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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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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3    붉은 원숭이해 희망도 붉다 댓글:  조회:5170  추천:7  2016-01-05
붉은 원숭이해 희망도 붉다   김희수     힘찬 청양의 울음소리를 들은지 바로 어제 같은데 벌써 양울음소리도 미약해지고 붉은 원숭이의 웃음소리가 은은히 들려온다. 을미년(乙未年)의 착한 청양은 가고 병신년(丙申年)의 엉덩이가 빨간 재주군 원숭이가 희망을 안고 뛰여온다.   운동부족인 나는 언제부터인가 뻐스와 리별하고 걸어서 출퇴근했다. 보행코스는 뻐스코스와 달리 다양하게 선택할수 있어 좋았다. 나는 공원다리를 지나는 코스가 아니라 공원안을 가로질러 돌다리를 건너는 코스를 선택했다. 거리를 줄이려는 원인도 있었지만 더 중요한것은 지나가면서 공원의 경치, 특히 원숭이를 곁눈질하려는 의도였다.   그렇게 나는 출근하면서 한번 흘끗, 퇴근하면서 한번 슬쩍 원숭이들을 곁눈질 했고 여유가 있을 때면 가까이 다가가 재롱을 부리는 원숭이를 구경하기도 했다. 나처럼 매일 두번씩 원숭이를 구경할수 있는 “행운”을 가진 사람도 드물것이다. 그런데 나의 이런 “행운”이 새해부터 더는 따르지 않을번한 작은 에피소드가 있었다. 단위에 변동이 있어 새해부터 하남으로 출근하게 될것으로 기본상 결정이 나있었다.   그래서 나는 언제 다시 볼지 모르는 원숭이앞으로 다가가서 “잰내비야, 안녕!”하고 작별인사를 했다. 그리고 한동안 원숭이를 구경하다가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찍었다. 무엇보다도 여태껏 날마다 보던 원숭이를 원숭이해에 마음껏 볼수 없다는것이 서운했다. 출근길이 달라지면 일부러 공원에 가지 않고는 원숭이를 볼수 없게 되는것이다.   그런데 얼마 안되는 사이에 일은 180도로 돌아 변동이 없이 원상태로 돌아가는것으로 최종 결정이 났다. 그 순간 “원숭이해에 원숭이를 날마다 볼수 있게 되였구나”하고 안도의 숨을 내쉬였다.   희망찬 새해에 원숭이는 희망의 나무에 올라 이리뛰고 저리뛰고 분주히 돌아칠것이다. 우리도 원숭이해를 맞아 가슴 설레이는 날에 새 희망을 안고 새 출발을 하면서 분주히 돌아칠것이다. 원숭이해에 흉내 잘 내는 원숭이를 흉내내는것도 흥미있는 일이 되리라 믿는다.   원숭이는 사람을 가장 많이 닮은 동물로 흉내를 잘 낸다. 우리도 원숭이처럼 흉내를 잘 내보자. 하지만 우리는 맹목적으로 흉내 내지 말고 나쁜것은 버리고 좋은것만 흉내내자. 그른것은 버리고 옳은것만 가려서 흉내내자. 찌꺼기는 버리고 알짜만 골라서 흉내내자. 기계적으로 흉내만 내지 말고 알짜만 섭취해 참신하고 기발한 자신만의 창발력을 발휘해 기적을 만들자.   원숭이는 팔이 길다. 우리도 원숭이처럼 긴팔을 가져보자. 하지만 우리는 긴팔로 남의것을 가져오거나 남을 때리지 말고 긴팔을 뻗쳐 힘든 사람을 도와주자. 또 내게 차려진것을 남에게 빼앗기지 않도록 긴팔을 뻗쳐 내것을 챙기고 내것을 지켜보자.   원숭이는 꾀가 많고 지혜롭다. 우리도 원숭이처럼 꾀와 지혜를 가져보자. 하지만 남을 해치고 탐욕만 챙기는데 얕은 꾀를 부리지 말고 범행이나 음모를 꾸미는데 지혜를 악리용하지 말고 다 같이 희망을 키워 성공하고 복을 누리는데 꾀를 쓰고 지혜를 모아보자.   원숭이는 민첩하다. 우리도 원숭이처럼 민첩하게 살아보자. 하지만 행동만 민첩하게 하는 원숭이가 되지 말고 민첩한 행동과 민첩한 사고능력을 겸비한 인간으로 거듭나야 한다.   원숭이는 타고난 재주군이다. 누구나 잘 아는 손오공을 련상하게 된다. 우리도 원숭이같은 재주군이 되여보자. 공부 잘해 출세하고 농사도 잘 짓고 장사도 잘 하는 재주를 가져보자. 돈을 잘벌어 가족이 함께 살고 민족이 모여살고 두번째 아이 낳는 재주도 가져보자.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진다는 속담이 있다. 나무에서 떨어지는것은 두려운것이 아니다. 두려운것은 한번 나무에서 떨어졌다고 다시 나무에 오를 엄두를 내지 못하는 일이다. 파란만장한 가시덤불 같은 인생길에서 희망의 나무에 오르다가 한두번쯤 떨어지는것은 누구나 다 할수 있는 자그마한 실수이다. 왜서 나무에서 떨어졌는가를 생각해 그 답을 찾은후에 다시 나무에 오르면 희망이 현실이 될것이다. 더구나 붉은 원숭이해에 우리의 희망이 아침노을처럼 붉게 타오름에랴.    
332    장개석 모택동의 작전에 고립무원 처지 댓글:  조회:5918  추천:0  2015-12-26
장개석 모택동의 작전에 고립무원 처지   (번역)   1946년에 국민당이 전면적으로 내전을 일으켰을 때 호종남이 거느린 부대는 서북에서의 국민당주력이였다. 애초에 호종남(胡宗南)은 국민당군의 최후 방어지역을 중경과 성도를 축으로 하는 서남지역 보다 귀주의 서중부쪽인 먄마와의 변계지역을 선택할 예정이였다. 1949년 8월 11일에 국민당 천상악(사천-호남-호북지역)변구 수정공서(绥靖公署) 주임 송희렴(宋希濂)이 비행기로 한중(汉中)으로 날아와 호종남과 만나 최후방어지역을 상의했다. 두 사람은 황포군관학교 1기 동기생이다. 그들은 국민당군의 최후방어지역을 귀주서중부 만먀변계지역으로 꼽았다. 부대를 이 일대로 집결해 란창강(澜沧江), 노강(怒江)과 고려공산(高黎贡山)의 지형적리점에 의지해 계속 저항하기로 했다. 그들은 만부득이 할 경우에 접경지역인 먄마로 퇴각한다는 계획도 세웠다. 당시 호종남은 40만명, 송희렴은 10여만명의 병력을 거느리고있었다. 패전중에 있는 국민당군의 대부분 병력에 해당되였다. 송희렴은 항일전쟁시기에 11집단군을 이끌고 인도먄마로 원정해 귀주와 먄마변경에서 4년동안 전투를 벌려 이 일대의 지형과 민정(民情), 물산 등에 대해 훤히 알고있었다. 그들은 제1단계로 서강(西康)과 사천서쪽지역을 통제해 점차적으로 귀주와 먄마변계지역으로 부대를 이동하기로 했다. 2단계로는 인민해방군이 서남쪽에서 진군할 때 곧바로 주력을 귀주서쪽의 보산(保山), 등충(腾冲), 룡릉(龙陵), 망시(芒市) 일대를 축으로 하는 방어선을 구축하고 란창강, 노강과 고려공산의 천험을 리용해 인민해방군의 진공을 막기로 했다. 그런 연후에 상황에 따라 귀주로부터 먄마와 타이변경과 먄마경내로 들어가 인민해방군과 싸운다는 전략이였다. 호종남과 송희렴은 장개석이 8월중순 중경에 도착했을 때 관저로 찾아가 이런 전략계획을 보고했다. 뜻밖에도 장개석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안돼! 이 계획은 절대로 안돼! 너희들이 사천과 서남의 반벽강산(半壁江山)을 모택동에게 거저 바치려는게 아니야?” “그런게 아니고 사실은 군사상으로 볼 때 사천은 대만이나 해남, 주산(舟山)과 달리 공산당군이 4방에서 포위공격해온다면 우리들이 어떻게 해볼수 없습니다!” “안돼! 절대 안돼! 너희들은 군사는 알지만 정치를 모른다! 너희들이 단지 6개월만 지켜준다면 제3차세계대전이 폭발될수 있어. 그때 북경, 금릉(金陵-남경의 별칭), 상해는 우리것이 된다.” 장개석은 손을 휘저어가며 그들의 계획을 강력하게 반대했다. 나중에 호종남이 사천으로 퇴각할 때 그의 수중에는 국민당군의 정예인 제1군단을 포함해 30만명의 병력이 있었다. 호종남은 다시 장개석에게 서창(西昌), 운남(云南)으로 퇴각해 방어할것을 건의했으나 이 역시 거부당했다. 한편 모택동은 국민당군의 최후방어저지선인 서남을 공격하여 점령하기 위해 북쪽에서 치고 들어가는척하면서 남쪽에서 공격하는 량동작전을 펼치기로 했다. 예로부터 사천을 공략하는 방안은 두가지의 길이 있었다. 하나는 섬서에서 진령(秦岭)을 넘어 진격하는 길이다. 또 하나는 호북서쪽에서 장강의 원류를 따라 사천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장개석은 모택동이 팽덕회, 하룡이 이끄는 제1야전군의 주력을 진령으로 보내 사천을 공격할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생각했다. 장개석은 이런 판단에 따라 1949년 8월에 서남군정장관공서군사회의를 열어 직접 사천-섬서변계를 중점방어하는 서남방어를 위한 병력배치를 완료했다. 호종남집단군의 주력이 진령의 주산맥을 따라 제1방어선을 구축하고 백룡강(白龙江), 미창산(米仓山), 대파산(大巴山) 지역에 제2방어선을 설치하는 방어계획이였다. 또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사천동쪽과 귀주방면에 병력을 따로 배치했다. 하지만 모택동은 통상적인 진공로선 대신 제2야전군이 대우회작전을 펼쳐 호남서쪽, 호북서쪽에서 직접 귀주로 진격해 사천의 서부(叙府-지금의 의빈), 로주(泸州), 중경으로 돌격하도록 했다. 이런 작전은 인민해방군이 국민당군이 생각지도 못한 허를 찔러 국민당군의 서남 방어선의 뒤쪽에서 호종남집단군과 사천변계에 진을 친 국민당군의 퇴로를 끊어버리는것이였다. 이럴 경우에 사천경내의 국민당군주력은 대문이 닫히는 격이 되여 사천성내에 고립될수밖에 없다. 이와 함께 인민해방군 제1야전군의 일부부대가 진령으로 진격해 대거 사천을 공격하는 모양새의 거짓공세를 펼쳐 호종남집단군이 북쪽방어선에 주력하도록 했다. 그런 연후에 국민당군의 요해를 찔러 부대를 남하시켜 사천북쪽과 성도로 공격해 들어가도록 하는 성동격서전략을 펼쳤다. 이런 군사행동은 예측불허의 전략이였지만 위험부담도 높았다. 대병력이 “사천-호북-오남-귀주”의 수천메터높이의 높은 산과 험난한 협곡을 행군해야 하고 원활하지 못한 보급을 인내심있게 극복해야 했다. 때때로 궁지에 몰린 짐승이 마지막 발악하듯이 목숨을 걸고 덤비는 국민당군의 최후의 저항에 맞서 싸워야했기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작전이 성공함에 따라 장개석이 총력을 기울여 구축한 서남방어선은 변변한 전투 한번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스스로 무너져버렸다. 1949년 11월 1일에 몰래 호남서쪽지역에 집결한 인민해방군 제2야전군의 제3, 제5 두개병퇀(兵团)은 제4야전군의 일부부대와 합동작전을 펼쳐 쾌속으로 진격해 일거에 “호남-귀주”방어선을 돌파했다. 인민해방군은 11월 15일에 귀양을 해방시키고 11월 21일에 준의를 점령했다. 이렇게 하여 인민해방군은 사천성경내에 있는 국민당군의 귀주퇴로를 끊어버렸고 승기를 잡아 남쪽에서 사천남쪽을 포위공격할수 있는 유리한 기반을 만들었다. 이때 중경에서 지휘하던 장개석은 장담했던 철통방어가 남가일몽이 되자 부랴부랴 호종남부대를 사천으로 후퇴시켜 방어하게 하고 사천동쪽방어군도 서쪽으로 철수하도록 명령했다. 인민해방군 제2야전군은 국민당군의 어수선한 부대배치를 틈타 사천서쪽으로 철수하는 국민당군의 동쪽방어군과 호종남의 일부부대를 우회해 포위한후 사천남쪽산골짜기에서 궤멸시키고 중경을 점령했다. 성도로 후퇴한 장개석은 고립무원의 처지에 빠져 날로 압박해 들어오는 공산당군의 공격에 쩔쩔매였다. 마침내 권토중래의 꿈이 물거품이 되면서 대륙에서 도망쳐야하는 절명의 순간에 놓이게 되였다. 1950년 3월 26일에 인민해방군이 서창공항 가까이 공격해오자 호종남은 너머지 6만명부대의 지휘권을 참모장 라렬에게 넘겨주고 자신은 황망히 비행기를 타고 대만으로 도망쳤다. 대만에서 호종남은 패배한 책임을 지고 탄핵을 받을번 했다가 처벌을 면하게 되였다. 1951년 9월 9일에 호종남은 “진동창”이라고 변성명하고 “강절인민반공유격총지휘”로 임명되여 대진도에 주둔하면서 부대를 지휘하여 대륙연해에서 소란을 피우며 파괴활동을 했다. 1952년 10월 19일에 호종남은 국민당 제7기 중앙평의위원으로 당선되였고 “절강성정부주석”직을 겸임했다. 1953년 6월 24일에 인민해방군이 대진도로 진군하자 대만당국은 “강절인민반공유격총지휘부”를 취소했다. 그해 7월 23일에 대만으로 돌아온 호종남은 총통부전략고문위원회 상장고문직에 있으면서 한가하게 지내다가 1955년 9월에 팽호수비사령부 사령관직을 맡으면서 륙군2급상장으로 승진했다. 1962면 2월 14일에 병으로 사망되였다. 륙군2급상장이였던 호종남은 사망된 이튿날에 대진자제198호명령에 따라 륙군1급상장으로 진급되였다. 장개석의 신임과 중시를 받아온 호종남은 득의양양해했으며 야심발발하고 아주 거만하여 안하무인격이였다. 그는 항일전쟁시기에 서북에 숨어지내면서 왕으로 자처했으며 내전시기에 급선봉이 되였다. 하지만 그는 포부가 크지만 재능이 없었고 전략에 대해 알지 못했으며 선악을 가지지 않고 맹목적으로 장개석에게 복종했다. 호종남은 군사상에서 팽덕회의 적수가 되지 못했기에 패하여 대만으로 도망쳤으며 탄핵을 받는 랑패상이 되고말았다.  
