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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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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    왜서 녀자와 아이를 먼저 구해야 할가 댓글:  조회:6465  추천:19  2014-04-20
왜서 녀자와 아이를 먼저 구해야 할가   김희수     해상에서 배가 침몰했거나 비행기가 추락할 위험이 있어 탈출해야 할 때에는 녀자와 아이를 먼저 구해야 한다는것이 지구촌상식으로 되고있다. 그런데 지난 4월 16일 8시 48분경에 한국 전라남도 진도군 조도면 부근의 황해상에서 발생된 세월호려객선침몰사고에서는 이런 지구촌상식이 지켜지지 않았다. 사고 당시 마지막까지 남아서 승객들을 대피시켜야 했을 선장이 먼저 탈출했고 이어 항해사, 기관사 등 핵심선원들이 아이들을 선실에 대기하라고 남겨둔채 선두에 서서 살길을 찾아 탈출했다.   배와 운명을 같이 해야 할 선장이 저 혼자 살겠다고 녀자와 아이들을 먼저 구해야 한다는 지구촌상식마저 무시한채 먼저 탈출했으니 이 얼마나 한심한 일인가? 책임이고 뭐고 다 팽개치고 아이들의 생사는 나몰라라 하고 먼저 탈출한 선장에게 도덕과 량심이란게 있는걸가?   그는 마지막까지 남아서 아이들에게 구명조끼를 양보하고 또 빨리 대피해야 한다고 안내를 하다가 끝내 목숨을 잃은 22세의 녀성선원 박지영씨에게 미안하지 않은가? 배밖으로 거의 다 빠져나와 살게 된 상황에서 “살려달라”는 등뒤의 비명소리를 듣고 죽음을 무릅쓰고 친구를 구하려 뛰여든 단원고등학교 2학년 녀학생 김주아양에게 미안하지 않은가? 68세의 나이에 살겠다고 도망친 선장은 17세의 나이에 친구를 구하려고 삶을 포기했다가 안타깝게 사망된 김주아양의 소식을 듣고 어떤 표정을 지었을가?   선장은 학부모들이 “왜 살아 돌아왔느냐”고 묻는다면 어떻게 할가? 단원고등학교 2학년 학생 325명을 이끌고 세월호를 탔다가 가까스로 구조된 단원고등학교 교감 강민규는 학부모들의 이런 항의를 듣고 자책하다가 “200명의 생사를 알수 없는데 혼자 살기는 힘에 벅차다. 나에게 모든 책임을 지워달라. 내가 수학려행을 추진했다. 내 몸뚱이를 불살라 침몰지역에 뿌려달라. 시신을 찾지 못하는 녀석들과 함께 저승에서도 선생을 할가”라는 유서를 남기고 52세의 나이에 스스로 목을 매 자결했다. 선장에게는 이런 자책감이도 있는걸가?   선장은 또 “녀자와 어린이를 먼저 구해야 한다”는 이 위기시의 구조순서를 만든 버큰헤이드호 선장에게 부끄럽지 않은가?   1852년 2월에 영국해군의 수송선 버큰헤이드호(伯肯黑德号)가 남아프리카로 가던 도중에 암초에 부딪쳐 침몰위기에 처했을 때 한척에 60명을 태울수 있는 구명보트는 세척밖에 없었다. 승객들은 모두 630명, 180여명밖에 구조될수 없는 상황에서 선장(함정의 상좌)은 모든 병사들을 갑판우에 모이게 한 뒤 부동자세로 서있게 하고 녀자와 아이들을 3척의 구명보트에 태우게 했다. 그리하여 어린이, 녀자, 병약자 193명이 살아남고 선장을 포함한 병사들이 전부 그대로 수장됐다. 그후로 “녀자와 어린이를 먼저 구하라”라는 “버큰헤이드호의 전통”은 세계 모든 나라의 불문률이 되였다.   한때 중국에서 관중석을 꽉 메우며 상영되였던 영화 《타이타닉호(泰坦尼克号)》의 침몰사고는 1912년 4월 14일에 실제 일어났던 사고였다. 그 사고에서도 녀자와 어린이들에게 먼저 제한된 구명보트를 내주고 어른들과 선장, 항해사, 기관사를 비롯한 승무원들은 배와 함께 물속에 잠겼다.   이렇게 녀성과 아이들을 먼저 구하는것은 해상규칙과 전통일뿐만아니라 선장과 선원들의 의무이며 책임이다. 아이들을 구하고 목숨을 잃은 박지영씨는 해상규칙과 전통을 지켜고 의무와 책임을 다한 선장보다 더 선장다운 선원이다. 그런 의무도 책임도 없는 김주아양이 친구를 구하기 위해 삶을 포기한 행위는 책임보다도 자각이였을것이다.   그러나 세월호 선장과 일부 선원들은 의무와 책임은커녕 녀성과 아이들을 먼저 구해야 한다는 “버큰헤이드호의 전통”을 무시하고 아이들을 버려두고 먼저 살길을 찾아 탈출했다.   왜서 위기상황에서는 녀자와 아이를 먼저 구해야 할가? 녀성과 아이는 보호를 받아야 할 대상이기도 하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리유가 있다면 그것은 아이들은 인류의 미래이고 녀성은 생명을 잉태하고 키워주는 미래의 희망이기때문이다.   그러나 세월호 선장과 일부 선원들은 인류의 미래도 인류의 희망도 나몰라라 하고 팽개치고 도망쳤다. 그들에게는 미래도 희망도 없다.          
152    국산전쟁드라마로부터 본 군사상식 댓글:  조회:6015  추천:4  2014-04-19
국산전쟁드라마로부터 본 군사상식 (번역)     《량검(亮剑)》은 관중들의 환영을 받는 군사제재드라마인데 최근에 새로 다시 찍기까지 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량검》의 신판이나 구판을 포함해서 시청률이 높다고 소문난 국산군사제재드라마는 오래동안 군사상식이 잘 못된 장면들이 련속 나와서 비난을 받을대로 받아왔다. 또 국산군사제재드라마는 관중들에게 국방지식과 군사상식을 보급하는 방면에서 현저하게 오도한 착오를 범했다. 이 방면에서 미국과 일본에서 제작한 전쟁드라마는 본보기를 보여주고있다. 이를테면 현재까지 방송되고있는 일로전쟁을 반영한 《언덕우의 구름(坂上之云)》, 미국HBO에서 투자하여 제작한 2차대전드라마  《형제련》, 최근에 방송된 태평양전쟁을 반영한《태평양에서의 혈전》은 제작수준 및 도구와 력사고증 등 전업방면에서 매우 뛰여나다. 국내전쟁드라마는 미국과 일본에 비해 현저한 차이가 있다. 관중들은 앞으로 국내에서 제작한 군사제재작품에서 도구를 진실하게 사용하고 력사사실을 정확하게 반영할것을 바라고있다. 《새 량검(新亮剑)》중의 군사상식착오를 살펴보면 웃음거리가 많다. 신판 《량검》제3집중에는 초운비와 리운룡이 각각 체스꼬식 경기관총을 받쳐들고 공중에 대고 사격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는 웃지도 울지도 못할 일이다. 두 사람의 손은 모두 접은 두개의 받침대(两脚架)를 쥐고있고 손가락은 도기관(导气管)부위에 접근하고있다. 사격후 도기관은 몹시 뜨겁게 달아서 그런 자세라면 손이 데여 화상을 입게 된다. 영웅기개를 보여주는 이런 문제의 장면은 기타 많은 국산전쟁제재력사극에서도 동일하게 존재한다. 손으로 경기관총을 받쳐들고 련발사격하면 명중률이 매우 낮다. 사실 손으로 경기관총을 받쳐들고 련발사격하면 총을 쏘는 사람의 두손이 화상을 입을뿐만아니라 적이 근거리에 있지 않을 경우에는 안정성이 결핍하여 명중률이 매우 낮다. 또 이런 사격방식은 탄알이 특별히 크고 넓게 흩어지면서 사격하는 사람의 앞에 공교롭게도 전우들이 있다면 적은 명중하지 못하고 도리여 전우들의 목숨만 빼앗게 된다. 사실 일반적인 정황에서 경기관총조는 앞에서 돌격하는 일이 매우 드물다. 경기관총은 반급이나 패급의 화력지원에 사용되는데 사용시에 총의 두 받침대를 안정된 위치에 흔들리지 않게 고정시켜놓고 사격한다. 그래야만 사격의 정확성과 련속성을 보장할수 있다. 경기관총수가 정말로 총을 받쳐들고 사격할 경우에는 총의 두 받침대를 벌려놓고 두다리로 총의 두 받침대를 안정시키는 자세를 취해야 한다. 이렇게 해야 경기관총수의 손이 화상을 입지 않을수 있다. 또는 한손으로 손잡이를 잡고 다른 한손으로 사격하는것이 바른 자세이다. 그리고 공중에 대고 사격할 경우에는 두손으로 총신과 총의 개머리판(枪托)을 단단히 잡고 사격해야 한다. 인물의 용감하고 두려움없는 기개를 보여주기 위해 신판 《량검》중에 관병(官兵)이 밀집하여 돌격하는 상투적인 장면이 나온다. 이 역시 국산전쟁력사극에서 늘 보게 되는 착오적인 장면이다. 그러나 진짜전쟁에서 이렇게 하면 적의 화포, 수류탄, 경기관총의 마지막 리상적인 과녁이 될수 있다. 진짜전쟁에서는 돌격할 경우에 보병은 모두 흩어져 달린다. 사실 팔로군, 신사군 및 나중의 해방군과 조선전쟁때의 지원군은 모두 전쟁중에서 사람바다가 되여 돌격한적이 한번도 없었다. 조선전쟁시기 미군 제2보병사에서는 1950년 11월의 전역을 총결할 때 이렇게 서술했다. “지원군은 미군의 한개 보병련진지를 진공할 때 처음에는 공격중점을 주요진지측후방의 유리한 지형을 선택했고 공격병력을 1개패(약 30명)의 진지에 집중했다. 지원군의 첫 공격은 길게 많은 병력이 밀집하여 공격한것이 아니라 가장 많아 60~70명이 흩어져 달렸고 일반적으로 30~40명이 흩어져 달렸다.” 이는 아군이 적진으로 진공할 때 “인해돌격(人海冲锋)”을 발동하지 않았다는것을 설명한다. 스텐돌격총(斯登冲锋枪)은 중국전쟁력사극에서 가장 잘못 사용된 도구이다. 신판《량검》에서 이 돌격총은 먼저 초운비의 손에서 나타나는데 이 돌격총은 사실 해방전쟁시기에야 국민당군대에 제공된것이다. 그전에는 기본상 영국과 유럽의 일부나라에서 사용했다. 이렇게 《량검》에서 스텐돌격총은 력사사실보다 앞서 나타나 웃음거리로 되였다. 그후 이 련속극에서 스텐돌격총은 또 일본군특수부대의 손에서 나타났다. 먼저번보다 다른것은 독일제MP18독일총의 외형으로 개장한것이다. 구판 《량검》에서도 일본군특수부대에서 미국제M3식돌격총을 사용하고있는데 2차세계대전시기에 일본군은 미국제경무기로 장비한적이 없다. 신판 《량검》에서 일본군은 독일제MP18돌격총을 사용하는데 이 돌격총은 국민당군에서도 적지 않게 사용하고있다. 이는 당시의 력사사실에 부합된다. 이렇게 력사사실에 부합되게 하기 위해 신판《량검》에서 스텐돌격총의 외형을 독일제MP18돌격총의 모양으로 개장했지만 자세히 보면 의연히 스텐돌격총이란것을 식별할수 있다. 스텐돌격총은 영국에서 제2차세계대전시기에 대량 제조한  구경 9밀리메터돌격총이다. 영국군은 이 돌격총을 줄곧 1960년대까지 사용했는데 모두 400여만자루 제조했다. 이 돌격총은 구조가 간단하고 외형이 못생겼지만 위력이 매우 강하고 원가가 낮으며 신속하게 대량적으로 생산할수 있는 장점이 있다. 1918년에 독일의 저명한 군사무기설계사 슈마이저(施迈瑟)는 이름난 MP18돌격총을 설계해냈다. 베르그만(伯格曼)무기공장에서 생산한 베르그만MP18돌격총은 세계에서 처음 나온 돌격총이다. 제1차세계대전이 결속된후 독일에서 남은 모젤권총(毛瑟手枪)과 MP18돌격총이 중국에 류입되였다. 1925년에 한양병기공장에서 처음으로 MP18돌격총을 모방하여 제조하였는데 구경을 7.63밀리메터로 고쳤다. 1926년에 상해병기공장과 금릉제도국에서도 이 총을 모방하여 제조하기 시작했는데 2년사이에 6000자루를 생산했다. 광동, 공현병기공장과 대고조선소에서도 선후로 이 총을 약간 개조하여 제조했는데 구경이 9밀리메터, 7.65밀리메터, 7.63밀리메터였다. 이런 모방형돌격총은 모두 개머리판이 나무로 되였고 탄창(弹匣)이 좌측에 가로놓였으며 총신의 보호덮개(护套)에 동그란 구멍을 가득 냈기에 이름을 “화기관(花机关)”이라고 통칭했다. 극중에서 일본군이 사용한 저격보총도 38식보총을 개장한것이다. 묘준경은 현대제품인것이 현저하게 드러난다. 그 시기 현실에서 일본군이 사용한 97식과 99식 저격보총은 외관이 일반보총의 특징에 비해 현저하게 다르다. 그 시기 일본군이 사용한 97식저격보총은 38식보총의 표준적인 변형총이다. 99식저격보총은 99식짧은보총의 기초에서 총신을 두껍게 하고 묘준경을 첨가한 변형총이다. 진짜일본군의 97식과 99식저격총에 가설한 묘준경은 가설위치가 현저하게 뒤쪽에 치우쳐져 사격수가 관찰하기 편리하게 했다. 그러나 극중의 저격보총에 가설한 묘준경은 현대제품일뿐만아니라 가설위치가 앞으로 치우쳐져 사격수가 묘준할 때 머리가 총신에 붙게 되였다. 이런 가설방식은 실제전투에서 매우 불편한것이다. 극중에서 또 하나의 웃음거리는 일본군이 현역해방군의 07식군화를 신은것이다. 현재까지 3년동안 지속적으로 방영되고있는 일본대하력사드라마 《언덕우의 구름》은 중국 동북에서 진행된 일로전쟁을 반영한 작품이다. 이 력사드라마는 인물의 형상을 진실하게 반영하였을뿐만아니라 도구와 쌍방의 군복, 쌍방의 함정은 당시의 력사를 진실대로 반영하였다. 신판 《량검》은 다른 국산력사극에 비해 군사상식착오가 적은 셈이다. 이것도 국산력사드라마수준의 진보라고 할수 있다. 하지만 국산력사드라마의 수준은 국외의 력사드라마에 비해 차이가 매우 크다. 하지만 국산력사드라마는 전쟁제재의 경전이라고 할수 있는 《형제련》이나 《태평양에서의 혈전》과는 감히 비교할수조차 없다. 국내전쟁제재영화나 드라마는 장기간 많은 군사상식착오를 범하였는데 그 위해는 제작수준문제에만 있는것이 아니다. 국내전쟁제재영화나 드라마는 관중들에게 국방지식과 군사지식방면에서 헤아릴수 없을 정도로 착오적인 인식을 심어주었는데 이는 반드시 중시를 일으켜야 할바이다.      
151    좁쌀만큼 콩알만큼 댓글:  조회:5605  추천:9  2014-04-16
좁쌀만큼 콩알만큼   김희수     며칠전에 어느 음식점에서 친구와 함께 술을 마시는데 건너쪽 술상에서 다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야, 이 새끼야! 네가 어떻게 뒤에서 그런 더러운 일을 다 하니?” “임마, 털어서 먼지 안 날만한 사람이 없다구 넌 그리 깨끗하니?” 두 사람이 언성을 높이는것을 들으면서 나는 나도 털면 먼지가 나겠구나 하는 생각이 새삼스럽게 들었다.   신약성경 요한복음 8장에는 간음하다가 잡혀온 녀자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모세의 룰법에 따르면 돌로 처 죽여야 하기때문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돌로 치려고 하자 예수는 “너희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라고 말했다. 그러자 둘러선 무리들이 량심에 가책을 받아 나이 많은 사람부터 시작하여 젊은 사람들까지 모두 그 자리를 떠나고 말았다고 한다. 간음한 녀자를 돌로 쳐 죽이려고 했던 사람들 자신들도 죄가 있었기때문에 모두 그 자리를 떠난것이다.   가슴에 손을 얹고 물어 량심에 얼룩 한점 없이 백지장처럼 깨끗하게 살아온 사람은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없을것이다. 사람이 어느 한순간이거나 어느 한 과정에 한점 부끄럼이 없이 떳떳하게 살수는 있지만 옹근 일생에 거쳐 한점 부끄럼이 없이 살수는 없다.   량심에 얼룩 한점 없는 사람, 그런 사람은 이 세상에 있을수가 없다. 있다면 인간이 아니라 신일것이다. 적어도 모택동처럼 신격화된 경우일것이다. 우상화, 신격화 되였을 때의 모택동은 정말로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었다. 그러나 인간으로 다시 돌아온 본 모습의 모택동은 량심의 백지장에 얼룩이 한점이 아니라 얼룩덜룩했다.   모택동의 공로와 과실을 놓고 볼 때 공이 7, 과가 3이라고 한다. 림표는 공이 5, 과가 5라고 한다. 물론 달리 보는 견해도 있지만 상술한 견해가 우세를 점한다. 그럼 최대악인이라 불리우는 히틀러는 죄만 있고 공이 없었을가? 아니면 공이 1, 죄가 9일가? 세인의 칭송을 받는 넬슨 만델라는 공이 9, 과가 1이였을가?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살아온 윤동주시인도 부끄럼이 한점쯤은 있었으리라. 윤동주가 말한 뜻은 “지금까지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이 살아왔다”는것이 아니라 “지금까지는 부끄러운 삶을 살았을지 모르지만 앞으로는 죽는 날까지 부끄럼이 없는 삶을 살면 좋겠다”는 소망이였을것이다.   우리가 “윤동주는 부끄럼이 한점 없이 살아온 시인이다”라고 한다면 그것은 윤동주를 인간이 아니라 신으로 보는것이며 모택동신격화의 우를 범하는것으로 될것이다. 때문에 응당 “윤동주는 부끄럼이 한점 없이 살려고 노력한 시인이다”라고 해야 할것이다. 윤동주는 비록 바른 량심을 가지고 살았지만 조그마한 실수 같은것은 있었을것이다. 그런 조그마한 실수가 있을수 있는 윤동주이기때문에 우리에게 더욱 가깝고 친절하게 인간답게 다가오는것이다.   사람이 일생동안 범한 과오의 크기를 곡식이나 과일에 비한다면 윤동주나 만델라는 좁쌀이나 입쌀만큼 혹은 팥알이나 콩알만큼 될것이고 모택동은 귤만큼, 림표는 사과만큼, 히틀러는 수박만큼 될가? 물론 이는 정확한 비유라고 할수 없다. 대개 그렇다는 뜻이다.   내 자신을 놓고 볼때 부끄러움의 크기가 앵두만큼 될가? 귤만큼 될가? 사과만큼은 안될거라고 스스로 위안해보지만 내 깊은 속의 부끄러운 생각을 합쳐보면 사과만큼 되지 않을것이라고 장담할수는 없다. 비록 품고있은 생각뿐이고 행동으로 옮긴것은 아니지만 불쑥불쑥 .부끄러운 욕망을 가질 때가 이따금 있었다는것을 부인할수 없다.   정말로 부끄럼이 좁쌀만큼이나 콩알만큼 밖에 안되도록 일생을 산다는것은 힘든 일이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부끄러운 삶을 살았을지 모르지만 앞으로는 죽는 날까지 부끄럼이 없는 삶을 살면 좋겠다”는 소망을 가지고 바른 량심으로 살아가려고 노력한다면 죽는 날에 가서 부끄럼의 크기가 너무 부끄러울 정도로 늘어나지 않을것이다. 반면에 반성을 모르고 되는대로 살아간다면 부끄럼이 눈덩이 굴리듯 자꾸만 커져 어느새 수박만큼 될지 모른다.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이 많은 나는 아마도 죽는 날까지 윤동주의 서시를 항상 가슴에 새기며 살아야 할가 보다.       
