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옛날과 지금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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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과분한 우스개 사람을 죽이다 댓글:  조회:3729  추천:0  2009-09-14
  2004년 8월중순의 어느날 오후에 보슬비가 솔솔 내리였다. 정주시 모 향진의 자그마한 강가에 무덤이 새로 나타났다. 처량한 울음소리속에서 이윽고 하나둘 사람들이 자리를 뜨기 시작했건만 머리에 검은 상장을 드리운 한 중년사나이만은 친우들과 이웃들의 재삼되는 권고에도 불구하고 묘앞에 꿇어앉아 그냥 비통하게 부르짖고있었다. “여보, 애기엄마, 당신은 우스개로 우리 가정을 망하게 하지 말아야 했어. 당신이 이렇게 떠나면 너무하잖아. 아이구 나의 운명아…” 사망자의 이름은 희작이고 울고있는 사나이의 안해이며 30살이다. 이들에게는 귀여운 아들과 딸이 있다. 희작은 말하기를 좋아하고 떠들석한 분위기를 좋아하며 아무때건 사람들을 만나면 우스개를 피워댔다. 어떤 때는 우스개가 너무 과분하여 오해를 사기도 하고 가끔 말썽도 일으키군 했다. 하여 남편은 몇번인가 안해에게 귀띔을 해주었지만 그녀는 조금도 개의치 않아했다. “왜서요? 난 너무너무 재미나는데. 남들이 놀라와하는것도 재미나고 화를 내는것도 별멋인데요.” 그런데 누가 알았으랴? 그 희작이 즐기던 한마디 우스개소리가 사람들을 놀래운 비참한 비극을 불러올줄을… 어느날 희작은 목화밭에서 솜을 따고있었다. 그때 이 마을에 금방 시집온 새색시 뉴뉴도 함께 솜을 땄다. 희작은 새색시를 보더니 희한한 장난거리가 생겼다고 생각하면서 말을 걸었다. “이봐 새각시, 자네의 남편은 지금 뭘해요?” “네, 언니세요? 그이는 지금 집에 있어요.” 그러자 희작은 웃으면서 말했다. “이봐 뉴뉴, 조심하게. 전번에 내가 영화를 보고 마을로 돌아올 때 어떤 녀자가 자네의 남편 조우와 함께 아주 다정하게 손잡고 치근덕거리는것을 보았댔어. 그날 남편이 집에 늦게 돌아갔지?” “어찌 그런 일이?!” 뉴뉴는 희작의 말을 듣고 너무도 놀라 목화광주리를 땅에 떨구었다. “그런데 난 왜 그런 일을 몰랐을가요? 정말이세요?” “그런 말을 누가 본인의 앞에서 말해주겠어? 그런데 말이야. 내가 한 말을 꼭 비밀로 지키라구. 조우한테는 절대 말해선 안돼.” 뉴뉴가 당황하고 놀라하는 꼴을 보면서 희작은 속으로 깨고소히 웃었다. 그녀는 또 말이 나가는대로 지껄였다. “내가 보건대 그 녀자가 화화같애. 그애는 늘 조우와 같이 다니던데.” 속담에 말하는자는 무심해도 듣는자는 맘속에 새겨둔다고 했다. 사실 희작의 말은 황당하기 짝이 없는 용속한 롱담에 불과했지만 원래 마음이 좁고 고지식한 뉴뉴는 그날 저녁에 남편이 돌아왔던 일을 떠올리고는 희작의 말이 사실이라고 굳게 믿었다. “어디 두고 보자. 감히 금방 결혼한 안해를 속이다니?”  뉴뉴는 몸이 불편하다는 핑게를 대고 치미는 분노를 억지로 참으며 집으로 돌아갔다. 그때 남편 조우가 집마당에서 나무를 패고있었다. 조우는 일하러 나갔던 안해가 일찍 돌아온데다 낯색이 좋지 못한것을 보고 놀라와하면서 물었다. “여보? 어디 아파? 왜 이렇게 일찍 돌아왔어? 낯색도 좋지 않아보이는데?” 남편은 안해를 걱정하고있었지만 뉴뉴는 눈길을 꼿꼿이 세우고 따지고들었다. “영화보던 날 왜 늦었어요? 바른대로 말해요.” “야. 그날 영화보고 친구 왕철네 집에서 마작을 놀다왔지.” “뭐요? 마작을 놀았다구? 참 뻔뻔스럽고 유치해요. 날 바보취급하세요?” 조우가 아무리 해석해도 뉴뉴는 믿지 않고 점점 더 화를 냈다. 뉴뉴는 도끼를 들고 조우의 얼굴을 가리키면서 마구 욕설을 퍼부었다. “사실대로 말하지 않으면 절대 용서하지 않을것이고 리혼할것이야.” 조우는 어안이 벙벙하여 한식경이나 입을 열지 못했다. 이것이야말로 아닌 밤중에 홍두깨가 아닌가? 성실하고 정직한 조우는 자기의 가슴을 치며 절대 그런 일이 없다고 맹세했다. 그래도 안해가 믿어주지 않으니 도끼를 거머쥐고 온 마당이 떠나갈듯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어느 씨팔놈이 나를 물어먹어? 내 그자식과 생사결판을 낼테다.” 성실한 사람이 한번 성을 내게 되면 무섭기 그지없다. 뉴뉴는 자기 남편이 이렇게 성내는것을 한번도 본적이 없었다. 그러지 않아도 뉴뉴는 자기한테 호의로 남편의 비밀을 말해준 희작을 보호해주려 했는데 남편이 이렇게 드세게 나오자 더욱 걱정되여 입을 다물었다. 두 사람은 계속 싸움을 하면서 밥도 먹지 않았고 일도 하지 않았다. 도대체 이런 일이 있었을가 없었을가? 가령 있었다면 어떻게 해야 이 일을 밝혀낼수 있을가? 온밤 생각을 굴리던 뉴뉴는 마침내 좋은 생각을 찾아냈다. 이튿날 아침에 뉴뉴는 일찍 일어나 아침을 든든히 먹고 화화네 집으로 찾아갔다. 그는 화화네 집앞에서 허리에 두손을 지르고 욕을 퍼붓기 시작했다. 한창 아침밥을 먹고있던 화화네 집식구들은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다가 나중에야 그 욕의 내용이 화화가 뉴뉴의 남편을 꼬시였다는것임을 알수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집안에 앉아서 생벼락을 맞는다는 격이 아닌가? 보수통이라고 소문난 화화어머니는 대문을 닫아걸고 화화에게 따졌다. “이년아. 대체 무슨 일이야? 너 저년의 남편과 바람을 피웠니?” 화화는 너무도 억울하여 눈물을 흘리며 변명했다. “무슨 영문인지 나도 모르겠어요. 엄마도 이 딸을 안믿어요? 이 며칠전 난 그냥 외가집에 가있었잖아. 난 우리 마을에서 영화를 돌린것도 모르고있어요.” 그러자 어머니도 알아차린듯 말했다. “옳아, 옳구말구. 이 에미가 정말 얼빤하구나. 넌 외가집으로 놀러갔지.” 어머니는 문을 열고 대문밖에 대고 소리쳤다. “내 딸은 내가 잘 알아. 응, 우리가 성실하다고 꼭뒤에 앉아 오줌을 싸려는구나. 하지만 어림도 없다.” 뉴뉴가 집앞에서 계속 지껄이자 화화의 어머니는 대문을 열고 나가 거치른 목소리로 말했다. “이년이 누굴 욕해?” “남의 남편을 꼬시는 계집을 욕한다.” “개나발을 불지 마. 이년이 생사람을 잡아먹겠네.” “네가 개나발을 분다.” … 두 사람의 말싸움은 점점 더 심해졌다. 나중에 화화네 집식구들이 모두 나오고 뉴뉴의 남편 조우도 달려왔다. 마을사람들도 모여와 구경을 했다. 두 집의 말싸움이 승화되여 나중에 손찌검까지 벌어졌다… 구경군들속에는 희작도 있었다. 그는 벽돌 두장을 깔고 올라서서 재미있게 구경했다. 말싸움이 손찌검으로 벌어지자 그만 너무 놀라 물앉고말았다. 두 집에서 서로 조상 8대까지 욕하며 싸우다가 모두 머리가 터지고 피를 흘렸다. 싸움이 끝나자 조우는 안해를 데리고 촌위생소로 갔고 화화는 어머니를 향위생원으로 모시고갔다. 이때 희작은 례물을 사들고 두 집을 방문하여 진상을 말해주려고 했으나 그들이 용서해줄것 같지 않아 그저 입을 다물고 사태를 지켜보는수밖에 없었다. 온 마을을 떠들썩하게 한 사건이 재빨리 화화네 외가집마을로도 전해져갔다. 화화를 그토록 사랑하던 그 마을의 청년은 단연 퇴혼을 선포했다. 금방 고중을 졸업하고 사회에 첫발을 들여놓은 단순하고 정파다운 화화는 억울하게도 씻어버릴수 없는 치욕을 당하게 되자 집을 뛰쳐나갔다. 화화네집에서는 싸움에서 손해를 본데다가 딸까지 가출했으니 더는 참을래야 참을수 없었다. 화화의 어머니는 무함죄와 명예침해죄로 뉴뉴를 법에 고소했다. 법정에서는 인차 조사에 나섰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화가 희작의 입에서 나왔다는것을 조사해냈다. 남편이 캐묻자 더이상 속일수 없게 된 희작은 사건의 진상을 이실직고했다. 들을수록 분개한 남편은 안해를 땅에 엎어놓고 두들겨패면서 욕사발을 퍼부었다. “야, 이년아. 입덕을 톡톡히 보았지? 네가 쑤셔놓은 벌둥지를 도대체 어떻게 수습할테냐?” 일이 이 지경에 이르러서야 희작은 “화가 입으로부터 나간다”는 말의 진의가 무엇인가를 알았고 “세상에 후회를 고치는 약이 없다”는 뜻이 무엇인가도 알았다. 희작은 생각했다. 가령 화화를 찾지 못한다면 자기는 벌금을 당하든가 아니면 옥살이를 해야 할것이 아닌가? 그러면 이후에 무슨 낮으로 마을사람들을 대한단 말인가? 생각할수록 무섭고 생각할수록 앞이 캄캄해났다. 하여 그는 수면제를 먹고 자살했던것이다.   지음/연변라지오TV신문 제공
77    30년대초 중공실권자 왕명의 전기적인 사랑 댓글:  조회:4772  추천:0  2009-09-14
 앞줄 좌1이 맹경수이고 바로 뒤에 선 사람이 왕명이다.     왕명(王明)의 일생에는 착오도 많고 전기적인 이야기도 많다. 왕명은 한때 리립삼(李立三)의 “좌”경모험주의를 따랐지만 오히려 리립삼에 의해 철직당하고 당적을 보류해두고 관찰당하는 처분을 받았다. 그는 또 당시의 강소성당위 선전부의 일개 자그마한 간사로부터 일약 당중앙의 주요 령도자로 변신했다. 그는 “좌”로부터 극“우”로 뛰여넘었다. 그와 맹경수(孟庆树)의 사랑은 더욱더 곡절적이고 전기적이였다.   모스크바에서의 첫사랑 왕명과 맹경수는 모스크바중산대학에서 서로 알게 되였다.1925년 11월 28일, 왕명은 특혜를 받아 장문천, 왕가상 등 60여명과 함께 쏘련류학을 갔으며 모스크바중산대학 제1기 학생으로 입학했다. 1927년, 왕명은 미꼬브교장의 눈에 들어 학교에 남아 교수를 하는 한편 번역원으로 일했다.   맹경수는 1911년 12월 2일에 안휘성 수현의 한 지주가정에서 태여났다. 1927년에 맹경수도 쏘련류학을 갔으며 모스크바중산대학 제3기 학생으로 입학했다.   당시 중국에서 온 류학생들 대부분이 나이가 어린 까닭에 련애바람이 성행했다. 당시 16살 묘령소녀 맹경수는 용모가 청수했고 몸매도 쭉 빠졌으며 성격 또한 대범하여 남학생들의 이목을 끌었다. 그때 23살나는 왕명은 그녀에게 첫눈에 반해버렸다. 맹경수가 입학했을 때 왕명은 이미 학교에서 명성이 뜨르르했다. 그러나 맹경수는 그에 대해 경의와 흠모의 감정은 가졌지만 사랑의 감정은 느끼지 못했다. 맹경수는 수시로 보내오는 왕명의 사랑신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다른 한 남학생을 사귀였다. 그러나 마음먹으면 꼭 목적을 이루고야 마는 성격의 소유자인 왕명은 맹경수에게 남자벗이 있다 하여 물러선것이 아니라 그녀에게 사랑의 공세를 들이댔다. 1928년 6월, 중국공산당 제6차대표대회가 모스크바에서 열렸다. 미꼬브의 알선으로 왕명은 《대회》의 비서처 번역실 주임을 맡았다. 그는 이 기회를 빌어 대회에서 일할 중산대학생들을 선발할 때 락방된 맹경수를 지명해 대회사업에 참가하게 했다. 맹경수는 미꼬브와 공산국제의 신임을 받고있는 왕명이 전도가 유망한 청년이라는것을 보아내고 원래의 남자와 관계를 끊고 왕명과 사귀기 시작했다. 하지만 왕명의 키가 1메터 50여센치메터밖에 안되여서인지 왕명의 열렬한 사랑이 맹경수의 격정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1929년, 왕명은 귀국할 때까지도 맹경수의 긍정적인 답복을 받아내지 못했다.   “견우”의 실련 1929년 3월, 왕명은 모스크바로부터 귀국했다. 귀국전 미꼬브는 공산국제 동방부의 명의로 중공중앙에 전보를 쳐 왕명의 사업배치를 잘해줄것을 지시했다. 그러나 중공중앙에서는 의연히 원 규정을 견지했다. 즉 무릇 쏘련에서 돌아온 류학생들은 실제사업경험이 결핍하기에 일률로 기층에 내려보내 단련하게 하며 기층에서의 그들의 표현을 보아 다시 중앙 혹은 지방 령도기관에 배치한다. 이에 좇아 왕명은 선후로 상해 호서구위와 호동구위에서 선전사업을 맡아했다. 하지만 왕명은 이렇게 배치하는것이 인재에 대한 랭대이고 인재매몰이라고 생각하면서 사업에서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으며 만리밖에 있는 “직녀” 맹경수를 그리면서 나날을 보냈다.   련정에 빠진 “견우”가 하염없이 “직녀”를 그리워하고있을 때 “직녀”가 은하수를 날아넘어 “견우”의 곁으로 왔다. 1930년에 맹경수는 귀국했다. 귀국후 그녀는 상해 호동구위 부녀위원회 사업을 맡아했다. 하여 둘은 같은 호동구위에서 사업하게 되였다. 왕명은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칠세라 맹경수에게 맹렬한 사랑공세를 들이댔다. 당시 왕명은 중앙의 사업배치에 불만이 있는데다가 남녀간의 련정에 빠져있었기에 사업은 응부하는 식으로 대강대강 해나갔다. 결과 그는 상급에서 맡겨주는 임무를 제때에 완성하지 못해 늘 비판을 받았다. 이로하여 맹경수의 사랑천평이 기울어지기 시작했고 끈질게 달라붙는 왕명을 따돌리려고 세집을 물리고 친구의 세집을 찾아갔다. 왕명이 맹경수의 세집을 찾아갔을 때는 집이 텅 비여있었다. 왕명은 맹경수가 쓰던 몇개의 머리삔이 땅에 버려져있는것을 발견하고 보물이나 발견한듯이 머리삔을 주어서 깨끗이 닦은후 사랑의 기념품으로 소중히 간수했다.   “안해”를 맞다 1930년 7월 9일에 열린 중앙회의에서 리립삼과 왕명이 큰 쟁론을 벌렸다. 화가 치민 리립삼은 왕명에게 “우파”모자를 들씌우고 그의 중앙선전부 비서직무를 해임시켰으며 6개월간 당적을 보류하고 관찰하는 처분을 주고 강소성당위 선전부에 내려보내 간사직을 맡게 했다. 당시 상해에서 독신남자들이 쉽게 경찰들의 주의를 불러일으키는 대상이라 집을 구하기 매우 힘들었다. 강소성당위 선전부 비서 리초리는 왕명에게 가짜안해를 붙여주어 엄호하게 했다. 그 가짜안해가 바로 이견(易 )이란 젊은 처녀였다.   1930년 8월, 리초리는 당조직의 명의로 이견을 성당위기관으로 전근시키고 중요한 사업을 맡겼다. 어느날 저녁 리초리는 이견을 데리고 성당위기관에 가서 왕명과 만나게 했다. 그러면서 집주인이 독신남자에게 집을 세주려 하지 않으니 이견더러 왕명의 안해로 가장하라고 지시했다.   하여 왕명과 이견은 “부부”로 가장하고 베란다가 달린 10여평방메터되는 작은 집을 세맡았다. 이견은 당조직과 동지의 안전을 책임지느라 노력을 다했지만 왕명은 출장이 잦아서인지 “안해”에 대해 전혀 관심을 돌리지 않았다. 그녀와 사업에 관하여 언급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경력에 대해선 더욱 입을 열지 않았다. 왕명은 의연히 맹경수에 대한 정을 잊지 못하고 “안해”에 대해 무감각했다. 아련하고 단정한 이견은 가짜안해로 있는것이 달갑지 않았고 고독한 생활도 싫었으며 “남편”의 랭대를 받기가 더욱 싫었다. 이견은 참다못해 조직의 동의를 거친후 원래의 거처로 돌아갔다.   마침내 이룬 소원 맹경수가 사랑의 대문을 꼭 닫아걸고있었지만 왕명은 실망하지 않았다. 1930년 7월 30일, 맹경수는 불행하게 체포되여 상해 룡화간수소에 갇혔다. 이는 왕명에게 사랑의 마음을 표현할 절호의 기회를 가져다주었다. 왕명은 위험을 무릅쓰고 세번이나 룡화간수소에 가서 맹경수를 면회했다. 맹경수의 둘째삼촌 맹한지는 조카를 살리려고 관계를 통해 국민당관원들에게 돈과 뢰물을 보냈다. 맹경수는 마침내 1930년 11월 22일에 출옥했다.   맹경수는 왕명의 열렬하고 진실한 사랑에 감동되여 출옥한 이튿날 그와 결혼식을 올렸다.     1931~1934년 중공 최고실권자시절의 왕명     연안에서의 맹경수   44년을 이어온 결혼생활 왕명과 맹경수는 1930년 11월 23일에 결혼해서부터 1974년 3월 27일에 왕명이 모스크바에서 병으로 세상뜨기까지 함께 44년을 생활해왔다.   44년래 왕명은 쉽지 않게 얻어온 맹경수와의 결합을 더없이 소중히 여겼다. 그는 맹경수를 첫사랑때처럼 줄곧 관심하고 사랑해주었다. 맹경수도 왕명을 살뜰하게 보살펴주었다.   왕명과 맹경수 부부는 슬하에 자식 셋을 두었는데 딸 하나와 아들 둘이였다. 큰딸 왕방니(王芳 )는 1932년 1월 18일에 왕명이 공산국제 대표로 있을 때 모스크바에서 태여났는데 그는 중국어를 모르고 한번도 중국을 다녀온적이 없었다. 1937년 11월, 왕명부부는 쏘련에서 귀국하여 항일전쟁에 참가할 때 큰딸을 데려오지 않고 당시 공산국제총서기로 있던 지미뜨로브에게 주어 양딸로 삼게 했다. 전하는데 의하면 왕방니는 후에 녀비행사로 있었으며 1985년 1월 27일에 사망됐다.   두 아들은 모두 연안에서 태여났다. 큰아들은 왕범지(王凡芝)라고 하는데 1939년생이고 둘째아들은 왕범정(王凡丁)이라고 하는데 1945년 10월 2일에 태여났다. 맹경수는 두 아들을 무원칙적으로 사랑했다. 줄곧 그들을 집에 가두어두고 소학교도 보내지 않고 집에서 글을 배워주었다. 큰아들은 자란후 직접 초중에 입학했는데 그것마저 며칠밖에 다니지 못하고 부모를 따라 쏘련으로 갔다. 그때로부터 두 아들은 줄곧 쏘련에서 생활했다. 지금은 모두 로씨야국적을 가지고있다. 왕범지는 군인이 되였고 로씨야처녀와 결혼했다. 왕범정은 모스크바국제관리학원을 졸업하고 쏘련과학원원동연구소에서 사업했다. 그는 지금껏 결혼을 하지 않았다. 쏘련이 해체된후 그는 10여년간 해온 원동연구소사업을 그만두고 중국무술중심을 꾸렸다.   부동한 출신, 부동한 경력, 부동한 성격으로 인해 왕명과 맹경수 부부도 모순이 많았다. 빈민가정에서 태여난 왕명은 집도 없고 땅도 없었으며 지어 녀동생을 남의 집에 주어 민며느리로까지 시킬 정도로 살림이 구차했다. 반면에 지주집가정에서 태여난 맹경수는 쏘련류학을 가면서 집을 떠날 때에도 참대가마에 앉아갔고 쏘련에 가서도 양옥에 들고 빵을 먹으면서 호화스러운 생활을 했다. 이들 부부는 결혼후 자주 다투었는데 다툴 때마다 이웃이 알아듣지 못하는 로씨야어를 사용했다.   1974년 3월 27일, 왕명은 모스크바에서 병으로 세상을 떴다. 그때 그의 나이는 70세였다. 왕명이 사망된후 쏘련정부에서는 그를 모스크바 교외의 성모공동묘지에 안장했다. 1983년 9월 5일, 맹경수는 72세를 일기로 모스크바에서 돌아갔다. 그녀도 성모공동묘지에 안장되였다.   중국알자카페/연변라지오TV신문 제공    
