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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뿌리가 든든해야 건실하게 자랄수 있다 댓글:  조회:2105  추천:2  2013-12-23
얼마전에 있은 중소학생문체예술절의 검열식에서 중소학교 학생들과 학부모들이 우리 민족복장을 곱게 차려입은 모습은 참으로 보는 이들의 마음을 즐겁게 해주었다. 더우기 소학교학부모들이 민족복장에 상모를 돌리는 모습은 마음이 즐겁기에 앞서 감동과 격정으로 부풀어오르기까지 하는건 어쩔수가 없었다. 상모돌리기는 우리 민족전통문화로서 오늘날 자라나는 어린이들은 생소할수도 있다. 헌데 학부형들이 잊혀져가는 민족전통문화를 아이들앞에서 재현하니 어찌 감동을 먹지 않겠는가. 전에 우리가 자랄 때는 마을마다 청년활동실에 선전대가 있어 대대로 내려운 우리 민족문화를 접할수가 있었지만 지금은 모두가 떠나가고보니 그런 일도 호랑이 담배피우던 옛일로 되여버린지 오래다. 하다보니 우리의 자라나는 후대들은 우리 민족문화를 접할수가 없기에 민족복장에 장고춤만 고유한 민족문화인줄로만 착각하고있게 된다. 그런중에서도 다행스러운것은 우리의 학교들에서 학생들의 능력발전과 민족전통문화를 계승발전시킬것을 념두에 두고 사물놀이, 상모춤, 장고춤 등을 배워주고있을뿐만아니라 해마다 예술절, 운동회 등 다양한 활동을 조직하여 고유한 민족문화를 선보이고있어 삼복염천에 얼음물을 마신듯 거뜬해나는 마음이다. 내가 살고있는 시의 민족종교사무국과 조선족문화관에서는 해마다 음력설을 맞이하여 조선족음력설맞이 문예야회를 조직하고 우리 민족전통문화를 널리 선보이고있어 매년 음력설림박이면 자연히 문예야회가 기다려지는 마음이다. 내가 몸담고있는 학교에서도 지금까지 한국으로부터 선물받은 사물놀이기구를 가지고 사물놀이활동을 진행하고있는데 네가지 타악기가 어울려 울리는 소리를 들을때마다 귀맛이 좋은건 물론 우리 민족문화가 잊혀지지 않고 전해내려가고있다는데서 더 즐거워나는 마음이다. 지난해 내가 몸담고있는 학교에서는 건교65주년 경축행사를 가지였었는데 학생들의 문예공연은 수준급의 가무단공연보다 못지 않아 모두의 혀를 끌끌 차게 하였으며 공연내내 우뢰와 같은 박수갈채가 끊기지 않았었다. 특히 학생들의 북춤과 장고춤, 상모춤은 우리 민족의 고유한 무용이여서 전반공연을 클라이막스로 끌어올렸을뿐만아니라 가슴에 감동을 그들먹이 부어주었다. 우리는 간혹 길을 가다가도 “아리랑”이나 “노들강변”노래가 들려오면 자기도 모르게 발길을 멈추고 귀를 기울이게 된다. 왜서일가? 바로 우리 민족의 애창곡이자 대대로 전해내려온 민요가락이기때문이다. 헌데 문제는 이런 민족전통문화가 날따라 잊혀져가고있다는것에 가슴이 아프지만 멀리 흩어져 살면서도 지키려고 노력하는 지성인들이 있어 조금은 위안이 된다. 허나 몇몇 지성인들의 노력으로는 힘겹지 않을수 없다. 우리의 민족전통문화를 계승발전시키는데서 가장 주도적역할을 해야 할 부문이 바로 우리의 학교가 아닌가 생각한다. 배움에 어섯눈을 뜨고있는 소학생이나 한창 학구욕으로 끓어번지고있는 중학생들에게 고유한 우리 민족전통문화를 전수하여 그들이 대대로 전해내려온 우리 민족의 문화를 알게 한다면 우리의 민족전통문화의 계승발전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것이리라 믿는다. 그 어떤 식물이나 모두 뿌리를 가지고있음은 모두가 알고있는 일이며 뿌리가 건실하지 못하거나 썩는다면 그 식물이 건실하게 자라지 못하거나 죽는다는 도리쯤은 삼척동자도 알수 있는 일이다. 오직 뿌리가 땅속에 깊숙이 묻혀서 든든하게 자리를 잡는다면 더말할나위없이 건실하게 자랄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민족전통문화를 한그루의 나무로 생각한다고 할 때 우리의 중소학교나 기층의 문화관은 바로 민족전통문화라는 나무의 뿌리라고 생각하는것이 합당할것 같다. 우리의 중소학교나 문화관에서 우리 민족전통문화를 전수하고 계승발양시킨다면 우리의 민족전통문화는 이 세상에서 영원히 푸르르게 그 빛을 발할것이 아니겠는가? 우리의 중소학교나 문화관들에서는 우리 민족전통문화를 계승발전시켜야 한다는 사명감을 안고 보다 다양한 활동에서 체현시키기를 바라며 유관부문들에서도 물심량면으로 적극적인 지지가 있기를 기대해본다.       
45    행복념주 댓글:  조회:1989  추천:1  2013-12-16
거위털같은 함박눈이 펑펑 내리는 날 안해는 메주를 쑨다고 콩을 삶았다. 퇴근하여 집에 들어서는 순간 콩삶은 구수한 내음이 코끝을 간지럽히며 온몸에 그대로 퍼져왔다. 저녁술을 놓고 메주를 하는 안해를 도와 삶은 콩을 믹스기로 보드랍게 가노라니 저도 모르게 지나간 옛일들이 파라노마로 펼쳐지면서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는건 어쩔수가 없었다. 우리가 자라던 어린 시절은 참으로 지지리도 가난하던 시기라 군입질할것이라고는 오직 누룽지뿐이였는데 쌀이 귀하다보니 그것조차 흔치 않았다. 그때는 눈도 많이 내려 마을의 길량켠과 나무가리, 집가리에 항상 무릎넘어 오게 눈들이 덮여있었으며 입은 옷이 변변치 않아서인지 추위도 지금보다 훨씬 더 혹독하였었다. 일년중 가장 즐거운 날이 물론 설이였지만 설이외에도 즐거운 날이 있었는데 그런날을 꼽는다면 김장을 하는 날과 메주를 쑤는 날이다. 김장을 하는 날과 메주를 쑤는 날이 즐거운 까닭이라면 그날이 설날과 마찬가지로 여느날보다 먹을거리가 있기때문이며 따끈한 집에서 온집식구가 북적일수가 있어서이기도 하였다. 메주를 쑤는 날이면 어머니는 전날저녁부터 잘 다듬은 콩을 깨끗이 씻어 물에 담근다. 그렇게 담근 콩은 이튿날 점심무렵까지면 퍼질대로 푹퍼지게 되는데 그 콩을 가마에 넣고 부엌아궁이에 장작불을 피워서 몇시간을 들여 삶는다. 그때 당시 우리가 살고있던 집은 낮다란 토벽에 초가이영집이라 벽이 엷어 한기가 배여들어왔었는데 아궁이에 불을 피워 가마가 끓어번지면 인차 김이 뽀얗게 서리게 된다. 그러면 그 서려오르는 김에 토벽이 부실부실 떨어져 잘못될가봐 아궁이에 불을 피워서 김이 서리면 인차 화로에 장작이 탄 불덩이를 퍼담아놓아 김이 서리는걸 막아야 했다. 그렇게 화로에 이글거리는 불덩이를 퍼담아놓으면 우리는 인차 김치움에서 감자를 꺼내와 이글거리는 화로불에 파묻어놓는데 좀만 지나면 감자가 노랗게 익었었다. 그렇게 익은 감자를 꺼내여 까맣게 된 껍질을 바르고 호호 불면서 먹을때면 정말 진수성찬이 울고갈 정도로, 셋이 먹다가 하나가 죽어도 모를 정도였으니 지금 그날을 그려보는 이 순간에도 입에서 군침이 스르르 도는건 어쩔수가 없다. 그렇게 몇시간을 두고 장작불을 피워서 콩을 삶노라면 콩가마가 끓어올라 넘치는 수가 있었는데 그것을 막기 위하여 어머니는 된장을 몇숟가락쯤되게 꺼내여 풀어서는 콩가마에 넣는데 참으로 이상하리만치 콩가마가 끓어넘치는 일이 없게 되는것이였다. 어머니가 푹 익은 콩을 가마에서 꺼내 메주를 할 때면 우리는 바늘에 실을 꿰여서는 푹익은 콩을 한알한알씩 그 실에다 꿰는데 다 꿰여놓으면 마치 구슬을 꿰여놓은듯, 념주를 꿰여놓은듯한것이  보기만해도 장한 일을 한것같아 스스로도 어깨가 으쓱해나는건 어쩔수가 없었다. 그렇게 실에 꿰여놓은 콩을 나무가리나 짚가리우에 쌓인 눈을 파헤쳐 묻어놓고는 집으로 들어와 어머니가 만들어놓은 메주를 하나하나 날라다 방웃목에 펴놓은 벼짚우에 줄지어 세워놓는것으로 어머니의 일손을 방조해주었다. 메주가 다 만들어지면 시간도 한참지나 눈에 파묻어놓은 콩을 꺼내는데 그사이 추운 날씨로 눈속에 파묻힌 콩은 꼬당꼬당 얼어있는데다 그우에 눈까지 새햐얗에 묻어 참으로 보기만 해도 군침이 스르르 돌았다. 그런 콩을 한알씩 입에 넣을때면 콩에 묻은 눈이 먼저 사르르 녹은다음 언콩알이 이발에 닿이는데 그때의 그 시원한 감각은 참으로 무어라 형용할수 없었다. 그렇게 한알한알 빼여먹노라면 재미도 재미지만 맛이 일품인것으로 하여 마치도 천하를 독차지한듯한 느낌이였다. 그렇게 만든 메주로 간장을 달이는 날에는 또 파잎을 그채로 뜯어서 그안에 금방 달여 식힌 간장을 넣고는 그 간장을 조금씩 빨아먹는 맛은 몇십년이 흘러간 오늘도 잊혀지지 않는다. 나는 믹스기로 콩을 갈다말고 아들애와 함께 그제날처럼 바늘에 실을 꿰여 그 실에다 메주콩을 한알한알 꿰기 시작하였다. 한알한알의 구슬을 꿰듯, 한알한알의 념주를 꿰듯 정성들여 꿰였지만 아빠트다보니 그 옛날 짚가리나 나무가리에 쌓인 눈에다 파묻던것처럼 파묻을수가 없어 결국은 베란다의 창을 열고 걸어놓는수밖에 없었다. 한식경이 지나 메주를 다 만들고 창밖에 걸어놓은 콩뀀을 들여와서 안해와 아들애 셋이서 한알한알 뽑아 먹게 되였는데 비록 눈이 묻지 않았지만 언콩이 이발에 대일때의 그 찡한 맛은 여전하였었다. 처음으로 그런 콩을 먹어보는 아들애는 너무나 신기하다는듯이 냠냠 맛나게 먹으면서 정말 별미라고 연신 외우는것이였다. 그러는 아들애를 바라보면서 나와 안해도 얼굴에 웃음을 올리지 않을수 없었다. 그러면서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나와 안해 그리고 아들애가 먹는것이 어찌 한낱 평범한 메주콩에 비기랴. 전에도 그랬거니와 오늘도 그것은 한알한알의 행복의 념주라면 가장 적절할것 같다. 전에는 어머니가 삶아준 콩을 한알한알 꿰여서 먹었다면 오늘은 안해가 삶아놓은 콩을 나와 아들애가 한알한알 꿰여서 세식구가 단란히 앉아서 먹고있지 않는가. 한알한알의 콩은 한올한올의 사랑의 마음이며 그 사랑의 마음을 하나하나 음미하면서 마음으로 새기였으니 그 사랑의 마음을 새기는 순간만큼은 너무나 행복했었다. 사랑의 마음은 한겹한겹 쌓여 이루어져야 감동을 줄수 있고 또 그 감동이 행복을 안겨주게 된다.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을 한줄에 꿰였으니 그것은 곧 행복의 념주가 아니겠는가. 지천명의 나이가 다 되여가는 나지만 나이와 상관없이 안해가 메주를 쑬때마다 행복의 념주를 한알한알 꿰면서 참사랑의 맛을 진정으로 음미하리라 나름대로 작심하였다.
