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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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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똑똑하게 사는것 댓글:  조회:5245  추천:9  2014-09-25
  똑똑하게 사는것   김희수   어느날, 부지런한 농부와 백수건달이 죽어서 하느님을 만났다. 하느님은 두 사람에게 죽기전까지 어떻게 살아왔느냐고 물었다. 부지런한 사람이 먼저 대답했다. “저는 한편생 부지런히 일하면서 농사를 지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백수건달이 킥킥 웃었다. “한평생 일만 하고 살았다니? 당신은 정말 일생을 바보처럼 어리석게 살았구려.” 하느님이 백수건달을 보고 “그럼 넌 어떻게 살았느냐?”하고 물었다. 백수건달이 배를 쑥 내밀고 한바탕 신나게 자랑했다. “나는 어릴 때나 어른이 되여서나 배고 고프면 부모가 해준것을 먹고 심심하면 휘파람을 불면서 한편생 빈둥빈둥 놀기만 했습니다.” 하느님이 백수건달에게 다시 물었다. “그럼 넌 살았을 때 이승에 뭘 남겼느냐?” 그 말에 백수건달이 말문이 막혔는지 대답을 못하자 하느님이 다시 물었다. “남긴것이 아무것도 없느냐?” 백수건달은 곰곰이 생각해보더니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 “있긴 있는데…” “그네 뭐냐?” “빚입니다. 가족에게 빚만 남겼습니다.” “그것 말고 또 없느냐?” “하나 더 있기는 한데…” “뭐냐?” “똥. 똥입니다.” 웃음이 나오는 대목이지만 웃고 지날 일은 아니다. 세상에 빚과 똥만 남겨놓고 간 백수건달은 똑똑하게 산것일가? 한평생 일만한 농부는 바보처럼 산것일가?   농부는 세상에 뭘 남겨놓았을가? 아마도 큰 재산은 남겨놓지 못했을것이다. 그러나 농부는 똑똑하게 살았고 자식들에게 어떻게 사는것이 똑똑하게 사는것인가를 깨우쳐준것만은 틀림없다. 그러니 농부는 살면서 똥만 남겨놓은것이 아니라 똑똑하게 사는 “도리”도 남겨놓은것이다.   똑똑하게 사는것은 어째서 사느냐를 알고 어떻게 살아갈것인가를 분명하게 정해놓고 그 목표를 향해 한걸음 한걸음 전진하며 사는것이다. 더불어 사는 세상에서 옳고 그름을 똑똑하게 알고 정직하게 사는것이다.   지금까지 나는 왜서 사는지 모르고 얼떨떨하게 살아왔다. 어릴 때에는 왜서 공부를 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남들이 다 학교에 가니 학교를 갔고 지금처럼 “공부해라, 공부해라”하고 강조하지 않으니 공부를 하지 않았고 왜서 돈을 벌어야 하는지도 모르고 남들이 다 일자리를 찾으니까 공장에 들어가 일했고 왜서 결혼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남들이 다 장가를 가니까 장가를 갔다. 한때 문학공부를 한답시고 필을 들었지만 왜서 글을 써야 하는지를 똑똑히 알지 못했기에 지금까지 한번도 본격적으로 글을 쓴적이 없었다.   한때는 술에 절어 흐리멍덩하게 취생몽사를 했고 수십년동안 트럼프와 마작에 미쳐 멍청하게 살기도 했으며 드라마에 빠져 아까운 시간을 죽이며 얼떨떨하게 살기도 했다. 얼마나 많은 세월을 술과 도박, 드라마에 허비했는지 모른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흐리멍덩하고 어리석게 살면서 덧없이 흘러보낸 세월이 아깝다.   나는 내가 왜서 사는지를 모르고 되는대로 막 살아왔다. 그래서 남은 여생이라도 똑똑하게 살아보련다. 똑똑하게 살려면 적어도 백수건달처럼 이 세상에 똥만 남겨놓고 가는 일은 없어야 할것이다. 가족에게 빚만 남겨놓고 가는 일은 더구나 없어야 할것이고…     
50    국적은 달라도 민족은 하나 댓글:  조회:6518  추천:9  2014-09-16
국적은 달라도 민족은 하나   김희수     얼마전에 친척의 결혼식에 참석했다가 한 만주족로인과 한상에 앉은적이 있다. 그 로인은 술이 거나해지자 자신이 누구인지 몰라 너무 애달프다고 털어놓았다. 자신은 이제 늙어서 만주족 력사를 되돌아보니 글과 말을 잃은 현실이 너무 안타깝고 자신이 한족이지 만족인지 몰라 너무 허무하고 허탈하다고 했다. 자신의 아들딸과 손자손녀들은 한족행세를 하며 지금은 고민없이 살아가는것 같지만 앞으로 늙으면 자신과 똑 같은 생각이 들것이라고 했다.   그 말을 들으니 남의 일 같지 않았다. 우리 민족도 자칫하면 만족처럼 주류민족에 동화될 위게 놓여있다. 주류민족에 동화되면 “득”도 있고 “실”도 있을수 있다. 그런데 득은 무엇일가? 잘 살게 되는것이 “득”이라는 견해도 있는데 그건 개인에게는 득이지만 전체 조선민족에게 있어서는 실이다. 주류민족에 동화되면 조선민족에게는 실만 있을뿐 득이 없다는 얘기이다.   주류민족에 동화된다는것은 민족의 정체성을 잃고 만주족처럼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살아가야 하는 처참한 신세가 된다는것을 의미한다. 주류민족에 동화되면 림시거나 잠시는 경제적으로 좀 더 부유하게 잘 살수 있을지는 몰라도 정신적으로는 죽도 아니고 밥도 아닌 인간으로 허무하고 허탈하게 살아가게 될것이다.   차라리 빨리 한족으로 동화되면 좋겠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런 사람한테 “그런 선동을 하지 말고 자신이 한족이 되고싶으면 혼자서 신분증과 호적부를 가지고 해당부문으로 찾아가서 조선족(진짜 조선족이 옳은지?)을 한족으로 변경하는 수속을 하라고 권고하고싶다.   자신이 한족이 되고싶으면 혼자서 그 길을 갈것이지 왜서 다른 사람들을 한족으로 동화되라고 선동하는지? 마치 일제강점시기의 친일파를 보는것 같아 역겹다. 혼자서 민족을 배반하는것은 자유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을 선동하는것은 절대 용납할수 없는 일이다. 물론 선동해도 넘어갈 사람은 없을것이라고 생각된다.   지금은 글로벌시대여서 다른 나라로 국적을 변경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이제 국적은 중요하지 않다는 얘기이다. 자신의 필요에 의해 다른 나라의 국적을 가질수도 있다. 다른 나라의 국적을 가졌다고 해서 나라를 배반했다고 보는 견해는 케케묵은 사고방식이다.   국적은 변해도 한가지만은 변하지 않는것이 있는데 바로 피이다. 누구나 다른 나라의 국적을 가졌다고 해도 자신의 혈관에 흐르는 피는 변하지 않는다. 자신이 어느 민족인가는 잊지 않고있다. 물론 자신의 나라나 민족을 배반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런 경우는 극소부분이다.   우리는 태여날 때부터 중국국적을 가졌기에 중화인민공화국 공민이지만 조선민족이라는것만은 잊지 말아야 한다. 이 면에서 우리는 화교들을 본받을 필요가 있다. 화교들이 어느 나라에 가서나 자신을 중화민족이라고 하듯이 우리도 조선민족이라는것을 항상 가슴에 깊이 새겨두고 살아야 한다. 화교들이 어느 나라의 국적을 가졌든지를 막론하고 자신을 염황자손이라고 하듯이 우리도 자신이 단군의 자손이라는것을 뼈속깊이 새겨두어야 한다.   우리는 미국국적을 가졌든 일본국적을 가졌던 자신이 단군의 후손이고 백의민족이라는것만은 잊지 말고 살아야 한다. 자신의 뿌리를 모르고 민족마저 잊는것은 인간이라고 할수 없다. 또 인간이기를 포기한것이라고 볼수밖에 없다.   이 세상 어디를 가나 우리는 하나이다. 아리랑을 부르고 된장국에 김치를 먹으며 “ㄱㄴㄷㄹ…ㅏㅑㅓㅕ…”를 자유자재로 조합하는 우리는 하나의 백의민족이다.     
49    짧은 한생에 꿈이나 꾸며 사세 댓글:  조회:5677  추천:7  2014-09-09
짧은 한생에 꿈이나 꾸며 사세   김희수     길어야 고작 100년밖에 안되는 짧은 인생에 꿈이 없이 산다면 얼마나 무의미할가? 그래서 어릴 때부터 꿈을 가지라고 하는것일가?   내가 소학교에 다닐 때도 그랬다. 선생님은 우리에게 어려서부터 웅대한 포부를 품어야 한다면서 학생마다 한사람씩 지명하여 “리상이 무엇인가”고 물었다. 대부분 학생들은 공산당선서를 하듯이 “나의 리상은 공산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마지막 피 한방울 남을 때까지 분투하는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선생님이 구체적으로 어떤 리상을 품고있는가고 물어서야 서로 좀 다른 대답이 나왔는데 앞으로 커서 동존서, 구소운, 황계광 같은 영웅이 되겠다는 학생, 해방군이 되여 대만을 해방하겠다는 학생, 비행사가 되여 미제국주의, 일본제국주의가 침략하지 못하게 조국의 하늘을 지키겠다는 학생 등 “위대한 리상”, “원대한 리상”이였다.   지금은 그렇게 희떠운 소리를 하는 아이들이 없다. 지금의 아이들은 좀 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꿈을 가지고있는듯 하다. 하지만 부모들의 핍박에 의해 내꿈보다 부모들이 선택해준 꿈을 가지고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부모가 선택해준 꿈은 부모의 꿈이지 내꿈이 아니다. 부모는 아이들에게 내꿈을 가지도록 해야 한다.   꿈이 없는 사람에게 미래는 없다. 자신의 꿈이 뭔가를 알아야 어떻게 살고싶은가를 깨닫고 의의 있는 인생을 살아갈수 있다. 꿈은 내 인생의 등대와 같다. 나아갈 길을 밝혀주는 희망의 등대가 있다면 캄캄칠야에 혼자라도 두렵지 않다.   원대한 꿈, 거창한 꿈, 멋진 꿈, 아름다운 꿈이 아니라도 좋다. 작은 꿈, 소박한 꿈이라도 그런 꿈을 이루기 위한 열정을 가지고 열심히 살아가면 된다. 한 친구는 가족을 잘 살게 하는게 자신의 꿈이라면서 한국에 나가 억척스럽게 일하고있다. 소박한 꿈이지만 아무도 함부로 무시할수 없는 아름다운 무지개꿈이라고 할수 있다. 도박에 인이 박혀 거의 매일이다싶이 마작판에서 시간을 허비하면서 자녀도 돌보지 않고 가정불화를 일으키는 사람은 꿈이 없고 따라서 이런 사람에게는 미래가 없다.   꿈을 가지고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다면 그 꿈의 실현여부를 떠나서 모두 보람찬 일생을 보냈다고 할수 있다. 그 꿈을 실현했느냐 못했느냐가 중요한것이 아니라 꿈을 실현하기 위해 땀을 흘리며 노력한 과정이 중요한것이다. 그런데 성인이 되면 어릴 때 가졌던 무지개 꿈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넌 꿈이 있니?” “꿈? 있긴 한데…” “네 꿈은 뭐냐” “어릴 때는 디자이너가 꿈이였는데 지금은 잘 나가는 남자를 만나 시집을 가는거야.” 어느 드라마에서 두 녀성이 주고받던 대화가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 이처럼 많은 녀성들은 신데렐라를 꿈꾼다. 반면에 남자들은 왕자가 되기 위해 돈과 권력을 꿈꾼다. 하지만 신데렐라와 왕자는 제한되여있기에 이런 꿈은 하늘의 별을 따는 꿈과 같아서 아름답기는 하지만 이루기는 어렵다.   내게 맞지 않은 신발을 신으면 걷기 불편하다. 마찬가지로 내게 맞지 않은 꿈을 가지면 인생길이 불편하다. 일하기 싫어 빈둥빈둥 놀기만 하면서 하늘에서 돈이 떨어지가만 바라는 그런 사람은 아무리 돼지꿈을 꿔도 백일몽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언제쯤 복권에 당첨될수 있을가?”, “나는 언제쯤 대운이 터서 도박판에서 큰돈을 딸수 있을가?”하고  벼락부자가 될 황금몽을 꾸는 사람에게 우리는 꿈을 깨라고 말한다.   꿈을 가지는것도 좋지만 꿈은 품고만 있으면 저절로 이루어지는것이 아니다. 자신이 가진 꿈을 이루기 위해 많은 시간과 정력을 쏟아가며 뼈를 깎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열심히 노력했는데도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 꿈은 내게 맞는 꿈이 아니다. 여태까지 쏟아온 노력이 후회되는 사람도 있을것이고 이만큼 해봤으니 유감이 없다고 생각되는 사람도 있을것이다.   후회된다고 해도 후회약은 없으니 주저앉지 말고 다른 꿈을 가지고 다시 한번 도전해보아야 한다. 유감이 없다고 해도 내게 맞는 꿈이 아니기에 주저없이 깨끗이 포기하고 다른 꿈을 선택해야 한다. 물론 유감이 없다는건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달려왔던 나날들이 헛되지만은 않았다는것을 말해준다.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한 매 하나의 과정이 중요하다는것을 알았기때문일것이다. 하기에 내게 맞는 꿈을 찾아 다시 한번 달려본다면 그 꿈을 실현하는것은 별로 어렵지 않을것이다.   100년도 안되는 인생은 눈깜짝하는 한순간이다. 하루밤 꿈같은 인생에 꿈이나 꾸며 살아보는것이 좋지 않을가?   
