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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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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    댓글손님도 손님이다 댓글:  조회:7028  추천:4  2014-03-04
댓글손님도 손님이다   김희수     댓글에 대한 론쟁은 이미 많이 언급되여온 케케묵은 주제이지다. 하지만 댓글이 존재하는 한 계속 말해야 할 론쟁이기도 하다.   인터넷은 누리군(누리꾼 또는 네티즌)들의 세상이다. 누리군들이 자기의 세상에서 댓글을 다는것은 자유이다. 이 자유를 막을수도 없고 또 막아서도 안된다. 문제는 어떻게 하면 건전한 댓글문화를 만들수 있느냐 하는것이다.   인터넷에 오른 원문에 대하여 짤막하게 답하여 올리는 글을 댓글이라고 한다. 그럼 인터넷을 방문하여 댓글을 남기는 누리군을 댓글손님이라고 할수 있고 인터넷에 원문을 올리는 사람을 주인이라고 할수 있다. 건전한 댓글문화를 만들려면 주인과 손님이 다 함께 노력하여 주인이 주인답고 손님이 손님다운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     주인은 주인다운 주인으로   우리 민족은 손님을 극진하게 대접하는것으로 소문났다. 주인은 우선 찾아온 손님을 극진하게 대접해야 한다. 자신의 홈페이지나 블로그, 카페를 방문하여 글을 남기는 댓글손님을 환영해야 한다. 그것이 주인다운 태도이다. 만약 댓글이 싫고 “벙어리손님”만 환영한다면 번번히 댓글을 지우느라 고생하지 말고 “댓글은 일체 사절, 눈팅만 환영!”하고 홈피나 블로그의 상단에 큼직하게 밝혀놓는것이 좋을듯 싶다. 또 의견을 표명하거나 오류를 지적해주는 댓글이 싫다면 “의견표명, 오류지적은 사절, 칭찬댓글만 환영!”하고 밝혀놓는것이 좋을것이라고 생각된다. 소통을 하지 않을것이면 그냥 이메일에 글을 쓰는것이 좋을것이다. 물론 악성댓글일 경우는 주인의 마음에 따라 삭제할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잡지나 신문에 발표된 글도 독자들이 모두 평가할수 있다. 그런데 잡지나 신문에 독자란이 없는한 독자들의 목소리가 작자나 다른 독자들에게 전해질수 없는것이다. 어느 평론가가 그 글을 평론했다고 할 때 작자는 칭찬해주기만 바랄수 없다. 그럴 경우 평론가가 잘못을 지적해주고 대안을 제시해주었다고 해서 그 평론을 사전에 막을 권리도 없다.   인터넷에 올린 글도 마찬가지이다. 인터넷에 글을 올려놓고 눈팅만 하라고 강요할수는 없다. 또 칭찬댓글만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주인다운 태도가 아니다. 하늘우에 하늘이 있다고 자신이 아무리 유명한 인물이라고 하여도 누리군들속에는 평론가 못지 않게 더 수준이 높은 댓글손님도 있을것이다. 때문에 댓글손님의 의견표명을 함부로 무시해서는 안될것이라고 생각된다.   나도 댓글손님을 례절스럽게 대하지 못한적이 있다. 그 댓글이 인격모욕, 인신공격이고 오유가 있는 오류지적이라고 생각되여 신경이 좀 예민해졌던 같다. 하지만 너그럽게 용서하지 못한점을 반성해본다.   물론 손님중에 반갑지 않은 손님도 있을것이다. 술주정을 부리고 욕설을 퍼붓는 손님도 있을것이고 폭언이나 망언을 일삼는 손님도 있을것이다. 집에 찾아온 손님은 술주정을 부려도 나중에 찾아오는 다른 손님들이 그가 어느 정도로 어떻게 술주정을 부렸는지 모른다. 하지만 인터넷에 찾아온 댓글손님은 다르다. 술주정을 부렸다면 술주정을 부린 흔적이 고스란히 그대로 남아있기때문이다.   때문에 작자가 자신의 글에 달아놓은 댓글을 지울 필요는 없다고 본다. 누가 댓글에 주인의 글을 형편없는 글이라고 평가했다고 해서 좋은글이 형편없는 글이 되는것이 아니고 누가 댓글에 주인의 글을 좋은글이라고 평가했다고 해서 차한 글이 좋은글이 되는것도 아니다. 누리군들도 다 제마끔의 사유가 있기에 댓글의 평가에 따라 그 글을 좋다 또는 나쁘다고 판단하지 않을것이다. 누리군들은 객관적으로 그 글을 보고 댓글평가의 옳오그름을 판단할것이다. 물론 악의적인 댓글이 독자들에게 혼란을 조성하여 글에 대한 관점을 외곡하게 할수도 있지만 그럴 경우가 념려된다면 반박하는 댓글을 달아놓으면 될것이다.   댓글손님이 술주정을 부리고 욕설을 퍼붓는 경우 그 정도가 지나치지 않다면 다음번에 찾아올 때는 례절을 지키는 좋은 손님으로 될수 있도록 그 손님이 남긴 댓글에 대해 “방문해주어 감사합니다. 그런데 댓글을 좀 문명하게 달아주었으면 좋겠습니다”하고 답복하는것으로 잘 달래야 한다.   폭언이나 망언도 한두번쯤은 용서해주어야 한다. 이런 경우에는 “당신이 남겨놓은 댓글은 당신의 인격을 그대로 보여줍니다.”라는 댓글로 대답해야 한다. 하지만 습관이 되여 폭언이나 망언을 일삼는 손님에 한해서는 “이런 추태는 두번 다시 환영하지 않습니다”라고 다음번 방문을 사절해야 한다.   주인도 다른 블로그나 카페로 방문하면 손님으로 될수 있다. 자신이 당했다고 해서 똑같은 방식으로 다른 주인에게 갚아주는 행위는 하지 말아야 한다. 자신이 그런 손님이 싫었으면 다른 주인들도 그런 손님을 싫어한다는것을 알고 문명한 손님으로 되여야 한다.     손님은 손님다운 손님으로   주인도 주인자격을 갖추어야 하지만 댓글손님은 더욱 더 손님으로서의 자격을 갖추어야 한다. 어디가나 환영받는 손님이 되려면 도덕적 책임과 량심을 지켜야 한다. 글을 쓴 사람과 견해가 다르면 충고할것은 충고하되 가능하면 고무격려해주고 용기를 주는 댓글을 달아야 한다. 리성적으로 판단하고 댓글을 달아야지 감정에 치우쳐서는 안된다. 댓글을 남기기전에 세번 다시 랭정하게 생각해보고 신중을 기해야 하는것이 댓글손님이 반드시 갖추어야 할 자세이다.   남의 집을 방문하여 술주정을 부리며 자기가 댓글에 배설해놓은것이 오줌인지 똥인지 모르는 손님답지 않은 손님이 되여서는 안될것이다. 악플은 사람을 죽일수도 있을 정도로 위해성이 크다. 특히 유명인이나 연예인이 피해를 받는 경우가 많다. 근거도 없는 허위사실을 날조하여 실제로 있었던것처럼 만들어 무차별 집중공격을 하는 악성댓글때문에 최진실이 자살하지 않았던가. 악성댓글에 시달리면 정신적 고통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알수 있다.   이런 댓글손님은 손님답지 못한 손님으로 악플페인(악의적인 댓글인 악플을 올리는 일에 중독되여 일상생활이 불가능해진 사람)이라고 한다. 악플페인은 알콜중독이나 마약중독같이 결국에는 사회적 페인이 될것이다. 악성댓글을 올리기 시작하면 결국엔 페인이 되고만다. 남 잡이가 제 잡이 되는것처럼… 누리군마다 악성댓글의 아픔을 가슴에 새겨서 건전한 댓글문화를 만들어간다면 악플이 없는 따뜻한 온라인세상이 되지 않을가 싶다.       
132    중국고대 4대재녀 댓글:  조회:6491  추천:5  2014-03-02
중국고대 4대재녀     중국력사에서는 채문희, 리청조, 탁문군, 상관완아를 중국고대 4대재녀(才女)라고 일컽는다.   기구한 운명을 헤쳐온 채문희 채문희(蔡文姬)는 후한3국시기의 저명한 문학가로서 이름이 염(琰)이고 자가 문희 또는 명희이다. 채문희의 아버지 채옹은 그 당시 이름 높은 학자, 문학기재로서 음률에 정통하고 서예와 회화에 아주 능하였다. 채문희는 아버지 영향을 받아 거문고를 잘 타고 지식이 풍부했으며 타고난 문학적재질을 가지고있었다. 아버지가 거문고를 타다 선이 끊어지면 몇번째 선이 끊어진것을 눈을 감고도 찾아내는 등 천부적인 음악재질을 타고났다. 채문희는 16세 때 하동의 세족인 위중도와 결혼하여 부부금실은 좋았지만 불행하게도 남편이 1년만에 각혈로 죽었다. 시댁에서는 그녀가 자녀를 낳지 못했다고 구박했다. 채문희는 하는수없이 본가로 돌아와 살았다. 그후 아버지 채옹은 감옥에서 숨지고 채문희는 홀로 살았다. 그 무렵 권력다툼으로 인해 동한북부의 유목민족 흉노가 남부로 쳐들어 와는데 그때 채문희도 랍치되였다. 흉노의 좌현왕은 절세미녀 채문희에게 반하여 그녀를 왕비로 맞아들였다. 채문희는 좌현왕의 왕비가 되여 2명의 자녀를 낳고 현지음악까지 배웠다. 건안13년(208년)에 채옹의 친구였던 조조는 채문희가 흉노의 손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주근을 사자로 보내여 황금 천냥, 백벽 한쌍을 주고 채문희를 데려왔다. 그해 35세였던 채문희는 조조의 중매로 전교위 동사한테 시집을 갔다. 2년후 동사는 죽을죄를 범했는데 채문희는 조조의 승상부를 찾아가서 남편을 용서해달라고 빌었다. 조조는 채옹과의 옛정을 생각하고 또 친구딸의 비참한 신세를 보고 동사를 죽이지 않았다. 채문희는 동사에게 시집을 가서 아들과 딸을 하나씩 낳은데 딸은 후에 사마의의 아들 사마사에게 시집을 갔다. 채문희는 일생에 세번 시집을 갔는데 운명이 기구했다. 그녀는 명문가문에 태여났지만 평생 류랑생활을 하였으며 그녀의 작품은 이 비분과 슬픔속에서 만들어 졌다. 그의 창작 작품 호가18박자와 비분시는 채문희의 비참한 조우에서 비롯 된 것이다. 채문희는 사람의 애간장을 끊게 하는 거문고곡 《호가18박(胡笳十八拍)》을 창작했고 동사가 죽은후 저명한 《비분시(悲愤诗)》를 창작하여 남편을 기렸다. 《호가18박》은 중국 고대 10대 명곡이고 《비분시》는 중국 력사상 첫 장편서사시이다.     남송의 걸출한 녀류작가 리청조 리청조(李清照)는1084년 3월 13일에 장구(지금의 산동성 제남)에서 출생했는데 호는 이안거사(易安居士)이다. 남송의 걸출한 사인(词人)인 그녀는 18살 때 우승상의 아들 조명성과 결혼했다. 그들 부부는 금슬이 좋았는데 함께 금석서화를 연구하면서 행복한 생활을 보냈다. 어느해 중양절에 리청조는 저명한 《취화음》을 써서 외지에서 벼슬하고있는 남편에게 부쳐주었다. 그 사를 본 조명성은 찬탄을 금치 못했다. 그는 문을 닫고 래방객을 사절하며 밤낮 사흘동안 침식을 잃으면서 답사를 써보냈다. 그러나 좋은 날은 오래가지 못했다. 기원 1127년에 북방녀진족(금)이 쳐들어오자 리청조부부는 난민들을 따라 강남으로 피난을 가게 되였다. 그때 오래 모아두었던 금석서화를 대부분 잃어버린 리청조를 몹시 고통스러웠다. 그후 남편이 사망되자 리청조는 몹시 고독했다. 그 시기 그녀의 생활에 장여주란 남자가 뛰여들었다. 장여주는 리청조를 돈 많은 녀자로 알고 그녀한테 접근하여 달콤한 말로 유혹했다. 리청조는 장여주를 다정다감한 남자로 알고 그한테 시집을 갔다. 결혼후 장여주는 리청조에게 재산이 많지 않다는것을 알게 되였고 리청조도 장여주의 사랑이 거짓이였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그후 장여주의 관직이 돈을 주고 사온것임을 발견한 리청조는 남편을 고발했다. 당시에는 남편에게 죄가 있으면 안해도 함께 감옥살이를 해야 했다. 리청조의 부모가 옥졸을 매수하여 리청조는 9일만에 감옥에서 나올수 있게 되였다. 이렇게 되여 리청조의 두번째 혼인은 100일도 못되여 결속되고말았다. 리청조는 남편 조명성의 뜻을 잇기 위해 《금석록》을 편찬했다. 리청조는 《여몽령》, 《일전매》, 《영우락》, 《어가오》, 《무릉춘》 등 예술성이 높은 사작품을 세상에 남겨놓고 1155년 5월 12일에 사망되였다. 1959년에 제남시 박돌천공원에 리청조기념당을 세워는데 1999년에 대규모로 확건했다.     미모와 재능을 겸비한 당조의 최고 재녀 상관완아 664년에 섬주(지금의 하남성)에서 태여난 상관완아(上官婉儿)는 용모가 아름답고 요염한데다가 남달리 총명하고 영특했다. 또한 문체가 뛰여나 한번 붓을 들어 글을 쓰면 문장이나 글씨체가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상관완아의 할아버지 상관의는 섬세한 기교를 구사한 시풍인 상관체를 류행시키며 당태종때부터 널리 이름을 떨쳤고 당고종때에는 재상으로 되였지만 무측천의 페위를 도모하다가 처형되였다. 상관의의 가족도 모두 처형되였지만 갓난아기였던 상관완아와 어머니 정씨만은 외가쪽의 도움으로 살아남을수 있었다. 상관완아는 할아버지 상관의의 재능을 물려받아 시문에 능하고 천성이 총명했다. 그녀는 14살 때 궁의 노비로 들어가게 되였다. 무측천은 상관완아가 쓴 7언률시를 보고 글솜씨에 감탄하여 그녀를 노비의 신분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비서로 삼았다. 그때로부터 상관완아는 무측천에 대한 복수심을 버리고 녀황제를 도와주었다. 그후 상관완아는 당대문화가 번성하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무측천의 최측근으로  된 상관완아는 696년부터 조서를 담당하는 일을 맡아하면서 큰 권세를 누렸다. 상관완아는 시적 재능만 뛰여난것이 아니라 정치적 수단도 뛰여나 무측천의 조카인 무삼사와 애매한 관계로 가까이 지냈으며 698년에 다시 황태자가 된 중종과도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였다. 중종이 복위를 한 뒤에도 중종과 위황후의 신뢰를 받은 그녀는 황제의 명을 전담하며 대부분의 조칙을 꾸미였다. 그녀는 중종의 후궁으로서 소용(昭容)의 지위에 올랐으며 위황후와 무삼사 등과 련합하여 무측천때의 중신들과 무씨세력이 회복되도록 하였다. 그리고 중종에게 서관과 학사를 늘일것을 건의하고 조정을 대신하여 천하의 시문을 품평하였다. 710년에 중종이 죽고 위황후가 무측천처럼 스스로 황위에 오르려 하자 상관완아는 무측천의 딸인 태평공주와 련합하여 이를 견제하였다. 결국 리륭기가 태평공주와 힘을 합하여 위황후를 제거하고 아버지 리단(당예종을 말하는데 황제에 올랐으나 어머니 무측천이 녀황제로 되자 태자로 강등되였음)을 다시 황제로 옹립하였다. 하지만 리륭기는 상관완아를 죽이기로 결정했다. 주변의 상관완아의 목숨을 살려달라고 빌었지만 리륭기는 710년에 상관완아를 처형하였다. 향년 46세였다. 그후 당현종이 된 리륭기는 상관완아의 글들을 모아서 20권의 문집으로 편찬하였다. 당시를 모아 편찬한 《전당시(全唐诗》에도 상관완아의 시 32수가 실려있다.     아름다운 사랑신화를 엮은 재녀 탁문군 탁문군(卓文君)은 서한시기의 림공(지금의 사천성 공래시)사람인데 미모가 뛰여나고 거문고와 문장에 능했으며 가문이 부유했다. 어릴 때부터 남달리 총명했던 탁문군은 박학다식하여 시가사부(诗歌词赋), 음률 등 어느것 하나 정통하지 않은것이 없었다. 탁문군은 17살에 남편을 잃고 과부가 되여 친정에 와서 살았는데 숱한 명문가문에서 그녀한테 청혼하였다. 하지만 탁문군은 가난한 서생인 사마상여한테 마음을 주었다. 탁문군은 거문고를 잘 타고 시에 능한 사마상여의 재능에 반하여 그를 사랑하게 되였다. 탁문군의 아버지 탁왕손은 딸이 가난한 사마상여와 만나는것을 반대했다. 그러자 탁문군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밤도와 도주했다. 그때로부터 탁문군은 주점을 차려놓고 술을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 생활은 힘들었지만 그들의 사랑은 깊어만 갔다. 사랑과 행복을 위해 밤도와 도주한 탁문군의 비범한 용기와 그들의 랑만적인 애정이야기는 후세사람들의 찬탄을 자아냈다. 얼마후 탁왕손은 체면이 서지 않는다는 생각에 딸한테 거금을 대주어 주점을 그만두게 했다. 그후 사마상여는 경성에 들어가 벼슬하게 되자 기생집에 드나들고 첩을 맞아들일 생각을 하면서 환난을 함께 겪었던 안해를 버리려고 했다. 사마상여는 안해한테 “일이삼사오륙칠팔구십백천만”이란 13자 되는 편지를 보내왔다. 총명한 탁문군은 수자중에서 유독 “억(亿)”이 빠진걸 보고 “무억(无亿)”은 “무의(无意)를 암시한다는것을 알아차렸다. 탁문군은 눈물을 흘리면서 《원랑시》를 써보냈는데 그 시를 받아본 사마상여는 안해의 재주에 깜짝 놀라면서 자신의 행실을 부끄럽게 생각했다. 그후부터 사마상여는 다시는 안해를 버리고 첩을 맞아들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131    왕궁에 갇힌 캄보쟈의 허수아비 왕 댓글:  조회:6197  추천:0  2014-03-01
왕궁에 갇힌 캄보쟈의 허수아비 왕     해가 지고 마지막 남은 관광객들마저 떠나면 노로돔 시아모니 캄보쟈(캄보디아)국왕은 동화속에서나 나올것 같은 왕궁에서 쓸쓸히 혼자가 된다. 한 나라의 국왕이라면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할만 자리이다. 하지만 시아모니는 그렇지 않다. 그에게는 안해도 없고 자녀도 없다. 원하지 않았던 왕위에 올라 아무런 권력도 없는 허수아비 왕으로 하루하루를 고독하게 보내고있는 그는 왕궁에 갇힌 “죄수”나 다름없다. 혼자가 된 이 시간에 그에게 남은것은 마지못해 왕이 되기전에 보냈던 행복한 시절에 대한 기억이 거의 전부일것이다. 노로돔 시아모니는 1953년 5월 14일에 캄보쟈의 수도 프놈뻰(프놈펜)에서 노로돔 시아누크 전임국왕과 여섯번째 왕비인 모니니아트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여났다. 1965년에 프놈뻰에서 소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체스꼬의 수도 쁘라하의 한 중학교에서 공부하였다. 그후 1975년까지 쁘라하음악예술박사학원에서 고전음악과 고전무용을 전공하였다. 1976년에 조선에 가서 영화촬영에 대해 공부하고 1977년에 캄보쟈로 돌아왔다. 그러나 크메르루주정권에 의해 1979년까지 다른 왕실가족과 함께 가택연금을 당하였다. 1981년 발레를 가르치기 위해 프랑스의 빠리로 갔고 그곳의 모자르트음악학원에서 고전무용과 고전음악을 가스치는 교수로 활동하면서 거의 20년동안 프랑스에서 지냈다. 1993년에 빠리에 본부를 둔 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의 캄보쟈대사로 임명되여 국왕즉위 직전까지 활동하였다. 2004년 10월에 60년이상 왕위에 있으면서 캄보쟈에 큰 영향력을 행사해온 노로돔 시아누크국왕이 건강상의 리유로 양위할 뜻을 밝히자 국왕선출위원회에서 시아모니를 새 국왕으로 선출하였다. 그해 10월 29일에 그는 프놈뻰에 가서 캄보쟈의 국왕으로 되였다. 시아모니의 아버지 시아누크는 다재다난(多灾多难)했던 캄보쟈와 함께 파란곡절을 겪어온 인물이다. 캄보쟈에서는 1~6세기에 부남왕국이 섰고 9세기초에 자야바르만 2세가 전국을 통일하여 앙코르왕국을 세웠다. 앙코르왕국은 14세기부터 세력이 약해져 주변국가들의 영향을 받다가 1863년 프랑스의 보호국이 되였으며 왕의 제도는 계속 존속되였다. 시아누크는 1941년 4월에 조부인 국왕 모니본이 사망되자 왕위에 즉위하였다. 당시 캄보쟈는 프랑스의 보호국이였다. 캄보쟈의 독립을 념원하고있던 그는 1945년에 독립을 선언했다. 그리고 1949년에 프랑스련합내에서 캄보쟈독립을 획득하였다. 1955년 3월에 왕위를 아버지 수라마리트에게 양위하고 9월에 총선거에서 압승하여 수상 겸 외무장관으로 취임했다. 그는 국내적으로는 정치를 쇄신하고 대외적으로는 중립주의 외교를 표방하였다. 1960년에 국왕인 아버지가 사망하였을 때 왕위계승을 하지 않고 국가원수로 취임했다. 그렇게 되여 캄보쟈는 립헌군주국이지만 왕이 없는 상태로 되였다. 시아누크는 1961년에 라오스국제회의를 제창하고 중립화에 공헌하였다. 1970년 3월에 그가 외국방문을 가났을 때 우파인 론놀 등이 군사정변을 일으켜 그의 국가원수직을 박탈했다. 중국으로 망명간 그는 그해 5월에 북경에서 캄보쟈민족련합정부를 세우고 망명정권의 수반이 되였다. 1975년에 크메르루주군(軍)이 내전을 일으키고 캄보쟈를 장악했다. 