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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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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3    주덕의 부인 오약란이 사망된 내막 댓글:  조회:5686  추천:0  2015-10-24
주덕의 부인 오약란이 사망된 내막   (번역)   1903년 8월에 호남성 뢰양현의 한 소지식분자의 가정에서 출생한 오약란(伍若兰)은 1925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그리고 1928년 3월에 주덕과 결혼했다. 1928년 4월 하순에 주덕의 부대를 따라 정강산에 오른 오약란은 군정치부 선전부장직을 맡았다. 그녀는 선전대원들과 함께 근거지의 매 지방마다 선전표어를 붙이면서 군중들을 동원하여 혁명정권을 건립하고 토지혁명과 무장투쟁을 조직하는 일을 도왔다. 현재 정강산우의 모평촌, 당남촌 등지의 담벽에는 아직도 그녀가 석회물로 썼던 굵직한 표어가 그대로 남아있다. 당지에서는 지금도 그녀가 군중들을 도와 토지를 나누어주던 감동적인 이야기가 전해지고있다. 1929년 1월에 광서와 강서의 국민당이 제3차포위토벌을 실시했을 때 오약란은 전적위원회(前敌委员会)의 명령대로 홍4군주력을 따라 포위를 뚫고 산에서 내려와 강서 남부를 향해 출발했다. 그 시기에 홍4군 로농운동위원회 부녀운동회 과장직을 맡고있던 오약란은 험난한 후퇴길이였지만 앞장서서 전사들을 이끌고 선전표어를 붙이기도 하고 자체로 글을 써서 선전하기도 하면서 전체 관병들의 투지를 고무격려했다. 부대는 심오현 수하촌으로 전이할 때 국민당군에 포위되였다. 긴급한 상황에서 그녀는 군부를 엄호하기 위해 주동적으로 권총패를 거느리고 적들에게 반격을 가했다. 그러다가 불행하게도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적들의 손에 붙잡히게 되였다. 국민당군은 주덕의 부인을 포로했다는 말을 듣고 매우 기뻐서 그녀를 강서성의 강주로 호송했다. 적들이 높은 벼슬과 금전으로 유혹하기도 하고 온갖 혹형을 다 가하기도 했지만 그녀는 죽어도 굴복하지 않았다. 적들은 또 주덕과 관계를 끊겠다고 선포하면 자유를 주겠다고 구슬렸다. 그러자 오약란은 “그건 어림도 없는 일이다. 해가 서쪽에서 뜨고 강물이 꺼꾸로 흐르지 않는 한 주덕과 나를 갈라놓을 꿈도 꾸지 말라”고 소리쳤다. 적들은 그녀의 입에서 한마디도 알아내지 못하자 그녀를 잔인하게 살해했다. 그해 그녀는 26살이였는데 세상에 사진 한장도 남기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의 영웅적 이야기와 그녀의 이름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영원히 남아있을것이다.      
312    조자룡에 대한 력사적 진실 댓글:  조회:5461  추천:0  2015-10-18
조자룡에 대한 력사적 진실     《삼국연의》의 내용에는 사실과 허구가 뒤섞여있다. 만일 허구를 벗겨내버린다면 가장 먼저 신화에서 끌어내려질 사람은 아마도 제갈량일것이다. 그러나《삼국연의》에서 신격화된 사람은 제갈량뿐이 아니다. 두번째로 허구가 많이 포함된 사람은 아마도 관운장 즉 관우일것이다. “술이 아직 따뜻할 때 화웅을 베였다”는것은 사실이 아니였다. 또 관운장은 안량을 죽인것은 사실이였지만 문추는 죽이지 못했고 “다섯 관문을 넘으면서 여섯장수를 베였다”는것도 허구였다. 그리고 “화용도에서 조조를 붙잡았다가 풀어준 사실”도 없었다. 제갈량과 관운장 두 사람만큼은 아니지만《삼국연의》에서 신격화되였으나 진면모에 대하여는 많이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 있는데 그가 바로 조자룡 즉 조운이다. 조운은 원래 공손찬의 부하였는데 공손찬이 류비에게 보내여 전해와 함께 원소와 싸우게 하였다. 조운은 류비에게 의탁한 이후로 천하에 적수를 찾아보기 힘든 장군으로 되여 여러가지 활약을 하였다. 정사에 나오는 그의 활약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은 다섯가지이다. 첫째, 장판교에서의 활약이다. 장판교에서 있은 일에 관하여 여러 사적에 있는 내용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 《삼국지.조운전》: 선주(류비)는 조공(조조)에게 쫓겨서 당양의 장판에 이르러 처자를 버리고 남으로 도망쳤다. 조운이 류비의 어린 아들을 안았는데 바로 후주(류선)이다. 그리고 감부인을 보호하였는데 바로 후주의 모친이다. 조운의 보호로 모두 란을 벗어날수 있었다. 조운은 아문장군으로 승진하였다. ▲ 《운별전》: 운별전에 이르기를 선주가 패하자 어떤 사람이 조운은 이미 북으로 갔다고 말했다. 선주는 손으로 극을 잡고 긁으면서 “자룡은 절대 나를 버리고 가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조운이 도착하여 류비를 구했다. ▲ 《삼국지. 장비전》: 류표가 죽었다. 조조가 형주로 들어왔고 류비는 강남으로 도망쳤다. 조조가 추격했다. 류비는 쫓겨서 당양의 장판에 이르렀다. 류비는 조조의 병사가 다가왔다는 말을 듣고 처자를 버리고 도망쳤다. 조운이 류비의 아들과 부인을 보호했다. 이러한 기록을 보면 《삼국연의》에 묘사된것처럼 조운은 아두(류선)를 안고 수십만 조조의 군중에서 일곱번 들어갔다 일곱번 나오면서 50여명을 베였다는 소설내용은 많이 과장되고 윤색된것임을 알수 있다. 이상의 기록을 종합해 보면 실제의 상황은 조조의 군대가 몰려오자 류비는 처자식은 돌보지 못하고 주변에 있던 부하장수 수십명과 함께 먼저 도망치고 류비의 처자식을 돌보던 조운은 류선을 안고 감부인을 태워서 바로 뒤쫓아간것임을 알수 있다. 운별전에서 “조운도 곧 도착했다”는 문구가 이를 의미한다고 할것이다. 그리고 조조의 군대도 수십만대군이 아니라 하루만에 300여리를 추격해 피로해진 기병이라는것을 알수 있다. 그리고 우의 기록에 의하면 조운이 적의 목을 베였다든지 하는 점에 대하여는 전혀 기록이 없는것으로 보아서 조운이 류선을 안고 감부인을 태운채 계속 도망을 친것이지 적군의 목을 벤 전공을 세운것은 아니라고 보아야 할것이다. 둘째, 손부인이 류선을 오나라로 데려가려는것을 막았다 손권은 류비가 서쪽으로 익주에 들어가려 한다는것을 알고 선박을 보내여 녀동생(손부인)을 맞이하려고 하였다. 손부인은 류비의 아들인 류선을 데리고 오나라의 친정으로 돌아가고자 하였는데 장비, 조운이 부대를 이끌고 장강에서 손부인의 배를 막았다. 그리하여 류선을 데리고 되돌아올수 있었다.   셋째, 익주를 취할 때 조운이 두 성을 취했다 제갈량이 장비, 조운 등 장병을 이끌고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서 백제, 강주, 강양을 평정했다. 제갈량은 관우만 남겨서 형주를 지키게 했다. 조운은 외수에서 강양, 건위를 평정했고, 장비는 파서, 덕양을 평정했다. 넷째, 공영계(空营计)이다. 조조는 쌀을 북산의 아래로 옮겼다. 황충이 병사를 이끌고 나가서 쌀을 빼앗으려고 하였는데 시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조운이 수십기를 이끌고 군영을 나가 살펴보았다. 마침 조조가 병사를 대거 이끌고 나와서 조운은 황급히 그들과 맞부닥쳤다. 조운은 한편으로 싸우면서 한편으로 퇴각했다. 위나라병사들은 흩어졌다 다시 모이면서 군영아래로 몰려왔다. 조운은 군영에 들어간후 대문을 크게 열고 기발을 흔들고 북을 쳤다. 위나라병사들은 조운이 매복을 두었다고 의심했다. 조운은 북소리를 크게 울리면서 강한 활로 위나라병사들을 쏘았다. 위나라병사들은 깜짝 놀라서 서로 짓밟았고 한수에 떨어져 죽는자가 많았다. 류비가 다음날 아침에 조운의 군영으로 와서 전날에 전투했던 곳을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자룡은 온 몸에 담력을 지닌 장수이다”라고 칭찬했다. 다섯째, 기곡(箕谷)이다. 제갈량이 병사를 일으켰을 때 겉으로 사곡도를 통하여 공격한다고 말하고는 조운, 등지를 의군(疑军)으로 보내여 기곡을 지키게 하였다. 위나라 대장군 조진이 무리를 이끌고 이들을 상대했다. 조운, 등지는 약한 병사로 강한 적에 대응하다보니 기곡을 잃었다. 그래도 무리를 모아서 잘 지키는 바람에 대패에 이르지는 않았다. 이 일로 조운은 진군장군으로 강등되였다. 조운이 활약한 정사상의 이 다섯번의 전투를 보면 성을 공격하여 취한것은 단 한번이다. 그것도 이미 피페해진 익주의 두 군현이다. 이때 류비는 이미 면죽을 격파했고 장비는 또 다른 로선을 따라 공격하고있어서 성 두개는 거의 거저 주운것이였다. 나머지 네번은 그저 패전하였거나 패전중에 어찌어찌하여 겨우겨우 대패를 면하게 되는 경우에 기여하거나 주요인물을 구하는 역할을 제대로 수행한 정도이다. 기록상 조운은 적군의 유명한 장수를 죽인 적도 없었고 군사상 요새를 공격하여 격파한 사례도 없었으며 대형전투를 승리로 이끈 적도 없었다. 조운이 비록 무장으로서 혁혁한 전공을 세우지는 못했지만 정치적인 안목은 아주 뛰여났던것으로 보인다. 첫째, 류비가 사천(익주)을 얻은후에 성도의 전답을 여러 장수에게 분배하려고 하였다. 이때 조운은 “곽거병은 흉노를 아직 소멸시키지 못하였으므로 집안을 위하여 쓸수 없다고 한적이 있는데 지금 우리의 적은 흉노뿐이 아닌데 어찌 편안함을 구하겠습니까. 천하를 평정한 후에나 생각해야 할 일입니다. 익주인민은 오래동안의 전란으로 고통을 겪어왔으니 전답을 그들에게 돌려주어 편안히 생업에 종사하도록 하고 나중에 다시 징용하여야 그들의 환심을 살것입니다. 그들이 아끼는것을 빼앗아서는 안됩니다”라고 하였다. 류비는 그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둘째, 류비가 관우가 죽은후에 손권을 치려고 하자 익군장군이였던 조운은 이렇게 말했다: “나라의 적은 조조이지 손권이 아닙니다. 만일 위나라를 먼저 멸한다면 손권은 알아서 항복할것입니다. 이제 조조는 비록 죽었지만 그 아들인 조비가 자리를 차지하고있습니다. 민심을 따라 하루빨리 관중을 취하고 황하와 위하의 상류를 차지하여 역적을 토벌하여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관동의 사람들도 왕의 군대를 맞이할것입니다. 위나라를 놔두고 오나라와 먼저 싸워서는 안됩니다.” 셋째, 조운의 군사물자에 여유분이 있었다. 제갈량은 장사들에게 나눠주려고 하였다. 그러나 조운은 “군사적으로 실적이 없는데 어찌 하사할수 있겠습니까? 이 물건을 창고에 모두 넣어두었다가 10월이 된후 겨울에 하사품으로 내려야 합니다”고 말했다. 제갈량이 아주 좋은 생각이라고 받아들였다. 이러한 기재를 보면 조운은 대국관과 정치적판단력이 뛰여났던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바로 전후좌우 4대장군(관우, 장비, 마초, 황충)에게 결핍된것이다. 그러다보니 그는 비록 군사적으로 큰 업적을 세우지는 못했지만 큰 잘못이나 참패도 없었던것이다. 류비가 그에게 군대를 지휘하게 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신변에 둔것은 그의 이런 장단점을 잘 파악하고있었기때문일것이다. 어떠한 위기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랭정하게 대처하는 능력은 다른 사람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게다가 대국관과 장기적인 정치적안목이 있어 곁에 두고 의견을 듣기에도 아주 적합했다. 성도의 무후사(武侯祠)에 가보면 순평후(顺平侯) 조운이 무관자리가 아니라, 문관자리에 앉아있는것을 볼수 있다.    
311    열심히 사는것 댓글:  조회:5487  추천:10  2015-10-15
열심히 사는것   김희수   얼마전에 나와 동료들이 신문원고를 편집하고있는데 사무실문이 열리더니 20대의 한족녀성이 들어왔다. 그녀는 우리를 보고 굽신거리며 입을 여는데 들어보니 물건을 팔러온 세일즈맨(외판원)이였다.   그녀는 곧바로 내 앞에 다가와 웃는 얼굴로 가지고 온 물건을 내놓으며 선전했다. 그녀는 내 마우스받침판의 때를 잠간사이에 쉽고 효과적으로 제거할수 있다면서 시험해보려고 했다. 나는 시끄럽고 성가신 장사치라고 생각하면서 손짓으로 강하게 거부했다. 내가 응대도 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제품의 좋은 점에 대해 얼음에 박밀듯 줄줄 내리외우는데 그야말로 청산류수였다. 눈여겨 보지도 않고 귀담아 듣지도 않았지만 얼룩, 찌든때를 제거하는 제품인것 같았다.   내가 아무런 응대도 하지 않으니 그녀는 다른 동료한테 가서 또 환하게 웃으며 처음부터 다시 제품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나의 그 동료는 일에 방해가 된다면서 큰소리로 화를 내며 축객령을 내렸다. 그녀는 무시를 당하면서도 부드러운 목소리로 깍듯이 인사를 하고 나갔다.   그녀가 나간 다음에야 나는 열심히 살려고 하는 그녀를 무시한것이 마음에 걸리고 후회되였다. 물론 사무실로 찾아다니며 물건을 파는것은 정당한 일이 아니지만 일에 대한 그녀의 열정과 태도, 열심히 살려는 마음가짐만은 보귀한것이라고 생각된다.   몇년전부터 매일 걸어서 출퇴근하는 나는 출근길에 열심히 사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도로를 깨끗하게 청소하는 환경미화원들, 힘차게 사구려를 부르는 장사군들, 초조하게 할일을 기다리는 인력시장 일용로무자들, 손님을 싣고 달리는 운전기사들 그리고 출근족들…이들은 모두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라고 할수 있다.   물론 그들속에 태만을 부리거나 게으름을 피우는 사람들이 있을수도 있는데 이런 사람들은 례외이다. 머리를 쓰든 손발을 쓰든 법을 어기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부지런히 일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라고 할수 있다. 아무리 힘들고 고된 일이라고 해도 열심히 하는것, 그것이 바로 열심히 사는것이다.   우리 주변에도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 많다. 가족들을 위해 대도시나 외국에 나가 열심히 일하거나 고향땅에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 이들은 남에게 의거하지 않고 자신의 두손으로 행복을 창조한다.   내가 알고있는 사람들중에도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중에서도 문학에 빠져 열심히 글을 쓰고있는 두 사람이 있다. 두 사람은 다 한참은 후배이다. 한사람은 10여년전에 나의 동료였던 녀류작가이다. 그녀는 문학에 그렇게 열정적이면서도 짬을 타서 아이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치기도 했다. 문학창작도 부지런히 하고 문학활동에도 빠지지 않는다. 남편이 외국에 가있으면서 잠시 혼자 살고있으면서도 끼니마다 꼭꼭 영양을 따져가며 자신의 몸을 잘 챙기기도 했다. 그녀는 예쁘게 생기지 않았지만 열심히 사는 모습이 그녀의 용모를 아름답게 보이게 했다.   다른 한사람은 알고있은지 20년도 넘어되는 후배이다. 문학이 점점 외면당하고있는 시대지만 10여년동안 열심히 글만 써온 후배이다. 문학에 미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열심히 창작활동을 견지하여 지금은 우리 문단에서 중견작가로 활약하고있다. 20년전에는 나의 뒤에 있었지만 지금은 나보다 휠씬 앞에 서있다. 그와는 사이가 좋은것은 아니지만 열심히 문학을 하는 그 정신에는 탄복하면서 박수를 보내고싶다.   아무리 육체적으로 힘들고 열악한 환경에서 일한다고 해도 열심히 사는 사람들은 아름답다. 그들의 얼굴에 땀이 흘러도 그들의 옷에 기름때가 묻어도 그들의 몸에서 냄새가 나도 열심히 사는 사람들은 아름답다. 열심히 사는것은 순결하고 아름다운 행위이기때문이다.   이쁘지 않아도 이뻐 보이고 사이가 좋지 않은 사람도 탄복시키는것이 열심히 사는것이 아닐가?    
