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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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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3    해 탈□ 김희수 댓글:  조회:1126  추천:0  2020-11-20
1 택시기사에게 택시비를 주고 사철맛집 앞에서 내린 철우는 불룩한 가방부터 만져보았다. 그 안에 묵직한 것이 들어있다는 것을 다시한번 확인하고 나서야 마음이 든든해진 철우는 사철맛집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단간방을 찾아 자리잡은 그는 복무원 아가씨에게 잠간 기다리라고 하고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좀 전에 걸었던 전화번호에 다시 전화를 걸었다. “준수, 어디까지 왔어? 거의 온다구? 난 벌써 와서 기다리고 있어. 빨리 와.” 휴대폰을 내려놓은 철우는 조심스레 가방을 열고 100원짜리 묶음을 세여보았다. 세번이나 다시 세여보면서 열묶음이 맞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였다. 생각하면 너무나 힘든 세월이였다. 남들처럼 잘 먹고 잘살지는 못해도 아이들을 공부시키면서 먹고 입고 자는 근심이 없이 낮에는 출근하고 밤에는 마누라 궁둥이 만지며 나름대로 행복하게 살았는데 느닷없이 찾아온 안해의 뇨독증 때문에 불행이 시작되였다. 철우는 병 때문에 고생하면서도 아이들과 남편 앞에서 억지웃음을 짓는 안해가 안스럽고 불쌍하여 그런 안해를 살리겠다고 집 팔고 빚을 지며 치료비를 마련했다. 하지만 역부족이여서 찾아간 것이 준수였고 그에게 두말없이 선뜻 10만원이란 거금을 내준 것도 준수였다. “고맙다! 준수. 이 돈을 꼭 갚을게.” “고맙긴 뭐, 니 처가 이제 30대 초반인데 사람부터 살려야지. 돈이 더 수요되면 주저하지 말고 얘기해라.” “나도 그 사람 나이가 아까워 더 살리고 싶다. 아이들도 너무 어려 엄마가 수요되고……” 철우는 눈물을 훔치면서 차용증을 쓰자고 권했다. 싸인하고 손도장을 찍겠다고 했지만 준수는 친구 사이에 차용증을 써선 뭘 하겠느냐며 아무때나 돈이 생기면 본전만 갚아주면 된다고 했다. 그리고 앞으로 계속 사정이 어려우면 갚지 않아도 된다고 한마디 덧붙였다. 철우가 그럼 증인이라도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며 다른 사람을 부르자고 했지만 그것도 거절당했다. 그렇게 철우는 차용증도 증인도 없이 10만원을 받아가지고 나오면서 고맙다는 말밖에 하지 못했다. 그것이 1989년이였으니 10만원은 그때 도심의 아빠트 한채를 살 수 있는 거금이였다. 그런 거금을 차용증도 없이 선뜻 내준 준수가 고마워서 철우는 안해를 살리겠다고 치료비로 모두 쏟아부으며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 안해를 살리지 못했다. 친구 준수의 눈물나도록 고마운 지원의 손길과 철우의 정성 어린 간호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안해는 치료효과를 보지 못하고 결국 1년 후에 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남편과 아이들에게 빚만 남기고 떠나간 안해, 그래도 살았으면 고마웠을 텐데 치료비만 쓰고 간 안해가 야속했다. 어떻게 10살, 12살밖에 안되는 아들딸을 두고 35살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단 말인가? “여보, 그렇게 가면 나혼자 어쩌라구? 이 많은 빚을 어떻게 다 갚으라구?” 철우는 오열했다. 그는 이를 악물고 밤낮으로 일했고 허리띠를 졸라매면서 돈을 모았다. 준수의 빚을 갚겠다고 퇴근해서는 다른 일거리를 찾아하기도 했지만 돈은 별로 모아지지 않았다. 마누라 없이 살아도 이것 없이 못 산다고 했던 담배도 끊고 이걸 발명한 사람에게 노벨상을 주어야 한다던 술도 끊었다. 그렇게 3년 동안 억척스레 일하며 악착같이 아득바득 애썼지만 생각처럼 돈이 모아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나가야 벌 수 있다고 한국행을 권유하는 사람들의 말을 듣고 직장을 때려치우고 여기저기서 돈을 꿔다가 출국수속을 밟았다… 7년 동안 한국에서 별의별 고생을 다하며 모은 목돈을 손에 쥔 철우는 드디여 귀국했다. 귀국해서 처음 한 일이 준수한테 전화해 만나자고 한 일이였다. 이제 이 돈을 준수한테 넘겨주면 10년 동안 어깨를 지지누르는 것 같던 무거운 짐을 벗고 어깨를 쭉 펴고 다닐 것 같았다. 철우는 은행에서 준수를 만나 직접 빌린 돈을 주려고도 생각했지만 한잔 나누면서 고맙다는 말을 곁들이는 것이 나을듯 싶었다. 철우는 메뉴를 훑어보면서 준수가 좋아하는 료리 두가지를 먼저 주문했다. 그런데 거의 도착한다던 준수는 이제나 저제나 나타나지 않았다. 절대로 약속시간을 어길 준수가 아닌데 30분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었다. 혹시 무슨 급한 일이 있어 늦는다거나 못 오게 된다면 전화라도 하겠는데 지금까지 오지 못하는 걸 보면 사고라도 생긴 게 아닐가,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철우는 휴대폰을 꺼내 준수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응답이 없었다. 잠시후 다시 걸자 뜻밖에도 귀에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휴대폰 주인을 아십니까?” “네. 그분과 만나기로 한 친군데요…” “저… 이 휴대폰 주인은 교통사고가 나서…” “뭐라구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거기 어딥니까?” 철우는 준수가 어떻게 됐는지 물을 경황도 없이 위치부터 확인하고 서둘러 가방을 챙겨 부랴부랴 달려갔다. 살아야 하는데, 살아있어야 하는데, 이 생각만 하면서 주먹을 쥐고 달렸다. 현장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사람들 틈을 비집고 들어가 보니 교통경찰들이 현장조사를 끝내고 시신을 옮기고 있었다. 시신은 피투성이가 되였지만 낯익었다. 다가가 확인하는 순간 철우의 눈에서 눈물이 왈칵 터져나왔다. “준수야! 준수!” 준수가 가다니? 얼마 전까지도 씩씩하고 우렁찬 목소리로 전화하던 사람이 죽다니? 사람이 이렇게 쉽게 죽을 수 있다니? 인생이 너무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금이 들어있는 가방을 잡고 있는 손끝이 부들부들 떨렸다.   2 준수를 보내는 날, 하늘도 슬퍼서인지 비가 내렸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는 유가족의 눈물과 함께 땅을 적셨다. 평생 남을 도우며 살아온 고인의 장례식에 수많은 사람들이 비를 무릅쓰고 찾아와 애도를 표했다. 남편을 잃은 미망인과 아버지를 잃은 자식들의 애처로운 통곡소리가 철우의 가슴을 찢었다. 준수의 죽음이 자신 때문인 것 같아 철우는 한켠에 죄인처럼 우두커니 서있었다. 내가 맛집으로 부르지 않고 직접 돈을 돌려주었더라면 준수가 죽지 않았을텐데… 인간적이고 소탈한 준수의 모습이 영화필림처럼 스쳐지났다. 언젠가 둘이 함께 술을 마시며 한담을 할 때 준수가 웃으며 이런 말 한 적이 있었다. “철우야, 우리 둘중에서 누가 먼저 죽을가?” “그걸 누가 알아. 내 생각엔 내가 먼저 죽을 것 같다. 넌 나보다 건강하지 않니?” “그건 모르는 일이야. 건강해보이는 사람이 먼저 죽을 수도 있고. 여하튼 70까지 건강하게 살다가 가도 괜찮을 것 같다. 너무 오래 살면 벽에 똥칠을 할가 봐 두려워.” 철우는 죽는다는 말이 싫어 화제를 바꾸려고 준수를 흘겨보았다. “넌 오늘 왜 재수 없게 죽는다는 말을 자꾸 하니? 우린 아직 죽을 날이 멀었어!” “허허허” 준수는 소탈하게 웃었다. “죽음도 학문이야. 우리가 사는 것이 날마다 죽음을 향해 가까이 다가가는 길이 아니겠니? 죽은 후에도 사람들이 오래오래 기억해준다면 그의 삶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주지.” 그렇게 죽음에 대해 고담준론을 펼치며 70까지는 살겠다던 준수가 50도 안된 나이에 이렇게 빨리 갈 줄은 꿈에도 몰랐다. 철우는 인생이 무상하게 느끼면서 허탈감에 빠졌다. 그리고 친구의 죽음이 자신과 관계가 있다는 괴로움에 눈물을 훔쳤다. 장례식 내내 그런 자책감에 모대기다가 철우는 고인의 가족들을 대할 용기가 없어 부조돈을 다른 사람한테 맡기고 집으로 돌아왔다. 철우는 그 후에도 준수에게 빚을 졌다는 자책감 때문에 예전과 같은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자신이 가장 어려울 때 따뜻한 도움의 손길을 베풀어준 준수에게는 평생 갚지 못할 은혜의 빚을 졌고 준수 가족에게는 남편과 아버지를 잃게 한 빚을 졌다는 죄책감이 밤낮으로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사람이 빚을 지고는 못 사는 거야. 사람은 량심이 있어야 해. 은혜를 모르면 사람도 아니지.” 준수가 가고 한달이 지난 후 철우는 거금이 든 가방을 들고 준수의 안해를 찾아갔다. 미망인은 남편을 잃은 슬픔에서 벗어난듯 안존하고 차분한 모습으로 철우를 맞아주었다. 철우는 미망인이 타온 커피를 받아들고 죄책감을 감추느라 고개를 숙였다. 미망인이 커피가 싫으면 차를 따라오겠다고 일어서려고 할 때 철우는 고개를 들고 커피향이 좋다고 했다. 그는 죄책감을 털어버리려고 긴긴 세월 끈끈하게 쌓아온 고인과의 우정을 내세우며 고인의 인품을 칭찬하는 이야기를 하다가 고인의 가족상황에 대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특히 고인을 잃고 힘들겠는데 도움을 받을 일이 있으면 솔직하게 얘기해달라고 부탁했다. 미망인은 가끔씩 남편이 그리울 때가 있어 그렇지 아이들을 데리고 살아가는 데는 아무런 근심걱정이 없다고 했다. 철우는 그 때에야 비로소 고인의 집을 방문한 목적이 생각나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저, 준수가 생전에 돈을……” 성격이 급한 미망인은 철우의 말을 채 듣지 않고 가로챘다. “잘 아시겠지만 준수씨는 주머니사정이 넉넉해서 여태껏 누구한테 돈을 꾼 적이 없어요.” 한국에 가서 5년 동안 생활한 적이 있는 미망인은 언제나 남편에게 준수씨라는 호칭을 썼다. 철우는 미망인의 오해를 정정하려고 다시 입을 열었다. “저, 그런 게 아니라 준수가 누구한테 돈을 꾼 게 아니라 꿔준 일이……” 이번에도 미망인은 철우의 말허리를 잘랐다. “준수씨가 누구한테 돈을 꿔줬다고 한 말을 못 들었어요. 그의 유품에 차용증 같은 것도 없었구요.” “저, 그게 아니라 저……” 철우는 거금이 들어있는 묵직한 가방을 들고 돌려 주려고 일어섰다. 바로 그 때 갑자기 미망인의 핸드폰이 요란스럽게 울렸다. 핸드폰을 꺼내들고 상대방과 통화를 하던 미망인은 “미안하지만 급한 일이 있어서……” 하는 말만 남기고 부랴부랴 밖으로 뛰여나갔다. 멍해있던 철우가 거금이 든 가방을 든 채 뒤따라 나갔을 때는 미망인이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3 빚을 갚으러 갔다가 갚지도 못하고 그대로 돌아온 철우는 다시 찾아가서 갚아야지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차일피일 미루기만 했다. 빚을 꼭 갚아야 하는데 하고 마음속으로는 생각하면서도 행동에는 옮기지 못했다. 빚이 항상 무겁게 몸을 누르면서 괴롭혔지만 행동에 옮기지 못하는 자신이 싫어졌다. 공교롭게도 그때 식품상점을 경영하던 이웃이 사정 때문에 가게를 내놓는다고 했다. 당장 밥그릇이 필요했던 철우는 구미가 당겼지만 자금 때문에 고민했다. “준수의 빚은 나중에 갚고 먼저 이 돈을 당겨 쓴다?” 하고 생각하다가도 또 “안돼. 사람이 량심이 있어야지. 아무리 그래도 빚을 갚는 게 먼저야.” 하고 왼고개를 치기도 하며 갈등을 겪느라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 철우는 준수가 하늘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아 부끄러웠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 먹고살아야겠다는 의욕이 부끄러움을 덮었다. 온밤 이리 뒤척 저리 뒤척 잠을 못 이루며 량심의 목소리와 싸우던 철우는 아침에 일어났을 때 결단을 내렸다. 아이들을 시집 장가 보내고 밥은 먹고살아야 할 것이 아닌가. 그는 준수의 빚을 갚기로 했던 돈으로 가게를 차려놓고 아들과 함께 식료품을 팔았다. 딸 슬기는 취직이 어려워 한국으로 나갔다. 철우는 매일 가게문을 닫고 돈을 셀 때마다 준수의 빚을 갚아야 한다는 량심의 목소리를 외면할 수 없어 “돈을 모아 꼭 빚을 갚아야지.” 하고 중얼거렸다. 그는 아껴먹고 아껴쓰면서 아들에게 주는 용돈마저 줄였다. 아들은 입이 한자나 나와서 불만을 터뜨렸다. “이렇게 쥐뿔 만큼씩 모아서 어느 세월에 그 많은 빚을 다 갚겠습니까?”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모으고 또 모으면 목돈이 되겠지.” “아버지나 그렇게 사세요. 난 이 일을 더는 못하겠습니다. 창피해죽겠단 말입니다!” “창피하긴 뭐가 창피하단 말이냐?” “아이들이 나를 식장이라고 놀려준단 말입니다.” “식장?” “식료품장수란 말입니다.” 아들은 젊은 나이에 식료품이나 파는 게 체면이 깎인다고 투덜대더니 자기도 누나 따라 한국으로 가겠다고 떼를 썼다. “넌 어려서 안된다. 스무살밖에 안된 녀석이 어떻게 남의 나라에 가서 일하겠다는 거냐?” “누나도 갔잖아요? 나절로 벌어서 장가 갈 돈을 모아야지 않겠어요?” “장가갈 돈은 이 애비가 모아줄게.” “빚까지 진 신세에 어느 천년에 돈을 모으겠어요?” 엎친데 덮친 격으로 아들이 몇달 후에는 위장질환을 앓다가 수술까지 하게 되였다. 수술비로 적지 않은 돈이 나갔다. 그 후에도 철우는 식료품장사를 견지하면서 계속 돈을 모았지만 아들의 말처럼 그렇게 모아서는 20년 후에도 빚을 다 갚을 것 같지 않았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빚을 갚겠다는 철우의 의욕도 퇴색했다. 세월은 량심도 죄책감도 무감각하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몇해가 지난 후에는 차용증도 없고 증인도 없고 가족도 모르는 사실인데 그냥 묻어둬도 괜찮지 않을가 하는 그런 마음이 생겨났다.   4 세월이 흘러 딸도 시집을 가고 아들도 장가를 갔다. 그동안 철우는 준수에게 빚진 일을 잠시 잊고 살았다. 그런데 인생이란 게 참 묘하다고 해야 할가? 우연인지 필연인지 인간에게는 살다가 갑자기 잊고 살았던 기억을 되살리는 어떤 계기가 나타나게 되는 법이다. 그날 철우는 대련에 사는 딸집에 가려고 공항으로 나갔다. 이른 시간이여서 공항 대합실에서 비행기 시간을 기다리는데 갑자기 눈앞에 유령이 나타났다. 먼발치에서 철우를 바라보던 유령은 곧장 철우를 향해 다가왔다.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그 유령을 본 철우는 오싹 소름이 끼쳤다. 그 유령은 준수였다. 순간 철우는 오래동안 잊고 살았던 빚이 떠오르며 준수가 유령이 되여 빚받으러 온 것 같아 전신이 옥죄여오는 공포를 느꼈다. 그러던 철우는 가까스로 진정하며 귀신의 존재를 부정했다. “내가 헛것을 본 거야!” 철우는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았다. 그를 향해 다가오는 사람은 허깨비가 아니라 분명 준수였다. 내가 정말 귀신을 본 걸가? 귀신이 아니라면 죽은 사람이 어찌 살아서 내 눈앞에 나타날 수 있단 말인가? 온몸에 전률이 이는데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그 귀신이 깍듯이 인사했다. “슬기 아빠, 안녕하세요?” 그제야 철우는 정신을 차렸다. 눈앞에 있는 사람은 귀신이 아니라 준수의 아들 건이였다. 건이는 철우의 딸 슬기와 동갑이며 소학교부터 고중까지 줄곧 한반에서 공부한 동창생이였다. 준수는 생전에 두 아이를 놓고 철우와 사돈을 맺자고 롱담을 한 적도 있었다. 철우는 눈앞에 나타난 준수의 아들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이제 30대 중반에 들어선 준수의 아들은 제 아빠를 닮아도 너무 닮았다. “응, 너 건이 아니냐? 정말 오래간만이구나.” 철우는 건이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운 것을 발견했다. “너 얼굴색이 좋지 않구나. 무슨 일이 있는 거야?” “저, 엄마가 많이 아파요.” “무슨 병인데?” “연변병원에서 검사했는데 진단이 안 나와서 지금 북경병원에서 입원치료를 받고 있는중이예요. 치료비가 모자라 여기저기서 돈을 꿔가지고 다시 북경으로 가는 참입니다.” “어쩌다 그렇게…” 순간 철우는 오래도록 까맣게 잊었던 기억이 되살아나면서 마음속 깊은 곳에 잠자고 있던 죄책감이 꿈틀 고개를 드는 걸 느꼈다. 내가 진작 빚을 갚았더라면 준수 가족이 치료비 걱정은 덜었을 텐데 하는 량심의 가책에 건이의 얼굴을 마주볼 용기가 없었다. 철우는 준수가 사망한 후 준수의 가족이 어떻게 살아가는 지조차 외면하고 살아온 자신이 죽이고 싶도록 미웠다. 준수가 생전에 그토록 큰 도움을 주었는데 친구의 자식이 엄마의 치료비를 마련하려고 사처로 뛰여다니는 상황이 된 것도 모르고 있다니? 도움을 받을 때는 그 은혜를 꼭 갚겠다고 다짐했지만 결국 자신은 은혜를 저버린 천벌 받을 인간으로 된 것이다. “너 잠간만 기다려.” 철우는 현금인출기에서 은행카드에 있던 2만원을 찾아 수중에 있던 5000원의 현금과 함께 건이의 손에 쥐여주었다. 건이는 그 돈을 받으려고 하지 않았다. “내 너의 아버지한테 빚진 것이 있어 그런다. 받아라, 어서.” “고맙습니다. 나중에 꼭 갚겠습니다.” 건이는 빚진 것이 있다는 말을 철우가 아빠에게 신세를 좀 진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철우는 건이가 고맙다고 한 말과 나중에 꼭 갚겠다고 한 말에 너무 미안하고 죄스러워서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그날 철우는 딸집에 가는 것을 포기했다. 그리고 준수의 빚을 갚기 위해 또 한국으로 나갔다.   5 20년 만에 다시 찾은 서울은 낯익으면서도 낯설었다. 철우는 모든 것이 많이 변해있는 모습에 놀랐고 더구나 가리봉동, 대림동과 같은 조선족집거지까지 생겨난 것을 보고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한가하게 감상에 젖어있는 것도 잠간, 이곳에 온 목적 대로 하루빨리 돈벌이에 나서야 했다. 돈을 많이 벌어서 무엇보다 먼저 준수의 빚을 갚아야 했다. 빚이 어깨를 지지눌러 기를 펼 수 없었다. 빚을 다 갚아야 마음이 홀가분할 것 같았다. 사실 관광객이 아니라면 이곳에서 풍경 따위에나 취해 감상에 젖어있을 조선족은 매우 드물다. 분초를 다투어 벌어야 하기 때문이다. 20년 전에 왔을 때처럼 한국인에게 사기당하는 일은 적어졌지만 한국인의 눈치를 보면서 일해야 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한국인 앞에서는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어야 했다. 처음부터 주눅이 들면 한국인들의 업신여김을 받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20년 전에 철우는 이곳에서 한국인들에게 수없이 무시당하고 업신여김을 받았지만 참을 인자 셋을 품고 견지했다. 그런데 지금은 당당한 위엄이 무시라는 바이러스의 침입을 막아주는 효과적인 방어벽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였기에 이방인이 아니라 단군의 후손이란 자신감을 가지고 허리를 쭉쭉 펴고 일했다. 철우는 장기간 서울에 눌러 있던 친척에게 일자리를 부탁했다. 60세를 넘긴 몸으로 한국에 와서 일하자니 생각보다 힘들었다. 봉급이 높은 일자리는 이뤄질 수 없는 꿈이고 저임금의 일자리는 성에 차지 않았다. 그래도 하는 수 없이 젊은이들보다 낮은 임금을 받으며 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상대적으로 덜 힘든 일이였지만 장기간 육체로동을 하노라니 일을 끝내고 자리에 누우면 전신이 뻐근하고 팔다리가 쑤시군 했다. 사랑 찾아 인생을 찾아 하루종일 숨이 차게 뛰여다닌다 서울하늘 하늘아래서 내 꿈도 가까이 온다 … 지쳐 누워있다가도 이런 노래를 들으면 다시 힘이 생겼다. 아파도 참고 힘들어도 감내하면서 철우는 5년 동안 견지했다. 그렇게 고생한 보람으로 손에 목돈을 쥐기는 했지만 몸이 지치고 마음도 지쳐서 깊은 병이 들었다. 온몸이 아파서 귀국했을 때는 몰골이 말이 아니였다. 피골이 상접하고 눈확이 푹 꺼져들어간 데다가 얼굴까지 창백하여 보는 사람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특히 아들딸은 아버지의 그런 모습을 보고 서럽게 엉엉 울어댔다. 3개월 후에 철우는 급기야 입원했지만 의사는 가망이 없다고 했다. 이제 죽는다고 생각하니 먼저 간 안해가 떠오르고 또 준수가 떠올랐다. 준수와 함께 죽음에 대해 담론하던 일도 떠올랐다. 자신은 이제 2~3년은 더 살아야 70세를 채우지만 벽에 똥칠은 하지 않고 간다 생각하니 그래도 다소 위안이 되였다. 비록 오래 살지는 못해도 자식들에게 짐이 되지 않고 간다는 생각, 자식들도 이제 다 어른이 되여 각자의 가정을 이루었으니 부모 없이도 잘살 수 있을 것이란 믿음이 생기면서 눈을 감아도 안심이 될 것 같았다. 그런데 한가지 일이 딱 마음에 걸렸다. 죽기 전에 해결하지 못하면 눈을 감지 못할 것 같았다. 장장 30년을 자책감에 시달리게 하며 못견디게 괴롭히던 일이였다. 림종을 앞둔 철우는 아들딸을 불러놓고 말했다. “이전에도 말했지만 아빠가 친구에게 10만원을 빚진 것이 있는데 아직도 갚지 못했다. 그게 30년 전의 일이니까 지금 돈으로 100만원은 더 될 거다. 100만원은 아니여도 너희들이 힘자라는 만큼 꼭 갚아야 한다. 슬기야, 너 아빠 친구 준수를 잘 알지? 건이의 아빠 말이다. 너의 엄마가 앓을 때 치료비로 쓰라고 선뜻 거금을 내준 고마운 분이다. 그런데 아빠는 그런 친구의 은혜를 잊고 지금까지도 그 빚을 갚지 못했다. 빚을 지고는 못산다고 아빠는 그동안 자책감으로 인한 괴로움에 시달리며 살았다. 한동안은 빚진 일을 잊기도 했지만 기억에 영영 지워버릴 수는 없는 일이였지. 너희들에게 빚을 지우고 가는 것 같아서 미안하구나. 그러나 아빠가 이 지경이 되였으니 내가 지금까지 모은 돈에 너희들이 보탤 수 있으면 보태서 준수의 아들 건이에게 보내주어라. 이것이 아빠의 마지막 부탁이다.” “아빠, 그 돈을 꼭 갚아야 해요? 차용증도 쓰지 않았고 증인도 없다고 했잖아요? 우리가 갚지 않아도 건이네는 모를 거예요.” 철우는 그런 아들의 손을 꼭 잡고 마지막 힘을 모아 말했다. “차용증을 쓰지 않았다고 꾼 돈이 꾸지 않은 것으로 되겠니? 아빠의 친구가 우리 가족이 제일 어려울 때 도와주었는데 우리가 그 은혜를 잊어서야 되겠니? 지금 건이네도 엄마의 치료비에 거금을 쓰고 생활형편이 몹시 어려울 거다. 이제 아빠는 준수를 만나러 가겠는데 그를 만나서 뭐라고 말을 하겠니? 빚을 갚지 못하고 무슨 낯으로 그를 보겠니? 그러니 너희들이 아빠의 빚을 꼭 갚아다오. 제발 부탁이다. 아빠의 유언이라고 생각하고 꼭 갚아다오.” 철우의 딸 슬기는 지체하지 않고 자기의 저금을 찾아 돈 액수를 맞춘 후 건이에게 전화를 걸어 구좌번호를 알아냈다. 그런데 그러는 동안 철우는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상하게도 철우는 숨은 거두었지만 눈은 뜨고 있었다. “왜 눈을 감지 못하는 것일가?” “아빠는 아마 빚 때문에 눈을 감지 못한 것 같아.” 슬기는 돈을 건이의 구좌에 넣어주고 나서 아빠한테 빚을 다 갚았다고 속삭였다. 그제야 철우는 눈을 감았다. 연변일보 
