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옛날과 지금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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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    물웅덩이에서 발견된 녀자시체 댓글:  조회:3714  추천:0  2010-04-23
리려는 중경시 유양현 리계진에서 태여났다. 1995년, 젊고 예쁜 리려는 절강성 평양현에 사는 진강한테 시집을 갔다. 그들은 1남1녀를 낳고 화목하게 살았다. 그런데 남편 진강이 자그마한 장사를 하느라고 늘 외출했기때문에 홀로 남은 리려는 집에서 멀지 않은 공장에 출근하면서 몹시 외로왔다. 2005년 9월 16일, 리려는 선후로 녀동생 리평과 외지로 장사하러 나간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외지로 품팔이를 나가겠다고 하고는 영영 종적을 감춰버렸다. 그후 진강은 여러번 안해의 핸드폰에 전화를 걸었으나 번마다 전화기가 꺼져있는 상태였다. 처가집에 가보았으나 장모는 딸이 온적이 없다고 말했다.사처에 수소문하여도 아무런 소식도 없자 진강은 리려가 출근했던 공장에 가서 물어보았다. 리려의 동료는 리려가 그날 한고향사람이라고 하는 마모와 함께 갔는데 두 사람의 관계가 매우 밀접하다고 알려주었다. 마모의 집은 중경시 유양현 리계진 관전촌에 있었다. 2007년 2월 22일, 마모의 고향에 와서 조사하던 리려의 매제(妹夫) 룡상이 중요한 실마리를 찾았다. 한 농민이 그에게 “관전촌에는 물웅덩이가 있는데 2005년 10월부터 그 물웅덩이에는 많은 물오리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아마도 그안에 썩은 물건이 있는것이 틀림없습니다”라고 알려주었다. 이 물웅덩이가 마모네 집 부근에 있다는것이 더욱 의심스러웠다. 룡상은 긴 바줄을 얻어가지고가서 바줄을 몸에 동이고 그 물웅덩이로 들어갔다. 밑바닥으로 들어간 그는 깜짝 놀랐다. 백골이 그의 눈앞에 보였던것이다. 룡상은 그 길로 달려가 사건을 제보했다. 경찰측에서는 조사를 거쳐 그 백골이 리려라는것을 판단했다. 마모에게 중대한 혐의가 있다고 인정한 경찰들은 2008년 10월 8일 11시쯤 마모를 붙잡았다. 마모가 왜서 리려를 죽였을가? 원인은 리려가 그더러 리혼하라고 핍박했기때문이였다. 마모는 이렇게 털어놓았다.   “리려는 남편이 늘 외출하자 외롭고 고독하여 견딜수 없다면서 나의 품에 안겨들었습니다.” 2004년초, 집에서 혼자서 외롭게 지내던 리려는 잘 생긴 한고향남자 마모를 만나자 홀딱 반하여 남들의 눈을 피해 마모의 품에 안겼다. 리려는 점차 마모한테 시집가려는 마음을 품게 되였다. 2005년 9월, 리려는 고향에 가는 마모를 따라갔다. 기실 리려는 따로 속셈이 있었던것이다. 유양에 도착하자 리려는 자기의 생각을 털어놓았다. “이번이 좋은 기회예요. 그 녀자와 리혼해요!” 깜짝 놀란 마모는 손을 흔들면서 거절했다. 마모는 이렇게 털어놓았다. “나의 안해는 착하고 일도 잘했습니다. 그리고 나의 딸은 매우 귀엽습니다. 나와 리려는 외지에서 품팔이를 하면서 고독을 이기지 못해 불륜을 저지른것입니다. 나는 안해와 리혼하고 리려와 살려는 생각이 꼬물만큼도 없었습니다.” 그날 리려는 마모에게 여러번 리혼하라고 핍박했다. 마모가 번마다 거절하자 절망한 리려는 돌멩이를 주어서 마모에게 던지면서 “네가 리혼하지 않으면 죽여버릴테다!”라고 소리쳤다. 마모는 더는 참을수가 없어서 리려를 돌로 때려죽인후 물웅덩이에 처넣었다. 그리고 리려의 몸에 있던 9000여원의 현금을 가지고갔다… “그 당시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충동을 억제할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리혼할수 없었던것입니다.” 마모는 자신의 죄행에 대해 승인하면서 자신이 저지른 죄를 매우 후회했다. “나는 안해도 있고 세 아이도 있으며 가정도 행복한 축이였는데 어쩌다가이런 일을 저질렀는지 모르겠습니다. 불륜의 기쁨은 잠시뿐입니다. 부모, 안해, 자식에 대해 많이 생각해보면 안정된 행복이 바로 곁에 있는데도 몰랐습니다.” 현재 마모는 고의살인죄로 무기도형에 언도되였다.                                                                                               《중경석간》  
117    영원한 사랑은 환상 댓글:  조회:3622  추천:0  2010-04-22
116    반지 두개 낀 사연 댓글:  조회:3591  추천:0  2010-04-22
115    꽃나이에 죽어간 딸을 위해 댓글:  조회:3990  추천:1  2010-04-21
114    무술영화배우 리련걸 댓글:  조회:5432  추천:0  2010-04-19
113    바둑대왕 섭위평의 세 부인 댓글:  조회:5487  추천:1  2010-04-15
바둑대왕 섭위평은 두번 결혼했지만 모두 실패하면서 감정세계가 한때는 진공상태였다. 그러나 최근들어 한 공개적인 행사에서 아름다운 녀인이 그의 곁에 나타났다. 그녀가 바로 섭위평의 세번째 부인인 란리아이다. 란리아는 섭위평보다 23살이나 어리였다. 섭위평은 란리아와 결혼한것은 “금덩어리를 주은것”이라고 표현했다. 섭위평과 세명의 부인들간에 어떤 사연이 있었을가?   첫번째 부인 공상명 공상명은 일찍 여러번 바둑대회에서 전국1위를 차지하였고 일본의 직업9단 바둑기사를 물리친바 있다. 그러나 결혼후 그녀는 점차 자신의 바둑사업을 포기하고 “내조”에 전념했다. 그녀는 전심전력을 다하여 섭위평을 돌봐주었고 남편이 꿈을 실현할수 있도록 내조했다. 결혼한지 3년만에 그들에게는 아들이 있었다. 세 식구의 가족이 섭위평에게 가져다준것은 생활상의 안정뿐만아니라 정신적인 의탁이였다. 그것은 섭위평이 밖에서 성과를 거두게 하는 원천이 되였다. 이때 섭위평의 기력은  전성기를 맞이했다. 섭위평의 성공은 첫번째 부인인 공상명의 도움이 아주 컸다고 바둑계인사들이 보고있다. 공상명도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이를 부인하지 않았다. “당시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나 자신도 바둑에 대해 많은 꿈이 있었지만 그래도 섭위평의 기력이 나보다 훨씬 높다고 생각했기에 그를 도와 그가 품었던 꿈을 꼭 실현해주고싶었다. 나는 내가 도와주면 그가 꼭 실현할수 있을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달콤했던 혼인생활이 1990년에 이르러 큰 변화가 나타났다. 섭위평은 호남텔레비죤방송국에서 조직한 행사에 참가했다가 우연하게 배우 왕정을 알게 되였고 두 사람은 서로 눈이 맞았다. 섭위평은 당시의 일을 이렇게 회억했다. “그때 나와 공상명의 결혼은 이미 깨여지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나는 왕정에 관하여 안해에게 전혀 말하지 않았다. 나는 말해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우리는 결혼10돐기념행사를 조직했는데 많은 친구를 초청했다. 사실 결혼10돐기념행사는 우리의 ‘고별연회’였다. 그러나 당시 행사에 참가했던 많은 친구들은  그 진상을 모르고있었다. 그날 왕정과 그녀의 오빠인 왕강도 행사에 참석했었다. 녀자의 감각은 아주 뛰여났다. 당시 수백명이 있는 로비에서 나는 왕정과 거의 말을 하지 않았는데 공상명은 나와 왕정의 관계를 눈치챘던것이다.” 후에 왕정이 임신을 했지만 아이를 지워버리지 않겠다고 우겼다. 섭위평은 어쩔수 없이 정식으로 공상명에게 리혼을 제기했다. “여보, 우리 리혼하기요. 왕정과 같이 있으면 난 남자다왔고 너무나 행복했소. 그러는 왕정이 지금 임신을 했소. 난 아직 태여나지 않은 아이에게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하오. 그러니 당신과 리혼한후 왕정과 결혼하려 하오.” 이렇게 섭위평은 한때 동료였고 자신의 사업을 아낌없이 밀어주고 지지해준 첫번째 부인 공상명과 리혼했다. 공상명은 리혼한후 아들의 이름을 공령문(원 이름은 섭운총이였음)으로 고치고 한동안 일본에서 생활했다. 그녀는 아들에게 바둑에선 아버지를 따라배워야지만 다른 면에서는 절대 아버지를 따라배우지 말아야 한다고 항상 일깨워주었다. 공상명은 재혼한후 상해에서 열린 바둑대회에 참가하여 섭위평과 대적한적도 있었지만 두 사람은 한마디 말도 나누지 않았다. 지어 둘은 상대방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확실히 공상명의 마음은 섭위평의 배신을 아직도 용서하지 않은것 같다고 외부에서 보고있다.     두번째 부인 왕정 1991년, 섭위평은 첮번째 부인 공상명과 리혼한후 인차 두번째 부인 왕정과 결혼했다. 결혼하여 3개월만에 왕정은 아들 섭운청을 낳았다. 섭위평은 왕정을 알게 된 과정을 이렇게 회억했다. “우리는 호남텔레비죤방송국에서 조직한 행사에서 서로 만났다. 행사가 끝나자 우리는 북경으로 돌아갈 때 같은 기차를 탔으며 한침대칸에 들었다. 헤여질 때 서로 전화번호를 남겼다. 북경에 도착한 이튿날 왕정이 전화를 해서 우리는 함께 가라오케로 갔다. 우리는 가라오케에서 술을 마시면서 재미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가 가라오케에 갔다는것은 이미 그녀를 받아들였다는 말이다.” 섭위평과 왕정은 서로 사랑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의 말밥에 오를가봐 걱정되여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당시 왕정은 중국인민해방군총정치부 부근에서 살았는데 섭위평은 왕정을 만나러 갈 때마다 모자를 꾹 눌러쓰고 사람들의 눈치를 피해다녔다. 왕정도 섭위평을 만날 때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종이로 불을 감쌀수 없듯이 두 사람의 관계를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되였다. 섭위평에게 왕정과 그만두라고 조언해주는 사람들도 많았다. 왕정의 상급에서도 그녀를 찾아서 섭위평과 그만두는것이 좋겠다고 의견을 내놓았다. 지어 그만두지 않는다면 그녀를 신강으로 보내겠다고 했다. 섭위평은 당시 왕정과 그다지 깊은 애정이 있었던것이 아니라 완전히 정신적인 공허감으로 잠시 그녀와 접촉한것이다. 나중에 사람들이 압력을 가하자 섭위평은 오히려 강해졌다. 섭위평은 자신의 선택이였지만 나중에 자신이 아주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것을 깨달았다. 섭위평과 왕정의 결혼생활은 그다지 순조롭지 못했다. 섭위평자신도 두번째 결혼을 이렇게 평가했다. “우리 둘은 전공이 너무나 거리가 멀었다. 사업적으로 서로 도와줄수 있는것이 거의 없었다. 그녀는 자주 공연을 떠났고 나는 자주 시합을 했기에 둘이 진정으로 감정을 교류할 시간이 너무나 잛았다. 일상생활에서 나는 의존형이였는데 왕정의 도움이 필요했다. 하지만 왕정은 사업형녀자이므로 집안일에 크게 관심이 없었다. 우리는 각자의 전공에서는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지만 집안일을 서로 돌보지 않았다. 당시 나는 아주 짜증났다. 사람이 짜증이 나면 사람들의 간섭을 받지 않는 조용한 곳에서 살고싶어한다. 이것은 말로는 표현할수 없는 짜증이다. 난 너무나 짜증이 났다.” 2001년에 섭위평은 자신의 두번째 10년간의 결혼생활을 결속지었다. 왕정은 섭위평과의 사랑을 이렇게 회억했다. “처음에는 우리도 신혼부부들처럼 참 행복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서로 감정이 멀어졌다는것을 깨달았다. 나는 바둑시합에서 졌을 때 아주 기분이 나빴다. 기분이 나쁠적마다 안해에게 화를 냈다. 우린 애호가 서로 달라 랑만이라는것을 모르고 살아왔다. 하여 결혼하여 생활한지 10년이 되지만 순탄하지 않은 10년이였다.”   세번째 부인 란리아 2001년 4월, 섭위평은 상해로 가서 섭위평바둑(棋牌)구락부를 꾸렸다. 거기서 그는 처음으로 구락부의 고객담당부장인 란리아를 만났다. 섭위평은 비록 이미 두번이나 혼인에서 실패했고 이미 50에 가까운 나이였지만 아름답고 서글서글한 란리아에게 마음이 동했다. 섭위평은 이런저런 구실을 대고 자주 그녀를 만나 사랑의 공세를 들이댔다. 두달후 두 사람은 련애관계로 발전했다. 2001년 8월, 섭위평은 란리아와 그녀의 고향인 귀주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섭위평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것이 인연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나이가 20여세나 차이난다. 모든 면에서 차이가 너무나 크므로 때론 세대차이를 느낄 때도 있다. 그러나 서로 아주 잘 어울리고 즐겁게 지낸다. 결혼할 때에도 나는 꼬물만치도 망설이지 않았다. 나는 마치 금덩어리를 주은듯했다.” 세번째 부인에 대하여 섭위평은 아주 만족해했다. 란리아는 예쁠뿐만아니라 생활을 아주 잘 조직하는 녀인이였다. 란리아는 매일 집에서 남편의 입맛에 맞는 밥상을 준비했다. 하여 섭위평이 집안에 있는 시간이 자연히 많아졌으며 술마시는것도 절제했다. 이런 안해가 있음으로 하여 섭위평이 옷입고 분장하는것도 과거보다 훨씬 깔끔해졌다. 섭위평은 세번째 부인을 늘 자랑했다. “세번째 결혼은 먼저번 결혼과는 확실히 다르다. 그와의 결혼은 장애가 있었고 세속적인 압력도 많이 받았다. 하지만 난 모든것을 이겨내고 그녀와 결혼을 했다. 그녀와 함께 있으면 공동언어도 많았다. 하여 나는 일이 없으면 늘 집에 머물렀다. 좋은 안해를 두었기에 나는 거의 밖에 나가지 않는다. 그리고 집에 있으면 핸드폰도 켜놓지 않는다.” 섭위평은 세번째로 만난 부인 란리아에 대해 확실히 만족해하고있으며 끝까지 살아갈 동행자라고 자랑했다.   연변라지오TV신문  
