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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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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3    혁명근거지 정강산과 홍군의 형성 댓글:  조회:5283  추천:0  2015-05-31
혁명근거지 정강산과 홍군의 형성     1927년의 제 1차 국공합작은 국민당우파의 공산당축출로 끝났다. 공산당은 이제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 했다. 하룡, 엽정, 주덕 등 공산당지도자들은 약 2만여명의 홍군을 동원해 남창에서 봉기했다. 그들은 큰 힘을 들이지 않고 남창을 점령하여 혁명위원회를 설립했다. 중국인민해방군의 건군기념일은 이 남창봉기일인 8월 1일로 정했다. 그러나 남창봉기에 의해 수립된 남창혁명위원회는 얼마 가지 못했다. 국민당군이 남창을 압박해오자 혁명위원회는 남창을 버리고 광주로 내려갔다. 국민당군이 계속 추적하였기에 무장봉기를 통한 해방구건설로선은 광동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1927년 12월에 엽검영이 거느린 부대 및 로동자 수천명이 광주에서 무장봉기하여 광주로농민주정부를 수립했다. 그러나 압도적으로 우세한 군대로 포위공격하는 국민당군대와 3주간의 치렬한 전투끝에 대부분은 죽음을 당하고 몇명만이 간신히 탈출하여 또 다른 해방구인 해륙풍으로 피했다. 쏘련의 성공경험을 본받아 무장봉기를 통해 도시중심의 거점을 확보하려던 공산당의 전략과 공산국제(제3국제)의 지시는 결과적으로 잘못된 로선이였음이 드러났다. 당시 이 로선에 반대한 모택동은 농촌을 먼저 장악하여 도시를 포위한다는 중국실제에 알맞고 정확한 로선을 선택했다. 그는 전쟁터에서 패한 군대를 끌고 정강산으로 들어갔다. 이 정강산이 바로 중국공산당의 혁명근거지였다. 여기에서 홍군의 기본적인 조직이 짜여졌다. 모택동은 자신이 이끌고 들어온 부대를 정리하여 로농혁명 제 1군 제 1사단 제 1련대로 이름을 붙였다. 부대대원들은 국민당의 소탕작전에서 살아남은 약간의 로동자들, 이 지역출신의 젊은 광부, 철도원 및 농민으로 구성되였다. 그 뒤 주덕, 림표, 진의 등이 이끌고 들어온 부대를 재편성하여 홍군 제 4군(로농혁명 제 4군)이 창설되였다. 군장은 주덕이고 당대표(정치위원)는 모택동이였다. 당시의 홍군은 약 5만명정도였다. 그후 많은 부대들이 정강산으로 모였는데 그 부대들을 중심으로 홍군 제 5군이 편성되였으며 팽덕회가 지휘했다. 정강산은 몇개의 부락이 있는 오지였고 지역은 넓지만 사람들이 많이 살고있지 않은 지역이였기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밀려들자 의복, 식량 등이 매우 부족했다. 그러나 홍군은 혁명정신에 투철했다. 혁명을 위해서 홍군의 행동수칙이 정해진것도 이곳에서였다. 공산당은 정강산을 근거지로 하여 주변지역인 호남, 강서, 광동 3개성의 경계지역에 6개현으로 구성된 쏘베트를 건설할 계획이였다. 혁명근거지를 확대하기 위해 채택된 방법은 첫째, 무력투쟁의 방식이였다. 이것은 이전까지의 투쟁이 군사력이 강하지 못했기때문에 패했다는 경험에서 비롯된것이다. 둘째, 도시보다는 농촌을 중심으로 점령하고 세력확대의 주요대상을 농민으로 삼는는것이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이 장악한 지역에서는 지주들의 토지를 몰수하여 농민들에게 분배하는 토지개혁이 중심적인 정책으로 되였다. 그리고 지역별로 쏘베트를 건설해야 하며 장기적인 계획을 가지고 행해야 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또한 홍군의 유력한 전투방식은 유격전술이였다. 이것 역시 무기와 수자 등 모든 면에서 약세인 조건에서 나온 전술이다. 유격전술의 원칙은 모택동에 의해 제시되였는데 다음과 같다. 첫째, 적이 전진하면 우리는 물러선다. 둘째, 적이 멈춰서면 우리는 적을 교란시킨다. 셋째, 적이 전투를 피하면 우리는 공격한다. 넷째, 적이 물러서면 우리는 추격한다. 그후의 실천과정에서 이 원칙은 올바른것이였음이 판명되였다.    
292    반전드라마 같은 결혼식 댓글:  조회:5566  추천:8  2015-05-26
반전드라마 같은 결혼식   김희수     얼마전에 한 지인 아들의 결혼식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신랑의 아버지와 신부의 아버지의 발언이 있고 나중에 신랑신부의 발언이 있었다. 신랑의 아버지와 신부의 아버지는 모두 조선족이였는데 뜻밖에도 한족말로 발언했다. 물론 그 자리에는 한족들도 있었지만 조선족의 결혼식에 한어로 발언하는것을 보고 기분이 언짢았다. 필경 그 자리엔 조선족이 더 많았고 설사 한족이 더 많았다고 해도 조선족의 결혼식에 한족말로  발언하는것은 실수이며 례에 어긋나는 일이다.   처음엔 정말 섭섭했는데 반전이 있어 그나마 위안이 되였다. 반전드라마 같이 신랑신부가 모두 조선말로 발언했던것이다. 결혼당사자가 조선말로 발언하자 언짢았던 기분이 좀 누그러들었다. 만약 자라나는 젊은 세대들이 한족말로 발언했더라면 실망이 컸을것이다. 앞날의 희망을 보는것 같아서 다행이였다.   하지만 조선족이면서 한족말로 발언하는 부모들이 리해되지 않았다. 이는 아주 사소한 문제인것 같지만 절대 사소한 문제가 아니다. 이는 우리 조선족의 생사존망과 관계되는 큰 문제라고 생각된다. 아무리 한족이 13억인 중국에서 사는 200만 조선족이라고 해도 우리는 당당한 하나의 민족이다.   조선족이 주최하는 모임장소에서 조선말로 발언하는것은 조선족으로서의 기본 자세이다. 사람이 적게 모인 장소이건 많이 모인 장소이건 마찬가지이다. 둘이 모인 장소라도 조선말로 주고받아야 더욱 친근하고 신뢰할수 있는 대화를 이끌어갈수 있을것이다. 사람이 많이 모인 장소에서는 더구나 조선말을 우선순위에 놓아야 한다. 회의나 례식 같은 장소에서는 특히 조선말을 우선순위에 놓아야 한다.   조선족의 모임장소에 한족이나 기타 민족들도 참석했다면 조선말로 발언한후 그들을 배려하여 한어로 통역해 줄수는 있다. 하지만 한어를 우선 순위에 놓아서는 안된다. 한족이 더 많이 모인 장소라 해도 반드시 조선말을 우선 순위에 놓아야 한다. 한족 지도자가 많은 장소라 해도 반드시 조선말을 우선 순위에 놓아야 한다. 그 장소에서 제일 급이 높은 분이 한족이라고 해도 조선족이 주최하는 회의나 모임에서는 반드시 조선말을 우선 순위에 놓아야 한다. 연변조선족자치주에서 주최하는 크고 작은 행사에서는 모두 조선말을 우선 순위에 놓아야 한다. 만약 다른 지구나 성, 중앙에서 한족이나 다른 민족의 간부가 우리 자치주로 온 장소라면 경우에 따라 한족말을 우선 순위로 할수 있다.   조선말을 우선순위로 해야 하는것은 연변조선족자치주에 한에서만 행해져야 하는것이 아니다. 전국 각지의 어디서든 조선족이 주최하는 모임장소에서는 반드시 조선말을 우선순위에 놓아야 한다. 그 장소에 한족이나 다른 민족이 아무리 많아도 조선족이 주최하는 모임에서는 반드시 조선말을 우선 순위에 놓아야 한다.   이는 다른 민족도 마찬가지일것이다. 중국에는 56개의 민족이 있지만 어느 민족이나 그 지위가 동등하다. 인구가 많은 민족이나 인구가 적은 민족이나 그 지위가 동등하다. 주류민족인 한족도 마친가지이다. 한족이나 조선족이나 그 지위가 동등하다. 때문에 한족이 주최하는 장소에서는 한족이 한족말을 우선 순위로 할수 있고 조선족이 주최하는 장소에서는 조선족이 조선말을 우선 순위로 할수 있다.   조선족이면서 조선말로 발언하는것을 부끄럽게 여기는 사람들을 보면 정말로 가슴이 아프다. 조선족이면서 자식을 한족학교에 보내는 사람들을 보면 정말로 유감스럽다. 우리는 찬란한 문화와 우수한 언어를 가지고있는 위대한 민족이다. 절대로 한족에 뒤지지 않는 당당한 조선족이다. 우리는 일제치하에서도 고스란히 지켜온 우리 말과 우리 글을 더욱 소중히 여기고 더욱 자랑스럽게 여기고 더욱 사랑해야 한다.    
291    등소평에 대한 7번의 암살시도사건 댓글:  조회:7159  추천:1  2015-05-24
등소평에 대한 7번의 암살시도사건   (번역)     호금도는 2개의 비밀기록자료를 비밀해제하였는데 그중의 하나는 “절대기밀”로 분류된 자료로서 이미 사망된 국가지도자가 건국후에 맞은 폭력공격, 암살, 상해사건의 기록자료이다. 이 기밀해제문건에는 건국후에 이미 사망된 당, 정, 군의 국가지도자에 대한 암살시도사건에 관한 기록이 있는데 그중에는 등소평에 대한 7번의 암살시도에 대한 자료가 있었다.     첫째, 1969년에 등소평거처가 총격을 당한 사건   1969년 10월 21일에 등소평은 억울한 루명을 쓰고 중공중앙의 제1호명령을 받아 강서성 신건현 망성강의 버려진 한 보병학교에 연금되여있었다. 3일째 되던날(10월 23일 새벽)에 여러명의 무장”민병”들이 보병학교에 란입하여 등소평의 거처에 향하여 총을 쏘아댔다. 그러나 목표를 잘못잡아서 총기란사를 당한 곳은 등소평을 감시하던 경비들이 머무는 곳이였다. 경비들은 즉각 반격하였는데 여러명의 무장”민병”들은 총을 맞고 죽었다. “9.13”의 림표사건후에 내부에서는 “이 사건은 림표가 강서성 군구에 지시하여 이루어진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80년대초에 림표집단을 조사할 때 림표가 꾸몄거나 지시한것이 아님이 립증되였다.     둘째, 1973년에 등소평전용기가 공중해체된 사건   1973년 2월 20일에 중공중앙 판공청은 구쏘련제 비행기를 강서로 보내여 등소평을 북경으로 되돌아오게 하여 업무를 맞기려고 하였다. 그러나 강서성군구는 등소평을 기차에 태워서 북경으로 보내라는 긴급통지를 다시 받았다. 군구의 참모장이 직접 경비를 이끌고 기차 한칸을 붙여서 북경으로 보냈다. 결과 등소평이 타려고 했던 구쏘련비행기기는 북경으로 돌아가던중 안휘상공에서 공중해체되였다.     셋째, 1975년에 산보를 하다가 총격을 받은 사건   1975년 9월의 어느날에 산서성의 어느 지역으로 갔던 등소평, 강청 등의 일행이 경비와 함께 언덕에서 산보를 하는데 어디선가 총알이 날아왔다. 경비는 곧 총을 쏜 방향을 향하여 반격했다. 그러자 총을 쏜 자는 도망쳤다. 이 사건은 수수께끼로 남았다.     넷째, 1976년에 등소평이 연금된 초대소에 갑자기 화재가 발생된 사건   1976년 4월의 어느날에 등소평은 당내외의 모든 직무를 박탈당했다. 그리고 북경군구의 옥천산초대소 5호청사의 1층에 연금되였다. 저녁에 등소평이 연금된 1층에 갑자기 전원합선이 일어나 불이났고 1층의 101호방에서 10호방까지 전부 불에 타버렸다. 그날 저녁에 등소평은 학습이 예정되여있었다. 그런데 그 후에 경비와 함께 목욕탕에 가서 목욕을 하는 바람에 화를 면하였다. 나중에 등소평은 북경성내의 주택으로 옮겨졌는데 내부기록에는 이것이 엽검영이 보낸 경비가 등소평의 안전을 보호한것이고 암살의 위험을 피하게 하였다고 적었다.     다섯째, 1976년에 등소평이 탄 차의 차축이 부러진 사건   1976년 7월의 어느날에 등소평은 하북성 승덕의 피서산장으로 가라는 통지를 받았다. 그러나 등소평은 건강을 리유로 병원에서 검사를 한다고 하고 가지 않았다. 등소평을 승덕으로 보래려고 준비했던 작은 일제차량은 나중에 국방부로 보내졌다. 국방부에서는 사용하려고 검사를 했는데 결과 전륜축이 이미 부러져있었다. 만약 도로를 달렸다면 언제든지 차가 뒤집히고 불이 날수 있었다. 나중에 왕동흥은 등소평이 화를 면한것은 자신이 세운 공이라고 줄곧 자랑하였다. 그는 당시 등소평에게 승덕으로 가지 말라고 통지했다.     여섯째, 1980년에 등소평이 회의좌석에서 총격을 받은 사건   1980년 3월의 어느날에 등소평이 제남군구에서 부대를 시찰할 때의 일이다. 등소평이 군구의 회의에서 보고를 마치고 좌석으로 돌아왔을 때 회의장의 당번경비가 “모주석의 혁명로선을 보위하자! 등소평을 타도하자! 강청을 위하여 복수하자”는 구호를 웨치면서 등소평의 좌석을 향하여 련속 몇발을 발사하였다. 등소평의 신변에 있던 경비가 막아주어 등소평은 위험을 피하였다. 총을 쏜 자는 나중에 제압당하였다.     일곱째, 1988년에 등소평이 일곱번째 암살을 모면한 사건     1988년 2월의 어느날에 등소평, 진운, 양상곤 등이 상해의 서교빈관에서 설명절을 보내고있었다. 그런데 “모택동주의전투대”라고 자칭한 4명의 총을 든 무장분자들이 서교빈관으로 진입하여 당번을 서고있던 무장경찰들과 전투를 벌렸다. 3명은 그 자리에서 죽었고 1명은 체포되였다. 그들의 몸에서는 등소평을 암살하는데 사용하기 위한 거주지의 지도, 폭파약, 소음총, 발화기재 등이 발견되였다.       
