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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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박물관과 미술품소장 댓글:  조회:2451  추천:2  2014-04-24
 기자의 신분으로 중국조선족 원로미술가, 중견미술가들을 취재하다보면 그들의 적지 않은 대표적작품들이 국가급, 성급 혹은 미국, 일본, 한국 등 나라의 박물관, 미술관, 개인들에 의해 소장되였다는 이야기를 심심찮게 들을수 있었지만 정작 우리 지방의 박물관에 소장되였다는 이야기는 별로 들은적이 없다. 실제 우리 지방의 박물관, 미술관들에서 조선족대표적화가들의 력작들을 매우 적게 소장하고있는 실정이다. 하여 귀중한 그들의 미술작품을 사진에서나 겨우 눈요기를 할수 있을뿐이여서 안타까울 때가 많다. 원인은 지방재정의 투입이 여의치 않아 박물관측에서 미술품을 수장할 여력이 없거나 박물관측에서 우리의 미술작품의 수장에 대한 중시가 부족하기 때문일것이다. 프랑스 루브르박물관은 세상에서 제일 오래고 제일 규모가 크며 제일 저명한 박물관이다. 루브르박물관 미술소장품은 무려 46만점에 달하는데 이중 3만 5천점 가량만 일반인에게 공개되고있다고 한다. 이런 소장품중에는 미로의 “비너스”, 다빈치의 “모나리자”, 다비드의 “나뽈레옹 1세 황제대관식” 등 미술소장품이 가장 유명한데 해마다 9백만명에 달하는 유람객들이 루브르박물관을 찾는다고 한다. 루브르궁은 원래 중세기 왕인 펠리페 2세가 전쟁을 위해 건설한 성보로 그후 600년 동안 27명의 국왕이 계속해서 건설해 규모가 굉장한 황궁이 되였다. 원래 루브루궁에는 력대 프랑스 국왕들 특히 푸랑수아1세, 루이13세, 루이14세 등이 수집해놓은 방대한 량의 미술품이 소장되여있었다. 특히 루이14세는(1638―1715년) 프랑스력사상 재위시간이 제일 긴 국왕으로 취미가 매우 광범하였는데 예술에 조예가 깊었다. 그는 1663년에 회화와 조각학원을 건립함과 동시에 사람들을 국내 각지 그리고 이딸리아 등 구라파 각 국에 파견하여 전문적으로 로마고전시기 및 문예부흥시기의 작품을 구매하게 하였는데 회화작품수는 원래의 수백건으로부터 수천건으로 증가하였다고 한다. 루이 14세는 또 다빈치를 그의 궁전으로 데레오고 우월한 조건으로 예술가들을 흡인하여 빠리에 거주하게 함으로써 문예의 발전을 추동시켰다. 1789년 7월 프랑스에서는 류례 없는 대혁명이 일어났다. 프랑스의 운명을 뒤바꾼 혁명은 루브르의 운명도 바꿔놓았다. 1791년 혁명정부는 루브르궁을 “과학, 예술의 모든 기념물을 모으는 장소”로 지정하였다. 1793년 11월 8일 루브르는 “중앙예술박물관”이란 이름아래 대중을 위한 장소로 새롭게 문을 열었다. 이렇게 세계 첫 현대박물관이 탄생되였는데 이는 인류사상 중대한 문화적사건이며 박물관의 시대는 이로부터 시작되였다. 물론 이후 권좌에 오른 나뽈레옹은 유럽과 북아프리카에서 승리를 거듭하며 점령지에서 가져온 유물로 루브르를 한층 살찌웠지만 박물관의 회화소장품 가운데 3분의 2는 정상적인 경로를 통해 수장한 프랑스작가들의 작품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현재 루브르박물관은 어떤 형식으로 운영되고있을가? 루브르박물관을 운영하는데 소요되는 자금의 약 50%를 국가에서 부담하고 나머지는 1897년에 발족된 순수 민간 후원기구인 “루브르의 친구들” 같은 협회에서 담당한다고 한다. 정부예산과는 관계없이 현재 6만명이 넘는 회원들이 납부한 회비로 작품을 꾸준히 구입하거나 회원인 소장가가 작품을 기증하고있다고 한다. 미술품을 공공의 재산으로 생각하고 아끼는 프랑스인들의 마음을 엿볼수 있는 대목이다. 국제박물관 협의회에 의하면 “박물관은 인류와 인류환경의 물적 증거를 연구, 교육, 향유할 목적으로 이를 수집, 보존, 조사연구, 상호교류, 전시 및 교육하는 비영리적이며 항구적인 기관으로서 대중에게 개방되고 사회에 사회의 발전에 이바지한다.”고 정의하고있다. 박물관의 가장 핵심적인 역할은 문화유산의 전승과 관리이다. 박물관은 타임캡슐로서 인류문화와 자연에 대한 기록을 가능한 한 원형의 상태로 다음 세대에 물려줄 륜리적 책임이 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박물관도 루브르박물관의 운영경험을 타산지석으로 삼아 천방백계로 조선족미술가들의 작품을 소장함으로써 지역미술의 발전과 지역경제, 지역문화 발전에 이바지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33    중국식 강 건너 불보기 댓글:  조회:1862  추천:2  2014-04-22
  “집체랭담증”이란 사회병이 진일보 확산, 악화되는것을 방지하려면 정의를 구현하는 선량한 사람들이 더는 눈물을 흘리게 해서는 안된다. 마땅히 그들을 장려하고 보호하는 장치를 마련해 모든 국민들이 반사리익을 얻게 해야 한다. 중화민족은 예로부터 유교사상의 영향으로 선량하고 순박하고 열정적이였다. 하지만 현재 선행은 선한 보답을 받고 악행은 악한 보답을 받는다는 전통관념이 현실적인 도전에 직면해있다. 죽는 사람을 보면서도 그냥 강 건너 불보기식으로 랭담하게 대하는 도덕불감증이 일파만파로 사회구석구석까지 확산되면서 사람들을 심사숙고하게 한다. 몇년전에 필자는 이런 기사를 읽은적이 있다. 한 남성이 자기 집 문앞에서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마침 그의 안해가 사고현장을 지나게 되였다. 하지만 그의 안해는 사고당사자를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다. 결과 남편은 시간이 지연된 탓으로 병원에서 구급치료를 받았지만 아쉽게도 사망하고말았다. 두살난 아이가 뺑소니차에 치워 쓰러졌는데 7분간 십여명이 그 곁을 지나면서도 구원의 손길을 내밀지 않아 요절한 일, 초겨울 갓난 아기가 번화거리에 버려졌는데 나흘간 숱한 사람들이 그 광경을 목격하고도 그냥 지나쳐버려 동사한 일…이런 일은 많고도 많다. 다른 사람을 간섭하지도 방조하지도 않는 방관정서, 랭담정서가 중국에서 매우 보편적으로 존재하는데 그 근원은 매우 복잡하다고 할수 있다. 가장 보편적인 근원은 “쓸데 없는 일에 참견하지 말라”(少管闲事)는 일종 문화관습에 의한것이라고 할수 있다. 우리의 부모들은 자식이 먼 길을 떠날 때면 “쓸데없는 일에 참견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한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부모 혹은 학교로부터 가족, 친구, 동료들에게 선의를 잘 표달하라는 교육을 신물이 나도록 받아온 한편 낯선 사람에게는 다가서지도 말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들어왔다. 