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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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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    늙은 남편에 젊은 부인의 랑만적인 사랑 (2) 댓글:  조회:7302  추천:0  2014-08-02
늙은 남편에 젊은 부인의 랑만적인 사랑 (2)   (번역)     한번은 그녀가 친구와 함께 거리에 나갔는데 또 양진녕한테서 전화가 왔다. 옹범이는 핸드폰을 들고 말했다. “저는 지금 전번에 여러번이나 말했던 그 친구와 함께 거리에 나왔어요.” 곁에서 듣고있던 친구가 웃으며 말했다. “양교수가 널 사랑하는게 아니야? 그분처럼 신분과 지위가 있는 사람이 널 사랑하지 않으면 그렇게 빈번하게 전화를 하지 않을거야.” 옹범은 부끄러워 얼굴이 홍당무우처럼 빨갛게 달아올랐다. 꽃피는 5월에 양진녕은 옹범에게 함께 향항의 석오에 놀러가자고 청했다. 그날은 비가 내렸는데 석오촌에서 해변으로 통하는 길은 가파로왔다. 안전을 위해 두 사람은 서로 손을 잡았다가 그 길을 다 지나자 손을 놓았다. 그때에야 그녀는 양진녕이 자신의 손을 잡는 감각을 좋아한다는것을 깨달았다. 2004년 7월에 옹범은 친구들과 함께 내몽골려행을 떠났다. 그녀는 망망한 초원에서 또 양진녕의 전화를 받았다. 양진녕은 자신이 북경의 청화대학에 도착했다면서 놀러오라고 요청했다. 양진녕은 해마다 얼마간의 시간을 북경에서 지내다가  또 얼가간의 시간을 향항에서 보내군 했다. 며칠후 옹범은 북경에 도착했다. 양진녕은 이미 가정부에게 부탁하여 맛있는 음식을 준비해놓았다. 옹범은 양진녕이 미국에서 오래동안 살았지만 생활방식은 매우 전통적인것을 발견했다. 양진녕은 회양료리를 좋아하고 홍차를 즐겨 마셨다. 두 사람은 접촉이 많아지면서 서로 호흡이 잘 맞는것을 느꼈다. 북경에서 잠간 머무른후 옹범은 또 산서려행을 떠났다. 하지만 려행길에 그녀는 마음이 편안하지 않았다. 자꾸만 양진녕의 웃는 모습이 눈앞에 떠올랐다. 그녀는 자신이 사랑에 빠진것이 아닐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갑자기 당황해졌다. 이것이 어찌 가능한 일인가? 하지만 마음을 가라앉히고 조용히 생각해보니 양진녕은 나이가 많은외에 남자에게 있어야 할 모든 매력을 가지고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매우 걱정되기도 했다. 필경 54살의 나이차가 있었기때문이다. 반세기도 더 되는 이 나이차이를 극복할수 있을가? 광주에 돌아온 옹범은 비록 몸은 광주에 있었지만 마음은 양진녕에게 가있었다. 그녀는 영문시를 써서 메일로 양진녕에게 보내군 했다. 양진녕은 꼭꼭 시를 수개해서는 다시 보내주군 했다. 후에 옹범은 자신이 지은 시를 인테넷에 올려는데 향항 중문대학 번역학부의 몇몇 박사들은 그녀의 영문시가 운률과 미감방면에서 확실이 천부적인 재능이 보인다고 평가했다.  그리움에 모대기던 두 사람은 2004년의 국경절련후일을 맞게 되였다. 양진녕과 옹범은 함께 광주에서 멀지 않고 사람들도 많지 않은 북해로 려행을 따나자고 약속했다. 옹범이가 사진찍기를 좋아한다는것을 알고있는 양진녕은 그녀에게 마쯔시다디지털카메라를 사서 선물했다. 그해 국경절련후에 북해에는 손을 꼭 잡은 82세와 28살의 련인이 나타났다. 푸른 하늘에 흰구름이 두둥실 떠오르는 바다사이에 나이를 잊은 련인은 발자국을 남겨놓았다. 사랑하는 두 사람은 쌍인자전거를 타고 야자숲의 좁은길로 달리기도 하면서 즐겼다. 북해에서 북경으로 돌아온 후 며칠이 지나서 양진녕은 전화로 옹범에게 청혼했다. 광주에서 청혼전화를 받은 옹범은 애교스러운 목소리로 “청혼하면서 장미꽃을 선물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에 있어요?”하고 물었다. 양진녕은 황급히 웃으면서 “다음번에 꼭 보충하겠소”라고 승낙했다. 2004년 11월에 옹범은 부모가 있는 고향 조주로 돌아갔다. 옹범의 아버지 옹운광은 옹범을 매우 총애했다. 그날밤에 옹범은 부모한테 자신과 양진녕의 일을 털어놓았다. 28살의 젊디 젊은 딸이 80세를 넘은 할아버지와 결혼하겠다는 말을 들은 옹운광부부는 깜짝 놀랐다. 옹범은 참을성 있게 설복했다. 개명한 부모는 결국 딸의 선택을 막지 못했다. 부모가 동의한다는 뜻을 보이자 옹범은 즉시 이 기쁜 소식을 양진녕에게 전해주었다. 이틑날에 양진녕은 어디에서 결혼수속을 해주는가를 수소문했다. 그제야 그는 외국국적을 가진 사람은 반드시 녀자측의 호적이 있는 소재지에 가서 결혼등록수속을 밟아야 한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양진녕은 옹범에게 전화를 걸어 결혼등록수속을 할 준비를 하라고있으라고 부탁했다. 그날 저녁에 그들은 각가가 자신의 친구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해주었다. 그들의 편지를 받은 친구들은 모두 매우 격동되였다. 이틑날 아침에 향항 중문대학의 교수들은 신비하게 수군거리고있었는데 양진녕이 젊은 부인을 맞게 된다는 이야기였다. “옹범이라면 서른살도 되지 않은 처녀가 아닌가?” “그러게 말이네.” “하여튼 축하할 일이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부러워하는 축들이였고 “아니, 아무리 저명한 교수라도 그렇지? 나이가 얼마인데 주책이 없이…” “자신의 명성으로 젊은 아이를 꼬시다니?” 가당하지 않다는듯이 왼고개를 젓는 사람들은 질투하는 축들이였다. 어디서 소식이 흘러나갔는지 싱가포르언론에서 양진녕과 옹범이 곧 결혼하게 된다는 소식을 보도했다. 그 소식을 듣고 기자들이 물고늘어지는 바람에 옹범은 핸드폰을 받을 엄두도 못냈다. 2004년 12월 22일에 양진녕과 옹범은 옹범의 고향으로 날아갔다. 옹범의 부모는 이미 호텔에 자리를 마련해놓고 기다리고있었다. 양진녕은 자신의 자녀벌 되는 젊은 장인과 장모를 만나 인사했다. 12월 24일에 양진녕과 옹범은 양진한(양진녕의 동생)부부와 함께 가서 결혼등록수속을 밟았다. 이로서 82세의 늙은 할아버지와 28세의 젊은 녀인은 정식으로 부부로 되였다. 양진녕과 옹범은 2메터의 거리를 유지하면서 선후로 민정국의 대문으로 들어갔다가 이윽하여 나란히 손을 잡고 나왔다. 82세의 할아버지와 28살의 젊은 녀인의 결혼은 세인들의 화제를 모았다. 무려 54세의 나이차가 나는 그들 부부는 금슬좋은 부부로 유명했다. 당시 양진영은 중국언론에 “지금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말하건간에 30년이 지나고 40년이 지나면 모두 우리의 결혼이 랑만적인 일이였다는것을 알게 될것이다”고 말했다. 음력설기간에 양진녕은 옹범을 따라 광주로 돌아가 광주에 있는 옹범의 친구를 청해놓고 연회를 베풀었다. 양진녕은 젊은 부인의 친구들을 특별히 잘 대해주었으며 그들과 잘 어울리였다. 그는 매우 조심스럽게 젊은이들에게 자신과 옹범의 결혼을 어떻게 보는가고 물었다. 축복한다는 말을 들은 그는 이렇게 물었다. “그럼 자네들의 부모는 남자친구의 년령에 대해 제한하지 않는가 보군.” 결혼후 옹범은 자신의 졸업론문제목을 《허연충의 시학번역사상을 론함》이라고 고쳤다. 허연충은 북경대학의 저명한 교수인데 양진녕이 청화대학에 있을 때의 동창생이였다. 그녀는 론문을 쓰면서 허교수의 많은 작품을 읽었으며 허교수의 직접적인 가르침도 받았다. 졸업론문을 쓰는 시간이 매우 촉박했지만 옹범은 참답게 론문집필을 마쳤으며 지도교수의 호평을 받았다. 광동외국어대외무역대학에서는 연구생의 론문을 닉명의 형식으로 심사평의했다. 그리고 교내외에서 각각 한명의 전문가를 청해서 매 연구생의 졸업론문에 대해 심사평의했다. 두 전문가는 모두 옹범의 론문에 대해 비교적 높은 평가를 했다. 이전에 옹범의 생활방식은 서양식에 가까왔다. 그녀는 커피를 마시기 좋아했고 한밤중에 친구들과 채팅하기를 즐겼으며 아침에 늦게 일어나군 했다. 결혼후 그녀는 점차 자신의 시간을 조절하여 남편과 같이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났는데 매우 규칙적이였다. 결과 그녀의 건강상태가 더 좋아졌고 얼굴혈색이 좋아지고 윤기가 흘렀다. 향항의 저택에는 가정부가 없었기때문에 옹범은 직접 두 사람의 아침을 준비했다. 두컵의 우유, 몇쪼각의 빵, 두개의 닭알지짐으로 간단한 아침을 먹은후 양진녕은 학교에 나가군 했다. 몇년래 양진녕의 주요한 사업은 자신의 국제적인 영향력을 리용하여 향항의 중문대학과 북경의 청화대학에 정상급학술인재를 인입하고 자금을 모아 고등학술연구사업을 발전시키는것이였다. 근 1년사이 그는 청화대학에 1000만딸라의 자금을 모아들였고 미국의 프린스턴(普林斯顿)대학의 중국인후예학자이며 당대 계산기방면에서 세계적권위인 요기지교수를 청화대학에 초빙했다.  
192    늙은 남편과 젊은 부인의 랑만적인 사랑 (1) 댓글:  조회:7868  추천:0  2014-08-02
늙은 남편과 젊은 부인의 랑만적인 사랑 (1)   (번역)     2004년에 82세 되는 양진녕은 28살밖에 안되는 옹범과 결혼하여 화제를 모았다. 1976년 7월에 광동성 조주시에서 출생한 옹범(翁帆)은1994년에 산두대학 외국어언문학부 영어B반에 입학했다. 1995년 여름방학에 산두대학에서는 첫 세계화교물리학대회를 열었는데 양진녕이 부인 두치례와 함께 이 대회에 참석하게 되였다. 학교에서는 옹범을 선발하여 양진녕과 두치례를 영접하는 일을 책임지게 했다. 청순한 19살 처녀였던 그녀는 당시 저명한 과학자부부를 매우 흠모했다. 그후 그녀는 여러해동안 양진녕부부와 서신거래가 있었다. 옹범은 양진녕을 만나기전에 책과 인터넷을 통해 노벨상을 수여받은 이 과학자에 대해 얼마간 알고있었다. 위대한 물리학가로서 양진녕은 리론물리학에 거대한 기여를 했다. 그런 기여로 하여 중국인출신으로는 처음 리정도와 함께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하기까지 했다. 양진녕(杨振宁)은 1922년 10월 1일에 안휘성 합비시에서 태여났다. 중학교때 양진영은 매우 총명했는데 특히 수학천재였다. 어느날에 양진녕은 아버지를 보고 “아빠, 난 커서 꼭 노벨상을 수상할테야!”하고 말했다. 아들이 큰 포부를 품은것을 본 양무지는 매우 기뻐하며 공부를 잘하라고 고무해주었다. 양진녕의 아버지 양무지교수는 서방의 근대수학을 제일 먼저 중국에 인입한 선구자의 한분이다. 1923년에 양무지는 미국류학시험에 합격되여 먼저 미국서부의 스텐폴드대학에서 1년간 학습하였다. 1년후 양무지는 미국 중부의 시카코대학에 진학하여 석사와 박사학위를 따냈다. 20세기 30년대에 양무지는 청화대학 수학교수로 있었는데 그때 청화대학 수학계에서는 많은 세계급 수학가를 양성해냈다. 그 중에서 가장 걸출한 사람은 화라경과 진성신이다. 양진녕은 고중시절에 화학만 공부했을뿐 물리를 배우지 못했다. 때문에 그는 련합대학에 들어갈 때 화학학부를 지망했다. 그러나 련합대학에 입학한 후 자신이 물리학에 매우 큰 흥취를 가지고있는것을 발견한 그는 물리학부로 들어갔다. 그때 그가 중학교때 노벨상을 수상하겠다고 호언장담하던 말이 온 련합대학교에 퍼졌다. 사람들은 “양무지의 아들이 수학을 매우 잘하는데 왜서 아버지처럼 수학을 전공하지 않고 물리학부를 선택했는가 했더니 원래는 수학부문에 노벨상이 없었기때문이였군”하고 말했다. 옹범이가 인터넷에서 양진녕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던 2004년 2월의 어느날에 양진녕한테서 전화가 왔다. 양진녕은 중문대학에서 만나자고 요청했다. 1998년에 산두대학 영어학부를 졸업한후 옹범은 먼저 산두의 한 기업에서 사업하다가 1개월후 심수의 한 골프구락부에 가서 사업했다. 그 시기에 한 향항청년과 2년동안의 혼인경력이 있었지만 감정이 맞지 않아 헤여진후 2002년에 다시 광동외국어대외무역대학 번역학부의 석사반에 들어가 연구생공부를 시작했다. 2003년말에 광동외국어대외무력대학에서 연구생공부를 하고있는 옹범은 향항려행을 떠났다. 2011년에 청화대학 건축학원에 들어가 박사공부를 했다. 2003년에 양진녕의 부인 두치례가 미국에서 사망되였는데 광주에 있던 옹범은 그 소식을 모르고있었다. 양진녕의 결발부인은 저명한 항일명장이며 국민혁명군 륙군 중장이였던 두률명장군의 딸 두치례이다. 양진녕은 1949년의 크리스마스 휴가일에 한 호텔에서 두치례를 만났다. 두치례는 이전에 그가 련합대학부속중학교에서 교학할 때의 학생이였다. 그들은 1950년 8월에 결혼했다. 결혼후 그들은 푸린스둔에서 행복하게 살면서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보았다. 1951년에 맏아들 양광락(현재 컴퓨터공정사)이 태여났고 1958년에 둘째아들 양광우(현재 화학가)가 출생했으며 1961년에 딸 양우례(의사)가 출생했다. 현재 세 자녀는 모두 미국에 거주하고있다. 두치례는 2003년 10월에 병으로 사망되였다. 얼마후 양진녕을 만났을 때 옹범은 매우 격동되기도 하고 긴장되기도 했다. 9년만에 다시 만나서 이미 82세로 된 양진녕교수를 앞으로 달려가 부축해 되는지 어째야 되는지 결단을 내릴수 없었다. 그런데 그녀는 눈앞의 양진녕교수가 매우 정정하고 사유와 행동이 매우 민첩한것을 보고 놀랐다. 옹범은 양진녕교수가 9년전처럼 정력이 왕성한것을 보고 마음을 놓았다. 그번의 상봉에서 두 사람은 매우 즐어워했다. 옹범이 양진녕교수앞에서 리과학생이 학술계의 거인을 대하는것처럼 그렇게 긴장하고 어색해하지 않았기때문에 편하고 친근하게 대화를 나눌수 있었다. 양진녕은 자신의 지난날의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매우 총명했던 양진녕은 중학교도 채 졸업하지 않은 16살 되는 나이에 서남련합대학에 들어갔으며 20살에 대학을 졸업하고 서남련합대학의 연구원으로 들어갔다. 1945년에 미국에 건너가 시카고(芝加哥)대학에 들어간 그는 박사학위를 취득했으며 1949년에 프린스턴(普林斯顿)대학연구원에 들어가 박사후공부를 하면서 리정도와 합작하기 시작했다. 1957년에 양진녕은 리정도와 함께 공동히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했다. 그들 두 사람은 가장 먼저 노벨상을 수상한 중국인출신이다. 후에 향항의 한 방송국에서 양진녕을 방문했는데 그들은 양진녕게 일생에서 가장 큰 기여가 무엇인가고 물었다. 양진영은 그때 “나의 가장 큰 기여는 중국사람들을 도와 자기가 다른 사람보다 못하다는 심리를 극복하게 한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후 양진녕과 리정도는 누구의 이름을 앞에 놓겠는가 하는 문제때문에 다투었다. 1962년에 《뉴욕의 손님》이란 한편의 글 때문에 두 사람은 정식으로 결렬했다. 그 당시(두 사람이 서로 자신의 이름을 앞에 놓겠다고 다툴 때) 7살 되는 양진녕의 아들 양광락은 “난 앞으로 혼자서 노벨상을 수상하겠어”하고 말했다. 1977년에 양진녕은 량은좌 등과 함께 “미국화교협회”를 창립하여 중미관계를 촉진했다. 양진녕은 프린스턴대학연구소 교수, 뉴욕주립대학 석계분교 아이스탄강좌 교수와 리론물리연구소 소장을 력임했다. 또 1986년부터 향항중문대학 박문강좌 교수로 있었고 1995년에는 국립화교대학명예교수로 초빙되였으며 1997년에는 청화대학 고등연구중심 영예주임을 맡았고 1999년에는 정식으로 영예퇴직을 하고 청화대학 교수를 맡았다. 2003년말에 북경에 들어와 거주하면서 선후로 중국과학원, 미국국가과학원, 영국황가학회, 로씨야과학원, 대만중앙연구원, 로마교황학원 및 유럽 여러 나라와 남아메리카주의 과학원 등의 원사 영예직함과 영예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광동동관리공학원 명예교장을 맡고있다. 새 중국이 성립된후 양진녕은 등가선 등처럼 귀국하여 나라를 위해 일하지 못했다. 1971년부터 양진녕은 여러차례 중국에 와서 친척방문을 하고 강좌를 했으며 중미과학기술교류와 합작을 위하여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 시기 주은래가 그더러 조국에 돌아와 사회주의건설에 힘을 이바지하라고 청하였지만 그는 중국의 조건이 차하다는 리유로 거절했다. 2000년이후 양진녕은 자기가 자라난 조국으로 돌아왔다. 양진녕은 자기의 령혼심처에서 고려가 가장 많았던 문제는 자신의 중국뿌리와 미국국적에 관한 문제였다고 말했다. 양진녕이 미국국적에 가입할 때 그의 아버지는 반대하면서 그와 부자관계를 끊겠다고 성명을 발표하면서 죽어도 양진녕을 용서하지 않겠다고 했다. 이 일은 절대다수 국적을 바꾸려는 사람들이 반드시 겪어야 하는 몸부림일것이다. 지금 양진녕은 마음이 편안해졌다. 한것은 그가 조국으로 돌아왔기때문이다… 그번 만남이 있은후 양진녕은 밤낮 옹범의 생각에 빠져버렸다. 그녀의 청순한 얼굴이 자꾸만 눈앞에 떠오르며 잠을 이룰수 없었다. 그의 고독한 마음을 진솔하고 사랑스러운 녀인이 따뜻하게 해주었던것이다. 양진녕은 짬이 있을 때마다 그리움을 참지 못해 옹범한테 전화를 걸군 했다. 옹범은 과외시간에 양진녕의 전화를 받는것이 점점 습관되였다. 과학할아버지의 전화를 받는것은 이미 그녀의 생활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으로 되였다. 그녀는 늘 전화가 오던 그 시간이 되여도 양진녕의 전화를 받지 못할 때는 허전함을 느꼈다.      
