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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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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3    지구온난화 인류는 어디로 가는가? 댓글:  조회:4564  추천:6  2016-03-23
지구온난화 인류는 어디로 가는가?   김희수     지구온난화, 이제 우리는 피부로 이것을 실감하며 늘 입에 올리고있다. 여름은 너무 덥다. 겨울은 춥지 않아 겨울같지 않다. 스모그가 계속되고 불볕더위, 한파 등 이상기후가 빈번하게 발생된다. 이상기후가 몰고 온 한파를 제외하면 지금의 겨울은 엄동설한의 칼바람, 살을 에이는 강추위, 뼈속까지 얼어드는 맹추위, 꽁꽁 얼어붙은 강이라고 표현하기엔 너무 과장된 느낌이 든다.   예전에 겨울이 오면 남자들은 모두 털모자를 꾹꾹 눌러 썼고 녀자들은 모두 두꺼운 머리수건을 꽁꽁 매고 다녔다. 그런데 지금은 털모자나 머리수건이 사라진지 오래다. 왕바신(王八鞋), 따투쎄(大头鞋)를 신어도 발이 꽁꽁 얼고 개털모자를 써도 귀가 시리던 겨울은 어디로 갔지?   지구온난화로 인해 21세기말이면 빙하가 70%이상이 녹거나 완전히 사라질수 있다는 연구결과가 발표되였다. 빙하가 녹으면 해수면은 계속해서 상승하게 되고 이로 인해 지대가 낮은 지역은 물에 잠기거나 페허로 변할수 있다.   지구온난화로 인해 지구의 기온이 계속 올라간다면 장차 홍수나 가뭄, 도시가 바다물에 잠기는 큰 위험이  닥칠수 있다. 뿐만아니라 산소고갈이라는 더 끔찍한 재앙이 올수도 있다고 과학자들이 분석했다. 산소가 없으면 사람을 비롯한 지구상의 생물체가 살수 없다는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지구온난화로 신강위글자치구, 서장자치구, 사천성, 청해성, 감숙성, 운남성의 빙하는 1950년대 이후 18%가 줄었고 매년 243평방킬로메터씩 줄어들고있다고 한다. 자난해에 신강 아커타오(阿克陶)현에서 빙하가 이동해 1000㏊의 농지와 70가구에 피해를 입혔다. 신화통신은 2013년에 신강의 빙하가 20년내에 60% 감소하고 50년내에는 80∼90% 줄어들것으로 전망된다고 보도했다. 신강정부는 관광객의 빙하훼손을 방지하기 위해 신강정부는 22698평방킬로메터에 달하는 신강지역빙하에 대한 관광객방문을 2020년까지 금지했다.   지구온난화의 원인은 온실가스이고 온실가스중 지구온난화를 일으키는 주범은 이산화탄소라고 한다. 인류는 갈수록 필요한 에너지가 더욱 많아졌기때문에 손쉽게 에너지를 얻을수 있는 석유나 석탄과 같은 화석연료를 무분별하게 소비했다. 이런 화석연료가 연소될 때 지구온난화를 일으키는 주범인 이산화탄소가 가장 많이 배출된다.   계속되는 지구온난화를 막기 위해 인류는 이산화탄소배출을 줄이고 신재생에너지를 개발하는 등 다양한 노력을 하고있는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그런 노력이 지구온난화방지에 얼마만한 효과를 거둘수 있을가? 딱히는 몰라도 긍정적인 효과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200~300년후 혹은 500년후에 환경오염, 오존층파괴, 지구온난화, 핵전쟁, 소행성충돌, 화산폭발 등이 극에 달해 지구가 인류가 살수 없는 환경이 되면 인류는 어디로 갈가? 공룡처럼 멸종되여 흔적도 없이 사라질가? 우주의 어딘가에 있을 제2의 지구를 찾아갈가?   정말 인류가 살수있는 환경에 적합한 행성이 우주에 있을가? 있을수 있다. 그러나 인류가 살수 있는 행성이 있다고 해도 또 발견하였다고 해도 그 행성이 지구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면 거기까지 가기 어렵다. 태양계 너머의 은하계의 어느 행성인가에 제2의 지구가 있다고 해도 거기까지 가는 우주선을 제조할수 있는지도 문제지만 거기까지 가는 동안 인류는 늙어 죽을수도 있다.   그러면 가까운 곳에서 찾아야 한다. 화성은 인류가 우주선을 타고 가서 착륙할수 있는 태양계의 행성중에서 지구와 가장 비슷한 행성이라고 한다. 그러나 화성은 기온이 너무 추워서 생명체가 생존할수 있는 가능성이 희박하고 인류가 생존한다는건 더구나 불가능한 일이다.   그럼 인류는 어디로 갈가? 그때에 가면 과학이 상상할수조차 없이 발달하여 그런 상황에 대처할 방법이 얼마든지 있다고 믿어야 할가? 우리가 죽은후에 지구가 멸망하든 말든 무슨 상관이람? 하고 자포자기해야 할가? 나만 배부르게 살다가 죽으면 되지, 하고 강건너 불구경하듯이 수수방관해야 할가?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하고만 있어야 할가? 지구가 곧 인류가 생존할수 없는 환경이 되면 인류도 끝장이구나, 하고 비관실망해야 할가?   정말로 지구온난화를 방지할 길이 없을가? 길은 원래 없는것인데 사람이 다녀서 만들어진것이라고 한다. 전 세계 200여개 나라가 합심하고 각 나라마다 전 국민이 하나가 되여 발벗고 떨쳐나선다면 “산이 첩첩 물이 겹겹 길이 없나했더니 굽이돌아 또 새 마을이 나타나네”하는 옛시처럼 낭떠러지같은 절망속에서도 희망의 새길이 열릴것이라고 기대해본다.    
352    당나라 저명한 불교승려 현장 댓글:  조회:5096  추천:0  2016-03-23
당나라 저명한 불교승려 현장     중국의 4대명작중의 하나인 신화소설 《서유기》는 불가제자 넷이서 천신만고를 겪으면서 무수한 요귀들을 물리치고 마침내 서천에 가서 불경을 가져오는 이야기를 담았다. 이 소설의 주인공중의 한사람인 당승(唐僧)의 원형이 바로 중국 당나라의 저명한 불교승려인 현장(玄奘)이다. 현장은 당나라의 승려로서 기원 600년에 하남성에서 출생하였다. 현장은 어릴 때부터 아주 총명하였고 당시 풍미하였던 불교학설에 대해 특별한 흥취를 가졌다. 11살이 나던해에 현장은 벌써 불경을 읽을수 있었고 13살에 출가하여 중국의 문화중심지인 락양의 정토사에서 경론을 공부하였다. 그후로는 전국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스승을 구하여 불교리론을 통달하였다. 18살에 현장은 불교계에서 그 명성을 떨쳤다. 그가 인도불교학중의 “경장”, “률장”, “론장”을 통달하였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삼장법사(三藏法师)”라고 불렀다. 청년시기에 불교철학에 대해 집요하게 추구하기 시작한 현장은 당시의 불경번역문이 불완전하고 의문이 나는 부분이 많아 원저를 접하려고 불교의 근원지 인도로 가기로 다짐하였다. 기원 627년에 현장은 당시 당나라 수도였던 장안(지금 서안)을 떠나 인도의 나란다사로 향하는 머나먼 려정에 올랐다. 나란다사는 불교의 최고학부로서 그때 벌써 700여년의 력사를 갖고있어 인도불학의 권위이자 세계 기타지구의 불교신도들이 가고싶어하는 곳이였다. 1300여년전에 인류자체가 지리에 대한 지식이 결핍하고 교통조건 또한 지극히 락후했던 상황에서 도보로 중국중부에서 머나먼 인도에 간다는것은 엄청 힘든 일이였다. 도중에 인적이 없는 사막과 원시림을 경과해야 했고 중국서북의 대설산도 넘어야 했다. 독실한 불교신도인 현장은 모든 난관을 물리치고 기원 629년 여름에 마침내 불교고적이 많은 불교의 발원지 인도의 북부에 도착했고 나중엔 인도의 중부에 가서 불교의 6대 성지를 참배하였다. 현장은 인도에서 여러곳을 유람하면서 고승들에게서 불경을 배웠다. 어느날에 그는 배를 타고 간지스강을 건너다가 한무리 강도들의 손에 걸렸다. 강도들은 귀신을 믿는 자들이였는데 매년 가을마다 사람을 죽여 귀신에게 제를 지냈다. 배에 있던 강도들은 현장을 알맞는 포획물로 보고 그를 죽이려고 했다. 현장이 자기의 사정을 재삼 해석했지만 강도들은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현장은 어쩔수 없어 눈을 감고 경을 외웠다. 그런데 때마침 일진광풍이 불어치면서 무시무시한 파도를 일으켰다. 이에 강도들은 겁을 집어먹고 부랴부랴 땅바닥에 엎드려 잘못을 빌었다. 이 소문이 삽시에 당지에 쫙 펴졌다. 당지 사람들은 불교의 힘이 현장을 보호하고있다고 여겼다. 기원 631년 현장은 인도의 나란타사에 5년간 머무르며 계현론사를 모시고 “유가사지론”을 연구하였다. 그후 현장은 다시 6년간 인도각지에서 불교성지순례려행을 계속하면서 10여명의 불교대사들의 가르침을 받아 일류의 불교학자로 되였다. 기원 643년에 현장은 그가 수년간 수집한 600여부의 경전과 불상을 지니고 귀국길에 올랐다. 당시 당나라 황제였던 당태종은 사람을 보내 그를 영접하게 하였다. 현장은 환속하여 관직에 오르라는 황제의 요구를 마다하고 장안의 홍복사에 들어갔다. 당태종의 후원으로 그는 각지의 고승, 학자들을 모아 그들과 함께 불경번역작업을 시작하였는데 그 사업은 장장 19년간 진행되였다. 현장은 경전번역에 혼신을 바쳤다. 19년동안 번역한 75부 1335권에 달하는 경론에서는 5세기 인도불교의 전면모를 반영한 기본저작을 체계적으로 번역, 소개하였다. 로년에 현장은 최대의 불교경전 《대반약경》 600권을 번역하였다. 여러 문화에 대해 깊은 리해를 갖고있은데다가 또한 범문에 정통했던 탓으로 현장이 번역한 글은 원문의 뜻을 살리면서도 류창했다. 현장은 경전을 번역하는 한편 불교의 다른 한 류파를 형성했다. 그것이 바로 중국불교사상 현장이 형성시킨 법상종이다. 불교저작외에도 현장은 려행기 《대당서역기》를 통해 10년남짓한 동안에 다녀온 110개 나라의 력사, 지리분포, 민족기원, 물산과 기후, 문화와 정치 등을 일일이 소개하였는데 그 내용이 풍부하여 오늘날까지도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인도 및 전반 중아시아의 고대력사와 지리를 연구하는 진귀한 자료로 되고있다. 19세기 이후 《대당서역기》는 선후로 프랑스어, 영어, 일어, 독일어 등으로 번역되여 현대고고학자들이 고대인도와 중아시아의 력사문화유적을 발굴하고 성과적으로 연구를 진행할수 있도록 근거를 제공해주었다. 현장의 영향은 주관적목적과 직접적효과를 초월하여 중국 및 동방문화사상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있다. 그는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번역가, 불교학리론가일뿐만아니라 중고시대의 위대한 려행가로서 17년동안에 5만리를 걸어서 101개의 나라를 다녀왔는데 이는 세계력사상 드문 일이다. 그의 려행기는 오래전부터 불후의 세계명작으로 인정받고있다. 현장의 이야기는 력대문인들의 령감을 자극하였다. 당나라시기부터 많은 문인들이 예술수법을 리용하여 그의 이야기를 신격화하였는데 송나라에 와서는 《대당삼장취경시화》가 나왔고 명나라에 와서는 신화소설 《서유기》가 나왔다. 천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람들은 그에 대한 이야기를 즐겨 듣고있다. 《당조사화》    
351    중국농업의 신 신농씨 댓글:  조회:5219  추천:0  2016-03-20
중국농업의 신 신농씨     5000여년전에 신농씨(神农氏)는 강(姜)씨 성을 가진 부락의 한 수령이였다. 신농씨가 생활하던 년대에는 두령도 보통 씨족성원들과 함께 농사를 지어야 했다. 신농씨는 중국 최초의 농기구인 뢰사를 발명해 농업의 발전을 크게 추진했다. 그가 농업에 대해 큰 기여를 하였기에 사람들은 신농씨라고 존칭해 불렀다. 신농씨가 처한 시대는 부계씨족공사(父系氏族公社)초기여서 착취와 압박이 없고 사람들이 평등하게 우애를 나누며 살았다. 사기의 기재에 의하면 신농씨가 즉위한 시기에 남자들은 밭일을 하고 녀자들은 집에서 천을 짰으며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서 감옥과 형벌이 필요되지 않았고 천하를 호령하는 왕도 군대도 경찰도 필요없었다. 신농씨는 중국 최조의 의학전문가이다. 전한데 의하면 신농씨는 백성들이 병마에 시달리는것을 보고 불안을 금치 못했다. 그는 오곡이 건강에 리롭다는것을 안후 100가지 풀의 열매가 사람들의 병을 치료할수 없겠는가고 생각했다. 신농씨는 산속을 헤매면서 여러가지 초약을 채집했는데 초약의 특성을 알기 위해 신농씨는 직접 초약을 먹어보았다. 신농씨는 경상적으로 중독되였는데 지어 하루에 70여번이나 중독된 적도 있었다. 전한데 의하면 신농씨는 《신농본초경(神农本草经)》을 편찬했는데 여기엔 여러가지 질병을 치료하는 처방전이 기재되여있다. 신농씨는 또한 천문력산(天文历算)분야에서의 학자이기도 하다. 그는 복희씨(伏羲氏)가 발명한 팔괘(八卦)에 기초해 64괘를 내놓았는데 이름을 《귀장(归藏)》이라고 달았다. 64괘로 사건을 기록할수 있을뿐만아니라 점을 칠수도 있었다. 이밖에도 신농씨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필요되는 물건을 만들줄 모르는 반면에 필요되지 않은 물건들이 많이 생산되요 생활에 불편을 가져다주는것을 보고 사람들더러 한곳에 모여 물건을 팔고 사게 했다. 하여 중국에서 최초의 장마당이 생겨났다. 사람들에게 로동후의 오락을 제공하기 위해 신농씨는 5현금(五弦琴)을 만들었다. 오현금은 새소리와 같은 미묘한 음을 낼수 있었다. 후에 그는 아들에게 《종(钟)》이라 이름을 지은 악기를 만들어주었고 많은 가곡을 창작했다. 신농씨가 만들어낸 악기는 후세에 전해져 내려왔다. 신농씨는 강수(지금의 보계경내)에서 태여나서 죽은후 “다향지미(茶乡之尾)에 묻혔다. 다향지미는 지금의 호남성 주주시 염릉현 록원진(湖南省株洲市炎陵县鹿原镇)이다. 그는 염제(炎帝)라고 불리웠는데 존호는 신농이다. 후세사람들이 그를 중국농업의 신이라고 칭했다. 《고사》    
350    왜 좋은 이름에 집착할가? 댓글:  조회:4464  추천:6  2016-03-17
왜 좋은 이름에 집착할가?   김희수   근년들어 부모가 지어준 이름이 마음에 안들어 개명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애초에 그 이름을 지었을 때는 자식이 잘 되기를 바라는 부모의 아름다운 축복이 깃들었을것이다. 부모가 고민하면서 숱한 이름가운데서 골랐을 좋은 이름을 버리고 새 이름을 지으려고 할 때는 여러가지 원인이 있을것이다.   다른 아이들이 놀려준다거나 흔한 이름이여서 마음에 들지 않는다거나 남이 고치니 덩달아 고친다거나 또는 이름을 고쳐야 출세한다는 점쟁이의 말을 믿는다거나 등등 나름대로의 리유는 있겠지만 과연 이름을 고친다고 운명이 달라질가?   모택동은 1947년 3월 13일에 호종남(胡宗南)이 쳐들어왔을 때 연안을 떠나야 승리한다는 뜻인 리득승(离得胜)과 음이 같은 리덕승(李德胜)으로 개명했기에 전국을 해방하고 승리했다. 하지만 대립(戴笠)은 사주팔자에 좋다는 우농(雨农)이라고 개명했지만 결국 좋은 끝장을 보지 못하고 1946년 3월 17일에 비행기추락사고로 비속(雨中)에서 죽었다.   성공했거나 출세한 사람들은 이름을 잘 지어서 출세한것일가? 정말 그렇다면 이름을 지을 때 출세한 사람들의 이름을 따서 지으면 출세는 근심하지 않아서 될것이다. 이 세상에 동성동명이 많다. 그러나 같은 성과 같은 이름을 가졌다고 해도 운명은 서로 다르다. 동성동명이라고 해도 출세한 사람과 출세하지 못한 사람이 있을것이고 장수한 사람과 단명인 사람도 있을것이다. 자신이 하는 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것은 이름탓이 아니다. 한마디로 성공한 사람들이 이름을 잘 지어서 출세한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 세상에 이름 하나 잘 지어서 성공했거나 출세한 사람이 없다. 물론 개명한후 성공했거나 출세한 사람들은 적지 않다. 그러나 그들이 개명한후 손놓고 아무 노력도 하지 않았다면 출세할수 없었을것이다. 이들은 단순히 좋은 이름을 지어서 출세한것이 아니다. 반면에 개명후 실패한 사람들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름이 개인의 운명을 좌우한다는 전통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자녀에게 좋은 이름을 지어주겠다는 부모의 마음 지극히 옳은것이고 부모가 지어준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아 개명하려는 사람의 마음도 나무람해서는 안된다. 다만 이름에 너무 집착해 자주 개명하려고 하고 일이 뜻대로 안되면 이름탓으로 생각하는 사고방식만은 바꿔야 할것이다.   모든것을 만족시키고 충족시키는 좋은 이름은 없다. 절대적으로 좋은 이름은 없다는 뜻이다. 어떤 이름이 좋다고 너도나도 그 이름을 지으면 중복이 생기고 개성이 없어지게 된다. 작명소가 생겨나고 이름짓기에 도움을 주는 이름짓기프로그램이 나오면서 좋은 이름에 열광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있다. 하지만 이름은 이름일뿐 운명을 개변하지 못한다. 운명을 개변하는것은 좋은 이름이 아니라 자신의 두손이다.   이름없이 마당쇠로 살다가 죽은 사람도 있고 이름 석자로도 모자라 자, 호까지 달고 숱한 별명까지 길게 붙여서 자신을 나타낸 사람들도 있다. 이름이 없건 이름이 하나이건 이름이 여러개이건 또는 좋은 이름이건 수수한 이름이건 모두 죽으면 후세에 이름이 남는 사람은 극소수이다. 대부분은 죽음과 함께 그 이름도 사라진다.   이름을 바꾼다고 운명이 바뀌지 않는다. 아무리 좋다고 하는 이름으로 개명해도 자신의 노력이 없이 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 하지만 개명의 좋은 점도 있다. 이름을 바꾸면 자신심이 생겨날수 있다. 이제야 자아를 찾은것 같고 이제야 진정한 내가 된것 같아 날것만 같은 심정일수 있다. 이런 자신심에 날개를 달고 훨훨 날려면 자아도취에 취해 꿈만 꾸지 말고 꾸준한 노력의 날개짓을 힘차게 해야 한다.   개명이 헛되게 되지 않으려면 원대한 포부는 아니여도 자신만의 당찬 포부를 품고 참다운 인생관을 세우고 자신의 웅대한 목표를 위해 꾸준이 날개짓을 해야 좋은 이름에 걸맞는 결과가 이루어 질것이라고 생각한다.    
