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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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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3    누가 장개석을 최고권좌에 올려놓았는가 (1) 댓글:  조회:5851  추천:0  2014-11-22
누가 장개석을 최고권좌에 올려놓았는가    (번역)     많은 사람들은 장개석을 손중산이 선정한 후계자인줄로 오해하고있다. 손중산은 림종시에 송경령과 왕정위의 이름을 부른적이 있지만 장개석의 이름을 부른적은 없었다. 그리고 림종시에 후계자를 지정하지 않았다. 1911년 10월 10일에  무창봉기가 일어났다. 손중산은 미국에서 그 소식을 듣고 12월에 귀국했다. 17개성의 대표들은 손중산을 중화민국 림시대통령으로 천거했다. 손중산은 1912년 1월 1일에 남경에서 정식으로 취임하고 중화민국림시정부를 세웠다. 1912년 2월 12일에 청나라의 선통황제(부의)가 핍박에 의해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렇게 되여 2000여년의 군주전제제도가 결속되고 공화국이 건립되였다. 1925년 3월에 손중산이 사망되고 그해 7월 1일에 중화민국국민정부가 광주에서 성립되였다. 소위 “총리의 유일한 후계자”인 장개석은 국민정부의 상무위원회 위원도 아니였고 위원도 아니였으며 국민당중당집행위원회 위원도 아니였다. 심지어 후보위원도 아니여서 큰 영향력이 없는 인물이였다. 장개석은 1905년에 일본 도꾜에서 진기미(陈其美)의 소개로 손중산을 알게 되였다. 그러나 손중산이 의지할만한 군사인재로 본 인물은 처음에는 황흥(黄兴)과 진기미였고 후에는 주집신(朱执信), 등갱(邓铿), 거정(居正), 허숭지(许崇智), 진형명(陈炯明)이였다. 장개석이 유럽전쟁형세와 원세개를 반대하는 투쟁방책을 내놓아서야 손중산은 그에게 주의를 돌리게 되였다. 그후 장개석은 련속 손중산에게 “장래의 남북량군행동에 대한 판단”과 “월계군(粤系军)제2기작전계획” 등 견해를 써서 바쳤다. 하지만 손중산은 장개석을 괜찮은 참모인재쯤으로만 보았을뿐이다. 때문에 손중산은 장개석에게 참모장, 참군(参军)류의 실권이 없는 직무만 맡겼다. 장개석은 선후로 거정수하의 참모장, 손중산대통령부의 참군, 진형명수하의 작전과 주임, 허숭지수하의 참모장, 손중산대원수행영 참모장 등 직을 맡았다. 가장 먼저 장개석의 재능을 알아본것은 진형명이였다. 그는 장개석이 참모직에만 국한될 인물이 아니라는것을 발견했다. 진형명은 자신의 수하에서 작전과주임으로 있던 장개석이 사직을 하려고 하자 극구 만류하면서 “월군(粤军)이 백번 이겼다고 해도 자네 한 사람이 없어서는 안되네”라고 말했다. 진형명의 말은 옳았다. 나중에 진형명은 장개석의 손에 패했다. 1922년 4월에 손중산을 배반할 준비를 하고있던 진형명은 손중산에게 월군총사령직과 광동성 성장직에서 사직하겠다고 말했다. 손중산은 진형명의 사직을 비준했다. 진형명의 뜻을 모르는 장개석은 손중산을 찾아가서 진형명을 대신하여 통사정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통하지 않자 자신도 사직하고 진형명에게 환난을 같이하겠다는 편지를 써보냈다. 그러나 진형명이 손중산을 배반하자 장개석은 진형명과의 우의를 포기하고 자신에게 리익이 더 많을 손중산의 편에 섰다. 그 일로 손중산은 처음으로 장개석을 주의하기 시작했다. 손중산은 장개석의 성격을 좋아하지 않았다. 장개석은 화를 잘 내서 주위사람들과의 사이가 늘 긴장했다. 걸핏하면 사직하겠다고 나섰고 비준도 받지 않고 옷소매를 뿌리치고 간후 전보를 쳐도 회답하지 않았다. 1922년 10월에 손중산은 장개석을 허숭지의 참모장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몇개월후 장개석은 군부의 일에 진전이 없다는 리유로 사직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손중산이 료중개(廖仲恺)를 파견하여 군부로 돌아오라고 하였으나 장개석은 외고집을 부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1923년 6월에 손중산은 장개석을 대원수행영 참모장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장개석은 한달도 못되여 배척되는 화를 당하지 않겠다는 리유로 사직하고 계구(溪口)로 되돌아갔다. 1924년초에 손중산은 장개석을 황포군관학교준비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한달만에 장개석은 경비가 락착되지 않았다는 리유로 준비위원장직을 사직했고 그해 9월에 군관학교 교장직에서 물러나겠다고 사직서를 바쳤다. 1918년 7월에 진형명의 작전과 주임직을 사직해서부터 1924년 9월에 황포군관학교 교장직을 사직하기까지 6년사이에 장개석이 사직했다가 복직한 차수가 14번이나 된다. 손중산은 장개석이 다른 직무에서 사직한것은 참을수 있었지만 황포군관학교의 직을 사직한 일만은 용인할수 없었다. 1923년에 구쏘련전권대표 요페(越飞)는 손중산을 만나 《손문요페선언》을 체결한후 쏘련에서 경비와 무기, 군사교관을 보내주고 군관학교건립을 도와주겠다고 표시했다. 손중산은 몇십년동안 혁명을 하면서 자신의 군사가 없는 설음을 많이 맛보았고 손해도 많이 보았다. 이제 꿈에도 가지고싶었던 자신의 군대를 가질수 있게 되였는데 장개석이 또 사직하려고 하자 손중산은 장개석에 대해 몹시 실망했다. 병권을 매우 중하게 여겨온 장개석이 황포군관학교의 중요성을 모를리 없었다. 그가 불만을 느낀것은 “경비가 락착되지 않아서”가 아니였다. 1924년 1월에 국민당제1차대표대회를 열었는데 손중산이 장개석을 대표로 선정하지 않았고 각 성의 당부에서도 장개석을 추천하지 않았다. 국민당당사에서 매우 중요한 그번 대회에서 장개석은 한장의 입장권도 얻지 못했다. 이때문에 장개석은 불만을 터뜨렸던것이다. 1924년 11월 13일에 손중산은 북상을 시작했는데 이틀전에 황포의 새 군대를 당군(党军)이라고 개칭하기로 하고 장개석을 군사비서로 임명했다. 이는 손중산이 마지막으로 장개석에게 임명한 직무였다. 손중산은 북상하여 사망되기까지 4개월사이에 장개석에게 그 어떤 편지거나 지시를 전한적이 없었다. 손중산은 장개석에게 높은 직위를 내려준적이 없었다. 그럼 누가 장개석을 높은 직위에 올려놓았을가? 그 공로는 구쏘련의 로씨야에서 온 미하일 보로딘(米哈依尔鲍罗庭)에게 속한다. 보로딘은 손중산의 수석고문 겸 중국주재 공산국제대표였다. 보로딘은 첫사람으로 장개석을 권력의 최고봉에 오르도록 해준 사람이다. 공산국제의 파견을 받고 중국에 온 보로딘은 중국혁명의 발전에 거대한 영향을 끼쳤다. 손중산은 “보로딘은 내가 만나본 공산국제인원중에서 가장 탄복하는 사람이다”고 말했다. 보로딘과 손중산을 만나게 해준 사람은 구쏘련 외교관 가리한(加拉罕)이였다. 하지만 가리한은 보로딘에게 국민당을 개조하라고 한적이 없었다. 보로딘자신도 중국에 와서 처음 한 일이 나중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될 국민당의 개조를 실시한 일이 될줄을 몰랐다. 보로딘전에 국민당은 정치상, 조직상, 리론상에서 한개의 정당이라고 할수 없었다. 강령이 없었고 조직이 없었고 장정이 없었고 선거가 없었고 정기적인 회의도 없었고 당원의 수자도 똑똑히 알지 못했다. 말로는 3만명이라고 했지만 등기된것은 3000명밖에 안되였다. 또 당비를 바친 사람은 6000명이였다. 입당도 손을 들고 손중산에게 충성한다면 가입될수 있었다. 손중산자신도 “당원”이 얼마나 되며 누구누구가 당원인지 알지 못했다. 보로딘은 손중산에게 “당을 개조하지 않으면 국민당은 존재할수 없다”고 알려주었다. 그 말에 손중산은 큰 촉동을 받았다. 그전에 누구도 그에게 이런 말을 해주지 않았던것이다. 손중산은 이미 국민당에 대해 개조를 실행할 준비를 하고있었다. “중국국민당당강(中国国民党党纲)” 등 일련의 문서도 초안을 끝내놓고있었다. 이전에 손중산은 여러번이나 본당의 력량에 의해 당을 개조하려고 했지만 효과가 별로 없었다. 이번에 손중산은 보로딘에게 의거하고 구쏘련 무산계급정당의 건당경험을 운용하여 국민당을 개조하려고 결심했다. 보로딘은 구쏘련공산당의 조직방법에 따라 중국공산당원과 국민당좌파에 의거하여 국민당에 대해 철저한 개조를 하기 시작했다. 국민당제1차전국대표대회에서 통과된 그 중요한 “선언”은 바로 볼세비크당원인 보로딘이 직접 초안하고 중국공산당원 구추백이 번역하고 국민당원 왕정위가 윤색한것이다. 보로딘이 사망된후 근 40년이 지나서 대만의 리등휘가 국민당주석으로 되였다. 서방의 저명한 평론가는 리등휘가 국민당으로 하여금 레닌의 건당모식을 철저히 버리게 했다고 지적했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놀라움을 금할수 없었다. 그들은 몇십년동안 날마다 “공산당을 타도하자”고 웨치던 국민당이 레닌의 건당모식을 사용했을 줄은 모르고있었다. 보로딘을 만나본 사람은 모두 그의 인격적 매력에 끌려들었다. 그는 어떠한 기자를 만나든지 모두 자신의 탁월한 원견과 지식으로 그들을 정복했다. 그는 나타나기만 하면 현장에 있는 사람들을 통제했다. 그리고 그는 곧 그들의 중심이 되군 했다. 그는 중국의 전통, 습관, 례절을 매우 중시했다. 그는 방에 레닌의 초상을 걸지 않고 손중산의 초상만 걸어두었다. 무릇 보로딘을 접촉한 사람은 모두 그의 비범한 기질과 청중을 정복하는 능력에 탄복하군 했다. 그는 부동한 파들을 화해시키는 능력이 매우 강했다. 그가 있기만 하면 광주의 여러 세력들은 아무 탈없이 화목하게 지냈다. 각 파의 사람들은 일이 있으면 모두 그를 찾아와 상의하려고 했다. 그때마다 그는 언제나 합당한 방법을 내놓아 찾아온 사람들이 흡족한 마음으로 돌아가게 했다. 시간이 오래 지나면서 그의 거처는 자연스럽게 수많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중심으로 되였다.    
232    속유장군은 왜서 원수계급을 수여받지 못했는가? 댓글:  조회:8354  추천:6  2014-11-16
속유장군은 왜서 원수계급을 수여받지 못했는가?   (번역)     저명한 군사가이며 전략가인 속유(1907년 8월 10일~1984년 2월 5일)는 중국인민해방군 10대 대장 순위에서 서렬이 1위이다. 1955년 9월 중순에 한단을 시찰하고 돌아온 모택동은 중남해 이년당에서 주은래, 주덕, 류소기와 함께 해방군고급장교들에게 군사계급을 수여할데 관한 문제를 토론할 때 “전공, 경력, 재능, 품덕을 놓고 볼 때 속유는 모든 방면에서 능히 원수계급을 받을수 있습니다. 해방전쟁에서 화동야전군의 통수 속유를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었습니까?”하고 말했다. 하지만 속유는 원수계급을 사양했다. 그후 새로운 원수명단이 확정되여 정식으로 발표할 준비를 하고있을 때 당내의 몇몇 고위급간부들은 주은래, 류소기, 등소평이 군을 떠나 지방에서 사업했다는 리유로 원수계급수여명단에서 제외된 정황을 언급하면서 똑같이 지방에서 사업한 진의에게 원수계급을 수여하게 된데 대해 반대의견을 제기했다. 진의는 1954년 9월에 국무원 부총리 겸 과학원, 정법, 문화를 관할하는 책임자로 임명되였고 1955년 5월에 국무원에서는 진의에게 제1판공실, 제2판공실, 민족사무와 과학, 위생사업을 관할하게 했다. 만약 이런 문제로 진의가 원수계급을 받지 못하게 된다면 장기간 실제적으로 화동야전군을 지도하고 지휘하는 중임을 맡았던 속유를 다시 원수명단에 넣는것을 고려하지 않을수 없었다. 물론 속유자신이 다시 사양한것도 예상하던 일이였다. 1955년 9월 27일 오후 2시 30분에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에서는 인민해방군장군계급수여의식을 성대하게 거행했다. 국무원비서장 습중훈이 인민해방군군관계급을 수여할데 관한 주은래총리의 명령을 선독하고 국무원총리 주은래가 속유(粟裕), 서해동(徐海东), 황극성(黄克诚), 진갱(陈赓), 담정(谭政), 소경광(萧劲光), 장운일(张云逸), 라서경(罗瑞卿), 왕수성(王树声), 허광달(许光达) 10명에게 대장계급을 수여했다. 그날 오후 5시에 중남해회인당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원수계급수여의식이 성대하게 거행되였다. 원수는 한어사전에서 두가지의 뜻을 가지고있다. 하나는 군대중의 통수를 뜻하고 다른 하나는 장군보다 높은 계급을 뜻한다. 속유는 한개의 방면군인 화동야전군(제3야전군)을 거느린 통수로서 가장 많을 때에는 82만 5000여명의 군사를 거느렸다. 속유는 제4야전군 총사령이였던 림표를 제외하고 직접 제일 많은 군사를 지휘하여 작전한 고급장군이였다. 때문에 전자의 뜻을 놓고볼 때 속유는 원수라고 할수 있다. 하지만 후자의 뜻을 놓고 볼 때 속유의 계급은 대장이였기에 원수라고 할수 없다. 비록 10대 대장의 서렬에서 첫순위라고 하더라도 속유는 필경 원수가 아닌것이다. 력사적으로나 현실적으로 놓고 볼 때 대장은 원수가 향수하는 대우보다 차하였고 지명도도 일정한 거리가 있었다. 하지만 겸손했던 속유는 “내가 대장계급을 수여받은것도 높다고 생각하는데 원수라니요? 나는 나의 지위가 높다고 생각하지 낮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지략이 출중하고 혁혁한 전공을 세운 화동야전군 통수였던 속유가 원수계급을 수여받지 못한 일은 당시에는 물론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아쉬움을 자아내고있으며 군사애호가들이 관심하는 초첨으로 되고있다. 인민일보사 기자 김봉은 1950년말에 류백승과 속유를 취재한후 “년령, 자격과 경력을 놓고 볼 때 팽덕회는 자연히 속유보다 앞서지만 전공과 군사재능을 놓고 볼 때 전군은 속유가 약간 낫다고 공인하고있다. 그러나 속유는 대장계급을 수여받았고 팽덕회는 원수계급을 수여받았다”고 서술하여 속유가 원수계급을 수여받지 못한 유감을 표달했다. 《개국장군일화》라는 책에는 “속유장군은 ‘7전7첩’, 로남, 맹량고, 사토집, 예동, 제남, 회해, 도강, 상해 등 중대한 전역을 지휘하여 혁혁한 공훈을 세웠지만 1955년의 계급평의에서 원수계급에 오르지 못한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또 《속유대장》이란 책에는 속유가 1948년 5월에 진의에게 화동야전군 사령원직을 양보하고 자신이 화동야전군 사령원대리직과 정위대리직밖에 맡지 않은 력사에 대해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속유를 인격이 높고 절개가 곧다고 칭찬한 동시에 탁월한 군사가이며 전략가인 속유에 대해 아쉬움을 표시했다. 속유가 양보한것은 당시의 화동야전군 사령원 겸 정위직뿐만아니라 중화인민공화국의 원수계급이기도 했다”라는 구절이 있다. 1948년에 모택동은 중원야전군과 협동작전을 하기 위해 화동야전군 사령원이였던 진의를 중원야전군 부사령원으로 파견하고 속유에게 3개 종대를 거느리게 하여 도강작전을 지휘하도록 결정했다. 그리하여 속유를 화동야전군 사령 겸 정위로 임명했다. 하지만 속유가 진의에게 속했던 그 직위를 사양하자 중공중앙에서는 진의의 화동야전군 사령원 겸 정위직을 보류하고 속유에게 화동야전군 사령원대리 겸 정위대리직을 맡겼다. 속유는 소수민족인 동족(侗族)이였지만 자신이 동족인것을 모르고있었다. 《속유대장》이란 책에는 이렇게 서술했다. “사학가와 민족학가들은 ‘만약 속유가 자신이 동족인것을 일찌기 알고있었더라면 1955년에 계급제를 실시할 때 당과 국가의 민족정책에 따라 중화인민공화국에는 한분의 동족원수가 나타났을것이다’고 탄식하여 말했다.” 당시 28명의 군사위원회 위원중에서 속유는 서렬 15위였다. 나중에 원수계급을 받은 라영환은 이 명단에 들지 못했다. 서렬이 속유보다 앞섰던 군사위원회 위원은 모택동, 주덕, 류소기, 주은래, 팽덕회, 정잠(程潜), 하룡, 류백승, 진의, 림표, 서향전, 엽검영, 섭영진, 고강(高岗)이였다. 대원수립후보자(候选人)였던 모택동, 국민당군의 1급상장이였던 봉기장군 정잠 및 주요하게 지방사업을 책임졌던 류소기, 주은래, 고강을 제외하면 속유는 서렬 10위였다. 또 모택동은 속유를 10명의 원수명단중 제7위에 넣었다. 하지만 속유는 여러가지 원인을 고려하여 원수계급을 사양했다. 1948년에 모택동이 “속유에게 전역지휘를 책임지게 한다”고 지시했을 때 화동야전군 사령원 진의는 도량이 넓게 속유의 전역결책과 전역지휘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전역이 시작되였을 때 진의는 늘 지휘실을 떠나면서 “내가 여기를 떠나는것은 매우 필요하오. 속유사령이 번마다 나에게 보고하여 시간을 지체하는것을 피면할수 있기때문이요”하고 말했다. 그번에 모택동이 속유를 화동야전군 사령원 겸 정위로 임명하고 진의를 중원으로 보내 후근을 관할하게 했는데 속유는 후근사업이 진의의 특장이 아니라고 여겼다. 때문에 속유는 사양하면서 모택동에게 “진의동지는 화동야전군을 떠날수 없습니다. 그를 보내지 말아주십시오”라고 요구했다. 모택동은 “중앙에서 이미 결정한 일이요. 진의동지와 등자회동지는 중원국, 중원군구에 가서 사업하게 되니 동무가 화동야전군을 책임지오”라고 말했다. 속유는 하는수없이 마지막으로 “진의동지의 화동야전군 사령원 겸 정위직무를 계속 보류해주십시오”라고 요구했다. 모택동은 한참 생각해본후 속유의 요구를 동의했다. 그리하여 속유는 진의가 중원군구로 떠나간후 화동야전군 사령원대리 겸 정위대리직을 맡았다. 이는 속유가 후에 원수계급을 수여받는데 영향을 주었다. 여기서 지적해야할것은 그번의 사양으로 정식사령원이란 명의가 없었기때문에 객관상에서 속유의 지명도가 떨어졌고 그가 세운 전공이 약화되고 전이되고 마멸된것이다. 이 사실은 명예를 탐내지 않는 속유의 고상한 정신을 말해준다. 계급을 수여할 때의 현임직무로 보아도 속유는 원수계급에 합당한 립후보자였다. 1954년 10월 31일에 중앙인민정부 인민혁명군사위원회 총참모장을 중국인민해방군 총참모장으로 개칭했고 종속인민혁명군사위원회를 종속중공중앙군사위원회로 개칭했다. 총참부는 아래에 작전부, 정보부, 기술부, 통신부, 군무부, 장비계획부, 인민무장부, 군사운수사령부, 정치부, 간부처, 측량국, 행정경제관리부 등을 관할하는데 속유가 중국인민해방군 총참모장으로 임명되였다. 계급이 정식으로 선포되기전에 성격이 직방배기인 허세우는 자신의 계급이 상장밖에 안된것을 알고 주은래를 찾아가서 대장계급을 달라고 요구했다. 주은래는 “속유도 대장계급밖에 받지 못했소”라는 한마디말밖에 하지 않았지만 허세우는 더는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속유가 화동야전군을 실제로 지휘하던 부사령직을 맡아서 맹량고전역의 기적을 창조했을 때 허세우는 그 휘하 9종대의 사령원이였다. 그리고 속유가 화동야전군 사령원대리 겸 정위대리직을 맡았을 때 허세우는 그 휘하에서 한개 성을 공격하는 총지휘를 맡았다. 허세우는 속유가 대장계급을 받게 되였다면 자신은 상장계급밖에 받을수 없다는것을 알고있었던것이다. 중국인민해방군의 첫 원수계급수여의식은 이미 지나간 력사로 되였다. 하지만 후세사람들에게 약간의 유감도 남겨놓았다. 모택동은 속유를 보고 “당신은 대장계급을 수여받았지만 원수가 하는 일을 하고있소”라고 말한적이 있다. 중국인민해방군의 가장 우수한 장군의 한분인 속유는 비록 원수계급을 수여받지 못했지만 중국인민해방군의 높고도 영원한 기념비를 세워놓았다.  
231    배부른 사람들이 배고픈 사람들을 돕자 댓글:  조회:5901  추천:9  2014-11-10
배부른 사람들이 배고픈 사람들을 돕자   김희수     오래간만에 서랍을 뒤져 량표를 찾아보게 된것은 1955년도에 발행한 전국통용량표가 값이 간다는 소식을 듣고 혹시 나에게도 해당량표가 있나 하는 요행을 바라는 마음때무이였다. 예전에는 서랍안에 꽤 두툼하게 쌓여있었는데 몇번 이사를 하면서 어디에 흘렸는지 남아있는 량표는 몇장밖에 되지 않았다. 이리 보고 저리 보고 아무리 눈을 크게 뜨고 살펴봐도 나에게 그런 행운은 차려지지 않았다.   비록 졸부가 될 행운은 따르지 않았지만 량표를 펼쳐놓고 보노라니 못살고 배고프던 시절의 추억이 떠오르면서 마음이 착잡했다. 흔한것이 쌀이여서 배고픈 걱정을 모르다보니 량표가 생명처럼 귀중하던 그 세월을 까망게 잊고 산것이다.   지금은 어쩌다가 옥수수떡을 먹어본 이들은 맛있다고들 하겠지만 날마다 먹으면 질린다는 사실을 배고프던 시절을 거치지 않았던 지금의 신세대들은 알지 못할것이다. 궈테(锅贴)가 무엇인지, 옥수수밥이 어떤것인지, 옥수수가 좀 덜 섞인 이밥이 어떤것인지 알지 못할것이다. 매일 먹다 남은 밥상의 음식이 쓰레기통에 들어가고 식당에서 푸짐하게 차린 진수성찬이 거의 그대로 구정물에 들어가는 지금에 살고있는 신세대들은 배고프던 그 시절의 고충을 알지 못할것이다.   우리가 소학교에 다닐 때 도시락을 싸들고 가는 일이 많았다. 산놀이를 갈 때나 학교밭으로 일하러 갈 때 그리고 싸리나무하러 갈 때에는 꼭꼭 도시락을 싸들고 가야 했다. 또 학교가 먼 애들은 날마다 점심도시락을 싸들고 왔다. 이때면 부모들은 될수록 옥수수쌀이 덜 섞인 이밥에다 맛있는 반찬으로 도시락을 만들어보낸다. 점심이 되면 아이들은 빙둘러 앉아 각자 자신이 싸들고 온 도시락을 꺼내놓는다. 그런데 우리 반에는 저 혼자 구석쪽에 가서 돌아앉아 먹는 아이가 있었다. 나중에 일고보니 그 애의 도시락에는 이밥은 보이지 않고 싯누런 옥수수밥만 꽉 들어있었던것이다. 게다가 반찬도 된장에 파였다.   그 시기 우리 이웃에 한족이 살았는데 아들 일곱형제가 있었다. 한창 성장하는 나이인지라 옥수수궤테를 한 가마 해놓으면 게눈 감추듯 먹어치운군 했다. 물론 아이들도 배불리 먹지 못했지만 어른들은 항상 배를 골아야 했다. 그 시기에는 집집마다 달마다 주는 일쌀배급이 얼마 되지 않았기에 옥수수밥과 옥수수떡, 옥수수궤테를 질리도록 먹어야 했다.   이 모든것은 식량부족때문이였다. 그 시기 중국은 식량난을 해결하기 위해 량표로 제한적인 공급제를 실시했다. “량표(粮票)는 20세기 50년대로부터 20세기 90년대까지 중국이 특정경제시기에 발행한 일종 량식구매증명서였다. 그 시기에는 반드시 량표가 있어야만 량식을 구매할수 있었다. 량식으로 만든 과자나 만두도 량표가 있어야 살수 있었다. 최초로 배급표공급을 실행했던것은 량식이였다. 새 중국이 성립된 초기에 물자가 극도로 부족했다. 량식은 더구나 부족해 제한하지 않고 풀어놓고 공급할수 없었다.   1960년대에 들어서며 중국에서 량식과 부식품공급이 엄중하게 부족했다. 1961년에 시장에서 구매표로 공급한 상품은 156종에 달했다. 그 시기에는 량표, 기름뿐만아니라 담배를 사려고 해도 담배표가 있어야 했고 술을 사려고 해도 술표가 있어야 했다. 1전에 성냥 한갑을 사려고 해도 성냥표가 있어야 했다. 그외 고기표, 사탕가루표 등등 별의별 표가 다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해결할수 없어 호적에 따라 량식배급통장, 부식품통장, 석탄통장 등 물건구매통장을 발급했다. 자전거, 재봉침, 시계마저 표가 있어야 살수 있었다.   지금의 신세대들은 상상도 할수 없을것이다. 배고프던 시절에는 부모의 집, 형제의 집을 방문해도 량표를 가지고 다녀야 했다. 농민들은 량표 대신 쌀주머니를 메고 다녔다. 도시호적을 가진 공인(그때는 로동자를 공인이라고 불렀음)들은 농민친척들이 쌀주머니를 메고 오면 금덩이를 들고 온것보다 더 반가워할 정도였다.   그렇게 배고프던 시절도 끝날 때가 있었다. 전국의 농촌에서 개혁개방을 한후 량식은 이미 증장하기 시작해 예전처럼 긴장하지 않게 되였다. 그렇게 되니까 1984년 말에 심수에서 먼저 량표를 취소하고 량식가격을 높였다. 그리고 량식을 제한하지 않고 풀어놓고 공급하기 시작했다. 1993년에 전국적으로 량식과 식용유를 제한하지 않고 풀어놓고 공급한 결과 량표는 쓸모가 없게 되여 정식으로 사용정지를 당하게 되였다. 이렇게 되여 장장 40년에 달하는 “구매증경제”는 막을 내리게 되였다.   이제 두손으로 부지런히 일하기만 하면 배고픈 걱정은 하지 않게 되였다. 집집마다 량식이 남아돌아 배부르게 되니까 밥투정, 반찬투정을 부리고 고급음식점에 산해진미, 진수성찬을 차려놓아도 맛이 없다고 한다. 또 묵은 밥을 쓰레기통에 던져버리는가 하면 다이어트를 한다고 일부러 밥을 적게 먹기까지 한다. 우리는 아직도 지구상에 먹을것이 모자라 기아에 시달리는 많은 나라들이 있다는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유엔식량농업기구와 세계식량계획에서 발표한 《2014 세계식량 불안상황》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2012년부터 2014년까지 전세계 기아인구는 8억 530만명으로 조사되였다. 전 세계에는 세계인구의 1.5배가 충분히 먹을 량의 음식이 있지만 이 음식은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돌아가지 못하고있다. 중국처럼 식량이 남아도는 나라도 있지만 가난, 전쟁이나 독재, 분쟁이나 질병 등의 리유로 식량수급이 제대로 되지 않는 나라들도 있다.   중국에서 집집마다 먹다 남으면 버리는 음식과 식당마다 손님들이 버리고 간 음식만으로도 식량난에 허덕이는 한 나라를 먹여살릴수 있다고 한다. 저 배고파 우는 아이들을 어찌할가? 유엔아동기금회는 2014년의 보고서를 통해 레바논지역의 시리아난민 아동가운데 약 2000명이 굶주림때문에 사망될 위기에 처해있다고 밝혔다. 수단의 약 5만명의 아이들도 심각한 영양실조때문에 죽음의 문턱에 있다. 세계 곳곳에서는 식량위기로 1억명이상이 굶주림에 내몰리고있다. 매년 5세미만의 어린이 300만명이상이 영양실조로 목숨을 잃는다고 유엔식량농업기구와 세계보건기구가 지난달에 밝혔다.   일부 나라들에서 식량이 남아서 썩어나가도 인구의 6분의 1이 굶어 죽는 험악한 현실이 눈앞에 보이는데 내 배만 부르다고 어찌 흥타령만 부르고있을수 있겠는가? 국제원조도 필요한 상황이겠지만 배부른 사람들이 배고픈 사람들을 위해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따뜻한 사랑이 수요된다. 쌀이 남아돌아 하수도에 던지는 중국에서 쌀이 없어 굶어죽는 나라의 아이들을 어찌 보고만 있을수 있겠는가? 배고프던 시절의 량표를 떠올리며 이제부터 집에서 식사할 때에는 묵은 밥을 버리지 말고 외식할 때에는 먹을만큼 주문하는것이 어떨가? 그렇게 절약했다가 모은 자금으로 기아에 시달리는 아이들에게 도움을 주는 따뜻한 사회가 됐으면 한다.     