191    인류는 왜 전쟁을 좋아할가? 댓글:  조회:6191  추천:18  2014-08-01
인류는 왜 전쟁을 좋아할가?   김희수     남자아이들은 전쟁영화를 즐겨보고 전쟁놀이를 좋아하며 군인을 흠모한다. 아이들은 서로 사람을 죽이는 전쟁영화를 보면서도 아군이 적군을 쓸어눕히는 장면이 나오면 통쾌하게 박수를 친다. 또한 완구총을 들고 전쟁을 모방한 전쟁놀이를 신나게 해보기도 한다.   우리 어릴 때도 전쟁놀이를 많이 해보았다. 편을 갈라서 나무를 깎아 만든 총이거나 백화상점에서 사온 장난감총을 들고 입으로 “땅!”하고 상대방을 쏘고는 “넌 죽었다!”하고 신나서 환성을 지르기도 했다. 지금의 아이들은 이런 전쟁놀이는 하지 않지만 전쟁게임은 하고있다.   하지만 평화시대에 사는 아이들은 실제로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전쟁이 얼마나 잔인한지 모른다. 눈길을 중동에 돌려보자. 거의 매일이다싶이 총소리와 포소리를 들으며 자란 그곳 아이들은 무고한 민간인들의 목숨까지 무수히 앗아가는 전쟁이 얼마나 잔인한가를 공포와 고통속에서 몸으로 느끼고있다.   학자들은 인류력사는 전쟁의 력사라고 말한다. 미국의 미래학자 엘빈 토플러(阿尔文·托夫勒)는 그의 저서 《전쟁과 반전쟁》에서 “지구상에 유엔이 창설된 이후 1990년대까지 45년간 전쟁이 없었던 기간은 단 3주일에 불과했다”는 수치를 제시하면서 인류의 력사는 전쟁의 력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것을 실증해주었다.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가 발생하지 않았던 평등사회(원시공동체)에서는 전쟁이 없었다. 생산력발전으로 생산수단을 독점하는 인간집단이 출현하고 개인이 소유하는 재산이 생기고 이들이 가난한 인간집단을 착취하고 지배할수 있게 되여 계급이 발생하고 원시공동체사회의 붕괴와 더불어 최초의 계급사회인 노예제사회가 형성되면서 부락과 부락간에 더 많은 재산과 노예를 차지하고 더 큰 땅을 차지하기 위한 전쟁이 발생되였다.   이렇게 전쟁은 인간의 욕심에서 시작되였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남의 나라의 자원을 략탈하고 자국의 경제리익을 챙기기 위해 사람을 죽이고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리는 전쟁을 하는것이다. 얼마나 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전쟁으로 죽었는지 모른다. 또 얼마나 많은 군인들이 왜서 일어난 전쟁인지도 모르고 왜서 해야 하는 전쟁인지도 모르고 젊은 목숨을 바쳤는지 모른다.   칭키스칸이나 나뽈레옹을 영웅이라고 부르지만 그들이 일으킨 전쟁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가를 생각해보았는가? 전쟁에서 죽은 사람들은 응당 죽어야 할 사람들이였을가? 왜 이런 전쟁은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하는가?   혹자는 전쟁이 없었으면 발전도 없다고 말한다. 그들은  인류의 력사상 전쟁이 없었다면 인류는 행복하게 살았을가고 질문하면서 인류가 발전하고 력사가 진보할수 있었던 리유는 위대한 과학자도 아니고 정치가나 예술가도 아니고 바로 전쟁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는 전쟁을 일으키려는 나라가 전쟁을 정당화하려는 궤변일뿐이다.   혹자는 또 인류는 전쟁을 통해 령토를 넓히고 문명을 받아들이고 확산시키며 서로 발전해 나갔다고 말한다. 어쩌면 그럴듯한 말처럼 들린다. 하지만 이것도 전쟁, 문명, 발전이란 개념을 혼동시켜 전쟁을 미화화려는 허튼소리이다. 끊임없이 되풀이 되는 전쟁은 인류를 발전의 길로 인도하는것이 아니라 인류를 멸망의 길로 이끌것이다.   저 이라크, 리비아, 시리아, 팔레스티나 등 나라들처럼 실제로 총알이나 폭탄이 당신을 향해 날아온다고 생각해보면 서로 상대방을 죽이는 싸움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날가? 당신이 숨을 곳도 없어 오늘밤 죽을지도 모르는 가자지구의 주민들처럼 무서운 밤을 보내야 한다면 전쟁을 강건너 불구경하듯이 재미있게 보고만 있을수 있을가? 사방에서 날아오는 총알과 폭탄에 내 부모가 죽고 내 형제가 죽고 내 처자식이 죽는다면 전쟁이 꼭 필요하다는 말을 할수 있을가?   인류문명이 발전할수록 아이러니하게도 사람을 죽이는 무기도 발전했다. 전쟁을 준비하고있는 여러 나라들은 버튼 하나만 눌러도 적국의 주요도시를 초토화시킬수 있는 미사일, 적국의 정보를 수집하고 지상 또는 공중에서 전천후타격을 수행할수 있는 무인스텔스전투기, 연료보급이 필요없는 핵잠수함, 미사일공격에 대응하는 미사일방어체계 등 위력이 더 강하고 사람을 더 많이 죽일수 있는 최첨단무기들을 보유하고있다. 하지만 이에 만족하지 않고 이 보다 더 위력이 강하고 사람을 더 많이 죽일수 있는 무기를 개발하려고 치렬한 경쟁을 벌리고있다. 버튼 하나만 누르면 이 지구상의 인류를 모두 멸망시킬수 있는 무기를 개발하지 못하는것을 안타까와 할 지경이다.   이 지구상에 전쟁이 없었으면 하는것이 평화를 념원하는 모든 사람의 공통된 생각일것이다. 이처럼 전쟁은 꼭 피해야 할것이지만 피할수 없는것이기도 하다. 지금도 일부 나라에서는 군비경쟁과 패권다품이 계속되고있다. 일본은 그렇게 꿈꾸던 대동아공영권이 종말된지 70년이 되여오지만 지금도 력사의 교훈을 망각한채 집단적 자위권이란 구호를 내걸고 일본을 전쟁을 할수 있는 나라로 만들고있다. 전쟁에 환장한 나라다.   미국과 로씨야(러시아)는 세계를 제패하여 다른 나라들을 괴뢰로 만들어 자국의 경제리익을 챙기려고 군사력증강에 혈안이 되여있고 중국은 싸워서 이길수 있는 군대, 령토주권을 철저히 수호할수 있는 군대를 육성하려고 국방력강화에 박차를 가하고있다. 우리와 가까운 이웃인 조선반도(한반도)에서도 군사적 긴장상태가 되풀이되고있다.   지금 이 시각도 팔레스티나 가자지구에서는 전쟁이 계속되고있다. 지난 7월 8일에 이스라엘이 공습을 시작한 가지지구에서 아직도 총소리가 멎지 않고있다. 하루 100명이상 사망자가 나온다는 그 곳의 통곡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인간의 욕망이 사라지지 않는한 전쟁은 끝나지 않을것이다. 정말 진정한 평화란 존재하는걸가? 전쟁이 없으면 평화도 없을것이다. 전쟁때문에 존재하는 평화가 슬프다. 평화가 없어야 진정한 평화가 이루어진다. 평화가 없다는것은 전쟁도 없다는것을 의미하니깐.      
190    송태조의 선택 댓글:  조회:3209  추천:0  2014-08-01
송태조의 선택   ○ 풍몽룡(명나라 문학가)     옛날에는 제후국들이 임금에게 곡물을 바치는 법이 있었다. 남당에서는 곡물문제를 상의하기 위해 서현을 송나라로 파견하기로 했다. 서현은 언변이 아주 뛰여난 총명한 인물이였다. 원칙대로라면 송나라에서는 최소한 차장(次长)급 인물이 서현을 영접해야 했다. 그런데 송나라의 차장급 인물들을 두루 흝어보아도 남당의 서현에 비해서는 인물이 아닌지라 송나라 대신들은 적합한 인물을 고루지 못해 안절부절 못했다. 마침내 대신들은 이 일을 송태조에게 아뢰였다. “우리 나라에서는 서현을 맞이할 적합한 인물이 없는듯 하옵니다.” 송태조가 말했다. “왜 인재가 없다고들 하오? 경들은 잠간 물러가도록 하오. 내가 생각해 보겠소.” 뜻밖에 송태조는 궁정의 하인들 가운데서 글을 깨우치지 못한 10명의 명단을 작성해 올리라는 엉뚱한 어명을 내렸다. 신하들은 재빨리 하인 10명의 명단을 써서 송태조에게 바쳤다. 하인명단을 쭉 훑어보던 송태조가 연필로 한 사람의 이름에 동그라미를 치며 말했다. “이 사람이면 될것같소. 이 사람이면 훌륭해!” “예?” 대신들은 깜짝 놀랐다. 글을 깨우치지 못한 하인들가운데서도 제일 까막눈인 사람을 송태조가 점찍었던것이였다. 그렇다고 송태조에게 따져볼수도 없는 노릇인지라 대신들은 할수 없이 그 하인을 궁정으로 불러들였다. 결국 하인이 서현의 영접자자격으로 나선셈이였다. 자리를 정하고 앉자마자 짐작했던 바와 같이 서현의 말솜씨는 청산류수인지라 송나라 대신들의 마음은 옥죄여지는듯 했다. 일자무식의 송나라 하인은 도저히 무엇이라고 대답할수가 없었다. 그는 매우 긴장된 얼굴로 그냥 “예, 예”라고 응대만 했다. 서현은 서현대로 어찌된 영문인지를 몰라 이 말 저 말을 번갈아해가며 상대방의 입을 열어보려고 무진 애를 썼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갔다. 그때까지 단 한마디의 대답도 들어보지 못한 서현은 그만 지쳐버려 입을 다물고말았다. 송태조는 대국의 체면을 지키기 위해 이렇게 한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싸우지 않고 상대를 굴복시키는 현인들의 묘책이다. 송태조가 문맹하인을 파견한것은 우둔함으로 지혜를 정복한 방법이다. 지혜로운 자로써 우둔한 사람을 설득시키려 들면 우둔한 자는 리해하지 못하고 지혜로운 자로써 지혜로운 자를 정복하려고 들면 지혜로운 자는 굴복하려고 하지 않는 법이다.    
189    개가 사람을 물어도 뉴스 사람이 개를 물어도 뉴스 댓글:  조회:7406  추천:12  2014-07-28
개가 사람을 물어도 뉴스 사람이 개를 물어도 뉴스   김희수     1980년대 말이였다. 그 당시 나는 뒤마을에 있는 한 친구의 집에 자주 놀러갔다. 그 친구는 여러 신문과 방송에 많은 기사를 발표한 통신원이였는데 그의 집에는 다른 통신원들도 모여들어 글쓰기에 대해 토론하기도 했다. 나는 사실을 적는 기사보다 허구로 상상해낸 소설을 쓰기 좋아했던지라 그들의 토론에 참여하지 않고 듣기만 했다.   그들은 그 시기에 한창 화제거리가 되였던 “개가 사람을 물었다는건 이제 더는 기사거리가 안된다. 사람이 개를 물면 아주 훌륭한 기사거리다.”라는 기사선택표준에 대해 쟁론했다. 그 시기에 아마도 평범한 사건을 기사로 작성하는 통신원들이 적지 않았기에 그런 기사선택표준으로 통신원들에게 흥미롭고 중요환 사건을 기사로 작성하라는 깨우침을 주려고 했던것 같다.   사실 “개가 사람을 무는건 뉴스가 안되지만 사람이 개를 물면 뉴스가 된다(狗咬人不是新闻,人咬狗才是新闻)”는 말은 19세기 미국언론인 찰스 데이나(查尔斯·达纳)가 1882년 《뉴욕선(纽约太阳报)》에 쓴 《뉴스란 무엇인가》라는 글에서 한 말이다. 이 리론의 핵심은 신기한 사건을 잡으라는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신기하고 특별한것이 뉴스라는것이다. 개가 사람을 무는 일은 너무 많기때문에 신선하지 않고 영향력이 없다. 그러나 사람이 개를 물었다면 매우 드문 사건이여서 독자들을 흡인할수 있기에 상대적으로 뉴스가치가 높다는것이다.   몇달전에 여러 신문사의 감독관리를 책임졌다는 분이 우리 신문사에 오셔서 강의를 한적이 있는데 그분도 “개가 사람을 물고 사람이 개를 무는(狗咬人 人咬狗)”리론에 대해 언급했다. 그분은 사람이 개를 물면 뉴스가 되는건 맞지만 개가 사람을 무는것도 경우에 따라 뉴스가 될수 있다고 하면서 직위가 높은 간부거나 유명인사, 스타가 기르는 개가 사람을 물어놓았다면 뉴스가 될수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아주 평범한 산골농민이 기른 개가 그 마을을 방문온 높은 간부를 물어놓았다면 뉴스가 될수 있다고 말했다. 그외에도 여러가지 사례를 언급하고나서 마지막으로 평범한 집에서 기르는 개가 평범한 일반인을 물어놓았다면 뉴스가 될수 없다고 말했다.   나는 그분의 마지막 말에 이의가 있었지만 그 분의 체면때문에 그 자리에서 감히 말하지 못했다. 그분은 개가 사람을 무는것도 경우에 따라 뉴스가 될수 있다고 했지만 평범한 사람이 기르는 개가 평범한 사람을 무는것도 경우에 따라 뉴스가 될수 있다는것을 보아내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평범한 개가 평범한 사람을 무는것은 뉴스가 아니라고 성급하게 결론을 내려버리지 않았나 싶다.   우리는 이런 경우도 생각해보아야 한다. 평범한 집에서 기르는 개가 평범한 사람을 물었다고 할 때 개가 물어놓은 부위에 따라 뉴스가 될수도 있고 뉴스가 되지 않을수도 있다. 즉 평범한 개가 평범한 사람의 생식기를 물어놓았다면 뉴스가 될수 있다. 또 개의 주인과 개에게 물린 사람의 관계, 장소, 시간에 따라 뉴스가 될수도 있고 뉴스가 되지 않을수도 있다. 개에게 물린 사람이 개주인의 며느리이고 물린 시간이 결혼식날이고 장소가 결혼식장이라면 평범한 주인이 기른 개가 평범한 사람을 물었다고 해도 뉴스가 될수 있다. 또 개에게 물린 사람이 도적이거나 강간범이라면 뉴스가 될수 있다. 따져보면 이외에도 이러루한 경우는 얼마든지 있다.   우리 주변에서는 하루에도 수많은 사건들이 벌어지고있다. 이 가운데서 가장 최근에 벌어지고 중요하면서도 많은 사람들에게 흥미를 주는 사건을 선택해 기사를 작성해야 한다. 평범한 일상생활의 얘기와는 다른, 대중들의 관심이 높고 영향을 주는 중요한 사건을 뉴스로 다루어야 한다.   사람이 개를 무는 뉴스를 발견하려면 독특하고 예리한 관찰력을 가져야 한다. 홍콩에서는 일부 기자들을 파파라치(狗仔队)라고 부른다. 이런 기자들은 개처럼 코가 령민하여 냄새를 잘 맡는다. 그들은 일단 냄새(주로 연예인의 사생활에 대한 냄새)만 맡으면 모든 방법과 수단을 가리지 않고 뉴스거리를 먼저 빼앗으려고 다툰다. 우리는 이런 파파라치를 본받지 말아야 한다. 물론 독자들을 사로잡는 기이하고 흥미로운 얘기도 좋지만 그 보다는 인민대중들의 관심사인 민생에 대한 기사를 많이 쓰는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지금은 사람마다 스마트폰으로 정보를 전하고 정보를 공유하는 시대이기에 정보의 홍수속에서 쓰레기정보도 엄청난 량을 점한다. 때문에 뉴스다운 뉴스를 선정해 기사를 작성하는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본다.    
188    장개석과 대계도가 함께 사랑했던 일본녀자 댓글:  조회:6932  추천:1  2014-07-27
장개석과 대계도가 함께 사랑했던 일본녀자   (번역)     장개석에게는 정식으로 맞아들인 4명의 안해외에 정부가 많았는데 그중에는 일본녀자도 있었다. 1913년에 손중산이 령도한 제2차혁명이 실패했다. 손중산은 일본에 가서 망명생활을 했는데 원세개정부는 손중산을 위수로 하는 혁명당인을 잡아들이면서 일본정부에 손중산체포를 협조해줄것을 요구했다. 일본정부는 자신의 리익을 위하여 겉으로는 원세개정부의 요구를 들어주는척 했지만 암암리에 우익단체 “흑룡회”의 조직원들을 파견하여 손중산을 보호해주었다. 그무렵에 상해에서 제2차혁명에 참가했던 장개석(蒋介石)과 대계도(戴季陶)에게도 체포령이 내려졌다. 그들은 함께 일본으로 도망가서 손중산의 거처를 자주 드나들었다. “흑룡회”에는 신엔 미찌꼬(津渊美智子)라는 용모가 매우 아름다운 하녀가 있었다. 장개석이 올때마다 이 하녀는 매우 열정적으로 맞아주었다. 그렇게 여러번 접촉하면서 눈이 맞은 두 사람은 남몰래 동거하기 시작했다. 미치코는 장개석과 가까이 지냈지만 대계도와도 친했다. 그후 2년동안 장개석은 중국과 일본을 오갔는데 매번 일본에 체류하는 기간에는 늘 미찌꼬와 함께 있었다. 그러다가 1916년 6월에 원세개가 죽자 장개석과 대계도는 중국으로 돌아갔다. 1920년 가을에 생각지도 않았던 날벼락이 두 사람을 덮쳤다. 장개석의 방문을 세차게 두드리는 사람이 있었다. 미찌꼬가 서너살이 된 사내아이의 손을 잡고 서있었다. 장개석은 반가움과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반가운것은 옛 사랑을 다시 만나서이고 당혹스러운것은 아이가 누구의 아이일가 하는것 때문이였다. 다행히 미찌꼬는 “대계도의 혈육을 데리고왔다”고 말했다.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장개석은 밖으로 뛰여나갔다. 몇층만 올라가면 대계도의 집이였다. 장개석에게서 미찌꼬가 아이를 데리고왔다는 말을 들은 대계도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는 누가 들을세라 장개석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이건 우리 둘의 황당했던 과거의 일입니다. 한때의 풍류였는데 생각도 하기 싫습니다. 지금은 처자가 있잖습니까? 알다싶이 우리 집사람이 얼마나 사납습니까? 그 암펌이 알기라도 하는 날에는 난 끝입니다. 그러니 내 주소도 모르고 찾을 방법도 없다고 전해주십시오.” 장개석은 대계도가 시키는 대로 둘러댔다. 다 듣고 난 미찌꼬는 한바탕 울어댔다. “당신들은 다 형편없는 놈들이야. 자신의 혈육도 필요없다니 나도 필요없어!” 미찌꼬는 아이를 내려놓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장개석이 황급히 쫓아가 찾아보았지만 종적이 묘연했다. 장개석은 미찌꼬가 팽개치다싶이 두고간 사내아이에게 장위국(蒋纬国)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족보에도 올렸다. 생모가 누구인지는 적지 않았다. 고향에 보내 결발안해 모복매(毛福梅)와  첩 요야성(姚冶诚)이 3개월씩 돌아가며 키우게 했다. 부지런하고 현숙한 모복매는 14살밖에 안된 장개석에게 시집을 와서 내조를 잘하면서 장경국을 낳았지만 1927년에 장개석에게 리혼을 당했고 1939년 12월 12일에 불행하게도 폭탄에 맞아 사망되였다. 요야성은 남편이 아편중독자였기에 핍박에 의해 가무청에 들어가 사교계의 꽃으로 되였다. 그무렵에 장개석을 만나 첩으로 되였지만 봉건사상이 뿌리깊었던 장개석의 부모가 반대하였기에 장개석의 4명처첩중에서 유일하게 정식명분이 없었다. 장개석과 결혼한후 아이를 낳지 못했던 그녀는 모복매가 장개석과 리혼한후 장위국을 도맡아키웠다. 그녀는 1949년에 장위국을 따라 대만에 가서 1966년에 사망될 때까지 장위국과 함께 살았다. 그런데 사실 미찌꼬는 장개석과 대계도와 살면서 장위국외에 1916년 10월 16일에 둘째아들 대안국(戴安国)을 낳았고 1920년에 또 딸 안세방(颜世芳)을 낳았다. 이때문에 대안국과 안세방만 대계도의 자녀이고 장위국은 장개석의 아들이라는 설이 떠돌았다. 미찌꼬는 1977년에 사망되였다. 1989년에 장위국은 “내가 누구의 아들인지 나도 모른다. 궁금하지만 밝혀낼 방법이 없다”며 답답함을 토로했다. 이어 “장개석의 아들이여도 좋고 대계도의 아들이여도 좋다”는 말을 했다. 사실여부를 증명해줄 사람들은 끝내 입을 열지 않고 세상을 떠났다. 