76    대작가 모순과 진덕군의 사랑일화 댓글:  조회:3985  추천:0  2009-09-11
        젊은 시절의 모순과 진덕군       사진속의 남자는 20세기 중국의 걸출한 문학가 모순(茅盾)이고 녀자는 모순의 부인이 아니라 그의 정부인 진덕군(秦德君)이다. 이 전기적인 색채를 띤 녀자는 생전에 전국정치협상위원회 위원이였다. 진덕군이 돌아가자 신화사에서는 그녀를 “저명한 애국민주인사”라고 보도했다.   진덕군은 사천성 충현(지금은 중경시에 소속됨)사람이다. 1905년, 진덕군은 한 진사( 士)가정에서 태여났다. 진덕군은 14살때에 성도에서 “5.4”운동에 참가했다. 후에 북경에 가서 리대소(李大 )의 직접적인 령도하에 지하활동에 참가했다. 1922년, 17살인 진덕군은 리대소를 따라 상해로 가서 리달(李 )이 세운 상해평민녀자학교 학공부( 工部) 부장직을 맡았다. 이곳에서 진덕군은 처음으로 자기보다 10살 많은 모순을 알게 되였다. 당시 모순은 심안빙이라 했으며 문학부에서 교편을 잡고있었다. 1927년, 상해에서 “4.12”사변이 폭발하면서 제1차 국공합작이 철저히 깨여졌다. 상해에 온 진덕군은 당조직을 찾지 못하고 당시 녀자평민학교 교원이였던 진망도선생을 찾아갔다. 짐망도선생은 진덕군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지금 국세가 어지러우니 동문 일본류학을 가는것이 좋을것 같소. 일본에도 중국공산당조직이 있으니 그곳에서 당조직을 찾소. 그리고 모순도 곧 일본으로 떠날것이요. 두 사람은 동료이니 서로 도움이 될것 같은데…” 1928년 7월의 어느날, 진덕군과 모순은 함께 황포강에서 일본으로 떠나는 배에 올랐다. 하여 두 사람의 이야기가 시작되였다. 려행중에 모순은 자주 진덕군을 불러 갑판에서 산책을 하면서 자신의 경력을 이야기했다. 모순은 자신의 작품과 대혁명고조시에 《국민일보》 편집으로 있을 때의 일들을 이야기하며 아주 격동되였지만 자신의 사생활을 말할 때는 울적했다. 모순은 부모들의 강박으로 18살때에 한 녀자와 결혼했지만 성격차이로 여직껏 관계가 좋지 않았다고 했다. 여러날 되는 해상려행에서 모순과 진덕군의 관계가 점점 밀접해졌다. 일본에 도착한후 두 사람의 감정이 점점 가까와졌다. 모순은 국내에 있는 진덕군의 어머니에게 편지를 했다. 모순은 편지에서 부모의 독단혼인으로 자신의 혼인은 괴롭고 고통스러우니 견결히 안해와 리혼하고 진덕군과 함께 있겠다고 표했다. 그후 모순과 진덕군은 교또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다.   《훼멸》, 《동요》, 《추구》 등 모순의 작품이 상해문예계의 비평을 받았다. 하여 모순은 교또에서 새로운 작품을 내놓아 그들을 반박하려 했지만 좋은 글감을 찾지 못했다. 이때 진덕군이 모순을 찾아와 자신의 친구인 호란휴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호란휴는 “5.4”운동에서 배출된 녀청년이다. 반항정신을 가진 그녀는 낡은 혼인풍속을 반대하며 집을 뛰쳐나와 혁명에 참가했다. 모순은 호란휴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듣고 그녀를 주인공으로 한 새로운 장편소설 즉 《무지개》를 세상에 내놓았다. 1930년 4월, 진덕군과 모순은 일본에서의 망명생활을 마치고 귀국했다. 두 사람은 귀국한후 정부(情人)의 관계를 공개하고 함께 모순의 어머니를 보러 갔다. 두 사람은 또 로신의 소개로 “좌련(左 )”에 가입했다. 이때 모순의 안해 공덕지가 모순을 찾아와 울며불며 리혼하지 않겠다고 소란을 피웠다. 모순의 어머니도 아들이 리혼하는것을 동의하지 않았다. 일찍 아버지를 여읜 모순은 어머니의 손에서 자랐다. 하여 어머니에게 효성이 지극한 모순은 무엇이든 어머니의 뜻을 따라주었다. 그는 진덕군을 몹시 사랑했지만 어머니의 뜻을 어길수가 없어서 자아모순에 빠졌다. 후에 진덕군은 모순의 몸에서 미묘한 변화를 보아냈다. 이전에는 아주 결단성이 있었는데 지금에 와서는 말해도 어쩐지 얼버무리면서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다. 어느 한번 모순이 집을 나갈 때 진덕군이 그를 미행했다. 진덕군은 모순이 자기 안해 공덕지를 만나러 집에 가는것을 발견했다. 진덕군은 감정이 없는 생활에 대해 싫증을 느끼고 헤여지자고 했다. 생각밖에 모순은 견결히 동의하지 않았다. 하여 두 사람은 잠시 헤여져 생활하며 4년후에 다시 만나기로 약속했다. 이 4년동안 모순은 정력을 다해 많은 글을 썼으며 원고료로 리혼비용을 지불했다.   모순과 진덕군은 4년후의 만남을 약속하고 사진관에 가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기념사진을 찍은후 진덕군은 모순과 함께 살던 집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모순이 없는 집안은 초라하고 쓸쓸해보였다. 그는 이런저런 생각으로 고민하다가 밤에 수면제 200여알을 먹고 침대에 누웠다. 하지만 누군가에 의해 병원에 호송되여 7일만에 깨여났다. 그후 진덕군은 살길을 찾아 헤매다가 12년전에 떠났던 고향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적화분자(赤化分子)로 몰리워 다시 고향을 떠나야 했다. 하여 위험을 무릅쓰고 중경으로 향했다. 진덕군은 중경에서 여러번 모순에게 편지를 보냈다. 모순도 자주 회신을 했는데 회신할 때마다 4년후에 만나자고 한 약속을 끄집어냈다. 모순의 회신이 다소 그녀에게 위로로 되였다. 하지만 후에 모순이 어느 한번의 회신에서 이사한다고 전했으나 집주소까지는 알려주지 않았다. 이로하여 진덕군은 모순과의 모든 련계가 끊어졌다. 진덕군은 그동안 모순과 함께 보내던 시간을 생각하니 너무도 화가 났다. 그녀는 모순의 모든 편지를 태워버리고 또 상해에서 모순과 함께 남긴 리별의 기념사진을 찢어버렸다. 리별사진은 모두 두장 있었는데 한사람이 각각 한장씩 가지고있었다. 모순은 공덕지와 화해한후 그 사진을 집에 가지고 못갔다. 하지만 그 사진을 버리자니 어쩐지 아쉬워 자기가 제일 믿는 친구 호풍더러 잘 보관해달라고 부탁했다. 호풍은 당시 28살이였다. 1949년, 새중국이 창건되였다. 모순의 앞길은 순풍에 돛을 단듯 아주 잘 풀려 나중에 문화부 부장으로 승진했다. 하지만 호풍은 반혁명집단우두머리로 몰리워 하마트면 총살까지 당할번했다.  호풍은 아무리 어려운 세월이라도 모든것을 참아내고 친구의 부탁을 꼭 명심하고 그 사진을 잘 보관해두었다. 1966년, 호풍은 사천으로 압송되여가기 직전에 진덕군을 찾아가 그 사진을 넘겨주었다. 호풍은 친구의 부탁대로 그 사진을 장장 36년동안 보관하였던것이다. 진덕군은 오래동안 모순의 소식을 받지 못했다. 당시 4년후에 다시 만나자던 약속도 자연히 깨지고말았다. 그후 두 사람은 여러번 만난적이 있지만 서로 본체만체하면서 외면했다. 진덕군도 지난 일을 잊어버리고 주은래의 충실한 조수로 되였다. 진덕군은 후에 정무원(지금의 국무원)  부비서장 겸 전국정치협상회 부비서장인 곽춘도와 결혼했다. 결혼후 두 사람의 감정은 아주 좋았으며 늘 행복하게 보냈다.                        중년시절의 진덕군   1981년에 모순이 서거됐다. 장례위원회에서는 진덕군에게 모순이 서거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진덕군은 지나온 50년세월을 회상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그는 재삼 고려끝에 모순을 추도하는 모든 활동에 참가하지 않았다. 그는 고별식에서 모순의 눈길과 마주치는것이 두렵다면서 모순의 장례식에 참가하지 않았다. 1999년 2월, 진덕군은 아주 조용하게 이 세상을 떠났다. 《인민일보》  등 국내 여러 보도매체에서 진덕군이 서거됐다는 부고를 발표했다. 전국정치협상회의에서는 진덕군의 추도식을 엄숙히 거행했으며 그의 유골을 팔보산묘지에 안장했다. 한동안 진덕군과 사이좋게 보내던 모순의 골회도 이곳에 안장되여있다.                          《지음》/연변라지오TV신문 제공
75    황당한 “씨받이”로 인한 리혼사건 댓글:  조회:4190  추천:0  2009-08-27
하남성 정주시의 려려는 분노하여 법원을 찾아가 자기 남편 왕강이 미혼처녀 조미와 장기간 동거하여 아들까지 낳았으니 중혼죄에 해당된다고 고소했다. 법원에서는 일심판결에서 중혼죄로 왕강을 유기형 1년에 언도하고 조미를 유기형 10개월, 집행유예 1년으로 판결했다. 그럼 이런 황당한 일이 어떻게 되여 발생했을가?   1  1979년 8월 15일, 왕강은 하남성 정주시에서 태여났다. 1999년에 20살에 나는 왕강은 3살 이상인 려려와 결혼을 했다. 2001년 10월에 아들 왕명이 태여났다. 아들을 본 부부는 행복하기만 했다.구변이 좋은 왕강은 과장으로 승진했다. 하늘의풍운조화는 예측하기 어렵다는 말이 있다. 2003년 9월 7일, 이 불행한 날에 그의 가정에는 액운이 날아들었다. 이날 오후 왕강의 아들이 수영을 하다가 물에 빠져 목숨을 잃었다.려려는 실신한듯 중얼거렸다. “아들을 잃다니, 내 운명은 왜 이다지도 기구하냐? 난 기어코 아들을 낳고야 말테다…” 왕강부부는 산아제한위원회에 아들을 낳겠다는 신청을 했는데 비준되였다.하지만 려려는 좋다는 방법을 다 대보았지만 임심이 되지 않았다.   2 왕강은 초췌하고 허약한 안해에 대해 점점 실망했다. 왕강은 이렇게 대가 끊어져야 한다는 생각을 하니 화가 났다. 하여 다른 녀자에게서 아이를 얻을 생각을 해냈다. 왕강은 공장의 판매과장이여서 늘 출장을 다녔다. 왕강이 만나는 사람들중에도 정부를 둔 사람들이 많았다. 왕강은 아들은 낳으려면 다른 녀자를 사귀는것이 과분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왕강은 먼 친척관계인 24살인 조미처녀를 목표물로 점찍었다. 조미는 관계를 통해 왕강의 공장에 취직했다. 조미는 부모한테서 왕강이라는 먼 친척오빠가 공장에서는 꽤 권세가 있다는 말을 듣고 의식적으로 왕강에게 달라붙었다. 왕강은 조미네 가정생활이 아주 어려워 보상조건을 제기하면 자신의 목적을 달성할수 있을것이라고 생각했다.    2004년 3월부터 왕강은 자주 조미를 나이트클럽에 데리고갔으며 옷도 사주고 관광을 시키면서 많은 돈을 썼다. 나중에 오빠, 동생하던 관계가 자연스럽게 정부관계로 되였다. 정부관계로 발전하자 왕강은 조미를 보고 아이를 낳아달라고 간청했다. “사랑”에 빠진 조미는 별 생각 없이 승낙했다.려려는 남편에 대한 소문을 들었지만 그래도 조미가 먼 친척이니 별로 심각하게는 생각지 않았다. 어느날 왕강은 안해에게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려려는 황당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골머리를 앓았다. 려려는 속을 태우다 못해 남편보고 말했다.“당신이 다른 녀자를 통해 아들을 낳으려는데 전 반대하지 않겠어요. 하지만 조건이 있어요. 아들을 낳은후 관계를 철저히 끊어야 하며 아들은 내가 키워야 해요.” 왕강은 흐뭇해서 안해의 조건에 동의하면서 “부부협의서”를 썼다. 왕강은 조미를 내세워 집을 세맡고 동거생활을 했다. 려려는 억울할 때가 많았지만 “부부협의서”가 있었기에 참고 또 참았다. 2004년 10월에 조미가 임심했다. 왕강은 너무나 기뻐서 조미더러 출근하지 말라고 강요했다. “내가 돈을 잘 버니 당신은 지금 잘 먹고 잘 휴식하면서 몸관리를 잘해 좋은 아들을 낳는것이 첫째야.” 2005년 음력설에 조미는 설쇠러 집으로 갔다. 조미의 부모들은 딸과 왕강의 이상한 관계를 눈치채고있던터라 딸의 몸의 변화에 민감했다. 부모는 화가 나서 펄펄 뛰였다. 부모들은 왕강과의 관계를 끊고 당장 병원에 가서 류산하라고 야단쳤다. 왕강은 이 소식을 듣고 다급히 돈 2만원을 가지고 조미네 집으로 달려갔다. 왕강은 조미의 부모앞에 무릎을 끓었다.  일이 이 지경이 되자 부모는 하는수없이 돈을 받았다. 조미의 해산기가 점점 닥쳐오자 왕강은 안해에게 조미를 집에 데리고와서 아이를 낳게 하자고 제기했다. 려려는 왕씨네 대를 잇기 위해서는 남편의 제의를 받아들이고 조미를 집에 데려왔다. 조미가 왕강네 집에 온후 두 녀인은 서로 잘 어울렸다. 왕강은 조미가 아이를 낳기만 하면 돈을 주어 꼭 내보낼것이라고 안해에게 수차 다짐했다. 려려는 남편의 다짐을 믿고 진심으로 조미를 잘 대해주었다.  매일 닭을 고아주고 물고기료리를 해주었으며 과일을 사주었다. 2006년 5월에 조미는 왕강의 집에서 아들을 낳았다. 아이가 30일이 되는 날 그들은 남들이 어떻게 의론하던 상관없이 집에서 축하연을 차리고 친척과 친구들을 청해 한바탕 떠들썩하게 잔치를 했다.   3  아이는 장마철의 오이마냥 무럭무럭 자랐다. 하지만 려려의 기분은 좋지 않았다. 그녀는 남편더러 협의를 리행하라고 요구하면서 자신이 아들을 잘 키우겠으니 조미를 내보내라고 강요했다. 왕강은 조미가 아직도 몸보신을 해야 하는데 어찌 이렇게 내쫓을수 있느냐고 안해를 나무람했다. 안해가 강박할수록 왕강의 마음은 조미와 아들에게 점점 기울어졌다. 왕강은 조미를 보내겠다는 말을 더는 입밖에 내지 않았다. 려려는 너무도 화가 나서 미칠것만 같았다. 그녀는 조미가 상점에 물건을 사러 나간 틈을 타서 아이를 안고 본가집으로 가버렸다. 려려는 아이를 감춰놓고 조미더러 집에서 나가라고 핍박했다. 조미는 아이가 없어진것을 보고 화가 나서 출장간 왕강에게 전화했다. 왕강은 아이가 없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집으로 돌아왔다. 조미는 울며불며 야단쳤다. “당신이 우리 아들을 찾아오지 않으면 난 절대 용서하지 않겠어요. 그런줄 아세요.”왕강은 조미를 달래면서 말했다.“급해마오.  려려가 아들에게는 어쩌지 못할것이요. 내가 꼭 찾아오겠소. ” 왕강은 안해가 친정집으로 간것을 알아냈지만 감히 찾아갈 담이 없었다.  그는 안해에게 전화로 아이를 데리고 돌아오기만 하면 그녀의 요구를 다 들어주겠다고 구슬렸다. 려려는 남편의 달콤한 말에 넘어가 며칠후 아이를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이가 돌아온후 어느날 갑자기 아이가 또 없어졌다.  이번에는 조미가 아들을 데리고갔던것이다. 왕강부부는 너무 당황하여 급기야 동맹이 되여 아이를 찾기 시작했다. 조미는 이때 미혼모로서 혼자 아들을 키울 마음을 먹었던것이다. 며칠후 조미는 왕강에게 소식을 전했다. “아들을 찾지 말아요. 난 이런 명분이 없는 생활이 싫어요.  아들은 내가 잘 키울거예요.  당신 걱정하지 말하요. 난 당신이 더는 보고싶지 않아요.” 왕강은 아들을 잃고싶지 않았다. 그는 즉시 택시를 잡아타고 조미의 집으로 달려갔다. 조미는 매서운 눈길로 왕강을 쏘아보며 아들을 내놓지 않았다. 그녀는 왕강에게 자기와의 관계를 끊든가 아니면 돌아가 려려와 리혼하든가 량자간에 결단을 내리라고 협박했다. 왕강은 아들을 잃기 싫어 후자를 선택하기로 했다. 그후부터 왕강은 집으로 돌아오지 않고 조미와 동거했다.  그동안 왕강은 대부분의 수입을 조미에게 주어 조미네 집을 2층양옥으로 만들었지만 려려와 친딸에게는 돈을 별로 주지 않았다. 려려는 하는수 없이 딸을 데리고 단위에 찾아가 남편의 로임에서 생활비를 잘라내줄것을 요구했다. 조미는 이런 명분이 없는 “부부생활”이 지겨워졌다.  그는 쩍하면 왕강과 다투군 했다. 왕강은 하는수 없이 법원에 려려와 리혼할것과 부부공동재산을 나눌것을 신청했다. 남편이 리혼하련다는 소식을 들은 려려는 너무도 화가 났다. 그녀는 법원에 왕강과 조미의 중혼죄를 신고하고 법에 따라 형사책임을 추궁할것을 요구했다. 려려는 무모하게 후환을 키워 가정을 잃고말았다. 그러나 그가 이 점을 깨달았을 때에는 너무나 늦었다. 왕강은 이 사건을 심리하는 법정에서 려려가 자신의 명예를 훼손하고 전도를 망쳤다고 하면서 리혼할것을 표시했고 조미는 왕강이 만기석방된후 려려와 리혼하면 그와 정당하게 결혼하겠다고 표시했다.    제공:  연변라지오TV신문  
74    손중산의 일생 댓글:  조회:2657  추천:0  2009-08-26
