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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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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    엄마야 누나야 댓글:  조회:3412  추천:2  2014-06-06
엄마야 누나야  김희수   엄마가 간지도 10년, 누나가 간지도 5년이 된다. 달이 가고 해가 가고… 그 10년을, 그 5년을 형국이는 밤마다 눈물로 베개잇을 적시며 견뎌왔다.   《엄마, 어서 돌아와 응? 누나, 어서 돌아와 응?》 엄마에게서 전화가 올 때마다 형국이는 그렇게 간절히 애걸했다. 그러나 엄마는 그냥 그 대답뿐이였다. 《좀만 더 있다가 응? 1년만 더 기다려 응?》 그런데 그 1년이 어느새 5년이 되고… 5년후에는 또 누나까지 데려갔다. 《엄마, 가지 마. 응? 누나, 가지 마. 응?》 형국이는 엄마가 갈 때도 그렇게 울면서 빌었고 누나가 갈 때도 그렇게 울면서 빌었다. 그러나 엄마도 누나도 손수건으로 그의 눈물을 닦아주고는 훌쩍 떠나버렸다. 형국이는 엄마를 그리며 10년, 누나를 그리며 5년을 살았다. 그런데 아직도 엄마와 누나는 돌아오지 않는다. 어제도 할머니가 많이 앓는다고 전화했다. 그랬건만 엄마와 누나는 입원비를 부쳐보내겠다면서 돌아오겠다는 말은 아예 하지 않았다. 7년전, 아버지가 앓을 때도 그랬다. 치료비만 부치고 안부를 묻고는 끝이였다. 그러다가 아버지의 병세가 위급하다고 했을 때에야 아차! 했다. 엄마가 돌아왔을 때는 아버지가 벌써 운명하신후였다. 아버지의 후사를 치르고 엄마는 또다시 떠나갔다. 왜서 그렇게 가야만 했는지 형국이는 리해가 되지 않는다. 말로는 널 대학까지 공부시켜야지, 그리고 남부럽잖게 잘살아야지 하는것이 리유였다. 엄마가 널 공부시키기 위해 애면글면하는데 공부를 잘해야지. 아버지도 생전에 그렇게 말했지만 형국이는 웬 일인지 공부가 잘되지 않는다. 잘해야지, 잘해야지 하고 아무리 애써도 공부가 잘되지 않는다. 형국이의 학급에는 형국이처럼 부모가 출국한 애들이 많았다. 서로의 고민을 알아주는 그 애들과는 못하는 말이 없었다. 《임마, 넌 그래도 괜찮아! 엄마가 늘 전화도 해주고 돈도 부쳐보내지 않니? 그리고 너의 아버지와 리혼도 하지 않고…》 형국이가 엄마에 대한 불평만 하면 엄마에게 버림 받은 그 애들이 그랬다. 형국이는 그런 애들의 엄마에 비하면 자기 엄마는 그래도 훌륭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엄마가 그렇게 애쓰시는데 공부를 잘하려고 마음먹어도 웬 일인지 공부가 잘되지 않는다. 엄마가 떠난후에는 그래도 8년 년상인 누나가 있어서 괜찮았다. 외롭고 쓸쓸할 때면 누나가 엄마도 돼주고 아빠도 돼주고 하며 자상한 사랑을 베풀어주었다. 누나가 있을 때까지는 공부도 학급에서 앞자리였다. 그래서 대학에 붙는건 시간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빠가 세상 뜬후 누나도 훌쩍 떠나버렸다. 웬 일인지 누나까지 떠나간후 형국이의 학습성적은 점점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지난 6월, 신심 없이 시험장으로 들어갔던 형국이는 고개를 푹 숙인채 맥없이 걸어나왔다. 그 모습을 본 할머니가 그때부터 몸져눕기 시작했다. 과연 시험성적도 대학입학점수선 미달이였다. 엄마와 누나가 자꾸 전화로 점수를 얼마나 땄느냐고 물었다. 그때마다 형국이는 엄마와 누나가 시험점수를 알면 속상해할가봐 대답을 하지 못하고 얼버무려버렸다. 그러면 엄마와 누나는 돈은 얼마든지 대줄수 있으니 올해 붙지 못하면 명년에 다시 치라고 고무하지만 형국이는 공부를 다시 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저 엄마와 누나가 어서 돌아오기만 기대했다. 형국이는 속상하거나 외로울 때마다 강변으로 나온다. 강가를 거니노라면 빨래하던 엄마의 모습과 미역 감던 누나의 모습이 삼삼히 떠오른다. 엄마는 세탁기를 두고도 늘 빨래하러 강변으로 나오군 했다. 그때마다 누나도 따라나와 미역 감고 형국이도 팬티바람으로 미꾸라지를 잡는다고 설쳐댔다. 까르르 깔깔… 그가 맨손으로 미꾸라지를 잡으면 엄마도 웃고 누나도 웃었다. 생각하면 그때가 제일 좋았다. 그때가 제일 행복했다. 그런데 지금은 강변에 빨래하던 엄마도 없고 미역 감던 누나도 없다. 《왜 누나까지 가야 해? 가지 않으면 안되나?》 형국이는 누나가 떠날 때 눈물이 글썽하여 물었다. 《얘야, 남들처럼 잘살아야지. 널 대학공부시키고 장가보낼 돈까지 벌어가지고 올게.》 누나는 이렇게 말하면서 떠나버렸다. 외할머니께서는 엄마 어릴 때에는 오막살이 초가집에서 강냉이떡을 먹고 해진 옷을 다닥다닥 기워 입으면서도 온 집식구가 아기자기 웃으며 행복하게 살았다고 늘 이야기했다. 그때는 아무리 가난해도 가족이 서로 떨어져사는 집이 없었단다. 엄마 학교 다닐 때에는 부모들과 떨어져사는 애들이 거의 없었단다. 그런데 지금은 호화로운 아빠트(형국이는 아빠트를 비워두고 옛 동네 할머니의 집에서 살았다)에서 현대화가전제품을 구전하게 갖추고 살면서도 엄마와 누나는 만족을 모른다. 날마다 엄마와 누나를 그리던 어느날, 형국이는 갑자기 몸이 아파 병원으로 갔다. 의사가 상세하게 검사하더니 련계전화를 남겨놓고 가라고 했다. 형국이는 할머니가 근심할가봐 이모네 집전화번호를 남겨놓았다. 그런데 이튿날에 이모가 찾아와서 입원하라고 했다. 《약을 먹었더니 다 나았어요. 이제 아프지 않아요.》 형국이가 아무 일도 없다고 말했지만 이모는 무작정 병원으로 끌고갔고 할머니도 따라오면서 자꾸 눈물만 훔쳤다. 《할머니, 내가 뭐 큰병에 걸린것도 아닌데 울지 마.》 《응, 할머닌 울지 않는다. 울긴 왜 울어.》 그런데 할머니는 눈물을 끊임없이 흘렸다. 형국이가 입원한 날,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네가 아프다면서… 엄마가 갈게.》 《아니, 괜찮아.》 그렇게 돌아오라고 애원해도 들은척도 하지 않던 엄마가 누나까지 데리고 형국이의 곁으로 날아왔다. 이모에게서 형국이가 불치의 병에 걸려 이제 6개월밖에 살지 못한다는 불행한 소식을 전해듣고 울면서 달려왔다. 그러나 형국이는 그때까지도 그런줄을 모르고있었다. 《또 출국하는가요?》 형국이는 엄마와 누나의 손을 잡고 물었다. 《10년이야. 인생이 얼마라고 혈육끼리 서로 헤여져 살아야 해? 이젠 안 가, 이젠 안 가!》 엄마와 누나는 눈물이 글썽해서 대답했다. 그런데 누가 알았으랴. 죽는다던 형국의 병은 잘못 알려진것이였다. 형국이와 동성동명인 다른 사람의 병일줄을… 형국이는 인츰 퇴원했고 온 집안에 기쁨이 넘쳐났다. 형국이는 엄마랑 누나랑 함께 살게 된것이 무엇보다도 기뻤다. 그러나 그런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한달후, 엄마와 누나는 또 외국으로 떠났다. 가지 말라고 그렇게 애원하는 형국이를 무정하게 남겨놓고…  
172    강청이 태여나서 자살하기까지 (5) 댓글:  조회:10126  추천:1  2014-06-01
강청이 태여나서 자살하기까지   그녀는 바로 녀황제를 꿈꾸고있었던것이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을 분노케 했다. 1976년 4월 4일의 청명절을 기하여 천안문광장에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주은래추모행사를 벌리면서 그동안 쌓였던 강청에 대한 반감과 분노를 토해냈으니 그것이 바로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천안문사태였다. 그날 저녁에 중공중앙정치국에서는 회의를 소집하여 천안문사태를 “반혁명사건”으로 규정하고 다음날 병력을 투입하여 천안문광장의 시위군중을 무력으로 진압하였다. 4월 7일 오전에 모원신으로부터 보고를 받은 모택동은 등소평의 모든 직위를 해제하고(등소평이 천안문사태의 주동자로 알려졌음) 화국봉을 국무원총리에 임명했다. 그날 오후에 모택동은 다시 화국봉을 중공중앙 제1부주석에 임명함으로써 등소평은 다시 타도되고 화국봉이 정식으로 후계자로 선정되였다. 화국봉은 모택동의 후계자로서 정국을 수습하면서 강청을 견제하였지만 강청은 그러한 화국봉을 안중에 두지 않고 모택동이 사망된후의 정권장악을 위한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1976년 9월 9일 새벽 0시 10분에 모택동이 8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모택동이 세상을 떠나자 중국의 정국은 엄청난 회오리에 휘말렸다. 4인방인 왕홍문과 장춘교가 높은 지위에 들어갔기때문에 강청은 “모택동의 부인”이라는 자격으로 당당하게 화국봉을 제압할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그녀는 야심을 드러내고 화국봉과의 마지막 일전을 준비했다. 그러나 그녀의 그러한 계획은 엽검영 등 로간부들에 의해 하루아침에 수포로 돌아가고말았다. 1976년 10월 6일에 화국봉과 엽검영은 4인방을 일거에 짓부셔버렸다. 1977년 7월에 중국공산당 10기 3중전회에서 강청의 당적을 영원히 박탈하고 당내외의 모든 직무를 해임한다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1981년 1월 25일에 중화인민공화국 최고인민법원 특별법정은 강청에게 반혁명집단의 주범으로 사형을 선고하고 2년후에 형을 집행하도록 하였다. 1983년 1월에 최고인민법원 형사법정은 판결문에서 그녀의 형을 무기징역으로 감형하고 모든 정치적권리를 종신토록 박탈한다고 선고하였다. 1991년 3월 15일에 강청은 몹시 앓아서 공안병원에 입원했다. 병석에서 강청은 모택동을 몹시 그리워했다. 그녀는 모택동의 친필서한이며 자기와 모택동이 함께 찍은 사진을 보면서 모택동을 그리워했다. 그녀가 감옥생활을 하는 동안 딸 리눌이 늘 면회를 왔다. 1991년 5월 14일에 허약하고 절망에 빠진 강청은 새벽 3시 30분에 자살을 하였다. 향년 77세였다. 이 소식을 들은 리눌이 와서 사망통지서에 서명했고 그 어떤 장례식도 치르지 않는데 동의했다. 사흘후인 5월 18일에 강청의 유체를 화장했는데 그 자리엔 리눌도 없었고 모택동이나 강청의 친적이 한 사람도 없었다. 리눌의 요구에 의해 골회함은 리눌에게 보내주었다. 그때 전국, 전세계에선 강청의 사망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있었다. 1991년 6월 4일에 중국정부에서 《시대》주간에 이 소식을 정식 전세계에 보도했다. “주석님, 전 당신을 사랑해요! 당신의 학생이며 전사인 강청이 당신을 보러 갑니다!” 이것이 강청이 자살하기전에 남긴 유일한 유서였다.      
171    강청이 태여나서 자살하기까지 (4) 댓글:  조회:7263  추천:0  2014-06-01
강청이 태여나서 자살하기까지 (4)     그해 8월에 중앙문화대혁명소조 조장 진백달이 병으로 휴직하는 동안 강청은 제1부조장 겸 대리조장을 맡아 실권을 장악하였다. 그후 중앙문화대혁명소조는 조직과 권한이 강대해져 중공중앙서기처와 중공중앙정치국을 압도하였다. 이로써 강청의 권한은 더욱 막강해져 “중앙수뇌”로서 사실상 모택동, 림표, 주은래, 주덕의 다음 가는 권력을 휘두르게 되였다. 1966년 11월 28일에 강청은 인민대회당에서 개최된 수도 문화계의 무산계급문화대혁명대회에서 “문예혁명의 기수”로 등극함과 동시에 중국인민해방군 문화사업고문을 맡았다. 1969년 4월 28일에 거행된 중국공산당 9기 1중전회에서 강청은 중공중앙정치국 위원으로 들어가 공식적으로 상무위원 다음의 자리에 오르게 되였다. 1971년 9월 13일에 모택동의 후계자로 지목되였던 부주석 림표가 반란사건으로 사망되고 1972년 1월에 강생이 병으로 물러난후 강청은 지위가 3~4위로 올랐다. 강청의 권력이 급부상됨에 따라 장춘교와 요문원의 위치도 강청의 다음에 오르게 되였다. 림표사건이후 건강상태가 점점 악화된 모택동은 79세의 나이를 이기지 못하고 1972년 1월에 심장병으로 드러누웠고 4월에는 또 주은래가 암에 걸렸다는 진단을 받았다. 이는 모택동과 주은래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예고하는것이기도 하였다. 모택동은 자신의 뒤를 이을 후계자문제에 부딪히게 되였다. 원래 후계자로 지목되였던 림표가 타도된후 그의 뒤를 이을 마땅한 인물이 없었기때문이였다. 강청은 내심 자기가 후계자자리에 오를수 있다는 기대를 하였지만 모택동은 그녀를 안중에 두지도 않았었다. 1973년 3월에 강청은 서렬에서 한참 뒤로 밀려나고 모택동의 총애를 등에 업은 왕홍문이 강력한 후계자로 부상되였다. 강청은 그러한 왕홍문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장춘교, 요문원과 함께 일종의 정치사조직인 “4인방”을 결성하여 정치적주도권을 잡아나갔다. 1974년 1월에 강청 등은 모택동의 승인을 받고 제2차 문화대혁명이라 할수 있는 “비림비공(림표와 공구를 비판하는)”운동을 일으켰다. 강청 등은 이 운동을 통하여 공자의 극기복례는 노예제도를 복귀시키려는것이고 림표의 “반혁명수정주의 로선”역시 극기복례를 통하여 자본주의를 복귀시키려는것이라고 공격하였다. 표면적으로는 림표와 공자를 비판하였지만 그 리면에는 강청의 최대 정치적 걸림돌인 주은래를 제거하기 위한 음모가 숨어있었던것이다. 1974년 6월에 암진단을 받았던 주은래의 병세가 위중해져 병원에 입원하였다. 모택동과 주은래의 운명이 눈앞에 다가와있다는것을 감지한 강청은 그들의 사후에 정권을 장악할 새 내각을 구상하고 그것을 실행에 옮길 준비를 하였다. 주석에 강청, 국무원총리에 장춘교, 인민대표대회 위원장에 요문원… 그러나 모택동이 이미 그러한 사실을 간파하고있었던데다가 1973년에 국무원 부총리로 복권된 등소평이 주은래의 권력을 도맡아 행사함으로써 강청의 구상은 큰 난관에 부딪히게 되였다. 1974년 7월에 모택동은 중앙정치국회의를 소집한 자리에서 강청과 4인방을 “상해파”, “4인소종파”라고 지칭하면서 그들의 정치적행동에 대하여 엄중히 경고하였다. 이로써 강청의 정치적무대는 많이 좁아지게 되였다. 1974년 10월에 거행된 중앙정치국회의에서 강청은 자신의 지위를 만회하기 위하여 주은래와 등소평을 공격하였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1974년 12월에 모택동은 왕홍문을 불러 “4인방으로 활동하지 말라! 네사람이 함께 종파를 무어 일하는것은 좋지 않다”고 경고하였다. 그리고 1975년 1월에 발표한 인사문제에서 주은래와 등소평체제를 강화하고 왕홍문을 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부위원장명단에서 제외했다. 이로써 왕홍문을 전면에 내세우고 공작을 준비하려했던 강청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말았다. 1975년 4월에 강청은 북경대학과 청화대학에서 강연하면서 “현재 당의 최대 위험은 교조주의가 아니라 경험주의다”고 비판하였다. 그녀가 말한 “경험주의”는 바로 경험이 풍부한 주은래와 주덕, 등소평 등의 로간부들을 지칭한것이다. 그리고 장춘교와 요문원을 책동하여 《인민일보》,《광명일보》,《문회보》 등에 경험주의를 비판하는 문장을 게재하게 했다. 이에 모택동은 “경험주의와 교조주의에 대한 반대를 포함하여 수정주의를 반대한다고 주장했어야 한다. 량자는 모두 맑스-레닌주의를 수정한것으로서 다른 한쪽은 놔두고 한쪽만 주장해서는 안된다. 각지의 상황이 다른것은 모두 맑스-레닌주의에 대한 수준이 낮아서 그런것이다. 