집식구들은 아주 기뻐했다. 딸을 낳아 모두들 만족한다고 이름을 만매라고 지었으며 막내이자 딸이여서 사랑을 독차지하다싶이 했다. 만매는 군대에 입대해서야 비로소 리항(李恒)이란 정식이름을 가지게 되였다. 리항은 어머니성을 따른것이였다.   그해 호요방은 중국신민주주의청년단 중앙서기로 임명되였다.  이듬해에 4살난 호덕화는 어머니를 따라 북경으로 왔다. 호덕화의 기억에 의하면 부모가 유치원, 소학교, 중학교를 선택하는 기준은 오직 하나, 전탁이였다.   “어릴 때 나는 아버지한테서 친근함은 느낄수 없었다. 나와 한번도 놀아주지 않은 그이를 어느정도 무서워했다. 어머니는 사업만 했지 집에 대해서는 신경쓰지 않았다.  내 기억속에 어머니는 나를 딱 한번 안아주었다.  어머니품에 안겨 반짝거리는 안경을 마주보는 내가 호기심에 손을 뻗어 안경을 만지자 철썩 하고 어머니손이 내뺨을 때렸다.  놀라서 엉엉 우는 나한테로 외할머니가 황급히 다가와 어머니한테서 나를 빼앗았다. ‘아니, 한번도 아이를 안아주지 않더니 한번 안으면서 어떻게 때릴수 있어?’그러자 어머니는 ‘얘가 안경을 망가뜨리면 저는 래일 어떻게 사업을 해요.’라며 성을 냈다.”   네 아이 세가지 성   호요방의 네 자녀는 각각 부모의 성을 따서 호씨와 리씨 성을 가진외에 류씨도 있다. 어려서부터 다른 사람에게 양자로 보내여진 차남의 성이 류씨였다.   1945년 겨울, 전선에 나가게 되자 호요방부부는 어쩔수 없이 40일도 되지 않은 차남을 섬서북부 농촌의 류세창에게 보냈다.   그러면서 류세창에게 아이를 다시 다른 사람에게 보내지 말고 나중에 아이를 학교에 보내며 자유련애로 결혼하게 해달라는 부탁을 남겼다. 호요방은 아이가 류씨성을 가지도록 했다. 류세창은 얻은 아들에게 이름을 류호라 지었다. 호는 호요방의 호자와 발음이 같기때문에 두 성을 한꺼번에 쓴것이였다.   해방후 류세창일가는 청해로 갔다.  그는 집안살림이 어려웠으나 호요방의 부탁을 잊지 않고 류호를 학교에 보냈다.  13살에 류호가 우수한 성적으로 소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호요방은 아들을 한번도 찾지 않았다.   호요방이 이미 북경에 자리를 잡은 뒤 류세창부부는 수차 망설이다가 류호를 북경에 돌려보냈다. 당시 호요방은 류세창을 보고 깜짝 놀랐다.  한참동안 말을 잇지 못하던 호요방은 류호의 머리를 툭 치면서 류세창이 영원히 아버지란것을 기억하라고 말했다. 이후 매번 겨울방학과 여름방학이 되면 류호는 류세창부부를 보러 갔다.   “주자파”의 후대   문화대혁명시기 호요방은 자본주의집권파로 몰려 하남성 횡천현 황호농장에 가서 로동개조를 했다. 부인 리소는 격리심사를 받았고 나이 칠순인 외할머니는 안휘 고향집으로 보내여졌다. 부친의 비서,  운전기사도 모두 가버렸다. 만매는 혼자서 큰집에서 살았다. 집은 텅텅 비여있었다.   당시 고중에 다니고있던 호덕화는 청화대학에 입학하여 공정사가 되는것이 꿈이였다.  그런데 고중 1학년을 마치자마자 북경시정제2공사로 가서 도로수리를 맡게 되였다.   호덕화는 1973년에 중경통신학원에 합격됐다. 졸업후 남경통신학원에서 교편을 잡고 10년간 그곳에 눌러있었다. 1986년부터 중국과학원 소프트웨어연구중심에서 사업을 시작했다.   류호는 원래 청화대학 화학공업학부를 다녔는데 1966년 5월에 예비당원이 되였다. 일반당원의 예비고찰기간은 1년인데 비해 그는 입당한지 1년만에 문화대혁명을 만나다보니 1980년대에 정식당원이 되기까지 10여년을 예비당원으로 있었다.   맏이 호덕평은 “문화대혁명”때문에 운명이 바뀌였다. 1962년에 그는 북경대학 력사학부에 입학했다. 1967년 졸업하기 전날에 등소평, 호요방이 “자본주의집권파” 타도대상이 되면서 등박방과 호덕평도 “흑오류”자녀가 되여버렸다.  그는 북경대학에서 타도대상이 되였다.  그때 그는 심신에 극도의 상처를 받았다.   문화대혁명후에 호덕평은 석사연구생이 되였다. 졸업후 국가력사박물관에서 연구사업을 했다. 1984년 호덕평은 중공중앙 정당령도소조의 특파원이 되여 호북성으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한때 인기를 끌었던 여론간행물을 창간했다. 호덕평은 후에 중공중앙통전부 비서장을 지냈고 나중에 통전부 부부장으로 승진했다.   흐르는 세월속에서 온갖 풍상고초를 다 겪은 호씨집안 자녀들은 지금 편안하게 생활하고있다.                                                             《환구인물》    
54    농촌녀성 혼인을 미끼로 수만원 협잡 댓글:  조회:3960  추천:0  2009-06-09
돈화시 한장향 해흥촌의 농촌녀성 리국화는 혼인을 미끼로 남자친구의 돈 몇만원을 협잡했다가 경찰에 붙잡혔다.   2007년에 리국화는 가짜이름으로 방송국에 구혼광고를 냈다. 최씨성을 가진 남자는 구혼광고를 통해 리국화를 만나본후 첫눈에 정이 들었다. 후에 한국으로 로무송출을 나간 최모는 한국에서 번 돈을 리국화에게 부쳐보냈다. 그러나 리국화는 최모 몰래 다른 남자와 결혼하고 계속하여 최모의 돈을 협잡했다.   올 4월 13일, 홍석향 림강촌 농민 최모는 돈화시공안국 민주파출소에 찾아와 자기와 사귄지 3년이 되는 약혼녀 리미란이 가출했다고 신고했다. 경찰은 조사를 거쳐 리미란이란 이름은 가짜이며 혼인을 핑게로 재물을 협잡했다는 사실을 료해했다.   경찰은 여러번 연길 등지로 가서 조사한 결과 리미란의 본명은 리국화인데 몇년전 전남편과 리혼한후 지난해말에 박모와 결혼했으며 집은 연길시 북산가에 있다는 사실을 료해했다. 4월 20일 경찰들은 리국화의 집에서 그녀를 붙잡았다.   조사에 따르면 2007년 리국화는 혼인광고를 통해 최모를 알게 됐고 최모가 한국으로 나간후 줄곧 전화련계를 했으며 최모가 부쳐보낸 돈을 받았다. 지난해말에 리국화는 박모를 알게 됐고 후에 결혼했으나 최모에게는 이 사실을 숨기고 말하지 않았다.   올 3월 5일, 리국화는 최모의 신임을 얻기 위해 둘째딸과 함께 승용차를 몰고 장춘으로 가 귀국하는 최모를 맞이했으며 그가 벌어온 돈 1만원을 협잡했다. 4월 13일, 리국화는 또 최모로부터 인민페 1만 6000원과 1000딸라를 협잡한후 종적을 감추었다.   경찰에 붙잡힌후 리국화는 최모에게 1만원을 돌려주었다.   “랑만적인 사랑”에 빠진 녀공무원   올해 40살인 강림은 안휘성 안경시 모 기관에 출근하는 공무원이며 남편은 연해지구 모 대학교 교원이다. 그들에게는 총명하고 이쁘게 생긴 초중을 다니는 딸이 있다.  2006년 8월의 어느날, 강림은 망강현법원 원장이라고 자칭하는 왕민을 알게 되면서부터 몰라보게 변했으며 “랑만적인 생활”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 모든것이 왕민이 파놓은 “함정”이였다는것을 생각지도 못했다.   왕민이 파놓은 “함정”에 빠지다   강림은 남편이 연해지구에서 사업하고 딸이 외지에서 공부하기에 혼자 있는 밤이 되면 너무 적적하여 심심풀이로 마작을 놀기 시작했다. 강림은 마작판에서 여러 이성친구를 사귀였는데 그속에 영준하게 생긴 왕민도 들어있었다.   왕민은 강림보다 10살 어리였는데 망강현법원 원장이라고 자아소개했다. 강림은 전도가 유망한 왕민이 어쩐지 마음에 들었다. 이날도 여느때와 같이 저녁식사를 마치고 강림이 마작을 놀려고 활동실을 찾아갔다. 하지만 늘 먼저 와서 강림을 기다리던 왕민이 보이지 않았다. 이때 활동실 주인이 강림을 보고 왕민이 차에 치여서 올수 없다고 알려주었다. 근 한달간 강림은 하루도 빠짐없이 늘 전화로 왕민에게 안부를 전했으며 치료를 잘하고 속히 병석에서 일어나라고 고무격려했다.   어느날 저녁, 강림이 너무도 심심하여 TV를 보고있는데 왕민한테서 전화가 왔다. “누나, 그동안 잘 지냈소? 나 누나가 보고싶고 또 할말이 있으니 급히 만나야 하오. 강변에서 기다리겠소. 속히 나와주오.” 강림은 왕민의 전화를 받자마자 약속한 지점으로 달려갔다. 강림이 약속한 지점에 도착하니 왕민이 이미 나와 그녀를 기다리고있었다. 왕민은 만나자마자 강림을 보고 자기는 리혼하려 하는데 마누라가 동의하지 않아 크게 싸웠다고 말하며 살멋이 없어서 당장이라도 죽고싶은 생각이 간절하다고 털어놓았다. 왕민은 또 “태호현에 불쌍한 한 녀자애가 있는데 난 그애를 도와주는것이 소원이였소. 나에게 지금 1만원이 있는데 그 애가 고중공부까지 하는데 도움을 주려고 했소. 하지만 난 살 생각이 없으니 누나가 날 대신해서 이 일을 맡아주었으면 하오. 그러니 누나의 단위주소와 이름을 나에게 상세하게 알려주오. 내가 돈 1만원을 부쳐보내겠소.”라고 말했다.   강림은 자신의 이름과 단위주소를 왕민에게 알려주고 바보같이 왜 죽을 생각을 하냐고 질책하면서 곤난이 있으면 자기가 나서서 도와주겠으니 그런 생각을 버리라고 권고했다.   “사랑”에 빠져 30만원을 잃다   강변에서 서로 갈라진후 강림은 왕민이 돈을 부쳐보내겠다고 한 약속을 믿었지만 종무소식이였다. 그러던중 어느날 왕민한테서 전화가 왔는데 생각밖에 강림을 사랑한다는 전화였다. 처음에 강림은 그의 요구를 거절하였지만 왕민이 끈질기게 달라붙으면서 자신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자살하겠다고 나오는 바람에 결국 자신보다 10살 어린 “법원 원장”을 “사랑”하게 되였다.   후에 강림은 “사랑”에 빠져 왕민에게 몸까지 맡겼고 그의 요구라면 뭐든지 다 들어주었다. 서로 사귄지 1년남짓한 동안에 왕민은 12번에 거쳐 강림한테서 돈 29.3만원을 홀려냈다.   왕민이 강림한테서 처음으로 돈을 “빌린”것은 2006년 12월의 어느날이였다. 당시 왕민은 강림을 찾아와 이렇게 말했다. “위가 몹시 아파 병원에 가서 의사를 보였더니 위암인것 같다고 하면서 큰병원에 가 보이라고 하더구만. 하지만 나에게 그만한 돈이 없소. 누나가 먼저 나에게 돈을 꿔줄수 없겠소?”   강림은 위암이란 말을 듣고 두말없이 4000원을 내놓으면서 어서 합비로 가서 병을 보이라고 권고했다. 합비에서 돌아온 왕민은 강림을 찾아갔다. “고맙소 누나, 위암이 아니고 그냥 보통 위병이라오. 누나가 아니였으면 나 자살했을지도 모르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소.”   그번 일이 있은후 왕민은 달마다 이런저런 구실을 대고 강림한테서 돈을 “빌려”갔다. 자신이 병에 걸렸다든지 누이동생이 병이 위중한다든지 혹은 집을 사려는데 급히 돈이 수요된다든지 갖가지 구실을 대여 돈을 빌려갔는데 가져간 돈이 도합 29.3만원에 달했다. 제일 많이 꿔갈 때는 6만원이였다.   후에 강림은 돈이 급히 수요되여 왕민을 찾아가 빌려간 돈을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생각밖에 왕민은 돈이 없다고 딱 잡아떼면서 3000원밖에 내놓지 않았다. 후에 밝혀진 일이지만 왕민은 강림한테서 사기친 돈으로 도박빚을 갚고 나머지 돈은 탕진해버리였다.   “법원 원장” 원래는 사기범   왕민은 강림한테서 돈을 “빌릴” 때마다 차용증서를 꼭꼭 쓰군 했는데 이런 수단으로 강림의 신임을 얻었던것이다. 2008년부터 강림은 더는 꿔줄 돈이 없다면서 예전처럼 잘 꿔주지 않았다. 이때 왕민은 강림을 죽이거나 가족을 죽이겠다고 위협하고 둘의 관계를 공개하겠다고 협박했다. 강림은 자신때문에 가족이 피해를 보는것이 두려웠고 안해가 밖에서 바람을 피운다는 소문이 터지면 자신을 끔찍하게 사랑하는 남편의 심장병이 발작할가봐 무서워서 돈을 “꿔”주지 않으면 안되였다. 이때에야 강림은 왕민에게 잘못 걸려들었음을 알게 되였다. 하지만 그녀는 사업때문에 왕민의 신분을 밝힐 시간마저 없었다.   올해 6월 17일, 한 친구가 강림에게 놀라운 소식을 전했다. “강림아, 네가 말하던 그 사람이 법원사람이 아니라더라. 네가 그자한테 속히운것이 분명하다. 정신을 차려야 한다.”   이때에야 강림은 모든것을 알아차리고 남동생에게 자신이 사기군에게 사기당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리고나서 왕민에게 전화하여 돈을 가져가라고 전했다. 저녁 20시 30분경에 왕민이 약속한 지점에 나타났다. 하지만 전과 달리 강림이 혼자 온것이 아니라 남동생과 함께 그를 기다리고있었다.   셋은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거리를 거닐었다. 세 사람이 안경시공안국 대남문파출소를 지날 때 강림이 남동생에게 눈치질했다. 왕민이 상서롭지 못함을 느끼고 도주하려 할 때 두 형제가 달려들어 왕민을 제압하고 파출소로 끌고갔다.   경찰들의 심문과정에 인증물증앞에서 왕민은 모든것을 탄백했다. 왕민은 올해 32살이며 동성시 교외의 농민이고 사기군이였다. 2006년 1월 6일, 왕민은 한가하게 거리를 거닐다가 우연하게 경관증을 주었다. 그는 주은 경관증을 리용, 경찰로 가장하고 직업을 소개해준다는 구실로 선후하여 다른 사람들한테서 6만여원을 사취했다. 왕민은 사기죄로 유기도형 1년 6개월 집행유예2년 판결을 받았다. 집행유예기간 왕민은 안경에서 일자리를 찾아 일했으며 안해와 함께 안경에서 생활했다.   6월 25일, 왕민은 사기죄로 형사구류되였다.                                                             《법제일보》      
53    “내부규칙”의 악과로 인생을 망친 연출 댓글:  조회:4168  추천:0  2009-06-08