48    9월은 조선민족의 달 댓글:  조회:6544  추천:8  2014-09-01
9월은 조선민족의 달   김희수   9월에 접어들자 언제 만사가 귀찮았던 무더위가 있었던가 싶게 선들선들 가을바람이 시원하게 불면서 기분이 상쾌해진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시작되는 9월에 들어서며 시원하게 불어오는 선들바람이 먼저 우리의 명절을 맞이한다. 9월에 들어서며 두번째 날인 9월 2일은 처음으로 맞이하는 “조선언어문자의 날”이다. 예로부터 교육을 중시해온 우리 민족에게는 이 날이 매우 중요한 의의가 있다. 집을 팔고 소를 팔아서 자식을 공부시킨다는 우리 민족은 허리띠를 졸라매고 갖은 고생을 하면서도 자식의 공부뒤바라지만은 열심히 하였다. 그런 노력으로 우리 민족은 중국의 56개민족중에서 문맹이 가장 적은 우수한 민족으로 우뚝 설수 있게 되였다.   하지만 지금은 조선족인구의 감소로 인한 조선족학교위기, 우리 글 경시현상, 외래어충격, 온라인영향 등으로 조선글을 모르는 “조선족문맹”이 늘어나고있는 추세이다. 이런 시점에서 “조선언어문자의 날”이 제한된것은 우리 말과 글을 중시하는 붐을 일으켜 우리 민족을 위기에서 탈출시키는데 중요한 의의가 있다고 본다.   2014년 3월 25일에 연변조선족자치주 제14기 인민대표대회상무위원회 제9차 회의는 매년 9월 2일을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조선언어문자의 날”로 확정했다. “조선언어문자의 날”을 연변조선족자치주창립일인 9.3의 전날로 제정한것도 매우 중요한 의의가 있다고 본다. 이는 조선언어문자가 없다면 조선족자치주도 없다는것을 말해준다.   우리가 이 땅에서 소수민족의 일원으로 소수민족의 혜택을 향수하며 살려면 우선 자치주가 있어야 한다. 자치주가 계속 존재할수 있게 하려면 매개 조선족마다 조선언어문자를 잘 배우고 잘 지켜나가야 한다. 자라나는 후대들중에 우리 말과 우리글을 모르는 “조선족문맹”이 없도록 해야 한다. 중국소수민족의 주요문자중의 하나인 우리 민족의 문자를 천년만년 자자손손 전해야 한다.   “조선언어문자의 날”이 지나면 다음날은 연변조선족자치주창립일이다. 올해 9월 3일은 연변조선족자치주창립 62돐이 되는 날이다. 이 날은 연변조선족만의 명절이 아니라 전체 중국조선족의 명절이다. 연변조선족자치주는 연변조선족만의 자치주가 아니라 전체 중국조선족의 자치주이다. 때문에 우리 전체 중국조선족이 단합하여 연변조선족자치주를 지켜야 한다. 연변조선족자치주가 없으면 중국에서 조선족이 설 자리가 든든하지 못하게 된다.   9.3명절이 지나면 숨돌리기 바쁘게 또 9월 8일이 되여 우리 민족의 전통명절인 추석이 돌아온다. 추석은 순수한 우리말로 한가위이고 중국에서는 중추절(中秋节)이라고 한다. 추석에 한족들의 본을 따라 월병을 먹는데 습관된 우리는 우리 민족의 추석음식이 송편이라는것을 까맣게 잊고있다. 이제부터 추석에 월병보다 송편을 먹는 습관을 들이는것이 어떨가?   추석은 음력 8월 15일이고 보통 양력 9월의 달력에서 찾아볼수 있다. 올해는 38년 만에 이른 추석을 맞이하게 됐다. 2009년에는 10월 3일에 늦은 추석을 맞이했다. “조선언어문자의 날”, 연변조선족자치주가 창립된 날, 조선족전통명절 추석이 있어 9월은 명실상부한 조선민족의 달이다. 게다가 9월 10일은 스승의 날인 교사절이여서 교육을 중시하는 우리 민족의 달 9월에 의미를 더해준다. (2014년 9월 1일)    
47    선한 사람 악한 사람 따로 있나? 댓글:  조회:5800  추천:9  2014-08-19
선한 사람 악한 사람 따로 있나?   김희수     사람은 태여나서부터 철이 들 때까지는 본래 천성이 선량하다. 분명한것은 악한도 처음부터 악한이 아니라는것이다. 악한의 어린시절을 보면 악한도 아아때에는 세상의 모든 아이들처럼 선량했다는것을 알수 있다. 삼자경에서 이르길 “인지초, 성본선, 성상근, 습상원(人之初,性本善。性相近,习相远)이라고 했다. 인간은 태여날 때 모두 본성이 착하지만 자라면서 후천적인 환경이 다름에 따라 성격도 좋고 나쁨의 차이가 있게 된다는 뜻이다.   이와 반대로 순자는 사람의 천성은 원래 악하다고 보았다. 그는 아기는 어머니의 배속에서 나오자마자 울어대는데 그건 아기가 어머니의 피곤여부는 모르고 그저 배가 고파 젖을 먹을것만 알뿐이라는것이다. 만약 아이가 쌍둥이 혹은 세 쌍둥이라면 가능하게 이 아이들은 서로 다투어 젖을 먹으려 할것인바 이런 각도에서 보면 사람의 본성은 선량하지 못하다는것이다.   배고프면 먹고싶은것이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물의 본성이다. 동물은 먹어야 살고 살기 위해서는 먹어야 하기때문이다. 아기는 살고싶은 본능으로 엄마 젖을 찾는데 그것으로 인간의 선악을 론하는것은 타당하지 않다. 또한 선량하지 못하다는건 악하다는것을 말해주는것이 아니다. 선하지도 않고 악하지도 않은 그 중간이 있기때문이다.   악하다는것은 “인간의 도덕적 기준에 어긋나 나쁘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남에게 해를 끼치는것을 말한다. 아기가 젖을 먹으려 하는것은 어머니거나 같이 젖을 먹으려는 다른 아기에게 해를 끼치려고 하는 행동이 아니다. 배고파 젖을 먹으려 하는것은 아기의 잘못이 아니다. 잘못이 있다면 제때에 아기에게 젖을 먹이지 못한 어머니에게 책임이 있다. 어머니가 제때에 아기에게 젖을 먹였더라면 아기가 서로 젖을 먹으려고 타투는 일이 없었을것이다.   태여날 때 선한 유전자를 물려받거나 악한 유전자를 물려받으며 그 유전자가 아기의 성장에 큰 영향을 준다고 하는 견해도 있다. 그럼 선한 유전자를 물려받은 아기가 자라서 꼭 선한 사람이 되고 악한 유전자를 물려받은 아기가 자라서 반드시 악한이 된다고 단정지을수 있는가? 옛날 황제들을 보면 성군의 아들이 폭군이 되고 폭군의 아들이 성군이 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고금중외를 둘러보아도 부모가 살인범이면 자녀가 살인범인 경우는 드물다.   태여날 때 어떤 유전자를 물려받았는가를 가지고 인간의 선악을 판단할수 없다. 같은 유전자를 물려받은 쌍둥이도 하나는 선한 사람이 되고 다른 하나는 악한 사람이 될수 있다. 이는 태여날 때에는 모두 선량했지만 자라면서 후천적 환경의 영향을 받아 혹자는 착한 사람으로 되고 혹자는 악한 사람으로 된다는것을 말해준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세상을 보면서 자란다.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세상이란 어떤것인가? 자신들의 욕심으로 후대들에게 물려줄 자원을 마구 랑비하고 환경을 마구 오염시키고 더러운 욕망을 채우려고 탐오, 절도, 강탈, 강간, 살인을 저지르고 자신들의 리익을 위해 서로 죽이는 전쟁을 일으키고 … 한마디로 자연환경이나 인간정신이나 모두 오염된 세상이다. 이런 오염된 세상에서 어른들이 잘못 가르치면 아이들은 잘못 배우게 된다.   아이들은 호기심이 많고 모방성이 강하기에 어른들의 언행을 그대로 따라하게 된다. 말을 배우는것도 그러하다. 어디서 배웠는지 상소리를 곧잘 한다. 아이들은 상소리가 평소에 듣지 않던 말이기에 신기하고 호기심에 의해 그런 말을 한번만 들어도 곧 기억하게 되는것이다. 이렇게 처음에는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나쁜 말을 배우고 나중에는 어른들이 오염시켜놓은 세상에서 욕심부터 시작해 악의, 증오, 분노, 원망, 불평, 짜증, 질투, 심술, 복수심 등 나쁜 마음을 배우게 된다.   다행히도 어른들은 수치심을 알고 옳그 그름을 분별할줄 알기에 설령 자신이 나쁜 일을 했다고 하더라도 자식에게는 나쁜 일을 가르치지 않고 좋은것만 배워주려고 애쓴다. 그리하여 아이들은 어른들이 오염시켜 놓은 세상에서 자라지만 량심이 있는 어른들에게서 나쁜 일은 해서는 안된다는것을 배우기에 악한이 되는 경우는 적다.   후천적 환경이 인간의 선악을 결정한다면 왜서 같은 부모한테서 태여나 같은 환경에서 자란 쌍둥이는 하나는 선하고 다른 하나는 악한 경우가 있을가? 이런 경우는 이렇게 생각해보아야 할것이다. 쌍둥이라고 하지만 약간의 시간은 조금 떨어져 서로 다른 환경에서 보내고 서로 다른 사람들을 접촉한 시간이 있었을것이다. 그런 조금 다른 환경이 쌍둥이의 세계관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을수도 있다.   이로부터 교육의 중요성을 알수 있다. 삼자경에는 또 “양불교 부지과 교불엄 사지타(养不教,父之过 教不严,师之惰)란 말이 있는데 이는 “부모가 자식에게 사상과 행위들을 바르게 인도하고 교육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부모의 과실이고 스승이 제자에게 지식만 전수하고 실제상황에서 엄격히 가르치지 못한다면 그것은 스승의 라태함으로 직책을 다하지 못함이다”는 뜻이다.   아이가 자라서 악한 사람이 되면 그 잘못은 그 아이의 부모와 선생에게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때문에 부모와 선생은 어릴 때부터 아이들에게 “저것은 나쁜 일이기에 하지 말아야 한다”는것을 알려주어야 하고 “어째서 나쁜 일이며 어째서 하지 말아야 하는가”를 차근차근 도리로 설명해주어야 한다.   악한 부모나 악한 사람의 주변에 자란 사람들중에 어떤 사람은 자신에게 나쁜 영향을 끼친 부모거나 주변사람을 미워하면서도 어쩔수 없이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 자신도 그 사람처럼 행동하고 어떤 사람은 부모거나 주변사람은 해서는 안될 일을 한 사람이란것을 절감하고있기에 절대 그들처럼 되지 않으려고 한다. 이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선과 악이 존재하기때문이다.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세상이 원래 선과 악이 존재하는 세상이기에 천성이 착하던 아이들은 자라면서 점차 후천적 환경의 영향으로 악한 마음을 가지게 되는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마음속에 천사와 악마가 있다고 하는것이다. 사람의 마음속에 악이 자리잡으면서부터 인간은 항상 자신의 마음속에 악이 존재하고있다는것을 스스로 느끼게 되는것이다. 그래서 선한 일과 착한 일을 놓고 선택해야 될 때에는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선과 악이 싸우게 된다.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은 따로 없다. 선과 악이 싸워서 선이 이기게 되면 선한 사람으로 살게 되고 악이 이기게 되면 악한 사람으로 살게 된다.   이 세상에서 마음속으로 강간, 살인을 해보지 않은 사람은 한사람도 없을것이다. 이는 인간의 마음속에 악이 존재하기때문이다. 대부분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강간, 살인 등 나쁜 마음을 품고만 있으면서 행동에 옮기지 않는것은 마음속의 천사와 악마가 싸워서 천사가 이기기때문이다. 일단 천사와 악마의 싸움에서 악마가 천사를 이기게 되면 인간은 품고있던 나쁜 마음을 행동에 옮기게 된다.   살면서 남의것을 가지고싶은 마음도 있을것이고 누군가를 미워서 죽이고싶은 마음도 있을것이다. 이럴 때 마음속으로 가지고싶은것을 마음대로 가지고 죽이고싶은 사람을 마음대로 죽이는 생각을 품는것은 얼마든지 허용되는 일이다. 그런 생각을 행동에 옮기지만 않으면 된다.   이 세상에 악한 사람들이 적어지게 하기 위해서 어른들은 오염이 없이 깨끗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애써야 한다. 오염이 되지 않은 깨끗한 환경에서 후대들을 자라나게 하면서 언제나 선과 악이 마음속에서 싸울 때 선이 악을 이길수 있는 착한 사람으로 성장하게 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 어른들이 해야 할 일이다.     
46    왜서 권선징악이여야 하는가? 댓글:  조회:9074  추천:10  2014-08-05
왜서 권선징악이여야 하는가?   김희수     권선징악(劝善惩恶)이란 착한 일을 권장하고 악한 일을 징계한다는 뜻이다. 구전설화, 고대소설은 대부분 권선징악을 주제로 하고있다. 《흥부전》, 《춘향전》, 《홍길동전》, 《사씨남정기》 등은 권선징악을 주제로 한 대표적인 이야기이다. 《흥부전》은 착한 흥부는 잘 살게 되고 악한 놀부는 망하게 되는 이야기, 《춘향전》은 암행어사가 되여 내려온 리몽룡이 주색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은 부패하고 무능한 탐관오리 변학도를 징벌해 사랑하는 녀인 춘향의 복수를 해주는 이야기, 《홍길동전》은 명문 재상의 서자로 태여나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적서차별의 멸시를 참지 못하여 집을 뛰쳐나와 의적이 된 홍길동이가 고통을 받는 민중의 편에 서서 탐관오리들을 통쾌하게 응징하는 이야기이다.   물론 《춘향전》에 나오는 리도령을 춘향의 육체를 탐한 권력자, 리기적인 욕정의 사대부 남성으로 재평가하고 김만중의 《사씨남정기》에 나오는 악녀 교채란을 가부장제 첩제도에 기대여 풍족하게 살아보려고 한 녀성으로, 당시에는 드물게 욕망에 충실한 녀성으로, 다시 말해 유교적 가부장제에서 자신만의 생존방법을 터득한 인물로 재평가한 시각도 있지만 권선징악의 주제를 뒤집지는 못한다.   문화대혁명시기에 창작된 본보기극 《위호산을 지혜롭게 탈취》, 《백모녀》, 《홍색랑자군》 등도 권선징악을 다룬 경극 또는 발레무용극이다. 《백모녀》와 《홍색랑자군》은 발레무용극 먼저 영화도 있었고 《위호산을 지혜롭게 탈취》는 경극 먼저 곡파의 동명소설을 각색한 영화 《림해설원》이 있었다. 《위호산을 지혜롭게 탈취》는 정찰 패장 양자영이 토비로 위장해 토비소굴인 위호산으로 들어가 독수리를 우두머리로 하는 토비들을 소멸하는 이야기, 《백모녀》는 청년농민 왕대춘이 팔로군에 참가하여 악패지주 황세인을 징벌해 사랑하는 녀인 시얼(喜儿)의 복수를 해주는 이야기, 《홍색랑자군》은 대지주 남패천의 하녀였던 오경화(吴琼花)가 당대표 홍상청이 거느리는 랑자군에 참가하여 죄악이 극도에 달하는 남패천을 징벌하는 이야기이다.   권선징악은 수백년 우려먹은 소재이지만 오늘도 소설, 영화, 드라마의 주제로 한몫을 하면서 여전히 그 독특한 매력을 유지하고있다. 김용(金庸), 량우생(梁羽生), 고룡(古龙) 등의 무헙소설, 《소림사》, 《곽원갑》, 《황비홍》 등 무협영화와 무협드라마는 대부분이 권선징악을 주재로 하고있다.   한국의 복수극드라마도 권선징악이란 주제를 벗어나지 못한다. 한류열풍을 일으킨 리영애가 주연한 《대장금》을 비롯하여 복수극의 녀신 장서희가 주연한 《인어아가씨》와 《아내의 유혹》이 대표적이다. 그외 《노란복수초》, 《쓰리 데이즈》, 《잘 키운 딸 하나》, 《나만의 당신》, 《황금무지개》, 《갑동이》, 《빛나는 로맨스》, 《너희들은 포위됐다》, 《골든 크로스》, 《빅맨》, 《트라이앵글》 《호텔킹》 등 드라마들도 모두 권선징악으로 막을 내렸다. 그리고 현재 방영되고있는 《왔다! 장보리》, 《끝없는 사랑》, 《조선총잡이》 등도 권선징악으로 마무리될것으로 보인다.     뭐니 뭐니 해도 권선징악의 대표적 영화라면 프랑스의 저명한 영화배우 알랑드롱(阿兰德龙)이 주연한 《조로(佐罗)》를 으뜸으로 꼽아야 할것이고 권선징악의 대표적인 드라마라면 김초군이 주연한 대만드라마 《포청천(包青天)》을 첫번째로 꼽아야 할것이다.  우리는 가면을 쓴 협객 조로가 불합리한 세상을 향해 검을 휘두르며 악당들을 징벌할 때마다 그 통쾌함에 박수를 보내지 않을수 없다. 영화 《조로》를 본 분이라면 억압받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폭압과 폭정에 대항해 가면을 쓰고 검을 빼든 조로의 형상이 지금도 머리속에 지워지지 않고있을것이다.   또한 우리는 공평하고 사정을 돌보지 않는 포증(包拯)이 토호렬신과 악질무뢰한을 베는 개작두(狗头铡), 탐관오리와 나라에 해를 끼치는 간신들을 베는 호작두(虎头铡), 황제의 친인척과 황제나 귀족의 후손을 베는 룡작두(龙头铡)로 악한들을 처단할 때마다 그 통쾌함에 만세를 부르지 않을수 없다.   수백년이 흐른 지금에도 권선징악의 주제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까닭은 악한이 징벌을 받는것을 보면 속이 시원해지는 느낌 즉 통쾌함때문일것이다. 너무 빤하고 단순한 스토리 같지만 대중들을 열광하게 만드는 권선징악의 매력은 그 무엇으로도 대체 불가능하다. 권선징악이 문학창작에서 창의성 발휘를 저해한다는 견해도 있지만 낡은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고정관념을 깨고 새로운 사유로 무한한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면 결코 빤하지만은 않은 반전이야기로 독자 혹은 시청자들을 사로잡을수 있을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착한 사람은 행복하게 잘 살고 악한 사람은 징벌을 받았으면”하는것이 만백성의 소원이다. 아이들은 권선징악의 결말을 보면서 나쁜 일을 하면 벌을 받게 되고 착한 일을 하면 좋은 결과가 있게 되는구나 하는것을 깨닫게 되고 어른들은 현실에서는 감히 건드릴수 없는 권세 높은 악한들이 징벌받는것을 보면서 위안을 얻게 된다.   권선징악이 아니라 착한 사람이 비참하게 되고 악한 사람이 징벌을 받지 않는 결말이라면 어떻게 될가? 그런 결말의 이야기, 소설, 영화, 드라마를 보고 자란 청소년들은 “악한 일을 해도 결국엔 벌을 받지 않는구나”하는 잘못된 인식을 가지고 자신의 리익을 챙기기 위해서 도둑질하고 강도질하고 심지어 살인을 저지르려고 할것이다. 누구나 다 나쁜것을 따라 한다는 얘기는 아니다. 하지만 선과 악의 기로에서 헤매는 청소년들에게는 범죄의 길에 쉽게 빠져들게 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이것이 계급사회에서 권선징악이 필요한 리유이다.   악한을 징벌하고 주인공이 행복하게 사는 속시원한 해피엔딩의 결말이 아니고 남주인공이 죽는 《홍색랑자군》이나 《상어》같은 새드엔딩의 결말일지라도 현재 가속화되고있는 반부패캠페인처럼 악한만은 마땅한 징벌을 당해야 세상이 바르게 되지 않을가 싶다.    