그해 9월에 시아누크는 그들의 지지을 받고 귀국하여 국가원수직에 복귀하였다. 그러나 1976년 4월에 크메르루주가 독재를 강화하자 피박에 못이겨 사임하고 다시 중국과 조선에 들어가 망명객으로 머물렀다. 1979년 2월에 윁남군은 헹 삼린정권을 앞세우고 캄보쟈를 장악했다. 시아누크는 윁남군을 몰아내기 위하여 1982년에 반윁남파가 집결하여 수립한 민주캄보쟈련합의 불안정한 망명련립정부의 대통령이 되였다. 국외에서 국가회복운동의 지도자로서 투쟁을 계속해오다가 1991년에 귀국하여 과도정부인 캄보쟈민족평의회의 의장에 선출되였다. 1993년 9월에 립헌군주제로 환원하는 헌법개정을 하자 그는 다시 왕위에 복귀하여 캄보쟈의 국왕이 되였다. 하지만 망명객이 된후부터 시하누크에게는 실권이 없었다. 시아누크가 실질적인 권한을 통치한 기간은 캄보쟈가 독립한 1953년 11월 9일부터 1970년 3월 18일까지였다. 1993년 5월 총선에서 시아누크의 둘째 아들 라나리드가 제1총리로 선거되여 권력을 쥐였으나 1997년에 제2총리인 훈센이 군사정변을 일으켜 라나리드를 국외로 추방하고 단일 총리가 되여 현재까지 실권을 장악하고있다. 훈센은 2004년 10월에 시아누크국왕이 건강상의 리유로 양위할 뜻을 밝히자 국왕선출위원회로 하여금 정치에 전혀 관심이 없고 권력에 대한 야심이 없는 시아모니를 새 국왕으로 선출하게 했다. 시아모니는 왕위서렬로 보면 아홉번째였으나 정치에 관심이 없고 권력에 대한 야심이 없다는 리유로 순조롭게 새 국왕으로 선출되였다. 하지만 시아모니는 즉위한 날부터 왕궁에 갇힌 “죄수”나 다름없었다.  그를 가둔 장본인은 다름아닌 명민하고 술수에 능하며 무자비한 정치인으로 소문난 훈센총리라고 할수 있다. 캄보쟈의 모든 실권을 손에 쥔 훈센총리의 권력은 왕궁에까지도 뻗쳐있다. 시아모니는 즉위 다음날에 성명을 발표하여 “나는 립법, 행정, 사법 등에 관여하지 않고 정치에서 중립을 지키며 어떤 정치인물이나 정당의 편에도 서지 않을것이다”고 선포했지만 훈센은 그에 대한 감시를 줄곧 늦추지 않았다. 시아모니국왕은 정부가 파견한 감시인들에게 둘러싸여있다. 왕실담당장관인 콩솜올은 훈센의 측근인데 감시인들을 총괄지휘하고있다. 국왕은 왕궁담밖으로 거의 나가지 못하며 어쩌다 나갈 경우에도 감시인들이 반드시 동반해야 한다. 또 언론의 접근은 일체 차단되여있다. 캄보쟈헌법은 왕에게 상당한 권한을 부여하고있지만 실제로는 이 권한이 전혀 주어지지 않고있다. 야당의원으로 캄보쟈에서 정부를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몇사람중의 하나인 손치헤이는 “왕의 권한은 아무것도 없다. ‘허수아비왕’이다”라고 말했다. 캄보쟈에서 왕의 위상이 언제나 이랬던것은 아니다. 시아모니국왕의 부왕인 노로돔 시아누크는 수십년동안 이 나라에서 거인처럼 군림했다. 많은 사람이 그를 신과 같은 존재로 생각했고 그의 생일 같은 특별한 날이면 불꽃놀이행사를 보기 위해 수만명이 왕궁앞광장에 몰려들군 했다. 아마도 이런 시아누크의 존재로 하여 훈센은 아무런 정치적 야심도 없는 시아모니이지만 안심하지 못하고 항상 경계하고있는지로 모른다. 시아모니가 국왕에 즉위한지도 7년이 지났다. 지금 캄보쟈국민들은 시아모니국왕에 대해 이야기할 때마다 “슬프고 외로우며 버림받았다”와 같은 말로 국왕에 대한 측은한 감정을 내비치고있다. 시아모니국왕은 58세로 매일 매일을 서류를 결재하고 손님들을 접견하는 일상적 업무로 보내고있다. 그런 다음 식사하고 책을 읽는것이 생활의 거의 전부이다. 6명의 부인과 수많은 정부를 뒀던 부친과 달리 시아모니국왕은 평생 독신으로 살았고 왕위계승자를 남길것 같지도 않다. 최근에 있었던 그의 생일은 거의 누구도 모른채 조용히 지나갔으며 궁안에서조차 특별한 행사가 없었다. 왕궁에 있는 젊은 시종인 신치헤이는 “국왕이 선량하고 점잖으며 캄보쟈의 상징이지만 문제는 아무런 권력이 없다는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훈센이 캄보쟈의 실질적 왕이라고 말할수 있다”고 했다. 시아모니는 모국어외에 프랑스어, 체스꼬어, 영어, 로어에 정통했다. 여러 나라말을 능숙하게 구사하는 국왕이 손님들과 현지어로 대화를 나눌 때면 이를 엿들으려는 주변감시인원들은 짜증을 낼 정도라고 한다. 정치에 아무런 관심이 없고 권력에 대한 야망이 전혀없는 시아모니가 왜서 왕위에 순순히 올랐을가? 내막을 하는 사람들은 시아모니국왕은 왕실을 계속 존속시키려는 부모의 뜻에 따라 이때 어쩔수 없이 왕위를 계승했다고 말했다. 시아모니는 2005년 8월에 중국에 국사방문을 왔고 2008년 8월에 제29기 북경올림픽운동대회의 해당활동에도 참석했다. 그후 해마다 중국방문을 했다. 하지만 그의 곁에는 감시일군들이 한시도 떠나지 않았다. 그는 2천년에 달하는 캄보쟈왕실의 마지막 계승자가 될지도 모른다. 발레무용수였던 그에게는 거칠고 험난한 조국의 정치무대보다 유럽의 예술무대가 더 적합했을것이다. 시아모니는 어릴 때부터 누나인 보파데비공주(시아누크의 맏딸)와 함께 고전무용을 배웠고 14살 때에는 아버지 시아누크가 제작한 영화 《꼬마왕자》의 주인공역을 맡기도 했다. 시아모니는 그때를 회상하며 예술무대에서 활동했을 때가 가장 행복했다고 말했다.     
130    녀성의 달 댓글:  조회:6160  추천:6  2014-03-01
녀성의 달   김희수     3월은 녀성의 달이다. 예전에는 3월 8일 하루만 녀성의 날이였지만 최근 몇년간은 3월 1일부터 3월 31일까지 옹근 3월이 모두 녀성의 날로 되였다.   예전에 녀성들은 1년에 “3.8”절 하루만 녀왕대접을 받았다. 녀왕대접이란것도 별게 아니였다. 그날 하루 남편이 지어준 밥을 먹는게 고작이였다. 그래도 녀성들은 좋다고 그날만은 진짜 녀왕이라도 된것 같아서 우쯜댔다.   이 날이 되면 녀성들은 널찍한 집을 가진 동료의 집에 모여 색다른 음식을 해놓고 먹고 마시고 춤추고 노래하며 즐겁게 놀았다. 물론 남성들을 청하여 함께 즐겼다. 남성들은 녀성의 명절을 축하해준다는 명의로 먹고 마시며 한바탕 춤추며 놀았다는데 도대체 누구의 명절인지 알수 없었다.   이렇게 남성들도 녀성들의 명절에 합세하면서 “3.8”절을 앞당겨 쇠는 일이 생겼고 그렇게 앞당겨 쇠고 나니 정작 3월 8일이 되면 또 입이 궁금하고 배가 출출하여(사실은 술생각이 나서) 다시 한번 더 쇠고 본다. 그러고도 모자라서 “후, ‘3.8’절을 보내니 왠지 모르게 섭섭한데 한잔 하지비”하고 또 한번 “3.8”절을 더 쇤다.   이렇게 “3.8”절을 앞당겨 쇠는것을 “’3.8’절을을 맞이한다(迎三八)”고 하고 “3.8”절이 지나서 쇠는것을 “’3.8’절을 보낸다(送三八)”고 한다. 처음에는 “3.8”절을 3월 5일부터 시작해 앞당겨 쇠다가 점차 3월 3일로 앞당겼다. 그러다가 아예 3월이 시작되는 첫날인 3월 1일부터 앞당겨 쇠는 바람이 불고있다. 그것도 한번 앞당겨 쇠는것이 아니라 서너번은 앞당겨 쇠고있다. 친구들과 쇠고 동료들과 쇠고 가족들과도 쇠고…이렇게 하다 하다 점점 부풀어서 아예 3월 한달을 모두 “3.8”절로 하는게 좋겠다는 목소리가 커지고있고 실제로 그렇게들 하고있다.   그래서 3월은 명실공히 녀성의 달로 되고있다. 녀성의 날이든 녀성의 달이든 “3.8”절의 원래 뜻은 남녀평등인데 지금은 녀성의 지위가 높아져서인지 그런것은 별로 따지지 않고 먹고 노는데만 신경을 쓰고있는것 같아 보인다.     “3.8”절을 한국에서는 “세계녀성의 날”이라고 하고 중국에서는 “국제로동부녀절(国际劳动妇女节)”이라고 한다.   1908년 3월 8일에 1만 5000여명의 녀성로동자들이 미국의 뉴욕에서 정치적 평등권 쟁취와 로동시간을 줄이고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렸다. 1909년 3월 8일에 미국 시카고에서 녀성로동자들이 남녀평등권리를 요구하며 시위를 했다. 1910년에 단마르크(덴마크)의 쾨뻰하븐(코펜하겐)에서 열린 제2차 녀성운동가대회에서 독일의 로동운동지도자 클라라 제트킨(克拉拉·蔡特金)이 “이 날을 세계녀성의 날로 하자”고 제안하여 1911년 3월 8일이 첫 세계녀성의 날로 되였다. 중국은 1922년부터 시작하여 “3.8”절을 기념했고 1949년 12월에 중앙인민정부 정무원에서 매년 3월 8일을 부녀절로 규정했다.   상술한 “3.8”절유래에서 보다싶이 “3.8”절은 남녀평등권리를 요구한 날을 기념하기 위한것인데 지금은 그 의미가 퇴색해지고 먹고 마시는 날로만 되고있다. 물론 요즘은 녀성의 지위가 날로 높아지고있는 추세이지만 지금도 남성중싱에 있는 이 세상에는 남녀불평등현상이 엄연히 존재하고있다.   이 세상에는 남성에게 천시당하고 학대당하고 성폭행당하고 유린당하는 녀성들이 부지기수이다. 아랍국가의 녀성들은 절반이상이 문맹이다. 이슬람교률법엔 4명의 부인을 얻을수 있다고 되여있다. 세네갈, 우간다, 리비아, 애급(이집트), 남아프리카공화국, 수단, 마로끄(모로코), 에티오피아, 스워질랜드(스와질랜드), 소말리아, 바레인, 까타르(카타르), 아랍추장국련방(아랍에미리트연합국), 예멘, 요르단, 이라크, 사우디아라비아, 오만 등 이슬람교국가들은 일부다처제를 실시하고있는데 70%이상이 일부다처제가정이다.   이처럼 세계각지에는 심각한 녀성차별이 존재하고있고 중국도 녀성의 권리를 보장하고있지만 억압받고 차별당하고 버림받는 녀성들이 적지 않다. 중국의 가정폭력발생률은 29.7%~35.7%로서 피해자 대부분은 녀성이였다.   남녀차별이 엄연히 존재하고 녀성들이 진정으로 남녀평등권리를 누르지 못하고있는 현실에서 3월을 녀성의 달로 하는것은 아주 좋은 일이라고 본다. 하지만 3월이 먹고 마시는 달로만 되지 말아야 한다. 될수록 술파티회수를 줄이고 적게 먹고 마시는것이 절약차원에서나 건강보호측면에서나 모두 유익하다고 본다.   그대신 “3.8”절의 뜻을 되새기는 오락, 운동, 독서 모임을 많이 가지는것이 좋지 않을가 싶다. 가족끼리 쇨 때에는 남편이 아이들과 함께 안해에게 《녀성은 꽃이라네》와 같은 노래를 불러주거나 한해동안 수고했다는 내용의 편지나 시를 랑독해주는것도 좋을것 같다.   일본 극우세력의 도를 넘은 망언이 계속되고있는 시점에서 녀성의 달이 시작되는 첫날 3월 1일에는 녀성의 달을 위해 축배를 들기전에 먼저 1919년 3월 1일, 일제의 압박에 항거해 전세계에 민족의 자주독립을 선언하고 온 민족이 총궐기하여 평화적 시위를 전개한 “3.1”절을 잊지 말고 잠간이라도 민족을 각성시킨 3.1운동의 뜻을 되새겨보는 시간을 가져보는것이 좋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동료나 친구들과 더불어 “3.8”절을 쇨 때에는 함께 모여 노래하고 춤추며 놀기도 하고 간단한 취미운동도 하고 녀성권익보호법에 대한 지식도 학습하고 또 세계녀성의 날 창시자 클라라 제트킨부터 시작하여 우리 민족과 중국을 포함한 세계 저명한 녀성인물들의 사적을 학습한다면 명실상부한 녀성의 달로 될것이 아니겠는가?    
129    밥이 좋니 녀자 좋니 댓글:  조회:8961  추천:10  2014-02-25
밥이 좋니 녀자 좋니   김희수   밥과 녀자중에 어느것이 더 좋으냐고 묻는다면 어느 쪽을 선택하는것이 정답일가? 솔직히 말해서 이 물음엔 정답이 있을수 없다..   실례로 바다에서 배가 침몰되여 두 젊은 사내가 간신히 구명조끼덕에 목숨을 건져 빈몸으로 아무것도 없는 무인도에 표류되였다고 하자. 이틀쯤을 굶으면 배도 고프고 한창 혈기왕성할 때라 녀자생각도 나서 견딜수 없을것이다.   때맞춰 내리는 “급시우”처럼 사흩째 되는 날에 난파선이 무인도로 밀려왔는데 배우에는 두 사내에게 가장 수요되는 음식과 미녀가 있었다고 하자. 이 두가지 중에 한 사람이 한가지씩밖에 못가진다고 할 경우에 두 사내는 어느것을 선택할가?   이때 음식의 분량에 따라 선택이 달라질것이다. 음식이 한 사람이 하루정도 먹을 분량이나 기껏해야 며칠을 먹을수 있는 분량이라고 하자.  그럴 경우 두 사내는 아무래도 며칠을 더 살다가 결국은 굶어죽게 될바에야 미녀를 안고 일순간이라도 즐겨보자는 똑같은 생각을 품게 될 가능성이 높다.   만약 음식이 몇년 또는 몇십년 먹을 분량이라면 미녀보다 음식을 선택할 가능성이 더 높다. 아무리 김태희같은 미인이라고 해도 미녀를 안고 하루를 살기 보다 녀자가 없이라도 오래오래 살수 있는 쪽이 더 나을테니까. 혹시 “내 리상형의 녀자를 안을수 있다면 당장 죽어도 좋아!”하고 나설 자도 있을수 있겠지만 미녀와의 하루밤을 위해 목숨을 던질 용기 있는 자가 몇이나 될가?   이처럼 성욕이 식욕보다 우선일 때도 있지만 식욕이 기본적으로 우선이라고 할수 있다. 사람은 이성을 모르고 살수는 있어도 먹지 못하면 살수 없기때문에 성욕보다 식욕이 우선이라고 한다. 배가 불러야 녀자도 눈에 들어온다는 말처럼.   인간의 가장 본능적이고 중요한 3대욕구(식욕, 성욕, 수면욕)중에 우선순위를 매기라면 어느것을 선택하는것이 정답일가? 먹지 못해도 죽고 자지 못해도 죽는다. 하지만 “그거 안하고는 못살것” 같지만 안해도 죽지는 않는다. 때문에 성욕보다 식욕과 수면욕이 우선이라고 할수 있다.   이 세상에는 아직도 굶주린 사람들이 많다. 그런 사람들앞에 음식과 소녀시대같은 미인들을 줄 세워놓고 둘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먼저 음식에 덮칠것이다. 또 이틀이나 사흘 잠을 못잔 사람앞에 산해진미나 이영애같은 미인을 놓아준다고 해도 눈에 들어오지 않을것이다. 혹시 “내 평생에 먹고싶었던 조걸!”하거나 “내 평생에 안아보고싶었던 미인!”하고 잠을 포기할 용사도 있을지 모르지만.   이처럼 식욕이 1순위라지만 경우에 따라 성욕이 1순위가 될수도 있고 수면욕이 1순위가 될수도 있다. 중국처럼 굶어죽을 일이 없는 경우라면 아무리 산해진미를 갖다놓아도 미인을 먼저 선택할것이다. 또 잠을 못자서 죽는 경우도 없으니까 역시 미인을 먼저 선택할것이다. 이렇게 상대적으로 먹을 걱정이 없고 수면부족이 없는 나라의 국민들은 1순위가 성욕이 아닐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먹는것도 성욕만족을 위해 정력에 좋다는 음식을 먼저 선택한다. 하다못해 지렁이라도 정력에 좋다면 앞뒤 안 재고 꼭꼭 씹어먹는다.   실례로 금욕주의 나라가 있었는데 두 남녀가 그 욕망을 참고 참다가 도저히 참을수 없어서 합궁을 했다가 발각되여 벌을 받게 되였다고 하자. 그 벌이라는것이 남녀를 각각 흙벽을 하나 사이둔 다른 방에 가두어놓는것이라고 하고 방안에는 손으로 먹을수 있는 적당한 음식외엔 아무런 도구도 없다고 하자.   만약 며칠후에 문지기가 음식을 가져다 주러 방안에 들어섰다면 깜짝 놀랄만한 장면을 목격할 가능성이 높다. 두 남녀가 껴안고 사랑을 나누는 장면, 그리고 두 남녀의 열손가락이 다 피투성이 되게 다슬어 떨어지고 벽에는 사람이 나들만한 구멍이 뚫어져있는 장면…   성욕이란 이처럼 무섭고 억제하기 힘들다. 그래서 이것을 통제하지 못하면 성폭행, 성매매 같은 부작용이 생기는것이다. 성욕은 인간의 정당한 권리이고 또 마땅히 풀어야 하지만 법이 허용되는 범위내에서 행해져야 한다. 강제로 하거나 권력이나 돈으로 자기의 녀자가 아닌 다른 녀자를 범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마찬가지로 먹고싶다고 가게의 음식을 훔치는것으로 식욕을 만족시켜서는 안되고 피곤하다고 회의중이거나 수업중에 곯아떨어지는것으로 수면욕을 만족시켜서는 안될것이다.   각설하고 군자는 배부르면 학문을 닦을 생각을 하고 소인배는 배부르면 녀자생각을 한다는 말이 있는데 내가 보기엔 녀자생각만 하는 소인배도 어리석지만 학문만 닦는 군자도 바보인것 같다. 같은 값이면 분홍치마라고 녀자생각도 하고 학문도 닦는다면 금상첨화가 아닐가?    
128    남자를 자르고 천년을 산 사마천 댓글:  조회:5743  추천:2  2014-02-23
남자를 자르고 천년을 산 사마천     지혜롭고 용병에 능하였던 두릉장군은 겨우 5000명의 보병을 거느리고 북방의 흉노를 토벌하러 떠났다. 두릉장군은 계속되는 전투에서 적들을 격파하고 적진 깊숙히 들어갔다. 용맹스럽게 전투에서 많은 적을 무찌르고 돌격한 두릉장군은 적진에 너무 깊숙히 들어갔기때문에 끝까지 잘 싸웠으나 말에서 떨어져 포로가 되고말았다.   이 소식이 왕에게까지 전해지는 동안 그는 장렬히 전사한것으로 전해졌고 많은 사람들은 이에 애도하였으며 어떤 부하는 따라서 자결을 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듬해 봄이되자 두릉장군이 사실은 전사한것이 아니라 포로가 되여 오히려 적군의 장군으로 쓰이고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이에 패배한일이 없기로 유명한 왕이 이를 듣고 격노하였다. 그리고 즉시 신하들을 소집하였다. 신하들은 왕앞에서 두릉장군을 욕하기 시작하였다.   “페하, 그자는 혼자서 부대를 벗어났다는것부터가 무책임한 행동입니다.” “맞습니다. 페하, 그자는 전에도 충동적인 행동으로 고집이 세고 잘난척을 하던 그런 사람이였습니다.” 심지어는 그의 부하로 있었던 자들까지 입을 모아 욕을 하였다. “페하, 잠시나마 그자와 같이 있었다는것이 수치스럽습니다. 그자의 구족을 멸하여 후세에 교훈으로 삼아야 할것입니다.”   고집불통에다 신하의 의견에 귀기울이지 않는 왕이 이미 두릉장군의 일에 화가 난것을 보고 신하들은 감히 반론을 제시하지 못하고 왕의 눈치만 보면서 왕에게 아부하기만 했다. 이때 말석에 앉아있던 젊은 남자 하나가 불쑥 머리를 조아리며 말을 하였다.   “페하, 두릉자군이 전투에 나간지 겨우 반년밖에 안되였습니다. 여기에 있는 여러 신하들은 그가 전투에 나갈때 마중을 나가며 장군의 지략을 찬양했고 장군을 전도유망한 분이라고 칭찬들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반년도 안되여 장군의 사정을 알지도 못한채 장군을 역적이라고 모두들 비난하는데 이것이 믿을수 있는 인간의 마음입니까? 평소 그의 품성과 충성심을 보건데 그는 분명 적진에 홀로 남은 리유가 있을것입니다. 그 진실을 확인하기전에는 장군을 결코 나무랄수 없는줄로 아뢰옵니다.”   이 사람은 사마천이였다. 그 말에 격노한 왕은 사마천에게 궁형이라는 남자로는 치욕적인 형벌을 내렸다. 사람들은 남자도 아니고 녀자도 아니게 수치스럽게 사는것보다 남자답게 죽는것이 어떠냐고 말하였다. 사마천은 어디로 가나 비겁하고 수치스러운 사람이라고 손가락질을 받았다. 그러던중 임안장군이라는 사람이 사마천을 찾아왔다.   “더이상 수치수럽게 살아가지 말고 이 독약으로 자결하시오.” “싫소.” “사내가 죽는것이 그렇게 무섭나? 깨끗하게 죽으시오.” “싫소. 난 끝까지 살겠소.” “왕에게 직언하는것을 주저하지 않던 자네가 왜 목숨에는 연연하는것인가?” “앞으로 10년이나 20년이 지난후에 말하리다.” “아니, 그때까지 살아있겠다는 말인가? 내가 사람을 잘못보았군.”   그후 몇년후 임안장군은 억울한 루명을 쓰고 역적으로 몰려서 사형을 당하게 되였다. 그가 죽기전에 사마천이 그가 갇힌 감옥에 몰래 찾아갔다.   “마지막으로 만나고싶었습니다.” “난 사내답게 죽겠소, 당신처럼 그렇게 비겁하고 수치스럽게 연명하지 않겠단말이요.” “보십시오. 임안장군은 내가 왜 연명하고 사는지 아시오? 나는 살아서 력사를 쓸것이오. 이 나라의 간신배들이 어떻게 나라를 망쳐놓았고 임금이 어떻게 어리석었으며 백성들이 어떻게 고통받고 살았는지 하는것을 나는 살아서 력사에 남길것이요. 난 살아서 수치스러웠지만 이 나라의 어리석은 임금과 간신들은 력사속에서 두고두고 지탄을 받을것이오.”   이말을 들은 임안장군은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형장으로 나갔다. 그리고 사마천은 후날 력사저서를 완성하였는데 그 책이 바로 유명한 《사기》였다.    