손중산의 본명은 손문이다.손문( 1866년~1925년)은 중국 근대민주혁명의 선구자이다. 이름은 문(文), 자는 덕명(德明), 호는 일신(日新) 또는 일선(逸仙)이다. 일본에서 혁명활동을 할 때 이름을 중산(中山)으로 바꾸었다. 광서  5년(1879)에 손문은 어머니를 따라 호놀룰루(檀香山:Honolulu 미국의 섬)로 갔다. 당시에 그곳의 화교자본가였던 큰형 손미의 도움으로 손문은 호놀룰루, 광주, 향항 등지를 오가며 서양식근대교육을 체계적으로 받았다. 1883~1885년의 중국-프랑스전쟁은 손문에게 민족의 위기를 구해야 한다는 애국적정열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청나라정부의 부패와 무능함을 목격하면서 반청사상과 자산계급정치방안으로 중국을 개혁하겠다는 사상을 싹틔우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는 자주 반청관련언론을 발표하면서 초기의 개량주의자 하계(何啓), 정관응  등과 자주 만나 교류를 했다. 1892년에 손문은 향항 서의서원을 졸업한후 오문, 광주 등지에서 의사사업을 하다가 뜻있는 사람들과 함께 혁명단체 창설을 준비했다. 1894년에 손문은 리홍장에게 편지를 보내 “사람은 그 재능을 다할수 있어야 하고 토지는 그 리익을 다할수 있어야 하며 물건은 그 쓰임을 다할수 있어야 하고 재화는 그 흐름이 통할수 있어야 한다”는 개혁적인 주장을 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894년 11월, 손문은 상해에서 호놀룰루로 가서 흥중회를 조직하고 “만족축출, 중국회복, 련합정부건설”을 강령으로 삼았다. 1895년 2월, 향항흥중회를 창설하였다. 같은 해 10월, 흥중회는 광주에서 봉기를 모의하였으나 사전에 루설되여 실패로 돌아갔으며 손문은 해외로 망명하였다. 1896년 10월, 영국 런던에서 청나라공사관에 체포되였으나 영국인 친구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하였다. 그후 손문은 유럽과 미국 등 각국의 정치, 경제 상황과 많은 류파의 정치학설을 연구하고 많은 나라의 진보적인사들과 접촉을 가지면서 그의 독창적인 민생주의리론을 완성하였다. 여기에서 삼민주의사상의 기초가 형성되였다. 1897년, 손문은 영국에서 카나다를 거쳐 일본으로 가서 정부와 재야 인사들과 교분을 맺었다.무술변법이후 일본의 우호적인 인사들의 활동으로 손문은 강유위, 량계초(梁啓超)를 대표로 하는 개량파와 합작문제를 론의하였지만 개량파가 황제체제를 견지하고 혁명을 반대하였기에 합작은 실현되지 못했다. 1904년에 손문은 일본, 호놀룰루, 윁남, 타이, 미국 등지에서 화교와 류학생들을 대상으로 혁명을 선전하였다. 1905년에는 필리핀, 독일, 프랑스 등지의 류학생들속에서 혁명단체를 조직하고 이 시기에 국내의 혁명단체, 혁명지사들과 관계를 맺었다. 1905년 8월, 손문은 황흥 등과 함께 흥중회, 화흥회 등의 혁명단체를 기반으로 일본 도꾜에서 동맹회를 창건하였다. 여기에서 손문은 총리에 추대되였으며 그가 제기한 “만족축출, 중화회복, 민국창립, 토지소유의 균등”이 동맹회의 강령으로 채택되였다. 동맹회의 기관지 《민보》 발간사에서 손문은 제일 먼저 “민족(民族), 민권, 민생(民生)”의 3대주의를 발표하였다. 동맹회의 성립은 전국혁명운동의 발전을 강력하게 촉진시켰다. 그는 국내외 각지로 사람들을 파견하여 조직을 발전시키고 혁명을 선전하였다. 손문은 중국혁명민주파의 선봉으로 되였다. 그가 주도한 개량파 비판은 신해혁명(辛亥革命)의 강력한 사상적기초가 되였다. 1906~1911년, 동맹회는 화남 각지에서 여러차례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손문은 그러한 봉기에 전략방침을 제공해주었을뿐만아니라 해외에서 분주하게 다니면서 봉기를 위한 모금활동을 벌렸다. 비록 이들 봉기는 대중적기반이 부족하고 조직도 치밀하지 못하여 모두 실패로 끝나고말았지만 혁명의 열기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계기를 마련함으로써 청나라정부에 많은 타격을 입혔다. 1911년 10월 10일, 무창봉기를 기점으로 전국각지에서 이에 호응하는 봉기가 잇달아 일어났다. 손문은 미국에서 이 소식을 접한후 12월하순에 중국으로 돌아와 17개 성의 대표자들에 의해 림시대통령에 추대되였다. 1912년 1월 1일, 남경(南京)에서 림시대통령취임을 선포하고 중화민국 림시정부를 구성하였다. 이로써 중국은 2000여년에 걸친 군주전제제도를 종식시키고 공화국을 건설하였다. 3월 11일, 손문은 《중화민국림시약법》을 반포하였다. 제국주의와 봉건주의의 강대한 압력과 혁명당내부의 갈등으로 인하여 손문은 1912년 2월 13일에 림시대통령자리를 원세개에게 양위하였다. 그후 1여년간 손문은 민생주의를 적극적으로 선전하였지만 정권이 원세개의 수중으로 떨어진 뒤인지라 이러한 손문의 노력은 아무런 성과를 거둘수 없었다. 1912년 8월, 동맹회는 국민당을 개편하여 손문을 리사장으로 추대하였다. 1913년 3월, 원세개가 국민당대리리사장 송교인을 암살하자 손문은 무력으로 원세개를 타도할것을 주장하였다. 7월에 2차혁명을 일으켰으나 실패로 돌아가자 그는 다시 일본으로 도피하였다. 1914년 6월, 손문은 도꾜에서 중화혁명당을 조직하였고 10월 25일에 도꾜에서 송경령과 결혼하였다. 1917년 7월, 단기서(段祺瑞)의 북양군벌이 국회를 해산시키고 《림시약법》을 페기하자 손문은 서남군벌과 련합하여 광주에서 군사정부를 세웠다. 9월에 대원수에 추대되여 《림시약법》을 수호하기 위한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손문은 군사정부내에서도 군벌과 정치인들의 배척을 받아 1918년 5월에 어쩔수 없이 대원수직을 사임하고 일본을 거쳐 상해로 갔다. 1917년, 로씨야10월혁명이 성공하자 손문은 1918년 여름에 레닌과 쏘베트정부에 축전을 보냈다. 1919년의 5.4운동은 그를 크게 고무시켰다. 1919년 10월, 중화혁명당을 중국국민당으로 개편하였다. 1920년 8월, 손문은 복건성과 광동성 주둔군에 회군을 명령하여 광동에서 계계군벌을 축출하였다. 1921년 5월, 광주에서 비상국회의 추대로 비상대통령에 취임하였다. 계속하여 륙영정의 세력을 소멸시킨 다음 광동과 광서를 근거지로 삼고 북벌을 준비하였다. 광동군의 지휘권을 장악한 진형명이 1922년 6월에 반란을 일으켰다. 손문은 위험에서 벗어난후 해군을 이끌고 반란군에 대한 반격을 개시하였지만 다른 부대의 지원을 받지 못하여 하는수 없이 광주를 떠나 상해로 갔다. 진형명의 반란은 손문을 매우 어려운 상황에 빠뜨렸다. 이에 손문은 코민테른과 중국공산당의 도움을 받기로 결심하고 리대소  등 공산당인사들을 개인자격으로 중국국민당에 가입하도록 하였다.1923년 2월, 손문은 상해에서 광주로 돌아가 다시 륙해군 최고사령부를 창건하고 대원수의 이름으로 전군을 통솔하고 정무를 총괄하였다. 이와 동시에 서서히 중국국민당 개편준비작업에 박차를 가하였다. 8월에 장개석을 중심으로 하는 대표단을 쏘련으로 파견하여 정치와 군사를 시찰하게 하였다. 10월에 쏘련에서 파견된 보로딘을 고문으로 초빙하였다. 1924년 1월, 손문의 주관으로 중국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가 광주에서 소집되였다. 여기에서 새로운 당의 강령과 헌장을 제정하여 사실상 “로씨야와의 련합, 공산당과의 련합, 로동자 농민에 대한 원조”라는 3대정책을 확립하고 중국공산당원이 참여하는 중앙통치기구를 구성하였다. 이 대회에서 통과된 “중국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 선언”에서 손문은 삼민주의에 대하여 새로운 해석을 내리고 반제 반봉건적인 내용을 보충하였다. 1924년 5월, 손문은 광주 황포 장주도에서 륙군군관학교를 창설하고 혁명군대의 설립을 위한 기초를 다졌다. 이러한 일련의 혁명투쟁을 거치면서 손문은 제국주의의 타도만이 중국의 독립과 부강을 보장해줄수 있다고 인식하였다. 1924년 10월, 손문은 광주상인단체가 일으킨 무장반란을 진압하였다. 1924년 10월, 봉계군벌의 사령관 장작림과 직계군벌의 장군 풍옥상이 련합하여 조곤이 사령관으로 있는 직계군벌정부를 전복시켰다. 풍옥상, 단기서, 장작림은 손문에게 전보를 보내 국정을 함께 론의할것을 요청하였다. 손문은 이 요청을 받아들여 11월에 광주를 떠나 북으로 갔다. 12월말에 병을 무릅쓰고 북경에 도착하였으나 1925년 3월 12일에 간암으로 북경에서 세상을 떠났다. 손문은 중국의 위대한 민주혁명의 선구자이며 중국을 개혁하기 위하여 일생동안 모든 정력을 다 쏟았다.   손문의 유언 손문은 1925년 3월 12일 세상을 떠나기 전날 밤에 세개의 유서에 서명하였는데 그것은 “국사에 대한 유언”과 “가정에 대한 유언”, “쏘련에 보내는 유서” 였다. 그중 국사에 대한 유언에서 그는 40년에 걸친 혁명경험을 총화하여 “반드시 민중들을 일깨워서 세계에서 우리를 평등하게 대하는 민족과 련합하여 함께 분투합시다”고 결론지었다. 그리고 “혁명은 아직도 성공을 거두지 못했으니 동지들은 계속 더 노력해야 하오”라고 호소함으로써 그의 혁명주장과 혁명주의가 실현될수 있기를 희망했다. 그의 가정유언에서는 서적과 옷, 일상용품, 주택 등을 송경령에게 기념으로 물려준다 하고 자녀들에게는 그의 혁명유지를 계승할것을 요구했다. 쏘련에 보내는 유서에서는 3대 혁명정책을 실행하면서 견지하였던 반제 애국사업에 대한 그의 확고한 신념을 천명하고 세계 피압박민족의 자유쟁취전쟁에서 중쏘량국이 함께 협력하여 승리를 거두자는 소망을 표시하였다. 그리고 또 손문은 안해 송경령에게 자기 대신 쏘련을 방문하여 그가 생전에 이루지 못했던 념원을 실현시켜줄것을 간곡히 부탁했다. 손문의 유언에는 그의 반제 애국과 3대정책 견지라는 혁명정신이 나타나있었다.   제공:  연변라지오TV신문    
73    색정에 빠진 녀보스의 말로 댓글:  조회:4984  추천:0  2009-08-25
심양시공안기관에서는 공안부에서 인터넷에 수배령을 내린 리홍을 체포하였다. 올해 33살에 나는 범죄혐의자 리홍은 원래 복장업을 하던 보스였다. 술집과 나이트글럽 등을 오가며 손님들과 함께 질탕 먹고 마시는 사치스러운 생활을 누리는중에 저도 몰래 풍류색광으로 변해버린 그녀는 미친듯이 남자들을 탐했다. 가산을 탕진하고 호주머니가 텅텅 비게 되자 끝없는 정욕을 채우기 위해 돈을 사기치기도 했다.   1  심양시 화평구에 위치한 한 술집 독방에서 리홍은 한창 떠들썩하면서 손님들을 접대하고있었다. 이상한것은 한상 빙 둘러앉은 사람들중 리홍곁에 앉은 녀자 한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젊은 청년들이였다. 술이 거나해진 리홍이 맥주잔을 들고 이렇게 말했다. “애들아, 건배해. 오늘밤에는 밤새도록 술을 마시는거야, 자!” 청년들은 리홍에게 바싹 붙어서 육욕적인 동작을 하며 춤을 추었고 리홍은 연신 음탕한 옷음을 터뜨렸다. 밤 12시가 넘자 리홍은 백원짜리 한묶음을 꺼내들고 말했다. “오늘밤 특별히 좋았어. 내 보배둥이들아, 상금을 타거라.” 리홍은 청년들에게 각각 200원씩 뿌려주었다. 리홍은 옆에 앉았던 녀자의 부축을 받으며 술집문을 나섰다. “섯! 꼼짝말아!” 갑자기 날카로운 목소리가 울렸다. 매복했던 심양시공안국 모 분국 형사경찰대의 경찰들이 나타나 리홍의 손목에 수쇠를 채웠다.  2  3년전에 리홍은 심양에서 복장장사를 했다. 처음에 남을 대신해 매대를 보아주고 월급을 받았지만 후에는 매대를 세내 장사를 시작했다. 그녀는 워낙 성격이 강직하여 무슨 일을 하든 누구에게나 지지 않는 성미였다. 매일 아침 일찍부터 서둘러 밤 늦게까지 비가 오든 바람이 불든 열심히 일했으며 장사가 잘되여 많은 돈을 모을수 있게 되였다. 그녀는 복장가게를 사고 경영규모를 넓혀 어느덧 돈을 잘 벌기로 소문이 난 녀보스로 되였다.어느날 리홍은 남방에 가서 물건을 구입하게 되였다. 장사가 끝난후 복장가공업 주인 왕사장과 녀비서가 리홍에게 심수관광을 시켜주었다. 녀비서가 승용차를 몰고 왕사장과 리홍이 뒤좌석에 앉았다. 왕사장은 심수풍경을 소개하는 한편 음탕한 눈길로 리홍을 바라보며 슬슬 리홍의 허벅지를 어루쓸었다.  리홍이 불쾌해서 말했다. “례의를 지키세요.” 그러자 왕사장은 껄껄 소리내여 웃었다. “리사장이 이렇게도 개방되지 않았다는건 상상밖이야. 리사장은 사업에서는 성공했지만 감정세계는 완미하지 못하군. 리사장은 아직도 ‘개방’이란 의미의 다른 한 부분을 리해하지 못하는 모양이야.” 이때 앞에서 차를 몰고있던 녀비서가 한미디 했다. “녀인은 남자에게 자신을 개방해야 해요.  그게 바로 현대감이라는것이거든요.” 왕사장도 목소리를 높여 떠들어댔다. “나처럼 돈있고 권세있는 남자가 녀자들을 개방시키지 않으면 생활이 완미하다고 할수가 없는거야. 그리고 남자의 성공과 실력을 나타낼수도 없는거고.” 이번 남방행은 리홍에게 남자와 녀자에 대한 “개방학”을 배워주었고 그녀의 금후 생활에 큰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사회교제가 넓어지고 손님접대때문에 나이트클럽, 술집을 드나들다보니 리홍의 주변에는 늘 남자들이 많았다.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가 밤늦어 집에 돌아오면 남편이 너무 초라해보이여 아무런 감정도 없었다. 그녀는 한동안 남편을 멀리하다가 나중에 리혼했다. 독수공방의 나날에 리홍은 고독을 이기지 못해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솟구치는 욕정때문에 그녀는 갑자기 남자들을 사려는 생각을 하게 되였다. 남자들은 돈만 있으면 아가씨들을 마음대로 데리고 노는데 녀자라고 왜 남자를 데리고 놀지 못한다는 말인가? 무슨 일에서나 남에게 지는것을 싫어하는 리홍은 이렇게 구렁텅이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했다. 리홍은 곱게 화장을 하고 혼자서 모 나이트클럽을 찾아갔다. 그는 포수마냥 날카로운 눈길로 먹이로 될 남자들을 찾았다. 왈쯔를 추는 젊은 총각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주동적으로 다가가 총각에게 춤을 청했다.그리고는 총각의 손에 돈 2000원을 쥐여주었다. 청년은 처음에 멍해있다가 나중에 아주 기뻐서 말했다. “누님, 누님은 정말 통쾌합니다. 이 돈은 저의 한달 월급에 맞먹습니다.” 단 며칠만에 리홍은 그 청년을 자기 손아귀에 넣고 고급호텔에 드나들면서 돈을 물쓰듯했다. 그 청년과 리홍에 대한 소문은 총각의 녀자친구의 귀에까지 전해졌다. 어느날 저녁 청년은 우물쭈물하다가 말했다. “누님, 녀자친구가 눈치를 알아차리고 저와 관계를 끊겠다고 합니다. 전 그녀를 좋아합니다. 우리 헤여집시다.” 그러자 리홍은 눈을 무섭게 부릅떴다. “잘 들어요. 난 아직도 채 즐기지 못했어요.그 처녀와 관계를 계속하든 끊든 난 상관하지 않겠어요.  하지만 한달은 내곁에 있어야 해요.  전부를 나한테 맡겨요.  돈은 잘 계산해줄테니깐.  돈이 있으면 처녀는 얼마든지 있으니깐요.” 리홍의 말에 청년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리홍은 그 청년을 실컷 데리고놀다가 다시 새로운 목표물을 찾았다. 그후 리홍은 금전과 자색으로 하나 또 하나의 청년들에게 공세을 발동했다. 모 합자기업소의 판매부 부경리가 그녀의 품에 안겨들었고 모 기관의 비서가 그녀의 치마폭에 감겼으며 모 국의 국장이 그녀의 포로로 되였다… 그녀는 완전히 색광이로 타락했다. 육욕에 불타는 리홍이였기에 장사는 진작 뒤전에 밀려있었으며 판매액은 점점 줄어들었다. 어느날 한 직원이 계약서를 가져왔다. 남방에서 100만원에 달하는 복장을 구입하기로 되여있었다. 련속 여러날 밤생활에 지친 리홍은 시장조사와 연구도 하지 않고 경솔하게 결단을 내렸다.   결국 트럭으로 실어온 옷이 팔리지 않아 창고에 적치되였다.  이로 하여 복장점은 문을 닫게 되였다. 사업이 이 지경이 되였으면 정신을 차려야 했지만 그녀는 이미 진흙탕에서 빠져나올 힘이 없었다.그후 2년이 지나갔다. 리홍은 대체 얼마나 많은 남자들과 함께 침대에 올랐는지 그 자신도 헤아릴수 없을 정도였다. 이때 그녀가 아글타글 모았던 100여만원이 이미 한푼도 남지 않았다.   3  경제원천이 없어졌고 돈은 한푼도 남지 않았다. 부화사치한 생활에 습관된 리홍은 어찌할바를 몰랐다. 밤이 깊어갔지만 그녀는 잠들지 못했다. 눈앞에는 지난날 침대에 올렸던 멋진 젊은이들이 삼삼했다. 더는 이대로 누워있을수 없다고 생각한 리홍은 벌떡 일어나 입술을 깨물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돈을 얻어야 한다.” 리홍이 어렸을 때 부모들이 리혼하다보니 그녀는 아버지와 함께 생활했다. 하지만 생모와 여전히 래왕이 있었다. 어느날, 리홍은 어머니의 전화를 받았다. 어머니는 세를 준 집이 임대시간이 곧 끝나기때문에 딸더러 대신해 임대연장수속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어머니의 전화를 받고난 리홍은 금시 눈앞이 환해졌다. 그녀는 임대맡은 사람에게 전화해 더는 세줄 생각이 없으니 집을 빨리 내라고 했다. 집이 나자 리홍은 가옥증명서 등 서류를 가지고 한 가옥중개회사에 매매신청을 했다. 며칠후 가옥중개회사 일군이 리홍더러 집을 사려는 손님을 만나라고 했다. 리홍은 그 손님과 계약서를 체결하고 계약금 5000원을 받아냈다. 이튿날 오전에 리홍은 손님에게 전화해 계약에 의해 4만원을 먼저 지불하라고 요구했다. 리홍은 4만 5000원을  손쉽게 손에 넣었다. 일주일이 지난후 그 손님은 리홍을 만나 상세한 사항을 의논하려 했다. 그런데 리홍이 감쪽같이 자취를 감추었다. 급급히 리홍이 팔려는 집으로 찾아가보니 이미 다른 사람이 들어있었다. 그 사람은 자신도 이 집을 금방 구매했다고 말했다. 손님은 너무 당황하여 그만 목석같이 굳어졌다. 리홍은 이 집을 리용해 같은 수단으로 여러 사람들한테서 20여만원을 사기쳤다.손에 돈이 있게 되자 그녀는 급급히 총각들을 물색해서 하나하나 점유했다. 그녀는 또 멋진 총각 10여명을 단번에 사서 호텔독방에서 방탕하게 육욕을 만족시켰다…   4  간수소에서 만난 리홍은 온 얼굴에 피곤기가 몰려있어 초췌했다. 그녀는 순진한 남편과 행복했던 가정을 떠올렸고 지난날 힘겹게 돈을 벌던 분투의 나날들을 생각했다. 그녀는 땅을 치며 후회했다. 생활에 돈이 없어서는 안되지만 절대 돈의 노예가 되지 말아야 하고 돈의 주인이 되여야 한다.   그녀의 눈에선 후회의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제공:  연변라지오TV신문    