290    로총각의 순애보 / 김희수 댓글:  조회:3350  추천:1  2015-05-22
로총각의 순애보 김희수   조선남은 올해 마흔한살인 로총각이다. 코가 비뚤어진것도 아닌데 여태껏 장가를 못간것은 바로 그 개도 안 먹는 돈때문이였다. 요즘 세월의 로총각 대부분이 그러하듯 돈이 없는 그를 처녀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도대체 돈이 무엇이길래… 하지만 요즘 처녀들이 돈, 돈, 돈… 하는것은 순전히 먹고 살기 위해서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더욱 돈때문에 악을 쓰는것은 남보다 더 잘살기 위해서이다. 집도 널직한것으로 마련하고 가전제품도 호화스러운것으로 갖추고 자가용도 굴리면서 멋지게 살아보기 위해 사람들은 로씨야요, 리비아요, 한국이요, 일본이요 하며 외국으로 돈벌이를 떠나고 어떤 처녀들은 아예 외국으로 시집을 가버린다. 처녀들뿐만아니라 아줌마들도 남편과 아이까지 다 버리고 돈 많은 사장님이나 외국남자들의 품에 안겨버린다. 이제는 한국결혼이요, 일본결혼이요 하고 신문과 방송에 광고까지 내며 공공연히 우리 녀자들은 외국으로 가버린다. 《녀자들이 모두 외국으로 날아가면 나같은 로총각들은 어떻게 장가를 가나?》 조선남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였다. 이렇게 힘들게 사느니 차라리 개코같은 인생을 종말짓고말것을… 결국 한번은 저 화장터에 실려가 한줌의 재로 사라져버릴 인생인데…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조선남은 차마 목숨은 못 버리고 우유배달이랑, 생수배달이랑 하며 그럭저럭 하루하루 살아가고있었다. 오토바이에 싣고 다닌다 하지만 물통을 어깨에 메고 하루에도 6, 7층 아빠트를 몇십번씩 오를 때면 숨이 턱에 닿고 온몸이 땀투성이가 되여 밤에 자리에 누우면 어깨며 다리가 시큰시큰 쑤셨다. 더구나 엘레베터가 고장이 난 한 회사의 12층으로 올라갈 때면 정말 죽을 지경이였다. 그러나 이런 고생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생존을 위한것이니 얼마든지 견딜수 있고 또 이제는 단련되여 6, 7층 계단을 오르내리는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다만 견딜수 없는것은 녀자 없는 고독이였다. 온종일 뼈빠지게 일하고 집에 돌아오면 맞아주는것은 썰렁한 가마목뿐이다. 이 도시에 얼마 남지 않은 구식온돌집에 불을 지펴 밥을 짓고 자리에 누우면 낮에 생수배달을 했던 아빠트 주인들이 떠오른다. 널직하고 호화로운 집에서 사는 그들이 눈물나게 부러웠다. 특히 그런 집에서 사는 젊은 녀자들을 볼 때마다 나에게도 저런 마누라가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굴뚝같이 일어나고 집에 혼자 있는 젊고 이쁜 녀주인을 보면 마구 덮치고싶은 욕망이 불쑥불쑥 솟구칠 때가 한두번이 아니였다. 그중에서도 그의 단골이 된 정씨 아줌마를 보면 정신이 아찔했다. 정씨 아줌마는 그보다 서너살 년상이였지만 얼굴이며 몸매가 처녀 뺨칠 정도였다. 정씨 아줌마는 조선남과 낯이 익자 궁금한지 이것 저것 물었다. 《이렇게 일을 잘해서 집사람이 얼마나 좋아하겠어요.》 《허허, 집사람은 무슨 집사람… 난 총각입니다.》 《어머, 총각이라니? 나이도 있을텐데…》 《부끄럽지만 마흔을 갓 넘었습니다. 장가 가기 바쁜 세상이여서…》 《하기야 요즘 세월이 좀… 그렇지만…》 동정의 눈길로 조선남을 바라보던 정씨 아줌마는 갑자기 무슨 생각이 떠오른듯 무릎을 탁 치더니 시탐조로 물었다. 《저… 림시 데리고 살 녀자라도 구할 생각이 없어요?》 그러면서 자기가 아는 녀자인데 남편과 아이까지 있지만 딱한 사정이 있어서 한달에 500원씩 주는 남자가 있으면 《림시마누라》로 들어가겠다고 한다는것이였다. 조선남은 그 말을 롱담으로 듣고 픽 웃었다. 《어디 그런 미친 녀자가 있답니까?》 《미쳐서도 아니고 헤프고 밝히는 그런 녀자도 아니예요. 아주 정숙한 녀자인데 사정이 딱해서… 짠지장사를 하는데 남들만 음식솜씨가 못한지 잘 팔리지 않지, 다방이나 노래방 아가씨로 들어가자 해도 나이가 많지, 그렇다고 이 남자 저 남자에게 몸 파는 일은 죽어도 못하겠고… 그저 자기와 비슷한 나이의 착한 남자가 있으면 림시라도 그의 마누라로 되겠다나요.》 《기막히군!》 조선남은 한심한 일도 있다고 생각하면서 왼고개를 쳤다. 정씨 아줌마가 그 녀자와 만날 의향이 있으면 소개해주겠다고 말했지만 그는 아무 대답도 없이 그 집에서 나왔다. 가슴이 아팠다. 그날 밤 자리에 누웠지만 잠은 오지 않고 한숨만 풀풀 내쉬였다. 밤마다 녀자생각이 나서 못견디게 괴롭지만 참고 살아왔다. 이제 장가가긴 다 글러버린 처지에 아무 녀자나 데리고 살아볼가? 그는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한달에 500원이라… 그는 어느 한번 친구에게 《그렇고 그런 곳》으로 끌려가서 《그런 녀자》를 산적이 있었다. 한시간에 100원이였다. 거기에 비하면 한달에 500원이 아무것도 아니다. 그 녀자가 밉게 생기지 않았다면 림시라도 데리고 살아보자고 생각하다가 《이 미친놈!》 하고 주먹으로 제 가슴을 마구 쳤다. 미쳤지. 내가 미쳤지. 아무리 장가를 가지 못했다고 남의 마누라를 세맡겠다니? 그는 담배불을 붙여 뻑뻑 빨다가 담배연기를 길게 확― 내뿜었다. 담배연기는 그의 한숨처럼 천정으로 치솟아올랐다. 어디 한번 미친짓을 해본다? 이런 결심을 했다가도 그는 감히 행동에 옮기지는 못했다. 몇번이나 정씨 아줌마네 아빠트앞까지 갔다가도 발길을 되돌렸다. 쌍쌍이 걸어가는 남녀들, 10대의 어린것들마저 팔을 끼고 다닌다. 그런데 왜 나만은 혼자 쓸쓸하게 살아야 하나? 씨, 림시라도 좋고 잠시라도 좋다. 남의 녀자라도 붙잡고 살아보자. 그러다가 또 탄식이 나간다. 아아, 멀쩡한 사내놈이 장가를 못가서 남의 안해를 빌려서 살아야 하다니?! 슬프다, 이내 신세여! 그런데 사흘후 정씨 아줌마한테서 생수배달을 요청하는 전화가 왔다. 아니, 무슨 물을 벌써 다 마셨을가? 그가 오토바이짐받이에 생수를 달고 한달음에 달려가보니 정씨 아줌마가 귀속말로 소곤거렸다. 《내 전번에 말하던 그 녀자가 지금 우리 집에 와있어요.》 조선남이 그 녀자를 얼핏 보니 나이는 자기와 비슷해보였고 얼굴은 이쁘지 않았지만 몸매가 잘 빠지고 말할 때마다 살짝 드러나는 덧이가 매력적이였다. 《다방에 가서 돈 파느라 하지 말고 여기서 얘기 나누세요.》 정씨 아줌마가 자리를 피해주어 두 사람은 마주앉았다. 한동안 말없이 어색해있다가 조선남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정아주머니한테서 이미 그쪽 얘기를 들었습니다만 이렇게 뜻밖에 만나게 되니 어떻게 말해야 할지… 뭐 련애하는것도 아니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합시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저는 로총각이다보니 사실 녀자가 수요됩니다. 이렇게 못난 놈과 림시라도 살아볼 의향이 있다면 저한테 오십시오.》 《그쪽에선 제가 왜 이런 짓을 하는지, 제가 어떤 녀자인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그리고 제가 나쁜 녀자라고 생각되지 않으세요?》 그 녀자가 숙였던 고개를 살며시 들고 우울해보이는 눈으로 조선남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는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정씨 아줌마의 말로는 그녀가 딱한 사정이 있어서 그런다고 하지만 그는 구체적으로 그녀가 무슨 딱한 사정이 있는지 모른다. 필경 이런 일은 그녀나 그나 모두 떳떳하지 못한 일이였다. 그러니 서로 상대방에 대해 깊이 알려고 하지 말아야 할것이다. 《물론 궁금합니다만 그쪽에서 사정을 말하고싶지 않다면 굳이 캐묻지 않겠습니다.》 《사정을 봐줘서 고맙습니다. 정아주머니한테서 들었겠지만 한달에 500원입니다. 그런데 저는 평소엔 그냥 저의 집에서 생활하고 주말마다 그쪽 집으로 갈수 있습니다. 토요일과 일요일에만 그쪽과 함께 생활할수 있습니다. 그쪽에서 무슨 요구가 있으면 말씀해보십시오.》 날마다 함께 사는것이 아니고 주말에만… 욕심같아선 그녀를 진짜 안해로 맞아 한평생 날마다 함께 살고싶었다. 그러나 그는 이내 자기 처지를 깨닫고 가벼운 한숨을 내쉬였다. 《남의 안해를 빌려다 살아야 하는 신세에 무슨 요구가 더 있겠습니까?》 이렇게 두 사람은 림시주말부부를 맺기로 합의를 보았다. 그리고 그 녀자는 그날 밤으로 조선남을 따라갔다. 그 녀자는 조선남의 집에 들어서자마자 팔소매를 걷어올리고 집안에 어지럽게 널린 물건들을 깨끗이 거두고 쓸고 닦은후 행주치마를 두르고 부엌에서 저녁밥을 지었다. 오랜만에 녀자가 지어준 밥을 먹어보는 조선남은 너무 행복하여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전에 엄마가 지어준 밥을 내놓고는 녀자가 지어준 밥이 처음이였다. 저녁을 먹은후 텔레비죤을 보다가 그 녀자가 이불을 폈다. 그리고 베개 두개를 가지런히 놓고 먼저 누운후 처녀같이 부끄러운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여기 와 누우세요.》 텔레비죤을 보는척하면서 그 녀자의 눈치만 살피던 로총각은 가슴이 동해처럼 마구 설레였다. 그는 자신이 어떻게 그 녀자한테로 다가가 옷을 벗기고 끌어안았는지 모른다. 어느 땐가 《그렇고 그런 곳》에서 《그런 녀자》와 《그런 경험》이 있었지만 진정한 녀자의 맛을 보기는 처음이였다. 오래동안 굶주렸던 욕정의 분출구가 화려하게 폭발하는 순간 그는 녀자란 이런것이구나, 이래서 남자에겐 녀자가 있어야 하는구나를 깨달았다. 어떤 사정으로 돈때문에 온 녀자지만 잠시라도 자기 녀자가 되여주는것이 눈물나게 고마왔다. 단순히 육체적인 욕망때문만이 아니였다. 그는 그 녀자한테서 《가정》의 따사로움과 《사랑》의 감미로움을 느꼈다. 그 녀자는 어김없이 주말마다 찾아와서 그의 《안해》가 되여주었다. 그사이에 그는 알게 모르게 그 녀자한테 정이 들었다. 오래동안 사랑에 목말랐던 로총각은 진정으로 그 녀자를 사랑하게 되였다. 그는 날마다 주말이 돌아오기를 목이 빠지게 기다렸다. 그것은 달콤한 기다림이였다. 그런 기다림이 있었기에 그는 아무리 일이 바빠도 힘든줄 몰랐다. 남의 안해를 세맡자면 혼자 살 때보다 돈을 더 많이 벌어야 했기에 그는 생수배달을 하는외에 신문과 우유배달도 했다. 온종일 오토바이먼지를 들쓰면서 거리를 질주해도 그 녀자만 생각하면 성수가 났다. 생수를 두통씩 메고 6, 7층 계단을 오르내려도 기운이 막 솟구쳤다. 《쨍하고 해뜰 날 돌아온단다》는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12층도 잠간사이에 가볍게 오르내렸다. 어느날, 조선남은 그 녀자와 사랑을 나눈후 꼭 껴안고 속심을 털어놓았다. 《우리… 진짜 부부가 되면 안될가요?》 《림시라고 말했잖아요?》 《안해를 남한테 세줄만큼 박정한 남편이라면 리혼하고 나와 살자요. 난 당신을 영원히 생명처럼 사랑할겁니다!》 《그건 안돼요. 전 총각의 과분한 사랑을 받을만한 그런 녀자가 못돼요. 이러지 말고 앞으로 좋은 녀자를 찾아 장가를 드세요.》 《아닙니다. 내 눈엔 당신이 제일 좋은 녀자입니다. 우리 결혼합시다!》 《그건 불가능해요.》 그녀는 머리를 가로저었다. 조선남은 그 녀자를 더욱 으스러지게 꼭 껴안으며 애걸했다. 《난 정말 당신을 생명처럼 사랑합니다! 우리 결혼합시다!》 《자꾸 이러지 말아요. 우린 림시부부라고 계약했잖아요. 서로 계약을 지킵시다.》 《그럼 지금처럼 림시부부라도 좋으니 우리 영원히 이렇게 삽시다. 영원히 날 떠나지 말아주십시오. 네?》 《총각은 정말 순진해요. 이 세상을 너무 몰라요…》 조선남은 안타까왔다. 그 녀자와 영원히 함께 살고싶은데 그 욕망을 실현할수 없는 현실이… 그는 그 녀자가 어느날 문뜩 떠날가봐 근심되였다. 그런데 정말 그날은 끝내 찾아왔다. 《주말부부》를 맺은지 6개월이 되는 어느날, 그 녀자가 뜻밖에 《오늘이 마지막이예요. 이제 가면 전 다시 오지 못해요.》라고 했다. 순간 그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듯했다. 남의 안해였지만 그는 그 녀자를 자기 안해처럼 사랑했다. 그 사랑이 그의 가슴에 꽉 차서 이제는 그 녀자와 떨어져서는 못살것 같았다. 그런데 마지막이라니… 《왜?》 그 녀자는 헤여져야 하는 리유를 말하지 않았다. 그는 그 녀자의 정체를 알고싶었다. 그래서 그 녀자가 작별을 고하고 떠날 때 뒤를 밟았다. 그런데 이렇게 헤여지는 마당에 뒤를 밟는 자신이 너무 우스웠다. 하지만 강한 궁금증을 떨쳐버릴수 없었다. 그 녀자는 택시를 잡아타고 북대에서 내리더니 어느 골목의 초라한 대문앞에서 내렸다. 그는 오토바이에서 내려 멀찌감치 숨어서 살펴보았다. 그 녀자는 초라한 대문을 열고 낡아빠진 단층집으로 들어갔다. 슬금슬금 초라한 대문앞까지 다가간 그는 따라 들어갈가 말가 망설이다가 대문앞에서 서성거리며 기다렸다. 담배를 몇대 피웠는지 모른다. 반나절이나 지났을 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얼른 구석에 몸을 숨겼다. 그 녀자가 무거운 트렁크를 들고 나오더니 마침 그 골목에 왔던 택시를 불러 타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는 따라가려 했지만 오토바이가 시동이 걸리지 않아 놓치고말았다. 마침 그 옆집할머니가 대문앞으로 나온것을 보고 다가가서 물었다. 《저… 이 집 아줌마가 방금 짐을 들고 나가던데 어디로 갔는지 아십니까?》 할머니가 의아한 눈길로 바라보자 그는 제꺽 거짓말을 둘러댔다. 《이 집 아줌마가 우리 집에 와 가정보모를 했는데 오늘 갑자기 그만두고… 물건을 두고 갔기에 돌려주려고 왔는데…》 그제야 할머니는 경계심을 늦추고 입을 열었다. 《에그, 그 엠네 불쌍한 엠네요. 남정이 차사고로 반신불수가 돼서 혼자서 아이를 공부시키느라 죽을 고생을 했소. 어제는 외국 갔던 애 고모가 와서 애 아빠를 병원에 데려가고 아이는 애 이모가 와서 데려가고… 그 엠네는 외국으로 돈벌이하러 간다고 하더구먼.》 원래 이런 일이였구나. 조선남은 한숨을 내쉬였다. 그 녀자는 그저 한마디 미안하다는 말을 남기고는 그렇게 떠나갔다. 그 녀자가 없는 집은 너무 썰렁했다. 그는 집에서 뛰쳐나가 한동안 그 녀자가 떠나간 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 녀자는 어디로 갔을가? 한국으로 갔을가? 아니면 일본? 미국? 호주? 그는 오래도록 그 자리에 장승처럼 서있었다. 그의 집 굴뚝에서 시꺼먼 연기가 뭉게뭉게 솟아오르고있었다. 굴뚝에서 솟는 연기는 로총각의 《한숨》이였다.  