310    중국 미녀작가 댓글:  조회:5634  추천:1  2015-10-11
중국 미녀작가   步非烟   步非烟(原名辛晓娟),1981年出生于四川成都,毕业于北京大学中文系,2006年获得北京大学古代文学硕士学位,中国内地女作家。 2004年获得温瑞安神州奇侠奖,2005年、2006年获黄易武侠文学奖。著名学者孔庆东称步非烟为“大陆武侠作家中最具希望的新星”。她的作品大气磅礴、汪洋恣肆,想像力神秘奇特,笔风变化万端,她开创的女子武侠更被誉为新神话主义、大陆武侠奇幻界想像力的代表。"80后"青年作家 。[1] 她的作品有《华音流韶》系列、《武林客栈》系列、《昆仑传说》系列、《玫瑰帝国》系列、《修罗道》等。此外,她还曾受金山公司邀请,写过《剑侠情缘》小说。         米米七月   原名黄菲,1986年生于湘西,湖南张家界人,土家族姑娘,代表作品《他们叫我小妖精》、《小手河》、长篇小说《肆爱》。       吴韵汐   笔名桃花潭水、弱水雕栏,90后美女作家,13岁开始诗歌、小说创作。代表作品 《天空一无所有,为何给我安慰:海子诗传》     明晓溪 当代著名女作家,武汉大学硕士。 代表作品有《旋风少女》、《明若晓溪》、《泡沫之夏》、《会有天使替我爱你》[1]  等。2008年12月1日“2008第三届中国作家富豪榜”重磅发布,明晓溪以300万元的版税收入,荣登作家富豪榜第11位,引发广泛关注。而文笔细腻的明晓溪也有“现代小琼瑶”之称。     卫慧 1973年出生, 被称为 "晚生代"、 “新新人类”女作家, 1995年毕业于复旦大学中文系, 22岁的卫慧发表她的处女作《梦无痕》。做过记者、编辑、电台主持、咖啡店女侍,蹩脚的鼓手,不成功的广告文案,自编自导自演过话剧,生于浙江余姚,儿时在普陀山、桃花岛等地度过,1990年在南昌陆军学院参加为期一年的军训。参加99国际“超市艺术展”至今从事写作十年有余。作品有《像卫慧那样疯狂》、《水中的处女》、《欲望手枪》、《上海宝贝》、《我的禅》等。部分作品译成31种文字,并登上日、英、意、德、法、美及西班牙、阿根廷、爱尔兰、香港、新加坡的各类畅销榜前十。居纽约与上海,专职写作。       春树   1983年出生于北京,当代女作家、女诗人。 2000年, 春树从高中辍学, 开始自由写作。 至今已出版小说《北京娃娃》 、 《长达半天的欢乐》、 《抬头望见北斗星》等, 她有主编过《80后诗选》。 2004年,她获得第五届网络金手指的网络文化先锋奖。2004年,她成为美国《时代周刊》杂志封面人物,美国人称她为“新激进份子”。她也是80后著名代表人物之一。 她代表作有:《北京娃娃》《长达半天的欢乐》《2条命》《在地球上:春树旅行笔记》。《抬头望见北斗星》           安意如 原名张莉,1984年6月20日出生于安徽绩溪,现代作家。[1] 2002年毕业于安徽某中专院校。2005年9月,出版传记文学《看张爱玲画语》。[2]  2006年8月,出版文学随笔《人生若只如初见》和《当时只道是寻常》。[3]  2006年10月,出版文学随笔《思无邪——诗三百》。2009年8月出版新书《美人何处》。[4] 2012年12月出版《再见故宫》,多处抄袭或改编歌手河图所唱歌曲的歌词。[5]         沧月 1979年5月15日出生于浙江台州,中国当代奇幻文学作家、建筑师,毕业于浙江大学建筑设计及理论专业。 2001年开始发表作品,先以武侠成名,后转入奇幻领域。2002年,开始为杂志撰文。2007年,担任杭州市作家协会类型文学创作委员会主任。2014年,担任浙江省网络作家协会副主席。 她十年来出版作品二十余种,作品累积销量达10,000,000册[1]  ,代表作有《听雪楼》系列、《镜》系列、《羽》系列、《鼎剑阁》系列、《夜船吹笛雨潇潇》、《曼青》、《花镜》、《雪之蝶》、《雪满天山》等。                  郭妮 郭妮,别    名 妮殿、妮姬、妮j 80后青春偶像作家,广西柳州市1981年10月5日  有日产万字“华语小天后”的称号。曾联合聚星天华公司创建杂志《火星少女》,面向年轻女读者的刊物。其小说主要为少女向的青春恋爱小说,其中台湾版和香港版已发行(但主要支持者集中于内地)。号称“亿元女仔”,以高产闻名。代表作:《麻雀要革命》、《天使街23号》、《恶魔的法则》、《壁花小姐奇遇记》、《再见苏菲斯》          崔曼莉 毕业于南京大学,自由作家。 崔曼莉2002年开始创作,在文学刊物发表诗歌小说十余万字。著有长篇小说《最爱》,《浮沉》一、二部,《琉璃时代》,中短篇小说集《卡卡的信仰》等。其中《浮沉》销售过百万册,《琉璃时代》获中国作家出版集团长篇小说奖,短篇小说获诸多文学奖。2012年《浮沉》被改编成同名电视剧播出,被新闻出版总署推荐为最值得阅读五十本好书之一。《琉璃时代》获得中国作家出版集团长篇小说奖。四岁开始学习书法,2012年,书法作品在德国参加国际书法大展,并获收藏。         笛安 笛安,女,全名李笛安,中国作家。 2012年中国作家富豪榜上榜作家,著名作家李锐的女儿,1983年生于山西太原,2001年毕业于太原五中,同年考入山西大学历史系历史学专业。 2002年赴法留学,在巴黎索邦大学学习社会学,2010年获得硕士学位。现在是最世文化签约作家,《文艺风赏》杂志主编。获第八届“华语文学传媒大奖”最具潜力新人奖。2003年发表的第一篇小说《姐姐的丛林》在《收获》杂志成为头条;2007年9月出版中篇集《怀念小龙女》;2004年创作了长篇小说《告别天堂》;2005年创作的《芙蓉如面柳如眉》是笛安的第二部长篇;之后出版的《西决》、《东霓》、《南音》、《妩媚航班》  获得广大读者的喜爱;2013年12月5日,2013第八届中国作家富豪榜重磅发布,笛安再度上榜。           赵佳蓉 别名 落落,落大,落殿 出生日期 1982年4月30日 中国青春文学作家中国文艺网络奖·最佳作家 )一般指赵佳蓉 赵佳蓉(笔名落落),1982年4月30日生于上海,最世文化签约作家、《文艺风象》杂志主编、《最小说》别册《ZUI Silence》文字总监。2012年位列第14名,版税高达320万。[1] 曾因擅长描写校园青春小说,而被称为“校园女王”。2011年出版的《剩者为王》直指“剩女”话题,获得当年上半年虚构类畅销书第八名,成为排行榜中最畅销的女作家。 代表作主要有《年华是无效信》、《尘埃星球》、《须臾》、《不朽》、《剩者为王》、《千秋》、《万象》等             桐华  桐华,原名任海燕子,1980年10月18日桐华出生于陕西省, 中国言情小说作家、影视制作人、词作者。中国文坛言情小说“四小天后”之一,被封为“燃情天后”。毕业于北京大学。2005年从中国到达美国,创作第一部小说《步步惊心》在网站连载,2006年正式出版。2011年凭借《步步惊心》改编影视剧名声大噪。[1]  其小说《云中歌》《大漠谣》《最美的时光》等被陆续改编成影视,  2013年,桐华参与策划电视剧《金玉良缘》[3]  《抓住彩虹的男人》。             尹珊珊  80后代表作家之一。别    名 珊珊,乖乖女,尹小珊,嘟嘟妹 出生日期 1982年7月26日 第二届新概念作文大赛一等奖得主,代表作《纯快乐物语》,已出版《自由18岁》、《玫瑰在风中呼唤》。曾以文化成绩最高分考进中央戏剧学院戏剧文学系。           林静宜  林静宜,80后代表型青年作家、影视编剧。福建人,生长于东南海岸线。四川传媒学院编剧课程教师。四川作家协会会员,巴金文学院新苗工程重点作者。16岁起开始有文学、绘画作品见于报刊,至今在杂志开设有情感专栏。代表作有长篇小说《蝶葬》、《逆时钟》。黄健中导演曾不远千里选中林静宜为其创作电影剧本《栖镇故事》(唯一编剧)。2012年12月15日晚,新锐艺术盛典在上海落幕,80后福建作家林静宜摘下了新锐艺术人物文学类最具人气奖。           小妮子  小妮子,中国言情小说作家。2004年,小妮子处女作出版,《恶魔之吻》第一部以黑马之势席卷全国,奇迹般地创下百万册的销售神话,掀起一股铺天盖地的“小妮子热潮”,奠定了小妮子在青春文坛的地位。代表作有《恶魔之吻》、《龙日一,你死定了》《仲夏夜之恋》、《亲亲亲吻鱼》等。        
309    기념비의 시계와 같은 장개석과 리종인의 관계 댓글:  조회:5306  추천:0  2015-10-11
기념비의 시계와 같은 장개석과 리종인의 관계   (번역)     내우외환의 처지에 놓인 장개석(蒋介石)은 깊은 밤에도 잠을 이룰수 없었다. 1949년 11월 20일 오후 3시 30분에 백숭희(白崇禧)는 리종인(李宗仁)의 명령을 받고 중경에 와서 리종인이 이미 오전에 비행기를 타고 향항으로 날아갔다고 장개석에게 보고했다. 리종인이 직권도 인계하지 않고 위병이 재발했다는 리유로 병을 치료하러 향항으로 갔다는것이다. 장개석은 그날 저녁에 중경에 있는 국민당상무위원들과 상의한후 먼저 향항으로 사람을 파견하여 리종인을 중경으로 데려오기로 결정했다. 장개석이 무엇때문에 그토록 급히 리종인을 중경으로 데려오려고 했을가? 겉보기에는 대통령자리를 내놓은 장개석이 도량이 넓어서 애써 리종인대통령대리의 사업을 협조하는것처럼 보였다. 장개석자신도 대외에 그렇게 선전했고 시국을 똑똑히 알지 못하는 사람들도 장개석이 리종인을 중경으로 불러오려는것은 공동히 군사계획을 상의하려는것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간단한것이 아니였다. 리종인이 중경에 가는것을 재삼 거절한데는 그로서의 도리가 있었다. 내부의 사람들은 리종인이 중경에 온다고 해도 군사지휘권은 장개석에게 있다는것을 알고있었다. 자리를 내놓았다는것은 자리에서 물러났다는것이 아니다. 리종인은 장개석의 조종을 받는 괴뢰대통령이 되기 싫었던것이다. 또한 장개석에게 끌려 낭떠러지로 떨어지고싶지 않았다. 열흘전에 장개석은 대만에서 리종인의 일로 국민당원로 오치휘(吴稚晖)에게 고견을 물었을 때 오치휘는 “절대 리종인으로 하여금 정치상의 책임에서 벗어나게 하지 마십시오”라고 말했다. 장개석은 이 말을 정중하게 일기에 써넣었다. 지금 대세가 기울어지고 중경이 함락될 위험이 눈앞에 닥쳐오게 되자 장개석은 리종인을 끌어다가 희생양을 삼는것보다 더 합당한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리종인도 장개석의 이런 의도를 간파하고 중경으로 오지 않았던것이다. 그날 오전에 장개석은 또 백숭희를 만나서 자신이 다시 리종인의 대통령직을 빼앗을 뜻이 없으니 리대통령대리를 중경에 청해 함께 국가대사를 상의할것을 간곡하게 요구한다고 표시했다. 리종인의 대표로서 “제갈량”이라고 불리우는 백숭희는 장개석의 앞에서 대답도 하지 않고 묻지도 않았으며 모든 문제에 대해 태도표시를 하지 않았는데 그 뜻은 아주 명백했다. 자신은 다만 말을 전하는 전달자일뿐이라는것을 말해주려는것이였다. 혀바닥이 마르도록 설득하던 장개석은 백숭희가 한마디 말도 하지 않자 화가 나서 나중에는 리종인을 국가가 혼론에 처한 사태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고 마구 질책했다. 그러면서 국가원수의 명의로 병치료를 하기 위해 출국하지 말아야 한다고 꾸짖었다. “리대통령대리는 개인의 신의와 인격을 다 말아먹었으니 대체 무슨 심보란 말이요? 리대통령대리가 해외에서 추태를 보이는것을 피면하기 위해 꼭 중경으로 돌아오게 해야 하오. 그가 와서 대내외의 대계를 책임져야 할것이요. 그 다음에 출국해도 될것이요. 그러나 반드시 행정원장이 대통령직을 대행해야 되오. 이는 헌번규정에도 부합되는것이요.” 장개석의 뜻은 아주 명백했다. 리종인이 출국은 할수 있지만 반드시 “대통령”직을 내놓아야 한다는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장개석은 다른 사람이 대통령권자를 점하고있는것이 마음 편하지 않았던것이다. 옹근 국민당청사가 모두 넘어지게 되였는데도 장개석은 의연히 썩은 나무에 걸어놓은 “대통령간판”을 항상 마음에 두고있었다. 지혜가 풍부하고 계략이 많은 백숭희는 장개석의 히스테리에도 한마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다른 사람을 대신해 욕을 먹으면서도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 배역”을 성공적으로 연기했다. 침묵을 지키는 백숭희의 책략은 원래 더 큰 화를 내려는 장개석에게 다시 분통을 떠뜨릴 상대를 찾지 못하게 했다. 장개석은 혼자서 욕설을 퍼붓다가 제풀에 뭣해서 화를 가라앉히였다. 후에 장개석은 또 국민당중앙의 명의로 거정(居正),  주류선(朱骝先), 홍란후(洪兰友) 등 원로들을 대표로 파견하여 자신이 리종인에게 주는 친필편지를 향항에 가지고가서 리종인을 중경에 돌아오도록 권고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장개석은 대통령대리직을 가지고다니면서 가는 곳마다 자기의 주장을 말하는 리종인이 매우 못마땅했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장개석은 그날의 일기에 이렇게 썼다. “덕린(리종인의 자)은 출국했는데 사직도 하지 않고 자리를 내놓을 뜻도 없이 대통령대리의 명의로 미국에 지원을 요구했다. 그러나 지원요청을 이루지 못했는데도 국외에 머물면서 돌아오려고 하지 않는다. 당국(党国)의 존망도 아랑곳하지 않고 리해타산만 앞세우는 그의 행위는 비렬하고 무치하기 짝이없다!” 장개석은 리종인에 대해 큰소리로 욕설을 퍼부었지만 리종인은  그 일에 관해 《회억록》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국가대사를 관심하지 않은것이 아니였지만 나는 어려운 형세를 되돌릴 힘이 없었다. 내가 개인의 건강을 돌보지 않고 국내에 남아있어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다가 일단 나라가 망하고 이 몸이 죽는다면 그런 희생은 홍모보다 가볍다. 그럴바에는 빨리 병을 치료하여 목숨을 건지는것이 나을것이다. 그렇게 되면 앞으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칠 기회가 있을것이다. 때문에 나는 미국에 가서 병을 치료하기로 결정했다.” 리종인은 여기서 그와 장개석간의 정치투쟁중의 진실한 의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는 중경에 돌아가지 않은 원인을 “미국에 가서 병치료를 했기때문”이라고만 썼다. 장개석이 중경에 있는 기간에 리종인은 한번도 중경으로 가지 않았다. 당시의 중경신문에는 “두 대통령이 앞으로 제2의 수도에서 함께 일하게 될것이다”는 글이 대문짝만하게 실렸는데 그런 예언은 현실로 되지 못했다. 중경에 세워진 해방비는 처음에 “정신보루(精神堡垒)”라고 불리웠는데 항전중국민정부가 중경에 옮겨온후에 건조된것으로 “국민정신총동원”이란 뜻이 있다. 건축물은 정방형인데 3층높이의 포루이다. 일본비행기의 폭격을 방지하기 위해 겉에 검은칠을 했고 꼭대기에는 한폭의 기대(旗杆)를 세웠다. 항일전쟁이 승리한후 부루를 “항전승리기념비”로 고쳐 지었는데 비의 몸체는 8각기둥형이고 외부는 부각(浮雕)으로 장식되였다. 건물안에는 꼭대까지 닿는 회전계단이 있으며 꼭대기에는 4개의 방향으로 향한 4개의 “표준시계”가 있었다. 그러나 이 시계들의 시간은 정확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항간에 “기념비의 시계는 제 각기 간다”는 말이 나돌았는데 그 뜻은 장개석과 리종인의 불합작관계를 의미한것이였다.                  장개석의 국민당은 왜서 실패했는가 일본이 투항한후 국민당과 공산당이 중경담판을 할 때 민주와 자유를 바라는 지식분자들은 중국에서 응당 서방식의 자본주의길을 걸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후 그들은 모두 공산당을 지지했다. 이는 무엇때문인가? 항일전쟁이 승리한후에 대부분의 중국인은 3가지 요구를 가지고있었다. 첫째는 내전을 중지할것을 요구한것이다. 여러해동안 전쟁에 시달렸기에 더는 전쟁을 해서는 안된다는것, 중국인끼리 싸워서는 안된다는것이다. 둘째는 련합정부를 성립할것을요구한것이다. 국민당이 혼자서 집권하는 국면을 개변하여 각 당파가 모두 국가정치에 참가하는 정부를 성립해야 한다는것이다. 셋째는 국가민주화와 군대국가화를 요구한것이다. 즉 국가는 응당 민주의 방향으로 발전해야 하고 군대는 당파의 소유가 되지 말고 응당 국가소유에 귀속돼야 한다것이다. 그러나 국민당은 이 3가지요구를 하나도 실행하지 못했다. 첫째, 항일전쟁이 끝나자마자 곧 국공내전이 시작되였다. 둘째, 국민당은 모든 당파를 단합하여 하나의 련합정부를 성립하지 못했다. 후에 작은 당파인 민사당(民社党)과 중국청년당이 국민당을 따라 국민당의 국민대회에 참가하였지만 더욱 많은 민주당파와 무당파인사들은 공산당과 합작했다. 셋째, 국민당의 군대는 이름을 바꿨으나 성질은 개변되지 않았다. 북벌초기에 “당군(党军)”이라고 불렀고 1944년후에 “국민혁명군(国民革命军)”으로 이름을 바꿨으며 1945년후에 “국군(国军)”이라고 칭했다. 그러나 국군은 국민당정책을 집행하는 군대였다. 국민당이 실패한 원인중의 하나는 항일전쟁이 승리한후 전국인민의 3가지요구 즉 내전을 중지하고 련합정부를 건립하며 국갑민주화와 군대국가화를 실행하는 요구를 위반했기때문이다.        