112    세무국장과 그의 정부의 말로 댓글:  조회:3531  추천:0  2010-04-15
    남경시검찰원에서는 원 남경시 강년구지방세무국 국장 홍모모가 직무의 편리를 리용해 정부인 우모모와 결탁하여 348만원을 회뢰한 사건을 해명했다. 남경시법원에서는 홍모모와 우모모에게 각각 유기도형 14년 판결을 내렸다. 국장의 정부로 된 술집 녀주인 1996년에 우모모는 홍모모가 국장으로 있는 지방세무국 분국에서 관리하는 한 술집을 도급맡아 경영했다. 홍모모는 사업상의 관계로 이 술집을 드나들면서 녀주인 우모모를 알게 되였다. 당시 우모모는 35살이였지만 곡선미가 돋보이는 녀인이였고 노래도 잘 불렀다. 두 사람은 서로 각자의 사욕을 채우기 위해 래왕하기 시작했다. 1997년 11월의 어느날, 두 사람은 우모모의 집에서 술을 마시면서 정부관계를 맺을것을 약속했고 영원히 사랑할것을 다짐했다. 2000년, 우모모는 자신이 경영하던 술집을 시모모에게 양도하고 위치가 좋은 다른 술집을 도급맡으려 했다. 이때 시모모는 우모모를 보고 자기 생각을 털어놓았다. “당신은 지방세무국의 령도들을 잘 알고있지? 지방세무국의 건축공정을 도급맡을수 있도록 날 도와주오. 물론 소개비를 넉넉히 드리겠소.” 우모모는 홍국장과 밀회를 가질 때 시모모의 뜻을 전했다. 그러자 홍국장은 아주 기뻐했다. “마침 잘됐네. 이번 기회를 잘 리용하여 돈을 벌어들여야지. 안그래? 나의 사랑하는 천사, 당신도 인젠 술집에서 손을 떼오. 힘들게 일하지 말고 쉽게 돈을 벌수 있는 구멍을 찾아야지. 시모모가 도급맡을수 있게 내가 방법을 대보겠소.” 홍국장의 도움으로 시모모는 지방세무국청사 장식공정을 도급맡았다. 하지만 시모모는 시간을 질질 끌면서 약속대로 소개비 2만원을 우모모에게 주지 않았다. 홍국장은 우모모를 보고 신용을 지키지 않는 시모모를 차버리고 다른 사람을 물색하라고 권고했다. 우모모는 시모모의 관계를 통해 주모모를 알게 되였다.     단짝이 되여 저지른 비리 2002년의 추석을 앞두고 우모모와 주모모가 처음으로 서로 만났다. 주모모는 우모모를 보고 자신을 꼭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오늘 당신을 이렇게 만나니 참 기쁩니다. 이후 돈을 벌수 있는 공정이 있으면 날 잊지 말고 꼭 찾아주시오. 소개비를 넉넉히 드리겠습니다.” 우모모는 아주 통쾌하게 대답했다. “서로 좋은 일이 된다면야 그래야죠. 이것이 꿩먹고 알먹는 격이 아닌가요? 호호호…” 한달후에 홍국장은 우모모에게 좋은 소식을 전했다. “사랑하는 나의 천사, 우리 지방세무국 사업청사 내부수리공정이 곧 시작되는데 주모모더러 준비를 잘해가지고 공정도급경쟁에 참가하라고 하오. 그가 도급맡을수 있도록 내가 뒤에서 도와주겠소.” 우모모는 홍국장의 뜻을 주모모에게 전했다. 주모모는 일이 성사되면 공정비의 30%를 소개비로 주겠다고 약속했다. 우모모는 홍국장을 보고 주모모가 30%의 소개비를 주련다고 전했다. “뭐요? 30%? 뭉치돈이구만. 좋소. 주씨더러 값을 낮게 부르라고 하오. 그래야 내게 발언권이 있소.” “값이 너무 낮으면 주씨가 도급맡지 않으려하지 않을가요?” “아니요. 그들이 부른 값이 남들보다 낮아야 입찰경쟁에서 주도권을 잡을수 있소. 나 따로 생각한것이 있소. 주씨가 입찰에 성공하면 난 그에게 입찰범위에 속하지 않는 다른 공정을 더 주겠소. 주씨도 돈을 벌고 당신도 돈을 벌수 있게 말이요. 나의 뜻을 주씨에게 전하오.” 홍국장의 조정하에 주모모의 회사가 많은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500만원으로 그 공정을 도급맡았다. 그번 경쟁을 통해 주모모는 우모모에게 잘 보여야 돈구멍이 생길수 있다는것을 절실히 느꼈다. 사건이 드러난후 우모모는 심사를 받을 때 사업일군에게 이렇게 탄백했다. “2003년 3월부터 2005년 5월까지 주모모는 나에게 달마다 로임의 명의로 5000원씩 활동경비를 주었습니다.” 조사결과 지방세무국 사업청사 내부수리공정비용이 1000만원에 달했다. 우모모는 두번에 나누어 주모모한테서 돈 30만원을 받아먹었다. 첫번째 일에서 단맛을 본 우모모는 홍국장을 찾아가 애교를 부렸다. “이번에 당신의 도움이 컸어요. 돈이 수요되면 언제든 가져가세요. 당신의 몫도 있잖아요? 흐흐흐, 그리고 이후 그런 공정이 있으면 또 주씨에게 줍시다. 다음번에 소개비를 더 많이 받아야죠.” “그래, 난 나이도 있어 승진하기 어렵소. 그러니 기회를 놓치지 않고 돈을 벌어들일 생각이요. 하지만 내가 나서기보다 당신이 직접 나서는것이 더 나을것 같소. 다른 사람들의 눈치가 보여서.” “네, 알겠어요. 우리 잘해봅시다. 하지만 돈이 들어오면 당신을 잊지 않겠어요.” 이로써 둘은 단짝이 되여 여러번 비법적으로 자기 친신들에게 건축공정을 도급맡아주고 중간에서 많은 소개비를 받아먹었다. 2004년 봄, 홍씨가 국장직을 맡고있는 지방세무국의 산하 네개 분국에서 사무청사를 새로 장식하게 되였다. 홍국장은 이 정보를 우모모에게 전했다. “사랑하는 나의 천사, 산하에 있는 네개 분국에서 모두 새로 사업청사를 장식하오. 아주 호화롭게 장식하오. 주씨에게 전하오. 이번 경쟁에서 꼭 쟁취하라고 말이요.” “그래요? 규모가 어느정도죠?” “큰 공정이요. 200만원짜리 입찰이라고 전하오. 그리고 입찰범위에 속하지 않는 200만원짜리 공정이 따로 있소. 이후 륙속 그에게 맡길 생각이요.” “알겠어요. 이번엔 공정의 6%를 소개비로 받아야겠네. 그래야 돈을 많이 받아먹죠.” 우모모는 그번 공정비용을 700만원으로 계산하여 소개비 6%를 받아먹기로 했다. 주씨는 약속대로 42만원을 주기로 했으나 우모모는 선심을 쓰는듯이 꼬리를 버리고 40만원만 달라고 요구했다. 사실 그번의 실제공정비용은 900만원에 달했다. 사후 주씨는 두번에 나누어 우모모에게 40만원을 주었다.   돈에 눈이 어두웠던 결과   두번의 큰 입찰경쟁에서 주씨가 혜택을 보게 된 내막을 알아차린 많은 사람들은 모두 우모모를 찾아 도움을 청했다. 2005년 상반년, 왕모모는 친구를 통해 우모모를 알게 되였다. 왕모모는 우모모를 보고 도와달라고 청들었다. “당신이 지방세무국의 모모한 어른들과 친분이 있다는것을 잘 알고있소. 서쪽에 있는 공지에 집을 짓는다고 하는데 내가 도급맡을수 있도록 도와주오. 소개비는 요구대로 주겠소.” “소개비를 많이 준다면야 한번 힘써보죠. 하지만 약속을 꼭 지켜야 해요.” 우모모는 홍국장을 찾아가 정황을 알아보았다. 일주일이 지난후 홍국장은 제일 처음으로 우모모에게 소식을 전했다. “그것이 사실이요. 공정항목이 비준되였는데 우리가 구체적책임을 맡았소. 나는 토목건축과 장식을 모두 대외에 공개입찰하려 하오. 그래야 우리도 많은 돈을 챙길수 있을것이 아니요? 이번에 우리 뜻대로 되면 뭉치돈을 벌수 있소.” 우모모는 왕모모 회사의 서류를 홍국장에게 넘겨주었다. “서류같은것은 필요없소. 다만 공개입찰경쟁에 참가하라고 하오. 우리 쥐도 새도 모르게 일을 마무리지어야 하오.” 우모모는 홍국장의 뜻을 왕모모에게 전하면서 소개비로 공정의 3%를 요구했다. 홍국장은 소개비가 3%란 말을 듣고 불만족해했다. “고작 3%요? 안되오. 이번이 마지막 공정일지도 모르오. 더는 돈을 벌 기회가 없을지도 모르니 5%쯤은 받아야 하오. 그를 찾아가 다시 상의하오.” 홍국장의 막후조정하에 왕모모가 2000만원으로 그 공정을 도급맡았다. 2006년 음력설전에 왕모모는 약속한대로 100만원을 세번에 나누어 우모모에게 주었다. 돈에 단맛을 들인 우모모는 홍국장과의 관계를 리용하여 장식입찰에서 소개비 10%를 요구하여 160만원을 받아먹었다. 그는 또 각 과실의 사무용품을 구입해주는 일을 도맡아했는데 중간에서 19만원을 가로챘다. 홍국장과 우모모는 비법적으로 받아먹은 돈으로 시교외에 신식 아빠트를 사고 60만원에 달하는 고급승용차를 타고다니면서 사치하게 생활했다. 2009년 10월 30일, 남경시법원에서는 1심판결을 내렸다. 홍모모는 직무의 편리를 리용하여 많은 돈을 받아먹음으로써 회뢰죄가 구성되는바 유기형 14년에 언도하며 재산 20만원을 몰수했다. 우모모에게 14년 판결을 내리고 그의 재산 50만원을 몰수했다. 법원에서는 또 홍국장과 우모모한테서 돈 175만원을 사출해내고 “벤츠”표 호화 승용차을 차압했다. 나머지 장물들은 계속 추궁하고있는중이다.                                                               《신랑넷》
111    사랑으로 맞이한 생명의 승리 댓글:  조회:3892  추천:0  2010-04-13
110    13년 억울한 감옥살이와 배상금 52만원 댓글:  조회:4277  추천:2  2010-04-12
  2005년 3월 15일, 하남성 농민 서경상은 장장 13년동안의 억울한 감옥생활을 결속짓고 무죄석방되였다. 하지만 그는 기쁘지만은 않았다. 기나긴 억울한 감방생활로 하여 그는 정신상에서 너무나 많은 타격을 받았고 몸에 여러가지 질병도 지니게 되였다. 서경상은 왜서 억울한 감옥살이를 하게 되였는가? 1991년 음력설이 갓 지난후 하남성 주구시 록읍현 양호구향에서는 10여건의 강탈사건이 련이어 발생했다. 사건수사에 줄곧 진전이 없었기때문에 당지의 백성들은 공포에 떨고있었다. 그때 록색털조끼가 나타나면서 사건에 돌파적인 “전환의 계기”가 생기게 되였다. 1992년 2월, 양호구향 소교촌 농민 위국량과 염서장촌의 농민 서경상은 함께 술을 마셨다. 한참후 서경상은 덥다면서 옷옷을 벗었는데 안에 입은 록색털조끼가 드러났다. 그 록색털조끼를 본 위국량은 깜짝 놀랐다. 위국량은 즉시 공안국을 찾아가서 숨을 헐떡거리면서 사건을 제보했다. “제가 련쇄강탈사건의 범인을 알아냈습니다. 바로 서경상입니다. 그가 록색털조끼를 입고있었습니다. 그 록색털조끼는 나의 처제가 뜬것이 틀림없었습니다. 나의 처제도 련쇄강탈사건의 피해자중의 한사람인데…”   이 사실에 고도의 중시를 돌린 록읍현공안국에서는 즉시 서경상을 불러서 심문했다. 1992년 4월 1일에 서경상은 형사구류되였다.형사경찰대에 잡혀갔을 때 서경상은 자신이 왜서 잡혀갔는지 알수 없었다. 그런데 경찰들은 그를 무조건 범인이라고 락인찍고 심문을 들이댔다. 그가 아무리 아니라고 변명해도 소용이 없었다. 그리고 록색털조끼는 집중시장에 가서 산 낡은 조끼라고 해도 경찰들은 그의 말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무조건 바른대로 대라는 호령뿐이였다. 심지어 주먹질까지 하며 잠도 자지 못하게 했다. 수십번이나 반복하여 변명하던 그는 지쳐버렸다. 며칠후 서경상은 경찰들이 “네가 저지른 짓이지?”라고 따지고들 때 하는수없이 “내가 저지른것입니다”라고 승인했다. 그러자 경찰들은 기뻐하면서 또 누구랑 함께 했느냐고 따지고들었다. 그는 생각나는대로 말하려다가 경찰들이 믿지 않을가봐 량소룡이란 이름을 지어낸후 “공범”의 이름에 깡패들이 잘 쓰는 룡자를 붙이기로 했다. “이 사건은 나와 량소룡 그리고 우리가 데려온 ‘청룡’, ‘록룡’, ‘흑룡’ 다섯이 저지른것입니다. 