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중국 개국10대원수 계급표준은 어떻게 정했는가
(번역)
원수계급을 평가하여 결정하는 초보방안에는 모택동이 대원수로 되여있고 원수계급에는 주덕, 팽덕회, 림표, 류백승, 하룡, 진이, 라영환, 서향전, 섭연진, 엽검영 10명외에 주은래, 류소기, 등소평도 명단에 올라있었다.
당시 모택동은 중공중앙 주석, 중화인민공화국 주석, 중앙군위 주석, 전국무장력량 최고통수였기때문에 대원수로 되는것은 응당한 일이였고 모두가 기대하는 바였다.
주은래는 일찌기 황포군관학교 정치부 주임직을 맡았고 1927년 5월에는 중앙군위 서기직에 임명되였다. 그후 하룡 등과 함께 8.1남창봉기를 령도했으며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혁명군대를 창건했다. 1931년말에 홍군총정치부 정위 겸 제1방면군 총정위, 중화쏘베트공화국 중앙혁명군 군사위원회 부주석에 임명되였고 모택동, 주덕 등과 함께 홍군의 반포위토벌작전을 지휘했다. 장정중에 중앙3인군사지휘소조의 성원으로 되였고 항일전쟁이 폭발된후 중공중앙군위 부주석직에 임명되였다. 해방전쟁초기에 모택동 등과 함께 전국해방전쟁을 지도했고 1947년 8월에 중앙군위 총참모장직을 겸임했다. 또 모택동을 협조하여 료심, 회해, 평진 3대전역을 지휘했고 북평, 호남, 수원, 신강 등지의 평화해방사업을 지도했다.
류소기는 1934년에 장정에 참가하여 선후로 홍8군단, 홍5군단중앙대표, 홍3군단정치부 주임직을 담임했다. 1935년 1월에 열린 중공중앙정치국확대회의 즉 저명한 준의회의에서 류소기는 모택동의 정확한 주장을 지지했다. 항일초기에 화북지구의 적후항전을 령도했고 1940년에 신4군과 8로군화중총지휘부 정위직을 력임했다. 1943년 3월부터 중앙군위 부주석직을 담임했고 항일전쟁승리후 모택동이 중경에 가서 장개석과 담판하는 기간에 중공중앙의 대리주석직을 맡았다. 해방전쟁시기에는 계속 중공중앙군위 부주석직을 담임하면서 총정치부 주임직을 겸임했으며 해방전쟁승리의 중대전략결책을 제정하는데 참여했다.
등소평은 1929년 12월에 백색봉기를 령도했고 홍7군 정위와 전위서기직을 담임했으며 1933년에 홍군총정치부 비서장직을 담임하기도 했다. 1934년에는 장정에 참가하였고 항일전쟁이 폭발된후에는 8로군정치부 부주임직을 담임했다. 1937년 12월에 8로군 129사 정위직을 맡으면서 사장 류백승과 함께 진기예(晋冀豫)항일근거지를 항일근거지를 창설하고 그 지역의 항일전쟁을 아주 효과적으로 전개하였다. 1945년에 중공진기로예(晋冀鲁豫) 중앙국 서기, 진기로예군구 정위직을 력임했다. 항일전쟁승리후 등소평은 류백승과 함께 진기로예부대를 지휘하여 해방구를 공격하는 국민당군을 반격했으며 1947년 6월에 진기로예군구주력 12만대군을 거느리고 황하를 뛰여넘어 전략적인 반격을 시작했다. 1948년 5월에 중공중앙 중원국 제1서기, 중원군구 정위직을 력임했고 그해 11월에 회해전역총전위서기직을 맡으면서 류백승, 진이, 속유, 담진림과 함께 중원과 화동 2대야전군을 지휘하여 서회(徐淮)지구의 국민당군 주력과 결사전을 벌렸다. 회해전역승리후 제2야전군 정위직을 맡았고 1949년 4월에 제2야전군을 거느리고 도강전투을 지휘하여 남경을 점령했으며 류백승과 함께 부대를 거느리고 서남의 모든 성을 해방했다.
주은래, 류소기, 등소평은 모두 혁명전쟁시기에 인민군을 창건하고 무장력량을 령도하여 국민당군과 싸웠으며 전략결책에 탁월한 공훈을 세웠기에 원수계급에 오르는것은 당연한 일이였다. 1955년에 계급을 수여할 때 주은래는 국무원 총리직을 맡았고 류소기는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위원장을 맡았으며 등소평은 중공중당 비서장 겸 국무원 부총리직을 맡았다. 그런데 계급을 수여하기전에 모택동이 대원수계급에 오르는것을 거절하면선 “현재 지방에서 사업하는 사람은 모두 계급에 오르지 않는것이 좋습니다”라고 건의했다. 그리하여 주은래, 류소기, 등소평도 원수계급에 오르는것을 거절했다.