44    뒤돌아볼 필요가 있다 댓글:  조회:2391  추천:3  2013-12-16
요즘 많은 쟁명이 일고있는 영화 “황해”를 이름할수 없는 감정과 무거운 마음으로 마지막까지 보았다. 영화가 끝났지만 한동안 넋을 놓고 멍하니 앉아있노라니 아파오는 가슴을 다랠수 없었다. 비록 영화이지만 “황해”를 보고나니 90년대부터 거세차게 일어난 코리안드림과 그로부터 변화되여온 우리 조선족사회를 뒤돌아보지 않을수 없었다. 한국으로 가기 위하여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고 부자의 꿈을 안고 밀항선에 올랐으나 십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종무소식인 사람들, 고리대로 돈을 꾸어 한국행을 꿈꾸었지만 결국 사기당하여 툭털고 밖에 나앉게 되자 절망으로 저세상을 선택한 사람들, 기차역에서, 공항에서 서로 끌어안고 울면서 아이공부돈만 마련하면 인차 오마하고 굳게 약속하였지만 십년, 이십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돌아오지 않고있는 사람들, 처음가서는 진빚을 갚기위하여서라도 돈을 부쳐오던것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돈도 전화도 끊겨 행방불명이 되였거나 아예 가정을 버리고 새로운 길을 선택한 사람들이 어찌 한둘뿐이며 한두가지 사례라고 할수 있겠는가? 안해나 남편을 떠나보내고 처음은 가정살림에 몰두하다 날이 가고 달이 바뀜에 따라 고독을 달래기 위해서 마작판이나 술판을 찾아다니기 시작한것이 인이 박혀 허송세월하다 결국 가정을 잃은 사람들, 겨끔내기로 애인을 하다 결국 소중한 가정을 잃고 후회막급인 사람들, 소식이 없는 안해를 찾기위하여 갖은 방법을 다하여 한국으로 갔지만 안해는 낯선 사람보듯하더라는 이야기도 우리에게는 그렇게 낯선 이야기가 아닌 사실로 각인되여 있다. 힘들고 어지러운 노가다현장에서, 식당에서 아글타글 한푼두푼 모으겠다고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일하다보니 병이 골수에 드는줄도 모르다 어느날인가 힘이 빠져 쓰러진것이 한국땅에서 영영 눈감은 이가 어찌 한둘뿐인가! 한국의 그 어느 공사장이나 모두 우리 중국조선족들의 구슬땀이 깃들어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것이다. 좀더 잘살아볼 의념으로 한민족이라고 고국이라고 찾아갔지만 랭대를 받아야 했으며 기껏 부려먹으면서 로임을 미루다 결국 하루아침에 증발해버린 한국의 악덕사장들, 한국에 가고싶은 심리를 리용하여 꺼리낌없이 돈을 사기친 한국의 의미지를 흐리웠거나 흐리우고있는 사장들이 어찌 한두사람뿐이라고할수 있는가? 비록 김구남이 살인청부업자의 제안에 의하여 한국으로 살인을 떠나지만 그것은 빚을 갚고 소식이 끊긴 안해를 찾기위해서 어쩔수 없이 선택한 길이며 한국사회에 김태원같이 위선의 탈을 쓴 인간나부랭이들도 없지 않은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요즘도 간혹 뉴스로 나오지만 사실이야 어떻게 되였든 중국의 조선족들이 한국에서 범행을 저지르는것도 현실적인 문제이다. 비록 영화에 나오는 김구남이나 면정학, 김태원이 우리의 주변에서 실존하는 인물의 형상을 그대로 옮긴것은 아니지만 코리안드림이 일어난후의 중국조선족과 한국인을 바탕으로 부각되였음은 의심할수 없다. 하기에 영화 “황해”는 우리 중국조선족뿐만아닌 한국인들도 한번쯤 거울에다 자신들을 비춰보면서 뒤돌아보도록 한다고 본다. 이제 우리는 현실을 직시해야 할것이며 한국이란 곳에서 열심히 그리고 착실히 일하여 부를 축적하면서 선진적인 리념을 배워야 할뿐만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자신의 가족도 지킬줄 알아야 할것이다. 한국인 역시 같은 단군의 후손으로서 보다 넓은 마음으로 포섭해주어 함께 보다 떳떳한 자세로 세상을 열어가는것이 좋지 않을가 생각해본다. 살면서 앞으로 내처 달리는것도 좋지만 가끔은 한번쯤 지나온 길을 뒤돌아보면서 다듬는것도 빼놓을수 없이 중요한 일이며 또 그렇게 한다면 앞으로 내달리는데 차질없는 더 큰 동력으로 될것임은 의심치 않아도 될것이다. 영화 “황해”로부터 중국조선족과 한국인 모두 서로가 뒤를 돌아보면서 더 밝고 찬란한 래일을 만들기를 기대해본다. 비록 영화라고는 하지만 아쉬운 점이라면 영화전반에 도끼질이 란무하고 연길이 현실을 떠나 너무 지저분하게 나오며 면정학이 연길의 호텔에서 최리사의 패거리를 도끼로 토막을 내는것은 현실을 너무 탈리한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아직까지 중국을 모르고 중국의 조선족을 모르는 한국인들이 많겠는데 이런 장면을 본다면 오해가 생길수도 있지 않겠는가 하는 우려심도 가실수 없다.
43    나무가 점적주사를 맞았다 댓글:  조회:2002  추천:1  2013-12-09
 지난 여름에 퇴직교원이 자신이 애지중지 가꿔온 은행나무 두그루를 무상으로 지원하여 은행나무 두그루가 교정에 자리를 잡게 되였다. 은행나무는 우리가 살고있는 고장에서 웬만해서는 가꾸기 힘든 나무인데 그 퇴직교원이 담을 넘어서게 가꾸어온것을 교정에 옮겨오다보니 정말 운반으로부터 구덩이를 파서 그 구덩이에 옮겨 묻기까지 갓난 애를 움직이듯, 신주단지 모시듯 하였다. 은행나무는 잎으로부터 열매에 이르기까지 모두 귀중한 약재라고 하는 귀한 나무인데다 묘목도 아닌 사람의 다리통만큼 굵고 높은 담을 훌쩍 넘어서게 다 자란 나무를 옮겨오다보니 자연 정성을 쏟게 되였던것이다. 만물이 싹을 틔우는 새봄이 되자 자연 지난해 교정에 자리한 은행나무에 눈길이 가는건 어쩔수가 없었다. 지난 겨울의 혹독한 추위를 잘 견디여는 냈는지? 생명이 말라가고있는지 아니면 끓고있는지? 의혹을 떨쳐버릴수가 없어 결국 나무가 서있는 곳에 가보니 웬걸 은행나무도 다른 나무들과 내기라도 하듯 겨끔내기로 물기를 올리면서 한창 가지에 싹을 틔우기에 바삐 돌고있을줄이야. 그런 은행나무를 바라보노라니 자연 지난해 금방 옮겨왔을 때의 일이 떠올랐다. 금방 옮겨심은후 은행나무가 인차 뿌리를 내리지 못하면 영양실조가 와서 잘못될가 저어되여 또 뿌리를 어서 빨리 내리게 하기위하여 영양제와 성장제 점적주사를 놓게 되였었다. 하긴 내 나이 지천명의 고개에 올라서도록 나무가 점적주사를 맞는건 처음 보는 일이여서 매양 신기하기만 하였지만 그에 앞서 나무가 정말 점적주사효과를 볼수 있을가 하는 의문이 꼬리를 드는건 어절수 없었다. 헌데 봄이 날따라 깊어가는 오늘 은행나무가 묘목으로 옮겨와 먼저 자리를 한 나무들과 겨루기라도 하듯이 물을 올리고 싹을 틔우고있는것을 보니 과연 지난해의 점적주사가 효험을 보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노라니 문득 우리네 삶을 비춰보게 되는건 어쩔수가 없었다. 한 생명으로 이 세상에 태여나서 살아가노라면 자신의 마음에 맞는 직업이나 환경에서만 살아갈수 있는것만은 아닐것이다. 때로는 렬악한 환경속에서 새로운 자기를 찾기 위하여 모지름을 써야 할것인바 그러자면 자연 적응이란것을 떠날수 없다. 아마 그래서 일찍 생물학자 다윈은 적자생존이란 말을 했을것이다. 환경을 개변할수도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적응이 더 필요한 우리의 삶이 아닌가 생각한다. 적응하려면 자신이 생활하는 주위를 세심히 관찰해야 할것이며 세심히 관찰하느라면 주위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될것인바 그것은 곧 적응하는데 필요한 “영양제”가 될것이다. 또한 한 사람의 옳바른 성장을 위하여서는 그에게 따끔한 충고와 정확한 가르침이 있어야 할것인바 그것은 정말 그 무엇으로도 바꿀수 없이 보귀한것으로 될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한 사람이 새로운 환경에 뿌리를 내리고 옳바로 성장할수 있도록 도와줄수 있는 “성장제”로 될수 있기때문이다. 반대로 제멋에 사는 세상이라고 제멋대로, 자기가 아는대로 해나가면서 다른 사람의 말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도태되기 쉬울것이며 또 자신의 옳바른 성장을 념두에 두고 하는 충고를 곡해하거나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돌이킬수 없는 후회의 고배를 마시게 될것이다. 시간이란 가면 다시 오지 않고 한번 건너간 강물을 두번 다시 건느지 못하며 기회란 쉽사리 찾아오지 않는다는 말은 영원한 불변의 철리이다. 애초부터 적응을 위하여 또한 옳바른 성장을 위하여 자신에게 필요한 “영양제”와 “성장제”를 마다하지 말고 스스로 찾아서 쓴다면 그 효과는 더 말할 나위가 없을것이며 날따라 경쟁이 치렬해지는 이 세상에서 자신의 립지를 튼튼히 굳힐것인바 그것이 곧 적자생존이 아니겠는가. 우리 고장에서는 보기 힘든 은행나무가 자랄수 있은것도 그리고 다시 교정으로 자리를 옮겨와 뿌리를 내리면서 새롭게 자랄수 있은것도 모두 알심들인 정성도 있었지만 때에 맞는 영양제와 성장제가 크게 한몫하였기때문일것이다. 하다면 우리네 삶에도 때에 따라 영양제와 성장제가 필요하지 않을가? 나는 물을 올리며 싹을 틔우기에 한창 바삐 보내는 은행나무를 다시한번 바라보면서 앞으로의 멋진 모습을 그려보았다.
42    위기는 스스로 만들어가고있다 댓글:  조회:2443  추천:4  2013-12-09
 얼마전에 들은 이야기인데 오늘 이 시각까지도 알알해나는 가슴을 진정할수 없다. 고중2학년 학생이 선생님을 찾아와서 눈물을 흘리면서 이 세상에 살고싶은 생각이 꼬물만큼도 없이 죽고싶은 마음뿐이라고 말하여 선생님을 당황하게 하였을뿐만아니라 선생님이 그 학생의 마음을 돌려세우느라고 모든걸 제쳐놓고 며칠동안 보냈다고 한다. 알고보니 이 학생은 어려서 선후로 두 부모가 다 출국하고 년로한 할머니와 보내였는데 얼마전 할머니마저 저 세상으로 영영 가버리니 이제 더는 의지할 사람이 없게 되였던것이다. 생각해보면 어린 나이에 정신적으로 너무도 무거운 짐을 짊어져야 할 그 학생이 너무도 눈물나게 불쌍하다. 금방 출국붐이 일어날 때는 한쪽부모나 량부모가 없는 학생들이 적어서 인척관계가 있는 분들이 맡아 돌봐주던것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모두가 떠나다보니 이제는 정말 인척관계가 있는 사람도 없어져 거의 완전히 홀몸으로 있는 애들로 되여있다. 내가 몸담고있는 학교도 지금 편부모학생들이 90,5%를 차지하니 우리 학생들의 정황을 더 말치 않아도 알수 있는것이다. 전에 저녁자습이 끝나서 학교대문을 나설 때면 어두운 밤길이 걱정되여 학생들을 마중나온 학부형들로 학교대문을 꽉 메운 풍경은 참으로 보기가 좋았다. 비가 내리는 저녁에 우산이나 비옷을 들고 학교까지 나온 학부형들의 모습을 보노라면 세상부모의 마음을 헤아려볼수 있어 참으로 즐거워나는 마음을 금할수 없었으며  공부가 끝난 학생들 또한 부모님과 손잡고 나란히 걸어가는 모습은 너무도 보기 좋아 퇴근길에 오른 나의 발걸음도 공연히 가벼워났었다. 헌데 지금 이런 풍경은 낡은 터에서 이밥먹던 소리격으로 되였으며 혹 가물에 콩나듯 간혹 몇몇 학부형들의 모습밖에 볼수 없다.. 언젠가 학부모들과 한자리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게 되였는데 저녁에 학생을 마중하는 학부형은 다섯중 한사람도 없었고 학생이 집으로 돌아와서 좀더 공부할 때 곁에서 동무해주는 학부형은 다섯중 한사람뿐이라는것에 나름대로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 그러노라니 전에 북경대학입학생을 둔 학부모가 떠올랐는데 고중졸업까지 매일과 같이 아이가 하학하여 집으로 돌아오길 기다렸으며 함께 식사는 물론 저녁자습이 끝나서 돌아와 공부할 때면 따뜻한 우유를 한고뿌 풀어주고 곁에서 뜨개질을 하거나 신문, 잡지를 보면서 아이를 동무해주었다고 한다. 제멋대로 자라서는 하늘을 치받드는 락락장송이 될수 없듯이 훌륭한 인재로 키우자면 가정교육이 최우선시되여야 함은 아마도 삼척동자가 아는 일이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것이다. 가정, 학생, 학교가 삼위일체의 교육망을 형성할때만이 우리의 학생들이 건실하게 자라날것이며 명문대입학생이나 큰일을 할 재목으로 만들수 있을것이 아니겠는가? 언젠가 용무가 있어 한족중학교로 가게 되였는데 마침 학생들이 하학할 시간대였다. 그때 학생들을 마중나온 학부형들이 대문을 꽉 메워 발을 들이밀 자리조차 없었다. 학교 대문당직실옆에는 학부형대기실로 크게 두칸을 만들어놓았는데 그 두칸에 학부형들이 차고도 넘쳐나 대문을 메우고있었다. 어쩌면 전에 우리 학부형들이 만들었던 풍경을 지금 한족들이 만들어가고있는것에 무거워지는 마음을 진정할수 없었다. 우리의 교육이 위기를 맞아가고있다고 직시한지도 손꼽을 정도로 오래전의 일이다. 처음에는 학생수의 격감으로 뒤따른 페교, 한족학교로의 전학 등으로부터 시작되였지만 그래도 우리는 여전히 우리의 교육을 살리려고 발버둥치면서 교육을 선행하는 우량한 전통을 가지고있는 민족으로 자부해왔다. 헌데 지금은 그것이 점점 잊혀져가는 현실이 아닌가 자문해보게 된다. 학생수의 격감이나 한족학교로의 전학도 우리의 책임이지만 현재 학생들에게 부모로서의 따뜻한 사랑을 주지 못하면서 어린 나이의 가슴에 그늘을 지어주고있는것도 미뤄버릴수 없는 우리의 책임이 아닐가? 자식의 앞날을 위하자면 돈이 있어야 하고 또 그돈을 장만하는것도 좋은 일이지만 한번가면 다시는 오지 못하는 자식의 성숙의 시기를 곁에서 지켜주면서 사랑과 조언을 주는것은 그 무엇보다도 더 중요한 일이 아닐수 없다. 이제 그것조차 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교육은 정말 만회할수 없는 위기를 만들어가고있다고 해야 할것이다. 삼위일체에서 하나만 빠진다면 이빠진 치륜이 돌아가듯 윤활하게 돌아갈수 없을것이다. 한마디로 각자의 역할을 충분히 해나가는것이 바로 우리의 후대들을 바르게 자라나게 하는 명약이고 위기를 이겨나가는 바른 선택이 아닐가 생각한다.