우리 나라는 현재 익숙한 사람끼리 모여살던 사회로부터 낯선 사람들이 섞여사는 사회로 과도하는 단계에 처해있다. 익숙한 사람끼리 살던 사회에서 지켜오던 도덕규범이 현대사회에 적응되지 못하고있는데다 낯선 사람끼리의 시장질서, 도덕질서가 아직 완전히 형성되지 못해 서로 신임하지 못하는 현상을 빚어내고있다. 죽는 사람을 보고서도 랭담한 반응을 보이는것은 신임이 결핍한 축소판이기도 하다. 또한 시장경제의 발전과 더불어 금전만능의 영향을 받아 명철보신하면서 리익이 차례지지 않으면 거들떠도 보지 않는 도덕적라태가 만연하게 된것이다. 다음 방관자효과이다. 1964년 3월, 미국 뉴욕에 사는 한 녀인이 집부근에서 칼을 든 폭도의 침범을 당하게 되였다. 그녀는 살려달라고 높이 소리를 질렀지만 그녀의 이웃들은 창문에 다가서서 내다볼뿐 누구도 그녀를 구하려 하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폭도의 칼에 찔려 비참하게 사망하였다. 심리학자들은 대량의 실험과 연구를 거쳐 공공장소에서 위험하고 긴급한 사건을 목격한 방관자가 많을수록 방조하는 사람이 더 적어진다는 방관자효과란 리론을 내놓았다. 방관자가 많을수록 매 한명의 방관자는 중대한 문제 혹은 긴급한 상황이라는 생각을 덜 가지며 자기가 행동해야 할 책임을 덜 가진다는 리론이다. 다음 위험한 상황에 처한 사람을 구하는 정의를 구현한 사람에게 불리익이 돌아가는 아이러니한 현상도 도덕적불감증을 조장하는데 한몫하고 있다. 남경의 팽우라는 한 젊은이가 공공뻐스에 오를 때 넘어진 할머니를 부축했다가 법정에 서게 되였다. 법원에서는 팽우에게 인민페 4만원을 할머니에게 배상하라고 판결하였다. 리유는 “상리(常理)에 의하면 팽우가 할머니와 부딪치지 않았으면 할머니를 병원에 호송할 리유가 없다.”는 결론에서였다. 법원에서 판결을 내린후 팽우는 매체에 억울함을 하소연하였고 각 매체들에서 이 사건을 대서특필하였다. 결과 한 유명한 웹사이트에서 조사를 실시했는데 80%에 달하는 사람들이 금후에 좋은 사람이 되는것을 선택하지 않겠다고 답변하였다.개인권익이 보장을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랭담만이 자기의 생존가치를 획득할수 있다고 믿기때문이다. 《법제일보》에서는 죽는 사람을 보고도 구하지 않는 현상이 점점 많이 출현하고있는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인가 하는 조사를 진행하였는데 42.6%에 달하는 사람들이 도덕이 후퇴했다는 답을, 25.6%에 달하는 사람들이 법률에 구멍이 존재한다는 답, 28.8%에 달하는 사람들이 원인이 비교적 복잡하다는 답을 선택했다. 우리 나라에는 아직 죽는 사람을 보고도 구하지 않는 사람을 처벌하는 법률은 없고 정의를 용감하게 구현하는 사람들을 보호하는 제도적장치도 미비하다. 프랑스에서는 본인과 제3자에게 모두 위험이 없으면서도 고의적으로 위험에 봉착한 사람을 구조하지 않으면 5년 감금형에 처함과 동시에 7.5만유로 벌금을 안긴다. 우리는 누구든 위험한 상황에 봉착할수 있다. 우리는 누구나 위험한 상황에서도 구조를 받지 못하는 랭혹한 사회에서 생활하는것을 원치 않는다. “집체랭담증”이란 사회병이 진일보 확산, 악화되는것을 방지하려면 정의를 용감하게 구현하는 선량한 사람들이 더는 눈물을 흘리게 해서는 안될뿐만 아니라 시급하게 그들을 장려하고 보호하는 지방법률법규를 제정함으로써 모든 국민들이 반사리익을 얻게 해야 한다. 뭐니뭐니해도 “집체랭담증”을 근치하는 가장 근본적인 도경은 효과적인 공민도덕교육을 진행함으로써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정의의 홰불을 밝히도록 하는것이다. 나부터 다른 사람에게 작은 도움을 주고 작은 힘을 보탠다면 서로 돕고 온정이 넘치는 조화로운 사회가 우리를 포근하게 감싸줄것이다. 연변일보 4월 22일  
32    문화금융합작과 문화산업발전 댓글:  조회:1551  추천:1  2014-04-18
  요즘 국내 문화계, 금융계, 문화산업계에서 문화금융합작이라는 새로운 화두를 빈번히 떠올리고있다. 올해 3월말, 문화부, 중국인민은행, 재정부는 련합으로 전국문화금융합작회의를 개최하고 “문화금융합작을 심도있게 추진할데 관한 의견”을 반포하였다.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되는 문화금융합작에 관한 이번 회의는 과거를 총화하고 현재를 파악하며 미래를 꾀하는 특별한 의의를 갖는다. 금융은 현대경제의 핵심으로 경제발전을 촉진하는 혈액이다. 문화산업과 금융업의 합작을 강화하는것은 문화산업의 발전을 가속화하고 전 민족 문화창조활력을 불러일으키고 사회주의문화강국을 건설하는데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2010년, 중국인민은행, 재정부, 문화부 등 아홉개 부문에서 “금융이 문화산업진흥과 발전번영을 지지할데 관한 지도의견”을 출범하였다. 이는 문화금융사업이 정식으로 가동되였음을 의미하는것으로 중국문화산업발전의 중대한 돌파로 된다. 4년간, 정부부문, 금융기구, 문화기업은 각자의 우세를 발휘하고 힘을 모아 문화산업발전의 유효한 경로를 탐색하고 초보적으로 다원화 문화산업 투자, 융자체계를 형성하였다. 문화부에서는 문화산업신용대부항목리스트를 작성하였으며 전국 각 성 문화행정부문에서는 이미 당지 금융기구와 합작기제를 건립하였다. 은행기구에서는 문화기업을 위해 편리한 융자플랫폼을 구축함으로써 문화기업에 강대한 동력을 주입하였다. 재정부에서는 작년부터 “문화금융부축계획”을 가동하고 문화산업발전전문자금 4.61억원을 출자함과 동시에 리자보조대출(贷款贴息), 보험료보조금(保费补贴) 등 방식으로 문화금융합작에 지지를 보내고있다. 현재 문화금융합작으로 문화산업은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하고있는데 문화대형기업들이 해외시장을 개척하고있는가 하면 소형문화기업들이 현대기업으로 탈바꿈하고있다. 금융기업들도 만족스러운 경제효과를 보고있다. 문화와 금융이 량측 모두가 윈윈을 실현했다고 할수 있다. 특히 올해 3월말에 개최된 전국문화금융합작회의가 있은 뒤 문화금융합작이 점점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고있다. 상해시문화부문에서는 “전국의 첫번째 문화금융합작시험구를 쟁취하며 시험구내에 정부, 문화, 금융 등 부문간의 합작기제를 건립하고 문화산업중점융자 프로젝트목록을 작성하고 금융부문과의 효과적인 합작을 추진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문화금융합작조치를 출범하였다. 한편 최근 강소성 무석농촌상업은행은 중국의 첫 문화은행인 태호문화지행을 설립했다. 은행관계자는 단독대상, 단독수권, 단독표준, 단독실사, 단독고찰 등을 통해 문화기업을 대상으로 영화미디어대출, 창의디지인대출, 광고출판대출 등 다섯가지 금융제품을 출시하고 일식서비스체계를 구축할것이라고 밝혔다. 문화산업이 갈수록 각광받고있는 원인은 문화산업이 국민경제기둥산업으로 우리 나라 경제, 사회 발전 전체 국면에서 차지하는 지위가 갈수록 부각되고있기때문이다. 우리 지역에도 애니메이션, 광고, 인쇄 등 문화기업들이 수두룩하다. 하지만 이런 문화기업들은 국가의 문화금융합작정책을 잘 모르기때문에 융자, 세무, 토지 등 여러 방면에서 많은 애로를 겪고있다. 이런 난국을 타개하는 지름길은 각급 문화산업지도부문, 문화기업, 금융기구에서 정책을 확실하게 파악하고 정책을 최대한 우리에게 유리하게 리용하는것이라 사료된다. 연변일보 4월 17일자  