289    장개석의 본부인 모복매의 처량한 일생 댓글:  조회:5957  추천:2  2015-05-17
장개석의 본부인 모복매의 처량한 일생      장개석의 본부인이며 장경국의 모친인 모복매는 1882년 11월 9일에 절강성 봉화현에서 출생했다. 장개석과 모복매(毛福梅)는 1901년에 부모의 명과 중매를 거쳐 결혼했다. 두 집안은 모두 사업을 자그마하게 꾸리는 집안들이여서 집안이 서로 맞았다. 그해에 장개석은 14세이고 모복매는 18세였다. 당시 절강일대의 민속으로는 녀자가 나이많은것이 일반적이였으며 “ 4년차이가 가장 좋은 짝이며 아주 길하고 리롭다”고 했다. 결혼식때 장난꾸러기였던 장개석은 우스개거리를 만들어냈다. 원래 신부의 꽃가마가 남편의 집안에 도착하면 폭죽을 터뜨린다. 그때 놀이를 즐기던 아이나 결혼식에 참가한 아이들은 모두 물려나가 땅바닥에 떨어지는 폭죽을 줏군 했다. 신랑인 장개석은 원래 집안에서 결혼식을 준비해야 했는데 이 광경을 보고는 자기가 지금 무슨 립장인지도 모르고 곧 아이들틈으로 달려나가서 땅바닥에 떨어지는 폭죽을 줏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친구들과 손님들이 이를 보고 모두 박장대소를 했다고 한다. 봉화현에는 “신랑이 폭죽을 주으면 부부는 끝까지 가지 못한다”는 속설이 있었으므로 이런 행위는 금기에 해당되는 일이였다. 장개석의 모친 왕채옥(王采玉)은 화가 나서 발을 구르면서 욕을 했다. 신부도 가마속에서 그 말을 듣고 몰래 눈물을 흘렸다. 그들의 최종결과는 역시 이 말대로 되였다. 첫날밤에 장개석은 신방에서 달아나 어머니의 침대에서 잠을 잤다. 그 말을 들은 모복매는 서럽게 울다가 새벽이 되여 수탉이 울어서야 잠들었다. 봉화의 풍속에 따르면 남녀가 결혼후 정월 초이틀이 되면 신랑은 처가집에 가서 세배를 드려야 한다. 왕채옥이 재삼 권고해서야 장개석은 례물을 꾸려가지고 처가집으로 갔다. 그날에 장개석의 장인과 장모도 닭을 잡는다, 오리를 잡는다, 탕원(汤圆)을 만드다 하며 바삐 돌아쳤다. 하지만 반나절이 지나도 사위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장개석의 집에서 처가까지는 걸어서 3시간이면 닿을만한 거리이지만 해가 서산에 질 때가지 기다려도 사위는 나타나지 않았다. 손님들이 돌아가겠다고 하자 장개석의 처가에서는 난처해서 어쩔바를 몰랐다. 그때 모복매의 사촌동생 모홍방(毛鸿芳)이 숨을 헐떡거리며 달려와서 사위가 왔는데 모가사당에서 등불놀이를 하고있다고 알려주었다. 그 말을 들은 장개석의 장인은 자기의 귀를 의심했다. 9년동안이나 글을 읽은 사람이 규칙도 모르다니? 모정화(毛鼎和)는 급히 곁에 있는 큰아들을 보고 말했다. “무보야, 빨리 가보아라. 정말 너의 매제라면 그 보고 돌아가라고 해라. 오늘은 찾아오지 말라고 해라.” 모무보가 달려가려고 했지만 한발 늦었다. 문밖에서 징소리와 폭죽소리가 울리면서 등불대오가 다가오고있었다. 제일 앞에 선 소년이 바로 장개석이였는데 신이 나서 폭죽이 불을 붙이고있었다. 그 광경을 본 모정화는 화가 나서 사위인 장개석을 막아서서 대통으로 삿대질하며 욕설을 퍼부었다. “너, 너 변변치 못한 놈아! 무슨 낯짝으로 찾아와서 이런 꼴을 보이느냐? 장씨와 모씨 두 가문을 네놈이 더럽히는구나!”  장인에게 욕을 얻어먹은 장개석은 난처하여 아무말도 못하고 몸을 돌려 아무렇지도 않은듯이 달아났다. 결혼후 처음 몇년간은 장개석이 현소재지와 녕파에 가서 공부를 하였는데 모두 모복매가 동행했다. 두 사람은 수년을 함께 생활했다. 그때 장개석은 10여세여서 이미 다 컸지만 모복매가 모든것을 돌봐주었다. 모복매에게 있어서 장개석은 남편이라기보다는 성격이 나쁜 동생과 같았다. 한번은 두 사람이 싸워서 장개석이 그녀의 배를 발로 찼기에 그녀는 류산을 했다. 장개석은 18세가 되자 우국우민의 의식이 있었기때문에 일본으로 건너가서 군관학교에 입학했다. 장개석은 귀국하여 여름방학을 보내군 했는데 상해에서 머물렀다. 장개석의 모친은 모복매를 보내서 장개석을 돌봐주게 하였다. 모복매는 교육을 받지 못하고 전족을 한 전통녀인이여서 장개석의 체면을 구기는 일이 많았다. 장개석은 여러번이나 모복매에게 크게 화를 낸 적이 있었으며 오래동안 그녀를 본체만체하기도 했다. 하늘의 뜻인지는 몰라도 모복매는 집으로 돌아간후에야 임신한것을 깨달았고 다음해 봄에 장경국을 낳았다. 모복매는 그때부터 정신적인 의지처가 생겼다. 그녀는 전력을 다해서 아들을 돌보았다. 그때 장개석의 풍류는 점차 장개석의 모친의 귀에도 들려왔다. 장개석의 모친은 아들에게 자신이 죽은 후에라도 모복매를 잘 대해주라고 엄명했다. 장개석은 모친의 말을 잘 따라서 하나하나 모두 응낙했다. 모복매가 장씨집안에 시집온지 20년이 지난 1921년에 그녀가 친어머니처럼 따르던 장개석의 모친이 갑자기 사망되였다. 모복매는 의지처를 잃었다. 장례식을 끝낸후 반년도 되지 않아 장개석은 모복매의 오빠에게 서신을 보내여 모복매와 리혼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서신의 내용은 내개 이러했다. “10년동안 발걸음소리만 듣거나 사람그림자만 보아도 자극을 받았다. 내가 이제 결심을 했는데 이는 10년의 고통이다. 10년동안의 자극을 거쳐 이루어진것이며 또한 침통하고 비감한 심정이다.” 이로써 볼 때 리혼할 생각을 가진것은 오래전부터라는것을 알수 있다. 장개석은 먼저 상해에서 요야성(姚冶诚)을 품었고 나중에 진결여를 취했다. 그리고 원래의 부인에게 리혼서를 보낸것이다. 모복매에게 있어서 이것은 청천벽력이였다. 그와 아들은 함께 끌어안고 눈물을 흘렸고 더이상 살고싶은 마음이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왔다. 게다가 또 하나의 타격이 뒤를 이었다. 장개석이 아들에게 상해로 와서 공부하라고 한것이다. 계구의 옛날 집에는 모복매만이 홀로 남았다. 3년후인 1925년에 장경국이 구쏘련으로 류학을 갔기에 모자간은 그후 12년간을 떨어져서 지낸다. 첫2년간은 서신이 왕래되였지만 나중에 장경국이 쏘련신문에 “장개석을 성토하는 성명”을 발표한 이후 집안에서의 일체서신이 단절되였다. 1927년이 되여 장개석은 송미령에게 청혼했는데 송씨집안에서는 반드시 원부인과 공개적으로 리혼을 선포하도록 요구했다. 장개석은 계구로 돌아가서 모씨집안에 자기의 뜻을 밝혔다. 모씨집안에서는 례에 근거하여 “모복매는 이미 장씨집안에 시집갔으니 살아도 장씨의 사람이요, 죽어도 장씨의 귀신”이라고 답변했다. 장개석은 이 말을 듣고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잘못처리하면 사람의 목숨이 달린 일이였다. 어느날에 장개석은 몰래 옛집으로 모복매를 찾아갔다. 모복매는 마침 불상앞에 무릎을 꿇고 울면서 기도를 하고있었다. 장개석은 그녀의 눈빛이 멍하고 비통해하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영 언짢았다. 그는 그녀에게 리혼후에도 그녀가 여전히 옛집의 녀주인으로 남게 해줄것이며 주변사람들에게 그녀를 “대사모(大师母)”로 부르게 하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리고 생활의 모든 필요한것도 자신이 책임지겠다고 하였다. 모복매는 어쩔수 없이 리혼서에 서명하였다. 10년후에 장경국은 로씨야부인과 아들을 데리고 귀국했다. 모복매는 마침내 아들을 만나게 된것이다. 모복매가 며느리의 중국이름을 묻자 장경국은 부친이 중국이름을 “방랑(方娘)”으로 지어주었다고 말했다. 모복매는 “랑(娘)”이 별로 좋지 않다고 하였다. 그녀보다 배분이 높은 사람들마저 그녀를 모두 “랑(娘)”이고 부르면 복이 달아날것이니 “방량(方良)”으로 고치는것이 좋겠다고 했다. 이 량(良)은 어질고 현명하다는 뜻이니 좋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그후 장방량(蔣方良)이란 이름을 계속 쓰게 되였다. 아들, 며느리, 손자와 함께 한 기간이 모복매에게는 여러해동안 가장 즐거왔던 기간이다. 그녀는 아들과 손자를 데리고있으면서 그들이 좋아하는 고향음식을 많이 만들어 먹였다. 아들도 생활이 안정되면 모친을 모시고 함께 살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것은 아들과의 이 만남이 그녀와 아들의 마지막 만남이 되였다는 점이다. 반년후에 일본군의 비행기가 계구를 폭격했고 모복매는 불행히도 총알을 맞고 무너진 담장에 깔려 사망되고말았다. 그녀의 나이 58세때의 일이다. 1947년에 장개석이 고향집으로 돌아와 성묘를 했다. 아침에 그는 홀로 모복매의 묘에 가서 묵묵히 세번 절을 했다. 이것이 그녀에 대한 그리움인지 미안함인지 작별인사인지 장개석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알수 없을것이다. 모복매는 어려서부터 어려 사람들이 그녀의 명을 점쳐 주었다. 그녀의 남편과 아들은 모두 크게 부유하고 크게 귀하게 될것이라고 하였는데 이 말은 그대로 들어맞았다. 다만 점쟁이는 남편과 아들의 부귀가 그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을것이라는 점을 알지 못했던것이다. 그녀의 일생은 더할수 없이 외롭고 처량하였다.  
288    모택동의 전용렬차 피습사건 댓글:  조회:6002  추천:0  2015-05-10
모택동의 전용렬차 피습사건    (번역)   1955년에 소산현(萧山县)에서 모택동의 전용렬차피습사건이 벌어졌다. 이는 당시에 “통천대안(通天大案)”이라고 불리웠다. 1955년 6월 18일 19시 10분에 모택동주석과 중국남방을 방문하던 구쏘련의 부장회의 주석 마린꼬브(马林科夫)를 태운 전용렬차는 천천히 항주기차역에서 출발했다. 19시 45분에 렬차가 소산현의 서문도구(西门道口)를 지날 때 갑자기 “펑”하는 소리가 울렸다. 모택동을 수행하면서 안전을 책임지고있던 성공안청의 왕방(王芳)청장은 깜짝 놀라서 식은땀을 흘리면서 전용렬차를 신속히 검사했다. 그는 놀랍게도 여섯번째 차량칸의 오른쪽의 유리창에 구멍이 하나 나있는것을 발견했다. 구멍의 크기는 엄지손가락정도였다. 왕방과 경호일군들은 모두 식은 땀을 흘렸다. 렬차가 제기현(诸暨县)기차역에 정차했을 때 즉시 기차에서 내린 왕방은 기차역장실로 가서 성공안청 부청장 려검광(吕剑光)과 통화를 하여 전용렬차에서 발생한 상황을 알려주었다. 이 사건의 심각성은 이미 하늘끝에 닿을 정도였다. 려검광은 즉시 소산현공안국의 반진탁(潘振铎)국장에게 전화를 걸어 전용렬차가 피습된 상황을 알려주고 소산현공안국에서 즉시 사건을 해결하도록 지시한다. 전화를 마친 려검광은 즉시 밤을 새워 소산까지 갔다. 려검광은 반진탁과 함께 사건을 조사한후 함께 항주로 가서 절강성당위서기 강화(江华)와 담진림(谭震林)에게 보고하려고 했다. 담진림은 당시 중공중앙 정치위원이고 국무원 부총리 겸 화동국 제1서기직을 맡고있었는데 항주에 시찰을 내려왔던것이다. 강화서기의 거처에 도착한후에야 그들은 객실의 쏘파에 앉아있는분이 공안부 부부장 허건국(许建国)인것을 발견했다. 허건국은 담진림과 함께 왔던것이다. 려검광은 즉시 사건을 허건국에게 상세하게 보고했고 반국장이 보충하여 보고했다. 허건국은 다음날 아침에 담진림에게 이 사건을 보고한후 즉시 제기현기차역으로 가서 전용렬차에 뚫린 구멍을 살펴보았다. 자세히 조사한후 하건국은 이 구멍이 총격으로 생긴것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총격이라면 렬차의 다른쪽 유리체도 구멍이 나야 할것이기때문이였다. 이를 기초로 적이 모주석과 마린꼬브를 암살하려 했을 가능성은 아주 적다고 보았다. 오히려 현지민중들이 던진 돌이 전용렬차에 잘못 맞아서 그 구멍이 생것을 가능성이 컸다. 허건국은 수사의 중점을 안교향의 조가교촌으로 할것을 제안하였다. 왜냐하면 이곳의 철로는 마을을 가로질러 지나가기때문에 사건이 아마도 그 곳에서 발생했을 가능성이 컸다. 그들은 그 곳의 지주, 부농, 반혁명분자, 나쁜분자, 력사문제가 복잡한 분자들이 그날 저녁 19시부터 20시사이에 어디에서 무엇을 했는가를 자세히 조사했다. 하지만 그 사건은 4류분자가 저지른것이 아니였다. 1955년 6월 23일 오후에 소산현공안국에서는 수사상황을 종합하여 분석한 결과 촌민 조문생(曹文生)을 혐의자로 인정하고 중점적으로 조사했다. 예상했던대로 조가교촌의 시골농민 조문생은 공안국으로 잡혀와서 사실을 그대로 실토했다: “기차가 오기전인 6월 18일 저녁에 우리 5~6명은 철로서쪽에 서서 얘기를 나누고있었습니다. 나는 철로에서 주운 돌을 손안에 쥐고 놀고있었는데 그때 아주 멋있는 렬차가 달려오고있었습니다. 나는 그냥 돌을 던졌는데 기차의 차창유리에 맞았습니다.” 조문생이 한 말은 현장에 있던 다른 농민 조배흥의 증언과도 일치했다. 진상이 규명되자 수사에 참가했던 모든 일군들은 큰 짐을 벗은것 같았다. 려검광은 현장에 있던 공안일군들에게 말했다: “이 사건이 마침내 해결되였습니다. 왜 허건국부부장이 이렇게 중시했고 친히 현장까지 나와서 살펴봤겠습니까? 여러분들은 그날 그 전용렬차에 누가 타고있었는지 압니까? 바로 모주석과 쏘련부장회의주석 마린꼬브입니다. 이런 렬차가 피습받았으니 전국에서 최대의 사건이 아니겠습니까?” 그자리에 있던 공안일군들은 모두 놀라서 혀를 내밀었다. 사건은 해결되였는데 이 “통천대안”을 저지른 자를 어떻게 처리할것인가를 놓고 소산현공안국의 지도자들은 어찌 할지를 모르고있었다. 현공안국에서는 성공안국으로 사건기록을 보냈고 성공안국에서는 그 사건기록을 공안부로 보냈다. 진술록음자료와 증언진술기록도 모조리 함께 보냈다. 허건국은 보고를 받은후 “조문생이 철로교통안전을 파괴한것은 범죄행위이다. 조문생이 빈곤농민인 점을 감안하여 철저히 교육하고 경하게 처리하라. 집행유예면 괜찮겠다”고 지시했다. 중앙의 지시는 성으로 내려왔다. 성공안청 왕방청장은 조문생의 사건기록에 친히 처리의견을 적었다. 조문생은 구금된지 23일후에 석방되여 가족들과 만났다.  