45    인류는 왜 전쟁을 좋아할가? 댓글:  조회:6170  추천:18  2014-08-01
인류는 왜 전쟁을 좋아할가?   김희수     남자아이들은 전쟁영화를 즐겨보고 전쟁놀이를 좋아하며 군인을 흠모한다. 아이들은 서로 사람을 죽이는 전쟁영화를 보면서도 아군이 적군을 쓸어눕히는 장면이 나오면 통쾌하게 박수를 친다. 또한 완구총을 들고 전쟁을 모방한 전쟁놀이를 신나게 해보기도 한다.   우리 어릴 때도 전쟁놀이를 많이 해보았다. 편을 갈라서 나무를 깎아 만든 총이거나 백화상점에서 사온 장난감총을 들고 입으로 “땅!”하고 상대방을 쏘고는 “넌 죽었다!”하고 신나서 환성을 지르기도 했다. 지금의 아이들은 이런 전쟁놀이는 하지 않지만 전쟁게임은 하고있다.   하지만 평화시대에 사는 아이들은 실제로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전쟁이 얼마나 잔인한지 모른다. 눈길을 중동에 돌려보자. 거의 매일이다싶이 총소리와 포소리를 들으며 자란 그곳 아이들은 무고한 민간인들의 목숨까지 무수히 앗아가는 전쟁이 얼마나 잔인한가를 공포와 고통속에서 몸으로 느끼고있다.   학자들은 인류력사는 전쟁의 력사라고 말한다. 미국의 미래학자 엘빈 토플러(阿尔文·托夫勒)는 그의 저서 《전쟁과 반전쟁》에서 “지구상에 유엔이 창설된 이후 1990년대까지 45년간 전쟁이 없었던 기간은 단 3주일에 불과했다”는 수치를 제시하면서 인류의 력사는 전쟁의 력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것을 실증해주었다.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가 발생하지 않았던 평등사회(원시공동체)에서는 전쟁이 없었다. 생산력발전으로 생산수단을 독점하는 인간집단이 출현하고 개인이 소유하는 재산이 생기고 이들이 가난한 인간집단을 착취하고 지배할수 있게 되여 계급이 발생하고 원시공동체사회의 붕괴와 더불어 최초의 계급사회인 노예제사회가 형성되면서 부락과 부락간에 더 많은 재산과 노예를 차지하고 더 큰 땅을 차지하기 위한 전쟁이 발생되였다.   이렇게 전쟁은 인간의 욕심에서 시작되였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남의 나라의 자원을 략탈하고 자국의 경제리익을 챙기기 위해 사람을 죽이고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리는 전쟁을 하는것이다. 얼마나 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전쟁으로 죽었는지 모른다. 또 얼마나 많은 군인들이 왜서 일어난 전쟁인지도 모르고 왜서 해야 하는 전쟁인지도 모르고 젊은 목숨을 바쳤는지 모른다.   칭키스칸이나 나뽈레옹을 영웅이라고 부르지만 그들이 일으킨 전쟁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가를 생각해보았는가? 전쟁에서 죽은 사람들은 응당 죽어야 할 사람들이였을가? 왜 이런 전쟁은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하는가?   혹자는 전쟁이 없었으면 발전도 없다고 말한다. 그들은  인류의 력사상 전쟁이 없었다면 인류는 행복하게 살았을가고 질문하면서 인류가 발전하고 력사가 진보할수 있었던 리유는 위대한 과학자도 아니고 정치가나 예술가도 아니고 바로 전쟁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는 전쟁을 일으키려는 나라가 전쟁을 정당화하려는 궤변일뿐이다.   혹자는 또 인류는 전쟁을 통해 령토를 넓히고 문명을 받아들이고 확산시키며 서로 발전해 나갔다고 말한다. 어쩌면 그럴듯한 말처럼 들린다. 하지만 이것도 전쟁, 문명, 발전이란 개념을 혼동시켜 전쟁을 미화화려는 허튼소리이다. 끊임없이 되풀이 되는 전쟁은 인류를 발전의 길로 인도하는것이 아니라 인류를 멸망의 길로 이끌것이다.   저 이라크, 리비아, 시리아, 팔레스티나 등 나라들처럼 실제로 총알이나 폭탄이 당신을 향해 날아온다고 생각해보면 서로 상대방을 죽이는 싸움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날가? 당신이 숨을 곳도 없어 오늘밤 죽을지도 모르는 가자지구의 주민들처럼 무서운 밤을 보내야 한다면 전쟁을 강건너 불구경하듯이 재미있게 보고만 있을수 있을가? 사방에서 날아오는 총알과 폭탄에 내 부모가 죽고 내 형제가 죽고 내 처자식이 죽는다면 전쟁이 꼭 필요하다는 말을 할수 있을가?   인류문명이 발전할수록 아이러니하게도 사람을 죽이는 무기도 발전했다. 전쟁을 준비하고있는 여러 나라들은 버튼 하나만 눌러도 적국의 주요도시를 초토화시킬수 있는 미사일, 적국의 정보를 수집하고 지상 또는 공중에서 전천후타격을 수행할수 있는 무인스텔스전투기, 연료보급이 필요없는 핵잠수함, 미사일공격에 대응하는 미사일방어체계 등 위력이 더 강하고 사람을 더 많이 죽일수 있는 최첨단무기들을 보유하고있다. 하지만 이에 만족하지 않고 이 보다 더 위력이 강하고 사람을 더 많이 죽일수 있는 무기를 개발하려고 치렬한 경쟁을 벌리고있다. 버튼 하나만 누르면 이 지구상의 인류를 모두 멸망시킬수 있는 무기를 개발하지 못하는것을 안타까와 할 지경이다.   이 지구상에 전쟁이 없었으면 하는것이 평화를 념원하는 모든 사람의 공통된 생각일것이다. 이처럼 전쟁은 꼭 피해야 할것이지만 피할수 없는것이기도 하다. 지금도 일부 나라에서는 군비경쟁과 패권다품이 계속되고있다. 일본은 그렇게 꿈꾸던 대동아공영권이 종말된지 70년이 되여오지만 지금도 력사의 교훈을 망각한채 집단적 자위권이란 구호를 내걸고 일본을 전쟁을 할수 있는 나라로 만들고있다. 전쟁에 환장한 나라다.   미국과 로씨야(러시아)는 세계를 제패하여 다른 나라들을 괴뢰로 만들어 자국의 경제리익을 챙기려고 군사력증강에 혈안이 되여있고 중국은 싸워서 이길수 있는 군대, 령토주권을 철저히 수호할수 있는 군대를 육성하려고 국방력강화에 박차를 가하고있다. 우리와 가까운 이웃인 조선반도(한반도)에서도 군사적 긴장상태가 되풀이되고있다.   지금 이 시각도 팔레스티나 가자지구에서는 전쟁이 계속되고있다. 지난 7월 8일에 이스라엘이 공습을 시작한 가지지구에서 아직도 총소리가 멎지 않고있다. 하루 100명이상 사망자가 나온다는 그 곳의 통곡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인간의 욕망이 사라지지 않는한 전쟁은 끝나지 않을것이다. 정말 진정한 평화란 존재하는걸가? 전쟁이 없으면 평화도 없을것이다. 전쟁때문에 존재하는 평화가 슬프다. 평화가 없어야 진정한 평화가 이루어진다. 평화가 없다는것은 전쟁도 없다는것을 의미하니깐.      
44    개가 사람을 물어도 뉴스 사람이 개를 물어도 뉴스 댓글:  조회:7389  추천:12  2014-07-28
개가 사람을 물어도 뉴스 사람이 개를 물어도 뉴스   김희수     1980년대 말이였다. 그 당시 나는 뒤마을에 있는 한 친구의 집에 자주 놀러갔다. 그 친구는 여러 신문과 방송에 많은 기사를 발표한 통신원이였는데 그의 집에는 다른 통신원들도 모여들어 글쓰기에 대해 토론하기도 했다. 나는 사실을 적는 기사보다 허구로 상상해낸 소설을 쓰기 좋아했던지라 그들의 토론에 참여하지 않고 듣기만 했다.   그들은 그 시기에 한창 화제거리가 되였던 “개가 사람을 물었다는건 이제 더는 기사거리가 안된다. 사람이 개를 물면 아주 훌륭한 기사거리다.”라는 기사선택표준에 대해 쟁론했다. 그 시기에 아마도 평범한 사건을 기사로 작성하는 통신원들이 적지 않았기에 그런 기사선택표준으로 통신원들에게 흥미롭고 중요환 사건을 기사로 작성하라는 깨우침을 주려고 했던것 같다.   사실 “개가 사람을 무는건 뉴스가 안되지만 사람이 개를 물면 뉴스가 된다(狗咬人不是新闻,人咬狗才是新闻)”는 말은 19세기 미국언론인 찰스 데이나(查尔斯·达纳)가 1882년 《뉴욕선(纽约太阳报)》에 쓴 《뉴스란 무엇인가》라는 글에서 한 말이다. 이 리론의 핵심은 신기한 사건을 잡으라는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신기하고 특별한것이 뉴스라는것이다. 개가 사람을 무는 일은 너무 많기때문에 신선하지 않고 영향력이 없다. 그러나 사람이 개를 물었다면 매우 드문 사건이여서 독자들을 흡인할수 있기에 상대적으로 뉴스가치가 높다는것이다.   몇달전에 여러 신문사의 감독관리를 책임졌다는 분이 우리 신문사에 오셔서 강의를 한적이 있는데 그분도 “개가 사람을 물고 사람이 개를 무는(狗咬人 人咬狗)”리론에 대해 언급했다. 그분은 사람이 개를 물면 뉴스가 되는건 맞지만 개가 사람을 무는것도 경우에 따라 뉴스가 될수 있다고 하면서 직위가 높은 간부거나 유명인사, 스타가 기르는 개가 사람을 물어놓았다면 뉴스가 될수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아주 평범한 산골농민이 기른 개가 그 마을을 방문온 높은 간부를 물어놓았다면 뉴스가 될수 있다고 말했다. 그외에도 여러가지 사례를 언급하고나서 마지막으로 평범한 집에서 기르는 개가 평범한 일반인을 물어놓았다면 뉴스가 될수 없다고 말했다.   나는 그분의 마지막 말에 이의가 있었지만 그 분의 체면때문에 그 자리에서 감히 말하지 못했다. 그분은 개가 사람을 무는것도 경우에 따라 뉴스가 될수 있다고 했지만 평범한 사람이 기르는 개가 평범한 사람을 무는것도 경우에 따라 뉴스가 될수 있다는것을 보아내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평범한 개가 평범한 사람을 무는것은 뉴스가 아니라고 성급하게 결론을 내려버리지 않았나 싶다.   우리는 이런 경우도 생각해보아야 한다. 평범한 집에서 기르는 개가 평범한 사람을 물었다고 할 때 개가 물어놓은 부위에 따라 뉴스가 될수도 있고 뉴스가 되지 않을수도 있다. 즉 평범한 개가 평범한 사람의 생식기를 물어놓았다면 뉴스가 될수 있다. 또 개의 주인과 개에게 물린 사람의 관계, 장소, 시간에 따라 뉴스가 될수도 있고 뉴스가 되지 않을수도 있다. 개에게 물린 사람이 개주인의 며느리이고 물린 시간이 결혼식날이고 장소가 결혼식장이라면 평범한 주인이 기른 개가 평범한 사람을 물었다고 해도 뉴스가 될수 있다. 또 개에게 물린 사람이 도적이거나 강간범이라면 뉴스가 될수 있다. 따져보면 이외에도 이러루한 경우는 얼마든지 있다.   우리 주변에서는 하루에도 수많은 사건들이 벌어지고있다. 이 가운데서 가장 최근에 벌어지고 중요하면서도 많은 사람들에게 흥미를 주는 사건을 선택해 기사를 작성해야 한다. 평범한 일상생활의 얘기와는 다른, 대중들의 관심이 높고 영향을 주는 중요한 사건을 뉴스로 다루어야 한다.   사람이 개를 무는 뉴스를 발견하려면 독특하고 예리한 관찰력을 가져야 한다. 홍콩에서는 일부 기자들을 파파라치(狗仔队)라고 부른다. 이런 기자들은 개처럼 코가 령민하여 냄새를 잘 맡는다. 그들은 일단 냄새(주로 연예인의 사생활에 대한 냄새)만 맡으면 모든 방법과 수단을 가리지 않고 뉴스거리를 먼저 빼앗으려고 다툰다. 우리는 이런 파파라치를 본받지 말아야 한다. 물론 독자들을 사로잡는 기이하고 흥미로운 얘기도 좋지만 그 보다는 인민대중들의 관심사인 민생에 대한 기사를 많이 쓰는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지금은 사람마다 스마트폰으로 정보를 전하고 정보를 공유하는 시대이기에 정보의 홍수속에서 쓰레기정보도 엄청난 량을 점한다. 때문에 뉴스다운 뉴스를 선정해 기사를 작성하는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본다.    
