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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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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3    력사상 가장 많은 남편을 두었던 산음공주 댓글:  조회:8386  추천:3  2015-03-29
력사상 가장 많은 남편을 두었던 산음공주     중국의 황제는 아마도 가장 편안하게 살면서 향락을 누렸을것이다. 그들은 삼궁륙원에 수천명의 궁녀를 거느릴수 있었다. 절대적인 권력을 가진 자만이 절대적인 향락을 누릴수 있었다. 중국남북조시대의 송(宋)나라에는 산음공주(山阴公主)라고 불리우는 녀인이 있었는데 이름이 류초옥(刘楚玉)이다. 그녀는 이런 남자들만의 특권에 도전장을 내밀었고 자신이 원하는대로 삼궁륙원을 만들어냈다. 그리하여 수많은 남자들을 남편으로 두고 마음껏 향락을 누렸다. 산음공주의 모친은 문목황후(文穆皇后) 왕헌원(王宪嫄)이다. 왕헌원은 효무제와의 사이에 2남 4녀를 낳았는데 각각 다음과 같다. 페제(废帝) 류자업(刘子业), 예장왕(豫章王) 류자상(刘子尚), 산음공주 류초옥, 림회강애공주(临淮康哀公主) 류초패(刘楚佩), 황녀 류초수(刘楚琇), 강락공주(康乐公主) 류수명(刘修明)이다. 문목황후는 미녀였고 그녀가 낳은 딸들도 모두 그녀를 닮아 미녀들이였다. 이 네명의 딸중에서 가장 자색이 뛰여나고 음탕하기로 유명한 딸이 바로 산음공주이다. 대명8년(464년) 5월에 산음공주의 16살된 남동생 류자업이 황위를 계승했는데 력사에서 전폐제(前废帝)로 불리우는 인물이다. 류자업은 황음무도한 호색한이였다. 아마도 중국력사상에서 가장 호색한 황제일것이다. 그는 민간에서 미녀를 많이 뽑아들였을뿐아니라 부친의 후궁, 심지어 자신의 친고모, 친누나까지 침상에 끌여들여 향락을 즐겼다. 그에게 강점당한 고모는 력사상에서 신채공주(新蔡公主)라고 불리우는 녀인이다. 신채공주는 일찌기 장군 하매(河迈河邁)에게 시집갔었는데 류자업은 그녀를 궁중으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궁녀를 죽인후 그 시신을 하매의 집으로 보내면서 신채공주는 이미 죽었다고 거짓말을 말했다. 하매는 이 치욕을 견디지 못해 반란을 일으키려고 했다. 그러나 사전에 루설되는 바람에 류자업에게 살해되고말았다. 신채공주는 그때부터 성을 사(谢)씨로 바꾸고 궁중에 남아 황제인 조카의 녀인으로 되였다. 류자업은 심지어 신채공주를 황후로 세우려고 까지 하였으나 신채공주가 스스로 거절했다. 산음공주는 고모와는 달랐다. 그녀는 남동생과 서로 마음이 잘 맞았다. 사서의 기재에 의하면 산음공주는 자주 궁중에 들어와서 류자업과 함께 먹고 한침대에서 함께 잤으니 부부와 같았다. 류자업은 이 누나가 하는 말이면 뭐든지 들어주었다. 한번은 산음공주가 류자업에게 말했다: “저와 페하는 모두 선황의 자손인데 페하는 삼궁륙원을 거느리는데 첩은 부마 1명뿐이니 이것은 너무 불공평합니다. 어찌 이럴수 있습니까?” 이것은 기원 5세기경에 한 중국공주가 내뱉은 말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엄청난 말이다. 그러나 잘 들어보면 그녀가 주장하는 리치는 이렇다. 공주와 황제는 모두 한 부친에게서 태여났는데 왜 황제는 후궁을 만명이나 거느리고 공주는 겨우 부마 1명만 둘수 있는지? 류자업은 누나의 이 말을 듣고는 즉시 누나의 뜻을 받아들였다. 류자업은 정치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이 일은 신속히 처리했다. 그는 즉시 30명의 잘생긴 미소년들을 뽑아서 산음공주의 집으로 보내주었다. 산음공주는 이들을 모두 남첩으로 받아들였다. 산음공주의 남편이였던 부마 하집(何戢)이 갑자기 이렇게 30명이나 남첩이 생긴데 대하여 어떠한 반응을 보였는지는 사서에 기재되여있지 않다. 그러나 기분이 좋지 않았을것임은 분명하다. 하집은 원래 명문가출신이고 아주 잘생겼을뿐만아니라 풍채가 름름했다. 어린 남자들을 많이 가지게 되자 산음공주는 다시 성숙한 남자들에게 눈을 돌렸다. 당시 송나라의 조정에는 두명의 미남자가 있었다. 한명은 바로 산음공주에 장가든 하집이였고 다른 한명은 남군공주(南郡公主)에게 장가든 저연(褚渊)이였다. 저연의 자는 언회(彦回)이다. 배분으로 따지자면 저연은 산음공주의 고모부였다. 이 사람도 풍채가 뛰여나고 아주 준수하였다. 그리하여 산음공주는 이 저연을 마음에 두기 시작했다. 그녀는 다시 류자업을 찾아가 저연으로 하여금 자신과 며칠을 놀아주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 류자업은 저연의 품행이 단정하다는것을 알고있기에 그에게 아무 리유없이 산음공주와 며칠을 놀아달라고 얘기할수 없었다. 그래서 그저 그에게 공주집으로 가라고 조서를 내렸다. 저연이 공주집에 도착한 후에 어떻게 하는지는 산음공주의 능력에 달렸다고 생각했다. 산음공주는 신경을 써서 매일 화장을 하고 온 정성을 다해서 저연을 유혹하였다. 그러나 10일이 지나도록 저연은 나무조각같았고 교태를 부리는 산음공주에 대하여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공주는 마음이 급해졌으나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산음공주는 “그대는 구레나룻이 철극과 같이 강한데 어찌 조금도 사나이답지 못한가?”라고 물었다. 그러자 저연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언회는 비록 똑똑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하여 정리에 어긋나는 짓은 하지 않습니다.” 산음공주는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강온의 온갖방법을 동원했다. 그러나 저연은 전혀 동하지 않고 이렇게 응수했다. “당신은 공주이니 당신을 어떻게 할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공주님이 이렇게 계속 를 핍박한다면 소인은 자살로서 끝낼수밖에 없나이다.” 이 지경이 되자 산음공주도 더이상은 어찌하지 못했고 저연을 곱게 집으로 돌려보내 주었다. 산음공주의 좋은 시절은 결국 끝이 날수밖에 없었다. 경화원년 11월 29일(466년 1월 1일)에 류자업은 궁중의 반란으로 목이 달아났다. 다음날에 다른 황제가 등극했는데 구정치를 일소하기 위하여 류자상과 산음공주를 죽였다. 산음공주 류초옥이 죽었을 때 나이가 22살 내지 23살이였다. 젊은 나이에 죽은 그녀도 가엾지만 진정으로 불행한것은 그녀가 거느리던 30여명의 남첩들이였다. 산음공주가 피살될 때 그들도 산음공주와 함께 순장되였다.     
272    “그”보다 “그녀”가 좋다 댓글:  조회:5066  추천:8  2015-03-26
“그”보다 “그녀”가 좋다   김희수     글을 쓸 때 습관적으로 “그녀”보다 “그”를 쓰는 이들이 적지 않다. 틀린것은 아니지만 읽는이들에게 오해를 줄 개연성이 크다. 일반적으로 “그”라고 하면 남자라고 생각하게 된다. 나도 어느 단편소설을 읽다가 4분의 1쯤 읽어내려가서 “그”가 어떤 사람을 “오빠”라고 부르는 대목에 이르러서야 “그”가 녀자라는것을 알게 되였다.   “그녀”라고 썼으면 대번에 녀자라는것을 알아보았을것을 “그”라고 쓴것이 안타깝게 느껴졌다. 더구나 이 소설은 성별을 모호하게 함으로써 반전효과를 노린 작품도 아니였다. 만약 서두 첫머리에 “그는 생리가 오지 않았다”, 혹은 “그는 봉긋한 가슴을…”하는 식으로 썼다면 다른 문제이다. 그렇다고 해도 “그”는 “그녀”보다 느낌이 다르다.   중국어에는 “그”에 해당되는 말인 “他”, “她”, “它”가 있다. 말로 할 때엔 발음이 똑같아서 헛갈리지만 글에서는 가리키는 대상이 분명하다.   “他”는 고대와 근대에서는 남녀 및 모든 사물을 이르는 말이였지만 현대에 와서는 자신과 상대방 이외의 남성 제3자를 이르는 말로 되였다.   “她”는 녀성 삼인칭 대명사, 또 아름다운 사물이거나 자신이 존경하고 사랑하거나 귀중하게 여기는 사물에 대한 칭호로도 쓰인다.   “它”는 사람이외의 사물을 이르는 대명사이다.   “他”, “她”, “它”를 모두 “그”라고 할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면 남자인지 녀자인지 물건인지 헛갈린다. 때문에 “他”는 “그”, “그 사람”, “그이”라고 써야 하고 “她”는 “그녀”, 그 녀자”라고 써야 하며 “它”는 “그것”이라고 써야 한다.   이제 국어사전을 뒤져보자. “그”는 “말하는 이와 듣는 이가 아닌 사람을 가리키는 삼인칭 대명사, 앞에서 이미 이야기하였거나 듣는 이가 생각하고 있는 사람을 가리키는데 주로 남자를 가리킬 때 쓴다. 그리고 “그녀”는 주로 글에서, 앞에서 이미 이야기한 녀자를 가리키는 삼인칭 대명사이다.   사전적 의미로 볼 때 “그”는 녀자를 가리킬 때 쓸수 없는것은 아니지만 “그”는 주로 남자를 가리킬 때 쓰이므로 녀자를 얘기할 때에는 “그”보다 녀자를 가리키는 “그녀”를 쓰는것이 합당하다고 생각된다. 심지어 번역작품에도 원작에서는 “她”라고 썼는데 “그”라고 쓴 경우가 있다.   지금은 인터넷시대이고 정보가 마구 넘쳐나는 시대이기에 글을 짧고 일목료연하게 쓰는것이 좋다. 녀자를 가리킬 때 남자인지 녀자인지 헛갈리게 “그”를 쓰면 읽는이들이 짜증을 낼수 있다. 읽는이들은 성별이 분명하지 않은 글을 리해하느라고 시간을 더 소모할수 있다.   글은 독자들을 읽으라고 쓰는것이지 자신의 기교나 학식을 자랑하기 위해 쓰는것이 아니다. 남자인지 녀자인지 헛갈리게 쓰면 독자들이 읽다가 짜증이 나서 도중에 책을 덮어버릴수도 있다. 연지곤지 곱게 찍은 “그녀”가 있는데 하필 단장도 하지 않아 성별이 불분명한 “그”를 쓸 필요가 있을가?  
271    류소기의 “살인멸구사건”은 어떻게 조작되였는가? 댓글:  조회:5652  추천:1  2015-03-22
류소기의 “살인멸구사건”은 어떻게 조작되였는가?   (번역)     문화대혁명기간에 당시 국가주석이였던 류소기는 참혹하게 박해를 받았다. 강청, 강생, 사부치 등이 조직한 전문사건조사소조에서는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는 죄명을 만들어 냈다. 바로 “류소기가 사람을 죽여 입을 막았다”는 사건을 조작했던것이다. 아래에 조작한 내용을 보기로 하자.   “5.30운동이후에 계급투쟁이 격화되면서 당시 상해총공회의 책임자였던 류소기는 적들에게 붙잡힐가봐 무서워서 벌벌 떨면서 업무를 다 팽개치고 홀로 상해에서 도망쳐 장사로 갔다. 하지만 그는 1924년 12월 16일에 장사계엄사령부에 체포되였다. 호남성의 성장인 군벌 조항석은 직접 나서서 류소기를 즉시 처결하라고 지시했다. 류소기는 목숨을 보존하기 위하여 비겁하게 조항석이 제출한 조건을 받아들였고 국민당에 항복하였다. 1950년에 양검웅(楊劍雄)이라는 자가 류소기가 항복한 내용을 알고있다고 했다. 그 소식을 들은 류소기는 적에게 항복한 일이 들통날가봐 두려워 1953년에 양검웅을 죽여버리라는 비밀명령을 내렸다. 이렇게 류소기는 양검웅을 총살하고 살인멸구(杀人灭口)를 하였다.”   그럼 양검웅은 어떤 사람인가? 양검운은 원래 호남성 영향현 칠복교향의 철라충 사람이였다. 소학교를 다닐 때 양검웅은 류소기와 함께 녕향현의 옥담고등소학당을 다녔다. 그러나 두 사람은 같은 반에 있지는 않았다. 바로 이 리유때문에 50년이 지난후에 류소기는 억울한 루명을 쓰게 되였다.   양검운은 나중에 장사에서 중학교를 다니고 상해의 대하대학을 졸업했다. 양검웅의 이모부가 조항석이였는데 조항석은 그 시기에 군벌혼전중에 두각을 나타내여 호남성의 성장 겸 독군직을 지내고있었다. 양검웅은 공부를 그만두고 장사성에서 회계를 맡았다. 조항석을 업은 양검웅은 배경이 든든하였기에 많은 돈을 몰래 고향집으로 빼돌렸다. 비록 나중에 조항석이 물러나기는 하였으나 양검웅의 집안은 이미 고향에서 논밭을 사서 현지에서 가장 큰 부자로 손꼽혔다.   중국인민해방군은 1949년 4월에 장강을 건넜고 장개석정권은 와해되였다. 이때 중국공산당이 이끄는 유격부대 하나가 신속히 성장하였는데 녕향현이 그 유격부대가 활동하는 중심무대였다. 국민당정부는 중앙군 778사단을 녕향현에 보내여 유격대를 소탕하려고 했다. 양검웅은 구원병이 왔다고 생각하고 동네사람을 이끌고 778사에 량식이며 땔감을 보내주었다. 양검웅은 또 현지에서 누가 공산당이라는것을 밀고하여 10여명의 공산당원들이 국민당에 붙잡혀 살해되는 비극을 빚어냈다.   그후 국민당이 계속 패배하자 양검웅은 도박하는 심정으로 현성과 고향을 왔다갔다 하였는데 자신이 공산당을 밀고한 사실이 알려질가봐 몹시 두려웠다. 만일을 대비하기 위하여 그는 몸에 두자루의 총을 지니고 다녔고 한구에서 사귀였던 두명의 무술고수를 개인경호원으로 두었다. 이 무술고수는 하남성 광산현 사람인 곽기풍과 팽옥린이였는데 그들은 낮에는 양검웅의 곁에서 한걸음도 떨어지지 않았고 밤에는 한명씩 번갈아 당번을 서며 양검웅을 지켰다.   1949년 8월 5일에 호남성이 해방되자 양검웅은 얼음구덩이에 빠진것 같은 심정으로 절망을 느꼈다. 그해 10월 1일에 개국대전이 북경의 천안문에서 거행되였는데 양검웅은 천안문의 성루에서 모택동과 함께 서서 군중의 환호를 받고있는 낯익은 사람을 알아보았다. 그가 바로 탄자충(炭子冲)사람인 류소기였다. 탄자충은 양검웅의 고향인 철라충(铁锣冲)과는 3~5리 떨어져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같은 학교에서 공부한 사이였다. 양검웅은 내심 기뻐서 이 옛동창을 찾기만 하면 자신이 편안하게 살수 있을것이라고 생각했다.   양검웅은 류소기에게 요행을 바라는 심정으로 편지를 썼다. 편지에서 양검웅은 자신의 처지를 전혀 말하지 않고 두 경호원을 류소기에게 추천한다는 내용만 썼다. 그들이 무술전문가로서 뛰여나고 사상도 괜찮다는 내용을 적었다.   편지를 보내기는 했으나 회신은 없었다. 얼마후 청비반패(清匪反霸)운동이 시작되였다. 청비반패란 토비를 숙청하고 악패지주를 반대한다는 뜻이다. 청비반패운동이 시작되자 양검웅은 겁을 먹고 도망쳤다. 현지의 사람들은 정부에 그를 잡아달라고 요청했고 공안부문에서는 계속 그를 찾아다녔다. 1952년 10월 28일에 귀주의 깊은 산속에 3년가량 숨어있던 양검웅은 끝내 체포되였다. 1953년 1월 24일에 호남성정부에서는 양검웅의 사형을 비준했다.   양검웅은 사형선고를 받았지만 살려고 아득바득 애를 썼다. 그는 온갖 방법을 다해 머리를 짜내여 살구멍을 찾았다. 마침내 좋은 방법을 생각해낸 그는 법정에서 1924년에 류소기가 장사에서 체포되였다고 말한후 자신이 성장이였던 이모부 조항석에게 보증을 서서 류소기를 감옥에서 나오도록 해주었다고 얘기했다. 당시 공산당은 8가지의 관용정책을 내왔는데 그중의 하나가 “지하공작을 하던 혁명자를 구해주는데 도움을 준 사람은 처벌을 한단계 낮추어준다”는것이였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양검웅은 사형을 당하지 않을수 있었다.   녕향현공안국 국장이며 이 사건의 부심판장이였던 곽건국은 당시 중앙인민정부 부주석이던 류소기에게 급히 서신을 써서 확인을 요청했다. 곽건국의 서신은 3일후에 류소기의 책상에 올라왔다. 류소기는 양검웅과 소학교 동창이기는 하지만 그후 련락을 해본적이 없었다. 1949년 11월중순에 류소기는 양검웅으로부터 편지는 받았으나 답변을 하지는 않았었다. 그후 얼마 안되여 고향에서 온 친구들이 북경으로 찾아왔을 때 류소기는 양검웅에 대하여 물어보았고 그들로부터 양검웅이 그동안 저지른 일을 모두 듣게 되였다. 그리하여 그를 경계했던것이다. 류소기는 양검웅과 확실히 동창관계였다. 그러나 녕안현공안국의 공문에 의하면 양검웅은 큰 죄를 지었고 다시 개조하기 힘들다고 되여있었다. 이에 류소기는 다음과 같이 회신했다.   호남성 녕향중공현당위 공안국 곽건국동지: 1월 26일에 보낸 서신은 잘 받았음. 양검웅은 나와 소학교에서 같이 공부한적이 있으나 그후 30여년간 아무런 관계도 없었음. 그가 말하는 1924년에 장사에서 나를 감옥에서 구해냈다는 등의 말은 허튼소리로서 그런 사실이 전혀 없었음. 나는 1925년에 장사에서 체포되였었고 많은 사람들이 구해주었기에 감옥에서 2개월후에 나올수 있었음. 그러나 양검웅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음. 양검웅의 범죄는 당신들의 판결에 따라 처리할것. 류소기 1월 29일.   그러나 양검웅에 대한 판결은 문화대혁명기간에 류소기가 살인멸구한것으로 모함되였다.   척본우는 1967년 4월 1일에 《애국주의이냐 아니면 매국주의이냐? 반동영화 〈청궁비사〉를 평함》이란 글에서 창끝을 류소기에게 향했다. 그 글이 나와 며칠이 지났을 때 북경에서 내려온 몇몇 사람들이 녕향현소재지와 화명루향에서 사람을 찾아 얘기를 나누었다. 그들은 사람들의 말을 기록하고는 손도장을 찍게 했다. 사람들은 그들이 왜 그러는지 몰랐다. 나중에야 그들은 이 몇몇 사람들이 사부치가 책임진 전문사건조사소조에서 파견된 사람들이고 그들의 목적은 자료를 만들어 류소기가 녕향에서 살인멸구했다는것을 립증하기 위한것이라는것을 알았다.   1990년대초에 녕향현정협상무위원을 맡았던 주석선에 의하면 당시 전문사건조사소조는 그에게 서류를 써라고 했고 류소기가 살인멸구했다는것에 대한 증거로 삼으려고 했다. 주석선은 전문사건조사소조의 요구를 강하게 거절하였다. 그러자 전문사건조사소조의 성원들은 사람들을 불러 그를 비판하고 그의 륵골을 세 개나 부러뜨렸다.   전문사건조사소조는 주석선이 말을 듣지 않자 당시 양검웅사건의 심판원직을 맡았고 나중에 공사의 당위부서기직을 지냈던 종진기를 찾아갔다. 전문사건조사소조는 종진기에게 가짜증명을 요구했다. 그는 “양검웅은 현법원에서 사형을 판결받았고 성정부에서 심사하여 비준했습니다. 전체 사건처리과정에 대해 류소기동지는 전혀 몰랐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류소기동지가 어떻게 양검웅을 살인멸구하였겠습니까?”하고 반박했다. 전문사건조사소조는 “이건 필요하다”고 하면서 그더러 류소기가 양검웅을 살인멸구한 증인을 서달라고 강요했다. 오전 8시반부터 한밤중까지 세 사람이 그를 둘러싸고 돌아가면서 핍박했다. 그는 더이상 버티지 못하고  증명자료우에 “살인멸구”라고 네글자를 적었다. 량심의 가책에 시달려왔던 종진기는 지금도 자기의 유약함과 비겁함을 부끄러워 하면서 “그것은 내가 일생동안 저지른 가장 비겁한 짓이였다”고 자신을 질책했다.  
