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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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음악가 부부 댓글:  조회:6166  추천:9  2011-12-07
“어머님은 나를 음악의 길로 이끌어주신 계몽자이시다.” 작곡가 최창규선생은 60여년의 음악인생을 회고하면서 수많은 사연들이 영화처럼 떠오른다고 하면서 그중에서도 자신을 음악의 길로 이끌어주신 어머님이 고맙고 그립다고 했다.  최창규선생은 이렇게 회고한다. “해방전 우리는 왕청현 배초구에서 살았다. 어머님은 농부의 안해이고 네 아들의 엄마였다. 내가 일곱살인 해 어머님이 한동안 백로지에 풍금건반 문양을 그려놓고 손가락으로 짚어가면서 풍금연주 련습을 하시였다. 하루는 내가 어머님을 따라 성당으로 갔다. 어머님이 한복차림에 정중히 앉으셔서 나를 위해 풍금을 연주해주셨다. 어머님의 풍금소리는 나의 어린 가슴에 음악의 꿈을 심어주셨다. 1948년 어머님이 나에게 독일제 바이올린을 사주시여 내가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했다. 몇년후 하루는 어머님께서 풍금을 치시고 내가 바이올린을 연주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나 어설픈 연주였지만 참으로 평생 잊지 못할 모자의 2중주였다.”  최창규선생은 중국조선족의 저명한 작곡가이시고 연변가무단의 중견작곡가이시다. 그는 가곡 “친구의 노래”, 가극 “아리랑”(합작), 명상곡 “봇나무”, 무용곡 “군민의 정”, “벌목공”, “분배의 기쁨”, “푸른숲 설레이네”,“처녀지” 등 수많은 음악작품을 창작하여 연변가무단의 무대를 빛나게 했으며 국내외에서 명성을 떨치게 했다.   일전에 필자는 최창규선생과 일문일답의 대담을 가졌다. 아래에 그대로 정리하여 올린다.  “선생께서는 여러 작곡가, 연주가, 성악가, 무용가들과 어떤 관계속에 살아오셨는지요?” 연변가무단은 우리 민족의 대표적인 무대예술표현단체이다. 우리 작곡가들은 연변가무단의 무대에 아름다운 음악이 흐르게 하는것을 공동한 천직으로 생각한다. 지난 세기 90년대 작곡가 안국민,최삼명,허원식과 저희가 공동으로 작곡한 가극 “아리랑”이 바로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가극 “아리랑”의 모티브는 우리가 공동으로 설정하고 그것을 각자 맡은 악장에서 충실히 발전시켜 완전한 가극음악을 창조해냈다. 전국가극콩클 평의에서 “연변가무단의 작곡가들은 가극 ‘아리랑’음악창작에서 합작과 창조의 본보기를 보여주었다”고 높이 평가했다. 그리고 나의 창작작품이 연주가, 성악가, 무용가들에 의해 빛을 뿌리는데 내가 어찌 그들을 고맙게 생각하지 않고 협찬을 하지 않겠는가? 사실 무대예술은 종합예술이기에 여러 예술가들의 공동한 노력이 없으면 성공할수 없다.  “선생께서는 민족음악과 서양음악의 관계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민족음악은 작곡가의 터전이고 근본이다. 어떤 작곡가든지 모두 본민족의 음악에 귀를 기울려 그것을 발전시키는 과정에 외국음악의 영양분을 섭취하면서 자신의 작품을 더욱 찬란하게 발전시켜왔다. 로씨야의 위대한 작곡가 글린카와 차이꼽스끼는 모두 로씨야민요를 바탕으로 위대한 음악작품들을 탄생시켰다.  “선생께서는 우리 민족음악의 앞날에 대한 소망은?” 60여년간 우리의 민족음악은 눈부신 발전을 가져왔다. 그러나 세월은 해와 달 같이 길고 음악은 세월과 함께 살아간다. 하기에 민족음악은 갈길이 멀고 멀다. 우리는 몇수의 가곡과 무용곡, 기악곡에 만족할수 없다. 앞으로 국내외에서 명성을 떨치는 음악인재들을 많이 키워내여 민족령혼의 승화와 진보를 위해 더욱 훌륭한 가요,무용곡 특히는 기악곡, 교향곡을 창작해내야 할것이다.  “선생께서는 음악가 부부 인생을 살아왔다고 들었는데요?” 1957년, 연변예술학교 제1기 입학생들이 연변가무단에 와서 입학등록을 하는데 나는 한눈에 한 녀학생에게 눈도장을 찍었다. 본인은 물론 모르는 일이였다. 1961년, 주덕해주장님과 연변가무단의 배려하에 나는 중앙음악학원 작곡계에 입학하여 공부를 했다. 1964년 가을, 졸업후 우리는 결혼했다. 그 때 부인은 첼로연주가가 되여 연변가무단 악단에서 나의 창작작품을 기다리고있었다. 부인 리가자녀사의 말이다. “연변가무단에서 남편과 함께 했기에 그의가 창작한 작품을 연주할 기회가 아주 많았다. 남편이 집에서 며칠밤을 지새우면서 알심들여 창작한 작품이 악단에 교부되여 연주를 하게 된다. 그때마다 악단 지휘나 연주가들이 ‘이 작품은 잘 썼다.’고 찬사가 터질 때면 너무나 기뻤다. 그러나 때론 ‘이 작품은 시원치 않다.’는 소리가 들리거나 혹은 안무가와 의견이 생기면 나는 안타까움과 서운함을 금할수 없었다. 그래서 종종 조언을 할 때가 있었다. 우리는 음악의 터전에서 희로애락을 함께 한 음악부부이다.” “선생께서는 제2인생을 어떻게 보내시는지요?” 음악은 내 령혼의 메아리이다. 우리는 은퇴후에도 음악부부 인생을 살고있다. 제2인생에서 음악의 컴퓨터시대를 맞아 다행이다. 10여년전부터 음악창작과 음악저작을 위해 미디(전자음악제작)와 노테이션(전자악보제작)을 배웠다. 지금은 내가 창작한 작품들을 컴퓨터작업으로 정리하고있다. 나는 인생의 마지막순간까지 음악을 떠나서는 살수 없다. 물론 나의 제2음악인생은 안해의 내조가 있어서 더욱 행복하다.
29    농악무의 스승 댓글:  조회:5670  추천:3  2011-11-16
10월 중순의 하루 한 낯선 녀성이 걸어온 전화를 받았다. “옛날에 우리 아버지가 연변문공단에서 농악무를 배워줬고 연변예술학교에서도 강의를 하면서 학생들에게 농악무를 가르쳤다. 그런데 지금 연변에서 농악무에 관한 보도나 론문에는 우리 아버지의 업적이 하나도 적혀있지 않다.”  필자는 전화를 받은 즉시 달려가서 북경에 살고있다는 60여세의 언니와 연길에 살고있는 동생 자매들을 만났다. 사연은 이러했다. 하태일(河兑镒)선생은 1906년 경상남도 남해군 동천리 한 농민가정에서 셋째아들로 태여났다. 가난때문에 학교 문앞에 못 가본 소년 하태일은 다행히도 어릴 때부터 농악무를 가르치는 고향의 전통에 힘입어 7세부터 농악무를 배웠다. 그것도 농악무중에서 가장 인기높은 상모춤을 배워서 그 어느 아이보다 뛰여나게 춤을 추는 춤군으로 자라났다. 매년 추석이나 설 명절이 돌아오면 소년춤군은 농악대를 따라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공연하러 다녔다.  1936년 하태일선생은 식구를 이끌고 “북간도”라 부르는 지금의 연길시에 와 등짐을 풀었다. 그때부터 아버지는 연길시내에서 땅을 파고 상수도를 설치하는 고된 육체로동을 하면서 자식들을 공부시켰다. 그는 일이 없을 때는 경삼남도에서 이주해온분들이 모여사는 지금의 서시장북쪽에 있는 친구네집에 모여 농악놀이를 했다.  1951년 비오는 어느날, 하태일선생에게는 반가운 일이 생겼다.  그때 연변문공단에서는 민족문화예술을 발전시키라는 당의 지시와 자치주 주장이신 주덕해동지의 직접적인 배려로 연변문공단 김태희단장이 나서서 민간예인들을 초빙했는데 하태일선생도 그 민간예인중의 한분이였다. 그때부터 연변문공단에서는 매일 저녁 양마차로 아버지를 모셔가 배우들에게 농악무를 가르치게 하고는 양마차로 집에 모셔왔다. 얼마후 그는 문공단원에 채용되였다. 연변문공단의 저명한 발레무용가 조득현선생은 그때부터 하태일선생한테 한보한보 농악무를 배우면서 그 농악무를 무대공연 프로로 개편, 창작 하게 되였다. 하태일선생은 농악무를 가르치는 한편 젊은이들과 함께 주와 길림성, 동북3성의 문예콩클무대에 올라 여라차례 상을 탔다. 1957년 국가문화부 주최 전국무용대회에서 연변가무단에서 농악무를 올려 조득현선생은 농악무 안무우수상을 받았고 하태일선생은 주연 우수상을 받았다. 그때 모주석 등 령도동지들의 접견을 받았다. 1957년, 주덕해주장의 관심과 배려하에 연변예술학교가 창립되였다. 연변문공단에서 무용교원으로 50세를 훌쩍 넘긴 하태일선생은 1959년 7월부터 연변예술학교 무용교원으로 전근하여 학생들을 가르쳤다. 하태일선생은 춤군이면서 소리군이여서 “춘향전”  진도아리랑 등을 썩 잘 불렀다. 1975년 9월, 농악무의 스승인 하태일선생은 그 소중한 농악무유산을 후대들에게 더 많이 전수하지 못한 유감을 안고 이 세상을 떠났다. 이번에 하태일선생의 딸들이 연변무용계와 문예계의 여러 선배들을 만나 얘기를 해보니 이러한 “옛말”을 모두 잘 알고있었고 그외에도 생동한 “옛말”이 많았다고 한다.  이번에 얻은 교훈은 두가지이다. 하나는 우리가 아직 이러한 력사적인 조선족문화예술인물 특히는 이미 세상을 뜬 인물을 발굴하고 상세한 기록과 연구를 하는데 노력이 부족하다는것이다. 현재 우리앞에는 여러가지 력사저작이 펼쳐지고있지만 력사인물에 관한 더욱 구전하고 학술적가치가 있는 저작은 그리 많지 않다. 또한 혁명투쟁시기 력사인물에 대한 연구는 많은편인 반면 문화예술인물에 대한 발굴과 연구가 적은것도 사실이다. 더우기 지금의 열린 세상에서 많이 흩어져 살아가면서 이러한 연구사업이 따라가지 못한다면 우리 민족의 정체성에 영원히 되살릴수 없는 흠집을 남길것이다.  또 한가지는 우리가 문화유산을 발굴하고 정리함에 있어서 그 뿌리를 정확히 찾아내고 그 문화유산의 전승과정을 되도록 정확하게 밝혀내여 문화유산의 력사적인 흐름을 밝히고 계속 전승하는것이다. 민요 “아리랑”, “도라지”, “노들강변” 등은 어떻게 우리에게 전승되였을가? “농악무”, “장고춤”, “물동이춤” 등은 어떻게 전승되였을가?  “춘향전”, “심청전” 등 고전은 어떻게 전승되고 무대에 올려졌을가? 이러한 과제는 학자들에 의해 연구가 깊이 진행될뿐만아니라 대중들에게 많이 알려져서 그런 문화유산들이 대중속에서 계속하여 전승되게 하는것도 아주 중요한 사명이다. 금년 7월, “연변인물연구회”가 연변인물과 중국조선족인물 연구의 대장정을 위해 닻을 올렸다. 앞으로 “연변인물연구회”가 실사구시적이고 력사적이며 넓은 시각으로 연변의 인물과 중국조선족인물들을 발굴하여 권위적인 “인물록”, “인물평전”, “인물전기” 등 책자와 인물영상다큐를 펼쳐낼것이라 믿는다.   