230    제갈량과 그의 못생긴 안해 황월영 댓글:  조회:9241  추천:2  2014-11-08
제갈량과 그의 못생긴 안해 황월영     랑재녀모(郎才女貌)는 재능있는 남자와 미모의 녀자가 천생배필이 된다는 말이다. 하지만 삼국시기의 정치가이자 전략가인 제갈량(诸葛亮)은 못생긴 안해를 얻은것으로 하여 력사에 유명한 일화를 남겼다. 제갈량의 안해 황월영(黄月英)은 면남(沔南)의 이름난 명사 황승언(黄承彦)의 딸이였다. 황월영은 3국시기에 형주(荆州)의 면남(沔南) 백수(지금의 호북성 양양시 황가만)에서 출생했는데 별명이 황석(黄硕), 황완정(黄婉贞), 아추(阿丑)이다. 본명은 력사기재에 없으며 월영은 민간에서 전해진 이름이다. 황월영은 어려서부터 령리하고 학문에 능했을뿐만아니라 병서에 정통했고 천문지리에 밝았으며 지략이 풍부했다. 하지만 키가 작고 머리가 노란데다가 얼굴이 검어 생김새가 매우 추했다. 하여 18살이 되였으나 혼사말이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황승언은 일찍부터 제갈량이 마음에 들었지만 외모나 기량이 더없이 출중했던 그에게 차마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러던차 하루는 제갈량을 만나서 그의 의중을 떠보았다. “군이 안해를 고른다면 몸은 루추하고 머리는 노란색이며 얼굴은 검지만 재능이 있는 녀자를 배필로 맞을수 있겠는가?” 제갈량은 좋다 싫다 대답을 하지 않았다. 황승언이 찾아온 사실을 안 제갈량의 형수는 시동생에게 황월영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넌지시 물었다. “생원도 인젠 장가갈 나이가 되였잖아요? 황승언이 자기 딸을 주고싶어하는데 생원은 어떻게 생각해요?” 그러자 제갈량은 형수를 보고 이렇게 대답했다. “모두들 그 녀자는 누런 머리에 얼굴은 검어 추하기 이를데 없다고 합디다. 저도 직접 만나보지 못해서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 녀자가 쓴 시들을 본적이 있는데 그 뛰여난 재능에 놀랐습니다.” “그 녀자가 쓴 시가 마음에 들면 사람을 한번 직접 만나보는것이 어때요? 시를 잘 쓰면 학문도 있어야 하겠는데 안그래요?” “형수님이 그렇게 생각하면 한번 만나보겠습니다.” 형수의 권고로 제갈량은 황승언의 집에 한번 다녀오기로 했다. 그 당시 류비, 관우, 장비가 여러번이나 제갈량을 찾아와 힘을 합쳐 천하를 바로잡기를 원했는데 제갈량은 동의할지 말지 고민중이였다. 제갈량은 황승언을 찾아 상의도 할겸 겸사겸사해서 그의 집으로 찾아갔다. 황승언의 안내로 집에 들어간 제갈량이 집안을 살펴보니 벽에 화법이 뛰여난 그림 한점이 걸려있었다. 제갈량이 벽화를 감상하고있는데 황승언이 딸이 그린것이라고 소개했다. “내 딸이 제멋대로 그린것이니 비웃지 말게.” 황승언은 또 창밖에 탐스럽게 피여난 꽃들을 가리키며 자랑했다. “저것도 내 딸이 심고 가꾼것일세. 어떤가? 꽃들이 아름다운가?” 제갈량은 황월영의 재능에 감탄했다. “따님이 재간이 많은가 봅니다. 그림도 잘 그리고 꽃도 잘 가꾸니 말입니다.” “자랑은 아니지만 내 딸에게 그런 재주가 있는가 보오.” 이때 황월영이 방에서 나왔다. 제갈량은 그의 추한 외모에 대해서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제갈량은 황승언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류비, 관우와 장비가 와룡산으로 여러번 저를 찾아온적이 있습니다. 그들을 따라 세상을 다스리는데 나서야 할지 말아야 할지 결정을 내릴수가 없습니다. 선생님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저에게 방향을 가리켜주십시오.” 황승언은 기뻐하며 되물었다. “류비가 과연 자네를 찾았었군. 사람보는 안목은 있단말일세. 먼저 자네생각부터 들어보고싶네.” 그러자 제갈량은 자기생각을 털어놓았다. “사실 저는 조용한 시골에서 농사나 짓고 글이나 읽으면서 세상이 돌아가는것을 지켜보고싶습니다. 란세에 이름이 알려지기를 바라지도 않고 그냥 목숨이나 부지하면서 평화로운 삶을 살가 합니다.” 이때 옆에서 듣고있던 황월영이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지금은 당신이 이름을 날리려는것이 아니라 세상이 당신을 필요로 하고있습니다. 이는 완전히 다릅니다. 그리고 란세에 세상에서 개인목숨이나 유지하려는것은 잘못된 생각이라고 봅니다. 또 쉬운 일도 아닙니다. 공용이나 양수를 막론하고 예로부터 이런 생각을 품었던 문인들을 보면 결국에는 감금되지 않으면 살해당하고 아니면 류배를 떠나고…평화롭고 자유로운 생활을 하신분이 계십니까?” 황승언은 딸이 자신의 마음속말을 하는지라 연신 머리를 끄덕였다. 제갈량도 처녀의 대담함과 슬기로움에 또한번 놀라게 되였다. 황월영은 계속 말을 이었다. “그건 마치 보석이 흙속에 파묻힌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을 깊이 감추려 하실 필요가 있습니까?” 듣고있던 제갈량의 얼굴에 미소가 비꼈다. 흥분의 기색이 력력했다. 그는 황월영을 한번 바라보고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의 말을 들으니 느끼는바가 많소. 사실은 나도 뜻을 펼쳐 크게 해보려고 했으나 험난한 과정과 실패가 두려웠소. 평생 밭과 씨름하자니 그것도 내키지 않았소. 녀자의 몸으로 이런 깊은 생각을 하다니 정말 탄복되오. 나도 생각을 고쳐 다음에 류비가 다시 찾아오면 얘기를 나누어보고 생각이 같다면 기꺼이 따라서 갈가하오. 흥망성쇠는 나 개인의 의지로 좌우지되는것이 아니기때문에 신경쓰지 않으려오.” 와룡산에 돌아온 제갈량은 황월영을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했다. 그들의 혼인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결혼후 얼마 안되여 제갈량은 뜻을 이루기 위해 류비를 따라나섰다. 남편이 항상 전쟁터에 나가있었지만 황월영은 근면한 생활을 하면서 내조를 잘해 제갈량의 걱정을 덜어주는 훌륭한 안해가 되였다. 그녀는 제갈량의 친구들과 이웃들의 어려움을 만사를 제쳐놓고 도와주었으며 성품이 따뜻하고 친절했다.   그때로부터 “제갈공명이 마누라를 고르는것을 배우지 말아야 한다. 황승언의 딸과 같은 추녀를 얻을지도 모르니깐(不要学孔明选择妻子,只得到黄承彦的丑女儿)”하고 말하며 비웃던 사람들도 후에는 모두 그녀를 따르고 존경했다고 한다. 황월영은 재주가 비상했다. 후날 제갈량이 사마의와 싸울 때 군량운반장치인 “목우류마(木牛流马)”가 등장하는데 제갈량의 발명품으로 알려져있지만 사실은 제갈량의 안해가 발명한것이였다고 한다. 제갈량이 륭중에 거주할 때 손님이 찾아왔는데 제갈량은 안해에게 가루를 내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안해가 잠간사이에 가루를 다 내가지고왔다. 제갈량이 그처럼 빠른 안해의 솜씨가 이상하여 알아보니 몇몇 나무인형(木人)이 신속하게 밀가루를 밀가루를 빻고있었다. 너무도 신기하게 생각된 제갈량은 안해에게서 해당기계를 만드는 기술을 배웠다. 황월영은 세계에서 제일 처음 로보트(机器人)를 발명한 사람이라고 할수 있다. 황월영은 나무인형(木人)외에 나무개(木狗)와 나무호랑이(木虎)도 발명했다. 기원 231~232년에 제갈량은 료립, 두예, 호충 등 사람들을 소집하여 경곡현 서남 25리의 백마산에서 나무인형기계를 개진해 목우(木牛), 류마(流马) 두가지의 운수기구를 만들었다. 제갈량이 싸움터에까지 가지고다니던 거위털부채에는 안해가 가르쳐준 전략이 적혀있었다. 병사들의 병을 치료하기 위한 “제갈행군산”과 “와룡단”도 황월영이 만든것이라고 한다. 결혼할 때 황월영은 제갈량에게 거위털부채를 선물로 주었다. 부채에는 “성을 공격하여 땅을 빼앗고 나라를 잘 다스려 안정(攻城略地、治国安邦)”시키는 계책이 숨겨져있었다. 제갈량은 거위털부채를 금지옥엽처럼 애지중지하면서 춘하추동 손에서 놓치 않았다. 제갈량과 그의 부인은 금슬이 매우 좋았다. 그들은 슬하에 아들 제갈첨(诸葛瞻), 제갈교(诸葛乔—제갈량의 형 제갈근의 아들인데 제갈량이 양자로 삼았음), 제갈회(诸葛怀)와 딸 제갈과(诸葛果)를 두었는데 모두 머리가 비상하였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제갈첨은 17살에 촉나라의 공주와 결혼하였는데 용감무쌍한 장군으로 되였으며  전쟁터에서 등애와 싸우다가 영용하게 목숨을 바쳤다. 향년 37세였다. 황월영에 대해 일부 야사에서는 절세미인으로 소개했다. 시국이 어지러울 때라 황월영은 얼굴에 진흙을 발라 자기의 미모를 감추었다고 한다. 그리고 제갈량의 앞에서만 경국지색의 미모를 드러냈다고 한다. 어찌됐건 지모가 뛰여난 제갈량과 재능이 탁월한 황월영은 그야말로 천하에 길이 빛날 천생배필임에는 의심할바가 없다.    
229    중국인민해방군 첫 녀장군 리정 댓글:  조회:8040  추천:1  2014-11-02
중국인민해방군 첫 녀장군 리정   (번역)     1907년에 호남성 류양현에 출생한 리정은 1926년에 혁명에 참가하여 이듬해 3월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고 상감(湘赣)변계추수봉기, 상감과 상악천검(湘鄂川黔)근거지의 반포위토벌, 장정에 참가했다. 1927년 4월에 대혁명이 실패한후 백색공포가 호남성의 도시와 농촌을 휩쌌다. 적들은 사처에서 녀공산당원 리정을 붙잡으려고 날뛰였다. 리정은 상감변계의 심산밀림속에 들어간후 광주리를 메고다니며 숨어있는 공산당원들을 찾으러 다녔다. 며칠동안 뛰여다닌 결과 그녀는 마침내 공산당원 류선행, 류정원, 리회동을 찾았다. 4명의 공산당원은 함께 하나의 당지부를 세우고 리정이 서기직을 맡았는데 이는 류양현 영화구의 첫 지하당지부 서기였다. 혁명의 불씨는 또 류양대지에 지펴졌다. 공산당은 상감변계의 추수봉기를 일으키려고 준비하고있었다. 1927년 9월 11일에 추수봉기군 로농대오는 류양을 공격했다. 리정은 당지부의 동지들을 거느리고 즉시 전투에 뛰여들었다. 로농혁명군이 정강산에 들어간후 백색공포는 또 한차례 류양하 량안을 휩쌌다. 류소령을 대장으로, 안계초를 당대표로, 리정을 사병위원장으로 하는 류양유격대는 바로 이런 환경에서 성립되였다. 처음에 유격대는 몇명에 총 두자루밖에 안되였지만 대위산과 련운산에 의거하여 쳐들어오는 적들과 유격전을 벌리면서 교묘하게 숨어다녔다. 이렇게 적들의 총을 빼았아 유격대의 대오가 점점 크게 늘어나자 국민당은 당황해났다. 호남군벌 하건은 주한에게 한개 퇀을 거느리고 당지의 퇀방군(团防军), 련방군과 함께 류양의 유격대를 포위하여 토벌하라고 명령했다. 리정은 유격대를 거느리고 유리한 지형을 리용하여 적들의 수차례 되는 공격을 물리쳤다. 이튿날 저녁에 총성이 뜸해졌다. 대장은 리정이 임신 4개월인것을 고려하여 그녀더러 몇명의 육격대원들과 함께 먼저 진지에서 퇴각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리정은 “나는 공산당원입니다. 지방간부와 군중들이 먼저 퇴각하게 하십시오”라고 말했다. 산우의 포위를 뚫고 나간 동지들이 산에서 내려가자마자 산아래의 적들이 미친듯이 사격하기 시작했다. 1명의 유격대원과 몇명의 지방간부가 성공적으로 포위를 뚫고 나간외에 기타의 동지들은 모두 장렬하게 희생되였다. 날이 어두워지자 적들은 홰불을 켜들고 수색하기 시작했다. 리정은 두려워하지 않고 유격대원들을 거느리고 완강하게 적들과 싸웠다. 그녀는 탄알이 다 떨어지자 돌을 들어 쳐들어오는 적들의 대갈통을 향해 내리던졌다. 뒤산으로 살금살금 기여오른 적들은 유격대원들을 포위했다. 리정과 4명의 유격대원들은 조사암의 벼랑쪽으로 퇴각했다. “산채로 사로잡아라!” 적들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적들이 가까이 다가오자 리정은 4명의 유격대원들을 보고 “적들에게 사로잡힐수 없습니다. 아래로 뛰여내립시다”하고 소리치고 나서 자신이 먼저 벼랑아래로 뛰여내렸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가? 리정은 혼수상태에서 깨여난 그녀는 자신이 벼랑의 나무우에 걸려있는것을 발견했다. 복중태아는 불행하게도 류산되였다. 2명 생존자의 부축을 받으며 리정은 50~60리길을 걸어 마침내 적들의 포위구역을 벗어나 육격대로 돌아왔다… 새 중국이 성립된후 리정은 항미원조전쟁에 참가했다. 그후 1957년에 중화인민공화국 최고인민검찰원 군사검찰원 부검찰장에 임명되였고 1975년 10월에 총정치부 조직부 고문 등 직을 맡았다. 그녀는 1955년에 소장계급을 수여받아 중국인민해방군의 첫 녀장군으로 되였다. 그녀는 중국공산당 7차대회 후보대표, 13차 대표대회 특별초청 대표, 중앙고문위원회 위원 등 직을 맡았다. 1990년 3월 11일에 중국인민해방군의 첫 녀장군은 북경에서 사망되였는데 향년 83세였다.     
228    11월 11일 고독한 남녀들의 축제 댓글:  조회:5680  추천:13  2014-11-01
11월 11일 고독한 남녀들의 축제   김희수     일년 열두달 명절이 없는 달이 없다. 예전에는 11월에 명절이 없었지만 지금은 11월 8일 기자절이 있고 11월 11일 독신절(光棍节)이 있다. 이제 11월에 들어서면서 두 명절이 눈앞에 다가왔다. 아니 11월 1일을 중꽝꾼제(中光棍节)라고 하니 독신절은 이미 우리 앞에 다가왔다.   독신절은 “솔로데이”라고도 하는데 “솔로”는 이성친구 또는 애인이 없는 사람을 말하는 뜻이다. 또 솔로와 비슷하게 쓰이는 “싱글”이라는 말이 있는데 “싱글”은 배우자가 없이 혼자 살거나 결혼하지 않은 사람을 말하는 뜻이니까 독신 또는 미혼이라는 뜻이다. 여기에 또 리혼한 남녀를 뜻하는 “돌아온 싱글”이라는 말도 있다. 줄임말로 “돌싱”이다. 독신, 미혼, 솔로, 싱글, 돌싱 모두 혼자서 사는 남녀를 이르는 말이니 거기에는 고독이 내포되여있다.   고독, 11월 11일은 고독한 남녀들이 할수 있는 상상은 다 동원하여 미친듯이 즐겁게 놀아보는 명절이다. 중국에서는 꽝꾼제(光棍节)라고 하는데 즉 독신절이다. 11월 11일은 네개의 매끌매끌(光滑)한 막대기(棍子)가 가지런히 놓여있는 모양을 닮았고 꽝꾼(光棍)은 독신이라는 뜻이기에 이날은 독신남녀들의 명절로 되였다. 또한 1자의 모습은 외롭게 서있는 독신를 련상시키기에 1자가 네번 겹치는 이날이 독신의 날로 자리잡게 되였다.   1월 1일을 소꽝꾼제(小光棍节), 1월 11일과 11월 1일은 중꽝꾼제(中光棍节)라고 한다. 11월 11일은 “1”이 4개가 겹치기에 대꽝꾼제(大光棍节)라고 부른다. 독신절의 유래에 대해서 여러가지 설이 있지만 이런 명절이 있기를 바라는 대중들의 마음과 그런 대중들의 심리를 리용한 상가들의 판촉전략으로 하여 독신절문화가 형성되면서 그 규모가 해마다 커지고있다. 오늘날 갈수록 많은 젊은이들이 이날에 선을 보거나 선물교환을 하며 심지어 결혼식을 올리기도 한다. 또 여러 온라인쇼핑몰들이 탈광(脱光)을 리유로 대대적 할인행사를 시작하면서 독신절은 중국 최대 쇼핑일로 되였다.   탈광(脱光)은 벌거벗는다는 뜻과 함께 여러가지 뜻을 가지고있지만 여기서는 독신생활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다. 한국말을 빌면 솔로탈출이다. 올해 중국 최고갑부 명단에 오른 마운(马云)총재가 경영하는 아리바바그룹(阿里巴巴集团)은 산하의 도보(淘宝)와 천묘(天猫)를 통해 독신자들을 위한 대대적인 할인행사를 진행했다. 이 때문에 중국 독신절은 미국 최대규모 쇼핑의 날인 “검은 금요일”의 소비규모를 넘어섰다. 지난해 독신절 때에는 무려 5억 7000만달러이상의 수익을 낸것으로 나타났다.     세계적으로 독신문제는 심각한 상태이다. 현재 영국의 결혼인수는 150년래 최저수준으로 내려갔고 프랑스는 세 가구당 1가구는 독신이다. 독일 베를린의 독신인구는 54%에 달했고 일본의 30~34세 남성미혼률은 47.1%, 녀성미혼률은 32%이다. 미국로동통계국에 따르면 금년 8월말 기준으로 16세이상 미국인의 50.2%인 1억 2640만명이 싱글이다. 이렇게 미국은 싱글전성시대라고 한다.   중국의 독신문제도 엄중한 사회문제로 되고있다. 성별불균형으로 5년후에는 3000만명의 총각들이 장가를 못가게 된다고 한다. 현재 중국에서 결혼적령기에 달한 독신남녀는 이미 2억 4900만명에 달하는데 이중에서 1대1 비률로 3000만명이 장가를 못간다고 할 때 나머지 2억 1900명의 남녀는 결혼을 할수 있다. 그러나 결혼을 할수 있는 가능성이 있을뿐 꼭 결혼을 한다는 뜻은 아니다. 거기에 돌싱(돌아온 싱글)이라는 리혼한 남녀들까지 합치면 중국의 독신인구는 현재 2억을 육박하고있다.   조선족사회에서도 독신문제는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한지 오래된다. 개혁개방이 시작되던 시기에 젊은 녀성들의 도시진출과 출국바람으로 농촌 로총각들이 장가가기 힘들었는데 이제는 도시총각들도 마찬가지로 되였다. 처녀총각문제만이 아니다. 기혼남녀들중에도 배우자를 외국에 보내고 홀라 사는 남녀들이 적지 않다. 젊은층만이 아니라 중년층, 로년층 모두 독신문제가 심각하다.   독신절은 이 문제해결의 열쇠를 찾을수 있는 계기가 된다. 이날이 되면 중국에서는 “탈광(脱光)”, 한국에서는 “솔로탈출”이라는 구호를 내걸고있다. 이는 독신절을 리용해 돈을 벌어들이려는 장사군들의 판촉전략이기도 하지만 이 명절에 실제로 독신에서 벗어나는 남녀들이 적지 않다.   한국에서는 11월 11일을 “빼빼로데이”라고 한다. “빼빼로”는 긴 막대모양의 과자에 초콜릿을 입힌 음식이다. 지금은 이와 비슷한 과자를 부르는 일반 명사처럼 쓰이기도 한다. 빼빼로데이는 한국에서 젊은 층과 련인들 사이에서 빼빼로나 선물을 주고받는 날로 자리잡았으며 한국 최대규모의 데이행사일이 되였다.   우리 조선족사회에서 중국의 꽝꾼제(光棍节)와 한국의 “빼빼로데이”를 접목하여 사과배 같은 독신절브랜드를 만들어낸다면 어떨가? 조선족 상인들도 장사대박을 위해 머리를 써보고 조선족 독신, 솔로, 싱글, 돌싱 들도 솔로탈출을 위해 이 명절을 보다 더 잘 리용할 대책을 생각해봄이 어떨가?   이미 독신절이 다가왔다. 오늘밤 친구들과 함께 또는 여러 미녀들을 불러와 한잔을 하면서 솔로탈출을 위해 축배를 들어보자. 이 시각만은 고독하게 혼자 있지 말고 나와서 축배를 들자!     