31    도시의 품위 댓글:  조회:2297  추천:7  2014-04-08
  도시는 문화를 담는 그릇이며 흐르는 선률이며 제일 비싼 예술품이다. 한 도시의 품위는 최종적으로 사람들에게 얼마만한 문화향수의 유열과 미감을 주는가에 의해 결정된다. 연길의 주요거리를 산책하다보면 도시의 품위가 많이 승격되였음을 도처에서 감수할수 있다.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 60돐을 계기로 연길시에서는 장백산로, 역전거리, 연서가, 국자가 등 도로변의 건축물에 대한 정품개조공사, 불량주거지구역개조공사, “따뜻한 집”개조공사를 통해 도시를 한결 산뜻한 모습으로 탈바꿈시켰다. 장백로 량측의 건물들은 흰벽, 회색기와를 기본색조로 민속부호와 지붕풍격을 통일함으로써 조선족민족특색을 체현하였다. 연길시에서는 몇년래 선후로 26개의 도시공원, 유원지를 건설하였다. 이런 도시공원, 유원지들은 문화, 오락, 레저 기능을 충분히 발휘하여 시민들의 수요를 만족시키고 도시의 매력을 높여준것은 물론 도시의 록화피복률을 높이고 도시의 페가 맑아지게 하였다. 정품야경프로젝트를 통해 연길의 밤은 도시전체가 불야성을 이루고 별무리가 내려앉은듯 황홀하다. 연남로의 건물측면벽체의 상모춤,장고춤 등 조선족특색의 조명벽화들은 의미가 깊고 운치를 자아낸다. 부르하통하 량안 건물의 화려한 오색네온빛은 강물의 빛과 어울려 시민들과 유람객들을 무아지경에 빠지게 한다. 그외 우리 주에서는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 60돐을 계기로 중국조선족민속원, 연변박물관, 연변도서관, 연길체육중심 등 중점헌례공정을 완수하였다. 이러한 건물들은 세인들에게 연변의 경제사회발전성과를 집중적으로 전시하는 표지성건물로 되고있으며 연변인민들의 문화생활에 이채를 돋우어주고 생활의 보람을 제공하고있다. 총적으로 연길시는 이 몇년래 “문명도시”, “위생도시”, “원림도시” 건설에 박차를 가해 민족특색, 지역특색이 농후한 도시명함장을 세인들에게 선보임으로써 도시의 경쟁력과 품위를 높이고 연길시를 살기 좋은 도시로 건설하는 토대를 닦았다. 하지만 우리의 도시들에서 갈수록 력사흔적들을 찾아보기 힘들어 심히 유감스럽다. 도시의 가장 중요한 특질은 문화특징이다. 력사문화는 도시의 기억으로 력사가 없는 도시는 문화가 없는 도시이며 영구성을 상실한 도시이다. 한 도시의 문화는 수천년, 수백년의 문화가 루적되여 형성된것으로 한 민족의 전통문화의 중요한 조성부분이다. 이러한 력사맥락을 잃으면 도시는 질감과 령혼을 상실한것으로 된다. 도시가 쾌속적으로 발전하는 시기에 도시의 건설자들은 일반적으로 문화의 전승과 심미가치의 창조를 홀시한다. 하루가 멀다하게 우후죽순처럼 솟아나는 빌딩숲에 밀려 력사흔적들이 가뭇없이 사라지는 모습을 보면 가슴 한켠에서는 허전함을 금할수 없다. 도시의 품위는 “무형문화”와 “유형문화”가 서로 련계되는 방면에서 반영된다. 우리의 도시의 “유형문화”품위가 많이 때벗이를 한 반면 일부 시민들의 “무형문화”품위는 점점 추락하고있어 심히 우려를 자아내고있다. 리기주의와 황금만능주의에 빠져 일부 시민들의 생명존중사상, 준법정신, 시민륜리정신이 침몰하는 배처럼 힘없이 무너져가고있으며 자신의 일이 아니면 엮이는것이 싫어 뒤짐을 지고 구경만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있다. 시민들은 도시의 주체로 말 한마디, 행동 하나가 도시의 문명정도를 반영한다. 사회문명의 진보는 개체의 힘과 역할과 갈라놓을수 없으며 건전하게 발전한 개체인격과 자아를 초월한 리성정신과 타인을 존중하고 사회를 관심하고 사랑하는 인간미덕을 소요한다. 문명한 도시는 문명한 시민을 육성하며 문명한 시민은 도시의 문명을 창조한다. 타인의 권리와 개인, 집체, 국가와 사회리익을 존중하는것은 사회문명진보의 근본 목표이며 문명은 한개 도시의 령혼임을 항상 명기해야 할것이다. 도시품위문제의 핵심은 록색이 결핍한것이다. 연길시에서는 이 몇년 사이에 도시록화에 많은 심혈을 기울였다. 하지만 도시의 전체 면적에서 록화면적이 차지하는 비률은 보잘것 없으며 수종선택에서도 지역특색과 민족특색이 뚜렷하지 못하다. 록색도시란 생태도시, 환경도시를 말한다. 쉽게 말해 공해발생과 자연파괴를 최대한 줄이고 인간이 자연과 조화롭게 살아가기 위해 조성되는 도시로 록지가 70% 이상이며 태양, 풍력 등의 무공해발전, 전차 등 무공해대중첨단교통시설을 갖춘 도시를 말한다. 이런 록색도시에서는 품위 있는 생활이 가능하다. 하늘은 깨끗하고 공기는 맑고 시민들은 유유자적하면서 길을 걸어다닐수 있다. 도시의 품위는 거창한것보다는 세절에서, 부분적인것보다는 전면적인것에서, 외면보다는 내면에서, 밝은 곳보다는 어두운 곳에서, 보이는 곳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 우렬을 가려볼수 있다. 연길시의 주요거리는 확실히 깨끗하고 현대도시의 풍격이 농후하다. 하지만 일부 골목의 인행도는 볼품없이 망가져 여간 불편하지 않다. 일부 아빠트단지내는 가로등도 없고 날로 쌓여가는 쓰레기들로 몸살을 앓고있으며 공공록지는 파괴되여 입주민들의 자류지로 전락되고있다. 도시는 문화를 담는 그릇이며 흐르는 선률이며 제일 비싼 예술품이다. 고금중외의 여러가지 문화가 여기에서 충돌하고 반죽되여 지역특색을 가진 구역문화를 형성한다. 한 도시의 품위는 최종적으로 사람들에게 얼마만한 문화향수의 유열과 미감을 주는가에 의해 결정된다. 도시의 품위가 질적으로 개선되자면 삶의 장소로서 시민들이 살기 편리하고 쾌적한 도시, 아름답고 여유있는 도시, 개성 있고 문화적인 도시, 건강하고 안전한 도시, 력사가 숨쉬는 역동성 있는 도시, 수준 높은 인재집단과 경제활동을 유인하는 창조적인 도시, 국내외 관광객들에게 매력 있는 도시가 돼야 할것이다. 연변일보 4월 8일자  
30    무형문화재전승인 보호 절실 댓글:  조회:1302  추천:2  2014-04-04