몇차례의 복면입실강탈사건은 모두 우리 다섯이 함께 저지른 일입니다.” 1992년 4월 13일, 서경상은 록읍현검찰원의 비준을 거쳐 체포되였고 련쇄강탈사건도 “해명”되였다. 서경상은 나중에 이렇게 말했다.   “사실 그 관건적인 증거는 내가 입은 록색털조끼였습니다. 그것은 1991년 가을에 내가 이웃사람과 함께 집중시장의 매대에서 사온 낡은 옷입니다.” 서경상이 수십번이나 했던 이 해석은 1997년에 하남성검찰원에서 재조사를 할 때에야 실증되였다. 왜서 죄를 승인했느냐는 물음에 서경상은 “그거야 너무 빤한 일이 아닙니까? 경찰들의 핍박에 못이겨 그들의 구미에 맞게 불어댄것이지요”라고 말했다. 서경상이 핍박에 의해 공술한 “4명 공범”은 현재까지 붙잡지 못했다. 서경상이 체포된후 사건은 록읍현공안국 예심과에서 심리하게 되였다. 이 사건은 2급경독(警督) 리전귀가 책임졌다. 당시 리전귀는 서경상의 입실강탈죄를 인정한 151페지에 달하는 자료를 상세히 읽어본후 의심되는 점이 많은것을 발견했다. 리전귀는 서경상의 범죄사실이 실증되지 못했기때문에 사건을 기소할수 없다고 상급부문에 반영했다. 그후 록읍현공안국에서는 리전귀가 반영한 정황을 무시하고 서경상을 강탈혐의죄로 록읍현검찰원에 이송했다. 록읍현검찰원, 하남성검찰원 주구시분원, 주구시검찰원에서는 밀고 당기고 하면서 4년 4개월에 달하는 보충검사를 거쳐서도 사실을 밝혀내지 못했다. 하지만 록읍현검찰원에서는 1996년 12월 13일에 서경상에 대해 공소를 제기했고 1997년 3월 7일에 록읍현인민법원에서는 1심에서 서경상을 강탈죄와 절도죄로 유기도형 16년에 처한다고 판결했다. 1993년 7월, 리전귀는 고의적으로 서경상의 자료를 빼내여 범죄증거를 감추었다는 검거를 받았고 그해 11월에 그는 사사로운 정에 얽매여 부정행위를 한 혐의로 공소되였다. 록읍현인민법원에서는 리전귀사건을 심리한후 검찰원에서 리전귀에 대한 검찰원의 공소는 사실근거가 없기때문에 리전귀를 무죄로 판결했다. 록읍현검찰원에서는 즉시 항소를 제기했는데 주구지구중급인민법원에서는 1995년 8월 28일에 원판결을 유지한다는 종심판결을 내렸다.   1997년 11월 10일, 리전귀사건은 재판감독순서에 따라 하남성검찰원에 넘어왔다. 하남성검찰원에서는 리전귀사건에 관계되는 전부의 자료를 참답게 조사한후 리전귀를 무죄로 인정했다. 2001년 5월 27일, 하남성검찰원의 지령을 받은 주구시검찰원에서는 주구시중급인민법원에 무죄항소를 제기하여 서경상사건에 관한 록읍현법원의 판결은 착오라고 인정했다. 2001년 11월 7일에 주구시중급인민법원에서는 이 사건에 대해 재심결정서를 내려보내고 록읍현인민법원에서 따로 합의정을 조성하여 심리하라고 명령했다. 2002년 4월, 록읍현인민법원에서는 원판결을 유지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서경상은 2002년 5월 8일에 상소를 제기했다. 그러나 2003년 3월 25일에 주구시중급인민법원에서는 2심에서 원판결을 유지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2003년 5월 13일, 하남성검찰원에서는 이 사건이 잘못 판결되였다고 인정하고 하남성고급인민법원에 무죄항소를 제기했다.   2004년 6월 16일, 하남성고급인민법원에서는 공개법정을 열고 서경상사건을 심리했다. 이 사건을 책임진 하남성검찰원의 장한생검찰관은 “법원에서는 서경상이 타인과 결탁하여 입실강탈사건 8차를 저질렀다고 인정했는데 지금까지 소위 4명의 공범이라고 하는 공범은 한명도 밝혀내지 못했다. 또 사건흉기라고 인정한 칼, 총, 철몽둥이 등은 하나도 찾지 못했다. 서경상의 집에서 찾아낸 35건의 물품중에 장물이라고 확인할만한 물품은 하나도 없었다.  피고인의 공술과 피해자가 진술한 사실의 경과는 서로 맞는 부분이 하나도 인정되지 못했다. 소위 8차의 입실강탈사건은 무근거 무증거 범죄에 속한다”고 인정했다. 2005년 1월 10일, 하남성고급인민법원에서는 종심판결서를 내려보내여 1심과 2심에서 서경상에게 죄가 있다고 내린 판결을 취소하고 “서경상의 강탈죄, 절도죄는 사실이 똑똑하지 않다”는 리유로 록읍현인민법원에 다시 심리할것을 요구했다. 2005년 3월 15일은 하남성제1감옥 개봉서사분옥에서 옥살이를 하고있던 서경상에게 있어서 잊을수 없는 날이였다. 이날 하남성 록읍현검찰원에서는 하남성검찰원의 감독하에 서경상을 무죄석방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마침내 13년동안의 억울한 감옥살이를 결속짓고 자유의 몸이 되여 다시 해빛을 보게 되였다. 서경상은 자신이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하게 된 대가를 꼭 받아내고야 말리라고 마음먹었다. 2005년 6월 21일에 서경상은 억울하게 체포되고 억울하게 판결받았다는 리유로 하남성 주구시중급인민법원에 국가손해배상신청서를 바치면서 주구시중급인민법원, 록읍현인민법원, 록읍현인민검찰원에서 공동으로 손해배상을 해줄것을 요구했다. 하남성 주구시중급인민법원에서 기한이 지나도록 손해배상결정을 내리지 않자 서경상은 하남성고급인민법원에 신청을 제기하여 억울하게 체포되고 억울하게 판결받아 감금당한 배상금 30만 1915.90원(2004년의 표준에 따라), 정신위안비 13만원, 감금기간 발생된 질병치료에 수요되는 치료비용 13만원을 배상해줄것을 요구했다. 2009년 11월 23일, 하남성고급인민법원 배상위원회에서는 사실을 조사하여 밝혀낸후 다음과 같은 결정을 내렸다. 서경상은 억울하게 체포되고 억울하게 판결받아 감금되였기에 국가배상을 신청할 권리가 있다. 서경상이 억울하게 체포되고 억울하게 판결받아 4732일을 감금되여있었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배상위원회에서는 2008년 전국직공일평균로임(111.99원)표준에 따라 계산하여 배상금 도합 52만 9936.68원을 3개의 의무배상기관에서 공동으로 배상해야 한다고 인정했다. 배상위원회에서는 배상결정서중에 “서경상은 몸에 생긴 질병이 감금때문에 조성된것이라고 제기하였지만 해당되는 유효증거를 제공하지 못하였기때문에 치료비용배상요구는 지지를 받지 못한다. 서경상이 제기한 정신손해위안금은 국가배상법규정의 배상범위에 속하지 않기때문에 이 방면의 배상요구도 지지를 받지 못한다”고 밝혔다. 2009년 12월 17일 오전에 서경상은 하남성 주구시중급인민법원에 가서 부원장 장운주의 손에서 첫몫의 국가배상금 17만 6645.56원을 받았고 그날 오후에 하남성 록읍현인민법원에 가서 동등한 액수의 국가배상금을 받았으며 30분후 록읍현인민검찰원에 가서 또 동등한 액수의 국가배상금을 받았다. 이는 그가 국가배상금을 신청하여 4년 6개월을 기다린 결과였다. 《법제일보》
109    녀과학자와 그녀의 가족사랑 댓글:  조회:3507  추천:0  2010-04-12
      작가에게서 토지는? “토지는 작가의 삶의 터전이고 토지는 작가의 창작의 원천이다.” 어느 책에서 읽었던 말인지 아니면 오늘 오전에 있었던 “거장 박경리의 삶과 문학”이라는 특강을 듣고 문뜩 떠오른 나만의 생각인지는 가늠이 안간다. 하지만 특강이 끝나고 있은 간담회에서 내가 이렇게 자기의 소감을 피력한것만은 사실이다. 이 말을 하는 순간 내 느낌은 진실했고 이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나의 마음은 진실할뿐이다. 10대 후반에 문학을 내 출세의 지름길로 삼고저 한적이 있었다. 나는 고중 2학년을 다니다가 가정의 이러저러한 여건때문에 공부를 그만두고 입대하게 되였다. 부대에  가서야 나는 나의 지식의 한계를 알게 되였고 또 약속되지 않은 미래에 대한 두려움 같은것을 느끼게 되였다. 미래를 약속할수만 있다면 어떤것이라도 잡고싶었다. 그때 나의 손에 잡힌것이 바로 문학이라는 “짚으라기”였다. 15살, 초중 2학년에서 공부할 때 《연변일보》에 첫 통신을 발표하면서 작가가된다고 가슴을 들먹이던 한 문학소년이 잡을수 있었던 유일한 삶의 끈이 문학이였던것 같다. 나는 그 힘든 부대생활중에서도 죽기내기로 글을 쓰고 책을 보았다. 그때는 진실한 그 무엇을 쓰려는것이 아니라 어떤 글이라도 써서 어떤 간물에라도 발표하려는것이 목적이였다. 어떤 글이 어떤 곳에 발표되든 발표만 되면 그만큼 부대에서의 위치가 달라질수 있었고 그만치 미래가 약속될듯싶었던것이다. 수필이랍시고 동시랍시고 소설이랍시고 두루 신문이나 잡지에 발표했다. 발표되는 차수가 많아지자 나는 과연 그 지긋지긋 힘들기도 하던 련대를 떠나 퇀 정치처에 발탁되여 통신간사로 되였다. 소문이 부대주둔지의 조선족문화관에 전해졌던지 나는 문화관에 림시 전근되여 문학편집으로 일하는 기회도 잡게 되였다. 그곳의 추천으로 어느 대학이라는 곳에 가서 문학공부도 하게 되였다. 그게 계기가 되여 퇴대후 방송국이며 텔비죤방송국이며를 돌다가 오늘 출판사에 굴러들게 된것이다. 어쩜 어릴 때 받았던 삶에 대한 콤플렉스때문이였든지 나에게 있어서 “문학에 대한 관심은 나의 밥줄— 사업에 대한 관심”보다 크지 못했다. 정력을 사업에 쏟으면서 나는 차츰 날마다 문학과 멀어져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였고 차츰 문학의 끈마저 놓아버리게 되였다. 간혹 잠이 안 오는 밤이면 “문학”에 대하여 돌이켜볼 때도 있었지만 어느새 문학은 나에게서 떠나버린 렬차처럼 느껴질뿐이였다. 나는 가끔 “하루강아지 범 무서운 줄”도 모르고 문학앞에서 날뛰던 10대의 소년을 그리며 애수에 젖었던적도 한두번이 아니다. 그러다가 다시 문학의 끈을 잡아쥐게 된것이 2007년이였다. 운명의 장난이였다 할가? 그해 5월 나는 행운스럽게도 연변작가협회의 추천으로 중국작가협회에서 꾸리는 로신문학원 “제6기 중청년작가 고급연수반(아동문학반)”에 들어가 3개월간 공부할수 있은 기회를 가지게 되였던것이다. 그 3개월간 나는 문학에 대하여 다시 생각하게 되였고 진정한 의미에서의 문학을 접촉하게 되였으며 문학앞에서 자신의 천부를 가늠해보게 되였다. 따져보면 나는 문학에 천부가 없는 사람이다. 천부가 없다면 노력을 해야겠는데 과연 나에게 얼마만한 문학적잠재력이 있는것일가? 나는 나의 삶에 대하여 나의 인간자체에 대하여 차근차근 돌아보기 시작했다. 1989년 6월에 연변인민방송국에 입사하여 접촉한 사업이 청소년프로 제작이였다. 1993년 6월에 연변텔레비죤방송국에 전근하여 맡은 사업도 역시 청소년프로 제작이였다. 사업에 참가하여 장장 18년을 청소년들을 위한 일터에서 청소년들과 함께 달려왔던것이다. 청소년들과 함께 했던 이 18년이 바로 내 문학의 토지가 아니였을가? 2007년 5월의 어느날, 나는 내 문학의 토지에 첫삽을 박았다. 그렇게 시작한것이 장편소설 “천사는 웃는다”이다. 단편소설 한편 변변히 써내지 못했던 내가 장편소설창작에 달려든것이다. 그 작품을 쓰면서 나는 내가 소설을 쓴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뭔가를 쓰고싶었을뿐이였고 꼭 써내고싶었을뿐이였다. 그렇게 20일만에 17만자에 가까운 소설을 끝냈다. 작품에 종지부를 찍고 나는 뜻밖에도 너무나 차분해진 자신을 발견하게 되였다. 구경 내가 써낸 글이 어느 정도인지는 가늠할 길이 없었지만 쓰고싶어서 썼고 쓰지 않으면 안될것 같아서 썼기에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나의 글에 만족할수 있을것 같았다. 박경리님은 필생의 정력을 다하여 “토지”라는 제목으로 민족의 “토지”, 나라의 “토지”를 써냈다. 오늘 한국 원주 박경리문학공원 소장 고창영님의 특강을 들으며 박경리님의 인생자체가 바로 토지에 뿌리를 내린 작가의 훌륭한 보기가 아닐가를 생각해보았다. 요즘에 와서 나는 전처럼 발표나 수상에 연연하고싶지 않다. 다행히 인터넷이 발달한 시대를 만나서 나름대로 글을 쓰고 나름대로 인터넷에 글을 올린다. 과연 세상사람들 몇분이나 나의 글을 읽을수 있고 또 읽은후 어떤 평가를 내릴지 모르겠다.  글쓰는 사람으로서 자기의 글을 좀더 많은 사람들이 읽어주었으면 하는 생각을 하는것은 인지상정이겠지만 읽는 사람이 없어도 역시 무방할것 같다. 워낙 아무 욕심없이 쓰고싶어서 쓴 글인데 차곡차곡 내 문학의 토지에 옮겨 놓으면 그만이 아닐가? 어느날 지나가던 나그네가 들어와서 물 한바가지 마시고 가면 어떻고 심심한 아줌마가 들어와서 꽃 한송이 따가면 또 어떠랴.  쉴줄 모르고 뛰노는 어느 개구쟁이가 숨어들어왔다가 오줌 한번 찔 갈기고 도망가도 만족이겠다. 이 시점에서 문학은 더이상 나의 무엇을 위한 지름길로 될수 없다. 아동문학작가라는 이름으로 이 세상을 살면서 진정 토지처럼 소박한 모습을 보여야 겠다. 아동문학작가라는 이름으로 이 세상을 살면서 진정 토지처럼 순박한 글을 남겨야 겠다.  
