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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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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3    력대 중화민국 1급상장들 (2) 댓글:  조회:6830  추천:0  2015-02-01
력대 중화민국 1급상장들 (2)   (번역)     사망된후에 1급상장 군사계급을 수여받은 국민당 장군들   ◆ 류상(刘湘): 류상은 원훈(元勋)이라고도 하는데 자는 보징(甫澄)이다. 중화민국시기에 사천군벌이였던 그는 1888년 7월 1일에 사천성 대읍현 안인진에서 출생했다. 1932년 6월 4일에 군사위원회에서는 류상을 제7로군 총지휘 겸 륙군제21군 군장으로 임명했다. 1934년 12월 18일에 행정원에서는 사천성정부를 개조하기로 결의하고 류상을 사천성정부주석으로 임명했다. 1937년 12월 3일에 사천군을 제23집단군으로 재편했는데 류상이 총사령을 겸했다. 1938년 1월 20일에 류상은 “항일전쟁을 끝까지 진행해야 하며 적군이 국경밖으로 물러가지 않으면 전선에서 싸우고있는 사천군은 절대 고향으로 돌아오지 말아야 한다”는 유언을 남기고 한구에서 영영 눈을 감았다. 1월 20일에 국민정부주석 림삼은 공적에 따라 류상에게 륙군1급상장계급을 추증(追赠)한다고 명문화하여 공포했고 2월 14일에 정식으로 1급상장계급을 수여했다. 1939년 9월 19일에 성도에서 류상의 국장의식을 성대하게 거행했다. 문화대혁명시기에 류상의 묘는 반란파들에 의해 파혀쳐졌다. 1980년중기에 류상의 묘는 다시 수건되였으나 유골은 찾을수 없게 되였다. ◆ 조곤(曹锟): 중화민국초기 직계군벌(直系军阀)의 수령인 조곤은 자가 중산(仲珊)이다. 1862년 12월 12일에 천진 대고구에서 출생한 그는 1923년 6월에 직계군벌은 려원홍을 핍박하여 대통령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했다. 조곤은 의원들을 매수하는 방법으로 중화민국제5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였다. 1927년 2월에 국민혁명군이 북벌하면서 하남에 도착하자 조곤은 천진으로 도주했다. 1937년의 7.7사변후 일본특무두목  도이하라 겐지(土肥原贤二)가 여러번이나 조곤을 찾아와 괴뢰조직의 두목으로 되여달라고 요청했으나 조곤은 번마다 완강하게 거절하여 민족의 절개를 지키기도 했다. 1938년 5월 17일에 조곤은 병으로 천진에서 사망되였다. 향년 76세였다. 1939년 12월에 국민정부에서 조곤에게 륙군1급상장계급을 추증했다. ◆ 오패부(吴佩孚): 오패부는 자가 자옥(子玉)이고 1874년 4월 22일에 산동성 봉래현 북구진 호가촌에서 출생했다. 1917년 7월에 역적토벌군의 서로선봉에 임명되여 장훈의 복벽을 토벌하는 전투에 참가했으며 손중산을 도와 호법군정부를 세우는데 일조하기도 했다. 1919년 12월에 풍국장(冯国璋)이 병으로 사망되자 조곤과 오패부는 직계군벌 수령의 지위를 계승했다. 1925년 10월에 적군토벌련군 총사령으로 임명되여 하남을 공격하여 봉계군벌을 쳤으나 후에 봉계군벌과 련합하여 남북으로 국민군을 협공했다. 1926년 10월에 북벌군의 공격으로 오배부의 주력은 섬멸되였는데 그후부터 다시는 재기하지 못했다. 1932년에 북평(지금의 북경)에 돌아온 오패부는 괴뢰두목이 되여달라는 일본의 요구를 거절했다. 1939년에 오패부는 이앓이로 열이 몹시 났다. 그해 12월 4일에 일본치과의사는 일본특무두목  도이하라 겐지의 명령을 받고 오패부의 이를 치료해주는척 하면서 칼로 오패부를 찔러죽였다. 향년 65세였다. 1939년 12월 9일에 국민정부에서 오패부에게 륙군1급상장계급을 추증했다. ◆ 송철원(宋哲元): 송철원은 자가 명헌(明轩)이고 1885년에 산동성 악릉현(지금의 악릉시)에서 출생했다. 1926년에 국민군북로총지휘, 서로총사령으로 임명되였고 1927년 11월에 섬서성정부 주석으로 임명되였다. 1933년에 송철원은 제29군을 지휘하여 장성요새의 희봉구, 라문욕에서 일본군과 혈전을 벌렸다. 제29군의 대도대(大刀队)는 일보군과 박투를 벌려 일본군 6000여명을 소멸했다. 1935년에 평진위수사령, 기찰정무위원회 위원장 겸 하북성정부 주석에 임명되였다. 1940년 4월 5일에 병으로 사망되였다. 1940년 5월 18일에 국민정부에서 송철원에게 륙군1급상장계급을 추증했다. ◆ 진조원(陈调元): 진조원은 자가 설훤(雪暄)이고1886년 11월 12일에 하북성 안신현 동구진 동구촌에서 출생했다. 1930년 9월 5일에 국무회의에서는  안휘성정부를 개조하기로 결정하고 진조원을 안휘성정부 주석 겸 안휘성 당무정리위원회 위원으로 임명하여 부대를 지휘하여 홍군과 싸우게 했다. 1934년 12월 5일에 국민당중앙정치회의에서는 진조원을 군사위원회 군사참의원 원장으로 임명했다. 1936년 12월 4일에 장개석은 서안에 도착하여 공산당을 토벌할데 관한 군사회의를 열려고 준비했다. 10일에 진조원도 서안에 도착했다. 12일에 “서안사변”이 일어나자 진조원은 장학량, 양호성에게 구류당했다. 구류기간에 진조원은 제25군 군장 만요황의 이모를 희롱했다. 장학량은 진조원을 심판할 때 그를 “늙은 색마”라고 질책했다. 1937년 7월에 항일전쟁이 폭발된후 진조원은 줄곧 군사위원회 군사참의원 원장직을 맡으면서 부상병들의 귀대사업을 책임졌다. 1943년 12월 18일에 진조원은 인후암으로 중경에서 사망되였다. 향년 58세였다. 1944년 2월 2일에 국민정부에서는 진조원에게 륙군1급상장계급을 추증했다.     항일전쟁 승리후에 1급상장군사계급을 수여받은 국민당 장군들   ◆ 백숭희(白崇禧): 백숭희는 자가 건생(健生)이고 회족이며 1893년 3월 18일에 광서 림계현에서 출생했다. 사람들은 리종인과 백숭희를 “리백”이라고 불렀다. 두 사람은 국민당내에서 가장 실력이 있는 지방군사세력인 계계(桂系)의 중심으로서 다년래 줄곧 변함없이 합작했다. 1937년 7월에 항일전쟁이 일어난후 백숭희는 국군부참모총장 겸 군사훈련부장으로 임명되였다. 1938년에 리종인과 백숭희는 대아장회전(台儿庄会战)을 지휘하여 국군항전중 첫 중대한 승리를 취득했다. 그해 6월에 백숭희는 무한회전을 지휘하여 일본군 15만명을 소멸했고 1940년 2월에 계남전역을 지휘하여 두번이나 일본군을 패배시켰다. 1945년 10월 3일에 백숭희는 륙군1급상장계급을 수여받았다. 1946년 5월 15일에 국방최고위원회의 결의로 백숭희는 국방부장으로 임명되였다. 1949년 12월 30일에 백숭희는 해남도에서 대만으로 건너갔다. 리종인의 말에 의하면 백숭희는 국방부장직을 주겠다는 장개석의 승낙을 받고 대만으로 간것이다. 그러나 백숭희는 대만으로 간후 대통령부전약고문위원회 부주임, 중국회교협회리사장 등 실권이 없는 한가한 직에만 위임되였다. 리종인이 미국에 가서 있었기에 장개석은 또 백숭희를 리용하여 리종인을 견제하려고 했다. 보밀국에서는 백숭희공관의 맞은켠에 파출소를 세워놓고 백숭희의 일거일동을 엄밀하게 감시했다. 1965년에 리종인부부는 온갖 장애를 물리치고 북경으로 가서 중공당정군 지도자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리종인이 대륙으로 돌아가자 장개석이 백숭희를 리용하여 리종인을 견제하려던 일은 가치가 없게 되였고 백숭희도 제몸을 보전하기 어렵게 되였다. 리종인이 대륙으로 돌아간후 백숭희를 이가 갈리도록 미워한 장개석은 보밀국의 두목 모인봉에게 명령하여 백숭희에 대해 직접 제재행동을 취하라고 했다. 백숭희는 1966년 12월 1일에 대북에서 사망되였다. 사후 시신이 푸르게 변하고 입에 거품을 물었으며 침대깔개는 여러곳이 찢겨져있었다. 장개석이 특무를 파견하여 백숭희를 암살했을 가능성이 매우 많은데 사망원인은 지금까지 수수께끼로 되고있다. ◆ 진성(陈诚): 진성은 자가 사수(辞修)이고 1898년 1월 4일에 절강성 려수시 청전현 고시향 외촌에서 출생했다. 1943년에 중국원정군 사령장관, 1944년 11월에 군정부 부장, 1945년 1월에 후근부 총사령, 1946년 6월에 국방부 참모총장 겸 해군총사령직을 력임했다. 1947년 2월 21일에 진성은 륙군1급상장계급을 수여받았다. 1947년 8월에 장개석은 진성을 동북군영주임으로 위임하여 동북전쟁에 파견했지만 진성은 림표에게 패하고말았다. 1948년 10월에 장개석의 파견으로 대만정무를 주최하게 된 진성은 선후로 대만성 주석 겸 대만경비 총사령, 국민당부총재, 행정원 원장 등 직에 임명되였다. 1954년에 대만정부의 “부대통령”에 당선되였고 1965년 3월 5일에 간암으로 대북에서 사망되였다. 향년 67세였다.      
252    력대 중화민국 1급상장들 (1) 댓글:  조회:6563  추천:2  2015-02-01
력대 중화민국 1급상장들 (1) (번역)     1급상장은 4성상장(四星上将)이라고도 한다. 국민당의 1급상장은 유일한 특급상장(5성상장)인 장개석을 제외하고 가장 높은 군사계급이다. 항일전쟁이 승리하기전에 국민당군 특급상장, 1급상장, 2급상장의 계급표식은 모두 군복의 금판령장우에 3개의 3각별을 달았다. 항일전쟁이 승리한후 령장우에 달았던 계급표식을 견장우에 달았는데 특급상장은 5개의 5각별을 견장우에 달았고 1급상장은 견장우에 4개의 5각별을 달았으며 2급상장은 3개의 5각별을 견장우에 달았다. 당연히 중장은 2개의 5각별, 소장은 1개의 5각별.   1935년 4월 2일에 1급상장군사계급을 수여받은 국민당 장군들 ◆ 풍옥상(冯玉祥): 풍옥상장군은 본명이 풍기선(冯基善)이고 자가 환장(焕章)이다. 1882년 11월 6일에 출생한 풍옥상은 본적이 안휘성 소현(巢县—지금의 안휘성 소호시 하각진 죽가촌)이고 기적(寄籍)이 하북성 보정시이다. 1927년 4월에 풍옥상은 국민혁명군 제2집단군 총사령을 맡았고 1928년에 부대를 거느리고 제2차북벌에 참가했으며 10월에 행정원 부원장 겸 군정부장으로 임명되였다. 1935년 12월에 남경에서 군사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임명되였다. 1936년후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부위원장, 제3전구와 제6전구 사령장관직을 맡았다. 1946년에 핍박에 의해 강제로 퇴역한후 수리고찰의 명의로 미국으로 가게 되였다. 반세기동안 부대를 거느리고 전쟁터를 누비였던 풍옥상은 1948년 9월 1일에 선박화재사고로 여섯째딸 풍효달(冯晓达)과 함께 사망되였는데 그의 죽음은 지금까지도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로 되고있다. ◆ 주배덕(朱培德): 주배덕은 1888년에 출생했는데 자가 익지(益之)이다. 1930년 4월에 중원대전이 폭발했을 때 제1로군 총지휘로 임명된 주배덕은 장개석을 도와 각파의 군벌을 굴복시켜 전국통일을 실현했다. 1931년 6월에 국민정부 위원으로 당선되였고 12월에 군사위원회 참모총장으로 임명되였다. 1937년 2월 15일에 병에 걸린 주배덕은 독일에서 수입한 항빈혈약물을 주사받았다. 17일밤 11시에 주사로 인한 혈액중독으로 사망되였다. 향년 49세였다. ◆ 리종인(李宗仁): 리종인은 자가 덕린(德邻)이고 1891년 8월 13일에 광서 림계에서 출생했다. 1926년에 좌익군 지휘관, 강좌군 총지휘, 국민당호북성림시정치회의 위원, 안휘성정부 주석, 국민정부위윈과 국민정부군사위원회 위원 등 직을 력임했다. 1948년 4월에 리종인은 중화민국 부대통령으로 당선되였고 1949년 1월 21일에 장개석이 은퇴한후 중화민국 대리대통령으로 취임했다. 1949년 11월 20일에 의사를 찾는다는 명의로 미국으로 가서 16년동안의 망명생활을 했다. 1956년 4월부터 1965년 6월까지의 기간에 리종인은 선후로 다섯번이나 정사원을 북경에 파견하여 주은래를 만나 그가 대륙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게 했다. 1965년 7월에 리종인은 겹겹의 장애와 위험을 무릅쓰고 안해와 함께 조국 대륙으로 돌아왔다. 1969년 1월 30일에 그는 페염으로 북경에서 사망되였다. ◆ 하응흠(何应钦): 하응흠은 자가 경지(敬之)이고 1890년 4월 2일에 귀주성 흥의에서 출생했다. 황포계에서 장개석의 제2호인물이였다. 1931년의 9.18사변후 국민당중앙정치회의 특별사무위원회 위원직을 맡았고 1933년에 북평군분회 대리위원장직을 맡았다. 1938년에 군사위원회 참모장, 1944년에 중국륙군 총사령, 1948년에 국방부 부장직을 력임했고 1987년 10월   21일에 병으로 대만에서 사망되였다. ◆ 장학량(张学良): 장학량은 1901년 6월 3일에 료녕성 태안현 구간향 악가촌 장가보둔에서 봉계군벌 수령 장작림의 장자로 출생했다. 자는 한경(汉卿), 호는 의암(毅庵), 유명은 쌍희, 소륙자이고 풍류를 즐기는 국민당4대미남자중의 하나였다. 1928년 6월 4일에 발생된 세상을 놀래운 황고둔사건으로 아버지 장작림이 일본인에 의해 폭사(炸死)된후 동북보안 총사령직을 이어받아 동북3성을 통치하기 시작했다. 1931년 9월 18일에 일본관동군이 세상을 놀래운 “9.18”사변을 일으키자 장학량은 동북을 일본군에 내주고 도망쳤다. 1934년 2월에 예악환3성초총 부총사령, 무창해영주임, 서북초총 부총사령 등 직을 력임했다. 1936년 12월 12일에 양호성과 함께 세상을 놀래운 “서안사변”을 일으켜 공산당과 련합하여 항일하도록 무력으로 장개석을 핍박했다. 그 일로 줄곧 장개석에게 연금되였다가 1990년부터 점차 인신자유를 회복하여 1993년 4월에 동북대학 명예교장, 5월에 할빈공업대학 명예리사장으로 초빙되였으며 1995년에 대만을 떠나 미국 하와이에 거주했다. 2001년 10월 14일에 병으로 사망되였다. 향년 101세였다. ◆ 진제당(陈济棠): 진제당은 자가 백남(伯南)이고 1890년 2월 12일에 광동성 동흥마로진에서 출생했다. 1929년 3월에 국민당중앙집행위원으로 당선되였고 1937년 9월에 국민정부위원회 위원, 최고국방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되였다. 1946년에 해남특구 행정장관 겸 경비사령으로  임명되였고 1949년에 해남행정장관 겸 해남경비사령직에 임명되였다. 1950년 4월에 대만으로 도주한후 대만 “대통령부” 정치전략고문직을 맡았다. 1954년 11월 3일에 대만에서 사망되였다. ◆ 당생지(唐生智): 당생지는 1889년에 호남성 동안에서 출생했는데 자가 맹소(孟潇)이다. 북벌전쟁시기에 국민혁명군 제8군 군장, 전적총지휘, 제4집단군 총사령, 호남성 주석 등 직을 맡았다. 1929년에 국민당정부 군사참의원 원장, 제5로군 총지휘에 임명되였다. 1937년 11월에 남경위수사령장관으로 임명되였고 남경이 일본군에게 점령당한후 조직과 련계를 잃은 그는 장기간 한가롭게 호남성에 거주했다. 1949년에 호남평화봉기에 참가했고 건국후 전국인민대표대회 제2, 3기 상무위원, 정협전국위원회 제1기, 2기, 3기, 4기 상무위원으로 당선되였으며 호남성인민정부 부주석, 부성장, 중남군정위원회 위원, 중남행정위원회 위원 등 직을 맡았다. 1970년 4월 6일에 장사에서 암으로 사망되였다. 향년 82세였다. ◆ 염석산(阎锡山): 염석산은 자가 백천(百川)과 백천(伯川)이고 1883년 10월 8일에 산서성 오태현 하변촌(지금의 정양현 하변진)에서 출생했다. 그는 1911년에 무창봉기후 산서성도독(都督)으로 추천되였고 북양정부기간에 원세개를 지지하여 산서성 성장으로 임명되였다. 1927년에 국민혁명군 북방총사령으로 임명되였고 이듬해에 제3집단군 총사령으로 임명되였다. 1929년에 당생지를 토벌하는 전쟁에 참가했으며 장개석에 의해 륙해공군 부사령으로 위임되였다. 1949년 4월에 중국인민해방군이 태원을 점령한후 산서에서 도주했으며 그해 6월에 광주에서 국민정부 행정원장 겸 국방부장으로 취임했다. 후에 대만으로 건너가서 행정원장, 국민당중앙평의위원에 임명되였다. 1960년에 병으로 대북에서 사망되였다. ◆ 진소관(陈绍宽): 진소관은 자가 후보(厚甫)이고 1889년 10월 7일에 복건성 민현에서 출생했다. 1932년 1월에 해군부장으로 임명되였고   1938년에 해군총사령에 임명되였다. 1949년 8월에 부분적 국민당해군봉기에 참가했고 복주가 해방된후 복건성인민정부 부주석, 부성장, 국방위원회 위원, 화동군정위원회 위원 등직을 력임했다. 1969년 7월 30일에 복주에서 사망되였다. 향년 80세였다.   1939년에 1급상장군사계급을 수여받은 국민당 장군   ◆ 정잠(程潜): 정잠은 자가 송운(颂云)이고 1882년 3월 31일에 호남성 례릉에서 출생했다. 일본륙군사관학교 제6기졸업생인 정잠은 상군도독부 참모장, 비상대통령부 륙군총장, 광동대본영 군정부 부장 등직을 력임했다. 1938년부터 제1전구 사령장관 겸 하남성주석직을 맡았고 란봉회전 등 대전역을 지휘했다. 1939년 5월 13일에 국민정부에서는 정잠에게 륙군1급상장계급을 수여했다. 1940년에 군사위원회 부총참모로 임명되였고 항일전쟁이 승리한후 무한행영주임으로 임명되여 화중(华中)의 군정(军政)을 관할했다. 1949년에 7월 22일에 정잠과 진명인은 대표를 파견하여 공산당과 평화담판을 했다. 8월 4일에 정잠과 진명인은 호남성 보안부 및 국민당제1병퇀의 전체관병들을 거느리고 장사에서 봉기를 거행했다. 중국공산당의 지도부에서는 장사에서 봉기한 정잠과 진명인에게 중임을 맡겼다. 1949년후 정잠은 선후로 중앙인민정부 위원, 전국인대 상무부위원장, 호남성 성장, 민혁중앙부주석 등 직을 력임했다. 문화대혁명시기에 주은래의 특별보호로 박해를 받지 않았다. 1968년 4월 5일에 북경에서 사망되였다.    