308    비명에 죽은 중한 녀자연예인들 댓글:  조회:9732  추천:7  2015-10-07
비명에 죽은 중한 녀자연예인들   제명을 다 살지 못하고 안타깝게 젊은 나이에 저 세상으로 간 홍안박명의 녀자 연예인들, 그녀들이 남긴 소중한 순간들, 기억들 그리고 그녀들의 맑은 미소는 우리들의 마음속에 영원히 빛날것이다.     비명에 죽은 중국 녀자연예인들   1. 옹미령(翁美玲):   향항배우 옹미령은 1959년 5월 7일에 향항에서 출생했다. 1980년대초에 대륙에서 가장 환영받는 녀배우로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옹미령은 1985년 5월 14일에 자택에서 가스자살로 혜성처럼 빛나던 꽃같은 삶을 마감했다. 향년 26세였다. 바람난 남자친구 탕진업(汤镇业)때문에 상심해서 자살한걸로 알려졌다.    2. 류단(刘丹):   류단은 1975년 11월 10일에 흑룡강성 할빈시에서 출생해 락양에서 자랐다. 1998년에 《환주공주(还珠格格)2》에서 향비(香妃)역을 맡으며 인기를 누렸다. 류단은 2000년 1월 30일 아침 6시에 광주에서 심수로 달리는 고속도로에서 뜻밖의 교통사고로 불행하게 사망되였다. 향년 26세였다.    3. 균자(筠子):   본명이 오아군(吴雅君)인 대륙가수 균자는 1977년 7월 18일에 신강에서 출생했다. 2000년 9월 10일에 균자는 자택에서 스스로 목을 매 봄꽃처럼 찬란하던 자신의 생명을 결속지었다. 향년 23세였다.    4. 진보련(陈宝莲):   향항배우 진보련은 1973년 5월 23일에 상해에서 출생했다. 2002년 7월 31일 5시 30분쯤에 여러번이나 자살, 자학 경력이 있는 진보련은 갓 1개월이 지난 아들을 남겨놓고 상해 정안구 남양로에 있는 24층 옥상에서 투신해 자살했다. 향년 29세였다.  5. 허위륜(许玮伦):   대만배우 허위륜은 1978년 11월 13일에 대만 대북시에서 출생했다. 2007년 1월 26일에 중산고속도로에서 남하하다가 교통사고로 중상을 입고 대중시등청병원에 실려가 구급을 받았지만 효과를 보지 못하고 1월 28일 19시 37분에 사망되였다. 향년 28세였다.     6. 려초녕(黎础宁):   대만 가수 려초녕은 1984년 10월 16일에 대만 남투현 포리진에서 출생했다. 2008년 11월 12일 야밤에 그녀는 자가용차안에서 숯을 피워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7. 반성의(潘星谊):   배우 반성의는 1980년 10월 11일에 안휘성 회북시에서 출생했다. 반성의는 2009년 2월 20일 오전 7시쯤에 자택에서 뜻밖의 사고로 사망되였다. 당시 그녀의 아버지는 주방에서 밥을 짓다가 갑자기 “쨍그랑”하는 소리를 듣고 달려가보니 어항이 깨여져 산산조각이 난 유리가 온 방바닥에 흩어져있었고 중상을 입은 딸이 유리조각가운데 넘어져있었다. 아버지는 딸의 시력이 좋지 못해(병독성결막염) 그날 병원에 가려고 준비하던 중이였다고 했다. 아버지는 어항옆에 전화가 있었는데 아마도 시력이 좋지 못해 어항에 부딪치면서 미끄러져 넘어진것 같다고 했다. 결국 반성의는 넘어지면서 유리쪼각에 대동맥이 파렬되였다. 그후 반성의는 북경대학제3병원으로 호송되였으나 구급효과를 보지 못하고 사망되였다. 향년 27세였다.    8. 진림(陈琳):   가수 진림은 1970년 1월 31일에 중경에서 출생했다. 1990년대에 전남편 심영혁(沈永革)과 함께 대륙가요계의 신화를 창조하며 최고인기가수로 활약했던 그녀는 심영혁의 혼외련으로 부부감정이 파렬되여 리혼한후 저조기에 들어가 아무런 작품도 내놓지 못했다. 2009년 7월 24일에 음악인 장초봉(张超峰)과 결혼했다. 결혼후 남편 장초봉은 진림이 전 남편 심영혁을 잊지 못한다는 리유로 안해에게 폭력을 행사했던것으로 알려졌다. 2009년 10월 31일에 진림은 북경의 친구집에서 투신자살했다.  9. 배우 백정(白静):   시버족(锡伯族)인 백정은 1983년 6월 4일에 료녕성 조병산시에서 출생했다. 백정은 2012년 2월 28일 오후에 북경시 조양구에 있는 거처에서 감정분규로 남편 주성해(周成海)의 칼에 찔려 사망했다. 향년 29세. 주성해도 뒤따라 자살했다.     10. 홍서양(洪瑞襄):   대만 배우이며 가수인 홍서양은 1968년 2월 23일에 대만 대북시에서 출생했다. 2012년 3월 23일 저녁 11시에 대만 신북시 림구구에 주차한 승용차안에서 홍서양의 시신이 발견되였는데 사망시간은 2일전, 사망원인은 숯을 피워 스스로 목숨을 끊은것으로 알려졌다. 향년 44세였다. 홍서양은 영화감독 왕도남(王道南)과 결혼했으나 자식이 없었다. 그녀는 왕도남과 리혼한후 배우 림홍상(林鸿翔)과 사귀였다.   11. 량정문(梁静雯):   향항 유선텔레비죤방송국 경제관련채널의 기자겸 아나운서인 량정문은 2015년 4월 8일에 자택에서 숨진채 발견되였다. 모친에 의해 발견된 량정문은 방안에서 숯을 피워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현지경찰은 량징원의 사망을 스트레스로 인한 자살로 추측했다. 유서는 발견되지 않았다. 향년 34세였다.    자살한 한국 녀자연예인들    1. 이은주:   배우 이은주는 1980년 12월 22일(음력 11월 16일)에 전라북도 군산시에서 이상열과 최순향의 1남 1녀중 둘째로 태어났다. 이은주는 2005년 2월 22일 오후 20분께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수내동 자신의 아파트 드레스롬에서 이동식 옷걸이에 넥타이 끈으로 목매 숨져 있는 것을 그녀의 오빠가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했다. 침대 옆에는 "엄마, 미안해, 사랑해. 영화가 너무 하고 싶었다. 사람으로 살아도 사는 게 아니다. 돈이 다가 아니지만 돈 때문에 참 힘든 세상이야. 나도 돈이 싫어. 누구도 원망하고 싶지 않다" 라는 내용의 유서를 발견했다.   이은주는 목을 매 자살하기 전에 먼저 커터칼로 왼쪽 손목 동맥을 자르려 시도했던 사실이 경찰 조사결과에 밝혀졌다. 그녀의 자해로 침대위에 피가 많이 흘려져 피자국이 많이 있었으며 자살 실패 후 목을 맨 것으로 경찰은 추정했다. 이은주는 영화 "주홍글씨" 촬영 후 알몸연기 등 노출연기에 의한 고민 때문에 우울증이 심했고 그로 인해 자살 직전까지 줄곧 불면증에 시달렸다.  은주는 영화를 찍으면서 살이 4킬로나 빠질 정도로 고생했다.  특히 한석규, 엄지원과 함께 찍었던 베드신 장면은 33번이나 찍었고 베드신을 찍는 일주일 내내 3~4시간 밖에 잠을 자지 못했다.    2. 유니:   배우 겸 가수 유니는 1981년 5월 3일에 출생했다.  1996년 드라마 《신세대 보고 어른들은 몰라요》를 통해 데뷔했고 드라마, 영화 등에 출연하며 연기 활동을 하였다. 2003년 1집 앨범을 발표하며 가수로 데뷔하였다. 2005년 2집을 발표하였으며, 2006년에는 일본에서 싱글 앨범을 발매하기도 했다. 2007년 3집 발매를 앞둔 2007년 1월 21일 낮에 자택에서 목을 매 자살하였다. 향년 27세. 사유는 오래전부터 앓아온 우울증으로 추정된다. 유서는 발견되지 않았다. 유니 어머니는 유니가 어려서 연예계에 데뷔해 내성적인 성격으로 마음고생이 심했으며 그로 인해 우울증이 있었는데 그게 원인인 것 같다고 밝혔다.    3. 정다빈:   배우 정다빈의 본명은 정혜선으로 1980년 3월 4일 경기도 성남시에서 1남 1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2007년 2월 10일, 당시 본인 남자친구의 집 화장실에서 수건으로 목을 매 숨진 채 발견되었다. 향년 28세. 아래는 사망 전 날 올라온 정다빈의 글이다. 복잡해서죽을것같았다.이유없이화가나서미칠것같았다. 멀미가날듯이속이힘들었다.머리가너무아파서눈물이났다. 신경질의성낼노의노예가될뻔했다.울다웃다미치는줄알았다. 내가나를 잃었다고생각했었고나는뭔가.정체성을잃어갔었다.   순간. 전기에감전이되듯이. 번쩍.   갑자기평안해졌다.주님이오셨다.형편없는내게.사랑으로. 바보같은내게.나의소중함을알게하시고.용기를주신다. 주저앉으려했던나를.가만히.일으켜주신다. 나는.이제.괜찮다고.말씀하신다. 나는.괜.찮.다. -정다빈, 싸이월드 미니홈피 (2007년 2월 9일)-   4. 최진실:   정상의 자리에 올라 만인의 사랑을 받았던 저명한 배우 최진실은 1968년 12월 24일에 아버지 최국현과 어머니 정옥숙 사이에서 태어났고 남동생 최진영(배우이자 가수이며 2010년 3월 29일에 자택에서 자살)이 있다. 최진실은 2008년 10월 2일 오전 6시 15분, 서울특별시 서초구 잠원동의 자택 욕실에서 숨진 채로 발견되었다.   대중문화 평론가 차우진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 시대가 갔다. 그를 스타로 만들고 바라보고 우상으로 세운 것도 우리들이었고 그를 고통 속에서 세상을 등지게 만든 것도 우리들이었다. 최진실의 죽음은 단지 누군가의 죽음으로 한 시대의 끝을 경험하는 것과는 다른 생각을 갖게 한다. 최진실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은 우리 자신에 대해 반성하는 것과 같다. 최진실의 부재가 충격적인 것은 시대적인 무의식이 투영되었다가 왜곡되는 과정이 적나라하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의 부재가 환기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그가 있어서 우리가 얼마나 행복했던가란 사실이다. 그의 죽음을 기억하고 그의 부재로부터 배운 것들을 잊지 않는 일이야말로 그를 애도하는 가장 옳은 방법이라고 믿는다.    5. 장채원:   연예인 장채원은 1982년 7월 18일에 출생했다. 원래는 장정한이란 이름을 가진 남자였지만 2004년말에 여자로 성전환 수술을 하고 “장채원”으로 개명하였다. 2008년 10월 3일 오후에 서울 한남동 자택에서 목을 매 숨진채 발견되었다. 경찰은 자살로 추정하였으며 남자 친구와 헤어진 뒤 충동적으로 자살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장채원은 자살당일 오전 자신의 미니홈피에 “엄마 미안해 다음에는 잘할께...”라는 글을 남겼다. 스포츠서울은 친구의 말을 인용 자살 원인을 악성 댓글에 의한 상처와 남자 친구와의 이별 때문이라고 전했다. 일부 언론은 배우 최진실의 자살로 인한 베르테르 효과(모방자살)일 가능성을 언급하기도 하였다.     6. 장자연:   배우 장자연은 1980년 1월 25일에 전라북도 정읍에서 1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교통사고로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도 역시 교통사고로 2006년에 돌아가셨다. 2006년 27세에 롯데제과 CF로 연예계에 데뷔하였으며 KBS《꽃보다 남자》에 출연하며 배우로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일명 “장자연 리스트”에 따르면 그녀는 데뷔 후 성상납 강요와 폭력 등에 시달려 왔다고 한다. 2009년 3월 7일에 경기도 분당의 자택에서 사망한 채로 언니에 의해 발견되었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30세였다. 사인은 구체적으로 알려지지 않았으나 우울증이 원인이라는 지인들의 증언이 있다.       7. 김수진:   간호사인 어머니가 서독으로 유학을 떠나1975년 6월 28일에 그곳에서 독일인과의 사이에서 김수진을 낳았다. 배우 김수진은 2013년 3월 29일 오후 9시쯤 강남구 논현동 자택에서 목을 매 숨진 채 발견됐다. 경찰은 우울증에 의한 자살로 추정했다. 김수진의 자살소식은 이틀이 지난 4월1일 인터넷을 통해 알려졌으며 수일간 검색어 상위에 올랐다.   한국의 가수 겸 배우인 유채영도 본명이 김수진이다. 1973년 9월 22일에 출생해 2013년 10월 말 위암 말기 판정을 받고 항암치료 중 2014년 7월 24일 향년 42세로 사망했다. 그외 1988년생인 가수 김수진, 1993년생인 가수 김수진, 1996년 2월 20일에 출생한 배우 김수진 등 동성동명의 건재한 연예인이 있다.    8. 설리 1994년 3월 29일에 출생했던 한국의 가수 겸 배우 설리(본명 최진리)가 2019년 10월 14일 오후 3시 20분쯤 경기 성남시에 위치한 심곡동의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설리는 그동안 각종 악성댓글에 시달려 온 것으로 알려졌다. 설리는 과거 "내게만 유독 색안경을 끼고 보는 분들이 많다", "오해하지 마라 난 나쁜 사람 아니야"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8. 구하라 1991년 1월 3일에 출생했던 한국의 가수이자 배우인 구하라 씨가 절친 설리가 자살한지 42일만인 2019년 11월 24일 저녁 6시쯤 서울시 강남구 청담동에 있는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구하라씨는 절친 설리가 극단적 선택을 하고 숨졌을 때 영상편지를 보내며 설리 몫까지 열심히 살겠다고 말했지만 결국 자신도 자살을 선택했다. 구하라씨는 절친했던 가수 설리 씨의 죽음으로 힘든 시간을 보냈던 것으로 알려졌다. 구하라씨는 이미 지난 2019년 5월에 한차례 자살을 시도했다가 구조된 적이 있다. 
307    개고기 먹지 말라니 소가 음매… 댓글:  조회:6656  추천:11  2015-10-03
개고기 먹지 말라니 소가 음매…   김희수     10월 4일은 세계동물의 날이다. 이날은 동물애호, 동물보호를 위한 기념일이다. 최초에 야생동물사냥은 인간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하나의 방식이였다. 그러다가 탐욕에 눈이 어두운 인간들이 야생동물을 마구 사냥하기 시작했다.   어릴 때에는 동물보호의식이 높지 못했기때문에 공기총이나 고무줄새총으로 새를 쏘아죽이는것을 취미로 여겼다. 그때는 사냥총으로 야생동물을 사냥하는 일도 종종 있었다.   인간이 조성한 생태계파괴, 환경오염은 동물의 생존에 엄중한 위험을 주고있다. 게다가 인간의 탐욕으로 인한 사냥으로 많은 동물들이 멸종위기에 처했다.   국제자연보호련맹의 “적색목록(레드리스트-红色名单)”에 따르면 전세계적으로 약 2만 1000종이 멸종의 위험에 처해있는데 그중에서 약 1만종은 멸종의 위험성이 매우 커서 시급한 보호가 필요하다고 한다. 근 500년래 전세계적으로 785종의 동물이 이미 멸종되였고 멸종위기에 놓인 동물들은 해마다 크게 증가하고있다.   야생동물보호는 아주 절박한 상황에 놓였다. 그런데 인간이 사육하는 동물에마저 보호의 목소리를 높이는건 리해가 되지 않는다. 근년에는 복단대학연구생이 고양이를 학대한 사건, 한 녀성이 하이힐로 고양이를 밟은 사건, 고양이를 불에 태운 사건 등 고양이학대현상이 잇달아 나타남에 따라 동물을 학대하지 말데 대한 목소리도 높다.   동물학대에 대해 생각이 미치자 어릴 때 잠자리를 하나 둘 잡아서는 무지막지하게 잠자리날개를 마구 잘라버리던 기억이 새삼스레 떠오른다. 잠자리를 각을 떠서 죽이는 아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동물학대라고 생각해본적이 없었고 동물학대라고 지적하는 어른들도 없었다. 잠자리가 인간들에게 하잘것없는 동물이였기 때문일가?   다 같은 동물인데 쥐를 밟아죽이면 잘 죽였다고 하고 고양이를 밟아죽이면 동물학대라고 한다. 모기나 파리를 때려죽이는건 응당한 일이고 벌레같은것은 밟아죽여도 뭐라고 나무람하는 사람이 없다. 쥐나 모기나 파리는 해로운 동물이라서 그렇다쳐도 벌레는 왜서 밟아죽여도 동물학대라고 하지 않는가?   어느 전국인대대표가 고양이고기와 개고기를 먹는것을 금지할것을 건의했다고 한다. 식품안전을 위한것이라면 리해된다. 그러나 그 리유뿐이 아니다. 고양이와 개가 인간의 반려동물이라는것이 주된 리유이다. 이는 너무 황당하다. 그럼 소, 양, 말, 닭, 오리 등은 동물이 아니란 말인가? 왜서 소고기, 양고기는 먹어도 되고 고양이고기, 개고기는 먹으면 안된단 말인가? 차라리 모든 동물의 고기를 먹는것을 금지하라고 하지? 물론 열에 아홉이 항의하겠지만…   야생동물을 보호하고 동물학대를 반대해야 하는것은 천만지당한 일이지만 인간이 사육하는 동물에까지 등급을 매기고 존비귀천의 차별을 두는것은 한심하고 황당하고 어이가 없다. 인간사회에는 상류층, 중산층, 하류층이 존재하지만 동물계에는 그런 등급이 없다. 있다면 그건 인간이 정한것이다.   인간은 무엇이나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동물보호도 인간중심으로 돌아간다. 애완견은 보호동물이 아니지만 인간이 좋아하기때문에 특급보호동물보다 더 높은 보호를 받는다. 특급보호동물은 중점보호대상이지만 일부 인간들은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마구 사냥하고 마구 잡아서 암시장을 통해 교역한다.   희귀동물, 명종에 가까운 동물이기에 특별대우를 받는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고양이나 개가 특별대우를 받는것은 양이 울고  소가 항의할 일이다. 쥐도 못잡는 고양이나 집도 못지키는 개따위가 인간에게 고기와 털을 공급하는 나보다 존귀하다니? 아이구, 매매… 인간들에게 안겨 재롱을 부리는 고양이나 개같은 기생충따위가 인간에게 고기와 털, 우유를 공급하는 나보다 더 높은 대우를 받다니? 나도 상류층인간들에게 아부할것을…음매…        
306    그날의 그 사건 댓글:  조회:3224  추천:0  2015-10-03
그날의 그 사건   김희수     황산약업유한회사의 강철사장은 거래처의 구옥화와 다섯번째로 만났다. 구옥화는 강철보다 열살이나 어린 30세의 요염한 녀인이였다. 그녀는 몸매가 버들가지 같고 얼굴은 부용꽃 같아서 남자들을 끌만한 매력이 있었다. 그녀는 강철과 업무상의 거래로 만날 때마다 장사얘기를 하는 도중에 가끔씩 추파를 던지곤 했다. 요염한 웃음으로 유혹하기도 하고 대화중에 미묘한 암시를 보내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강철은 그녀를 마구 껴안고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참았다. 사실 40세의 젊은 사장인 강철에게 혼외사랑을 요구하는 녀인들이 여럿이 있었고 그 중에는 구옥화보다 더 젊고 더 어여쁜 처녀들도 있었다. 하지만 강철은 자기에게 아들딸을 낳아준 현숙한 조강지처를 생각하면서 녀인들의 유혹을 일일이 물리쳤다. 그런데 그날 저녁에는 귀신에게 홀리웠는지 그만 구옥화의 유혹에 넘어가고 말았던것이다. 업무상의 일을 상의하다가 저녁이 되자 강철은 귀빈루술집에서 구옥화를 저녁식사에 초대했고 둘만의 자리에서 구옥화는 요염한 웃음으로 강철에게 련속 술을 권했다. 장사일이 순조롭게 되자 강철은 그녀가 권하는 술을 마다하지 않고 모두 마셔버렸다. 술이 거나하게 되자 구옥화는 강철을 부축하여 호텔에 들어갔고 그 다음 그녀는 강철을 침대에 쓰러뜨리고 강철이 어쩔 사이도 없이 옷을 벗고 마구 덮쳐들었다. 녀인이 발가벗고 달려드는 바람에 강철은 안해고 뭐고 생각할 겨를이 없이 녀인에게 빨려들어갔다… 일이 끝난후 강철은 후회하며 애꿎은 담배만 뻑뻑 빨았다. 그런데 그는 샤워하겠다고 화장실에 들어간 구옥화가 거기서 공안국에 자신이 강간당했다는 제보전화를 걸고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얼마후 경찰들이 눈앞에 나타나자 강철은 어리둥절해졌다. 구옥화가 손으로 강철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남자가 바로 방금전에 저를 강간했어요.》 목욕수건으로 몸을 두른 구옥화는 찢겨진 브래지어와 팬티를 강간당한 증거물로 내놓았다. 경찰들이 보니 침대시트가 어지럽게 흐트러져 있었고 녀인의 옷이 여기저기 널려져 있었다. 경찰들은 구옥화를 다른 방에 데리고 가서 자초지종을 물었다. 구옥화는 울면서 고소했다. 《저 사람과 업무상담이 끝나고 저녁에 함께 술을 마셨어요. 워낙 술이 약한 저는 그만 취했는데 저 사람이 호텔까지 끌고와서 저를 침대에 눕히고 갑자기 제 몸을 덮쳐왔어요. 깜짝 놀란 저는 술이 확 깼어요. 저는 젖먹던 힘까지 다 내여 몸부림치고 저 사람의 잔등까지 할퀴였지만 벗어날수 없었어요. 그래서 저는 제발 놓아달라고 애걸하며 빌었지만 짐승같은 저 사람은 끝내 제 몸을 짓밟아놓고야 말았어요.》 구옥화는 자기를 성폭행한 강철을 엄하게 징벌해달라고 강력하게 요구했다. 그런데 경찰들이 다시 강철이한테 물으니 구옥화의 말과 완전히 달랐다. 《강간이라니? 정말 억울합니다. 저는 그녀를 강간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실무상담을 하다가 함께 저녁식사를 했고 저는 기분이 좋은 김에 그녀가 권하는 술을 많이 마시고 취한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그녀가 저를 부축하여 호텔까지 왔는데 갑자기 그녀가 저를 침대에 쓸어눕혔습니다. 그녀가 주동적으로 옷을 벗고 달려들었는데 오히려 강간당한건 제 쪽입니다.》 두 사람의 진술이 전혀 다른것을 보고 신중하게 사건을 처리하기 위해 경찰들은 즉시에 기술부문의 일군들을 현장에 불러 진일보 조사하여 구옥화가 제공한 찢겨진 속내의와 침대시트의 음모 등 물품을 증거로 확보했다. 강철이 한사코 구옥화를 강간했다는것을 부인했지만 경찰측은 유력한 인증과 물증을 내놓으며 그의 강간죄혐의가 성립된다고 인정했다. 이 소식을 들은 강철의 안해 홍매는 남편이 강간범이라고 믿지 않았다. 홍매는 공안국에 찾아가 남편과 구옥화가 한 공술을 자세히 료해하고 의문되는 점을 발견했다. 그녀는 남편과 구옥화가 그날 저녁식사를 했다는 귀빈루술집을 찾아가 남편의 사진을 내보이며 정황을 자세히 조사해보니 두 술집접대원이 그날 사진의 남자가 취했고 녀자쪽에서 부축했다고 했다. 이 중대한 증거를 내놓자 구옥화는 강철의 안해가 술집접대원을 매수하여 가짜 증언을 했다고 물고 늘어졌고 경찰측도 그것이 강간죄를 부인할만한 증거가 되지 못한다고 했다. 하지만 홍매는 락심하지 않고 변장하고 남몰래 구옥화의 뒤를 밟았다. 홍매는 남몰래 구옥화의 뒤를 미행하다가 구옥화가 맥주집에서 어떤 사내와 만나 통쾌하게 복수했다며 술잔을 들고 경축하는것을 목격했다. 그녀는 즉시 접대원으로 가장해서 음식을 나르는체 하며 그들의 칸에 들어가서 몰래카메라를 장치했다. 그들이 주고받는 말과 행동이 모두 몰래카메라에 잡혔다. 홍매는 경찰들을 불렀고 경찰들은 몰래카메라에서 구옥화와 어떤 사내가 주고받는 대화를 듣고 모든 영문을 알수 있었다. 원래 강철은 1년전에 술먹고 사고를 친 한 직원을 해고 시켰는데 그 직원이 바로 구옥화의 동생이였다. 노래방아가씨로 여러 술집을 다니며 사내들을 꼬신 경험이 있는 구옥화는 직업을 잃고 거지신세가 된 동생을 위해 복수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강철을 접근하여 몸까지 바치면서 복수극을 꾸몄던것이다. 억울한 루명에서 벗어난 강철은 구옥화를 무함죄로 고소하겠느냐는 안해의 물음에 《놓아줍시다》하고 대답했다.    