270    흔한게 물인가 댓글:  조회:6851  추천:15  2015-03-16
흔한게 물인가 김희수     수도물을 틀어놓으면 물이 콸콸 나오는데 물이 부족하다구? 일부 사람들은 물부족을 믿지 않고있다. 점차 심각해지는 물부족과 수질오염을 방지하고 물의 소중함을 되새기기 위하여 매년 3월 22일을 세계 물의 날로 제정하고 1993년부터 기념하고있지만 “흔한게 물인데”하면서 물부족위기를 피부로 느끼지 못하고있다.   확실이 지구에는 흔한게 물이다. 지구의 71%가 물이기때문이다. 그래서 “돈을 물쓰듯 한다”는 말도 나왔다. 무한정 나오고  넘쳐나는게 물이다. 그런데 왜서 학자들이 세계적으로 물이 부족하다고 경고하고있을가?   지구에는 물이 많지만 바다물이 대부분이고 마실물이 부족하다. 굳이 찾자면 마실물도 많은것이 사실이다. 지하 대수층에는 호수들과 강들에 있는 물을 모두 합친것보다 100배나 더 많은 물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대부분 너무 깊은 곳에 있어서 퍼올릴수가 없다. 퍼올릴수 있는 얕은 대수층의 물은 여러 나라에서 너무 빠른 속도로 너무 많이 뽑아올리고있는 실정이다. 또 강이나 호수, 빙하에 담수가 충분히 있지만 물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과 너무 거리가 먼 곳에 있어 사용할 방법이 없다. 자료에 의하면 전세계 담수의 70%는 빙하, 만년설, 얼음, 영구동토(永久冻土)지대에 얼어있는 상태로 존재한다. 그런데 이것들은 인간의 거주지와 너무나 먼 거리에 있어 가져다 사용할 방법이 없다.   중국수리부에서는 매년 3월 22일부터 3월 28일까지를 “중국 물의 주일”로 정했으며 1991년부터 매년 5월의 두번째 주를 “도시물절약선전주”로 정했다. 중국은 수자원이 부족하고 물오염현상이 매우 엄중하며 해마다 더욱 심해지고있다. 자료에 의하면 중국은 가뭄과 물부족이 엄중한 국가에 속한다. 1인당 평균담수자원은 세계평균수준의 1/4밖에 되지 않으며 세계순위 110위, 전세계 1인당 평균수자원이 가장 결핍한 나라중의 하나이다. 1인당평균리용가능한 수자원량은 900립방메터밖에 되지 않으며 분포도 매우 불균형하다. 400여개 도시가 물공급부족문제에 시달리고있는데 그중 물보족이 비교적 엄중한 도시는 110개에 달한다. 전국 도시 물부족총량은 60억립방메터이다.     해마다 엄중해지고있는 물오염현상은 물부족을 더욱 가심화시켰고 도시주민들의 식수안전과 건강을 엄중하게 위협하고있다. 현재 전세계적으로 물부족국가가 40여개이고 물부족인구가 약 10억인데 전문가들은 10년후면 물부족인구가 30억을 넘을것으로 내다보았다. 지구에서 물부족이 가장 심각한 지역은 중동과 아프리카 북부지역이다.   마거릿 챈(陈冯富珍) 세계보건기구 사무총장은 매년 160만명이 물부족과 위생환경이 차한 원인으로 사망되고있으며 그중 90%는 5세미만의 어린이고 개발도상국(发展中国家)에 집중되여있다고 지적했다.   석유가 많이 나는 나라들에서는 석유를 판 돈으로 바다물을 담수화하여 수영장이나 먹는 물로 사용하고 물이 없어 농사를 지을수 없는 경우에는 식량을 수입하여 물부족문제를 해결한다. 또 돈이 있는 나라들에서는 댐(大坝)을 건설하거나 지하수를 함유하고있는 지층에서 물을 퍼올리는 방법으로 물부족문제를  다소 해결하기도 한다. 하지만 어느 나라나 다 돈이 충족한것이 아니고 이런 방법은 최상책이 아니다. 댐개발은 생태계를 파괴할수도 있기때문에 산림을 잘 보존하는것이 더욱 중요하다.   전문가들은 물부족현상의 가장 큰 원인은 무엇보다 지속적인 인구증가에 있다고 말한다. 때문에 물부족문제를 해결하려면 우선 인구증가부터 막아야 한다. 세계인구가 놀라운 속도로 증가되면서 그와 함께 물사용량이 급격하게 늘어났을뿐만아니라 식량수요가 폭증되면서 담수람용현상도 심각해졌다. 자료에 의하면 농업용관개용수를 무제한으로 끌어다 쓴 결과 강, 호수 등에는 물이 거의 말라있는 상황이다. 물이 공업용으도 만만치 않게 사용되고있다. 수자원의 합리한 사용과 완벽한 보호가 없다면 인류는 물기근에 허덕이다가 결국 눈물만 남을것이다.   물부족문제를 해결하려면 무엇보다도 국제적협력이 필요하다. 국제기구와 각 나라의 정부, 민간단체가 참여하고 단합하여 수질오염방지와 수자원보호를 위해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해마다 세계 물의 날이 돌아오면 말로만 물부족을 경고하지만 실제 행동은 별로 없다.     말은 그럴듯 하지만 물부족문제해결을 뒤로 미루거나 아예 방치해두는 경우가 많다. 자신의 리익이나 기득권세력의 리익, 국부의 리익, 눈앞의 리익을 위해 수질오염의 원인이 되는 란개발을 눈감아주고있다. 환경을 엄중하게 파괴하는 란개발에는 푸른등을 켜주지만 수자원보호에 관한 투자에는 린색하다. 목소리만 높이지 말고 실속 있는 대안을 시급히 제시해 당장 행동에 옮기는것이 최선이라고 생각된다.   시민들의 물절약만으로 물부족문제를 해결할수 없다. 그래도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물절약을 해야 한다. 우리가 평소에 쓰는 수도물도 절약해야 하지만 소비하는 음식과 물건도 절약해야 한다. 그런 음식과 물건을 생산하는 과정에도 물이 사용되였기때문이다. 음식과 물건을 랑비하는것도 물을 랑비하는것과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아무리 바른 대안을 제시하고 많은 사람들이 호응한다고 해도 힘이 있는 사람들이 움직이 않는다면 물부족문제해결은 아름다운 꿈에 불과하다. 세계인구 72억명중에 71억 9999만명이 물기근에 시달린다고 해도 마지막까지 물을 왕창왕창 쓰면서 영원히 물부족을 모르는 1만명의 권력자, 재벌들이 손을 쓰지 않는한 물부족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수 없다.    
269    국민당은 왜 남경을 수도로 정했는가? 댓글:  조회:6579  추천:2  2015-03-15
국민당은 왜 남경을 수도로 정했는가?   (번역)     1840년대부터 중국의 국가안전은 서방렬강의 위협을 받아왔다. 신해혁명후에 어느 곳을 중국의 새로운 정치중심으로 할것인가 하는 문제는 혁명당인들이 직면한 중대한 정치론쟁으로 되였다. 각파는 당시 무창을 새로운 정치중심으로 하는 파와 상해를 새로운 정치중심으로 하는 파로 갈라져 서로 다투었다. 무창은 신해혁명이 일어난 곳이다. 무창봉기가 일어난후인 1911년 11월 7일에 악군도독부는 신정부건립문제에 관하여 각지로 통지을 보냈다. 각성에서 전권위원을 무창으로 파견해서 림시정부를 구성하자는 내용이였다. 당시 혁명당인들의 정치적기반이 비교적 강한 곳은 동남연해지역이였다. 강소절강지역에서는 새로운 정치중심으로 상해를 주장했다. 강소도독 정덕전, 절강도독 탕수잠은 련명으로 호군도독 진기미에게 전보를 보내여 상해에 “림시회의총기관”을 설립하자고 요구했다.   중국의 새로운 정치중심을 어디에 둘것인가 하는 문제는 남경을 점령하면서 혁명당내부에서 어느 정도 공감대를 형성했다. 1911년 12월 12일에 각성대표는 무한, 상해에서 남경으로 모였다. 그해 12월 29일에 각성의 대표회의가 남경에서 개최되였고 중앙림시정부를 구성하기 위한 준비작업에 들어갔다. 1912년 1월 1일에 중화민국이 정식으로 성립되였다. 손중산은 남경에서 중화민국림시대통통에 올랐다. 혁명파는 잠시 론쟁을 거쳐 마침내 남경을 림시정치중심으로 결정했다. 이렇게 되여 당시 중국정치지리국면에서 두개의 정치중심이 생기게 되였다: 하나는 청왕조의 정치중심인 북경이고 다른 하나는 혁명당의 중치중심인 남경이였다.   손중산이 림시대통령직을 맡을 때에 “원세개가 공화제를 옹호하고 청나라황제를 퇴위시키면 나는 대통령자리를 양보하겠다”고 말한바 있다. 수도에 관하여 손중산은 남경이든 북경이든 모두 좋다는 립장이였지만 남경을 선호하는 편이였다. 1912년 2월 12일에 원세개는 청나라황제를 퇴위시켰다. 손중산은 사직하고 원세개로 하여금 그의 자리를 대체하게 했다. 그러나 손중산은 원세개에게 3개의 조건을 내밀었다. 그중의 2개조건은 남경을 수도로 하는것과 관련된다.   첫째, 림시정부는 남경에 둔다. 둘째 신임대통령은 남경에서 취임한다. 즉 원세개를 남방혁명파의 감독과 통제하에 두겠다는것이였다. 그외에 일본에 가있던 손중산에 대한 영향력도 회피할수 없는 문제였다. 신해혁명때 중국의 남북정권에 모두 영향력을 가지고있던 일본의 조정과 민간에는 중국의 정치중심을 남경에 두기를 원하는 사람이 더 많았다. 일본의 생각은 아주 명확했다. 중국정치중심이 남으로 옮겨오는것을 리용하여 중국의 북방방어력을 약화시키자고 함이였다. 그렇게 해야 동북과 몽골에 대한 침략이 쉬웠기때문이다.   동맹회 회원들이 이 문제를 토론할 때에 북경을 수도로 하자고 주장한 사람이 20명이고 남경을 수도로 하자고 주장한 사람이 8명이였다. 나중에 손중산과 황흥이 남경을 수도로 하자고 견지하는 바람에 토론에 붙여 남경을 수도로 확정했다. 원세개는 자신의 세력권인 북방을 벗어나 남방으로 옮겨와서 혁명파의 견제를 받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 북방의 군인집단도 정치중심의 남쪽이전을 바라지 않았다.   1912년 4월 2일에 원세개는 림시정부를 북경으로 옮기기로 결의했다. 손중산이 남경에 정치중심을 건설하려는 계획은 무산되였다. 원세개가 북경을 정치중심으로 고집한것은 그 나름대로의 음모가 있었다고 볼수 있다. 그렇지만 합리성도 있었다. 첫째, 북경을 선택하는 자체가 바로 각지역이 원하는 바였다. 둘째, 일본제국주의가 동북지방을 집어삼키려고 하는 상황하에서 북경의 정치중심을 유지하는것이 일본에 대응하는데 유리했고 황제복벽파를 막는데도 유리했다.   북경의 정치중심으로서의 지위는 1912년에서 1927년까지 유지되였다. 원세개의 통치기간동안 표면적으로는 강권정치였지만 원세개가 죽은후에는 북양군벌 3대파인 환계군벌, 직계군벌, 봉계군벌과 다른 지방군벌들이 할거하면서 정치중심으로서의 북경의 지위는 약화되였다.   1927년에 국민당이 북벌을 시작했다. 새로운 정치중심을 확정하는 문제에 있어서 국민혁명군총사령관인 장개석은 처음에는 정치중심을 무한에 두는데 찬성했다. 나중에는 립장을 바꾸었는데 여기에는 두가지 리유가 있었다: 하나는 당생지가 기본적으로 량호(两湖)지역을 지배하게 되였기때문이다. 장개석은 당생지가 지배하는 호북과 호남지역에서는 자신이 총사령관의로서의 권위를 발휘하기 어렵다고 보았다. 다른 하나는 북벌전에 광주지역은 홍색화되여있었기때문이다. 장개석이 무한으로 천도하는것에 동의했던것은 공산주의운동의 기반이 약한 량호지역을 선택하기 위함이였고 국민당내의 좌파세력을 견제하기 위함이였다. 그러나 북벌로 무한을 점령한후에 무한의 홍색화정도는 광주보다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 않았다. 무한에 정치중심을 두는것은 국민당내의 좌파에 유리할것이 뻔했다. 이런 두가지 리유로 장개석은 남경을 수도로 정하게 되였던것이다.   장개석은 남경에 정치중심을 두었지만 당시에 무한에도 왕정위를 중심으로 하는 또 다른 정치중심이 형성되였다. 얼마후에는 서산회의파가 상해에 또다른 국민당중앙당부를 결성했다. 이외에 북경을 중심으로 하는 군벌정권이 아직 소멸되지 않았다. 중국은 당시에 실제로 여러 정치중심이 병존하는 국면이였다. 그러나 이러한 국면은 오래가지 않았다. 1927년 9월에 국민당내 각 세력은 타협을 이루어 특별위원회를 남경에 두기로 선포했다. 1928년 2월 2일에 국민당은 회의를 개최하여 상해, 무한, 남경에 3개의 당중앙이 있던 국면을 끝냈다. 같은해 6월에 장개석은 다시 북벌을 시작했고 북경을 함락시켰다. 곧 이어 동북의 장학량도 국민당에 합류하여 전국은 형식적인 통일을 이루게 되였다. 당시의 조건하에서 국민당은 중국의 정치중심을 남경에서 북경으로 옮기는 문제를 심각하게 검토하지 않았다. 이와 반대로 북경의 전통적인 정치중심으로서의 개념을 약화시키기 위하여 국민정부는 북경을 북평(北平)으로 개칭했다.   중국의 정치중심으로 된 남경은 중국에서 근 1000년동안 형성되였던 전통적인 정치지리국면을 뒤바꿔 버렸다. 중국은 력대이래로 국방요지인 장성이북지역에 대한 방어능력이 상당히 약화되였다. 중국의 정치중심이 남으로 이전된후 장개석은 중심지역의 통치를 우선적으로 고려하게 됨에 따라 정부가 동남지역에서 상인들과 리권을 다투는 현상이 심해졌다. 이리하여 중국은 국가자본과 관료자본이 독점하는 기형적인 형태로 바뀌였다. 동남연해지역과는 달리 중국의 내륙지역에 대하여는 갈수록 덜 중시하게 되였다. 그 결과 농촌에 대한 국민당의 통치력이 갈수록 약화되였다.   정치중심을 남쪽으로 이전한것은 국가의 대외방어력에 빈틈을 생기게 한 실수였다. 이에 따라 국민당은 서방렬강과의 관계를 처리함에 있어서 영국과 미국과의 관계를 중시하고 일본에 대한 방어에 소홀하게 되였다. 일본은 제1차대전기간동안에 중국에 대한 침략을 확대하여 중국의 국가안전에 큰 위협을 미치는 상황이였다. 일본은 동북, 몽골을 점령하는것을 기본국책으로 정했다. 장개석이 군사력을 모아서 2차북벌을 시도할 때에 일본은 장개석더러 장강류역에 뿌리를 내리도록 요구하면서 북벌을 반대했다. 그 뜻은 중국이 통일되는것을 막겠다는것이였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장개석이 남방에 수도를 정함으로써 북방에 대한 방어는 갈수록 약해졌다. 객관적으로 일본의 동북에서의 세력확장을 도와준 격이 되였다. 국민정부가 건립된후 5년의 기간내에 일본은 동북에 군대를 출병시키고 1937년에는 중국침략전쟁을 개시했다.   이 때문에 국민당은 큰 대가를 치렀다. 국민당의 정치중심남쪽이전과 소극적 항일은 일본군의 세력확장을 간접적으로 도와 결국은 국민당의 수도 남경까지 일본군에게 점령당하는 참패를 겪게 했다. 장개석이 소극적으로 항일한것은 군사세력을 보존했다가 공산당을 소멸하기 위함이였다. 하지만 그것은 장개석의 오산이였다. 장개석은 조국땅을 짓밟은 외적은 못본척 하고 중국사람으로서 중국사람(공산당)을 쳤기때문에 인심을 잃었다. 수천년의 중국력사를 살펴보면 한때 세력이 아무리 강했더라도 인심을 잃으면 결국 력사의 무대에서 물러나는 꼴이 되였다. 물론 장개석도 그런 끝장을 면치 못했다. 만약 국민당이 정치중심을 북경으로 정하고 동북방어를 강화했더라면 일본은 쉽게 중국을 침범하지 못했을것이다. 
