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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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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전초기에 장개석은 왜서 미친듯이 공산당을 토벌했는가?
2015년 04월 06일 10시 51분  조회:6884  추천:2  작성자: 넉두리

항전초기에 장개석은 왜서 미친듯이 공산당을 토벌했는가?
 
(번역)






 
항전초기에 장개석은 모든 력량을 집중하여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농촌근거지와 홍군을 대처하기 위해 일본침략자와 타협했다. 그는 “항일을 입에 담는 자는 용서하지 말고 죽이라”는 반동명령을 내리는 한편 친일파두목 황부를 파견하여 일본군과 담판을 하게 함으로써 다시 타협했다.

1933년 5월 31일에 국민당정부는 일본제국주의와 “당고협정”을 체결했는데 이는 주권을 잃어 나라를 욕되게 하는 매국협정이였다.

일본군이 대거 침입하고 장개석이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면서 부저항정책을 집행하여 조국의 령토를 순순히 일본군에게 넘겨준 행위는 전국인민의 지대한 분노를 일으켰다.

중국공산당은 중화쏘베트공화국림시중앙정부, 중국공농홍군혁명군사위원회(즉 중앙혁명군사위원회)의 명의로 1933년 1월 11일에 선언을 발표하여 중국공농홍군은 “즉시 쏘베트구역에 대한 진공을 정지하고 민중의 민주권리를 보장하며 민중을 무장하여 항일한다는 3가지조건을 지키는 무장부대라면 어떠한 무장부대와도 정전하고 공동으로 일본에 대항하는 작전협정을 체결하기를 바란다”고 제출했다.

1933년 6월 1일에 중국공산당은 또 중화쏘베트공화국림시중앙정부의 명의로 《국민당이 평진화북을 팔어먹는것을 반대하기 위한 선언》을 발표하여 국민당정부가 일본제국주의와 함께 체결한 《당고협정》을 반대했고 장개석반동집단이 전력을 다해 인민을 진공하고 일본제국주의에 투항하고 나라를 팔아먹은 죄행을 폭로했다. 그리고 전국인민이 일치 단결하여 빼앗긴 땅을 도로 찾고 중국을 보위하며 중화민족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투쟁하자고 호소했다.

광대한 인민군중들이 적극적으로 중국공산당의 호소에 따라 홍군과 일체 항일애국력량이 항일하고 장개석을 반대하는 행동을 대량으로 지원했는데 이런 형세는 중국혁명의 발전에 매우 유리했다.
전국인민이 일치 단결하여 항일하는 고조가 일어나자 국민당군대 내부의 일부 관병들도 공산당토벌을 중지하고 일치 항일할것을 요구했다.

장성의 각 입구를 지키는 중국군도 전국민민의 항일열정에 고무되여 장성내외의 민중의용군과 배합하여 자발적으로 일본군과 싸웠다.

국민당장군 송철원이 거느린 제29군은 장성 희봉구에서 영용하여 항전하여 일본군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장광내와 채정개는 19로군을 거느리고 국민당정부에 전군이 북상하여 항일할것을 요구하면서 선발대를 조직하여 북상하여 항일할 준비를 했다. 하지만 장개석은 19로군의 정당한 요구를 거절하고 선발대를 되돌려 계속 공산당을 토벌하라는 엄령을 내렸다. 이는 분개한 19로군관병들이 후에 “복건사변”을 발동한 원인으로 되였다.

풍옥상, 길홍창, 방진무 등을 위수로 한 항일애국장군들은 장개석의 매국투항정책에 불만을 품고 적극적으로 중국공산당의 호소에 따라 합작하여 항일할것을 표시했다. 1933년 5월 26일에 그들은 장가구에서 찰수항일동맹군(察绥抗日同盟军)을 성립했다고 전국에 선포하면서 련합하여 항일할것을 주장했다. 이 대오는 몇천명으로부터 10여만명으로 발전했다. 그해 6월중순에 항일동맹군은 출병하여 북쪽으로 공격했다. 7월하순에 선후로 강보, 고원, 다륜을 수복했으며 괴뢰군을 차하얼성(察哈尔省)에서 완전히 쫓아냈다. 그리고 장가구에서 동북4성을 수복할 계획위원회를 성립하고 진일보 대일작전을 준비했다. 일순간에 전군인민들이 항일동맹군을 지원하는 열조가 일어났다.

장개석은 이런 항일행동이 자신의 공산당토벌대업에 영향을 끼친다고 인정하면서 매우 적대시했다. 그는 수하의 량대특무조직인 “CC단”과 “람의사(蓝衣社)”에 비밀명령을 내려 국민당통치구내에서 인민의 항일민주운동을 미친듯이 진압했으며 공산당과 항일분자들을 무참히 살해했다. 1933년 7월부터 1934년 7월까지 1년사이에 “CC단”에 붙잡히고 살해된 공산당원만 해도 4500여명이나 되였다.
그리고 장개석은 항일동맹군의 항일을 허락하지 않았을뿐만아니라 “국책을 파괴했다”는 죄명으로 10여개 사의 병력을 출동시켜 항일동맹군을 포위하고 일본군과 배합하여 미친듯이 동맹군의 대본영 장가구를 포위공격했다.

그해 9월말에 찰수항일동맹군(察绥抗日同盟军)은 탄약과 량식이 떨어져 실패했다. 풍옥상은 핍박에 의해 직무를 내놓았고 방진무는 국외로 망명했으며 길홍창은 장개석에게 살해당했다.

장개석은 1933년 5월 8일에 각급 군관들앞에서 장편연설을 발표했다.

“옛사람들이 외적을 물리치려면 먼저 내부를 안정시켜야 한다고 했는데 그 뜻은 먼저 내란을 평정한 다음에야 외국의 침략을 막아낼수 있다는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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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 4 ]

4   작성자 : 한마디
날자:2015-04-15 08:26:56
장개석은 확실히 항전초기에 적극적으로 항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1937년의 송호회전에는 자신의 수중에 있는 직계부대를 거의 모두 투힙해 일본군과 대혈전을 벌리기도 했습니다.

아래 2번 진실님이 력사사실과 부합되지 않는다고 했는데 항일초기와 중기, 말기를 갈라 보아야 합니다.
3   작성자 : 동원
날자:2015-04-10 16:30:57
잘 감상했습니다.
2   작성자 : 진실
날자:2015-04-10 01:49:58
역사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
1   작성자 : 독자
날자:2015-04-06 19:21:48
좋은글 항상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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