305    림립과가 모택동을 암살하려고 했던 내막 댓글:  조회:5432  추천:3  2015-10-03
림립과가 모택동을 암살하려고 했던 내막   (번역)   1971년 8월 16일에 모택동은 무한에 도착했다. 무한에서 모택동은 선후로 호북성, 호남성 등지의 당정군 책임자들과 5차례의 담화를 나누었다. 모택동은 진백달(陈伯达), 황영승(黄永胜), 오법헌(吴法宪), 엽군(叶群), 리작붕(李作鹏), 구회작(邱会作) 등의 려산회의에서의 표현에 대해 비판하면서 림표(林彪)도 일부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했다. 림표는 여러가지 경로를 통해 모택동의 남방순시담화내용을 알게 되였다. 당황해난 림표는 엽군을 시켜 선후로 황영승, 오법헌, 리작붕, 구회작 등을 찾아가 밀담하면서 대책을 상의하게 했다. 당초 림표의 생각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데도 가지 않는것이였다. 림표가 운명을 하늘에 맡기려는 생각이 든것은 형세를 분석한후 정치생명을 내걸고 모택동과 이판사판으로 싸우려고 해도 승산이 적다는것을 알게 되였기때문이다. 림표는 자신의 행동이 자식들에게 련루될가봐 겁이 났다. 엽군의 생각은 림표와 달랐다. 모택동의 남방순시담화내용중에 자신의 이름도 있다는것을 알게 된후 혼비백산하여 림표를 보고 온 가족이 함께 외국으로 도망치자고 했다. 그러나 림립과(林立果)는 도망치자는 어머니 엽군의 주장을 반대했다. 그는 자신이 장악한 “련합함대”를 거느리고 주동적으로 모택동과 해보려고 했다. 림립과는 누나 림립형(林立衡)과의 담화중에 이런 생각을 드러낸적이 있었다.  “누나, 어차피 형세는 수장(림표를 가리킴)에게 매우 불리하니깐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고있기보다 주동적으로 출격하면 일루의 희망이 있을지도 몰라. 난 형세의 발전을 기다려볼 생각이야. 정 안되면 목숨을 걸고 모택동과 한바탕 해보거나 광주에다 따로 중앙을 세울거야. 그래도 안되면 산에 올라 유격전을 하는거지. 수장께서는 수십년동안 군대를 지휘했기에 위망이 높아. 시기가 되면 수장께 충성하는 사람들이 모두 일어나 모택동이 한 나쁜 짓을 만천하에 공개할거야.” 100만대군을 거느린 통수였던  림표는 긴요한 관두에 우유부단하면서 말설이였다. 상대는 전국인민들에게 신으로 떠받들리우고있는 모택동이였기때문이다. 림표는 당내의 합법적인 투쟁을 통해 정면으로 대응할수 없었다. 비상적인 수단중에서도 신세를 망치지 않고 가족에게 련두되지 않을 빈틈없는 계책을 찾을수 없었다. 막다른 골목에 이른 림표는 마음을 다잡고 모택동을 먼저 해치우자는 립립과의 제의에 동의했다. 림표는 이것이 위험한 행동이라는것을 알고있었지만 궁지에 몰린 처지인지라 이판사판으로 모험을 해보지 않을수 없었다. 9월 8일에 림립과는 림표가 쓴 “림립과, 주우치(周宇驰)동지가 전달하는 명령대로 하시오”라는 명령서를 지니고 몰래 북경으로 돌아가 급히 모택동을 암살할 행동계획을 선포했다. 모택동의 기요원(机要员) 사정의(谢静宜)의 남편은 공군당위사무실에서 사업하고있었다. 남방순시를 떠나기전에 모택동은 사정의를 통해 림립과가 공군에 비밀조직인 “련합함대”를 성립하고 무장으로 정권을 탈취할 준비를 하고있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그리하여 남방순시도중에 모택동은 로정에 대해 엄밀하게 비밀을 지키면서 가는 곳마다 방비를 강화하였다. 그는 림표의 반혁명정변을 방지하기 위해 각지의 당, 정, 군의 책임자들에게 군사정변을 일으키려는 자들이 있다고 공개했다. 력사상에서 림표거나 황영승과 깊은 연원이 있었던 일부 대군구에 대해 모택동은 강건책과 유화책을 함께 쓰면서 상대방을 와해시켰다. 어느 한번 모택동은 여러 사람앞에서 광주군구 사령원 정성(丁盛)과 광주군구정위 류광원(刘兴元)을 불러놓고 말했다. “당신들은 모두 나의 홍1방면군이였지. 그럼 《3대규률8항주의》를 불러보시오. 당신들은 보조를 맞추어 일체 행동은 지휘에 복종해야 하지요.” 모택동의 이 방법은 매우 효과적으로 림표일당의 심리담벽을 파헤쳐 그들의 부서를 혼란시키고 원래의 계획을 전부 수포로 돌아가게 하였다. 모택동의 이 거동은 당과 군대내의 림표세력을 견제하여 그들로 하여금 감히 경거망동하지 못하게 했다. 또 그들로 하여금 마음을 돌려 모택동에게 림표의 문제에 대해 반영하게 하는 효과를 거두었다. 그중 몇가지 문제는 모택동의 경각성을 불러일으켰다. 모택동은 원래 림표에 대해 경계하고있었기에 가는곳마다 방비하고있었다. 이미 항주에 머물고있던 모택동은 의심스러운 상황을 보고받은후 불길한 징조가 잠복되여있다고 단정했다. 그리하여 림립과가 림표의 친필명령서를 지니고 북경으로 달려간 9월 8일 저녁에 모택동은 길을 재촉하여 속히 북경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모택동은 자신의 행적에 대해 철저하게 비밀에 붙였다. 심지어 북경에서 중앙의 일상사업을 주체하고있는 주은래마저도 아무것도 모르고있었다. 모택동은 또 상대방을 현혹시키기 위해 자신의 전용렬차를 여기여기 움직여놓으면서 대외에 자신이 10월 1일전날밤에야 북경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있다는 가상을 보여주었다. 그리고나서 이틀후에 갑자기 항주를 떠나 상해를 거쳐 북경으로 돌아갔다. 그후의 사실이 증명하다싶이 모택동의 미혼진이 확실히 림립과일당을 미혹시키는 효과를 일으켰다. 원래 모택동암살행동은 모헙적인것이여서 심리상에서나 기술상에서 모두 극복하기 힘든 장애와 난제가 존재했다. 모택동은 신같은 존재이고 전국인민이 숭배하는 우상이여서 모택동에게 불충한 털끝만한 생각도 대역부도한 죄로 취급되고있었다. 그런 모택동을 직접 살해한다는것은 목숨을 내놓고 하는 모험이 아닐수 없었다. 게다가 모택동의 행적이 수시로 변하고 거주지도 경계가 삼엄하여 암살행동이 더욱더 어렵게 되였다. 이런 정황에서 림립과의 수하들이 비록 9월 8일밤부터 시작하여 이틀동안 머리를 쥐여짜며 각종 암살행동방안을 꾸몄으나 시종 손을 쓸 확실한 방법을 찾을수 없었다. 골간성원들은 비록 림씨부자한테 충성을 맹세했지만 정작 일이 닥쳐오자 “련합함대”의 성원 대부분은 겁이 나서 모택동의 행적을 알수 없다는 리유로 앞에 나서려고 하지 않았다. 이런 정황에서 암살행동을 책임진 림립과도 멈춰야 할지 게속 해야 할지 견단을 내리지 못해 동요하기 시작했다. 림립과는 제1선에서 지휘하고있는 강등교(江腾蛟)에게 “잠시 포치하지 말고 기다려라. 그렇잖으면 수습할 여지가 없다”고 통지했다. 그런데 이것이 시간을 벌기 위한 모택동의 계책과 맞아떨어졌다. 림립과가 잠시 손을 쓰지 말라고 명령을 내린것과 동시에  9월 10일 오후에 모택동은 갑자기 항주를 떠나 상해로 달려갔다. 그전에 모택동은 자신이 항주를 떠난다는 사실과 상해를 거친다는 사실을 당지의 책임자에게 알리지 말라고 명령했다. 상해역에 도착한후 모택동은 상해의 고가화원을 돌아보던 이왕의 관례대로 하지 않고 전용렬차에서 밤을 보냈다. 모택동은 북경으로 돌아오기전에 사람들의 이목을 가리기 위해 “상대방이 눈치채지 못하게 도망(金蝉脱壳)치는 계책을 썼다. 모택동은 반란파출신의 상해시혁명위원회 부주임 왕홍문더러 자신을 대표하여 금강호텔에 허세우를 청해 식사대접을 하게 했다. 왕홍문은 또 모택동의 지시대로 림립과의 패거리이며 공군제4군의 제1정위인 왕유국(王维国)도 함께 청했다. 이는 허세우더러 왕유국을 견제하기 위함이였다. 이렇게 배치를 해놓은후 모택동은 간다는 말도 없이 몰래 기차를 타고 상해를 떠났다. 모택동은 가는 길에 모두 푸른등을 켜놓게 하고 밤낮으로 길을 재촉하여 20일 오후에 북경에 도착했다. 북경으로 돌아온후 모택동은 안전을 위해 인차 중남해로 들어가지 않았다. 그는 먼저 봉태역에서 북경시 당정군의 제1책임들을 불러놓고 동향을 알아보았다. 모택동은 북경안팎에 이상한 움직임이 없는것을 확인했지만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여 북경군구사령원 리덕생에게 공정병을 집결해 남구에 들어서도록 분부했다. 그렇게 한후에야 모택동은 중남해의 거처로 돌아갔다.    
304    금도는 그런 쩨쩨한 말이 아니라 탁 트인 마음이다 댓글:  조회:3587  추천:0  2015-10-03
금도는 그런 쩨쩨한 말이 아니라 탁 트인 마음이다 [강상헌의 바른말 옳은글 98 ] 2014년 새해 금도사용설명서   강상헌 언론인 · (사)우리글진흥원 원장     사노라면 언젠가는 밝은 날도 오겠지 // 흐린 날도 날이 새면 해가 뜨지 않더냐 // 새파랗게 젊다는 게 한 밑천인데 // 쩨쩨하게 굴지 말고 가슴을 쫙 펴라 // 내일은 해가 뜬다 내일은 해가 뜬다. (김문응 작사 길옥윤 작곡, 1966년작 《사노라면》 가사 1절)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뜬다.” 왕년의 대작 미국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여주인공 스칼렛 오하라(비비언 리 출연)가 막판에 주먹 불끈 쥐며 그렇게 부르짖었다. 원문(Tomorrow is another day.)보다 우리말 번역문이 더 아름다워 우리 젊은이들 가슴을 더 흔들었다. “사노라면”의 해 이미지와 흡사하지 않는가?   그 가슴에 품은 뜻, 흉금이다. 왜 있지 않는가? 흉금을 터놓고 얘기하자는 말, 가슴을 쫙 펴고 구긴 데 없이 당당하게 살자는 이 노래가 사람을 내내 달뜨게 하는 까닭일 터. 그 낱말의 사촌이 바로 금도(襟度)다.   마음의 큰 터전, 모두를 보듬어내고도 화수분일 것 같은 백범 김구 선생 웃음보처럼 낙낙한 가슴 속을 이른다. ‘다른 사람을 포용할만한 도량’이라고 사전은 새긴다. ‘금도’는 이렇듯 아름답고 귀한 말이다. 아웅다웅 투닥토닥 하는 상황에 쓰는 지저분한 말이 아니다.   70년대 통속 연애소설의 상투적 주제 ‘넘어서는 안 될 선’의 기억이 아직 남아서일까? 정치인들의 그 ‘금도’는 잘라 말해 어리석다. 금도의 뜻이 그게 아니다. 뚱딴지도 유분수지, 금도가 ‘마지노선’이란다. 최근의 보도를 보자.   최경환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말이 정치적 금도를 넘나들고 있다."고 했다. 같은 당 황우여 대표는 “...인간적 아픔은 피해가는 것이 최소한의 금도 아니었는가”라고 했다. 그 당 대변인이 “SNS에서도 넘지 말아야할 선이 있다"고 언급한 그 ‘선’이 바로 그들의 금도다. 민주당 전병헌 원내대표도 “...최소한의 예의와 금도를 깬 처사"라고 ‘금도타령’으로 벋섰다.   정치를 평하고 논하는 대학교수도 예외는 아니다. ‘정론-막말의 금도’란 이름의 신문 칼럼에서 신율 명지대 교수는 “...모든 말에는 금도가 있다. 부부싸움에도 해도 될 말과 해선 안 될 말이 있고 부모 자식 간에도 마찬가지다.”라고 했다.   미디어오늘은 여러 차례 이 말의 오염(汚染)과 오용(誤用)을 지적해 왔다. 한겨레신문도 이런 밉상을 보다보다 지쳤는지 한 칼럼에서 이 말의 뜻을 되레 차분하게 설명해줬다. 경향신문 사장을 지낸 언론인 고영재 씨의 글 이 대목을 통해서다.   ... 금도, 의미심장한 말이다. 인간 세상의 난제를 해결하는 실마리가 숨어 있는 말이기도 하다. 금도에 담긴 도량, 배려, 분별, 약자에 대한 측은지심 등의 의미를 곱씹어 볼 일이다. 무릇 금도란...   ‘금도 타령’이 한동안 뜸했다. 그러다 또 한 무리 정치인들이 생각 없이 엉터리 말 ‘금도’를 질러대니 우리 언론들 따라 외우기 바쁘다. 우리 신문과 방송의 데스크들, 선배님들은 요즘 후배님들을 어떻게 지도하는지 궁금하다. 걱정스럽기도 하고. 그들은 모두 공인(公人)들이다. 선배 김재곤 기자의 핏대가 문득 그립다. 고 김용정 기자도.   금지가 뼈에 사무친, 하릴없는 패배의식의 결과일까? 금도(襟度)를 금도(禁度)라고 지레 무심코 짐작한 결과로 본다. 하긴, 그 나이 사람들의 의식은 측은할 정도로 쩨쩨할 수 있다. ‘날이 새면 해가 뜨지 않더냐’라고 절규했어야 할 정도로 핍박의 사고에 익숙했던 시절이었다. 독재의 프레임은 차츰 ‘대인(大人)의 금도’와 같은 표현들을 세상에서 지웠다.   세상이 그렇게 이끌었을 수도 있었다. 전적으로 그들의 (무식) 탓만은 아니라는 얘기다. 그런 선배들에게서 후배들은 따라 배웠다. 그러나 고쳐야 할 사항이다. 그 낱말뿐일까?   금도는, ‘넘어서는 안 될 선’ 따위의 야릇한, 엉큼한 말이 아니다. 너른 가슴이다. 관대함이고 아량이다. 남을 즐겁게 하는 배려다. 푸근한 미소다. 당당함이고 흔쾌함이다. 열린 마음이다. 이효리의 마음 같은 상큼한 청춘이다. 베풂이고 감사다. 금도는, 2014년 새해 모든 이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기쁨이다.     토/막/새/김 저고리[의(衣)] 앞 여미는 부분이 옷깃[금(襟)]이다. 저고리가 흩날리지 않도록 단정하게 여미는 데 ‘하지 말라’는 뜻 금(禁)을 썼다. 두 이미지(그림글자 衣 禁)가 하나 됐다. 옷깃 안쪽은 사람의 가슴, 襟이 옷깃이면서 ‘가슴’의 뜻이 된 인연이다. 신령스런 힘이 숨 쉬는 숲 임(林)과 제단 또는 신(神)의 영역을 뜻하는 시(示)가 붙어 ‘금하다’[禁]라는 완강한 뜻이 됐다. 나무[목(木)] 모여 숲[林]되고, 거기에 제단[示] 놓여 금지[禁]가 되고, 거기에 저고리[衣] 붙어 가슴[襟]되는, 오랜 문자역사의 퍼즐은 사물의 이치를 보듬고 있다. 본디다.          