251    고국이 있어 동화되지 않는가 댓글:  조회:6978  추천:11  2015-01-27
고국이 있어 동화되지 않는가   김희수     고국(한국과 조선)이 있어 중국조선족은 동화되지 않는다고 락관하는 사람들이 있다. 정말 그럴가? 사실 중국조선족은 지금 경제, 문화, 언어, 문자, 풍속습관 등에서 주류민족에 서서히 동화되여가고있다.   농촌에서는 리농현상으로 농촌경제발전에서 가장 중요한 땅을 지키지 못하면서 우리 삶의 터전을 잃어가고있다. 도시에서도 조선족의 민영경제는 매우 취약하다. 물론 대도시에는 비교적 큰 조선족기업도 있지만 전국적으로 굴지의 기업이 없다. 더구나 연변에는 조선족사회의 견고한 토대로 될 중대형기업이 별로 없다. 조선족 대부분은 외국돈벌이에 의거하고있는 실정이다. 조선민족경제의 취약한 상태는 경제동화를 보여주고있으며 조선족의 취업, 교육, 과학기술, 문화 등에 영향을 주고있다.   과거에는 우리 민족이 문화수준이 높고 민족의식이 강했기에 우리 민족의 문화, 언어, 문자, 풍속습관을 지키고 중국땅에서 우수한 민족으로 당당하게 살아왔다. 하지만 개혁개방후 중국조선족사회는 급변하면서 인구이동, 인구감소로 민족교육체계가 붕괴되고 민족문화가 상실되여가고있다.   동화를 막는데 가장 중요한 조선족학교도 줄어들고있다. 농촌학교는 물론 도시학교도 하나 둘씩 페교되고있다. 조선족공동체를 이루는데 가장 중요한 인구도 급감세를 보이고있다. 우리 말과 글보다 한족말과 글을 더 잘하는 아이들도 늘어나고있다. 조선족 신문, 잡지도 하나 둘씩 줄어들고있다.   이렇게 조선족사회가 동화의 위기에 직면하고있지만 현재 중국땅에서 살고있는 우리의 세대만큼은 동화되지 않는다. 우리 세대는 동화되지 않지만 다음 세대 혹은 그 다음 세대에 가서는 주류민족에 동회될수 있다.   우리 조선족에게 고국이 있어 동화되지 않는다고 락관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정말 그럴가? 앞으로 우리의 아들이거나 손자, 증손자가 학부모가 된다고 하자. 그리고 그때에 가서 중국조선족인구가 줄고 즐어 자치주가 없어지고 조선족학교도 페교되고 우리 말로 된 방송, 텔레비죤방송도 없어지고 우리 글로 된 신문잡지도 자취를 감춘다고 하자.   이런 상황에서 미래의 아이들이 학교도 없는 우리 글을 배우려고 하겠는가? 신문잡지도 없는 우리 글을 사용하려고 하겠는가? 그때 가서 우리 글은 완전히 외국어(한국, 조선)로 된다. 우리의 아이들은 외국어를 배운데 해도 고국어보다 영어를 먼저 선택할것이다.   고국이 있어 동화되지 않는다고 락관하는 사람들은 또 그때 가서 조선족들이 한국이나 조선으로 이민가서 살면 되지 않겠는가고 반문할것이다. 하지만 전체 조선족들이 모두 고국(남북통일이 된다고 해도)으로 가서 산다는것은 현실적이 못된다. 그때 가서 고국으로 가서 사는 조선족들이 많아질수는 있지만 중국에 남아서 사는 조선족들도 적이 않을것이다.   비록 우리에게 고국이 있다고 하지만 앞으로도 중국땅에 계속 남아서 사는 조선족들이 적지 않을것이다. 중국땅에 조선족이 존재하는 한 조선족은 고국이 있다고 해도 언젠가는 만족처럼 동화될것이다.   중국에 살면서 중국말을 하고 중국어를 써도 자신이 조선족이라는것을 잊지 않으면 되지 않겠냐고 하는 사람도 있을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민족의식을 가지고있다고 해도 이미 경제, 문화, 언어, 문자, 풍속습관 등에서 완전히 동화된 상태에서 관념도 점점 회박해지면서 결국에는 동화되고 말것이다.   만주족의 경우를 놓고 보아도  그렇다. 지금 만주족은 말로는 만주족이지 한족이나 다름없다. 이제는 200여년동안 중국을 통치한 과거를 자랑하면서 “나는 만주족이다”라고 하는 만주족은 없다. 대부분 만주족은 자신이 만주족이란 관념도 상실하고있다.   동화는 이렇게 무서운것이다. 우리는 지금 자기의 민족학교를 갖고있고 자기의 자치주를 갖고있고 자기의 방송, 신문, 잡지를 갖고있어서 동화되지 않고 조선족으로 떳떳이 살고있는것이다. 하지만 앞집 처녀 믿다가 장가 못가듯이 고국만 믿고 동회위기에 철저히 대비를 하지 않고있다가 완전히 동화될수 있다. 그때 가서 “중국조선족”이라고 말할 사람, 불러줄 사람이 있을가?    
250    장개석을 대신하여 공개장소에서 활동한 비밀인물 댓글:  조회:7293  추천:0  2015-01-25
  장개석을 대신하여 공개장소에서 활동한 비밀인물   (번역)     1934년에 홍군을 포위토벌하기 위해 장개석(蒋介石)은 직접 사천, 운남, 귀주에 가서 장병들을 위문하기로 결정했다. 진립부(陈立夫)는 뜻밖의 화를 방지하기 위해 장개석을 대신하여 공개장소에 나설 인물(替身)을 선택하여 동행하게 하기로 마음먹었다. 진립부가 장개석을 닮은 몇명을 추천했지만 장개석은 모두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나중에 장개석은 결의형제 하운(何云)이 생각났다. 1880년에 절강성에서 출생한 하운은 장개석보다 7살 년상이였다. 하운은 상해에서 록영병(绿营兵)으로 있을 때 오장(伍长)과 함께 물건을 사러 거리에 나간적이 있었다. 그때 오장이 담배가게에서 권연을 가지고도 돈을 주지 않았다. 가게주인이 돈을 달라고 하자 오장은 오히려 제쪽에서 화를 내면서 주인을 마구 때렸다. 하운은 보다못해 오장을 말리면서 돈을 주라고 했다. 마침 그곳을 지나던 장개석이 그 광경을 목격하게 되였다. 장개석은 하운이 자기와 똑같이 생긴것을 보고 놀랐다. 또 하운이 부패한 청정부를 증오하는것을 보고 그를 쓸모 있는 인재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장개석은 하운과 결의형제를 맺었다. 하운은 장개석의 소개로 동맹회에 가입했고 후에 장개석의 부관으로 되였다. 진립부가 하운의 사진을 보니 과연 생김새가 장개석과 비슷했다. 진립부는 즉시 차를 항주에 보내 하운을 데려오게 했다. 하운이 남경에 도착한 그날밤에 대통령부에서 연회가 있었다. 연회석에서 장개석과 하운은 지난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운은 장개석의 은혜에 몹시 감격해하고있었다. 장개석이 황포군관학교 교장직을 맡은후 전례를 깨고 파격적으로 학교문에도 다녀보지 못한 하운을 황포군관학교 제1기학원으로 받아들였다. 또 북벌군이 항주를 공격한후 장개석은 하운을 항주시공안국 국장 겸 절강성군사청 부청장으로 임명했다. 식사가 끝난후 진립부는 하운을 밀실로 안내했다. 진립부는 단도직입적으로 “이번에 당신을 남경에 청해온것은 한가지 중요한 임무를 맡기기 위해서입니다. 귀주의 정황은 매우 복잡하여 장위원장의 안전을 보장할수 없습니다. 그래서 장위원장을 대신하여 공개장소에 나설 사람을 찾아야 하는데 당신이 이 일을 맡는것이 어떻겠습니까?” “물어볼 필요가 없습니다. 저를 선택한것은 장위원장과 진주임이 저를 믿기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꼭 장위원장님께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하운이 시원스럽게 대답하자 진립부는 하운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큰소리로 말했다. “좋습니다. 그런데 장위원장을 대신하려면 생김새가 흡사해야할뿐만아니라 본질적인 면도 비슷해야 합니다. 크게는 군정대사를 처리하는데서부터 작게는 음식습관에 이르까지 당신은 반드시 위원장님과 똑같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조그마한 허점도 보아내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그후부터 하운은 시시각각 장개석의 곁에 붙어서서 장개석의 하나하나의 말과 행동을 지켜보면서 그대로 따라했다. 화를 내는 행동과 웃는 모습까지 그대로 따라했다. 그리고 밤이면 밀실에 돌아가 낮아보았던 장개석의 말과 행동을 반복적으로 련습했다. 장개석을 모방하기는 결코 쉬운일이 아니였다. 하운의 고향은 절강성 서남부였기때문에 습관과 발음이 장개석과 매우 큰 차이가 있었다. 장개석은 고기를 적게 먹고 고기를 먹을 때 반드시 생선이 있어야 했지만 하운은 고기와 남새를 구분하지 않고 많이 먹고 빨리 먹었다. 하지만 하운은 장개석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고생을 두려워하지 않고 열심히 련습했다. 1934년 12월초에 장개석은 중산릉에서 위병대를 검열할 때 일부러 하운을 내보내여 효과를 시험해보기로 결정했다. 일본식 짧은 수염을 기른 하운은 가슴에 훈장과 메달을 가득 단 특급상장군복을 입은후 검은색외투를 걸치고 위병대앞에 나타났다. 위병대는 주석대를 지날 때 일제히 경례를 군례를 올리면서 “위원장님, 안녕하십니까?”하고 높이 웨쳤다. “장개석”은 주석대우에서 엄숙한 표정을 짓고 사병들을 향해 손을 흔들며서 “형제들, 안녕하십니까?”하고 소리쳤다. 검열이 결속된후 “장개석”은 강의를 하지 않았다. “장개석”은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주석대의 요원들과 일일히 악수를 하고 나서 빠른 걸음으로 걸어나갔다. 그때 송미령이 걸어나오며 매우 기쁜 심정으로 “장개석”의 손을 잡고 “친애하는이, 위병대의 장비와 정신상태가 모두 좋군요. 하지만 약간의 문제가 있군요”하고 말했다. “장개석”은 대번에 얼굴이 붉어지면서 잠시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한참후에야 그는 “부인은 어떤 고견을 가지고있는지요?”하고 물었다. 그러자 송미령은 의아해서 되물었다. “친애하는이, 설마 보아내지 못한건 아니겠지요?” “장개석”이 머리를 가로 젖자 송미령은 웃으며 말했다. “당신두 참, 귀인은 잊음이 헤프다더니…됐어요. 돌아가 다시 말해주지요.” 송미령은 “장개석”의 손을 잡아끌었다. “장개석”은 고분고분 따라갔다. 일이 이렇게 되자 진립부는 급해났다. 만약 “장개석”이 정말로 송미령과 함께 승용차에 올라 대통령부로 직통한다면 일이 매우 시끄럽게 될판이였다. 진립부는 급히 “장개석”에게 눈짓을 했다. 그제야 “장개석”은 급히 멈춰서서 “부인, 난 먼저 화장실에 가야겠소”하고 말했다. “장개석”이 화장실쪽으로 걸어가자 그제야 여러 군정요인들은 주석대에서 내려와 송미령을 보고 인사했다. 진립부는 몰래 진땀을 흘리다가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였다. 가짜장개석 하운이 겨우 사람들을 속여넘겼던것이다. 하운의 성공적인 연기에 매우 만족을 느낀 장개석은 장기적으로 그를 시종실에 남겨두었다가 필요할 때 쓰기로 마음먹었다. 그후 하운은 장개석을 대신해 많은 공개장소에 나타났다. 기념식이나 기념사진을 찍을 때에는 대부분 하운이 장개석을 대신하여 활동했다. 1935년에 귀주로 갔을 때 처음에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일부 연회에만 참석했다. 일은 장개석이 비밀리에 비행기를 타고 곤명으로 날아온후에 생겼다. 귀주에서 장개석을 대신하여 활동하던 하운은  자기 마음대로 병력을 이동시키고 장수를 파견하였다. 그때문에 병력이 부족되여 무의식중에 홍군에게 한갈래의 길을 내주게 되였다. 홍군이 봉쇄에서 벗어나자 장개석은 대노했다. 하운은 남경에 돌아온후 진립부의 요청을 받았다. 진립부는 하운을 당산汤山아래에 있는 별방에 연금시켰다. 하운은 별장에서 하루를 일년같이 보내면서 항주에 있는 안해와 아이들을 그리워했다. 그 시기의 장개석은 공산당포위토벌에 혈안이 되여 그를 대신하여 천군만마를 지휘했던 결의형제를 한쪽에 버려두었다. 그러다가 1935년 11월에 열린 국민당6중전회에서 왕정위에게 총알이 날아오자 장개석은 위험한 장소에서 자신을 대신할 하운을 생각하게 되였다. 그러나 송미령이 견결히 반대했다. 하운이 장개석과 너무 똑같았기에 송미령은 늘 진짜 장개석과 가짜 장개석을 알아보지 못한데서 불필요한 시끄러움이 생겼기때문이다. 게다가 하운은 문화수준이 낮아 여러가지 소질이 차하였고 사투리를 섞어서 말했기에 장개석을 대신하여 공개장소에 나설 합격된 인물이 아니였다. 장개석은 하운에게서 절대로 비밀을 루설하지 않겠다는 보장을 받은후 하운의 자유를 회복해주었다. 1937년 5월에 장개석은 하운에게 소장계급을 수여하고 국민정부군사참의원 참의직을 맡겼다. 하운에 남경에 출근하지 않고 항주에 앉아서 진립부의 보살핌으로 높은 로임을 받았다. 하지만 일본군이 남경, 상해, 항주를 점령하자 처지가 어렵게 된 하운은 장개석을 찾아 중경으로 갔다. 장개석은 마음대로 행동하지 말고 명령을 기다리고있으라고 했다. 항일전쟁이 승리한후 하운은 장개석의 명령을 받고 항주의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 시기에 장개석은 내전을 하느라고 바삐 보낸데다가 자신을 반대하던 군벌들도 하나하나 굴복시켰기에 위험한 장소에 대신 나갈 인물이 수요되지 않았다. 생활형편이 어려웠던 하운은 여러번이나 장개석과 진립부에게 편지를 써서 공직을 회복해달라고 요구했지만 줄곧 회답을 받지 못했다. 하운은 병상에서 “내가 ‘위원장’을 대신해주었지만 위원장은 나를 인정해주지 않는구나!”하고 탄식했다. 1947년 6월에 장개석은 자신에게 충성하고 목숨을 걸고 싸운 애장들에게 계급을 수여했다. 그때에야 장개석은 갑자기 하운이 생각나서 군사위원회에 부탁해서 다시 하운에게 소장계급을 수여하게 했다. 하운이 그 소식을 들었을 때는 병세가 중해서 말도 할수 없었다. 하운은 힘들게 한번 웃었을뿐이였다. 1947년 9월에 하운은 병으로 고향 건덕현에서 사망되였다. 향년 67세였다.  
249    전기적인 잠복영웅 전장비 댓글:  조회:5500  추천:0  2015-01-18
전기적인 잠복영웅 전장비   (번역)     1895년에 절강성 호주의 한 상인가정에서 출생한 전장비(钱壮飞)는 본명이 전장추(钱壮秋)이다. 1919년에 국립북경의과전문학교(지금의 북경대학의학부)를 졸업한 그는 북경에 남아 의사사업을 하면서 미술과 해부학을 가르치기도 했고 영화감독과 배우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는 또 서예와 무선전기술에 능하기도 했다. 1925년에 그는 부인 장진화(张振华)와 함께 북경에서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27년에 대혁명이 실패한후 전장비는 풍옥상의 서북군에 들어가 군의(军医)로 있다가 봉급을 제때에 주지 않기에 상해로 들어가면서 조직과 잠시 련계를 잃게 되였다. 이듬해 8월에 전장비는 무선전훈련반초생광고를 보고 시험을 쳐서 수석으로 합격되였다. 이 훈련반은 국민당이 새로 세운 특무조직에 속했다. 전장비는 일이 중대한것을 느끼고 여러가지 경로를 거쳐 리국농을 찾아갔다. 주은래는 이 소식을 들은후 좋은 기회라고 생각되여 전장비에게 잠복임무를 맡겼다. 1929년말에 전장비는 리극농(李克农), 호저(胡底)와 함께 당의 지시에 따라 국민당의 최고정보기관에 잠복해 들어갔다. 재능이 넘치고 총명한 전장비는 국민당중앙조직부 당무조사과 특무두목 서은증(徐恩曾)의 기요비서로 임명되였다. 주은래는 해방후에 “그들 세 사람(리극농, 전장비, 호저)은 범의 굴에 깊숙히 잠입해들어갔는데 룡담3걸(龙潭三杰)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만약 룡담3걸이 없었더라면 중국공산당의 력사는 다시 써야 할것입니다”라고 감탄조로 말한 적이 있다. 1928년 8월에 전장비는 국민정부건설위원회 무선전관리처 상해주재판사처에서 꾸린 훈련반에 수석으로 합격되여 들어갔다. 그후 무선전관리처의 상해영업처에 배치된 그는 그 당시에 무선전관리처의 영업과장 겸 상해영업처주임직을 맡고있던 서은증의 눈에 들었다. 진립부의 직계사촌동생인 서은증은 전장비가 업무에 능하고 자기와 한고향인것을 보고 자신의 업무관리를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당시에 서은정에게는 정부가 있었는데 합당한 거처가 없었다. 공산당조직에서는 그녀를 전장비의 집에 거주하게 했다. 그렇게 되여 전장비의 집은 더욱 안전하게 되였다. 서은정은 자신의 처가 모르도록 정부를 숨겨준 전장비의 “의로운 행위”에 대해 매우 고맙게 생각했다. 1929년 12월에 서은정은 국민당중앙조직부 총무부 주임 겸 당무조사과 주임대리직에 임명되였다. 서은정은 주동적으로 전장비를 기용비서로 추천했다. 중공중앙특수과에서는 리국농, 전장비, 호저에게 특별당소조를 세우고 함께 국민당특무기관에 잠복해들어가라고 지시했다. 국민당고위급관원들은 암호문을 가지고 오가는 정보내용을 알아보군 했다. 장개석과 진립부의 지시에 따라 당무조사과의 암호문은 서은증이 혼자서 직접 보관했다가 혼자서 사용하고있었다. 전장비는 몰래 보험궤안에 들어있는 암호문을 꺼내여 특무용카메라로 찍어두었다. 전장비는 이 암호문을 통해 국민당최고위급내의 핵심기밀을 장악했다. 1930년 겨울부터 1931년 2월까지의 기간에 장개석은 혁명근거지에 대해 제1차포위토벌과 제2차포위토벌을 감행했는데 전장비는 해당병력부서와 중요한 정보를 알아내여 리극농, 진갱(陈赓) 등을 통해 당중앙에 보내주었다. 1931년 4월에 장기간 중공중앙기관의 보위사업을 책임졌던 고순장(顾顺章)이 무한에서 적들에게 붙잡힌후 반변했다. 고순장은 상해의 중공중앙비밀을 전부 적들에게 털어놓았다. 위급상황에서 전장비는 자신이 장악한 비밀암호로 6통의 특급비밀전보문을 풀어서 제때에 정보를 리극농에게 보내주었다. 리극농은 이 정보를 진갱에게 전해주었고 진갱은 또 이 위급한 상황을 주은래에게 보고했다. 주은래는 상해의 중공중앙과 강소성위, 공산국제원동국의 기관을 지휘하여 긴급히 전이하게 했다. 4월 27일밤에 고순장과 련계가 있는 모든 관계를 끊어버리고 주은래, 구추백, 왕명, 박고, 등영초, 등소평, 진운, 진갱, 섭영진 등 지도동지들과 지하교통원들이 순리롭게 위험에서 벗어났다. 전국이 해방된후 주은래는 여러번이나 “전장비동지가 아니였더면 우리는 모두 국민당반동파의 손에 죽었을것입니다”라고 감탄해마지 않았다. 1934년 10월에 전장비는 장정에 참가했고 1935년 1월에 열린 준의회의후 홍군총정치부 부비서장으로 임명되였다. 그해 4월에 전장비는 귀주성 금사현 후산향에서 사망되였다. 향년 39세였다. 백색구역에서 퇴각하여 쏘베트구역으로 돌아온후 전장비는 홍1방면군을 따라 기나긴 장정길에 발자국을 남겼지만 불행하게도 귀주성 오강변에서 기이하게 실종되였다. 전장비는 서쌍영(徐双英)과 결혼하여 1914년에 맏딸 전초(钱椒)를 보고 1915년에 둘째딸 전진진(钱蓁蓁)을 보았다. 전진진은 려리리(黎莉莉)라고도 한다. 전장비는 1915년에 장진화를 알게 되여 1919년에 그녀와 결혼했다. 장진화는 아들 전강(钱江)과 전굉(钱锽)을 낳았다. 전굉은 후에 전일평(钱一平)이라고 이름을 고쳤다. 전일평은 아버지를 회상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만난것은 1931년 4월 26일 깊은 밤이였다. 그 시기에 우리는 상해 성도로에 거주했다. 밤중에 어머니가 이불속에서 자는 나를 잡아일으켰다. 아버지가 낮은 소리로 ‘빨리, 빨리 일어나라. 다른데 가서 자야한다’고 하는 말밖에 안들렸다. 그때 나는 일곱살이였다. 아버지는 미처 어머니에게 몇마디 부탁도 못하고 급히 상에 엎드려 편지 한통을 썼다. 그리고 곤난이 있으면 조직에서 관심해줄것이니 어머니더러 할머니와 아이들을 잘 보살펴주라고 하면서 만약 서은증徐恩曾이 우리를 난처하게 굴면 그 편지를 공개하라고 부탁했다. 아버지는 편지를 어머니에게 넘겨준후 급히 나갔다. 어머니는 사태의 엄중성을 알고 아버지를 붙잡고 시집올 때 가지고왔던 장신구를 아버지의 손에 쥐여주었다. 그렇게 마지막으로 아버지의 얼굴을 잠간동안 본후 우리는 그와의 련계를 잃게 되였다. 아버지가 떠난후 과연 서은증은 나의 누나 전초(钱椒)를 붙잡아 남경경비사령부에 가두었다. 그후 그는 아버지가 그의 탐오부패를 적발할가봐 두려워 누나를 풀어주었다. 나는 아버지의 막내아들이였다. 나의 누나 전초는 아버지를 따라 정보사업의 제1선에서 사업했다. 형님 전강(钱江)은  영화 《중화의 아들딸》을 찍은 저명한 촬영사이며 감독이였다. 둘째 누나 려리리는 1930년대 중국의 저명한 “무성영화황후”였다. 나는 형님과 누나의 문예재능은 모두 아버지의 유전인자를 물려받은것이라고 생각된다. 국립북경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아버지는 의술을 정통했을뿐만아니라 서예, 미술, 조각, 만화와 가곡창작에 능했으며 《홍색간첩》, 《누구를 위해 희생하는가》 등 극본을 쓰고 직접 출연하기도 했다. 음력설을 쇨 때 아버지는 빈센트로 약솜을 집어서 주련을 썼는데 그 정경은 지금까지도 사람들의 기억속에 깊은 인상으로 남아있다.”   전장비의 사망원인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다. 모택동은 전장비의 실종에 대해 매우 큰 중시를 돌리면서 홍5군퇀에 통지하여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꼭 전장비를 찾으라고 지시했다. 홍5군퇀은 명령을 받은후 이 임무를 군퇀 보위국장 구양의(欧阳毅)에게 맡겼다. 구양의는 신속하게 부대를 거느리고 강을 건너가서 전장비를 찾기 시작했다. 그들은 수림속과 마을을 샅샅이 뒤졌으나 전장비의 종적을 찾지 못했다. 특수한 전선의 전기적 영웅 전장비는 이렇게 우연하게 혁명대오에서 소실되였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사람들은 그의 실종경과에 대해 알게 되였다. 원래 그가 군위2국의 부국장에 임명되였을 때 군위수장이 많았기때문에 그에게 당나귀밖에 차려지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행군속도가 늦어져 오강을 건너갈 때 대부대와 뒤떨어지게 되였다. 그때 적기가 폭격을 하는 바람에 피해서 수림속으로 들어갔던 그는 토비들에게 발견되여 붙잡히게 되였다. 토비들은 그가 홍군의 고급간부인것을 보고 그를 인질로 삼아 재물을 협박하려고 했다. 그때는 이미 부대가 멀리 떠났기때문에 련계할수 없었다. 전장비는 상해에 있는 안해에게 편지를 써서 방법을 대여 돈을 가지고 자신을 구하러 오라고 했다. 그의 안해는 편지를 받았지만 길이 멀고 또 국민당통치구역이였기때문에 남편을 구하러 갈 방법이 없었다. 결과 전장비는 토비들에게 살해되였다. 하지만 이는 추측에 불과하고 전장비의 진정한 사망원인은 아직까지도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248    권세를 위해 10명의 친혈육을 죽여버린 무측천 댓글:  조회:7267  추천:1  2015-01-11