372    꽈배기인생 댓글:  조회:1116  추천:0  2020-09-07
단편소설   꽈배기인생   김희수   내 인생은 태여날 때부터 꽈배기처럼 비비 꼬여있었다. 꽈배기는 중국말로 마화(麻花)라고 하고 함경북도 방언으로 타래떡이라고 한다. 꽈배기건 마화건 타래떡이건 나는 이 음식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어릴 때에는 무척 즐겨 먹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내가 꽈배기를 너무 좋아해서 엄마는 로임을 타는 날이면 꼭꼭 꽈배기를 사다주곤 했다. 꽈배기를 먹을 때면 언제나 꽈배기처럼 땋아내린 뒤집 명희누나의 외태가 생각났다. 나는 명희누나의 외태를 풀듯이 꽈배기를 한가닥씩 길게 풀어 가지고 한입씩 입에 넣고 오물오물 씹곤 했다. 그런데 어느날인가 내가 꽈배기를 맛있게 냠냠 먹는 것을 지켜보던 명희누나가 “자 똥 먹는 걸 좀 봐라. 창지 똥 먹는다”하고 익살스럽게 웃으며 놀려주었다. 내 이름은 조선말로 창길(昌吉)이지만 조선족들은 중국어 발음대로 “창지”라고 불렀다. 명희누나가 꽈배기를 똥이라고 한 다음부터 나는 꽈배기가 정말 똥같아서 다시는 먹지 않았다. 그 것은 아마도 내가 다섯살 때라고 기억된다. 나는 내가 먹는 꽈배기를 똥이라고 한 명희누나한테 보복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명희누나의 하교길에 기다리고 있다가 명희누나가 나타나자마자 바지를 벗고 오줌을 갈겼다. 뜻밖에 오줌세례를 받은 명희누나는 평소에 그렇게 예쁘던 눈을 무섭게 지릅뜨며 화를 벌컥 냈다. “야, 임마! 내 오늘 니 고토리를 쑥 빼먹겠다!” “빼먹어봐라, 빼먹어봐라!” 명희누가 쫓아오자 나는 바지춤을 붙잡고 줄행랑을 놓았다. 사흘후였다. 내가 집마당에서 혼자서 놀고 있는데 갑자기 명희누나가 달려오더니 무작정 내 바지를 벗겼다. 손에는 가위를 들고 있었다. “야, 임마! 내 오늘 니 고토리를 쑥 잘라버리겠다. 다시는 오줌을 누지 못하게.” “누나, 하지 마. 제발……”      이러다가 정말로 고추가 명희누나의 가위에 썩둑 잘리는 게 아닌가 하는 공포에 질려 온몸이 덜덜 떨렸다. 때마침 엄마가 와서 말렸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내가 사내구실을 못할 번 했다. 엄마는 내가 첫돌이 지난지 얼마 안되여 새마을 조선족동네로 이사를 왔는데 당시 뒤집에 명희누나네가 살고 있었다고 했다. 명희누나네는 색다른 음식을 하게 되면 언제나 우리 집으로 들고 왔고 우리 엄마도 그 보답으로 꼭꼭 채소를 보내주곤 했다. 할머니네가 채소밭을 가꾸고 있었기에 우리 집에는 채소가 좀 여남이 있었던것 같다. 우리 집은 한족이였지만 만두나 젠빙(煎饼)보다는 된장국이나 김치를 더 즐겨 먹었다. 명희누나가 내 고추를 자르려고 했던 그 사건이 있은후 나는 얼마동안 명희누나를 멀리했지만 달포도 지나지 않아 곧 명희누나와 화해했고 명희누나가 하교하면 그 뒤를 졸졸 따라다니곤 했다. 그때마다 명희누나의 친구들은 늘 명희누나와 나를 놀려주었다. “야아, 어떤 애는 엉뎅이에 꼬리 달렸다. 창지 명희 꼬랑대구나!” 하지만 명희누나는 개의치 않았다. 그런데 옥자누나만 늘 나를 쫓으려고 애썼다. “야, 창지야, 넌 남자라는게 남자들과 놀아야지 왜 부실하게 자꾸 녀자들과 놀려구 하니? 저리 가라, 가!” 옥자누나가 쫓으면 나는 명희누나의 뒤에 피했고 명희누나는 그런 나를 두둔하고 나섰다. “창지 아직 어려서 그러니 여기서 놀게 하자꾸나.”      나보다 세살 년상인 명희누나는 “똑똑한 애”라고 동네어른들로부터 늘 칭찬을 받았다. 공부도 잘했고 말도 잘했고 돌차기(망차기), 공기놀이, 고무줄놀이, 실뜨기 등 못하는 놀이가 없었다. 돌차기를 할 때면 명희누나의 발은 신들린 것 같았다. 명희누나가 한 발은 들고 한 발로만 뛰여가면서 돌을 차면 돌은 바로 목표하는 칸의 가장 적중한 곳에 떨어지곤 했다. 공기놀이를 할 때면 공기돌 하나를 우로 던지고 그 사이에 땅바닥의 네개의 공기돌을 몽땅 손안에 쥐고 우에서 내려오는 공기돌마저 착착 받아쥐는데 조그마한 손이 어찌 그리 예쁘고 빨리 움직이는지 보는 눈이 다 뒤집힐 지경이였다. 명희누나가 고무줄놀이를 할 때면 곡마단의 곡예공연을 보는듯 아슬아슬했다. 두 아이가 일정한 거리를 두고 량쪽에 서서 각각 고무줄의 량끝을 잡고 손을 머리우로 뻗쳐 고무줄을 높이 들어올리면 명희누나가 중간쯤에서 다리를 쭉 들어올려 고무줄을 착 발목에 걸어 내려 두발을 감아치는데 넘어질듯 하면서 균형을 잡는 그 동작이 얼마나 잽싸고 우아한지 모른다. 누나들이 고무줄놀이를 할 때면 나는 곁에서 지켜보다가 나도 함께 놀자고 떼를 쓰곤했다. 고무줄놀이에서 가장 쉬운 것이 “혁명을 틀어쥐고 생산을 촉진하자(抓革命促生产)”는 놀이였다. 이 놀이는 고무줄의 량끝을 이어서 두줄로 만든후 두 아이가 일정한 거리를 두고 량쪽에 서서 고무줄을 두발목에 걸고 있으면 다른 아이들이 하나, 둘씩 놀이동작을 한다. 고무줄놀이는 발목에서부터 무릎, 넓적다리, 궁둥이, 허리, 겨드랑이, 어깨, 목, 귀, 머리와 머리 위 한 뼘, 머리 위 두 뼘, 마지막에는 손을 뻗친 높이에까지 점점 고무줄의 높이를 상승시키는데 두줄놀이는 외줄놀이처럼 높이 뛸수 없기에 외줄놀이보다 높이를 몇단계 낮춘다. 두줄놀이를 할 때는 두 아이가 고무줄을 걸고 있고 다른 아이들은 차례로 한 아이씩놀이를 한다. 고무줄을 걸고 있는 두 아이가 “쫘(抓)”하고 소리치면 고무줄 한켠에 두발을 모으고 대기하고 있던 아이는 토끼처럼 깡충 뛰여서 두발이 두줄의 고무줄 안으로 들어오도록 내려선다. 그리고 “거(革)”하고 소리치면 개구리처럼 폴짝 뛰여서 두 다리를 벌려가지고 두발이 각각 두줄의 고무줄밖에 닿도록 내려선다. 다시 “밍(命)”하고 소리치면 원숭이처럼 잽싸게 뛰여올랐다가 두 발이 고무줄 안에 들어오도록 내려서고 “추(促)”하고 소리치면 벼룩처럼 훌쩍 뛰여 오르는 순간 몸을 90도로 돌려서 처음에 서있던 고무줄 한켠으로 내려서고 “썽(生)”하고 소리치면 바람처럼 씽하니 뛰여오르는 순간 두 발등에 고무줄의 한줄을 걸어가지고 건너편으로 넘어내리고 “찬(产)”하고 소리치면 캥거루처럼 껑충 뛰여오르는 순간 발등에 걸었던 고무줄에서 벗어나며 고무줄 건너쪽으로 살짝 내려선다. 잘하는 아이가 먼저 한 동작씩 하면서 뒤따라 하는 아이에게 고무줄높이를 낮춰주기도 한다. 두줄놀이는 상대적으로 쉽기에 유치원아이들이나 소학교 저학년아이들이 놀고 외줄놀이는 소학생이나 중학생들이 논다.          나는 명희누나네가 전투영웅 황계광, 구소운을 구가하는 한족노래에 맞추어 고무줄놀이를 하는것을 많이 보았다. 그 노래는 지금도 기억에 남는데 내용이 대략 이러했다. ……쓰얼 쓰얼쑈링땅(十二、十二小铃铛), 짠떠우잉쓩 황지광(战斗英雄黄继光), 황지광, 츄쏘우윈(黄继光、邱少云), 타먼씨썽 워이워먼(他们牺牲为我们), 둬씨라쒀 미라쒀(哆唏啦嗦咪啦嗦). 나는 명희누나가 놀이를 할 때면 곁에서 구경하면서 “누나 잘 한다!”하고 손뼉을 치면서 응원했다. 어느날, 내가 외가집에 갔다 오니 여러명의 녀자애들이 동네공터에서 편을 나누어 꽃찾기놀이를 하고 있었다. 두 편이 서로 팔짱을 끼고 일정한 거리를 사이두고 마주 서서 있다가 명희누나의 편에서 먼저 한 발작씩 전진하며 노래를 부르자 상대방의 편에서 또 한발작씩 전진하며 노래로 대답했다.   우리 집에 왜 왔니 왜 왔니 왜 왔니 꽃을 찾으러 왔단다 왔단다 왔단다 무슨 꽃을 찾겠니 찾겠니 찾겠니 명희꽃을 찾겠다 찾겠다 찾겠다   상대방 편에서 명희꽃을 찾겠다고 하자 명희누나가 나서서 상대방의 한 사람과 가위바위보로 승부를 결정했다. 아쉽게 명희누나가 져서 명희누나는 상대편으로 넘어갔다. 이겨서 좋구나 좋구나 좋구나 져서두 좋구나 좋구나 좋구나   두 편은 한 판을 결속짓고 다음 판으로 넘어가 또 노래를 부르며 다시 시작했다. 아이들이 “명희꽃”을 찾는 회수가 제일 많았다. 그만큼 명희누나는 애들 속에서 인기가 높았다. 아이들 무리에서 리더격인 명희누나는 재치있는 리더십으로 아이들을 쥐락펴락 했고 아이들은 명희누나가 하는대로 고분고분 따랐다. 그 덕에 나는 무난히 녀자애들속에 끼워서 놀수 있었다. 나는 열살전에는 딱지치기, 유리구슬치기, 땅따먹기, 살구씨따먹기, 땅에 여러가지 형태의 금을 긋고 겨루는 놀이 등 남자애들의 놀이보다 공기놀이, 고누, 고무줄놀이, 실뜨기 등 녀자애들의 놀이를 더 좋아했다. 물론 이런 녀자애들 놀이는 모두 명희누나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명희누나한테서 배웠다. 하지만 열살이 되던 해에 명희누나의 날벼락 같은 말을 듣고 마음의 상처를 받은후로 더는 명희누나의 뒤를 따라 다니지 않았다. 사람들은 나를 조선족보다 조선말을 더 잘하는 한족이라고 한다. 내가 조선어를 류창하게 술술 구사할라치면 조선족아줌마들은 “저는 어떻게 조선말을 그리 잘하오?” 하고 묻는다. 나는 “저는”하는 말이 리해되지 않아 얼른 대답을 하지 못하고 “예?”하고 되묻는다. 아줌마들이 “제 말이요.”하고 한마디 더 해서야 나는 “아, 예. 저는 조선족학교에 다녔습꾸마.”하고 대답한다. 그리고 꼬치꼬치 캐여묻는 사람이 있으면 “우리 부모가 원래 조선말을 잘하는데다가 조선족마을에서 태여나 줄곧 조선족들과 이웃하고 살았습꾸마”라고 말해준다. 내가 어릴 때에는 조선족마을과 한족마을이 따로 따로 있었다. 그때는 한족들은 한족들끼리, 조선족들은 조선족들끼리 동네를 형성하고 저마끔 한 동네에서 살았는데 간혹 조선족동네에 한족집이 한둘이 있는 동네도 있었다. 우리 집이 바로 그랬다. 우리 집은 초가집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새 마을 조선족동네에서 유일한 한족집이였다. 명희누나의 엄마는 우리 집에 놀러올 때면 언제나 “이 집 가무떼기 있습둥?”하고 소리치면서 노크했다. 그러면 우리 엄마는 그 목소리를 알아듣고 “명희 엄맘둥? 날래 들어옵소”하고 반긴다. 나는 “가무떼기”라는 것이 가정주부라는 뜻이란 걸 나중에야 알게 되였다.     나의 부모는 왜서 조선족동네에서 살았고 왜서 나를 조선족유치원, 조선족학교에 붙였을가? 이런 의문이 있었지만 나는 부모한테 물어본적이 없다. 나는 외할머니를 본 적이 없었지만 외할머니가 조선족이였다고 한다. 외할머니가 조선족이여서 엄마가 조선말을 잘했고 나 또한 반은 조선족인 엄마에게서 배워서 조선말을 잘했던 것 같다. 어릴 때 나는 외할머니가 조선족이니 내 몸에서 4분의 1이 조선족피가 흐르고 있는 줄로 알았다. 그러다가 나중에 내가 입양아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난 진짜 한족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출생의 비밀에 대해 알려준 것은 명희누나였다. 내가 열살이 되던 해에 명희누나는 자그마한 일로 나하고 다투다가 “야 창지야, 너는 주어온 아이다. 너네 엄마가 널 검은 철다리 밑에서 주어왔다”하고 놀려주었다. 그 날벼락 같은 말을 듣고 나는 “아니야, 난 우리 엄마가 낳은 아이야!”하고 소리쳤다. 그리고 나는 그 즉시 울면서 집으로 달려가 엄마를 붙잡고 “명희누나가 그러는데 내가 다리 밑에서 주어 온 아이래. 엄마, 이게 정말이야?”하고 따져 물었다. 순간 엄마는 당황해 하며 “누가 그런 허튼소리를 줴치던?”하고 되물었다. “명희누나가 그랬어.” “그건 거짓말이야. 우리 창지는 이 엄마가 낳은 아이야.” “정말이야?” “그럼. 정말이지.” 그제야 안심이 된 나는 다시 명희누나를 찾아가서 “누나는 왜 거짓말을 했어?! 우리 엄마가 다 알려줬어. 난 다리 밑에서 주어 온 아이가 아니라 엄마 배속에서 나온 아이래.”하고 따지듯이 말했다. 명희누나는 그런 나를 째려보며 소리쳤다. “야, 이 멍청아! 너네 엄마야 당연히 아니라고 하겠지 실말을 하겠니? 우리 엄마가 그러는데 너네 친엄마가 널 낳아서 검은 철다리 밑에 버렸대. 그 걸 지금의 너네 엄마가 주어다 키웠대.” “거짓말이야!” “정말이야. 너네 원래 살던 동네의 왕아줌마가 말하는 걸 우리 엄마가 직접 들었대. 왕아줌마는 네네 엄마가 다리 밑에서 널 주어 오는 걸 직접 보았대. 왕아줌마가 나중에 알아보니 너네 친엄마는 처녀의 몸으로 널 낳았기에 키울수 없어 갓난 널 다리 밑에 버렸대.”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나는 내가 버림받은 아이라는 것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정말로 버림받은 아이라면 괴로워 미칠것 같았다. 나는 한참 울다가 물었다. “그럼 우리 친엄마는 지금 어디 있대?” “그야 누구도 모른대. 널 다리 밑에 버리고 간후 누구도 소식을 모른대.” “아니야! 거짓말이야!” 하늘이 무너지는 듯 했다. 그날밤 나는 열살 어린 나이에 처음 외박을 했고 룡정역 대합실에서 밤을 지냈다. 그리고 이튿날 아침에 집으로 달려가 친엄마가 어디 있느냐고 발광을 해서 엄마를 당황하게 했다. 엄마는 곧장 명희네 집에 찾아가서 “이 집 명희가 왜 당치않은 말을 해서 우리 창지를 버림받은 아이로 만드냐”고 명희 엄마를 보고 야단을 쳤다. 명희 엄마는 어른들끼리 하는 말을 명희가 잘못 알아듣고 그런 말을 했다고 사과했다. 엄마는 명희 엄마와 함께 우리가 원래 살았던 동네에 찾아가 왕아줌마를 데려왔고 왕아줌마는 내 앞에서 “주어 온 아이란 건 쉬창지(许昌吉)를 말한 거야. 넌 쉬창지(徐昌吉)잖아? 난 너네 엄마가 널 임신해서 배가 불룩한 것도 보았고 널 낳는 것도 직접 보았다. 넌 너의 엄마가 낳은 아이가 틀림없어”하고 해석했다. 결국 “허(许)”와 “서(徐)”는 중국어로 발음이 같아서 명희누나가 오해했다는 것이였다. 그날 어른들이 다 물러간후 나는 명희누나를 보고 “들었지? 난 주어 온 아이가 아니야.”하고 아주 떳떳하다는 듯 배를 쑥 내밀었다. 그런데 명희누나는 그런 나를 비웃으며 반박했다. “다른 집 애들은 다 형이나 누나, 동생들이 있는데 너만 혼자인 게 이상하지 않니? 네가 주어 온 아이가 아니면 왜 네네 집엔 아이가 하나뿐이겠니?” 정말 그랬다. 다른 집들은 형제자매가 네댓씩 되였고 명희누나도 동생이 둘이나 있었다. 내가 정말로 주어 온 아이일가 하는 의심이 들었지만 나는 더는 엄마에게 따져 묻지 않았다. 엄마가 상심할가봐 그런 것도 있었지만 혹시나 정말로 나를 주어 온 아이라고 승인할가봐 더욱 겁났던 것이다. 그날밤 나는 혼자 이불을 머리까지 뒤집어쓰고 울면서 밤을 지새웠다. 이튿날 새벽에 쪽잠을 자고 일어나보니 정주간에 밥상이 차려져있고 그 옆에 어머니가 누워 계셨다. 우리 집은 웃방과 정주 두간이 있는 조선족 온돌을 놓은 집이여서 웃방의 미닫이문을 열면 정주간과 부엌이 한눈에 드러나 보인다. 우리 집은 세 식구인데 나는 웃방에서 자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정주간에서 주무셨다.   “어머니, 어디 아프신가요?” “네 어머니는 네가 괴로워하는 모습이 가슴 아파서 지난밤에 눈물로 밤을 새웠다.” 아버지가 대신 하는 말에 나는 가슴에 뜨거운 것이 울컥 치밀며 눈물이 나왔다. 어느새 일어났는지 어머니가 나를 와락 껴안았다. “창지야, 누가 뭐래도 넌 내 아들이야! 우리가 널 얼마나 사랑하고 아끼는지 알지?” “압니다. 어머니, 미안해요!” 나는 양부모의 넘치는 사랑을 알지만 갓난 나를 버린 생모를 용서할 수 없었다.   다음날 나는 엄마가 나를 주어왔다는 검은 철교를 찾아갔다. 집에서 5백보가량 걸으면 기차길이 나타나고 그 기차길을 건너 다시 2백보가량 걸으면 또 새로운 기차길이 나타나는데 그 기차길을 따라 잠간 걷노라면 해란강우에 놓인 검은 철교에 다달을 수 있다. 이 검은 철교에는 내 발자국이 수없이 남아있다. 학교밭이 검은 철교 건너쪽에 있었기에 반아이들과 함께 학교밭에 일하러 다닐 때도 건너 다녔고 여름철에 동네 아이들과 함께 수영하러 다닐 때도 건너 다녔고 가을철에 동네 아이들과 함께 과수원에 과일서리를 하러 다닐 때도 건너 다녔고 겨울철에 동네 아이들과 함께 썰매를 타러 다닐 때도 건너 다녔다.    나는 검은 철교의 한 끝에 멍하니 서서 검은 철교의 저쪽 끝을 바라보기도 하고 강물을 넋없이 바라보기도 했다. 다리밑에 버렸다면 가운데는 강물이니 시작점이나 끝점 어디에 버렸을 것이다. 수없이 건너다닌 검은 철교지만 어쩐지 낯설어보였다. 그런데 이쪽에 서면 이쪽이 시작점 같고 다리를 건너 저쪽에 서서 보면 저쪽이 시작점 같다. 시작점이던 끝점이던 어느 한쪽에 버렸을 것이다. 계단을 내려가 강뚝에서 경사지게 돌로 쌓은 다리아래를 내려가보니 첫 교각주위에 자그마한 백사장이 있었지만 아이를 버릴만한 장소는 아니였다. 다리건너쪽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아이를 버릴 마음을 먹은 모진 엄마라지만 사람의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버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론 여름철이나 겨울철이라면 수영이나 썰매 타러 나온 아이들이 빨리 발견할수 있었겠지만 내 생일이 4월초이니 군데군데 살얼음판이 남아있는 이 계절에 강가로 놀러 나온 아이들이 없었을 것이다. 비록 이른 봄이라지만 빨리 발견하지 못하면 아기는 얼어죽을 것이 아닌가? 그러니 사람의 눈에 잘 띄는 곳에 버렸을것이다. 아마도 다리 맨 밑이 아니라 다리 조금 밑인 강뚝 어딘가에 버린것 같았다. 귀를 기울이니 가까운 곳에서 응아응아 하는 갓난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아이의 울음소리는 점점 더 처량하게 들렸다. 저렇게 애달프게 우는 아이를 버리고 어떻게 발걸음이 떨어졌을가? 엄마라는 사람은……  나는 몸서리치는 다리 밑을 피해 다시 검은 철교에 올라섰다. 갑자기 호각소리가 들려왔다. 철교 저쪽을 바라보니 당직실로 쓰고 있는 일제 때의 또치카에서 나온 철도원아저씨가 기차가 온다는 신호로 푸른 기발을 높이 들고 호각을 불고 있었다. 호각소리에 이어 뿡 하는 기차의 기적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이내 다리란간에 몸을 기댔다. 순간 기차가 기적소리 높이 강풍이 몰아치듯 지나갔다. 기적소리에 귀가 먹먹했고 기차바람에 내 몸이 날려갈 것 같았다. 순간 나는 갓난아이가 기차가 지나가는 소리에 얼마나 무서웠을가, 얼마나 공포에 떨었을가 하는 생각이 스쳐지났다.     왜 하필 다리밑에 버렸을가? 차라리 강물에 버렸더라면 이처럼 고통스럽지 않았을것을. 키우지도 못하고 버릴거면 왜 나를 낳았어? 나는 나를 낳은 엄마가 죽도록 미웠고 내가 버림받은 아이란걸 알게 한 명희누나가 죽이고 싶도록 미웠다.    그렇게 죽이고 싶도록 밉던 명희누나였지만 몇년이 지난후에는 지난 일을 잊고 다시명희누나를 좋아하게 되였다. 단순히 좋아한 정도가 아니였다. 나는 청소년기 이성에 어섯눈을 뜨기 시작하면서 명희누나를 사랑하게 되였다. 많고도 많은 녀자들 중에 왜 하필 세살이나 년상인 명희누나만 녀자로 보였을가? 내 눈엔 명희누나가 세상에서 제일 예쁘게 보였다. 명희누나만 보면 공연히 가슴이 설레이고 하루라도 명희누나를 보지 못하면 미칠 것 같았다. 어느날은 명희누나와 섹스하는 꿈을 꾸면서 처음 몽정을 하기도 했다. 다음날 젖은 속옷을 누가 볼가봐 두려워 몰래 빨래했고 그후 명희누나를 보기가 민망했다. 그러다가 어느날부터는 명희누나의 손을 잡고 정처없이 걷고 싶었고 명희누나의 입술에 키스를 하고 싶었다. 그렇게 련며칠 밤잠을 설치면서 젊은 날의 짝사랑 고민을 하다가 마침내 내 마음을 고백해야겠다는 결단을 내렸다. 그날은 날씨가 화창한 일요일이였다. 명희누나를 향한 사랑의 불길이 훨훨 타오르는던 그날 나는 낚시대를 들고 명희누나를 찾아갔다. 말이 낚시대이니 그건 대나무가지로 만든 비자루에서 단단한 가지를 골라내여 낚시대랍시고 만들어 거기에 낚시줄과 낚시바늘을 맨것이다. 또 치약의 웃부분을 녹인 납으로 봉돌을 만들어 달아놓았는데 당시 아이들에게 이런 낚시도구가 류행이였다. “누나, 낚시하러 갈가?” 내가 낚시대를 흔들어보이자 명희누나는 조금은 놀란 표정을 짓더니 이내 눈을 곱게 흘겼다. “오늘은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낚시 낚자만 들어도 싫어하던 네가 낚시야?” “나도 한번 낚시 배워볼려구. 누나, 같이 가줄래.”  “사내애들 하는 낚시를 내가 왜 가?” “날씨도 좋은데 낚시도 하고 미역도 감고 좋잖아?” “그럼 애들 불러 함께 가자.” “애들은 무슨…… 우리 둘만 가자.” “너랑 나랑 둘이서만?” “응.”  “우리 둘이서 무슨 재미야?” 명희누나는 기어이 애들을 부를 작정이였다. 급해난 나는 핑계거리를 찾았다. “사람이 많으면 물고기가 달아나. 우리 둘만 가자.” 그러나 명희누나는 애들을 부르러 이집 저집 찾아다녔다. 마침 일이 잘 되느라 그런지 애들이 모두 어디로 멀리 놀러 갔는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명희누나는 단념했는지 나를 따라 나섰다. 명희누나와 내가 강가에 이르니 빨래 하러 나온 아낙네들과 수영하러 나온 아이들이 많았다. 우리는 룡문교를 건너 강뚝을 따라 계속 올라가다가 버드나무가 있는 조용한 곳에 자리잡았다. 명희누나와 나는 버드나무 아래에 나란히 앉아 낚시질을 했다. 나는 어설픈 동작으로 낚시바늘에 미끼를 끼워서 강물에 던졌다. 원래부터 낚시에는 흥미가 없었던 차라 나는 낚시대를 잡은 채 홀린듯이 명희누나의 얼굴만 넋없이 바라보았다. 명희누나는 희고 보동보동한 손으로 산들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있었다. “야 창지, 너 왜 낚시엔 집중하지 않고 나만 보니? 그래 가지고 물고기를 낚기나 하겠니?” 명희누나는 가까이 다가와 나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탁 튕겼다. 나는 바보처럼 씩 웃었다. “누나가 너무 이뻐서……” “너 녀자 이쁜 것두 아니?” “응. 누나 너무 이뻐. 정말 이뻐! 누나 나랑 련애할래?” “뭐라구?!” “누나 우리 약혼하자!” 나는 불의의 습격을 했다. 전광석화와 같이 순식간에 명희누나의 입술에 키스를 퍼부었다. 갑작스럽게 당한 명희누나는 당황해다가 나를 콱 밀치고 주먹을 내들었다. “나보다 나이도 어리고 키도 더 쬐꼬만게 이 누나랑 련애하겠다구? 누나랑 련애하려면 10년은 더 자라야 할걸.”  나는 련애하겠다고 명희누나한테 덤볐다가 머리에 꿀밤 한 대를 맞았다. 명희누나가 또 꿀밤을 먹이려고 하자 나는 황급히 피하며 소리쳤다. “내 지금은 키가 작지만 몇년후엔 누나보다 더 클수 있어. 누나, 10년 기다려줘.” “야, 임마! 10년후엔 누난 시집가서 애 엄마가 될거다!” 명희누나는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깔깔 웃어댔다. 그렇게 내 청춘의 첫 고백은 실패로 끝났고 실련의 아품이 너무 컸지만 나는 명희누나를 포기하지 않았다. 명희누나와 나는 모두 대학에 입학하지 못했다. 명희누나는 대학시험제도가 회복되기 전에 중학교를 졸업하고 하향지식청년으로 농촌에 내려가 집체호 생활을 했기에 대학에 갈 꿈조차 꾸지 못했다. 나는 대학시험제도가 회복되던 해에 중학교를 졸압했지만 그 당시 대부분 아이들이 그랬듯이 나 또한 공부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기때문에 대학에 붙지 못했다. 