  무형문화재보호에서 전승인에 대한 보호는 매우 중요한 지위를 차지한다. 이는 무형문화재의 특성에 의해 결정된다. 무형문화유산이 유형문화유산과 구별되는 하나의 기본특성은 무형문화유산은 개체 혹은 군체의 전승인들에 의지하는 활동형태의 문화로 전승인들이 말로 전하고 마음으로 가르치는것을 통해 세세대대 전해지는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무형문화재에 대한 보호는 물질형태의 보존만 의미하는것이 아니라 전승인의 활동형태의 보존도 포함된다. 걸출한 전승인들은 전통을 계승하는 가운데서 문화선택과 문화창신을 할수 있는 능력을 소유한자들로 무형문화재의 전승, 보호, 연속, 발전중에서 탁월하고도 중요한 역할을 하며 대중들로부터 존경을 받는다. 례를 들면 우리 나라 전통의약 시조 화타, 목석건축 시조 로반, 술 시조 두캉이 바로 그러하다. 현재 무형문화재 전승인들을 보호하는 면에서 직면한 곤경은 날로 엄중해지고있다. 경제건설과 현대화진척이 가속화되면서 농경문명시기에 산생되였던 무형문화재의 생존발전환경이 신속하게 개변되면서 소멸속도가 부단히 가속화되고있다. 례를 들면 전통공예시장 규모가 축소되면서 생산규모가 축소되고 사람들의 생활방식과 관념에 변화가 발생하면서 일부 민간예술은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고 일부 전통습속은 점점 사라지고있는것이다. 청년일대들은 현대문명을 숭배한 나머니 민족전통을 외면하고 배우려 하지 않거나 계승하려 하지 않고있다. 게다가 많은 민간예인들의 나이가 많아 제때에 계승하지 않으면 이런 기예가 실전되거나 멸절될 상황에 처해있다. 다년간 우리 주 각급 정부에서는 심혈을 기울여 민간음악, 민간무용, 민속, 민간미술 등 9개 류형의 300가지 무형문화재종목을 수집하였는데 주정부에서는 3차에 걸쳐 모두 89가지에 달하는 무형문화재를 지정했다. 그중 77가지가 성급무형문화재로, 16가지가 국가급무형문화재로, 조선족농악무가 유녀스코 인류무형문화재 대표작으로 등재되였다. 그외 63명이 주급무형문화재종목의 대표적인 계승인으로, 40명이 성급종목의 대표적전승인으로, 2명이 국가급종목의 대표적전승인으로 선정되였다. 우리 주 무형문화재전승인들이 처해있는 상황도 크게 락관적이지 못하다. 우리 주의 허다한 전승인들은 경제사회 환경이 변하고 시장경제조류의 충격하에 전통문화기능에 의거하여 기본적인 생존조건을 유지할수 없게 된데다 생존할수 있는 문화환경과 사회지위가 갈수록 위축되고 전승인들의 기본권익 및 전승활동이 재정, 기술, 법률 등 방면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있다. 이런 상황을 개변하려면 우선 관념부터 전변시켜야 한다. 전승인들의 무형문화재보호중에서의 가치와 지위에 깊은 중시를 돌리고 전승인들에 대한 보호를 옹근 보호사업의 중점과 중심으로 틀어쥐여야 한다. 다음 전승인들에 대한 재정적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정부차원에서 경비를 지원하고 상응한 생활대우와 사회대우를 제공하고 전승인의 민간문화자원을 개발, 리용하고 전승인들이 생존할수 있는 촌락과 전통문화생태환경을 보호하고 대중매체, 여론도구를 통해 무형문화재보호를 홍보하고 무형문화재전승활동에 유리한 문화환경, 공중환경을 창조해주어야 한다. 다음 급선무로 나서는것은 사회교육과 학교교육을 통하여 무형문화유산 대표작을 전승할 후계자를 양성하는것이다 .
29    중국조선족영화 발전 맥락 댓글:  조회:1803  추천:5  2014-04-03
올해는 중국조선족영화 탄생 85주년이 되는 해이다. 85주년을 계기로 중국조선족영화 발전 맥락을 짚어보는것은 중국조선족영화의 발전을 위해서 의미 있는 작업이라 하겠다. 1928년, 전창근 씨나리오, 정기택의 감독으로 된 중국조선족의 첫 영화 “안중근”이 상해에서 탄생하였다. 당시 국민당당국은 검열시에 영화중의 반일장면과 민족사상이 표현된 부분을 사정없이 삭제했기에 영화의 이야기는 잘 이어지지 못한채 관중들과 대면하였다. 그후 정기택감독은 “세 영웅의 미인쟁탈”, “영사막에 피여난 꽃”(원령옥 주연) 등 9편의 예술영화를 제작하였다. 김염은 중국의 제1대 영화황제로서 로상해에서 제일 저명한 영화스타중의 한사람이였다. 그는 1962년에 스크린을 떠날 때까지 33년간 “야초한화”(野草闲花) 등 46부의 영화에서 주역을 맡아함으로써 중국영화의 발전에 마멸할수 없는 기여를 하였다. 새 중국이 창건되여서부터 64년간 중국조선족을 제재로 한 영화가 10여부 창작되였다. 1949년에 동북영화촬영소에서 8명의 항일녀전사가 일본군의 첩첩한 포위에 들자 목단강에 뛰여들어 영용히 희생되는 력사사건을 소재로 한 “중화의 딸”을 제작하고 1957년에는 장춘영화촬영소에서 항일녀영웅을 구가한 영화 “김옥희”를 제작하였다. 영화 “김옥희”가 1960년 7월에 홍콩에서 상영되였는데 련 며칠동안 입장권이 매진되는 성황을 이루었다. 1958년에 리홍규, 황봉룡, 최형동, 최현숙의 합작으로 된 영화 “봄우뢰”가 제작되였다. 영화는 당시 공업대약진운중 석현제지공장과 장백제지공장사이에 벌어진 사회주의로동경쟁을 주제로 한것이다. 이 밖에 조선족인민들의 력사와 생활을 반영한 영화로는 “기러기”(1960년, 연길현우전국 리호천의 모범사적을 다룬 영화), “태양을 향하여”(2002년, 인민음악가 정률성을 소재로 한 영화), “해란강반의 벼꽃향기”(2012년, 현시대 조선족농민들의 생활을 형상화한 영화) 등 10여부가 있다. 영화 “첫봄”(1982년, 씨나리오 최정연)은 건국후 처음으로 조선족이 씨나리오와 작곡을 맡고 극중인물의 모든 배역을 담당한 중국조선족영화사상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영화는 “10년 동란”을 겪은 조선족농민들이 개혁개방의 봄바람을 타고 분발하여 부유의 길로 나가는 정경을 생동하게 묘사하였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장률, 박준희, 김광호, 김혁 등 조선족감독들이 중국영화계에 얼굴을 내밀면서 중국조선족영화발전을 위해 기폭제역할을 하였다. 장률감독은 2000년에 첫 단편영화 “11세”로 베니스영화제 단편경쟁부문에 올라 단숨에 주목을 받은뒤 “망종”(칸영화제, 부산영화제 등 영화제에서 수상), “두만강” 등 7편의 영화를 제작하면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외 박준호감독은 “력도산의 비밀”, “철인 왕진희” 등 3부의 영화를 제작하고 김광호감독은 “궤도”(부산영화제 신인작가상), “서서 자는 나무”(촬영중)를 제작하였으며 20대의 나젊은 감독 김혁은 “괄호”, “사신” (私信) 등 4편의 영화를 제작하였다. 중국조선족영화는 85년이라는 긴 려정을 거쳐 자기의 작가, 감독, 배우를 배출됨으로써 독립적으로 영화를 제작할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게 되였다. 이러한 거족적인 발전에 힘입어 중국조선족들의 생활을 반영한 영화들이 속속 제작되고있다. 하지만 이러한 영화중에 중국조선족의 생활을 전면적이면서도 깊이가 있고 시대감있게 형상화한 영화가 매우 적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우리의 작가와 영화인들에게 주어진 공동의 숙제라 하겠다.  