권세를 위해 10명의 친혈육을 죽여버린 무측천 (번역)   중국력사상에서 유일한 녀황제인 무측천은 잔인함과 총명, 광적인것과 랭정함을 한몸에 지닌 형상으로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그녀는 초인간적인 지혜와 정치수단을 가진 동시에 마음이 독하고 수단이 악렬했을뿐만아니라 잔인한 관리들을 등용하여 강경한 수단으로 자신의 무주왕조(武周王朝)를 다스렸다. 그녀는 심지어 포대기속의 친딸마저 목을 졸라 죽였다. 무측천은 예쁘고 책략이 뛰여났으며 권세를 탐하여 온갖 계략을 꾸며댔다. 그녀는 또 불교를 신봉했지만 황음무치했다. 그녀는 모골이 송연할 정도로 잔인하고 무정하게 권력과 리익을 위해 다투었으며 자신의 통치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라면 사랑도 혈육도 모두 버릴수 있었다. 조숙한 무측천은 14살에 남녀의 일에 대해 알고있었다. 그해(정관 11년 즉 기원 637년)에 당태종은 미녀선발을 했는데 결과 무측천은 후궁으로 선발되여 입궁했다. 입궁하기전에 어머니 양씨가 통곡했지만 그녀는 매우 평온한 어조로 “천자를 만나면 복이 넝쿨째로 굴러들어오겠는데 슬퍼하게 뭔가요?”하고 말했다. 과연 당태종은 무측천을 보자마자 그녀에게 홀딱 반하여 사흘만에 “재인”으로 봉했다. 당조초기의 후궁제도에 따르면 재인은 정5품으로서 황제의 121명 처첩중에서 서렬 30위에 속하여 높지는 않았지만 낮지도 않았다. 더구나 이는 관례를 깨고 월급하여 승급시킨것이다. 당태종 리세민(기원 599년 1월 23일~ 기원 649년 7월 10일)은 나이가 무측천(기원 624년 2월 17일~기원 705년 12월 16일)의 아버지벌이 되였기에 무측천은 당태종과 한평생을 함께 보낼수 없다는것을 알고있었다. 처음에는 당태종의 총애를 받다가 점점 랭대를 받게 되자 무측천은 기타의 계략이 있는 비빈들처럼 당태종이 죽은후의 준비로 황자들중에서 뒤배를 찾기 시작했다. 당시 황자들중에서 가장 당태종의 총애를 받은 황자는 위왕 리태였다. 궁중에서 적지 않은 비빈들이 모두 리태의 비위를 맞추며 암암리에 그와 사통했지만 무측천만은 그녀들과 달리 앞을 내다보는 혜안이 있었다. 무측천은 나약하고 성실한 진왕 리치를 선택했다. 리치라면 앞으로 마음대로 조종할수 있을것이였기때문이다. 어느날에 무측천은 뒤간으로 가는 리치의 뒤를 따라 들어가서 금대야에 담은 물을 두손으로 받쳐들고 손을 씻으라고 했다. 반쯤 무릎을 꿇고 애교가 넘치고 매혹적인 자태로 추파를 보냈다. 리치는 뜨겁게 달아오르는 욕정을 억누를수 없어 손을 씻는다는것이 그만 더운물을 무측천의 얼굴에 튕겨놓았다. 그 일이 있은후 “모자”는 당장에서 마른 장작에 불이 붙은것처럼 걷잡을수 없이 한몸으로 되여 붙어버렸다. 얼마후 무측천은 리치의 아이를 임신하였다. 때문에 《정사(情史)》에서는 리치를 “증(烝)”이라고 했다. 그 뜻은 아버지의 녀자와 성관계를 발생했다는것이다. 무측천은 당태종의 습성을 꿰뚫어보았다. 무측천의 계략에 따라 리치는 아버지 당태종에게 잘보이려고 갖은 애를 다 썼다. 당태종은 결국 리치를 태자로 봉했다. 당태종이 죽은후 리치가 황위를 이었는데 그가 곧 당고종이다. 당대후궁의 규정에 따라 무측천은 후궁을 떠난후 장안의 감업사 수선암에 출가하여 5년동안 녀승으로 되였다. 당시 25~26세였는데 한창 청춘이 발랄한 나이였다. 그해 당고종과 후비일행은 당태종의 사망5돐에 맞춰 감업사에 찾아와서 분향하고 복을 기원했다. 황제에게 총애를 받고있는 소숙비를 질투하고있던 왕황후는 무측천을 본후 몰래 사람을 파견하여 그녀를 다시 입궁시켰다. 그리고 무측천을 곱게 단장시켜 슬그머니 당고종의 침상으로 보냈다. 무측천의 힘을 빌어 소숙비를 견제하려는것이였다. 처음에 무측천은 겸손하게 례절을 지키면서 천방백계로 왕황후에게 아부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이 힘을 합쳐 소숙비를 물리쳐버렸다. 하지만 무측천은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온갖 방법을 다하여 왕황후의 자리를 빼앗으려고 했다. 무측천은 재물로 궁중의 태감과 궁녀들을 매수하여 왕황후의 일거일동을 살피게 했다. 무측천은 당태종의 재인으로 있을 때 독한 녀자로 소문났다. 그때 서역에서 당나라에 보마(宝马) 한필을 보내왔는데 매우 사나와서 젊고 힘센 남자들도 길들일수 없었다. 말을 잘 타기로 소문난 당태종도 그 말을 타다가 굴러서 땅바닥에 떨어졌다. 모두들 속수무책으로 있을 때 무측천이 나서서 말했다. “천첩에게 세가지 물건만 주면 그 말을 다스릴수 있습니다.” “무슨 세가지인가?” 당태종이 묻자 무측천이 대답했다. “쇠채찍, 쇠망치, 칼입니다. 먼저 쇠채찍으로 가죽이 찢기도록 때리는것입니다. 그래도 말을 듣지 않으면 쇠망치로 죽도록 대갈통을 내리쳐야 합니다. 그래도 굴복시키지 못할 경우에는 칼로 숨통을 끊어버려야 합니다.” 당태종은 비록 전쟁터에서 반생을 보내면서 사람과 말을 수없이 죽였지만 무측천처럼 마음이 독하고 수단이 악렬한 녀자는 처음 보았다. 그래서 암암리에 무측천을 경계하였다. 사실 무측천은 사악하고 잔인했을뿐만아니라 독사같은 녀인이였다. 속담에 범도 제 새끼를 잡아먹지 않는다고 했지만 무측천이란 흉악하고 잔인한 암펌은 자식을 잡아먹을었을뿐만아니라 뼈도 남기지 않고 삼켜버렸다. 무측천은 왕황후를 제거해버릴 한가지 독한 계략을 생각해냈다. 그 당시 무측천은 딸을 낳았는데 매우 령리하고 예쁘게 생겨 고종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왕황후도 아이를 낳지 못해 무측천의 딸을 매우 좋아했다. 어느날에 왕황후가 무측천의 거처로 찾아왔는데 무측천은 일부러 친절하게 황후와 한담을 하는척 하면서 기회를 타서 궁녀에게 꼬마공주를 안고오라고 시켰다. 왕황후는 기뻐서 아이를 안고 놀다가 아이가 잠이 들어서야 돌아갔다. 황후가 방금 문을 나섰을 때 궁녀가 달려들어와 황제가 온다고 아뢰였다. 천재일우의 기회라고 여긴 무측천은 잔인하게도 포대기속에서 자고있는 친딸의 목을 졸라죽였다. 그리고 어린 딸의 시신을 바라보며 “너는 제왕의 집에서 태여났지만 아쉽게도 이 에미의 전도를 위해서 죽어야 한다”고 말한후 이불을 덮어버렸다. 그때 고종이 들어와서 이불을 열어보고 딸이 숨이 막혀 죽은것을 보게 되였다. 고종은 방금 누가 왔다갔는가고 물었다. 무측천은 울면서 황후밖에 왔다간 사람이 없었다고 대답했다. 고종은 비분하여 “황후가 내 딸을 죽였다!”고 소리쳤다. 고종은 즉시 조서를 내려 왕황후를 페위시키고 무측천을 황후로 봉했다. 얼마 안되여 무측천은 또 황제를 충동질하여 왕황후와 소숙비에게 사약을 내려 죽게 했다. 황후가 된후 무측천은 자기의 네 오빠를 제발하여 높은 벼슬을 주려고 했다. 그런데 네 오빠는 그녀의 작법에 대해 인정하지 않으면서 그녀가 마음대로 조정을 뒤흔든다고 책망했다. 무측천은 대노하여 그들을 변방으로 류배시켰다. 그리고 도중에 핍박하여 그중 두 오빠를 자살하게 했다. 나머지 두 오빠도 하마트면 독해를 당할번 했다. 무측천의 친언니 한국부인은 남편을 잃은후 딸을 데리고 황궁으로 찾아왔다. 고종은 미모의 모녀를 보고 홀딱 반하여 후궁으로 들인후 무측천을 전보다 랭담하게 대했다. 어렵게 황후가 되여 황제의 총애를 독차지 하던 무측천이 어찌 다른 녀자가 황제의 총애를 받는것을 보고만 있을수 있겠는가? 그 상대가 친언니고 외조카딸이라고 해도 용서할수 없는 일이였다. 한달후 한국부인은 갑자기 영문을 알수 없이 죽어버렸다. 고종은 무측천이 한 짓이라고 의심했지만 증거를 찾을수 없었다. 그래서 소홀함이 없이 한국부인의 딸 위국부인을 보호했다. 그후 다행히 죽을 고비를 넘긴 무측천의 두 오빠가 황궁으로 찾아오게 되였다. 무측천은 후궁에서 한상 차려놓고 두 오빠를 초대했는데 그 자리에는 고종과 위국부인도 있었다. 무측천은 직접 주방에 내려가 두 오빠가 가져온 물고기안에 독약을 넣었다. 그리고 그 물고기를 고종의 총애를 받고있는 위국부인에게 주었다. 그 물고기를 먹은 위국부인은 당장에서 일곱구멍에서 피를 흘리면서 죽었다. 이렇게 자신에게 장애가 되는 외조카딸을 제거한 무측천은 두 오빠를 무함했다. 그녀는 두 오빠가 가져온 물고기에 독약이 들어있다고 하면서 시위에게 명령하여 두 오빠의 목을 베여버렸다. 이번에 그녀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본것이다. 눈앞의 련적을 제거하고 또 자신이 하는 행동을 반대할것이 뻔한 두 오빠를 처리해버린것이다. 당고종은 만년에 몸이 병약하여 황위를 무측천에게 양위하려고 했지만 군신들이 견결히 반대하는 바람에 어찌 해볼 도리가 없었다. 고종은 무측천을 격노시킬수 없어 황위를 무측천이 낳은 아들 리홍에게 양위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무측천은 곧 실현하게 될 황제꿈이 깨여지는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녀는 녀황제로 되기 위해 친아들 리홍에게 독주를 먹여 죽여버렸다. 그후 고종은 무측천의 둘째아들 리현을 황태자로 봉하고 리현에게 국사를 맡겼다. 먼저 손을 쓰는것이 유리하다고 생각된 무측천은 또 하나의 친아들 리현을 핍박하여 죽여버렸다. 고종이 죽자 무측천은 혼자 권력을 쥐고 마음대로 할수 있게 되였다. 중종과 예종은 모두 선후로 각각 55일과 6개월의 상징적인 황제노릇밖에 못하고 무측천에 의해 페위당했다. 무측천은 당(唐)을 주(周)로 고치고 녀황제로 되였다. 사서의 기재에 따르면 무측천은 선후로 모두 딸 하나, 아들 둘, 오빠 넷, 언니 둘, 외조카딸 하나를 죽였다. 이 모든것은 황제의 총애를 받고 권력을 다투고 녀황제꿈을 실현하기 위해서였다. 무측천은 음험하고 잔인하기를 극에 달했지만 공정하게 평가하면 녀황제로 된후 확실하게 진보적인 개혁조치를 취했다. 
247    마지막 황제 부의의 사랑이야기 댓글:  조회:7509  추천:3  2015-01-04
마지막 황제 부의의 사랑이야기   (번역)     아이신줴러 부의(爱新觉罗·溥仪)는 중국력사상의 마지막 황제였다. 부의는 광서 32년(1906년) 1월 14일에 순왕부(醇王府)에서 출생했다. 부의는 도광황제의 증손이며 광서황제의 친동생 재풍(载沣)의 장자였다. 1908년 10월에 자희태후와 광서황제는 동시에 중병에 걸렸다. 자희태후는 중남해에서 군기대신들을 불러놓고 후사를 상의했다. 광서황제에게 후대가 없었고 청나라의 내외정세가 혼란에 빠져있었기때문에 군기대신들은 나이가 든 사람을 황위에 올려야 한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자희태후는 대노했다. 결국 3살인 부의를 황위에 올리기로 합의를 보았다. 그후 광서황제와 자희태후는 이틀을 사이두고 사망되였다. 15일후에 부의는 태화전에서 정식으로 제위에 올랐다. 광서황제의 황후 륭유와 재풍이 섭정했다. 이듬해 년호를 선통(宣统)이라고 고쳤다. 선통 3년(1911년)에 신해혁명이 폭발했고 이듬해 2월 12일에 륭유태후는 핍박에 의해 “퇴위조서”를 내렸다. 그후 부의는 1934년부터 1945년 일본이 투항하기까지 위만주국황제로 되였는데 년호를 강덕(康德)이라고 했다. 황제로부터 백성으로 되기까지 부의의 인생은 전기적 색채를 띠였다. 그의 혼인 또한 매우 복잡하고 곡절적이였다. 그는 일생에서 선후로 1명의 황후, 1명의 황비, 두명의 귀인과 1명의 안해를 맞았는데 두번 리혼했고 두번 상처했으며 자녀가 없었다. 그러면 5명의 녀인과의 혼인생활은 어떠했을가? 매 녀인이 그에게 끼친 영향은 어떠했으며 그가 매 녀인에게 어떠한 생활을 가져다주었을가? 최근에 위만주국황궁박물관의 연구원이며 길림성민속학회 부리사장인 심연은 장춘도서관에서 광대한 독자들에게 말대황제 부의의 혼인생활과 애정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부의의 운명중 행운과 비애는 늘 부동한 배경하에 재현하군 했다. 그는 일생에서 3번 제위에 올랐다. 부의와 완용의 혼인은 행복으로 시작되였다가 비극으로 막을 내렸다. 부의와 완용의 혼인은 24년동안 지속되면서 중국사회의 가장 혼란스러운 년대를 경험했다. 부의는 황궁에서 쫓겨나고 피해다니고 괴뢰황제로 되는 굴곡적인 길을 걸었다. 부의와 완용 개인의 전도와 운명은 국가의 전도와 운명과 긴밀히 련결되여있었다. 1922년에 17살의 부의는 왕공대신들과 상의하여 내무부 대신 영원의 딸 완용(婉容)을 황후로 책봉했다. 17세에 황후가 된 완용은 시체를 따르는데다가 재능이 있고 다정하여 부의에게 새로운 생활을 가져다주었다. 완용은 늘 부의에게 영어를 배워주었고 서양음식에 대해 알려주었다. 부의는 완용에게 엘리자베스(伊丽莎白)란 영문이름을 지어주었다. 어릴 때부터 황궁에서 살아온 부의는 완용의 덕에 서양문화를 접수하게 되였고 사랑과 활력을 감수했다. 하지만 좋은 날은 오래가지 못했다. 완용과 부의의 관계가 파렬된 주요원인은 그들의 정치견해가 달랐기때문이다. 완용은 정치리상과 포부가 있는 녀인이였다. 그녀는 줄곧 부의를 도와 “복벽대업”을 완성하려고 했다. 그러나 “9.18”사변후 부의가 일본인의 품에 안기자 완용은 부의가 일본인의 괴뢰황제가 되는것을 극력 반대했다. 이에 부의는 완용을 자신이 복벽의 꿈을 실현하려는데 걸림돌이 된다고 인정하면서 몹시 미워했다. 괴뢰황제의 황후가 되는것을 원하지 않았던 완용은 두번이나 “황궁”에서 도망치려고 시도했지만 모두 성공하지 못했다. 이에 완용은 초조하고 불안해하면서 화를 잘 냈다. 그러다가 아편인이 박혔다. 그런 열악한 환경에서 그녀는 임신하게 되였다. 그후 29세일 때 완용은 부의에 의해 랭궁(冷宫)에 들어가게 되였다. 완용은 40세에 사망될 때까지 랭궁에서 살았다. 부의와 완용의 혼인비극은 그들의 운명처럼 력사의 희생품과 식민통치의 희생품으로 되였다. 1922년 11월 30일에 13세의 문수(文绣)는 숙비(淑妃)로 책봉되여 황후인 완용보다 하루 먼저 황궁에 들어가 부의와 혼레식을 치루었다. 그러나 문수는 황비로서의 즐거움과 행복을 얻지 못했다. 이 혼인은 그녀의 비극적인 인생의 시작으로 되였다. 서양의 교육을 받은 황후 완용은 1부1처제를 견결히 주장하면서 천진에 있는 7년동안에 늘 문수와 다투었다. 문수는 완용만 감싸주는 부의에게 몹시 실망했다. 불평등한 대우를 참을수 없었던 문수는 1931년 가을에 부의와 리혼하기로 결정하고 법에 리혼소송을 걸었다. 이 황제와의 리혼풍파는 세상을 놀라게 했다. 중국력사상에서 황제가 리혼하는 일은 처음이였다. 1937년에 완용이 랭궁으로 쫓겨난후 부의는 완용에게 보복하기 위해 당시 북경중학교에서 공부하고있던 녀학생 담옥령을 “상귀인(祥贵人)”으로 맞아들였다. 17살의 담옥령은 홀로 장춘으로 와서 부의와 결혼했다. 담옥령은 젊고 예쁜데다가 온화하고 현숙하여 주위사람들과의 사이가 매우 좋았다. 입궁후 그녀는 부의와의 관계도 매우 좋아 특별한 총애를 받았다. 담옥령은 북경에서 공부할 때 진보사상의 교육을 받았고 기차에 앉아 동북으로 오면서 일본군의 침략폭행을 목격했기때문에 부의의 처지를 리해할수 있었다. 부의에게 담옥령은 한줄기의 따뜻한 해빛과도 같았기때문에 그녀에 대한 사랑이 극진했다. 하지만 홍안박명이라고 담옥령은 부의와 결혼한지 5년만에 22살의 나이로 병으로 사망되였다. 담옥령이 병으로 앓는 기간에 부의는 줄곧 곁에서 보살펴주었다. 담옥령의 사망은 부의에게 매우 큰 타격을 주었다. 담옥령을 기념하기 위해 부의는 명령을 내려 담옥령에게 “명현귀비”라는 시호를 내려 청왕조 귀비의 신분으로 장례를 치루었다. 담옥령이 사망된후 부의는 죽을 때까지 그녀의 사진을 몸에 지니고 다녔다. 그 사진의 뒤면에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옥령”이라고 씌여져있었다. 담옥령(谭玉龄)이 죽은후 일본관동군은 부의를 통제하기 위해 부의에게 일본녀자를 부인으로 맞아들이라고 했다. 비록 부의는 괴뢰황제였지만 혼인문제에서는 양보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사생활이 일본인의 감시를 받는것이 두려웠기때문에 일본녀자를 부인으로 맞지 않겠다고 강하게 나섰다. 결국 부의는 위만주국의 녀학생 리옥금(李玉琴)을 “복귀인(福贵人)”으로 맞아들였다. 리옥금은 출신이 가난했고 나이가 어렸기때문에 입궁후 멸시를 받았다. 부의는 “21조”를 제정하여 리옥금에게 반드시 청왕조의 례법을 지키고 사상상에서 자신에게 절대 복종하도록 얽매여놓았다. 그리하여 리옥금은 황궁에서 평등과 자유가 없이 부의의 놀이개로만 살아야 했다. 1945년 8월에 일본의 투항과 함께 위만주국이 해체되자 리옥금은 부의를 따라 위만주국의 황궁에서 나와 통화 대률자로 갔다. 새중국이 성립된후 리옥금은 정부의 도움을 받아 장춘도서관에서 사업했다. 1955년에 리옥금은 무순에서 부의를 만났을 때 리혼을 제기했다. 그리하여 그녀는 마침내 자유를 얻었다. 일본이 투항한후 부의는 일본군과 함께 도꾜로 도망치려다가 공항에서 구쏘련군에게 붙잡혔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후 모택동은 부의를 사면해주었다. 부의는 특별사면을 받은후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였다. 1960년 3월에 부의는 보통공민의 신분으로 난생처음 북경식물원의 원예사직업을 얻었다. 1962년에 부의는 북경관상병원의 간호원 리숙현(李淑贤)과 결혼했다. 그는 보통백성으로서의 진정한 가정이 있게 된것이다. 결혼후 두 사람은 서로를 너무 사랑하여 떨어져서는 살수 없는 사이가 되였다. 어느날에 부의는 리숙현을 껴안고 “이전에 내가 황궁에 있을 때는 근본 부부지간에 응당 있어야 할 관심과 사랑에 대해 모르고있었소. 황후나 황비는 나의 노리개일뿐이였소. 기분이 좋으면 같이 자고 기분이 나쁘면 외면하였소. 당신을 만나기전에 나는 사랑이란 무엇인지 몰랐소. 당신을 만나서야 나는 인간세상에 이렇게 달콤한 남녀간의 사랑이 존재한다는것을 깨닫게 되였소”라고 말했다. 부의는 말과 같이 안해 리숙현을 끔찍히 사랑했다. 1963년 여름의 어느날이였다. 그날은 폭우가 많이 내려 공공교통이 저애를 받았다. 그날에 부의는 퇴근하여 안해가 돌아오지 않자 급히 우산을 찾아들고 안해의 마중을 나갔다. 반나절이나 기다려도 리숙현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그는 도로의 하수도덮개가 열려있는것을 발견했다. 그는 혹시 안해가 오다가 하수도에 빠질가봐 하수도앞에서 안해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다. 부의와 리숙현은 5년동안 행복한 부부생활을 했다. 부의가 사망될 때까지. 부의가 1967년 10월 17일 새벽 2시 30분에 사망된후 골회는 팔보산혁명공동묘지에 안장되였다. 1980년 5월 29일은 부의가 사망된지 13돐이 되는 날이였다. 그날 당과 정부에서는 부의를 위해 추도회를 거행했다. 1995년 1월 26일에 부의의 골회함은 청서릉내의 숭릉(광서릉)부근의 화룡황가릉원에 매장했다. 이는 리숙현이 직접 처리한것이다. 부의가 사망되여 30년이 지난후인 1997년 6월 9일에 리숙현은 페암으로 사망되였다. 향년 72세였다.     