331    조선족 지금은 아플 때 댓글:  조회:5392  추천:8  2015-12-22
조선족 지금은 아플 때   김희수     어느 장례식에 참석했을 때 고인의 맏아들이 보이지 않아서 사정을 알아보니 한국에 간지 2년째라는것이다. 고인은 전날저녁에 갑자기 사망했기에 한국에 가있는 맏아들은 부고를 전해듣고도 이튿날 오전에 치르게 될 장례식에 도착하지 못할것은 뻔했다. 예전에 7일장까지 치르면서 외지에 간 아들을 기다리던 생각을 하면 가슴이 아프다.   부모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도 돌아가지 못한다. 자녀가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고도 돌아가지 못한다. 팔소매로 눈물을 훔치고는 다시 일하러 나갈뿐이다. 보다 나은 미래의 삶을 위해 벌어야 하기때문이다. 여기서는 눈물도 사치이다. 아무리 슬프고 고독하고 아파도 참아야 한다. 차별화를 당하고 랭대를 받고 무시를 당해도 참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재한조선족들의 현주소이다.   장기간의 고된 로동에 몸이 지친데다가 쌓이고 쌓인 스트레스, 이런저런 고민에 마음까지 피로해져 몸에 병이 생긴다. 하지만 어지간한 경우에는 참고 계속 일하기에 나중에 병이 깊어져 사망한 경우도 있고 중병에 걸린 경우도 있다. 잔병은 누구나 다 가지고있다. 몸이 지쳐서 아프다. 마음도 상처를 입어 아프다. 이것 또한 재한조선족들의 현주소이다. 하지만 이들은 희망을 안고 살면서 새로운 기적과 부를 창조하고있다.   조선족사회는 지금 아플 때이다. 대도시 진출과 끊임없는 대규모의 한국행으로 리산가족이 늘면서 조선족 대부분이 리산의 아픔을 안고 살아가고있다. 온가족이 모여 명절을 쇠는 그런 풍경은 이젠 옛말이 되였다. 조선족마을에서 아기의 울음소리와 아이들이 글읽는 소리를 들을수 없고 조선족이 농사짓는 모습도 보기 힘들게 되였다.   2015년 12월 19일자 한국일보는 “조선족의 터전인 중국 동북3성 거주 조선족은 한때 200만명에 달했지만 현재는 불과 40만~60만명 정도로 급감했을 것으로 전문가들은 추산한다. 이농현상으로 중국 대도시와 연안도시로 50만명 정도가 빠져나갔고, 한국으로도 이미 75만명(국내 체류 조선족에 한국국적 회복인원 포함) 이상 건너왔다. 한국 이외의 다른 외국으로도 15만~20만명이 이동하면서 조선족 마을은 붕괴 직전이다.”고 보도했다.   이런 가슴 아픈 현실을 두고 조선족사회의 미래가 암담하다고 두손 놓고 앉아서 비관할수만은 없다. 일루의 희망이라도 있다면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게다가 조선족공동체가 무너진다는것은 시기상조이다. 조선족사회가 해체될 위기에 처해있는것은 사실이지만 위기는 고비만 잘 넘기면 더 발전할수 있는 기회로 될수 있다.   조선족전통사회는 해체되고있지만 그 해체와 더불어 새로운 조선족집거구가 형성되고있다. 농촌에서 도시로 이동하고 소도시에서 대도시, 연해도시 또는 해외(주로 한국)로 이동하고있지만 흩어지면서도 다시 모인다. 결국엔 다시 모일것이다.   대도시, 연애도시에 가있건 한국에 나가있건 우리 모두가 중국조선족이다. 조선족은 모래알처럼 흩어진것이 아니다. 새로운 집거구를 형성하고 조선족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살아가고있다. 아무리 멀리 떨어져있어도, 아무리 장기간 헤여져있어도 우리는 스마트폰 하나로 긴밀히 련결되여있다.   아프면서 성장한다는 말이 있다. 아이들은 아프면서 크면 더욱 단단하고 건강해진다. 조선족사회도 진통을 경험하는 성장과정을 거치면 앞으로 더욱 성숙하고 더욱 건강해질것이란 희망을 가져본다. 우리 다 같이 희망을 가지고 함께 고민하고 함께 위기를 해결해 넘기면서 포기하지 않고 조선족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한 도라지노래는 계속 울려퍼질것이고 아리랑선률은 영원할것이다.      
330    조자룡이 관우보다 뛰여나다는 증거 댓글:  조회:5770  추천:2  2015-12-21
조자룡이 관우보다 뛰여나다는 증거       ◇ 관우와 조자룡에 대한 적장의 평가   관우는 적장 방덕으로부터 단 한번 영웅이라고 칭해졌다. 그러나 조자룡은 적장 조조, 이전, 하후무, 곽준, 만정으로부터 다섯번 영웅으로 칭해졌다. 여몽과 감녕은 관운장이 손에 큰 칼을 들고 로숙을 붙잡고있는것을 보고 로숙이 상처를 입을가봐 두려워 감히 움직이지 못했지만 관우의 칼을 두려워하지는 않았다. 주유의 여러 장수가 모두 류비를 죽이려고 할 때 조자룡이 검을 차고 따르는것을 보고 감히 손을 쓰지 못했다. 여러장수가 두려워한것은 검을 쥐고 따르는 조자룡이였다. 육손은 류비와 관우를 칠 때 그들이 형주를 잃고 대패하여 도망치는것을 보고 “후퇴하지 말라. 주야로 추격하여 류비를 잡아라”고 전군에 명령을 내렸지만 나중에 조자룡이 구하러 왔다는 말을 듣고는 전군에 퇴각명령을 내렸다. 조조는 관우에 대해 “나는 일찌기 관공의 인재와 무예가 삼군에서 으뜸간다는 말을 들었기에 내 사람으로 만들려고 한다”고 했다. 그러나 조자룡에 대해서는 “내가 만일 조자룡을 얻었다면 천하를 얻지 못할가봐 걱정할 필요가 있었겠는가”하고 말했다.     ◇ 적군에 대한 관우와 조자룡의 위력 대비   관우가 혼자서 여러명과 싸운 경우는 딱 한번뿐인데 토산에서 서황, 허저와 싸운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적을 유인하기 위한것이였다. 조자룡은 혼자서 다섯번이나 여러명과 싸웠다. 양산에서 장료, 우금, 이전과 싸웠고 장판파에서 마연, 장개, 초촉, 장남과 싸웠고 적벽에서 서황, 장합과 싸웠고 봉명산에서 한요, 한기, 한경과 싸웠고 봉명산에서 위나라의 8명 장수와 싸웠다. 그중 적을 유인하기 위한것은 한번뿐이였다. 관우의 무예가 대단하지 않다고 공개적으로 멸시한 사람은 원술, 순정, 진기 세사람이였지만 조자룡의 무예를 대단하지 않다고 공개적으로 멸시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관우가 늙지 않았을 때 허저, 채양, 양령 등이 관우를 생포하겠다고 큰소리를 쳤다. 그러나 조자룡이 늙지 않았을 때 조자룡을 생포하겠다고 큰소리친 사람은 없었다. 관우를 직접 대면해서 생포하겠다고 말한 사람은 하후돈, 채양, 방덕이 있었지만 조운의 면전에서 그를 생포하겠다고 말한 사람은 없었다. 우금의 선봉인 방덕은 관우를 생포하겠다고 큰소리쳤고 하마터면 성공할번했다. 다만 관평이 도와주어 실패했다. 곽준의 선봉인 소우는 조운이 늙었을 때 조운을 생포하겠다고 큰소리쳤지만 조운의 창에 찔려 죽었다. 관우가 “관우가 여기있다. 방덕은 어찌 나와서 죽음을 받지 않느냐”고 소리치니 방덕이 말을 타고 나와서 관우와 백합을 싸웠지만 조자룡이 “조자룡이 여기 있다”고 소리치니 위나라 병사들은 놀라서 말에서 떨어진 자가 100여명이고 나머지는 모두 고개를 넘어 도망쳤다.     ◇ 관우와 조자룡의 방어능력 비교   관우가 방덕과 싸울 때 고개를 들어보니 화살소리가 났다. 화살이 다가와서 미처 피할 틈이 없어 왼쪽팔에 맞게 되였다. 방덕의 궁술에 대하여는 따로 언급이 없었다. 조자룡이 한경과 싸울 때 한경은 한꺼번에 3발을 쏘았다. 하지만 모두 조자룡이 창으로 막아냈다. 한경은 무예에 정통하고 궁술과 마술이 뛰여났다. 관우는 조인의 수하에게 화살을 맞아 말에서 떨어진 적이 있다. 조자룡은 원소의 화살이 비오듯하는 상황하에서 전혀 상처를 입지 않았다. 그리고 주선의 군사가 화살을 쏠 때에도 창으로 막아내서 모두 물에 떨어지게 만들었다.     ◇ 관우와 조운의 1:1 결투능력 비교   1합이내의 결투: 관우와 싸운 사람은 모두 10명이다. 정원지, 화웅, 순정, 공수, 변희, 왕식, 진기, 하후존, 한복, 양령인데 그중 3명을 죽였다. 조자룡과 싸운 사람은 모두 14명이다. 고람, 배원소, 장호, 하후은, 종신, 형도영, 모용열, 초병, 주연, 주찬, 소우, 금환삼결, 순우도인데 그중 9명을 죽이고 1명을 생포했다. 관우는 1합에 화웅을 참하였는데 화웅은 그전에 삼합만에 유섭을 참하고 다시 반봉을 참했으므로 체력이 많이 소모된 상태였다. 조자룡은 1합에 고람을 참하였는데 고람은 3합만에 유벽을 참하여 체력이 그다지 많이 소모되지 않은 상태였다. 2~3합의 대비: 관우는 2~3합의 정면승부에서 한번도 상대방을 죽인 적이 없다. 조운은 2~3합에서 딱 1번만 상대방을 죽이지 못했다: 관우와 문추의 싸움에서 2합만에 문추가 겁이나서 말을 끌고 강을 따라 도망했다. 조운과 안명의 싸움에서 2합도 되지 않아 조운은 창으로 안명을 찔러 말에서 떨어뜨려 죽였다. 관우와 장흠의 싸움에서 3합도 되지 않아 장흠은 대패하여 도망쳤다. 조운과 종진의 싸움에서 조운은 1창에 종진을 말에서 떨어뜨렸다. 관우와 주연의 싸움에서 3합이 되지 않아 주연은 도망쳤다. 조운과 한영의 싸움에서 3합도 되지 않아 한영은 창에 찔려 말에서 떨어져 죽었다. 관우와 반장의 싸움에서 3합도 되지 않아 반장이 도망쳤다. 조운과 한덕의 싸움에서 3합도 되지 않아 한덕은 창에 찔려 말에서 떨어져 죽었다. 관우와 맹탄의 싸움에서 맹탄은 3합을 싸우고 말을 돌려 도망쳤다. 조운과 반수의 싸움에서 3합이 되지 않아 반수가 패했다. 여러합을 싸운 경우의 대비: 관우와 차주의 싸움에서 차주는 여러합을 싸우다가 막지 못하게 되지 말을 몰고 되돌아갔다. 그런데 차주는 다른 장수를 참한 기록이 없다. 조운과 여광의 싸움에서 수합을 싸우다가 조운의 창에 찔려 여광이 말아래로 떨어졌다. 여광은 수합만에 잠벽을 참한 기록이 있다. 회수를 모르는 경우의 대비: 관우는 북을 울리며 채양을 참하였고 장비가 이를 보고 기뻐했다. 조운은 자리에 앉기전에 유준, 마한을 참하였고 이로 인하여 마초가 그를 더욱 존중하게 되였다. 관우는 단독대결에서 일곱번 10합이상을 싸웠는데 그중 한번 승리했다. 조자룡은 여섯번 10합이상을 싸웠는데 그중 세번 승리했다.   ◇ 관우와 조자룡의 포위돌파능력 비교   관우는 1번 무인지경으로 돌파한 적이 있었지만 조자룡은 3번 무인지경으로 돌파한 적이 있었다. 관우는 4번 포위당하였는데 제1차는 몸을 뺄수 없어 항복했고 제2차는 포위망을 뚫고 나왔으며 제3차는 몸을 빼지 못하고있는것을 관평, 요화가 구출해주었고 제4차에서는 사망되였다. 조자룡은 5번 포위당하였는데 제1차는 공손찬을 보호하면서 포위망을 뚫었고 제2차는 유리를 보호하며 퇴각했으며 제3차는 아두를 안고 7번이나 들락날락 했고 제4차는 포위망을 뚫었으며 제5차는 몸을 빠져나가지 못하여 관흥, 장포가 구출해주었다. 관우가 토산에서 포위를 빠져나가지 못할 때는 관우의 전성기였고 조자룡이 봉명산에서 포위를 벗어나지 못할 때는 이미 로년이였다. 토산에서 포위당했을 때 관우의 수하에 3000인마가 있었고 적군인 하후돈이 5000, 허저와 서황의 군대는 인원수가 불명확했다. 이렇게 다 합쳐도 2만 5000명이상은 아니 되였것이다. 봉명산에서 포위당했을 때 조자룡의 수하는 1000여명이고 적수인 동희, 설측은 각각 3만을 데리고있었으며 주사령관인 하후무의 군대는 인원수가 불명확했지만 동희, 설측보다는 많았을것이다. 그렇다면 아마도 10여만명은 되였을것이다.     ◇ 동일한 적수간의 비교   관우는 주연과 삼합을 싸웠는데 주연이 거짓으로 패한척하고 도망쳤다. 그러나 조자룡은 한창에 주연을 찔러죽였다. 허저는 조자룡과 싸워본 후에 조자룡이 10여일을 나가서 싸움을 걸었지만 나가지 않았다. 장판파에서 조조가 조자룡을 생포하라고 하였는데도 허저는 나가지 않았다. 그러나 허저는 관우와 싸워본 후에 관우를 생포하겠다고 큰소리치고 다녔다. 관우는 장료와 싸우면서 장료의 무예가 자기의 아래가 아니라고 하였다. 조자룡은 혼자서 장료, 우금, 이전과 싸우면서 류비가 멀리 도망치기를 기다려 몸을 뺐다. 관우의 적수 문추는 조운과 비긴 적이 있다. 조운의 적수 서황은 관우를 물리친 적이 있다. 문추는 관우앞에서 두회합을 싸우고 도망쳤다. 서황은 옆에 장합이 있는데도 감히 조운과 싸우려고 하지 않았다. 하비성에서 하후돈이 사람을 시켜 성아래에서 욕을 하게 하였다 관우는 대노하여 3천인마을 이끌고 하후돈과 싸웠다. 여기서 적을 유인한 자는 하후돈이며 리성을 잃고 싸우러 나간 자는 관우였다. 박망파에서 하후돈이 대노하여 말을 내려치며 앞으로 와서 조자룡과 싸웠다. 여기서 유인한 자는 조자룡이고 리성을 잃은자는 하후돈이였다.      
329    참는게 아재비다 댓글:  조회:4740  추천:8  2015-12-15
참는게 아재비다   김희수     근년에 박춘봉, 김하일 등 조선족의 이미지를 왕창 추락시키는 한국내 조선족범죄가 늘어나고있어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하고있다. 한국이나 국내를 포함해서 우리 주변에서 일어난 폭력사건이나 살인사건을 살펴보면 대부분이 일시적인 충동을 참지 못해 분노가 폭발해 발생한 비극임을 알수 있다.   한국 경기도 시흥에서 안해를 목졸라 살해한 뒤에 시신을 훼손해 시화호에 유기한 김하일은 구속된 당시에 “저도 모르게 욱해서 그랬습니다. 집사람에게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말했다. 물론 김하일이 19년전에도 도문시 석현진에서 20대녀성을 살인한 전과가 있지만 그때도 화를 참지 못해 살인을 저질렀을 가능성이 높다. 만약 참았더라면 이런 비극을 피면할수 있었을것이다. “참을 인(忍)자 셋이면 살인도 피한다”고 하지 않는가?   화가 나면 참지 못해 갑자기 늑대나 호랑이로 돌변하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일수록 욱하는 성질을 자제하면서 화를 참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분노를 참지 못해 값비싼 대가를 치른 사람들의 사례를 적어두고 거울로 삼으면서 참을 인(忍)자를 항상 가슴에 새겨두어야 한다.   화를 참으면 병이 나지 않는가? 화를 참으면 더 큰 화를 불러오게 되는 경우도 있지 않는가? 쌓이고 쌍였던 분노가 마침내 폭발하여 일어난 범죄도 있지 않는가? 의학적으로 보면 화를 참으면 있던 병이 더해지고 없던 병도 생겨날수 있다. 그래서 의사들은 화가 날때 참지 말고 풀라고 권한다.   그럼 화를 참아야 하는가? 풀어야 하는가? 의사들이 화를 풀라고 하는것은 마구 행패를 부리거나 싸우라는 말이 아니다. 자기만의 방법을 찾아 화를 다스리라는 뜻이다. 화가 난다고 마구 란동을 부리거나 다른 사람과 싸우면 타인에게 상처를 입히거나 타인을 사망에 이르게 하는 엄중한 후과를 조성하게 된다. 결국 자신도 폭행죄나 살인죄로 감옥신세를 지게 되여 후회막급, 그때는 아무리 가슴을 치며 후회해도 소용이 없다.   화는 참아야 하고 또 풀어야 한다. 그럼 이는 모순되지 않는가? 아니, 전혀 모순되지 않는다. 참아야 한다는것은 그 자리에서 잠시 참아야 한다는것이고 풀어야 한다는것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상황에서 풀어야 한다는것이다. 즉 그 자리를 피해서 다른 조용한 장소에 가서 풀어야 한다는것이다.   화가 날 때에는, 특히 화를 내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게 될수 있는 경우에는 재빨리 그 장소를 벗어나 휴대폰으로 음악을 듣는다거나 조용한 강변에 가서 큰소리로 화가 나게 한 상대를 욕한다거나 큰돌을 그 상대라고 가정하고 큰돌을 향해 돌팔매질한다던가, 헬스장으로 달려가서 권투글러브를 끼고 샌드백을 상대라고 상상하며 “죽일놈, 죽일놈”하고 들이친다거나…자신에게 적당한 화풀이방법을 찾아 화를 다스려야 한다.   화가 나서 피하고싶은데 싸워야 할 상대를 피할수 없을 경우에는 제자리에 돌아서서 속으로 “참는게 아재비다”하고 백번을 외워보는게 아마도 효과가 좋은 방법일것이다. 화가 날 때에는, 특히 누군가 화를 돋굴 때에는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입을 닫는것이 좋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고 한쪽에서 잠잠하면 상대방도 혼자서 화를 내다가 제풀에 지쳐서 물러갈것이다.   아무리 화가 나도 참아야 한다. 참으면 당시에는 손해를 보는것 같지만 나중에는 “그때 참기를 참 잘 했지”하고 회심의 미소를 짓게 될것이다. 묻지마 살인이나 계획적인 살인을 제외한 살인은 대부분 일시적충동으로 인기된 분노범죄이다. “참을 인(忍)자 셋이면 살인도 피한다”는 속담이 있댜. 또 “참는게 아재비다”, “참는 자에게 복이 있다”는 말도 있다. 힘들어도 조금만 참자, 추워도 조금만 참자, 아파도 조금만 참자, 참고 참고 또 참으면 얼었던 강물이 풀리고 따스한 봄이 올것이다.     