187    모택동의 신변에 잠복한 군통특무 댓글:  조회:6404  추천:1  2014-07-19
모택동의 신변에 잠복한 군통특무   (번역)     1913년 2월 18일에 절강성 선거현 하각향 서륙촌에서 출생한 심지악은 공산당의 신분으로 자신을 감추면서 연안의 모택동신변에 잠복해있은 군통특무였다. 1933년에 22살 되는 심지악은 상해복단대학에서 공부하면서 공산당동학들의 영향을 받아 적지 않은 공산주의서적을 읽었고 로동자운동을 지지하기 시작했다. 그후 공산당을 통해 포동석탄회사에서 로동자로 있으면서 로동자운동을 지도하다가 붙잡혀 국민당정부의 감옥에 들어갔다.  심지악은 비록 로동자운동을 동정하고 좌파청년들과 접촉했지만 공산당에 가입하지는 않았다. 대립은 한고향사람인 심지악이 총명하고 예민한것을 보고 호감을 가졌다. 대립은 심지악을 설복하여 비밀리에 국민당특무조직에 가입시키고 단선련계를 가졌다. 대립은 심지악에게 중국공산당조직에 가입하여 잠복해있으라고 지시했다. 심지악은 대립의 지시대로 로동자운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였을뿐만아니라 중국공산당조직의 정보를 얻기 위해 정식으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했으며 상해에서 공산당의 정보를 전달하는 임무를 맡았다. 1937년 봄에 서안사변이 결속된지 얼마안되여 국민당과 공산당이 2차합작협의를 맺었지만 국민당정부는 공산당에 대해 우려하면서 의연히 공산당을 심복지환의 대적으로 인정했다. 은페된 전선은 쌍방의 승부를 결정할수 있는 주요한 전장(战场)이였다. 대립은 장기적인 관찰을 거쳐 심지악이 성숙되고 신중하며 조심스럽고 빈틈이 없어 능히 중임을 담당할수 있다고 인정했다. 대립은 심지악에게 공산당조직의 심장인 연안에 깊이 잠복해있으면서 정보를 수집하라고 지시했다. 대립의 명령을 받은 심지악은 혁명의 성지인 연안에 있는 《항일군정대학(원 홍군대학)》에 가서 공부하겠다고 조직에 신청했다. 심지악은 상해에서 다년간 로동자운동을 지도했고 국민당감옥에 갇힌적이 있었으며 복단대학에서 맑스주의서적을 읽은적이 있었기에 공산당조직에서는 그의 신청을 곧바로 비준했다. 연안에 도착한 심지악은 항일군정대학 제2기생으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심지악은 재치있고 로련하며 학습성적이 우수했기때문에 학교간부들의 호감을 샀다. 연안지도층에서는 조국의 방방곡곡에서 모여든 진보청년들속에 적지 않은 국민당특무들이 혼입했을것이라고 단정했다. 엄밀하게 판별하고 고찰하는외에 돌연습격으로 방법으로 항일군정대학 학생들속에서 특무들을 사출해냈다. 어느날에 어느 교원이 수업강의를 하다가 갑자기 손으로 학생들을 가리키며 “저 보시오. 국민당이 파견한 특무놈을 좀 보시오!”하고 큰소리를 친다. 그러면 담이 작은 학생들은 몸을 떨면서 즉시 낯색이 파랗게 질린다. 그때 학생들속에 있던 사업일군들이 공포에 떨고있는 학생들을 붙잡으면 틀림없는 특무였던것이다. 하지만 이런 정황에서도 심지악은 태연자약했기에 신분이 드러나지 않았다. 그는 공산당요원들과 친하면서 중공중앙기관의 정보를 수집했다. 심지악은 성적이 우수했기때문에 졸업후 모택동의 신변에서 사업할 비서중의 하나로 선발되였다. 심지악은 신분을 감추고 깊이 잠복해있었다. 항일전쟁이 폭발된후 중공중앙에서 발부한 약간의 중요서류와 심지악이 수집한 중요정보들은 비밀리에 중경으로 전달되였다. 1933년에 대립의 설복에 의해 군통특무로 되여서부터 1941년 겨울에 중경으로 돌아가기전까지 심지악은 공산당핵심조직에 9년동안 잠복해있었다. 심지악과 함께 사업한 적이 있는 장애평은 심지악에 대해 이렇게 평가한 적이 있었다. “심지악은 9년동안 공산당원으로 있는 기간에 7년은 모범당원이였다. 그는 개성이 주은래와 비슷했는데 내성적이고 온화하고 함축적이였다.” 1994년 2월에 심지악이 대북에서 사망되였을 때 대북 《중앙일보》에 실린 추모문장에는 “중공의 전임 국방부장 장애평은 심지악을 ‘지용이 겸비하고 나라를 사랑하고 두 주인을 섬기면서 량쪽이 모두 상하지 않게 했다’고 평가했다”는 구절이 있었다. 바로 이 “두 주인을 섬기면서 량쪽이 모두 큰 손실을 입지 않게 했다”는것은 사람들에게 무한한 추측을 불러일으켰다. 숱한 사람들이 그 비밀을 알려고 심지악에게 접근했다. 하지만 누구도 심지악의 입에서 반마디의 해석도 듣지 못했다. 중국인민해방군이 도강을 시작하던 1949년 3월에 대량의 국민당군은 주산(舟山)으로 철퇴했는데 그 시기 심지악은 보밀국의 “소절정보소(苏浙情报站)”의 소장직을 맡고있였다. 심지악은 주산에서 정보소 소장직을 맡고있는 1년기간이 자신의 정치생명에서 전환점이 될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1950년 3월에 보밀국에서는 중국공산당 대만성사업위원회 서기 채효건의 공산당간첩사건을 해명했다. 채효건은 중공화동국에서 파견한 지하당 녀당원 주심지를 고발했다. “주심지는 대만전략방어도를 포함한 중요한 군사정보를 가지고 주산으로 달아났는데 곧 배를 타고 상해로 가려고 준비하고있습니다다.” 공산당의 변절자 채효건을 통해서 이런 정보를 장악한 대북보밀국은 주산의 정보소 소장 심지악에게 비밀전보를 보내 꼭 녀공산당원 주심지를 붙잡으라고 명령했다. 만약 주심지를 붙잡지 못하게 되면 중국인민해방군이 주심지가 전해준 정보를 리용하여 대만에 등륙할수 있다고 했다. 이 위급한 정황에서 조심스럽고 빈틈이 없는 심지악은 시간앞에서 달리는 정신으로 수색작업을 벌렸다. 그는 주산도(舟山岛)의 45만명 군민들속에서 주심지를 찾아내여 붙잡았다. 1905년에 절강성 진해현에서 출생한 주심지는 중국공산당의 우수한 당원이며 혁명렬사이다. 그녀는 본명이 주이음이고 애명이 주계봉였는데 혁명에 참가한후 이름을 주풍으로 고쳤다. 5.30운동후 혁명에 참가한 주심지는 1945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고 1949년 겨울에 대만에 파견되여 정보수집사업을 출중하게 완성하였다. 그녀는 반역자 채효건의 고발로 심지악에게 붙잡혀 감옥에 갇혔다가 1950년 6월 10일에 대만 마장정 사형장에서 영용히 희생되였다. 2010년 12월 9일에 주심지렬사의 골회는 고향땅에 안치되였다. 2011년 7월 14일에 주심지렬사의 골회는 다시 절강성 진해혁명렬사릉원에 안치되였다. 심지악이 공을 세울 때는 바로 장경국이 특무계통을 정돈하려고 계획하고있을 때였다. 1950년 5월에 장개석은 심지악을 “대통령부자료소조” 석비훈련반 부주임으로 임명했다. 주요임무는 “대통령부자료소조” 주임인 장경국을 협조하여 석비훈련반의 툭무를 배향하는 일이였다. 이때는 또 심지악과 장경국의 관계가 밀접한 시기였다. 그후 심지악이 대진방위사령부 정치부주임을 맡은 4년남짓한 기간에 장경국은 대진에 자주 찾아오면서 심지악과 조석으로 만나서 심후한 감정을 쌓아갔다. 심지악도 에누리없는 “태자계(太子系)”의 사람으로 되였다. 1958년 봄에 심지악은 조사국(调查局) 부국장직을 맡았고 1964년에는 조사국 국장으로 승진되여 대만 “조사국의 아버지”로 불리웠다. 1979년 3월에 심지악은 리직했지만 장경국은 그를 자신의 곁에서 떠나지 못하게 했다. 장경국은 그를 “대통령부 국책고문”으로 초빙하고 대통령부인 장경국판공실옆에 심지악의 사무실을 만들어놓았다. 장경국이 사망될 때까지 심지악은 줄곧 국민당정부에서 가장 신임하는 특무계통의 원로였다. 심지악은 1990년에 전위선암말기였는데 1993년 11월에 암세포가 페부에까지 확산되였다. 그 기간에 심지악은 안해 서로(徐露)의 권고대로 북경에 가서 명의를 찾았다. 북경에 체류하는 기간에 심지악은 북경조어대 국민관에 들었지만 대륙방면의 초대를 받지 않겠다고 고집하면서 주숙비를 포함한 전부의 비용을 자신의 돈지갑을 털어 물었다. 대륙의 최고층에서 심지악을 접견하겠다고 했지만 그는 “저는 북경에 병을 보이러 왔을뿐 다른 뜻은 없습니다”하고 거절했다. 심지악의 옛 동창생인 장애평은 명나라의 명의인 리시진의 후대를 찾아서 심지악의 병치료를 해주도록 배치했다. 치료기간에 장애평과 심지악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전 국가주석 양상곤은 심지악을 만나 대륙을 떠난후 대만에서 있었던 일들에 대해 알려줄것을 바랐다. 대륙방면에서는 심지악이 대만에서 생활한 기간에 대한 기록이 공백이였기때문이였다. 1994년 2월에 심지악은 병으로 대북에서 사망되였다. 82세로 일생을 마치면서 그는 그 어떤 서류도 세상에 남기지 않고 수많은 력사의 비밀을 가지고갔다.    
186    월드컵 사나이들의 그 눈물 댓글:  조회:9251  추천:10  2014-07-14
월드컵 사나이들의 그 눈물   김희수     지구촌 최대의 축구축제인 2014브라질월드컵이 북경시간으로 지난 6월 13일 새벽 4시에 브라질과 크로아티아의 경기로 선을 보인것이 어제 같은데 벌써 7월 14일 북경시간으로 새벽 3시에 시작된 독일과 아르헨띠나(아르헨티나)의 결승전도 독일팀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개막전에서는 개체국 브라질팀이 크로찌아팀을 상대로 3대1로 승리를 거두었고 결승전에서는 독일팀이 아르헨띠나팀을 상대로 1대0으로 승리해 우승컵을 받아안았다. 최종 승자 독일은 기쁨의 눈물을 흘리고 아르헨띠나는 상심의 눈물을 쏟았다.     이번 월드컵에서 무엇보다도 가장 인상적인것은 축구선수와 축구팬들의 눈물이였다. 사나이는 쉽게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그러나 11명씩 출전해 두 팀이 자웅을 겨루는 축구장에서는 강자라고 불리는 사나이들도 지거나 이기게 되면 어쩔수 없이 눈물을 흘린다. 지면 상심의 눈물, 이기면 기쁨의 눈물을 90분 혹은 120분 뛰여다니던 잔디밭에 뿌린다.   2010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에서 화란(네덜란드)을 1:0으로 이기고 우승했던 에스빠냐(스페인)는 4년만에 다시 강적 화란을 만나 1:5로 참패를 당하고 이어 칠레에 0:2로 무릎을 꿇는 수모를 당하면서 16강행이 좌절되여 잔디밭에 통한의 눈물을 뿌리며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D조의 강팀으로 16강이 무난하리라고 점찍었던 잉글랜드와 이딸리아(이탈리아)는 선후로 꼬스따리까(코스타리카)와 우루과이의 벽을 넘지 못해 조별리그에서 탈락하는 수모를 당하면서 부끄러운 눈물을 감추면서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조선팀이 8강돌풍을 일으켰던 1966잉글랜드월드컵에서 우승했던 잉글랜드, 1934이딸리아월드컵, 1938프랑스월드컵, 1982에스빠냐월드컵, 2006독일월드컵에서 우승했던 찬란한 력사를 지녔던 이딸리아가 처참하게 무너지리라고 누가 예상했겠는가?   뽀르뚜갈(포르투갈)은 메시와 함께 세계 최고의 공격수로 꼽히는 크리스티아누 호날두(克里斯蒂亚诺·罗纳尔多)를 앞세웠지만 독일과 미국의 벽을 넘지 못해 16강진출에 실패했다. 혼자의 힘으로 고독했던 호날두는 골을 넣고도 눈물을 흘렸다. 호날두는 세계에서 가장 비싼 몸값을 자랑하는 선수이다. 년봉은 2013년 기준 5374만유로이다. 2014년 브라질월드컵 출전선수중 가장 많은 년봉을 받는 선수이다.     한국팀은 1차전에서 로씨야(러시아)와 1-1로 무승부를 기록해 아쉬움을 남겼지만 그래도 16강진출이 가능했다. 그러나 2차전에서 알제리팀에 2-4로 참패를 당하면서 축구팬들에게 실망을 주었다. 그래도 심연에서 빠져나올 실날같은 희망이 남아있었지만 3차전에서 벨지끄(벨기에)에 0-1 패배해 16강이 좌절되였을뿐만아니라 이번 월드컵경기에서 한번도 이겨보지 못한 아시아팀들의 자존심을 지켜내는데도 실패했다.   조별예선에서 강팀 에스빠냐를 꺾고 이변을 일으키며 16강에 오른 칠레는 브라질과 1대1로 빅으면서 연장전까지 동점을 유지했지만 승부차기에서 패배해 아쉽게도 8강에 진출하지 못해 눈물을 쏟았다.   1998프랑스월드컵에서 우승한적이 있는 프랑스는 8강에 올랐지만 강팀 독일에 0대1로 무릎을 꿇으면서 눈물을 흘리며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1930우루과이월드컵과 1950브라질월드컵의 우승국인 우루과이는 북경시간으로 6월 29일 새벽 4시에 있은 8강쟁탈전에서 C조의 최강팀으로 16강에 오른 꼴롬비아(콜롬비아)에 0대2로 속절없이 무너지면서 8강꿈을 접고 눈물을 흘리며 집으로 돌아가는수밖에 없었다.   불운하게도 남미 강호 우루과이, 유럽 강팀 잉글랜드와 이딸리아와 함께 죽음의 D조에 속해  최약체로 지목됐던 꼬스따리까(코스타리카)는 최대 이변을 일으키면서 D조 1위로 16강에 올라 북경시간으로 6월 30일 새벽 4시에 그리스를 상대로 1대1로 빅으면서 120분 연장혈투를 거쳐 승부차기끝에 8강신화를 이루어냈다. 그리고 그 기세를 몰아 북경시간으로 7월 6일 4시에 유업 강팀 화란과 맡붙어 연장전까지 무승부로 나가다가 승부차기에서 져서 아쉽게도 돌풍을 멈추었다. 꼬스따리까는 패배의 눈물을 흘렸지만 추국팬들은 그들에게 박수갈채를 보냈다.    1958스웨리예(스웨덴)월드컵, 1962칠레월드컵, 1970메히꼬(멕시코)월드컵, 1994미국월드컵, 2002한일월드컵에서 우승한 축구왕국 브라질은 가장 많은 5차례의 우승에 전통의 남미 강호로 개최국의 리점까지 안고있어 유력한 우승후보로 꼽혔다. 그리고 삼바축구답게 조별예선에서 A조 1위로 16강에 오르는가 싶더니 칠레와 승부차기로 겨우 이기고 8강에 올라 꼴롬비아와 혈투를 벌려 겨우 2대1로 승리를 맛보았지만 네이마르(内马尔)가 상대 수비수 수니가(苏尼加)의 무릎에 허리를 맞고 중상을 입는 손해를 보게 되였다.     메시와 호날두에 버금가는 공격수인 네이마르를 잃은 브라질은 지난 7월 9일 북경시간으로 새벽 4시에 시작된 독일과의 준결승전에서 1대 7로 크게 참패를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상상도 못한 충격패를 당한 브라질은 통한의 눈물을 쏟았다. 브라질의 이 참패로 브자질팀의 광팬인 네팔의 15세 소녀가 자살까지 하는 비극이 벌어졌다. 브라질은 네덜란드와의 3-4위전에서도 0대3으로 완패를 당해 상심의 눈물로 이번 월드컵을 마무리지었다.     1978아르헨띠나월드컵과 1986멕시코월드컵에서 우승한적이 있는 아르헨띠나는 세계 최고의 공격수 리오넬 메시(里奥内尔·梅西)의 힘을 입어 조별예선에서 3전 전승으로 통과한 뒤에 16강전과 8강전에서 스위스와 벨지끄(벨기에)를 각각 1대0으로 꺾고 4강에 안착해 준결승에서 유럽 강팀 화란과 맡붙게 되였다. 룡과 범의 대결에서 아르헨띠나는 무승부로 승부차기까지 가면서 겨우 결승에 올라 기쁨의 눈물을 유감없이 쏟았다. 하지만 결승전에서 또 다른 유럽 강팀 “전차군단” 독일을 만나 룡과 범의 대결을 펼치다가 연장전에서 상대방에게 골을 내주며 실패의 눈물을 쏟았다.   1954스위스월드컵, 1974독일월드컵, 1990이딸리아월드컵에서 우승한 력사를 자랑하는 유럽 전통 강팀 독일은 세계 최고의 공격수 호날두를 가진 뽀르뚜갈(포르투갈)을 4대0으로 꺾고 16강에 오른후 알제리를 2대1로, 프랑스를 1대0으로 꺾고 4강에 오른후 준결승에서 무서운 상대로 여겨졌던 개최국 브라질을 만났다. 하지만 누구도 상상 못한 7대1의 대승을 거두면서 결승에 올라 기쁨의 눈물을 유감없이 쏟았다. 독일은 결승전에서 1대0으로 또 다른 남미의 강팀 아르헨띠나를 꺾고 24년만에 다시 월드컵우승트로피(大力神杯)를 들어올렸다.   지구촌 최대의 축구축제인 월드컵 잔디밭에서 흘리는 눈물은 실패의 쓴 눈물이든 승리의 단 눈물이든 모두 값진 눈물이다. 쉽게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나이들이 자존심을 구기면서 체면에 손상을 당하면서까지 흘릴만한 값진 눈물이다. 승자든 패자든 모두 박수갈채를 받아야 한다. 축구에는 영원한 승자도 없고 영원한 패자도 없다. 어제의 패자가 오늘의 승자로 될수 있고 오늘의 승자가 래일의 패자로 될수 있다.   다음의 2018러시아월드컵과 다음 다음의 2022카타르월드컵에서는 또 어느 나라의 팀들이 실패의 눈물과 승리의 눈물을 흘릴것인지? 기대된다. 2014년 7월 14일 아침.      
185    세번 약속을 어겨 림표의 운명을 개변시킨 장개석 댓글:  조회:6068  추천:2  2014-07-13
세번 약속을 어겨 림표의 운명을 개변시킨 장개석   (번역)     손중산이 사망된후 왕정위와 장개석의 권력다툼은 점점 심해졌다. 장개석은 울적한 가슴을 달래려고 황포군관학교 마당에서 산책하다가 황포군관학교 4기학원들이 수업을 보고있는 교실쪽으로 다가갔다. 그때 학생들은 전술과수업을 보고있었다. 장개석은 조용히 교실로 들어가 뒤쪽에 앉았다. 지도교원은 얼마전에 있었던 혜주공격전을 실례로 그번 전투가 승리할수 있었던 원인을 학생들에게 분석하게 했다. 마침 그번 전쟁은 장개석이 직접 지휘한것이였기때문에 장개석은 귀가 솔깃하여 듣고있었다. 학생들은 륜번으로 교단에 올라 자신의 견해를 털어놓았다. 장개석은 듣기만 하고 가타부타 태도를 표시하지 않았다. 림표의 차례가 되였다. 림표는 말은 몇마디 하지 않고 흑판에 혜주지형도를 그리기 시작했다. 림표는 정신을 집중하여 성곽과 민가, 지세와 지표, 산천과 하류를 자세하고도 정확하게 그렸다. 장개석은 그 다음을 보지 않아도 림표가 인재라고 단정했다. 림표는 이미 이번 과제에 대해 깊이 연구하여 손금보듯 환하게 꿰뚫고있었다. 용병지도(用兵之道)는 계획을 세우고 싸움을 시작하는데 있다. 림표는 전쟁의 정수에 대해 독특한 리해를 가지고있었다. 그런 림표는 장개석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주었다. 교실에서 살그머니 나온 장개석은 수행일군에게 수업이 끝난후 림표를 교장실로 불러오라고 분부했다. 얼마후 장개석은 림표와 비교적 긴 담화를 나누었다. 그때 림표와 나누었던 담화내용을 장개석은 10여년이 지난후에도 세절마다 생생하게 기억하고있었다. 그 시기 림표는 비록 햇내기학생에 불과했지만 자신의 속셈을 쉽게 드러내지 않았고 말을 천금같이 아꼈다. 이왕에 다른 사람들과 담화할 때 장개석은 늘 많이 물어보고 적게 대답하여 시종 주동권을 장악했다. 하지만 림표는 짐작하기 어려웠다. 림표는 물음에 대답할 때 한마디 말도 더 하지 않았다. 그의 입에서 나온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심사숙고한후 적당하게 내뱉은 말이였다. 장개석은 이상야릇한 감각을 느꼈다. 젊은이라면 응당 혈기가 넘치고 생기발랄해야 했다. 림표처럼 이렇게 어리지만 침착하고 어른스러우며 궁리가 깊은 사람은 처음이였다. 장개석은 직감으로 자신의 앞에 앉아있는 청년이 보기 드문 장군감이지만 다스리기 어렵고 예측할수 없는 사람이라는것을 알수 있었다. 사생간에 일문일답을 하면서 시간이 퍼그나 많이 흘렀다. 그때 교장판공실 비서 진립부가 노크하고 들어오면서 왕정위가 황포군관학교에 도착했으니 교장께서 나가 공무를 상의하기를 바란다고 청했다. “냥씨피(娘希匹)!” 장개석은 몹시 분개하여 입버릇이 된 욕설을 퍼부었다. 료중개가 사망된후 군관학교의 당대표직을 이어받은 왕정위는 장개석의 세력범위를 파고들어오려고 하고있었다. 장개석은 화가 났지만 당시 왕정위가 광동정부의 제1책임자였기에 참으면서 겉으로는 공손한척 했다. 왕정위가 또 황포군관학교에 찾아오자 장개석은 화가 난김에 몸을 돌려 바삐 나가느라고 림표에게 다시 보자는 말을 하는걸 잊었다. 림표는 자존심이 매우 강한 사람이였다. 그는 이 교장이 변덕스럽고 진정으로 자신을 중하게 여기지 않는다고 느꼈다. 방금전까지도 크게 등용하겠다고 고무격려하던 장개석이 일시에 낯색이 변하여 자신을 한쪽에 내 팽개친채 말도 없이 나가자 림표는 모욕을 당한 감을 느끼면서 그 일을 항상 마음에 품고있었다. 며칠후 장개석은 또 일부 학생들을 불러 개별담화를 했는데 그중에 림표도 있었다. 장개석은 림표에게 졸업하면 총사령부에 들어와 사업하도록 배치해주겠다고 승낙했다. 림표는 먼저번의 일로 장개석을 원망하고있었지만 이런 승낙을 받고나니 매우 격동되였다. 림표는 공산당조직의 사람이였기에 자신이 졸업하면 조직에서 배치해놓은 엽정독립퇀으로 가게 된다는것을 알고있었다. 그러나 혈기왕성하고 웅대한 포부를 실현하려는 마음이 매우 강렬했던 림표에게 총사령부는 매우 큰 흡인력이 있었다. 장개석은 림표를 보고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좋네. 내가 지금 싸움터에 나가야 되기에 후에 자네한테 련계하겠네!” 북벌전쟁에 나간 장개석은 호남성, 호북성, 강서성까지 쳐들어갔다. 그가 광동성을 떠난지 몇달이 되여 황포군관학교 4기생들이 졸업을 앞두게 되였다. 장개석은 진립부를 불러 4기생들의 졸업배치정황에 대해 물었는데 그중 전문적으로 림표에 대해서 물었다. 진립부는 당시 북벌군총사령부의 기요과장 겸 비서처 처장이였고 장개석의 심복이였다. 진립부는 “전 교장님의 뜻을 알겠습니다. 림표에 대해 조사한적이 있는데 그는 공산당분자일 가능성이 높고 그의 일부 친척도 중공(中共)의 주요인물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때문에 그를 교장님의 곁에 둔다는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봅니다”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난 장개석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이 황포군관학교가 공산당의 대본영이 되다니? 림표의 일은 다시 언급하지 않겠어. 난 승냥이를 내 곁에 불러들일수 없어!” 장개석과의 담화가 있은지 얼마 안되여 림표는 중공황포당단서기(党团书记) 웅웅에게 정황을 회보했다. 당시 웅웅은 “당신은 꼭 장개석의 신변에서 사업할수 있도록 이번 기회를 쟁취해야 하오. 그러면 앞으로 더욱 큰 역할을 하게 될거요”하고 확실하게 지시했다. 이런 지시를 받은후 림표는 총사령부에 들어가 사업할수 있도록 힘을 쓰리라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장개석은 두번째로 약속을 어겨 희망을 가득 품고있던 림표의 가슴에 차디찬 실망을 안겨주었다. 황포군관학교의 모든 졸업생들이 배치를 받았을 때에야 림표는 자신이 두번째로 조롱을 받았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그후 섭영진을 통해 림표는 결국 엽정독립퇀으로 들어가게 되였다. 그때로부터 림표의 휘황한 군인생활이 시작되였다. 림표는 수많은 전투를 지휘하여 승리하면서 천하에 이름을 날리게 되였다. 1941년 10월에 림표가 구쏘련에 가서 상처를 치료하고 귀국할 때 중공중앙에서는 국민당방면에 통지하여 림표가 서안을 통해 연안으로 돌아올수 있게 도움을 줄것을 바랐다. 그때는 제2차국공합작시기여서 큰국면을 위해 량당에서 서로 도움을 주는 일이 가능했다. 장개석은 림표라는 말을 듣고 몹시 중시를 돌렸다. 그는 림표를 자기의 사람으로 만들려는 생각을 가지고있었기때문이다. 장개석은 호종남을 불러 주의사항을 말한후 대립과 배합하여 림표의 안전을 책임질것을 부탁했다. 장개석은 호종남에게 “림표를 접대할 때 열정적이고 살뜰하게 대해주게. 림표가 친절감을 느낄수 있게 말이네”라고 지시했다. 호종남은 자신이 선배이고 림표보다 급이 더 높았지만 장개석의 명을 어길수 없어 한달음에 림표가 있는 서안주둔 팔로군판사처 소재지 칠현장으로 달려갔다. 당시 호종남은 10만대군을 거느린 큰 인물이였지만 림표에게 탄복하면서 따뜻하게 대해주었다. 림표는 워낙 과묵한 사람이였지만 호종남의 태도에 감염되여 말이 많아졌다. “술은 지기를 만나 마시면 1000잔으로도 모자란다”고 두 사람은 몇년전에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싸운적이 있었던 적이였다는것도 까맣게 잊고 권커니 작커니 하며 흥미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호종남은 림표와 이야기를 끝낸후 아무도 모르게 림표와 대립을 만나게 했다. 림표와의 담화를 마치고 관저로 돌아온후 대립은 흥분제를 먹은듯 흥분하여 문을 닫아걸고 림표와의 담화내용을 정리했다. 대립이 중경으로 돌아온후 장개석은 서안으로 갔던 일이 소득이 있는가고 물었다. 대립은 “위원장께서 분부한 일을 림표에게 전달했습니다”라고 간단하게 회보했다. 대립은 공을 세우기를 좋아하는 성격이여서 밥이 다 되기전에는 뚜껑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밥이 다 되면 다른 사람들이 짐작하지 못하는 큰 “폭탄”을 터뜨리군 했다. 대립이 감추기를 좋아하는 성격때문에 장개석은 림표의 마음이 움직이지 않은것이라고 여겨 그 일에 대해 다시 묻지 않았다. 림표도 장개석이 자신을 중시하지 않는다고 여겼다. 1971년에 림표가 비행기추락으로 사망되였을 때 장경국은 장개석에게 림표에 대한 서류를 발견하였다고 보고했다. 그것은 대립이 서안에서 림표와 비밀담화를 했을 때의 서면자료였는데 몇십년동안 방치되여 먼지로 뒤덮여있었다. 그 서류를 가져오라고 해서 돋보기를 끼고 자세히 읽어본 장개석은 낯색이 파랗게 질렸다. 그는 두손을 부르르 떨면서 탄식했다. “우농(대립의 자)이 나의 큰일을 그르쳤구나!” 구경 대립이 어떻게 큰일을 그르쳤는지는 알수 없다. 그러나 결과로부터 볼 때 공을 세우기 좋아하는 대립의 성격이 군사천재 림표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는 장개석의 계획을 다시 한번 허사로 되게 했던것이다.    