349    후배기자들 올바른 한글사용 바라는 마음으로 이룬 100회 댓글:  조회:3507  추천:0  2016-03-13
후배기자들 올바른 한글사용 바라는 마음으로 이룬 100회   [인터뷰] 강상헌 우리글진흥원 원장   안혜나 기자 | hyena@mediatoday.co.kr       2012년부터 시작한 본지 ‘강상헌의 바른말 옳은글’ 칼럼이 100회를 맞이했다. ‘바른말 옳은글’ 칼럼의 저자 강상헌 우리글진흥원 원장은 1978년 동아일보에 입사 98년 퇴사때까지 꼬박 20년 기자 생활을 한 중진 언론인이다. 그는 항상 후배 기자들에게 올바른 한글 사용의 중요성을  강조해왔다. 강 원장이 현재 미디어오늘을 통해 언론에서 잘못 쓰여지고 있는 한글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이 역시 후배 언론인들에게 올바른 한글 사용법을 고민하게 하기 위한 선배 언론인의 마음이다.     ‘바른말 옳은글’ 칼럼을 쓰는 이유는 무엇인가   글을 쓴다는 것은 자신의 생각을 말과 글을 통해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기사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선배 기자 입장으로서 후배 기자들이 글을 쓰거나 기사를 작성할 때 올바른 한글 표현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명확하게 밝히길 바라는 선배의 마음을 담아 ‘바른말 옳은글’ 칼럼을 시작하게 됐다.   요즘 기사를 보면 올바른 한글을 쓰지 않는 경우가 많다   후배 기자들이 작성한 기사를 보면 처음엔 화가 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이들이 어떠한 교육과정을 밟고 한글을 배웠는가에 대해 이해한 후로는 후배기자들에게 나타나는 한글사용의 문제점이 사회 전반의 구조적인 요인에서 비롯됐다는 것을 알았다.   한글은 아쉽게도 한자를 배워야 그 본디를 정확히 이해할 수 있는 언어이다. 하지만 지금의 젊은 세대들은 한자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세대이다, 이러한 젊은 후배기자들이 한글과 한자에 대한 깊이있는 교육이 부족하다보니 한글로 문장을 구현할 때 오류가 생기고 애매모호한 문장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기사에서 독자들이 봐도 어색한 문장들이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자 교육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아직 대한민국에는 한자 교육에 대한 다양한 의견들이 있다. 나는 한자에 대한 중요성은 알고 있지만 섣불리 한자 교육에 대한 입장을 말하기는 곤란하다고 본다. 하지만 글을 좀 더 잘 쓰고 싶고 한글이라는 언어에 대해 깊이있는 공부가 필요하다고 느낀다면 한자를 배우길 권한다.   그런데 아직 젊은 사람들이 ‘한자’라고 하면 어렵고 복잡하다고 생각해 한자 공부를 꺼리는 경향이 많다. 하지만 한자를 배우고 한글 공부를 한다면 마치 디지털카메라의 해상도가 좋아지듯이 한글을 보는 깊이와 시선, 글을 다루는 솜씨도 훨씬 좋아질 수 있다. 한자 공부에 대한 팁을 주자면 한자를 단순히 복잡한 언어라고 보지 말고 하나의 그림 형태로 이해하면서 공부한다면 한자에 대해 공부하기가 훨씬 수월할 것이다. 한글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많은데 한글 사랑에 대한 계기가 있는가   난 지난 30년동안 매일같이 글을 써온 사람이다. 어릴 때부터 책 읽고 글 쓰는 것을 좋아했는데 이러한 글에 대한 관심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내가 기자 생활을 시작하면서 대선배들로부터 글을 잘 쓰는 방법, 한글을 다루는 방법을 배웠다. 당시 선배들의 가르침과 한글에 대한 나의 애정이 지금의 나로 이어져 온 것 같다.   현재 ‘우리글 진흥원’을 대표로 활동하고 있는데 ‘우리글 진흥원’은 어떤 일을 하는 곳인가   우리글 진흥원은 지난 2011년에 시작해 올해로 만들어진지 만 3년이 됐다. 현재 우리글 진흥원이 주로 하는 일은 국가기구 및 지방자치단체 등이 보도자료 및 글을 작성할 때 올바르게 한글을 쓸 수 있도록 자문해주고, 한글 사용법에 대한 강의 활동 등을 펼치고 있다. 또한 대학생을 대상으로 글쓰기 교육 및 강의도 진행하고 있다.   ‘우리글 진흥원’을 만든 계기가 있는가   난 현재 헝클어지게 엉망으로 쓰여지고 있는 지금의 한글이 올바른 모습으로 돌아오길 바란다. 그래서 나는 한글의 본모습과 올바른 한글 쓰기를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만들게 됐다.   글을 쓸 때 한글을 올바르게 쓰고자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사람들은 자신이 어릴 적 한글을 습득하고 배웠던 개인적 취향을 유지하면서 평생 글을 쓴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글을 다 쓰고 난 후 자신이 글에 쓴 단어가 적절한 단어인지, 문장 작성에 완성도가 있는지 검토하지 않고 지나쳐버리기 일쑤다. 앞에서 언급했다시피 글을 자신의 생각을 담는 것이다. 글을 다 작성하고 난 후 국어사전을 찾아가면서 올바르지 않는 단어는 수정하고, 문장이 어색하다 싶으면 고치는 노력을 보이면서 글의 완성도를 놓이는 작업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러한 글의 완성도를 높이고자 한다면 한글에 대한 깊이있는 공부가 필요하다. 그러니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한글과 한자에 대한 꾸준한 공부가 필요하다.   ‘바른말 옳은글’ 칼럼을 보면 언론사의 올바르지 못한 한글 사용에 대한 지적이 많다   언론사가 작성하는 기사와 뉴스는 대한민국 국민들이 한글의 본보기로 삼아서 보는 한글의 기준, 표본과 같은 것이다. 그러니 언론사가 올바르지 못한 한글을 사용한다면 국민들도 올바르지 못한 한글을 사용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언론이 올바른 한글을 사용하도록 돕기 위해 스스로 ‘글 선생’을 자처하면서 바른말 옳은글 칼럼을 작성해 후배 기자들에게 올바른 말과 글을 쓸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는 것이다.   칼럼 소재는 어디서 얻는가   일주일에 보통 7, 8개씩 제보가 들어온다. 그럼 내가 해당 기사나 글을 보고 ‘바른말 옳은글’ 칼럼을 작성할지 판단한다. 아니면 내가 TV나 신문을 보고 느낀 한글에 대한 올바르지 못한 표현을 칼럼으로 작성한다. 그리고 나도 아직 한글과 언어를 공부하고 있는 사람이라 칼럼 작성할 때 주위 사람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는데 전남대 김태완 교수, 명지대 진태하 원로교수, 성균관대 전광진 교수에게 많은 도움을 받는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는가   내가 이 칼럼을 쓰는 이유는 후배를 사랑하는 마음을 이 칼럼을 통해 드러낸다고 볼 수 있다. 후배 기자들이 내 칼럼을 통해 좀 더 명확하면서도 자신의 생각을 올바르게 전달하는 기사를 작성하고 한글에 대한 끊임없는 공부와 연구를 하길 바란다. 그리고 한글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한글을 올바르게 쓰도록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길 바란다.         
348    진독수 당적을 제명당한 후 감옥에서 지내던 나날들 댓글:  조회:5501  추천:1  2016-03-13
진독수 당적을 제명당한후 감옥에서 지내던 나날들   (번역)     1927년에 대혁명이 실패한후 진독수의 아들 진연년과 진교년이 련이어 국민당에 의해 살해되였다. 진연년과 진교년은 1922년 6월부터 1923년까지 선후로 프랑스와 구쏘련의 모스크바동방대학에 가서 공부했다. 진연년은 선후로 중공광동구당위 조직부장, 구당위 서기, 중공절강구당위 서기, 강소성당위 서기직을 력임했다. 1927년 6월 29일에 살해될 때 29살밖에 되지 않았다. 진교년은 선후로 중공북경지당위 조직부장, 북방구당위 조직부장, 중공호북성당위 서기, 중공중앙조직부 부장, 중공강소성당위 조직부장 등직을 력임했다. 1928년 1월 19일에 살해될 때 26살밖에 되지 않았다. 반년사이에 두 아들을 잃은 진독수(陈独秀)는 고통으로 온몸이 초췌해졌다. 진독수는 복청천에게 “제5차대표대회에서 나는 공격의 대상으로 되였습니다. 모두들 나를 우경기회주의, 투항주의라고 했는데 내가 누구에게 투항했다는 말입니까? 장개석이 연년과 교년을 모두 살해했는데 내가 내아들을 살해한 그에게 투항했다는 말입니까? 왕정위가 ‘혁명을 하려는 사람은 왼쪽으로 오고 혁명을 하지 않으려는 사람은 물러가시오’라고 높이 웨쳤는데 내가 그를 좌파라고 여겼을뿐만아니라 쓰딸린마저 그를 좌파라고 인정했습니다."라고 말했다. 1929년 11월 5일에 진독수는 당적을 제명당했다. 이 기간에 진독수는 점차 구쏘련의 트로쯔끼의 관점을 접수하기 시작했다. 공산국제의 독재전재에 대해 불만을 느낀 그는 간행물을 꾸리고 글을 써서 중국의 문제는 응당 중국인 자신이 연구하고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다. 진독수는 당적을 제명당했지만 신앙과 추구를 포기하지 않았으며 남경국민당정부의 암흑통치를 견결히 반대했다. 1932년 10월에 상해의 저택에서 국민당은 “민국위해죄”로 진독수를 붙잡아 감옥에 처넣었다. 장개석은 진독수를 “민국위해죄”로 법정에서 재판해야 한다고 지시했다. 진독수는 남경군사법정으로 압송되였다. 1933년 4월 14일에 강소성고등법원에서 진독수의 사건을 공개심리하기 시작했다. 법정에서는 진독수를 “민국위해죄”로 기소했다. 진독수는 높은 소리로 항변했다. “나는 국민당과 국민정부를 반대했다는것만 승인합니다. 국민을 해쳤다는것은 승인하지 않습니다. 정부는 국가가 아니기때문입니다. 손중산, 황흥 등은 만청정부를 뒤엎고 북양군벌을 타도했습니다. 정부를 타도하는것이 곧 반역죄라고 한다면 국민당은 두번이 반역죄를 지은것이 아니겠습니까?” 방청석에서는 한바탕 웃음소리가 터졌다. 진독수의 변호사는 그의 친구 장사소였다. 장사소는 경전중의 고사를 리용하여 장편대론을 하였고 진독수가 중국공산당에서 제명당한것은 국민당을 협조했기때문에 숙청을 당한것이라고 변호했다. 그 말을 들은 진독수는 즉시 성명을 발표했다. “장변호사의 발언은 완전히 그 개인의 뜻입니다. 그는 나에게 동의를 얻은적이 없습니다. 나의 정치주장은 장변호사가 말하는 변호의 근거로 될수 없습니다. 응당 나의 변명문의 견해를 근거로 해야 합니다.” 이번 신판에 대처하기 위해 진독수는 2월 2일에 변명문을 써놓았다. 이 변명문에는 “법과 리치로 따지면 국민당정부와 국가를 구별해야 한다, 국민당이야말로 국민에게 해를 끼치는 당이며 국민정부는 나라를 망치는 정부이다. 이런 정부가 빨리 무너지지 않으면 나라의 전도가 없을것이다”라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그는 자신이 이미 공산당을 떠났고 자신이 신앙하던 주의를 저버렸다는것을 승인하지 않았다. 진독수와 장사소의 변호는 도리가 있고 근거가 있었지만 법원에서는 당국의 뜻대로 진독수를 유기형 13년에 처하고 공민의 권리를 15년동안 박탈한다고 판결했다. 판결문랑독이 끝나자 진독수는 당장에서 큰소리로 항의했다. “나는 국민당을 반대했지 나라를 반대하지 않았소! 판결이 공정하지 못하니 나는 상소하겠소!” 그후 옛친구 백문위는 진독수의 아들 진송년을 보고 “너의 아버지는 나이 들어도 그 기개가 변하지 않아 영웅호걸이 되려고 하는구나. 많은 친구들이 도와주려고 해도 도와줄수가 없구나”하고 말했다. 당시 진독수는 이미 53세였다. 이것은 그의 일생에서 다섯번째의 감옥행이였다. 당사학자들은 진독수가 일생에서 감옥생활을 한 차수는 네번이란 설과 다섯반이란 설이 있다고 했다. 그런데 진장박이 믿는것은 다섯번이란 설이였다. 두가지 설의 쟁점은 1913년 7월에 구류된것을 체포로 셈에 넣을수 있는가 하는것이였다. 진독수는 안휘도독부 비서장직을 맡고있을 때 도독 백문위를 협조하여 원세개를 토벌하는 “2차혁명”에 참가했으나 백문위의 부하 호만태의 배반으로 실패했다. 진독수는 안휘성 무호를 지날 때 그곳에 주둔하고있던 공진붕에게 “랍치”당했다. 《진독수대전》의 저자 임건수는 “체포는 사법술어입니다. 이번에 진독수가 공진붕에게 묶이여 상객으로 끌려간것은 정권기관에서 체로한것과 성질이 다름니다. 때문에 나는 네번이란 설을 믿습니다”라고 말했다. 1934년에 진독수는 옥중에서 시 《금분루(金粉泪)》 56수를 썼다. 시중에는 비슷한 력사사실을 빌어 현실을 풍자하며 장개석을 위수로 한 4대가족의 암흑과 부패한 정치를 규탄했다. 1932년 10월 25일에 군정부장 하응흠이 와서 심문했다. 진독수에게서 시국에 대한 견해와 중국공산당에 대한 태도를 알아본후 하응흠은 정부와 합작하자고 권고했다. 그후 북경대학 교장 장몽린, 교육부 부부장 단석붕, 철도부장 고맹여 그리고 진공박, 서은증 등이 선후로 감옥에 찾아와 회개서만 쓰면 자유를 얻을수 있다고 설득했다. 그러나 모두 퇴박을 맞고 화를 내면서 돌아갔다. 1937년에 항일전쟁에 폭발했기에 국민당은 정치범을 석방했다. 5년동안 감옥살이를 한 진독수는 남경고등법원에 석방을 제기했다. 1937년 8월 21일에 사법원에서 진독수를 감형한다는 공문이 내려왔다. “범인은 이미 감옥에서 5년을 넘겨 징역을 받았는데 애국감정이 깊고 뉘우치는 태도가 좋았다… 범인 진독수의 원 징역기간을 감형하여 유기형 5년으로 집행하는것으로 관대하게 처리한다.” 진독수는 이 설법에 대해 몹시 화를 냈다. 출옥후 즉시 《신보》편집부에 편지를 써보냈다. “그들이 나를 ‘애국감정이 깊고 뉘우치는 태도가 좋았다’고 했는데 애국한다고 감히 뽐내지 못하겠고 뉘우친다는것은 뭘 가리키는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원래 무죄이기에 뉘우칠 대상이 없으며 억울하게 재판을 받았기에 뉘우침은 다른 사람에게 속해야 합니다.” 진독수가 출옥한후 옛친구 호적이 그에게 미국에 가서 “우공(寓公)”이 되라고 했고 장개석은 그에게 국민당 로동부장직을 맡아달라고 청했지만 그는 모두 거절했다. 국민당정부는 또 10만원을 투자하여 그에게 따로 “공산당”을 창건하고 국민정부에 참가하라고 청했지만 진독수는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다. 장개석은 국민당 중앙조직부장 진과부를 시켜 진독수에게 로동부장직을 주고 해마다 10만원의 경비와 국민참정회 다섯명의 명액을 주는것으로 유혹하라고 했다. 또 국민당중앙 비서장 주가화를 시켜 진독수에게 새로운 공산당을 조직해줄것을 요구했다. 그들의 요구를 들은 진독수는 화가 나서 말했다. “장개석은 나의 동지들을 죽였고 나의 두 아들도 죽였으며 나를 5년동안이나 감옥살이를 하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나는 그와 철천지원쑤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국공이 합작하여 공동의 원쑤 일본을 대적해야 하니깐 그와 합작하여 항일하는것을 나는 반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나더러 새로운 공산당을 조직하고 정부에 참가하라면 그것은 헛된 생각입니다!” 1937년의 7.7사변후에 국제국내형세는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진독수는 출옥후에 정세를 잘 살펴보고 트로쯔끼파의 극좌주장을 비판하고 트로쯔끼파와의 결렬을 선포함과 동시에 국공합작을 옹호하고 중국공산당의 항일강령을 옹호하며 적극적으로 전민족의 항전대오에 뛰여들었다. 진독수는 출옥할 때 일본군이 상해를 공격하고있었다. 상해의 트로쯔끼파가 진독수더러 상해에 가서 다시 “당조직”을 세우라고 했을 때 진독수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의 의견은 진독수외에 어떤 사람도 대표하지 않습니다. 나는 중국의 대다수 사람들을 위해 말할뿐이지 어떤 당파에게나 구속되지 않을것입니다.” 1937년 9월 9일에 진독수는 배를 타고 남경을 떠나 무한에 도착했다. 중국공산주의운동의 선구자이고 중국공산당창시인이며 중국공산당의 조기 최고령도자인 진독수는 1942년 5월 27일에 사천성 강진에서 사망되였다. 