그 대신 나는 3년동안 군복무를 하고 나와 백화공사에 취직했다. 군대에서 제대하던 날 나는 집에 잠간 들렀다가 곧 명희누나가 있는 집체호로 찾아갔다. 명희누나는 뜻밖에 찾아온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너 군대 갔다 오더니 진짜 사내대장부 됐구나!” 명희누나가 내 손을 잡아주고 집체호의 다른 누나들도 키 크고 잘 생긴 군대총각이 왔다고 기뻐했다. 그런데 내가 명희누나의 신랑감이라고 롱담을 했을 때 남자들쪽에서 한 형이 적의에 찬 눈길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 형이 명희누나를 짝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집으로 돌아갈 때 명희누나는 동구밖에까지 따라 나오며 나를 배웅해주었다. 작별인사를 나눌 때 나는 갑자기 명희누나의 손을 잡으며 고백했다. “이제 내가 누나보다 키도 더 컸으니 우리 진짜로 련애하자.” “창지, 너 또 그런 롱담을……” “롱담이 아니야.” 나는 일생에 두번째이자 마지막으로 명희누나의 입술에 키스를 퍼부었다. 이번에는 사춘기의 키스가 아니라 정열에 불타는 청춘의 키스였다. 뜻밖에도 명희누나는 나를 물리치지 않고 키스를 고스란히 받아들였다…… 그후 나는 명희누나의 집체호로 뻔질나게 다녔다. 우리는 집체호에서 500메터 떨어진강가의 버드나무아래를 비밀장소로 만들었고 명희누나는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해 살금살금 비밀장소로 나왔다. 어느날 명희누나는 불쑥 생뚱한 말을 했다. “창지야, 미안해.” “갑자기 미안하다니?” “내가 널 주어온 아이라고 놀려준 일이……” “다 지나간 일을 새삼스럽게. 난 다 잊었어.” 그 순간 갑자기 스치는 생각이 나서 나는 바보같은 물음을 던졌다. “날 낳아준 엄마가 왜 하필 다리밑에 날 버렸을가?” “너 바보야? 지금도 다리밑에 버렸다고 생각하는 거야?” “……” 나의 진지한 눈길에 명희누나는 깔깔 웃어댔다. “그건 어른들이 아이를 놀려주는 말투야. 어른들은 흔히 아이들이 말을 잘 듣지 않으면 ‘넌 다리밑에서 주어온 아이야’하고 놀려주는데 정말 아이를 다리밑에 버리는 부모가 있을가? 누군가의 집앞에 버리면 버렸겠지.” 그럼 나의 생모도 날 지금의 양부모가 살던 집앞에 버린 걸가? 다리밑이 아니라…… 몇년후 명희누나는 집체호생활을 결속짓고 도시로 돌아와 제지공장에 취직했다. 명희누나가 취직하자 나는 정식으로 청혼하고 부모님께 결혼의사를 밝혔다. 한족들은 녀자가 세살쯤 년상인 것을 개의치 않아서 그런지 부모님은 “명희 그 아이를 오래동안 곁에서 지켜보아서 잘 아는데 현모량처가 될수 있을 것 같다.”고 하면서 통쾌하게 동의했다. 그런데 내가 년하이고 한족이라는 리유로 명희누나의 부모님이 심하게 반대했다. 그렇게 되자 어머니는 명희누나의 부모님을 찾아가서 사정했다. “우리 창지는 비록 한족이라 하지만 조선족이나 다름없습꾸마. 말이나 습관이나 완전히 조선족입꾸마. 명희를 친딸처럼 잘 대해줄테니 우리 창지한테 줍소.” “그게 아니 될 말입꾸마. 아무리 조선말을 잘 한다고 해도 민족이 다른데……게다가 창지는 우리 명희보다 세살이나 어리지 않습둥?” 명희누나의 어머니는 손사래를 치며 반대했다. 어머니는 명희누나의 어머니한테 다시 한번 사정했다. “민족이 다르다고 결혼 못하는 게 아니꾸마. 우리 어머니도 조선족인데 한족집에 시집와서 잘 살았습꾸마. 사실 한족이라는 것도 알고 보면 여러 민족이 융합되여 하나의 민족으로 된 게꾸마. 먼 옛날에 황제를 수령으로 하는 하족(夏族)과 염제를 수령으로 하는 화족(华族)이 련맹을 맺은후 점차 하나로 융합되여 화하족(华夏族)이 되였고 후에 화하족은 장면족(藏缅族), 토화라인(吐火罗人), 동이족(东夷族), 초족(楚族), 통고사인(通古斯人), 서융(西戎), 치우(蚩尤)의 후대, 흉노족(匈奴族), 선비족(鲜卑族) 등과 융합되여 새 민족 즉 한족이 산생되였다고 합꾸마.” “창지 엄마 유식한 건 알겠는데 안 되는건 안 되는 겠꾸마!” 명희누나의 엄마가 그렇게 안 된다고 하는데도 어머니는 마지막으로 무릅까지 꿇고 사정했다. “애들이 서로 좋아하는 걸 봐서 결혼시키깁소!” 사정이 사촌보다 낫다고  하지만 명희누나의 아버지는 인정사정 봐주지 않았다. “내 딸을 한족한테 주느니 차라리 절에 출가시키겠다!” 그야말로 딸을 녀승으로 만들지언정 나한테는 시집보내지 않겠다는 비장한 결단이였다. 게다가 명희누나의 아버지는 한마디 경고를 더 붙였다. “네 놈이 다시 내 딸을 만나봐. 다리를 분질러버릴 거야!” 삭발하고 비구니가 된 명희누나와 다리가 분질러진 내 모습을 상상하니 등골이 오싹해졌다. 하지만 나는 다리가 분질러질 위험을 무릅쓰고 남몰래 명희누나를 만나서 변함없는 사랑과 확고한 의지를 보여주었으나 명희누나는 녀승이 되는 것이 두려웠던지 리별을 선언했다. 내가 아무리 매달리고 애걸복걸해도 헤여지자는 명의누나의 결심을 꺾을 수 없었다. “누나, 난 10년이고 20년이고 누나를 기다릴 거야!” 나는 터져나오는 눈물을 참으며 애타게 소리쳤으나 명희누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렸다. 그렇게 내 첫사랑은 내 가슴에 아픈 상처만 남기고 끝나버렸다. 그후 명희누나는 이사를 갔고 이듬해에 다른 남자한테 시집을 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신랑은 명희누나와 한집체호에 있던, 나를 적의에 찬 눈길로 바라보던 그 남자였다. 우리는 명실상부한 갑돌이와 갑순이의 신세가 된 것이다. 명희누나가 시집을 간 이듬해에 나도 한족처녀를 만나 장가를 갔지만 화가 나서 간 것이 아니였다. 장가간 날 첫날밤에 달을 보긴 했지만 울지는 않았다. 그저 명희누나의 얼굴이 희미하게 떠올랐을 뿐이다. 그후 세월이 살같이 흘러 내 딸도 시집을 갈 나이가 되였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내 딸, 천금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내 생명과도 같은 그 아이에게만은 세상에 둘도 없는 좋은 신랑감을 골라주려고 했지만 내 뜻대로 되지 않았다. 어느날 나와 안해가 텔레비죤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내 딸이 키가 큰 남자를 데리고 와서 결혼할 사람이라고 소개했던 것이다. 딸에게 불의의 일격을 당한 나는 한동안 놀라서 아무말도 못했다. “너 남자친구와 사귄다는 말도 없었잖아? 그런데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아니고 결혼이라니……” 안해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더욱 기가 막힌 것은 딸이 데리고 온 젊은이가 조선족이였던 것이다. 준수한 외모에 품행이 단정한 젊은이였고 경제형편도 넉넉한 편이였지만 조선족이라니? 나는 내 아픈 과거가 생각나 딸이 좋다고 하니 크게 반대를 못했지만 안해는 절대 안된다고 딱 잘라 말했다. “안돼.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전에는 안된다!” 딸도 울며불며 그 젊은이가 아니면 시집을 안 간다고 야단을 쳤다. 딸의 눈물에 마음이 약해진 나는 안해를 달랬다. “지금은 민족이 달라도 문제될 게 없잖소? 애들이 좋다는데…… 요즘은 조선족사위를 삼은 집이 적잖은 것도 현실이고……우리 단위의 서과장도 지난해에 조선족사위를 삼은 일을 당신도 알고 있잖소?” “서과장은 돼도 난 안돼요.” 안해가 아무리 반대해도 딸을 이길 수 없었다. 내 딸은 우리를 속이고 결혼등록을 하는 날로 그 젊은이와 동거했다. 그리고 그해 말에 덜컥 임신까지 했다. 배가 불러오자 안해도 하는 수 없이 고집을 꺾고 딸의 결혼식을 치르는데 동의했다. 그런데 이보다 더 놀라운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딸이 임신까지 하는 동안 안해의 반대 때문에 우리는 사돈을 만나지 못하고 있다가 결혼식을 앞두고 마주앉게 되였다. 사돈과 만나는 장소에서 안사돈을 보는 순간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안사돈이 바로 나의 첫사랑 명희누나였던 것이다. 명희누나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서로 놀라기는 했지만 그 자리에서 정체를 밝히지 않고  모르는 척 했다. 그리고 나중에 둘이 따로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명희누나는 아이까지 가진 상태에서 어른들의 문제 때문에 자식들의 결혼을 반대할 수 없다는 립장을 밝혔고 나도 생각이 복잡했지만 같은 생각이라고 의사를 표시했다. 이리하여 우리 둘이 이루지 못한 사랑을 자식들이 이루게 되였다. 결혼후 몇달만에 내 딸이 아들을 낳았고 나는 외손자를 보게 되였다. 그런데 외손자를 본 기쁨을 누려 볼 틈도 없이 안해가 말썽을 피웠다. 외손자의 호적을 올릴 때 일이 생겼다. 안해는 아이가 엄마의 성을 따르게 하고 민족도 한족으로 올려야 한다고 고집했다. 나는 허거픈 웃음을 지었다. “글쎄 우리의 욕심은 그렇지만 아이가 아버지의 성을 따르는 것은 예로부터 내려온 법이요. 따라서 민족도 아버지의 민족을 따라야 응당한 것이요.” “뭐가 응당하는 거예요? 지금 어느 시대인데 그 따위 말을 해요? 지금은 아이가 엄마의 성과 엄마의 민족을 따를 수도 있는 시대예요.” “딸은 출가외인이라는 말도 있지 않소. 말도 안되는 그런 생각은 그만두는 게 좋겠소.” 내가 딱 잘라 말했지만 안해는 한마디도 지려고 하지 않았다. “딸은 출가외인이란 말 옛말이 된지 오래예요. 우리는 자식이라곤 딸 하나밖에 없는데 외손자가 우리의 대를 잇게 해야 되잖아요?” “자식이 하나인 건 사위네도 마찬가지요. 그쪽도 대를 이어야 할 게 아니겠소?” “아이참, 당신은 누구 편이예요?” “무슨 편이 따로 있겠소? 난 누구편도 아니요. 그저 공정하게 말하는 거요. 조선족이 자꾸 줄어든다고 하지 않소? 기왕에 딸을 조선족한테 시집보냈으니 외손자를 조선족으로 올려 조선족을 한명이라도 보태 게 하자구. 우리 한족은 세계에서 인구가 제일 많은 민족이 아니요? 그만큼 여유가 있기에 배포를 부려도 되잖겠소?” 내가 짐짓 배를 쑥 내밀었으나 안해는 어림없는 소리라는 듯 손사래까지 쳤다. “인도인구가 중국인구를 거의 따라 오는데 우리가 방심해서야 되겠어요?” “허허참, 조선족은 중국인구가 아니요? 그리고 인도의 주류민족인 힌두스탄족은 인도인구의 72%정도밖에 안 되지만 한족은 중국인구의 92%나 되오. 이러니 세계 최대의 민족답게 배를 쑥 내밀어도 될게 아니겠소?” 내가 아무리 구구절절이 설득을 해도 안해한테 내 말은 소귀에 경읽기였다. 안해는 사돈집에 찾아가서 수십가지 리유를 대면서 외손자의 호적을 한족으로 올려야 한다고 한바탕 야단을 치며 목소리를 높였지만 사돈집에서 양보하지 않고 딸까지 시집편을 따르겠다고 하는 판에 독불장군이라 손을 들고 말았다.    외손자의 호적문제 때문에 소란이 있은후 우리 집에는 또 약간의 소란이 일어났다. 집에 도둑이 들었던 것이다. 도둑은 집이 빈틈을 타서 좌물쇠를 부수고 침입해 서랍과 궤에서 현금과 보자기를 훔쳐갔다. 내가 외출했다가 집에 돌아왔을 때 어머니는 땅을 치며 울어댔다. “창지야, 도둑이 보자기를 훔쳐갔다. 보자기를……” 나는 어머니가 그렇게 슬프게 우는 것을 처음 보았다. 어머니는 내 손을 꼭 잡고 연신 “미안하다, 미안하다.”고 했다. “어머니, 보자기에 무슨 귀중한 물품이라도 들었습니까?” 어머니는 울면서 머리를 끄덕이였다. 나는 보자기에 무엇이 들었는지 물어보지 않고 “어머니, 제가 돈을 많이 벌어서 드릴테니 울지 마십시오.”하고 위안했다. 웬 일인지 그날밤에 나는 나의 생모가 갓난아기를 버리는 꿈을 꾸었다. 그후 며칠동안 고요한 밤에 자리에 누우면 내가 누구일가, 하는 생각에 잠을 들 수 없었다. 생모는 왜 나를 버렸을가? 그리고 처녀를 임신시킨 나쁜 생부는 어떤 낯짝일가? 나는 몇번이나 양부모한테 물어볼가 하다가 그만두고 사처에 수소문하여 왕아줌마를 찾았다. 며칠만에 나의 생모가 나를 버리는 것을 목격했다는 바로 그 왕아줌마를 찾는데 성공했고 그날로 왕아줌마를 만났다. 이 때의 왕아줌마는 이미 주름살이 밭고랑처럼 깊게 패인 백발의 왕할머니가 되여있었다. “절 알아보시겠습니까?” “누군데?” 왕아줌마는 나를 찬찬히 뜯어보더니 모르겠다는 듯 머리를 가로저었다. “쉬창지입니다. 내 친엄마가 날 버리는 걸 할머니가 보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오, 자네구먼. 개구쟁이 자네를 본 것이 어제같았는데. 참, 세월이 사람을 이처럼 늙게 만드는구먼.” 왕아줌마는 지난일을 떠올리며 감회에 젖어있었지만 나는 그런 기분이 아니였다. “내 생모는 어떤 사람이였습니까? 왜 나를 버렸답니까? 아는대로 다 얘기해주십시오.” 내가 무턱대고 질문을 던지자 왕아줌마는 당황해하다가 후, 하고 탄식했다. “자네 여태껏 그 아픈 걸 가슴에 품고 살았구먼. 나도 사실 자네 생모에 대해 아는 게 얼마 없네. 그저 새파랗게 젊은 녀자가 갓난 아기를 자네 양부모네 집 문앞에 버리는 걸 보았을 뿐이네. 그때 이상하여 뒤를 밟았더니 영국더기에 있는 어떤 초가집으로 들어가더구먼. 그래서 이웃들에게 물어보니 이웃들도 그 녀자가 금방 이사해와서 잘 모른다더구먼. 누군가 그 녀자는 처녀인데 아이를 낳았다더구먼. 무슨 사정이 있는 것 같았네. 그후 자네의 양부모와 같이 가보니 그 녀자는 어디론가 가버리고 없었네. 동네사람들도 그 녀자가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고 했네. 내가 아는 건 이뿐이네.” 이만한 단서를 가지고 생모를 찾는다는 건 하늘의 별따기일 것이 분명했다. 나는 생모를 찾는 것을 포기하고 가장 알고 싶은 한마디를 물었다. “내 진짜 성은 뭔지 아십니까? 내 생모는 한족이였습니까?” “글세. 자네를 버렸을 때 보자기가 하나 있었는데 아마 그 안에 자네 출생을 증명할만한 글쪽지 같은게 있었을 거네. 아마도 한족집 문앞에 버린 걸 보아선 한족일 것 같기도 하지만 그 녀자가 조선말을 류창하게 하는 걸 보았다는 사람도 있네. 뭐 자네처럼 한족이 조선말을 잘 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그런데 자네 생모는 자네 양부모가 결혼한지 6년이 되도록 아이가 없다는 걸 알고 그 집 문앞에 아이를 버린 것 같네. 그러고 보니 한족일 수도 있고 조선족일 수도 있겠는데……” 모든 것이 애매했다. 나는 보자기를 도둑맞은 일이 떠올랐다. 왕아줌마가 말한 보자기가 그 보자기일가? 그래서 어머니가 그렇게 슬프게 울었구나. 집에 돌아간 나는 집 구석구석을 샅샅이 뒤지면서 보자기를 찾아보았지만 결국 헛물만 켜고 말았다. 도둑맞은 보자기가 그 보자기임에 틀림없었다. 보자기가 없어졌으니 내 출생의 비밀에 대해서도 알수 없었다. 양부모한테 묻고 싶었지만 그들이 마음이 상할가봐 입을 열지 못했다. 내가 보자기를 찾던 그해 나의 양아버지가 사망되였다. 이제 양아버지가 사망됐으니 양어머니에게 물어보는 길밖에 없었다. 그러나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차차 물어보자, 하고 내 출생의 비밀에 대해 묻는 일을 뒤로 미루었다. 그리고 그해 한국으로 돈벌이를 나갔다. 3년이 지나후 엄마의 병세가 위급하다는 전화를 받고 나는 급급히 귀국했다. 내가 도착했을 때 엄마는 림종을 앞두고 있었다. 엄마는 나의 손을 꼭 잡고 무슨 말을 했지만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수 없었다. 나는 엄마가 영원히 건강할줄 알았다. 그래서 오래전부터 어머니에게 꼭 묻고 싶었던 말이 있었지만 마음속에 넣어두고 있었다. 이 시각 나는 그 말을 묻지 않을수 없었다. “어머니, 제가 입양아입니까? 어떤 처녀가 낳아서 버린 아이를 어머니가 안아다가 키우신 겁니까?” 엄마는 맥없는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간신히 머리를 끄덕였다. 나는 다시 가장 묻고 싶었던 물음을 다그쳤다. “어머니, 제가 한족입니까? 조선족입니까?” 엄마는 멍하니 나를 바라보기만 할뿐 미동도 하지 않았다. 나는 엄마가 말로 의사를 표시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물었다. “어머니, 제가 한족입니까?” 나는 엄마가 머리를 끄덕이거나 가로젖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나는 엄마의 대답을 들을수 없었다. 엄마는 그 순간 숨을 거두었던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한족인가? 조선족인가? 이는 영원히 알수 없는 비밀로 되였다.      연변문학 2019년 6월호             
371    [단편] 할 일이 있습니까? (김희수) 댓글:  조회:1265  추천:0  2020-09-03
단편소설   할 일이 있습니까?   김희수     사람들이 다 출근했거나 일하러 나간 후의 도시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노라면 나처럼 할 일이 없이 빈둥빈둥 놀기만 하는 백수들이 수없이 많은 것을 발견하게 된다. 야근하는 사람들과 퇴직한 사람들을 제외하더라도 할 일이 없는 20대, 30대, 40대, 50대들이 자신의 취미에 따라 공원, 숲속, 놀이터, 강가, 낚시터, 장기판, 오락방, PC방, 마작방 등에 몰려드는 광경을 볼 수 있다. 이들은 직업이 없거나 잠시 일자리를 그만두고 노는 백수들이다. 어느날부터인가 나는 오전 9시부터 오토바이를 타고 이 도시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다가 나 같은 백수가 이처럼 많은 것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그날은 오토바이를 집에 버려두고 발길이 닿는대로 걸어가는데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선생님, 할 일이 있습니까?” 머리를 들고 말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아서야 나는 내가 수무그룹앞을 갓 지나 로무일군들이 쭉 늘어서 하루의 일거리를 기다리고 있는 인력시장까지 온 것을 발견했다. 거기엔 숱한 남녀 로무일군들이 서서 한담을 하면서 일손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나타나서 자신들을 불러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 로무일군중에 조선족이 매우 적었기에 나는 조선말이 들리자 신기한 눈길로 말소리가 나는 쪽에 시선을 돌렸다. “선생님, 할 일이 있습니까?” 내 또래의 40대 아줌마가 내 앞까지 다가오며 재차 물었다. 그러자 한패인 듯한 세명의 녀인이 뒤따라 나를 둘러쌌다. 나는 시간이 많고 심심하던 차라 장난기가 동하여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고 말꼬투리를 잡았다. “난 선생님이 아닙니다. 선생이라고 부르지 마십시오.” “아이참, 학생을 가르쳐야 선생님입니까? 선생님, 할 일이……” 나한테 말을 건 아줌마가 얼굴이 반반하고 말소리가 부드러운데다가 하도 인상이 좋았기에 나는 긴 대화를 나누어볼 생각으로 정면 대답을 회피하려고 말허리를 잘랐다. “그래도 난 선생이라고 불리울 자격이 없습니다.” 내가 하도 사양하니까 예쁜 아줌마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초면에 만난 낯선 분인데 뭐라고 부르겠습니까? 손님이라고 부르자니 제가 뭐 손님을 접대하는 영업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우리 집을 찾아 온 손님도 아니지 않습니까? 한국사람들처럼 아저씨라고 부르자니 어쩐지 부자연스럽고 당신이라고 부르자니 남편을 부르는 것 같고 그 쪽이라고 부르자니 례절이 없는 것 같고……” 예쁜 아줌마가 재미있게 얘기하자 나도 신바람이 났다. “정말 그렇기도 합니다. 한족들처럼 니디 워디 하면 간단할텐데요.” “그렇기도 하군요. 여하튼 선생님, 할 일이 있습니까?”   “할 일이요? 아참, 할 일이야 있다면 있고 없다면 없지요.” 내가 능글능글 웃자 예쁜 아줌마는 약간 짜증이 난 듯이 목청을 높였다. “도대체 있단 말입니까? 없단 말입니까?” “지금은 할 일이 없어서 여기에 와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좀 지나면 할 일이 있을지도 모르지요. 마작판에서 ‘한 사람이 모자란다(三缺一)’라는 전화가 오면 만리장성을 쌓을 일이 생길 수 있고 술상에서 ‘한잔 하자’라는 전화가 오면 거나하게 마실 일이 생길 수도 있지요.” “아니, 제 말은 선생님이 할 일이 아니라 제가 할 일이 있는가 하는 겁니다.” “그럼 응당 ‘시킬 일이 있습니까?’라거나 ‘일손을 요구합니까?’라고 물어야죠.” “아이, 뭐 신문에 내겠습니까? 문법까지 따지며 말꼬투리 잡습니까? ‘할 일이 있습니까?’라고  물어도 사람들이 다 알아듣는데 말입니다.” 예쁜 아줌마는 화를 내는 듯 했지만 말소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이럴 때는 웃는 얼굴을 보여줘야 한다. “허허허, 내가 지금 할 일이 없어서 심심하고 또 아주머니도 여기 서서 심심해 하는 것 같아 얘기거리를 만들자구 그런 겁니다. 화 났다면 죄송합니다.” 예쁜 아줌마와 함께 나를 둘러싼 세 녀인은 모두 조선족이였다. 그중 둘은 50대로 보이고 하나는 30대 후반이 아니면 40대 초반으로 보였다. 50대 녀인중 하나는 뚱뚱했고 다른 하나는 마른편이였다. 그리고 어려보이는 녀인은 넷중 키가 제일 컸다. 50대의 두 녀인이 일을 시키러 온 사람이 아니니 대꾸를 하지 말라고 눈짓했지만 예쁜 아줌마는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고용주를 기다리기 심심했던지 내 기대대로 긴 대화를 이어갔다. “뭐, 화까지야. 아까 마작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나도 이전엔 마작미치광이였슴다. 그런데 마작을 오래 놀아보니 돈을 잃는 건 물론 건강까지 나쁘게 됐슴다. 소변을 억지로 참느라 방광염에 걸렸고 오래 앉아있으니 허리통증이 생겼슴다. 그리고 술얘기도 나왔지만 술도 마찬가짐다. 나도 한때 애주가였는데 간이고 위고 다 나빠져서 지금은 술을 끊었슴다.” “그래도 마작, 술, 담배가 3대 아편인 걸 어떻게 합니까? 마누라 없이 살아도 마작, 술, 담배가 없으면 못산다고 하지 않습니까?” “에그그, 남자들은 마누라가 다 달아나야 정신을 차리겠는지.” 뚱뚱한 녀인이 우리의 대화에 끼여들었다. 뚱뚱한 녀인이 예쁜 아줌마를 보고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분이 우리 이쁜이에게 반했구나.” 마른 녀인도 맞장구를 쳤다. “하기야 우리 이쁜이 보고 일을 시키는 고용주들이 많기도 하지비.” “거야 두말하면 잔소리죠. 내 요 미모에 반하지 않으면 남자가 아니죠.” 예쁜 아줌마는 두 녀인의 칭찬에 부끄러워하기는 커녕 한술 더 떠서 자화자찬했다. 그녀는 대화하는 동안에도 누가 일을 시키러 오는 사람이 있나 해서 거리쪽을 살려보군 했다. 나는 미안한 생각이 들어서 말했다. “내가 쓸데없는 말을 많이 했는데 정말 미안합니다. 미안한 김에 아줌마에게 일을 시킬가 합니다.” 그러자 예쁜 아줌마의 눈이 반짝 하고 빛났다. “무슨 일입니까? 시키는 일은 뭐든지 다 하겠습니다.” 