287    조선족간부 앞에 왜 조선족이 붙었을가 댓글:  조회:5180  추천:12  2015-05-03
조선족간부 앞에 왜 조선족이 붙었을가   김희수     이미 많은 사람들이 언급했지만 일부 조선족간부들은 자신이 조선족인것을 부끄러워하는것 같다. 그들은 조선글로 발언고를 쓰고 조선말로 발언하면 자신의 문화수준이 낮아지고 체면이 깎이고 명예가 손상되는것처럼 여기고있다. 반면에 한어로 발언하면 문화수준이 높아지고 체면이 서고 명예가 빛나는것으로 인지하고있다.   조선족간부는 조선족을 위해 일해야 하고 조선족을 대변하여 말해야 한다. 이는 조선족간부로서 응당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자질이다. 조선족인것을 체면이 깎이는것으로 여기는 순간부터 조선족간부는 조선족이 아니다. 조선족간부가 조선족이 아니면 간부로 존재할수 있을가?   조선족사회가 있어야 조선족간부가 존재할수 있다. 더 정확히 말해서 연변조선족자치주가 있어야 조선족간부가 존재할수 있다. 연변조선족자치주가 있기에 민족정책에 따라 조선족간부는 소수민족간부비례의 혜택을 받는다. 연변조선족자치주가 없다면 그 많은 조선족간부들이 존재할수 있을가? 연변조선족자치주가 아닌 한족지구를 살펴보라. 조선족간부가 몇이나 되는가? 조남기, 리덕수, 전철수 등 조선족간부는 모두 연변조선족자치주출신이다.   조선족간부는 자신이 조선족이기에 그 자리에 간부로 설수 있다는것을 알아야 한다. 조선족이 아니라면 한족들과 동등하게 경쟁해야 하는데 그 결과는 밀릴것이 뻔하다. 하기에 아무리 한족말로 발언해도 소수민족혜택을 받지 못하는 경우에는 조선족은 간부로 되기 힘들다는것을 깨달아야 한다.   이런것을 깨닫는다면 더는 자신이 조선족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을것이다. 이런것을 깨닫는다면 조선글로 글을 쓰고 조선말로 발언하는것을 더는 체면이 깎이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것이다. 이런것을 깨닫는다면 자신이 조선족임을 망각하지 않을것이다. 이런것을 깨닫는다면 조선족을 위해 일하고 조선족을 대변해 말하려고 할것이다.   조선족간부는 단순한 간부가 아니라 간부앞에 조선족이라는 무겁고도 영광스러운 이름이 붙어있는 간부이다. 조선족간부, 왜서 간부가 뒤에 있고 조선족이 앞에 있는가? 이는 간부인 나보다 조선족이 먼저라는것이다. 즉 조선족간부는 조선족을 위해 일하는 간부, 조선족을 대변해 말하는 간부라는것을 말해준다.   조선족간부는 항상 자신이 조선족이라는것을 잊지 말라고 간부앞에 조선족을 붙여주었다는것을 명심해야 한다. 이를 망각하면 자신이 간부로 설자리가 없다는것을 자각해야 한다.   앞에 조선족이라는 무겁고도 영광스러운 이름을 달고있는 조선족간부라면 항상 조선족간부로서의 사명감과 도의적 책임감을 느끼면서 조선족사회의 언어, 교육, 문화 등이 발전하고 연변조선족자치주가 건재하도록 일조해야 하지 않을가.   조선족간부들에게 간부앞에 조선족이 붙어있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또 명심할것을 부탁드리고싶다.  
286    신비한 동행자 댓글:  조회:3080  추천:2  2015-05-03
신비한 동행자   김희수       시병원의 나젊은 의사 동일삼은 새로 맞은 안해 옥화와 함께 신혼려행을 떠났다. 그들이 렬차에 올라 방금 자리를 잡았을 때 느닷없이 웬 녀인이 그들앞에 나타났다. “아이, 두분께서 신혼려행을 떠나시는 모양이군요. 참 즐겁겠네요!” 동일삼부부는 놀란 눈길로 그 녀인을 바라보았다. 그 녀인은 동일삼의 전처 향자였는데 남자처럼 머리를 짧게 깎은 모습이 전보다 더 젊고 예뻐보였다. 향자는 동일삼부부가 응대하건 말건 맞은켠에 앉으며 능청스럽게 웃었다. 말로는 물건구입을 떠난다지만 동일삼은 어쩐지 전처가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있는것만 같아 저으기 불안해났다. 향자는 방송국의 아나운서였다. 그 인물, 그 목소리에 반한 동일삼은 그녀와 결혼했지만 그때로부터 고민에 모대기는 비참한 인생이 되고말았다. 향자는 자기 몸을 남편의 몸과 마음을 쥐고 흔드는 “무기”로 삼아 자신의 말을 고분고분 잘 들으면 몸을 허락하고 조금이라도 거역하면 한달이고 두달이고 몸을 범접하지 못하게 했다. 이런 때 새로 병원에 들어온 처녀간호사 옥화가 동일삼의 신변에 나타났다. 동일삼은 언제나 생글생글 웃는 옥화의 싱싱한 모습을 볼 때마다 마음속 번뇌가 말끔히 가셔지군 했다. 옥화 또한 의술이 높고 사업심이 강한 동일삼을 존경하고 흠모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두 사람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정이 들었다. 그러던 어느날, 동일삼은 일기를 쓰다 말고 급한 환자가 있어 수술실로 들어갔는데 공교롭게도 그 일기책을 옥화가 보게 되였던것이다. 옥화는 그 일기를 읽고 동일삼의 불행한 혼인에 대해 알게 되였고 동일삼이 자신을 사랑한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이튿날, 옥화는 동일삼을 찾아가서 처녀의 진정을 서슴없이 고백했다. “전 동선생님이 가정이 있는 분이라는데서 자신을 억제했어요.” 이때로부터 두 사람의 은밀한 사랑은 시작되였다. 향자는 어느덧 자기의 “무기”가 무용지물이 되여버린것을 발견했다. 부쩍 의심이 든 향자는 남편의 뒤를 미행하기 시작했는데 끝내 꼬리를 잡고 말았다. 남편이 같은 병원의 처녀간호사와 애매한 관계가 있다는것을 발견한 향자는 화가 나서 길길이 날뛰였다. 동일삼이가 리혼을 제기하자 웬일인지 향자는 순순히 동의했다. 하여 동일삼은 옥화와 재혼하고 신혼려행을 떠났던것이다. “동선생은 전보다 몹시 여위였군요. 새 부인을 맞아드리더니 정력을 크게 소모했나 보군요.” 향자는 제멋대로 지껄이다가 일삼이가 응대하지 않는것을 보고 옥화한테 얼굴을 돌리고 수작을 걸었다. “아이, 동선생부인은 입이 너무 크군요. 그 입으로 동선생을 너무 괴롭히지 말아요.” “썩 물러가오!” 일삼이는 향자의 몰렴치한 언사에 참을수 없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향자는 떡심좋게 웃으면서 대꾸했다. “저더러 물러가라구요? 전 돈을 내고 차를 탔으니깐 두분께서 환영하지 않아도 방법이 없어요.” 동일삼은 옥화를 데리고 다른 차간으로 피해갔다. 향자가 또 따라와서 시끄럽게 굴가봐 그들은 다음 정거장에서 내려 차를 바꿔 탔다. 그들이 자리를 잡고 앉은지 얼마 안되여 그들의 맞은쪽에 색안경을 낀 젊은 남자가 와서 앉았다. 남자는 동일삼한테서 담배불을 빌리며 어디로 가는가고 물었다. 일삼이가 장춘에 가서 며칠 묵는다고 하자 젊은이는 자기도 동행이라고 하면서 몹시 친절하게 굴었다. 그 젊은이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어느덧 장춘역에 와 멎었다. 렬차에서 내린 동일삼부부는 중등쯤 되는 호텔에 자리잡았다. 그 젊은이도 그들의 맞은편 방에 들었다. 동일삼부부가 목욕을 마치고 막 침실에 들어서자 반갑지도 않은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일삼이가 문을 열자 렬차에서 동행했던 젊은이가 배를 부여잡고 신음소리를 내고있었다. “동선생님, 동선생님은 의사라니깐 절 좀 봐주세요. 웬 일인지 배가 아파 죽겠어요!” 그 젊은이는 다짜고짜로 일삼이를 끌고 자기방으로 들어갔다. 침대에 드러누운 사나이는 하얀 배를 드러내고놓고 울상을 했다. 일삼이가 배를 만지자 젊은이는 재빨리 그의 손을 잡아 가슴우로 끌어올렸다. 갑자기 손에 몽글몽글한것이 만져지자 일삼이는 덴겁한듯 깜짝 놀랐다. “엉?” 일삼이가 놀라서 주춤하자 사나이는 음흉하게 웃으면서 색안경과 가발을 벗었다. “당신이?!” 일삼이는 전처의 얼굴에 놀라 뒤로 주춤 물러섰다. 향자는 재빨리 일삼이의 목에 매달리며 애교를 부렸다. “여보, 제가 당신의 안해로 있을 때 린색하게 굴었는데 지금은 당신 마음대로 저를 가지세요!” “이걸 놓소. 난 안해가 있는 사람이요!” “안해가 있는 사람이라구요? 난 당신의 안해가 아닌가요?” “비키오. 난 안해한테 미안한 짓을 할수 없소!” “뭐라고? 나한테는 미안한 짓을 해도 되고 그년한텐 미안한 짓을 할수 없단 말이지? 내가 그년만 못한게 뭐냐? 왜 차별을 놓는가 말이야. 난 오늘 기어코 널 녹여낼테야!” 향자는 성난 사자처럼 펄펄 뛰면서 일삼이의 허리띠에 손을 댔다. 일삼이는 안깐힘을 다해 향자를 밀어버리고 부리나케 그 방에서 뛰쳐나왔다. “왜 그러세요?” 옥화가 쫓기는 강아지처럼 달려들어오는 남편을 보고 의아스레 물었다. 동일삼은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말했다. “그는 남자로 변장한 향자년이였소!” “어마나, 그년이 자꾸 따라와 시끄럽게 구는군요. 어쩌면 좋아요?” “지금 당장 떠나서 다른 호텔로 갑시다!” 그들은 서둘러 짐을 꾸려가지고 호텔을 빠져나와 택시를 잡아타고 다른 호텔에 찾아들었다. 그래도 불안하여 잠을 설친 그들은 이튿날에 장춘구경을 포기하고 심양행보통렬차를 잡아탔다. 그들은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그들이 앉은 차탁우에는 먼저번의 려객이 먹다 남긴 붉은대추 한줌이 놓여있었다. 동일삼은 그 붉은대추를 밀어던지려다가 위생이 불결할것 같아서 후에 쓰레기에 던지려고 비닐봉지에 넣어두었다. 렬차는 이따금씩 기적을 높이 울리며 달리고 또 달렸다. 렬차가 대여섯 정가장을 지났을 때 허리가 구부정하고 머리가 희슥희슥한 로파가 그들 맞은쪽에 맥없이 앉았다. 로파는 일삼이와 눈길이 마주치자 뜻밖에도 반색했다. “아유, 이거 동선생이 아닌가유?” “네. 그런데 할머닌…” “날 모르겠어요? 동선생이 아니면 우리 애는 언녕… 지금도 그 은혜를 잊지 않고있어유!” 분명 자기가 구해준 환자의 어머니이겠는데 일삼이는 도무지 로파를 보았던 기억이 떠오르지 않았다. 로파가 5년전에 교통사고로 다 죽게 된 자기의 아들을 수술하여 살려주지 않았느냐고 설명을 가해서야 비로서 그런 일이 있은듯 싶은 생각이 들었다. 로파는 그때 일삼이가 구해준 아들이 심양의 모 회사에서 사업한다면서 자기는 지금 그 아들집으로  가는 길이라고 했다. 로파는 동선생의 은혜를 갚을길이 없다면서 가방에서 붉은대추를 꺼내 그들에게 맛보라고 권했다. 동일삼부부는 로파가 성의껏 권하자 사양하지 못하고 받아쥐였다. 얼마후 동일삼부부는 잠이 들었는지 의자에 기대여 눈을 감고있었다. 그것을 지켜보던 로파는 그 자리를 슬며시 떠나서 다음의 자그마한 정가장에서 내렸다. 정거장을 벗어난 로파는 인적기 없는 산속에 들어가 가발과 가짜 살가죽을 벗어던졌다. 로파는 원래 향자였던것이다. 교모하게 로파로 변장한 향자는 독약을 넣은 붉은대추로 동일삼부부를 감쪽같이 지옥에 보내려고 했던것이다. 그녀가 리혼에 순순히 동의한것도 오늘의 복수를 위해서였다. “량심없는 배신자, 동가놈아! 이젠 저승에 가서나 그 화냥년과 좋아해라! 으흐흐!” 향자가 복수의 쾌감에 미친듯이 웃을 때 불쑥 동일삼이와 옥화가 유령마냥 그녀의 앞에 나타났다. “앗, 너희들은 사람이냐? 귀신이냐?” 혼비백산한 향자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동일삼은 분노에 찬 눈길로 향자를 쏘아보면서 말했다. “향자, 넌 우리가 너의 속임수에 넘어가 죽었으리라고 생각했지? 난 먼저번에 속았기 때문에 웬 로파가 동행하자 특히 주의하여 살펴보았어. 넌 아나운서였기 때문에 목소리는 신통하게 위장했지만 젊은 녀자의 그 손만은 감출수 없었어. 넌 환자의 어머니인체 했지만 내 눈과 내 기억만은 속일수 없었어. 난 네가 대추를 내놓을 때 그 대추에 독약이 묻혀있으리라고 의심했어.” “그런데 넌 그 대추를 먹었잖았어?” “우리가 먹은건 먼저번의 려객이 남기고간 대추였어.” 향자는 고양이 락태한 상이 되여 그 자리에 폴싹 주저앉았다. 제딴에는 주도면밀한 복수극을 벌렸다고 득의양양해하던 향자는 제가 되려 올가미에 걸려들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던것이다.  (1995년)    
285    모국어보다 영어 더 잘하는게 좋은 일인가요? 댓글:  조회:3799  추천:1  2015-05-03
모국어보다 영어 더 잘하는게 좋은 일인가요? 강상헌 외국어 ‘오픈’이 삼킨 우리말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는 말이 있다. 젠체하는 이들은 이란격석(以卵擊石)이라는, 흔치도 않은 숙어도 들먹인다. 한강에 돌 던지기, 벌겋게 단 화로에 눈[雪] 한 송이[홍로점설(紅爐點雪)], 한잔 물로 수레 가득 땔나무의 불끄기[배수거신(盃水車薪)] 등도 비슷한 뜻이다.   ‘도저히 감당 못할 일’이다. 계란으로 바위를 친들, 요즘 말 ‘진격(進擊)’의 용사라도,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러나 그 말 속에는 ‘그렇다한들 그대로 두고 볼 수만은 없다’는 의지가 담긴 경우 드물지 않다. 굽힐 수 없는 명분, 불굴의 그 투지는, 그 자체로 보람일 수 있다.   ‘문자’ 늘어놓고 잘난 체 하는 모양새, 그다지 곱지 않다. 보는 이들도 같은 느낌일 터다. 그럼 이 영어 ‘문자’의 느낌은 어떠한가? ‘오픈’을 도마에 올린다.   이 낱말 볼 때마다 ‘계란으로 바위치기’를 생각한다. 불붙은 땔나무 수레의 절망감과 눈 한 송이의 희망, 그래도 한강에 돌은 던져야 한다. 하늘 향한 삿대질은 비겁하다. 우리말보다 훨씬 더 많이 쓰이는 ‘가장 강력한 외국어’다. 이런 말씀하실 줄 안다. 이렇게 대답하리라.   “이 보오. 무슨 뜻인지 모르는 바는 아니외다. 허나 글로벌 시대에 이미 우리 말 다 된 그 말 가지고 시비해서 무슨 효용이 있으리오? 너그러운 금도(襟度)를 보여 옹졸한 글쟁이라는 욕 듣지 않도록 자중자애(自重自愛)하시지요.”   -사려 깊은 고언(苦言), 감사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 단어가 피아노나 컴퓨터 같은 외래어(外來語)와는 다르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오픈은 한갓 외국어(外國語)일 뿐이지요. 바꿔 쓸 적확(的確)한 우리말이 있느냐 없느냐를 기준으로 생각합니다.   홈페이지를 ‘누리집’으로 바꿔 부르자고 하는 국립국어원의 ‘홈페이지’. 세금으로 움직이는 이 국가기구도 ‘오픈’의 괴력(怪力)에는 하릴없다. 우리말은 우리의 혼을 담는 그릇이다.   “현실적으로, 외국어나 외래어를 선호하는 것은 어느 정도 이해해야 하는 것 아니오? 애써 배운 외국말 섞어 쓰고 싶은 현학(衒學)의 취향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일 테고, 선생도 예외일 수는 없지 않나요?”   -‘진단’이 틀렸다고 봅니다. 그래서 핵심을 놓치고 있는 것이지요. ‘오픈’이 말아먹는 이 상황은 외국어 선호나 유식한 체 하려는 속성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보다 시민 중 상당수가 우리말보다 영어를 더 잘 알기 때문이라고 저는 짐작합니다. 즉, 영어는 잘 아는데 비해 정작 어머니말(마더텅 mother tongue)은 (그만큼) 잘 알지 못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오픈(open). 열린 펼쳐진 개방된 노천(露天)의 영업중인 공개된 솔직한 미정(未定)인 따위의 형용사로, 열다 눈뜨다 입벌리다 펴다 개방(開放)하다 개통(開通)하다 개업하다 개막하다 개관(開館)하다 시작하다 따위의 동사로, 옥외(屋外) 야외(野外) 노출(露出) 따위의 명사로 참 다양하게 쓰인다. 맥가이버 칼 같은 쓸모 많은 말이다.   비슷하되, 용도와 상황에 따라 다소간의 차이를 품는 ‘오픈’의 이런 여러 쓸모들을 섬세하게 구분하는 우리말을 골라 쓰는 것이 어려워진 까닭이다. 그래서일 것이다. 두루뭉술, 전문가들까지도 대충 ‘오픈’으로 통일, 이젠 그 맞잡이 우리말을 떠올리기도 어려워졌다. ‘오픈’의 바다에 침몰한 것이다. 용불용설(用不用說), 안 쓰면 더 쪼그라든다. 뭐든지, 말도.   우리의 말무더기가 초라해진다. 오래 지녀온 걱정이다. 다양한 어감(語感)의 묘미를 요즘 말글의 어휘에서 보기 어렵다. 가령 박경리 ‘토지’나 최명희 ‘혼불’의 웅혼(雄渾)한 이야기 떠받치는 어휘의 씨줄날줄 기기묘묘 얽히고설킴은 이미 딴 세상이다. 패스트푸드나 라면으로 배고픔은 덜 수 있다. 그러나, 생각은 언어로 한다. 햄버거 말글로 ‘창조’는 못 짠다.                   고래심줄 세금으로 나라말 지키는 국립국어원 홈피마저 ‘오픈’ 타령이다. ‘내용은 한국어 교육 사이트(10월 오픈 예정)에서 제공…’ 등 많은 오픈들이 거기에 또아리를 틀고 있다. 오픈은 더 힘세다. 우리말 모르는 것 부끄럽다 여기지 않아 생긴 서글픈 부등식(不等式)이다. 하릴없이 계란이라도 던져야 하는 이유다. 그 계란던지기모임은 언제 오픈하느냐고요?   ‘시작’ ‘개막’ ‘열린’ 등 많은 뜻의 말 다 잠재워버린 오픈과 같은 경우를 찾아보자. ‘레버리지 효과를 기대하는 중국펀드가 많다’는 증권사 직원의 말에 ‘레버리지 효과’가 뭐냐 라디오 진행자가 물었다. “아, 그러니까, 그게, 레버리지처럼 작은 투자로 큰 이득을 획득하기 위한 ...” 레버리지가 leverage인줄은 알지만 ‘지렛대’임을 (잘) 알지 못하는, 우리말보다 영어를 더 잘 하는 일부 인구(人口)의 특성으로 본다. 영어 낱말 액센트 위치에 따라 달라지는 발음과 의미의 차이까지 빠삭한 그들에게 우리말글의 무게는 얼마나 될까?  