72    청백리 어사 포공 댓글:  조회:2762  추천:0  2009-08-24
포청천(999~1062)은 북송시대의 유명한 정치가이다. 자는 희인(希仁), 이름은 증(拯), 안휘성 합비 출신이다. 그는 단주지주(端州知州), 감찰어사( 察御使), 삼사호부판관(三司戶部判官),영주, 양주, 지주(池州),강녕, 개봉부지부  및 삼사사(三司使)를 거쳐 가우6년(1061)에는 관직이 추밀부사에 이르렀다. 1062년에 포증은 향년 64세로 병사했다. 그가 죽은후에는 다시 그를 례부상서에 추증하고 시호를 “효숙”이라 했다. 포증(包拯)은 전기적인 인물로 남송(南宋)과 금대에 이미 그를 주인공으로 삼은 소설과 희곡 등이 출현하였으며 원나라(元代)때에는 포공희, 포공전설, 소설 등에서 포공을 찬양한 작품이 매우 성행하였다. 명나라때에는 각종 전기, 지방극과 수백권에 이르는 소설화본 《포공안(包公案)》으로 더욱 발전하였으며 청나라때에는 다시 《룡도공안》, 《삼협오의》, 《칠협오의》 등의 장편소설로 발전하였다. 지금에 이르러서도 중국의 지방극은 물론 희극과 소설속에서 포증을 주제로 한 작품이 많이 전해지고있다. 1993년부터 그를 주인공으로 한 《포공(包公)》 극집이 계속 쏟아져나오면서 약 500여편의 영화가 제작되였으며 포청천이란 이름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는 이미 시공을 초월하여 청백리의 전형적인 인물로 그 명성이 자자했다. 북송 진종 함평(咸平) 2년(999), 포증은 전통적인 학자집안에서 태여났다.  그의 부친은 송왕조의 하급관리였다. 북송 인종(仁宗) 천성 5년(1027), 포증은 진사에 급제하여 건창현 지현에 임명되였으나 년세가 많은 부모님을 공양하기 위해서 관직을 사임하였다. 몇년후 량친이 모두 돌아가자 무덤가에 초막을 짓고 3년상을 치렀으며 그후에도 명리를 탐하지 않고 고향에서 정직하고 소박한 생활을 하였다. 북송 인종 경우4년(1037), 그는 천장현의 지현에 임명되였다. 약 40여세가 되여서야 비로소 정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였지만 이때부터 그는 죽기전까지 강직한 성품으로 청렴결백하고 공평무사한 정치를 펼침으로써 위대한 발자취를 중국력사에 길이 남기게 되였다. 그가 천장현 지현으로 있을 때 한번은 그 현에 특이한 소송사건이 발생하였다. 어떤 농부가 밤에 소를 외양간에 매여두었는데 이튿날 아침에 일어나보니 소가 땅바닥에 드러누워 입에서 피를 토하고있었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농부가 소의 입을 벌리고 살펴보니 누군가에 의해 소의 혀가 잘려있었다. 분통이 터져 참을수 없었던 그 농부는 즉시 관청으로 달려가서 고소하고 죄범을 잡아달라는 부탁을 하였다. 미궁에 빠진 사건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가? 포증은 잠시 생각을 하다가 그 농부에게 “우선 이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당장 집으로 돌아가서 그 소를 도살하여 팔아버리게”라고 하였다. 당시의 법률에 의하면 소는 개인이 임의로 도살할수 없는것이였다. 그러나 혀가 잘린 소는 얼마 살지도 못할것이고 관청에서 소를 도살하라고 지시했기때문에 그는 집으로 돌아가서 그 소를 도살하였다. 그 이튿날에 어떤 사람이 관청으로 찾아와서 그 농부가 임의로 소를 도살했다고 고발했다. 이에 포증은 자세한 내막을 물어본후 즉시 큰 소리로 호통을 쳤다. “정말 대담한 놈이로구나. 네가 남의  소혀를 잘라놓고 도리여 임의로 소를 도살했다고 그 사람을 고발하다니?!” 그 사람은 갑작스런 포증의 호통에 할말을 잊고 땅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고 자기의 죄행을 인정하였다. 사실 소의 혀를 자른 사람은 그 농부와 원한이 있었기에 먼저 소의 혀를 자른 다음에 다시 그 농부가 임의로 소를 도살했다고 고발했던것이다. 이 일이 있은 이후 포증의 판결에 대한 명성이 크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포증은 여러곳에서 지방관을 력임하였는데 그는 가는 곳마다 과중하고 잡다한 세금을 없애고 억울한 사건을 깨끗이 해결해주었다. 그후 그는 경성(京城)으로 가서 간관을 력임하면서 인종에게 불법을 저지른 관료들을 막기 위한 많은 시책들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당시 북송은 범중엄의 신정(新政)이 실패로 끝난후 조정의 부패가 날로 극심해졌다. 특히 경성 개봉부에서는 고관대작들과 황제 인척들의 부정부패가 더욱 심하였으며 그들은 국법도 안중에 두지 않았다. 가우원년(1056) 12월, 인종(仁宗)은 개봉의 질서를 정돈할 필요성을 절감하고 포증을 개봉부지부에 임명하였다. 포증은 그 이듬해 3월에 정식으로 부임하여 가우 3년 6월까지 약 1년 4개월간 개봉부를 맡았다. 개봉부는 황실의 내외척과 권문세족들이 모여있는 곳이였다. 전에는 이 직책을 맡은 사람이 권문세족들과 내통하여 뢰물을 받지 않은적이 없었다. 포증은 개봉부지부에 임명된후 이러한 부패를 척결하기로 결심하였다. 송나라의 법규에 의하면 누구든 관청에 고소를 할 때는 먼저 대리인에게 부탁하여 고소장을 쓴 다음 담당관리를 통하여 그것을 지부에게 전달해야 하였다. 이때 간악한 소송대리인들은 사기를 쳐서 무고한 소송인들의 재물을 갈취하군 하였다. 포증은 그러한 법규를 철페하고 억울한 일을 당한 백성이 고소를 할 때는 직접 개봉부앞으로 와서 북을 치도록 하였다. 그리고 북소리가 울리면 개봉부에서는 정문을 열고 백성들이 직접 안으로 들어와서 고소를 하도록 하였던것이다. 이렇게 되자 개봉부의 관리들은 더이상 중간에서 롱간을 부릴수 없게 되였다. 어느해에 개봉에 홍수가 발생하였는데 알고보니 그곳의 수로가 막혀 배수가 되지 않았기때문이였다. 조사에 나선 포증은 어떤 환관과 권문세족이 수로를 점유하고 화원과 루각을 만들었기때문에 수로가 막혔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포증은 즉시 명령을 내려 그들에게 수로우에 세운 모든 건축물을 철거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한사람이 그것을 철거하려고 하지 않았다.  개봉부에서는 사람을 파견하여 계속 독촉을 하였지만 그는 여전히 억지를 쓰며 땅문서를 꺼내 그 땅이 자기 소유라고 강변하였다. 포증은 다시 조사해보고 그 땅문서가 위조한것임을 밝혀냈다. 이에 화가 난 포증은 그에게 강제철거명령을 내리고 상소를 올려 그 사실을 인종에게 고하였다. 결국 그 사람은 어쩔수 없이 그 화원을 철거하였다. 포증의 법집행이 엄격하다는 사실을 전해들은 개봉부의 권문세족들은 함부로 나쁜짓을 저지르지 못했다. 그리하여 개봉부에서는 남녀로소를 막론하고 포증이 청렴한 관리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였다. 포증은 친척과 친구들에게도 매우 엄격하였다. 어떤 친척이 그를 후원자로 리용하려고 하였지만 그는 전혀 돌보지 않았다. 세월이 갈수록 친척과 친구들도 그의 강직한 성품을 파악하고는 더이상 개인적인 일로 그를 찾아가지 않았다. 가우6년(1061), 인종은 포증을 매우 신임하고 중시하여 그를 추밀부사로 승진시켰다. 고관이 된후에도 포증의 사생활은 여전히 평민처럼 소박하고 검소하였다. 그 이듬해 5월에 그는 중병을 얻어 죽으면서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자손들이 벼슬을 하여 부정부패를 저지르면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하라. 그리고 그들이 죽은후에도 우리 포씨집안의 선산에 묘를 쓰지 못하도록 하라.” 사람들은 포증이 살았을 때 그를 청백리로 칭송했을뿐만아니라 죽은후에도 그를 청백리의 전형적인 인물로 삼고 그를 추앙하여 “포공(包公)”이라 하였다. 30여년의 재임시절에 포증이 법에 따라 관직을 박탈했거나 강등시킨 고관대작이 무려 30여명이나 되였다. 이것은 력사적으로 보기 드문 경이적인 일이였다. 그리고 그는 한 개인과 하나의 사건을 위해서 어떠한 경우에도 포기하지 않고 집요하게 조사하여 공정한 판결을 내렸다. 포증에 의해 탄핵된 사람들은 모두 막강한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였으며 그들중에는 포증보다 관직이 높은 사람들도 있었다. 그의 공평무사한 판결과 청렴결백한 생활, 예리한 통찰력은 많은 대중들의 존경을 받았으며 이로써 그는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자연스럽게 신적인 인물로 승화되였던것이다. 이러한 숭배는 포공이 선한 사람을 보호해주고 악한 사람을 징벌해주7며 재앙을 없애주고 복을 내려줄것이라는 믿음에서 비롯된것이다.     제공:  연변라지오TV신문    
71    성 결벽증이 부른 사랑비극 댓글:  조회:5848  추천:0  2009-08-21
성생활은 워낙 부부사이에 행복의 뉴대이다.  그러나 이 글에서 나오는 한쌍의 젊은 부부는 고민할대로 하다가 결국 같이 훼멸의 길을 걷게 되였다… 안해의 결벽증 개체운수업에 종사하던 왕건은 H진 시골에서 사는 진려려라고 부르는 처녀와 눈이 맞아 결혼했다. 비록 시골에서 자랐지만 진려려에게는 도시처녀와 같은 기품이 차넘쳤다.   왕건은 성녀같이 순결한 마음과 깨끗한 그녀의 습관에도 매혹되군 했다. 그녀는 방에 먼지 한점이 있어도 안되였으며 앉았다 일어난 자리를 닦고 또 닦아야 시름을 놓았다. 두 사람의 감정이 폭발적일 때에도 왕건이 그녀를 포옹하는것까지는 허용했지만 키스하는것을 싫어했다. 강제적으로 키스하면 곧 수건으로 입을 닦고 또 닦군 했다. 련애시절에는 그녀의 이런 결벽증이 왕건의 마음을 한결 더 매혹시키군 했다. 하지만 결혼후에 왕건은 이러는 안해가 리해되지 않았다.  결혼전에는 그냥 깨끗하고 순결한 녀자로만 생각했었다.  육체적인 접촉을 피하는것이 처녀의 몸을 지키는것으로 리해되여 단정하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고 그래서 그녀를 더욱 사랑했다. 그러나 결혼후까지 그런 상황이 거듭되자 아름다운 느낌이 아닌 번뇌로 변했다. 신혼밀월을 지내는 동안 진려려는 왕건의 맹렬한 키스를 거절하지는 않았지만 얼굴에 반감의 기색이 어려있었다. “이렇게 위생적이 아닌 행위는 이제 두번 다시 하지 마세요. 난 견딜수 없어요. 두번 다시 하지 마세요.” 그는 미리 준비했던 더운물에 수건을 적셔 힘껏 얼굴을 닦은후 화장실에 뛰여가 치솔질했다.신혼밀월을 마친후 왕건은 보름동안 외지에 가서 운수업을 했다.  운수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왕건은 목욕을 하고 입을 닦았다.  이때 진려려는 쏘파에 앉아 텔레비죤을 보고있었다. 안해의 기분이 좋을 때를 기다리고있던차라 왕건은 열심히 몸을 닦고 안해를 품에 그러안으며 입술에 키스를 하려 했다. “아이구 냄새야,  빨리 가서 입을 더 닦고 오세요.” 그 한마디에 왕건의 달았던 몸이 싸늘하게 식었고 자존심이 상할대로 상했다. 그럭저럭 일은 끝났지만 뒤이어 화장실에서 진려려가 몸을 씻는 소리가 들려왔다. 왕건은 기분이 정말 좋지 않았다.왕건은 우연히 책을 보다가 자위를 하는 방법을 알게 되였다. 안해가 받아주지 않으니 그렇게라도 자신의 욕망을 푸는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로부터 그는 욕정이 북받치면 책의 방법대로 “발등의 불”을 끄군 했다. 어느날 새벽 2시에 왕건은 한창 자위를 하다가 안해에게 들키우고말았다.   그렇게 온순하고 우아하던 진려려는 이날 무척 날카로왔다. “당신 너무 무료하고 비렬해요. 사람을 너무 실망시키는군요.”왕건도 화가 났다.“야밤중에 소리는 왜 쳐? 다 당신때문이라는것을 아직도 몰라?!” 결혼해서 첫 싸움은 이렇게 일어났다. 그들은 날이 샐 때까지 다투었다.  나중에 둘은 서로 그러안고 통곡을 쳤다.  이튿날 진려려는 6000원을 주고 일본제 성생활도구를 사다 남편에게 주었다.  이것이 그녀가 남편에게 바칠수 있는 “사랑”이였다. 그러나 이 “사랑”은 오래 가지 못했다.  얼마 안지나 왕건은 성생활도구에 싫증을 느끼고 대신 안해에 대한 욕정이 북받쳤다. 부부의 행복을 위해 그들은 온갖 좋은 방법을 다 생각해냈다.   한달후의 어느날 왕건은 안해가 가르쳐준대로 “해당화무도장”에서 효화라는 아가씨를 알게 되였다. 무도장주인은 왕건더러 안전문제는 고려할것 없이 하고싶은대로 하라고 했다.   그러나 왕건으로서는 스스로 추하다는 죄의식에 시달려 아무런 일도 성사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그리고 잠에 취한 안해에게 그 과정을 말하며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녀를 끌어안아도 자꾸 당신이 떠오르는걸 어떡해.”“당신은 정말 시키는 서방질도 못하네요.”진려려는 동정어린 눈길로 남편을 바라보았다. 왕건은 와락 안해를 품에 안았다.   그러나 진려려는 여전히 남편을 거절했다. “날 시끄럽게 굴지 말아요.  하루동안 힘들게 일했어요.”왕건은 혼자 속을 끙끙 앓으며 통곡이라도 치고싶었다. 남편의 권리를 행사 부부 한쪽에서 성생활에 랭담하다고 하여 같이 랭담해지는 일이 아니였다. 오히려 곱절 더 불타오르는듯했다. 날이 갈수록 안해와의 성생활에 대한 왕건의 환상은 부풀어갔다. 3월 18일은 왕건의 생일이였다.  진려려는 일찌기 집으로 돌아왔다. 문밖에서 남편의 이름을 부르며 집에 들어섰는데 이때 마침 왕건이 한창 인형녀자를 안고 자위를 하고있었다.  진려려로서는 상상도 못할 정경이였다. 혐오와 실망이 화산처럼 폭발했다. 손에 들었던 생일선물이 떨어지고 차탁의 차고뿌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땅에 떨어졌다. 지나치게 열중했던지 왕건은 안해가 집에 들어선것마저 모르고있다가 느닷없는 소리에 깜짝 놀랐다. 진려려가 울면서 소리를 질렀다. “당신 너무 비렬하고 무치해요. 당신은 그렇게도 녀자가 없으면 못사는건가요? ”왕건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안해앞에서 한 남자의 존엄이 깡그리 무너져버렸다.  그는 옷을 주어입고 밖으로 나와버렸다.  그날 밤에 한 친구의 집에서 눈물로 날을 밝히면서 친구에게 자신의 고통을 하소연했다.   친구는 그의 사정을 알고 너무도 분해서 말했다. “세상에 이런 일도 있었어?   젊고 이쁜 안해를 둔 남편이 이런 고통을 당한다는건 말도 안돼.  내가 가르쳐준대로 하라구.” 왕건은 친구의 말대로 “남편”의 권리를 행사하기로 했다.   그때로부터 그는 욕정이 북받치기만 하면 안해가 아무리 거절해도 자신의 욕망대로 했다. 진려려는 거의 매일 저녁 공포속에서 시달렸다.어느날 저녁 10시경, 진려려가 잔일을 하고나서 맥이 진해 쏘파에 앉아 숨을 돌리고있었다.   이때 왕건이 귀가했다.  그는 총망히 몸을 씻고나서 곧 안해에게 달려들었다.  그것으로 하루근심이 사라진줄로 알았는데 새벽이 되자 남편이 또 안해에게 달려들었다. 몸이 허약한 안해는 그만 까무러치고말았다.  왕건은 놀라 택시를 불러 안해를 병원으로 실어갔다. 이튿날 오후, 진려려는 친정어머니의 부축을 받으며 파출소에 찾아갔다. 당직경찰은 이렇게 권고했다. “부부사이가 아닙니까? 좋은 마음으로 남편을 감화시키십시오. 될수있는한 안해의 고통을 알아주도록 많이 설명해서 강박적인 성행위를 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만일 상해죄가 성립된다면 기소해 법원의 처리를 받게 될수 있습니다.” 그후 진려려는 왕건이 강박행위를 해올 때마다 반항하였다.   그럴 때마다 왕건은 화가 나서 안해를 마구 때렸다.  진려려는 온 몸에 상처를 입은후 사진을 찍어 증거를 만들어 남편을 상해죄로 기소했다. 법원에서 왕건을 상해죄로 유기형 3년에 언도하려고 했을 때 진려려는 울면서 기소를 취소해달라고 요구했다. “남편이 감옥에 가게 되면 난 한평생 친척들과 친구들로부터 남편을 해쳤다는 루명을 쓰고 살게 될겁니다. 그리고 아들애도 학교에 가게 되면 아버지가 감옥에 갔다고 놀림을 받게 될것입니다. 아들을 보더라도 그렇게 할수 없습니다.” 변태적인 보복의 후과 남편이 감옥에 가지 않고 자신도 남편의 피해를 받지 않기 위해 진려려는 법정에 리혼을 신청했다. 왕건은 리혼이란 말을 듣고 눈앞이 캄감했다. 다시는 강박적인 행위를 하지 않겠으니 한번만 기회를 달라고 했다. 그후 오래동안 왕건은 안해의 눈치를 보며 아주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하지만 참을수 없는지 왕건은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고말았다.  어느날 저녁 왕건은 목욕하고 타올을 걸친 안해의 날씬한 몸매를 보더니 참을수가 없어 안해를 덥석 품에 안고 침대로 갔다.  안해가 아무리 반항해도 소용이 없었다… 진려려는 남편과 리혼한후 주씨남자를 사귀게 되였다. 왕건은 진려려가 새로 남자를 사귀고있다는 소식을 듣고 진려려를 찾아갔다. “난 당신을 진정으로 사랑했소. 당신이 영원히 다시 재혼하지 않겠다고 했기에 난 리혼에 동의했소. 그런 거짓말로 날 속이다니. 내가 그자보다 무엇이 부족하단 말이요? 알려주지, 당신이 만일 사랑이 생겨 재혼을 한다면 당사자는 이 세상에 나밖에 더 있을수 없소.” 그후에도 왕건은 여러번 진려려에게 혼인관계를 회복하자고 제의했다.  그러나 번마다 거절당했다.  왕건은 화가 나서 보복하겠다고 했지만 진려려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느날 아침,  왕건은 진려려더러 법원에 가서 아들의 부양권문제를 해결하자고 했다. 오후 2시경에 진려려가 남동생과 함께 법원으로 가는 굽인돌이에 이르렀을 때 왕건이 뛰쳐나와 진려려를 죽인후 도망을 쳤다. 경찰들은 그날 밤 11시에 왕건을 체포했다. 법원에서는 왕건을 사형에 처했다.서로 사랑하던 한쌍의 부부가 기형적인 혼인생활때문에 함께 죽음의 결과로 치달았다.  결혼생활에는 상호 리해와 사랑이 필요하다. 각자가 장기간 자신의 개성만 강조한다면 비극이 생기지 않을수 없다. 만일 그들이 심리의사를 찾아 고통의 근원을 찾고 해결하였더라면 혼인위기를 극복하고 폭력적인 결과를 피면했을수도 있지 않았겠는가?                                                                 《검찰일보》  