184    우편배달부 이래도 되는가 댓글:  조회:6985  추천:9  2014-07-07
우편배달부 이래도 되는가   김희수   사무실에 저마다 휴대폰이 있다보니 사무실전화는 받는 기능만 하고있은지 오래다. 또 사무실전화는 대부분 독자들이 걸어온 전화이다. 그중에서도 열에 아홉번은 신문을 받지 못했다는 독자들의 전화이다.   독자가 대부분 로인들이다보니 우체국문제로  신문을 받지 못하게 된것을 신문사의 잘못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사연을 들어보면 대부분 경우 우편배달부들의 업무태만으로 신문배달이 되지 않아 생긴 일이였다.   지금은 편지 쓰는 사람들이 적다보니 예전에 비해 우편배달부들의 업무량이 상대적으로 줄어들었다. 하지만 우편배달부들의 직업의식은 오히려 낮아지고있다. 편벽한 고장이거나 주소를 보고 찾기 힘든 곳이면 찾아가려고 하지 않는다.   얼마전에 미국 일리노이 남부 농촌마을에 45년간 신문과 우편물을 배달해온 90세 할아버지가 건강악화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구역을 모두 돌며 배달을 마치고 입원한지 2주일만에 눈을 감았다는 한국 연합뉴스의 기사를 본적이 있다. 이 할아버지는 2주일전 갑자기 건강에 이상신호가 온것을 느꼈지만 배달구역을 모두 돌기전까지는 병원으로 갈수 없다며 맡은 임무를 완수했다고 한다.   입원전까지 매주 5일을 하루도 빠짐없이 자전거를 타고 우편배달을 했다는 할아버지의 기사를 읽으며 그 투철한 직업윤리의식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기도 했다.     예전에 집에서 편지나 신문을 받아본적이 있는 나이 많은 세대들은 그 당시의 우편배달부들이 얼마나 자신이 하는 일에 전력을 다하고 직업에 긍지를 느끼고 성실하게 일했지는 똑똑히 알고있을것이다.   편지의 주소가 똑똑하지 않으면 한집 한집 물어보면서 찾아주었고 편지 받는 주인이 이사를 갔을 경우에는 그 이사한 집까지 찾아가서 편지를 전해주곤 하는것이 그 시기의 우편배달부들이였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빠짐없이 시골의 오솔길로 자전거를 달리던 우편배달부들…그런 우편배달부들의 투철한 직업윤리의식과 봉사정신이 지금은 죽어가고있다.   물론 지금의 우편배달부들이 다 직업의식이 낮다는 말이 아니다. 바라건대 신문을 고대하여 기다리는 로인분들을 위해 우편배달부들이 당년의 선배들의 투철한 직업윤리의식과 봉사정신을 본받아 자신의 직업에 대한 사회적 역할과 직무를 충실히 수행했으면 한다.     
183    호색한 대립이 제일 총애한 군통미녀 댓글:  조회:7470  추천:2  2014-07-06
호색한 대립이 제일 총애한 군통미녀   (번역)     대립(戴笠)은 유명한 호색한이였는데 그가 일생중에서 범한 녀인은 부지기수였다. 녀색을 즐기기로 소문난 그의 친구 당생명마저 “대립은 괴짜야. 그는 한시도 녀자를 떠나서 살지 못한단 말이야”하고 개탄했다. 군통(军统)에는 미녀가 모자라지 않았기에 군통의 대두목 대립은 권세를 미끼로 수많은 꽃같은 미녀를 마음껏 품에 안을수 있었다. 군통은 국민정부군사위원회조사통계국(国民政府军事委员会调查统计局)의 간칭이다.     군통의 수많은 미녀중에 대립의 총애를 가장 많이 받은 녀인은 “화매(华妹)”라고 불리운 진화(陈华)였다. 진화는 군통에서 “꽃중의 꽃”이라고 불리운 미녀였다. 그녀는 남달리 아름다운 미모를 가졌을뿐만아니라 머리까지 총명하여 대립을 도와 적지 않은 큰일을 성사시켰다. 어느 한번 대립은 진화를 안고 꿀맛을 본후 감개무량하여 “진화, 나의 천하에서 절반은 네가 날 대신해서 얻어온거야”하고 말했다. 집안이 가난하고 출신이 비천했던 진화는 생활의 핍박에 의해 13살이 되던 때에 어린 기생으로 되였다. 그러다가 16살에 손중산의 휘하부대에 참군했다가 상해경비국 사령 양호의 눈에 들어 그의 정부로 되였다. 진화에게 있어서 양호라는 큰 나무는 여간만 든든한 뒤심이 아니였다. 양호는 일찌기 동맹회에 가입했다. 원세개가 황제로 칭하던 1915년에 손중산은 군대를 동원하여 원세개를 쳤다. 양호는 강소군 총사령, 해군륙전대 사령 겸 대리해군총사령에 임명되였다. 1922년에 광주비상대통령부 근위대장, 광주비상대통령부 참군(参军)에 임명되였고 1924년에 북벌토적군 제2군 제1사 사장을 력임했다. 손중산이 사망된후 양호는 장개석과 의형제를 맺고 1927년에 상해경비사령으로 되였다. 그해 4월 12일에 양호는 진군과 함께 백숭희(白崇禧)의 지휘하에 장개석이 상해에서 일으킨 반혁명정변을 구체적으로 집행했다. 5월 7일에 “숙당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된 양호는 “숙당”기회를 리용하여 선후로 상해, 항주, 녕파 등지에서 공산당원 진연년, 선중화, 하적화, 양미산, 왕곤, 선중선, 동자흥, 탁란방, 호초금, 오자형 등을 살해했다. 1932년에 진화는 우연한 기회에 대립을 만나게 되였다. 당시 대립은 군통의 전신인 복흥사(复兴社)특무처를 세우고있었는데 각 방면의 인재가 급히 수요되였다. 대립의 전도를 보면 양호를 릉가할것이라고 여긴 진화는 대립의 수하로 들어가 사방에 소문난 복흥사의 미녀로 되였다. 진화는 미모가 뛰여났을뿐만아니라 사업능력도 매우 강했다. 그녀는 대립을 위해 수많은 인재를 발굴해냈다. 그녀는 교묘하게 류과청, 리복양 등 9명을 설복하여 대립을 위해 일하게 했다. 이 9명은 그후 군통의 철혈자객으로 되였다. 특히 류과청은 군통 상해구역 행동조장으로 임명된후 왕정위괴뢰정부의 중요한 한간두목을 암살하는데 큰공을 세웠다. 이때문에 대립은 군통미녀 진화를 새로운 안목으로 보게 되였다. 대립은 뛰여난 미모에 총명한 두뇌까지 가진 나젊은 미녀를 더욱 좋아하게 되였다. 대립은 그녀를 품에 안기 위해 온갖 수단을 다했다. 하지만 대립이 어떻게 사랑고백을 하든 진화는 딱 잘라 거절했다. 이때문에 대립은 몹시 락심하면서 고민했다. 그후 진화는 대립이 어릴 때 매우 고생스럽게 살았다는것을 알게 되였고 또 대립이 이름을 고친 사실에 감동을 받았다. 가난했던 대립은 1926년에 황포군관학교에 신청할 때 가지고온 돈이 다 떨어졌다. 그날에 마침 큰비가 내렸는데 돈이 없어 려관비까지도 빚지게 되였다. 그때 어떤 사람이 그에게 삿갓(斗笠) 하나를 주면서 빚진 려관비까지 물어주었다. 그 사람이 바로 후에 군통고위층으로 들어간 서량이였다. 이 우정을 기념하기 위해 대립은 자신의 이름을 삿갓을 쓰다는 뜻으로 대립(戴笠)이라고 고쳤던것이다. 비스한 경력을 겪은 진화는 대립에게 호감을 가지면서 그의 품에 안겨버렸다. 그때로부터 진화는 대립의 일생에서 유일한 이성지기로 되였다. 대립은 왕정위, 손과 등 중요한 인물을 감시하는 임무를 그녀에게 맡겼다. 진화는 자신의 뛰여난 지혜와 비범한 능력으로 어떤 임무든지 훌륭하게 완성하여 대립의 총애를 받았다. 바로 당생명이 말한것처럼 대립은 괴상한 사람이였다. 국민당특무 두목인 대립은 일생에서 영화부귀를 누릴대로 다 누리였다. 그는 부동산과 자가용차는 많았지만 현금과 금은보석은 별로 없었다. 때문에 대립은 녀인을 돈으로 유혹하는 일이 드물었다. 그는 그저 녀인을 데리고노는것으로 그쳤다. 항일전쟁시기에 진화는 상해간첩전에서 큰 공을 세웠다. 대립의 요청을 받고 중경 증가암지구에 있는 대립의 거처로 날아간 진화는 기쁨에 겨워 대립의 품에 안겼다. 대립은 진화의 공로를 축하하기 위해 술상을 차렸는데 4가지 료리에 국 한사발뿐이였다. 그것을 본 진화는 웃지도 울지도 못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대립은 진화가 입은 담비외투와 그녀가 신은 목긴 구두가 모두 수입품인것을 보고 선물용으로 쓰겠으니 남겨놓으라고 했다. 이렇게 되여 진화는 이불짐만 싸가지고 향항에 있는 집으로 날아갔다. 당시는 항일전쟁시기여서 중경에 물자가 결핍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정부의 물건마저 놓아주지 않았으니 여기서 거리낌없이 재물을 긁어내는 대립의 수단을 알고도 남음이 있다. 항일전쟁이 승리한후 대립은 장개석이 자신을 대하는 태도에서 점차 장개석이 자신에 대해 경계를 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토끼를 잡고나면 사냥개는 삶아먹힌다”는 말이 생각나서 개탄하면서 진화를 보고 자신의 앞날이 근심된다고 말했다. 1946년 3월초에 대립은 북평으로 가기전에 진화의 거처로 찾아가 뜨거운 밤을 보냈다. 그것은 진화와 대립의 마지막 만남이였고 마지막 정사였다. 격정의 순간이 지난후 대립은 한동안 침묵을 지켰는데 진화는 그의 마음이 몹시 무거운것을 알수 있었다. 한참후 대립은 정중한 어조로 진화를 보고 말했다. “진화, 내가 솔직하게 알려줄테니 잘 들어. 령감(장개석을 가리킴)이 날 버리려고 해. 난 곧 죽을거야.” 진화는 그때 대립이 죽을 마음을 품고있다고 인정했다. 그 당시 항일전쟁이 승리한후 특무조직인 군통국은 취소될 가능성이 있었다. 그때는 대립이 한창 득세할 때였는데 군통특무는 수십만이였고 미국의 지지까지 받고있었다. 대립은 먼저 경정부 부장으로 되고 다음 해군사령자리를 노리려고 했는데 이것이 장개석의 의심과 불만을 자아냈던것이다. 장개석은 의심이 많은 사람이였다. 그는 사람을 쓸 때 늘 부하의 세력이 너무 커서 통제불가능하게 되는것을 방지했다. 장개석은 일생에서 간첩조직과 군사를 가장 중시하면서도 이 부문을 주관하는 부하의 권력이 너무 커지는것을 가장 두려워했다. 대립은 확실히 야심이 있었다. 그는 스스로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정할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여겼다. 그는 호종남과 함께 장개석의 권력을 이어받을 계획을 세운적이 있었다. 그러나 장개석이 살아있는 한 장개석을 뒤엎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는 장개석에게 기대여 세력을 키워야 했던것이다. 이튿날 아침에 대립은 진화와 작별하고 북평으로 들어갔다. 대립이 떠난후 불길한 예감이 든 진화는 줄곧 안절부절못했다. 그녀의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력사는 대립이 죽은 소식을 이렇게 기재했다. “1946년 3월 17일 오후 1시 6분에 대립이 탄 비행기는 남경의 상공에 도착했다. 1시 13분에 작탄이 폭발되여 비행기가 남경시 강녕구 판교진 대산에 추락되였다. 대립을 포함하여 비행기안에 있던 13명이 전부 사망되였다.” 대립이 탄 비행기가 폭발된후 군통국의 조사일군들이 13명의 해골사진을 진화에게 보이자 그녀는 한눈에 대립을 가려냈다. 그녀는 익숙한 몇대의 금이외에 높이 들어올린 오른손이 주먹을 쥔 상태로 있는것을 보고 림종전의 대립의 모습을 상상할수 있었다. 그것은 대립이 사격후에 습관처럼 하던 동작이였다. 대립은 총을 쏜후에 멋있게 보이려고 늘 그런 동작을 했던것이다. 이런 원인으로 진화는 대립의 죽음을 자살로 인정했다. “주인(老板—대립을 가리킴)은 먼저 비행사를 쏘아죽여 비행기가 통제를 잃게 하였어요. 그래서 비행기가 산에 부딪쳐 폭발된것이예요.” 진화는 대립과 지냈던 마지막밤을 생각하면서 대립의 자살을 더욱 확신했다. 그후 향항으로 이주한 진화는 리발관을 꾸려 생계를 유지했다. 40여년후 82세가 되였을 때 진화는 회고록을 써서 대립이 자살한것이라고 인정했다. 그녀가 쓴 《진화녀사회고록》은 상하책으로 되였는데 1988년 1월에 대만독가출판사에서 출판했다. 얼마후 한때 세상에 이름이 널리 알려졌던 군통의 꽃은 병으로 향항에서 지고말았다.     
182    개꿈해몽 댓글:  조회:3463  추천:1  2014-07-02
개꿈해몽   풍몽룡(명나라 문학가)       3국시기 위나라(魏国)의 주선(周宣)은 유명한 해몽가로 널리 알려졌다. 그만큼 찾아오는 손님들도 많았고 희한한 사람도 많았다. 어느날에 한 손님이 그를 찾아와 간밤의 꿈에 새끼개를 보았다고 했다. “손님은 고기를 먹게 될거요.” 주선이 해몽했다. 손님은 주선의 해몽을 듣고 싱글벙글 웃으며 떠나갔다. 그후 손님은 정말로 우연스레 고기를 먹게 되여 해몽과 딱 맞아떨어짐에 감탄했다. 고기를 공짜로 먹은 손님은 며칠도 안되여 또 고기생각이 나서 주선을 찾아갔다. 이번에는 시치미를 뚝 떼고 거짓말을 했다. “엊저녁에도 또 개꿈을 꾸었어요.” 주선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손님은 부상을 입을수 있으니 부디 조심하길 바라오.” 똑같은 개꿈이라 으레 좋은 소리를 들을 줄로 생각하고 말했는데 이번엔 너무나 불길한 해몽이였다. 손님은 오만상을 찌푸리며 아무말도 안하고 몸을 툭툭 털고 일어나 가버렸다. 얼마후에 손님은 수레를 타고 갔다가 어줍잖게 떨어져 발목부상을 입었다. 주선의 해몽이 또 맞아들어간것이다. 너무나도 희한한 일이라 손님은 세번째로 주선을 찾아가 또 거짓말을 했다. “선생님의 해몽대로 발목을 다쳤어요. 그런데 엊저녁에 또 개꿈을 꾸었어요.” 주선이 웃으며 말했다. “이번엔 불을 조심해야겠소.” (이번에도 맞아떨어질가?) 손님은 속으로 설마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어쩐지 마음 한구석이 편치가 않았다. 며칠후에 손님의 집에 큰 불이 나서 순식간에 집이 재더미로 변해버렸다. 손님은 황급히 주선의 집으로 달려가 물어보았다. “개꿈을 세번이나 똑같이 꾸었는데 어찌해서 해몽은 세번 다 다릅니까? 그리고 매번 꿈과 해몽이 맞아떨어진것은 무슨 원인이죠?” 주선이 해석했다. “개는 제사용물건이므로 첫번째의 개꿈은 고기를 먹을수 있음을 나타냈소. 두번째의 개꿈은 제사가 끝나면 개를 밖으로 내가기때문에 사람이 수레에서 떨어질수 있음을 말해주는것이요. 그래서 손님은 수레에서 떨어져 부상을 입은것이지요. 세번째는 개를 불태워 없애야 하므로 화재를 조심해야 한다는것이였소.” 손님은 이때에야 비로소 솔직히 털어놓았다. “저의 첫번째꿈이 진짜이고 두번째꿈과 세번째꿈은 모두 거짓말이였습니다.” 주선이 말했다. “길흉화복은 마음가짐에서부터 비롯되는것이요. 손님이 그런 마음가짐을 갖고있었기때문에 진짜꿈을 꾸었든 거짓말을 했든 사건과 일치했던거요. 해몽이란 꿈을 적당하게 풀이할뿐이요.”      