예쁜 아줌마의 말에 나는 또 장난기가 동했다. “정말로 시키는 일은 뭐든지 다 할수 있겠습니까?” “네. 선생님이 상상하는 그런 일은 말구요.” “내가 상상하는게 어떤 건데요?” “아이참, 남자들은 다 엉큼하지 않습니까?” 예쁜 아줌마가 백이든 흑이든 남자들은 다 씨잡아 욕하는 것을 보고 나는 웃으며 대꾸했다. “남자들은 다 엉큼하지만 마음속파와 행동파 두 가지 부류가 있지요.” “마음속파는 뭐고 행동파는 또 뭡니까?” “엉큼한 생각을 마음속에 품고만 있는 남자들을 마음속파라고 하고 그런 생각을 행동에 옮기는 남자들을 행동파라고 하지요. 나는 대부분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마음속파랍니다. 그러니 난 무슨 상상같은 걸 할지는 몰라도 행동에 옮기지는 않습니다. 그저 내가 시킬 일만 생각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구요. 무슨 일인가요? 저에게 시킬 일이……” “갑시다. 가보면 알게 아닙니까?” “무슨 일인지 말해야 알죠. 값도 흥정해야 하고……” “일당은 최고로 쳐주겠습니다. 그런데 정말 무슨 일이든 다 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다짐을 받 듯이 다시 웃으며 묻자 예쁜 아줌마는 곱게 눈을 흘겼다. “아니, 선생님두 참, 그런게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면 아무리 힘든 일이라도 다 하겠다는 말입니다. 다른 사람을 해치지 않고 법을 어기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내가 오늘 시킬 일도 사람을 해치지 않고 법을 어기지 않는 일입니다. 그리고 도구도 필요없이 맨 주먹으로 가면 됩니다.” “그럼 좋습니다. 갑시다!” 아줌마가 나를 따라 나서자 곁의 세 녀인도 함께 따라왔다. 나는 급히 세 녀인을 막아섰다. “내가 시킬 일은 이 아줌마가 혼자서 해도 얼마든지 되는 일입니다. 다른 사람은 필요없습니다.” “우리 네 사람은 일할 때 항상 함께 뭉쳐다니는 한패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떨어질 수 없습니다.” 세 녀인이 기어코 따라 오겠다고 하자 나는 하는 수 없이 넷 모두 데리고 나섰다. 내가 앞장서 걷는데 예쁜 아줌마가 따라오며 내 어깨를 툭 쳤다. “무슨 일을 시키는지는 몰라도 택시를 타야지 않겠습니까? 지금 10시가 다 됐는데 이렇게 걸어서 어느 시간에 일하겠습니까?” “안심하십시오. 하루 일당을 다 쳐준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걸어가는 것도 일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뭐가 그리 신비합니까? 선생님이 사기군이 아닌지 모르겠네요.” “허허, 내가 일당을 주지 않으면 넷이서 함께 날 파출소로 끌고 가십시오.” 나는 네 녀인을 데리고 공원으로 들어가 한바퀴 돌아다녔다. 그리고 그녀들을 데리고 공원정자에 나란히 앉았다. “우리를 여기로 데리고 와서 무슨 일을 시키겠다는 겁니까?” 예쁜 아줌마가 답답하다는 듯 물었다.    나는 전화를 거는 척하다가 대답했다. “여기서 친구를 기다리는 중입니다. 이제 친구가 오면 일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네 녀인은 의심하는 눈빛이였으나 더 묻지 않고 저들끼리 횡설수설했다. “정말 오래만에 공원에 와 보는구나. 무슨 일이 그리 바쁜지 한 시내에 있는 공원도 와볼 시간이 없었네.” 뚱뚱한 녀인이 비탄조로 내뱉자 마른 녀인이 동감을 표시했다. “그러게 말이우. 그런데 여기 와 보니까 할 일이 없이 노는 사람들이 어째 이리 많은지 모르겠소.” “지금은 취업 하기 힘들어 노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소. 우리 아들은 대학을 졸업한지 이티가 되는데 취직을 못했다니까.” “하긴 제 조카도 마찬가짐다. 중점대학을 졸업하고도 취직을 못해 한국에 나가 막벌이를 한다잖아요.” 예쁜 아줌마도 한마디 했다. 셋이서 계속 한담을 했지만 키 큰 녀인만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뚱뚱한 녀인이 키 큰 녀인의 어깨를 툭 쳤다. “막내가 좀 얘기해보우. 그래 남편이 집에서 논다더니 일자리를 얻었소?” “리혼했습니다.” “뭐?!” 세 녀인이 모두 놀란 소리를 질렀다. 키 큰 녀인은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처녀때 그 사람의 달콤한 말재주에 넘어가 결혼했더니 일하기 싫어하는 건달일줄 어찌 알았겠습니까? 처음에는 어느 소구역의 경비원이였는데 술 처먹고 돼지처럼 쿨쿨 자는 사이에 도난사건이 생겨서 그날로 일자리에서 쫓겨났죠. 그래서 나같이 로무를 하자고 말했더니 힘든 일은 못하겠다 하고 청소하는 일을 소개 시켜줬더니 아는 사람을 만나 창피하다고 하루만에 일을 그만뒀죠. 환자를 간병하는 일을 소개시켜줬더니 사내대장부가 어찌 남의 대소변을 받아내겠는가 하면서 거절했죠. 그러다가 한국에 나갔는데 처음에는 돈을 좀 벌었다고 소식을 보내오더니 그 돈을 다른 녀자에게 다 써버리고 빚까지 지고 돌아왔어요. 그래서 화김에 리혼하고 말았어요.” 나도 이따금씩 녀인들의 말에 끼여들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점심때가 되자 녀인들이 친구가 왜 아직도 오지 않느냐, 빨리 전화하라고 재촉했다. 나는 웃으면서 먼저 점심이나 먹고 보자면서 녀인들을 조선족맛집으로 데리고 갔다. 녀인들은 나같은 고용주는 처음 본다고 하면서 의심하는 눈길로 나를 바라보면서도 체면 차리지 않고 맛있고 비싼 음식을 시켜 먹었다. 나는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많이 들라고 권했다. 녀인들은 힘든 일을 해서인지 그 많은 음식을 게눈 감추듯 다 먹어버렸다. 뚱뚱한 녀인은 잘 먹었다고 하면서 트림까지 했다. 식사가 끝나자 녀인들은 또 빨리 일을 시켜달라고 재촉했다. 나는 할 일이 많지 않아 천천히 해도 된다고 했으나 녀인들은 빨리 끝내자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맛집에서 나오자 나는 이 골목 저 골목 돌다가 녀인들을 데리고 조선족커피집으로 들어갔다. 녀인들은 일당을 근심하지 말라는 나의 말에 미심쩍어 하면서도 따라 들어왔다. 녀인들은 아메리카노커피를 청했고 나는 아이스커피를 마셨다. 녀인들은 커피를 마시는 동안에도 쉴새없이 입을 놀려댔다. 뚱뚱한 녀인이 새로 온 손님에게 커피를 따라주는 접대원아가씨를 바라보더니 우리한테 물었다. “아까 맛집에서도 그렇고 여기 커피집에서도 그렇고 다들 이상한 걸 발견하지 못했소?” “이상한 거라니?” 마른 녀인과 키 큰 녀인이 어리둥절해 하는데 예쁜 아줌마가 눈을 깜빡거리더니 히죽 웃었다. “아까 맛집과 여기 커피집이 모두 조선족집인데 접대원은 모두 한족인게 이상하다는 거죠?” “그래 맞아.” 뚱뚱한 녀인이 예쁜 아줌마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내밀었다. “우리 이쁜이 언제 봐도 똑똑하다니까!” “얘를 칭찬하지 마오. 자꾸 춰주니까 우리 머리우에 올라앉으려고 하는 게 아니겠소?” “내 언니들 머리우에 올라앉기야 쉽지요뭐. 그런데 막내 머리우에 올라앉기는 힘들죠. 막내가 너무 키가 커서……” 예쁜 아줌마의 말에 나이 많은 두 녀인이 한바탕 웃어댓다. 여태껏 잠자코 있던 키 큰 녀인이 아까 화제를 다시 이어갔다. “지금 간판은 조선족집이지만 한족들이 하는 영업집이 많죠. 이게 다 조선족들이 관내나 한국에 많이 나가서 그렇죠. 지금 조선족들은 힘든 일, 더러운 일은 다 그만두고 한국에 나갔지만 거기서도 더 힘든 일, 더러운 일을 하고 있어요. 여기선 조선족들의 빈자리를 한족들이 다 차지하고 있고요. 우리가 하는 로무일도 우리 패와 숙자네 패 말고는 조선족이 없잖아요?” 예쁜 아줌마도 한숨을 내쉬였다. “그건 그렇슴다. 정말 여기서 일자리를 찾자면 많은데 다들 한국에 나가자고 하죠. 사실 나도 한국에 나가고 싶은데 아이를 공부시켜야 하기에 지금은 안돼요. 앞으로 아이를 대학에 보내놓고 한국에 나갈 예정이예요.” 나는 여기서도 일자리가 많다고 하면서도 한국에 가겠다고 하는 예쁜 아줌마를 보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한참 얘기를 하던 중 예쁜 아줌마가 갑자기 생각난 듯 또 나를 보고 재촉했다. “우리한테 무슨 일을 시켜려고 그러는지는 몰라도 빨리 일 좀 합시다.” 다른 세 녀인도 독촉했다. “우린 커피같은 걸 마시며 한가하게 보낼 사람이 아니니 빨리 일을 시켜주십시오.” “좋습니다. 솔직하게 말하겠습니다.” 내가 정색하자 네 녀인은 무슨 중요한 발표라도 기다리 듯 조용히 입을 다물고 나만 바라보았다. 나는 에헴, 하고 기침소리를 내면서 말을 이었다. “사실 난 한국에 나가 돈을 좀 벌어왔지만 지금은 할 일이 없어 빈둥빈둥 노는 백수입니다. 마누라가 지금도 한국에 나가 있고 나는 아이를 공부시킨다는 핑계로 밤낮 스마트폰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스마트폰 중독자로 되였답니다. 앉아서도 스마트폰, 누워서도 스마트폰, 서서도 스마트폰, 길을 걸어가는 동안에도 스파트폰에서 눈을 떼지 않았답니다. 하루종일 손에서 스마트폰을 놓지 않고 계속 들여다 보았지요. 사람들은 또 나같은 사람을 일러 수그리족(低头族)이라고도 하지요. 나는 언제나 스마트폰 2개, 보조배터리(充电宝), 이어폰 등을 휴대하고 다니죠.” “그래서?” “밤낮 스마트폰에 너무 몰입했더니 목과 허리가 아프고 잠이 오지 않을 뿐만아니라 우울증, 불안, 공포 등 증상이 나타나서 미칠지경이였습니다.” “적당히 좀 하지. 그래서?” “그래서 병원치료를 받았으나 낫지 않아 심리상담사를 찾아갔더니 주로 산책을 많이 하고 타인과 대화를 많이 하라고 해서 오늘 녀사분들을 고용해 대화를 나눈 것입니다. 녀사분들은 오늘 할 일을 다 완성했으니 이제 일당을 드리겠습니다.” 내가 일당을 넉넉하게 드리자 녀인들은 일도 하지 않고 돈을 받아 미안하다고 했다. “아닙니다. 내가 녀사분들과 대화하면서 스마트폰중독에서 벗어나는데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특히 예쁜 아줌마와 대화를 나눠 오늘 즐거웠습니다.” 내가 악수를 청하자 예쁜 아줌마는 내 손을 잡아 흔들며 곱게 눈을 흘겼다. “우리 녀자들도 이렇게 아무 일이나 다 하는데 선생님이 그렇게 할 일이 없어서야 되겠습니까?” 그 이튿날도 나는 발길이 닿는대로 걸어가면서 생각에 잠겼다. 나도 할 일이 있어야 하겠는데. 무슨 일을 찾아할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 걸어가는 누군가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할 일이 있습니까?” 귀에 익은 목소리여서 바라보니 어제 만났던 예쁜 아줌마였다. 그제야 나는 내가 또 수무그룹 앞을 지나 인력시장 앞에 서 있음을 발견했다. 그런데 예쁜 아줌마가 말을 건 사람은 내가 아니라 방금 자가용에서 내린 어떤 신사였다. 나는 황급히 그 자리를 떠났지만 예쁜 아줌마가 했던 말이 자꾸만 귀전을 때렸다. “할 일이 있습니까?”   2019년 9월 20일 연변일보 해란강부간 발표.  
370    고국도 모르고 모국도 모른다 댓글:  조회:2476  추천:6  2020-06-14
고국도 모르고 모국도 모른다   김희수   어느 조선족 사이트에서 “고국도 아니고 모국도 아니다”라는 어이 없는 글을 보게 되였다. 아래 이 글의 내용을 요약한다.   두 단어의 정확한 의미를 알기 위해 한국의 《표준국어대사전》을 찾아봤다. 모국: 1. 자기가 태여난 나라. 흔히 외국에 나가있는 사람이 자기 나라를 가리킬 때에 쓰는 말. 2. 따로 떨어져나간 나라에서 그 본국을 이르는 말. 고국: 주로 남의 나라에 있는 사람이 자신의 조상 때부터 살던 나라를 이르는 말. 사전해석이 알려주듯이 현재 중국에서 중국국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한국을 “모국”이라고 사용하는 건 옳지 않은 사용법이다. 한국이 일부 이민 1세의 모국이였겠지만 3대 4대에 걸치는 우리가 태여난 나라는 아니다. “고국”이라고 사용하는 건 더더욱 삼가해야 할 것 같다. 사전에 보면 “남의 나라에 있는 사람이…”라고 해석을 하고 있다. 즉 한국을 “고국”이라고 하면 스스로 지금 살고 있는 나라를 “남의 나라”로 인정하는 셈이 된다. 스스로를 이방인으로 만들고 있는 자세이다.   글은 사전해석을 근거로 조선족에게 한국은 고국도 아니고 모국도 아니라고 성급하게 판단하고 있다. 우선 바이두(百度) 백과의 해석을 보자. 모국: 문화상의 조국을 가리키는 말이다. 즉 다른 나라의 국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자신의 조상이 세세대대로 살던 나라를 이르는 말이다. 상술한 해석에 따르면 중국조선족은 한국을 모국이라고 부를 수 있다. 화교들이 미국국적을 가졌든 유럽국적을 가졌든 모두 중국을 자신의 조국, 모국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리고 모국에 대한 《표준국어대사전》의 해석을 다시 보자. 모국: 주로 남의 나라에 있는 사람이 자신의 조상 때부터 살던 나라를 이르는 말. “고국도 아니고 모국도 아니다”라는 글의 작자는 이 해석을 근거로 “중국조선족은 중국국적을 가졌기에 남의 나라에 사는 사람이 아니다. 고로 조상 때부터 살던 나라 한국을 고국이라고 부를수 없다”고 판단하고 있는데 상술한 사전해석에서 맨 앞에 “주로”란 말이 있다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그러니까 “주로 남의 나라에 있는 사람이”지 이런 경우가 아닐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중국국적을 가진 조선족도 “자신의 조상 때부터 살던 나라”인 조선이나 한국을 고국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조선이나 한국을 “모국”, “고국”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스스로 지금 살고 있는 중국을 “남의 나라”로 인정하는 셈이 되는 것이 아니다. 더구나 스스로를 이방인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는 자신이 속한 민족에 대한 사랑의 표현일뿐. 전 세계의 화교들은 자신이 어느 나라의 국적을 가졌든간에 모두 중국을 자신의 조국, 모국이라고 부르고 자신을 염황자손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고국도 아니고 모국도 아니다”라는 글의 작자는 조선족더러 우리의 조상이 세세대대로 살던 나라를 “모국”, ‘고국”이라고 부르지 말란다. 우리 민족더러 조상도 모르는 인간망종으로 되라고 하니 이 얼마나 어이없는 일인가?!      
369    40년후 우리는 열아홉살이 되였다 댓글:  조회:1575  추천:0  2020-06-14
40년 후 우리는 열아홉살이 되였다 —룡정1중 79년졸업생 40주년 동창모임 기념수필     수필   40년후 우리는 열아홉살이 되였다   김희수   우리는 살면서 여러가지 모임에 참석하게 된다. 가족모임, 창립모임, 친목모임, 연구모임, 독서모임, 친구모임, 동호회모임, 향우회모임, 기부모임, 봉사자모임, 협회모임, 회식모임, 총화모임, 송년회모임 등 별의별 모임이 다 있고 모임마다 모두 뜻이 깊겠지만 그 중에서 가장 사람의 마음을 격동시키는 모임이 바로 동창생모임이라고 생각된다. 동창생은 동년배이고 한 교실에서 함께 공부하고 운동장에서 함께 뛰놀던 잊지 못할 추억을 공유하고 있기에 만나면 더욱 반갑다. 특히 40년만에 다시 만났다면 그 감격과 반가움은 더 이를데없을 것이다. 지난 7월 18일이 바로 그런 날이였다. 그날 오전에 우리는 유서깊은 룡정에 모여 룡정1중 79년 졸업생 40주년 동창모임을 가졌다. 보고 싶던 얼굴들을 만나 반갑게 인사하면서 그 때 그 시절을 추억하는 순간 우리는 비록 이순의 나이에 이르렀지만 40년전 학창시절로 되돌아가 열아홉살, 스무살이 되였다. 40년동안 살아온 경력은 서로 다르지만 공동한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우리는 40년이란 시간을 뚝 떼여버리고 격정의 학창시절로 되돌아가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첫눈에 알아보는 이들도 있고 몰라보는 이들도 있었지만 알아보든 몰라보든 다들 악수하며 반가운 인사가 오갔다. 모임의 첫 행사는 모교를 찾아가 기념사진을 찍기였다. 졸업사진을 찍은지 어제같은데 어느덧 4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우리는 40년전에 졸업사진을 남긴 모교를 배경으로 다시 한번 우리의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소중한 추억으로 남게 될 기념사진을 찍었다. 40년이란 세월도 우리의 마음속에 고이 간직된 학창시절의 추억을 변하게 하지 못했다. 한 교실에서 함께 공부하고 학교밭에서 함께 로동하던 그 시간들은 우리의 추억속에 변함없이 남아있다. 오래 된 기억은 점차 잊혀진다고 하지만 학창시절의 추억만은 40년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이 우리들의 기억속에 남아 다시 어제일처럼 새록새록 떠오른다. 우리는 문화대혁명이 갓 일어나던 시기에 유치원에 다녔거나 소학교에 갓 입학한 세대들이였다. 비록 졸업을 2년 앞두고 대학입학시험제도가 회복되기는 했지만 공부보다 로동을 더 중시해온 시절에 학교 다닌 세대들이였다. 소학교 때부터 5월 말, 6월초면 모내기, 여름이면 김매기, 가을이면 벼가을 하기, 싸리나무 하기, 대채전 만들기, 겨울방학이면 거름모으기 등 1년 사시절 해보지 않은 로동이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우리는 교실에서 함께 공부하던 추억외에 함께 로동하던 잊지 못할 추억까지 간직하고 있는 특수한 세대들이였다. 그리고 지금 아이들처럼 공부에 목을 매지 않았기에 딱지치기, 유리구슬치기, 땅따먹기, 살구씨따먹기, 돌차기, 공기놀이, 고무줄놀이, 실뜨기 등 놀이를 마음껏 놀았던 동년의 유쾌한 추억까지 간직하고 있는 유감없는 세대들이였다. 이런 격정의 나날을 함께 해온 우리들이였기에 그 추억이 더욱 소중하고 감미롭다. 그립던 동창들을 만나 아름다운 추억을 함께 나눌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크나큰 행복이다. 그리고 이런 동창모임에서 다시 소중하고 아름다운 추억을 남긴다는 것 또한 크나큰 행복일 것이다. 우리는 이 소중한 모임의 순간을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기기 위해 자체 가무공연프로와 게임, 오락프로를 마련했다. 우리가 이번 79년 졸업생 40주년 동창모임을 위해 마련한 다채로운 가무공연은 룡정 해란강호텔에서 막을 올렸다.   그립던 동창들아 다정히 모여앉아 지나간 학창시절 추억을 하면서 다시 만난 오늘의 기쁨을 이 술잔에 담아보자    이번 모임에 참석한 동창생 모두가 무대에 올라가 부른 대합창 “동창원무곡”에 이어 학창시절부터 음악과 예슬을 지향하고 있던 동창생들이 독창, 독무, 독주, 3인조 또는 다인조로 나와 장끼를 자랑했다. 관중이나 공연자가 따로 없었다. 우리가 관중이고 우리가 가수, 무용가였다. 가무단이 울고 갈 프로 못지 않은 우리의 공연은 시종 즐거운 웃음과 박수소리 속에서 진행되였다. 공연이 끝나자 우리는 이번 모임을 위해 물심량면으로 후원해준 동창들과 이번 행사를 위해 로고를 아끼지 않은 준비위원회 동창들을 위해 잔을 들고 나서 이미 저 세상으로 가버린 동창들을 간단히 추모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건강이 최고임을 절감하면서 오찬을 마친 후 우리 일행은 다음 행사장인 동성용진 인화촌에 자리잡은 해란강민속촌을 찾아갔다. 그날 오후 비가 많이 내렸지만 우리의 게임놀이를 막지는 못했다. 남녀가 배합해 고무풍선터치우기, 수건으로 눈을 감싸고 동그라미안에 트럼프장 던지기, 남녀가 함께 주머니속에 하반신을 넣고 달리기…… 우리는 다시 열아홉살, 스무살이 되여 우리의 열정을 불태웠다. 모두가 웃고 떠들며 즐겁게 뛰논 흥겨운 한마당이였다. 비속에서의 신나는 놀이가 끝나자 풍성한 만찬을 마주한 우리는 이번 행사의 원만한 성공을 위해 다시 축배를 들었지만 그래도 성에 차지 않아 우등불오락놀이에 돌진했다. 우등불을 밝히고 흥겨운 곡조에 맞추어 춤추기는 다른 관광객들까지 흡인했다. 어린아이들로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구경하던 관광객 모두 우리의 대오에 가입해 손에 손잡고 빙빙 돌면서 덩실덩실 춤을 춘다.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 그 모닥불과 함께 우리의 제2의 청춘도 불탔다. 우등불놀이가 끝나자 다시 차려지는 술상, 술자리가 무르익자 40년전에는 못하던 이야기들도 오간다. 누가 누구를 짝사랑했다는 이야기, 누구와 누구는 비밀련애를 했다는 이야기를 서슴없이 터놓는다. 그렇게 담소를 나누면서 그 때 그 시절의 아련한 추억을 더듬는다. 당시 남자들 이름 마지막 자에는 “호”가 많이 들어갔고 녀자들 이름 마지막 자에는 “자”가 많이 들어갔다. 그래서 영호야, 경호야, 응호야 하고 부르면 장난꾸러기 사내애가 떠오르고 순자야, 길자야, 정자야 하고 부르면 얌전한 녀자애가 떠오른다. 장난꾸러기 누구는 사장님이 되였고 얌전둥이 누구는 원장님이 되였다. 그런 달콤한 추억을 잠재우고 날이 밝자 우리는 아침운동을 하고 조찬을 먹은 후 저만침 떨어져 있는 해란강반 온천수락원으로 향했다. 초로의 신사숙녀들은 따뜻한 온천수에 몸을 담그었다가 시원한 수영장에 뛰여들기도 했다. 수영에 능한 이들은 수영복 그대로 물에 뛰여들고 수영에 서툰 이들은 구명조끼를 입고 물놀이에 동참했다. 우리는 재미있는 물놀이를 추억으로 남기고 나서 다시 룡정으로 향했다. 모교에서 멀지 않은 동방랭면집에서 그동안 즐거웠던 순간들을 회상하며 40주년 행사는 아름다운 력사의 한페지를 기록해 놓고 아쉬운 막을 내렸다. 졸업 40주년을 계기로 더욱 많은 교류와 더욱 진한 우정이 쌓이고 나아가서는 50주년, 60주년 행사 때 더 많은 동창생들이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만나기를 약속하며 우리는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다시 만나자, 동창들아! 오늘의 이 추억을 소중히 간직하자! 인류 력사에 40년은 짧디 짧은 시간이지만 우리 인생에 40년은 기나긴 시간이다. 그러기에 40년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 아니다. 사고나 병으로 40년도 못 살고 가버린 이들도 적지 않으니까. 하지만 백세인생에 40년은 두번 반이나 올수 있는 시간이다. 지금 우리가 이순의 나이 다 되여 40년전의 스무살을 담소하지만 이제 다시 40년이 지난후 백세가 되여 오늘의 이순을 담소하는 이들이 우리 중에 있으리라고 단언한다. 그때 가면 그분들이 지금의 우리가 얼마나 잊지 못할 소중하고 아름다운 추억을 남겼으며 얼마나 멋지게, 얼마나 진지하게, 얼마나 리얼하게 60인생을 담론했는지를 후대들에게 전해주리라 믿는다.     2019년 8월 2일 금요일 연변일보 해간강부간 제1679기 6면에 실렸음.                     