28    동창생들의 여행 댓글:  조회:4114  추천:2  2011-10-12
일전에 대학시절 동창생들이 부부동반으로 두만강려행을 했다. 국경절련휴기간이라 모두들 편한 마음으로 려행길에 올라 차창밖에 무르익어가는 가을풍경을 바라보면서 이야기꽃을 피웠다. 동창생들이 모이면 첫 화제는 당연히 "옛날이야기"다. 1962년 가을,  20대 청춘남녀들이 농예가의 꿈을 안고 대학에 입학하여 동창생이 되였다. 그때는 3년 "곤난시기"를 금방 지내고 나라의 경제와 식량형편이 다소 좋아지는 시기여서 사람들의 얼굴에는 얼마간 화색이 도는 시절이였다. 또한 "뢰봉정신"이라는 사랑의 물결이 온누리에 넘쳐나 서로 사랑하고 돕는 사회풍기가 흥했다. 그러나 그러한 호시절도 잠간, 대학을 졸업할 무렵에는 "문화대혁명"이라는 "대동란"이 터지면서 학우들은 웃음을 잃은채 뿔뿔이 흩어져야 했다. 오늘 려행길에서는 모두들 약속이나 한듯이 그런 가슴아픈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가 대학시절 즐겨부르던 노래와 기막히게 웃겼던 "사건"들만 찾아내서 웃음보를 터뜨렸다. 이제는 모두 70세 좌우의 "로지식분자"들이여서 자신의 인생이야기, 자식키우던 이야기, 건강장수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 모두 고단수였다. 또한 열두사람중에 동창생들의 남편이나 부인은 교수와 공무원들이라 참신한 정보와 지식을 보태주어 더욱 즐거웠다. 동창생들은 모두 고급농예사들이라 농사를 보는 안목이 남달랐다. 려행길에 두만강반의 벼농사를 살펴보면서 그 누런 색상으로 보아 대체로 풍년이 들었다고 판단했다. 지금은 벼종자가 좋고 농약이 구전하여 이제는 저온랭해도 잘 이겨내기에 기상악재가 없으면 풍년은 당연한것이다. 도로는 나라의 경제동맥이다. 이번 려행길에 인상이 깊었던 또 한가지는 두만강일대의 도로였다. 지난 70년대까지만 해도 뻐스편으로 룡정에서 삼합으로 가자면 무척 힘들었다. 도로가 모래길인것은 물론이고 오랑캐령을 넘을 때는 도로가 산세를 따라 험난하게 뻗어서 덜커덩거리는 버스에 앉아 마음을 조여야 했다. 오늘은 단풍이 울긋불긋 물든 산천을 구경하면서 이야기꽃을 피우는 사이에 어느덧 뻐스는 산속을 벗어나 두만강가의 변강도로에 들어섰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몇년동안 두만강려행을 하지 않은 사이에 두만강가에는 이미 넓고도 평탄한 포장도로가 쭉 뻗어있지 않는가. 포드뻐스가 변강도로를 신나게 달리는데 두만강은 유유히 바다로 흘러간다. 1929년 독일에서부터 시작한 고속도로는 1954년부터는 미국으로 뻗었고 나중에는 여러 나라로 뻗으면서 경제대동맥의 역할을 해왔다. 1989년에는 중국에도 고속도로가 뻗기 시작하여 지금은 그 연장선이 이미 지구 두바퀴를 거의 도는 7만여키로메터라고 한다. 요즘은 고속도로가 발달하고 국도가 거미줄처럼 이어지고 촌마다 마을마다 세멘트향촌도로가 깔려 모두 도시와 련결되였다. 아름다운 산천경개앞에서는 누구도 흥이나는 법이다. 삼합의 산등성에 있는 "망강각(望江阁)"정자에 올라 두만강을 내려다보니 산천이 참으로 아름다왔다. 흥이난 부인들은 포드뻐스에서 울려나오는 즐거운 노래소리에 맞춰 춤판을 벌렸다. 그러한 장면들은 이미 디지털사진으로 담았으니 두고두고 "한살이라도 젋었을 때"를 회고하면서  웃을것이다. 그 흥을 이어 백년이 넘는 기와집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닭도리탕, 감자밥에 옥수수까지 곁들이니 진수성찬이 따로 없었다. 오후 귀가길에 일행은 명동촌을 방문하여 우리 력사를 돌아보았다. 1908년 4월, 김약연선생께서는 명동학교를 꾸려 항일시인 윤동주, 영화 "아리랑"의 주역 나운규 등 수많은 항일지식인을 키워냈다. 우리는 윤동주시인의 생가를 방문하여 그의 생애를 더듬고 조문을 드렸다. 150여년전부터 우리의 조상들은 두만강을 건너와 이 땅에 삶의 터전을 닦고 벼농사를 지으면서 희로애락의 력사를 엮어왔다. 그러한 력사를 지켜본 "달라재"선바위와 산등성에 단풍이 붉게 물들어있어 마치도 거대한 화룡이 꿈틀대는듯했다. "동창생들의 려행"은 참 좋은 모임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번 려행은 학창시절의 아름다운 옛이야기를 하면서 인생을 뒤돌아보았고 겨례들의 빛나는 력사를 탐방하면서 자호감을 느꼈으며 산천경개를 두루 돌아보면서 우리도 청산처럼 살아가자고 다졌다. 그래서인지 저녁에 한 "녀학생"이 메일에 이번 려행은 "평생 잊지못할 기념"이 될것이라고 한다. 앞으로 우리는 몇달에 한번씩 이러한 모임을 가지기로 했다. (칼럼니스트)  
27    세월의 단풍 댓글:  조회:4199  추천:4  2011-09-28
연변의 강산은 참으로 아름답다. 봄에는 평원으로부터 장백산까지 차례로 꽃이 피고 가을이면 장백산에서 평원으로 단풍이 물든다. 요즘은 단풍이 강산을 울긋불긋 물들이면서 산천이 거대한 수채화로 변해가고 있다.  모아산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니 먼 산들은 벌써 단풍이 들었고 세전이벌은 황금벌로 변했는데 만무과원에서는 사과배가 무르익는다. 산책길숲속에는 머루넝쿨이 먼저 빨갗게 물들어 이제야 노란색을 내비치는 단풍나무에 넥타이처럼 드리워져 가을소식을 알린다. 1991년 가을, 필자는 기자들과 함께 돈화에서 장백산방화호림 전용비행기에 올라 하늘로 날아올랐다. 우리가 방금 리륙했을 때 땅위에는 초가을 풍경이라 단풍이 짙지 않았다. 비행기가 장백산림해에 점점 다가가면서 우리는 광활한 단풍의 바다위를 날리시작했다. 가을이라는 세월은 장백림해를 다채로운 꽃밭으로 단장하고 있었다. 기자들은 저마다 바쁘기 시작했다. TV기자는 동영상을 촬영하느라고 여념이 없고 사진기자들은 더욱 와이드한 장면을 찍느라고 여념이 없었다. 창문유리가 화면의 질을 떨어뜨리것이 아쉬운 기자들은 기장에게 청을 들어 아예 비행기 대문을 확짝 열어제끼고 각자는 허리에 바줄을 단단히 매고 대문가에 없드려 신나게 단풍의 바다를 찍고 또 찍었다. 비행기가 고도를 점점 높이면서 단풍의 바다는 점점 멀어지고 저 멀리 구름의 바다가 펼쳐지기 시작했다. 한동안 비행기는 구름속을 날아오르더니 드디여 새파란 하늘을 보게 되였다. 그순간 저멀리 하늘가에 웅장한 장백산이 둥둥 떠 있지않는가. 우리는 감탄의 함성을 지르면서 넋을 잃었다. 이 강산을 천만년 지켜온 성산이 아니가.  기자들은 평생에 한번 볼까말까하는 항공영상으로 장백산의 웅위로운 모습을 마음껏 촬영했다. 우리는 그렇게 가을이 금방 겨울로 이어지는 대자연의 조화를 한눈으로 보았다. 지금도 20년전 그날의 장백산사진을 보느라면 참으로 감개무량하다. 세월도 무르익으면 단풍이 든다. 그래서 이라 불러본다. 농부들은 진달래피는 봄날부터 벼씨를 붓고 논을 갈면서 한해 농사를 시작하여 단풍이 물들면서 한해의 풍작을 맞이한다. 사실 매년마다 단풍이 곱게, 그리고 오래도록 물들어 있으면 가을농사도 그만큼 넉넉하다. 그것은 서리가 늦게 내리기 때문이다. 이 짙게 피여날수록 농가에는 산같은 벼낫가리며 빨간고추다래 노란호박이 마당과 지붕을 장식하게 된다. 인생도 배움의 세월, 분투의 세월을 지내고 나면 을 보게 된다. 배움의 세월을 회상할 때면 아직도 책갈피속에 소중히 간직한 단풍잎처럼 생각나는 스토리들이 많다. 대학시절 유전학을 배울 때 현대유전학의 대부인 멘델의 경전적인 실험이 생각난다. 우선 순종의 흰색 완두꽃에 빨간 완두꽃을 잡교하여 얻은 씨를 이듬해에 심었을 때 피여난 완두꽃은 모두 빨간색이였는데 그러한 빨간꽃에 모두 자화수분을 해서 그 씨았을 다음해에 다시 심어 피여난 꽃은 절묘하게도 빨간꽃과 힌꽃의 비례가  3대1이였다는 것이다. 그러한 실험으로 하여 멘델은 자연계의 모든 생물에는 자아를 복제하고  대대손손 유전하려는 유전인자가 있다는 유전법칙을 규명했다. 의 세월에 북대황에서 농사를 지으면서도 가끔씩은  멘델의 완두꽃실험이 생각나서 매번 들꽃을 볼 때마다 그 꽃들의 색상을 유심히 살피면서 동란세월의 번뇌를 잊으려했던 기억이 난다. 현대의 생명공학은 바로 그 전설적인 완두꽃실험을 밑거름으로하여 동물과 식물의 유전인자를 파악하고 그것을 해명함으로써 인류는 지금 으로 진입하고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빨간단풍, 노란단풍 역시 그러한 아름다움을 대대로 물려주려는 단풍유전인자의 조화가 아니겠는가. 우리는 150여년이란 세월을 중화민족의 일원으로 떳떳하게 살아왔다. 우리가 력사에 남긴 은 많고도 많다. 우리는 겨례의 유전자가 담긴 을 한잎한잎 잘 주어서 우리의 력사를 빛내야 할것이다. 또한 개혁개방의 세파속에서 새로운 삶의 지혜를 터득해 앞으로 가야할 만리장정길 위에 계속 을 피워야 할것이다.  
26    연변TV 위성의 장미빛 미래 댓글:  조회:4497  추천:4  2011-09-07
연변위성방송이 다섯살 생일을 맞이했다. 국내의 각지와 동북아지역에 전파되는 우리의 위성방송에 축하의 박수를 보낸다.  중화대지에 뿌리내려 150여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위성방송까지 하면서 떳떳하게 살아가고있어서 참으로 자랑스럽다. 연변위성방송은 당과 국가의 민족정책의 혜택이다.  2003년 6월, 중앙의 관련 지도자가 연변을 시찰할 때 연변의 조선어라지오TV방송사업의 새로운 국면을 열어갈데 관한 지시를 내리면서 연변위성방송사업은 국가의 “서신공정”의 일환으로 되였다. 2006년 8월 10일, 연변위성방송은 정식으로 동북아의 하늘에 전파를 발사하면서 조선어위성방송의 새시대를 열었다. 사실 위성방송은 성,시,자치구급이상에서만이 할수 있는 방송인데 우리는 지구급이면서도 위성방송을 할수 있어서 특혜를 누리는것이다.  연변위성방송은 중국조선족의 위성방송이다. 연변위성방송은 연변이라는 지리적인 지역을 넘어 국내 각지에 살고있는 조선족을 대상으로 하는 위성방송이다. 하기에 연변위성방송 뉴스프로는 중국조선족의 새로운 기상을 생생하게 전하고있고, 두만강지역개발과 선도구건설 실황, 우리의 력사와 전통문화를 실은 TV매거진 "두만강", 우리생활의 이모저모를 보여주는 "사랑으로 가는 길", "고향의 아침", "청춘스타트", "우리네 동네", "경제와 생활"  등 프로는 중국조선족의 정치, 경제, 문화, 청소년,사회 등 여러 면의 새 기상을 생동하게 전해주고있다. 또한 "아리랑극장", "문화광장",  "매주일가", "드라마극장"  등 문예프로는 우리의 전통문화와 문화유산을 배경으로 21세기 중국조선족문화의 진수를 생생히 보여주고있다. 연변위성방송은 중국의 뉴스와 문화를 조선어TV방송으로 전파하는 창구이다. 연변위성방송은 CCTV방송의 뉴스와 사회교양프로,  다큐멘터리,  드라마 등 우수한 프로들을 조선어로 역제하여 방송함으로써 국내조선족들에게는 물론이고 동북아의 조선어 TV프로  시청자들에게 중국의 소식과 문화를 전파하는 사명도 수행하고있다. 그 와중에 해외에서 류학, 사업, 로무를 하고있는 조선족동포들에게 고향의 소식을 전해주는 메신저역할도 잘하고있다. 위성방송의 핵심적인 기능은 와이드앵글(넓은 시각)에 있다. 위성방송은 보다 넓은 세상을 취재대상으로 하고있고 보다 넓은 세상에 새 소식과 참신한 문화를 전파하기 위해 하는 방송이다. 하기에 연변위성방송은 앞으로 중국조선족동포들이 살아가고있는 곳이라면 국내외 그 어디라도 찾아가서 카메라로 대화를 할것이다. 위성방송은 하늘에서 대지를 내려다보는 방송인만큼 21세기를 살아가는 중국조선족동포들의 이야기를 더욱 심각하게 내려다보고 그중에서 참신하고  다이나믹한 뉴스들을 제때에 전파해야 할것이다. 또한 중국조선족문화의 새 기상을 제때에 파악하여 그것을 다 같이 향수할수 있도록 배려해야 할것이다.  위성방송은 국내외에 시청자들을 두고있다는것을 잊지 말아야 할것이다. 국내에서 조선족동포들은 물론이고 조선어를 배우는 형제민족시청자들도 있다. 또한 동북아지역의 조선어시청자들이 우리의 위성방송을 지켜보고있음을 명기해야 할것이다. 그러한 시청자들의 요구를 들어주기 위해서는 위성방송을 위성안테나,  인터넷,  케블방송을 통해 다 시청할수 있도록 더욱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할것이다. 1987년 7월, 필자가 연변TV방송국에 재직할 때 외국취재단을 초청해서 공동으로 력사다큐멘터리프로를 제작했었다. 당시 그 외국취재단의 단장이 며칠후 위성방송을 시작해야 하기에 급히 귀국해야 한다고 해서 참 부러웠다. 1997년 필자는 "21세기 중국조선족발전방략" 연구에 참여하여 "21세기 연변조선족문화의 전망"을 집필했는데 그속에 “앞으로 우리는 위성방송과 인터넷방송을 개국하여야 한다”는 “어리석은 꿈”을 적었다. 지금 그  꿈은 현실이 되였다. 연변은 중국조선족문화의 "종가집"이다. 또한 TV사업의 본질은 영상문화이다. 하기에 우리는 중국조선족동포들을 위해 뉴스와 참신한 조선족문화를 TV영상으로 전파해야 할 사명을 지니고있다. 35년전 연변TV방송국이 개국하면서 전국의 지구급에서는 처음으로 이러한 역할을 시작했었는데 지금은 연변위성방송도 지구급에서 선참이라니 참 뿌듯하다. 자고로 "청출어람"이라 했거늘 연변위성방송이 중국조선족문화 "종가집"의 특색이 짙은 TV프로를 많이 개발하고 제작하여 국내외 광범한 시청자들 마음속의 새별이 되기를 바라는바이다.  (전임 연변TV방송국 국장)
25    소년하령영 댓글:  조회:4200  추천:1  2011-08-17