41    뿌리없이 자랄수 있을가 댓글:  조회:2036  추천:6  2013-12-03
일전에 나의 이웃으로 있었던 당씨의 저녁식사초청을 받고 당씨네 집으로 다녀온적이 있다. 당씨네는 원래 나와 한아빠트단지에서 이웃으로 살았댔었는데 시내변두리에 가지고있던 단층집이 파가이주호에 들다보니 다시 이주하게 되였던것이다. 새로 이주한 당씨네 층집에 다달아보니 층집앞에 아름드리 비술나무가 모진 세월속에서도 그대로 드팀없이 버티고서있는것이 한눈에 안겨왔었다. 그날 저녁 당씨와 저녁식사를 하면서도, 식사를 끝마치고서도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되였는데 전에 이웃으로 살았었지만 그날 저녁 당씨를 새롭게 알수 있었으며 또 그로하여 당씨를 더욱 우러러보게 되기도 하였다. 당씨는 만족이였는데 소학교공부도 바로 끝마치지 못하였다. 허나 그가 만족의 력사에 대한 구술이나 당씨가족사에 대한 구술을 듣노라면  그가 소학교공부도 바로 마치지 못하였다는 말이 의심될 지경이였다. 비록 만족의 언어문자는 잊혀져 자신도 모르지만 만족의 고유한 문화전통과 가족사는 반드시 알아야 조상들에게 미안하지 않을것이라는 생각에서 스스로 자학하여 만족의 력사와 민족전통에 대하여 공부하였다는것이다. 더우기 품을 넣어 당씨가족사를 정리하였으며 당씨가족협회를 내와 당씨가 회장으로 활약하고있는데 일년에 한번은 대형활동을 만족의 풍속습관 그대로 진행한다는것이다. 이야기과정에 당씨는 스스로 편찬한 당씨가족사와 당씨가족활동때마다 기념으로 남겨둔 사진들을 보여주었는데 복장이나 행사장장식에 이르기까지 모두 만족들의 풍속습관대로 하였기에 말그대로 눈길을 끌었으며 만족을 료해하는데 다소라도 도움이 될수 있을것 같았다. 그날 저녁 격동으로 도도하게 열변을 토하는 당씨를 보노라니 어쩐지 얼굴이 화끈거려남을 어쩔수 없었다. 소학교공부도 바로 마치지 못한 당씨가 비록 잊혀진 자기 민족의 언어문자에 대하여서는 몰라도 전통문화에 대하여 그렇듯 숙달하고 또 자신의 가족사를 일목료연하게 정리한것을 보면서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을수 없었기때문이다. 지금까지 우리 민족문화전통에 대하여서는 얼마나 알고있고 또 민족문화전통을 계승발전시키기 위하여 얼마만한 노력을 들였으며 자기의 가족사에 대하여 관심을 가져나보았던지 질문해보지 않을수 없었다. 한 가정의 가족사가 근근히 그 가정의 가족사에만 국한되는것만은 절대 아니다. 한 민족의 구성원이 가정이라는 핵이 모여서 이루어진것이라면 한 가정의 력사도 마찬가지로 한 민족의 일부를 체현하는것이라고 말할수 있을것이다. 하다면 한 가정의 가족사를 옳게 정리한다면 그것은 바로 한 민족, 한 시대의 축도로 될수 있는바 그것 역시 민족문화전통의 계승에서도 한몫할수 있을것이다. 력사는 흘러가는 물과 같이 한번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다면 지나간 력사를 옳바로 기록하여 후대들에게 전해주어야 하는 임무는 바로 현재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일것이다. 요즘같이 지구가 촌으로 되여 여기저기에 흩어져 살아가는 우리 후대들에게 조상들의 발자취를 알려주는것은 자못 중요한 일이 아닐수 없다. 구경 자신의 성씨 본적지는 어디이며 조상들은 어느 년대에 월강이민이 되였으며 어디에서 보따리를 풀고 삶의 터전을 닦아 오늘날에 이르게 되였는가에 대하여 자라나는 후대들에게 똑똑히 교대해주어야 하며 그들이 그것으로 가족과 우리 민족의 력사를 깨치는데 도움을 주어야 할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자연 단군의 후손으로서의 자부심을 가질것이며 뒤를 이어 가족사를 열심히 써나갈것인바 그것이 바로 력사를 기록하는것이고 문화와 전통은 그로부터 자연 이어질것이라고 믿는다. 그날 저녁 당씨와의 이야기에서 나는 많은것을 깨쳤으며 또 새로운 마음도 먹게 되였다. 나에게는 아직 어머니가 계시기에 이제 더 미루지 말고 어머니에게서 우리 가족사에 대하여 상세히 알아본다음 내 능력껏 가족사를 정리하여 나의 동생들과 나의 아들에게 전해주리라 다지였었다. 뿌리를 똑똑히 알게 하여 부끄럼없이 떳떳이 살아가게 하고픈 마음이다. 당씨의 배웅을 받으며 밖으로 나오니 층집앞의 비술나무는 여전히 그자리에 그대로 끄떡없이 서있었다. 두사람이 팔을 벌려 안아도 다 안지 못할것 같았는데 아마도 백년은 실히 될것 같았다. 그런 나무를 바라보느라니 만약 뿌리를 든든히 내리지 못하였다면 또 뿌리가 적거나 없었다면 저렇듯 고목으로 자랄수 있었을가 하는 생각이 잠간 머리를 스치였었다. 순간 이제 가족사를 정리하면 제목을 “뿌리”라고 달것이라는 생각이 번개같이 떠올랐다.
40    새 신을 신고 낡은 길을 가다 댓글:  조회:1902  추천:5  2013-12-03
이 십여년간 우리의 교육이 참으로 많은 변화를 가져온것만은 부인할수 없는 현실임은 모두가 자인하는 바이다. 자질교육으로부터 시작된 요즘의 새로운 과정개혁에 이르기까지 많은 전문가들이 자신의 고견을 내놓았고 지어 책자로 펴내기까지 하였으며 수많은 강습반과 회의를 열고 보급하느라고 열을 올리였으며 지금도 열을 올리고있다. 특히 한족들인 료녕성의 위서생선생의 뒤를 이어 요즘은 또 산동성 두랑구중학교의 교수모식을 따라배우느라고 열을 올리고있는데 그들의 교수모식이 확실히 선진적인것만은 부정할수 없는 일이며 또 우리가 마땅히 따라배워야 함도 절실한것만은 사실이라고 본다. 우리보다 먼저 경험하여 좋은 성적을 따내고있으니 마땅히 우리도 그런 우수한 경험들을 우리의 교육과 결부하여 우리의 교육에 도입한다면 진정한 우리의것이 될것인즉 그러면 우리의 교육도 희망이 넘치는 교육이 될것임은 누구나 다 말할수 있는 리치이다. 문제는 새로운 교육리념을 어떻게 대하고 타인의 경험을 어떻게 들여오는가가 중요하다고 본다. 지금까지 다녀본 강습이나 회의를 본다면 새로운 감을 주는듯 싶지만 결국 따지고보면 전의 답습이 많고 새로운것이 차지하는 비중이 작다는 생각이다. 또한 교수경색이나 교수연구회를 다녀오면서 참관교수를 하고나면 마음이 흡족할 때가 아주 적다는것이다. 문제는 교수를 잘못해서가 아니라 너무 잘해서 개운하지 않은것이다. 마치도 무대우에서 연출하는 연극배우의 연기같고 학생들도 너무 일치해서 어안이 벙벙할 지경일 때가 많다. 매시간마다 교원이나 학생들 모두가 저렇게만 한다면 그런 교수는 정말 말그대로 어디에 내놓아도 당당할것임은 의심치 않아도 될것이다. 알아보면 한시간의 참관교수를 위하여 알심들여 조직한 한차례의 연극일뿐 평시는 그럴수 없다는것이다. 그러니 자연 한숨이 몰려올라오는건 어쩔수 없었다. 새로운 과정개혁이든 아니면 두랑구중학교 교수모식이든 관계없이 우선 관념을 갱신하는게 중요하다고 본다. 관념갱신이 바로 새로운 교수리념을 갖는다는 말로 될것인즉 새로운 교수리념을 가진다면 그건 쉬운 말로 새 신발을 신었다함이 적절할것 같다. 하다면 새로운 과정개혁에 따른 새로운 교수리념을 갖추었다면 이제부터 그것을 그대로 실천에 옮겨야 할것이며 또 실천에 옮길때야만이 진정한 의미가 있고 효과를 가져올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리념은 가지고있지만 그 리념을 실천에 옮기지 않는다면, 전의 모식 그대로 해나간다면 새로운 리념은 아무런 효과도 일으키지 못하는것으로 될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새 신을 신었지만 새로운 길로 가지 않고 옛날의 흙길로 고집하고 걸어간다면 새 신은 새 신으로서의 빛을 내지도 못하고 낡은 길의 흙탕물을 뒤집어 쓸것이다. 허나 반대로 새 신을 신고 새로 닦은 길로 걸어간다면 활개를 치면서 걸어도 새 신에는 아무런 흙탕물도 튀지 않고 오히려 걸음도 거뿐할것인즉 그때는 새 신을 신은 보람이 있을것이다. 아무리 새로운 교수리념을 갖추고 새로운 교수모식을 배웠다고 할지라도 실제 교수에 실천하지 않거나 인입하지 않는다면 그건 결국 낡은 길을 고집하는것인즉 얼핏 생각에는 별일없어보이지만 실은 우리의 후대들에게 죄를 짓는 일로 될것이며 자신을 한번쯤 반성해볼 일일것이다. 새로운 교수리념으로 새로운 교수모식을 배워서 그대로 실제교수에 실천하고 인입하는 일인자로 거듭난다면 그건 곧바로 새 신을 신고 새로운 길로 활개를 치며 대활보로 걷는것이 될것인즉 걸음도 경쾌할것일뿐만아니라 만인의 박수를 받을것임은 의심치 않아도 될것이다. 허나 반대로 새 신을 신고 낡은 길을 고집한다면 그건 곧바로 눈감고 야웅하는 격일것인즉 심사숙고해야 할 일이 아닐가.  
39    사랑이란 서로를 메워주는것 댓글:  조회:1589  추천:1  2013-11-25
일전에 우연히 한국에서 돌아온 고향사람을 만난적이 있다. 한국나간지 10년도 넘어 20년에 가까워오니 참으로 반갑지 않을수 없었다. 한사람의 인생에 몇개 되지 않는 20년인데 그 20년 가까운 세월을 한국에서 보내고 돌아온 고향사람은 만난 첫순간부터 겉차림이나 말투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변화가 많다는 느낌이였다. 전에 풍편에 남편과 리혼하였다는 말을 들은적이 있는지라 무람없이 이야기를 나누던중 왜 남편과 헤여졌는가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었다. 헌데 너무 뜻밖의 말이 그의 입에서 튀여나올줄이야. “너무도 늦게 리혼한것이 후회될뿐이오. 왜 그런 남자를 만나 살았는지 나 자신을 질책하게 된단 말이오” 그의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무어라 할말을 찾지 못하고 그녀만 멍하니 쳐다보지 않을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표정도 없이 아주 담담히 그 말을 내뱉는것이였다. 고향에서 살 때 한생산대에서 일하면서 정이 들어 사랑을 속삭이다가 결혼하여 아들딸을 본 그였다. 지금 젊은이들은 겪어도 보지 못한 소설같은 련애사끝에 올린 결혼식이고 자식낳고 남편공대 잘하면서 마을에서는 말그대로 깨알이 쏟아지도록 금슬이 좋은 부부로 정평이 나있었다. 지금도 기억에 또렷하지만 고향에서 살 때 그들부부는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면서 억척스레 일하여 남먼저 벽돌기와집을 짓고 유족하게 살았었다. 90년대, 너나없이 떠나는  한국나들이는 그들부부도 잘 살아보려는 부푸는 가슴을 안고 떠나게 하였다. 그들이 떠나던 때만 하여도 그들은 마을에서 부자행렬이였지만 더 잘살아보려는 욕심은 어린 자식들을 떼여두고 한국행을 선택하게 하였던것이다. 헌데 함께 한국으로 간 부부였지만 몇년후에는 결국 리혼하여 남남이 되는 현실을 만들어야 하였다. 구경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확실하게 모르지만 비록 함께 간 한국이지만 하는 일이 다르다보니 함께 있지 못하게 되였는데 그것이 서로를 의심하는 화근으로 되였던것만은 틀림이 없다. 그것이 결국은 헤여지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였는데 자식들도 부모들의 처사에 따르겠다는 태도였댔다니 리혼은 너무도 쉽게 하루아침에 이루어지게 되였던것이다. 성경 “창세기”에 나오는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까지는 거론하지 않더라도 부부가 동심일체인건 부부로 살아보았거나 현재 부부로 사는 사람들은 다 알것이리라 믿는다. 서로가 마음이 통하고 정이 통하여 부부의 연을 맺고 백년도 못사는 인생에 서로에게 의지하면서 살아가는것이 바로 인간으로서의 남녀가 아닌가 생각한다. 우리 말 속담에 한입안의 혀도 깨물때가 있다는 말이 있다. 서로 다른 성격으로 서로 다른 환경에서 성인이 된만큼 모든것이 돌아가는 기계의 치륜처럼 척척 맞물릴수 없는것이 또한 부부사이가 아니겠는가. 하다면 살아가면서 서로의 부족점을 메워주고 서로의 아픔을 나누는것이 바로 진정한 사랑일것이며 그러면 관용이 이루어질것인바 또 그런 사랑이라면 그 어떤 암초에도 견디여 낼것이다. 혹 백년도 못사는 인생에 왜 하필이면 맞지 않는 사람과 걸리적거리면서 살겠는가 반문해올수도 있다. 하긴 질그릇이 땅에 떨어져 산산쪼각이 난다면 다시 원모습으로 되기는 힘들것이다. 문제는 땅에 떨어지기 직전이다. 그 땅에 떨어지기 직전에 멈추어서 무엇이 부족하였던가를 생각해보고 서로 한발 물러서서 서로를 메워준다면 흐렸던 하늘이 금방 개이듯이 다시 원상태로 돌아갈것이다. 그렇게 서로를 메워주는 일이 반복되여 간다면 부부일지라도 서로가 서로에게 감사해할것이며 그런 속에서 석양을 맞이하게 될것인즉 살아가면서 부부가 사랑공부를 게을리 하지 말고 공부하는대로 실천해나가는 일은 자못 중요한 일인바 그러면 아물지 못할 아픈 마음의 상처는 만들지 않을것이리라 생각한다.