127    칭키스칸의 관을 열어본 유일한 사람 댓글:  조회:6711  추천:0  2014-02-23
칭키스칸의 관을 열어본 유일한 사람     칭키스칸(칭기즈칸—成吉思汗)은 몽골족의 걸출한 정치가, 군사가이며 원나라를 건립한 민족영웅이다. 그는 기원 1277년 서하로 진격하던 도중 65세를 일기로 돌연 병사했다. 칭키스칸이 죽은 뒤 부하들은 몽골족의 풍속에 따라 그의 시신을 밀장했는데 오늘날까지도 칭키스칸의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그후 사람들은 력사기록에 따라 여러군데를 조사하다가 오늘날의 성릉(成陵)을 칭키스칸릉으로 정했다. 항일전쟁시기 중국공산당은 칭키스칸릉이 일본 침략군에게 도굴될것을 우려하여 칭키스칸의 릉침을 성릉으로부터 꺼내어 유림, 연안 등지를 거쳐 섬북고원남측에 위치한 황제릉에 암장해놓자는 비밀결정을 내렸다. 이 작업은 치밀한 안배끝에 극비리에 안전하게 진행되였다.   칭키스칸 릉침은 그후 몇년동안 황제릉에 암장돼있다가 항일전쟁승리후에야 다시 오늘날의 성릉으로 옮겨오게 된것이다. 이는 당시 국가 최고기밀의 하나로 몇사람을 제외하고는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았다. 지난 50년대 초, 우란후(울란부—乌兰夫)국무원 부총리(몽골족)가 칭키스칸릉을 참배하던 중 문뜩 릉을 지키고있는 수위에게 부탁이 있는데 들어줄수 있느냐고 물었다. 수위는 부총리의 부탁이면 모두 들어줄수 있다고 깎듯이 말했다. 이때 우란후부총리는 잠깐 망설이다가 “칭키스칸의 관을 열어봐도 되겠느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 불의의 질문에 흠칫 놀란 수위는 조금 주저하다가 “물론 볼수 있습니다. 오늘날 당신도 역시 몽골인의 칸이니깐요!”라고 대답했다. 이어 우란후부총리는 관이 안치된 밀실로 들어갔다.   칭키스칸릉 밀실내의 관에 칭키스칸본인의 유골이 담겨져있는지, 아니면 단지 칭키스칸의 의관뿐인지는 누구도 모른다. 민간에서는 또한 칭키스칸 관내에 두개의 말등자가 놓여있다는 소문도 떠돌고있었으나 이 모든것은 단지 세인들의 추측일뿐이지 실증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럼 우란후부총리는 관을 연후 무엇을 보았을가? 정말로 칭키스칸의 유골은 존재했을가?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 수위가 밝힌데 따르면 밀실에서 걸어나오는 우란후부총리의 표정은 매우 엄숙했다고 한다. 무엇이 있었는가 하는 수위의 질문에 우란후부총리는 일언반구의 말도 하지 않았고 수위도 더이상 감히 묻지 못했다고 한다.    
126    한달에 한번쯤은 서점에 가보자 댓글:  조회:5893  추천:7  2014-02-19
한달에 한번쯤은 서점에 가보자   김희수     오래만에 연길시 신화서점으로 가보았다. 요즘 세월에 누가 책을 읽나 했더니 생각밖에도 서점엔 책 사러 온 사람들이 많았다. 조용히 진렬대를 오가며 책을 고르는 사람, 책을 펼쳐들고 열심히 읽어보는 사람들…그들이 모두 우러러보이고 존경스럽게 느껴졌다. 그리고 평소에 바쁘다는 구실로 서점에도 자주 다니지 못하고 독서도 게을리 해온 자신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나는 룡정에서 살던 1990년대 중기까지만 해도 일요일마다 서점에 갔고 또 직접 책가게를 경영해보기도 했다. 그리고 연길에 와서도 얼마간은 서점에 자주 갔다. 그러다가 마작, 트럼프, 술, 드라마에 빠져 서점과는 담을 쌓다싶이 했다. 그러다보니 물론 글도 쓰지 못했다. 소위 신문사에 몸을 담고 글을 쓴다는 내가 독서에 게을리하고 서점에도 거의 발길을 끊다싶이 했으니 얼마나 한심한 일인가?   나처럼 서점에 드물게 다니거나 아예 서점에 발길도 향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을것이다. 나는 나를 포함해서 서점과 담을 쌓고 사는 사람들에게 한달에 적어도 한번쯤은 서점에 가보자고 권하고싶다. 휴일을 리용해서 부부동반해도 좋고 아이의 손목을 잡고가도 좋고 혼자가도 좋다. 가보면 꼭 새로운 감수를 느낄수 있을것이고 뜻밖의 수확을 거둘수도 있을것이다.   한달에 한번쯤이 안되면 한해에 서너번이라도 여유시간을 짜내여 서점으로 가보자. 그리고 어떤 책들이 있는가 한번 돌아보자. 그러다가 마음에 드는 책이 있으면 값이 얼마인가 보지 말고 그 책을 사가지고 나오자. 책 한권이 아무리 비싸다고 해도 술 한번 마시는 값보다는 쌀것이다. 술 한번 적게 마시고 마작 한번 적게 놀면 그 돈으로 책 몇권은 얼마든지 살수 있고 술 마시고 마작노는 시간이면 한해에 책 몇권은 쉽게 읽을수 있을것이다.   어떤이들은 스마트폰이나 컴퓨터를 리용해 독서할수도 있고 인터넷서점(网上书店)을 리용해 앉아서도 책을 살수도 있는데 힘들게 발품을 팔 필요가 있겠는가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터넷을 리용하는 방법은 어찌 보면 쉽고 편리한 방법일지는 몰라도 좋은 방법은 아니라고 본다. 평소에도 늘 컴퓨터화면이나 스마트폰화면에 빠져있는 현대인들이 독서나 책 한권을 사는데까지 인터넷에 의존한다면 점점 라태해져 안일한 삶만 추구하다가 페인이 될 위험도 있다. 컴퓨터나 스마트폰을 장시간 사용하면 우울증, 뇌졸증 등 질병에 걸릴수 있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컴퓨터나 스마트폰은 필요할 때 적절하게 사용하는것이 좋다는 얘기이다.   운동부족으로 건강이 나빠진 현대인에게 온라인서점(网上书店)을 리용하기보다 오프라인서점(实体书店)에 가서 책을 사면 운동효과도 불수 있고 혼탁한 방안에서 벗어나 신선한 공기도 마실수 있어 일거량득이 아니겠는가? 또 한가지는 컴퓨터중독이나 스마트폰중독에서 벗어날수 있다는것이다. 그리고 직접 책진렬대앞을 지나노라면 온라인서점에서는 느낄수 없었던 책향기를 맡을수 있고 손바닥에 책을 올려놓으면 저자의 온기를 느낄수 있다. 느낌이 다르다는 얘기이다. 어쩌면 책속의 향기가 한 사람의 운명을 바꿔줄지도 모른다. 내게 꼭 맞는 책을 골라서 읽는다면 거기서 유용한 지식과 반짝이는 령감을 얻어 성공의 희열을 맛볼수 있을것이다. 성공한 사람치고 독서를 하지 않은 사람은 없을것이다. 책을 읽는다고 다 성공하는것은 아니지만 성공한 사람은 못되여도 좀 더 가치있는 사람은 될수 있다.   책을 들면 저자의 온기를 느낄수 있어야 그 책을 읽을 생각이 들것이고 책을 읽어도 열심히 읽을수 있을것이다. 나는 간접적이거나 직접적으로 저자들에게서 많은 책을 선물받았다. 저자들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사실 나는 무심하여 저자의 온기를 느끼지 못했기에 “나중에 여유가 생기면 읽어보자”고 자꾸만 미루다보니 그 책들을 다 읽지 못했다. 책을 읽을 시간은 기다리면 있는것이 아니라 짜내면 있는것인데도 술을 마시고 드라마를 보는데만 시간을 랑비하면서 독서를 게을리 했던것이다.   나는 몇년전부터 시력이 나빠져서 인터넷글은 보지만 종이책의 글은 잘 보지 못한다. 대낮에 밖에서나 해빛이 잘 들어오는 밝은 방안이 아니고는 책의 글자가 희미하여 알아보지 못한다. 신문교정을 볼 때도 확대경을 들고 본다. 이제 돋보기를 갖춰놓고 선물받은 책도 읽어보고 나에게 수요되는 다른 책들도 읽어보려고 한다.   물론 독서광은 되지 않을것이다. 독서광은 아무나 되는것이 아니고 흉내낸다고 되는것도 아니니까. 그저 내가 읽고싶고 내게 맞는 책을 골라 읽을것이다. 여러분들께도 그렇게 권하고싶다.   그리고 이제부터 한달에 한번쯤은 두발로 걸어서 서점에 가보려고 한다. 책향기에 흠뻑 취해보는것도 별다른 향수가 아닐가?    
125    알몸으로 히틀러를 암살하려 했던 할리우드 녀배우 댓글:  조회:7376  추천:1  2014-02-16
알몸으로 히틀러를 암살하려 했던 할리우드 녀배우     마를렌 디트리히는 세계에서 수입이 제일 높은 영화배우였다. 그녀는 1901년 12월 27일에 베를린 교외의 황가경찰가문에서 막내딸로 출생했다. 1923년부터 1929년사이에 디트리히는 18부의 무성영화에 출연했다. 디트리히는 29세때인 1930년에 할리우드 감독 스턴버그에게 발탁되여 영화 《푸른 하늘 천사》에 출연하게 되면서 국제적 명배우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하였다. 《푸른 하늘 천사》에서 그녀는 요염한 술집접대부역을 맡아 그녀특유의 매력을 충분히 발산하면서 인기를 얻자 할리우드로 넘어갔다. 그후 스텐버그가 감독한 영화 《마로끄》로 일약 명배우로 되여 세계 남성들의 육감적인 우상으로 각광을 받았으며 당대 최고의 곡선미 소유자로 유명해졌다. 디트리히의 아름다움에 반한 히틀러는 그녀를 위해 베를린부근에 영화기지를 세워놓고 독일의 할리우드를 만들려고 준비했다. 히틀러는 여러번이나 디트리히에게 청혼했지만 번마다 거절을 당했다. 1937년에 디트리히가 영국에서 영화 《천명》을 찍을 때 갑자기 여러명이나 되는 히틀러의 특사가 그녀를 찾아왔다.  그들은 공백지표를 내밀면서 그녀가 독일로 돌아가기만 하면 부르는 값을 모두 주겠다고 유혹했다. 그리고 히틀러가 그녀를 독일 최고의 배우로 만들어주겠다고 대답했다면서 나치스정권의 선전부장 파울 괴벨스를 파견하여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게 했다. 그러나 디트리히는 단마디로 거절했다. 그녀는 친구에게 독일로 돌아가기를 거절한 리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난 히틀러를 위해 선전하고싶지 않았어. 만약 눈앞의 영예를 위해 독일로 돌아가면 난 인류의 죄인으로 되는거야.” 그날밤 디트리히는 대담한 계획을 세웠는데 자신의 계획을 애인 페어뱅크스에게 알려주었다. “난 히틀러를 침대우에서 죽여버리겠어요. 난 진심으로 히틀러를 사랑하는척 할거예요. 난 파울 괴벨스에게 독일로 돌아가겠다고 대답하겠어요. 그들은 몸을 수색할것이니깐 난 알몸으로 히틀러의 침대에 오르겠어요. 그리고 히틀러가 잠들었을 때 독약으로 그를 죽여버리겠어요!” 하지만 파울 괴벨스는 히틀러의 안전이 근심스러워던지 디트리히가 독일로 돌아오는것은 환영한다고 말했지만 히틀러와 단독으로 만나겠다는 그녀의 요구는 들어줄수 없다고 했다. 디트리히는 1937년 3월 6일에 미국국적을 획득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 막바지에 접어든 1944년과 1945년에 그녀는 미군의 옷을 입고 알제리, 이딸리아, 벨지끄, 프랑스 등 나라의 전선에 나가 련합군위문공연을 다녔다. 그녀는 BBC방송에 출연하여 “청년들, 희생하지 마세요. 전쟁은 미친짓이고 히틀러는 멍청이니깐요!”라고 웨쳤다. 1947년에 그녀는 미국 최고의 공민상인 “대통령자유훈장”을 획득했다. 1950년에 프랑스정부에서는 그녀한테 “프랑스영예군단훈장”을 수여했다. 20세기 미국문학의 거장인 헤밍웨이는 그녀의 목소리만으로 가슴이 무너질것이라고 했다. 그녀의 쉰듯한 감성적인 목소리는 제2차 세계대전중 수많은 젊은이들의 가슴을 무너뜨렸다. 향수를 부르는 애절한 노래가 방송되는 저녁 9시55분이면 나치스병사도 련합군도 모두 총을 내려놓고 그녀의 노래에 귀를 귀울였다고 한다. 그녀의 사생활은 평탄치 않았으나 남편과의 관계는 끝까지 유지되였다. 그러나 남편과는 성관계를 갖지 않는 부부생활을 했고 동성련애자로 소문나기도 했다. 헤밍웨이는 그녀와 한번도 잠자리를 가지지 못했지만 그녀와의 사랑에서 헤여나오지 못했다. 1934년 려객선안에서 만난 이후 헤밍웨이는 디트리히에게 열렬한 련애편지를 써보냈다. 1949년부터 약 10여년동안 보낸 편지들이 디트리히의 딸 마리아 리바를 통해 2007년에서야 공개되였다. 결국 헤밍웨이는 1961년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고 디트리히는 1992년까지 90세에 이른 삶을 살다가 빠리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124    이태백이 놀던 달은 어데 갔나? 댓글:  조회:6500  추천:10  2014-02-14
리태백이 놀던 달은 어데 갔나?   김희수       달아달아 밝은 달아 리태백이 놀던 달아 … …   둥근달을 볼 때마다 떠오르던 이 동요, 어릴 때에는 이 동요를 떠올리며 리태백이 술에 취해 읊던 달은 얼마나 밝았을가? 하고 생각하며 다시 달을 쳐보았다. 그때의 보름달은 그래도 리태백이 놀던 달 못지 않게 밝았다.   “참 달이 밝다!” 어른들이 그렇게 말했고 우리 아이들도 보름달을 쳐다보며 “야, 달이 참 밝다!”하고 감탄했다. 보고 또 보아도 밝기만 했다. 그래서 어른들은 마당에 술상을 차려놓고 한잔씩 나누며 이야기꽃을 피웠고 아이들은 손전등이 필요없이 학교운동장에 나가 마음껏 뛰놀았다.   그렇게 밝던 달이 오늘은 왜서 밝아보이지 않을가? 리태백이 놀던 달은 어데 갔지?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놀던 달은 어데 갔지? 우리가 어릴 때 놀던 달은 어데 갔지?   한해중에 가장 밝은 달은 정월 대보름달과 팔월한가위 보름달이다. 그래서 한해에 두번씩 기다려지는 보름달이다. 그런데 오늘의 달은 예전의 달보다 밝아 보이지 않는다. 그 때는 자연빛만 있었던 시기여서 지금보다 달이 더 밝았을가? 그래서 “팔월추석 보름달이 밝다하지만 시골에서 더 밝을줄 몰랐습니다”라는 노래도 생겨났을가?   눈부신 연길시의 불빛 사이로 갑오년 정월 대보름달이 떠올랐지만 어쩐지 예전의 보름달보다 밝아 보이지 않는다. 야경은 한층 밝아지고 더 아름다워 졌지만 달은 더 밝아보이지 않는다. 예나 지금이나 밝은 달은 달라진것이 없겠는데…   물론 천문학적인 각도에서 보면 시간에 따라 어떤 시간대에는 달이 더 밝아보이고 어떤 시간대에는 달이 덜 밝아보일수 있다. 또 지역에 따라 어떤 곳에서는 달이 더 밝아보일수 있고 어떤 곳에서는 달이 덜 밝아보일수 있다.   달이 타원궤도를 돌기때문에 같은 정월 대보름달이라고 해도 크기가 변한다고 한다. 가장 가까울 때의 거리가 35만3800킬로메터이고 가장 멀 때는 41만킬로메터가 된다. 가까울 때는 큰달이 뜨고 멀 때는 작은달이 뜨는데 그 차이는 14%정도나 된다. 또 지역에 따라 달이 뜨는 시간도 다르다.   천문학자들은 이번 갑오년 정월 대보름밤에 보는 달은 완전히 둥근 달은 아니라고 밝혔다. 그래서 예전보다 밝아보이지 않을가?   집집마다의 굴뚝에서 연기가 나던 세월에도  달은 지금보다 더 밝았다. 강물에 똥빨래를 하고 오줌을 누던 세월에도 강물은 지금보다 더 맑았다. 자동차가 지나면 먼지가 뽀얗게 일던 흙길 비포장도로밖에 없던 그 세월에도 공기는 지금보다 더 깨끗했다.   지금은 집집의 굴뚝과 석탄보일러굴뚝도 거의 없어졌지만 하늘은 더 뿌옇게 변했다. 강물에서 빨래하고 헤염치는 사람도 없어졌지만 강물은 더 더러워졌다. 자그마한 골목까지 멋지게 포장도로로 만들었지만 공기는 더 오염되였다. 스모그때문에 하늘이 뿌옇게 보인다. 그래서 보름달도 밝아보이지 않는걸가?   보름달이 예전보다 밝아보이지 않는 주요한 원인은 대기오염에도 있겠지만 달을 사랑하는 마음이 현대인들에게서 점점 식어지고있기때문이 아닐가 생각된다. 현대인들은 무엇이 그리 바쁜지, 무엇에 그리 쫓기는지 스마트폰화면은 들여다볼 시간이 있어도 하늘을 올려다 볼 겨를은 없다. 밤하늘에 초생달이 뜨는지 보름달이 뜨는지도 모르고 지나가기 마련이다.   정월 대보름에 한족들의 음식인 원소(元宵)를 먹는줄은 알아도 우리 민족의 음식인 오곡밥을 먹는줄은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올해는 정월대보름날이 밸런타인데이와 겹쳐 명절분위가가 더 짙어졌지만 어쩐지 술좌석의 분위기만 더 흥성흥성해진것 같다. 커플끼리 산보하며 달구경하기가 둘도 없이 좋은 날이지만 달을 올려다보는 커플들은 많지 않다.   저 대보름달이 옛날을 그리며 외로워하고있다. 저 보름달을 보면 액을 물리치고 복을 부르기 위해 달집을 불태우며 새로운 한해를 시작하던 옛사람들이 떠오른다. 저 보름달을 보면 오곡밥에 버섯, 고사리, 고비, 도라지 등 9가지 나물을 먹고 한해동안 부스럼이 나지 말라고 호두, 잣, 밤, 땅콩 등 부럼을 나이 수대로 깨물던 조상들이 떠오른다. 저 보름달을 보면 정월 대보름날 아침에 “귀밝이술 마셔라”하며 아이들에게까지 한모금씩 권하고는 윷놀이를 하던 할아버지, 할머니의 모습이 떠오른다. 저 보름달을 보면 “더위팔기”, “동제(洞祭)”, “탑돌이” 등 우리 민족의 정월대보름 세시풍속과 풍성한 달맞이 민속놀이행사가 떠오른다.   정월 대보름의 밤하늘에 홀로 외롭게 떠있는 저 달을 보면 함께 놀아주며 위로해주고싶다.   우리의 뿌리를 되돌아보아야 오늘의 마음을 다잡고 밝은 미래를 맞을수 있다. 아무리 바쁜 일상이라도 가끔씩 밤하늘을 보자. 둥근달이 떠있는 하늘이 아니라도 좋다. 조각달이 떠있는 하늘이라도 좋고 반달이 떠있는 하늘이라도 좋다. 밤하늘을 올려다노라면 달을 사랑하게 될것이고 달을 사랑하면 자연을 사랑하게 되여 환경보호에 힘쓸것이다. 따라서 환경이 아름다워지면 달도 밝아질것이다. 그렇게 되면 저 보름달도 리태백이 놀던 그 달처럼 휘영청 밝은 모습으로 떠오를것이라고 믿는다.   (2014년 2월 14일 갑오년 정월 대보름날 밤에 술을 마시고 브르하통하강변에서 달을 올려다보다가 돌아와서 씀.)     