227    한 녀인의 눈물 댓글:  조회:4014  추천:1  2014-11-01
한 녀인의 눈물   김희수   그 낯선 사나이가 또 나타났어요. 제가 아들 창호를 학교에 보내려고 문을 열었을 때 저의 집을 기웃거리며 살피던 그 사나이는 도적질하다가 들킨 사람처럼 화뜰 놀라며 황급히 물러갔어요. 화상을 입은 얼굴이 불그데데하고 거무죽죽하게 얼룩얼룩한 모습이 여간만 험상궂지 않았어요. 벌써 사흘째 아침마다 도적고양이처럼 슬금슬금 기여들어 두리번거리는 품이 도적놈이 틀림없었어요. 저의 치부소식이 신문과 방송을 통해 널리 알려진터라 그 사내가 십중팔구는 저의 재물을 노린것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엉큼한 사내들이 가끔 방중에 문을 두드리는 시달림도 용케 이겨낸 저는 별로 겁나지 않았어요. 그러데 아들애의 신상에서 일이 벌어지리라곤 천만 뜻밖이였어요. 학교에서 돌아온 창호의 손엔 놀이감권총이 쥐여져있었고 책가방엔 새 필통과 새 학습장이 들어있었으며 호주머니엔 그애가 가장 즐겨먹는 대추가 불룩하게 차있었어요. “창호야, 너 이걸 어디서?” “어떤 아저씨가 줬어요. 영 무섭게 생긴…” “뭐라구?!” 순간 가슴이 섬찍해지며 불길한 예감이 파고들었어요. 그 험상궂은 사나이가 아들애를 유인하여 랍치하려는게 아닐가요? 삽시에 근심과 걱정이 가슴속에서 첩첩한 구름처럼 몰려왔어요. 저는 저의 생명보다 귀중한 창호를 가슴에 꼭 껴안았어요. 아들을 위해 전 시집도 가지 않고 10년세월을 굳세게 살아왔어요. 실로 돌이켜보기에도 힘겨운 추억, 가슴아픈 추억, 고통스러운 추억이지요. 어머닌 저를 낳고 난산으로 돌아가셨고 아버진 이듬해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어요. 의지가지없는 고아인 저를 룡암골의 바보아들을 둔 량주가 키워줬어요. 이처럼 불행한 운명을 타고 난 저에게 하느님은 가혹하게도 소아마비후유증에 쌍지팽신세를 져야 하는 시련까지 안겨주었어요. 다행히 양부모가 저를 살뜰히 대해주고 뒤집오빠 춘남이가 따뜻한 손길을 뻗쳐주었길래 저는 삶의 용기를 가질수가 있었어요. 소꿉동무로 함께 자란 춘남오빠는 늘 보호자로 되여 저와 바보오빠를 업신여기는 애들을 혼내주었어요. 저는 이런 춘남오빠가 미더웠고 나이가 듦에 따라 자연히 그에게 호감이 갔어요. 근육질이 탄탄한 의젓한 총각으로 자란 그에게서 전 이성의 강렬한 흡인력을 느꼈어요. 하지만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고 이런 생각을 애써 털어버렸어요. 춘남오빠가 종전과는 달리 절 조용한 곳으로 데리고간 그날은 정말 꿈과 같았어요. 춘남오빠는 청춘의 정열이 이글이글 불타는 눈으로 저를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갑자기 제손을 꼭 잡고 고백하는것이였어요. “금자! 꽃인듯 꽃보다도 어여쁘고 달인듯 달보다도 환한 금자! 아름다운 금자, 선녀같은 금자, 내 각시가 되여주오!” 전 가슴이 막 활랑거리며 얼굴이 확 달아오름을 느껴었어요. 이어 춘남오빠는 저를 품속에 와락 끌어안고 마구 키스를 퍼부었어요. 전 지나친 흥분으로 어깨를 들먹였어요. 우리의 사랑은 정말로 달콤했어요. 춘남오빠에게 처녀를 잃었을 때 전 울었어요. 웬 영문인지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리더군요. “춘남오빠, 변하면 안돼요. 네? 절 버리고가면…” “그런 일은 절대 없을거요! 내가 금자를 사랑하는 마음은 영원토록 변하지 않을거요!” 춘남오빠는 손수건을 꺼내 저의 눈물을 닦아주고는 저를 꼭 껴안았어요. 전 춘남오빠의 품에서 행복을 느꼈고 미래의 희망을 내다보았어요. 열광적인 사랑의 도가니에 빠져 시간가는줄 모르던 저는 어느날에 배속에서 새 생명이 꿈틀거리고있음을 발견했어요. 그런데 또 잇달아 무시무시한 일이 발생했어요. 양부모는 저를 민며느리로 데려왔다면서 바보아들과 잔치날까지 정해놨어요. 잔치를 사흘 앞둔 날밤에 저는 늘 만나던 장소에서 춘남오빠를 만났어요. 춘남오빠는 저를 꼭 끌어안고 미칠듯이 키스를 퍼부었어요. 가슴속에서 근심이 여울치고있는 저는 그럴 여유가 없어서 춘남오빠를 살며시 밀쳤어요. “오빠, 어떻게 해요? 이제 잔치날이 막 닥쳐오는데…” “글쎄, 골치아픈 일이요.” “아이참, 우리 둘이 결혼하면 되잖아요? 전 당장 오빠네 집에 가서 살겠어요!” “허참, 결혼이 어디 그리 간단한 일이요?” “그럼 무슨 방법이 있나요?” “글쎄, 낸들 무슨 방법이…” 춘남오빠는 애꿎은 담배만 뻑뻑 빨아댔어요. 저는 주대가 없는 그가 얄미워났어요. 전 그의 입에서 담배대를 확 나꿔채여 저만큼 던져버렸어요. “배속의 아이는 어떻게 해요?” “떨궈버리우!” “뭐라구요?” 전 저의 귀를 의심했어요. 그의 입에서 주저없이 이런 말이 튀여나오다니? “왜 떨궈비리겠어요? 우리 결혼하면 해결될 일인데…” “금자, 우린 결합될수 없소!” “왜요?” 우리 부모는 장애자며느리를 삼을수 없다오!” “네?!” 눈앞이 캄캄해지고 하늘땅이 빙글빙글 돌아가며 환멸의 비애가 가슴에 차고넘쳤어요. 스무살 처녀의 순정이 이렇게 한줄기 연기로, 한줌의 재로 되여버렸어요. “제가 장애자이기때문이라구요?” 울분이 가슴가득 괴여올랐어요. 피눈물이 솟구쳤어요. “그래요. 전 장애자예요! 하하하! 오빤 제가 장애자인걸 몰랐어요? 저도 그만 잊고있었군요. 하하하! 전 장애자예요!” 그렇게 히스테리적으로 웃으면서 저는 춘남오빠와 헤여졌어요. 그날밤에 저는 아무도 모르게 고통과 절망을 안겨준 룡암골을 떠나 도망의 길을 다그쳤어요. 그러다가 굶주림과 피로에 지친 저는 시가지의 어느 시계방앞에 쓰러졌어요. 마음씨 고운 시계방의 난쟁이가 저를 구하여 조수로 받아주었어요. 저는 지나간 모든것을 잊어버리고 착실히 일만 했어요. 제가 출산했을 때 난쟁이는 영양가있는 음식을 먹여준다, 빨래를 해준다 하며 정성껏 시중을 들었어요. 전 인간세상의 따사로움을 한껏 느꼈어요. 난쟁이는 아이를 기막히게 고와했어요. 짬만 있으면 애를 데리고놀았어요. 애가 세살되던 해의 어느날에 저는 난쟁이가 애를 데리고놀면서 하는 말을 엿듣게 되였어요. “창호야, 아저씨 곱니?” “곱다.” “엄마, 곱니?” “곱다.” “나도 창호의 엄마가 곱다. 아저씨가 창호의 아부지가 될가?” “아부지? 해해. 아부지! …” 난쟁이는 창호의 보동보동한 볼을 빨아주었어요. 저는 더 보고만 있을수 없어 아이를 빼앗아가지고 거실로 돌아갔어요. 그날밤에 저는 오만가지 착잡한 생각에 빠져 이리뒤척 저리뒤척하며 잠을 이루지 못했어요. 그 일이 있은후 저와 난쟁이사이는 어색해졌어요. 난쟁이는 더는 아이한테 접근할 엄두를 못했어요. 전 어쩐지 그가 측은해났어요. 마음씨 곱고 손재간이 출중한 그가 생리적결함때문에 여태껏 로총각으로 있었어요. 전 그와 가정을 이루려고 작심했어요. 그런데 우리의 아름다운 연분이 맺어지기도전에 그가 인간세상과 하직할줄을 누가 알았겠어요. 난쟁이가 급병으로 세상을 떠난후 저는 시계수리를 그만두고 옷장사에 나섰어요. 끈질기게 한덕에 원근에 이름난 치부장원이 되였더니 청혼자도 많았어요. 하지만 전 아들을 위해 사랑의 창문을 꽁꽁 닫아버렸어요. 아들은 저의 생명보다도 귀중해요. 그런데 지금 험상궂게 생긴 사나이가 아들을 해치려들고있으니 제가 어찌 불안하지 않을수 있겠어요. “창호야, 그 무섭게 생긴 사람이 널 보고 어찌던?” “이름과 나이를 물어봤어요.” “이후부터 주의해야 한다. 낯선 사람이 주는 물건은 받지 말고. 알겠니? 래일부터 엄마와 함께 학교가자. 돌아올 때도 마중갈께.” 다음날 아침에 저는 아이와 함께 학교가는 길에 나섰어요. 거리에는 출근길에 나선 사람들과 오가는 차량들로 붐비였어요. 아이는 저의 앞에서 재롱을 피우며 깡충깡충 뛰여갔어요. 바로 그때 저는 그 험상궂게 생긴 사나이가 멀지 않은 앞에 서있는것을 발견했어요. 학교가는 아이의 길목을 지키고있어던게 틀림없었어요. 아이는 어느새 저한테서 멀어져 그 낯선 사내쪽으로 가까이 가고있었어요. “창호야!” 제가 부르는 소리에 뒤돌아보던 아이는 다가오는 자전거를 피하여 길복판에 들어섰어요. 공교롭게도 그 시각에 해방패자동차 한대가 아이를 향해 질주해왔어요. 쏜살같이 덮쳐드는 자동차앞에서 혼비백산한 아이는 어쩔바를 몰라 가만히 서있기만 했어요. “창호야, 창호야!”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듯 눈앞이 캄캄했어요. 아이가 자동차밑으로 빨려들어갈 아슬아슬하고 위기일발의 순간이였어요. 갑자기 그 험상궂게 생긴 낯선 사나이가 번개같이 달려가며 아이를 밀어던졌어요! 아이는 구원되였어요. 하지만 그 험상궂게 생긴 사나이는 영영 일어나지 못했어요. 아이를 해친다고 의심했던 사나이가 아들을 구하다가 생명을 바쳤어요. 후에 그 사나이의 호주머니에서 저의 이름과 주소를 적은 편지가 나왔어요. 그 편지를 펼쳐든 저의 손은 심하게 떨렸어요. “금자! 손꼽아 세여보니 꼭 십년이요. 십년전에 금자를 차버린 내가 십년후인 오늘 버림받은 몸이 되였소. 뜻밖의 사고로 화상을 입은 나를 안해는 헌신짝같이 차버렸소. 응당한 보응이요! 나는 신문에 실린 금자의 사적을 읽고 금자가 홀몸으로 아이를 키우면서 그처럼 꿋꿋이 살아가고있다는것을 알았소. 금자는 장애자가 아니요. 진정한 장애자는 나같은 인간이요. 나는 아이가 나의 아이라는것을 확인했으나 아이앞에서 아버지라고 밝힐 면목이 없었소. 나는 아버지로 될 자격마저 없는 인간이요. 아이와 더물어 길이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오. 영원히 용서받을수 없는 춘남으로부터.” “애 아버지!” 저는 피타게 부르짖었어요.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어요. (1990년)  
226    문학의 또 다른 은혜로움 치유 댓글:  조회:3130  추천:1  2014-11-01
문학의 또 다른 은혜로움 치유   박민근     어째서 좋은 문학을 위대하다고 하는 걸까? 이 뻔한 질문에 답하기 어려운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문학이 가진 넓고 깊은 능력 때문일 것이다. 문학 읽기는 다른 일이 따라가기 어려운 숱한 긍정성을 갖고 있다. 문학이 가진 능력 가운데 단연 독보적인 것은 인간을 고통에서 구하는 치유의 힘이다.   문학 읽기는 상처 입은 자를 재생시키는 내면의 공간을 마련한다, 부활시킨다. 상처란 대개 내면을 잃을 때 생기기 때문이다.   어쩌면 문학작품 읽기면 충분하다. 마음을 다친 사람은 지하철이나 작은 골방에서도, 시끄러운 공공장소나 한적한 시골길 나무 그루터기 위에 앉아서도 절대 회복의 시공간을 마련할 수 있다. 단지 책을 펴고, 그 심층을 더듬어 따라가기만 해도 치유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존경받는 비평가 해럴드 블룸은 독서, 특히 문학작품 읽기가 우리 삶에서 필요한 까닭이 책이 가진 치유력에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는 ≪독서기술How to read and why≫ 처음을 이렇게 열고 있다.   “책을 잘 읽는 유일한 방법은 없지만 왜 읽어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이유는 있다. 정보는 무한히 널려 있다. 그런데 지혜는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운이 좋다면 선생으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겠지만, 궁극적으로 우리는 혼자이며 남의 도움 없이 해결해 나가야 한다. 잘 읽는 것은 고독이 제공하는 크나큰 즐거움 중 하나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적어도 내 경험으로는 치유의 효과가 가장 큰 즐거움이기 때문이다. 독서는 우리에게 우리 자신이나 친구, 또는 친구가 될 수 있는 사람 속에 있는 타자성(他者性)을 일깨워준다. 상상에 의한 허구의 문학인 순문학은 타자성이며, 바로 그러한 이유로 고독을 경감시켜 준다. 우리가 읽는 이유는 사람들에 대해 충분히 알지 못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우정이 너무 취약하고, 위축되거나 사라지기 쉬우며, 공간과 시간과 불완전한 연민, 그리고 가정과 애정 생활의 온갖 슬픔으로 짓눌리기 쉽기 때문이다.”   문학작품을 읽는다는 것은 또한 매우 인간적인 일이기도 하다. 게임이나 사냥, 탐식이나 육욕은 짐승들도 할 수 있는 영역이다. 대부분의 훌륭한 문학작품은 한 사람의 작가가 인간 존재에 대한 탐색과 그 여정으로 얻는 가치와 울림을 전한다. 특히 좋은 문학은 깊은 울림을 간직하고 있으며, 그 울림은 언제나 사람의 마음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인도한다.   우리는 살며 숱한 상처와 시련을 겪고 견디며 살아간다. 그런데 이 상처 많은 인생이, 이 세상의 험한 강을 건너기 위해서는 마음의 단련과 회복이 무엇보다도 필요한데, 이를 가장 성실하게 도울 수 있는 일이 문학작품을 읽는 것이다.   만약 우리 현대인이 문학에서 멀어진다면 그것은 이 소중한 치유의 기능을 잃는 안타까운 일인 것이다.   나날은 상처를 입히지만, 문학을 읽고 또 읽으면 그 상처는 단지 상처가 아니라 내적 성장과 인생의 본질에 대한 이해를 돕는 밑거름으로 자리할 수 있다. 문학 읽기가 치유적으로 작용할 때는 자신의 삶의 경험을 반추하는 순기능이 잘 일어날 때이다.    나는 문학 읽기에 어려움이 그리 크지 않은 내담자 대부분에게 ≪독서기술≫이 아닌, ≪독서기술≫에 실린 작품목록을 보여준다. 사실 이 책은 비평가의 글쓰기답게 읽기가 녹록치 않은 편이다.   다만 ≪독서기술≫가 제시하는 문학작품의 목록들은 명성이 자자한 노비평가가 선별한 치유력 높은 작품들로 채워져 있다.   책에는 대중이 이미 잘 알고 있는, 이반 투르게네프에서부터 이탈로 칼비노 같은 작가까지, 그리고 대중들이 쉽게 접하지 않았을, 월터 새비지 랜도나 존 키츠, 내서네이얼 웨스트 같은 작가들을 포함하여, 또 대중들이 익히 알고 있는,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찰스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같은 작품부터, 조금은 생속한 헨리크 입센의 ≪헤다 가블레르≫, 윌리엄 포크너의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 토머스 핀천의 ≪제49호 품목의 경매≫같은 작품들에 이르기까지 해럴드 블룸의 격조 있는 이해와 감상이 실려 있다.   나는 이 책 자체보다는 이 책에서 선별한 작품들을 읽어보라고 권한다. 이 책을 읽는 것은 문학작품을 읽은 이후 고려할 일이다. 아니 굳이 이 책을 읽지 않아도 상관없다고까지 말할 때가 많다.    ≪독서기술≫이 추천하는 책들은 베스트셀러가 아닌 스테디셀러의 목록으로 채워져 있다. 나 역시 금방 유행하다 사라지는 책보다는 시간을 견딘 책을 권한다. 오래된 책은 그 자생력이나 뿌리가 강한 책이기도 하다. 잠시 나왔다 사라지는 책에 비해 꺼트릴 수 없는 내부의 힘이 존재하는 책인 것이다.   세상에는 세월이 가도 퇴색하지 않는 이야기가 있다. 영화 ≪캐러비안의 해적≫도 재밌지만, ≪아라비안나이트≫나 ≪오디세이아≫를 능가하긴 어렵다. 사랑받는 자기계발서나 힐링 서적이 노장의 잠언들이나 스피노자의 세계이해 만큼을 제시하기는 쉽지가 않다. 세월을 견디며 고전의 글귀 한 줄 한 줄에 깊은 의미의 층이 새겨지는 까닭이다. 누군가 만약 내 책과 톨스토이 책을 두고 고민하고 있다면 나는 지체 없이 톨스토이를 들라고 권할 것이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고전을 읽는 일이 ‘도전’이 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고전 읽기가 현재에 도움 되지 않는 시간낭비쯤으로 치부된다.   하지만 고전을 읽으면 큰 성장을 담보할 수 있다. 조금 낯설어졌거나 내 몸에 맞지 않는 듯한 이야기가 갑갑해진 내 마음, 온갖 규격이나 틀로 이미 짜여버린 내 지성을 초월하게 돕는 진심어린 치유제이다. 자신의 구미에, 생각사이즈에 맞는 이야기로만 위안 받고 싶어 하는 것은 어쩌면 흔한 욕심이지만, 자기를 깨치는 성장을 방해할 가능성이 있다.   때로 느낌과 생각의 심연으로 이끄는 이야기들에 선선히 마음과 영혼을 내맡길 필요가 있다. 인생에서 때로는 세찬 ‘죽비’가 필요한 순간이 있다.   진희씨의 우울증은 묵고 깊었다. 명문대를 나와 번듯한 직장에서 나름 인정받는 그녀였지만, 고등학교 시절부터 자주 또 힘겹게 우울증이라는 자신 안의 악마와 전쟁을 벌여야만 했다.   이 작은 악마는 이제 물러갈 듯도 했지만, 쉬이 물러가지 않았다. 퍽 오래 진희씨의 자기처방은 끊임없이, 유행하는 베스트셀러 힐링 서적을 읽는 것이었다.   그녀는 나름 독서광이었다.   나와의 상담에서도 자신이 그간 읽은 힐링서를 쭉 나열하고, 자기 감상과 평가를 조리 있게 풀어냈다.   그래서 그녀와의 상담은 유쾌하면서도 한편으로 답답했다. 최근 그녀는 책 읽기가 도움이 되지 않아 옛날 영화를 다운받아 보는 것으로 ‘전향’했다고 고백했다.   좋은 영화는 조금 더 나은 ‘회복’ 효과를, 그렇지만 일시적인, 가져다주는 것 같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나는 영화를 많이 봤으니 이제 책을 좀 읽으라며, 치유서와 문학작품을 권했다. 그리고 또 다시 해럴드 블룸의 ≪독서기술≫에 나오는 목록을 보였다.   그녀 역시 한때 문학작품을 많이 읽었다고 했다. 하지만 어지러웠다고 했다.   “선생님, 제가 17살쯤이었던가요? ≪채털리 부인의 연인≫을 읽는데, 어찌나 혼란스러웠는지요. 그리고 까뮈의 ≪페스트≫는 읽기 자체가 고문이었어요.”   “그러셨군요. 그렇지만 지금 그 작품들을 다시 읽는다면 어쩌면 전과는 많이 다른 의미로 다가올지 몰라요.”   “어쨌든 명작소설은 그리 흥미가 없어요. 더 갑갑해지기만 하고, 시간도 너무 오래 걸리고.”   “진희씨, 하지만 어떤 때는 우리의 그 조급한 시간관념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얼마 전 저도 ≪데미안≫을 오랜 만에 다시 읽고서 큰 감회에 사로잡혔답니다. 혹시 여기 나와 있는 제인 오스틴의 ≪엠마≫나, 토마스 만의 ≪마의 산≫, 토니 모리슨의 ≪솔로몬의 노래≫는 읽어보셨나요? 제 말을 믿고 한 번 시도해보세요.”   결국 그녀는 내 조금은 ‘억지스러운’ 권유를 받아들여 학창 시절 사놓고 미처 보지 않았거나, 예전 읽었던 ‘명작’을 다시 한 번 읽게 되었다. 그녀는 그 경험이 놀라웠다고 했다. 그것은 강렬한 빛이 커튼 뒤에서 새어나오는 듯한 신선하고도 경이로운 경험이었다고 했다.   예의, 잘 접하지 않던 치유서와 문학 감상이 그녀에게 회복의 단서를 마련해주었다.   여전히 우리 마음의 떠나지 않는 짙은 암흑들로 스산한 이때, 그동안 읽으려는 마음만 품고 치워두었던 그 고전들에 한 번 도전해보길 바란다. 문학에 한 번 자신을 내맡겨보길 바란다.   박민근독서치료연구소 소장 /  ≪당신이 이기지 못할 상처는 없다≫ 저자   박민근 작가, 심리치료사 44세 (만 43세) 남성 출생: 1971년 7월 3일   당신이 이기지 못할 상처는 없다 (심리상담가가 문학에서 찾아낸 한 문장의 위로와 응원) 청림출판사 2014.04.15 아이를 바꾸는 책읽기 아이를 바꾸는 책읽기 (아이 때문에 고민하는 엄마들을 위한 독서 해법) 중앙북스 2013.07.01 공부에 욕심내는 아이 공부에 싫증내는 아이 공부에 욕심내는 아이 공부에 싫증내는 아이 청림출판     
225    색을 탐하여 모택동에게 엄한 징벌을 당한 두 장군 댓글:  조회:7215  추천:1  2014-11-01
색을 탐하여 모택동에게 엄한 징벌을 당한 두 장군 (번역)     1928년 3월에 로농혁명군을 거느리고 계동 사전에 도착한 모택동은 군기를 바로잡으려고 “3대규률과 6항주의”를 반포했다. 후에 “3대규률과 8항주의”로 수정하여 1947년에 다시 반포했다. 그중 “8항주의”중에는 군인이 “녀성을 희롱하지 못한다”고 규정했다. 그런데 아군의 두 고급군관이 이 규률을 위반하여 한명은 목이 잘리는 처형을 받았고 다른 한명은 관직을 강직당하는 처분을 받았다.   “눈물을 흘리며 마속을 참수”한 모택동   1911년에 강서성 남강에서 출생한 황극공은 소년시절에 중국로농홍군에 참가하였고 장정중에 대공을 세웠다. 홍군 1방면군과 2방면군이 회합할 때 황극공은 홍군려장직을 맡았다. 1937년에 연안항일군정대학 제6대 대장을 력임한 그는 문무를 겸임한 고급장령으로 되여 모택동의 칭찬까지 받았지만 류천과의 혼인문제로 비참한 최후를 마쳤다. 본명이 동추월인 류천은 태원시우인중학교의 진보적인 학생이였다. 로구교사변이 발생된후 적극적으로 공산당의 항일호소에 따라 연안에 찾아온 그녀는 항일군정대학에 들어가 공부할 때 황극공을 알게 되였다. 단기간의 접촉을 거쳐 서로 호감을 가진 두 사람은 편지거래를 통해 련애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황극공은 류천이 다른 남동창생과 래왕한다는 리유로 질투했다. 게다가 황극공은 떠도는 소문을 믿고 류천이 다른 남자를 사랑하며 자신을 배반했다고 책망하면서 즉시 결혼하자고 재촉했다. 류천은 황극공의 옹졸함에 반감을 가지면서 결혼을 거절했다. 그렇게 되자 화가 난 황극공은 1937년 10월 5일에 20세도 안된 류천을 연하의 강뚝에 데리고가서 총 두방을 쏘아 죽여버렸다. 항일군정대학 부교장 라서경은 중앙령도의 비준을 거쳐 황극공을 체포했다. 이 사건을 심사하는 과정에 연안의 각 단위에서 이 사건을 놓고 토론을 조직했다. 어떤 사람은 황극공은 홍군의 중요한 간부이고 당에 대한 공헌이 많기에 립공속죄의 기회를 주자고 했다. 또 어떤 사람은 황극공은 비록 공이 있지만 규률을 무시하고 살인했기에 반드시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황극공은 중앙에 편지를 보내여 만약 사형을 집행한다면 공산당의 법원에서 죽지 않고 전쟁터에 나가 적과 싸우다가 죽겠다고 요구했다. 그는 자신에게 기관총을 주면 집법대의 감독하에 적진에 돌격하다가 죽겠다고 했다. 하지만 고급군관이 그런 일을 범하여 영향이 나빴기때문에 모택동은 제갈량이 눈물을 흘리며 마속을 베듯이 황극공을 참형에 처하지 않을수 없었다. 모택동과 중앙의 지시를 받은 섬감녕변구(陕甘宁边区)고등법원에서는 황극공을 사형에 처한다고 최후판결을 내렸다.     안해를 버리고 처제를 취하려다가 관직을 강직당한 왕근산   1915년에 호북성 황안(지금의 홍안)의 한 가난한 농가에서 출생한 왕근산은 9살에 소몰이를 했고 13살에 품팔이를 했다. 성격이 강직한 그는 악패지주에 대한 원한이 깊었다. 홍군이 황안을 점령했을 때 15살밖에 안된 왕근산은 홍군에 참가했다. 그는 반장으로부터 제2야건군 제3병퇀 부사령원 겸 12군 군장과 정치위원으로 되였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후 그는 천동군구(川东军区) 사령원, 지원군제3병퇀 부사령원, 산동군구 부사령원, 사령원대릴, 북경군구 부사령원, 중화인민공화국 공안부 부부장을 력임했다. 그는 1955년에 중장계급과 1급8.1훈장, 1급독립자유훈장, 1급해방훈장을 수여받았다. 팔로군 129사 부퇀장직에 임명되였을 때 부상당한 왕근산은 팔로군병원에 실려갔다. 당시 팔로군병원에는 “병원의 꽃”이라고 불리우는 간호원이 있었다. 그 간호원의 이름은 한수암이였다. 한수암의 살뜰한 간호덕분에 왕근산은 빨리 건강을 찾았다. 그렇게 알게 된 그들은 서로 호감을 가지게 되였다. 그후 왕근산과 함께 입원했던 진석련의 중매로 왕근산은 한수암과 결혼하여 선후로 자녀 여덟을 보았다. 하지만 왕근산은 이미 새 중국이 성립된 초기부터 녀대학생인 자신의 처제를 사랑했던 왕근산은 안해를 버리고 처제와 재혼하려고 했다. 왕근산의 안해는 가정을 지키기 위해 당중앙과 모택동에게 편지를 써보냈다. 이 일은 당중앙과 모택동의 고도로 되는 중시를 받았다. 먼저 왕근산의 로상급 등소평을 파견하여 담화하게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그후 주은래가 직접 찾아가도 마찬가지였다. 왕근산의 부하들도 찾아와서 가정을 지키라고 권고했다. 마지막에 모택동은 왕근산의 처리문제를 류소기에게 맡겼다. 결과 왕근산은 당적이 제명되고 강직을 당하여 중장으로부터 대좌로 떨어졌고 북경군구 부사령원 겸 공안부 부부장으로부터 하남성의 한 농장의 부농장장으로 떨어졌다. 왕근산은 1978년 5월 10일에 병으로 남경에서 사망되였다. 왕근산은 텔레비죤련속극 《량검(亮剑)》의 주인공 리운룡의 원형으로서 중국인민해방군의 저명한 장군이다.      
224    야래향의 전설 리향란의 파란만장한 인생드라마 댓글:  조회:7043  추천:1  2014-10-26
야래향의 전설 리향란의 파란만장한 인생드라마   (번역)     리향란(李香兰)의 본명은 야마구치 요시코(山口淑子)이다. 리향란의 인기가 절정에 달하던 시기는 바로 일본이 중국을 침략하던 위만주국시기였다. 리향란은 조국인 일본과 고향인 중국사이에서 운명의 희롱을 받으면서 청춘세월을 고뇌속에서 보냈다. 야마구치 요시코의 할아버지는 어려서부터 한학(汉学)을 좋아했고 중국문화를 흠모했기때문에 1906년에 일본을 떠나 중국으로 왔다. 야마구치 요시코는 1920년 2월 12일에 중국 료녕성 봉천(지금의 심양)에서 출생했다. 1932년에 야마구치 요시코의 아버지 야마구치 후미오(山口文雄)는 평정산(平顶山)사건에 련루되여 적과 내통했다는 죄명으로 구류되였다. 그후 야마구치 요시코일가는 심양으로 이사갔다. 야마구치 요시코는 13살때 아버지의 친구이며 심양은행총재인 친일파 리제춘을 알게 되여 그의 양딸로 되였다. 그때로부터 그녀는 양아버지의 성을 따라 리향란이란 듣기 좋은 중국이름을 가지게 되였다. 1934년 그녀는 반숙화(潘淑华)라는 이름으로 북평의 익교녀자중학교에 입학해 1937년에 그곳을 졸업했다. 동북을 침범하고 부의를 부축하여 위만주국을 세운 일본은 “대동아공영권”의 가상을 보여주기 위해 1937년에 특별히 “만주영화촬영소”를 세웠다. 일본어와 중국어에 능통했기때문에 봉천방송국의 신만주가곡의 가수로 등용된 리향란은 중일전쟁이 발발한 1938년에는 만주국의 국책영화사, 만주영화진흥협회에서 중국인 전속녀배우 리향란으로 영화에 출연했다. 영화의 주제가도 큰 인기를 끌었기에 리향란은 가수 겸 영화배우로 일본과 만주에서 큰 인기를 모았다. 그리고 중국이름과 유창한 중국어로 인해 일본과 만주에서는 그녀를 중국인 명배우인줄로 여겼다. 그때 리향란은 저명한 간첩 김벽휘(가와시마 요시코)와도 친밀하게 지냈다. 중일전쟁 당시 일본영화에도 많이 출연한 리향란은 만주진흥협회의 전업녀배우로 출연해 인기를 모았다. 리향란은 만주철도회사에서 자금을 내여 세운 이 영화촬영소에서 초빙한 첫기의 전직배우였다. 1941년 2월 11일에 니혼극장에서 “노래하는 리향란”으로 출연했을 당시 대성황을 이루었는데 많은 팬들이 몰려들어 니혼극장바깥에도 사람들로 둘러싸였기에 소방차가 출동해 물을 뿌려 군중을 해산하는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1943년에는 아편전쟁에서 활약한 중국의 영웅 림측서를 묘사한 장편력사영화인 《만세류방(万世流芳)》에 참가한 그녀는 림측서의 제자인 심달년의 련인으로 녀주역을 맡았다. 전중국에서 이 영화가 개봉되자 극중 그녀가 부른 주제가인 매당가(卖糖歌)와 계연가(戒烟歌)는 중국영화사상 가장 큰 인기를 끌어 리향란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듯했다. 《만세류방》으로 인기를 얻은 그녀는 기자회견에서 자신이 일본인이라는 사실을 밝히려 했지만 주위의 만류로 밝히지 못했다. 리향란이 주역을 맡은 첫부의 영화는 《밀월급행렬차(蜜月快车)》였다. 이 영화를 찍고 그녀는 “일본어를 아는 중국소녀배우”로 소문났다. 그후 그녀는 《지나의 밤(支那之夜)》, 《백란의 노래(白兰之歌)》 등 영화에서 항일운동을 하다가 친일파로 되여 일본인을 꿈꾸는 중국인 녀성역을 맡았다. 이것은 그녀의 인기를 선전에 리용한 일본군부의 음모였다. 나중에 그녀는 “당시 나는 열몇살밖에 안된 소녀여서 어른들이 시키는대로 역을 맡았다”고 말하면서 이 영화에 출연한것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리향란은 일본 봉천방송국의 새 프로 “만주신가곡”에서 《어가녀(渔家女)》, 《소군원(昭君怨)》, 《맹강녀(孟姜女)》 등 중국가곡을 불렀다. 그녀는 《야래향(夜来香)》을 불러 명성을 크게 떨쳤다. 명가수 리향란은 이렇게 탄생되였다. 그녀는 명가수로부터 저명한 영화배우로 인기몰이를 하면서 연예계의 “슈퍼거성(超级巨星)”으로 높이 떠올랐다. 리향란은 크게 이름을 날린후에도 계속 일본군을 선전하거나 일본침략전쟁을 미화한 영화에서 주역을 맡았다. 나중에 리향란은 그때의 일을 회상하면서 “전쟁년대에 생존을 위해 나는 결사적으로 성악과 연기를 배웠다”고 말했다. 그녀는 군국주의를 위해 선전하고 중국인을 멸시한 영화를 찍은것에 대해 매우 큰 자책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리향란”이란 이름때문에 그녀를 중국인으로 오인했기에 일본군을 위해 영화를 찍는 그녀를 더욱 미워했다. 그녀는 중압에 견디지 못해 1944년에 “만주영화촬영소”에서 사직하고 상해에 거주했다. 1945년에 일본이 무조건 투항하고 위만주국이 멸망되자 전국에서 친일파 한간을 토벌하는 행동이 시작되였다. 국민당에게 매국노로 체포된 리향란은 군사법정에서 “한간죄”혐의로 심문을 받게 되였다. 그녀는 중국인으로 여겨져 상해경마장에서 총살될 운명이였다. 그러나 봉천시절의 친구가 야마구치가문의 일본호적을 제출하고 그녀가 일본인이라는것을 증명했기에 한간죄는 적용되지 않고 국외추방을 선고받았다. 재판당시 재판관은 그녀가 일본국적이라는것을 리유로 무죄를 선고했지만 그녀가 《지나의 밤》에 출연해 중국인을 일본인에게 굽실거리게 한 대목은 도의적으로 용서받을수 없는 죄라고 말했다. 그러자 요시코는 젊었을 적에 철이 없어 한짓이니 용서해달라고 머리를 숙였다고 한다. 1946년 2월 28일에 리향란은 평범한 가정주부차림으로 화장기없이 평복을 입고 귀국선에 올라탔지만 중국정부의 출국관리가 그녀를 알아보았기에 다시 감옥에 들어갔다. 하지만 10일후 오해가 풀려 3월에 다시 귀국선을 탄 리향란은 다시 투옥될가봐 선박화장실에 몸을 숨겼다. 그러다가 배가 항구를 출발하자 바깥으로 나왔는데 그때 라지오에서 그녀가 부른 “야래향(夜来香)”이 흘러나왔다. 일본으로 귀국한 리향란은 1947년에 본명인 야마구치 요시코로 일본영화계에서 활약했다. 주연작으론 1950년에 제작된 《황혼의 탈주》가 대표적이다. 1950년대에 그녀는 미국의 할리우드와 브로드웨이(百老汇)에 들어가 선후로 적지 않은 무대극과 영화에 출연하여 거성이 의연히 살아있음을 보여주었다. 그 시기에 뉴욕에서 일본계 미국인이며 저명한 조각가였던 이사무 노구찌(野口勇)와 결혼했지만 1955년에 리혼했다. 1952년부터 1958년까지 향항에서 영화 《금병매(金甁梅)》, 《신비한 미인(神秘美人)》, 《하루밤 풍류(一夜風流)》에서 주연으로 연기한 그녀는 중국이름인 리향란으로 다시 부활했다. 그녀는 향항의 100대 명판공사에서 10곡의 영화주제가를 불러 큰 인기를 끌기도 했다. 1958년에 일본으로 돌아간 그녀는 외교관인 오타카 히로시(大鹰弘)와 재혼했다. 그후 남편의 성을 따라 “오타카 요시코(大鹰淑子)”라고 이름을 고쳤다. 후에 그녀는 연예계에서 은퇴하고 전문 남편을 내조하는 외교관의 부인으로 살았다. 오타카 히로시는 2001년 4월에 73세로 사망되였다. 1969년에 50세가 눈앞인 그녀는 오래동안 마음속에 품었던 기자꿈을 실현하게 되였다. 텔레비죤방송국프로의 사회자로 된 그녀는 중동, 남아프리카 등지를 다니면서 아라파트, 만델라 등 풍운인물을 취재하기도 했다. 1974년에 당시의 수상이였던 다나까 가꾸에이(田中角荣)의 요청으로 자유민주당선거에 참가한 그녀는 처음으로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였고 그후 1980년과 1986년에 재당선되였다. 그녀는 환경정치차관, 오끼나와 참의원 및 북방령토문제를 둘러 싼 특별위원회 고문직을 맡았다. 1992년에 정계에서 은퇴했는데 1993년 11월 3일에 2등보관훈장을 수여받았다. 퇴직후 그녀는 줄곧 “아시아녀성기금회” 부리사장직을 맡았다. 그녀는 이 직무를 리용하여 일본정부에 전쟁피해자 및 당년의 위안부들에게 사과하고 손해배상을 하도록 힘쓰겠다고 말했다. 1990년대에 고래희의 나이로 일본우익세력의 압력을 무릅쓰고 북경대학, 남경대학 등 중국의 대학을 방문한 리향란은 “력사견증인”의 신분으로 광대한 학자들에게 “나는 ‘9.18사변’, ‘로구교사변을 겪었으며 ‘평정산사건’의 처참한 정경을 목격했습니다”고 말했다. 그녀는 《중국에서의 나날—리향란: 나의 전반생》이란 자서전을 써냈다. 연예계의 전설인 그녀는 지금까지도 살아있다.  