268    내 아내만은 깨끗하여라 댓글:  조회:4577  추천:0  2015-03-14
내 아내만은 깨끗하여라     요즘와서 남자들이 바람피우고 외도하는 일은 흔히 볼 수 있는 보통일로 됐다. 도시 남자들중 열에 아홉이 바람을 피운적이 있다고 하는데 이는 물론 과장된 통계인지는 모르겠지만 요즘 남자들의 바람이 얼마나 극성스러운가를 알수 있다. 그런데 남자들이 바람을 피우자면 상대가 있어야 할것이 아닌가? 그래서 그런지 바람피우는 여자, 외도하는 여자…아무나 함부로 할 수 있는 놀음이 아닌데 요즘 이런 사례들을 심심찮게 본다. 주위에서 바람난 여자들에 대한 소문도 귀에 많이 들리지만 내 눈으로 직접 본 사례도 적지 않다. 내 친척들의 아내, 내 동료들의 아내, 내 친구들의 아내…이런 아내들 중에는 남편들이 모르게 슬그머니 외도하는 유부녀들도 있고 놀랍게도 남편이 알고 있는데도 공공연히 외도하는 유부녀들도 있다. 이런 바람난 여자들중에는 남편이 외지에서 출근하거나 남편이 출국하고 혼자 사는 (아이가 있거나 없거나) 여자들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남편과 함께 가정생활을 하는 여자들도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한다. 남자들이 바람피우는 이유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결혼한지 오래된 남자들이 바람피우는데는 한가지 공동한 이유가 있다. 결혼하여 여러해가 지나면 아내에게 익숙하기때문에 성적인 감흥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을 남자로 인정해주는 여자를 찾게 된다. 그러면 여자들이 바람피우는 이유는 무엇일가? 그것은 놀랍게도 여자는 한 남자로는 부족하다고 한다. 이것이 여자가 외도하는 이유와 정당성이란다. 그리고 진정한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모습이란다. 여자들은 주어진 환경이나 위치 또는 사고의 틀에 따라서 이유는 다들 다를수 있지만 공통된 주제를 가지고 론했을 때 털어놓는 사연은 거의 비슷하다고 한다. 즉 일상의 탈출을 꿈꾸는건 부족한것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닌 만족을 느끼려는 욕망이 지배적이란다. 안에서 받는 고통이나 우울감에서 탈피하려는 방법으로 외도를 택하는데 배우자가 아닌 다른 이성에게서 또 다른 대리만족을 얻고자 한다고 한다. 우리 속담에도 《몰래 훔쳐먹는 떡이 더 맛있다》고 했는데  그래서 맥이 통한걸까? 바람난 여자들에 대한 정확한 통계는 알수 없지만 내 아내만은 이 부류에 속하지 않는것이 다행이다. 내 아내는 오직 가정만을 지키는 정숙한 여자이다. 나는 아내에게 물어본적이 있다. 당신은 외도를 꿈꾸어 본적이 없어? 아내의 대답은 이랬다. 가끔씩 나도 외도를 꿈꾸어 본적이 있어요. 현실 탈피의 핑게가 아닌 막연한 동경일지는 몰라도 한번쯤 어떨까…그러나 목에 걸리는게 있고 발목을 잡는게 많아요. 도덕이 시퍼렇게 살아 있고 윤리가 아직 땅속에 매장되지 않았어요. 더 중요한건 이것을 무장해제 시킬 용기가 없어요. 하지만 남자들은 내 아내와 같은 여자가 적기를 바란다. 내 친구녀석은 “내 아내를 내 놓고는 이 세상 여자들이 모두 바람이 났으면 좋겠어.”하는 말을 늘 입에 달고있었다. 그런데 그의 아내도 끝내 바람이 났다. 그는 나를 보고 “네 아내도 마찬가지야.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고 어디 두고봐라.”했고 얼마후에는 내 아내가 어떤 남자와 단둘이 함께 다방에서 맥주마시는 현장을 발견하고 나를 불러냈다. 나는 놀랐지만 아내를 믿고싶었다. 천하의 여자들이 모두 바람이 났다하더라도 내 아내만은 깨끗하기를 바라는것이 이 세상 모든 남편들의 공동한 념원이 아닌가.    
267    아름답게 사는것 댓글:  조회:5171  추천:7  2015-03-09
아름답게 사는것   김희수     단위화장실에 갔다가 화장실변기통에 더러운 배설물이 그대로 있는것을 여러번 목격한적이 있다. 손 한번 움직여 물내리기를 하는것이 힘든 일도 아닌데 자기가 마구 싸놓은 더럽고 구린내 나는 배설물을 “기념”으로 남겨놓고 도망친 놈은 대체 어떤 놈일가? 아마도 그놈은 몸은 비단으로 감았을지는 몰라도 심보는 그놈이 배설해놓은 똥처럼 더럽고 구린내가 물씬물씬 풍길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전에 한쌍의 젊은 남녀가 청소부들이 깨끗하게 쓸어놓은 길에 아무 거리낌없이 귤껍질을 훌 던져버리는것을 본적이 있다. 마침 청소부도 발견하고 달려와서 쓰레기를 아무데나 버리지 말고 쓰레기통에 버리라고 권고했지만 그 남녀는 “쓰레기를 치우는 일은 니들이 할일이 아니냐”고 하며 “하찮은 청소부따위가 누굴 훈계하냐”고 오히려 제 쪽에서 화를 내는것이였다. 옷은 멋지게 차려입은 신사숙녀였지만 그 행동거지는 쓰레기처럼 더럽고 악취 풍겼다.   우리 사회에서는 청소부를 천하다고 깔보고 업신여기는 경향이 있다. 한국에서는 청소부를 환경미화원이라고 부른다. 환경을 아름답게 가꾸는 사람이란 뜻이다. 청소부들이 있어 거리가 깨끗하고 우리가 사용하는 공공화장실도 깨끗하다. 환경을 아름답게 가꾸는 이들이야말로 참으로 아름답게 사는 사람들이 아니겠는가.   내가 사는 아빠트는 1~2층이 상가이고 3층부터 주택이다. 그래서 실외에 주택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고 3층부터 실내에 계단인 구조로 되여있다. 그 때문에 겨울에 눈이 오면 계단에 눈이 쌓여 걷기가 불편하며 자칫 넘어질 위험도 있다. 요즘은 또 지붕우의 눈이 녹아 처마밑에 고드름이 매달리기도 하고 락수물이 떨어지기도 하면서 처마밑 통로는 온통 얼음판으로 되였다.   해마다 반복되는 일이지만 내가 사는 아빠트에는 해마다 눈을 치고 얼음을 끄는 할아버지 한분이 계신다. 누가 시키지도 않고 보수 한푼도 받지 못하고 감사하다는 말 한마디도 듣지 못하면서 그 할아버지는 눈만 오면 꼭꼭 삽과 비자루를 들고 계단의 눈을 친다…   내가 룡정에 살 때도 우리 동네에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매일 새벽 참대비자루를 들고 마당을 쓰는 할아버지가 계셨다. 자기집 마당뿐만아니라 공터와 동네 사람들이 모두 출입하는 길까지 깨끗하게 쓸어놓군 했다. 그때는 모두 단층집이였는데 웃쪽 한족동네에서는 일부분 사람들이 쓰레기를 아무곳에 마구 던지고 도랑에 음식물찌꺼기거나 채소찌꺼기를 구정물과 함께 버리군 했기때문에 비가 오면 도랑물이 잘 내려가지 않았다. 일부 사람들이 매일같이 주변환경을 더럽혀놓아도 할아버지는 욕 한마디 없이 날마다 묵묵히 삽과 비자루로 주변을 깨끗이 청소해놓군 했다.   이런 무보수청소공할아버지들이 있어 동네환경이 깨긋하다. 이렇게 여러 사람을 위해 자가 한몸을 희생해 환경을 아름답게 가꾸는 할아버지들을 누가 아름답다고 하지 않겠는가.   연예인처럼 예쁘게 보이기 위해 부모가 준 얼굴을 뜯어고친다고 아름답게 사는것이 아니다. “마음이 고와야 여자지 얼굴만 예쁘다고 여자냐”하는 노래가사처럼 마음까지 곱게 가꿔야 참으로 아름답게 사는것이라고 말할수 있다. 얼굴, 몸매를 아름답게 가꾸고 옷을 곱게 차려입는것은 외면을 아름답게 가꾸는것이다. 아름답게 살려면 외면을 아름답게 가꿔야 할뿐만아니라 내면도 아름답게 가꿔야 한다. 내면을 가꾸지 않고 외면만 중시하면 자신이 배설하는 배설물처럼 더럽고 악취 풍기는 인간쓰레기로 되고말것이다.   때문에 부지런히 독서를 하면서 내면을 가꾸는 일에 투자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겉치장만 곱게 하고 내면을 가꾸지 않으면 겉보기에는 멋진 신사숙녀같지만 비단보에 싼 개똥이나 마찬가지일것이다. 몸도 비단이여야 하지만 마음도 비단이여야 한다. 이렇게 겉도 아름답게 가꾸고 속도 아름답게 가꾸며 사는것이야말로 참으로 아름답게 사는것이 아닐가.    
266    장경국의 부인 장방량의 파란 많은 일생 댓글:  조회:6133  추천:1  2015-03-08
  장경국의 부인 장방량의 파란 많은 일생   (번역)     2004년 12월 15일 점심에 장경국의 부인 장방량(蒋方良)은 대북에서 사망되였다. “중국의 제1가정”에 시집을 온 이 로씨야녀자는 대륙에서 란세의 시대를 겪었으며 대만에 쫓겨가서 적적한 일생을 보냈다. 이 세상과 고별할 때 그녀의 표정은 매우 평온했다. 1934년에 벨라루씨에서 구쏘련의 우라산으로 온 17세의 처녀 장방량은 중국에서 온 장경국을 알게 되면서부터 운명을 개변하게 되였다. 장방량은 본명이 분나였다. 부모를 여윈 그녀는 언니와 함께 살았다. 기술학교를 졸업한후 그녀는 우라산구의 중형기계공장으로 들어와 일하게 되였다. 그 시기에 그녀는 부공장장직을 맡고있던 니꼴라이를 알게 되였다. 이 니꼴라이가 바로 장경국의 로씨야이름이였다. 장경국과 장방량이 서로 알게 된 경과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두가지 설이 있다. 한가지는 “영웅이 미녀를 구했다”는 설이다. 어느날에 장경국은 밤 11시가 넘을 때까지 연장근무를 하게 되였다. 일을 마치고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에서 장경국은 한 거구의 괴한이 처녀의 앞을 막고 희롱하는것을 목격했다. 장경국은 키가 크지 않았지만 용감하게 달려들어 몇주먹에 괴한을 넘어뜨렸다. 장경국이 구한 처녀가 바로 장방량이였다. 이렇게 되여 추운 겨울밤에 로씨야처녀는 중국청년을 사랑하게 되였다. 다른 한가지는 “미녀가 영웅을 구했다”는 설이다. 장경국은 씨베리아 알타이금광으로 찾아가는 도중에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다가 한 작은 역에서 앓아눕게 되였다. 작은 역에서는 오래동안 차가 통하지 않았다. 천리에 눈덮이고 사람이 희소한 이국땅에서 장경국은 목숨이 경각에 달리게 되였다. 마침 그때 장방량은 기술학교에서 겨울방학을 하게 되여 집으로 돌아오다가 이 작은 역을 들리게 되였다. 그녀는 눈보라를 피하려고 물을 끓이는 방으로 들어갔다가 짚더미에 쪼르리고 누워있는 장경국을 발견하였다. 그녀는 눈속에서 나무를 찾아 난로를 피운후 더운물을 끓여 장경국에게 마시게 했다. 그리고 자신이 휴대했던 빵을 주었다. 주린 배를 채운 장경국은 좀 기운을 차리게 되자 자신의 파란 많은 경력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장방량은 이 중국청년에게 호감을 가지게 되였다. 그후 우라산구의 중형기계공장에서 다시 만났을 때 그들은 서로 사랑에 빠지게 되였다. 1935년 봄에 장경국과 장방량은 우라얼중형기계공장의 로동자구락부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1년후에 중로혼혈아인 장효문이 태여났다. 아이가 있게 되자 황량한 씨베리아에서 고생하던 그들의 생활에 즐거움이 있게 되였다. 1937년 4월에 분나는 고향을 떠나 장경국과 함께 중국으로 왔다. 장경국은 그녀에게 “방량”이란 이름을 지어주었다. 뿐만아니라 그녀더러 반드시 중국의 풍속습관을 따르도록 강요했다. 장방량은 “태자비”의 신분에 어울리도록 적응하느라고 매우 힘들었다. 정식으로 장씨가문에 들어서는 날부터 시작하여 장방량은 중국전통녀성의 미덕을 가진 녀성이 되도록 노력했다. 남편을 따라 중국에 오기전에는 비록 생활이 호화스럽지는 못했지만 매우 자유로왔다. 씨베리아는 비록 추웠지만 태여나서 자란 고장이였다. 그러나 중국에 온후에는 고국은 그저 꿈속에서만 나타나군 했다. 특수하고 관계가 복잡하며 례의격식이 번다한 대가정에서 매사마다 신중하고 말마디마다 조심해야 했다. 지난날의 분나는 자유로왔지만 중국에 시집온 장방량은 시부모와 남편의 뒤바지를 하며 참고 살아가야 했다. 그후 딸은 시집을 가고 관저내에는 두 로인만 남았다. 장방량은 적적하고 고독했지만 남편이 곁에 있어 의지가 되였다. 하지만 장경국이 사망되고 그후 8년내에 세 아들도 련이어 사망되는 바람에 그녀에게는 슬품만 남았다. 그녀는 늘 장경국의 사진과 네 아이의 사진만 멍하니 바라보군 했는데 한번 보기 시작하면 한나절이나 그렇게 시선을 사진에서 떼지 않았다.  