38    목마른데 시급한것은 물이다 댓글:  조회:1836  추천:0  2013-11-25
얼마전에 들은 이야기인데 지금도 가슴 한구석이 알찌근해나는건 어쩔수가 없다. 현성중학교 교장질하던 분이 너무 힘들어서 그만 나눕자 그 밑의 젊은 교원을 교장으로 추대하였는데 그도 못하겠다고 나눕었다는것이다. 전같으면 교장도 장자라 서로 하자고 하겠건만 지금은 하라고 추대하여도 하지 못하겠다고 나눕는 판이니 좀은 이상하다고 할지는 몰라도 실은 그 마음을 충분히 리해하고도 남음이 있다. 십년전까지만해도 우리의 학교들은 퍼그나 흥성한 편이였다. 물론 농촌소학교들은 문을 닫기 시작하였지만 현성에 있는 소학교나 중학교들은 그한시기만은 전보다 학생들이 불어났으니 흥성할법도 한 일이 아닐수 없었다. 헌데 시간이 흐름에 따라 농촌소학교의 페교를 이어 향진의 중학교들이 학생고갈로 문을 닫기 시작하면서 현성의 중학교들도 한해가  다르게 학생들이 눈에 뜨이게 줄어들기 시작하면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하였다. 그 문제란 다름이 아니라 학교를 꾸리기가 힘들어지기 시작하였던것이다. 참새는 작아도 오장륙부를 다 갖추고있듯이 비록 학생수가 날따라 줄어들지만 갖출건 다 갖추어야 하고 할것은 다해야 하니 자연 힘들지 않을수 없게 되였다. 거기다 몇해전부터 나라로부터 소학교와 초중은 학생들로부터 일전한푼 걷어들이지 못하게 하고 나라로부터 학생머리수에 따라 돈을 주는데 원체 학생수가 적다보니 내려오는 돈은 말그대로 새발의 피라 사무용품과 출장비지불도 에떼우기 힘들 정도라고 할수 있다. 그러다보니 겨울이 되면 일부 작은 학교들에서는 돈때문에 열공급을 제대로 할수 없어 손발이 얼어 고생하기까지 한다고 한다. 이런 정황에서 령도직책을 짊어진 분들은 자연 자나깨나 학교운영에 필요한 자금으로 골머리를 앓아야 하고 그것으로 발버둥질을 쳐야하니 그 압력이란 참으로 자신만 알고있는것이라면 어떨가? 일부 책임자들은 여러 지성인이나 단체들을 찾아서 손을 내밀고있지만 “빌어온 장이 사흘을 못넘기”듯이 그렇게 좀씩 얻어오는 자금으로는 근본문제를 해결할수 없는 상황이다. 몇해전까지만해도 대학입시만 끝나면 우리 조선족학생들이 문, 리과장원을 차지하고 자랑찬 모습으로 우리 나라의 명문대인 북경대학과 청화대학으로 떠나갔지만 이제는 그런 일들도 옛말로 다가설 날이 되여오고있다. 학생들이 많을 때니깐 어쨌든 좋은 학생도 많을수 있지만 지금은 초중졸업생이 고작 몇십명이여서 고중을 꾸리기위해서라도 제발 고중공부를 해주십사하고 불러들여야하니 진정 손꼽는 학생을 고르기란 말그대로 눈을 씻고도 힘겨운 일이 아닐수 없는 현실인즉 명문대는 그렇게 쉽게 이루어질수 없는 일로 우리와 점점 거리가 멀게 될것이다. 이런 고충을 헤아려 우리의 교육을 관심하는 학자, 전문가 지어는 민족간부들까지 동참하여 우리 교육의 미래를 두고 열띤 토론을 벌리고있는데 참으로 가슴을 울렁이게 하는 일이 아닐수 없다. 헌데 문제는 그것은 어디까지나 열띤 토론이고 리론이지 실제로는 아무런 일도 해결할수 없다는것이다. 우리의 민족간부들도 이런 회의에 참석하면 침방울을 튕기면서 당금이라도 큰문제를 해결해줄 태세로 나오지만 돌아앉으면 잊음이 너무 헤퍼서 아쉬움만 한가슴 가득 남긴다. 사막에서 갈증에 모대기여 입술까지 초들초들 마른 사람에게 그때 당시로서는 가장 시급한것이 한방울의 물이라도 입에 들어가는것이다. 그런 사람을 곁에 두고 물은 어떤 물을 마셔야 하며 물은 어디가야 얻을수 있고 또 어떻게 담아와야 한다는 등등 텅빈 말로 시간을 보낸다면 아마 그 갈증에 모대기던 사람은 갈증이 더 심해져 탈수로 쇼크를 일으키거나 잘못하면 생명도 위험할수 있을것이다. 우리의 교육이 획기적인 전변을 가져오는것도 자못 중요하겠지만 현재로서는 학교운영자금을 지원받는것이 더 시급하다고 본다. 어떤 회의에서의 열띤 발언보다는 실제적인 문제를 해결해준다면 그건 너무도 감사한 일이고 또 우리의 교육을 진정 관심하는 지성인이나 민족간부의 미덕이 아닐수 없다. 실제적인 문제가 해결되여야 교육에서의 획기적인 전변도 있게 될것이며 따라서 더 많은 학생들을 명문대에 수송할수도 있지 않을가.  
37    배우며 실천하는 삶 댓글:  조회:1672  추천:0  2013-11-18
언젠가 봄에 있은 일이지만 기억에 새롭다. 봄날이였지만 기온이 갑자기 떨어지면서 련며칠동안 비가 계속 내려 출퇴근하기조차 불편하였다. 그날도 저녁자습이 끝나 늦게야 집으로 돌아오게 되였는데 비가 부실부실 내려 우산을 받쳐들고 비속을 걸을수밖에 없었다. 우산을 받쳐들고 목을 가뜩이나 움츠리고 내가 사는 아빠트구역까지 다가서니 희마한 가로등만이 외롭게 비속을 비춰주고있었는데 아빠트단지로 들어가는 입구의 대문은 닫혀져있고 밖에는 승용차 한대가 떡 버티고 서있었다. 이 비내리는 밤에 왜 그곳에 서있을가 하는 의문도 잠간 승용차가 울리는 경적소리를 듣고 대뜸 짐작이 갔다. 아빠트구역정차장으로 들어가야 할 승용차인데 대문이 닫겨서 들어가지는 못하고 운전수가 내려 문을 열자니 비가 내리여 아빠트접수실의 경비를 부르느라고 울리는 경적임에 틀림없었지만 문을 열어줄 사람은 여전히 나타나지 않았다. 대문에는 사람이 나드는 작은 문이 달려 열려있었지만 나는 선뜻 다가가서 대문을 활짝 열어 젖혀주었다. 문이 열리자 승용차는 서서히 움직이면서 안으로 들어왔는데 나의 옆을 스치는 순간 운전수가 차창을 내리우면서 “고맙습니다”라는 한마디를 남기는것이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음은 이상하리만큼 설레여 왔다. 층계를 올라 집으로 들어가는 내내 아니, 잠자리에 들어서도 흥분된 마음을 눅잦힐수가 없었다. 그러노라니 자연  북경에 있는 동생네 집에 갔다가 있었던 일이 떠오르면서 낯모를 그 처녀애가 눈앞에 우렷이 떠오르는건 어쩔수가 없었다.  그해겨울 북경에 있는 동생네집으로 갔다가 하루는 너무도 심심하기에 동생이 만류하는것도 고집을 부리면서 8리교시장에 다녀오게 되였다. 8리교시장은 북경의 통주구에 있는데 역시 통주구에 자리잡고있는 동생네집에서도 공공뻐스로 거의 이십분넘어되는 거리였다. 문제는 8리교시장에 가면 물건값이 싸고 없는 물건이 없어 마치도 시골장거리를 방불케하였기에 나는 그곳을 다녀오기를 좋아했던것이다. 그렇게 시장에 가서 이곳저곳을 돌면서 눈에 띄우는 사고싶은 먹거리들을 가득사서 들고 공공뻐스역으로 나오는데 길거리에서 보험회사의 인원들이 설날이 가까워오니 주련과 복자를 새긴 광고용 붉은 종이를 무료로 건네주기에 받아보니 쓸만할것 같아 그대로 말아쥐고 차에 올랐다. 차에 오르니 마침 애된 처녀애의 옆에 빈자리가 있기에 엉뎅이를 붙이고 앉게 되였다. 차가 떠나자 나는 손에 말아쥔 그 붉은 종이가 풀리지 않고 또 구겨지지 않게 하느라고 자연 신경을 쓰게 되였다. 이때 옆에 앉은 그 처녀애가 얼굴에 환한 웃음을 띄우면서 나의 손에서 그 붉은 종이말이를 낚아채서 곱게 말고는 자기가 메고있는 가방에서 접착제를 꺼내여 여러곳에 정성스레 붙인다음 다시 나의 손에 쥐여주는것이였다.  “이러면 괜찮을거예요” 챙챙한 목소리로 말하는 그 처녀애를 바라보니 이제 고중졸업반이 아니면 대학에 갓 입학하였을 나이였는데 얼굴에 생글생글 웃음을 물고있는것이 참으로 애되고 예뻤다. 너무도 뜻밖에 벌어진 광경에 나는 일순간 할말을 잊고 넋을 잃은채 처녀애만 퀭하니 바라보았다. 일파만파 일어나는 마음의 격동을 억누를수 없어 연신 고맙다는 말만 곱씹었었다.  내가 목적지에 도착하여 차에서 내릴 때도 처녀애는 나의 물건을 들어서 차문밖에까지 건네주면서 조심해서 다녀가라고 인사까지 깎듯이 하는것이였다. 공공뻐스가 흰연기를 뿜으며 나의 시야에서 멀어질때까지 나는 그 자리에 못박힌듯이 서서 부풀어오르는 마음의 격정을 억누르면서 처녀애에게 부디 행운이 깃들기를 마음으로 기원하였다.  동생네 집에 도착하여서도 나는 그 낯모를 처녀애를 머리에 떠올리면서 진정할수 없었다. 나에게 삶의 도리를 가르쳐준 처녀애가 고맙기만 하였다. 사실 내가 비내리는 저녁에 대문을 열어주고 운전수로부터 고맙다는 인사를 받게 된것은 전적으로 그 처녀애에게 돌려야 하며 또 그 처녀애의 덕분이라고 해야 할것이다. 여태껏 살아오면서 또 살아감에 있어서 작디작은 일에서일지라도 타인을 위하여 타인에게 베품을 주는것에 대하여서 입이 반지르르하게 말은 잘해왔지만 실제로 행동에 옮겨 실천해보지는 못한 나 자신이여서 지금 이 시각까지도 부끄러운 마음을 금할길 없으며 또 자신이 작고 초라해보이기까지 해나는건 어찌할 방법이 없다. 헌데 그날 8리교에서 돌아오다 만난 처녀애의 행동은 무언의 깨우침으로 되여 나를 아프게 채찍질해주었으며 또한 나로 하여금 행동으로 실천해보게끔 하였는데 그 실천은 참으로 나의 마음을 즐겁게 해주었으며 타인에게도 편안함을 줄수가 있어서 좋았다.  배움이라면 단지 지식의 배움뿐만이 아닌 여러분야의 각가지 배움이 망라됨을 새삼스럽게 느껴보았다. 그가운데서도 특히 삶의 도리를 배우고 실천하는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한바 배우고 깨치며 실천하는  과정이 바로 신나는 삶, 즐거운 삶으로 만들어줄것이며 풍요로우면서도 후회가 적은 삶을 만들어줄것이다. 또한 그런 삶을 살아가게 되면 자신의 인격적위치도 높아질것이며 대방에게 푸근하고도 편안함을 줄것인바 서로가 삼복간 무더위에 차디찬 얼음물을 마시기라도 한듯이 온몸이 시원해날것임은 의심치 않아도 될것이다.  오늘 이 시각에도 나에게 이런 도리를 깨우쳐준 그 낯모를 처녀애가 고맙기만 하다. 그 처녀애가 깨우쳐주었기에 나는 대방에게 베품이란 무엇인가를 알게 되였으며 또 나의 생활에 실천을 해보게 되였는데 실천의 결과는 참으로 즐거움만 한가득 선사받게 되였다. 이제부터 살아가면서 생활의 구석구석에서 참된 인간이 되는 참된 도리를 깨쳐 그 배운 도리를 실천에 옯기는 삶을 살아가리라 다짐해본다. 그러면 비록 이렇다할 업적을 쌓는 위인의 인생이 아닌 한낱 평범한 인간의 평범한 인생이라할지라도 나로서의 기쁨과 즐거움, 풍요로움과 다채로움을 만끽하면서 살아가는 삶이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36    원하는 바를 해주면 위하는 일을 한것이다 댓글:  조회:1723  추천:0  2013-11-18