328    모택동의 아들 모안룡의 생사비밀 댓글:  조회:5906  추천:0  2015-12-12
  모택동의 아들 모안룡의 생사비밀   (번역)     양개혜는 1927년에 모택동의 셋째아들 모안룡(毛岸龙)을 낳았다. 1930년 11월 14일에 양개혜가 국민당반동파에게 살해된후 모안룡은 두 형인 모안영(毛岸英), 모안청(毛岸青)과 함께 모택동의 큰 동생 모택민의 집에 가서 살게 되였다. 거기서 모안룡은 상해지하당이 령도하는 대동유치원에 다녔다. 1931년 봄에 상해지하당은 엄중한 피해를 입었다. 그리하여 모택동의 세 아들은 류랑아로 되여 상해의 거리에 떠돌아다니게 되였다. 그때 모안영, 모안청은 동생 모안룡을 잃었는데 지금까지 모안룡의 생사는 수수께끼로 되고있다. 지금까지 살아있다는 설도 있고 세균성리질로 상해광자병원(지금의 서금병원)에서 사망되였다는 설도 있다. 텔레비죤극 《모안영》을 촬영하는 현장에서 총고문이 취재를 접수할 때 이렇게 말했다. “병원의 한 간호사가 모안영을 보고 모안영의 동생이 독성리질에 걸려 사망되였다고 했습니다. 후에 모안청의 부인 소화가 그 병원에 와서 모안룡의 병력서를 찾았는데 없었다고 합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1931년 5월말이거나 6월초의 어느날에 모안룡은 갑자기 설사를 하고 고열이 났다. 그래서 보육원의 진봉영(리구실렬사의 미망인)이 모안룡을 안고 부근의 광자병원으로 달려가 구급을 받았으나 효과를 보지 못하고 그날밤에 사망되였다. 유치원에서 행정사무사업을 책임진 요아부가 관을 사서 장례식을 치뤘다고 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광서에서 모안룡을 발견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중공지하조직에서는 전문 사람을 파견하여 찾아보았으나 결과를 보지 못했다. 20세기 80년대에 저명한 특형배우 고월이 나타나자 사람들은 그가 모택동이 잃어버린 셋째아들 모안룡이 아닐가 하고 추측했다. 《모택동의 아들 모안룡》이라는 책에는 사회상에 생사불명이라고 전해졌던 모안룡이 세상에 살아있다고 했다. 모안룡은 어느 집에 양자로 들어갔다가 후에 강남항일부대에 참가했으며 항미원조전쟁까지 나갔다고 부상을 입었다. 그런데 모택동이 모안룡이라는 신분을 승인하지 말라고 부탁했다는것이다. 이에 대해 모안영의 부인 류사제는 믿을만한 사실이 아니라고 했다. 
327    가볍게 창녀를 말한다 댓글:  조회:12091  추천:8  2015-12-08
가볍게 창녀를 말한다   김희수     돈을 받고 남자에게 몸을 파는 녀자를 창녀, 창부, 분홍녀, 매춘부, 매음부, 매음녀, 창기, 성매매녀성, 갈보라고 부른다. 갈보는 창녀를 속되게 이르는 말이다. 이외에 콜걸도 있는데 콜걸은 매춘장소에서 손님을 기다리는것이 아니라 전화호출에 응하여 매춘을 하는 녀성을 가리켜 부르는 말이다.   남창은 남색을 파는 일을 직업으로 하는 남자이다. 한국에서는 성산업에 종사하는 사람을 통틀어 성근로자라고도 부른다. 창녀촌, 집창촌, 사창가는 창녀가 생활하는 시설이 모인 거리를 뜻한다. 붉은 등이 늘어선 거리라는 뜻으로 홍등가, 유곽이라고 하고 매음하는 사람들이 모여사는 곳이라는 뜻으로 매음굴이라고도 한다.   기생, 기녀는 조선의 사전에서 “① 낡은 사회에서 노래와 춤을 파는것을 업으로 하는 비천한 계층의 녀자. ② 노래와 춤, 몸과 웃음을 파는것을 업으로 하는 젊은 녀자를 통털어 이르는 말.”이라고 했고 한국의 사전에서 “① 잔치나 술자리에서 노래나 춤 또는 풍류로 흥을 돋우는 것을 직업으로 하는 여자. ② 전통사회에서 잔치나 술자리에서 노래·춤 및 풍류로 참석자들의 흥을 돋우는 일을 업으로 삼았던 여자.”라고 했다. 그러니까 기생이나 기녀는 조선사전의 두번째 의미대로라면 창녀라는 뜻도 포함된다. 하지만 한국사전의 뜻대로라면 노래와 춤만 팔지 몸을 파는 녀자는 아니다.   중국이나 조선족사회에서는 기생이나 기녀(妓女)를 창녀의 뜻으로 사용하고있다. 중국에서는 기녀(妓女)를 “구중국에서 전문훈련을 받아 직업봉사능력을 갖추고 성매매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청루녀자(青楼女子)로 업내의 직위는 ‘창(娼)’보다 높다. 즉 화대수입이 비교적 높고 사회지위가 비교적 높은 상대에게 몸을 판다.”고 정의했다.     중국대륙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후 법률적으로 성매매를 금지했기에 기녀는 비법이였다. 1949년에 중국공산당이 정권을 장악한지 얼마 안되여 인민정부에서 기생집을 강제로 페쇄하고 포주를 처벌하고 기생을 개조하는 등 조치를 통과해 창기제도를 금지했다. 1957년에 이르러 매음창기활동은 기본상 엄금되였다. 그러나 1970년대말 즉 1978년에 개혁개방이 시작되면서부터 여러가지 원인으로 매음활동이 중국에서 다시 나타나기 시작했다. 특히 개방도시와 연해지구에서 만연되고 확산되는 추세이다.   북경표준어로 기생의 기(妓)와 닭 계(鸡)의 발음이 동음이기에 기녀를 속칭으로 닭이라고도 불렀다. 중국에서는 창녀를 청루녀자(青楼女子), 암창(暗娼), 풍진녀자(风尘女子)라고도 불렀고 전문 황제와 제왕들을 상대로 하는 창녀를 궁기(宫妓)라고 불렀다. 오늘날에 와서 창녀를 함께 먹고 함께 마시고 잠자리까지 함께 하는 녀성이라는 뜻으로 삼동반아가씨(三陪小姐)라고도 부른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창녀는 줄곧 인류력사와 함께 존재해왔다. 중국고대에는 류여시(柳如是), 소소소(苏小小), 리사사(李师师), 진원원(陈圆圆), 량홍옥(梁红玉), 동소완(董小宛) 등 명기(名妓)가 있었고 우리 민족력사에는 황진이, 이매창, 소백주 등 명기와 론개, 계월향, 홍련 등 의로운 일을 한 기생이 있었다.   세상에 이름을 남긴 명기와 의로운 기생이 있었다고 해서 기생의 존재를 찬성한다는 말이 아니다. 몸을 파는 창녀는 몸을 사겠다는 남자가 있기에 존재한다. 팔겠다는 창녀와 사겠다는 오입쟁이, 누가 더 나쁠가? 피차일반이겠지만 창녀는 남자들에게나 녀자들에게나 모두 무시당하는 존재이다.   무시당하면서 돈때문에 몸을 판다. 자의든 타의든 창녀는 돈때문에 몸을 판다. 돈이 많은 녀자는 몸을 팔지 않는다. 몸을 팔 필요가 없기때문이다. 고대로마의 황후 메사리나와 같은 녀자를 제외하고… 그리고 자중자애하는 녀성도 몸을 팔지 않는다. 핍박에 의한 경우는 제외하고…   어떤 리유로 창녀가 되였건 성매매는 잘못 들어선 “직업”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창녀만 무조건 나쁘다고 단죄할수는 없는 일이다. 창녀를 사자고 하는 남성도 나쁘기 때문이다. 어쩌면 오입쟁이가 창녀보다 더 나쁠수 있다.   파니까 샀지. 파는걸 샀는데 왜 나쁘나고 해? 금지품을 샀으니까 나쁘다는거야! 누가 금지품을 팔라고 했어? 너같이 사자는 놈이 있으니까 판게 아니겠어?   마약, 장기, 야생동물, 밀수품과 마찬가지로 몸은 이성에게 팔아서는 안된다. 아무리 자기의 몸에 달렸다고 해도 법으로 금지한 이상 팔아서는 안된다. 파는 사람은 팔아야 되는것만 팔고 사는 사람은 사야 되는것만 사야 한다.   세계적으로 성매매를 합법화한 나라도 있고 금지한 나라도 있다. 중국은 후자이다. 따라서 중국에서 성매매는 비법이며 타격대상이다. 때문에 전국 곳곳에서 이따금씩 지하성매매업소를 급습해 성매매를 하는 남녀들을 엄하게 처벌하고있다.     성매매가 비법이기에 처벌하는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문제는 성매매녀성들을 사람취급을 하지 않는것이다. 심수의 경찰이 거리에서 100명의 창녀들과 오입쟁이들을 대중앞에 공개한 적이 있고 동관경찰도 창녀를 바줄로 묶은채 길거리에서 얼굴을 공개한적이 있다.   죄패를 목에 걸고 거리로 끌고다니며 투쟁하던 문화대혁명 때의 정경이 눈앞에 떠오르며 눈살이 찌프러진다. 아무리 죄가 있다고 해도 창녀도 인권이 있는데 거리에서 마구 끌고 다니다니…창녀도 사람인데 개취급을 해서야 되겠는가?      
326    사내들을 죽음도 불사하게 만든 기녀 초요갱 댓글:  조회:4372  추천:0  2015-12-08
사내들을 죽음도 불사하게 만든 기녀 초요갱   이한우 (한국)     세조 9년(1463년) 윤7월 4일 세조가 조정 내 유신(儒臣)들을 위해 경회루에서 큰 잔치를 열었다. 이 자리에는 당시 '4기녀'로 유명했던 옥부향(玉膚香) 자동선(紫洞仙) 양대(陽臺) 초요갱(楚腰輕)이 모두 불려와 춤과 노래를 선보였다. 이날 실록이다.   "초요갱은 어려서 평원대군(平原大君) 이임(李琳)의 사랑을 받다가 평원대군이 죽자, 화의군(和義君) 이영(李瓔)과 사통하였는데, 임금이 이영(李瓔)을 폄출(貶黜)하고 초요갱도 쫓아냈다가 얼마 아니되어 초요갱이 재예(才藝)가 있다고 하여서 악적(樂籍)에 다시 소속시키니 계양군(桂陽君) 이증(李 曾)과 또 사통하였다. 임금이 이 사실을 알고 비밀리에 이증에게 묻기를 '어찌 다른 기생이 없어서 감히 초요갱을 두고 서로 간음하는가?' 하니 이증은 그것이 무고(誣告)임을 변명했으나 이날도 초요갱의 집에서 묵었다. 뒤에 판사(判事) 변대해(邊大海)가 몰래 초요갱의 집에 묵었다가 이증의 종에게 맞아 죽었다."   '허리가 개미처럼 가는 초나라 미인의 경쾌함.' 초요갱에 담긴 뜻이다. 잠깐 옆으로 샌다. 당시 기생들의 이름이다. 옥부향은 '옥같이 맑은 피부에서 아름다운 향기가 난다'는 뜻이고 자동선은 '신선들이 사는 곳의 선녀'라는 뜻이다. 그 밖에 '이슬을 머금은 꽃이라는 뜻'의 함로화(含露花)라는 기생도 있었다.   초요갱 초요갱은 도대체 얼마나 미인이었기에 그냥 고관대작도 아니고 세종의 아들들과 동시에 놀아날 수 있었을까? 평원대군 이임은 세종과 소헌왕비 사이의 일곱째 아들이고 화의군 이영과 계양군 이증은 세종과 신빈 김씨 사이에서 난 아들이다. 이임과 이영은 이복형제, 이영과 이증은 동복형제이고 따라서 세조와도 형제간이다. 초요갱은 그에 앞서 수양대군이 정변을 일으킨 직후인 단종 3년(1455년) 이영과의 관계가 문제가 돼 궁궐에서 쫓겨난 바 있다.   그런데 궁궐을 나간 초요갱은 세종 때 좌의정을 지낸 신개의 막내아들 신자형(申自衡)과 눈이 맞았다. 아예 안방을 꿰차고 들어앉았다. 세조 3년(1457년) 6월 26일 사헌부에서는 예장(禮葬)도감 판사 신자형이 본부인을 멀리하고 초요갱에게 빠져 초요갱의 말만 듣고 여종 두 명을 때려죽였다며 처벌을 요구하는 기록이 나온다.   그러나 신자형은 계유정난의 공신이었기 때문에 유배는 가지 않고 직첩(職牒)만 빼앗겼다.   그런데 석 달여 후인 10월 7일 사헌부에서는 훨씬 충격적인 보고를 올린다. 신자형의 7촌 조카뻘인 안계담이란 자가 초요갱을 '덮치기 위해' 다짜고짜 신자형의 안방으로 들이닥쳐 신자형의 아내 이씨는 놀라서 달아나다가 땅에 뒹굴고, 초요갱을 찾지 못한 안계담이 신자형의 노비들을 마구 구타하는 사건이 발생했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아름다운 기녀를 둘러싼 사내들의 쟁탈전에는 왕실에서 미관말직까지 귀천(貴賤)이 따로 없었다.   앞서 이복형님이기도 한 세조에게 야단맞은 계양군 이증과 관련해 실록에는 "주색(酒色)으로 인해 세조 10년 8월 16일 졸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40도 안 돼 세상을 뜬 것이다.   초요갱은 남자들에게 횡액(橫厄)을 가져다 주는 '요부(妖婦)'와도 같은 존재였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초요갱의 입장에서 보자면 억울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자신이 누구를 죽인 적이 없다. 죽음도 불사한 사내들이 달려들다가 날개를 태워버리기도 하고 목숨을 잃기도 했을 뿐이다.       [출처] 조선일보      
325    중국공산당력사에서 첫번째 잠복영웅은 누구인가 댓글:  조회:5360  추천:1  2015-12-06