223    장개석이 리종인을 암살하려고 한 내막 댓글:  조회:6282  추천:3  2014-10-18
장개석이 리종인을 암살하려고 한 내막   (번역)     1948년 11월 2일에 동북해방군은 료심전역에서 동북국민당군 47만여명을 섬멸하고 대승을 거두었다. 당시 해방군의 사상자수는 6만 9000여명밖에 안되였다. 며칠후 국민당중앙정치위원회 비서장인 진포뢰(陈布雷)가 자살했다. 국민당의 제1문필가로 불리우는 진포뢰는 장개석의 모사였다. 장개석은 료심전역에서 참패당하고 오른팔이나 다름없는 진포뢰가 사망되자 주먹을 불끈 쥐고 탄식했다. 게다가 리종인(李宗仁)의 계계(桂系)세력이 점점 커지고있었다. 장개석은 재삼 생각하던끝에 가장 큰 장애인 리종인을 제거해버려리고 마음먹었다. 비록 리종인은 20여년을 금란지교(金兰之交)로 지내오던 절친한 사이였지만 장개석은 자신의 앞길에 방해가 된다면 사정없이 제거해버릴 각오가 되여있었다. 얼마 안되여 국민당 국방부 보밀국 운남정보소 소장 심취는 보밀국 국장 모인봉이 보내온 긴급전보를 받았다. 즉시 남경에 와서 새로운 임무를 접수하라는 명령이였다. 심취가 남경에 도착한 그날 오후에 모인봉은 초대소에서 그에게 리종인을 암살하라는 중요한 임무를 맡겼다. 다음 모인봉은 심취를 데리고 남경중앙군관학교에 있는 장개석의 저택으로 갔다. 장개석은 두 사람에게 임무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말하고나서 비밀을 절대 밖에 루설해서는 안되며 행동을 시작하면 꼭 사명을 완수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장개석은 왜서 리종인을 제거하려고 했는가? 원래 장개석과 계계(桂系)는 합쳤다 헤여졌다 하면서 여러가지 모순이 서로 겹겹하게 얽혀있었다. 1927년에 장개석이 남경정부를 건립한후 독제를 실시하면서 자기와 견해가 다른 사람들을 배척하는 바람에 다방면의 불만을 일으켰다. 그때로부터 장개석과 계계의 관계는 날따라 악화되였다. 당시 계계군은 남경사방의 세력을 통제하고있었다. 백숭희(白崇禧)는 공개적으로 장개석에게 대들면서 장개석이 하달한 무한작전명령을 거절했다. 장개석은 다시 일어선후 계계의 대부분 군사력량을 와해시켰다. 그후에도 장개석과 계계의 다툼은 끊임없이 계속 되였다. 계계는 광서일대에서 세력을 키우면서 다시 일어설 기회를 노렸다. 1930년에 풍옥상(冯玉祥)과 염석산(阎锡山)이 련합하여 장개석을 반대하자 계계도 풍옥상, 염석산과 합작하여 장개석을 반대했다. 하지만 후에 장학량이 봉계(奉系)군을 거느리고 와서 장개석을 돕는 바람에 성세호대하던 반장개석련맹은 실패하고 말았다. 1936년 6월에 광동에 둥지를 틀고있던 월계(粤系)군의 대표 진제당(陈济棠)은 장개석이 항일하지 않는다는 명의를 빌어 계계와 련합하여 장개석을 반대했다. 1937년에 전국에서 일치하게 항일해야 된다는 형세에 따라 계계는 장계석의 중앙군에 귀의했다. 1948년 3월에 위기를 맞은 국민당은 제2기국민대표대회를 열고 민주헌정(宪政)을 실시하기로 함과 아울러 헌법규정에 따라 대통령을 선거하고 대통령제를 실행하기로 결정했다. 대통령은 이미 장개석으로 정해놓았기에 대통령선거는 형식뿐이였다. 장개석은 “부대통령후보는 국민당중앙에서 지명한다”고 규정했다. 리종인은 중국주재 미국대사 스튜어트(司徒雷登)의 지지하에 부대통령선거에 참가하기로 결정했다. 리종인이 부대통령선거에 참가하는데 대해 장개석은 처음에 태도가 애매했다. 리종인은 장개석이 동의했다고 오해하고 선거사무위원회를 조직했다. 그런데 장개석은 갑자기 손과(孙科)를 부대통령후보로 지명했다고 선포했다. 그리고 국민당의 중요인물을 내세워 리종인이 선거를 포기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그러나 리종인은 포기할수 없다고 강경하게 태도를 표시했다. 그러자 장개석은 직접 리종인을 찾아가서 선거를 포기하라고 말했다. 리종인이 그럴수 없다고 하자 장개석은 큰소리로 말했다. “내가 지지하지 않으면 당신은 당선될수 없소. 그러니 주동적으로 포기하는게 현명한 선택이 될거네.” “그야 두고봐야 알지요. 제가 꼭 당선될겁니다!” 리종인은 강경한 어조로 대답했다. 장개석은 유명한 독재자여서 부하가 자기의 앞에서 언성을 높이는것을 절대 용서하지 않았다. 그런데 리종인은 장개석의 앞에서 언성을 높였을뿐만아니라 감히 그의 뜻을 어기기까지 했던것이다. 결국 리종인은 선거에서 4차의 투표를 통해 손과를 이기고 부대통령으로 당선되였다. 리종인이 당당하게 장개석과 맞설수 있은것은 미국의 지지가 있었기때문이다. 장개석의 반동통치가 곧 붕괴되려고 하는것을 본 미국은 중국이란 식민지를 잃지 않기 위해 새로운 괴뢰를 내세워 인심을 잃은 장개석을 대신하게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리하여 당시에 장강이남에서 의연히 비교적 큰 실력을 유지하고있는 계계를 선택했다. 미국은 계계수령 리종인을 지지하여 부대통령에 선거되게 한후 필요시에 장개석의 후계자로 되게 하려고 했던것이다. 계계가 기세가 등등하여 압력을 가하자 장개석은 자신의 정치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리종인을 제거하려고 결정했다. 장개석이 직접 나서서 심취를 불러 암살임무를 포치한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리종인을 이가 갈리도록 미워했는가를 알수 있다. 장개석의 명령을 받은 특별행동소조에서는 리종인을 암살하기 위한 계획을 주밀하게 세웠다. 당시 계계군의 일부분이 안휘에 있었다. 특별행동소조에서는 광화문외공항부근에 잡화점을 차려놓고 특무를 파견하여 감시하게 하면서 리종인이 비행기를 타고 남경을 떠날 경우 모인봉에게 즉시 보고하도록 했다. 그러면 모인봉은 준비해놓고있던 전투기로 공중에서 리종인의 비행기를 격추한후 비행기사고로 위장하기로 계획했다. 리종인 등이 기차를 타고가는것을 방지하기 위해 특별행동소조에서는 강남역부근에 작은 판자집을 사놓고 특무를 파견하여 담배가게를 차려놓고 그들을 감시하게 했다. 그외 항주로 통하는 탕산부근의 도로옆에 음식점을 차려놓고 도로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감시하게 했다. 특별행동소조에서는 또 리종인의 저택 맞은쪽에 작은 술집을 차려놓고 리종인의 일거일동을 감시했다. 그리고 모인봉은 리종인이 남경을 떠나려는 기미가 보이면 쫓으면서 도중에 저격할수 있도록 속도가 가장 빠른 차량 두대를 특별행동소조에 보내주었다. 장개석은 남경에서 손을 쓰게 되면 꼭 자신의 최후결정을 기다려야 하지만 남경이외의 지방에서 손을 쓸 경우 명령을 기다리지 말고 즉시 사격하라고 특별행동소조에 지시했다. 리종인은 비록 반대분자를 대하는 장개석의 음험한 수단에 대해 잘 알고있었지만 미국이 뒤에서 지지해주기에 장개석이 감히 자신에 대해 경거망동하지 못할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장개석의 본성에 대해 잘 알고있는 계계의 다른 요원들은 장개석의 음모에 대해 어느 정도 알아챘다. 12월 24일에 황소횡(黄少竑)은 상해에 가서 성탄절을 쇤다는 핑게를 대고 남경을 떠났다. 그는 떠나갈 때 정사원(程思远)을 보고 “내가 알건대 장개석과 계계의 관계는 특별히 긴장해지고있는 모양입니다. 만약 두률명(杜聿明)이 거느린 부대가 포위망을 뚫고 위험에서 벗어난다면 장개석은 정치위기를 맞게 될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덕공(德公—리종인을 가리킴)의 안전이 위험하게 될수 있습니다. 덕공에게 조심하라고 알려주십시오”라고 당부했다. 그 당시 정사원은 장개석이 그런 음모를 꾸미고있지 않을것이라고 여겼다. 1949년 1월에 해방군은 회해전역에서 장개석의 정예부대를 전부 소멸했다. 그러나 아직도 큰 세력을 가지고있는 리종인은 이 기회를 틈타 장개석에게 은퇴를 강요했다. 이때문에 특별행동소조는 가장 긴장한 단계에 진입했다. 그때 장개석은 잠시 은퇴하고 리종인에게 상태수습을 맡길것인지 아니면 리종인을 암살한후 자신이 계속 자리를 지킬것인지를 줄곧 고려하고있었다. 모인봉은 날마다 심취를 불러 장개석이 명령만 내리면 곧 손을 쓸수 있도록 만단의 준비를 하고있으라고 명령했다. 당시 심취와 진경천, 왕한문은 모두 독을 바른 탄알을 재운 두 자루의 권총을 준비하고있었다. 이런 탄알이 몸의 어떤 부위에 명중되든 상대는 혈액중독으로 사망될수 있었다. 오덕후도 자신이 세운 낡은 서점에서 암살행동을 엄호하기 위해 톰슨기관총(汤姆逊机枪)과 작탄을 준비하고 대기하고있었다. 만약 리종인이 외출하지 않을 경우에 암살명령이 내리면 그들은 리종인의 저택에 진입하여 저격하려고 계획했다. 만에 하나의 실수도 없도록 하기 위해 모인봉은 남경전등회사에서 일하는 특무 2명을 암살행동에 협조하도록 배치했다. 이 두 특무는 변압기를 수리한다는 구실을 대고 담장밖의 변압기우에 서서 가방에 휴대한 총으로 리종인의 침실, 주방 등을 향해 사격하고 담장안으로 진입하여 저격할 준비를 갖추고있었다. 1월 하순에 시국이 더욱 위급해지자 장개석은 내외압력을 이기지 못해 리종인에게 대통령대리직을 맡겨 국면을 지탱하게 하고 자신은 은퇴(隐退)하기로 결정했다. 장개석은 잠시 암살을 중지하라고 지시한후 자신은 옛집 봉화(奉化)에 은거하면서 막후에서 지휘했다. 1월 20일에 모인봉(毛人凤)은 심취(沈醉)를 불러서 특별행동소조의 암살행동을 결속지으라고 명령했다. 이리하여 리종인을 암살하려던 음모는 막을 내리게 되였다.  
222    장개석의 목숨을 구해준 진갱 댓글:  조회:7305  추천:1  2014-10-11
장개석의 목숨을 구해준 진갱   (번역)     본명이 진서강(陈庶康)인 진갱(陈赓)은 1903년 2월 27일에 호남성 상향시 룡동향 천호촌에서 출생했다. 중화인민공화국 10대 원수 다음으로 가는 10대 대장중의 한분인 진갱은 1961년 3월 16일에 58세의 나이로 상해에서 사망되였다. 황포군관학교 제1기 졸업생인 진갱은 고향친구 장선운(蒋先云), 하충한(贺衷寒)과 함께 “황포3걸”로 불리웠는데 장개석은 이 셋에 대해 인재라고 매우 높게 평가했다. 졸업후 재능이 뛰여난 진갱은 학교에 남아 선후로 제2기 입학생들의 련장, 제3기 입학생들의 부대장직을 맡았다. 1925년 10월에 국민혁명군인이 제2차로 군벌 진형명을 동정할 때 황포군관학교 교장 겸 국민혁명군 제1군 군장이였던 장개석은 총지휘를 맡았다. 그 시기에 22살밖에 안된 진갱은 제1군 제2사 제4퇀에서 련장직을 맡았다. 그번 전투에서 진갱이 용감하게 싸운것을 본 장개석은 그의 련을 전부 자신의 총지휘부로 전이시키고 진갱을 자신의 경호원으로 두었다. 그번 전쟁에서 제3사 사장의 착오적인 지휘로 화양에서 반란군 림호의 주력부대에 포위되였다. 총지휘인 장개석은 전황이 위급하다는 소식을 듣고 급하여 직접 화양전선으로 달려갔다. 그때 사장 담서경은 아무런 방법도 없어 쩔쩔 매고있었다. 망원경으로 그 정황을 지켜도던 장개석은 급하여 “진갱은? 진갱은 어디 있어?”하고 소리쳤다. “전 여기에 있습니다. 교장님!” 진갱이 부근의 방공호에서 뛰쳐나오며 장개석의 앞으로 다가갔다. “자네가 즉시 달려가 담서경에게 철퇴해서는 안된다는 나의 명령을 전달하게!” 진갱은 번개같이 달려가 담서경에게 장개석의 명령을 전달했다. 그런데 담서경은 이미 부대를 명령할 능력이 없었다. 수하병사들은 그의 명령을 듣지 않았다. 진갱은 장개석의 명령을 전달한후 신속히 총지휘부로 돌아왔다. 망원경으로 모든 정황을 살펴본 장개석은 진갱을 보고 “혁명군인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아. 난 자네에게 제3사의 대리사장직을 맡아서 즉시 적들을 물리칠것을 명령하네”하고 말했다. 군령을 받은 진갱은 총을 들고 산우로 올라가서 총을 쏘며 “후퇴하지 말고 나의 지휘를 들엇”하고 소리쳤다. 그러나 그의 명령을 듣는 자가 없었다. 진갱은 하는수없이 지휘부로 되돌아 상황을 회보했다. 하지만 장개석은 “혁명군인은 후회하지 않아”하면서 물러서려고 하지 않았다. 림호의 부대가 가까이 달려오자 진갱은 장개석을 끌고 총탄을 무릅쓰고 후퇴했다. 어렵게 산에서 내려왔는데도 장개석은 바위우에 앉아서 “난 도망치지 않겠어. 내가 무슨 낯으로 돌아가겠는가? 힘들게 혜주를 점령했는데 여기서 망할줄은 몰랐어”하고 말했다. 림호의 부대가 추격해오는데도 장개석은 도망치려고 하지 않았다. 진갱은 급하여 장개석을 업고 퇴로를 뚫고 화살같이 달려갔다. 그들은 황혼무렵에야 림호군의 추격에서 벗어날수 있었다. 위급한 시각에 장개석을 구해준 진갱의 이야기는 날개라도 돋힌듯 온 국민혁명군에게 알려졌다. 당시 황폭군관학교의 동학들은 “황포3걸중에 장선운의 필재와 하충한의 말재주도 진갱의 다리만 못하네”라고 탄복했다. 그후 진갱은 장개석의 수종참모로 되여 장개석의 사무실을 마음대로 출입할수 있었다. 처음에 진갱은 “보고(报告)”하고 들어갔다. 그런데 장개석은 “이후부터는 직접 들어오게. 자네마저 믿지 못하면 내가 누굴 믿겠는가?”하고 말했다. 이 사실로부터 장개석이 진갱을 얼마나 믿었는지 알수 있다. 그런데 장개석은 황포군관학교중의 공산당명단에 진갱의 이름이 있는것을 발견하고 비탄에 빠져 진경의 이름밑에 “이 사람에게 부대를 맡기지 말라”고 썼다. 장개석의 신변에 오래 남을수 없게 되였다는것을 알게 된 진갱은 어머니의 병을 핑게로 휴가를 맡았다. 장개석은 진갱의 속셈을 알았지만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은혜를 생각해서 휴가를 주었을뿐만아니라 배표와 로비를 대주고 “진갱을 중앙군사정치학교의 중좌 대장으로 임명한다”는 위임장까지 보내주었다. 그러나 진갱은 장개석의 “호의”를 거절하고 광명의 길을 찾아갔다. 1927년 4월에 장개석이 혁명을 배반한후 진갱은 즉시 장개석의 수하에서 벗어난다고 선포한후 8.1남창봉기에 참석했다. 그 일을 알게 된 장개석은 여러번이나 측근들을 보고 “진갱은 인재야. 그는 나의 목숨을 구해주었기에 난 그를 중하게 쓰려고 했네. 그런데 그는 어리석게도 공산당을 따라갔어”라고 말했다. 1933년 3월에 진갱은 다리를 상하여 비밀리에 상해에 호송되여 치료를 받게 되였다. 그런데 그는 반역자 진련생의 밀고로 불행하게 국민당에 체포되였다. 그해 4월 1일에 그는 남경에 압송되여 중앙헌병사령부에 감금되였다. 당시 남창에서 중앙쏘베트구역의 포위토벌을 지휘하던 장개석은 진갱을 붙잡았다는 말을 듣고 매우 기뻐했다. 장개석은 진갱을 남창으로 압송해오라고 명령했다. 그는 이전에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적이 있는 진갱을 직접 만나서 “은혜에 보답”하는척 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했다. 진갱을 만난 장개석은 실망하면서도 동정하는 말투로 말했다. “자넨 나의 훌륭한 학생이였어. 내가 교장직을 맡은 황포군관학교의 걸출한 학생이였지. 자네가 비록 정치상에서 착오를 범했지만 교장은 언제나 학생을 애호하기때문에 용서해줄수 있어.” 장개석의 말에 진갱은 랭소했다. “난 당신이 용서해주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당신 맘대로 처리하십시오!” 장개석은 진갱을 자기편사람으로 끌어오려던 일이 허사로 되자 크게 실망했다. 이렇게 되여 진갱은 다시 남경으로 압송되여갔다. 그 시기에 중공당조직과 송경령은 진갱을 구원하려고 적극적으로 노력했다. 그 때문에 국민당은 진갱을 살해하지 못했다. 장개석도 배은망덕이란 오명을 쓸수 없었다. 국민당은 진갱을 계속 감화시켜 자기편으로 끌어오기 위해 진갱을 어느 한 저택에 전이시켜 특수대우를 향수하게 했다. 비록 위병들이 지키고있었지만 진갱은 “자유롭게” 거리를 다닐수 있었다. 이는 진갱에게 도망칠 기회를 주었다. 그는 장계취계하여 국민당에 합작하는척 했다. 그러자 국민당은 진갱에 대한 경계를 점차 늦추었다. 국민당은 어느날밤에 갑자기 진갱이 사라진것을 발견했다. 진갱은 “친구”의 도움을 받아 순리롭게 남경에서 탈출했던것이다. 4개월동안의 철창생활을 마치고 그는 다시 당의 품으로 돌아왔다.  
221    첫경험에 대한 녀자의 이야기 댓글:  조회:9908  추천:1  2014-10-06
첫경험에 대한 여자의 이야기 김행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장 (전 청와대 대변인) E-mail : ginko0405@gmail.com   다음 카페에 지난 9월 30일 올라와 조회수 100만명이 넘은 글이 있다. 페이스북과 트위터등 SNS를 통해서 지금 이 시간에도 계속 확산되는 글이다. 글 제목은 “남자도 읽어볼만한, 첫경험에 대한 여자의 이야기”다. 찬반 댓글을 통해 공방이 이어지고 있다. 대체 어떤 글이길래?   글은 영화 ‘노랑머리’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남자들에게 ‘(첫경험에 대해) 입장 바꿔 생각해 보라’고 하고 ‘내 몸은 내가 주인이잖아’로 끝맺는다. 매우 체험적인 글로 판단되어 ‘느낌 그대로를 생생하게 살리기 위해’ 일부를 제외하곤 글 대부분을 옮겨왔다. 이 글을 읽게 되는 독자들 사이에서도 격한 논쟁이 이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판단은 전적으로 독자의 몫이다.   담론 형성을 위해 질문 하나를 던져 본다. 이 글이 회자되는 이유는?   [노랑머리]라는 영화에서 이런 장면이 나온다.   주인공 소녀가 낙태하고 돌아온 날, 아파서 쩔쩔매는데 남자가 소녀 옆에서 꿈지럭거리자 소녀가 너무나 미안한 표정으로 “오빠, 내가 못 해줘서 미안해”하자 남자 급 삐친다. 자궁 속을 벅벅 쇠주걱으로 긁힌 아픔보다 성기에 피 몰려 딱딱해진 게 더 대단한 것이라 그걸 못 풀어줘 미안하다는 건가? 영화라지만 왠지 화가 치밀었다.   [여자가 떠안아야 하는 것들…]   남자는 첫경험이 꼭 치뤄야 할 통과의례이자 무용담이겠지만 여자는 첫경험은 두려움이자 사후에 생기는 모든 위험을 떠안고 가야 하는 예민한 문제다. 흥이 덜 난다고 착용을 기피하며 피임 확률이 80%인 콘돔 챙기는 것도 유세를 떨고 그나마 잘못된 상식으로 바로 빼면 된다며 제대로 된 착용조차 못하는 남자들. 이런 조선 남자들 덕분에 여자들은 부작용까지 감수해가며 하루라도 빼먹으면 안 되는 피임약을 복용하고, 약국에서 얼굴 붉히며 산 임신테스트기로 가슴 졸이며 아침 소변을 받아내고, 조금만 생리가 늦춰져도 발을 동동 구르며 인터넷을 뒤적거리다 80%가 남자 의사라는 산부인과에서 다리를 벌린 채 진찰을 받는다.   . . 더 민망한 것은 배부른 유부녀들 사이에서 솜털 보송보송한 얼굴로 괜히 죄지은 것 마냥 앉아 대기하는 짓이다. 거기다 씻지도 않은 손을 거침없이 팬티 속에 넣고 어느 야동에서 본 손놀림으로 비벼대며 “좋아?”라고 말하는 철딱서니 없는 남친 덕에 환부가 가렵고 부어 올라도 대놓고 긁지도 못하고, 병원 가기도 뭐해서 혼자 끙끙대다가 재수없으면 세균 감염으로 허니문용 방광염까지 걸리게 되니 이래저래 여자는 첫경험을 시작으로 포문부터가 전쟁이다.   [그녀들의 두려움을 아는가?]   그러나 이런 육체적인 문제는 오히려 애교다. 여자들의 성상담 제목 중 제일 흔하게 보는 제목이 “섹스 후 그가 변한 것 같아요”다. 일단 관계 맺고 나면 시큰둥해지고 낚인 고기에 더 이상 떡밥을 주지 않는 남자들의 태도에 혼전경험에 대단히 관대하지 못한 조선 땅의 여자들은 불안하기 짝이 없다. 임신과 낙태의 위험을 혼자 떠 안고 가는 것도 무서워 죽겠는데 육체적, 정신적 고통까지! 이런 극도의 스트레스를 동반한 섹스를 스스럼없이 하기가 쉽겠는가? 대부분 믿음을 주는 상대와 안정된 공간에서 편안한 마음으로 하고 싶은 게 여자 맘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이러고 도망가면? 변하면? 임신 되면? 얘 깨끗하긴 한 거야?’ 이런 걱정들이 꽉 들어차 있는데 어떻게 섹스에 집중이 되겠는가? 입장을 바꿔서 상상해 보자. 만약 첫경험 때 남자가 출혈을 겪는다면? 임신을 남자가 하게 된다면? 여자의 좁은 질 입구를 통과하다 남자의 성기가 부드득 긁혀 귀두표피가 밀려 살점이 떨어져 출혈이 생기고, 귀두표피가 너무 얇은 사람은 출혈이 없어 여자로부터 처음이 아니라는 의심을 받게 될 것이다. 이 과정에서 여자가 피임하지 못하면 남자의 뱃속에 아이가 잉태되고, 그 잘난 성기 속으로 쇠 꼬챙이를 넣어 안 보이는 아이를 조각조각 찢어 박박 긁어 내야 한다고 상상해 보라. 그리고 정복욕 강한 여자를 만나 자고나면 감정이 식어버려 버림받을 지도 모르고, 여자랑 섹스 한 경험이 있는 남자는 곱지 않은 시선을 받고 여러 여자를 만나면 걸레라고 수군거림을 받는다면? 그런다면? 응? 응? 참 맘 편하게 잘 사시려나?   [하고 싶을 때 못하면 죽는거 였구나]   그런데 남자들은 오히려 버럭버럭 성질을 낸다. ‘내가 믿음을 주지 못했고 두려우니까 여자가 주저하는구나, 안정시켜주고 믿음을 줘야지’라고 생각하지 않고 “날 못 믿어? 나한테 올인 하지 못 하는 거야?” 이따위로 나오는 거다. 내가 아는 어느 한 남자도 그랬다. ‘몸을 허락하느냐’를 ‘여자가 자신에게 올인하느냐, 안하느냐’로 생각하고 있었다. 아무리 여자가 잘 주고 속 깊은 사랑을 해도 몸을 허락하지 않으면 그건 나한테 온전히 믿음을 가지지 못하고 불신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데 할 말이 없었다. 남자는 단순해서 단순한 데서 행복을 찾는 거고 사랑을 확인하는 거라는 데 어쩌겠나. .   . 성범죄자 인권을 심하게 보호해주는 우리 인권국가 대한민국은 여자가 남자를 자극시켜 감히 고추가 딱딱해지게 만들었기에 야하게 입고 자극시킨 여자가 잘못했다고 한다. 그래, 내가 남자 몸을 너무 몰랐나 보다. 아마 발기되서 사정하지 못하면 정액이 역류하여 몸에 흘러 들어가면 치명적인가보다. 아니다…. 아마 독이 쌓여서 칵~ 뒈져버리는 모양이다. 그러니까 여중학생을 돌아가면서 성폭행한 머슴아들 부모들이 폭행당한 여중학생 부모들한테 ‘딸년 교육 잘 시키라’고 막 길길이 화를 내는 모양이다. 그리하여 날 흥분하게 만들어 당연히 내가 섹스하고 싶으니 해야 한다 회유하고, 설득하고 안 해 주면 ‘우리 관계 끝’이라는 식으로 성질도 부리면서 위에서 말한 온갖 불안함을 떠안은 여자를 32%나 눕혀버리고 마는구나.   [내 몸은 내가 주인이잖아]   잠자리를 해도 불안하지 않고 모든 위험들을 감수할 만큼 사랑에 확신이 있다면 그건 남자가 믿음을 주고 그녀를 아껴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 그 남자가 그런 좋은 남자가 아닐지라도 그녀의 결심이 혼자만의 착각일지라도 남자에게 버림받든 어쩌든 내 인생 각본은 내가 쓰는 것이니 몸의 주인이 허락한 것이다. 그러나 아직 믿음이 가지 않고 더 지켜보고 싶은 마음인데 남자가 내 몸을 컨트롤 하려 드는 건 진심으로 건방진 짓이다. 이런 나의 주장을 말했을 때 너무나 이기적이라는 욕을 들었다.   하지만 내 몸인데! 내가 임신과 낙태 공포를 피하고 싶다는데 내 생존 본능인데! 나도 성인이고 그 정도 자기 방어는 할 수 있는 건데 이기적인 게 당연한 거 아닌가. 뜨거운 냄비를 만지면 화상을 입는 걸 알아서 안 만지겠다고 젖은 행주를 이용해서 조금 있다가 만지겠다고 하는 건데 그게 잘못된 건가? 그것보다 자기 몸을 멋대로 나에게 넣겠다는 게 더 이기적이지 않은가? 몸의 주인은 ‘니’가 아닌 난데, 왜 내 몸을 내 맘대로 하는 게 이기적이라는 건가. 내 몸은 니 몸이 원하는 걸 꼭 풀어줘야 하는 의무가 있는 ‘니 것’ 이 아닌데.   선택해라~ 그대들이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공포에 떨며 타의에 의해 마지못해 열어 준 문 앞에서 혼자 박 두드리며 각설이 타령을 부르던지, 몸의 주인이 허락하도록 정성을 들여서 뜨겁게 환대를 받으실 것인지를!     [출처]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남자도 읽어볼만한 '첫경험에 대한 여자 이야기'   최근 SNS에서 '남자도 읽어볼 만한 첫경험에 대한 여자의 이야기'라는 제목의 글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해당 글은 지난 2006년 '늙어가는 토끼의 뒷담화들' 개인 블로그에 '내 몸은 내 거라고'라는 제목으로 올라왔는데요. 타인에 의해 처음으로 성관계를 하게 되는 여성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내용이 담겼습니다.   늙어가는 토끼의 뒷담화들 : 네이버 블로그 blog.naver.com     글쓴이는 "여자의 첫경험 요인 중,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닌 타인에 의해 성관계를 하게 된다"는 조사 결과를 언급하며 '사랑해서'라는 이유가 겨우 8%라는 사실에 분노했습니다.   이어 여자는 첫경험 후 임신과 낙태의 위험 등 떠안고 가야 하는 것들에 대한 두려움을 자세히 설명하며, 관계를 맺고 나면 시큰둥해지는 남자들의 태도 등에 대해서도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특히 "남자들은 (섹스를 쉽게 하지 못하는 여자들에 대해) 오히려 버럭버럭 성질을 낸다"며 "'내가 믿음을 주지 못했고 두려우니까 여자가 주저하는구나, 안정시켜주고 믿음을 줘야지'라고 생각하지 않고 '날 못 믿어? 나한테 올인 하지 못 하는 거야?' 이따위로 나온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내가 아는 어느 한 남자도 그랬다. '몸을 허락하느냐'를 '여자가 자신에게 올인 하느냐, 안 하느냐'로 생각하고 있었다"며 "아무리 여자가 잘해주고 속 깊은 사랑을 해도 몸을 허락하지 않으면 그건 나한테 온전히 믿음을 가지지 못하고 불신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데 할 말이 없었다"고 허탈해했습니다.   글쓴이는 "내 몸은 내가 주인이다. 선택해라 그대들이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공포에 떨며 타의에 의해 마지못해 열어 준 문 앞에서 혼자 박 두드리며 각설이 타령을 부르던지, 몸의 주인이 허락하도록 정성을 들여서 뜨겁게 환대를 받으실 것인지를"이라며 글을 마무리 지었습니다.    