246    8월 15일 서울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댓글:  조회:4512  추천:1  2015-01-01
日王의 항복선언 안믿어… 8월 15일 당일 서울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전봉관 KAIST 인문사회학과 교수     [1] 1945년 8월 15일 그날 만세 부르며 뛰쳐나와?… 우리가 아는 광복의 기억은 왜곡됐다 항복·패전이란 단어 안나와 첫날은 광복인지 어리둥절… 16일 되어서야 '태극기 만세' 행복의 물결 온나라 뒤덮어   日 전쟁중 철저히 언론통제… 국민, 포츠담선언 뭔지몰라 조선총독은 9월 9일까지 여전히 조선총독으로 행동                                                                                             전봉관 KAIST 인문사회학과 교수   1945년 광복 이후 70년, 대한민국은 격동의 역사를 숨 가쁘게 달려왔다. 좌우 대립과 전쟁, 산업화와 민주화에 이르는 길에서 때로는 고통에 힘겨워하고 스스로 이룬 놀라운 성취에 감격하기도 했다. 지난 역사를 되돌아보는 일은 미래로 가는 길을 모색하기 위한 것이다.   "포항에서 병원을 운영하던 남편은 병원 문을 모두 걸어 잠그고는 조그마한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켜고 방송을 들으라고 했어요. 일왕이 벌벌 떨면서 항복 선언을 하는데, 그 방송을 처음부터 끝까지 들었던 겁니다. 일왕의 방송이 끝나자 이어서 한국말 방송이 나왔어요. '우리는 해방이 되었습니다. 대한민국 만세!' 라디오에서 우렁찬 목소리로 전 국민을 향해 소리쳤어요."   현재 한국인들이 간직한 해방 당일의 이미지는 수필가 전숙희(1919~2010)의 증언과 비슷할 것이다. 하지만 이 증언의 몇몇 대목은 역사적 사실에 어긋난다. 전날 밤부터 당일 아침까지 수차에 걸쳐 일왕 방송 예고가 있었으므로 굳이 문을 걸어 잠그고 방송을 들을 이유가 없었다. 트랜지스터가 발명된 것은 그로부터 2년 후인 1947년이었다. 결정적으로 그날 라디오에서 '해방' '대한민국 만세' 같은 말은 방송되지 않았다.   이처럼 기억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흐릿해지거나 왜곡되고 엇갈리게 마련이다. 독립운동가 박진목은 8·15 당일 "대구 시내가 태극기를 들고 나와서 만세를 부르고 울고불고하는 사람들로 야단"이었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같은 대구 출신 노동운동가 이일재는 "1945년 8월 16일 예정대로 일본 군대에 입대"해서 "이틀 뒤 일본군이 모두 퇴각해 18일에야 집으로 돌아왔다"고 증언했다. 만일 8·15 당일 태극기가 휘날리고 만세 소리가 높았다면, 다음 날 선량한 대구 청년이 일본 군대에 입대하는 역설적인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역사학자들은 대체로 8·15 당일은 어리둥절한 채로 특별한 사건 없이 지나갔고, 만세 인파가 해방의 환희에 젖어 거리로 본격적으로 쏟아져 나온 것은 이튿날인 16일부터라고 의견을 모은다. 서울 주재 소련 총영사관 부영사의 아내로 8·15 전후 서울에 있었던 파냐 샤브쉬나의 기록도 이를 뒷받침한다.        (왼쪽)8월 15일 도쿄 - 1945년 8월 15일 폐허가 된 일본 도쿄 시내에서 히로히토 일왕의 라디오 방송을 듣는 시민들. (오른쪽)8월 16일 서울 - 1945년 일제의 항복 소식을 듣고 거리로 나와 환호하는 서울 시민들. 8월 16일 서대문형무소 앞에서 촬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일보 DB     "8월 15일의 서울은 마치 쥐 죽은 듯했다. 물론 주민들은 일본의 항복을 알고 있었으나 많은 사람이 믿지 않았다. 그냥 기다렸다. 조심스러운 기쁨과 희망을 가지고. 그런데 그 바로 다음 날 모든 것이 바뀌었다. 거세고 억제할 수 없는 행복의 물결. 그 물결은 말 그대로 시내와 온 나라를 뒤덮었다."   일본의 패전은 15일 정오 조선·일본·대만 등에 방송된 일왕의 육성 방송인 이른바 '옥음방송(玉音放送)'을 통해 알려졌다. 1940년 조선의 라디오 유료 청취자 수는 22만7573명이었다. 여러 사람이 라디오 하나에 모여서 '옥음방송'을 들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단지 청취자가 적어서 해방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전쟁 기간 내내 일제 군부는 철저히 언론을 통제했다. 조선 독립을 명시한 1943년 11월 카이로회담이나 일본에 무조건 항복을 요구한 1945년 7월 포츠담선언은 당연히 보도되지 않았다. 8월 6일 히로시마, 9일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돼 수십만명이 희생되었을 때조차 미군의 '신형폭탄' 투하로 무구한 양민이 희생되었다는 정도로만 보도됐다.   이러한 언론 통제 탓에 대부분의 일본인과 조선인은 패전 임박을 예상할 수 없었다. 15일 일왕의 '옥음방송'이 항복 선언일 것으로 예상했던 사람도 얼마 되지 않았다. 경성방송국 일본인 직원들조차 천황의 중대 발표가 소련에 대한 선전포고일 것으로 짐작했을 정도였다.   히로히토 일왕의 '옥음 방송' 중 무조건 항복 내용. 4분 37초 동안의 '옥음방송'은 잡음이 심해서 알아듣기 어려웠다. 난해한 한문 투의 문장은 일본인도 한 번 들어서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천황의 육성 방송 직후 일본인 아나운서가 종전 조서를 다시 한 번 낭독했고, 이덕근 아나운서가 한국어로 번역한 원고를 낭독해 대강의 '개요'는 청취자들이 이해할 수 있었다.   "짐은 제국 정부로 하여금 미·영·중·소 4개국에 그 공동선언을 수락한다는 뜻을 통고토록 하였다."   소위 '무조건 항복 선언'이었다. 하지만 '종전 조서' 어느 곳에도 패전·항복·해방·독립 같은 단어는 없었다. 이 구절이 '무조건 항복 선언'으로 해석되는 것은 천황이 수락하기로 한 포츠담선언이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포츠담선언의 내용은 이튿날인 16일자 신문에야 최초로 게재되었다. 포츠담선언의 내용을 알지 못한 채 종전 조서를 읽고 해석해봐야 전쟁이 끝났다는 것을 짐작하기란 쉽지 않았다.             '옥음방송' 직후 배포된 매일신보에는 천황의 종전 조서와 함께 당시 조선총독 아베 노부유키의 유고(諭告)가 게재됐다. 아베 총독은 소위 '일본과 조선은 한 몸'이라는 '내선일체(內鮮一體)'를 강조하면서 유언비어 유포와 동포 상잔(相殘)을 경계하라고 당부했다. 9월 9일 미군 사령관 하지 중장에게 정식으로 항복할 때까지 아베는 여전히 조선총독이었고, 총독으로 행동했다.   전쟁은 끝났지만 일본이 패망한 것도 같기도 하고 아닌 것도 같고, 조선이 해방된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아 어리둥절하기만 했던 날. 그날이 1945년 8월 15일이었다.    
245    양처럼 착하게 살기엔 너무 험한 세상 댓글:  조회:6684  추천:16  2015-01-01
양처럼 착하게 살기엔 너무 험한 세상   김희수     돌이켜보면 지나온 갑오년 말띠해는 정말로 말처럼 급하게 달려온 한해였던것 같다. 그렇게 달리기에만 급급해서 탈레반테로, 중동지역의 전쟁, 말레이시아항공기추락사고, 세월호침몰사고와 같은 어둡고 침침했던 참사도 많았던게 아닌가 싶다. 그래서 사람들은 양띠해인 새해엔 양처럼 착하게 살아가는 세상이 되기를 바랄것이다.   새해 2015년은 을미년 양띠해이다. 양은 순하고 착한 동물로 정평이 나있다. 하지만 너무 착한것도 탈이다. 너무 착하면 남에게 당하기만 하다가 잡혀먹히기까지 한다. 양가죽을 쓴 늑대들이 활개치는 험한 세상에서 양처럼 착하게 살기란 쉽지 않다. 양처럼 착하게만 살다가는 어느때 어디서 양의 탈을 쓴 늑대에게 잡혀 양꼬치구이가 될지도 모른다. 또 자칫하면 다른 사람의 잘못을 대신 뒤집어쓰고 억울하게 희생양(替罪羊)이 될수도 있다.   눈 감으면 코 베여갈 세상이란 속담이 있지만 요즘 세상은 눈을 뜨고도 코 베여갈 세상이라고 한다. 도처에 양의 탈을 쓴 사기군 늑대가 시시각각 당신의 코를 노리고있다. 당신이 방심하는 순간 늑대는 바람처럼 나타나 당신의 코를 베여갈지도 모른다.   양은 진가를 식별하는 능력이 약하기에 양의 탈을 쓴 늑대를 구분하지 못한다. 또 너무 착하고 순진하기에 양의 탈을 쓴 늑대를 진짜 양인줄로 믿는다. 양의 탈을 쓴 늑대가 달콤한 말로 꼬시면 귀가 솔깃해서 정말로 곧이듣고 늑대가 파놓은 함정에 서서히 빠져든다. 한두번 함정에 빠진 양이라고 해도 양의 탈을 쓴 늑대들이 약간이라도 다른 함정을 파놓으면 그것이 함정인줄 모르고 또 빠져든다. 교활하고 사악한 늑대들은 양들의 이런 약점을 알기에 그 약점을 리용하여 각양각색의 함정을 파놓는다. 그래서 양들은 항상 당하기만 한다.   예전에 어른들은 자식들에게 착하게 살라고 교육했지만 지금은 자식들에게 약게 살라고 교육한다. 그만큼 세상이 험해지고 살벌한 무한경쟁시대이다보니 예전처럼 착하게 남을 생각해주면서 살다가는 큰 랑패를 볼수도 있기때문이다. 약게 사는것은 워낙 리익을 챙기기 위한 장사군의 수단인데 어느새 많은 사람들의 처세술이 되였다.   약게 살면 당하지 않을가? 험한 세상에서 살면서 양의 탈을 쓴 늑대에게 당하지 않으려면 남에게 해가 되지 않을 정도의 거짓말은 해야 되고 항상 빈틈없는 방어태세를 갖추어야 하며 위법이 되지 않을 정도의 반격도 가해야 한다. 거짓말이든 방어든 반격이든 그 척도를 가늠하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   지혜가 없으면 큰 랑패를 보게 된다. 어느때 양의 탈을 쓴 늑대가 불쑥 나타나 해칠지도 모르는 험한 세상에서 진가를 식별하는 지혜가 없으면 자신을 지키기 불가능하다. 그렇기때문에 애니메이션 《희양양과 회태랑(喜羊羊与灰太狼)》에서 늑대부부 회태랑과 홍태랑을 골탕먹이는 어린양 희양양의 총명과 요괴를 식별해낼수 있는 손오공의 안목이 필요하다. 항상 지혜의 손수건으로 두눈을 예리하게 닦아서 늑대의 탈을 벗길수 있는 혜안이 되도록 해야 한다. 양의 탈을 쓴 늑대가 활개치고 다니는 이 험한 세상을 이겨나가려면 힘을 길러야 한다. 힘은 완력이 아니라 지혜에서 온다. 하기에 힘을 기르려면 독서를 많이 하면서 세상을 사는 지혜를 터득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사람은 악해야 한다. 착하게 살면 손해를 본다. 착하게 사는건 바보짓이다”고 말한다. 하지만 고금중외를 막론하고 아무리 험한 세상일지라도 착하게 살아온 사람들이 있었고 지금도 있으며 앞으로도 있을것이라는것은 분명하다.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착하게 사는 이들이 존재하는 한 험한 세상에도 얼음이 녹고 꽃이 피는 봄이 올것이다.   (2015년 1월 1일 아침.)     