어쨌든 교육을 시켜야 한다. 다년간 맑스-레닌주의를 제고시키는것이 좋다”라는 지시를 내리고 강청 등을 겨냥하여 “우리 당에서 맑스-레닌주의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어떤 사람은 스스로 안다고 생각하고 사실은 잘 모르면서 걸핏하면 남을 훈계하려 한다”라고 비판하였다. 그리고는 정치국에서 이 문제를 론의하라고 지시하였다. 모택동의 지시에 따라 중공중앙정치국에서는 4월 27일에 회의를 소집하여 강청의 문제에 대한 론의를 하였으며 그 론의에서 어쩔수없이 강청은 자아비판을 해야만 했다. 이로써 강청은 문혁이후 최대의 정치적위기를 만나게 되였다. 1975년 9월에 모택동의 병세가 더욱 위중해져 말을 잘 못할 정도였으며 주은래도 4차수술을 받았다. 그 시기 모택동은 조카 모원신을 곁에 두고 자기와 중앙정치국사이의 특수련락원으로 삼았다. 모택동의 지시가 모두 모원신을 통해서 전달되게 된것이였다. 그러나 모원신은 강청을 어머니라고 부를 정도로 그녀와 아주 각별한 사이였다. 이 기회를 리용하여 강청은 모원신과 결탁하고 잠간동안 “최고지시”를 반포하는 대권을 장악하였다. 모원신은 모택동에게 등소평이 문화대혁명의 성과에 대해서 거의 언급하지 않고 류소기의 수정주의에 대해서도 비판을 하지 않는다고 건의하였다. 그후 정국은 등소평 등을 우경주의로 몰아갔다. 이로써 등소평의 지위는 다시 위축되였다. 1976년 1월 8일에 중국공산당 중앙 부주석, 국무원총리, 전국정협 주석 주은래가 암으로 사망되였고 이어 주덕도 세상을 떠났다. 주은래와 주덕의 죽음은 강청에게 무엇보다도 기쁜 소식이였다. 최대의 정적이 력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기때문이였다.  주은래가 세상을 떠난후 국무원총리의 자리는 비여있게 되였다. 리치대로 한다면 당연히 제1부주석인 등소평이 총리직을 맡아해야 했지만 1976년 2월 2일에 하달된 “중공중앙통지”에서는 뜻밖에도 화국봉을 총리로 임명하였다. 이는 등소평에 대한 모택동의 신뢰가 떨어지고 대신 화국봉에게 후임을 맡긴것을 의미한다. 1976년 2월 25일에 중공중앙은 각 성, 시, 자치구와 각 군부책임자회의를 개최하여 등소평에 대한 비판을 공개화 했다. 그 시기 강청 등 4인방은 모든 언론을 총동원하여 등소평과 수정주의비판에 열을 올렸다. 이로부터 화국봉이 중공중앙의 일상업무를 주관하게 되였으며 이 기회를 리용하여 강청은 다시 전면에 나설수 있었다. 1976년 3월 2일에 강청은 12개 성, 구 회의를 소집하여 등소평을 신랄하게 비판한 다음 마치 녀황제가 된듯한 어조로 목소리를 높였다. “다른 사람들은 나를 무측천이라고 류언비어를 퍼뜨립니다. 나는 계급문제에 있어서는 그녀를 릉가하지만 능력면에서는 그녀에 미치지 못합니다. 림표에게 편지를 써서 나를 무측천이라 말한 사람도 있습니다. 나는 영광스러움에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무측천은 녀자로서 봉건사회의 황제였습니다. 동지 여러분! 평범하지 않습니다. 정말 평범하지 않습니다. 그녀의 남편도 병이 아주 심하였습니다. 그녀는 남편을 도와 국사를 처리했으며 그러면서 재능을 키워나갔던것입니다. 무측천은 비범한 녀걸인데 그들은 비렬한 방법으로 무측천을 비방하고 나를 비방하였습니다…”  
170    강청이 태여나서 자살하기까지 (3) 댓글:  조회:7627  추천:1  2014-06-01
강청이 태여나서 자살하기까지 (3)     중공중앙정치국에서는 모택동의 뜻에 따라 강청과의 결혼을 비준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강청에 대해서는 “첫째, 모택동과 하자진의 부부관계가 공식적으로 정리되지 않고 그대로 존재하는 한 강청은 모택동의 부인으로 행세할수 없다. 둘째, 강청은 모택동의 일상생활과 건강을 책임지고 돌보아야 하며 차후 그 누구도 당중앙에 이와 류사한 요구를 제기할 권리가 없다. 셋째, 강청은 모택동의 사적인 업무와 생활에만 간여해야 하며 20년동안 당내의 어떠한 직무도 맡는것을 금한다. 당내의 인사문제와 정치활동에도 절대 참여할수 없다”는 규정을 두기로 했다. 이것이 바로 후에 “약법삼장(约法三章)”이라고도 일컬어진 규정이다. 그후 강청은 이 규정에 묶여 문화대혁명이 일어나기전까지는 어떠한 정치활동에도 참여하지 못했다. 1938년 11월에 강청은 24세의 나이로 자기보다 21살이나 많은 모택동(당시 45세)과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후에도 강청은 명분상으로는 여전히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비서였지만 실제로는 집에서 모택동의 생활을 돌보는 평범한 가정주부였다. 그 시기 강청은 행동을 극히 조심하면서 항상 미소를 잃지 않되 말을 삼가했다. 그리고 모택동을 위해서 세타를 짜고 맛있는 료리를 만들며 노래도 불러주었다. 집에 사람들이 찾아오면 모택동이 부를 때를 제외하곤 좀처럼 얼굴을 나타내지도 않았다. 그래서 모택동의 집을 방문하였던 어떤 외국기자는 그러한 강청의 인상에 대하여 “그녀는 솔직하면서도 겸손하고 사리에 밝은 현모량처 같았다”라고 기술하기도 하였다. 뛰여난 배우 출신답게 자기의 속마음을 철저히 숨긴채 얼마나 완벽하게 현모량처역을 잘 연기해내였는지 알수 있는 대목이다. 강청은 모택동과 결혼하기전에 이미 네번의 결혼경험이 있었으며 황경과 동거할 때에는 임신도 하였으나 상해에서 수술로 락태시켰다. 그때 그녀는 배우활동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있었기때문에 아이를 원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모택동과 결혼한후에 그녀는 빨리 아이를 갖고싶어 했다. 아이가 있으면 무료한 시간을 달랠수도 있고 “모택동의 정식부인”자격을 확실히 다질수 있다고 생각했기때문이다. 1940년 8월에 그녀는 마침내 딸 리눌(李讷)을 낳아 모택동의 사랑을 받으면서 정식부인의 지위를 더 굳게 다질수 있었다. 그후 그녀는 재차 임신을 하였으나 더이상 아이를 갖지 않겠다는 생각에서 락태수술을 한후 다시 임신중절수술을 하였다. 1949년부터 강청은 모택동을 따라 다닐수 있게 되였으며 료양차 쏘련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이는 강청에 대한 규제가 많이 완화되였음을 의미한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이후 그녀는 일을 하고싶다면서 공식적인 직책을 요구했다. 당에서는 신중한 상의를 거쳐 그녀에게 중국공산당 중앙선전부 영화처부처장이라는 직함을 주었다. 이 직책은 매일 출근할 필요도 없을 정도의 한가한 직이였지만 어쨌든 그녀는 이때부터 당내의 공식적인 직함을 가지게 되였으며 또 이를 기점으로 정치에 대한 야망을 키워갈수 있었다. 그후 그녀는 또 전국영화지도위원회 위원(후에 문화부영화국고문으로 변경)을 겸임하면서 영화 《무훈전》과 유평백(俞平伯)의 《홍루몽간론》등 사상적으로 문제가 된다고 생각되는 문예들에 대한 비판운동에 앞장섰다. 1956년에 강청은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에서 모택동의 생활비서로 임명받았다. 말이 생활비서이지 그것은 실제로 부부장급의 간부직이였기때문에 당내에서 그녀의 위상은 한층 높아졌다. 1963년 12월 12일과 1964년 6월 27일, 두차례에 걸쳐 문예문제에 관한 모택동의 지시가 나왔다. 모택동은 이 지시에서 건국이후 문예계의 사회주의적 개조의 성과가 보잘것 없으며 문련산하의 각 협회는 최근 몇년사이에 수정주의의 변두리로 굴러떨어졌다고 단언하였다. 이 지시는 정치적 운신의 폭을 넓히려고 계획하고있던 강청에게 절호의 기회로 다가왔다. 1964년 6월 5일~7월 31일 경극현대경연이 북경에서 거행되였는데 이 기간에 강청은 전면에서 나서서 경극혁명의 기수로 행세하면서 “경극혁명을 론한다”라는 제목으로 공개연설을 하였다. 1938년 8월 하순에 연안에 들어간 이후 27년만에 처음으로 공개석상에서 가진 그녀의 연설은 그후 본격적인 정치활동을 위한 신호탄이 되였다. 그때부터 강청은 경극혁명이란 이름하에 문예계의 정풍운동을 주도하면서 극좌적사조를 선동하였다. 중간인물론, 사실주의심화론, 시대정신회합론 등을 비판하고 연구적가치가 있는 문예론들까지도 “자산계급적 문학주장”, “반혁명수정주의적 문학주장”으로 몰아 무자비한 비판을 가하였다. 그녀는 또 전국을 다니면서 로동자, 농민, 군인 등에 대해 묘사한 연극작품을 골라내 현대경극으로 개편하도록 지시하고 《홍등기》, 《사가방》, 《위호산을 지혜롭게 탈취》, 《백호퇀을 기습》,《룡강송》, 《해항》, 《홍색랑자군》, 《백모녀》 등을 우수한 경극현대화의 본보기로 선정하였다. 마침내 그녀는 “무산계급문예혁명의 기수”라는 칭호를 듣게 되였다. 경극의 현대화에 앞장서서 많은 성과를 올린 결과 그녀의 이름은 제3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산동성대표명단에 올라갔다. 1964년 12월 20일~1965년 1월 4일에 제3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제1차회의가 북경에서 거행되였을 때 그녀는 인민대표자격으로 인민대회당에 들어갔다. 이때부터 그녀는 정식으로 중국의 정치무대에 등장하였던것이다. “경극혁명을 론한다”는 연설발표이후 전국인대 대표에 당선될 때까지 그녀는 정치상에서 서서히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이 모든것은 그녀가 공개적으로 진행한것이였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녀는 북경과 상해를 빈번하게 왕래하여 장춘교, 요문원 등과 접촉하면서 극히 비밀스런 정치활동을 준비하고있었다. 강청은 1962년 7월 6일에 오함의 신편 력사경극 《해서의 파직》을 보고 “이 극에는 심각한 정치적오류가 내재되여있으니 이 극의 공연이 금지되기를 주장한다”라고 말한바 있었지만 당시에는 그러한 그녀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후 반사회주의적인 작품에 대하여 “반드시 비판하고 철저히 비판해야 한다”는 비판의 열기가 한창 고조에 올랐을 때인 1965년 11월 10일에 상해 《문회보》에 《해서파직을 평함》이라는 글이 실렸다. 이 글은 강청이 8~9개월간에 걸쳐 준비한것으로 요문원의 이름으로 발표되였지만 실제로는 강청과 장춘교, 요문원 세 사람의 합작품이였다. 요문원은 이 글에서 《해서파직》을 일러 반당 반사회주의의 독초라고 비판하였는데 그것은 바로 당시 북경시 부시장이면서 저명한 력사학자인 《해서의 파직》의 작자 오함을 직접적으로 겨냥한것이였다. 그 글이 발표된이후 11월 12일부터 26일까지 상해의 《해방일보》, 절강의 《절강일보》, 산동의 《대중일보》, 강소의 《신화일보》, 복건의 《복건일보》, 안휘의 《안휘일보》, 강서의 《강서일보》에도 차례로 실렸다. 그것은 화동의 6개지역이 모두 요문원의 문장을 지지하였음을 의미한다. 북경시 부시장이 걸려있는 문제라 망설이면서 대세를 관망하고있던 북경지역도 여론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11월 29일에 《해방군보》를 시작으로 《북경일보》, 《인민일보》, 《광명일보》에서 요문원의 글을 게재하였다. 상해에서 붙인 비판의 불씨가  마침내 북경지역까지 전국적으로 확산되였던것이다. 그후 이것은 단순히 학술계의 범위를 뛰여넘어 사회적인 대중정치운동으로 발전하여 문화대혁명의 시발점이 되였다. 1966년 3월에 강청은 문예정풍운동에 더욱 박차를 가하기 위하여 장춘교, 진백달, 유지견, 진아정 등과 함께 론의하여 “부대문예공작좌담회기요”를 작성하였다. 당시에 모택동도 그 글을 읽어보고 만족해하면서 “우리는 반드시 당중앙의 지시에 따라 문화전선상의 사회주의대혁명을 꿋꿋이 전개하여 반동로선을 철저하게 짓밟아야 한다”라는 구절 뒤에 “이 반동로선을 짓밟은후에도 새로운 반동로선이 생길지 모르니 계속 투쟁을 견지해야 한다”라는 구절을 덧붙이는 등 세군데나 직접 수정을 가하기도 하였다. 1966년 4월 10일의 “기요”는 중국공산당중앙의 중요문건으로 채택, 발간되여 전국각지에 배포되였다. 문화방면에 있어서 대혁명이 없으면 안된다는것을 골자로 하고있는 이 “기요”는 바로 문예사업에 대한 강청의 의견을 철저하게 집행하도록 전국각지에 하달한것이나 다름없었다. 특히 이 문건에서는 “모택동동지가 친히 세차례나 수정하였다”, “림표동지가 위탁한것이다”라는 등의 문구가 삽입되여있어 그녀의 배후세력이 누구인지 잘 나타나 있었다. 이 “기요”는 강청의 등장을 알리는 신호탄이였다. 이로써 강청은 중국공산당내에서 위상이 강화되고 새로운 정치실세로 전면에 부각되기 시작하였던것이다. 1966년 5월 28일에 중공중앙에 “중앙문화대혁명소조”가 신설되여 강청은 부조장직을 력임하였다.      
169    강청이 태여나서 자살하기까지 (2) 댓글:  조회:6689  추천:0  2014-06-01
강청이 태여나서 자살하기까지 (2)     1934년 5~6월경에 리운학은 이름을 리학으로 바꾼후 다시 상해로 돌아와서 기독교상해청년회 로동부의 소개로 녀공야학교에서 가창과 연기 등을 가르쳤다. 그후 다시 서명청이 있던 포동의 야학교로 옮겨 장숙정(张淑贞)이란 이름으로 교사생활을 계속하였다. 1934년 10월말에 리운학은 상해조풍공원(지금의 중산공원)에서 옛친구 아락을 만나기로 하였다. 그러나 그때 공청단중앙 련락원이였던 아락은 국민당특무들의 추적을 받고있던 상태였다. 그들이 만날 무렵에 아락은 이상한 낌새를 채고 급히 도망쳤는데 아락을 놓친 특무들은 그 대신 리운학을 체포해갔다. 리운학은 상해시 공안국에 약 1개월간 갇혀있다가 기독교상해녀청년회의 도움을 받아 보석으로 풀려났다. 그때 마침 황경이 상해로 돌아왔다. 마땅히 갈곳이 없던 리운학은 황경의 큰어머니네 집에서 황경과 함께 동거생활을 했다. 1935년 봄에 그녀는 상해업여극인협회에 들어가 유명한 입센의 희곡 《인형의 집》의 녀자주인공 노라역을 맡게 되였다. 이것은 그녀의 인생을 또 다시 바꾸는 중대한 전환점이 되였다. “1935년 봄…난 영원히 그날을 잊을수 없다. 그날은 내 마음처럼 음산한 날이였다. 나는 한없이 따뜻한 고향을 떠나 일생에 있어 가장 소중하면서도 다시는 얻지 못할것을 버리고 상해로 가서 《인형의 집》을 공연하였다. “노라”의 공연은 내가 본격적으로 희극계에 발을 들여놓는 계기가 되였다…”(강청의 자술 중에서) 여기에서 강청이 “일생에 있어 가장 소중하면서도 다시는 얻지 못할것을 버리고”라고 술회한것은 바로 그녀와 황경사이의 아이를 가리키는것이다. 당시에 강청은 이미 임신을 하고있던중이였는데 무대에 서기 위해 락태수술을 했던것이다. 이 공연에서 그녀는 그간의 불행을 말끔히 씻고 세상에 이름을 떨칠수 있기를 열망했다. 1935년 3월에 그녀는 예명을 람평(蓝苹)이라 하였다. 《인형의 집》은 당시에 공연되기전부터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던 작품으로서 1935년 6월 27일에 상해의 금성대극원에서 첫 공연을 가졌다. 《인형의 집》은 첫 공연부터 련일 초만원을 기록하면서 대단한 호응을 받았다. 상해의 각 언론에는 노라역을 맡았던 람평에 관한 기사가 쏟아져나왔다. 《인형의 집》의 대성공으로 강청은 불과 21세의 어린 나이에 다소 유명세를 타기는 했으나 대스타가 되기에는 아직도 험난한 길이 많이 남아있었다. 그녀는 관객이 적은 연극무대에서는 대스타가 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관객이 훨씬 더 많은 영화계로 시선을 돌렸다. 1935년초에 전통영업공사가 상해에서 영화 《풍운아녀》를 촬영하고있었다. 