284    일본군의 폭격속에서 열린 모택동과 강청의 결혼식 댓글:  조회:7167  추천:1  2015-05-03
일본군의 폭격속에서 열린 모택동과 강청의 결혼식   (번역)     일본군이 중국을 침략하자 가는 곳마다 초연이 자욱했으며 피비린 냄새가 넘쳐났다. 하지만 “붉은 수도” 연안은 평온한 세계였다. 이 황토세계에 자리잡은 옛성에서 높이 울려퍼진 항일구호는 일본군의 주의를 불러일으켰다. 1938년 12월 20일에 아침식사를 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갑자기 공중에서 요란한 소리가 울려오더니 날개에 붉은색의 “대병(大饼)”표식을 칠한 10여대의 비행기가 나타났다. 일본군이 비행기는 100여매의 폭탄을 떨어뜨렸다. 폭격소리는 고요한 연안의 평온을 깨뜨렸다. 비록 연안사람들이 거주하는 요동(窑洞)을 천연적인 방공동이라고 하지만 연안성의 광범한 지역은 폭탄의 위력을 견뎌내지 못하고 파손되였으며 어떤 요동은 작탄의 충격에 무너지고말았다. 일본군의 첫 공습에 수명명의 사상자가 발생되였다. 그날에 중공중앙조직부, 광화서국 등을 포함한 서북려관일대가 가장 엄중한 손실을 당했다. 진운은 폭격에 출입문이 봉해진 요동안에 갇혀있다가 7~8명의 전사들이 흙을 파혀쳐서야 구원되였다. 그때로부터 연안에서는 공습경보를 울리기 시작했다. 기자는 당시 연안에서 살았던 왕관란의 부인 서명청을 찾아가서 취재했다. 중공중앙농촌사업위원회 주임직을 력임한적이 있는 왕관란은 모택동과도 친하게 지냈다. 서명청의 회상에 따르면 일본비행기의 폭격이 있은 그날 저녁에 그녀와 남편 왕관란은 초청을 받고 연안성의 봉황산 아래에 있는 모택동의 요동으로 향했는데 모택동의 요동도 폭격을 맞았다. 그러나 모택동은 그 요동에서 주연을 베풀어 손님을 대접했다. 그 연회에는 장문천, 리부춘, 채창, 라서경 등이 참석했다. 그번 연회는 왜서 베풀었는가? 주인은 말하지 않았지만 손님들은 마음속으로 알고있었다. 상해에서 온 24살에 나는 한 녀인이 빈번히 손님들에게 술을 권했다. 그녀가 바로 상해에서 영화배우로 활약하다가 연안으로 찾아온 강청이였다. 모택동은 그날 강청과 결혼했던것이다. 송미령은 장개석보다 10살 년하였고 강청은 모택동보다 21살 년하였다. 공교롭게도 국공량당의 령수가 결혼할 때 모두 “약법삼장(约法三章)”이 있었다. 장개석과 송미령이 결혼할 때의 “약법삼장”은 송미령이 제출한것이다. 그 “약법삼장”은 아래와 같다. 첫째, 장개석은 반드시 하느님을 믿어야 하며 세례를 받고 기독교신도로 되여야 한다. 송미령이 독실한 기독교신자였기때문에 두 사람은 반드시 공동한 종교를 믿어야 한다. 둘째, 송미령은 아이를 낳지 않는다. 훌륭한 몸매를 유지하여 중국혁명사업을 위해 더욱 많이 분투하기 위해서이다. 셋째, 송미령은 그 어떤 정부공직도 맡지 않으며 공식적인 고위급결책회의에 참석하지 않는다. 송미령은 장개석의 개인비서신분을 가지고 대외정치활동에 종사한다. 장개석과 송미령이 결혼할 때의 “약법삼장”에 대해 전해진 판본이 아주 많은데 이상은 향항광각경출판사에서 출판한 《장씨3대의 로맨스》란 책에서 인용한것이다. 모택동과 강청이 결혼할 때에도 “약법삼장”이 있었다. 모택동과 강청의 “약법삼장”은 모택동이 제출한것도 아니고 강청이 제출한것도 아니다. 그것은 중공중앙정치국에서 제출한것이다. 이 “약법삼장”의 판본도 매우 많은데 “약법삼장”의 내용도 서로 일치하지 않다.  
283    잘난 사람과 못난 사람 댓글:  조회:4871  추천:5  2015-04-28
잘난 사람과 못난 사람   김희수   어느 모임에서였다. 외모가 잘 생기지 못한 젊은이가 당시를 줄줄 내리 외우고 영어와 프랑스어도 류창하게 구사했다. 곁에서 듣고있던 청년이 “人不可貌相啊!”하고 경탄했다. 그런데 당사자는 그를 곱지 않은 눈길로 흘겨보았다. 겉모습이 못났지만 재능이 있다는 말로 들렸기때문이다.   그럼 이와는 반대로 예쁘게 생긴 녀성이나 잘생긴 남성에게 “人不可貌相啊!”라고 한다면 어떻게 될가? 역시 좋아하지 않을것이다. 그것은 겉모습은 잘났지만 재능이 없다거나 품성이 나쁘다는 말로 들리기때문이다.   인불가모상(人不可貌相)이란 사람은 겉모습만 보고 재능과 품성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뜻을 나타내는 성구이다. 이 말을 당사자앞에서 삼가해야 하겠지만 세상의 리치를 말해주는것만은 틀림없다.   그런데도 외모가 잘난 사람이 외모가 못난 사람보다 더 떠받들리고있다. 외모지상주의시대여서 연예인도 외모가 뛰여나야 잘 뜬다. 련애를 해도 외모부터 본다. 그래서 외모에 자신없는 사람들은 성형이니 뭐니 하면서 거금을 퍼부으면서 부모가 준 얼굴을 뜯어고친다.   그런데 외모지상주의시대에도 사람을 잘난 사람과 못난 사람으로 구분하는것을 볼수 있다. 그럼 “잘났다”와 “못났다”를 판단하는 기준은 뭐고 그 기준이란게 과연 있는걸가? 외모가 잘났다면 잘난 사람일가? 학력이 높다면 잘난 사람일가? 직위가 높다면 잘난 사람일가? 재산이 많다면 잘난 사람일가? 품성이 고결하다면 잘난 사람일가? 그런데 품성은 겉에 드러나는게 아니여서 사람들은 흔히 외모, 학력, 직위, 돈을 보고 잘나고 못나고를 판단한다.   돈이 많은 사람은 외모가 별로여도 사람들이 잘났다고 한다. 직위나 권세가 높은 사람은 외모가 차해도 사람들이 잘났다고 한다. 학력이 높은 사람은 외모가 딸려도 사람들이 잘났다고 한다. 외모가 뛰여난 사람은 돈이 없고 직위가 없고 학력이 낮아도 사람들이 잘났다고 한다. 돈도 많고 권세도 있고 학력도 높고 외모도 뛰여난 사람은 잘나도 너무 잘난 사람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돈도 없고 직위도 없고 학력도 없고 외모도 형편없어서 하나도 잘난게 없는 사람은 진짜 못난 사람일가?   여기에 인불가모상(人不可貌相)이란 말이 적용된다. 아무리 잘난 사람이라도 겉모습만 보고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된다. 돈이 많아서 잘난 사람 서명(徐明)과 권세가 높아 잘난 사람 주영강(周永康)을 례로 들어보자.     21살의 젊은 나이에 대련실덕그룹(大连实德集团)을 세워 리사장으로 되고 2005년의 중국부호순위에 8위로 올랐던 서명은 돈이 어마어마하게 많은 대부호였지만 당시 대련시 시장이였던 박희래(薄熙来)에게 2000여만원에 달하는 뢰물을 먹인 범죄사실이 드러나 졸지에 신세를 망치게 되였다. 중국에 서명처럼 범죄를 저지른 부호가 헤아릴수 없이 많다.   주영강은 중국에서 한때 서렬 9위로 높은 직위에 있었지만 돈과 녀색에 눈이 어두워 범죄를 저질러 결국 추락하게 되였다. 그는 공인된 애첩만 무려 29명에 달했고 400여명의 녀성과 불륜을 저질렀다. 그는 뢰물수수죄, 직권람용죄, 국가기밀고의루설죄로 재판을 받았다. 중국에 주영강처럼 돈에 눈이 어두워 권력을 마구 휘두르다가 죄인이 된 탐관들이 부지기수이다.   이처럼 겉모습은 잘났지만 내면이 더러운 사람은 못나도 한참 못난 사람이다. 이들은 백로처럼 겉은 희고 속이 검기에 겉모습만 보고 잘났다고 판단해서는 안된다. 사람들은 잘난 사람을 선호한다. 하지만 겉모습만 보지 말고 내면이 아름다운가를 보아야 한다.   자신보다 잘난 사람을 보면 초라해지면서 괜히 질투가 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그 앞에서 주눅들 필요는 없다. 내면을 아름답게 가꾸고 겸하여 외모를 아름답게 꾸미기에 노력한다면 나도 조만간에 잘난 사람이 될수 있다. 꽃이 아름답지만 그 꽃을 아름답게 가꾸는 사람이 더 아름답다.     
282    과부를 서로 취하려고 싸운 북송의 두 재상 댓글:  조회:5658  추천:1  2015-04-25
과부를 서로 취하려고 싸운 북송의 두 재상     송태조 조광윤(赵匡胤)은 960년에 5대 10국의 전란을 결속짓고 송조를 건립했다. 976년 11월 14일에 송태조(宋太祖)가 갑자기 사망되자 송태조의 친동생 조경(赵炅)이 황위를 계승했다. 조경이 바로 송태종(宋太宗)이다. 송태종은 본명이 조광의(赵匡义)였는데 형님 조광윤의 이름을 회피하느라고 조광의(赵光义)라고 고쳤다가 황위에 오른후 조경이라고 개명했다. 송태종이 997년에 사망되자 그의 셋째아들 송진종(宋真宗)이 황위를 계승했다. 송진종의 이름은 조항(赵恒)이다. 송진종은  송태종의 맏아들도 아니고 황후의 아들도 아니여서 원래는 황위를 계승할 자격이 없었다. 송진종의 큰 형님 조원좌(赵元佐)가 정신병에 걸리고 둘째 형님 조원희(赵元僖)가 비명횡사를 했기때문에 행운스럽게도 태자로 되였다. 송태종이 죽은후 송진종은 태감 왕계은(王继恩)과 태후가 짜고 든 궁정정변음모에 걸려들었는데 승상 려단(吕端)이 제때에 구원해주었기때문에 무사히 황제의 자리에 오를수 있었다. 두 승상과 과부의 이야기는 바로 이 송진종시기에 발생된것이다. 북송 함평5년(1002년) 10월에 송조의 세번째 황제 즉 송태종의 셋째아들 송진종이 조서를 반포했다: 좌승상(左丞相) 향민중(向敏中)을 재상의 자리에서 파직하고 호부시랑으로 삼는다. 우승상(右丞相) 장제현(张齐贤)을 태상경(太常卿), 분사서경락양(分司西京洛阳)으로 좌천시킨다. 이 조정의 대지진을 몰고온 연유를 따져보면 실로 민망스럽기 그지없다. 이 당당한 좌우승상은 과부 한명을 서로 취하겠다고 싸워서 일어난 일이기때문이다. 그 과부는 좌령군위장군(左领军卫将军) 설유길(薛惟吉)의 미망인인 시씨(柴氏)이다. 설유길의 부친은 송태조시기의 재상인 설거정(薛居正)이다. 설거정은 우리가 지금 볼수 있는 24사(二十四史)중 《구오대사(旧五代史)》의 편찬자이니 재상이면서 재자(才子)라고 할수 있다. 이 재자는 아주 사나운 부인을 두었다. 그녀는 자식을 낳지 못했을뿐만아니라 그가 시비나 첩을 가까이 하지도 못하게 했다. 그리하여 할수 없이 설유길을 양자로 들이게 되였다. 설거정은 설유길을 지나치게 귀여워했다. 그리하여 설유길은 하루종일 문제아이들과 어울려서 축구를 하고 술마시고 놀기를 즐기는 불효자식이 되였다. 설거정이 죽은후에 송태종이 친히 문상을 갔다가 설유길에게 물어보았다: “불초자식은 잘 있는가? 지금은 버릇을 고쳤는가? 아마도 부친의 위업을 이어받지 못할것같은데 어찌하면 좋은가?” 설유길은 곁에서 두려움에 감히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그리고 그후로 잘못을 뉘우치고 새사람이 되였다. 그는 아래사람들에게도 잘 대해주고 재물을 가볍게 여겨 베풀기를 좋아하여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그도 부친과 마찬가지로 집안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했다. 결국 그가 죽은후에 그의 안해로 인해 세상을 시끄럽게 하는 과부사건이 벌어진것이다. 시씨는 설유길의 후처이다. 나이가 젊어서 과부가 되였고 자식도 없었다. 그리고 평소에 설유길의 두 아들인 설안상, 설안민과도 사이가 좋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그녀는 개가를 하려고 했다. 시씨가 고른 사람은 당시 유명한 배불뚝이 재상 장제현이였다. 이 제상은 몸이 비대하고 다른 사람보다 훨씬 많이 먹었다. 그는 시씨와 남몰래 혼약하기로 하고 사람과 수레를 보내여 그녀를 맞이하려고 했다. 그러자 설안상이 개봉부에 고발했다. 그는 계모가 조부와 부친 2대에 걸쳐 모은 거액의 재산을 가지고가려고 한다고 하였다. 개봉부는 사건에 관계된 사람이 재상이다보니 감히 혼자서 결정하지 못하고 송진종에게 보고했다. 송진종은 사건을 크게 벌리고싶지 않아서 관리를 보내여 조용히 시씨에게 물어보게 했다. 그런데 시씨의 주장과 설안상의 고발장은 차이가 컸다. 송진종은 부득불 이 사건을 어사대에서 심리하도록 명령했다. 그런데 극적인 장면이 나타났다. 피고인 시씨가 오히려 원고로 되여 거꾸로 고발했다. 그녀가 고발한 사람은 또 다른 재상인 향민중이였다. 항민중이 설씨집안의 옛집을 헐값에 사들였고 자기에게 구혼을 했다는것이다. 그런데 자신이 응하지 않으니 수치가 분노로 바뀐 항민중이 설안상을 시켜 사실을 날조하여 자신을 고발했다는것이다. 이전에 설안상형제가 제대로 구실을 하지 못하자 송진종이 그들에게 조부와 부친의 재산을 팔아먹지 못하도록 명을 내린바 있었다. 향민중까지 련루되여버리니 송진종은 그에게도 물어보지 않을수 없었다. 향민중은 확실히 500만을 들여 설씨의 집을 사들인적이 있다고 인정했다. 최근에 상처했지만 재혼할 생각은 없으며 시씨에게 구혼한 적이 없다고 하였다. 향민중이 설씨의 집을 사들인것은 황제의 조서를 어긴것이기는 하지만 일을 적당히 마무리짓고싶어했던 송진종은 끝까지 추궁할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시씨는 끝까지 고집했다. 다시 북을 두드리며 소송을 제기했다. 그리하여 이 사건은 다시 어사대에서 심리하게 되였다. 사건은 점점 더 복잡해졌다. 염철사(盐铁使) 왕사종(王嗣宗)은 향민중과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이때 그가 나서서 폭로했다. 향민중이 최근에 이미 고인이 된 부마도위(驸马都尉) 왕승연(王承衍)의 녀동생을 취하려고 했다는것이다. 밀약은 이미 이루어졌으나 납채는 아직 하지 못했다고 했다. 송진종은 왕씨에게 물어보고 나서 확실히 그런 일이 있었다는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송진종은 향민중에 대하여 불만을 갖게 되였다. 그리하여 그를 불러서 면전에서 그가 솔직하지 못하며 몰래 재혼에 관한 일을 추진하고있으면서 황제에게는 그런 생각이 없다고 얘기하였다고 힐난했다. 그리고 나서 이제 생각해보니 향민중이 시씨에게 구혼하지 않았다는 말도 믿기 힘들다고 말했다. 장제현도 일이 자기 생각대로 되지는 않았다. 어사대에서 장제현을 조사하다가 시씨의 고발장이 원래 장제현의 아들이자 당시 태자중사의 직위에 있던 장종회(张宗诲)가 시씨를 시켜서 쓰게 한것이라는것을 밝혀냈다. 장제현도 이 사건에서 무관할수가 없었다. 어사대에서 다시 시씨의 심복인 종을 심문해보니 시씨가 금은보화 약 2만민(缗)을 매장했다는것을 발견했다. 얼마후에 송진종이 친히 심문하였다. 심문결과 다음과 같이 처분했다. 향민중은 재상에서 파면하고 호부시랑이 되였다. 장제현은 태상경이 되여 서경으로 갔다. 장종회는 해주별가로 강등되였다. 설안상은 황제의 조서를 위반하여 주택을 팔았으므로 태형에 처하며 팔아버린 집은 되사들이도록 했다. 그리고 어사대와 개봉부에 분부하여 수시로 감독하게 시켰다. 재상에 대한 처리의견은 송진종의 명의로 제서(制书)를 작성했는데 제서를 작성하는 한림원학사 송백은 원래 향민중에게 원한이 있었다. 그는 예전에 향민중에게 10덩이의 은자를 빌리려고 했는데 향민중이 이를 거절했었다. 그리하여 송백은 제서를 초안하면서 글을 더욱 악독하게 썼다. 내용중에 “대짐식언 위신자매(对朕食言,为臣自昧)”와 같은 말이 들어갔다. 향민중은 제서를 읽고 눈물을 흘렸다. 시씨는 마음먹은대로 장제현에게 시집가지 못했다. 그리고 그녀는 벌금으로 구리 8근을 내야 했다. 그리고 설씨주택을 재매입하는 돈은 그녀가 매장해둔 금은보화를 썼다. 결국 “남편도 잃고 돈도 잃은 격”이였다. 시씨에게 다른 어떤 좋은 점이 있어서 두 재상의 마음을 움직였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것은 그들이 그녀를 취하려고 서로 싸운 리유중의 중요한 원인이 그녀에게 돈이 많았기때문이란것이다. 리학자인 정이(程颐)는 직방배기로 이렇게 말했다. “두 재상이 한 녀인을 서로 취하려고 싸운것은 그녀의 10만이나 되는 호주머니속의 재산때문이였다.” 그렇다면 과부 시씨에게는 도대체 돈이 얼마나 있었을가? 고증에 의해 알려진바에 의하면 당시의 물가는 다음과 같았다. 희녕5년(1072년)에 경사(지금의 개봉) 등지의 밭을 팔려면 1등의 토지는 1무당 3관(贯) 내지 2관 500문(文)이였다. 개봉지역의 집임대료는 외지보다 비쌌다. 천희원년의 임대료는 1칸에 1일당 164문이였고 매월당 4관 491문이였다. 이상의 토지가격과 주택임대가격을 참고해보면 시씨가 매장한 2만관의 자금은 6666무의 좋은 밭을 살수 있는 돈이였다.