150    작년에 왔던 각설이 댓글:  조회:6228  추천:10  2014-04-14
작년에 왔던 각설이   김희수     날씨가 따뜻해지니 겨우내 보이지 않던 거지들이 눈에 띄인다. 거리에서 가련한 모습으로 구걸하는 거지를 보노라니 각설이타령이 생각난다.   얼시구 시구 들어간다 절시구 시구 들어간다 작년에 왔던 각설이가 죽지도 않고 또 왔네…   봄이 오니 작년에 왔던 거지들이 또 연길에 몰려든 모양이다. 지나가던 한 사람이 “안쪽거지들이 또 왔다”고 말한다. 온몸에 때가 더덕더덕 묻어있고 꾀죄죄한 옷을 입은 거지가 동냥그릇을 앞에 놓고 구걸을 하고있다. 봄이 오면 제비와 함께 찾아오는것이 거지이다.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온건 반갑지만 “안쪽”거지들이 찾아온건 정말 보기싫다. 거지들이 길가에 엎드려 도시미관을 해치고있는 꼴이 정말 눈꼴사납다. 거지는 치안, 도시미관, 사회질서, 도시환경에 나쁜 영향을 끼친다.     이런 거지 대부분은 낮에는 거지 밤에는 신사다. 거지들이 낮에는 가련한 상을 하고 비락질을 하다가 밤에는 술집에 들어가 싼페이쑈제(三陪小姐)를 껴안고 논다는 사실이 여러번 증명된바 있다. 시민들이 동정해서 던져주는 돈이 거지의 생계유지에 쓰이는것이 아니라 거지의 향락을 만족시키는데 쓰이니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거지들을 동정하는 사람들은 동정을 받는 거지가 동정을 해주는 자신들보다 몇갑절이나 더 부유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물론 거지들이 모두 부자인것은 아니다. 정말 로동능력이 없고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운 거지들도 있을수 있다. 하지만 동냥이 직업이 되여서는 안된다. 거지들을 동정해주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거지들이 늘어날것이다. 일하기 싫어하고 게으른 자들이 동냥그릇을 들고 비락질에 나설것이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거지를 불쌍하고 가엾게 여겨 동냥그릇에 돈을 던져주는데 이런 동정심은 거지무리들을 키워주는것이나 다름없다. 거지에게 동정을 베풀 필요가 없다. 이것이 너무 무정하고 인정이란 꼬물만큼도 없는 행위같지만 우리는 진정으로 동정을 해줘야 될 사람에게 동정을 베풀어야 한다. 전쟁시기에 전쟁고아들이 거지로 되는 경우는 응당 동정해주어야 하지만 평화시기의 현재 중국에서 동냥하는 거지는 동정의 대상이 아니다. 가엾고 불쌍한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사람들의 동정이 그들을 한평생 거지로 살아가게 하는 결과를 가져다줄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들은 불쌍한 사람에게 동정을 베풀면 자신이 하는 일이 잘된다는 말을 믿고 거지에게 돈을 주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도와주는것도 진정으로 불쌍한 사람을 도와줘야 착한 일을 한것으로 되고 보답을 받게 될것이다. 거지는 도와줘야 될 대상이 아니기에 그들을 아무리 도와줘도 그건 착한 일이 될수 없다.   거지들을 죽으란 말이 아니다. 팔다리가 성한 거지들은 자기의 두손으로 벌어먹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정말로 로동능력을 상실해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운 처지라면 그건 민정부문에서 해결해야 할 일이다. 정부에서 그런 거지들을 통일적으로 복지시설에 데려가야 한다. 전쟁시기의 거지들이라면 다른 문제이다. 재해가 생겨도 거지가 생겨날수 있지만 그건 잠시의 현상이다.   이 세상 사람들이 모두 한마음이 되여 거지에게 동정을 베풀지 않는다면 거지가 생길수 없다. 거지가 생존할수 있는 “토양”이 없기때문이다. 거지의 속성은 게으름, 일하기 싫은것, 공짜를 좋아하는것, 놀고먹는것이다. 일하기 싫은 자는 먹지도 말라는 말이 있다. 거지들은 먹지 말아야 한다. 거지들의 동냥그릇은 언제나 텅텅 비여있게 해야 한다. 돈이 없고 먹을것이 없게 되면 거지들은 더는 생기지 않을것이다. 물론 단시일내에 거지를 없애려는것은 현실적이 되지 못한다. 모든 사람이 거지에게 동정을 베풀지 말았으면 하는것도 희망사항일뿐이다.   하지만 거지로 인한 사회문제는 간과할수 없는 문제이다. 거지는 심지어 범죄의 온상으로 되고있다. 두목이 있고 조직이 있는 거지무리들은 가정불화거나 여러가지 원인으로 가출한 아이들, 부모의 리혼으로 간섭하는 사람이 없는 아이들, 버림받은 아이들을 받아들여 저들의 돈벌이수단으로 구걸에 내몰고있다. 또 거지두목들은 전국각지에서 장애인들을 끌어모아 구걸에 내몰고있다. 이런 거지무리들은 사회에 해를 끼치는 악성종양이기에 깨끗이 뿌리를 뽑아버려야 한다.   불완전한 통계의 의하면 현재 우리 나라의 거지수는 100만명이상에 달한다. 최근에 북경에서는 《북경시궤도교통운영안전관리방법》을 공포했다. 이 법규에는 지하철 등 궤도교통역의 입구, 역내, 차안에서 구걸하지 못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여있다. 이에 일부 사람들은 이 법규의 제정은 사실상 거지의 구걸자유권리를 박탈했다고 인정했다.   《법제일보》에 따르면 거지에게는 그 무슨 “구걸권”이 없다. 구걸행위는 사회도덕이거나 국가법률이 제창하는 행위가 아니다. 우리 나라의 헌법에는 “구걸권”에 해당한 근거가 없다. 구걸의 권리는 우리 나라 법률제도의 보호를 받아야 할 권리가 아니다. 또 구걸은 사회의 보편적인 도덕이 찬양하고 인정하는것이 아니며 일종의 도덕권리도 아니다. 거지가 손을 내밀 때 우리는 거지에게 시주를 할 의무가 없다. 우리가 거절을 했다고 해서 법률의 추궁을 받지 않으며 도덕여론의 질책을 받지 않는다.   행인들의 팔에 매달리며 애걸하는 류랑어린이거지, 장애인으로 위장하여 땅바닥에 기여다니면서 애처롭게 소리치며 손을 내미는 거지가 보이는 지구거나 도시는 관광객들도 눈을 찌프릴것이며 다시 오려고 하지 않을것이다. 또 오려고 하던 다른 관광객들도 소문을 듣고 오지 않으려고 할것이다. 이는 연길시를 관광도시로 건설하는데도 장애로 될것이다.   우리 주에서도 북경시와 같은 구걸을 제한하는 법규를 내와야 한다. 그리고 거지가 산생되는 빈곤의 근원을 제거해야 한다. 선진국에서는 거지들이 발을 붙일수 없도록 하는 제도를 세워놓고있다. 우리 연변에서도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운 처지에 처한 사람들이 도움을 받을수 있는 사회구제시스템을 구축하고 제도화해야 한다고 본다.     
149    장개석의 사망비밀 댓글:  조회:8119  추천:5  2014-04-11
장개석의 사망비밀   (번역)   장개석은 1972년 7월부터 병상에 누워있었다. 그때부터 그의 몸에는 산소호흡기를 비롯한 여러가지 의료기기가 가득 꽂혀있었다. 물리치료를 받을 때 장개석은 이런 의료기기들을 뽑아내고 침대에서 내려 30분정도 활동했다. 장개석은 군인출신이였기에 놀라운 의력으로 정원의 화초를 감상하며 단거리산책을 할수 있었다. 그렇게 되자 송미령은 장개석의 건강을 빨리 회복시키기 위해 매일 오후 차에 앉아 교외로 드라이브(兜风)를 해야 한다는 규칙을 세웠다. 그런데 장개석이 차에 앉아 교외로 드라이브를 갈 경우 병실의 여러가지 의료기기의 감시범위를 벗어나야 하기에 위험했다. 하지만 송미령이 자신의 의견을 고집했기때문에 의료소조에서는 《3군총병원》의 최신구급차를 동원하여 장개석의 전용차를 뒤따르게 했다. 처음 드라이브를 하는 날, 오래간만에 외출하는 장개석은 몹시 흥분되였다. 송미령도 오래가만에 장개석과 함께 산책하는지라 기분이 좋아서 경호원에게 좀 멀리 달려도 된다고 분부했다. 장개석이 거의 1시간만에 사림관저로 돌아왔기때문에 의료소조의 “어의”들은 손에 땀을 쥐였다. 송미령은 장개석이 하루 빨리 건강이 회복되여 “대통령부”에 나가 “국가”사무를 보기를 바랐다. 장개석은 오래동안 공개장소에 얼굴을 내밀지 않았기에 외부에서는 장개석의 사망설까지 나돌았다. 송미령은 세인들에게 장개석이 “건재”함을 보여주기 위해 일부러 장개석이 공개장소에 나오도록 배치하고 텔레비죤방송을 통해 그 장면을 내보냈다. 1972년 9월부터 1974년 12월 1일까지의 기간에 장개석의 병세는 의연히 의료소조에서 통제할수 있는 범위내에 있었다. 그러나 공식판 《장개석치료보고》에서 1973년 12월 22일부터 1974년 12월 1일까지의 치료정황에 대해 언급할 때 “의료소조에서는 장개석의 만성전위선염이 나았다 도졌다 하여 장개석의 건강이 악화되고 장개석의 혈관경화와 심장비대증이 수시로 합병증을 일으킬가봐 세계의 유명한 비뇨기과, 심장 등 방면의 전문가들을 청하였다. 결과 영양을 증가하고 체력을 증진하면서 약물사용, 염증발생통제 등 보수적인 치료방법을 취해야 하며 과격한 치료방법을 사용해서는 안된다고 결정했다”고 썼다. 대만의 섬내(岛内)사무는 모두 장개석의 비준이 있어야 실행될수 있었다. 관저사무에 대해서 장개석은 송미령에게 도맡겼다. 정부사무에 대해서 장개석은 송미령이 참견하는것을 허락하지 않았지만 대미(对美)외교사무만은 송미령의 의견을 존중했다. 장개석이 병상에 눕게 된후 의료사무에 대해서 송미령이 독단으로 처리했다. “행정원장”으로 당선된 장경국은 대부분 정부사무를 장악했지만 사림관저내의 사무에 대해서는 송미령의 결정에 대해 감히 반대의견을 내놓지 못했다. 송미령은 외조카딸인 공령위를 친딸처럼 총애하고 신임했다. 재벌가 공상희와 송애령의 딸인 공령위는 천문지리에 밝았는데 자신의 소총명을 믿고 모르는것도 아는듯이 행동했다. 그때문에 실수할 때도 있었는데 송미령은 책임을 추궁하지 않았을뿐만아니라 그녀를 믿어의심하지 않으면서 더욱 총애했다. 1974년 11월말에 사림관저의 “의료총고문”으로 불리우는 공령위는 송미령을 보고 미국에 “서양화타”로 불리우는 세계명의가 있는데 장개석의 병을 능히 치료할수 있다고 장담했다. 송미령은 귀가 솔깃하여 즉시 그 미국의사를 청해오라고 지시했다. 공령위는 오빠 공령간과 함께 미국에 가서 “서양화타”를 청해왔다. 송미령은 미국의사를 상빈으로 모시고 장시간 이야기를 나누었다. 미국의사는 장개석의 긴 병력서를 보고난후 한바탕 리론을 늘여놓으면서 장개석의 병세가 안정되였기에 즉시 등부위천자(背部穿刺)수술을 해야 회복될 희망이 있다고 장담했다. 장개석의 병세가 회복될 희망이 있다는 말을 들은 송미령은 몹시 기뻤다. 천자란 몸의 일부에 속이 빈 가는 침을 혈관이나 몸의 일부에 찔러넣어 몸속의 체액, 조직 등을 뽑아내거나 약물을 주입하는것을 말한다. 그러나 장개석의 의료소조성원들은 미국의사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런 수술은 “과격치료방법”이라고 인정하면서 환자에게 예측할수 없는 위급한 후과를 가져올것이라고 경고했다. 하지만 미국의사는 등부위천자수술이 장개석의 병세를 회복시킬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고집했다. 미국의사의 말을 믿은 송미령은 의료소조의 경고를 무시했다. 의료소조에서는 장경국을 찾아가 “미국의사는 장대통령의 병세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중국인의 체질과 체형이 백인과 다르다는것을 고려하지 않고있습니다. 만약 미국의사가 장대통령의 서면병력서자료만 보고 등부위천자수술을 한다면 매우 위험합니다. 송부인은 공령위의 비전업적인 말만 듣고 미국의사를 너무 믿고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의료소조의 회보를 들은 장경국은 깜짝 놀랐다. (공령위가 또 무슨 짓을 하고있는거야? 그녀가 일으킨 화근이 적었단 말인가? 만일 의료소조의 말처럼 등부위천자수술이 위험하다면 그 책임을 누가 질수 있겠는가?) 장경국은 송미령에게 권고하려고 사림관저를 찾아갔는데 입을 열기전에 송미령이 먼저 의료소조에서 장개석의 건강을 회복시키지 못하고있는 상황에서 미국의사에게 한번 맡겨보는것이 좋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장경국은 의료소조의 의견도 들어보는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송미령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장개석이 등부위천자수술을 받은것은 1974년 12월초의 일이였다. 그후 장개석의 병세는 점점 악화되였다. 원래 서양의사를 의술이 고명하다고 춰올렸던 송미령과 사림관저(士林官邸)의 “의료총고문”이라고 불리우던 공령위는 모두 김 빠진 풍선마냥 풀이 죽어서 안절부절못했다. 의료소조의 “어의”들은 일찍 송미령과 장경국에게 등부위천자수술을 하면 매우 위험하다고 경고한바 있었다. 유감스러운것은 송미령이 시종 들은척도 하지 않은것이였다. “어의”들은 처음부터 등부위천자수술은 장개석의 병세가 악화된 주요원인이라고 인정했다. 의료일군과 시위들은 모두 마음속으로 알고있었다. 송미령이 페천자수술로 페부의 농혈된 액체를 뽑아내자고 결정한것은 확실히 선의로부터 출발한것이였는데 그것이 장개석의 생명을 빨리 결속짓게 한  최명부(催命符)로 되였다는것을… 송미령과 공령위가 마음속으로 가책을 느꼈는지는 누구도 알수 없는 일이였다. 송미령은 자신과 공령위가 큰 화를 저질렀다는것을 깨달았지만 체면때문에 잘못을 승인하지 않았다. “의료총고문”인 공령위는 의료소조에서 등부위천자수술을 반대하는 리유를 알고 다시는 “미국의사”라는 말을 입밖에 꺼내지 않았다. 하지만 후회해도 늦었다. 공씨가문은 장개석을 위해 적지 않은 일을 해주었다. 1960년대초기에 장개석은 대륙을 공격하려고 생각했지만 신식무기를 사들일 자금이 모자라서 공씨가문에 손을 내밀었다. 그시기는 공상희가 살아있을 때였는데 공상희는 장개석의 전화를 받자마자 수억의 자금을 기부하여 미국제M-24형전차를 탑재(搭载)할수 있는 등륙함을 사들이는데 일조했다. 악화된 병세는 다시 회복되기 어려웠다. 장개석은 점점 죽음을 향해 가깝게 다가가고있었다. 장경국은 내막을 알고있어도 공씨남매의 책임을 추궁할수 없었다. 1975년 1월 1일에 장개석이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하자 장경국은 일기를 쓰는것으로 아버지의 병세에 대해 근심하는수밖에 없었다. 그 시기는 바로 합의사가 장개석에게 페천자를 시행한지 한달후였다. 장경국은 그날의 일기에 “양력설에 아버지께 세배를 드렸다. 아버지는 수면상태에 있는데 병세가 매우 엄중하여 내 가슴이 칼로 찢기는듯 아프다”고 썼다. 수술후유증으로 장개석은 계속 고열혼미상태에 있었다. 페부감염이 엄중하고 심장기능이 쇠퇴하고 혈액순환이 잘되지 않아 장개석의 체내기관에 다시 액체가 쌓이기 시작했다. 여러가지 병이 서로 불화를 이끌면서 장개석의 병세는 악성순환을 반복했다. 1975년 4월 5일 밤 11시 50분에 의료소조의 “어의”들은 실망한 표정으로 심장구급설비를 내려놓고 정식으로 장개석이 숨을 거두었다고 선고했다. 향년 89세였다.  1969년의 교통사고가 장개석의 심장부위에 엄중한 내상을 입혀 장개석의 건강은 악화되였다. 만약 그번의 교통사고가 없었더라면 장개석은 병석에 눕지 않았을것이다. 또 만약 송미령이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물리치지 않고 독단으로 미국의사의 의견에 찬동하지 않았더라면…그래서 페부에서 액체를 뽑아내는 수술을 하지 않았더라면…원래 안정되였던 장개석의 병세가 돌변하여 수습하지 못할 지경으로 되지는 않았을것이다. 이 모든것은 구경 천명이였을가? 장개석의 운이 다 기운것이였을가?     