181    슬픈 녀자 / 단편소설 댓글:  조회:3476  추천:3  2014-07-01
슬픈 녀자   김희수     나는 불행하게도 슬픈 녀자로 이 세상에 태여났다. 철부지시절엔 그런줄도 모르고 나는 아무런 근심걱정없이 애들과 술래잡기도 하고 공기놀이도 하고 고무줄놀이도 하면서 유쾌히 뛰놀았다. 그러다가 중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내가 슬픈 녀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였다. 웬일인지 남학생들은 누구나 내곁에 앉기를 꺼렸으며 나와 말을 걸기조차 싫어했다. 심지어 나를 쳐다보는것마저 겁나했다. 어쩌다 나와 눈길이 마주치면 번개같이 다른 곳으로 시선을 피하며 외면했다. 물론 이 모든것은 남녀유별때문이 아니였다. 남학생들은 다른 녀학생들과는 스스럼없이 웃고 떠들면서 잘 놀았던것이다. 특히 애금이한테는 아이스크림이랑 사탕껌이랑 바나나랑 사주면서 무척 다정하게 굴었다. 그래도 그때는 아직 이성에 눈을 뜨지 못한 때여서 남학생들에게 외면당하는것은 분한대로 참고 지낼수 있었다. 하지만 녀학생들에게마저 멸시당하는건 도저히 참을수 없었다. “에그그, 쟤두 녀자야?” “글쎄다. 제딴엔 녀자라고 치마를 입은걸 좀봐. 히히…” 나에게 이런 모욕을 퍼붓는 애들과 머리채를 끄집어당기며 싸움한적도 한두번이 아니였다. 학급에서 나를 업신여기지 않고 나하고 놀아주는 애는 유독 애금이 혼자뿐이였다. 애금이는 나랑 이웃집에서 소꿉놀이를 함께 하며 자란 가장 친한 애인데 우리는 늘 그림자처럼 붙어다니곤 했다. 애금이는 나를 깔보는 애들이 있으면 언제나 내 역성을 들어주곤 했다. “너희들이 사람을 그렇게 업신여기면 못써! 너희들은 뭐가 잘나서 그래?” 그러면 애들은 금시 풀이 죽어서 “어머, 애금이는 왜 저런 애랑 같이 노니?” 하고 슬금슬금 뒤걸음친다. 언제부터인가 애들속에서 이상한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우리반에 원숭이 한마리가 있다는것이였다. 물론 원숭이는 어떤 애의 별명임이 틀림없었다. 원숭이? 그렇게 자랑스런 칭호는 아닌데…누구의 별명일가? 처음에 나는 그것이 나에게 붙여진 별명인것을 몰랐다. 어느날 애금이랑 나란히 걸어가고있는데 멀리서 쑥덕거리던 애들이 우리 쪽을 향해 “원숭이”하고 합창하는것이였다. 이런 일은 몇번이나 있었다. 나는 뭔가 심상찮은것을 느꼈다. “원숭이”는 결코 애금의 별명이 아닐것이다. 애금이와 원숭이는 어울리는 곳이 있을수 없다. 애금이는 보는 사람마다 “와!”하고 놀라고 다음에는 “이쁘기두해라!”하는 감탄이 절로 뒤따르는 그야말로 장미꽃처럼 예쁜 아이다. 그렇다면 “원숭이”는 틀림없이 나를 가리키는 말인데… “원숭이”란 뭘 뜻하는 말일가? 내 행동이 원숭이처럼 날렵하다는 뜻은 절대 아닐거야. 나는 운동선수도 아니고 체육성적도 겨우 급제이고 나무우로 바라오를 줄도 모르니까. 그럼…내 얼굴이?! 집에 돌아오기 바쁘게 나는 거울에 얼굴을 비춰봤다. 거울속의 내 얼굴을 이윽토록 들여다보던 나는 급기야 울음을 터뜨렸다. 어찌나 분하고 억울하던지…나는 내 얼굴이 못생겼다는걸 안다. 하지만 원숭이처럼 생겼을 줄은 정말 몰랐다. 그날 저녁에 나는 퇴근하여 돌아온 엄마를 붙잡고 울면서 행악질했다. “엄마, 왜 날 남들처럼 곱게 낳지 못하고 이리도 못생기게 낳았나요? 네? 왜서요?!” “얘가 오늘은 왜 이래?” “애들이 날 원숭이처럼 생겼대요! 흑흑…원숭이란 별명을 달고 놀려준단 말이예요!” “아니 나쁜 애들! 사람의 인격을 그렇게  모욕하는 법이 어디 있니?!” 분하여 펄쩍 뛰던 엄마도 나를 껴안고 눈물을 흘리셨다. 나는 엄마의 눈물을 닦아주고는 내 방으로 달려들어갔다. 그리고 문을 꽁꽁 닫아버렸다. 사실 이건 엄마를 나무랄수도 없는 일이였다. 엄마라고 어째서 자식을 곱게 낳고싶지 않았겠는가. 어느 부모가 자식이 밉게 태여나기를 바라겠는가. 자식을 낳는 일이 어디 곱게 낳고싶으면 곱게 낳고 밉게 낳고싶으면 밉게 낳고 그렇게 마음대로 되는 일인가? 이 밝은 세상을 보게 해준것만해도 아빠 엄마에게는 감사한 일이지. 그런데 왜 나만 하필 이렇게 밉게 태여났나? 조물주도 정말 불공평하지. 애금이는 너무 이쁘게 만들어주면서도 왜 나는 너무 추하게 빚어놓았담? “녀성은 꽃이라네”하는 노래가사도 있다싶이 녀자는 꽃처럼 아름다운 존재가 아닌가. 그런데 왜 나만은 녀자인데 이리도 추하게 빚어놓았단말인가! 빌어먹을 조물주! 망할놈의 조물주! 나는 조물주에게 악담을 퍼부으며 저주했다. 나는 내가 슬픈 녀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부터는 웃음을 잃었다. 그리고 학급의 모든 애들을 증오했다. 남자애든 녀자애든 잘난체하는 애들을 모두 증오했다. 나하고 그림자처럼 붙어다니는 애금이를 내놓고는… 애금이는 공부를 잘했다. 그래서 나는 그애를 따라 공부에 애썼다. 그런 덕에 나는 애금이와 같은 중점고중에 붙었고 또 같은 의과대학에 들어가 공부하게 되였다. 대학에서도 애금이와 나는 가장 친한 친구가 되여 늘 그림자처럼 붙어다녔다. 애금이와 함께 다닐 때면 나는 늘 자비감을 느끼곤 했다. 우리가 나란히 거닐 때면 만나는 사람마다 “와, 저 녀학생이 미인인데!”하고 감탄하면서 그애한테만 관심을 돌리고 나같은건 영 무시해버린다. 그러면서도 애금이랑 붙어다니는 리유는 가련하기 짝이없는 허영심때문이다. 공부 못하는 애들이 “우리 아버진 무슨 사장, 우리 아버진 무슨 국장”하고 아버지를 등대고 우쭐하듯이 나도 “난 애금이와 가장 친한 사이야”하는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싶었던것이다. 어디로 가나 인기가 있는 애금이, 사람마다 칭찬하는 애금이, 남자들마다 침을 흘리는 애금이…이런 애금이와 가장 친한 친구란 사실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가! “쟨 애금이와 가장 친한 사이래!” “야, 부럽다! 난 애금이와 친하고싶어도 연줄이 없어서 못친하는데…” 애들이 이렇게 겉으로 드러내놓고 얘기를 아니해도 속으로는 이렇게 생각하며 부러워하는것 같았다. 정말이지 이런 허영심마저 없었다면 나는 나를 무시하는 남학생들앞에서 여태껏 버텨내지 못했을것이다. 그리고 나는 애금이와 친한덕에 많은 남학생들의 품에 안겨볼수 있었다. 고중때도 그랬지만 대학에 들어와서부터 나에게 잘 보이려는 남학생들이 갈수록 많아졌다. 처음에는 나를 무시하던 애들이 커피를 사준다, 저녁을 사준다, 나이트클럽에 청한다하며 나를 공주모시듯 했다. “저…오늘 시간 있어?” 어느날에 또 한 남학생이 나한데 다가와서 다정하게 말을 걸었다. “보리자루”란 별명을 가진 애였다. 보리자루는 인물도 잘 생기고 공부도 잘 했지만 녀학생들앞에서는 얼굴만 붉히며 두마디이상의 대화도 못하는 애였다. 그래서 어느 계집애가 “꾸어다 놓은 보리자루”란 말을 간략해서 “보리자루”란 별명을 달아주었던것이다. 나는 이 보리자루가 무슨 목적으로 왔는지 알면서도 짐짓 모르는척 시치미를 떼고 말했다. “글쎄. 시간이야 짜내면 있을수도 있지만…왜? 나랑 데이트하자구?” “그…그래. 가자, 내 저녁 사줄게.” 나는 못이기는체하며 보리자루를 따라갔다. 그날 저녁에 잘 먹고 잘 마시고나서 3차로 노래방까지 가서 잘 놀아댔다. 나는 보리자루와 함께 사랑노래를 부르기도 했고 보리자루의 품에 폭 파묻혀서 춤을 추기도 했다. 보리자루는 싫으면서도 마지못해 나를 안고 춤을 추는 눈치였다. 노래방에서 나와서 조용한 곳에 이르자 보리자루는 나를 불러놓고 무슨 할말이 있는듯 머뭇거리는것이였다. 그가 한동안 머뭇거리기만 하면서 입을 열지 못하자 나는 그를 차갑게 쏘아보며 따져 물었다. “말해봐. 오늘 저녁을 사준 의도가 뭐지? 나한테 프로포즈하려는거냐?” “헤헤…그래. 프로포즈하려는건 옳은데…” “어머! 난 동의다! 래일 당장 결혼등기하러 가자!” 나는 보리자루의 속셈을 빤히 알면서도 짐짓 오해한척 하며 그의 품에 뛰여들었다. 그러자 그는 황급히 나를 밀어내며 말을 더듬었다. “저…저…그…그게 아니야!” “그럼 뭐냐?” “저…저…이걸…” 그는 호주머니에서 편지 한통을 꺼내 떨리는 손으로 내손에 쥐여주며 말했다. “이걸 애금이한테 전해줘!” “애금에게 줄게면 네가 직접 줄게지 왜 내손을 걸치는거냐?” “그애를 만나면 떨려서…” 그래. 떨리기도 하겠다. 구변이 뛰여난 애들도 애금의 앞에서는 자신이 없다면서 내 손을 빌리는 판인데 하물며 제 앞의 말도 변변히 못하는 보리자루임에랴. “이건 내가 밤잠도 못자면서 쓴거야. 569일동안 짝사랑을 하면서…꼭 애금이한테 전해줘. 부탁한다.” 나는 보리자루의 진정에 감동되여 기숙사에 돌아가자마자 그 련애편지를 애금의 손에 쥐여주었다. “이건 뭐냐?” “한 남학생의 마음이 담긴 꽃편지…” “아니, 너 또 쓸데없이…” 애금이는 그 편지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땅바닥에 내던지며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넌 왜 이따위 심부름만 하는거야? 다신 남자애들 손에서 이따위걸 받아들고 오지마!” “성내지 말고 읽어봐. 이건 널 진정으로 사랑하는 한 미남자가 569일동안 짝사랑을 하면서 쓴 마음속 고백이란다.”  “시끄러워! 애송이 동창생들은 내 눈에 들지 않으니 다시는 그애들의 심부름을 하지마. 기어코 하겠으면 너나 그애들과 련애해라.” “이 가시나야, 사람을 놀리지 마. 그애들이 나같은걸 눈에 들어할리 있니? 너무 재지 말고 남이 정성껏 쓴 편진데 읽어보기나 해. 그런 다음에 싫으면 싫다고 한마디라도 적어줘. 적선하는 셈치고. 그래야 나도 할말이 있지.” “시끄럽다는데 왜 자꾸 그래?” 애금이는 버럭 화를 내며 돌아섰다. 상놈의 계집애, 잘 났다고 우쭐대긴! 나한테 프러포즈하는 남자가 단 한 사람이라도 있었다면 난 너무도 행복하여 막 울어버렸을거야. 이튿날에 나는 보리자루를 만나 편지를 도로 돌려주었다. 개봉도 하지 않은 편지봉투를 본 보리자루는 의아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니?! 이건…애금이한테 전해주지 못한거야?” “전해줬어. 그런데 그앤 거들떠보지도 않고 팽개치더라.” “보지도 않았단 말이냐?! 읽어보지도 않고…” 보리자루의 얼굴이 갑자기 어두워졌다가 새파랗게 질리는것이였다. 나는 그만 보리자루가 불쌍한 생각이 들었다. 나는 구혼하다가 퇴짜맞은 기분이 어떤지, 거절당한 실련의 고통이 얼마나 큰지 하는건 당해보지 않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애금이한테 련애편지를 보냈다가 퇴박맞은 보리자루의 몰락을 보고 실련이란 두 글자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실감하게 되였다. 그후부터 워낙 말수가 적던 보리자루는 완전히 벙어리가 되였다. 온종일 멍하니 무슨 생각에 잠겨있던 보리자루는 얼마후 혼자서 이 거리 저 거리 쏘다니며 “읽어보지도 않고…읽어보지도 않고…”하고 쉴새없이 중얼거렸다. 그는 결국 미쳐버렸던것이다. 보리자루가 미쳐버린후 나는 더는 남학생들의 련애편지심부름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나에게 잘 보이려고 커피도 사고 춤도 청하던 남학생들이 하나 둘 떨어져나가더니 마침내 한놈도 얼씬하지 않았다. 제기랄, 얼굴이 반반한 녀자애들궁둥이만 쫓아다니는 수컷들! 그런데 남학생들이 떨어져나가자 이번엔 녀학생들이 나하고 바짝 친하려고 달라붙는게 이상했다. 그무렵에 녀자애들은 누구나 나하고 단둘이 다니기를 좋아했다. 나는 처음에는 그것이 나하고 애금이가 나란히 붙어다니는것을 보고 부러워 그러는것인줄로 알았다. 그래서 멋도 모르고 좋아서 그 애들에게 끌려 도서관으로 가도 함께 가고 쇼핑하러 가도 함께 갔다. 어제는 달숙이가 잡아끌었고 오늘은 해란이가 끌어당기고해서 나는 끊임없이 그애들의 짝이 되여줘야 했다. 그 애들은 특히 나를 데리고 자기의 남자친구의 앞에 나타나기를 특별히 좋아했다. 나는 그것이 그 애들이 내 앞에서 자기의 남자친구를 자랑하기 위한것이라고만 생각하고 자존심이 상하는대로 친구를 잃지 않기 위해 그냥 따라다녔다. 그러다가 나는 뭔가 이상한것을 발견했다. 나하고 함께 다니는 애들마다 다른 애들에게 똑같은 칭찬을 받는게  아닌가.  “어머나, 저 애가 이전보다 예뻐진걸 봐.” 그 애들의 남자친구들도 놀란 눈길로 바라보며 “와, 우리 XX씨 오늘따라 이쁜데!” 하고 감탄하기도 하고…그러다가 무슨 화장품을 쓰느냐, 어느 미용원에 다니느냐고 꼬치꼬치 따져묻기도 했다. 한번은 같은 반에 다니는 김양과 함께  쇼핑하러 나갔다가 거리에서 중문학부에 다닌다는 김양의 후배고향친구를 만났다. 그 후배는 김양을 보자 “어머, 언니 예쁘게 번졌다!”하면서 깜짝 놀라는것이였다. 김양은 오래간만이라면서 후배를 다방에 청했다. 김양과 후배가 자리에 앉을 때 나는 배가 아파서 화장실로 들어갔다. 내가 볼일을 마치고 나오니 김양과 후배는 내가 다가온줄도 모르고 신나서 이런 말을 주고받는것이였다. “언닌 무슨 화장품을 쓴거야? 그리고 어느 미용원에 다닌거야? 예뻐진 비결을 좀 가르쳐 줘!” “난 고급화장품을 쓴것도 아니고 미용원에 다닌것도 아니야.” “그럼 비결이 뭐야?” “비결? 호호호! 넌 나하고 함께 온 애를 봤지? 그애가 바로 고급미용사야!” 나는 그만 어정쩡하였다. 내가 고급미용사라니? 내가 언제 미용술을 배운적이 있었던가? 저 애가 불긴 부는데…난 부동의 자세로 그냥 그 애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어머, 언닌 고급미용사랑 친한게 정말 좋겠소! 그런데 그 고급미용사에게 독특한 미용비결이라도 있는 모양이지?” “비결은 무슨 비결. 그냥 그 애하고 함께 다니면 자연적으로 미용이 되는거야. 1전 한푼 쓰지 않고.” “언니두 참, 그저 그 고급미용사와 함께 다니면 자연히 미용이 된다니? 사람 놀리는게 아니우?” “넌 참 둔하기두! 그것도 못 알아듣겠냐? 넌 나하고 같이 온 그 애 생김새를 봤지?” “그 고급미용사…히히, 언니 솔직히 말해서 난 그렇게 못생긴 녀자를 난생 처음 봤소! 아하, 그러니까…언니 알았소!” 김양의 후배가 갑자기 뭔가 깨달았다는듯 무릎을 탁 쳤다. “그러니까 그렇게 추하게 생긴 녀자랑 함께 다니니 두 사람이 선명하게 대비가 되면서 언니가 더욱 돋보이고 예뻐 보인거였군요!” 거기까지 들은 나는 피가 거꾸로 흐르는듯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올랐다. 분하여 부들부들 온몸을 떨다가 나는 말없이 그 자리를 떠났다. 내가 저도 모르게 그 애들의 “고급미용사”노릇을 해주었다니! 아아, 이 분하고 억울한 마음을 어디에 하소연할가! 이제와서 생각해보니 애금이가 나하고 함께 다니길 좋아한것도 이 때문이 아니였을가? 괘씸한 가시내! 오라질 가시내! 사람을 업신여겨도 유분수지 네가 어찌 나한테 그럴수 있니? 그후부터 나는 누구와도 단짝이 되여 다니지 않았다. 혼자서 묵묵히 걸어다니고 혼자서 묵묵히 생각하고 혼자서 묵묵히 공부에만 열중했다. 그럭저럭 슬픈 녀자의 대학생활은 끝나고 애금이와 나는 졸업후 또 운명처럼 같은 병원에 취직하게 되였다. 병원에서도 애금이와 나는 같은 의사였지만 판이한 대우를 받았다. 애금이는 선배의사나 간호사, 환자들에게 귀염받고 칭찬받는 대상이였지만 나는 누구에게나 무시당하고 외면당하는 신세였다. 게다가 애금이는 다음 원장후보로 물망에 오르고있는 젊은 미남닥터와 약혼까지 한 사이여서 모두의 선망의 대상이기도 했다. 나는 또 한번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다. 그녀는 잘난 인물덕에 시대의 총아로 가는곳마다 떠받들리는데 나는 왜 시대의 불행아로 태여나 어디가나 무시당해야만 하는가! 아아, 비참한 내 인생, 불쌍한 내 신세여! 이때로부터 나는 애금이를 질투하기 시작했다. 아니, 아주 오래전부터 나는 마음속깊이 줄곧 그녀를 질투해왔는지 모른다. 나는 애금의 미모를 볼때마다 “주여, 저애의 얼굴이 주근깨투성이로 되게 하여주시옵소서”하고 기도하기도 했고 “저애의 얼굴이 저애한테서 실련당한 남자들의 칼에 긁히여 바둑판이 되거나 류산벼락을 맞고 험상궂게 되게 하여주시옵소서”하고 마음속으로 빌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기도하면 할수록 그녀의 얼굴이 도리여 더 예뻐지는게 아닌가! 그녀가 잘못되기를 저주하면 할수록 더 잘되는게 배아파 못견딜 지경이였다. 그러다가 그녀에게 마침내 불행이 닥쳐왔다. 그해 3.8절에 병원에서 회식을 조직하여 우리는 “먹자술집”에서 부어라 마셔라 하며 배터지게 먹은 다음 과별로 따로 “놀자노래방”에 가서 불러라 추어라 하며 싫컷 놀았다. 거기서도 나는 무시당하는 꼴이여서 춤짝이 없었지만 내 멋에 논다고 마이크를 잡고 목청을 뽑아댔다. 노래방에서 헤여질 때 같은 기숙사에 든 애금이와 나는 함께 집으로 돌아가게 되였다. 평소엔 원장후보가 늘 애금이를 기숙사까지 바래다주었는데 이날은 원장후보가 출장중이여서 그녀와 나는 오래간만에 길동무가 되였다. 노래방에서 기숙사까지 거리가 멀지 않은데다가 차안이 답답하다고 하며 애금이는 걸어가자고 했다. 때는 새벽 2시, 거리엔 드문드문 지나가는 택시외에는 사람그림자 하나 얼씬하지 않았다. 우리가 작은 골목에 접어들었을 때 승용차 한대가 우리 옆에 와서 멎더니 별안간 세 괴한이 뛰쳐나와 우리의 손목을 꽉 잡는것이였다. 나는 놀라 어찌할 바를 모르는데 애금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애걸했다.   “이…있는 돈을 다 드릴테니 제…제발 목숨만은 사…살려주세요!” “우린 돈도 싫고 목숨도 싫어!” “그…그럼 원하는게 뭐죠?” “원하는게 뭔가구? 으하하!” 사내들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이 아가씨, 시치미를 떼고있군. 그래 정말로 우리가 원하는게 뭔지 모른단 말이요? 우린 마흔살이 되도록 장가를 못간 불우총각이란 말이요!” “헤헤, 그렇소. 아가씨들, 오늘 선심 좀 베풀어 우리 불우총각 장가 좀 들게 해줘요!” 알고보니 이 놈들은 돈이나 재물을 빼앗고 살인하는 강도가 아니라 녀자몸을 탐내는 색마였구나. 놈들의 정체를 알게되자 나는 놀란 가슴을 진정하고 안도의 숨을 내쉬였다. 애금이는 제발 놓아달라고 애걸복걸했지만 난 날 잡아가시오 하고 얌전하게 가만히 있었다. 이거 공연히 놀랐잖아. 목숨을 빼앗는 강도라면 두렵지만 몸을 빼앗는 호색한이야 두려울것도 없지. 달라면 주면 되니까. 주고싶어도 줄 남자가 없어 고민이였는데 차라리 잘됐잖아. 밤에 잠자리에 누워 괴한에게 강간당하는 상상도 얼마나 많이 했던가. 어떤 날 밤에는 거리에 막 달려나가 아무 남자나 붙잡고 몸을 맡기고싶어 발광하기도 했지. 그런데 오늘 드디여 그 소원을 이루게 되는구나. 나는 눈을 꼭 감고 그 시각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나를 붙잡고있던 녀석이 갑자기 내 손을 홱 뿌리치며 덴겁한 소리를 지르는것이였다. “에씨, 재수없어! 이 계집은 원숭이처럼 생겼잖아.” “뭐가 원숭이야?” 다른 녀석이 와서 나를 눈여겨보더니 구토라도 할듯 왝왝 구역질을 해대며 뇌까렸다. “퉤! 퉤! 메스꺼워! 박색이라도 이런 박색은 처음이야! 30년전에 먹었던 오그랑죽이 다 올라오겠어!” “히야, 내껀 절색이야!” 그때 애금이를 붙잡고있던 녀석이 환성을 질렀다. 그러자 내 쪽에 있던 두 녀석이 애금이한테로 다가가 보더니 감탄하는것이였다. “야아, 천하일색이군! 우리 함께 나눠먹자!” “왔다다! 오늘은 내 먼저다!” 세 호색한은 저항하는 애금이를 강제로 차안에 밀어놓았다. 나는 나절로라도 따라간다는듯 차곁으로 성큼 다가갔다. 그때 세 녀석이 나를 무섭게 쏘아보더니 그중 한 녀석이 발길로 내 궁둥이를 차면서 꽥 소리질렀다. “야야, 이 원숭이야, 넌 저리 썩 물러가라!” 애금이만 달랑 싣고 쏜살같이 달려가는 승용차의 뒤모습을 쏘아보던 나는 너무도 분하고 억울하여 울음을 터뜨렸다. 아아, 원통하구나! 녀자로 태여나서 강간조차 거절당하다니! 강간당할 자격마저 없다니! 비참한 내 인생이여! 남들은 강간당한것이 분하여 운다지만 나는 강간당하고싶어도 강간당할 자격마저 없는것이 분하여 울었다. 나는 제 설음에 겨워 애금이가 당한 봉변도 잊고 혼자서 훌쩍훌쩍 울다가 기숙사로 돌아왔다. 량심적으로 말해서 나는 공안국에 사건을 제보하고 애금의 집에 알리면서 애금이를 구출하기 위해 힘써야 했다. 하지만 그놈의 쓰잘데없는 질투때문에 나는 그녀의 불행을 기뻐했다. 잘코사니! 잘났다고 으스댈적에 알아봤지. 칼로 흥한 자 칼로 망한다고 인물로 흥한 넌 인물로 망한게지. 흐흐, 이제 소문나면 넌 그 원장후보닥터에게 시집가긴 다 글렀어! 이튿날에 출근한 난 애금이가 지난밤에 세 색마에게 륜간당했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워낙 나쁜 소문은 빨리 퍼지는 법이라 얼마 안되여 병원안팎에 애금의 일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마침 출장갔던 원장후보도 돌아왔으니 그 사실을 모를리 없었다. 이제 나에겐 애금이가 머리도 못들고 다니다가 원장후보에게 채이는것을 통쾌한 기분으로 지켜보는 일만 남았다. 그런데 세상일이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였다. 일은 뜻밖에도 내 생각과는 다르게 번져갔다. 사람들은 애금의 불행을 동정하면서 강간범만 욕해댔다. “짐승보다 못한 새끼들, 우리 병원의 꽃을 짓밟아놓다니?! 그놈의 물건을 썩둑 잘라서 씨를 말려야 해!” 그리고 나중에는 애금이가 당하는것을 보고도 제보하지 않은 나를 타매하면서 “생긴게 못났더니 하는 짓마저 얄밉다”고 질책하는가 하면 “차라리 못생긴 제가 당하고 애금이를 구했더라면 마음씨 곱다는 말이나 듣지”하고 나무람하기도 했다. 원장후보는 또 애금이를 전보다 더 끔찍하게 사랑해주면서 다음달로 결혼날자까지 잡았던것이다. 일이 이렇게 되자 비참해진건 나밖에 없었다. 하느님도 무정하지. 왜 이 몸을 추하게 만들어놓고 이다지도 고달프게 한단말인가. 그래 내가 추하게 태여난게 죄였단말인가! 애금이가 결혼하는 날에 나는 그녀의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나는 어느덧 마흔살이란 나이를 먹었다. 마흔살이 되는 그해 가을에 나는 정말로 절망에 빠져 개코같은 내 인생을 종말 지으려고 마음먹었다. 이제 더 살아보았자 그저 그렇고 그런 내 인생에 쨍 하고 해뜰 희망이 있을것 같지 않았다. 마흔살 로처녀가 되여 남들의 비웃음을 받으며 사느니 차라리 가련한 이 몸을 저 부르하통하에 던져 물고기들에게 은혜나 베풀자. 비장한 결의를 다진 나는 무지개다리를 건너 강가로 나갔다. 그런데 배놀이 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내가 투신자살하는데 방해가 되였다. 자살하기 적당한 곳을 찾아 걷고 또 걸었다. 하남다리에 올라 흐르는 강물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서 오라고 손짓하는것만 같았다. 나는 마지막으로 이 세상의 공기를 마음껏 들이마시고 눈을 꼭 감고 “아빠, 엄마, 절 낳아주신 은혜에 보답하지 못하고 불효녀는 갑니다”하고 마음속으로 외운후 다리아래로 뛰여들었다… 이렇게 나는 죽었다. 죽어서 나는 다른 세상으로 갔다. 그런데 그 세상 사람들도 나를 신기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나는 내 얼굴이 너무 못생겨서 그러는것이라고 짐작했다. 나는 두손으로 얼굴을 가리우며 통곡했다. 죽으면 이런 고통이 없으리라고 생각했는데 저승에서도 이런 고통이 따를줄은 생각도 못했다. 그때 누군가 나를 보고 말했다. “아니, 녀사님은 왜서 그렇게 예쁜 얼굴을 가리고 계십니까? 우리에게 한번만 더 보여주십시오!” 내가 두손을 내리우고 보니 숱한 사람들이 나를 둘러싸고있었다. 그 사람들은 모두 나를 보고 “와, 절세미인이구나!”하면서 감탄하는것이였다. 그 말을 들은 나는 그들이 나를 놀려주는것이라고 생각하고 화가 나서 욕설을 퍼부었다. “당신들은 불쌍한 녀자를 놀리는것이 그렇게도 기분이 좋습니까? 이승에서도 이런 수모를 견디지 못해 저승으로 왔는데 여기서도 이러면 난 어떻게 살라고 그럽니까? 아니, 이승에서는 그래도 내가 못생겨도 원숭이처럼 못생겼다고 사실대로 말해주면서 놀려주는데 여기서는 오히려 나를 원숭이구경하듯이 바라보면서도 잘생겼다고 비꼬아대니 아아, 지옥이라고 이런 지옥이 어디 있습니까?” 나는 슬픈 녀자로 태여나 죽어서도 슬픈 녀자로 된 내 운명이 너무 슬퍼서 울고 또 울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갑자기 나를 보고 화를 내는것이였다. “아니, 이 녀자봐라! 그렇게 예쁜 얼굴을 가지고도 못생겼다고 울기까지 하니 그래 우리를 못생겼다고 놀리는게 아닌감?” 나는 정말로 어리둥절해졌다. 저승에서는 미적표준이 달라진걸가? 나처럼 못생긴 사람이 미인인걸가? “선녀처럼 예쁜 녀사님, 어디 한번 비춰보세요!” 그때 누군가 나한테 거울을 가져다주었다. 나는 급히 거울을 들고 보았다. 거울속의 내 얼굴을 본 나는 깜짝 놀랐다. 어쩌면 내 얼굴이 애금의 얼굴로 변할수 있다 말인가? 그렇게 부러워하던 애금의 얼굴…그러니깐 이승에서 못생긴 얼굴로 살아온 한을 저승에서 풀라고 이렇게 얼굴을 바꿔준걸가? 나는 죽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갑자기 사람들이 저쪽으로 우르르 몰려가고있었다. 나도 호기심이 들어 뒤따갔다. 사람들은 방금 이승에서 죽어서 여기로 온 녀자를 둘러싸고있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 녀자를 보고 “어머, 세상에! 저렇게 못생긴 녀자도 있네! 원숭이처럼 생겼잖아?”하고 놀려주는것이였다. 사람들속을 비집고 들어가 그 녀자를 본 나는 깜짝 놀랐다. 그 녀자는 바로 내였다. 아니, 나의 얼굴을 가지고있었다. 나를 본 그 녀자도 놀란소리를 지르는것이였다. “앗, 당신이 어떻게 내 얼굴을 가지고있어?!” 알고보니 그 녀자는 애금이였다. 살아서 미인이였던 애금이는 죽어서 못생긴 내 얼굴을 가지게 된것이다. 잘코사니! 애금이한테 다가간 나는 그녀를 비웃으며 말했다. “네가 이승에서는 잘 났다고 우쭐대도 여기서는 이승에서의 나처럼 맨날 눈물코물 쥐여짜며 수모를 당해야 해. 이 원숭이처럼 못생긴 간나새끼야!” 그런데 애금이가 갑자기 “내 얼굴을 내놔! 내 얼굴을 내놔!”하며 나한테 달려들어 날카로운 이발로 내 어깨를 깨물었다. “앗!” 나는 비명을 질렀다. “아, 깨여났군요!” 웬 녀자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천천히 눈을 떠보니 예쁜 간호사가 나를 지켜보고있었다. 나는 병원의 침대에 누워있었던것이다. “내가 어떻게 되여…” “왜서 그런 나쁜 마음을 먹었어요? 저의 남자친구가 물에 뛰여든…” 간호사는 나를 뭐라고 부를지 생각하는것 같더니 잠시후 말을 이었다. “저의 남자친구가 언니를 구했어요. 이렇게 살아났으니 정말 다행이예요.” “거…거울 좀…” 나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앉으며 말했다. 간호사는 어리둥절해다가 한참후에야 깨달은듯 손거울을 찾아가지고 왔다. 나는 빼앗다싶이 거울을 나꿔챘다. 그리고 거울에 얼굴을 비춰보았다. 거울을 든 손이 바르르 떨렸다. “저…언니, 아마도 얼굴때문에 고민하는것 같은데 사실 저도 이전엔 영 못생겼어요. 그런데 3년전에 성형수술을 받고 지금처럼 예쁜 얼굴로 변하고 남자친구도 사귀게 되였어요. 그러니 언니도 희망을 가지세요. 제가 절 수술해주었던 성형외과의사를 소개해줄가요?” “필요없어요.” 나는 간호사의 호의를 거절했다. 병원에서 나온 나는 홀로 강뚝을 거닐며 생각에 잠겼다. 내가 죽지 않고 살아온것도 내 운명일것이다. 아직은 죽지 않을 운명이라면 다시는 죽음을 택하지 않을것이다. 그럼 계속 슬픈 녀자로 살아갈것인가? 성형수술을 받고 애금이처럼 아름다운 얼굴로 살아갈가? 아니, 나는 내가 생긴대로 살아가련다. 슬픈 녀자가 이닌 못생겨도 제 잘난 멋에 웃으며 멋있게 사는 녀자로…아마도 이것이 나를 죽지 못하게 한 주의 뜻이 아니겠는가?    