220    장개석과 모인봉을 골려준 리극농 댓글:  조회:7581  추천:1  2014-10-04
장개석과 모인봉을 골려준 리극농   (번역)     새 중국이 성립된후 병사를 거느린 적도 없고 전쟁터에 나간적도 없는 리국농(李克农)은 상장계급을 수여받아 특수한 장군으로 되였다. 모택동은 어느 한번 외빈을 접견할 때 “리극농은 중국의 대특무입니다. 하지만 우리 공산당의 특무이죠”라고 말했다. 1962년에 리국농은 병으로 사망되였다. 그 소식을 들은 미국정보부문에서는 사흘동안 휴식하면서 강적이 사라진것을 경축했다. 모택동의 찬탄을 받고 적들을 벌벌 떨게 한 리극농은 누구인가? 아래에 리극농이 적들과 지혜와 용기를 겨룬 부분적인 력사사실을 소개한다.   장개석의 코를 꿰고 다닌 리극농 항일전쟁이 승리하게 되자 생각밖에도 장개석은 모택동을 중경에 청해 평화담판을 하자고 요구했다. 리극농은 이것은 분명히 평화의 허울을 쓰고 모택동을 암해하려는 음모이며 장개석의 속임수라고 인정했다. 모택동도 리극농의 분석에 일리가 있다고 여기고 잠시 장개석의 요청에 대답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국민당은 연안에 련락소를 세웠는데 국민당특무 주려무와 라백륜이 무전을 책임졌다. 리극농은 오래전부터 그들을 중점적으로 감시하고있었다. 국민당에 대해 잘 알고있는 리극농은 장개석이 전보로 모택동을 청하는 동시에 대립이 꼭 특무들에게 연안방면의 정보를 수집하라고 명령했을것이라고 판단했다. 과연 주려무는 여러번이나 모택동을 만나겠다고 리극농에게 제기했다. 번마다 거절하던 리극농은 모택동에게 주려무와 라백륜을 역리용하는것이 어떠냐고 물었다. 모택동은 좋은 방법이라고 하면서 1945년 8월 16일에 주려무와 라백륜을 접견하고 자신은 중경으로 갈 준비를 하지 않았다고 했다. 련락소로 돌아간 주려무와 라백륜은 급히 중경에 무전을 쳐서 이 소식을 전했다. 그 전보문을 받아본 장개석은 모택동이 중경으로 올 담량이 없다고 단정했다. 이렇게 되면 공산당측에 평화를 원하지 않는다는 죄명을 씌울수 있다고 여긴 장개석은 20일과 23일에 련속 모택동을 청하는 전보를 보냈다. 모택동은 리극농과 상의한 계책에 따라 장개석에게 회신을 한 동시에 두번 다 주려무와 라백륜을 접견하여 그들의 손으로 중경에 전보를 보내게 했다. 모택동과 리극농의 생각대로 장개석은 모택동이 중경으로 담판하러 오지 못할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8월 24일에 중경 《신화일보》는 공개문장을 실어 장학량과 양호성이 구류당하고 엽정과 료승지가 감방에 갇힌 사실을 증거로 삼아 장개석을 믿을수 없는 사람이라고 폭로했다. 그리고 모택동이 중경회담에 가지 못한 책임은 전적으로 장개석에게 있다고 지적했다. 이리하여 장개석은 인격과 도의에서 모두 극히 피동적인 곤경에 처하게 되였다. 신문은 읽은 장개석은 크게 화가 나서 “냥시피(娘希匹)”하고 욕설을 퍼부었다. 그는 모택동에게 “안전보장”을 주지 못하고 “특무들이 횡행”한다는 헛점을 주지 않기 위해 “모택동이 중경에 오기만 한다면 그의 안전을 절대적으로 보장하겠다”고 표시했다. 그리고 대립을 불러 “부하들을 엄하게 단속하여 어떤 행동도 하지 못하게 하게. 만약 조금이라도 차실을 빚는다면 엄하게 다스릴거야”하고 엄령을 내렸다. 장개석은 또 헌병사령 장진을 불러 “중경치안을 잘 유지하게. 위반하는 자는 먼저 처리하고 후에 보고하게”라고 명령했다. 장개석이 상술한 조치를 댔다는 정보를 장악한 리극농은 이번에는 장개석이 절대로 모택동을 암해하지 못할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즉시 모택동에게 해당상황에 대해 보고했다. “중경담판”에서 피동을 주동으로 바꾸어 장개석의 평화담판의 사기극을 까밝히기 위해 모택동은 반복적인 심사숙고를 거친후 마침내 중경으로 갔다.         장계취계하여 국민당특무를 골려준 리극농 1946년 1월에 미국대통령 트루먼(杜鲁门)이 파견한 “특사”이며 륙군상장인 마셜(马歇尔)의 참여하에 국공쌍방은 협상을 거쳐 《국내군사충돌을 중지할 방법에 관한 협의》를 달성했다. 쌍방의 협의에 따라 북평에 군사협조처집행부를 성립하여 국공쌍방의 군사충돌을 방지하고 쌍방의 정전령집행상황을 감독하게 했다. 당시 중공중앙정보부 부부장이였던 리극농은 중공대표단 비서장의 신분으로 중공대표단과 함께 북평으로 갔다. 리극농은 기요부문과 방송국의 동지들과 함께  취명장청사에 거주했다. 취명장내의 사업일군은 대부분 국민당특들이 맡았다. 중공대표단의 행동은 국민당특무들의 감시와 통제를 받고있었다. 군사협조처의 사업이 시작됨에 따라 중공대표단은 중앙과 각 근거지와의 전신련계를 크게 강화할수 있었다. 그러나 국민당특무들의 감시로 무전과 기요사업은 매우 큰 압력을 받게 되였다. 정보사업은 국민당특무들의 중점파괴대상이였고 중국공산당방면의 난제였다. 국민당특무들의 감시에 대해 리극농은 일련의 방지조치를 취했다. 첫째, 무전과 기요과를 취명장의 남쪽방에 집중시키고 전문일군이 지키면서 아무나 드나들지 못하게 했다. 둘째, 모든 사업일군들이 일률로 자체로 생활을 책임지고 식당의 “복무원”들이 마음대로 청사내로 드나들지 못하게 했다. “복무원”들이 진입할수 없게 되자 복무원으로 가장한 특무들은 갖은 핑게를 대고 청사내로 들어가려고 시도했다. 리극농은 딱 거절할수 없는 상황이라면 진입을 허락하되 어디를 가다 전문일군이 따라 다니면서 자유행동을 할수 없게 하라고 명령했다. 중공대표단의 준둔지에서 정보를 얻기 위해 복무원으로 가장한 특무들은 방안청소, 빨래 등 잡일을 열심히 했다. 그들은 방안에 떨어진 종이나 호주머니안에 넣어둔 종이에서 가치가 있는 정보를 발견할수 있기를 바랐다. 국민당특무들의 그런 잔꾀에 대해 잘 알고있은 리극농은 동지들에게 모르는척 하고 일부러 종이에 아무 수자거나 이름같은것을 써서 호주머니에 넣어두는것으로 특무들을 골려주라고 했다. 그후 여러 사람들이 “특무들이 호주머니의 종이를 가져갔다”고 보고하자 리극농은 “국민당특무들이 그런 방면에 취미가 있다면 좀 어렵게 수자를 써서 그들더러 천천히 연구하라고 하지요. 그들이 할일이 없어서 그러는데 일감을 줘야지요”하고 말했다.   빈틈없는 계책으로 모인봉과 승패를 겨룬 리극농 1949년 12월에 모택동이 처음으로 쏘련을 방문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모인봉은 기회가 왔다고 여겼다. 모택동의 전용렬차가 출발한후 모인봉과 미국고문 브래드(布莱德)는 두분째 “황고둔사건(皇姑屯事件)”을 모방한 두가지 방안을 제정했다. 첫번째 방안은 대륙의 동북에 잠복한 국민당특무조직인 동북지하기술종대에 명령하여 모택동의 전용렬차를 량쪽에서 포위하여 가로막고 장춘 14호철교를 파괴하며 할빈역에 시한폭탄을 가설하는것이다. 두번째 방안은 북경천안문부근의 남지자에 잠복한 “만능잠복대(潜伏台)를 리용하여 기회를 엿보아 행동하는것이다. 그와 동시에 북경중앙사회부의 회의실에서는 리극농이 해당일군들을 소집하여 회의 열고 “만능잠복대”를 찾아내여 붙잡을 문제와 구체적인 방안을 연구했다. 얼마후 홀로 전신업무책임자, 전보업무, 정보, 전보문해석 4가지직무를 맡은 계조상을 붙잡았다. 리극농은 계조상에게 원래의 지법대로 아래와 같은 내용의 전보를 모인봉에게 쳐보내라고 명령했다. “모인봉선생, 당신들이 반복적으로 큰소리치며 자랑하던 ‘만능잠복대’는 이미 우리 손에 들어왔고 소좌 전신책임자 계조상도 우리가 잘 ‘돌보고’있소. 앞으로 당신들이 파견한 특무들은 우리가 잘 돌볼테니 안심하오. 그저 직접 만나서 감사를 드리지 못할뿐이요. 당신에게 전보문을 보내는이는 바로 리극농이요. 당신들은 지금 ‘남에게 얹혀’사니 좋은 날이 오래가지 못할것이요. 당신이 정보국을 거느리고 온다면 나 리극농은 당신의 안전을 보장해줄것이요. 이 전보업무담당일군은 당신의 수하특무 계조상이라는것을 알아두오.” 대북에서 그 전보문을 받아본 모인봉은 깜짝 놀랐다. 그는 자신의 눈을 믿을수 없어 두번이나 다시 읽어보았다. 화가 난 그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한마디 말도 못했다. 늙은 소 콩밭으로 간다고 모인봉은 절망하지 않았다. 그의 손에는 아직 “동북기술종대”라는 왕패가 있었기때문이다. 그는 전보원에게 “리극농아, 어디 기다려봐, 누가 최후의 승자인가를”라는 회답전보문을 쳐보내도록 명령했다. 며칠후의 어느날밤에 국적표시가 없는 비행기가 할빈에서 멀지 않은 산림의 상공에서 낮게 선회하고있었다. 비행기에서는 두명의 특무가 락하산을 타고 뛰여내렸다. 락하산이 땅바닥에 닿자마자 지면에 매복했던 우리측 감시일군들이 그들을 꼼짝달싹못하게 붙잡았다. 그 두명은 동북기술종대의 암살행동을 지도하라고 모인봉이 파견해보낸 특파원이였다. 그들은 “우리는 래일 오전에 할빈 송화강호텔에서 동북기술종대와 접속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국민당보밀국을 대표하여 해당조직원들에게 위임장을 수여하는것으로 반공(反共)에 공로가 있는 조직원들을 고무격려하려고 했습니다”하고 털어놓았다. 이튿날 아침에 송화강호텔의 고급방에서 모인봉이 파견한 특파원 장대평과 우관군은 동북기술종대 사령원 마내와 접속했다. 하지만 마내와 접속한 장대평은 원래의 장대평이 아니라 우리측의 정보원이 가장한 가짜 장대평이였다. 몇마디의 대화가 오간후 동북기술종대 사령원 마내는 170명의 명단을 내놓았다. 이렇게 모인봉의 다른 한장의 “왕패”는 리극농의 손에 들어갔다. 판문점막후에서 기묘하게 지휘하여 미국을 굴복시킨 리극농 중미쌍방이 조선전쟁을 끝내려고 판문점에서 담판을 할 때 모택동은 담판대표로 리극농을 생각했다. 담판대표는 1선, 2선, 3선으로 나뉘였는데 2선에 숨어 모든것을 장악한 리극농은 직접 모택동, 주은래와 김일성의 전보문을 오가게 했다. 우리측의 대표가 상대방의 황당한 관점에 대해 반박할 때 상대방의 대표는 발언을 거절했다. 이렇게 담판은 대치국면에 들어갔고 쌍방은 모두 상대방이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담판석의 공기는 굳어졌다. 이는 고도로 긴장한 심리전이였다. 의지력, 인내력, 자제력을 겨루는 무언의 싸움이였다. 1선담판대표 자성문이 회의장소를 떠나 리극농에게 어떻게 하겠는가고 지시해줄것을 요청했다. 이때 묵묵히 앉아서 깊은 생각에 잠겨있던 리극농은 종이우에 “앉아 기다립시다”고 써서 주었다. 그 종이쪽지는 몰래 중조대표들의 손에 전달되였다. 그제야 조급정서가 가라앉은 대표단 성원들은 움직이지 않고 부동의 자세로 앉아서 기다렸다. 침묵이 132분간 지속되였다. 미국인들은 더 버틸수 없어 휴전을 선포했다. 무언의 132분은 담판력사에서 침묵이 가장 긴 기록을 창조했다. 중조대표가 회담을 주최할 차례가 돌아왔을 때 리극농은 미국측에서 빈번하게 휴회하는 방책에 대처하여 불의에 허를 찌르는것으로 승리를 이끌었다. 쌍방대표가 갓 자리에 앉았을 때 리극농은 즉시 휴회를 선포했다. 그 시간은 25초밖에 걸리지 않았다. 미국인들은 어찌할바를 몰랐다. 시간을 끄는것과 빨리는것은 담판중의 기교였다. 리극농은 이 두가지의 방법을 절묘하게 운용하였다. 미국인들은 리극농의 담력과 식견, 기민에 대해 감탄해마지 않았다. 정전협정을 체결할 계단에 들어섰을 때 쌍방의 파괴활동을 피면하기 위해 리극농은 절묘한 방법을 제기했다. 즉 쌍방의 사령관이 현장에서 서명하지 말고 쌍방의 수석대표가 서명하기만 하면 즉시 효력을 발생하며 그후 각자가 자신의 사령관에게 보내여 서명을 받은후 원본을 교환하는것이다. 이 방법은 중조량국의 최고지도층의 허락을 받았고 미국측도 이런 교묘한 조약체결형식에 대해 기껍게 접수했다. 이렇게 “조선정전협정”은 순조롭게 체결되였다.  
219    중편소설 추녀결사대 (4) 댓글:  조회:3594  추천:2  2014-10-04
중편소설 추녀결사대 김희수 4. 불타는 복수     “다음은 금실언니와 은실언니의 원쑤를 갚을 차례야.” 그녀들은 마지막 복수상대를 찾아나섰다. 두차례의 사건때문에 공안부문의 조사가 심했지만 그녀들은 대담하게 행동했다. 동실이, 옥실이, 순실이는 금실이가 눈물을 흘리면서 몇번이나 해주던 얘기를 잊을수 없었다. “나와 은실이는 일본에 가서 5년동안 갖은 고생을 다하면서 거금을 벌어가지고 귀국했어. 그동안 도박빚만 잔뜩 걸머지고있던 남편은 우릴 반갑게 맞아주었어. 미혼인 은실이는 며칠동안 우리집에 묵으면서 장래일을 토론하기로 했어. 여러 친척들이 모여 그리움과 회포를 풀고 돌아간후 남편이 도박에서 손을 싹 씻고 장사를 해보겠다고 하길래 나도 음식점이나 경영하려고 영업집을 흥정했지. 우리집은 다섯집이 한줄로 붙은 낡은 단층집이였어. 그래서 살림도 할수 있고 영업도 할수 있는 집을 흥정하고 이튿날 현금을 가져가기로 했어. 남편이 하도 독촉하길래 전날 오후 미리 저금소에 가서 현금 200만원을 찾아왔어. 그런데 그날밤 일이 생길줄이야 누가 알았겠니? 밤중에 자다가 갑자기 화끈해나길래 눈을 떠보니 덮고있는 이불에서 불이 활활 타오르고있었어. ‘아악’하고 소리지르며 일어나니 곁에 누워 자던 남편이 보이지 않았어. 그리고 내가 안고 자던 가방도 없어졌어. 현금 200만원이 든 가방말이야. 그때 ‘언니! 불이났어. 불이야, 사람살려!’하고 웃방에서 자던 은실이가 고함치는 소리가 들려왔어. 나는 재빨리 방으로 달려갔어. 그리고 은실의 손을 잡고 나가려고 했어. 겨울이여서 방문을 봉했길래 살아나갈 길은 정주간 출입문밖에 없었어. 그런데 불길은 벌써 온집안에 번지여 사면팔방에서 빨간 혀를 날름거리면서 우리를 삼켜버리려고 기세사납게 덮쳐왔어. 우리는 불속을 헤치고 앞으로 나갔어. 그러자 화염은 삽시간에 우리의 머리칼을 태워버렸어. 그래도 우리는 불에 타죽지 않으려고 문쪽을 향해 결사적으로 전진했어. 우리가 출입문까지 간신히 갔을 때 웃방의 지붕 한모퉁이가 무너져내려왔어. 우리는 황급히 문을 열고 나가려고 했어. 그러나 문이 열리지 않았어. 그제야 나는 남편이 불을 질렀다는것, 불을 지르고 달아나면서 밖으로 문을 잠궈놓았다는것을 알았어. 우리는 절망속에서도 결사적으로 발길로 문을 걷어차며 ‘불이야, 불이야! 사람살려요!’하고 목청껏 웨쳤어. 그러다가 쓰러졌는데 깨여났을 때는 병원의 침대에 누워있었어. 그날밤 옆집에서 몇몇 청년들이 마작을 놀았는데 한 청년이 소변보러 밖으로 나왔다가 불이난것을 발견하고 고함쳐서 사람들을 불렀대. 옆집 주인은 고맙게도 자기집 물건이 타는것보다 사람의 목숨이 더 귀중하다면서 청년들더러 빨리 우리집에 뛰여들어 사람을 구하라고 독촉하면서 자신이 앞장섰대. 결국 우리의 목숨은 구했으나 옆집은 타서 재가 되였지. 하지만 우리는 살아난것이 죽기보다 못한 상황이 되였어. 얼굴과 온몸이 타서 귀신의 몰골이 되였지. 공안국에서 사건을 조사했지만 달아난 남편을 붙잡지 못했어. 우리는 거울속의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꼭 우리 손으로 그자를 붙잡아 복수하리라 맹세했어. 은실이는 불에 온몸이 타면서도 속옷에 감춘 저금통장과 신분증만은 꼭 감싸고 보호했던거야. 은실에게는 500만원의 저금이 있었어. 누군가 우리더러 성형수술을 하라고 했어. 하지만 국내의 수준으로는 피부이식이요, 성형수술이요 하는걸 아무리 해봤자 우리처럼 엄중한 상처는 정상적으로 회복되기는 불가능한거야. 그렇다고 외국에 가서 그런 수술을 받자면 500만딸라면 어떨가, 500만원 인민페로는 수술비용이 어림도 없었어. 우리는 모든걸 포기했어. 우리의 목숨을 구해준 옆집에 새집을 사주고 나머지는 모두 복수비용으로 쓰기로 했어.” 석달후, 그녀들은 끝내 금실의 남편을 찾아냈다. 그자를 붙잡은것은 우연한 일이였다. 다섯 녀자는 금실의 남편 청수를 찾으려고 다시 A시로 들어갔다. 거기서 병원의 미스 정을 찾아갔더니 사촌오빠가 방금 귀국했다고 알려주었다. 그 말을 들은 다섯 녀인은 희망이 보이는것 같아서 몹시 기뻤다. 금실이가 미스 정에게 그 사촌오빠를 만나게 해달라고 졸라댔다. 미스 정이 전화를 걸더니 1시간후에 신세대다방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고 알려주었다. 다섯 녀인은 미스 정과 함께 신세대다방으로 갔다. 한참 기다리니 미스 정의 사촌오빠가 나타났다. 간단한 인사를 나누자 사촌오빠가 입을 열었다. “정순(미스 정)이한테서 들어서 그쪽 사연을 대략 알고있습니다. 청수와는 가까운 친구는 아니고 친구를 통해 가끔씩 만나는 사이였습니다. 청수가 그런 짓을 했다니…친구이지만 용서가 안됩니다. 그런 친구를 둔게 부끄럽습니다.” 미스 정이 사촌오빠의 어깨를 탁 치면서 말했다. “오빠는 그저 그 친구가 어디 있는지만 말해주면 되오. 어서 이 불쌍한 언니들을 위해 그 친구의 행방을 알려주오.” 다섯 녀인도 간절한 눈길로 사촌오빠의 입만 바라보았다. 사촌오빠는 담배를 꺼내 피우려다가 녀자들만 있는것을 보고 불을 붙이지 않고 손에 들고만 있었다. 그는 한참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친구를 배반하는 일이지만 경우가 경우이다보니 말해주겠습니다. 제가 청수와 가장 가까운 친구를 통해 알아보았는데 청수는 그 동안 늘 노래방, 안마원에 드다들면서 돈을 물쓰듯 썼답니다. 그러다가 도박판에서 돈을 다 잃고 빚쟁이들을 피해 지금은 B시의 아리랑다리 서쪽 강뚝에서 두번째에 위치한 사촌형의 아빠트에 숨어있는다고 하더군요. 그 사촌형부부는 모두 일본에 나가고 비여있는 집이라고 들었습니다.…” 사촌오빠는 구체적인 집의 위치도를 그려주면서 5층인것은 알지만 어느 집인것은 모른다고 했다. 다섯 녀인은 미스 정과 사촌오빠에게 고맙다는 인사로 맥주대접을 한후 B시로 달려갔다. 아리랑다리 서쪽 강뚝에 있는 그 아빠트를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그 아빠트에는 7층아빠트인데 5층이 10호나 되였다. 다섯 녀인은 한 사람이 두집씩 맡아가지고 문을 두드리면서 주인을 찾았다. 그 아빠트는 초인종이 없었다. 은실이가 3단원 5층 1호의 문을 두드리자 한 뚱뚱한 중년 녀인이 나왔다. 은실이는 청수의 사촌형이라는 그 부부의 이름을 대면서 어느 집에 사느냐고 물었다. 중년 녀인은 그런 사람을 모른다고 했다. 은실이는 미스 정의 사촌오빠한테서 들었던 대로 사촌형부부의 외모특징을 설명하면서 지금은 일본에 나갔다고 했다. 그제야 중년 녀인은 그 집에 바로 곁에 있는 2호집이라고 하면서 2호집에 지금은 주인의 사촌동생이라고 하는 한 청년이 혼자서 살고있다고 알려주었다. 금실이가 휴대하고 다니던 청수의 사진을 보여주니 중년 녀인은 바로 그 청년이 맞다고 했다. 은실이는 기뻐서 다른 자매들에게 찾았다고 전화를 걸었다. 얼마후 다른 네 녀인이 은실이가 있는 5층으로 달려왔다. 그녀들은 간단히 상의한후 2호집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응답이 없었다. 두번이나 더 두드리며 문에 귀를 대고 집안의 동정을 살폈지만 인기척이 없었다. “집에 없는거야.” “어디 갔을가?” “다른데 달아난건 아니겠지?” “저녁에 다시 와 보자.” 다섯 녀인은 돌아가 저녁을 먹은후 다시 와서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여전히 응답이 없었다. 금실이가 휴대폰을 꺼내 미스 정의 사촌오빠가 알려준 청수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여보세요.” 청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금실이는 온몸의 피가 끓어오르는것을 느꼈다. 그녀는 청수가 자신의 목소리를 알아들을가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네가 다시 전화해봐라.” 금실이가 옥실이한테 여차여차 하라고 시켰다. 옥실이가 청수한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청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옥실이는 침착하게 물었다. “전 위생비 받으러 왔는데 주인이 없어서…언제쯤 올수 있는데요?” “뭐? 위생비? 그런데 그쪽이 어떻게 내 전화번호를 알지? 도대체 누구야?” 청수가 화를 내더니 전화를 끊어버렸다. 다시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다섯 녀인은 한시간동안 더 기다리다가 려관으로 돌아갔다. 이튿날 아침 일찍 달려와 문을 두드려보았지만 역시 사람이 없었다. 련속 사흘이나 진을 치고있으면서 기다렸으나 청수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나흘째 되는 날에 뜻밖에도 청수가 거주한다고 하던 2호집에 웬 중년 남자가 이사왔다. 마침 현장에 있던 순실이가 전화를 해서 동실이를 제외한 다른 녀인들이 모두 달려왔다. 동실이는 설사를 해서 혼자서 려관에 남아있었다. 금실이가 중년 남자에게 물었다. “이 집에 살던 청년은 어디로 갔어요?” “아, 그 청년 말이요? 그는 마작판에서 늘 함께 놀던 청년이요. 요즘 내가 살던 집을 허물게 되였는데 그 청년이 이 집을 나에게 세를 주었소.” “이 사람이 맞나요?” 금실이가 청수의 사진을 꺼내 보여주니 중년 남자는 머리를 끄덕이였다. “이 청년이 맞소.” “그럼 이 청년은 어디로 갔어요?” “그 청년은 지금 여럿이 함께 거주하는 눅거리 세집에 들어있소.” “그 세집은 어디 있어요?” 중년 남자는 웬 일로 청수를 찾느냐고 되물었다. 금실이가 친척이라고 하자 중년 남자는 이상한 눈길로 바라보더니 모른다고 하면서 알려주지 않았다. 네 녀인은 려관으로 돌아갔다. “이제 어떻게 할가?” 려관방에서 다섯 녀인은 얼굴을 맞대고 청수의 거처를 찾을 일에 대해 상의했다. “먼저 그 중년 남자를 미행하여 마작을 노는 장소를 알아내자. 그 곳에 꼭 청수가 나타날거야.” 금실이가 말했다. “마작장소를 알아내면 동실이가 마작판에 들어가 놀음을 놀면서 청수가 나타나는가를 살펴봐라. 중년 남자가 동실이의 얼굴을 모르기에 의심하지 않을거야.” 이튿날부터 다섯 녀인은 중년 남자를 미행하여 그가 마작을 노는 장소를 알아냈다. 그 다음날부터 동실이가 마작판에 나타났다. 동실이는 이 동네에 갓 이사왔다고 하면서 마작판에 붙었다. 마작을 놀면서 남자들을 살펴보니 그 속에 사진으로 봤던 청수가 있었다. 동실이는 일부러 청수와 함께 마작을 놀면서 그와 접촉했다. 동실이는 일부러 남편이 한국에 나가 혼자 사는 녀자라고 자신을 소개하면서 청수에게 추파를 보냈다. 그리고 마작이 끝난후에는 함께 맥주 마시러 가자고 꼬셨다. 청수는 마른 침을 꼴깍 삼키면서 따라 나섰다. 맥주집에서 맥주 서너병 마시자 청수는 화장실로 간다고 일어섰다. 동실이는 청수가 화장실로 간 사이에 청수의 맥주잔에 수면제를 탔다. 배설하고 돌아온 청수는 아무것도 모르고  수면제를 탄 맥주를 꿀꺽꿀꺽 잘도 마셔댔다. 그리고 욕정이 불타는 색마의 눈길로 동실이를 바라보다가 결국 잠들고말았다. 동실이는 밖에서 대기하고있던 네 녀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섯 녀인은 자는 청수를 부축하여 맥주집에서 나왔다. 그녀들은 훔쳐온 7인용 승용차에 청수를 싣고 원 거주지 외딴집이 있는 시골로 달려갔다. 도중에 그녀들은 돼지처럼 쿨쿨 잠이 들어 아무것도 모르는 청수의 손발을 꽁꽁 묶어놓았다. 그녀들이 외딴 초가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새날이 밝아올 무렵이였다. 그녀들은 두손과 두발을 꽁꽁 묶어놓은 청수를 외딴집의 나무기둥에 매놓았다… 잠에서 깨여난 청수는 눈앞에 벌어진 광경에 깜짝 놀랐다. 