123    련인절 소야곡 댓글:  조회:4053  추천:2  2014-02-12
련인절 소야곡/콩트이야기   김희수     또 2월 14일, 밸런타인데이가 왔다. 언제부터인지 중국에서도 성탄절이요, 련인절이요, 어버이날이요 하는 서구의 명절을 쇠기 시작했다. 구실이 없어서 먹지 못하는 연변사람들이라 명절이라고 하면 닥치는대로 먹어댄다. 중국에서는 밸런타인데이를 정인절(情人节)이라고 하는데 우리는 그냥 련인절이라고 번역하여 부른다. 장걸은 나가 먹기가 싫어서 집에서 먹고 안해와 함께 털레비죤을 보고있다가 친구 최인철이 걸어온 전화를 받았다. “야, 칭런제(情人节)인데 집구석에 들어박혀 뭘 하나? 빨리 나와서 함께 칭런제를 쇠자구.” “련인절? 허허, 마누라를 련인이라 할수 없으니 련인절을 어떻게 쇠겠어? 난 련인도 없는데…” “제기랄, 흥타령이네. 나처럼 마누라가 외국에 간 사람은 이럴 때 더구나 고독하다구. 잔말 말구 어서 나와. 난 지금 자네집 문앞에 와있다구.” 장걸이가 밖으로 나가니 기다리고있던 최인철이가 손을 잡아당겼다. “어디가 한잔 하자구.” “남자끼리 련인절을 쇠겠나? 동성련애라도 할셈인가? 자네 게이는 아니겠지?” “에이, 사람 놀리지 말게. 쌍쌍이 팔을 끼고 가는 련인들을 보면 부럽고 질투 나서 혼자서라도 한잔 하고싶은 심정이야.” “그럼 택시라도 부르지.” “이런 날은 걸어서 가자구.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련인절을 쇠는지 구경도 할겸.” 그들은 시대광장 쪽으로 걸어갔다. “저기 광고판에 쓴걸 보니 칭런제를 발렌타인데이라고 하는군. 발음이 어려워서 딱히 뭐라고 하던지 잊었는데” “내 사전을 찾아봤는데 밸런타인데이(Valentine Day)가 올바른 표기야. 그런데 사람들이 습관적으로 발렌타인데이라고 부르지. 또 어떤 사람들은 발랜타인데이, 바렌타인데이, 벨렌타인데이라고도 부르지.” 쌍쌍의 련인들이 다정하게 팔을 끼고 오가고있었다. 그때 최인철이 장걸의 어깨를 툭 쳤다. “저기 저 노랑머리가 자네 아들이 아닌가?” 최인철이 가리키는 쪽을 바라보니 한 노랑머리 사내아이가 제 또래의 소녀에게서 초콜릿을 선물받더니 둘이서 팔을 끼고 다정하게 걸어가는것이였다. 아들이 틀림없었다. “아니, 저 녀석이?!” 이제 중학교 3학년에 다니는 녀석이 련인절에 련애한답시고 날치는것이 한심했다. 장걸이가 저 쪽으로 사라지는 아들의 뒤모습을 바라보고있는데 누군가 그를 불렀다. 돌아다보니 아는 친구였는데 어떤 녀자의 팔을 끼고 신나게 걸어오면서 손을 흔들고있었다. 그가 고개를 끄떡거리면서 인사를 받자 그 친구는 녀자를 그 자리에 잠간 세워놓고 그한테로 다가왔다. 장걸은 그 녀자가 그의 안해도 아니고 그가 이전에 데리고 다니던 련인도 아닌것을 보고 웃으면서 물었다. “자네 련인절을 멋있게 쇠는구만. 어디서 또 새로운 녀자를 사귀였나?” “사귄게 아니라 세를 맡은거네.” “세를 맡다니?” 친구는 아무 술집에서 련인을 세준다는것이였다. 귀맛 당기는 소식인지라 장걸이와 최인철이 그 술집으로 달려가 보니 헛소문이 아니였다. 그들은 각각 한 녀자씩 세를 맡았다. 한시간에 50원이란다. 술집측에서 주의를 주었다. “우리는 련인절에 짝이 없어 외롭게 지내야 할 독신들도 행복하게 련인절을 쇨수 있도록 하기 위해 림시련인을 빌려주는것입니다. 여기서 세를 주는 련인은 화류계아가씨가 아닙니다. 그녀들은 순전히 당신들을 동반하여 함께 거리를 거닐면서 한담이나 할뿐이니 도를 넘는 행동을 하지 말것을 부탁드립니다. 그럼 즐거운 밤이 되십시오!” 말로는 독신들을 위한것이라고 하지만 련인을 세맡아 가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유부남들이였다. 장걸과 최인철도 각각 자신들이 세맡은 “련인”의 팔을 끼고 서로 다른 쪽으로 걸어갔다. 장걸이가 세맡은 녀자는 나이가 어려보였다.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는 가운데서 그녀가 아르바이트를 나온 대학생처녀라는것을 알아냈다. 장걸은 이 얘기 저 얘기 하다가 그녀에게 넌지시 물었다. “우리는 림시련인이라해도 련인은 련인인데 키스라도 한번 해보면 안될가?” “어머, 안돼요!” “한번만 해봅시다!” 장걸이가 간절하게 요구하자 그녀는 마지못해 동의하면서 조건을 달았다. “딱 3초동안만 허락하겠어요. 그 이상은 절대 안돼요. 만약 1초라도 초과하면 110경찰을 부르겠어요.” 장걸은 그런 그녀가 너무 귀엽게 여겨졌다. 그녀는 살며시 눈을 감고 기다렸다. 장걸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그녀의 입술우에 자신의 입술을 포갰다. 첫키스할 때의 짜릿하고 가슴설레이는 감각이 되살아났다. 한시간이 지나자 장걸은 그녀를 돌려보냈다. 지금쯤은 최인철도 끝났겠다싶어서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자네 벌써 끝났어? 난 이제 시작이야!” 핸드폰 저쪽에서 최인철의 말소리에 이어 녀자의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자네 지금 뭘하고있는거야?” “뭘하고있긴? 세맡아온 련인과 사랑의 밤을 보내고있지!” “아니, 그 녀자는 아가씨가 아니라고 했잖아?” “거야 둘이 하기 나름이지. 아니 이거 이 녀자가 벌써 벗고있네. 전화 끊어!” 장걸은 씩 웃었다. “녀석, 마누라 외국 보내구 외로워하더니 련인절을 제대로 쇠고있네. 난 가서 녀편네의 궁둥이나 만져야지!” (2004년 2월)  
122    형제민족에게 우리 글 보급 어떨가? 댓글:  조회:5722  추천:7  2014-02-12
형제민족에게 우리 글 보급 어떨가?   김희수     언어와 문자는 민족문화의 령혼이다. 하지만 많은 소수민족들은 언어와 문자를 잃어버리고 타민족의 언어문자를 사용하고있다. 중국의 55개 소수민족가운데서 자기의 문자를 가지고있는 소수민족은 12개뿐이다. 이 12개 소수민족을 꼽으면 몽골족(蒙古族), 장족(藏族-티베트족), 위글족(维吾尔族-위구르족), 까자흐족(哈萨克族-카자흐족), 끼르끼즈족(柯尔克孜族-키르기즈족), 조선족(朝鲜族), 이족(彝族), 태족(傣族), 랍호족(拉祜族-라후족), 경파족(景颇族), 시보족(锡伯族-시버족), 로씨야족(俄罗斯族-러시아족)이 있다.   소수민족가운데서 인구가 두번째, 세번째로 많은 만족(满族)과 회족(回族)은 자기민족의 말과 글이 없다. 그들은 한족과 함께 한어와 한문을 통용하고있다. 자기의 문자를 가지고있는 12개 소수민족과 자기민족의 말고 글이 없는 만족, 회족을 제외한 기타의 소수민족은 자기민족의 말은 가지고있지만 자기민족의 문자가 없다.   소수민족가운데서 인구가 가장 많은 쫭족(壮族-1617만명)도 자기민족의 문자가 없다. 조선족보다 인구가 더 많지만 자기민족의 문자가 없는 민족들로는 묘족(苗族), 토가족(土家族), 부이족(布依族), 동족(侗族), 요족(瑶族)이다. 원래 자기민족의 문자를 가지고있었지만 현재 잃어버린 민족들이 많다. 55개소수민족가운데서 자기민족의 문자가 있는 12개민족외에 회족과 만족이 한문을 쓰고 다른 민족들은 한문 혹은 다른 민족의 문자를 쓰고있다.   1949년 이전에는 문자를 사용하는 민족이 21개였다. 그리고 문자종류는 24가지였다. 해방후 일부 소수민족들이 새로 창제된 문자를 사용했는데 같은 민족사이에도 서로 다른 여러가지 문자를 사용하는 민족들이 있었기에 중국의 소수민족현행문자는 모두 40가지에 달했다. 그리고 55개 소수민족이 사용하는 언어는 80가지이상에 달했다. 그러나 대부분 소수민족문자는 한어병음문자를 부동한 방법으로 사용했다. 이런 문자와 언어는 존재하고있다는 형식뿐이지 사용자가 극히 적고 사용범위가 매우 적었다.   29개 민족이 54가지 문자를 사용한 시기도 있었다. 일부 소수민족은 같은 소수민족이라고 해도 부동한 분가(支系)에 따라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해왔다. 일부 소수민족은 2개 혹은 그 이상의 언어와 문자를 사용해왔다. 고산족(高山族)은 13가지의 언어를 사용했다. 이 때문에 55개 소수민족은 모두 72가지 언어를 사용했다. 그러다가 지금은 대부분 언어와 문자가 사라졌다.   우리 민족의 문자는 몽골문, 장문, 위글문, 까자흐문과 함께 중국소수민족의 주요 5개문자로 되고있다. 이 5개민족의 문자는 해당문자를 사용하는 인구가 대거 집거해있고 100만명이상의 인구가 사용하고있다. 또 본민족의 정치, 경제, 문화, 교육 등 각 령역에 사용되며 린근이거나 함께 거주하고있는 다른 민족들도 사용하고있다. 현재 문자가 있는 12개소수민족중 7개소수민족의 문자는 통일적인 규범이 없고 사용범위가 매우 적다.   문자가 없는 소수민족은 주로 한자를 사용하거나 다른 소수민족문자를 사용하고있다. 대부분 소수민족은 본민족언어를 본민족내의 일상생활에서만 사용하고 정치생활, 학교교육에서는 한어나 기타 소수민족의 언어를 사용하고있다. 소수민족 총인구의 절반이상이 한자거나 기타 소수민족의 문자를 사용하고있다.   1000만명이상이 사용하는 언어문자라고 꼭 강한 생명력이 있는것은 아니다. 만족은 현재 인구가 1100만명에 달하는지만 언어와 문자를 모두 잃고 한어와 한자를 사용하고있다. 회족도 인구가 천만에 가깝지만 자기민족의 언어와 문자를 잃고 한어와 한자를 사용하고있다.   전세계적으로 언어와 문자가 없어지는 일이 매일이다싶이 벌어진다고 한다. 중국소수민족중에도 언어와 문자가 없어진 민족이 많다. 회족의 언어와 문자는 이미 멸절되였고 만족의 언어와 문자도 멸절된거나 다름없다.   만족어와 만족문자를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달랑 셋만 남았는데 그들은 흑룡강성 북방촌락에 사는 이미 70~80세가 되는 로인들이다. 이 세 로인이 사망되면 만족어와 만족문자는 세계력사무대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더불어 청조시기에 남겨놓은 수천만건에 달하는 만족문자자료는 영영 알아볼 사람이 없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언어와 문자가 없는 형제민족에게 우리 언어와 글을 보급한다면 성공할 가능성이 있지 않을가? 형제민족에게 우리 글을 보급한다는것 자체가 큰산을 옮기려는것처럼 말도 안되는 소리로 들릴수도 있겠지만 우공처럼 꾸준히 노력한다면 전혀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물론 한어와 한문을 자기민족의 언어와 문자처럼 받아들여 사용하고있는 회족이나 만족 같은 소수민족들에게는 우리 말과 우리글의 보급이 불가능할지 모른다. 하지만 자기 민족의 언어와 문자가 없는 소수민족중에 우리 언어와 글에 호감을 가지게 될 소수민족이 꼭 있을것이다.   물론 어렵고 힘들고 장애도 많고 실패도 있을수 있다. 문자가 없는 소수민족이라고 해도 중국의 공통문자인 한자를 받아들이는것처럼 그렇게 쉽게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을것이다. 그들에게 타민족인 우리 글의 보급은 배타성이 강할것이다. 하지만 첫술에 배부를수는 없는 법. 장애에 부딪칠 때마다 한삽 한삽 파서 옮기느라면 종당에는 길이 열릴것이다.   중국도 국가차원에서 중국어국외보급을 위해 공자학원을 추진하고있고 한국도 한글해외보급을 추진하고있다. 한류열풍과 한국기업들의 해외진출성공에 힘입어 한글에 대한 외국인들의 관심도 높아지자 한국의 포도학사 등이 해외에 한국어보급과 한글세계화를 위해 몽골, 윁남(베트남), 캄보쟈(캄보디아), 아프리카 국가 등 100여개 나라에 한글학교설립추진을 계획중이라고 한다.   우리도 한류열풍을 빌어 우리 글의 보급을 추진해야 한다. 우선 보급한다는 마음보다 형제민족에게 우리 글을 홍보한다는 차분한 자세를 가져야 한다. 무엇보다도 형제민족들과의 공감, 소통이 선행돼야 한다. 대화를 통해 친선을 도모하고 상대방의 민요와 우리 민족의 도라지, 아리랑 등 민요를 교류하며 우리 글은 배우기 쉽고 빨리 배울수 있으며 사용하기 편리하다는것을 홍보해야 한다. 우리 글이 우수하고 과학적이고 론리적인 문자라는 사실에 공감하게 될 때 쯤이면 우리 글 보급을 추진할 시기가 성숙되였다고 생각해도 무방할것이다. 그러면 이제부터 슬슬 “유치원생도 쉽게 배울수 있는 글을 배워 우리 글에 당신들의 문화를 홍보하면 조선족뿐만아니라 조선, 한국에도 전파를 탈수 있다”고 상대방의 귀가 솔깃하도록 얘기해주어야 한다.   그 정도까지 되였다고 해도 성공했다고 볼수 없다. 어쩌면 거기서부터 시작이 될수도 있고 넘어야 할 산이 첩첩 물이 겹겹일수 있다. 하지만 저 너머에는 꽃향기 풍기는 새 마을이 나타날것임을 믿어야 한다.   형제민족에게 우리 글을 보급한다는것 자체가 우둔한 발상일수도 있다. 하지만 우둔한것이 범 잡는다는 말이 있지 않는가?    
121    시골 창녀/명시감상 댓글:  조회:7872  추천:11  2014-02-05
시골 창녀 —한국 제7회 웹진 시인광장 선정2014년    “올해의 좋은 시” 상 수장작 김이듬     수상시인 김이듬시인       진주에 기생이 많았다고 해도   우리 집안에는 그런 여자 없었다 한다   지리산 자락 아래 진주 기생이 이 나라 가장 오랜 기생 역사를 갖고 있다지만   우리 집안에 열녀는 있어도 기생은 없었단다   백정이나 노비, 상인 출신도 없는 사대부 선비 집안이었다며 아버지는 족보를 외우신다   낮에 우리는 촉석루 앞마당에서 진주교방굿거리춤을 보고 있었다   색한삼 양손에 끼고 버선발로 검무를 추는 여자와 눈이 맞았다     집안 조상 중에 기생 하나 없었다는 게 이상하다   창가에 달 오르면 부푼 가슴으로 가야금을 뜯던 관비 고모도 없고   술자리 시중이 싫어 자결한 할미도 없다는 거   인물 좋았던 계집종 어미도 없었고   색색비단을 팔러 강을 건너던 삼촌도 없었다는 거   온갖 멸시와 천대에 칼을 뽑아들었던 백정 할아비도 없었다는 말은   너무나 서운하다   국란 때마다 나라 구한 조상은 있어도 기생으로 팔려간 딸 하나 없었다는 말은 진짜 쓸쓸하다     내 마음의 기생은 어디서 왔는가   오늘밤 강가에 머물며 영감(靈感)을 뫼실까 하는 이 심정은   영혼이라도 팔아 시 한 줄 얻고 싶은 이 퇴폐를 어찌할까   밤마다 칼춤을 추는 나의 유흥은 어느 별에 박힌 유전자인가   나는 사채이자에 묶인 육체파 창녀하고 다를 바 없다     나는 기생이다 위독한 어머니를 위해 팔려간 소녀가 아니다 자발적으로 음란하고 방탕한 감정 창녀다 자다 일어나 하는 기분으로 토하고 마시고 다시 하는 기분으로 헝클어진 머리칼을 흔들며 엉망진창 여럿이 분위기를 살리는 기분으로 뭔가를 쓴다     다시 나는 진주 남강가를 걷는다 유등축제가 열리는 밤이다 취객이 말을 거는 야시장 강변이다 다국적의 등불이 강물 위를 떠가고 떠내려가다 엉망진창 걸려있고 쏟아져 나온 사람들의 더러운 입김으로 시골 장터는 불야성이다     부스스 펜을 꺼낸다 졸린다 펜을 물고 입술을 넘쳐 잉크가 번지는 줄 모르고 코를 훌쩍이며 강가에 앉아 뭔가를 쓴다 나는 내가 쓴 시 몇 줄에 묶였다 드디어 시에 결박되었다고 믿는 미치광이가 되었다     눈앞에서 마귀가 바지를 내리고   빨면 시 한 줄을 주지   악마라도 빨고 또 빨고, 계속해서 빨 심정이 된다   자다가 일어나 밖으로 나와 절박하지 않게 치욕적인 감정도 없이 커다란 펜을 문 채 나는 빤다 시가 쏟아질 때까지   나는 감정 갈보, 시인이라고 소개할 때면 창녀라고 자백하는 기분이다 조상 중에 자신을 파는 사람은 없었다 ‘너처럼 나쁜 피가 없었다’고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펜을 불끈 쥔 채 부르르 떨었다   나는 지금 지방축제가 한창인 달밤에 늙은 천기(賤技)가 되어 양손에 칼을 들고 춤추는 것 같다     (웹진 『시인광장』 2013년 6월호 발표)                                                                           선정 이유      한국 현역시인들의 참여와 선택      2014 「올해의좋은시상」 본선에 진출한 10편의 시를 놓고 심사에 들어갔다. 전년도와 마찬가지로 시인광장이 정한 원칙에 의해 전년도 수상자인 김신용과 편집위원인 최형심을 제외한 김사인 김소연 김행숙 신용목 김이듬 김중일 박연준 김두안의 작품이 대상이었다. 심사위원들의 자유로운 기준과 숙고의 선택으로 각자 3편을 고른 다음 투표한 결과 일차에서는 김사인 시인 2표, 김소연 시인 2표, 김이듬 시인 2표, 김행숙 시인 2표를 획득했다. 이는 심사위원들의 시선이 겹친 시인과 펼쳐진 시인이 다양하다는 뜻이었다. 위 시인들의 작품을 다시 읽고 2차 투표를 한 결과 김사인 시인 2표 김이듬시인 2표로 좁혀졌다. 이 부분에서 심사위원들의 검토와 숙고가 다시 이어지고 토의결과 3차에서는 단일합의로 김이듬 시인의 「시골 창녀」로 결론을 냈다.   다른 심사위원들이 처음 선정한 시편들의 이유와 마찬가지로 선자는 처음에 김두안의 「환월幻月」, 김사인의 「김태정」, 김이듬의 「시골 창녀」를 주목했다. 그러나 2차와 3차를 거쳐 마지막까지 남은 「김태정」과 「시골 창녀」를 검토하면서 이 두 작품이 많은 시인들의 관심과 또 선자들의 시선을 끈 이유를 생각하게 되었다. 이 두 작품은 시의 형식적 태도에서는 대척점에 있다. 그러나 서사를 끌고 가는 호흡과 긴 주제에 대한 시적 진실성은 양자가 공히 공유하고 있는 우수한 작품들이다.   모든 시인들이 참여하고 쳐다보고 있는 이 상의 본질과 목표에 좀 더 접근하는 시가 어떤 시인가를 고민했다. 선자들은 김이듬의 「시골 창녀」가 우리 시단에 좀 더 활력을 불러오리라는데 동의하고 일치된 의견으로 「시골 창녀」를 2014 올해의 좋은시 상으로 결정하기로 했다.   끝까지 선방한 김사인의 「김태정」에 아쉬움을 표하며 김이듬 시인에게 축하한다. 이 상은 한국 현역시인들의 참여와 선택으로 이루어진 상이고 선자들은 그 과정에서 대행을 했을 뿐이다. 그러므로 수상자는 다른 문학상과는 성격이 다른 이 상의 공정성과 그 명예에 자부심을 가져도 좋다. 이 말은 10선에 오른 다른 작품들에게도 해당된다. 선자들이 달랐다면 그 작품들이 수상작이 되었을 수도 있었을 터이므로.        김백겸 (시인, 웹진 시인광장 主幹)     1953년 대전에서 출생. 충남대학교 경영학과와 경영대학원 졸업. 1983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기상예보〉가 당선되어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 『비를 주제로한 서정별곡』, 『가슴에 앉힌 산 하나』, 『북소리』, 『비밀 방』, 『비밀정원』 등과 시론집 『시적 환상과 표현의 불꽃에 갇힌 시와 시인들』,『시를 읽는 천개의 스펙트럼』, 『시의 시뮬라크르와 실재(實在)라는 광원(光源)』이 있음. 현재 ‘시힘’,‘화요문학’  동인이며 웹진 『시인광장』 主幹. 한국원자력연구원 근무. 대전시인협회상, 충남시인협회상 수상.                선정 이유    감정의 긴장 과정, 고조과정, 그리고 완결       작년 한 해 시단의 특징적인 현상 가운데 하나는 시가 무척이나 길어졌다는 것이다. 왜 그렇게들 길게 쓰는지, 이유는 각기 다르겠지만 어떻게 하다보니 그것이 어떤 공통적 수렴점이 된 것 같다. 하지만 그런 산문적인 시들로서 아주 선연한 감동을 주는 시들을 몇 편 만나지 못한 것을 보면 시의 이 장형화를 마냥 반갑게 마주대할 수만은 없을 것 같다. 우리 시에서 이런 장형화는 시적인 것과 산문적인 것의 구별점에 대해서, 시적 언어의 선택과 집중이라는 문제에 대해서, 또 조사 처리, 어미 처리 같은 데서의 섬세한 형식상의 문제들애 대해서도 이유를 제시해야 하는 난점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결코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할 수 없다. 이렇게 일반화된 장형화는 시의 타락의 징후다. 긴장의 이완을 땜질하는 장광설일 수도 있다.   김이듬 시인의 '시골 창녀'나 김사인 시인의 '김태정'은 비교적 긴 시들임에도 작년 한 해 동안 급격히 증가된 장형화된 시들의 단점을 공유하지 않으려는 자의식을 비교적 잘 갖추고 있는 시들이라고 생각된다.   '시골 창녀'는 여성 시인 자신일 수 있는 시적 화자의 마음의 풍경을 연을 바꾸어가며 리듬이 달라지는 '드라마' 속에서 극적으로 펼쳐내고 있는 시다. '김태정'은 한 아름답게 살다 세상을 떠난 한 여성 시인의 모습을 반추하는 여러 각도를 보여주는 시로서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생각하게 하는 시다. 둘 다 각기 다른 미덕을 갖추고 있으나, 그 방향이 다른데, 앞의 것이 화자 자신의 여성 시인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에 대한 자의식 쪽으로 파고 들어간다면, 뒤의 것은 화자가 관찰적, 회고적인 시각으로 한 여성 시인의 인생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여기서 '시골 창녀'를 '김태정'보다 선호하게 된 연유를 말한다면, 긴 시가 처음부터 끝까지 그 몸체를 지탱할 수 있는 리듬과 그 색조의 변화를 '시골 창녀' 쪽이 더 기술적으로 처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기술은 단지 기술이 아니다. 그렇게 해서 '시골 창녀'는 어떤 '모노드라마'의 '대단원'의 막을 내릴 수 있게 해준다. 감정의 긴장 과정, 고조과정, 그리고 완결이 있다.     방민호 문학평론가(시인, 서울대교수)   1965년 충남 예산에서 출생. 서울대학교 국문과 및 同 대학원 졸업. 1994년 제1회 《창작과 비평》 신인평론상을 수상하며 평론 활동 시작.  2000년 《현대시》를 통해 시단 등단. 저서로는 비평집 『비평의 도그마를 넘어』와 『문명의 감각』 등이 있음. 현재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 中.                 선정 이유    기존 질서에 대한 도전과 우리의 선입견을 뒤집는 충격    본심에 올라온 10편 중에서 작년 수상자인 김신용 시인의 시와 『시인광장』 편집장인 최형심 시인의 시를 제외하고 나머지 8편을 읽었다. 모두 예심에서 뛰어난 역량과 장기를 인정받고 올라온 작품들이고, 또 그간 여러 작품들을 통해서도 독특한 지평을 넓혀온 시인들의 작품이었기에, 솔직히 나는 이들 중 어느 작품이 ‘올해의 좋은 시’로 선정된다 해도 수상자격으로 충분하리라 여겼다.   1차 투표에 나는 김사인, 김소연, 김행숙 시인의 작품을 추천하였다. 김사인 시인의 ‘김태정’은 가난하게 살다간 한 인물을 그리면서 추념 보다는 생전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현시하며 그 아래 깔린 외로움을 환하게 비춰내고 있다. 김소연 시인의 ‘장남감의 세계’는 현재의 시간과 과거의 시간이 겹치면서도 그 틈이 어긋나 결코 같은 시간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인식론적으로 보여준다. 김행숙의 ‘옥토정기 찾기’는 ‘빨간약’이라는 대상을 기점으로 우리 생이 단순하게 정의될 수 없다는 점을 활달한 상상을 통해 제시하고 있다.   1차 투표에서 수상자가 결정이 되지 않아 다시 2차 투표가 실시되었으나, 이것으로도 최종 수상자가 나오지 않자 3차 투표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나는 김이듬 시인의 ‘시골 창녀’를 다시 주목하기로 했다. 다른 심사위원이 계속 그를 추천하는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내가 이 작품을 처음 추천하지 않은 이유는 지나친 산문성과 요설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작품이 지니고 있는 역사적 상상력의 신선함, 그러면서도 기존 질서에 대한 도전과 우리의 선입견을 뒤집는 충격은 요즘 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 납득이 갔다. 그래서 나도 3차 투표에서 김이듬 시인의 작품을 ‘올해의 좋은 시’ 수상시로 선정하는데 동의했다.   김이듬 시인에게 마음 깊이 축하의 말씀을 전한다. 그리고 아쉽게 탈락한 분들에게도, 모두 우리 시단이 뽑은 올해의 가장 멋진 작품들이라는 점을 환기하면서, 더불어 축하드린다.       정한용(시인, 문학평론가)      충주에서 출생. 2000년 시작하여 현재 80여명의 회원을 가진 인터넷 문학동인 빈터 대표. 2003년 미국 아이오와대학교 국제창작 프로그램 및 2011년 코로라도 Art Ranch residency 프로그램 참여. 2012년 만해문학상과 천상병시상 수상. 다섯 권의 시집 『얼굴 없는 사람과의 약속』,『슬픈 산타 페』, 『나나 이야기』,『흰 꽃』, 『유령들』과 두 권의 평론집 『지옥에 대한 두개의 보고서』와『울림과 들림』이 있음. 현재 『시인광장』 편집위원.   웹진 시인광장 【Webzine Poetsplaza  SINCE 2006】                   수상 소감   수상가옥은 젖었으나    정결케 하는 한 가지 방법, 신을 향해 기도할 것, 다른 사람들이 모르게 은밀히 기도할 뿐만 아니라,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 기도할 것. 죽은 이들에 대한 경건함, 존재하지 않는 것을 위하여 무엇이든 다할 것. -『중력과 은총』, 시몬 베유       수상 소식을 들었다, 그저께 진주에서 청주 가는 시외버스 안에서. 장례식장으로 가는 길이었다. 평소 관혼상제에 무심한 내가 1월 중순 김진완 시인 모친상 조문을 시작으로 일주일 사이 세 곳에 문상을 갔다. 이상하게 성급히 움직였다. 자살한 사나이는 목재 나이테 분석 전문가였다. 그의 영정 아래 흰 국화를 놓았다. 그 순간, 그토록 가까우며 동시에 가장 먼 곳을 향해 나는 인사했다.     시는 죽음과 같다. 시는 누구에게나 온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나를 둘러싸고 있다. 시를 쓸 때 나는 미래와 단절된다. 영원한 비극성에 끌리지 않고 순수한 결정체나 정신의 일보전진도 꾀하지 않는다. 누가 보든 안 보든 흐느끼는 누군가 나타난다. 퍼소나라고 하자. 아까는 어린 백정이 등장했다. 그의 온몸은 피범벅이 된다. 언어의 근육, 이런 거 모른다. 그는 털 뽑고 껍질 벗긴 살점을 저울에 다느라 바쁘다. 쳐내도 움직이는 대가리를 안고 발라놓은 수북한 뼈들 사이에서 춤을 추기도 한다. 나는 그 어린 백정 퍼소나와 다투었다. 자기투쟁, 자기혁명, 뭐 이런 거 모른다. 다소 정결해질 뿐. 아무튼 나는 싸운다. 무수한 나와 사물들, 말과 침묵과 욕망들과……     기차 타고 여행하는 도중에 수상소식을 접했다면, 그 별안간 떨어진 분에 넘치는 희보(喜報)로 객실 통로를 뛰어다니며 춤을 췄을지도 모른다. 수상은 통로이자 장애물이다. 수상시인은 물 아래 그림자 수상가옥에 입성한다. 여보게! 낚시 잘 되나? 몇 마리나 잡았는가? 지나치게 빛나서 흐릿해 보이는, 문단이라는 그물에 걸리지 않는 문청 피라미(被羅美), 악어(惡語)들아! 난 날름 들어간다. 너희들은 바깥에서 전선을 가다듬기 바란다. ‘최고작’ ‘수상작’ 등을 만드는 시스템에 저항해라. 여기저기 폭탄상금을 싣고 내달리는 시 카니발 광란열차에 뛰어올라 비상 브레이크를 당겨다오.     천만다행 내 시는 덜 빛났다. 심지어 비루하고 무식하며 품격 없는 시를 뽑아주신 동료시인들과 심사위원님들의 무모와 불온, 그 훌륭함에 놀라울 따름이다. 믿기지 않았지만 나는 기절초풍할 정도로 감격했고 감사한다. 구차하게 덧붙인다면, 시를 잘 쓰는, 내가 사랑하는 몇몇 시인에게 미안하다.       김이듬 시인     1969년 경상남도 진주에서 출생. 부산대 독문과 졸업. 경상대 국문과에서 박사학위 취득. 2001년 계간 《포에지》(나남출판사)로 등단. 네 권의 시집『별 모양의 얼룩』(2005. 천년의시작)『명랑하라 팜 파탈』(2007. 문학과지성사)『말할 수 없는 애인』(2011. 문학과지성사)『베를린, 달렘의 노래』(2013. 서정시학)와 장편소설『블러드 시스터즈』(2011. 문학동네) 출간. 제1회 시와세계작품상(2010)과 제7회 김달진창원문학상(2011), 제7회 웹진 시인광장 올해의좋은시상(2014) 수상. 2012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파견작가로 선정되어 독일베를린자유대학에서 한 학기 간 생활. 현재 경상대 출강 중.                       시골 창녀 / 김이듬        진주에 기생이 많았다고 해도   우리 집안에는 그런 여자 없었다 한다   지리산 자락 아래 진주 기생이 이 나라 가장 오랜 기생 역사를 갖고 있다지만   우리 집안에 열녀는 있어도 기생은 없었단다   백정이나 노비, 상인 출신도 없는 사대부 선비 집안이었다며 아버지는 족보를 외우신다   낮에 우리는 촉석루 앞마당에서 진주교방굿거리춤을 보고 있었다   색한삼 양손에 끼고 버선발로 검무를 추는 여자와 눈이 맞았다     집안 조상 중에 기생 하나 없었다는 게 이상하다   창가에 달 오르면 부푼 가슴으로 가야금을 뜯던 관비 고모도 없고   술자리 시중이 싫어 자결한 할미도 없다는 거   인물 좋았던 계집종 어미도 없었고   색색비단을 팔러 강을 건너던 삼촌도 없었다는 거   온갖 멸시와 천대에 칼을 뽑아들었던 백정 할아비도 없었다는 말은   너무나 서운하다   국란 때마다 나라 구한 조상은 있어도 기생으로 팔려간 딸 하나 없었다는 말은 진짜 쓸쓸하다     내 마음의 기생은 어디서 왔는가   오늘밤 강가에 머물며 영감(靈感)을 뫼실까 하는 이 심정은   영혼이라도 팔아 시 한 줄 얻고 싶은 이 퇴폐를 어찌할까   밤마다 칼춤을 추는 나의 유흥은 어느 별에 박힌 유전자인가   나는 사채이자에 묶인 육체파 창녀하고 다를 바 없다     나는 기생이다 위독한 어머니를 위해 팔려간 소녀가 아니다 자발적으로 음란하고 방탕한 감정 창녀다 자다 일어나 하는 기분으로 토하고 마시고 다시 하는 기분으로 헝클어진 머리칼을 흔들며 엉망진창 여럿이 분위기를 살리는 기분으로 뭔가를 쓴다     다시 나는 진주 남강가를 걷는다 유등축제가 열리는 밤이다 취객이 말을 거는 야시장 강변이다 다국적의 등불이 강물 위를 떠가고 떠내려가다 엉망진창 걸려있고 쏟아져 나온 사람들의 더러운 입김으로 시골 장터는 불야성이다     부스스 펜을 꺼낸다 졸린다 펜을 물고 입술을 넘쳐 잉크가 번지는 줄 모르고 코를 훌쩍이며 강가에 앉아 뭔가를 쓴다 나는 내가 쓴 시 몇 줄에 묶였다 드디어 시에 결박되었다고 믿는 미치광이가 되었다     눈앞에서 마귀가 바지를 내리고   빨면 시 한 줄을 주지   악마라도 빨고 또 빨고, 계속해서 빨 심정이 된다   자다가 일어나 밖으로 나와 절박하지 않게 치욕적인 감정도 없이 커다란 펜을 문 채 나는 빤다 시가 쏟아질 때까지   나는 감정 갈보, 시인이라고 소개할 때면 창녀라고 자백하는 기분이다 조상 중에 자신을 파는 사람은 없었다 ‘너처럼 나쁜 피가 없었다’고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펜을 불끈 쥔 채 부르르 떨었다   나는 지금 지방축제가 한창인 달밤에 늙은 천기(賤技)가 되어 양손에 칼을 들고 춤추는 것 같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영감(?)을 모신다는 점에서 시인과 기생은 닮았습니다. 영혼을 파느냐 몸을 파느냐 하는 것만 다를 뿐 자신의 일부를 판다는 점도 닮았습니다. 그 대가로 사랑을 얻지만, 밤마다 몸과 마음이 춤을 추도록 하기 위해서 약을 빨든 술을 빨든 무언가를 빨아야 한다는 것 역시 닮았습니다. 아마도 시인과 창녀는 공통의 조상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신에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신전에서 몸을 팔던 고대 신녀들, 혹시 그들이 둘의 공통 조상은 아닐까요?   - 시인 최형심         정말 순결을 강조하는 한국... 진실된 고백과 인정이야말로 순결로 가는 첫걸음이라고 생각해요. 시가 참 뜨겁네요.   선천적으로 감정에 헤프기는 시인만큼이나 독자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둘 다 삶을 살아가는 행위인만큼 시작과 감상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믿지만 정말 고통스러울 게 분명한 창작의 고통을 기꺼이 감수해낼 정도로 미쳐버리고 퇴폐해버린 시인이야말로 진짜배기 기생인건가요, 아니면 체통있는 집안의 유일한 진짜배기 사람일까요.   하하... 시인도 독자도 감정에 헤프죠. 창작의 고통을 위해 몸도 영혼도 버린 시인이야말로 진짜배기겠죠. 펜만 쥐었다고 다 시인인가요... 라디비나 네 선생님 두려워하지 않으려고 조금씩 벗어던지고 있습니다,,, 정성스러운 가슴이 뜨거워지는 시죠.   싯귀 한 줄 얻기가 얼마나 어려운 줄 잘 알겠습니다. 그저 적당한 단어 하나 어물쩍 찍어 붙이려던 내 감정이 부끄럽습니다.   쉽게 쓸 수 있는 시라면 거기에 얼마나 대단한 진실이 담겨있겠습니까? 읽고 이해하기 쉬운 시라도 쓸 때는 고통스러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치부까지 온전히 토해내야 하는 용기가 필요하겠군요. 거침없는상상의 끝이 없네요 이 시도 사실 거침없죠. 누구나 자신을 포장하고 싶은 게 본능인데, 사실 나 창녀나 다름없어,라고 고백하는 시인의 자세가 참 훌륭합니다.   부끄러움과 솔직함을 정말 절묘하게 섞어낸 것 같아요. 아무리 글 잘 쓰는 이라도 아름다운 문장들이 막 툭툭 튀어나오는 게 아님을 또 새삼...   김이듬 시인은 솔직하고 대범한 작가죠. 그래도 그 솔직함이 다순한 외설이 아니라 깊이와 아름다움을 가진 것이기에 많은 사랑을 받는 것 같습니다.   시 김태정 김사인       1.   울 밑의 봄동이나 겨울 갓들에게도 이제 그만 자라라고 전해주세요   기둥이며 서까래들도 그렇게 너무 뻣뻣하게 서 있지 않아도 돼요 좀 구부정하세요   쪽마루도 그래요 잠시 내려놓고 쉬세요   천장의 쥐들도 대거리하는 사람 이제 없다고 너무 외로워 마세요   자라는 이빨이 성가시겠지만 어쩌겠어요   살 구부러진 검정 우산에게도 이제 걱정 말고 편히 쉬라고 해주세요   귀 어두운 옆집 할머니와 잘 지내라고 전해주세요   더는 널어 말릴 양말도 속옷 빨래도 없으니 늦여름 햇살들께서도 고추 말리는 데나 거들어드리세요     해남군 송지면 해원리 서정리 미황사 앞     2.     죽는다는 일은 도데체 무슨 일인가요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요   버뮤다 삼각지대 같은 안 보이는 무슨 깔때기 같은 것이 있어   그리로 내 영혼은 빨려나가는 걸까요   아니면 미닫이를 탁 닫듯이 몸을 털썩 벗고 영혼은   건넌방으로 드는 걸까요     아이들에게 말해주세요   마당에서 굴렁쇠도 그만 좀 돌리라고   어지럽다고     3.   슬픔 너머로 다시 쓸쓸한   솔직히 말해 미인은 아닌   한없이 처량한 그림자만 덮어쓰고 사람 드문 뒷길로만 피하듯 다니 던   소설공부 다니는 구로동 노동자 공아무개 젖먹이를 도맡아 봐주던   순한 서울 여자 서울 가난뱅이   나지막한 언덕 강아지풀 꽃다지의 순한 풀밭   응, 나도 남자하고 자봤어, 하더라는   그 말 너무 선선하고 환해서   자는 게 뭔지 알고나 하는 소린지 되려 못 미덥던   눈길 피하며 모자란 사람처럼 웃기나 잘하던   살림솜씨도 음식솜씨도 별로 없던     태정 태정 슬픈 태정   망초꽃처럼 말갛던 태정       4.   할머니 할아버지 곁에서 겁많은 귀뚜라미처럼 살다 갔을 것이다   길고 느린 시간이 천천히 흘러가는 것을 마루 끝에 앉아 지켜보았을 것이다   한달에 5만원도 안 쓰고 지냈을 것이다   휴대폰도 인터넷도 없이   시를 써 장에 내는 일도 부질없어   그저 조금만 먹고 거북이처럼 조금만 숨 쉬었을 것이다   얼찐거리다 가는 동네 개들을 무심히 내다보며   그 바닥의 초본 식물처럼 엎드려 살다 갔을 것이다     이제 더는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을   그 집 헐어진 장독간과 경첩 망가진 부엌문에게 고장난 기름보일러에게   이제라도 가만히 조문해야 한다   새삼 슬픈 시늉은 할 건 없겠으나,           김사인   시인. 문학평론가. 1956년 충북 보은 태생. 서울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했고, 현재 동덕여자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 1982년 ‘시와 경제’의 창간동인으로 참여하며 시쓰기를 시작했다. 김사인의 시들은 대체적으로 형식면에서는 매우 균제된 느낌을 주지만 치열한 내적 긴장을 함축하고 있다. ‘무수히 들끓는 감각의 반란을 통제하기 위한 시인의 혹독한 극기의 산물’이라는 비평가의 지적이 설득력이 있다. 이것은 시대와의 불화로 몸살을 앓는 시인 자신과의 치열한 싸움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그리고 시의 정신과 감성 양면에서 자기 자신에 대한 철저한 엄격성을 지키고자하는 의지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1987년 제6회 신동엽창작기금을 받았고, 2005년 제20회 현대문학상, 2006년 제14회 대산문학상 시부문 수상, 2007년 제1회 서정시학 작품상을 수상한 바 있다. 시집으로는 『밤에 쓰는 편지』(청사, 1987), 『가만히 좋아하는』(창비, 2006)이 있고 신철균과 함께 사진시집인 『따뜻한 밥 한 그릇』(큰나, 2006) 을 펴내기도 했다. 이외에 임동확과 함께 5․18 20주년 기념 시선집인 『꿈 어떤 맑은 날』(이룸, 2000)을 펴냈으며 『박상륭 깊이읽기』(문학과지성사, 2001)를 엮어내기도 했다.       물푸레나무                            김태정           물푸레나무는   물에 담근 가지가   그 물, 파르스름하게 물들인다고 해서   물푸레나무라지요   가지가 물을 파르스름 물들이는 건지   물이 가지를 파르스름 물올리는 건지   그건 잘 모르겠지만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어스름   어쩌면 물푸레나무는 저 푸른 어스름을   닮았을지 몰라 나이 마흔이 다 되도록   부끄럽게도 아직 한 번도 본 적 없는   물푸레나무, 그 파르스름한 빛은 어디서 오는 건지   물속에서 물이 오른 물푸레나무   그 파르스름한 빛깔이 보고 싶습니다.   물푸레나무빛이 스며든 물   그 파르스름한 빛깔이 보고 싶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이 세상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빛깔일 것만 같고   또 어쩌면   이 세상에서 내가 갖지 못할 빛깔인 것만 같아   어쩌면 나에게   아주 슬픈 빛깔일지도 모르겠지만   가지가 물을 파르스름 물들이며 잔잔히   물이 가지를 파르스름 물올리며 찬찬히   가난한 연인들이   서로에게 밥을 덜어주듯 다정히   체하지 않게 등도 다독거려주면서   묵언정진하듯 물빛에 스며든 물푸레나무   그들의 사랑이 부럽습니다   김태정   *김태정(1963~2011) 서울에서 태어나 2011년 9월 6일 해남에서 세상을 떠났다. 시집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창비 2004) 한권을 남겼다. 생전에 모 문화재단에서 5백만원을 지원하려 하자, 쓸 데가 없노라고 한사코 받지 않은 일이 있다. 그의 영가는 미황사에서 거두어주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가끔 시인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가 생가해봅니다. 세속적인 욕심 부리지 않고 자연과 하나 되어 조용하게 사는 것이 시인답게 살아가는 것이겠지요? 말이 쉽지 현대사회에서 그렇게 사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래도 진짜로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어서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요. 시인 김태정은 온몸으로 시인다운 삶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시인 최형심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어린 처녀의 외간 남자가 되어   김사인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어린 그 처자 발그라니 언 손에 얹혀 나 인생 탕진해버리고 말겠네 오갈 데 없는 그 처자 혼자 잉잉 울 뿐 도망도 못 가지 그 처자 볕에 그을어 행색 초라하지만 가슴과 허벅지는 소젖보다 희리 그 몸에 엎으러져 개개 풀린 늦잠을 자고 더부룩한 수염발로 눈꼽을 떼며 날만 새면 나 주막 골방 노름판으로 쫓아가겠네 남는 잔이나 기웃거리다 중늙은 주모에게 실없는 농도 붙여보다가 취하면 뒷전에 고꾸라져 또 하루를 보내고 '나 갈라네' 아무도 안 듣는 인사 허공에 던지고 허청허청 별빛 지고 돌아오겠네 그렇게 한두 십년 놓아 보내고 맥없이 그 처자 몸에 아이나 서넛 슬어놓겠네 슬어놓고 나 무능하겠네 젊은 그 여자 혼자 잉잉거릴 뿐 갈 곳도 없지 아이들은 오소리 새끼처럼 천하게 자라고 굴 속같이 어두운 토방에 팔 괴고 누워 나 부연 들창 틈서리 푸설거리는 마른 눈이나 내다보겠네 쓴 담배나 뻑뻑 빨면서 또 한 세월 보내겠네 그 여자 허리 굵어지고 울음조차 잦아들고 두 눈에 파랗게 불이 올 때쯤 나 덜컥 몹쓸 병 들어 시렁 밑에 자리 보겠네 말리는 술도 숨겨놓고 질기게 마시겠네 몇 해고 애를 먹어 여자 머리 반쯤 셀 때 마침내 나 먼저 숨을 놓으면 그 여자 이제는 울도 웃도 못하리 나 피우던 쓴 담배 따라 피우며 못 마시던 술이나 배우리 욕도 배우리 이만하면 제법 속절없는 사랑 하나 안 되겠는가 말이 될는지는 모르겠으나.                     인절미 김사인       외할머니 떡함지 이고 이 동네 저 동네 팔러 가시면 나는 잿간 뒤 헌 바자 양지 쪽에 숨겨둔 유릿조각 병뚜껑 부러진 주머니칼 쌍화탕병 손잡이 빠진 과도 터진 오자미 꺼내놓고 쪼물거렸다 한나절이 지나면 그도 심심해 뒷집 암탉이나 애꿎게 쫓다가 신발을 직직 끈다고 막내 이모한테 그예 날벼락을 맞고 김치가 더 많은 수제비 한 사발 눈물 콧물 섞어서 후후 먹었다 스피커에서 따라 배운 ‘노란 사쓰’ 한 구절을 혼자 흥얼거리다 아랫목에 엎어져 고양이잠을 자고 나면 아침인지 저녁인지 문만 부예 빨개진 한쪽 볼로 무서워 소리치면 군불 때던 이모는 아침이라고 놀리곤 했다 저물어 할머니 돌아오시면 잘 팔린 날은 어찌나 서운한지 함지에 묻어 남은 고운 콩고물 손가락 끝 쪼글토록 침을 발라 찍어머고 또 찍어먹고   아아 엄마가 보고 싶어 비어지는 내 입에 쓴 듯 단 듯 물려주던 외할머니 그 인절미 용산시장 지나다가 초라한 좌판 위에서 만나네 웅크려 졸고 있는 외할머니 만나네                -김사인 시집 중에서 [출처] 김사인의 '인절미'|작성자 허산재    