2008년 3월의 어느날, 북경 모 텔레비죤방송국의 유명한 연출 하수성이 강간혐의범으로 체포되였다.  이번 일로 하수성은 단위에서 제명당했고 안해 류화도 남편을 절대 용서할수 없다면서 리혼을 제기했다…   인테넷에서 미녀자매를 만나다   북경의 한 간부가정에서 태여난 하수성은 1999년에 중국매체대학 신문학부를 졸업한후 북경 모 회사에서 선전간사로 있다가 2003년에 북경 모 텔레비죤방송국에 초빙되여 연출로 일했다.   2004년에 하수성은 은행직원 류화를 만나 결혼했으며 이듬해 귀여운 아들을 낳아 키웠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장이 있고 행복한 가정이 있음으로 하여 하수성의 생활은 안정되고 충실했다. 하지만 이 모든것이 “단풍잎”의 출현으로 산산쪼각이 날줄이야.   “단풍잎”의 본명은 호려원이고 올해 23살이며 광서 계림사람이다. 호려원은 북경 모 중점대학 외국어학부를 졸업하고 북경의 모 번역회사에 취직했다. 하수성은 “버들가지”라는 아이디로 자주 인터넷에 올라 채팅을 했다. 어느날 “버들가지”와 “단풍잎”이 우연히 만나 재미나게 잡담을 했다. 첫 대화가 있은후부터 하수성은 매일 잠들기전에 “단풍잎”과 잡담을 하는것을 잊지 않았다.   2007년 10월의 어느날, 하수성은 꿈속에서 그리던 “단풍잎”을 직접 만나고싶어 전화를 했다. 그날 저녁 두 사람은 커피점에서 만났다. 호려평은 “버들가지”가 텔레비죤방송국 연출이라는 말을 듣고 아주 흥분해면서 자신에게 녀동생이 있는데 도와달라고 청을 들었다. “광동 모 대학에서 신문학을 전공하는 녀동생이 있는데 대학을 나오면 나를 찾아올것이예요. 녀동생을 많이 도와주세요.” 2008년 1월 20일, 두 사람은 또 인터넷에서 만났다.   “단풍잎”: “녀동생을 당신에게 맡기겠어요. 많이 관심해줘요.”“버들가지”: “당신 중매를 서는거요? 아니면 나에게 아가씨를 소개해주는거요?”“단풍잎”: “참. 롱담도 과하시네. 나의 동생이면 당신의 동생이 아닌가요? 안그래요?”“버들가지”: “무슨 뜻이죠? 그가 나의 처제란 말이요?”“단풍잎”: “당신이 그렇게 생각해도 좋아요. 그럼 언제 날 안해로 삼겠어요? 그날이 오길 기다리겠어요.”   언니가 “내부규칙”을 허락   2008년 2월 14일, “단풍잎”과 “버들가지”는 인터넷에서 또 만났다.   “단풍잎”은 아주 정색해서 말했다. “하선생님, 이전의 말은 모두 롱담이였어요. 이번에 정식으로 들어주세요. 현재 광동의 모 중점대학을 다니고있고 녀동생이 아무리 우수하다 할지라도 북경에서 발전하려면 어림도 없죠. 실습할 단위조차 찾기 힘든 형편입니다. 동생의 취직문제에서 선생님이 많이 신경을 써주세요. 만약 선생님이 출근하는 텔레비죤방송국에 취직할수 있다면 더욱 좋겠어요. 그럴수만 있다면 우리 자매는 그  은혜를 잊지 않고 꼭 보답하겠어요.”   그러자 “버들가지”는 이렇게 대답했다. “텔레비죤방송국에 취직하기 쉽지 않소. 나에겐 그런 권리가 없소. 하지만 난 녀동생을 우리 부서에 와 실습할수 있도록 추천할수 있소. 실습이 끝나면 남아서 일할수 있는지는 모르겠소. 녀동생의 개인서류를 먼저 나에게 보내주오.”   사실 그동안 호려화는 자신의 개인서류를 여러 매체에 올렸지만 와서 면접보라는 단위가 하나도 없었다. 하여 그녀는 광서로 돌아가 일자리를 구하려 했지만 언니가 북경에 남아 서로 의지하면서 살고싶다고 하기에 꾹 참고 기다리던 참이였다.  “단풍잎”은 녀동생의 개인서류를 보낼 때 일부러 녀동생의 생활사진 여러장을 더  보냈다.   호려화의 개인서류를 받아쥔 하수성은 멍해졌다. 광서에 이처럼 잘 생긴 미녀가 있다니 그는 믿어지지 않았다. 하수성은 엉뚱한 생각까지 하면서 호려원에게 전화했다. “녀동생이 당신처럼 참 예쁘군요. 하지만 당신처럼 세상물정을 아는지는 모르겠소.”   호려원은 하수성의 말뜻을 알아차린듯 이렇게 말했다. “하연출님, 당신이 ‘내부규칙’을 말하는것은 아니겠죠? 녀동생은 이름있는 ‘교정의 꽃’이고 원근에 소문난 미녀입니다. 왜요? 마음에 드나보죠?”   그동안 하수성의 안해 류화가 부처장자리 경쟁준비에 눈코뜰새 없이 바삐 보내는 바람에 젊은 부부가 잠자리를 같이 한지도 오래되였다. 정력이 왕성한 젊은 남자는 예쁜 녀자의 사진을 보고 엉뚱한 생각을 하면서 얼굴을 붉히였다…   2008년 2월 27일 저녁 10시, 하수성이 집으로 돌아오니 아들과 보모는 이미 자고있었으며 안해는 귀가하지 않았다. 이때 하수성의 머리속에 호려화의 이쁜 모습이 떠올랐다. 그는 호려화가 생각나 짤막한 메시지(短信)를 보냈는데 인차 회답이 왔다. “하선생님, 전 지금 인터넷에 올랐어요. 아이디가 ‘정조옥’이예요. 선생님을 기다리고있던 참이였어요.”   “버들가지”: “아이디 참 재미있는데. 누굴 위해 정조를 지키려 해요?”   “정조옥”: “난 자신을 위해 정조를 지키고싶어요. 마음에 드는 백마왕자가 나타나면 그에게 활짝 열어주겠어요.”   “버들가지”: “당신은 참 훌률하고 이뻐요. 난 당신을 우리 텔레비죤방송국에 와서 실습할수 있도록 추천하겠소. 만약 모든것이 잘 풀리면 텔레비죤방송국에 남게 될지도 모르오.”   “정조옥”: “너무 고마와요. 소녀라지만 은혜를 갚을줄 몰라서야 되겠어요? 선생님을 실망시키지 않을거예요.”   은혜를 꼭 갚아주겠다고 하니 하수성의 가슴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내부규칙”착각으로 인생을 망치다   2008년 3월 13일 저녁, 하수성은 퇴근하여 집에 돌아온후 인터넷에서 호려원을 만났다. “버들가지”: “녀동생의 일은 잘 되여가고있소. 하지만 준비를 잘하라고 전하오.” “단풍잎”: “준비요? 무슨 준비죠? 혹시 ‘내부규칙’말인가요?” “버들가지”: “참, 별소릴 다하네. 상대방은 당신의 친동생이란걸 모르오?” “단풍잎”: “난 동생을 도와주고있어요. 그런데 동생이 아직 철들지 못해서 많이 가르쳐줘요. 그럼 둘이 래일 만나세요. 내가 동생에게 전하겠어요.”   3월 14일 오후 5시, 하수성은 퇴근을 앞두고 안해에게 전화를 했다. “여보, 오늘 저녁 일있어 좀 늦을것 같구만. 그런줄로 알고 먼저 휴식하오.”   하수성과 호려화는 약속한 지점에서 만났다. 직접 만나고보니 호려화는 사진보다 더 예뻤다. 하수성은 가슴이 쿵쿵 뛰였지만 억지로 참으면서 료리를 청한후 호려화에게 양주를 부어주었다. 술이 서너잔 돌아가자 하수성은 말이 많아졌다. 그는 대학교시절의 자랑거리와 련애경력을 늘여놓기 시작했는데 대학교때에 많은 녀자들이 줄지어 따랐다고 자랑했다. 그는 또 “텔레비죤방송국에 취직하게 되면 평생 평온한 생활을 할것이고 친척친우 이웃까지도 당신때문에 자호감을 느낄것이요.”라고 말했다. 하지만 호려화는 언니와 달리 그냥 조용하게 그의 말만 듣고있었다. 하수성이 흥분되여 호려화의 손을 잡으려 하자 그는 얼굴을 붉히면서 피하군 했다. 식사후 하수성은 호려화를 집까지 바래주겠다며 그녀를 차에 태웠다. 집근처에 도착하자 호려화는 미안해하면서 인젠 돌아가도 된다고 말했지만 하수성은 언니의 부탁이라면서 끝까지 바래주겠다고 우기였다. 호려화가 집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하수성도 따라들어서서는 문을 안으로 잠그어버렸다. 상서롭지 못함을 느낀 호려화가 막 집문을 나서려는데 하수성은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호려화가 안된다면서 견결히 반항하자 하수성은 화를 내면서 그녀의 뺨을 후려쳤다. “언니가 말해주지 않았어? 그런데 넌 왜 거절하는거야?”   “뭐요? 언닌 절대 그럴수 없어요. 난 자신의 정조와 절대 교역을 하지 않아요.”   하수성은 굶주린 승냥이처럼 나약한 호려화에게 덮쳐들었다… 경황중에 호려화는 과일칼을 집어들고 하수성의 목을 찌르려 했다. 하수성은 겁을 먹고 호려화의 몸우에서 내려왔다…   호려화는 통곡했고 하수성도 제정신이 들었다. 하수성은 옷을 주어입고 도주하려다가 이대로 갈수는 없다는 생각에서 호려원에게 전화하여 사실경과를 간단하게 설명하고는 속히 와달라고 부탁했다. 이때 호려화도 남자친구에게 자신이 집에서  폭행당했으니 즉시 경찰에 제보한후 이곳으로 속히 오라고 전했다.   북경의 모 증권회사에서 실습하고있는 남자친구와 호려원 그리고 경찰들이 거의 동일한 시간에 도착했다. 도주하려던 하수성은 사회구역 대문어구에서 경찰에게 덜미를 잡혔다.   언니 호려원은 조사를 받을 때 이렇게 실증했다. “나는 하수성과 채팅을 할 때 과분한 롱담을 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롱담에 불과합니다. 내가 어찌 친동생더러 ‘내부규칙’을 범하게 하겠어요? 하수성처럼 고급교육을 받은 지명인사가 이런것이 법을 어기는 행위임을 어찌 모를수 있단 말입니까?” 2008년 7월 8일, 하수성은 강간죄혐의로 체포되였으며 단위에서 제명당했다. 안해도 전혀 용서할수 없다면서 리혼했다…      《지음》    
52    일생동안 형을 잊지 않은 모안청 댓글:  조회:6277  추천:0  2009-06-05
  모택동의 둘째아들 모안청은 2007년 3월 23일 오전 4시 18분에 84세를 일기로 북경301병원에서 병으로 돌아갔다.   모안영이 조선전쟁터에서 희생된후 모택동의 유일한 아들인 모안청은 각계의 관심과 주목을 받아왔다. 등영초, 강극청, 왕진 등 로동지들이 생전에 그와 그의 가족을 아주 관심하였고 당과 국가의 지도자들도 여러번 그와 그의 가족을 찾아주었다.   동 년   모안청은 1922년 11월 13일에 호남성 장사시 동향 판창에서 모택동과 모택동의 첫번째 부인인 양개혜 사이에서 둘째아들로 태여났다.   모안청이 4살되던해 가을에 모택동은 중공중앙이 한구에서 소집한 긴급회의에 참가한후 부인 양개혜, 보모 진옥영과 모안영, 모안청, 모안룡 삼형제를 비밀리에 장인네 집인 장사 판창의 양가댁으로 보내고나서 명령을 받들고 추수봉기를 일으키러 떠났다. 그때로부터 20년이 지나서야 모택동, 모안청부자가 다시 상봉할수 있었다.   모택동이 떠난후 3년동안 모안청은 장사 판창에서 어머니 양개혜의 신변에서 자랐다. 1930년 11월 14일, 양개혜가 호남군벌 하건에게 살해되자 모씨3형제는 외할머니 향진희와 함께 살았다. 얼마후 상해로부터 향진희더러 아이들을 상해로 보내라는 모택민의 편지가 왔다. 주밀한 배치끝에 60여세의 향진희할머니와 20여살의 며느리 리숭덕이 친척방문가는 사람으로 분장하고 삼형제를 데리고 기차에 앉아 무한으로 갔으며 거기서 다시 배를 타고 상해에 도착했다.   상해에서 모씨3형제는 지하공산당이 꾸리는 상해대동유치원에서 공부하게 되였는데 후에 상해지하당이 엄중하게 파괴를 당하면서 대동유치원도 해산되여 모안영, 모안청형제는 동건오의 집에 맡기여졌고 그후부터 두 사람은 끝없는 생활의 어려움을 맛보게 되였다.   모안영이 후에 그때의 처참한 생활을 회억하며 한 말이 있다. “나는 그때 도적질하지 않고 부자밑에서 일하지 않은외에는 모든 생활이 《삼모류랑기》의 삼모와 다를바 없었다. 거리바닥에서 자고 남의 마루바닥을 닦아주었으며 쓰레기통에서 누데기를 줏는 등 무슨 일이나 다 하였다. 상해에는 외백도교라는 곳이 있는데 인력거가 올라가기 힘드므로 나와 동생 안청이 뒤에서 떠밀어주고는 돈을 좀씩 얻어가지군 하였다…”   아 픔   더욱 불행한것은 이 시기에 모안청이 구타당하여 머리에 상처입고 뇌진탕이란 병을 얻어 일생동안 그 영향을 받게 된것이다.   1936년, 동건오를 위수로 한 상해지하당원들의 도움으로 모안영과 모안청 두 형제는 동북의용군사령 리두장군이 서유럽으로 고찰가는 기회를 타서 프랑스를 거쳐 쏘련에 도착하였다.   1937년초, 모스크바에 이른 두 형제는 선후로 모스크바교외의 모니노국제 제2아동병원과 이완노브성의 국제 제1아동병원 등 곳에서 공부를 하였다. 이때 모택동은 이미 홍군을 거느리고 섬북에 이르렀고 거기서 연안을 중심으로 한 항일근거지를 세웠다.   1938년, 누가 쏘련으로부터 안영과 안청의 사진을 가져왔었는데 모택동은 기쁨을 금치 못했다. 얼마후 모택동은 편지를 써서 쏘련으로 가는 사람한테 부탁했다. “사랑하는 안영, 안청아! 늘 너희들을 생각한다. 너희들의 형편이 좋고 진보하였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또 너희들의 사진까지 받아보았기에 아주 기쁘다. 지금 인편으로 이 편지를 보내니 너희들도 나한테 편지를 보내오기 바란다. 나는 너희들의 편지를 기다린다! 나의 형편은 좋은편이니 후에 기회가 있으면 다시 편지를 쓰겠다…”   바로 그해에 쏘련에 있는 모택동의 두번째 부인 하자진이 모안청형제와 련계를 갖고 늘 두 사람을 보살펴주었다.   1947년, 모안청은 귀국후 리부춘, 채창의 소개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으며 후에 흑룡강 극산현의 토지개혁시점에 참가했다.   1949년 7월, 모안청은 북경에 돌아와 중공중앙 선전부 맑스-레닌저작편역실에서 로어번역을 맡았다. 그는 10여부의 맑스-레닌경전저작과 정치리론서적을 번역출판하였고 10여편의 글을 발표하였다. 하지만 상해에서 상처받은 머리는 나을리 없었다.   모택동의 보건의사 왕학빈의 회억에 의하면 한번은 모택동이 편지 한통을 왕학빈에게 보여주었는데 모안청이 모택동한테 쓴것이였다. 편지내용은 모안청이 자기 머리속에 한 “녀석”이 들어있는데 자기는 그 “녀석”과 끝없이 싱갱이질하고있다는것이였다. 그후 모택동은 하는수 없이 모안청을 쏘련에 보내 병치료를 받게 했다.   혼 인   1959년, 쏘련에서 치료를 받고 귀국한후 모안청은 대련 남산호텔에서 휴양하고있었다. 그때 모안영이 이미 조선전쟁터에서 희생되였다. 대련시공안국 경위처 원 처장 장세보의 회억에 의하면 모택동의 사돈 장문추가 모택동과 계속 인연을 맺겠다고 원하면서 모안영의 안해인 류송림의 녀동생 소화를 데리고 대련에 와 휴양했다. 하지만 사실상 그 휴양은 “맞선을 보는 색채가 얼마간 있었다.”   뜻밖에도 모안청과 소화는 보자마자 익숙한 사이처럼 이야기를 잘하였다. 그후 두 사람은 편지를 서로 주고받았다. 이 일을 안 모택동은 특별히 모안청에게 편지를 썼다. “네 병이 많이 나았다니 아주 기쁘다. 의사동지들과 너를 도와주고있는 다른 동지들의 의견을 잘 듣고 잘 휴양하면서 치료를 잘해야 한다. 절대 성급해서는 안된다. 너의 형수 사제와 그 녀동생 소화가 너를 보러 왔고 또 너의 병상황을 아주 관심하고있으니 너는 그녀들을 잘 대해주어야 한다. 네가 소화와 많은 편지를 주고받았다고 하던데 너희들은 친구로 사귈 의향이 있니? 소화는 좋은 아이이다. 잘 이야기해보아라…”   1960년의 5.1절전야에 모안청과 소화는 대련호텔에서 결혼식을 올렸고 1970년에 아들을 보았는데 모택동은 “신우”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고 향   1931년에 장사 판창을 떠난후 모안청은 여러해동안 고향으로 가보지 못했다.   1952년에 그는 처음으로 소산으로 갔었다. 모안청의 사촌동생 모안평의 회억에 의하면 모안청은 그때 모택동의 고향집을 참관하고 촌에서 일부 로인들을 만났는데 그속에는 그의 할머니도 들어있었다. 떠날 때 모안청은 특별히 200원을 꺼내 로인한테 드리면서 “이것은 아버지가 주는것이 아니라 내돈”이라고 말했다 한다.   모택동이 서거한후 모안청부부는 여러번 소산으로 가보았는데 갈적마다 소산호텔에 들었고 또 모택동의 고향집과 적수동으로 가보았으며 소산에다 중로 두 나라 문자로 “나는 소산을 몹시 사랑한다”는 제사를 썼다.   “이 말은 우리가 그한테 아무런 제시도 하지 않았는데 그가 생각해낸것이다.” 모안평은 회억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자기의 출생지인 판창에 대해 모안청은 더욱 깊은 감정을 품고있었다. 어릴적 그는 줄곧 어머니 양개혜의 신변에서 자랐고 “양영수”라는 이름도 가지고있었다.   몇십년후 그는 눈물을 머금고 어머니묘에 와 성묘한 다음 서명책에다 “양안청”이라고 썼다. 모두들 그가 잘못 쓰지 않았는가고 여겼지만 그의 유년시절 감정의 문이 그때까지 열려있었는지도 모른다.   만 년   쏘련에서 11년간 사업하고 학습하였기에 모안청은 로어로 사고하는 습관이 양성되였고 일상생활양식도 유럽식의 풍격을 확보했다.   음악을 좋아하는것은 모안청의 큰 애호이다. 젊었을 때 그는 피아노 등 악기를 다룰줄 알았고 작곡도 할줄 알았다. 모안청의 생활은 주로 텔레비죤을 보고 책을 읽고 신문을 보는것인데 로어를 한어보다 더 잘 알기에 특히 로씨야문학을 즐겼다.   모안청의 집에서 비서장으로 4년간 있은 장정걸은 “모안청은 성격이 아주 좋다. 정말 좋다!”고 말했다.   장정걸의 회억에 따르면 모택동이 혁명하러 떠나고 양개혜가 일찍 희생되여 모안영, 모안청 형제는 오래동안 서로 의지해 살아온 까닭에 그들 “형제의 감정은 특별히 깊다.”   “안영의 희생은 그한테 아주 큰 충격을 주었다.” 장정걸은 모안청이 여러번 “나는 형을 보았다. 나는 그와 산보하러 갔다”고 말하는것을 들었다고 했다.   《환구시보》  