43    월드컵 사나이들의 그 눈물 댓글:  조회:9229  추천:10  2014-07-14
월드컵 사나이들의 그 눈물   김희수     지구촌 최대의 축구축제인 2014브라질월드컵이 북경시간으로 지난 6월 13일 새벽 4시에 브라질과 크로아티아의 경기로 선을 보인것이 어제 같은데 벌써 7월 14일 북경시간으로 새벽 3시에 시작된 독일과 아르헨띠나(아르헨티나)의 결승전도 독일팀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개막전에서는 개체국 브라질팀이 크로찌아팀을 상대로 3대1로 승리를 거두었고 결승전에서는 독일팀이 아르헨띠나팀을 상대로 1대0으로 승리해 우승컵을 받아안았다. 최종 승자 독일은 기쁨의 눈물을 흘리고 아르헨띠나는 상심의 눈물을 쏟았다.     이번 월드컵에서 무엇보다도 가장 인상적인것은 축구선수와 축구팬들의 눈물이였다. 사나이는 쉽게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그러나 11명씩 출전해 두 팀이 자웅을 겨루는 축구장에서는 강자라고 불리는 사나이들도 지거나 이기게 되면 어쩔수 없이 눈물을 흘린다. 지면 상심의 눈물, 이기면 기쁨의 눈물을 90분 혹은 120분 뛰여다니던 잔디밭에 뿌린다.   2010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에서 화란(네덜란드)을 1:0으로 이기고 우승했던 에스빠냐(스페인)는 4년만에 다시 강적 화란을 만나 1:5로 참패를 당하고 이어 칠레에 0:2로 무릎을 꿇는 수모를 당하면서 16강행이 좌절되여 잔디밭에 통한의 눈물을 뿌리며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D조의 강팀으로 16강이 무난하리라고 점찍었던 잉글랜드와 이딸리아(이탈리아)는 선후로 꼬스따리까(코스타리카)와 우루과이의 벽을 넘지 못해 조별리그에서 탈락하는 수모를 당하면서 부끄러운 눈물을 감추면서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조선팀이 8강돌풍을 일으켰던 1966잉글랜드월드컵에서 우승했던 잉글랜드, 1934이딸리아월드컵, 1938프랑스월드컵, 1982에스빠냐월드컵, 2006독일월드컵에서 우승했던 찬란한 력사를 지녔던 이딸리아가 처참하게 무너지리라고 누가 예상했겠는가?   뽀르뚜갈(포르투갈)은 메시와 함께 세계 최고의 공격수로 꼽히는 크리스티아누 호날두(克里斯蒂亚诺·罗纳尔多)를 앞세웠지만 독일과 미국의 벽을 넘지 못해 16강진출에 실패했다. 혼자의 힘으로 고독했던 호날두는 골을 넣고도 눈물을 흘렸다. 호날두는 세계에서 가장 비싼 몸값을 자랑하는 선수이다. 년봉은 2013년 기준 5374만유로이다. 2014년 브라질월드컵 출전선수중 가장 많은 년봉을 받는 선수이다.     한국팀은 1차전에서 로씨야(러시아)와 1-1로 무승부를 기록해 아쉬움을 남겼지만 그래도 16강진출이 가능했다. 그러나 2차전에서 알제리팀에 2-4로 참패를 당하면서 축구팬들에게 실망을 주었다. 그래도 심연에서 빠져나올 실날같은 희망이 남아있었지만 3차전에서 벨지끄(벨기에)에 0-1 패배해 16강이 좌절되였을뿐만아니라 이번 월드컵경기에서 한번도 이겨보지 못한 아시아팀들의 자존심을 지켜내는데도 실패했다.   조별예선에서 강팀 에스빠냐를 꺾고 이변을 일으키며 16강에 오른 칠레는 브라질과 1대1로 빅으면서 연장전까지 동점을 유지했지만 승부차기에서 패배해 아쉽게도 8강에 진출하지 못해 눈물을 쏟았다.   1998프랑스월드컵에서 우승한적이 있는 프랑스는 8강에 올랐지만 강팀 독일에 0대1로 무릎을 꿇으면서 눈물을 흘리며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1930우루과이월드컵과 1950브라질월드컵의 우승국인 우루과이는 북경시간으로 6월 29일 새벽 4시에 있은 8강쟁탈전에서 C조의 최강팀으로 16강에 오른 꼴롬비아(콜롬비아)에 0대2로 속절없이 무너지면서 8강꿈을 접고 눈물을 흘리며 집으로 돌아가는수밖에 없었다.   불운하게도 남미 강호 우루과이, 유럽 강팀 잉글랜드와 이딸리아와 함께 죽음의 D조에 속해  최약체로 지목됐던 꼬스따리까(코스타리카)는 최대 이변을 일으키면서 D조 1위로 16강에 올라 북경시간으로 6월 30일 새벽 4시에 그리스를 상대로 1대1로 빅으면서 120분 연장혈투를 거쳐 승부차기끝에 8강신화를 이루어냈다. 그리고 그 기세를 몰아 북경시간으로 7월 6일 4시에 유업 강팀 화란과 맡붙어 연장전까지 무승부로 나가다가 승부차기에서 져서 아쉽게도 돌풍을 멈추었다. 꼬스따리까는 패배의 눈물을 흘렸지만 추국팬들은 그들에게 박수갈채를 보냈다.    1958스웨리예(스웨덴)월드컵, 1962칠레월드컵, 1970메히꼬(멕시코)월드컵, 1994미국월드컵, 2002한일월드컵에서 우승한 축구왕국 브라질은 가장 많은 5차례의 우승에 전통의 남미 강호로 개최국의 리점까지 안고있어 유력한 우승후보로 꼽혔다. 그리고 삼바축구답게 조별예선에서 A조 1위로 16강에 오르는가 싶더니 칠레와 승부차기로 겨우 이기고 8강에 올라 꼴롬비아와 혈투를 벌려 겨우 2대1로 승리를 맛보았지만 네이마르(内马尔)가 상대 수비수 수니가(苏尼加)의 무릎에 허리를 맞고 중상을 입는 손해를 보게 되였다.     메시와 호날두에 버금가는 공격수인 네이마르를 잃은 브라질은 지난 7월 9일 북경시간으로 새벽 4시에 시작된 독일과의 준결승전에서 1대 7로 크게 참패를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상상도 못한 충격패를 당한 브라질은 통한의 눈물을 쏟았다. 브라질의 이 참패로 브자질팀의 광팬인 네팔의 15세 소녀가 자살까지 하는 비극이 벌어졌다. 브라질은 네덜란드와의 3-4위전에서도 0대3으로 완패를 당해 상심의 눈물로 이번 월드컵을 마무리지었다.     1978아르헨띠나월드컵과 1986멕시코월드컵에서 우승한적이 있는 아르헨띠나는 세계 최고의 공격수 리오넬 메시(里奥内尔·梅西)의 힘을 입어 조별예선에서 3전 전승으로 통과한 뒤에 16강전과 8강전에서 스위스와 벨지끄(벨기에)를 각각 1대0으로 꺾고 4강에 안착해 준결승에서 유럽 강팀 화란과 맡붙게 되였다. 룡과 범의 대결에서 아르헨띠나는 무승부로 승부차기까지 가면서 겨우 결승에 올라 기쁨의 눈물을 유감없이 쏟았다. 하지만 결승전에서 또 다른 유럽 강팀 “전차군단” 독일을 만나 룡과 범의 대결을 펼치다가 연장전에서 상대방에게 골을 내주며 실패의 눈물을 쏟았다.   1954스위스월드컵, 1974독일월드컵, 1990이딸리아월드컵에서 우승한 력사를 자랑하는 유럽 전통 강팀 독일은 세계 최고의 공격수 호날두를 가진 뽀르뚜갈(포르투갈)을 4대0으로 꺾고 16강에 오른후 알제리를 2대1로, 프랑스를 1대0으로 꺾고 4강에 오른후 준결승에서 무서운 상대로 여겨졌던 개최국 브라질을 만났다. 하지만 누구도 상상 못한 7대1의 대승을 거두면서 결승에 올라 기쁨의 눈물을 유감없이 쏟았다. 독일은 결승전에서 1대0으로 또 다른 남미의 강팀 아르헨띠나를 꺾고 24년만에 다시 월드컵우승트로피(大力神杯)를 들어올렸다.   지구촌 최대의 축구축제인 월드컵 잔디밭에서 흘리는 눈물은 실패의 쓴 눈물이든 승리의 단 눈물이든 모두 값진 눈물이다. 쉽게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나이들이 자존심을 구기면서 체면에 손상을 당하면서까지 흘릴만한 값진 눈물이다. 승자든 패자든 모두 박수갈채를 받아야 한다. 축구에는 영원한 승자도 없고 영원한 패자도 없다. 어제의 패자가 오늘의 승자로 될수 있고 오늘의 승자가 래일의 패자로 될수 있다.   다음의 2018러시아월드컵과 다음 다음의 2022카타르월드컵에서는 또 어느 나라의 팀들이 실패의 눈물과 승리의 눈물을 흘릴것인지? 기대된다. 2014년 7월 14일 아침.      
42    우편배달부 이래도 되는가 댓글:  조회:6963  추천:9  2014-07-07
우편배달부 이래도 되는가   김희수   사무실에 저마다 휴대폰이 있다보니 사무실전화는 받는 기능만 하고있은지 오래다. 또 사무실전화는 대부분 독자들이 걸어온 전화이다. 그중에서도 열에 아홉번은 신문을 받지 못했다는 독자들의 전화이다.   독자가 대부분 로인들이다보니 우체국문제로  신문을 받지 못하게 된것을 신문사의 잘못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사연을 들어보면 대부분 경우 우편배달부들의 업무태만으로 신문배달이 되지 않아 생긴 일이였다.   지금은 편지 쓰는 사람들이 적다보니 예전에 비해 우편배달부들의 업무량이 상대적으로 줄어들었다. 하지만 우편배달부들의 직업의식은 오히려 낮아지고있다. 편벽한 고장이거나 주소를 보고 찾기 힘든 곳이면 찾아가려고 하지 않는다.   얼마전에 미국 일리노이 남부 농촌마을에 45년간 신문과 우편물을 배달해온 90세 할아버지가 건강악화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구역을 모두 돌며 배달을 마치고 입원한지 2주일만에 눈을 감았다는 한국 연합뉴스의 기사를 본적이 있다. 이 할아버지는 2주일전 갑자기 건강에 이상신호가 온것을 느꼈지만 배달구역을 모두 돌기전까지는 병원으로 갈수 없다며 맡은 임무를 완수했다고 한다.   입원전까지 매주 5일을 하루도 빠짐없이 자전거를 타고 우편배달을 했다는 할아버지의 기사를 읽으며 그 투철한 직업윤리의식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기도 했다.     예전에 집에서 편지나 신문을 받아본적이 있는 나이 많은 세대들은 그 당시의 우편배달부들이 얼마나 자신이 하는 일에 전력을 다하고 직업에 긍지를 느끼고 성실하게 일했지는 똑똑히 알고있을것이다.   편지의 주소가 똑똑하지 않으면 한집 한집 물어보면서 찾아주었고 편지 받는 주인이 이사를 갔을 경우에는 그 이사한 집까지 찾아가서 편지를 전해주곤 하는것이 그 시기의 우편배달부들이였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빠짐없이 시골의 오솔길로 자전거를 달리던 우편배달부들…그런 우편배달부들의 투철한 직업윤리의식과 봉사정신이 지금은 죽어가고있다.   물론 지금의 우편배달부들이 다 직업의식이 낮다는 말이 아니다. 바라건대 신문을 고대하여 기다리는 로인분들을 위해 우편배달부들이 당년의 선배들의 투철한 직업윤리의식과 봉사정신을 본받아 자신의 직업에 대한 사회적 역할과 직무를 충실히 수행했으면 한다.     
41    이쁘면 용서받는다 댓글:  조회:7505  추천:8  2014-06-19
이쁘면 용서받는다   김희수     어느날에 반금련이 빗장을 잠그다가 실수로 빗장을 떨구었는데 그것이 공교롭게도 창문 아래로 지나가던 서문경의 머리에 떨어진다. “앗! 어느 놈이야?” 서문경이 욕설을 퍼부으려고 바라보니 경국지색의 미녀인지라 웃으며 반금련의 실수를 용서해준다.   이는 《수호전》이나 《금병매》를 읽어본 사람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이야기이다. 여기서 만약 반금련이 예쁘게 생기지 않았더라면 용서받을수 있었을가? 아니, 적어도 서문경과 같은 호색한에게는 용서받지 못했을것이다.   나도 이와 비슷한 경우를 경험한적이 있다. 만원뻐스안에서 웬 녀자가 하이힐로 내 발을 밟았는데 몹시 불쾌했다. 일부러 그런것이 아니라는것을 알면서도 내 입에서는 욕설이 나오려고 했다. 그러나 머리를 드는 순간 나는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욕을 꾹 삼키고말았다. 내 발을 밟은 녀인은 반금련 같은 미인이였던것이다. 나는 서문경 같은 바람둥이는 아니였지만 반금련 같은 미인의 실수를 용서해주었던것이다. 서문경처럼 그녀에게 첫눈에 홀딱 반하여 엉큼한 마음을 먹은건 더구나 아니였다. 잘못을 했어도 이쁘면 용서해주고싶은 마음이 생기는것이다.   그러나 이쁘다고 해서 꼭 용서를 받는것도 아닐것이다. 이쁘면 이성에게는 용서받을수 있으나 동성(동성애는 제외)에게는 용서받지 못할수도 있다. 또 이성이라고 해서 다 미인을 용서해준다는 보장은 없다. 이성이 모두 서문경이나 나와 같을수 없기때문이다. 그리고 이쁘다고 해서 다 용서받는것도 아니다.   어느 맥주집에서 목격했던 일이다. 건너상에서 맥주를 마시던 한 녀자가 일어서서 화장실로 가려고 하다가 그만 발을 빗디디였다. 그 바람에 그 녀자는 앞으로 꼬꾸라지면서 한손으로 앞의 술상을 짚고 다른 한손으로 한 남성이 마시던 맥주잔을 쳐버렸다. 맥주잔에 가득 채워졌던 맥주는 고스란히 남성의 옷에 쏟아졌다. 순식간에 맥주벼락을 맞은 남성은 벌떡 일어서 그 녀자를 쏘아보았다. 그러던 그 남성이 도로 앉아버렸다. 노기충천했던 표정도 가뭇없이 사라졌다. 실수로 맥주잔을 뒤엎은 녀인은 양귀비나 서시 같은 미인이였던것이다. 아마도 남성은 녀자가 이뻐서 용서해준것 같았다. 그런데 다음순간이였다. 그렇게 이쁜 녀자의 입에서 나왔을가 의심되는 말이 그녀의 입에서 쏟아져나왔다. “아 씨… 재수없다!” 남성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는듯 그녀의 입을 멍하니 쳐다보는데 그녀의 입에서 다시 험한 말이 쏟아져나왔다. “이 씨, 쉬털이야!” 그 말에 남성이 너무 기가막혀 한마디 했다. “이 녀자가? 사과하기는 커녕…” “이 씨…내 잘못도 아닌데 사과는 무슨…” 이쁜 녀자는 “아 씨, 이 씨”란 말을 습관처럼 내뱉었다. 그 녀자는 원래 이뻐서 용서받을수 있었는데 고약한 행실때문에 결국 남성에게 귀쌈 한대를 얻어맞았다.   “아무리 큰 잘못을 했어도 이쁘면 용서받는다”는 말은 이런 경우에는 통하지 않는다. 이쁘면 작은 실수는 용서받을수 있지만 큰 잘못은 용서받을수 없다.   그러면 이쁘지 않으면 용서받을수 없는가? 얼마전에 퇴근길에 있은 일이다. 내가 금방 비가 그친 인행도(무질서하게 주차한 차량사이로 차도 다니고 오토바이도 다니고 사람도 다니는 길이여서 인행도라고 해도 되는지 모르겠다)로 걸어가다가 앞에서 우산을 들고 서있는 한 녀인의 곁을 지나려던 순간 그 녀인이 뒤를 보지 않고 갑자기 홱 돌아섰다. 그 바람에 그녀가 들고있던 우산이 내 어깨죽지를 강타했다. “아이쿠!” 내가 아픔을 호소하자 그녀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면 연신 “미안합니다”하고 사과했다. 그런 그녀를 다시 보니 뚱뚱한 몸매에 얼굴까지 밉상이였다. 내가 이마살을 찌푸리자 그녀는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몹시 다친것 같은데 병원에 같이 갑시다.” “아, 괜찮습니다.” “그럼 약방에 가서 약이라도 발라야 되잖을가요?” 그녀는 앞에 있는 약방을 가리키며 같이 가자고 했다. 나는 사절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녀가 거듭 사과하는 바람에 조금전까지 따끔따끔 아프던 어깨죽지의 통증도 어느새 가셔진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진심으로 그녀를 용서해주었다. 그녀는 얼굴이 이뻐서 용서를 받은것이 아니라 마음이 이뻐서 용서를 받은것이였다.   얼굴이 이쁘면 일부 사람들에게서 용서받을수 있고 마음이 이쁘면 모든 사람들에게서 용서받을수 있다. 마음이 이쁜 사람은 용서받지 못할 큰 잘못은 하지 않을테니깐.     