303    력사는 말한다 댓글:  조회:6406  추천:15  2015-08-17
력사는 말한다   김희수     항일전쟁승리 70돐기념일을 눈앞에 두고 발표된 아베담화에서 아베 신조는 중국, 조선, 한국, 말레이시아, 필리핀, 싱가포르, 미얀마, 인도네시아 등 아시아인민에게 아픈 상처를 주었던 침략행위에 대해 직접적 사과를 하지 않았다.   일본정부는 30만명이상의 민간인들을 학살한 남경대학살참극을 승인하지 않고있다. 그들은 중국인, 조선인(한국인) 등 6000여명을 죽이며 생체실험의 만행을 저지른 일본 731세균부대의 죄행도 감추려고 한다, 그들은 중국(대륙, 대만), 조선(한국), 동남아, 네덜란드 등지의 40만명이상의 녀성들을 강제로 끌어다가 일본군의 성노예로 만든 위안부만행도 부인하고있다.   지난 6월에 장춘에 갔을 때 위만주국황궁박물관을 참관한적이 있었다. 이 박물관은 중국에 현존하는 3대궁정유적의 하나로 장춘시 관성구 광복로 북측에 자리잡고있다. 중국력사에서의 마지막 황제 부의가 거주하던 위만주국괴뢰황궁을 재건한 이 박물관은 일본제국주의가 무력으로 중국동북을 침략하여 점령하고 파쑈식민통치를 실시한 력사의 증거물이다.   1931년 9월에 동북을 침략한 일본은 중국을 본격적으로 침략하기 위한 일환으로 이듬해 3월 9일에 청나라 마지막 황제 부의를 부추겨 “만주국”이라는 괴뢰정부를 세웠다. 간략하여 위만황궁(伪满皇宫)이라고 불리우는 이 박물관에 들어서면 일본이 동북을 전 중국을 침략하기 위한 후방으로 삼으려고 어떻게 부의를 조종했으며 부의가 무너진 청정부를 만회하려고 어떻게 일본제국주의의 꼭두각시노릇을 했는지… 등등의 생생한 력사현장을 눈앞에서 볼수 있다.     부의는 1932년 9월 15일에 여기서 일본에 만주국을 승인받기 위해 동북지구의 주권을 팔아먹는 《일만의정서(日满议定书)》를 체결했다. 그리하여 동북지구는 일본이 침략전쟁을 확대하는 군사, 물자 보급기지로 되였다. 일본제국주의는 “만주국”이라는 든든한 후방이 있게 되자 1937년 7월 7일 밤에 로구교사변을 일으켜 본격적으로 중국을 침략하기 시작했다.   위만황궁에서 동쪽으로 이어지는 동북함락력사진렬관(东北沦陷史陈列馆)에 들어서면 일본제국주의가 무력으로 중국동북을 침략하고 파쑈식민지통치를 실시한 증거자료(사진, 문물, 실물)를 볼수 있다. 또한 동북인민들이 평화와 자유를 위해 피흘리며 일제와 맞써 싸운 위대한 장거를 볼수 있다. 그 속에는 양림, 조기석, 김순덕, 최철관, 안희숙, 박락권, 최희숙, 김훈, 김명주, 김정길, 김성범, 리동원, 김윤식, 강인복, 김성룡, 조영희, 박상걸, 임두식 등 수많은 우리 민족의 항일투사들도 있다.   일본은 저들의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해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으로 대동아공영권이란 슬로건을 내세웠지만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를 점령하고 가장 먼저 한 일은 피점령국의 자원과 로동력을 략탈하는것이였다. 남의 나라를 마구 짓밟고 마구 강탈하고 마구 학살하는 이것이 바로 일본침략자의 진면모였다.   일본은 침략전쟁을 벌리면서 승승장구하여 중국의 절반지역을 점령하였지만 침략자의 패배는 이미 시작부터 정해져있었다. 일본은 중국이란 이 기름진 땅덩어리가 욕심이 나 혈안이 되였지만 일본이란 늑대가 삼키기엔 중국은 너무 거대한 룡이였다. 비록 잠에서 깨여나지 못해 늑대에게 물려 상처투성이 되였지만 룡은 룡인것이다. 일본은 속도전을 하려고 했지만 덩치가 큰 중국을 단시일내에 삼키려는것은 망상에 불과했다.   이에 반해 모택동은 지구전을 구사했고 국공이 항일민족통일전선을 구축하여 일치 항일하며 일본군과 용감하게 싸웠다. 게다가 일본은 동남아시아에 이르기까지 전선을 너무 광범하게 형성했기에 장기전을 하려면 후방보급이 따라가기 힘들었다. 일본의 패배는 시간문제였다. 미국과 쏘련의 개입은 일본의 패배를 앞당기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우리 민족의 수많은 항일투사들도 일제와 피흘려 싸우면서 일제의 패망과 항일전쟁승리를 이끄는데 일조했다.   일본은 침략전쟁에서 패배한지 70년이 되였지만 력사를 외곡하면서 과거의 침략력사에 대한 사죄와 반성을 하지 않고있다. 이는 일본군국주의의 뿌리깊은 침략근성이 아베 신조를 비롯한 극우세력의 내면에 깔려있다는것을 말해준다. 일본은 헌법 제9조(평화헌법)개정을 통해 집단자위권을 근거로 자국이 공격받지 않더라도 지구촌 곳곳에 자위대를 보내 전쟁을 할수 있는 보통국가로 변신하려고 한다.   하지만 력사는 일제침략만행을 고스란히 기록하고있기에 과거의 력사가 반복되는것을 원하지 않는 우리들은 일본군국주의부활을 눈뜨고 보고만 있지 않을것이다.    
302    전설의 조선족영웅 무정장군 댓글:  조회:8549  추천:0  2015-07-19
전설의 조선족영웅 무정장군     “무정(武亭)장군이 엄지손만 척 꺼내들고 어디를 겨냥하면 그곳에 백발백중의 포탄이 떨어져 적들에게 불벼락을 안겼다.” 이는 지난 세기 20년대로부터 40년대를 걸치면서 중국의 광활한 대지우에서 제국주의침략자를 반대하여 싸우고 나라의 독립과 민족의 해방을 위해 싸운 중국조선족의 걸출한 대표이며 전설의 영웅인 무정장군에 대한 전설적 이야기이다. 1905년에 조선 함경북도 경성군에서 태여난 무정(본명 김무정)은 서울에서 가난한 고학시절을 보내면서 나라를 잃은 비애를 온몸으로 겪었다. 혁명에 뜻을 두고 청년운동과 로동운동에 종사하던 그는 일제에 체포되여 세번이나 옥살이를 하면서 갖은 혹형을 받았다. 1923년에 18세에 나는 무정은 조선공산주의자 려운형의 영향으로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망명했다. 이듬해에 하남보정군관학교 포병과를 졸업하고 국민당부대에서 포병중좌로 활약하던 그는 군벌혼전에 실망하고 1925년에 장가구에서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그후 무한, 상해에서 지하투쟁을 하다가 두차례 체포감금되였으나 조직의 구명운동으로 석방되여 향항으로 망명했다가 1930년 6월에 중앙쏘베트근거지로 찾아갔다. 거기서 무정은 팽덕회수하의 홍군제3군단 포병련 련장으로 임명되여 남정북전을 시작했다. 그해 7월에 미, 영, 일 제국주의 군함은 동정호반의 악주성을 미친듯이 포격하였다. 격분한 무정은 팽덕회에게 반격을 제의하였다. 팽덕회장군은 그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본때를 보여주라고 고무하였다. 당시 홍군내에는 포를 쏠줄 아는 사람이 팽덕회와 무정뿐이였다. 수중의 야전포 4문과 산포 2문으로 전사들을 지휘하여 다가오는 적함을 겨누고 포격하자 10여척의 적함이 삽시에 불에 탔다. 홍군전사들은 사기가 충천하여 “제국주의를 타도하자”고 소리높이 웨쳤다. 이는 중국인민해방군력사상의 첫 대포소리였다. 이로부터 무정의 이름과 함께 조선인의 명성이 홍군내에 널리 알려졌다. 1931년에 홍군중앙군사위원회 직속포병퇀이 창건되면서 무정은 제2임퇀장에 부임되였고 1933년 10월에 홍군대학 특과학교가 세워지면서 교장을 겸임하여 홍군내의 최초포병인재들을 키워내는데 혁혁한 공훈을 세웠다. 홍군의 2만 5000리장정이 시작되자 무정은 중앙군위기관으로 편성된 제1종대 제3지대 사령원 겸 정위로 임명되여 장정에서 가장 치렬한 상강나루터점령임무를 수행했다. 장정도중에 당중앙의 북상항일을 반대한 장국도의 음모로 각 군단과 군위, 모택동과의 련계가 끊어진 상황에서 무정은 팽덕회의 지시를 받들고 목숨걸고 비밀전신번호를 제1군단에 전해줌으로써 당중앙과 홍군을 위기에서 만회했다. 무정은 주덕총사령, 팽덕회부총사령 등 중앙군위지도자들의 가장 신임받는 장군의 일원으로 되여 장정을 마치고 연안에 도착했다. 1936년 6월에 무정은 홍군사단급이상 38명으로 조직된 연안항일군정대학 제1기고급간부과 학원으로 해당학과를 배우면서 강의도 하고 항일군정대학을 졸업한 뒤 홍군총부작전과 과장, 팔로군총부작전과 과장으로 되였다. 1937년 8월 25일에 중국공농홍근은 국민혁명군 제8로군으로 개편되였다. 그해말에 항일전쟁의 새로운 수요에 따라 팔로군총부에서는 포병퇀을 건립하기로 결정했다. 중앙군위에서는 포병퇀건립임무를 무정에게 맡겼다. 원 소속병력에 유격 제2대를 포함하여 총 1000여명을 6개 련으로 편성했다. 그외에 기관련, 관통대 및 선전대를 가진 포병퇀을 건립하였다. 1938년 1월 28일에 산서성 림분부근의 한 광장에서 포병퇀건립의식이 성대히 치러졌다. 대회에서는 팔로군판사처 주임 팽설풍이 중공중앙군사위원회의 임명서를 랑독하면서 무정을  우리 군 첫 포병퇀 퇀장으로 선포했다. 포병퇀건립초기에 해당군사장비도 없고 간부와 기술골간도 없었다. 무정은 우선 간부를 양성하기 위해 계획있게 정치사상교육을 진행한 기초에서 제4련을 전문 간부를 양성하는 련으로 삼고 각 련에서 우수한 골간을 뽑아 단기훈련반을 열었다. 그때 훈련반에서 무정은 직접 강의를 하면서 엄지손을 척 꺼내들고 알기 쉽게 통속적으로 포사격원리와 포를 조종하는 요령을 가르쳤다. 훈련반을 나온 동지들은 기술골간으로 되여 당시의 긴급수요를 해결하였을뿐만아니라 인재로 되여 그후의 포병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포병퇀은 건립되면서 일제와 싸우는 전투에 참가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포병퇀 건립 1돐을 기념하여 모택동은 “포병퇀은 항일전쟁가운데서 주력병퇀이 되여 민족을 위해 영광을 떨치고 팔로군의 모범이 되여야 한다”는 제자를 써주고 금기를 증정하였다. 1940년에 중외를 진감하는 백퇀대전이 일어났다. 무정은 포병퇀을 인솔하여 될수록 적진지와 가까운 거리에 포를 걸어놓고 직접 사격을 지휘함으로써 적의 또치까를 백발백중하여 보병들의 작전을 엄호하고 진격로를 열어놓음으로써 아군의 승리에 중대한 기여를 하였다. 백퇀대전이 끝난후 무정은 당중앙의 지시에 따라 포병퇀을 떠나 관내 조선인항일단체를 통일하고 련합하는 조직사업에 나섰다. 워낙 1939년부터 무정은 섬북조선청년련맹의 서명편지로 관내의 조선혁명동지들은 일치단결하여 공동히 항일할것을 호소하였다. 1941년 1월 10일에 태항산항일근거지의 진동남팔로군전선 총사령부소재지에서 화북조선청년련합회 제1차대표대회가 열렸다. 대회에서 회장으로 당선된 무정은 화북조선쳥년련합회 행동강령과 과업을 진술하면서 간부양성과 조선혁명단체의 통일을 언급하면서 화북 20만조선동포들은 항일투쟁에로 뭉쳐야 함을 강조하였다. 제1차대표대회후 조선청년대표들은 무정의 파견을 받고 락양, 서안 등지로 가 조선의용대의 북상을 조직지도하기 시작하였다. 조선의용대는 1938년 10월 10일에 무한에서 창립된 첫 조선인항일무장대오로서 100여명의 의용대 대원들은 전국 6개 전구(战区)에서 항일무장선전사업을 하고있었다. 몇개월간의 간난신고끝에 조선의용대 대부분 전사들은 국민당통치구역을 벗어나 태항산근거지로 집중되였다. 그들은 1941년 6월에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로 편성되였다. 1942년 7월 11일부터 3일간 화북조선청년련합회 제2차대표대회가 청장하기슭에서 열렸다. 이 대회에서 화북조선청년련합회는 화북조선독립동맹으로서 조선의용대는 조선의용군으로 개칭되였고 이 부대는 조선독립동맹에 소속된 부대로 결정되였다. 대회에서는 김백연, 무정, 박효삼 등 11명을 집행위원으로 선거하였고 당중앙에서는 무정을 조선의용군 총사령으로 파견하였다. 조선의용군은 중국공산당의 령도와 팔로군의 통일지휘하에 일본제국주의와 싸우는 조선인무장부대로 확정되였다. 조선의용군 총사령으로 임명되여 태항산근거지에 이른 무정장군은 1942년 12월 1일에 섭현 곡원촌에 《화북조선청년혁명학교》를 세우고 직접 교장을 담임하면서 학원들에게 정치사상교양과 군사훈련을 강화하고 적점령구로부터 찾아오는 조선청년들을 교육시켜 조선의용군에 참가시켰다. 1943년말부터 조선의용군은 당중앙의 호소에 따라 혁명의성지 연안에 가 군정훈련을 하게 되였다. 1945년 7월에 연안에 이른 무정장군은 8월 11일에 주덕총사령이 내린 연안총부 제6호명령을 받들고 9월에 조선의용군을 거느리고 팔로군 및 원 동북군 각 부대를 따라 동북으로 진출하였다. 《조선의용군행진곡》을 부르며 각 항일근거지에서 심양으로 모여온 조선의용군은 1000여명에 달하였다. 무정장군은 심양에서 조선의용군 전체회의를 열고 당면의 정세와 금후의 과업에 대해 연설하고 조선의용군을 3개 지대로 개편하였다. 1지대는 남만에 남고 3지대는 북만으로, 5지대는 동만으로 진군하여 대오확군사업을 벌리면서 동북각지에서 적잔여세력을 소멸하는 투쟁에 뛰여들었다. 당면의 형세하에서 무정장군과 조선독립동맹, 조선의용군 주요지도자들은 개인신분으로 압록강을 건너 조선으로 나갔다. 조선에 진출한후 무정장군은 조선림시인민위원회 중앙위원, 로동당 제2서기, 보안간부훈련대 포병사령관 등 직무를 력임하였다. 무정장군은 1952년 10월에 조선의 한 자그마한 병원에서 사망되였는데 사망원인은 지금까지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일생동안 자신의 일체를 헌신해온 전설의 영웅 무정장군은 우리 조선민족의 지지 않는 전설로 오늘도 우리와 함께 새 세기속을 살아가고있다.  