28    전자도서 출판의 현주소 댓글:  조회:1763  추천:7  2014-04-01
요즘 세계적으로 전자도서출판시장이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하면서 도서출판시장의 새로운 판도를 예고하고있다. 전자도서란 도서로 간행되였거나 간행될수 있는 저작물을 디지털데이터를 리용해 전자 기록매체, 저장장치에 수록한뒤 유선, 무선 정보통신망을 통해 컴퓨터나 휴대단말기로 그 내용을 읽고 보고들을수 있도록 한 디지털도서를 총칭한다. 전자도서가 세상에 태여난것은 지난세기 말, 당시 전자도서는 세계 10대 기술의 하나로 선정될만큼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10년이 흐르도록 전자도서가 전체 도서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미미할 정도였다. 그 원인은 다수의 전통출판사들이 리윤이 얼마 남지 않는 전자도서의 출판을 꺼렸기때문이다. 전자도서출판시장이 새로운 전기를 맞이한것은 2009년부이다. 전자도서시장의 급팽창은 스마트폰과 태블릿PC의 보급이 급격히 늘어난데다 콘텐츠 공급자인 출판사의 전자도서출간이 본격화되였기때문이다. 독자들이 전자도서를 처음 접하기 시작한 시기도 스마트폰 등 모바일 전자도서 리용 기기의 대중화시기와 일치한 “4년 이내”가 대부분인것으로 나타났다. 전자도서를 읽는 매체는 스마트폰(44.1%), 컴퓨터, 노트북(38.1%), 태블릿PC(11.2%), 개인 휴대단말기(3.6%)의 순으로 조사되였으며 전자도서 전용단말기(2.3%)의 비중은 매우 낮았다.   다국적 회계법인에 따르면 글로벌 전자도서시장의 년간 성장률은 2009년 50.6%, 2010년 56.8%,  2011년 64.9%, 2012년 48.5%였고 올해는 36.0% 성장해 시장규모는 1118억달라로 예상했다. 글로벌출판시장에서 전자도서가 차지하는 비중도 작년에 7.3%에 달했고 2016년에는 18%에 달할것으로 전망했다. 최근 종이책으로 출판한 책의 50% 이상을 전자도서로 전환하는 출판사의 비중도 40%에 달한다고 한다. 전자도서출판에 획기적인 기여를 한 기업은 미국의 아마죤회사이다. 아마죤회사는 세계적으로 제일 처음 전자도서의 대리정가체계(代理定价体系)를 건립하고 높은 가격으로 출판상으로부터 전자도서를 구입하고 9.99딸라라는 낮은 가격으로 독자들에게 공급하였다. 또 이 회사는 자기의 출판플랫폼을 건립하고 몇년간에 걸쳐 백만건에 달하는 전자도서콘텐츠를 마련하였다. 일반적으로 전자도서는 종이형태의 도서와 그 내용에서 다를바 없지만종이도서는 들고 다니기 불편하고 나무를 소모해야 하고 찢기거나 손상도가 높으며 단가가 지속적으로 상승하는 등 단점이 있으나 전자도서는 데이터파일에 담겨있고 컴퓨터나 휴대용정보단말기에 의해 널리 접근할수 있고 많은 사람들에게 류통될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현재 세계적으로 갈수록 전자도서출판이 활성화되고있는데 반해 중국조선족에게는 단 한권의 전자도서도 없는 실정이다. 리윤창출은 잠시 차치하더라도 우리의 민족문화, 언어를 체계적으로 연구, 발전시킬수 있는 기틀을 마련한다는 전략적인 안목에서 우리의 전자도서출판도 이젠 살손을 대야 할 단계라고 생각한다.
27    전통문화와 현대화 댓글:  조회:1497  추천:5  2014-03-26
  30년래 개혁개방이 끊임없이 심화되는 가운데 국제, 국내학술교류가 전례없이 활발하게 전개되면서 많은 국내외학자들은 중국전통문화의 현대화중의 지위와 역할문제를 두고 열렬한 토론을 벌리고있다. 전통문화와 현대화의 관계문제에서 력대로 두가지 극단적인 경향이 존재하였다. 하나는 중국의 전통문화를 전반적으로 부정하고 전통문화와 현대화의 유기적인 련계를 분리시키는 민족문화허무주자들이다. 민족문화허무주의를 고취한 대표적인 인물은 호적이다. 그는 “중국오늘의 문화충돌”이란 글에서 “전면적인 서방화”를 주장하였는데 “서양의 현대화문화는 우리가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현세의 추세로 중국은 반드시 좋은것이든 나쁜것이든 서구의 문화를 전면적으로 모방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다른 일파는 서방문화는 이미 파산되고 21세기에는 유교문화가 전세계 문화를 부흥시킬것이라고 예단하면서 극력 중국전통문화를 치켜세우는 민족문화국수주의자들이다. 전통문화와 현대화는 력사발전 행정에서 형성된 두개의 고리이다. 전통문화는 과거 문화창조활동의 축적으로 후세의 문화성과에 영향을 미치며 현대화는 목전 력사발전과정의 목표로 량자는 서로 구별되면서도 필연적인 련계를 갖는다. 전통문화는 절대로 말살할수 없으며 인류문화는 계승이 없으면 발전도 없다. 하지만 전통문화가 아무리 유구하고 풍부하고 다채롭다 하더라도 어두운 면과 소극적인 면이 있기 마련이다. 요즘 우리 문단에도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등 현대주의문학에만 집착하고 고전을 하찮게 여기고 또 전통에만 매달리면서 변화와 창신을 두려워하는 두가지 경향이 함께 존재한다. 여기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것은 현대주의수렁에 깊이 빠지고서도 생명을 살리는 전통의 끈을 무시하는것이다. 현대문학기법에만 매달려 문학적성취를 거두려 한다면 기초가 없는 모래땅에 공중루각을 지으려는 몽상과 다를바 없다. 고전에는 다양한 전통과 문화를 쌓아올린 공동체의 경험이 녹아들어 있고 세계와 존재에 대한 탁월한 개인들의 치렬한 탐색이 기록되여있다. 젊은 날에 고전을 집중적으로 읽은이는 누구나 그 영향이 일생을 통해 지속된다는것을 느낄것이다. 사실 현재주의문학이 겉보기에는 사실주의, 랑만주의 등 전통문학에 대한 거부와 반동으로 출발하였지만 그 리면을 보면 결코 백퍼센트의 “반 사실주의, 반랑만주의”적인것만은 아니다. 또 현대주의문학의 정원에는 꽃들뿐만 아니라 화학염료도 있다. 아무리 현대적인 문화라 해도 본국의 토양에서 뿌리가 뽑힌것은 번성할수 없다. 현대적인 문화채광기술을 배우는 목적은 본국을 형성하는 삶과 전통속에 무궁무진하게 매장되여있는 금맥을 개발하기 위해서이다. 서구화는 중국문화현대화의 수단이지 결코 목적이 아니다.