40    멋있게 사는것 댓글:  조회:5436  추천:9  2014-06-11
멋있게 사는것   김희수     누구나 멋있게 살아보고싶은 생각을 한번쯤은 해보았을것이다. 그럼 어떻게 사는것이 멋있게 사는것일가?   어떤이는 세계일주를 하면서 명승지들을 돌아보는것이 멋있게 사는것이라고 생각할수 있고 어떤이는 고대광실에서 살면서 호화로운 자가용비행기를 소유하는것이 멋있게 사는것이라고 생각할수 있다. 또 어떤이는 최고급술집에서 맥켈란(麦卡伦), 레미마르탱(人头马) 루이13세(路易十三) 브랜디(白兰地), 헤네시(轩尼诗) 등과 같은 세계명주를 마시것이 멋있게 사는것이라고 생각할수 있고 어떤이는 심지어 진시황처럼 삼천궁녀를 거느리며 사는것이 멋있게 사는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이렇게 멋있게 사는것에 대해 사람마다 다르게 생각할수 있다. 그럼 누구처럼 사는게 멋있게 사는것이고 누구를 멋있게 살았다고 해야 할가?   세계 최고권위를 자랑하는 노벨상을 설정하고 가버린 스웨덴의 발명가이며 화학자인 노벨을 멋있게 살았다고 하는 사람도 있을것이고 세상에서 가장 다재다능한 희극대왕이며 영화천재인 채플린을 멋있게 살았다고 하는 사람도 있을것이고 축구왕 펠레거나 마라도나를 멋있게 산다고 하는 사람도 있을것이고 세계최고부자 빌게이츠를 폼나게 멋있게 산다고 하는 사람도 있을것이다.   이렇게 누구나 다 자기 나름대로의 척도가 있을수 있기 때문에 “바로 이렇게 사는것이 멋있게 사는것이다”고 꼭 찍어 말할수 없지 않을가?   그러고보면 타인들로부터 멋있게 산다고 평가받는 사람은 멋있게 사는것일수 있다. 한국에서 멋있게 사는 사람을 꼽으라면 일과 사랑에서 모두 성공하고싶은 녀성들의 영원한 롤모델로 되고있는 기업인 조안리, 기아와 빈곤에 시달리는 여러나라에 파견되여 구호활동을 하면서 전 세계인을 친구로 여기며 살고있는 세계일주 오지려행가이며 국제구호활동가이자 작가인 한비야, 자전거로 7년간 112개국을 누빈 한국의 자전거려행전문가 문종성 등을 꼽을수 있을것이다.   인생을 멋있게 사는 사람은 이들처럼 자기의 인생을 스스로 개척하며 사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청소년시기에는 멋있게 살고싶은 희망에 한껏 부풀어 있다가도 결혼하면 직장일과 집안일때문에 바삐 뛰여다니고 아이가 생기면 자녀 뒤바라지를 하느라고 인생의 꿈을 포기한다. 심지어 그 뒤바라지는 자식이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도 계속 이어진다.   우리는 개혁개방을 하게 되면서부터 외국의 선진국에서는 자녀가 성인이 되면 더는 부모가 자녀를 부양하지 않으며 자녀들도 부모의 도움을 바라지 않고 자수성가하기 위해 분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였다. 그런데 30년이 넘었지만 우리의 부모들은 지금까지도 그렇게 하지 못하고있다. 자녀가 성인이 되여도 계속 양육비를 지급하고 장가를 가서 아이 낳고 부모가 되여도 시름을 놓치 못해 계속 자녀들을 돌봐주고 있다. 심지어 늙어 허리가 굽어 죽을 때까지 손자, 손녀들을 돌봐주고있다. 그렇게 자녀들을 위해 모든것을 희생하다보니 과장된 말로 하루라도 자신을 위해 멋있게 살아보지 못하다가 죽게 된다.   세상에 태여났다가 길어서 100년밖에 안되는 인생에 한번도 멋있게 살아보지 못하고 죽는 다면 얼마나 억울한가?   내가 아는 한 녀자가 있다. 40대인데 살림도 잘하고 직장일도 잘하고 취미생활도 잘한다. 직장에서는 자기 앞의 일을 착실히 하고 집에 돌아가서는 남편과 아이도 잘 챙겨준다. 아이의 공부뒤바라지도 남들 못지 않게 잘하고 남편도 잘 받들지만 아이와 남편을 위해 자신의 모든것을 바치거나 전부의 시간을 할애하지는 않는다. 자신을 위한 일에도 시간을 짜내 엄마동아리 모임에도 참가하고 배드민턴을 치러도 다닌다.   이렇게 그녀처럼 가족을 위하면서도 가족을 위해 자신의 행복까지 희생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인생을 사는것이 멋있게 사는것이 아닐가?   여태껏 자녀들을 위해 희생한 부모들이라면 지금부터라도 자녀 뒤바라지를 그만두고 하고싶었고 원했던 일을 하면서 자신의 여생을 한번 멋있게 살아보는것이 어떨가? 한번뿐인 삶 폼나게 멋있게 살자. 세상에 태여났다가 한번도 멋있게 살아보지 못하고 죽으면 얼마나 유감이 될가?     
39    아이들과 놀아주자 댓글:  조회:6314  추천:18  2014-06-01
아이들과 놀아주자   김희수     오늘은 6.1 국제어린이날(六一国际儿童节)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인 1942년 6월 9일에 히틀러의 명령으로 독일군에 의해 체코의 광산마을 리디체(利迪策) 전체가 파괴됐던 리디체학살과 전세계 모든 전쟁에서 사망된 어린이들을 기념하고 어린이학살을 반대하고 아동인권을 보장하기 위해 1949년 11월에 열린 국제민주녀성련합회 리사회의에서 매년 6월 1일을 국제아동절로 정했다. 중국, 조선 등 나라들은 이 날을 어린이날도 기념하지만 한국은 우리와 달리 매년 5월 5일을 어린이날로 기념한다.   어린이날인 오늘은 부모들이 간만에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평소에 아이가 가지고싶어했던 물건을 선물해주기 위해 아이들의 손을 잡고 집을 나설것이다. 오늘은 마침 일요일이여서 평소에 바쁘던 부모들도 어린이들과 놀아주려고 할것이다.   아이들은 천성적으로 노는것을 좋아하지만 지금의 아이들은 놀고싶어도 학업때문에 놀 시간이 없고 또 함께 놀아줄 친구도 별로 없다. 부모들도 아이들과 놀아주려고 하지 않는다.   내가 어릴 때는 동네아이들과 어울려 놀기도 잘 놀았다. 지금의 아이들은 공부가 우선이지만 내가 어릴 때에는 놀이가 우선이여서 밥술이 떨어지기 바쁘게 문을 박차고 나가 놀았고 학교에서 돌아오기 바쁘게 책가방을 벗어던지고 밖으로 나가 놀았다. 부모도 공부해라고 닥달하지 않았고 고중입시, 대학입시도 없었으며 지금처럼 영어요, 일어요, 로어요 하는 외국어 수업도 없었으니 마음놓고 놀기만 했다.   그 시절에는 통상 오전만 수업시간이 있었고 오후에는 학교밭에 가서 일을 할 때도 있었지만 휴식할 때가 더 많아서 놀 시간이 많기도 했다. 물론 숙제가 있기는 했지만 30분정도면 다 해치울수 있었기에 학업부담도 없었다. 그래서 간단한 숙제만 마치면 같은 반 친구들이 아니면 동네친구들과 함께 마음껏 뛰놀았다. 그 시기에는 지금처럼 컴퓨터나 스마트폰은커녕 텔레비죤마저 없었기에 누구의 집에 모여서 옛말을 듣거나 밖에 나가서 노는것이 최대의 취미였다.   놀이종류도 많아서 별의별 놀이를 다 놀았다. 숨바꼭질(술래잡기) 놀이를 하는것은 보통이고 딱지치기, 구슬치기, 고무줄놀이, 공기놀이, 제기차기, 팽이치기, 고누, 땅재먹기, 땅따먹기, 말타기, 윷놀이, 무릎싸움(닭싸움), 수건돌리기, 땅에 금을 긋고 발로 돌을 차며 놀던 돌차기(씨차기, 사방치기)…   남자아이들은 주로 딱지치기, 살구씨먹기를 많이 놀았고 녀자아이들은 주로 고무줄놀이, 공기놀이를 줄겨 놀았다. 낮에는 땅에 금을 긋고 하는 놀이를 재미있게 놀았고 밤에는 손전지로 상대편의 얼굴을 알아내여 “아무개 봤다, 꿍!”하는 놀이를 신명나게 놀았다.     지금의 아이들은 이런 놀이를 잘 모른다. 돈을 쓰지 않고도 얼마나 재미있는 놀이를 놀수 있는지도 모른다. 지금은 여럿이 즐거움을 함께 나누던 놀이가 사라지고있다. 그 대신 돈으로 살수 있는 게임기, 컴퓨터, MP3, 스마트폰 등이 아이들의 놀이도구가 되였다.   예전에 우리는 혼자 있으면 심심해서 죽을것 같았다. 그래서 혼자서 노는 애가 없었고 다른 애들의 집으로 찾아가 “아무개 놀자”하고 불러서 응답하면 들어가 함께 놀았다. 같은 반의 친구들과 노는 때도 있었지만 한 마을 애들과 같이 노는 때가 많았다. 하지만 지금의 애들은 스마트폰만 있으면 심심한줄 모른다. 혼자서도 할수 있는 이런 놀이는 아이를 고립시킬수 있고 게임중독, 스마트폰중독에 빠지게 할 위험도 있다.   친구들과 함께 즐길수 있는 놀이와 멀어져 스마트폰 하나에 목을 매고있는 지금의 아이들은 대화가 부족하다. 친구들끼리의 대화뿐만아니라 부모와의 대화도 부족하다. 외국나들이로 부모와 떨어져있는 아이들이 많은데다가 늘 스마트폰만 가지고 놀기 때문에 대화부족현상은 더욱 심각해지고있다.   이런 상황에서 아이들과 놀아주면서 대화로 소통하는 시간을 가지는것이 매우 필요하다고 본다. 아침저녁의 밥상머리를 리용해서도 대화를 할수 있고 학교로 데려다주거나 학교 마중을 갔다 올 때를 리용해서도 대화를 할수 있다. 아아들과 함께 산책, 공원놀이를 하거나 함께 운동을 하면서 대화로 소통하는 시간을 가져보는것도 좋다.   사실 요즘 아이들은 공부에 쫓기여 다니다보니 가족들과 대화할 시간도 많이 부족하다. 게다가 스마트폰이 대화부족을 더 심화시키고있어 부모 또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중시와 관심이 필요하다. 아이에게 손에서 스마트폰을 잠시 내려놓게 하고 아이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가 아이들과 놀아주는 시간을 가져보는것이 무엇보다 유익하지 않을가 싶다.   직장일이 바쁜데 아이들과 놀아줄 시간이 어디 있냐고 하거나 노는 시간을 떼내면 아이들의 공부에 지장을 주지 않겠느냐는 부모들이 있을수 있겠지만 아무리 빠쁘다 해도 시간은 짜내면 있는것이고 노는 시간이 학업부담에 시달리는 아이들에게 재충천의 기회를 주어 공부 성적이 쑥쑥 올라가게 할수도 있지 않겠는가.   우리 부모들이 아무리 바쁘더라도 어런이날처럼 날마다 아이들에게 관심을 돌려 다만 하루에 5분이라도 짬을 내서 아이들과 대화하고 주말에 짬을 내서 아이들과 놀아주기를 견지한다면 그런 관심이 부모와의 대화부족으로 외롭고 고독해진 아이들에게는 보약이 되지 않을가 싶다.   마침 오늘은 날씨가 좋지만 올해 처음으로 기온이 35도로 올라갔으니… 불볕더위에 아이들이 더위먹지 않도록 조심하기를 바라면서 어린이날 아침에…    
38    바르게 살기 댓글:  조회:5702  추천:12  2014-05-29
바르게 살기   김희수     어떻게 사는게 바르게 사는것일가? 이 문제에 정답이 있는지 알수는 없지만 그래도 한번 수학문제처럼 풀어보고자 한다.   어느 시골에 가방끈이 짧은 소학교 선생이 있었는데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인생을 바르게 살아가야 한다고 강의했다. 그러자 한 학생이 어떻게 사는게 바르게 사는것이냐고 물었다. 그 교원은 학생의 물음에 선뜻 대답을 할수 없어 머뭇거리다가 “인생을 바르게 살려면 너희들의 부모처럼 살거라”하고 말했다.   그리하여 학생들은 각각 자신의 부모를 롤모델로 삶고 부모가 하는대로 살아갔다. 그 학생들의 부모들중에 모범농사군, 모범촌장, 불량배 등이 있었다. 모범농사군의 아들은 아버지처럼 날마다 부지런히 농사를 지으며 살았고 모범촌장의 아들도 아버지처럼 되기 위해 노력하며 살았다. 그리고 불량배의 아들도 나름대로 아버지처럼 불량배들과 섭쓸려 다니며 살았다.   그후 세월이 흘러서 농부의 아들은 아버지처럼 농업전문호가 되였고 촌장의 아들도 아버지처럼 촌장이 되였다. 그런데 불량배의 아들은 강탈, 강간 등 나쁜 일을 일삼다가 콩밥을 먹게 되였다. 그리고 촌장의 아들은 비록 촌장이 되긴 했지만 그 과정이 정당하지 못했다. 촌장의 아들은 촌장선거를 앞두고 경쟁자들을 위협하거나 없는 죄를 뒤집어씌워 무함한 결과 촌장이 되였다. 또 촌장이 된후에도 촌에 소속된 탄광의 수입으로 개인의 욕심을 채웠고 안전대책을 마련하지 않아 적지 않은 사망자가 생긴 탄광사고까지 빚어냈다.   그들은 모두 자신들의 아버지처럼 바르게 살려고 했는데 왜 결과는 판판 다를가? 농부는 바르게 살아온 부모를 롤모델로 삶고 살았기에 바르게 살수 있었고 불량배의 아들은 잘못 살아온 부모를 롤모델로 삶고 살았기에 바르게 살수 없었다. 그럼 촌장의 아들은 왜서 바르게 살아온 부모를 롤모델로 삶고 살았지만 바르게 살지 못했을가?   누구나 자기 나름의 롤모델은 있을것이다. 과거에 우리는 혁명렬사나 영웅인물을 본보기로 삶았다. 말하자면 양정우(杨靖宇), 길홍창(吉鸿昌), 조상지(赵尚志), 조일만(赵一曼), 강죽균(江竹筠), 허운봉(许云峰), 류호란(刘胡兰), 구소운(邱少云), 황계광(黄继光), 동존서(董存瑞), 장사덕(张思德), 맥현득(麦贤得), 양근사(杨根思), 구양해(欧阳海), 라성교(罗盛教) , 류영준(刘英俊), 류문학(刘文学) , 뢰봉(雷锋), 왕걸(王杰), 초유록(焦裕禄), 공번삼(孔繁森), 임장하(任长霞) 등이였다.   지금은 명인, 스타들을 롤모델로 삶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이같은 인물을 본받아 산다고 해서 꼭 바르게 사는것이라고 할수 없다. 물론 이들 본보기들은 과대포장이 있다고 해도 대부분이 바르게 살았다고 할수 있음직하다. 하지만 누구나 모두 그들처럼 살아야만이 바르게 사는것이라고 할수는 없다. 평범하게 산다고 해도 다른 사람을 해치지 않고 깨끗한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바르게 사는것이라고 할수 있다.   