265    “위대하다”에 대하여 댓글:  조회:6907  추천:11  2015-03-01
“위대하다”에 대하여   김희수     얼마전에 중앙텔레비죤방송국 체육채널 “천하축구”의 진행자와 축구해설위원이 아르헨따나(아르헨티나)의 축구선수 메시(梅西)와 뽀르뚜갈(포르투갈)의 축구선수 호날두(罗纳尔多)를 위대한 축구스타라고 칭하는 말을 들으며 “위대하다”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였다.   몇년전에도 CCTV5 “축구의 밤”과 “천하축구” 프로에서 진행자와 축구해설위원이 축구왕 마라도나(马拉多纳), 브라질 축구선수 호나우두(罗纳尔多), 프랑스 축구선수 지단(齐达内), 에스빠냐(스페인) 축구선수 라울(劳尔), 영국 축구선수 베컴(贝克汉姆) 등을 위대한 축구스타라고 칭하는 말을 들은 기억이 생생하다.   처음에는 이런 위대한 축구선수들을 하나하나 훑어보면서 축구해설위원이 “위대하다”를 람용하는게 아닐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위대하다”는 아무데나 함부로 붙여서는 안 되잖은가. 소위 위대하다고 하는 이 축구선수들은 모두 녀자문제가 복잡했고 집단섹스파티를 여는 등 무수한 섹스스캔들을 일으켰으며 특히 마라도나는 마약복용, 총기사고, 탈세, 폭행 등으로 말썽을 일으키지 않았는가.   이런 사람들을 “위대하다”고 칭할수 있을가? 납득이 되지 않아 국어사전을 검색해보니 “위대하다”의 사전적 의미는 “도량이나 능력, 업적 따위가 뛰여나고 훌륭하다”였다. 그러니까 모든 면에서 다 뛰여나고 훌륭해야 되는게 아니라 어느 한 분야에서 도량이나 능력이나 업적 중에 하나가 뛰여나고 훌륭하면 “위대하다”고 칭할수 있는것이였다.   문화대혁명시기에는 “위대하다”가 다섯 위인과 당, 조국 등에 한해서만 사용되였다. 즉 맑스(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쓰딸린(스탈린), 모택동, 중국공산당에 한해서만 “위대하다”를 붙일수 있었다. “위대한 맑스”, “위대한 엥겔스”, “위대한 레닌”, “위대한 쓰딸린”, “위대한 모주석”, “위대한 맑스-레닌주의만세!”, “위대한 모택동사상만세!”, “위대한 중국공산당만세!” “위대한 조국이여!” 등 이런 식으로 우상화에만 사용되였다.   모택동이 사망된후에도 우상화의 영향이 계속 남아있어 공공기관은 물론 집집마다 모주석초상옆에 화국봉의 초상을 걸어두었다. 하지만 “위대한 령수 모주석” 하는 식으로 화국봉에게는 “위대하다”를 붙이지 못하고 “영명하다”를 붙여 “영명한 령수 화주석”이라고만 불렀다. 이렇게 “위대하다”는 함부로 아무데나 붙이지 못했다.   문화대혁명의 착오가 시정되면서 “위대하다”도 “위대한 사상가 공자”, “개혁개방의 위대한 총설계사 등소평”, “위대한 문학가 로신”, “위대한 수학자 화라경”, “위대한 영화배우 채플린”, “위대한 농민”, “위대한 로동자” “위대한 어머니 사랑” 등 식으로 더욱 많은 범위에 쓰이게 되였다. 그리고 위대한 마라도나 등으로도…   이렇게 어느 한 방면에서 도량, 능력, 업적 중에 하나가 뛰여나고 훌륭한 사람에게 “위대하다”를 쓰는것은 절대 람용이 아니다. “위대하다”는 맑스, 엥겔스, 레닌, 쓰딸린, 모택동에 한해서만 쓰이면 안된다. 사실은 이 다섯 위인도 어느 방면에서나 다 뛰여나고 훌륭한것이 아니고 과오도 있는게 아닌가. 과오가 없으면 인간이 아니라 신이다. 과거에 우리는 이 다섯 위인을 신으로 보았기때문에 공만 있고 과가 없는것으로 알았다.   “위대하다”를 과오가 없고 공로만 있는 사람에게만 붙일수 있다면 인간에게 붙일수 없다. 과오가 없는 인간이란 있을수 없기때문에. 그러면 “위대하다”를 “신은 위대하다”, “위대한 자연의 힘” 등 식으로밖에 쓸수 없을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과오가 있지만 어느 한두가지 방면에서 공로가 뛰여나고 훌륭한 사람에게 주저없이 “위대하다”를 붙일수 있게 되였다.   안자(晏子), 로자(老子), 공자(孔子), 묵자(墨子), 맹자(孟子), 장자(庄子), 순자(荀子), 한비자(韩非子), 동중서(董仲舒) 등에게는 “위대하다”를 붙여 “위대한 사상가”라고 부른다.   위대한 의학자들로는 중국에는 편작(扁鹊), 화타(华佗), 장중경(张仲景), 손사막(孙思邈), 리시진(李时珍) 등이 있고 한반도(조선반도)에는 전순의, 임언국, 허준, 허임, 강명길, 이제마 등이 있다. 중국조선족중에는 중국종양의학의 창시자로 불리우는 김현택(金显宅)이 있다.   세계적인 위대한 과학자들로는 아인슈타인(爱因斯坦), 에디슨(爱迪生), 큐리부인(居里夫人), 코페르니쿠스(哥白尼), 뉴턴(牛顿), 노벨(诺贝尔) 등이 있고 중국의 위대한 과학자들로는 로반(鲁班), 장형(张衡), 심괄(沈括), 곽수경(郭守敬), 채륜(蔡伦), 필승(毕升), 조충지(祖冲之), 모이승(茅以升), 리사광(李四光), 등가선(邓稼先), 전학삼(钱学森), 전삼강(钱三强) 등이 있고 한반도의 위대한 과학자들로는 최무선, 장영실, 이순지, 이태규, 안동혁, 김진의, 조장희, 이휘소, 데니스 최, 피터 김 등이 있다. 중국조선족의 위대한 과학자들로는 김홍광(金红光), 리상영(李相荣), 강경산(姜景山) 등이 있다.   세계적인 위대한 작곡가, 음악가를 손꼽자면 바흐(巴赫), 모짜르트(莫扎特), 베토벤(贝多芬), 슈베르트(舒伯特), 쇼팽(肖邦), 슈만(舒曼), 차이코프스키(柴可夫斯基) 등이 있다. 또 중국에는 유백아(俞伯牙), 주재육(朱载堉), 섭이(聂耳), 선성해(冼星海), 왕락빈(王洛宾), 화언균(华彦钧), 하록정(贺绿汀), 류천화(刘天华), 마사총(马思聪), 시악몽(时乐蒙), 등이 있고 한반도에는 왕산악, 우륵, 박연, 홍란파, 윤극영, 윤이상, 안익태, 정명훈 등이 있고 중국조선족중에는 정률성, 최건, 장천일 등이 있다.   세계적인 위대한 미술가를 헤아리자면 다 빈치(达·芬奇), 반 고흐(梵高), 피카소(毕加索), 로댕(罗丹), 고갱(高更), 라파엘로(拉斐尔), 미켈란젤로(米开朗基罗) 등이 있다. 또 중국에는 고개지(顾恺之), 오도자(吴道子), 석도(石涛), 당인(唐寅), 제백석(齐白石), 서비홍(徐悲鸿), 장대천(张大千) 등이 있고 한반도에는 신사임당, 김홍도, 신윤복, 안견, 김환기 등이 있으며 중국조선족중에는 한락연, 석희만 등이 있다.   세계적인 위대한 작가를 살펴보면 단테(但丁), 괴테(歌德), 셰익스피어(莎士比亚), 빅토르 유고(雨果), 발자크(巴尔扎克), 모파상(莫泊桑), 푸시킨(普希金), 톨스토이(托尔斯泰), 토스토예브스키(陀思妥耶夫斯基), 체호프(契诃夫), 타고르(泰戈尔), 헤밍웨이(海明威) 마크 트웨인(马克·吐温), 오 헨리(欧·亨利), 앨리스 먼로(艾丽丝·门罗),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郎),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树), 조앤 K. 롤링(J·K·罗琳) 등이 있다.   또 중국의 위대한 작가들로는 굴원(屈原), 리백(李白), 두보(杜甫), 한유(韩愈), 소동파(苏东坡), 관한경(关汉卿), 조설근(曹雪芹), 문일다(闻一多), 심종문(沈从文), 림어당(林语堂), 욱달부(郁达夫), 모순(茅盾), 파금(巴金), 량실추(梁实秋), 서지마(徐志摩), 전종서(钱钟书), 고행건(高行健), 막언(莫言), 장애령(张爱玲), 애청(艾青), 가평요(贾平凹), 진충실(陈忠实), 북도((北岛), 여추우(余秋雨), 여화(余华), 잔설(残雪), 필비우(毕飞宇), 지자건(迟子建), 김용(金庸) 등이 있다.     그리고 한반도의 위대한 작가들로는 리규보, 김시습, 허균, 김만중, 림제, 박지원, 정약용, 황진이, 리광수, 렴상섭, 김동인, 김유정, 리상, 김소월, 김영랑, 윤동주, 홍명희, 고은, 서정주, 정지용, 김수영, 황석영, 조정래, 리문열, 박경리, 박완서, 김영하, 김연수, 박민규, 박형서, 황정은, 김애란 등이 있고 중국조선족중에는 김학철 등이 있다.   왜적함대를 대항해 싸운 위대한 영웅을 꼽으라면 단연 1592년 4월 13일부터 7년 동안 이어진 임진왜란에서 왜적을 물리쳐 멸망직전의 위기에 몰린 조선을 구한 리순신과 1894년 7월 25일부터 1895년 4월 17일까지 이어진 갑오중일전쟁에서 왜적과 싸우다가 장렬하게 최후를 마친 등세창(邓世昌)을 꼽아야 할것이다.   중국조선족중에서도 위대한 사상가, 위대한 과학자, 위대한 음악가, 위대한 의학자, 위대한 교육자, 위대한 미술가, 위대한 기업가, 위대한 작가 등 “위대하다”를 붙일수 있는 위대한 인물이 많이 나오기를 기대해본다.    
264    김장이 김치인가 댓글:  조회:3426  추천:0  2015-03-01
김장이 김치인가 -김장과 김치의 어원   강상헌 언론인 · (사) 우리글진흥원 원장       김장, 대한민국의 김치 만들기와 나누기’(Kimjang, Making and Sharing Kimchi in the Republic of Korea)가 최근 유네스코의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이미 보도된 내용을 새삼스럽게 영어 제목까지 표시하며 언급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우리 당국이 규정에 따라 유네스코에 신청하고, 유네스코는 이를 검토하여 결정했을 사안이다. 허랑하게 했을 리가 없다. 그런데 제목을 보면 ‘김장=김치’가 아니다. 관련 있는 말이기는 하지만, 엄연히 김장과 김치는 다른 단어다. ‘김치’를 담구고 이를 나누는 공동체적 미덕의 전 과정이 ‘김장’이다. 맞다, 우리가 먹는 것은 김치다, 김장을 먹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언론을 포함한 여러 형태의 글쓰기나 말하기에서 김장과 김치를 같은 것으로 쓰는 경우를 본다. 심지어는 국립국어원의 국어사전도 그렇다. 그 사전은 김장과 김치가 같은 것이라고, 이렇게 풀었다. 다른 사전들도 베낀 듯 거의 같다.     그렇다면 김장은 김치를 만드는 것이면서 동시에 김치다. 그런데 그렇게 아퀴 짓기에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한국인은 매일 김장을 먹는다고? 어색하다. 또 ‘아닐 것’이라는 얘기를 자주 듣는다. 형식의 측면으로도, 내용적으로도 논리적이지 않은 점이 또한 지적돼야 한다. 김치를 담그는 것이 김장인데, 김장을 담그는 것도 김장이 되는 셈이다.   물론 시민들 중 일부가 그렇게 알았을 수 있고, 또 쓸수도 있다. 그런데 ‘김장=김치’의 등식(等式)을 확정하는 과정에서 어색하거나, 비논리적이거나,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그런 (가능한) 지적들에 관해 한번이라도 논의가 있었을까?   그 사전 귀퉁이를 살피니 ‘김치’의 어원이 침채(沈菜)라 했다. 즉 (물에) 담근 푸성귀(채소)란다. 또 각 지역의 김치를 이르는 향토(鄕土) 말 중에는 가장 일반적인 것으로 ‘짐치’가 있다. 침채의 변형 또는 토속적 변용(變容)이라고 푼다. 또 그 침(沈) 글자에다 ‘이러 저러한 성질을 가진 것’이란 뜻의 우리말 ‘치’를 붙인 ‘침치’의 변형일 거라는 견해도 있다.   그 사전, ‘김장’의 비슷한 말로 진장(陳藏) 침장(沈藏)을 들었다. 또한 어원(語源)으로 침장을 제시했다. 뜻으로 읽으면 진장은 ‘편 것을 저장함’이고, 침장은 ‘담궈 저장함’이란 뜻이다. 고개 끄덕여진다. 다른 자료들에는 ‘팀장’ ‘딤장’을 거쳐 김장이 됐다는 풀이도 있다.   김장과 김치는 한국말이다. 낱말 곁에 한자 표기가 따로 없으니 한자어가 아니라는 얘기다. 그러나 어원까지 살핀 마당에 두 말이 같다고 할 사람이 어디 있을까 싶다. 김장의 ‘장’은 냉장고(冷藏庫)의 장과 같은 말이거나 최소한 관련이 있는 말은 아닐까?   대부분은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김장과 김치는 같은 것이라고 여긴다. 사전에도 그리 돼 있지 않은가? 이해관계(利害關係) 따위로 다툼이 생길 소지가 적은 단어이기 때문에 대부분 무신경하게 지나친다. 이번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가 이 단어들의 뜻(의 차이)에 관해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일부 언론은 ‘왜 김치가 아니고 김장이 등재됐지?’하는 궁금증을 표시하는 글을 싣기도 했다. 그 답은 ‘유네스코가 상업화(商業化)를 우려해 개별 음식을 그 대상으로 삼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지만, 시민들의 상당수는 ‘김장과 김치가 다르구나’하는 사실을 (무의식중에 라도) 한 번 더 느낀 기회가 됐겠다.   ‘짜장면과 자장면’ 논란을 명쾌하게 풀어낸 일로 너무 유명한 국립국어원, 이번에 불거진 ‘김장=김치?’ 상황은 어떻게 풀어낼까? 그 국가기관은, 시민들에게는, 말글의 재판소다. 거기서 만드는 사전은 국가대표 국어사전이다.   토/막/새/김     김치의 다른 어원들을 보자. 한 사전(네이버의 두산백과)은 침채 말고도 김치의 어원을 ‘함채(鹹菜)’가 ‘감채’ ‘김채’ ‘김치’로 변화한 것이라는 설(說)도 제시했다. 함(鹹)은 소금기를 말한다. 또 침채는 ‘팀채’ ‘딤채’ ‘짐채’ ‘김채’로 변화되어 김치가 되었다는 것이다. 한 회사의 김치 전용냉장고 이름이 떠오른다. 순수한 우리말인 ‘디히’가 ‘지히’를 거쳐 ‘지’로 변한 채소 발효식품 이름을 주목하기도 한다. 이 이름은 오이지 짠지 섞박지와 같은 이름으로 오늘날의 요리에 전해진다. 말(언어)는 마치 살아서 움직이는 듯하다.      
263    추억 댓글:  조회:3135  추천:2  2015-03-01
추 억   김희수     요즘 징병검사로 병원은 초만원을 이루고있었다. 나는 생기발랄한 미래의 병사들을 위해 한사람 한사람 세심하게 신체검사를 해나갔다. 두번째 청년의 검사를 끝내고 세번째 청년의 이름을 부를 때였다. 키가 훤칠하게 크고 얼굴이 네모번듯한 중년남자가 역시 키꼴이 장대한 청년을 데리고 들어섰다. 나를 찬찬히 바라보던 중년남자가 반갑게 소리쳤다. “경수야, 너 의사로 되였구나!” “누구더라?” 내 이름까지 부르며 하대를 하는 중년남자를 곱지 않은 눈길로 바라보던 나는 놀라움과 반가움이 섞인 목소리로 그를 맞아주었다. “야, 승호구나! 이게 몇해만이냐?” 우리는 반갑게 손을 잡았다. 헤여진지 20여년이 되는 승호를 만나니 만감이 교차하면서 까마득히 잊어버렸던 어린시절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쳐갔다. 까닭모를 대자보(大字报)가 사처에 나붙고 “타도하자!”하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던 그때 어른들은 “훙써(红色)”니 “캉다(抗大)”니 “빠얼치(八二七)”니 뭐니 하면서 무리를 지어 대변론하고 돌팔매질하고 맞총질하며 판가리싸움을 하였다. 그 시기 도대체 어째서 때리고 마스고 광란하는지 어른들도 똑똑히 모르고있었으니 갓 짜개바지를 벗어놓은 우리야 무엇을 알았으랴! 한두해가 지나자 살벌하던 분위기는 좀 즘즘해진듯 싶었다. 그러나 가끔 “나쁜놈”에게 고깔모자를 씌워 투장해는 일이 많았고 날마다 식사전이나 상학전에는 “어록책”을 정히 들고 수령의 초상을 마주하여 만수무강을 축원하는것이 어길수 없는 법칙으로 되였다. 그때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것도 “로3편”, “만세”, “타도”였다. 어느 수업시간이였다. “누가 우리의 적인가? 누가 우리의 벗인가?”하는 모주석의 문장을 배울 때 선생님이 학생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누가 우리의 벗입니까? 알만한 학생 손드세요.” 학생들이 너도나도 “옛”하고 손을 들었으나 승호만이 책상에 납죽 엎드려 연필로 무엇인가 열심히 그리고있었다. “승호학생!” 내 앞에 앉은 선생님의 지명을 받자 흠칫 놀라 머리를 쳐들었다가 자기를 쏘아보는 선생님의 눈길과 마주치자 황망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말해보시오. 누가 우리의 벗입니까?” “저…” 승호는 뒤통수를 긁적거리며 어물어물 말꼬리를 흐렸다. “우리 아버지.” 순간 물뿌린듯이 조용하던 교실에서 일시에 폭소가 터졌다. 선생님은 학생들의 웃음소리가 즘즘해지기를 기다려서 다시 물었다. “그럼 우리의 적은 누구입니까?” “교장선생님입니다!” 승호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자신있게 대답했다. 교실안은 대번에 술렁거렸다. 물목이 터진듯 여기저기에서 “저새끼, 반동이다!”하는 소리가 쏟아져나왔다. 승호는 구원을 바라는 눈길로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교장선생님이 어째서 우리의 적입니까?” 선생님이 따지고들자 승호는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교장선생님은 코가 크기때문입니다. 외국특무처럼.” “하하하!” 학생들속에서 또 한번 웃음통이 터졌다. 