이 영화의 주제가 《의용군진행곡》이 바로 현재의 국가이다. 《풍운아녀》의 제작이 끝날 무렵에 강청은 전통영업공사에 들어갔다. 그후 강청은 전통영업공사의 세번째 작품 《자유신》의 여월영(余月英)역을 맡았다. 그러나 극중의 여월영은 그다지 비중이 높지 않은 배역이여서 자못 실망이 컸었다. 1935년 9월에 그녀는 당시 상해영화계에서 영향력이 있던 영화평론가 당납과 열애에 빠져 동거했다. 당시 언론에서는 강청이 당납의 이름을 빌어 유명세를 타려한다는 소문이 무성하기도 했다. 1936년 4월 21일에 강청은 당납과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는데 그때 심균유의 주례하에 강청과 당납, 조단과 엽로천, 고이기와 두소견이 동시에 집체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에는 정군리, 리청 그리고 촬영사 마영화가 참석했다. 그후 강청은 영화 《도시풍광》과 연극 《흠차대신》 등에 출연하였으나 그다지 비중이 있는 배역을 맡지 못하고있었다. 연화영편공사의 《랑산첩혈기》에서 주인공 유삼의 안해역을 맡았으나 그 역도 허명뿐이였다. 1936년 6월에 강청은 어머니가 앓는다는 거짓말로 상해를 떠나 천진에 가서 황경을 찾아 동거했다. 그후 1936년 9월에 강청은 장민과 서로 사랑의 감정이 생겼다. 1937년 5월에 강청은 당납과 헤여지고 상해연극계에서 매우 명망이 높던 연출가 장민과 동거생활에 들어갔다. 당납의 명성을 리용하여 영화계에서 스타가 되여 보려고 하였으나 영화계의 높은 벽에 부딪혀 뜻을 이루지 못하자 다시 연극계로 돌아와 장민의 명성을 리용하기로 했던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그녀의 계획은 또 다시 수포로 돌아가고말았다. 이 일로 인하여 유부남이였던 장민은 안해와 리혼하게 되였다. 사랑하는 강청을 잃고 절망한 당납은 거듭 자살소동을 벌리게 되여 여론이 강청을 부도덕한 녀인으로 몰아갔다. 상해에서 더이상 발붙일 곳이 없게 된 강청은 스타의 꿈을 접고 1937년 7월에 도망치듯 상해를 떠났다. 이때 그녀는 황경이 연안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연안으로 갈 결심을 했다. 그녀는 서안으로 가있던 서명청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하였다. 서명청은 엽검영의 부인 위공과 친분이 두터웠던지라 그녀의 소개로 팔로군사무소로 가서 주은래의 부인 등영초를 만날수 있었다. 등영초는 강청이 상해의 진보적인 좌익극단에서 활동하던 배우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그녀를 연안으로 갈수 있도록 주선해주었다. 당시 연안에서는 진보적인 문화계인사들을 적극 환영하고있었던 터였다. 1937년 8월말에 강청은 연안에 도착하여 제3초대소(서북려사라고도 함)에 투숙하였다. 여기에서 그녀는 숙박부에 이름을 적으면서 람평 대신 강청(江青)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강청이라는 이름은 그녀가 심혈을 기울여 지은것으로 두가지 의미를 내포하고있다. 첫째, “청 (青) 색은 쪽에서 나오지만 쪽보다 더 푸르다”는 “청출어람”의 의미이다. 여기에서 “쪽” 즉 “람”은 바로 람평을 가리키는것이다. 다시 말하면 “청(青—강청)은 비록 람평(蓝)에서 나왔지만 람평때보다 더욱 뛰여난 능력을 발휘하겠다”는 의미이다. 둘째, 강청(江青)이란 말은 당나라시인 전기의 시 “성시상령고슬곡이 끝나도 상수의 녀신은 보이지 않고 강가의 산봉우리만 푸르구나”에서 나왔다. 강청은 연안에 도착한후 곧장 심사를 받았다. 2개월간의 심사를 거친후 강청은 황경의 도움으로 다시 당적을 회복하고 1937년 11월에 중국공산당 중앙당교에 입학하여 6개월간 교육을 받았다. 1938년 7월 7일에 “7.7” 첫돐 기념행사가 연안에서 열렸다. 그날 오전에는 모택동의 보고가 있었고 오후에는 문화행사가 있었는데 이 문화행사에서 강청은 경극 《타어살가》의 주연을 맡아 관중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공연을 끝까지 관람한 모택동은 배우들을 격려하기 위해 분장실로 들어가서 강청과 악수를 하고 담소를 나누었다. 이로써 강청과 모택동의 력사적인 만남이 이루어진것이다. 강청이 연안에 들어갔을 때 모택동의 세번째 부인 하자진(贺子珍)은 서안에 있었다. 해외의 많은 사람들은 강청이 모택동의 집에 발을 들여놓고 하자진과 크게 다투었기때문에 하자진이 서안으로 떠났다고 주장하고있지만 하자진이 서안으로 떠난 일은 강청과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강청은 평생동안 하자진을 한번도 만난적이 없었기때문이다. 당시에 강청은 다른 사람에 비해 용모가 출중한 편이였으며 연기도 뛰여났다. 지금은 그녀를 삼류배우라 평가하는 사람도 많지만 그 당시 상황에서 그녀는 분명 연안과 섬북지역의 인기배우였다. 그녀는 연기뿐만아니라 노래도 잘하였다. 모택동은 그녀가 공연한 《타어살가》를 좋아하였다. 그녀는 글씨와 문장에도 뛰여났고 특히 해서를 잘 썼다. 말타기와 트럼프를 좋아하고 뜨개질과 화장을 잘 하였으나 사격은 좋아하지 않았다. 1938년 4월 10일에 로신예술대학이 연안에 창설된후 강청은 그 대학의 연극과 지도원을 맡았다. 1938년 8월에 강청은 군위원회 사무실 비서로 발령받아 모택동과 함께 일할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였다. 그때부터 모택동과의 관계가 례사롭지 않은 사이로 발전하였다. 강청은 모택동을 숭배하고 사랑했다. 사업이 바빴지만 정력이 충만했던 모택동은 청춘의 활력이 넘치는 아름다운 강청의 격정에 빠져버리고말았다. 모택동과 강청의 련애설이 퍼져나가자 그것을 반대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중 가장 격렬하게 반대한 사람은 장문천(张闻天)이였다. 그는 하자진이 우수한 공산당원으로 빛나는 투쟁의 력사를 가지고있고 험난한 장정을 겪으면서 여러차례 부상을 입었기때문에 당연히 그녀를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모택동의 결혼이 개인의 사생활에 관한 문제이므로 누구도 간섭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결국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에서는 모택동의 결혼문제를 토론에 붙였는데 다수가 반대하였다. 그러자 모택동은 강청과의 혼인을 동의하지 않으면 주석직에서 사직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168    강청이 태여나서 자살하기까지 (1) 댓글:  조회:6127  추천:0  2014-06-01
강청이 태여나서 자살하기까지      강청은 본명이 리운학(李云鹤)이고 산동성 제성현에서 출생했다. 강청의 할아버지 리순해(李纯海)는 원래 2만여평방메터의 토지를 소유한 지주였으나 아버지 리덕문(李德文) 대에 이르러 파산하였다. 강청은 1972년의 자술에서 “나는 매우 가난한 수공업집안에서 태여났다”고 하였는데 사실 그녀의 아버지는 목공소주인이였다. 리덕문은 처음에 목공소견습공으로 들어가 뒤에는 목공소주인이 되였으며 그뒤 다시 제성현의 성문부근에 려관을 차렸다. 리덕문의 본처는 원래 지주집안의 딸이였으나 늙고 못생겼다는 리유로 리덕문의 사랑을 받지 못하였다. 그래서 리덕문은 50세에 다시 결혼하여 20여세의 젊고 예쁜 리란씨(李栾氏)를 첩으로 삼았다. 1914년 3월에 란씨는 딸애를 하나 낳았다. 그러나 리덕문과 란씨는 아이를 임신했을 때 아들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름까지 리진남으로 지어놓았던 터이라 실망이 컸다. 그들은 할수 없이 이름을 다시 리진해(李進孩)로 고쳐지었으니 그녀가 바로 몇십년후 중국대륙을 떠들썩하게 흔들었던 강청이다. 강청이 태여났을 때 그녀의 아버지 리덕문은 이미 60세였으며 우로 이복오빠 리건훈(일명 리간경이라고도 함)과 언니 리운하가 있었다. 리진해(강청)는 6세 되던 해에 다른 녀자애들처럼 전족을 해야만 했다. 당시 산동지역에는 여전히 전족이라는 악습이 성행하고있었기때문이다. 어린 리진해는 전족한 발이 너무도 아파서 밖에서 놀 때에는 몰래 전족을 풀어버리고 집에 올 때 다시 전족을 하곤 했다. 이러한 일은 당시로서는 감히 상상도 할수 없는 대담한 행동이였다. 리진해는 어릴 때 담이 크고 남에게 지면 죽고 못사는 맹랑한 성격의 소녀였다. 그녀의 이러한 성격을 잘 대변해 주는 어린시절의 한 에피소드가 있어서 여기에 소개한다. 리진해의 동네에 단운전이라는 아이가 있었는데 리진해는 그녀와 함께 잘 놀다가도 자주 싸우군 했다. 하루는 단운전이 리진해를 보고 “넌 첩의 자식이야! 누가 모를줄 아냐, 네 아빠는 이리, 네 엄마는 호랑이, 넌 새끼 호랑이야! 네 집에는 전부 나쁜 사람들뿐이구나!”라고 놀렸다. 이 말을 듣고 화가 난 리진해는 당장 단운전에게 달려들었지만 도저히 그녀를 당해낼수 없었다. 얼마후 리진해는 길에서 놀고있다가 마침 이복오빠인 리건훈을 만났다. 당시 리건훈은 제성현 경찰국소속 경관으로서 한창 거드름을 피우고있을 때였다. 리진해는 리건훈에게 달려가서 단운전과 있었던 일을 낱낱이 일러바치고 원한을 갚아달라고 부탁하면서 분을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리건훈은 그녀에게 반드시 보복해 줄테니 안심하라고 약속했다. 다음날에 리건훈은 순경들을 데리고 단운전의 집으로 찾아가서 “우리 집을 이리집안이라 욕한 놈이 누구야! 어서 나와!”라고 웨쳤다. 단운전은 겁에 질려 벌벌 떨면서 담장모퉁이에 꼭 숨어있었다. 단운전의 아버지가 나와서 애들끼리 싸우다 그런것이니 참으라고 하면서 대신 사과를 하였다. 하지만 리건훈은 오히려 자식교육을 잘못 시킨 부모의 책임이 더 크다고 하면서 데리고간 순경들과 함께 구타를 가했다. 이에 단운전의 아버지는 만신창이가 되도록 맞았으며 그것을 차마 보지 못하고 강력하게 항의하던 단운전의 삼촌도 리건훈과 순경들에게 죽도록 두들겨 맞았다. 이 일로 단운전의 삼촌은 억울하게 죽고말았으며 단운전의 숙모는 생계를 잇기 위해 두살밖에 안된 자기애를 버려두고 남의 집 유모로 들어가야만 했다. 얼마후 두살짜리 애도 엄마젖을 먹지 못해 굶어죽었다. 이때 리진해의 나이는 불과 일곱살이였다. 처음에 그녀는 단운전에게만 보복할 생각이였지만 그 결과는 너무도 엄청난것이였다. 리건훈이 단운전의 집에서 행패를 부리고있을 때 리진해는 열심히 단운전을 찾고있었다. 그녀는 겁에 질려 숨어있던 단운전을 발견하고 이렇게 말했다. “이제 겁나냐? 모두 너때문에 생긴 일이야. 또 한번 욕해 봐!” 이 일이 있은 뒤로 동네아이들은 모두 그녀를 피해다녔으며 아무도 그녀와 함께 놀지 않았다고 한다. 리진해는 강청이 어릴 때 집에서 부르던 이름이고 그녀의 공식적인 이름은 리운학이다. 그녀는 소학교에 들어갈 때까지도 정식이름이 없었다. 그때 그녀가 다니던 학교의 리사장 설환등이 그녀의 다리가 가늘고 길다고 해서 운학(云鹤)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한다.(그녀가 자술에서 “군계일학”을 운운하면서 이름을 지은 경위를 설명한것은 유명해진 뒤에 꾸며낸 이야기로 보여진다.) 리덕문은 성미가 급하고 거칠어 걸핏하면 자기 안해에게 손찌검을 하군 했다. 어느 원소절대보름에 리운학의 어머니 란씨는 실수로 넘어져 그릇을 깨뜨렸다. 이에 화가 난 리덕문이 삽으로 마구 때리는 바람에 그녀는 손가락이 부러졌고 놀라서 울던 리운학은 따귀를 얻어맞아 이가 부러졌다. 더이상 고통과 멸시를 당할수 없다고 판단한 란씨는 리운학을 데리고 그 집에서 나와서 살았다. 그러나 아무것도 가진게 없었던 란씨는 생계를 잇기 위하여 남의 집 종살이라도 해야 했다. 그녀는 리운학을 친척집에 맡겼다. 그로부터 리운학에게는 가난하고 힘든 생활이 계속 되였다. 1926년에 12세의 리운학은 소학교 5년과정을 졸업하고 그해 아버지가 사망되자 어머니와 함께 천진에 있는 동부이모(同父异母)인 언니네 집에 가서 살았다. 중학교진학을 하지 못한 그녀는 언니네 집에서 별로 하는 일이 없이 몇년을 지냈다. 1929년 봄에 그녀의 형부 왕극명(당시 봉계군벌의 군관)이 제남으로 전근되여 그녀도 언니네 식구를 따라 제남으로 갔다. 그해 여름에 거기에서 15세의 리운학은 산동실험극원에 들어가 조태모와 왕박생 등으로부터 연극과 고전음악을 배웠다. 그때 강청은 학력이 낮고(다른 사람들은 최소 중학교졸업이상이였음.) 가난하여 동기생들로부터 갖은 멸시를 받았지만 개성과 승부욕이 아주 강했기때문에 수업시간에 뒤지지 않으려고 열심히 노력했다고 한다. 실험극원입학은 그녀의 인생을 바꾸는 첫번째 전환점이 되였다. 연극배우 리운학이 없었다면 후날의 영화배우 람평이 있을수 없었기때문이다. 1930년에 실험극원은 정국의 변화로 문을 닫게 되였다. 리운학과 학생들은 왕박생을 따라서 북경으로 가서 “해명극사”를 조직하여 순회공연을 하였다. 그때 그녀는 경극단에 들어가 제남, 청도, 연태 등지에서 공연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곳의 사정도 리운학이 적응하기에게는 여러모로 어려운 점이 많았다. 연기경력이 짧은데다 사투리가 심해서 북경인들에게 그다지 호응을 받지 못하였고 공연도 정기적으로 있지 않았기때문이였다. 1931년 봄에 리운학은 다시 청도에 있던 조태모(당시 청도대학 총장)를 찾아갔다. 조태모의 배려로 그녀는 청도대학 도서관의 직원으로 근무할수 있었다. 여기에서 그녀는 도서관직원으로 근무하면서 중문과수업을 청강하고 유명한 현대문학가 문일다와 심종문을 알게 됨으로써 어느 정도 문학적소양을 쌓을수 있었다. 당시에 그녀는 조태모의 처남 유계위(일명 황경이라고도 하는데 청도대학 리과생, 후에 천진시장 겸 중국공산당 천진시위원회 서기 력임)와 사랑에 빠져 동거생활을 하였으며 조태모의 안해이자 황경의 누나인 유산을 따라서 전한이 창설한 극단 남국사에 들어갔다. 당시 유산은 중국연극계의 인기배우로 남국사의 일원이였다. 1931년 9월 18일에 일본관동군이 동북삼성을 점령하여 각지에서 반일운동과 반장개석운동이 일어났을 때 리운학은 황경과 함께 진보적인 학생운동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1933년 2월에 19세의 리운학은 황경의 소개로 정식으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당시 황경은 중국공산당 청도대학 지하지부 서기를 거쳐 중국공산당 청도시위원회 선전부장을 맡고있었다. 그런데 이해 7월에 반역자의 밀고로 황경이 국민당에 체포되는 사태가 발생되여 강청은 조태모의 소개로 황급히 상해로 도망갔다. 그리하여 그녀는 당조직과 련계를 잃고말았다. 상해에서 그녀는 전한과 그의 동생 전원의 도움으로 서명청이 책임자로 있던 “신경공학단”의 교사로 들어갔다. 1933년 겨울에 체포되였던 황경이 아버지의 도움으로 석방되여 상해로 돌아왔다. 그러나 황경의 부모가 반대하는 바람에 그들은 결혼식을 올리지 못하고 따로 집을 구하여 다시 동거를 시작하였다. 1934년 1월 28일에 상해에서 “1. 28”항전 2돐을 기념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신경공학단의 단원들은 대부분 이 시위에 참가하였으며 이 일로 리운학은 체포될 위기에 처했다. 이에 리운학은 황경과 함께 북경으로 도망갔다. 북경에서도 그들은 동거를 계속하였으나 황경의 부모가  그들의 동거를 반대하여 생계비를 보내주지 않아 생계를 잇기가 곤난한 지경이였다. 결국 리운학은 황경의 곁을 떠나기로 결심하였다.    