자신은 손발이 꽁꽁 묶여있는데 눈앞에 귀신같은 다섯 녀인이 무섭게 쏘아보고있었기때문이다. 이때 다섯 녀인은 모두 가면을 벗은 모습이였다. “너희들은 귀신이냐? 사람이냐?” 다섯 녀인은 아무말도 하지 않고 청수를 쏘아보기만 했다. 청수는 공포에 몸을 떨기 시작했다. “여기가 어딥니까? 당신은 누구신지?” “우린 복수의 화신이다!” 은실이가 청수의 귀쌈을 후려치며 말했다. 금실이도 청수의 귀쌈을 갈기면서 증오에 불타는 눈길로 쏘아보았다. “청수, 너 네 죄를 아느냐?” 청수는 한 녀인이 자기의 이름까지 부르자 더욱 놀라서 몸을 화들화들 떨었다. “다…당신들은 마…마작빚을 받으러 온겁니까? 내 꼭 갚겠으니 요…용서해주세요.” “이놈아, 아직도 네가 지은 가장 큰 죄가 무엇인지 모르겠느냐? 난 네가 불에 태워죽이려고 했던 금실이다! 그리고 이 앤 내 동생 은실이고…” “금실이라구? 귀…귀신이야!” 청수가 공포에 온몸을 와들와들 떨었다. 금실이와 은실이가 번갈아 청수의 귀쌈을 후려지며 소리질렀다. “이 놈아, 똑똑히 보아라! 우린 사람이다!” “너희들은 죽지 않은거냐?” “넌 우리가 죽기를 바랐겠지?” “아, 요…용서해주오. 금실이…제발 용서해주오.” “뭐? 용서해달라구?” “그래도 죽지 않고 이렇게 살아있지 않소? 그러니 용서해주오. 제발…” “이 놈아! 넌 그래 우리가 이런 모습을 하고있는게 살아있는거라고 생각하느냐?” 곁에 있던 동실이가 참다못해 한마디 했다. “이건 죽기보다 못한 모습이야! 금실언니와 은실언니는 살아있어도 살아있는게 아니야! 오직 네 놈에게 복수하기 위해 여태까지 살았던거야!” “그래 우린 오늘을 위해 버텨왔다! 오늘의 복수를 위해 살아왔다!” 금실이가 은실이가 이구동성으로 고함쳤다. 금실이는 은실이를 불러 뭐라고 상의하더니 저녁에 복수행동을 시작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금실이와 은실이는 날이 저물어오자 옥실이와 순실에게 술과 안주를 사오라고 심부름을 시켰다. 옥실이와 순실이가 나가자 금실이와 은실이는 또 동실에게 음료와 빵을 더 사오라고 돈지갑을 주었다. 동실이는 급히 밖으로 나왔다. 여기 두메산골에는 식품상점이 한집뿐이였는데 외딴 초가집에서 그곳까지 가자면 30분가량 걸어가야 했다. 동실이는 빨리 걸었기에 식품상점에 도착했을 때는 옥실이와 순실이를 따라잡았다. 세 자매는 식품상점에서 이것저것 사다가 금실이와 은실이가 준 돈지갑에서 종이쪽지를 발견했다. “아니, 이건 뭐야? 큰언니가 쓴거잖아…” 세 자매는 황급히 쪽지를 읽어내려갔다.   동실아, 옥실아, 순실아! 너희들의 복수는 통쾌하게 끝났고 이제 나와 은실이의 복수만 남았구나. 원쑤놈은 이미 잡아왔으니 복수는 우리 두 사람의 손으로 완성하려고 한다. 나와 은실이는 불속에서 이미 죽은 몸, 오직 오늘의 복수만을 위해 살아왔다. 그러니 복수하는 순간 우리도 갈것이다. 활활 타는 불속에서 원쑤놈을 보내며 우리도 함께 가려고 한다. 불쌍한 동실아, 옥실아, 순실아! 너희들은 살아야 한다. 나머지 돈을 나눠 가지고 살길을 찾아가거라. 안녕히!   “언니!” “언니!” “언니…” 세녀인은 정신없이 부르짖으며 상점문을 열고 나와 쏜살같이 달려갔다. 그녀들은 오금에서 불이나게 외딴 초가집을 향해 달려갔다. 그쪽에서 시꺼먼 연기와 뻘건 불길이 하늘높이 솟아오르는것이 눈앞에 안겨왔다. 세녀인은 가슴이 미여지는것 같았다. 그녀들은 주먹을 쥐고 허둥지둥 뛰여갔다. 불길이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녀들이 목적지에 다달았을 때는 외딴 초가집이 반나마 타들어가고있었다. 벌써 불구경을 나온 사람들이 적지 않게 모여있었다. 외딴집이여서 불길이 다른 곳으로 번져갈 념려가 없었기에 누구도 나서서 불을 끄려고 하지 않았다. 또 불길이 워낙 기세가 사나워서 안에 있는 사람을 구하려고 선뜻 나서는 사람도 없었다. 불길은 여전히 세차게 타오르고있었다. 활활 밤하늘을 태우면서 세차게 솟아오르는 불길, 그것은 두 녀인의 비장한 복수의 불길이였다. “언니야!” “언니야…!” “언―니―야―” 세녀인은 목놓아 울면서 피타게 불렀다. 울다가 부르고 부르다가 울고…외딴 초가집이 다 타버렸을 때는 구경군들도 다 흩어지고 그녀들도 지쳐버리고 말았다. 기구한 운명이 하나로 이어져 마음을 함께 해온 다섯 녀인! 이제 그녀들은 셋밖에 남지 않았다. 가슴속에 깊은 원한을 품은 그녀들은 복수, 오직 복수만을 위해 살아왔고 다른 길이 없었다. 지금은 원쑤놈들을 다 잡아내여 복수를 마쳤건만…결국 복수의 끝은 이렇단 말인가? 세 녀인은 한줌의 재로 타버린 두 언니께 절을 올리고 나서 눈물을 훔치며 길을 떠났다. 워낙 도시보다 일찍 잠든 산골마을은 고요한 정적속에 잠겨들고 풀벌레들만이 이 밤에 그녀들에게 구슬픈 노래를 불러주고있었다. 캄캄칠야의 오솔길을 한걸음 한걸음 더듬어가던 그녀들은 갑자기 주춤거렸다. 어디로 갈것인가? 눈앞이 어둡고 길은 보이지 않았다. (2003년)    
218    중편소설 추녀결사대 (3) 댓글:  조회:3305  추천:1  2014-10-04
중편소설 추녀결사대 김희수 3. 피값은 피로 갚다   금실이가 미리 준비해둔 류산병을 동실에게 넘겨주며 말했다. “동실아, 복수할 때가 왔다. 어서 통쾌하게 복수해!” 류산병을 받아쥔 동실의 손이 떨렸다. 동실은 살기띤 눈길로 범호를 쏘아보았다. 범호의 얼굴이 송장처럼 퍼렇게 질렸다. 동실이가 병마개를 열자 등골이 오싹해진 범호는 머리를 조아리며 빌었다. “소…소연이…제…제발…옛정을 생각해서라도 요…용서해주오!” 순간 동실의 눈앞에는 범호와 아기자기한 사랑을 주고받던 아름다운 지난날들이 파노라마처럼 떠올랐다. 그녀는 손맥이 풀리면서 류산병을 방바닥에 놓아버렸다. 금실이가 황급히 류산병을 주어서 동실에게 다시 쥐여주며 말했다. “동실아, 마음이 약해져선 안돼! 어서…” “언니, 난 차마 못하겠소.” 그러자 옥실이와 순실이가 격분해서 말했다. “동실언니, 언니가 저 새끼한테 어떻게 당했는데…그걸 벌써 잊었소?” “동실언니, 잔인한 자에게는 잔인하게! 그자에게 어떻게 당했으면 당한만큼 돌려줘야 하오!” 은실이도 거울을 들고와서 동실의 얼굴을 비춰보이며 말했다. “저 자가 널 이지경으로 만들었는데 그래 복수하지 않겠단 말이냐?” 거울속에 비친 자신의 귀신같은 모습을 본 동실이는 다시 류산병을 받아쥐였다. 범호를 쏘아보는 그녀의 두눈에서 증오의 불길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사나운 기세로 달려드는 동실이를 본 범호는 몸에서 솜털까지 곤두서는듯한 전률을 느꼈다. 동실이는 이를 악물고 류산을 범호의 얼굴에 확 끼얹었다. “아악!” 범호의 비명소리가 길게 울려퍼졌다. 그녀들은 범호의 눈을 가리고 입을 틀어막은후 밤중에 그를 차에 실어다가 도시의 한복판에 던져버렸다. 그리고 돌아와서 다음의 복수계획을 토론했다. 금실이가 1인자답게 지시했다. “동실의 원쑤를 갚았으니 다음은 옥실과 순실의 복수를 할 차례야. 순실이가 그 련분이란 여우 갈보년의 거처를 알아냈다고 했지? 이제 우리 더 자세히 정찰한후 그 갈보년의 뒤를 미행하는거야. 그러면 혹시 그 두 망나니를 찾아낼지도 몰라.” 이튿날, 추녀결사대는 얼굴에 실리콘가면을 쓰고 도시로 출발했다. 그날은 헛탕을 치고 려관에서 하루밤을 묵었다. 다음날에 그녀들은 두개소조로 나누어 1소조는 동실이와 순실이가 오토바이를 몰고 1호목표인 련분이란 갈보년의 거처를 정찰하고 2소조는 금실이, 은실이, 옥실이가 승용차를 몰고 크고 작은 술집들을 돌면서 2호목표인 코빨갱이와 애꾸눈이의 종적을 정찰했다. 동실이와 순실이는 오래도록 련분의 거처를 맴돌며 감시했다. 오전 11시쯤 돼서 련분이가 문을 열고 나왔다. 시체 옷을 입은 그녀는 오리궁둥이를 흔들며 걸어가더니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누구한테서 온 전화인지 경쾌한 음악이 울려나왔다. “와이―어머, 장대장이세요? 오대장도 함께 있다구요? 네,네, 장미술집으로 오라구요? 네, 곧 갈게요.” 련분의 목소리가 워낙 높아서 오십보 뒤에 있는 동실이네 귀에까지 똑똑히 들렸다. “저 여우 갈보년이 또 꼬리질하는군! 장대장이요, 오대장이요 하는게 그 사람가죽을 뒤집어 쓴 두마리 승냥이 코빨갱이와 애꾸눈이 틀림없어.” 련분이를 쏘아보는 순실의 눈에 불이 철철 흘렀다. 그녀는 련분의 꼬임에 들어 신세를 망치던 그날을 영원히 잊을수 없었다. 동갑나이인 설매와 홍매는 두메산골인 가난한 홍북촌에서 살았다. 열일곱살 나던 해 그녀들은 돈을 많이 벌어보겠다고 도시로 진출했다. 처음에는 남의 가게에서 옷을 팔아주다가 한 고향사람인 련분이를 만났다. 련분이는 몹시 반가워 하며 그녀들을 데리고 가서 자기의 집을 구경시켰다. 120평방메터가 되는 호화로운 아빠트였는데 가전제품이 구전했다. “어머, 이게 언니집 맞아요?” “언닌 어느새 이 많은 돈을 벌었나요?” 설매와 홍매는 부러운 눈길로 방안을 둘러보았다. 련분이가 호들갑스럽게 떠들어댔다. “이건 아무것도 아니야. 도시에선 돈을 쉽게 벌수 있어. 너들도 몇년만 잘하면 이런 집을 얼마든지 살수 있어.” “우린 한달에 500원밖에 못받아요. 옷을 많이 팔아야 700원을 준대요. 그리고 가정부로 들어가도 500원이상은 못받는대요. 그 돈으론 먹고 쓰고나면 없는데 어느 천년에 이런 집을 사겠어요?” “남의 가게를 봐줘서야 무슨 출로가 있겠니? 내가 알고있는 몇몇 술집이 있는데 그런 곳에 접대원으로 들어가면 한달에 3000원을 받는단다. 그외 팁으로 들어오는 수입은 그보다 몇배나 더 많단다.” “어머, 그게 술집아가씨(三陪小姐)가 아니요? 그런 일을 어떻게 하오?” 설매와 홍매가 놀라서 펄쩍 뛰자 련분이는 간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지금 일하고있는 술집은 그런 곳이 아니야. 거긴 국가에서 꾸리는 5성급호텔인데 거기에 다니는 손님들은 아주 문명하단다. 그리고 국가에서 인정하는 경비일군들까지 있어서 아주 안전하단다.” “그런곳에 가면 손님들과 같이 술을 마셔야 되는게 아니오? 그런 곳엔 별의별 손님들이 다 있다는데 얼마나 무섭겠소? 그러다가 잘못되면…” 설매와 홍매가 못미더워하자 련분이는 다시 간살을 떨었다. “어마, 너넨 정말 촌뜨기여서 모르는구나. 거기의 접대원들은 술상곁에 서서 가만있다가 손님들의 술잔이 비면 곧 다가가서 술만 부어주면 돼. 또 거기의 손님들은 모두 점잖고 문명하여 접대원들에게 다른 수작은 절대 하지 않거든. 또한 거기에 오는 손님들은 대부분이 외국상인들이라 통이 커서 팁도 두두룩하게 많이 주거든.” “정말 그렇게 깨끗한 술집이 있소?” “거긴 그렇게 돈을 많이 번다는데 아무나 못들어가겠지?” 설매와 홍매는 귀가 솔깃했다. 그녀들의 마음이 움직이는것을 본 련분이는 요사스럽게 눈알을 굴리다가 교활하게 웃으며 말했다. “거기에 들어가자면 대학에 붙기만 더 힘들단다. 나도 그 술집의 총경리와 친분이 있는 우리 삼촌을 통해서 들어갔지. 너들이 들어갈 생각이 있다면 내 연줄을 놓아줄게.” “아이, 정말이요? 깨끗하고 돈을 많이 벌수 있다면 우린 들어가겠소.” “언니, 우릴 위해 힘써 주오!” 설매와 홍매는 손님들에게 술만 부어주는 접대원을 TV드라마에서 보았던지라 련분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귀가 솔깃하여 자기들을 술집에 들어가게 해달라고 청을 들었다. 며칠후 련분이는 설매와 홍매를 백조술집에 데리고 가서 총경리에게 소개했다. 총경리는 두 처녀의 아래우를 쭉 훑어보더니 만족의 미소를 지으며 그 즉시로 출근하라고 했다. 두 처녀는 너무도 기뻐서 어쩔줄을 몰랐다. 하지만 그녀들은 자신들이 련분의 꼬임에 들어 악마의 소굴에 빠져들었을 줄을 어찌 알았으랴! 련분의 말대로 백조술집은 경비일군들이 지켜주어 아주 “안전”했다. 하지만 경비일군들은 손님들의 성희롱으로부터 접대원들의 인신안전을 지키는것이 아니라 접대원들을 외부로 도망치지 못하도록 지키는 역할을 하고있었다. 경비일군들은 설매네를 그곳에서 먹고 자게하면서 술집문을 한발작도 나서지 못하게 지켰다. 그리고 강박적으로 손님을 받도록 명령했다. 원래 백조술집은 지하기생집이였던것이다. 설매와 홍매는 자신들이 암흑한 운명에 처한것을 몹시 두려워했으나 그들에게 순종하지 않았다. 그녀들은 처음에는 련분이도 이런 사실을 모르는 줄로 알았다. 련분의 삼촌이 총경리와 친분이 있다니 련분이를 만나면 곧 이곳에서 풀려날줄로 알았다. 그래서 련분이를 만나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녀들을 지키던 경비대장이라는 애꾸눈이와 코빨갱이가 빙그레 웃더니 한시간후 련분이를 데리고 왔다. 두 처녀는 련분에게 매달려 울면서 자신들의 처지를 하소연했고 어서 삼촌에게 부탁해서 자기들을 이곳에서 나가게 해달라고 애걸했다. 그런데 련분이가 도리여 그녀들을 구슬리는것이 아닌가. “일이 이렇게 된바엔 어쩌겠니? 마음을 안착하고 잘해봐라. 손님을 받는 일이 처음엔 좀 어렵지만 습관되면 여간 즐거운 일이 아니야. 이 손님 저 손님에게서 목돈을 받는 재미란…” “언니! 그게 무슨 말이요? 우리더러 몸을 팔란 말이요? 언닌 처음부터 알고 우릴 이 매음소굴에 빠뜨린게 아니오?” 설매와 홍매는 너무도 놀랍고 분하고 격분하여 마구 소리질렀다. “언닌 도대체 우리와 무슨 원쑤진 일이 있어서 우릴 이런 구렁텅이에 빠뜨려놓고 우리 일생을 망치게 한단말이요?!” 그러자 련분이는 제쪽에서 도리여 눈살이 꼿꼿해서 쏘아붙였다. “내 너넬 위해 치부할 기회를 마련해주었는데 감사하단 말은 못할망정 은인을 욕하다니? 여길 구렁텅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여긴 녀자들이 큰돈을 벌수 있는 활무대야!” 설매는 너무도 어이없어 말이 나가지 않았다. 홍매가 격분해서 따지고 들었다. “이제보니 언닌 이런데서 몸뚱아리를 팔아서 치부했겠구만. 우리더러 그런 더러운 돈을 벌라구? 언닌 제걸 팔다못해 이젠 뚜쟁이질까지 하는구만.” “뭐? 뭐?” 련분이는 얼굴색이 퍼래졌다가 갑자기 능청스럽게 웃으며 뇌까렸다. “욕하겠으면 싫컷 욕해라. 너넨 지금은 날 욕하겠지만 앞으로 돈을 많이 벌게되면 나한테 감사드릴거야. 몸을 파는게 뭐 나쁜 일이야? 몸을 판다고 달라지는것도 없는데. 나를 봐라. 지금까지 천명이나 되는 남자들과 그 일을 했지만 여전히 처녀같잖아? 그리고 숱한 남자들이 나하고 결혼하지 못해 안달아하고있어. 그중엔 사장님도 있고 국장님도…” “닥쳐!” 홍매가 듣다못해 련분의 말을 탁 자르며 고함쳤다. “더러운 여우 갈보년아! 우리가 너같은줄 아느냐? 우린 널 공안국에 고발할테다!” “고발?” 련분이가 갑자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으하하!” 그러다가 련분이는 송곳눈으로 홍매네를 쏘아보며 을러멨다. “이년들이 하늘 높은줄 모르는구나! 여기가 어디라고 큰소리야. 여기에 들어오면 순종하는 길밖에 없어. 깨끗한 몸으로 여길 나가려니 꿈도 꾸지 말라. 남자들을 많이 받아 술집에 만족할만한 돈을 벌어줘야 나처럼 자유를 얻을수 있는거야! 부질없는 반항은 하지 말고 고분고분 순종해라. 알겠느냐?” “퉤! 더럽다!” “이 개ХХ같은 년아!” 설매와 홍매가 다투어 욕설을 퍼붓자 련분이는 또 한번 너털웃음을 터뜨리더니 코빨갱이와 애꾸눈이를 보고 말했다. “이년들이 아무래도 먼저 Х맛을 먹여줘야 정신을 차리겠는 모양이예요. 장대장과 오대장네 먼저 이년들의 딱지를 떼줘요. 장대장과 오대장네는 정말 복이 있어요. 숫처녀 맛을 보게 됐으니. 으흐흐!” 련분이가 나가자 애꾸눈이와 코빨갱이가 굶주린 늑대처럼 사납게 달려들었다. 한놈이 하나씩 맡아가지고 물고 빨고 만지고 하며 지랄발광을 해댔다. 그녀들은 옷이 찢겨지고 벗겨져나갔지만 젖먹던 힘을 다 내서 반항했다. 두 망나니는 근 반시간동안이나 땀을 뻘뻘 흘리며 성폭행을 시도했으나 힘만 뺐을뿐 성공하지 못했다. 몇번이나 거듭 달려들어 성난 물건을 집어넣으려고 시도했으나 그녀들이 두 다리를 꼭 오무리고 결사적으로 반항하는 바람에 번마다 실패하고 말았다. 그녀들의 손톱에 낯짝까지 할퀴운 두 망나니는 분하여 씩씩거리며 고아댔다. “이 씹팔년들이 감히 반항해?! 똥매를 맞아봐야 제정신이 들겠는 모양이구나!” 두 망나니의 주먹과 발길이 비발처럼 날아왔다. 그녀들이 아픔을 견디지 못해 고개를 숙이고 두 손으로 얼굴을 막자 두 망나니는 구두발로 그녀들을 마구 짓밟아놓았다. 그녀들의 얼굴은 피투성이 되였고 팔, 다리, 가슴은 퍼렇게 멍들었다. 두 놈은 때리기에 지쳤는지 매를 잠간 멈추고 뇌까렸다. “야, 이 간나들아! 손님을 받겠니? 안받겠니?” 그녀들은 이를 꼭 악물고 두 눈을 부릅뜨고 두 망나니를 쏘아볼뿐 대답하지 않았다. “이 간나들이?!” 화가 치밀어오른 두 망나니는 바줄을 가져와서 그녀들을 알몸 그대로 꽁꽁 묶어놓았다. 그리고는 날카로운 칼끝을 그녀들의 얼굴에 바싹 들이대며 을러멨다. “우리 말을 듣겠니? 안듣겠니? 말을 듣지 않으면 네년들의 낯짝에 장기판을 그어줄테다!” “녀자에게 가장 중요한것은 얼굴이야. 그까짓 몸뚱아리야 판다고 뭐 다스니? 우리한테 먼저 준 다음 손님들에게 개방해라. 그러면 술집도 돈을 벌고 너네도 돈을 벌고 누이 좋고 매부 좋고 다 좋지 않니? 고분고분 손님을 받으면 우린 너네를 보호해 줄거고 그렇지 않고 말을 듣지 않으면 너네 얼굴을 망가뜨려 놓겠다!” 그녀들은 등골이 서늘해나며 사지를 벌벌 떨었다. 두 망나니는 동시에 칼끝으로 그녀들의 얼굴을 살짝 긁었다. 그녀들의 볼에서 시뻘건 피가 흘러나왔다. 그녀들은”아악!”하고 비명을 질렀다. “이 간나야, 말을 듣겠니? 안 듣겠니? 우리하고 한판 하겠니? 안 하겠니?” “우리하고 재미있게 놀면 이만해두고 그렇지 않고 계속 반항하면 얼굴에 바둑판을 새겨놓겠다!” 두 망나니는 칼끝에 묻은 피를 그녀들에게 보이며 위협했다. 그녀들은 가슴속에서 치밀어오르는 울분을 참을수 없어 꽥 소리를 질렀다. “이 인간망나니들아! 죄를 저지르면 벌을 받는 법이다. 당장 손을 멈추고 우리를 풀어달라!” “죄에 죄를 더하지 말고 이만 그쳐라! 공안국에 고발할테다!” 두 망나니는 너털웃음을 웃었다. “으하하…고발하겠다구? 고발하겠으면 고발해라. 이 간나들아, 우리가 무서워할줄 아느냐?” “이 간나들이 정말 악질이구나! 네년들이 어느만큼 견디는가 어디보자.” 두 망나니는 뭐라고 수근거리더니 담배에 불을 붙여 꼬나물었다. 그리고 악마처럼 웃으며 말했다. “으흐흐…이년들이 이쁜 젖탱이를 달았구나. 이 젖탱이를 더 이쁘게 미용해줘야지.” “그래, 젖탱이부터 미용해주자구. 담배불로 말이야! 으흐흐…” 두 망나니는 담배불을 그녀들의 젖꼭지에 갖다댔다. “아악!…” 그녀들의 입에서 자지러진 비명소리가 터져나왔다. 하지만 잔인무도한 두 망나니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그녀들의 젖통을 담배불로 원을 그어가면서 지져놓았다. 처절한 비명소리...살타는 냄새...그녀들이 기절해넘어가자 두 망나니는 술을 마시며 그녀들이 깨여나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그녀들이 정신을 차리자 두 망나니는 계속해서 야수적만행을 저질렀다. 두 망나니는 칼로 그녀들의 얼굴을 가로세로 마구 “X”자와 “#”자를 그어서 보기에도 끔찍한 생채기를 만들어놓았다. 그녀들은 참을수 없는 모진 고통에 신음하면서 욕설을 퍼부었다. “이 악독한 놈들아, 네놈들은 좋은 끝장이 없을게다!” “이 살인악마들아, 네놈들은 천벌을 받을게다!” 두 녀인의 얼굴에서 시뻘건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피가 많이 흐르자 두 망나니는 그녀들의 얼굴에 지혈면을 발라주고나서 악마처럼 웃어댔다. “으흐흐…으흐흐…이 간나들이 아직도 입은 살아있구나.” “안되겠어. 아직도 모자란가봐. 웃입대신 아래입을 다스려놓아야지.으흐흐…” 두 망나니는 어디론가 나갔다가 한참 후 당구 큐를 하나씩 들고왔다. 그들은 잔인하게 당구 큐를 그녀들의 질속에 마구 쑤셔넣었다. 그리고나서 음부마저 담배불로 지져놓고서야 포악한 행위를 그만두었다…   “순실아, 빨리! 빨리…” 동실이가 재촉해서야 순실이는 몸서리치는 추억에서 깨여났다. 동실이가 순실의 어깨를 쳤다. “저 여우 갈보년이 택시를 잡아탔어. 우리도 빨리…” 동실이와 순실이는 재빨리 오토바이를 몰고 련분이가 탄 차의 뒤를 쫓았다. 그녀들은 뒤를 쫓는 한편 금실이네한테 핸드폰으로 1호목표가 장미술집에서 2호목표를 만나기로 약속했다고 통지했다. 금실이네가 먼저 장미술집에 도착했다. 술집안을 기웃거리며 찾았으나 2호목표는 보이지 않았다. 그녀들은 단간방들을 기웃거렸다. 문을 닫은 단간방들을 하나하나 열고 들어가서 살펴보다가 방을 잘못 찾은체하면서 도로 나와버리곤 했다. 12층의 맨마지막 방을 열고 들어갔던 옥실이는 온몸이 경직하는듯 했다. 바로 눈앞에 코빨갱이와 애꾸눈이 있었던것이다. 술상에 앉아 료리가 들어오기를 기다리고있던 녀석들은 지금은 옥실이로 이름을 바꾼 설매의 얼굴을 못알아보고 접대원으로 알았는지 “넌 새로온 애냐? 료리가 왜 이리 늦니? 빨리 좀 가져와!”하고 재촉했다. 원쑤를 눈앞에 둔 옥실이는 가슴에서 복수의 피가 끓어올랐다. (이런 죽일 놈들! 얼마나 찾아 헤맸는데 이제야 만났구나! 아아, 이 원쑤를 어떻게 갚나?) “아니, 이년 뭐해? 빨리…” 녀석들이 재차 재촉하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옥실이는 “네네…”하고 물러나왔다. 그녀는 금실이와 은실에게 “2호목표가 안에 있어요.”하고 낮은 소리로 알려주었다. 바로 그때 웬 녀인이 핸드폰으로 통화하면서 이쪽으로 걸어오고있었다. 그녀를 바라보던 옥실이가 주먹을 불끈 쥐더니 “1호목표예요”하고 나직이 말했다. 그녀들은 얼른 자리를 피하면서 몰래 련분이를 감시했다. 련분이가 2호목표가 있는 방으로 들어가고 련분의 뒤를 따라 온 동실이와 순실이도 뒤따라 나타났다. 그녀들 다섯은 뭔가 의논하더니 옥실이와 은실이가 남아서 감시하고 나머지는 재빨리 목표가 들어간 옆방에 자리잡고 앉아서 접대원을 불러 술과 안주를 시켰다. 복도에서 서성거리며 감시하고있던 옥실이와 은실이는 한 접대원이 료리를 들고 나타나서 목표가 들어간 방에 들어가려고 하자 얼른 막아서서 료리를 나꿔챘다. 그러자 접대원이 조급해서 말했다. “아니, 이건 손님들의 료리가 아니예요. 손님들이 요구한 료리는 좀 더 기다려야 해요. 들어가서 내심하게…” “우린 지금 급해서 그래요. 외국에서 오신 귀빈을 모셨는데 좀 우대해줘요.” 옥실이와 은실이는 접대원의 손에 50원짜리 인민페를 쥐여주며 구슬려댔다. 그러자 접대원은 좋아라고 물러났다. 옥실이와 은실이는 재빨리 금실이네가 있는 방으로 들어가 료리에 몽혼약을 섞어가지고 다시 나와서 곧바로 목표가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련분이와 뭔가 수근거리고있던 애꾸눈이가 그녀들이 들어서는것을 보고 욕설을 퍼부었다. “씹팔, 왜 이리 늦은거야! 빨리 갖다 놔!” “네네, 늦어서 미안해요.” 옥실이와 은실이가 일부러 허리를 곱실거리며 료리를 술상에 갖다 놓았다. 애꾸눈이, 코빨갱이, 련분이 셋은 옥실이를 알아보지 못했다. 은실이는 손에까지 화상을 입어 보기흉한 상처가 남았기에 장갑을 끼고있었다. 그것을 본 코빨갱이가 이마살을 찌프리며 소리쳤다. “아니, 이년이 장갑은 왜 끼고 지랄이냐? 우리한테서 사스가 옮을가봐 그러냐, 조류독감이 전염될가봐 그러냐? 엉?!” “미…미안해요. 당장 나가서 벗겠어요.” 옥실이와 은실이는 허리를 한번 더 굽실거리고 나서 급히 물러나왔다. 두 녀인은 급히 카운터에 가서 두방의 술값을 물고 슬며시 금실이네가 있는 옆방으로 들어가서 의미있는 눈짓을 해보였다. 다섯 녀인은 가만히 숨을 죽이고 옆방의 동정에 귀를 기울였다. 