선생님은 승호의 학습장을 집어들고 보더니 눈살이 꼿꼿해졌다. “이건 뭔가요?” “해방군입니다!” “해방군이 모자를 삐딱하니 쓰는가요? 국민당특무처럼? 수업시간에 이따위걸 그리니 적과 벗에 대한 개념도 혼동하지. 다음부터 시간에 집중을 잘해야 합니다. 알겠어요?” 선생님은 이번에는 학급에서 공부를 제일 잘하는 정순이를 보고 물었다. “정순학생이 말해보시오. 누가 우리의 적입니까?” 내 옆에 앉은 정순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챙챙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승호입니다. 승호가 우리의 적입니다!” 교실안은 일시에 키드득거리는 소리와 함께 수군거리는 소리로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선생님은 “조용히”를 부르고 나서 정순이에게 캐여물었다. “승호학생이 왜서 우리의 적입니까?” “승호는 부농인 자기의 아버지를 우리의 벗이라고 했고 존경하는 교장선생님을 우리의 적이라고 했습니다. 때문에 승호는 우리의 적입니다!” “아닙니다! 승호는 좋은 애입니다!” 나는 참지 못하고 발딱 일어나서 나의 가장 친한 동무를 변호해나섰다. “정순아, 넌 승호의 그림책을 봤니? 놈들이 나오는 낯판대기에다 모두 송곳으로 찔러놨어! 이렇게 놈을 미워하는 애가 어떻게 우리의 적일수 있니?” 정순이도 질세라 손을 흔들면서 소리질렀다. “흥, 나도 봤어. 그 뒤장에 있는 우리 해방군의 얼굴에도 송곳흔적이 있는데 뭐. 승호는 반동이고 나쁜놈이고 계급의 적이야!’ 나도 화가 나서 맞받아 소리쳤다. “좋은 애를 무함하지 말어!” “경수야, 넌 왜 나쁜 애의 편을 드니? 그럼 너도 나쁜 애야!” “승호는 좋은 애야!” “나쁜 애야!” “좋은 애야!” 선생님은 옥신각신하는 우리를 제지시키며 얼굴에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동무들, 부농자제라하여 부모와 한동아리로 보아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계급투쟁은 치렬하고 복잡하고 계급의 적들은 시시각각 복벽을 꿈꾸면서 우리의 후대들을 부식하고 쟁탈하려고 망녕되게 시도하고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적일수도 있고 우리의 벗일수도 있는 지주, 부농, 반형명분자의 자제들을 우리켠으로 끌어와야 합니다.” 선생님의 말씀에 우리는 더욱 어리둥절해졌다. 도대체 누가 우리의 적이고 누가 우리의 벗인가? 그후에 승호는 “반동구호”사건으로 나어린 가슴에 상처를 입고 정순이와 싸우게 되였다. 소조공부가 끝날 무렵이였다. 소조장인 정순이가 승호의 숙제를 검사하다가 별안간 “반동구호!”라고 새된 소리를 지르더니 승호의 숙제책을 들고 부리나케 학교쪽으로 뛰여갔다. 이튿날에 등교하자바람으로 승호는 선생님한테로 불리워갔다. 선생님은 숙제책을 펼쳐들고 엄한 눈길로 승호를 쏘아보았다. 그것은 정순이가 바친 승호의 숙제책이였는데 거기에는 “림표는 인민의 원쑤이다!”라는 비뚤비뚤한 글씨가 씌여있었다. “이건 동무가 썼습니까?” “네, 제가 썼습니다!” 승호는 선생님의 엄숙한 질문에 씩씩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장한 일이라도 한듯이 싱글벙글 웃기까지 했다. 그러자 화가 난 선생님은 책상을 “쾅”하고 내리치며 꽥 소리질렀다. “동무, 정신을 차리시오! 림부주석은 모주석의 가장 친밀한 전우이며 믿음직한 후계자입니다. 중앙수장을 원쑤라고 악독하게 모독하다니요? 이건 계급의 적들의 반동언론입니다! 솔직하게 탄백하시오. 이건 부농인 동무의 아버지가 시킨 일이지요?” “아닙니다. 선생님이 그렇게 말씀시구두…” “뭐야? 내가 언제 그렇게 그런 말을 했어?” “그저께 림부주석의 ‘모주석의 말씀은 마디마디가 진리여서 한마디가 만마디를 당한다’는 어록을 배울 때…” “너, 정신을 어따 두었니? 그때 내가 림부주석은 인민의 원수라고 했지 어디 원쑤라고 했니?” “전 원수인지 원쑤인지 잘 몰랐습니다. 그저 선생님의 발음이…” “아니, 이런…원수와 원쑤도 구별못하니 락제만 하지.” 선생님은 허거픈 웃음으로 이 일을 마무리했다. 하지만 정순이의 입을 통하여 이 일을 알게 된 아이들은 늘 승호를 둘러싸고 “반동, 반동, 새끼반동”하고 놀려주었다. 그러자 울뚝밸이 치솟은 승호는 하학하는 길에 정순이의 멱살을 잡고 따졌다. “야, 누가 반동이야? 다시 말해!” “다시 말하면 어째? 니가 반동이다! 어째?” 정순이는 두려워하기는커녕 딱 마주서서 가시돋친 말로 승호를 찔러주었다. “이 간나!” 승호의 손이 내가 말릴사이도 없이 불이 번쩍나게 정순이의 뺨을 후려쳤다. 정순이는 울음을 터뜨리면서도 입만은 놀려댔다. “새끼반동 같은게 으응, 어디 두고보자 으응…” 울분으로 하여 승호는 주먹을 부르르 떨었는데 그의 눈에서 웬 일인지 물기가 반짝이였다. 승호는 학급애들뿐만아니라 마을애들한테도 무시당하고 멸시를 받았다. 겨울방학의 어느날에 우리 마을의 아이들은 “특무잡이”놀음을 하게 되였다. 상급생인 정순의 오빠 원식이가 대장이 되여 “특무”가 될 애를 뽑았다. “대만특무에 승호!” “싫어! 난…” 승호는 특무질을 안하겠다고 떼를 썼다. 그러자 원식이는 승호를 삼켜버릴듯이 노려보며 고함쳤다. “임마, 싫어두 해야 돼!” “싫어. 난 해방군역을 하겠어!” “흥, 부농새끼가 해방군을 해? 임마, 너 같은건 특무, 반역자, 졸개질이나 해야 돼!” “씨, 누가 부농새끼야? 넌 개새끼야, 개새끼!” 승호는 더는 굴욕을 참을수 없었던지 자기보다 머리 하나가 더 큰 원식이한테 대들었다. 원식이도 화가 나서 승호의 면상에 사정없이 주먹을 안겼다. “요 새끼반동아! 내 오늘 너를 타도하여 납작하게 만들겠다!” 원식이는 승호의 코와 입에서 피가 터져나와서야 손을 떼고 애들을 데리고 떠나버렸다. 승호의 발밑에 깔린 새하얀 눈우에 시뻘건 피자국이 꽃잎처럼 피여났다. 나는 연필깎는 칼로 솜옷을 베여낸후 솜 한웅큼을 끄집어내여 승호의 피를 닦아주었다. “승호, 괴로와말아. 응? 우리 둘이 놀면 되지 않니? 내가 특무질하고 네가 해방군이 돼라 응?” 승호는 자기를 따뜻이 위로해주는 말을 듣자 내 손을 꼭 잡고 울음을 터뜨렸다. 이 일로하여 우리의 우정은 더욱 깊어졌다. 우리는 늘 그림자처럼 붙어다녔다. 숙제도 함께 하고 썰매도 함께 타면서… 그러던 어느날에 승호는 불쑥 이런 말을 꺼냈다. “경수야, 넌 커서 뭘 할래?” “난 말이야. 음…모르겠어. 넌?” “군대가 될래!” “군대? 야, 장하구나!” “난 군대가 되여 우리 아버지, 어머니하구 동생들이 잘 살도록 하기 위해서 놈들과 싸우겠어!” “그래? 난 뭘 할가? 음…난 의사가 될래. 의사가 되여 우리 할아버지의 병을 떼주구 네 병두 봐주구 그리고 또…” “야, 넌 좋은 생각을 했구나. 넌 의사가 되구, 난 군대가 되구. 야, 우리 앞날 만세!” 승호는 기쁜 나머지 퐁퐁 뛰며 환성을 질렀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의 우정이 파렬되는 도화선으로 될줄이야 누가 알았으랴! 계급투쟁의 새로운 동향을 면밀하게 주시하고있던 학교측에서는 과단성있게 반부식운동을 벌렸다. 적발하라! 누가 나쁜 말 나쁜 일을 하였는가를 모조리 적발하라! 이러한 호소에 호응하여 모두 적극적으로 일떠나 적발서를 써바쳤으나 나는 연필도 들지 않았다. 쓸것이 없었다. 내 눈엔 모두 좋은 사람으로 돼보이는데 누구를 나쁜 놈이라고 적발한단 말인가? 운동이 한창 고조에 오르던 어느날에 선생님이 나를 조용히 불렀다. “경수학생은 왜서 적발신을 쓰지 않습니까?” “…” “우리 빈하중농자제들은 이번 운동에 앞장서야 돼요. 동무가 승호와 단짝이 되였다는 적발신이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빈농인 동무를 믿어요. 동무는 승호와 친했으니깐 그가 한 나쁜 일도 알고있겠지요? 어서 그를 적발하시오!” “승호는 좋은 애입니다! 그는 나쁜 일을 한적이 없습니다!” “경수학생, 계급의 적들은 교활하기 짝이 없습니다. 겉으로는 늘 선량한척 하지만 속으로는 딴 꿍꿍이를 꾸미고있단 말입니다. 그들은 우리 무산계급정권을 탈취하려고 망녕되게 시도하고있습니다. 우리는 시시각각 경각성을 높여 웃음속에 칼을 품고있는 한줌도 못되는 계급의 적들을 일망타진해야 됩니다. 승호의 아버지는 어제 반혁명죄로 체포되였습니다. 정순동무는 벌써 승호의 많은 문제를 적발했습니다. 경수동무, 승호의 아버지란 이 부농분자는 승호를 통하여 동무를 나꿔서 저들의 검은 집단에 가입시키려고 마수를 뻗쳐씁니다. 정신을 차리고 어서 승호와 계선을 가르시오!” 나는 등골이 서늘해지며 공포의 전률을 느겼다. 아, 승호는 원래 나쁜 애였구나! 그런줄도 모르고 난 그애를 따라 그애의 아버지가 이끄는 검은 집단에 가입할번 했구나. 하마트면 나도 나쁜 애로 될번했구나. 정말 위험했어. 나는 낭떠리지에 선듯 온몸에 소름이 끼치며 눈앞이 캄캄했다. “선생님, 전…적발하겠습니다.” “그래. 좋습니다. 승호가 어떤 나쁜 일을 했는지 말해보시오.” “나쁜 일을 한건 없습니다.” “그럼 어떤 나쁜 말을 했는가를 말해보시오.” “승호는…” 나는 곰곰히 생각해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애는 군대에 가겠다고 했습니다.” “군대?” “네. 부농인 아버지를 위해서…” “그것 보시오. 그 부농분자는 세상을 뒤엎기 위해 자기의 아들에게 총을 메우려고 했소. 흥, 망상이지. 망상!” 이튿날에 비판대회가 열렸다. 승호는 학급애들의 분노에 찬 눈길을 한몸에 받으며 교단앞에 머리를 푹 떨구고 서있었다. “승호, 너 말해봐. 왜 참군하려고 했어?” 립장이 견정하고 기치가 선명한 정순이가 앞장서 따지고들었다. 승호가 침묵을 지키자 사처에서 “말해라! 말해!”하고 소리쳤다. 승호는 시달리다 못해 입을 열었다. “적과 싸우려고…” “적이란 누구냐? 우리 혁명동지들과 싸우겠단 말이지? 부농인 아버지를 위해서?” 승호는 천천히 머리를 들더니 괴로운 눈길로 나를 바라보는것이였다. 나하고만 한 말이 탄로났으니 내가 고발했으리란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였다. 나는 가슴이 불안했다. 정순이가 내 속을 빤히 들여다보기라도 한듯이 내 곁에 다가와 귀속말로 속삭였다. “두려워 말어라. 그는 한줌도 못되고 우리는 금성철벽이다. 경수야, 네가 실제행동으로 승호와 계선을 가를 때가 왔다. 자, 빨리!” 정순이의 말에서 힘을 얻은 나는 용감하게 앞으로 걸어나가 승호를 손가락질하였다. “승호, 말해라! 너의 아버지가 참군하라고 시켰지?” “아니야!” 아니라구? 뻔뻔스러운 놈!” 나는 불시에 승호의 가슴에 된 주먹을 안겼다. 그러자 아무런 준비도 없던 승호는 뒤로 허망 나자빠졌다. 승호는 입술을 꼭 사려물고 나를 뚫어지게 쏘아보았는데 얼굴근육이 경련하듯 푸들푸들 떨렸다. “경수야, 너까지도…” 오열에 차 웨치는 승호의 눈에서 두줄기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경수야, 넌 어린 시절의 뜻대로 의사가 되였구나!” 승호의 말에 나는 추억에서 깨여났다. 어린 시절 그의 가슴에 깊은 상처를 안겨줬던 일에 가책을 느끼며 나는 낯이 뜨거워났다. 그때 내가 안긴건 주먹만이 아니였다. 그것은 친구에 대한 배반이였다. 그렇다. 가장 가깝게 지내던 친구에 대한 믿음이 깨여지는 순간 그의 가슴은 얼마나 괴로웠겠는가! “승호야, 어릴 때 널 비판할 때 내가…” “허참, 철부지때의 일을 새삼스럽게 들춰내선 뭘해.” “그래두 난…” “경수야, 혼란하고 시비가 전도되였던 세월인데 어찌 정순이나 너를 나무람할수 있겠니? 그때는 어른들도 멋모르고 날뛰였는데 아이들이야 무엇을 알았겠니? 채찍을 안기려면 응당 순진하고 깨끗한 우리의 어린 심령에 무시무시한 공포심을 들쒸우고 서로 적의를 품고 경계하게 한 그 동란세월에 안겨야 하겠지. 허어, 지금은 좋은 세월이 오지 않았니? 경수야, 이 앤 나의 아들이야.” 승호는 데리고온 청년을 가리키며 말했다. “신체검사하러 왔다. 이 애를 군대에 보내려고.” 나는 승호와 청년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나는 승호의 뜻을 알수 있었다. 그는 자기가 이루지 못한 꿈을 아들에게 의탁하려는것이였다. 나는 승호의 아들이 의젓한 해방군전사로 될것을 바라면서 신체검사를 시작했다. (1987년)  
262    장씨 세습제를 종결지은 장경국 댓글:  조회:6127  추천:1  2015-03-01
장씨 세습제를 종결지은 장경국   (번역)     1975년 4월 5일 밤 11시 50분에 장개석이 사망된후 그의 맏아들 장경국(蒋经国)이 1975년 4월 28일에 국민당대통령으로 취임했다. 1975년에 장개석이 사망된후 송미령은 즉시 대만을 떠나 미국에 가서 장기적으로 거주했다. 외계에서는 모자간에 서로 응어리를 풀지 못했기때문이라고  해석했다. 그때의 장경국은 이미 실질적인 후계자였지만 중대한 일을 처리할 때마다 례모적으로 송미령에게 의견을 묻군 했다. 장경국이 “부대통령”을 선택할 때 송미령은 “신중하게 2인자를 선택하라”고 하면서 “우리 당의 종지를 진심으로 따르고 부흥대업의 집행을 견지”하는 사람을 선택할것을 권고했다. 후에 장경국이 선택한 “부대통령”은 리등휘였다. 송미령은 늘 사람들에게 “경국이가 국사를 처리하는데 나는 간섭하기 불편합니다”라고 말했다. 송미령은 리등휘에게 의견이 있었지만 결국 장경국의 선택을 존중했다. 정계에서는 장경국과 송미령이 화목하지 못하다는 소문이 돌았는데 장경국의 귀에도 그 소문이 들어갔다. 1986년에 장개석의 탄생 100돐을 기념할 때 장경국은 송미령이 대만으로 오지 않으면 모자간의 불화설이 사실이란것을 증명해주게 되는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여 막내아들 장효용(蒋孝勇)을 미국에 파견하여 송미령을 대만으로 모셔오게 했다. 장경국으로 말하면 둘째아들 장효무는 성격이 충동적이고 딸 효장은 혼사때문에 장기간 미국에 숨어지녔기에 내성적인 장효용이가 가장 합당한 후계자감이였다. 장경국은 또 장효용을 자신의 정치사무를 협조해줄 적임자로 여겼다. 장경국의 부관 옹원의 화상에 따르면 매주 화요일과 금요일은 장효용이 아버지에게 여러가지 사무에 대해 보고하는 날이였다. 민감한 정계의 인사들은 장경국의 그런 속셈을 알아내고 “태자”에게 잘 보이려고 모여들었다. 장경국도 많은 재주가 있는 청년들을 불러들여 장효용과 합작하고 교류할 기회를 주었다. 하지만 장경국은 만년에 “우리 장씨가문은 이후에 ‘대통령’선거에 참가해서는 안된다”고 했다. 이 말은 “장가왕조”의 통치에 종지부를 찍었다. 장경국이 장씨세습제도를 종결지은것은 력사학자들로부터 영명한 선택이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1988년 1월 13일에 장경국은 대북에서 사망되였다. 향년 78세였다. 중국지도자는 장경국의 불행한 서거에 심심한 애도를 표시하면서 1월 14일에 담화를 발표해 “장경국선생은 한개 중국원칙을 견지하고 “대만독립”을 반대하며 국가통일을 주장했으며 량안관계를 완화시키는데 공헌했다”고 높이 평가했다. 중공중앙 및 해당인사와 대륙에 있는 장경국의 친척들도 모두 대북에 조전을 보냈다. 장경국은 행정원장임기내에 10대건설을 추진하여 대만경제를 신속하게 발전시킴으로써 대만을 “아시아의 네마리 작은룡”중의 하나로 되게 했다. 집정말기에 그는 민주개혁을 추진하여 대만정치를 민주화의 길로 이끌었고 “한개 중국”립장을 견지했으며 “대만독립”을 반대했다. 1987년 11월에 부분적 인사들이 대륙으로 나가 친척방문을 할수 있도록 개방하여 근 40년간 량안동포들이 서로 왕래를 못하던 국면을 결속짓게 했다. 1910년 4월 27일에 절강성 봉화에서 장개석과 모복매(毛福梅)의 맏아들로 태여난 장경국은 사실 대만인민을 위해 많은 공헌을 했다. 그는 특히 기층민중들의 생활을 관심했다. 그는 매년 200차이상 농촌을 방문하여 지방의 진실한 정황을 료해했고 향촌건설을 중시했으며 수력발전 및 기초의료위생건설을 락실하여 도시와 농촌의 차별을 줄였다. 그는 지금까지 대만민중들에게 가장 환영받는 대통령으로 되고있다. 장경국의 동생 장위국(蒋纬国)과 장경국의 아들 장효용도 병으로 사망되자 송미령과 장방량(장경국의 부인)은 더욱 큰 타격을 받았다. 장씨가문은 모두 해외에 이민하여 다시는 정치사무에 대해 간섭을 하지 않았다. 2003년 10월에 송미령은 뉴욕에서 사망되였다. 향년 106세였다. 송미령의 사망소식을 들은 전세계의 화교들은 추모활동을 벌렸다. 전국정협주석 가경림은 조전에서 “송미령녀사는 중국근대사에서 영향력이 있는 지명인사이다. 송미령녀사는 중국인민의 항일전쟁과 국가분렬을 반대하기 위하여 힘썼다”고 했다. 송미령은 유언을 남기지 않았고 구술로 력사사실을 언급하지 않았으며 회억록도 남기지 않았다. 또한 개인의 비밀서류도 세상에 남기지 않았다. 일생동안 중요한 력사사실을 많이 경험한 송미령이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것은 중국력사에서 영원히 미봉할수 없는 손실이다. 이로써 장씨일가는 정식으로 력사무대에서 물러났다. 근 100년의 중국력사에서 장씨가문의 영향은 비범했다.      