120    영국청년과 6년동안 정사 나눈 자희태후 댓글:  조회:7991  추천:1  2014-02-05
영국청년과 6년동안 정사 나눈 자희태후   (번역)   청나라말기 중국을 통치한 자희태후(慈禧太后)와 영국귀족청년의 은밀한 이야기를 담은 회고록 《태후와 나》가 최근에 영문판과 중문판으로 출판됐다. 이 책의 저자는 청나라말기에 영국외교부통역으로 청나라황실을 드나들었던 영국인 에드번드 백하우스남작이다. 《태후와 나》는 저자가 황궁에서 보고 들은 특별한 이야기를 주축으로 하여 저친왕과 군기대신, 후비사이의 은밀한 사랑이야기 및 저자와 자희태후사이에 있었던 6년간의 정사이야기를 담았다. 이 책에서 저자는 주로 29세의 영국귀족청년(저자 본인)과 67세의 자희태후와의 은밀한 사랑이야기를 썼다. 에드번드 백하우스(埃蒙德·巴恪思)는 1873년에 영국 요크의 명문가문에서 출생했다. 남작작위를 물려받고 옥스포드대학을 졸업한 에드번드는 1898에 북경으로 왔다. 그는 영어외에 일어, 라틴어, 로어, 중국어, 만족어, 몽골어 등 여러가지 언어에 정통했기에 영국외교부의 통역을 맡았다. 1903년에 청정부에서는 그를 경사대학당(지금의 북경대학)의 법률과 문학교수로 초빙했다. 1년후에 그는 영국외무 전원으로 되였다. 1944년 1월에 71세의 에드번드 백하우스는 북경에서 사망되였다. 사망되기 1년전에 그는 회고록의 형식으로 유럽에 있을 때의 젊은 시절의 이야기를 기록한 《지나간 일들》과 청나라말기에 중국황실을 드나들면서 경험한 일들을 기록한 《태후와 나》를 썼다. 그러나 전쟁시기이고 내용이 자희태후와의 은밀한 정사를 담은 책이였기때문에 출판되기 어려웠다. 에드번드 백하우스가 사망된후 그의 원고를 도와주었던 스위스의사는 원고를 여러부로 복제하여 영국박물관, 빠리국립도서관, 미국 하부트학원도서관에 전해주었다. 그가 1973년에 사망되자 그의 친구는 원고를 원 저자 에드번드 백하우스가 생전에 공부했던 옥스포드대학도서관에 전해주었다. 2007년에 북경텔레비죤방송국 《과학교육관찰》프로에서 북경고궁박물원도서관 부관장 향사는 처음으로 자희태후가 영국귀족청년과 6년동안 정사를 나누었다고 밝혔다. 북경텔레비죤방송국의 이 보도로 하여 사람들은 영국귀족청년 에드번드 백하우스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가지게 되였다. 《태후와 나》를 번역한 왕소가는 저자 에드번드 백하우스에 대해 감탄하면서 이렇게 소개했다. “저자는 보기 드문 언어천재입니다. 이 책은 영문으로 씌여졌는데 중간에 프랑스어, 라틴어, 로어, 그리스어, 일어, 중국어를 끼워넣었습니다. 더욱 사람을 탄복시키는것은 저자가 여러가지 언어사이에 자유자재로 경전을 인용하여 자연스럽게 전환했으며 여러나라의 력사, 전고, 기문, 일사 등을 아주 재치있게 채택한것입니다. 이 책은 1943년에 씌여졌고 그 시기 저자는 70세의 고령이였습니다. 어떠한 참고자료도 없었고 인터넷과 검색을 할수 없는 당시의 정황에서 전부 기억에 의해 썼다는것은 정말 경탄하지 않을수 없는 일입니다. 물론 이 책을 번역하기 매우 어려웠습니다. 미국편집의 도움을 받아서 먼저 여러가지 언어를 전부 영어로 정리한후 다시 제가 중문으로 번역했습니다.” 에드번드 백하우스는 자희태후가 사망된 2년후인 1910년에 《태후통치아래에서의 중국》이란 책을 펴냈다. 이 책은 독특한 시각으로 독자들에게 중국봉건력사에서 최후로 강권통지를 해왔던 자희태후와 그녀의 통치아래에서 몰락하는 청나라의 부패상을 보여주었다. 에드번드 백하우스가 쓴 《북경궁정회고록》은 학술계의 칭송을 받고있다. 또 그는 20세기초의 학술계에서 중국력사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남긴 괴짜동양학자로 알려져있다. 그는 서방기자들과 접촉하지 않고 조용히 은거해 지낸것으로 하여 더욱 존경을 받았다. 그런데 저자가 사망된후 67년만에 《태후와 나》가 출판되여 물의를 빚었다. 저자는 책에서 자신이 자희태후와 6년동안 맺은 성관계를 상세히 묘사했다. 1835년 11월 29일에 출생한 자희태후는 함풍황제의 비였고 동치황제의 생모였는데 함풍황제가 사망된후 황태후의 신분으로 수렴청정하면서 1861년부터 죽을 때(1908년 11월 15일)까지 대청제국의 실제 통치자로 되였다. 26세때인 1861년 8월에 함풍황제가 사망되자 청상과부로 된 자희태후는 수많은 남자들과 성관계를 맺었다. 최근에 《태후와 나》가 출판되면서 자희태후가 정말로 영국귀족청년과 정사를 가졌을가 하고 이 책의 진실성에 대해 반신반의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이미 1976년에 영국의 저명한 력사학자 휴 트레버 로퍼(休·特雷弗·罗珀)는 《숨겨진 일생: 에드번드 백하우스의 비밀》이란 책을 출판하여 에드번드 백하우스남작을 “계획적이고 조직적으로 증거를 조작해 세상을 속인 인물”이라고 비판했다. 또 그의 작품은 “한 자페증동성련애자의 음란한 상상으로서 허구해낸 억압되고 비틀린 성욕의 최후배설”이라고 질책했다. 하지만 학자들은 한 사람의 견해로 이 책의 모든 가치를 말살한다는것은 음식을 먹다가 목이 멘다고 그 음식을 다시 먹으려 하지 않는것과 같다고 반박했다. 이 책을 번역한 왕소가는 “자희태후와 이 책의 저자와의 정사에 대해 어떻게 리해하는가”하는 기자의 물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책에 언급된 력사재료의 진실성에 대해서는 한마디로 ‘사실이다’거나 ‘거짓이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저자와 자희태후와의 사이에 정사가 있었다는것은 사실이겠지만 책에서 묘사한것처럼 그렇게 빈번하고 그처럼 뜨거웠겠는가 하는것은 알수 없는 일입니다. 이 책에서 광서황제는 자희태후가 보낸 하수인에게 목이 졸려 죽음을 당했고 자희태후는 원세개의 총에 맞아죽었다고 했는데 이와 같은 중대한 사실은 다른 사람한테서 들은대로 썻을수 있기에 사서(史书)와 다를수 있습니다. 하지만 궁정귀족들의 생활에 대한 묘사는 세절이 매우 상세하고 진실하여 꾸며낸것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이 책에는 허구의 성분이 있을수 있지만 저자를 ‘증거를 조작해 세상을 속인 인물’이라고 질책하는것은 공정하지 못한 평가입니다.” 이 책에 60여세의 자희태후의 피부가 20세의 소녀와 같다고 묘사했는데 이는 사실일가? 청나라연구전문가이며 청동릉문물관리처 전임 부주임 우선포는 이렇게 소개했다. “자희태후는 27세에 과부로 되였는데 몸보양에 대해 매우 중시했습니다. 미용술에 대해서는 더욱 중시했습니다. 1902년전후 자희태후의 신변에는 갓 프랑스에서 돌아온 덕령과 용령자매가 있었는데 그녀들은 자희태후의 목욕시중을 들 때 직접 자희태후의 몸을 만져보았는데 몸매가 풍만하고 살결이 아주 곱고 부드러웠다고 했습니다. 덕령은 《어향표묘록》에서 자희태후는 60여세이지만 20세의 소녀와 같았다고 하면서 그야말로 미인이였다고 찬탄했습니다. 덕령은 또 《태후의 화장대》와 《옥체진렬》이란 글에서 자희태후가 진주분을 먹고 닭알흰자위를 바르고 사람젖을 먹는 등 방법으로 피부를 보양하고 얼굴을 아름답게 가꿨다고 썼습니다.” 자희태후가 사람젖을 먹는것으로 얼굴미용을 했다는데 대해 의심하는 견해도 있었지만 우선포는 북경제1력사서류관에서 청나라서류를 읽다가 무의식중에 황궁에서 자희태후에게 젖을 공급한 녀자들의 명단이 적혀있는것을 발견했고 말했다. 덕령은 또 글에서 자희태후가 갓 출산한 젖이 잘 나오는 젊은 녀자들을 황궁에서 거주하게 했는데 밤중에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들렸다고 썼다. 당시 자희태후가 몰래 사생아를 낳았다는 추문도 돌았다. 그전에 이미 자희태후가 15세에 갓 입궁하여 함풍황제를 만나기전에 이미 공친왕과 몰래 정사를 나누었다는 추문이 돌았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동치황제의 신분에도 의문을 가지면서 동치황제는 함풍황제의 친아들이 아니라 자희태후가 공친왕과 사통하여 낳은 사생아라고 인정했다. 야사의 기재에 의하면 자희태후는 영록을 몹시 총애했는데 함풍황제 몰래 두 사람은 경상적으로 사통했다고 한다. 또 자희태후는 수렴청정을 한후에는 공개적으로 영록을 자신의 침대에 불러들여 뜨거운 밤을 보냈다고 한다. 그외에도 자희태후는 잘 생긴 젊은 남자만 보면 궁에 한달씩 묵게 하면서 밤마다 정사를 나누었다고 한다. 이런 사실은 모두 《문진우기(闻尘偶记)》와 같은 야사에 기재되여있다. 야사에는 있고 정사에는 없다고 하여 사실이 아니라고 할수 없다. 자희태후의 음란한 생활이 정사에 기재될 가능성이 매우 적기때문이다. 그외 고궁박물원도서관에서 소장한 자희태후의 사진(1904년에 찍음)을 보면 자희태후가 로년에도 불구하고 의연히 눈동자가 맑고 아름다왔으며 용모가 예뻤다는것을 알수 있다.      
119    영예와 치욕이 엇갈린 사부치의 인생 댓글:  조회:6285  추천:2  2014-02-04
영예와 치욕이 엇갈린 사부치의 인생   (번역)     새 중국이 탄생되여서부터 무수한 혁명가, 정치가, 군사가, 과학가들이 서거된후 유골이 팔보산혁명공동묘지에 안치되였다. 그런데 중국공산당의 력사에서 사부치 한 사람만이 전반생에 공로가 탁월했지만 죽은후 도리여 추도사가 취소되였고 당적이 제거되였으며 유골함이 팔보산혁명공동묘지에서 내쫓기는 치욕을 당했다. 1909년 8월에 호북성 황안현(지금의 홍안) 봉강향의 한 가난한 농민가정에서 태여난 사부치는 어릴 때 부모의 농사일을 도우면서도 부지런히 공부했다. 1927년 11월 13일에 중국공산당이 령도한 황마봉기에 고무된 사부치는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무장투쟁에 참가했다. 사부치는 싸움에서 점차 군사재능을 보여주어 홍군의 련지도원으로부터 퇀정치처 주임, 사정치부 주임, 군정치부 주임으로 승진했다. 30살전에 홍군의 고급장교로 된 사부치는 악예환쏘베트구역을 창립하고 공고하게 하는데 힘썼으며 반포위토벌전투에서도 일정하게 공헌했다. 장국도는1930년대초에 사업을 주최하는 기간에 악예환쏘베트구역에서 “좌경”정책을 실시했다. 내부일군에 대해 심사하는 과정에서만 수많은 홍군간부들이 박해를 받았다. 그 시기에 사부치는 장국도를 바싹 따라 “숙반(肃反)”과정에 맹목적으로 사람을 의심하면서 검은 재료를 만들어 간부들을 심문했다. 그때문에 악예환쏘베트구역의 수많은 간부들이 배척되고 타격받고 강직되였다. 심지어 몇몇 간부들은 억울한 죄로 살해당하기까지 했다. 그런 “공로”로 사부치는 홍군 4방면군 총정치부 조직부장으로 승직되여 인사대권을 장악했다. 물론 사부치가 홍4방면군의 발전에 일정한 공헌을 한것은 사실이다. 그는 홍4방면군의 반포위토벌전투중에서 유격전으로 국민당군을 소멸하였고 부대를 따라 서쪽으로 진군하면서 적지 않은 승전고를 울려 사천군벌무장을 벌벌 떨게 했으며 부대가 좌절을 당했을 때 전사들과 동고동락하면서 정치사상사업을 틀어쥐였다. 그는 장정에 참가하면서 장국도의 로선이 그릇되다는것을 알고 장국도가 분렬하여 따로 중앙을 세우려는것을 반대했고 태악지구에서 8년동안 활동하면서 항일전쟁의 승리와 아군의 발전에 공헌했으며 류백승, 등소평수하의 장군으로 되여 해방전쟁에서 혁혁한 공헌을 세웠다. 건국후 사부치는 중공운남성 당위제1서기, 곤명군구 사령원 겸 정위로 임명되여 운남성의 당정군을 모두 장악했다. 그 시기 사부치는 운남봉기부대의 개편사업을 조직했고 운남의 토지개역을 지도했으며 크고 작은 토비무장을 소멸하여 운남지구의 사회질서와 생산을 회복했다. 그 시기 그의 가장 큰 공헌은 마약금지선전사업을 틀어쥐고 마약밀매조직을 타격하여 운남에서 장기간 마약흡입과 마약밀매현상이 근절되게 한것이다. 사무치는 1955년에 상장계급을 수여받았고 1959년에 공안부 부장, 인민무장경찰부대 사령원 겸 정위로 임명되였으며 1965년에 공안부 부장을 겸하면서 국무원 부총리로 승직했다. 문화대혁명기간에 사부치는 등소평을 비판하는데 앞장섰다. 그는 자신의 직접 상급이였던 등소평에 대해 사정없이 모함하여 강청의 호감을 샀다. 강청의 눈에 든 사부치는 문화대혁명기간에 중앙령도서렬 21위로부터 9위로 상승되였다. 1966년 12월 18일부터 “왕광미특별사건심사소조” 조장을 맡은 사부치는 강청, 강생 등과 결탁하여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이며 국가주석인 류소기를 “미국특무”로 모함하여 타도하는데 앞장섰다. 1968년 9월에 사부치는 조작해낸 류소기의 “죄증재료”를 강청에게 보내주었다. 강청, 강생, 사부치는 “죄증재료”를 “반역자이고 내부간첩이며 로동자역적인 류소기의 죄행에 대한 조사보고”로 고쳤다. 10월 13일부터 31일까지 열인 중국공산당 제8기 확대회의인 12중전회에서 이 보고를 통과시켰다. 그리하여 류소기는 억울하게 당내외 일체직무를 철소당하고 영원히 출당되였다. 사부치는 1967년 2월부터 시작하여 강청, 강생, 진백달 등과 결탁하여 “자산계급복벽역류(후에 2월역류라고 했음)라는 죄명으로 담진림, 진의, 엽검영, 리부춘, 리선념, 사향전, 섭영진 등 로간부들을 무함하고 박해했다. “2월역류”를 비판하면서 4명의 원수와 3명의 부총리가 충격을 받았거나 물러나지 않으면 타도되였다. 게다가 류소기, 등소평, 도주, 하룡이 이미 타도되였고 주덕, 진운이 배척되였으며 류백승은 병으로 몸이 쇠약하여 작용을 발휘할수 없었다. 그리하여 중국공산당 정치국위원중에 모택동, 림표, 주은래, 진백달, 강생 다섯 사람만 남았고 정치국 후보위원은 사부치 한명만 남아있었다. 이렇게 되자 중앙문화대혁명령도소조가 중앙정치국을 대체하는 류례없는 당의 령도기구인 “중앙문화대혁명팽두회의(碰头会)”가 나타났다. 이 “팽두회의”는 중앙문화대혁명령도소조 전체성원인 진백달, 강생, 강청, 장춘교, 요문원외에 주은래, 사부치, 황영승, 오법헌, 엽군, 왕동흥, 온옥성이 렬석했다. 사부치는 로간부들을 타도하는데 앞장섰기때문에 계속 중용되였다. 1970년 4월에 중공중앙에서는 정당건당사업좌담회를 열고 강생, 장춘교, 사부치 세 사람이 소조의 책임지도자로 결정되였다. 림표사건이 발생된후 사부치는 계속 새로운 군사위원 사무회의 성원으로 되였다. 사부치의 사업은 주요하게 공안계통이였는데 그가 공안계통에 조성한 위해는 가장 컸다. 1966년 5월부터 사부치는 공안부 부장의 직권을 리용하여 선후로 313명의 련합공작소조를 북경시공안국에 파견하였다. 그후 그는 북경시공안국의 원 지도부를 자신의 측근들로 갈아치우고 전임 국장과 기타 지도성원들을 반당분자로 몰아 타격했다. 그 바람에 북경시공안국에서는 1600여명이 피해를 입었고 72명이 감옥살이를 하게 되였다. 사부치는 또 강생과 함께 13명의 북경시지도간부를 모함했다. 원 북경시당위 제2서기 류인, 당위서기 등척, 부시장 오함 등은 핍박에 의해 사망되였다. 사부치는 또 반란파들을 선동하여 공안사무를 접수하여 관리하게 했다. 1967년 2월 11일에 북경시공안국은 군사관제를 실행했다. 사부치의 중용을 받고있는 군사관제위원회 부주임 류전신은 군사관제위원회의 실권을 장악한후 사부치의 뜻때로  북경시공안국의 10명의 정부국장과 117명의 정부처장, 분국 국장을 모두 특무, 반역자라고 무함했다. 1968년 4월에 사부치는 북경시공안국 군사관제위원회의 명의로 《구북경시공안국반혁명집단이 미국, 장개석특무와 결탁해 특무간첩활동을 한 일부 정황보고》를 써서 북경시공안국을 장기간 미국, 장개석특무와 결탁하여 간첩활동을 하면서 목숨을 걸고 미국과 장개석에게 충성을 한 반혁명집단이라고 무함했다. 사부치는 보고에서 “북경시공안국의 특무활동은 류등(류소기, 등소평)사령부의 지지를 받았고 “대특무 팽진, 라서경, 류인의 지휘하에 미국과 장개석의 뜻을 받들어 진행되였다”고 억울한 사건을 조작했다. 사부치의 선동과 지지하에 “공안기관, 검찰기관, 법원을 짓부시자”는것이 반란파들의 구호로 되였다. 이렇게 되여 홍위병들이 사람을 때려죽여도 관계하지 못하는 등 전국의 공안기관은 마비상태에 빠졌다. 1970년 12월부터 1971년 2월 11일까지 주은래의 지시에 따라 공안부에서는 제15차 전국공안회의를 열었다. 주은래는 사부치에 대해 엄하게 비판하고 새 중국의 첫 17년의 공안사업을 긍정하면서 절대 대부분의 공안간부들은 좋거나 비교적 좋다고 했다. 주은래의 강화가 전달된후 일부분의 지도간부와 업무골간들은 륙속 공안부에 돌아왔고 공안부도 지방공안기관과 련계와 그들에 대한 업무지도를 회복했다. 그후 사부치는 위암진단을 받으면서 나쁜 일을 계속할수 없게 되였다. 1972년 3월 26일에 사부치는 북경에서 위암으로 사망되였는데 향년 63세였다. 3월 29일에 사부치의 추도회대회가 거행되였는데 천안문, 신화문 등 곳에 그를 애도하는 반기가 내걸렸다. 추도사에서는 사부치의 죽음은 “우리 당과 우리 군의 중대한 손실”이라고 했다. 1978년 12월에 중국공산당 제11기 3중전회의에서 사부치, 강생에 대해 심사했다. 1980년 10월에 중공중앙에서는 강생, 사부치의 반혁명죄행을 전당에 공포하고 두 사람의 “추도사”를 취소함과 동시에 당적을 제명하기로 결정했다. 팔보산혁명공동묘지에 안치되였던 사부치의 유골함도 덮었던 당기를 벗겨서 다른 곳으로 옮겨가게 했다. 1981년 1월 23일에 중화인민공화국 최고인민법원 특별법정판결서 특법자(特法字) 제1호는 사부치를 림표, 강청반혁명집단사건의 16명 주범중의 하나라고 밝혔다.  