한참 수군수군하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이윽고 잠잠해졌다. 긴장하게 전투준비를 하고있던 그녀들은 벌떡 일어서서 옆방으로 뛰여들어갔다. 세 년놈은 약기운이 몸에 퍼졌는지 보기좋게 쓰러져있었다. 그녀들은 재빨리 행동했다. 힘이 센 금실이가 체격이 왜소한 련분이를 업고 은실이와 옥실이가 애꾸눈이를, 동실이와 순실이가 코빨갱이를 부축해가지고 나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갈 때까지 눈치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주치는 사람들은 술에 취한 사람을 부축해가는거라고 여기고 자기와는 상관없는 일이라는듯 본체만체하고 지나갔다. 그녀들은 죽은 돼지같은 세 년놈을 간신히 끌고 술집앞에 세워놓은 자기들이 몰고 온 승용차로 다가갔다. 그녀들은 힘을 합쳐 승용차의 뒤좌석에 세 년놈을 처넣었다. 금실이가 운전석에 올라 차를 몰고 옥실이가 조수석에 앉았다. 그뒤를 동실이와 순실이가 오토바이를 몰고 바싹 따랐다. 은실이는 동실의 뒤에 앉았다. 그녀들은 먼저 차를 조용하고 작은 골목으로 몰고 들어가서 죽은 돼지같은 세 년놈을 바줄로 꽁꽁 묶어놓은후 수건으로 입을 틀어막고 검은 천으로 눈을 가리워놓았다. 그 다음 다시 차를 몰고 달렸다. 번화한 거리를 벗어나자 차는 속력을 가하며 쏜살같이 달렸다. 사이드미러를 통해 뒤좌석의 세 원쑤놈을 쏘아보는 옥실의 눈에 증오의 불길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얼굴과 온몸이 피투성이 되여 밤중에 길바닥에 던져지던 비참한 일이 머리속을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그날 코빨갱이와 애꾸눈이는 반죽음이 된 설매와 홍매를 밤중에 시골의 길가에 던져버렸다. 우연하게 길에서 금실이네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죽어서 원혼이 되였을지도 모른다. 그날 병원치료를 받고 나와서 파출소에 고발했지만 련분이와 두 망나니는 어디론가 종적을 감춰버린 뒤여서 어쩔수 없었다. 그리고 비리경찰의 보호를 받고있는 백조술집은 겉으로는 정당한 영업을 하고있어서 아무런 처리도 받지 않았다. 공안부문의 사건조사가 흐지부지해지자 그녀들은 자신들의 손으로 원쑤놈들을 찾아내여 복수하리라 속으로 별렀다. 그녀들은 소식이 잡힐만한 곳이면 어디든지 찾아가서 물어보았다. 원쑤놈의 종적을 끈질기게 추적하던 설매와 홍매는 뜻밖에 고향사람을 만나서 련분이가 B시에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녀들은 즉시 B시로 찾아가 끈질기게 렴탐한 결과 끝내 련분의 거처를 알아냈던것이다… 날이 어두워지는것과 함께 그녀들은 외딴 초가집에 도착했다. 세 년놈은 이미 깨여나 있었다. 년놈들은 영문도 모른채 차에서 끌려져내려와 집안으로 끌려들어갔다. 끌려들어가면서도 년놈들은 꽁꽁 묶어놓은 바줄을 벗어나겠다고 버둥거리며 몸부림쳤다. 그녀들은 년놈들의 눈을 가리웠던 검은 천을 풀어주고 입에 틀어막았던 수건을 빼내주었다. 어리둥절하여 방안을 둘러보던 년놈들은 겁에 질린 눈길로 그녀들을 바라보았다. “다…당신들은 누구요? 왜 우리를 랍치한거요?” 애꾸눈이가 사내노라고 목에 피대를 세우며 항거했다. 련분이도 억울하다는듯 한마디 했다. “우린 당신들과 원쑤진 일도 없는데…” “원쑤진 일이 없다구? 이 년아!” 옥실이가 더는 참지 못하고 달려들어 련분의 귀싸대기를 찰싹찰싹 후려쳤다. 순실이도 분노가 북받쳐서 애꾸눈이와 코빨갱이의 뺨을 번갈아가며 후려갈겼다. 곁에서 구경하던 금실이, 은실이, 동실이도 달려들어 세 년놈을 주먹으로 치고 발길로 걷어찼다. “다…당신들은 도…도대체 왜 이러는거요?” 이번에는 코빨갱이가 항거했다. 옥실이와 순실이가 부엌에 가서 날카로운 칼을 집어들고 왔다. 그녀들은 각기 코빨갱이와 애꾸눈이의 낯짝에 시퍼런 칼끝을 갖다대며 증오에 찬 눈길로 쏘아보았다. “이놈들아, 우리를 못 알아보겠느냐?” “다…당신들은?!…” “기억력을 살려줄가?” 옥실이와 순실이는 얼굴에 쓴 고무가면을 벗어던졌다. 두 망나니는 사시나무떨듯 와들와들 떨면서 겁난 눈길로 그녀들을 바라보았다. 그녀들을 찬찬히 눈여겨보던 애꾸눈이와 코빨갱이 그리고 련분이는 모두 깜짝 놀라 부르짖었다. “아! 네…네년들이?!” “네년들이라니? 이 악마놈들아!” 옥실이와 순실이는 분노에 차서 부르짖으며 각기 코빨갱이와 애꾸눈이의 낯짝에 시퍼런 칼끝을 바싹 들이대고 내리그었다. 두 놈의 얼굴에서 시뻘건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아악!” 날카로운 비명이 두 놈의 입에서 새여나왔다. 두 녀인이 다시 한번 칼질을 하면서 따져물었다. “어떠냐? 얼굴미용을 하는 맛이 좋으냐?” “우…우리가 자…잘못했으니 요…용서해주오…” 두 망나니는 고통에 얼굴을 찡그리며 용서를 빌었다. “너들이 뭐 잘못이 있겠니? 우리를 미용해줬으니 우리도 그만큼 너넬 미용해주면 되겠는데. 리치가 그렇지 않느냐?” 두 녀인은 추호의 용서도 없이 계속해서 칼로 두 놈의 낯짝에 마구 “X”자와 “#”자를 그어놓았다. 두 놈은 처절한 비명을 연신 질러댔고 곁에서 지켜보는 련분이는 겁에 질려 사지를 벌벌 떨고있었다. 옥실이와 순실이는 두 악당의 얼굴에 지혈면을 발라주면서 차갑게 웃었다. “이번엔 아래도리를 미용해줘야지.” 어느새 금실이와 은실이가 미리 준비했다가 넘겨주는 가위를 옥실이와 순실이가 받아쥐였다. 두 놈은 온몸을 와들와들 떨었다. 옥실이와 순실이는 가위로 각기 두 놈의 바지지퍼 주위를 베여낸후 팬티까지 도려냈다. 그러자 두 놈의 축 처진 물건이 밖으로 드러났다. 동실이가 두대의 담배에 불을 붙여서 옥실이와 순실에게 넘겨주었다. 옥실이와 순실이가 빨갛게 타들어가는 담배불을 두 놈의 성기 가까이에 가져가려 하자 두 악당은 그만 혼비백산하여 공포에 떨면서 울부짖었다. “제…제발 그것만은 용서해주오!” “제발 빕니다! 녀사님들, 그것만은…” 두 녀인은 랭담하고 격멸에 찬 눈길로 두 악당을 쏘아보았다. “야. 이 녀석들아! 아래도리를 미용 좀 해주겠다는데 왜 울며불며 야단들이냐?” “남자들은 그걸 생명처럼 간주한다지? 남자들에게 가장 중요한게 그거겠지? 그러니까 우리가 더욱 정성들여 미용해줘야 되는게 아니겠어? 으하하…” “녀사들…아니 천사님들 제발 저희들의 죄를 용서해주옵소서!” “아…제발 비나이다! 잘못했습니다!” 두 악당은 비굴하게 눈물을 질질 흘리며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다. 하지만 원한이 가슴속에 깊이 쌓인 두 녀인은 그들을 비수같이 쏘아보며 고함쳤다. “용서해달라구? 네 녀석들은 아무 잘못도 없는 우리에게 사정이 있었느냐?” “이런 악마같은 놈아! 우리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놓고도 용서를 바라느냐?!” 두 녀인은 담배를 한모금씩 빨아들이고 담배재를 털어버렸다. 그리고 시뻘겋게 불타는 담배불로 두 악당의 성기를 여기저기 사정없이 마구 지져놓았다. 처절한 비명소리가 방안을 가득 채웠다… “이 여우 갈보년은 어떻게 처리할가?” 동실이가 사지를 벌벌 떨고있는 련분이를 쏘아보면서 물었다. 두 악당은 이미 기절해 자빠져있었다. 금실이가 격분해서 말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당한 만큼 갚아줘야지. 이런 찢어죽일년은 말이야. 그렇지? 옥실아, 순실아?” “당한 만큼 갚아줘!” 은실이도 부추겼다. “설매야, 홍매야, 제발 날 용서해줘!” 옥실이와 순실이가 반응을 보이기전에 련분이가 앞질러 용서를 빌었다. 옥실이와 순실이는 랭담하게 그녀를 쏘아보며 물었다. “우리가 왜 널 용서해줘야지?” “네년이 용서를 받을만한 리유를 말해봐. 그럼 용서해줄게!” 련분이는 살구멍수가 나졌나싶어 머리를 굴리며 궁리하다가 말했다. “내가 잘못하고 죄를 지은것만은 사실이지만 너네 얼굴과 몸을 해친건 아니잖아?” “닥쳐! 우리를 지하매음소굴에 빠뜨려놓은건 누구야?” “우릴 성폭행하라고 사주한건 또 누구야?” 옥실이와 순실이가 격분하여 쏘아보자 련분이는 울상이 되여 빌었다. “하지만 난 너넬 직접 해치지 않았잖아? 설매야, 홍매야, 옛정을 생각해서라도 제발 날 용서해줘!” 옥실이와 순실이는 분노가 울컥 치밀어올랐다. “우린 설매와 홍매가 아니야! 설매와 홍매는 언녕 죽었어! 네년의 손에 죽은거야!” 두 녀인은 련분의 앞에서 칼을 흔들어댔다. “당한 만큼 갚아줄테야!” 얼굴이 송장처럼 퍼렇게 질린 련분이는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와들와들 떨었다. 그러나 두 녀인은 사정없이 그녀의 얼굴에 칼질을 해댔다… 다섯 녀인은 또 밤을 타서 세 년놈을 도시의 거리바닥에 던져버리고 왔다.    
217    중편소설 추녀결사대 (2) 댓글:  조회:3146  추천:1  2014-10-04
중편소설 추녀결사대 김희수   2. 결혼식날 신랑을 랍치     백옥같은 흰눈이 포실포실 내리는 거리로 꽃단장을 한 42대의 승용차가 줄지어 달리고있었다. 차창에 매달린 매화꽃 같은 눈송이를 바라보며 신랑은 신부의 손을 잡고 행복의 미소를 지었다. “우리 결혼날자 참 잘 잡았소. 결혼식날 눈이 오면 한평생 복 받는다는데.” “우린 행복할거예요!” 신부도 행복에 겨워 신랑의 품에 얼굴을 묻으며 속삭인다. 결혼식을 거행하게 될 혼례청사는 멀지 않은 곳에 있었으나 혼례차대렬은 위풍을 시위라도 하듯 도시의 크고 작은 거리를 빙빙 돌면서 천천히 달리고있었다. 번화한 거리를 지나 작은 골목에 들어섰을 때 두명의 녀자교통경찰이 나타나 차를 세우고 면허증을 검사했다. 맨앞의 안내차와 신랑신부의 차는 무사통과하고 뒤의 차들만 남아서 계속 검사를 받고있었다. 녀자교통경찰은 교통규칙을 위반한것이 아닌데도 일부러 트집잡아 혼례차들을 난처하게 구는듯 했다. 운전사의 면허증을 검사하는가 하면 안전띠를 검사하기도 하고 심지어 차에 앉은 매개 손님들의 신분증까지 자세히 검사하면서 시간을 질질 끌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혼례차는 급해했고 급기야는 인민페 1000원을 내놓으며 혼례식에 늦어지지 않게 길을 내달라고 애걸했다. 한편 앞에서 무사통과 했던 차도 얼마 못가서 시끄러운 일에 봉착했다. 또 느닷없이 세명의 녀자교통경찰이 나타나서 길을 가로 막았다. 신랑이 투덜거렸다. “오늘은 무슨 녀자교통경찰이 이리 많아?” 그런데 녀자교통경찰은 앞의 안내차는 무사통과 시키고 신랑신부의 차만 붙잡아두고 애를 먹이고있었다. 그중 한 녀자교통경찰은 신랑을 뚫어지게 눈여겨보더니 당장 차에서 내리도록 명령했다. “아무래도 이 신랑이란 자가 의심스럽단 말입니다. 전번에 사람 깔아놓고 뺑소니친 그자와 너무나 똑 떼 닮았어요. 본부에 데리고 가서 확인해 봐야겠습니다.” 세명의 녀교통경찰이 잽싸게 달려들어 신랑의 손에 수갑을 채웠다. 신랑은 의심스러운 눈길로 녀교통경찰들을 바라보았다. “당신들 교통경찰이 맞아? 교통경찰이 수갑을 휴대하고 다니다니?” “넌 차로 사람을 깔아죽이고 도망친 뺑소니범이야! 그러니 수갑을 채워야지!” “난 뺑소니범이 아닙니다. 억울합니다. 억울해요! 난 곧 결혼식을 올려야할 신랑이니 빨리 놔주세요!” “그래요. 그인 뺑소니차를 몬적이 없으니 어서 놔주세요!” 신랑신부 그리고 운전수와 둘러리 모두 울상이 되여 애걸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뺑소니범이 옳은지 아닌지는 가서 조사해보면 알게 되겠지. 쓸데없는 소리 말고 순순히 따라와!” 녀교통경찰은 신랑을 압송하여 경찰차에 실었다. 신부와 둘러리들이 란리법석을 떨었으나 신랑을 압송한 경찰차는 아랑곳하지 않고 나는듯이 달렸다. 처음에는 소리를 지르고 발악하던 신랑은 얼마후 체념했는지 가만있었다. 그러다가 차가 교외를 벗어나자 신랑은 당황하여 부르짖었다. “날 어디로 데려가는거요? 당신들은 도대체 누구요?” “개자식, 입 좀 다물어!” 뒤좌석에 앉은 두 녀교통경찰이 달려들어 수건으로 신랑의 입을 틀어막고 검은 천으로 눈을 가리웠다. 교외를 벗어난 차는 꼬불꼬불 오솔길을 돌고 돌아 서너시간 달렸다. 그리고 십여분간 멈춰서서 셋이 식사를 하는듯하더니 다시 어딘지 모를 방향으로 달리고 달렸다. 눈이 많이 내리지 않아 차가 달리는데는 아무런 영향이 없었다. 차가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는 어둑어둑한 때였다. 세명의 녀교통경찰이 입을 틀어막고 눈을 가린 신랑을 끌고 외딴집으로 들어갔다. 집안에 있던 두녀인이 그들을 맞아주었다. “언니네들이 그놈을 순리롭게 잡아왔군요.” “옥실이, 순실이 너들이 벌써 와있었구나.” 옥실이와 순실이라고 불리운 두녀인은 맨처음 신혼차를 가로 막았던 가짜 녀교통경찰이였다. 그리고 신랑을 랍치해온 세 녀교통경찰은 원래 금실이, 은실이, 동실이였고 그녀들이 몰고 온 차는 신랑을 랍치하기 위해 훔쳐온 경찰차였다. 그녀들은 붙잡아온 신랑을 죄수처럼 무릎을 꿇게하고 그의 입에 틀어막았던 수건을 빼내고 눈에 가리웠던 천을 풀어주었다. 신랑은 주위를 둘러보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다…당신들은 가…가짜 교통경찰이지? 왜 장가가는 사람을 붙잡아온거요?” 다섯 녀인은 매서운 기운이 서리발치는 눈길로 신랑을 쏘아보았다. 옥실이와 순실이가 달려들어 신랑의 귀쌈을 찰싹찰싹 후려쳤다. “그래 우리는 가짜다. 너 같은 량심없는 놈도 장가를 가?! 이놈아!” “다…당신들은 도…도대체 누구요?” 다섯 녀인이 살기등등한 눈길로 신랑을 쏘아보며 이구동성으로 웨쳤다. “우리는 복수의 녀신이다!” 다섯 녀인이 동시에 얼굴에 씌웠던 고무가면을 벗었다. 그러자 기절초풍할 지경으로 놀란 신랑은 “아!”하고 외마디비명을 질렀다. 그의 눈앞에 소름이 오싹 끼치도록 보기흉한 다섯 얼굴이 나타났던것이다. 그것은 사람의 얼굴이 아니라 귀신의 얼굴이였다. 리더격인 금실이가 동실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동실이가 신랑의 귀쌈을 힘껏 후려치며 말했다. “네놈이 저지른 나쁜짓을 실토해라!” 신랑이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말했다. “난…나쁜짓을 한적이 없소.” 그러자 동실이가 증오의 불길이 이글이글 불타는 두눈으로 신랑을 무섭게 노려보며 소리쳤다. “양범호! 너 나쁜 짓을 한적이 없다구?” “다…당신은 누구요?” 신랑 양범호는 웬 녀인이 자기의 이름을 부르자 깜짝 놀라 소리쳤다. 동실이가 다시 범호의 뺨을 사정없이 갈겨댔다. “범호, 너 이 악마같은 놈아! 그래 네가 훼손시킨 이 얼굴을 모르겠느냐?” “다…당신은…소…소연이?!” 겁에 질린 눈길로 동실을 바라보던 범호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난…난 소연의 얼굴을 훼손시키지 않았소. 그…그건 명도가 한짓이요. 소연이도 알다싶이 류산을 던진건 명도가…아악…” 범호는 말끝을 채 맺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동실의 주먹이 벼락같이 그의 면상으로 날아왔던것이다. 그의 코구멍에서 시뻘건 액체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잇달아 동실의 주먹이 그의 눈통으로 날아왔다. “이 나쁜 새끼야! 어디다 변명이냐?” 동실의 눈에서 증오의 불길이 이글거렸다. 범호… 명도… 돌이켜보고싶지 않은 지난일들이 그녀의 머리속을 주마등같이 스쳐갔다. 소연이와 범호는 모두가 부러워하는 행복한 한쌍의 련인이였다. 영원한 사랑을 약속한 그들은 세집을 얻어 동거하면서 아기자기하게 살아갔다. 그러나 이런 비법동거생활은 장구지책은 못되였다. 어쨌든 결혼해야 했는데 그러자면 “내집”이 있어야 했다. 하지만 다달이 살아가는 생활비용을 쓰고나면 남는것이 없는 그들의 수입으로 집을 마련한다는것은 헛된 꿈에 불과했다. 결혼하여 남부럽지 않게 살아가자면 출국하는 길밖에 없다고 그들은 생각했다. 소연이는 일본수속을 다그쳤고 범호는 로씨야수속을 밟았다. 그런데 소연의 일본수속은 자꾸만 꼬여갔고 범호만이 순리롭게 로씨야땅을 밟게 되였다. 혼자 남게된 소연이는 편지로 그리움을 전하며 범호가 돌아올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러던중 친구의 결혼파티에서 풋면목을 익힌 명도라는 총각이 그녀의 생활에 뛰여들었다. 명도는 기회만 있으면 소연이를 청해 음식을 대접했다. 명도가 성실하고 마음이 착했기때문에 소연이는 그의 청을 거절하지 않았다. 하지만 언제나 일정한 거리를 두고 단둘이 만나는 장소만은 피했다. 그렇게 달이 가고 해가 바뀌였지만 명도는 그녀와의 만남의 장소를 꾸준히 마련했다. 소연이는 명도와 만나는 시간이 많아짐에 따라 점차 그에게 호감을 갖게되였다. 하지만 자신에겐 사랑하는 범호가 있기에 녀자의 본분만은 지켜야 한다는것은 항상 잊지 않고있었다. 그녀는 끝내 범호가 돌아오는 날까지 5년을 외로움과 괴로움을 참고 견뎌냈다. 범호가 돌아온 그날 밤에 그녀는 범호의 품에 얼굴을 묻고 어린애처럼 엉엉 울었다. 그녀는 전날 명도의 청혼을 용하게 거절했던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범호의 사랑이 이전처럼 뜨겁지 못한것을 발견했다. 게다가 명도가 집요하게 사랑의 공세를 들이댔는데 그것이 결국 범호에게 발각되고 말았다. 그녀는 사실대로 자신이 청백하다는것을 털어놓았으나 범호는 그녀를 행실이 부정한 년이라고 악담을 퍼부으며 주먹과 발길로 사정없이 때렸다. 그러면서 관계를 그만두자고 했다. 그녀는 울면서 그에 대한 자신의 사랑은 추호도 변한적이 없으니 절대 헤여질수 없다고, 목숨이 붙어있는 한 영원히 그를 따르겠다고 말했다. 며칠후 그녀는 자신의 청백을 해명해달라고 명도를 찾아가 말할 생각이였는데 마침 명도한테서 먼저 만나자는 전화가 걸려왔다. 그들은 공원의 으슥한 곳에서 만났다. 명도는 한손에 무슨 액체가 들어있는 병을 들고있었는데 다른 한손으로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소연이, 난 소연이를 사랑하오! 우리 결혼하기오!” “명도씨, 이러지 말아요. 난 곧 범호씨와 결혼하게 되는데 명도씨때문에 그의 오해를 받고있어요. 명도씨가 나서서…” “소연이, 소연이는 범호와 결합될 운명이 아니오! 그와의 사랑은 이뤄질수 없으니 나하고…” “안돼요! 난 영원히 범호씨만 따를거예요!” “소연이, 소연이가 나한테 시집오지 않겠다면 난 소연의 꽃같은 얼굴을 훼손시켜버릴거요!” 갑자기 명도가 음흉하게 웃더니 액체가 들어있는 병을 흔들며 위협했다. “나한테 시집오겠소? 안오겠소? 안오겠다면 이 류산을 소연의 얼굴에 뿌리겠소!” “아니?! 뭐…” 소연이는 온몸에 소름이 끼치며 낯선 사람보듯 명도를 바라보았다. 선량하던 명도가 갑자기 포악한 망나니로 변하다니?? 소연이는 두눈을 꼭 감고 추호의 흔들림도없이 대답했다. “나의 사랑은 오직 범호씨에게만 속해요! 당신이 나의 얼굴을 망가뜨리겠으면 망가뜨려봐요!” “에익! 이 년이?!” 절망에 빠진 명도는 손에 들고있던 병마개를 열고 안에 들어있는 액체를 소연의 얼굴에 확 끼얹었다. “아…앗!” 째지는듯한 비명소리와 함께 소연이가 그자리에 쓰러졌다… 동실의 회억은 가장 고통스런 순간에 가서 멎어버렸다. 그녀의 눈에서 저도몰래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온몸을 떨기만 하던 범호가 다시 한번 떨리는 목소리로 변명했다. “소연이, 소연의 얼굴에 류산을 뿌린건 내가 아니란 말이요. 그건 명도가…” “닥쳐! 진짜 흉범은 바로 너야!” 동실이의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그녀는 발길로 범호의 가슴을 힘껏 걷어찼다. 범호가 “어이쿠”하고 비명을 지르며 뒤로 넘어갔다. 동실이는 격분에 찬 목소리로 꾸짖었다. “이 인간망나니야! 내가 얼굴에 심한 상처를 입고 입원해있는 동안 너는 한번도 병문안을 오지 않았을뿐만아니라 절교신까지 보내왔지. 내가 절망에 빠져 자결하려고 할 때 나와 같은 처지에 있는 이 자매들을 만나 이름을 동실이라 고치고 복수의 힘을 기르게 된거야. 후에 조사를 해서야 난 모든 진실을 알게된거야.” 이미 귀국하기전부터 로씨야에 온 고향친구를 통해서 명도가 소연이를 짝사랑하고있다는 소문을 들은 범호는 귀국하자마자 소연이 몰래 명도를 만나서 “나와 소연이는 아무래도 결합될수 없는 운명이요. 우리 부모는 소연이와 결혼하는 날에는 목숨을 버리겠다면서 우리의 결혼을 반대하고있소. 그러니 명도가 나대신 소연이를 사랑해주오.”하고 말했다. 거기에 힘을 얻은 명도는 소연에게 줄기차게 사랑의 공세를 들이댔다. 하지만 번마다 거절당하고 말았다. 그가 고민에 빠져있을 때 범호가 또 찾아와서 방법을 대주었다. “구슬려서 안되면 위협해보오. 계속 거절하면 류산을 뿌려서 얼굴을 훼손시키겠다고 을러메란 말이오.” 그러면서 범호는 들고온 액체병을 흔들어보였다. 명도가 깜짝 놀라며 머리를 가로 저었다. “그건 안되오! 그런 짓은 절대 할수 없소!” 그러자 범호는 빙그레 웃으며 병속의 물을 자신의 얼굴에 쏟아부었다. “이건 가짜요. 맨물이란 말이요. 이것으로 위협해서 말을 들으면 좋은 일이고 거절당한다면 물이라도 끼얹어 그녀의 놀라는 모습을 보면 통쾌한 보복이라도 되는게 아니겠소? 그동안 애써 추구해온 보답으로 말이요. 하하하…” 범호는 또 화장실에 가서 병에 물을 담는체하면서 진짜 류산이 들어있는 병을 명도에게 넘겨주었다… “이 나쁜 새끼야!” 동실이는 격분해서 이를 갈며 쏘아붙였다. “명도는 내 얼굴에 뿌린것이 진짜 류산인것을 알고 너무 놀라서 어안이 벙벙하여 멍해 있다가 마구 울부짖으며 나를 업고 병원에 달려갔어. 그리고 절망한 나머지 공안국에 찾아가서 자수하고 혼자서 모든 죄를 뒤집어썼어. 이런 사실을 난 명도가 갇힌 감옥에 면회 가서 알아냈어. 그리고 우리 자매 다섯이서 너와 관계된 사람들을 하나하나 조사하여 알아본 결과 너는 로씨야에 함께 간 고향의 어떤 처녀와 거기서 수년간 살림을 꾸렸으며 돌아오자마자 그 처녀와 결혼하기 위해 이같은 비렬한 음모를 꾸몄다는 사실을 밝혀냈어.” “이 악귀같은 새끼야! 이래도 변명할거냐?” 금실이, 은실이, 옥실이, 순실이가 차례로 범호에게 주먹과 발길을 날렸다. 범호는 윽윽 비명을 지르다가 악쓰며 발악했다. “그래 옳다. 모든 음모는 내가 꾸민것이다. 그래 날 어쩔 작정이냐?” “이 새끼야, 우리는 복수의 녀신이야! 너한테 복수의 칼을 안길테다!” “뭐…날 죽이겠다구?” 공포에 떨던 범호는 금실이가 칼을 들고오자 그만 바지에 똥을 삑 하고 쌌다. 그는 울면서 애걸했다. “제…제발…모…목숨만 살려주시오! 그러면 내 돈 10만원을 드리겠소!” “이 비겁한 새끼야, 아이구 이 구린내…돈으로 목숨을 건지자구? 어림도없는 일이야!” “그…그럼 매사람에게 10만원씩 드리겠소!” “이 새끼, 정신 좀 차려라! 그깟 더러운 돈으로는 안된다. 하지만 우리는 너의 더러운 목숨은 빼앗지 않겠다!” 범호는 비로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였다. 하지만 여전히 겁에 질린 눈길로 동실이네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그럼…날 도대체 어…어떻게 처리할거요?” 금실이가 범호를 차갑게 쏘아보며 말했다. “우리의 복수방침은…” 그러자 은실이, 동실이, 옥실이, 순실이가 말을 이었다. “피값은 피로 갚는다!”  