347    송경령과 송미령은 왜서 모두 아이를 낳지 못했는가 댓글:  조회:7781  추천:0  2016-03-06
송경령과 송미령은 왜서 모두 아이를 낳지 못했는가   (번역)     송경령편   송경령이 아이를 낳지 못하게 된 원인을 말하려면 먼저 그녀가 손중산과 함께 험난한 혁명의 길을 걸어온 이야기부터 해야 한다. 1916년 3월에 송경령과 손중산이 함께 일본에서 귀국하여 상해로 돌아온후부터 근 10년동안 손중산은 계속 중국혁명을 령도했다. 그 기간에 상해에 있으면서 책을 집필하기도 하고 상해에 가서 정무를 돌보기도 했는데 그들 부부는 늘 함께 사업했다. 송경령의 탁월한 머리는 손중산의 두뇌를 더욱 풍부하게 하여 그의 인격을 더욱 위대하게 완성시켰다. 그들이 귀국한후 손중산은 광주로 가서 대원수로 되여 제1차호법운동을 령도했다. 군벌과 정객들의 배척을 받은 손중산은 화가 나서 대원수직을 사직했다. 그 시기에 손중산은 상해에 거주하면서 어찌할 방도가 하나도 없어 의기소침해지고 절망에 빠져있었다. 송경령은 생활상에서 손중산을 전심전력으로 보살피고 정신상에서 고무격려하며 손중산을 분발하게 했다. 손중산이 독서를 즐기는것을 잘 알고있는 송경령은 가치가 있는 서적과 신문잡지를 수집했으며 손중산을 도와 자료를 열람하고 저서를 편찬했다. 1918부터 1919년사이에 손중산은 문을 닫고 래방객을 사절하고 문장을 지으면서 현상태를 개변하려고 결심했다. 그 시기의 저작에는 모두 송경령의 심혈이 깃들어있었다. 그녀는 손중산을 도와 많은 초안을 작성했으며 영문번역도 했다. 1920년 11월 25일에 송경령은 군정직무를 회복한 손중산을 따라 상해를 떠나 광주로 다시 돌아갔다. 1921년 4월에 손중산은 광주에서 비상회의를 열고 중화민국정식정부를 성립하기로 결정하고 대통령부를 월수산 남록에 설치했다. 1921년 5월 5일에 손중산은 림시대통령에 취임했다. 그해 10월 24일에 손중산은 계림에 가서 북벌계획을 세웠다. 송경령은 뒤에서 적극적으로 손중산의 군사행동에 배합했으며 녀성들을 동원하여 출정군인위로회를 조직했다. 동시에 송경령은 각계인사들을 동원하여 거액의 위문경비를 모금했으며 위로대를 조직하여 전선에 가서 전투에 나설 전사들을 위문했다. 북벌군이 순리롭게 진군할 때 손중산이 친히 배양한 부하 진형명이 혁명을 배반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1922년 6월 16일 새벽 2시에 손중산은 진형명의 부대가 월수산을 공격하는데 정세가 위급하다는 보고를 받았다. 손중산은 깊은 잠이 든 송경령을 흔들어 깨우며 이 곳이 위험하니 함께 떠나자고 했다. 하지만 송경령은 위험에 직면했지만 두려워하지 않고 전반 국면을 돌보기 위해 떠나지 않으려고 결심했다. 그녀까지 떠나면 반란군에게 철군의도가 쉽게 발견될수 있기때문에 그녀는 남아서 손중산이 비밀리에 철수하는것을 엄호하려고 했다. 그리하여 송경령은 손중산을 보고 “중국에 내가 없어서는 되지만 당신이 없어서는 안돼요!”하고 말했다. 경호원들도 함께 떠나자고 권고했지만 송경령의 결심을 꺾지 못했다. 손중산은 하는수없이 50명의 위병들을 남아서 송경령과 대통령부를 지키라고 하고는 혼자서 떠났다. 손중산은 두번이나 반란군의 눈을 피해 황포의 영풍함에 올랐다. 그는 사전에 약속했던대로 례포 세방을 쏘아 안전하게 영풍함에 도착했다는 신호를 보냈다. 밤공기를 째며 울려퍼진 세방의 포소리는 월수청사에까지 들려왔다. 그 세방의 포소리를 들은 송경령과 위병들은 안도의 숨을 내쉬였다. 손중산이 떠난지 반시간이 되여 갑자기 포성이 울리더니 반란군들이 월수청사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반란군들이 산지를 점령하고 높은곳에서 좌우협공하면서 “손문을 죽여라, 손문을 죽여라”하며 미친듯이 웨쳐댔다. 사방이 어두워 적들을 볼수 없었기때문에 위병들은 잠시 반격을 하지 않았다. 날이 밝자 위병들은 보총과 기관총으로 반격하여 반란군의 공격을 30여차나 물리쳤다. 반란군들은 월수아빠트에 맹렬한 포격을 가했다. 목욕실이 포탄에 맞아 무너졌지만 위병들은 두려워하지 않고 용감히 싸웠다. 아침 8시가 되자 탄알이 모두 떨어졌다. 손중산이 이미 영풍함에 도착해 이 곳에 계속 남아있을 필요가 없었기때문에 송경령은 산아래로 내려가기로 결정했다. 두명의 위병과 요대장은 손경령을 호위하면서 천교를 따라 천천히 앞으로 걸어나갔다. 탄알이 두번이나 송경령의 귀밑으로 스쳐지났다. 그들이 방금 천교를 지났을 때 천교가 반란군의 포격에 붕괴되고 요대장도 탄알에 맞아 넘어졌다. 두 위병은 요대장을 대통령부의 후원으로 업고가서 상처를 감싸주었다. 그들이 대통령부에 도착했을 때 주위는 포화로 뒤덮여있었다. 송경령이 방금 대통령부에서 나왔을 때 건물의 지붕이 무너져버렸다. 아침 8시부터 오후 4시까지 송경령 등은 포화가 계속되는 지옥속에 로출되여있었다. 오후 4시에 광주위수구 사령 위방평은 부관을 대통령부에 파견하여 손중산의 위병들과 담판했다. 위병들은 첫째로 송경령의 안전을 보장해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그러나 부관은 송경령의 안전을 보장할수 없다고 대답했다. 그때 두층의 철문이 모두 열리면서 반란군들이 와아 소리를 지르며 밀려들었다. 혼란중에 송경령은 대문으로 달려나갔다. 급한중에 꾀가 생긴다고 손경령은 손에 들고있던 가방속의 물건을 땅바닥에 흩어지게 던져버렸다. 그녀는 반란군들이 서로 패물과 돈을 빼앗는 기회를 리용하여 도망쳤다. 송경령은 그 시기에 임신한 몸이였기때문에 행동이 불편했다. 대문을 빠져나온 송경령은 기지와 용감성으로 위기를 넘기면서 여러번이나 반란군을 피해 아는 사람의 집에 가서 휴식하다가 배를 타고 령남대학 교장 종영광의 저택으로 갔다. 그런데 과도한 피로때문에 송경령은 종영광의 저택에서 그만 류산을 하고말았다. 이것이 송경령의 일생에서 유일한 한번의 임신이였다. 그 한번의 류산때문에 송경령은 평생 아이를 낳을수 없었다. 이는 녀성에게 있어서 건강방면에서나 정신상에서 지대한 고통이 아닐수 없었다. 그러나 송경령은 필경 일세의 위인이였다. 그녀는 크나큰 도량과 진심어린 깊은 사랑을 가지고있었기에 그후의 혁명생애에서 수천수만의 어린이들을 위해 장기적으로 녀성아동복리사업에 종사했다. 아이들을 아끼고 사랑하는 송경령은 전 중국아동을 위해 모성애를 바쳤다.     송미령편   대만 《련합보》의 보도에 따르면 장위국은 대계도의 아들인데 장개석이 부양하여 친아들로 간주했다. 장위국은 형님의 압제를 받으며 마음속으로 늘 불괘하게 여기고있었다. 장위국을 키워준 요치성은 장위국에게 “너의 ‘아버지’는 어렸을 때 조심하지 않아 음낭이 난로에 데였는데 왕대부인이 아들의 화상을 치료하기 위해 돼지기름을 발라주었단다. 그런데 그 때문에 개에게 물려서 생육능력을 잃게 되였단다”라고 알려주었다. 그러니 장위국은 장개석의 친아들이 아니라는것이다. 그러나 장개석의 일기에 따르면 1927년 12월에 그와 송미령이 결혼한후 1928년에 송미령이 임신을 해서 그는 몹시 기뻐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자객이 뛰여드는 바람에 송미령이 놀라서 류산을 했다. 미국 스탠퍼드대학의 연구원 곽대군은 장개석의 일기에 따르면 그해 8월에 어떤 자객이 한주일내에 두번이나 장개석이 거처하는 아래층의 위병을 돈으로 매수하여 웃층으로 올라와 암살하려고 했다. 첫번째는 24일 야밤인데 자객이 위병을 돈으로 매수한후 웃층으로 올라가려다가 송미령을 놀라서 깨여나게 했다. 장개석은 25일의 일기에 “안해가 병으로 인공류산을 했다”고 썼다. 27일의 깊은 밤에 두명에게 돈으로 매수당한 위병이 침실에 침입하여 총을 쏘려다가 장개석이 돌아눕는 바람에 놀라서 달아났다. 그후 장개석은 주모자가 누구인지 조사했고 그일이 있은 후 송미령은 더는 생육을 하지 못했다. 송미령이 류산을 했다는 장개석일기의 기재는 요치성이 장위국에게 했던 말이 정확하지 않다는것을 말해주었을뿐만아니라 영문으로 저술된 《진결여회억록》에서 언급했던 “장개석이 생육을 할수 없는 원인이 젊었을 때 매독에 걸렸기때문이다”라는 설을 뒤엎어놓았다. 장개석의 일기에 따르면 장개석은 젊었을 때 욕정에 몸부림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장씨가문을 대표해 미리 장개석의 일기를 읽은 미국 스탠퍼드대학 후버연구소(斯坦福大学胡佛研究院)의 객원연구원 반방정은 “장개석은 송미령과 결혼한후 딴 사람으로 되였고 경건한 기독교신자로 되였다”고 말했다. 반방정은 또 “장위국은 젊었을 때 쏘련에 가서 류학하면서 12년동안 묵어있었는데 그 기간에 장개석이 쓴 일기를 보면 장개석이 장위국을 매우 좋아했다는것을 알수 있다. 그러나 송미령이 장개석에게 장위국의 출생에 대해 솔직히 말해달라고 요구했을 때 장개석은 도리여 대계도와의 의리를 지켜 대답하지 않았고 그 일로 송미령은 화가 나서 향항에 체류하면서 돌아오지 않았다”고 말했다.  
346    송미령이 사귀였던 남자들 댓글:  조회:6370  추천:2  2016-02-28
송미령이 사귀였던 남자들   (번역)     미국 웰즐리대학의 기록보관소에는 송미령의 처녀시절 서한들이 소중히 간직되여있다. 그 서한에 따르면 송미령이 장개석과 결혼하기전에 적지 않은 청혼자들이 있었으며 송미령자신도 좋아하던 남자들이 있었다.   이 서한들은 송미령이 미국의 대학에 다닐 때의 동창생이였던 밀스(米尔斯)에게 써보낸것이였다. 송미령보다 4살 년상인 밀스는 그녀의 일생에서 단짝 친구였다. 송미령의 처녀시절의 편지중에 그녀의 마음을 흔들어놓았다고 언급했던 남자들이 지금에 와서 누구인지 중요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들의 출현으로 하여 송미령은 사랑과 혼인에 대해 많은 사고를 할수 있었는데 그것은 그녀가 인생가치를 추구한 마음의 려정을 보여주었다.   1917년 6월에 송미령은 웰즐리대학을 졸업한후 오빠 송자문과 함께 귀국했다. 귀국하는 배우에서 송미령은 “Mr.Van Eivigh”이라는 “운명의 남자”를 만났는데 첫눈에 반해버렸다. 그 남자는 건축사였는데 아버지가 화란사람이고 어머니는 프랑스사람이였다. 배우에서 10여일동안 얘기를 나누면서 두 사람은 서로에게 호감을 가지게 되였다. 그가 송미령에게 청혼했을 때 19세의 송미령은 마음이 움직였다.   상해에 돌아온후 그녀의 혼인문제는 부모의 간섭을 받았다. 송미령의 아버지 송요여는 비록 미국류학을 다녀온 선교사였지만 어머니 예계진은 중국에서 나서 자란 녀성으로서 매우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기독교신자였다. 그들은 19살밖에 안되는 딸을 그렇게 어린 나이에 시집보내고싶지 않았고 더구나 외국인에게 시집을 보내고싶지 않았다. 부모의 반대때문에 송미령은 정서가 저락되여있었고 혼인문제에서 매우 비관적이였다.   1917년 8월 16일에 밀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송미령은 이렇게 썼다. “나는 집에만 있고싶었고 결혼하고도 싶지 않았어요. 특히 제가 전번 편지에 언급했던 배우에서 만난 그 운명의 남자하고 결혼하고 싶지 않았어요. 내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랑 결혼할수 없게 되였지만 그렇다고 다른 남자들과도 결혼하고싶지 않아요. 명성과 금전을 위해서라면 몰라도…”   부모의 반대때문에 반년도 지나지 않아서 그 남자와의 련애가 끝나버렸다. 그때문에 부모와 크게 싸운 송미령은 한동안 힘든 나날을 보냈다. 갓 귀국한 송미령은 자신에 대한 부모의 “관심”에 적응되지 못했다. 그녀는 토라지는 방식으로 자신의 불만을 표시했다. 사실 미국에서 공부할 때 송미령은 한 남학생에게 호감을 가진 적이 있었지만 대학 2학년에 올라간후에는 더는 그 남학생을 좋아하지 않았다. 10년간의 류학생활을 하면서 송미령은 독립하는 습관을 가지게 되였다.    귀국후 며칠이 안되여 오래전부터 알고있던 이성친구 HK와 양선생이 북경에서 송미령을 찾아왔다. HK군은 2년동안 송미령을 추구했다. 두 사람은 미국에서 공부할 때 언약을 한적이 있었고 송미령도 상대방을 좋아한적이 있었다. 그러나 귀국후 송미령은 그와 헤여졌다.   1918년 1월말에 HK는 또 북경에서 송미령을 보러 상해로 왔다. 송미령의 어머니는 딸이 그에게  시집가는것을 바라지 않았다. 몇번 대면한후 송미령은 다시 그와 만나는것을 거절했으며 HK가 있을 가능성이 있는 모든 야회에 출석하는것을 피했다. 송미령이 랭대했지만 HK는 포기하지 않았다.   송미령을 접근하기 위해 그는 송씨가문에서 례배를 드리는 교회당으로 다니기 시작했다. 그가 검질기게 달라붙자 송미령은 화가 나서 교회당으로 다니지 않았다. 후에 두 사람은 만나도 서로 말도 걸지 않았다. 이렇게 친구가 낯선 사람으로 변해버렸다. HK의 끈질긴 애정공세는 효과를 보지 못했을뿐만아니라 오히려 송미령의 반감을 야기시켰다. 그때로부터 송미령의 편지에는 그녀를 골치아프게 한 HK가 다시는 언급되지 않았다.   HK를 거절한 시기인 1918년에 두 남자가 선후로 송미령의 마음을 흔들어놓았다. 그중 한 사람은 미국류학을 다녀왔지만 이미 결혼한 남자였다. 송미령은 자신이 유부남을 사랑하게 될줄은 생각도 못했다. 1918년 4월에 송미령은 중병에 걸린 아버지를 돌보는 한편 유부남을 사랑하면서 그와 결혼할수 없는 현실이 고통스러웠다.   1918년 5월초에 송미령의 아버지 송요여가 신장병으로 사망되여 온집식구는 한없는 슬픔에 잠겨있었다. 그 기간에 송미령은 혼인에 대해 리성적인 사고를 가지고있었다. 그녀는 녀자는 꼭 결혼해야 한다고 여겼지만 의연히 리성과 정감, 리상가 현실사이에서 방황하고있었다. 어떤 때 그녀는 모든것을 포기하고 그 기혼남자한테 시집을 가려고 시도했으며 심지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편벽한 곳으로 가서 원시생활을 하려고도 생각했다.   또 어떤 때는 그 나이 많고 부유한 남자한테 시집을 가서 자신의 리상을 실현하려고도 했다. 물질생활의 풍족과 혼인문제에서의 끊임없는 흔들림이 송미령으로 하여금 무료한 느낌을 받게 했다. 자신의 존재가치와 의의를 증명하기 위해 1918년부터 송미령은 더욱 실제적 의의가 있는 사회사업을 하려고 노력했다.   명문가문에서 태여나 조건이 우월하고 지식과 미모를 겸비한 그녀를 따르는 남자들이 많은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였다. 송미령이 우수한 남자들을 하나하나 거절하는것을 본 사람들은 그녀가 임자 있는 꽃이 아닐가고 의심했다. 요언은 그렇게 생겨났다. 1919년 7월 14일에 송미령이 밀스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있었다.   “상해라는 이 도시에서는 가는 곳마다 내가 이미 약혼했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게다가 소문마다 내가 약혼했다는 상대는 다른 남자였습니다. 친구들도 모두 내가 약혼한 남자가 도대체 어느 남자인지 몰랐습니다. 더욱 우스운것은 나와 약혼했다고 소문난 그 남자들은 누구도 소문을 부정하거나 승인하지 않았습니다.”   송미령의 어머니 예계진은 딸에게 좋지 않은 소문이 돌자 그해 6월부터 딸이 어떤 남자친구도 만나지 못하게 했다. 2개월이 지나자 요언은 잠잠해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미국에서 온 몇몇 옛친구들이 송미령이 약혼하지 않았다는것을 알고 그녀에게 애정공세를 들이대며 귀찮게 굴었다. 그때문에 그녀는 매우 괴로왔다. 그녀는 그 남자들이 매우 좋은 친구라고 여겨 단지 친구로 지내기 싶었을뿐이지 그들과 우정을 초월한 사이로 엮이고싶지 않았다.   이때부터 1921까지 송미령이 밀스에게 써보낸 편지는 처음 2년동안보다 적었으며 련애문제에 대해서도 매우 적게 언급했다. 다만 1921년 5월 25일에 써보낸 편지만은 례외였다. 그번 편지에서 송미령은 친구에게 버니라고 부르는 남성에 대해 언급했다.   송미령이 버니와 련애한다는 말을 들은 부모는 화를 내면서 견결히 반대했다. 버니가 외국인이였기때문이다. 송미령은 버니를 특별히 좋아했다. 전에 만났던 모든 남자들보다 더 좋아했다. 심지어 최근에 약혼까지 한 그 사람보다도 더 좋아했다. 하지만 송미령은 알고있었다. 버니와의 관계는 우정을 초월한 사랑으로 발전할수 없다는것을…   송미령은 편지에 이렇게 썼다. “우리 가정은 보수적이여서 가족의 순결한 혈통을 유지해야 된다고 엄격히 규정했기때문에 죽어도 내가 외국인에게 시집가는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나도 버니와는 불가능하다는것을 알고 단념했습니다.”   송미령은 버니와의 련애사실을 말하면서 밀스에게 현재 다른 한 남자의 사랑을 받아들여야 할지 말아야 할지 진지하게 생각해보는중이라고 했다. 바로 그녀가 최근에 약혼한 그 남자였다.   이 편지는 송미령이 처녀시절에 보낸 편지중 애정문제에 대해 언급한 마지막 한통의 편지였다. 자신이 특별히 좋아한다고 했던 버지는 부모의 강련한 반대때문에 포기했던것이다. 그 진지하게 고려중이라는 우수한 남자의 사랑을 송미령이 받아들였는지는 지금까지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다.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한후 송미령은 오래동안 사랑에 대한 동경과 갈망을 가지고있었고 혼인에 대해 리성적으로 깊이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돈이 있고 능력이 있고 신분이 있고 교양이 있는 많은 남자들의 청혼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할 용기가 없었다. 처첩이 있는 군인출신의 정치명인 장개석이 나타날 때까지…   1927년은 바로 송미령과 장개석이 사랑하고 결혼을 한 중요한 한해였다. 송미령은 밀스에게 한통의 편지도 써보내지 않았다. 장개석과 결혼한후인 1928년 1월에 송미령은 남경에서 “장개석의 부인”의 명의로 밀스에게 한통의 편지를 써보냈다. 편지에서 그녀는 결혼정황과 혼인에 대한 그들부부의 부동한 견해에 대해 언급했다. 비록 신혼시절에 의견차이가 있었고 결혼생활에서 갈등이 있었지만 그런 의견차이와 갈등은 그녀와 장개석의 근 50년에 달하는 혼인생활에 조금마한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    
345    환경오염과 정신오염 댓글:  조회:4670  추천:6  2016-02-25
환경오염과 정신오염   김희수     환경오염은 누가 조성하는가? 자연재해거나 사람이다. 자연재해는 피할수 없는 자연현상이기에 사람의 힘으로 막을수 없다. 하지만 인간이 인위적으로 일으킨 환경오염은 얼마든지 방지하고 줄이거나 피할수 있는것이다. 그런데 인간이 인위적으로 조성한 환경오염을 방치하면 기후변화, 지구온난화 등을 불러와 자연재해의 원인이 되는 악순환을 가져오게 된다.   인간은 왜서 환경을 오염시키는가? 눈앞의 리익이나 개인리익 또는 국부의 리익을 위해서이다. 개개인으로 놓고 말할 때 쓰레기를 아무데나 마구 버리거나 가래, 똥, 오줌 등 배설을 아무데나 하거나(혹은 아이, 애완견 등에 배설시키거나) 등의 행위는 일시적인 편리와 게으름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이 만들어낸 쓰레기를 들고가서 쓰레기통에 치우려면 힘이 들거나 시끄럽다고 생각하기에 그 자리에 내버려둔채 엉덩이를 툭툭 털고 제몸만 깨끗하게 건사하고 떠나버린다. 또 음식물을 먹으며 길을 가다가도 찌꺼기를 길가나 강에 마구 버린다. 내 자신만 편리하면 된다고 생각하기때문이다.   한개 기업의 경우 자기 기업의 경제리익만을 위해 주변환경을 마구 오염시키면서 제품을 대량 생산한다. 원래는 환경오염방지대책을 대야 하지만 그러려면 경제리익이 적어지고 제품생산이 늦어질수밖에 없기때문에 주변환경이야 오염되든 말든 관계하지 않고 경제리익만 추구한다.   한개 나라의 경우 자기 나라만의 경제발전, 군사력강화 등을 위해 매연, 악취, 소음, 진동, 오수, 오물, 페기물, 방사능물질 등을 배출해 환경을 마구 오염시키면서 대량 생산을 추진한다. 미국, 일본 등 발달한 나라들은 환경오염을 눈감아주는 대가로 경제발전을 이끌어왔다. 이들 나라들은 먼제 환경을 오염시켜 놓고 나중에 환경오염을 방지한다는 말도 안되는 소리를 줴치며 이 지구를 자기만의것인듯 마구 오염시키 놓았다. 이제 발전도상국(개발도상국)들이 발달한 나라들이 그랬던것처럼 경제발전을 위해 환경을 오염시키려고 한다.   이런 오염배출은 점점 더 넓은 지역으로 확대된다. 한개 도시에서 다른 도시로, 도시에서 농촌으로, 한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확대된다. 이런것은 모두 눈앞의 리익만을 생각하기때문이다. 수년이나 수십년동안에는 돌아오는 리익이 많다. 이것이 눈앞의 리익이다. 하지만 그로 인한 환경오염으로 인간의 건강과 생존에 엄중한 장애가 나타난다. 또한 100년후 혹은 몇백년후에 지구는 엄중하게 병들어가게 된다. 장원한 리익, 후대들의 리익을 위한다면 국부의 리익을 희생하더라도 환경오염부터 줄여야 한다. 환경오염원인이 되는 생산 소비는 하지 말고 모든것을 친환경으로 일체화해야 한다.   물론 인류가 생존하고 발전하려면 환경을 오염시키는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하지만 환경을 적게 오염시키는것은 가능한 일이다. 또 환경오염을 방지하고 줄일수 있다. 환경을 오염시키는것도 정도가 있다. 지금 인류는 해도 너무 한다. 심하게 오염시킨다. 엄중하게 오염시킨다. 이렇게 우리가 사는 환경을 마구 오염시키면 결국 우리에게 피해가 돌아온다. 간단하게 스모그만 봐도 알수 있다. 이보다 더 엄중한 피해는 많고도 많다. 아직 눈앞에 다가오지 않은, 앞으로 다가올 피해도 많고 심각하다.   물론 사람들은 이런 도리를 너무 잘 알고있다. 그런데 왜 환경을 오염시키는가? 이는 인간의 정신이 오염되였기때문이다. 정신이 오염된 사람은 자신이 사는 지구를 사랑하지 않기에 환경을 마구 오염시키는것이다. 정신이 오염되지 않은 사람은 절대 환경을 오염시키지 않는다. 환경을 오염시키는것은 결국 자멸의 길이라는것을 알고 있기때문이다.   정신이 오염된 사람들은 내 집만을 깨끗이 청소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실외도 내가 호흡하고 살아가는 장소이고 내가 먹고 입는것을 공급받는 장소인데도 그걸 모른다. 더 크게는 지구도 우리가 살고있는 하나의 집인데도 그걸 모른다. 혹자는 그런걸 누가 몰라? 라고 반박할수도 있다. 알면서도 범하는건 모르는것보다 더 엄중하다. 이런 사람들은 정신이 더 엄중하게 오염되였다는것을 말해준다.   물론 이 세상에 정신이 전혀 오염되지 않은 사람은 없을것이다. 오염정도가 적거나 많은 구별이 있을뿐. 정신이 덜 오염되였거나 조금 오염된 사람들은 그래도 지구 전체를 내집으로 생각할것이다. 정신이 많이 오염되였거나 엄중하게 오염된 사람들은 내집밖의것은 모두 남의 집이라고 생각할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정신세척제로 깨끗하게 빡빡 때밀이를 해서 온전한 정신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렇게 정신이 맑고 깨끗해진 사람은 더는 환경을 오염시키지 않을것이다. 믿어도 된다.      