로인절을 맞아 자식들 덕분에 효도관광을 했다. 무더운 여름날에 몇번이나 항공편을 갈아 탑승하면서 국내외려행을 하니 피곤하기는 해도 볼거리 먹거리가 좋고 견식을 넓힐수 있어서 즐거웠다.  요즘은 학생들의 방학기간이라 공항이나 기내에서 소년하령영((少年夏令营) 려행단을 많이 볼수 있었다. 귀국하는 날 북경으로 날아오는 항공편에는 중국 신강의 중학생들이 앞으로 미국류학을 하기 위해서 미국견학하령영을 무어 미국 로스안젤레스에 날아갔다 온다면서 왁자지껄이며 좋아한다. 그들과 동시에 미국의 중학생들이 중국으로 수학려행을 온다고 함께 공항에 모였는데 탑승대청바닥에 펄쩍 주저앉아 포커를 치면서 깔깔거린다. 그런가 하면 우리 옆자리에는 한국의 중학생들이 중국관광을 간다고 몹시 설레여한다. 내가 "중국은 너무 넓어서 한평생 중국사람으로 살아도 다 못 가본다"고 하니 "아, 상상이 안가네요…"라고 한다. 북경에 도착해서 뉴스를 보니 국가주석 호금도의 초청을 받은 500명 로씨야어린이들이 "2011 북경하령영"에 참가하여 천안문광장을 유람하면서 얼굴마다 함박꽃이 활짝 피였다. 지난 세기 50년대에는 연길시중앙소학교 소선대대표를 비롯한 중국어린이들이 쏘련국제하령영에 초청되여 뜻깊은 여름방학을 보냈었다.  그 옛날 우리도 여름방학기간에 학생들의 방학써클활동을 하령영이라고 불렀다. 당시는 중국이 쏘련을 따라배우는 시기여서 모든 분야에서 쏘련의 선진경험을 배우면서 그랬던 것이다. 요즘 그러한 하령영이라는 활동이 다시 부활되고있는가보다. 미국이나 한국에서는 그러한 학생들의 과외활동을 경우에 따라 수학려행 혹은 캠프라고 한다.  1954년 여름방학에 연길시에서는 제1기 소년하령영이 개학됐다. 그때 연길시에는 조선족소학교가 중앙소학교, 공원소학교, 하남소학교 3개 학교가 있었다. 각 학교에서 선발된 학생들은 연길시공원소학교에서 성대한 "연길시소년하령영 개학식"을 열고 2주일간의 각 써클활동에 들어갔다. 소년하령영에는 문학써클, 음악무용써클, 미술써클, 자연써클, 체육써클 등이 있은것으로 기억난다. 그때 필자는 중앙소학교 5학년 학생이였는데 다행이도 소년하령영에 선발되여 문학써클에서  각종 문학써클활동에 열심히 참가했었다.  하루는 문학써클 보도원선생님이 강연을 하셨다. 그날 강연의 줄거리는 이러하다. 로신은 당대중국의 위대한 문학가이다. 그의 본명은 주수인이다. 청나라말기 그는 “동아병부”인 중국을 구하기 위해 일본에 류학을 가서 의학을 전공했다. 한번은 강의끝에 기록영화를 상영했는데 영사막에는 일본군인들이 중국사람들을 무참히 학살하는 장면이 상영됐다. 이때 일본학생들은 열광하면서 연거퍼 “만세”를 웨쳐댔다. 그때부터 주수인은 중국사람들을 각성시키기 위해 수술칼을 던지고 문학의 필을 들었다. 그의 일본교수님은 주수인이 의학공부를 포기하는것을 아주 아쉬워하였다.  그후 그는 “로신”이라는 필명으로 “광인일기”를 발표하면서 위대한 문학가로 다시 태여났다. 보도원선생님의 격양된 강연은 우리를 감동시켰고 가슴이 뛰게 했으며 눈물을 머금게 했다. 50년대 소년하령영은 그렇게 우리에게 꿈을 심어주었고 격정과 희망을 주었다. 1958년, 필자는 연변제3고중이라는 한족고중을 다녔는데 어문교과서에서 “후지노선생”(藤野先生)이라는 과문을 배우게 되였다. 그때 어문선생님 역시 아주 격양된 어조로 로신선생이 의학을 버리고 문학가가 된 인생역전을 중화민족의 운명과 같이한 위대한 인생이라고 높이 평가하면서 흥분했다. 그때 필자는 당연히 몇년전 소년하령영에서 들었던 로신에 관한 강연을 새삼스레 떠올렸다. 또한 그 과문에 심취되여 첫 단락부터 몇몇 중점단락을 줄줄 외웠다.  올해 여름방학에도 우리의 중소학년 학생들중에는 비행기나 기차, 배를 타고 국내외려행을 하거나 산과 들을 찾아 소년하령영활동을 하는 학생들은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 우리는 언제면 세계에서 국내외려행을 가장 많이 하면서 지혜를 키우는 독일 같은 선진국 사람들을 따라배울수 있을가? 우리 어린이들의 현실은 무더운 여름방학에도 대부분 숙제나 여러가지 학원에 얽매워 정신을 못차린다. 그래서 많은 어린이들은 "꿈"속에서 웃을 시간조차 없이 피곤하다. 어린이들을 이렇게 꽁꽁 묶어서 키우기에 커서는 상상력과 창의력이 부족하고 창업의 용기는 더욱 없다.  로인절을 맞으면서 우리는 지금 어린 아이들의 고달픈 실태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누구의 탓인가? 당연히 어른들의 탓이다. 어른들의 공명심과 사회의 경쟁사태가 그 뿌리이다. 어른들은 1등을 하라고 졸라대고 선생님은 100점을 맞아야 1등이라고 고아대고 사회에서는 명문대출신이 아니면 취직을 하기 어렵다고 호소한다.  어린 아이들은 천진란만하게 잘 놀면서 재미있게 공부를 하고 엉뚱한 꿈을 꾸어야 하는 시절에 꿈은 커녕 꽃봉오리가 병들어가고있는데 앞으로 예쁜 무궁화꽃은 어떻게 피여나겠는가?
24    장정길을 따라 댓글:  조회:3952  추천:1  2011-07-20
리완빈(李完彬)은 “중국에서 네갈래 장정길을 완주한 제1인자”라는 영예의 타이틀을 지닌 멋진 사나이다. 특수부대 용사처럼 검은색 모자와 옷차림에 군화를 신었다. 그의 더부룩한 코수염과 왕성한 구레나룻은 너무나 힘있어보인다.   중국공산당 창건90돐을 맞아 연변라지오TV방송국의 로간부당지부 리성영서기의 발기하에 로세대방송일군들은 리완빈을 초청하여 그의 장정려정과 인생담을 청취했다.“장정길을 따라”보고회는 참으로 감탄과 감동의 도가니였다.   리완빈(50세,  조선족)은 연변대학 정치학부 국제무역88학번 졸업생이며 길림성방주대외무역회사의 회사원이다. 그는 회사 김형권리사장의 유력한 지지하에 부인 신향자(申香子, 49세, 왕청현병원 간호사)와 아들 리휘(李辉)를 이끌고2004년10월10일부터2009년10월25일까지5년 동안에 력사상 중국로농홍군 제1,2,4방면군과 홍군 제25군의 네갈래 장정길을 두발로 완주해13개 성,자치구를 통과함으로써 도합5만여리를 걸었다.   리완빈일가가 장정길을 걸은 초심은 과연 무엇이였을가?  2003년17세인 아들 리휘가 대학시험을 치르느냐 아니면 군대에 가느냐 하는 관두에서 아버지는 아들에게 국방의무의식을 심어주고 완강한 투지와 건강한 신체를 키워주기 위해 아들에게 “장정길을 걷고나서 군대를 가거라!”라고 제의했다. 아들이 흔쾌히 수락했다.   장면1: 2004년10월9일, 그들은 북경에서 찦차로 강서성 서금으로 질주했다. 그들의 장정길은 이렇게 신선놀음마냥 시작됐다. 그런데 북경--심수고속도로 하남성 안양시경내에서 찦차는 커다란 교통사고를 당해 운전수가 당장에서 사망하고 옆에 앉았던 친구는 중상을 입었으며 뒤에 앉았던 리완빈은 얼굴에 여덟바늘을 깁는 상처를 받았다. 다행히 아들은 무사했다. 이래도 장정길을 갈것이냐 말것이냐?  그것이 문제였다. 아들이 물었다.“우리는 계속 가야 합니까?”아버지의 대답이다. “장정길에서는 전진만 있었고 후퇴는 없었다. 희생만 있었고 실패도 없었다. 우리는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장정길을 걸으면서 인생의 진가를 맛보아야 한다!”  2004년10월10일, 그들은 중국로농홍군 제1방면군의 장정출발지인 강서성 서금에 도착하여2만5천리 장정의 첫발을 내디디였다.   장면2: 아버지와 아들은 노트북과TV카메라, 사진기 그리고 식량, 텐트까지 지고 하루에 적어도12시간에60리 이상씩 걸었다. 그것도 모두 험산준령에 뻗은 오솔길였고 풍찬로숙이 일상이였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아들더러 장정길을 걸으면서도 공부를 하라고 “잔소리”를 해댄다. 그래서 부자간에는 갈등과 언쟁도 생겼다.  그런 와중에 아버지가 험산준령에서 지칠대로 지친 아들에게 담배를 권하고 담배불까지 붙여주면서 화해를 구하는 명장면을 연출하면서 아빠와 아들 사이라는 위계질서는 무너져버렸다. 참으로 기막힌 인간수업이였다.   장면3:  2005년4월4일, 리완빈은 홍군이 지나갔다는 귀주성 개양현의 남강대협곡을 지날 때, 아들은 다른 젊은이와 함께 산을 에돌아 평탄한 길을 걸어가게 하고 자신은 모험적으로 대협곡도전에 나섰다. 남강대협곡은 깊이350여메터나 되는 대협곡이다. 그가 절벽을 타고 악전고투하며250메터까지 내려갈 때 이미 희생을 뒤전으로 했다. 그런데 이제 남은100여메터는 다시 오를수도 내려갈수도 없는 험난한 절벽의 중턱이였다. 그는 노트북과 사진기를 담은 등짐을 절벽아래로 내동댕이치고 두손으로 절벽의 거치른 암석을 이악스럽게 훑다싶이 하면서 미끄러져내려갔는데 다행히 두발이 암반에 멈추어서게 되였다. 그렇게 극한의 사투로 또100여메터 절벽을 타고 내려 그는 드디여 강가에 도착했다. 국제태권도6단 보유자인 리완빈은 끝내 대협곡을 정복했다. 그러나 이제까지 찍은2만여장의 사진이 노트북과 함께 페물이 되여버렸다.  그는 명실공히 생과 사의 시공을 넘나드는 쓴맛을 보았다.   장면4: 리완빈은 절절하게 말한다. 부인과 함께 사천성 아바지구의 험산준령속에 뻗은 장정길을 톺아오르다보면 이제까지 같이 살아온 인생길을 되돌아보는 좋은기회가 되였다고. 한번은 부부 단 둘이 근4000메터나 되는 산봉우리에서 서로 부둥켜안고 지친 몸을 달래며 한담을 하는데, 친구들중에 누구는 돈을 꽤나 많이 벌었어도 결국은 돈때문에 망하고, 누구는 인생살이가 잘 안돼서 끝내는 리혼하거나 패가망신을 하고, 그러니 지금은 우리가 가장 행복한 부부가 아닌가!   장면5:   2005년10월19일, 아버지와 아들은 강서성 서금(江西省瑞金)으로부터374일을 걸어 홍군 제1방면군의2만5천리 장정 종착점인 섬서성 오기진(陕西省吴起镇)에 도착했다. 그해12월12일, 아들 리휘는 참군하여 영광스러운 중국인민해방군 전사가 됐고 이듬해에는 입당을 하고 우수전사가 되고3등공을 세우고 반장이 되였다.  2만5천리 장정이 그를 강철전사로 키웠다.   이러한 명장면외에도5년간 리완빈일가가 장정길에서 겪은 인생드라마는 많고도 많다. 장정길에서 영국력사학자 리애더 등 장정길을 걷는 사람들과 만나 동행하던 얘기, 사천성의 고산지대 장족동포들과 맺어진 깊고도 애절한 우정, 초지를 지나던 아슬아슬한 경과, 옛날에 홍군의 장정을 지원한 농민의 후예가 그들의 짐을 실은 말을 자기네 밀밭에 끌고 가서 푸른 밀풀을 뜯게 하는 정성. 하기에 리완빈은 아들을 억센 청년으로 키우려던 초심으로부터 시작하여 자기도 진정한 장정길의 사나이가 되려는 결의하에 걷고 또 걸었다. 그러한 정보는 그의 홈페이지(www.liwanbin.com)에서 생동하게 볼수 있었다.   올해4월말 중공연변주위 선전부 리흥국부장은 연변라지오TV방송국 미디어쎈터에서 기획한 “중국공산당 창건90돐 맞이 —리완빈 홍군장정 출발지점답사”  TV프로 취재팀을 바래면서 타이틀 “장절길을 따라(沿着长征路)>”를 써주었다.   리완빈일가처럼 “장정길을 따라”두발로 걸는 위대한 실천은 중국사람들이 “장정정신”을  대대손손 이어가겠다는 선언서이며 선전대이며 파종기이다.    
23    가수의 꿈 댓글:  조회:3934  추천:26  2011-06-15
              가수의 꿈                      김희관 칼럼니스트     백청강이 한국 MBC문화방송의 스타오디션 “위대한 탄생”에서 우승을 따내면서 돌풍을 일으켰다. 서울서 과거를 봐서 “알선급제”한셈이다. 그가 우승을 하는 순간, 한국의 TV시청자들은 물론이고 한국에 사는 조선족동포들이 들끓었다.    백청강이 일으킨 돌풍의 핵은 “가수의 꿈”이였다. 백청강은 개혁개방이래 특히는 국내외 로무바람이 불어치는 시대배경속에서 수많은 청소년들처럼 부모님이 모두 한국과 외지에 로무를 떠나면서 9세부터 할아버지, 할머님의 슬하에서 자랐다고 한다. 도문시5중을 다니는 시절부터 가수가 되려는 꿈을 키우기 시작한 그는 연길시 POP예술양성쎈터에서 음악을 배우면서 음악자질을 키웠고 몇년간 나이트클럽에서 가수로 전전하며 세상을 알게 되였다. 그 와중에 그는 연변TV방송국의 청소년프로에 진출하여 상도 탔고 2009년에는 TV매주일가 “난”을 불러 인기를 더했다. 그러던 그가 가수생활과 대학입시를 앞두고 고민을 하던중 작년 11월 청도에서 열린 “위대한 탄생” 오디션을 통과해 본선에 진출하게 되였다. 5월 27일 “위대한 탄생”의 우승자가 되면서  백청강은 아빠, 엄마와 함께 무대에 올라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기자가 백청강에게 물었다. 가수로서의 꿈은 무엇인가? 꿈을 가지려면 크게 가져야 한다. 마이클 잭슨처럼 되고싶다. 춤도 추고 노래도 하고 여러 쟝르를 다 소화해낼수 있는 세계적인 가수가 되고싶다.    “코리안드림”을 이뤘다는 평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아직 꿈을 이룬것은 아니다. 오디션프로그램에 겨우 우승했을뿐이고 이것을 발판으로 진짜 가수가 되는것, “위탄” 후에 내가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   연변에 사는 조선족청소년들에게 해주고싶은 이야기는 무엇인가? 꿈을 절대로 포기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가수가 아니더라도 그 꿈을 이룰 때까지 피땀을 흘리면서 열심히 노력하면 언젠가 꿈을 이룰수 있다.꿈이란 무엇일가? 무릇 마음속 깊은 곳에서 간절히 원하는것이면 그것이 바로 꿈이다. 하기에 꿈은 론리적이거나 합리적이지 않아도 괜찮고, 꿈을 꾸는데 특별한 자격이 필요한것도 아니다. 꿈은 이루어질지 아닐지 확실하지 않더라도 반드시 도달하고싶은 마음속의 산마루이다.  만약 도달할것이 확실하다면 우리는 그것을 꿈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꿈은 인생에 있어서 리상의 정신적요람이다. 아름다운 꿈은 반드시 고상한 리상을 낳게 되며 인생은 그 리상을 위해 비상할것이다. 그러한 비상과정에 자신은 세계관과 사회관, 인생관과 가치관을 키우게 될것이다.    인생은 꿈을 실현하는 세상살이다. 청소년들은 저마다의 꿈이 있어야 할것이며 그러한 꿈을 실현하기 위해 꾸준한 노력을 해야 할것이다. 21세기에 와서 세상은 정보화시대, 문화콘텐츠시대, 생명공학의 시대 등 참신한 시대가 펼쳐지고있다. 이러한 새 시대에 청소년들이 만약 저마다의 꿈이 없다면, 그 꿈이 엉뚱하지 않다면, 그 꿈을 이룩하기 위한 피타는 노력이 없다면 그 인생은 무색할것이다.    청소년들의 꿈을 키워주기 위해서는 가정과 학교, 직장과 사회에서 물심량면의 도움이 필요하다. 이번에 백청강이 “위대한 탄생”에서 우승을 할수 있은데는 국내외 여러 면의 도움이 있었다. 특히는 MBC문화방송의 7개월간의 합숙연수와 무대출연이 있었다. 또한 김태원멘토와 같은 우수한 도사들의 엄격하고도 예술적인 지도가 있었다. 기자가 김태원멘토에게 “어떤 가능성을 봤느냐”고 묻자, “딱 두글자다. 바로 열정”이라고 지체없이 답했다.    앞으로 우리의 청소년들이 꿈을 키우는 과정에는 여러 학과의 선생님들과 도서관, 박물관, 과학기술관, 천문대, 기상, 지질관측소 등 모든 공공시설의 우수한 멘토들이 청소년들의 방문을 반갑게 맞아주고 꾸준히 지도해주는것이 필요하다.    백청강은 “위대한 탄생”의 우승자가 되여 상금 1억원과 음반제작지원금 2억원 등 한화 3억원 그리고 준대형승용차 1대를 받았다. 그는 자신을 키워준 모든분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고이 간직한 참다운 가수이다. 기자가 “상금 절반을 기부하겠단 말, 후회하나? ”라고 물었을 때 그는 “후회는 없다. 내뱉은 말은 지킨다. 꼭 기부할거다”라고 잘라 말했다. 그리고 그는 최근에 말한대로 상금의 절반을 복지원에 기부하였다.    고마움을 아는 인간이야말로 참다운 인간이다. 백청강가수에게 필자가 한마디 부탁을 적는다. 청강아, 앞으로 자주 “연변아리랑”을 불러다오.