301    서해동 중국군사지도자들중 가장 신비한 대장 댓글:  조회:5999  추천:2  2015-07-12
서해동 중국군사지도자들중 가장 신비한 대장   (번역)     “중국공산당의 군사지도자들중에 서해동(徐海东)보다 더 이름이 나고 신비한 군사지도자는 없을것입니다.” 이것은 1936년 여름에 미국기자 에드가 스노가 모택동과 홍군장군들을 취재하고 나서 내린 평가이다. 서해동은 중국인민해방군의 군사지도자이고 개국대장이며 걸출한 군사가였다. 건국후 중앙군사위원회에서는 그를 해방군의 36명군사가중의 하나로 인정했다. 모택동은 서해동을 “중국혁명에 큰공을 세운 사람”이며 “로동계급의 본보기”라고 높이 찬양했다. 서해동은 1900년 6월 17일에 호북성 대오현 하점구 서가요(지금의 대오현 신성진 서가요)에서 태여났다. 1925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서해동은 1955년에 대장계급을 수여받았으며 1급8.1훈장, 1급독립자유훈장, 1급해방훈장을 수여받았다. 그는 제1, 2, 3기의 국방위원회 위원, 중국공산당 제8, 9기의 중앙위원을 력임했다. 그는 1970년 3월 25일에 림표, 강청반혁명집단의 잔혹한 박해를 받아 억울하게 하남성 정주시에서 서거했다. 1925년에 광동에 도착한 서해동은 국민제4군소속의 사장 장발규수하의 패장대리로 임명되였다. 첫전투는 정사교에서 벌어졌는데 서해동이 거느린 패는 오패부수하의 4개 포병련을 소멸하고 12문의 포를 로획했다. 장발규는 몹시 기뻐서 전체 사를 집합시킨후 서해동을 앞에 불러놓고 칭찬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서해동을 소위 패장으로 승직시켰다. 정사교전투이후 서해동은 북벌군을 따라 하승교, 남창, 정주의 전쟁터를 누빈후 다시 무창으로 돌아왔다. 그 시기는 1927년의 “4.12”반혁명대도살이 시작되였을 때였다. 당조직에서는 장개석이 공산당을 살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면서 서해동에게 속히 부대를 떠나라고 통지했다. 서해동은 총 한자루에 탄알 여덟발을 가지고 명부를 던져버린후 부대를 떠났다. 그후 서해동은 황파에 가서 군사부장직을 맡았다. 처음에 13명에 총 한자루, 탄알 여덟발이였다. 서해동은 홍군에서 싸움에 능하다고 소문이 났다. 어느 한 전투에서 그는 2000명의 병력으로 적의 한개 사를 섬멸하고 적군 사장을 생포했다. 그번 전투에서 패배하여 포로된 국민당 사장은 자신이 어떻게 되여 졌는지 몰라서 서해동을 보고 “당신은 황포군관학교 몇기를 졸업했습니까?”하고 물었다. 서해동이 “나는 ‘청산대학(青山大学)’을 나왔습니다”라고 대답하자 그는 더욱 어리둥절해졌다. 악예환(鄂豫皖)근거지는 점차 전국의 제2대쏘베트구역으로 발전했다. 홍군창건초기에 국민당에서 내건 체포명단중에 현상금이 가장 높은 세 사람은 모택동, 팽덕회, 서해동이였다. 당시에 미국기자 에드가 스노는 15군단주둔지로 가는길에서 가는 곳마다 국민당이 비행기로 뿌린 삐라를 보았는데 삐라에는 “무릇 팽덕회거나 서해동의 목숨을 끊어놓는 자에게는 현상금 10만원을 준다”는 내용이 찍혀있었다. 서해동은 전쟁터에서는 아주 무서운 사람이였지만 평소에는 아주 친절한 지휘관이였다. 서해동은 성질이 급하여 전쟁터에서는 두번 말하는 일이 없었다. 한번 돌격하라는 명령을 내리면 즉시 달려가야지 조금이라도 머뭇거리면 채찍으로 때리군 했다. 전군에서는 모두 서해동이 엄격하다는것을 알고있었다. 장정도중에 어느 한번은 국민당부대와 갓 싸우고 난후라 매우 피로한 상태여서 호르래기를 불어도 모두 듣지 못했다. 급해난 서해동은 방마다 찾아다니면서 몽둥이로 200여명을 때려서 깨웠다. 당시 만약 조금만 늦었더라면 모두 국민당군에게 붙잡혔을것이다. 또 한번은 우가하전투에서 탄알이 서해동의 얼굴을 스치고 나갔다. 경호원이 “군장님이 부상을 입었습니다”하고 급히 소리쳤다. 그러자 서해동은 경호원을 무섭게 노려보며서 “누가 부상을 입었다구 그래? 입다물어!”하고 고함쳤다. 그는 자신이 부상을 입은것을 전사들이 알게 되면 군심이 동요될가봐 그랬던것이다. 사후에 그는 경호원에게 진심으로 사과했다. 서해동은 아홉번 부상을 입었는데 여덟번은 총상이고 한번은 “홍창회(红枪会)”에서 엉뎅이를 찔러서 난 상처였다. 어느 한번 그가 서른살 때 부상을 입었는데 한 사람도 병문안을 오지 않았다. 그때 그는 몹시 섭섭했다. 그런 경력이 있었기에 그는 부상병들을 일일이 찾아가서 위문하군 했다. 1932년에 국민당군은 악예환근거지를 4번이나 포위토벌했는데 장국도는 핍박에 의해 홍4방면군 주력을 거느리고 쏘베트구역을 떠나 장정을 시작했다. 홍25군의 일부와 제75사, 제27사는 쏘베트구역에 남아서 투쟁을 견지했다. 그들앞에 놓인것은 20만명의 국민당대군과 엉망진창이 되고 날로 줄어드는 근거지였다. 서해동은 그토록 험한 환경에서 홍25군을 거느리고 연안까지 찾아갔다. 그리고 도중에 악예섬(鄂豫陕)혁명근거지를 창건했다. 당시 서해동이 거느린 홍25군은 평균년령이 18세였다. 로혁명근거지에서 사망된 전사들이 매우 많았고 후에 참군한 병사들은 모두 청소년들이였다. 당시에 홍25군의 전투부대는 모두 18세이하의 전사들이 위주였다. 서해동의 부인이 장정에 참가했을 때 만 16세밖에 안되였다. 이런 연유로 하여 후에 구쏘련에서 《서해동과 그의 동자군》이란 책까지 나왔다. 서해동의 부대는 매우 젊었지만 싸움에서는 아주 용맹했다. 25군에는 한가지 전통이 있었는데 무릇 25군에 참가하려는 군인에게 “죽음이 두렵지 않으냐? 만약 죽음이 두렵다면 우리 25군에 올수 없다”라고 묻군 했다. 이리하여 25군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군인들만 모여들었다. 서해동은 25군을 거느리고 겹겹의 포위를 뚫고 섬북으로 진군하여 1935년 9월에 류지단과 회합했다. 1935년 11월초에 서해동은 마침내 중공중앙과 모택동을 만났다. 서해동의 일가친척중 66명의 혁명을 위해 목숨을 바쳤는데 27명이 가까운 친척이고 39명이 먼 친척이였다. 악예환전투가 벌어졌을 때 서해동은 어머니를 만난적이 있었다. 그러나 서해동의 명성이 높아지자 장개석은 서씨가문을 멸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1930년부터 시작하여 국민당은 서씨성을 가진 사람은 모두 죽이는 바람에 서해동이 악예환을 떠나 장정에 참가했을 때는 이미 일가친척 66명이 살해당했다. 1932년에 홍4방면군이 떠난후 서해동은 23일동안에 어떤 때 잠시 선잠을 잤을뿐 대부분 잠을 자지 못했다. 그때문에 적을 물리친후 서해동은 련속 사흘동안 잠을 잤다. 결과 잠을 깼을 때 그는 피를 토했다. 그것은 서해동이 사장직을 맡고있는 시기였다. 여러번이나 죽음의 고비에서 살아돌아온 서해동은 자신의 건강에 매우 자신감을 가지고있었다. 1939년에 서해동은 화중에 파견되여 신4군 강북지휘부의 부총지휘직을 맡게 되였다. 처음으로 일본괴뢰군과의 싸움에서 승리한후 서해동은 또 피를 토했다. 서해동은 주가강전투에서 일본괴뢰군 160여명을 소멸하고 일본 소좌 한명을 사로잡았다. 원래 일본군이 너무 강대했기때문에 신4군은 감히 화중에서 일본군과 싸우려고 하지 못했다. 그때문에 그번 승리는 매우 중요한 의의가 있었다. 1940년 1월 28일에 서해동은 앓아누웠다. 그는 페가 부어서 이불도 덮을수 없었다. 그런데도 그는 사업을 견지하겠다고 했다. 당시에 신4군의 지도자 진의와 장운일이 모두 중앙에 “서해동동지의 병세는 매우 위중합니다. 그런데도 그가 사업을 견지하겠다고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보고를 올렸다. 모택동은 서해동한테 전보를 보냈는데 후에 서해동은 그때의 일을 회상하면서 “전보문은 200여자였는데 주석께서 연안에 계시기에 나의 병문안을 갈수 없다는 내용이였습니다”라고 했다. 그리고 “서해동동지가 사업을 견지하겠다고 하는 말을 들었는데 여덟글자를 보냅니다”라는 내용도 있었다면서 그 여덟글자는 바로 “하늘이 무너져도 관계하지 말고 병치료에만 전념하십시오(静心养病,天塌不管)”라는것이였다고 말했다. 당시 그 전보문을 본 서해동은 눈물을 흘렸다. 《문회보》       
300    청태종 황태극의 특이한 혼인관계 댓글:  조회:7131  추천:3  2015-07-05
청태종 황태극의 특이한 혼인관계       청나라초기의 황제들은 혼인에서 정략결혼의 색채가 충만했다. 청태조(清太祖) 누르하치(努尔哈赤)의 처첩중 사서에 기록된 녀인은 모두 14명이다. 그중 7명의 처첩은 정략결혼의 결과였다. 나머지 처첩들도 대부분 서로 다른 부락에서 왔다. 청나라초기에는 만족과 몽골족의 정략결혼이 성행했다. 《청황실사보》 2권의 기록에 따르면 청태종(清太宗) 황태극(皇太极)은 몽골족 처가 7명으로서 그의 후비들중에서 절반을 차지했다. 순치황제 복림의 몽골족처는 6명으로서 그의 후비들중에서 1/3을 차지했다. 청나라의 황제중에 청태종 황태극의 혼인은 가장 기이했다. 황태극의 처첩중 명호가 있는 후비는 15명이였다. 이 15명의 후비들중에서 7명이 몽골초원에서 왔다. 후비들중 지위가 가장 높았던 “숭덕오궁후비(崇德五宮后妃)”는 모두 몽골족녀인이였다. 게다가 두명은 과부였다. 나머지 3명은 커얼친(科尔沁)부의 망구스집안의 고모조카관계인데 모두 청태종에게 시집을 왔다. 황태극의 혼인에서 기이한 점은 이뿐만이 아니였다. 그는 이미 그와의 사이에 딸을 낳은 적이 있는 측비인 보얼지지터씨를 다른 사람에게 개가시킨 적도 있다. 그렇다면 천자의 고귀한 자리에 있던 청태종이 왜 과부를 두명이나 부인으로 받아들였을가? 원래 이 두 녀인은 신분이 특수했다. 그녀들은 모두 몽골부락의 맹주인 차하얼(察哈尔)의 린단칸(林丹汗)의 부인들이였다. 그녀들은 남편 린단칸이 죽은후에 청태종에게 투항하였고 천총8년과 천총9년에 차례로 청태종의 후궁으로 들어왔다. 1632년(후금천총6년)에 청태종은 8기대군을 이끌고 몽골의 여러부락을 공격했다. 린단칸의 차하얼로 진격하여 격전을 벌린 끝에 린단칸의 부대를 거의 절반이나 소멸했다. 린단칸은 대패후에 청해초원으로 도망갔다. 2년후인 1634년에 민심을 잃은 린단칸은 청해에서 병사했다. 그의 부하들은 점차 와해되였고 그의 부인들도 새로운 살길을 찾아나서게 되였다. 1634년 8월에 린단칸의 후비중 하나인 떠우투먼(窦土门) 푸진(福晋)이 도니쿠루크의 호송하에 일행을 이끌고 청태종의 군영으로 찾아와서 귀순했다. 그리고 무후르 이지야르지방에 머물며 목축을 했다. 사실 당시 떠우투먼은 청태종에게 시집을 가고싶어했으나 스스로 말을 꺼내지 못하고있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잘 헤아리는 대패륵 다이샨이 그녀가 온 뜻을 알아차리고 청태종에게 말했다. “이 녀인은 하늘에서 내린 녀인이니 그녀를 후궁으로 받아들여야 하옵니다!” 청태종은 그녀가 아주 예쁜것을 보고 첫눈에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외부에서 전쟁을 일으켜 다른 사람의 처를 빼앗았다는 악명을 들을가봐 우려했다. 그래서 계속 사양했다. 대패륵 다이샨은 이렇게 권고했다. “아니옵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면 몽골사람들의 투항을 얻어낼수 있고 몽골이 우리의 동맹군으로 될수 있사옵니다.” 다른 패륵들도 그렇게 하는것이 린단칸의 부하들의 투항을 받아내는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다. 이미전에 마음이 움직였던 청태종은 사흘간 생각하는척 하고 그녀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청태종은 패륵들에게 자신이 겪은 기이한 일도  얘기했다. “짐이 행군도중에 나리트강에 주둔했는데 꿩 한마리가 짐의 군영막사안으로 날아들었소. 짐이 보기에 이는 미인이 들어올 길조였소. 떠우투먼 푸진이 짐에게 개가하는것은 바로 하늘이 맺어준 인연이라고 생각되오. 하늘의 뜻이라면 받아들일수밖에 없소.” 떠우투먼 푸진을 모시고 청태종에게 귀순했던 도니쿠루크는 아주 기뻐하며 “신들이 온 목적은 바로 떠우투먼 푸진을 황상께 바치는것이였나이다”하고 아뢰였다. 도니쿠루크는 사명을 완수했고 청태종에게 충성을 다할것을 맹세했다. 청태종이 떠우투먼 푸진(窦土门福晋)을 받아들인후 1년도 되지 않은 1635년 3월에 린단칸(林丹汗)의 다라대푸진(多罗大福晋) 즉 정실부인인 낭낭태후(囊囊太后) 나무종(娜木钟)이 1500호의 무리를 이끌고 귀순했다. 그해 4월에 린단칸의 또 다른 다라대푸진인 소태태후(苏泰太后)가 그녀의 아들 어저(额哲) 즉 린단칸의 계승자를 데리고왔다. 또 1000호의 무리를 이끌고 투항하면서 전국옥새를 바쳤다. 두명의 존귀한 태후와 함께 온것은 또다른 두명의 측실인 백기푸진(伯奇福晋), 아이철의도(俄尔哲依图)푸진 그리고 린단칸의 녀동생인 태송공주(泰松公主) 등이 있었다. 이 녀인들중에서 자격이나 지위로 보면 낭낭태후가 가장 높다. 그녀는 몽골군왕의 집안에서 태여났을뿐만아니라 린단칸의 “정실부인”이였다. 그렇다면 누가 가장 존귀한 낭낭태후를 취해야 하는가? 당연히 지위가 가장 높았던 청태종이다. 청태종은 처음에는 이를 사양하는척 했다. 그러다가 여러 패륵들이 여러번 권하자 청태종은 그녀를 안해로 맞아들였다. 나무종의 지위가 고귀했으므로 청태종 숭덕원년인 1636년에 후비를 책봉할 때 그녀를 서궁 인지궁귀비에 봉했다. 그녀보다 1년이나 먼저 청태종에게 개가했던 두토문 푸진은 지위가 나무종에 미치지 못하여 차동궁연경궁숙비에 봉해졌다. 일찌감치 1625년에 이미 청태종에게 시집와있던 서궁비 부무부타이는 차서궁으로 밀려나서 영복궁 장비에 봉해졌다. 청태종의 후궁들중에서 지위가 가장 존귀한것은 “숭덕오궁후비”들이였다. 그녀들은 모두 몽골족녀인이였다. 상술한 두명의 린단칸의 미망인을 제외하고 나머지 3명은 모두 몽골 커얼친부 망구스집안에서 나왔다. 이 세명의 비는 친고모조카간이다. 몽고의 커얼친부는 후금에 가장 먼저 귀순했다. 커얼친부 좌익의 수령인 밍안 패륵의 형인 망구스는 1614년에 딸을 청태종에게 보내여 처로 삼게 했다. 그녀가 바로 청태종의 중궁황후 효단문황후이다. 저저황후(哲哲皇后)로 불리운 녀인이다. 만몽간의 혼인은 정략결혼으로 정치적 안정을 가져왔다. 1629년에 청태종은 군사를 일으켜 명나라를 쳤는데 커얼친부의 23명 패륵이 무리를 이끌고 뒤따르면서 명나라군대를 물리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1625년(천명10년)에 커얼친 패륵 자이상의 아들인 오극선(吴克善)은 녀동생 부무부타이를 청태종의 비로 보냈다. 이 녀인이 나중에 그 이름도 유명한 장비(庄妃)로 된 인물이다. 장비는 중궁황후의 친조카딸이며 순치황제 복림의 생모이다. 그녀는 일생동안 청나라의 세 황제를 거쳤는데 바로 란세에서 태평성대로 들어서는 력사적 시기였다. 그녀는 황제를 보좌하여 청나라궁중내부의 갈등과 투쟁을 해결하여 청나라초기에 사회질서의 안정을 이루는데 기여했다. 후세에 그녀는 청나라의 국모라고 불리웠다. 1634년에 우크샨은 다시 녀동생 하나를 심양으로 보내여 청태종의 비가 되게 했다. 이번에 보내온 녀인은 장비의 친언니인 하이란주였다. 청태종은 그녀를 신비(宸妃)로 삼았다. 이렇게 되여 멍구스의 집안의 고모부터 조카까지 3명의 녀인이 모두 청태종에게 시집가게 되였다. 신비 하이란주는 청태종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았다. 청태종은 《시경》에서 애정을 노래한 시구인 “관관조구 재하지주 요조숙녀 군자호구”에서 이름을 따서 하이란주가 거주하는 궁을 “관조궁”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하이란주의 지위를 5궁중에서 2번째로 높은 자리에 올려놓았다. 그러나 하늘이 미인을 시기해서인지 신비 하이란주는 33세의 나이로 병사했다. 그녀를 잃은 청태종은 비통해하며 침식을 페했다. 그러다가 혼절하기까지 했다. 청태종은 신비를 위하여 륭중한 장례식을 거행하고 민혜공화원비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녀는 청나라의 후비들중에서 시호가 가장 긴 녀인이다. 신비를 잃은후부터 청태종은 조석으로 비통해하며 음식도 얼마 먹지 못했다. 신체가 갈수록 나빠졌고 하는 말에도 두서가 없어졌다. 나중에 여러 왕과 대신들이 그를 사냥하러 나가도록 권했다. 그런데 사냥터로 가는 길에 신비의 묘를 지나게 되였다. 청태종은 다시 가슴이 아파져서 대성통곡을 했다. 신비가 죽은후 2년도 되지 않아 청태종도 저세상으로 가버렸다. 청태종의 신비에 대한 사랑은 지극했다. 이는 력대황제들중에서 보기 드문 경우였다. 청나라 초기에 통치자들은 유가의 사상에 완전히 물들지 않았다. 청태종의 후비중에 이미 그와의 사이에 딸을 둘이나 낳은 측비가 있었다. 그 측비는 바로 몽골 자루트부의 다이칭 패륵의 딸 보얼지지터씨였는데 청태종은 그녀를 다른 사람에게 개가시켰다. 에허부의 더얼거이 타이지의 아들인 난추의 안해로 보낸것이다. 일대의 제왕인 청태종이 자신의 후비를 다른 사람에게 개가시킨 사실은 정말 리해가 되지 않는 일이고 중국의 봉건왕조에서 아주 보기 드문 경우이다.  