261    개불알꽃을 아시나요? 댓글:  조회:6267  추천:2  2015-03-01
개불알꽃을 아시나요?     개불알꽃은 요강꽃, 작란화, 복주머니란이라고도 하는데요, 학명은 Cypripedium macranthum이고 중국어로 大花杓兰(속명은 大口袋花)이라고 하지요.   개불알꽃은 중국의 흑룡강성, 길림성, 료녕성, 내몽골자치구, 하북성, 산동성, 대만 그리고 일본, 한국, 조선, 로씨야의 사할린섬, 시베리아 등지에 분포되여있답니다.   개불알꽃은 외떡잎식물 란초목 란초과의 여러해살이풀이고 산기슭의 풀밭에서 자라며 높이 25~40센치메터입니다. 짧은 뿌리줄기를 옆으로 뻗고 마디에서 뿌리를 내리며 털이 납니다. 줄기는 곧게 서고 잎은 3~5개가 어긋나고 타원형이며 길이 8~20센치메터, 나비 5~8센치메터입니다.     5~7월에 길이 4~6센치메터의 자홍색 꽃이 줄기끝에 1개씩 핍니다. 포는 잎모양이며 길이 7∼10센치메터입니다. 꽃잎가운데 2개는 달걀모양의 바소꼴이고 끝이 뾰족하며 밑쪽에 약간의 털이 납니다. 입술꽃잎은 길이 3.5~5센치메터로 큰주머니 모양입니다. 열매는 삭과이며 7~8월에 익습니다.   개불알꽃은 해발 500~600메터의 깊은 산속에 자라는 여러해살이식물로서 늦봄에서 초여름으로 접어드는 5월에 커다란 진한 분홍색의 꽃이 핍니다. 분홍색이외에 흰색 또는 노란색도 있으나 극히 드뭅니다.     커다란 둥근 꽃이 아래로 늘어진 모양새가 개의 불알을 닮았다 하여 “개불알꽃”이라는 이름을 얻었는데  한편 요강을 닮았다고 “요강꽃”이라고도 부른답니다. 일부 식물학자들은 이름이 너무 야하고 교육적이지 못하다고 하여 “복주머니란”이라는 예쁜 이름을 새로 지어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우로 40~50센치메터정도 뻗은 줄기에 3~5개의 커다란 주름진 잎이 줄기를 감싸고있고 줄기끝에 달걀만한 커다란 자홍색꽃송이가 달립니다. 일반적으로 야생화는 크기가 작지만 개불알꽃은 극히 드물게 큰 꽃을 피웁니다. 꽃은 3개의 꽃받침과 3개의 꽃잎으로 이루어지는데 꽃받침과 꽃잎의 색갈이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합니다. 그래서 꽃받침과 꽃잎 모두가 꽃으로 인식됩니다. 둥근 공모양으로 아래쪽으로 늘어져 달려있는것을 입술꽃잎이라고 부릅답니다. 다른 2개의 꽃잎은 좌우로 기다랗게 타원형으로 뻗어 균형을 이루고있습니다.     열매에는 수만개의 씨가 들어있고 익으면 스스로 터져서 씨가 퍼져나가는 삭과(蒴果)입니다. 자연상태로 뿌려진 씨는 거의 발아하지 못하고 뿌리가 번져서 번식하지만 자생지에서 캐다가 다른 지역에 옮겨 심으면 2~3년안에 모두 죽어버립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하는 일부 사람들은 푼돈을 벌기 위해 무단채취를 계속하는데 이때문에 식물자체의 멸종위기를 맞게 된것입니다.   개불알꽃은 또 약재로도 쓰인답니다. 개불알꽃의 뿌리와 뿌리줄기를 오공칠(蜈蚣七)이라고 하는데 쓰고 맵고 따뜻한 성질을 가지고있답니다. 오공칠은 리뇨(利尿)작용을 하고 부종(浮肿)을 없애며 혈액을 잘 순환하게 하고 어혈을 제거하고 풍사를 몰아내고 습사를 없애며 통증을 멎게 하는 효능을 가진 약재로 전신부종, 소변이 잘 안나오는 증세, 대하병(带下病), 풍습으로 허리와 다리가 아픈 증세, 타박상, 리질 등을 치료하는 작용을 한답니다. 꽃 즉 오공칠꽃(蜈蚣七花)은 외상으로 출혈했을 때 사용한답니다.       그럼 이번에는 한국시인 오탁번이 지은 시 《개불알꽃》을 감상해볼까요?     개불알꽃     연못가 누운 소나무 아래   올봄에도 개불알꽃이   두 송이나 피었다   눈썹만한 햇볕에서도 고개 돌리고   솔개그늘 좋아하는   개불알꽃       누운 소나무를   차일로 삼아   들깻빛 반점도 선명하니   발그레한 불알 두 쪽이   암내라도 맡았는가   갸웃갸웃 흔들린다      
260    허세우는 왜 두번째 안해를 용서해주지 않았는가 댓글:  조회:6803  추천:0  2015-02-22
허세우는 왜 두번째 안해를 용서해주지 않았는가   (번역)     허세우는 일생에 세번 결혼했다. 전쟁년대의 복잡하고 잔혹한 환경속에서 그의 혼인은 파란곡절을 겪었다. 허세우의 결발안해는 주석명(朱锡民)인데 허세우와 한고향사람이였다. 1901년에 출생한 주석명은 허세우와 네살 년상이였다. 가난한 가정에서 출생한 주석명은 부지런하고 재간있고 천성적으로 착하여 일찍 허세우 어머니의 호감을 샀다. 허세우는 어머니의 명에 따라 주석명을 안해로 맞아들였다. 허세우는 결혼한지 사흘만에 작전명령을 받고 어머니와 신혼안해와 작별하고 전선으로 달려갔다. 전란으로 세상이 어수선한 세월에 허세우는 어쩌다가 밤중에 집에 가서 잠간동안 안해를 만나보았을뿐이다. 그후 황마봉기에 참가한 허세우는 봉기대오를 따라 고향을 떠났다. 그리고 얼마후에는 홍군을 따라 장정길에 오른 허세우는 섬북에 도착했다. 허세우와 주석명은 아들 셋을 보았는데 맏이와 둘째는 모두 어려서 요절하고 셋째아들 허광만이 살았다. 허세우가 집에서 떠난후 가족들은 그에 대한 아무런 소식도 듣지 못했다. 후에 허세우가 어느 한 전투에서 총에 맞아 사망되였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사리밝고 대의명분을 잘 아는 허세우의 어머니는 며느리를 독수공방하게 할수 없었다. 허세우의 어머니는 며느리에게 개가하라고 권고했다. 결국 허세우의 어머니주장으로 주석명은 성실하고 본분을 잘 지키는 농민한테 재가했다. 이렇게 잘못 전해진 소식때문에 허세우의 안해는 다른 사람의 안해로 되였다. 그 시기에 반동무장세력이 혁명가속에게 미친듯이 보복하기 시작했다. 허세우는 어머니가 보복을 피해 피난을 떠났고 안해와 아들이 살해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공교롭게도 허세우도 잘못 전해진 소식때문에 다시 두번째로 안해를 맞아들이게 되였다. 세월이 흘러 어느덧 몇십년이란 세월이 흘러갔다. 백발이 된 허세우의 어머니는 아들이 살아있을거란 실날같은 희망도 버린지 오래 되였다. 바로 그때 전국이 해방되였고 허세우는 산동군구 사령원이 되였다. 허세우의 이름은 자주 신문에 실렸다. 허세우가 살아있다는 소식을 들은 주석명은 기쁘기도 하고 슬프기도 했다. 기쁜것은 자신이 날마다 그리던 전 남편이 살아있었다는것이고 슬픈것은 자신이 이미 다른 사람의 안해로 되여 허세우의 품으로 다시 돌아갈수 없게 되였다는것이다. 그후 허세우는 어머니를 자신이 거주하고있는 제남으로 모셔왔다. 허세우의 어머니는 주석명이 효부였고 착한 며느리였는데 자신의 권고로 재가하였다고 알려주었다. 그 말을 듣고 허세우는 탄식했다. 허세우가 두번째로 맞아들인 안해는 뢰명진(雷明珍)이다. 사천성 달현에서 출생한 뢰명진은 장정에 참가한 홍군전사이다. 뢰명진은 진보를 추구하고 일에서 박력이 있었기에 장정대오가 섬북에 도착한후 중앙조직부의 배치로 연안현에 내려가 부녀부장직을 맡았다. 허세우는 연안에 도착한지 얼마안되여 뢰명진에게 호감을 가지게 되였다. 중매를 통해 서로 사랑하게 된 그들은 연안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후 그들은 서로 존중하고 사랑하면서 두터운 감정을 쌓았다. 세심한 뢰명진은 부대에서 양을 잡은후 버린 양털을 모아두었다가 실을 짜서 허세우에게 털옷을 떠주었다. 하늘의 조화는 알수 없다고 그들의 아름다운 인연은 장국도의 착오로선에 련루되여 좋은 결말을 보지 못했다. 1937년초에 허세우가 있는 홍군대학(후에 항일군정대학으로 개명했음)은 보안에서부터 연안으로 옮겨졌다. 항일군정대학에서 “장국도의 로선”을 청산할 때 투쟁을 확대화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그때문에 항일군정대학에서 공부하던 홍군4방면군의 고급장령들도 련루되여 투쟁을 받았다. 홍군4방명군에서 온 학원들은 하나하나 모두 기가 죽어 머리도 들지 못했다. 허세우는 몹시 억울함을 느꼈다. “여기서 이 어른을 박대한다면 다른 곳으로 가야지. 이 어른을 받을 곳이 얼마든지 있을테니깐 우리 가자!” 원래 성질이 급하고 정치상에서 아직 성숙하지 못했던 허세우는 항일군정대학에서 공부하던 홍군4방면군의 고급장령들을 선동하여 비밀리에 사천에 돌아가서 유격전을 할 착오적인 생각을 했다. 그리고 떠날 준비를 하다가 일이 탄로가 나서 허세우 등 홍군4방면군의 수십명 고급장령들이 “반혁명집단을 조직한 죄”, “혁명을 배반한 죄”, “총을 가지고 도주한 죄” 등 죄명을 쓰고 갇히게 되였다. 허세우는 너무 억울하고 분했지만 입이 열개라도 할말이 없는 처지가 되였다. 절망한 허세우는 죽기만을 바랐다. 그런 처지에서 그는 안해 뢰명진이 몹시 그리웠다. 그는 다른 사람한테 부탁해서 안해한테 마지막으로 남길 말이 있으니 한번 만나러 오라고 햇다. 안해한테 함께 백년해로 할수 없게 된것이 미안하다는 말을 하려고 했던것이다.    그런 부탁을 한후 이제나저제나 안해가 오기만을 기다리던 허세우는 뜻밖에도 안해의 절교신을 받게 되였다. 편지에는 “허세우, 전 당신이 미워요. 전 절대 반혁명분자를 사랑하지 않을거예요. 우리 리혼합시다”라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그 편지는 허세우에게 청천벽력이 아닐수 없었다. 허세우는 자신이 곤경에 처하여 친인들의 위안이 절실하게 필요할 때에 안해가 그토록 무정하게 배신할줄을 생각도 못했다. 이 일은 강철같이 억센 사내대장부인 허세우에게 일생동안 아물기 힘든 상처를 남겨놓았다. 후에 모택동이 친히 “장국도투쟁”을 확대화한 착오를 시정하였기에 허세우는 무사히 풀려날수 있었다. 그때에야 뢰명진은 자신의 일시적인 충동으로 경솔하게 내린 결정을 후회하면서 여러번이나 허세우를 찾아와서 잘못을 빌면서 재결합을 하자고 애원했다. 하지만 허세우는 용서해주지 않았다. 뢰명진이 주덕, 진갱, 진석련 등 허세우의 상급과 로전우들을 청하여 허세우의 마음을 돌려세우려고 했지만 허세우는 “안된다”고 딱 잘라 말했다. 허세우가 세번째로 맞아들인 안해는 전보(田普)였다. 1922년에 산동성 래양에서 출생한 전보는 허세우보다 17살이나 년하였다. 그들은 환난을 함께 한 진정으로 금슬이 좋은 부부였다. 허세우와 전보는 1941년에 결혼하여 2자 4녀를 낳아 키우면서 44년이란 세월을 함께 살았다. 1939년 가을에 허세우는 중공화북국 당학교에 가서 공부하게 되였다. 얼마후 주덕의 추천과 모택동의 비준을 받아 산동종대로 전근되여 제3려 려장직을 맡았다. 그때로부터 16년동안의 산동전투생활이 시작되였다. 또 거기서 허세우의 세번째이자 마지막 사랑이 시작되였다. 1941년에 허세우는 이미 36살이 되였지만 여전히 독신이였다. 늘 병사들을 거느리고 전투를 하느라 눈코뜰새 없었지만 곁에서 돌봐줄 사람이 없어서 그의 생활은 엉망이였다. 그의 부하들은 그가 혼자서 고생하는것을 보다못해 그에게 배우자를 소개해주려고 상의했다. 후근부장 고대산은 근거지의 병기공장에서 일하는 품행이 단정하고 용모가 아름다운 처녀를 허세우에게 소개해주려고 마음먹었다. 고대산은 허세우를 모시고 병기공장으로 선을 보러 갔다. 병기공장문앞에 도착하자 허세우는 고대산이 소개해주기를 기다리지 않고 안에서 일하는 처녀를 손으로 가리키면서 “내 보기에는 저 처녀면 좋겠소”라고 말한후 말을 타고 돌아갔다. 허세우가 가르킨 처녀는 전명란(田明兰)이였다. 전명란은 후에 전보라고 이름을 고쳤는데 그녀가 바로 고대산이 허세우에게 소개해주려고 했던 처녀였다. 당시는 항일전쟁이 가장 간고하던 세월이였기에 그들에게는 꽃그늘과 달빛아래의 랑만도 없었고 아기자기한 속삭임도 없이 번개식 결혼을 했다. 허세우의 말대로 “서로 동의하는가, 동의하지 않는가를 물은후 둘 다 동의한다고 해서 5분만에 통쾌하게 결혼”했던것이다. 허세우와 전보가 결혼한후 조직에서는 허세우의 생활을 보살펴주기 위해 정식으로 전보를 허세우의 생활비서로 배치했다. 전보는 허세우를 살뜰히 보살피며 최선을 다해 내조했다. 허세우와 전보는 생사고락을 함께 하면서 44년이란 세월을 사랑했다. 전보는 허세우를 애틋이 추억하면서 “허세우의 수많은 전기적인 영웅적 사적은 나를 깊이 감동시켰습니다. 그이는 나의 엄한 스승이면서도 친구였습니다”라고 말했다. 허세우도 생전에 감탄하면서 “전보는 나의 일생에서 가장 충직한 동반자입니다. 래세가 있다면 나는 또 전보를 안해로 맞아들일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복건당사월간》
259    청년시절에 거지행세를 하며 돌아다닌 모택동 댓글:  조회:6191  추천:0  2015-02-16
청년시절에 거지행세를 하며 돌아다닌 모택동   (번역)     모택동의 사적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알고있지만 그가 청년시절에 동학 소유(萧瑜)와 함께 거지행세를 하며 돌아다닌 이야기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소유는 저명한 시인 소삼(萧三)의 형으로서 모택동과 함께 신민학회를 발기한 인물이다. 1916년 여름에 모택동과 소유는 몸에 1전한푼도 지니지 않고 천리길을 걸어서 장사, 녕향, 안화, 익양, 원강 5개현을 돌아다녔다. 1916년 7월에 장사제1사범학교에서 공부하고있던 모택동과 소유는 사회에 대해 료해하기 위해 여름방학기간을 리용하여 거지처럼 화장하고 호남성을 돌아보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우산과 자그마한 헝겊가방을 하나씩만 휴대하고 길을 떠났다. 헝겊가방안에는 옷한벌과 세수수건, 종이, 펜 등 간단한 물건이 들어있었다. 그들은 몸에 1전한푼 지니지 않고 걸어서 길을 떠났다. 상강앞에 이르렀을 때 그들은 첫번째 난관에 부딪쳤다. 돈이 없어서 강을 건널수 없었던것이다. 그들이 거듭 사정해서야 배사공은 그들을 배에 오르라고 했다. 강을 건넌후 그들은 장사에서 녕향현으로 가는 길을 따라 걸어갔다. 그들은 이야기를 하면서 걷다보니 시간이 가는줄도 몰랐다. 배가 고파서야 그들은 비럭질을 시작했다. 그들은 길옆의 농가를 찾아다니며 밥을 빌었다. 하지만 농민들은 배를 곯고있는 처지인지라 좀처럼 음식을 주지 않았다. 여러집을 돌아다녀서야 배를 절반쯤 불릴수 있었다. 그들은 밥을 빌어먹기가 쉽지 않다는것을 깨달았다. 후에 그들은 지식인의 집을 찾아가 보기로 결정했다. 어느날에 그들은 류씨성을 가진 로신사의 집으로 찾아갔다. 그들은 먼저 밥 한그릇을 달라는 뜻의 시 한수를 써서 로신사에게 드렸다. 그들의 재주에 탄복한 로신사는 그들을 청하여 한끼를 대접한후 려비로 쓰라고 40전까지 주었다. 류씨댁에서 나온 그들은 시내물을 따라 걷다가 날이 어두워지자 강뚝아래에서 로숙하기로 마음먹었다. 피곤했던 그들은 눕자마자 잠이 들었다. 모택동이 밤중에 깨여나보니 소유가 어느새 굴러갔는지 부근의 나무아래에서 자고있었다. 다시 잠을 자려던 모택동은 멀지 않은 곳에서 호랑이 한마리가 웅크리고있는것을 발견했다. 모택동은 몹시 놀라고 두려웠지만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말이 생각나서 살금살금 소유한테로 기여갔다. 호랑이가 아직 자신들을 발견하지 못했으니깐 소유가 깨여나서 소리지르는것을 방지하면 된다는 생각에서였다. 모택동은 소유의 옆에서 날이 밝을 때까지 지켰다. 그런데 날이 밝은후에 보니 호랑이로 보였던것은 원래 커다란 돌이였다. 두 사람이 방금 일어났는데 풀숲에서 뱀이 나타나서 그들한테로 다가왔다. 깜짝 놀란 그들은 “걸음아 날 살려라”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여갔다. 그후부터 두 사람은 다시는 야회에서 밤을 자지 않기로 약속했다. 녕향현소재지에 도착한후 모택동은 며칠동안 거지생활에서 받은 감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총결지었다. “몸에 1전한푼도 없이 지내기는 매우 힘들지만 머리를 쓰면 끝까지 견지할수 있고 어떠한 곤난이든지 극복할수 있다.” 이튿날에 그들은 녕향현 소재지에 도착했다. 그때 그들은 동창생 진소휴와 하숙형이 이 부근에서 살고있다는 생각이 나서 찾아가보았다. 그들은 먼저 진소휴의 집에서 며칠을 지내면서 주위의 농가들에 대해 조사했다. 그들은 조사를 통해 농민들이 량식이 모자라고 옷도 제대로 입지 못한다는것과 대부분 농민들이 50세까지도 살지 못한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그 기간에 그들은 농민들과 함께 물도 긷고 밭일도 하면서 생활체험을 했다. 다음 그들은 하숙형의 집으로 찾아갔다. 하씨댁은 자체로 돼지를 기르고 농사질을 하면서 자급자족하는 전형적인 농민이였다. 하숙형의 아버지는 자신의 농장, 돼지우리, 논밭을 참관시켰다. 그는 자신의 두손으로 분투하여 가업을 일떠세운 이야기를 하면서 자급자족하는 생활에 매우 만족하고있었다. 하로인이 열정적으로 만류했기때문에 모택동과 소유는 그의 집에서 이틀이나 묵다가 길을 떠났다. 길에서 모택동은 하로인과 함께 지냈던 시간들을 돌이켜보면서 감개가 무량했다. 얼마나 소박하고 선량한 로인인가? 자신의 하로인은 자신의 로동으로 자급자족하는 생활에 만족하고있었다. 그런데 불행한것은 헐벗고 굶주린 농민들이 많다는것이였다. 모택동은 무수한 농민들이 자신의 토지가 없어 다른 사람의 머슴살이를 하는것을 보았다. 농민들은 매일 새벽 일찍 일어나서 밭에 나가서 죽도록 일하다가 밤늦게 돌아오지만 자신의 로동성과는 모두 지주에게 바쳐야 했다. 사람마다 자신의 토지가 있고 즐거운 생활을 할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가! 모택동은 그런 세상을 만들고싶었다. 두 사람은 안화에 도착한후 계속 익양으로 향했다. 현소재지에 도착했을 때는 오전 10시쯤 되였다. 아침식사를 하지 않았기때문에 체면을 무릅쓰고 차집으로 들어갔다. 아침식사가 끝나자 소유가 남겠다고 했기때문에 모택동은 방법을 대여 돈을 얻으려고 했다. 그러나 두개의 골목을 돌면서 구걸했지만 21전밖에 얻지 못했다. 두 사람은 상의한후 점포에 주련을 써주는것으로 소비돈을 해결하기로 했다. 모택동은 붓을 날려 주련을 써주었는데 모두들 글씨가 멋지다고 찬탄했다. 한번은 차집주인과 한담을 하게 되였다. 원래 차집주인은 선비였는데 생활의 핍박에 의해 차집을 경영하게 되였다. 주인은 자호감을 가지고 말했다. “나에게는 아들 셋이 있는데 두 아들에게는 장사를 하게 하고 한 아들에게는 글을 읽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니 가문에 긁읽는 기풍이 유지되고 넉넉하게 살수도 있게 되였죠.” 주인은 아주 자랑스럽게 이야기했지만 모택동은 주인의 결정이 아주 리기적이라고 인정했다. 가정의 리익만 생각하고 아들들의 소원과 사회의 정체리익은 안중에도 없었기때문이다. 모택동은 소유를 보고 말했다. “중국인들은 가정관념을 매우 중하게 여기기때문에 민족감정이 결핍하지요. 훌륭한 국가는 인민을 보호하기때문에 인민은 국가를 보위할 의무가 있습니다. 인민은 마땅히 나라를 생각해야지 자기 가정의 리익만 생각해서는 안되지요.” 여기까지 말한 모택동은 잠시 침묵하다가 말을 이었다. “가장 중요한것은 강유력한 정부가 있어야 한다는것이지요. 훌륭하고 강유력한 정부를 세우기만 하면 인민은 능히 조직할수 있습니다!” 그들이 익양을 떠나려고 준비하고있을 때 벽에 붙은 현장고시를 보게 되였다. 그때에야 그들은 익양현 현장이 바로 제1사범학교의 화학선생으로 계시던 장강봉선생이란것을 알고 찾아가보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대문을 지키는 위병이 그들이 거지라고 들어가지 못하게 가로막았다. 그들이 오래도록 버텨서야 위병은 하는수없이 장현장에게 아뢰였다. 장강봉은 그들의 이름을 듣고 모셔오라고 분부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장강봉과 함께 술을 마시면서 몇시간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두 거지가 현장의 귀빈으로 초대된것이였다. 이튿날에 그들이 떠날 때 장강봉은 위병을 시켜 그들을 성문밖까지 바래다주게 했다. 익양에서 다시 출발한 그들은 원강을 따라 걸으면서 장강봉에 대해 이야기했다. 어느날 저녁에 그들은 한 자그마한 려관에 도착했다. 다른 손님이 없었기때문에 녀주인은 그들에게 말을 걸었다. 모택동은 “우리는 거지인데 장사로부터 걸어서 왔습니다. 이미 천리길을 걸었지요”하고 말했다. 녀주인은 크게 놀라면서 “제가 관상을 볼줄 아는데 한눈에 두분이 대단한 인물이란걸 알아보았습니다.  그런데 거지라니요?”하고 말했다. 그 말에 두 사람은 웃고 녀주인도 따라 웃었다. 이튿날에 두 사람이 떠날 때 녀주인은 그들을 바래주면서 “저는 호여영이라고 불러요. 이후 모선생이 출세하면 제가 모선생의 참모노릇을 할게요”라고 롱담조로 말했다. 두 사람은 호여영과 작별하고 몇시간의 길을 걸어서 원강현에 도착했다. 그러나 미처 생각지 못한것은 빙설이 녹으면서 장강에 물이 넘쳐 원강현이 완전히 외계와 차단된것이였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배를 타고 장사로 되돌아가기로 결정했다. 장사로 돌아오는 배우에서 모택동은 옷을 잘 입은 두 사람이 아주 사소한 일로 손찌검을 하며 싸우는것을 목격했다. 모택동은 사람의 도덕수준을 가늠하는것은 금전이 아니라 지식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장사에 도착한후 두 사람은 이번의 경력을 기념하기 위해 함께 사진을 찍었다. 사진의 두 사람은 해여진 옷에 짧은 바지를 받쳐입었고 짚신을 신고있었다.    