22    몸속에는 도덕의 피가 흘러야 하건만 댓글:  조회:4409  추천:32  2011-06-01
몸속에는 도덕의 피가 흘러야 하건만   김희관 칼럼니스트   도덕이 문제가 됐다. 신문, 라지오TV방송, 인터넷에서는 전국 각지에서 발생하는 비도덕적인 식품, 약품 안전사건, 음주운전교통사건, 론문조작사건, 녀대학생 “얼나이(二奶)”명단사건 등 별의별 기상천외한 추문들을  적발하고 비판하느라 야단법석이다. 아기들이 먹는 “삼록분유”사건은 3000만명 아기의 생명과 건강을 해치는 엄청난 사건이였다. 그때로부터 집중적으로 적발하기 시작한 여러가지 식품안전사건은  “인조닭알”  같은 상상을 초월하는 식품안전사건으로 번지면서 끊기지 않더니 요즘은 피임약으로 재배한 오이가 시장에서 팔려서 그것을 먹으면 불임을 초래할수 있다고 야단법석이니 이제는 “식품안전”문제가 사람마다의 밥상에 올랐다. 보도에 의하면 지난 3월 11일 일본대지진 직후 일본에서 상해 포동공항으로 귀국한 한 류학생이 마중나온 어머니가 학비를 보내주지 않았다고 칼로 어머니를 무참하게 찌르는 비극이 벌어졌는데 그 현장에 구경군은 많았어도 쓰러진 어머니를 구한 사람은 다름아닌 외국인이였다는것이다. 5월 17일자 신화넷에서는 한 망나니가 교통사고를 내고 뺑소니를 치다가 다시 돌아가서 그 피해자를 차로 뭉개 살해한 사건을 질타하면서 “오래동안 많은 사람들은 자라는 과정에 도덕의 최저한도(底线)에 대한 교육도 받지 않아서 머리속에는 도덕의 최저한도의식이 없다. 우리의 도덕교육 특히는 최저한도에 대한 교육이 안되여있다. 우리가 숭고하지 않아도 좋지만 무치할수는 없다. 지금 관가에서 상가에까지, 학교에서 병원까지 곳곳에 무치한 인간들이 너무나 많다”고 질호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도덕이 산사태처럼 실추하는 현상은 하루이틀에 끝날것 같지 않다. 도덕은 신앙을 기초로 한다. 중국사람들의 신앙은 바로 《국학(国学)》의 근본인 유석도(儒释道)에 있다. 유석도는 인(仁 자애로운것)을 핵심으로 유가학설, “보도중생(普度众生 바다에 빠져 허덕이는 사람을 구원한다는 뜻)”을 근본으로 하는 불가신앙, 우주의 근본은 도라는 도가의 리념에 그 뿌리를 두고있다. 근래 여론계에서는 <문혁>이라는 10년 동란시기에 “국학”의 근본인 유석도에 대한 무자비한 비판이 중국사람들의 신앙의 뿌리를 송두리채 뒤흔들어놔서 지금에 와서는 신앙에 혼선이 빚어지고 도덕의 실추현상이 나타난다고 의론하고있다.  또한 개혁개방 30여년간 경제건설이 중심사업이 되고 시장경제가 발육하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이 너무나 돈에만 집찹하면서 시장경제의 규칙이나 공공도덕에는 무관심한 상태이며 신용의식과 브랜드의식이 아직은 유아상태에 처해있는것도 또 한가지 중요한 원인이라고 진단하고있다. 목전 중국은 “세계의 공장”역할을 하면서 경제총량은 세계에서 미국 다음인 두번째 자리로 뛰여올라 G2가 되였지만 인당 수치는 아직은 아주 낮은 수준이다. 앞으로 중국이 “세계의 공장”에서 “세계의 시장”으로 전환하고 국부(国富)가 민부(民富)로 이어지자면 사회주의시장경제가 잘 발전해야 한다. 그 과정에는  전반 사회의 새로운 수준의 도덕수양이 필수적이다. 우리는 자고로 “도(道)는 닦고 덕(德)은 쌓으라”는 조상들의 가르침을 받들고 살아왔다. 도라는것은 우주관이고 세계관이다. 도는 글을 익히고 지식을 배우고 과학기술관념을 세우면서 닦게 된다. 덕은 인생관이고 사화관이다. 가정에서는 부모슬하에서 식구들이 서로 사랑하고 화목하며, 학교와 사회 생활에서는 동창생과 친구, 직장 동료들과 공존공영하는 과정에서 서로 정을 나누고 덕을 쌓아가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로자의 《도덕경》에 담은 5천언(五千言)을  펼쳐볼 필요가 있다. 얼마전 국무원총리 온가보는 엄중한 도덕실추사태에 대하여 신화넷 대화실을 찾아 담화를 발표하고 네티즌들과 대화를 했다. 온총리는 아기들의 분유가 또다시 문제시되는것과 관련하여 “기업가들의 몸속에는 도덕의 피가 흘러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우리의 기업들은 전반 사회를 대상하기에 도덕문제가 아주 중요하다. 내가 보기에는 믿음과 도덕은 현대사회에서 응당 해결해야 할 시급한 문제이다”라고 지적했다. 도덕이 무엇인가에 대해 온총리는 가장 중요한것은 “인간을 사랑하는것(爱人)”이라고 했다. 그는 중국의 전통적인 유가의 명언을 인용해 사람은 “인”을 소유해야 하고 “인”을 소유하면 인간을 사랑하게 된다(仁者人也,仁者爱人。)고 하면서 기업가들도 사회의 일원이기에 백성을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동정심을 가져야 한다고 하면서 “자기가 원하지 않는것은 남에게 강요하지 말아야 한다. (己所不欲,勿施于人。)” 동정심은 도덕의 기초이다. 이것은 유가철학에 명백히 적혀있다. 맹자는 “사람이 측은한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 (人无恻隐之心,非人也)”라고 하면서 측은한 마음은 인간의 기본자세라고 했다. “만약 우리의 기업들이 자기의 리익만 생각하고 심지어 리익을 위해 의리까지 팽개치고 남의 고통 지어는 생명을 대가로 돈을 버는것은 참으로 비극적인것이고 법률에서도 허용되지 않는다.” 온총리는 자신은 지난 25년간 중남해에 살면서 쉬는 날이 없었다고 하면서 마지막으로 “나라의 강대함과 신용은 경제실력에서뿐만아니라 더우기는 민족의 소질과 도덕의 힘(民族的素质和道德的力量)에서 표현되여야 한다”고 힘주어 말하였다.
21    어곡미 단상 댓글:  조회:3933  추천:49  2011-05-26
              어곡미 단상                                                                   김희관      쌀은 힘이다, 쌀은 문화이다. 6월15일 연변민간문예가협회와 룡정시문련에서 공동으로 주최한 개산툰 “어곡전민속마을”세미나에 참석하여 여러 학자와 전문가들의 수준높은 세미나를 경청하면서 느낀 감상이다. 유서깊은 하천평벌에서 어곡전민속마을이 개발된다니 진심으로 경하드린다.      쌀은 힘이다. 사람에게 있어서 쌀은 생명을 보장해 주는 중요한 에네지 원천이다. 하기에 자고로 “농사 천하지 대본”이라 하지 않았는가. 나라와 민족에게 있어서 식량안전은 정치적, 군사적, 사회적 안전의 기본보장이다. 중국에서는 아직 식량안전이 완전히 해결된것이 아니다. 지금의 13억인구가 앞으로 몇십년간은 계속늘어날 전망이기에 식량안전은 더욱 락관할 수 없다. 하기에 금년초 온가보총리는 정부사업보고에서 앞으로 전국적으로 농지면적 18억무를 확보해야 한다고 힘주어 강조했다. 지금 나라에서는 인공위성으로 부단히 찍어내는 사진을 근거로 전국의 토지자원을 엄격히 관리하고 있으며 환경오염과 무지한 농지점령사건들을 처벌하고 있다.      최근 발표된 유엔 식량기구의 통계에 의하면 지금 세계인구 64억중에는 아직도 기아인구가 8억을 넘기고 있고 굶어죽는 사람이 전쟁에서 죽는사람보다 많다고 한다. 그래도 세계적인 벼잡교육종가이며 중국농업과학원 원사인 원룽평이 한 말이 있어서 마음이 좀 놓인다. “리론상에서 광합작용원리대로라면 벼의 무당 산량은 1,500키로그람이 날수 있는데 지금 우리는 무당 7-800키로그람 소출을 내고 있다. 우리가 농업과학기술방면에서 계속 노력을 한다면 중국의 식량안전은 확실히 지킬 수 있다고 본다.”      쌀은 문화이다. 쌀은 농경문화와 민속문화의 산물이다. 옛날부터 벼농사는 농경문화의 중심에서 꾸준히 발전해 왔다. 백여년전부터 우리의 조상들은 연변대지에서 벼농사를 시작한것도 다 아는 사실이다.  그 과정에 개산툰 하천평벌의 최학출농민이 유지온상육모기술을 고안해내여 어곡미를 생산했다는 사실 또한 벼농사에서 중대한 발명창조라고 할 수 있다.      해방후 연길시 신풍촌의 최죽송농민이 유지온상을 더욱 발전시켜 벼농사에서 커다란 성과를 온렸다.  주은래총리께서는 중국의 벼농사는 “남진북최(南陈北崔-남방의 벼농사 장원은 진영강(陈永康)이고 북방의 벼농사 장원은 최죽송(崔竹松)이라는 뜻)”라고 칭찬하였다. 오죽하면 1962년6월 주은래총리께서 연변을 시찰하실 때 친히 신풍대대를 방문하시고 농민벼재배가최죽송을 접견하셨겠는가. 지금도 우리주의 벼재배에 관한 과학기술연구와 생산실천은 북방지구에서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벼농사를 둘러싸고 우리에게는 민속문화도 풍성하다.  정월대보름 보름달이 휘영청 떠오르면 농부들은 논밭에서 벼짚을 태우고 쥐불을 돌리면서 악귀를 쫒고 풍년을 기약했으며 논갈이철에는 황소에게 찰떡을 먹였다. 벼모를 낼 때에는 품앗시꾼들이 선줄꾼의 선창을 따라 모내기 타령을 불렀다. 어찌 그뿐이랴, 벼모내기가 끝나면 단오를 맞아 동네 농부들이 그네, 씨름, 널뛰기,활쏘기를 하는가 하면 논두럼을 돌면서 사물놀이를 했었다. 추석이면 햇쌀밥을 지어 풍년을 기리고 조상을 섬기던 풍속도 가관이였다. 최근 몇년래 농학자들은 조상들의 지혜를 본받아 논에서 사물놀이를 했더니 벼가 3할이상 더 잘자라고 벼이삭도 빨리 나왔다고 한다.      어곡전을 지켜나선 우스광스러운 허수아비들이 하는 말이다. “벼들은 사물놀이 소리를 들으면 신이 나구요, 사람들은 쌀밥을 먹어야 힘이 난다구요...”                            (작자 문화평론가)      
20    물 동 이 춤 댓글:  조회:4229  추천:54  2011-05-19
 풍향계                 물 동 이 춤                              김희관        금년 11월5일은 연변예술학교예술단이 미국방문공연 20돐이 되는 날이다. 물동이춤은 예술단 무대공연의 첫절목이였다.      연변예술학교예술의 미국방문공연은 미국아세아문화중심의 초청과 한국일보 미주본사의 후원하에 이루어졌다.      1985년 10월말 예술단 일행은 연변의 지도자들과 친인척들이 의 열렬한 배웅을 받으면서 연변을 출발, 기차편으로 북경에 도착한후 문화부 초대소에 투숙하면서 출국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루는 문화부에서 통지가 왔는데 중앙령도들이 우리 일행을 접견한다고 했다. 그날 오후 우리가 버스편으로 도착한 곳은 중남해 근정전이였다. 잠시후 중공중앙 청치국 상무위원 호계립이 중공중앙 대외선전판공실 주임 겸 신화통신사 사장 주목지와 문화부 간부들의 배동하에 회의장에 도착했다. 집체사진을 찍은후 회견이 시작됐다. 호계립은 다음과 같이 말씀했다. < 연변예술학교예술단은 나라에서미국에 파견하는 첫 소수민족예술단이다.  여러분들은 사회주의 중국의 좋은 형세와 민족정책의 우월성을 미국사회에 널리 홍보해주기 바란다. 나는 동무들에게 또 한가지 임무를 맏기려 하는데 그것은 지금 미국에 체류중인 근 4만명이 되는 중국류학생들을 위문하고 그들이 하루빨리 학업을 훌륭히 완성하고 귀국하여 나라의 현대화건설에 참가해 달라는 부탁을 전해주기 바란다. >      11월5일 예술단은 항공편으로 북경을 출발, 동경에세 하루를 쉬고 미국시간으로 11월6일 오전 10시, 미국 쌘프랜시스코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을 나서자 우리는 꽃다발속에 묻혔고 기자들이 질문공세에 진땀을 흘렸다.   동서방의 시차에 적응하기 위하여 우리는 이튿날 저녁에야 첫공연을 했다. 아름다운 음악반주와 함께 <물동이춤>으로 부터 시작한 무대공연은 관중들의 열광속에 100분동안에 순조롭게 끝났다. 그런데 떠날줄 모르고 환호하는 관중들에게 답례하고 무대에 올라온 관중들과 함께 <아리랑>과 <고향의 봄>을 부른 시간이 2시간이 넘었다.      그 때부터 우리는 한달동안 워싱톤, 뉴욕, 시카코, 로스안젤레스, 휴스톤, 필라델피야, 하와이 등지를 순회공연하면서 시종 관중들의 열광속에서 지냈다. <물동이춤> <장고춤><농악무> 등 무용절목과  <내고향 오솔길>  <초가삼간>  <반갑구나> 등  노래절목  그리고 가야금, 장고, 장새납, 목금 등 기악독주프로는  모두 전통예술을 바탕으로 한 절목들이여서 미국동포들의 커다란 박수를 자아냈다. 미국동포사회의 신문들은 일제히 <백두산기슭에 살아온 민족의 혼> 이라고 극찬했다.      중국류학생과 화교들을 위한 공연도 매번마다 대성황을 이루었다. 워싱톤에서 미국주재 중국대사관 한서대사는 그렇게 다망하면서도 2번이나 우리를 대사관으로 초청해 파티를 열어주셨고 < 연변예술학교예술단은 예술이 좋고 인품이 좋고 풍격이 좋다. 동무들은 중국소수민족의 문화예술을 미국사회에 알리는데 큰 공로를 세웠다.>고 치하했다.      <물동이춤>을 감상한 할머니들은 <옛날 고향에 살던 시절로 돌아간것 같다. > 면서 즐거워했다. 예술단 전용버스의 흑인기사는 <우리도 물동이춤이 있다.> 면서 엄지손가락을 내들었다. 지금 생각해봐도 그 때 우리가 전통예술을 기본으로 공연프로를 구성한것은 참 잘된것 같다.    20세기 80년대만 해도 농촌에 가면 혹간 우물가에서 물동이를 이고 물을 긷는 아낙네들을 볼수 있었는데 지금은 산골오지에 가도 볼수 없다. 그도 그럴것이 대부분 농촌마을에 수도물이 들어갔기에 이제는 물동이를 구워내는 토기가마의 불도 꺼진지 오래다. 그래서 10여년전부터는 물동이도 귀한 골동품이되였다.       <고조선 문물도감> 을 보면 3000년전 압록강변 미송리에서 구워낸 물동이는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물동이와 모양새가 기본상 같다. 그러니 민족적이고 전통적인 디자인의 보수력은 얼마나 큰것인가.      예술단은 미국방문기간 세계적으로 명성높은 워싱톤의 국회도서관, 뉴욕의 줄리어드음악대학, 브로드웨이, 로센젤레스의 헐리우드영화도시, 시카코의 바이올린제작학교, 휴스톤의 미국우주항행중심 등 허다한 명소들을 견학하면서 많은것을 배웠다.   연변예술학교는 이러한 년륜을 쌓아왔기에 지금은 연변대학 예술학원으로 성장하여 전국의 예술대학 행렬에 떳떳히 섰으며 우리민족의 예술의 전당으로 되였다.      연변예술학교예술단의 미국방문공연이 <물동이춤> 등 전통예술로 미국에서 대성공은 우리에게 <오직 민족적인것만이 세계적인것이다>라는 진리를 여실히 말해주었다 .         (1985년 미국방문공연 연변예술학교예술단 단장)                                                                                                                                     2005년 10월19일