148    력사상의 10대 저명한 독신자 댓글:  조회:9395  추천:0  2014-04-11
력사상의 10대 저명한 독신자   (번역)     2011년은 외톨이(光棍) 즉 독신의 해이며 2011년 11월 11일은 독신의 날이다. 이 독신의 날을 맞으면서 본지는 력사상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10대 명인들을 소개한다.   (1) 그리스의 저명한 철학자 플라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이며 객관적 관념론의 창시자인 플라톤은 기원전 427년에 그리스 아테네에서 출생했다. 《소크라테스의 변명》, 《파이돈》, 《향연》, 《국가론》 등 저서를 남긴 플라톤은 평생 독신으로 살다가 기원전 347년에 81세의 나이에 일생을 마감했다.     (2) 이딸리아 천재적 미술거장 레오나르도 다 빈치     이딸리아 문예부흥시기의 거장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1452년 4월 15일에 이딸리아 피렌체근교의 빈치라는 마을에서 사생아로 태여났다. 다 빈치는 문예부흥시대의 이딸리아를 대표하는 천재적 미술가, 과학자, 기술자, 사상가이다. 15세기 문예부흥시대의 미술은 그에 의해 완벽한 완성에 이르렀다. 조각, 건축, 토목, 수학, 과학, 철학, 음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면에 재능을 보인 그는 문예부흥시대를 대표하는 가장 위대한 예술가일뿐만아니라 지구상에 생존했던 가장 경이로운 천재중 하나이다. 다 빈치는 1519년5월 2일에 6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그는 평생을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살았기때문에 자식을 남기지 않았지만 미술사에 길이 남을 걸작 《최후의 만찬》, 《모나리자》 등 작품을 남겼다.     (3) 영국 녀왕 엘리자베스 1세     1533년 9월 7일에 헨리 8세와 두번째 왕비인 앤 불린 사이에서 태여난 엘리자베스 1세는 국교의 확립을 이루려고 힘썼고 종교적 통일을 추진하였으며 화페제도를 통일하고 중상주의정책을 펼쳤다. 또 빈민구제법에 의하여 토지를 잃은 농민의 무산화를 방지하였고 영국의 동인도회사를 설립하였다. 엘리자베스 1세는 독일, 프랑스, 이딸리아 등의 외국어를 공부하여 력사, 음악, 신학에 능통하였다. 25세때에 에메리 1세가 죽자 뒤를 이어 즉위하였으며 에스빠냐왕 펠리프의 구혼을 받았으나 당시 최강을 자랑하던 에스빠냐의 압력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거절하였다. 그녀의 오랜 치세는 영국의 절대주의 전성기를 이루었으므로 국민으로부터 “훌륭한 냐왕”라고 불리우며 경애의 대상이 되였다. 엘리자베스 1세는 평생 처녀로 살다가 1603년 3월 24일에 생을 마감했다.     (4) 영국의 천재적 과학가 뉴톤     1642년의 성탄절에 영국 링컨셔의 울즈소프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여난 아이작 뉴턴은 물리학자, 천문학자, 수학자, 근대리론과학의 선구자였다. 수학에서는 미적분법을 창시하였고 물리학에서는 뉴톤역학의 체계를 확립했다. 또한 이것에 표시한 수학적방법 등은 자연과학의 모범이 되였으며 사상면에서도 역학적자연관은 후세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령감이 떠올라 만유인력의 법칙을 확립한 근대과학성립의 최고의 공로자이다. 그가 주장한 “자연은 일정한 법칙에 따라 운동하는 복잡하고 거대한 기계”라고 하는 력학적 자연관은 18세기 계몽사상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뉴톤은 평생을 독신으로 살다가 1727년 3월 20일에 8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5) 독일의 천재적인 음악가 베토벤     베토벤은 1770년 12월 17일에 독일의 본에서 가난한 음악가의 아들로 태여났다. 그는 30대전에 청력을 잃었지만 시련을 이겨내고 《영웅교향곡》을 작곡했다. 음악가에게 청력이란 목숨과도 같았지만 베토벤은 청력을 잃은후에도 인류의 빛과 령혼이 되는 작품들을 지속적으로 창작하였다. 베토벤이 평생에 걸쳐 작곡한 피아노쏘나타 32곡은 피아노음악의 금자탑으로 손꼽히고있다. 그러나 베토벤은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계속해서 열번째 교향곡을 준비하면서 완숙미를 자랑하는 다양한 현악4중주곡을 작곡했다. 사랑하는 녀인들이 모두 청혼을 거절했기에 베토벤은 평생 독신으로 살다가 1827년 3월 26일에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6) 스웨리예의 위대한 과학가 노벨     1833년 10월 21일에 스톡홀름에서 발명가의 아들로 태여난 알프레드 베른하르드 노벨은 고체폭탄인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하여 1867년에 특허를 얻었고 1875년에 무산화약발리스타이트를 발명하였다. 이러한 발명 및 특허에 의해 그의 가문은 유럽최대의 부호로 되였다. 노벨은 숨을 거두기 1년전에 자기재산에서 생기는 리자로 해마다 물리학, 화학, 생리학과 의학, 문학, 평화의 5개부문에 걸쳐 공헌이 있는 사람에게 상을 주라는 유언장을 남겼다. 세계의 평화와 과학의 발달을 념원해 오던 그의 유언에 따라 그의 유산은 스웨리예의 과학아카데미에 기부되였다. 그 기부금으로 1901년부터 노벨상제도가 설정되였다. 이 상은 물리학, 화학, 생리학과 의학, 문학, 경제학, 평화의 6개부문으로 나누어 국적 및 성별에 관계없이 그 부문에서 뚜렷한 공로를 세운 사람에게 해마다 수여되고있다. 노벨은 19살 때 외국류학을 나갔다가 프랑스에서 한 처녀를 사모하게 되였다. 그후 이 처녀는 죽고말았다. 그 처녀의 죽음으로 마음에 상처를 입은 노벨은 평생 결혼을 하지 않고 독신으로 살다가 1896년 12월 10일에 이딸리아 산레모의 별장에서 일생을 마쳤다.     (7) 화란의 위대한 화가 빈센트 반 고흐     1853년 3월 30일에 화란의 그루트 준데르트라는 작은 마을에서 출생한 반 고흐는 선명한 색채와 정서적인 감화로 20세기 미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화가이다. 그의 수많은 자화상을 비롯하여 풍경화, 초상화 그리고 해바라기 등은 세계에서 가장 비싼 작품으로 되여 각종 기록을 갱신하고있다. 반 고흐는 8살 된 아들까지 있는 과부인 외사촌누나 키 보스 스트릭커에게 청혼했으나 거절당했다. 그후 반 고흐는 5살 된 딸을 가진 임신한 창녀 시엔과 동거했다. 시엔과는 약 1년 넘게 같이 생활했지만 1883년 가을에 헤여졌다. 1884년 가을에 반 고흐보다 10살이나 많은 마고 베게만이라는 이웃집 녀인이  반 고흐를 사랑한다고 고백했다. 반 고흐는 그녀에게 보답하기 위해 결혼하기로 결심했지만 두 집안의 반대로 결혼하지 못했다. 그후 정신적인 병으로 고통을 겪던 반 고흐는 우울증이 점점 심해졌다. 1890년 7월 27일에 권총으로 자살함으로써 37세의 나이에 일생을 마쳤다.     (8) 영국의 저명한 녀류소설가 제인 오스틴     1775년 12월 16일에 영국 햄프셔주의 스티븐턴에서 출생한 제인 오스틴은 《오만과 편견》 등 불후의 명작을 남겼다. 담담한 필치로 인생을 포착하고 은근한 유머를 담은 그녀의 작품은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높이 평가되였고 세계문학의 대표적 작가의 한 사람으로 평가되였다. 제인 오스틴은 자신보다 6살 년하인 젊은이에게서 청혼을 받은적이 있었지만 거절하고 평생을 독신으로 지내다가 몸이 쇠약해져 1817년 7월 18일에 42세의 나이로 일생을 마감했다.     (9) 프랑스의 저명한 작가 볼테르     본명이 프랑수아 마리 아루에인 볼테르는 1694년 11월 21일에 프랑스의 빠리에서 태여났다. 저명한 작가이며 계몽사상가의 신으로 불리우는 볼테르는 《자디그》, 《캉디드》 등의 철학소설과《관용론》, 《철학사전》, 《샤를르 12세사》, 《루이 14세의 시대》, 《각 국민의 풍습·정신론》 등 99권의 거작을 남겼다. 유부녀인 에밀리와 20년동안 동거했지만 자식이 없이 평생 독신으로 살다가 1778년 5월 30일에 84세의 나이에 다사다난했던 생을 마감했다.     (10) 중국의 저명한 철학가 김악림     중국의 저명한 철학가이며 론리학자인 김악림은 1895년에 호남성 장사시에서 출생했다. 저명한 저서 《지식론》을 남긴 김악림은 일생동안 량사성의 안해 림휘인을 사모했다. 그는 림휘인을 사랑한다는것을 숨기지 않았을뿐만아니라 량사성의 앞에서까지 “너의 안해를 사모한다”고 말했다. 림휘인은 중국의 첫 녀성건축가이며 문학가인데 그녀는 남편 량사성외에 시인 서지마, 철학가 김악림의 사랑을 받았다. 김악림은 림휘인이 사마된후에도 해마다 몇번씩 그녀의 산소를 찾아가서 성묘하는것으로 그녀를 그리면서 평생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살다가 1984년 10월 19일에 90세의 나이로 북경에서 사망되였다.                                                                  (생활안내)      
147    악마같은 아버지를 죽이고 처형당한 녀자 댓글:  조회:7408  추천:0  2014-04-04
악마같은 아버지를 죽이고 처형당한 녀자     명문귀족 첸치집안의 미소녀     첸치가문은 원로원 의원과 추기경 등 명사를 낳은 로마 굴지의 명문귀족이였다. 프란체스코 첸치와 그의 안해 에르시아의 사이에는 일곱명의 아이들이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둘째딸 베아트리체 첸치는 보기 드문 미소녀였다. 검고 부드러운 머리카락, 사랑스런 얼굴 생김새, 생기 넘치는 검은 눈동자, 날씬한 몸매… 1584년에 7세의 나이에 어머니를 잃은 베아트리체는 그때로부터 8년을 장미꽃으로 둘러싸인 기숙학교에서 지냈다. 하지만 거기에서의 즐거운 소녀시절도 15세 때에 나폴리 국경에 가까운 페트렛트라성에 사는 아버지에게 이끌려 가게 됨으로써 일변했다. 베아트리체의 아버지는 녀자들을 번갈아 가며 침실로 끌어들였을뿐만아니라 성안에 다 들릴 정도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몽둥이를 들고 그녀를 쫓아다니군 했다. 베아트리체는 방에 들어박혀서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일이 많아졌다.   친딸을 범하는 야만스런 아버지의 욕정     베아트리체와 계모 루크레치아에게 있어서 밤에 잠자기전의 몇시간은 지옥과 같았다. 프란체스코는 난로 앞에 앉아 두 사람이 보고있는 앞에서 트림을 하기도 하고 더러운 말로 웨치기도 하고 그러다가는 구멍이 뚫린 의자에 앉아서 대변을 보고는 두 사람에게 억지로 엉덩이까지 닦게 하는것이였다. 1593년 3월의 어느날 저녁에 베아트리체가 침대에 누워있는데 갑자기 그녀의 아버지가 나타났다. 그녀는 깜짝 놀라서 모포를 뒤집어썼지만 아버지는 상관하지 않고 들어와서 침대끝에 앉았다. 그러고는 갑자기 베아트리체의 모포를 벗기고 예쁜 딸을 덮치려 했다. 깜짝 놀란 베아트리체는 고함치며 침대에서 굴러 떨어졌다. 아버지는 겁이 나서 뒤걸음질치는 딸을 벽까지 바싹 몰고 갔다. 그리고 애원하듯 목이 터지게 소리를 지르는 베아트리체를 덮쳐 란폭하게 속옷을 벗기고 딸의 순결을 마음껏 짓밟았다… 집사 올림피오는 당당한 체구와 거무스름한 피부의 45세 된 미남이였다. 그는 가련한 베아트리체가 아버지에게 학대받고있는것을 보고 동정하게 되였다. 그 동정이 차츰 애정으로 변한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올림피오의 애무를 받으면서도 베아트리체는 전혀 다른것을 생각하고있었다. 그 무렵부터 그녀의 마음속에는 아버지를 살해하겠다는 무서운 생각이 꿈틀거리고있었던것이다. (그녀는 지옥과 같은 생활에서 도망가고싶다. 녀자로서의 행복을 누리고싶다.) 베아트리체는 아버지를 살해하기 위해 올림피오를 끌어들였던것이다.   서로 다른 목적으로 시작된 프란체스코 살해     어느날에 베아트리체는 예전에 아버지의 마부였던 마르치오를 통해서 로마에 있는 오빠 쟈코모에게 지금의 고통스러운 생활에서 구출해 달라고 호소했다. 그것이 어쩌다가 아버지의 귀에 들어가 버렸다. 화가 난 프란체스코는 베아트리체가 오빠에게 보냈던 편지를 그녀의 눈앞에 내밀고는 채찍으로 마구 때리기 시작했다. 옷이 찢기고 부드러운 피부에 피가 맺히자 이번에는 베아트리체를 헛간에 가두어 버렸다. 전신이 쑤시는 고통속에서 베아트리체는 헛간의 축축한 바닥에 누워있었다. 이제 더이상 견딜수 없었다. 이 지옥에서 도망칠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설령 그것이 자신에게 위험이 닥치는 일이라도… 그후에도 또다시 지옥과 같은 나날이 계속 되였지만 베아트리체는 어떤 릉욕이나 폭력도 잠자코 참았다. 오로지 아버지를 살해하려고 하는 결심만이 그녀를 지탱해 주었다. 오빠 자코모도 함께 아버지를 살해할 계획을 세우게 된것은 그 무렵이였다. 베아트리체는 아버지의 폭력과 학대에 견딜수 없어 아버지를 죽이려고 했고 올림피오는 그녀를 구하려고 서슬이 시퍼래서 기다렸으며  자코모는 아버지의 유산으로 빚을 갚으려고 아버지를 죽이려고 별렀다. 1598년 9월 8일 밤에 베아트리체는 포도주에 아편을 섞어서 아버지에게 마시게 했다. 이튿날 새벽에 집사 올림피오와 마부 마르치오는 마치와 방망이를 들고 성안으로 잠입했다. 올림피오는 프란체스코를 덮쳐서 멱살을 누르고 오른손에 든 쇠망치로 머리를 마구 내리쳤다. 올림피오와 마르치오는 계획대로 마루바닥을 뜯어내고 프란체스코의 시체를 밀어 떨어뜨렸다. 그렇게 하는 동안 베아트리체는 피묻은 깔개를 잘게 잘라서 변소에 던져버렸다.   의혹을 깊게 하는 올림피오의 실종     성으로 돌아온 올림피오는 시치미를 떼고 장례식을 도맡아 했지만 사람들의 의혹을 두려워해서 한시라도 빨리 사체를 매장하도록 신부를 재촉했다. 이런 그의 행동은 오히려 세상의 의혹을 불러일으키고 첸치 일족이 파멸하게 된 원인이였다. 프란체스코의 죽음은 사람들의 의혹을 자아냈다. 결국 1598년 11월 14일에 쟈코모와 베아트리체는 심문을 받게 되였다. 오누이는 아버지가 베란다에서 떨어져 죽였다고 주장했지만 의심은 풀리지 않았다. 사건이 발생된후 올림피오는 첸치집을 제집 드나들듯 했다. 버릇없이 첸치집안사람들과 같은 밥상에서 식사를 하고 밤에는 베아트리체의 침실에 들어박혀서 그녀의 아름다운 육체를 제 마음대로 주물렀다. 참다 못한 오빠 쟈코모는 어느날에 베아트리체를 불러놓고 말했다, “이대로 그자를 두면 우리 집안 명예가 더러워진다. 즉시 이 집에서 내쫓아 버려!” 몸에 위험이 닥쳤다는것을 느낀 올림피오는 부리나케 성을 떠났으나 그후 쟈모코가 보낸 자객에게 살해당했다. 올림피오의 실종은 더욱 의혹을 자아냈다. 경찰은 집요한 수사끝에 프란체스코의 무덤을 파헤치고 검사했다. 의사들은 유체의 상처가 도끼로 맞은 상처라고 증언했다. 베아트리체, 루크레치아, 쟈코모, 마르치오, 그리고 동생 베르나르드까지 붙잡히게 되였다.   눈앞에서 펼쳐지는 가족의 고문     마르치오, 쟈코모,  루크레치아는 선후로 발가벗겨져서 손이 뒤로 묶여 매달리게 되는 순간 고통을 견디지 못해 찢어지는 비명을 지르며 모든 죄를 베아트리체에게 전가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베아트리체는 억울함을 주장했다. 이렇게 되자 재판장은 베아트리체가 지켜보는 앞에서 오빠와 계모를 고문했다. 베아트리체는 그들의 자백은 모두 고문때문에 강요당한것이라고 주장했다. “거짓말입니다. 아무도 아버지를 죽이지 않았습니다.”   첸치가문을 근절하는 법왕의 책략     땅거미가 지기 시작하자 경찰들은 베아트리체를 고문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손이 뒤로 묶이고 오빠와 동생처럼 높이 매달렸다. 팔의 뼈가 관절부분에서 불거져나온 그녀는 가슴을 괴로운듯이 헐떡이였다. 바줄이 늦추어지고 축 늘어지면서도 베아트리체는 의연히 굴복하지 않았다. 자코모, 루크레치아, 베아트리체에게는 사형판결이 내려졌지만 로마의 명문가문인 첸치일족을 죽여서는 안된다는 편지가 눈송이마냥 로마법왕에게 날아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왕이 은사를 베풀지 않았던것은 첸치일족을 멸문시키고 그 막대한 자산을 몰수하려는 속셈이 있었기때문이라고 전해오고있다. 처형이 집행되기 조금전에 베아트리체는 “한 불행한 남자아이”를 위해 500스쿠드라는 돈을 샌티스부인에게 위탁한다는 유언을 남겼다. “그 돈의 리자로 남자아이를 양육할것, 부인이 아이보다 먼저 죽는 경우에는 다른 누군가에게 같은 조건으로 그 돈을 위탁할 것.” 력사가들은 그 남자아이가 베아트리체와 올림피오의 사이에서 태여난 아이라고 추정하고있다. 1599년 9월 11일에 로마의 다리광장에서 처형이 집행될 때 베아트리체는 22세이지만 아직 십대로밖에 보이지 않는 천진란만한 미소녀였다. 먼저 계모 루크레치아의 목이 잘려졌고 다음으로 오빠 쟈코모가 달구어진 불에 근육과 다리가 태워지고 머리는 내려친 마치에 박살나고 몸은 갈가리 찢겨져 처형대에 매달렸다. 동생 베르나르드는 간신히 죽음은 면했지만 그 대신 처형장에서 형과 누나가 처형당하는것을 몇번이나 실신하면서 지켜보아야만 했다.  폭력, 강간, 유괴 등 온갖 나쁜 짓에 물든 악마같은 아버지를 죽인 베아트리체는 빠른 걸음으로 단두대로 달려나가 스스로 용감하게 목을 작두밑에 내밀었다고 한다. 작두가 내리쳐졌고 절단된 그녀의 목을 사형집행관은 높이 쳐들어 사람들에게 보게 하였다.  아버지의 학대로부터 자유를 구하려고 했으나 결국 얻지 못한 가련한 미소녀 베아트리체! 온 로마의 사람들이 이 절세미소녀의 죽음을 깊이 탄식하고 슬퍼했다.     