불량배의 아들처럼 바르게 살지 못한 사람을 롤모델로 삼고 그런 인생을 살려고 한다면 바르게 살수 없다. 또 촌장의 아들처럼 바르게 살아온 사람을 롤모델로 삶았다고 해도 그처럼 되기 위해 방법과 수단을 가리지 않는 과정을 밟는다면 그것을 바르게 사는것이라고 할수 없다.   바르게 살기 위해서는 우선 남을 해치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한다. 남을 해치지 않는것을 원칙으로 하면서 우리가 사는 세상에 도움이 되고 사회에 유용한 사람으로 되는것이 바르게 사는것이라고 말하고싶다.   혹자는 이런 궤변을 내놓을수 있다. 남을 해치지 않는것이 바르게 사는것이란 말은 충분히 합리적인것처럼 보이지만 거기엔 잠재적 한계가 있다고 말이다. 부득이한 사정으로 남을 해치게 되는 경우도 있기때문이란것이다. 이런 주장을 하는 분들의 경우는 아마도 다음과 같은 사례가 아닐가 싶다.   당신에게 유부남인 친구가 있고 그 친구에게는 밖에 숨겨둔 녀자가 있다. 그리고 당신은 총각인데 그 사실을 알고있다고 하자. 하루는 친구가 만나자고 해서 갔는데 친구는 숨겨둔 녀자를 데리고 나왔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친구의 안해가 낌새를 채고 그 장소로 남편을 찾아왔다. 자신의 외도가 들통날가봐 급해난 친구는 당신에게 눈짓을 하며 숨겨둔 녀자를 당신의 녀자친구라고 마누라에게 소개한다. 친구의 안해가 당신에게 그 녀자가 정말로 당신의 녀자친구가 맞느냐고 묻는다. 아니라고 하면 친구의 혼인이 파탄날지도 모르는데 당신은 진실을 말하겠는가? 아니면 거짓말을 하고 친구를 위기에서 구하겠는가?   이런 경우 바르게 살기 위해서는 그 녀자가 친구의 숨겨둔 녀자라고 진실을 말해야 하는데 그러면 친구의 가정을 해치는것이 되지 않겠는가? 이 같은 문제를 질문하면서 혹자는 이를 바르게살기의 딜레마일수도 있다고 말할지도 모르겠지만 먼저 언급한 남을 해치지 않는다는것과 후에 얘기한 친구의 가정을 해치게 되는것은 같은 범주에 속하지 않는 두가지 다른 개념이다. 전자는 영원히 남을 해치지 않는것이고 후자는 잠시 남을 해치는것이다. 친구의 비밀을 지키는것은 잠시는 친구의 가정을 해치지 않는것 같지만 결국에는 수습할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친구의 가정을 완전히 파탄내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반면에 진실을 말하게 되면 잠시는 친구의 가정을 해치는것 같지만 친구의 부부관계가 악화되는것을 미연에 방지할수 있고 상처가 곪아터지기전에 미리 도려내 치유하게 되는 좋은 결과를 가져올수 있다.   왕왕 우리는 두가지 다른 개념을 동일한 단어거나 류사한 사례라는 리유로 같은 범주에 속하는것으로 혼동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무엇이 가장 바르게 사는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고 회의를 품고 비관할수도 있는데 부동한 개념을 같은 범주라고 혼동하면 그로하여 도출해낸 결론이나 판단도 정확하지 않다는것을 알아야 한다.   바르게 살기에서 가장 중요한것은 긍정적으로 생각하는것이다. 갑과 을이란 아이가 있었다. 둘 다 가정불화로 다투다가 부모들이 리혼했는데 갑은 부모를 원망하고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면서 나쁜 아이들과 섭쓸려다니다가 결국 범죄의 길로 나가게 되였다. 그러나 을은 “나는 부모처럼 되지 않기 위해 착실하게 살겠다. 이 세상에는 나보다 더 어려운 처지에서 사는 아이들도 적지 않은데 나는 그래도 그들과 비하면 다행히 아닌가? 내가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면서 되는대로 살아간다면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망치는 길이 될것이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공부를 견지했다. 결국 을은 명문대학을 졸업하고 문제아이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 심리상담사로 되였다.   만약 살아가면서 바르게 살기 위해 남을 해치게 되는 상황에 부딪치더라도 영원히 해치게 되는 경우거나 더 많이 해치게 되는 경우를 버리고 잠시 해치게 되는 경우거나 적게 해치게 되는 경우를 선택한다면 량심에 물어 부끄러울게 없을것이다. 잠시 남을 해쳤거나 약간 해쳤다고 해도 더 오래 더 크게 해치게 되는 상황을 방지했기에 그렇게 사는것은 성실하고 순결한 마음으로 바르게 사는것이라고 감히 말씀드리고싶다. 또한 항상 긍정적인 생각을 하면서 살아간다면 그것이 바로 바르게 사는것이라고 강조하고싶다.    
37    그럴 때는 빈말이라도 하시지 댓글:  조회:5920  추천:13  2014-05-23
그럴 때는 빈말이라도 하시지   김희수     살면서 때로는 어쩔수 없이 빈말이라도 해야 할 때가 있다. 우리는 길을 가다가 아는 사람을 만나면 “우리 집으로 놀러 오세요”하고 말할 때도 있고 친구와 함께 식사하러 가다가 아는 사람을 만나면 “같이 갑시다”하고 말할 때가 있다. 이는 경우에 따라 그 사람을 정말 청하고싶어 하는 말일수도 있고 인사치레로 하는 빈말일수도 있다. 하지만 정말이든 빈말이든 듣는 사람은 기분이 좋아질것이다.   얼마전에 우리와 광고거래가 있는 어떤 사업가 분이 우리 사무실에 찾아온 적이 있었다. 그분은 광고문을 다시 작성하고 광고디자인을 보다 완성도 있게 하기 위해 우리 사무실의 광고업무원 그리고 컴퓨터디자이너와 함께 두 시간 가량 꾸준히 심혈을 기울이였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점심때가 되였다.   그날은 다른 사람들은 볼일이 있어 나가고 사무실에는 그 사업가분외에 광고업무원과 컴퓨터디자이너 그리고 나 셋이 남았다. 그런데 그분은 광고업무원과 컴퓨터디자이너만 데리고 점심식사하러 나갔다. 사무실에 혼자 남은 나는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분이 두 사람만 데리고 식사하러 나간것이 너무 당연한 일인데도 어쩐지 기분이 좀 그랬다. 광고업무원은 광고거래로 친분이 깊은 사이이고 컴퓨터디자이너는 광고디자인을 하느라고 수고를 했으니 그 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음식대접을 하는것은 백번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아무런 친분도 없고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은 나를 식사자리에 청하지 않은것도 리소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 분이 두 사람을 청해 가면 나혼자 남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날 그 시각에 사무실에 나 말고 다른 사람이 한사람이라도 더 있었더라면 아무런 문제될것도 없는 일이다. 그런데 그분은 사무실에 나 한사람만 달랑 남게 되는것을 번연히 보면서도 나하고는 아무말도 안하고 두 사람만 청해서 식사하러 나간것이다.   한 사람만 남겨놓고 그냥 간다는것은 리소당연하다(리치가 마땅히 그러하다)고는 말할수 있지만 의리당연하다(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에 마땅하다)고는 말할수 없다. 그럴 때는 같이 가자고 빈말이라도 한마디 하는것이 의리당연한것이 아닐가? 같이 가자고 한다고 해서 누가 가야 할 자리가 아닌걸 알면서 따라 가겠는가? 만약 그분이 같이 가자고 한마디 했다고 해도 나는 따라 가지 않았을것이다. 그 자리는 내가 가야 할 자리가 아니기때문이다.   또 지금 세월에야 식사 한끼, 술한잔하는 자리가 뭐 대단한것도 아니잖은가? 지난 세기 90년대 이전에야 누가 같이 가자고 빈말이라도 하면 체면 무릅쓰고 따라가는 사람이 더러 있었지만…그러나 술자리를 일부러 피하기도 하는 지금 세월에 빈말인줄 알면서 따라 갈 사람이 있을가? 뭐 앉을 자리 설 자리를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몰라도…   그러면서 왜 빈말이라도 해주기를 바라냐고? 모순된 일같기도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그런 빈말이라도 들었더라면 혼자 남아있어도 기분이 좋아졌을것이기 때문이다.   혹시 그분의 립장에서는 “내가 내 돈을 내고 청하는데 누구를 청하고 안 청하고는 내 마음이지 않은가, 왜 속에 없는 말을 하겠냐, 그건 내 체질이 아니야”하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고 아무리 싫은 사람이라고 해도 따뜻한 말 한마디 해주면 인심을 얻을수 있을것이고 또 립장을 바꿔놓고 혼자 남은 사람이 나라고 생각해보면 속에 없는 말을 하는 체질이 아니라고 해도 빈말이 어렵지 않게 나갈수 있을것이다.   “같이 갑시다.”   아주 간단한 한마디이지만 이 한마디의 빈말이 상대방의 기분을 배려하게 되고 내 마음도 유쾌해지게 할것이다.  
36    똬리 그 넘치는 정감 댓글:  조회:7961  추천:9  2014-05-19
똬리 그 넘치는 정감   김희수     얼마전에 인터넷에서 동영상을 찾아 클릭하다가 물동이춤을 추는 장면이 나와서 한참을 감상했다.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빙글빙글 돌고 또 돌아도 물동이가 떨어지지 않는것을 보면 절로 감탄이 나온다. 옛날 마을처녀들이 물동이를 이고 샘물터로 또는 우물가로 물을 길러 나오던 모습을 담은 무용이다.   예전에 어머니도 물동이를 이고 우물가로 물을 길러 다녔다고 한다. 나는 어머니가 물동이를 이고 물을 길러 다니는 모습은 보지는 못했지만 내가 어릴 때 어머니가 물통을 이고 물을 길러 수도물가로 다니는 모습은 많이 보았다. 어머니는 빨래 하러 강변으로 갈 때도 빨래함지를 머리에 이고 다녔고 량식점에 가서 배급을 타올 때도 쌀주머니를 머리에 이고 다녔다. 그렇게 짐을 머리에 이고 다닐 때마다 빠지지 않는것이 똬리였다. 먼저 똬리를 머리중심에 잘 놓은 다음에 그우에 물동이나 빨래함지, 쌀주머니 등을 올려놓는다. 어머니는 똬리가 없을 땐 급한대로 수건을 돌돌 말아 사용하기도 했다.   어머니는 머리에 물건을 이고 다닐 때 때로는 한손으로 물건을 잡기도 하지만 손을 놓고 걸을 때도 있었다. 나는 그럴 때마다 어머니의 머리우의 물건이 떨어질가봐 조마조마했지만 신기하게도 어머니의 머리우의 물건은 어머니의 머리에 딱 붙은듯 떨어지지 않았다. 머리에 인 물건이 떨어지지 않는것은 물동이를 받쳐주는 똬리가 있기때문이라는것을 그때는 몰랐다.   녀인들이 물동이나 짐을 머리에 이고 가기 위해서는 머리에 받쳐주는 뭔가가 있어야 했다. 그리하여 만들어진것이 똬리이다. 똬리를 머리에 얹고 그우에 짐을 인다. 똬리는 충격을 완화시켜주는 작용을 하는데 이것은 녀인들의 지혜에 의해 생겨난것이였다.   똬리는 물동이나 짐을 일 때 머리우에 얹어 짐을 받치는 고리모양의 물건으로 지방에 따라 뚜아리, 뚜와리, 뙈리, 뙤리, 뙈미, 또아미, 똥아리, 똥애미, 또바리, 따바리, 뙤바리, 또가리, 또개미, 때가리, 또뱅이, 따뱅이, 따빙이, 똬뱅이, 따배, 따비, 또배, 따반지, 따방구, 때방구 등으로도 불리웠다.   내가 살았던 룡정에서는 똬리를 함경도방안으로 “따발”이라고 불렀다. 또 그때는 똬리모양으로 만든 “따발사탕”이 아이들에게 인기였고 전쟁영화에서 보았던 “따발총”도 남자아이들에게 인기절정이였다.   똬리는 옛날에 짚이나 왕골, 골풀, 헝겊, 죽순껍질 등을 둥글납작하게 틀어서 심을 만들고 왕골이나 골풀 등을 곱게 싸서 섬세하게 만들었다. 앞쪽에 해당하는 부분에 삼이나 짚으로 끈을 달아 머리에 얹고 끝을 입으로 물 정도의 길이로 했다. 똬리를 머리에 얹고 물동이나 무거운 짐을 일 때에 몸의 중심이 맞지 않아 똬리가 떨어지는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똬리끈의 끝을 입으로 물고 물건을 들어 얹었다.   내가 어릴 때 보았던 똬리중에는 물동이춤을 출 때 사용하는 도구처럼 빨간색, 파란색, 노란색 등을 칠해 알록달록 예쁘게 만든것도 있었다. 아줌마들보다 처녀들이 이런 예쁜 똬리를 더 애용했던것 같다. 여하튼 똬리만 얹어놓으면 녀인들의 머리에는 물동이건 빨래함지건 쌀주머니건 모두 다 그우에 올려놓고 마술사처럼 이고 갈수 있었다. 뙤리는 슬기로운 우리 민족 녀인들이 한많은 아리랑고개를 넘어오면서 로동속에서 창조해낸 지혜였고 우리 민족 녀인들이 수난의 년대를 걸어온 력사의 증거물이다.   똬리우에 짐이나 물동이를 이고 가는 녀인들의 모습은 이제 민속촌이거나 무용배우들이 공연하는 물동이춤에서나 볼수 있게 되였으니…우리민족의 옛것이 하나둘 사라져가는건 아쉽지만 한평생 세세대대로 이어오며 똬리를 동반하며 힘든 일만 해온 녀인들이 이제는 무거운 짐에서 해방되였으니 이 아니 다행일가.      