368    대약진시대에 벌어진 황당한 일들 댓글:  조회:5916  추천:0  2017-05-21
대약진시대에 벌어진 황당한 일들   중공중앙정치국은 1958년 8월에 북대하에서 확대회의를 열었다. 회의후에 중국은 “영국을 따라잡고 미국을 초과한다”는 구호를 내걸고 전민이 강철을 제련하는(全民炼钢)운동과 농촌인민공사화운동을 시작했다. 그 시기의 대약진운동에서 별의별 기이한 일들이 다 발생되였다. 《염황춘추》 2006년 제8기에 실린 리개원이 쓴 글을 보면 대약진기간중에 많은 간부들은 기층에 내려가서 선전하고 공산주의인민공사의 아름다운 미래를 묘사했다. 당시 국무원의 한 부총리는 하남성 수평현에서 아주 구체적으로 연설했다. 그는 인민공사의 좋은 점을 다음과 같이 얘기했다: “첫째, 좋은 먹을거리는 배만 채우는것이 아닙니다. 매끼에 돼지고기, 닭고기, 물고기, 닭알이 있을것이며 더욱 멋진 음식도 있을것입니다. 례를 들면 원숭이머리, 제비집(燕窝), 해산물 등도 필요한만큼 공급합니다. 둘째, 옷을 입는것도 모두 원하는대로 만족시켜 드립니다. 하나같이 검은색이나 푸른색이 아닌 각종 색갈과 모양의 옷이 있습니다. 멀리 않은 장래에는 보통옷은 그냥 업무복으로 사용하고 퇴근하면 사람들은 가죽옷, 나일론옷, 양털옷으로 갈아입을것입니다. 인민공사는 모두 여우를 키워서 여우가죽옷을 만들어입을것입니다. 셋째, 집은 현대도시의 기준에 맞춥니다. 현대화가 무엇입니까? 인민공사입니다. 집의 북쪽에는 난방설비를 하고 남쪽에는 랭방설비를 합니다 .사람들은 모두 높은 건물에 사는것은 더 말할것도 없고 안에는 전등, 전화, 상수도, 무선전화와 텔레비죤이 있을것입니다. 넷째, 달리기선수를 제외하고는 려행객이나 행인들이 모두 교통수단을 가지게 될것입니다. 항공로선도 각방향으로 다 다닐것이고 모든 성에는 비행장을 만들고 모든 지방에 비행기공장이 세워질 날도 멀지 않았습니다. 다섯재, 모든 사람은 고등교육을 받을것입니다. 교육은 이미 보급되였습니다.” 당시 중앙정치국 후보위원이던 강생은 “공산주의는 천당이고 인민공사는 교량”이라고 허튼소리를 치기도 했다. 먼저 인민공사라는 교량을 세운후 다리를 넘어가면 바로 공산주의라는것이였다. 하북성 서수현에서는 인민공사대식당을 건설하자는 기치를 높이 들고 먼저 “밥먹는것은 무상”이라는 구호를 내걸었다. 전현에 6.4만여호의 주민호와 32만명의 인구, 248개의 농업합작사가 있었다. 대약진기간중에 전현에 모두 1777개의 공공식당을 만들어 28.5만명이 식당에서 밥을 먹었다. 이렇게 전현의 식당화를 실현했다. 서로 다른 업무, 임무의 필요에 따르기 위하여 이외에 야외전투군인식당 1410개, 유아식당 119개, 로년식당 248개도 내왔다. 가가호호 모두 쌓아두었던 량식을 무상으로 식당에 헌납했다. 나중에 인민공사라는 이 교량은 900만평방킬로메터의 중국대지 곳곳에 세워졌다. 공공식당도 전국각지에 생겨났다. 그러나 좋은 시절은 오래 가지 못했다. 인민들이 다리를 건너가고 나서 보게 된것은 꿈에 그리던 천당과는 완전히 상반된 광경이였다. 원숭이머리, 제비집료리, 해산물은 고사하고 멀건 죽마저도 먹을수 없게 된것이다. 대약진은 전방위적으로 시작되였다. 교육도 례외가 아니였다. 새로운 공장은 학교를 둘수 있다. 중학생을 모집해서 여기서 공부한다. 한 공장이 바로 하나의 대학이다. 하루에 몇시간은 공부하고 몇시간은 일한다. 공장이 바로 학교이고 학교가 바로 공장이다. 나중에 졸업하면 대학을 졸업한 동시에 기술자가 되는것이다. 이것도 공산주의로 가는 하나의 조건이였다. 하남성 방성현 성관진에는 모두 1.1만명 인구가 있었는데 몇개월내에 종합홍전대학, 위생학교, 희극학원, 음악학원, 무도학원, 사범 등 9개의 전문학교가 설립되였다. 각종 공농대학, 홍전대학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1958년 7월부터 10월까지 대약진기간동안 강생은 중앙문교소조(中央文教小组) 부조장의 신분으로 북경과 하남성의 일부학교를 시찰하면서 “교육혁명”의 진행상황을 파악했다. 북경사범대학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사범대학은 두가지 임무가 있습니다. 하나는 학교를 운영하는것이고 하나는 공장을 운영하는것입니다. 모든 반은 공장을 하나씩 운영해야 합니다. 학교는 소학교, 중학교에서 대학교까지 해야 합니다.” 1958년에는 이런 일하고 공부하는 학교를 적어도 100개를 만들려고 하였는데 설립할 상황이 되는지 안되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강생은 농업생산에서도 “사람이 얼마나 대담하게 하는지에 따라 땅은 그만큼 생산해준다”고 했었는데 설마 교육도 “사람이 얼마나 대담하게 하는지에 따라 학교도 얼마든지 설립할수 있다”는것인가? 교수를 평가하는데 있어서 강생은 “대약진”중에 아주 황당한 견해를 밝힌바 있다. 그는 북경농업대학을 시찰할 때 명확하게 지시했다: “학교는 최소한 학교, 공장, 농장, 연구소, 농업국 5개의 간판을 내걸어야 한다. 만일 10여개의 간판을 내걸수 있으면 더 좋다. 교수는 심는 작물의 생산량에 따라 급을 평가해야 한다. 무당 1000근을 생산하면 5급교수이다. 2000근이면 4급교수, 3000근이면 3급교수, 4000근이면 2급교수, 5000근이면 1급교수이다.” 1958년 8월 4일에 하북성 서수현 당위서기는 시찰을 내려온 중앙수장에게 이렇게 보고했다: “금년의 전현 평균무당생산량은 2000근에 달했습니다. 총생산량은 12억근입니다.” 이외에 그는 또 허풍을 떨어 “1개의 배추가 520근이고 보리는 무당 12만근이며 면화는 무당 5000근을 생산합니다”라고 보고했다. 중앙수장이 이렇게 물었다: “그렇게 많은 량식을 거두었습니까? 당신들의 전체 현이 31만명인데 어떻게 그렇게 많은 량식을 다 먹을수 있겠습니까? 당신들은 량식이 너무 많으면 어떻게 합니까?” “량식이 많으면 기계와 바꿉니다.” “기계와 바꿔도 다 안되면 어떻게 합니까? 당신들의 량식이 남아돌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기계와 바꾸지 않으려고 하면 어떻게 합니까?” “그러면 우리는 산약(山药)으로 알콜을 만듭니다.” “모든 현마다 알콜을 만들면 그렇게 많은 알콜을 어디에 쓰려고?” “우리는 그저 어떻게 하면 더 많은 량식을 얻을지만 생각하고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먹어치울지는 생각하지 않고있습니다. 사실 량식이 많으면 좋지 않습니까? 많아서 국가가 필요없다고 하고 아무도 필요없다고 하면 인민공사사원들끼리 많이 먹으면 됩니다. 하루에 다섯끼도 먹을수 있습니다.” “전인민이 강철을 제련하라”는것은 대약진의 핵심이였다. 1958년 1월 하순에 북경에서 개최된 최고국무회의에서 이렇게 제안했다: “15년후에 4000만톤의 강철, 5억톤의 석탄, 4000만킬로와트의 전기를 만들어야 한다.” 이때로부터 보수사상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1958년 6월 21일에는 야금부가 대약진의 사상지도에 따라 중앙에 보고했다. 1959년의 강철생산량은 3000만톤을 초과할수 있고 1962년에는 8000~9000만톤에 이를수 있다고 보고했다. 이 보고서는 전국에 돌려지면서 선전되였다. 중공중앙은 그해 8월 17일부터 30일까지 북대하에서 거행된 정치국확대회의에서 “전당전민이 1070만톤강철생산을 위하여 분투할것을 호소함”이라는 문건을 채택했다. 전인민의 강철제련은 불꽃처럼 전국으로 번져갔다. 심지어 중남해의 안에도 작은 고로(小土炉)를 가설했다. 농촌이나 도시나 할것없이 모든 곳에서 작은 고로를 가설하고 강철생산을 시작했다. 국가기관의 마당, 공장, 학교, 거리에는 모두 강철제련의 열기가 뿜어져나왔다. 북경, 상해 등 11개도시의 18개 대학에서만 매년 69.2만톤의 강철을 제련할수 있었는데 이는 1949년 전국강철생산량의 4.38배였다. 제남시의 중학교에서는 1주일내에 77개의 소형고로를 만들었다. 할빈시의 19중학교에서는 10명의 대원이 5일만에 강철제련기술을 익혔고 하루만에 작은 공장을 지었다. 그리고 하루반나절만에 강철제련설비를 가설했으며 전교의 지원하에 3일만에 3000여근의 페철을 만들어냈다. 이리하여 “소년위성강철제련공장”이 생긴것이다. 1958년 7월중순에 첫번째 쇠물이 녹아져나왔다. 이 작은 공장의 년간생산품은 1800대의 뜨락또르부속품으로 사용되였다. 어린아이들이 10여일만에 야금기술자가 되다니 어찌 기적이 아니겠는가? 그 시기에는 누구나 강철을 제련할수 있었다. 어느 시의 중산로에는 10여명의 가정주부가 맨손으로 일어나서 기술도 모르고 재료도 없는데 그날로 소형고로를 만들었고 그날로 강철을 만들어냈다. 의과대학부속병원의 의사, 간호사들은 환자를 돌보지 않고 병원내에서 고로를 만들고 철강을 만들어냈다. 이런 가지가지 황당한 일들이 대약진시기에 일어났다. 리성적으로 보면 이런것들은 모두 말도 안되는 일이였지만 당시에는 이런 거짓말이 횡행했다. 아마도 거짓말도 백번을 중복하면 진리로 바뀌나보다.  
367    미녀라면 사족을 못쓴 조조 댓글:  조회:6292  추천:2  2017-03-19
미녀라면 사족을 못쓴 조조     조조(155~220년)는 미녀라면 사족을 못쓰는 위인이여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손에 넣지 않고는 배기지 못했다. 출신성분도 가리지 않았다. 창기든 유부녀든 눈에 들기만 하면 방법을 대여 손에 넣고야 말았다. 후일 조비를 낳아 황후가 된 변부인은 창기출신이였지만 그녀의 미모에 반한 조조는 그녀의 신분이 천하다고 해서 꺼리지 않고 부인으로 맞아들였다. 두부인의 경우는 더욱 한심했다. 그녀는 남편이 멀쩡히 두눈을 펀히 뜨고 살아있는 유부녀였다. 류비가 조조와 함께 하비성에서 려포를 포위했을 때의 일이였다. 하루는 관우가 조조를 찾아왔다. 조조는 느닷없이 찾아온 관우를 의아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러자 관우는 조조를 보고 낮은 소리로 부탁했다. “려포의 부장중에 진의록이라는 자가 있는데 이제 우리가 이겨 성이 함락되면 그의 처를 나에게 주십시오.” “허허, 이제보니 운장도 어지간히 녀색을 밝히는구려. 그러지요.” 조조는 흔쾌히 허락했다. 그런데 성이 곧 함락되려고 하자 관우가 몇번 더 찾아와서 “진의록의 처를 꼭 나한테 줘야 합니다”라고 다짐을 받았다. 조조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진의록의 처가 어떤 미인이기에 저 관우라는 사내를 이토록 애태우게 했을가? 려포가 항복하고 성이 함락되자 조조는 장난삼아 먼저 진의록의 처를 데려오게 했다. 보니 대단한 미인이였다. 그녀가 다른 사람의 처였고 관우가 달라고 부탁했지만 그녀의 뛰여난 미모에 반한 조조는 다른것을 고려할 겨를이 없었다. 진의록의 처라고 하지만 미인은 전리품이니까 승자가 가지는것은 당연하지. 비록 관우가 먼저 탐내서 달라고 했지만 내 마음을 설례이게 한 미인을 어찌 그에게 내줄수 있겠는가? 먼저 차지한게 임자지! 그래서 조조는 그녀를 자신의 첩으로 삼았다. 후일 조조의 비빈이 된 두부인이 바로 그녀였다. 조조는 두부인을 꽤나 사랑했었던것 같다. 두씨가 조조의 첩이 되였을 때 이미 진의록과의 사이에서 낳은 진랑이라는 아들이 하나 있었다. 조조는 진랑을 아들처럼 궁에서 키우며 심히 예뻐했다. 매번 손님들을 맞을 때마다 무릎에 앉히고는 이렇게 말하군 했다. “세상에 나처럼 의붓자식을 친아들처럼 사랑하는 사람이 또 있을가?” 한편 련모했던 녀인을 빼앗긴 관우는 깊은 원한을 품었다. 후일 관우가 조조의 후한 대우에도 불구하고 끝내 그에게 심복하지 않은 까닭이 여기에 있다. 세상에 사랑하는 녀인을 빼앗아간 사람의 밑에서 일하고싶은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관우는 간적 조조를 도모해 중원을 되찾고 한나라 황실을 회복하겠다고 거창한 구호를 내걸었다. 하지만 그것은 꿈에 지나지 않았다. 조조는 미녀를 좋아한 덕분에 무려 25명이나 되는 아들과 6명의 딸을 얻을수 있었지만 그 과정에서 평생의 원한을 사기도 하고 목숨을 잃을번하기도 했다. 진의록의 처 두부인을 빼앗았다가 관우에게 한을 품게 했던 일도 조조에게 교훈이 되지 않았다. 장제가 죽자 과부된 추씨를 슬쩍 취했다가 거의 죽을번했던 적도 있었다. 표기장군 장제는 홍농에 주둔하고있을 때 사졸들이 굶주려서 남쪽의 성을 공격하던중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 죽고말았다. 장제의 부인 추씨는 장제의 조카인 장수에게 의지했다. 조조가 남정할 때에 군대가 육수에 이르자 장수가 무리를 이끌고 항복하였다. 그때 과부 추씨를 본 조조는 첫눈에 반하여 그날밤으로 그녀를 품었다. 조조가 자신의 숙모를 건드린것을 알게 된 장수는 치욕을 느끼고 조조에게 원한을 품었다. 조조는 그것을 알고 몰래 장수를 죽이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계책이 새여나가 장수가 조조를 엄습하였다. 장수는 조조가 추씨에게 빠져 음탕한 놀이를 하는 틈을 타서 기습공격을 감행했다. 그 싸움에서 전위가 조조를 지키다가 죽고 조조는 뒤문으로 달아났다. 도망칠 때 조조의 조카 조안민이 란도질 당해 죽었다. 조조의 맏아들 조앙도 조조를 구하자마자 장수의 군사들의 손에 죽고말았다. 조조의 맏아들 조앙은 유부인의 소생이였다. 그러나 유부인이 일찍 죽었기에 정실부인인 정부인이 조앙을 맡아 키웠다. 자식이 없었던 정부인은 조앙을 친자식처럼 정성껏 키웠다. 정부인은 조조가 장수의 숙모와 염문을 뿌렸다가 조앙을 죽게 하고 홀로 살아 돌아온것에 몹시 분개했다. 그녀는 조조를 볼 때마다 늘 이렇게 바가지를 긁군 했다. “내 아들을 데려가 죽이고는 혼자 살아 돌아오다니 어찌 그럴수가 있습니까!?” 조조는 이 말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몹시 괴로왔다. 그런 잔소리에 견딜수 없었던 조조는 정부인을 친정으로 돌려보냈다. 정부인이 기가 좀 꺾이면 다시 데려올 생각이였다. 정부인은 조조와의 화해를 거부하고 돌아오려고 하지 않았다. 조조가 직접 정부인의 친정집으로 찾아갔을 때 정부인은 베틀에 앉아 베를 짜고있었다. 조조는 정부인의 등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면서 달랬다. “나를 좀 보아서 함께 집에 돌아갑시다!” 정부인은 고개를 돌리지도 않았다. 조조는 발길을 돌려 나가다가 문지방에 서서 다시 말을 걸었다. “정말로 헤여지자는것이요?” 아무 대답이 없자 조조는 하는수 없이 관계를 끊었다. 정부인은 남은 여생을 길쌈을 해서 자급했다. 조조는 정부인을 쫓은것이 끝내 마음에 걸렸었던 모양이였다. 나중에 병이 깊어져 스스로 다시 일어날수 없게 되였을 때 조조는 깊이 탄식했다. “내가 평생에 뜻대로 살았지만 크게 마음에 빚진 일이 없었다. 다만 내가 죽어서 저 세상에 가서 맏아들 조앙을 만났을 때 그 애가 ‘저의 어머니는 어디에 계십니까?’라고 묻는다면 내가 장차 뭐라 대답해야 할가?!” 조조는 처음부터 반역을 꿈꾸었던 적이 없었다. 그는 죽는날까지 한나라의 충신으로 남기를 원했던 사람이였다. 그의 꿈은 자신이 죽었을 때 묘비명에 “한나라 고 정서장군(征西将军) 조후지묘(曹侯之墓)”라고 쓰이기를 소망했다. 단지 시대가 그를 한나라를 빼앗은 역적으로 만들었을뿐이다. 조조가 적벽대전에서 패하고 돌아오자 한나라 조정에서는 새로운 여론이 일어났다. 조조는 이미 큰 공을 이뤘으니 이제 2선으로 후퇴해야 한다고…그동안 조조의 위력과 업적에 눌려 잠잠하던 한나라황실과 문벌이 높은 조정대신들의 합작품이였다. 헌제는 조조의 공적을 기린다는 명목으로 3개의 현을 식읍으로 내려주었고 문벌이 높은 조정대신들은 패전으로 한 날개가 꺾인 조조에게 이제 할만큼 했으니 군국의 대권을 내놓고 초야로 돌아가라고 은근히 압력을 가했다. 이에 대해 조조는 자신의 뜻을 분명하고 솔직하게 밝혔다. “만약 국가에 내가 없다면 얼마나 많은 자들이 황제를 칭할지, 또 얼마나 많은 자들이 왕을 칭할지 모른다. 제군들은 내가 곧 병권을 넘겨주고 국사를 맡아 다스리는 일에서 물러나 무평후국(武平侯國)으로 귀향하기를 바라고있다. 이는 실질적으로 불가능하다. 어째서인가? 진실로 내가 병권을 놓게 되면 다른 사람들에게 화를 당할것이 두렵기때문이다. 또 내 몸이 패망하는 즉시 국가가 위태로운 지경에 빠질것이므로 허명을 사모하여 실질적인 화를 부르는것을 옳다고 할수 없으니 그렇게 할수는 없다.” 여기서 “차라리 내가 세상을 저버릴지언정 세상이 나를 저버리지 못하게 하겠다”라는 조조의 립장이 잘 표현되여있다. 조조가 주공과 같은 성현처럼 후세사람들에게 추앙을 받기를 원했었더라면 이때 조정의 의론에 따라 군국의 대권을 반납했어야 했다. 그러나 조조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조조가 군국의 대권을 내놓고 고향으로 돌아갔다면 그 자신과 가족의 생명안전을 결코 보장받지 못했을것이다. 또 시대적상황으로 볼 때 조조가 아니더라도 다른 실력자가 결국은 한나라를 패망시키고 황제의 지위를 빼앗았을것이다. 한나라는 이미 스스로 멸망한 상태였기때문이였다. 한나라는 국가의 가장 기본적인 기능인 국가안정보장과 질서유지에 철저히 실패함으로써 백성들의 생존자체를 위협에 빠뜨렸다. 조조에게 국가의 모든 권력이 집중된것은 이러한 혼란상황을 극복하려고 동분서주한 결과였을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조가 어떻게 권력을 내놓고 초야로 돌아갈수 있단말인가? 이런 리유로 조조는 희대의 “악당”이요 “역적”이 되였다. 그러나 인민의 삶을 도탄에 빠뜨린 한나라의 황실을 부흥하겠다고 해야만 정의의 편이라고 할수 있을가? 《삼국연의》에서는 조조를 역적이라고 욕했지만 력사학자들은 조조를 영웅이라고 재평가했다.    
366    모택동은 왜서 대약진착오를 승인했는가? 댓글:  조회:5659  추천:0  2017-02-19
모택동은 왜서 대약진착오를 승인했는가?     1960년 여름이 되여 모택동은 압력을 느꼈다. 그는 자신이 창도한 “대약진”과 인민공사운동중에서 일부 일처리방법과 구호에 대해 확신이 없었고 동요하기 시작했다. 지금의 젊은이들은 상상할수도 없지만 1959년 봄에 중남해의 중앙지도자들의 집에는 비서가 지도자들에게 식량분량을 자보받아 그 표준대로 공급하는 일이 벌어졌다. 당시 국가에서는 매개 도시인구에 규정된 배급식량을 최저한도로 감소하고 량식배급에 대해 저표준분량으로 정할것을 요구했으며 남새로 량식을 대체하게 했다. 당시에 몸이 웅장한 모택동이 자보한 정량은 매달 26근이였고 류소기가 18근, 주은래가 24근, 주덕이 26근이였다. 이 정황이 중앙의 각 당지부와 당소조에 알려진후 모두들 중앙고위급지도자들의 식량표준이 너무 낮다고 인정하면서 적어도 절대 대부분 남성간부들의 식량표준(28근)과 같아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중앙지도자들은 모두 만족된다고 하면서 변동하지 말라고 견지했다. 그리하여 그들이 자보한 분량만큼 그들에게 량표(粮票)를 발급했다. 이런 국면은 하루 아침에 조성된것이 아니였다. 1958년부터 “대약진”을 시작하면서 1959년에 모택동은 또 착오적인 려산회의에서의 투쟁을 발동했다. 그번의 “반우경”운동은 극좌사조가 늘어나게 만들어 짧디짧은 3년내에 국민경제가 엄중하게 불균형을 이루었고 전국적으로 량식이 대폭 줄어들었으며 삼림이 엄중하게 파괴되였을뿐만아니라 농민들이 기아에 시달렸고 질병이 련이어 발생했다. 그 시기 굶어죽고 질병에 죽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모택동은 백성들이 기아에 시달리고 굶어죽는다는 소식을 들은후 근심걱정으로 애가 타서 안절부절못했다. 1960년 6월 14일부터 18일까지 중공중앙에서는 상해에서 정치국확대회의를 열고 경제문제와 국제문제에 대해 토론했다. 회의의 마지막날에 모택동은 두시간에 거쳐 《10년총결》을 써냈다. 말이 10년총결이 사실은 주요하게 3년동안의 대약진총결이였다. 그날 오후의 페막식에서 모택동은 3년보충계획지표와 《10년총결》에 대해 연설했다. 모택동은 《10년총결》에서 자아비판을 했다. “나 자신도 많은 착오가 있었습니다. 어떤것은 당사자와 함께 범한것입니다.” 모택동은 고지표는 결심하고 고쳐야 합니다. 고쳐야만 완전히 주동을 쟁취할수 있습니다. 주동권은 극히 중요한 일입니다.” 모택동은 또 사회주의시기의 혁명과 건설에 있어서 매우 큰 맹목성이 있었고 인식하지 못한것이 있었다고 승인했다. 그는 “우리는 아직도 그에 대해 심각하게 인식하지 못하고있는데 두번째 10년기간에 조사연구하여 그에 대한 고유의 규률를 찾아내야 하며 그 규률을 리용하여 사회주의혁명과 건설을 위해 복무해야 한다”고 말했다. 《10년총결》은 모택동이 처음이자 유일하게 계통적으로 3년동안의 대약진을 총결한 문장이였고 또 그 자신이 처음으로 “대약진”과 인민공사운동중에서 착오가 있었다는것을 승인한 중요문헌이였다. 하지만 당시의 정황에서 모택동은 지도사상상의 “좌”적인 착오를 인식하지 못했고 또 인식할수도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쏘련에서 재중전문가를 전부 철수시키는 엄중한 문제가 발생되였다. 당시 중국을 도와주려고 온 쏘련전문가는 모두 1300명이 있었는데 경제, 국방, 문교, 과학연구 등 200여개 기업과 부문에 분포되여있었다. 그들이 전부 철수하면 중국의 일부 중대한 설계항목과 과학연구항목이 중도에서 중단하게 되고 일부 시공중에 있는 건설항목도 중지하게 되며 일부 실험생산에 들어간 공장과 광산도 기한내에 생산에 들어가지 못하게 된다. 이는 곤경에 처한 중국경제에 설상가상이 아닐수 없었다. 1960년 7월 31일에 모택동의 주최하에 주은래는 회의에서 쏘련전문가들이 철수한 문제와 외교무역문제에 대해 보고했다. 후르쑈브가 고압정책을 쓰며 핍박하자 모두 허리띠를 졸라매고 빚을 물어야 한다고 했다. 모택동은 묵묵히 줄담배만 피우다가 마지막에 “명년내로 빚을 다 갚읍시다”라고 말했다. 회의의 마지막날에 모태동은 1시간동안의 강화를 했는데 국내문제에 대해 말하다가 갑자기 량식생산을 틀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모택동은 전답관리를 잘하고 가을걷이, 가을곡식심기를 잘하며 량식을 많이 심고 량식을 많이 생산하라고 지시했다. 백성은 식량을 생존의 근본으로 여긴다고 먹는 문제가 첫째였다. 농촌인민공사가 급히 “공산주의”로 과도한다는 바람이 부는 정황에 대해 “생산자료는 각각 인민공사, 생산대대, 생산대 3급에 속하고 생산대로 기초로 한다”는 정책은 적어도 5년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5년후에 다시 말합시다. 꼭 개인소유제부분이 있어야 하고 사원들에게 약간의 자류지를 주어야 합니다. ‘대집체, 소자유’는 1958년 무창회의결의때 제기한것인데 이 점을 꼭 명심해야 합니다. 오늘 내가 한 말은 나 개인의 의견이 아니고 우리가 과거에 공동을 결정한것입니다. 그리고 중앙에서 지시한것인데 오늘 내가 다시 한번 중복한것입니다.” 모택동이 이런 정책을 재차 천명한것은 당의 농촌정책이 앞으로 새로운 조정이 있게 된다는것을 예시했다. 세심한 사람들은 모택동이 회의에서 한마디말밖에 하지 않았다는것에 주의를 돌렸을것이다. 북대하에서 회의를 하는 한달남짓한 기간에 모택동이 바다에 들어가 수영을 한 차수는 5~6번밖에 되지 않았는데 이는 이왕에 매우 드문 일이였다. 과연 모택동의 심정은 매우 무거웠다. 그는 늘 혼자서 오래동안 쏘파에 앉아서 침묵을 지키군 했다. 잠도 잘 자지 못했다. 국제상에서 쏘련 등 방면에서 압력을 가하고 국내에서는 당초 예상하지 못했던 수습하기 어려운 경제국면이 나타났다. 1960년 10월에 들어선후 일부 농촌에서 사람이 굶어죽는 엄중한 사건이 갈수록 많아지고있다는 정황이 모택동한테까지 반영되였다. 그 정도로 문제가 엄중한것을 보고 몹시 놀란 모택동은 다시 국내문제에 정력을 집중했다. 1961년 1월 14일부터 18일까지 열린 중공중앙 8기 9중전회에서 리부춘은 “국민경제가 3년의 대약진을 거치면서 새로운 불균형과 새로운 문제가 나타났다”고 하면서 “1961년부터 2~3년내에 조정, 공고, 충실, 제고의 방침을 실행해야 한다”고 했다. 회의에서는 이 《의견》을 통과했고 회의공보중에 정식으로 전당화 전국인민에게 선포했다. 1961년부터 국민경제에 대해 “조정, 공고, 충실, 제고”의 8자방침을 실행한다. 그 주요내요은 농업을 대대적으로 회복하고 국민경제의 집중통일관리를 가강하며 종업원과 성진인구를 감소하며 시장공급을 안정, 조절하는것이다. 중앙에서 1960년 11월에 《농촌인민공사의 현정책문제에 관한 긴급지시》를 내보낸후 1961년 3월과 5월을 선후로 광주와 북경에서 사업회의를 열고 《농촌인민공사사업조례(초안)》에 대해 토론하고 수정했다. 전국 농촌에서 《긴급지시편지》와 《농촌인민공사사업조례(초안)》의 기본정신을 시행하는것은 생산대대를 기본핵산단위로 하는 3급소유제를 다시 천명한것이다. 이는 현계단 농촌인민공사의 기본제도이다. 동시에 배상정책을 견결히 실행하고 량식수매를 감소하며 농민부담을 경감할것을 요구했다. 또 농부산품수매가격을 제고하고 적당한 매매정책을 규정하며 각항각업에서 농업에 대한 지원을 가강하라고 했다. 그리고 중앙에서는 최근 2~3년내에 반드시 경제관리대권을 더욱 많이 중앙과 중앙국에 집중하고 1958년이래의 지방주의와 분산주의를 반대하기로 결정했다. 동시에 종업원인수와 비농업인구를 줄이고 1961년에 각각 960만과 1000만 두가지 지표를 완성할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사회집단구매력을 강력하게 줄이고 일상용공업제품과 수공업제품을 회복, 발전시키고 18가지 종류의 기본생활필수품가격을 안정시키는 동시에 부분적 소비품에 대해 고가를 실행하고 류통경로를 증가하기로 했다. 상술한 조정조치의 정식시행은 엄중한 경제곤난국면을 호전시키는데 적극적인 작용을 했다. 게다가 자연재해까지 감소되여 농업생산에서 호전의 조짐이 보였다. 1961년의 량식산량은 전해에 비해 2.6% 증가해 도시주민의 최저생활수요를 기본적으로 보장했다. 몇년간의 간고한 노력을 거쳐 당시 엄중하게 균형을 잃었던 국민경제가 기본상 회복되기 시작하였고 인민의 생활도 어느 정도 개선되였다. 특히 농민, 로동자, 도시인구지표를 조정하는 동시에 공산당은 지식분자와 여러 정치파벌과의 관계를 조정하였다. 비록 이런 노력은 좌경사상이 지도하는 당시의 정황에서 전면적으로 철처하게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지만 공화국의 령수와 인민군중이 동고동락하고 함께 환난을 겪으면서 견뎌온 시대였다.          