19    기와에 깃든 혼 댓글:  조회:4156  추천:67  2011-05-16
풍 향 계              기와에 깃든 혼                                                  김희관        2000년 국경절 연휴 때 였다. 나는 막 저믈어 가는 20세기가 너무도 아쉬워서 문화예술계의 친구들과 함께 <두만강전통문화탐방팀>을 무어가지고 지난 세월 두만강반에 남겨진 겨레의 전통문화 흔적을 하나라도 더 찾아보려고 두만강변으로 떠났다. 이번의 탐방 프로젝트는 검은 기와를 수집하는 작업이였다.       30여년전 <연변일보> 농촌조 기자를 할 때는 두만강반의 조선족마을을 취재하려 많이 다녔다. 어느 봄날 삼합에서 점심을 대충 먹고 대소사과농장으로 취재를 가려니까 뻐스가 없어서 몇십리길을 그냥 두발로 걸었다. 혼자 걸으면서 산과 마을에 활짝 핀 사과배꽃 등 백화들을 바라보느라니 고달픈도 잊을수 있었다. 그러던중 조동마을을 지나는데 검은 기와를 쓴 전통 한옥 한채가 내눈에 들어왔다. 아, 검은 기와집을 활짝 핀 새하얀 사과배꽃이 포옹하고 있으니 그 또한 선경이 아닐수 없었다. 그 때 가장 아쉬운것은 카메라가 없는것이였다.    2000년가을 우리는 약 한달간 두만강 천리길을 답사하였다. 전통한옥으로 유명한 훈춘시 경신진 회령봉마을은 물론이고 룡정시 지신향 명동촌, 장재촌을 비롯해서 화룡시 숭선진끝자락 두만강발원지까지 무릇 인가가 있는 곳이면 다 답사를 했다.    두만강전통문화탐방활동은 수확이 아주 많았다. 우선 백여년좌우되는 검은기와와 막새기와를 수집해 놓고 보니 참 볼만했다. 많은 기와들은 백여년전에 조선에서 구워서 건네온것이라 해수를 따질수가 없었다. 다행이도 일부 기와에는 조선어로 <복>자가 새겨져 있어 아주 반가웠다. 당지에서 구은 기와에는 한자로 <중화민국 2년>이라고 새긴것도 있었다. 왜놈들이 명동학교에 불을 질러 교사가 무너지니까 동네 농민들이 주어다 지붕에 언젔다는 기와에는 <1915>년이라는 년호가 뚜렸하게 새겨저 있었다. 막새기와들은 더욱 보기 좋았는데 매화꽃문양과 태극문양이 태반이였다. 지신향의 한 기와집 지붕에 우뚝솟은 치미기와는 아침해살을 반기며 힘차게 울어대는 수닭의 꼬리를 련상케 했다. 또한 훈춘시 밀강진에 있는 귀면와들도 참 생동했는데 우스꽝스러운 귀신상들은 악귀를 쫓기에는 괜찮을것 같았다. 달라재 장재촌의 한 기와집에는 처마 네귀에 한자로 <복>과 <수>가 새겨진 기와를 달아놨는데 우리팀이 아무리 탐내해도 집주인이 < 그 기와를 가지려면 이 집을 통채로 사라>는 바람에 사진만 찍고 그만 물러서고 말았다. 그 때 들은 얘기인데 이미 몇년전부터 어떤 사람들이 이런 마을들을 돌아 다니면서 일부 막새기와를 사갔다고 했다. 그리고 어떤 유지들은 아예 한옥 한채를 몇천원에 사서 검은기와만 벗겨다가 다른곳에 한옥을 짓는바람에 전통한옥들이 헐값에 팔리여 허물리기 시작한지 몇년이 된다고 했다. 올봄에 두만강변에 진달래구경을 하려 가면서 보니까 달라재 장재촌의 그 <복>  <수>기와를 처마에 달아놓은 한옥은 이미 헐리여 흔적을 감추었을 뿐만아니라 다른 전통 한옥들도 많이 없어졌다.     두만강전통문화탐방과정에서 우리팀은 점차 새로운 과제를  구상하게 되였다. 그중 저항시인 윤동주생가의 기와가 혹시 어디에 남아있지 않을까 하는 호기심은 우리들을 매우 흥분시켰다. 마침 우리팀에는 명동에서 나서자란 친구가 있어서 그 자초지종을 쫓을수가 있었다. 몇번의 시도끝에 우리는 옛날 윤동주시인의 생가를 사서 30년간 살았던 일가를 찾았고 80년대초 그 집이 팔리면서 기와는 누가 벳겨가고 재목은 누구네가 사갔다는것을 알수 있었다.    몇차레의 현지답를 거쳐 우리는 윤동주생가의 막새기와를 끝내찾아 냈다. 그 막새기와를 보는 순간 우리팀 모두는 황홀한 나머지 말을 잊었다. 막새기기와는 둥근테두리속 상단 량켠에 두개의 십자를 새겼고 중앙에는 태극문양이 넉넉히 부각돼 있었으며 하단 량켠에는 무궁화 두 송이가 아로 새겨져 있었다. 이러한 막새기와 문양은 당시 <3.13룡정반일대시위>에 앞장섯던 김약연선생을 비롯한 항일투사들이 민족의 정신을 분발시키기 위해 특별히 고안해서 구워낸 막새기와가 틀림없었다. 그런데 아쉬운것은 대동란시기 이런것들도 잡귀신이라고 해서 석회칠을 막 해놓아 우리들의 가슴을 몹시 아프게 하였다.   우리팀이 윤동주생가의 막새기와문양을 조선과 한국의 수백종에 달하는 막새기와도록과 대조해 보았는데 윤동주생가의 막새기와문양은 아무데도 없었다.     윤동주시인 생가와 기타 전통 한옥들의 한장 한장 이끼덮인 검은 기와들은 마치도 조선족백년사의 한 페이지 한 페이지처럼 우리에게 많은 옛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그속에는 겨레의 희노애락과 혼이 슴배여 있다…>고.   우리팀은 그러한 전통기와에 깃든 얘기들을 사진과 문자로 상세히 기록했는데 지금 그 앨범을 펼쳐 보느라면 이건 진짜로 조선족력사의 한부분이 틀림없다. 지금 천리 두만강반에서 한옥을 비롯한 겨레의 전통문화유산들이 그대로 방치되여 비바람에 사라져 가고 있는것을 보면 참으로 가슴이 아프다. 다행이도 당국에서 조선족민속촌을 개발한다는 희소식이 있다니 학수고대 한다. 부탁이라면 전통문화와 문화전통을 잃으면 겨레의 뿌리를 잃는것이니 부디 신중을 기하기를 바란다.   2002년봄 우리팀은 연변TV제작팀과 함께 명동촌에서 년로하신 윤동주시인의 녀동생내외분을 모시고 윤동주생가의 원래 상황과 막새기와를 재확인 했다. 그해 연변TV제작팀의 녀류PD는 <기와에 깃든 혼>이라는 TV다큐멘타리를 제작하여 국제상을 탔다.                      <연변일보 >2005년 8월5일                                               (작자 연변TV방송국장 역임)
18    진달래꽃(김희관) 댓글:  조회:4117  추천:50  2011-05-06
진달래꽃                                                                                 김희관 붉은 5월을 맞아서인가 해마다 이때면 야산에는 진달래꽃이 울긋불긋 피여나서 봄소식을 알린다. 겨울잠에서 성급히 깨여나 새파란 새옷도 떨쳐입지 못한채 봄소식을 알리는 진달래꽃이 심히 고맙다. 이제 얼마 지나지 않으면 새파란 새옷을 떨쳐입고 자신도 봄꽃이느라고 우쭐대는 철쭉을 볼것이니 그래도 진달래가 더욱 사랑스럽구나.진달래는 식물학적으로 진달래과(Ericaceae)에 속하는 락엽활엽관목이다. 중국, 조선반도, 일본,  몽골, 시베리아,  우수리 등지에 분포되여있다.  진달래꽃은 꽃색갈이 붉은것이 두견새가 밤새 울면서 피를 토했다는 전설때문에 두견화라고도 부른다. 진달래는 새파란 잎이 없이 꽃이 먼저 피고 꽃이 지면 잎이 돋아난다. 역시 진달래과에 속하는 철쭉은 꽃과 나무잎이 함께 피여난다. 진달래꽃은 먹을수도 있고 약에도 쓰기에 참꽃이라고도 부른다.  옛날풍속에 따르면 삼월 삼짇날무렵에 화전을 만들어 먹거나 진달래술(두견주)을 담그기도 했다. 한방에서는 진달래꽃잎이 부인병과 해소, 고혈압 등 증상에 유효하다고 한다. 민간에서는 꽃잎을 꿀에 재워 천식에 먹는다.진달래꽃이 피면 생각나는 사연이 많다. 우선 김소월의 시 “진달래꽃”이 생각난다. 나 보기가 역겨워/가실 때에는/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녕변에 약산/진달래꽃/아름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가시는 걸음걸음/놓인 그 꽃을/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나 보기가 역겨워/가실 때에는/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몇년전 북대하 외국어대학에서 교학을 할 때 한국어를 배우는 학생들에게 김소월의 “진달래꽃”을 번역해보라고 숙제를 냈다. 처음에 학생들은 “가시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몰랐다. 몇번의 랑독과 강의를 거쳐서야 드디여 “가시는” 사람이 님이라는것을 알게 되였다. 한 녀학생의 번역문이 괜찮아서 그 번역문을 랑독하고 자신의 리해를 얘기하게 했다.  반에 대부분이 녀학생들이라 머리를 끄덕이며 동감을 표하면서도 중국고전에서는 거의 찾아볼수 없는, 님을 보내면서도 진달래꽃을 아름드리 따다가 가시는 길에 뿌려주어 즈려밟고 가시게 하는 한 녀인의 리별에 대해 리해할수 없다는 표정이였다. 백의동포 녀인들이 떠나가는 님에 대한 산화공덕(散花功德)의 미덕과 정한을 다 알리 만무하기때문일것이다.진달래꽃이 피면 혁명선렬들이 생각난다. 요즘 야산에는 울긋불긋 진달래꽃이 피여서 우리들을 대신해 이 강산을 위해 목숨을 바친 선렬들의 충혼을 위로하고있다. 일전에 연변력사연구소 원 소장 권립교수에게 청을 들어 1992년 길림성민정청에서 통계한 연변의 혁명렬사통계표를 받았다. 항일투쟁시기 연변의 항일렬사는 도합 3125명이고 그중 조선족 항일렬사는 3026명이며 녀성렬사는 338명인데 그중 조선족 녀성렬사가 336명이다. 해방전쟁시기 혁명렬사는 도합 4313명이고 그중 조선족렬사는 3713명이며 녀성렬사 24명중 조선족 녀성렬사가 22명이다. 그래서 국가문화부 부장이며 저명한 시인인 하경지선생이 우리에게 “산마다 진달래요 촌마다 렬사비라”는 시를 남겨주셨다. 1992년 봄, 연변TV방송국에서는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 40돐을 경축하기 위해 처음으로 연변조선족 150년 력사를 담은 TV다큐멘터리를 제작하기로 했다. 그래서 필자가 권립교수에게 씨나리오를 부탁했더니 권립교수는 “선렬들의 피와 땀으로 가꾼 대지—연변”이라는 씨나리오를 심혈들여 집필해줬다. 우리의 150년 력사는 이때부터 영상으로 제작되기 시작하여 TV다큐멘터리 “연변아리랑” 등으로 이어졌다. 진달래꽃이 피면 자치주 주화가 생각난다. 20여년전부터 진달래꽃이 자치주의 꽃으로 지정되면서 진달래꽃은 우리와 더 가까와졌다.  엄동설한이라도 진달래광장을 거닐 때면 진달래꽃이 우리 마음속의 꽃이라는것을 새삼스럽게 떠올리게 된다. 진달래꽃이 피면 “진달래꽃축제”가 생각난다. 《연변일보》의 보도에 의하면 화룡시에서는 진달래군락지의 훼손을 막고 진달래축제를 정상화하기 위해 2004년부터 진달래기지건설에 착수하였다. 진달래자원,  자연환경,  교통조건 등 종합적인 요소를 감안하여 서성진 소재지에서 서북쪽으로 3킬로메터 떨어진 부대골에 진달래동산을 개발하여 해마다 진달래 2만그루씩 심었다. 또한 훈춘시로부터 3만 5000그루의 진달래묘목을 인입하였다. 진달래동산의 진달래는 단일한 지방품종으로부터 지금은 “영홍”,   “두견” 등 5종의 우량품종으로 늘어났다. 그 와중에 진달래기지건설에 이미 근 100만원을 투입하였다.  몇년간 화룡시의 진달래축제는 민족민속축제문화를 잘 전파하고있다. 앞으로 전 주 각지에서도 야산의 진달래군락지를 보호하고 개발하는것이 필요하다.봄이면 “진달래꽃축제”를 열어 진달래꽃이 엄동설한을 이겨내는 인내성, 새파란 잎사귀도 없이 봄을 먼저 알리는 선구자의 자세, 혼신의 색채을 다 피워 선혈들의 충혼을 위로하는 정성 그리고 소박한 미소 등 고귀한 품성을 선양하면서 축제의 진수를 보여주었으면 좋겠다.