299    일세를 풍미한 단기서 댓글:  조회:5157  추천:2  2015-06-28
일세를 풍미한 단기서   단기서(段祺瑞)는 왕사진(王士珍), 풍국장(冯国璋)과 더불어 “북양삼걸(北洋三杰)”이라고 일컬어진 인물이다. 1865년에 안휘성 합비에서 출생한 단기서는 환계군벌의 사령관으로서 본명은 계서(启瑞)이고 자는 지천(芝泉)이다. 1889년에 천진무비학당 포병과를 졸업한 단기서는 독일에서 군사학을 공부하고 이듬해에 중국으로 돌아왔다. 1896년 천진으로 가서 신건륙군(新建陆军) 좌익포대 제3영 통대(统带) 겸 무위우군 각 학당의 총책임자직을 력임하였다. 1903년에 청나라 조정에서 군사훈련소를 설립하자 단기서는 원세개가 확대하여 개편한 북양군의 중요한 참모로 되였다. 1911년에 무창봉기가 일어나자 단기서는 칙명을 받들어 호북으로 달려가서 혁명을 진압하였다. 남북회담기간인 1912년초에 그는 원세개의 의향에 따라 청나라 조정에 두번의 전보를 보내 황제퇴위를 독촉하였다. 그해 3월에 원세개는 손중산으로부터 중화민국대통령직을 이어받았고 단기서는 륙군총장에 임명되였다. 1913년에 단기서는 한동안 국무총리대리직을 력임하다가 군대를 동원하여 2차혁명을 진압하였다. 원세개는 1916년 3월 22일에 강력한 반발에 부딪혀 황제의 년호를 취소하고 단기서를 재등용하여 참모총장직에 임명하였다. 그해 4월에 단기서는 서세창(徐世昌)을 대신하여 국무경 겸 륙군총장직을 력임하였다. 그해 6월에 원세개가 사망되자 려원홍(黎元洪)이 대통령직을 계승하였고 단기서는 국무총리 겸 륙군총장직에 임명되여 북경정부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북양군벌은 점차 직계군벌과 환계군벌의 두파로 분렬되였으며 단기서는 환계군벌의 사령관이 되였다. 1917년에 독일에 대한 선전포고문제로 충돌이 생기자 려원홍은 단기서의 총리직을 해임하였다. 이에 단기서는 각 성의 군사장관들을 책동하여 려원홍을 타도하였다. 1917년 6월에 장훈(张勋)은 려원홍과 단기서의 충돌을 화해시킨다는 명분으로 군대를 이끌고 북경에 진입하여 청나라의 마지막황제 부의의 확제복위를 시도했다. 장훈의 복벽음모가 실패되고 려원홍은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단기서는 부대통령이였던 풍국장을 대통령대리로 맞이하고 자신은 다시 총리직을 맡았다. 그러나 《림시약법》과 국회의 부활을 거부하였다. 그해 9월에 손중산이 광주에서 림시약법을 수호하는 군사정부를 세웠다. 단기서는 무력통일정책을 추진하기로 결정하였으나 풍국장이 사령관으로 있는 직계군벌의 저지를 받았다. 그해 11월에 단기서는 강요에 의해 국무총리직과 륙군총장직을 사임하였다. 그러나 단기서의 사주를 받은 각 성의 군사장관들이 풍국장에게 압력을 가했다. 그리하여 단기서는 다시 복위되여 남방정벌에 군대를 동원하였다. 북양군이 호남성 형양을 점령한 후에 직계군벌 우두머리 오패부가 1918년 8월에 휴전통신문을 련속적으로 보내고 단기서정부의 친일매국정책을 공격하였다. 이로써 직계군벌과 환계군벌간의 갈등을 더욱 심화되였다. 1918년 9월에 풍국장이 대통령대리직임기를 마치고 물러나자 안복국회(安福国会)에서는 서세창을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단기서도 총리직에서 물러나 참전감독직만을 전담하였다. 1920년 7월에 직계군벌과 환계군벌간의 전쟁이 일어났다. 여기에서 환계군벌이 패배하자 단기서는 직위에서 물러나 천진으로 이주했다. 그후 단기서는 봉계군벌 장작림, 남방의 손중산과 련합하여 직계군벌의 통치를 반대하였다. 1924년 10월에 이르러 봉계군벌은 풍옥상의 부대와 련합하여 직계군벌을 물리쳤다. 단기서는 중화민국림시집정직에 추대되였다. 그는 “선후회의(善后会议)”를 소집하여 손중산이 주장하는 국민회의를 배척하였다. 1926년 3월 18일에 단기서는 갑자기 집정부호위대를 시켜 북경의 각계 인사들로 구성된 반제국주의청원대렬을 향해 총격을 가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 “3.18학살사건”에서 사상자는 100여명이나 되였다. 1926년 4월에 단기서는 다시 봉계군벌, 직계군벌과 련합하여 풍옥상의 국민군을 공격하려는 음모를 꾸몄으나 사전에 루설되여 동교민항사관구로 도망쳤다. 이로 인하여 오패부, 장작림의 신임을 잃게 되자 단기서는 결국 천진의 조계지로 물러나 도피생활을 하면서 자호를 정도거사(正道居士)라고 하였다. 1933년 2월에 단기서는 상해로 이주하였다가 1936년 11월 2일에 상해에서 병사했다.        
298    국민당은 대륙의 국보를 어떻게 대만으로 옮겼는가? 댓글:  조회:5234  추천:0  2015-06-21
국민당은 대륙의 국보를 어떻게 대만으로 옮겼는가?   (번역)     1948년 12월 27일에 국민당의 제1차 문화재가 대만의 기륭(基隆)에 도착했다. 당시 남경에서 대만으로 옮겨온 문화재는 3차로 나누어졌는데 제2차, 제3차는 각각 다음해 1월 9일과 2월 22일에 도착했다. 이 문화재는 주로 당시 북경고궁박물원, 중앙박물원, 중앙도서관, 북평도서관의 서화, 자기, 옥기, 선본도서, 외교부조약자료 등 합계5000여상자였다. 대만정부는 이 문화재를 기초로 “대북고궁박물원”을 건립하였다. 그리하여 오늘날 남북 2개의 “고궁박물원”이 존재하는 국면이 형성되였다. 문화재의 이전은 먼저 항일전쟁으로 남쪽으로의 이전이 이루어지고 나중에 해방전쟁으로 대만으로의 이전이 이루어졌다. 1948년 11월에 서주회전이 끝난후 장개석은 남경이 위험하다고 느꼈다. 그는 나중에 몸을 피할 장소를 마련하기 위하여 대만을 장악하기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그는 대량의 황금, 기계설비, 심지어 공장까지 대만으로 이전시켰다. 그리고 전쟁시기에 남경고궁박물원에 보관하고있던 문화재정품(원 북경고궁에서 남으로 이전시킨것)과 남경중앙박물원, 국립중앙도서관, 중앙연구원의 수장품을 대만으로 이송시켰다. 1931년에 일본침략군이 동북지역을 장악하자 문화재를 보호하기 위하여 국민당정부는 문화재남쪽이전계획을 세웠다. 1933년부터 문화재대이전이 시작되였는데 주로 고궁에서 소장하고있던 문화재가 중심이였다. 진품은 12년에 걸쳐 북경에서 상해, 남경을 거쳐, 사천, 귀주 등 후방으로 이송되였고 항일전쟁이 끝났을 때 다시 남경으로 옮겨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해방전쟁이 폭발되여 남경으로 옮겨왔던 문화재들은 북경으로 되돌아가기전에 그중 정품들이 국민당의 기밀자료와 함께 대만으로 보내졌다. 제1차 문화재는 1948년 12월 20일에 남경을 떠났다. 운송을 책임진 해군상륙정은 “중정함(中鼎舰)”이였다. 당시의 국면은 이미 아주 불안정했기에 많은 국민당방면의 사람들은 배를 타고 대만으로 피할 생각을 하고있었다. 고궁박물원에서 70여년간 일했던 나지량(那志良)로인의 회고에 의하면 “중정함”이 기륭으로 떠날 때 사람들은 가족과 짐을 들고 배를 타려고 몰려들었다. 그리하여 순식간에 배는 사람들로 가득차게 되였다. 이렇게 되니 문화재의 안전이 위협을 받게 되였다. 책임자인 항립무는 이런 혼란을 해결할 좋은 방법이 없어 해군사령관 계영청을 찾아갔다. 계영청이 나서서  사람들에게 다른 배를 마련해서 가족들을 태워주겠다고 해서야 겨우 혼란이 진정되였다. 제3차문화재를 운송할 때는 이미 1949년 1월말이였다. 도망치는 사람들은 두달전보다 더욱 급했다. 이번에 운송을 책임진것은 “곤륜호”였다. 이 군함이 도착하자 해군부의 가족들은 앞다투어 배에 올랐다. 문화재상자를 실을 때 이런 사람들과 뒤섞였다. 항립무는 이전의 방법을 사용하려고 또 총사령관 계영청을 찾아갔다. 계영청이 다음의 배에 타라고 하자 배에 탔던 사람들은 제발 살려달라고 애걸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 정경을 보고 계영청도 눈물을 흘렸다. 계영청은 할수없이 문화재의 안전이 약간 문제가 되더라도 그들을 모두 태우고 떠났다. 그때문에 일부 문화재를 싣지 못해서 대륙에 남겨두게 되였다. 문화재가 대만에 도착한후 먼저 대중시의 사탕공장창고를 빌려서 보관했다. 때마침 사탕을 만들지 않는 계절이여서 거기에 놔둔것이다. 보관조건은 아주 나빴다. 1950년 4월이 되여서 대중시 교외의 무봉향 길봉촌의 창고가 완성되여 문화재는 새로운 창고에 보관되였다. 1965년 11월 12일에 대북고궁박물원이 정식으로 건립되면서 국보는 마침내 적당한 보존과 전람장소를 갖게 되였다.    
297    윁남독립의 아버지 호지명 댓글:  조회:5012  추천:0  2015-06-13
윁남독립의 아버지 호지명     1930년 2월 3일에 향항의 로동자마을의 한 작은집에 윁남의 공산주의운동가들이 모였다. 국외에서 활동하고있는 윁남의 혁명세력은 세 분파로 나뉘여 갑론을박하고있었다. 이에 윁남혁명세력의 실질적인 지도자 호지명(胡志明, 1890년 5월 19일 출생)이 회의를 소집한것이다. 먼저 자신을 소개한 호지명은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우리는 분렬되여있는 혁명세력을 하나의 당으로 뭉쳐야 합니다. 그래야만이 프랑스제국주의와 싸울수 있습니다.”   호지명의 말에는 거역할수 없는 힘이 실려있었다.   혁명가들은 통합정당의 이름에서부터 하나하나 의견을 좁혀나갔다. 그리하여 윁남공산혁명세력의 공식적인 통합정당인 “윁남공산당”이 탄생되였다. 안전을 위해 장소를 옮겨가며 회의를 하는 동안에 호지명은 지나온 세월을 반추하면서 감회에 젖군 했다. 그의 나이 이제 40이 넘었으니 고국을 떠난지 20년이 다 되였던것이다. 오직 조국 윁남의 백성들에게 행복을 되찾아주리라고 결심하고 떠난 길이였다. 경찰에 쫓기면서 하루도 편안하게 눈을 붙일수 없었던 세월, 아직도 갈길은 멀었지만 이제 초석을 다져놓았다는 마음에 호지명은 안도의 숨을 내쉬였다.   엄밀히 말해 호지명이 지도한 윁남공산당은 레닌의 공산국제나 중국공산당과는 질적으로 다른것이였다. 호지명에게는 식민지배를 받고있는 윁남의 현실을 타개하는것이 무엇보다도 급선무였다. 호지명은 프랑스제국주의를 타도하고 윁남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지식인, 중농, 소자산계급만이 아니라 의식이 있는 부르죠아민족주의집단도 혁명세력에 참여할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공산주의자기전에 먼저 민족주의자임을 말해주는 호지명의 이러한 생각은 새통합정당의 강령에 반영되였다. 그러나 윁남공산당의 2월강령에 대해 공산국제는 부분적으로 문제점을 지적했다. 강령의 민족주의적인 색채가 문제였다. 10월에 소집된 회의에서 민족주의적인 색채를 제거한 새로운 강령이 채택되였고 그에 따라 당명도 “인도지나공산당(印度支那共产党)”으로 바뀌였다.   이는 윁남뿐만아니라 캄보쟈나 라오스 등 인도지나를 형성하는 세 나라의 혁명을 함께 추구한다는 의미가 담겨있는것이였다. 민족독립을 우선으로 하고 이를 위해 중간계급의 협조를 구하려고 했던 호지명의 전략은 묵살되였지만 호지명은 새로운 강령을 선선히 받아들였다. 받아들일것은 군말없이 받아들이고 확신이 서면 단호하게 실천에 옮기는것, 그것이 호지명의 크나큰 장점이였다. 온화하면서도 단호하고 단호하면서도 넓은 그의 성품이야말로 성공의 일등공신이였다.   호지명을 영웅으로 만든것은 시대상황이였다. 19세기중반의 프랑스인들은 윁남의 가톨릭교도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윁남을 침략하여 식민지 인도지나를 건설했다. 윁남에 들어온 프랑스인들은 자본주의방식에 따라 대규모의 고무농장에 자본을 투입하여 윁남사람들의 사고방식을 바꾸려고 했다. 불교와 유교를 중시하는 공동체적인 생산방식을 존중하는 윁남사람들에게 자본주의는 야만적인것이였다.   일찍 부모를 여읜 호지명의 아버지는 어렵게 공부하여 2급박사학위를 땄다. 그러나 그는 식민지관료체제에 들어가고싶지 않았다. 호지명의 아버지는 안해의 죽음을 핑계로 조정의 관직임명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버지의 이러한 성격이 아들 호지명에게도 그대로 이어졌음은 물론이였다.   11살의 호지명은 아버지한테서 고전공부를 하다가 아버지의 친구가 가르치는 학교로 가게 되였다. 아버지의 친구는 학생들에게 윁남의 독립을 옹호하는 정신을 불어넣었다. 호지명은 새로운 스승밑에서 너무도 즐거왔다. 그러나 나라를 잃은 슬픔에 피가 끓어오른 스승은 결국 독립운동에 합류하기 위해 학교문을 닫고 떠났다. 호지명은 다시 아버지한테로 돌아와 고전공부를 계속했다. 아버지는 한문을 공부하여 무작정 공직에 나가려고 하지 말고 고전의 속뜻을 리해하고 사람들을 리롭게 할 방법을 찾도록 하라고 가르쳤다.   호지명은 이 무렵에 유학의 경전보다는 중국의 《3국연의》와 《서유기》 같은 이야기가 더 재미있었다. 호지명은 또 마을의 힘센 아이 지엔을 좋아했는데 그에게서 용광로를 사용하는 방법을 배우기도 하고 그를 따라 새사냥을 가기도 했다. 저녁이면 지엔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지엔은 독립운동가들이 오랑캐를 몰아내려다가 실패한 이야기를 실감나게 해주었다.   호지명은 동네에서 구할수 있는 책이 대부분 윁남력사가 아니라 중국력사를 다루고있다는것을 확인하고 조국의 력사를 알기 위해 성소재지까지 걸어가기도 했다. 그는 서점에서 윁남력사서적을 탐독하고는 중요한 구절들을 암기해두었다가 친구들에게 들려주었다.   사실 호지명을 영웅으로 만든것은 용기였다고 해야 옳다. 그는 새로운 일을 시도하는데 신중하기는 했지만 확신이 서면 항상 과감했다. 어렸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납세거부시위에 참여하여 국학에서 퇴학당한후에도 결코 락담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새로운 세계에 눈을 돌리는 계기로 삼았다.   1911년 6월에 그는 드디여 프랑스의 기선에 주방보조로 취직하여 윁남을 떠난다. 이제 호지명에게 본격적인 떠돌이생활이 시작되였다. 중국, 프랑스, 미국, 영국, 로씨야가 호지명의 무대였다. 당시의 미국대통령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선언하자 호지명은 윌슨에게 편지를 쓰고 윁남독립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들고 련합국지도자들을 직접 찾아갔다.   세계를 돌아다니는 동안에 호지명은 프랑스와 영국에도 힘들게 살아가는 로동자가 존재하고 또 량심적인 지식인이 있음을 발견했다. 그것이 그를 차츰 사회주의운동에 몸담게 하는 정당성을 제공했다. 1924년 6월에 호지명은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5차공산국제대회에 프랑스공산당대표로 참석하여 세차례에 걸쳐 연설을 했다. 그는 아시아의 식민지문제와 농민의 역할에 대해 힘주어 강조했다. 이 인상적인 연설은 화제가 되였지만 농민의 역할을 강조한것이 이단적이라는 리유로 나중에 제재를 당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새로운 공산주의지도자의 탄생을 예고하는 사건임에 틀림없었다.   무엇보다도 호지명을 성공으로 이끈 힘은 열정이였다. 그는 윁남민족해방의 열망 하나로 한평생 꿈속에서도 꿈을 꾸었다. 그 꿈은 1945년에 정말 꿈처럼 찾아왔다.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후 인도지나공산당은 전국인민대회를 소집하여 하노이를 점령했다. 민족해방위원회를 소집하여 호지명을 주석으로  내각을 구성한 혁명세력은 그해 9월 2일에 독립선언서를 랑독했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여났다. 그들은 조물주로부터 누구에게도 양도할수 없는 권리를 부여받았다. 생존, 자유, 행복의 추구 등이 바로 그 권리이다.”   독립선언서를 랑독하는 호지명의 목소리가 온 세상에 울려퍼졌다.   그러나 꿈같은 행복은 오래 가지 못했다. 윁남독립은 사실상 반토막이 되고말았다. 1954년에 제네바협정에 의해 윁남은 북위 17도선을 경계로 남북으로 갈라지게 된것이다. 이제 호지명의 열정은 독립이 아니라 통일쪽으로 향해졌지만 통일 또한 미국이나 프랑스 등의 제국주의렬강으로부터 진정으로 독립하는것이였다. 리해관계가 대립된 이상 전쟁은 필연이였는지 모른다. 1964년 8월에 시작된 윁남전쟁은 1975년까지 윁남을 온통 피로 물들인 현대사 최고의 비극이였다.   현대사에서의 최고비극이 진행되는 동안에 페결핵이 호지명의 건강을 위협하고있었다. 호지명은 죽음에 대비하여 유언장을 작성했다. 1965년에 처음 작성하고 이어 1968년과 1969년에 손으로 고쳐 쓴 유언장에는 “윁남인민의 생활수준을 높이는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요,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함께 추구하는것이 필요하다”고 씌여져있었다. 1969년 9월 2일에 호지명은 그토록 열망했던 조국의 통일을 보지 못하고 일생동안 힘차게 쉬였던 숨을 멈추었다.   실로 호지명의 일생은 조국의 운명과 함께한것이였다. 조국이 노예상태였기에 그는 외국을 돌아다니며 온갖 험한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 닥쳐도 참고 때를 기다렸으니 그의 일생이야말로 성공의 교과서와도 같은것이였다.   호지명의 사망소식이 전해지자 전세계의 언론이 그에 관한 기사를 대서특필했다. 우루과이의 한 신문은 “그는 우주만큼 넓은 심장을 가진 사람이였으며 아이들에 대한 가없는 사랑을 지닌 사람이였다. 그는 모든 분야에서 소박함의 모범이였다”고 극찬했다. 분명히 그는 권력을 통해 어떠한 부귀영화도 누리지 않았고 조금의 안락함도 추구하지 않았다.   호지명이 유언장에서 “내가 죽은후에 웅장한 장례식으로 인민의 돈과 시간을 랑비하지 말라. 내 시신은 화장해달라”고 당부한것은 그의 인품을 그대로 말해주었다. 권력이 있을 때나 없을 때나 한결같았던 인품속에서 그의 탁월한 정치력과 추진력이 솟아나왔는지도 모른다.    