70    려씨천하를 꿈꾼 려태후 댓글:  조회:2993  추천:0  2009-08-20
려태후( BC241~BC180)는 이름이 려치, 자는 아후이며 한고조  류방의 황후이다.  그녀는 류방이 죽은후에 정권을 장악하여 16년간 한나라제국을 통치했다. 려치는 진(秦)나라때 단부현(지금의 산동성 단현)에서 태여났다.  그녀의 아버지 려공은 원쑤를 피하여 패현으로 이주했으며 류방과 친분을 맺은 뒤 딸을 그에게 시집보냈다.  초한전쟁이 시작된지 얼마 안되여 려치는 류방의 부모와 함께 항우의 진영에 인질로 잡혀갔다. 기원전 203년에 려치와 류방의 부모가 석방되였다.  그 이듬해에 류방은 황제에 오르고 려치는 황후가 되였다. 려치는 일찍 뛰여난 지략으로 류방의 천하통일을 보좌하였을뿐만아니라 한나라초기에는 류방이 류씨이외의 왕(제후)들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고조10년(BC197)에 류방이 양하후 진희의 반란을 평정하러 출정하였을 때 서울 장안을 지키고있던 려치는 회음후 한신의 반란정보를 입수한후 마침내 승상 소화와 모의하여 한신을 궁궐로 불러다가 죽이고 3족을 멸하였다. 얼마후 류방은 진희의 반란을 평정하고 락양으로 돌아온후에 량왕(梁王)  팽월(彭越)이 반란을 도모하려 한다는 보고를 받았다. 류방은 즉시 팽월을 체포하였지만 모반의 증거가 없자 그를 평민으로 강등시켜 파촉(巴蜀)에 류배보내기로 하였다. 도중에 팽월은 려치를 만나 그녀에게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면서 집으로 돌아가 여생을 편히 살수 있도록 류방에게 잘 말해줄것을 청하였다. 락양으로 돌아온 려치는 류방에게 “팽월은 용맹한 장수이니 그를 촉(蜀)에 보낸다면 범을 산에 풀어주는것과 같아서 크나큰 후환이 될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류방은 즉시 팽월을 죽여버렸다. 려치의 슬하에는 아들 류영(후의 혜제)과 딸 로원공주가 있었다.   그러나 류방은 류영의 성격이 나약하다는것을 리유로 자신이 총애하던 비빈  척부인(戚夫人)의 아들 조왕  류여의를 태자로 삼으려고 하였다. 척부인의 눈물어린 호소와 류방의 결심으로 류여의는 거의 태자에 오를번했지만 장량을 중심으로 하는 여러 대신들의 간언과 려치의 노력으로 류여의는 태자에 오르지 못하고 류영이 태자의 자리를 계속 유지할수 있었다. 고조 12년(BC195) 4월에 류방이 죽고 려치의 아들 류영이 제위를 계승하여 한나라의 제2대 황제 혜제(惠帝)로 되였다. 이에 황태후가 된 려치는 어린 혜제를 대신하여 정사를 보면서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려태후는 류방의 사랑을 받았던 척부인과 태자의 자리를 넘보았던 조왕 류여의를 그대로 놓아두지 않았다.  먼저 척부인을 영항(永巷: 원래는 궁녀들이 살던 곳이였으나 후에는 죄를 지은 비빈을 감금하는 곳으로 사용되였음)에 감금한 다음 조왕 류여의를 제거할 기회를 노리였다. 혜제 원년(BC195) 12월, 혜제가 새벽에 활쏘러 나간 틈을 리용하여 려태후는 혼자 남아있던 류여의에게 독주를 먹였다.   아침 해뜰 무렵에 혜제가 돌아왔을 때 류여의는 이미 싸늘한 시체로 변해있었다. 그후 려태후는 다시 척부인의 손과 발을 자르고 눈알을 뽑고 귀를 태우고 벙어리가 되는 약을 먹인 다음 “돼지우리”에 가두고 그녀를 “사람돼지”라고 불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혜제는 려태후의 야만적인 행위에 충격을 받고 병을 얻게 되였다.  그는 려태후에게 사람을 보내여 다음과 같이 전하였다. “이것은 사람이 할짓이 아닙니다. 저는 태후의 아들로서 더이상 천하를 다스릴수 없게 되였습니다.” 그리고는 매일 주색에 빠져서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그후 려태후는 다시 류씨성을 가진 제후들을 하나씩 제거하기 시작하였다. 혜제 7년(BC188) 가을에 혜제가 세상을 떠났다. 혜제가 죽은후 려태후는 2명의 소제(少帝: 1명은 원래 평민의 소생이였는데 려태후가 혜제의 황후 장씨에게 명하여 그를 데려오게 하여 혜제의 아들로 삼은 다음 그의 생모는 죽여버렸다.  다른 1명은 상산왕(常山王) 류의이다)를 차례로 옹립하고 황제의 지위를 대신하였다.  황제의 이름으로 반포되는 모든 명령과 조서는 모두 려태후의 손에서 나왔으며 이때로부터 그녀는 실질적인 황제나 다름없었다. 려태후는 자신의 정치적지위를 강화하기 위하여 자신의 정책을 반대하던 태위(太尉) 주발(周勃)과 우승상 왕릉(王陵)을 파면하고 “류씨외에는 누구도 왕이라 칭해서는 안된다”는 류방과의 약속을 파기하고 려태, 려산, 려록 등 많은 려씨일족들을 왕으로 책봉했다. 려태후는 황제의 지위를 대신한 8년동안 많은 정적들을 무참히 죽이고 려씨정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그 어떤 야만적인 행동도 서슴치 않았지만 국정운영면에서는 그 어느 왕조의 황제에 못지 않은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기도 하였다. 그녀는 먼저 류방이 시행해오던 민생안정정책을 계승하여 농업을 장려하는 한편 삼족을 멸하는 연좌제와 요언령(妖言令) 등의 가혹한 형벌을 페지하였다. 이로써 이 기간에는 백성들의 생활이 비교적 안정되였을뿐만아니라 그동안 혼란했던 사회도 점차 질서를 잡아가고 피페했던 경제도 점점 회복되였다. 그러나 려태후는 “류씨외에는 누구도 왕이라 칭해서는 안된다”는 류방과 여러 대신들의 약속을 파기하고 많은 려씨일족들을 왕으로 삼았기에 대신들의 불만은 더욱 커졌다.  즉 그속에는 그녀가 죽은후에 일어날수밖에 없는 또 다른 정치적불안요소가 잠재되여 있었던것이다. 기원전 180년 3월, 천하를 호령하던 려치도 결국은 세월의 흐름을 이기지 못하고 병을 얻어 자리에 눕게 되였다. 7월에 병세가 위독해지자 그녀는 급히 뒤일을 수습하기 위하여 조카 려산을 상국에 임명하여 북군을 통솔하게 하고 려록을 상장군에 임명하여 남군을 통솔하게 한후 두 사람에게 다음과 같이 부탁했다. “고조가 천하를 평정했을 때 대신들과 ‘류씨외에 왕이 되는 자는 모두 합심하여 토벌하라’는 약속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려씨가 왕에 책봉되여 권력을 장악하고있으니 대신들은 모두 이에 불복하고있습니다.   내가 죽은후에 황제는 나이가 어리므로 대신들이 란을 일으킬것이니 그대들은 반드시 군사를 장악하여 황궁을 수호하도록 하시오. 나의 장례를 치를 때도 그대들은 황궁을 떠나지 말고 반란에 대비해야 할것이요.” 그리고는 다시 려록의 딸을 황후로 삼은 다음 자기가 죽은 후에도 려씨천하를 유지하려는 야망을 끝까지 버리지 않았다. 7월 신사일(辛巳日), 려태후는 장안 미앙궁에서 62세의 나이로 병사하였다.  려태후가 죽은후에 태위 주발과 승상 진평, 주허후 류장 등은 신속하게 려씨일족을 죽이고 문제(文帝) 류항을 황제로 옹립하였다.  이로써 려태후와 그녀의 일족에 의해 다스려지던 한나라는 다시 류씨천하를 회복하게 되였다. 려태후의 묘지는 류방의 장릉 서쪽(지금의 섬서성 함양시 동쪽 17.5킬로메터되는 곳)에 있다. 사마천은 《사기》 《려태후본기》에서 그녀의 치적을 다음과 같이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혜제와 려태후 시절에 백성들은 전국시기의 고통에서 벗어날수 있었으며 군신(君臣)들은 모두 ‘무위’의 경지에서 안식(安息)하려고 하였다. 그러므로 혜제는 팔장만 끼고 아무 일도 하지 않았고 려태후가 녀성으로서 황제의 직권을 대행하여 모든 정치가 방안에서 이루어졌지만 천하가 태평하고 안락했다.   형벌을 가하는 일도 드물었으며 죄인도 드물었다.  백성들이 농사에 힘을 쓰니 의식(衣食)은 나날이 풍족해졌다.”     제공:  연변라지오TV신문    
69    황제의 꿈을 접지 못한 풍운아 원세개 댓글:  조회:6400  추천:0  2009-08-19
  원세개(1859~1916년)는 북양군벌사령관으로부터 중화민국 대통령직을 력임하였다.   자는 위정(慰庭)이고 호는 용암(容庵)이며 하남성 항성 출신이다.  젊은 시절에 두번이나 향시에 응시했으나 합격되지 못하자 결국 문(文)을 포기하고 무(武)를 택하여 리홍장의 막료인 오장경의 휘하로 들어갔다. 1882년(광서 8년)  8월, 조선에서 “임오군란”이 일어났다.  당시 청나라정부는 조선(명성황후)의 구원요청에 응하여 오장경을 조선으로 파견하였다.   이때 원세개는 리홍장의 천거로 한성에 주둔하면서 조선방어임무를 맡았다. 1894년 7월, 중일갑오전쟁(즉 청일전쟁)이 터지기전날 밤에 원세개는 변장을 하고 한성에서 탈출한후 천진으로 돌아왔다. 1895년 12월, 원세개는 영록,  리홍장 등의 추천으로 천진소참(天津小站)에 주둔하고있는 정무군에 파견되였다. 그는 정무군의 이름을 “신건륙군”으로 바꾸고 많은 심복들을 끌어들이거나 양성하여 전군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다. 이후 이들은 대부분 청나라말기 중화민국초기의 군정요인으로 되였다. 서세창(徐世昌), 단기서(段祺瑞), 풍국장, 왕사진, 조곤, 장훈 등이 바로 그들이다.   천진소참의 군사훈련은 청나라말기 신식군대발전의 전환점으로 되였으며 또한 원세개의 야망을 다지는 기초로 되였다. 당시 유신변법운동이 왕성하게 전개되자 원세개는 강연학회에 기부금을 내고 유신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1898년, 무술변법기간에 원세개는 유신파앞에서는 “보수파를 제거하고 새로운 정부를 내오자”는 제안을 수락하였지만 돌아서자마자 이 사실을 서태후에게 밀고했다.  서태후는 광서황제를 구금하고 다시 섭정을 맡는다고 선포했다. 1899년 6월, 원세개는 공부우시랑, 산동순무 서리로 승진하여 신군(新 : 당시에는 ‘무위군’이라 하였음) 전병력을 동원하여 의화단운동을 잔혹하게 진압하였다. 이로써 그는 단번에 국내외의 주목을 받는 실력자로 부상하였다. 1901년이후 원세개는 직예총독 겸 북양대신(北洋大臣)으로 임명되였다. 1902년 원세개는 보정(保定)에서 북양상비군(략칭 북양군)을 편성하였다. 1905년에 북양군을 북양6진으로 편성하였는데 제1진은 만족귀족 철량이 통솔하는 기병(旗兵)이고 나머지 5진은 모두 원세개의 통제하에 있었다.   주요 장령들은 거의 대부분 천진소참시절의 심복들이였다.  이 시기에 원세개는 북양공장광산기업 발전,철도건설, 순경창설, 지방정권정돈,신식학당설립 등 방면에서 많은 성과를 올렸다. 신정(新政)을 실행하면서 원세개를 중심으로 하는 하나의 방대한 북양군사정치집단이 빠른 속도로 발전했다.  이들 북양집단이 세력확장을 통하여 만족황제측근집단의 세습적지위를 강력하게 위협했으며 량측의 권력다툼도 날로 심화되였다. 1906년,  원세개는 강요에 의해 겸임하고있던 직무를 모두 사임하고 북양군 제1진, 제2진, 제3진, 제6진을 륙군부 직할로 넘겨주었다.   그 이듬해에는 다시 북양을 떠나 북경으로 가서 군기대신 겸 외무부 상서직을 력임하였다. 1909년초,   원세개는 섭정왕  재풍에 의해 모든 직무에서 해임되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료양하였다.   그러나 그의 많은 부하들은 여전히 요직에 있으면서 실권을 장악하고있었으며 원세개는 항상 재기를 준비하고있었다. 1911년 10월에 무창봉기가 일어났다.  원세개는 10월 27일에 흠차대신으로 임명되여 호북전선의 륙해군을 통솔하였다.   계속하여 내각총리대신으로 임명되여 북양군을 이끌고 한구를 점령한후 즉시 북경으로 진입하여 내각을 구성하고 청나라정부의 군정대권을 장악하였다. 12월에 당소의를 파견하여 혁명당과 협상하였다.  손중산이 이끄는 혁명당은 청나라의 황제를 퇴위시키고 공화(共和)체제를 약속한다면 원세개를 대통령으로 선출하겠다는 조건을 내세웠다.  원세개는 혁명당의 기세를 빌어 선통황제 부의를 퇴위시켰다. 1912년 2월, 손중산이 중화민국 림시대통령직에서 사임한후 참의원에서는 만장일치로 원세개를 후임자로 선출하였다. 원세개는 북경의 군사반란을 빌미로 북경에서 대통령에 취임할것을 요구하였고 참의원에서는 그것을 수락하지 않을수 없었다.  원세개는 취임초기부터 전제독재정치를 도모하였다. 그는 국민당을 집권실행의 최대 걸림돌로 판단, 북양군경(北洋 警)을 책동하여 정치를 간섭하고 국민당원들을 내각에서 쫓아내고 남방 각 성의 혁명군대를 감축하고 국민당지도자 송교인을 암살하였다.   이와 동시에 량계초를 중심으로 하는 청나라말기 립헌파를 끌어들여 그들에게 진보당결성자금을 지원하고 국민당과 대항하였다. 외교방면에서도 원세개는 영국의 강력한 지지를 얻어 5개국 은행단으로부터 2500만파운드를 차관으로 확보했다.   원세개는 1913년 7월에 2차혁명을 진압하고 북양세력을 장강류역의 각 성으로 확장했다. 1913년 10월, 원세개는 군경을 동원하여 국회를 협박하고 정식으로 대통령에 선출되면서 렬강들의 공식적인 승인도 얻어냈다. 이어서 국민당과 국회를 해산하고 별도로 정치회의와 약법회의를 소집하여 독재통치의 수단으로 삼았다. 1914년 5월, 민주주의정신이 깃들어있는 “림시약법”과 국무원을 페지하고 정사당과 륙해군대원수판사처의 설립을 선포하였다.   이 개편을 통하여 그를 지지하였던 진보당을 몰아내고 단기서 등의 군권을 박탈함으로써 군정대권을 자신에게로 집중시켰다. 1914년말부터 군주제 복원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여 1915년 5월에 일본이 제안한 21개조 요구조항중의 대부분을 받아들이고 일본정부로부터 군주제에 대한 지지를 얻어냈다.   얼마후 다시 북양관료들을 교사하여 주안회와 청원단을 조직하도록 하고 군주제 복원활동을 더욱 강화하였다.   12월 11일, 참정원에서 원세개를 “중화제국 대황제”로 추대했다.   그 다음날 원세개는 제위를 받아들인다는 명령을 반포하고 민국 5년(1916)을 “홍헌원년”으로, 대통령부를 신화궁으로 고쳐 1916년 원단(元旦)에 있을 황제등극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시대의 흐름을 거스른 원세개의 이러한 행위는 전국적으로 각계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12월 25일, 채악과 당계요 등이 운남에서 봉기를 선포하고 원세개를 토벌하기 위한 호국전쟁을 일으켰으며 귀주와 광서에서도 잇달아 호응하였다.   북양파내부에도 위기가 도처에 도사리고있었다.   결국 원세개는 1916년 3월 22일에 군주제 취소와 “중화민국”년호의 회복을 선포하였다. 그리고 다시 단기서를 국무경 겸 륙군총장으로 기용하고 북양세력에 의존하여 대통령직을 계속 맡고자하였다.  그러나 봉기를 일으킨 각 성에서는 그가 다시 대통령으로 되는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단기서도 그에게 군정실권을 내놓으라고 요구하였으며 광동,   절강,  섬서,  호남, 사천 등지에서도 독립 혹은 그와의 관계단절을 선포함으로써 그는 결국 대중과 측근들 모두에게서 고립되였다.  원세개는 5월하순에 울분에 싸인 나머지 병이 나고말았으며 6월 6일에는 거국적인 성토속에서 세상을 떠났다.  