365    쏘련군에 참패해 흑할자도를 잃어버린 장학량 댓글:  조회:5724  추천:1  2017-02-12
쏘련군에 참패해 흑할자도를 잃어버린 장학량     1929년 7월에 중쏘간에 중동철로권익의 귀속문제때문에 무장충돌을 초래한 《중동로사건》이 폭발되였다. 전투는 주요하게 중국의 만주리와 자라이눠얼(扎赉诺尔)지역에서 벌어졌다. 그해 7월부터 11월까지 크고 작은 전투가 수십차 벌어졌다. 처음에 중국동북정부가 중동철로의 전보와 전화를 되찾고 쏘련인들을 본국에 돌려보내려고 하면서 쏘련군과 동북군의 무장충돌이 일어났고 잇달아 전쟁으로 번졌다. 처음에 전쟁에서 승리의 단맛을 보던 동북군은 11월에 들어서자 대패를 당했다. 쏘련군이 선후로 자라이눠얼, 만주리, 하이라얼(海拉尔)을 점령했다. 동북군은 2000여명이 사망되고 7000명이 포로되였다. 쏘련측의 통계에 따르면 쏘련군은 143명이 사망되고 4명이 실종되였으며 665명이 부상을 당했다. 1929년 5월 27일에 할빈특구 경무처장 미춘림은 쏘련이 할빈령사관에서 원동당원해회를 연다는 비밀정보를 접수했다. 장학량은 비밀전보를 보내 할빈특구 장관 장경혜에게 군대와 경찰을 파견해 할빈주재 쏘련령사관을 수색해 총령사를 붙잡으라고 명령했다. 동시에 중동철로쏘련종업원련합회를 봉인하고 중동로 쏘련측의 정, 부 국장의 직무를 중지시켰다. 5월 29일에 장경혜는 또 명령을 내려 할빈, 치치할, 하이라얼 등지의 쏘련령사관을 봉쇄해버렸다. 5월 31일에 쏘련정부는 중국 남경정부에 항의를 제출하면서 할빈령사관의 체로인원을 석방할것을 요구했다. 동시에 쏘련은 변경지구에 병력을 증강해 외교교섭이 실패하면 무력으로 해결할 준비를 했다. 《5. 27사건》의 폭발은 《중동로사건》의 도화선으로 되였다. 장학량이 28살에 발동한 《중동로사건》으로 하여 중국지도에서 닭의 볏인 흑룡강과 우쑤리강사이의 흑할자도(黑瞎子岛)를 쏘련군이 점령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로원수(老帅) 장작림이 1928년 6월에 일본군의 음모에 의해 렬차폭발로 사망된후 젊은 원수(少帅) 장학량이 동북3성 보안 총사령직을 맡았다. 얼마후 장학량은 국민정부에 의해 륙해공군 부사령으로 임명되였다. 그 시기에 그는 28살의 혈기왕성한 청년이였다. 장학량은 이 전쟁을 통해 쏘련군의 수중에 있는 철로권, 전화권, 전보권을 모두 찾아서 중국의것으로 만들려고 했다. 그때는 레닌이 10월혁명승리후에 전세계에 향해 “제정로씨야가 중국에서 빼앗은 땅을 전부 중국에 돌려주겠다”고 선포한지 10년이 지났을 때였다. 그러나 이미 쓰딸린시기가 된 쏘련은 1689년 9월 7일(강희 28년 7월 14일)에 《네르친스크조약(尼布楚条约)》을 체결할 때 중국에 속하는 령토라고 확인했던 이 땅에서 동청철로, 전화, 전보, 광산, 삼림 등의 권리를 행사했다. 1928년 6월에 국민정부가 통일된후 외교부장을 담임했던 왕정정은 남경에서 불평등조약수정을 중심으로 하는 “혁명외교”를 발동했다. 통일을 옹호했던 장학량은  이런 형세에 고무되여 쏘련측에 땅을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1990년 봄에 장학량은 당덕강앞에서 구술할 때 “내가 로씨야사람과 싸운것은 자신을 과대평가한것이였습니다”라고 말했다. 당시 혈기왕성했던 장학량은 세인들에게 본때를 보여주고싶었던것이다. 장학량은 1929년 7월부터 시작해 중동철로의 쏘련인을 쫓아냈고 할빈시내의 쏘련기구를 차압했다. 그해 7월 18일에 쏘련은 중국과 외교관계를 단절한다고 선포했다. 그와 동시에 길림의 중쏘변경에 쏘련군이 집결하기 시작했다. 이 싸움에서 중국군은 처음에 승세를 보였다. 중국의 만주리와 자라이눠얼지역에서 1929년 7월부터 11월초까지 동북군은 충분한 준비가 있었기에 적지않은 승리를 거두었다. 쏘련도 이 전쟁은 져서는 안될 전쟁이라는것을 알고있었다. 그리하여 쏘련은 지휘관을 가륜(加伦)으로 바꾸었다. 가륜은 중국명이고 본명은 바실리 콘스탄티노비치 블류헤르(瓦西里·康斯坦丁诺维奇·布柳赫尔)였다. “원동군의 령혼”이라고 불리우는 가륜이 온후 동북군은 한개 려가 전멸되는 처참한 참패를 맛보았다. 가륜은 장개석이 령도하는 국민혁명군군사총고문을 맡은적이 있었고 중국대혁명과 북벌에도 참가했으며 중국공산당이 발동한 남창봉기도 지도했다. 쏘로국내전쟁시기에 장군으로 성장한 그는 한개 보병사로 대량의 땅크, 장갑차와 같은 장비를 갖춘 기계화부대 자위군을 보기좋게 쳐부신 기적을 창조하기도 했다. 그는 1935년에 쏘련에서 처음 군사계급을 수여한 5대원수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1938년 11월 9일에 스탈린의 숙청명단에 들어 일본간첩이라는 루명을 쓰고 비밀리에 처형되였다가 1956년에 억울한 루명을 벗었다. 동북군의 장비가 중국에서 두번째에 가라면 서럽다고 할 정도였지만 쏘련군과 비할수는 없었다. 쏘련군함이 40발의 포탄을 발사할 때 상업선박을 개장한 동북해군은 한발의 포탄밖에 발사하지 못했다. 한광제려장이 지휘한 제17려는 전군이 전멸했고 량충갑려장이 지휘한 제15려는 만주리에서 전부 포로되였다. 하이라얼을 잃은후 할빈과 흑할자도도 쏘련군이 점령했다. 새 군벌을 대처하기에 바빴던 장개석은 장학량에게 도움을 줄수 없었다. 1929년 11월하순에 자라이눠얼, 만주리, 하이라얼은 이미 쏘련에게 함락되였다. 장학량은 부득불 패배를 승인하고 1929년 11월 26일에 정전을 요구했다. 장학량은 채운승을 파견하여 쏘련과 담판하게 했다. 1929년 12월 20일에 장학량은 미국측의 조정하에 쏘련과 《백력협정(하바롭스크협정)》을 체결했다. 이것이 《중동로사건》이다. 중국측에서는 중동철로를 중쏘에서 공동히 관리하던 원래상태를 회복하자는 쏘련측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쌍방에서는 포로를 석방하고 전쟁결속을 선고했다. 결과는 철로를 빼앗아오지 못했다. 게다가 쏘련군은 철군한다고 했지만 중국령토인 흑할자도에 간후 섬에 눌러앉아 가려고 하지 않았다. 흑할자도는 쏘련의 하바롭스크와 린접했고 흑룡강, 우쑤리강을 지키는 요충지였다. 때문에 제정로씨야때부터 로씨야는 줄곧 흑할자도의 전약의의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1929년 당시의 쏘련정부도 흑할자도의 전략의의를 중시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 모든것은 정전후에 체결된 《백력협정(하바롭스크협정)》에 체현되였다. 이 협정에 대해 국민정부는 승인하지 않았다. 장학량을 위수로 하는 지방대표는 국가와 국가지간의 담판에 참여할수 없다. 이 담판은 동북군대표의 권한을 초월한 담판이였다. 장개석도 이 담판을 승인하지 않았다. 송미령의 큰 언니 송애령이 곁에서 장개석을 보고 “협정을 승인하세요. 그래야 쏘련에서 장경국을 중국에 돌려보낼수 있어요”라고 권고했지만 장개석은 동의하지 않았다. 하지만 정전을 위해 협정을 체결하지 않을수 없었다. 협정은 쏘련이 중동철도에서 소유했던 권익을 회복시켰다. 그 대가로 쏘련군이 동북에서 철군하게 되였다. 그러나 쏘련군은 협정에 따라 동북에서 철군하지 않았다. 쏘련군은 다시 철로의 권익을 얻은후 수상요충지 흑할자도를 강정했는데 그렇게 점령한것이 줄곧 79년동안이나 점령하고있었다. 장학량이 《중동로사건》을 일으켜 쏘련이 우리 나라의 령토 흑할자도를 점령하는 결과를 초래했는데 이는 그후 중로의 령토분쟁에서 가장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중의 하나로 되였다. 그러다가 2004년에 체결한 《중로국계동단보충에 관한 중화인민공화국과 로씨야련방의협정》에 따르면 중국은 174평방킬로메터에 달하는 흑할자도의 절반주권을 되찾았다. 2005년에 로씨야의 두마(의회명칭), 련방위원회와 중국의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는 선후로 이 협정을 비준했다. 그때로부터 흑할자도 더 나아가서 중로변계문제의 최정해결에 종지부를 찍게 되였다. 흑할자도는 중로변계 무원현경내의 흑룡강과 우쑤리강이 합류되는 주항도 서남측에 위치해있는데 중국에서 태양을 가장 일찍 볼수 있는 지방이고 흑룡강류역중 최대의 강섬이다. 면적은 350평방킬로메터로서 오문의 12배, 진보도의 500배에 달한다. 《정주일보》      
364    무언가 이뤄내야 한다는 생각 버려라 댓글:  조회:1985  추천:0  2017-02-09
무언가 이뤄내야 한다는 생각 버려라   이의수     시원한 아침공기를 마시며 가까운 등산로로 산책을 한다. 시원하다 못해 차가운 봄바람이 몸속깊이 파고든다. 산을 오르는 사람들의 모습은 다양하다. 맨손체조를 하면서 가는 사람,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즐기며 걷는 사람, 진지한 대화를 하며 대부분의 사람들을 앞서 보내는 사람, 혼자 열심히 달리는데만 집중하는 사람 등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저마다의 느낌과 생각을 가지고 산으로 오르고 산에서 내려온다.   산행하는 사람들 가운데 가장 멋없게 산을 오르는 사람은 누구일가? 그것은 정상까지 올라가는 그 자체를 위해 산에 오르는 사람이다. 매일 아침 산꼭대기에 올라서서 소리쳐야 되는 성취주의자들이 있다. 성취주의자는 어떤 미래의 목적지에 도착하면 그때부터 영원히 행복해질것이라는 환상을 갖고있다. 성취주의자에게 려행은 중요하지 않고 목적지에 도착하는것만이 중요하다.   반면에 쾌락주의자들은 목적보다는 오로지 려행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성취주의자들과 쾌락주의자들 사이에 회의주의자들이 있다. 목적지와 려행 두가지를 다 별 볼일 없는것으로 여기고 포기한 허무주의자는 삶에 환멸을 느낀다. 성취주의자는 미래의 노예로 살고 쾌락주의자는 순간의 노예로 살며 허무주의자는 과거의 노예로 산다고 한다.   우리에게는 목적지에 도달하려고만 하는 목적의식도 중요하지만 목적지에 도달하는 과정도 중요하다. 목적지에 도달하는 과정속에서 즐거움이 있어야 한다. 인생은 그 과정속에서 행복을 발견하는것이 중요하다. 아빠트 하나를 장만하기 위해서 모든것을 절제하고 돈을 모으는 일에만 집중하고 살아온 중년들이 있다.   승진을 위해서 모든것들을 포기하고 직장에만 매달려온 사람들이 있다. 아빠트를 장만했지만 그 뒤 더 넓은 아빠트가 눈에 들어와 또다시 돈의 노예가 되여살아간다. 승진을 하였지만 더 높은 직위에 오르고싶어서 더 일에 매달려 산다. 내가 생각했던것들을 성취했다고 내 인생의 행복이 성취된것은 아니다. 지난 시간들을 되돌아보면 숨가쁜 인생을 살아왔다. 좀 더 나은 인생을 살아보겠다고 몸부림치며 앞만 보고 달려왔다. 그런데 비로소 이뤘다고 생각하는 순간 또다시 더 이뤄갈것이 생겨 달음질을 멈출수 없다.   아직도 달려야 한다는 생각이 머리속에 가득하지만 어디서 멈춰서는것이 내 인생의 완전한 성취인지 헷갈린다. 목표를 찾다가 정작 목표를 잃어버린것 같다. 중년이 되면 내가 무언가를 이뤄야겠다는 의지가 솟구친다. 그러한 열망은 정말 중요한것들을 놓치도록 만든다. 내 삶속에서 성취에 대한 리유와 목적이 분명해야 한다. 만일 노예처럼 살아야 이뤄낼수 있는것이라면 고민해 보아야 한다. 그러한 삶을 선택해야 할 만큼 그 일이 그렇게 절실한지 말이다. 그리고 이에 대해 가족들의 공감과 지지를 받을수 있어야 한다.   원하는 일을 이루는것도 중요하지만 일상의 행복을 지켜가면서 이뤄낼수 있는것이 진짜 행복이다. 고통의 대가로 채워진 성취를 통한 행복이 아니라 일상의 즐거움속에 이뤄가는 성취가 행복이 될수 있다. 내 인생의 작은 수수께끼 하나를 풀어내는 즐거움으로 매일을 채워 나가자. 너무 큰것을 이루려다가 길잃은 인생이 되기보다 작은것의 즐거움을 느끼며 큰것을 이뤄내는 인생을 만들어보자.    
363    꽃길과 가시밭길 댓글:  조회:45452  추천:5  2017-02-09
꽃길과 가시밭길   김희수     지금 당신의 앞에 꽃길과 가시밭길이 놓여있는데 이 중에 어느 길로 가겠는가?   만약 이런 질문이 나온다면 누구나 꽃길을 선택할것이다. 아름다운 꽃길을 놔두고 험한 기시밭길을 자진해서 걸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꽃길을 지나면 가시밭길이 끝없이 계속 되고 가시밭길을 지나면 꽃길이 쭉 무한하게 펼쳐져있다면 대답은 달라질것이다.   앞으로 어떻게 되든 말든 지금 좋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꽃길을 선택한 사람들은 나중에 후회하며 울게 될것이고 앞날의 행복을 위해 고생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각오로 가시밭길을 선택한 사람들은 나중에 웃으며 옛말을 하게 될것이다.   꽃길과 가시밭길은 쉬운 말이여서 누구나 그 뜻을 알고있을것이다. 국어사전을 뒤져보면 “꽃길은 꽃이 피여있거나 꽃으로 장식된 길을 의미하기도 하고 순탄하고 순조로운 삶을 뜻하기도 한다”고 풀이되여있다. 그리고 “가시밭길은 가시덤불이 우거진 길을 의미하기도 하고 괴로움과 어려움이 심한 경로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고 풀이되여있다.   그러니 미친사람이 아니고서야 꽃길을 놔두고 가시밭길을 걸으려고 할 사람이 없을것이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꽃길만 있는것이 아니라 가시밭길도 있기에 가시밭길을 피해 꽃길만을 걷는다는것은 금수저가 아니면 매우 어려운 일이다. 금수저란 재벌 2~3세거나 고위급간부의 자녀들을 지칭한다.   재벌이나 고위급간부가 아니더라도 자식들을 꽃길만 걷게 해주고싶은것은 모든 부모의 공통된 마음일것이다. 조선족사회에도 자식들을 꽃길만 걷게 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가시밭길을 걷는 부모들이 많다. 외국에 나가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하면서 돈을 많이 벌려고 애쓴다. 자식들을 좋은 대학에 보내고 좋은 직장에 취직시키고 좋은 상대를 만나 결혼하게 하고 좋은 집에서 좋은 차를 타고 다니며 행복하게 살수 있게 해주려는것이다.   하지만 부모가 만들어준 꽃길이 영원할수 없다. 부모가 돌아가면 자신의 인생은 자신이 걸어야 하기때문이다. 부모가 물려준 돈으로 계속 꽃길을 만들수 있는 금수저, 은수저도 있겠지만 부모가 만들어준 꽃길이 끝나면 가시밭길을 걸어야 하는 동수저, 흙수저가 더 많다.   젊어서 고생은 금을 주고도 못산다는 속담이 있다. 물론 요즘은 젊어서 고생은 늙어서 신경통 온다고 반박하는 이들도 있지만 지금은 할머니, 할아버지의 세대들처럼 신경통이 올 정도의 고생은 많지 않다. 지금의 가시밭길은 옛날의 가시밭길과 달라서 등이 휘고 손발이 얼어터질 정도로 험하지 않다.   그렇다 하더라도 외자녀시대인 지금 대부분 부모들은 자식 하나만을 애지중지 키우면서 가시밭길을 한발작도  걷게 하려고 하지 않는다.   자식 하나를 낳아 불면 꺼질까 쥐면 터질까 장중보옥같이 애지중지 키워 장가까지 보낸 어떤 부모가 있었다. 자식을 꽃길만을 걷게 하기 위해 부부가 번갈아가며 한국에 나가 힘들고 험한 막로동을 하면서 돈을 벌어 아들을 공부시키고 집 마련해주고 차 사주고 해서 장가 보냈다. 그런데 고생을 모르고 고이고이 자란 아들은 보모를 떠나 외지 대학에 가서는 홀로서기를 할수 없어 중퇴했고 나중에 부모가 간신히 취직시켜주고 장가보내주었지만 직장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백수로 지내다가 리혼까지 하고 다시 부모한테 붙어사는 캉가루족이 되였다.   독립하지 못하고 제 구실을 못하는 아들은 허구한 날 빈둥거리면서 소비돈을 달라고 늙은 부모에게 손을 내민다고 한다. 부모는 또 자신들이 살아있는 동안은 그럭저럭 아들을 먹여살리기는 하겠지만 자신들이 죽으면 독립하지 못하는 아들이 어떻게 혼자서 살아가겠는가고 걱정하고있다니 한심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처럼 부모가 만들어준 꽃길만 걸어온 자녀들은 탄탄대로에 습관되여 약간만 경사진 비탈길을 만나도 지레 겁부터 먹고 풀썩 주저앉는다. 이런 자녀들이 가시밭길을 만난다면 더구나 갈팡질팡하며 가시에 한번 찔려도 울면서 뒤걸음칠것은 불보듯 빤하다.   반면에 처음부터 부모들이 오솔길, 비탈길을 걷게 하고 용감하게 가시밭길을 걷도록 인도한 자녀들은 혼자서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을 알게 되여 아무리 험난한 가시밭길이라도 활개치며 헤쳐나갈것이다. 그렇게 가시밭길을 헤쳐온 사람들앞에는 꽃길만이 펼쳐질것이다.   우리의 부모들은 자식에게 가시밭길을 피하라고 하지 말고 가시에 찔리면 그 아픔을 견디는 방법을 깨닫게 하고 기시에 덜 찔리거나 찔려도 쑥 뽑아버리고 여유있게 웃으며 걸을수 있는 요령을 터득하게 해야 한다. 귀한 자식 매로 키워라고 귀한 자식일수록 어려서부터 가시밭길을 걷도록 인도하는것이 현명한 부모의 양육지혜가 아닐가 싶다.        
362    주은래가 병세가 위급할 때 털어놓은 비밀 댓글:  조회:5547  추천:0  2017-02-05
주은래가 병세가 위급할 때 털어놓은 비밀     그것은 1975년 12월 20일 오후의 일이였다. 주은래의 체온은 38.7로 올라갔다. 그는 갑자기 중앙조사부 부장 라청장을 만나겠다는 요구를 제기했다. 당시 중앙에서는 중앙정치국위원이여야 주은래를 만날수 있다는 규정이 있었다. 때문에 사업일군을 전화로 상부에 지시해줄것을 청하였다. “4인방”은 서로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밀면서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서 전화는 등소평한테까지 가게 되였다. 등소평은 “총리께서 중병에 계신데 그의 요구라면 뭐든지 다 들어주시오”하고 말했다. 사업일군은 다음날에 주은래의 분부대로 승요차를 파견해 라청장을 병원에 모셔왔다. 라청장이 갓 병실에 들어서자 주은래는 혼미상태에 빠졌다. 라청장은 병실옆 객실에서 기다리는수밖에 없었다. 정오까지 기다려서야 주은래가 깨여났다는 소식이 와서 라청장은 즉시 주은래의 병상앞까지 달려갔다. 주은래는 라청장에게 모택동이 당년에 중경에서 위험에서 벗어난 놀라운 비밀을 알려주었다. 주은래는 미약한 음성으로 라청장에게 대만동포를 잊지 말라고 말했다. “특히 혁명에 공헌한 대만벗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일생에 혁명에 유익한 일을 한번만 한 사람이라도 말입니다. 례하면 지금도 대만에 있는 장씨성을 가진 그 두사람…” 거기까지 말하고 주은래는 또 혼미상태에 빠졌다. 의사들이 구급에 바삐보내는 바람에 담화는 중지되였다. 라청장은 병실밖에서 기다렸다. 한나절을 기다렸지만 주은래는 깨여나지 못했다. 라청장은 주은래의 병세가 엄중하다는것을 알았다. 그는 자신과의 담화로 주은래를 피로하게 할수 없다는 생각에 살며시 병원에서 나왔다. 주은래가 말한 장씨성을 가진 두 사람은 도대체 누구일가>? 라청장은 지난일을 돌이켜보면서 말했다. “나는 주은래의 신변에서 40여년동안 사업하면서 그가 하는 이야기를 헤아릴수 없이 들었습니다. 이왕에 총리께서 하신 말씀에 근거하면 그가 말한 장씨성을 가진 두 사람은 서안사변을 일으킨 장학량과 중경헌병사령직을 맡았던 장진일것입니다.” 원래 당년에 중경담판에서 결과가 있게 되자 모택동은 연안으로 돌아올 준비를 했다. 1945년 10월 8일 저녁에 장치중은 모택동을 위해 환송만찬회를 열었다. 이 만찬회에서는 중경에 있는 국민당 요인, 각 당파, 문화계의 지명인사 도합 500여명이 참석하였다. 누가 알았겠는가? 그때 흉보가 전해졌다. 홍암촌에서 멀지 않은 가릉강변도로에서 총소리가 들려왔다. 주은래를 닮은 중경주재 팔로군판사처의 비서이며 국민당원로 료중개의 사위인 리소석이 불행하게 총에 맞아 병원에 실려갔다. 그 소식을 들은 주은래는 모택동을 놀라게 하지 않고 중경헌병사령 장진과 함께 차에 앉아 금탕가시민병원으로 달려갔다. 주은래가 당도했을 때 리소석은 피를 너무 많이 흘려 이미 사망되였다. 당시 중경의 도로는 복잡하고 사회가 혼란했다. 게다가 일부 국민당특무들이 자신을 목숨을 바쳐서라도 모택동을 죽이고야 말겠다고 맹세했다는 정보까지 주은래의 귀에 들어왔다. 어떻게 모택동을 안전하게 모시고 홍암촌까지 갈것인 하는것은 매우 긴박한 문제였다. 주은래는 장진에게 모택동의 안전을 절대적으로 보장해달라고 요구했다. 국민당 헌병사령 장진은 “주주임께서 마음을 놓으십시오. 만찬회가 끝나면 내가 모선생을 나의 차에 모시고가겠습니다. 어느 방면의 특무든지 헌병사령의 차에 총을 쏠 담량은 없을것입니다”하고 말했다. 장진은 말한대로 모택동을 거주지까지 모셔다주었다. 이틑날에 장진은 또 모택동에 대한 경호를 강화했다. 10월 10일 오후에 국공회담협정은 매원에서 체결되였다. 장진은 이틑날에 모택동이 연안으로 돌아간다는 소식을 듣고 경계를 강화하고 자신이 직접 모택동을 공항까지 호송했다. 주은래는 여러번이나 장진이 중경담판에서 큰 공을 세웠다고 언급했는데 사망되기전까지 그를 잊지 않았다. 주은래는 경상적으로 이 일을 이야기하며 대만에 관한 사업을 책임진 일군들에게 타일렀다. “장진의 직무는 헌병사령입니다. 우리의 정책에 따르면 총살해야 할 특무입니다. 하지만 직무만 보아서는 안됩니다. 우리에게 도움을 주고 우리를 위해 공헌을 한 옛 친구를 잊지 말아야 합리하게 대만에 관한 문제를 잘 처리할수 있고 옛 친구에게 미안하지 않습니다. 물 한방울의 은혜도 반드시 용솟음치는 샘물로 갚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주은래였다. 진심으로 사람을 대하는 그는 당내당외를 막론하고 모두 가장 의로할수 있는 동지이고 벗이였다. 그는 생명의 최후순간에도 우리 당을 도와준 반대당의 옛친구를 잊지 않았다.    