344    등소평과 화국봉의 아슬아슬한 쟁론 댓글:  조회:7017  추천:1  2016-02-20
등소평과 화국봉의 아슬아슬한 쟁론   (번역)     등소평이 갓 복직했을 때는 의연히 화국봉이 중국의 방향을 장악하고있었다. 국정방침은 어떠한 실질적인 변화도 없었다. 계급투쟁은 의연히 “기본고리”였고 “두가지 무릇”은 의연히 주류사조였다. 또 “세세대대로 모택동사상의 위대한 기치를 높이 추켜들자”는 화국봉의 가르침이 전국에 전해지고있던 시기였다. 등소평은 앞으로 나가려고 했지만 과거에 대해 설명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는 중국을 이끌고 미래를 향해 달릴 때 무거운 과거의 짐을 지고갈수 없었다. 과거에 대해 똑똑히 말하지 않으면 앞으로 나갈수 없었다. 이는 의식형태의 문제이면서도 권력이 누구에게 속하는가 하는 문제이기도 했다. 전자의 문제: 모택동이 아직도 중국인의 도사로 될수 있는가? 만약 될수 있다고 하면 모택동에게 여러번이나 비판을 받고 두번이나 타도되였던 등소평이 무슨 리유로 다시 정치에 나설수 있겠는가? 만약 될수 없다면 정신지주가 없는 중국이 미래로 향해 나갈 힘이 있겠는가? 후자의 문제: 문화대혁명이 남긴 지금의 권력체계이다. 이것을 절대로 계속 이후 중국의 원칙근거로 할수 없었다. 그러나 이 문제는 화국봉과 관련되여있었다. “두가지 무릇”에 대한 비판은 화국봉과 련계되지 않게 할수 없겠는가? 만약 화국봉과 련계된다면 또 허락을 얻을수 있겠는가? 중국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은 리해할수 없을것이다. 지금의 중국사회 가치관념으로 가늠해보아도 어리둥절해할것이다. 그러나 당시는 1978년 가을이였고 이 문제는 확실히 중국의 전반적인 대세중의 결정적인 부분이였다. “두자지 무릇”은 모택동의 후계자와 정치유산계승자인 화국봉이 형세를 안정시키고 자신의 정치지위를 든든히 하기 위해 제출한 주요한 정치방침이였다. “두가지 무릇”은 “무릇 모주석께서 결정한 결책에 대해 우리는 반드시 모두 옹호해야 하며 무릇 모주석께서 내린 지시에 대해 우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없이 따라야 한다”는것이다. 북경에서 나타난 이 쟁론은 1977년 봄부터 시작되였지만 멈추지 않았다. “두가지 무릇”을 견지하는 진영의 사람들은 패배중에 있었고 반대진영의 사람들은 점차 강대해지고있었다. 마치 한가닥의 “화근”이 1978년 여름에 닥쳐와 중남해의 높은 담장을 뚫고 나가 전국을 휩쓸은것 같았다. 그런데 가장 먼저 진동을 받은것은 머나먼 지방인 대서남이였다. 6월 25일에 감숙성당위 제1서기 송평은 리론학자들을 모아놓고 “용기를 내여 진리를 추구하라”고 했고 또 “이것은 금지구역이고 저것도 금지구역이라고 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두 주일이 지나서 이 “역류”는 다른 한 머나먼 지방인 동북으로 휩쓸어갔다. 흑룡강성당위 제1서기 양역신은 부하들에게 “사상을 해방”하라고 하면서 무슨 말이나 다 할수 있고 약점을 잡지 말고 모자를 씌우지 말며 몽둥이로 때리지 말라고 당부했다. 또 두 주일이 지났을 때 료녕성당위제1서기 임중이는 더욱 단호하게 말했다. “실천은 진리를 검증하는 유일한 표준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현재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아 바른 상태로 되돌릴수 있는 최선의 선택입니다.” 그후 서북방향에서 또 호응했다. 신강위글족자치구당위제1서기 왕봉은 이렇게 말했다. “진리의 표준은 오직 사회실천뿐입니다.” 그는 또 “이 문제를 승인하는가 안하는가 하는 문제는 하나의 리론문제일뿐만아니라 우리 당과 국가의 사상로선, 정치로선과 관계되는 문제입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이 “역류”는 남쪽으로 흘러내려갔다. 그해 9월 상순에 복건성당위서기 료지고는 “과학리론은 객관적법칙을 증명하는 론거이지 진리를 검험하는 표준이 될수없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또 “이는 당과 국가의 전도, 운명과 관계되는 큰 문제입니다”라고 말했다. 이 말은 확실히 고의로 과장하여 듣는 사람을 놀라게 하려고 한 말이 아니였다. 적어도 등소평이 보기에는 그랬다. 그러나 등소평은 이 몇몇 성당위서기들이 나서서 말했다고 해서 일이 다 된것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그는 이 쟁론을 전국에 확대하여 “무릇파”가 부끄러워 얼굴을 들수 없게 해야 한다고 여겼다. 그래야만이 자신의 리론도 새 시대의 주류로 될것이고 진일보 행동하면서 가는곳마다 “불을 지필수” 있다고 여겼다. 등소평은 17개월전부터 개혁의 불을 지피기 시작했다. 1977년 4월 10일에 그는 “완전히 정확하게 모택동사상을 리해해야 한다”고 말했다. 1977년 5월 24일에는 또 “두가지 무릇”은 안된다고 말했고 1978년 5월 30일에는 또 “지금 실천은 진리를 검증하는 표준이란것마저 문제가 되고있습니다. 그야말로 해괴한 일입니다”라고 말했으며 1978년 6월 2일에는 “어떤 사람들은 누가 실사구시를 견지하고 실제로부터 출발하여 리론과 실천을 결합하면 천추에 용납못할 큰 죄악이라도 지은줄로 생각합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관점은 사실상 맑스, 레닌, 모택동의 본래 말대로 따라하고 그대로 전하고 그대로 적용하면 된다고 주장하는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맑스레닌주의, 모택동사상을 위반하고 중앙정신을 위반한것이라고 여깁니다. 그들이 제기한 문제는 작은 문제가 아니라 맑스주의, 모택동사상을 어떻게 보는가에 관계되는 문제입니다.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아 정상으로 되돌리고 정신적 속박에서 벗어나려면 우리의 사상을 크게 해방해야 합니다.” 1978년 7월 22일에 등소평은 “론쟁은 피면할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나서서 론쟁하는 근본원인은 ‘두가지 무릇’입니다”하고 말했다. 등소평의 말은 모두 북경의 높은 담벽안에 한 말이였다. 지금 그에게 수요되는것은 중남해에서 나와서 이 옛도시밖으로 나가는것이였다. 그는 황금의 가을에 전문렬차에 올라 북방으로 달려갔다. 1978년 9월 14일 새벽에 등소평일행은 길림성 도뢰소역에 도착했다. 흑룡강성당위서기 리력안이 플래트홈에서 기다리고있었다. 기차가 잠간 멎은후 등소평은 흑룡강성 대경유전으로 곧추 달리라고 요구했다. 이어 또 멈추지 않고 할빈까지 달려갔다. 그는 마음속에 할말이 많았다. 그는 리력안과 물질장려에 대해 담론했고 대경시당위서기 진렬민과 외국설비를 도입할 문제에 대해 담론했다. 9월 16일에 등소평은 길림성 장춘시에 도착했다. 남호호텔에 들어간후 길림성당위서기 왕은무가 강화를 요청했을 때 그는 다시는 말을 에두르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지금 우리앞에 놓여있는 문제는 두가지입니다. 첫째문제는 리론과 실천의 련계인데 모든것은 실천으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지금 사람의 사상이 경직되여 무엇이나 모두 우에서 말한것이면 그대로 합니다. 화주석이나 그 부주석이 말한것이면 그대로 하지요. 자기절로 사고하려고도 하지 않고 진정으로 소화하려고도 하지 않지요.” 이 말은 직방적일뿐만아니라 신랄하고 예리해서 현장에 있는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고 흥분하게 했다. 그런데 생각밖에도 등소평이 더욱 예리하게 말했다. “두번째문에는 어떻게 모택동의 위대한 기치를 높이 받들겠는가 하는것입니다. 이는 큰 문제입니다. 여러분들도 과거에 ‘두가지 무릇’에 대해 의론했지요? 무릇 모주석께서 서명하고 말씀한것은 움직이지 못하고 무릇 모주석께서 해놓은것은 무두 움직이지 못한다고 했는데 이것이 모주석의 위대한 기치를 높이 든것이란 말입니까? 아닙니다. 잘못하면 모주석의 명성을 손상시키게 됩니다. 모주석의 가장 위대한 점은 실사구시입니다. 맑스와 레닌은 종래로 농촌으로부터 도시를 포위해야 한다고 말한적이 없습니다. 당시 세계상에도 그런 선례는 없었습니다. 모주석의 위대한 점은 무엇입니까? 바로 중국의 구체적인 조건에 근거하여 혁명의 구체적인 도로를 밝혀준것입니다. 만약 실사구시의 기본사상이 없었다면 중국의 실정에 맞는 이런 길을 가르켜줄수 있었겠습니까? 중국혁명을 승리에로 이끌수 있었겠습니까?” 이 말을 마친후 등소평은 장춘을 떠나 심양으로 갔다. 이번에 등소평은 “두가지 무릇”이 진정한 모택동사상이 아니라는것을 말했을뿐만아니라 “두가지 무릇”이 이미 중국의 백성을 편안히 생활수 없게 했다는것을 암시했다. 등소평은 이렇게 말했다. “모주석께서 우리에게 수립해준 실사구시의 우량한 전통과 작풍을 회복하지 않으면 우리의 네가지 현대화는 희망이 없습니다. 우리는 너무 가난하고 너무 뒤떨어졌는데 솔직하게 말해서 인민들에게 미안합니다. 우리의 인민은 너무 좋습니다. 참을성도 이제는 한계에 달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반드시 생산력을 발전시켜야 하며 인민의 생활조건을 개선해야 합니다.” 그의 이런 말은 앞에 있는 고급관원들을 들으라고 한 말이였다. 그러나 분명히 백성들에게는 더욱 듣기 좋은 말이였다. 사실 등소평은 전국에서 모두 일떠나 그에게 호응할것을 바라고있었다.     
343    참 예쁜 꽃지바다 왜 하필 해수욕장이라고 해요? 댓글:  조회:3579  추천:0  2016-02-20
  참 예쁜 꽃지바다, 왜 하필 해수욕장이라고 해요? [강상헌의 바른말 옳은글] 바다가 소금물 샤워장인가       강상헌 언론인 · (사)우리글진흥원 원장     영국 시인 존 메이스필드(1878~1967)의 시집 ‘Salt-Water Ballads’(소금물의 노래). 영문학사(史)에도 오른 이름이지만, 우리 소월 시집처럼 대중적으로도 인기 있다. 그 소금물은 바다다. 멋없다고 씨익 웃고 그냥 지나칠 일 아니다. 그의 바다 향한 열병(熱病)의 시 ‘Sea Fever[씨 피버]'는 대박이었다. 첫머리만 외워도 ‘아!’하고 학창시절 그리울 분들 많으리.   I must go down to the seas again, to the lonely sea and the sky... (아무래도 나는 다시 바다로 가야겠네, 그 외로운 바다와 하늘로...)   우리에게 바다의 이름은 ‘바닷물 샤워장’의 이미지와 겹친다. 해수욕장이라는 이름 때문이다. 그 이름이 어떻게 생겨나, 지금껏 우리 아름다운 해변의 대표명칭으로 쓰이고 있는지 알아내지는 못했다. 그러나 바다 떠올릴 때마다 안타까웠다. 우리 말글 시리즈 2주년 100회 맞아 여러분께 예쁜 선물 드리고 싶은 마음으로 선택한 주제, ‘바다의 제 이름’이다. 10년은 묵힌 생각, 답을 찾진 못했다. 다행히 어진 이들의 비슷한 마음, 여러 생각을 얻을 수 있었다. 따로 아름다운 이름 붙인 지자체도 있어 마음 설레기도 했다. 이런 지혜, 잘 모으면 더 좋은 결실 가능할 수도 있다는 희망을 품고 있다. 의견 주시면 계속 연구할 터, 고견 사양하지 말고 가르쳐 주시기 바란다. 이 글은 이를테면 ‘중간발표’ 격이다.   해수욕장(海水浴場) 이름의 뜻은 ‘바닷물에 몸을 씻는 곳’이다. 목욕(沐浴)의 욕 자(字)다. 목욕을 사전은 ‘머리를 감으며 온몸을 씻는 일’이라 푼다. 좀 이상하지 않은가? 머리 감는 것을 왜 따로 설명했을까? 이유는 속뜻 때문이다. 목(沐)은 머리를 감는 것, 욕(浴)은 몸을 씻는 것이다. 둘 다 그 동작이나 비슷한 이미지의 그림에서 오래 전에 생겨났다.   시인이 열병을 앓았던 그 바다는 목욕탕이 아니다. 우리가 그리워하는 바다도 그렇다. 목욕탕 욕조에서처럼 물 텀벙거리며 노는 좋은 뜻 아니냐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바다가 여름에만 물장구치며 노는 데인가? 하긴 오래 전에는 맥주를 여름에만 얼음 채워(히야신가 뭔가 해서) 마시는 것으로 알았다. 바다가 세상 변화에 걸맞는 제 이름을 얻지 못한 것이다.   그렇게 불러 왔기 때문에 ‘해수욕장’ 낱말에 그 아름다운, 즐거운, 신비로운, 생명력 넘치는, 외로운, 화려한, 때로 광포(狂暴)한 바다의 여러 압도적인 이미지가 담겨 있으리라고 지레 생각해 온 것이다. 그러나 뜻 따지니 허망하지 않은가? 바닷물목욕탕이라, 해수탕? 저 바다가? 이제 묻어두어도 될 이름 아닌가, 아쉬우면 괄호에 넣어 새 이름과 함께 쓰던지.   가장 마음에 두고 있는 새 이름은 그냥 ‘바다’다. 땅 이름 뒤에 붙이면 된다. 품도 덜 들고, 이미지도 간결하며, 날 것 그대로의 싱싱한 아름다움이 뚝뚝 묻어 떨어진다. 가마미바다 해운대바다 경포대바다 대천바다 몽돌바다 김녕성세기바다... 꽃지바닷가처럼 ‘바닷가’도 더할 나위 없이 좋지만, 앞에 지명(地名) 붙으면 오히려 거추장스런 느낌 든다.   한자(漢字)라야 권위서고 ‘있어 보인다’고 생각한다면, 해변(海邊) 해안(海岸)을 붙이면 된다. 해수욕장보다 부드럽다. 더 세련된 듯한 해빈(海濱)도 있다. 바닷가라는 비슷한 뜻이다. 청포대해변 남해해안 함덕해빈... 이호태우해변은 제주도 옛 이호해수욕장에 전통배 태우 뜻 합쳐 지자체가 붙인 멋진 이름, 박수 보내고 싶다. ‘이호태우바다’가 더 멋지지 않은가?   고유어로 즐거운 곳이라는 바다의 이미지를 덧붙이고 싶다면, ‘바다뜰’ 또는 ‘바다뜨락’은 어떨까? 하조대바다뜰 송정바다뜨락... 처음에야 좀 설은 듯 하겠지만 즐겨 부르면 좋은 이름 되는 법이다. 즐겁게 노는 모습은 ‘멱’ 또는 ‘미역’이란 낱말로 덧붙여도 좋을 것 같다.   육지가 바다 쪽으로 튀어나온 지형(地形)인 ‘곶(串)’의 곶지가 변해 ‘꽃지’로 탈바꿈했다고 한다. 충남 태안반도의 그 바다, 꽃 이름자처럼 아름다운 곳이다. 꽃지해수욕장보다는 꽃지해변 꽃지바다뜨락이 더 낫지 않을까. ‘꽃지바다’ 이름을 지도에서 볼 수 있게 된다면 얼마나 기쁠까. 이름(말)은 그 모습(본디)과 어울려야 좋다. 가치를 담아야 한다.   토/막/새/김 남북대화 초기, 평양에 간 방송사 카메라가 물었다. “해수욕 자주 가세요?” 기억 선명하진 않지만, 중년여성 그 겨레 “날마다 가디요.”라 했던가. 신문방송이 난리가 났다. 해수욕도 모르더라고. 또, 채소도 모르는지 채소를 ‘남새’라 하더라고 했다. 비웃는 것이었다. ‘바닷물 멱(미역)’이라 말하던 그 사람들, 요즘 연속극 보고 서울물 들어 다 ‘해수욕’ 안다. 남새는 고유어 표준말이다. 채소(菜蔬)라야 맞아? 기자들이 그랬다. 부끄러웠다. 아직 못 잊는다. 북한 다녀와 감옥살이도 했던 황석영은 1993년 책 ‘사람이 살고 있었네’를 썼다.    