지난 겨울방학에 우리 나라의 남단으로 불리울수 있는 특구인 심천으로 다녀오게 되였는데 감수가 참으로 깊다. 거의 매일이다싶이 동생의 차에 앉아 심수의 곳곳을 돌아다니였는데 그 가운데서도 공원의 등산길이 가장 인상깊다. 심수의 시내든 교구든 그 어느 공원에 가나 문표가 없이 누구나 다 무료로 들어갈수 있는데 공원으로 들어가보면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는것이 가장 적절할것 같다. 가족끼리, 친구끼리, 련인사이, 부모를 모시고 모두 얼굴에 웃음꽃을 활짝 피우고 연을 띄우기도 하고 푸른 나무나 꽃나무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기도 하는데 참으로 즐거운 한때를 보내는구나 하는 마음에 공연히 곁따라 신났다.  공원마다 거의가 산을 끼고있었는데 산이 얼마나 높든 산의 정상까지 모두 돌계단을 만들었거나 아니면 반듯하게 길을 닦아놓아 사람들이 등산하는데 편리를 도모해주고있었다. 하기에 휴식일이면 등산길은 말그대로 사람들로 붐비여 부딪치지 않으면서 등산하는데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하였다. 가파른 산의 정상에 올라 발밑의 도시를 굽어보노라면 사람들의 등산을 위하여 이 높은데까지 길을 닦다니 참으로 사람이 못하는 일이 없구나 하는 생각에 앞서 시민들의 등산을 위하여 이 높은데까지 길을 닦아준 유관부문의 배려와 공정일군들에게 감사의 마음이 그들먹이 괴여오르는건 어쩔수 없었다. 물론 심수는 특구여서 경제가 앞선것도 있겠지만 문제는 의식문제가 아닌가 생각한다. 특구인만큼 모든 면에서 절주가 빠르기에 사람들은 여가시간을 가족과 함께, 친구와 함께, 부모님과 함께 보내면서 건강을 챙기기에 신경을 쓰고있는바 그 하나로 콩크리트속을 빠져나와 등산이란 유산소운동으로 일탈에서 벗어나는 동시에 몸도 가꾸는것이다. 이런 마음, 이렇게 하고싶은 마음을 정부로부터 알고 그들이 원하는대로 편안하면서도 몸도 가꿀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주었을것인즉 그건 참으로 백성들을 배려하고 관심하고 위한 일로서 모두가 박수를 보내야 할 일이 아닐수 없다. 그러노라니 자연 내가 사는 작은 현성도시가 눈앞에 떠오르는건 어쩔수가 없었다. 비록 작은 현급시이지만 널리 자랑하고 싶은 일이라면 시내와 5리 상거한 곳에 일년사시장철 퐁퐁 솟구치는 샘터가 있는데 물맛도 일품이라고 할수 있다. 이렇듯 좋은 샘터가 있기에 시민들 거의가 걷거나 자전거를 타면서 물통을 메거나 달고 물을 긷는데 열성을 보이고있는데 참으로 보기 좋은 풍경을 이루고있다. 나 역시 몇년전부터 운동겸 물도 긷기위하여 매일마다 도보로 걸어서 다녀오군 하는데 비가 오지 않는 여름이나 눈이 온 겨울이면 괜찮은데 눈이 녹는 봄철이나 비가 내린 여름철이면 한번 갔다오기가 여간 말째지 않다. 길이 멀어서가 아니라 시내를 벗어나면 지금은 거의 구경조차 할수 없는 흙길이여서 눈이 녹거나 비가 내린후면 흙탕물로 범벅이 되여 간혹 차가 지나갈 때 조심하지 않으면 흙탕물을 뒤집어쓰기가 일쑤이며 신발이고 바지가랭이고 흙범벅이 되는건 례사로운 일로 생각해야 하기때문이다. 실은 따지고 보면 시민들 거의 모두가 이 길로 운동겸 물도 긷느라고 다니고있으며 또 모두가 샘터가 콘크리트로 잘 다져지고 아스팔트길이면서 좋기는 길옆에 가로등까지 설치되여 저녁걷기운동에도 도움을 주면 얼마나 좋을가 하는 생각을 하고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것이다. 허나 아쉬운것은 아직까지도 샘터를 콘크리트로 깨끗이 다져놓거나 길을 아스팔트로 변신시키지 않고있으며 어느 누구도 관계하지 않고있다. 시민들이 그렇듯 바라고 원하고있지만 말이다. 백성들을 위하여 좋은 일을 하려면 문제는 경제가 따라가야 한다는건 얼마든지 리해가 가지만 꼭 경제만 론하기보다는 우선 백성들이 무엇을 원하는가를 아는것이 중요하며 그들이 원하는걸 알았다면 그 일을 해주기에 노력해야 할것이며 만약 현실적으로 그 일을 해주었다면 그건 진정으로 백성들을 위한 일을 한것으로 될것인바 그렇게 되면 우리의 백성들은 마음으로부터 정부에 감격해마지 않을것이다. 하긴 백성들을 위하여 큰일을 해주는것도 중요하겠지만 작은 일이라도 모든 백성들이 원하는 바를 해준다면 곧바로 모든 백성들을 위한 일로 되지 않겠는가? 우리의 정부가 백성들이 원하는 보다 실제적이고 보다 생활적인 일들을 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35    봄의 향기 댓글:  조회:1560  추천:0  2013-11-11
금년봄은 여느해의 봄과 달리 늦게 오는상 싶다. 기온이 여느해보다 낮고 변덕이 많아 봄이 왔다는 느낌이 들기 어려울 정도이다. 청명을 눈앞에 두었지만 눈이 허옇게 대지를 덮고있으니 봄기운이 알려지지 않는다해도 과언은 아닐것이다. 계절이 봄인만큼 봄을 맞은 지난 4월1일 상지시조선족중학교에서 성 고중조선어문교수연구토론회의가 있었다. 상지시 입구에서 말타고있는 조상지장군의 동상을 보는 순간 상지시는 유서깊은 곳임을 짐작할수 있었다. 회의기간 날따라 학생수가 격감되여가고있는 오늘날에도 우리 민족언어문자를 살리기위하여 로심초사하는 조선어문교원들의 모습이 너무도 보기 좋았었다. 더우기 새로운 과정개혁의 리념을 체현한 리성애교원과 서계영교원의 공개수업은 참으로 감수가 깊었다. 학생들에게 사유의 공간을 최대한으로 넓혀주어 학생들로 하여금 자유롭게 사고한후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시키게 하는 교수는 참관하는 이들의 가슴을 내내 울렁이게 하였다. 또한 참관교수뒤에 이어진 교수토론에서 서로가 자신의 관점을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는 전경은 말그대로 서로의 장점을 따라배우고 단점은 매울수 있는 배움의 장, 교류의 장이 되기에는 한치의 손색이 없었다. 여느 회의에서나 그러하듯이 이번 회의의 마지막순서도 학교의 축하공연이 있었다. 회의를 다녀보면 어느 학교나 다 축하공연이 있었는데 보통 학생들이 춤, 노래, 악기독주 등 몇가지 절목으로 출연하는것이 관례였기에 오늘도 그렇겠지 하는 마음으로 관람석에 앉아있는데 누군가 공연프로그램을 건네주기에 받아서 대충 훓어보았더니 8개의 절목중 2개의 절목이 초중1학년조와 고중1학년조 선생님들의 절목이였다. 그때까지 공연은 시작되기전이였지만 교원들의 절목이 프로그램에 적혀있다는것이 너무나 신기하여 곧 있게 될 공연에 대한 호기심이 한가슴 그들먹이 고여오는건 어쩔수 없었다. 드디여 공연이 시작되였는데 초중1학년조 선생님들이 나이와 맞지 않게 생기발랄하고 천진란만한 동작으로 추는 어린이춤은 흥분에 들뜨게 하였으며 고중1학년조 선생님들이 률동적이고 약동적인 춤사위로 추는 현대춤은 장내에 시종 박수갈채가 떠나지 않게 하였다. 학생들의 공연도 좋았지만 교원들의 공연을 보는 내내 나는 이름할수 없는 감정에 휩싸이면서 나름대로의 생각에 잠기게 되였다. 교원들의 공연이 예술적으로 평가해서 아주 좋았다기에 앞서 교원들이 공연했다는 그 자체는 예술의 높이를 초과하지 않을가 하는 생각도 가져보았었다. 우리는 늘 우리의 교육에서 교원의 선도적인 작용에 대하여 중시하여 왔으며 또한 선도적인 작용을 일으키기위하여 노력해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것이다. 모든 일에서 교원의 선도적인 작용이 필요하지만 현실적으로는 그렇게 원만하게 이루어지지 않고있다고 생각된다. 특히 새로운 과정개혁하에서 학생들의 능력배양을 념두에 두고 교원의 시범이 있다면 학생들에게 공감대를 형성해주어 그들의 발산사유에 령감의 불꽃을 달아줄수 있지 않겠는가. 하다면 그날 선생님들의 춤을 감상한 학생들은 자신을 가르치는 선생님을 더욱 존경하게 될것이며 또 더 자연스럽게 다가설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렇게 된다면 가르침에서나 배움에서 사제간이 더 친근해질것인즉 그것이 곧바로 교원이 말보다는 행동으로 보여준 선도적인 작용이 일으킨 역할이 아니겠는가. 회의가 끝나 학교교정을 나서면서 볼라니 교정의 나무들은 변덕많은날씨에도 끄덕없이 물기를 올리려고 서두르고있는상 싶었다. 이제 청명이 지나면 곧 본격적으로 물기를 올려 눈을 틔우고 봉우리가 질것이며 멀지 않아 꽃이 피여 향기를 피울것이다. 허나 아직은 이르건만 나는 벌써 상지시조선족중학교교정에서 봄날의 향기를 나름대로 만끽하여 너무나 즐거운 마음이였다  
34    모여야 곬을 이루어 거세차진다 댓글:  조회:2019  추천:2  2013-11-11
금년 겨울방학에 동생들이 있는 심수로 다녀올 기회가 생기게 되였는데 그길에 향항과 오문을 유람할 생각으로 향항오문통행증을 만들려고 지난 1월초에 공안국으로 가게 되였다. 생각밖으로 공안국에는 통행증과 려권을 신청하러 온 사람들로 붐비고있었다. 수속절차는 다음과 같았다. 우선 신청서류를 받아서 작성한다음 다른 칸으로 가서 사진을 찍어야 하는데 증명사진다섯장에 45원이였다. 그러나 실제 사용하는 사진은 두장뿐이였다. 다음 또 다른칸으로 가서 무조건 배달비(传递费)40원을 바쳐야 신청을 접수하는데 배달비를 납부하고 오면 다시 접수처에 통행증은 140원, 려권은 220원을 또 따로 납부해야 했다. 필자는 이렇게 돈을 받는것이 맞는지 틀리는지를 알아본적은 없지만 필자의 생각으로는 사진을 두장만 사용하면 두장만 찍으면 될것인데 하필이면 그렇게 비싸게 쓰지도 못할 석장을 더 찍는가 하는것이고 다른 하나는 배달이 필요없어도 또 실제로 배달을 하여주지도 않으면서 배달비를 무조건 떼는것은 합리하지 않다고 본다. 그날 내내 마음은 불쾌해나면서 공연히 짜증만 나는건 어쩔수 없었다. 헌데 문제는 통행증과 려권수속을 밟으러 그곳으로 온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누구 하나 의문을 가지고 질문하거나 따지는 사람이 없다는데 더 놀라왔으며 마음은 더 그늘져오는건 정말 나로서도 리해가 가지 않았다. 그날 수속하러 온 사람들을 어림잡아 백명에 가까울것 같았는데 모두가 줄을 선 긴행렬이 어서 줄어들어 자신의 차례가 되여 수속을 마치고 돌아가려는 일념뿐이였지 왜서 이런 돈을 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근본 생각도 가져보지 않는것 같았다. 사회의 발전과 더불어 지구라는 이 거대한 땅덩어리에서 살고있는 사람들 모두가 조화롭고 밝으며 보다 편안하고 즐거운 사회가 되기를 바라고있는것만은 자타가 공인하는 숨길수 없는 현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것이다. 하다면 이런 사회는 어느 한두사람의 힘으로 또는 한개부류의 사람들 힘으로는 도저히 이루어질수 없다. 사실 이 사회에 살고있는 모든 인간들은 태여나는 순간부터 책임이라는 두글자를 머리에 새겨야 할것이며 모든 일에서 책임을 질줄 아는 사람으로 되여야 할것이다. 물론 자신이나 가정에 대한 책임은 더 말할것 없겠지만 사회에 대한 책임도 결코 회피할수는 없다. 만약 누구나 다 이 사회에 대한 책임을 회피한다면 이 사회가 어찌 발전할수 있으며 어찌 우리가 바라는 그런 사회가 만들어질수 있겠는가? 한줄기 시내물은 절대로 바다로 흘러갈수 없다. 처음에는 돌돌 구을며 흘러갈지라도 흘러감에 따라 바위와 암초에 부딪쳐야 할것이며 또 증발되는것도 피면할수는 없기에 바다에 이르기전에 말라붙고 말것이다. 허나 한줄기 시내물이 흘러가다 다른 한줄기 시내물을 만나서 합세하여 흘러가다 또 다른 시내물을 만난다면 작은 강을 이룰것이며 그 강이 또 흘러가다가 다른 강을 만난다면 사품치는 큰강을 이룰것이며 종당에는 힘차고 거세차게 바다로 흘러가 물로서 바다로 흘러가고팠던 소원을 이루고 말것은 의심치 않아도 될것인바 이는 삼척동자도 알수 있는 간단한 도리가 아닌가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밝고 참된 사회를 바라는 우리의 소원을 현실적으로 이루려면 한두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이룰수 없다. 오직 사회전원이 모두 책임이라는 의무감을 갖고 참여한다면 부정과 부패, 비리와 암투는 자리를 잡지 못할것이며 종당에는 물러나게 될것이다. 그러면 물이 바다로 흘러가는 소원을 이루듯이 우리가 바라는 사회가 만들어질것임은 의심치 않아도 될것이다. 강건너 불보듯 혹은 그까짓것쯤이야 하는 식으로 스쳐지나면 비록 보기에는 아주 대범하거나 호방할것 같지만 결국은 아주 작은 일도 새끼를 쳐 큰일로 번져질것이며 그러노라면 수습할수 없을 정도로 가게 될것인데 종당에는 이 사회에 살고있는 전원들 모두가 당하는 결과를 가져올것이다. 사회인원으로서의 책임을 생각하고 모두가 한마음이 되여 말이 아닌 실천에 옮긴다면 우리가 바라는 사회는 우리의 두손에 의하여 꼭 만들어질것이다. 물이 모여야 곬을 이루어 거세차듯이 사회구성원 모두가 한마음이 되여 참여한다면 그 힘은 누구도 당하지 못할것이다.