51    서주(西周) 개국 임금-주무왕 댓글:  조회:2538  추천:0  2009-05-31
 주무왕 (중국 역사 인물)   서주 왕조의 개국 임금인 주무왕 희발(姬發)은 주문왕의 차남이다. 형 읍고(邑考)가 상조(商朝) 주왕(紂王)에게 참살당한 것으로 인해 주무왕은 왕위에 오르게 됐으며, '무'는 그가 죽은 뒤의 시호(諡號)다.   주무왕의 생몰년은 역사적인 고증이 없는 것으로 그의 정확한 나이를 알 수 없지만, 93세까지 살았다고 구전되고 있다.   주문왕 통치 50년이란 세월동안, 상조를 토벌하기 위해 온갖 준비를 했다. 내정을 개혁하고, 생산을 발전시키며, 온갖 정력을 몰부어 덕으로 나라를 다스리고, 인재를 중시한 것으로 주나라는 날로 번창했다.   희발이 왕위를 계승한 뒤, 계속 강상(姜尙)을 재상(國相)으로 임명하고 형제인 주공단(周公旦)과 소공석(召公奭)을 조수로 두어 상조를 토벌하는 일에 적극 돕도록했다.   당시 상조의 주왕은 날로 잔인하고 흉폭했으며, 극도로 사치하고 탐욕스러웠다. 결국 충신 한 명 한 명을 잃게 되며 백성들의 원한이 하늘을 찔렀다.   바로 이때 주무왕은 기회를 노려, 도읍을 풍읍(豊邑)에서 호경(鎬京)으로 옮기고, 상조에 대해 또 한번의 탐구적인 공격을 진행했다. 이번의 진공은 주나라 군대에게 있어서 한차례 단련일 뿐만아니라 보귀한 실전 경험을 갖게 된다.   2년 뒤, 주무왕은 맹진(孟津)에 총 800명의 제후를 불러 놓고 맹약을 한다. 모든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한 희발은 직접 전차(戰車)300대에 근위무사 3000인, 갑병(甲兵)4만5천 명 그리고 소국(小國)의 병력을 연합하여 동쪽으로 진격해 주왕에 대한 토벌을 시작한다.   맹진에서 진행된 궐기대회에서 그들은 주왕의 여러 죄행을 나열했으며, 하늘을 도와 주왕을 벌한다는 뜻을 표한다. 이번 궐기대회의 소집은 주왕을 토벌하는 연맹군들의 투지를 더해줬는가 하면 작전의 의의와 그들의 손에 거머쥔 사명감을 각인시켜줬다.   쌍방은 격렬한 투쟁을 벌렸다. 주왕을 토벌하는 연맹군은 일치단결한 정의의 힘이라면, 상조 군사들은 황급하게 허둥허둥 전쟁에 나선 흩어진 모래알과 같았다.   아주 빠른 시간내에 상조 군대를 격파한 주군은 바로 조가(朝歌)성을 점령했다. 주왕은 더 이상 만회할 수 없는 대세 앞에서 녹대(鹿臺)에 올라 자분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된다.   주나라 군대는 번개같은 속도로 상조 도읍을 점령한 것으로 상조(商朝)의 멸망을 선고한다.   주무왕의 상조 토벌은 중국 역사상의 한 차례 대사다. 구체적인 시간에 대해 아직 정확한 고증은 없지만 보통 기원전 1057년으로 얘기하고 있다.   희발이 상조를 멸하고 서주(西周)를 건립했으며 도읍을 호경에 정했다. 이는 중국 역사상의 세번째 노예제왕조다.  자신의 통치를 공고키 위해 희발은 주공의 상조 백성을 위로하여 천하를 안정케 하는 방안을 채용했다. '공/公', '후/侯', '백/伯', '자/子', '남/男' 등 다섯 등급으로 작위를 나뉘어 친족과 공신을 책봉했으며, 그들로 하여금 제후국을 건립하게 했다. 강상은 영구(營丘)에 도읍을 정해 제나라(齊)를 건립했고, 주공은 곡부(曲阜)에 도읍을 정해 노나라(魯)를 건립했다. 한편 주왕(紂王)의 아들 무경(武庚)을 상나라 도읍에 남겨 은후(殷侯)로 책봉하여 상조의 유민들을 안정시켰다.   이와함께 주무왕은 범인을 석방하고, 가난한 백성을 구제하며 생산을 발전시킨 것으로 서주 초기 정치의 안정, 경제의 발전 더 나아가 사회의 발전을 추동했다.   서주 건국 3년 후, 발희는 병으로 타계하자 아들 희송(姬誦)이 그의 왕위를 계승했다. 당시 희송의 나이가 아직 어린것으로 주공단이 대신 국정을 다스렸다.   낡은 왕조를 뒤엎고 새 왕조를 건립한 주무왕은 중국 역사상 이름 날린 군왕 중 하나로, 오늘까지 후인들의 칭송을 받고 있다.   제공:중국국제방송  
50    혁명가 운대영의 기이한 사랑 댓글:  조회:3840  추천:0  2009-05-30
    운대영은 중국공산당 조기의 중요한 지도자이다. 저명한 청년령수와 확고부동한 혁명가로서의 운대영의 영용한 사적은 수많은 중국청년들을 고무격려했다. 또한 운대영의 애정생활도 마찬가지로 무수한 청년들의 마음을 감동시켰다.   운대영은 강한 반봉건의식을 가지고있었고 혼인자유를 주장했다. 하지만 그 자신이 오히려 부모가 마음대로 정하고 중매인이 줄을 단 혼인에 직면했다. 심씨네와 운대영네는 한고향출신으로서 두 집은 관계가 친밀했다. 운대영의 부모는 그를 심씨네 둘째딸 심보수와 결혼시키기로 결정했다.   운대영은 부모가 정한 이 혼인에 맞서 대항했지만 끝내 어머니의 눈물을 이기지 못하고 핍박에 의해 혼사를 동의하고말았다. 1915년 10월, 운대영은 심보수와 결혼했다.   신혼날밤에 마음이 울적한 운대영은 신방에 들어가지 않고 다른 방에서 잤으며 신부와는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서방의 자유사상의 영향을 받은 젊은이로서 운대영은 애정에 대해 자신의 동경을 갖고있었다. 그는 자기의 두터운 일기책을 신부에게 주면서 먼저 서로 료해하고 감정이 생긴후 다시 부부로 되자고 제기했다. 련며칠 두 사람은 서로 말을 하지 않았다. 결혼후 삼일에 신부는 친정집으로 돌아가 어머니한테 울면서 하소연했다. 어머니는 딸의 말을 듣고 몹시 놀랐지만 운대영의 행동에서 그가 보통인물이 아님을 느끼게 되였다. 하여 어머니는 딸에게 “내가 보건대 운대영은 재능있고 뜻을 가진 청년이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있는지 모르겠지만 네가 그한테 먼저 편지를 써보아라.”라고 말했다.   심보수는 어머니의 말대로 남편에게 편지를 썼다. 그날 저녁 그녀는 회답편지를 받았다. 운대영은 안해의 편지를 보고 아주 뜻밖이였으나 한편으로 각별히 기뻤다. 그는 회답편지에서 책을 많이 읽고 도리를 잘 알아야 한다고 안해에게 말했다. 이튿날 심보수는 또 남편에게 편지를 썼다. 신혼부부는 이렇게 벽을 사이두고 편지를 주고받았다. 시간이 지나 피차간에 료해가 깊어지자 진정한 사랑이 싹트게 되였다.   운대영은 몸집이 웅장하고 생활이 소박하였으며 성격이 너그럽고 큰 소리 한번 치지 않았다. 심보수는 총명하고 부드럽고 남을 잘 생각해주는 등으로 정말 명문집 녀자다왔다.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하면서 행복하게 지냈다.   운대영은 안해에게 새 사상을 말해주고 일기를 쓰도록 가르쳤으며 영어를 배워주었다. 보건대 연약한것 같지만 큰 뜻을 지닌 심보수는 진리를 위해 싸우려는 남편을 적극 지지해주었다.   하지만 이들의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1918년 2월 25일에 심보수는 난산으로 목숨을 잃었다. 운대영은 안해가 죽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는 죽은 안해한테 인공호흡을 시키고 진맥해보면서 안해가 다시 살아나기를 바라고 바랐다. 하지만 모든것은 다 소용없었다. 운대영은 거의 기혼해 넘어질번했다. 그는 다급히 달려온 장인, 장모앞에 꿇어앉아 큰소리로 엉엉 울었다.   극도의 비통에 빠진 운대영은 다시는 장가를 들지 않겠다고 굳게 맹세했다. 그는 일요일마다 일기책을 가지고 안해의 무덤으로 찾아가서는 일기를 읽는가 하면 무덤앞의 풀을 어루만지면서 묵묵히 눈물을 흘리였다.   다시는 장가를 들지 않겠다는 운대영의 맹세는 가정, 사회, 친척, 친구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친구 사원정은 그한테 “너는 옛사람들의 ‘죽을 때까지 한사람만 따른다’는 말을 고집하고있지 않아?”라고 물었다. 그러자 운대영은 “나는 그걸 제창하지 않지만 반대하지도 않아. 문제는 자원에 달린거야. 억지로 자기희생을 하라고 하는것도 틀린것이지만 진짜 애정을 위해 자기희생을 하려는 사람을 막는것도 합리하지 않아. 재혼하는가 안하는가 하는것은 완전히 자유적이여야 해.”라고 대답했다.   사원정은 “그럼 네가 이 세상을 개조하려고 재혼하지 않고있는거야?”라고 물었다. 운대영은 “그것도 있지. 중국녀자들은 남자들의 압박을 너무 받았어. 남자들은 늘 이런저런 리유로 자기의 욕심을 다 채우지만 녀자들에게 정조를 지키라고 강박하고있잖아. 두고봐, 나는 이런 불공평한 세상을 개변시킬거야. 하지만 다른 사람들더러 나를 따르라는 말은 아니야.”라고 말했다. 그는 또 “내가 재혼하지 않는것은 이런 리유뿐만이 아니야. 죽은 안해에 대한 나의 감정은 나를 그렇게 시키고있어.”라고 정중하게 강조했다.   애정에 대한 운대영의 변함없는 마음은 심씨네 넷째딸 심보영 즉 심보수의 녀동생을 깊이 감동시켰다. 심보수가 난산으로 죽었을 때 심보영은 12살이였다. 운대영은 안해에게 한 낙언을 충실하게 리행하면서 늘 처가집에 가서는 심보수의 동생들에게 공부를 가르쳐주었다.   심보영이 호북녀자사범학교에 입학한후 운대영은 자기가 주필로 있는 《중국청년》잡지를 그녀에게 부쳐주었으며 부지런히 공부하여 인류의 해방사업을 위해 분투하라고 고무격려했다. 그의 도움으로 심보영은 아주 빨리 진보하여 1924년에 사회주의청년단에 가입하였고 이듬해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그 몇년동안에 운대영은 혁명의 용광로속에서 연약한 서생으로부터 강철전사로 성장했다. 그와 심보영 사이에는 늘 편지가 오갔다. 공동한 리상으로 하여 형부에 대한 심보영의 존경과 동정이 점점 사모로 변하게 되였고 동시에 운대영의 마음속에도 일종 신기한 힘이 생겨나 저도모르게 마음이 흔들렸다. 어느날 광주에 있던 운대영은 무한에서 보낸 심보영의 편지를 받았다. 편지에는 애정이란 말이 한마디도 없었지만 그는 혁명적녀청년의 용감하고도 깊은 사랑을 읽을수 있었으며 또 그런 사랑을 거절할수 없었다.   북벌전쟁이 시작되자 운대영과 심보영은 무한에서 만났다. 그때 운대영은 무한중앙군사정치학교 총교관이였고 22살되는 심보영은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성립제1소학교에서 교편을 잡고있었다. 운대영은 요청에 의해 성립제1소학교에 가서 연설하게 되였다. 심보영은 교원들속에 서서 운대영을 정깊게 바라보면서 조용히 그의 연설을 들었다. 연설이 끝나자 그들 두 사람은 심보수의 묘지로 찾아갔다. 길에서 운대영은 안해를 추모하여 지은 시 《강성자》를 낮은 목소리로 읊었다.   운대영은 죽은 안해앞에서 10년동안의 어려웠던 행정을 이야기한후 “오늘 나는 무산계급혁명전사로 되였고 당신의 녀동생 심보영도 어른으로 자라났으며 무산계급전사로 되였소. 우리들의 공동한 혁명리상을 실현하기 위해 나는 그녀와 어깨겯고 싸우기를 바라고있소. 당신이 구천에서 알고있다면 나의 생각에 동의하겠지.”하고 정깊게 말했다.   여기까지 말한 운대영은 눈물투성이가 되였다. 그는 몸을 돌려 심보영을 미안스레 바라보면서 “량해해주오. 동의도 얻지 않고 이런 말을 하였소. 나와 혁명적반려로 되기를 바라지 않으면 언니한테 말해도 되오.”라고 말했다.   심보영은 말없이 울먹이면서 운대영한테 힘있게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1927년 1월 16일, 32살되는 운대영과 22살되는 심보영은 결혼식을 올렸다. 그해 7월에 왕정위가 혁명을 배반했다. 국민당의 수배령속에서 운대영은 심보영과 리별하고 중앙림시위원회의 명령을 받들고 구강, 남창으로 가 공산당의 혁명무장부대와 합류했다. 그후 몇년간 그는 남북을 전전하면서 목숨을 내걸고 혁명의 승리를 위해 용감히 싸웠다.   1930년 5월 16일, 운대영은 상해에서 체포되였다. 1931년 봄에 중공중앙에서는 여러측의 력량을 조직하여 아직 신분이 폭로되지 않은 운대영을 구출하기로 결정하였고 심보영더러 감옥에 가 운대영과 면회하면서 출옥준비를 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일이 거의 되여갈 때 뜻밖에 반역자 고순장의 밀고로 운대영의 신분이 폭로되고말았다.   하여 운대영은 1931년 4월 29일에 장렬하게 희생되였다. 그해 그는 36살이였다.   연변라지오TV신문 제공
49    동북인들 단오명절을 어떻게 즐기나? 댓글:  조회:2541  추천:0  2009-05-28