296    배설의 미학 댓글:  조회:8758  추천:7  2015-06-09
배설의 미학   김희수   6월에 들어서서 사흘째 되는 그날은 웬일인지 기분 잡치는 일만 연이어 터졌다. 출근길에 지나가던 사내가 가래를 탁 뱉는데 내 옆에 날아와 딱 떨어졌다. 또 저만큼 걸어가는데 어떤 녀인이 마주오다가 코를 킁 하고 푸는데 코물이 내 발밑에 와 떨어졌다. 그날 퇴근길에 강변 돌다리를 건너오다가 하마트면 똥을 밟을번 했다. 개똥도 아니고 사람똥이였다. 그리고 집으로 올라오는 실외계단을 오르다가 또 하마트면 누군가 배설해놓은 토사물을 밟을번 했다.   더러운 배설물을 연이어 맞닥뜨리니 구토할것만 같았다. 화장실에 가서 양치질을 하고 나니 기분이 좀 가라앉았다. 그리고 배설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았다.   사람은 살기 위해 먹어야 할뿐만아니라 배설도 해야 한다. 대소변, 코물, 가래 등을 통해 몸안의 오물과 독소를 체외에 배출해야 한다.   사람은 또 마음속에 있는 탐욕, 분노, 슬픔, 원망, 미움, 시기, 질투, 증오, 저주 등 나쁜 감정의 찌꺼기들을 배출해야 한다.   몸속과 마음속에 있는 이런것들을 배설하지 않으면 오물과 독소가 몸과 마음에 퍼져 죽을수도 있다.   몸과 마음의 정화를 위해 반드시 몸속과 마음속에 있는 오물, 독소를 배설해야 한다.   사람은 배설할 때 배설의 쾌감을 느끼게 된다. 뒤가 묵직하거나 방광이 꽉 찼을 때 대소변을 배설하면 시원한 느낌이 든다. 코를 풀거나 가래를 뱉어도 마찬가지로 배설의 쾌감을 느끼게 된다. 또한 억압된 분노를 표출해도 배설의 쾌감을 느끼게 된다. 화가 날 때 욕설을 퍼붓고 나면 스트레스가 풀리면서 속이 시원한 느낌이 든다.   배설중에서 최고의 쾌감은 뭐니뭐니 해도 섹스라고 할수 있다. 부끄럽고 감추고싶지만 인간은 최고의 쾌감을 맛보기 위해 섹스를 한다. 그리고 이런 배설을 제일 좋아하는것도 사실이다.     배설은 인간에게 매우 중요하다. 잘 배설해야 오래 산다. 하지만 배설은 제마음대로 아무데나, 아무렇게나 해서는 안된다. 길가에 대소변, 코물, 가래를 마구 배설해서는 안된다. 대소변은 반드시 화장실에 배설해야 하고 코물과 가래는 반드시 휴지에 풀어 쓰레기통에 던져야 한다.   마음속에 있는 나쁜 감정의 찌꺼기도 제마음대로 배설해서는 안된다. 화가 난다고 입으로 대소변 같은 구린내 나고 더러운 욕설을 배설해서는 안된다. 분노가 치솟는다고 사람을 마구 구타하거나 칼부림을 해서는 안된다. 성욕이 일어난다고 아무 녀자나 붙잡고 섹스를 해서는 안된다.   배설은 시원하게 해야 되지만 배설물은 더러운것이기에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 않게,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게 슬그머니 감추면서 살짝 배설해야 한다. 그래야만이 배설의 쾌감도 마음껏 느낄수 있지 않을가?.    
295    성인 호랑이? 미디어 언어파괴 현상들 댓글:  조회:3559  추천:1  2015-06-09
성인 호랑이? 미디어 언어파괴 현상들   강상헌의 바른말 옳은글   강상헌 언론인 · (사)우리글진흥원 원장       전 세계적으로 5백여 마리, 중국에 20여 마리밖에 남지 않았다는 백두산 호랑이의 자태가 카메라에 뚜렷이 잡혔다면 반갑고 재미난 뉴스다. 우리나라 대표적 방송사가 지난 19, 20일 이틀간 네 차례에 걸쳐 동영상 화면과 함께 뉴스로 내보냈다. 당당한 외관, 과연 백두산 호랑이구나! 중국 발 특파원 뉴스였다. 눈이 시원했다.   그런데, 설마, 내 귀를 잠깐 의심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기자의 그 말은 ‘성인’이었다. 제목의 이 기사에서 기자는 이렇게 말했다.   “야생 백두산 호랑이입니다. 갈색 털에 온 몸에는 검은 줄무늬가 선명합니다. 성인 수컷으로 추정되는 이 호랑이는 자기 영역을 돌아보는 듯 천천히 걸음을 옮깁니다...”   성인은 “사물이 이루어지는 원인”이라는 成因, “인(仁) 즉 덕을 갖췄다”는 成仁, “지혜와 덕이 매우 뛰어나 길이 우러러 본받을 만한 사람”을 가리키는 聖人이 있다. 그리고 또 성년(成年) 어른(大人)”을 이르는 成人 등 몇개의 성인이 있다.   발음은 같고 뜻이 다른 동음이의어(同音異議語)들이다. 그 호랑이 기사에서는 어떤 ‘성인’을 말한 것일까? 혹 ‘곰과 호랑이가 사람이 되고자 동굴에 들어가 마늘과 쑥으로 연명하다가…’하는 단군신화를 빗댄 비유적 표현이었을까? 그런데 곰은 웅녀가 됐지만, 호랑이는 정해진 시간을 참지 못하고 뛰쳐나와 실패하지 않았던가. “다 큰 수컷 호랑이”라는 말을 ‘성인(成人) 수컷 호랑이’라고 표현한 것으로 이해하자. ‘이룰’ 성(成)과 ‘사람’ 인(人)의 두 글자의 합체다. 우선 이 점을 지적한다. 왜 ‘다 큰 수컷 호랑이’라고 쓰지 않았을까? 한자어 대신 우리말로 좀 풀어썼다고 무슨 흠이 되랴. 지적 사항 또 하나, 성인이 사람(만)을 지칭하는 단어인지 몰랐을까? 생물 책은 ‘다 큰 동물’을 이르는 말로 성체(成體)라는 단어를 쓴다. ‘다 큰 사람’을 成人이라 함과 같다. 그 기사의 ‘성인 수컷 호랑이’는 ‘성체 수컷 호랑이’로 고쳐야 제 뜻이 된다.   성인을 ‘어른’이라 하는 것과 같은, 다 큰 동물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토박이말이 없다는 점은 먼저 언급해야 한다. 또 영어단어 adult[애덜트]는 사람[성인] 짐승[성체] 곤충[성충(成蟲)]등을 다 가리킨다. 비교언어학적인 접근은 또 다른 통찰력을 줄 수 있으리라.   초등학생 같은 아이들은 ‘성체’ 대신 ‘성인’이라고 흔히 쓴다. 말의 선택에 어려움을 겪는 것이다. (성인들의) 인터넷 글쓰기에서도 어렵지 않게 그런 고충을 볼 수 있다. 또 신문과 방송의 글에서도 상당한 수의 ‘성인 호랑이’ 표기를 더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래서 ‘성인 호랑이’ 방송기사가 양해가 될까? 그 많은 시청자들에게?   비행기로 물건을 옮긴다는 공수(空輸)를 ‘산지(재배지)에서 바로 식당과 같은 소비처(消費處)로 실어온다’는 직송(直送)과 혼동해 쓰는 경우도 흡사하다. “건너 텃밭에서 수확한 배추를 부엌으로 바로 공수해오니 싱싱하다.”는 식이다. 이 방송사 뉴스도 예외가 아니다.   최근 유행인 ‘자처하다’도 그렇다. 일부 기자들, 이 덜 떨어진 말을 자주 쓴다. 이 방송사 도 ‘역시나’다. 독자 시청자 등 ‘고객’들은 그 말을 그렇게 쓰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고, 기억할 것이다. 잘못된 말의 전파, 즉 언어 와전(訛傳)의 채널 중 하나겠다.   “생계고민으로 교도소 행을 자처한 범행이 있었다.” “영국 윌리엄 왕자가 자선기금 홍보를 위해 하룻밤 노숙을 자처했다.” “지친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겠다고 개그 프로 출연을 자처한 목사님이 있다.”의 ‘자처’를 말함이다. 이 자처는 다 ‘자청’으로 고쳐야 맞다.   자청은 스스로(自) 어떤 일을 하겠다고 바라는(請) 것, 자처는 (어떤 목적을 위해) 스스로 어떠한(다른) 사람인 체 한다(處)는 뜻이다. (원래 그 신분이 아니지만) 범죄자 노숙자 개그맨을 자처할 수는 있으되, 자청할 수는 없다. 또 ‘자처’에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자결(自決)의 뜻도 있으니 주의할 것. 말에는 각각의 쓰임새가 있다. 사전의 ‘용례’가 그것이다.   방송이 이렇듯 잘못된 말을 퍼뜨리고 있는 사실, 시민들은 엄중하게 지켜본다.      
294    홍수전과 그가 거느린 녀인들 댓글:  조회:6767  추천:0  2015-06-07
홍수전과 그가 거느린 녀인들   (번역)     홍수전은 청정부의 간담을 서늘케 했던 태평천국봉기군의 령수였지만 눈앞의 승리에 도취되여 주색에 빠진 졸장부로 변해버렸다. 홍수전의 눈에 녀인들은 모두 그의 노리개이고 노예였다. 그는 녀인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그는 천왕의 권력을 13세밖에 되지 않았으나 이미 색에 빠진 맏아들에게 넘겨주고 자신은 태상황으로 되였다. 홍수전은 도광23년(1843년)에 배상제회(拜上帝会)를 조직한 때로부터 “천하의 남자들은 모두 형제이고 천하의 녀자들은 모두 자매이다”라는 평등사상을 들고 나와서 농촌의 가난한 녀성들이 많이 참가했다. 홍수전은 또한 “사람을 한명 죽이는것은 내 아버지를 죽이는것과 같이 처리하고 녀인을 한명 간음하면 내 처를 간음한것과 같이 처리하겠다”는 말도 한적이 있다. 이리하여 태평천국의 초기에는 태평군내에 녀성들로만 구성된 녀군도 있었다. 그들은 남자들과 함께 용감하게 전투에 참가했고 무한까지 밀고 올라올 때까지만 하여도 남녀는 모두 같이 직위를 받고 같이 벼슬을 지냈다. 남경을 함락시킨후 태평군이 동쪽으로 향할 때에도 녀군은 여전히 선봉에 섰다. 그러나 자그마한 승리를 얻은후에 홍수전은 이미 강산의 절반은 손에 넣었고 대국은 이미 정해졌다고 생각해서인지 문을 닫아걸고 태평천자노릇을 하려고 하였다. 동시에 차지한 지역의 녀인들을 자신의 노리개로 삼으려고 하였다. 홍수전은 소년시절부터 후궁을 가득 둔 제왕의 궁정생활을 그리워하였다. 금전봉기때에 그는 이미 비(妃)를 15명이나 두고있었다. 1년후 광서에서 포위전을 벌릴때에 홍수전에게는 이미 36명의 녀인이 있었다. 광서땅을 얻고 호남에 도착했을 때 현지에서 헌납한 미녀 4명을 받아들였다. 무창을 점령한후에 홍수전은 첫번째 왕비선발을 통해서 민간녀자중 자색이 뛰여난 60명을 뽑았다. 남경에 도착한후 홍수전은 도대체 얼마나 많은 녀인을 거느렸는가? 홍수전이 모두 얼마나 많은 녀인을 가졌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통계를 낼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것이다. 청왕부에는 2000~3000명의 미녀들이 있었는데 남자는 태감을 두지 않고 홍수전 1 명이 살았다. 그리고 이런 미녀들은 모두 낮에는 홍수전을 시중들고 밤에는 홍수전을 침대에서 모시는 녀인들이였다. 이것은 고대의 군왕이 3000궁녀를 둔다는것과 비슷했다. 미시적으로 보면 홍수전의 맏아들이며 후계자인 유천왕(幼天王) 홍천귀복(洪天贵福)이 1864년 10월 25일에 강서성 석성황산에서 포로로 잡혀서 쓴 진술서를 보면 앞부분에 자신을 소개하는 글이 나오는데 “현재 나이는 16세이고 로천왕이 나의 부친이다. 그는 88명의 모후를 두었는데 내가 9살때 4명의 처를 두었다”는 내용이 있다. 이것이 아마도 믿을만한 기록일것이다. 이와 비교하자면 호색하기로 유명했던 함풍화제도 겨우 18명의 비빈만을 두었으므로 홍수전에는 미치지 못했다. 홍수전은 41세에 남경에 들어가서 52세에 자결할 때까지 미녀들만으로 둘러싸인 천왕부에서 11년을 보내면서 천경의 성문을 한발짝도 나가지 않았다. 그는 전투를 지휘한적도 없고 조정의 일에 대하여 물어본적도 없다. 그당시 그는 장년이였고 체격이 건장하였는데 11년동안 겨우 25편의 조서만을 내려보냈다. 그리고 함풍 4년부터 함풍8년(1854~1848년)까지는 비여있다. 이 5년간 단 1편의 조서도 내리지 않은것이다. 그동안 그는 무슨짓을 한것일가? 한마디로 말하면 그는 비빈들과 술을 마시고 시를 지으면서 색에 빠져있었던것이다. 홍수전은 글을 얼마 읽지 않았다. 그가 지었다는 소위 “부시(赋诗)”는 그저 말나오는대로 쓴것에 불과하다. 함풍 7년(1857년)에 태평천국에서 인쇄하여 발행한 “관서(官书)”중의 하나인 《천부시(天父诗)》에 수록된 500수의 시를 보면 대부분이 홍수전이 천경에 진입한 초기 3년동안 궁중생활을 하면서 후궁들에게 보라고 쓴 남자와 남편의 권리에 관한 내용이였다. 례를 들어 아래와 같은 내용이다. “비빈, 녀관들은 아침마다 천왕을 위하여 몸을 씻고 옷을 입고 머리칼을 다듬으며 주인의 고민을 잘 풀어주어야 한다. 주인이 존엄이 높고 바르게 지켜지면 강산에서 영원히 위엄을 누릴수 있다. 그후에 천왕에게 문안인사를 해야 한다. 그리고 천왕에게 차와 가래침통을 올려야 한다: 차를 바칠 때에는 바르게 해야 한다. 침통을 제대로 받치지 않으면 용서할수 없다. 이런것을 보더라도 홍수전의 위엄과 황음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만할것이다. 그가 4번이나 과거를 보았음에도 합격하지 못한 원인도 쉽게 알수 있다. 남경에 온 천왕 홍수전은 처음에는 광서에서 그를 따라온 옛날 녀인들의 거친 성격과 더러운 습관을 싫어하기 시작했다. 어떤 녀인이 큰 소리로 얘기하는것을 듣고는 바로 시를 지어 질책했다. “아름다운 녀인의 가는 목소리가 귀한것이다. 어찌 개가 짓는것같은 소리를 내느뇨?” 어떤 녀인이 이발을 닦고 분을 바르고 향수를 뿌릴줄 모르는것을 보고 그는 아주 심하게 놀려주었다. “주인을 따라 오르지 못하면 영원히 오르지 못하고 영원히 태양을 볼수 없다. 얼굴은 튀여나와 시꺼멓고 몸에서는 악취가 난다. 입에서는 류황을 태우는 냄새가 난다.” 홍수전은 꺼리낌없이 새 녀자를 좋아하고 이미 데리고 놀던 녀인을 싫어하는 감정을 드러냈다: 그는 재수없는 녀자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처벌할지도 규정했다. “첫째, 나를 모시는데 경건하지 않으면 맞아야 한다. 둘째, 고개를 빳빳이 하고 가르침을 듣지 않으면 매를 맞아야 한다. 셋째, 눈을 들어 남편을 바로 처다보면 매를 맞아야 한다. 넷째, 천왕에게 경건하지 못하게 물어보면 매를 맞아야 한다. 다섯째, 기가 바르지 못하면 매를 맞아야 한다. 여섯째, 말을 큰 소리로 하면 매를 맞아야 한다. 일곱째, 입이 있으면서 대답하지 않으면 매를 맞아야 한다. 여덟째, 얼굴에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면 매를 맞아야 한다. 아홉째, 눈을 좌우로 돌리면 매를 맞아야 한다. 열째, 말하는것이 침착하지 않으면 매를 맞아야 한다." 이외에 또 하나의 기괴한 규정이 있다. “주군을 쳐다볼 때는 어깨까지 보아야 한다, 가장 좋은것은 가슴앞을 보는것이다; 감히 눈을 우로 드는것은 왕을 태만히 한것이고 하늘을 태만히 한것이다.” 부녀들이 형벌을 받을 때 억울하더라도 변명해서는 안된다. 그저 때리는대로 맞아야 하고 그렇지 않았다가는 처벌이 배가된다. “때리면 잘못을 아는것은 한 죄이고 때려도 잘못을 모르는것은 두 죄이다; 한 죄는 맞음으로써 소멸되지만 두 죄는 절대 용서할수 없다.” 알려진 바로는 최소한 3명의 녀인이 천왕부에서 처벌받을 때 억울하다고 하며 죄를 인정하지 않았다가 피살당했다. 피살당한 사람중에는 죽을 때까지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심지어 홍수전에게까지 대들었다가 결국 오마분시(五马分尸)의 혹형을 당했다. 이 점만 보더라도 홍수전이라는 인물이 얼마나 잔혹했는지 알수 있다. 태평군이 남경에 들어온 이후에 가장 먼저 동왕 양수청의 명령을 받아 주민들은 군영을 따를 사람은 군영으로 복귀하고 군영을 따르지 않을 사람들은 각자 민가로 복귀했다. 나중에 북왕 위창휘가 병이 든 양수청을 대신하여 정사를 돌보았는데 일체의 공상업을 몰수하고 남녀를 분리거주하도록 하는 조치를 취했다. 남자들은 군영에 들어가 병사가 되고 녀성들은 려관에 들어가 로동에 참가한다는것이다. 당시 천경에는 토목공사를 많이 벌렸는데 녀성들은 모두 천왕부의 건축에 참가했다. 천왕부주위의 담장은 높이가 2장이고 넓이가 4척이였다. 성벽우에는 갈라진 도자기조각을 추가했고 성밖에는 붙잡혀온 녀성들이 도랑을 팠다. 어떤 사람은 집을 짓는데 동원되였다. 이 점을 보더라도 홍수전은 자신의 향락을 위해서 백성의 고통은 아랑곳하지 않았다는것을 알수 있다. 태평군이 민심을 얻어 남경을 점령하였다가 민심을 잃어 민중들이 대거 떠나게 되는데까지 겨우 몇달밖에 걸리지 않았다. 태평군이 성에 진입하기전에 남경에는 원래 80만명이 살았는데 봄에 태평군이 들어온후 9개월만에 등기인구를 조사해보니 15만명밖에 되지 않았다. 그중 로약자인 남자가 4만명, 부녀가 11만명이였다. 홍수전이 스스로 “작은 천당”이라고 부른 천경이 사실은 인간지옥이였던것이다. 홍수전은 수천수만의 녀성을 동원해서 집을 짓고 도랑을 파고 성벽을 만들었다. 비바람이 불거나 눈이 내려도 계속 일하도록 핍박했다. 사람을 때려서 죽이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그리하여 백성들의 원성이 높았다. 홍수전은 천왕부의 미녀들속에서 11년의 제왕생활을 보냈다. 동치 3년(1864년)에 홍수전은 증국전(曾国荃)이 거느린 호남군이 공격해오자 말일이 다가왔음을 알고 2000여명의 미녀들을 버리고 52세의 나이에 자살했다. 그가 죽은후 48일후에 천경이 함락되였고 태평천국이 멸망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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