180    하룻밤에도 숱한 남자를 나가떨어지게한 무측천 댓글:  조회:4815  추천:2  2014-07-01
하룻밤에도 숱한 남자를 나가떨어지게한 무측천   정지천 동국대 분당한방병원 내과 과장     중국의 영화나 드라마에 자주 등장하는 무측천(武則天: 624~705)은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성 황제로서 절대 권력을 휘둘렀던 여걸입니다. 게다가 평균 수명이 불과 30세 정도이던 당나라 때 무려 82세까지 장수했습니다. 그녀의 장수비결은 우수한 유전인자를 물려받은 것을 첫손 꼽을 수 있습니다. 측천의 모친이 당시로서는 매우 드물게 92세까지 장수하였고, 아버지는 군인 출신으로 강한 신체의 소유자였기 때문이죠. 한의학적으로 선천품부(先天稟賦), 즉 신장의 정기를 강하게 타고 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건강하게 장수할 수 있는 기본은 우선적으로 건강한 체질을 물려받는데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장수하는 것은 아니죠. 상당한 노력이 따라야 하는 겁니다.       평생 나태하지 않고 끊임없이 노력하다   무측천은 평생 근면하여 나태하지 않고 끊임없이 노력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어머니가 문장을 쓰는 것에 통달하고 아버지가 군인이었기에 어릴 적부터 학문을 배우는 한편 말타기와 활쏘기를 비롯한 무술을 단련하는데 진력했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영재교육을 받았던 것인데, 그래서 온갖 지식이 풍부해지고 건강한 신체의 기초를 다졌던 것이죠.   측천은 14세에 황궁에 뽑혀 들어와서 의복을 담당하는 관직인 상의(尙衣)로 임명되었다가 비범한 담력으로 태종의 관심을 끌어 승은을 입고 후궁 중에서 가장 낮은 직위인 재인(才人)에 봉해졌습니다. 그런데 태종이 세상을 떠나게 되고 고종이 즉위하게 되자 관례에 따라 다른 후궁들과 함께 비구니가 되어 감업사에서 지냈습니다. 그러던 중 태자 시절에 무측천의 미모를 눈여겨보았던 고종에 의해 궁에 복귀하여 소의(昭儀)가 되었습니다. 이후로 역사 공부도 하면서 온갖 계책을 쓰고 비밀리에 많은 사람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신비(宸妃)가 되더니 33세에는 황후를 음해하여 내쫒은 다음 자신이 황후에 올랐고, 36세에는 병든 고종을 대신하여 정사를 돌보기 시작하였으며 45세에 조정을 손아래에 두었고 마침내 67세에 황제까지 되었던 것이죠.   엄청난 정력의 화신   무측천은 그냥 오래 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역사에 기록될만한 호색가로서 숱한 남성들을 데리고 성생활을 한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이런 점에서 비슷한 삶을 살았던 여성 최고 권력자도 여럿 있는데, 74세까지 살면서 용모가 수려한 젊은 남성들과 어울렸던 청나라의 서태후, 67세까지 살면서 수십 명의 남첩을 거느렸던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대제, 81세까지 살았던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 등입니다.   측천은 매일 밤마다 성욕이 솟구쳐 몸이 활활 달아올라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신하와 미소년은 물론 길거리의 고약장수도 침실로 불러들였다고 하는데, 건장한 장정들이 잠자리에서 수청을 들었지만 하룻밤에도 수많은 남자가 비틀비틀하며 쓰러졌다고 합니다. 심지어 77세에도 식지 않는 성욕을 유지하며 수많은 미소년들을 선발해 잠자리를 함께 했다고 합니다. 아무리 측천의 건강이 뛰어난다고 해도 그렇게 되기는 쉽지 않은데, 아주 특별한 비결이 있었으니 바로 ‘무후주(武后酒)’라는 술입니다. 무후주라고 이름이 붙은 연유는 측천이 좋아하여 매일 즐겨 마신 결과 정력이 왕성하여 늙어지지 않고 마음껏 행동하여도 지치지 않았기 때문이죠.     메추리로 담근 무후주   무후주는 메추리로 담근 술입니다. 메추리를 암순(鵪鶉), 순조(鶉鳥)라고 하기에 암순주(鵪鶉酒)라고도 하지요. 측천은 메추리와 메추리알을 약한 불에 오래 삶은 국도 즐겨 마셨다고 합니다. 메추리술이 정력에 좋다는 소문이 널리 퍼지자 당나라 전역에서는 메추리의 씨가 마를 정도로 한동안 메추리 사냥이 성행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메추리는 닭목 꿩과에 속한 작은 새로서 곡식이나 잡초의 씨, 벌레 등을 먹고 삽니다. 동의보감에는 메추리고기가 맛이 달고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중간 성질이며 오장을 보충하고 속 기운을 도와주며 근육과 뼈를 충실하게 하는 효능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추위와 더위를 견디게 하는 효능이 있고, 설사와 이질에도 좋습니다. 아이들이 이질에 걸렸거나 여러 가지 빛이 나는 대변이 나오는 경우에 메추리 고기를 구워 먹이면 낫는다고 하였고, 아이들이 야윈 경우에도 메추리 고기나 알을 먹이면 살이 붙게 만든다고 하였습니다. 메추리 고기는 닭고기에 비해 단백질은 많지 않으나 비타민 B1과 B2가 월등히 많이 들어 있지요.   무후주를 만드는 방법은 메추리의 머리, 깃털, 내장을 제거한 뒤 흐르는 물에 깨끗이 씻어 물기를 제거한 뒤 하수오, 녹용, 인삼, 고량주 또는 소주를 함께 넣어 반으로 졸도록 달입니다. 완전히 식힌 뒤에 다른 단지에 담아 꿀을 넣고 밀봉하여 냉암소나 지하실 같은데 3개월 정도 숙성시키면 됩니다. 매일 두 번 마시면 성기능을 회복시키고 강화시켜 주므로 갱년기 정력 감퇴에 효과가 좋다고 합니다.   메추리알은 훌륭한 강정식   메추리알은 대부분의 알이 산성식품인 것과는 달리 알칼리성입니다. 계란과 비교해 보면 비타민 B1, B2, 그리고 인과 철이 훨씬 많이 들어 있으며, 단백질 함량이 많고 아미노산 중에 글루타민산 등이 더 많습니다. 그래서 성욕 감퇴나 정액량 감소에 도움이 되고, 산후증 치료에도 효과가 있습니다. 얼굴이 달아오르거나 가슴이 두근거리고 유난히 추위를 타거나 무릎이 시리고 바람이 들어오는 느낌이 들거나 머리가 무거우면서 아픈 경우에 좋고, 어지럼증, 불면, 피로, 저림증 등의 개선에도 도움이 됩니다.       메추리 대용으로 좋은 음식은?   메추리의 대용으로 꿩이나 참새가 좋습니다. 꿩고기는 따뜻한 성질로서 뱃속을 따뜻하게 하여 비위장의 기운을 보충하고 기력을 강화시키는 효능이 있으므로 훌륭한 스태미나 음식으로 활용되어 왔습니다. 감기, 기관지, 천식에 꿩고기를 백숙으로 달여서 장기간 복용하면 효과가 있고, 꿩고기를 고아서 우려낸 육수는 피로회복 및 술 마신 뒤 숙취해소에도 좋습니다. 또한 여성미용에도 뛰어나며, 노인들의 몸보신으로도 좋은 장수식품이죠. 왕이 꿩고기를 매일같이 즐겨 먹은 이유는 꿩이 음기가 많은 야산과 양기가 많은 들판을 날아다니며 양쪽의 기를 모두 받았기 때문입니다. 꿩은 먹이도 음기가 많은 풀뿌리나 나무열매, 그리고 양기가 많은 곡식과 벌레를 고루 먹으므로 음기와 양기가 고루 배합된 최상의 식품이라고 할 수 있지요. 물론 꿩고기에는 단백질이 풍부하며 8가지 필수아미노산이 고루 들어 있고, 오메가3 지방산, 칼슘, 철, 비타민 A, B1, B2, 니아신 등도 함유되어 있지요.   참새는 신장의 양기를 강하게 하고 精髓를 더해 주므로 성기능을 강하게 하며 성욕과 성감이 저하된 것을 상승시켜 주고, 허리와 무릎을 따뜻하게 하며 소변이 잦은 것을 막아 주는 효과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중국의 황제나 조선의 왕들도 참새구이와 죽을 먹었기에 수많은 후궁들을 거느릴 수 있었다고 합니다.    
179    새 중국 개국10대원수 계급표준은 어떻게 정했는가 댓글:  조회:8764  추천:1  2014-06-29
새 중국 개국10대원수 계급표준은 어떻게 정했는가   (번역)     원수계급을 평가하여 결정하는 초보방안에는 모택동이 대원수로 되여있고 원수계급에는 주덕, 팽덕회, 림표, 류백승, 하룡, 진이, 라영환, 서향전, 섭연진, 엽검영 10명외에 주은래, 류소기, 등소평도 명단에 올라있었다. 당시 모택동은 중공중앙 주석, 중화인민공화국 주석, 중앙군위 주석, 전국무장력량 최고통수였기때문에 대원수로 되는것은 응당한 일이였고 모두가 기대하는 바였다. 주은래는 일찌기 황포군관학교 정치부 주임직을 맡았고 1927년 5월에는 중앙군위 서기직에 임명되였다. 그후 하룡 등과 함께 8.1남창봉기를 령도했으며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혁명군대를 창건했다. 1931년말에 홍군총정치부 정위 겸 제1방면군 총정위, 중화쏘베트공화국 중앙혁명군 군사위원회 부주석에 임명되였고 모택동, 주덕 등과 함께 홍군의 반포위토벌작전을 지휘했다. 장정중에 중앙3인군사지휘소조의 성원으로 되였고 항일전쟁이 폭발된후 중공중앙군위 부주석직에 임명되였다. 해방전쟁초기에 모택동 등과 함께 전국해방전쟁을 지도했고 1947년 8월에 중앙군위 총참모장직을 겸임했다. 또 모택동을 협조하여 료심, 회해, 평진 3대전역을 지휘했고 북평, 호남, 수원, 신강 등지의 평화해방사업을 지도했다. 류소기는 1934년에 장정에 참가하여 선후로 홍8군단, 홍5군단중앙대표, 홍3군단정치부 주임직을 담임했다. 1935년 1월에 열린 중공중앙정치국확대회의 즉 저명한 준의회의에서 류소기는 모택동의 정확한 주장을 지지했다. 항일초기에 화북지구의 적후항전을 령도했고 1940년에 신4군과 8로군화중총지휘부 정위직을 력임했다. 1943년 3월부터 중앙군위 부주석직을 담임했고 항일전쟁승리후 모택동이 중경에 가서 장개석과 담판하는 기간에 중공중앙의 대리주석직을 맡았다. 해방전쟁시기에는 계속 중공중앙군위 부주석직을 담임하면서 총정치부 주임직을 겸임했으며 해방전쟁승리의 중대전략결책을 제정하는데 참여했다. 등소평은 1929년 12월에 백색봉기를 령도했고 홍7군 정위와 전위서기직을 담임했으며 1933년에 홍군총정치부 비서장직을 담임하기도 했다. 1934년에는 장정에 참가하였고 항일전쟁이 폭발된후에는 8로군정치부 부주임직을 담임했다.  1937년 12월에 8로군 129사 정위직을 맡으면서 사장 류백승과 함께 진기예(晋冀豫)항일근거지를 항일근거지를 창설하고 그 지역의 항일전쟁을 아주 효과적으로 전개하였다. 1945년에 중공진기로예(晋冀鲁豫) 중앙국 서기, 진기로예군구 정위직을 력임했다. 항일전쟁승리후 등소평은 류백승과 함께 진기로예부대를 지휘하여 해방구를 공격하는 국민당군을 반격했으며 1947년 6월에 진기로예군구주력 12만대군을 거느리고 황하를 뛰여넘어 전략적인 반격을 시작했다. 1948년 5월에 중공중앙 중원국 제1서기, 중원군구 정위직을 력임했고 그해 11월에 회해전역총전위서기직을 맡으면서 류백승, 진이, 속유, 담진림과 함께 중원과 화동 2대야전군을 지휘하여 서회(徐淮)지구의 국민당군 주력과 결사전을 벌렸다. 회해전역승리후 제2야전군 정위직을 맡았고 1949년 4월에 제2야전군을 거느리고 도강전투을 지휘하여 남경을 점령했으며 류백승과 함께 부대를 거느리고 서남의 모든 성을 해방했다. 주은래, 류소기, 등소평은 모두 혁명전쟁시기에 인민군을 창건하고 무장력량을 령도하여 국민당군과 싸웠으며 전략결책에 탁월한 공훈을 세웠기에 원수계급에 오르는것은 당연한 일이였다. 1955년에 계급을 수여할 때 주은래는 국무원 총리직을 맡았고 류소기는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위원장을 맡았으며 등소평은 중공중당 비서장 겸 국무원 부총리직을 맡았다. 그런데 계급을 수여하기전에 모택동이 대원수계급에 오르는것을 거절하면선 “현재 지방에서 사업하는 사람은 모두 계급에 오르지 않는것이 좋습니다”라고 건의했다. 그리하여 주은래, 류소기, 등소평도 원수계급에 오르는것을 거절했다. 1955년에 우리군이 실행한 계급제에서 원수계급표준은 매우 높았다. 그해 2월 8일에 제1기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제6차회의에서 통과되고 국가주석 모택동의 비준으로 발부된 《중국인민해방군군관복역조례》중에는 인민무장력량을 창건하고 령도했거나 전역군단작전을 령도하여 탁월한 공훈을 세운 고급장령에게 중화인민공화국 원수계급을 수여한다고 밝혀놓았다. “홍군의 아버지” 주덕원수는 자격과 덕망이 높았고 “홍군의 강한 사자” 팽덕회원수는 용맹스럽고 강직했으며 “홍군의 날랜 매” 림표원수는 불패의 상승장군이였고 “군신(军神)” 류백승은 지략이 뛰여나고 판단이 정확했으며 “하수염(贺胡子)” 하룡원수는 “남창봉기”를 총지휘한 중국인민해방군 창시자였고 “시인” 진이원수는 문무를 겸비한 장군이였으며 “정치원수” 라영환원수는 군사와 정치에 모두 능했고 “북방사성(北方帅星)” 서향전원수는 우리군의 보기 드문 기재였으며 “유사(儒帅)” 섭영진원수는 학자기질이 다분한 영재였고 “엽참좌(叶参座)” 엽검영원수는 명실상부한 우리군의 총참모장이였다. 바로 이런 엄격한 표준에 의해 최종적으로 주덕(朱德), 팽덕회(彭德怀), 림표(林彪), 류백승(刘伯承), 하룡(贺龙), 진이(陈毅), 라영환(罗荣桓), 서향전(徐向前), 섭영진(聂荣臻), 엽검영(叶剑英)이 10대원수의 계급을 수여받았다. 원수라는 이 지위가 혁혁한 최고계급은 력사상에서 2가지 종류의 함의를 가지고있었다. 하나는 관칙명칭이였고 다른 하나는 군사계급칭호였다. 원수라는 명칭이 제일 먼저 사용된것은 기원전 633년의 춘추시기에서 부터였다. 당시에는 군대중의 자격과 경력, 위망과 전공이 가장 높은 사람에 대해 존중하는 칭호였지만 관직명칭은 아니였다. 사서 《좌전·선공(宣公)12년》과 《한서·조충국전》에 기재된 원수(元帅), 통수(统帅)는 모두 군대중의 최고급별의 지휘관을 가리키는 말이였다. 수, 당, 5대, 송조의 전쟁시기에는 모두 원수직무를 설치했는데 직권경중과 분공관리에 따라 관리명호도 달랐다. 례하면 “천하병마원수”, “병마대원수”, “행군(行军)원수”, “행영(行营)원수”가 있었는데 그중에는 또 “도원수(都元帅)”, 원수, “부원수”의 등급차이가 있었다. 당태종 리세민은 황제의 보좌에 오르기전에 “서토원수(西讨元帅)”를 담임한적이 있었다. 금나라에 이르러 전쟁시기에 원수부를 설치하고 부동한 급별의 원수를 임명하여 전문적으로 토벌하는 일을 장악하게 했다. 원나라의 각 도(道), 주(道)에는 도원수부거나 원수부, 부원수부를 설치하여 부동한 이름의 원수를 임명하여 당지의 행정 및 군사대권을 장악하게 했다. 명나라에서는 추밀원아래에 제익(诸翼)원수부를 두고 원수, 동지(同知)원수 등 관직을 임명하여 군을 통솔하여 원정을 나가게 했다. 원수라는 이름을 군사계급칭호에 사용하여 최고계급을 표시한것은 16세기중엽의 프랑스군이였다. 당시 프랑스2세는 처음 4명의 고급장령에게 원수계급칭호를 수여했다. 프랑스에 이어 16세기의 게르만제국, 17세기의 오스트리아, 로씨야, 18세기의 영국, 19세기의 에스빠냐, 토이기, 이딸리아, 일본, 20세기의 구쏘련, 중국, 뽈스까, 로므니아, 유고슬라비아, 벌가리아, 핀란드, 인도, 타이, 조선, 몽골, 애급, 수단, 브라질 등 나라들이다. 어떤 나라들에서는 원수구분을 다른 등급으로 나누었다. 원수급별을 가장 많이 나눈 나라는 구쏘련인데 쏘련대원수, 쏘련원수, 주수(主帅), 원수 4개급별로 나누었다. 제2차세계대전중 나치스독일의 원수구분은 제국원수와 군종원수(军种元帅) 2개급별이였다. 조선의 원수구분은 대원수, 원수, 차수 3개급별이다. 중화인민공화국 1955년의 법률문건에는 중화인민공화국 대원수와 중화인민공화국 원수 2개급별로 나눈다고 규정했다. 하지만 원래 모택동에게 수여하기로 되여있던 대원수계급은 모택동의 거절로 비여있었다. 어떤 나라들에서는 원수구분을 부동한 종류로 두었다. 일반적으로 륙군원수, 해군원수, 공군원수 3개종류였다. 중화인민공화국 개국원수계급을 수여받은 10대원수는 크게 4가지표준에 도달되였다. 첫째, 중국인민해방군창건시기의 중요한 무장봉기의 령도자거나 참여자였다. 둘째, 그들은 모두 아군의 각 시기의 중요한 령도자였다. 셋째, 그들은 아군의 중요한 전역군단작전을 령도하고 지휘하여 탁월한 공훈을 세웠다. 넷째, 그들은 원수계급을 수여받을 때 급별이 매우 높았다. 그중 주덕, 팽덕회, 림표 세 사람은 1952년에 전군이 평급을 할 때 제1등의 군위부주석급이였고 류백승, 하룡, 진이, 라영환, 서향전, 섭영진, 엽검영은 제2등의 대군구 사령원, 정위급이였다. 급별이 높은것은 그들이 영예롭게 원수계급에 오를수 있는 중요한 조건중의 하나였다.    