33    력사유적을 찾아서 댓글:  조회:2442  추천:1  2013-11-04
 한국 흥사단(흥민통)에서 주최하는 제14회 동북아 청소년친선문화제의 일원으로 추천되였다는 소식을 접해서부터 마음은 설레임으로 벅차오르기 시작하였으며 떠날 림박이 되니 잠을 이룰수 없었다. 언제부터 가보고싶은 몇몇 유적지를 직접 가볼수 있다는것도 그렇지만 민족의 미래를 걱정하고 민족의 미래를 위하여 헌신하는 지성인들을 만나서 며칠동안 함께 할수 있겠다는데서 더 마음이 설레여왔었다. 대련으로 향한 열여덟시간의 기나긴 야간렬차를 타서 고생스러웠지만 이제 곧 생소한 얼굴들을 만날수 있다는 기대감에 피곤도 물러가는것 같았다. 도착하여 보니 우리 흑룡강 일행이 제일 늦어서 죄송한 마음이였으나 어찌나 친절하게 맞이하여 주는지 모든것은 그때 순간이였었다. 의사는 갔어도 정신은 영원하다 간단한 점심식사를 마치고 일행 90명은 두대의 대형뻐스에 탑승하여 려순으로 향발하였다. 력사에서 영원히 지워버릴수 없는 려순감옥을 돌아보기 위해서였다. 려순감옥은 려순시외곽에 자리하고있었는데 옛건물 그대로 잘 보존되여 있었는데 우리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돌아보고있어 사람들로 북적이였다. 가이드의 해설을 들으면서 감옥을 둘러보노라니 침략자들의 비인간적인 만행에 저도 모르게 두주먹이 불끈 쥐여지는건 어쩔수 없었다. 비록 일행의 발걸음소리가 들렸지만 어쩐지 나의 귀가에서는 침략자들에게 비인간적인 학대와 고문을 당하면서 내는 신음소리가 들리는것만 같았다. 민족의 영웅인 안중근의사는 내가 살고있는 흑룡강 할빈역에서 조선침략의 원흉 이또히로부미를 격살하였고 또 려순감옥에서 순국했다는건 익히 알고있었지만 정작 안중근의사가 갇혀있던 감방과 순국한 자리에 섰을 때의 감정은 무어라 형언할수 없었다.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침략의 원흉 이또히로부미를 격살한 그 정신은 참으로 고매하여 세세대대로 이어받아야 할것이며 찬미해야 할것이다. 그외에도 신채호선생님과 이회영선생의 사진앞에서도 마음은 너무도 무거워 났으며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것을 서슴없이, 아낌없이 바친 그들의 정신이야말로 참으로 고상하고 숭고함을 다시한번 심절하게 느끼게 하였다. 비록 의사들은 갔지만 그들의 정신은 영원히 우리들의 귀감으로 되여 새겨져있을것이라는 생각을 하노라니 다소 위안이 들었지만 침략자들의 만행은 비록 력사이지만 잊을수 없으며 다시는 있어서는 않될것이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나 보고싶어” 단동은 조선의 신의주와 마주한 도시로서 푸르른 압록강에서 배를 타고 거니노라면 조선을 지척에서 바라볼수 있었다. 우리 일행은 대형유람선에 올라 압록강을 돌게 되였는데 조선쪽으로 가까이 갔을 때 모두 함께 목청을 돋우어 “안녕하세요?”. “건강하세요”하고 크게 웨쳤었다. 그 소리에 강저쪽 언덕에서 일하던 조선의 일군들이 손을 저어 답례를 보내왔었다. 홀연 우리 일행중에서 “어마나, 나 보고싶어”하는 외마디 웨침소리가 들려왔었는데 그 웨침소리는 울먹이는 웨침소리였기에 목을 메우며 짧게 들려왔었다. 그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말그대로 온몸이 떨려나면서 저도 모르게 눈확이 뜨거워남을 어쩔수가 없었다. 동족애란 무엇인가하는 가장 적절한 답을 얻어보는 순간이 아닐수 없었다. 비록 한번도 본적이 없고 말도 건네본적이 없지만 한마디 인사에 간단히 손저어 답례하였지만 그속에서 우리의 피는 같은 피임을 너무도 똑똑히 실감하는 순간이였다. 끊어진 압록강단동철교를 걸으면서 나는 많은 생각을 해보았다. 이제 어느날인가는 저 끊어졌던 단동철교가 진정으로 이어져서 서울에서 렬차에 앉으면 당날로 신의주를 거쳐 단동으로 와서 다시 세계로 나가는 그날이 올것이라 믿고싶었다. 뿐만아니라 이제 다시는 울먹이면서 그리움에 휩싸여 보고싶다는 말을 하지 않게 그리고 보고싶으면 언제든지 달려가서 볼수 있는 세계화의 시대가 펼쳐질것이리라 믿고 싶었으며 우리들에 의해 실현되게 하여 더는 후대들에게 상처를 주지 말아야 하지 않을가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력사책이나 사극을 통하여 리성계가 위화도에서 네가지 불가를 빌미로 료동정벌을 포기하고 회군하여 고려를 뒤엎고 조선을 세웠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정작 위화도를 바라보니 감회가 깊었으며 그때 만약 리성계가 료동정벌에 나섰으면 어떻게 되였을가, 또 료동정벌에서 승리하였다면 과연 어떻게 되였을가 하는 생각을 해보노라니 력사도 순간에 의하여 좌우지 되며 그로하여 영원이라는것이 결정되지 않을가 하는 생각도 가져보았다. 동양의 피라미드 고중조선어문교과서에 풍기재선생이 쓴 “피라미드가 주는 계시”라는 글이 있어 학생들에게 교수해준적이 있었는데 그 글의 피라미드는 애급의 피라미드를 말한것이였다. 허나 집안시에서 만난 장수왕릉은 비록 애급의 피라미드와는 비길수 없겠으나 그 규모와 크기는 정말 혀를 두르지 않을수 없었다. 말그대로 동양의 피라미드가 되기에 손색이 없었다. 그런 피라미드앞에서 삶과 죽음에 대하여 잠간 생각해보지 않을수 없었으며 영원한 삶이란 있을수 없고 죽음 또한 영생할수 없지 않을가 생각해보면서 왜 자신의 무덤에 대하여 그렇듯 신경을 써왔을가 하는 의문도 가져보지 않을수 없었다. 광활한 료동땅을 메주밟듯 달리던 광개토태왕의 비와 릉앞에서는 자연 머리가 숙어졌으며 요즘 한국 TV에서 방송하는 “광개토태왕”을 머리에 떠올리게 하는 순간이였다. 자랑찬 력사를 후대들에게 널리 알리는것은 미룰수 없는 책임을 다시 느끼게 하는 순간이였다. 5호릉의 벽화는 몇천년이 흐른 오늘날까지도 그대로 보존되여 있었는데 벽화로 당시의 사회를 알아볼수 있어 좋았으며 어쩌면 오늘까지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보존될수 있게 한 당시 인민들의 지혜에 자연 머리가 숙여지면서 감탄하지 않을수 없었다. 환도산성을 둘러보면서 천연요새를 리용한 당시 인민들의 지혜와 슬기에 감복하였으며 각양각색의 무덤떼앞에서는 한때는 천하를 호령하면서 말을 타고 광활한 지역을 누비였을 이름모를 사람들로하여 숙연해지는 마음을 달랠길 없었다. 장백산에 울려퍼진 친선의 멜로디 전날까지도 화창하던 날씨였으나 우리가 통화에서 이도백하로 향발하는 야간렬차에 올랐을때부터 하늘은 흐릿하여 오기 시작하였으며 이도백하에 내린 이른 아침에는 비가 좀 내렸을뿐만 아니라 날씨 역시 흐릿하여 모두가 장백산천지를 볼수 있을가 하는 걱정뿐이였다. 우리가 정작 장백산에 들어서니 무정한 하늘은 비를 퍼붓기 시작하여 끝내는 장백산천지를 볼수 있는 행운을 가지지 못하고 말았다. 허나 일행 모두가 민족의 성산 장백산에 온것만으로도 장백산의 정기를 듬뿍 받아서인지 명랑한 기분이였다. 장백산 민속촌에서의 하루밤은 참으로 뜻깊은 하루밤이였으며 내내 이어지지 못하는 아쉬움만 그들먹이 고여왔었다. 제14회 동북아 청소년친선문화제 중한 친선예술축제는 밤늦도록 장백산에 울려퍼졌었는데 통일을 갈망하는 단막극이나 답사기간의 일정을 일축하여 표현하는 장끼표현, 활발하고 명랑한 십대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노래와 춤은 정말 보는 이들의 마음을 울렁이게 하였으며 감동을 그들먹이 실어주었다. 우리 일행외의 투숙객들도 모여와 구경했으니 그 정경은 구태여 더 설명하지 않아도 가히 짐작할수 있을것이다. 축제의 평심으로 참여한것도 나의 일생에서는 잊을수 없는 일이다. 밤늦어 잠자리에 들었으나 좀체로 잠들수 없었다. 이제 어느날인가는 세계화의 길로 나가 더는 국계에 구애없이 우리 모두가 늘 한자라에 모였으면 하는 바램이였으며 그날이 어서빨리 오기를 두손모아 기원하였다. 선인들의 발자취를 더듬어 도문에서 봉오동골짜기로 향할때부터 마음은 이상하리만큼 흥분되여 왔었다. 홍범도장군이 봉오동골짜기에서 일본놈들을 너무도 멋지게 족치여 지금까지도 전설같이 전해내려오고있기때문이였다. 봉오동골짜기는 산세가 험해서 매복하여 족치기는 참으로 좋은 곳이였다. 봉오동골짜기에 서있노라니 자기도 모르게 귀전에서 돌격의 함성소리와 총소리가 울려오는 느낌이였으며 마음은 흥분으로 들뜨기도 하였다. 룡정에서 찾아본 “3,13”독립의사릉은 찾는 순간부터 무거워나는 마음이였다. 모두가 묵념으로 시작하였으며 오래동안 그자리에서 떠날념을 못하였다. 조국의 독립과 해방을 위하여 자신을 바친 의사들이 너무도 거룩하게 안겨왔었다. 우리 교육의 발상지인 서전서숙, 명동학교, 대성중학교를 돌아보면서 어디가나 교육을 중시하고 교육을 우선시한 우리 민족의 미풍량속과 소팔아 자식공부시킨다는 미담을 그대로 느낄수 있어 좋았다. 명동촌에서 우리 민족의 저항시인 윤동주생가를 찾았는데 시인이 동년을 보낸 발자취를 더듬어볼수 있어 참으로 감회가 깊었다. 룡정의 일송정에 올라 60리 평강벌과 세전벌, 유유히 흘러가는 해란강을 바라보는 마음은 시원하기에 앞서 무거워났다. 그제날 선구자들은 여기서 밀회를 가지고 행복한 앞날을 그리였으니 말이다. 비록 “선구자의 노래”를 어렴풋하게 기억하여 조금은 부끄러웠으나 일행이 합창으로 부르는 모습은 참으로 보기가 좋았다. 다시 만날 그날을 기약하며 마지막날 연변대학예술학원에서 있은 조별미션답사는 참으로 의의있고 뜻깊었다. 매조별로 자신들이 다녀온곳을 소개하고 또 자신들이 느낀점을 간략하여 설명하였는데 소조를 대표하여 설명하는 학생들 모두가 조리있고 줌점이 명확하여 탄복이 가지 않을수 없었다. 그 순간 나는 저도 모르게 우리의 교육을 반성해보지 않을수 없었다. 지금까지 우리의 교육은 많은 개혁을 해오면서 발전을 거듭해왔지만 아직도 학생들의 능력배양은 말에 그치고있을뿐 현실적으로는 잘 이루어지지 못하고있다 해야 할것이다. 이제 우리의 학생들도 한국학생못지 않게 능력을 가진 학생으로 배양해야겠다는 생각을 해보게 되는 순간이였다. 8월12일 이제 우리들이 헤여져야 할 시간은 드디여 다가오고야 말았다. 생각같아서는 시간이 멈추어버렸으면 좋으련만 시간은 이 세상 그 누구에게나 가장 공평한 법이니 우리의 힘으로는 어쩔수가 없었다. 결국 아쉽지만 헤여져야만 했다. 서로 손잡고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였으며 억지로 웃음은 지었지만 목은 갈려있었다. 그러다 어느 누구인가 흐느끼기 시작하였으며 결국은 눈물을 흘리고야 말았다. 인간이란 만남과 헤여짐속에서 사는것이라고해도 과언이 아니건만 헤여져야 하는 순간만큼은 너무도 사람의 마음을 설레이게 하는것이여서 어쩔수가 없었다. 인연이란 한번 만나고 일생동안 그리움속에서 살기도 하고 또 한번도 만나지 않고 영원히 그리움속에서 산다고 하는데 우리의 만남과 인연은 영원하기만을 바라고 또 바랐다. 나는 굳게 믿는다. 피는 물보다 진한것이다. 우리 모두가 단군의 후손으로서 우리의 몸에서는 같은 피가 끓고있으니 언젠가는 또 만날것이며 만나면 또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어갈것이리라. 그리고 우리 모두 동북아 평화와 통일을 위하는데 한몫할것임은 의심하지 않을것이다. 지금 이 글을 마무리 하는 순간에도 7박8일을 함께 하였던 한국의 학생들과 학자분들이 눈앞에 삼삼히 밟혀온다. 민족의 어제를 잊지 말고 후대들에게 알려주어야 할 필요성을 안고 동분서주하면서 또 민족의 미래를 걱정하는 지성인들이 있기에 우리는 하나가 되여 나아갈것이다. 90여명을 인솔하느라고 항상 학생들과 한마음이 되여 앞뒤로 뛰여다니던 이현정부장님과 김도현간사님, 그리고 매사에서 항상 꼼꼼히 챙겨주시던 류종열대표님, 통일부장관과 차관직을 지니셨지만 항상 무람없이 대해주시던 리봉조대표님, 항상 유머와 재치로 이야기를 리드해가는 정용상교수님, 비상한 기억력으로 민족의 발자취를 정통한 노성태선생님, 어디가나 정경을 꼼꼼히 렌즈에 담던 리종각교수님 그외의 모든 분들을 영원히 잊을수 없다. 이제 어느날인가 또 존경스러운 분들과 한자리에 모여 즐거운 한때를 만들어보길 기원하는 마음이다. 그날까지 부디 지성인들 모두가 건강하게 보내길 진심으로 기원하면서 이글을 마친다.
32    늦은것보다 멈추는것이 더 두렵다 댓글:  조회:1762  추천:2  2013-11-04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차를 타고 가노라면 빨리 달리여 바라고 떠난 목적지에 빨리 도착하기를 원하는데 이는 차를 타고가는 사람들의 공통한 심리라고 할수 있다. 그러다가 일단 바라던 생각과는 달리 차가 멈추어버린다면 그때는 빨리 달리기보다는 늦게라도 멈추지 말고 계속 달렸으면 좋았을걸 하는 생각을 하게 될것이다. 이것이 일상생활에서 차타기라면 우리의 삶도 때로는 이 차타기와 흡사할 때가 많다. 우리는 무슨 일이든 벌리면 조급한 심리를 감추지 못한다. 세상의 모든 일은 자체로서의 순서가 있는데 그 순서를 떠나서 너무 결과만 바라다보면 결국 원만한 결과를 맞이하게 되는것이 아니라 중도이페하는 아쉬움을 맞이하게 된다. 전에 고향마을에 있을 때의 일이다. 호도거리 책임제를 실시하여 몇해가 되지 않아서 산도 자류산으로 계약을 맺고 도거리를 할수 있게 되였다. 그러자 고향마을의 두청년이 팔을 걷어부치고 나서게 되였는데 그 소행이야말로 참으로 우러러볼만한것이였다. 한사람은 큰산을 두개나 도거리하고 그해부터 련속 3년간 봄이면 삯을 내면서 로력을 동원하여 나무를 심기시작하였는데 일부 사람들은 리해하지 못하는 눈빛이였으나 대부분 사람들은 아주 장한 일을 한다고 치하를 아끼지 않았다. 헌데 산과 마을이 멀리 떨어져있고 또 가물을 타는데라 나무를 심어도 활착률이 높지 못하여 해마다 고생해야 했다. 그렇게 몇년을 견지하니 산에 한뽐만한 애솔들이 푸픈 잎을 다보록이 떠이고있는 모습이 보여 참으로 보기 좋았다. 헌데 여기서 중도이페할줄이야. 다른데 더 좋은 돈벌이가 있다면서 기다리기가 바쁘다고 이미 그렇게 공을 넣은 산을 헐값에 팔고 떠나갔던것이다. 결국 후에 넘겨받은 사람이 지금까지 그 도원에서 노다지를 캐고있음은 의심치않아도 될 일이다. 다른 한청년은 마을앞산의 황무지를 뜨락또르로 갈아엎었는데 그옆을 지나기만 해도 정말 말그대로 흙의 싱그러움이 그대로 코끝을 간지렵혀와 무엇이든 심으면 우썩우썩 자랄것만 같았다. 그는 그밭에다 인삼을 심을 생각으로 밭가운데 자그마한 벽돌집도 짓고 본격적으로 인삼재배를 시작하였다. 그렇게 인삼도 심고 봄이면 밭도 더 늘구고 하여 모두들의 부러움을 자아냈는데 그만 하루아침에 그 밭을 한족사람한테 양도할줄이야. 뱀잡이가 돈을 번다는 말을 듣고 기술요구가 높은 인산재배를 그만두고 뱀잡이를 떠나간것이다. 이러한 실례는 너무나 많은데 공통점이라면 모두가 늦은 걸음이라도 끝까지 가지 못하고 중도하차로 멈추어버리고만것이다. 일전에 한국TV의 “여섯시 내 고향”에서 보았는데 부모님이 운영하던 떡집을 물려받아 떡장사를 하여 아들딸 공부시키고 시집장가 보내였으며 지금은 남부럽지 않게 살아가고있는데 그 떡집을 또 딸사위가 물려받으려고 매일 떡만들기를 배우느라 땀을 흘리고있는 모습은 참으로 가슴에 그대로 와닿아 감동이 여울져오고있는건 어쩔수가 없었다. 떡집을 대를 이어 운영해오면서 자신들만의 비법과 노하우를 가질수 있었던것은 바로 멈추지 않고 끈기있게 밀고 나왔기때문이며 바로 그랬기에 그것으로 가족의 행복을 마련하고 삶의 가치를 창조할수 있었던것이다. 그러고보니 우리의 삶에서 그 무슨 일을 하나 멈추지 않는 정신이 성공의 여부를 결정함을 쉽게 깨칠수 있다. 일에서 빠른것도 좋겠지만 빠르다고해서 능사만은 아님을 잊지 말아야 한다. 가장 작은 실례로 나무 한토막을 칼로 끊는다할 때 힘을 들여서 몇분동안에 끊어버리면 좋겠지만 그런 힘이 미치지 못할 때는 하루에 한번씩 자국을 낸 자리에 힘을 넣어 긋는다면 비록 시간적으로는 늦을지라도 나무는 어느날인가 두토막으로 나게 될것이다. 허나 단숨에 끊기지 않는다고 칼을 버리고 포기한다면 그 나무를 영원히 두토막으로 내지 못할것은 너무도 자명한 일이 아닌가. 어떤 일이든 시작하기가 어렵지만 그보다는 그 일을 끝까지 밀고 나가서 성공하기는 더 어렵다고 본다. 성공의 여부에는 여러가지 인소가 작용하겠지만 조급정서를 삼가하고 보다 느슨한 마음으로 늦을지라도 멈추지 말고 끈기있게 밀고나가는것이 보다 중요하지 않을가 생각해본다.