167    아이들과 놀아주자 댓글:  조회:6326  추천:18  2014-06-01
아이들과 놀아주자   김희수     오늘은 6.1 국제어린이날(六一国际儿童节)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인 1942년 6월 9일에 히틀러의 명령으로 독일군에 의해 체코의 광산마을 리디체(利迪策) 전체가 파괴됐던 리디체학살과 전세계 모든 전쟁에서 사망된 어린이들을 기념하고 어린이학살을 반대하고 아동인권을 보장하기 위해 1949년 11월에 열린 국제민주녀성련합회 리사회의에서 매년 6월 1일을 국제아동절로 정했다. 중국, 조선 등 나라들은 이 날을 어린이날도 기념하지만 한국은 우리와 달리 매년 5월 5일을 어린이날로 기념한다.   어린이날인 오늘은 부모들이 간만에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평소에 아이가 가지고싶어했던 물건을 선물해주기 위해 아이들의 손을 잡고 집을 나설것이다. 오늘은 마침 일요일이여서 평소에 바쁘던 부모들도 어린이들과 놀아주려고 할것이다.   아이들은 천성적으로 노는것을 좋아하지만 지금의 아이들은 놀고싶어도 학업때문에 놀 시간이 없고 또 함께 놀아줄 친구도 별로 없다. 부모들도 아이들과 놀아주려고 하지 않는다.   내가 어릴 때는 동네아이들과 어울려 놀기도 잘 놀았다. 지금의 아이들은 공부가 우선이지만 내가 어릴 때에는 놀이가 우선이여서 밥술이 떨어지기 바쁘게 문을 박차고 나가 놀았고 학교에서 돌아오기 바쁘게 책가방을 벗어던지고 밖으로 나가 놀았다. 부모도 공부해라고 닥달하지 않았고 고중입시, 대학입시도 없었으며 지금처럼 영어요, 일어요, 로어요 하는 외국어 수업도 없었으니 마음놓고 놀기만 했다.   그 시절에는 통상 오전만 수업시간이 있었고 오후에는 학교밭에 가서 일을 할 때도 있었지만 휴식할 때가 더 많아서 놀 시간이 많기도 했다. 물론 숙제가 있기는 했지만 30분정도면 다 해치울수 있었기에 학업부담도 없었다. 그래서 간단한 숙제만 마치면 같은 반 친구들이 아니면 동네친구들과 함께 마음껏 뛰놀았다. 그 시기에는 지금처럼 컴퓨터나 스마트폰은커녕 텔레비죤마저 없었기에 누구의 집에 모여서 옛말을 듣거나 밖에 나가서 노는것이 최대의 취미였다.   놀이종류도 많아서 별의별 놀이를 다 놀았다. 숨바꼭질(술래잡기) 놀이를 하는것은 보통이고 딱지치기, 구슬치기, 고무줄놀이, 공기놀이, 제기차기, 팽이치기, 고누, 땅재먹기, 땅따먹기, 말타기, 윷놀이, 무릎싸움(닭싸움), 수건돌리기, 땅에 금을 긋고 발로 돌을 차며 놀던 돌차기(씨차기, 사방치기)…   남자아이들은 주로 딱지치기, 살구씨먹기를 많이 놀았고 녀자아이들은 주로 고무줄놀이, 공기놀이를 줄겨 놀았다. 낮에는 땅에 금을 긋고 하는 놀이를 재미있게 놀았고 밤에는 손전지로 상대편의 얼굴을 알아내여 “아무개 봤다, 꿍!”하는 놀이를 신명나게 놀았다.     지금의 아이들은 이런 놀이를 잘 모른다. 돈을 쓰지 않고도 얼마나 재미있는 놀이를 놀수 있는지도 모른다. 지금은 여럿이 즐거움을 함께 나누던 놀이가 사라지고있다. 그 대신 돈으로 살수 있는 게임기, 컴퓨터, MP3, 스마트폰 등이 아이들의 놀이도구가 되였다.   예전에 우리는 혼자 있으면 심심해서 죽을것 같았다. 그래서 혼자서 노는 애가 없었고 다른 애들의 집으로 찾아가 “아무개 놀자”하고 불러서 응답하면 들어가 함께 놀았다. 같은 반의 친구들과 노는 때도 있었지만 한 마을 애들과 같이 노는 때가 많았다. 하지만 지금의 애들은 스마트폰만 있으면 심심한줄 모른다. 혼자서도 할수 있는 이런 놀이는 아이를 고립시킬수 있고 게임중독, 스마트폰중독에 빠지게 할 위험도 있다.   친구들과 함께 즐길수 있는 놀이와 멀어져 스마트폰 하나에 목을 매고있는 지금의 아이들은 대화가 부족하다. 친구들끼리의 대화뿐만아니라 부모와의 대화도 부족하다. 외국나들이로 부모와 떨어져있는 아이들이 많은데다가 늘 스마트폰만 가지고 놀기 때문에 대화부족현상은 더욱 심각해지고있다.   이런 상황에서 아이들과 놀아주면서 대화로 소통하는 시간을 가지는것이 매우 필요하다고 본다. 아침저녁의 밥상머리를 리용해서도 대화를 할수 있고 학교로 데려다주거나 학교 마중을 갔다 올 때를 리용해서도 대화를 할수 있다. 아아들과 함께 산책, 공원놀이를 하거나 함께 운동을 하면서 대화로 소통하는 시간을 가져보는것도 좋다.   사실 요즘 아이들은 공부에 쫓기여 다니다보니 가족들과 대화할 시간도 많이 부족하다. 게다가 스마트폰이 대화부족을 더 심화시키고있어 부모 또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중시와 관심이 필요하다. 아이에게 손에서 스마트폰을 잠시 내려놓게 하고 아이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가 아이들과 놀아주는 시간을 가져보는것이 무엇보다 유익하지 않을가 싶다.   직장일이 바쁜데 아이들과 놀아줄 시간이 어디 있냐고 하거나 노는 시간을 떼내면 아이들의 공부에 지장을 주지 않겠느냐는 부모들이 있을수 있겠지만 아무리 빠쁘다 해도 시간은 짜내면 있는것이고 노는 시간이 학업부담에 시달리는 아이들에게 재충천의 기회를 주어 공부 성적이 쑥쑥 올라가게 할수도 있지 않겠는가.   우리 부모들이 아무리 바쁘더라도 어런이날처럼 날마다 아이들에게 관심을 돌려 다만 하루에 5분이라도 짬을 내서 아이들과 대화하고 주말에 짬을 내서 아이들과 놀아주기를 견지한다면 그런 관심이 부모와의 대화부족으로 외롭고 고독해진 아이들에게는 보약이 되지 않을가 싶다.   마침 오늘은 날씨가 좋지만 올해 처음으로 기온이 35도로 올라갔으니… 불볕더위에 아이들이 더위먹지 않도록 조심하기를 바라면서 어린이날 아침에…    
166    바르게 살기 댓글:  조회:5718  추천:12  2014-05-29
바르게 살기   김희수     어떻게 사는게 바르게 사는것일가? 이 문제에 정답이 있는지 알수는 없지만 그래도 한번 수학문제처럼 풀어보고자 한다.   어느 시골에 가방끈이 짧은 소학교 선생이 있었는데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인생을 바르게 살아가야 한다고 강의했다. 그러자 한 학생이 어떻게 사는게 바르게 사는것이냐고 물었다. 그 교원은 학생의 물음에 선뜻 대답을 할수 없어 머뭇거리다가 “인생을 바르게 살려면 너희들의 부모처럼 살거라”하고 말했다.   그리하여 학생들은 각각 자신의 부모를 롤모델로 삶고 부모가 하는대로 살아갔다. 그 학생들의 부모들중에 모범농사군, 모범촌장, 불량배 등이 있었다. 모범농사군의 아들은 아버지처럼 날마다 부지런히 농사를 지으며 살았고 모범촌장의 아들도 아버지처럼 되기 위해 노력하며 살았다. 그리고 불량배의 아들도 나름대로 아버지처럼 불량배들과 섭쓸려 다니며 살았다.   그후 세월이 흘러서 농부의 아들은 아버지처럼 농업전문호가 되였고 촌장의 아들도 아버지처럼 촌장이 되였다. 그런데 불량배의 아들은 강탈, 강간 등 나쁜 일을 일삼다가 콩밥을 먹게 되였다. 그리고 촌장의 아들은 비록 촌장이 되긴 했지만 그 과정이 정당하지 못했다. 촌장의 아들은 촌장선거를 앞두고 경쟁자들을 위협하거나 없는 죄를 뒤집어씌워 무함한 결과 촌장이 되였다. 또 촌장이 된후에도 촌에 소속된 탄광의 수입으로 개인의 욕심을 채웠고 안전대책을 마련하지 않아 적지 않은 사망자가 생긴 탄광사고까지 빚어냈다.   그들은 모두 자신들의 아버지처럼 바르게 살려고 했는데 왜 결과는 판판 다를가? 농부는 바르게 살아온 부모를 롤모델로 삶고 살았기에 바르게 살수 있었고 불량배의 아들은 잘못 살아온 부모를 롤모델로 삶고 살았기에 바르게 살수 없었다. 그럼 촌장의 아들은 왜서 바르게 살아온 부모를 롤모델로 삶고 살았지만 바르게 살지 못했을가?   누구나 자기 나름의 롤모델은 있을것이다. 과거에 우리는 혁명렬사나 영웅인물을 본보기로 삶았다. 말하자면 양정우(杨靖宇), 길홍창(吉鸿昌), 조상지(赵尚志), 조일만(赵一曼), 강죽균(江竹筠), 허운봉(许云峰), 류호란(刘胡兰), 구소운(邱少云), 황계광(黄继光), 동존서(董存瑞), 장사덕(张思德), 맥현득(麦贤得), 양근사(杨根思), 구양해(欧阳海), 라성교(罗盛教) , 류영준(刘英俊), 류문학(刘文学) , 뢰봉(雷锋), 왕걸(王杰), 초유록(焦裕禄), 공번삼(孔繁森), 임장하(任长霞) 등이였다.   지금은 명인, 스타들을 롤모델로 삶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이같은 인물을 본받아 산다고 해서 꼭 바르게 사는것이라고 할수 없다. 물론 이들 본보기들은 과대포장이 있다고 해도 대부분이 바르게 살았다고 할수 있음직하다. 하지만 누구나 모두 그들처럼 살아야만이 바르게 사는것이라고 할수는 없다. 평범하게 산다고 해도 다른 사람을 해치지 않고 깨끗한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바르게 사는것이라고 할수 있다.   불량배의 아들처럼 바르게 살지 못한 사람을 롤모델로 삼고 그런 인생을 살려고 한다면 바르게 살수 없다. 또 촌장의 아들처럼 바르게 살아온 사람을 롤모델로 삶았다고 해도 그처럼 되기 위해 방법과 수단을 가리지 않는 과정을 밟는다면 그것을 바르게 사는것이라고 할수 없다.   바르게 살기 위해서는 우선 남을 해치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한다. 남을 해치지 않는것을 원칙으로 하면서 우리가 사는 세상에 도움이 되고 사회에 유용한 사람으로 되는것이 바르게 사는것이라고 말하고싶다.   혹자는 이런 궤변을 내놓을수 있다. 남을 해치지 않는것이 바르게 사는것이란 말은 충분히 합리적인것처럼 보이지만 거기엔 잠재적 한계가 있다고 말이다. 부득이한 사정으로 남을 해치게 되는 경우도 있기때문이란것이다. 이런 주장을 하는 분들의 경우는 아마도 다음과 같은 사례가 아닐가 싶다.   당신에게 유부남인 친구가 있고 그 친구에게는 밖에 숨겨둔 녀자가 있다. 그리고 당신은 총각인데 그 사실을 알고있다고 하자. 하루는 친구가 만나자고 해서 갔는데 친구는 숨겨둔 녀자를 데리고 나왔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친구의 안해가 낌새를 채고 그 장소로 남편을 찾아왔다. 자신의 외도가 들통날가봐 급해난 친구는 당신에게 눈짓을 하며 숨겨둔 녀자를 당신의 녀자친구라고 마누라에게 소개한다. 친구의 안해가 당신에게 그 녀자가 정말로 당신의 녀자친구가 맞느냐고 묻는다. 아니라고 하면 친구의 혼인이 파탄날지도 모르는데 당신은 진실을 말하겠는가? 아니면 거짓말을 하고 친구를 위기에서 구하겠는가?   이런 경우 바르게 살기 위해서는 그 녀자가 친구의 숨겨둔 녀자라고 진실을 말해야 하는데 그러면 친구의 가정을 해치는것이 되지 않겠는가? 이 같은 문제를 질문하면서 혹자는 이를 바르게살기의 딜레마일수도 있다고 말할지도 모르겠지만 먼저 언급한 남을 해치지 않는다는것과 후에 얘기한 친구의 가정을 해치게 되는것은 같은 범주에 속하지 않는 두가지 다른 개념이다. 전자는 영원히 남을 해치지 않는것이고 후자는 잠시 남을 해치는것이다. 친구의 비밀을 지키는것은 잠시는 친구의 가정을 해치지 않는것 같지만 결국에는 수습할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친구의 가정을 완전히 파탄내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반면에 진실을 말하게 되면 잠시는 친구의 가정을 해치는것 같지만 친구의 부부관계가 악화되는것을 미연에 방지할수 있고 상처가 곪아터지기전에 미리 도려내 치유하게 되는 좋은 결과를 가져올수 있다.   왕왕 우리는 두가지 다른 개념을 동일한 단어거나 류사한 사례라는 리유로 같은 범주에 속하는것으로 혼동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무엇이 가장 바르게 사는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고 회의를 품고 비관할수도 있는데 부동한 개념을 같은 범주라고 혼동하면 그로하여 도출해낸 결론이나 판단도 정확하지 않다는것을 알아야 한다.   바르게 살기에서 가장 중요한것은 긍정적으로 생각하는것이다. 갑과 을이란 아이가 있었다. 둘 다 가정불화로 다투다가 부모들이 리혼했는데 갑은 부모를 원망하고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면서 나쁜 아이들과 섭쓸려다니다가 결국 범죄의 길로 나가게 되였다. 그러나 을은 “나는 부모처럼 되지 않기 위해 착실하게 살겠다. 이 세상에는 나보다 더 어려운 처지에서 사는 아이들도 적지 않은데 나는 그래도 그들과 비하면 다행히 아닌가? 내가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면서 되는대로 살아간다면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망치는 길이 될것이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공부를 견지했다. 결국 을은 명문대학을 졸업하고 문제아이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 심리상담사로 되였다.   만약 살아가면서 바르게 살기 위해 남을 해치게 되는 상황에 부딪치더라도 영원히 해치게 되는 경우거나 더 많이 해치게 되는 경우를 버리고 잠시 해치게 되는 경우거나 적게 해치게 되는 경우를 선택한다면 량심에 물어 부끄러울게 없을것이다. 잠시 남을 해쳤거나 약간 해쳤다고 해도 더 오래 더 크게 해치게 되는 상황을 방지했기에 그렇게 사는것은 성실하고 순결한 마음으로 바르게 사는것이라고 감히 말씀드리고싶다. 또한 항상 긍정적인 생각을 하면서 살아간다면 그것이 바로 바르게 사는것이라고 강조하고싶다.    
165    대립은 왜서 국민당에 가입하지 않았는가? 댓글:  조회:6052  추천:3  2014-05-24
대립은 왜서 국민당에 가입하지 않았는가?   (번역)   누구도 국민당정보조직의 특무대부로 명성이 높은 중국국민당 민국정부 군통(군사위원회조사통계국) 국장 대립(戴笠)이 국민당 당원이 아니라고 하면 믿으려 하지 않을것이다. 국민당이 대립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은것도 아니였고 대립이 국민당을 반대한것도 아니였지만 대립은 죽을 때까지 줄곧 국민당에 가입하는것을 거절했다. 그는 비록 국민당원이 아니였지만 국민당의 군통국 국장이란 중요한 직무를 담임했으며 권세가 하늘을 찌를듯 했는데 이는 사람을 놀라게 하는 정치해프닝이 아닐수 없다. 당시의 기형정치가 낳은 배경에서만이 대립식의 정치투기분자가 나타날수 있었다. 1897년에 절강성 강산현 보안향에서 출생한 대립은 본명이 춘풍(春风)이며 자는 우농(雨农)이다. 그는 “장개석의 검”, “중국의 게슈타포(盖世太保)”, “중국의 가장 신비한 인물”로 불리웠는데 잔인하고 무정한것으로 소문났다. 6살에 아버지를 여읜 그는 1917년에 참군했고 1921년에 상해에서 두월생(杜月笙)을 알게 되여 결의형제를 맺었다. 그는 1927년에 광주에 들어가 이름을 대립이라고 고쳤으며 그해 9월에 시험을 쳐서 황포군관학교 제6기생으로 되였다. 북벌시기 국민혁명군 제1군 기병영 1련에 편입되였다. “4.12정변” 때 동학들중에 끼여있은 20여명의 공산당원을 적발한 공로로 장개석, 호종남(胡宗南) 등 국민당거물들의 높은 평가를 받아 기병영국민당당부 집행위원으로 선거된 그는 정보사업에 종사하기 시작했다. 1928년에 국민혁명군 총사령부 상위(上尉)련락참모로 임명된 그는 정보사업을 주관했다. 1931년말에 장개석이 핍박에 의해 “한발작 물러났다가 다시 전진하려는 계책”으로 잠시 관직에서 물러나자 대립은 “련락조”를 조직하여 계속 장개석에게 충성했다. 1932년 1월에 장개석이 다시 남경으로 들어가 “중화복흥사(中华复兴社)”란 특무조직을 세우고 대립을 특무처장으로 임명했다. 대립은 장개석에게 “목숨을 다 바쳐 정의를 위해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일하겠습니다”라고 표시했다. 대립은 선후로 저명한 진보인사 양전, 사량재와 애국명장 길홍창을 살해했다. 대립은 1935년에 남창항영조사과 과장으로 임명되였다. 후에 남창항영조사과가 군사위원회조사통계국과 합병되자 대립은 2처의 처장으로 되였다. 1936년 12월에 서안사변이 발생된후 대립은 송미령을 따라 장개석을 구하러 서안으로 들어갔다. 그때로부터 장개석의 심복으로 되여 장개석의 중용을 받았다. 1937년에 “소절행동위원회” 별동대 5개지대를 조직하고 자기저로 서기장 겸 총지휘를 맡았는데 후에 “충의구국군”이라고 이름을 고쳤다. 이듬해 대립은 군통국 부국장으로 임명되였다. 1939년초에 대립은 하영년(何永年)이라는 가명으로 향항으로 해서 하노이로 들어가 왕정위(汪精卫)암살을 지휘했다. 1942년에 대립은 미국 해군중장을 회견하고 정보사업을 상담했다. 다음해에 “중미특종기술합작소”를 세우고 미국 해군중장과 대립은 각각 정, 부 주임을 맡았다. 그들은 전국각지에서 특무활동에 종사하여 민주운동과 공산당조직을 파괴하고 수많은 진보인사들과 공산당원들을 살해했다. 대립은 출세한후 여러번이나 고향 강산현에 돌아간적이 있었다. 1937년말에 고향에 돌아갔을 때 강산현 현장 정종은 대립에게 자위대에 무기와 탄약을 배치해달라고 요구했다. 다음해 1월에 대립은 부하를 파견하여 50자루의 총과 1만발의 탄알을 가져다주었다. 1943년에 대립은 강산현에 중학교를 세우고 경비를 군통국에서 대주었으며 자신이 학교 리사장을 맡았다. 항일전쟁승리후 장개석은 대립에게 한간문제를 처리할 권력을 주었다. 1946년에 대립은 중국교통총국을 조직하여 원 군통무장조직인 “충의구국군”을 18개 교통총대로 확장했다. 그해 3월 17일에 대립은 청도에서 전용비행기를 타고 상해를 경과하여 남경으로 돌아오다가 비행기가 추락되여 남경부근의 판교진 대산에서 죽었다. 국민정부는 1946년 6월 11일에 명령을 발부하여 대립에게 륙군중장계급을 추증했다. 대립은 장개석이 가장 신임하는 유력한 장수였고 국민당군에서 생살대권을 틀어쥐고있었다. 그는 한번 말한 말은 다시 거두어들이는 법이 없었다. 그는 국민당군통국 국장을 맡은 8년동안 비밀명령을 내려 수많은 혁명동지들을 살해했다. 또 얼마나 많은 진보인사를 잔인하게 살해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대립은 죽을 때까지 국민당에 가입하지 않았다. 그가 국민당에 가입하지 않은것은 장개석의 심리를 틀어쥐고 자신의 충성심을 보여줌으로서 자신의 지위를 더욱 굳건히 하려는데 있었다. 대립은 16살 때 학교에서 위생을 강조하고 진보를 제창하며 아편과 전족을 반대하는 “청년회”의 주석으로 되였다. 대립은 1914년에 결혼했는데 신부 모수총의 아버지 모응승은 현소재지에서 2~3킬로메터 떨어진 풍림진에 살고있는 지주였다. 1916년에 대립은 도적질하다가 붙잡혔는데 학교측에서는 그를 제명했다. 그 이듬해 대립의 아들 대장의가 출생했다. 그후 대립은 도박판에서 여러번이나 속임수를 쓰다가 붙잡혔다. 목숨을 살리기 위해 대립은 항주로 도망쳐 참군했는데 반국강이 지휘하는 절강륙군1사(총부는 녕파에 있었음)에 들어갔다. 대립은 참군한 후에도 계속 도박을 놀면서 지방의 깡패들과 친했다. 지방깡패들은 그를 청방에 소개해주었다. 상급이 도박에 빠져 깡패들과 섭쓸리는 그를 징벌하려고 하자 그는 도주병으로 되였다. 1921년에 대립은 청방과의 관계를 리용하여 상해로 들어갔다. 항주에서 친했던 청방의 “스승”이 그를 당시 상해탄에서 가장 권세가 있는 청방의 거두 황금영을 소개해주었다. 대립은 이런 관계를 통해 류지륙, 장소림, 왕효뢰, 향해잠, 장자렴, 전득승, 풍석죽, 당소무, 석효선, 범소증이 세력을 휘두르던 시대에 상해깡패들과 친구로 되였다. 1923년에 대립은 늘 상해 소동문의 16포일대를 돌아다녔는데 그곳의 깡패들속에서 꽤 이름이 있었다. 대립은 31살 때 호종남부대의 정보사업을 주관했다. 대립은 자신의 미래 성과가 상해지하사회와 동맹관계를 건립하는데 달려있다고 인정했다. 그래서 대립은 당시의 상해경비구 사령 양호를 찾아갔다. 양호는 대립이 찾아온 뜻을 알고 “자네가 상해에서 정보사업을 하려면 한 사람과 관계를 잘 맺어야 하네”라고 알려주었다. 그 사람이 바로 두월생이였다. 명성이 높은 청방 거두 두월생은 젊은 대립이 “인재”라는것을 보아냈다. 후에 두월생, 양호, 대립은 결의형제를 맺었다. 대립의 일생에서 가장 좋은 친구는 호종남이였다. 대립은 호종남이 항주에 왔을 때 행운스럽게 만난후부터 중요한 동맹관계로 되였다. 대립이 출세하게 된 또 한번의 중요한 기회는 상해에서 장개석을 만난것이였다. 그들이 만난 구체적인 시간은 똑똑하지 않지만 가능하게 1921년이였을것이다. 당시 장개석은 대계도(戴季陶), 진과부 등 친구들과 함께 상해에서 주식무역시장을 경영하여 손중산을 위해 자금을 모으고있었다. 대립은 처음에 자신을 안중에도 두지 않는 이런 혁명파들을 건달나부랭이로 알았다. 대계도는 자신과 같은 성을 가진 대립이 보통인물이 아님을 간파하고 그에 대한 태도를 고쳤다. 총명한 대립은 그들이 손중산이 파견한 광주의 특공일군들이란것을 추측하고 천방백계로 그들앞에서 자기의 능력을 보여주었다. 장개석은 대계도가 대립을 좋게 대하는것을 보고 대립에 대해 다른 눈으로 보게 되였다. 대립이 이미 대계도를 “아저씨”라고 부르는것을 보고 그에게 더욱 중요한 임무를 맡겼다. 1938년 3월에 중경에서 국민당중앙위원회 림시전체대회가 열렸을 때 장개석은 대립을 중앙위원으로 확정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대립은 급히 달려가 장개석에게 “저는 국민당 당원도 아닌데 어떻게 중앙위원으로 될수 있겠습니까?”하고 보고했다. 장개석은 듣고 나서 매우 놀라면서 물었다. “자네는 황포군관학교 졸업생이고 복흥사의 사원이며 또 나의 신변에서 여러해동안 일을 했는데 왜서 아직도 당원이 아닌가?” 대립은 차렷자세를 취하면서 대답했다. “학생은 한마음 한뜻으로 교장님을 따르면서 먹고 입을게 모자란다든가 전도가 없다던가 입당을 한다든가 하는건 개의치 않습니다. 높은 직위와 많은 월급은 학생이 추구하는 바가 아닙니다!” 그 말을 들은 장개석은 매우 기뻐하면서 즉석에서 쪽지를 써주었다. 대립이 받아서 보니 쪽지에는 “장중정(장개석은 이름이 중정이고 자가 개석임)이 대립을 중국국민당당원으로 소개한다”는 몇글자가 씌여있었다. 대립은 급히 사양하면서 중앙위원으로 되지 않고 죽을 때까지 장개석의 “무명학생”으로 살겠다고 맹세했다. 이어 그는 우렁찬 목소리로 “교장께서 신임만 해시주면 학생은 더없는 영광으로 생각하겠습니다”하고 대답했다. 1945년에 중경에서 국민당 6차대표대회를 열었을 때 장개석은 또 대립을 중앙위원의 자리에 올려놓으려고 했다. 그러나 대립은 사절하면서 “교장께서 신임만 해주시면 당(党), 관(官) 두글자는 개의치 않습니다”라고 표시했다. 이에 장개석은 대립을 더욱 중시하고 극진히 관심했지만 한편으로 그의 세력이 지나치게 커지는것을 경계했다.       