178    손중산을 죽음에서 구한 자매경호원 댓글:  조회:6281  추천:4  2014-06-22
손중산을 죽음에서 구한 자매경호원   (번역)     손중산에게는 림시경호원들이 많았다. 그런 경호원들중에는 일당백의 무당파무예를 정통한 윤예지(尹锐志)와 윤유준(尹维俊) 두 자매가 있었다. 그녀들은 10여번이나 손중산을 죽음에서 벗어나게 도와주었는바 “혁명녀협객”이라고 불리운 추근과 함께 중국근대사에서 “3대녀걸”로 불리우고있다. 윤예지와 윤유준은 절강성 승현사람이다. 언니 윤예지는 1891년에 출생했고 녀동생 윤유준은 1895년에 출생했다. 윤씨가문은 대대로 무예를 련마해왔기때문에 윤예지와 윤유준은 어려부터 가문에서 전해온 무예를 익혔다. 소녀시절에 아버지는 그녀들을 청나라 산서성 태원부 무예총지도이며 강호에서 “오독극수(五毒殛手)”라고 불리우는 무술고수 리덕원한테서 무예를 배우게 했다. 리로오(李老五)라고 불리우는 리덕원은 윤씨자매에게 도가 무당파 태화문의 무예정화를 8년동안 가르쳤다. 사상이 진보적이였던 윤씨자매는 소녀시절에 여러번이나 혁명당을 위해 통신련략을 해주었으며 광복회에 참가했다. 그후 명도녀학당에 들어가 공부하면서 선생 추근을 알게 되였다. 서석린, 추근의 환절봉기가 실패한후 윤예지도 체포대상이 되여 상해로 도망쳐 신물을 팔면서 신분을 숨다. 그녀는 요용침, 왕금발 등과 함께 비밀리에 혁명활동을 하면서 작탄을 만드는 방법을 배웠다. 이듬해 여름에 윤예지는 소흥에 돌아와 녀자학교를 꾸리면서 왕금발과 합작하여 추근을 살해한 막후인물 호도남을 처단했다. 1911년 6월에 광복회의 령도자 도성장이 자금을 모으러 남양으로 가자 광복회의 일상사업은 사실상 윤씨자매가 주관했다. 그해 10월에 무창봉기가 폭발했는데 윤씨자매는 그에 호응하여 도성장의 명의로 상해의 각계인사들과 함께 혁명을 계획했다. 윤예지는 남경공격을 지원하기 위해 작탄을 다그쳐 만들다가 부주의로 뒤머리에 부상을 입었다. 그리하여 녀동생 윤유준이 녀자선봉대를 거느리고 남경을 공격했다. 우화대와 중화문을 점령하는 전역에서 윤유준은 앞장서 싸웠기에 표창을 받았다. 상해와 강소가 독립된후 절강순무 증온은 의연히 험준한 지형을 방패삼아 완강하게 저항했다. 이에 윤예지는 직접 부대를 거느리고 항주에 가서 봉기를 일으켰다. 봉기중에 17살밖에 안되는 윤유준은 결사대를 거느리고 먼저 순무아문에 뛰여들어 첫번째 작탄을 던져 그번 전투를 승리에로 이끌었다.   윤예지와 윤유준 자매는 손중산의 경호원을 맡은 기간에 출중하게 임무를 완성했다. 무창봉기가 성공했을 때 손중산은 유럽에서 중국혁명을 선전하면서 자금을 모으고있었다. 무창봉기가 성공했다는 기쁜 소식을 들은 손중산은 즉시 배를 타고 귀국했다. 1911년 12월 25일에 손중산이 상해에 도착했다는 소식이 남경에 전해진후 각 성의 혁명당대표들은 일치하게 그를 림시대통령으로 추천하여 중화민국림시정부를 창건하여 청나라조정과 대항하자고 나섰다. 그때 혁명당인들에게 손중산의 안전을 보장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손중산이 상해에 도착한 그날 오후에 상해 갑북경찰서의 경찰들이 도적 한놈을 붙잡았는데 그 도적이 훔친 돈지갑에서 손중산이 각계인사들을 만나는 자리에서 손중산을 암살하려고 계획한 종이쪽지를 발견했다. 경찰서 서장은 즉시 그 쪽지의 내용을 호군도독부에 알렸다. 크게 놀란 호군도독 진기미는 윤씨자매에게 손중산의 신변경호를 맡기고 주위에 10여명의 경호원을 배치했다. 그날 오후 4시에 손중산은 원 계획대로 합동화원에 와서 상해의 각계인사들을 만났다. 윤예지는 녀비서차림을 하고 손중산의 뒤에 바싹 따라섰고 하녀차림을 한 윤유준은 손중산의 옆에 서서 주위를 경계했다. 연회가 결속된후 공연이 시작되였다. 손중산과 진기미는 나란히 앞줄에 앉았고 윤예지는 손중산의 뒤좌석에 앉았으며 윤유준은 주위를 돌아다니면서 동정을 살폈다. 공연이 고조에 올랐을 때 무대에서 무술배우로 위장한 한 자객이 고나도무술동작을 하여 장내의 박수갈채를 받았다. 박수소리가 높아지자 기회를 노리던 그 자객은 손을 쓰려고 했다. 하지만 자객의 의도를 눈치챈 윤예지는 순식간에 권총으로 무대우의 샹들리에등을 명중하여 꺼버렸다. 그와 동시에 번개처럼 무대우로 뛰여올라간 윤유준은 두손으로 암기를 날려 무술표연을 하는 자의 두눈을 명중했다. 이렇게 두 자매는 손쉽게 손중산을 암살하려던 자객을 붙잡았다. 사후에 진기미는 윤예지에게 “왜서 무술배우가 자객이란것을 발견하고서도 직접 총을 쏘아 죽이지 않고 먼저 무대우의 등부터 꺼버렸소? 어둠속에서 자객들이 활동하기 더 쉽지 않겠소?”라고 물었다. 그러자 윤예지는 웃으며 대답했다. “전 그자가 무대에 오르자마자 자객이란걸 눈치챘어요. 배우라면 공연에만 정신을 집중하겠는데 그자는 자꾸만 무대아래를 곁눈질했어요. 그러다가 고난도동작으로 관중들을 끌면서 기회를 만들려고 했어요. 전 그자가 곧 손을 쓰려고 한다는것을 눈치챘어요. 만약 총으로 그자를 쏘아죽인다면 다른 자객들이 혼란한 틈을 빌어 손을 쓸수 있었어요. 그래서 무대우의 등을 명중하여 꺼버렸어요. 자객은 갑자기 어두워지면 그 시각에 아무것도 볼수 없기에 붙잡기 쉬웠어요. 또 다른 자객들도 갑자기 등불이 꺼지면 무슨 일인지 놀라서 경솔하게 손을 쓰려고 하지 못할거예요. 또 총소리를 들은 다른 경호원들이 총을 빼들고 사격준비를 하고있을테니깐 폭로되지 않은 자객들은 일이 잘못 된것을 알고 도망칠게 뻔하잖아요?” 1912년 1월 1일에 손중산은 상해에서 기차를 타고 남경으로 향했다. 그날 저녁에 10시에 림시대통령취임식이 거행되였다. 이튿날 오후에 손중산은 부자묘에서 연설을 했다. 그는 봉건등급, 례절, 호칭을 페지하고 “국민은 주인이고 관리는 공복”이라는 관념을 전파했다. 손중산이 연설을 한다는 말을 듣고 거리의 행인들은 너도나도 부자묘로 모여들었다. 그 시각 부자묘에 모여든 사람들속에는 광동에서 온 3명의 자객들이 숨어있었다. 그들은 청나라의 강남제독 장훈이 남경에서 도망치면서 남겨놓은 군인들이였다. 그들은 손중산이 연설을 한다는 말을 듣고 암살행동을 하려고 달려왔던것이다. 그들은 손중산을 암살하기만 하면 청나라 조정에서 큰 상을 줄것이라고 믿었다. 그들중에 관직이 제일 높은 사람은 초관(哨官—련장급)인데 회전식련발권총을 한자루 가지고있었다. 그 다음은 붕장(棚长—패장급)인데 장원매회필(일종 예리한 무기)을 가지고있었다. 다른 하나는 18반무예를 정통한 효용(보통 사병급)이였는데 각반을 두른 다리에 비수를 감추고있었다. 남경거리의 사람들이 광동말을 알아듣지 못한다고 여긴 그들은 공개적으로 암살행동에 대해 상의했다. 효용이 암살행동을 실행하고 다른 두 사람이 엄호를 책임지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그들은 윤씨자매가 처음부터 그들을 주의깊에 살피고있었으며 그들이 하는 광동말을 다 알아들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윤씨자매는 빠른 눈짓으로 말을 주고받았다. 윤예지가 초관과 붕장을 제어하고 윤유준이 효용을 맡기로 한것이다. 호용은 자신만만해서 동료들에게 눈짓하고 손중산이 연설하고있는 곳을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다. 호용이 떠나자마 윤예지가 번개같이 두손을 날려 초관의 회전식련발권총과 붕장의 장원매회필을 빼앗아냈다. 호용을 미행하던 윤유준은 호용이 무예에 능한것을 발견하고 그가 준비가 없는 틈을 타서 발로 넘어뜨리고 눈깜짝할사이에 그가 눈치를 차리지 못하게 그의 몸에서 비수를 빼앗아냈다. 얼마후 일어나서 사람들의 속을 비집고 손중산의 가까이에 다가간 호용은 다리에 감은 각반을 만졌다. 그런데 각반에 감추었던 비수가 보이지 않았다. 든든하게 꽂았던 비수가 보이지 않자 깜짝 놀란 그는 손을 쓸 엄두도 내지 못하고 도망쳤다. 림시정부 륙군부장 황흥은 이 소식을 들은후 기뻐서 윤씨자매를 “혁명녀협객, 민국공신”이라고 칭찬했다. 민국2년(1913년)에 윤씨자매는 가족을 만나러 북경으로 갔다. 그때 원세개는 그녀들을 금전과 벼슬로 유혹하여 자신의 경호원으로 만들려고 했으나 그녀들의 거절을 받았다. 녀동생 윤유준은 1914년에 절강성의 한고향사람인 광복회 회원 구소와 결혼했다. 그후 5년후인 1919년 7월 16일에 산두에서 병으로 사망되였다. 언니 윤예지는 1916년에 광복회 회원 주아위와 결혼했다. 이듬해에 주아위는 일본륙군대학에 가서 공부할 때 윤예지와 함께 거주했다. 그들은 2년후에 북경에서 살았는데 여러해동안 정치활동에 참가하지 않았다. 항일전쟁시기에 윤예지는 중경에서 선후로 부녀사업대 부대장, 항일군공렬사유족공장 공장장을 담임하면서 적극적으로 항일구국활동에 참가했다. 윤예지는 1948년 1월 10일에 중경에서 사망되였다. 
177    이쁘면 용서받는다 댓글:  조회:7519  추천:8  2014-06-19
이쁘면 용서받는다   김희수     어느날에 반금련이 빗장을 잠그다가 실수로 빗장을 떨구었는데 그것이 공교롭게도 창문 아래로 지나가던 서문경의 머리에 떨어진다. “앗! 어느 놈이야?” 서문경이 욕설을 퍼부으려고 바라보니 경국지색의 미녀인지라 웃으며 반금련의 실수를 용서해준다.   이는 《수호전》이나 《금병매》를 읽어본 사람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이야기이다. 여기서 만약 반금련이 예쁘게 생기지 않았더라면 용서받을수 있었을가? 아니, 적어도 서문경과 같은 호색한에게는 용서받지 못했을것이다.   나도 이와 비슷한 경우를 경험한적이 있다. 만원뻐스안에서 웬 녀자가 하이힐로 내 발을 밟았는데 몹시 불쾌했다. 일부러 그런것이 아니라는것을 알면서도 내 입에서는 욕설이 나오려고 했다. 그러나 머리를 드는 순간 나는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욕을 꾹 삼키고말았다. 내 발을 밟은 녀인은 반금련 같은 미인이였던것이다. 나는 서문경 같은 바람둥이는 아니였지만 반금련 같은 미인의 실수를 용서해주었던것이다. 서문경처럼 그녀에게 첫눈에 홀딱 반하여 엉큼한 마음을 먹은건 더구나 아니였다. 잘못을 했어도 이쁘면 용서해주고싶은 마음이 생기는것이다.   그러나 이쁘다고 해서 꼭 용서를 받는것도 아닐것이다. 이쁘면 이성에게는 용서받을수 있으나 동성(동성애는 제외)에게는 용서받지 못할수도 있다. 또 이성이라고 해서 다 미인을 용서해준다는 보장은 없다. 이성이 모두 서문경이나 나와 같을수 없기때문이다. 그리고 이쁘다고 해서 다 용서받는것도 아니다.   어느 맥주집에서 목격했던 일이다. 건너상에서 맥주를 마시던 한 녀자가 일어서서 화장실로 가려고 하다가 그만 발을 빗디디였다. 그 바람에 그 녀자는 앞으로 꼬꾸라지면서 한손으로 앞의 술상을 짚고 다른 한손으로 한 남성이 마시던 맥주잔을 쳐버렸다. 맥주잔에 가득 채워졌던 맥주는 고스란히 남성의 옷에 쏟아졌다. 순식간에 맥주벼락을 맞은 남성은 벌떡 일어서 그 녀자를 쏘아보았다. 그러던 그 남성이 도로 앉아버렸다. 노기충천했던 표정도 가뭇없이 사라졌다. 실수로 맥주잔을 뒤엎은 녀인은 양귀비나 서시 같은 미인이였던것이다. 아마도 남성은 녀자가 이뻐서 용서해준것 같았다. 그런데 다음순간이였다. 그렇게 이쁜 녀자의 입에서 나왔을가 의심되는 말이 그녀의 입에서 쏟아져나왔다. “아 씨… 재수없다!” 남성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는듯 그녀의 입을 멍하니 쳐다보는데 그녀의 입에서 다시 험한 말이 쏟아져나왔다. “이 씨, 쉬털이야!” 그 말에 남성이 너무 기가막혀 한마디 했다. “이 녀자가? 사과하기는 커녕…” “이 씨…내 잘못도 아닌데 사과는 무슨…” 이쁜 녀자는 “아 씨, 이 씨”란 말을 습관처럼 내뱉었다. 그 녀자는 원래 이뻐서 용서받을수 있었는데 고약한 행실때문에 결국 남성에게 귀쌈 한대를 얻어맞았다.   “아무리 큰 잘못을 했어도 이쁘면 용서받는다”는 말은 이런 경우에는 통하지 않는다. 이쁘면 작은 실수는 용서받을수 있지만 큰 잘못은 용서받을수 없다.   그러면 이쁘지 않으면 용서받을수 없는가? 얼마전에 퇴근길에 있은 일이다. 내가 금방 비가 그친 인행도(무질서하게 주차한 차량사이로 차도 다니고 오토바이도 다니고 사람도 다니는 길이여서 인행도라고 해도 되는지 모르겠다)로 걸어가다가 앞에서 우산을 들고 서있는 한 녀인의 곁을 지나려던 순간 그 녀인이 뒤를 보지 않고 갑자기 홱 돌아섰다. 그 바람에 그녀가 들고있던 우산이 내 어깨죽지를 강타했다. “아이쿠!” 내가 아픔을 호소하자 그녀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면 연신 “미안합니다”하고 사과했다. 그런 그녀를 다시 보니 뚱뚱한 몸매에 얼굴까지 밉상이였다. 내가 이마살을 찌푸리자 그녀는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몹시 다친것 같은데 병원에 같이 갑시다.” “아, 괜찮습니다.” “그럼 약방에 가서 약이라도 발라야 되잖을가요?” 그녀는 앞에 있는 약방을 가리키며 같이 가자고 했다. 나는 사절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녀가 거듭 사과하는 바람에 조금전까지 따끔따끔 아프던 어깨죽지의 통증도 어느새 가셔진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진심으로 그녀를 용서해주었다. 그녀는 얼굴이 이뻐서 용서를 받은것이 아니라 마음이 이뻐서 용서를 받은것이였다.   얼굴이 이쁘면 일부 사람들에게서 용서받을수 있고 마음이 이쁘면 모든 사람들에게서 용서받을수 있다. 마음이 이쁜 사람은 용서받지 못할 큰 잘못은 하지 않을테니깐.     