146    저승에서 만난 할아버지 댓글:  조회:3395  추천:1  2014-04-04
저승에서 만난 할아버지   김희수     수돌이는 아무런 희망도 없는 이 세상에서 더는 살고싶지 않았다. 극도의 절망에 빠진 그는 어느날밤, 독약을 먹고 자리에 누워 죽기를 기다렸다. 황천길에서 그는 힘들이지 않고 저승에 떨어졌다. 참 이상했다. 머리를 들어보니 대청에 앉아있는 염라대왕이 바로 그가 일곱살나던 해에 세상뜬 할아버지였다. “할아버지!” “넌 누군데 날 할아버지라고 부르는거냐?” “할아버지, 제가 할아버지의 손자 수돌입니다!” “네가 수돌이라구?  허허허, 네가 벌써 어른이 됐구나! 몇살이냐?” “서른하고도 세살을 더 먹었습니다.” “그런데 왜 이처럼 젊은 나이에 이곳에 왔느냐?” “인간세상에서는 살 재미가 없었습니다.” “밝은 세상이 싫어서 이 어두운 세상으로 오다니? 무슨 말못할 고충이라도 있는 모양인데 그렇다고 네가 이렇게 떠나오면 인간세상에 남아있는 네 애비에미는 얼마나 속타하겠으며 네 안해와 자식들은 누굴 믿고 살아간단말이냐?” “제가 이렇게 죽으면 아버지, 어머니는 시름을 덜겁니다. 그리고 전 미혼이여서 안해도 자식도 없습니다.” “뭐라구? 서른살이 넘도록 장가도 못가다니! 그럼 약혼한 녀자라도 있겠지?” “장모님 배속에나 있겠는지요.” “보아하니 넌 이 할배를 닮아 키도 구척이고 생김새도 의젓한데 아직 장가를 안간걸 보니 눈이 너무 높아 어지간한 처녀들은 눈에 차하지 않았던 모양이구나.” “장가를 안간게 아니라 못간겁니다. 저한테 시집오자는 녀자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시라소니 같은 녀석! 서른살이 넘도록 녀자 하나 나꾸지 못한단말이냐? 네 이 할아버지는 스무살전에 벌써 시집오자는 녀자들이 너무 많아서 누굴 결혼상대로 정해야 할지 몰라 쩔쩔 맸단말이다. 그리고 네 애비도 총각때 네 에미 말고도 시집오자는 녀자가 수두룩했단 말이다. 그런데 넌 조상님들이 부끄럽게 서른살이 넘도록 장가를 못가다니!” “할아버지, 지금은 세상이 달라졌습니다. 마을엔 처녀라곤 그림자도 찾아볼수 없습니다.” “처녀가 없다니? 그게 무슨 소리냐? 내가 세상을 뜨던 그해까지만 해도 네 또래의 계집애들과 아래웃또래의 계집애들로 마을은 떠들썩했는데 그 숱한 계집애들이 모두 어딜 갔단말이냐?” “모두 도시나 외국으로 시집을 갔거나 돈벌이를 떠납답니다.” “미친년들이구나! 농사는 안짓고 쯧쯧…그러면 이웃마을의 처녀를 데려오면 될게 아니냐?” “이웃마을도 마찬가지입니다. 동서남북 어디나 시골엔 처녀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너말고도 장가 못간 로총각들이 많겠구나.” “부지기수입니다. 전 그래도 로총각중에서 어린축에 속합니다. 근식형이랑 성주형이랑 만철형이랑 무도 마흔살이 넘도록 녀자 손목도 잡아보지 못한 처지입니다. 할아버지도 아들 5형제를 낳았다고 뽐내던 살구나무집을 알겁니다. 그집 막내가 저와 동갑이고 맏형이 마흔다섯살인데 그 5형제가 모두 장가를 못가고있답니다.” “아이구, 기막힌 세상이구나. 그럼 네형 삼돌이도 장가를 못간게 아니냐?” “삼돌형은 다행히 아이 둘달린 과부한테 장가를 들었습니다.” “뭐라구? 삼돌이가 어디 병신이라구 과부한테 장가를 든단말이냐? 그것도 아이 둘이나 달린…아이구!” “그런 자리라도 차려지면 복인줄 알아야 합니다. 지금은 과부들도 시체를 따라 모두 도시나 외국으로 가버렸습니다. 그뿐만아니라 가정이 있는 젊은 녀자들도 도시나 외국으로 떠났고 젊은 남성들도 그 뒤를 따르고있습니다.” “젊은놈들이 모두 떠나면 농사는 누가 짓는단말이냐?” “농사만 지어 언제 돈을 벌겠습니까? 저와 동갑인 뒤집 일국이는 외국나들이 몇번에 큰돈을 벌더니 꽃 같은 색시를 맞아서 도시아빠트에서 보란듯이 살고있습니다.” “너희들 시골총각들은 잘 살지 못하기 때문에 처녀들이 거들떠도 보지 않는 모양이구나. 후, 가난이 원쑤구나! 돈이 원쑤구나!” 길게 탄식하던 할아버지는 다시 수돌이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그렇다면 너도 돈을 많이 벌면 일국이처럼 색시를 얻을수 있을게 아니냐?” “돈을 번다는게 어디 식은죽먹긴줄 압니까? 지금 세월에 농사만 지어 번신할수 없고 남들처럼 출국하자해도 뜻대로 안되지. 도시에 들어가 삼륜차를 한해동안 끌어보았지만 먹고나니 남는게 없었습니다. 인젠 사른세살이 됐는데도 녀자의 살맛이 어떤지조차 모르니 무슨 사는 멋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개코같은 인간세상을 떠나서 여기로 온겁니다.” “이 뼈없는 놈아! 그만한 좌절앞에서 삶의 용기마저 잃다니! 네가 일국이보다 못한게 뭐냐? 넌 일국이보다 더 큰 부자로 될수 있고 일국이보다 더 예쁜 색시를 맞을수 있다는 그런 포부를 품고 노력해보란말이다!” “일리 있는 말씀입니다만 저에게 손오공 같은 신통력도 없는데 무슨수로 부자가 될수 있겠습니까? 제가 벌써 서른하고도 셋인데 이제 돈을 벌어서 어느 천년에 부자가 되겠습니까? 늙어죽을 때 부자가 되여 뭘 하겠습니까? 좋은 세월을 다 놓치고 오금을 못 쓸 때 장가를 가겠습니까? 글쎄 3~5년 고생해서 큰 부자가 될수 있다면 죽을둥살둥 모르고 해보겠습니다만…” “이 등신같은 놈아! 너처럼 ‘언제면 하늘에서 큰돈이 떨어지겠는가, 언제면 벼락부자가 되겠는가’고 백일몽을 꾸며 하루하루 허송세월을 보내다간 40~50살이 되여도 그 모양이요, 60~70살이 되여도 그 꼴일테지. “대부유천 소부유근”이라고 세상에 처음부터 부자가 어디 있겠느냐? 부지런하면 작은 부자는 될터이고 작은 부자가 쌓이면 그게 곧 큰 부자가 도지 않겠느냐! 지금부터라도 늦지 않으니 부지런히 일하여 40~50살에 부자가 되여 장가들면 70~80살이 되도록 외톨이로 늙기보다 낫지 않겠느냐?” “지당한 말씀입니다. 할아버지의 그 말씀을 듣고보니 눈앞이 밝아지고 힘이 막 솟습니다. 그런데 인간세상을 떠난 몸이여서…” “이제라도 늦지 않다. 네가 분투할 결심만 있다면 인간세상으로 보내주마. 기억해라. 저승에선 총각귀신을 안 받으니 부지런히 돈을 벌어 꼭 장가를 가야 한다는것을!” 염라대왕인 수돌이의 할아버지는 수돌이를 번쩍 들어서 공기돌 던지듯 힘껏 허공중에 올리던졌다. 수돌이는 우물안에서 밖으로 솟구치듯 온몸이 우로 자꾸만 솟구치더니 순식간에 어떤 산꼭대기에 닿았다. 수돌이는 사방이 너무나 눈이 부셔서 몸의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다가 산아래로 허망 굴러떨어지고말았다… “아앗!” 수돌이는 몽롱한 꿈속에서 깨여났다. 수돌이가 먹은 독약은 가짜였다. 신생한 수돌이는 꿈속에서 들었던 할아버지의 말씀을 되새기며 주먹을 불끈 틀어쥐였다. “내 꼭 부지런히 일하여 10년, 늦어도 20년후엔 부자가 되여 보름달처럼 환한 색시를 맞아드릴테야!” (1997년)  
145    수도열쇠 댓글:  조회:5626  추천:8  2014-04-04
수도열쇠   김희수     얼마전에 사무실에서 한담을 하던중에 생수얘기가 나와서 저마다 한두마디씩 하다가 화제가 수도물로 이어지면서 누구의 입에선가 “수도열쇠”란 말이 나왔다. “수도열쇠가 뭐예요?” 아직 30대에 들어서기전인 후배가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40대에 들어선 후배도 수도열쇠란게 어떻게 생겨먹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예전에는 마을마다 공공수도물이 있고 집집마다 수도열쇠가 있었다는 사실을 젊은 세대들은 잘 모른다. 녀자들은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물을 길어먹었고 남자들은 멜대를 어깨에 메고 물을 길어먹던 세월이 있었다는것을 젊은 세대들은 잘 모른다. 그러니 수도열쇠가 어떻게 생겼고 어떤 용도로 쓰였는지 알 턱이 있겠는가?   그 시기 산골에서는 샘물을 퍼다 마셨고 시골에서는 우물을 길어먹거나 펌프물을 잣아올려 마셨으며 도시에서는 공공수도물을 길어먹었다. 수도물을 길어먹던 시절이 고달프기는 했지만 그 시대 사람들에게는 재미있고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있다.   내가 30여년을 살았던 고향 룡정에도 마을마다 공공수도물이 있었다. 물을 긷는 도구로는 주로 오지물동이, 바게쯔(원추형의 물통)와 바께쯔보다 용적이 배가 되는 원통형 물통이 있었다. 우리 집은 공공수도물과 거리가 좀 멀어서 물을 길어다가 물독에 채우려면 시간이 많이 걸렸기때문에 멜대에 물통 두 개를 달고 다니며 물을 길어야 했다. 언제부터인가 나도 물지게를 메고 물을 길으러 나섰다.   출근전 아침시간이거나 퇴근후의 저녁시간이면 공공수도물가에는 물을 길으러 온 사람들이 많아서 줄을 서야 했다. 사람이 줄을 서는것이 아니라 물통이 줄을 선다. 크기와 모양이 서로 다르고 낡은 정도도 서로 다른 물통들이 길게 줄을 서있는 모습은 정말로 가관이였다. 그렇게 물통들을 줄 세워놓고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남자들은 담배쌈지를 꺼내들고 담배쉼을 하고 녀자들은 시시껄렁 잡담을 하며 깔깔 웃어댄다. 그러는 사이에 어떤 사람은 남몰래 자신의 물통을 남의 물통앞에 놓고 새치기를 하는 일도 있었다.   수도물을 길으러 갈 때 잊지 말고 꼭 휴대해야 하는것이 바로 수도열쇠다. 이 수도열쇠는 어느 집의것이나 모양과 규격이 똑 같았고 어느 공공수도물이나 다 틀어서 물이 나오게 할수 있었다. 수도열쇠는 전체가 쇠로 만들어졌고 한뼘이 될만한 손잡이가 있다. 손잡이굵기는 치솔손잡이부분만큼 했고 손잡이우쪽은 기윽자모양으로 굽혀졌으며 손가락길이만큼 굽혀져있는 부분에 구멍이 뚫려져있었다. 그 구멍을 공공수도물의 웃쪽 옆부분에 쇠저가락 비슷하게 생긴것이 들여다보이는 부분에 꽂아넣고 손잡이를 슬쩍 틀면 수도물이 콸콸 쏟아져 나온다.   공공수도물 역시 어느 마을의것이나 똑 같았다. 지금 가정에서 사용하는 수도물과 비슷했지만 수도관이 가정용수도관보다 더 굵었고 수도꼭지가 따로 없었다. 아이들 키만큼 한 수도관우에 “철갑옷”을 입혀놓고 우에는 “철갑모”를 씌워놓았는데 “철갑옷”속의 수도관과 이어진 수도관이 “철갑모”의 약간 아래부분쯤으로 한자쯤 나왔고 그 나와있는 수도관끝이 지금의 수도물처럼 아래로 향하도록 굽혀져있었지만 굽혀진 끝부분은 수도꼭지가 아니라 그냥 수도관과 이어진 부분이였다. 수도물뒤에는 하수도뚜껑처럼 덮어놓은 네모난 콘크리트뚜껑이 있었는데 그 두껑을 열면 우물 비슷한 내부가 보였다. 맨 밑에는 땅밑 수도관과 수도물의 수도관을 이어놓은 부분이 로출되여있었다. 일반적으로 수도물이 고장났을 때가 아니면 이 수도물뚜껑은 열지 않지만 마을의 장난꾸러기들이 수도열쇠를 가지고오지 않았을 경우에 여럿의 힘으로 수도물뚜껑을 열고 땅밑에 장치한 수도물여닫기와 이어진 쇠줄을 당겨서 수도물이 나오게 했다. 그렇게 수도물이 나오면 콸콸 흐르는 수도물에 입을 대고 마시기도 하고 여름이면 머리를 감기도 했다.   그런데 공공수도물을 길어먹던 일이 이제는 옛말이 되였다. 집집마다 상수도가 들어오면서 공공수도물이 사라진지도 수십년이 되였고 수도열쇠도 자취를 감추어버린지 오래다. 갓 집에 상수도가 들어올 때만 해도 편안히 집에 앉아서 수도물을 받아먹게 됐다고 기뻐했는데 어느때부터인가 수도물을 직접 마시지 못하게 되였다. 도시의 수도물이 비록 시골의 샘물이나 우물물에 비할수는 없었지만 바가지에 받아서 꿀꺽꿀꺽 마시면 목구멍에서 배속까지 시원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수도물이 안전하지 못하게 되여 돈주고 물을 사먹어야 한다. 세상에 공짜는 물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그 시절에는 물을 돈주고 사먹는 시대가 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그런데 사먹는 물은 안전한가?   국가질감독검험검역총국 공식사이트에 따르면 지난해 9월에 우리 나라 22개 성, 자치구, 직할시의 211개 기업에서 생산한 220종의 통포장 음용수(饮用水)와 병포장 음용수 제품을 추출하여 검사한 결과 6개회사 브랜드의 음용수에서 기준치를 초과하는 브롬산염(溴酸盐)이란 발암물질이 함유되여있는것이 발견되였다. 그외 12개생수회사의 브랜드에서 유리유효염소(游离氯), 대장균(大肠杆菌) 등이 불합격으로 나타났다. 최근의 조사에 따르면 중국총인구의 20%에 해당되는 2억 8천만명의 주민은 불안전한 음용수를 사용하고있어 음용수수질개선이 시급한것으로 나타났다.   돈주고 사먹는 물이 예전에 마시던 공짜물만 못하다니? 돈 주고 사먹는 생수보다 수도열쇠 하나면 공짜수도물을 마음놓고 안전하게 먹을수 있던 그때 그 시절의 물맛이 그립다.     