17    인 생 5 일 (김희관) 댓글:  조회:3978  추천:45  2011-04-18
풍향계    인  생  5  일                        김희관 전 연변문화국장 “인생5일”이란 한평생을 살아가는 동안 가장 기념해야 할 날자는 몇일이나 될까 라고 자문자답해서 얻은 답안이다. 몇 해전인 20세기까지만 해도 한평생을 “백년도 못사는 인생”이 통설이였는데 지금은 인류의 유전자 코드가 잇따라 풀리면서 이제는 “앞으로 백년을 사는 것은 기본”이라는 “희소식”이 파다하게 전해지고 있다. 그래서인지 미래학자들은 서둘러 “지금의 정보화시대 다음에는 바이오(생명)와 건강의 시대가 올것이다.”라고 하면서 제2의 인생, 제3의 인생을 운운한다. 그러면 인류의 력사는 농경시대, 공업화시대, 후공업화시대, 정보화시대, 바이오와 건강의 시대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백년인생을 평균치로 잡고 그중에서 가장 빛나는 “인생5일”을 생각해 봤다.  태여나는 날. 아기가 어머님의 궁전에서 “으-악…”하면서 태여나는 날이다. 그런데아기는 임금의 자식이던 농부의 자식이던 상관없이 모두 빈주먹인 것은 확실하다. 한살돌잔치 때면 아기가 손으로 붓을 들던지 돈을 잡으면 어른들은 아기의 손금을 운운해서 모두 길조라면서 박수를 치며 웃어댄다. 그러나 할아버지가 지어주는 이름만큼은 문무량반을 념두에 두고 지은 것이니 이미가 심장하다. 장군이, 유생이, 후남이 하면서 말이다. 학교 가는날.  어머님의 손을 잡고 소학교에 입학하던 날 또한 기념할만한 날이다. 지금이야 유치원을 거쳐 소학교를 다니지만 이전에는 거리바닥에서 딱지 치며 놀다가 엄마손에 끌려 학교에 입학했었다. 아무튼 배움의 인생이 시작된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학교교육과 사회교육이 병행하면서 평생 배울수 있는 길이 열였기에 나이에 상관없이 부단히 새로운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지식을 배울수 있다. 그러기에 부모와 자식이 동창생이 되거나 자식의 부모의 선생이 되는 사례도 속출하고 있다. 정보화시대가 시작되면서 인터넷으로 외지와 외국에 있는 자식들과 정보를 교류하고 서로 배우는 일상생활은 우리를 매일매일 학생으로 살게 한다. 장가 드는 날 (시집 가는 날). 어른이 됐으니 장가를 들거나 시집을 가는 것은 천륜지락이다. 그래야 어른답고 행복할것이다. 또한 자식을 낳아 대를 이을수 있어 “불효중의 불효”를 범하지 않을것이 아닌가. 지금은 청년남녀들의 혼사가 많이 늦어지고 있는데 공부를 더 하거나 일을 더하는것은 앞으로 살아갈 보금자리를 마련하기 위한것이라니 나무랄것 없다. 그런데 싱글족(독신자)이  점점 많아지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본다. 평생을 혼자 살겠다고 맹세한 것은 아니겠지만 혼인에는 관심이 없이 일에만 매달리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한다. 이제는 다른 민족이거나 외국인과의 혼인도 나무랄것이 못 된다. 하지만 연변의 춘향들이 외지로 외국으로 시집가는 사례가 많아지면서 고향의 더벅머리 총각들이 홀로 늙어가는데는 좋은 방도가 없을까? 성공하는 날. 성공하는 날은 그리 쉽게 정해 지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인생에 있어서 성공과 실패는 쌍둥이처럼 붙어 다니고 성공이라 해도 커다란 성공과 자그마한 성취가 주마등처럼 도래하니 한평생이 끝나기 전에는  딱히 어느 때가 성공의 날자인지를 락인할 수 있을지 미정이다. 몇 년동안 노력끝에 오리농법으로 벼풍작을 안아온 농부에게 물었더니 앞으로 더 큰 면적에서 더 큰 풍작을 이루어야 성공이라 할 수 있다고 한다. 나노연구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젊은 학자에게 물었더니 박사후를 통해서 앞으로 연구가 더 심화되여야 한다니 아직은 아닌 것 같다. 돈을 꽤 많이 벌었다는 사장님께 물었더니 대답이 걸작이다. “아직 돈배가 않찬는데유…”  그러니 그 누구나 한세상을 살면서 크고 작은 성공의 날은 반드시 있지만 감히 이미 마지막 성공의 날을 맞이했다고 자만할 수 없다. 떠나가는 날. 이 세상에 올 때 빈주먹으로 왔으니 빈주먹으로 가는것은 당연하다. 필자는 인생의 마지막날이 반드시 “태산보다 무겁거나 새털보다 가볍다 ” 하기 보다는 바래주는 사람들게서 “정직하게 열심히 살았다”는 평을 받으면 그 인생은 훌륭한것이라고 생각한다. “인생5일”을 살아가자면 두가지 에네지가 필요한데 그 한가지는 식량이요 다른 한가지는 문화이다. 밥을 매일 먹듯이 문화도 평생 배워야 한다.  아기가 배우면서 자라나 30년이면 “이립(而立)”하고  계속하여 배우며 일하면서 30년을 지내느라면 “이순(耳顺)”하여 정년퇴직을 맞게 된다. 그 다음은 시체말로 “제2의 인생”이라고 해서 또 30여년을 계속 배우며 적당한 일이나 취미생활을 하느라면 “백수(白寿)”가 될것이다.  하기에  “인생5일”은 배우고 배우고 또 배우는 인생이라 해야 할것이다.          <연변일보> 2007년7월27일  문화부간 발표. <해란강여울소리> 황상박선생의 청탁을 받고 재발표 07.8.21.
16    토끼해의 소망 (김희관) 댓글:  조회:3655  추천:38  2011-04-08
토끼해의 소망  -김희관   <산또끼 토끼야 너 어데로 가나, 깡충깡충 뛰여서 너 어데로 가나…> 토끼해가 왔다. 옛날에 부르던 동요 <산토끼>가 생각난다. 1938년 <조선동요작곡집>에 처음 실린 동요<산토끼>는 세세대대 어린이들에게 애창 동요로 구전되고 있다. 동요<산토끼>는 푸르른 산야에서 자유롭게 뛰노는 산토끼의 형상을 통하여 어린이들에게 자연을 사랑하고 푸른동산을 즐기는 랑만적인 동화의 세계를 그려주고있다.   고전소설<토끼전> 또한 우리가 잘 아는 문화유산이다. 지난 50년대 소학교 <한글>교과서에서 <토끼전>을 배우던 그 즐거움이 떠오른다. 우리반 녀선생님이 마침 그 당시 유행을 따라 희토끼털목도리를 두르고 다녔는데 매번 <토끼전> 얘기만 나오면 학생들이  키득키득  웃음보를 터뜰여서 난리가 났었다.   고전소설<토끼전>은 인도설화에 뿌리를 둔 불전설화(佛典說話)를 근원설화로 하고 있다. 그 근원설화는 중국의 불교경전 번역본과 우리조상들의 재창작과정을 여러차례 거쳤다. 그래서 인도의 불전설화에서 원래는 악어의 아내가 원숭이간을 먹고 싶어했다는 우화에서 고전소설<토끼전>으로 재창작되는데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토끼전>은 여러가지 문체로 력사경전에 실리고 소설<토끼전>으로 씌여지고 판소리 <수궁가>로 불려왔다.   <토끼전>에서 토끼가 자라의 속임수에 넘어가 자라등을 타고 바다 깊숙히 룡궁에 도달하니 불치병에 걸려 신음하는 룡왕이 당장 간을 내놓으라고 호통을 친다. 토끼는 생사결판의 찰나에도 정신을 가다듬고 혼신의 지혜를 다 풀어 열변을 토한다. <소토(小兎), 비록 죽을지라도 한 말씀 아뢰리이다. 대왕은 천승의 임금이시요, 소토는 산중의 조그마한 짐승이라. 만일, 소토의 간으로 대왕의 환후(患候) 십분 하리실진대, 소토, 어찌 감히 사양하오며, 또 소토 죽은 후에 후장(厚葬)하오며 심지어 사당까지 세워 주리라 하옵시니, 이 은혜는 하늘과 같이 크신지라, 소토 죽어도 한이 없사오나, 다만 애달픈 바는, 소토는 바로 짐승이오나 심상(尋常)한 짐승과는 다르와, 본대 방성(房星)  정기를 타고 세상에 내려와 날마다 아침이면 옥 같은 이슬을 받아  마시며 주야로 기화요초(琪花瑤草)를 뜯어 먹으매 그 간이 진실로 영약이 되는지라. 이러하므로, 세상 사람이 모다 알고 매양 소토를 만난즉 간을 달라 하와 보챔이 심하옵기로 그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와, 염통과 함께 꺼내어 청산녹수 맑은 물에 여러 번 씻사와 고봉준령(高峰峻嶺) 깊은 곳에 감추어 두옵고 다니옵다가, 우연히 자라를 만나 왔사오니, 만일 대왕의 환후 이러하온 줄 알았던들 어찌 가져오지 아니하였으리잇고?> 참으로 토끼의 지혜, 결국은 조상들의 지혜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토끼해를 맞으면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소망은 앞으로 우리가 새하얀 토끼들처럼 지혜롭게 오손도손 살아가는 것이다. 지혜란 무었일까? 지혜는 바로 슬기, 사리를 밝히고 모든 사안을 잘 처리해 나가는 능력이다. 물론 지금까지 우리는 슬기롭게 살아왔다. 문제는 21세기라는 새로운 력사시기에서는 우리 주변환경의 모든것이 다 급변하고 있는것만큼 역시 더 높은 차원의 지혜가 필요하다. 지혜는 부단히 충전되는 지식과 수시로 수집되는 정보, 그리고 다이나믹한 네트워크 환경속에서 살아남을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과정에서 얻어진다. 그 와중에 사람마다 집단마다 정확한 판단과 용기가 필요하다. 물론 우리에게는 민족자치라는 파워가 있다. 우리가 오직 <애국애족>의 사업을 벌려 나간다면 우리의 지혜는 빛을 바랠 것이다.   <토끼와 거북이> 역시 옛날에 재미있게 배운 동화이다. 토끼와 거북이가 달리기경주를 하는데 저만치 먼저 달려간 토끼가 뒤에서 저 멀리 떨어진 거북이를 비웃으면서 산등선에서 한잠을 잤다. 토끼가 잠에서 깨여나 보니 거북이가 앞서가 그만 경주에 졌다는 얘기다. 어쩌면 우리의 청소년들이 이 동화를 다시 읽고 자성해야할지도 모른다. 지난해 대학시험에서 우리 학생들이 주내의 한족학생들보다 평균점수에서 크데 뒤졌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이게 웬일인가? 하고 크게 놀랐다. 몇십년간 토끼처럼 저멀리 앞서가던 우리의 청소년들이였는데.   우리는 분명히 진화하고 있고 진취하고 있으며 진보하고 있다. 그 에너지는 바로 지혜이다. 우리가 농경사회에서 공업화사회로, 농촌에서 도시로 나아가서는 국내외 방방곳으로 삶의 시공을 넓혀가면서 분명히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그 뿐만아니라 더 높은 단계의 지식과 정보와 재간을 소유하기 위해 열심히 배우면서 진취하고 있어 석사박사 지성인들이 엄청나게 늘고있다. 그러한 노력은 이전에는 상상도 못하던 재부와 영광, 그리고 참신한 삶을 누리게 해 진보의 참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확신하건데 앞으로 우리가 살아가야 할 길은 오직 지혜로운 삶의 길뿐이다.   (전 주문화국장)2011년 1월6일 소한 – 16일 일요일 연변일보
15    <아리랑>의 향기 (김희관) 댓글:  조회:4090  추천:27  2011-03-29