244    한밤의 늑대들 댓글:  조회:3832  추천:1  2015-01-01
한밤의 늑대들     김희수       한밤의 늑대들은 어두컴컴한 골목에서 어슬렁어슬렁 걸어다니다가도 먹이를 찾지 못하면 시퍼런 대낮에도 네거리에 뛰쳐나와 사냥물을 노린다. 어느 봄날의 오후 1시에 오학범, 허기만, 백현식 이 세마리의 늑대가 자그마한 도시의 번화한 거리에 나타났다. 이 늑대들은 지나가는 택시들을 노려보다가 녀택시운전기사가 모는 택시 한대를 불러세웠다. 차문을 빠금히 열고 얼굴을 내민 예쁘장한 녀택시운전기사를 본 늑대들은 “OK!”하면서 차에 올랐다. 학범이가 운전수옆자리에 엉덩이를 들이밀고 기만이와 현식이가 뒤좌석에 몸을 묻었다. “어디 가세요?” “화룡쪽으로 몰아주오.” 학범이는 담배를 꼬나물며 옆좌석을 곁눈질했다. 핸들을 잡은 택시아가씨는 표정 하나 흐트러지지 않고 앞만 응시하고있었다. 어느덧 다리를 건너 시내를 벗어난 택시는 고속으로 달렸다. 학범이의 탐욕스런 눈길은 택시아가씨의 봉긋한 젖가슴에서 떠날줄을 몰랐다. 택시에 앉는 순간부터 택시아가씨의 가슴을 만지만지고 미칠지경인것을 억지로 참으면서 학범이는 날씨며 택시수입 따위의 얘기들을 지껄여댔다. 하지만 택시아가씨는 짧게 한마디씩 응대할뿐 운전에만 정신을 집중하는듯 했다. 택시가 모아산부근에 다달았을 때 음탕한 눈길로 택시아가씨의 뒤모습만 노리고있던 두 마리의 늑대가 슬금슬금 택시뒤를 살피다가 갑자기 소리쳤다. “차 좀 세워주오. 젠장, 맥주를 너무 많이 마셨더니 참을수 있어야지.” “빨리 좀…바지에 막 싸겠소.” 택시가 길옆에 멈춰서자 기만이와 현식이는 재빨리 차에서 내리면서 앞뒤를 살펴보았다. 너덧대의 차량들이 지나오고 지나가자 그들은 바지춤을 까는체하면서 차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한참후 오가는 차량이 잠시 끊어지자 그들은 학범에게 눈짓했다. 학범이가 머리를 끄덕이자 그들은 번개같이 달려와 운전석의 차문을 열고 택시아가씨를 끄집어냈다. 갑자기 벌어진 사태에 택시아가씨는 어쩔바를 몰라 바들바들 떨다가 고함쳤다. “사람…살려요!” 당황해난 세마리의 늑대는 재빨리 손으로 그녀의 입을 틀어막고 산속으로 끌고갔다. 인적이 없는 깊은 숲속으로 들어간 세마리의 늑대는 평퍼짐한 곳에 “먹이”를 내려놓았다. 기만이와 현식이가 자기의 차례를 기다리며 망을 보고 우두머리인 학범이가 먼저 택시아가씨한테 덮쳐들었다. “제발…있는 돈을 다 드릴테니 살려주세요!” 택시아가씨는 애원하면서 돈지갑을 내밀었다. 학범이는 그 돈지갑을 넙적 받아 호주머니에 쑤셔넣고 계속 달려들었다. “이러지 마세요. 돈을 드렸는데 절 놓아주세요.” “으흐흐. 난 돈도 가지고 너도 가질테야. 시키는대로 옷을 벗으면 살려준다. 빨리 홀딱 벗어!” 겁에 질린 택시아가씨가 떨리는 손으로 옷을 벗자 학범이는 참을수 없다는듯 굶주린 늑대처럼 그녀를 덮쳤다. 다음은 기만이와 현식이가 번갈아 허리띠를 풀었다… 달포후 자정이 넘은 밤중에 세미리의 늑대는 또 어두컴컴한 골목에서 어슬렁거리며 사냥물을 노리고있었다. 그러던중 현식이가 갑자기 배가 아파서 뒤간에 갔다가 돌아오니 초조하게 기다리고있던 기만이가 재촉하는것이였다. “빨리 가자. 또 하나 잡았다. 학범이가 로획물을 료리하러 세집으로 끌고갔다.” “어때, 섹시하던?” “말도 말라. 나긋나긋한게 맛이 기막힐거야!” 한달음에 세집으로 달려간 그들은 문밖에서 망을 보며 차례를 기다렸다. 집안에서 학범이가 처녀를 을러메는 소리가 들려왔다. “빨리 옷을 벗어!” “제발…이러지 마세요. 전 다음달에 곧 결혼하게 돼요.” “으흐흐. 거 참 좋구나. 오늘 내가 먼저 신랑이 되여줄 테니 어서 옷을 벗어!” “제발 절 놓아주세요!” 처녀의 애원소리에 현식이는 이상하게도 여느때와 달리 몸이 오싹해났다. 하지만 얼마후 터져나오는 처녀의 찢어지는 비명소리에 현식이는 온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이윽하여 학범이가 만족스런 미소를 지으면서 나오자 언녕 허리띠를 풀어놓고 기다리고있던 현식이는 “오늘은 내가 먼저”하고는 참을수 없다는듯 막 들어가려는 기만이를 물리치고 안으로 달려들어갔다. 그러던 현식이가 “앗!”하고 놀란소리를 지르며 정신나간 사람처럼 허둥지둥 되돌아나왔다. “너 웬일이냐?” 학범이와 기만이가 의아해서 따져묻자 현식이는 울상이 되여 말했다. “인젠 끝장이야. 저앤 내 사촌누이동생이야!” “뭐라구?” 학범이와 기만이도 여간 놀란게 아니였다. “저애가 널 고발하면 우린 모두 들통날게 아니야. 아예 저앨 죽여버리자!” 학범이가 칼을 뽑아드는것을 보고 현식이는 급히 앞을 막아서며 “그건 안돼”하고 소리쳤다. “제길, 그럼 네가 책임지고 그앨 구슬려!” 학범이와 기만이는 돌아가고 현식이가 혼자 남아서 사촌녀동생을 얼리고 닥치고 하며 구슬렸으나 그녀는 울기만 하다가 달려나가더니 끝내 파출소를 찾아가 현식이를 고발했다. 이튿날 현식이와 기만이는 붙잡혀 쇠고랑을 찼고 학범이는 어떻게 낌새를 챘는지 어디론가 도망쳐버렸다. 이 사건을 취재한 모 신문사의 최수암기자는 이 사건을 신문에 보도하면서 아래와 같은 말로 글을 마무리지었다. “한밤의 늑대들은 녀성들의 공포심리를 리용하여 손쉽게 녀성들의 정조를 빼앗았다. 범인들은 녀성들 스스로 옷을 벗게 만들어놓고 강간했는데 이는 우리의 녀성들은 자아보호의식과 저항의식이 너무나 약하다는것을 말해준다. 물론 녀성들은 상대적으로 남성들보다 힘이 약하지만 ‘녀자호신술’을 리용하면 그 어떤 남자든지 물리칠수 있다. 필자가 여기서 언급한 ‘녀자호신술’은 무예를 말하는것이 아니다. 무예를 익혀 늑대들을 대적하는것은 소수의 녀성들만 할수 있는 일이지만 이 ‘녀자호신술’은 녀성들이 누구나 다 할수 있는 방법이다. 의학적으로 말하면 폭력을 사용하기전에는 강간은 불가능하다. 녀자가 결사적으로 저항하고 무릎을 오무리면 방어벽이 되는데 철벽같이 견고하여 어떤 남자도 이 보루를 돌파할수 없다. 녀자의 호신술이란 바로 이런것인데 많은 녀성들은 늑대가 협박하면 지레 겁을 먹고 옷부터 벗는다.” 그런데 최수암기자의 이 글을 세번이나 읽은 라신애양한테 뜻밖의 재앙이 떨어졌다. 어느날 밤 늦은 귀가를 하던 라신애양은 으슥한 골목에서 한마리의 늑대를 만났는데 이 늑대가 바로 그물에서 빠져나갔던 오학범이였다. 학범이는 다짜고짜로 신애양을 끌고 공사중지중인 건물로 들어가려고 했으나 신애양의 완강한 저항을 받았다. 신애양이 소리를 지르며 결사적으로 반항하자 학범이는 손수건으로 그녀의 입을 틀어막고 강박적으로 그녀를 끌고 건물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거기서도 신애양은 완강하게 저항하며 옷을 벗으려고 하지 않았다. 학범이가 완력으로 옷을 벗기면서 덮쳐들자 신애양은 “녀자호신술”로 끝까지 저항하며 최후의 보루를 지켜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목적을 달성할수 없게 된 학범이는 칼을 빼들고 을러멨다. “고분고분 말을 듣지 않으면 죽여버릴테다!” 하지만 신애양은 굴함없이 늑대와 싸웠다. 신애양을 굴복시킬수 없게 된 학범이는 마침내 늑대의 본성을 드러내 칼로 신애양의 복부를 사정없이 들이찔렀다… 사흘도 안되여 오학범은 쇠고랑을 찼다. “왜서 라신애양을 죽였는가”라는 경찰들의 질문에 “그녀가 끝까지 반항했기때문에 죽였습니다”라는 대답이 범인의 입에서 나왔다. 그말을 전해들은 신애양의 모친 차씨가 신문사로 달려와 최수암기자를 찾았다. “절 찾았습니까?” 차씨는 자기앞에 나타난 최수암기자를 보고 다시 한번 따져물었다. “자네가 최수암기자유?” “예, 제가 최수암기자인데 무슨 일입니까?” 그러자 차씨는 다짜고짜 최수암기자의 멱살을 틀어쥐고 “내 딸을 물어내! 내 딸을 물어내!”하며 울며불며 야단쳤다. “아니, 왜 이러십니까?” 최수암기자가 영문을 몰라 따져묻자 차씨는 “네놈이 신문에 그 무슨 ‘녀자호신술’인지 나발인지 하는 글을 써냈기에 내 딸이 잘못됐다”면서 대성통곡했다. 라신애양은 그 당시 최수암기자의 글을 어머니한테 보이면서 “엄마, 만약 내 앞에 늑대가 나타나면 난 녀자호신술로 대적할테야”라고 호기스레 말했다는것이였다. 최수암기자는 탄식하면서 또 다음과 같은 글을 발표했다. “늑대들의 앞에서 녀자호신술로 자기몸을 보호하는것은 매우 필요하다. 하지만 범인이 폭력을 사용하고 생명이 위험하다고 생각될 때엔 저항을 포기하는것이 명지한 처사이다. 이건 절대 비겁한 일이 아니다. 녀성에게 있어서 정조는 매우 소중한것이지만 생명은 정조보다 더 귀중하다. 이런 정황에서 정조를 지켜내지 못했다고 해서 비난할 사람은 없다. 늑대들에게 당한 일부 녀성들은 과중한 심리부담을 갖고 자신을 괴롭히고있는데 강간은 녀성의 잘못이 아니다. 때문에 몸이 더럽혀졌다는 생각은 버리고 떳떳하게 머리를 들고 다녀야 한다. 육체상 정신상에서 녀성들의 건강을 해치는 늑대들은 마땅히 호되게 족쳐야 한다. 하지만 족치는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아무리 족쳐도 새로운 늑대들이 끝없이 나올테니깐. 하기에 늑대들의 번식을 방지하자면 청소년들에게 법제교양과 함께 성교육을 착실하게 하여 올바르고 건전한 성도덕관을 심어주어 그들로 하여금 건강한 심리로 건실하게 성장하도록 이끌어주어야 한다.” (1998년 5월)
243    자식을 버린 에미도 밥을 먹고 사는가 댓글:  조회:6640  추천:6  2014-12-29
자식을 버린 에미도 밥을 먹고 사는가   김희수   신랑망(新浪网) 같은 대형종합사이트에 들어가 사회뉴스를 클릭해보면 자신이 낳은 갓난아기를 화장실에 버리거나 인터넷을 통해 팔아먹는 비정한 엄마에 관한 기사를 자주 보게 된다. 갓난아기를 버리는 엄마는 대부분 무지몽매한 미성년이고 어린 자식을 팔아먹는 엄마는 모두 사람이기를 포기한 악녀들이다.   우리 조선족사회에도 엄마가 자식을 버리는 현상들이 많이 존재하고있다. 개혁개방전에는 조선족사회에 자식을 버리는 엄마들이 매우 적었다. 그러다가 개혁개방후, 특히 한국바람이 불면서 자식을 버리고 달아난 엄마들이 놀라울 정도로 많아졌다.   범도 제 새끼를 잡아먹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데 연변TV의 “사랑으로 가는 길” 프로에는 대부분 자식을 버리고 달아난 엄마의 이야기가 나온다. 조선족 녀성중에는 팔자를 고쳐보겠다고 자식을 버리고 달아난 녀성들이 적지 않다는 얘기이다. 공중화장실에 간다고 속여놓고 몰래 자식을 버리고 달아나 7~8년동안 소식 한번 없는 녀성, 계부한테 자식을 던져버리고 한국으로 달아난후 전화 한통 없는 녀성…   가정을 이루고 살다가 이 남자와 못살겠거나 살기 싫으면 남편을 버리고 달아나는건 그럴수 있는 일이라고 리해할수 있다. 하지만 자식을 버리고 달아나는건 사람으로 해서는 안되는 일이다. 짐승도 제 새끼는 보호한다는데 사람이 제 새끼를 버려서야 되겠는가? 더구나 위대하다고 하는 모성애를 가진 엄마가 제 자식을 버린다면 그건 사람도 아니고 엄마도 아니다. 짐승보다 못하다는 말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다.   물론 리유도 있을것이다. “에미인들 자기가 낳은 자식을 버리고싶어 버렸겠냐?” “오죽하면 자식을 버렸겠냐?” 눈물을 머금고 버렸을것이라고 변명도 하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자기합리화를 위한것이다. 이는 “그럴 만한 딱한 사정이 있었겠지”하고 동정하고 리해할수 있는 일이 아니다. 아무리 딱한 사정이라도 자식을 버려야 하는 리유가 될수 없다. 낳았으면 책임져야 한다. 버림받은 아이가 “책임질것도 아니면서 왜 나를 낳았나요?”하고 질문하면 무슨 말을 할것인가?.   남편과 더는 살수 없어 자식을 버리고 달아난 경우라고 해도 법적으로 리혼수속을 밟고 아이에 대한 양육문제를 명확하게 확정지어야 한다. 그리고 다른 가정을 꾸려 아이와 떨어져있을수밖에 없는 경우라면 전화나 인터넷을 통해 자주 통화를 하며 떨어져 있어도 엄마는 아이를 버리지 않았다는 기분이 들도록 해야 한다. 버린 자식을 없는 자식이라고 생각하며 련락을 끊고 산다면 그런 녀인은 엄마도 아니고 인간도 아니라고 말할수밖에 없다.     이런 엄마를 “배 아파 낳은 자식을 없는 자식으로 취급하며 사는 에미마음이 편했겠냐? 속으로 피눈물을 흘리며 고통속에 살았을것이다.”고 리해해줘야 하는가? 누가 자식을 버리고 살라고 핍박한것도 아니 잖은가? 스스로 자식을 버리고 달아나는 길을 선택한것인데 정말로 방법이 없어 그랬던것처럼 자기합리화를 하려고 한다. 물론 생활의 핍박도 있었을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생활의 핍박이 있었다고 해도 조선족사회에서 자식을 버린 엄마들의 경우를 종합해보면 자식을 버리지 않으면 안될만큼의 정도는 아니였다고 할수 있다.   실제로 나는 주변에서 엄마에게 버림을 받은 자식들을 여러명을 보았다. 10년전쯤인가 사무실에 동료의 시조카딸이 놀러온적이 있다. 여나문살 되는 녀자아인데 역시 엄마에게 버림받은 아이였다. 엄마가 한국에 갔다는것만 알고 10년동안 소식조차 모르고 살아온 그 아이는 나의 동료를 보고 자기의 엄마가 되여달라고 여러번 졸랐단다. 얼마나 엄마의 사랑이 그리웠으면 삼촌댁을 엄마(당시 동료는 아이가 없었음)로 되여달라고 졸랐겠는가?   몇년전에 시골에 갔다가 엄마에게 버림받고 할머니와 함께 사는 아이를 본적이 있다. 측은한 눈길로 손자를 바라보면서 “쯧쯧 저 어린걸 버리고 가놓고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갈까?”하고 며느리를 욕하던 할머니의 목소리가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 버림받은 아이들은 엄마에 대한 그리움에 울다가 점차 엄마를 미워하고 원망하게 된다. 연변TV의 “사랑으로 가는 길” 프로에 나온 열살짜리 아이가 하던 말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에미닭도 병아리에게 먹이를 물어다주는데 날 버리고가서 소식조차 없는 엄마는 닭보다도 못하다!”   《중화인민공화국혼인법》 제21조에는 “부모는 자녀를 부양하고 교육할 의무가 있다”고 규정했다. 자식을 버리는것은 도덕적으로나 륜리적으로 용서빋지 못할 아주 못된 짓일뿐만아니라 법적으로도 위배되는 행위로 응당 단죄받아야 한다.   이 세상의 녀인은 모두 엄마로 될수 있다. 하지만 무자격 엄마, 자격미달 엄마로 되여서는 안된다. 물론 엄마자격증이 따로 없지만 엄마로 되기전에 “내가 정말 아이를 책임지고 키울수 있는지”에 해대 진지하게 고민해보아야 한다. 자식을 책임지고 키울 자신이 없다면 잠시 아이를 임신하지 말아야 한다. 정말로 가슴에 물어 엄마로 될 자격이 있다고 확신 될 때 아이를 가지는것이 옳다고 생각된다.   
242    천하영웅들을 무릎 꿇게 한 절세미녀 댓글:  조회:7924  추천:1  2014-12-28
천하영웅들을 무릎 꿇게 한 절세미녀   (번역)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숭정황제는 전귀비를 몹시 총애했다. 이 때문에 황후는 전귀비를 몹시 질투했다. 그날밤도 전귀비한테로 가버린 황제를 생각하며 황후는 질투와 고민에 모대기고있었다. 그때 딸의 거처로 황후의 부친 가정백이 찾아왔다. 요즘 딸이 고민하고있는 영문을 알고있는 가정백이 한가지 계책을 드렸다. “황후마마, 차라리 예쁜 기생을 하나 사서 황제페하께 드리면 황제페하는 그 기생에게 빠져 더는 전귀비를 총애하지 않을겁니다. 그리고 그녀는 한낱 기생출신이니까 황제페하께서 아무리 총애한다하더라도 황후마마께는 아무런 위험이 없을 줄로 아뢰옵니다.” “그 계책이 괜찮기는 하나 어디 황제페하를 홀딱 반하게 할만한 기생이 있겠어요?” “황후마마, 소신이 전귀비보다 백배는 더 미모가 출중한 기생 하나를 알고있사옵니다.” 가정백은 지난밤, 자기의 혼을 송두리째 뽑아놓던 그 아릿다운 기생을 생각하니 지금도 온몸이 나른해나며 황홀경에 빠져있는듯 했다. 황후는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방도가 없는지라 그 기생을 데려오로록 부친에게 명령했다. 가정백은 이튿날 곧 기녀원에 가서 그 예쁜 기생을 사서 숭정황제께 올렸다. 그 기생을 본 황제는 그 자리에서 혼이 빠져 달아나는듯 했다. 그 기생의 눈섭과 눈동자는 그린듯이 수려하고 용모는 말로 형용할수 없이 아름다왔다. 두 눈동자는 호수에 물결치듯 찰랑거리고 입술을 살짝 벌리고 웃는데 그 아름다운 자태는 양귀비도 부끄러워 얼굴을 가리울 지경이였다. 이 경국지색의 미녀가 바로 중국고대력사에서 4대 명기중의 하나로 불리는 진원원(陈圆圆)이였다. 진원원의 본명은 형원(邢沅)이고 자는 원원(圆圆), 원방(畹芳)이다. 어릴 때부터 양모 진씨의 슬하에서 자랐기에 성을 진씨로 고쳤다. 진원원은 명말청초인 1623년 4월 3일에 강소의 무진(지금의 상주)에서 출생해 1695년 5월 16일에 사망되였다.   “아아, 그야말로 천하제일의 미녀로구나!” 진원원의 화용월태에 첫눈에 반한 황제는 연신 감탄하면서 가정백이 물러나기 바쁘게 진원원을 끌어안고 침대에 올랐다. 한편 황후는 황제가 더는 전귀비의 거처로 찾아가지 않으니 몹시 기뻐서 진원원을 불러들였다. 진원원의 용모가 선녀같이 아름다운것을 보고 황후는 깜짝 놀랐다. 진원원의 옥같은 손을 잡자 황후는 온몸이 나른해지고 취해서 정신이 몽롱해졌다. (같은 녀자인 나도 이렇게 취하는데 하물며 남자들이야 더 말해 뭣하랴.) 황후는 이런 생각을 하며 질투하는 마음도 없지 않았다. 진원원을 맞아드린 숭정황제는 제정신이 아니였다. 진원원한테 넋을 송두리째 빼앗긴 황제는 진원원의 곁을 한시도 떠나려고 하지 않았다. 조정으로 나가 정사를 돌보지 않고 침실에서 진원원을 안고 즐기며 그녀에게 연지를 발라주고 눈섭을 그려주기도 하고 그녀의 발을 씻어주고 혀바닥으로 그녀의 오이씨같은 발을 핥아주기도 했다. 그리고 그녀를 곧 귀비로 봉했다. “짐의 보배 진귀비여! 짐은 앞으로 그대를 황후로 봉하겠소. 이제부터는 황후나 다른 귀비들 그리고 비빈이나 귀인들 가운데 한사람도 눈에 차는 녀인이 없소. 그대를 봉황이라 한다면 이 궁안의 아니, 이 세상의 다른 녀자들은 모두 오리나 거위와 다름없소. 짐은 봉황같은 그대와 더불어 천년만년 살겠소!” 하지만 숭정황제의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천하의 영웅 리자성이 맹렬한 기세로 쳐들어온다는 급보가 자꾸만 날아들었다. 진원원을 아쉽게 품에서 놓아주고 조정으로 정사를 돌보러 나갔다가 정오무렵에 들어온 황제는 안색이 창백했고 눈살을 찌푸리고있었다. 황제는 갑자기 진원원에게 신경질을 부렸다. “너때문에 나라일을 망치게 되였어. 네가 궁안에 머무는 며칠동안 역적 리자성이 3채의 성을 함락했어. 넌 나라를 망치는 요녀야! 짐은 녀색에 빠진 못난이가 될수 없어. 즉시 너를 궁에서 내보내고 정치를 새롭게 해야겠어. 아아, 그 리씨 도적놈은 정말 무서운 놈이야!” 진원원은 생각했다. (도데체 리자성은 어떻게 생긴 분일까? 황제마저 무서워 벌벌 떨다니. 그분은 꼭 영웅호걸일거야.) 진워원은 황제마저 벌벌 떨게 한 리자성을 영웅이라고 속으로 흠모했다. 진원원은 황궁에서 나온 후 주국장 저택으로 갔다. 어느날 주국장은 잔치를 크게 차려놓고 손님을 청했다. 잔치에 참석한 손님들은 꾀꼴새같은 목소리로 노래하고 나비처럼 춤을 추는 진원원을 보고 모두 넋을 잃었다. 그중에서도 정욕으로 이글이글 타는듯한 오삼계의 눈동자가 제일 로골적이였다. 오삼계는 그 즉석에서 주국장에게 진원원을 달라고 요구했다. 주국장은 진원원을 내놓기 싫었으나 오삼계의 권세가 무서워 찍소리 못하고 진원원을 내주었다. 진원원을 얻은 오삼계는 천하를 통째로 얻은듯 너무도 기뻐서 어쩔줄을 몰랐다. 진원원에게 혼을 송두리째 빼앗긴 오삼계는 밤낮 진원원을 끌어안고 황홀경에 빠져버리는 재미에 제정신이 아니였다. 그러다가 숭정황제의 명령을 받고 만주의 군사들이 쳐들어오는것을 막으러 산해관으로 갔다. 떠나면서도 오삼계는 진원원과 떨어지기가 아쉬워 출발시간을 지체하기까지 했다. 1644년 3월 19일, 리자성이 북경을 점령했고 숭정황제는 매산우에서 목을 매달아 죽었다. 리자성의 부하가 오삼계의 집을 뒤지다가 천하미녀 진원원을 발견하고 곧 붙잡아서 리자성에게 바쳤다. 천하제일미녀를 본 리자성은 미칠지경으로 기뻤다. 그는 매일밤 진원원과 잠자리를 같이 하며 즐거운 신음을 뽑아냈다. 진원원은 이처럼 정력적인 남자를 한번도 본적이 없었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흠모하던 영웅에게 기꺼이 몸을 내맡겼다. 한편 오삼계는 리자성이 북경을 점령하고 자기의 미녀를 가로채갔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분하여 만주사람들과 련맹하여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왔다. 리자성은 싸움에서 패하였지만 진원원을 끌어안고 호탕하게 웃었다. “나의 보배 진원원이여! 짐은 한평생 세가지 자랑할만한 큰일을 했어. 첫째는 명나라 황제를 핍박하여 죽게 만든것이고 둘째는 짐이 대순국의 황제가 된것이고 셋째는 천하제일미녀 진원원을 데리고 잔것이야. 이 세가지 일중에서 짐이 가장 의기양양하게 여기는것은 세번째 일이야. 진원원이여! 짐이 너를 안고 자봤으니 이제 죽어도 원이 없노라!” 리자성은 오삼계에게 패하여 도망치다가 눈물을 뿌리며 진원원과 혜여졌다. 오삼계의 부하는 진원원을 발견하자마자 그녀를 데리고 가서 오삼계에게 바쳤다. 진원원을 다시 안은 오삼계는 너무도 기뻐서 미칠지경이였다. 오삼계는 진원원의 속살을 파고들며 말했다. “나의 귀염둥이 진원원이여! 다른 사람들이 나를 매국노라고 욕하지만 너를 다시 얻었으니 그와 같은 악명을 듣는것도 보람있는 일이야!” 진원원은 오삼계의 정에 감격하여 그가 나라와 민족을 팔아먹은 역적이라는것도 잊고 기꺼이 그에게 몸을 내맡겼다. 그후 오삼계는 청나라의 평서왕으로 봉해졌다. 그때 천하제일의 무림고수라고 불리우는 호일지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 당시 이름난 영웅호걸이였던 그는 우연한 기회에 사천성 성도에서 진원원을 보게 되였다. 아름다운 녀인은 소매자락속에 있는 옥과 같은 손으로 입술을 가리고 방긋 웃고있는데 온갖 교태가 뚝뚝 떨어졌다. 호일지는 온몸이 나른해지고 취해서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 모를 지경이였다. 진원원은 천하의 모든 남자들이 자기를 보기만 하면 하나같이 넋을 잃는 광경을 수없이 많이 보아서 호일지가 자기를 보자마자 얼이 빠지는것을 보고도 개의치 않았다. 하지만 호일지는 그후부터 혼백을 빼앗겨 정신을 차릴수도 없게 되였다. 몰래 진원원일행을 따라 운남에까지 간 그는 곧 신분을 감추고 평서왕부에서 원예사노릇을 하며 진원원을 위해 꽃을 심고 잡초를 뽑아주곤 했다. 그는 진원원의 미색에 빠져 기꺼이 그녀의 하인노릇을 하며 그녀를 위해 채소를 가꾸고 땅을 쓸며 나무를 하고 물을 길었다. 그는 매일매일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을 바라볼수 있는것만으로도 무상의 쾌락을 느꼈다. 그는 이렇게 줄곧 23년동안 진원원의 하인노릇을 하며 아침저녁으로 그녀를 보기만 하면 만족할수 있었다. 이 23년동안 진원원은 그에게 쉰다섯마디를 건넸을 뿐인데 그는 진원원이 자기에게 한 말을 한마디도 빠짐없이 모두 기억했다. 어느날 진원원은 그를 보고 꽃을 꺾어오라고 했다. 그는 너무도 행복했다. 진원원을 위해 꽃을 꺾는 일이 그의 일생에서 제일 행복한 일이였다. 그는 가슴을 들먹거리며 꽃중에서 제일 탐스럽고 제일 예쁜 꽃을 꺾어왔다. 그가 넘겨주는 꽃을 봤던 진원원은 무심결에 그의 손목을 잡았다가 놓았다. 그 순간 호일지는 너무도 감격스럽고 행복하여 넋을 잃을 지경이였다. 그후 호일지는 천하제일미녀의 섬섬옥수가 닿았던 자리에 코를 대고 미녀의 향기를 맡으며 련 사흘동안 흥분되여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다가 “아아, 천하제일미녀 진원원이여!”하고 크게 부르짖고는 곧 숨을 거두었다.    