해마다 맞이하는 단오명절, 이 날에 중국에서는 종자(粽子)를 먹는 것 외 또 어떤 민속을 보유하고 있을까?   중국 전통 민간명절의 하나로 단오절은 단지 '복고풍'에만 구애되어 신선한 활력소들이 부여되지 않았다면 오늘의 생기발랄한 명절분위를 조성하지 못할 것이다.   어떻게 단오명절의 깊은 문화적 전통을 계승하고, 문화적 의의를 발굴하는것이 현대사회 그리고 현대 사람들이 단오명절을 즐기는 외 심사숙고 할 하나의 과제다.   최근 요녕성 민속 전문가 곽련순(郭蓮純)은 인터뷰 중 "단오명절은 일찍 중국의 남방에서 전해내려와 각 지방에 '머물'면서 독특한 지방적 색채를 띄며, 요녕 지역의 사람들은 단오명절을 즐길 때 색다른 풍습을 보이고 있다."라고 밝혔다.   과연 중국 요녕성에서는 어떻게 단오명절을 즐기는건지 아래에 알아보도록 하자!   첫째: 아침, 해가 뜨기 전, 쑥물로 얼글을 씻는데 이는 귀가 밝고 눈이 맑도록 한다. 단오명절이 찾아오면 시장 곳곳에서 쑥의 인기가 최고다.   둘째: 사람들은 일출(日出) 전 산을 오르며, 백양나무나 솔나무 가지를 꺾어 집문에 꽂는데, 이는 "불길을 막고, 평안과 길복을 기원'을 표한다. 하지만 심양지역에는 산이 비교적 적어, 도심의 사람들은 보통 공원을 거니는 것으로 등산을 대체 한다.   셋째: 어린아이의 몸에 작은 조롱박따위의 액세서리를 달며, 손 그리고 발, 목에는 다섯가지 색상으로 묶어진 "5채선/五彩線"을 맨다. 이는 모두 병을 막고 재앙을 피한다는 아름다운 풍속으로 지금까지 사람들이 즐겨하고 있다.   네째: 종자(粽子)먹기. 동북의 종자 만드는 법은 아주 간단하다. 종자엽(粽子葉)에 소는 찹쌀에 몇 개의 대추를 추가하는 것이다. 1홍(紅)1백(白)1청(綠)의 배치는 미적 감각이 뛰어날 뿐만아니라, 한 입 한 입 느껴지는 달콤한 대추향은 그야말로 일품이다.   날로 발전하는 생활수준과 함께 늘 '바쁘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니는 현대 사람, 특히 현대의 젊은이들은 집에서 종자를 만들어 먹는다는 것은 가능성이 아주 작은 일이다.   하지만 슈퍼 또는 대형 마트에서는 단오명절을 앞두고 미리미리 여러가지 맛의 종자를 진렬해 사람들의 소비를 기다리고 있어, 지금의 생활은 그야말로 편안하고 편리하다.   중국국제방송  
48    운남녀성 연변까지 유괴 댓글:  조회:4151  추천:0  2009-05-26
일전에 안도현경찰은 만리길을 넘나들며 특대녀성유괴사건을 해명하여 범죄혐의자 3명을 나포하고 유괴된 녀성 1명을 구출해냈다.   안도현 량병진 모 촌 농민 장씨의 외아들은 나이 40살이 넘도록 장가를 들지 못하였다. 장씨는 사처에 수소문하여 며느리감을 물색하였다. 그러던 2007년 3월, 장씨는 이웃의 소개로 안도현의 리씨녀성을 알게 되였다. 리씨는 2만 5000원만 주면 장씨의 아들에게 색시감을 소개해주겠다고 답복하였다.   비록 년간수입이 몇천원밖에 안되는 장씨네 가정이였지만 40살 넘은 아들이 장가들면 대를 이을수 있다는 생각에서 돈을 꾸어서라도 며느리를 들이기로 결정하였다.   2007년 9월 8일, 리씨와 리씨의 남편 왕씨는 소옥이라고 부르는 녀성을 장씨집에 데리고왔다. 소옥에게 흡족해난 장씨네는 당장에서 2만 5000원을 리씨부부에게 주었고 이튿날에 소옥의 동의도 거치지 않고 아들에게 결혼식을 치러주었다.   며느리 아기 안고 도망   하지만 장씨네가 생각지도 못한것은 2년후의 어느날 소옥이가 7개월밖에 되지 않은 어린 아들을 안고 갑자기 가출한것이다. 장씨부자는 며칠동안 찾아헤맸지만 결국엔 찾지 못하였다. 온집 사람들은 뒤늦게야 혼인사기를 당했음을 알게 됐다. 하지만 남보기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한 장씨일가는 꾹 참고 소문내지 않았다. 장씨가 화병으로 앓아눕게 되자 하루종일 눈물로 세월을 보내던 장씨의 아들은 파출소에 신고를 하였다.   녀성유괴사건에 련루돼   신고를 받은 안도현공안국에서는 녀성유괴사건전문조사조를 무었다. 조사를 거쳐 전문조사조에서는 안도현 명월진의 리씨녀성과 남편 왕씨에게 중대한 혐의가 있음을 발견하였다. 금년 4월 11일, 안도경찰은 주요혐의자인 리씨와 왕씨가 운남성에 은닉해있다는 제보를 받게 되였다. 경찰은 즉시 항공편으로 운남에 가서 당지 경찰의 배합하에 4월 13일 리씨와 왕씨를 운남성 곤명에서 나포하였다.   심사를 거쳐 리씨와 왕씨는 2007년에 운남사람 리안에게 선후로 각각 2만원과 2만 5000원을 내고 2명의 녀성을 안도현 량병진으로 유괴해다 팔아넘겨 2만 5000원을 챙긴 범죄사실을 탄백하였다.   4월 14일, 범죄혐의자 리안도 운남성 대리에서 나포되였다. 리안이 승인한데 따르면 2007년에 선후로 1만원과 1만 5000원의 가격으로 2명의 운남녀성을 유괴해다가 리씨에게 팔아넘겨 1만 5000원을 챙겼다.   일자리구실로 유괴   경찰이 조사한데 따르면 2007년 8월에 운남소녀 소운과 소옥은 리안의 소개로 안도현의 리씨부부를 알게 되였고 리씨부부는 직업을 소개해준다는 구실로 안도까지 유괴해다가 장가들지 못한 농촌의 로총각들에게 팔았던것이다. 이미 성공적으로 구출된 소운은 경찰에 의해 안전하게 고향으로 돌아갔고 소옥의 행방은 경찰이 찾고있는중이다.   왕씨와 리안은 이미 구속되였으며 리씨는 임신하였기에 불구속립건되였다.   《길림신문》      
47    안해탓에 들통난 시당위부서기의 비리 댓글:  조회:4059  추천:0  2009-05-26
2009년 4월중순, 하남성규률검사위원회는 2008년 성내정청장급이상 간부들에 대한 조직심사결과를 공포했다. 공포문에는 원 정주시당위 부서기 겸 규률검사위원회 서기 왕치업의 당적을 제명하고 그의 모든 직무를 박탈하며 비법적으로 소득한 돈 387.2만원을 법에 따라 몰수하고 국고에 바친다는 내용도 들어있었다. 이 핵폭탄급사건은 정주시뿐만아니라 하남성 나아가서 전중국을 놀래웠다.   왕치업이 권력을 람용하여 뢰물을 받아먹은 사건이 밝혀진것은 아주 희극적이였다. 왕치업의 마누라가 8개 저금통장이 들어있는 차통을 페품으로 처리하였다. 2명 페품수매자는 차통속에 들어있는 8개 저금통장을 발견하고 이 기회에 왕치업을 협박해서 돈을 갈취하려 했다. 제보를 받은 경찰들은 즉시 행동하여 이 2명 페품수매자를 나포했다. 후에 두집 페품수매자가족들이 나서서 사건의 진상을 여러 보도매체에 반영하여 해당부문의 중시를 불러일으켰다. 결국 왕치업의 부패사건은 극적으로 적발되였다.   “친절한” 안해 협박자들에게 단서 “제공”   2007년 8월의 어느날, 하남성 신밀시에서 온 농민 장강과 조룡은 예전처럼 삼륜차를 끌고 페품을 수매하고자 정주에 왔다. 두 사람은 시정부가족들이 모여 살고있는 백화화원아빠트단지로 왔다. 헌데 보안일군이 대문을 지키고있었다. 두 사람은 보안일군의 호주머니에 고급담배 두갑을 넣어주고는 안으로 들여보내달라고 사정했다. 보안일군은 “이곳은 시정부간부가족들이 살고있는 단지여서 눈치있게 행동해야 하오.”라고 말하면서 들여보냈다. 때마침 왕치업의 마누라가 창문을 열고 집안청소를 하고있었다. 그가 무심결에 밖을 내다보니 장강과 조룡이 페품을 수매하고있었다. 그녀는 장강과 조룡에게 손을 저으면서 “이봐요, 5층으로 올라와요. 페품들이 많으니 모두 가져가요”라고 소리쳤다.   장강과 조룡이 5층에 올라오니 왕치업의 마누라가 페품이라며 내놓은 물건들이 한아름이 되였다. 그속에 낡은 옷들도 있었고 한번도 입어보지 않은 상표까지 달려있는 새옷들도 있었다. 장강은 놀라면서 물었다. “이 모든것을 페품으로 처리하려 합니까? 모두 새것으로 보이는데 페품으로 처리하기엔 너무 아까운것 같은데요?” 그러자 왕치업의 마누라는 “가져가기 싫으면 그만두세요. 그 주제에 무슨 잔말이 그리도 많아요?”라고 화를 냈다. 장강은 “노여워마십시오. 우리야 이런 물건들을 가져가면 더없이 좋지요.”라고 말했다. 장강과 조룡은 페품들을 종류별로 정리하여 저울에 달아보는 일을 2시간만에 끝마쳤다. 두 사람은 페품을 삼륜차에 다 싣고는 돈 200원을 주고 떠나려 했다. 이때 왕치업의 마누라가 장강을 보고 잠시만 기다리라고 말하고는 객실에 들어가 오래된 차통( 茶)을 가져왔다. “두 사람 오늘 수고가 많았어요. 이 차는 오래 묵은 차라지만 고급차여서 맛이 좋아요. 당신들이 가져다 맛보세요. 차가 싫으면 차통을 페품으로 수매해도 좋아요.”   장강은 미안해하면서도 10전짜리 엽전 3개를 주고는 그 차통을 바지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오후 신민에 돌아온 장강과 조룡은 정주에서 수매한 페품들을 페품수매소에 날라갔다. 장강은 왕치업의 마누라에게서 받은 그 차통을 페품수매소 주인 리봉에게 주면서 “고급차요. 한번 맛보시오. 우리같은 촌놈들에게 이런 고급차는 필요없소. 돈이 제일 좋소.”라고 말했다. 그동안 리봉은 페품을 수매하면서 많은 일들을 겪여보았다. 차통을 손에 쥐고 이리저리 살펴보던 리봉은 뭔가 의심스러웠다. 가위로 차통의 밑굽을 베자 밑굽에 접어놓은 저금통장이 들어있었다. 모두들 놀라서 소리쳤다. “저금통장이다. 차통에 저금통장이 들어있었구나.”   워낙 차통밑굽에 8개의 저금통장이 들어있었던것이다. 저금통장의 주인은 왕치업이고 금액은 모두 합쳐 200여만원이였다. 하지만 이들을 놀라게 한것은 저금통장의 주인이 당시 정주시당위 부서기 겸 규률검사위원회 서기 왕치업의 이름과 일치하였던것이다.   극적으로 뢰물수수사건 들통   세상물정을 많이 겪은 리봉은 저금통장에 들어있는 금액과 저금통장을 감춘 방식을 보면 임자는 일반사람이 아닐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들은 이 기회에 왕치업한테서 많은 돈을 우려내자고 합의를 보았다. 리봉 등은 정주에서 도매장사를 하는 로건평을 찾아갔다. 로건평은 왕치업의 아들과 친분이 있었다.   로건평 등은 처음에 “수고비” 50만원을 요구했으나 왕치업측에서 동의하지 않았다. 후에 여러번 담판을 거쳐 30만원으로 정했다. 쌍방은 한 커피점에서 만나 저금통장과 현금을 교환하기로 약속했다. 그날 저녁 8시경에 로건평 등 5명이 약속한 커피점에 나타났다. 사전에 이곳에 매복하고있던 경찰들이 즉시 조치를 취해 로건평 등을 “공갈사기죄”로 나포했다.   로건평 등 다섯명이 “공갈사기죄”로 나포되였다는 소식을 접한 가족들에서는 리해되지 않았다. 가족들은 보도매체에 사실의 진상을 공개하여 “피해자”를 구출하려 했다. 가족들은 당지 보도매체뿐만아니라 신화사 하남지사매체에 고소장을 올려보냈다. 신화사 하남분사에서는 내부참고의 방식으로 이번 사건을 공개하여 해당부문의 고도로 되는 중시를 불러일으켰다. 하여 권력을 람용하여 많은 뢰물을 받어먹은 왕치업의 부패사건이 공개처리되였다.   《전강석간》     
46    등소평의 퇴직이 확정되기까지 댓글:  조회:3826  추천:0  2009-05-26
  등소평의 만년은 활력으로 충만되였다. 1977년 73세의 나이에 세번째로 정계에 다시 들어섰을 때는 이미 많은 사람들로 말하면 가정의 즐거움을 누리는 년세였으나 그는 오히려 이때로부터 눈부신 만년에 들어섰다. 그는 1997년에 서거하기까지 20년동안 중국의 개혁개방과 사회주의현대화사업에 모든 심혈을 몰부었다.   1989년 9월 4일: 등소평의 사직담화   승용차 몇대가 번화한 거리를 지나 질서있게 후미진 골목길에 들어서더니 한 철문앞에 멈춰섰다. 강택민 등 몇몇 중앙지도동지들이 차에서 내려 사업일군의 안내하에 넓고 밝지만 소박하게 꾸려진 집안에 들어섰다. 등소평은 그들과 일일이 악수하고나서 단도직입적으로 그들에게 자기의 퇴직시간과 방식에 대해 상의하자고 말하였다. 중앙책임동지들은 마음속으로부터 그가 퇴직하지 말것을 바랐기때문에 변명하려 하였다.   등소평은 손을 저으면서 “퇴직은 이미 결정된 일이고 그러면 좋은 점도 많소.”라고 말하였다. 그는 자리를 같이한 정치국 상무위원들의 심정을 리해하였다. 이때는 강택민동지를 핵심으로 한 제3대 중앙지도부가 건립된지 3개월도 채 되지 않았고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등소평이 키를 잡을것을 바랐기때문에 그는 인내성있게 해석하기 시작하였다.   “만약 퇴직하지 않고 사업하다가 죽기라도 하면 세계에서 어떤 반향이 일어날지 말하기 어렵소. 자연법칙은 개변할수 없고 지도층도 부단히 갱신해야 하오. 퇴직이 제도로 되여야 지도층변경이동도 비교적 쉬워질거요.” 그는 퇴직은 이렇게 결정하자고 딱 잘라 표시하였다. 그는 두번째 담배를 물면서 “두번째 문제는 퇴직방식인데 이 문제에 대해선 반복적으로 고려해보았고 이미 양상곤동지와도 이야기가 있었소. 퇴직을 리용하여 공적과 은덕을 찬양하는것은 필요없고 좋은 점도 없소. 깔끔하고 소박하게 즉  중앙에서 나의 요구를 비준해주고 몇마디 말만 하면 되오.”라고 말하였다. 그는 중앙책임동지들을 일일이 둘러보면서 “나의 퇴직방식도 그렇고 죽은 뒤에도 그렇고 간소하게 해주길 부탁하오.”라고 말하였다.   등소평은 또 세번째 문제 즉 자기의 퇴직시의 직무교대에 대해 언급하였다. 그는 구성된지 3개월도 채 되지 않는 중앙지도자들을 둘러보다가 눈길이 강택민동지의 몸에 가 멈춰섰다. “군위에는 주석이 있어야 하오. 우선 당의 군위주석을 확정하고 동시에 국가군위주석도 확정해야 하오. 나는 강택민동지를 군위주석으로 제의하오.”라고 말하였다.   그날 등소평은 중앙정치국에 자신이 중앙군위주석직에서 물러나고자 사직의 뜻을 적은 편지를 써보냈다. 700여자밖에 안되는 이 사직서에는 글자마다 당과 국가, 인민에 대한 로당원, 로공민의 참된 마음이 체현되여있었다. “나의 생명은 당, 국가에 속합니다. 퇴직후에도 나는 계속 당과 국가의 사업에 충성할것입니다.”   1989년 11월 9일: 등소평의 퇴직일   늦가을의 북경이다. 등소평은 평소와 마찬가지로 아침식사를 하고나서 바깥을 내다보며 “진눈까비가 적지 않게 내리는구만. 북경은 지금 눈이 와야 될 때지”하며 감개에 젖어 말하였다. 9월 당중앙에 사직서를 바친후 그는 줄곧 자기의 퇴직을 반대하는 일부 동지들을 설복하였다.   11월 9일은 중국공산당 13기5중전회의 마지막 날이였는데 회의에서는 등소평의 퇴직문제에 대하여 최후의 표결을 하게 되였다. 오전 9시쯤 판공실 주임은 등소평의 신변에 와서 한창 진행되는 회의정황, 거기에서도 중점적으로 그의 퇴직문제에 대한 토론정황을 회보하였다. 등소평은 회보를 통하여 많은 동지들이 점차 그의 퇴직에 대한 결심과 의의를 리해하는것을 알고는 기뻐하며 “결국 이 일이 완성되는구만.”라고 홀가분하게 말하였다.   가족들의 점심밥상의 화제는 자연히 등소평의 퇴직문제를 벗어날수 없었다. 