361    아이들을 구원하라 댓글:  조회:3512  추천:2  2017-01-17
아이들을 구원하라                                                                  김희수     어린이들은 미래의 주인이고 왕이다. 그러나 현재 수많은 어린이들이 비참한 지옥에서 살고있다.   특히 전쟁이 그칠 날이 없는 중동에서는 어린이들이 더욱 비참한 생활을 하고있다. 먼저 그것을 립증해주는 아래의 기사들을 보기로 하자.   “예멘에서 어린이들을 전쟁에 내몰고있다. 연필을 쥐여야 할 아이들이 총을 들고 싸우다가 치렬한 전투에서 죽어가고있다. 유엔아동기금은 분쟁이 격화하고있는 예멘내 무장세력중 3분의 1이 어린이라고 밝혔다. 중동과 북아프리카지역 어린이 2100만명이 교육을 받지 못하고 있거나 중단위기에 처해있다고 유엔이 최근에 보고서를 통해 지적했다. 비교적 교육률이 높았던 시리아와 이라크는 내전으로 인해 300만명의 어린이들이 학교에 다니지 못하고있으며 예멘과 리비아에서도 정국불안이후 학교를 못다니는 아이들이 급증했다.”   “극단주의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가 또 어린이를 내세워 인질을 참수하는 장면을 공개했다. 이슬람국가가 10∼11세 정도로 보이는 흑인소년이 비무장인질을 참수하는 내용의 새로운 선전동영상을 배포했다고 영국 일간 인디펜던트가 보도했다.앞서 유포된 이슬람국가 동영상에서 ‘이슬람을 믿지 않는 자들을 죽이겠다’고 협박한 4∼5살짜리 꼬마 역시 영국출신인 이사 데어로 확인됐다. 이슬람국가는 2015년 7월에도 10살가량의 어린이대원이 시리아군을 흉기로 참수하는 영상을 공개한바 있다.”   “보코하람은 9세 소녀도 자살폭탄테러에 내몰고있다. 보코하람은 2014년 4월에 나이지리아 동북부 보르노주 치복시에 있는 치복 공립녀자중등학교 기숙사를 습격해 녀학생 276명을 랍치하면서 국제적인 인지도를 얻었다. 피랍 녀학생중 약 200명이 아직 행방불명이다.”   “극단주의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가 최근에 어린 소년들을 내세워 인질을 참수한데 이어 이번에는 네살배기 아이까지 동원해 공분을 사고있다.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와 더 타임스는 영국태생으로 알려진 이사 데어(4살)가 리모컨을 작동해 인질 3명이 탄 자동차를 폭파하는 IS의 선전영상이 공개됐다고 보도했다.”   “이슬람극단주의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가 이라크 북부 마을에 화학무기공격을 가해 세살배기 녀자아이가 숨졌다고 이라크정부가 밝혔다. 특히 올해 3살 된 녀자어린아이 파티마 사미르는 화학무기에 로출된 뒤에 신장과 페질환을 앓다가 2016년 3월 10일에 사망했다.”   “이스라엘공습에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 살던 6살 소녀 이스라 아부 쿠사, 10살 된 그의 오빠 야신 아부 코사가 숨졌다고 알자지라와 일간 하레츠 등 현지언론이 2016년 3월 13일에 보도했다.”   이처럼 전쟁이 계속되고있는 중동뿐이 아니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고있는 이웃나라 인도의 어린이들도 비참하긴 마찬가지이다.   “인도의 외진 마을에 미성년자 결혼현상이 아직도 아주 심각한 수준이다. 최근에 인도의 최년소 신부가 고작 2살밖에 안된다는 사실이 인도언론에 보도되며 파장이 일고있다. 인도의 외진 마을에서 미성년 결혼은 여전히 보편적인 현상이다. 풍속에 따라 어린 신부는 결혼후에 여전히 친정에서 살다가 11~12살이 되면 남편의 집으로 가는데 그후 어린 신부의 운명은 온전히 시댁에 달려있다. 이때부터 어린신부는 나이에 비해 훨씬 힘든 가무로동을 해야 하고 교육을 받을 기회조차 박탈당한다. 심지어 시댁으로부터 비난을 받고 폭행을 당하기 일쑤이며 일부는 십대에 벌써 아이를 낳고 엄마로 살아가기도 한다. 유엔아동기금의 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적으로 3분의 1 이상의 어린 신부가 인도출신인것으로 집계됐다.”   선진국이라는 미국도 마찬가지이다. 총기소지가 자유로운 미국에서는 총기란사로 매일 35명정도 목숨을 잃는데 그중에서 1명은 14세이하의 어린이라고 한다. 심지어 11세의 남자아이가 이웃집 8세의 녀자아이를 총으로 살해(2015년 10월 3일 저녁 7시 30분에 미국 테네시주 화이트파인에서 발생)한 끔찍한 사건이 발생하기까지 했다.   우리 나라도 례외는 아니다. 류동인구가 증가됨에 따라 아동학대, 아동매매 현상이 더욱 심각해지고있는 상황이다. 민정부의 통계에 따르면 현재 전국에서 떠돌아다니며 구걸하는 어린이가 100만~150만명이다. 정부의 통계에 따르면 조직적인 인신매매범죄집단까지 급증하면서 매년 1만명가량의 아이들이 랍치되고있다. 중국의 보도매체는 매년 랍치되는 어린이가 20만명가량일것으로 추산하고있다. 공안부문의 자료에 따르면 유괴되여 팔려가는 어린이는 대부분 6세이하이며 50%이상이 친척이거나 친부모가 직접 팔아먹는것으로 드러났다. 그외 아동학대현상도 빈번하게 발생하고있어 그에 관한 기사도 매일 나오고있는 실정이다.   어린이 기아현상도 엄중하다. 통계에 의하면 세계적으로 10세이하의 어린이가 5초에 1명씩 굶어죽는다고 한다. 식량이 남아돌고있는 중국에서 사는 우리 아이들에게는 이것이 딴세상의 이야기같을수 있다. 하지만 이는 우리와 한 하늘을 이고 같은 땅에서 같이 숨을 쉬고 살고있는 어린이들의 이야기이다.   로신은 《광인일기》에서 “아이들을 구원하라”고 웨쳤다. 그런데 근 100년이 지난 오늘에도 아이들은 비참한 지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있다. 왕으로 떠받들려야 할 어린이들이 노예처럼 팔려가고 학대받고있다. 물론 왕자님, 공주님으로 떠받들리면서 살아가는 어린이들이 대부분이겠지만 그들마저도 랍치, 폭행, 학대, 살해 등의 위험에 로출되여있다.   누가 아이들을 전쟁에 내 몰고 아이들을 랍치하고 아이들을 팔아먹고 아이들을 학대하고 아이들을 굶어죽이는가? 그 장본인은 어른이다. 아이들을 지옥같은 비참한 세상에 살게 하는 어른들은 반성해야 한다. 아이들은 우리의 미래이다. 미래를 지켜주지 못하는 어른은 어른이 아니다. 우리의 아이들을 우리가 지키고 우리의 미래를 우리가 보호해야 한다.   어린이들은 미래의 주인이다. 그들이 자라서 어른이 되면 우리는 죽거나 밀려나고 그들이 세상의 주인이 된다. 수십년이 지나서 그들이 주인이 될 때 또 어린이들을 비참한 생활에 내모는 그런 악순환이 생기지 않기를 바라면서, 이 세상의 모든 어린이들이 진정한 왕자님, 공주님으로 떠받들리며 행복하게 사는 세상이 오기를 바라면서, 로신처럼 “아이들을 구원하라!”고 웨쳐본다. (2016년 4월)    
360    옛말이 되였으나 잊을수 없는 윁남자위반격전 댓글:  조회:5465  추천:1  2017-01-14
옛말이 되였으나 잊을수 없는 윁남자위반격전         1978년 12월 25일에 윁남군은 10만이상의 병력과 여러개의 땅크부대를 동원해 캄보쟈를 침공했다. 윁남은 인도지나반도에서 패권을 차지하려는 야망을 가지고있었다. 그런데 언감생심 하찮게 보았던 캄보쟈가 그런 윁남을 저지하려고 했다. 윁남은 그런 캄보쟈를 눈에 든 가시처럼 여기고 “가르침”을 주려고 작심했다. 당시 캄보쟈수도 프놈펜에는 중국의 군사고문 6000명이 주둔해있으면서 캄보쟈의 좌파세력인 크메르 루주(红色高棉)를 지원했다. 윁남은 구쏘련과 우호조약을 맺었고 구쏘련군이 중국북쪽국경지역에 부대를 증강했기때문에 캄보쟈를 침공해도 중국이 개입하지 못할것이고 또 구쏘련이 중국의 개입을 저지할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윁남의 판단은 틀렸다. 1975년에 미군을 몰아내고 남북을 통일한 윁남은 120만명이나 되는 화교들의 재산을 빼앗았다. 그뿐만아니라 국경일대에서 1978년 하반기에만 해도 700차례에 거쳐 무장충돌을 일으켜 300여명의 사상자를 초래했다. 윁남측은 1978년에 중국의 윁남령토침입에 따른 충돌이 2175건에 달했다고 발표했다. 등소평은 일찌감치 “오만하고 감사할줄 모르는” 윁남에 대해 “징벌”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1978년 9월에 열린 정치국회의에서 윁남을 공격할데 관한 문제가 직접 언급되였다. 정치국회의에 앞서 등소평이 윁남공격을 이미 결정했다는 설이 있다. 등소평은 1978년 11월초에 9일간 타이, 말레이시아, 싱가포르를 방문했다. 윁남을 공격할 때 이 나라들이 중국에 대해 가질 두려움을 없애기 위한 사전의 조치였다. 싱가포르 수상 리광요를 만난 자리에서 등소평은 윁남을 배은망덕한 놈이라고 욕하면서 윁남이 캄보쟈를 공격하면 중국은 윁남이 무거운 대가를 치르게 할것이라고 말했다. 등소평은 또 쏘련은 중국과 윁남의 싸움에 관여하지 않을것이라고 말했다. 중국은 쏘련쪽은 마음을 놓았지만 미국이 어떻게 나올지 알수 없었다. 1978년 12월 4일에 때마침 미국대통령 카터가 국교정상화를 제안했다. 등소평은 8일만에 전격적으로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1979년 1월 1일에 중미는 국교를 정상화했다. 등소평은 1월말부터 2월초까지 서둘러 미국을 방문했다. 리유는 두가지였다. 윁남을 구쏘련으로부터 떼어놓기 위해 미국이 개입할 여지를 차단하고 미국을 활용해 윁남과 구쏘련의 군사협력을 막기 위해서였다. 등소평은 카터에게 “꼬마친구가 말을 안들으면 엉뎅이를 때려야 한다(小朋友不听话,该打打屁股了)”라고 말했다. 귀국길에 등소은 일본에도 들렀다. 일본 수상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를 만나 미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윁남징벌의 정당성을 천명했다. 공격준비는 이로써 끝났다. 1979년 2월 11일에 정치국확대회의가 열렸다. 공격날자를 17일로 결정했다. 4월에 시작되는 우기를 피하기 위한 선택일이였다. 기원 938년에 당나라가 멸망된 후 5대10국에 속한 남한(南汉)이 윁남에 패함으로써 1000년만에 윁남이 독립할수 있었다. 그 당시에 우기를 고려하지 않고 무리한 전쟁을 벌렸기때문에 남한국이 윁남에 실패했던것이다. 등소평은 그런 력사를 고려하지 않을수 없었다. 북쪽에서 만약 구쏘련이 결빙된 아무르강과 우수리강을 건너더라도 곧 해빙되여 더이상의 작전전개가 어려울것이라는것도 강이 풀리게 될 날자를 선택한 원인중의 하나였다. 중국인민해방군이 윁남국경을 넘던 1979년 2월 17일에 신화사는 선전포고문을 발표했다. “남이 나를 건드리지 않으면 나도 남을 건드리지 않는다. 만약 남이 나를 건드리면 나도 반드시 남을 건드린다(人不犯我, 我不犯人, 人若犯我, 我必犯人)”는 모택동의 말을 인용했다. 중국은 전운(战云)이 무르익을 때까지 기다렸다. 상대방이 먼저 손을 쓰기를 기다려서 다시 유리한 시기를 틀어쥐고 상대를 제압하는 “후발제인(后发制人)”의 전략이였다. 이는 미국이 9·11테로이래 “예방성전쟁(预防性战争)’이라는 명목으로 선제공격을 불사한것과 대조된다. 광주군구 사령원 허세우상장이 동선광서변방부대 총지휘를 맡았다. 허세우는 “무서워서 뒤걸음치는자는 죽인다! 싸움터에서 도망치는자는 죽인다! 전투기회를 지연시키는자는 죽인다! 적에게 투항하는자는 죽인다! 군사정보를 루설한자는 죽인다! 전쟁기률을 위반한자는 죽인다! 칼을 사용한자는 죽인다! 죽인다…”는 “십살령(十杀令)”을 내렸다. 무한군구 사령원 양득지상장이 곤명군구 사령원으로 임명되여 서선운남변방부대 총지휘를 맡았다. 양득지는 윁남이 프랑스에 항거해 싸우는 전쟁에서 중국군사고문으로 있으면서 윁남을 지원했었다. 허세우가 지휘하는 동선병퇀은 제41군, 제42군, 제43군, 제54군, 제55군, 제50군(149사는 서선에 배치됨)으로 구성되여 광서방향으로 출발했다. 양득지가 지휘하는 서선병퇀은 제11군, 제13군, 제14군, 제50군 149사로 구성되여 운남방향으로 출발했다. 1979년 2월 17일 자정에 중국인민해방군이 윁남국경 26개 지점을 통해 물밀듯이 공격해들어갔다. 9개군의 22만 5000명의 병력, 전투기 170여대, 땅크 200여대를 몰고 공격한 중국군에 맞서 윁남은 민병대와 지역수비대 10만병력으로 막아냈다. 당시 인도지나반도에서는 중국과 윁남이 격렬하게 충돌했다. 중국은 윁남공격에서 처음에 실패했다. 25년간의 전투를 통해 단련된 윁남지역수비대와 민병대의 로련함과 윁남의 특수지형때문이였다. 미군이 남기고간 50억딸라어치의 최신형 전쟁물자와 무기도 위협적이였다. 민병대는 윁남북부특유의 복잡한 땅굴과 엄페호, 산간지형을 십분 잘 활용했다. 문화대혁명으로 실전경험이 없고 장비가 낡은 중국군은 생각밖에도 윁남군한테서 악몽같은 타격을 받았다. 1954년에 사상 최초로 식민지군대가 제국주의군대를 격파했던 “디엔 비엔 푸전역(奠边府战役)을 지휘하고 미국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무원갑(武元甲)장군이 윁남군을 지휘했다. 정규군 대신에 예비군병역 10만을 동원한 그는 유리한 지형을 리용해 중국군을 방어하는 전략을 펼쳤다. 그리고 최정예병력 5만은 정규전이나 장기전으로 확전될 경우를 대비해 하노이에서 대기하는 배수진을 쳤다. 경험을 섭취한 중국군은 전면공격을 개시하여 윁남의 중심도시를 하나 하나 점령했고 윁남의 가장 중요한 전략요지 량손성을 점령하는데 성공하여 하노이를 핍박했다. 1979년 3월 5일에 동서량선의 아군은 앞사람이 쓰러지면 뒤사람이 전진하면서 윁남경내 40킬로메터까지 깊이 들어가 윁남수도 하노이가 직접 아군의 공격에 처하게 하므러써 윁남을 징벌하는 전략목적에 도달했다. 중국군은 1979년 3월 6일부터 1979년 3월 16일까지 모두 중국경내로 철군했다. 중국군은 로케트포와 장거리포의 엄호를 받으며 철퇴하면서 지뢰를 묻었다. 윁남군은 대규모의 추격행동을 하지 않았다. 1979년 3월 16일에 중국은 전쟁이 결속되였다고 선포했다. 하지만 그때로부터 1990년초까지 윁남은 줄곧 변경에서 끊임없이 도발행동을 감행했다. 1990년 2월 13일에 중윁 량국간에 마지막 한차례의 전투가 있은후 중윁변경은 조용해졌다. 당시 중윁전쟁에 대한 각국의 태도는 어떠했는가? 1979년 2월 22일에 신화사는 중국의 자위반격전에 대한 각국의 태도를 종합했다. 첫째, 중국을 비난하고 윁남을 지지하며 중국군의 철군을 요구한 나라들로는 구쏘련, 꾸바, 체스꼬슬로벤스꼬, 벌가리아, 민주독일, 웽그리아, 뽈스까, 몽골, 아프가니스탄, 에티오피아, 모잠비끄, 알바니아, 앙골라 및 캄보쟈의 친윁헹삼린(韩桑林)정권으로 기본상 구쏘련과 그 위성국가들이였다. 둘째, 중국에 유감을 표시하며 중국의 철군을 요구한 나라들로는 라오스와 인도였다. 셋째, 중국을 반대하고 캄보쟈에 대한 윁남의 군사행동을 반대한 나라들로는 카나다, 스웨리예, 뉴질랜드였다. 뉴질랜드는 중국군의 철군도 요구했다. 넷째, 중국군이 윁남에서 철군하고 윁남군이 캄보쟈에서 철군할것을 요구한 나라들로는 미국, 일본, 동남아국가련맹 5개국, 오스트랄리아, 로므니아, 유고슬라비아, 영국, 이딸리아, 화란, 노르웨이, 핀란드, 이라크였다. 다섯째, 중국과 윁남에 모두 유감을 표시하며 윁남과 캄보쟈에서 자기절로 자기 나라의 운명을 장악하기를 바란다고 한 나라들로는 유럽공동체국가와 기타 나라들이였다. 여섯째, 담판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호소한 나라들로는 애급, 말리, 리비아, 마다가스까르, 방글라데슈, 끼쁘로스와 북유럽의 기타 나라들이였다. 일곱째, 공개적으로 성명을 발표하여 태도를 표시하지 않은 나라는 뽀르뚜갈이였다. 여덟째, 중국을 지지한 나라는 민주캄보쟈였다. 중윁전쟁은 참담했다. 17일간의 전투에서 중국군 2만 6000명과 윁남군 3만명이 사망되였고 중국군 3만 7000명, 윁남군 3만 2000명이 부상당했다.      
359    1월은 희망의 달 댓글:  조회:5412  추천:6  2017-01-01
1월은 희망의 달                           김희수   희망찬 2017년 새해가 밝았다. 새해를 맞을 때마다 우리는 “희망찬”이란 단어를 새해앞에 붙인다. 누구나 새해를 맞으면 괜히 설레이고 황금빛 희망에 부풀게 된다. 그만큼 새해는 기분이 좋고 무엇이나 다시 시작할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더 큰 도약을 위해 더 큰 계획을 세우고 더 큰 목표를 향해 더욱 신나게 달려보고싶을것이다.   지난해로 말하면 누구에게는 아프고 힘들었던 한해였을것이고 또 누구에게는 뜻깊고 보람찬 한해였을것이다. 누구에게는 슬프고 괴로웠던 한해였을것이고 또 누구에게는 즐겁고 행복한 한해였을것이다. 누구에게는 허송세월한 한해였을것이고 또 누구에게는 열심히 달려온 한해였을것이다. 그러나 지난해가 어떠한 한해였던지를 막론하고 누구나 새해에는 새로운 희망을 가지고 새 출발을 하려고 할것이다.   지난해에 이루지 못했던 아쉬움이 남았다면 새해에는 꼭 이루겠다는 희망을 가지게 될것이고 지난해에 불쾌했거나 불행했던 일로 좌절했거나 절망했다면 새해에는 기쁜일과 좋은 일이 생길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게 될것이다. 투병생활을 했다면 몸이 건강하기를 바랄것이고 사업에서 실패했다면 일이 뜻대로 되였으면 하는 희망을 품게 될것이다.   그래서 새해의 첫달인 1월을 새 출발을 시작하는 희망의 달이라고 할수 있다. 1월은 비록 소한, 대한의 맵짠 추위가 잠시 맹위를 떨치기도 하지만 따뜻한 봄이 시작된다는 립춘이 곧 오게 되고 대동강이 풀린다는 우수, 경칩이 눈앞에 있기에 봄이 멀지 않다는 희망을 가지게 되는 명실상부한 희망의 달이다.   아이들은 나이를 한살 더 먹었다고 자랑하고 로쳐녀, 로총각, 고령의 로인들은 나이를 한살 더 먹었다고 탄식도 하겠지만 누구나 모두 새로운 희망에 가슴이 더 벅차오를것이다. 나이 한살을 더 먹는다는것은 그만큼 더 성숙된다는 뜻이다. 그래서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를 터득하고 새해에는 역경속에서도 희망을 가지고 지혜롭게 위기를 벗어나 성공하는 사람으로 성장할것이다.   지난해에는 나에게도 안 좋은 일이 있었다. 어머니가 갑자기 병으로 쓰러진 뒤 누워서 일어나지 못하게 되였다. 새해에는 어머니의 건강이 회복되고 좋은 일이 많이 생기는 한해가 되였으면 하는 희망을 품고 희망의 달 1월부터 새롭게 시작해 보련다.   거지도 재벌이 되는 이 세상에서 새로운 한해에는 돈에 울던 백수는 취직을 하고 사랑에 속던 총각은 장가를 가고 글 읽던 학생은 대학 가고 병마에 시달리던 환자는 완치가 되고 배고파 우는 저 나라 아이들은 배불리 먹고 음식 가지고 장난하는 장사군은 뒈지고 가짜약 만드는 놈은 감옥에 가고 부지런히 일하는 사람은 부자가 되기를 기원한다.   새해 2017년은 이 세상에 사는 누구나 다 몸과 마음이 건강하고 돈을 많이 버는 한해가 되기를 기원한다. 그리고 누구나 행복하고 즐겁고 화목하고 만복이 깃드는 한해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358    모택동: 끌고 나가 총살하시오! 댓글:  조회:8150  추천:2  2017-01-01
모택동: 끌고 나가 총살하시오!     1950년 3월 4일에 북경을 떠난지 88일이 되는 모택동은 중국당정대표단을 거느리고 중남해로 돌아왔다. 이틑날에 리은교는 향산에 가서 안해 한계형을 데려왔다. 당시 20대초반인 리은교는 무당파(武当派)의 속가제자이며 모택동의 경호원이였다. 모택동은 특별히 료리사에게 몇가지 료리를 더 부탁해서 한계형을 대접했다.   식사후 모택동은 한계형에게 향산의 일부 정황에 대해 상세하게 물어보았다. 한계형은 무의식중에 한 중앙령도간부가 기관에서 향산의 산비탈에 건축공사를 하는 기회를 타서 자신의 2층집도 지었는데 입주하지 않았을뿐이라는 이야기를 했다. 그 말을 들은 모택동은 삽시간에 얼굴빛이 변했다. 한계형은 더 말하지 못했다.   이틑날 오후에 리은교는 국향서옥에서 향산에 자택을 지었다는 그 령도간부를 만났다. 리은교는 그를 데리고 모택동의 있는 곳으로 갔다. 모택동의 응접실에는 주은래와 섭영진이 있었다. 모택동은 두손으로 허리를 집고 서서 그 사람의 아래우를 훑어보며 마음속의 화를 억누를수 없어 큰소리로 고함쳤다.   “당신의 위엄이 여간 아니군. 내 보기엔 당신은 과거의 왕후장상과 비슷하군!” 그 령도간부는 놀라서 식은땀을 흘렸다. 그는 감히 머리를 머리를 들어 모택동을 보지도 못했다.   모택동은 뒤짐을 지고 큰 걸음으로 방안을 왔다갔다 하더니 갑자기 그 령도간부를 향해 손가락질 하며 물었다.   “당신이 이렇게 하는게 공산당간부다운 일이요? 백성들이 뒤에서 우리를 뭐라고 욕하겠소? 내가 일찍 승리한후 리자성을 닮지 말라고 말하지 않았소? 당신은 왜서 바보인척 하는거요?”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하겠다고 일떠서 명나라황제를 뒤엎은 리자성은 북경을 점령하자 승리에 도취되여 부화방탕한 생활을 하면서 도리여 백성들의 고혈을 빨아먹었다. 모택동은 이를 경계하라고 여러번이나 말했었다. 당시는 국민당을 몰아내고  갓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운지 반년도 안되는 때였다.   겁에 질린 그 사람은 머리를 푹 숙이고 가슴이 한줌만 해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주석님, 제…제가 잘…잘못했습니다…”   “당신이 잘못했다구? 집을 지을때는 그것이 잘못이란걸 몰랐소? 내 보기엔 당신은 알고도 범한것 같소. 수중에 권력이 있다구 마음대로 휘들러서야 되겠소?” 모택동은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이느라고 잠시 말을 끊었다. 주은래와 섭영진은 서로 쳐다보며 누구도 말을 못했다. 갑자기 모택동이 두모금 빨고 힘껏 비벼끄더니 손을 흔들며 엄하게 소리쳤다. “끌고 나가 총살하시오!”   그 말에 리은교는 깜짝 놀랐고 주은래와 섭영진도 놀라서 쏘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령도간부는 바지에 오줌을 쏘며 주저앉았다. 모택동은 리은교를 보고 명령했다. “이 자를 끌고 나가시오! 끌고 나가 총살하시오!”   리은교는 주은래와 섭영진의 눈치를 살폈다. 주은래와 섭영진은 사태가 이 지경까지 되자 부득불 앞에 나서서 한마디씩 했다. “주석님, 먼저 화를 누르십시오!” “이 문제는 먼저 조사를 똑똑히 한후 엄하게 처리해야 합니다!” 모택동은 계속 화를 내며 말했다.   “우리 공산당원은 인민을 위해 복무해야지 향수를 누리려고 여기에 오지 않았습니다. 탐오부패는 더구나 허락할수 없습니다! 이렇게 향수부터 누리려고 하면 리자성이 될것입니다!”   주은래와 섭영진은 그 령도간부를 꼭 엄하게 처리하겠다고 말했다. 그제야 화가 좀 가라앉은 모택동은 섭영진에게 그 령도간부에 대한 처리를 맡겼다. 현재 습근평이 부패척결을 추진하고있는 이때에 이 이야기는 매우 좋은 교재로 되고있다.           