241    전기적 홍색녀간첩 황모란 댓글:  조회:6699  추천:1  2014-12-21
전기적 홍색녀간첩 황모란   (번역)   1907년에 호남성 류양시의 명문가문에서 출생한 황모란(黄慕兰)은 본명이 황창정이며 황숙의, 황정혜라는 이름도 가지고있었다. 그녀는 1926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황모란의 첫번째 결혼은 불행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딸을 자신의 친구아들과 강제로 결혼시켰다. 그런데 이 첫번째 남편은 술주정뱅이에 도박군이며 바람둥이였다. 황모란은 결혼한지 1년도 안되여 탈가하여 도망쳤다. 당시 그녀는 18세였다. 그후 그녀는 중공중앙기관보인 《민국일보》의 주필, 중공중앙군사위원회 기요처 주임비서, 경위퇀 정치지도원직을 맡았던 완희엄을 알게 되여 1927년 “3.8절”에 결혼했다. 1927년에 국민당과 공산당이 분렬된후 황모란은 남편과 함께 지하사업을 하게 되였다. 이때로부터 황모란의 잠복생애가 시작되였다. 황모란은 처음에 강서성위 비서와 기밀교통원사업을 했다. 그녀는 임신한 몸으로 한밤중에 성위서기 진담추한테서 성경에 미음으로 비밀문서를 쓰는 방법, 려관에 나가 련락암호를 주고받는 방법, 부두에서 교통선박을 기다리는 방법 등을 배웠다. 1928년에 아들 완창걸이 태여난지 3일만에 그녀의 남편 완희엄은 강서의 서남으로 파견되여 토지혁명과 무장투쟁을 지도하게 되였다. 그녀는 남편을 보내면서 다시 만날 날이 빨리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런데 적에게 체포된 완희엄은 4개월후 영용하게 희생되였다. 1928년 12월에 황모란은 지하당조직의 파견을 받고  비밀리에 상해에 들어가 중앙위원회 기요비서직을 담임하면서 중국공산당중앙특별행동과의 성원으로 되였다. 그녀는 또 중앙의 기요교통원을 겸임하면서 늘 전국각지에서 중앙과 련계하러 상해로 찾아온 지하교통원들을 맞아들이군 했다. 황모란은 1929년에 주은래의 비준을 맡고 상해에서 중앙위원 하창과 결혼했다. 하창은 1931년에 비밀리에 소주에 들어가 유격전쟁을 하다가 1935년에 29살의 나이로 희생되였다. 선후로 두 남편을 잃은 황모란은 중국인민혁명 호제총회의 구조부장직을 맡았다. 그녀는 중공지하사업 원로 반한년과 단선련계를 가지고 체로된 동지들을 구조하는 임무를 담임했다. 그녀가 맡은 첫번째 임무는 체포된 공회련합회 지도자 관향응을 구조하는 일이였다. 그녀는 상해조계지의 진보적인 변호사 진지고를 통하여 성공적으로 관향응을 구조했다. 그녀는 상해 사교계에 진입하여 많은 정보를 얻었다. 1930년 6월의 어느날 오후에 황모란은 커피점에서 진지고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우연히 프랑스조계지의 순포방에서 번역사업을 하고있는 조병생을 만났다. 조병생은 진지고의 동창생이였다. 조병생은 진지고를 보자 반갑게 웃으면서 다가왔다. 그리하여 그들은 한상에서 커피를 마시게 되였는데 진지고가 조병생을 보고 물었다. “요즘은 또 어떤 인물을 잡아들였나?” 그러자 조병생은 신이 나서 이야기했다. “며칠전에 현상금 10만원을 내건 공산당두목을 잡아들였네. 호북사람이고 나이는 60세정도인데 주홍코에 금이발이고 손가락이 아홉개라네.” 황모란은 긴장하게 들으면서 머리속으로 조병생이 묘사한 특점에 부합되는 인물이 누굴가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그 인물이 정치국주석 향충발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향충발이 당을 배반하는 경우에는 중앙의 중요인물들이 체포될 위험이 있었다. 황모란은 즉시 이 정보를 반한년에게 알려주었다. 반한년은 급히 주은래한테 이 정황을 반영하였다. 주은래는  신속히 리부춘, 채창 등 사람들을 전이시켰다. 과연 그날밤에 향충발은 순포방의 경찰들을 데리고와서 직접 열쇠를 열고 주은래 등이 거처했던 방으로 뛰여들었다. 황모란이 이번 정보를 알아내지 못했더라면 상해의 중공 중추기구가 순식간에 화를 입었을것이다. 주은래는 그녀를 “당의 백과전서”라고 칭찬했다. 1933년에 진지고가 황모란에게 청혼했다. 당조직은 당시의 복잡한 백색공포환경에서 황모란이 진지고와 결혼하면 사업에 유리하다고 인정했다. 왕모란은 조직의 말을 듣고 진지고의 청혼을 받아들였다. 1935년에 5월에 황모란은 상해의 중화예술사에서 진지고와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다. 1942년 12월 2일에 황모란은 남자아이를 낳았는데 불행하게 요절되였다. 1950년에 진지고는 상해를 떠나 향항으로 갔는데 그후 두 사람은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황모란의 일생은 곡절적이였다. 그녀는 여러번이나 감옥살이를 했다. 그중 두번은 국민당감옥에 갇혔고 한번은 해방후 반한년사건에 련루되여 17년동안이나 진성감옥에서 징역살이를 했다. 1980년에 황모란의 억울한 사건은 해명되였다. 그후 그녀는 상해시정부에서 사업하다가 퇴직했다. 황모란은 1993년부터 지금까지 줄곧 항주에 거주했다. 2011년은 황모란이 105돐을 맞은 해이며 그녀가 중국공산당에 가입한지 85년이 되는 해였다. 최근에 기자가 황모란의 집에 전화를 걸었을 때 그녀의 집 가정보모가 “황로인님께서는 낮잠을 주무시고있습니다. 어떤 기자든지 로인님의 따님을 통해야만 취재를 할수 있습니다”라고 알려주었다. 얼마후 기자와 만난 황모란의 딸 진대중은 이렇게 말했다. “어머님은 년세가 많아서 기자의 취재를 받지 않습니다. 우리 어머니의 일생은 당의 사업에 모든것을 바친 빛나는 일생이였습니다.” 
240    조선족은 조선족 꿈을 댓글:  조회:11565  추천:10  2014-12-14
조선족은 조선족 꿈을   김희수     많은 조선족들이 한국에 나가 힘들게 돈을 버는것은 무엇때문인가? 한마디로 지금보다 더 잘 살아보자는것이 아닐가. 지금보다 더 큰 집을 마련하고 더 좋은 차를 소유하고 더 나은 물질생활을 향수하자는것, 또 자식들을 대학공부시키고 류학보내고 출세시키고 시집장가 보내고 한밑천 잡아보자는것이 아닐가.   물론 한국에 나가지 않고 중국에 남아있는 조선족들도 한국에 나가 있는 조선족들과 똑같은 소원을 가지고있다. 그러니까 지금보다 더 잘 살아보려는것이 조선족꿈이 아닐가? 리론적으로는 국가요, 민족이요, 리상이요 하는 미사려구들이 안받침 되여야 하겠지만 통속적으로 이렇다고 하면 너무 용속한 표현일가?   우리는 중국꿈에 대해 많이 얘기해 왔고 얘기하고있다. 중국꿈은 한마디로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실현하는것이다. 구체적으로 국가부강, 민족진흥, 인민행복을 실현하는것이다. 결국 지금보다 더 잘 살아보자는게다. 그러니까 중국꿈은 조선족꿈과 모순되지 않는다.   중국에는 56개 민족이 있다. 그러니까 56개 민족이 각각 자기 민족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면 56개의 꽃이 활짝 피여나 그것이 곧 중국꿈이 되지 않을가 생각된다. 조선족은 중국꿈에 보조를 맞추어 조선족 꿈을 실현하는것이  목표가 아닐가 싶다.   조선족 꿈은 지금보다 더 잘 사는것이다. 그런데 조선족이 조선족으로 지금보다 더 잘 살려면 조선족 정체성이 지켜지고 건전한 조선족 사회가 유지되여야 한다. 민족정체성이 유지되고 조선족 사회가 건재하려면 연변조선족자치주를 잘 건설해야 한다.   그러니까 조선족 꿈은 다시 말해 연변조선족자치주를 잘 건설하는것이라고 할수 있다. 연변조선족자치주가 없으면 조선족은 자치권리를 향수할수 없게 된다. 우선 우리 글이 소수민족 다섯개 주요문자에서 밀려날것이고 우리 글 출판사, 신문사, 잡지사, 방송 등이 모두 사라지게 될것이다.   산재지구의 조선족들은 혹시 연변조선족자치주는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전체 중국조선족들에게 자치주가 있어야 조선족의 자치권리를 향수할수 있게 되는것이다. 연변조선족자치주가 없으면 중국조선족사회가 무너지고 조선족은 주류민족에 동화되고말것이다.   주류민족에 동화되면 중국조선족도 이름뿐이고 따라서 조선족 꿈도 물거품처럼 사라질것이다. 조선족사회가 없는 조선족 꿈은 있을수 없기때문이다. 조선족 꿈은 지금보다 더 잘 살아보자는것이기는 하지만 반드시 조선족이 자치권리를 보장받을수 있는 조선족자치주가 건재해야 한다. 조선족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우선 연변조선족자치주를 잘 건설해야 한다것, 이것이 핵심이다.   연변조선족자치주를 잘 건설하려면 우선 조선족인구감소부터 막아야 한다. 자치주가 존재하려면 조선족인구가 일정한 비례로 유지되여야 하기때문이다. 앞으로는 필연적으로 자치주인구가 증가되기때문에 조선족인구감소만 막아서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한족 및 다른 민족인구의 증가에 따라 조선족인구도 증가되여야 자치주를 유지할수 있다. 조선족인구의 감소세를 막으려면 우선 출산률을 높여야 한다. 이는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우리 민족의 운명을 위해서는 반드시 해야 되는 일이다. 혼인출산년령도 앞당겨야 한다.   1990년대 이전에는 20대에 결혼하여 30살전에 모두 부모가 되였지만 지금은 20대에 결혼하는 젊은이들은 보기 힘들고 30~40대에 결혼하는 젊은이들이 많은 실정이다. 늦게 결혼한다고 결혼전에 경제적 기반을 이룬 커플들이 많은것도 아니다. 집도 마련하고 자가용차도 사려면 결혼이 늦어질수도 있지만 어차피 부모의 도움으로 결혼할거라면 일찍 결혼하여 산모와 아이의 건강에 다 좋다는 30살전에 출산하는것도 조선족 꿈을 위해 좋은 선택이리고 생각된다.   다음으로 외지의 조선족과 외국으로 나간 조선족을 연변으로 돌아오게 하는 방법이다. 이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지만 “불가능이 없는” 나폴레옹의 사전을 빌려서라도 연변에 조선족인구를 집중시켜야 한다. 중국조선족들이 연길을 중심으로 연변에 모여 살게 해야 한다. 물론 청도, 북경, 상해 등지와 한국의 대림동에 새로운 조선족집거구가 형성되고있고 이는 시대발전의 필연적인 추세라고 하지만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과정에 우리 민족이 분산되고 언어, 문자를 잃어가고있는 현상은 간과해서는 안된다.   조선족들이 연변에 모여 살게 하자는것은 케케묵은 낡은 사고방식이라고 타매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전체 조선족의 미래지향적인 안목으로 높이 서서 보다 멀리 내다본다면 상술한 관점을 수긍하기는 어려운 일이 아닐것이다.   인구문제가 해결되면 다음으로 조선족학교를 잘 꾸려 민족인재를 양성하고 인구자질제고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 또 조선족간부마다 앞장서 조선말로 발언하고 조선글을 사용하고 조선족마다 우리 말과 우리 글을 우선시해야 한다. 이것이 중국에서 조선족이 조선족으로 살아남으려면 반드시 해야 할 일인데 모두가 무관심한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것은 아닐가 고민해본다.      