중국공산당력사에서 첫번째 잠복영웅은 누구인가   (번역)     집정지위를 얻기전에 특수한 환경때문에 중국공산당 당원은 공개신분의 당원과 비공개신분의 비밀당원으로 나뉘였다. 비밀당원중에는 “룡담3걸(龙潭三杰)”로 불리운 리극농(李克农), 전장비(钱壮飞), 호저(胡底), “후룡담3걸(后龙潭三杰)”로 불리운 웅향휘(熊向晖), 신건(申健), 진충경(陈忠经), 그리고 백숭희신변의 기요비서 사화갱(谢和赓) 등이였다. 이런 비밀당원들은 모두 상급과 단선련계를 가지고있었기에 병사했거나 희생되였을 때 사람들은 그들이 중국공산당 당원인줄 모르고있었다. 그렇다면 누가 중국공산당력사에서 첫번째 비밀당원이였는가? 그가 바로 구군벌의 진영에서부터 혁명의 길을 걸어온 주덕이였다. 주덕은 중국공산당의 비밀전선에서 싸운 첫번째 “잠복영웅”이였다. 소년시절에 서당에서 글을 배운 주덕은 20세에 성도의 고등사범에 들어갔다. 그후 운남강무당에 들어가 반청혁명(反清革命)의 동맹회와 신해혁명에 참가했다. 운남강무당을 졸업한후 주덕은 운남군에 참군하여 소위 패장으로부터 시작해 원세개토벌과 군벌혼전을 겪으면서 소장(少将) 려장으로까지 승직했다. 그는 다른 장군들과 달리 무력람용과 권력다툼에 대해 염오했다. 그는 많은 청년군관과 학생들을 집에 끌어들이며 “신청년” 등 진보잡지를 애독했다. 로씨야의 10월혁명과 “5.4”운동의 영향을 받은 주덕은 낡은 군사투쟁의 방법으로는 혁명의 목적에 도달할수 없다는것을 의식했다. 1921년에 주덕은 주동적으로 월수입이 매우 높은 군부를 떠나 중국공산당을 찾기 시작했다. 1922년 7월초에 주덕은 북경의 《민보》에서 주필을 맡고있는 친구 손병문(孙炳文)을 찾아갔다. 손병문은 공산당이 상해에서 창건된 정황에 대해 주덕에게 이야기해주었다. 그해 8월중순에 주덕과 손병문은 함께 상해로 왔다. 그들은 상해에서 손중산을 만난 혁명을 군벌과 동맹을 맺는데 의거해서는 안된다는 주장을 제기했다. 며칠후 주덕은 손병문을 따라 상해의 갑북에 있는 당중앙거처에 찾아가 중공중앙집행위원회 주임직을 맡고있는 진독수를 만났다. 주덕은 자신의 경력에 대해 솔직히 털어놓으며 공산당에 가입하겟다고 신청했다. 그러나 진독수는 주덕처럼 구군벌에 있던 사람이 입당하려면 더 고찰해야 한다고 인정했다. 게다가 주덕은 손병문과 진독수에게 입당소개인이 되여달라고 하지 않았기에 진독수는 주덕의 입당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이에 주덕은 실망했다. 그러나 주덕은 공산당에 가입하려는 욕망이 강렬했기에 포기하지 않았다. 1922년 9월에 주덕은 주은래를 찾아 입당신청을 제출했는데 주은래도 주덕의 입당요구에 대해 즉시 대답하지 않았다. 주덕은 밤을 지새우며 주은래에게 자신의 신분, 경력에 대해 이야기하며 공산당에 가입하려는 의지를 밝혔다. 이렇게 되여 주은래는 주덕에 대해 깊이 료해하게 되였다. 2개월후에 주은래와 장신부는 함께 주덕의 입당소개인으로 되였다. 주덕은 로동자가 아니였기에 당의 장정규정에 의해 그의 입당은 반드시 중앙집행위원회의 심사통과를 거쳐야 정식당원으로 될수 있었다. 주덕이 당의 고험을 통과했고 주은래와 장신부의 소개가 있었기때문에 진독수는 당중앙을 대표하여 주덕의 입당신청을 비준했다. 그러나 주덕의 당적은 대외에 비밀로 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진독수가 심사숙고한 후에 내린 결정이였다. 당시의 환경에서 공산당은 어렵게 구군대에서 높은 지위에 있던 사람을 당원으로 접수했는데 이는 군중들에게 불량한 영향을 끼칠수도 있었다. 동시에 주덕의 당적이 대외에 공개되지 않는것이 혁명에 유리하다고 판단되였기에 진독수는 주덕을 “비밀당원”으로 두기로 결정했다. 이는 진독수가 내놓은 우리 당의 최초의 시도였는데 그후의 중국공산당력사에서 “비밀당원”을 받아들이는데 선례를 만들어놓았다. 이런 “비밀당원”들은 모두 혁명실천중에서 그 무엇으로도 대신할수 없는 작용을 발휘했다. 이처럼 주덕의 당적은 최초에 비밀이였다. 이는 당의 사업에 유리했으며 군군벌을 우리편으로 끌어오는데 중대한 공헌을 할수 있는 보장이 되였다. 북벌전쟁이 시작된후 1926년 7월에 주덕은 쏘련에서 귀국했다. 주덕이 상해에 도착하자 진독수가 상해 갑북구의 당중앙거처에서 그를 회견했다. 진독수는 주덕을 비밀당원의 신분으로 사천군벌 양삼(杨森)한테 파견하여 양삼을 설복하여 북벌을 지원할수 있게 하라고 했다. 그와 동시에 진독수는 주덕더러 운남군과 옛관계를 리용하여 군벌 손전방(孙传芳)의 실력을 조사하라고 했다. 그런 임무를 맡고 사천으로 간 주덕은 원래 오패부와 결탁하려고 했던 양삼을 설복하여 기치를 바꾸게 했다. 양삼은 그해 11월 2일에 정식으로 국민혁명군 제22군 군장직을 맡았다. 그 시기에 주덕은 공개적인 당원의 신분으로 당대표직을 맡았다. 구군벌들속에서 비밀사업을 한 이 경력은 주덕으로 하여금 우리 당의 가장 이른 “잠복영웅”으로 되게 했다. 1927년의 남창봉기시 전군(滇军)교육퇀 1부를 거느리고 참가했는데 제9군 부군장을 맡았다. 봉기군이 호산으로의 남정이 실패했을 때 주덕은 위험한 정황에서 근 천여명의 너머지 “철군”을 거느리고 광동서북부와 호남을 거쳐 1928년 4월에 정강산에 올라 모택동과 회합했다. 모택동과 주덕은 홍4군을 건립하고 주덕은 군장을 맡았는데 전국에서 첫번째 홍군주력의 최고군사지휘관이였다. 후에 중국로농홍군 총사령, 팔로군 총지휘(후에 제18집단군으로 개칭), 중국인민행방군 총사령 등 인민군대의 최고령도직무를 맡았다. 주덕은 인민군대의 창건자와 령도자의 한분이며 당과 국가의 주요령도자의 한분이며 중화인민공화국 10대원수의 첫자리에 계신 분이다.      
324    1300년동안 완정하게 보존된 무측천릉묘의 비밀 댓글:  조회:5884  추천:1  2015-11-29
1300년동안 완정하게 보존된 무측천릉묘의 비밀   (번역)     만약 세계에서 어느 황제의 릉묘를 파헤치기 가장 어려운가고 묻는다면 조금의 의심도 없이 무측천의 “만년수역(万年寿域)—건릉(乾陵)”이라고 대답해야 정답일것이다. 무측천의 릉묘는 랭병기(冷兵器)시대의 도검(刀剑)에도 시달렸고 열병기(热兵器)시대의 기관총과 대포의 세례도 받았다. 1300여년을 거치면서 건릉을 파헤치려고 했던 도굴범(盗墓贼)중 이름이 있는 자만 해도 17명이상이였다. 지금에 이르기까지 한무제의 무릉(茂陵)이 도굴당해 텅비였고 당태종의 소릉(昭陵)도 모두 파헤쳐졌다. 강희황제의 릉묘는 더 험하게 당해 뼈마저 완정하게 보존되지 못했다. 그런데 왜서 유독 무측천의 건릉만이 완정하게 보존되였을가? 이 일은 건릉을 수건할 때부터 말해야 할것이다. 건릉은 기원 684년에 수건하기 시작하여 23년만에 공사가 기본상 완공되였다. 건릉은 섬서성 건현성 북쪽 6킬로메터 되는 량산에 자리잡고있는데 서안과 76킬로메터 떨어져있다. 량산은 자연적으로 형성된 석회암질의 산봉이다. 3개의 봉우리가 우뚝 솟아있는데 최고봉인 북봉은 해발 1047.3메터이다. 동서가 서로 마주서있는데 당시 사람들은 “내두산(奶头山)”이라고 불렀다. 건릉동쪽에서 서쪽을 바라보면 량산은 녀성이 반듯이 누워있는 형상인데 북봉은 머리같고 남이봉은 가슴같다. 사람들은 이를 녀황제 무측천을 상징하는 절묘한 형상이라고 말했다. 당나라의 풍수선생은 량산이 녀주인에게 유리하다고 인정했다. 때문에 무측천은 량산을 당고종과 자신이 죽은후에 누워있을 “만년수성”으로 선택했다. 건릉을 수건할 때는 당나라가 흥했고 국력이 강했기때문에 릉원규모가 방대했고 건축이 웅위롭고 아름다와 “력대황제의 릉묘중 최고”라고 불리웠다. 당조초기에 당태종 리세민은 예로부터 망하지 않은 나라가 없고 파헤쳐지지 않은 무덤이 없었다는 력사교훈을 받아들여 그와 장손황후의 소릉(昭陵)부터 시작하여 “인산위릉(因山为陵)”의 장례제도를 내왔다. 당시의 저명한 예술대사 염립덕, 염립본 형제가 건축군과 조각군을 결합하여 설계한 릉원이 끝없이 이어진 산우에 기복을 이루며 놓여있는데 멀리서 보면 마치 룡이 누워있고 봉황새가 날아오르는듯한 형상이다. 당고종과 무측천의 건릉(乾陵)은 점차 소릉(昭陵)의 모양을 갖추었다. 당조의 도읍 장안의 격식으로 건설된 릉원은 황성(皇城), 궁성(宫城), 외곽성(外郭城)으로 나늬였는데 남북주축선은 4.9킬로메터에 달한다. 다년간의 탐측과 고찰을 거쳐 릉원안의 보물은 적어도 500톤에 달할것으로 문물전문가가 예측했다. 전후통로의 량측에 각각 4개의 석굴이 있는데 석굴안에는 당조흥성시기의 가장 가치있는 보물이 가득 차있다. 금강벽으로 통해있는 근 100메터되는 통로량측에는 각종 금은제기(金银祭器)가 빼곡이 배렬되여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세인들의 흥미를 끄는것은 최상급 국보(国宝)인 “란정서(兰亭序)”이다. 건릉일대의 민간에는 일찍 “란정서”가 무측천의 묘지에 묻혀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상습도굴범, 변경을 지키는 총독, 토비, 군벌 심지어 농민봉기군까지 건릉에 수많은 금은보화가 묻혀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와서 삽과 괭이로 묘지를 파혜쳤다. 무측천이 건릉에 누워있은 시각부터 량산은 조용할 날이 없었다. 제일 처음 건릉을 찾아온것은 당조말기의 반란대군 령수 황소였다. 이 소금장사군은 60만대군을 거느리고 장안을 공격한후 한바탕 통쾌하게 불사르고 략탈하는것으로 토비근성을 만족시키고 나서 갑자기 할일이 없는것을 발견했다. 이때 누군가 량산의 서측황토지하에 대량의 자갈이 매장되여있다고 아뢰였다. 이 소식은 당릉중 가장 부유한 건릉의 입구가 량산의 서측에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것을 암시했다. 황소는 크게 기뻐서 즉시 40만병사들을 동원하여 량산에 올라 서측부터 파헤치기 시작했다. 병사들 대부분이 농민출신이였기에 삽과 괭이를 쓰는 솜씨가 매우 능숙했다. 얼마 안되여 절반의 량산을 파헤쳐 40메터 깊이의 “황소도랑”을 남겼지만 건릉의 입구를 찾지 못했다. 그후 당왕조군이 장안을 공격하자 황소는 아무것도 얻지 못한채 도망쳤다. 자칭 서생이라고 우쭐댔던 황소는 우둔하기 그지없어 건릉이 북쪽에 자리잡고 남쪽을 향했다는것을 알지 못했다. 당조황제는 고의적으로 시공할 때 생긴 자갈을 릉원에서 300여메터밖에 있는 곳에 매장했다. 때문에 황소는 속임수에 들어 다른 방향으로 파헤쳤던것이다. 건릉에 죄악의 손을 뻗친 두번째 인물은 5대시기의 요주절도사 온도였다. 온도는 당왕조의 황제릉묘를 파헤치려고 태여난것 같았다. 그는 건릉전에 이미 17개의 당나라의 황제릉묘를 파헤쳤다. 그는 마지막으로 건릉을 파헤치려고 했다. 하지만 그의 리상은 파멸되였다. 그는 황소처럼 수만명의 인력을 동원하여 시퍼런 대낮에 건릉을 파헤치려고 했다. 그러나 산에 오르면 폭우가 내리고 산에서 내려오면 날이 개이군 했다. 이렇게 세번이나 반복되자 온도는 무슨 일인지 도무지 알수 없었다. 그는 하느님이 노한것이라고 생각되여 다시는 건릉을 파헤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이렇게 되여 건릉은 두번째로 재난을 면했다. 가장 위험한것은 세번째였다. 세번째로 출동한것은 40만대군보다 더 강한 현대화로 재편성한 한개 사였다. 또한 도구도 삽과 괭이가 아니라 바위도 가를수 있는 기관총과 대포였다. 그렇게 기세등등하게 출동한 도굴주범은 바로 민국시기의 국민당 장군 손련중(孙连仲)이였다. 부하들을 거느리고 량산에 오른 손련중은 손전영(孙殿英)이 자희태후와 건륭황제묘를 폭발시킨것을 본받아서 군사훈련을 한다는 명의로 작탄을 묻어 건릉을 폭발시켜려고 했다. 그러나 폭발준비를 하고있을 때 갑자기 검은 연기같은것이 몰려와 룡권풍을 이루더니 흙먼지가 휘몰아쳐 삽시에 온천지가 어두컴컴해졌다. 돌이 굴러떨어지고 모래가 날려 섬서성에서 온 7명의 병사가 당장에서 피를 토하며 죽어버렸다. 그 바람에 다른 병사들은 목숨을 구하겠다고 산아래로 도망쳤다. 이렇게 되여 건릉은 마지막 재난을 면하게 되였다. 건릉은 당조의 제3대 황제인 고종 리치와 그의 황후 무측천을 합장한 묘이다. 건릉릉원의 주작문(朱雀门)밖의 동서량측에는 61존석인상(61尊石人像)이 분포되여있다. 61존석인상의 크기는 1.50~1.77메터로서 진짜사람과 비슷한데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번상(蕃像)” 또는 “빈왕상(宾王像)”이라고 부른다. 건릉에 현존하는 번신상은 모두 61존인데 동쪽에 29존이 있고 서쪽에 32존이 있다. 이렇게 대칭되지 않았기에 학자들은 번신상이 모두 61존만이 아닐것이라고 의심했다. 과연 연구일군들은 건등의 동쪽릉원구에서 높이가 2.45메터이고 너비가 0.86메터인 미완성석재를 발견했다. 후에 또 그쪽에서 사람형태가 형성된 다른 하나의 반제품을 발견했고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부근의 촌민들이 미완성석상을 발견했다. 이 발견으로 하여 학자들은 건릉의 번신상이 원래는 64존이였을것이라고 판단했다. 건릉의 번신상은 명조중후기에 엄중하게 파손되여 대부분 머리가 없어졌다. 그리고 본세기초에 모든 번신상의 머리가 사라졌다. 명조 가정(嘉靖) 34년(기원 1555년 1월 23일)에 섬서성 화현일대에서 8~11급의 강렬한 지진이 발생되였다. 사람들이 달콤하게 잠을 자고있던 밤중에 지진이 일어났기때문에 그번 지진에 80여만명이 사망되였다. 화현은 건릉에서 100여킬로메터밖에 안되여 진중지대(震中地带)에 속했기에 건릉은 훼멸성적인 타격을 받았다. 이것이 력사상 저명한 관중대지진(关中大地震)이다. 전문가들은 관중대지진이 번신상(番臣像)의 머리를  끊어지게 한 원인중의 하나라고 단정했다. 번신상뿐만아니라 건릉의 많은 석상석마가 훼손된 부분도 모두 머리부분이였기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석상의 경부가  취약한 외에 다른 하나의 중요한 원인은 석상의 재질(材质)이라고 분석했다. 당시 조각에 채용된 석료(石料)에는 일부 흠이 있었다. 즉 석료에서 일부 옅은색의 선을 볼수 있었다. 돌이 손상을 받을 때 이런 곳이 가장 쉽게 갈라지게 된다. 연구일군의 판단에 의하면 61존번신상(尊番臣像)의 일부분이 그번 관중대지진에 훼손되였다. 나머지 석상은 500~600년전의 명조말기에 발생된 여러차례의 전쟁에서 훼손되였을 가능성이 높다. 비록 이 61존번신상의 머리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수 없지만 소매폭이 몸에 딱붙는 옷, 너른 허리띠, 짧은 가죽신, 두발이 마치 살아있는것처럼 생생한 형상은 마치 조정에서 번신(蕃臣)들이 시립하고있는 정경을 보는듯 하다. 이런 정경은 우리에게 당나라의 태평성세를 상상하게 한다.    