342    소털같이 많은 시간 댓글:  조회:4941  추천:6  2016-02-18
소털같이 많은 시간   김희수     어릴 때에는 정말 시간이 소털같이 많을것 같았고 사람에게 그런 시간은 영원할것 같았다. 그런데 굼벵이처럼 느리게만 가던 시간이 언제부터인가는 갑자기 기차처럼 빨라져 1년, 2년이 순식간에 지나가고 또 비행기처럼 빨라져 10년, 20년이 눈깜짝할 사이에 가버렸다.   이제는 살아온 날보다 앞으로 살아갈 날이 더 적어진다. 세월이 무정하구나. 너울쓰고 시집을 온지 어제같은데 오늘은 백발의 할머니로 되였네, 라고 하던 동네 할머니는 순식간에 화장터의 재로 되여 사라져버렸다. “계급투쟁”을 웨치던 미치광이도 저 세상으로 가버렸고 눈이 사탕가루라고 하던 익살군도 저 세상 사람이 되였다. 그래서 세월이 류수같고 화살같다는 말이 나왔나 보다.   백세시대라고 할 때 인간에게 시간이 정말 소털같이 많을것 같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백세까지 산다고 해도 실제 인간이 사용할수 있는 시간은 백년인것이 아니다. 인간은 잠을 자는데 인생의 3분의 1을 허비한다. 게다가 인간은 아깝게 허비하는 시간이 너무 많다. 세수하고 밥을 먹고 화장실에 가서 일보는데 시간을 허비해야 한다. 목욕하고 리발하는데도 시간을 할애해야 한다. 또 남자는 수염을 깎는데, 녀자는 화장을 하는데 시간을 써야 한다.   이렇게 계산하면 백년을 산다고 해도 인간에게 시간은 기껏해야 몇십년밖에 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도 우리는 시간이 소털같이 많다고 여기면서 여유있게 살아왔다.   우리 어릴 때에는 시간이 너무 많아서 걱정이였다. 수업시간이 끝나면 숙제도 얼마 안되고 과외도 따로 없었기에 밖에 나가서 아이들과 함께 놀기만 했다. 어찌나 긴지 영원히 끝날것 같지 않았던 지루한 방학기간에도 무슨 놀음을 하며 시간을 보내면 좋을지 몰라 딱지치기, 제기차기, 숨박곡질, 유리알굴리기, 살구씨먹기, 땅따먹기, 돌차기, 실뜨기, 땅에 놀이판을 그리고 편을 나누어 노는 ㄹ자놀이(집뺏기), 8자놀이(진지점령하기), 전쟁놀이(녀자애들은 주로 공기놀이, 고무줄놀이) 등을 번갈아놀았다. 그렇게 시간을 충족하게 보내면서 자랐다.   그런데 지금의 아이들은 놀새없이 바삐 보내면서 한가한 시간이 없는것 같다. 잠을 자고 밥을 먹고 배설하는 시간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동안 아이들은 수업에 시달리고 또 영어, 피아노, 미술, 서법, 작문 등 과외에 목매여 눈코뜰새없이 바삐 보낸다. 게다가 틈만 있으면 휴대폰게임에 빠져 정신이 없다보니 여유가 없고 한가한 시간이 없다. 정말로 시간을 빈틈없이 쓴다.   하지만 결국 이것도 잘하지 못하고 저것도 잘하지 못한다. 어느 하나도 뾰족하게 잘 하는게 없다. 어느 방면에서도 두각을 나타내지 못한다. 어른들도 마찬가지이다. 늘 바쁘다고 하고 항상 시간이 모자란다고 투덜대기만 한다. 매일 시간에 쫓기면서 이런 일 저런 일로 바삐 내보지만 결국 이것도 저것도 잘 해놓은 일이 없는 경우가 많다.   학교에서 공부하는것도 대학에 가는것도 결국 밥을 먹는 재간을 배우기 위해서이다. 자신의 두손으로, 자신의 능력으로 벌어서 밥을 먹을수 있는 재간을 가져야 한다. 밥을 먹는 재간은 한두가지면 충분하다. 여러가지 재간을 가진 사람은 어느 재간으로도 밥벌이를 하지 못한다. 지금은 대학을 졸업하고도 밥을 먹는 재간이 없는 젊은이들이 많다. 시간에 쫓기면서 10여년을 공부했지만 밥을 먹는 재간을 배우지 못한것이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진다. 누구에게는 더 많이, 누구에게는 더 적게 주어지지 않는다. 100세 로인에게도 하루는 24시간, 1년은 365일 5시간 48분 46초이고 1세 아기에게도 하루는 24시간, 1년은 365일 5시간 48분 46초이다. 대통령에게도 하루는 24시간이고 평민에게도 하루는 24시간이다. 부자에게도 하루는 24시간이고 가난한 자에게도 하루는 24시간이다. 이처럼 누구에게나 똑 같은 시간이 주어지지만 어떤 사람은 천재가 되고 어떤 사람은 용재가 된다.   거목이 되고 성공한 사람들은 시간을 효률적으로 잘 쓴다. 그들은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면서 열가지, 백가지에 시간을 다 쓰지 않는다. 자기가 하고싶고 할수 있는 어느 한가지 분야에만 시간을 쓴다. 열가지, 백가지 일에 시간을 다 쓰면 늘 시간에 쫓기게 되고 바삐 보내지만 어느 한가지 일에서도 성공하지 못한다. 그러나 어느 한가지 일에만 시간을 쓰는 사람은 성공하면서도 여유롭게 시간을 보낸다.   요즘 사람들은 시간이 없다, 시간이 바쁘다고 하면서도 시도때도 없이 스마트폰에 빠져 쓰레기정보, 게임에 시간을 빼앗긴다. 한시간이상의 게임이나 채팅은 취미생활이 아니라 시간랑비이다. 대신 자신이 가장 하고싶은 중요한 일에 시간을 써야 한다. 물론 여유가 있다면 낚시, 등산, 독서, 사교무, 화투, 트럼프, 마작 등 취미생활에도 시간을 쓸수 있다. 자신의 능력으로 벌어서 밥을 먹을수 있고 나머지 시간이 있다면 여유롭게 취미생활에도 시간을 쓰고 사회활동에도 시간을 쓰고 가족을 위한데도 시간을 쓰는것은 당연하다.   우리는 시간에 쫓기는 사람이 되지 말고 시간을 창조하고 시간을 지배하는 사람이 되여야 하지 않을가 싶다.    
341    恨 노래한 민족시인 김소월과 현대시의 아버지 정지용 댓글:  조회:3505  추천:0  2016-02-14
恨 노래한 민족시인 김소월과 현대시의 아버지 정지용 유종호가 말하는 동갑내기 시인의 작품세계…     "김소월은 그리움과 슬픔의 정서를 통해 인간 회복을 호소한 민족시인입니다. 반면 정지용은 우리말을 찾아서 닦고 조직하는데 시 인생을 바친 20세기 최초의 직업시인이죠. 1902년생 동갑내기인 이들이 다른 시대인처럼 느껴지는 것은 작품 세계의 차이가 빚어내는 착시 현상일 것입니다."   유종호 전 연세대 석좌교수는 13일 서울 종로구 W스테이지에서 열린 '네이버 열린 연단: 문화의 안과 밖' 강좌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는 김소월의 '진달래꽃'과 정지용의 '정지용 시 전집'을 주제로 '2015 오늘을 성찰하는 고전 읽기' 마지막 강연을 펼쳤다.       유 전 석좌교수는 두 시인을 같은 해에 태어나고 사망한 마르크스와 투르게네프(1818~1883)와 비교하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는 "많은 사람이 김소월과 정지용이 동갑이라는 사실을 의외라고 느낄 것"이라며 "이들의 차이는 사회적 총화로서 인간의 개성 차이에서 오는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유 전 석좌교수는 김소월이 정지용에 비해 다작(多作)했지만 김소월의 작품 성취도는 높낮이가 고르지 못했던 반면 정지용은 상대적으로 고른 편이었다고 평가했다.   그는 한국의 대표적 시인이었던 두 사람이 모두 불행하게 세상을 떴다는 것을 공통점으로 들었다.   유 전 석좌교수는 "김소월은 자살설이 정설로 굳혀졌고 북으로 간 정지용은 정치와 전쟁의 와중에서 최후를 맞았다"며 "반면 미당 서정주는 86세로 천수를 다하고 900편에 이르는 걸출한 시편을 남겼다. 미당의 상대적인 행운은 김소월과 정지용의 불운을 부각시켜 준다"고 말했다.   그는 동시 '엄마야 누나야','말'에서 두 시인의 차이가 단박에 드러난다고 주장했다.   그는 "김소월의 '엄마야 누나야'는 옛 가락에 의탁해 동심을 드러내고, 정지용의 '말'은 개성적이고 독창적인 면에서 자연스럽게 인지의 충격을 준다"며 "이러한 면이 두 시인 사이에서 세대 차를 느끼게 하고, 이는 많은 작품에서 그대로 발견된다"고 강조했다.   유 전 석좌교수는 이후 두 시인의 본격적인 작품 해석에 들어갔다.   우선 그는 김소월의 '초혼',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차안서선생 삼수갑산', '옷과 밥과 자유' 등을 예로 들며 "김소월은 인간의 보편적인 슬픔을 표출하며 독자들에게 공감과 위로를 안겨줬다"고 해석했다.   이어 "그는 인간 삶의 본원적인 슬픔에 대해 깊은 통찰을 보여주진 못했다"면서도 "그의 시는 이념의 명시적 표출을 멀리했기 때문에 거부감을 주지 않고 호소력을 갖는다"고 덧붙였다.   그는 김소월의 대표작 '진달래꽃'에 대해서도 "조국의 산천에 지천으로 피어 있어 상징이 될 수 있는 진달래꽃으로 조선주의를 밝혔다"며 "이는 그가 천성의 시인이었음을 말해준다"고 평가했다.   유 전 석좌교수는 정지용에 대해서는 대표작 '향수'로 강연을 이어갔다.   그는 "일제 한자어를 마구잡이로 빌려 쓰던 1920년대에 정지용은 주류 사회에서 배제된 토박이말을 찾아내 그것을 시어로서 조직하는 일을 선도했다"며 "토박이말의 시적 유효성을 보여주며 부족 방언의 순화에 크게 기여했다"고 말했다.   이어 "시가 우리말로 빚어진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통찰하고 방법적으로 자각한 그는 한국 현대시의 아버지"라고 주장했다.   유 전 석좌교수는 '향수'가 미국 시인 트럼블 스티크니(Trumbull Stickney)의 '추억'을 모방해서 짜깁기했다는 항간의 의혹을 강하게 비난했다.   그는 "모방설의 최대 약점은 스티크니의 원문을 놓고 정지용 작품과 비교·대조해야 한다는 제1원칙을 소홀히 했다는 것"이라며 "우리말 번역만 놓고 피상적으로 파악한 유사점으로 모작이라고 속단했다"고 지적했다.   '백록담', '종달새', '또 다른 태양' 등의 작품을 예로 들며 정지용에 대한 각박한 평가에 대해선 안타까움을 표했다.   유 전 석좌교수는 "그의 작품 중에는 경박한 감각과 말놀이라고 여겨지는 것들도 적지 않다"면서도 "그는 서정시 쓰기가 힘든 시대에 '언어 미술이 존속하는 이상 그 민족은 열렬하리라'는 신념과 '우리 시는 우리말로 빚어진다'는 방법적 자각을 시로 실천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의 공로는 응분의 평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20세기 최초의 직업시인이라 할 수 있는 그의 시적 성취가 후속 시인들에게 가장 많은 영향력을 발휘했다는 사실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덧붙였다.   2016/02/14 10:36 연합뉴스 김보경 기자     
340    항전시기에 황금을 연안에 운송한 무명영웅들 댓글:  조회:5087  추천:0  2016-02-14
항전시기에 황금을 연안에 운송한 무명영웅들   (번역)     20세기 30년대에 항일전쟁이 폭발하였는데 그 비장한 력사를 돌이켜보면 다음과 같은 하나의 수수께끼가 남아있는것을 발견할수 있다. 국민당통치하의 구중국에서 연안홍색정권의 항전경비는 구경 어디에서 왔을가?   초원현은 황금이 많이 나는 고장이다. 중국에서 처음으로 년생산량이 만량이 되는 현인데 당년에 불행하게도 일본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초원시의 《황금지》 기재에 따르면 “7.7사변”이 발생된 후에 일본군의 오가와지대가 1939년 2월 27일에 초원을 공격하여 점령했다. 그들은 이튿날에 또 령롱금광을 점령한 후에 북지나개발회사를 세우고 황금자원을 미친듯이 략탈하기 시작했다.   령롱금광의 봉쇄를 강화하기 위해 일본군은 사방 5리도 안되는 금광구범위내에 한개 중대의 병력을 주둔시켰다. 주변의 산우에 일곱 곳의 포루를 건축하고 중심금광구역에 세겹의 전기철조망을 늘여놓았으며 금광의 유일한 통로에 3개의 보초소를 세웠다. 금광에 거주하던 수많은 백성들이 쫓겨나고 한개련의 괴뢰군과 한개련의 기관총부대가 주둔했다. 주변의 대원, 구곡, 대상, 구가천 등 촌들에도 일본군과 괴뢰군이 주둔했다. 령롱금광은 물샐틈없을 정도로 일본군의 경계가 삼엄했다. 1941년 7월에 일본군은 령롱금광에 하루 황금생산량이 150톤이 되는 목조구조공장을 세우고 1200여명의 일군을 고용하면서 황금자원략탈을 다그쳤다. 팔로군의 침투를 방지하기 위해 일본군은 완제품황금에 대해 전면적으로 통제했고 황금조사대대를 내와서 황금밀매를 발견하면 일률로 몰수했으며 팔로군과 접근하는 자는 모두 총살했다. 범위굴에 들어가 황금을 빼앗기 위해 중공교동특위에서는 다른 곳에는 없는 상설기구인 교동황금사업위원회를 설립했다. 이 조직의 지도하에 광산로동자들은 일본군, 괴뢰군과 지혜로운 싸움을 벌렸다. 어떤 때는 돌로 고품질의 금광석을 바꾸어놓았고 어떤 때는 탄갱에서 금광석조각을 가지고 나왔다. 또 일본놈들이 남쪽에서 작업하면 팔로군은 몰래 북쪽에서 구멍을 파군 했다. 8년항일전쟁중에 중공교동특위에서는 황금자원을 모으기 위해 일제와 한간들과 특수한 생사박투를 벌렸는데 대량의 교동아들딸들이 수만량의 황금을 연안에 운송하기 위해 선혈과 생명을 바쳤다. 중공교동특위에서는 지방무장을 조직해 일본군의 황금운송차량, 광산구역의 포루를 습격하여 한간과 매국역적을 징벌했고 금광로동자들을 조직하여 파공하는 방식으로 일본놈들의 정상적인 생산을 파괴했다. 동시에 광석을 비밀리에 중국공산당이 관할하는 금광제련공장으로 운송했다가 다시 완제품황금을 지하교통소를 통해 연안으로 운송했다. 불완전한 통계에 의하면 항전시기에 초원현의 민중들이 팔로군을 위해 공헌한 황금은 수십만량에 달했다. 1940년만 해도 공회서기 소계광과 진문기 등이 비밀리에 연안에 운송한 황금은 2만량이 넘었다. 이 력사적 장거에 대해 당년에 주은래부주석과 주덕총사령은 찬탄해 마지않으면서 초원현인민이 세운 특수한 공헌에 감사를 드린다고 했다. 특히 소계광 등 사람들을 연안에 청해 접대해주었다. 사람의 심금을 울려주는 황금탈취전에서 소계광은 관건적인 인물의 한 사람이였다. 1939년 겨울의 어느날에 중공교동구의 공회서기직을 맡고있던 소계광은 초원현에 가서 황금을 마련하라는 임무를 맡았다. 당시 금광에서 비교적 가까운 류행촌에는 손무본이 거느리는 국민당의 비정규군이 주둔해있었다. 손무본은 황금을 통제하기 위해 한개 련의 병력을 금광에 주둔시켜 로동자들을 감시하게 했다.  소계광은 국민당관리로 변장하여 당지에서 가장 큰 금광주인 “허실눈”의 신임을 얻었다. 그는 “허실눈”을 리용하여 몰래 몇십자루의 총을 숨겨가지고 들어가서 로동자금광보호대를 조직했다. 그리하여 나중에 손무본의 비정규군을 금광에서 쫓아냈다. 그때로부터 잠장금광은 항일인민정부에 속하게 되였다. 이렇게 마련된 황금을 어떻게 적점령구역의 층층이 되는 봉쇄선을 통과하여 연안까지 운송하였을가? 력사자료에는 당시 교동에서 항일전선에 지원한 황금 등 물자는 “발해통로”와 “빈해통로”를 통과해 비밀리에 중공산동분국, 산동군구와 산동성전시사업추진위원회 및 로남구위에 운송된후 다시 연안으로 보내졌다. 수많은 교동의 아들딸들이 정의를 위해 뜨거운 피를 흘리고 생명을 바쳤는데 그중에는 60여년동안 사람들이 모르던 비밀도 숨겨져있다. 오늘의 래주시 후파진 북려촌에는 오래된 옛주택이 한채 있는데 당지의 백성들은 모두 그 집에 항일렬사 려품삼의 주택이라는것을 알고있다. 그러나 그들은 려품삼이 어느 부대에 있었는지 모르고있었다. 유가족들도 그가 팔로군에 있을 때 무엇을 했는지 잘 모르고있었다. 1950년 6월 9일에 려품삼이 액현인민정부에 의해 혁명렬사칭호를 수여받았지만 그의 구체적 사적에 대해서 정부에서도 잘 모르고있었다. 2004년 3월 25일에 려품산의 유가족들이 옛집을 수리할 때 무의식중에 높은 곳의 벽틈에서 한장의 손상된 누런 종이를 발견했다. 그것은 1943년에 교동행정주임공서에서 항일대원의 가족한테 발급한 우대량식증명서로서 제52호, 량식 600근, 식구 5명” 등 글자가 적혀있었다. 후날에 려품삼의 어머니는 당시의 일을 회상하면서 “액현이 해방되기전에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면 누군가 깊은밤을 타서 10~20근씩 담은 량식주머니를 우리집문앞에 놓아두군 했습니다. 나는 아들이 무엇을 하는지는 딱히 몰라도 일본놈들이 줄곧 아들을 잡으려고 한다는것은 알고있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 기간에 려품삼은 어떤 때에는 비밀리에 집에 돌아와 자택의 남쪽마당에서 낯선 사람과 접속해 비밀담화를 나누기도 했고 어떤 때에는 적들과 마주쳤지만 번마다 슬기롭게 벗어나군 했다. 그는 어머니를 깊이 믿었기에 중요한 서류를 어머니에게 맡겨 보관시키면서 “만약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꼭 이 서류를 전부 태워버리세요”하고 당부했다. 1943년에 일본군은 우리측의 간첩이 제공한 비밀보고를 받고 려품삼의 거처를 알게 되였다. 그들은 3명의 특무를 파견하여 친척방문을 한다는 구실을 대고 장기적으로 촌마을에 숨어있으면서 려품삼을 붙잡을 기회를 기다렸다. 6월의 어느날 깊은 밤에 려품삼은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가 어머니와 낮은 소리로 이야기를 할 때 갑자기 밖에서 “주교에 일본놈이 왔다”하는 고함소리와 함께 누군가 뒤창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부근에 숨어있던 일본특무가 고의로 소리를 지른것이였다. 려품삼이 이번에 집에 돌아온것은 련락원과 접속하기 위해서였다. 일이 탄로난것을 본 그는 자전거를 타고 북쪽으로 달아나다가 적들의 포위에 들었다. 해방후 우리군에 포로된 특무의 자백에 따르면 당시 그들은 산을 울려 호랑이를 놀라게 하는 수법으로 일부러 일본놈이 왔다는 거짓 정보를 흘린후 주교와 반대쪽인 북쪽에 매복해 있었던것이다. 일본놈들은 려품삼을 중요한 인물이라고 여겨 일본군 사령부로 압송했다. 일본놈들이 혹독한 고문을 들이대며 “팔로군이 무슨 임무를 수행하느냐, 상급은 누구냐”고 물었지만 그는 자신이 팔로군인것만 말하고 다른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의 입에서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한 적들은 그를 마대에 넣고 잔인하게도 칼로 마구 찔러댔다… 당지에서 전투에 참가했던 로동지의 회상에 따르면 1939년부터 1943년까지 려품삼과 전우들이 비밀리에 사들이고 무장으로 공격하는 방식으로 일본놈들의 손에서 대량의 황금을 거두어들였다. 이렇게 마련한 황금은 이름난 “발해통로”를 따라 중공산동분국으로 운송되였다가 다시 연안으로 보내졌다. 도중에 적들의 봉쇄선을 넘어야 했기에 정예의 팔로군전사들만 골라서 황금을 특제한 옷의 호주머니에 넣어가지고 운송했다. 한 사람이 열냥정도씩 넣어갖고 다녔기에 행군하기도 편리했고 적들을 만나면 림기응변하고 재빠르게 대응할수 있었다. 려품삼이 희생된후 그의 어머니는 과단하게 아들이 부탁한 중요한 자료를 태워버려 적들에게 아무런 흔적도 남겨주지 않음으로써 남은 동지와 당중앙의 전쟁경비안전을 담보했다. 그러나 이 영웅장거도 매몰되여 한단락의 아무도 알지 못하는 력사비밀로 되였다.    