164    그럴 때는 빈말이라도 하시지 댓글:  조회:5937  추천:13  2014-05-23
그럴 때는 빈말이라도 하시지   김희수     살면서 때로는 어쩔수 없이 빈말이라도 해야 할 때가 있다. 우리는 길을 가다가 아는 사람을 만나면 “우리 집으로 놀러 오세요”하고 말할 때도 있고 친구와 함께 식사하러 가다가 아는 사람을 만나면 “같이 갑시다”하고 말할 때가 있다. 이는 경우에 따라 그 사람을 정말 청하고싶어 하는 말일수도 있고 인사치레로 하는 빈말일수도 있다. 하지만 정말이든 빈말이든 듣는 사람은 기분이 좋아질것이다.   얼마전에 우리와 광고거래가 있는 어떤 사업가 분이 우리 사무실에 찾아온 적이 있었다. 그분은 광고문을 다시 작성하고 광고디자인을 보다 완성도 있게 하기 위해 우리 사무실의 광고업무원 그리고 컴퓨터디자이너와 함께 두 시간 가량 꾸준히 심혈을 기울이였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점심때가 되였다.   그날은 다른 사람들은 볼일이 있어 나가고 사무실에는 그 사업가분외에 광고업무원과 컴퓨터디자이너 그리고 나 셋이 남았다. 그런데 그분은 광고업무원과 컴퓨터디자이너만 데리고 점심식사하러 나갔다. 사무실에 혼자 남은 나는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분이 두 사람만 데리고 식사하러 나간것이 너무 당연한 일인데도 어쩐지 기분이 좀 그랬다. 광고업무원은 광고거래로 친분이 깊은 사이이고 컴퓨터디자이너는 광고디자인을 하느라고 수고를 했으니 그 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음식대접을 하는것은 백번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아무런 친분도 없고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은 나를 식사자리에 청하지 않은것도 리소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 분이 두 사람을 청해 가면 나혼자 남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날 그 시각에 사무실에 나 말고 다른 사람이 한사람이라도 더 있었더라면 아무런 문제될것도 없는 일이다. 그런데 그분은 사무실에 나 한사람만 달랑 남게 되는것을 번연히 보면서도 나하고는 아무말도 안하고 두 사람만 청해서 식사하러 나간것이다.   한 사람만 남겨놓고 그냥 간다는것은 리소당연하다(리치가 마땅히 그러하다)고는 말할수 있지만 의리당연하다(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에 마땅하다)고는 말할수 없다. 그럴 때는 같이 가자고 빈말이라도 한마디 하는것이 의리당연한것이 아닐가? 같이 가자고 한다고 해서 누가 가야 할 자리가 아닌걸 알면서 따라 가겠는가? 만약 그분이 같이 가자고 한마디 했다고 해도 나는 따라 가지 않았을것이다. 그 자리는 내가 가야 할 자리가 아니기때문이다.   또 지금 세월에야 식사 한끼, 술한잔하는 자리가 뭐 대단한것도 아니잖은가? 지난 세기 90년대 이전에야 누가 같이 가자고 빈말이라도 하면 체면 무릅쓰고 따라가는 사람이 더러 있었지만…그러나 술자리를 일부러 피하기도 하는 지금 세월에 빈말인줄 알면서 따라 갈 사람이 있을가? 뭐 앉을 자리 설 자리를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몰라도…   그러면서 왜 빈말이라도 해주기를 바라냐고? 모순된 일같기도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그런 빈말이라도 들었더라면 혼자 남아있어도 기분이 좋아졌을것이기 때문이다.   혹시 그분의 립장에서는 “내가 내 돈을 내고 청하는데 누구를 청하고 안 청하고는 내 마음이지 않은가, 왜 속에 없는 말을 하겠냐, 그건 내 체질이 아니야”하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고 아무리 싫은 사람이라고 해도 따뜻한 말 한마디 해주면 인심을 얻을수 있을것이고 또 립장을 바꿔놓고 혼자 남은 사람이 나라고 생각해보면 속에 없는 말을 하는 체질이 아니라고 해도 빈말이 어렵지 않게 나갈수 있을것이다.   “같이 갑시다.”   아주 간단한 한마디이지만 이 한마디의 빈말이 상대방의 기분을 배려하게 되고 내 마음도 유쾌해지게 할것이다.  
163    똬리 그 넘치는 정감 댓글:  조회:7984  추천:9  2014-05-19
똬리 그 넘치는 정감   김희수     얼마전에 인터넷에서 동영상을 찾아 클릭하다가 물동이춤을 추는 장면이 나와서 한참을 감상했다.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빙글빙글 돌고 또 돌아도 물동이가 떨어지지 않는것을 보면 절로 감탄이 나온다. 옛날 마을처녀들이 물동이를 이고 샘물터로 또는 우물가로 물을 길러 나오던 모습을 담은 무용이다.   예전에 어머니도 물동이를 이고 우물가로 물을 길러 다녔다고 한다. 나는 어머니가 물동이를 이고 물을 길러 다니는 모습은 보지는 못했지만 내가 어릴 때 어머니가 물통을 이고 물을 길러 수도물가로 다니는 모습은 많이 보았다. 어머니는 빨래 하러 강변으로 갈 때도 빨래함지를 머리에 이고 다녔고 량식점에 가서 배급을 타올 때도 쌀주머니를 머리에 이고 다녔다. 그렇게 짐을 머리에 이고 다닐 때마다 빠지지 않는것이 똬리였다. 먼저 똬리를 머리중심에 잘 놓은 다음에 그우에 물동이나 빨래함지, 쌀주머니 등을 올려놓는다. 어머니는 똬리가 없을 땐 급한대로 수건을 돌돌 말아 사용하기도 했다.   어머니는 머리에 물건을 이고 다닐 때 때로는 한손으로 물건을 잡기도 하지만 손을 놓고 걸을 때도 있었다. 나는 그럴 때마다 어머니의 머리우의 물건이 떨어질가봐 조마조마했지만 신기하게도 어머니의 머리우의 물건은 어머니의 머리에 딱 붙은듯 떨어지지 않았다. 머리에 인 물건이 떨어지지 않는것은 물동이를 받쳐주는 똬리가 있기때문이라는것을 그때는 몰랐다.   녀인들이 물동이나 짐을 머리에 이고 가기 위해서는 머리에 받쳐주는 뭔가가 있어야 했다. 그리하여 만들어진것이 똬리이다. 똬리를 머리에 얹고 그우에 짐을 인다. 똬리는 충격을 완화시켜주는 작용을 하는데 이것은 녀인들의 지혜에 의해 생겨난것이였다.   똬리는 물동이나 짐을 일 때 머리우에 얹어 짐을 받치는 고리모양의 물건으로 지방에 따라 뚜아리, 뚜와리, 뙈리, 뙤리, 뙈미, 또아미, 똥아리, 똥애미, 또바리, 따바리, 뙤바리, 또가리, 또개미, 때가리, 또뱅이, 따뱅이, 따빙이, 똬뱅이, 따배, 따비, 또배, 따반지, 따방구, 때방구 등으로도 불리웠다.   내가 살았던 룡정에서는 똬리를 함경도방안으로 “따발”이라고 불렀다. 또 그때는 똬리모양으로 만든 “따발사탕”이 아이들에게 인기였고 전쟁영화에서 보았던 “따발총”도 남자아이들에게 인기절정이였다.   똬리는 옛날에 짚이나 왕골, 골풀, 헝겊, 죽순껍질 등을 둥글납작하게 틀어서 심을 만들고 왕골이나 골풀 등을 곱게 싸서 섬세하게 만들었다. 앞쪽에 해당하는 부분에 삼이나 짚으로 끈을 달아 머리에 얹고 끝을 입으로 물 정도의 길이로 했다. 똬리를 머리에 얹고 물동이나 무거운 짐을 일 때에 몸의 중심이 맞지 않아 똬리가 떨어지는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똬리끈의 끝을 입으로 물고 물건을 들어 얹었다.   내가 어릴 때 보았던 똬리중에는 물동이춤을 출 때 사용하는 도구처럼 빨간색, 파란색, 노란색 등을 칠해 알록달록 예쁘게 만든것도 있었다. 아줌마들보다 처녀들이 이런 예쁜 똬리를 더 애용했던것 같다. 여하튼 똬리만 얹어놓으면 녀인들의 머리에는 물동이건 빨래함지건 쌀주머니건 모두 다 그우에 올려놓고 마술사처럼 이고 갈수 있었다. 뙤리는 슬기로운 우리 민족 녀인들이 한많은 아리랑고개를 넘어오면서 로동속에서 창조해낸 지혜였고 우리 민족 녀인들이 수난의 년대를 걸어온 력사의 증거물이다.   똬리우에 짐이나 물동이를 이고 가는 녀인들의 모습은 이제 민속촌이거나 무용배우들이 공연하는 물동이춤에서나 볼수 있게 되였으니…우리민족의 옛것이 하나둘 사라져가는건 아쉽지만 한평생 세세대대로 이어오며 똬리를 동반하며 힘든 일만 해온 녀인들이 이제는 무거운 짐에서 해방되였으니 이 아니 다행일가.      
162    공자와 마부 댓글:  조회:2995  추천:1  2014-05-17
공자와 마부   풍몽룡(명나라 문학가)     여러 나라를 떠돌아다니며 방랑생활을 하던 공자(孔子)가 조그마한 실수를 저질렀다. 그가 타고 다니던 말이 어느새 농부의 밭으로 들어가 농작물을 못쓰게 만들어놓았던것이다. 화가 난 농부가 무작정 공자의 말을 끌고가버렸다. 공자가 물었다. “누가 가서 말을 찾아오겠느냐?” “예, 제가 가서 찾아오겠습니다.” 원래 말주변이 좋은 공자의 제자 자공이 선뜻 나섰다. 공자의 마부도 뒤지려고 하지 않으려는듯 이렇게 말했다. “제가 말을 잘 지켜보지 못했으므로 저의 탓입니다. 그러니 제가 찾아와야죠.” 자공과 마부는 서로 말을 찾아오겠노라고 했다. 공자가 말했다. “그래도 자공이 먼저 가는것이 나을것이다.” 자공은 제법 어깨를 으쓱하며 공자의 말을 가져간 농부를 찾아갔다. 그런데 자공이 입술이 닳도록 얘기를 했지만 농부는 공자의 말을 돌려주려고 하지 않았다. 풀이 죽어서 되돌아온 자공의 얘기를 들은 공자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상대가 알아들을수 없는 말로써 상대를 설득시키려 하는것은 마치 소와 말, 양을 잡아 산짐승에게 제사를 지내려는것과 같으며 아름다운 음악을 새에게 들려주는것과 같다. 그러니 문제가 해결될수 없지.” 자공에게 그렇게 말한 공자는 이번에는 마부를 보고 보냈다. 공자의 말을 가져간 농부를 찾아간 마부가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나 나나 다 같은 농부요. 우리가 깜빡 조는 사이에 말이 밭으로 들어간것 같구만.” 마부의 말을 들은 농부는 언제 화를 냈던가 싶게 허허 웃으며 즉시 말을 돌려주었다. 사람은 언제나 동업자와 잘 어울리는 법이다. 농부의 앞에서 “시(诗)”와 “서(书)”의 도리를 늘여놓은것은 무능한 선비들의 어리석은 행동에 불과하다. 마부의 말은 솔직했다. 설령 자공이 마부처럼 말을 했다 하여도 농부는 여전히 듣기 싫어했을것이다. 무엇때문인가? 한 사람은 깔끔한 선비차림이고 한 사람은 우직한 농부인지라 애당초 어울려지지 않는다. 그러면 무엇때문에 공자는 처음부터 마부를 보냈다면 자공이 속으로 불만을 품을수가 있다. 자공이 실패하여야만 비로소 마부가 능력을 나타낼수가 있는것이다. 현인들은 이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고 올바르게 다스렸다. 공자가 마부를 농부에게 파견한것은 우둔함으로 우둔함을 정복한 방법이였다.  
161    주은래의 두 양딸 댓글:  조회:9927  추천:0  2014-05-17
주은래의 두 양딸   (번역)     주은래와 등영초는 비록 자신의 후대는 없었지만 많은 렬사의 자녀들을 입양했다. 이런 양자녀들중에서 줄곧 평범하지 않은 련계를 유지하고있은것은 두 사람뿐이였는데 그들로는 손병문(孙炳文)렬사의 딸 손유세(孙维世)와 리소석(李少石)렬사의 딸 리미(李湄)였다. 손유세와 리미는 주은래가 직접 인정한 양딸이였는데 그녀들은 줄곧 주은래와 등영초를 아빠, 엄마라고 불렀다. 손유세의 아버지 손병문은 주은래의 전우였는데 1927년에 혁명을 하다가 희생되였다. 당시 손병문에게는 4자녀가 있었는 손유세는 5살밖에 안되였다. 항일전쟁이 폭발된 그해 손유세는 무한의 팔로군판사처에 찾아가 연안으로 가겠다고 신청했다. 그러나 누구도 그녀를 아는 사람이 없어 비준되지 않았다. 그 당시 16살밖에 안된 손유세는 혼자서 문어구에 서서 상심하여 울기만 했다. 그때 주은래가 그녀를 발견하고 양딸로 삼았다. 그후 주은래는 그녀를 연안으로 데리고갔다. 1939년에 주은래가 팔을 상하여 쏘련으로 치료하러 떠나게 되였는데 손유세도 모택동의 비준을 받고 함께 갔다. 그후 손유세는 쏘련에 남아 7년동안 희곡을 배우다가 새중국이 성립된후 귀국했다.   귀국후 손유세는 주은래와 등영초를 몹시 따랐으며 주은래와 등영초도 양딸을 몹시 사랑해주었다. 1950년에 손유세는 혼자서 서화청에 양부모의 은혼기념연회를 차례놓았다. 이에 주은래와 등영초는 몹시 감동되였다. 그후 손유세는 김산(金山)한테 시집을 갔다. 주은래와 등영초는 동의하지 않았지만 반대하지 못했다. 주은래는 양딸의 결혼식때 등영초에게 부탁하여 《중화인민공화국혼인법》이란 책을 결혼선물로 주었다. 결혼식에 참석한 사람들은 모두 주은래가 손유세의 신랑에게 긴고주(紧箍咒)를 씌워준것이란것을 알았다. 그후 10여년간 세 사람은 줄곧 친부모자식처럼 친밀하게 지냈다. 비록 주은래와 등영초는 손유세를 친딸처럼 사랑해주었지만 문화대혁명시기에 이 렬사의 딸을 보호해주지 못했다. 강청이 결사적으로 손유세를 죽음으로 몰았기때문이다. 1967년 12월에 공안일군들이 손유세의 집에 뛰여들어 “특무혐의”가 있다는 죄명으로 손유세의 남편 김산을 체포했다. 그후 손유세도 감옥에 들어가게 되였다. 손유세는 감옥에서 족쇄와 수갑을 찼으며 지독한 고문을 당했다. 1968년 10월 4일에 손유세는 매를 맞아 감옥에서 사망되였다. 숨을 거두었을 때까지 그녀는 족쇄와 수갑을 차고있었다. 손유세가 사망되였다는 소식을 들은 주은래와 등영초는 비통을 참을수 없었지만 비상시국이여서 마음속으로 묵묵히 양딸을 애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양딸 손유세를 잃은후 주은래와 등영초는 다른 양딸 리미에게 더욱 많은 사랑을 주었다. 주은래는 1942년 8월에 리미를 양딸로 삼았다. 그해 주은래는 료중개(廖仲恺)의 딸 료몽성(廖梦醒)을 파견하여 송경령을 도와 중국동맹을 보위하는 사업을 회복하게 했다. 료몽성은 딸 리미를 데리고갔다. 그때 엽정(叶挺)의 부인 리수문(李秀文)과 엽정의 딸 양미(杨眉)도 그녀와 동행했다. 두 어머니와 두 딸은 오문으로부터 중경으로 갔다. 료몽성네가 도착하자 주은래는 증가암 50호에 한상 차려놓고 그녀들을 청했다. 리미와 양미는 주은래를 보자 친절하게 “주백부(周伯伯)”라고 불렀다. 주은래는 기뻐서 두 녀자애를 한팔에 하나씩 안으면서 말했다. “양아빠라고 불러라!” 이렇게 되여 리미와 양미는 주은래의 양딸이 되였다. 비록 그 당시 등영초는 중경에 없었지만 그후 두 아이를 만났을 때 양어머니로 되여주었다. 1945년 10월 8일에 주은래의 비서를 담임한적이 있던 리소석이 중경에서 살해되였다. 그 소식을 들은 주은래는 렬사의 안해 료몽성과 딸 리미를 홍암촌의 팔로군판사처로 데려왔다. 주은래와 등영초는 아버지를 잃은 렬사의 딸 리미를 친딸처럼 사랑해주었다. 료몽성은 딸 리미와 함께 한시기 홍암촌에 거주하다가 향항으로 가서 어머니 하향응(何香凝)을 만났다. 1949년 4월에 하향응은 딸 료몽성과 함께 외손녀 리미, 손자 료겸, 료휘를 데리고 해방된 북평으로 왔다. 이렇게 되여 리미는 다시 양부모 주은래와 등영초를 만나게 되였다.  