144    조물주는 왜 인간에게 잠을 주었나 댓글:  조회:5549  추천:11  2014-04-02
조물주는 왜 인간에게 잠을 주었나   김희수     이 세상에서 숨을 쉬고 살아있는 모든것들은 잠을 잔다. 식물도 동면하는 동물처럼 겨울이 되면 하던 일을 멈추고 겨울잠을 잔다. 고급동물인 인간도 잠을 잔다.   전기가 없던 옛날에는 밤에 할일이 없었기에 모두 일찍 자군했다. 마당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옛말을 하기도 했지만 일찍 잠을 자는게 습관이였다. 전기는 있었지만 텔레비죤이 없던 시기에는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보고오는 일도 있었지만 일찍 자는 습관은 변하지 않았다. 그때까지는 일찍 자고 일찍 깨여나는것이 보편적이였다. 그래서 일찍 자는 잠이 보약이라거나 일찍 자고 일찍 깨여나면 건강과 행복이 찾아온다는 말도 있었다.   집집마다 텔레비죤이 있게 되면서 잠을 자는 시간이 늦어지기는 했지만 본격적으로 먹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고 노는 오락장소가 생겨나면서 현대인들은 늦게 자는 습관을 가지게 되였다. 늦게 자도 이튿날의 출근 때문에 일찍 깨여나야 하기에 현대인들의 잠시간은 상대적으로 줄어들었다.   인간의 적정수면시간은 7~8시간이다. 평균수명이 100세도 안되는 인생에서 3분의 1의 시간을 잠을 자야 하니 얼마나 아까운 시간인가? 이런 계산대로라면 만약 90세를 산다고 할 때 30년동안은 잠을 자야 하는것이다. 물론 하루 7~8시간보다 더 적게 자는 사람도 있고 더 많이 자는 사람도 있다. 어쨌든 사람의 일생에서 잠이 차지하는 시간은 엄청 긴 시간이다.   인간에게 잠이 없다면 대개 30년은 더 사는 셈이 되지 않겠는가? 그러니 잠이 없다면 얼마나 좋을가? 조물주는 왜 고작 100년도 못사는 인간에게 30년을 허비해야 하는 잠을 주었을가? 잠이 없다면 인간은 더 많은 일을 할수 있고 더 많은 삶의 목표를 정해놓고 더 가치있는 삶을 살수 있을것이 아닌가?   그런데 왜 30년쯤 죽은듯이 누워있어야 하는 잠을 주었을가?   천지만물을 창조한 조물주는 인간의 뇌가 피로에 약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있었기 때문에 인간에게 잠을 준것이 아닐가? 인간의 뇌는 낮동안 지속적으로 각성상태에서 활동을 유지하며 수많은 정보를 처리하고 필요한 판단을 내리느라고 지쳐있기때문에 잠을 통해 잠시 뇌를 휴식시켜야 한다. 바쁜 일상에 지친 현대인에게 잠은 몸과 마음의 피로를 회복해주는 보약이다.   이렇게 잠은 인간이 생존하는데 꼭 필요한 생리현상이라고 한다. 그런데 한가지 의문이 있다. 조물주는 인간의 뇌를 휴식시키기 위해서만 잠을 준것일가? 곰곰히 생각해보니 조물주가 인간에게 잠을 준 또 다른 리유가 있을것 같다. 잠을 자는 동안 꿈을 꾸라는것, 대낮의 현실에선 불가능한 꿈을 꾸라는것이 아닐가? 깨여나면 어디까지는 생시처럼 생생하고 어디까지는 아리송하고 어디까지는 기억나지 않는 미스터리한 꿈, 그것이 개꿈이던 돼지꿈이던 또는 흉몽이던 길몽이던 꿈이 있어서 잠이 의의가 있는것이 아닐가? 그러고 보니 잠도 삶의 일부분으로 인생의 3분의 1이 아깝게 허비되는것이 아닌것 같다.   밤이 깊었다. 컴을 끄고 잠을 자야겠다. 피로도 풀고 생시와 또 다른 신비하고 미스터리한 꿈을 꾸기 위해…      
143    공화국창건후 첫 고위급간부 암살사건 댓글:  조회:6083  추천:0  2014-03-30
공화국창건후 첫 고위급간부 암살사건   (번역)     1951년 2월에 중앙인민정부에서는 《중화인민공화국반혁명징벌조례》를 반포하였는데 그때로부터 전국적으로 기세드높은 반혁명진압운동이 시작되였다. 그러나 일부 반혁명분자들은 멸망을 달가와하지 않고 의연히 새로 태여난 인민정권을 뒤엎으려고 취후발악을 하면서 한번 또 한번 새 정부의 고위급간부들을 암살했다. 1951년 3월에 모택동의 원 비서이며 산동성인민정부위원이며 산동성군구 정치부 부주임인 황조염(黄祖炎)은 인민해방군내부에 숨어든 반혁명분자에게 암살되였다. 이는 새 중국이 성립된후 처음으로 발생된 고위급간부암살사건이기에 중앙지도자들까지도 경악했다. 1951년 3월, 제남의 밤은 아직도 쌀쌀하여 거리에는 행인이 드물었다. 3월 13일 밤 8시 30분에 경이로에 위치한 제남시정부의 강당에서 북소리와 거문고소리가 울려퍼졌다. 산동성군구문화사업좌담회의가 방금 끝나고 문예야회의 공연이 시작된것이였다. 좌담회에 참석한 대표는 200여명이였는데 대부분이 산동성군구계통 사정(司政)기관의 문화, 선전교육을 책임진 과급이상의 간부들이였다. 황조염은 앞줄의 오른쪽 첫좌석에 앉아있었는데 그는 그날밤 좌담회에 참석한 간부들중에서 직무가 가장 높은 수장이였다. 공연이 시작되기전에 그는 주석대에 올라 대표들을 향해 강화를 한후 자기의 자리에 돌아와 앉았다. 그때 누구도 회의에 참석한 일군중에 한 사람이 황조염의 일거일동을 주시하고있다는것을 알지 못했다. 그날밤에 황조염은 원래 열이 몹시 나서 강화를 마친후 집에 돌아가 쉬려고 했는데 다른 사람들의 흥을 깨뜨릴가봐 계속 남아서 문예공연을 관람했다. 공연이 한창 고조에 오르고있을 때 황조염의 좌측 뒤쪽에 앉은 한 사내가 흉악한 눈길로 황조염을 쏘아보고있었다. 하지만 누구도 그를 주의하지 않았다. 그 사내는 사람들이 관람에만 몰두하느라고 자신에게는 주의를 돌리지 않는것을 보고 살그머니 황조염의 뒤로 다가가 총을 꺼내들었다. 그는 1초동안 황조염의 머리를 겨눈후 방아쇠를 당겼다. “땅!”하는 총소리와 함께 황조염은 당장에서 쓰려졌다. 흉수는 이어 오른쪽 처장의 좌석에 대고 한방 쏘았다. 너무 갑작스럽에 발생된 일이라 모두들 어리둥절해졌다. 한참후 누군가 큰소리로 “저 놈을 붙잡아라”고 소리쳤다. 하지만 그때는 흉수가 이미 자진한 뒤였다. 산동성군구 보휘부의 장일평 등은 급히 화조염을 성립병원으로 호송했다. 의사들이 모든 방법을 다해 구급했으나 효과를 보지 못하고 황조염은 불행하게 사망되였다. 향년 43세였다. 황조염을 암살한 흉수는 공개된 반혁명분자가 아니라 당내에 숨은 반혁명분자 왕취민이였다. 왕취민은 혜민군분구 선전교육과 부과장이였다. 산동성 문등현 서횡요촌의 한 지주의 가정에서 출생한 왕취민은 항일전쟁초기에 소학교 교원으로 있다가 1940년에 팔로군에 혼입해들어왔고 이듬해에 공산당내부에 혼입해들어왔다. 1944년에 농민의 소작료, 토지세, 대출리자 등을 낮추는 정책을 실시하자 자신의 가정리익에 손해를 입는것을 보고 소극적으로 저항하면서 병을 핑게로 장기적으로 집에서 휴식했다. 토지개혁운동때 그는 부모가 투쟁을 당하게 되자 군중들을 욕하면서 요언을 퍼뜨려 토지개혁을 반해했다. 하지만 그는 처분을 받지 않았다. 1950년 11월에 왕취민은 혜민군분구에 전근되여 선전교육과 부과장직을 맡았다. 그후 그는 직권을 리용하여 조직에서 나서서 자신의 아버지가 악패지주가 아니라는것을 증명해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그 요구가 거절을 당하게 되자 당과 당의 토지개혁정책에 더욱 큰 불만을 품게 되였다. 1951년 2월에 전국적으로 반혁명진압운동이 시작되였다. 3월 6일에 혜민군분구에서는 왕취민의 고향사람들이 부쳐보낸 련명신을 받았다. “악패지주인 왕취민의 아버지는 두 농민을 핍박하여 죽게 한 죄행을 저질렀습니다. 그리고 왕취민은 1938년에 적에게 두명의 지하당원을 밀고한적이 있습니다. 이에 우리는 이번 반혁명진압운동에서 그들을 처리해주기를 바랍니다.” 혜민군분구 정치부의 지도부에서는 왕취민의 정서에 영향을 끼칠가봐 엄숙하게 처리하지 않고 산동성군구에도 보고하지 않았다. 왕취민은 고향사람들이 자신을 적발했다는것을 알게 된후 놀라서 함께 죽더라도 한번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총을 닦고 칼을 갈면서 기회만 기다렸다. 하지만 혜민군분구지도부에서는 왕취민의 반상적인 행동에주의를 돌리지 못했다. 그리하여 그를1951년 3월 13일에 제남에서 열린 산동성군구 문화사업좌담회에 참석하게 하여 황조염을 암살하는 사건이 발생되게 하였다. 해방초기에 농촌에서 토지개혁을 실시할 때 당내에는 왕취민과 같은 가정에서 출새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대부분 공산당의 토지개혁정책을 옹호하고 지지하면서 혁명사업에 충성했다. 황조염이 암살당한 그날밤에 중공산동분국과 산동성군구에서는 즉시 이 소식을 중앙에 보고했다. 모택동 등 중앙지도동지들은 황조염이 암살당한 소식을 듣고 몹시 놀랐다. 모택동은 중공중앙을 대표하여 각 중앙국, 대군구, 지원군 당위 및 해당단위에 통보를 내려보냈다. “산동성군구 정치부 부주임 황조염동지는 3월 13일에 좌담회에 참석했다가 반혁명분자 왕취민에게 암살당했습니다. 이는 우리 당의 고위급간부가 당내에 숨어든 반혁명분자에게 암살당한 사건으로서 과거에는 보기 드물었습니다. 이에 전당에서는 경각성을 높여야 합니다. 이에 다음과 같이 통보합니다. 첫째, 반혁명분자들의 보복을 엄하게 방지해야 합니다. 반혁명분자들의 보복은 필연적으로 존재한다는것을 인정하고 반드시 사전에 방지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경비를 강화하는 외에 적극적인 방법을 강구하여 반혁명조직을 파내고 반혁명소굴을 짓부셔버려야 합니다. 반혁명분자들이 미처 보복할 사이가 없이 견결하고 신속히 그들을 소멸해야 합니다.” 둘째, 절대 무사태평하다고 생각하지 말고 반드시 당내, 정부내, 군대내에 소수의 반혁명분자들이 혼입해들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지금부터 시작하여 이 문제에 주의를 돌려 의심스러운 분자들을 조사하여 재료를 수집해야 합니다. 지구당위 및 행정공서 1급이상의 기관, 군분구 및 사(师) 1급이상의 기관, 도시에서는 시구량급기관내에서 특별히 의심스러운 분자들을 주의하여 조사해야 합니다. 확실한 조사하여 재료가 확실하다면 반드시 합당하게 처벌하여 당, 정, 군 각급지도기관의 순결과 안전을 보장해야 합니다. 절대 우유부단하거나 관용을 베풀어 나쁜 일을 하도록 조장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건이 발생된후 산동성군구에서는 욍취민소재의 혜민군구의 지도부와 해당간부에 대해 엄숙하게 처리하고 이번 사건의 교훈을 참답게 총결했다. 반혁명진압운동이 방금 시작되여 군대내부에서는 반혁명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다. 결과 각급 조직에서는 마비사상이 존재했고 경각성이 부족했다. 보위부문에서는 안전사업이 소홀하여 회장에 대한 경호배치가 따라가지 못했다. 이런 사건이 다시 발생되지 않도록 방지하기 위해 군구에서는 구체적인 조치를 제정했다. 산동성군구 사령원 허세우는 명령을 내려 이후 기관간부들이 토비토벌 등 임무를 집했할 때를 제외하고는 일률로 총을 휴대하지 못한다고 규정했다. 1952년 10월 26일에 모택동은 처음 제남땅을 밟았다. 모택동이 이번에 산동에 온것은 사업회보를 듣고 산동각지를 시찰하는외에 또 하나의 중요한 일정이 있었는데 그것은 황조염렬사를 추모하기 위해서였다. 그날 오후에 산동분국의 시찰활동계획배치에 대해 알아본후 모택동은 산동성군구 사령원 허세우한테 물어서 황조염의 묘지가 남쪽교외의 사리산에 있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모택동은 허세우를 보고 말했다. “내가 묘지에 가보아야겠소. 난 1938년초에 연안에서 그와 리별했댔소. 그때 그는 신4군을 편성하러 산에서 내려온 진의를 맞이하러 갔댔는데 벌써 14년이 되였소. 그런데 그것이 영원한 리별이 될줄은 생각도 못했소.” 1952년 10월 27일에 모택동은 허세우와 함께 승용차에 앉아서 화조염렬사의 묘지로 찾아갔다. 묘지로 가는 도중에 모택동은 허세우를 보고 말했다. “조염동지는 얻기 힘든 인재요. 문무에 능하고 사람됨됨이가 너그럽소. 그는 조직관념과 사업심이 강하고 자신에 대한 요구가 엄격하며 동지들과의 우애도 깊었소. 난 그가 몹시 그립소.” 황조염의 묘지는 렬사릉원의 제일 높은 곳에 있었다. 모택동은 황조염의 묘지앞에서 허리를 굽혀 묵묵히 묵도를 하고나서 애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염동지, 내가 당신을 보러 왔소!” 모택동이 눈물을 흘리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통곡했다. 
142    새 생명의 탄생 댓글:  조회:6201  추천:14  2014-03-28
새 생명의 탄생   김희수     3월에 들어서며 련이어 출산소식을 접했다. 먼저 동료가 미국에 있는 자신의 녀동생이 두번째 아이를 낳았다며 스마트폰을 들고와 갓난 녀자아기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뒤이어 출산휴가기간 중이던 동료가 남자아기를 출산했다는 소식이 웨이신(微信)에 아기사진과 함께 올랐다. 귀여운 아기사진들을 보면서 생명의 경이로움에 저절로 깊은 감동을 느꼈다.   새 새명의 탄생은 그 자체로서 성스러운것이고 새 생명을 창조한 어머니는 그 자체로서 위대한것이다. 배속의 아기를 세상밖으로 나오게 하기 위해 곡경을 치르는 어머니, 마침내 세상밖으로 나와 힘찬 고고성을 울리는 갓난아기, 꼼지락거리는 작은 생명… 우리는 모두 그렇게 태여났고  우리의 어머니들은 모두 그렇게 새 생명을 창조했다.   녀성은 모진 출산의 진통을 경험하면서 어머니로 된다. 어머니로 되는 과정은 자연 분만일 경우 진통이 시작되고 나서 자궁경부가 완전히 열리게 되는 첫고비, 자궁경부가 완전히 열리고 나서 태아가 만출되기까지의 두번째고비, 태아만출후 태반이 나올 때까지의 세번째고비, 태반이 만출까지 이루어진 뒤 분만후 1시간 동안의 네번째고비의 산통을 극복하는 그야말로 사선을 넘나드는 과정이다.   어머니가 되는 과정도 힘들지만 아버지로 되는 과정도 쉽지 않다. 출산을 위해 모진 진통을 겪는 안해에게 아무런 도움도 줄수 없다는게 한스러워 산실밖에서 바질바질 속을 끓이면서 산모와 아기가 모두 무사하기를 속으로 비는 그 심정, 마음속으로 안해를 응원하면서 이제나 저제나 하고 아기가 태여나기를 애타게 기다리는 그 심정, 아들일가, 딸일가 하고 초조하게 기다리는 그 심정…     그러다가 “응애”하는 갓난아기의 힘찬 고고성이 들리고 간호사가 산실밖으로 나오면 아버지가 된 기쁨에 막 달려가고… 그런 애아빠의 심정을 아는 간호사가 묻기전에 먼저 “순산입니다”하고 알려주면 안도의 숨을 내쉬고 다음에 간호사가 “고추입니다”하고 알려주는 경우에는 너무 기뻐서 퐁퐁 뛰고 “산모와 아이가 모두 무사합니다”하고 말하는 경우에는 딸이란걸 알고 서운해하던 그 심정…   물론 어머니가 되는 과정은 아이를 잉태해서부터 출산하기까지의 10개월정도가 모두 포함된다. 아니, 결혼하기로 결정한 날부터 시작해서 아빠, 엄마로 되는 준비과정일것이다. 그러다가 임신하게 되면 녀자는 엄마가 될 마음가짐으로 배속아이에게 태교를 하고 남자는 안해의 배에 귀를 대보기도 하고 점점 커져가는 안해의 배를 보면서 아빠가 될 꿈에 젖어있을것이다.   결혼하는 신랑신부에게 어른들은 한결같이 “아들딸 낳고 행복하게 잘 살아라”는 덕담을 한다. 일단 결혼하기로 마음먹은 커플들은 마음속에 조만간에 엄마, 아빠로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품고있을것이다. 결혼전에 아이를 가질수도 있고 결혼해서 몇년후에 아이를 낳으려고 했지만 뜻밖에 임신하여 엄마, 아빠가 될수도 있다. 결혼한 부부는 잉태소식을 알게되면서부터 부모로 되는 과정을 겪는다.   그런데 요즘 임신부들은 대부분이 제왕절개분만을 선택한다고 한다. 출산예정일과 가까운 날에서 길일을 선택해 출생일을 미리 정해놓기도 한다. 예전에는 출산예정일은 알았지만 출생일은 미리 알수 없었다. 아이가 어느날에 태여나는지는 하느님도 미리 알수 없었다. 출산예정일이 되여 산통이 심해지는 등 증상이 나타나면 산부인과에 가는것이고 산부인과에 가서 검사를 받아봐야 아이가 태여나는 날을 확정할수 있었다. 그래서 밭에서 일하다가 아이를 낳는 경우도 있었고 길을 가다가 길가에서 아이를 낳는 경우도 있었다.   이것이 자연분만시대에 있은 자연의 섭리에 맞는 출산이였다. 그런데 지금은 대부분 제왕절개분만을 하기에 출생일까지 미리 알수 있다. 아이가 태여나는것은 원래 신비한 일인데 출생일을 미리 알면 신비롭지 않다. 게다가 아이의 성별까지 미리 알고있으니 “아무날에 남자아이(혹은 녀자아이)를 낳겠군”하고 점쟁이가 된 기분이니 아이의 출산은 조금도 신비롭지 않다.   제왕절개분만은 정상적인 자연분만을 할수 없는 경우에 선택하는 방법이지만 지금은 자연분만을 할수 있는 녀성들도 제왕절개분만을 선택한다. 자연분만으로 안전하게 출산할수 있을가? 출산후 몸매가 망가지지 않을가? 많은 녀성들이 이런 우려를 가지고 아름다운 몸매를 보전하고 안전하게 출산하기 위해서 제왕절개분만을 선택한다고 한다.   자연분만은 출혈이 적고 감염이 적고 회복이 빠른 등의 장점이 있다. 녀성의 몸은 그 자체가 아무런 도움이 없이 스스로 분만을 할수 있도록 만들어져있다고 한다. 그래서 혼자서 출산하는 녀성도 있는가 보다. 복중의 태아 또한 산도를 통해 세상밖으로 나가기 위해 스스로 노력한다고 한다. 그러니까 사실상 엄마와 아이의 노력으로 출산을 완성하는 자연분만은 아주 자연스러우며 건강한 분만방법인것이다. 그러니 난산위험이 없는 경우 자연분만에 대한 확신을 가져보는것이 좋을듯 싶다. 그것이 더욱 엄마다운 엄마로 되는 길이라고 생각된다.   요즘의 많은 산모들은 제왕절개분만을 선택하기에 네가지 고비를 넘는 힘겨운 출산의 진통을 모른다. 요즘의 아버지들은 아들일가 딸일가 하고 산실밖 복도에서 애타게 기다리던 신비로움을 모른다.   우리들의 생일을 “어머니가 곡경을 치른 날”이란 뜻의 “모난일(母难日)”이라고 하는데 요즘 태여나는 아이들의 생일을 진정한 의미의 “모난일”이라고 할수 있을가?   아무튼 새 새명의 탄생은 성스럽고 경이롭다. 이 아이들이 자라서 어른이 되는 세상은 지금보다 나은 행복하고 아름다운 세상이였으면 좋겠다. 그들이 엄마, 아빠가 되여 새 생명을 탄생시킬 때에는 좀 더 신비로움을 느끼면서 잊지 못할 추억이 남을 과정을 경험했으면 좋겠다. 그것이 우리가 없는 세상일지라도 새 생명은 영원히 태여나니깐.     