323    등소평이 사망전에 한 마지막 한마디 말 댓글:  조회:6364  추천:0  2015-11-22
등소평이 사망전에 한 마지막 한마디 말   (번역)   1994년 음력설이후 등소평은 다시 공개장소에 나타나지 않았다. 해외매체들은 다투어 등소평의 병이 위급하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등소평은 북경의 4방형(四方形)자택에서 편안한 나날을 보내고있었다. 1997년 2월에 등소평의 병이 위급했다. 의사의 해석에 따르면 등소평의 심장, 간장, 비장은 모두 건강하고 로인에게서 흔히 볼수 있는 당뇨병이거나 전위선염도 없었다. 치명적인 문제는 신경계통에서 발생되였다. 이것은 의학상에서 파킨슨(帕金森)합병증이라고 하는 일종 완치할수 없는 질병이였다. 1996년 12월의 어느 아침에 일어난 등소평은 호흡이 곤난한것을 느꼈다. 그리고 움직이기도 힘들었고 음식도 넘기지 못했다. 신변의 의사들은 이런 국면을 통제할수 없어 등소평을 변원으로 호송하는수밖에 없었다. 그해 양력설에 적은 눈이 내려 북경은 어디라없이 은빛세계를 이루었다. 그러나 301병원은 명절기분이라군 조금도 찾아볼수 없었다. 등소평의 병실은 병원마당의 남단에 있는 작은 청사의 꼭대기층에 자리잡고있었다. 병상주위에는 늘 많은 사람들이 서있었고 의사들과 간호원들이 쉴새없이 드나들었다. 그러나 어떤 때에는 담당의사 황림(黄琳)과 등소평만이 함께 있었는데 등소평은 이따금 정신을 집중하여 텔레비죤기록편을 시청했다. 그럴 때면 얼마간씩 정신상태가 좋아진것 같았다. 한번은 또 텔레비죤기록편을 시청했는데 등소평은 텔레비죤화면에서 멀리 걸어오는 사람을 똑똑히 분별하지 못했다. “저기 걸어오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등소평의 물음에 황림은 웃으며 대답했다. “바로 당신입니다. 좀 찬찬히 보십시오.” 그 사람이 가까이 오자 등소평은 자신이라는것을 알아보고 가볍게 입술을 움직이며 웃었다. 황림은 “이 기록편의 제목은 《등소평》인데 중앙텔레비죤방송국에서 방금 제작한것입니다. 모두 12부랍니다”라고 알려주었다. 등소평은 아무말도 하지 않고 한부 한부씩 감상했다. 황림은 등소평이 청각기능이 감퇴되여 잘 듣지 못한다는것을 알고있었다. 그래서 그는 등소평의 귀가에 입을 대고 텔레비죤기록편에서 등소평을 찬송하는 말을 한구절 한구절씩 중복하여 말해주군 했다. 황림은 갑자기 등소평의 얼굴에 한가닥 부끄러워하는 표정이 떠오른것을 발견했다. 등소평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병마의 고통속에 시달렸는데 이런 표정을 짓는것은 매우 힘든 일이였다. “그분은 매우 굳센 분이였습니다.” 황림은 나중에 그때의 일을 회상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저는 그분이 림종전에 고통스러워하는것을 느낄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한다디 신음소리도 내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그분은 매우 평온했습니다. 저는 그분도 자신의 병세가 매우 심해 앞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것을 알고있으리라고 느꼈습니다. 그분은 1992년에 그토록 많은 말을 했는데 지금 다시 전국인민에게 무슨 말을 남겨야 하지 않겠는가? 저는 이렇게 생각하고 그분에게 무슨 말을 하고싶은가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몇주일동안 그분은 다시 그런 화제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저의 물음에 가볍게 한마디 대답했습니다.” 그때 등소평이 사망하기전에 마지막으로 남긴말은 다음과 같은것이였다. “나는 해야 할 말은 이미 다 했어.” 1997년 2월 7일은 바로 음력 정월 초하루였다. 등소평의 병세는 점점 위중해졌다. 경위비서 장보충은 새해를 축하해야 한다는 생각이 떠올라 모두를 한곳에 모이게 했다. 모두들 술잔을 들었지만 눈물만 흘릴뿐 한마디말도 하지 못했다. “새해 의학계에서 기적을 창조했으면 좋겠는데…” 모두들 그렇게 기원했지만 애석하게도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93세의 등소평은 12일을 더 지탱하다가 1997년 2월 19일에 호흡기능이 극도로 쇠약해져서 의기에 의해서만 생명을 유지할수 있었다. 그날 21시 08분에 위인은 심장의 고동을 멈추었다.     
322    궁금한것을 밝혀라 댓글:  조회:5230  추천:7  2015-11-18
궁금한것을 밝혀라   김희수     며칠전에 흑룡강신문사이트에 들어갔다가 북경 모 영화회사에서 시나리오작가로 활약하고있는 조선족 녀류작가를 소개한 글을 감명깊게 읽었다. 그런데 7000자 남짓한 장문의 글에 녀류작가의 나이가 밝혀지지 않은것이 유감스러웠다.   작가라고 하면 독자들이 궁금해하는것이 물론 대표작이나 주요작품, 고향, 직업같은것이겠으나 그에 못지 않게 궁금한것이 나이다. 그 정도로 성취한 작가이면 년령이 얼마쯤 될가 하는것은 누구나 다 궁금해하는것이다. 몰론 이 글에서 언급한 내용으로 녀류작가의 나이를 추측불가능한것이 아니다.   학교선전대의 일원으로 무대우에서 대합창을 하다가  모택동초상을 든채 잠이 들었던 연고로 반동파로 몰려 투쟁을 받았다는 대목으로 추축해보면 이 녀류작가가 1966~1976년에 소학교에 다녔다는것을 알수 있다.   고중을 졸업하고 4년후에 시험제도가 회복되여 대학시험을 치렀다는 대목을 분석해보면 대학시험제도가 회복된것이 1977년이였으니 18~19살에 고중을 졸업했다고 할 때 그해 그녀의 나이는 22~23살이다. 그럼 현재 환갑나이가 된다는 얘기이다.   그런데 사이트에 올린 이 녀류작가의 사진을 보면 주름 한점 없는것이 많아야 40대로밖에 돼보이지 않는다. 사진의 뒤에 2010년이라는 글이 있으니 5년을 더한다고 해도 50대에 갓 들어섰을 정도밖에 돼보이지 않는다. 동안이여서 사진속의 얼굴이 젊어보일수 있다고 해도 실제 나이를 추측하기 쉽지 않다.   이 글에는 또 녀류작가가 월반하여 13살에 초중을 졸업(가정형편이 어려워 고중에 가지 못하고 13살에 생산대에 들어가 일했다는 대목이 있는데 일을 하루동안 했는지 며칠동안 했는지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지만 내용을 가늠해보면 1년은 넘겨 한것 같지 않다)했다는 대목이 있으니 대학시험을 칠 때의 나이를 두살정도 줄여서 생각할수 있다. 그럼 이 녀류작가의 나이는 57~59세라고 점쳐볼수 있다.   글에서 나이를 밝혔더라면 이렇게 글의 내용을 다시 다시 훑어보고 분석하면서 나이를 추측하는 수고는 없었을것이다. 설사 프라이버시라는게 있어 나이를 구체적으로 밝히지 못한다고 해도 40대작가, 50대작가, 60대작가 정도로 밝힐수야 있지 않겠는가?    지금은 인터넷시대여서 다른 사이트에서 올린 인기글을 번역하거나 퍼다가 내 사이트 혹은 내 블로그에 올리는 경우가 많다. 퍼다가 올리는 과정에 일반적으로 내용을 줄이는 경우가 많다. 특히 포토뉴스의 경우 그러하다. 인민망 한국어판이 지난 10월 23일에 올린 “미국 전역 최고 롱다리 소녀 화제, 무려 125cm”란 뉴스를 례로 들어보자.   “미국 뉴욕 출신 20살의 Holly Burt는 미국 전역에서 가장 긴 두 다리를 가지고 있다. 그녀는 플로리다 주의 한 대학교에서 디자인을 전공하고 있는 학생으로 다리 길이가 무려 125.73cm에 달한다. 이는 이미 모델 Lauren Williams의 기록 124.46cm를 초월했다. 그녀는 2년 전 뉴욕으로 이사 올 때, 조각 같은 자신의 몸매 덕분에 사람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었다.”   인민망 한국어판이 올린 포토뉴스 전문이다. 이에 관한 원문뉴스는 영문사이트에 있겠지만 번역뉴스는 중문사이트에도 있고 한국사이트에도 있다. 중문사이트나 한국사이트나 인민망에서 올린 글보다 몇배는 길다. 인민망은 몇배나 긴 글을 번역했거나 퍼오면서 골자만 줄여서 올린것이 분명하다. 이렇게 줄여서 올릴 때는 독자들을 배려해서 독자들이 궁금해하는것을 놓지지 말아야 한다.   웃글에서는 시간, 장소, 인물, 년령, 요점에서 장소(미국 뉴욕), 인물(Holly Burt), 년령(20살), 요점(다리 길이가 무려 125.73cm)은 있지만 시간이 빠지고 없다. 여기서 빼놓은 시간은 “지난 19일(현지 시간)”이다. 그러니 “지난 19일의 보도에 따르면” 혹은 “지난 19일에 보도했다”라고 해야 된다. 그외 이 글에서는 독자들이 궁금해하는 중요한 한가지가 빠졌다. 바로  최고 롱다리 처녀의 키이다.   독자들은 125.73cm나 되는 긴 다리를 가진 이 처녀의 키는 도대체 얼마나 될가 궁급해할것이다. 중문사이트나 한국사이트에는 이 처녀의 키와 가족의 키가 다 밝혀져있다. 가족의 키까지는 밝히지 않는다고 해도 이 처녀의 키만은 밝혀야 했을것이다. 196cm라고. 짧게 줄이는것은 좋지만 독자들이 정말 궁금해하는것까지 마구 줄여서는 안된다는 생각.   또 한가지는 긴 다리 처녀의 이름이다. 이 글에서는 처녀의 영문이름만 밝혔다. 우리 글로 올린 글이라면 꼭 우리 글로 된 이름을 밝혀야 한다고 본다. 즉 홀리 버트(霍莉·伯特)라고.   기사를 쓸 때 우선 대중들이 관심하는것, 알고싶어 하는것,  독자들이 궁금해하는것을 써야 하지 않을가. 글을 다 쓴 다음에도 독자들이 궁금해하는것을 빼놓은것이 없는가를 살펴보는 습관을 들이는것은 어떨가?    
321    모택동이 당적을 제명당했던 원인 댓글:  조회:4381  추천:0  2015-11-15
모택동이 당적을 제명당했던 원인   (번역)     “좌경”로선을 집행한 호남특위에서는 특위군사부장 주로(周鲁)를 강서성 녕강현 롱시의 룡강서원에 파견하여 모택동의 행동이 너무 우적이라고 비판했다. 그리하여 전선위원회를 취소했는데 이는 모택동의 전선위원회 서기직을 제명한것과 같았다. 더욱 놀라운것은 주로가 모택동의 당적을 제명했다고 선포한것이다. 《모택동년보》(상권)과 중국청년출판사에서 출판한 《모택동의 길》의 기재에 따르면 1928년 3월 상순은 바로 모택동이 로농혁명군을 거느리고 정강산혁명근거지를 세웠을 때였다. 당시 모택동은 중공중앙정치국 후보위원이고 중국공산당 제1차대표대회 대표였으며 중국공산당의 창시인중의 한 사람이였다. 주로는 당시 중공호남특위 군사부장, 성군사위원회 특파원직을 맡고있었다. 그는 호남특위의 대표로 정강산으로 갔는데 무슨 권리가 있어 모택동의 당적을 제명했겠는가? 주로는 자신이 중공중앙문건을 보았는데 이 문건에 모택동의 당적을 제명할데 대한 중공중앙의 결정이 똑똑히 씌여있었다고 하면서 자신은 다만 당중앙의 결정을 집행했을뿐이라고 말했다. 중공중앙에서는 어느때에 모택동의 당적을 제명하기로 결정했는가?  1927년 11월 9일부터 10일까지 중공중앙림시정치국에서는 상해에서 확대회의를 열었는데 구추백(瞿秋白)이 회의를 주관했다. 그번 회의는 구추백의 “좌경”망동주의가 고봉에 달한 회의였다. 회의에서는 모택동이 장사진공을 포기하고 정강산으로 들어간것은 중앙의 전술전략을 완전히 위반한것이며 단순한 군사투기라고 호되게 비판했다. 그리하여 《정치규률결의안》을 내왔는데 그중 모택동의 처분에 대해 이렇게 썼다. “호남성위 위원 팽공달(彭公达), 모택동(毛泽东), 역례용(易礼容), 하명한(夏明翰)의 현임 성위위원자격을 반드시 취소하고 팽공달동지의 중공중앙정치국 후보위원자격을 취소함과 동시에 당내에 두고서 반년동안 관찰하는 처분을 주어야 한다. 모택동동지는 8.7긴급회의후 중앙에서 호남성위를 개편해 중앙의 추수폭동정책을 집행하라고 파견한 특파원이기에 사실상에서 호남성위중심이다. 따라서 호남성위에서 범한 착오에 대해 모택동동지는 응당 책임을 져야 한다. 이에 응당 중앙림시정치국 후보위원직에서 해임시켜야 한다.” 모택동에 대한 처분결정은 중공중앙에서 1927년 11월 9일부터 10일까지 사이에 진행된것인데 무엇때문에 1928년 3월 상순에야 주로에 의해 전달된것일가? 처분결정은 모택동의 중앙림시정치국후보위원의 직무를 해직시킨것인데 주로는 왜서 모택동의 당적을 제명했다고 선포했을가?  그 원인은 주요하게 다음과 같다. 당시의 중공중앙문건이 비밀지하교통원을 통해 전달되였는데 상해에서부터 호남으로 전달되는 과정이 비교적 길었다. 녕강에 도착하려면 백색구역을 지나야 했기때문에 주로는 중공중앙문건을 몸에 지니고 갈수 없어 기억에 의해 전달했다. 그리하여 모택동의 중앙림시정치국후보위원회의 직무를 해직한다는 결정을 모택동의 당적을 제명했다고 잘못 전했다. 1927년 4월 상순에 모택동이 부대를 거느리고 호남에 도착했을 때 호남특위에서는 이 중공중앙문건을 보았다. 그리하여  주로가 중앙문건의 결정을 잘못 전달했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1956년 9월 10일에 모택동은 중국공산당제8차대표대회예비회의 제2차전체회의에서 상술한 일에 대해 언급할 때 이렇게 말했다. “나중에 그것은 헛소문이라고 했습니다. 정치국에서 제명당한것은 당적을 제명당한것이 아니라고 했지요. 아, 그제야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였습니다. 그 때 나에게 “총자루주의”라는 이름이 붙었지요. 그것은 내가 “총에서 정권이 나온다”는 한마디 말을 했기때문이였습니다. 그들은 ‘정권이 어떻게 총에서 나온단 말입니까? 맑스도 말한적이 없고 책에도 그런 말은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착오를 범했다면서 나에게 “총자루주의”라는 별명을 붙였지요. 확실히 맑스는 그런 말을 한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맑스는 “무장으로 정권을 탈취할수 있다”고 말한적이 있습니다. 내가 언급했던 그 말의 뜻도 무장으로 정권을 탈취한다는것이였지 그 무슨 보총이나 기관총안에서 정권이 쑥 빠져나온다는 말이 아니였습니다.” 상술한 정황으로 보아 모택동의 중앙정치국후보위원과 전선위원회 위원직무를 해직시킨것은 모택동이 일으킨 추수봉기가 중앙위원회의 비준을 거치지 않은 문제때문이 아니라 구추백의 “좌경”착오로 인해 조성된 위해의 결과라는것을 알수 있다.  