108    강제로 녀자친구에게 마약을 주사한 총각 댓글:  조회:4308  추천:0  2010-04-09
  강서인민방송국 아나운서 호문의 본명은 고옥강이다. 1982년에 감숙성 옥문시에서 태여난 호문은 2002년에 강서구강학원을 졸업한후 남창시인민방송국에 취직하여 사회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2007년에 강서인민방송국에 전근해간 그는 유모아적이고도 품위있는 목소리로 《생활가속도》프로를 사회하여 “금패(金牌)아나운서”로 되였다. 2008년 2월 27일, 남창대학제1부속병원에 입원한 호문은 뇨독증말기라는 진단을 받았다. 의사는 신장이식수술을 하는 길밖에 없다고 알려주었다. 호문의 아버지 고천생은 53살인데 이미 퇴직하였고 어머니 풍광명은 51살인데 몸이 불편하여 몇년전에 정리실업을 당했다. 아들이 뇨독증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은 고천생부부는 하늘이 무너지는것만 같았다. 풍광명은 작년 11월에 자궁근종에 걸렸다는 진단을 받고 치료를 받고있는 중이지만 자신의 몸을 돌볼 겨를이 없었다. 그녀는 의사의 손을 꼭 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선생님, 저의 신장을 아들에게 주겠으니 제발 제 아들을 구해주세요”라고 애걸했다.   고천생은 그런 안해를 껴안고 “당신은 몸상태가 좋지 않으니 내 신장을 내놓겠소”라고 말했다. 의사는 우선 조직적합성이 맞는 신장을 찾기가 어렵다는 점과 직계가족이 맞을 확률이 높기는 하지만 검사해보아야 한다는 점을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2008년 2월 28일, 강서인민방송국의 지도부, 동료 및 보도매체의 친한 기자들이 병문안을 왔다. 그들은 신장이식수술을 하려면 거액의 자금이 수요되고 조직적합성이 맞는 신장이 있어야 하며 호문의 부모는 가정생활이 어려워 치료비용을 감당할수 없는 정황이라는것을 료해하고 사회의 힘을 동원하여 모금하기로 결정했다. 그 이튿날, 국지도부에서는 방송을 통하여 호문이 뇨독증에 걸렸다는 소식을 공개하면서 사회의 도움을 청했다. 2008년 3월 3일, 검사결과 호문의 아버지 고천생은 1996년에 횡경막종양수술을 받았고 고혈압이기때문에 장기를 기증하기에 합당하지 않았다. 그리고 병원에서도 조직적합성이 맞는 신장을 단시일내에 찾기가 어려웠다. 신장이식수술을 빨리 하지 않으면 생명이 위태롭게 된다. 호문의 부모가 속수무책으로 울고만 있을 때 한 젊은이가 찾아와서 신장을 기증하겠다고 나섰다.   요명봉이라고 하는 그 젊은이는 대학생이였다. 그는 강서성인민방송국의 《생활가속도》프로를 듣고 이 프로의 사회자 호문이 뇨독증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였다. 호문을 만나서 호문의 싸인까지 받은적이 있는 그는 처음에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는 우상처럼 숭배하고 형님처럼 존경하던 호문이 죽는것을 보고만 있을수 없었다. 호문의 부모를 찾아온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저와 호문형의 혈형은 모두 A형이여서 희망이 큽니다. 저의 신장을 하나 떼내여 호문형을 구할수만 있다면 전 정말 기쁘겠습니다!” 호문의 부모는 뜻밖에도 고마운 젊은이가 나타나서 신장을 기증하겠다고 하자 너무 감동되여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그런데 위생부에서 발부한 《장기이식기술림상응용관리잠행규정》에는 친척이 아닌 산사람의 장기기증은 제창하지 않는다고 했기때문에 요명봉이 호문에게 신장을 기증하려면 어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우리 나라에는 친척이 아닌 사람이 신장을 기증한 사례가 있었기때문에 쌍방에서 매매행위가 없었다는것을 증명하기만 하면 해당부문의 비준을 얻을 희망이 있었다. 이튿날 검사해보니 요명봉과 호문의 조직적합성은 16항이 모두 맞아떨어졌다. 의사는 이런 확률은 의학상에서 10만분의 1이라고 하면서 기적이라고 말했다. 2008년 3월 8일, 호문의 어머니 풍광명은 은인에게 감사를 드리기 위해 과일을 사들고 요명봉의 기숙사로 찾아갔다. 검사결과를 기다리고있던 요명봉은 자신이 우상으로 여기고있는 호문형을 구할수 있다는 말을 듣고 너무도 기뻐서 아이들처럼 퐁퐁 뛰였다. 풍광명은 “너의 부모도 네가 신장을 기증하려는 사실을 알고있느냐”고 물었다. 그런데 요명봉은 그 물음에 선뜻 대답을 못하고있다가 “압니다”라고 얼버무리는것이였다. 그런 요명봉의 태도에서 풍광명은 그가 부모를 속이고있다는것을 느꼈다. 풍광명은 병원에 돌아와 의사한테 “신장을 기증하면 정상적인 사람처럼 생활할수 있는가”고 물어보았다. 의사는 리론상에서는 신장 하나를 떼내도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하지만 힘든 로동을 할수 없으며 앞으로 조심하지 않아 유일한 하나의 신장이 손상을 받는다면 생명이 위험할수 있다고 알려주었다. 의사의 말을 들은 풍광명은 놀라서 즉시 요명봉한테 전화를 걸어 이런 사실을 알려주며서 신중하게 고려해보라고 권고했다. 하지만 요명봉은 “제가 이미 신중하게 고려한후 결정한 일이니 어머님께서 안심하세요”라고 말했다. 풍광명은 감동되여 눈물이 날것만 같았다. 그러나 부모에게 자식은 살점과 같은데 어찌 아들이 다른 사람한테 신장을 떼주는것을 찬성할 부모가 있겠는가? 풍광명은 다시 요명봉을 찾아가서 부모한테 신장기증사실을 말했는가고 물어보았다. 그러자 요명봉은 “우리 부모는 모두 상해에서 품팔이를 하고있는데 제가 어릴 때부터 그들은 외아들인 저의 말을 모두 들어주었습니다. 이 일을 그들은 처음에는 반대할수도 있겠지만 제가 견지하면 그들도 더는 반대하지 않을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이 일을 알면 가슴아파할가봐 저는 그들에게 알리고싶지 않습니다”라고 눈물을 흘리면서 “호문형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우상입니다. 그가 생명이 위험한것을 전 보고만 있을수 없습니다”라고 말을 이었다. 이 말을 들은 풍광명은 젊은이 대신 자신이 모험을 해보리라고 마음먹었다. 그녀는 남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의사를 찾아갔다. 2008년 3월 17일, 검사결과 어머니와 아들의 조직적합성은 기본상 맞았다. 풍광명은 안도의 숨을 내쉬면서 격동되여 아들을 껴안고 “얘야, 엄마가 너를 구할수 있게 되여 정말 기쁘구나! 의사는 방금 검사결과를 보고 엄마의 신장을 너에게 줄수 있다고 하더구나”라고 알려주었다. 그러나 호문은 어머니가 자궁근종을 앓고있어 수술을 하면 위험할수 있다는것을 알고있었다. 그는 울면서 “어머니, 만약 어머니가 나에게 신장을 준다면 난 죽어도 받지 않겠어요!”라고 말했다. 고천생도 가슴이 찢어지는것 같았지만 안해를 막을수 없었다. 그는 모자가 무사하기를 비는수밖에 없었다. 2008년 3월 17일 저녁, 풍광명은 요명봉에게 전화를 걸어 그가 신장을 기증하지 않아도 된다고 알려주었다. 요명봉은 깜짝 놀라서 “무엇때문입니까? 혹시 호문형님이…”라고 말끝을 잇지 못했다. 풍광명은 사실을 알려준후 “얘야, 너의 엄마도 널 열달동안 배속에 품고있었고 또 널 20여년동안 키우느라고 갖은 고생을 다했을게다. 그런데 네가 다른 사람에게 신장을 떼준다는걸 알게 되면 얼마나 가슴아파하겠니?  난 엄마로서 호문에게 건강한 신장이 이식될것을 바라지만 또 마찬가지로 너도 건강하게 살아가기를 바란다. 만약 네가 호문을 구하고 건강에 영향을 받는다면 우린 죽어서도 근심걱정으로 불안해할것이다”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요명봉은 풍광명한테서 모성애를 초월한 그 어떤 신성함을 느꼈다. 2008년 4월 3일, 남창대학제1부속병원의 외과의사들은 성공적으로 어머니 풍광명의 신장을 아들 호문에게 이식해주었다.   2009년 음력설, 풍광명과 호문의 몸은 모두 회복되였다. 호문의 가족은 호문의 기숙사에서 새 생명을 맞는 음력설을 쇠였다. 정월 초8일, 요명봉과 그의 부모가 선물을 사들고 찾아왔다. 요명봉의 부모는 상해에서 강서에 설을 쇠러 왔다가 풍광명이 신장을 기증하려는 요명봉의 호의를 거절했다는 사실을 알고 감사를 드리려고 찾아왔던것이다. 풍광명은 “제가 요명봉의 신장기증을 거절한것은 어머니로서의 본능이였을뿐입니다. 감사를 드리려면 당신들에게 감사를 드려야지요. 당신들은 훌륭한 아들을 두었으니깐요”라고 말했다. 두집 부모들은 이런 인연이 있으니 호문과 요명봉을 결의형제로 맺어주는것이 좋겠다고 상의했다. 이렇게 되여 호문과 요명봉은 형제의 인연을 맺게 되였다. 2009년 3월 1일,   《생활가속도》프로에서는 또다시 호문의 친절한 목소리가 울려나와 청취자들을 감동시켰다. “친애하는 청취자 여러분, 여기는 강서성인민방송국입니다. 호문이 주최하는 《생활가속도》프로가 또다시 청취자들과 대면하게 되였습니다. 지난 1년동안 저는 병때문에 이 프로와 잠시 리별하게 되였습니다. 제가 병마와 싸우는 동안 청취자 여러분들께서 저에게 크나큰 관심과 도움을 주셨는데 이에 심심으로 되는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저는 저에게 두번째 생명을 준 어머니에게 특별히 인사를 드립니다. 어머니, 감사합니다!”                                                                       《지음》
107    아나운서아들을 살린 어머니 댓글:  조회:6644  추천:0  2010-04-09
  강서인민방송국 아나운서 호문의 본명은 고옥강이다. 1982년에 감숙성 옥문시에서 태여난 호문은 2002년에 강서구강학원을 졸업한후 남창시인민방송국에 취직하여 사회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2007년에 강서인민방송국에 전근해간 그는 유모아적이고도 품위있는 목소리로 《생활가속도》프로를 사회하여 “금패(金牌)아나운서”로 되였다. 2008년 2월 27일, 남창대학제1부속병원에 입원한 호문은 뇨독증말기라는 진단을 받았다. 의사는 신장이식수술을 하는 길밖에 없다고 알려주었다. 호문의 아버지 고천생은 53살인데 이미 퇴직하였고 어머니 풍광명은 51살인데 몸이 불편하여 몇년전에 정리실업을 당했다. 아들이 뇨독증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은 고천생부부는 하늘이 무너지는것만 같았다. 풍광명은 작년 11월에 자궁근종에 걸렸다는 진단을 받고 치료를 받고있는 중이지만 자신의 몸을 돌볼 겨를이 없었다. 그녀는 의사의 손을 꼭 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선생님, 저의 신장을 아들에게 주겠으니 제발 제 아들을 구해주세요”라고 애걸했다.   고천생은 그런 안해를 껴안고 “당신은 몸상태가 좋지 않으니 내 신장을 내놓겠소”라고 말했다. 의사는 우선 조직적합성이 맞는 신장을 찾기가 어렵다는 점과 직계가족이 맞을 확률이 높기는 하지만 검사해보아야 한다는 점을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2008년 2월 28일, 강서인민방송국의 지도부, 동료 및 보도매체의 친한 기자들이 병문안을 왔다. 그들은 신장이식수술을 하려면 거액의 자금이 수요되고 조직적합성이 맞는 신장이 있어야 하며 호문의 부모는 가정생활이 어려워 치료비용을 감당할수 없는 정황이라는것을 료해하고 사회의 힘을 동원하여 모금하기로 결정했다. 그 이튿날, 국지도부에서는 방송을 통하여 호문이 뇨독증에 걸렸다는 소식을 공개하면서 사회의 도움을 청했다. 2008년 3월 3일, 검사결과 호문의 아버지 고천생은 1996년에 횡경막종양수술을 받았고 고혈압이기때문에 장기를 기증하기에 합당하지 않았다. 그리고 병원에서도 조직적합성이 맞는 신장을 단시일내에 찾기가 어려웠다. 신장이식수술을 빨리 하지 않으면 생명이 위태롭게 된다. 호문의 부모가 속수무책으로 울고만 있을 때 한 젊은이가 찾아와서 신장을 기증하겠다고 나섰다.   요명봉이라고 하는 그 젊은이는 대학생이였다. 그는 강서성인민방송국의 《생활가속도》프로를 듣고 이 프로의 사회자 호문이 뇨독증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였다. 호문을 만나서 호문의 싸인까지 받은적이 있는 그는 처음에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는 우상처럼 숭배하고 형님처럼 존경하던 호문이 죽는것을 보고만 있을수 없었다. 호문의 부모를 찾아온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저와 호문형의 혈형은 모두 A형이여서 희망이 큽니다. 저의 신장을 하나 떼내여 호문형을 구할수만 있다면 전 정말 기쁘겠습니다!” 호문의 부모는 뜻밖에도 고마운 젊은이가 나타나서 신장을 기증하겠다고 하자 너무 감동되여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그런데 위생부에서 발부한 《장기이식기술림상응용관리잠행규정》에는 친척이 아닌 산사람의 장기기증은 제창하지 않는다고 했기때문에 요명봉이 호문에게 신장을 기증하려면 어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우리 나라에는 친척이 아닌 사람이 신장을 기증한 사례가 있었기때문에 쌍방에서 매매행위가 없었다는것을 증명하기만 하면 해당부문의 비준을 얻을 희망이 있었다. 이튿날 검사해보니 요명봉과 호문의 조직적합성은 16항이 모두 맞아떨어졌다. 의사는 이런 확률은 의학상에서 10만분의 1이라고 하면서 기적이라고 말했다. 2008년 3월 8일, 호문의 어머니 풍광명은 은인에게 감사를 드리기 위해 과일을 사들고 요명봉의 기숙사로 찾아갔다. 검사결과를 기다리고있던 요명봉은 자신이 우상으로 여기고있는 호문형을 구할수 있다는 말을 듣고 너무도 기뻐서 아이들처럼 퐁퐁 뛰였다. 풍광명은 “너의 부모도 네가 신장을 기증하려는 사실을 알고있느냐”고 물었다. 그런데 요명봉은 그 물음에 선뜻 대답을 못하고있다가 “압니다”라고 얼버무리는것이였다. 