339    장개석의 틀이를 시리게 한 민국제일자객 왕아초 댓글:  조회:6600  추천:2  2016-01-31
장개석의 틀이를 시리게 한 민국제일자객 왕아초   (번역)     왕아초(王亚樵), 장개석은 이 이름을 듣기만 하면 틀이가 시큰거렸고 대립은 이 이름을 듣기만 하면 “문을 든든히 잠궜는가 검사했어?”하고 소리쳤다. 구상해탄의 3거두인 황금영, 두월생, 장소림도 길에서 왕아초를 만나기만 하면 급히 길을 되돌아 다른 길로 가군했고 늘 부하들에게 절대 왕아초의 기분을 건드리지 말라고 부탁했다. 원 국민당군통의 핵심인물인 심취는 “세상사람들은 모두 마귀를 두려워하지만 마귀는 왕아초를 두려워한다”고 말한적이 있다. 별 기이한 일이 다 벌어지고있던 민국의 란세에 위세가 등등한 신비한 인물 왕아초가 나타났는데 그는 무예가 뛰여나고 경공(轻功)이 탁월하며 신출귀몰하고 행방이 묘연하며 올 때는 소리없이 왔다가 갈 때는 흔적없이 사라지군 했다. 그는 전문 상층사회의 고관요인들과 일본군고급관리들을 암살했다. 그는 늘 상해,  남경, 무한, 복주, 향항, 남녕 등지를 귀신같이 달려다니며 어디에 탐관, 한간, 일본군이 있으면 그 곳에 가서 제거해버리군 했다. 그의 손에서 도끼가 번쩍하면 악인들의 머리가 날아갔고 그의 손에서 총이 “땅”하고 울리면 악인들의 심장이 멎어버리군 했다. 그는 몸매가 왜소했는데 검은테안경을 끼고 다녀서 매우 점잖아보였다. 그러나 그의 신분은 살기등등한 도끼방(斧头帮) 방주, 항일철혈한간제거퇀 퇀장이였다. 그는 “강회대협(江淮大侠)”, “암살대왕”, “민국제일자객”, “원동제일자객” 등으로 불리면서 강호에서 위세를 떨쳤고 그의 명성은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어느 한번 왕아초와 상해경비사령 양호는 무슨 문제때문에 상의했는데 의견이 맞지 않아 다투게 되였다. 화가 난 왕아초는 키가 작기에 걸상에 올라가서 양호의 량쪽 귀쌈을 후려쳤다. 많은 병사들을 거느리고있는 양호였지만 왕아초의 무예가 뛰여나다는것을 알고있기에 찍소리 못하고 바보처럼 웃기만 했다. 여기서 왕아초가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가를 보아낼수 있다. 1889년에 합비에서 출생한 왕아초는 일찍 신해혁명에 참가했고 후에 사회당에 가입하여 사회당안휘지부 부장을 담임했다. 1913년 겨울에 환계군벌 예사충(倪嗣冲)이 안휘의 정권을 빼았고 사회당을 “란당(乱党)”이라고 하면서 진압했기에 왕아초는 상해로 도망쳤다. 왕아초는 “안휘로동자동향회”를 조직하고 암살테로조직인 도끼방을 묶어세웠다. 도끼방의 명성은 하루아침에 높아졌고 왕아초의 이름은 상해를 진동했다. 그가 통제하고있는 “상해로동자총회”의 회원은 가장 많을 때 10만명에 달했다. 왕아초와 그의 암살조직은 시종일관하게 “장개석을 반대하고 항일하자”는 기치를 높이 들고 암살을 통해 사회변혁을 일으킬수 있기를 바랐다. 왕아초는 상해 포동에 들어선 일본해군 제3함대의 “출운호”를 폭발해버렸고 매국협정을 맺은 왕정위괴뢰정부 외교부 부부장 당유임, 온갖 나쁜 짓을 다 저리른 송호경찰청 청장 서국량 등을 암살했다. 장개석, 왕정위, 송자문 등도 하마트면 왕아초의 손에 죽을번 했다. 왕아초는 려산에서 장개석을 암살하려고 했고 남경에서 왕정위를 암살하려고 했으며 북경역에서 송자문을 암살하려고 했다. 장학량이 스스로 책임을 지겠다고 사직하고 상해로 갔을 때 그를 맞아준것은 기폭장치를 빼버린 작탄이였다. 이것은 왕아초가 동북의 3000만동포를 망국노로 만든 민족죄인 장학량에게 보낸 경고였다. 왕아초는 장학량이 정신을 차려 다시 항일하기를 바랐던것이다. 일본군, 왕정위괴뢰특무, 군통특무, 검은 패거리 등 여러 세력들이 여러번이나 왕아초를 죽이려고 쫓아다녔다. 장개석은 왕아초의 머리에 현상금 100만원을 내걸었고 왕정위괴뢰특무들은 층층이 병력을 배치하고 왕아초를 죽음으로 내몰려고 했으며 일본첩보기관은 덫을 놓고 왕아초를 유혹하여 붙잡으려고 온갖 수단을 다했다. 하지만 기민하고 용감한 왕아초는 번마다 위험한 상태에서 안전하게 벗어나 계속 악세력과 완강하게 싸웠다. 1933년 가을에 장개석은 현상금 100만원을 내걸고 왕아초의 목숨을 끊어오라고 명령했다. 당시 장개석은 왕아초의 도끼에 목숨을 잃을가봐 몹시 두려워했다. 장개석이 현상금을 내건 명단중에 림표, 서해동 등이 있었는데 현상금은 10만원을 초과하지 않았다. 군통특무들과 경찰들이 전면 수색에 나서자 왕아초는 교묘하게 부두로동자로 변장하여 상해를 떠나 향항으로 도망쳤다. 1935년에 리제심, 진명추, 왕아초 등은 향항에서 비밀회의를 가지고 국민당제4기6중전회에서 장개석과 왕정위를 암살할 계획을 세웠다. 왕아초는 화극지를 남경에 파견하여 암살을 책임지게 하고 하파광과 장옥화가 옆에서 협조하며 기자신분을 얻은 손봉명이 구체적암살행동을 맡기로 했다. 그해 11월 1일에 손봉명은 권총을 사진기안에 감추고 중앙대례당으로 들어갔다. 회의가 개막된후 대표들이 사진을 찍었는데 왕정위가 앞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장개석은 보이지 않았다. 손봉명은 권총을 꺼내들고 왕정위를 향해 사격했다. 왕정위는 몸에 총알 세발을 맞았는데 한발은 몸속에 숨어있다가 9년후에 왕정위를 일본도꾜 제국대학병원의 수술대에서 죽게 만들었다. 왕정위암살을 왕아초가 지휘했다는것을 알게 된 장개석은 두려워서 대립을 불러놓고 명령했다. “빠른 시일내에 왕아초를 잡아와! 산채로 잡지 못하면 죽여도 좋아. 왕아초를 잡아오기전에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마!” 대립과 정개민은 왕아초를 잡으려고 수백명의 군통특무를 향항에 파견했지만 헛물만 켜고말았다. 1936년 2월에 왕아초는 군통특무들의 추격을 피하여 몇몇 부하들과 함께 광서의 오주로 도망쳤다. 왕아초는 리종인과 백숭희를 세번이나 찾아가 군사를 동원해 장개석을 토벌하라고 건의했지만 리종인과 백숭희는 거절했다. 오주에 거주하면서 왕아초는 궁지에 빠졌다. 향항에서 왕아초를 붙잡지 못한 대립은 왕아초가 의협심이 강해 부하들에 대한 보살핌이 매우 지극하다는것을 알고 왕아초의 부하 여립규를 붙잡아 남경의 감옥에 처넣었다. 여립규가 죽어도 왕아초를 배신하지 않겠다고 하자 대립은 여립규의 처 여완군을 찾아가서 “우리가 너의 남편 여립규를 놓아주고 상금을 톡톡히 주겠으니 왕아초한테 련계하여 경제형편이 어려우니 도와달라고 해.” 1936년 10월초에 여완군은 갑자기 향항에서 오주로 와서 왕아초의 부하들과 련계를 가진후 왕아초에게 전화를 하여 “향항에서 경제형편이 힘들어 오주로 왔다”고 말했다. 그때 여완군은 이미 대립에게 회유당했던것이다. 그녀는 오주에 온후 즉시 군통 주요책임자의 한 사람인 정개민과 련계를 가졌다. 10월 20일에 그녀는 일이 있어 상의하자고 하면서 왕아초를 자기의 거처로 청했다. 의리를 중히 여기고 의협심이 강한 왕아초는 여완군을 도와주기 위해 그녀의 집으로 찾아갔다. 여완군의 거처에 도착한 왕아초는 수십명의 특무들이 매복해있는줄도 모르고 문을 열고 들어갔다. 왕아초가 들어서자 방안에 매복해있던 특무들이 석회가루를 그의 얼굴에 뿌렸다. 왕아초는 석회가루가 눈에 들어가 눈을 뜰수 없었지만 원래 무예가 뛰여났기때문에 몇몇 특무들을 쓸어눕혔다. 하지만 특무들의 쏜 총이 다섯발이나 그의 가슴에 명중되였고 세 곳에 칼에 찔려 목숨을 잃었다. 특무들은 잔인하게 왕아초의 얼굴가죽을 벗겨버렸고 살인멸구하기 위해 여완군까지 죽여버렸다. 대립은 1923년에 호종남, 호포일과 함께 왕아초와 결의형제를 맺었지만 의리를 저버리고 왕아초를 살해했다. 그는 의협심이 강한 왕아초의 약점을 리용하여 신출귀몰하고 소리없이 왔다가 바람처럼 사라지는 “암살대왕” 왕아초를 살해했다. 일본놈들의 손에도 넘어지지 않던 일대의 민족영웅은 처첨하게 장개석의 독수에 목숨을 잃었으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수 없다. 왕아초는 길에서 억울함을 당하는 사람을 보면 서슴없이 칼을 뽑아 도와주는 호한이였고 탐관오리, 악당, 일본군을 보면 처단해버리는 영웅호걸이였다.  
338    호문에서 아편을 소각해버린 림측서 댓글:  조회:6101  추천:2  2016-01-24
호문에서 아편을 소각해버린 림측서   (번역)   사방을 메운 구경군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흠차대신 림측서(林则徐)는 영국을 비롯한 서양상인들에게서 압수한 2만 1000상자가 넘는 아편을 20일에 거쳐 소각해버렸다.   1839년에 생긴 중국의 아편문제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당시 중국에 수입되는 아편의 량은 년간 4만상자에 달했다. 한 상자의 아편을 대략 100명의 아편중독자가 소비한다고 볼 때 중국의 아편중독자는 400만명으로 추산되였는데 그것은 당시 중국인구의 1%에 해당되였다. 그리고 그 수자는 매년 급속히 늘어갔다. 1만상자에서 4만상자로 되기까지 10년도 걸리지 않았던것이다. 경제적문제도 심각했다. 18세기후반에 중국은 영국에 차(茶)를 팔아서 대량의 은을 얻고있었으나 그후 영국이 은대신 인도에서 생산된 아편으로 차의 대금을 치르는 정책으로 바꾸었다. 그러자 1807년을 기점으로 중국이 아편때문에 은을 영국에 지불하는 형태로 역전되였다. 1827년에는 1800년을 기준으로 전국류통량의 20%에 달할 정도로 은류출량이 심각해졌는데 당시 중국의 세금은 은납제였으므로 국가재정과 국민의 살림살이가 동시에 급격히 나빠져갔다. 실로 이대로라면 아편은 “수십년후에는 세금을 낼 사람도 없어지고 무기를 들 사람도 모조리 없어질것”이라는 우려가 과장이 아닐 정도의 위협을 가져오고있었다. 림측서는 1785년 8월 30일에 복건성 후관현에서 태여났다. 시골의 훈장인 아버지의 수입으로는 생계가 어려워서 어머니와 누이들이 베를 짜서 살림에 보태야 했다. 아들이 태여나자 그의 아버지는 당시 복건성의 순무였던 서사증이 명성이 높았기때문에 “서순무와 같은 사람이 되여라”는 뜻에서 아이의 이름을 “측서”라고 지었다. 때문에 림측서는 일찍부터 관계진출을 목표로 학문에 열중했으며 유능하고 깨끗한 관리가 되여 고통받는 백성을 구제하겠다는 포부를 가졌다. 스물일곱이 되던 1811년에 과거에 급제해 진사가 되였고 8년 뒤에 운남성의 향시 감독관이 되는것을 시작으로 절강성, 강소성, 섬서성 등을 다니며 지방행정직을 두루 력임했다. 그는 청렴하면서 공정하게 직무를 수행하여 송대의 전설적인 명관 포청천에 빗대여 “림청천”이라고 불리웠다. 1830년초에는 북경에서 근무했는데 이때 공자진, 위원 등과 교류하며 개혁파의 지식인과 관료들의 모임인 “선남시사”에 가입하기도 했다. 비록 반년만에 다시 지방으로 내려가게 되여 시사활동을 오래 하지는 못했으나 공자진 등의 개혁사상에는 크게 공감하여 그후 림칙서의 활동은 모두 그런 사상에 따라 이루어졌다. 1832년부터 1838년까지는 강소성 순무와 호광성 총독을 잇달아 맡았는데 낡은 수리시설을 개축하고 재해를 입은 지방을 구호하는 일에 관가의 힘만이 아니라 상인들의 조직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그는 부패하고 무기력한 관료집단보다 상인의 조직이 훨씬 현지의 사정에 밝고 행동도 효률적으로 한다는 사실을 알고있었다. 그는 상인들을 활용할뿐만아니라 그들의 상업활동을 장려하고 후원했으며 소금판매문제에서 상인들에게 최대한 자률성을 부여하는 시책을 썼다. 다만 부도덕하고 반사회적인 상업활동은 엄격하게 규제하고 처벌했는데 대표적인것이 아편판매였다. 그는 어느 지방의 총독보다 효과적으로 아편판매를 근절하는데 성공했다. 이로써 마침 아편문제로 골머리를 앓고있던 도광황제의 눈에 들게 되였다. 당시 청나라조정은 아편문제해결책을 두고 철저히 금지해야 한다는 엄금론(严禁论)과 은페된 아편판매를 차단하기란 현실적으로 어려우니 차라리 판매를 합법화하고 대신 세금을 거두자는 이금론(弛禁论)으로 갈라져있었다. 이금론도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었으나 널리 도덕적모범을 보여야 할 조정이 취할 태도는 아니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였다. 림측서도 상소를 올려 엄금론에 찬성했으며 그에 필요한 여섯가지 방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여 황제의 관심을 끌었다. 그리하여 1838년말에 림측서는 도광황제의 아편근절특명을 받고 흠차대신으로서 광동성에 파견되였다. 광동성의 광주는 오래전부터 해외무역의 창구였기에 서양에서 아편이 들어와 전국으로 퍼지는 출발점이기도 했다. 림측서는 먼저 아편이 거래되는 광동 지하조직부터 일망타진하기 시작했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현지정보에 밝아야 한다고 여긴 그는 온갖 수단을 써서 정보를 수집했는데 과거시험을 치르면서 과제를 “아편판매망을 뿌리뽑는 법”으로 내걸어 과거에 응시한 현지인들의 현실성있는 의견을 널리 취합하기도 했다. 1839년 1월에 광주에 도착한 그는 먼저 아편과 관계된 4000명 가까운 중국인을 붙잡아들이고 류통되고있던 아편 3만근을 몰수했다. 그리고 1839년 3월부터는 외국인들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서양인의 힘과 탐욕스러움을 잘 알고있던 그는 마구잡이로 그들을 압박하기보다 좋은 말로 타이르는 일부터 시작했다. 그러면서 아편과 무관한 외국상인들의 립장을 키워주는 한편 영국과 미국상인들 사이를 리간질하는 술책도 썼다. 림측서는 마지막에 강제적 수단을 써서 아편을 몰수했다. 그는 외국상인들에게 “다시는 아편을 거래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쓰도록 했다. 미국, 뽀르뚜갈 등의 상인은 서약서를 제출했으나 영국상인만은 제출하지 않고 광주를 떠나 오문의 본거지를 옮겼다. 그러다가 1839년 7월 7일에 술에 취한 영국군인이 림유희라고 하는 중국인을 살해하는 사건이 터졌다. 림측서는 즉각 범인을 인도할것을 요구했으나 영국측은 거절했다. 그러자 림측서는 오문에 거주하는 영국인들에게 식량과 물의 공급을 차단해버렸다. 그러자 영국인들은 오문에서도 물러나지 않을수 없었다. 결국 영국에 대해서는 정상적인 무역조차 금지한다는 조치가 취해졌다. 이제 전쟁을 피하기 힘들다고 여긴 림측서는 전력을 다해 전쟁준비를 했다. 그는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다”는 손자병법에 따르려고 이미 광동에 오기전부터 백방으로 서양관련정보를 수집했다. 구할수 있는 모든 서양의 서적과 잡지를 번역시켜 주로 서양인들의 성격과 무기, 전술을 중심으로 해서 《사주지(四洲志)》를 비롯한 몇권의 책으로 엮어냈다. 또한 림측서는 서양의 대포를 사들이고 서양상선을 사들여 전투함으로 개조하였다. 또 자체적으로 증기선과 자주포까지 만들어냈다. 그는 무기확보에만 전념한것이 아니였다. “우리가 저들에 비해 유리한 점은 이곳 지리에 밝다는것이다. 백성의 힘을 모으면 관병의 힘보다 훨씬 강력해진다.” 그는 이렇게 말하며 해안거주민중에서 장병을 모집하여 수병을 만들었다. 그리고 영국인의 목에 현상금을 걸었는데 이는 적에게 해를 입히기보다는 중국내부에서 영국에 협력하는 자들을 색출하기 위함이였다. 하지만 당시 청나라에서 누구보다 서양사정에 밝았던 림측서는 영국이 전력으로 공격해올 경우 결국 승리하기 어렵다는 점을 알고있었다. 그래서 정면대결보다는 유격전으로 대응해야 하며 북경에 이르는 요해처를 집중적으로 방비해야 한다는 상주문을 황제에게 올렸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그의 조언을 무시해버렸다. 결국 1840년 6월에 영국은 전투함 16척과 4000명의 병력으로 광동을 습격했다. “아편전쟁”이 시작된것이다. 림측서의 지휘로 백성과 군대가 단결해서 방어한 결과 영국군은 끝내 광동을 함락시키지 못했다. 그러나 그 사이에 영국군의 주력은 림측서가 예측했던 그대로 북경을 진격했다. 청나라군대는 수적으로 훨씬 우세했으나 화력과 전술에 앞선 영국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결국 북경함락이 눈앞에 보이자 청나라조정은 림측서에게 전쟁의 책임을 물어 파면하고는 영국과의 교섭에 나섰다. 그래서 일단 영국군의 진격을 멈추게 했으나 얼마후 다시 강경론자들이 득세하며 맞서자 광동에 물러가 있던 영국군은 더욱 강한 병력을 출동시켜 상해를 점령하고 남경까지 진격했다. 결국 청왕조는 굴복해 1842년 8월에 “남경조약”을 맺았다. 향항을 할양하고 추가개항을 하며 거액의 배상금지불, 영국인활동의 자유보장 등에 합의한 청왕조의 위신은 땅에 떨어졌다. 이는 사실상 20세기초에 이르기까지 계속된 “동양의 굴욕사”의 시작이였다. 림측서는 결코 무턱대고 전쟁을 일으킨 사람이 아니였으나 아편전쟁이 끝나자 조정은 일제히 그에게 책임을 돌렸다. 그는 처형만은 간신히 면했지만 멀리 신강으로 좌천되였다. 그런 벽지에서도 그는 현지의 위글족들의 문화를 배우려고 힘썼으며 청나라관리로서는 처음으로 이슬람교도와 상대할 때 필요한 요점을 기록으로 남겼다. 그리고 1850년에 “태평천국”을 진압하는 일에 동참하라는 조정의 명을 받고 광서성으로 가던 도중 1850년 11월 22일에 사망되였다. 지식, 지혜, 인격 등 모든 점에서 림측서는 서양의 침략에 맞서 동양이 내놓을수 있던 가장 우수한 관료였을것이다. 그는 근대적사상의 실마리라고도 할수 있는 개혁사상을 가졌다. 모택동은 “림측서는 중국에서 자산계급민주주의혁명을 시작한 사람이다”고 그 점을 높이 평가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동양의 체제를 유지한채 서양의 기술을 가미한다는 동도서기적인 개혁사상이였지 체제자체를 변혁하려는것은 아니였다. 물론 그런 개혁사상을 계속 발전시킬 기회가 주어졌다면 동양이 자체적으로 근대화에 성공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서양은 기다려주지 않았다. 림측서는 반봉건의 뜻을 채 펴보기도전에 반제국주의의 투쟁에 나서야 했다. 서양을 가장 잘 리해한 사람이였으면서도 서양이 동양을 짓밟는 서막을 연 사람으로 남고 말았다.      