풍향계 <아리랑>의  향기 -김희관    내가 언제부터 <아리랑>을 알기 시작했는지는 기억이 없다. 아마 어린시절 상지 하동에서 동네 할머니들이 우물가 그늘에 모여앉아 부르는 민요를  듣은 때부터일것이다.   1985년11월 필자는 연변예술학교예술단을 인솔하여 미국의 워싱톤 등 도시들을 한달간 순방하면서 공연을 한적이 있다. 그 때 우리는 당지 동포들과 함께 뜨거운 눈물을 머금고  <아리랑>과  <고향의 봄>을 수없이 목메여 부른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1987년 7월 일본 NHK방송의 제작진을 초청해 와서 우리와 함께 <머나먼 옛날-- 발해>라는 TV력사다큐멘타리를 촬영한적이 있다. 그 프로는 유명한 감독인 미즈다니선생이 메카폰을 잡았다. 그는 우리를 만나자 마자 자기는 조선민족의 <아리랑>을 연구하고 있다면서 지난 몇년간 조선과 한국을 넘나들면서 <아리랑>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였고 <아리랑>세미나에도 참가하고 <아리랑>의 본고장인 강원도 정선과 조선민족의 성산인 백두산에도 올랐으며 지금은 <아리랑>다큐멘타리를 구상하고 있다고 했다. 필자는 미즈다니선생이 그 때 기념으로 남긴 <아리랑>특집을 아직도 종종 펼쳐본다. 미즈다니선생은 <아리랑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장에서 <1929년 조선총독부가 <아리랑 금창령>을 내렸다. 그것은 3년전 라운규의 유명한 영화 <아리랑>이 조선민족이 스스로 만든 최초의 영화작품으로 상영되였으며 같은 해 가을에는 광주항일학생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이다>라고 지적했다.   20세기 70년대 한 일본사람이 아버지로부터 광복전 조선영화 필름을 많이 물려받았다고 하면서 그중에는 라운규의 영화<아리랑> 필름도 있다고 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그 사람과 수많은 담판을 했었다.  그런데 그는 몇년전 죽을 때까지 <글쎄요>하면서 영화 <아리랑>필름을 끝내 내놓지않아 아직도 그 실존여부가 묘연하다.  2003년 한국의 영화인들은 라운규의 영화<아리랑>을 새로 제작해 남북에서 동시 상영하는 축제도 벌렸다.   <아리랑>은 미국 여류작가 님 웰즈도 감동시켰다. 그는 1937년 연안에서 만난 조선족 혁명가 김산을 주인공으로  인물전기 <아리랑>을 펴냈다. 1995년 님 웰즈녀사는 이미 80고령의 할머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아주 흥분된 목소리로 <아리랑>을 불렀다. 김산은 자기에게 <아리랑>은 열두고개라고 알려주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김산은 자기가 기자생애에 만나본 가장 멋진 동방의 혁명지사였다고 역설했다. 지금 북경에 살고 있는 김산의 아들은 몇년전 최초 영어판 <아리랑>을 한국의 지인들로 부터 선사받으면서 70년대 전에는 아버지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었는데 1983년 중공중앙에서 명예를 회복해 주면서부터는  혁명가 아버지가 자랑스럽다고 한다.   1996년 필자는 <중국연변조선족력사화책>을 주필하면서 김산선생이 연안에 계실 때 님 웰즈가 찍은 사진은 손쉽게 수집했는데 라운규선생의 인물사진은 국내외의 수많은 자료를 뒤져도 얻지를 못해서 할수없이 라운규선생이 영화<아리랑>에 출연한 배역사진을 대용으로 실었다. 그러나 우리민족 영화사업의 선구자인 라운규선생이 20세기 10년대말 룡정시 지신향 명동학교 출신이라는 력사를 알면서도 인물사진 한장 못 모신다는점이 늘 알끈했었다.  몇년후 필자는 조선 <통일신보>에 실린 라운규선생의 생애와 영화예술에 관한 보도시리즈를 읽게 되였고 마침내 1촌 크기의 라운규선생의 인물사진까지 얻을수 있었다. <중국연변조선족력사화책>은 국가도서상을 받았다.   1997년 필자는 <중국조선족력사화책>원고를 후배들에게 넘겨주면서  TV대하력사다큐멘타리<연변아리랑>을 제작할것을 부탁했다. 너무나 고마운것은 전국정협 부주석 조남기장군님께서 친필로 <연변아리랑> 휘호를 써주시여 연변TV에서 방송한 50여부의 대하력사다큐멘타리 <연변아리랑>을 격려해 주시였다.   연변에서 <아리랑>은 전통문화의 맥을 이어가는데 큰몫을 하고있다. 연변가무단이 창작하고 공연한 가극 <아리랑>은 국가문화부의 대상을 받았다. 주문예집성판공실에서는 오래전부터 연변에서 구전해 내려온 여러가지 <아리랑>을 수집하고 기보했는데 그중 어떤것은 한국 당지에서도 실전된 <아리랑>이여서 아주 귀중한 민요유산으로 인정되기도 했다. 연변에는 아리랑예술단을 비롯해서 <아리랑>을 주제로 하는 대중문화가 발달하고 있으며 근년에는 도처에서 <아리랑>으로 이름을 지은 상호와 광고를 흔히 볼수있다.   우리는 전통문화가 있는 민족이며 역시 문화전통이 있는 민족이다.  우리는 고목에 꽃을 피우듯이 <아리랑>이 계속 울려퍼지게 해야할것이다. 몇년전CCTV에서 아리랑그룹이 청년가수 콩클에서 <시청자들이 가장 절찬하는 가수>  1위에 당선됐다고 방송하는 순간 나는 코마루가 찡해났다.    <아리랑>은 조선민족 전통문화의 대명사이다. 몇백년동안 구전해온 <아리랑>은 조상의 넋, 겨레의 얼, 민족의 혼을 담고있는 문화유산이며 우리의 정과 한을 한몸에 지니고 살아 숨쉬면서 전통문화의 향기를 온누리에 휘뿌려 왔다. 앞으로 우리가 세세대대로 전통문화를 계승해 나간다면 우리의 생활에는 <아리랑>의 향기가 그윽할것이다.   2003년 9월 3일부터 연변라디오방송에서는 <아라랑의 향기>라는 프로를 신설하고 우리의 전통문화를 전파하고 있다. 필자는 지금도 그 프로를 기획하고 첫방송에 참여한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뿌득하다.   우리의 후손들이 중국과 세계의 방방곳곳에서 아리랑을 부르면서 한오백년 잘 살아가기를 진심으로 기원하는바이다.(작자 연변문화국 국장  연변TV방송국장 역임)  
14    룡정정신 (김희관) 댓글:  조회:3600  추천:40  2011-03-23
  룡정정신   김희관 원 연변문화국 국장     3월 13일,  필자는 “룡정3.13반일운동 92돐 기념대회”에 초대되여 다시한번 “룡정정신”의 세례를 받았다.   1919년 3월13일, 연변각지에서 모여온 조선족동포들은 룡정의 서전대야에서 “일제의 침략을 반대한다!”,“친일주구를 타도하자!”라는 구호를 목청껏 웨치면서 일본령사관으로 향하여 시위행진을 단행하였다. 반일시위 도중 시위대는 주둔군과 경찰의 총탄을 맞아 17명의 희생자와 몇십명의 부장자를 냈다. 3.13렬사들의 선혈은 헛되지 않았다. “룡정3.13반일운동”은 연변인민들이 총을 들고 일제의 침략을 반대하는 기폭제가 되여 15만원 탈취사건, 봉오동전투, 청산리대첩, 항일련군 등 항일무장투쟁으로 이어졌다.   지난 세기 90년대부터 룡정3.13기념사업회 회장 최근갑옹은 회원들을 이끌고 3.13기념사업을 시작하는데는 수많은 애로와 난관을 극복해야 했다. 최근갑회장은 “선렬들의 빛나는 력사를 우리가 지키지 않으면 누가 지키겠는가?”하는 일념으로 지금까지 피타는 노력을 경주해왔다.   그와 동시에 중국조선족력사를 연구하는 력사학자들과 지성인들의 부단한 노력도 큰 힘을 실어주었다. 중공연변주위와 주정부의 령도하에 《연변조선족사》 편찬을 제안하고 주도한 전 연변정치협상회의 부주석 김영만옹은 “19세기 60년대부터 우리의 조상들은 중국으로 천이하였는바  19세기말에서 20세기초에 중국조선족으로 거듭났다. 하기에 룡정3.13 반일운동은 당연히 우리의 력사이다”라고 단언했다.  오늘날 중공연변주위,  길림성 당위,  국가민족사무위원회 등 상급령도의 배려하에 룡정3.13반일운동은 《중국조선족혁명투쟁사》, 《연변조선족사》와 《중국연변조선족력사화책》에 빛나는 한페지로 되였다.   룡정은 중국조선족의 성지이다. 룡정에 있는 “룡정지명기원지정천(龙井地名起源之井泉)”이라는 우물은 우리가 옛날부터 이땅의 주인이였다는 증표이기도 하다. 또한 일본령사관 옛터는 일제가 중국대지에 침략의 마수를 뻗히기 시작한 전초기지이기도 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땅에 궤나리보짐을 내리놓은 그날부터 일제와 불구대천의 적수가 되여 생사결판으로 싸워야 했다. 룡정3.13반일운동은 바로 그러한 피어린 투쟁의 서막이였다.   룡정은 중국조선족의 교육과 문화예술의 발상지이다. 룡정에는 우리의 첫 근대 학교인 서전서숙이 있었다. 그때로부터 우리는 민족교육의 첫발을 내디디였다. 민족교육은 걸출한 공산주의자이며 화가이신 한락연선생과 같은 훌륭한 청년들을 키워냈다. 룡정에는 일송정이 있어서 많은 유지청년들이 그곳에서 우국우민의 꿈을 키웠다. 룡정에는 명동학교가 있어서 시인 윤동주, 영화 “아리랑”의 주인공 라운규를 배출했다.   중공룡정시위 선전부 김길남부장의 기념연설에 의하면 21세기에 룡정은 새로운 자태로 태여나기 위해 현재 중국조선족민속문화성 프로젝트를 추진하고있다고 한다.  유서깊은 명동촌을 사회주의 새 농촌 시범촌으로 개발하는것이 그 일환이다. 10여년전 필자는 명동촌에서 전통부락과 막새기와에 관한 민속답사를 진행하였다. 동시에 연변TV방송국의 후배들과 함께 윤동주시인의 누이동생 윤할머님 내외분을 모시고 TV다큐 “기와에 깃든 령혼”을 제작하여 좋은 영상효과를 보았다. 전통부락을 잘 복원하는것 역시 문화유산을 발굴하고 보존하는 중요한 사업인만큼 명동촌이 참신하고 풍요로운 전통민속촌으로 거듭났으면 참 좋겠다.   금년에 한락연연구에 관한 고위급 포럼을 개최함과 아울러 한락연기념관과 한락연공원 개발을 다그친다고 한다. 참 지당하고 반가운 소식이다. 1982년 필자가  장춘에서 길림성사회과학원의 총서에 실린 로일대혁명가전기 한편을 읽었다. 그 인물전기의 주인공이 바로 룡정출신의 조선족 로혁명가이며 화가이신 한락연선생이였다. 필자는 너무나 놀랍고 자랑스러워서 그 전기를 밤도와 번역하여 《연변문예》잡지에 실었다. 그때부터 한락연선생의 전기적인 인생이 우리앞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한락연기념관과 한락원공원이 하루속히 락성되기를 학수기대한다.   민족교육과 민족문화가 발달한 곳에는 고귀한 정신이 빛나는 법이다. 92년전 3.13반일운동 당시 룡정의 청년학생들과 인민대중은 경의로운 “룡정정신”을 보여주었다. 그 당시 “룡정정신”은 일제의 침략을 반대하는 반일정신이였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총을 들고 싸우는 혁명정신이였다. 지금에 와서 “룡정정신”은 개혁개방이라는 조류속에서 룡정을 중국조선족의 문화교육과 민속문화의 성지로 개발하는 과학적인 창조정신이 아니겠는가.  