281    어머니 지구의 하소연 댓글:  조회:4968  추천:7  2015-04-20
어머니 지구의 하소연   김희수     아무도 내 나이를 모릅니다. 내가 46억년전에 태여났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 7만 5000년전에 태여났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누구도 내 정확한 나이를 모릅니다. 그저 망망한 우주에서 내가 생겨난후 점차 생명체가 생존할수 있는 환경으로 형성되면서 생명체가 생겨났고 나중에 원시인류가 나타나 내 품속에서 뛰놀게 되였다고 합니다.   나는 두다리로 걸어다니고 말할줄 아는 인류가 점점 지혜로운 현대적인 인간으로 변모해가는 과정을 보면서 매우 기뻐했습니다. 내 품에서 생존하는 생명체중에서 인류만큼 총명한 생명체는 없었기때문입니다. 그런데 나는 점점 이 인류한테 실망을 느끼게 되였습니다.   인류는 내가 저들을 편애한다고 착각한 모양입니다. 내 품속에서 자라는 생명체는 모두 나의 자식이기에 나는 그들을 똑같이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인류는 자신이 이 세상의 주인이라고 잘못 생각했습니다. 그런 잘못된 생각으로 탐욕이 생기면서 다른 생명체를 마구 유린하고 제멋대로 생태계와 천연자원을 마구 파괴하고 란개발을 하며 환경을 오염시키고있습니다.   지금 내 몸은 지구온난화, 오존층파괴, 생물다양성감소(生物多样性减少), 산성비, 삼림대량감소, 토지사막화, 대기오염, 수질오염, 해양오염 등으로 병들어있습니다. 하지만 인류는 저들의 망동이 결국 인류의 재앙을 불러온다는것을 알면서도 지금도 계속 탐욕을 멈추지 않고 내 몸을 마구 괴롭히고있습니다.   인류는 말로는 “우리가 살고있는 지구는 하나뿐이다. 아끼고 사랑해야 한다”고 하면서도 서로 이 어머니의 살점을 더 뜯어먹지 못해 안달난듯이 탐욕의 손길을 멈추지 않고있습니다. 마치 저들의 소유물인듯 마음대로 쓰고 버리려고 하고있습니다. 인류의 선조들은 아름다운 내 몸을 크게 손상시키지 않고 물려주었는데 지금의 인류는 병들어 죽어가는 나를 후대들에게 물려주려고 하는것 같습니다. 하나뿐인 이 어머니가 얼마나 엄중하게 병들어있는지, 얼마나 더 지탱할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것 같습니다. 아니, 생각은 하고있었습니다.   미국의 게이로드 넬슨(盖洛德·尼尔森)과 데니스 헤이스(丹尼斯·海斯)란 사람이 지구환경오염문제의 심각성을 알리고 지구환경보호를 위해서 1970년 4월 22일을 “지구의 날”로 선언하고 2000만명이상이 참가한 성세호대한 환경보호활동을 조직했습니다. 그 영향력이 점점 커져 1990년 4월 22일에는 전세계 140여개 나라의 2억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지구의 날 활동에 참가했습니다. 그리하여 2009년 제63차 유엔총회에서는 정식으로 매년 4월 22일을 “세계지구의날(世界地球日)”로 제정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목소리만 크고 실제 행동은 별로 없습니다. 지각있는 사람들의 자그마한 실천은 이루어지고있지만 기업의 환경오염문제는 그대로 방치되고있습니다. 환경보호법은 있지만 정부차원의 철저한 조치와 강력대응방침이 마련되지 않고있기때문에 법이 있어도 제대로 집행되지 않고있습니다. 나라와 지역마다 그리고 기업마다 자기들의 리익이 따로 있습니다. 지구환경을 오염시키지 않으면 그 리익이 손해를 보게 될수도 있습니다. 아마도 그래서인지 인류는 그 리익을 위해서 병든 내 몸을 계속 파먹으려고 하고있습니다. 누구나 지구환경보호라는 인류공동의 리익을 위해 자신의 리익을 희생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또 고위관리와 집법일군들은 엄중한 환경오염문제를 발견하고도 국부의 리익을 위해 눈을 감아주고있습니다. 그래서 화가 나고 속상해서 한마디 욕하고싶습니다.   “이 병신새끼들아, 귀를 기울여 보아라. 이 에미의 고통에 차 죽어가는 신음소리가 들리지 않느냐?”     
280    송자문은 정말 세계최고부자였는가? 댓글:  조회:5389  추천:1  2015-04-18
송자문은 정말 세계최고부자였는가?   (번역)     중국인민해방군이 도강을 하자 송자문(宋子文)은 사직하고 미국으로 갔다. 하지만 당시의 미국여론은 그에게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았다. 미국여론은 송자문이 미국원조과정에서 사사로이 재산을 개인적으로 챙긴 일을 대거 보도했다. 심지어 송자문이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으로까지 보도되였다. 사실 송자문이 세계최고부자라는 소문은 이미 오래전부터 나온것이였다.   비록 송자문은 “량조국구(两朝国舅-누나인 송경령이 손중산의 부인이고 녀동생인 송미령이 장개석의 부인이기에 그렇게 불리웠음)라는 대단한 신분을 가지고있었고 오래동안 중화민국의 재정부장의 요직을 맡았지만 1930년대까지는 송자문의 개인재산에 대하여 그다지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1930년대중반이후부터 사람들은 송자문의 재산에 대해 흥미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후의 력사를 뒤져보면 그의 재산에 관한 각종 자료, 전설이 물밀듯이 나타났다. 그 시기는 바로 송자문의 재산이 급격히 증가된 시기였다.   1933년 가을에 군사비문제로 장개석과 심각한 의견차이가 나타나자 송자문은 다시 한번 국민당정부 재정부장의 직위를 사직했다. 동시에 중앙은행 총재, 행정원 원장의 요직도 사직했다. 그는 잠시 중화민국의 권력핵심에서 물러나 있었다. 정치적인 실의는 오히려 그에게 사업상의 흥취를 불러일으켰다. 그 시기에 그는 전국경제위원회 상무위원직은 사직하지 않았기에 그 직을 리용하여 전국경제건설에 열정을 나타냈다. 새로운 경제건설계획을 추진하려면 대량의 자금이 필요하다는것을 송자문은 잘 알고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강대한 실력을 지닌 투자집단인 중국건설은회사(中国建设银公司)를 설립했다.   중국건설은회사가 성립된후에 송자문은 경제령역에서 계속 호풍환우하려면 절대로 대재벌의 지원을 벗어날수 없다는것을 잘 알았다. 그러나 당시 중국금융계의 배경을 보자면 중국은행이 가맹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력사적인 원인으로 중국은행의 력대총재는 모두 한간들이였다. 1935년에 장개석, 송자문, 공상희 등이 한구에서 비밀리에 모의하여 중국은행에 대한 개조계획을 통과시켰다. 이 계획의 기밀유지는 아주 잘되였다. 사전에 장가요가 알지 못하게 하고 왕정위 등의 한간거두들도 모르게 하였다. 행정원장을 맡고있던 왕정위가 소식을 들었을 때는 모든 문건이 이미 완성된 후였다. 이것은 한간들에게 청천벽력이였다.   중국은행 리사장직를 맡은 송자문은 실력이 강대한 금융기관의 지원을 바탕으로 송자문은 마침내 중국정계, 공상실업계, 금융계에서 모두 존경하는 인물이 되였다. 그때부터 송자문은 자신이 장악한 경제위원회, 중국건설은회사, 중국은행의 3대도구를 통하여 계속 민족공상업, 금융업에 침투하고 지배하고 합병하는 활동을 벌렸다. 그리고 놀라운 속도로 송씨가족을 핵심으로 하는 관료매판집단과 독점왕국을 건설했다. 이를 통하여 송자문은 신속히 재부를 축적했다.   송자문이 경제건설계획과 개인재산추구의 측면에서 잘 나가고있을 때 영미파의 령수라는 배경과 대일강경파의 대표인물이라는 명성으로 인하여 그는 일본측과 국내한간들로부터 적대시당하게 되였다. 일본인들은 재주를 있고 일처리는 서방자유주의자와 같은 송자문을 심지어 그들의 최대적수인 장개석보다 더 싫어하게 되였다.   일본측과 왕정위일파의 반격으로 하여 송자문의 재산이 세계에서 제일 많다거나 그가 미친듯이 재산을 긁어모은다는 소문이 줄을 이었다. 1939년에 일본간첩은 “국민당정부의 고급급관리예금상황에 대한 비밀조사보고서”에 송자문 한사람만 5000여만원의 재산을 상해의 외국은행에 예금해두었다고 실었다. 그리고 전쟁기간동안에 일본은 송자문이 대통국민은행과 뉴욕의 화기은행에 7000만딸라의 예금을 해놓았다고 지적했다. 그와 동시에 송자문은 세게최고부자라는 소문이 소리없이 퍼져갔다.   력사학자들의 고증에 따르면 이런 정보는 모두 전시에 일본의 정치선전수단의 하나로 밝혀졌다. 당시 인용된 작자도 그다지 믿고있지 않았지만 그때로부터 송자문의 재산에 대한 소문은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송자문이 당시 경제건설에서 종횡으로 활약하고있었고 금융계에서 호풍환우하였으며 그의 가족들이 권력을 장악하고있었기때문에 더더욱 널리 퍼져갔다.   두터운 금융자본을 가지고있었기에 송자문은 경제분야에서 확장하는것은 식은죽먹기처럼 쉬웠다. 광동은행을 례로 들자면 남방에서 광동은행은 영향이 큰 화교자금계은행이다. 1935년 가을에 채무가 많아서 위기에 처하자 송자문은 자신의 권력과 영향을 리용하여 자금을 투입하여 개조했다. 그는 20만주를 사들여 비록 최대주주는 아니였지만 아무도 그와 감히 싸우려고 할수 없게 만들었다. 결국 개조후의 리사장은 모든 사람의 만장일치로 송자문이 맡았다. 송자문은 자신의 심복에게 총경리직을 넘겼다. 그때로부터 광동은행은 송씨가족의 개인은행으로 바뀌였다.   남양형제연초회사를 놓고보면 원래 중국최대의 담배회사였다. 회사사장인 간씨형제는 “연초대왕”으로 불리웠다. 이 회사는 1930년대에 경영과 재무에서 사면초가의 처지에 처했다. 이때 송자문은 겨우 70만원의 대가로 이 회사의 52%주식을 사들였다. 그리고 70만원도 광동은행이 대신 납부했다. 송자문은 한푼도 내지 않고 남영형제연초회사를 자신의 산하에 넣어버렸다.   그외에도, 송자문은 신화은행, 중국국화은행, 중국보험회사, 상해은행등에 모두 투자를 했다. 송자문은 공업에도 적지 않게 투자하였다. 일부분 금융기관을 차지한후 그는 은행의 자금으로 공장, 광산과 철로건설에 투자했다. 중국건설은회사가 몇몇 철로와 공장, 광산에 투자한외에 송씨집안은 사천사업회사, 진화종이공장, 민생회사, 화풍화기방직포공장, 대중화화시회사, 화풍화기면분공장, 중화서국 등 공업, 광업기업에 일정한 주식을 차지했다. 송자문과 송자량은 이런 기업의 리사장 혹은 리사를 맡았다. 서북 섬서, 감숙 두곳의 10여개의 방직, 면분, 제약, 인쇄, 양조, 석탄채굴, 성냥 등 공장도 송씨가족의 지배하에 들어왔다.   송자문은 상업분야에서도 아주 활발하게 활동했다. 그가 친히 경영하는 중국면업회사는 몇달만에 자본이 갑절로 뛰여올랐다. 화남미업회사는 독점적으로 “외국쌀”의 수입업무를 수행하여 리윤이 엄청났다. 항전후 상해에 부중무역회사, 중국수출입무역회사, 통일무역회사, 금천무역회사, 등을 설립하여 물자부족, 물가상승을 틈타서 큰 돈을 벌었다.   경제분야에서 이처럼 활약이 컸기에 그의 재산에 대하여 당연히 관심이 집중되였다. 당시 글을 보면 “송씨의 경제활동은 우에 언급한 7개은행, 12개 류통회사, 22개 큰 공장, 1개의 운수회사이다. 주식은 모두 얼마일가? 송자문자신도 재산수자를 몰랐을것이다”라고 했고 또 다른 글에서는 “그 당시 독자적으로 6억원을 가지고있었다”고 밝혔다. 또 4대가족이 여러 분야에서 독점하고있는 재산 및 그들이 가진 예금과 사업은 통계를 내보면 최소한 200억딸라가량이다”고 하기도 했다.   정말 이러한 수자라면 4대가족중 어느 한명만 하더라도 세계최고부자의 반렬에 오를수 있었을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어떠한가? 사료의 통계에 따르면 당시 전국에는 3개의 국가독점자본집단이 있었다. “4행2국(중앙은행, 중국은행, 교통은행, 중국농업은행, 중국신탁국 및 우정저금회업국), 자원위윈회 및 중국방직건설회사이다. 합계는 겨우 62,972억원이였다. 1947년의 환률로 계산하면 100억딸라에 미치지 못했다. 만일 당시 국민정부가 관할하는 모든 자산을 합친다고 하더라도 200억딸라에는 미치지 못했다.   이를 보면 우에서 얘기한 “4대가족”의 재산이란 단순히 장개석, 송자문, 공상희, 진립부와 진과부의 개인재산을 얘기하는것이 아니라 국민당 및 국민당정부 통치하의 “국가독점자본”의 재산을 의미한다고 한것이다. 단순히 송자문만을 본다면 비록 그가 장악한 공상금융기관이 많지만 전부 점유하는것은 아니고 일부 투자하거나 요직을 맡고있었을뿐이다. 그의 개인재산은 이런 기업의 총자산보다 적을수밖에 없다. 대략 1000만딸라정도일것이다. 송자문이 정계에 있을 때 국가은행 혹은 재정부에서 투자하여 설립한 기업은 송자문의 개인재산으로 볼수 없다. 미국학자 대홍초(戴洪超)가 한 말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그가 오래동안 회사의 중요요직을 겸직하였고 회사의 구분을 명확히 하지 않았으므로 다른 사람들이 의심을 하는것도 아주 자연스럽다.” 송자문은 비록 재산이 엄청 많았지만 소문에서처럼 억만부호는 아니였다. 그러나 어찌되였건 당시 관료자본의 제도하에서 그가 재물을 취득한 경로는 정치특권을 리용하는것에서 벗어날수 없었고 권력을 가지고 재물을 긁어모았다고 말할수도 있다.    