26    격려와 칭찬의 힘 댓글:  조회:1963  추천:9  2014-03-21
  2월초, 연변가무단 소극장에서 있은 연변가무단의 “2014년 새봄맞이음악회”공연을 관람하고 이왕과는 다른 깊은 감명을 받았다. 관중들은 매 종목이 끝날 때마다 악사와 가수들에게 열렬한 박수의 응원을 보내주었는데 공연은 시종 새봄의 약동하는 분위기로 흘러넘쳤다. 특히 오스트리아 작곡가인 요한 슈트라우스 1세가 작곡한 “라데츠키행진곡”을 연주할 때 조예찬지휘가 관객들에게 몸을 돌려 박수를 유도하여 관객들도 연주와 어울리도록 함으로써 악곡의 밝고 경쾌한 분위기가 한껏 연출되였고 현장분위기는 한껏 달아올랐다. 공연에 취미가 있는 필자는 연길에서 펼쳐지는 공연을 거의 다 관람하는편인데 관중들이 박수에 린색하다는것을 절감할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종목이 끝나서도 무덤덤하게 요지부동인 관중들도 많은 와중에 혼자서 손이 얼얼하도록 박수를 치다가 적잖은 사람들의 의아한 눈길을 받고는 저절로 움츠러들 때면 정말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이딸리아의 유명한 오페라극장에서 있은 일이다. 공연이 시작되였어도 공연에 출연하기로 한 가수가 도착하지 않아 대신 한 무명가수가 무대에 올라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노래가 한곡 끝나서도 관중들은 박수를 치기는커녕 못 마땅한 표정 그대로였다. 이때 무대옆에서 한 꼬마가 “아빠! 최고야” 하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가수는 아들을 바라보고 더 열정적으로 노래를 불렀다. 이를 본 관중들이 하나, 둘 일어나서 극장이 떠나갈듯 박수를 치기 시작하면서 공연장은 감동의 물결로 차넘쳤다. 그 무명가수가 후날 “인류력사상 가장 위대한 테너”라는 찬사를 받은 파파로치였다. 격려와 칭찬은 사람뿐만아니라 식물도 변화시킨다. 프랑스 코냑 지방의 포도원은 토질이 척박하여 생산되는 포도는 그냥 먹을수도 와인으로 만들어 먹을수도 없는 시고 떫은 품종이라고 한다. 이러한 포도를 와인으로 만들어 숙성시켜 세계의 명주 코냑으로 만드는 제조사들의 제조비법은 특이할 정도라고 한다. 제조사들은 오크통속의 숙성되여가는 코냑의 맛과 향, 빛갈에 대해 “아, 향기 좋다”, “빛갈도 아름다와라”라는 찬사를 끊임없이 보냄으로써 향과 빛갈이 일품인 세계 최고급 코냑을 완성시킨다고 한다. 인간은 누구나 존중받기를 원하고 내가 한 일들이 대중들로부터 인정받기를 원한다. 격려와 칭찬에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다. 사람들은 자신의 성취에 대해 공개적으로 인정받으면 더 높은 목표를 품게 된다. 격려와 칭찬은 명예, 권력, 재능, 학식이 없어도 가능한 일로 주는 사람이든 받는 사람이든 해로울게 하나도 없으며 서로에게 해도 좋은것이다. 심리학자들은 “결함이 가장 많은 사람이 남을 가장 많이 비판한다”고 지적하고있다. 악플보다 리플을, 조롱보다는 격려와 칭찬을 보내면 사소한것에서 큰것을 얻을수도 있다. 연변일보 3월 21일자  
25    연변,홍색관광 잠재력 무궁무진 댓글:  조회:1742  추천:4  2014-03-14
  근년간 중국의 홍생관광시장이 거세차게 요동치면서 관광시장의 새로운 블루칩으로 부상하고있다. 홍색관광시장을 활성화하기 위해 중국은 선후로 “2004년―2010년 전국홍색관광발전계획요강”, “2011년―2015년 전국홍색관광발전계획요강”을 반포하였다. 요강실시이래 로혁명구역의 교통, 통신 등 기초시설이 눈에 뜨이게 개선되고 취업률과 생활수준 및 지명도가 크게 제고되였다.  2015년에 이르러 전국홍색관광객 연인수 8억여명 돌파, 국내관광객총수에서 차지하는 비률이 4분의 1로 제고, 종합수입이 2000억원을 돌파할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연변에서는 관광업을 새로운 경제성장극으로 간주하고 중점적으로 삼림생태, 민속풍정, 빙설운치, 변경풍모 등 관광상품을 개발함으로써  “전국소수민족변경관광시범구”, “동북아관광경제권의 핵심구역”으로 거듭나고 관광산업이 명실공히 기둥산업으로 자리매김하였다. 특히 2013년 연변은 성공적으로 “2013 중국 10대 공기청정도시”에 명부를 올리고 “2013 제일 아름다운 중국방(中国榜)”관광목적지로 선정되면서 관광산업이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였다. 지난 한해, 연변에서는 국내외 관광객 연 1167만여명 접대하고 관광총수입 172억원을 실현함으로써 전해 같은 시기에 비해 각기 15%와 25% 성장하였다. 하지만 유감스러운것은 연변의 홍색관광은 결책부문의 중시가 부족하고 투입이 미미하며 산업화수준이 높지 못하고 상품형식이 단조로운 등 여러가지 원인으로 걸음마를 타는 단계에 머물러있다. 관광객수, 관광수입 등 기본적인 통계마저 없이 홍색관광시대의 흐름에 엮이지 못하고있는 실정이다. 연변은 로혁명구역으로 항일전쟁, 해방전쟁, 항미원조전쟁에서 근 2만명이 희생되였으며 근 600여개의 렬사비가 세워져있다. 여기에 천개에 달하는 혁명유적지까지 가세하면 연변은 천혜의 홍색관광자원을 보유한것으로 우세가 뚜렷하다. 연변의 대표적인 “홍색관광경전풍경구역”으로는 룡정시의 대성중학교기념관, 간도일본총령사관전시관, 윤동주생가, 한락연주제공원, 주덕해옛집, 화룡시의 약수동쏘베트 옛터, 어랑촌 13용사 옛터, 홍기하전적지, 연길시의 왕우구항일유격근거지, 왕청현의 소왕청항일유격근거지 등이 있다. 연변의 홍색관광에서 가장 시급한것은 현, 시마다 당지의 이런 독특한 홍색관광자원우세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한두개의 “홍색관광경전(经典)풍경구역”과 한두갈래의 “홍색관광정품코스”를 개발하고 기초시설건설을 다그치는것이다. “홍색관광경전풍경구역”과 “홍색관광정품코스”개발에서의 관건은 자금조달이다. 힘써 국가지원자금을 쟁취하는 한편 민간자본도 유치해야 한다.  홍색관광을 높은 기점에서 운행시키려면 장백산관광, 입경관광, 민속관광, 생태관광, 농촌체험관광 등 원유의 잘 정비된 관광자원과원활하게 접목시켜야 하며 혁명력사문화유산의 발굴, 정리, 보호, 전시, 홍보 등 소프트웨어건설도 하드웨어건설과 마찬가지로 전력을 다해 병행해야 한다. 연변의 혁명유적지는 대부분 편벽한 곳에 위치해있으며 경제발전이 상대적으로 락후하다.연변의 홍색관광자원의 적극적인 개발은 락후한 지역의 경제발전과 사회안정에 미치는 파급효과가 자못 크다. 홍색관광은 민생에 관계되고 민의에 순응하는 혜민공사임과 동시에 새로운 경제성장극으로 되여 연변의 경제발전에 비상의 나래를 마련해줄것이다 .