258    애비얼굴에 똥칠을 왜 할가 댓글:  조회:6406  추천:9  2015-02-09
애비얼굴에 똥칠을 왜 할가   김희수   자고로 애비얼굴에 똥칠을 하는 일은 늘 있어왔기에 새삼스러운것이 아니다. 하지만 요즘 중국 연예계에서 마약범죄로 애비얼굴에 똥칠을 한 사건이 잇달아 생기면서 두 거물급스타에 세인들의 이목이 집중되였다.   세계적인 영화배우 성룡(成龙)의 아들 방조명(房祖名)과 국내에서 손꼽히는 영화배우이며 감독인 장국립(张国立)의 아들 장묵(张默)이 최근에 선후로 마약범죄로 각각 유기형 6개월과 함께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애비를 잘 만난 덕에 연예계에 쉽게 발을 들여놓은 이 두 젊은 배우는 세인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애비얼굴에 구린내가 팍팍 나게 똥칠을 해댄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또 애비를 잘 만난 덕에 중형을 받지 않고 가벼운 처벌을 받을수 있게 되였다.   방조명은 8년의 마약흡입경력이 있었고 다른 사람들에게 마약을 흡입할 장소를 제공했기에 사람들은 그가 3년형은 선고받을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2015년 1월 9일에 북경시 동성구인민법원의 재판에서 방조명은 유기형 6개월에 벌금 2000원을 병과하는 처벌밖에 받지 않았다.   장묵은 2012년에 한번 구속된 전과가 있는데다 마약흡입이 상습적이였기에 사람들은 그가 중형을 선고받게 될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2015년 1월 27일에 북경시 해정구인민법원의 1심에서 장묵은 6개월형에 벌금 5000원밖에 선고받지 않았다. 게다가 6개월전에 체포되여 이미 형기가 만기되였기에 2심까지 가지 않고 이틀후에 석방되였다.   두 사람은 자수했고 죄를 뉘우치는 태도가 좋았다는게 경한 처벌을 내린 리유이다. 붙잡힌 다음에 죄를 승인한것도 자수인가? 또 죄를 뉘우치는 태도가 좋았다면 한사람은 왜서 8년동안이나 마약흡입을 했고 다른 한사람은 왜서 두번이나 감옥으로 들어갔겠는가? 애비들의 배경이 상당한 힘이 되였을건 불보듯 뻔하다.   연예계의 거물급인 두 사람의 아들이 마약범죄로 잡혀가다니? 더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마약퇴치 홍보대사인 성룡의 아들이 마약흡입을 한것이다. 그것도 8년동안이나 마약흡입을 했고 다른 사람에게 마약을 흡입할 장소까지 제공해준것이다. 성룡이 목이 빠지게 다른 사람에게 마약을 흡입하지 말라고 홍보하는 동안 아들은 다른 사람까지 끌여들여 장기간 마약흡입을 한것이다.   이럴 때 애비로서 무슨 말을 할가? 성룡과 장국립은 아들때문에 얼굴에 똥칠을 당하고 명예가 바닥에 떨어질번 했지만 로련한 그들은 위기를 모면하는 수법을 알고있었다.     우선 장국립은 2012년 때처럼 급급히 나서서 사과하지 않고 아들의 마약범죄에 대한 언급을 회피했다. 먼저번처럼 사과하면 역효과를 낼수 있다는것을 알고있었던것이다. 첫번째 사과는 받아줬지만 두번째 사과는 받아줄 확률이 낮았기때문이다. 장국립은 타이밍을 기다렸다가 때마침 방송되고있는 드라마에서 자신이 맡은 배역이 아들과 비슷한 처지에 처했을 때 극중의 배역을 빌어 “나는 모든 문제는 자신이 저지른것이기에 다른 사람을 탓해서는 안된다고 여긴다. 그러나 생활에 사랑이 있고 꿈이 있다면 좋은 방향으로 바뀔수 있다”고 말했다.   아니나 다를까 장국립의 그 말은 사과보다 열배나 나은 효과를 보았다. 재빨리 그를 리해하고 그의 아들을 용서해주었다. 성룡도 아들의 똥칠벗기에 나섰다. 그는 인터뷰를 통해 공적인물로서 부끄럽다는 사과를 하고 마약범죄를 저리른 아들은 엄격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성룡은 국민들이 거물급 스타의 사과에 약하다는것을 알고있었다. 예상했던대로 국민들은 연예인도 사람인데 착오를 범할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들을 벼랑으로 몰아 앞길을 철저하게 망치게 하지 말기를 바라고있었다.   법도 그런 민심을 간파한듯 두 거물의 아들을 때려서 아프지 않을만큼 아주 경하게 처벌했다. 법도 연예인범죄에 관대한것인가? 어쩌면 장국립이나 성룡은 사전에 이런것을 모두 계산에 넣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아버지의 든든한 후광으로 남들보다 쉽게 연예계에 발을 들여놓은 장묵이나 방조명은 똥을 싸놓으면 알아서 뒤수습을 해주는 아버지의 배경을 믿고 애비얼굴에 똥칠하는 일을 대수롭지 않게 저지르는건 아닌지? 또 연예인실수에 관대한 선량한 국민들의 심리를 리용해 아무곳에나 마구 똥을 싸놓는건 아닌지?   다른 사람보다 몇년을 적게 분투하고 들어온 연예계에서 기성연예인들을 따라가자니 애로가 많고 아무리 노력하고 발버둥쳐도 애비를 따라갈수 없는 절망, 고통 그런것들 때문에 몸부림치다못해 구린 똥을 아무데나 배설했을수도 있지만…   이미 연예인을 선택했으면 공적인물답게 탈선행위를 자제하며 적어도 애비얼굴에 똥칠하는 일은 하지 말아야 되잖겠는가?    
257    50여년전에 2억명의 목숨을 앗아갈번 했던 꾸바미사일위기 댓글:  조회:5662  추천:0  2015-02-08
50여년전에 2억명의 목숨을 앗아갈번 했던 꾸바미사일위기     미국과 구쏘련이 핵무기를 손에 쥔채 기세싸움을 벌리던 40여년 랭전기간중 가장 긴박했던 사건이 1962년의 “꾸바미사일위기”이다. 1962년은 미쏘간에 심각한 대립과 긴장관계에 처해있던 한해였다. 랭전의 전성기에 발생된 꾸바미사일위기는 미쏘간의 핵전쟁위험조차 포함한것이였다. 꾸바미사일위기는 1962년 10월 22일부터 11월 2일의 11일동안 중거리핵미사일을 꾸바에 배치하려는 구쏘련의 시도를 둘러싸고 미국과 구쏘련이 대치하여 핵전쟁직전까지 갔던 국제적 위기이다. 구쏘련이 미국을 겨냥한 중장거리핵미사일발사기지를 꾸바의 곳곳에 비밀리에 건설하고있음을 알아낸 미국이 이를 즉각 철거하라고 모스크바에 요구하고 관련장비와 인력을 실은 구쏘련배들이 더는 꾸바를 드나들지 못하도록 함정(舰艇)을 동원해 해상을 전격봉쇄했던 사건이다. 제3차세계대전, 그것도 두 강대국이 전면 핵전쟁직전까지 감으로써 온 세계가 숨을 죽였던 이 위기가 지난지 50년이 됐다. 1962년 10월 16일에 미국중앙정보국이 몇달전부터 첩보수준으로 떠돌던 문제의 핵미사일발사기지건설을 항공정찰을 통해 확인하고 이를 케네디(肯尼迪)대통령에게 보고했다. 극비의 국가안전보장회의를 6일동안 잇달아 연 끝에 10월 22일에 케네디가 텔레비죤방송에 나섰다. 케네디는 그때까지 국민이 전혀 모르던 꾸바상황을 설명하고 “당장 해상봉쇄에 들어간다”는 중대발표를 했다. 당사자인 구쏘련에도 사전경고가 없던 돌연적인 발표였다. 그다음 날부터 미국학교와 직장은 민방공훈련에 들어갔다. 어린이들은 선생들의 지시에 따라 책상밑으로 숨고 팔로 머리를 감싸는 실습을 했다. 실제효과가 있을지 의심습지만. 케네디의 성명에 이어 핵무기를 관장하는 미군부대들은 전면적인 핵전쟁을 준비했고 구쏘련도 비슷한 조치를 취하고있었다. 온 인류의 운명이 걸린 도박이였지만 어떤 나라도 개입하거나 중재할수 있는 상황이 아니였다. 그저 전세계는 공포와 긴장속에서 숨죽이며 사태의 전개를 바라보고있었을뿐이였다. 긴장은 10월 24일에 미사일은 운반하던 16척의 구쏘련화물선이 해상봉쇄작전을 펼치고있던 미국해군함정에 다가서면서 최고조에 달했다. 미군에 비상이 걸린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비상은 처음 경계상태 3 단계에서 시작해 며칠뒤에는 전쟁직전에 발령되는 최고 단계인 2단계로 격상됐다. 그와 동시에 핵탄두를 싣고 갈 대륙간탄도미사일 145기가 발사대기에 들어갔고 핵폭탄을 실을 중(重)폭격기 23대, 핵폭탄을 장착할 요격기 161대가 출격준비를 마쳤다. 이런 핵무기목적지는 꾸바가 아닌 구쏘련이였다.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끼에 각각 한발씩 투하된 원자탄이 두 도시를 초토화했던 점과 그 뒤로 핵무기성능이 훨씬 강화된 점을 고려하면 이런 무기의 파괴력을 짐작할수 있을것이다. 이와는 따로 재래식무기로 꾸바를 타격할 상황에 대비해 폭격기 1400대가 8개조로 나뉘여 1개조는 항시 공중에 떠있는 공중준비상태에 돌입했다. 꾸바미사일위기는 그 전해에 일어났던 피그스만사건(猪湾事件)과 련관되여있다. 꾸바는 미국 플로리다반도에서 140여킬로메터 떨어졌다. 1959년에 부패한 바티스타정권을 몰아낸 꾸바에 사회주의정권이 탄생하자 미국과 꾸바의 관계는 급속도로 랭각되기 시작했다. 그동안 바티스타정권의 든든한 뒤배였던 미국은 코앞의 나라에 새로 들어선 피델 카스트로(菲德尔·卡斯特罗)정권을 눈에 든 가시처럼 여겼다. 결국 미국중앙정보국은 이를 전복시킬 작업에 들어갔다. 꾸바에서 미국으로 망명한 난민 1500여명을 훈련시킨 뒤 꾸바 피그스만에 상륙시킨것이다. 이들이 현지에서 활동을 시작하면 민중봉기가 일어날것이라고 기대했지만 공작은 완전한 실패로 끝났다. 비밀이 루설되여 상륙대원들이 바로 제압당한것이다. 구쏘련은 이 사태를 앞세우며 카스트로를 설득해 문제의 핵미사일발사기지건설에 들어갔다. 미국에 한참 뒤처진 핵전력상황때문에 압박을 느끼던 크레물리궁은 이 기회에 미국에 린접한 곳에 핵을 배치하면 어느 정도 만회가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미국대통령 케네디의 대국민발표직전까지 미국국가안보회의에서 론의된 대응방안은 다양했는데 구쏘련에 대한 외교적압박, 전투기를 활용한 꾸바내에 있는 문제의 기지를 폭격, 미군상륙을 통한 카스트로정부를 무너뜨리기 등이였다. 합참회의쪽 사람들은 꾸바에 대한 전면침공이 최선이라는 강경론을 내세웠다. 반면에 미국국방장관 로버트 맥나마라(罗伯特·纳马拉)는 “이번 사태를 모르는척하고 그냥 넘어가자”는 방안을 내놓았다. 그는 “핵폭탄보유량이 미국은 5000개, 구쏘련은 300개에 불과한 상황에서 꾸바에 핵미사일 몇십기가 추가된다고 해도 힘의 비례에는 변동이 없을테니 긁어 부스럼을 만들지 말자”는것이였다. 케네디대통령의 대국민발표후 첫 나흘동안 량국정상간에 전보를 리용한 몇차례의 교신이 있었다. 하지만 구쏘련의 최고지도자 흐루쑈브(赫鲁晓夫)는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는 쏘련선박은 미국의 해상봉쇄를 묵살할것이라 밝혔다. 실제로 그사이에 미사일과 관련된 구쏘련선박 수십척이 봉쇄선을 향해 점점 다가오고있었다. 미국국가안전보장회의에서 주전파의 목소리가 커가고 일촉즉발의 충돌위험이 높아질무렵에 구쏘련이 타협안을 제시했다. “미국이 꾸바를 더는 침공하지 않을것임을 공개적으로 밝히고 미국이 구쏘련을 겨냥해 토이기에 배치해놓았던 미사일을 철수할 경우 구쏘련도 꾸바내의 미사일을 철수하겠다”는 내용이였다. 이 타협안을 받은 미국은 곧바로 수정안을 구쏘련에 보냈다. 수정안은 “미국이 꾸바불침공을 공개적으로 선언하되 토이기내의 미국미사일철수는 두 정상간의 비밀약속으로 덮어뒀다가 꾸바내의 미사일이 철수된 직후 미국의 자발적조치형식으로 리행한다”는 내용이였다. 이는 미국의 체면을 세워줄 눈가림으로서 미국국무장관 데이비드 딘 러스크(迪安·拉斯克)가 낸 고안이였다. 1962년 10월 28일에 흐루쑈브가 이 수정안을 받아들였다. 미국의 첫 국가안전보장회의 이후 13일간 이어진 련속극은 이렇게 일단락을 맺았다. 사람들은 숨을 다시 내쉬였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이 사태를 망각했다. 꾸바미사일위기를 일단락한 직후 가장 단순화된 평가는 “케네디의 배짱이 구쏘련을 꺾었다”였다. 이는 세월이 지나면서 정론으로 굳어졌다. 미국의 다른 한가지 양보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으니 이런 평가가 나올만도 했다. 카나다군사대학 교수 도언은 먼지가 쌓인 문서보관소를 뒤진 끝에 꾸바미사일위기의 해결과정에서 케네디와 흐루쑈브외에 또 한명의 주역을 발굴해 최근에 한 학술잡지에 발표했다. 당시에 제3대유엔사무총장 우탄트(吴丹)가 막판 며칠간에 눈부신 구실을 했다는 내용이다. 당시에 미국과 구쏘련의 대표부는 뉴욕유엔본부건물 38층에 각각 자리잡았다. 도언교수는 “우탄트가 두방을 숨가쁘게 오가며 중재한끝에 타협이 이뤄졌다”고 했다. 한번은 미국대표가 심야에 우탄트를 깨워서 미국이 최소한의 체면을 세울수 있도록 구쏘련측을 설득해달라고 간청했다는 일화도 찾아냈다. 꾸바미사일위기에 관해 훨씬 뒤에 밝혀진 또 하나의 섬뜩한 사실이 있다. 당시에 꾸바에는 문제의 전략핵무기와는 따로 전술핵폭탄 100여개와 이를 운용할 구쏘련군병력도 주둔해있었다는것이다. 전략핵무기란 대형핵폭탄 혹은 이를 실어나를 미사일을 말한다. 이는 실전에 사용하기보다 힘을 과시해 상대로 하여금 공격할 엄두를 못내게 하는것이 주목적이다. 이에 비해 소형인 전술핵폭탄은 실전에서 사용할것을 전제로 배치된다. 전략핵무기는 군통수권자만이 발사명령을 내리지만 전술핵폭탄은 일선의 지휘관도 발사명령을 내릴수 있다. 만약 당시에 미국이 꾸바를 상대로 군사행동에 들어갔더라면 꾸바주둔 구쏘련군이 방어를 위해 전술핵무기를 썼을 가능성이 높고 그 결과는 생각하기조차 아찔한 상황으로 치달았을것이다. 미국 하버드대학 안전보장전문가 앨리슨교수는 최근에 외교안전보장분야의 전문잡지에 발표한 글에서 “만약 당시에 전면핵전쟁으로 갔더라면 미국인 1억명, 구쏘련인 1억명이상이 사망됐을것”이라고 추산했다. 군사전문가들은 당시에 케네디의 대응에 칭찬할만한 점이 있다면 벼랑끝전술을 들고나온 담력보다 강경론자의 큰 목소리에 휘둘리지 않고 균형을 잘 잡은 점이라고 분석했다.    