279    전쟁은 무법천지인가 댓글:  조회:7312  추천:6  2015-04-13
전쟁은 무법천지인가   김희수     전쟁은 법도 없는것 같다. 아무나 마구 죽여도 살인범이 아니다. 처벌도 받지 않는다. 상대가 총을 든 군인이든 적수공권인 민간인이든 제 마음대로 죽인다. 전쟁사를 살펴보면 인류력사에서 전쟁이 시작된후 줄곧 그래 왔고 지금도 그렇게 하고있다.   고대전쟁이든 근대전쟁이든 현대전쟁이든 쌍방이 서로 상대방을 더 많이 죽이기 위해 싸웠다. 화살과 칼이든 총과 땅크, 대포든 전투기, 잠수함, 핵무기든 모두 사람을 많이 죽일수 있기 위해 만들어졌다. 왜서 인류끼리 서로 죽여야 하는가? 누구를 위해 싸우는가? 무엇을 위해 싸우는가? 이에 대해 전쟁판에서 싸우고있는 전투원들도 잘 모르고 지휘관들도 똑똑히 모르고있다.   전투원들이건 지휘관들이건 모두 막후에서 전쟁을 조종하는 극소수인의 리익에 의해 움직여지는 장기쪽일뿐이다. 그 극소수인의 리익을 위해 수천수만배 되는 장기쪽들이 희생해야 한다. 군인들끼리 서로 죽이는건 전쟁판이니까 그럴수 있다치고 무고한 민간인들을 죽이는건 무엇때문인가?   인류력사에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민간인을 죽이지 않은 전쟁은 없었다. 또 부녀자를 강간하지 않은 전쟁은 없었다. 민간인과 부녀자들뿐만아니라 어린이들도 죽임을 당하고 전쟁터에 내몰리기도 한다. 과거에도 그랬지만 현재 진행형이기도 하다.   지난 4월 9일에 수니파 극단주의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가 이라크군에 협력했다는 리유로 민간인 약 300명을 보복살해했다. 현재 중동지역의 내전에서 민간인을 살해하는건 흔한 일로 되여버렸다. 이라크, 시리아, 예멘의 내전에선 매일 민간인, 어린이들이 살해당하고 부녀자들이 성폭행당하고있다. 또 이 지역의 전쟁에 개압하고있는 미군의 무인기공격에도 적지 않은 민간인들이 죽었다.   전쟁은 법도 없는 무법천지인가? 이렇게 마음대로 죽이고 유린해도 되는가?     전쟁에도 전쟁법이 있다. 이 법에 따르면 전쟁중이라도 상대의 전투행위와 관련없는 민간인, 인류자산이라고 할수 있는 문화재는 보호해야 한다. 전투의지가 없는 전쟁포로를 살상해서도 안된다. 이 법을 위반한 사람이나 인류위해죄를 범한 사람은 전쟁범죄재판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전쟁법이 있어도 법이 실제로 집행되지 못하고있다. 인류력사에서 고금중외를 막론하고 살인죄는 모든 범죄중에서 가장 엄하게 처벌한다. 하지만 전쟁중에 상대방 적군을 죽이는것은 정당화된다. 적을 많이 죽일수록 영웅으로 떠받들리고 또 포상을 받고 계급이 오른다. 이런 전쟁의 특수속성때문에 전쟁에서는 법이 지켜지지 않고 무법천지로 되고있다.   법은 집행해야 한다. 집행되지 않는 전쟁법은 있으나 마나하다.    
278    장개석은 누구에게 대륙을 잃은 죄명을 씌웠는가? 댓글:  조회:5746  추천:1  2015-04-12
장개석은 누구에게 대륙을 잃은 죄명을 씌웠는가?   (번역)     대륙에서 쫓겨나 총망히 비행기를 타고 대만에 내린후 장개석은 어디에 거주할것인가에 신경을 썼다. 그러다가 결국 양명산아래에 있는 사림(士林)을 선택했는데 이 동을 사림관저(士林官邸)라고 불렀다. 그후 30년동안에 사림관저는 대만정치권력을 다투는 무대로 되였다. 그때의 장개석으로 말하면 자기의 권력을 회복하고 국민당을 재정돈하는것이 가장 급히 처리해야 할 사무였다.   1950년 1월에 송미령이 미국에서 대만으로 날아왔는데 이는 저조상태에 있던 장개석에게 큰 위안이 되였다.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영어에 능한 송미령은 줄곧 장개석의 외교고문으로 있었는데 이는 장개석에게 매우 큰 도움이 되였다.   송미령이 대만에 도착한후 장개석은 곧 부인을 동반하여1950년 3월 1일에 직무를 다시 회복하는 의식을 거행했다. 이렇게 장개석은 다시 대통령의 보좌에 앉게 되였다. 대만을 견고하게 하는것은 당시 장개석과 전체 국민당에 있어서 모두 중점중의 중점이였다. 그러나 장개석의 옆에서 지켜보던 진성은 매우 똑똑히 알고있었다. 그 시기 대만환경은 그 자신이 장개석의 파견으로 대만성주석 겸 대만경비 총사령직을 맡고있던 1948년보다 더 복잡했던것이다. 진성의 아들 진리안은 이렇게 말했다.   “대만에 올수 있는 사람은 당연히 장위원장과 연원이 있는 사람이였지요. 원래부터 장위원장과 불화가 있었던 사람은 자연히 오지 않았지요. 이는 매우 자연스러운 인연관계였습니다. 장개석이 대만에 온후 모두 그의 말을 들었고 그가 다시 나서서 령도해주기를 바랐습니다. 사실상 그렇게 되였습니다. 저의 아버지를 놓고 말하면 원래 별다른 견제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많으니 의견도 달랐고 원래 대륙에 있었을 때의 파벌도 그대로 대만에 옮겨오게 되였지요.”   장개석이 직무를 회복하는 의식은 유쾌한 기분속에서 행해졌지만 어색한데가 있었다. 그것은 “부대통령”이 없는 장소였고 전임대통령대리였던 리종인이 이미 미국으로 갔기때문이다. 리종인은 곧 검찰원의 탄핵제안을 받아 대만당국(当局)의 책임추궁목표로 되였다. 이어 장개석은 개조위원회를 성립했다. 16명위원의 명단중에 진과부, 진립부형제의 이름을 찾아볼수 없었다.   대만력사학자 류유개는 이렇게 말했다. “대만에 도착한후 대륙을 잃은 책임을 찾아서 분석하게 되였습니다. 누가 대륙을 잃게 했는가? 모두가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때문에 그때에야 당을 개조하자고 말하면서 CC파가 그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CC파는 진씨형제를 위수로 한 중앙구락부조직을 가리키지요. 이는 국민당내부의 중요한 파벌인데 진씨형제 성씨의 첫자모를 따서 지은것입니다.”   CC파는 내전시기에 매우 활약했는데 핵심인물은 진과부와 진립부형제였다. 그들 형제는 장기적으로 국민당을 조종했기에 사람들은 “장가천하에 진씨당”이라고 형용했다. 국민당개조가 시작되자 진씨형제가 제일 먼저 그 대상이 되였다. 개조위원회가 성립된후 얼마 안되여 진립부는 곧 대만을 떠나 미국으로 갔다. 그러나 대만에 남아있던 진과부는 얼마 안되여 병으로 사망되였다.    
277    항전초기에 장개석은 왜서 미친듯이 공산당을 토벌했는가? 댓글:  조회:6887  추천:2  2015-04-06
항전초기에 장개석은 왜서 미친듯이 공산당을 토벌했는가?   (번역)   항전초기에 장개석은 모든 력량을 집중하여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농촌근거지와 홍군을 대처하기 위해 일본침략자와 타협했다. 그는 “항일을 입에 담는 자는 용서하지 말고 죽이라”는 반동명령을 내리는 한편 친일파두목 황부를 파견하여 일본군과 담판을 하게 함으로써 다시 타협했다. 1933년 5월 31일에 국민당정부는 일본제국주의와 “당고협정”을 체결했는데 이는 주권을 잃어 나라를 욕되게 하는 매국협정이였다. 일본군이 대거 침입하고 장개석이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면서 부저항정책을 집행하여 조국의 령토를 순순히 일본군에게 넘겨준 행위는 전국인민의 지대한 분노를 일으켰다. 중국공산당은 중화쏘베트공화국림시중앙정부, 중국공농홍군혁명군사위원회(즉 중앙혁명군사위원회)의 명의로 1933년 1월 11일에 선언을 발표하여 중국공농홍군은 “즉시 쏘베트구역에 대한 진공을 정지하고 민중의 민주권리를 보장하며 민중을 무장하여 항일한다는 3가지조건을 지키는 무장부대라면 어떠한 무장부대와도 정전하고 공동으로 일본에 대항하는 작전협정을 체결하기를 바란다”고 제출했다. 1933년 6월 1일에 중국공산당은 또 중화쏘베트공화국림시중앙정부의 명의로 《국민당이 평진화북을 팔어먹는것을 반대하기 위한 선언》을 발표하여 국민당정부가 일본제국주의와 함께 체결한 《당고협정》을 반대했고 장개석반동집단이 전력을 다해 인민을 진공하고 일본제국주의에 투항하고 나라를 팔아먹은 죄행을 폭로했다. 그리고 전국인민이 일치 단결하여 빼앗긴 땅을 도로 찾고 중국을 보위하며 중화민족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투쟁하자고 호소했다. 광대한 인민군중들이 적극적으로 중국공산당의 호소에 따라 홍군과 일체 항일애국력량이 항일하고 장개석을 반대하는 행동을 대량으로 지원했는데 이런 형세는 중국혁명의 발전에 매우 유리했다. 전국인민이 일치 단결하여 항일하는 고조가 일어나자 국민당군대 내부의 일부 관병들도 공산당토벌을 중지하고 일치 항일할것을 요구했다. 장성의 각 입구를 지키는 중국군도 전국민민의 항일열정에 고무되여 장성내외의 민중의용군과 배합하여 자발적으로 일본군과 싸웠다. 국민당장군 송철원이 거느린 제29군은 장성 희봉구에서 영용하여 항전하여 일본군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장광내와 채정개는 19로군을 거느리고 국민당정부에 전군이 북상하여 항일할것을 요구하면서 선발대를 조직하여 북상하여 항일할 준비를 했다. 하지만 장개석은 19로군의 정당한 요구를 거절하고 선발대를 되돌려 계속 공산당을 토벌하라는 엄령을 내렸다. 이는 분개한 19로군관병들이 후에 “복건사변”을 발동한 원인으로 되였다. 풍옥상, 길홍창, 방진무 등을 위수로 한 항일애국장군들은 장개석의 매국투항정책에 불만을 품고 적극적으로 중국공산당의 호소에 따라 합작하여 항일할것을 표시했다. 1933년 5월 26일에 그들은 장가구에서 찰수항일동맹군(察绥抗日同盟军)을 성립했다고 전국에 선포하면서 련합하여 항일할것을 주장했다. 이 대오는 몇천명으로부터 10여만명으로 발전했다. 그해 6월중순에 항일동맹군은 출병하여 북쪽으로 공격했다. 7월하순에 선후로 강보, 고원, 다륜을 수복했으며 괴뢰군을 차하얼성(察哈尔省)에서 완전히 쫓아냈다. 그리고 장가구에서 동북4성을 수복할 계획위원회를 성립하고 진일보 대일작전을 준비했다. 일순간에 전군인민들이 항일동맹군을 지원하는 열조가 일어났다. 장개석은 이런 항일행동이 자신의 공산당토벌대업에 영향을 끼친다고 인정하면서 매우 적대시했다. 그는 수하의 량대특무조직인 “CC단”과 “람의사(蓝衣社)”에 비밀명령을 내려 국민당통치구내에서 인민의 항일민주운동을 미친듯이 진압했으며 공산당과 항일분자들을 무참히 살해했다. 1933년 7월부터 1934년 7월까지 1년사이에 “CC단”에 붙잡히고 살해된 공산당원만 해도 4500여명이나 되였다. 그리고 장개석은 항일동맹군의 항일을 허락하지 않았을뿐만아니라 “국책을 파괴했다”는 죄명으로 10여개 사의 병력을 출동시켜 항일동맹군을 포위하고 일본군과 배합하여 미친듯이 동맹군의 대본영 장가구를 포위공격했다. 그해 9월말에 찰수항일동맹군(察绥抗日同盟军)은 탄약과 량식이 떨어져 실패했다. 풍옥상은 핍박에 의해 직무를 내놓았고 방진무는 국외로 망명했으며 길홍창은 장개석에게 살해당했다. 장개석은 1933년 5월 8일에 각급 군관들앞에서 장편연설을 발표했다. “옛사람들이 외적을 물리치려면 먼저 내부를 안정시켜야 한다고 했는데 그 뜻은 먼저 내란을 평정한 다음에야 외국의 침략을 막아낼수 있다는것입니다.”  