31    보슬비가 되련다 댓글:  조회:1626  추천:1  2013-10-30
  교수준비로 책에 파묻혀있다가 머리를 쉬울겸 창밖을 내다보니 바람 한점없이 고요하고 흐릿하던 하늘에서 어느때부터인지 보슬비가 보슬보슬 내리기 시작하였다. 그런 창밖을 초점없이 내다보노라니 자기도 모르게 우수에 잠긴듯, 무엇을 갈망하는듯한 수연학생의 모습이 우렷이 떠오르면서 사색의 깊은 심연에 빠지는건 나로서도 어쩔수가 없었다. 개학초가 되여 학년조에서는 교원들마다에게 학생들을 맡아서 이끄는 임무를 주게 되였는데 나에게도 학생들이 차례지게 되였다. 정작 학생명단을 손에 받아들고보니 담임사업을 그만둔후로 학생들과의 담화가 퍽 적어졌던 자신을 새롭게 뒤돌아보지 않을수 없었다. 하여 어느날인가 나는 나에게 차례진 수연학생을 주동적으로 찾게 되였다. 사무실로 잠간 다녀가라는 전갈을 받고 나의 사무실로 찾아온 수연학생은 들어서면서부터 몸둘바를 몰라하면서 얼굴이 홍당무우가 되여 겨우 내가 앉은 사무상곁으로 다가오는것이였다. 난 그러는 수연학생을 일별하면서 차분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수연학생, 동무와 이야기를 나누려는것이지 절대 비평하려는것이 아니니깐 시름놓소. 오늘 우리는 아무런 구애도 없이 이야기를 나눠보기오” 나의 말에 수연학생은 너무도 뜻밖이고 의외라는듯 의아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면서 들어설때보다는 조금은 구속없는 표정으로 내가 가리키는 자리에 아미를 숙이고 다소곳이 앉았다. 처음 이야기는 물론 내가 여러면으로 이끌었는데 서로가 말을 주고받기 시작하여서부터 수연학생은 맑고 또렷한 눈길로 나를 쳐다보면서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자연스럽게 이야기하기 시작하였다. 알고보니 수연학생은 아버지가 십여년전에 한국으로 나갔는데 그만 현장에서 사고로 돌아가게 되였으며 어머니는 한국사람을 만나 재가하여 한국으로가 어린 아이까지 딸린 상황이다보니 지금은 외할머니와 함께 지내고있었다. 물론 어머니가 수연학생앞으로 생활비는 넉넉히 부쳐오지만 외로운 외할머니와 의지하면서 부모님의 사랑이 목마르게 살아가는 학생이였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수연학생의 눈에는 어느덧 가랑가랑 눈물이 맺히기까지 하였는데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런 수연학생을 바라보는 나는 무어라고 말했으면 좋을지 일시 감이 서지 않았다. 지금 거의 모든 학생들의 부모가 출국하여 학생들이 고아아닌 고아로 보내는것이 현실임은 낯설지 않지만 이제 사춘기에 막 들어서는 어린 학생이 이렇듯 아물지 못한 큰상처를 가슴에 그대로 가지고 공부할줄은 천만뜻밖이지 않을수 없었다. 그러는 수연학생이 부모사랑 또는 부모못지 않은 사랑을 얼마나 갈구하고있는가는 그말을 하고있는 그의 눈길이 그대로 알려주고도 남음이 있었다. 나는 스스로의 마음을 갈아앉히면서 나로서는 그에게 힘이 될만한 말을 골라하느라고 짧은 시간동안 무척이나 신경을 썼다. “수연이, 동무의 마음을 충분히 리해할만하오. 이제 남은 학창생활을 보다 충실히 보내기를 바라오. 앞으로 힘이 자라는데까지 동무를 이끌고 방조해줄테니 곤난한 일이 있으면 찾아오오” “선생님, 고맙습니다. 앞으로 저도 선생님을 자주 찾겠지만 선생님께서 절 많이 찾아주시면 더 고맙겠습니다.” 나의 말에 수연학생은 좀전과는 다른 사뭇 밝은 표정을 띠면서 말하는것이였다. 그런 그의 표정이 좋았지만 그의 그 한마디 말은 나의 가슴에 큰 돌멩이를 던진듯 크나큰 파문을 일구며 좀처럼 진정할수 없게 하였다. 수연학생이 나간 문쪽을 바라보면서 나는 무거워나는 마음을 겨우 달래며 나혼자만의 생각에 깊숙이 빠지지 않을수 없었다. 예로부터 우리 교원들을 일컬어 인류령혼의 공정사라고 한다. 그말의 의미를 파고들자면 깊겠지만 간단히 한마디로 일축한다면 교원이 한사람의 성장에 자못 중요한 역할을 일으킨다는것이라고 생각한다. 만물의 령장인 인간은 인간이기전에 우선 동물인데 그것도 감정을 가진 고급동물이기에 인간이 된것이다. 인간이기에 사랑을 갈구하게 되며 한창 자라는 아이들은 부모의 사랑을 더없이 갈망하게 된다. 그러고보니 현실적으로 그런 사랑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의 마음이 얼마나 허전하고 또 얼마나 사랑에 목마를가 하는 생각을 해보지 않을수 없다. 한 사람의 성장에서 중요한 역할을 일으키는 교원은 우선 글을 가르치는 교원이기전에 부모못지 않은 사랑을 앞세울줄 아는 교원이 된다면 그 교육의 효과는 말치않아도 가히 짐작할수 있을것이다. 주는 사랑도 한순간의 사랑보다는 모든 면을 살뜰히 보살펴주는 지속적이고 차분한 사랑이라면 그 사랑은 그대로 학생의 마음에가 닿을것이며 또 마음에 닿는다면 그 나이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마음의 상처도 많이 치유되여 보다 밝은 마음으로 매사를 대하고 보다 넓은 시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될것인즉 그러면 말그대로 인류령혼의 공정사로서의 직책을 수행함에 손색이 없게 될것이고 우리의 학생들 역시 진정 마음으로 우러러보게 될것이며 영원히 잊지 못할 영상으로 각인할것이다. 삼복염천에 갈증으로 불타는 사람에게 약수를 선물한 사람이니깐. 뚝뚝 떨어지는 비방울소리에 나는 간신히 사색의 심연에서 헤여나올수 있게 되였다. 창밖을 내다보니 그때까지도 보슬비는 처음 내리던 그대로 보슬보슬 내리고있었는데 교정에 휘늘어진 수양버들을 흠뻑 적시고 다시 큰 비방울을 만들어 땅에다 뚝뚝 떨구고있었으며 창문앞 잔디밭에는 눈에 띄우게 비물이 흥건히 고여 있었다. 그런 풍경을 내다보는 나의 머리에는 불현듯 반짝하고 무언가 비쳐왔다. 보슬보슬 내리는 보슬비가 비록 내릴 때는 느낌정도로 작지만 차분히 오래도록 내리니 나무도 잔디밭도 모두 흠뻑 적실수 있으며 소리없이 땅속에 그대로 잦아들수 있다. 만약 우리의 학생들에게도 사소한 작은 일부터 시작하여 매사에 차분히 사랑을 몰붓는다면 그 사랑은 그들의 마음심처까지 닿을수 있을것이며 종당에는 융합과 공명이 일어날것이 아니겠는가! 보슬비같은 사랑! 참으로 마음에 드는 발견이 아닐수 없었으며 자신의 발견에 금시 마음 한쪽이 건뜻 들리면서 스스로 실실 나오는 웃음을 금할길 없었다. 종래로 꿈이 없는 나는 그날저녁 꿈을 꾸게 되였는데 꿈에 어쩌면 내가 보슬보슬 내리는 보슬비로 되지 않았겠는가!
30    코기러기가 있어야 한다 댓글:  조회:1655  추천:2  2013-10-30
 금년추석에 고향에 다녀오면서 보고 들은 일들은 지금도 나의 머리속에서 잊혀지지 않고 수시로 마음을 괴롭히는건 어쩔수가 없다. 고향의 앞산에 팔뚝만큼 굵은 이깔나무가 푸른 숲을 이루고있어 참으로 보기 좋아 물어보았더니 타민족이 심은거란다. 그 산은 분명 우리 마을 산이였는데 타민족이 나무를 심다니? 내가 고향에 있을 때는 그 앞산을 집집마다 자류산이라고 떼주어 나도 아마 3년은 우리 집에 배당된 산에 이깔나무묘목을 심은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후 무슨 원인인지는 몰라도 그걸 다 페지하였지만 그 산만은 여전히 우리 촌의 산으로 되여 있었다. 헌데 그 산이 어떤 경로를 거쳤는지 우리 조손족마을 산을 타민족이 버젓이 차지하고 대를 이어 락을 볼수 있는 도원으로 만들었음은 분명하다. 130여가구에 인구 500여명이였던 우리 마을은 마을 뒤편에 덩실한 초등학교가 있었는데 학생이 둘어 학교가 페교된지도 여러해가 된다. 헌데 그 넓던 학교운동장에 다른 마을에서 파헤치고 줄줄이 벽돌집을 지어 집들이 들어섰을 줄이야. 현재 마을에는 인구가 30여명밖에 남지 않았으며 농사를 짓는 집은 오직 한집밖에 없고 그 넓은 옥답들은 모두 타마을 촌민들이 활개치며 농사를 짓고있다. 물론 농사를 지을 조선족촌민들이 모두 마을을 떠났으니 밭을 묵일수도 없고 또 양도할수도 있는 일이나 가슴아픈것은 몇해전에 마을을 떠나면서 해마다 논을 양도하기 귀찮다고 그때의 시세로 헥타르당 1500 ~ 3000위안에 10년 심지어는 20년 기한으로 양도해버린것이다. 현재의 시세로는 헥타르당 8000위안에도 너도나도 달려드는 상황인데 말이다. 이런 영문도 모르고, 가슴아픈 일들이 있어도 나서서 해결할 사람이 없는것이 더 마음을 괴롭히고있다. 현재 마을에서 증명하기 위해 소개장을 떼려고 해도 소개신용장에다 도장만 꾹 찍어주면서 내용은 스스로 써라고 한다. 그러니 산이나 집터나 땅을 두고 억울해도 나서서 하소연하거나 해결할 방법을 찾아볼 사람이 없으니 참으로 억장이 무너진다. 마을도 이제는 예전의 마을이름은 사라지고 행적적으로는 타민족촌과 합병되여 다른 이름으로 되여 있다. 지금 30여명밖에 없는 마을이 이제 십년이 지나면 어떻게 될런지 생각하기조차 무서운 일이다.   그런 마을을 보면서 생각이 깊어지지 않을수 없었다. 잘 살아보려고 해외로 연해도시로 물밀듯 나아가는것은 막을수 없는 일이며 어떻게 보면 좋은 일이라고 할수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던 보금자리는 아예 관계치도 않고 조상들이 첫보습을 박았던 산과 들은 어떻게 되든 방치해야 한단 말인가? 어느날인가 옛보금자리를 찾게될 때 그것이 모두가 우리들의것이 아닌 남의것이라면 그때는 어떻게 하겠는지 … 제 보금자리 사랑할줄 모르는 새가 없다고 비록 몸은 떠났어도 고향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을 항상 간직하고 고향을 다녀오면서 고향일에 참여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현재 많은 곳에서 벼농사합작사를 꾸리면서 마을의 토지를 집체로 운영하는데 참으로 좋은 일이다. 헌데 그런일도 앞에 나서서 이끌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사람이 없는 마을은 그대로 지켜보고만 있어야 하는 형편이다. 이 짊을 누가 짊어져야 할가?우리의민족간부들이 아닌가 생각한다. 민족간부들을 사무실에서만 사무를 보게 하지 말고 몇개 마을을 책임진 간부를 내려보내 우리 민족마을 살리기의 선두주자로 나서게 하여 이끌어가게 한다면 그저 말없이 마을들이 사라져가는 현황을 막는데 큰 보탬이 될것이다. 억울한 일, 가슴 아픈 일들을 해결해주고 벼농사합작사를 꾸리며 헐값에 양도한 밭을 조율해주는 등등의 일들을 선두에 나서서 이끌어간다면 산과 들을 지켜갈수 있을것이며 정말로 이렇게 한다면 멀리 나가있는 사람들도 감격해마지 않을것이며 마을살리기도 말뿐이 아닌 실제가 될것이라 믿어의심치 않는다.    