357    고강 림표가 항미원조를 반대했는가? 댓글:  조회:4426  추천:2  2017-01-01
고강 림표가 항미원조를 반대했는가?     1954년에 중국공산당 제7기4중전회에서 고강, 요수석사건에 대해 결정을 내린후 고강이 항미원조에 출병할것을 반대했다는 설법이 있었다. 1971년의 “9.13”사건후에도 또 림표가 항미원조출병을 반대했다는 설법이 있었다. 20세기 90년대말까지 항미원조전쟁에 대해 언급한 개별적인 저작에서 이런 설법이 있었다. 그럼 고강과 림표가 정말로 항미원조출병을 반대했는가?   고강과 림표가 항미원조출병을 반대했다는 설법은 근거가 부족하다. 1950년 6월 하순에 미국이 무장으로 조선내전을 간섭하고 대만해협을 침입하자 중공중앙에서는 항미원조에 출병하고 대만해방을 뒤로 미루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은 당시 각 중앙국의 주요지도자들중 고강이 제일 먼저 알고있는 사람중의 하나였다.   1950년 7월 7일에 중앙군위에서 동북변방군을 조직할데 대한 문제를 연구했고 그 이듵날에 변방군에 편입된 부대는 즉시 광주, 중원 등지로부터 동북으로 집중되였다. 이미 확정된 변방군 사령원 겸 정치위원 속유, 부사령원 소경광, 부정치위원 소화는 병으로 잠시 와서 직무를 맡을수 없었다. 1950년 7월 22일에 주은래와 섭영진은 련명으로 모택동에게 “변방군을 먼저 동북군구에 귀속시켜 고강사령원 겸 정치위원의 지휘를 받게 하는게 어떻겠습니까”하고 건의했다. 모택동은 그 건의를 비준했다.   동북변방군의 공급과 참전에 수요되는 물자준비, 장비의 보충과 수리, 운수, 전방동원 등 참전준비는 모두 동북군구 사령원 겸 정치위원인 고강의 직접적인 지도하에서 진행되였다.   1950년 8월중순후에 조선전쟁은 작아대치국면이 나타났다. 그해 8월 31일에 고강은 모택동에게 조선전쟁상황과 변방군준비사업에 대한 몇가지 구체적인 문제에 대해 보고했다.   “현재 아군의 어떤 간부들중에는 일본군이나 국민당군과 싸울 때의 안광으로 오늘의 적을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적들의 전술, 공군, 대포 등 특점에 대해 잘 알지 못하면서 말입니다. 또 일부 간부들은 미국공군에 대해 속수무책인데 전문가들을 조직하여 적의 작전특점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그래야만이 작전시 적을 소멸할 파악이 있게 됩니다.”   모택동은 1950년 9월 3일에 고강에게 “반드시 현대전쟁의 관점으로 부대를 교육해야 합니다. 절대 적을 경시해서는 안됩니다. 당신의 의견은 정확합니다. 그 문제에 대해 연구해봅시다”라는 내용의 답장을 보냈다. 이는 고강이 동북변방군의 작전준비사업에 대해 적극적이고 주동적으로 나섰다는것을 말해준다.   주은래와 팽덕회가 그후에 했던 보고에서도 볼수 있다싶이 중공중앙정치국에서 항미원조출병에 대해 토론할 때 확실히 부동한 의견이 있었다는것을 알수 있다. 양상곤신변에서 사업했던 일군의 말에 의하면 양상곤은 “당시 출병에 대해 찬성하는 사람은 소수였습니다. 출병을 하지 말자거나 잠시 출병을 하지 말자는 의견이 다수였습니다”라고 말한적이 있었다. 중앙정치국회의에서 결정을 내리기전에 고강이 출병하는데 찬성하지 않았다고 해도 그가 혼자 아니였을것이다. 찬성했건 반대했건 모두 당내의 민주체현으로 정상적인것이였다. 더구나 어떤 의견이든 모두 당과 국가의 리익을 책임지기 위해 고려한것이였다. 때문에 누가 찬성하지 않는다는 의견을 내놓았다고 해서 항미원조출병을 반대했다고 하는것은 공정하지 못한것이다. 중공중앙정치국에서 중국인민지원군을 조직하여 “항미원조, 보가위국”의 결정을 내린후 출병을 찬성하는 고강의 태도는 견결했고 매우 적극적이였다.   1950년 10월 8일에 모택동이 중국인민혁명군사위원회 주석의 명의로 서명한 중국인민지원군을 조직할데 관한 명령중의 규정에는 “중국인민지원군은 동북행정구를 총후방기지로 한다. 총후방기지는 모든 후방사업과 조선을 지원할데 대한 사무를 담당한다. 동북군구 사령원 겸 정치위원 고강동지가 총부방사업의 배치를 지휘하고 책임진다”는 내용이 있다. 그날 고강은 방금 지원군 사령원 겸 정치위원직을 맡은 팽덕회와 함께 심양으로 날아갔다. 1950년 10월 9일에 고강은 팽덕회와 함께 지원군 군이상간부회의를 열고 출국작전에 대해 상의했다.   1950년 10월 8일에 주은래는 모택동과 중공중앙의 위탁을 받고 림표더러 쏘련에 가서 쓰딸린 등 쏘련지도자들에게 중공중앙정치국회의에서 출병을 결정한 정황을 통보하고 쏘련측에서 무기장비와 공중엄호를 제공해줄것을 요구하라고 부탁했다. 쓰딸린은 쏘련공군이 준비가 되지 않았다면서 3개월내에는 중국지원군작전을 엄호할수 없다고 대답했다.   이 소식이 북경에 전해지자 모택동은 1950년 10월 13일에 다시 중공중앙정치국위원회의를 소집했다. 그번 회의에서 고강은 항미원조에 출병하는 대해 태도가 매우 견결했다. 고강과 팽덕회는 쏘련에서 공군이 출동하지 못한다고 해도 우리는 반드시 출병해야 한다고 표시했다. 모택동은 그날 주은래에게 보내는 전보에서 “고강, 팽덕회동지 그리고 기타 정치국동지들과 상의한 결과 우리 군은 반드시 항미원조에 출병해야 한다고 일치하게 인정했습니다”하고 썼다.   1950년 10월 14일 3시에 모택동은 다시 주은래에게 전보를 보내여 “팽덕회와 고강동지는 모두 괴뢰군과의 싸우면 승산이 있다고 인정했습니다. 그들과 나는 모두 참전이 꼭 유리하다고 인정했습니다.   첫째, 지원군이 출동한후 팽덕회는 동북총후방기지의 사업에 만족을 표시했다. 팽덕회는 항미원조전쟁기간에 “지원군이 전선에서 승리한데는 두 사람의 공로가 크기에 응당 그들에게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그중 한사람은 고강이고 다른 한사람은 홍학지(지원군 부사령원 겸 지원군후방근무사령부 사령원직을 맡았음)입니다.   둘째, 중공중앙정치국에서 중국인민지원군을 조직하여 항미원조, 보가위국의 결책을 내온후 고강의 태도와 행동을 보면 고강이 항미원조에 대해 태도가 견결했고 적극적이였다는것을 알수 있다.   셋째, 1951년 11월에 고강과 림표는 동시에 중앙군위 부주석으로 임명되였다. 림표가 항미원조출병을 반대했다는 설법은 주요하게 그가 병을 핑계로 지원군통수직을 맡지 않겠다고 한것과 관계된다. 그리고 또 중공중앙정치국에서 항미원조출병을 결정한후에도 림표가 의연히 출병을 반대했다는것이다.   모택동은 확실히 림표에게 지원군통수직을 맡기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1950년 8월 31일에 고강은 변병군이 출동후 해당문제 대해 모택동에게 보낸 편지중에는 “부대를 지휘하는 통수와 전문인재가 빨리 동북에 올것을 건의합니다. 그래야 충분히 준비할수 있습니다”라는 내용이 있었다. 모택동은 1950년 9월 3일에 고강에게 회답편지를 보냈다.   “림표와 속유는 병이 있고 또 두 사람은 이 기간에 해야 할 사업이 있어서 잠시 나가지 못할것입니다. 아마 몇개월후에야 가능할것 같습니다.”   모택동의 이 편지에서 림표는 확실히 병이 있었다는것을 알수 있다. 때문에 한달후에 중국인민지원군을 조직하여 항미원조에 출병할 때 림표는 지원군 통수를 맡을수 없었던것이다. 중공중앙의 결정에 의해 림표는 쏘련에 가서 치료를 받았다.   당시 림표는 중공중앙정치국 위원이 아니였다. 양상곤의 일기와 그번 회의에 참가했던 박일파에 따르면 림표는 1950년 10월 4일 오후와 5일 오후에 중공중앙정치국확대회의에 참가했다.   림표가 회의에서 무슨 의견을 발표했던 항미원조출병을 반대했다고 말할수 없다. 중공중앙정치국에서 항미원조출병을 결정한후에도 림표가 항미원조출병을 반대했다는 설법은 증거가 없어 믿음성이 없다. 그러나 1951년 11월 5일에 중앙인민정부위원회 제13차회의에서 고강과 림표를 동시에 중앙인민정부 인민혁명군사위원회 부주석으로 보충선거했다.   1951년말과 1952년초에 림표가 3개월간 중앙군사위원회의 일상사업을 주최했다. 항미원조는 당시 중국공산당과 중국인민에게 첫째가는 대사였기에 만약 고강과 림표가 항미원조출병을 반대했다면 모택동과 중공중앙에서 그들을 그토록 신임하지 않았을것이고 항미원조가 시작되여 1년이 지난후 그들을 중앙군위 부주석으로 보충선거하지 않았을것이다.      
356    죽음도 갈라놓지 못한 한무제와 리부인의 사랑 댓글:  조회:4239  추천:2  2017-01-01
죽음도 갈라놓지 못한 한무제와 리부인의 사랑     서한때에는 황제와 항후의 릉을 나란히 배치를 하였는데 황제릉은 서쪽에 황후릉은 동쪽에 위치했다. 그런데 무릉(한무제의 무덤)만은 동쪽에 있어야 할 황후의 릉이 없다. 한무제에게 진황후와 위황후 두명의 황후가 있었다. 하지만 진황후는 페위되였고 위황후는 억울한 고소를 당해 자살하고말았다. 이런 까닭에 황후의 릉이 없고 대신에 한무제가 말년에 의지했던 리부인의 묘가 있다. 그런데 리부인은 황후의 서렬에 오르지 못했기에 그녀의 무덤은 동쪽에 위치하지 못하고 무릉의 서북쪽에 위치해있다. 리부인은 비천한 출신이였다. 그녀의 오빠인 리연년(李延年)은 노래와 춤에 뛰여난 배우였다. 작곡에 뛰여난 자질이 있어서 감미로운 선률로 변주곡을 만들어 불렀는데 한무제는 물론 신하들이 모두 좋아했다. 어느날에 리연년은 한무제앞에서 춤추며 노래를 부를 기회가 생겼다.   북방에 아름다운 미인이 있어(北方有佳人) // 세상 제일의 미모를 독차지 했구나(絶世而獨立) // 한번 웃음 지으면 온 성이 무너지고(一顧傾人城) // 두번 웃음 지으면 온 나라가 기울어지네(再顧傾人國) // 성과 나라가 기우는것을 어찌 모르랴마는(寧不知傾城與傾國) // 천하의 아름다운 미인은 다시 얻기 어려운 법(佳人難再得).   이 노래를 들은 한무제는 리연년의 누이동생이 노래의 주인공임을 알고 탄복하여 그날부터 리부인을 애첩으로 삼았다. 하지만 미인박명이라는 말처럼 리부인은 젊은 나이로 요절했다. 리부인은 입궁한지 몇년이 되지 않아 앓기 시작하더니 결국 병이 더이상 치료할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리부인이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한다는 말을 들은 한무제는 리부인을 보러 찾아왔다. 경국지색에 대한 황제의 사랑은 식을줄 몰랐는데 사랑하는 녀인을 보내야 했으니 황제의 가슴은 얼마나 미여졌겠는가? 어여쁜 얼굴을 한번 보고싶어 찾아왔으나 리부인은 보여주지 않았다. 황제가 온것을 본 리부인은 급히 이불로 얼굴을 가리우고 말했다. “첩이 병으로 얼굴이 망가져 페하를 뵙지 못하겠나이다. 제가 죽은후 저의 식구들을 보살펴주십시오.” “부인이 병이 위중하지만 약으로 치료할수 있는데 어찌 짐을 다시 보지 못한단 말이요?” 한무제는 기어코 리부인의 얼굴을 보려고 이불을 들어올렸다. 리부인은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울었다. 영원한 리별을 앞두고 한무제는 얼굴을 보여달라고 거듭 사정했지만 리부인은 끝내 보여주지 않았다. 황제는 속상해하며 떠났다. 그 자리에 있던 리부인의 누이동생이 리부인을 탓했다. 그러자 리부인이 말했다. “페하께서 알고계신 얼굴은 예전의 내 모습이다. 그런데 이제 이렇게 추한 모습을 보이면 황제는 놀라서 우리 식구들을 절대로 보살펴주시지 않을것이다.” 며칠후 리부인은 세상을 떠났다. 일의 결과는 과연 리부인이 예상대로 되였다. 리부인이 한무제에게 얼굴을 보이지 않은것은 그녀에 대한 황제의 무한한 그리움을 자아냈다. 그리하여 황제는 명화가를 청하여 그녀의 화상을 그려 감천궁에 걸어놓았다. 그리고 리부인이 죽자 한무제는 리연년을 악부의 장관인 협률도위(協律都尉)에 임명했다. 그리고 또 한명의 오빠인 리광리(李廣利)를 이사장군(貳師將軍)으로 삼았다. 리부인에 대한 한무제의 애틋한 사랑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제나라의 방사 소옹(少翁)을 시켜 리부인의 혼령을 불러오게 하고 황제는 애절함에 겨워 노래까지 불렀다.   “부인이오, 아니오?(是邪非邪) // 내 멍하니 서서 그대만을 바라보노니(立而望之) // 어이 이다지 나폴나폴 더디게만 오시는가(偏何姗姗其來遲).   뛰여난 문인이였던 한무제였기에 리부인의 죽음은 그를 시인으로 만들기에 충분하였다. 총희(寵姬) 리부인에 대한 한무제의 애타는 마음이 한편의 부(賦)에서 절절하게 나타났다.   저토록 밝은 세상 두고(去彼昭昭) // 어둠의 세계로 떠나갔구려(就冥冥兮) // 신궁으로 내려가면(旣下新宮) // 다시는 옛터로 돌아오지 못하나니(不復故庭兮) // 아아, 애달프도다!(嗚呼哀哉) // 그리운 혼령이 이토록 아른 하거늘(想魂靈兮).   사랑은 권력보다 강하다. 권력은 처음 잡을 때에는 무한한 힘을 가지나 시간이 지날수록 가벼워진다. 사랑은 다르다. 처음엔 밋밋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애틋한 그리움이 수시로 요동쳐 보고픈 마음은 한시도 식을줄을 모른다. 권력은 사랑을 버릴수 있지만 사랑은 권력마저도 포기하게 만든다. 가장 아름다운것이 사랑이지만 가장 두려운것도 사랑이다. 천하의 제왕 한무제도 평생 많은 녀인을 거느렸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이 그리웠다. 많은 녀인들속에서 한무제가 원하는 사랑은 리부인이였다. 하지만 정들 무렵에 리별이라면 그 사랑은 애가 끊어지는 처절함이 된다. 천하의 권력을 다 가졌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크지 않은 리부인의 묘가 광활한 벌판에 홀로 다소곳하게 누워있다. 한무제는 그녀의 죽음을 슬퍼하여 황후에 준하는 장례를 치르고 그녀의 묘를 “영릉(英陵)”으로 불렀다. “꽃”처럼 어여쁘고 “옥”처럼 귀한 녀인이 잠든 곳이라는 의미이다. 한무제의 애끊는 사랑이 최고의 례우를 해준것이다. 그러나 리부인묘는 그러한 례우에 개의치 않고 일편단심 동남쪽의 무릉만 바라보고있다. 산같은 무릉도 고적한 동풍이 싫어 서북쪽의 영릉을 향해 앉았다. 525메터의 오작교가 없는 벌판엔 철책이 가로막고있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손잡고 있을수 없어 애틋한 그리움으로 오늘도 영원히 마주보아야만 하는 사랑, 그 사이를 오가는 바람만이 흐느낌과 애절함으로 사랑의 언어를 전하고있다.      
355    루명 벗은 옹정황제 댓글:  조회:6922  추천:2  2016-04-03
  루명 벗은 옹정황제   청나라 4대 강희황제부터 아들 옹정황제, 손자 건륭황제에 이르는 134년은 중국력사의 전성기이다. 지금 중국의 엄청난 땅덩어리는 이때 정해졌다. 6000만명이던 인구도 이 기간에 2억명으로 늘었다. 강희황제와 건륭황제는 력사상 가장 뛰여난 군주”라는 명예도 함께 누렸다. 그러나 옹정황제에게는 유독 “잔인한 독재자”의 형상이 따라다녔다. 강희황제는 아들이 서른다섯이나 되였다. 강희황제가 일찌감치 둘째아들을 황태자로 지명하자 신하들이 아들에게 줄을 서는 일이 벌어졌다. 그는 황태자를 페위했다. 그러자 황자(皇子)들간에 후계자리를 놓고 다툼이 뜨거웠다. 서로 헐뜯고 고자질했다. 1722년에 강희황제가 죽게 되자 아들들이 모였다. 대신(大臣) 롱고도가 방에 들어가 황제의 뜻을 받아왔다. 계승자는 넷째 아들, 후날의 옹정황제였다. 옹정황제는 몸을 돌보지 않고 일했지만 후계지명을 둘러싼 음모설에 시달렸다. 음모설은 이랬다. “강희황제는 원래 열넷째아들에게 제위를 물려준다는 뜻으로 롱고도의 손바닥에 “十四(십사)”라고 썼다. 옹정황제에게 매수된 롱고도가 방을 나오면서 “十四”에서 “十”을 혀로 핥아 지우고 “四”만 남겼다.” 강희황제가 “열넷째 아들에게 넘겨준다(传位十四皇子)”고 종이에 써둔것을 옹정황제가 훔쳐서 위조했다는 소문도 있었다. “十四”의 “十”을 “~에게”를 뜻하는 어조사 于(우)로 바꿔 “넷째아들에게 물려준다(传位于四皇子)”가 되게 했다는 얘기이다. 옹정황제는 소문을 퍼뜨린 이복형제들을 “개”, “돼지”라고 부르고 감옥에 가둬 죽게 했다. 그는 죽을 때까지 황태자를 발표하지 않았다. 후계자이름을 적은 종이를 황궁안의 “정대광명(正大光明)”이라고 쓰인 액자뒤에 두고 “내가 죽으면 열어보라”고 했다. 그러고는 “한번 후계자로 마음에 뒀더라도 잘못하면 언제든 바꿀수 있다”고 했다. 그랬더니 황자들은 아버지 마음에 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황제가 되기 위한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옹정황제식의 황위세습제도는 청나라가 끝날 때까지 계속되였다. 최근에 료녕성에서 옹정황제의 “황위찬탈”루명을 벗겨줄 강희황제의 유서가 발견됐다고 한다. 유서에는 “넷째아들은 인품이 남다르고 생각이 깊어 대통(大統)을 이을 만하다”고 되여있다. 유서는 만주어와 몽골어로도 씌여있어 한자 몇글자로 고치는것으로는 내용을 바꾸기 어렵게 되여있다고 한다.         
354    강청의 전 남편 당납의 비밀신분 댓글:  조회:7856  추천:0  2016-03-27
강청의 전 남편 당납의 비밀신분   (번역)     1914년에 강소성 소주에서 출생한 당납(唐纳)은 1935년 봄에 녀배우 람평과의 사랑에 빠져 그녀와 동거했다. 그러다가 1936년 4월 26일에 항주의 륙화탑에서 람평과 결혼식을 올렸다. 그날 조단과 엽로천, 고이기와 두소견도 함께 결혼식을 올렸다. 세쌍의 명배우가 함께 올리는 결혼식은 많은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그 당시 당납은 공청단에 가입하였고 그후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당납이 중국공산당특별당원이고 국가안전부의 정보일군이란 사실은 줄곧 비밀로 되여있었다. 람평은 선후로 유계위(俞启威-일명 황경), 당납, 장민(章泯), 모택동 네 남자에게 시집을 갔는데 네 남자는 모두 중국공산당 당원이였다.   결혼후 당납과 람평의 생활은 행복하지 못했다. 그들은 늘 언성을 높이며 다투었다. 부부싸움을 하는 차수가 점점 늘어났는데 어느 한번은 그들 부부가 또 크게 싸웠는데 하기언과 사매의 앞에서 강청은 당납의 머리카락을 잡고 휘둘러서 당납의 머리를 벽에 부딪쳐 놓았다. 당납은 부부간의 불화로 두번이나 자살하려고 했으나 성사하지 못했다.   당납과 람평이 리혼한후 일본군은 상해를 공격했다. 람평은 제남, 서안을 거쳐 1937년 8월에 연안으로 들어가 이름을 강청이라고 고쳤다. 당납은 1937년말에 무한으로 갔다가 제2의 수도 중경으로 들어갔다. 당납이 혼자서 고독하게 사는것을 본 조단은 18세의 녀배우 진로를 그에게 소개해주었다. 1938년 3월의 어느날에 조단의 소개로 처음 만난 당납과 진로는 첫눈에 정이 들어 함께 말타기도 하고 수영도 하다가 번개식결혼을 했다.   1938년 10월에 당납과 진로는 윁남을 거쳐 향항으로 가서 한달 남짓한 동안 놀다가 상해로 돌아왔다. 당납과 진로는 프랑스조계지의 해격로(지금의 화산로)의 강소로구에 거주했다. 당납은 장기(蒋旗)라는 필명으로 《진원원》, 《생로》 등 장막극본을 썼다. 진로는 상해에서 배우로 활약했는데 당납은 그녀에게 “홍엽(红叶)”이란 예명을 달아주었다. “홍엽”의 함의는 “람평”과 상대되는것이다.   1940년 5월 1일에 진로는 아들을 낳았는데 당납은 몹시 기뻐서 아들의 이름을 마균실이라고 지었다. 그리고 아명을 엄마의 예명 홍엽에 따라 홍아라고 불렀다. 진로는 당시 당납의 정치신분을 모르고있었다. 다만 당납의 행적이 늘 비밀스럽다고 느꼈을뿐이다. 어느 한번 당납은 진로를 보고 “만약 내가 체포되여 당신에게 련루되면 당납과 리혼한지 오래된다고 말하오”라고 말해서 진로를 놀라게 했다. 몇년후에야 진로는 당납이 중국공산당의 지하활동에 참가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였다. 진로와 당납의 혼인은 8년밖에 지속되지 못했다. 당납은 중경에서 다른 한 녀배우 강건을 사랑하게 되여 그녀와 동거했지만 얼마 못가서 성격차이로 헤여졌다.   항일전쟁이 승리한후 중경에서 상해로 돌아간 당납은 《문회보》의 부총편집으로 사업하면서 마계량이란 필명으로 글을 썼다. 당납이 진로의 집으로 찾아갔을 때 진로는 이미 소금장사군과 결혼하여 잘 살고있었다. 그러나 당납은 늘 아들 홍아를 보러 다녔다.   1947년 8월에 미국대통령특사 웨더마이어(魏德迈)가 상해에서 연 기자초대회에 참석한 당납은 그곳에서 《자유론단보》의 녀기자 진윤경을 알게 되였다. 젊고 예쁘고 영어와 프랑스어에 능하고 재주가 출중한 진윤경에게 첫눈에 반한 당납은 거의 날마다 그녀에게 격정에 넘치는 련애편지를 써보냈다.   진윤경은 원 프랑스주재 중국(국민당정부)공사(公使)인 진록의 셋째딸이였다. 전칭이 특명전권공사인 공사는 외국에 파견되는 외교사절중 대사(大使) 다음의 직급에 속한다. 1949년 2월에 진윤경은 유엔교육과학문화기관의 미국사무소에 가서 사업하게 되였다. 이미 《문회보》의 총편집을 담당하고있던 당납은 진윤경과 함께 있기 위해 사직하고 뉴욕으로 날아갔다. 당납은 뉴욕일보에서 사업하다가 유엔의 한 중문인쇄공장에 옮겨가 사업했다.   당납이 미국으로 간것은 진윤경을 만나기 위한것도 있었지만 강청의 보복을 피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그 시기는 국민당이 몰락하고 중국공산당이 승리를 눈앞에 두고있는 때였다. 그가 계속 중국에 남아있을 경우 공산당이 나라를 세우면 보복심이 강한 강청이 그를 가만놔둘리 없다고 생각했기때문이다. 당년에 상해에 있을 때 사람들앞에서 당납의 머리를 잡아끌어 벽에 부딪쳐놓기까지 했던 강청이 제1부인의 신분으로 어떤 보복을 할지 알수 없었던것이다.   그후 진윤경이 유엔교육과학문화기관의 총부가 있는 프랑스의 빠리로 가자 당납도 그녀를 따라 빠리로 갔다. 빠리에서 진윤경과 결혼한 당납은 천교호텔을 개업했다. 그는 강청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이름을 마소장이라고 고쳤다. 진윤경도 안나라는 영문이름을 썼다. 빠리의 화교들은 마소장이 원 프랑스주재 중국공사 진록의 사위라는것만 알았지 그가 중국공산당 제1부인의 전 남편이였다는 사실은 모르고있었다.   문화대혁명기간에 당납은 해외에 있었기에 강청의 마수를 피면할수 있었다. 그후 “4인방”이 감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들은후에야 당납은 귀국했다. 그런데 그를 접대한것은 중공중앙조사부였다.   중공중앙조사부는 1955년 6월 20일에 정식으로 성립되였는데 제1임 부장은 리극농이 겸임했다. 1983년 7월 1일부터 중공중앙조사부를 주체로 하고 공안부의 반간첩부문 및 기타 해당부문이 합병하여 중화인민공화국 국가안전부를 세웠다. 당납은 중국대륙을 떠난후 1978년에 처음 빠리에서 귀국했다. 당납은 프랑스에서 마소장이란 이름으로 살았지만 중공중앙조사부는 그를 당납이라고 불렀다. 이로보아 프랑스에서의 당납의  비밀신분이 무엇인지 말하지 않아도 알수 있다.   문화대혁명시기에 강청은 장춘교한테 부탁하여 정군리를 찾아 담화하게 했다. 장춘교는 정군리를 불러놓고 “강청동지가 연안에 간후 당신에게 써보낸 몇통의 편지와 강청동지의 두장의 사진을 바치시요”라고 말했다. 1966년 10월 9일 아침에 상해 회해로에 위치한 강무청사 3층 정군리의 집에 홍위병차림을 한 공군 4군 교도대가 뛰여들어와 일기, 서한, 친필원고, 사진 등 자료들을 가져갔다. 얼마후 정군리는 체포되여 감옥에 들어갔다. 당납과 강청의 친구였던 정군리가 강청의 지난  력사를 너무 많이 알고있었기때문이다.   후에 이 소식을 들은 당납은 “만약 내가 국내에 있었다면 더 처참하게 당했을겁니다”라고 말했다. 중국대륙을 떠난후 처음 귀국한 당납은 1978년 12월에 북경에서 엽검영원수의 접견을 받았다. 엽검영은 무엇때문에 프랑스화교 당납을 회견하였는가?   당시 중공중앙 부주석이였던 엽검영은 중앙군사위원회의 사업도 주관하고있었는데 중공중앙조사부는 그의 직속령도를 받고있었다. 당납은 사실 중공특별당원이고 프랑스에서의 중공중앙조사부 중요간부였기에 귀국하자마자 엽검영의 접견을 받았던것이다. 엽검영은 당납의 부인은 부르지 않고 당납만 지명하여 접견했다. 엽검영이 당납을 접견했을 때 당납의 정치신분은 프랑스화교가 아니였다. 만약 프랑스화교신분이였다면 당납의 부인도 함께 엽검영의 접견을 받았을것이다. 이는 그번 접견이 중공중앙조사부의 내부회견이였다는것을 말해준다.   때문에 당시의 접견은 비밀리에 진행되였다. 그때로부터 옹근 30년이 지나서 엽검영의 일생을 소개할 때에야 엽검영이 당납을 접견했던 당시의 사진이 신문에 실렸다. 하지만 사진설명에는 당납을 프랑스화교라고 소개했다.   당납이 프랑스의 빠리에서 천교호텔을 경영할 때 그곳은 명류들이 모이는 장소였다. 당납은 장인의 국민당신분의 엄호를 받았고 호텔경영인이란 신분을 가지고있었기에 정보사업을 하기 가장 합당했다. 때문에 누구도 당납이 중공중앙조사부의 고급정보간부일것이라고 의심하지 않았다.   1985년 9월에 당납은 또 귀국했는데 그때는 국가안전부에서 그를 배치해주었다. 1983년 7월 1일부터 중공중앙조사부는 국가안전부로 개칭했다. 중공중앙조사부는 중국공상당정보기구이지만 국가안전부는 중화인민공화국정부의 정보기구이다. 그번에 당납은 부인과 딸을 데리고 귀국했는데 국가안전부에서 상해의 5성급호텔인 신금강호텔에 배치했다.   배우, 영화평론가, 기자, 중국공산당 특별당원, 중공중앙조사부의 중요간부, 제1부인 강청의 전 남편 등 여러가지 신분을 가졌던 당납은 1988년 8월 23일에 페암으로 빠리에서 사망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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