118    내가 없어도 세상은 돌아간다 댓글:  조회:6675  추천:8  2014-02-04
내가 없어도 세상은 돌아간다   김희수   어릴 때부터 “모주석만세”, “모주석어록”, “최고지시”를 배우며 자란 나는 그 시기에 모택동이 없으면 세상이 돌아가지 못하는줄로 알았다. 그래서 위대한 령수 모택동이 사망되여 8억(당시의 중국인구)인민들이 통곡할 때 정말로 이러다가 중국이 무너지는게 아닐가? 하는 생각이 들기까지 했다.   그러다가 모택동이 “동무가 사업을 맡아하니 나는 마음이 놓인다(你办事我放心)”고 하면서 후계자로 지명했다는 화국봉이 영명한 령수로 되여 천안문에 오르는것을 보면서 다소 마음이 놓였다. 모주석이 시름을 놓으니 전당이 시름놓고 전군이 시름놓고 전국인민이 시름놓고 나도 시름놓게 된것이였다. 그런데 화주석이 “기본고리를 틀어쥐고 나라를 다스린다(抓纲治国)”는 전략결책인지 정치강령인지를 내놓았지만 신통하지 않아 나라경제가 발전하지 못했고 백성들의 생활도 펴이지 못했다.   그래서 등소평이 나서게 되였다. 등소평은 이름앞에 “위대한”이나 “영명한”을 붙이지 않고 이름뒤에 “만세”를 붙이지 않았지만 개혁개방의 위대하고 영명한 일을 해놓았고 배부른 백성들의 배속에서 만세소리가 나오게 하였다.   지금은 모택동, 화국봉, 등소평도 모두 가버렸고 그들이 없지만 세상은 여전히 돌아가고있다.   일찍이 6국을 통일하고 “3황(三皇)”의 “황”자에 “5제(五帝)의 “제”를 취하여 처음으로 “황제(皇帝)”의 칭호를 사용한 진시황(秦始皇)은 자기가 없으면 세상이 돌아가지 못할것 같아서 천세만세를 누리려고 불로장생약을 애타게 찾았다. 하지만 결국 장생은 커녕 절명하고 말았다.   말 타고 중앙아시아와 유럽을 주름잡으며 서양인들까지 공포에 떨게 했던 칭키스칸(칭기즈칸)이나 유럽의 여러 나라를 말발굽아래에 짓밟으며 유럽제패에 나섰던 나뽈레옹(나폴레옹)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그 거룩한 이름을 력사에 남겼지만 그들이 사라져도 세상은 돌아갔다.   이제 악명을 남긴 독재자들을 보자. 유태인(유대인)을 무참히 학살한 전쟁미치광이 히틀러는 세계제패의 황당한 꿈을 꿨지만 말일이 다가오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에티오피아를 침공해서 부족들을 독가스로 학살하도록 명령한 무솔리니는 후에 광장에서 돌팔매질에 맞아 죽었으며 이라크에서 20여년간 장기집권하면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사담 후세인은 미군에게 잡혀 교수형을 당했고 악명높은 일제의 군 통수권자 도죠 히데키는 전범재판에 끌려가기 싫어서 자살을 했지만 실패하여 나중에 교수형을 당했다.   이들 독재자들은 그 행위로 미루어보아 “내가 없으면 지구는 돌아가지 않을것”이라고 착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들은 자기들이 없으면 세상이 더욱 잘 돌아가는줄을 몰랐을것이다.   지금도 이 세상에는 자기가 없으면 세상이 돌아가지 못하는줄로 알고있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그래서 조그마한 권력이라도 쥐면 언제까지라도 놓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 권력을 내놓으면 다른 사람도 할수 있고 하다보면 더 잘할수도 있는데 말이다.   얼마전에 친척집 결혼잔치에 갔을 때 사돈쪽에서 온 아이 둘이 주고받는 말을 들었던 기억이 새롭다. 처음부터 듣지 않아서 무슨 문제를 가지고 그러는지 모르겠으나 한 아이가 다른 아이에게 “야, 니 반장이란게 참가 아이하면 어떻게 되니? 니 없으면 우리 반이 어쩌니?”하고 물으니 그 반장이란 아이가 “내가 뭐 대단하다구 그래? 내가 없어도 우리 반이 돌아간다. 다른 애들이 더 잘할수도 있어.”하고 말하는것이였다.   그때 그 반장이란 아이가 “내가 없어도 우리 반이 돌아간다”고 하던 말이 신선한 충격으로 내 가슴에 와닿았다. 이렇게 아이들까지 아는 도리를 우리 어른들은 왜 모르는지 모르겠다.   세상에는 죽을 때까지 하고싶어도 일정한 시기나 년령대가 지나면 하지 못하는 일이 있다. 운동선수가 그러하다. 아무리 날고 뛰는 스타라도 결국 은퇴하고만다. 마라도나도 그랬고 요명(姚明)도 그랬다. 하지만 선수들은 은퇴시기에 따라 그 명성의 무게가 다르다. 때문에 현명한 선수들은 전성기에 금메달을 목에 걸고 박수갈채를 받으며 은퇴한다. 반면에 금메달을 더 걸어보겠다는 욕심에 은퇴시기를 미루면 미룰수록 그런 선수들은 은퇴시기에 동메달도 걸지 못하고 오명만 남기게 될것이다.   중국녀자탁구선수 등아평(邓亚萍)은 전성기에 금메달을 달고 은퇴했기에 백전백승의 선수로 남았고 왕남(王楠)은 더 해보려는 욕심때문에 은퇴시기를 한해 두해 미루다보니 2002 부산아시안게임에서 선후로 조선선수 김향미와 김영희에게 패했고 2008북경올림픽에서 장이녕(张怡宁)에게 패하는 패배기록을 남겼다. 하지만 왕남은 그래도 “내가 없어도 세상은 돌아간다”는 도리를 깨닫고 그해에 장이녕에게 큰언니(大姐)의 자리를 내주고 은퇴했다. 김연아도 2월 8일에 열리는 2014소치동계올림픽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한다. 팬들에게는 아쉬움이 남겠지만 그로하여 그 이름은 더욱 빛날것이고 팬들에게도 더욱 깊은 인상으로 기억에 남게 될것이다.   지도간부들도 운동선수와 마찬가지이다. 죽을 때까지 그 자리에 앉아있을수는 없다. 한번만 더 해보겠다고 버티면 버틸수록 오명만 남길것이다. 전성기에 금메달을 목게 걸고 은퇴하는 선수들처럼 대중들이 박수를 쳐줄 때 은퇴하면 세상에 아름다운 이름을 남기게 될것이다.   내가 없으면 반드시 내 비여있는 자리를 메꾸는 사람이 있을것이다. 지도자의 자리가 아니더라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없어도 세상은 돌아가고 네가 없어도 세상은 돌아간다. 이 지구에 단 한사람만 남아있어도 세상은 돌아간다. 이 지구에 인류가 멸망해도 세상은 돌아간다. 인류가 아닌 또다른 세상이 돌아갈뿐이다.     
117    자가용차시대에 사는 행운과 불행 댓글:  조회:5603  추천:4  2014-01-29
자가용차시대에 사는 행운과 불행   김희수   자가용시대에 사는 우리는 많이 편리해졌다. 아무때나 자가용차를 몰고 자신이 가고싶은 곳으로 갈수 있으니까. 출퇴근도 택시나 뻐스를 기다릴 필요없이 스스로 몰고갈수 있고 짬이 있을 때면 쇼핑도 할수 있고 련인이나 가족, 친구와 함께 려행도 갈수 있다.   한편 자가용차시대에 사는 우리는 몹시 불편해졌다. 교통체증으로 인한 시간랑비, 스트레스… 자가용차시대에 사는 우리에게는 또 불행도 따른다. 교통사고증가, 배기오염, 소음공해… 자가용시대에 사는 우리는 그래도 좋다. 더 좋은 차를 타고다니면 체면이 서고 어깨가 올라가니깐.   자가용차시대에 사는 우리는 힘들다. 자가용차가 없으면 장가 들기도 쉽지 않다. 지금 처녀들은 신랑감을 고를 때 “집이 있나요? 차(자가용)가 있나요?”하고 물어본다. “재봉침이 있나요? 자전거가 있나요?”하고  물어보던 옛날에 비하면 세상이 변해도 몰라보게 변했음을 실감하게 된다.   대부분 출근족들이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하던 지난날에는 각 단위의 마당에 자전거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는데 지금은 자전거 대신 자가용차가 즐비하게 주차되여있다. 우리가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하던 그 시기에야 어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자가용차를 타고 출퇴근하는 날이 오리라고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때 우리는 단위의 차를 몰고다니는 운전수를 몹시 부러워했고 찦차나 승용차에 한번 앉으면 벼슬이나 한것 처럼 몹시 기뻐했다. 그때는 “외국에서는 18세이상이면 누구나 운전면허증을 따낼수 있다”고 하던 누군가의 말이 믿어지지 않았는데 지금은 그런 세샹을 눈으로 보게 되였다.   자가용차시대가 자가용차족들에게는 좋은 점을 많이 가져다주었겠지만 보행자에는 많은 불편을 가져다주었다. 자동차의 증가로 끊임없이 흘러가는 자동차행렬때문에 활개치며 마음대로 활보할수도 없다. 보도와 차도가 구분이 있어야 하는데 보도가 따로 없다. 사람이 다니는 길에도 주차를 해놓아 불편한것쯤은 그래도 참아줄만하다. 그런데 주차해놓은 차가 어느때 뛰쳐나와 보행자의 목숨을 위협할지 모르며 좀전에까지 보도에 보이지 않던 난데없는 승용차가 불쑥 나타나 달려오며 보행자의 목숨을 노리기도 한다.   도로를 가로 건널 때는 더구나 조심해서 주변을 살펴보고 차흐름이 잠시 끊기기를  기다려서 좌우를 살펴보며 보행속도를 조절해야 한다. 차가 가까이에 왔으면 걸음을 멈춰야 하고 차가 좀 멀리 떨어져 있으면 걸어야 하며 어중간한 거리에 있으면 달려야 한다. 이렇게 사람이 출발점에서 목적지까지 줄곧 차눈치를 보아야 한다.   차눈치를 보며 조심조심 걸어가는 사람들과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달리는 차흐름을 바라보노라니 이 도시에 택시차와 자가용차가 없던 그 시절이 떠오른다. 그때는 도로에서 공차기를 해도 위험한 줄을 몰랐다. 더 거슬러 올라가서 자동차가 없이 도로에서 수레와 마차만 달리던 그 시절에는 어떠했을가?   자가용비행기시대도 눈앞에 곧 다가오려고 하는 이 격변의 시대에 이처럼 후진적인 생각에 잠겨있는것이 한심하지만 보행자와 운전자에게 모두 불편을 가져다주는 이 도시의 도로문제는 꼭 해결되여야 할 문제라고 생각된다. 정말 보행자들에게는 이 도로를 건너는것이 얼마나 아슬아슬한 모험인지 모른다.   가다가도 막히고  또 가다가도 막히는 도로는 정말 짜증난다. 운전자들은 누구도 양보하려고 하지 않고 틈만 있으면 비집고 들어간다. 그러다보니 길이 더 오래 막혀버린다. 질서가 없다. 서로 앞서가겠다고 조그마한 틈이라도 있으면 무작정 들이밀고 한걸음 한걸음 전진한다.   유럽 등 선진국에서는 자가용으로 출퇴근하는 사람들이 줄어들고 뻐스나 지하철 같은 대중교통을 리용하는 시민들이 크게 늘었다고 한다. 또 선진국들에서는 교통체증을 줄이기 위해 자각적으로 자가용을 리용하지 않고 자건거를 타고다니는 시민들이 증가되고있다고 한다. 그런데 연길시에서는 자가용차가 해마다 증가되고있고 그 증가추세가 앞으로 언제까지 게속 될지 짐작하기 어렵다. 그로 인해 심회되는 교통체증, 주차난은 골치거리이다.   게다가 교통규칙을 지키지 않는 보행자들때문에 도로는 무법천지로 되고있다. 보행자들은 아무때나 아무곳에서나 자신의 편리를 위해 무작정 길을 가로 건넌다. 오가는 차량도 상관하지 않는다. 틈만 있으면 앞차와 뒤차의 사이로 요리 살짝 조리 살짝 빠져나간다. 차가 속도를 늦추고 피해주는것을 당연한것처럼 여긴다. 횡단보도를 건널 때도 정지신호등을 무시하고 마구 건넌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가려고 교통규칙이건 공중도덕이건 상관하지 않는다. 이때에는 차가 사람의 눈치를 봐야 한다. 보행자전용도로가 있어야 한다.   연길시의 추차난은 더욱 극심해지고있다. 변변한 주차장이 보이지 않는다. 선진국에서는 고충건물을 지으면 지하주차장부터 건설한다는데 이 도시의 고충건물지하는 죄다 상가들이 점령해버렸다. 건물앞에 무질서하게  주차해놓은 차량들은 도시의 미관을 흐리우고있을뿐만아니라 지나다니는 보행자와 건물에 출입하는 시민들에게 많은 불편을 가져다주고있다.   이제 운전에 재미를 붙인지 몇년이 되지 않는 연길자가용족들에게 주차난완화를 위해 출퇴근할 때에 대중교통을 리용하라고 권고하면 현실적이 되지 못하겠지만 그들에게 문명주차를 권고하고싶다. 운전자마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면서 문명하게 주차했으면 좋겠다. 그보다 주차장이 문제겠지만.   자가용차는 날로 급증하는데 이런 차량을 수용할수 있는 주차장은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교통체증완화를 위한 도로확장도 중요하지만 추차난을 해결하기 위한 주차장건설도 시급한 문제이다. 주차난은 한국 등 외국이나 중국의 다른 도시에서도 겪는 골치거리이지만 연길시의 주차난이 더 심각하고 대책마련이 시급한 상황이다. 운전자들마다 문명주차를 하는 한편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효과적이고 근본적인 해결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본다.    
116    모안영이 사망된 진실을 현장에서 목격한 견증인 댓글:  조회:8111  추천:1  2014-01-26
  모안영이 사망된 진실을 현장에서 목격한 견증인   (번역) 모안영     모안영은 1922년 10월 24일에 호남성 장사시에서 모택동과 양개혜의 맏아들로 태여났다. 8살 때 양개혜가 체포된후 어머니를 따라 감옥살이도 했고 어머니가 희생된후 거리에서 넝마주이도 하고 신문도 팔면서 어린 나이에 온갖 고생을 다하다가 1936년에 동생 모안청과 함께 쏘련에 가서 공부했다. 그후 쏘련군사학원에서 학습했고 쏘련조국보위전행에 참가했으며 총탄이 비발치는 유럽전쟁에도 참가하여 용감히 싸웠다. 1946년에 연안에 돌아온 모안영은 그해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고 1950년 10월에 중국인민지원군에 참가했다. 성보는 모안영의 사망을 현장에서 목격한 견증인이다. 아래의 사실은 성보의 회상에 근거하여 기록된것이다. 압록강북안으로 쥐도 새도 모르게 도강하여 조선으로 건너온 중국인민지원군은 팽덕회의 지휘에 따라 1950년 11월 5일에 적군 1만 5800여명을 소멸하고 제1차전역을 결속지었다. 이번 전역에서 아군의 차단부대가 지정된 위치에 도달하지 못하였기에 미국 기병 제1사와 영련방사가 도주하여 이 전역에서 한국군밖에 치지 못하였다.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장군은 중국이 “상징적으로 출병”할것이라고 잘못 판단하고 중국인민지원군을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그는 꼭 1950년 성탄절전에 조선전쟁을 결속짓겠다고 큰소리를 쳤다. 1950년 11월 19일 오전에 조선 대유동의 중국인민지원군 총부에서 지원군당위 상무위원회들이 중요한 작전회희를 열고있었다. 팽덕회는 좌우를 둘러보며 말했다. “이번엔 먼저 후퇴해야겠습니다. 맥아더더러 우리가 그를 무서워하는것처럼 착각하게 하여 그가 더욱 미친듯이 진군하게 말입니다. 그때 우리는 기회를 찾아 적을 섬멸해야 합니다!” 그 말을 듣던 모안영은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서 지도앞으로 다가가더니 지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내 생각엔 응당 적군을 향해 공격해야 한다고 봅니다. 적은 도망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우린 왜서 승승장구로 진군하지 않고 후퇴해야 합니까?” 모안영의 직접 상급이며 작전실 주임인 성보는 모안영의 말을 듣고 손에 땀을 쥐였다. 그는 (안영아, 네가 처음 전선에 나와 용감한 정신은 좋지만 어찌 감히 팽총사령에게 반대의견을 제출할수 있단 말이냐? 팽총사령의 성격을 너도 모르는건 아닐텐데. 며칠전에 열린 첫번째 작전회의에서 팽총사령은 제때에 적을 차단하지 못한 그 부대의 군지휘원에게 “거기에 적의 빈틈이 있었는데 당신들은 왜서 꾸물거리면서 그렇게 늦었단 말이요? 제때에 지정한 지점에 도착하지 못한것이 무슨 행위인지 모른단 말이요? 그건 군령을 어긴 행위란 말이요.  적을 소멸할수 있는 기회를 그르쳤으니 법에 따라 참형에 처해야 하는거요! 난 지원군의 총사령 겸 정위로서 일체 군령군기를 위반한 사람에 대해 징벌할 권리가 있소! 난 다른 재간은 없어도 제갈량처럼 마속을 참형할 담력만은 있소!”라고 한바탕 욕설을 퍼붓는걸 너도 보지 않았더냐? 너 지금 어떤 벌을 받으려고 그러는거냐?)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성보의 추측은 빗나갓다. 팽덕회의 반응은 모든 사람들이 예상하지 못한것이였다. 팽덕회는 모안영의 의견을 끝까지 들은후에 평온한 어조로 좌우를 둘러보며 물었다. “당신들이 보기에는 모안영동지의 의견이 어떻소?” 등화부사령은 “적의 기세가 사납습니다. 한번 얻어맞았다고 기가 꺾일 적이 아닙니다. 만약 전면 공격을 한다면 우리가 손실을 볼것입니다. 난 팽총령사의 작전에 동의합니다. 먼저 적을 무서워하는척 후퇴했다가 장계취계하여 적을 타격해야 합니다!” 팽덕회는 또 기타의 부사령에게 의견을 물어본후 “좋습니다. 우리는 먼저 30킬로메터를 후퇴합시다. 후퇴하면서 운동중에 기회를 보아 적을 섬멸합시다. 싸울 때 옛 방법을 한번 더 쓰려고 합니다. 그 부대로 하여금 다시 적진을 차단하게 하여 립공속죄할 기회를 주겠습니다.” 회의가 끝난후 팽덕회는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아직 점심시간이 되지 않은걸 본 팽덕회는 “누가 나하고 장기 한판을 두겠소?”하고 물었다. 지원군총부에는 팽덕회와 장기를 둘수 있는 사람은 홍학지, 성보, 모안영 세사람이였다. 팽덕회는 다른 취미는 없었지만 한가할 때에는 장기를 두기 좋아했다. 그는 장기를 잘 두지 못하여 늘 세 사람에게 패하군 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한가지 묘수가 있었는데 그것은 “한번만 물려주오”였다. 적수가 그의 기물중의 “포”나 “차”를 먹으려고 하면 그는 제꺽 “포”나 “차”를 꼭 잡고 놓지 않았다. 그리고는 자기가 쓴 기물을 원자리에 놓고 잡혔던 기물을 살리군 했다. 말이 한번이지 그런 일은 여러번 반복되군 했다. 팽덕회가 물려달라고 할 때에는 세사람의 태도가 모두 달랐다. 홍학지는 “하하하”하고 웃으면서 “로총께서 또 물려달라시네”하면서 막지 않았다. 성보는 감히 아무말도 못하고 팽덕회가 하는대로 가만히 있었다. 그러나 모안영만은 팽덕회의 체면을 봐주지 않고 자신이 먹게 될 장기쪽을 팽덕회의 손에서 빼앗군 했다. “제가 한판 겨루어보겠습니다.” 모안영이 먼저 나섰다. 장기쪽을 다 배렬한후 모안영은 “로총, 이번엔 우리 한번 쓴 장기쪽은 다시 물리지 못한다고 약정합시다”고 말했다. 팽덕회도 그렇게 하자고 통쾌하게 대답했다. 장기가 시작되여 얼마후 팽덕회가 불리하게 되였다. 게다가 팽덕회는 모안영의 "말"이 자신의 "차"를 먹게 된것도 보지 못했다. 모안영은 주저하지 않고 팽덕회의 '차"를 먹어버렸다. “안돼. 안돼. 난 그렇게 쓰지 않겠소.” 팽덕회는 자신의 "차"를 빼앗아왔다. 그것은 두번째로 물리는것이여서 모안영은 불쾌하여 “제미랄, 로총은 왜 또 물립니까?”라고 소리쳤다. 곁에서 지켜보던 홍학지는 개의치 않고 “하하하”하고 웃었지만 성보는 이마살을 찌프렸다… 점심을 먹을 때 성보는 모안영을 조용히 불러놓고 말했다. “쏘련군대의 규정에는 참모장은 작전을 결정할 때 총사령에게 3번밖에 의견을 제기할수 없다고 했어. 그리고 우리 같은 참모들은 수장의 작전결정에 간섭할 권리가 없어. 우리의 직책은 정황만 제공하는것이야. 난 오전에 네가 한 발언이 우리 참모의 범위를 초과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또 부사령들도 아직 발언하지 않았는데 네가 먼저 의견을 발표한건 너무 지나친 일이 아니냐?” “아. 성처장, 그때 난 미군을 빨리 물리칠것만 생각하다보니 후퇴하겠다니 너무 급했던거요.” “네 심정을 난 리해해. 그러나 지금은 미군이 매우 강대해. 그들의 무기는 우리보다 더 선진적이기에 정면으로 맞섰다가는 손해만 보게 돼.” 모안영은 머리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성처장의 말이 옳소. 회의때 나의 행위는 잘못된것이요!” “그리고 장기를 둘 때도 말인데 팽총사령은 긴장하게 사고한후 장기를 노는 습관이 있는걸 너도 알잖아? 팽총사령은 긴장을 풀기 위해 오락삼아 노는것이니 정식경기처럼 생각하지 말아라. 홍부사령은 늘 져주지 않니? 그건 팽총사령을 기쁘게 하여 긴장을 풀게 하려는거야. 그런데 너는 ‘제미랄’하는 욕까지 하였으니 참…” 모안영은 눈을 크게 뜨더니 말했다. “정말 내가 그렇게 말했소? 참 ‘제미랄’이란 말은 나의 입버릇이 돼서…” 1950년 11월 25일에 모안영은 북쪽벽의 난로앞에서 3개의 “A”자가 있는 전투전보를 등기하고있었다. 모안영은 지원군사령부의 로어번역이여서 일이 많지 않았기에 주동적으로 전보를 등기하고 발송하는 임무를 맡아서 했다. 팽덕회는 모안영의 옆칸에 있는 작은 방의 행군침대에 누워있었다. 전날 오전에 미군정찰기가 지원군총부의 상공에서 약 1시간동안 선회했는데 이 이상한 현상은 총부의 주의를 일으켰다. 미군이 가능하게 이 폭격목표를 발견한것이라고 예견했기에 등화, 홍학지와 당직이 아닌 참모들은 모두 오늘에 있을지 모르는 공습을 방지하기 위하여 나무판자집에서 멀리 않은 동굴에 피신했다. 작전실에는 실제로 떠날수 없는 총사령과 몇몇 당직 참모들만 남아있었다. 오전 11시경에 4대의 미군폭격기가 지원군총부의 상공으로 날아왔다가 북쪽으로 날아갔다. 작전실에 남아있는 참모들은 미군폭격기가 북쪽의 어느 목표를 폭격하러 간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팽덕회총사령의 안전에 대해 걱정한 성보는 총망히 팽덕회가 잠든 작은 방으로 뛰여들어갔다. 마침 홍학지도 달려와서 팽덕회를 데리고 모안영이 있는 방옆을 돌아서 문밖의 동굴쪽으로 걸어갔다. 그제야 성보는 안도의 숨을 내쉬였다. 그런데 적기는 또 북쪽에서 날아와 다시 작전실상공에서 선회했다. 그것을 본 성보는 “적기가 방금 북쪽으로 갔는데 왜 또 돌아왔을가? 그들이 찾고있는 목표가 중국인민지원군총부인 이곳이 아닐가?”하는 의문이 들었다. 성보는 하늘에서 곧 작탄이 떨어지려는것을 보고 큰소리로 “위험해, 빨리 뛰여라!”라고 소리치면서 모안영과 고서흔이 빨리 작전실에서 뛰여나오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폭탄이 옹근 작전실을 명중하여 나무판자집이 전부 무너졌다. 이렇게 되여 모안영과 고서흔은 불속에서 사망되고말았다. 모안영의 묘지는 조선 평안남도 회창군의 중국인민지원군렬사릉원에 안치되였다.   