141    동북전역에서 국민당 거목 진성을 물리친 림표 댓글:  조회:7428  추천:0  2014-03-22
동북전역에서 국민당 거목 진성을 물리친 림표   (번역)   동북민주련군의 가을철공세가 결속된후 1947년 10월 15일에 모택동은 동북민주련군 총사령 겸 정위인 림표에게 전보를 보내여 더욱 큰 규모의 겨울철작전을 앞당겨 개시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림표는 현재 그의 부대가 관을 넘어 작전한다는것은 현실적이 못된다는것을 의식하고 모택동에게 회답하는 전보에서 기동출격작전을 1948년초로 늦출것을 건의했다. “금주에서부터 심양일대까지의 하류가 모두 얼어야 아군의 대부대가 행동하기 편리하고 금주와 심양사이의 작전에 최대의 병력을 투입할수 있습니다. 대거점공격, 대증원작적의 수요에 적응하기 위해 우리는 래년 4~5월에 다시 100개의 새 병퇀을 확대하기로  했습니다. 기동과 평수로작전에 관해 림표, 라영환, 류아루는 다음과 같이 생각했습니다. 현재 대군이 움직인다면 보충공급이 곤난합니다. 그렇다고 규모가 크지 않은 부대가 나간다면 병력이 분산되여 작은 전투는 찾기 어렵고 큰 전투를 하려고 해도 병력이 모자라게 됩니다. 때문에 우리는 잠시 움직이지 않고 명년에 강물이 언후 다시 형세를 보아서 움직이기려고 합니다.” 동북전역에서 국민당군이 병력을 집중하여 대도시를 고수하고있는 상황에서 림표는 4~5개 종대를 집중하여 도시공격작전을 발동하거나 6~7개의 종대를 집중하여 대규모의 운동전을 하는수밖에 없었다. 공격할수 있는 작은 거점은 이미 존재하지 않았기때문이다. 그 시기 재정비와 확충을 거쳐 림표의 병력은 가을철작전시기보다 근 22만명이 더 증가되여 총병력은 이미 74만명이 되였다.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군대는 동북지구에서 처음 병력이 국민당군을 초과했다. 12월초에 동북지구의 기온은 마침내 령하 20도로 내려갔다. 강울이 얼어 무거운 군수물자를 실은 차도 통과할수 있게 되였다. 동북민주련군은 두꺼운 솜옷을 입고 신선한 우랍초를 받친 신을 신고 한자 깊이 쌓인 눈길로 전진했다. 12월 15일에 2종대와 10종대는 심양이북의 법고를 포위했고 7종대는 법고이서의 창무를 포위했으며 8종대는 창무이남의 신립툰을 포위했다. 1종대, 3종대, 6종대는 법고, 신민, 심양사이에 도착했고 4종대는 심양에 접근했으며 9종대는 심양서북방향의 신민부근에 이르렀다. 동북민주련군이 전면적으로 출동하자 긴장해난 군민당군의 국방부참모총장이며 동북군영주임 진성은 즉시 철령을 고수하던 신6군 신22사에 법고를 증원하라고 명령했다. 신22사의 출동은 림표에게 전투하기 적합한 기회를 가져다주었다. 림표는 아래와 같이 명령했다. (1) 10종대 29사는 법고를 물샐틈없이 포위하여 적들이 도망치지 못하게 할것. (2) 2종대와 7종대의 주력은 신속하게 법고동남을 돌아서 측면으로 진공할것. (3) 3종대는 철령으로 우회하여 적군 22사의 퇴로를 막아 신3군 14사와의 련계를 끊어놓을것. 12월 16일에 신22사(적군)는 철령과 법고사이의 진서보루와 랑랑묘의 일선에 도착하여 법고이동의 2종대(아군)의 진지를 공격했다. 2종대는 즉시 반격하면서 5사를 적의 측면과 후면으로 우회하게 했다. 신22사는 자신이 공격대상으로 되였다는것을 발견한후 급히 철령으로 후퇴했다. 신22사가 얻어맞자 12월 20일에 진성은 급히 장춘을 고수하던 신1군 54사와 림시편제로 된 53사, 사평을 고수하던 제71군 87사와 91사, 개원을 고수하던 제53군 103사와 림시편제로 된 30사, 료남을 지키던 제52군 제2사에 심양과 철령지구를 증원하여 심양을 포위한 림표군의 군사위협을 해제하라고 명령했다. 국민당군의 대규모의 이동은 림표가 줄곧 기다리고있던 바였다. 림표는 동쪽을 치는척 하고 서쪽을 치는 전술로 사면이 산으로 둘러쌓여 견고한 법고를 포기하고 2종대와 7종대에 서쪽의 창무를 공격하여 이동한 적군과 분산된 적군을 소멸하라고 명령했다. 창무는 심양이북철로선의 중요한 거점의 하나로서 국민당군 제49군 79사의 3개퇀이 지키고있었는데 병력이 1만명나 되였다. 12월 28일에 총공격이 시작되였다. 5시간후 창무성을 지키던 1만여명의 적군은 소멸되였고 군민당군 제49군 79사 소장 부사장 리불태와 7000여명의 적군이 포로되였다. 이는 림표군이 첫번째로 대낮에 발동한 도시공격전이였다. 그후로 동북민주련군은 대부분 대낮에 도시를 공격했다. 창무전투가 결속되자마자 림표는 1종대, 8종대, 9종대에 계속 남녕로로 전진하여 금주부터 심양사이의 교통련락을 철저하게 차단하라고 명령했다. 림표군이 사상자가 많아서 다시 전투하기 어렵다고 여긴 진성은 법고이남지구에서 림표군과 주력작전을 벌릴 계획을 포치했다. 국민당군의 5개군이 동쪽에서 철령으로, 서쪽에서 신민으로 료하량안의 100킬로메터를 따라 부채형으로 전면 출격했다. 진성의 대군이 출격한 날은 바로 1948년 양력설이였다. 진성은 그날부터 적수의 칭호가 변한것을 몰랐다. 1947년 12월 30일 17시에 동북민주련군총부에서는 “1948년 1월 1일부터 동북민주련군총사령부를 중국인민해방군동북군구사령부로 개칭하고 원래의 동북민주련군총사령부의 간칭인 ‘동총(东总)’을 중국인민해방군동북군구사령부의 간칭인 ‘동사(东司)’로 개칭한다”고 통지했다. 바로 그날에 림표는 진성의 3로대군(三路大军)중의 좌로 신5군이 진격이 빨라서 이미 돌출하게 앞으로 나와있고 력량이 상대적으로 박약하다는것을 발견했다. 림표는 각 종대를 동원하여 국민당군 신5군을 섬멸하는 전술을 펴나갔다. 림표군에게 포위된 신5군은 공주툰과 그 서남지구에 갇히게 되였다. 진성은 신오군 군장 진림달에게 공주툰을 고수하면서 증원을 기다리라고 명령했다. 진성은 림표가 자신의 한개 군을 섬멸하리하고는 생각도 못했기때문이다. 림표는 적군의 4개군이 멀지 않은 곳에 있었지만 그들이 자신들의 병력을 보전하기 위해 증원을 오지 않을것이라는것을 알고  대담하게 공격을 들이댔다. 공주툰을 계속 지킬것인가, 후퇴할것인가? 그때까지도 진성은 의연히 망설이고있었다. 각지의 증원부대에서 모두 그에게 “빠른 속도로 전진하고있다”고 보고했기때문이다. 림표는 2종대에 명령하여 새벽에 총공격을 발동하게 했다. 6일밤에 진성은 마침내 신5군에 심양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7일 아침에 림표군의 총공격이 시작되였다. 호되게 얻어맞은 국민당군은 결국 투항했고 진림달, 195사 사장 사대증, 43사 사장 류광천 등 1만 3000여명 관병들이 포로되였다. 거기에 7000여명의 사상자까지 합치면 신5군 2만여명이 전부 섬멸된것이다. 진성은 급히 료양을 지키던 제52군의 주력과 사평을 지키던 제71군의 주력을 심양으로 돌아오라고 명령했다. 그후 그는 위병으로 드러누웠다. 1월 10일에 장개석은 심양으로 찾아왔다. 장개석은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진성을 만났다. 진성은 신5군이 전멸된 원인을 하급들이 자신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았기때문이라고 하면서 신6군 군장 료요상을 처벌해줄것을 요구했다. 군민당동북군영에서 사장이상의 장령들이 참석한 군사회의가 열렸다.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장개석은 화가 나서 상을 내리치며 료용상장군, 리도장군 등이 무능하여 신5군이 섬멸되였다고 10여분동안 “냥씨피(娘希匹)”를 반복하며 줄욕을 퍼부었다. 장개석은 남경으로 돌아가자마자 나쁜 소식을 듣게 되였다. “신립툰이 림표군에게 근 한달동안 포위되여 제49군 26사의 9000여명 군사가 탄알과 군량이 떨이지고 많은 군사가 동상을 입어 사기가 저락되여있던중에 갑자기 림표군의 명렬한 공격을 받았습니다.” 진성은 동북군영 부사령장관 정동국과 함께 남경으로 가서 장개석을 만났다. 진성은 장개석앞에서 다시 군민당군이 동북에서 패배한 원인은 하급들이 부패하고 타락되여 자신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았기때문이라고 변명했다. 그의 말을 듣고난 장개석은 “진장군은 다른 일은 상관하지 말고 마음놓고 료양이나 잘하게”하고  말했다. 그제야 진성은 자신의 군사생애가 결속되였다는것을 깨달았다. “심양과 함께 생사를 같이 하겠다”, “심양을 지키지 못하면 총으로 자살하겠다”고 맹세했던 진성은 병을 핑계대고 장개석에게 사직을 제출했다. 1948년 2월 5일에 패전한 진성은 초라하기 그지없는 모습으로 심양을 떠났다. 때는 그가 동북군을 거느린지 6개월도 안되였다. 림표가 거느린 동북인민해방군의 겨울철공세 제1단계작전이 결속되였다. 이 전투에서 림표군은 국민당군 5만 8000여명을 섬멸하고 북녕철도를 차단했으며 국민당군이 동북을 고수하는 요지인 심양의 관문을 열어놓았다. 동북야전군은 령하 40도의 날씨에 야외에서 작전하다보니 8000여명이 동상을 입었고 신5군을 섬멸하는 전투에서만도 사상자수가 1만여명에 달했다. 
140    지금은 잠에서 깨여나야 할 때 댓글:  조회:5672  추천:4  2014-03-19
지금은 잠에서 깨여나야 할 때   김희수     “빨리 일어나, 아침 먹고 학교가야지?” 누구나 어릴 때는 늦잠을 깨우는 엄마의 소리를 들었을것이다. 또 자라서는 “따르릉”하는 자명종소리에 깨여나 서둘러 밥을 먹고 부랴부랴 출근도 했을것이다. 지금은 자명종대신 스마트폰기능을 리용하겠지만.   어쨌든간에 잠을 깨우는 소리가 들리면 잠을 더 자고싶어도 일어나야 한다. 배설하고 씻고 밥먹고 새로운 하루를 시작해야 한다.   그런데 요즘은 잠을 깨우는 소리가 분명 들리는데도 일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분명 잠에서 깨여나라고 웨치는 소리가 들리는데도 말이다.   “2010년에 전국의 조선족인구가 183만 929명으로서 2000년의 192만 3842명에 대비해 4.83% 줄었다, 해방초기에 조선족인구비률이 63.4%를 차지했던 연변이 2012년의 조사에서 조선족인구(79만8000명)비률이 36.65%밖에 안되였다. 이런 인구감소세가 지속되고 그 흐름을 완화하는 대책 부재가 지속되면 중국조선족이 자기 민족정체성을 잃을 가능성이 크다.”   “지난해 연변에서 1만 9500여쌍이 결혼등기를 하고 7800여쌍이 리혼을 해 리혼률이 40%에 달했다.”   “조선족학생수가 급감하면서 최근 20년 새 90%이상이 문을 닫아 중국내 조선족학교가 위기에 처했다.”   중국조선족의 정체성이 상실될 위기에 처했다는 경고의 목소리가 우리의 잠을 깨운다. 이런 목소리를 들었다면 정신을 차리고 무관심의 잠에서 벌떡 깨여나 관심의 창문을 열어야 한다. 그리면 조선족사회의 현황도 보일것이고 위기에 대처할 고민도 하게 될것이다.   조선족중에 일부 사람들은 “조선족인구가 줄어들든 말든 나와 무슨 상관이람?”하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을것이다. 그러나 말은 그렇게 해도 그들의 속마음은 그렇지 않을것이다. 그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자신이 조선민족이라는 잠재의식이 자리잡고있을것이다. 때문에 이들을 무감각, 무관심이란 발편잠에서 깨여나게 하여 관심의 창문을 열어준다면 이들도 마음속으로 조선족인구가 즐어들지 않고 늘어나 우리 민족이 이 땅에서 천세만세 자치권리를 누리면서 살아가기를 바랄것이다.   위기가 왔다고 해서 실망하거나 비관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우리가 항상 무관심의 잠에서 깨여나 관심의 창문을 열어둔다면 위기의 고비를 얼마든지 넘길수 있을것이다. 또 위기가 왔다고 해서 거창하게 “위기가 왔다”하고 목소리를 높이고 “위기에서 벗어나자”고 구호만 웨쳐서 해결 될 일이 아니다. 언론에서 목소리도 높여야 하지만 높은 목소리보다 자그마한 실천이 더 절실히 요청되는 시점이다. 언론과 학자들이 힘을 합쳐 정부의 노력과 실천을 이끌어내는것이 중요하다.   조선족사회 구성원들은 가정의 해체를 막는 일부터 시작하면 길이 열릴것이다. 가족끼리 모여앉아 따뜻한 밥을 먹고 따뜻한 대화를 나누며 손을 꼭 잡고 놓치 말아야 한다. 모두가 이렇게 가정을 지키는 일부터 시작해 우리 민족의 언어와 문화를 지켜간다면 중국조선족사회의 앞날은 희망이 있을것이다.   바야흐로 봄이 다가오고있다. 이제는 긴긴 동면에서 깨여날 때다. 겨우내 잠자던 앙상한 나무들도 슬슬 깨여나 파릇파릇 새싹을 내뿜으려 하고있다. 우리도 이제 무관심의 잠에서 깨여나자. 관심의 창문을 열고 가만히 귀를 기울여보자. 그러면 인터내셔널가(국제가)의 선률이 들릴것이다.   일어나라 굶주린 노예들 전세계 로고대중들! 우리의 피가 끓어넘친다 진리를 위해 싸우자! 낡은 세계 짓부셔버리고 노예들 일어나라! 짓밟혀 천대받던자들 천하의 주인이 되리!   이는 판가리 싸움 굳게 뭉쳐 앞으로 인터내셔널을 기어코 실현하리   우리는 하느님도 신선도 임금도 밎지 않는다! 우리는 다만 제손으로 인류의 행복 창조하리   로동의 열매를 찾자면 철창을 부시고 나와 불길을 올려 쇠를 단김에 두드려야 성공하리!   이는 판가리 싸움 굳게 뭉쳐 앞으로 인터내셔널을 기어코 실현하리     프랑스의 시인이자 빠리꼼뮨(파리코뮌)의 혁명가인 외젠 에덴 포티에(欧仁·鲍狄埃)가 1871년 6월에 작사하고 로동계급의 작곡가 피에르 드제이테(皮埃尔·狄盖特)가 1888년 6월에 곡을 붙인 무산계급을 각성시킨 노래이다. 한국의 번역본, 조선의 번역본, 중국조선족의 번역본은 가사가 서로 다르다. 조선의 번역본은 일역한 일본의 《국제가》를 조선어로 번역한것으로 알려졌고 중국조선족의 번역본은 중역한 중국의 《국제가》를 조선어로 번역한것으로 보인다. 나는 이 국제가의 가사를 다음과 같이 고쳐보았다.   일어나라 중국조선족들 전세계 우리 동포들 우리의 피는 하나이다 자랑찬 단군의 후손들 서로의 불신임을 버리고 겨레들 단합하라 이 세상 어디에 살던지 우리는 중국조선족   이는 우리의 사명 세세대대 이어가며 민족의 얼과 뿌리 영원히 지켜가리   우리는 요행도 다행도 천운도 바라지 않는다 우리는 다만 제손으로 우리의 력사 창조하리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려면 엄마곰 아빠곰 아기곰이 다같이 아리랑을 부르며 이 땅의 주인이 되자!   이는 우리의 사명 세세대대 이어가며 민족의 얼과 뿌리 영원히 지켜가리!   이제 우리 모두 중국조선족의 인터내셔널가를 부르며 세세대대로 이 땅에서 민족의 얼과 뿌리 영원히 지켜가자.    
139    력사의 음지에 사라진 4인방 댓글:  조회:9359  추천:2  2014-03-18
력사의 음지에 사라진 4인방   문화대혁명시기에 중국을 암흑천지로 만들었던 강청, 왕홍문, 장춘교, 요문원을 일컬어 “4인방”이라고 부른다.   강청의 앞잡이 왕홍문     왕홍문(王洪文)은 본명이 왕홍원이며 1935년에 장춘에서 출생하여 일찍이 1950년에 중국인민해방군에 입대하였으며 그후 조선전쟁복구에 나가기도 하였다. 1951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군에서 제대한 후에는 상해 면방직 제17공장에서 로동자로 근무하다가 면방직 제17공장 보위과 간사를 지냈다. 1966년에 문화대혁명이 일어나자 "상해로동자혁명반란총사령부"를 조직하여 사령관을 맡았다. 같은 해 11월에는 철로에 가로누워 렬차의 운행을 막은 상해 "안정사건"을 주동하여 중국공산당 상해시위원회를 협박하였다. 1967년초에 장춘교, 요문원과 손잡고 상해 "1월폭풍"을 만들어 권력탈취의 바람을 일으켰다. 그후 상해시 혁명위원회를 결성하여 부주임을 력임하고 상해 면방직 제17공장 혁명위원회주임을 력임하였다. 1968년에 중국공산당 상해시위원회가 다시 신설되자 제3서기를 력임하였으며 그후 상해시 로동자대표대회 주임, 상해시 로동조합 총련합회 주임, 상해 경비구 정치위원을 력임하였다. 1969년 4월 중국공산당 9기대회에서 중앙위원에 선출되였다. 1973년 8월 중국공산당 10기대회에서 중앙위원, 중앙정치국 위원, 상무위원회 위원, 중앙 부주석에 선출되였으며 이와 동시에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상무위원을 겸임하였다. 1956년 2월에 쏘련공산당 제20차대회에서 쓰딸린을 비판하고 쏘공량당의 관계가 악화되자 모택동은 수정주의를 방지하고 수정주의를 반대하는것을 초점으로 삼았고 계급투쟁을 틀어쥐고 날마다 말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으며 또 미제국주의가 사회주의중국을 자본주의로 변화시키려는 희망을 제3대, 제4대에 두고있는 형세하에서 후계자문제를 급선무로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림표를 후계자로 두었다가 실패하자 다시 젊고 전도가 있다고 여긴 왕홍문을 후계자로 정하였다. 왕홍문은 후계자로 지목된 기간에 강청의 당권 및 국가 최고권력 찬탈행위에 적극 가담하여 강청반혁명집단의 핵심인물이 되였다. 1974년부터 1975년까지 강청, 장춘교, 요문원과 더불어 4인방을 결성해 “림표를 비판하고 공자를 비판(批林批孔)”하는 운동을 일으켜 주은래를 중심으로 한 원로무산계급 혁명가들을 대대적으로 공격하고 당중앙을 총괄하고있던 등소평의 일상적인 업무를 반대하여 당권과 국가 최고권력을 탈취하려고 모의하였다. 그리고 계속하여 북경 제1차 천안문사건의 류혈진압에 적극 개입하였다. 그후 직접 상해로 내려가서 그의 직속하에 있는 무장조직을 결성하여 상해 민병폭동을 획책하려 하였다. 1976년 10월 7일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결정에 의해 구속 수감되였다. 1977년 7월, 중국공산당 10기 3중전회에서는 그의 당적을 영원히 취소하고 당내외에서의 모든 직무를 해임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1980년 11월 20일부터 1981년 1월 25일 사이에 중화인민공화국 최고인민법원 특별법정에서 공개재판을 받았다. 1981년 1월 25일,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종신토록 정치권리를 박탈당했다. 1992년 8월 3일에 간염으로 옥중에서 병사하였다.     야망으로 가득찬 음모가 장춘교   장춘교는 1917년 2월에 산둥성 거야에서 출생하여 1932~1937년 제남과 상해에서 문예활동에 종사하였다. 1938년 연안에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고 "진찰기일보", "신석문일보"에서 총편으로 있었고 1954년 상해 "해방일보" 사장이 되였다. 1963년 중국공산당 상해시위 상무위원회, 서기처 후보서기 겸 선전부장, 1966년 당 중앙문화혁명소조 부조장, 1967년 상해시위 혁명위원회 주임 겸 남경군구 제1정치위원 및 상해경비구 제1정치위원, 해방군총정치부 주임을 지녔고 1969년 당 제9기 중앙위원․중앙정치국 위원, 1973년 당 제10기 중앙위원․중앙정치국 위원․중앙정치국 상임위원, 1975년 제4기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부총리에 선임되였다. 1966년부터 76년까지 10년동안 이어진 중국 문화대혁명의 광기를 주도한 4인방중의 한 사람인 장춘교는 기타 세 사람과 함께 극좌적인 문화대혁명을 통해 중국 전통문화와 가치관을 말살시킴과 동시에 수백만명의 무고한 사람을 박해받아 사망에 이르게 했으며 수천년에 걸쳐 내려온 중국 전통문화재가 대부분 소실되게 했다. 장춘교는 강청이 녀황제를 꿈꾸고 왕홍문이 모택동의 자리를 꿈꾸고 유문원이 주덕의 위원장 자리를 꿈꿀 때 총리의 자리를 찬탈하려는 야심을 품고 강청 등과 결탁하여 주은래를 타도하는데 앞장섰다. 홍콩과학기술대학 중국사회 전문가 데이비드 교수는  권력에 대한 야망으로 가득 찼던 장춘교의 사상은 현대 경제개혁의 수요와 어긋났다고 평가했다. 1976년에 4인방의 일원으로 체포된 장춘교는 1981년에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형집행이 2년간 유예되였고 1983년에 무기형으로 감형되였다. 장춘교는 재판을 받는 동안 처음부터 마감까지 입을 꾹 다물고 침묵을 지켰다. 1998년 신병 치료를 위해 교도소를 나와 병원에서 지내다가 2005년 4월 21일 암으로 사망되였다.     붓으로 사람을 죽인 요문원     문화대혁명 시기에 림표, 강청 반혁명집단의 핵심 인물이였던 요문원(姚文元)은 1932년 절강성 제기에서 출생하여 대학을 졸업한 후에 문화홍보활동에 종사하였다. 그러다가 1948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여 일찍이 중국작가협회, 상해 로만구로동운동위원회, 구위원회 선전부, 상해 "해방일보", 중국공산당 상해시위원회정책연구실에서 선후로 업무를 맡았다. 1965년 11월, 강청과 장춘교의 사주를 받고 "신편역사극 〈해서파직〉을 평함"이란 글을 발표하였으며 이로부터 강청반혁명집단의 핵심인물이 되였다. 1966년 문화대혁명이 일어나자 중국공산당 중앙문화대혁명 소조구성원을 력임하였다. 1967년초 장춘교, 왕홍문과 함께 상해 "1월폭풍"을 만들어 정권찬탈 바람을 전국적으로 일으켰다. 그후 중국공산당 상해시위원회 제2서기, 상해시 혁명위원회 제1부주임 등을 력임하였으며 중국공산당 제9, 제10기 정치국 위원으로 선출되였다. 1974년부터 1975년까지 그는 "림표와 공자를 비판하는(批林批孔) 운동"을 리용하여 인민민주전정을 타도할 목적으로 많은 문장을 발표하여 당과 국가의 지도자들을 모함하고 박해하였다. 강청, 장춘교, 왕홍문과 더불어 4인방을 결성하여 당과 국가의 최고권력 찬탈을 기도하였다. 요문원은 1976년 10월 6일 회인당에서 회의에 참석하라는 통지를 받고 갔다가 체포, 7일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의 결정에 의해 구속 수감되였다. 1977년 7월, 중국공산당 10기 3중전회에서는 그의 당적을 영원히 취소하고 당내외의 모든 직무를 해임한다는 결정을 하였다. 그는 1980년 11월 20일부터 1981년 1월 25일 사이에 중화인민공화국 최고인민법원 특별법정에서 공개재판을 받고 징역 20년에 5년간 정치권리 박탈을 선고받았다. 감옥에서 그는 강청처럼 야단치지도 않고 장춘교처럼 묵묵히 침묵을 지키지도 않았으며 열심히 개조하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애썼다. 매일 신문과 책을 읽으며 반성문을 써바치면서 림표, 강청반혁명집단과 계선을 가르겠다고 보고했다. 그는 개조표현이 적극적이였으며 신문을 보고 자기의 제기하기도 했다. 가소로운것은 그가 신문에서 백성들이 배불리 먹고 입쌀고 밀가루가 남아돈다는 보도들 읽고 감옥당국에 "이렇게 흥청망청 먹고 랑비하면 몇년 못가서 량식이 거덜날것이니 다시 량표를 발행하여 계획적으로 제한해야 합니다. 당신들이 저의 의견을 중앙정치국에 전하여 간고분투하는 정신을 견지하지 않고 마구 먹어버리면 나라의 창고가 텅 비게 된다고 귀띔해주십시오."하고 제기한것이다. 1996년 1월 출옥할 때 요문원은 10여년동안 갇혀있던 감방을 둘러보며 길게 한숨을 지었다. 그런후 천천히 죄수복을 벗고 가족들이 가져온 중산복을 갈아입었다. 그는 바깥의 찬란한 태양을 바라보며 감옥문을 나서서 이미 기다리고있는 가족들한테로 다가갔다. 그는 가족들과 함께 북경기차역으로 가서 상해로 가는 기차표를 끊었다. 지난날 문밖을 한발작만 나서도 수많은 경호원들과 수행인원들이 전후에 따라서는 으리으리한 큰 인물이였던 그는 누가 자신을 알아볼가봐 모자를 꾹 눌러썼다. 그러나 상해역에 도착하여 마중을 나온 안해 김영을 보았을 때 그는 눈물이 글썽하여 "후-정말로 꿈같은 10년이구려!"하고 탄식했다. 요문원은 2005년 12월 23일에 당뇨병으로 사망되였다. 