35    가정화목은 대박 댓글:  조회:6965  추천:15  2014-05-12
가정화목은 대박   김희수     매년 5월 15일은 “세계가정의 날”이다. 1989년 12월 8일, 제44차 유엔총회에서 가정의 중요성을 널리 알리고 그 역할 및 책임의식을 확산하기 위하여 그리고 건강한 가정을 통해 평화로운 인류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해 1994년을 “세계 가정의 해”로 지정했다. 1993년에 뉴욕특별회의에서 매년 5월 15일을 “세계 가정의 날”로 제정하였다. 그리하여 1994년부터 이 “세계 가정의 날”을 기념하게 되였다.   중국에는 현재 약 3억 7000만개의 가정이 있다. 이렇게 많은 가정이 집집마다 속사정은 달라도 화목하게 살려는 소원만은 한결같을것이다. 가정화목은 가족을 위하는 마음과 행동에서 이루어진다.   장나라고 하는 리혼하고 쌍둥이아들을 데리고 사는 녀자가 있었는데 금년에 29살이고 쌍둥이는 7살이였다. 편벽한 초원에서 태여난 그녀는 어릴 때부터 오빠와 함께 아빠, 엄마가 공연하는 극단을 따라다녔다. 극단이 어디로 가면 그녀는 어디로 가군했다. 집이 없었던 그녀의 식구들은 공연하는 고장의 학교거나 농민의 집에 거주하군 했다. 그렇게 떠돌이생활을 하면서 그녀는 자신의 집이 있었으면 하는 소원을 품게 되였다. 그 소원은 너무나 아득했지만 그녀는 자신이 노력하고 견지하면 꼭 이루질것이라고 믿었다.   그녀는 결혼했고 쌍둥이아들까지 낳았지만 불행하게도 남편과 리혼하게 되였다. 남편은 가족을 돌볼줄을 모르는 사람이였기때문이다. 어릴때부터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지고 태여난 그녀는 결혼식파티에서 노래를 불러주는 웨딩싱어(婚庆歌手)였다. 광활한 초원에서 그녀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녀가 저명한 가수여서 그런것이 아니였다. 이름 있는 가수들은 수입이 적고 길이 멀다는 리유로 편벽한 곳으로 가지 않았다.   그녀의 오빠는 병이 있어 일을 할수 없었다. 그녀는 이제 로인이 되여버린 엄마, 아빠에게 힘든 일을 시키고싶지 않았다. 그때문에 그녀는 가족을 위해 아무리 길이 멀고 수입이 적다고 해도 결혼하는 집이 있기만 하면 달려가 노래를 불러주군 했다. 그렇게 결사적으로 돈을 벌어 그녀는 선불금 27만원을 지불하고 집을 구매했다. 집열쇠를 받아들고 새집들이 하는 날에 온집식구가 서로 얼싸안고 울었다. 그녀의 가족들은 그녀가 아니면 이 가정이 풍비박산이 났을거라고 했다.   장나와 함께 웨딩싱어였던 리미라는 녀자가 있었다. 그녀는 남편도 있고 아이도 있었지만 도시의 화려한 결혼식파티에만 다니며 노래를 부르다가 남편도 아이도 버리고 한 색마국장의 첩이 되였다. 그 색마국장은 원래 장나를 욕심내고있었는데 장나가 거절하자 꿩 대신 닭이라고 리미를 호화별장에 데려다놓고 첩으로 삼았던것이다. 리미는 일시적인 향락을 위해 가정을 파탄내고 가족을 버렸지만 다른 사람에게 의탁한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색마국장의 본마누라가 찾아오고 뢰물을 받아 흥청망청 써버리던 색마국장도 나중에 반부패운동에 걸려 감옥밥을 먹게 되면서 그녀도 련루되여 공안기관에 구속되였다.   장나는 가족을 위해 살았기에 가정화목을 지킬수 있었고 리미는 가족을 버렸기에 가정이 파탄나고 자신마저 망가지게 되였다. 가정이란 이렇게 중요하다. 가진것이 아무리 많아도 가정이 화목하지 못하면 행복할수 없다. 가장 큰 재부는 돈이 아니라 가족이다.   가정이 화목하면 만사가 이루어진다(家和萬事成)는 말이 있다. 그런데 우리는 예전에 가정화목은 뒤전으로 하고 쩍하면 공산주의실현을 위해 분투한다거나 사회주의건설을 위해 헌신하겠다고 큰소리를 탕탕 쳐댔다. 선진이 되여 상장을 받았거나 운동경기에서 메달을 땄을 때에는 또 반드시 “국가를 위해 어떠어떠하게 노력했으며 오늘의 이 영예를 안겨준 당과 인민에게 감사를 드린다”는 희떠운 소리를 목청껏 웨쳐댔다. 이런 말들은 모두 마음에도 없는 허풍에 지나지 않았다.   지금은 세월이 많이 달라져서 “가족을 위해 어떠어떠하게 노력했으며 오늘의 이 아무개를 만들어준 부모에게 또는 스승에게 감사를 드린다”고 진실을 말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우리 모두 가정의 화목을 위해 살아간다면 굳이 나라를 위한다고 큰소리를 치지 않아도 나라를 위하는 일이 될것이다.   조선족사회의 가정해체현상이 심각해진 시점에서 가정화목은 더욱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예전에는 3대이상이 사는 대가족이 많았지만 지금은 부부와 그들의 미혼자녀로 구성된 핵가족이 많아졌다. 또 한국나들이로 부부가 헤여져 살고 부모와 자녀가 헤여져 살고있는 경우가 많은 현재의 가정에서 고부관계보다 부부관계와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더욱 중요하게 되였다.   부부가 서로 사랑하고 리해하고 보듬어주고 모든것을 가족의 화목을 위해 출발한다면 리혼률도 줄것이고 부득이한 사정으로 하여 리혼을 했다고 해도 가정화목을 위하는 마음이 있다면 자녀를 끝까지 책임지면서 자녀에게 상처를 주지 않을것이다.   진정으로 가정화목을 위한다면 사리사욕에 눈이 어두워 법을 어기거나 남에게 해가 되는 일을 하지 않을것이다. 내가 법을 어기거나 남을 해치면 벌을 받게 되여 결국에는 내가 지은 죄로 인해 가족들도 화를 입게 되기때문이다. 가족을 위한다는 미명하에 자신의 그릇된 행위를 정당화하거나 자신의 정당하지 못한 행위를 합리화시키는 사람도 있지만 이는 진정으로 가족을 위하는것이 아니다.     진정으로 가족을 위하는 사람은 좋은 남편, 좋은 안해거나 좋은 아빠,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해 집안에서는 가정화목을 도모하고 사회에서는 사회성원으로서의 의무를 다할것이다. 또 화목한 가정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자신들의 위해 고생하는 아빠, 엄마에게 보답하기 위해 바르게 행동하고 공부도 잘할것이다.   “싸리나무 한가지는 꺾기 쉽지만 아름드리나무는 꺾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가족들이 한 마음이 되여 서로 보호하고 관심하고 지지하고 리해하고 사랑하고 치유한다면 그 어떤 난관이 가로막아도 헤쳐나갈수 있을것이다. 원칙과 상관없는 사소한 일은 따지 말고 일이 있으면 공동히 상의한다면 해결하지 못할 일이 없을것이다.   가정은 사회의 가장 기본이 되는 세포로서 가정이 화목하지 못하다면 조화사회구축이라든가 중국꿈이라든가 하는것은 공담에 불과하다. 가정이 화목하지 못하면 리혼률도 상승하고 허다한 사회문제를 초래한다. 가출, 폭력, 살인, 강탈, 강간 등 부도덕한 행위나 범죄행위가 란무하게 된다. 가정이 파탄되면 사회가 불안정해지고 사회가 불안정해지면 국가가 사라지고 세계가 망하게 된다. 반면에 가정이 화목하면 사회와 국가도 안정하게 되고 모든 국가마다 화목한 가정으로 똘똘 뭉쳐 안정을 유지하게 되면 세계평화도 이루어질것이다.   이래서 가정화목은 대박이라고 하는것이다.      
34    돼지와 키스하는 시장 성장이 나온다면 댓글:  조회:6818  추천:21  2014-05-05
돼지와 키스하는 시장 성장이 나온다면   김희수   최근에 호북성 함녕시실험소학교 부교장 홍요명(洪耀明)이 학생들과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돼지와 키스를 한 기사를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학생들의 덕육방면을 책임진 그의 노력으로 학교내의 환경위생은 줄곧 깨끗하게 유지되였다. 그런데 학교문어구에 통해로부근에 장사군들이 난전을 쭉 벌려놓아서 학생들과 행인들이 쓰레기를 마구 버리는 현상이 엄중했다. 특히 아침에 등교할 때 음식과 음료쓰레기들이 많이 쌓여 어지럽기 말이 아니였다.   지난 3월의 국기게양식때 홍요명은 전교학생들 앞에서 “동무들이 학교문어구의 길에서 쓰레기를 던지지 않고 쓰레기를 버리는 사람들을 제지하여 난전거리가 깨끗하게 변모된다면 한달후의 국기게양식때 내가 동무들앞에서 새끼돼지와 키스하겠습니다”하고 말했다.     물론 홍요명은 돼지와 키스하겠다고 약속한후 손을 놓고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은것이 아니였다. 한달동안 그는 매일 아침 7시에 학교문어구의 난전거리를 돌아다니면서 학생들에게 쓰레기를 마구 버리지 말라고 타일렀고 학교방송과 학교의 영상화면을 통해 문명행위준칙 등 내용을 선전했으며 학교텔레비죤방송사업일군들을 동원하여 학생들이 쓰레기를 쓰레기통에 버리는 문명한 행위를 카메라에 담아 방영하게 했다.   학생들은 선생이 정말 약속을 지키는가를 두고보자는 마음으로 쓰레기를 마음대로 버리지 않았으며 쓰레기가 보이기만 하면 주어서 쓰레기통에 버리군 했다. 과연 그후 한달기간 학생들의 노력으로 학교문어구 난전길에 더는 쓰레기가 보이지 않았다.   지난 4월 28일의 국기게양식대 홍요명은 전교 4000여명의 사생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새끼돼지와 키스를 하여 학생들과 한 자기의 약속을 지켰다. 선생이 돼지와 키스를 하지 못할것이라고 여겼던 학생들은 선생을 말하면 말한대로 하는 선생, 학생들과 한 약속은 꼭 지키는 선생이라고 하면서 그의 말을 잘 따랐다.   돼지와 키스하는것은 꺼림칙하고 또 체면이 깎이는 일이다. 하지만 아이들과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돼지와 키스를 한 홍요명 부교장의 용기에 박수를 보내고싶다. 그는 자신의 행동으로 아이들에게 어려서부터 환경을 보호해야 한다는 문명의식을 심어주었을뿐만아니라 약속의 중요성을 알게 했다.   시민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돼지와 키스하는 시장, 성장이 나온다면 어떨가? 시민들은 그런 시장이나 성장의 밑에서 도시를 아름답게 건설하기 위해 있는 힘을 아끼지 않을것이다. 기대해본다.     
33    꽃피는 5월에는 마음의 꽃도 활짝 댓글:  조회:6447  추천:13  2014-05-01
꽃피는 5월에는 마음의 꽃도 활짝   김희수     5월에는 명절이 많다. 5월이 시작되는 첫날은 5.1국제로동절(근로자의 날)이고 4일은 5.4청년절, 5일은 무산계급의 정신령수 맑스(마르크스)탄신일, 30일은 5.30참안일이다. 그래서 팔에 붉은 완장을 끼고 손에 붉은 어록책을 들고 다니던 시절에는 5월을 “붉은 5월”이라고 불렀다. 지금은 “붉은 5월”이라 부르지 않지만 예전보다 명절이 더 많아졌다.   5월의 두번째 일요일인 11일은 어머니날(母亲节), 12일은 국제간호사의 날(또 2008문천대지진6주기), 15일은 국제가정의 날, 18일은 국제박물관의 날, 마지막날인 31일은 세계금연의 날이다. 이외 한국에는 어린이날(5일), 어버이날(8일), 입양의 날(11일), 스승의날(15일), 성년의 날(19일), 부부의 날(21일) 등이 있다.   이렇게 5월에는 명절의 꽃이 아롱다롱 피여있다. 게다가 자연의 꽃도 활짝 피여있어 5월을 꽃피는 5월이라 부른다. 5월에는 또 련인들끼리 사랑의 표현으로 장미꽃을 주고받는 날인 로즈데이(14일)도 있어 꽃피는 5월의 랑만을 더해준다.   꽃피는 5월에는 5.1절휴가도 있어 아름다운 꽃들이 활짝 피여나는 산천경개를 구경하기도 제격이다. 5월의 향긋한 꽃향기에 취해 수려한 대자연의 절경을 감상하노라면 몸도 마음도 상쾌해질것이다.     자연의 꽃이 아름답게 피는 이 5월에 마음에도 사랑의 꾳, 리해의 꽃, 행복의 꾳, 희망의 꽃을 아롱다롱 피운다면 우리들의 마음도 자연의 꽃처럼 아름다워지고 우리 사는 세상도 한결 아름다워질수 있지 않을가 싶다.   또한 우리들의 마음에 봄, 여름, 가을, 겨울 사시장철 시들지 않는 향기가 가득한 꽃을 활짝 피운다면 그 어떤 참사나 비극도 피면할수 있을것이고 참사나 비극이 발생해도 모두가 자신이 맡은 직책을 다해 신속히, 정확히, 효과적으로 구조에만 최선을 다할것이 아닐가 싶다.   누구에게 슬픈 일이 생기면 다 같이 아파하고 누구에게 기쁜 일이 생기면 다 같이 웃어주고 서로 옴니암니 따지지도 않고 티격태격 싸우지도 않고 미워하지도 않고 분노하지도 않고 질책하지도 않고 질투하지도 않고 욕심내지도 않고 탓하지도 않고 서로서로 리해하고 도와주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이런 세상을 바란다면 유토피아를 꿈꾸는 철부지아이라고 코웃음을 칠지도 모른다. 혹자는…   철부지아이가 꿈꾸는 유토피아라고 해도 좋다. 지성이면 감천, 정성이 지극하면 돌우에도 꽃이 핀다는 말처럼 오직 한마음 한뜻으로 우리들의 마음에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피우고 또 피운다면 우리가 꿈꾸는 유토피아, 결코 망상이 아닐것이다.     