276    졸업증서냐 실질능력이냐 댓글:  조회:5238  추천:11  2015-04-02
졸업증서냐 실질능력이냐   김희수     취업을 하려고 면접시험에 참가하면 제일 먼저 묻는것이 “원핑(文凭)”이다. 일반본과대학 졸업증이라도 내놓으면 고개를 끄덕이고 명문대학 졸업증을 내놓으면 “OK”이다. 만약 중등전업학교 졸업증마저 내놓지 못하면 무조건 락방이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원핑”만 있으면 다 된다는 말이 있다.   대학졸업증이 없으면 어디서나 “인재취급”을 하지 않는다. 나쁘게 말해서 “사람취급”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모종의 원인으로 대학에 가지 못한 사람들은 무시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도 그렇고 또 취직을 하기 위해서도 그렇고 연변대학 통신학부를 다녀서라도 졸업증서를 손에 쥐려고 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위조군들에게 돈을 주고 가짜졸업증서, 가짜 박사학위증서를 사기까지 한다.   중국에서 “원핑(文凭)”이라고 부르는 학력증서는 사회에서 중시를 받고 쓸모가 많지만 실질능력과 대등한것이 아니다. 한 사람이 대학졸업증이나 박사학위를 취득했다고 해서 그 사람이 꼭 그만한 능력을 가지고있다는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은 그와 대등한 능력을 가지고있을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그 이상의 능력을 가지고있을수도 있으며 또 어떤 사람은 그 이하의 능력을 가지고있을수도 있다.   “원핑(文凭)”은 옛날에는 관청에서 발급한 증명문서를 일렀는데 지금은 졸업증서, 학위증서를 이르는 말로 되였다. 지금 사회에서는 이것만 있으면 한 사람의 학력수준을 인정받고 취업도 쉽게 할수 있다. 하지만 “원핑”은 학력(学历)을 말해주는것이지 학력(学力)을 말해주는것은 아니다.   학력(学历)은 간단하게 말해 학교를 다닌 경력을 말한다. 여기에는 어떤 등급과 류형의 학교에서 배우고 졸업했는가, 어떤 학위거나 증서를 받았는가 하는것이 포함된다.   학력(学力)은 간단하게 학습능력과 지식수준을 말한다. 다시 말해 교육을 통하여 얻은 지식수준이나 기술따위의 능력, 교과서내용을 리해하고 그것을 응용하여 새로운것을 창조하는 능력을 말한다. 즉 실질능력을 말한다.   학력(学历)이 아무리 높아도 실질적인 능력이 낮으면 업무수행능력도 떨어진다. 때문에 많은 학자들은 학력(学历)을 볼것이 아니라 학력(学力)을 보는 사회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학력(学力)은 겉에 드러나는것이 아니기때문에 학력(学历)을 말해주는 학력증서를 보게 된다.     모집단위에서 인재를 모집할 때 누가 실질능력이 있는지 첫눈에 알아볼수 없기때문에 학력부터 보게 된다. 그럼 능력이 있다고 나서는 사람을 뽑아서 시용기간을 두고 관찰하다가 나중에 실질능력이 있는 사람을 정식으로 채용하면 되지 않겠는가? 이렇게 질문할수도 있겠지만 대답은 “no”다. 학력증서를 보지 않고 모집했다가 다른 단위에 인재를 빼앗기면 어쩌겠는가? 필경 확률을 따져보아도 학력증서가 없는 사람보다 학력증서가 있는 사람중에 실질능력자가 더 많을것이 아니겠는가?   이 사회에서는 학력이 높은 사람은 실질적인 능력이 낮아도 사회에서 존경받고 높은 경제대우를 받지만 실질적인 능력이 높은 사람은 학력이 낮으면 실질적인 능력보다 더 낮은 평가와 대우를 받게 된다.   학력지상주의를 반대하는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학력만 높으면 다야? 실질능력이 있어야지!” 이 말에는 반박이 뒤따른다. 만약 이 말을 학력이 높은 사람이 했다면 “학력이 중요하지 않다면 넌 왜 학력을 땄느냐”고 따질것이고 이 말을 대학문에도 들어가보지 못한 사람이 했다면 “네가 ‘원핑’이 없으니까 학력이 높은 사람을 질투해서 그렇게 말하는게지”하고 삐죽거릴것이다. 만약 학력증서가 없는 사람들이 “고리끼처럼 대학문을 나오지 못해도 자학자습으로 성공한 인재들이 적지 않다”고 하면 또 자기위안을 하는거라고 비웃을것이다.   학력이 높을수록 어른 대접을 받는 사회이다. 때문에 죽도록 공부해 대학에 가야 하고 연구생공부를 해야 하고 박사학위를 따내야 한다. 그러나 죽은 공부는 하지 말아야 한다. 죽도록 공부하는것도 방법이 아니다. 잠도 자고 운동도 하고 가장 좋은 컨디션을 보장하며 공부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학력만큼 또는 그 이상의 실질능력을 가진 인재로 되기 위한 공부를 해야 한다.    
275    “잊혀진 계절”은 맞지 않는 말일까? 댓글:  조회:4251  추천:0  2015-04-02
  “잊혀진 계절”은 맞지 않는 말일까?         “길 가던 버스가 갑자기 폭발하다니, 믿겨지지가 않아.” “그러게 말이야. 이 사건은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을거야.” 최근 서울 행당동에서 일어난 버스폭발 사건에 대해서 두 여성이 나누는 대화가 이랬다. 두 사람 모두 잘못된 말을 쓰고 있었다. 그런데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많은 사람들이 쓰고 있어서 어디가 잘못됐는지 단번에 알아채기도 쉽지 않다. 두 여성은 모두 ‘이중피동’을 쓰고 있다. 이중 피동은 피동형 동사에 ‘-어지다’ 형태의 피동표현을 한 번 더 쓰면서 중복된 피동표현을 하는 것을 말한다. 잘못된 우리말 쓰기의 전형 가운데 하나다. 피동은 주어가 직접 움직이는 능동에 대립되는 것이다. 주어가 남의 움직임에 의해 동작을 하게 되는 문법현상이다. ‘믿겨지지 않다’는 ‘믿다’의 피동사인 ‘믿기다’와 피동을 나타내는 ‘-어지다’가 결합된 이중피동 형태가 부정형과 결합했다. ‘잊혀지지 않는다’는 ‘잊히다’에 ‘-어지다’가 합쳐진 꼴에 역시 부정형과 결합했다. 두 문장을 바르게 표현하면 “믿기지 않아”, “잊히지 않을 거야”라고 해야 한다. 특히 ‘잊혀지다’는 바른 표현인 ‘잊히다’ 보다 훨씬 자주 쓰였던 표현이다. 가수 이용을 비롯해 여러 사람이 ‘잊혀진 계절’이라는 노래제목으로 노래했다. 바른 노래제목을 달자면? ‘잊힌 계절’이라 해야 할 것이다. 국립국어원 김형배 학예연구관은 “한글창제 이후 중세시대에는 국어에서 피동표현이 거의 사용되지 않았는데 영어의 영향을 받으면서 현대에는 피동표현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능동으로 표현하는 것이 익숙하고 자연스럽다는 설명이다. 예를들어 ‘화살이 살에 박히고’라는 피동 표현이 옛 문헌에는 ‘화살이 살에 박고’라고 기록돼 있을 정도다. 흔히 “미용실에서 머리 깎고 왔다”라는 표현을 많이 쓰는데 원칙적으로는 피동표현을 쓰는 것이 맞다. 자기 머리는 스스로 깎는 것이 아니라 깎이는 것이기 때문. 능동표현이 익숙해졌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으로 지금 우리말은 이대로 굳어졌다. 이중피동은 말이 쓸데없이 길어지고 깔끔하지 못하다. 김형배 연구관은 “피동표현은 국어가 발달하면서 점점 익숙해져가고 있으나 이중피동은 분명히 잘못된 우리 말 글 쓰기”라고 지적했다. 박양명 기자            또 다른 견해     국어 선생님들이 시험 문제를 낼 때의 특징 중 하나는 어법에는 맞지만 일상적으로 잘 쓰지 않는 표현을 내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한 예로 이용 씨의 노래 ‘잊혀진 계절’이나 그룹 동물원의 팬들이 가장 좋아하는 노래 ‘잊혀지는 것’을 들 수 있다. 이 노래 제목에 무슨 바르지 않거나 곱지 않은 말이 있을 것이냐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그런데 그분들에 의하면 ‘잊혀지다’라는 말은 어법에 맞지 않는 말이라고 한다. 그 이유는 이 말에는 ‘잊다’에 피동의 의미를 만드는 ‘-히-’와 ‘-어지다’가 동시에 사용된 것이기 때문에 이중 피동이 된다는 것이다. 이중 피동은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쓰지만, 어법을 따지지 않더라도 고쳐서 쓰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다. 예를 들면 ‘범인으로 생각되어지는 인물’과 같은 표현은 ‘범인으로 생각되는 인물’로 바꾸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그렇지만 이 경우에서 어법에 맞게 ‘잊힌 계절’ ‘잊어진 계절’이라고 하면 매우 어색해진다. 대부분의 문학 전공자들은 이런 어색한 표현이 옳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국어 교사가 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런 말들은 출제에서 제외를 한다. 그리고 사람들이 ‘잊혀지다’에서 사용되는 ‘-어지다’를 피동을 나타내는 것으로 인식하기보다는 ‘이루어지다’ ‘없어지다’ ‘깨끗해지다’에서 보이는 것과 같이 ‘어떤 결과에 이름’의 의미로 인식을 하는데, 이럴 경우 어법에 맞지 않다고 하기도 어렵다. 현재의 어법에 맞지 않고, 사전에 등재되어 있지 않다고 해서 완전히 틀렸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런 말들 중에 시험에 가장 많이 나오고, 신문의 칼럼들에서 지적하는 말 중 하나가 바로 ‘바라다’를 잘못 활용한 사례인 ‘바래’와 ‘바램’이다. 이 예들은 ‘바라+아’가 결합된 것을 잘못 말한 것이라는 지적을 워낙 많이 받다 보니 텔레비전을 보면 사람들끼리는 자연스럽게 “잘하길 바래”라고 말하는데, 자막은 매우 어색하게 ‘잘하길 바라’로 나온다. 그렇지만 이 경우도 사람들이 ‘바래’를 쓰는 것이 아주 근거 없는 것은 아니다. 만약 어법이 만고불변의 진리라면 ‘사랑하다’의 경우 ‘사랑하+아’가 되어 ‘널 사랑하’라고 고백을 해야 한다. 그렇지만 ‘하다’가 붙는 모든 말들은 ‘여 불규칙 활용’이라고 하여 어미 ‘아/어’가 ‘여’로 바뀌고 ‘하여’가 줄어서 ‘해’가 된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어간의 형태 그대로 두었을 때 발생하는 어색함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만나다’의 경우는 어간이 문장의 종결어미로도 사용되는 ‘나’로 끝나기 때문에 ‘내일 만나’와 같은 표현이 어색하지 않지만, ‘바라다’ ‘삼가다’와 같은 경우는 ‘바라’ ‘삼가’라고 하면 어색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여 불규칙 활용’과 같은 원리를 적용해 ‘바래’ ‘삼가해’와 같은 표현을 쓰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3시까지 오기 바람”과 같은 예에서 ‘바라다’의 명사형을 ‘바램’으로 쓰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그렇지만 희망을 뜻하는 명사 ‘바람’이 될 때는 ‘바램’을 더 많이 쓰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이유는 이미 강력하게 자리를 잡고 있는 ‘바람’(風)이라는 말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다. ‘주검’이라는 말이 동사 ‘죽다’에서 온 말은 맞지만 명사가 되면서 ‘죽음’이라는 말과의 의미 충돌을 피하기 위해서 다른 형태로 사용하는 것과 원리가 상통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이 그 나름의 타당한 근거를 가지고 자연스럽게 사용하는 말은 억지로 고치라고 하기보다는 빠른 심의를 통해 인정을 해 주는 것이 중요하다. 민송기                 부록 잊혀진 계절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시월의 마지막 밤을. 뜻모를 이야기만 남긴 채 우리는 헤어졌지요. 그날의 쓸쓸했던 표정이 그대의 진실인가요. 한마디 변명도 못하고 잊혀져야 하는 건가요. 언제나 돌아오는 계절은 나에게 꿈을 주지만. 이룰 수 없는 꿈은 슬퍼요. 나를 울려요...   그날의 쓸쓸했던 표정이 그대의 진실인가요. 한마디 변명도 못하고 잊혀져야 하는 건가요. 언제나 돌아오는 계절은 나에게 꿈을 주지만. 이룰 수 없는 꿈은 슬퍼요. 나를 울려요...      
274    소월의 진달래꽃은 지금도 피고 있을까 댓글:  조회:4066  추천:1  2015-04-02
소월의 진달래꽃은 지금도 피고 있을까   김병훈   김소월(1902~1934)의 시는 현대 서정시의 처음과 끝이다. 그의  서정시를 능가하는 시를 본적이 없고 그의 시어와 운율은 근 1세기가 지난 지금도 깊은 울림을 준다. 애잔하면서도 전통적인 정조와 입에 감기는 운율까지, 실로 그는 천재였다.   소월의 시를 읊조리면 어느새 눈물이 나고 가슴이 박차오르며 때로는 신이 난다. 시에 문외한인 사람이 보아도, 전문 평론가가 보아도 소월의 시는 명쾌하고 마치 마음속에 흐르는 노래처럼 리듬을 타고 일렁인다. 보는 관점마다 다 다르겠지만 소월의 시만큼 우리말을 아름답고 우아하게 구사한 문학작품은 또 없을 것이다. 그의 시는 한마디로 한 개인의 상상력과 지식으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수천 년간 수많은 사람들의 머리와 입으로 전승되며 다듬어진 민요같다. 그런 시를 혼자 썼다고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   고작 32년을 살다 간 요절 시인은 백여 수의 시를 남겼는데 하나같이 가슴과 머리와 입에 와 닿는 명시다. 《진달래꽃》은 소월의 대표작으로 한국적 미학과 서정성의 극치를 단순명쾌한 시어로 표현하고 있어서 굳이 외우려 하지 않아도 몇번 읽다 보면 마음의 앙금으로 남아 자연스럽게 발성이 되어 나온다. 그 《진달래꽃》의 무대가 영변의 약산이다. 시 속에도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 오리다”로 등장한다.   영변은 평안북도 내륙지방으로 묘항산에서 그리 멀지 않다. 원래 소월의 고향은 영변 옆의 구성인데 예로부터 이 지역에서는 약산의 진달래가 유명했나 보다. 약산은 영변읍 바로 옆에 솟아 있으며 산 아래로는 청천강의 지류인 구룡강이 안동 하회마을처럼 거대한 물돌이 지형을 만들며 감아 돌고 있다. 산의 동북쪽 분지에 영변읍이 자리한다. 겨우 488메터의 높이지만 강변 저지대에서 곧추 솟아서 상당한 고도감을 준다.   문제는 약산의 서쪽과 남쪽에 그 유명한 영변 핵시설이 있다는 것이다. 국내는 물론 세계적으로 파문을 일으킨 “북핵문제”의 진원지가 바로 여기다. 이제 약산에는 더 이상 진달래가 피지 않을 것이고 산 곳곳에는 핵시설을 보호하는 군사시설만이 가득할 것이다.   그래도 언젠가는 약산을 오르는 산길과 구룡강 강변에는 다시 진달래가 피여나고 그 사이로 난 꽃길은 최고의 자전거 코스가 될 것이라 믿어본다.                 부록   진달래꽃                              김소월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김소월(金素月)의 본명은 정식(廷湜)입니다. 그는 1902년 8월 6일에 평북 구성군에 출생하고, 그의 아버지 김성도는 1904년 처가에 가던 중 철도 공사를 하던 일본 목도들에게 폭행을 당하여 정신이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김소월은 광산 사업을 하는 조부에 의하여 자라났습니다. 남산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오산학교(1915년-1919년)에서 민족의 스승인 조만식 선생을 만나고, 평생 문학 스승인 김억 선생을 만났습니다. 1916년 오산학교 시절에 고향인 구성군 평지면의 홍단실과 결혼하였습니다. 3.1운동 후 오산학교가 문을 닫자 배재고등보통학교 5학년에 편입하여 졸업했습니다. 1923년에 도쿄상업대학에 입학했으나 동년 9월 관동대지진 후 중퇴하고 귀국했습니다. 김소월은 고향에서 조부님의 광산 사업을 도우며 일했으나 실패하고, 구성군 남시에서 동아일보 지국을 개설했으나 역시 실패하여 극도로 빈곤하게 되어, 정신적으로 충격을 받아 술로 세월을 보내고 친지들로 부터 멸시와 천대를 받았습니다. 1922년에 우리나라의 서정시의 기념비적 작품인 "진달래꽃"을 지에 발표하고, 그리고 "예전엔 미쳐 몰랐어요" "산유화"를 발표했습니다. 김소월의 유일한 시집 을 1925년에 출판했습니다. 김소월은 향토적 소재와 설화적 내용을 민요적 기법으로 노래했습니다. 그의 유일한 단편소설은 입니다. 김소월은 초기에는 여성적인 서정시를 썼으나, 말년에는 남성적인 참여적인 글을 썼다고 합니다. "진달래꽃" "산유화" "금잔디" "엄마야 누나야" "예전엔 미쳐 몰랐어요" 등은 한국 사람들이 가장 애송하는 시들입니다. 불행하게도 1934년 12월 24일에 곽산에서 아편을 먹고 음독자살했다고 합니다. 1981년에 금관 문화훈장을 추서하고, 남산에 그의 시비가 서 있습니다. 5~6년의 짧은 문단생활이지만 154편의 시와 시론을 남기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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