320    히틀러와 함께 소문난 독재자 무쏠리니 댓글:  조회:4473  추천:0  2015-11-08
히틀러와 함께 소문난 독재자 무쏠리니     이딸리아 파쑈당의 괴수이고 독재자이며 제2차세계대전의 원흉인 베니토 무쏠리니(贝尼托·墨索里尼)는 1883년 7월 29일에 이딸리아의 작은 진에서 태여났다. 학교에 다닐 때 무쏠리니는 말썽꾸레기였다. 툭하면 친구들과 싸웠고 선생에게도 대들기 일쑤였다. 하지만 머리가 나쁘지는 않았기에 공부를 해야 하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집중할줄도 알아서 사범학교를 나왔다. 1919년 3월 23일에 무쏠리니는 밀라노(米兰)에서 “파쑈(法西斯)전투단”이라는 조직을 만들었는데 1921년에 이 조직을 “이딸리아국가파쑈당”이라고 고치고 이 당의 령수로 되였다. 1922년 10월 28일에 무쏠리니는 파쑈당의 군사조직을 이끌고 로마로 진군했다. 폭동을 일으켜 정권을 탈취한 무쏠리니는 그해 10월 30일에 내각총리로 되였다. 세계 최초의 파쑈국가가 이딸리아에서 탄생된것이다.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维托里奥·伊曼纽尔三世)는 이름뿐이고 실권은 무쏠리니에게 있었다. 무쏠리니는 정권을 잡은 직후 의회를 위협해서 법률을 독자적으로 개정할 권한을 가짐으로써 령수가 되였다. 이듬해에는 “선거결과 가장 많이 득표한 정당이 의석의 3분의 2를 차지한다”는 선거법을 만들어 파쑈당이 영구적으로 집권할 토대를 마련했다. 군대와 경찰간부는 파쑈들로 채워졌다. 집권이전과 마찬가지로 파쑈행동대가 날뛰며 정권에 비판적인 언론사나 사회주의자들을 습격했는데 징역중이던 흉악범들중에서 행동대 대장들을 특별채용했다. 무쏠리니는 “사납고 잔인한 자들이 좋다…불굴의 기백을 가진 자들! 범죄자들중에 쓸만한 자들이 많다”고 말했다. 1924년 5월에 행동대가 정권의 비리를 고발한 사회당의 마테오티를 암살하자 맹렬한 반정부운동이 벌어졌는데 무쏠리니는 언론을 검열하고 사회주의자들을 무차별 검거함으로써 대응했다. 또한 1927년까지 지방자치제를 없애며 파쑈당외의 모든 정당을 페지하는 일련의 조치로 명실공히 독재체제를 수립했다. 하지만 겉보기와 달리 이딸리아파쑈은 같은 전체주의로 분류되는 독일의 나치스주의나 구쏘련의 스딸린주의처럼 절대적인 권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무쏠리니의 파쑈당은 아돌프 히틀러(阿道夫·希特勒)의 나치스(纳粹)당이나 쓰딸린의 쏘련공산당처럼 국가우에 군림하는 권력집단이 아니였고 국민의 사상을 개조하며 “열성집단”을 박멸한다는 목표를 추진하지도 못했다. 무쏠리니의 집권을 도와준 자본가들과 국가관료들 그리고 가톨릭교회는 막강한 힘을 유지했으며 이름뿐이라 해도 국왕의 대권도 유지되였다. 이들은 21년후에 결국 무쏠리니를 타도해버렸다. 무쏠리니의 권력은 화려하고 자극적인 볼거리로 유지되였다. 그는 로마식의 경례를 했으며 장교출신이 아니였음에도 원수군복을 입고다녔다. 그는 청중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특유의 웅변술로 “로마제국의 영광을 재현하겠다”고 큰소리쳤다. 그리고 해외원정으로 그 허풍을 조금이라도 실현하려고 했다. 그래서 국제련맹탈퇴를 불사하며 1935년에 에티오피아를 침략하고 1939년에 알바니아도 병합했다. 그러나 이딸리아군대의 허약체질은 개선되지 않아서 거의 두손을 들고있었던 알바니아를 점령하는데도 한껏 힘이 들었다. 제2차세계대전이 시작된후에는 독일에 압도당하고있던 프랑스와 힘들게 싸웠고 그리스와 애급을 침략하다가 도리여 반격당해 독일군의 힘을 빌리는 치욕을 겪었다. 히틀러는 권력을 잡으며 무쏠리니를 많이 본받았으나 얼마후에는 히틀러가 무쏠리니를 아래사람 대한듯하는 관계가 되였다. 독일과 이딸리아의 국력차이와 나치스와 파쑈의 국민장악력차이때문이였다. 히틀러는 어려움에 부닥친 무쏠리니를 여러번 도와주었으나 1939년의 “강철협정”에 명시된 조항에도 불구하고 타국과 전쟁을 벌릴 때 무쏠리니와 협의는커녕 통보조차 하지 않았다. 전쟁이 계속되며 히틀러가 무쏠리니에게 바라는것은 지중해쪽에서 련합군을 막는 방패막이와 “총알받이”에 지나지 않는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무쏠리니는 리해관계가 전혀없는 쏘련전선에 병력을 보내라는 히틀러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했다. 이때문에 10만명의 이딸리아인이 얼어붙은 땅에서 쓰러져갔다. 이렇게 되자 “공연히 히틀러의 전쟁에 말려들어 막강한 미국, 영국, 쏘련과 적이 되면서 실제리익은 전혀 챙기지 못하고있다”는 불만이 높아져 갔다. 화려한 연극도 하루 이틀이지 황제놀음과 호언장담도 점점 싫증이 났다. 1943년에 “비밀병기로 적들을 끝장낼테니 두고 보라”는 무쏠리니의 말을 비웃듯이 시칠리아섬(西西里岛)에 련합군이 상륙하고 로마(罗马)에 폭탄이 떨어지자 이딸리아의 파쑈당중에서 배반자가 나왔다. 1943년 7월 24일에 파쑈평의회에서 측근이던 디노 그란디와 그의 사위 치아노 등이 앞장서서 무쏠리니를 당수뇌에서 끌어내렸다. 그 다음날에는 이딸리아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가 무쏠리니의 수상직을 해임했다. 그리고 그를 체포하여 은밀한 곳에 가둬버렸다. 21년이나 집권하며 그토록 많은 군중을 열광시켰던 무쏠리니였지만 권력을 잃은 그를 위해 나서는 이딸리아인은 아무도 없었다. 나선 쪽은 오히려 독일인이였다. 이딸리아가 련합군쪽으로 돌아서면 곤난하다고 여긴 히틀러()는 특공대를 보내 무쏠리니를 구출했다. 그후 무쏠리니는 약 20개월정도 북이딸리아의 살로에서 “살로공화국”을 다스렸다. 하지만 그것은 허울뿐이였으며 대부분의 결정은 독일이 내렸다. 그랬지만 무쏠리니는 자신을 권좌에서 끌어내린 배신자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배신자들을 처단할수 있는 권한을 달라고 했다. 독일은 이를 허락했다. 무쏠리니를 배신한 자들중에는 그의 사위 치아노백작(齐亚诺伯爵)도 있었다. 무쏠리니의 딸 에다(埃达)는 어느 무도회에서 젊고 전도가 유망한 외교관 치아노백작(齐亚诺伯爵)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 1930년에 결혼식을 올린 두 사람은 일순간에 전 이딸리아가 가장 부러워하는 한쌍의 부부가 되였다. 결혼후 에다는 남편 치아노를 따라 중국의 상해로 들어와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다. 그런데 얼마 안되여 에다는 남편이 밖에서 외도하는것을 발견했다. 에다는 “치아노가 아버지의 권력을 리용하려고 나와 결혼한것이 아닐가”하고 몹시 상심했다. 혼인위기가 발생되였을 때 상해의 국세가 악화되였다. 에다는 남편을 따라 이딸리아로 돌아왔다. 에다는 치아노가 비록 자신을 배신한 적이 있었지만 부부의 정을 생각해서 치아노를 살려달라고 아버지에게 애원했다. 무쏠리니는 딸을 가장 사랑했으나 사위만은 용서할수 없었다. 무쏠리는 딸의 눈물도 아랑곳하지 않고 사위 치아노를 처형했다. 남편이 죽음을 당하자 에다는 두번 다시 아버지를 보려고 하지 않았다. 무쏠리니의 안해 라켈레도 그를 떠나버렸다. 늙고 지친 허수아비독재자 무쏠리니에게는 오래동안 그만을 사랑해온 련인 클라라 페타치만이 위로가 되였다. 1945년 4월에 련합군과 남부 이딸리아의 유격대는 힘을 합쳐 북진했다. 무쏠리니는 스위스로 넘어가 다시 비행기를 타고 에스빠냐로 탈출하려고 했다. 그러나 알프스산맥의 가파로운 길에서 유격대에게 잡히고말았다. 그들은 메제그라라는 마을에서 무쏠리니를 처형했다. 전하는 말로는 유격대 대장이 권총을 겨누자 무쏠리니는 “여기, 가슴을 쏴!”라고 외치며 외투를 열어젖혔고 련인 페타치가 그를 몸으로 막았다고 한다. 두 사람의 시체는 밀라노로 보내져 로레타광장(洛雷托广场)에 거꾸로 매달렸다. 이렇게 히틀러에 버금가는 독재자는 죄많은 일생을 마쳤다. 무쏠리니가 처음 파쑈국가를 세웠지만 오늘날에 파쑈이라고 하면 그보다는 히틀러를 먼저 떠올린다. 그가 군국주의를 내세웠지만 세계대전에는 소극적이였고 인종청소를 부르짖거나 대량학살을 벌리지도 않았기때문일것이다. 사실 그는 현대적인 독재자보다 고대의 폭군에 가까왔다. 로마황제처럼 그도 개인숭배와 화려한 볼거리로 계급분렬이나 지역갈등을 무마시키며 군림했다. 하지만 로마와는 달리 그의 군대는 허약했고 훨씬 강한 국가들에게 둘러싸여있었다. 히틀러가 현대사를 뒤흔든 대악당이라면 무쏠리니는 어리광대에 더 가까왔다.  
319    녀자가 남자를 구타 무서워 살겠나? 댓글:  조회:7461  추천:7  2015-11-05
녀자가 남자를 구타 무서워 살겠나?   김희수     어릴 때 나는 룡정의 신안소학교에 다녔다. 바로 내가 다니던 신안소학교부근의 마을에 사는 어느 한족부부가 늘 싸움을 했는데 승자는 항상 안해였다. 그 시기에 조선족녀자들이 남편앞에서 찍소리도 못했지만 한족들은 달랐다. 한족들의 경우 남자들이 안해앞에서 찍소리도 못했다.   그 한족부부는 싸운다 하면 동네가 떠들썩하게 싸우군 했다. 처음에는 집에서 싸우다가 안해가 매를 들면 남편은 무서워 밖으로 달아나군 했다. 나는 그 집의 안해가 남편을 밖에까지 쫓아오며 구타하는 장면을 서너번 목격했다. 안해는 달아나는 남편을 따라잡은후 한손으로 남편의 멱살을 잡고 다른 한손으로 남편의 뺨을 짝짝 소리나게 때렸다.   그 시기에 한족 남자들이 안해에게 쥐여사는 공처가였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안해에게 폭행을 당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조선족의 경우 조선족 녀자가 남편을 구타하는 일은 더구나 보고 죽자 해도 없었다.   그런데 개혁개방후 세상이 달라졌다. 조선족 남자들도 안해에게 쥐여사는 과거의 한족 남자들의 신세가 되고말았다. 그래서 간 큰 남자 시리즈까지 나왔다. 반찬투정하거나 안해에게 말대꾸를 해도 간 큰 남자가 되는것이다.   날이 갈수록 녀자들은 무섭게 변하고있다. 1990년대에 연변에서 잠자는 남편을 도끼로 찍어죽인 사건이 있었는데 지금도 생각하면 녀자가 무섭다는 생각이 든다. 오죽했으면 남편을 죽였겠는가?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겠지, 하고 그 녀자의 립장에서 리해해 보려고 해도 그 잔인한 살인까지 용납할수는 없다.   3년전에 퇴근하는데 한 20대의 녀자가 길옆에서 담배를 피우고있었다. 그때 지나가던 40대의 남자가 몇초동안 그 녀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자 담배 피우던 녀자가 그 남자를 쏘아보면서 “보긴 뭘 봐?”하고 꽥 소리질렀다. 녀자의 고함소리에 겁에 질린 남자는 찍소리도 못하고 도망치듯 가버렸다.   재작년의 어느날 새벽 3시쯤에 떠드는 소리에 잠에서 깨여나 창밖을 내다보니 세 청년이 한 청년을 사정없이 구타하고있는데 한 젊은 녀성이 곁에서 구경하고있었다. 청년이 맞아서 반죽음이 되여서야 세 청년은 손을 떼고 가는데 그중 한 청년이 구경하던 젊은 녀성을 보고 “저 쯤 패주면 되니?”하고 물었고 그 녀성이 흡족하다는듯 “양, 만족이요!”하고 대답했다.   작년의 어느날 밤에 술자리가 끝나서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20대의 세 녀성이 한 남성을 주먹으로 치고 발길로 차는것을 본적이 있었다. 금년 여름의 어느날 밤에 또 한 20대의 녀성이 손으로 한 남자를 가리키며 “이 아새끼, 죽여버린다!”하고 고함치는 광경을 목격한 적이 있었다.   녀자가 남자를 구타하는건 일도 아니다. 이제는 녀자가 어린이의 눈알을 뽑기도 하고 자신이 갓 낳은 피덩이를 가차없이 창밖으로 던져버리기도 한다. 중국에서 남편이나 동거남의 생식기를 잘라버리는것은 희귀한 일이 아니다. 그러니 녀자가 남자를 구타하는것쯤은 여기에 비하면 새발의 피다.   녀자가 무섭다. 녀자에게 죄를 짓지 말라. 녀자를 화나게 하지 말라. 함부로 녀자를 건드리지 말라. 섣불리 녀자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지 말라. 잠을 자다가 어느 순간에 녀자의 가위에 거시기가 잘리거나 녀자의 도끼에 죽음을 당할지 모른다.   폭력은 남자들만의 소유물이 아니다. 녀성의 지위가 높아진 오늘날에는 녀자도 폭력을 휘두를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남녀평등을 주장한다고 해도 녀성들이 남자들과 폭력따위를 공유해서는 안된다. 남존녀비사상이 지배하던 과거에 녀자들이 아무리 수난을 당했다고 해도 “눈에는 눈 이에는 이”식으로 폭력을 휘둘러서는 안되며 그런 폭력을 정당화해서는 더구나 안된다.   아무리 세상이 변했다 해도 남자는 남자다, 녀자는 녀자답게 온순해야 한다, 이런 뜻이 아니다. 남자가 담배를 피운다고 해서 녀자도 평등을 주장하며 같이 담배를 피운다면 자신의 건강만 해칠뿐이다. 마찬가지로 남자가 폭력을 휘두른다고 해서 평등을 주장하며 같이 폭력을 휘두른다면 결국 감옥행, 자신만 해칠뿐이다.   그럼 녀자들보다 10배, 100배는 더 많고 악렬한 남자들의 천인공노할 폭행은 묵과해도 좋단 말인가?! 단죄하려면 남자들부터 단죄해야 할게 아닌가? 그래서 하는 말이다. 남자들의 폭행은 더없이 잔인하고 악렬하기에 본받지 말라는…    