등소평은 침착하게 “퇴직후 내가 바라는것은 진정한 평민으로 보내며 거리에도 나가보고 여기저기를 다니며 참관하는것이다”고 자기의 심정을 표현하였다. 손녀는 웃으면서 “할아버지는 정말 리상주의입니다”고 말하였다.   오후 3시쯤 전국대표대회에 참석한 대표들은 표결을 거쳐 중앙군위주석직에서 은퇴할데 대한 등소평동지의 요구를 통과하였다.   등소평은 인민대회당 휴식실에서 금방 회의장에서 온 중앙 각 지도자들과 악수하였다. 강택민의 제의하에 그들은 일자로 서서 진귀한 력사적순간을 남겼다. 이어서 등소평은 강택민 등 사람들의 배행하에 등불이 휘황한 대회당에 들어섰는데 순식간에 우뢰와 같은 박수소리가 울려퍼졌으며 그 자신도 마음을 진정시킬수 없었다. 공산주의사업과 국가의 독립, 통일, 건설, 개혁을 위해 수십년간 분투해온 로당원, 로공민으로서 이제 일터를 떠나야 했으니 어찌 마음이 평온하랴! 그는 미소를 지으며 침착하게 마이크앞에 서서 “저에 대한 여러 동지들의 리해와 지지에 감사를 드리며 전국대표대회에서 나의 퇴직요구를 접수한것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충심으로 전국대표대회와 동지들에게 감사합니다.”고 말하였다. 이어서 그는 대표들의 가운데 서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모두들 이 위대하면서도 평범한 로인과 헤여지기 서운해하며 건강장수하기를 기원하였다.   새로 당선된 중앙군위주석 강택민은 등소평을 배행하여 인민대회당문앞까지 바랬다. 강택민은 자기 어깨에 놓인 짐이 무겁다는것을 마음깊이 느끼면서 등소평의 손을 잡고 “후회없이 나라를 위하여 온 힘을 다 바치겠습니다.”고 한마디로 자기의 심정을 표했다.   등소평:   “문화대혁명”이 중국의 력사발전에 많은 피해를 가져다주었다. 등소평은 “문화대혁명”운동을 언급할 때 늘 자신의 잘못도 있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1980년 중국공산당 두번째 력사결의때 등소평은 이렇게 말했다.   “전체적으로 놓고 말하면 현재 우리는 모택동동지가 이미 제출하였으나 못한 일들을 하였다. 금후 상당히 오랜 시간에도 이런 일들을 해야 한다. 물론 우리는 발전이 있을뿐만아니라 아직도 계속 발전해야 한다.”   이 말은 등소평동지가 1980년 10월 25일에 호교목, 등력군과 한 담화인데 이미 “등소평문선” 제2권에 수록되였다. 이 말을 개괄하면 실제로 4가지 의미를 말해준다.   선인들이 제기하고 구상했으나 하지 못한 일들을 하자. 선인들이 한 그릇된 일들을 시정하자. 선인들이 제대로 하지 못한 일들을 진일보 완벽하게 하자. 선인들이 접촉해보지 못했던 새로운 일들을 하자.   이 네마디는 보건대 평범한것 같지만 구체적으로 중국의 개혁개방은 어떤 기초에서 앞으로 나아가야 하며 어떻게 력사와 현실, 계승과 발전을 봐야 하는가 하는 대도리를 제시하고있다.   등소평의 이 네마디 말은 새시기에 개척한 길은 모주석 그 일대가 한 일과 내적관련이 있다는것을 객관적으로 공정하게 제시해주었다. 사실상 옛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만약 선인들을 참조좌표로 한다면 후세인들이 한 일은 총적으로 이 네가지 방면의 일을 했을따름이다. 이른바 력사의 계승과 발전, 후세인들이 옛사람을 초월한다는것을 한조목 한조목씩 명확히 분석해보면 대체적으로 이 네가지 상황이다.   돌이켜보면 등소평은 이 네마디를 1980년에 제출했다. 1989년의 “6.9”연설과 1992년의 남방담화에서 등소평은 실천경험총화와 관련하여 또 이와 비슷한 네마디 말을 했다. 개괄해 말한다면 “맞는것은 견지하고 잘못된것은 바로잡고 부족한것은 더욱 힘을 내며 새로운 문제해결에는 다그쳐야 한다”이다.   《력사문현》      
45    남편의 검은색가방 댓글:  조회:4731  추천:0  2009-05-25
방을 따로 쓰자는 남편의 전격적선언은 리나에게 실로 충격적이였다. 결혼후 지금까지 리나의 머리냄새를 맡아야 잠이 온다던 남편이였다. 그런 남편이 어느날 갑자기 방을 따로 쓰자니 이건 뭐가 잘못되여도 크게 잘못된 일이였다.   그동안 사실 악착같이 살아야 한다는 구실로 남편에게 소홀한 점도 없지 않았다. 아침저녁 꾀죄죄한 몰골로 대문을 나서는 남편이 안스러운 적도 한두번이 아니였다.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써야 한다는 구실로 사사건건 남편의 일상사에 제동을 걸며 꾸려온 살림이였다.그덕에 요만한 집 한채나마 장만할수 있었다고 위안해보지만 마음 한구석이 늘 개운치 못한것도 사실이였다.   여하튼 남편의 돌연적인 행동은 리나를 당황하게 하기에 충분하였다. 그렇다면 혹시 남편에게 새로운 녀자라도 생겼단 말인가? 그러나 리나는 인차 고개를 가로저었다. 적어도 새로운 녀자를 거느리려면 환한 용모, 넉넉한 지페, 녀자를 꼼짝 못하게 할 기술 등이 있어야 하는데 리나가 보기에 남편은 아무리 후한 점수를 주어도 그 어느 한가지도 해당사항에 없었다.   그날 아침의 선언이후 가뜩이나 말수 적은 남편이 저녁을 먹기 무섭게 서재를 겸한 자기방에 밤새도록 들어박혀있는것이였다. 그렇다고 잠을 자는것도 아니였다. 남편방의 불은 거의 밤새도록 켜져있었다. 이런 불안한 날들이 보름째로 접어든 어느날, 리나는 뜻밖에도 남편에게서 이상한 점을 발견하게 되였다. 그것은 어느날부터인가 남편의 손에 들린 검은색가방이였다.방을 따로 쓰자고 제의한 다음날부터 남편은 검은색가방을 신주모시듯 가지고다녔다.   가방속에 무엇이 들어있을가? 리나는 몹시 궁금했다. 어느날, 리나는 남편이 화장실로 간 틈을 타서 남편의 그 검은색가방을 열어보았다. 거기에는 5개의 사진첩이 들어있었는데 펼쳐보니 리나가 세상에 태여나서부터 여태까지 찍은 사진들이 년대순으로 배렬되여있었다. 어떤 사진은 리나 자신도 잃어버려 못보던 사진이였다. 그녀는 화장실에서 돌아온 남편을 보고 물었다.   “당신, 이 사진들을 어디서 모았어요?”   “당신이 시집오기전의 사진은 내가 장모님과 처가집 친척들을 찾아다니면서 모은것이고 당신의 유치원때의 사진과 졸업사진은 유치원선생과 당신의 유치원동창들을 찾아다니면서 모은거라오.”   놀란 표정을 짓는 리나를 바라보면서 남편은 나머지 말을 이었다.   “래일은 당신의 40돐 생일이요. 이건 당신의 생일선물로 준비한것이요. 우리가 방을 따로 쓰는것은 일시적인 일이요. 하지만 당신의 40돐 생일은 한번밖에 없음을 생각하면…”   “여보…”   어느새 리나의 두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가정문적보》      
44    안해에게 바치는 노래 댓글:  조회:4084  추천:0  2009-05-25
호북성 천문으로 하향했던 호발운은 1970년에 무한으로 돌아와 7435공장에서 3년간 용접공으로 있다가 통계원으로 되였다. 1974년의 어느날, 공장책임자가 와서 방송국에서 그를 한번 왔다가란다고 전해주었다. 그날 호북성인민방송국 문예부에 찾아간 호발운은 거기서 처음 리홍이란 처녀를 만났다. 호발운이 자리에 앉자 그녀는 호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더니 한대를 그에게 권하고 자기도 한대를 꺼내 피우는것이였다. 호발운은 그 년대에 젊은 녀자가 담배를 피우는것을 처음 보았다.   리홍은 호발운의 작품을 방송하는 문제를 상의하려고 그를 불렀던것이다. 호발운은 리홍을 보고 어느 학교를 졸업했는가고 물었다. 그녀는 서안에서 출생했는데 초중69기를 졸업하고 집체호에 내려가지 않고 군대에 나갔다고 했다. 문화대혁명시기의 초중69기면 소학교졸업정도였다. 집체호에도 내려가지 않고 군대에 나갔다가 제대한후 성방송국에 들어간다는것은 일반인의 자제에게는 있을수 없는 일이였다. 당시 반특권주의자였던 호발운은 단도직입적으로 “당신과 같은 사람들이 방송국에서 사업하니 정말 세상이 망태기이지”하고 욕을 내뱉었다.   그런데 리홍은 화를 내지 않고 “군대에 나갔다고 해서 복을 누린것은 아닙니다. 당신들만 고생한건 아니지요”라고 말했다.   열흘후 호발운은 리홍의 전화를 받았는데 그녀는 그더러 자신이 만든 프로를 들어보라고 권했다. 뜻밖에도 그녀가 만든 프로는 매우 수준이 높았다. 특히 극좌적인 년대에 그녀는 우아한 피아노협주곡을 리용했는데 매우 듣기 좋았다. 호발운은 그녀를 새롭게 인식하게 되였다. 리홍은 륙속 호발운의 작품을 방송해주었다.   1975년 늦봄, 리홍은 호발운의 집에 책을 빌리러 찾아왔다. 그녀는 영광표 담배 2갑과 과일병졸임 한병을 사가지고왔다. 그들은 온종일 이야기하면서 담배 2갑을 다 피웠다. 그 병졸임은 점심술안주로 되였다. 리홍은 담배를 피울뿐만아니라 술도 잘 마셨다.   그녀는 부대에서 영화를 상영했는데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상영기구들을 자동차에 싣고 책가방에 찬만두와 짠지, 물병을 넣고 먼길을 떠나군 했다. 그리고 부대에 도착하면 나무막대기를 땅에 박고 영화화면으로 될 하얀 천을 걸어놓은후 깊은 밤까지 련속 몇부의 영화를 돌리군 했다. 영화가 끝나면 상영기구들을 수습하여가지고 돌아갔고 또 돌아가서는 필림을 원상태로 돌려놓고 설비들을 잘 보양해야 했다. 그녀가 영화를 돌릴 때엔 병사들이 늘 머리 를 돌려 그녀만 뚫어지게 바라보군 했다. 부대에서는 녀자를 볼수 없었기때문이였다. 그녀는 로병들처럼 담배로 답답함을 달래고 술로 추위를 막군 했다. 그러다가 그녀는 마침내 병을 얻어 두번이나 위출혈을 했다.   리홍이 호발운한테서 처음 빌린 책은 《쑈팡평전》이였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피아노를 배웠기때문에 쑈팡의 피아노협주곡에 대해 알고있었다.그 다음 그녀는 《뿌쉬낀시선집》, 《체호브단편소설선집》, 《안나 까레니나》 등 책을 빌려갔다. 리홍은 그 당시 군이상간부들만 볼수 있는 내부서적들을 가져다주었다. 문학과 음악이란 두가지 공동한 애호를 가진 그들은 이렇게 사귀게 되였다.   1977년 10월 6일,호발운은 갑자기 “반동언론”을 퍼뜨렸다는 죄명으로 공장에서 격리심사를 받게 되였다. 그는 공장의 한 자그마한 방에 갇혀있었는데 방에는 자그마한 창문이 있고 밖에는 높다란 담장이 막혀있었다. 그 당시에는 경상적으로 정전이 되여 밤에는 초불을 켰다. 호발운은 다 쓰고 남은 물렁물렁한 양초로 고니, 토끼, 코끼리, 꽃사슴 등 여러가지 동물을 만들었다.   어느날, 밤중에 담장밖에서 웬 녀인이 그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리홍의 목소리였다. 그는 감시일군에게 자신이 만든 양초조각품을 주면서 나가서 리홍에게 갖다주라고 부탁했다.   그후부터 밤마다 리홍은 담장밖에서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때마다 그는 감시일군에게 부탁하여 여러가지 모양의 양초조각품을 그녀에게 갖다주게 했다. 리홍도 감시일군을 통해 담배, 과일, 과자, 통졸임, 고기졸임, 털실옷, 털수건 등을 보내주었다. 그녀는 경상적으로 담배갑속에 편지를 써서 그에 대한 그리움을 표달했다. 그런데 그 편지가 끝내 조사소조 일군들에게 발각되였다. 조사소조에서는 리홍의 단위에 이 사실을 알려주었고 방송국에서는 리홍을 비판하고 감시했으며 직무를 정지시켰다. 그리고 그녀의 부모한테 통지하여 리홍이 현행반혁명분자를 사랑하고 매우 위험한 일을 저질렀다고 알려주었다.   호발운은 정식으로 현행반혁명분자로 정해져서 처리를 기다려야 했다. 1978년 11월, 리홍은 호발운을 면회하러 왔다. 그녀는 호발운에게 “어머니는 처음에는 저를 미워하던것이 가슴이 아파서 편지를 보내여 집으로 오라고 해요. 저는 당신을 위해 2년동안이나 부모를 보러 집에 가지 않았어요. 당신이 자유를 얻기전에는 집에 가지 않겠어요”라고 말했다. 호발운은 “우리가 이후에 어떻게 되든지 그분들은 영원히 리홍의 부모요.꼭 부모를 보러 가야 하오”라고 설복했다. 그녀는 부모를 보러 가는데 동의하면서 가기전에 호발운과 결혼하겠다고 말했다.   “이번에 가서 부모들과 고별하고 와서 당신이 어디로 가든지 나는 영원히 당신과 함께 있겠어요.”   1978년 11월 28일, 호발운은 마음씨 고운 감시일군의 도움을 받아 가만히 공장감방에서 빠져나가 약속한 골목에서 리홍을 만났다. 그날은 몹시 추웠는데 그들은 량쪽에서 마주 걸어왔다. 리홍은 붉은색솜옷을 입고 붉은색수건을 두르고 왔는데 손에는 사탕 한주머니와 빠나나송이가 들려져있었다. 호발운은 너무 씻어서 색이 바랜 옷을 입었다. 한 친구가 빌려준 집이 그들의 혼례식장이였다. 친구가 주는 열쇠를 쥐고 그들은 낡고 자그마한 집으로 들어갔다.   거기서 그들은 신성하고 랑만적인 결혼식을 올렸다. 그날 진정한 부부로 된후 그들은 붉은기사진관에 가서 결혼기념으로 4촌짜리 흑백사진을 찍었다.한달후, 력사적인 11기3중전회가 열렸다. 그 황당한 사건도 황당한 시대와 함께 결속되였다. 1979년 1월 6일, 호발운은 현행반혁명분자란 모자를 벗고 자유의 몸이 되였다. 출근하는 첫날 그들은 각자의 단위에 결혼신청서를 바쳤다. 그들은 서안에 있는 리홍의 친정집에 갔는데 리홍의 어머니는 그들을 위해 성대한 결혼잔치를 차리고 가정무도회를 열어주었으며 그들을 데리고 명승고적을 관광했다. 그들은 또 북경에 가서 중앙당학교에서 학습하고있는 리홍의 아버지를 만나보았다. 로홍군간부인 리홍의 아버지는 그들의 결혼을 축하해주었다.   1980년 봄에 리홍은 아들을 낳았다. 1986년, 리홍은 북경방송학원에 시험쳐서 들어갔으며 졸업한후 호북촉촌경제방송국의 문예부 주임으로 되였다. 1989년 여름, 리홍은 방송국을 떠나 텔레비죤극중심에 들어가 편집사업을 했다. 2001년, 리홍은 또 위가 아파 병원에 가서 검사했더니 위암중기라는 진단이 나왔다. 그후 수술을 받고 화학치료를 받는 동안 호발운은 안해의 곁에서 한발자국도 떠나지 않았다.   2003년 11월 28일은 그들의 결혼기념일이였다. 이날을 어떻게 보낼것인가를 상의하지 않았지만 그들은 25년전에 신혼의 첫날밤을 보냈던 그 잊을수 없는 거리를 다시 걸어보려는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있었다. 그날 안해와 함께 뜻깊은 려행을 하고 돌아온 호발운은 안해를 원형으로 하는 장편소설을 써서 안해에게 바치기로 마음먹었다. 3개월후 그는 안해에게 바치는 장편소설 《여언》을 써서 원고예약이 있었던 인민문학출판사와 당대문학잡지사에 보냈지만 민감한 내용이 있다는 원인으로 발표되지 못했다.   그후 호발운은 안해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여러 병원을 돌아다녔으며 안해가 가는 마직막 순간까지 곁에서 병시중을 해주었다. 그는 또 《안해에게 바치는 노래》를 창작하여 작곡가에게 부탁하여 곡을 붙였다. 그후 그는 늘 안해를 안고 조용히 《안해에게 바치는 노래》를 불러주었다.   2004년 11월 28일은 그들의 결혼기념 26돐이였다. 이날이 오기를 고대하여 기다리던 리홍은 힘겹게 병상에서 일어나 남편의 어깨에 몸을 기대였다. 아들이 그들 부부의 마지막 사진을 찍어주었다.   2004년 12월 2일 7시 38분, 리홍은 호발운의 곁을 영영 떠났다. 호발운은 병원에서 파견한 화장사를 거절하고 직접 안해에게 화장을 해주었다. 그는 안해를 보내면서 “천국에서 기다려주오”라고 부탁했다. 2009년 1월, 장편소설 《여언》이 독자들과 대면하게 되였다. 그는 책의 첫페지에 안해와 함께 찍은 사진을 싣고 사진아래에 “먼저 간 안해에게 바친다”는 글을 써넣었다.       《지음》      