68    부부로 된 어제날의 “원쑤” 댓글:  조회:4100  추천:0  2009-08-18
1년전에 무고하게 죄명을 들쓴 서안처녀 조려려가 자기를 무함하고 고달프게 한 왕준생을 피고석에 끌어올렸다. 그러나 1년이 지난후에는 뜻밖에도 그제날의 “원쑤”들이 한쌍의 신랑신부가 되여 결혼식에 나섰다… 첫눈에 반하다 왕준생은 원래 한 국유기업소의 선전간사였다. 그는 촬영,  미술을 잘할뿐만아니라 춤도 잘 추고 노래도 잘 불렀다.  1년전에 기업소가 불경기에 처하는 바람에 그는 실업당했다.   그후 그는 한 사영광고회사에 취직했지만 현실을 받아들일수 없었다.  그는 늘 혼자 “은하수다방”에 가서 외로운 마음을 풀군 했다. 어느 하루 왕준생은 “은하수다방”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모 대형호텔에서 일하는 23살되는 조려려를 우연히 만났고 만난 첫 순간에 반하고말았다. 이날 조려려는 한 동료와 다툰후 발길이 가는대로 가다보니 “은하수다방”을 찾아왔던것이다. 청춘의 매력이 흘러넘치는 조려려가 다방에 나타나자 사람들의 눈길이 일시에 그녀에게 쏠렸다. 은은한 음악이 울려퍼지자 왕준생은 함께 노래를 부르자고 조려려를 청했다. 조려려의 달콤한 목소리와 아름다운 용모는 왕준생에게 잊을수 없는 기억을 남겼다. 그날 밤 조려려의 매혹적인 모습이 떠올라 왕준생은 잠들수 없었다. 왕준생은 조려려의 얼굴을 한번만이라도 더 보고싶어 매일 “은하수다방”의 첫 손님으로 되였다. 하지만 조려려는 이 세상에서 증발되기라도 한듯이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사기군에게 사기당하다 두달이 지난 어느날, 왕준생의 뒤에서 갑자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머리를 돌려보니 전화를 하고있는 처녀가 바로 그가 밤낮 그려보던 조려려였다. 왕준생은 다급히 그녀를 불렀다. 처녀는 저으기 놀라는 기색이였다. “절 아세요? 전 당신을 모르는데?…” 왕준생은 급기야 “은하수다방”에서 만나 함께 노래를 불렀던 일을 말했다. 두서없이 말하는 왕준생을 쳐다보던 쳐녀는 곧 그의 뜻을 알아차리고 얼버무려 대답을 하고는 무슨 일때문에 불렀느냐고 물었다.   왕준생은 처녀도 자신을 기억하고있다는 생각이 들어 흥분해하면서 함께 식사를 하자고 청들었다. 처녀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머리를 끄덕였다. 그후로부로 쳐녀와의 만남이 자주 이루어졌다. 어느 주말에 왕준생은 쳐녀를 호출했는데 처녀는 아버지가 병원에 입원했으니 만날수 없다고 말했다. 왕준생은 이 기회에 아버지도 볼겸 둘의 관계도 공개할겸 병원으로 가겠다고 말했다. 처녀는 완곡히 사절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에 대한 당신의 마음이 진심이라면 돈을 좀 구해주세요.” 왕준생은 저금했던 돈 2만원을 처녀에게 주었다. 이튿날 오후 쳐녀는 또 전화를 걸어와 어버지의 병이 더 위중하여 당장 수술해야 하니 돈을 구할데가 없는가고 물었다.  왕준생은 부모들과 친구들에게서 또 1만원을 모아 처녀에게 주었다. 처녀는 감격해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당신은 정말 좋은 사람이예요. 이 은혜를 잊지 않고 꼭 갚을게요.” 이틀이 지난후 왕준생이 처녀를 호출했지만 대답이 없었다. 그는 처녀가 아버지의 병때문에 바쁜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한주일이 지나서 또 호출했다. 하지만 생각밖에 호출중지라는 신호가 울려왔다.  왕준생은 불길한 느낌이 들어 가슴이 서늘해났다… 조려려는 구경 누구인가? 늘 쾌활하게 지내던 아들이 몰라보게 울적해있는것을 보고 부모들이 무슨 일인가고 재삼 따져물어서야 왕준생은 조려려를 만났던 사실을 낱낱이 털어놓았다.   왕준생은 또 그 처녀가 아니면 절대 장가를 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부모들은 아들의 마음을 돌려세우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아들의 뜻을 꺾지 못했다. 부모들은 하는수 없이 아들의 뜻을 따르기로 하고 사람들을 사처로 보내 끝내 향항인이 투자해 꾸린 대형호텔에서 그 처녀를 찾아냈다. 왕씨네는 처녀에게 왕준생과 약혼하면 돈문제를 더 따지지 않을것이지만 이 혼사를 동의하지 않으면 공안기관에 사기죄로 신고하겠다고 말했다.   말이 채 끝나기도전에 처녀는 화를 내면서 자신은 왕준생이란 사람을 전혀 모르며 돈을 사기친 일은 더욱 없다고 하면서 사람들을 시켜 왕씨네를 호텔에서 쫓아냈다. 왕씨네는 펄펄 뛰면서 아들의 반대에도 마다하고 공안기관에 제보했다.  공안기관에서 조사해본 결과 왕준생이 조려려에게 돈을 주었다는 시간에 빈틈이 있었고 조려려의 아버지는 병원에 입원한적이 없으며 몸도 아주 건강했다. 왕씨네는 아들이 거짓말을 했다고 믿지 않았으며 왕준생과 조려려가 대면할것을 요구했다. 두 사람이 만났을 때 왕준생은 그만 아연해졌다. 자기 돈을 사기친 처녀가 눈앞의 조려려와 생김새가 같기는 하지만 느낌으로 보아 그 처녀가 아니였다. 이때 조려려도 왕준생이 바로 오래전에 “은하수다방”에서 만나 인연이 있었던 남자라는것을 알아보았다. 그녀는 이 잘생긴 남자가 이처럼 비렬한 수단으로 자신을 모해할줄은 몰랐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려려는 대체 무슨 목적이냐고 화를 냈다.  왕씨네는 아들이 난처해하는것을 보고 말꼭지를 잘라 물었다. “목적이 뭐냐고? 모르쇠를 대지 말어. 혼사를 할거냐?  아니면 돈을 돌려줄거냐?” 조려려는 더는 모욕을 참지 못하고 왕씨네와 싸우기 시작했다. 조려려가 련애를 빙자하고 재물을 사기쳤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펴졌다. 경찰들은 이 사건의 배후에 꼭 무슨 사연이 있을것이라고 짐작하고 여러모로 수사를 하여 진정한 사기군을 잡아냈다. 이 사기군은 황려나였다. 황려나는 대학시험에서 락방된후 시재정학교 자비생으로 공부했다.   그녀는 한침실에 있는 학생의 돈을 훔쳤다가 발각되여 학교에서 제명당했다. 황려나는 감히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사회에서 떠돌아다니며 이쁜 용모와 달콤한 입으로 재물을 사기쳤다.   그날 저녁 왕준생이 그녀를 잘못 알고 식사를 청했을 때 그녀는 온갖 재간을 다 피워 왕준생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돈을 사기쳤던것이다. 분노가 사랑으로 변하다 경찰들은 심입되는 조사를 거쳐 사건의 진상을 밝혀냈다. 조려려와 황려나는 워낙 쌍둥이자매였다.   20여년전에 조려려의 아버지와 황려나의 아버지는 한직장에서 일했으며 아주 친한 사이였다.   한 우연한 사고에서 황려나의 아버지가 조려려의 아버지를 구하다가 불행하게도 생육능력을 잃게 되였다.   조씨부부는 쌍둥이를 낳은후 황씨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10개월에 나는 쌍둥이중의 한 아기를 황씨부부에게 주었다. 그 어린애가 바로 황려나였다.  황려나가 6살나던 해에 황씨는 하북성 고향으로 전근해갔다.  그때로부터 조씨네와 황씨네는 서로 소식이 끊어졌다. 진상이 밝혀지자 왕씨네는 조씨집을 찾아가 사과했다.  하지만 조씨집에서는 분을 삭일수 없어 왕준생을 법에 신고하고 피고인의 무함책임을 추궁하며 정신 및 명예손상비 8000원을 배상할것을 요구했다. 법원에서는 개정전에 쌍방당사인들을 불러놓고 화해시키려 했다. 왕준생은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조려려에게 피해를 끼친 원인은 결국 그녀에 대한 남다른 감정때문이였습니다. 나는 그녀를 보자 바로 사랑을 느꼈습니다.   그가 어떤 요구를 제기하든지 다 감당하겠습니다.” 조려려는 왕준생이 미웠고 화가 났지만 그의 진심과 성실한 눈빛에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법원에서는 조정을 거쳐 피고 왕준생이 원고 조려려에게 공개적으로 사과하고 정신 및 명예손상비 8000원을 지불하며 피고에 대한 원고의 기타 요구를 취소하기로 협의했다. 이튿날 조려려는 뜻밖에도 왕준생의 편지를 받았다. “나는 그 어떤 경제적인 배상도 당신의 마음의 상처를 가실수 없으리라는것을 잘 알고있습니다.   솔직히 말해 나는 이 사건에 책임이 있지만 절대 후회는 하지 않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한 처녀를 진심으로 사랑했기때문입니다.  미안하지만 돈 8000원은 현재 사기당한 빚때문에 당장 갚을수 없습니다. 시간을 조금 더 주었으면 합니다…” 조려려는 이때까지 수많은 남자들을 살펴보았지만 왕준생처럼 진심으로 한 녀자를 사랑하는 남자는 처음 본다고 생각했다. 그는 왕준생에게 돈에 대해서는 너무 조급해하지 말며 이후 더는 사기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내용으로 답장을 보냈다. 사랑한 죄때문에 처녀에게 피해를 주고 자신도 피해를 당한 일로 인해 한동안 풀이 죽었던 왕준생은 조려려의 답장을 받자마자 마음이 따뜻해났다.   그는 조려려의 피해보상비를 빨리 갚기 위해 여러곳의 일을 맡아 밤낮없이 일했다.   3개월이 지난 어느날 그는 보상비를 가지고 호텔로 찾아갔다.   동료는 조려려가 3일전에 교통사고로 병원에 입원했다고 알려주었다.   불안한 마음으로 병원에 찾아갔더니 조씨네 집에서는 뜻밖에 그를 선선히 받아주었다.   그후로부터 왕준생은 마음으로나마 처녀에게 끼친 피해를 보상해주려고 매일 병원으로 찾아갔다. 결국 왕준생의 행실이 나중에 처녀의 마음을 감동시켰고 그때문에 그제날의 “원쑤”가 신랑신부가 되여 결혼식을 올리게 된것이였다.      
67    곽수경 - 중국 고대의 저명한 천문학자 댓글:  조회:2761  추천:0  2009-08-02
  곽수경(郭守敬,1231-1316)은 자가 약사(若思)이며 중국 원조때 천문학자, 수학가, 수리전문가, 기기제조가이다.   곽수경과 왕순(王恂), 허형(許衡) 등 사람들은 중국 고대 가장 선진적이고 가장 오래 사용한 역법- "수시력((授時歷)"을 만들어냈다. 왕순(王恂)과 곽수경 등 사람들은 한조이후의 40여종 역법을 연구, 분석해 각 역법의 장점을 섭취하여 천문학에서 중요한 성과를 이룩했다.   정밀한 역법을 만들기 위해 곽수경은 전국 각지에 27개 관측점을 설립해 대규모적인 "사해측량(四海測量)"을 진행했으며 본격적인 "측정여정"을 시작했다.   곽수경이 편찬한 천문역법 저작으로는 "추보(推步)", "입성(立成)", "역의의고(歷議擬稿)", "의상법식(儀象法式)" 등 14가지로서 총 105권에 달한다.   곽수경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사람들은 달 뒷면의 환형산(環形山)을 "곽수경 환형산"으로 명명했으며 소행성2012을 "곽수경 소행성"으로 명명했다.   노년시기 곽수경은 수리공정에 진력했다. 원조 건립 28년~30년사이 그는 대도(大都, 오늘의 베이징)로부터 통주에로의 운하(즉 백부거와 통혜하)공정을 완성했으며 그 이듬해 곽수경은 소문관(昭文館)대학사 겸 지태사원사(知太史院事)로 승진했다. 그는 수리공사를 책임진 기간 일부 정밀한 시간기록계를 만들기도 했다.    
66    철창속의 참회 댓글:  조회:4203  추천:0  2009-07-30
인민경찰 이는 내가 평화시대의 군인으로 자랑높은 그 행렬에 들어서는것이 소시적에 품었던 꿈이였다.  선생님이 커서 무엇이 되려느냐고 물으면 경찰이 되겠다고 떳떳이 대답했고 그림을 그려도 경찰모를 그리는것이 유일한 취미로 되여 부모님들의 귀여움을 받던 때가 어제같다. 시골에서 태여나 부모님들의 사랑속에서 꿈많은 동년시절을 보내고 중학교에 진학한 나는 학습에 노력하고 품성이 우수하여 동학들의 신임을 받는 학급장이 되였다. 나의 적극적인 활약으로 학급의 여러가지 활동이 잘 조직되였고 성과가 뚜렷해지자 선생님들의 믿음과 부모님들의 눈먼 사랑속에 받들려 매일매일 흥분속에 잠기다보니 점차 제멋대로 우쭐하는 학생으로 변했다. 게다가 전자유희청에 자주 드나들고 사회의 “형제”들과의 만남이 잦아지면서 학습성적이 하강선을 그었고 무단결석,  조퇴가 빈번했다. 결국 나에게 차례진것은 고중시험 락방에 이어 집구석을 지켜야 하는 슬픈 운명이였다. 부모님들은 할수 없이 나에게 모 대학 태권도훈련반에 가서 태권도를 배울 기회를 마련해주었다. 운동에 소질이 있는 나는 태권도를 경찰이 구비하여야 할 기본기능으로 삼고 남보다 땀을 더 흘리며 훈련을 열심히 했다.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1997년 봄, 항주에서 진행되는 전국태권도시합에 참가하여 남들의 분투정신을 따라배우는 기회를 얻었다.   사회진출에서 한몫을 담당할 신념을 안고 항주에서 돌아오자 예기치 못한 사건이 발생했다. 친형제와 다름없는 딱친구가 무리싸움에서 패거리들의 칼부림에 목숨을 잃었던것이다. 친구와의 의리를 그 무엇보다도 귀중히 여긴 나는 딱친구의 골회함을 안고 통곡하다가 꼭 “원쑤”를 갚겠다고 철석같이 맹세했다.   그때로부터 품에 칼을 지니고 “복수”의 길에 올라 밤낮을 가리지 않고 거리와 골목길을 누비며 앙갚음의 기회를 노렸다. 짝패들은 나를 기둥으로 믿고 상대편과 겨뤄보려고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범죄의 심연속으로 점점 빠져들어가는 아들을 가슴아프게 바라본 부모님들은 나에게 새로운 환경을 바꾸어주었다.   드디여 외성의 한 경찰학교에 입학한 나는 잠시나마 범죄의 길에서 해탈되였다.   경찰학교는 내가 꿈에도 바라던 곳이였기에 모든 곤난을 이겨낼수 있었고 간고한 훈련을 받으면서도 삶의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간혹 딱친구를 잃은 슬픔에 종주먹을 부르쥘 때도 있었지만 선생님들의 사정없는 비판이 뒤따르군 하면 앙갚음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수시로 자신을 채찍질하였다. 그리하여 지나간 과거를 잊어버리고 새로운 인생길을 개척하리라 다짐하군 했다. 하지만 성미가 괴벽하여 동학들의 간단한 롱담도 받아넘기지 못하고 때때로 주먹을 휘둘렀다.  선생님들의 따뜻한 타이름과 동학들의 우호적인 도움으로 자신을 반성해본 나는 욱하는 성격을 고치기에 알힘을 들여 마침내 덤덤한 성격의 소유자로 동학들과 가까와졌다. 한학기가 지나서 나는 학교 규률위원,  학급의 체육위원으로 당선되였다. 주먹세계에 빠져있던 기억을 지워버리고 사람답게 살아볼 결심을 굳혔지만 딱친구를 잃은 상처만은 가슴에 맺힌 한으로 남아있었다.  노력과 분투끝에 우수한 성적으로 흑룡강성 수화시경찰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에 돌아와 실습생활을 하게 되였다. 17세 나이에 낯선 타향에서 2년간의 경찰학교생활을 마치고 오매에도 그리던 고향으로 돌아왔다.   며칠후 룡문가파출소에서 실습하게 되여 경찰복을 입고 문을 나서니 부모님들은 물론 이웃들도 나에게 대견한 눈길을 보냈다. 실습기간 나는 어둡고 고통스럽던 지난날을 청산하고 삶의 희망을 일구며 새 출발을 하려고 애섰다. “나무는 쉬려 하는데 바람이 자지 않는다”는 말과 같이 느닷없이 불행이 닥쳐왔다. 예전에 나와 싸웠던 패거리들은 내가 돌아온줄 알고 여러번 찾아왔다. 나는 그들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당당한 인민경찰로 될 내가 두번 다시 좌절하지 않으려는 자신의 굳은 약속을 지키려고 그들을 피해다녔다. 나를 찾지 못한 그들은 나의 “형제”들의 집부터 들이쳐서 칼로 모진 상처를 입혔다.  칼부림을 당한 “형제”들의 병문안을 갔더니 그들은 “우리 형제들이 당하고있다. 도와달라!”고 애걸했다. 하얀 붕대를 감고 병상에서 애원하는 “형제”들의 절절한 목소리는 나의 눈굽을 적시였다. 딱친구를 잃은 슬픔이 채 가셔지기전에 또 “형제”들이 병상에서 고통을 겪다니 실로 가슴이 미여지는것 같았다. 하지만 경찰복을 입은 나는 싸움을 제지시켜야 할 신성한 임무가 있었으므로 망나니를 패주고싶은 욕망을 삼키느라고 가슴을 마구 탕탕 쳤다.  패거리들은 한번 또 한번 도전을 걸었고 나는 번마다 피하느라고 신경을 도사렸다. 고락을 함께 나누었던 “형제”들이 무리싸움에서 류혈이 랑자하여 매일이다싶이 병원에 실려들어갔으므로 “형제”들은 피해다니는 나를 원망하고 비웃었다.  더는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참을수 없었고 “형제”의리를 지키지 않을수 없었다.  맹목적인 의리, 어리석은 배려로 잘못된 삶은 이렇게 시작되였다. 드디여 나는 칼부림세계에 다시 들어서 그자들을 혼뜨검내주는 길에 올랐다.1999년 6월 15일 저녁 9시경, 동생이라 불리우는 애가 패거리들한테 맞아 인사불성이 된채로 나를 찾아왔다.  참상을 그저 보고만 있을수 없는 나는 경찰복을 입었다는것을 망각한채 몸에 칼을 품고 패거리들을 찾아떠났다.  방정맞게도 골목길에서 그들과 맞띠웠다.  그들이 차에서 내리자 바람으로 칼을 빼들고 우리를 향해 다가왔다. 그자들을 무서워할 내가 아니였다. 나도 칼을 날리며 “용맹”을 떨치여 순간의 실수를 저질렀다.  만일 그때 나에게 법적관념이 조그만치라도 있었더라면 아니 조금만 랭정하게 생각하고 일을 처사하였더라면 자신을 망각하지 않았을것이다. 앞사람이 쓰러지자 뒤에서 달려오던자들이 모두 뿔뿔이 도망쳤다.  당당한 위력을 과시한 우리는 승리자의 자태로 그 자리를 떠났다. 이튿날은 나에게 있어서 운명을 바꾸어놓은 날이였다. 그날 나는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자유를 잃었고 부모형제와 사랑하는 친인들과 생리별해야 하는 애달픔을 뼈저리게 느껴야 했다. 새벽녘 공안국형사경찰대대에서 우리 집을 찾아왔다. 처음 살인이라는 사실을 대면했을 때 현실을 믿을수가 없었다. 죄를 저지른 나는 법의 천라지망을 벗어나지 못하고 인민의 재판석에 올라 고의상해죄로 유기형 13년에 언도되였다. 분발노력으로부터 타락으로, 인민경찰로부터 죄인으로,  얼마나 현저한 대비인가?  한때는 피타는 노력과 심혈을 가울여 어엿한 경찰이 되려고 애면글면했지만 “형제”의리에 눈이 가리워 기로에 들어섰으므로 사회와 인민, 부모님과 형제들에게 용서받을수 없는 죄인으로 되였다. 13년, 한 사람의 인생에 몇번의 13년이 있는가?  그것도 한창 꽃펴날 20살의 청춘시절을 높은 담장안에서 로동개조로 흘러보내야 하니 말이다. 지난일들을 새삼스레 돌이켜보면 마음은 한없이 쓰리고 후회막급하여 흐르는것이 아픔의 눈물뿐이다.  철창을 부여잡고 쪼각난 하늘을 멍하니 쳐다보노라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흘러내려 앞자락을 적시고 자리에 누우면 그립던 부모님생각에 베개가 젖어들었다. 인생의 꽃피는 시절에 활개치지 못하고 자유를 잃고서야 진정 행복이란 무엇인가를 새삼스레 느끼게 되였다. 나는 특수한 인간세상에서 죄인들의 서글픈 웃음속에 비낀 애절함을 보았고 한숨과 절망속에서 흘러간 지난날을 뼈저리게 뉘우치는 참회의 목소리도 들었다. 인간의 가치, 인간의 존엄을 회복하고 인간세상의 품속으로 돌아가기 위해 개조를 다그치는 오늘도 나는 기로에서 헤매는 청소년들에게 나의 인생의 한토막을 반면교재로 삼아 범죄의 구렁텅이에 빠지지 말것을 바라마지않는다.                                                      정 남     