256    인구가 많으면 지구가 망한다 댓글:  조회:6729  추천:12  2015-02-01
인구가 많으면 지구가 망한다   김희수     새해에 들어서면서 세계인구는 72억명 수준에 들어섰다. 세계인구가 50억명을 넘은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국제련합이 해마다 7월 11일을 세계인구의 날로 지정한것(1987년 7월 11일)이 어제일 같고 세계인구가 60억시대를 맞은것(1999년)도 방금전의 일같은데 벌쎄 70억시대를 넘어섰다니 놀랍기만 하다.   더욱 놀라운것은 앞으로 세계인구가 지속적으로 증가해 2050년안에 100억명을 넘어서게 될수 있다는 연구결과가 나온것이다. 인구학자들은 “지구가 최대한 수용할수 있는 인구는 100억명이 안된다”고 예상했다. 이는 인구의 증가가 인류를 멸망시킬수 있다는 경고의 메시지이다.   세계인구가 적을 때는 인간의 환경파괴와 자원개발이 자연에 미치는 영향은 미비했다. 하지만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자원사용량이 늘어나면서 전 세계적으로 환경파괴가 가심해졌다. 인류는 곧 심각한 사태에 직면하게 될것인데도 아직까지 효과적인 대책이 마련되지 않고있다.   사망자수보다 출생자수가 많으면 인구는 증가한다. 세계의 인구는 기원전후에 2억~3억명이였고 1804년에 이르러 10억에 달했다. 그 당시는 인간의 수명이 짧았고 갓난아이가 죽는 경우가 많았기에 세계인구는 증가되지 않았다. 하지만 20세기초에 의학의 발달로 인간의 평균수명이 늘어나고 신생아사망률이 현저하게 줄어들며서 인구가 급속히 증가하기 시작했다.   연구자료에 의하면 1927년에 20억, 1960년에는 30억, 1974년에는 40억, 1987년 7월 11일에는 50억, 1999년 10월 12일에는 60억명이였다. 2015년에 들어서면서 세계인구는 이미 72억명을 돌파했다.   전 세계적으로 매초에 약 4.3명이 출생, 매분에 약 259명이 출생, 매 시간에 약 1만 5540명이 출생, 매일 약 37만영이 출생한다. 사망자수를 덜면 세계적으로 인구가 해마다 약 8296만명이 증가한다.   2015년 1월 20일, 국가통계국에서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2014년말까지 중국 대륙의 인구는 13억 6782만명에 달한다. 인구 1억이상인 나라는 중국, 인도(12억 4000만), 미국(3억 2000만), 인도네시아(2억 5000만), 브라질(2억), 파키스탄(1억 9000만), 나이지리아(1억 7000만), 방글라데시(1억 6000만), 로씨야(1억 4000만), 일본(1억 2700만), 메히꼬(1억 2000만), 필리핀(1억) 12개국이고 1억에 접근하는 나라는 에티오피아(9600만), 윁남(9300만)이다.     이렇게 세계인구는 폭발적으로 계속해서 증가되고있다. 인구가 급격하게 증기되면 세계적으로 식량수요가 늘어나면서 식량이 엄중하게 부족되는 위기에 처하게 된다. 인류증가로 인한 식량난을 해결하려면 농산물을 증산해야 된다. 예전에는 농업재배에 가축의 변이나 인분 등 천연비료만 사용했지만 지금은 농산물증산을 위해 대량의 화학비료와 살충제를 사용하고있다. 천연비료는 무공해이지만 농약, 화학비료는 인체에 해로울뿐만아니라 토지를 오염시키고 환경을 파괴하게 된다.   이렇게 토지가 황페화되고 환경이 파괴되면 지구의 멸망을 다그치게 된다. 인구증가에 따른 페단은 너무나 많다. 사람이 살자면 우선 먹어야 되기에 증가된 인구만큼 식량과 자원의 소비가 증가되고 그에 따라 오염물질과 쓰레기도 그만큼 증가된다. 인구가 증가됨에 따라 식량난, 물부족, 자원고갈, 환경오염의 심화로 인류의 생존도 위협을 받게 된다.   인구가 증가되면 증가된만큼 각종 개발이 늘어나면서 자원이 더 소모되기때문에 워낙 제한되여있는 자원은 고갈될수밖에 없다. 또 그런 맹목적인 개발로 환경오염이 심해지면서 자연서식지가 엄중하게 파괴되고 지구생태계의 균형이 사라지게 된다.   과학기술이 고도로 발전하면 물부족, 식량부족, 에너지고갈 등 문제도 자연스럽게 해결될것이기에 인구증가는 큰 문제로 되지 않을것이라고 락관하는 사람들이 있다. 설사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다른 행성에 가서 살면 될게 아니냐? 우리가 사는데 필요한거라면 닥치는대로 쓰고 볼판이지. 개발하면 개발할수록 자꾸 나오는게 자원이 아닌가?   하지만 이런 생각은 위험하다. 자원은 끝없이 솟아나는 샘이 아니다. 과학기술도 한계가 있고 지구자원도 한정되여있다. 과학기술발전이 모든걸 해결해줄것이라는것, 다른 행성에서 살면 될것이라는것은 모두 아름다운 념원일뿐이다. 이 지구에 인구가 넘쳐나는 한 지구멸명은 시간문제이다. 대책마련이 없으면 과잉개발로 앞으로 인류가 지구에서 생존할수 없는 환경이 만들어지게 될것이다.   이 지구는 우리가 살고있지만 우리의것만이 아니라 우리 후대들의것이다. 우리가 후대들을 생각하지 않고 인구만 자꾸자꾸 늘여가면서 지구의 자원을 야금야금이 아니라 왕창왕창 갉아먹는다면 지구는 우리 손에서 뼈만 앙상하게 남고말것이다. 과연 이 많은 인구가 지구의 에너지를 내 손자의 손자의 손자의것이라는 생각없이 내것이라고 여기면서 마구 고갈시키고 자연을 파괴해간다면 지구가 얼마나 버틸수 있을가?   세계인구 100억시대가 눈앞에 와있다. 지구는 이미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인구를 지탱할수 있는 역량을 넘어섰다. 인구증가를 통제하지 못하면 앞으로 공룡이 멸종된것처럼 인류도 멸망하고 인류문명도 끝장날것이다. 위기감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과잉인구문제를 해결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255    총각이 기다려요 댓글:  조회:3004  추천:1  2015-02-01
총각이 기다려요   김희수     강인자의 남편은 다른 면에서는 흠잡을데없이 다 좋은데 술만 과하게 마시면 마누라한테 매를 댈가 하는 나쁜 버릇이 있었다. 결혼하여 10여년이 지나고 아이가 중학교에 갈 나이가 되도록 그 버릇은 그냥 고치지 못하고있었다. 강인자는 그런 남편의 버릇을 떼려고 온갖 노력을 다했으나 허사였다. 하루는 강인자의 친구 최인자가 놀러와서 한 총각이 자기를 따르고있다면서 편지 한통을 꺼내 보였다. 사랑하는 인자씨: 인자씨가 나보다 나이가 많다는것도 압니다. 인자씨가 결혼한 녀성이고 아이까지 있는 녀성이라는것도 압니다. 하지만 총각인 저는 인자씨를 묵묵히 사랑해왔습니다. 인자씨의 가정이 화목하지 못하다는것을 안 지금은 인자씨를 더더욱 사랑합니다. 인자씨, 사랑을 소중하게 여길줄 모르는 그 따위 남편과 리혼하고 저에게로 오십시오. 저는 우주와 같이 무한하고 생명과 같이 따뜻한 사랑으로 인자씨를 영원히 사랑해줄것입니다! 로총각 K로부터   《어마나, 무슨 이따위 장난편지야?》 강인자는 너무도 우스워 깔깔 웃었다. 그런데 최인자는 정색해서 말했다. 《장난편지가 아니야. 아주 순진한 총각이야. 진심으로 날 좋아하고있어!》 《너 그래 정말 리혼할 셈이냐?》 《그래 리혼할테야. 더는 이렇게 참으면서 살수 없어!》 최인자의 남편은 심한 도박군인데 가장집물을 몽땅 도박판에 밀어넣다싶이 하고있었다. 강인자는 최인자가 불행한 혼인에서 벗어나 행복한 생활을 누리기를 진심으로 축복했다. 그런데 말썽이 생기자고 그랬던지 최인자가 까먹고 총각의 편지를 그만 두고 갔는데 그 편지를 공교롭게도 퇴근하여 돌아온 강인자의 남편이 보게 되였던것이다. 성을 밝히지 않고 《사랑하는 인자씨》라고 했으니 자기 안해한테 온 편지인줄로 알고 강인자의 남편은 얼굴이 흙빛이 되여 안해를 불렀다. 《이게 도대체 뭐요?》 남편의 손에 쥐여있는 편지를 본 강인자는 친구의 비밀이 폭로된줄로만 알고 킥 웃었다. 그런데 남편이 천둥같이 노하여 도끼눈을 부릅뜨고 쏘아보는것이 아닌가. 《왜 그러세요?》 《왜라니? 언제부터 K라는 총각과 좋아했소?》 그제야 남편이 오해하고있다는것을 알아챈 강인자는 사실대로 해석하려다가 문뜩 꾀가 떠올라 일부러 그런척 했다. 《제가 좋아한게 아니라 그 총각이 절 따르는걸 어떻게 해요?》 《에익, 빌어먹을!》 강인자의 남편은 화가 나서 주먹을 쳐들었다. 그런데 평소에는 두려워 쩔쩔 매던 안해가 낯색 하나 변하지 않고 덤벼드는것이 아닌가. 《때려요. 때려! 이제 한번만 때리면 전 그 총각을 찾아가겠어요!》 이렇게 되자 강인자의 남편은 너무도 기막혀 들었던 주먹을 내려놓고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이거 아무리 로총각들이 장가가기 힘든 세상이라구 유부녀한테까지 련애편지를 날리다니…》 《이것이 바로 안해를 아까지 않는 유부남들에 대한 경종인줄 아세요!》 《허허, 이제부터 여보님을 녀왕님처럼 받들어 모셔야 되겠네!》 강인자의 남편은 허구프게 웃었다. 그때로부터 안해를 때리는 그의 버릇이 많이 개변되긴 했는데 어쩌다 옛버릇이 되살아날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강인자가 《총각이 기다려요!》하고 한마디만 하면 강인자의 남편은 들었던 주먹을 맥없이 내려놓는다고 한다. (1997년)    
254    중국의 노벨문학상 애증사 댓글:  조회:3676  추천:1  2015-02-01
중국의 노벨문학상 애증사   암살된 문일다, 가장 위대한 중국 시인 “88년 노벨 문학상은 사실 선충원의 것                                                     김명호 한국 성공회대 교수     월명성희(月明星稀), 달이 밝으면 주변에 있는 별들은 빛을 잃을 수밖에 없다. 소동파(蘇東坡)의 적벽부(赤壁賦)에 나오는 구절이다.   중국에서 사각지대에 묻혀버린 사건이 많다. 중국의 노벨 문학상에 얽힌 아주 중국적인 사건도 그중 하나다.   남 얘기하기 좋아하기로는 중국인 따라갈 사람들이 없다. 누가 얼마 해먹었고, 누구 부인이 누구와 각별한 사이고 그 남편은 누구와 가깝다는 등 공원이나 찻집, 공중변소에 쭈그리고 앉아 시간 가는 줄 모르기 일쑤다. 앞에서 배 움켜쥐고 서 있는 사람 따위는 아랑곳하지도 않는다. 사실 같은 유언비어, 거짓말 같은 진실이 난무할 수밖에 없다. 골목마다 소재가 다르지만 전국적인 것이 태반이다.   모옌(莫言)이 올해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결정된 후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새로운 얘깃거리와 함께 예전부터 나돌다 잠복했던 얘기들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2000년 10월, 프랑스 국적의 가오싱젠(高行健)이 노벨 문학상을 받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대륙 작가들은 입을 삐죽거렸다. “노벨이 중국 작가와 무슨 원수 질 일이 있었길래 중국 본토 작가들이 아직도 노벨 문학상을 못 받는단 말인가.” 가오싱젠은 3년 전까지만 해도 엄연한 중국 국적이었다.   가오싱젠 상 받자 “中 본토와 원수졌나” 1985년, 고란 말름크비스트(Goran Malmqvist)가 노벨 문학상 종신 심사위원에 선정되자 중국 작가들은 “이제야 노벨 문학상으로 통하는 길이 열렸다”며 기대에 부풀었다. 인간관계를 중요시하는 민족이다 보니 그와 편지라도 몇 번 주고받은 작가들은 “5·4 신문학운동 이후 최대의 사건”이라며 흥분했다. 18명의 심사위원 중 중국문화를 이해하고 중국 고전과 현대문학, 쓰촨(四川) 방언에 정통한 사람은 말름크비스트가 유일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스웨덴이 배출한 세계적인 중국학자 요하네스 칼그렌(Johannes Karlgren)의 수제자였고, 부인도 남편 장악력이 뛰어난 쓰촨 여인이었다. 마웨란(馬悅然)이라는 중국 이름도 있었다. 며칠 밤을 뜬눈으로 새워도 피곤한 줄 모를 만한 경사였다.   말름크비스트는 번역가로도 명성을 떨쳤다. 92년 68세가 될 때까지 수호전, 서유기 같은 고전과 모택동 시집[毛澤東詩詞全集]과 원이둬(聞一多)·선충원(沈從文)의 소설 등 700여 종의 중국 책을 직접 번역했다. 스웨덴에 있는 그의 책상에 중국 작가들이 보내온 저술들이 산처럼 쌓이기 시작했다.   90년 가을, 홍콩을 방문한 말름크비스트와 중국 출판인의 대화를 엿들은 적이 있다. 중국인들이 노벨상을 얼마나 중요시하는지 실감이 났다. 처음부터 끝까지 노벨 문학상에 관한 얘기였다. 루쉰(魯迅), 선충원, 라오서(老舍), 원이둬, 바진(巴金) 등 중국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들의 이름이 난무했다. “중국인들은 1936년에 세상을 떠난 루쉰이 노벨 문학상을 거절했다며 자부심을 느낀다. 당시 서구인들은 루쉰이 뭐하는 사람인지 몰랐다. 양셴이(楊憲益)의 주옥 같은 번역은 루쉰 사후에 나왔다.” 양셴이는 홍루몽(紅樓夢)을 영어로 번역한 베이징의 일류 술꾼이었다.   말름크비스트는 신문학운동이 배출한 최고의 작가로 선충원을 꼽았다. “심사위원들은 매주 네 번씩 회의를 연다. 6월부터 8월까지는 회의가 없다. 88년 5월 10일 밤, 대만 여류작가로부터 선충원이 베이징의 허름한 아파트에서 세상을 떠난 걸 아느냐는 전화를 받았다. 스웨덴 주재 중국대사관 문화참사에게 사실 여부를 확인했다. 선충원이 도대체 뭐하는 사람이냐고 내게 되물었다. 조금만 더 살았더라면 그해 가을의 노벨 문학상은 선충원 차례가 됐을지도 모른다.” 88년은 말름크비스트가 선충원 소설 3권의 완역본을 출간한 해였다. 그런 탓인지 몰라도 말조심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너무 토속적인 게 흠이다. 외국인들이 이해하기 힘들다.”   우리 신문에 자주 거론되던 바진의 작품에 관한 얘기도 빼놓지 않았다. “아주 좋은 소설들이다. 미래의 중국 연구자들이 지난 세기 쓰촨인들의 생활상을 알려면 꼭 읽어야 한다. 문학적 가치는 선충원의 것들만 못하다. 비교 대상이 못 된다.”   시인으로는 46년 국민당 특무에게 피살당한 원이둬에게 가장 후한 점수를 줬다. “중국 문학 사상 가장 아름다운 시를 쓴 정말 위대한 시인이었다. 걸출한 학자이기도 했다. 붉은 촛불(시집 紅燭)의 비애는 읽는 사람을 황홀하게 만든다. 노벨 문학상을 받고도 남을 만했다. 비장미 넘치는 시인이었다.” 2007년 10월, 중국을 방문한 말름크비스트는 다시 선충원 얘기를 꺼냈다. “시간이 흘렀으니 얘기하겠다. 88년 10월의 노벨 문학상은 선충원 것이었다. 발표 5개월 전에 세상을 떠난 것이 아직도 애석하다. 작가는 이것저것 따질 필요가 없다. 그냥 쓰고 싶은 걸 쓰면 된다. 체제나 반체제, 이런 건 우리의 관심사항이 아니다. 노벨 문학상은 세계 최고의 문학상이 아니다. 좋다고 생각되는 작가에게 주는 상이다. 중국에는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사람들보다 더 좋은 작가가 많다.”   첸중수 “노벨상, 화약보다 더 큰 해악” 중국인들이 노벨상에 너무 집착한다며 폭발력 강한 발언도 했다. “상금은 내게 줄 테니 명예만 우리에게 달라는 산둥(山東)성의 문화담당 간부도 있었다. 어떤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보낼 때마다 서화(書畵)를 몇 점씩 보내곤 했다. 다 돌려줬다.” 문화담당 간부가 누군지 밝히라는 추궁이 잇따랐지만 이름은 밝히지 않았다. 온갖 소문이 꼬리를 이었다.   모옌이 수상자로 발표되자 문화계가 발칵 뒤집혔다. 모옌은 산둥 사람이었다. 5년 전에 재혼한 말름크비스트의 부인까지 구설수를 탔다. “이번 노벨 문학상 수상자는 이 여자가 결정했다.” 43세 연하인 말름크비스트의 두 번째 부인도 쓰촨 출신의 중국 여인이었다.   온갖 소문에 시달린 말름크비스트는 “다시는 중국인과 상종하지 않겠다”며 돈에 얽힌 얘기도 폭로했다. “미화 60만 달러를 들고 와 자신의 소설을 번역해 달라는 젊은 중국 작가가 있었다. 거절하자 다른 심사위원에게 달려갔다.” 장이이(張一一)라는 작가의 이름까지 공개했다.   노벨상 얘기가 나오면 ‘문화곤륜(文化崑崙)’으로 추앙받던 첸중수(錢鍾書)를 떠올리는 중국인이 많다. 첸중수는 노벨 문학상 후보로 거론되자 “버나드 쇼의 말이 맞다. 노벨이라는 사람은 화약보다도 노벨상을 만들어 인류에 더 큰 해를 끼쳤다”며 불쾌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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