그런 요명봉의 태도에서 풍광명은 그가 부모를 속이고있다는것을 느꼈다. 풍광명은 병원에 돌아와 의사한테 “신장을 기증하면 정상적인 사람처럼 생활할수 있는가”고 물어보았다. 의사는 리론상에서는 신장 하나를 떼내도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하지만 힘든 로동을 할수 없으며 앞으로 조심하지 않아 유일한 하나의 신장이 손상을 받는다면 생명이 위험할수 있다고 알려주었다. 의사의 말을 들은 풍광명은 놀라서 즉시 요명봉한테 전화를 걸어 이런 사실을 알려주며서 신중하게 고려해보라고 권고했다. 하지만 요명봉은 “제가 이미 신중하게 고려한후 결정한 일이니 어머님께서 안심하세요”라고 말했다. 풍광명은 감동되여 눈물이 날것만 같았다. 그러나 부모에게 자식은 살점과 같은데 어찌 아들이 다른 사람한테 신장을 떼주는것을 찬성할 부모가 있겠는가? 풍광명은 다시 요명봉을 찾아가서 부모한테 신장기증사실을 말했는가고 물어보았다. 그러자 요명봉은 “우리 부모는 모두 상해에서 품팔이를 하고있는데 제가 어릴 때부터 그들은 외아들인 저의 말을 모두 들어주었습니다. 이 일을 그들은 처음에는 반대할수도 있겠지만 제가 견지하면 그들도 더는 반대하지 않을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이 일을 알면 가슴아파할가봐 저는 그들에게 알리고싶지 않습니다”라고 눈물을 흘리면서 “호문형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우상입니다. 그가 생명이 위험한것을 전 보고만 있을수 없습니다”라고 말을 이었다. 이 말을 들은 풍광명은 젊은이 대신 자신이 모험을 해보리라고 마음먹었다. 그녀는 남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의사를 찾아갔다. 2008년 3월 17일, 검사결과 어머니와 아들의 조직적합성은 기본상 맞았다. 풍광명은 안도의 숨을 내쉬면서 격동되여 아들을 껴안고 “얘야, 엄마가 너를 구할수 있게 되여 정말 기쁘구나! 의사는 방금 검사결과를 보고 엄마의 신장을 너에게 줄수 있다고 하더구나”라고 알려주었다. 그러나 호문은 어머니가 자궁근종을 앓고있어 수술을 하면 위험할수 있다는것을 알고있었다. 그는 울면서 “어머니, 만약 어머니가 나에게 신장을 준다면 난 죽어도 받지 않겠어요!”라고 말했다. 고천생도 가슴이 찢어지는것 같았지만 안해를 막을수 없었다. 그는 모자가 무사하기를 비는수밖에 없었다. 2008년 3월 17일 저녁, 풍광명은 요명봉에게 전화를 걸어 그가 신장을 기증하지 않아도 된다고 알려주었다. 요명봉은 깜짝 놀라서 “무엇때문입니까? 혹시 호문형님이…”라고 말끝을 잇지 못했다. 풍광명은 사실을 알려준후 “얘야, 너의 엄마도 널 열달동안 배속에 품고있었고 또 널 20여년동안 키우느라고 갖은 고생을 다했을게다. 그런데 네가 다른 사람에게 신장을 떼준다는걸 알게 되면 얼마나 가슴아파하겠니?  난 엄마로서 호문에게 건강한 신장이 이식될것을 바라지만 또 마찬가지로 너도 건강하게 살아가기를 바란다. 만약 네가 호문을 구하고 건강에 영향을 받는다면 우린 죽어서도 근심걱정으로 불안해할것이다”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요명봉은 풍광명한테서 모성애를 초월한 그 어떤 신성함을 느꼈다. 2008년 4월 3일, 남창대학제1부속병원의 외과의사들은 성공적으로 어머니 풍광명의 신장을 아들 호문에게 이식해주었다.   2009년 음력설, 풍광명과 호문의 몸은 모두 회복되였다. 호문의 가족은 호문의 기숙사에서 새 생명을 맞는 음력설을 쇠였다. 정월 초8일, 요명봉과 그의 부모가 선물을 사들고 찾아왔다. 요명봉의 부모는 상해에서 강서에 설을 쇠러 왔다가 풍광명이 신장을 기증하려는 요명봉의 호의를 거절했다는 사실을 알고 감사를 드리려고 찾아왔던것이다. 풍광명은 “제가 요명봉의 신장기증을 거절한것은 어머니로서의 본능이였을뿐입니다. 감사를 드리려면 당신들에게 감사를 드려야지요. 당신들은 훌륭한 아들을 두었으니깐요”라고 말했다. 두집 부모들은 이런 인연이 있으니 호문과 요명봉을 결의형제로 맺어주는것이 좋겠다고 상의했다. 이렇게 되여 호문과 요명봉은 형제의 인연을 맺게 되였다. 2009년 3월 1일,   《생활가속도》프로에서는 또다시 호문의 친절한 목소리가 울려나와 청취자들을 감동시켰다. “친애하는 청취자 여러분, 여기는 강서성인민방송국입니다. 호문이 주최하는 《생활가속도》프로가 또다시 청취자들과 대면하게 되였습니다. 지난 1년동안 저는 병때문에 이 프로와 잠시 리별하게 되였습니다. 제가 병마와 싸우는 동안 청취자 여러분들께서 저에게 크나큰 관심과 도움을 주셨는데 이에 심심으로 되는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저는 저에게 두번째 생명을 준 어머니에게 특별히 인사를 드립니다. 어머니, 감사합니다!”                                                                       《지음》
106    임신한 정부를 시집보낸 뒤 댓글:  조회:3721  추천:0  2010-04-07
105    손자와 손자병법 댓글:  조회:4812  추천:0  2010-04-07
  손자는 손무(孙武) 라고도 한다. 자는 장경(长卿)인데 제나라 낙안, 지금의 산동성 혜민 출생이다. 손자는 춘추 말년의 저명한 군사가다. 그의 선조는 진국의 공자 진헌이다. 기원전 672년 진선공 21년, 진헌은 내란으로 제나라로 피신해 이름을 전헌이라 고쳤다. 제나라를 위해 전공을 세운 전헌에게 제나라 왕은 손씨라는 성을 하사해 이름을 손서라고 부르게 했다. 군사적 재능이 뛰어난 손서는 손자의 할아버지다.     후에 제나라에 내란이 일어나 손자는 고향을 떠나 지금의 강소성, 안휘성, 절강성 일대인 오나라로 피신했다. 손자는 한동안 은거생활을 해오다가 나중엔 한 대신의 천거를 받아 오나라 왕 합려를 알현하게 되었다. "사기-손자열전"의 기재에 보면 손자가 오왕을 알현할 때 오왕이 "그대 13편의 병서를 모두 읽었소."라고 말한 기록이 있다. 그 13편의 병서가 바로 병법서로서 사상 최초 그 권위를 자랑하는 "손자병법"이다.   전해지고 있는 손자의 일화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일화는 "사기-손자열전"에서 나오는 기록이다. 그 일화는 이러하다. 손자는 오왕 합려를 만난 자리에서 궁녀 180명을 두 진영으로 나누고 오왕이 총애하는 두 궁녀를 대장으로 삼은 후 훈련을 시켰다. 그러나 궁녀들은 마치 새로운 유희를 하듯 희희낙락 하면서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 이에 손자는 대장을 맡은, 오왕이 총해하는 두 궁녀를 그 자리에서 참수한 후 다시 훈련을 시켰다. 다시 훈련을 시키자 궁녀들은 섶을 지고 불속에라도 뛰어들 수 있을 정도로 훈련에 열중했다. 오왕 합려는 손자의 능력을 인정하여 그를 장군으로 삼았다. 손자는 초나라, 제나라, 진나라를 제압하여 마침내 오왕 합려가 패업을 이루는데 큰 공을 세웠다. 약 6천여 자에 달하는 "손자병법"은 시계(始计),작전(作戰),모공(謀攻),군형(軍形), 병세(兵勢), 허실(虛實), 군쟁(軍爭), 구변(九變), 행군(行軍), 지형(地形), 구지(九地), 화공(火攻), 용간(用間) 등 13편으로 되어있다. 손자는 "손자병법"에서 보편적인 의의가 있는 일련의 작전원칙과 작전방법을 제기했는데 손자병법은 풍부한 군사변증법사상을 내포하고 있다. 그의 병법사상은 중국 고대 군사학이 성숙되었음을 보여준다. "손자병법"은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졌다. 기원 8세기에 "손자병법"이 일본에 전해진 후 18세기 후부터 프랑스, 영국, 독일, 러시아어로 출판되었다.     "손자병법"은 나라와 나라 사이에는 반드시 충돌이 있기 마련이며 충돌이 벌어지면 전쟁을 하게 되고 전쟁은 곧 생사존망과 연결되기에 계속 생존해 나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도(道), 천(天), 지(地), 장(将), 법(法)의 다섯 가지 특성을 이해해야 한다고 적고 있다. "손자병법"에서 적고 있는 도(道)란 백성이 기꺼이 윗사람과 더불어 생사를 함께 하고자 결심하고 위태로움을 만나도 두려움이 없는 것이고 천이란 것은 음양, 추위, 더위, 때와 같이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자연의 혜택이며 지라는 것은 땅이 가져다주는 지리적 조건으로 전쟁을 하는 당사자 간의 거리, 지형, 땅의 면적 등을 말하고 장이란 군을 통솔하는 장수가 지략, 신뢰, 인의, 용맹을 갖추었는가 하는 것이며 법은 군대의 편성과 그 조직, 명령계통이 잘 되어 있는가 하는 것과 병기를 말한다. 이 다섯 가지를 이해하게 되면 언제 용병을 하며 어느 때는 용병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손자병법"을 통해 우리는 손자가 천시(天时), 지리(地利), 인화(人和)를 매우 중시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약 백성들이 전쟁을 싫어한다면 그 어떤 작전을 쓴다 해도 소용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병사를 거느리면 반드시 그 마음도 함께 거느려야 한다. 또한 손자는 "손자병법"에서 전쟁의 가장 높은 경지는 모략의 운용이라고 하면서 군사를 쓰는 최상의 방법은 적의 계략을 파악하여 이를 치는 것이라고 했다. 즉 상대를 알고 자신을 알면 백번을 싸워도 위태롭지 않으며 전쟁을 잘하는 사람은 상대를 조정하여 자기가 있는 곳으로 유인하여 싸움터로 허겁지겁 달려가야 하는 수고로움을 아낀다는 것이다. 손자는 이 모든 것보다 우선은 백전백승하는 사람이 아니라 싸우지 않고 상대를 굴복시키는 것이라고 했다. 이 점에서 우리는 손자가 반드시 물리적인 접촉을 통한 싸움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승패에 관계없이 양측이 모두 큰 손실을 입는 싸움보다도 최대의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것은 모략의 운용을 첫자리에 놓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손자병법"은 중국 고대 군사사상에서 빛나는 한 폐지를 수록했다."손자병법"은 2000여년전의 군사이론을 계통적으로 연구한 저서이다."손자병법"은 군사지리학, 군사 후근보장학, 군사심리학 등 여러 군사 분야의 지식을 망라하고 있다. 세계적으로 지금까지도 "손자병법"을 지혜의 결정체로 인정해 오고 있는 그 까닭은 "손자병법"의 바탕으로 되고 있는 철학성이 심후하고 정치 경향성이 진보적이기 때문이다. 손자는 선인들의 진보적인 유물주의 전통을 계승 발양했으며 군사 활동 자체의 특징에 근거해 자신의 소박한 유물주의 립장과 태도를 "손자병법"을 통해 천명했다.     손자는 천도는 일종의 자연적인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으며 전쟁을 객관 물질운동의 현상으로 대하면서 전쟁활동의 자체 특성에 따라 실사구시적으로 전쟁실천을 지도해 나갈 것을 주장했다. "손자병법"에서 군사문제에 대한 손자의 이성적인 인식은 민본주의정신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민본주의 사상은 "손자병법"의 또 하나의 철학사상이다. 손자는 현명한 정치와 백성의 이익은 전쟁활동을 진행함에 있어서의 정치적인 전제라고 했다. 그는 전쟁 중 결책과정에서 백성의 이익을 돌보는 기초에서 적합한 결책을 내려야 하며 가장 적은 대가로 승리를 거두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손자가 군졸들을 사랑하고 포로를 우대하며 상과 벌을 평등하게 내려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손자의 민본주의 정신이 군사정책면에서의 집중적인 구현이라고 볼 수 있다.     변증법적이고 능동적인 사유방식은 "손자병법"의 영혼이다. 손자의 병법사상은 일찍부터 그 영향이 군사범위를 초월했다. 각국의 정치가, 외교가, 경제가와 과학, 체육계 인사들도 "손자병법"에 대해 절찬을 아끼지 않고 있다. 프랑스의 해군 상장 라크스트는 "손자병법"의 모략은 "전쟁에 적응될 뿐만 아니라 중대한 정치적인 결책에도 도움을 주고 있다."고 했다. 일본의 경제학자들은 10권에 달하는 "손자병법 경영총서"를 펴냈는데 이 책은 경제 분야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미국의 학자 죠지는 "손자병법"은 오늘의 군사 지휘관과 현대 경영학자들이 참답게 연구할 명작이라고 하면서 손자병법은 여전히 큰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104    심장에 14년동안 숨은 탄알 댓글:  조회:3591  추천:1  2010-04-06