337    모택동의 딸 리민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 댓글:  조회:5716  추천:2  2016-01-17
모택동의 딸 리민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   (번역)   건국후에 살아있었다고 알려진 모택동의 아들딸은 리민(李敏), 리눌, 모안영, 모안청이였다. 모택동은 이 네명의 자녀를 몹시 사랑했다. 모안영, 모안청은 모택동과 양개혜의 아들이고 리눌(李讷)은 모택동과 강청의 딸이다. 그리고 여기 소개하는 리민은 모택동과 하자진의 딸이다. 1936년 겨울에 모택동은 홍군을 거느리고 섬북의 보안현으로 왔다. 보안은 작은 현소재지로서 인구가 모두 400명밖에 안되였고 집도 많지 않았다. 당시 모택동과 하자진은 보안현 소석산의 자그마한 토굴에 거주했다. 토굴은 매우 낡아서 지붕에서는 물이 떨어졌고 땅바닥은 매우 습했다. 실내에는 침대도 없고 흙온돌이 있었지만 난로도 없고 부뚜막도 없었다. 토굴밖에 세개의 벽돌을 쌓아놓아 그우에 주전자를 놓고 물을 끓일수 있을뿐이였다. 하자진은 부사당한 몸으로 아이를 낳았다. 하자진과 함께 장정을 했던 녀홍군전사 등영초, 강극청, 류영, 종월림 등이 소식을 듣고 축하하러 토굴로 찾아왔다. 모택동은 빙그레 웃으며 그녀들을 맞아주었다. 그녀들은 “자진이가 낳았어요?”하고 물었다. 모택동은 유머스럽게 “낳았소, 낳았소, 큰 닭알을 낳았소”하고 대답했다. 녀홍군들은 토굴안으로 들어가 하지진의 품에 안겨 울고있는 아기를 보았다. 등영초는 앞으로 다가가서 가볍게 아기를 안아보았다. 그녀는 아기가 여위고 작은것을 보고 애처로운 생각이 들어 “정말로 꼬마교교(娇娇)구나”하고 말했다. 다른 녀홍군전사들도 따라서 꼬마교교라고 불렀다. 옆에 서있던 모택동은 등영초의 말을 듣고 딸의 아명을 “교교”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름은 리민(李敏)이라고 지었다. 후날 리민이 쏘련에서 귀국했을 때 모택동이 “리민아”하고 부르자 리민은 “저의 이름이 왜서 모민이 아니고 리민인가요?”하고 물었다. 그러자 모택동이 말했다. “너의 이름은 민이지만 꼭 모민(毛敏)이라고 불러야만 하는것이 아니라 리민이라고 부를수 있다.” “왜서요? 큰오빠는 모안영, 둘째오빠는 모안청, 그들은 모두 아빠의 모씨성을 따랐는데 난 왜서 성이 모씨가 아닌가요?” 리민이 의아해서 눈을 크게 뜨고 묻자 모택동이 웃으며 알려주었다. “아빠의 성이 모씨인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혁명사업의 수요로 아빠는 모윤지(毛润之) , 자임(子任), 리득승(李得胜) 등 10여가지 이름을 썼단다. 그 이름중에서 아빠는 특별히 리득승이라는 이름을 좋아했단다. 그래서 널 리민이라고 부르는거지.” 1947년 3월에 호종남의 20만대군이 연안으로 쳐들어왔다. 그 당시는 잠시 연안을 포기해야 나중에 연안을 다시 찾을수 있는 형세였다. 그리하여 모택동은 떠나면 승리한다는 리득승(离得胜)이란 뜻으로 “리득승(李得胜)”이란 가명을 썼다. 모택동은 리득승이란 이름으로 작전을 지휘하여 다시 연안을 찾고 전국을 해방했다. 모택동은 토굴에서 태여난 교교를 매우 귀여워했다. 하지만 하자진은 마음속에 근심이 가득하여 조금도 기뻐할수 없었다. 그녀가 그 시기에 생각한것은 어머니로 된 기쁨이 아니라 사업이였다. 그녀는 아이가 자신의 리상을 실현하는데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녀는 낳은지 4개월밖에 안되는 교교를 옛 고향집에 맡겨놓고 자신은 항일군사정치대학에 들어가 공부했다. 1937년 10월에 하자진은 모택동과 리혼하고 연안으로부터 서안을 거쳐 쏘련으로 가서 공부했다. 쏘련에서 하자진은 모택동의 아들을 낳았다. 그러나 1939년에 천진하고 사랑스러운 아들은 병에 걸렸는데 제때에 치료를 받지 못해 저 세상으로 가버렸다. 고독에 빠진 하자진은 뼈저리게 후회했다. 1941년 4월에 모택동은 하자진을 위안해주기 위해 4살된 딸 교교를 하자진이 있는 모스크바에 보내주었다. 이렇게 교교는 천리밖에 있는 어머니를 만나게 되였다. 그때로부터 리민은 모스크바에서 어렵고 힘든 세월을 보냈다. 타국생활은 하자진에게 수많은 고난을 가져다주기도 했고 행복과 즐거움을 가져다주기도 했다. 천리밖에서 찾아온 딸은 방금 아들을 잃은 타격에 상처를 입었던 그녀의 마음에 령단묘약이였다. 하자진은 딸의 응석을 받아주었으며 딸때문에 애쓰고 근심하면서도 귀여운 딸이 하루가 다르게 자라나는 모습을 보면서 몹시 자호감을 느꼈다. 쏘련에서 생활하는 몇년동안에 교교의 마음에는 엄마뿐이고 아빠는 없었다. 그녀가 연안을 떠나 쏘련으로 갔을 때에는 너무 어려서 아빠에 대한 인상이 별로 없었다. 국제아동원의 대청에는 각국 공산당령수의 거폭의 초상화가 걸려있었는데 그중에는 쏘련공산당 거목인 레닌과 쓰딸린, 벌가리아공산당 령수인 게오르기 디미트로프(格奥尔基·季米特洛夫), 중국공산당 거목인 모택동, 주덕 등이 있었다. 아동원의 선생은 늘 아이들에게 국제주의교육을 시켰는데 각국 공산당령수가 본국의 인민을 지도하여 투쟁한 일을 이야기해주군 했다. 선생은 중국공산당의 령수 모택동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했는데 교교는 경모하는 마음으로 그 이야기를 듣군 했다. 그녀는 중국의 령수가 자신의 아빠일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하자진도 아빠에 대해 이야기해주지 않았다. 어느 한번은 쏘련에 와있던 모안청이 특별히 국제아동원으로 찾아와서 녀동생을 만나보았다. 그는 녀동생에게 사탕을 사다주었다. 그들 남매는 사람이 없는 대청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모안청이 갑자기 높은 곳에 걸려있는 모택동의 초상화를 가리키며 말했다. “교교야, 넌 저분이 누구인지 아느냐?” “알아. 중국공산당의 령수 모택동이지.” “저이는 우리의 아빠야!” “거짓말, 나에게는 아빠가 없어요.” “거짓말이 아니야. 저분은 정말로 우리의 아빠야! 아빠가 우리를 쏘련에 보내 공부하게 해주었어.” 그제야 리민은 모택동이 자신의 아빠라는것을 믿게 되였다. 그러나 아빠는 아직도 거리가 너무 먼 존재였다. 교교는 자신이 아빠와 어떤 관계인지 상상할수 없었다. 아빠에 대한 교교의 감정은 엄마의 이야기를 통해 점차 깊어졌다. 하자진은 교교더러 아빠에게 편지를 쓰라고 당부했다. 교교가 아빠에 대해 잘 알수 없게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던것이다. 그러나 하자진의 서술은 너무 간단하고 일반적이였다. 그녀는 교교를 아이로 생각하고 심도가 깊게 이야기해주려고 하지 않았다. 교교는 갑자기 많이 성숙되였다. 교교는 많은것을 깨닫게 되였다. 교교는 어머니가 왜서 오래도록 그렇게 우울해 하고 상심에 잠겨 있었는지를 알게 되였다. 1947년 여름에 하자진은 왕가상, 주중려부부와 함께 모스크바에서 귀국하여 할빈으로 돌아왔다. 11세의 리민에게 이 곳은 완전히 낯선 고장이였다. 눈깜짝할 사이에 모택동이 령도하는 해방전쟁은 승리했다. 모택동과 당중앙은 북평으로 들어갔다. 그때 모택동은 의연히 동북에 있는 딸과 하자진이 생각되였다. 모택동은 여러해동안 보지 못했던 딸이 몹시 그러워졌다. 그는 딸을 북평으로 데려다가 공부하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1949년 여름에 하자진의 친녀동생 하이는 모택동의 부탁을 받고 할빈으로 갔다. 그녀는 언니 하자진을 만나서 “모주석께서 먼저 교교를 데려다가 북평에서 공부시키겠다고 하면서 언니는 할빈에 남아서 통지를 기다리라고 했어요”하고 말했다. 그때 교교는 이미 13살이였다. 교교는 천진하고 활발하고 똑똑하고 령리했으며 로어를 류창하게 구사할수 있었다. 교교는 어머니를 닮아 선천적으로 타고난 미모에 몸매가 호리호리했으며 피부가 하얗고 온몸에서 소녀의 매력이 넘쳐흘렀다. 그러나 오관, 눈섭, 얼굴륜곽은 모택동을 닮아서 매우 귀여웠다. 교교는 아빠를 만나러 북평에 간다는 이모의 말을 듣고 매우 기뻐했다. 그러나 아빠와 헤여진지 너무 오래 되여 아빠에 대한 인상이 남아있지 않은것이 걱정되였다. 그리하여 리민은 필을 들어 로어로 아빠에게 편지를 써보냈다. 그후 리민은 아빠를 리해하게 되였고 아빠를 존경하고 사랑하게 되였다. 리민은 북경사범대학 화학학부에서 공부하는 기간인 1959년 8월 29일에 북경항공학원의 우등생 공령화(孔令华)와 결혼식을 올렸는데 모택동은 기쁜 마음으로 딸의 결혼식에 참가했다. 결혼후에 리민과 공령화는 중남해에서 살았는데 모택동에게 천륜지락(天伦之乐)의 새로운 즐거움을 갖다주었다.  
336    원숭이 엉덩이가 빨간 사연 댓글:  조회:5250  추천:7  2016-01-14
원숭이 엉덩이가 빨간 사연   김희수     200종이 넘는 원숭이는 엉덩이가 빨간 종류도 있고 그렇지 않은 종류도 있다고 한다. 그럼 원숭이의 엉덩이는 왜서 빨갈가? 한 아이의 백일잔치 떡과 시루를 서로 가지려고 다투다가 구멍속으로 들어간 게에게 물려서 원숭이엉덩이가 빨갛게 되였다는 민간설화도 있지만 원숭이엉덩이가 빨간 리유는 사람의 입술이 빨간것 처럼 얇은 피부에 빨간색 피가 비치기때문이라고 한다.   아마 우리 세대들은 실제 원숭이 모습을 보지 못했던 어릴 때부터 “원숭이 어덩이는 빨갛다”는 동요를 통해 원숭이 엉덩이가 빨갛다는것을 알게 되였을것이다. 그때는 누구나 다 이 노래를 부르며 자랐다. 누가 지었는지는 알수 없지만 가사는 다음과 같다.   잰내비 엉덩이 빨갛다 // 빨간것은 사과다 // 사과는 맛있다 // 맛있는것은 바나나다 // 바나나는 길다 // 긴것은 기차다 // 기차는 빠르다 // 빠른것은 비행기다 // 비행기는 높다 // 높은것은 하늘이다 // 하늘은 푸르다 // 푸른것은 바다다 // 바다는 짜다 // 짠것은 소금이다 // 소금은 희다 // 흰것은 입쌀이다 // 입쌀은 작다 // 작은것은 좁쌀이다 // 좁쌀은 노랗다 // 노란것은 똥이다 // 똥은 구리다 퉤! 퉤! 퉤!   한국에서는 이 동요의 가사가 좀 다르다.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 // 빨가면 사과 // 사과는 맛있어 // 맛있으면 바나나 // 바나나는 길어 // 길면 기차 // 기차는 빨라 // 빠르면 비행기 // 비행기는 높아 // 높으면 백두산 // 백두산은 뾰족해 // 뾰족하면 가시 // 가시는 무성해 // 무성하면 소나무.   이 동요는 류행되면서 연변에 와서 연변의 입말에 맞게 가사가 고쳐졌는지, 아니면 한국과 다르게 조선에서 류행되던 가사가 중국에 전해진것인지? 고증된 자료를 찾지 못해 사실을 알수 없다.   한국에서 류행되였던 동요는 원숭이의 빨간 엉덩이가 무성한 소나무로 끝나면서 아이들에게 소나무처럼 무성한 희망을 안겨주려고 했던것 같고 연변에서 류행되였던 가사는 원숭이 빨간 엉덩이가 똥으로 끝나면서 아이들에게 우스개, 익살로 웃음을 주려고 했던 같다. 연변에서 류행되였던 동요의 결말(노란것은 똥이다 // 똥은 구리다)은 어른들이 그렇게 고쳤는지, 어린이들끼리 전하면서 그렇게 고쳤는지 알수 없지만 그 결말이 아직 끝나지 않은것 같아 미지근하다. 그래서 나는 결말에 한마디를 보태서 불러보았다.   “똥은 구리다 // 구린것은 탐관이다 // 탐관은 없어져라 퉤! 퉤! 퉤!   새해 원숭이해에는 백성들의 피땀을 빨아내는 탐관오리를 몰아내고 부정부패, 온갖 비리를 척결해 백성들이 좀 더 잘살수 있는 한해가 되였으면 좋겠다.     