65    1950년: 항미원조 보가위국 댓글:  조회:6137  추천:1  2009-07-30
    【북경=신화통신】 1950년 10월 19일 초저녁무렵, 중국인민지원군들은 보무당당히 압록강을 건너 조선전장으로 달려갔다. 항미원조전쟁이 이로써 서막을 열었다. 1950년 6월, 조선에서 내전이 발발했다. 9월 미국 등 나라들은 "유엔군"의 명의로 인천에 상륙했다. 아울러 "38선"을 넘어 전쟁의 불씨가 조선반도 북측에 떨어지면서 재빨리 중조국경선까지 퍼지기 시작했다. 비록 당시 중국은 정권을 공고히 하고 경제를 회복하는 긴박한 과업에 봉착하고있었지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부탁을 받고 중공중앙에서 여러차례 회의를 소집하고 거듭 가늠하고나서 10월 상순 항미원조, 보가위국이란 어려운 결단을 내렸다. 유난히 가혹한 이번 전쟁에서 중국인민지원군들은 기백이 산하를 삼킬듯한 영웅적인 웅장한 노래를 엮었고 인류전쟁사상 약소한 병력으로 강한 적을 물리친 빛나는 전범을 보여주었다. 이국타향에서 중국인민지원군들은 백설로 뒤덮인 고산준령속에서 번개같이 날아다니며 피흘려 용감하게 싸웠다. 상감령전역에서 이들은 산꼭대기의 흙들이 적들의 포화로 무려 2메터되게 푹 패인 상황에서도 진지를 고수하면서 한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다. 적들의 주단식폭격과 엄밀한 봉쇄속에서도 이들은 물리칠수 없고 폭격에도 끄떡않는 강철같은 운송선을 구축했다. "왕패공군"과의 겨룸에서도 이들은 "공중에서 총칼을 휘두르는 "용기로 세계공군전투사상 기적을 이루어냈다. 이들은 더없이 어려운 최악의 조건에서 눈으로 목을 추스리면서 용감하게 싸워 생명극한의 가혹한 시련을 이겨냈다. 조선전장에서 지원군들속에서는 수없이 많은 영웅인물들이 용솟음쳐나왔다. 라성교, 황계광, 양근사, 구소운… 이들은 모두 가장 사랑스러운 사람이란 공통한 이름을 갖고있다.  조선인민들을 위하고 국제주의의무를 수행하기 위해 모택동주석의 큰아들 모안영을 포함한 많은 영웅들이 조선의 땅속에서 영원히 잠들고있다. 지원군이 조선전쟁에 참가한후 전국인민들의 애국열정과 적극성이 광범위하게 동원되였다. 사람들은 너도나도 실제행동으로 항미원조운동에 참가했다. 로동자들은 "공장이 곧 전장이며 기계는 곧 총포이다"라는 구호를 제기했다. 농민들은 애국풍작거두기운동을 펼쳤다. 학생, 간부들은 너도나도 애국공약에 서명했다.  지원군들이 무기장비를 바꿀수 있게 하기 위해 전국인민들은 모금해 비행기와 대포를 구매해 기증하는 운동을 벌렸다. 하남성의 저명한 예극배우 상향옥이 령도하는 "향옥연극사"는 반년 동안에 170여차례의 공연을 해 비행기 한대를 구매해 지원군에 기증했다. 1951년 11월 15일까지 전국인민들이 모금한 금액은 무려 4조원(옛 화페)에 달했다. 거의 3년 동안의 가렬처절한 판가리싸움을 거쳐 1953년 7월 27일 미국은 부득이 정전협정에 서명할수 밖에 없었다. 그때 "유엔군"  총사령으로 있던 크라크는 후에 "나는 사람들이 결코 흠모하지 않는 명성을 띠게 되였다. 나는 미국사상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정전협정에 서명한 사령관으로 되였다"고 말했다. 그해 9월 12일,  중국인민지원군사령원 겸 정치위원 팽덕회는 "중국인민지원군항미원조에 관한 보고"에서 의미심장하게 이렇게 말했다. "서방침략자들이 수백년 동안 동방의 한 해안선에다 몇대의 대포만 걸어놓으면 한 나라를 점령하고 쥐락펴락하던 시대는 영원히 되돌아오지 않게 되였다."   신화통신 2009.7.29
64    송미령의 일생 댓글:  조회:5868  추천:1  2009-07-29
  《중국인민해방군 군가》의 작곡가인 정률성은 1914년 7월 한국 전라남도 광주의 한 혁명가정에서 태여났다. 1933년 5월에 그는 중국에 와서 “의렬단”이 남경에다 꾸린 “조선혁명간부학교”에 들어가 학습하면서 반일비밀사업에 종사하는 한편 로씨야의 이름난 음악가 크리노아를 만나 음악을 배우기 시작했다. 부친 정해업과 모친 최영은 사이의 5남 3녀중 5남인 정률성은 원명이 부은이였는데 음악에서 성공한다는 뜻에서 음률과 이룰성을 따 률성으로 고쳤다. 1937년, 일본침략전쟁이 발발하면서 정률성은 항일근거지인 연안으로 갔고 여기서 로신예술학원 음악학부에 입학했다.  그는 문학학부의 동창생인 막야더러 혁명의 정열로 넘치는 가사 《연안송》을 쓰게 하고 거기에 곡을 달았다.  이렇게 불멸의 송가인 《연안송》이 세상에 고고성을 울렸다.  이 노래는 연안으로부터 각 항일전선에,  지어 멀리 동남아시아나라에까지 보급되였으며 수천수만의 청년들을 항일투쟁에로 불러모았다.  1938년 8월에 로신예술학원을 졸업한 그는 연안항일군정대학 정치부 선전과에 배치되여 사업하게 되였다. 1939년  1월에 정률성은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이때 그는 생각지도 못했던 일에 말려들어 정치생명에 새로운 시련을 겪었야 했다.  해당부문에서는 “조선인들의 사회배경이 복잡하므로 더는 그들을 중국공산당에 가입시키지 않는다.  이미 가입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당적을 정지시켜야 한다.”는 통지를 받았다. 당시 해당부문의 지도자는 “정률성은 《연안송》 등 혁명가사를 창작했고 표현도 좋으므로 잠시 당적을 보류한다. 하지만 정률성은 연안에 오기전의 상세한 정활을 조직에 회보해야 한다.  특히 남경에 있을 때 어떻게 일본사람의 정보를 수집했는가?  수집한 정보를 어디에 보냈으며 누구에게 주었는가…등 사실을 진실하게 밝혀야 한다.”고 명확히 표시했다. 정률성은 남경에 있을 때 조선인들로 뭉쳐진 “의렬단”에 가입하여 반일비밀사업에 종사했다.  이 조직은 극비에 속하는 조직이여서 단선련계를 맺었다. 그의 직접적인 지도자는 김약산이였는데 김약산은 “대한민국림시정부”를 따라 대후방인 중경으로 갔다. 조국을 떠나 타향에서 친인들이 그립고 동지들이 그리웠다. 당시 정률성은 연안녀자대학 학생회 부주석인 정설송(丁雪松)과 련애를 했다. 정률성은 녀자친구를 찾아가 자신의 고독한 심정을 털어놓았다. 정설송도 남자친구의 일에 애간장을 태울뿐 그로서는 어찌할 힘이 없었다. 정설송은 정률성을 보고 이렇게 위안했다. “동무, 너무 실망하지 마세요. 당조직을 믿어요. 난 동무를 어띠까지나 사랑해요.” 사랑하는 녀자친구의 고무격려하에 정률성은 혁명에 대한 신심을 굳게 다지였다.  다행히 당시 팔로군포병퇀 퇀장 무정(장정중에서 생존한 조선인)이 선뜻이 나서서 “정률성은 정치상에서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증명을 섰다.  또 진운 등 동지들의 신임으로 모든 사실이 밝혀지고 정률성도 해방되였다. 정률성은 자신의 일생을 중국인민의 혁명과 건설 사업에 바쳤다. 정률성은 한침실에 있는 전우 공목(시인)과 함께 한가마밥을 먹으면서 손잡고 《팔로군군가》, 《팔로군행진곡》, 《팔로군과 신사군》등 8수의 가사로 된 《팔로군대합창》가사를 창작하고 자신이 직접 작곡하였다. 《팔로군행진곡》은 해방전쟁시기에 《중국인민해방군행진곡》으로 되였다.  1988년 7월 25일,  중공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이였던 등소평이 서명한 명령에 의해 《중국인민해방군 군가》로 지정되여 모든 군내의 행사나 의식에서 의식곡으로 널리 불리우게 되였다. 1941년, 정률성은 정설송과 결혼했다. 부인 정설송과는 슬하에 딸 정소제를 두었는데 현재 정소제는 북경 모 합창단의 단장으로 일하고있으며 사위 김인섭은 중국인민해방군 소장으로 있다. 정률성이 1941년에 작곡한 “《조선의용군행진곡》은 2000년 “6ㆍ15 남북정상회담”때 평양공항에 내린 한국 김대중대통령을 맞으며 환영곡으로 연주되였었다. 1942년 8월,  정률성은 화북조선혁명군정학교의 교무장으로 임명되여 태항산근거지로 갔다.  1945년 8월, 일제가 투항한후 정률성은 조직의 결정에 따라 한때 조선에 가서 사업하였다.  그는 조선인민군협주단 단장책임을 맡았다.  그는 인민군장병들을 승리와 영광의 한길로 고무하는 영생불멸의 노래인 《조선인민군행진곡》을 작곡하였다.  이 노래는 후에 《조선인민군 군가》로 되였다. 1950년 10월에 중국에 다시 온 정률성은 1951년에 또다시 가렬처절한 조선전선에 나가 “중국인민지원군행진곡”을 창작하였다. 전투기백으로 차넘치는 이 노래는 중조 두 나라 인민들을 승리에로 고무하였다. 해방후 정률성은 1952년부터 1966년까지 중국가무단, 중국음악가협회 창작조, 중앙악단 등 중국 최고의 음악단체들에서 음악활동에 종사했다.  그는 새생활창조와 생기가 들끓고있는 공장,  농촌과 부대로 다니며 수십수의 노래를 지었다.  1959년 반우파운동때 “반당분자”라는 루명을 쓰고 1966년 “문화대혁명”초기에는 “특무”로 몰려 옥고를 치렀다. “4인무리”의 압제와 타격을 받을 때에도 그는 송백같은 굳은 절개로 모택동의 시사에 곡을 다는 작곡사업을 계속하였다. 1976년, “4인무리”가 거꾸러진후 음악창작활동을 재개했지만 고혈압으로 돌아갔다. 그의 유체는 북경 팔보산혁명공동묘지에 안장되였다.  팔보산 정률성묘지앞에는 부인 정설송의 위탁을 받고 친구 교우가 쓴 글이 새겨져있고 묘비뒤편에는 그의 리력이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정률성동지는 1914년 음력 7월 7일에 한국 전라남도 광주의 한 혁명가정에서 태여났다. 소년시절에 반일애국독립활동에 참가했고 1933년 중국에 와서 선후로 남경과 상해 일대에서 항일구국활동에 종사했으며 1937년 10월 연안으로 갔고 1939년 1월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으며 일생을 중국인민의 혁명과 건설 사업에 바쳤다. 그는 충성스러운 국제주의전사이다.  1976년 12월 7일 북경에서 세상을 떴고 향년 62세였다.” 중화인민공화국 부주석이였던 왕진은 “정률성동지를 추모하여”란 글에서 “정률성동지는 현대중국에서 섭이,  선성해의 뒤를 이어 나온 걸출하고 우수한 작곡가이며 중국무산계급혁명음악사업의 개척자의 한사람”이라고 하였다. 정률성은 일생동안에 서정가곡을 포함해 군가, 합창, 동요, 영화음악, 기악곡을 망라해 360여편의 음악작품을 창작하였다. 그중 대표적인 곡으로는 《연안송》과 《팔로군행진곡》 즉 《중국인민해방군 군가》를 들수 있는데 이 두곡은 중국인민들에게 널리 알려진 사랑받는 노래로 중국현대음악사에서 대체할수 없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있다. 이로써 정률성은 섭이, 선성해와 더불어 중국근대음악사의 3대 음악가로 불리우기에 손색이 없다.  1990년 북경아시아경기대회에서 개막식 첫 프로그램으로 그의 대표곡인 《중국인민해방군 군가》가 연주된바 있고 2001년 가을에 북경에서는 그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태양을 향하여》가 개봉된바 있다.    
63    승강기에 갇혔다가 공포증에 걸린 처녀 댓글:  조회:3951  추천:0  2009-07-29
환자: 기영, 26세   병증상: 승강기에 갇혔다가 나온후부터 승강기에 오를 생각을 못하고 심지어 혼자서 층계를 오르기도 두려워했다.  나중에는 집문을 나설 용기마저 잃었다.   의사의 말: 공포성신경증에 걸렸는데 알아듣기 쉽게 말하면 공포증입니다. 기자 최부요:  의외로 승강기에 한시간남짓이 갇혀있은것으로 해서 그녀의 생활은 철저히 개변되였습니다. 승강기에 오르지 못할뿐만아니라 정상적인 외출도 문제로 되고있습니다.   매일 집에 숨어있으면서 하루 세끼도 기본상 배달시켜 먹습니다. 심리의사는 그녀가 공포증에 걸렸다고 말했다.   의외로 승강기에 한시간 갇히다 기영(가명)은 료녕성 철령사람이다. 금년에 26세인 그녀는 대학을 졸업하고 심양의 모 무역회사에서 조리사업에 종사하고있었다. 작년 9월중순의 어느날, 그녀가 탄 승강기가 9층에 이르러 갑자기 멈춰서면서 승강기안의 전등도 꺼졌다.   “저는 승강기안에 한시간넘어 갇혀있었어요.  승강기에서 나올 때 온몸이 땀에 흠뻑 젖었어요!” 기영은 격동되여 회억했다.   그날 그녀는 동사자들의 부축을 받으며 집으로 돌아갔다. “모두들 제가 잠을 자고나면 좋아지려니 생각했는데 기실 그것은 악몽의 시작이였을뿐이예요.”   이튿날,   기영은 억지로 일어나 회사에 출근했다.  그러나 사무청사에 이르러 그녀는 어떻게 해도 승강기에 오를 용기가 없었다. 나중에 그녀는 혼자서 층계를 톺으며 15층으로 올라갔다. “저는 며칠만 지나면 좋아지려니 생각했어요. 그러나 얼마 안되여 저는 제가 병든것처럼 느껴졌어요. 승강기에 오를수 없을뿐만아니라 층계에 오르기도 두려웠어요.” 기영은 막무가내라는듯이 말했다.  그녀의 정황은 날따라 못해져갔다.  소음도 두렵고 말하기도 싫어졌다. 반달후 그녀는 마지못해 사직하고말았다.   “금년 년초에 와서 저는 집문을 나설 용기마저 없어졌어요.   하루 세끼도 배달시켜 먹군 했어요.  남자친구는 믿기 어려워했을뿐만아니라 리해해주지도 못했어요.  우리는 말다툼끝에 갈라지고말았어요.”   건의:  충격을 당한후 인차 자지 말아야 한다 “그녀가 걸린 병은 공포성신경증인데 흔히 말하는 공포증입니다.” 기영과 이야기를 나누어본 심양시 정신위생중심 심리과의 오휘주임은 이렇게 진단을 내렸다.   치료효과가 리상적이 되게 하기 위해 오주임은 기영을 데리고 그녀가 마음속으로 제일 두려워하는 사물을 접촉했다. “저는 매일 그녀를 도와 한차례 심리안마를 해주었습니다. 정기적으로 그녀를 데리고 근육을 안마하고 마음을 느슨하게 해주었습니다. 한달후 그녀는 저를 신임했고 저와 함께 층계를 오르내렸습니다. 지난달 중순, 그녀는 마침내 저의 보호하에 승강기에 올라탔습니다.”  “여기에서 저는 모든 사람들에게 제시해주고싶습니다. 충격을 당했거나 괴로운 일에 부딪쳤을 때 인차 잠자지 말아야 합니다.  피곤하더라도 잠자면 안됩니다. 꼭 심정이 완전히 가라앉은 다음에 잠자리에 들어야 합니다.  그러면 심리질병에 걸릴 확률을 절반으로 줄일수 있습니다.” 오주임의 제시이다.   “저는 제가 또 정상인으로 변했다고 느껴졌어요.” 여기까지 말한 기영은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녀는 기자에게 지난 4월 15일에 3차나 승강기에 올라탔는데 두려운 느낌이 없었으며 새로운 사업터도 찾았다고 말했다.      
62    정부의 손에 녹아난 해군중장 댓글:  조회:3911  추천:0  2009-07-28
2006년 6월 29일, 신화사는 원 해군 부사령 왕수업이 경제범죄로 해군 부사령직을 해임당했다는 소식을 발표하였다. 농민자식이 장군으로 왕수업은 1943년에 하남성 엽현 등리향의 한 가난한 농민가정에서 태여났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공부에 힘썼기에 그의 성적은 아주 훌륭하였다. 1964년에 21살인 왕수업은 하남성대학입시에서 6등의 성적으로 천진대학에 입학하여 공업과 민용건축학부에서 공부하게 되였다. 1968년, 해방군 총정치부가 일부 대학교에서 우수한 졸업생들을 뽑아 입대시켰는데 왕수업은 륙군 제38군에 들어가게 되였다.  그는 공병으로부터 시작하여 1994년 7월에 소장으로 승진하였으며 1995년 12월부터 2001년 7월까지 총후근부 병영건축부 부장으로 있었고 2001년 7월에 해방군 해군 부사령원으로 되였으며 2002년 7월에 해군중장으로 승진하였다. 건축을 하며 억대돈을 탐오수뢰 1995년부터 2001년까지 왕수업은 전군 제3대병영개건을 책임지였다. 관련자금이 방대하기에 부패에 직면할 위험성도 더 컸다. 또한 부대의 병영개혁정책도 그한테 탐오수뢰할수 있는 틈을 가져다주었다. 공용건축은 다 입찰제도를 실시하고있지만 군대비밀이거나 군비에 관련되는 등 원인으로 하여 부대는 아주 큰 정도에서 여전히 지도자가 결정하고 청부업자한테 일을 맡기는 방식을 취하고있었다.   하여 왕수업은 많은 건축도급상들이 달라붙는 대상으로 되였다.  초보적으로 조사한데 의하면 왕수업의 탐오수뢰관련자금은 1.6억원이 된다고 한다. 끝내 정부의 손에 망해 금전과 권세를 갖고있는 왕수업은 십몇년전에 많은 정부를 두고있었다. 하지만 그는 후에 정부의 손에 망할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다. 왕수업이 건축공사를 책임지였기에 그의 안해도 어느 건축업과 관련되는 공사에서 총경리로 있었는데 부부간은 관계가 좋지 않아 일찍 별거하고있었으며 두 딸은 외국에 나갔다. 왕수업에게는 여러명의 정부가 있었는데 그중에서 상대적으로 고정되고 시간이 제일 긴 녀인이 장모였다.  어느 대군구의 문공단 배우였는데 왕수업의 눈에 든후 그의 정부로 되였다. 왕수업은 기건부장이라는 권세지위를 리용하여 그녀를 북경으로 전근시켜 동거생활을 하였다. 지금 30여살인 장모는 그때 왕수업에게 아들 하나를 낳아주었는데 왕수업은 기뻐서 어쩔줄 몰라하였다. 2001년, 왕수업이 해군 부사령원으로 승진한후 장모는 그와 결혼할것을 요구하였다.  왕수업이 대답하지 않자 그녀는 갈라질것을 제기하고 다른데로 시집가겠다고 말하였다. 왕수업도 갈라지는데는 동의하였지만 그녀가 낳은 아들을 자기한테 넘기라고 하였다.  장모는 그 대신으로 돈 500만원을 청춘손실비로 줄것을 요구하였다. 왕수업이 동의하지 않고 몇년 질질 끌자 장모는 중앙군위 책임자한테 왕수업의 추행을 적발하기로 마음먹었다. 왕수업과 관계를 가졌던 녀인들이 다 조사받았는데 그중에서도 장모가 제일 엄밀한 조사를 받았다. 왕수업은 그녀를 북경에 데려온후 집을 사준다 차를 사준다 하며 적지 않은 돈을 썼던것이다.   왕수업 잡힐 때 자살을 시도 2005년 12월, 왕수업은 몸이 불편하다면서 주해에 가서 휴양하겠다고 조직에 제의하고 12월 23일 오후에 떠날준비를 했다. 12월 23일 오전, 왕수업은 예전처럼 해군사령부에서 열리는 아침회의에 참석했다가 총참모보위부일군들에게 잡혀갔다. 당시 왕수업은 침착한체하면서 회의를 사회하는 해군사령원 장정발을 보고 물었다.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잘못된것은 아니겠죠?” 그러자 장정발사령원이 말했다. “잘못된것이 없지요. 당신의 정치생명은 이미 끝났습니다.” 중앙군사위위회 장숙전이 중앙군사위원회를 대표하여 “중앙군사위원회 검찰원의 체포령”을 선독할 때 왕수업은 자신의 공무용가방에서 권총을 꺼내 자살하려 했다. 이때 한 특수경찰이 번개같이 달려들어 권총을 빼앗아내고 수갑을 채웠다. 검사결과 왕수업이 늘 휴대하고 다니는 공무용가방에 독일제 권총이 두자루가 있었고 모두 장탄한 상태였다. 집에서 거액의 장물이 나타나 왕수업이 체포된후 조사일군들은 북경과 남경에 있는 두채의 집에서 인민페 5200만원을 사출해냈다. 그는 랭장고와 세탁기에 장물을 감추었던것이다. 조사일군들은 또 그의 사무실에 있는 비밀금고에서 5000여만원이 들어있는 저금통장을 찾아냈다. 군대내에서의 반부패폭풍 총후근부 부장 료석룡상장은 군대 각급 지도간부 특히 고위급지도간부의 경제권력이 대단한데 어떻게 군사자원을 효과적으로 분배관리하고 기제와 뿌리로부터 부패를 다스리겠는가 하는것이 우리 군 건설에서의 중대한 과제로 되였다고 말하였다.  전하는데 의하면 앞으로 5년간 전군에서는 4000여명이상의 지도간부에 대해 심계를 실시한다.    