115    동성애 골방에서의 긴긴 울음도 끝나고 댓글:  조회:9410  추천:11  2014-01-25
동성애 골방에서의 긴긴 울음도 끝나고   김희수     동성애는 먼 옛날부터 있었지만 줄곧 골방의 음지에 숨어 해볕을 보지 못했고 양지에 나타나면 무시당하고 억압을 받아왔다. 하지만 로마시대에는 동성애가 일반적인 사회현상이였다. 중세시절에 유럽의 일부 국가에서는 게이끼리 혹은 레즈비언끼리 부부처럼 살았던 샤례가 적지 않았다고 한다.   중국에는 명나라때 복건성에서 동성이 서로 혼례식을 올렸다는 기록이 있다. 또 《전국책》의 기재에 의하면 위왕은 납첩 룡양군을 총애했다. 중국의 동성애는 유구한 력사를 가지고있는바 제왕으로부터 평민에 이르기까지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모두 존재했다. 한고조와 적유, 필원과 리계관, 한무제의 진황후와 초복, 당태종의 아들 리승건과 칭심… 우리 민족의 력사를 보면 고려의 목종(재위 997~1009년)이 동성인 유행간과 유충정을 사랑했고 공민왕(재위 1351~1374)도 동성애에 빠져 총신 김흥경 등 미남자들을 사랑했다. 황실은 동성애의 골방이였다.   비록 한시기, 일부 나라에서 동성애와 동성결혼이 양지로 나오기도 했지만 많이는 억압당하고 업신여겨져왔기때문에 양지에 나오지 못하고 음지에서 진행되였다. 지금은 시대가 달라져 동성결혼합법화국가가 늘어남에 따라 동성애자들이 음지에서 륙속 양지로 나오고있다.   2000년대에 들어서 동성결혼의 합법화추세가 전세계로 번지고있다. 2001년 4월 1일에 화란(네덜란드)이 세계 최초로 동성결혼제도를 시행하였다. 그 뒤를 이어 잇달아 2003년에는 벨지끄(벨기에), 2005년에는 카나다(캐나다), 에스빠냐(스페인), 2006년에는 남아프리카공화국, 2009년에는 노르웨이와 스웨리예(스웨덴), 2010년에는 아르헨띠나(아르헨티나), 뽀르뚜갈(포르투갈)과 이슬란드(아이슬란드), 2012년에는 단마르크(덴마크), 2013년에는 우루과이, 브라질, 뉴질랜드, 프랑스와 영국이 동성결혼제도를 립법해 프랑스는 이를 시행하고있다. 영국의 경우에는 2014년부터 잉글랜드(英格兰)와 웨일스(威尔士)에서 먼저 시행된다. 멕시코에서는 멕시코시티와 킨타나로오에서 허용하고 미국에서는 뉴멕시코, 뉴욕, 뉴저지, 하와이 등 20개주에서 허용하고있다. 현재 독일과 룩셈부르그(룩셈부르크), 이딸리아(이탈리아)가 동성결혼제도의 립법화를 진행, 론의중에 있고 아일랜드는 2015년 봄에 동성결혼을 허용하는 헌법개정안을 국민투표에 부칠 예정이다.   남성동성애자를 게이(gay)라고 하고 녀성동성애자를 레즈비언(lesbian)이라고 한다. 불과10여년사이에 동성결혼허용물결이 지구촌을 흔들고있을 정도로 변해가고있다. 아이슬란드(冰岛)의 첫 녀성총리 요한나 시귀르다르도티르(约翰娜·西于尔扎多蒂), 미국의 피겨스타 조니 위어(约翰尼·威尔), 미국영화배우 재커리 퀸토(扎克瑞 昆图) 등 수많은 정치가들과 스타들이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당당히 밝혔다. 중국연예인(홍콩, 대만 포함)들 중에 장국영(张国荣), 언승욱(言承旭), 주걸륜(周杰伦), 왕려굉(王力宏), 모녕(毛宁), 진곤(陈坤), 종한량(钟汉良) 등 수십명이나 동성애자혐의를 받고있다.       전세계에서 약 4%의 인구가 평생 동성과만 성행위를 하고있다. 중국에서 동성애자는 총인구의 3~6%를 차지한다. 구제적으로 중국의 동성애자는 3600만명이상이다. 중국은 1997년의 새 형법에 “류망죄(流氓罪)”를 취소하면서 동성애를 형사처벌을 하지 않게 되였다. 2001년에는 《중국정신장애분류와 진단표준》에서 동성애를 자아승인형과 자아부조화형으로 나누었고 전자는 정신질병명단에서 제거되여 중국동성애의 비병리화를 실현했다.   2010년 1월 13일의 영문판 《중국일보》는 10일전에 두 남성인 증안전과 반문걸이 공개결혼식을 올렸는데 밀월중에 있는 그들이 가족과 친척들의 질책, 사회의 혐오 등 거대한 압력과 고통을 받고있다는 소식을 실었다. 이는 중국의 첫 동성애자의 결혼이였다.   당시 45살인 증안전은 결혼한적이 있고 딸까지 있었지만 자신이 이성에 대해 좋아하지 않는다(녀성을 포옹해도 나무를 끌어안은것처럼 무감각했다고 한다)는것을 발견하고 수치감에 모대기다가 2009년 2월 10일에 협의리혼을 하고 그해 11월에 게이들의 출입이 잦은 술집에서 만난 당시 27살의 제대군인 반문걸과 첫눈에 정이 들어 결혼했다.   청도대학교수이며 에이즈병, 동성애 전문가인 장패천은 “동성애자들이 동성애군체중 다수의 성파트너와 마음대로 성행위를 하는 등의 특수한 생활방식때문에 그들이 에이즈병에 감염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동성애는 에이즈병과 관계가 없다는 견해도 있다.   동성결혼을 허용하는 국가가 전 세계적으로 증가하는 추세에 있는 반면에 주로 이슬람권국가에서는 동성애나 동성애자의 동거를 처벌의 대상으로 삼아 최고 사형까지 판결하고있다. 또한 로씨야(러시아)에서는 2013년에 《동성애선동금지법》을 제정하여 공개장소와 언론에서의 동성애행위나 시위 등 운동을 불법으로 규정하여 벌금 및 징역형으로 다루고있다. 그때문에 미국의 오바마대통령과 프랑스의 올랑드대통령 등 많은 나라의 정상들이 로씨야의 반인권적인 “동성애차별”을 비판하며 2014소치동계올림픽개회식에 참석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제 곧(2월 7일) 로씨야의 소치에서 열리게 될 소치동계올림픽에 수많은 동성애자들이 몰려들것으로 전망된다.   비록 동성애와 동성결혼이 음지에서 양지로 나오고있지만 로씨야와 나이제리아(나이지리아)를 비롯해 동성애를 처벌할데 대한 처벌론란은 올 들어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있다.   동성결혼을 긍정적인 시각으로 보던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던 이 동성결혼자체가 많은 문제점을 안고있다. 인구감소, 국가의 성장동력의 쇠퇴,  입양이나 대리모, 인공수정 등 륜리문제, 자녀교양에서의 가치관, 정신, 정서상 혼란문제 등 안고가야 할 미해결문제가 수두룩하다.       
114    중국력사상 가장 잔인한 10대 살인백정 댓글:  조회:10360  추천:1  2014-01-25
중국력사상 가장 잔인한 10대 살인백정     중국고대사에 나타난 10명의 살인미치광이들은 사람을 죽이고도 눈 한번 깜짝하지 않았고 다른 사람의 목숨을 초개같이 여기면서 피빚을 얼마나 졌는지 모른다. “살인백정”이라는 네글자로 그들을 형용하는것이 가장 적절할것이다. 그럼 아래에 력대 10명살인백정의 하늘에 사무치는 죄행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철혈살인백정 백기   공손계라고도 불리운 백기(白起)는 전국시기의 진나라 대장군이였다. 싸움판에서 백기가 어찌나 무자비했던지 6국의 군대들은 백기가 군사를 거느리고 온다는 말만 들어도 혼비백산할 지경이였다. 기원전 294년에 백기는 군사를 거느리고 한나라와 위나라의 련합군을 치면서 적군의 수급을 벤것만도 24만개였고 기원전 273년에 군사를 이끌고 조나라와 연나라의 련합군을 공격하면서 그가 벤 수급만도 13만개였다. 후에 또 조나라장군 가언과 일전을 벌리면서 물을 리용해 조나라병사 2만명을 익사시켰고 기원전 264년에 한나라를 공략하며 5만여명의 목을 전부 베였다. 전쟁터에서 적군의 목을 벤것을 살인백정이라고 할수 없다고 해도 백기는 기원전 278년에 군사를 거느리고 초나라를 공략할 때 물을 터뜨려 언성(지금의 하북성 의성 동남쪽)이 잠기게 함으로써 사망자수가 수십만명에 이르게 하였는데 사망자중에는 10여만명에 달하는 백성들도 있었다. 또 기원전 260년에 조나라와의 장평전투에서 백기는 생포한 조나라군사 40만명을 생매장하고 겨우 240명의 소졸을 돌려보내 소식을 전하게 했다.     잔인한 살인백정 조조   3국시기 저명한 정치가이며 군사가일뿐만아니라 시인인 조조(曹操)는 란세의 영웅일뿐만아니라 잔인하기 그지없는 살인백정이였다. 193년에 도겸을 공략할 때 서주대도살을 감행했는데 기재에 따르면 남녀로소를 가리지 않고 10만여명을 살해했을뿐만아니라 개든 닭이든 짐승조차도 가만놔두지 않고 닥치는대로 죽였다. 당시 시체가 도처에 널린 까닭에 사수하까지 막혀 흐르지 못하는 정도가 되였다. 그밖에 조조는 장막을 치면서 옹성토벌을 감행했고 려포를 치면서 팽성토벌을 감행했으며 원상을 치면서 업성토벌을 감행했다. 또 오환을 치면서 류성토벌을 감행했는데 조조는 토벌을 감행할 때마다 모조리 죽이는 정책을 실시하여 그 수단이 극히 잔인함을 보여주었다.     식인살인백정 황소   당조말년의 농민봉기군 수령 황소(黄巢)는 횡포하고 지독하기로 소문났다. 황소는 장안성을 함락한후 사람을 어찌나 많이 죽였는지 시체가 온 거리에 널려있을 정도였다. 후에 관군이 다시 장안성을 수복한후 백성들은 완전히 관군의 립장에 서서 “황소가 사람을 마구 죽여 피가 온 성안에 질벅했다”고 공소했다. 《구당서》의 기재에 따르면 “황소가 군사를 거느리고 진주를 1년간 포위하고있었는데 량초가 다 떨어지자 수백개의 대형돌절구를 만들어놓고 펀히 살아있는 백성들과 포로들을 남녀로소 구분없이 돌절구에 넣고 찧어서 그 고기를 병사들이 먹게 했다. 진주 4개주의 백성들을 다 잡아먹고나자 황소는 또 하남, 허, 당 등 10개주의 백성들에게도 마수를 뻗쳤다. 황소는 또 광주 대사에서 학살을 감행했는데 아랍 등 무슬린상인들을 20여만명 살해했다. 과연 그 미친듯한 살인행각은 사람들로 하여금 모골이 송연해지게 하였다.     야만살인백정 테무진   테무진(铁木真) 칭키스칸(成吉思汗)은 세계력사상 걸출한 정칙가이며 군사가이지만 그가 세운 몽골제국의 패업은 가히 수많은 사람의 백골로 세운것이라고 말할수 있다. 1215년에 테무진은 금나라의 도성 중도(지금의 북경)를 함락했는데 성안의 백성들을 한달동안이나 대도살했다. 당시 100만명을 헤아리는 사람들이 그 재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1221년에 테무진은 한차례의 유럽정벌에서 대도살을 감행했는데 당시 몽골병사 5만명이 매인 평균 24명의 백성을 도살했다. 그 당시 도합 120만명의 백성이 목숨을 잃었다.     최악의 살인백정 구비라이   칭키스칸의 손자 원세조 구비라이(忽必烈)는 원나라를 건립한 영웅이지만 종족멸종의 정책을 시행하여 한족들을 대거 학살했는데 그 사망자는 1800만명이 넘었다. 중국 북방의 90%에 달하는 한족평민들은 대부분이 그 종족멸종참극의 희생양이 되고말았다. 구비라이가 사천에서 대도살을 감행하기전에 300만~2000만명의 인구가 있었는데 도살후 80만명도 남지 않았다. 이 인간성을 상실한 종족멸종행위는 기니스세계기록대전에 수록(1985년)되였다.       랭혈살인백정 주원장   명나라 개국황제 주원장(朱元璋)은 황제가 된후 갑자기 마음이 변하여 공신들을 마구 학살했다. 사서에 기재된데 의하면 호유용, 리선장, 란옥삼 사건에서 도합 10만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주원장은 재위 30년간 20만명을 살해했는데 공신들을 기본상 다 죽여버렸다. 주원장은 개국명장 상우춘(常遇春)에게 이쁜 녀인을 주어 첩으로 삼게 했다. 그런데 상우춘의 안해가 질투하여 그 첩의 손목을 잘라버렸다. 이를 알게 된 주원장은 즉시 사람을 보내여 상우춘의 안해를 죽여버리고 그 갈비뼈를 삶아서 상우춘 및 대신들이 식용하게 하였다. 주원장은 또 사람의 가죽을 바르는 형벌을 만들어 잔인한 본색을 세상에 알리였다.       변태살인백정 주체   주원장의 넷째아들인 명성조 주체(朱棣)는 애비 주원장에 비해 손색이 없는 살인백정이였다. 그는 1402년에 친조카 건문제의 황위를 빼앗은후 건문제궁의 녀관, 태감 등 모든 사람들을 모조리 죽여버렸는데 한번에 1만 4000명이나 학살했다. 그는 또 건문제에게 충성하던 옛신하 방효유 등을 전부 살해했는데 “9족”이 아니라 “10족”까지 멸했다. 그리고 방효유의 안해 및 그 가족중의 녀자들은 군영에 가두어놓고 병사들이 마음껏 즐기게 했는데 한명의 녀자가 밤낮이 따로 없이 20여명 사내들의 수욕을 만족시켜야 했다. 그러다가 육신이 지쳐서 죽는 녀자는 시체를 가져다 개에게 먹이게 했다. 영락말년에 주체는 또 한번 궁녀, 환관들에 대한 대도살을 감행했는데 그번 대참사에서 살해된 궁녀만도 근 3000명에 달했다. 림종을 앞두고도 학살본성을 잊지 않은 주체는 바로 죽는 날에도 30여명의 궁녀들을 교살하여 자기와 함께 묻게 했다. 과연 명실상부한 변태살인백정이였다.       야성살인백정 장헌충   명나라말년의 봉기군 수령이였던 장헌충(张献忠)은 군사를 거느리고 성도를 함락한후 3일동안이나 대학살을 명령했다. 대학살을 그만둔후에도 장헌충은 의연히 날마다 100여명씩 살해했다. 그러다가 청나라군이 몰려오자 곧바로 도망쳤다. 바로 대군이 성도에서 도망치기전에 그는 참혹한 “4광정책”을 실시했는데 그것이 바로 사천인을 모조리 죽이고 일반백성으로부터 군인가족(로약자와 환자, 부상자)에 이르기까지 심지어 자기의 군사들중에 섞여있는 호북병사와 사천병사들 그리고 최초에 자기를 따르며 사선을 넘나들던 친병들까지 모조리 죽여 그 고기를 베여 군량으로 했다. 기재에 따르면 어느날 저녁에 장헌충은 자기가 부르는데 대답하지 않았다는 리유로 명령을 내려 자기의 어린 아들까지 죽여버렸다. 그리고는 이튿날에 후회되여 처첩들을 불러 왜 아들을 구하지 않았느냐고 문책하고나서 처첩들과 자기 아들을 죽인 도부수들을 모조리 죽여버렸다.       흡혈살인백정 누르하치   녀진을 통일하고 후금을 건립한 청태조 누르하치(努尔哈赤)는 군사를 거느리고 료동지구를 점령한후 당지 가난한 사람들이 생활난으로 반란이라도 일으킬가봐 료동지구의 빈민들을 모조리 붙잡아다 죽여버렸다. 후에 또 료동의 부자들이 압박에 못이겨 반항할가봐 두려워 료동지구의 부자들도 대부분 다 죽여버렸다. 누르하치는 료동백성 도합 300여만명을 살해했는데 료동지구의 한족들은 기본상 다 화를 면치 못했다. 이는 피를 보기 좋아하는 누르하치의 본성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지옥살인백정 다탁   누르하치의 열다섯째 아들이며 청나라 예친왕(豫亲王)인 다탁(多铎)은 1645년에 군사를 거느리고 양주를 포위한후 대포를 쏘아 성문을 열고 양주성으로 짓쳐들어갔다. 다탁은 련속 10일간 대도살을 감행해 양주백성 80만명을 살해했다. 이로써 번화하던 양주성은 순식간에 인간지옥으로 변했다. 청나라군이 양주백성들을 보는대로 살해하다보니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이게 되였는데 어린애들도 재화를 피하지 못했다. 나중에 련못도 피로 물들어 벌겋게 되였는데 이런 상황을 만들어낸 다탁이야말로 명실상부한 지옥백정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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