43    총각만 찾는 리혼한 녀자 댓글:  조회:4008  추천:0  2009-05-22
  소홍이가 리혼한지 3년만에 련락을 한것은 뜻밖이였다. 새로 만나는 남자가 있는데 곧 결혼할것이라는 말과 함께 그래도 친구인데 널 꼭 만나게 해주고싶다는 전화였다. 그녀와 나는 함께 회사에 들어가 친구로 되였는데 하루 20시간은 붙어다닐 정도였다. 그러다가 그녀는 갑작스런 리혼결정으로 회사도 그만두고 나와 련락도 끊어버린 상태였다. 갑자기 전화가 와서 결혼할 남자를 소개하겠다니 괘씸하지만 그 남자가 총각인데다 년하이고 의사라는 얘기를 듣고 만나고싶은 생각이 들었다.   소홍의 전 남편은 소홍이에게 헌신적이고 착하기만 했지 능력이 없었다. 하지만 이번의 새 남자는 첫인상부터가 괜찮아보였다. 저 남자 왜 소홍이같은 리혼한 녀자에게 결혼하자고 매달리는걸가 의아할 정도였다. 그러나 서로 보듬어주고 의지하여 새출발하겠다는 두 사람이 참 예뻐보이기까지 했다.   “소홍아, 네가 이제 네 짝을 진짜 만났구나.”라고 하며 감격스러워 코끝이 찡했다. 서로 한발씩 뒤늦게 만난 인연을 안타까와하며 이제라도 만났으니 알콩달콩 잘 살것이라고 내 앞에서 두손을 꼭 마주잡아보였다.그후 소홍은 총각을 따라 경성으로 들어갔는데 3년동안 소식이 없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아는 사람한테서 소홍이의 소식을 들었는데 그녀가 새로운 회사 를 꾸려 엄청나게 잘나가는 녀사장이 되였다는것이였다. 내가 결혼이야기를 꺼내니 그 총각은 사기군이여서 헤여졌다고 했다.그후 3년이 지난 지금 소홍이와 다시 련락을 하고 지내는데 얼마전 새로 사귄 남자 이야기를 꺼냈다. 지금 하고있는 회사의 직원인데 나이도 많고 리해심 많은 총각이라고 한다. 무엇보다도 자신이 하고있는 일을 잘 도와주고 가장 믿을만한 사람이며 자신을 녀자로서도 아끼고 사랑해준다고 했다. 난 그 남자가 소홍이보다는 회사를 집어삼킬 욕심에 그녀에게 접근하는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난 리혼한 녀자라면 같은 아픔을 지닌 리혼한 남자와 재혼할 가능성이 많고 그러는것이 어찌보면 공평하다고 생각했는데 소홍이는 왜 매번 총각을 만나려고 하는지 의아했다.   소홍이는 그 남자와 다음달에 결혼하기로 결정했다면서 청첩장을 보냈다.“정말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것이다. 그동안 해온 내 실수를 절대로 반복하지 않으려면 하얀 백지가 필요했거든. 정말 하얀 백지 같은 남자라고 생각한다. 축하해달라.”청첩장과 함께 온 편지를 받고 울컥했다. 하얀 백지에 다시 쓰고싶었다는 말에.“총각을 찾아 재혼하려니 내가 가진것이 없어선 안되겠더라는 생각에 이를 악물고 성공했지. 내가 총각과 결혼해도 욕먹지 않을 정도로 내가 당당해지기 위해서 열심히 일했다. 이제 애도 낳고 너처럼 아줌마가 되여서 살거다.”그래, 소홍아. 너만 행복하게 살수 있다면 결혼을 축하해줄게!      《녀성생활보》    
42    장하고 갸륵한 사랑의 용기 댓글:  조회:3766  추천:0  2009-05-22
  강소성 계동시 회동진 만영촌에서 출생한 황신은 2005년 8월에 고중을 졸업한후 광서쫭족자치구 의주시에서 품팔이를 하고있는 큰 아버지의 소개로 의주시 사해운수회사에 들어가 품팔이를 하였다.   2개월후의 어느날, 20살에 나는 황신은 룡강로자연미화장품상점에서 샴푸를 고르다가 조심하지 않아 고급화장품 한병을 땅바닥에 떨어뜨려 깨버렸다. 상점의 판매원은 소매가격에 따라 220원을 배상하라고 했으나 몸에 200원밖에 없는 황신은 도매가격에 따라 배상하겠다고 고집했다. 쌍방에서 떠들자 숱한 구경군들이 몰려와서 황신은 난처한 립장이 되였다. 그때 한 젊은 녀판매원이 다가와서 도매가격에 따라 180원을 배상하도록 배려해주었다.   황신은 감격의 눈길로 그 녀판매원을 바라보았다. 키가 크고 예쁘게 생긴 그녀는 온화한 미소를 짓고있었다. 그녀에게 호감을 가진 황신은 이튿날 또 화장품상점에 찾아갔다. 그는 그녀와 한담을 하다가 함께 식사를 하자고 요청했다.   함께 식사를 하면서 황신은 그녀에 대해 많은것을 알게 되였다. 반효문이라고 하는 그녀는 그보다 4살 년상이였는데 광서쫭족자치구 합산시에서 출생하였다. 2살때 아버지를 여읜 그녀와 그녀의 오빠는 초중을 졸업한후 사처로 돌아다니면서 품팔이를 해야 했다. 어린 나이에 고생한 이야기를 하면서 그녀는 눈물을 흘렸다. 황신은 불쌍한 그녀를 꼭 도와주리라고 마음먹었다.   그때로부터 황신은 저녁마다 반효문을 청해 함께 식사도 하고 산책도 하였다. 황신은 반효문과 접촉이 잦아지면서 그녀가 매우 단순하며 선량하다는것을 발견하고 점점 그녀에게 호감을 가지게 되였다. 동시에 그녀의 몸이 매우 허약하다는것을 발견했다. 번마다 산보를 오래 하면 땀을 흘리고 다리가 나른해서 더 걷지 못하는것이였다. 황신은 여러번이나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으라고 했으나 반효문은 번마다 거절했다. 어느 한번 황신은 너무도 안타까와서 효문이, 난 효문이를 몹시 사랑하오! 그런데 효문이가 자신의 몸을 이렇게 아끼지 않으니 내 마음은 칼로 에이는듯 아프오!”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반효문은 몸을 돌려 달아나는것이였다.   그후 반효문은 황신을 멀리하면서 만나자는 황신의 요구를 번마다 거절했다. 반효문이 자신을 싫어서 그러는것이라고 생각한 황신은 정서가 저락되여 울적한 나날을 보내면서 그녀를 잊으려고 애썼다. 하지만 15일도 안되여 그는 그녀를 보고싶어 화장품상점으로 찾아갔다. 그런데 반효문이 병이 들어 며칠전에 사직하고 집으로 돌아갔다는것이였다. 조급해난 황신은 한달음에 반효문의 집으로 찾아갔다. 초췌해진 모습으로 침대에 누워있던 반효문은 집까지 찾아온 황신을 보고 깜짝 놀랐다. 황신의 신분을 알게 된 반효문의 어머니는 딸이 직장암에 걸렸는데 1만원의 수술비용이 수요된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반효문은 2004년에 갑상선암에 걸렸다. 수술하기 위해 숱한 돈을 꾸느라고 빚을 졌기때문에 이번에는 수술비용을 마련할수 없어서 속수무책으로 병상에 누워만 있었던것이다.   황신은 반효문의 암증을 치료는 못한다고 해도 그녀의 생명을 연장해주리라고 마음속으로 다졌다. 그는 곧 사직하고 저금한 돈 2000원을 가지고 왕효문의 집으로 찾아가서 그녀를 돌봐주기 시작했다.   심수에서 품팔이를 하고있는 반효문의 오빠가 4000원을 부쳐보냈으나 수술비용은 엄청나게 모자랐다. 황신은 자신이 급성담낭염에 걸려 수술을 해야 한다고 부모를 속여서 8000원을 얻었다.   2006년 7월초, 황신은 반효문을 데리고 광서의과대학제2부속병원에 가서 직장암근치수술을 받게 했다.2007년 9월 2일, 1년이란 고통스러운 화학치료를 거친후 반효문의 체내의 암세포는 완전히 소실되였다. 그런데 얼마 안되여 또 무서운 암증이 반효문에게 덮쳐왔다.   2007년 10월초, 반효문은 배에 바람이 차고 위가 불편한 감을 느끼기 시작했는데 위염인가 하여 별로 주의를 돌리지 않았다. 3개월을 지체한후 증상이 심해지자 남녕시제1인민병원에 가서 검사해보았더니 중기란소암이란 진단이 나왔다. 의사는 그녀의 량측 란소에 모두 악성종양이 나타났고 자궁과 기타 부위도 전부 수술로 제거해야 하기때문에 10만원이란 비용이 있어야 한다고 알려주었다. 황신은 단위의 사장한테 가서 돈을 꿔달라고 하다가 거절당했 고 병원에 가서 애걸했으나 또 거절당했다. 그는 부모한테 사정을 말하고 돈을 꿔달라고 전화를 걸었으나 부모는 페인이 된 녀자를 상관하지 말고 그녀한테서 떠나라고 그에게 “명령”했다.   다른 방법이 없게 되자 황신은 반효문의 사정을 적은 패쪽을 목에 걸고 구걸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모두 구경만 할뿐 그를 도와주려는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2008년 2월말, 황신은 거리에서 구걸하다가 귀인을 만났다. 남녕에 출장을 나왔던 서안홍운이사회사 경리 등지홍은 황신과 반효문의 이야기를 들은후 감동되여 당장에서 3만원을 내놓았다.   3월 9일, 반효문은 광서민족병원에 입원하여 수술을 받을 준비를 했다. 수술하기 전날밤에 반효문은 황신을 보고 눈물을 흘리면서  “내가 란소를 제거하면 페인이 되여 당신과 결혼할 자격이 없어요. 그러니 어서 내곁을 떠나세요”라고 말했다.  반효문의 어머니도 눈물을 흘리면서 “우리 딸이 더는 자네의 짐이 되게 할순 없네. 어서 떠나게!”라고 말했다. 하지만 횡신은 “효문이 어떻게 되든지 난 영원히 곁에 남아 돌봐주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이튿날, 반효문은 순조롭게 란소제거수술을 받았다. 그후 2개월동안 그녀는 5번이나 되는 화학치료를 받아 병세가 점차 안정되였다. 그녀는 더는 은인의 돈을 쓰고싶지 않아 퇴원하겠다고 고집했다. 그러나 란소를 제거했기때문에 그녀의 체내에는 녀성호르몬이 엄중하게 결핍되여 인공합성한 녀성호르몬제를 복용하는것으로 녀성의 제2성징이 퇴화되는것을 통제해야 했다. 의사는 또 반효문과 황신이 적당한 성생활을 하여 음도를 자극함으로써 음도가 위축되는것을 방지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후 인심을 격동시키는 시각 황신은 온화한 애무로 반효문의 격정을 불러일으켰고 두 사람은 완전히 몸과 마음이 하나로 되였다. 성관계가 끝난후 반효문은 황신의 품에 안겨 행복의 눈물을 흘렸다.   수술후 반효문의 몸에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어느날 아침, 화장을 하던 그녀는 처참한 소리를 지르더니 미친듯이 거울과 화장품을 방바닥에 팽개쳤다. 원래 그녀는 거울속에서 자신의 얼굴에 옅은 수염이 돋은것을 발견했던것이다. 자신의 몸에 남성의 특징이 나타나자 반효문은 성격이 거칠어져서 쩍하면 황신에게 화를 내군 했다. 황신은 그녀의 주의력을 분산시키기 위해 퇴근후 모든 활동과 모임을 물리치고 일찍 집에 돌아와 그녀의 손을 잡고 산책하였다. 그는 또 음반과 중고풍금을 사다놓고 자신이 출근한후 그녀가 혼자 오락에 빠져 모든 번뇌를 잊도록 해주었다. 그외 그는 남녕시건강미협회와 재활협회에 련계하여 반효문을 요청하여 암과 싸운 이야기를 강의할수 있게 해달라고 간절하게 청을 들었다.   황신의 노력으로 반효문은 점차 자신심을 얻었다. 그녀가 병이 나으면 품팔이를 하여 황신의 부담을 덜어주려고 생각하고있을 때 또 무서운 병마가 덮쳐왔다. 2008년 9월초, 피부가 노랗게 변하고 식욕이 없어졌다. 광서의과대학제2부속병원에 가서 검사해보았더니 수담관암( 管癌)이라는것이였다. 의사는 유일한 치료방법은 수술하여 수담관을 제거하는것인데 수술난이도가 높고 10만원의 수술비용이 수요된다고 알려주었다.   거듭되는 암증의 타격을 받은 반효문은 몸을 더 지탱할수 없을 지경이였다. 집세마저 내기 어려웠던 황신은 그녀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오는수밖에 없었다. 15일후 반효문은 전신에 열이 발생하면서 암세포가 초기확산되는 증상이 나타났다. 병마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녀는 여러번이나 자살하려고 했으나 황신에 의해 성사하지 못하고말았다. 반효문에게 병마와 싸울수 있는 용기를 주기 위해 황신은 그녀와 결혼식을 올리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부모 에게 전화를 걸어 이 일을 알려주었다.   2008년 10월 1일, 합산시 하리광구의 한 자그마한 집마당에서 사람을 감동시키는 결혼식이 거행되였다. 신랑이 병색이 짙은 신부의 손을 잡고 입장했을 때 축하하러온 마을사람들은 일제히 박수를 쳤다.첫날밤, 황신은 반효문을 끌어안고 “지금 당신은 나의 안해로 되였소. 당신은 약속해주오. 나를 위해 잘 살겠다고말이요. 우리 부부 일심동체로 되였으니 함께 병마와 싸웁시다!”라고 말했다. 그 시각 반효문은 행복의 눈물을 흘렸다.   《지음》      
41    남의 자가용차를 탐낸 경비원의 비참한 후과 댓글:  조회:4047  추천:0  2009-05-21