29    바른 마음 바른 행동 댓글:  조회:1837  추천:2  2013-08-29
아마 2년전부터라고 생각된다. 나라에서 빈곤학생보조금으로 해마다 돈을 내려보내여 많은 학생들이 그 혜택을 보고있어 참으로 보는 사람들의 마음까지 훈훈하게 해주어 좋았다. 부모들이 아직도 출국하지 못하고 농사에 얽매여 사는 학생, 부모가 불구여서 방조를 받아야 할 정황인 학생, 부모들이 비록 한국에 나갔지만 한국수속으로 빚을 산더미같이 지고 나가다보니 앞길이 묘연한 학생들로서 정말 학비나 숙비, 식비마저 제때에 납부하기 어려워하는 학생들을 선택하여 적은 돈이나마 보탬이 되라고 주군 하였다. 큰돈은 아니지만 나라에서 주는 관심이니 응당 감격한 마음으로 받아야 할것이며 또 대신 학업에 더 열중하여야 도리일것이나 그것을 응당한것으로 받거나 받고도 기색하나 변치않고 다음해에도 응당히 자기의것으로 되여야 한다는 식은 참으로 보기가 좋지 않았다. 더우기 그외의 다른 학생이 찾아와서 자기네도 곤난하니 보조대상에 들어가겠다고 자진하는 일도 있었는데 조사해보니 보조까지 받아야 할 정황은 근본 아니였다. 이런 일들을 보고 듣고나니 자기도 모르게 한숨이 올라오면서 깊은 사색에 잠기지 않을수 없었다. “명심보감”의 존심편 제19장에는 이런 글이 있다. “너의 꾀함이 현명하지 못하면 후회한들 어찌 미치며, 너의 생각이 착하지 못하면 가르친들 무슨 보탬이 있으랴? 이(利)를 생각하는 마음을 오로지 한다면 도에 어긋나고 사(私)를 위하는 마음이 굳으면 공(公)을 멸하게 된다.” 이 구절의 해석을 간추려본다면 자신만의 리익을 추구하는 마음을 가지고 일을 하다가 실패한다면 후회한들 소용이 없을것이며 자신만을 위하는 마음만을 가진 자를 가르쳐준들 무슨 도움이 되랴. 리익만을 위하는 마음은 공을 멸하는 결과를 져오게 된다는것이다로 되였다. 사람은 자신의 리익을 위하는 마음만을 가져서는 않되며 자신의 리익만을 위하다보면 공적인것까지도 탐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는 뜻으로 나름대로 리해하게 되는 구절이다. 사람은 자기인다음 타인인것만은 부정할수 없는 사실이지만 항상 자기위주가 되다보면 결국 리기적인 마음만 생길것이며 또 나아가서는 남의것까지도, 공적인것까지도 다 자기것으로 만들려고 천방백계로 힘쓰게 될것인바 그렇게 된다면 그 후과는 불보듯 뻔하게 될것이다. 문제는 이런 마음을 정화시켜 자기보다는 남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을 가지게 해야 할것이다. 자기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면 어느날 정말 자기에게 무엇인가 뜻밖에 차례지였을때는 진정 감사한 마음을 간직하게 될것이며 그 마음에 보답하려고 노력할것이다.  곤난보조금은 곤난한 학생에게 주는 혜택인데 그것이 자기에게 차례지였다면 응당 진정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학업에 정진하여 부끄럼이 없는 학생이 되기에 힘써야 할것이며 그런 정경을 보는 옆에서는 곤난한 학생에게 돌려진것을 진심으로 축복해줄줄 알아야 할것이다. 받고도 응당한것으로 또는 자기에게도 응당 차례지여야 한다고 청을 드는것 모두가 바로 리기심의 작간이 아니겠는가? 바꾸어말하면 바른 마음을 가지지 못했기에 바르지 못한 행동이 나올수 있은것이다.  우리의 교육은 이 몇년간 참으로 많은 개혁을 시도해오고있으며 또 많은 변혁을 가져왔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어떠한 개혁을 하든 교육의 최종목적은 바로 바른 인간을 육성하는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지식을 장악하고 능력을 갖추는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우선 먼저 참된 인간으로 육성하는것이 기본의 기본이다. 아무리 박식하고 다재다능하여도 바른 마음을 갖추지 못하였다면 바꾸어 말하여 참된 인간이 되지 못한다면 바르지 못한 행동, 참되지 못한 행동을 하게 될것은 더 말치 않아도 알수 있을것이며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게 될것은 불보듯 뻔한 일로 될것이다. 인성교육을 첫자리에 놓고 우리의 학생들이 바른 마음을 가지고 바른 행동을 하는 참된 학생이 되여 보다 많은 지식을 장악하고 실제능력을 갖춘다면 우리의 교육이 말그대로 교육으로서의 진정한 사명을 완수하였다고 하지 않을가.
28    마음의 공간 댓글:  조회:1713  추천:1  2013-08-29
공간이란 쉽게 말해서 빈자리나 빈곳을 말한다. 우리는 생활가운데서 항상 비좁은 공간보다는 널직한 공간을 선호하며 넓은 공간에서는 모든것이 자유로워지는 느낌이지만 반대로 비좁은 공간에서는 숨이 갑갑하여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된다. 생활에서 넓은 공간을 선호한다면 자신의 마음의 공간은 어느 정도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물론 우리가 살아가는데서 생활속의 공간도 중요하겠지만 마음의 공간은 생활속공간보다 더 중요하다. 그것은 마음은 지성과 감성 그리고 의지를 포함하여 내면적인 진정한 자신을 의미하기에 마음의 공간이 어느 정도인가에 따라서 삶의 질도 달라진다고 말할수 있기때문이다. 서한때의 한신은 젊어서 가난하여 푸주간에서 일하는 백정에 불과하였다 한다. 어느날 건달이 람루한 옷차림을 하고 길을 가는 한신의 앞에 나타나 시비를 걸어오게 되였다. “푸주간 칼을 찬걸 보니 그럴듯해보이는데 우리 한판 붙어보자. 만약 자신이 없다면 지금 내 가랑이 밑으로 기여나가라” 그때의 한신은 끓어번지는 분노로 죽든지 살든지 칼을 들고 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꾹참고 건달의 가랑이 밑으로 기여나갔다. 물론 옆에서 구경하는 사람들이 모두 비웃었지만 한신은 그것도 참고 견디였다. 몇년후 한신이 류방을 받들어 천하를 통일하여 큰공을 세우고 그곳에 금의환향하여 당년의 그 건달을 찾아 “지난날 자네로부터 받은 굴욕이 오늘의 나를 만들어주었네”라고 말하고는 그를 자신의 휘하에서 일하게 했다 한다..  한신이 코앞의 분노와 험담을 두고 참을수 있었던것은 바로 마음의 공간이 한없이 넓었기때문이며 그 공간이 한없이 넓었기때문에 포용할줄 아는 마음가짐을 가질수 있었던것이다. 나는 그 어떤 능사도 아니고 또 모두를 이끌수 있는 능력을 가졌거나 직위를 소유한것도 아니면서 어떤 일을 하나 항상 나의 표준에 놓고 다른 사람도 함께 움직여주었으면 할 때가 많다. 하기에 만약 나의 의지대로 나의 표준대로 되지 않을 때는 마음이 아파나고 지어는 화를 내기에 이르기도 하는데 결국 동기야 어떻게 되였든 결과는 좋지 못하게 되며 마음이 상하게 된다. 언젠가 모임이 있어 우리 일행 8명이 함께 길을 떠나게 되였는데 모든 일이 순리롭게 진척되여 참으로 즐거웠다. 헌데 마지막 귀가시간에서 의견이 맞지 않았다. 생각밖으로 일행중의 친구되는 분이 기어이 저녁을 대접하겠다고 하는데 일행 8명중 두분이 집에 일이 있어 급히 돌아가겠다는것이였다. 그날 난 함께 왔으면 저녁식사가 끝나서 함께 돌아가야 한다고 얼굴을 붉히면서 고집하기에 이르렀다. 허나 집에 일이 있어 꼭 돌아가야 하는 그들의 의지를 꺾을수 없었다. 그때 옆에 있는 친구가 나의 옆구리를 슬쩍 다치면서 일이 있으면 가야지 더 말리지 말라고 귀띔해오기에 내키지 않는대로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들을 떠나보내고 나는 잠간 생각을 굴려보지 않을수 없었다. 함께 갔던 그들이고 일도 순리로왔으니 웬만하면 함께 돌아오련만 집에 피치못할 사정이 있으니 먼저 돌아져야 했겠는데 기어이 나의 의사대로 나의 시간표대로 하려고 했으니 만류하는 나나 나의 만류를 거절하는 그들이나 서로 힘겨웠으며 그렇게 상쾌하지만은 않았을것이다. 집에 일이 있어 가야한다면 차라리 “하루동안 수고많았는데 조심해서 먼저 돌아가 일 잘 보십시오”하고 시원스럽게 말했더라면 먼저 돌아가는 그들이 되려 미안해할것이며 나 또한 마음이 부딧하지는 않았을것이 아니겠는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마치 보둑이 터지면서 막혔던 물이 한꺼번에 밀려나가듯이 마음은 금시 맑아오면서 개운해졌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알게 모르게 그리고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자신의 마음에 공간을 마련하게 된다. 헌데 왕왕 생활에서의 공간은 넓은것을 선호하면서도 따지고 보면 마음의 공간은 탐탁치 못할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그렇게 마음의 공간이 탐탁치 못하고 좁혀지면 자연히 현실이나 타인에 대한 원망이 생기게 될것인즉 결국 자신의 감옥을 스스로 만들어가는것이라면 적절할것 같다. 탐탁치 못한 마음의 공간, 마음의 감옥이 생기니 다른 사람의 의사나 마음을 받아들일 자리가 없게 되여 항시 자신의 틀에 남도 맞추어 넣자고 할수밖에 없게 된다. 허나 타인도 자신의 세계가 있고 자신의 공간이 있는데 왜 나만의 틀에 맞춰져야 하겠는가? 내가 만든 틀은 나에게만 필요하고 타인에게는 전혀 필요치 않은데 말이다.  위대한 문학가 빅토르 유고는 “바다보다도 광대한것은 하늘이지만 그보다 오히려 더 광대한것은 사람의 마음이다”라고 말했다. 뜻인즉 사람의 마음은 한없이 넓어야 한다는것이다. 한없이 넓다는것은 공간이 넓다는 뜻인즉 기쁨과 슬픔, 분노와 즐거움, 불쾌함과 유쾌함 등 모든것이 다 들어설수 있는 자리가 있다는 말이 된다. 페쇄된 사고에서 열린 사고, 사랑과 나눔의 사고로 바뀌여진다면 마음의 공간도 넓어질것인즉 그러면 타인도 스스럼없이 드나들수 있는 사랑의 큰그릇이 될것이다. 한신을 귀감으로 항시 떠올릴 필요가 있을것이다. 마음의 공간이 작아지면 스스로도 감내하기 힘드니만큼 이제부터라도 내 마음의 공간은 내 스스로 만드는것임을 잊지 말고 보다 넓은 공간, 큰 그릇을 만드는 지혜를 익혀나갈것이다. 
27    외로운 과일나무들 댓글:  조회:1884  추천:1  2013-07-08
지난 여름에 있은 일이다. 친구와 함께 차를 타고 멀리 산골양어장에 낚시질을 떠나게 되였는데 가는 도중에 잠간 볼일이 있어 산골마을에 들리게 되였다. 바로 산밑에 위치한 마을인데 산우에서 나무를 해서 굴리면 집마당에 떨어질수 있는 그렇듯 나무가 흔하고 물이 좋고 거기다 물고기도 많아 정말 말그대로 장작불때고 이밥 배불리 먹는 살기 좋은 고장이였다. 물이 하도 좋아 따로 수도를 파지 않고 산의 샘물을 그대로 끌어들여 집집마다 수도물로 공급하니 더 말치 않아도 알수 있을것이다. 그렇게 물좋고 공기좋아 너도 나도 잘살아보겠다고 찾아들던 마을이 지금은 너무도 조용하다못해 괴괴하여 오직 귀뚜라미와 베짱이의 울음소리가 판을 치고있었다. 마을가운데까지 가면서 볼라니 많은 집들의 창문에 널판자를 대고 못을 박아놓았었는데 그건 분명히 주인이 없어 집을 철거한 집임에 틀림없었다. 헌데 눈길을 끄는것은 빈집도 또 널판자를 박아놓은 창문도 아닌 풀이 마음대로 자란 가운데 떡 벋히고 선 과일나무들이였는데 앵두와 사과가 가지가 휘도록 달려있는것이였다. 때는 한창 앵두철이였는데 그렇듯 가지가 휘게 앵두가 달리다못해 땅밑에까지 익은 앵두가 한벌 깔리게 떨어져있었다. 그런 앵두나무를 바라보노라니 저도 모르게 입안에 신침이 감돌아 차를 세우고 앵두나무곁으로 달려가 가지를 메운 앵두를 한웅큼씩 훓어서 걸탐스럽게 먹게 되였다. 그러노라니 저도 모르게 어린 시절의 일들이 파라노마로 떠오르는건 어쩔수가 없었다.  내가 보낸 동년시절에는 앞뒤터전이 있는 집이라면 앵두나무나 사과나무 한두그루쯤은 다 있었지만 집에 터전이 없는 집은 그럴수 없었기에 과일나무가 있는 집이 그렇게 부럽지 않을수가\ 없었다. 하기에 저녁이면 과일나무가 있는 집의 바자를 넘어 들어가서 과일서리를 하군 하였는데 때로는 주인장이 비추는 전지불에 혼비백산하여 엎어지면서 도망하느라고 어쩔줄 모르기도 하였다. 그러면 뒤에서 주인장이 헛기침을 하면서 “이놈들, 먹고싶으면 낮에 와서 마음놓고 따먹거라. 고양이처럼 저녁에 다니지 말구”하는 소리가 들리면 어린 나이였지만 공연히 얼굴이 화끈거려남을 어쩔수 없었다. 그 시절에는 먹을것이 귀한 시절인것도 있지만 동네에 아이들이나 사람들이 많아서 과일이 남아돌수가 없었다.  내가 그렇게 걸탐스럽게 앵두를 따서 볼이 미여지게 입안에 쑤셔넣고있는데 “차라리 가지채로 뚝뚝 끊어서 가져가십시오”하는 낯선 소리가 들려오기에 돌아보니 늙은이 한분이 나의 곁에 다가와있었다. 나는 나이와 걸맞지 않은 나의 행동에 무안함을 금치못하면서 얼굴을 붉히였다.  “가지채로 꺾어가면 나무가 상할가봐…” “괜찮소. 사람이 없어서 과일이 달려도 먹을 사람이 없는데 나무가 상하면 어떻구 괜찮으니 편할대로 하십시오” 늙은이는 한숨까지 길게 쉬면서 마을에 남은 사람이 겨우 20여명으로서 나무에 달린 과일도 먹을 사람이 없어서 썩어간다고 한탄하였다. 늙은이의 말을 듣노라니 방금까지 맛나게 먹던 새콤달콤하던 앵두맛이 어디로 갔는지 알길 없이 대신 입안이 씁쓰레 해짐은 어쩔수 없었다.  너도 떠나고 나도 떠나다보니 모두가 떠나고 남은 사람들이란 늙은이들뿐이여서 모두가 새농촌건설로 마을길을 닦는다고 법석을 떨지만 이 마을은 로력이 없다보니 꿈도 꾸지 못한다고 한다. 그러고보니 마을의 길은 전의 모래길이였으며 철거를 한 집이 많아 살다가 금방이라도 달아난 마을같이 어수선한 기분이였다. 노래나 시에서 보면 어디가나 고향을 잊지 못해서 저녁이면 고향을 그리고 달빛을 보아도 고향생각에 눈물이 저절로 난다고 하는데 마을을 떠나 사처로 간 사람들은 자기가 살던 고향마을을 얼마나 그리고있는지 묻고싶은 마음이다. 진정 고향을 그린다면 그리움에만 그치지 말고 한번쯤 고향을 다녀오면서 고향의 일에 관심을 돌리고 사라져가는 고향마을을 지키는데 한힘을 보태줬으면 하는 마음이다. 노래와 시에서 그리움만 읊조려서는 앵무새격이 될것인즉 아무런 쓸모도 없을것이다. 차에 앉아 낚시터로 다시 출발하는 나의 마음은 흐리터분해지면서 종시 걷힐줄 몰랐다. 어쩌면 숱한 과일을 가지가 휘도록 부담스럽게 안고있는 저 과일나무들이 외롭지 않을 그날이 올것이라고 믿고만 싶은 마음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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