13    서안 연안 (김희관) 댓글:  조회:3944  추천:33  2011-03-18
풍향계 서안   연안 -김희관 전 주문화국국장   금년 국경절연휴를 맞아 오랫동안 가고 싶었던 서안–연안 관광코스를 부부동반으로 돌아보았다.   서안은 력사상 진, 한, 수, 당 등 13조대의 73명의 황제가 무덤을 남긴 5천년 중국력사의 축소판이며 성당시대의 장안이다.   지금은 명나라 때 쌓은 성곽을 복원해서 서안의 번화한 중심가를 구성했고 종루와 북루를 중심으로 사방으로 뻗은 거리는 아주 가관이다. 하지만 이렇게 력사상 유명한 도시가 <세계문화유산도시>에 급제하려고 여러번  <과거>를 보았는데 세계유네스코에서 내린 결론은 <성곽은 좋은데 성곽안에는 옛모습이 기본상 없음니 락제> 란다. 옛장안에 이렇게 고대건물이 없은 원인은 력사상 조대가 바뀔 때마다 새황제는 새궁궐을 지었고 또한 전란의 파괴도 끝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요즘 서안시는 국내외 학자와 건축설계사들을 뫼시고 <현대장안>을 구상하고 있는데 초보적인 결론은 2054년까지 성곽안을 현대화한 <당황성>으로 탈바꿈한다는 것이다. 그러자면 서안시는 성곽안의 40여만인구를 20만으로 줄이고 현대화건축을 당나라시대의 고대건축으로 대치하는 것이 상책이란다. 그러자면 건축대역사가 펼쳐지는 것은 물론이고 흙 한삽을 떠도 <진나라 벽돌에 한나라 기와가 따라 나온다>는 문물의 보고에서 얼마나 많은 고대문물을 파내야 할지 상상하기도 어려운 일이다. 그렇게해야 서안은 현대판 <당황성>장안으로 거듭나서 세계로 나아갈수 있다.   서안 동북쪽에 위치한 진시황릉은 인공위성으로 요측을 거쳐 대략의 위치와 거대한 규모는 알고 있지만 지금의 기술수준으로는 도무지 파헤칠수가 없기에 백년후 후세들에게 맏겼다고 한다.   세계 여덟번째 기적이라고 하는 병마용 제1호 관람장에 들어서는 순간 우리는 <아->하고 말문이 막혔다. 길이 잠든 진시황을 보위하느라 병마용 6천여개가 정연히 줄지어 땅속에서 2천여년을 말없이 숨어있었다. 그 병마용들은 실제 거구의 사나이 크기에 각자의 표정은 모두 달랐다.  1974년 당지 농민들이 가물방지우물을 여기저기 파면서 병마용파편을 발견하기 시작하여 병마용들은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병마용진영이 그곳에만 해도 네곳이나 되니까 앞으로 진시황릉 주변을 모두 파헤치면 병마용이 얼마나 될찌 아직은 상상하기 어렵다. 거기에다 진시황이 시작한 만리장성까지 합치면 그것은 진정 옛날부터 이어온 중국의 저력이라 할것이다.   서안에서 연안으로 가는 도중 꼭 들려야 하는 명소중 하나는 황하의 호구폭포이다. 몇년전 CCTV에서 어느 모험가가 오토바이로 호구폭포를 날아넘는 장면을 보았던 바로 그곳이다. 우리는 그렇게 쾅-쾅 무서운 굉음을 내면서 쏟아져 내리는 거대한 호구포로를 녹화하면서 저도 모르게 <그대는 보았느냐 저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는 황하수를…> 라는  당나라 시인 리백의 <장진주>시구를 목청껏 읊었다. 호구폭포는 참으로 황하의 성격을 단번에 감상할수 있는 명소였다. 인민음악가 서성해가 호구폭포가에서 <황하대합창>의 모티브를 얻었다는 전설은 천만 지당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튿날 새벽 관광뻐스편으로 몇시간 달려간 곳은 한번 꼭 가보고 싶었던 혁명의 성지 연안이였다. 섬북의 황토고원 오지에 위치한 연안은 1935년 2만5천리 장정 끝에 3만여명의 홍군이 도착하면서부터 중국혁명의 붉은근거지가 되였다. 봉황산에 우뚝솟은 보탑은 수나라 때 지은것이여서 세월의 세례를 받아 이제는 서쪽으로 좀 기울었다. 양가령에서는 중공 제7차 당대회가 열었고 <황하대합창>과 <백모녀>를 처음 공연했다는  중앙대례당과 연안문예좌담회을 가졌던 중공중앙판공청 회의실 그리고 모택동, 주덕, 주은래, 류소기 등 혁명가들이 살았던 토막굴집을 둘러보면서 느낀 감상이라면 한마디로 <그들은 정말로 풍류인물들이였구나,,,>   우리는 관광뻐스편으로 1천2백키로를 달리면서 당나라 때는 양귀비가 미역을 감았고 서안사변 때는 장개석이 잡히기도 했던 청화지를 유람했다.놀라운것은 당시 장개석의 전용비행사가 조선인혁명가였다는 것이다.  중화의 시조로 읽컸는 황제령도 둘러보았다. 그동안 우리는 5천년 전통문화의 일각을 엿볼수 있었고 혁명의 성지를 답사할수 있었다,   어찌그뿐이랴. 서안에서 우리는 항일전쟁시기 주은래의 지시를 받고 서북장관공서 리제심주석의 고참신분으로 당을 위해 헌신한 연변 룡정 출신의  혁명가이며 중국의 피카소라고 불리는 저명한 화가 한락연의 명복을 빌었다. 연안에서는 홍군의 제1대 포병사령 무정장군과  <중국인민해방군>군가와  <연안송>의 작곡가인 정률성을 그렸고 또한 미국 녀류작가 님. 웰즈가 쓴 인물전기 <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의 억울한 령혼앞에 머리을 숙였다. 그외에도 저명한 작가 김학철을 비롯한 수많은 조선족 혁명가들이 연안과 태행산에서 청춘의 선혈로 황토고원을 물들이며 민족해방의 그날을 위해 헌신했었다. 하기에 모택동주석은 <오성붉은기에는 조선족의 선혈도 슴배여 있다>는 명언을 남기셨다. 그래서 우리는 이번 여행길이 그리 낯설지 않았다.  (연변TV방송국장 역임) <연변일보> 2005년10월14일
12    신유목민 (김희관) 댓글:  조회:3817  추천:31  2011-03-11
풍향계   신유목민                                                      -김희관 주문화국장 역임   지난 7월 나는 서울에서 열린 국제대회에서 <신유목민>이라는 신조어 하나를 배웠다. 그 뜻인즉 고대에는 우리의 선조들이 말을 타고 초원을 찾아 달렸다면 후에는 말에서 내려 정착생활을 하기위해 토지를 찾아 부단히 이주를 했으며 근대사회에 와서는 도시와 공장을 찾아서 걸음을 채촉했었다. 지금의 젊은세대들은 <신유목민>이 되여 한손에는 핸드폰 한손에는 노트북을 들고 정보를 쫒아 국내외로 질주한다는 것이다. 그날 대회에서 특강을 청취한 50여개나라에서 온 참석자들은 <신유목민>이라는 신조어를 모두 찬성하는 반응이였다.   필자의 할아버지께서는 3.1만세운동에 적극 참가하시다가 일본군경들에게 쫒기여 가족을 이끌고 평안북도 정주에서 환인현으로 이주하면서 우리는 중국조선족이 되였다. 우리들은 가정마다 모두 눈물젖은 두만강과 압록강을 건너온 비슷한 이민사가 있다.   지금 200만 중국조선족은 개혁개방과 정보화시대를 맞아 새로운 삶의 터전을 닦느라고 한창이다. 국내를 보면 동북3성의 조선족집거지들이 상대적으로 위축되면서 많은 동포들이 관내로 이주하여 북경,천진지구, 청도,위해,연대지구, 상해,항주,소주지구 , 심천,주해지구 등  여러곳에 조선족들의 꽃동네 새동네를 마련해 가고 있다.   어찌 그뿐이랴. 이번 국제대회의 자료에 의하면 금년 5월까지 한국에서 유학, 로무, 취직, 결혼(중국국적)한 조선족은 15만4천여명이라고 한다. 그외 일본, 미국, 영국, 캐나다, 브라질, 남아공 등 몇십개 나라에 나가서 유학, 로무, 취직, 결혼생활을 하는 조선족동포들까지 다 포함한다면 아마 약 30만명좌우의 조선족동포들이 세계각국에서 생활하고 있는것으로 추산된다. 얼마전 국내 어느 신문에 <연변 세자매 아프리카에서 창업>이라는 기사는 필자를 눈물이 핑 돌게 했다. 참으로 우리의 동포들은 세계의 조류를 따르는 자랑스러운 <신유목민>들이다.   필자는 <신유목민>들이 점점 늘어나는 형세에서 웃어도 보지만 우울해질 때도 없지않다. 어떤 친구들은 연변의 조선족사회가 붕괴되 간다고 근심한다. 그래도 나는 <붕괴>라는 관점에는 합류하지 않기로 작심했다. 자고로 고향을 그리지 않는 사람이 없으며 락엽은 뿌리를 찾는다고 했거늘 우리의 동포들이 국내와 세계각국에서 <신유목민>으로 살아가도 고향생각은 늘쌍하면서 언젠가는 돌아올 생각을 한다고 믿는다. 호주 시드니의 해변가에서 만난 연변동포가 눈물이 글썽해서 <고향에 빨리 가고 싶다>고 말하던 기억이 생생하다.   고향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우리는 과연 무었을 해야하는가? 지성인들은 여러차례 세미나와 글에서 각양각색의 대책을 내놓았다. 필자는 연변의 경제를 부흥시키고 전자공학, 생명공학, 환경공학 등 첨단과학기술을 골간으로 하는 여러가지 일자리를 마련하고 전통문화의 대집성인 민속촌을 비롯한 문화산업을 발전시키고 아늑한 생활환경을 점차 조성해나간다면 세계를 질주하던 고향출신의 <신유목민>들이 점차 말고삐를 돌리게 될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동북아의 금삼각으로 불리우는 연변이 러시아, 조선,한국, 일본 등 나라들과 함께 평화를 정착시키고 공동으로 경제를 부흥하는 <노비자>시대가 도래하면 더욱 좋을것이다.   고향사람들은 <신유목민>들에게 부탁이 있다. 타향에서 살아도 같은 보름달을 보고 살아가는것이니 고향의 산천과 전통문화를 잊지말고 문화전통을 발양하여 민족문화를 이어가는데 힘써달라고. <금의환향>할 때에는 자식들을 많이 거느리고 올것이며 아가들이 우리말과 글 그리고 풍속습관을 잘 알게 해주기를 바란다. 괜히 할머님 앞에 와서 절을 할줄모르고 그저 <할로!> 한마디 외치다간 할머니가 <이눔!>하면서 경을 칠라.   물론 그러한 일이 없으려면 국내외의 그 어디에서 살아가던지간에 <신유목민>가정들에서는 아무리 바쁘게 살아간다고 해도 자녀들에게 백의민족의 씨앗을 심어주어 후대들이 우리민족의 혼을 이어받아 민족의 전통, 언어, 문화, 풍속습관과 공동한 심리소질을 소유하게 이끌어 주어야 할것이다. 이렇게 한다면 백의동포의 후예로서 손색이 없을것은 물론이요, 백의민족의 문화와 외국의 문화를 공유함으로써 남들보다 부자가 되는것은 자명한 일이 아니겠는가.   <신유목민>들이여, 세계를 힘차게 달려라.    2005년9월16일
11    력사를 캐는 심마니 (김희관) 댓글:  조회:3648  추천:34  2011-03-10
풍향계   력사를 캐는 심마니 김 희 관 (전 연변TV방송국장)        옛날부터 산삼을 캐는 사람을 심마니라고 한다.       필자는 력사학자가 아닌 방송인으로서 우리민족의 력사를 발굴하여 TV대하력사다큐멘타리 <연변아리랑>과  < 혈흔>을 제작한 서봉학프로듀서에게 <력사를 캐는 심마니>라는 별호를 달아주고 싶다 .      올 가을 연변TV-1채널에서 방송된  TV대하력사다큐멘타리 <혈흔>(18집)은 해방전 우리나라 관내 여러 성, 시에서 항일과 민족해방을 위해 헌신한 우리민족 선렬들의 피자욱 어린 력사를 발굴하고 영상화하여 시청자들에게 방송한  하나의 대작이다.       <우리민족선렬들의 피어린 력사는 황하수처럼 흘러갔지만 그들의 위대한업적을  몰라주면 한평생  미안하지 않겠는가 ? >  <혈흔>제작인의 소박한 제작동기이다 .     <혈흔>제작진은 2002년 3월부터 금년 6월까지 산해관이남의 12개성, 시의 50여개 도시와 혁명근거지를 찾아다니면서 간난신고 끝에 많고많은 우리민족 선렬들의  피어린 혁명투쟁 업적을 발굴해냈다.  이렇게 발굴해낸 보귀한 력사자료에  대하여 력사학자들은 관내 우리민족선렬들의 력사를 발굴하고 정리하는 방면에서 중대한 발견과 진전이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연변아리랑>(40집, 1999년방송)과  <혈흔>의 성공은 연변대학 박창욱교수님과 연변력사연구소 권립소장님 등 여러 저명한 력사학자들의 전적인 지지성원과 구체적인 지도와 갈라놓을수 없다. 이것이야 말로 력사학자들과  <력사를 캐는 심마니>의  협력의 본보기이다.   <연변아리랑>과  <혈흔>은 선렬들과 시청자들의 뜨거운 눈물의 만남이였다.  시청자들은 우리민족의 력사를 영상으로 시청하면서 많은 감동을 받았다. 시청자들은 편지를 제작진에 보내오거나 전화를 걸어와 축하를 하고 많은것을 배웠다고 하면서 우리에게 이렇게 훌륭한 력사가 있는것에 대해 자호감을 느낀다고 했다. 특히 혁명선렬들의 유가족들은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제작진에게 감사를 표했다.   또한 력사와 영상의 만남은 고이 잠들었던 선렬들을 살아숨쉬게  하였다. <연변아리랑>과 <혈흔>은  꽃피는 봄이 오면 사라지는 광야의 눈보라가 처럼 잊혀진 우리민족의 항일과 민족해방사를 생동한 영상으로 회생시켜 시청자 가정의  안방을 찾았을 때 그것은 아주 효과적인  혁명전통교양이였다.   <사기>의 저자 사마천은 중국력사상 가장 위대한 애국주의력사학자였다. 사마천은 <사기>를 쓰기위해 그야말로 <만권의 책을 읽었고 만리길을 걸었다>.  그는 한무제를 따라 많은 지방을 답사하였고 또한 한무제의 명을 받고  운남, 사천, 귀주 등지에 파견되여 당지의 천문지리, 력사민속을 고찰하였다. 그는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기원전 104년부터 <사기>를 쓰기 시작하여 10여년이라는 세월의 고생끝에  중국력사상 황제로부터 한무제시대에 이르는 약 3000년의 중국력사를  <사기>에 담았다. 그러고 보면 사마천도 <력사를 캐는 심마니>였다.     <민족사>는 우리민족의 가장 소중한 유산이다. 지금 우리가 19세기 후반기와  20세기에 두고온 력사는 아직 다 정리되지 않았다. 심지어 어떤 력사는 아직  발굴과정에 있다.  <민족사>는 여러방면의 력사들로 구성되여있다. 례하면 중국조선족의 이민사, 혁명투쟁사, 민족자치사, 문화예술사, 경제발전사, 대외교류사, 민속생활사 등 이다.  몇십년래  력사계에서는 많은 노력을 경주하여 하다한 저서와 논물을 발표했다.  그러한 성취가 있었기에 분명한것은 오성붉은기에는 우리민족선렬들의 선혈이 숨배여 있으며 우리는 중화민족의 떳떳한 일원이며 연변은 우리가 피와 땀으로 가꾼 대지라는 것이다.     력사는 거울이다. 우리는 <민족사>라는 거울앞에 자주 비추어 보아야 할것이다. 특히 청소년들에게 우리의 빛나는 력사를 가르쳐주어 그들이 그 어디에서 살아가더라도 우리민족의 자부심을 가지고 우리민족의 전통, 언어, 문화, 풍속습관과 공동한 심리소질을 확보하면서 대대손손 선진민족으로 살아가게 해야할것이다.   20세기50년대 말기부터 당중앙의 배려와 국가민족사무위원회의 지도하에 착수한 <조선족간사>는 10년동란기를 거쳐 80년대 중기에 와서야 출판되였다.  앞으로  필자의 한가지 간절한 소망이라면 력사학자들과  <력사를 캐는 심마니>들이 일심 협력하여 <중국조선족통사>를 하루 빨리 출판하는것이다.                                                    2005년12월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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