하북성 형수시 안평현에서 출생한 왕경양은 2004년에 고중을 졸업하고 4촌형님을 따라 중경시 복지거소구역에 와서 경비원일을 하기 시작했다. 여기는 대부분 갑부들이 거주하는 고급소구역이였다. 매일마다 호화로운 자가용차를 몰고 출입하는 갑부들을 보면서 로임이 700원밖에 안되는 왕경양은 늘 마음속으로 세상은 불공평하다고 생각했다.   복지거소구역은 매일밤 12시에 문을 닫는데 12시후에는 문어구에 서서 지키지 않고 방안에 들어가 지키는것이 규칙이였다. 모두 젊은이들이여서 졸음이 많기때문에 경비원들은 모두 1시후에는 접이식침대에서 잠을 자군 했다. 이때 만약 누가 문을 두드리면 누구도 침대에서 일어나 문을 열어주려고 하지 않았다.   이 소구역에는 바오마표승용차325i를 몰고 다니는 주민이 있었는데 늘 새벽 2시쯤에 귀가하기때문에 경비원들은 모두 귀찮고 성가시게 생각되여 그가 아무리 요란하게 경적을 울려도 일부로 못들은척 했다. 그런데 왕경양만은 례외였다. 그는 늘 먼저 일어나 웃는 얼굴로 문을 열어주군 했다. 그때문에 바오마주인은 왕경양에 대한 인상이 매우 좋았다. 그들은 점차 익숙해지자 친구로 되였다.   이 바오마주인은 진영비라고 하는데 절강성 금화시에서 출생했다. 그가 출근하는 회사의 본부는 금화시에 있고 분회사는 중경시에 있기때문에 그는 늘 금화시와 중경시 사이를 왔다갔다 했다. 그는 의리를 중하게 여기는 사람이여서 늘 왕경양을 불러 차에 앉히고 시내돌이를 하군 했다. 왕경양은 차에 앉아서 이리저리 만져보면서 이런 차를 가진 주인을 몹시 부러워했다. 차에 앉는 차수가 늘어나자 왕경양은 차에 대해 미친듯한 애착을 가지게 되였다. 복지거소구역의 주민들은 모두 자가용차를 1~2대씩 가지고있었기때문에 소구역앞에는 각양각색의 승용차들이 즐비하게 늘어서있었다. 왕경양은 진영비가 매달 13일부터 25일까지는 금화시의 본부로 가기때문에 그 시간에는 바오마차를 소구역주차장에 세워두고 간다는것을 잘 알고있었다.   왕경양은 차를 몰고싶은 욕망이 갈수록 강렬해졌다. 2006년 7월, 그는 1980원을 지불하고 자동차운전을 배워서 그해 11월에 자동차면허증을 따냈다. 면허증만 있고 차가 없어 그는 더욱 참기 힘들었다. 왕경양은 진영비의 바오마차를 볼 때마다 그 차를 몰고 거리를 달리고싶은 충동이 일어났다.   어느날, 왕경양은 관음교로 물건구매를 나갔다가 한 열쇠수리공이 각양각색의 자동차열쇠를 만드는것을 보고 바오마차의 열쇠도 만들수 있는가고 물었다. 열쇠수리공이 200원을 내면 만들어준다고 하자 왕경양은 바오마차의 열쇠를 만든후 진영비가 금화시로 갔을 때 그의 바오마차를 몰고다니고싶은 생각이 불붙듯했다. 그는 이튿날 진영비의 집으로 달려가서 “우리 아버지가 하북성에서 나를 보러 오는데 진형의 차를 2시간만 빌려주오”라고 사정해서 차를 몰고가서 열쇠수리공한테서 200원을 주고 차열쇠를 만들었다. 그러나 그 열쇠로는 차문만 열수 있을뿐 차의 발동은 걸수 없었다. 다시 열쇠수리공한테 가서 물어보니 고급차의 발동기에는 모두 비밀번호로 보호시설이 되여있어 차를 몰수 있는 열쇠는 만들수 없다는것이였다.   2007년 6월, 암시장에서 어떤 자동차의 열쇠나 다 만들어준다는 말을 들은 왕경양은 또 한번 진영비한테서 차를 빌려가지고 그 암시장으로 달려갔다.   그곳에서 암거래장사군은 핸드폰처럼 생긴 물건을 꺼내더니 그보고 다시 발동을 걸라고 했다. 그와 동시에 핸도폰처럼 생긴 물건의 전자화면에 두줄의 수자가 나타났다. 그다음 암거래장사군은 왕경양의 손에서 열쇠를 받아가지고 모양을 뜨더니 50분후에 돈을 가지고와서 열쇠를 찾아가라고 했다. 50분후에 그가 약속한 지점으로 찾아가 열쇠를 찾아서 시험해보니 신기하게도 발동이 걸리는것이였다. 원래 핸드폰처럼 생긴 물건은 차열쇠의 비밀번호를 알아내는 기계였다. 그는 기뻐서 2000원을 지불했다.   그후 왕경양은 진영비가 금화시로 갈 때마다 바오마를 몰고 나가서 거리를 질주했다. 그 시기 그는 금제술집에서 품팔이를 하고있는 고천이란 처녀와 련애중에 있었다. 고천은 하북성 한단시 영년현 소룡향 고장촌에서 태여났는데 허영심이 많아서 남자친구가 남의 차를 몰고다니는것을 알면서도 고급승용차에 앉아다니는 재미에 빠져있었다. 왕경양은 녀자친구의 허영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늘 녀자친구와 녀자친구의 친구를 바오마에 태우고 거리를 질주했다.   2008년, 고천이 음력설을 쇠러 고향으로 돌아갔을 때 그와 함께 품팔이를 나갔던 한마을의 처녀들이 “너의 남자친구가 바오마차를 몬다고 하던데 왜 그 차에 앉아오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음력설을 쇤후 중경으로 돌아와 출근하면서 왕경양을 만난 고천은 한번 바오마차를 몰고 자기의 집으로 갈수 없겠느냐고 물었다. 왕경양은 놀라서 머리를 가로저으면서 말했다.   “이건 시내에서 달리는것도 아니고 1000여킬로메터거리를 달려야 하니 필경 흔적이 남게 될것이요. 만약 발견된다면 큰일이요. 더구나 이건 차를 빌리는것도 아니고 훔치는 일인데 안되오!”   하지만 한참후에 왕경양은 한번 바오마차를 몰고 녀자친구의 집에 가서 뽐내고싶은 생각이 머리를 쳐들었다.   2008년 7월 12일, 고천은 갑자기 할아버지가 사망되였다는 전화를 받았다. 고천은 왕경양에게 전화를 걸어 “진영비가 곧 금화시로 가게 되잖아요? 바오마차를 몰고 집으로 갈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요”라고 꼬드겼다. 왕경양은 그녀의 말에 그렇게 하겠다고 통쾌하게 대답했다.   2008년 7월 13일 오전, 진영비가 바오마차를 세워둔채 금화시로 가려고 소구역의 문을 나서자 왕경양은 휴가를 맡았다. 그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몰래 진영비의 바오마차를 몰고 금제술집앞에까지 달려가 고천을 조수석에 앉인후 중경시교외 고속도로로 달렸다. 길에서 그들은 기분이 너무 좋아서 음악을 들으면서 코노래를 흥얼거렸다.   2008년 7월 15일밤, 왕경양은 바오마를 몰고 한단시 영년현 소룡향 고장촌에 있는 고천의 집에 들어섰다. “고천의 남자친구가 바오마차를 몰고왔다”는것은 전 촌의 특대뉴스로 되여 고천의 할아버지장례보다 더 큰 관심사로 되였다. 전촌의 사람들이 모두 자신을 둘러서서 엄지손가락을 내밀자 왕경양은 어깨가 으쓱해졌다.   그때 갑자기 왕경양의 핸드폰이 울렸다. 전화를 받자 뜻밖에도 진영비의 성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정말 담이 크구나! 네가 감히 내 차를 도적질해 몰고 하북성으로 가다니! 내 평소에 널 동생처럼 대해주었는데 네가 어찌 내게 이럴수 있어? 빨리 차를 몰고 돌아와. 만약 차가 조금이라도 고장나기만 하면 넌 감옥살이를 할줄 알아라!”   원래 왕경양이 최근에 보인 반상적인 행동은 동료들의 주의를 불러일으켰던것이다.  그와 다툰적이 있는 한 동료는 왕경양과 바오마차가 동시에 보이지 않는것을 보고 왕경양이 그 차를 몰고 하북성에 있는 집으로 갔을것이라고 추측하고 등록부에 있는 진영비의 전화번호에 전화를 걸어 진영비한테 이 사실을 고발했던것이다.   진영비의 전화를 받은 왕경양은 일시에 멍해졌다. 삽시에 얼굴이 창백해진 그는 “끝장이야”라고 중얼거리면서 바오마차에 올라 발동을 걸고 차를 뒤걸음시켰다. 모두들 그의 반상적인 행동에 놀라서 무슨 일이냐고 물었지만 그의 머리는 공백이였다. 바로 그때 뜻밖의 일이 발생했다. 왕경양이 정신이 황황하여 차를 뒤걸음칠 때 바오마차는 돌연히 속도를 가하면서 고천의 집의 흙벽을 쳐놓았다. 고천의 집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더욱 비참한 일은 집안에 있던 고천의 아버지가 갑자기 집이 무너지는 바람에 산채로 깔려서 사망된것이였다. 고씨집에서는 격분하여 왕경양에게 물매를 안겼다. 고천도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남자친구를 발길로 차면서 “이 바오마차도 이자의것이 아니라 도적질해온것이예요”라고 소리쳤다. 마을 사람들은 더욱 분노하여 그에게 물매를 안겻다.   2008년 7월 16일, 왕경양은 촌민들에 의해 당지의 공안국에 끌려갔다. 그날 한단시 영년현공안국에서는 그를 형사구류시켰다. 간수소에 갇힌 왕경양은 자신이 다른 사람의 차를 도적질해서 몰고갔다가 사람을 죽인것을 생각하자 너무도 무서워서 큰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   사건발생후 석가장시지공변호사사무소의 금정주임은 중화인민공화국형법 제133조의 규정에 의해 왕경양의 행위는 교통사고죄로 구성되며 3년이하의 유기도형에 민사배상책임을 져야 한다고 인정하면서 왕경양의 행위가 절도죄로 구성되는가 하는것은 신중하게 결정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호화소구역의 경비원이 매일 각양각색의 자가용차들이 출입하는것을 보면서 부러워하는것은 정상적인 심리이다. 그러나 부러워하는것은 부러워하는것이고 심리상태를 잘 조절해야 한다. 자신이 자가용차를 살 능력이 없다면 다른 사람의 자가용차를 몰고 위풍을 부릴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 그건 위법범죄행위로서 자신의 욕구를 만족시키려는 생각은 꿈도 꾸지 말아야 한다.   그런 생각을 행동으로 옮겼을 때는 후회막급이고 일생을 망치게 되기때문이다. 왕경양의 비극은 우리들에게 누구나 욕망이 있지만 이런 욕망을 실현하려면 반드시 자신의 노력에 의거해야지 위법범죄행위로 실현하려고 한다면 돌을 들어 제 발등을 깐다는것을 말해준다.                                                                       《법제생활》      
40    은혜을 갚으려고 몸을 헌신한 시골녀인 댓글:  조회:3811  추천:0  2009-05-12
올해 52살인 주상은 상해시 모 직업기술양성중심 주임이다. 주상은 우연한 기회에 상해에 와서 품팔이를 하는 농민공부부를 알게 되였다. 주상은 농민공부부가 어렵게 생활한다는것을 알고 그들에게 돈도 보내주고 생활용품도 가져다주었다. 지어 주상은 그들을 도와 가게까지 꾸려주었다.   젊고 예쁜 농민공안해 정정은 그 은혜에 보답하고저 주상에게 자기 몸을 바치였다. 그후 두 사람은 정이 깊어져 정부관계로 되였다. 농민공남편인 원청은 안해와 주상이 정부관계를 유지하고있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주상에게 돈 60만원을 내놓으라고 협박했다. 결국 원청은 위협공갈죄로 법원의 판결을 받게 되였다.   농민공부부를 만난 주임   2008년초, 상해 모 직업기술양성중심 주임 주상(51살)은 상해 포동개발구에 가서 양성반을 꾸리였다. 하여 주상은 늘 밖에서 식사를 하다보니 자주 음식점에 드나들었으며 젊고 예쁜 복무원아가씨 정정을 알게 되였다. 정정은 사천성의 빈곤한 시골에서 온 복무원이였다. 정정은 아침일찍 일어나 저녁늦게까지 음식점에서 힘들게 일했지만 한달로임이 몇백원밖에 되지 않았다. 정정은 고향에 있는 남편이 상해에 오면 함께 자그마한 음식점을 꾸릴 생각을 해보았다. 주상의 도움으로 정정은 남편과 함께 자그마한 음식점을 경영했다.   어느날 오후, 주상은 정정이 보고싶다면서 정정이 경영하는 음식점을 찾아가는중이라고 전화를 했다. 오전에 비가 내리여 길이 몹시 미끄러웠다. 주상은 부주의로 길에 넘어져 일어나지 못했다. 주상이 길에 넘어져 일어나지 못한다는 전화를 받고 정정은 다급히 달려와 구급차를 호출하여 주상을 병원으로 호송했다. 진단결과 주상은 다리뼈가 골절되였다. 주상의 집이 멀리 떨어져있고 또 안해의 몸도 허약하다보니 그를 간호해줄 사람이 없었다. 그동안 정정은 어려모로 주상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남의 도움을 받았으면 갚을줄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 정정은 선뜻이 나서서 림시간호를 책임졌다. 정정은 병상에 누워있는 주상의 똥오줌도 받아내고 더운물로 그의 몸도 깨끗이 닦아주면서 정성을 다해 간호했다.   한병실에 누워있는 다른 환자들은 정성을 다해 간호하는 정정을 몹시 부러워했으며 착한 딸을 두었다고 칭찬했다. 그러자 주상은 얼굴을 붉히면서 “참 착한분이죠. 하지만 저의 딸은 아니고 그냥 사이좋게 지내는분입니다. 이 은혜을 잊지 않고 나중에 꼭 보답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주상은 퇴원한후 정정의 음식점으로 찾아가 그동안 신세를 많이 졌다면서 인사를 했다. 정정의 남편 원청은 “신세라니요. 오히려 우리가 주임님의 신세를 많이 졌습니다. 그 은혜를 어떻게 보답할지 모르겠는데 이렇게까지 찾아오니 몸둘바를 보르겠습니다.”라고 말하면서 미안해했다.   주상은 입원치료를 받을 때 정정이 자신을 간호하느라 많이 허약해졌다면서 몸보신을 하라고 돈 2000원을 내놓았다.   시골에서 온 이들 부부에겐 돈 2000원이 적은 수자가 아니였다. 그들은 절대 받을수 없다면서 극구 사양했지만 주상의 “성화”에 못이겨 받고말았다. 정정과 원청은 자신들을 진심으로 보살펴주고 돌봐주는 주상의 은혜를 꼭 갚겠다고 약속했다.   은혜에 보답하고저 몸을 바치다   그번 일이 있은후 주상은 쩍하면 음식점으로 찾아와 정정을 만났다. 이날도 주상은 정정을 모터찌클에 태우고 칠포거리에 나가 쇼핑했다. 정정은 주상의 허리를 꼭 잡고 상해에 온지 몇해 되지만 한번도 상해구경을 해보지 못했다면서 오늘 신나게 놀아보자고 애교를 부리였다.   그러자 주상은 “상해구경을 마음껏 시켜줄수 있소. 하지만 이 손을 놓소. 남들이 보면 뭐라겠소. 괜히…”라고 긴장해하면서 말했다. 정정은 그러는 주상이 우스운듯 웃으면서 “사실 난 시골녀자이고 배운것도 별로 없어요. 그동안 우린 주임님의 신세를 많이 졌어요. 그 은혜를 갚아야 하는데 우리에겐 아무것도 없어요. 하여 난 자신의 깨끗한 몸을 당신에게 바치려 해요. 당신이 거절하면 안돼요.”라고 말했다. 젊고 예쁜 녀자의 애교어린 열정이 주상의 격정을 불러일으켰다. 주상은 자신의 품에 안긴 정정을 꼭 껴안고 열렬한 키스를 퍼부었다…   올해 3월초, 주상은 원청에게 술장사를 소개해주어 돈을 벌게 했다. 원청은 한상을 차리고 주상을 청했다. 주상은 취중에 “명년에 기회를 잡아 우리 큰 장사를 해보기요. 40만원쯤은 어렵지 않으니 내가 자금을 대겠소. 당신들이 열심히 뛰면서 일해보오.”라고 큰소리를 쳤다. 원청은 “주임님, 보잘것 없는 이 시골놈을 이렇게 잘 대해주니 난 더 할말이 없습니다. 평생 이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라고 맹세했다.   그러자 주상은 “‘3.8’절에 단위에서 해남관광을 조직하오. 마침 한 녀교원이 시험일때문에 관광을 떠니지 못하오. 명액이 하나 남았소. 려행사에서 돈을 돌려주지도 않소. 자넨 정정을 보낼 생각이 없소? 단위측은 내가 잘 말해보겠으니 별 문제 없을것 같소.”