138    현대련애 기술이 필요없다 댓글:  조회:6362  추천:7  2014-03-12
현대련애 기술이 필요없다   김희수     마음에 드는 엠나가 있어 련애편지를 좀 써달라고 하던 친구가 생각난다. 예전에 남자들은 이성에 대해 호감을 가질 나이가 되면 녀자를 꼬시는 련애기술을 알고싶어했다. 그때는 왜서 계집아이를 이르는  평안도, 함경도 방언인 “에미나이”에서 온 “엠나”거나 경상도, 전라남도의 방언인 “가시나”에서 온 “간나”를 녀자를 낮잡아보는 말로 여기면서 사용했는 모르겠다. 게다가 어떤 때는 “엠나”, “간나”의 뒤에 새끼라는 말까지 붙여서 불렀다. 하여튼 련애할 나이가 되면 선배거나 녀자를 잘 꼬시는 친구한테 가서 련애기술을 배우려고 했다.   녀자를 꼬시는 방법은 크게 두가지였다. 하나는 련애편지로 꼬시는것이고 다른 하나는 말로 꼬시는것, 그러니까 련애기술이란 련애편지 잘 쓰는 기술과 말 잘하는 기술이라고 해도 무방할것이다. 뭐 녀자의 성격에 따른 공략방법이라든가 녀자의 호감을 사기 위한 작전이라든가 하는 고급기술이야 어찌 일반인들이 알고있었겠는가?   물론 친구들과 짜고 “영웅이 미인을 구하는(英雄救美)”식의 연극을 꾸미는 일도 있긴 있었지만 주된 기술은 그래도 련애편지와 말재주였다. 구변이 좋은 남자들도 처음에는 련애편지를 쓰는 경우가 많았다. 녀자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미사려구를 많이 사용했는데 글재주가 모자라는 친구를 위해 련애편지를 대신 써주는 일도 적지 않았다. 좀 글깨나 쓴다는 친구가 있으면 련애편지를 대신 써달라고 매달릴정도였다.   잘 쓴 련애편지에 혹해 넘어오는 녀자들도 적지 않았다. 말주변이 좋은 남자들은 먼저 련애편지로 자신의 마음을 고백한 다음에 녀자가 사귀기를 원하면 말재주로 녀자를 꼬셔서 결혼에 성공하는 반면에 언변이 없는 남자들은 련애편지를 무기로 꾸준히 애정공세를 퍼부었다.   이렇게 련애편지와 말재주가 련애의 성패를 좌우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편지지에 친필로 한글자 한글자 정성들여 써서 편지봉투에 넣고 수신인과 발신인의 주소를 상세히 적은후 우표를 착 붙여서 부치는 우편편지는 사라져버린지 오래다. 그대신 스마트폰기능을 리용한 인터넷채팅이거나 문자메시지가 대세여서 이제 더는 련애편지를 쓰는 기술이 필요없게 되였다.   련애기술도 필요없게 되였다. 스마트폰 하나면 다 통한다. 편애편지도 스마트폰으로 대신할수 있고 말재주도 스마트폰으로 대신할수 있는 세상이 왔다. 간단한 문안문자는 누구나 다 쓸수 있고 미사려구도 인터넷을 검색하면 수시로 복사해 보낼수 있다.   또한 말재주도 필요없게 되였다. 예전에 녀자와 마주앉으면 떨려서 말을 잘 못하는 남자들은 장가 가기 힘들었지만 지금은 스마트폰보급으로 직접 얼굴을 보지 않고서도 대화를 주고받을수 있기에 녀자앞에서 떨려서 말을 잘 못하는 남자들도 대답하게  의사를 표시할수 있게 되였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한가지는 스마트폰시대에 들어서면서 련인들이 마주앉아도 긴 대화가 필요없게 된것이다.   련인들이 단둘이 앉아 이야기를 나누게 될 때에는 남자가 대화를 리드하고 이끌어가야 한다. 녀자의 성격과 취향에 맞게 흥미로운 화제로 대화를 리드하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예전에는 언변이 없는 남자들이 결혼전에 녀자친구와 단둘이 오래 앉아 이야기하게 되는 빈집, 공원, 강변 같은 데이트장소를 될수록 피하려고 했다. 1990년대중반부터는 다방 같은 장소도 포함되였다. 하지만 지금은 언변이 없는 남자라고 해도 녀자와 단둘이 있는 데이트장소를 피할 필요가 없게 되였다.   지난해 가을에 친척집으로 놀러간 적이 있었는데 먼 조카벌이 되는 총각이 녀자친구를 데리고왔다. 총각이 말재주가 없어서 총각의 어머니는 근심이 많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총각과 처녀가 단둘이 앉아있는 방을 기웃거리기도 하고 대화를 엿들으려고 했지만 두 사람이 한시간이 지나도록 한마디 말도 없이 앉아있더란다.   보고있기가 하도 민망하여 강변에 나가 바람을 쏘이라고 권했는데 두 사람을 보내놓고 궁금해서 몰래 따라가 먼발치에서 바라보았더니 또 한시간이 지나도록 한마디 말도 없이 묵묵히 앉아있더란다. 녀자가 돌아간후 총각의 어머니가 아들을 보고 둘이서 뭘 했느냐고 물었더니 손에 든 스마트폰을 가리키며 “걔는 걔대로 나는 나대로 이걸 보며 놀았어요”라고 말하더란다. 총각의 어머니는 아들이 퇴짜를 맞을가봐 몹시 근심했다. 그런데 처녀쪽에서 총각이 마음에 든다며 오는 “5.1”절에 결혼식을 올리자고 할줄을 누가 알았으랴…   스마트폰 하나면 다 통하는 세상, 정말로 편리한 세상이 왔다. 사람과 사람사이에 대화도 필요없게 되였다. 사무실에서도 스마트폰화면, 모임장소에서도 스마트폰화면, 길을 걸으면서도 스마프폰화면에만 정신이 팔린 현대인들에게 이제 련애마저 기술이 필요없게 되였다. 언변이 없어도 장가를 못갈가봐 근심할 필요도 없게 되였다. 사랑하는 커플끼리 마주앉아도 벙어리처럼 말없이 스마트폰화면만 바라보는 세상, 날씨는 많이 따뜻해졌지만 마음은 차갑게 느껴지는 계절이다.     
137    한국에 김연아 박지성이 있어야 하는 리유 댓글:  조회:5913  추천:6  2014-03-08
한국에 김연아 박지성이 있어야 하는 리유   김희수     한국인들은 누구도 믿지 않는다. 오직 나 자신만 믿는다. 한국인들에게는 믿음을 주는 인물이 없기때문이다. 한국에는 몽골인을 하나로 뭉치게 한 칭기즈칸 같은  한국인의 정신적 지주가 될만한 인물이 없다. 대통령도 믿지 못한다.   대통령 해먹기 가장 힘든 나라가 한국인것 같다. 한국 력대대통령중에 리승만(이승만)으로부터 시작해서 윤보선, 박정희, 최규하, 전두환, 로태우(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로무현(노무현), 리명막(이명박), 박근혜까지 욕먹지 않은 대통령이 한분도 없다. 현직때도 욕, 은퇴해서도 욕을 먹는다.   한국에는 “대통령이라는 자리는 욕먹는게 기본”이라는 말도 있다. 한국인을 만족시킬 대통령은 이 지구상에는 없을것이다.   대통령도 믿지 못하는 나라, 대통령도 믿지 못하는 대한민국 국민은 누굴 믿고 살가?   “우리는 단군의 후손이다”라고 하는 단군도 한국인들을 하나로 단합시키지 못한다.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이고 우수한 훈민정음을 창제한 세종대왕도 한국인들을 하나로 뭉치게 하지 못한다.   그런 한국인들이 놀랍게도 한강의 기적을 창조하였고 전세계에 한류열풍이 일어나게 했으며 2002년 월드컵에서는 전세계에 잊지 못할 기억을 남겨주었다. 수십만명의 한국인들이 길거리에서 한마음이 되여 붉은 물결을 이루며 열띤 응원을 펼쳤던것이다.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길거리응원을 끝내고 가버린 자리에 쓰레기 한점 남지 않았다는 사실도 세인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그 당시에 전세계는 하나로 뭉친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놀라면서 무한한 감동을 느꼈던것이다.   한국인들을 하나로 단합하게 만든 힘은 무엇이였을가? 모르긴 해도 그후에도 피겨녀왕이라고 불리우는 한국 피겨스케이팅(花样滑冰) 선수 김연아, 산소탱크(氧气瓶)라고 불리우는 한국 축구선수 박지성에 열광하는 한국인들의 모습에서 그 답을 찾아볼수 있지 않을가?   평소에 모래알처럼 흩어져 있던 한국인들이지만  김연아와 박지성을 응원할 때면 한마음이 된다. 평소에는 그렇게 한마음이 될수 없다는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김연아가 이미 은퇴했고 박지성이 한국국가대표팀은퇴를 확인했다. 이 시점에서 제2의 김연아, 제2의 박지성이 빨리 나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저 모래알 같은 한국인들을 누가 한마음으로 뭉치게 하겠는가?     
136    모택동의 아들 모모를 찾던 곡절적인 이야기 댓글:  조회:6415  추천:1  2014-03-08
모택동의 아들 모모를 찾던 곡절적인 이야기   (번역)   1909년 9월 28일에 강서성 영신현 향신에서 하환문의 맏딸로 출생한 하자진(贺子珍)은 원명이 계원, 자진(自珍)이다. 1926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그녀는 영신현공청단위서기, 중공길안현당위 부녀운동위원회 서기직을 담임하다가 1928년에 정강산에서 모택동과 결혼했다. 하자진은 모택동과 결혼하여 3남3녀를 낳았는데 그중에서 리민이 현재 유일하게 생존해있는 자녀이다. 하자진은 1929년 3월에 맏딸 양월화(원명 모금화)를 낳았는데 후에 전투에서 후퇴하면서 황망히 한 백성의 집에 맡겼다가 1973년에 찾았다. 하자진은 1930년에 남자아이를 낳았지만 요절되였다. 그후 1932년 11월에 모안홍(모모)을 낳았는데 장정을 하기전에 한 백성의 집에 맡겼는데 모택담이 사망된후 행방불명이 되였다. 하자진은 1935년 2월에 딸 왕수진을 낳았는데 장정도중에 행방불명이 되였다. 그 이듬해 하자진은 딸 모교교(리민)을 낳았다. 그후 1937년에 모택동과 리혼하고 이듬해 10월에 모스크바에 가서 아들 료와(로씨야이름)를 낳았는데 얼마 안되여 요절되였다. 하자진은 만년에 병으로 상해에서 치료를 받고있다가 1984년 4월 19일 17시 17분에 사망되였다. 1953년 3월에 강서성 성장 소식평은 중공중앙조직부 부부장 안자문이 북경에서 보낸 긴급전보를 받았다. 전보는 1934년 10월에 서금의 백성에게 맡겨놓았던 모택동의 아들 모모를 찾아줄것을 요구하는 내용이였다. 전보문을 읽은 소성장은 얼마전에 상해에 거주하고있는 하자진도 자신에게 편지를 써서 서금에 두고온 아들을 찾아달라고 부탁하던 일이 떠올랐다. 당시 하자진은 아이의 아명을 모모라고 지었다. 장정을 시작하기전에 하자진은 모택동의 동생 모택담에게 부탁하여 모모를 당지의 백성에게 맡기게 했다. 모택담과 하자진의 녀동생 하이는 부부였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모택담은 조카를 한 백성의 집에 맡겨놓은후 전투에서 사망되였다. 모택담이 사망되였기에 모모가 어느 지방의 어느 백성의 집에 맡겨놓았는지 하이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하이는 언니의 아들을 찾으려는 결심을 굽히지 않았다. 하이는 모모를 찾으려가다가 도중에 교통사고로 사망되였다. 소식평은 즉시 서금적의 로홍군인 강서성 민정청 청장 주개전을 불러 모모를 찾는 임무를 맡겼다. 주개전은 또 우대무휼처의 청년간부 왕가진을 불러 모모를 찾는 임무를 맡겼다. 서금에 도착한 왕가진은 먼저 서금현의 현장과 부현장 그리고 홍군 녀전사 황장교를 찾았다. 사흘후 서금현 현장 류휘산은 로홍군좌담회를 열었다. 좌담회에는 17명의 로홍군이 참석했는데 그들은 저마다 당시의 정황을 회상해보았다. 그들은 홍군이 장정을 하기전에 어떤 홍군간부가 어느 백성의 집에 아이를 맡겼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그러나 모모가 어느 곳에 남았는지는 아무도 모르고있었다. 왕가진은 촌마다 돌아다니면서 조사하기 시작했다. 한달반이나 되는 동안 70~80개의 촌을 돌아다녔지만 모모의 향방을 찾지 못했다. 그후 왕가진은 서금현당안관에서 력사자료를 찾아보았다. 그는 1934년의 《서금현지》에  “공산당의 괴수 모적(毛贼) 택동이 아들을 서금의 마을에 맡겼다”는 기록을 보고 모모가 확실히 서금에 남았다는것을 확신했다. 어느날 엽평향정부에 거주하던 왕가진은 두 농민과 한담하다가 주방촌의 주성태농민이 당년에 홍군의 아이를 부양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였다. 왕가진은 이튿날에 주성태의 집으로 찾아갔다. 주성태와 그의 안해 황월영은 1934년 9월말에 자신들이 홍군의 아이를 맡아서 키웠다고 대답했다. 국민당이 쳐들어오자 주성태는 아이의 안전을 위해 아이의 이름을 길에서 주어왔다는 뜻으로 “도래(道来)”라고 지었다. 그들은 19년동안 주도래를 자신들의 다섯 친자녀보다 더 애지중지 키우면서 중학교까지 공부시켰다. 그런데 두달전에 그들부부가 상상도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남경에서 왔다는 주월천이라고 하는 중년녀인이 남경군구공군사령부의 소개신을 가지고 와서 모모를 자신의 아들이라고 하면서 데려갔던것이다. 주월천의 남편은 중앙쏘베트구역 순시원이였던 곽보청인데 1933년 2월에 복건성 녕화에서 사망되였다. 주월천도 아이를 서금에 맡겨놓았는데 이번에 서금현 민정부문의 일군과 함께 주성태네 집에 찾아와서 다짜고짜로 주도래가 자신의 아들이라고 하면서 남경으로 데려갔다. 왕가진은 세심한 사람이였다. 그는 주성태부부에게 주도래의 사진이 있는가고 물어보았다. 황월영은 주도래가 방금 남경에게 부쳐보낸 사진이 있다면서 왕가진에게 보여주었다. 그 사진을 본 왕가진은 깜짝 놀랐다. 사진의 주도래는 모택동의 젊은 시절의 모습과 너무 흡사했기때문이다. 황월영은 주도래의 편지도 보여주었다. 주도래는 편지에 부모와 형제자매들이 너무 그립다고 하면서 “나는 아버지, 어머니의 집으로 가서 이전처럼 당신들과 함께 살고싶어요. 남경의 어머니는 절 좋아하지 않아요. 그는 녀동생만 고와해요. 녀동생도 나를 촌티가 난다면서 싫어해요”라고 썼다. 왕가진은 의심스러웠다. 그 남경의 어머니는 오래동안 헤여졌던 친아들을 찾았는데 왜서 랭대하는걸가? 도래가 자신의 아들이 아니라는것을 발견하고 그런 반상적인 행위를 저지르는것은 아닐가? 주도래는 분명 모택동을 닮았는데… 세심한 왕가진은 또 주월천이 도래를 데려갈 때 도래가 아기때 입던 옷을 가지고갔는가고 물어보았다. 황월영은 남경에서 온 녀인은 이전에 도래를 맡길 때의 물건을 하나도 요구하지 않았다고 했다. 도리대로 말하면 그렇게 귀중한 력사물증을 어머니가 가져가지 않을수 없는 일이였다. 왕가진은 의심스러운 점을 성민정청의 주청장에게 회보했다. 주개천청장은 이 일을 소식평성장에게 회보하고 소식평성장은 또 전보로 중앙조직부에 회보했다. 중앙조직부에서는 왕가진과 황월영에게 남경으로 가서 주도래를 데리고 하자진이 있는 상해로 가라는 임무를 맡겼다. 하자진이 직접 주도래를 보고 확인할수 있게 하려는것이였다. 왕가진은 서금에 가서 황월영을 데리고 함께 남경으로 가서 주도래를 찾았다. 1953년 6월중순의 어느날, 왕가진과 황월영이 주도래를 데리고 상해경비구에서 방공사령원직을 맡고있는 하자진의 오빠 하민학의 안내를 받으며 상해에 있는 하자진의 거처로 갔을 때 하자진은 첫눈에 모모를 알아보고 눈물을 흘리면서 “모모예요! 나의 모모예요”하고 말했다. 하자진은 1932년 11월에 복건성 장정복음병원에서 모모를 낳을 때의 일을 똑똑히 기억하고있었다. 산후 14일후 아들을 보러온 모택동은 “아이의 이름을 모안홍이라고 하고 아명을 모모라고 합시다”고 말했다. 황월영이 모모를 맡았을 때 모모가 입었던 아기옷을 보여주자 하자진은 자신이 직접 한뜸한뜸 바느질하여 지은 옷이 맞다고 확인했다. 하민학이 모모를 데리고 부대의 큰 병원에 가서 검사해본 결과 혈형도 하자진과 똑같았다. 모모의 신분이 특수했기때문에 모모는 10여일후 북경에 있는 중앙조직부의 초대소로 호송되였다. 초대소에서 모택동과 하자진의 딸 리민은 아버지의 모습을 그래도 빼여닮은 모모를 보자마자 친절하게 “오빠”라고 불렀다. 주은래, 주덕, 사각재, 동필무 등 중앙쏘베트구역에서 전투했던 로혁명가들과 등영초, 강극청, 사맹기(帅孟奇) 등 녀성혁명가들이 선후로 모모를 찾아보고는 모두 모택동의 젊었을 때의 모습과 똑 같다면서 기뻐했다. 그런데 이 일을 알게 된 남경의 주월천이 중앙조직부의 초대소로 찾아와서 “주도래는 내 아들이야! 내 아들을 다른 사람이 데려가면 난 여기서 목을 메여 죽을테야”하고 울고불며 떠들어댔다. 그 바람에 이 일을 더 “확인”해야 했기때문에 주도래는 모택동이나 하자진에게로 가지 못하고 사맹기의 저택에 들어갔다. 주도래는 그해 9월에 청화대학부속중학교에 들어가 공부했고 1957년에 시험에 합격되여 청화대학에 입학했다. 졸업후 그는 국방과학연구단위에 배치되여 과학연구에 종사했다. 그러다가 불행하게도 1966년 하반년에 문화대혁의 폭력투쟁이 시작되였을 때 주도래는 남경에서 폭력배들에게 맞아 사망되였다. 이 소식을 들은 황월영은 눈물을 흘리면서 “이럴줄 알았더라면 그 아이를 북경에 보내지 말았을걸 그랬어. 우리 집에 남아서 농사나 지었더라면 목숨만은 살아있었겠는데”하고 한탄했다. 주도래가 누구에게 맞아죽었는가 하는것은 아직까지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135    하늘에 묻노라 정이란 무엇이길래 댓글:  조회:7080  추천:2  2014-03-08