  금년에 44살인 부계림은 호남성 회화시 원릉현에서 태여났는데 20세기 90년대에 농한기만 되면 과일도매장사를 했다. 1995년 양력설, 배 한척을 세맡은 부계림은 고장현의 과수재배농한테서 귤 한척을 샀다. 땅거미가 질 무렵 귤을 다 싣자 운반공들이 모두 돌아가고 부계림부부와 배사공만 남았다. 부계림은 배사공을 고물에 가게 하고 안해는 배에서 기다리게 한후 자신은 이물에 가서 배를 몰 준비를 했다. 바로 그때 대안으로부터 작은 배 한척이 쾌속으로 질주해오고있었다. 그 작은 배는 부계림의 배에 바싹 다가서더니 두 젊은이가 짐을 실은 배에 뛰여올랐다. 부계림이 무슨 일이냐고 물으려는데 상대방이 부계림의 검은 가죽가방을 빼앗으려고 했다. 검은 가죽가방속에는 과수농들에게 지불할 돈5000여원이 들어있었다. 부계림은 죽을 힘을 다해 가방을 끌어안으면서 강도를 잡으라고 소리쳤다. 그때 두 강도가 저마다 총을 한자루씩 빼들었다. 부계림은 총앞에서 어찌할바를 몰랐다. 두 강도는 부계림을 향해 “땅! 땅! 땅!”하고 총을 세방이나 쏘았다. 두방은 왼쪽 허벅다리에 맞고 한방은 앞가슴에 명중되였다.  총에 맞은 부계림은 더 견뎌내지 못하고 넘어지고말았다. 두 강도는 가죽가방을 빼앗은후 신속히 뛰여내려 작은 배를 타고 대안으로 도망쳤다.사건은 순식간에 일어났는데 전 과정은 2분도 걸리지 않았다. 배사공과 부계림의 안해가 달려왔을 때는 부계림의 몸에서 시뻘건 피가 막 흘러나오고있었다. 배사공과 부계림의 안해는 급히 부계림을 원릉현의 한 병원으로 실어갔다. 의사는 수술대에 누운 부계림의 왼쪽 허벅다리에서 탄알 두알을 꺼냈다. 앞가슴에 명중된 탄알은 하나의 륵골을 끊어놓았는데 의사가 부계림의 가슴을 가르고 오래동안 흉강내부를 살펴보았지만 탄알을 발견하지 못했다. 수술대우에 누운 부계림은 “가능하게 탄알이 갈비뼈를 명중한후 체외로 빠져나갔을것입니다”라고 하는 의사의 말을 들었다. 15일후 부계림은 퇴원했는데 그때 현공안국에서 흉수를 붙잡았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범죄혐의자 장용군과 라강도 원릉현사람인데 도박에서 빚을 진후 빚재촉이 심해지자 돈에 혈안이 되여 눈에 쌍심지를 켜고 다니다가 장사군 부계림을 강탈하기로 마음먹었던것이다. 심사결과 라강은 주범인데 부계림의 가슴에 명중된 그 탄알은 라강이 쏜것이였다. 회화시중급인민법원에서는 라강을 사형에 처하고 종범 장용군을 유기도형 17년에 처한다고 판결했다.하지만 그후부터 부계림은 총상후유증에 시달려야 했다. 비가 오는날이면 가슴이 아파났고 평소에 약간만 힘을 써도 흉강을 두드리는것처럼 심장이 쿵쿵 뛰군 했다. 병원에 가서 보이니 의사는 심전도검사를 해본후 심률성합병증 이니깐 휴식을 잘하고 가슴이 아플 때 “심률정(心率停)”을 복용하면 고통을 덜수 있다고 알려주었다. 2005년 6월의 어느날, 부계림은 밥을 먹다가 갑자기 가슴이 몹시 아파서 두손으로 밥상을 꽉 잡았다. 부계림의 안해는 남편이 고통스레 얼굴을 찡그리고 진땀을 흘리는것을 보고 병원에 가보라고 권고했다. 그러나 부계림은 “고질병이니 좀 지나면 괜찮소”라고 말했다.그후부터 동통은 더욱 빈번하고 심해졌다. 남편이 점점 더 견디기 힘들어하는것을 보고 부계림의 안해는 도시병원에 가서 검사해보자고 재촉했다. 그러나 부계림은 “좀 더 지나보고 그냥 아프면 병원에 찾아가겠소”라고 말했다. 그후 1년남짓한 동안 아픔이 잠잠해지자 부계림은 병원에 가서 검사해보겠다던 생각을 잊어버렸다. 2009년 5월초, 부계림은 페암으로 고생하는 아버지를 모시고 원릉현중의병원으로 찾아갔다. 아버지의 병을 치료하는 동안 부계림은 심장이 불쑥 뛰쳐나올것처럼 아파서 ?광선검사?CT검사를 해보았다. 검사결과 의사는 부계림의 심장에서 검은 그림자가 함께 뛰는것을 발견하고 병이 중하니 장사에 가서 검사해보라고 권고했다. 부계림은 아버지가 사망된후 또 심장이 뛰여나올것처럼 몹시 아파 고통에 시달리다가 혼절까지 했다. 안해가 심장을 누르면서 인공호흡을 시켜서야 깨여난 부계림은 “빨리 택시를 부르오. 장사병원으로…”하더니 또 까무러쳤다. 그날밤, 병세가 위급한 부계림은 장사의 중남대학상아병원으로 호송되였다. 구급을 거쳐 부계림은 다시 깨여났다. 의사들이 ?광선검사?CT검사를 한 결과 부계림의 심장에 직경이 10밀리메터이고 길이가 13밀리메터인 검은 물체가 있는것을 발견했다. 그 검은 물체는 심장에 붙어서 심장과 함께 뛰고있었다. 심장의 표면으로 보면 아무런 흔적도 없었지만 아무때나 근육수축으로 심근을 돌파한후 심방(心房)에 진입해 대출혈을 일으킬 위험이 있었다. 의사들은 이 물체가 무슨 물체인지 알수 없었지만 심장병변으로 자라난 종양이 아니라 외부의 물체에 심장이 손상을 입은후 심장에 남아있는 이물질이라는것을 판단했다. 의사들은 부계림을 보고 심장이 손상을 입은적이 없는가고 물었다. 부계림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자신이 14년전에 강도들한테 총상을 입은적밖에 없었다. 그런데 당시 병원에서 수술할 때 의사는 허벅다리에 맞은 탄알 두알만 꺼내고 가슴에 명중된 탄알은 이미 체외로 빠져나갔다고 했던것이다. 부계림은 14년전의 일을 의사들한테 상세하게 이야기했다. 의사들은 고분별률의 CT검사를 해본후 부계림의 심장속에 들어있는 이물질이 확실히 탄알이라는것을 발견했다. 탄알은 심장벽과 2밀리메터 떨어져있었는데 자칫하면 심근을 뚫어놓을 가능성이 있었다. 의사들은 믿을수가 없었다. 탄알이 심장을 명중한후 14년동안이나 무사하게 견뎌왔다니?!  탄알의 위치로 보아 당시 탄알이 심장을 명중했을 때 부계림을 사망에 이르게 할수도 있었다. 그리고 심장속에 숨은 이 “시한폭탄”은 아무때나 심장을 뚫어 만회할수 없는 후과를 초래할수 있었다. 만약 직접 눈으로 목격하지 않았다면 천방야담이라고 했을것이다. 구경 무슨 원인이 조성한것일가?   환자의 생명이 위급했기때문에 의사들은 더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탄알을 꺼내는것이 당면한 급선무였다. 이때 부계림은 손으로 가슴을 누르면서 아픔을 참을수 없다고 소리쳤다. 이런 정황이 계속되면 심장자체의 강유력한 수축으로 탄알이 심근벽을 뚫어서 생명이 위험할수 있었다. 한시급히 탄알을 꺼내야 했다. 그러나 탄알이 이미 심근과 융합되여 일체(一 )로 되였고 탈알의 위치가 심장의 관상동맥과 밀접히 이어져있어 수술하기 매우 어려웠다. 해부위치가 복잡하고 자칫하면 두가지 정황이 나타날 가능성이 있었다. 첫째, 탄알을 억지로 꺼낸다면 혈관벽에 손상을 주어 대출혈을 일으킬수 있었고 둘째, 흉강을 해부할 때 외부의 힘으로 탄알을 움직여 탄알이 심근을 뚫고 심방에 진입하여 대출혈을 일으킬수 있었다. 병원지도부에서는 이 특수한 정황에 중시를 돌리고 병원의 심장외과전문가들을 모두 모여놓고 수술방안을 토론했다. 수술안전을 최대한 보장하기 위해 이 병원의 심장외과주임 라만준교수가 책임지고 수술하기로 결정했다. 2009년 7월 6일 오후 3시, 부계림은 수술실로 들어갔다. 라만준교수는 옹근 5시간만에 직경이 10밀리메터이고 길이가 13밀리메터인 탄알을 환자의 심장에서 떼여냈다. 라교수는 또 부계림에게 심장외상회복수술을 해주었다. 수술이 끝난후 부계림은 흉부외과 중환자보호실로 실려갔다. 수술후 부계림의 안해는 남편을 처음 수술한 의사가 “탄알이 갈비뼈를 명중한후 체외로 빠져나갔다”고 하면서 탄알을 꺼내지 않았다면서 남편이 14년동안 고생하고 생명이 위험할번 했기때문에 손해배상을 해야 한다고 원릉현의 모 병원을 법에 고소했다. 하지만 병원측에서는 “당시 우리 병원의 의료수준과 의료설비로는 심장에 숨은 탄알을 발견할수 없었던것은 당연한것이기때문에 손해배상을 할수 없다”고 반박했다. 그러나 소송결과보다 수술성공사례가 더욱 사람들의 중시를 일으켰다. 라만준교수가 이 특수한 수술에 성공한 사례는 일본, 미국, 영국, 프랑스 등 10여개 나라 전문가들의 중시를 일으켰다. 그들은 심근자아수복과 재생기능에 대해 토론했다. 미국 워싱톤의학원의 병리학전문가 노어크는 “중국의 이 수술사례는 진일보 더 깊이 연구할 가치가 있으며 사람들의 중시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인체내부기관의 자아수복과 재생기능 그리고 많은 의난문제는 우리가 풀기를 기다리고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 돌파가 있으면 인류에게 상상할수 없는 복음을 갖다줄것입니다”라고 인정했다.   《법제일보》
103    황당한 보복이 빚어낸 비극 댓글:  조회:3526  추천:0  2010-03-31
   
102    혼외련에 빠졌던 한 녀인의 참회 댓글:  조회:4275  추천:0  2010-03-21
  혼외련에 빠졌던 한 녀인의 참회 려려는 인물도 좋고 성격도 시원시원하여 많은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남편인 소량은 말주변이 없어서인지 교제하기를 싫어했다. 이런 성격차이가 이들의 혼인에 많은 불화를 일으킬줄은 누구도 생각지 못했다… 2001년 봄, 모 회사 부기원으로 사업하는 려려는 이모의 소개로 제대군인이며 모 기업에서 보안사업을 하는 소량을 만나 결혼했다. 당시 려려와 소량의 첫만남은 아주 짧은 시간이였다. 려려가 약속장소에 금방 도착하자마자 그녀의 단위에서 급한 일이 있다면서 그녀를 호출했던것이다. 첫만남의 시간은 아주 짧았지만 려려는 영준하게 생기고 무던해보이는 소량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소량도 이쁘게 생기고 시원시원해보이는 려려에게 한눈에 반했다. 이틀후 소량은 려려에게 전화를 했다. “려려씨인가요? 우리 동물원에서 만납시다.” “동물원이요? 네, 그럼 안녕히!” 려려는 소량의 만나자는 전화를 받자마자 동물원으로 달려갔다. 려려와 소량은 두번째로 동물원에서 만나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려려는 말수가 적지만 녀자의 마음을 잘 리해해주고 따라주는 소량에게 마음이 끌렸다. 나중에 두 사람은 열렬히 사랑하다가 그해 11월에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후 려려는 시댁식구들과 함께 시집에서 살았다. 2002년 겨울, 려려는 귀여운 아들을 낳았다. 시부모들은 덩치같은 손자를 낳아준 며느리를 더욱 아끼고 사랑했다. 려려는 집안일을 할줄 모르는데다가 단위일때문에 바삐 돌아치다보니 시어머니가 집안일을 도맡아했지만 시어머니는 며느리를 조금도 원망하지 않았다. “며느리, 집안일은 걱정말고 밖에서 일이나 잘하게. 그러면 난 만족이네.” “네, 어머님. 하지만 어머님이 고생하는걸 보면 미안해요.” “괜찮네, 나야 집에서 놀고있으니 집안일을 하고 애를 잘 보면 되는거지.” 려려는 며느리를 걱정해주는 시부모가 마음에 들어 로인들에게 속내의와 보건약품 등을 사다주었다. 시어머니는 이웃을 만날 때마다 며느리자랑을 했다. 2004년 겨울, 려려는 사업의 수요로 부기원일을 그만두고 사무실에서 일했다. 사무실은 평소에 별로 할일도 없어 한가할 때가 많다. 하여 려려는 출근하면 컴퓨터에 올라 QQ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남편이 단위에서 집을 분배받자 려려는 시집에서 나와 따로 살림을 꾸렸다. 아들은 시어머니가 데리고 키웠다. 보안일군인 남편이 늘 저녁당직을 서기에 려려는 혼자 밤을 보낼 때가 많았다. 그때마다 려려는 인터넷에 올라 채팅으로 고독한 시간을 보냈다. 나중에 려려는 채팅에 빠졌으며 자기보다 많이 어린 젊은 채팅친구를 사귀게 되였다. 처음에 려려는 정신적으로 의탁할수 있는 젊은 친구를 찾았다고 자호감을 느꼈다. 하지만 상대방이 간절히 만나자고 요구하자 마음이 동하여 한번 만나주었다. 그번 만남의 시작으로 둘은 자주 만났으며 나중에 한이불속에서 재미를 보는 정부관계로 발전했다.   어느날, 려려가 욕실에서 목욕을 하고있는데 려려의 핸드폰에서 메시지가 왔다는 소리가 울렸다. 남편이 무심결에 열어보니 그 젊은 친구가 보낸 메시지였다. “누나, 난 누나가 보고파. 그날 누난 정말 이뻤어요. 언제 다시 만나요?” 소량은 안해가 밖에서 바람을 피우고있다는것을 알아차렸다. 소량은 안해가 바람을 피우고있다는 사실을 장인과 장모에게 일러바쳤다. “사위, 사위를 볼 면목이 없네. 내가 딸을 잘 교육하겠소. 자식을 봐서라도 한번 용서해주게.” 려려도 남편에게 한번 용서해달라고 사정했다. “여보, 내가 잘못했어요. 한번 용서해줘요. 그와 철저히 관계를 끊겠어요.” 소량은 안해를 용서해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요. 그런줄 아오.” 2007년 1월, 려려의 회사에서는 업무의 발전수요에 따라 북경으로 진출하게 되였다. 려려는 아들과 시부모 그리고 본가집을 돌봐야 했기에 회사를 따라가지 못하고 무직업자로 되였다. 집에서 할일없이 한가하게 보내던 려려는 마작에 재미를 붙이기 시작했다. 그해 10월에 려려는 마작판에서 리혼한 남자 강씨를 알게 되였는데 두 사람은 서로 눈이 맞아 관계를 발생했다. 그후부터 강씨는 매일 저녁마다 려려에게 사랑한다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2008년 2월의 어느날 새벽 2시에 강씨한테서 또 메시지가 왔다. “여보, 보고싶소. 당신이 지금 뭘하는지 참 궁금하오.” 려려는 남편몰래 객실에 나와 강씨에게 메시지를 보내다가 화장실로 가는 남편한테 발각되였다. “당신 야밤에 뭘하오?” “아무것도 아니예요.” “핸드폰은 뭔데? 내놓소.” 소량이 안해의 핸드폰을 가로채고 열어보니 강씨에게 보내는 사랑의 메시지였다. “뭐야? 또 바람을 피우는거야? 당장 리혼이야.” 남편이 리혼하려 했지만 려려는 동의하지 않았다. 려려도 남편이 한직장에 다니는 녀자와 관계가 밀접하다는 소식을 들었다. “리혼은 못하겠어요. 만약 리혼하면 난 그 녀자를 찾아가 혼내주고 소문을 퍼뜨리겠어요.” 려려가 막무가내로 나오자 남편도 어쩔수 없는지 더는 리혼한다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번 일은 무사히 지나갔지만 그후부터 려려와 소량은 부부생활을 하지 않았다. 소량은 자주 야근을 했다. 그럴 때마다 려려는 독수공방하기 싫어 강씨를 찾아갔다. 려려는 남편의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마작친구라면서 강씨를 남편에게 소개했다. 소량은 마작놀음에 빠진 사람들은 좋은 사람들이 아니라면서 그들을 멀리하라고 당부했다. 려려는 남편이 그 녀자와 사이좋게 보낸다는것을 알고 그 녀자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계속 우리 남편과 래왕하면 사람을 시켜 널 혼내주겠다.” “뭐예요? 세상사람들은 다 너희들처럼 그런가고 생각하나보는데 우린 그렇지 않아요. 당신과 입싸움을 하기 싫어요. 시간이 있으면 남편공대나 잘하세요.” 려려는 남편이 퇴근하자 낮에 그 녀자를 만났던 이야기를 꺼냈다. “아, 그 녀자요? 금방 배치받아왔소. 대학에서 사귀던 남자친구와 헤여져 많이 속상해하고있소. 불쌍한 사람들을 도와줘야 하지 않겠소?” “그렇게 세심하고 녀자를 잘 생각해주는 당신이 왜 안해에 대해선 무관심이죠?” “당신도 녀자요? 남편도 모르고 가정도 모르는 당신도 한심하군. 그런 대접을 받고싶으면 자신부터 개변하오.” 남편은 집문을 차고 나가버렸다. 려려는 강씨를 만나고싶으면 남편에게 친구와 약속이 있다면서 거짓말을 했다. 처음에는 남편이 안해의 거짓말을 곧이곧대로 믿어주었지만 후에 안해의 친구한테서 알아보고 모든것을 알아차렸다. 려려의 친정집에서도 딸이 또 바람을 피운다는것을 알고 펄펄 뛰였다. “나쁜년, 넌 우리 딸이 아니야. 썩 물러가. 다신 우리 집에 나타나지 말어.” 아들도 아빠한테서 무슨 말을 들었는지 엄마를 멀리하면서 랭정하게 대했다. 려려는 모든 사람들에게 배신당하는 감을 느껴 금방 미칠것만 같았다. 그럴 때마다 강씨가 옆에서 많이 위로해주었다. 소량은 가정을 유지하려 했지만 더는 이런 집에서 살지 못하겠다면서 리혼을 제기했다. 려려는 이때에야 자신이 남편의 속을 너무 상하게 했다는것을 알고 몹시 후회했다. 그는 가정과 아들을 위해 더는 이렇게 보내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며 남편에게 용서를 빌었다.   “여보, 내가 잘못했어요. 다시는 그러지 않을게요. 한번만 용서해줘요. 우리 아들을 봐서라도 네?” “인제와서 그런 말이 무슨 소용이 있소. 그만하고 나가오.” 이튿날 소량은 자신이 싸인한 리혼협의서를 안해앞에 내놓았다. 려려는 이 가정을 더는 유지할수 없다고 생각되여 리혼협의서에 싸인을 했다. 려려가 아들을 키우겠다고 하니 소량은 집을 아들의 이름으로 변경하고 모자가 살게 했다. 그리고 그동안 모았던 저금통장을 전부 안해에게 내놓으면서 아들을 잘 키워달라고 신신당부했다. 이때에야 려려는 자신이 남편을 떠날수 없다는것을 알게 되였고 그가 말수는 적어도 참 좋은 사람이라는것을 절실히 느끼였다. 려려는 자신의 잘못으로 남부럽지 않게 화목하던 가정이 깨여진것을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나처럼 보내는 자매들이여, 속히 각성하고 정신차리세요. 지금도 늦지 않았어요. 이 세상에 뭐니뭐니해도 남편과 가정이 제일 소중하다는것을 잊지 마세요. 남편도 있고 자식도 있어야 화목한 가정이고 행복한 가정입니다.” 지음    