라고 시탐적으로 원청을 보면서 말했다. 원청은 단모금에 술잔을 비우더니 “주인님이 나서서 그를 보내려고 하는데 나는 반대할 리유가 없습니다. 걱정하지 말아요. 이곳의 일을 내가 책임지고 보살피겠으니 그렇게 합시다.”라고 사나이답게 찬성했다.   원청이 어찌 알았으랴. 이 모든것이 바로 몇시간전에 주상과 정정이 남몰래 획책한 “밀월관광”이었음을.   남편 현장에서 간통범을 잡다   주상과 정정은 해남도관광을 떠났다. 10일간 해남도관광의 “부부생활”을 통해 주상과 정정의 감정은 더욱 깊어졌다. 상해로 돌아온 주상은 갈라질 때 정정의 손을 꼭 잡고 “이후 우린 서로 자신을 단속해야 하오. 하지만 난 당신들을 돌봐주는것을 잊지 않겠소. 그래야 나의 마음도 편안할것 같소.”라고 말했다. 정정은 “당신의 마음을 리해해요. 그동안 신세가 많았어요. 부디 건강하세요. 생각나면 아무때건 찾아오세요.”라고 아쉬워하면서 말했다.   두달후 원청의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중병에 걸리여 당금 치료를 받아야 했다. 하지만 원청에게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 부쳐보낼 치료비가 없었다. 주상이 이 소식을 전해듣고 돈 5만원을 가지고 원청을 찾아왔다. “자넨 이 5만원을 먼저 가져다 쓰게. 모자라면 나에게 알리오. 내가 방법을 대여 해결해보겠소.”   주상은 또 이렇게 말했다. “이 음식점으로는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울것 같소. 차라리 문을 닫고 손재간을 배우란 말이요. 우리 양성중심에서 전공공부를 하여 전공자격증을 취득하는것이 어떻소. 전공자격증이 있으면 내가 공장에 취직시켜주겠소. 로임은 2000원정도는 잘될것이요. 이 음식점보다 퍽 낳을것이요.”   주상의 소개로 원청은 양성중심에서 전공공부를 하여 전공자격증을 취득하고 모 공장에 취직했다. 정정도 음식점을 남에게 넘겨주고 모 장식회사에 취직했다.   어느날 주상이 정정을 찾아왔다. 두 사람은 원청이 몰래 세집을 맡을 일을 상론했다. 한주일이 지난후 주상과 정정은 세집을 맡고 “신혼부부”생활을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의 “비밀”은 오래가지 못했다. 원청은 안해와 주상의 관계가 특별하다는 눈치를 차리고 의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확실한 증거를 잡지 못했다. 어느날 아침 원청은 안해보고 “오늘 단위일로 며칠간 출장을 가오. 그동안 잘 지내오. 그리고 일이 있으면 주상주임을 찾아가오.”라고 말했다. 그러자 정정은 남편의 짐을 꾸려주면서 “잘 다녀와요. 나 뭐 어린애인가봐요? 참 걱정하지 말아요. 나 당신을 기다리면서 잘 지낼게요.”라고 말했다. 남편이 집문을 나서자마자 정정은 주상에게 전화를 했다. “여보, 사랑해요. 오늘 우리 남편이 출장을 떠났어요. 며칠 걸린대요. 어서 세집에 와요. 그동안 몹시 보고싶었어요.” 정정은 화장을 곱게 하고 집을 나섰다. 원청은 정정의 뒤를 미행했다. 정정은 그런줄도 모르고 시장에 들리여 남새를 사가지고 세집으로 갔다. 주상도 모터찌클을 타고 세집으로 왔다. 두 사람은 술상을 차려놓고 술을 마신후 이불속으로 들어갔다…   이때에야 원청은 모든것을 알게 되였다. 원청은 그동안 속히운것이 너무도 화가 나서 미칠것만 같았다. 그는 세집문을 차고 뛰여들어 안해와 한이불속에 있는 주상에게 매질을 가했다. “이 더러운놈아. 감히 나의 녀자를 다치는거야? 오늘 잘 만났다. 시골놈의 주먹맛을 봐라.” 주상은 부들부들 떨면서 “용서하오. 나 잘못했소. 제발 살려만 주오.”라고 빌고들었다.   원청 60만원 공갈혐의로   주상에게 주먹질을 들이대던 원청은 그래도 화가 풀리지 않아 밖에 나가 벽돌장을 들고와 주상을 때리려 했다. 인명사고가 일어날가봐 두려워 정정이 막아나섰다. 주상은 옷을 주어입고는 원청을 보고 말했다. “동생, 정말 미안하오. 내가 잘못했소. 그동안 사귀여온 정을 봐서라도 용서해주오.” 그러자 원청은 “흥, 이대로 끝날수는 없소. 정신손해비로 60만원을 내놓지 않으면 당신의 단위에 고발하고 당신의 집에도 알리겠소.”라고 을러멨다.   주상은 이때에야 잘못 걸려들었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그쯤 새 단위에 전근된 주상은 성과를 올려 잘 보이려고 노력하고있을 때였다. 만일 새 단위에서 이 일을 알게 되면 모든것이 끝장이였고 또 집에까지 알려지면 심장병으로 앓고있는 안해가 기절해 돌아갈지도 모를 일이였다. 여기까지 생각한 주상은 “동생, 나에게 그만한 돈이 없소.”라고 사정했다. “안돼, 일전한푼도 골아선 안돼. 전에 40만원으로 장사를 하겠다고 큰소리를 치더니 인제와서 없다고? 내가 그렇게 만만하게 보이오?” 이때에야 주상은 취중에 허풍을 친 자신을 원망했다. 사실 주상에겐 그만한 돈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원청의 요구대로 정신손해비 60만원을 주겠다는 “빚문서”에 억지로 싸인을 했다.   6월 12일, 주상은 심장병으로 앓고있는 안해 몰래 저금통장의 돈을 전부 찾아냈다. 그래도 돈이 모자라니 이곳저곳에서 긁어모아 돈 60만원을 만들어가지고 원청에게 넘겨주고 싸인한 “빚문서”를 찾아냈다.   집으로 돌아온 주상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 단 한번의 잘못으로 60만원을 한꺼번에 떼우는것이 너무도 분통했다. 안해의 병도 치료해주고 후반생을 보내려고 아글타글 모은 돈이 아닌가? 주상은 일주일후 공안기관을 찾아가 원청을 사기협박죄로 고소했다. 일전 민행구검찰원에서는 사기협박죄로 원청을 법원에 기소했다.                             《뉴스석간》      
39    류소기 부인 왕광미의 인생 댓글:  조회:5142  추천:2  2009-05-11
  2006년 10월 13일 새벽, 전임 국가주석 류소기의 부인 왕광미녀사는 85세를 일기로 평온한 모습으로 이 세상과 고별했다.   왕광미는 1921년에 북경 서단 구형부거리 32번지에서 출생했다. 26세되던 해에 왕광미는 연안으로 가서 혁명생애를 시작했다. 1949년에 왕광미는 령수부인의 신분으로 북평으로 내려와 중남해에 들어갔다. 46세되던 해에는 투옥생활을 시작했고 2006년에는 중남해에서 몇발작도 되지 않은 병원에서 인생의 최후를 마쳤다.   미국행을 거절한 왕광미   왕광미가 류소기를 배행하여 인도네시아를 방문할 때의 고귀하고 아름다운 자태, “문화혁명”기간에 핍박에 못이겨 치포를 입고 탁구채를 목에 걸고 투쟁을 맞던 그 처참한 모습 그리고 배에 올라 류소기의 유골을 바다에 뿌릴 때의 그 비통한 표정… 등등 력사적인 장면들은 중국인의 마음속에 깊이 새겨져있다.   기복적인 왕광미의 인생은 시종 류소기와 련계되여있다. 허나 그녀의 일생에서 두단계는 독립적으로 인생을 영위하였는데 하나는 학생시절이고 다른 하나는 만년의 생활이다. 그만이 소유한 이 두단계의 력사는 뭇사람들이 그닥 잘 알지 못하고있다.   왕광미는 1921년에 한 옛관리가정에서 태여났다. 당시 부친은 워싱톤에서 열린 9개국 회의에 참가하는 등 명성있는 유지인사였다. 부친 왕지창은 일찍 일본 와세다대학 상업학과를 전공했으며 북양정부 농업상업부 공상부 사장으로 임직했었다. 모친 동결여는 한 부유한 소금장사군가정에서 태여났고 천진북양녀자사범학교출신이였는데 “문화혁명”기간에 감옥에서 세상을 떴다.   왕광미는 11명남매가운데서 일곱째인데 아래로는 녀동생 넷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있는 여섯째오빠 왕광영은 후에 “홍색자본가”로 명성이 자자했으며 광대은행을 창설했다.   고중시절에 왕광미는 “수학왕”이란 애명을 얻을만큼 명성이 있었고 후에는 포인대학 수리학부에 입학하여 연구생공부도 했었다. 이같은 경력으로 하여 이 혁명적인 령수부인은 만년에도 “광학을 리용하여 거리를 측정할데 대하여”란 론문을 또렷이 기억하고있었다.   왕광미는 만년에 “나는 ‘나라를 구하기 위해 공부하는’ 리론의 영향하에 워낙 항전승리후 미국류학을 가서 원자물리를 전공하고 돌아와 나라의 건설에 이바지하려 했어요.”라고 말했다. 그는 자기를 큐리부인과 같은 사람에 비유했다.   1946년에 국공합작으로 한 군대배치부를 설립할데 대해 의론하고있을 때 왕광미는 출중한 영어실력으로 지하당번역원으로 됐다. 허나 국공합작이 실패하자 조직에선 그더러 연안으로 갈것을 요구했다. 이때 왕광미는 이미전에 류학을 신청했던 두 학교에서 입학통지서를 받았다. 그 하나는 미국 스탄프드대학이고 다른 하나는 미국 캘리포니아대학 원자물리학부였다.   “허나 당시는 군대배치부에서 근무할 때여서 갈수가 없었죠.” 왕광미는 만년에 당시를 떠올리며 말했다.   하지만 20년후 그가 “어디로 갈것인가”하는 인생선택에서의 자그마한 “망설임”이 그만 죄로 되고말았다. 왕광미의 장녀 류정정은 중앙텔레비죤방송국 양란의 취재를 접수할 때 “문화혁명”대자보를 떠올리면서 “어머니는 일찍 연안과 미국사이의 선택을 두고 망설이였죠. 당시로는 원칙적인 문제였죠. 나는 집으로 와서 어머니한테 질문했어요. 어머니는 솔직하게 망설이였다고 하면서 정부장학금으로 공부할수 있고 또한 최고학교에서 박사공부를 하는것이 꿈이였다고 하더군요.”라고 말했다.   1946년 8월에 한 작은 비행기가 왕광미를 싣고 연안으로 향했다. 그번의 연안행으로 인해 왕광미는 학수고대했던 “큐리부인”의 꿈을 영영 가슴속에 묻어야 했고 다른 인생길을 걸어야 했다. 이 길은 그도 생각지 못했던 기복으로 얼룩진 한 령수부인의 길이였던것이다.   류소기에 대한 3가지 기억   1963년 11월에 왕광미는 류소기를 배행하여 인도네시아를 방문했다. 이는 중국지도자가 처음 부인과 함께 외국을 방문한것이여서 지금도 표징적인 의의를 띠고있다. 당시 흰색의 치포를 입은 왕광미는 중-인 두 나라 인민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주었다.   왕광미로 말하면 그번 방문은 휘황과 두려움이 뒤섞인 정치임무였다. 그는 출국전에 전문 복장과 례절문제로 송경령을 찾아 자문까지 받았었다. 허나 4년후에는 이 아름다운 형상을 추악하게 묘사한 연극이 청화대학에서 공연되였다.   그번 인도네시아방문을 두고 외계에서는 왕광미와 류소기의 20여년 결혼생활중 주석의 부인으로는 제일 눈부신 순간이였다고 평했다. 출신과 수양으로 하여 당시 중국지도자 부인들가운데서 왕광미의 형상은 제일 돋보였다.   1948년에 27세되던 왕광미는 50세 되는 류소기와 결혼했다. 자기가 제일 존경하던 최고지도자와 결혼한후 이 지식형녀성은 일상가사를 전담하는 가정주부로 되였다. 왕광미의 그 온화하고 부드러운 성격으로 인해 당시의 생활은 류소기의 생명가운데서 제일 안정된 가정생활로 남아있었다.   왕광미는 만년에 시시로 인정이 따분히 담겼던 3가지 장면을 회상하군 했는데 첫째는 첫애를 출산했을 때 류소기가 그의 볼에 가볍게 키스해주던 장면이고 둘째는 “문화혁명”기간 투쟁받을 때에 류소기가 그를 도와 옷견지들을 정리해주었는데 이는 그들의 마지막 대면이였다. 그리고 투쟁받던 기간에 그는 하도 남편의 모습이 애처로와서 물 한컵 떠드렸는데 남편이 받아마시던 그 작은 일도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추억으로 가슴속에 남아있었던것이다.   1967년 4월부터 청화대학의 투쟁비판문헌자료들을 보면 왕광미는 시종 극단적인 상황에서도 매 한마디 답변마다 반항과 보류, 지혜와 믿음으로 자기의 남편을 보호했었다. “문화혁명”초기에 왕광미는 류소기를 보고 “우린 왜 그처럼 추악하게 묘사되지만 서로간에 원망이 없나요?”라고 묻자 류소기는 “호상 신임하기때문이지.”라고 대답했다.   1967년에 왕광미는 “미국중앙정보국 장기침입 고급전략적특무”라는 “죄”명을 쓰고 진성감옥에 투옥되여 장장 12년간 은페된 투옥생활을 했다.   1972년 8월 17일에 왕광미는 리별한지 5년이나 되는 자식들과 만날수 있게 되였다. 이날에 그는 비로소 류소기가 사망된지 3년이 된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웃음으로 은혜와 원한을 묵새기다   1979년에 왕광미는 감옥에서 나왔다.   사람들이 왕광미의 모습을 재차 볼수 있었던것은 왕광미가 하남성 성장한테서 류소기의 골회함을 받을 때부터였다. 왕광미가 한참이나 남편의 골회함에 얼굴을 묻고있는 모습은 당년의 그 한 력사를 경험해온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감동에 젖게 했다. 명예를 회복한후 왕광미는 전국정협위원과 상무위원회 위원직을 력임했었으나 정치에 대해서는 별로 말하지 않았다. 그는 만년의 대부분시간을 빈곤한 어머니들을 돕는 사업에 투신했는데 기금회자금이 부족할 때면 어머니가 남긴 골동품을 팔아 보태였다.   만년에도 왕광미는 산책하고 수영하는 취미를 잊지 않았다. 그는 매일 《인민일보》를 구독하였고 중앙텔레비죤뉴스를 시청하였다. 83세되던 해에 그는 모택동과 류소기 두 가정의 대규모의 모임을 조직하였다. “웃음으로 은혜와 원한”을 대하는 그의 처사는 많은 매체의 주의를 불러일으켰다.   왕광미와 류소기사이에는 1남 3녀가 있다. 아들 류원은 군사과학원 정위로 있고 큰딸 류평평은 미국영양학박사로 일찍 국내무역부 과학사 사장으로 임직했었으며 둘째딸 류정정은 하버드공상학원을 졸업한후 현재 상업에 종사하고있고 셋째딸 류숙숙은 해외에 거주하고있다. 1979년에 왕광미와 아들딸들은 인민대회당에서 있은 음력설야회에 참가했었다. 그는 회억록에서 “이는 10년래 내가 처음 공개적인 장소에서 모습을 드러낸것이였는데 사람들은 나를 알아보고 악수도 청하고 포옹도 해주었고 또한 어떤 동지들은 나의 손을 잡고 흐느껴 울었는데 나도 눈물을 머금고 사람들을 향하여 허리굽혀 인사했다. 그때 나는 기쁨에 겨워 ‘내가 또 이처럼 동지들과 함께 있게 됐네요. 인민이 나를 해방시켰습니다’고 말했다”며 감동의 장면을 생동하게 묘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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