239    중국문학의 변신과 도전 댓글:  조회:4922  추천:0  2014-12-14
중국문학의 변신과 도전 백지운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HK연구교수     중국 정통 문학사에서는 1976년, 즉 문혁 이후의 문학을 ‘신(新)시기 문학’이라부른다. 그런데 최근 1949년부터 70년대까지를 ‘전(前)삼십년 문학’, 개혁·개방 이후 현재까지를 ‘후(後)삼십년 문학’이라 구분하는 경향이 있다. 지난 30여 년간 중국이 겪은 엄청난 변화를 생각하면 이런 구분은 타당하고도 남음이 있다. 79년 덩샤오핑(鄧小平)이 처음 제기한 ‘소강(小康)사회 건설’의 방향이 새 지도자 시진핑에 의해서도 거듭 확인됐다. 중국은 2020년 ‘전면적 소강사회 건설’을 향해 전진 중이다. 그러나 화려한 외양 안에는 오랜 상처와 세파에 단단하게 굳어진맨살이 있다. 지금부터 살펴볼 ‘후삼십년’ 문학은 바로 그 맨살이다.   질풍노도 시대 한마디로 1980년대는 질풍노도의 시대다. 사회주의 시기에 ‘지식인’은 애매한 존재였다. 시대의 주역은 ‘노농병’이었고 그 ‘동반자’였던 지식인은 좀처럼 체제의 신뢰를 받지 못했다. 50년대 반우파 투쟁을 거쳐 문화혁명기에 이르러 지식인의 존재 기반은 극도로 위태로웠다.   마침내 문혁이 종결되고 개혁·개방 직후 반동으로 몰렸던 지식인들이 하나 둘 복권됐다. 농촌과 변방으로 하방당한 ‘지청(知靑:지식청년)’들도 대거 도시로 돌아왔다. 오랜만에 사회의 중심에 선 지식인들은 잃어버린 실존적 근거를 찾아 길을 나선다.   80년대 문학은 ‘상흔문학(傷痕文學)’과 ‘반사문학(反思文學)’에서 시작된다. 78년 루신화(盧新華)는 문혁 시기에 반동으로 몰린 어머니와 절연한 주인공이 어머니의 죽음 후 돌이킬 수 없는 상처로 괴로워한다는 자전적 소설 『상흔』을 발표했다. 문혁 직후 홍위병 세대의 심경을 잘 보여 주지만 시간적으로 문혁을 충분히 사유하지 못한 치기를 어쩌진 못했다.   뒤이어 나온 반사문학은 보다 성숙했다. 왕멍(王蒙)·장셴량(張賢亮)·다이허우잉(戴厚英)은 극좌노선과 관료주의가 낳은 비극적인 시대상을 깊이 있게 묘사했다.   그중 한국에서도 출간된 다이허우잉의 『사람아, 아, 사람아』는 참회의 시각으로 망각된 휴머니즘의 가치를 불러냈다.   80년대 중반에 ‘심근문학(尋根文學)’이 등장했다. 당시 중국 정부의 공식 입장이 ‘문혁의 전면 부정’임을 감안하면 상흔문학이나 반사문학 식의 문혁 비판은 오히려 체제순응적인 면이 있다. 심근문학 작가 한사오궁은 문혁을 악마화하는 것이야말로 문혁에 대한 진정한 반성을 차단한다고 생각했다. 청년 시절의 하방 경험에 기반한 그의 소설은 홍위병과 지청이 같은 세대라는 당연한 사실을 일깨운다. 그의 세대는 아버지·스승을 반동으로 내몬 가해자이자 황폐한 변경에서 하릴없이 청춘을 허비한 피해자였다. 『귀거래』 『여자, 여자, 여자』의 인물들이 겪는 착란과 환상은 이런 분열적 시대 경험에 기인한다.   ‘심근문학’은 분열과 혼돈으로 충만하다. ‘심근(뿌리 찾기)’이라는 모토 자체가 역설적으로 ‘뿌리’를 상실한 세대의 정신적 공황을 반영하는 것이다. 한때 열렬히 신봉했던 이념과 가치가 하루아침에 ‘전면 부정’되고, 모처럼 활짝 열린 문으로 서구의 새 사상과 사조가 물밀 듯 밀려왔다. 믿었던 현대는 ‘봉건’으로 매도되고 새로운 현대가 시작됐지만 앞이 보이지 않았다. 이런 공황 상태에서 이들은 자신이 청춘을 보낸 농촌과 변방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아청의 『장기왕』 『아이들의 왕』, 장청즈의 『북방의 강』 『심령사』는 이런 혼돈의 시대가 낳은 보석이다.   ‘심근문학’은 형식 면에서도 가히 전위적이었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는 획일적 굴레에서 벗어나 시대가 선사한 자유를 맘껏 들이켰다. 초현실주의, 마술적 리얼리즘, 의식의 흐름, 노장사상…. 이들은 할 수 있는 것들을 모두 실험했다. 80년대 끝 무렵의 ‘선봉문학(先鋒文學)’은 이런 실험문학의 마지막 단계이자 90년대 문학으로 가는 과도기이다. 또한 모옌과 위화, 쑤퉁을 낳은 토양이 됐다.   탈정치화 시대 1990년대 문학의 가장 큰 특징은 지식인의 영락과 문학의 범속화다. 80년대 작가들은 혼돈의 시대에 방향을 제시할 의무가 자기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지식인으로서의 실존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대중도 그들을 따랐다. 그런 면에서 80년대는 문학의 전성기였다. 작가들에겐 대중의 존경과 최소한의 안락한 생활이 보장됐다. 90년대처럼 시장에 아첨할 필요가 없었다.   90년대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중국 문학의 생리를 뒤바꿔 놓았다. 위대한 작품을 결정하는 것은 이제 시장이다. 작가들은 실험을 중단했다. 대중이 이해하지 못하는 작품은 존재가치가 없었다. 80년대 말 ‘선봉문학’으로 출발한 작가들은 ‘신사실주의’와 ‘신역사주의’라는 새 장르에 둥지를 틀었다. 둘은 같은 계열이다. 쉽게 말해 ‘사실’을 새로 쓰고 ‘역사’를 새로 쓴다는 뜻이다. 여기서 사실과 역사는 ‘팩트(facts)’의 다른 말이다. 세상을 움직이는 숭고한 이념을 추구했던 지난 시대와 달리 90년대 작가들은 팩트에 집착했다. 세상에서 진실한 것은 오직 하나, 순간순간 눈에 보이고 만져지는 팩트뿐이다. 중국에서 이때처럼 문학이 왜소해진 때도 없을 것이다. 문학은 더 이상 숭고한 게 아니라 범속한 개인들의 범속한 일상일 뿐이다. ‘문학의 탈정치화’라는 말이 회자된 것도 이때였다. 이들은 체제를 비판하지도 지지하지도 않았다. 가능한 한 멀리 떨어져 걸었다.   중산층의 자잘한 일상을 집요하게 파고든 류전윈의 『닭털 같은 나날』은 신사실주의의 대표작이다. 팡팡의 『풍경』은 무의미한 삶에 유독 번득이는 생존본능을 섬세하게 그렸다. 위화도 초기의 실험을 접고 『산다는 것』 『허삼관 매혈기』 같은 범속한 문체로 돌아왔다. 문혁을 그렸지만 그는 어떤 정치적 발언도 하지 않는다. 평범한 인물의 파란만장한 인생역정 뒤에 문혁은 배경으로 깔려 있을 뿐이다. 쑤퉁은 30년대 ‘민국’ 시기를 주로 다뤘다. 그 역시 시대와 역사에 함구했다. 『쌀』은 한 용속한 인물의 동물적 본능과, 그럼에도 결국 처절하게 실패하는 운명의 냉혹함을 담았다. 왕안이의 『장한가』는 상하이 40년의 현대사를 고요히 흐르는 한 여인의 육체 속에 응축시켰다.   90년대의 또 다른 특징은 ‘순문학’과 통속문학의 경계가 흐려졌다는 것이다. 중국에서 순문학은 소비주의 문학과 구분되는 본격 문학을 뜻한다. 엘리트와 대중의 차이가 현격했던 과거와 달리 90년대는 사회 중간층이 형성되면서 독서가 교양이 아닌 ‘소비’ 대상이 된 시기다. 왕숴의 애정물과 범죄물은 중간층을 대상으로 ‘건달문학’이란 새 장르를 개척했다. 그가 시나리오를 쓴 TV 드라마 ‘갈망’은 90년대 ‘왕숴 붐’을 일으켰다. 한편 주원의 『나는 달러가 좋아』는 좀 다른 건달문학이다. 거침없는 욕설과 외설은 껍데기만 남은 기성세대의 엄숙주의에 보내는 조롱이다.   보면 볼수록 90년대는 반어적이다. 작가가 계몽자가 아닌 대중과 똑같은 범속한 ‘개인’으로 내려옴으로써 중국 문학이 대중적 저변을 넓혔기 때문이다.   춘추전국시대 2000년대는 문학의 전국시대(戰國時代)다. 사방에서 실력자들이 득세했다. 1990년대까지 근근이 명맥을 유지하던 ‘순문학’은 곳곳에서 치고 올라오는 신세대 문학에 속수무책이다. 무엇보다 지난 10년 세상이 너무 빨리 변했다. 기성세대와 근본적으로 다른 ‘바링허우(80後)’ ‘주링허우(90後)’ 세대의 독서 취향을 ‘순문학’이 종잡지 못하는 사이에 새로운 문학들이 세상을 뒤바꾸고 있다.   가장 막강한 도전자는 단연 ‘인터넷문학’이다. 중국의 인터넷소설은 기성 문학판을 뒤흔드는 정도다. 90년대부터 시장경제가 문학의 체질을 바꿨지만 2000년대 문학에 개입하는 대자본의 경영방식은 차원이 다르다. 상하이에 본사를 세운 ‘성다원쉐(盛大文學)’는 우리 식으로 말하면 거대 연예기획사다. 수많은 작가를 ‘전속’으로 거느린 이 주식회사는 철저한 영리성 원칙에 따라 작품을 생산·관리한다. 작가를 아이돌로 띄우고 파생·부가상품으로 이윤을 극대화한다. 여기엔 이중성이 있다. 자본 증식의 욕망에 몸을 맡겨 ‘놀이’로 전락한 문학이 겉모습이라면 양극화, 권귀(權貴) 자본주의, 관료 부패, 대량 실업으로 얼룩진 중국 현실에 대한 비판과 냉소가 내면 깊숙이 산재한다. 이 상반된 양면을 ‘바링허우’의 두 원조 궈징밍과 한한이 대표한다. 23세에 잡지 ‘최소설’을 창간한 궈징밍은 2010년 ‘최만화(最漫畵)’ ‘방과후’ 등 계열사 잡지를 통합하고 수십 명의 아이돌 전속작가를 영입해 문화출판기획사를 차렸다. 반면 한한이 낸 잡지 ‘독창단’은 발간 2호만에 발매 금지됐다. 지금 그는 블로거로 활동 중이다. 중국 사회의 아픈 곳을 찌르는 그의 신랄한 문장은 2010년 타임지가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으로 지목할 정도다.   신흥문학에 압도당하고 있지만 ‘순문학’에도 약진하는 작가들이 있다. 그중 비페이위와 츠쯔젠은 기성문학과 다른 서사풍격으로 장편소설의 최고 권위 마오둔문학상을 받으며 문단의 총아로 떠올랐다. 90년대 문학이 사회에서 고립된 ‘개인’들의 독백이었다면, 이들은 개인과 사회의 새로운 관계방식을 찾고 있다. 비페이위의 『위미』는 문혁에서 개혁·개방으로 이어지는 중국 사회의 상처 난 내면을 시골 소녀의 눈으로 예리하게 훑는다. 근작 『추나』에선 맹인 안마사들의 세계로 들어가 삶과 영혼의 깊이를 탐색했다. 한편 츠쯔젠은 네이멍구자치구와 러시아 국경지대를 잇는 헤이룽장성 일대를 배경으로 에벤키(Ewenki)족 100년의 부족사를 그렸다. 여성·맹인·소수민족 등 기성 서사의 변방에 있던 소수자의 시선으로 중국의 역사와 현실을 섬세하게 복원하는 이들은 ‘순문학’이 아직 건재함을 보여 준다.   마지막으로 작지만 주목할 흐름이 있다. 2004년 출현한 ‘저층(底層)문학’이다. 류지밍을 비롯한 작가들은 개혁·개방과 초고속 성장이 초래한 양극화·부정부패 등에 주목한다. 농민공·해고노동자·촌부·광부 등 중국 사회의 광범위한 저변을 지탱하는 저층의 삶을 서사화하려는 새로운 시도가 위기에 몰린 ‘순문학’의 지원군이 될 것인지 귀추가 주목된다.    
238    노벨문학상 수상자 모디아노 문학의 미래 낙관 댓글:  조회:2762  추천:0  2014-12-14
노벨문학상 수상자 모디아노 문학의 미래 낙관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프랑스 소설가 파트 리크 모디아노(69)가 문학의 미래를 낙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지난 12월 9일(현지시간) 영국 일간 가디언에 따르면 겸손하고 수줍은 성격으로 언론에 모습을 별로 드러내지 않는 것으로 유명한 모디아노는 7일 스톡홀름 스웨덴 한림원에서 행한 노벨문학상 수상 기념 강연에서 미래 세대의 소설가들이 "호메로스 이후 모든 세대들이 해온 것처럼 (문학의) 영속성을 지킬 것"이라면서 이같이 밝혔다.   앞서 스웨덴 한림원은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모디아노를 선정해 발표하면서 "붙잡을 수 없는 인간의 운명을 기억의 예술로 환기시키고 나치 점령 당시의 생활상을 드러냈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모디아노는 파편화된 기억을 통해 작품을 풀어나간다는 점에서 '제2의 마르셀 프루스트'로 불리기도 한다.   모디아노는 이와 관련, "불행히도 나는 프루스트의 재능과 솔직함으로 과거의 일을 기억하는 것이 더 이상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면서 그 이유로 프루스트가 묘사하고 있는 사회는 여전히 연속성을 유지하고 있던 19세기 사회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프루스트의 기억은 정지화면처럼 매우 세세하게 과거가 다시 나타나도록 만들고 있다. 오늘날 나는 건망증과 망각과의 지속적으로 투쟁하면서 기억은 그 자체보다 더 불확실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같은 망각의 규모는 우리가 오직 과거의 단편과 단절된 흔적, 순간적이고 거의 파악할 수 없는 인간의 운명을 포착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이어 "그럼에도 이 같은 큰 망각의 시기에 맞서 희미한 이야기들을 바다 위의 빙산처럼 다시 보이도록 만드는 것이 소설가들의 사명"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 연설에서 또 발자크와 디킨스,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 등 19세기 작가들에 대한 향수도 일부 내비쳤다.   그는 "그때는 시간이 지금보다 느리게 흘렀으며 이 같은 느림은 소설가가 에너지와 주의를 집중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면서 하지만 "그 이후 시간은 점점 빨리 흐르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자신과 같은 시대의 작가들은 "과도기적"인 작가들이라는 생각이 든다면서 인터넷과 휴대전화, 이메일, 트위터 등에 익숙한 미래의 작가들이 "모든 이들이 지속적으로 연결돼 있고 우리 자신만의 영역이었던 친밀함과 비밀이 '소셜네크워크'들로 인해 잠식당하는 이 세상을 문학을 통해 어떻게 표현할지 궁금하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최근 문학 내지 소설의 죽음을 예견하는 일부 젊은 작가들과 달리 자신은 문학의 미래를 계속 낙관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한편 올해 노벨상 시상식은 노벨상 창시자인 알프레드 노벨의 기일인 12월 10일 스톡홀름과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열렸다.      
237    장학량의 첫번째 녀자는 외사촌형수였다 댓글:  조회:11722  추천:6  2014-12-14
장학량의 첫번째 녀자는 외사촌형수였다   (번역)     장학량의 외사촌형수는 장학량(张学良)보다 10년 년상이였으며 성이 림씨였다. 장학량과 외사촌형수의 연분은 빠나나로부터 시작되였다. 그 시기의 봉천(奉天)에서는 빠나나를 본 사람이 몇이 되지 않았다. 조이손이 총독직을 맡았을 때 그의 집식구가 쓰레기통에 한더미의 빠나나껍질을 던졌다. 호기심이 많은 사람들이 개가 뼈다귀를 발견한듯 그 빠나나껍질을 주어다가 벗겨진 껍질을 원 모양대로 회복시켜 보았다. “이것이 원래는 가지처럼 생겼는데 밭에서 달리는걸가? 장작림(张作霖)도 빠나나를 보지 못했다. 장학량의 외사촌형수가 장작림의 집에 빠나나를 선물로 들고왔을 때 장작림은 냄새를 맡아보고 “이게 무슨 물건일가? 먹는걸가?”하고 중얼거렸다. 외사촌형수는 공손하고 례의가 발랐지만 말은 거칠었다. “이건 귀한 물건이예요. 남방사람만이 먹을수 있는거죠. 듣자니 180년만에야 이렇게 크게 잘한다고 하더군요.” 그 말을 들은 장작림은 신기하여 빠나나를 들고 요리조리 살펴보면서 말했다. “제길할, 180년에만에 이렇게 자란다니? 장백산의 산삼처럼 진귀하구나.” 외사촌형수는 별게 아니라는 말투로 말했다. “뭐 진귀한것도 아니예요. 만리밖에서 나다보니 얻기가 쉽지 않을뿐이예요. 이는 우리 그이가 특히 대원수님께 드리는겁니다.” 사실 당시 장작림은 륙군27사의 중장 사장이여서 대원수급이 아니였지만 사람들이 그렇게 불렀는데 장작림 자신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장작림은 손에 쥐였던 빠나나를 도로 놓으면서 아이들에게 갖다주라고 했다. 이렇게 빠나나는 장학량의 손에까지 들어가게 되였다. 장학량은 빠나나에서 향기가 나는것을 보고 누가 가져왔느냐고 물었다. 하인이 외사촌형수가 가져온것이라고 알려주었다. 장학량은 생각났다. 그 외사촌형수는 장학량의 집에 몇번 놀러왔는데 집의 몇몇 엄마(장작림의 첩)들은 그녀를 피하면서 접대하지 않았다. 장작림의 셋째첩 대헌옥(戴宪玉)은 그녀가 구미여우처럼 생겼다고 했고 장작림의 넷째첩 허주양(许澍旸)은 그녀가 날때부터 남자들의 혼을 빼앗아가는 눈을 가지고있어 당승이 그녀를 보아도 파계(破戒)할것이라고 했다. 장학량은 구미여우라는게 무슨 뜻인지는 몰라도 혼을 빼앗아간다는 말은 알만했다. 그는 도사가 구혼대법(勾魂大法)을 연기하는것을 보았는데 그 도사가 악한 매같은 눈길로 누군가를 바라보면 그 사람은 머리속이 웅웅거린다고 했다. 장학량은 처음 외사촌형수를 볼 때 머리속이 웅웅거렸다. 하지만 외사촌형수의 눈은 악한 매같은것이 아니라 수정같이 맑고 아름다왔는데 눈동자가 움직일 때마다 웃는것 같았다. 빠나나는 다섯개밖에 되지 않았다. 큰누나 장관영(张冠英)은 남동생 장학량, 장학명(张学铭), 장학증(张学曾)과 녀동생 장회영(张怀英), 장회동(张怀曈)에게 하나씩 나누어주고 자신은 이가 아파서 먹지 못하겠다고 했다. 장학량은 누나가 일부러 양보한다는것을 알고 자신의 몫을 누나에게 주었다. 장학명은 빠나나의 뿌리부분을 한입 떼여 씹어보고는 도로 뱉아버렸다. 아이들은 이 물건이 생것으로 먹는것이 아니라고 여겼다. 외사촌형수에게 어떻게 먹는것이냐고 물어보자니 촌놈이라고 웃을가봐 겁이 났다. 아이들은 불에 구워서 먹어보기로 상의했다. 빠나나를 화로우에 놓으니 쯔륵쯔륵 소리가 났다. 30분이 지나 소리가 거의 사라지려고 할 때 불과 가장 가까운 부분에 닿은 빠나나에서 연기가 났다. 장회영은 갈구리로 빠나나를 끌어왔다. 장학명이 손을 내밀자 장관영은 그의 손을 탁 쳐놓으면서 말했다. “야, 좀 기다려서 먹어. 뜨거워!” 빠나나는 이미 마르고 까맣게 모양이 변해버렸다. 장학명은 빠나나를 보다가 갑자기 웃었다. “형, 저 빠나나가 뭐 같아?” 장학량은 연기가 나는 빠나나를 바라보며 되물었다. “뭐 같니?” 장학명은 낄낄 웃으며 말했다. “내가 보기엔 개똥같아! 방금 싸놓은 개똥말이야.” 장관영은 화를 내면서 말했다. “넌 역겹지 않니? 그런 말을 하면 다른 사람이 그걸 어떻게 먹니?” 장학명은 한입 뚝 떼여서 질근질근 씹어먹었다. 아주 맛있게 먹는것처럼 하던 그는 갑자기 빠나나를 토해내며 울상을 지었다. “형, 정말 개똥같아!” 장학량은 장학명의 손에서 빠나나를 빼앗아 먹어보다가 “웩”하고 뱉아버렸다. 다른 아이들도 먹어보다가 모두 토해내며 낯을 찡그렸다. 며칠후 장학량이 외사촌형수를 만났을 때 외사촌형수가 “빠나나를 먹은 감각이 어떠냐”고 물었다. 그때 장학량은 장학명이 빠나나를 개똥같다고 하던 말이 생각났다. 그러나 선녀같이 아름답고 정이 넘치는 외사촌형수의 앞에서 장학량은 그런 더러운 말을 옮기고싶지 않았다. 더구나 빠나나는 그녀가 선물한것인데 례절상 사실대로 말할수 없었다. 그래서 장학량은 “빠나나가 맛있었어요.. 정말 맛있었어요. 여태껏 그처럼 맛있는 과일은 처음 먹어보았어요”라고 대답했다. 그날 장학량은 선물을 가지고 외사촌형수의 집으로 갔던것이다. 장작림은 평생 남에게 인정빚을 지는것을 원하지 않았다. 누구에게 뢰물을 받았거나 은혜를 입었다면 후에 꼭 갚아주군 했다. 마침 길림에 갔던 오준승이 10여병의 인삼고를 가지고왔다. 장작림은 장학량을 시켜 장학량의 외사촌형수에게 인삼고 몇병을 가져다 주라고 심부름을 시켰다. 이런 일은 장작림자신이 나설수 없었고 몇몇 첩들도 그 구미여우한테 가기 싫어했다. 장작림은 이런 심부름을 아들 장학량한테 시키는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누가 알았으랴? 장학량은 그번 걸음에 인삼고와 함께 그 자신까지 외사촌형수에게 선물하게 될줄을… 외사촌형수의 집은 조양가의 동쪽 만주철도가 있는 고려회관(지금의 심양소년아동도서관)옆에 있는 청기와집이였다. 때는 바로 양춘가절이여서 온 정원에 느티나무꽃이 만발했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그윽한 향기가 코를 찔렀다. 외사촌형이 외출하고 집에는 외사촌형수와 하녀 하나만 남았다. 이 외사촌형이 누구이고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장학량은 몰랐다. 장작림의 셋째첩 대헌옥은 그가 세력이 있는 사람에게 붙어서 바라올라온것이라고 했다. 그러자 장작림의 넷째첩 허주양이 한마디 보충했다. “담장밖의 담쟁이덩굴을 보았지? 누가 오줌을 쌌는데 거기서 담쟁이덩굴이 자라서 담장을 타고 올라온거지.” 그날 저녁에 발생된 일을 장학량은 몇년후에 풍용에게 말해주었다. 풍용은 장작림의 의형제 풍덕린의 아들로서 장학량과 동갑이였다. 장작림과 풍덕린은 권력과 세력다툼을 했지만 두 사람의 아들은 형제처럼 친했다. 그날 장학량이 오리라고 생각도 못했던 외사촌형수는 기뻐서 어쩔줄을 몰랐다. 그녀는 장학량의 손을 잡아 자기의 옆에 앉혔놓고 꾸짖듯이 말했다. “쬐꼬만 녀석이 왜 외사촌형수를 보러 자주 오지 않느냐? 내가 널 잡아먹기라도 할가봐 그러냐?” 모르는 사람이 그 말을 들으면 두 사람의 관계가 매우 가까운줄로 알것이다. 사실 장학량은 이 외사촌형수를 두번밖에 만나보지 못했고 한마디 말도 건너보지 못했다. 장학량은 인삼을 꺼내놓고 어물거리면서 모기소리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건… 우리 아빠가…형수한테 주라고 한건데…장백산의 인삼고예요.” 외사촌형수는 인삼고를 받아가지고 과장하여 말했다. “이건 나를 주는거냐? 와아, 정말 좋아. 꼬맹이야, 넌 인삼고가 어떤 효과가 있는지 아느냐?” 장학량은 머리를 가로저었다. 외사촌형수는 장학량의 얼굴에 입을 붙이다싶이 하고 말했다. “넌 장백산의 선녀라는 말을 들어보았느냐? 천지선녀라고도 하지. 바로 그 선녀가 인삼고를 바르고난후 누구나 한번 보면 한평생 잊지 못하게 되는 미인으로 되였지.” 장학량은 외사촌형수의 뜨거운 눈길을 피하여 고개를 숙였다. “전 몰라요. 전 장백산선녀를 본적이 없어요.” 말이 끝나자 외사촌형수는 바람같이 문을 열고 나갔다. 장학량은 무거운 짐을 벗은듯 홀가분했다. 그는 고개를 들고 방안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문이 열리더니 진한 향기가 침습해왔다. 장학량은 머리를 숙이고있었으나 외사촌형수가 눈앞에 다가온것을 느꼈다. 겉옷을 다 벗은 외사촌형수가 장학량을 껴안았다. 장학량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나의 외사촌형수입니다. 아빠가 알면 나의 다리를 분질러놓을것입니다.” 외사촌형수는 장학량을 더욱 힘주어 껴안으며 말했다. “넌 기효람(纪晓岚)을 아느냐? 그 청나라의 대재자(大才子) 기효람을 말이야?” 장학량은 머리를 끄덕였다. “알아요. 선생님이 알려주었어요.” 외사촌형수가 말했다. “기효람은 ‘날 낳은 엄마와 내가 낳은 딸을 내놓고 다른 녀자는 모두 범할수 있다’고 말한적이 있지. 넌 이 말의 뜻을 알겠느냐?”. 장학량은 외사촌형수를 한번 바라보다가 머리를 숙이면서 말했다. “전 몰라요.” “모른다구? 그럼 내가 알려주지. 오너라, 요 꼬맹이야!” 장햑량이 인삼을 들고 들어와서부터 외사촌형수가 전등을 끄기까지는 불과 20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장학량은 어리벙벙하여 외사촌형수의 치마밑에 빨려들어갔다. 그해 장학량은 13살밖에 안되였다.  