318    이렇게 쓰면 노벨상 받는다 댓글:  조회:3413  추천:7  2015-11-01
이렇게 쓰면 노벨상 받는다     소설은 독자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켜야 한다. 흡인력이 있어야 한다. 독자들의 구미에 맞아야 한다. 신선한 감정세계를 그려야 한다.       작자와 독자, 작중인물과 독자가 서로 통하고 호흡을 같이 해야 한다. 각계계층 독자들의 수요를 파악해야 한다. 예술매력으로 독자들을 정복해야 한다.       독자들로 하여금 내가 쓴 소설을 읽게 하고 계발을 받을수 있게 해야 한다. 그리고 철리적인 것, 나만의 독특한 것이 여야 한다. 작가는 세계를 창조한다. 작가는 예술적인 천부가 있어야 한다. 작가는 풍부한 상상력이 있어야 한다. 작가는 이야기를 꾸며내고 가공하는 능수여야 한다.     소설은 장엄한 거짓말이다. 생활에 있는 진실한 사실이라 하여 예술의 진실이 아니다. 꾸며낸 이야기도 예술의 진실이 될 수 있다.       보편적인 것에서 개별적인 것을 찾아내고 개별적인 것에서 보편적인 것을 체현해야 한다. 깊은 생활체험과 풍부한 지식이 있고 사상적 매력과 작가의 인격을 갖추어야 한다. 언어는 반드시 예술적이어야 한다.-언어관. 언어는 작가의 기본공이다.-언어의 형상성, 언어의 매력. 언어는 색채가 있고 동태적이어야 한다. 작가는 언어의 마술사가 되어야 한다. 언어예술의 대가로 되어야 한다.       세절은 반드시 독특해야 한다. 세절은 생활에서 받은 독특한 감수이다. 세절은 때론 정절을 대체할 수 있다. 노신의 《공을기》에서는 세 개의 세절로 공을기의 일생을 묘사하였다. 감정은 반드시 진실해야 한다. 생활의 독특한 발견이 있어야 하고 그 것을 심각하게 발굴하여 발전시켜 창작해야 한다.       소설은 사람을 쓰는 것이다. 복잡하고 변화가 많은 인간을 쓰는 것이다. 인간의 깊은 내심세계를 파헤쳐야 한다. 이야기는 신선하고 중복이 없게 비상적인 상태에서 인간의 진면모를 그려낼 수 있다.     소설은 사람 사는 잔 이야기이다. 몸과 마음으로 느껴야 한다. 통치자가 한 개인의 운명까지 관계해서는 안된다. 이 모든것을 바로 잡아주는 작용을 문학이 해야 한다. 읽고 나면 머리 속에 형상으로 남아 있는 작품이어야 성공적이다.     소설은 어느 짙은 인생의 단면을 그려주어야 한다. 아직 누구도 써내지 않았던 나만이 보아낸 독특한 그 것을 써내야 한다. 엄격한 자세가 있어야 한다. 부지런해야 한다.   어느 인상적인 한 장면이 머리 속에 박혀 그 것이 계기로 후에 한편의 엉뚱한 소설이 될 수 있다. 쓰고저 하는 것을 어떻게 가장 요령 있게 재미있게 지루하지 않게 선명하게 표현할 것인가 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심후한 역사감과 선명한 당대성이 조화적으로 통일되어 있고 철리적 상징성과 역사적 신비성이 조화적으로 통일되어 있으며 줄거리 구성의 굴곡성과 세부묘사의 풍부성이 조화적으로 통일되어 있고 전통적 수법과 외래수법이 조화적으로 통일되어 있어야 한다.     문학의 길에 들어선다는 것은 고생문이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문학은 물질적인 풍요와 만족한 생활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문학은 진지성을 가지고 파고들어야 한다.     문학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가장 절실하게 꾸미지 않고 표현하는 것이다. 문학은 생활이고 인생자체이다.       문학의 5대 요소는 인간성, 사회성, 시대성, 민족성, 도덕성이다. 문학의 3대 특성은 영원성, 독창성, 보편성이다.       소설은 리상화를 반대하고 진실성을 추구해야 한다. 성격묘사에 있어서 그 인물이 무엇을 하는가를 보여줌과 동시에 더욱 중요하게는 어떻게 하는가를 보여주어야 한다. 소설은 작가의 의지나 정서경향을 직접적으로 설교하는것이 아니라 장면이나 환경, 사건, 인물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보여주어야 한다.   생활의 진정한 가치를 파악해야 한다. 이야기정절을 통해 인물형상을 두드러지게 해야 한다. 알아듣게 글을 써야 하고 기쁨 속에 비관적 정서를, 슬픔 속에 느슨함을, 속된 장면에 우아한 언어를 쓰는 재치가 있어야 한다.     지루한 것을 생동하게 묘사하고 끝까지 물고 늘어지고 깊게 파고들어야 한다. 어떤 사실이 작가를 통하여 얽히고 반죽되여 작가의 것이 된다면 그것이 원 사실과 다른 거짓이라하여도 그것이 더 진실하고 실물적인 것이다. 리론에 집착하기보다 쓰고저 하는 것에 깊이 파고들어야 한다. 작중 인물을 꿈속에서까지 생각하면서 살아있는 실체를 어떤 각도로 그려내야 한다. 뿜어내지 않으면 못견딜 강렬한 그런 할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 순수소설은 낮은 수준의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와 맞먹는 수준이나 자기보다 높은 수준의 사람들에게 모든 힘을 다 내여 공을 들여 쓴 소설이다.       (1994년 연변작가협회 민족문학원 제1기 강습반 소설강의종합)      
317    한국방송 앵커의 굴찌칸 굴욕 댓글:  조회:3695  추천:0  2015-11-01
한국방송 앵커의 굴찌칸 굴욕 [강상헌의 바른말 옳은글] 용언 어간 말음 ㄺ의 발음    강상헌 언론인 · (사)우리글진흥원 원장     “집값이 폭등하던 시기 시장을 옥죄었던 굵직한 규제들이 잇따라 풀리고 있습니다.” 1월 3일 한 뉴스를 글로 적은 홈페이지의 문장이다. 실제 소리는 [굴찌칸 규제들이...]였다.   향도(嚮導), 시민들 사이에서는 낯설지만 군대 울타리 안에서는 익숙한 단어다. 군 출신들도 잘 안다. 원래 ‘길을 인도함. 또는 길은 인도하는 사람’의 뜻, 이 의미를 바탕으로 행진할 때 대오(隊伍)의 맨 앞에서 방향과 속도를 조절하는 사람이라는 뜻의 군사용어로 쓴다.   스탠더드(standard) 즉 기준(基準), 군대에서는 ‘제식 훈련에서 대오(隊伍)를 정렬하는 데 기본이 되는 표준을 대원들에게 알리는 구령(口令)’이다. 이 ‘기준’ 구령을 외치는 임무를 맡은 사람을 중심으로 참가자들은 모이거나 흩어진다. 이 또한 ‘군사용어’다.   한국방송(KBS)의 간판 뉴스 ‘KBS뉴스9’는 스스로 자임 또는 자부하듯, 이견(異見) 없진 않겠지만, 현실적으로, 뉴스의 향도 또는 기준이다. 표현이 깨끔하지 않고 조건의 말들이 붙은 것은 KBS 탓만은 아니리라. 그러나 최소한 말에 있어서만은 시청자 또는 국민의 향도 또는 기준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최영철 ‘앵커’의 언어실력은, 그렇게 중요하다. 뉴스를 전하는 이들의 연모인 ‘말’에 관한 이야기다. 앵커라는 이름의 진행자(MC)가 방송에서 틀린 말을 한다면, 시청자들은 그 오류를 본을 삼는다. 엉터리 향도나 기준은 반듯한 행렬(行列)을 도리어 망가뜨리는 것이다. 길로 가야지 논두렁으로 가면 어쩌나. 국민의 국어 교육에도 큰 폐해다.   [국찌칸 규제들이...]가 맞다. 중학교 때부터 나오기 시작하는 우리말 발음 문제의 손꼽히는 이슈 중 하나다. 고교생이면 모르면 안 되는, 시험에 잘 나오는 대목이다. 기억이 나지 않는 이도 있겠지만, 이렇게 배웠을 터다. ‘용언(用言)의 어간(語幹) 말음(末音) 겹받침 ㄺ의 발음’이라는 제목과 설명이다. 괄호의 한자는 필자가 첨가했다.   ㄺ은 어말 또는 자음 앞에서 [ㄱ]으로 발음한다. 표준발음규정, 국가의 기준인 것이다. 달걀을 낳는 닭은 [닥]이다. 날씨가 맑다[막따], 늙다[늑따] 들의 사례가 있다. 그런데 ‘다만, 용언의 어간 말음 ㄺ은 ㄱ 앞에서 [ㄹ]로 발음한다’는 조항이 있다. 예외인 것이다. 맑게[말께] 묽고[물꼬]등이 사례다.   ‘굵직하다’는 그래서 [굴찌카다]가 아닌 [국찌카다]다. ‘굵게’가 [굴께]인 것과 대비된다. 정확히 뜻을 이해하고 그 자리에서 서너 번 씩만 입에 올려 소리를 내봤더라면,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에도 입에 붙은 그 말은 쉬 되새겨진다. 그래서 대부분 틀리지 않는다. 문제는 소리 내어 외어보지 않았던 사람들이다. 국어의 발음(발성) 교육의 문제인 것이다.   발음 뿐 아니라 뜻도 흐릿하다. 용언은 ‘동사 형용사 같은, 서술어 기능을 하는 문장성분’이다. 어간은 활용어가 활용할 때 변하지 않는 부분, ‘보다’ ‘보니’에서 ‘보’와 ‘먹다’ ‘먹니’에서 ‘먹’이다. 말음은 종성이다. 이해가 잘 되시는지? 사전 만든 이들은 당시 한자어를 활용해 표제어와 그 풀이를 적었다. 지금 사람들은, 선생님들까지도, 대부분 한자를 안 배웠다.   뜻을 또렷히 새겨보지도 않고, 소리 내어 외어보지도 않은 채 눈으로만 익힌 ‘용언의 어간 말음 ㄺ의 발음’ 이론은 시험 끝 종소리와 함께 망각의 늪으로 빠지기 십상이다. 그래서인지 우리 사회 꽤 중요한 인사들도 자주 그 앵커처럼 [굴찌칸 규제...]식 발음으로 굴욕을 겪는다. 지금이라도 [국찌칸 규제...]를 대여섯 번만 외우면 될 텐데.   언어와 (보편적) 지식이나 교양 등 방송인으로서의 소양보다는, 외모와 매끄러운 말솜씨 등 연예인 선발 기준으로 진행자들은 선발하고 있는 것 같다는 얘기를 늘 듣는다. 뉴스까지 방송사 간 농염(濃艶)과 달변(達辯)의 대결을 벌이는 것인가? 지적이고 언어도 정확하면서 아름답기까지 한 진행자는 진정 나무에서 고기를 구하는, 연목구어(緣木求魚)인가?   강호동, 박지선 씨가 곧 거기 나설라, 말도 잘 하는 이 분들이야 말로 눈길끌기에 최적 아닌가. ‘말’ 안 되는 이가 마이크 잡으면 고객(시청자)들이 비웃는다. 노래방에서도 그렇듯.   토/막/새/김 본말전도(本末顚倒), 중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구별되지 않거나 일의 순서가 잘못 바뀐 상태를 이르는 숙어다. 본디[本]와 끄트머리[末]가 뒤집혔단다. 내용으로 승부하기 버거우니 장식품으로나마 눈길 끌어보겠다는 계산도 본말전도다. 성형(미용)수술 ‘공장’의 난립이나 짝퉁이라도 하나 들어야 거리에 나설 수 있다는 ‘세련녀’들의 치열한 열등감 열패감(劣敗感)도 본말전도의 병적 전개일 수 있다. 바르고 고운 말, 언론인으로서의 자질이 아닌 다른 조건을 먼저 챙기면, 그들의 방송보도는 암울할 것이다. ‘본말전도 방송’ 아니겠는가.        