176    중국공산당 최대 반역자 장국도 댓글:  조회:7200  추천:2  2014-06-15
중국공산당 최대 반역자 장국도   (번역)     장국도(张国焘)는 자가 개음(恺荫)이고 특립(特立)이라는 이름도 가지고있다. 1897년 11월 14일에 강서성 평향시 상률현 금산향 산명촌에서 출생한 장국도는 1916년에 북경대학에서 공부하면서 여러가지 새로운 사조의 영향을 받았다. 힘없고 가난하며 내우외환에 시달리고있는 당시의 시국에 대해 불만을 품고있던 장국도는 반일애국의 청원시위활동에 참가하였으며 학생구국회에서 성립한 《민국》잡지사에서 적극적으로 애국활동에 종사했다. 1919년 5월 4일에 폭발된 5.4운동에서 장국도는 등중하, 황일규, 고군우 등과 함께 핵심적인 지도작용을 일으켰다. 모든 애국청년들과 마찬가지로 장국도는 지대한 열정으로 이 운동에 뛰여들었다. 1920년 4월에 장국도는 리대소의 건의로 맑스주의저작과 사회주의를 소개한 서적을 계통적으로 학습했다. 7월초에 북경의 국세가 긴장해지자 리대소는 장국도에게 상해로 가서 진독수와 함께 앞으로의 계획을 세워보라고 했다. 진독수를 만나보고 북경에 돌아온 장국도는 리대소에게 진독수가 상해에서 공산당창건준비에 착수하고있는 정황을 회보했다. 리대소는 당창건조건이 초보적으로 구비되였다고 인정하면서 찬동을 표시했다. 일련의 준비를 거쳐 10월에 리대소, 장국도, 장신부 세 사람은 북경대학 도서관 주임실에서 회의를 열고 정식으로 북경공산당조직을 성립하고 후에 여러 사람을 가입시켰다. 11월말에 북경공산당조직에서는 회의를 열고 중국공산당북경지부를 명명하기로 결정하고 리대소를 서기로 추천했다. 그리고 장국도에게 조직사업을 책임지게 하고 라장룡이 선전사업을 책임지도록 결정했다. 리대소의 지도하에 장국도, 등중하, 라장룡, 류인정 등은 사회주의청년단을 조직했다. 북경공산당조직이 성립되여서부터 중국공산당 1차대표대회가 열리기까지 장국도는 맑스주의리론학습에서나 로동자들을 조직하는 사업에서나 모두 매우 큰 성과를 이루었다. 이는 장국도의 정치생애에서 매우 중요한 한페지로 되였다. 1921년 7월에 중국공산당 제1차대표대회가 상해에서 열렸다. 장국도는 북경공산당조직의 대표신분으로 회의에 참석했는데 추천에 의해 회의를 주관했다. 그번 회의에서 장국도는 중앙국(中央局) 성원으로 선거되였으며 조직사업을 책임졌다. 회의후 중국로동조합서기부 주임 겸 《로동주간》 주필로 임명된 장국도는 로동운동을 지도했다. 중국공산당 제3차대표대회에서 장국도는 국공합작을 반대했기에 중앙위원으로 당선되지 못했다. 의기소침하여 북경으로 돌아온 장국도는 양자렬과 결혼했다. 북경에서 반역자의 고발로 장국도와 양자렬은 함께 체포되였다. 적들의 고문에 견디지 못한 장국도는 죽음이 두려워 리대소, 진독수, 담평산, 장곤제 및 북경의 공산당원들을 고발하여 공산당을 배반했다. 그러나 이 시기의 력사는 당시에 누구도 몰랐기에 장국도는 조직을 속이고 적과 투쟁한 영웅으로 되였다. 중국공산당 제4차대표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으로 선거된 장국도는 다시 중앙으로 돌아와 사업했다. 국민당우파가 공산당을 배척하고 타격하며 국공합작을 파괴하는 음모활동에 대해 장국도는 타협하고 양보하는 정책을 실시했다. 국민당 제2차대표대회, 중산함사건, 당무사건정리 이 3대사건에 대해 장국도는 모두 국민당에 양보했다. 1926년말에 장국도는 중공호북구당위 서기직을 담임했다. 대혁명이 실패한후 장국도는 림시중앙상무위원회 위원직을 맡았는데 남창으로 가서 남창봉기를 제지하려고 했다. 그의 의견이 부결된후 그는 봉기에 동의했을뿐만아니라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봉기의 전과정에 참가했다. 1928년에 장국도는 구쏘련으로 건너가 중국공산당 6차대표대회에 참가했으며 제6기 1중전회에서 중앙정치국위원으로 당선되였다. 회의후 그는 중국공산당 공산국제대표로 모스크바에 남았다. 1931년 4월에 중공중앙에서 장국도, 진창호, 심택민을 악예환쏘베트구역에 파견했다. 장국도는 악예환쏘베트구역 중앙국 서기 겸 군사위원회 주석으로 임명되였다. 장국도는 권력을 장악한지 얼마 안되여 악예환특위와 홍군에 대해 전면적으로 개조했다. 그는 “볼세비크의 개조”, “숙반강화” 등의 명의를 내걸고 악예환쏘베트구역의 반대파숙청을 확대하여 수많은 혁명동지들을 죽음으로 몰아갔다. 1935년에 홍군 제1방면군과 제4방면군이 합류하자 8만여명의 군대를 장악한 장국도는 1만여명의 군대밖에 장악하지 못한 모택동과 맞서 따로 중앙을 세우고 당과 홍군을 분렬하려고 시도했다. 섬북에 도달한후 1937년 3월에 연안에서 열린 정치국확대회의에서 당중앙에서 장국도의 착오를 비판하고 “장국도동지의 착오에 대한 결정”을 통과했다. “결정”은 장국도가 많은 중대한 정치문제에서 원칙적인 착오를 범했다고 지적했다. 소수가 다수에 복종하는 조직원칙에 따라 장국도는 “나의 착오”라는 서면반성문을 썼다. 그제야 장국도는 섬감녕변구정부 대리주석으로 임명되였다. 1938년 4월 4일은 국공쌍방에서 공동으로 황제릉에 제사를 지내는 날이였다. 섬감녕변구정부 대리주석의 신분으로 이 활동에 참가한 장국도는 황제릉앞에서 국민당 서안안무공서주임 장정문을 만났다. 제사가 끝난후 장국도는 호송하는 사람들에게 “내 서안에 볼일이 있으니 먼저 가시오”하고 경호원 한사람만 데리고 국민당방면의 차에 앉아 거들먹거리며 사라졌다. 무한에 돌아온후 주은래 등이 여러번이나 권고했으나 장국도는 이미 장개석에게 투항하기로 결심을 굳혔다. 장국도는 1938년 9월에 중경에 도착했다. 대립은 장국도에게 국민당특종정치문제연구실을 책임지게 했다. 군통특무조직에 가입한 장국도는 전문 공산당을 대처하는 특공일군들을 훈련시켰다. 공을 세우기 위해 장국도는 대립에게 “팔로군129사를 투항시키겠다”고 제기했다. 그는 승산이 있다는듯 “129사는 주요하게 홍군4방면군을 개편한 부대인데 홍군4방면군은 내가 거느리던 대오입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것은 장국도의 오산이였다. 장국도가 실패했다는 소식을 들은 대립은 화가 나서 부하들에게 당장 장국도를 불러오라고 명령했다. 얼마후 부하들이 장국도를 데려오자 대립은 장국도를 손가락질하며 한바탕 욕설을 퍼부은후 즉시 장국도의 일체직무를 철소하고 전용차를 포함한 일체 생활대우를 취소한다고 선포했다. 리용가치를 잃은 장국도는 이렇게 국민당에게 버림받았다. 1946년에 관계를 통해 사후구제총서 강서분서 서장으로 된 장국도는 “금의환향”하여 부귀영화를 누리는듯한 느낌이 들어 기뻐했다. 그러나 장국도가 일을 맡은후 그와 원쑤를 맺었던 왕릉기가 곳곳에서 그와 맞섰다. 울분을 억누르며 2개월동안 참고있던 장국도는 더는 해먹을수 없다고 생각되여 사직하고 강서성을 떠나 상해로 피해갔다. 1949년에 장가왕조의 대세가 기울어지자 장국도는 황망히 가족을 데리고 대만으로 도망쳤다. 대북에 세를 맡은 그는 계속 국민당을 위해 일하려고 생각했지만 국민당은 그에게 “사업”을 배치하지 않았을뿐만아니라 그의 생활형편에 대해서도 물어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국민당제6기 중앙위원”이란것을 언제나 마음속에 잊지 않고있었으나 국민당은 그를 잊고있었다. 얼마후 그가 거주하고있는 주택은 행정원의 비준을 맡아 동남행정장관공서에 강제로 징수되였다. 그는 노기충천하여 행정원을 찾아가서 도리를 따졌지만 아무런 결과도 보지 못했다. 집을 빼앗긴 장국도는 다시 가족을 데리고 당시 영국식민지였던 향항으로 이주했다. 1956년에 중국공산당 제8차 대표대회가 열린후 국내형세가 많이 느슨해진것을 본 장국도는 귀국하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여러가지 경로를 통해 중공중앙에 자신의 요구를 전달했다. 얼마후 중공중앙에서 사람을 파견하여 장국도한테 보냈다. 그 사람은 장국도한테 “귀국하는건 문제없다. 하지만 전제조건은 착오를 승인하는것이다”라는 중공중앙의 뜻을 전달했다. 장국도는 이런 조건을 예상했지만 정작 듣고나니 망설이였다. 그는 재삼 생각해보다가 결국 귀국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1961년에 장국도는 미국 캔자스주대학의 청탁을 받고 회고록을 쓰기 시작했다. 그는 캔자스주대학에서 매달 2000원(향항돈)씩 주는 돈으로 생활비를 해결했다. 그후 10여년동안 장국도는 판권을 팔아 생활을 유지했다. 1966년에 향항을 떠나 카나다로 간 장국도는 카나다에서 류학중인 큰 아들 장해위한테 몸을 의탁했다. 1977년 12월에 갓 80돐 생일을 쇤 장국도는 갑자기 중풍에 걸려 관청에서 꾸린 로인무료병원에 입원했다. 1979년 12월 3일의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겨울밤이였다. 카나다의 토론토에 있는 한 로인병원의 병상에 누워있던 장국도는 엄한의 침습에 시달리다가 비참하게 이국타향에서 객사했다. 그의 옆에는 간호원도 없었고 친인도 없었다.    
175    멋있게 사는것 댓글:  조회:5455  추천:9  2014-06-11
멋있게 사는것   김희수     누구나 멋있게 살아보고싶은 생각을 한번쯤은 해보았을것이다. 그럼 어떻게 사는것이 멋있게 사는것일가?   어떤이는 세계일주를 하면서 명승지들을 돌아보는것이 멋있게 사는것이라고 생각할수 있고 어떤이는 고대광실에서 살면서 호화로운 자가용비행기를 소유하는것이 멋있게 사는것이라고 생각할수 있다. 또 어떤이는 최고급술집에서 맥켈란(麦卡伦), 레미마르탱(人头马) 루이13세(路易十三) 브랜디(白兰地), 헤네시(轩尼诗) 등과 같은 세계명주를 마시것이 멋있게 사는것이라고 생각할수 있고 어떤이는 심지어 진시황처럼 삼천궁녀를 거느리며 사는것이 멋있게 사는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이렇게 멋있게 사는것에 대해 사람마다 다르게 생각할수 있다. 그럼 누구처럼 사는게 멋있게 사는것이고 누구를 멋있게 살았다고 해야 할가?   세계 최고권위를 자랑하는 노벨상을 설정하고 가버린 스웨덴의 발명가이며 화학자인 노벨을 멋있게 살았다고 하는 사람도 있을것이고 세상에서 가장 다재다능한 희극대왕이며 영화천재인 채플린을 멋있게 살았다고 하는 사람도 있을것이고 축구왕 펠레거나 마라도나를 멋있게 산다고 하는 사람도 있을것이고 세계최고부자 빌게이츠를 폼나게 멋있게 산다고 하는 사람도 있을것이다.   이렇게 누구나 다 자기 나름대로의 척도가 있을수 있기 때문에 “바로 이렇게 사는것이 멋있게 사는것이다”고 꼭 찍어 말할수 없지 않을가?   그러고보면 타인들로부터 멋있게 산다고 평가받는 사람은 멋있게 사는것일수 있다. 한국에서 멋있게 사는 사람을 꼽으라면 일과 사랑에서 모두 성공하고싶은 녀성들의 영원한 롤모델로 되고있는 기업인 조안리, 기아와 빈곤에 시달리는 여러나라에 파견되여 구호활동을 하면서 전 세계인을 친구로 여기며 살고있는 세계일주 오지려행가이며 국제구호활동가이자 작가인 한비야, 자전거로 7년간 112개국을 누빈 한국의 자전거려행전문가 문종성 등을 꼽을수 있을것이다.   인생을 멋있게 사는 사람은 이들처럼 자기의 인생을 스스로 개척하며 사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청소년시기에는 멋있게 살고싶은 희망에 한껏 부풀어 있다가도 결혼하면 직장일과 집안일때문에 바삐 뛰여다니고 아이가 생기면 자녀 뒤바라지를 하느라고 인생의 꿈을 포기한다. 심지어 그 뒤바라지는 자식이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도 계속 이어진다.   우리는 개혁개방을 하게 되면서부터 외국의 선진국에서는 자녀가 성인이 되면 더는 부모가 자녀를 부양하지 않으며 자녀들도 부모의 도움을 바라지 않고 자수성가하기 위해 분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였다. 그런데 30년이 넘었지만 우리의 부모들은 지금까지도 그렇게 하지 못하고있다. 자녀가 성인이 되여도 계속 양육비를 지급하고 장가를 가서 아이 낳고 부모가 되여도 시름을 놓치 못해 계속 자녀들을 돌봐주고 있다. 심지어 늙어 허리가 굽어 죽을 때까지 손자, 손녀들을 돌봐주고있다. 그렇게 자녀들을 위해 모든것을 희생하다보니 과장된 말로 하루라도 자신을 위해 멋있게 살아보지 못하다가 죽게 된다.   세상에 태여났다가 길어서 100년밖에 안되는 인생에 한번도 멋있게 살아보지 못하고 죽는 다면 얼마나 억울한가?   내가 아는 한 녀자가 있다. 40대인데 살림도 잘하고 직장일도 잘하고 취미생활도 잘한다. 직장에서는 자기 앞의 일을 착실히 하고 집에 돌아가서는 남편과 아이도 잘 챙겨준다. 아이의 공부뒤바라지도 남들 못지 않게 잘하고 남편도 잘 받들지만 아이와 남편을 위해 자신의 모든것을 바치거나 전부의 시간을 할애하지는 않는다. 자신을 위한 일에도 시간을 짜내 엄마동아리 모임에도 참가하고 배드민턴을 치러도 다닌다.   이렇게 그녀처럼 가족을 위하면서도 가족을 위해 자신의 행복까지 희생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인생을 사는것이 멋있게 사는것이 아닐가?   여태껏 자녀들을 위해 희생한 부모들이라면 지금부터라도 자녀 뒤바라지를 그만두고 하고싶었고 원했던 일을 하면서 자신의 여생을 한번 멋있게 살아보는것이 어떨가? 한번뿐인 삶 폼나게 멋있게 살자. 세상에 태여났다가 한번도 멋있게 살아보지 못하고 죽으면 얼마나 유감이 될가?     
174    중국 최대 한간 왕정위 댓글:  조회:7471  추천:0  2014-06-09
중국 최대 한간 왕정위   (번역)   왕정위(汪精卫)의 본명은 왕조명(汪兆铭)이고 자는 계신(季新), 호는 정위이다. 1883년 5월 4일에 광동성 삼수현서(三水县署—지금의 광동성 불산시 삼수구 하구진)에서 출생한 왕정위는 1904년 9월에 동경정법대학에 들어가 공부하면서 서방의 민주사상을 접촉했다. 그때로부터 그의 가슴에는 봉건전제제도를 뒤엎고 서방식민주공화국을 건립하겠다는 신념이 있게 되였다. 1905년 7월에 손중산을 만나서 동맹회에 가입했고 동맹회장정을 작성하는데 참여했으며 한달후 동맹회 평의부 평의장으로 임명되였다. 그후 “정위”라는 필명으로 《민보》에 《민족의 국민》, 《혁명의 추세를 론함》 등 일련의 문장을 발표하여 3민주의 사상을 선전했으며 강유위, 량계초 등 개량파의 황제보호론을 호되게 꾸짖어 손중산의 호평을 받았다. 1907초에 손중산을 따라 남양으로 들어간 왕정위는 동맹회분회를 세우고 남양혁명당보인 《중흥일보》의 주필을 맡아 보황당의 《남양총회보》와 론전을 벌렸다. 1908년에 먄마에 동맹회 앙광분회를 세웠는데 그해 3월에 왕정위는 말레이시아의 삐낭시(槟城)에서 화교거부 진경기의 딸 진벽군을 알게 되였다. 그후 싱가포르에서 동맹회 남양지부를 세우는 등 사업을 하면서 혁명경비를 마련했다. 1909년 10월에 남양에서 일본으로 들어가 《민보》의 주필을 담당하면서 비밀리에 《민보》 제25기와 제26기를 발행했다. 1910년 1월에 황복생 등과 함께 북경에 돌아와 수진사진관을 꾸리고  암암리에 섭정왕 재풍암살을 계획했다가 일이 탄로난후 경찰에 체포되여 종신감금형에 언도되였다. 처음에 그는 죽음으로 나라에 보답하려고 결심했으나 숙친왕 선기의 구슬림에 넘어가 뜻을 굽히고말았다. 왕정위는 1912년초에 상해에서 진벽군과 결혼식을 올렸다. 왕정위와 진벽군은 6남매를 보았는데 다섯째가 요절한외에 나머지는 모두 장수했다. 1925년 3월에 손중산이 사망되고 그해 6월 26일에 왕정위의 주최하에 국민당중앙정치회의가 열렸다. 회의에서는 국민당총리의 칭호를 영원히 손중산에게 남겨주고 이후 국민당은 집체령도의 위원제를 채택하기로 결정했다. 회의에서는 또 손중산생전의 대원수부행정기구를 철소하고 국민당의 최고행정기관을 국민정부로 고치기로 결정했다. 7월 1일에 국민정부가 정식으로 성립되였는데 왕정위가 국민정부 상무위원회 주석 겸 군사위원회 주석, 선전부 부장 등 직에 임명되였다. 그는 또 1926년 1월에 국민당 2차 대표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회 상무위원회 위원으로 당선되였다. 그러나 “중산함사건(‘3.20사건’이라고도 하는데 1926년 3월에 장개석이 국공합작을 파괴하고 혁명의 령도권을 쟁취하려고 의도적으로 중국공산당을 배척하고 타격한 정치사건)”이 발생된후 핍박에 의해 사직하고 프랑스로 갔다. 1927년 2월에 프랑스를 떠나 구쏘련을 통해 귀국했다. 구쏘련에 들렸을 때 쓰딸린이 이 국민당좌파령수를 접견했다. 귀국후 무한국민정부 주석직을 맡은 그는 혁명을 배반한 장개석과 권력싸움을 벌렸다. 1927년 4월 5일에 왕정위와 진독수는 련명으로 “국공량당령수 왕조명, 진독수의 련합선언”을 발표했다. 4월 18일에 남경의 장개석국민정부가 성립되였다. 장개석은 국민당중의 원로 반공분자 호한민을 청하여 국민정부 주석을 맡게 하고 자신은 중앙군위주석과 국민혁명군 총사령을 맡았다. 이렇게 국민당은 공개적으로 왕정위의 “무한정부”와 장개석의 “남경정부”로 분렬되였다. 왕정위는 7월 15일에 무한에서 공산당을 등지고 장개석과 합류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그후에도 줄곧 장개석과 암투를 벌렸다. 왕정위는 12월 16일에 정계에서 은퇴한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진벽군과 함께 프랑스로 갔다. 그는 1929년에 귀국한후 “중국국민당 제2기 중앙집행감독위원련석회의”의 명의로 명령을 발부하여 각지의 “호당구국군(护党救国军)”에 위임장과 부대번호를 내주었다. 1928년 11월에 진공박(陈公博) 등이 상해에서 개조파를 성립했는데 왕정위가 수령으로 선거되였다. 1930년에 왕정위는 풍옥상(冯玉祥), 염석산(阎锡山), 리종인(李宗仁)과 련합하여 장개석을 반대하려다가 실패한후 향항으로 도망쳤다. 1931년에 왕정위는 장개석을 반대하는 각파의 세력을 모아가지고 광동에서 따로 국민정부를 세웠다. 9.18사변후 전국인민들이 각 당파가 단합하여 일치하게 항일할것을 요구하자 왕정위는 다시 장개석과 합작했다. 1935년 11월 1일에 국민당은 제5기전국대표대회를 열었는데 4기6중전회가 개막되였다. 개막식이 결속된후 중앙위원들이 대문앞에 모여서 사진을 찍을 준비를 했다. 왕정위는 득의만면하여 배를 쑥 내밀고 맨 앞줄의 걸상에 앉았다. 그의 옆의 장개석자리는 비여있었다. 중앙위원회 주석인 장개석은 무슨 영문인지 그때까지 회의장소에 나타나지 않았다. 사진사가 사진을 찍을 준비를 하고있는데 갑자기 사진기를 둘러싸고있던 사람들속에서 한명의 기자가 불쑥 달려나오면서 총을 꺼내들고 왕정위를 향해 련속 세방을 쏘아댔다. 총소리와 함께 왕정위가 쓰러지자 대경실색한 사람들은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져 달아났다. 왕정위의 경호원 양개평은 자객을 향해 련발사격을 해댔다. 그때에야 도착한 장개석은 왕정위암살을 지시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중상을 입은 왕정위는 요행 목숨을 건졌다. 1936년에 서안사변이 발생된후 왕정위는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 장개석을 대신해 정권을 장악할 준비를 했다. 장개석이 남경으로 돌아온후 왕정위는 국민당정치위원회 주석을 담임했다. 1937년 7월에 항일전쟁이 폭발되자 왕정위는 국방최고회의 부주석, 국민당 부총재, 국민당참정회의장으로 선발되였는데 당, 정 권력이 모두 장개석의 아래였다. 1938년 12월에 웥남의 하노이로 도망쳤다가 귀국하여 남경으로 돌아온 왕정위는 “염전(艳电—왕정위가 1938년 12월 29일에 림백생을 시켜 장개석에게 보낸 전보식성명으로서 일본에 대한 타협정책을 지지한다고 표시한 친일성명)”성명을 발표했다. 1938년까지 일본에 투항한 괴로군은 7만 8000명이였지만 왕정위가 일본에 투항한후 괴로군수는 14만 5000명으로 증가되였다. 그후 일본의 주구로 된 괴로군수는 놀라울 정도로 늘어나 100만명을 넘었다. 후에 왕정위는 일본측대표와 비밀리에 “중광당협의(重光堂协议)”를 체결하고 공개적으로 일본과 합작했다. 왕정위는 1940년 3월 20일에 남경에서 괴뢰민국정부를 성립했다. 그해 11월 30일에 남경에서 “화일기본조약(华日基本条约)”체결의식을 거행했는데 왕정위는 행정원장의 신분으로 출석하여 조약에 서명하고 자체로 주석직을 맡았다. 일본에 충성한 매국역적 왕정위는 1944년 11월 10일에 일본의 나고야시에서 병으로 악명높은 일생을 마감했다. 왕정위의 안해 진벽군도 중국의 최대 녀한간이였다. 진벽군은 1891년 11월 5일에 말레이시아의 삐낭시(槟城)에서 태여났는데 아버지 진경기는 남양거부였다. 일본이 투항하자 그녀는 국민당감옥에 갇혔다. 1949년 4월에 소주가 해방된후 진벽군은 사자구감옥에서 공안국 간수소로 이송되였다. 7월 1일에 상해가 해방된후 진벽군은 또 소주감옥에서 상해제람교감옥으로 압송되였다. 처음에 진벽군은 중국공산당과 인민정부에 매우 깊은 저촉정서를 가지고있어 자신이 한간이란것을 승인하지 않았다. 진벽군은 국민당감옥에 있을 때에는 조건이 악렬하여 밥도 제대로 먹지 못했는데 공산당감옥에서 인도주의정신으로 대우를 잘해주자 너무 뜻밖이여서 “내가 반평생 공산당을 반대했는데 공산당이 이렇게 날 잘 대해주다니? 하하하. 이건 다 내 신분이 특수하기때문이지”하고 득의양양하여 어깨를 으쓱했다. 새중국이 성립된후 국가 부주석인 송경령과 중앙인민정부 위원인 하향응이 련명으로 감옥에 갇혀있는 진벽군한테 편지를 써보냈다. 송경령과 하향응은 일찍 진벽군과 사업을 함께 해온 동료였고 손중산의 령도아래서 함께 혁명사업을 해온 동지였으며 사적으로도 감정이 깊었다. 송경령과 하향응은 함께 모택동과 주은래를 만나 “진벽군문제는 왕정위와 다름니다. 나라를 팔아먹고 적에게 투항하는데 지지하고 참여했지만 결책자는 아닙니다. 적당한 시기에 진벽군의 태도를 보아 석방해주기 바랍니다”라고 제기했다. 모택동과 주은래는 송경령과 하향응의 의견을 존중하여 “진벽군이 죄를 승인하는 간단한 성명만 발표하면 중앙인민정부는 명령을 내려 진벽군을 석방해주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진벽군은 송경령과 하향응의 호의를 거절하면서 말했다. “내가 일본과 화친한것은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였는데 무슨 죄가 있겠는가? 나는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후회하지도 않는다. 나는 달갑게 감옥에서 일생을 마치겠다.” 진벽군은 또 어이없게도 “나는 장개석을 반대했고 당신들 공산당도 장개석을 반대했으니 우린 동지라고 말할수 있어. 그러니 날 장개석역적처럼 대해선 안돼”라고 당당하게 말했다. 1959년 6월 17일에 진벽군은 상해제람교감옥병원에서 숨을 거두었는데 향년 68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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