236    송미령의 생일비밀 댓글:  조회:7261  추천:0  2014-12-07
송미령의 생일비밀   (번역)   중국인의 생일은 때론 다른 사람들의 의심을 자아내여 당사자를 난처하게 한다. 어떤 사람은 음력으로 생일을 쇠고 어떤 사람은 양력을 기준한다. 더우기 조대가 교체되는 년대에 출생한 사람들이 그렇다. 민국초기에 출생한 사람들은 대부분 음력을 기준으로 하여 자신의 생일을 신고한다. 송미령의 생일에도 이런 비밀이 숨어있다. 송미령이 처음 미국으로 갈 때(1907년) 휴대했던 려권에는 그녀의 출생일이 청나라 광서 24년 2월 12일(음력)로 되여있다. 중앙연구원의 2000년중서력전환표에 따르면 이날은 기원 1898년 3월 4일이다. 송미령에 관한 여러 문헌과 서적을 뒤져보아도 그녀의 생일은 서로 다르다. 현재 류행되는 서적 《송가왕조》에는 송미령이 기원 1897년 3월 5일에 출생했다고 했는데 이는 려권에 비해 1년이 더 빠르다. 2003년 10월 24일의 뉴욕시보에 실린 송미령의 부고문에는 그녀가 1898년 3월 5일에 출생했다고 밝혀져있는데 이는 려권에 비해 하루의 차이가 난다. 최근에 상해에서 출판한 손중산, 송경령의 문물사진록에는 송미령의 출생일이 “1897년 3월 14일(청나라 광서 정유년 2월 12일)로 되여있는데 이는 편자가 정유년 2월 12일을 꺼꾸로 계산하여 1897년 3월 14일이라고 한것 같은데 년도와 날자가 모두 맞지 않다. 그외 이 책에는 송미령의 사망일을 2003년 10월 24일이라고 했는데 이는 하루가 늦어진것이다. 더욱 흥미있는것은 미국 뉴욕주에 있는 공원묘지의 묘비에 송미령의 출생일을 1898년 2월 12일이라고 새겨넣은것이다. 이 날자는 음력을 양력으로 쓴것이거나 “중서합벽(中西合壁)”일것이다. 년도는 서력(西历)의 기원으로 계산하고 월과 일은 음력으로 쓴것이다. 이런 현상은 그곳의 적지 않은 중국인에게 존재했다. 비석을 세울 때 출생일은 음력으로 하고 사망일은 양력으로 했던것이다. 이런것은 중국인들이라면 한참 생각해보면 알수 있지만 서양인들이라면 도무지 영문을 몰라 얼떨떨해할것이다. 일반인의 생일날자가 정확하지 않다면 큰일이 아닐것이다. 하지만 송미령같은 영향력이 있는 력사인물의 생일이 정확하지 않다면 응당 바로잡아야 할것이다. 서양인의 출생일은 모두 양력을 사용하기에 정확하지 않은 현상이 매우 드물게 존재한다. 생일은 병원이거나 지방정부에서 내여준 출생증명에 따르는데 송미령의 출생증명이거나 세례를 받은 증명은 현재까지 어떠한 기록도 나타나지 않았다. 1907년에 발급한 송미령의 려권은 가장 이른 공식서류로서 현재 시아틀(西雅图)의 미국국가서류보관실에 보존되여있다. 더욱 이르고 더욱 유력한 증거를 발견하기전에 송미령의 출생일은 반드시 이 려권을 기준으로 해야 한다. 그렇게 계산하면 송미령의 출생일은 1898년 3월 4일이고 사망일은 2003년 10월 23일이다.     
235    총을 휴대하고 장개석거실을 자유로 출입한 엽검영 댓글:  조회:7385  추천:0  2014-11-30
총을 휴대하고 장개석거실을 자유로 출입한 엽검영   (번역)     전국정협위원이며 국제유학련합회보급위원회 부주임인 엽향진(叶向真)은 개국원수 엽검영(叶剑英)의 둘째딸이다. 엽향진은 “아버지 엽검영은 총을 휴대하고 장개석의 거실을 마음대로 드나들수 있는 유일한 사람으로부터 짚신을 신고 혁명에 참가하는 길을 선택했다”고 말했다. 1897년 4월 28일에 광동성 매현에서 출생한 엽검영은 1920년 여름에 손중산이 조직한 계계군벌(桂系军阀)을 몰아내는 전역에 참가했다. 1922년 6월에 월계(粤系)군벌 진형명(陈炯明)이 손중산을 배반하자 해군륙전대 영장직을 맡았던 엽검영은 부대를 거느리고 손중산을 보호하여 위험에서 벗어나게 했다. 1924년초에 건국월군 제2사 참모장직을 맡았던 엽검영은 료중개선생의 요청으로 황포륙군군관학교창건에 참가하여 교수부 부주임직을 맡았는데 당시에 매우 위망이 있는 교관중의 한분이였다. 엽향진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버지는 그 시절에 손중산선생을 보호했으며 후에 황포군관학교를 건립할 때 20명 건교인중의 한명이였다. 황포군관학교가 건립되였을 때 아버지는 부교육장으로 임명되였다. 그 당시에 황포군관학교의 수업과목은 전부 아버지가 제정했다. 아버지는 황포군관학교의 모든 수업과목을 제정한후 동정(东征)을 하러 갔기에 개학의식에 참가하지 못했다.” 1925년에 광동성 동강일대에 도사리고있던 월계(粤系)군벌 진형명(陈炯明)은 반혁명무장을 동원하여 광주혁명정부를 와해하고 뒤엎으려고 시도했다. 광동혁명근거지를 공고히 하고 진형명의 반동음모를 분쇄하기 위해 중국공산당의 창의와 호소하에 광주혁명정부는 진형명을 토벌하기로 결정했다. 1월 15일에 동정을 선언하고 2월 1일에 진군하기 시작했다. 엽향진은 엽검영한테서 들었던 그때의 이야기를 이렇게 언급했다. “아버지는 황포군관학교건립과 동정에 참가했기때문에 장개석과 매우 깊은 우의를 맺게 되였다. 또 그때문에 장개석은 엽검영을 제일 신임했다. 누구나 검과 총을 휴대하고 장개석의 거실로 들어갈수 없었다. 그러나 유독 엽검영만은 검과 총을 휴대하고 장개석의 거실로 자유롭게 드나들수 있었다.” 장개석은 엽검영을 가장 중하게 여겼다. 후에 장개석은 엽검영을 제2사의 사장에 임명하고 겸하여 광동과 광서의 염무관리를 책임지게 했다. 1925년에 엽검영은 진형명을 토벌하는 동정에 두번이나 참가해 용감하게 싸우고 과단하게 지휘하여 출중한 군사재능을 보여주었다. 1926년 7월에 북벌전쟁에 참가한 엽검영은 초기에 국민혁명군 제1군 총예비대 지휘부 참모장직에 임명되였다. 남창을 공략한후 그는 국민혁명군 신편 제2사 사장직에 임되였다. 1927년 4월 12일에 장개석이 반혁명정변을 발동한후 엽검영은 단호하게 장개석을 반대하여 무한으로 가서 국민혁명군 제4군 참모장직을 맡았으며 그해 7월에 백색공포속에서 비밀리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엽향진은 이렇게 말했다. “광동과 광서의 소금을 관리하는 직무는 힘들이지 않고 돈을 많이 벌수 있는 자리였다. 아버지는 6개월사이에 100만딸라의 수입이 있게 되였다. 당시 사장인 아버지가 외출할 때면 말을 탔는데 뒤에서 가마가 따랐으며 사병이 단마르크에서 수입해들인 과자와 정제우유를 지게에 메고 따라갔다. 당시 정제우유는 모두 수입제여서 매우 비쌌다. 뒤에서는 또 사병이 위스끼(威士忌)와 브랜디(白兰地)를 가지고 따라갔다. 아버지는 말을 타고싶지 않을 때에는 가마에 앉아다녔다. 그때 많은 사람들은 아버지의 지위를 부러워하며 하루만이라도 그런 자리에 앉고싶어했다. 당시에 아버지는 자신만 생각한것이 아니라 광대한 로고대중들을 위하고 민족과 나라를 위해 분발하려고 했던것이다. 그랬기때문에 후에 장개석이 혁명을 배반하고 ‘4.12’대도살을 일으켰을 때 아버지는 외래침략자에 대항하지 않고 자기의 동포와 공산당을 살해하고있는 장개석을 계속 따르는것은 진정한 애국자가 할일이 아니고 출로가 없는 일이라고 여겼다. 하여 아버지는 단호하게 구두를 벗어놓고 짚신을 신고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면서 정강산으로 찾아갔다. 아버지는 정강산에서 많은 혁명선배들과 함께 인민과 조국을 해방하는 대업을 위해 어깨곁고 싸웠다. 당시 혁명에 참가한 사람들중에는 관리들의 핍박에 의해 반란을 일으킨 사람들도 있고 백성을 위해 청원하러 온 사람들도 있고 아버지처럼 높은 벼슬과 많은 록봉을 포기하고 리상을 위해 혁명에 참가한 사람들도 있었다. 아버지의 리상은 높은 직위와 명성을 위해서가 아니라 로고대중들을 잘 살게 하기 위한것이였다. 만약 자신을 위한것이였다면 아버지가 장개석을 따르지 않았다고 해도 재산을 가지고 미국으로 갔을것이다. 당시의 100만딸라는 지금의 10억딸라에 맞먹을 거액이였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렇게 하지 않고 많은 애국지사들처럼 인민과 조국에 충성하고 손중산선생처럼 전국의 압박받고 천대받는 인민을 각성시켜 3개의 큰 산을 뒤엎고 중국인민의 공화국을 건립하려고 했던것이다. 이것은 당년에 혁명에 참가한 공산당원과 우리 선배들의 공동한 리상이였다.”      
234    누가 장개석을 최고권좌에 올려놓았는가 (2) 댓글:  조회:6906  추천:0  2014-11-23
누가 장개석을 최고권좌에 올려놓았는가   (번역)   보로딘은 광주에 신선한 공기를 가져다주었다. 그의 풍격은 주위사람들을 깊이 감염시켰다. 그의 명성은 원동지구에 쫙 퍼졌다. 혁명자들은 그를 광주의 “레닌”이라고 불렀다. 상해조계지에서는 그를 “홍색수도”의 “홍색야수”라고 말했다. 이렇게도 령리하던 보로딘은 손중산이 사망된후 눈에 콩깍지가 씌웠던지 속마음이 씨꺼먼 장개석을 최고의 권좌에 앉도록 밀어주었던것이다. 당시 장개석이 강유력한 인물로 되려면 장애가 되는 세 사람을 제거해야 했다. 그 세 사람은 군사부장 허숭지, 외교부장 호한민, 재정부장 료중개였다. 일반적인 규률로 보면 장개석이 이런 장애를 제거하는것은 불가능한 일이였다. 그러나 불가능했던 일이 몇개월내에 발생되였다. 1925년 8월 20일에 국민당중앙집행위원회, 국민정부위원회와 군사위원회에서는 긴급회의를 열었는데 사람들의 시선은 모두 보로딘에게 집중되였다. 손중산이 사망된후 몇달동안 보로딘은 광주정부에서 주요하게 정권을 장악한 인물로 되였다. 겉으로는 모든 결의가 몇몇 국민당지도자들이 공동으로 결정하는것 같았지만 사실은 보로딘에게 결정권이 있었다. 그가 거주하고있는 저택의 웃층에는 늘 광주정부의 부장들, 국민당중앙집행위원들과 중국공산당원들로 초만원을 이루었고 아래층에는 번역일군들이 중문문서를 영어거나 로어로, 영어거나 로어를 다시 중문으로 번역하느라고 바삐 돌아쳤다. 각종 재료, 보고, 지시가 보로딘의 거처에서 끊임없이 전달되였다. 보로딘은 그번의 중요한 회의에서 왕정위, 허숭지, 장개석 세 사람으로 특별위원회를 세우고 정치, 군사와 경찰을 관할하는 권한을 주자고 건의했다. 이는 구쏘련의 “반혁명숙청및태업특설위원회”의 조직과 비슷했다. 보로딘자신은 특별위원회의 고문을 맡았다. 그의 건의가 곧 결의였기때문에 그 건의는 즉시 통과되였다. 정치, 군사와 경찰을 관할하는 대권을 틀어쥐고있는 특별위원 3인중에 왕정위는 국민당정부 주석이였고 허숭지는 국민당정부 군사부장이였지만 장개석은 월군참모장과 황포군관학교 교장이상의 직무를 맡은적이 없었다. 사실 그전에 보로딘은 장개석을 전도가 있는 인물로 보았다. 그때문에 구쏘련에서 파견되여온 국민혁명군군사총고문 가륜(加伦)과 많이 다투기도 했다. 가륜은 중국에서 쓴 이름이고 그의 본명은 와실리 콘스탄티노비치 블류헤르(瓦西里·康斯坦丁诺维奇·布柳赫尔)이다. 가륜은 마땅히 허숭지를 등용하여 황포와 대등한 군사력량을 배양해야 한다고 보면서 어느 개인이거나 어느 한 파가 중심이 되는 우환을 방지해야 한다고 여겼다. 그러나 보로딘은 허숭지의 월군은 구군대여서 큰 임무를 맡을수 없다고 여기면서 장개석의 황포군관학교 새 군인들이 혁명성질을 갖고있기에 큰 임무를 맡을수 있다고 인정했다. 7월에 국민정부가 성립되였을 때 가륜은 다시 군사독재를 방지하기 위해 허숭지를 위수로 하는 군사위원회제도를 건립하자고 제기했다. 그러나 보로딘은 동의하지 않으면서 장개석을 지지했다. 두 사람의 의견충돌이 갈수록 엄중해지자 모스크바에서 나서서 결정을 내릴수밖에 없었다. 보로딘은 청년시절부터 쓰딸린을 알고있었다. 때문에 보로딘의 영향을 많이 받은 쓰달린은 장개석을 신임했다. 결과는 가륜이 광동을 떠나게 되였다. 군사고문인 가륜은 자못 정치의의가 있는 의견을 제기했지만 정치고문인 보로딘은 관건적인 시각에 장개석의 군사재능에 속아 개인정치시야의 사각에 빠져버렸다. 그는 직접 지극히 큰 권력을 장개석의 손에 쥐여주었다. 중국에는 “아무리 총명한 사람도 천번에 한번쯤은 반드시 실수를 한다”는 말이 있다. 그런데 이 한번의 실수는 너무 크고 너무 관건적인것이여서 이미전에 쌓았던 999번의 성공이 이 한번의 실수로 훼멸되였다. 파스퇴르(巴斯德)는 기회는 준비된 자의 편이라고 말했다. 장개석은 이날을 위해 충분한 준비를 했다. 그는 갑자기 수중에 “정치, 군사, 경찰을 관할할수 있는 대권”이 쥐여졌을 때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군사조직을 즉시 움직여 먼저 허숭지를 억압했다. 1925년 8월 20일에 중국국민당집행위원회 위원, 국민정부위원회 위원, 군사위원회 위원, 황포군관학교 당대표인 료중개가 국민당중앙당부의 문밖에서 피살되였다. 지금까지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로 남아있는 이 사건은 일정한 정도로 력사방향을 개변시킨 돌발사건이였다. 장개석은 허숭지가 이 사건에 관련되여있다는 리유로 군대를 지휘해 그의 저택을 포위했다. 허숭지는 황망히 상해로 도주했다. 그 다음으로 제거해야 할 인물은 호한민이였다. 장개석은 호한민의 동생 호의생이 료중개의 암살사건에 관련된다는 리유로 호한민을 조사받게 한후 외교사절로 구쏘련에 보냈다. 료중개피살사건을 처리하면서 장개석은 권력쟁탈에 장애가 되는 세 인물을 깨끗이 쓸어버렸다. 6개월후에야 보로딘은 자신이 마귀병마개를 열어주었다는것을 깨달았다. 허숭지, 호한민, 료승지가 소실된후 보로딘은 이미 원래의 생각대로 장개석을 견제하지 못하게 되였다. 보로딘은 장개석의 능력을 너무 얕잡아보았다. 료중개를 매장하고 허숭지와 호한민을 쫓아버린후 장개석의 앞에서는 아직도 마지막 3개의 장애가 남아있었다. 그 3개의 장애는 바로 앞에 나서서 지휘하고있는 국민정부 주석 왕정위, 막후에서 조정하고있는 국민정부정치고문 보로딘, 마음속의 철전지원쑤 중국공산당이였다. 장개석은 국민당조직의 전부력량을 자신의 손아귀에 틀어쥐기전에는 계속 보로딘의 힘과 영향을 리용해야 했다. 보로딘의 말은 왕정위와 장개석중에서 의연히 결정적인 작용을 놀았다. 장개석은 반복적으로 “보로딘의 의견은 곧 나의 의견입니다”라고 했던 손중산의 말을 인용하면서 보로딘을 춰주었다. 그러면서 그는 보로딘을 제거할 시기를 기다렸다. 드디여 시기가 다가왔다. 제2차동정(东征)에서의 대승은 장개석의 명성을 하늘을 찌를듯이 높여주었다. 광주로 돌아오는 도중에 자발적으로 모여든 남녀로소와 사회 각 단체들로 이루어진 환영대오가 길량옆에 쭉 늘어섰다. 대중들이 빼곡이 둘러싸서 폭죽을 터뜨리며 환영하고 군악대가 연주하는 가운데 승전고를 울리며 돌아오는 장개석에게 광주의 왕정위, 담연기, 오조추, 고응분, 송자문이 련명으로 축전을 보냈고 국민정부요원들이 한줄로 서서 경의를 표시했다. 이렇게 군권을 틀어쥔 장개석은 위풍이 당당했다. 일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1926년 1월에 광주에서 국민당제2차대표대회가 열렸을 때 장개석은 1표기권외에 전부찬성의 최고표수로 중앙집행위원으로 당선되였다. 그 기권표는 장개석자신일것이 분명했다. 그것은 전부찬성표보다 더 강한것이였다. 그번 대회에 참석한 공산당대표 100명은 모두 장개석에게 찬성표를 던져주었다. 그해에 장개석은 40세였다. 송경령은 동정승리후의 광동형세에 대해 말할 때 “이 기간의 형세는 손중산선생이 계실때보다 더욱 좋았다”고 평가했다. “손중산선생이 계실때보다 더 좋았다”는 한마디가 송경령의 입에서 나왔다는것은 최고의 칭찬이였다. 국민당제1차대표대회에서 입장권도 얻지 못했던 장개석은 제2차대표대회에서 개인명성이 정점에 달했다. 이렇게 명성이 정점에 달하게 되자 손을 쓰기도 편리했다. 1926년 3월 20일에 발생된 “중산함사건”에서 장개석은 료중개, 허숭지, 호한민을 쓸어버릴 때처럼 일거삼득의 효과를 보았다. 이번에 타격할 목표는 중국공산당, 구쏘련고문단, 왕정위였다. 때마침 보로딘이 광주에 없었다. 구쏘련고문은 전부 장개석에 의해 연금되였다. 장개석은 또 “당무안정리”를 리용하여 암암리에 보로딘을 배척하여 실권을 잃어버리게 했다. 공산당원도 “당무안정리”후에 핍박에 의해 국민당중앙과 제1군에서 퇴출했다. 장개석은 왕정위를 밀어내고 군권을 장악했다. 1927년 7월 15일에 왕정위는 무한에서 “분공(分共)회의를 열고 중국공산당을 반대하겠다는 립장을 정식으로 선포했다. 이로서 대혁명은 완전히 실패했다. 장개석을 최고의 권좌에 올려놓은 보로딘은 1926년부터 1927년의 1년사이에 장개석에 의해 “손중산총리가 사망된이래 우리에게 이처럼 위대한 정치활동가가 없었다”고 높이 떠받들렸다가 “적색혁명을 선동하여 정권을 뒤엎으려고 시도한 음모가”로 되여 즉시 잡아들여 총살해야 될 운명에 처했다. 정치인물은 왕왕 순식간에 상전백해속에서 사람들이 짐작할수 없는 인물로 되여버린다. 보로딘은 장개석이 생각하는것처럼 그렇게 복잡하지 않았으며 장개석도 보로딘이 생각하는것처럼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이전에 일본사관생이였던 장개석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아직도 자신을 반대하던 사람들을 탄복하고있었고 자신을 리용하려고 했던 사람들을 극도로 미워했다. 당년에 보로딘이 장개석을 권좌에 올려놓는것을 반대했던 가륜은 귀국후 1938년 10월에 있은 구쏘련의 반혁명숙청운동에서 체포되였다. 구쏘련주재 중국대사 양걸의 보고를 받은 장개석은 가륜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손과를 특사의 신분으로 구쏘련에 보내여 쓰딸린에게 가륜을 자신의 사인고문으로 파견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구쏘련의 반혁명숙청행동은 너무 빨랐다. 가륜은 체포되여 한달만에 총살되였다. 손과가 쓰딸린에게 장개석의 요구를 전달했을 때 쓰딸린은 가륜이 이미 죽었다는 소식을 알려주었다.  자신을 반대했던 가륜의 목숨을 구하려고 했던 장개석은 도리여 자신을 최고의 권좌에 올려놓았던 보로딘의 목숨을 빼앗으려고 체포령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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