160    가정화목은 대박 댓글:  조회:6993  추천:15  2014-05-12
가정화목은 대박   김희수     매년 5월 15일은 “세계가정의 날”이다. 1989년 12월 8일, 제44차 유엔총회에서 가정의 중요성을 널리 알리고 그 역할 및 책임의식을 확산하기 위하여 그리고 건강한 가정을 통해 평화로운 인류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해 1994년을 “세계 가정의 해”로 지정했다. 1993년에 뉴욕특별회의에서 매년 5월 15일을 “세계 가정의 날”로 제정하였다. 그리하여 1994년부터 이 “세계 가정의 날”을 기념하게 되였다.   중국에는 현재 약 3억 7000만개의 가정이 있다. 이렇게 많은 가정이 집집마다 속사정은 달라도 화목하게 살려는 소원만은 한결같을것이다. 가정화목은 가족을 위하는 마음과 행동에서 이루어진다.   장나라고 하는 리혼하고 쌍둥이아들을 데리고 사는 녀자가 있었는데 금년에 29살이고 쌍둥이는 7살이였다. 편벽한 초원에서 태여난 그녀는 어릴 때부터 오빠와 함께 아빠, 엄마가 공연하는 극단을 따라다녔다. 극단이 어디로 가면 그녀는 어디로 가군했다. 집이 없었던 그녀의 식구들은 공연하는 고장의 학교거나 농민의 집에 거주하군 했다. 그렇게 떠돌이생활을 하면서 그녀는 자신의 집이 있었으면 하는 소원을 품게 되였다. 그 소원은 너무나 아득했지만 그녀는 자신이 노력하고 견지하면 꼭 이루질것이라고 믿었다.   그녀는 결혼했고 쌍둥이아들까지 낳았지만 불행하게도 남편과 리혼하게 되였다. 남편은 가족을 돌볼줄을 모르는 사람이였기때문이다. 어릴때부터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지고 태여난 그녀는 결혼식파티에서 노래를 불러주는 웨딩싱어(婚庆歌手)였다. 광활한 초원에서 그녀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녀가 저명한 가수여서 그런것이 아니였다. 이름 있는 가수들은 수입이 적고 길이 멀다는 리유로 편벽한 곳으로 가지 않았다.   그녀의 오빠는 병이 있어 일을 할수 없었다. 그녀는 이제 로인이 되여버린 엄마, 아빠에게 힘든 일을 시키고싶지 않았다. 그때문에 그녀는 가족을 위해 아무리 길이 멀고 수입이 적다고 해도 결혼하는 집이 있기만 하면 달려가 노래를 불러주군 했다. 그렇게 결사적으로 돈을 벌어 그녀는 선불금 27만원을 지불하고 집을 구매했다. 집열쇠를 받아들고 새집들이 하는 날에 온집식구가 서로 얼싸안고 울었다. 그녀의 가족들은 그녀가 아니면 이 가정이 풍비박산이 났을거라고 했다.   장나와 함께 웨딩싱어였던 리미라는 녀자가 있었다. 그녀는 남편도 있고 아이도 있었지만 도시의 화려한 결혼식파티에만 다니며 노래를 부르다가 남편도 아이도 버리고 한 색마국장의 첩이 되였다. 그 색마국장은 원래 장나를 욕심내고있었는데 장나가 거절하자 꿩 대신 닭이라고 리미를 호화별장에 데려다놓고 첩으로 삼았던것이다. 리미는 일시적인 향락을 위해 가정을 파탄내고 가족을 버렸지만 다른 사람에게 의탁한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색마국장의 본마누라가 찾아오고 뢰물을 받아 흥청망청 써버리던 색마국장도 나중에 반부패운동에 걸려 감옥밥을 먹게 되면서 그녀도 련루되여 공안기관에 구속되였다.   장나는 가족을 위해 살았기에 가정화목을 지킬수 있었고 리미는 가족을 버렸기에 가정이 파탄나고 자신마저 망가지게 되였다. 가정이란 이렇게 중요하다. 가진것이 아무리 많아도 가정이 화목하지 못하면 행복할수 없다. 가장 큰 재부는 돈이 아니라 가족이다.   가정이 화목하면 만사가 이루어진다(家和萬事成)는 말이 있다. 그런데 우리는 예전에 가정화목은 뒤전으로 하고 쩍하면 공산주의실현을 위해 분투한다거나 사회주의건설을 위해 헌신하겠다고 큰소리를 탕탕 쳐댔다. 선진이 되여 상장을 받았거나 운동경기에서 메달을 땄을 때에는 또 반드시 “국가를 위해 어떠어떠하게 노력했으며 오늘의 이 영예를 안겨준 당과 인민에게 감사를 드린다”는 희떠운 소리를 목청껏 웨쳐댔다. 이런 말들은 모두 마음에도 없는 허풍에 지나지 않았다.   지금은 세월이 많이 달라져서 “가족을 위해 어떠어떠하게 노력했으며 오늘의 이 아무개를 만들어준 부모에게 또는 스승에게 감사를 드린다”고 진실을 말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우리 모두 가정의 화목을 위해 살아간다면 굳이 나라를 위한다고 큰소리를 치지 않아도 나라를 위하는 일이 될것이다.   조선족사회의 가정해체현상이 심각해진 시점에서 가정화목은 더욱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예전에는 3대이상이 사는 대가족이 많았지만 지금은 부부와 그들의 미혼자녀로 구성된 핵가족이 많아졌다. 또 한국나들이로 부부가 헤여져 살고 부모와 자녀가 헤여져 살고있는 경우가 많은 현재의 가정에서 고부관계보다 부부관계와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더욱 중요하게 되였다.   부부가 서로 사랑하고 리해하고 보듬어주고 모든것을 가족의 화목을 위해 출발한다면 리혼률도 줄것이고 부득이한 사정으로 하여 리혼을 했다고 해도 가정화목을 위하는 마음이 있다면 자녀를 끝까지 책임지면서 자녀에게 상처를 주지 않을것이다.   진정으로 가정화목을 위한다면 사리사욕에 눈이 어두워 법을 어기거나 남에게 해가 되는 일을 하지 않을것이다. 내가 법을 어기거나 남을 해치면 벌을 받게 되여 결국에는 내가 지은 죄로 인해 가족들도 화를 입게 되기때문이다. 가족을 위한다는 미명하에 자신의 그릇된 행위를 정당화하거나 자신의 정당하지 못한 행위를 합리화시키는 사람도 있지만 이는 진정으로 가족을 위하는것이 아니다.     진정으로 가족을 위하는 사람은 좋은 남편, 좋은 안해거나 좋은 아빠,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해 집안에서는 가정화목을 도모하고 사회에서는 사회성원으로서의 의무를 다할것이다. 또 화목한 가정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자신들의 위해 고생하는 아빠, 엄마에게 보답하기 위해 바르게 행동하고 공부도 잘할것이다.   “싸리나무 한가지는 꺾기 쉽지만 아름드리나무는 꺾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가족들이 한 마음이 되여 서로 보호하고 관심하고 지지하고 리해하고 사랑하고 치유한다면 그 어떤 난관이 가로막아도 헤쳐나갈수 있을것이다. 원칙과 상관없는 사소한 일은 따지 말고 일이 있으면 공동히 상의한다면 해결하지 못할 일이 없을것이다.   가정은 사회의 가장 기본이 되는 세포로서 가정이 화목하지 못하다면 조화사회구축이라든가 중국꿈이라든가 하는것은 공담에 불과하다. 가정이 화목하지 못하면 리혼률도 상승하고 허다한 사회문제를 초래한다. 가출, 폭력, 살인, 강탈, 강간 등 부도덕한 행위나 범죄행위가 란무하게 된다. 가정이 파탄되면 사회가 불안정해지고 사회가 불안정해지면 국가가 사라지고 세계가 망하게 된다. 반면에 가정이 화목하면 사회와 국가도 안정하게 되고 모든 국가마다 화목한 가정으로 똘똘 뭉쳐 안정을 유지하게 되면 세계평화도 이루어질것이다.   이래서 가정화목은 대박이라고 하는것이다.      
159    농민부총리 진영귀의 6가지 “제일” 댓글:  조회:5639  추천:3  2014-05-10
농민부총리 진영귀의 6가지 “제일”   (번역)     1. 제일 가난한 국무원부총리   1973년에 진영귀(陈永贵)가 중앙정치국위원과 국무원부총리로 당선된후 주은래는 진영귀에게 호적을 북경으로 옮겨와 로임을 타라고 권고했다. 그러나 진영귀는 자기부터 본보기를 보여야 한다면서 호적을 옮기지 않고 의연히 대채에서 로임을 탔다. 대채대대에서는 이 국무원부총리에게 만점을 기록하고 만출근으로 하여 매일의 로동로임을 1원 50전씩 결산해주었다. 산서성에서 진영귀가 성의 직무를 겸임한것에 근거하여 매달 100원을 보조해주었고 국무원에서 매달 생활비로 36원을 보조해주었다. 136원에다 로동로임을 첨가한것이 곧 이 부총리의 전부 수입이였다. 그런데 그에게는 찾아오는 손님이 많아서 식사대접을 하다보니 늘 돈이 모자라서 절약해 쓰군 했다. 어느날에 기등규(纪登奎)와 진석련(陈锡联)이 진영귀네 집에 찾아와서 산서라면을 먹었는데 취사원이 닭 한마리를 사왔다. 진영귀가 취사원을 보고 물었다. “닭은 왜 사왔소? 나는 이 닭을 안먹겠소. 손님들이 라면을 먹으로 왔는데 우리 밀가루음식을 하기오.” 진영귀는 늘 좁쌀죽 한사발이거나 칼국수 한그릇에 짠지 몇저가락을 놓고 쪽걸상에 앉아 후룩후룩 먹는것으로 한끼를 때우군 했다.   2. 제일 술을 많이 마신 연회   1975년 12월 26일의 저녁에 정치국회의를 마친후 강청이 모두 모여앉아 모택동의 생일연회를 열자고 제의했다. 사업일군이 모태주를 들고오자 장춘교와 요문원이 진영귀에게 건배하라고 억지로 술을 권했다. 그러자 진영귀가 큰소리로 말했다. “당신들이 자꾸 권하면 좋소. 모주석께서 년세가 얼마면 난 그만큼 건배하겠소.” 그날은 모택동의 82돐 생일이였다. 사업일군들이82개의 밑굽손잡이가 긴 술잔(高脚杯)에 모태주를 넘치게 부어놓자 진영귀는 82잔을 한모금에 한잔씩 련거퍼 다 마셔버렸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는 운전수를 보고 “오늘 많이 마신것 같군. 제밀할, 날 취하게 하려구? 어림도 없어”라고 말했다.   3. 정치리론학습을 가장 두려워 한 진영귀 진영귀는 한동안 매일 오후마다 왕홍문의 거처에 가서 맑스, 엥겔스, 레닌, 쓰딸린의 저작을 학습했다. 그는 무슨 《고타강령비판》이란 맑스의 저작을 학습하라거나 외우기도 어려운 포이어바흐(费尔巴哈)라고 하는 독일철학자의 이름을 기억하라고 할 때에는 골치가 아파 죽을 지경이였다. 그는 매번 학습하고 돌아올 때면 큰 병을 앓은 사람처럼 기진맥진했다. 그는 학습하기 싫었지만 학습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러다가 그는 꾀를 생각하고 학습하러 가지 않았다. 왕홍문이 학습하러 오라고 전화를 걸어오면 그는 전화를 받는 경호원을 보고 말했다. “내가 집에 없다고 하오!”   4. 제일 골치아픈 일은 문건비준   진영귀는 40살에야 겨우 문맹을 벗어났는데 문화수준이 매우 낮았다. 그는 부총리로 된후 늘 문건을 보고 비준해야 했는데 모를 글자가 많았다. 그는 다른 사람과 물어보기 창피하여  방안에서 멍하니 “이 글자를 어디서 봤더라?”하고 머리를 쥐여짜며 생각했다. 어느 한번은 문건을 비준할 때 “待后处理”란 “대(待)”자가 반나절이나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았다. 중앙판공청에서 문건을 바치라고 독촉해서야 그는 창피를 무릎쓰고 비서와 “대”자를 어떻게 쓰는가고 물었다. 비서는 “‘초대소’, ‘접대소’라고 할 때 모두 그 ‘대’자를 쓰지 않습니까?”하고 대답했다. 그제야 진영귀는 손바닥으로 머리를 탁치며 말했다. “아, 그러길래 눈에 익지. 과연 어디서 보던 글자군!”   5. 제일 참을수 없는 일은 놀면서 량식을 랑비하는것 진영귀는 갓 중앙에 와서 사업할 때 처음에는 그와 그의 비서, 경호원이 모두 경서호텔에 가주했다. 중앙지도자들은 오후와 밤에 사무를 보는데 습관되여 오전에는 아무일도 하지 않았다. 진영귀는 그들이 아무일도 하지 않고 량식만 소모하는것을 보고 참을수 없어서 뒤짐을 지고 쉴새없이 화원을 돌아다니면서 할일없이 놀기만 하는 흉내를 냈다.   6. 제일 리해할수 없는 일은 여러사람이 그를 받들어모시는것   1974년 8월에 중앙에서는 진영귀에게 조어대로 이사오라고 통지했다. 진영귀는 3호아빠트에 들었다. 아빠트에는 복무원 3명, 료리사 1명, 운전수 1명, 경호원 1명, 비서 1명이 모두 그를 받들어 모셨다. 그는 리해할수 없어서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한사람을 왜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받들어모시는걸가? 나더러 이불도 개이지 못하게 하고 마당도 쓸지 못하게 하다니? ” 진영귀는 아무일도 못하게 하자 심리부담이 증가되였다. 그는 이 사람들을 모두 대채로 데리고가서 농사를 짓게 하고싶었다.    
158    돼지와 키스하는 시장 성장이 나온다면 댓글:  조회:6848  추천:21  2014-05-05
돼지와 키스하는 시장 성장이 나온다면   김희수   최근에 호북성 함녕시실험소학교 부교장 홍요명(洪耀明)이 학생들과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돼지와 키스를 한 기사를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학생들의 덕육방면을 책임진 그의 노력으로 학교내의 환경위생은 줄곧 깨끗하게 유지되였다. 그런데 학교문어구에 통해로부근에 장사군들이 난전을 쭉 벌려놓아서 학생들과 행인들이 쓰레기를 마구 버리는 현상이 엄중했다. 특히 아침에 등교할 때 음식과 음료쓰레기들이 많이 쌓여 어지럽기 말이 아니였다.   지난 3월의 국기게양식때 홍요명은 전교학생들 앞에서 “동무들이 학교문어구의 길에서 쓰레기를 던지지 않고 쓰레기를 버리는 사람들을 제지하여 난전거리가 깨끗하게 변모된다면 한달후의 국기게양식때 내가 동무들앞에서 새끼돼지와 키스하겠습니다”하고 말했다.     물론 홍요명은 돼지와 키스하겠다고 약속한후 손을 놓고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은것이 아니였다. 한달동안 그는 매일 아침 7시에 학교문어구의 난전거리를 돌아다니면서 학생들에게 쓰레기를 마구 버리지 말라고 타일렀고 학교방송과 학교의 영상화면을 통해 문명행위준칙 등 내용을 선전했으며 학교텔레비죤방송사업일군들을 동원하여 학생들이 쓰레기를 쓰레기통에 버리는 문명한 행위를 카메라에 담아 방영하게 했다.   학생들은 선생이 정말 약속을 지키는가를 두고보자는 마음으로 쓰레기를 마음대로 버리지 않았으며 쓰레기가 보이기만 하면 주어서 쓰레기통에 버리군 했다. 과연 그후 한달기간 학생들의 노력으로 학교문어구 난전길에 더는 쓰레기가 보이지 않았다.   지난 4월 28일의 국기게양식대 홍요명은 전교 4000여명의 사생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새끼돼지와 키스를 하여 학생들과 한 자기의 약속을 지켰다. 선생이 돼지와 키스를 하지 못할것이라고 여겼던 학생들은 선생을 말하면 말한대로 하는 선생, 학생들과 한 약속은 꼭 지키는 선생이라고 하면서 그의 말을 잘 따랐다.   돼지와 키스하는것은 꺼림칙하고 또 체면이 깎이는 일이다. 하지만 아이들과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돼지와 키스를 한 홍요명 부교장의 용기에 박수를 보내고싶다. 그는 자신의 행동으로 아이들에게 어려서부터 환경을 보호해야 한다는 문명의식을 심어주었을뿐만아니라 약속의 중요성을 알게 했다.   시민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돼지와 키스하는 시장, 성장이 나온다면 어떨가? 시민들은 그런 시장이나 성장의 밑에서 도시를 아름답게 건설하기 위해 있는 힘을 아끼지 않을것이다. 기대해본다.     