101    바둑대왕 섭위평의 세 부인 댓글:  조회:7464  추천:0  2010-03-21
중국 바둑 대왕 섭위평   바둑대왕 섭위평의 세 부인   바둑대왕 섭위평(聂卫平)은 두번 결혼했지만 모두 실패하면서 감정세계가 한때는 진공상태였다. 그러나 최근들어 한 공개적인 행사에서 아름다운 녀인이 그의 곁에 나타났다. 그녀가 바로 섭위평의 세번째 부인인 란리아이다. 란리아는 섭위평보다 23살이나 어리였다. 섭위평은 란리아와 결혼한것은 “금덩어리를 주은것”이라고 표현했다. 섭위평과 세명의 부인들간에 어떤 사연이 있었을가?     첫번째 부인 공상명 공상명은 일찍 여러번 바둑대회에서 전국1위를 차지하였고 일본의 직업9단 바둑기사를 물리친바 있다. 그러나 결혼후 그녀는 점차 자신의 바둑사업을 포기하고 “내조”에 전념했다. 그녀는 전심전력을 다하여 섭위평을 돌봐주었고 남편이 꿈을 실현할수 있도록 내조했다. 결혼한지 3년만에 그들에게는 아들이 있었다. 세 식구의 가족이 섭위평에게 가져다준것은 생활상의 안정뿐만아니라 정신적인 의탁이였다. 그것은 섭위평이 밖에서 성과를 거두게 하는 원천이 되였다. 이때 섭위평의 기력은  전성기를 맞이했다.              공상명   섭위평의 성공은 첫번째 부인인 공상명의 도움이 아주 컸다고 바둑계인사들이 보고있다. 공상명도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이를 부인하지 않았다.   “당시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나 자신도 바둑에 대해 많은 꿈이 있었지만 그래도 섭위평의 기력이 나보다 훨씬 높다고 생각했기에 그를 도와 그가 품었던 꿈을 꼭 실현해주고싶었다. 나는 내가 도와주면 그가 꼭 실현할수 있을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달콤했던 혼인생활이 1990년에 이르러 큰 변화가 나타났다. 섭위평은 호남텔레비죤방송국에서 조직한 행사에 참가했다가 우연하게 배우 왕정을 알게 되였고 두 사람은 서로 눈이 맞았다. 섭위평은 당시의 일을 이렇게 회억했다. “그때 나와 공상명의 결혼은 이미 깨여지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나는 왕정에 관하여 안해에게 전혀 말하지 않았다. 나는 말해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우리는 결혼10돐기념행사를 조직했는데 많은 친구를 초청했다. 사실 결혼10돐기념행사는 우리의 ‘고별연회’였다. 그러나 당시 행사에 참가했던 많은 친구들은  그 진상을 모르고있었다. 그날 왕정과 그녀의 오빠인 왕강도 행사에 참석했었다. 녀자의 감각은 아주 뛰여났다. 당시 수백명이 있는 로비에서 나는 왕정과 거의 말을 하지 않았는데 공상명은 나와 왕정의 관계를 눈치챘던것이다.”   후에 왕정이 임신을 했지만 아이를 지워버리지 않겠다고 우겼다. 섭위평은 어쩔수 없이 정식으로 공상명에게 리혼을 제기했다.   “여보, 우리 리혼하기요. 왕정과 같이 있으면 난 남자다왔고 너무나 행복했소. 그러는 왕정이 지금 임신을 했소. 난 아직 태여나지 않은 아이에게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하오. 그러니 당신과 리혼한후 왕정과 결혼하려 하오.”   이렇게 섭위평은 한때 동료였고 자신의 사업을 아낌없이 밀어주고 지지해준 첫번째 부인 공상명과 리혼했다.   공상명은 리혼한후 아들의 이름을 공령문(원 이름은 섭운총이였음)으로 고치고 한동안 일본에서 생활했다. 그녀는 아들에게 바둑에선 아버지를 따라배워야지만 다른 면에서는 절대 아버지를 따라배우지 말아야 한다고 항상 일깨워주었다. 공상명은 재혼한후 상해에서 열린 바둑대회에 참가하여 섭위평과 대적한적도 있었지만 두 사람은 한마디 말도 나누지 않았다. 지어 둘은 상대방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확실히 공상명의 마음은 섭위평의 배신을 아직도 용서하지 않은것 같다고 외부에서 보고있다.     두번째 부인 왕정 1991년, 섭위평은 첮번째 부인 공상명과 리혼한후 인차 두번째 부인 왕정과 결혼했다. 결혼하여 3개월만에 왕정은 아들 섭운청을 낳았다.   섭위평은 왕정을 알게 된 과정을 이렇게 회억했다.   섭위평과 왕정   “우리는 호남텔레비죤방송국에서 조직한 행사에서 서로 만났다. 행사가 끝나자 우리는 북경으로 돌아갈 때 같은 기차를 탔으며 한침대칸에 들었다. 헤여질 때 서로 전화번호를 남겼다. 북경에 도착한 이튿날 왕정이 전화를 해서 우리는 함께 가라오케로 갔다. 우리는 가라오케에서 술을 마시면서 재미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가 가라오케에 갔다는것은 이미 그녀를 받아들였다는 말이다.”   섭위평과 왕정은 서로 사랑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의 말밥에 오를가봐 걱정되여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당시 왕정은 중국인민해방군총정치부 부근에서 살았는데 섭위평은 왕정을 만나러 갈 때마다 모자를 꾹 눌러쓰고 사람들의 눈치를 피해다녔다. 왕정도 섭위평을 만날 때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종이로 불을 감쌀수 없듯이 두 사람의 관계를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되였다. 섭위평에게 왕정과 그만두라고 조언해주는 사람들도 많았다. 왕정의 상급에서도 그녀를 찾아서 섭위평과 그만두는것이 좋겠다고 의견을 내놓았다. 지어 그만두지 않는다면 그녀를 신강으로 보내겠다고 했다. 섭위평은 당시 왕정과 그다지 깊은 애정이 있었던것이 아니라 완전히 정신적인 공허감으로 잠시 그녀와 접촉한것이다. 나중에 사람들이 압력을 가하자 섭위평은 오히려 강해졌다. 섭위평은 자신의 선택이였지만 나중에 자신이 아주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것을 깨달았다.   섭위평과 왕정의 결혼생활은 그다지 순조롭지 못했다. 섭위평자신도 두번째 결혼을 이렇게 평가했다.   “우리 둘은 전공이 너무나 거리가 멀었다. 사업적으로 서로 도와줄수 있는것이 거의 없었다. 그녀는 자주 공연을 떠났고 나는 자주 시합을 했기에 둘이 진정으로 감정을 교류할 시간이 너무나 잛았다. 일상생활에서 나는 의존형이였는데 왕정의 도움이 필요했다. 하지만 왕정은 사업형녀자이므로 집안일에 크게 관심이 없었다. 우리는 각자의 전공에서는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지만 집안일을 서로 돌보지 않았다. 당시 나는 아주 짜증났다. 사람이 짜증이 나면 사람들의 간섭을 받지 않는 조용한 곳에서 살고싶어한다. 이것은 말로는 표현할수 없는 짜증이다. 난 너무나 짜증이 났다.”   2001년에 섭위평은 자신의 두번째 10년간의 결혼생활을 결속지었다. 왕정은 섭위평과의 사랑을 이렇게 회억했다. “처음에는 우리도 신혼부부들처럼 참 행복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서로 감정이 멀어졌다는것을 깨달았다. 나는 바둑시합에서 졌을 때 아주 기분이 나빴다. 기분이 나쁠적마다 안해에게 화를 냈다. 우린 애호가 서로 달라 랑만이라는것을 모르고 살아왔다. 하여 결혼하여 생활한지 10년이 되지만 순탄하지 않은 10년이였다.”     세번째 부인 란리아 2001년 4월, 섭위평은 상해로 가서 섭위평바둑(棋牌)구락부를 꾸렸다. 거기서 그는 처음으로 구락부의 고객담당부장인 란리아를 만났다. 섭위평은 비록 이미 두번이나 혼인에서 실패했고 이미 50에 가까운 나이였지만 아름답고 서글서글한 란리아에게 마음이 동했다. 섭위평은 이런저런 구실을 대고 자주 그녀를 만나 사랑의 공세를 들이댔다. 두달후 두 사람은 련애관계로 발전했다. 2001년 8월, 섭위평은 란리아와 그녀의 고향인 귀주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섭위평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것이 인연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나이가 20여세나 차이난다. 모든 면에서 차이가 너무나 크므로 때론 세대차이를 느낄 때도 있다. 그러나 서로 아주 잘 어울리고 즐겁게 지낸다. 결혼할 때에도 나는 꼬물만치도 망설이지 않았다. 나는 마치 금덩어리를 주은듯했다.”   세번째 부인에 대하여 섭위평은 아주 만족해했다. 란리아는 예쁠뿐만아니라 생활을 아주 잘 조직하는 녀인이였다. 란리아는 매일 집에서 남편의 입맛에 맞는 밥상을 준비했다. 하여 섭위평이 집안에 있는 시간이 자연히 많아졌으며 술마시는것도 절제했다. 이런 안해가 있음으로 하여 섭위평이 옷입고 분장하는것도 과거보다 훨씬 깔끔해졌다.   섭위평은 세번째 부인을 늘 자랑했다.   “세번째 결혼은 먼저번 결혼과는 확실히 다르다. 그와의 결혼은 장애가 있었고 세속적인 압력도 많이 받았다. 하지만 난 모든것을 이겨내고 그녀와 결혼을 했다. 그녀와 함께 있으면 공동언어도 많았다. 하여 나는 일이 없으면 늘 집에 머물렀다. 좋은 안해를 두었기에 나는 거의 밖에 나가지 않는다. 그리고 집에 있으면 핸드폰도 켜놓지 않는다.”   섭위평은 세번째로 만난 부인 란리아에 대해 확실히 만족해하고있으며 끝까지 살아갈 동행자라고 자랑했다.   지음    
100    청나라말기의 대군벌 원세개 댓글:  조회:7719  추천:0  2010-03-07
청나라말기의 대군벌 원세개   원세개(袁世凯:1859년 1916년)의 자는 위정(慰庭)이고 호는 용암(容庵)이다. 그는 중국근대사에서 한때 중원땅을 제패했던 북양(北洋)군벌의 시조이며 중화민국 대통령으로까지 취임함으로써 한때 청나라말기, 민국초기의 중국정계를 좌우지했다.     원세개는 1859년 9월 16일에 하남성 항성의 한 관원가문에서 태여났다. 원세개는 과거에 급제를 하지 못하게 되자 종군했다. 1892년에 조선정부에서 내란을 진압하려고 청나라에 파병을 요구했다. 하여 원세개가 군사를 이끌고 조선내란평정에 출전하게 되였다. 조선에 있는 기간에 원세개는 뛰여난 군사와 외교능력을 발휘해 청나라의 중시를 받게 되였다. 1894년에 리홍장의 추천으로 원세개는 주 조선총리대신으로 임명되였다. 1895년부터 천진에서 “신식륙군”을 훈련시켰고 7000여명의 병력을 장악하면서 무시할수 없는 력량으로 되였는바 이를 기초로 자기 세력을 키웠으며 북양군벌의 기틀을 마련했다. 그는 1901년에 직예총독 겸 북양대신으로 임명되였고 1907년에 군기대신 겸 외무부 상서로 추대되였다. 1908년에는 선통(宣统)황제가 즉위하면서 황실의 배제로 내려앉았다.   1911년에 신해혁명이 폭발하면서 내외로 곤경에 빠진 청나라정부에서는 다시 원세개를 등용했으며 그로 인해 그는 총리내각대신으로 군정대권을 잡았다.     대권을 잡은후 청나라 망국의 조짐을 보아낸 원세개는 전국의 혁명세력과 련합하여 청나라황제를 몰아내고 공화제를 실시했다.     1912년 3월, 혁명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관계로 원세개는 중화민국 림시대통령으로 되였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중화민국 초대 대통령으로 부임했다.   대권을 잡은 원세개는 1915년 12월에 황제를 회복, 중화제국을 건립하고 기년을 홍헌(洪宪)으로 개칭했다.       1916년 3월 22일에 내외의 압력으로 제국을 페지하고 민국을 회복했다. 1916년 6월 6일에 원세개는 뇨독증으로 북경에서 57세를 일기로 사망됐다.       미신을  믿고 황제로 된  원세개 20세기초의 중국사회는 아주 복잡했다. 락후한 생산관계와 자주 일어나는 재난으로 백성들의 삶은 고달팠으며 다른 한편으로 부패한 상부구조와 군벌전쟁으로 하여 국면은 여지없이 혼란했다. 이 혼란한 시기를 리용하여 원세개는 전국의 혁명세력과 련합하여 청나라황제를 몰아내고 공화제를 실시했다.원세개는 집권시간이 비록 짧았지만 일국의 국가지도자로서 83일간 “황제”자리에 있었다. 원세개에 대한 전설은 아주 많다. 지금까지도 사람들사이에서 이야기거리가 되고있는것은 원세개의 미신과 황제즉위다. 원세개가 천하의 반대를 무릅쓰고 황제에 등극한것은 풍수를 믿은데 중요한 원인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명리(命理)와 관상이 비범했다는것도 작용했다. 