1955년에 우리군이 실행한 계급제에서 원수계급표준은 매우 높았다. 그해 2월 8일에 제1기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제6차회의에서 통과되고 국가주석 모택동의 비준으로 발부된 《중국인민해방군군관복역조례》중에는 인민무장력량을 창건하고 령도했거나 전역군단작전을 령도하여 탁월한 공훈을 세운 고급장령에게 중화인민공화국 원수계급을 수여한다고 밝혀놓았다. “홍군의 아버지” 주덕원수는 자격과 덕망이 높았고 “홍군의 강한 사자” 팽덕회원수는 용맹스럽고 강직했으며 “홍군의 날랜 매” 림표원수는 불패의 상승장군이였고 “군신(军神)” 류백승은 지략이 뛰여나고 판단이 정확했으며 “하수염(贺胡子)” 하룡원수는 “남창봉기”를 총지휘한 중국인민해방군 창시자였고 “시인” 진이원수는 문무를 겸비한 장군이였으며 “정치원수” 라영환원수는 군사와 정치에 모두 능했고 “북방사성(北方帅星)” 서향전원수는 우리군의 보기 드문 기재였으며 “유사(儒帅)” 섭영진원수는 학자기질이 다분한 영재였고 “엽참좌(叶参座)” 엽검영원수는 명실상부한 우리군의 총참모장이였다.
바로 이런 엄격한 표준에 의해 최종적으로 주덕(朱德), 팽덕회(彭德怀), 림표(林彪), 류백승(刘伯承), 하룡(贺龙), 진이(陈毅), 라영환(罗荣桓), 서향전(徐向前), 섭영진(聂荣臻), 엽검영(叶剑英)이 10대원수의 계급을 수여받았다.
원수라는 이 지위가 혁혁한 최고계급은 력사상에서 2가지 종류의 함의를 가지고있었다. 하나는 관칙명칭이였고 다른 하나는 군사계급칭호였다.
원수라는 명칭이 제일 먼저 사용된것은 기원전 633년의 춘추시기에서 부터였다. 당시에는 군대중의 자격과 경력, 위망과 전공이 가장 높은 사람에 대해 존중하는 칭호였지만 관직명칭은 아니였다. 사서 《좌전·선공(宣公)12년》과 《한서·조충국전》에 기재된 원수(元帅), 통수(统帅)는 모두 군대중의 최고급별의 지휘관을 가리키는 말이였다. 수, 당, 5대, 송조의 전쟁시기에는 모두 원수직무를 설치했는데 직권경중과 분공관리에 따라 관리명호도 달랐다. 례하면 “천하병마원수”, “병마대원수”, “행군(行军)원수”, “행영(行营)원수”가 있었는데 그중에는 또 “도원수(都元帅)”, 원수, “부원수”의 등급차이가 있었다. 당태종 리세민은 황제의 보좌에 오르기전에 “서토원수(西讨元帅)”를 담임한적이 있었다. 금나라에 이르러 전쟁시기에 원수부를 설치하고 부동한 급별의 원수를 임명하여 전문적으로 토벌하는 일을 장악하게 했다. 원나라의 각 도(道), 주(道)에는 도원수부거나 원수부, 부원수부를 설치하여 부동한 이름의 원수를 임명하여 당지의 행정 및 군사대권을 장악하게 했다. 명나라에서는 추밀원아래에 제익(诸翼)원수부를 두고 원수, 동지(同知)원수 등 관직을 임명하여 군을 통솔하여 원정을 나가게 했다.
원수라는 이름을 군사계급칭호에 사용하여 최고계급을 표시한것은 16세기중엽의 프랑스군이였다. 당시 프랑스2세는 처음 4명의 고급장령에게 원수계급칭호를 수여했다. 프랑스에 이어 16세기의 게르만제국, 17세기의 오스트리아, 로씨야, 18세기의 영국, 19세기의 에스빠냐, 토이기, 이딸리아, 일본, 20세기의 구쏘련, 중국, 뽈스까, 로므니아, 유고슬라비아, 벌가리아, 핀란드, 인도, 타이, 조선, 몽골, 애급, 수단, 브라질 등 나라들이다. 어떤 나라들에서는 원수구분을 다른 등급으로 나누었다. 원수급별을 가장 많이 나눈 나라는 구쏘련인데 쏘련대원수, 쏘련원수, 주수(主帅), 원수 4개급별로 나누었다. 제2차세계대전중 나치스독일의 원수구분은 제국원수와 군종원수(军种元帅) 2개급별이였다. 조선의 원수구분은 대원수, 원수, 차수 3개급별이다. 중화인민공화국 1955년의 법률문건에는 중화인민공화국 대원수와 중화인민공화국 원수 2개급별로 나눈다고 규정했다. 하지만 원래 모택동에게 수여하기로 되여있던 대원수계급은 모택동의 거절로 비여있었다.
어떤 나라들에서는 원수구분을 부동한 종류로 두었다. 일반적으로 륙군원수, 해군원수, 공군원수 3개종류였다.
중화인민공화국 개국원수계급을 수여받은 10대원수는 크게 4가지표준에 도달되였다.
첫째, 중국인민해방군창건시기의 중요한 무장봉기의 령도자거나 참여자였다.
둘째, 그들은 모두 아군의 각 시기의 중요한 령도자였다.
셋째, 그들은 아군의 중요한 전역군단작전을 령도하고 지휘하여 탁월한 공훈을 세웠다.
넷째, 그들은 원수계급을 수여받을 때 급별이 매우 높았다. 그중 주덕, 팽덕회, 림표 세 사람은 1952년에 전군이 평급을 할 때 제1등의 군위부주석급이였고 류백승, 하룡, 진이, 라영환, 서향전, 섭영진, 엽검영은 제2등의 대군구 사령원, 정위급이였다. 급별이 높은것은 그들이 영예롭게 원수계급에 오를수 있는 중요한 조건중의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