32    열명의 범죄자와 한명의 억울한 사람 댓글:  조회:6802  추천:11  2014-04-23
열명의 범죄자와 한명의 억울한 사람   김희수     우리는 홍콩 영화나 드라마에서 경찰이 범죄혐의자를 붙잡을 때 “당신은 묵비권을 행사할수 있고 변호사를 선임할수 있으며 지금부터 말하는 모든 발언은 법정에서 불리하게 적용될수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장면을 적지 않게 보게 된다. 이는 억울하게 범죄루명을 쓰는 일이 없도록 하려는 미란다원칙에서 출발한것이다.   내가 법을 어긴 일이 없는데 어느날 갑자기 경찰이 찾아와서 나를 끌고가고 내가 하지도 않을 일을 했다고 자백을 강용하고 감옥에 처넣는다면 얼마나 억울할가?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있을법한 이런 일이 사실 이 세상에는 적지 않게 존재하고있다.   1998년 8월 4일, 하남성 안양시 안양현 곡구진 진소둔촌에 사는 진염홍(秦艳红)의 앞에 갑자기 경찰들이 나타났다. 경찰들은 이웃촌에 사는 녀성 가해영(贾海荣)을 살해했다는 혐의로 그를 끌고갔다. 그해 30살이 되는 가해영은 전날 점심에 촌 서쪽의 자류지에서 목이 졸려서 죽었는데 3명의 소학생이 하교길에 진염홍이 그날 사건현장부근에 나타난것을 목격했다고 진술했던것이다.   증거가 있는것도 아니고 살해하는것을 직접 목격한것도 아니고 사건현장에 나타난 적이 있었다는것만으로 무고한 사람을 끌고간 경찰은 얼마나 한심한가! 일반적으로 이런 경우라면 끌고갔다고 해도 몇마디 물어보아서 살해하지 않았다고 하면 즉시 돌려보내는것이 원칙이며 또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고 본다. 그런데 그게 아니였다.   밤중에 안향현형사경찰대의 4명 경찰이 찾아와서 조살할 정황이 있다고 하자 진염홍은 놀라기는 했지만 자신이 죄를 지은 일이 없었기에 태연하게 경찰들을 따라갔다. 하지만 그가 억울하게 살인루명을 쓰게 될줄을 누가 알았으랴? 경찰들은 진염홍에게 육체적, 정신적인 고통을 주며 자백을 강요했다. 경찰들은 3명의 소학생들이 진염홍이 사건현장부근에 나타난것을 보았다고 한것을 과장하고 보태서 “네가 가해영을 죽이는것을 본 사람이 있다. 바른대로 말해라”고 윽박질렀다. 진염홍이 “살인하지 않았다”, “억울하다”고 했으나 경찰들은 그의 말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원래 이쯤 되면 “정말 억울한것이 아닐가?”하는 의문을 가지고 조사에 나서야 할것이다. 범죄자를 놓쳐서도 안되지만 한명의 억울한 사람을 만들어서도 안되는것이 법제원칙이다. 또 그렇게 하는것이 집법일군의 의무이고 책임이다. 하지만 하루빨리 범죄자를 붙잡아 공을 세우겠다는 욕심에 눈이 뒤집힌 경찰들은 서민이야 억울함을 당하든 말든 관심이 없었다. 아니, 그들은 자신의 리익만 꾀하고 서민의 억울함 같은건 념두에 두지 않았다.   중국의 경찰은 경찰앞에 “인민”이란 두글자를 붙혀 “인민경찰”이라고 부른다. 인민경찰은 인민을 위한 경찰이란 뜻이다. 인민경찰은 인민의 생명안전을 지키고 범죄자를 붙잡아 치안을 유지해야 하는것도 중요하지만 무고한 인민을 범죄자로 몰지 말아야 한다. 아무리 범죄자를 붙잡는것이 중요하다고 해도 의심스러운 사람을 다 범죄자로 여겨서는 안된다. 더구나 조사가 없고 증거가 없이 무고한 사람을 마구 핍박하고 구타해서는 안된다.   그런데 안향현형사경찰들은 억울하다고 호소하는 진염홍을 범죄자취급을 하면서 사정을 두지 않고 주먹으로 치고 발로 걷어찼다. “솔직하게 털어놓으면 관대하게 처리하고 항거하면 엄하게 처리한다(坦白从宽抗拒从严)”는 정책이 아편처럼 머리에 박혀버린 경찰들은 저들의 요구하는대로 자백하도록 강요했다. 결국 진염홍은 그해 9월 8일에 검찰기관에 의해 비준체포되였고 살인혐의로 기소되였다.   한 무고한 사람을 살인자로 모른 일은 이처럼 간단했다. 안양시중급인민법원에서 법정을 열었을 때 검찰관(公诉人)은 “3명의 소학생들이 사건이 발생된 날에 진염홍이 사건현장부근에 나타난것을 목격했고 진염홍자신도 가해영을 강간하려다가 성사하지 못하자 손으로 목을 졸라죽였다고 자백했다”고 기소했다.   진염홍은 법정에서 그것은 고문에 의한 강제자백이였다면서 자신의 진술을 뒤집어엎었다. 진염홍의 변호사도 진염홍이 사건현장에 나타났다는것을 보았다는 3명 소학생의 증언과 고문에 의한 강제자백으로만 죄를 판정할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안양시중급인민법원은 진염홍의 자백이 수사경찰들이 현장에서 조사한 정황과 일치하다는 리유로 1999년 10월 8일에 진염홍을 사형에 처하고 정치권리를 종신박탈하며 피해자가족에 경제손실 1만원을 배상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충분한 증거도 없이 한 사람에게 사형판결을 내렸던것이다. 인민법원에서 인민의 목숨을 이렇게 가볍게 여겨도 되는것인가? 조그만한 의심이라도 있다면 재조사를 할것을 요구해야 하고 증거가 불충분하다면 서뿔리 판결을 내리지 말아야 하는것이 법원에서 해야 할 일이 아닌가?   하늘이여, 천리는 어디에 있고 포청천(包青天)은 어디에 있는가?! 억울하게 강간죄명에 살인죄명까지 쓴 진염홍은 간수소에서 대성통곡하다가도 넋을 잃고 멍하니 벽만 쳐다보고있었다고 한다. 가족들이 믿지 않고 사처로 상소하러 다녔지만 법원에서는 판결을 번복하지 않았다. 그의 처와 딸도 절망하면서 남편, 아빠가 사형장으로 나갈 시간만 계산하고있었다.   그러다가 2001년 2월에 원추복(元秋伏)이란 진범이 붙잡히면서 이 억울한 사건은 180도로 뒤집어졌다. 원추복은 3개성의 11개 도시를 돌아다니며 강탈강간사건 40건을 저지르고 18명을 살해한 살인악마였다.   한달후 하남성고급인민법원은 원 판결을 취소하고 안양중급인민법원이 다시 심사하도록 결정을 내렸다. 이렇게 되여 4년동안의 억울한 감옥살이를 하고 하마트면 사형장으로 끌려나갈번 했던 진염홍은 2002년 5월 28일에 간수소의 대문을 열고 나와 다시 해볕을 보게 되였다.   진염홍이 억울한 살인루명을 쓰고 4년동안 감옥살이를 한 동안 집안이 풍비박산이 났다. 진염홍과 그의 가족은 이 정황을 상소하러 다니면서 북경까지 찾아가겠다고 했다. 그렇게 되자 급해난 공안부문은 진염홍에게 단번에 29만원을 배상해주는것으로 입막음을 했다. 그후에 발생된 뒤얘기도 많지만 여기서는 더 언급하지 않겠다.   최근에도 이와 비슷한 사건이 밝혀졌다. 지난 2014년 4월 17일의 사천뉴스넷의 보도에 의하면 사천성 수녕시 선산구 신교진 백가촌에 사는 왕본여가 1996년 11월에 강간살인죄란 루명을 쓰고 사형집행유예판결을 받고 18년동안 억울한 감옥살이를 하다가 2012년에 진범 리언명이 붙잡히자 풀려나오게 되였다. 2013년 7월에 내몽골자치구고급인민법원에서 원 판결을 번복하고 왕본여에게 내려졌던 강간살인죄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판결했다. 그리하여 왕본여는 그해 7월에 석방되였고 150만원의 배상금을 받게 되였다.   이 사건도 역시 고문에 의한 강제자백이였다. 만약 진범이 붙잡히지 않았더라면 왕본여가 얼마나 더 감옥살이를 해야 할지 알수 없었다. 본분을 지켜며 살아온 그는 장장 18년동안 억울한 감옥살이를 하는 동안 부모를 잃었고 무죄석방되여 나와서도 텔레비죤을 켤줄조차 몰랐다. 그는 자신을 사정없이 때린 경찰을 용서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무고한 사람을 핍박하고 때려서 범인으로 조작해낸 경찰을 어찌 용서할수 있으랴.   중국에는 이와같은 억울한 사건, 허위로 조작한 사건, 오심사건이 많이 존재하고있는 실정이다. 이미 알려진 이런 억울한 사건과 잘못된 사건은 하북성과 하남성에 각각 20건, 운남성에 9건, 호북성에 8건, 광서와 흑룡강성에 각각 7건, 섬서성과 강서성에 각각 6건, 호남성, 료녕성, 광동성, 안휘성, 감숙성에 각각 5건, 길림성, 사천성, 복건성, 절강성, 산서성에 각각 4건, 귀주성과 해남성에 각각 3건, 중경과 내몽골에 각각 2건, 산동성, 북경, 신강에 각각 1건이다. 이는 부분적인 통계이다.   범죄혐의자를 붙잡아서 판결하고 처형하는 과정에 억울한 사건, 오심사건이 한건도 생기지 않는다는것은 있을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경찰이 충분한 증거가 없이 고문으로 강제자백을 요구하거나 허위로 사건을 조작해서는 안된다. 선진국에서는 “열명의 범죄자를 놓치더라도 한명의 억울한 사람을 만들어서는 안된다”는 원칙을 내놓고있지만 중국에서는 이와 반대로 “열명의 억울한 사람을 만들더라도 한명의 범죄자를 놓쳐서는 안된다(과장된 표현이기는 하지만 억울한 사건의 배후에는 꼭 이런 경우가 적용된다)”는 식으로 사건수사를 하고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1960년대, 미국에 여러가지 범죄를 저질렀던 미란다라는 사람이 어린 녀자아이를 랍치했다가 경찰에 붙잡힌 사건이 있었다. 미란다는 자신의 범행을 모두 자백하였는데 그것이 결정적 증거로 작용되여 유죄로 판결되여야 했다. 하지만 그는 결국 무죄로 풀려났다. 우에서 언급한 “진염홍사건”과 상반되는 결과였다. 경찰이 피의자의 권리에 대해 말해주지 않았기때문이다. 미국에는 법이 정한 이 절차를 어긴 수사로 얻은 증거는 무효가 된다는 규정이 있었다.   이 판결이 있은 이후 “열명의 범죄자를 놓치더라도 한명의 억울한 사람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지키기 위해 미국경찰은 범죄용의자를 체포할 때 “당신은 묵비권을 행사할수 있고 변호사를 선임할수 있으며 지금부터 말하는 모든 발언은 법정에서 불리하게 적용될수 있습니다.(你有权保持沉默, 如果你不保持沉默, 那么你所说的一切都能够用来在法庭作为控告你的证据, 你有权请律师在讯问时到场)라고 말하는데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미란다경고(米兰达警告)이다. 이를 알려주지 않고 받아낸 진술은 법정에서 증거로 사용할수 없다고 한다.   범죄혐의자, 피고인은 묵비권을 행사하거나 대답을 거절할 권리가 있다. 미란다권리가 확립되기전에 경찰은 범죄혐의자가 문초에 대답하는것을 당연한 일로 여겼기때문에  범죄혐의자에게 변호사를 선임할수 있고 묵비권을 행사할 권리가 있다는것을 알려주지 않았다. 범죄혐의자가 모른다고 말하면 경찰은 “우린 이미 증거를 장악했어. 죄를 승인하면 관대하게 처리받을수 있어”라고 말한다. 범죄혐의자는 일반적으로 긴장하고 초조하기에 경찰의 오도로 경찰의 말에 따르면 자신에게 유리하다고 여기게 된다. 미란다권리가 있게 된후 범죄혐의자들은 심리압력을 해제하게 되였다.   미란다원칙은 중국에 적용되지 않는다. 미란다원칙의 핵심은 침묵권 즉 피고인이 묵비권을 행사할수 있다는것이다. 그러나 중국형법은 “피고인은 주동적으로 범죄사실을 자백하고 사법기관의 조사에 협조할 의무가 있다”고 명확하게 규정했다. 때문에 중국은 미란다원칙을 적용할수 없다.   중국형법에도 위법증거배제원칙이 있다. 그러나 실천중 범죄혐의자권리에 대한 보호가 부족한 원인으로 왕왕 유명무실한 규칙으로 되고있다. 중국의 절차위법은 범죄혐의인이 자기절로 증거를 제공하는것이 수요하는데 이 점이 몹시 어렵다. 국외에서는 사법기관이 자기절로 자신이 법을 어기지 않았다는것을 증명할것을 요구하기때문에 24시간동안 감시카메라로 범죄혐의인이 심사를 받는 정황을 기록하는데 록화영상이 몇분 중단되여도 정확하게 설명할수 없다.   어느 나라나 모두 당사인이 죄를 “자백”하는것을 허용한다. 이는 당사인이 자기의 권리를 포기하는것으로 사법원가도 절약할수 있다. 형법에서 반대하는것은 “핍박에 못이겨 자기절로 죄를 승인”하는것이다. 바로 “진염홍사건”처럼 고문에 의해 강제자백하게 하는 등 방식으로 범죄혐의인이 죄를 승인하게 핍박하는것이다. 이때문에 억울한 사건이 발생될 위험이 있게 된다. 설령 자백하고 죄를 승인했다고 하더라도 사법기관에서는 철저한 조사를 진행해야 하며 반드시 범죄혐의인이 자백한 내용과 사법기관에서 조사한 내용이 일치한것이 확정되여야 사건에 대해 최종적으로 결론을 내릴수 있다.   범죄혐의자는 법원에서 최종판결을 내리기전까지 혐의자일뿐 범죄자가 아니다. 그런데도 일부 공안일군들은 충분한 증거도 없는 정황에서 범죄혐의자를 범죄자라고 락인부터 찍어놓고 심문한다. 이렇게 선입견과 편견을 가지고 수사하면 억울한 사건이 만들어지기 마련이다. 용의자가 묵비권을 지키면 고문으로 자백을 강요해서라도 사건을 마무리 지으려고 한다. 이런 경찰은 경찰앞에 “인민”이란 두글자를 달 자격이 없다.   이런 자격없는 경찰들이 적으면 적을수록 진염홍이나 왕본여처럼 억울함을 당하는 사람도 적이질것이다. “하늘이여, 천리는 어디에 있고 포청천은 어디에 있는가?!”고 비분강개를 터뜨리는 사람도 적어질것이다.    이쯤에서 경찰대오를 순결화할 필요성과 중요성이 제기된다. 비리경찰, 깡패경찰은 쫓아내고 경찰다운 경찰, 경찰앞에 인민이란 두 글자를 달고 다니기에 부끄럽지 않은 그런 경찰만이 경찰대오에 남아있기를 기대한다면 헛된 망상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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