24    전통마을 보호대책 시급 댓글:  조회:1610  추천:2  2014-03-12
연변의 사회주의 새농촌 건설이 일취월장하면서 가는 곳마다 빨갛고 파란 함석지붕의 예쁜 마을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 우리들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 한편 아늑한 정서를 자극하는 정겨운 전통마을들이 점점 시야에서 사라지고있어 아쉬울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중국의 저명한 화가 락근홍(骆根兴, 1955년생)선생은 연변에 창작하러 왔다가 한 시의 지도자에게 전통마을의 중요성을 피력하면서 전통마을을 극구 보호해야 한다고 설파하였다. 그 지도자도 전통마을의 중요성을 모르는바가 아니지만 누군들 헐망한데다 겨울에 난방도 잘 안되는 낡은 집에서 살겠는가고 반문하였다고 한다. 물론 그 지도지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 하지만 우리의 전통마을들이 물먹은 토담처럼 맥없이 허물어져가고있는 상황을 그대로 방치할수는 없다. 일전에 주택건설부, 문화부, 재정부에서는 련합으로 제2패 중국전통마을보호명록을 공포하였는데 비교적 높은 보호가치를 지닌 전통마을이 전국적으로 5천개밖에 현존하지 않고있다고 지적하였다. 그 5천개중에는 연변의 전통마을이 한개도 포함되여있지 않는걸로 알고있다. 참으로 답답하고 참담한 현실이 아닐수 없다. 전통마을은 한 민족이 력사의 변천중에서 모여서 생활하는 모식으로 발전해온 온정된 사회단원(单元)으로 본민족의 유구한 문명력사를 적재하고있다. 20세기 80년대까지만 해도 연변의 농촌은 전통마을이 주류를 이루었다. 마을마다 적게는 서너채, 많게는 십여채의 백년고택도 찾아볼수 있었다. 하지만 개혁개방이 급물살을 타기 시작한 지난세기 90년대로부터 리농현상이 심각해지고 도시화가 숨가쁘게 진행되면서 전통부락은 놀라운 속도로 해체되고 소실되면서 지금까지 이어내려온 문화형대가 급격하게 핵분렬되고 전통문화의 내재결구가 산산이 조각날 위험에 직면하게 되였다. 연변농촌의 경우 빈집이 늘어나면서 백년고택을 막론하고 정부에서 빈집 한채를 허무는데 5백원가량의 보조금을 지불하였는데 이런 정책은 전통마을의 몰락에 한몫을 하였다. 하지만 우리의 전통마을이 말끔하게 사라진것은 아니다. 례를 들면 룡정시 중심으로부터 남쪽으로 7.5킬로메터 떨어진 지신진 승지촌은 연변의 초재주장 주덕해동지의 옛집이 있는 마을로 “15만원탈취사건 유적지”, “‘5.30’폭동지휘부 유적지” 등 유명한 유적지가 있는 외 백년고택도 여려채 현존해 있다. 전통마을을 보호하는것은 계통공정으로 반드시 계획이 선행되여야 한다. 전통마을계획 설계에 민속, 옛 건축, 민간예술, 리론연구 등 전문가를 참여시켜야 한다. 각급 지방정부에서는 전통부락에 대한 보호계획을 세밀하게 세우고 전통마을의 배치, 외관을 보존하는 동시에 합리하게 생활시설을 증가하여 촌민들의 거주환경을 개변시켜야 한다. 다음 각급 지방정부에서는 전통마을에 대한 투입을 증가하여야 한다.옛 건축과 전통마을 보호를 정부재정예산에 편입시키고 해마다 보수자금을 늘여야 한다. 전통마을을 보호하는 관건은 생산을 발전시키고 생활을 개선시키는것이다. 현재 우리 주 농촌의 최대문제는 빈집이 많은것이다. 빈집이 많은 원인은 도시와 농촌의 차이가 현저하기 때문이다. 지금의 상황에서 농촌을 리탈한 촌민들의 귀촌을 바라는것은 현실적이 못된다. 먼저 정부의 막대한 자금을 투입하여 생산과 생활이 우월한 한두개의 대표성적인 전통마을보호시범촌을 건설함으로써 농민들의 귀촌을 자극하는것도 좋은 방도일것이다. 중요한 력사가치와 문화가치를 지니고있는 전통마을은 우리의 무가지보이며 재생할수 없는 문화유산이다. 또한 우리가 력사를 돌이켜보고 미래를 전망하는 시공교량으로서 우리의 령혼이 기거하고 최종적으로 회귀하는 정신적인 고향이며 중국조선족전통문화의 중요한 캐리어이다.사회주의 새 농촌을 건설함에 있어서 네모반듯한 새 벽돌집을 짓기 위해 천편일률로 전통마을을 부수는것은 능사가 아니다. 만약 전통마을이 완전히 사라진다면 무엇을 의미하겠는가.심사숙고만 해야 할 문제가 아니다. 전통마을에 대한 보호대책이 시급하다.  연변일보 11일자    
23    연변무대미술발전 일별 댓글:  조회:1929  추천:1  2014-01-17
근 70년(1945년―현재)간의 발전려정에 연변의 무대미술은 전문인재가 전무한 상황에서 가장 원시적인 무대미술설계로부터 출발하여 레이자미술세트(布景), 컴퓨터등광, 현대투영기술, 전자조률대(电子调音台), 화장, 복장, 효과, 도구 등 다양한 분야의 각종 현대화한 과학기술수단을 응용할수 있는 전문인재대오가 형성됨으로써 연변의 공연예술의 발전에 막중한 기여를 하였다. 1945년, 항일전쟁이 결속되여서부터 1950년대초까지는 연변무대미술의 초창기였다. 이 시기 연변각지에서는 문예단체가 우후죽순처럼 일어서고 무대미술도 걸음마를 떼기 시작하였다. 당시 연변에서는 연극 “혁명자”, “흥부와 놀부” 등 13부의 연극이 공연되였는데 무대설계는 매우 간단하여 나무가 소요되면 산에 가 나무를 베여 무대에 세우는 방식이였으며 조명등이 없어 홰불로 무대를 밝혔다. 1953년 제1차 동북3성문예공연에서 연변가무단의 무극 “평화를 위해서”(무대설계 박창렬)가 무대미술설계 1등상을 수상하였다. 지난세기 50년대 중기부터 “10년 대동란”이 결속되기까지는 연변무대미술이 기틀을 잡기 시작한 시기였다. 1956년 1월, 연변연극단에서는 무대미술설계사 김영호를 중앙연극학원에 보내여 쏘련전문가의 지도를 받게 하였으며 1963년 1월 상해연극학원 무대미술학부를 졸업한 남승철이 연변연극단에 배치되였다. 