157    모택동이 후계자를 선정한 이야기 댓글:  조회:7862  추천:0  2014-05-01
모택동이 후계자를 선정한 이야기 —모택동은 왜서 주은래를 후계자로 선정하지 않았는가    (번역)   주은래(周恩来)가 서거하자 국무원총리자리가 비였다. 원래는 응당 등소평(邓小平)이 총리의 후계자로 되여야 했다. 등소평은 제1부총리였기때문이다. 그러나 등소평은 비판을 받고있는 처지여서 총리자리를 이어받을수 없었다. 장춘교(张春桥)와 왕홍문(王洪文)은 등소평을 타도하면 자신들이 당연히 후계자로 되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1976년 2월 2일에 하달된 《중공중앙통지》에는 뜻밖에도 위대한 령수 모주석의 제의에 따라 화국봉(华国锋)을 국무원대리총리로 임명한다고 했다. 그리고 엽검영(叶剑英)이 병으로 앓고있는 기간에 진석련(陈锡联)이 중앙군사위원회의 사업을 책임진다고 했다. 이는 모택동(毛泽东)이 새로운 후계자로 화국봉을 선정했다는것을 보여주었다. 화국봉은 류소기(刘少奇), 림표(林彪), 왕홍문, 등소평후 모택동이 또 친히 선정한 후계자였다. 1970년 7월부터 모택동의 기요비서겸 생활비서를 담임했던 장옥봉(张玉凤)은 모택동이 후계자를 선정하던 정경을 회고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후계자문제에 대해 모주석은 여러번이나 저에게 ‘이 문제는 골머리를 썩여야 할  일이요. 림표도 내가 선정했고 왕홍문도 내가 선정했지만 모두 자격이 안되오’라고 말했습니다. 1970년초에 저는 한번 모주석께 ‘주총리는 그렇게 훌륭한데 왜서 그를 후계자로 선정하지 않습니까?’라고 물은적이 있는데 그때 모주석은 손바닥을 펴고 칼로 자르는 동작을 하면서 ‘총리는 비록 훌륭하지만 이것이 모자라오’라고 대답했습니다.” 주은래가 사망되였을 때 모택동의 조카 모원신(毛远新)이 병석에 있는 모택동을 보고 누구를 총리로 임명하겠는가고 물었다. 모택동은 “왕홍문과 장춘교에게 양보하라고 알려라”라고 말한후 “그래도 화국봉이 좋을것 같구나”라고 말했다. 이렇게 되여 화국봉은 대리총리로 되여 정치국사업을 주관하게 되였다. 1976년 4월 30일 오후에 모택동은 화국봉과 담화했는데 당시 모택동의 발음은 똑똑하지 않았다. 모택동은 장옥봉의 부축을 받으며 종이에 “천천히, 급해하지 마시오”, “과거의 방침대로 하시오”, “동무가 사업을 맡아하니 나는 마음이 놓이요(你办事,我放心)!”라고 써서 화국봉에게 주었다. 그후 “과거의 방침대로 하시오”라는 말은 모택동의 림종부탁이고 “당신이 사업을 맡아하니 나는 마음이 놓이요”라는 말은 후계자를 지정한것이란 설이 나돌았는데 이는 사실과 맞지 않는다. 사실 모택동은 그와 비슷한 말을 주은래, 등소평 등의 앞에서도 서너번 말한적이 있었다. 례하면 등소평이 만리(万里)를 사천성당위 제1서기, 철도부 부장으로 천거했을 때 모택동은 등소평을 보고 “좋소. 동무가 사업을 맡아하니 나는 마음이 놓이요”라고 말한적이 있었다. 1976년 1월 21일과 28일에 모택동은 화국봉을 국무원 대리총리로 임명할것을 제의한후 또 화국봉이 중앙의 일상사업을 주관하게 제의했다. 화국봉을 국무원 대리총리로 임명한것은 모택동이 장춘교가 총리로 당선될 가능성을 부정했다는것을 말해준다. 화국봉을 중앙의 일상사업을 주관하도록 한것은 모택동이 의연히 왕홍문을 랭대했다는것을 말해준다. 장춘교보다 키가 머리 하나는 더 크고 나이가 4살 년하인 화국봉은 정치수단이나 문장, 말재주가 모두 장춘교보다 못했다. 산서사투리를 하는 이 대한이 갑자기 나타나서 장춘교의 총리꿈을 물거품으로 만들어놓았던것이다. 본명이 소주(苏铸)이고 자가 성구(成九)인 화국봉은 1921년에 선서성 교성현의 한 제혁로동자의 가정에서 태여났다. 28살의 모택동이 상해에서 중국공산당 제1차회의에 출석할 때 화국봉은 고고성을 울리며 태여났던것이다. 1938년에 17살인 화국봉은 집에서 떠나 산에 올라 항일유격대에 참가하여 1940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46년에 화국봉은 중국공산당 교성현당위서기를 담임한지 얼마안되여 중국공산당 양곡현당위 서기 겸 현 무장대대 정치위원을 담임하여 “화정위”라고 불리우게 되였다. 1949년 8월에 동정호의 남안에 위치한 상양현성에 붉은기가 꽂혔다. 부대를 따라 남하한 화국봉은 상향현 제1임 현당위서기 겸 현무장대대 정위로 임명되였다. 그때로부터 화국봉은 호남성에서 20여년을 사업했다. 1952년에 화국봉은 상담현에 전근되여 현당위서기를 담임했고 몇달후 중국공산당상담지구 당위원회 부서기 겸 상담지구전원(专员)으로 승진했다. 1954년에 화국봉은 중국공산당 상담지구당위원회 서기를 담임했다. 당시 화국봉 자신도 상담현당위 서기, 상담지구당위원회 서기라는 직무가 특수하게 중요하다는것을 의식하지 못했다. 모택동이 바로 상담현사람이였다! 1955년 7월에 모택동이 《농업합작화의 문제에 관하여》란 보고를 한후 34살의 화국봉은 《우경사상을 극복하고 농업합작화운동고조의 도래를 적극적으로 영접하자》, 《농촌 각 계층의 동태를 충분하게 연구하자》, 《합작화운동중에서 반드시 견결히 빈농에게 의거하자》라는 세편의 문장을 썼다. 모택동은 이 고향의 흙냄새가 나는 문장을 읽고 친절감을 느꼈다. 동시에 처음 화국봉이란 이름에 주의를 돌리게 되였다. 모택동은 호남성을 지날 때 상고머리를 한 화국봉을 접견했다. 1955년 10월에 열린 중국공산당 제7기 6중전회 확대회의에서 모택동은 화국봉을 렬석대표로 특별요청하여 상담지구의 합작화운동경험을 소개하게 했다. 일개 지구당위원회 서기가 중국공산당 중앙전회에서 강화를 한다는것은 아주 대단한 일이였다. 회의후 화국봉은 호남성으로 돌아간지 얼마 안되여 중국공산당 호남성당위 통전부 부장으로 승진했다. 1959년 여름에 중공중앙에서는 강서성 려산에서 제8기 8중전회(바로 제1차로산회의)를 열기로 결정했다. 그해 6월 하순에 북경을 떠난 모택동은 장사를 지나게 되였다. 당시 강청은 항주에서 휴양하고있었다. 모택동은 장사에서 화국봉을 만나 담화하면서 고향을 돌아보겠다고 했다. 화국봉은 즉시 모택동의 상담행을 배치했다. 1959년 6월 25일 저녁에 모택동은 떠난지 32년이 되는 고향 상담의 소산충(韶山冲)에 도착했다. 옛집(故居)의 벽에 걸려있는 양개혜(杨开慧)의 사진을 바라보던 모택동은 전처 하자진(贺子珍)에 대한 그리움에 잠을 이룰수 없었다. 모택동은 려산에 오른후 전용차를 보내 남창에 거주하고있는 하자진을 데려오게 했다. 모택동은 20여년이나 헤여졌던 하자진을 려산에서 만났다. 그런데 누가 고발했는지 항주에서 휴양하고있던 강청이 이 소식을 알게 되였다. 화가 난 강청은 장도전화로 “내 지금 당장 려산으로 찾아가겠어요”라고 말했다. 그 바람에 하자진은 려산에서 하루밤밖에 자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려산회의에서 모택동은 팽덕회(彭德怀)를 맹렬하게 규탄했다. 중국공산당 호남성당위 제1서기 주소주(周小舟)도 련루되였다. 주소주는 모택동과 한고향사람이고 모택동의 비서를 담임한적이 있었다. 모택동은 려산에서 내려간후 친히 화국봉을 중국공산당 호남성당위 서기처 서기로 임명하라고 지시했다. 그후 모택동이 호남성에 가기만 하면 화국봉이 곁에서 모시군 했다. 모택동은 늘 “화국봉동지는 정직한 사람이요”라고 말했다. 1968년 4월 8일에 호남성혁명위원회가 성립되였을 때 화국봉은 부주임을 담임했다. 1969년에 화국봉이란 이름은 중국공산당 제9차대표대회의 주석단명단과 제9기중국공산당중앙위원회의 명단에 나타났다. 화국봉은 중국공산당 호남성당위 제1서기를 담임했다. 1970년 12월 18일에 모택동은 저명한 저서 《서행만기(西行漫记)》를 쓴 미국 기자이며 작가인 에드가 스노(埃德加·斯诺)와 담화할 때 화국봉에 대해 언급했다. 스노의 글이 미국의 《생활》잡지에 발표된후 화국봉은 처음으로 국외의 주의를 일으켰다. “친밀한 전우” 림표가 국외로 도망가다가 사망된후 모택동은 부득불 다른 후계자를 선정하지 않을수 없었다. 모택동은 상해의 왕홍문과 장사의 화국봉을 북경으로 전근시켰다. 그 시기 화국봉은 북경에 있었지만 의연히 호남성당위 제1서기, 광주부대정위, 호남군구제1정위직을 겸임했다. 공안부 부장 사부치가 1972년에 사망된후 화국봉은 모택동의 제의에 따라 공안부 부장직을 담임했다. 공안부 부장의 지위가 중요하다는것은 모두가 알고있는것이다. 때문에 화국봉은 북경에 든든하게 발을 붙인것으로 된다. 1973년 5월에 모택동은 정식으로 왕홍문을 후계자로 선정한다고 표시했다. 왕홍문을 중앙정치국회의에 렬석시킬 때 모택동은 화국봉을 예비후계자로 여기고 왕홍문과 동시에 중앙정치국회의에 렬석시켰다. 1973년 8월에 열린 중국공산당 10차대표대회에서 왕홍문은 부주석으로 당선되여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지만 화국봉은 중앙정치국위원으로 되여 그렇게 사람들의 눈에 띠이지 않았다. 화국봉은 말수가 적고 자신을 드러내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북경에서 그가 유일하게 의거할 사람은 모택동뿐이였다. 그는 “4인방”과 아무런 관련이 없었고 주은래, 등소평, 엽검영 등과도 아무런 교분이 없었다. 중앙정치국의 날카로운 투쟁중에서 그는 언제나 중립을 지켰으며 유일하게 모택동의 명령에만 복종하였다. “4인방”은 전력을 다해 등소평을 넘어뜨렸지만 모택동은 대권을 화국봉에게 넘겨주었다. 
156    꽃피는 5월에는 마음의 꽃도 활짝 댓글:  조회:6477  추천:13  2014-05-01
꽃피는 5월에는 마음의 꽃도 활짝   김희수     5월에는 명절이 많다. 5월이 시작되는 첫날은 5.1국제로동절(근로자의 날)이고 4일은 5.4청년절, 5일은 무산계급의 정신령수 맑스(마르크스)탄신일, 30일은 5.30참안일이다. 그래서 팔에 붉은 완장을 끼고 손에 붉은 어록책을 들고 다니던 시절에는 5월을 “붉은 5월”이라고 불렀다. 지금은 “붉은 5월”이라 부르지 않지만 예전보다 명절이 더 많아졌다.   5월의 두번째 일요일인 11일은 어머니날(母亲节), 12일은 국제간호사의 날(또 2008문천대지진6주기), 15일은 국제가정의 날, 18일은 국제박물관의 날, 마지막날인 31일은 세계금연의 날이다. 이외 한국에는 어린이날(5일), 어버이날(8일), 입양의 날(11일), 스승의날(15일), 성년의 날(19일), 부부의 날(21일) 등이 있다.   이렇게 5월에는 명절의 꽃이 아롱다롱 피여있다. 게다가 자연의 꽃도 활짝 피여있어 5월을 꽃피는 5월이라 부른다. 5월에는 또 련인들끼리 사랑의 표현으로 장미꽃을 주고받는 날인 로즈데이(14일)도 있어 꽃피는 5월의 랑만을 더해준다.   꽃피는 5월에는 5.1절휴가도 있어 아름다운 꽃들이 활짝 피여나는 산천경개를 구경하기도 제격이다. 5월의 향긋한 꽃향기에 취해 수려한 대자연의 절경을 감상하노라면 몸도 마음도 상쾌해질것이다.     자연의 꽃이 아름답게 피는 이 5월에 마음에도 사랑의 꾳, 리해의 꽃, 행복의 꾳, 희망의 꽃을 아롱다롱 피운다면 우리들의 마음도 자연의 꽃처럼 아름다워지고 우리 사는 세상도 한결 아름다워질수 있지 않을가 싶다.   또한 우리들의 마음에 봄, 여름, 가을, 겨울 사시장철 시들지 않는 향기가 가득한 꽃을 활짝 피운다면 그 어떤 참사나 비극도 피면할수 있을것이고 참사나 비극이 발생해도 모두가 자신이 맡은 직책을 다해 신속히, 정확히, 효과적으로 구조에만 최선을 다할것이 아닐가 싶다.   누구에게 슬픈 일이 생기면 다 같이 아파하고 누구에게 기쁜 일이 생기면 다 같이 웃어주고 서로 옴니암니 따지지도 않고 티격태격 싸우지도 않고 미워하지도 않고 분노하지도 않고 질책하지도 않고 질투하지도 않고 욕심내지도 않고 탓하지도 않고 서로서로 리해하고 도와주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이런 세상을 바란다면 유토피아를 꿈꾸는 철부지아이라고 코웃음을 칠지도 모른다. 혹자는…   철부지아이가 꿈꾸는 유토피아라고 해도 좋다. 지성이면 감천, 정성이 지극하면 돌우에도 꽃이 핀다는 말처럼 오직 한마음 한뜻으로 우리들의 마음에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피우고 또 피운다면 우리가 꿈꾸는 유토피아, 결코 망상이 아닐것이다.     
155    군벌거두 손전방을 암살한 녀호걸 댓글:  조회:6708  추천:2  2014-04-26
군벌거두 손전방을 암살한 녀호걸   (번역)   시검교(施剑翘)는 본명이 시곡란(施谷兰)이다. 그녀는 1905년에 안휘성 동성에서 태여났고 생부는 혁명렬사 시종운(施从云)이다. 생부가 사망된후 시검교는 아버지 시종운의 동생 시종빈(施从滨)의 양녀로 들어가 삼촌 시종빈을 아버지라고 불렀다. 시종빈은 1925년에 산동성군무조리 겸 봉계제2군 군장을 담임했다. 시종빈은 그해 11월의 직봉대전에서 패배하여 손전방(孙传芳)에게 포로되였다. 당시 5성련군통수(五省联军统帅)였던 손전방은 포로된 시종빈을 즉시 총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도 분이 풀리지 않은 손전방은 시종빈의 시신을 동강낸후 머리를 안휘성 방부기차역꼭대기에 7일동안 걸어놓았다. 아버지가 비참하게 살해된 소식을 들은 시검교는 비분강개하여 주먹을 불끈 틀어쥐고 꼭 손전방을 죽여 아버지의 원쑤를 갚겠다고 하늘에 맹세했다. 그러나 당시 연약한 녀자가 손전방같은 군벌거두를 암살한다는것은 불가능한 일이였다. 그리하여 시검교는 복수의 희망을 사촌오빠 시중성에게 걸었다.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읜 시중성은  시검교의 아버지 시종빈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다. 시종빈이 살해되였을 때 시중성은 연태경비사령부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고있었다. 시검교는 이런 사촌오빠의 힘을 빌면 손전방을 암살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가 찾아갔을 때 유망한 전도와 부귀영화에 미련을 둔 시중성은 단마디에 시검교의 부탁을 거절했다. 몹시 실망한 시검교는 집에 돌아간후 장편편지를 써서 시중성과의 남매관계를 단절했다. 몇년후 시검교는 산서성 태원에 갔다가 산서군벌 염석산의 부대에서 첩보계장을 담임하고있는 시정공을 알게 되였다. 그때까지 시검교는 한시도 원쑤를 갚을 일을 잊은적이 없었다. 그녀는 아버지가 비참하게 살해된 사실을 시정공에게 털어놓으면서 복수를 도와달라고 했다. 시검교의 미모에 반한 시정공은 비분강개하는척 하면서 “만약 기회가 있다면 내 이 몸이 분신쇄골이 되더라도  검교를 대신하여 원쑤를 갚아주겠소”하고 호언장담했다. 그 말을 믿은 시검교는 시정공에게 몸까지 바쳤다. 하지만 결혼후 시정공은 안락한 생활에 빠져 결혼전에 맹세했던 말을 말끔히 잊어버렸다. 시검교가 기다리다못해 여러번이나 원쑤를 갚아달라고 말했지만 그때마다 그는 차일피일 미루기만 했다. 시검교는 더는 참을수 없어 1935년 6월에 아이를 데리고 태원을 떠나 천진의 친정으로 돌아왔다. 그후 그녀는 다른 사람이 나서서 자신을 대신해 아버지의 복수를 해줄 생각을 버리고 직접 손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시검교는 손전방과 관계되는 정보라면 모두 수집하면서 손전방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1935년 추석날에 시검교는 프랑스조계지의 대광명영화관문앞에 세워놓은 검은색승용차를 발견했다. 차번호가 1093호인 그 차는 틀림없는 손전방의 승용차였다. 영화가 끝난후 시검교는 처음 가까운 거리에서 검은색안경을 낀 기세등등한 손전방을 만났다. 그러나 떼를 지어나오는 관중들이 많아서 손을 쓸수 없었다. 그녀는 아버지를 살해한 원쑤가 승용차에 올라 사라지는것을 눈을 펀히 뜨고 보고있는수밖에 없었다. 그후 시검교는 여러번이나 영국조계지에 있는 손전방의 호화저택주위를 돌아보았으나 경계가 삼엄하여 손을 쓸수 없었다. 시검교는 손전방을 미행하여 그의 행동규률을 알아냈다. 그때 손전방은 갑자기 불교신도로 탈바꿈하여 천진거사림(居士林)의 부림장으로 되였다. 1935년 10월에 시검교는 “동혜”라는 이름으로 불교절당인 거사림에 들어가 거사(거사림의 불교신도)로 되였다. 그후 그녀는 손전방을 암살할 기회가 오기만 기다렸다. 1935년 11월 13일은 불경을 강의하는 날이였다. 시검교는 그날에 근운붕과 손전방이 모두 경문을 들으러 거사림에 온다는것을 알고있었다. 그날은 비가 내리고 찬바람이 불어서 거리에는 오가는 사람들이 매우 적었다. 근운붕은 비때문에 오지 않았지만 손전방은 비를 무릅쓰고 제 시간에 거사림에 도착했다. 거사림에서 부처에게 절하고 불교강의를 들을 때 남녀거사들은 두줄로 갈라서 앉았다. 마침 남거사들의 줄앞에는 근운붕이 앉고 녀거사들의 줄앞에는 손전방이 앉는것이 규칙으로 되였다. 그날도 손전방은 녀거사들의 줄앞에 앉았다. 그전에 시검교는 세번이나 불교강의를 들었지만 강의를 들어러 온 거사들이 많아서 손을 쓰지 못했다. 하지만 오늘은 비때문에 강의를 들으로 온 거사들이 적었다. 시검교는 손을 쓰기가 좋다고 여겼지만 맨 뒤에 앉아서 손전방과의 거리가 멀었다. 그녀는 뒤의 난로가 뜨겁다는 리유로 앞으로 옮겨 앉았다. 거사들이 부명법사를 따라 경문을 읽을 때 손전방도 거사들과 함께 눈을 감고 경문을 읽었다. 기회가 왔다고 생각한 시검교는 남몰래 가방에서 브라우닝권총(勃朗宁手枪)을 꺼내들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손전방의 머리를 겨낭한후 방아쇠를 당겼다. 불교절당에 울려퍼진 “땅!땅!땅!”하는 세방의 총소리와 함께 손전방은 당장에서 숨을 거두었다. 혼비백산한 거사들은 그 자리에 굳어져 한 사람도 일어나 도망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시검교는 사람들을 향해 큰소리로 말했다. “모두들 무서워하지 마십시오! 나는 아버지의 원쑤를 갚았을뿐 무고한 사람을 해칠 마음이 없습니다. 손전방은 내가 죽였으니 내가 책임지겠습니다. 절대 여러분들에게 련루되게 하지 않을것입니다.” 말을 마친 시검교는 가방에서 삐라와 《국민들에게 알리는 글》이란 책자를 꺼내 사방에 뿌렸다. 그리고 그녀는 집에 전화를 걸어 거사에 성공했다고 말한후 동해스님한테 가서 자신이 자수하겠으니 경찰국에 통지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때 손전방의 부하가 달려들어왔다. 그는 시검교가 총을 들고있는것을 보고 서뿔리 다가서지 못하고있다가 경찰이 온후 시검교를 붙잡아갔다. 그날 오후 6시에 《신천진보》는 호외를 발행하여 “시종빈의 딸이 쏜 복수의 총에 손전방이 비명에 쓰려지다”는 특대뉴스를 보도했다. 다음날에 천진, 북평, 상해 등지에서도 이 소식을 보도하여 전국이 들썽했다. 다음날에 사건은 천진지방법원검찰처에 이송되였다. 시검교는 자신이 손전방을 살인한 경과와 원인에 대해 숨김없이 진술했다. 시검교의 진술을 들은 사람들은 그녀의 용기에 감탄하면서 그녀를 “녀호걸”이라고 불렀다. 연약한 녀자가 혼자서 손전방같은 거물을 암살할수 없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처음에 그녀의 배후에 누가 있지 않을가고 의심했다. 이런 의문에 대해 시검교는 아래와 같이 진술했다.  “저는 아버지의 원쑤를 갚으려고 오래동안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배후는 없습니다. 저의 아버지가 만약 싸움터에서 돌아갔더라면 저는 손전방을 원쑤로 여기지 않았을것입니다. 하지만 손전방이 잔인하게 포로된 아버지를 살해하고 수급을 매달아 가족들이 일주일이나 아버지의 시신을 거두지 못하게 하였기에 저는 그를 불공대천의 원쑤로 여긴것입니다. 저의 시집형제들과 남편은 모두 총이 있고 세력이 있지만 은혜를 저버리고 우리 아버지의 원쑤를 갚아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가족도 믿을수 없는데 어찌 남을 믿을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다시는 다른 사람을 찾지 않고 어머니도 모르게 행동했습니다. 권총은 태원에 있는 저의 남편한테서 가져온것입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의 총을 가지고놀았기에 사격에 대해 잘 알고있었습니다.” 손전방의 가족대표와 시검교의 가족대표가 법정에서 수개월동안 변론했지만 결과를 보지 못했다. 얼마후 천진지방법원에서 시검교를 유기형 10년에 처한다고 1심판결을 내렸다. 그후 변호사의 신고로 천진고급법원에서 다시 심리하고 징역을 유기형 7년으로 정했다. 당시 사회각계에서는 시검교가 죄악이 하늘에 사무친 대군벌 손전방을 암살한것은 나라와 인민을 위해 유익한 일을 한것이라고 일치하게 평가했다. 당시의 《대중생활》잡지는 손전방이 이미 불문에 귀의했기에 그의 과거를 추궁하지 말아야 한다는 일부 사람들의 설법에 대해 “중국의 수많은 군벌과 관료들은 무고한 인명을 도살한후 늘 념불을 외우면서 불교에 몸을 담고있는데 이는 불교의 허울로 자신의 몸에 묻은 피흔적을 씻고 비렬하게 나라를 팔아서 긁어모은 돈을 세탁하려는 음모이다. 손전방이 바로 그런 사람이다”는 글을 실어 반박했다. 당시의 전국부녀회인 료녕, 양주, 강도부녀회와 려경안휘학회, 안휘성 립휘주사범 등 단체에서 시검교를 동정하여 나서서 최고법원에서 시검교를 석방해줄것을 요구했다. 또 이 사건은 풍옥상장군까지 놀라게 했다. 풍옥상은 시검교를 알지 못했지만 신해혁명시기에 시검교의 친아버지 시종운과 함께 용감히 적을 물리친적이 있었다. 풍옥상은 소식을 알게 된후 즉시 중화민국 개국공신 리렬균, 장계 등과 함께 련합으로 남경정부에 압력을 가해 아버지의 원쑤를 갚은 효녀이며 인민을 위해 해를 제거한 녀호걸인 시검교를 석방해줄것을 요구했다. 일부 신문에서는 풍옥상장군이 단독으로 장개석에게 전화를 걸어 시검교를 석방해줄것을 요구한 사실을 보도했다. 결과 시검교가 감옥에 들어간지 1년이 채 되지 않는 1936년 10월 14일에 중화민국 국민정부 주석 림삼은 전국에 공고를 발표하여 시검교를 사면한다고 선포했다. 그후 중화민국 최고법원에서 특사령을 내려 시검교를 석방했다. 시검교가 사면된지 얼마안되여 항일전쟁이 폭발하였다. 즉시 남방으로 달려간 시검교는 선후로 장사, 중경 등지를 돌아다니면서 항일전사들을 위해 위문품을 모으고 학교를 꾸리는 등 나라와 인민을 위해 유익한 사업을 했다. 새중국이 건립된후 시검교는 1952년에 북경으로 이사왔는데 줄곧 거사의 신분으로 벽운사에서 수행했다. 그녀는 1957년에 북경시의 정협특별초청위원으로 되였다. 시검교는 1973년에 병으로 사망되였는데 그때까지 줄곧 북경시의 정협특별초청위원으로 있었다.      