335    선생을 팔아먹었다는 오명을 쓴 탕은백 댓글:  조회:5291  추천:0  2016-01-10
선생을 팔아먹었다는 오명을 쓴 탕은백   (번역)     상해에서 후퇴할 때 국민당 제37군은 강만(江湾)에서 후퇴할 준비를 하고 기다리라는 탕은백(汤恩伯)의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부대는 강만에서 오래도록 기다렸지만 탕은백한테서 소식이 오지 않았다. 군장 라택개(罗泽闿)는 사처에 사람을 파견하여 수소문해서야 탕은백이 강만의 수만명군사를 버리고 이미 상해에서 군함을 타고 도망쳤다는것을 알았다. 인민해방군이 공격해오자 갈길이 없는 37군은 손을 들고 투항하는수밖에 없었다. 라택개는 혼란을 틈타서 백성의 옷으로 갈아입고 사천로의 한 친구집에 숨었다. 며칠후에 조용해지자 라택개는 배를 타고 향항으로 도망쳤다. 라택개는 향항을 거쳐서 대만으로 갔다. 구사일생으로 대만에 도착한 라택개가 첫번째로 한 일은 부하들의 목숨은 상관하지 않고 자기만 살겠다고 달아난 탕은백을 질책하는것이였다. 탕은백의 측근은 탕은백을 감싸면서 도리여 라택개를 비난했다. 상대방은 서로 공격하면서 충돌은 더욱 격화되였다. 이 송사는 나중에 장개석까지 나서도록 커졌다. 상해를 잃은데는 탕은백에게 일정한 책임이 있었지만 필경 그는 장개석이 배치한 “서둘러 운송하는 계획”을 완성했고 마지막의 후퇴명령도 장개석이 내린것이였다. 후퇴질서가 매우 혼란하여 이미 후퇴명령을 기다리고있던 한개군을 포기한데는 탕은백의 책임이 있었다. 이 일에 대해 장개석은 탕은백을 두둔할수 없었다. 그는 회의를 열어 상해보위전에 대해 검토하는것으로 이 일을 해결하려고 했다. 회의는 진성(陈诚)이 주최했다. “여러분, 오늘 회의를 열게 된것은 상해전을 돌이켜보려는것입니다. 상해를 잃은 책임을 누가 져야 하는가를 토론해보고  제가 회의의견을 장총재께 보고해드리겠습니다.” 진성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라택개는 벌떡 일어나서 “상해를 잃은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난 상관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탕사령은 전장(战场)의 최고지휘관으로서 전투가 가장 치렬할 때 부대를 버리고 먼저 도망쳤습니다. 우리 37군의 수만명 장병들은 전쟁터에서 벼려져서 하늘을 향해 하소연해도 대답이 없었고 땅에 대고 애원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하늘에 눈이 있어 나를 망하게 하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진작 내가 공산군의 총에 맞아 귀신이 되였을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부하들은 불쌍하게도 부상당하고 포로되여 모두 대륙에 남았습니다. 난 그들에게 미안합니다!” 회장은 끓는 가마처럼 대번에 술렁거렸다. 어떤 사람들은 탕은백을 질책하면서 상해를 잃은 책임을 모두 그가 져야 한다고 했고 어떤 사람들은 “옹군 국민당이 모두 대륙을 잃고 대만으로 도망쳤는데 그 책임은 누가 져야 하는가”고 따지면서 탕은백을 두둔했다. 탕은백은 줄곧 침묵을 지키다가 회의가 끝날 무렵에야 손을 들고 발언했다. “여러분, 상해를 잃은데 대해 전구(战区)사령관인 내가 응당 주요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러나 후퇴명령은 총재께서 실력을 보존하기 위해 친히 내렸습니다. 후퇴는 질서있고 계획에 따라 실시되였습니다. 당시 오송구(吴淞口)밖의 배는 적재량이 8톤이였는데 장갑병을 포함한 8만명의 부대를 모두 싣고 후퇴했습니다. 37군도 원해 배를 타고 후퇴할수 있었지만 후에 공산군의  선두부대가 오송구를 공격하여 전화가 통하지 않아서 내가 파견한 련락원과 련계할수 없었습니다. 만약 후퇴하지 않고 좀 더 기다렸다면 우리 모두 공산군의 대포밥이 될것이 뻔했습니다. 나는 할수 없이 배를 출발시키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37군이 후퇴하지 못한것에 대해 나도 몹시 가슴이 아팠습니다.” 여기까지 듣고있던 라택개는 탕은백의 말을 중동무이를 하고 화가 나서 소리쳤다. “형제들이 채 후퇴하지 않았는데 당신이 먼저 도망치고도 무슨 체면이 변명하는겁니까? 당신은 응당 총으로 자살하여 당국에 사죄하고 천하에 사죄해야 합니다. 당신은 가슴이 아파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 말에 탕은백은 노하여 소리쳤다. “라택개! 네가 적전을 잘못해 진지를 잃고 37군이 대륙을 잃은거야. 그러니 넌 직접적인 책임을 져야 해! 너야말로 진작 자살해야 했어. 무슨 낯짝에 목숨을 달고 대만까지 도망쳐왔어?!” 두 사람은 서로 손가락질하며 상대방을 질책했다. 진성은 하는수없이 37군문제는 군사법정에 넘긴다고 선포했다. 이 송사는 후에 진성이 라택개와 탕은백을 찾아가서 화해를 시키면서 흐리부지해지고말았다. 라택개의 송사가 해결되지 못했는데 진의(陈仪)에 대한 처리문제가 또 탕은백을 골치아프게 했다. 진의는 대만에 호송되여온후 기륭요새사령부에 감금되였다. 그는 정서가 저락되여 온종일 한마디 말이 없었으며 어떤 사람과의 담화도 거절했다. 탕은백은 대륙에서 대만으로 도망쳐온 초기에 면구스러워 찾아가지 못하고 측근 진대경을 시켜 두번 일상용품을 사가지고 진의를 보러 가게 했을뿐이였다. 1950년 6월, 조선전쟁폭발전야에 대만형세는 급변했다. 장개석은 인민해방군이 대만을 공격할가봐 진의를 재판하라고 명령했다. 원래 진의는 탕은백이 고발한것이였다. 1948년 11월에 절강성정부 주석직을 맡고있던 진의는 절강성경보처 처장 모삼(毛森)이 처결하라고 비준했던 100여명의 공산당원과 진보인사들을 풀어주었다. 그는 또 1949년 1월에 중공지하조직의 도움을 받아 이전의 부하 탕은백에게 봉기를 일으키라고 권고했다. 하지만 탕은백은 장개석에게 고발했고 진의는 “공산당과 결탁하여 모반음모를 꾸몄다”는 죄명으로 붙잡혔다.   탕은백은 장개석에게 보고하면 장개석이 자신과의 정분을 생각해서 진의에게 최대로 해직처문만 내릴것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모인봉이 진의를 압송하여 대만으로 왔을 때 “총재께서는 진선생을 대만으로 호송해오면 안전할것이라고 말했는데 별일이 없을것입니다”라고 말했던것이다. 그런데 지금 군사법정에서 재판을 한다고 하니 진의는 죽음을 면할수 없을것이 뻔했다. 탕은백이 이 소식을 들었을 때는 장개석이 이미 대남으로 가고 대북에 없었다. 즉시 대남으로 찾아간 탕은백은 장개석을 만나려고 했다. 그러나 사흘을 기다려도 장개석은 만나주지 않았다. 나흘째 되던날에 장개석의 시종이 탕은백에게 말했다. “총재께서 이미 대중(台中)으로 갔는데 떠날 때 진의의 문제가 해결된 후에 당신을 만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탕은백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멍해 서있었다. 하지만 탕은백은 포기하지 않았다. 급히 대북으로 돌아간 그는 선후로 상해에서 환난을 같이 겪었던 곡정강, 뢰진, 방치, 진량을 찾아가서 장개석앞에서 좋은 말을 하여 진의를 구해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모두들 진의는 죽은 목숨이나깐 구할 방법이 없다고 대답했다. 뢰진은 “그 어른이 죽이겠다고 마음먹으면 꼭 죽이고야 마는것이니깐 당신은 찾아가지 마십시오”하고 직방 말했다. 아무리 해도 어쩔수 없게 된 탕은백은 마지막으로 동갑인 모인봉을 찾아갔다. “자네가 장총재께 잘 말해보게. 당년의 약속을 지켜 진선생의 목숨을 살려달라고 말이네.” 모인봉은 흔쾌히 도와주겠다고 대답하고 장개석을 찾아갔다. 그러나 며칠후에 모인봉이 탕은백을 찾아와서 말했다. “내가 장총재를 찾아가서 애걸했지만 줄욕만 얻어먹었네. 이제 나도 방법이 없네.” 1950년 6월 18일에 진의는 사형장에 끌려가 총살당했다. 진의는 큰 걸음으로 사형장으로 걸어가면서 소리쳤다. “사람은 죽어도 정신은 죽지 않는다!” 탕은백은 진의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대성통곡했다. 그는 자택에 고인의 빈소를 세우고 절하면서 참배했다. 사흘째 되는 날에 장개석은 탕은백을 불렀다. 장개석을 만난 탕은백은 말없이 눈물만 흘렸다. 분을 다 풀지 못한 장개석은 탕은백을 훈계했다. “진의는 법에 의해 처결되였고 죽어 마땅한데 자넨 왜 아직도 우는거야? 듣자니 자네가 집에 진의빈소를 세웠다던데 돌아가서 당장 없애버리게!” 탕은백은 집에 돌아간후 눈물을 흘리면서 빈소를 없애버렸다. 진의가 죽은후 탕은백은 대만군정계에서 “선생을 팔아 부귀영화를 누린다”는 죄명을 쓰게 되였다. 친구들도 래왕이 적어졌다. 1954년 6월 29일에 탕은백은 일본에서 치료를 받다가 수술대우에서 사망되였는데 그의 죽음은 지금까지도 수수께끼로 되고있다.     
334    모택동이 가장 두려워한 3가지 댓글:  조회:6260  추천:1  2016-01-05
모택동이 가장 두려워한 3가지   (번역)   첫째, 눈물을 두려워했다   모택동은 하자진(贺子珍)을 보고 “나는 가난한 백성들의 울음소리가 가장 두렵소. 그들의 눈물을 보면 나도 눈물이 나오는것을 참을수 없소”라고 말한적이 있다. 1937년 9월에 8로군이 동쪽으로 황하를 건넌후 모택동은 찦차에 앉아 서백파로 간적이 있었다. 찦차가 량쪽면이 가파로운 절벽인 큰 산골짜기를 지날 때 도로옆의 풀숲에 8~9세쯤 되는 녀자아이가 누워있고 그 옆에 30여세 되는 시골녀인이 앉아있는것을 발견했다. 시골녀인은 두눈을 꼭 감고있는 안색은 노란 녀자아이를 내려다보며 눈물을 흘리고있었다. 그 정경을 본 모택동은 “차를 세우시오”하고 소리쳤다. 운전수 주서림이 차를 멈춰 세우자 모택동은 첫 사람으로 뛰여내렸다. 이런 거동에 경호원들은 어짤바를 몰랐다. 이전에는 경호원들이 먼저 뛰여내린후 모택동을 부축하군 했다. 큰 걸음으로 그들한테 다가간 모택동은 녀자아이의 손과 이마를 만져보면서 물었다. “이 아이가 병에 걸린것 같은데요?” “감기에 걸려 열이 올랐는데 약을 먹어도 열이 내리지 않고 헛소리만 칩니다. 이러다간 잘못될것 같습니다.” 녀인은 울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모택동은 즉시 차우에 앉아있는 주의사를 불렀다. 아이의 병을 살펴보던 주의사가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모택동은 급히 물었다. “구할수 있습니까? 조그만 희망이 있어도 꼭 구해야 합니다!” “구할수 있지만 약이…” “약이 없습니까?” “있긴 하지만 한대밖에 남지 않아서…” “무슨 약입니까?” “페니실린(盘尼西林)입니다.” “그럼 빨리 아이에게 사용하시오!” “이는 수입약이여서 돈으로도 사기 매우 어렵습니다. 주석께서 필요하시게 되거나 가장 요긴한 대목에 쓰려고…” “지금이 바로 요긴한 대목이요. 당장 아이에게 주사를 놓으시오!” 주의사는 소중하게 간직해두었던 페니실린을 아이에게 놓아주었다. 그 당시에는 지금처럼 항생소가 흔하지 않았기때문에 매우 특효가 있었다. 주사를 맞은 아이는 갑자기 눈을 뜨더니 가볍게 “엄마”하고 불렀다. 아이가 눈을 뜬것을 본 시골녀인은 기쁨의 눈물을 흘리면서 목메여 소리쳤다. “보살님, 목숨을 살려주신 보살님!” 모택동은 눈굽을 찍으며 주의사를 보고 말했다. “당신은 뒤의 차로 이들 모녀를 집까지 실어다주시오. 그리고 아이를 다시 살펴보아서 괜찮으면 돌아오시오!” 후에 그 불쌍한 모녀에 대해 언급할 때마다 모택동은 눈물이 글썽하여 “그 아이가 지금은 어찌 되였는지 모르겠군. 그때 그 아이를 데려다가 치료해주는걸 그랬군”하고 말하군 했다. 모택동은 여러번이나 불쌍한 농민들을 걱정하면서 말했다. “농민들은 병을 보이려면 몇십리길을 걸어야 하지요. 방법을 대여 의사들이 농촌으로 찾아가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농민들이 지은 쌀을 먹고있으니 응당 농민들을 치료해주어야지요!”   둘재, 피를 두려워했다     가렬처절한 전쟁터를 천만번이나 넘나들면서 시신이 산처럼 쌓이고 피가 강물처럼 흐른것을 볼때로 보아온 모택동이 피를 두려워한다면 누구도 믿지 않을것이다. 모택동의 가족과 친구들도 전쟁터에서 얼마나 많이 희생되였는지 모른다. 하지만 모택동은 적들의 흉악하고 잔인한 만행앞에서 추호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런 모택동이였지만 어떤 의미에서 볼 때 피를 보는것을 두려워했다. 1949년 3월 25일에 중공중앙은 서백파에서 향산쌍청별장으로 옮겨왔다. 총포소리에 습관된 군관과 전사들은 전투가 없는 태평성세에 적응하기 힘들었다. 향산엔 새들이 많았다. 누가 먼저 앞장섰는지 그들은 새사냥에 나섰다. 그 당시에는 야생동물보호법이 없었고 록생평화조직도 없었다. 세계대전이 결속된지 얼마 되지 않고 중국의 해방전쟁도 남방에서 계속되고있는 현실에서 몇천명의 사람이 죽는것도 문제로 삼지 않는데 하물며 몇마리의 참새을 잡는것쯤이야… 그날에 회의를 마치고 쌍청별장으로 돌아오던 모택동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몇몇 경위간부들과 마주쳤다. 그들은 사격술이 뛰여나 많은 참새를 잡아가지고 돌아오는 길이였는데 참새를 쇠줄에 길게 꿰여들고 기쁨의 환성을 지르며 걸어왔다. 모택동은 그들을 보고 물었다. “무슨 기쁜 일이 있는거요? 손에 든것이 무엇이요?” “참새를 좀 잡아가지고 오는 길입니다.” 한 경위간부가 참새를 꿴 쇠줄을 모택동의 앞에 흔들어보이며 말했다. 쇠줄엔 참새피가 가득 묻어있었는데 모택동의 발앞에 피방울이 떨어지기까지 했다. 모택동은 마음아픈 표정을 지으며 한걸음 물러섰다. 그는 갑자기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소리쳤다. “빨리 치우시오. 내 눈앞에 보이지 않게 하시오!” 참새를 들고있던 경위간부는 놀라서 피가 떨어지는 참새를 얼른 등뒤에 감추었다. “누가 참새를 잡으라고 했소:? 참새도 생명이 있단 말이요! 기쁘게 날아다니는 참새를 그렇게 처참하게 쏘아죽이다니? 이후엔 참새를 잡지 마시오. 누구든 참새를 잡아선 안되오!” 1964년에 모택동은 중남해에서 사교무활동에 참가했다. 휴식시간에 그는 쏘파에 앉아 담배를 피웠다. 그때 함께 춤추던 공군정치부예술단의 녀배우가 모택동의 옆에 와서 앉았다. 모택동은 관심조로 친절하게 물었다. “훈련이 힘들지 않소?” “예. 매우 고생스럽습니다. 어떤 때는 사고까지 생긴답니다.” “사고까지?” “네. 천진의 한 극단에서는 《효천견(哮天犬)》역을 맡은 배우가 곤두박질을 련습하다가 넘어져 목이 자꾸만 빠져들어가서…” “아이구!” 모택동은 끔찍하여 차마 눈 뜨고는 볼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만, 그만 말하오.” 모택동은 한숨을 내쉬더니 비극에서 빠져나기라도 하듯이 총망히 구석쪽으로 걸어갔다. 다시 곡이 울렸을 때에도 모택동은 이마살을 찡그리며 구석쪽에 앉아서 춤을 추지 않았다.     셋째, 목숨을 살려달라는 소리를 두려워했다     모택동은 농민의 아들이였지만 우화중의 농부처럼 꽁꽁 언 독사를 불쌍하다고 품속에 넣지 않았다. 장개석이거나 기타 정치군사상의 적들이 살려달라고 애걸해도 모택동은 “초패왕 본받지 않고 승승장구로 궁한 원쑤를 추격”했다. 하지만 모종 의미로 볼 때 그는 확실히 살려달라는 소리를 듣기 두려워했다. 섬북에 있을 때 생활이 가장 간고할 때 한 경위전사가 고생을 견딜수 없어 도주했다. 경위전사는 적지 않은 비밀을 알고있었기에 일반 작전부대의 전사가 도주한것보다 성질이 엄중했다. 경위부대는 즉시 사람을 동원하여 추격한 결과 그 전사를 붙잡았다. 사람들은 원래 도주행위를 증오한데다가 도주병을 쫓느라고 고생했기때문에 도주병을 손가락질하며 가슴에 가득찬 화를 풀었다. “저 새끼를 때려죽여야 해!” “응당 총살해야 해!” 분노에 찬 소리는 모택동을 놀라게 했다. 요동에서 걸어나온 모택동이 붙잡아온 도주병을 보니 나이가 어렸는데 온 얼굴에 눈물코물이 흐르고있었다. 총살한다는 소리를 듣고 혼비백산한 그는  엉엉 울면서 “살려주십시오! 저는 적에게 투항한것이 아닙니다. 그저 집생각이 나서 도망칩것입니다. 저의 목숨을 살려주십시오”하고 애걸복걸했다. 모택동은 원래 도주병을 증오했지만 도주병이 애걸하는 소리와 그의 불쌍한 모습을 보고 눈시울이 젖었다. 모택동은 손을 저으며 소리쳤다. “그를 놓아주시오! 빨리 놓아주란 말이요!” “그는 도주병입니다!” “그는 나쁜 놈입니다!” “어디가 나쁘단 말입니까?” 모택동은 이마살을 찌프리며 말했다. “그는 아직 어린아이입니다. 빨리 놓아주시오. 아이를 더 놀라게 하지 말고요.” 한 간부가 불복하며 말했다. “이렇게 엄중한 문제를 판결하지 않고 놓아주다니요? 규률을 집행하지 않고 어떻게 병사들을 다스리겠습니까?” “당신만 병사를 다스릴줄 압니까?” 모택동은 설복력 있는 어조로 말했다. “그는 아직 어리고 갓 혁명에 참가하여 고생을 해보지 못했기에 힘들었을겁니다. 집생각도 나구요. 당신이 그들 가두어놓으면 그는 더욱 집생각을 할게 아니겠습니까? 게다가 그는 적에게 투항한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빨리 놓아주시오. 맛있는것도 많이 만들어 먹이시오. 그래야 집생각도 적게 할게 아닙니까? 알아들었습니까?” 그리하여 그 도주병은 풀려나게 되였다. 그 어떤 처벌도 받지 않았을뿐만아니라 며칠동안 보살핌을 받으며 특별식사를 했다. 물론 그 경위전사는 다시는 도주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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