하늘에 묻노라 정이란 무엇이길래   —경요의 애틋하고 눈물겨운 사랑이야기     대만의 저명한 작가 경요(琼瑶)는 원명이 진철(陈喆)이다. 경요외에 심여, 봉황 등 필명을 썼다. 1938년 4월 20일에 사천성 성도의 한 지식분자의 가정에서 출생한 그녀는 4남매중에 맏이로 태여났는데 큰 남동생과는 오누이쌍둥이였다. 아버지 진치평은 대학교수였고 어머니 원행서는 학자가문의 출신이였다. 경요는 어릴때부터 중국고전문학에 매우 큰 흥취를 가졌고 9살 때 처녀작 《불쌍한 소청》을 《대공보》아동판에 발표했다. 그녀는 1949년에 부모를 따라 대만으로 갔다. 경요는 18살 때 자신의 어문선생과 첫사랑을 시작했다. 그녀는 자신보다 25살이나 년상인 선생님에게 빠졌고 선생도 재능있고 정열적인 녀학생을 사랑했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은 세속의 비난을 면치 못했고 부모의 견결한 반대를 받았다. 결국 그녀는 부모와 사회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눈물을 삼키며 한다락의 첫사랑에 종지부를 찍었다. 대학시험에서 세번이나 미역국을 먹은후 경요는 대학을 갓 졸업한 영어선생 경균을 알게 되였다. 문학에 공동한 애호를 가지고있은 그들은 서로 사랑하여 자그마한 세집을 맡고 결혼까지 하였다. 얼마 안되여 경요는 임신하였는데 해산할 림박에 남편 경균은 류학을 떠나게 되였다. 1961년에 경요는 아들을 낳았는데 남편이 곁에 없어서 늘 한손으로 아이를 안고 다른 한손으로 장편소설을 쓰군했다. 그런데 외국에 가서 나쁜 습성에 물이 든 경균은 대만에 돌아오자 문학창작을 포기하고 도박에 빠져버렸다. 나중에 그는 가정의 생활비까지 모두 도박판에 밀어넣었다. 1963년 7월에 경요는 자신의 첫사랑이야기를 다룬 장편애정소설 《창밖》을 《환관》잡지에 발표하여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경균은 경요가 이따위 소설을 써서 자신을 망신시켜 친구들앞에서 얼굴을 들수 없게 했다고 질책했다. 1964년 봄에 경요는 경균과 리혼함으로써 고통스런 혼인을 결속지었다. 리혼후 경요는 창작에만 전념하여 또 한부의 장편애정소설을 《련합보》부간에 련재했다. 그 당시 그녀는 《환관》잡지사 사장이며 《련합보》부간의 주필인 평흠도를 알게 되였다. 그녀의 재주를 알아본 평흠도는 그녀를 이름난 녀류소설가로 배양하리라 마음먹었다. 그해 36살인 평흠도는 명망 높은 사장이며 큰 신문의 부간의 주필일뿐만아니라 편집, 번역, 음악 등 다방면에 정통한 다재다능한 인재였다. 평흠도의 고무를 받고 경요는 륙속 장편애정소설을 발표했다. 경요와 평흠도는 작품을 토론하고 인생을 담론하는 가운데서 서로 사랑의 감정이 움텄다. 하지만 두 사람은 모두 이 감정을 가슴속에 깊이 감춰둬야만 한다는것을 알고있었다. 평흠도는 안해가 있는 세아이의 아버지였기 때문이였다. 경요는 남의 남편을 빼앗아 그 녀인에게 상처를 입히고싶지 않았다. 그녀와 평흠도는 모두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고 이 소중한 감정을 묵묵히 가슴속에 묻어두고만 있었다. 몇년후 경요의 자서전 장편애정소설을 각색한 영화 《창밖》이 방영되였다. 이 영화엔 경요의 부모가 딸의 첫사랑을 반대하는 장면이 그대로 묘사되여있었다. 이 영화를 보고난 그녀의 어머니는 몹시 노하여 그녀를 손가락질하며 “내가 왜 이런 딸을 낳았나? 네가 책을 써서 부모를 욕하고도 부족하여 또 영화까지 찍어서 부모를 욕하느냐?”하고 노발대발하면서 그녀를 질책했다. 깜짝 놀란 경요는 무릎을 꿇고 어머니의 옷자락을 부여잡고서 눈물을 비오듯 흘렸다. 곁에서 이 장면을 목격한 평흠도 역시 깜짝 놀라서 경요의 부모를 위안하는 한편 경요를 부축하면서 가슴아픈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와 눈길이 마주치는 순간 괴롭고 서러우며 절망적인 복잡한 감정에 울먹이던 경요는 의지할 언덕을 만나듯 그의 몸에 얼굴을 묻었다. 그도 그녀를 꼭 껴안았다. 그 시각 그들의 마음은 하나로 이어졌다. 어머니는 그녀를 용서하지 않았을 뿐만아니라 단식하는 방법으로 그녀의 마음을 괴롭히고 량심의 가책을 받게 했다. 어머니가 단식한지 닷새째 되자 온집안이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5일동안이나 음식을 들지 않은 어머니는 몰골이 말이 아니였다. 이제 더 음식을 들지 않으면 생명이 위험했지만 모두가 속수무책이였다. 이 위급한 시각에 평흠도가 왔다. 평흠도는 손자를 리용하는 묘한 방법을 썼다. 경요의 6살난 아들더러 외할머니께 우유를 권하게 하고 다 같이 어머니의 침대앞에 무릎을 꿇고 애걸하도록 했다. 어머니는 마침내 눈물을 흘리며 외손자가 권하는 우유를 마셨다. 평흠도가 아니 왔더라면 어머니가 정말 사망이라도 하면 어쩌나 하고 근심했던 경요는 안도의 숨을 내쉬였다. 긴장했던 경요의 마음을 가라앉혀 주기위해 평흠도는 그녀와 그녀의 녀동생, 그리고 녀동생의 남자친구를 데리고 도심에 놀러갔다. 그러나 도중에 차사고가 나서 평흠도는 오른 쪽 발이 골절되여 오래동안 지팽이신세를 지게 되였다. 이 차사고로 하여 생명의 취약함을 느낀 두사람은 더는 사랑의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경요는 기쁨과 고통의 모순속에서 늘 괴로와했다. 어느 한번 평흠도는 긴 사랑의 편지를 썼다면서 종이를 돌돌 말아서 경요에게 주었다. 그녀가 돌돌 만 종이를 풀어보니 종이의 길이가 3메터는 되였는데 종이에 아무런 글도 없었다. 다만 제일 아래끝에 서캐만큼 “평흠도”라고 썼을뿐이였다. 그녀는 하고싶은 말이 많고 많지만 쓸수 없는 그의 심정을 읽을수 있었다. 그녀는 해서는 안될 이 사랑에서 하루 빨리 벗어나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날 평흠도는 차를 몰고 경요를 데리고 대만의 저명한 풍경구인 우래로 놀러갔다. 차가 우래의 환산길을 천천히 달릴 때까지 묵묵히 앉아있던 경요는 긴 침묵을 깨뜨리며 “우리 다시는 만나지 맙시다. 영원히!”하고 자기의 결심을 말했다. 그러자 평흠도는 갑자기 얼굴이 어두워지더니 즉시 차를 급정거했다. 그리고 차문을 열고 “어서 내려가!”하며 그녀를 떠밀었다. 그녀는 어찌된 영문인지도 모르고 그에게 떠밀려 차에서 내려왔다. 길 량옆은 모두 낭떠러지고 절벽이였다.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평흠도는 시동을 걸고 미친듯이 절벽을 향해 차를 몰려고 시도했다. 대경실색한 그녀는 황급히 달려가 팔을 벌리고 차를 막아섰다. 그러자 평흠도는 식은 땀을 흘리며 재빨리 차를 급정거시켰다. 차는 절벽의 끝에 가서 아슬아슬하게 멈추었다. 후날 경요는 그때의 정경을 자신의 수필에서 이렇게 묘사했다. “나는 우리가 서로 창문유리를 사이두고 얼마나 오래동안 서로를 주시했는지 모른다. 내 의식속에서 그것은 100세기는 될 그렇게 오래고 긴 시간이였다. 그 순간 하늘도 없고 땅도 없고 세계도 없고 우주도 없었다. 오직 우리 둘만이 세상에 남아있을뿐이였다. 한 사람은 차안에서 내다보고 다른 한사람은 차밖에서 마주보고… 그리고 삶과 죽음만이 있을뿐이였다. 다음순간 그는 번개같이 차문을 열고 나왔다. 나는 이미 힘을 잃고 더는 몸을 지탱할수 없었다. 한발작만 더 뒤걸음치면 나는 절벽에 떨어질수 있었다. 그 시각 나는 아무런 고려도 없었다. 그가 절벽으로 차를 몬다면 내가 떨어져 그와 함께 죽은들 무슨 유감이 있겠는가. 하지만 내가 절벽으로 떨어지려는 찰나에 그는 힘있게 내 손을 잡아당겼고 나는 그의 품에 와락 안겨버렸다… 낭떠러지에 서서 우리는 몸을 떨며 울었다. 그는 ‘당신이 없이 못살것 같았어. 차라리 죽는것이 낫다고 생각했지. 고통도 없이…’하고 말했다. 우리는 날이 어두워서야 차안으로 들어갔다. 그 다음 그는 조심스레 차를 몰았다.” 사랑으로 죽고 살고 하다가 경요는 마음을 모질게 먹고 눈물을 흘리며 정을 끊어버렸다. 두 사람은 각자의 책임을 생각하고 래세에 다시 만날것을 약속하고 헤여졌다. 몇년이 지났다. 의연히 혼자 살고있는 경요앞에 양씨가 나타났다. 미국에 거주하고있는 양씨는 가문이 호화롭고 사람됨됨이가 온화하고 부드러웠다. 경요가 리혼한지 얼마 안되였을 때 양씨는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한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당시 경요가 심정이 불쾌하여 의식적으로 그를 피했기에 그는 유감을 남기고 미국으로 떠났었다. 지금까지 양씨는 미혼으로 있었는데 다시 대만으로 왔다가 경요가 혼자사는것을 보고 용기를 내여 또 한번 그녀한테 사랑을 고백했다. 경요는 그의 진지한 사랑에 감동되였다. 그녀도 조용히 의탁할 곳을 갈망하고있었다. 양씨가 대만을 떠나려 할 림박에 그녀는 그의 청혼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들이 결혼하려고 서두르고있을 즈음에 갑자기 평흠도가 나타났다. 평흠도는 안해와 성격이 맞지 않아 리혼했다고 경요에게 알려주었다. 평흠도를 다시 보는 순간 그녀는 자신이 꿈을 꾸고있는것 같았고 그와 함께 했던 모든 기억들이 일시에 되살아나면서 자신들이 종래로 혜여진적이 없는것처럼 느껴졌다. 그때는 그들이 절벽에서 생사를 넘나들며 고통스럽게 헤여진지 8년이나 되는 해였다. 그들의 진지한 사랑에 감동된 양씨는 그들의 사랑을 축복해주고는 묵묵히 혼자서 미국으로 떠났다. 3년후 이미 41살인 경요와 50살을 넘긴 평흠도는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고 부부로 되였다. 사랑하는 두 사람은 마침내 결합된것이다! 결혼후 그들은 늘 함께 있으며 그림자처럼 떨어질줄 몰랐다. 꿈을 찾는 소녀처럼 오래동안 헤매던 경요는 이제야 자신의 꿈을 찾은것만 같았다. 따라서 문학창작에서도 령감이 용암처럼 솟구쳐서 수많은 애정소설을 써냈다. 2002년에 평흠도는 백내장수술을 했는데 경요는 모든 일을 뒤로 미루고 한시도 그의 곁을 떠나지 않고 그를 보살펴주었다. 2003년에 평흠도는 재차 병으로 앓아누웠는데 병독이 신경을 침입하여 안면신경이 마비되고 오른쪽 얼굴이 비뚤어지고 왼쪽 눈을 뜰수 없게 되였으며 입안이 부어서 음식을 먹기도 어려웠다. 그를 구하기 위해 경요는 모든 일을 제쳐놓고 손수 얼굴에 붕대를 감아주기도 하고 눈에 약을 넣어주기도 하면서 살뜰하게 보살펴주었다. 그녀의 정성어린 간호가 있었기에 평흠도의 병세는 안정되였고 몸도 점차 회복되였다. 병세가 호전된 남편이 그녀에게 《당신이 있길래》란 노래를 불러줄 때 그녀는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134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댓글:  조회:6010  추천:5  2014-03-06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김희수     사람의 의식속에는 무수한 만약이라는 가정이 존재하고있다. 그래서 유감을 남기고 살아온 사람들은 한번쯤은 자신이 걸어온 과거에 대해 돌이켜보면서 “만약 내가 애초에 공부를 좀 더 했더라면 좋은 대학에 갔을텐데… 만약 내가 명문대학을 나왔더라면 출세하여 돈도 많이 벌고 지금의 집보다 더 큰 집을 마련하고 지금의 차보다 더 호화로운 차도 마련하고 지금의 안해보다 더 예쁜 녀자와 결혼했을텐데…”하고 만약이란 가정아래 자신의 과거를 장미빛과거로 다시 설계해볼 때가 있을것이다.   크게 유감을 남기지 않고 살아온 사람들은 또 그들의 나름대로 “만약 부모가 나에게 책을 많이 읽고 좋은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지 않았더라면…만약 은사를 만나지 않았더라면…만약 내가 곤경에 처했을 때 내 손을 잡아주는 친구가 없었더라면…만약 내가 넘어지고 좌절했을 때 희망의 등대가 되여준 안해와 아이들이 없었더라면…인생을 포기했더라면…”하고 자신의 오늘을 만들어준 과거를 고맙게 생각할것이다.   사람의 일생도 그렇지만 사람의 하루에도 무수한 만약이라는 가정아래 수많은 다른 하루를 꿈꿔볼수 있다. 만약 내가 출근시 택시를 타지 않고 뻐스를 탔더라면…만약 내가 이쪽 길로 가지 않고 저쪽 길로 갔더라면…만약 내가 그를 만나지 않았더라면…만약 내가 술을 마시지 않았더라면…만약 내가 서양음식점에 가지 않고 한식점에 갔더라면…만약 내가 조금만 참았더라면…만약…만약…   력사도 마찬가지이다. 만약 나뽈레옹(나폴레옹)이 유럽 전체를 제패했더라면…만약 히틀러가 쓰딸린(스탈린)을 이겼더라면…미국의 남북전쟁에서 남부가 북부를 이겼더라면…레닌의 10월혁명이 실패했더라면…사담 후세인이 이라크정권을 장악하지 않았더라면…걸프전쟁(海湾战争)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쏘련(소련)이 해체되지 않았더라면…만약…만약…   만약 진시황이 6국을 통일하지 못했더라면…항우가 류방(유방)을 이겼더라면…류비(유비)가 삼국을 통일했더라면…리자성이 승승장구의 기세로 청을 물리쳤더라면…오삼계가 청에 투항하지 않았더라면…만약 홍수전의 태평천국이 승리했더라면…손중산이 신해혁명을 일으키지 않았더라면…장작림이 일본군이 일으킨 폭발사고로 죽지 않았더라면…모택동이 장개석을 물리치지 못했더라면…만약…만약…   만약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했더라면…만약 조선이 일본의 메이지유신보다 더 먼저 근대화를 실현했더라면…만약 일본이 조선을 강점하지 않았더라면…만약 6.25전쟁에서 어느 일방이 이겼더라면…만약…만약…   만약 중국에서 8.15광복을 맞았을 때 조선반도(한반도)로 돌아갔던 근 100만명의 우리 민족이 귀국하지 않고 동북에 남아 조선족자치구를 지켜냈더라면…1960년대 초기에 조선족들이 조선으로 건너가지 않고 조선의 민초들이 중국 연변으로 대거 건너왔더라면…계획생육정책인지 산아제한정책인지 내려왔을 때 조선족들도 한족들처럼 아이 셋을 낳던 넷을 낳던 서로 눈을 감아주었다라면…개혁개방바람이 불었을 때 시골처녀들이 도시나 외국으로 나가지 않고 시골총각들과 결혼하여 아이 낳고 살았더라면…만약…만약…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결과는 달라졌을것이다. 만약이란 가정이 존재한다면 결과는 좋은쪽으로 달라질수 있고 나쁜쪽으로 달라질수도 있을것이다.   하지만 력사에는 만약이란 가정이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의 일생도 마찬가지이다. 유감을 남기든 다행을 남기든 지나가면 그뿐이다. 력사도 인생도 한번뿐 다시 오지 않는다.   만약이란 가정아래 지나간 세월을 돌이켜 볼 때 유감스러움이 적고 다행스러움이 많은 한생이 되도록 하루하루를 보람있게 살아가는것이 인생의 지혜가 아닐가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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