154    열명의 범죄자와 한명의 억울한 사람 댓글:  조회:6829  추천:11  2014-04-23
열명의 범죄자와 한명의 억울한 사람   김희수     우리는 홍콩 영화나 드라마에서 경찰이 범죄혐의자를 붙잡을 때 “당신은 묵비권을 행사할수 있고 변호사를 선임할수 있으며 지금부터 말하는 모든 발언은 법정에서 불리하게 적용될수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장면을 적지 않게 보게 된다. 이는 억울하게 범죄루명을 쓰는 일이 없도록 하려는 미란다원칙에서 출발한것이다.   내가 법을 어긴 일이 없는데 어느날 갑자기 경찰이 찾아와서 나를 끌고가고 내가 하지도 않을 일을 했다고 자백을 강용하고 감옥에 처넣는다면 얼마나 억울할가?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있을법한 이런 일이 사실 이 세상에는 적지 않게 존재하고있다.   1998년 8월 4일, 하남성 안양시 안양현 곡구진 진소둔촌에 사는 진염홍(秦艳红)의 앞에 갑자기 경찰들이 나타났다. 경찰들은 이웃촌에 사는 녀성 가해영(贾海荣)을 살해했다는 혐의로 그를 끌고갔다. 그해 30살이 되는 가해영은 전날 점심에 촌 서쪽의 자류지에서 목이 졸려서 죽었는데 3명의 소학생이 하교길에 진염홍이 그날 사건현장부근에 나타난것을 목격했다고 진술했던것이다.   증거가 있는것도 아니고 살해하는것을 직접 목격한것도 아니고 사건현장에 나타난 적이 있었다는것만으로 무고한 사람을 끌고간 경찰은 얼마나 한심한가! 일반적으로 이런 경우라면 끌고갔다고 해도 몇마디 물어보아서 살해하지 않았다고 하면 즉시 돌려보내는것이 원칙이며 또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고 본다. 그런데 그게 아니였다.   밤중에 안향현형사경찰대의 4명 경찰이 찾아와서 조살할 정황이 있다고 하자 진염홍은 놀라기는 했지만 자신이 죄를 지은 일이 없었기에 태연하게 경찰들을 따라갔다. 하지만 그가 억울하게 살인루명을 쓰게 될줄을 누가 알았으랴? 경찰들은 진염홍에게 육체적, 정신적인 고통을 주며 자백을 강요했다. 경찰들은 3명의 소학생들이 진염홍이 사건현장부근에 나타난것을 보았다고 한것을 과장하고 보태서 “네가 가해영을 죽이는것을 본 사람이 있다. 바른대로 말해라”고 윽박질렀다. 진염홍이 “살인하지 않았다”, “억울하다”고 했으나 경찰들은 그의 말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원래 이쯤 되면 “정말 억울한것이 아닐가?”하는 의문을 가지고 조사에 나서야 할것이다. 범죄자를 놓쳐서도 안되지만 한명의 억울한 사람을 만들어서도 안되는것이 법제원칙이다. 또 그렇게 하는것이 집법일군의 의무이고 책임이다. 하지만 하루빨리 범죄자를 붙잡아 공을 세우겠다는 욕심에 눈이 뒤집힌 경찰들은 서민이야 억울함을 당하든 말든 관심이 없었다. 아니, 그들은 자신의 리익만 꾀하고 서민의 억울함 같은건 념두에 두지 않았다.   중국의 경찰은 경찰앞에 “인민”이란 두글자를 붙혀 “인민경찰”이라고 부른다. 인민경찰은 인민을 위한 경찰이란 뜻이다. 인민경찰은 인민의 생명안전을 지키고 범죄자를 붙잡아 치안을 유지해야 하는것도 중요하지만 무고한 인민을 범죄자로 몰지 말아야 한다. 아무리 범죄자를 붙잡는것이 중요하다고 해도 의심스러운 사람을 다 범죄자로 여겨서는 안된다. 더구나 조사가 없고 증거가 없이 무고한 사람을 마구 핍박하고 구타해서는 안된다.   그런데 안향현형사경찰들은 억울하다고 호소하는 진염홍을 범죄자취급을 하면서 사정을 두지 않고 주먹으로 치고 발로 걷어찼다. “솔직하게 털어놓으면 관대하게 처리하고 항거하면 엄하게 처리한다(坦白从宽抗拒从严)”는 정책이 아편처럼 머리에 박혀버린 경찰들은 저들의 요구하는대로 자백하도록 강요했다. 결국 진염홍은 그해 9월 8일에 검찰기관에 의해 비준체포되였고 살인혐의로 기소되였다.   한 무고한 사람을 살인자로 모른 일은 이처럼 간단했다. 안양시중급인민법원에서 법정을 열었을 때 검찰관(公诉人)은 “3명의 소학생들이 사건이 발생된 날에 진염홍이 사건현장부근에 나타난것을 목격했고 진염홍자신도 가해영을 강간하려다가 성사하지 못하자 손으로 목을 졸라죽였다고 자백했다”고 기소했다.   진염홍은 법정에서 그것은 고문에 의한 강제자백이였다면서 자신의 진술을 뒤집어엎었다. 진염홍의 변호사도 진염홍이 사건현장에 나타났다는것을 보았다는 3명 소학생의 증언과 고문에 의한 강제자백으로만 죄를 판정할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안양시중급인민법원은 진염홍의 자백이 수사경찰들이 현장에서 조사한 정황과 일치하다는 리유로 1999년 10월 8일에 진염홍을 사형에 처하고 정치권리를 종신박탈하며 피해자가족에 경제손실 1만원을 배상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충분한 증거도 없이 한 사람에게 사형판결을 내렸던것이다. 인민법원에서 인민의 목숨을 이렇게 가볍게 여겨도 되는것인가? 조그만한 의심이라도 있다면 재조사를 할것을 요구해야 하고 증거가 불충분하다면 서뿔리 판결을 내리지 말아야 하는것이 법원에서 해야 할 일이 아닌가?   하늘이여, 천리는 어디에 있고 포청천(包青天)은 어디에 있는가?! 억울하게 강간죄명에 살인죄명까지 쓴 진염홍은 간수소에서 대성통곡하다가도 넋을 잃고 멍하니 벽만 쳐다보고있었다고 한다. 가족들이 믿지 않고 사처로 상소하러 다녔지만 법원에서는 판결을 번복하지 않았다. 그의 처와 딸도 절망하면서 남편, 아빠가 사형장으로 나갈 시간만 계산하고있었다.   그러다가 2001년 2월에 원추복(元秋伏)이란 진범이 붙잡히면서 이 억울한 사건은 180도로 뒤집어졌다. 원추복은 3개성의 11개 도시를 돌아다니며 강탈강간사건 40건을 저지르고 18명을 살해한 살인악마였다.   한달후 하남성고급인민법원은 원 판결을 취소하고 안양중급인민법원이 다시 심사하도록 결정을 내렸다. 이렇게 되여 4년동안의 억울한 감옥살이를 하고 하마트면 사형장으로 끌려나갈번 했던 진염홍은 2002년 5월 28일에 간수소의 대문을 열고 나와 다시 해볕을 보게 되였다.   진염홍이 억울한 살인루명을 쓰고 4년동안 감옥살이를 한 동안 집안이 풍비박산이 났다. 진염홍과 그의 가족은 이 정황을 상소하러 다니면서 북경까지 찾아가겠다고 했다. 그렇게 되자 급해난 공안부문은 진염홍에게 단번에 29만원을 배상해주는것으로 입막음을 했다. 그후에 발생된 뒤얘기도 많지만 여기서는 더 언급하지 않겠다.   최근에도 이와 비슷한 사건이 밝혀졌다. 지난 2014년 4월 17일의 사천뉴스넷의 보도에 의하면 사천성 수녕시 선산구 신교진 백가촌에 사는 왕본여가 1996년 11월에 강간살인죄란 루명을 쓰고 사형집행유예판결을 받고 18년동안 억울한 감옥살이를 하다가 2012년에 진범 리언명이 붙잡히자 풀려나오게 되였다. 2013년 7월에 내몽골자치구고급인민법원에서 원 판결을 번복하고 왕본여에게 내려졌던 강간살인죄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판결했다. 그리하여 왕본여는 그해 7월에 석방되였고 150만원의 배상금을 받게 되였다.   이 사건도 역시 고문에 의한 강제자백이였다. 만약 진범이 붙잡히지 않았더라면 왕본여가 얼마나 더 감옥살이를 해야 할지 알수 없었다. 본분을 지켜며 살아온 그는 장장 18년동안 억울한 감옥살이를 하는 동안 부모를 잃었고 무죄석방되여 나와서도 텔레비죤을 켤줄조차 몰랐다. 그는 자신을 사정없이 때린 경찰을 용서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무고한 사람을 핍박하고 때려서 범인으로 조작해낸 경찰을 어찌 용서할수 있으랴.   중국에는 이와같은 억울한 사건, 허위로 조작한 사건, 오심사건이 많이 존재하고있는 실정이다. 이미 알려진 이런 억울한 사건과 잘못된 사건은 하북성과 하남성에 각각 20건, 운남성에 9건, 호북성에 8건, 광서와 흑룡강성에 각각 7건, 섬서성과 강서성에 각각 6건, 호남성, 료녕성, 광동성, 안휘성, 감숙성에 각각 5건, 길림성, 사천성, 복건성, 절강성, 산서성에 각각 4건, 귀주성과 해남성에 각각 3건, 중경과 내몽골에 각각 2건, 산동성, 북경, 신강에 각각 1건이다. 이는 부분적인 통계이다.   범죄혐의자를 붙잡아서 판결하고 처형하는 과정에 억울한 사건, 오심사건이 한건도 생기지 않는다는것은 있을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경찰이 충분한 증거가 없이 고문으로 강제자백을 요구하거나 허위로 사건을 조작해서는 안된다. 선진국에서는 “열명의 범죄자를 놓치더라도 한명의 억울한 사람을 만들어서는 안된다”는 원칙을 내놓고있지만 중국에서는 이와 반대로 “열명의 억울한 사람을 만들더라도 한명의 범죄자를 놓쳐서는 안된다(과장된 표현이기는 하지만 억울한 사건의 배후에는 꼭 이런 경우가 적용된다)”는 식으로 사건수사를 하고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1960년대, 미국에 여러가지 범죄를 저질렀던 미란다라는 사람이 어린 녀자아이를 랍치했다가 경찰에 붙잡힌 사건이 있었다. 미란다는 자신의 범행을 모두 자백하였는데 그것이 결정적 증거로 작용되여 유죄로 판결되여야 했다. 하지만 그는 결국 무죄로 풀려났다. 우에서 언급한 “진염홍사건”과 상반되는 결과였다. 경찰이 피의자의 권리에 대해 말해주지 않았기때문이다. 미국에는 법이 정한 이 절차를 어긴 수사로 얻은 증거는 무효가 된다는 규정이 있었다.   이 판결이 있은 이후 “열명의 범죄자를 놓치더라도 한명의 억울한 사람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지키기 위해 미국경찰은 범죄용의자를 체포할 때 “당신은 묵비권을 행사할수 있고 변호사를 선임할수 있으며 지금부터 말하는 모든 발언은 법정에서 불리하게 적용될수 있습니다.(你有权保持沉默, 如果你不保持沉默, 那么你所说的一切都能够用来在法庭作为控告你的证据, 你有权请律师在讯问时到场)라고 말하는데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미란다경고(米兰达警告)이다. 이를 알려주지 않고 받아낸 진술은 법정에서 증거로 사용할수 없다고 한다.   범죄혐의자, 피고인은 묵비권을 행사하거나 대답을 거절할 권리가 있다. 미란다권리가 확립되기전에 경찰은 범죄혐의자가 문초에 대답하는것을 당연한 일로 여겼기때문에  범죄혐의자에게 변호사를 선임할수 있고 묵비권을 행사할 권리가 있다는것을 알려주지 않았다. 범죄혐의자가 모른다고 말하면 경찰은 “우린 이미 증거를 장악했어. 죄를 승인하면 관대하게 처리받을수 있어”라고 말한다. 범죄혐의자는 일반적으로 긴장하고 초조하기에 경찰의 오도로 경찰의 말에 따르면 자신에게 유리하다고 여기게 된다. 미란다권리가 있게 된후 범죄혐의자들은 심리압력을 해제하게 되였다.   미란다원칙은 중국에 적용되지 않는다. 미란다원칙의 핵심은 침묵권 즉 피고인이 묵비권을 행사할수 있다는것이다. 그러나 중국형법은 “피고인은 주동적으로 범죄사실을 자백하고 사법기관의 조사에 협조할 의무가 있다”고 명확하게 규정했다. 때문에 중국은 미란다원칙을 적용할수 없다.   중국형법에도 위법증거배제원칙이 있다. 그러나 실천중 범죄혐의자권리에 대한 보호가 부족한 원인으로 왕왕 유명무실한 규칙으로 되고있다. 중국의 절차위법은 범죄혐의인이 자기절로 증거를 제공하는것이 수요하는데 이 점이 몹시 어렵다. 국외에서는 사법기관이 자기절로 자신이 법을 어기지 않았다는것을 증명할것을 요구하기때문에 24시간동안 감시카메라로 범죄혐의인이 심사를 받는 정황을 기록하는데 록화영상이 몇분 중단되여도 정확하게 설명할수 없다.   어느 나라나 모두 당사인이 죄를 “자백”하는것을 허용한다. 이는 당사인이 자기의 권리를 포기하는것으로 사법원가도 절약할수 있다. 형법에서 반대하는것은 “핍박에 못이겨 자기절로 죄를 승인”하는것이다. 바로 “진염홍사건”처럼 고문에 의해 강제자백하게 하는 등 방식으로 범죄혐의인이 죄를 승인하게 핍박하는것이다. 이때문에 억울한 사건이 발생될 위험이 있게 된다. 설령 자백하고 죄를 승인했다고 하더라도 사법기관에서는 철저한 조사를 진행해야 하며 반드시 범죄혐의인이 자백한 내용과 사법기관에서 조사한 내용이 일치한것이 확정되여야 사건에 대해 최종적으로 결론을 내릴수 있다.   범죄혐의자는 법원에서 최종판결을 내리기전까지 혐의자일뿐 범죄자가 아니다. 그런데도 일부 공안일군들은 충분한 증거도 없는 정황에서 범죄혐의자를 범죄자라고 락인부터 찍어놓고 심문한다. 이렇게 선입견과 편견을 가지고 수사하면 억울한 사건이 만들어지기 마련이다. 용의자가 묵비권을 지키면 고문으로 자백을 강요해서라도 사건을 마무리 지으려고 한다. 이런 경찰은 경찰앞에 “인민”이란 두글자를 달 자격이 없다.   이런 자격없는 경찰들이 적으면 적을수록 진염홍이나 왕본여처럼 억울함을 당하는 사람도 적이질것이다. “하늘이여, 천리는 어디에 있고 포청천은 어디에 있는가?!”고 비분강개를 터뜨리는 사람도 적어질것이다.    이쯤에서 경찰대오를 순결화할 필요성과 중요성이 제기된다. 비리경찰, 깡패경찰은 쫓아내고 경찰다운 경찰, 경찰앞에 인민이란 두 글자를 달고 다니기에 부끄럽지 않은 그런 경찰만이 경찰대오에 남아있기를 기대한다면 헛된 망상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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