61    강유위와 “무술변법” 댓글:  조회:4028  추천:0  2009-07-27
  《중국인민해방군 군가》의 작곡가인 정률성은 1914년 7월 한국 전라남도 광주의 한 혁명가정에서 태여났다. 1933년 5월에 그는 중국에 와서 “의렬단”이 남경에다 꾸린 “조선혁명간부학교”에 들어가 학습하면서 반일비밀사업에 종사하는 한편 로씨야의 이름난 음악가 크리노아를 만나 음악을 배우기 시작했다. 부친 정해업과 모친 최영은 사이의 5남 3녀중 5남인 정률성은 원명이 부은이였는데 음악에서 성공한다는 뜻에서 음률과 이룰성을 따 률성으로 고쳤다. 1937년, 일본침략전쟁이 발발하면서 정률성은 항일근거지인 연안으로 갔고 여기서 로신예술학원 음악학부에 입학했다.  그는 문학학부의 동창생인 막야더러 혁명의 정열로 넘치는 가사 《연안송》을 쓰게 하고 거기에 곡을 달았다.  이렇게 불멸의 송가인 《연안송》이 세상에 고고성을 울렸다.  이 노래는 연안으로부터 각 항일전선에,  지어 멀리 동남아시아나라에까지 보급되였으며 수천수만의 청년들을 항일투쟁에로 불러모았다.  1938년 8월에 로신예술학원을 졸업한 그는 연안항일군정대학 정치부 선전과에 배치되여 사업하게 되였다. 1939년  1월에 정률성은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이때 그는 생각지도 못했던 일에 말려들어 정치생명에 새로운 시련을 겪었야 했다.  해당부문에서는 “조선인들의 사회배경이 복잡하므로 더는 그들을 중국공산당에 가입시키지 않는다.  이미 가입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당적을 정지시켜야 한다.”는 통지를 받았다. 당시 해당부문의 지도자는 “정률성은 《연안송》 등 혁명가사를 창작했고 표현도 좋으므로 잠시 당적을 보류한다. 하지만 정률성은 연안에 오기전의 상세한 정활을 조직에 회보해야 한다.  특히 남경에 있을 때 어떻게 일본사람의 정보를 수집했는가?  수집한 정보를 어디에 보냈으며 누구에게 주었는가…등 사실을 진실하게 밝혀야 한다.”고 명확히 표시했다. 정률성은 남경에 있을 때 조선인들로 뭉쳐진 “의렬단”에 가입하여 반일비밀사업에 종사했다.  이 조직은 극비에 속하는 조직이여서 단선련계를 맺었다. 그의 직접적인 지도자는 김약산이였는데 김약산은 “대한민국림시정부”를 따라 대후방인 중경으로 갔다. 조국을 떠나 타향에서 친인들이 그립고 동지들이 그리웠다. 당시 정률성은 연안녀자대학 학생회 부주석인 정설송(丁雪松)과 련애를 했다. 정률성은 녀자친구를 찾아가 자신의 고독한 심정을 털어놓았다. 정설송도 남자친구의 일에 애간장을 태울뿐 그로서는 어찌할 힘이 없었다. 정설송은 정률성을 보고 이렇게 위안했다. “동무, 너무 실망하지 마세요. 당조직을 믿어요. 난 동무를 어띠까지나 사랑해요.” 사랑하는 녀자친구의 고무격려하에 정률성은 혁명에 대한 신심을 굳게 다지였다.  다행히 당시 팔로군포병퇀 퇀장 무정(장정중에서 생존한 조선인)이 선뜻이 나서서 “정률성은 정치상에서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증명을 섰다.  또 진운 등 동지들의 신임으로 모든 사실이 밝혀지고 정률성도 해방되였다. 정률성은 자신의 일생을 중국인민의 혁명과 건설 사업에 바쳤다. 정률성은 한침실에 있는 전우 공목(시인)과 함께 한가마밥을 먹으면서 손잡고 《팔로군군가》, 《팔로군행진곡》, 《팔로군과 신사군》등 8수의 가사로 된 《팔로군대합창》가사를 창작하고 자신이 직접 작곡하였다. 《팔로군행진곡》은 해방전쟁시기에 《중국인민해방군행진곡》으로 되였다.  1988년 7월 25일,  중공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이였던 등소평이 서명한 명령에 의해 《중국인민해방군 군가》로 지정되여 모든 군내의 행사나 의식에서 의식곡으로 널리 불리우게 되였다. 1941년, 정률성은 정설송과 결혼했다. 부인 정설송과는 슬하에 딸 정소제를 두었는데 현재 정소제는 북경 모 합창단의 단장으로 일하고있으며 사위 김인섭은 중국인민해방군 소장으로 있다. 정률성이 1941년에 작곡한 “《조선의용군행진곡》은 2000년 “6ㆍ15 남북정상회담”때 평양공항에 내린 한국 김대중대통령을 맞으며 환영곡으로 연주되였었다. 1942년 8월,  정률성은 화북조선혁명군정학교의 교무장으로 임명되여 태항산근거지로 갔다.  1945년 8월, 일제가 투항한후 정률성은 조직의 결정에 따라 한때 조선에 가서 사업하였다.  그는 조선인민군협주단 단장책임을 맡았다.  그는 인민군장병들을 승리와 영광의 한길로 고무하는 영생불멸의 노래인 《조선인민군행진곡》을 작곡하였다.  이 노래는 후에 《조선인민군 군가》로 되였다. 1950년 10월에 중국에 다시 온 정률성은 1951년에 또다시 가렬처절한 조선전선에 나가 “중국인민지원군행진곡”을 창작하였다. 전투기백으로 차넘치는 이 노래는 중조 두 나라 인민들을 승리에로 고무하였다. 해방후 정률성은 1952년부터 1966년까지 중국가무단, 중국음악가협회 창작조, 중앙악단 등 중국 최고의 음악단체들에서 음악활동에 종사했다.  그는 새생활창조와 생기가 들끓고있는 공장,  농촌과 부대로 다니며 수십수의 노래를 지었다.  1959년 반우파운동때 “반당분자”라는 루명을 쓰고 1966년 “문화대혁명”초기에는 “특무”로 몰려 옥고를 치렀다. “4인무리”의 압제와 타격을 받을 때에도 그는 송백같은 굳은 절개로 모택동의 시사에 곡을 다는 작곡사업을 계속하였다. 1976년, “4인무리”가 거꾸러진후 음악창작활동을 재개했지만 고혈압으로 돌아갔다. 그의 유체는 북경 팔보산혁명공동묘지에 안장되였다.  팔보산 정률성묘지앞에는 부인 정설송의 위탁을 받고 친구 교우가 쓴 글이 새겨져있고 묘비뒤편에는 그의 리력이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정률성동지는 1914년 음력 7월 7일에 한국 전라남도 광주의 한 혁명가정에서 태여났다. 소년시절에 반일애국독립활동에 참가했고 1933년 중국에 와서 선후로 남경과 상해 일대에서 항일구국활동에 종사했으며 1937년 10월 연안으로 갔고 1939년 1월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으며 일생을 중국인민의 혁명과 건설 사업에 바쳤다. 그는 충성스러운 국제주의전사이다.  1976년 12월 7일 북경에서 세상을 떴고 향년 62세였다.” 중화인민공화국 부주석이였던 왕진은 “정률성동지를 추모하여”란 글에서 “정률성동지는 현대중국에서 섭이,  선성해의 뒤를 이어 나온 걸출하고 우수한 작곡가이며 중국무산계급혁명음악사업의 개척자의 한사람”이라고 하였다. 정률성은 일생동안에 서정가곡을 포함해 군가, 합창, 동요, 영화음악, 기악곡을 망라해 360여편의 음악작품을 창작하였다. 그중 대표적인 곡으로는 《연안송》과 《팔로군행진곡》 즉 《중국인민해방군 군가》를 들수 있는데 이 두곡은 중국인민들에게 널리 알려진 사랑받는 노래로 중국현대음악사에서 대체할수 없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있다. 이로써 정률성은 섭이, 선성해와 더불어 중국근대음악사의 3대 음악가로 불리우기에 손색이 없다.  1990년 북경아시아경기대회에서 개막식 첫 프로그램으로 그의 대표곡인 《중국인민해방군 군가》가 연주된바 있고 2001년 가을에 북경에서는 그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태양을 향하여》가 개봉된바 있다.    
60    사기함정인 인터넷사랑에 빠져 댓글:  조회:3857  추천:0  2009-07-23
남경시 시민 조군은 남경시 한 번화거리에서 pc방을 경영하고있었다.  어느날 그는 인터넷에서 사귄 녀자친구로부터 이런 전화를 받았다. “조군씨, 사랑해요. 아버지가 꾸린 새 공장이 곧 개업해요. 당신이 이번 기회에 장인어른되시는분에게 잘 보여야 하지 않겠어요?” 조군은 통쾌하게 승낙하면서 즉시 2만원을 부쳐보냈다. 하지만 조군은 자신이 인터넷을 리용하여 사기치는 한무리 사기군들에게 협잡당했다는 사실을 모르고있었다.  나중에 자신이 사기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조군은 남경시 고루파출소에 제보했다.  경찰들은 즉시 출동하여 광주에 가서 한무리 사기집단을 짓부시고 사기혐의자 6명을 나포했다. 올해 35살인 조군은 일찍 pc방을 경영하여 많은 돈을 벌었지만 여직껏 마음에 드는  대상자를 만나지 못했다.  올해 4월에 그는 우연하게 한 인터넷혼인소개소사이트( 站)에 뜬 미혼녀자들에 관한 리력서를 보게 되였다. 이들의 리력서를 하나하나 펼쳐보니 모두 예쁜 용모를 가진 녀자들이였다. 조군은 아주 흥분되여 즉시 이 사이트의 회원으로 가입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조군의 우편함에 “사랑의 꽃편지”가 날아들어왔다.  그중에서도 려려라고 하는 아주 예쁘게 생긴 광동의 녀자가 조군의 마음을 끌었다.  두 사람은 인터넷에서 자주 만나 잡담을 했으며 나중에 사랑하게 되였다.“조군씨, 사랑해요. 우리 아빠는 대기업의 보스얘요. 나는 아빠의 기업을 관리하고있어요. 결혼할 나이가 퍽 지났지만 사업때문에 합당한 대상자를 만나지 못했어요.” “그렀소?  돈많은 부자집의 공주님이 왜서 나같은 남자를 사랑하오?  난 돈도 없고 배후도 없는 보통시민에 불과하오.” “호호호, 아빠엄마는 돈보다는 성실하고 정직한 남자를 사위로 삼으려고 해요.” “허허허, 돈없는 나같은 남자도 그 요구에 부합되나보군?” “그럼요, 내가 딱 마음에 들면 그만이죠. 그리고 장차 아빠의 재산은 자식이 하나뿐인 내가 물려받을걸요.” “그렀소?  딸의 몫이면 사위몫이 아닐가?” “참 총명하시네.  당연히 그렇죠.  날 이뻐해주세요.” 여직껏 마음에 드는 대상자를 만나지 못한 조군은 그 많은 재산을 물려받을수 있다고 하니 저도몰래 웃음주머니가 흔들거리였다. 올해 5월 2일에 조군은 인터넷에서 또 려려를 만났다. “그동안 잘 지냈어요?  나의 사랑하는 조군씨!” “그냥 려려만 생각하면서 지냈소.” “이봐요, 아빠가 여러개 공장을 가지고있어요. 나 지금 새 공장의 개업식현장에 와있어요.  핸드폰으로 들어봐요.  밖에서 폭죽이 터져요.” 조군이 핸드폰을 켜니 폭죽소리가 들려왔다. “조군씨, 개업식에 친척과 친구들이 축하례물을 보내왔어요.  미래의 사위인 당신의 축하례물은요?” “난 돈이 별로 없는데 얼마면 되겠소?” “돈은 그만두고 꽃바구니면 족해요.” 돈을 보내지 않아도 된다는 말에 조군은 더욱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그는 꽃바구니를 어떻게 보내야 할지 몰라 려려에게 물었다. “꽃바구니면 되겠소?  그런데 어떻게 보내오?” “우리 집 부근에 꽃상점이 있어요.  꽃상점의 전화번호를 알려줄테니 아빠에게 꽃바구니를 전해달라고 주인에게 부탁하면 돼요.” 조군은 려려가 알려준 전화번호대로 꽃상점주인과 련계를 취했다. 그러자 꽃상점주인은 당지의 풍속대로 값이 가는 꽃바구니를 보내야 한다고 알려주었다.  조군이 알아본데 의하면 그 꽃상점에 3000원짜리 꽃바구니와 5000원짜리 꽃바구니도 있고 1만원짜리 꽃바구니도 있었다. 조군은 미래의 장인에게 잘 보이려고 5000원짜리 꽃바구니를 보내달라고 부탁하면서 알려준 구좌에 5000원을 부쳐보냈다.  그런데 생각밖에 려려한테서 전화가 왔다. “조군씨,  당신이 이렇게 린색한줄은 생각못했어요. 당신이 보낸 꽃바구니가 너무 초라해서 낯을 들고 다니지 못하겠어요. 미래의 사위라는 당신이 참 너무 째째해요.” 려려가 화를 내니 조군은 당황했다. 이 일로 하여 려려가 당금 자기곁을 떠날것만 같아 인차 꽃상점주인에게 전화를 했다. “여보시오,  돈을 더 보내줄테니 더 좋은 꽃바구니가 없습니까?” “왜 없겠습니까? 비싸서 그렇죠.” “얼마면 돼요?  돈은 걱정말고 제일 좋고 제일 비싼걸로 골라 보내주세요.” “이곳에 제일 비싼 ‘도금화’란 꽃바구니가 있소. 하지만 1만 5000원이여서 너무 비싸…” “그럼 그걸로 하십시오.  즉시 돈을 보내겠습니다.” 조군은 전화를 끊자마자 돈 1만 5000원을 또 부쳐보냈다. 조군은 돈을 부쳐보낸후 려려에게 전화를 했지만 전화가 련결되지 않았다. 련 며칠동안 계속 전화를 해보았지만 계속 끊어져있었다.  이때에야 조군은 려려에게 사기당했다는것을 알아차리였다.조군은 려려에게 사기당한줄을 번연히 알면서도 처음에 파출소에 제보하지 않았다. 그는 려려를 잊지 못해 그에게 메시지(短信)를 보냈다. “당신이 어찌 이럴수가 있소? 난 당신을 진정으로 사랑하오.  당신은 나의 감정을 희롱했고 나의 돈을 사기쳤소.  이는 비도덕적인 행위요.” 며칠후에 생각지 못했던 려려한테서 이런 메시지가 날아왔다. “조군씨, 노여워말아요. 난 확실히 당신의 감정을 리용하여 돈을 홀려냈어요.  하지만 보스에게 바치다보니 지금 그 돈이 없어요. 용서해요.” 그번 일이 있은후에도 조군은 인터넷에서 자주 려려를 만나 잡담을 했다. “려려,  난 당신을 잊지 못할것 같소.  우리 다시 시작하면 안될가?” “난 당신을 한번 사기친 나쁜 녀자인테 괜찮아요?” “모두 지나간 일인데 잊어야지.” “그럼 좋아요. 나 시간을 잡아서 한번 남경으로 놀러가겠어요.”두 사람은 이렇게 남경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이번에 조군은 전번처럼 어리석진 않았다. 조군은 남경시 고루파출소에 자신이 사기당한 사실을 적발하고 그 사기군이 곧 남경에 온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5월 19일에 려려는 남경에 도착하자마자 즉시 공안경찰들에게 잡혔다. 알고보니 이는 한차례 인터넷혼인소개소를 리용한 사기사건이였다.  려려는 올해 23살이고 광동사람이며 이미 결혼까지 한 가정부녀였던것이다.  그는 고향사람들과 함께 사기친 사실을 탄백했다. “호씨성을 가진 고향사람이 나를 찾아와 나더러 미혼녀자로 가장하고 인터넷혼인소개소에 등록하면 청혼하는 남자들의 돈을 홀려낼수 있다고 알려주었어요. 하여 돈에 눈이 어두워 그들과 손잡고 나쁜 일을 했습니다.  꽃상점주인도 가짜였습니다.” 경찰들의 교양하에 려려는 자신이 지은 죄를 뉘우치고 법죄혐의자들의 단서를 제공해주었다. 경찰들은 려려의 도움으로 즉시 출동하여 광동에 가서 련속 이틀밤을 새우면서 한무리 사기집단을 짓부셨다. 조사해본 결과 이 사기집단 성원들은 모두 한고향사람들이였다. 이들은 선후하여 항주, 복건 등지에서 도합 4번이나 사기사건을 저질었는데 액수가 10여만원에 달했다.  현재 6명의 사기혐의자들이 경찰에 의해 구류되였다. 당지경찰들은 시민들에게 인터넷혼인소개소에 등록할 때 정규적인 인터넷혼인소개소인가를 꼭 확인해야 하며 경솔하게 상대방을 믿지 말아야 할뿐만아니라 맹목적으로 돈을 부치지 말고 꼭 부쳐보내야 할 경우 개인의 상세한 정보를 루설하지 말것을 신신당부했다.                                           
59    티베트 송짠감보와 당나라 문성공주 댓글:  조회:4232  추천:0  2009-07-22
1300년전, 당나라의 문성공주는 당시 번화한 도시였던 장안(오늘날 산서 서안의 북쪽에 위치함)을 떠나 서쪽으로 3000km를 지나서 토번왕 송짠감보와 화친을 했다. 이는 당조와 토번의 우호교류의 새로운 기원을 열어놓은것이다.. 송짠감보와 문성공주의 이야기는 오늘날까지 한(漢)-티베트 두 민족사이에 널리 유전되고 있다.   7세기초, 중원지구에서 수년간 전쟁을 거쳐 이연(李淵, 당고조), 이세민(李世民, 당태종) 부자는618년에 장안성에 중국 역사이래 전례없던 대당제국을 건립했다. 당시 국력이 강성한 당나라는 동부아세아지역의 문명중심지로 전변하여 주변의 민족부락에 강렬한 영향을 끼쳤기에 많은 민족부락은 전후로 당조와 우호관계를 맺었다.   정관8년(634), 송짠감보는 토번(티베트족의 선조)의 짠보(국왕)로 즉위했으며 13살 어린 나이에 론커얼(論科耳), 상낭(尙囊) 등 신하의 보조하에 반란군을 토벌하고 토번을 통일시켰다. 당나라가 중원지구에서 제패하고 있을 때 송짠감보도 고원에서 군림을 하였으며 일부 소국을 겸병하고 로소(지금의 서장자치구 라싸)에 서울을 정하여 통일된 토번왕조를 세움과 동시에 적극적으로 당조와의 밀접한 관계를 도모했다. 기원 634년부터 두차례를 거쳐 말도 잘하고 총명한 사신 록동짠(綠東贊)을 당나라에 파견하여 당태종에게 화친을 요구하였다. 기원641년 당태종은 드디어 송짠감보의 화친요구에 동의했으며 문성공주를 그에게 시집보내기로 승낙했다.   록동짠은 자신의 총명과 재질을 잘 발휘하여 당태종이 낸 여러 난제를 해결해 마침내 송짠감보가 아름답고 선량한 문성공주를 맞이할 수 있게 한 이야기는 티베트족 민간이야기에도 많은 기록이 있다.   당시 당나라에서 한창 불교가 성행되고 있을 때 토번에는 불교가 없었다. 문성공주는 아주 지극한 불교도로서 토번으로 갈 때 불탑, 경전, 불상을 갖고 갔으며 그곳에 불사를 세워 불교를 널리 알릴 것을 결심했다.   문성공주는 한면으로 불교를 널리 알려 백성을 위해 행복을 기원함과 동시에 다른 면으로는 오곡종자 및 유채씨를 가져와 백성들에게 파종방법을 가르쳤다. 옥수수, 감자, 누에콩, 유채는 고원기후에 적합해 잘 자랐고 밀은 끊임없이 변종되어 오늘날 티베트족 인민들이 즐겨먹는 쌀보리로 변종했다. 문성공주는 또 차, 말, 소라, 낙타 그리고 생산기술과 의학서적을 가져와 토번의 사회진보를 추진하였다.   송짠감보는 현숙하고 다재다능한 문성공주를 무척 사랑하여 그녀를 위해 부다라궁을 수건했다. 부다라궁은 모두 1000개의 궁실로 이루어졌으며 외관이 화려하고 웅위하다. 하지만 그후 번개와 우뢰, 전쟁에 의해 파괴되었는데 17세기의 두차례 확대건설을 거쳐서야 현재의 규모를 이룰 수 있게 되었다. 부다라궁 주건물은 13층으로서 높이 117m, 총 면적은 36만㎡에 달해 웅위한 기백을 자랑하고 있다. 부다라궁에는 많은 벽화들이 보존되어 있는데 그 중에는 당태종이 다섯번이나 토번의 사신 록동짠을 시험한 이야기와 문성공주가 토번으로 가는 길에서 겪은 간난신고 및 라싸에 도착한 후 티베트족 인민들의 뜨거운 환영을 받고 있는 장면들이 담겨져 있다.   송짠감보가 문성공주를 아내로 맞아들인 후 중원과 토번의 관계는 더욱 밀접해졌으며 그 후 200여년간 전쟁이 거의 발생하지 않아 평화적 국면을 형성할 수 있게 되었다.   영용하고 지혜로운 송짠감보는 티베트를 통일한 후 토번의 정치, 경제, 문화발전을 추진시켰고 티베트족과 한족간의 우정을 돈독히 함으로서 중국의 통일된 다민족국가의 역사발전을 위해 큰 기여를 했다. 문성공주는 고생을 무릅쓰고 머나먼 토번에 시집간후 당나라와 토번의 경제문화 교류를 크게 추진했고 한족과 티베트족 사이의 우정을 한층 깊이 함으로서 역사적 기여를 했다.   중국국제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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