216    중편소설 추녀결사대 (1) 댓글:  조회:3657  추천:1  2014-10-04
중편소설   추녀결사대   김희수     이것은 2003년에 생긴 이야기이다. 한때 세상을 뒤흔든 놀라운 사건이였지만 지금은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1. 가면을 쓴 녀자들   깊고 깊은 두메산골에 주인없는 외딴 초가집이 있었는데 언제부터인지 금실이, 은실이라고 부르는 두 녀자가 세를 맡아 들고있었다. 그녀들은 늘 A시쪽으로 나갔다가 며칠에 한번씩 돌아오곤 했다. 한번은 그녀들이 밤중에 마을에 들어서다가 손전등을 들고오는 한 농민과 마주쳤다. 부지불식간에 손전등으로 두 녀인을 비춰본 그 농민은 갑자기 “아악!”하고 비명을 지르더니 돌아서서 “걸음아 날 살려라”하고 정신없이 달아났다. 숨이 턱에 닿아 헐떡거리며 집에 들어선 그 농민은 자기가 방금 외딴 초가집 부근에서 두 녀자귀신을 보았다고 했다. 그리고 이튿날 마을 사람들에게도 녀자귀신을 본 얘기를 했다.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않는 사람도 있었으나 그후부터 모두들 밤중에 외딴 초가집부근에 나가는것을 꺼려했다. 그리고 외딴 초가집의 두 녀자가 밤중에 귀신으로 변하는게 아닐가 하고 의심들을 했지만 마을 사람들에게 해가 되는 일이 발생되지 않았기에 입을 다물고있었다. 사실은 외딴 초가집의 두 녀자는 친자매간이였는데 불붙는 집에 갇혔다가 옆집에서 마작을 놀던 청년들의 도움을 받아 구사일생으로 목숨은 구했으나 온몸에 심하게 화상을 입은 불행한 경력을 가지고있었다. 더구나 그 불은 큰언니 금실의 남편 청수가 일부러 질러놓고 달아난것이여서 그녀들은 가슴에 깊은 원한을 품고있었다. 그 당시 청년들은 그녀들을 불속에서 구해서 병원에 싣고갔다. 입원치료를 받았으나 엄중하게 화상을 입은 그녀들의 온몸은 상처투성이였고 더구나 얼굴은 보기가 끔찍할 정도였다. 처음 거울을 마주했을 때 그녀들은 절망에 찬 비명을 질러대며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금실이가 바줄에 목을 매려고 했을 때 은실이가 발견했고 은실이가 목을 매려고 할 때 금실이가 눈치채고 지켜보다가 말렸다. “우리가 왜 죽어?” 두 자매는 붙안고 울었다. 한참을 울다가 두 자매는 주먹을 불끈 틀어쥐였다. “죽지 말고 살아서 복수하자!” 그녀들은 이를 악물고 남몰래 복수의 칼을 갈았다. 의사는 해외에 나가 성형수술을 받으면 얼굴모습을 어느 정도 회복할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들 자매는 얼굴회복보다 복수가 먼저였다. 그들 자매는 상처가 아물어 퇴원하는 길로 짐을 쌌다. 도시에서 뻐스를 타고 네시간을 가야 하는 두메살골에 빈 외딴집이 있다는것을 알아낸 그녀들은 밤도와 택시를 리용해 그곳으로 찾아갔다. 그 집은 정신이 이상한 한 남자가 살다가 죽은 집이여서 누구도 들려고 하지 않았다. 두 자매는 그 집에 짐을 풀었다. 그날부터 두 자매는 두메산골에 깊숙이 숨어서 지내면서 은밀하게 남자의 종적을 찾기 시작했다. 이미 종적을 감추고 달아난 남자를 찾기란 바다에서 바늘을 찾는것 만큼이나 어렵겠지만 두 자매는 하늘끝까지 가서라도 남자를 꼭 잡아낼 잡도리였다. 그 짐승같은 남자를 찾아내 그 남자의 가슴에 복수의 칼을 꽂고야 말겠다는 결사의 각오를 다지고 또 다졌다. 그녀들은 먼저 실제 사람피부처럼 보이는 실리콘가면을 사들였다. 이 실리콘가면은 아주 정교하게 만들어졌는데 외국에서 들여온것이여서 구입하기 어려웠다. 그 실리콘가면을 쓰면 진짜 얼굴처럼 보였다. 두 자매는 실리콘가면을 쓰고 도시로 여기저기 뛰여다니며 남자의 소식을 렴탐했고 밤에는 쓰고있기가 답답하여 실리콘가면을 벗어놓았다. 귀신을 보았다는 농민이 본것은 바로 화상을 입어 보기 흉하게 된 그녀들의 진짜얼굴이였다. 금실이와 은실이는 날마다 금실의 남편 청수를 추적하느라 동분서주했다. 금실이는 은실이와 함께 먼저 청수의 부모가 거주하는 집으로 찾아가보았지만 거기에도 없었다. 청수의 부모는 청수와 련계가 있을것 같았지만 어디로 도망쳤는지 모른다고 했다. 원래 큰 희망을 품지 않았지만 청수 부모의 랭랭한 태도에 실망도 느끼고 화도 나서 금실이는 나오면서 문을 쾅 닫았다. 아빠트계단을 내려오는데 전화가 울렸다. 금실이는 핸드백에서 전화를 꺼냈다. 두 자매가 화상으로 입원해있던 병원의 중년간호사가 걸어온 전화였다. 두 자매의 사연을 잘 알고있는 그녀는 두 자매가 퇴원해 나올때 청수의 행방을 알아보겠다고 대답했었다. “우리 병원의 간호사 쑈쩡(小郑)이 청수의 친구를 안다고 합데.” 두 자매는 쏜살같이 병원으로 달려갔다. 쑈쩡은 조선족이였다. 사촌오빠가 청수의 친구였는데 지금은 한국에 나갔다고 했다. 나중에 사촌오빠와 련계가 되면 청수의 행방을 물어보겠노라고 선선히 대답하는 미스 정을 보면서 두 자매는 다시 희망을 품게 되였다. 두 자매가 금방 미스 정과 헤여졌는데 병원의 뒤쪽복도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알아보니 입원한 녀환자가 자살하려다가 간호사한테 발견되였다는것이다. “자살? 왜? 불치병이라도 걸렸나요?” 금실이의 물음에 한 중년환자가 대답했다. “에그, 새파랗게 젊은 녀잔데 누군가 그녀의 얼굴에 류산(硫酸)에 끼얹었다나? 좀 전에 거울에 비친 자신의 흉한 얼굴을 보았던 모양이요. 그래서 목을 매여 죽겠다고 란리를 피웠다나. 쯧쯧 불쌍하기두.” 금실이와 은실이는 자신들과 같은 처지인 그녀가 몹시 걱정되였다. 비록 얼굴 한번 본적이 없는 낯선 녀자였지만 그녀가 또 나쁜 마음을 먹을가봐 걱정되여 그대로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두 자매는 자살을 시도했다는 그녀의 병실로 찾아갔다. 그녀는 절망에 빠진 표정으로 침대우에 멍하니 앉아있었다. 금실이와 은실이가 그녀한테로 다가가려고 할 때 그녀가 갑자기 일어나며 병실밖으로 뛰여나갔다. 두 자매는 그녀의 뒤를 쫓아갔다. 허둥지둥 달려가던 그녀는 유보도 나무의자에 앉아 흐느끼였다. 두 자매가 다가가자 그녀는 다시 일어나서 병원밖으로 달려나가더니 길 한복판에 서서 자동차가 마주 달려오는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모든것을 포기한듯 눈을 감고있었다. 다행히 자동차가 급정거하는 바람에 그녀는 자동차와 한보의 거리를 놓고 무사하게 되였다. “죽고싶으냐?!” 차에서 내린 운전기사가 욕설을 퍼붓다가 그녀의 얼굴을 보고 덴겁하여 뒤걸음치더니 황망히 차를 몰고 사라졌다. 두 자매가 쏜살같이 달려가 그녀의 손을 잡고 병원마당으로 돌아왔다. 두 자매는 그녀를 유보도 의자에 앉혀놓고 위안해주면서 인생을 포기하지 말라고 말해주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런 몰골로 살아서 뭘 하느냐며 어깨를 들먹거렸다. 금실이와 은실이는 서로 눈짓하더니 동시에 가면을 벗었다. 두 자매의 진짜 얼굴을 본 그녀는 깜짝 놀랐다. 금실이가 자신들이 당한 불행을 이야기해주고나서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우리도 몇번이나 나쁜 마음을 먹었어요.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이렇게 만든 놈을 징벌하지 않고 죽을수는 없었어요!” 두 자매의 이야기는 그녀를 절망에서 빠져나오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녀는 가족을 만난듯 두 자매의 품에 안겨 흐느껴 울더니 자신의 불행에 대해 이야기했다. “제 이름은 소연이라고 불러요. 범호라는 남자를 만나 동거했는데…” 소연의 이야기를 들은 금실이와 은실이는 솟구치는 분노를 참을수 없었다. 그들은 소연이와 함께 복수하자고 약속했다. 그후부터 소연이는 자신과 같은 처지인 금실이와 은실이를 가족처럼 믿고 의지하게 되였다. 소연은 퇴원하는 길로 금실이와 은실이가 거주하는 시골의 외딴집으로 와서 살았다. 세 자매는 날이 밝으면 가면을 쓰고 사처로 다니면서 자신들을 망가뜨린 남자들의 종적을 찾아다녔다. 그들은 먼저 소연의 얼굴에 류산을 뿌린 명도부터 찾기로 했다. “명도 그 놈이 내 얼굴을 이렇게 만들었어요. 그래도 일말의 량심은 남았는지 날 업고 병원에 갔어요. 그리고 입원비까지 지불하고 도망쳤더군요”. 그들은 한달째 A시의 골목을 샅샅이 찾아보았지만 헛물만 켰다. 그러던 어느날이였다. 그날, 세 자매는 아침을 먹자마자 가면을 쓰고 도시로 들어갔다. 일이 잘 되자고 그랬는지 도시에 도착하여 뻐스에서 내리자마자 명도의 친구를 만났다. 명도와 늘 붙어다니던 친구이기에 소연이는 첫눈에 알아보았다. 소연은 명도의 친구가 달아날가봐 두손으로 그의 팔을 붙잡고 물었다. “명도가 어디 있어요?” “어? 소연이구먼.” “명도 그 새끼 어디 있어요?!” 금실이와 은실이도 다가와서 따져물었다. 명도의 친구는 세 녀인을 번갈아보더니 떠듬거렸다. “나…나두 명도를 못본지 오래되오.” “바른대로 말해! 말하지 않으면 죽인다!” 금실이와 은실이가 좌우에서 명도 친구의 량옆구리에 칼끝을 들이댔다. 명도의 친구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며…명도는…가…감옥에 있소.” 명도의 친구는 명도가 소연의 얼굴에 류산을 끼얹은후 자책감에 시달리다가 파출소에 찾아가 자수했다고 알려주었다. 세 녀인은 명도의 친구가 알려주는 감옥으로 찾아갔다. 그러나 그날은 명도를 면회할수 없었다. 그래서 세 녀인은 종적을 감춘 금실의 남편 청수를 찾아다니다가 날이 어둡자 시골로 가는 막차를 잡아탔다. 세 년인은 모두 피곤하여 눈을 감았는데 그 사이에 뻐스는 외딴집이 있는 시골마을을 지나갔다. 뒤늦게 깨여난 세 녀인은 부랴부랴 뻐스에서 내렸다. 세 녀인은 지나온 길을 되돌아 걸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한참 걸어가던중 앞서가던 은실이가 갑자기 놀란 소리를 질렀다. “여기 사람이 누워있어요!” 금실이와 소연이가 달려가보니 길옆에 두 녀인이 누워있었다. “죽은것 같아요.” 은실이가 말했다. “사람…살려줘요.” 그때 누워있던 두 녀인중에 한 녀인이 가냘픈 소리로 구원을 청했다. “살아있어요!” 소연이가 떨리는 소리로 말했다. 두 녀인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본 세 녀인은 깜짝 놀랐다. 그 두 녀인의 얼굴도 처참하게 훼손된 상태였다. “사람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놓고 길가에 던져버리다니? 어떤 놈들인지…” “빨리, 병원으로 데려가자!” 금실이가 다급히 소리치면서 그중 한 녀인을 업으려고 했다. 은실이와 소연이가 도와주고 은실이가 다른 녀인을 업었다. 세 녀인은 두 녀인을 번갈아 업고 가까운 촌위생소로 달려갔다. 거기서 두 녀인은 간단한 치료를 받고 이튿날에 도시병원으로 옮겨졌다. 세 녀인은 그 두 녀인이 퇴원할 때까지 곁에서 보살펴주었다. 그 두 녀인은 세 녀인도 자신들과 같은 처지인것을 알고 친자매를 만난듯 그들을 믿고 의지하게 되였다. 퇴원하는 날 두 녀인은 세 녀인을 따라 외딴집으로 왔다. 두 녀자는 설매와 홍매라고 불렀는데 온밤 눈물을 흘리면서 건달들의 칼에 얼굴이 훼손당한 자기들의 비참한 경력을 이야기했다. 그날밤 다섯 녀인은 서로 끌어안고 한바탕 울었다. 그리고 서로의 처지를 위로하고나서 다섯은 결의 자매를 맺고 나이 순서로 금실이, 은실이 뒤를 이어 소연이는 동실이라고 이름을 고치고 설매와 홍매는 각기 옥실이, 순실이라고 개명했다. 큰언니 금실이가 주먹을 불끈 쥐고 웨쳤다. “그자들을 반드시 우리 손으로 잡아내서 복수하자!” 그녀들은 다섯 녀인으로 무어진 복수조직을 “추녀결사대”라고 부르기로 했다. 금실이가 다 함께 복수구호를 부르자고 하면서 먼저 웨쳤다. “죽음을 무릅쓰고 복수하자!” 네 녀자도 주먹을 불끈 쥐고 복창했다. “죽음을 무릅쓰고 복수하자!” “피는 피로써 갚자!” “피는 피로써 갚자!” 다섯 녀자는 가면을 쓰고 복수의 길에 나섰다. 실리콘가면은 그녀들의 화상자국과 흉터자국을 가려주었다. 그리고 원 생김새와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복수심에 불타는 다섯 녀자, 이제 새롭게 태여난 모습으로 복수의 상대를 찾아나선것이다.  
215    중국은 잠에서 깨여난 사자 댓글:  조회:7588  추천:16  2014-10-01
중국은 잠에서 깨여난 사자   김희수     사람들은 중국을 “동아병부”라고 부르기도 했고 “잠자는 사자”라고 부르기도 했다. “동아병부(东亚病夫)”라는 말은 청나라말기와 민국초기에 외국인들이 중국인을 폄하하여 부르던 말이다. “동아병부”란 이 듣기 싫은 칭호는 영국인이 상해에서 꾸린 영문신문 《노스 차이나 데일리 뉴스(字林西报)》 1896년 10월 17일자에 게재된 한편의 글에서 제일 처음으로 언급되였다.     8국련합군에 무참하게 짓밟혀 찍소리도 못하던 부패하고 무능한 청정부와 아편중독으로 말라빠진 중국인은 말그대로 동아병부였다. 광활한 땅 대부분이 일본에 짓밟혀 상처투성이가 된 중국은 어쩔수 없는 동아병부였다.     무협영화에서 중국무술고수들이 아무리 “중국사람은 동아병부가 아니다”고 웨치면서 외국무술고수들을 때려눕혀도 그 시기에 중국은 확실히 동아병부였다. 중국인은 정신상태도 동아병부였을뿐만아니라 몸상태도 동아병부였다.   1936년에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제11회 올림픽에서 69명으로 구성된 중화민국대표단은 근 30개항목의 경기에 참가했다. 그러나 장대높이뛰기선수 부보로(符保卢)가 제2회전에 진출한외에 전부 제1회전에서 도태되는 수모를 겪었다. 중화민국대표단이 귀국도중에 싱가포르를 경과할 때 당지 신문은 《동아병부》라는 제목으로 중국인을 조롱하는 만화를 실었는데 그때부터 “동아병부”는 외국인들이 중화민족을 얕잡아 부르는 말로 되였다.   1984년에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제23회 올림픽에서 중국 사격선수 허해봉이 사상 첫 금메달을 따고 이어 중국선수들이 14개의 금메달을 더 첨가해 올림픽메달순위 4위에 오르면서 중국은 정식으로 “동아병부”라는 모자를 벗게 되였다. 그후 중국은 스포츠강국으로 되였고 잇달아 경제강국, 군사강국으로 부상했다.     나폴레옹(拿破仑)은 “중국은 잠자는 사자이다. 그 사자가 만약 잠에서 깨여나기만 하면 세계를 진동시킬것”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지난 3월 27일에 프랑스를 방문했을 때 습근평주석은 중프수교50돐기념대회강연을 통해 이 나폴레옹의 명언을 언급하면서 “중국이라는 사자가 깨여났다”고 발언했다.   사실 중국은 “동아병부”가 아니라 “잠자는 사자”였다. 중국이라는 사자가 잠을 자고있었기에 겉으로는 동아병부처럼 보였던것이다. 그래서 보잘것 없는 벼룩이도 달라들어 마음대로 사자의 몸을 물어뜯었고 한줌도 못되는 쥐새끼도 무서운줄 모르고 덮쳐들어 사자의 털을 뽑았다.   중국이란 사자는 너무나 오래동안 깊은 잠을 자고있었다. 수십년, 수백년동안 잠을 자고있었다. 아니 심지어 수천년동안 잠을 자고있었는지도 모른다. 유구한 력사와 찬란한 문화를 가진 문명고국이라고 자랑하고있지만 중국은 몇십년전까지 강대국의 꿈을 꾸지 못했다. 체대는 컸지만 실상은 약체국이였다. 첫 세습제노예제국가인 하조로부터 마지막 봉건왕조인 청조에 이르기까지의 수천년력사에서 중국은 주변의 소국에 얻어맞지 않은 조대가 없었다.   중국력사상에서 가장 번영발전하였다고 하는 당조때마저도 굶어죽고 얼어죽은 백성들의 시신이 길가에 가득하였다. 또 당태종과 당중종은 토번(장족)의 침입이 무서워 토번왕 송짠감보와 츠다이주단에게 선후로 문성공주와 금성공주를 시집보냈다.   지금으로부터 65년전에 모택동이 중국인민은 일어섰다고 하면서 천안문에 올라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을 선포했지만 그때까지 중국이란 잠자는 사자는 완전히 깨여나지 못하고 반수면상태에 있었다. 등소평이 개혁개방을 실시하고 선후로 홍콩과 마카오를 되찾아오면서 중국은 세계를 놀라게 하였다.   선견지명이 있는 사람들은 중국이란 잠자는 사자가 깨여났다는것을 느꼈을것이다. 과연 얼마 안되여 중국은 GDP(국내총생산)가 8조 9,393억달러(2013년 기준)로 상승해 제2경제대국 일본을 제치고 세계 2위로 되였다. 그리하여 중국은 제1경제대국(GDP가 16조 7,242억달러인 미국과 함께 G2국가로 되였다.   중국은 현재 부민강국(富民强国)의 꿈을 꾸고있다. 현재 신흥강국으로 부상해 강국의 목표는 가까와졌지만 부민(富民)의 목표를 실현하려면 아직 거리가 멀다. 중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6,569달러(2013년 기준)밖에 안되여 세계 87위에 머물러있다. 이는 1위인 룩셈부르크(11만 573달러), 9위인 미국(5만 2,839)과는 물론 33위인 한국(2만 3,837)과도 매우 큰 차이가 있다.   중국은 빈부의 차이가 너무 크다. 중국부호들의 재산은 세계 상위권에 속하지만 백성들의 생활수준은 세계 중하위권밖에 안된다. 물론 중국이란 사자는 깊은 잠에서 갓 깨여나 이제 갓 기지개를 켜기시작했기때문에 본격적으로 달리고 날려면 세수도 하고 준비운동도 해야 한다. 하지만 부호들의 수자가 얼마 되며 부호들의 재산이 얼마나 되는가를 자랑할것이 아니라 일반인들의 생활수준이 얼마나 되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래야만이 진정한 중국꿈이 이뤄질줄로 안다.     
214    엄마의 눈물 댓글:  조회:3948  추천:5  2014-10-01
엄마의 눈물   김희수     훈이야, 엄마가 왔다. 서울에서 심양, 다시 심양에서 연길, 이렇게 비행기를 타고 엄마는 널 보러 왔단다. 네가 보고싶어 1년만에 다시 고향에 돌아왔단다! 공항에서 나온 경자는 한달음에 아들한테로 달려가고싶은 마음이였다. “누나!” 마중나온 동생 경수가 목메여 부르며 달려와 얼싸안았을 때 경자는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동생이 짐을 받아들고 택시에 올라탔을 때에야 경자는 안부를 물었다. “어머니는 어떠시냐?” “그냥 그렇소.” “호, 네가 고생이구나.” 경자의 어머니는 2년전에 반신불수가 되여 운신을 못했다. 명의란 명의는 다 찾아보고 좋다는 약은 다 써보았으나 지금까지 그 본새로 차도가 없었다. 경수는 그런 어머니를 돌보느라고 대학교기숙사에도 들지 못하고 집에서 통학하고있었다. “훈이는…” 경자는 가장 알고싶은 소식을 나중에야 물었다. “그애가 제 애비를 찾아간 후에는 소식을 모르고있소. 나도 공부와 집일이 바빠서 그애를 찾아가보지 못했소. 미안하오. 누나…” 경수는 머리를 숙이면서 말했다. 친정집에 도착한 경자는 어머님께 인사를 드리고나서 짐도 풀지 않고 총망히 택시를 잡아타고 철남으로 향했다. 단층집들이 늘어선 낯익은 골목에서 내린 경자는 총총걸음으로 다가가더니 어느 한 집문앞에 멈춰섰다. 전남편과 함께 여러해를 살던 집, 남들처럼 아기자기하게 살았더라면 그녀는 결코 이 집을 뛰쳐나가지 않았을것이다. 전남편은 지독한 술주정뱅이에 도박군이였다. 로임한푼 내놓지 않고도 끼니마다 음식타발하며 쩍하면 녀편네한테 손찌검을 하기가 일쑤였다. 그래도 경자는 아이를 위해 불평 한마디 없이 참고 지냈다. 하지만 남편의 행패는 점점 더 심해졌다. 더는 참을수 없게 된 그녀는 결국 천정에 피해가서 리혼을 제기했다. 그런데 화불단행이라고 경자가 정식으로 리혼하고 아이를 데리고 오는 날에 청상과부로 고생속에 살아온 친정어머니가 몸져눕게 되였다. 난전을 벌려 금방 대학에 입학한 경수의 뒤를 대주던 어머니가 운신을 하지 못하게 되자 남동생의 뒤바라지, 어머니의 치료비, 아들의 학비 등 경제부담과 가정의 중임이 가냘픈 경자의 어깨에 지워지게 되였다. 어머니의 난전을 이어받은 그녀는 목쉬도록 사구려를 웨쳤으나 그 수입으로는 어머니의 치료비를 대기에도 태반부족이였다. 날이 갈수록 빚더미만 앃일뿐. “여기서 아무리 버둥거려도 살구멍이 있을것 같지 않다. 출국하면 돈을 번다던데…” 어느날, 어머니의 병문안을 온 이모가 한숨섞인 어조로 말했다. 출국? 경자는 한가닥 희망의 빛을 보는듯 했다. 그래서 사처에 연줄을 달아보았으나 남들에겐 활짝 열려있는 출국의 문이 그녀에게만 꽁꽁 닫겨져있는것 같았다. “지름길이 있단다.” 두번째로 병문안을 온 이모가 경자의 귀에 대고 나직이 속삭였다. 그 지름길이란 한국인에게 시집가는 길이란다. “싫어요!” 처음에 단호히 거절하던 경자는 이모의 거듭되는 설복에 넘어가 마침내 머리를 끄덕이고야 말았다. “이 한몸 내 던져 가족을 살리자!” 이것이 이를 악문 그녀의 비장한 결심이였다. 얼마후 이모가 결혼상대를 물색해왔다. 교통사고로 마누라를 잃은 50세의 한국사장님이란다. “나이가 좀 많지만 사람이 진국이란다. 네 사진을 보더니 마음에 드는 처녀라며 흡족해하더라.” “처녀라니요?” “난 그 사람에게 네가 처녀라고 소개했단다.” “이모두 참, 사실대로 리혼녀라고 할게지 왜 거짓말을 했나요?” “리혼한 녀자라면 아이가 있는것이 드러날거야. 그 사람은 몸의 순결여부는 따지지 않지만 아이가 있는 녀성은 싫다고 했단다.” “그렇다고 어찌…” 그러나 경자는 그 한국인과 대면할 때 아이를 이모집에 숨겨놓고 울며겨자먹기로 처녀행세를 했다. 그녀한테 반한 한국사장님은 “어머니의 치료비와 동생의 학비에 보태오”라고 하면서 목돈을 내놓았다. 가짜로 미혼공증을 하며 결혼다보니 남들보다 갑절이나 되는 거액의 돈을 9개월이나 되는 마라손식수속에 밀어넣고 마침내 비자 내고 항공권을 손에 쥐게 되였다. “훈이야, 엄마가 먼데 간단다.” 한국신랑 몰래 아들애와 작별하는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샘솟듯 흘러내렸다. “이제 가면 언제 오나?” “인차 올게!” “엄마, 가지 마!” 그때 눈물이 글썽해서 애원하며 매달리던 아들의 모습이 지금도 그녀의 눈앞에 삼삼하다. “훈이야, 엄마가 왔단다. 엄마는 1년을 10년맞잡이로 밤낮 너를 그려왔단다!” 마음속으로 이렇게 웨치면서 경자는 떨리는 손으로 문을 두드렸다. 그런데 문을 열고 얼굴을 내민것은 낯선 사내였다. “저, 이 집 주인은요?” “무슨 일입니까? 내가 이 집 주인인데…” “네?! 그럼 이 집에 있던…” “아, 원 주인말입니까? 그는 한달전에 이 집을 나한테 팔고 북대마을에 있는 자그마한 세방을 얻어 이사를 간다고 하던데요.” “네?!” 낯선 사내가 문을 닫자 실망한 경자는  한동안 멍하니 서있었다. 그때 옆집문이 열리면서 “이게 훈이에미 아니요?”하는 반가운 소리가 들려왔다. 이전에 이웃에서 사이좋게 지내던 강녀인이였다. “훈이 아빠는 왜 집을 팔고 세방으로 이사를 갔는지 아시나요?” 강녀인의 집에서 인사말이 오간 뒤 경자가 물었다. “에그, 훈이애비는 사람질을 못하다가 죽겠습데. 곰같은 나그네들이 와서 도박빚을 물라는 성화에 못이겨 집을 팔았다오.” “아니, 제가 부쳐보낸 돈 2000딸라도 있겠는데요.” “아이구, 그런 돈이 있었길래 글쎄 한때는 부지런히 술집녀자들을 끌어들였지. 훈이에미도 그렇지, 그 버릇을 알면서 그 나그네 손에 돈을 쥐여줄건 뭐요?” “글쎄. 나도 훈이를 위해서…” 리혼할 때 경자는 아들을 데리고 몸만 빠져나왔다. 집이고 가장집물이고 일체 재산은 모두 전 남편한테 줘버리고 빈몸으로 나왔지만 지옥에서 빠져나온듯 숨이 활 나오면서 살것 같았다. 경자가 한국에 시집간지 반년남아 되였을 때 아이는 외할머니의 대소변냄새가 싫었던지 아버지한테로 가겠다고 했다. 그때 경자는 한국에서 남편 몰래 전 남편과 전화로 통화하면서 부탁했다. 아이를 잘 보살펴달라고. 그랬더니 전 남편은 자기는 술버릇과 도박버릇을 깨끗이 떼고 엄마없는 불쌍한 아이만 보살피는 일에 전념하고있다고 했다. 그저 경제적으로 힘이 미약한것이 한스러울뿐이라고 부언하면서. 경자는 물론 그 말을 다는 믿지 않았지만 범도 제 새끼를 중히 여긴다는데 사람가죽을 쓴 전 남편이 간대로 그러랴싶어 훈이의 학비와 생활비로 쓰라고 2000딸라를 부쳐보냈던것이다. 그런데 제 새끼의 생활비를 술집계집의 사타구니에 밀어넣다니?! 그것도 부족해서 집까지 도박에 말아먹다니?! 그런 망나니와 함께 있은 훈이가 근심되였다. “그 나그네 훈이를 잘 보살피던가요?” “말두 마오. 한달인가 같이 있다가 제 할미한테 쫓아버렸다오.” “네?!” 흥안의 시골에서 살고있던 아이의 친할머니는 오금을 바로 쓰지 못하여 바깥출입도 겨우하는 80세의 로인이였다. 그런 로인이 어떻게 아이를 잘 돌볼수 있겠는가? 그리고 그렇게 먼곳에서 학교는 어떻게 다닌단 말인가? “내 전번 주일에 시내에서 그애를 만났는데 뻐스를 탈 돈도 없어 낡은 자전거를 타고 학교에 다닌다고 하던데 불쌍해서 못보겠습데.” 경자는 눈물이 왈칵 쏟아져내렸다.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경자는 얼굴을 돌리고 강녀인의 집에서 나왔다. 밖에는 어느새 어둠이 깔려있었다. 마음같아서는 흥안으로 달려가고싶었으나 친정어머니가 기다릴것 같아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날밤을 뜬눈으로 지새운 경자는 아침을 대충 먹고 훈이가 다니는 학교로 향했다. “엄마, 빨리와. 난 엄마가 보고싶어!” 한국에서 남편 몰래 전화로 통화할 때 아들애가 부르짓던 애절한 음성이 또다시 귀전에 들려온다. 아들애가 당금이라도 “엄마”하고 부르며 달려올것만 같아서 가슴이 두근거린다. “훈이가 입원했어요.” 학교에서 만난 담임선생님의 말에 경자는 가슴이 철렁했다. “어제 학교에서 갑자기…집에 알렸지만 훈이의 할머니는 오금이 굼뜨지, 아부지, 어머니는 찾을수 없지, 훈이의 외가집에 알리자고 해도 주소를 모르지…” “훈이가 무슨 병으로…” “그애가 글쎄 학교쓰레기통에서 변질된 음식을 뒤져먹고…식물중독에…” 경자는 가슴이 갈기갈기 찢기는것 같았다. 아이가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애들이 먹다버린 찌꺼기를 주어먹었을가?! 애비, 에미가 퍼렇게 살아있는 애가 거지로 되여버리다니! “훈이의 증세가 어때요?” “위험하대요.” 눈앞이 캄캄했다. 병원에 도착하여 담임선생님이 안내하는 병실로 달려들어가는 경자는 제정신이 아니였다. “훈이야, 이 에미가 모질어 널 이지경으로 만들었구나. 그 어떤 일이 있어도 너만은 버리지 말아야 했어. 흐흑…훈이야, 눈뜨고 봐, 엄마가 널 보러 왔단다!” 한 어머니의 처절한 울부짖음에 하늘도 슬퍼서인지 “우르릉 꽝!”하고 통곡했다… (199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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