많은 력사자료는 원세개가 황제에 즉위한것은 미신과 큰 관계가 있다는것을 말해주고있다. 항성은 중원에 위치하고있으며 문화적인 전통이 깊은 곳이다. 상명(相命), 풍수, 무술은 당시 사회에서 아주 성행했다. 원씨집안은 상명지술(相命之 )을 믿었다. 1909년에 원세개는 섭정왕 재풍에 의하여 료양의 명의로 고향으로 쫓겨와 창덕에 은거하고있을 때 상명과 풍수에 깊이 빠졌다. 원씨집안의 남자들은 일반적으로 수명이 길지 못했다. 누군가가 통계를 내본적이 있는데 최대한의 수명이 57세였다. 전해지는바에 따르면 현지의 유명한 상명대사(相命大 )가 원세개에게 58세를 넘기지 못할것이라고 했다. 원세개는 조급하여 반문했다. “무슨 푸는 방법이 없겠는가?” 그러자 상명대사는 이렇게 대답했다. “어렵다. 다만 룡포를 입게 되면 풀수 있을것이다.” 원세개는 그 말을 듣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몰래 사람을 보내여 사명대사를 죽여버렸다.   원세개로 하여금 황제의 자리에 오르도록 촉구한것은 표면적으로는 일련의 사건들이였다. 원세개는 대통령부에 깊이 들어박혀있은 까닭에 부하와 친지들이 그의 눈을 가렸다. 친구인 양도는 대거 “군주립헌”이 중국에 가장 적합하다고 주장하면서 공화제는 중국실정에 맞지 않는다고 했다. 부하들은 원세개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도록 요구했고 호소문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량사이, 주계검, 주자제 등 관리들은 각 성의 인민청원단을 조직하여 군주제를 옹호했다. 북경에는 상회청원단, 인력거청원단, 걸개청원단, 기녀청원단 등이 조직되였다. 원세개가 황제에 오른것은 개인의 주관적인 망상이 근원이라면 미신은 그 촉진제였다고 말할수 있다. 미신으로 인해 “구오존상(九五尊相)”이라는 자기암시에 빠진것은 원세개로 하여금 황제에 오르도록 만드는 심리적인 요소였다. 1909년 봄, 원세개는 류배지에서 허장의에게 명을 보아달라고 부탁했다. 허장의는 명을 보고나서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신해년 8월에 운세가 바뀌고 관직이 더욱 높아진다. 8월에 무창봉기가 발발하고 당신은 다시 동산재기하여 내각총리로 될것이다.” 원세개는 자기의 성취를 시대의 선물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개인적인 운명에 따른것이라고 생각했다. 대통령으로 된후에는 더욱 상명선생, 풍수도사들에게 빠졌다. 1913년과 1914년에 그는 가흥련, 장진룡, 곽삼위, 장효초 등에게 자신의 명과 “룡흥지운(황제가 되는 운)”이 있는지를 봐달라고 했다. 집안사람들과 종복들도 가짜미신으로 “천의”를 조작했다. 1914년에 하남성 황성의 원씨조상묘를 지키는 한성이 황급히 북경으로 올라와서 원세개에게 보고문을 올렸다. “원세개의 생부인 원보중의 묘옆에 밤중에 붉은 빛이 나타났는데 그 모습이 홰불과 같았으며 사방을 비춥니다. 그리고 원씨의 조상묘부근에는 자등수(紫藤 )가 자라는데 그 모습이 웅크린 룡과 같고 길이가 1장이 넘습니다. 또한 조상묘의 부근에서는 ‘천명유귀(天命攸 :천명이 귀속된 곳)’라는 글자가 새겨진 돌이 나왔습니다.” 원세개는 그 말을 들은후에 한성에게 큰 상을 내리고 절대 외부인들에게 말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원세개는 장남 원극정을 고향에 보내여 진실여부를 확인하라고 했다. 원극정은 황성에서 서신을 보내여 이렇게 보고했다. “등나무가 아주 빠르게 자라고있으며 굵기가 어린애팔뚝을 넘었고 색갈이 붉은 피빛입니다. 천명이 귀속된 상서로운 증거가 아닌가 합니다.” 원세개는 그 편지를 받고 아주 기뻐했다. 원세개는 서신을 보내여 아들에게 현지에서 사람을 모집해 담장을 쌓아서 보호하며 소나 말이 밟고 다니지 못하게 하도록 당부했다. 당시 북경성의 한 천문학자도 원세게에게 이런 글을 올렸다. “여러날 밤에 천상을 연구해본 결과 삼경이후에 제성(帝星)이 어느 위도를 비추었습니다. 자세히 관찰해보니 바로 하남성 항성이였습니다. 그리고 지금 제성이 이미 북으로 오고있으니 한달후면 북경에 도착할것 같습니다. 이것은 하늘이 내리는 뜻이니 황제에 오를수 있습니다.” 이렇게 여러가지 분위기를 조성하자 원세개는 황제에 오르는것이 자신의 유일한 선택이라고 생각했던것이다.   황제에 오르는것이 천명에 따른것이라면 얼마나 오래동안 황제의 자리에 있을수 있을가? 사료의 기록에 따르면 원세개는 곽삼위에게 그의 조상묘를 관찰하게 하면서 이렇게 물었다. “룡흥지운의 년수는 얼마인가?” 곽삼위는 한동안 계산해보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만일 황제에 오른다면 팔이지수(八二之 )입니다.” 원세개는 다시 물었다. “이는 820년인가? 아니면 82년인가? 그것도 아니면 8년 2개월인가?” 그러자 곽삼위는  대답했다. “황제자리에 얼마나 오래 있을수 있는가는 나중에 스스로 아시게 될것입니다. 천기를 루설할수 없습니다.” 원세개는 혼자서 생각해보았다. 자신의 왕조가 820년이나 간다는것은 있을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8년 2개월밖에 되지도 않을것이라고 생각하여 82년이라고 생각했다. 82년이라면 3대는 내려간다는 말이 아닐가? 그리하여 자신이 황제에 도전해보는것이 가치가 있을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원세개는 황제자리에 오르자마자 전국 백성들의 욕을 바가지로 먹으면서 겨우 83일간 홍헌황제로 있다가 죽게 될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99    성룡의 여인들 댓글:  조회:11724  추천:1  2010-02-16
     성 룡 의 이야기 A B C   성룡 “결혼 이튿날 아들 태여나” 향항영화배우 성룡은 호남위성TV의 《막후이야기(背后的故事)》 프로그램에 출연해 안해 림봉교(林凤娇)와의 련애와 결혼이야기를 밝혔다. 예전에 그는 녀자에게 청혼하는 방식이 매우 단도직입적이여서 림봉교에게 직접 “나 좋아해? 안해?”라고 물었다고 한다. 그러나 림봉교는 그를 완곡하게 거절했고 전화도 하지 않았다.         성룡과 림봉교  림봉교는 줄곧 성룡의 숨겨진 녀인이 되는것을 기꺼이 받아들였고 교제부터 결혼해서 아들을 낳기까지 세상에 알려지지 않도록 조심했다. 오기리(吴绮莉)의 “소룡녀(小龙女)”사건이 발생한후 성룡은 더이상 가족을 숨기지 않았다. 그는 이 프로그램에서 아들의 성장모습이 담긴 사진들과 안해의 젊었을 때 모습을 공개했다. 그는 가족사진을 항상 휴대하고 다닌다고 했다.  성룡과 오기리   연예계에 데뷔한지 약 50년이 된 성룡은 최고로 인기를 끌 때 결혼을 했으며 이 사실을 계속 숨겨왔었다. 성룡은 안해와 결혼한 이튿날에 아들을 얻었다고 한다. 성룡은 세상에 결혼사실이 알려지기전까지 안해를 해외로 보내고 아들을 향항에 데려다가 신분을 숨기고 학교에 다니도록 했다. 성룡은 안해와의 련애를 회상하며 원래 그는 상대방이 맘에 들면 “나는 너를 좋아한다. 너는 어떠냐?”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은후 상대방이 동의하면 바로 행동으로 들어가는 타입이였으나 림봉교에게는 시작부터 거절을 당했다고 한다. 이후 두 사람은 순조롭게 결혼해 아들까지 낳았다. 성룡은 류덕화에 대해 “류덕화가 결혼한 사실을 나는 이미 오래전에 알고있었다. 그러나 그가 결혼을 했든 안했든 그것이 사람들에게 무슨 상관이 있는가?”라고 말했다. 성룡은 안해에 대해 매우 감사해하고있다고 솔직히 밝혔다. “나는 매일 그녀에게 잘하려고 애쓴다. 그러기에 늘 련인절이 오기를 기다리다가도 막상 그날이 오면 사랑의 표시를 하지 못하고있다”고 솔직하게 밝혔다.     성룡아들 “어머니는 나때문에 리혼하지 않고 참고 사셨다” 세계적인 명배우 성룡이 명성과 선행으로는 최고의 위치에 올랐지만 훌륭한 남편이 아니였음이 아들 방조명의 입을 통해 드러났다. 성룡의 아들이자 《남아본색(男儿本色)》  등에 주역으로 출연했던 인기영화배우 방조명은 일전 향항위성방송 연예프로그램에 출연해 자신의 성장사와 가족의 숨겨진 이야기들을 남김없이 털어놓았다.    성룡과 림봉교와 그들 사이 아들 방조명 성룡의 부인이자 방조명의 어머니 림봉교는 청순한 이미지로 1970년대 향항남성들의 우상으로 군림했던 명배우였으나 1982년에 성룡과 결혼하면서 연예계를 은퇴하고 가정주부의 길을 걸어왔다. 방조명은 어머니 림봉교가 20여년의 결혼생활을 불행하게 지냈으며 자신의 눈을 피해 숨어서 울고있는 모습을 종종 볼수 있었다고 밝혔다. 방조명은 “어머니가 몰래 화장실에서 울 때에 창문을 통하여 울음소리를 들을수 있었으나 고민끝에 가서 달래주기보다는 모르는척하는 쪽을 택했다”고 말해 출연자들로 하여금 눈시울을 붉히게 했다. 방조명은 자신이 숭배하는 우상은 아버지가 아니라 희생적인 사랑과 지혜를 몸소 보여준 어머니라며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감정을 드러냈다. 방조명은 또한 “어머니가 아버지와 리혼을 하지 않은 리유는 아들을 훌륭한 사람으로 키워내기 위해서였다”며 “어머니는 숱한 어려움속에서도 아무런 내색없이 이를 악물고 이를 버텨내신 강한 분이셨다”고 감사한 마음을 전했다. 방조명은 성룡의 어떤 점이 어머니를 힘들게 했는지 구체적으로 밝히지는 않았지만 그동안 옆집아저씨 같은 친근한 이미지와는 달리 “추문”으로 이름을 날린 성룡의 행적을 미루어 짐작할만하다는것이 방송을 본 시청자들의 중론이다. 실제로 림청하, 관지림, 장만옥, 류가령, 리가흔, 장자이 등 년령대를 막론하고 중화권미녀배우들중 성룡의 추문상대로 지목된 녀성들은 손에 꼽기 힘들 정도로 많다. 특히 지난 2001년에는 녀배우 오기리와의 사이에서 혼외정사로 낳은 4살짜리 딸이 세상에 공개되면서 전세계를 충격에 빠뜨린바있다. 당시 성룡은 직접 이 사실을 시인하며 한때 연예계 퇴출의 위기를 맞기도 했다.         성룡의 내연녀 이기리와 그녀와 성룡사이의 딸   방조명은 아버지 성룡에 대해서는 “언젠가 언론에 아버지가 잘못한 일을 공개하고 어머니에게 용서를 비는 일을 도와줄수도 있다”고 말하며 “어머니처럼 좋은 부인을 둔 아버지는 정말 행운스럽다”고 강조했다.     성룡 사후 모든 재산을 기부하겠다 성룡은 2008년말에 자신의 사후에는 모든 재산을 기부하고 홀몸으로 떠날것이라고 했다. 한창 인기가 있을 때인 25년전에 성룡은 병원에 입원한 어린 환자가 자신을 보고싶다고 하여 마지못해 그 병원을 찾아갔다. 어린 환자들의 귀여운 모습을 보고 그때부터 기부할 때마다 가슴에 다가오는 형언할수 없는 기쁨이 있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그때부터 오히려 받을 때보다 줄 때가 마음에 평온과 위안을 느꼈다는것이다. 성룡은 자신의 영화사에서 근무하는 직원사랑도 남다르다. 30년간 딱 3명을 해고했으며 최근 10년간은 한명도 해고한 직원이 없다고 한다. 영화계의 명인으로 세계인의 가슴에 각인을 심었다면 이제부터는 나누면서 살아가는 인간기본의 사랑을 몸으로 보여주는 귀중한 모습이다. 성룡은 이렇게 말했다. “필사적으로 돈을 벌어 필사적으로 기부하고 갈겁니다.”     성룡의 두번째 녀자친구 등려군 미국에서 자란 리소룡은 영어가 능숙했고 서양식문화에도 익숙했다. 그는 진정한 의미로 당대의 세계명인으로서 중국의 향항, 일본 등 아시아뿐만아니라 미국에서도 이름을 날린 인물이였다. 하여 제 2의 리소룡으로서 떠오른 성룡도 그렇게 성장하고싶었다. 영어대화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성룡은 갑작스레 미국으로 연수를 떠났다. 친구 진자강도 동행하여 미국으로 떠났다. 진자강은 의식적으로 성룡을 호텔에 던져놓고 떠나버렸다. 성룡은 통역도 없이 말도 못알아들으면서 TV만 보며 호텔에서 지냈다. 어느날 인터뷰일정이 잡혔다는 련락이 왔다. 성룡이 지우고싶어하는것이 리소룡의 그림자였는데 인터뷰에서 성룡을 리소룡의 후계자라며 거론했다. 성룡은 싫어하는 질문들만 잔뜩 받고 기숙사로 돌아왔다. 성룡의 영어수준이 너무 엉망이여서 상영이 취소되였다. 성룡은 그후 영어라는 언어의 장벽을 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어느날, 성룡은 방에서 영어공부를 하다가 사람구경이라도 하려고 해변가에 나갔다가 우연히 산책하는 한 동양녀자를 만났는데 그녀가 바로 대만출신 가수 등려군이였다.                 성룡과 등려군   등려군도 성룡과 비슷한 리유로 미국에 왔는데 성룡보다 영어를 좀 더 잘했던것이다. 친구가 없어 울적하던 성룡은 이것이 인연이라고 생각되여 등려군과 친해졌다. 후에 성룡은 향항으로 돌아가서 무술영화를 찍었다. 전하는데 의하면 등려군은 성룡의 두번째 녀자친구였다. 두 사람은 사이좋게 지내다가 어느 순간부터 관계가 조금씩 틀어지기 시작했다. 성룡은 두 사람이 헤어진것은 순전히 자기 탓이라고 말했다. 성룡은 당시 후배들을 거느리고 다니길 좋아했다. 그러나 고급스럽고 랑망적인 분위기를 추구하는 등려군은 둘만의 시간을 보내기를 즐겼으므로 이러는 성룡이 야속하게 보이였다. 당시 성룡은 가까스로 얻은 성공에 도취되여 등려군의 심정을 알아주지 못했고 그를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거기다가 후배들이 보는 앞에서 등려군에게 이래라 저래라 거들먹거리기가 일쑤였는데 처음에는 등려군이 참아주었다. 하지만 성룡이 계속 괴롭히자 등려군은 참지 못하고 헤여지기로 결심했다. 성룡은 어느날 촬영을 마치고 등려군을 찾아갔다. 등려군은 성룡을 보자 눈물을 흘리며 헤여지자고 제의했다. 성룡은 등려군의 성격을 잘 알고있기에 동의하는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두 사람은 3년간 사귀다가 헤여졌던것이다. 헤여질 때 등려군은 정말로 성룡에 대해 나쁜 감정이 많았겠지만 성룡은 등려군의 그런 감정보다 후회와 아쉬움이 더 많았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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