316    국공쌍방은 왜서 모두 담평산을 면직시켰는가 댓글:  조회:4508  추천:1  2015-11-01
국공쌍방은 왜서 모두 담평산을 면직시켰는가   (번역)     1886년에 광동성 고명에서 출생한 담평산(谭平山)은 담언상(谭彦祥), 담명겸(谭鸣谦), 담빙삼(谭聘三)이라고도 한다. 그는 중국근대사에서 공적이 뛰여나고 영향력이 있는 민주혁명가이다. 그는 신해혁명시기에 손중산을 따라 동맹회에 가입했고 5.4운동후 진독수의 도움을 받아 광동중공지부를 건립했으며 제1차국공합작과 농민운동, 남창봉기에서 불멸의 력사공적을 남겨놓았다. 그는 불요불굴의 정신으로 중화혁명당을 조직하고 3민주의동지련합회를 창건했으며 중국국민당혁명위원회를 조직했다. 그는 또 중국공산당의 새 정치협상회의에 참가하였으며 민주독립과 조국의 부강을 위해 평생의 정력을 이바지했다. 특히 중국공산당의 “5..1구호”에 호응하여 새 정협을 전개하는 운동에서 그의 주장과 영향력은 중국국민당혁명위원회와 각 민주당파들이 중국공산당의 령도를 접수하고 새 중국의 건설을 협상하는데 적극적인 작용을 일으켰다. 제1차국공합작시기에 담평산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풍운인물이였다. 담평산은 중국공산당 당원의 신분으로 국민당에 가입한후 1924년에 열린 중국국민당제1차전국대표대회에서 중앙상무위원으로 당선되였고 중앙조직부 부장직을 맡았다. 그리고 1927년 3월에 무한국민정부 위원 겸 농민부 부장직을 맡았다. 담평산은 성심성의로 손중산의 신3민주의를 옹호했다. 그는 손중산의 국민당개조를 도와준 국민당좌파의 중요한 령도인물중의 한 사람이였다. 더욱 관건적인것은 중국공산당의 일원인 담평산이 국민당내의 실권을 장악한것이다. 그는 국민당 제1기와 제2기의 중앙집행위원회 상무위원과 중앙조직부 부장의 신분으로 국민당내의 좌파세력과 민주인사를 령도하여 각종 농민운동을 조직했으며 농민운동간부를 양성했다. 그는 국공량당의 합작을 기초로 한 혁명통일전선촉진과 제1차국내혁명운동의 발전을 위해 불멸의 공적을 세웠다. 제1차국내대혁명이 실패한후 담평산은 중국공산당이 령도한 8.1남창봉기에 적극적으로 참가했으며 국민당중앙집행위원회의 명의로 국민당중앙위원, 각 성위, 특별시 등 대표련석회의를 주최하여 선거로 중국국민당혁명위원회를 산생시켰다. 1927년 8월 8일에 무한국민당중앙에서는 담평산의 당적을 제명하고 일제직무를 박탈한다고 선포했다. 그후 담평산은 봉기부대와 함께 남쪽으로 내려갔다. 1927년 11월 9일에 중국공산당은 림시정치확대회의를 열고 담평산의 당적을 제명한다고 선포했다. 국민당좌파의 령도인물인 담평산이 숙당후의 국민당우파에 의해 당적을 제명당한것은 놀랄만한 일이 아니였다. 그러나 그는 그와 동시에 또 중국공산당중앙에 의해 당적을 제명당했다. 그 원인은 무엇이였을가? 주은래동지는 1944년 3월에 《당의 제6차대회에 관한 연구》중에서 담평산이 당적에서 제명당한것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담평산이 당적에서 제명당한것은 장국도가 남창봉기를 반대했을 때 담평산이 한 사장을 보고 ‘장국도가 만약 봉기를 반대한다면 그를 죽여버려야 한다’고 말했기때문이다. 당시 나는 전적위원회 서기직을 맡고있었는데 그 사장은 장국도살해여부에 대해 나의 의견을 물었다. 나는 당내투쟁은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고 대답했다. 후에 누군가 이 사실을 공산국제대표에게 알려주었는데 공산국제에서는 담평산의 당적을 제명하기로 결정했다. 지금 생각하면 당시의 결정이 타당한것이 아니였다.” 만약 담평산이 장국도를 죽여버려야 한다고 말한 일로 공산국제에 의해 당적이 제명했다면 이 처벌은 너무 과중한깃이며 도리에 맞지 않는것이다. 이 보다 더욱 설복력이 있는 설법은 1927년 11월에 열린 중국공산당 림시정치확대회의에서 확정한 《정치규률결의안》에서 찾아볼수 있다. “담평산동지는 제5차대회후 국민정부의 농정부장직을 맡았는데 남창봉기전후의 그의 행동과 주장은 당을 떠난 자유행동이였다. 무한국민당과 정부에서 공산당을 제거하려는 행동을 시작할 때 담평산은 비밀리에 등연달 등과 련계하여 중국CP를 취소하고 따로 제3당을 조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지식분자동지들에게 중앙을 반대하고 따로 제3당을 조직해야 한다고 선전했으며 당의 결의를 무시하고 중앙의 동의도 없이 왕정위(汪精卫)한테 휴가를 맡았다. 그는 휴가신청서에 농민운동이 골치거리라고 욕을 퍼부었다… 그는 구강에서 중앙과 당을 무시하고 자유로 한다는 반당분위기를 불어넣었고 남창에서 계속 제3당에 대해 선전했다… 이는 본당조직의 행동과 위반되는것이기에 반드시 당적을 제명해야 한다.” 이 재료에서 볼수 있다싶이 담평산이 중국공산당에서 제명당한 원인은 당시의 중국공산당은 그가 엄중한 기회주의와 투항주의 착오를 범했다고 인정했기때문이다. 사실상 당시의 중국공산당의 이러한 관점은 공산국제의 영향을 받은것이였다. 제1차국내대혁명이 실패한후 공산국제는 즉시 국민당의 각파는 일률로 반동파라는 착오적인 판단을 내렸다. 1928년 2월에 공산국제집행위원회에서는 제9차전체회의에서 내놓은 《중국문제에 관한 결의》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원래 공산당원이였던 사람(례하면 담평산 등)들이 소위 ‘진정한 공산당’, ‘로농당’이라고 하는 새당을 창건하려고 하는것은 사실상 자산계급개량주의정당을 세우려는 시도이기에 중국공산당은 반드시 그들과 무정한 투쟁을 해야 한다.” 이 관점은 직접 중국공산당에 영향을 주었다. 중국공산당 제6차대회의 결의에서는 “중앙의 11월회의와 공산국제집행위원회 제9차전체회의에서 국민당 각파에 대해 내린 결정을 찬성한다고 하면서 그들은 모두 반혁명파벌이라고 확실하게 인정했다. 이로부터 당시의 중공중앙이 담평산의 당적을 제명한것은 공산국제의 영향을 받은 좌경사상의 착오적인 후과였다는것을 알수 있다. 평정산은 국민당과 공산당에게 모두 당적에서 제명당한후 적극적으로 국민당좌파와 중국공산당과 련계를 잃은 일부의 공산당원들을 조직하여 국민당, 공산당 이외의 새로운 혁명의 길을 개척하려고 시도했다. 1928년 3월에 담평산은 상해에서 일부분 국민당좌파, 애국지식분자들과 함께 등연달 등이 발표한 《모스크바선언》에 호응하여 중화혁명당을 조직했으며 장개석을 위수로 한 국민당우파들이 손중산의 3대정책을 포기한 내막을 폭로했다. 그는 또 중국공산당이 폭력투쟁을 강조하는것을 반대했다. 때문에 중화혁명당은 사람들에게 “제3당”이라고 불리웠다. 중화혁명당은 또 《돌격》, 《등탑》 등 주간을 출판하여 중화혁명당의 주장을 선전했는데 당시의 사회에서 일정한 영향력이 있었다. 1930년 봄에 담평산과 해외에서 돌아온 등연달은 계속 국민당명칭을 사용할것인가 하는 문제를 놓고 분기가 있었다. 그리하여 등연달은 중화혁명당을 중국국민당림시행동위원회로 고치기전에 령도기관을 떠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담평산은 의연히 농공민주당의 중요창시인의 한 사람으로 되였다. 그후 담평산은 비록 “제3당”을 떠났지만 의연히 혁명을 견지하고 조국의 독립과 부강을 위해 이바지하려는 립장은 한평생 변하지 않았다. 바로 이런 끈질긴 추구정신이 있었기에 담평산은 다시 중국공산당과 점점 더 가까와졌으며 결국 같은 혁명의 길을 걷게 되였다. 1949년 9월에 그는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제1기전체회의에 참가하여 전국정협위원으로 당선되였다. 그는 또 1949년 10월 1일의 개국대전에 참가했으며 건국후 중앙인민정부 위원, 정무원 정무위원, 정무원인민감찰위원회(감찰부의 전신) 주임 등 직을 력임했다. 그리고 1954년에 제1기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 제2기전국정협위원에 당선되였다. 또 1965년 2월에 중국국민당혁명위원회 제3기전국대표대회에 출석하여 대만을 평화적으로 해방하기 위해 분투하자고 호소했으며 3월에 중국국민당혁명위원회 제3기의 중앙부주석으로 당선되였다. 그해 4월 2일에 북경에서 사망되였다. 《인민정협보》      
315    두꺼비도 고니고기를 먹을수 있다구요? 댓글:  조회:5613  추천:8  2015-10-27
두꺼비도 고니고기를 먹을수 있다구요?   김희수     중국에는 “두꺼비가 고니(백조)고기를 먹으려 하는군(癞蛤蟆想吃天鹅肉)”이란 말이 있습니다. 중국의 최고명작 《홍루몽》제11회의 마지막쯤에 나오는 말입니다. 가서가 왕희봉을 탐낸다는 말을 들은 평아가 분해서 이런 말을 하면서 가서가 그런 생각을 품다간 꼭 제명에 죽지 못할것이라고 욕을 합니다.   “두꺼비가 고니고기를 먹으려 하는군”이란 말은 자신의 분수도 모르고 손에 넣기 불가능한 물건을 탐내는 사람을 비웃는 말입니다. 자기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똑똑히 알고 덤비라는 뜻이겠지요. 못생긴 두꺼비주제에 아름다운 고니고기를 먹으려 하는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라고 일깨워주는 말이겠지요. 이 말은 주로 못생긴 남자가 아름다운 녀인을 탐낼 때 그 남자를 비웃는 말입니다.   여기서 두꺼비는 못나고 가진게 없는 남자를 말합니다. “못나다”의 뜻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얼굴이 잘나거나 예쁘지 않다 또는 능력이 모자라거나 어리석다”고 해석되여있습니다. 그러니 두꺼비는 못생기거나 능력이 모자라고 어리석은 남자겠지요. 또 가진게 없는 남자도 구꺼비에 속하겠지요.   그러니까 못생긴 남자, 능력이 모자라고 어리석은 남자, 가진게 없는 남자는 아름다운 녀인을 탐내지 말라는 말이겠지요. 그럼 두꺼비는 정말로 고니고기를 먹을수 없을가요? 우리 주변에는 못생긴 남자가 아름다운 녀인을 얻는 사례가 종종 있습니다. 그래서 두꺼비도 고니고기를 먹을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몇년전에 못생긴 남자가 아름다운 녀인을 “집사람”이라고 소개하는 자리에서 누군가 낮은 소리로 “두꺼비도 고니고기를 먹을수 있군”라고 하는 말을 들은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알고보니 “못생긴 남자”는 두꺼비가 아니였습니다. 그는 능력이 있고 가진게 있는 남자였습니다. 원래는 “두꺼비”였지만 “룡”으로 탈바꿈했던거죠.   외모는 태여날 때부터 타고납니다. 아무리 성형이 발달한 시대라고 해도 태여날 때 못나게 태여났으면 죽을 때까지 못난대로 살수밖에 없는것이 대다수 “못난이”들의 운명입니다. 하지만 “두꺼비”로 태여났다고 누구나 다 한평생 “두꺼비”로 살아가는건 아니죠. 어떤이는 자신의 노력으로 “호랑”이나 “룡”으로 탈바꿈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고니고기도 먹을수 있는겁니다.   반면에 태여날 때부터 잘 생긴 얼굴로 태여나거나 금수저를 물고 “룡”으로 태여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기생오라비처럼 얼굴이 잘 생겼다고 해도 아름다운 녀자앞에 두꺼비로 보이는 남자들도 있습니다. 재물을 많이 가졌거나 높은 권세를 자랑하는 남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혹시 “룡”같아 보일수도 있지만 능력이 없다면 허수아비룡, 못생긴 “두꺼비”에 불과할뿐이죠.   그러니 고니고기를 먹고싶다면 각고의 노력을 다하여 “호랑이”나 “룡”으로 탈바꿈하라. 이 말을 부탁드리고싶습니다.    
314    연안미녀들의 운명 댓글:  조회:6369  추천:2  2015-10-25
연안미녀들의 운명 (번역)   연안의 3대 미녀배우   당년에 상해에서 연안으로 온 미녀배우가 3명이 있었는데 그녀들로는 강청(江青), 소비(苏菲), 리려련(李丽莲)이였다.   강청은 1937년 8월말에 연안에 도착하여 이듬해에 모택동과 결혼했다.   강청과 함께 연안에 온 리려련은 몸매가 늘씬하고 용모가 아름다왔다. 무도회에서 리려련은 영어로 리덕(李德)에게 인사했는데 리덕은 아름다운 녀자가 영어를 할줄 아는것을 보고 매우 놀랐다. 리덕의 본명은 오토 브라운(奥托·布劳恩)이고 리덕은 오토 브라운의 중국이름이다. 독일사람인 리덕은 1932년봄에 공산국제의 파견을 받고 중국에 와서 중화쏘베트공화국 중앙군사위원회 군사고문을 맡았다. 리려련에게 홀딱 반한 리덕은 곧 그녀에게 청혼했고 그녀는 리덕의 사랑을 받아들였다. 결혼후 그들은 늘 함께 춤추러 다니고 산보도 함께 하면서 그림자처럼 떨어질줄을 몰랐다.1939년 8월말에 공산국제의 요구에 의해 리덕은 쏘련으로 갔는데 그후부터 두 사람은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리려련은 해방후 전국부녀련합아동사업부와 대외련락부 부장직을 담임하다가 1965년 4월에 북경에서 사망했다.   소비(본명은 주소진-周素珍)는 1920년 5월 19일에 출생했다. 당년에 연안최고미녀라고 불리웠던 소비는 1939년 10월에 연안에 와서 로신예술학원에 들어갔는데 강청, 조단과 함께 상해무대에서 연극 《대뢰우》를 공연한적이 있었다. 그녀가 온 이튿날에 람평(蓝苹)이 그녀를 보러 왔는데 그 시기에 람평은 “강청”이라고 이름을 고쳤다. 옛친구는 만나자마자 서로 포응하면서 매우 반가와했다. 소비는 1940년에 미국의학박사 마해덕(马海德)과 결혼했다. 마해덕의 본명은 조지 하이더무(乔治·海德姆)이고 마해덕은 조지 하이더무의 중국이름이다. 마해덕은 문화대혁명기간에 억울하게 특무모자를 썼는데 소비도 련루되여 함께 감옥에 갇혀 박해를 받았다. 소비는 현재 마해덕기금회 명예 리사장을 맡고있다.     연안의 3대 미녀 연안에는 3대 미녀배우외에 또 3대미녀라고 불리운 류지란(刘志兰), 포안수(浦安修), 엽군(叶群)이 있었는데 그녀들은 모두 고급지도자의 부인으로 되였다.   포안수는 1918년에 북경에서 출생했는데 청년시절에 “12.9”애국학생운동에 참가했다. 1938년 4월에 연안으로 온 포안수는 20세의 나이에 팽덕회한테 시집을 갔다. 전국이 해방된후 포안수는 경공업부로동로임사(轻工业部劳动工资司) 사장, 북경사범대학 당위 부서기 등 직을 력임했다. 1959년 7월 2일부터 8월 16일까지 열린 “려산회의”에서 팽덕회가 억울하게 반당집단의 두목으로 몰리우게 되자 포안수는 정신상에서 거의 붕괴될 지경이였다. 그녀는 늘 울면서 무섭다고 했다. 그녀는 편지를 써서 “구군대의 출신이여서 경솔하게 행동하고 모주석을 존중할줄을 모른다”고 남편 팽덕회를 원망하고 질책했다. 그녀는 북경시 당위 제2서기 류인에게 편지를 써서 평덕회와 리혼하겠다고 표시했다. 팽덕회가 서거된후에 억울한 루명을 벗고 추도회를 준비하는 기간에 팽덕회의 가족에서는 포안수가 “부인”의 신분으로 추도회에 참가하는것을 견결히 반대했다. 그러나 중공중앙에서는 리혼보고가 비준을 받지 못했다는 리유로 포안수를 팽덕회의 부인으로 인정했다. 1991년 5월 2일에 포안수는 유선암으로 북경에서 사망되였다.   류지란과 포안수는 북경사범대학 부속중학교에 함께 다닐 때부터 딱친구였다. 류지란은 사람들에게 공인된 “령수부인중의 최고미녀”였다. 1917년에 북경에서 출생한 그녀는 1939년 4월 16일에 좌권(左权)장군과 결혼하여 딸 좌태북(左太北)을 낳았다. 그러나 결혼한지 얼마 안되는 1942년 5월 25일에 좌권은 부대를 지휘하여 중앙기관을 엄호하다가 사망되였다. 좌권이 사망된지 6년이 지나 그녀는 31세의 나이에 재가했으며 1992년에 사망되였다.   엽군은 1942년에 연안에서 림표와 결혼했다. 엽군보다 먼저 림표와 함께 살았던 림표의 전처 장매(张梅)는 “섬북의 한송이꽃”이라고 불리우는 미녀였다. 림표는 1937년에 《항일군정대학》의 교장직을 맡고있을 때 대학의 최고미녀라고 불리우는 장매와 결혼하였다. 하지만 조용한것을 좋아했던 림표는 활동적이였던 장매와 성격이 맞지 않았기때문에 1942년 1월에 쏘련에서 리혼했다. 그리고 엽군과 후반생을 같이 했다.     인생풍파를 많이 겪은 미녀 범원견 범원견(范元甄)은 강청, 엽군, 손유세(孙维世)와 함께 “연안4대미녀”로 불리웠다. 범원견은 학생운동시기에 왕명의 찬양을 한몸에 받았다. 그녀가 연안마레주의학원에 왔을 때 모택동도 그녀의 이름을 알게 되였다. 모택동은 길에서 그녀를 만나면 “소범(小范), 먼저 가오”하고 길을 양보했다. 그녀의 남편 리예는 나중에 범원견의 능력은 자신보다 뛰여나다고 직접 딸에게 말했다. 1939년에 범원견은 중경팔로군판사처에서 리예(李锐)와 결혼했다. 결혼후 두 사람은 함께 연안으로 갔다. 1943년 봄에 연안에서 구조운동을 할 때 리예는 특무혐의로 보안처에 갇혔다. 범원견도 이 운동에서 구조대상이였다. 정치연구실에서 그녀를 구조하기 위해 파견된 한 간부는 그녀를 도와 구조한다는것이 함께 뜨거운 밤을 보내기까지 했다. 그후 리예와 범원견은 리혼했지만 리예가 출옥한후 재결합했다. 해방후 범원견은 중용을 받았다. 그러나 1959년에 다시 리예가 “팽덕회(彭德怀), 황극성(黄克诚), 장문천(张闻天), 주소주(周小舟) 반당집단”의 추종자로 련루되였다. 두 사람은 1961년에 또 리혼했다. 그후의 각종 운동중에 범원견은 미친듯이 리예와 친인을 적발했다. 그녀는 당시 그렇게 하는것이 당성(党性)이라고 믿었기에 인성도 몰랐다. 결국 친인들을 배반한 그녀는 뭇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았다. 후날 딸 리남앙(李南央)은 그때의 일을 회상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는 1979년에 억울한 루명을 벗은후 엄마와 또 재결합을 할 생각이라고 하면서 저의 의견을 물었습니다. 나는 ‘아버지께서 좀더 오래 살면서 행복한 만년을 보내시려면 재결합을 하지 않는것이 좋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범원견은 2008년에 사망되였다. 향년 87세였다. 그녀의 비극은 그 시대의 비극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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