이 시기 연극 “아침노을”, “장백의 아들”, “심청전” 등 14부의 창작연극과 본보기극이 공연되였다. 김영호, 김영운, 남승철 등 전문일군들이 사실주의창작방법으로 무대미술을 창작하였는데 1959년에 있은 길림성현대연극콩믈에서 연변연극단의 연극 “아침노을”이 무대미술설계상(김영호)을 수상하였다. 1980년대초로부터 1990년대까지 연변무대미술은 개화기에 진입하였다. 1981년 4월 연변무대미술학회가 성립되면서 연변무대미술발전은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하였다. 이 시기 “장백의 아들”, “눈속에 핀 꽃”, “산귀신”, “도시+농민=?” 등 18부의 연극이 공연되였다. 1982년 12월에 개최된 제1차 전국무대미술전람에서 연극 “장백의 아들”(미술설계 남승철, 김영운 등)을 비롯한 4폭의 무대미술설계도가 전시되였다. 이 시기 견학, 무대미술전람 등 활동이 활발하게 가동되였으며 무대미술설계, 등광, 복장 등 분업이 형성되고 전문분야의 인재들이 속출하였다. 지난세기 90년대중기로부터 지금까지 연변무대미술은 전면적인 발전단계에 진입하였다. 이 시기 “장백의 정”(1997년), “들끓는 장백산”(2001년), “천년아리랑”(2006년), “장백산 아리랑”(2009년), “노래하노라 장백산”(2012년) 등 국내외에 명성을 떨친 10여부의 대형문예공연종목들이 무대에 올랐는데 모든 작품들이 국가급 무대미술설계상을 비롯한 여러가지 상을 수상하였다. 무대조명의 역할이 그 어느때보다 뚜렷해졌으며 무대도구의 구사도 더욱 넓어졌다. 활약한 무대미술설계일군들로는 전성환, 한동언, 임동길, 남승철, 방승한 등이 있는데 여기에는 국가1급무대미술설계사도 다수 포함되여있다. 70여년간 연변의 여러 세대의 무대미술설계일군들은 공연무대의 막후에서 연변공연예술의 발전에 마멸할수 없는 기여를 하였다. 하지만 표현예술의 형식이 풍부해지고 과학기술수준이 날따라 향상함에 따라 무대미술설계도 하루가 다르게 진화, 발전하고있다. 이러한 급속한 발전의 보폭에 맞추려면 젊은 무대설계일군들이 과감한 도전정신으로 현대기술을 습득함과 아울러 창신의식과 정품의식을 증강한다면 연변의 무대미술창작과 공연예술발전도 한단계 업그레이드 될것이리 믿어 의심치 않는다.     연변일보  
22    화제로 떠오른 문화소프트파워 댓글:  조회:1885  추천:1  2014-01-03
  지난해 12월 30일 오후, 습근평주석은 중공중앙 정치국 집단학습모임에서 국가문화소프트파워(软实力)를 제고하는것은 “중화민족의 대부흥―중국꿈의 실현과 긴밀히 관련되기에 국가문화소프트파워를 제고하고 그 토대를 단단히 다지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로써 2014년은 국가문화소프트파워의 토대를 단단히 다지는 새로운 원년으로 될것이다. 문화소프트파워는 문화와 의식형태의 흡인력이 구현하는 힘으로 세계 각국에서 문화전략과 국가전략을 제정하는 중요한 참조계로 되고있다. 당면 어떠한 국가든지 본국의 정치, 경제, 군사 등 하드파워(硬实力)를 제고하는 동시에 본국의 소프트파워를 제고하는것을 더욱 특수하고 중요한 위치에 놓고 틀어쥐고있다. 국가문화소프트파워를 제고하는것은 우리 나라 문화건설의 전략중점일뿐만아니라 나라건설과 조화세계 전략사상의 중요한 조성부분이며 특히는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의 전제조건이라고 할수 있다. 소프트파워는 근년에 국제관계령역에서 제일 류행되는 키워드로 사람들로 하여금 유형의 경실력에만 관심을 돌리게 하던데로부터 문화, 가치관, 도덕준칙,문화호소력 등 무형의 연실력에 관심을 돌리게 하고있다. 소프트파워란 개념은 미국 하버드대학의 조셉 나이가 1990년 《미국은 세계를 령도할수 있는가》라는 저서에서 처음으로 제기했다. 그는 하드파워와 소프트파워는 의연히 중요하지만 정보화시대에서 소프트파워는 이전보다 더 뚜렷해지고있으며 문화영향력, 의식형태, 제도배치상, 외교사무 등 4개 면의 영향력을 지니고있다고 귀납하였다. 중국문화소프타파워의 현상황은 전통문화에 대한 홍보와 보급에서 “원생태”상태에 머물러있고 우수한 문화전통자원우세가 강대한 현실생산력으로 충분하게 전환되지 못하고있으며 문예공연, 언어문화, 도서출판 등 문화령역에서 “문화적자”에 직면해있다. 습근평주석은 “국가문화소프트파워를 제고함에 있어서 중화문화의 독특한 매력을 전시해야 한다. 5000년의 문명발전과정에서 중화민족은 찬란한 문화를 창조하였다. 중화민족의 제일 기본적인 문화유전자와 당대문화를 서로 적응시켜야 하며 우수한 문화를 계승해야 할뿐만아니라 시대정신을 고양하여야 한다. 노력하여 국가문화연실력을 제고하고 당대 중국가치관을 전파해야 하고… 당대 중국가치관념을 국제교류와 전파 등 여러가지 면에서 관통해야 한다”고 지적하였다. 문화는 한 민족의 정신과 령혼이며 국가발전과 민족진흥의 강대한 힘으로 된다. 문화체제에 대한 개혁을 심화하여 문화발전활력을 증강하고 문화사업과 문화산업을 번영발전시킴으로써 국가문화소프트파워를 제고하고 전민족의 문명자질을 높이는것은 더는 미룰수 없는 초미의 과제로 나서고있다. 연변일보
21    조선족설창예술 재기 요청 댓글:  조회:2062  추천:1  2013-12-30
  20세기 70년대 조선족이 집거해있는 연변에서 “연변창담(唱谈)”, “평고엮음”, “북타령” 등 세가지 새로운 설창(说唱)형식이 창제되였다. 상기 세가지 설창예술형식은 “10년 동란시기” “본보기극”의 극본형태를 본뜨고 판소리표현형태 등을 기초로 하여 창제된 새로운 곡예(曲藝)쟝르였다. 1973년초, 주문화행정부문에서는 최수봉, 김남호 등 군중예술관 사업일군들을 북경, 천진, 상해 등지에 파견하여 곡예예술을 견학하게 하였다. 최수봉, 김남호 등은 반복적으로 견학하는 과정에서 어느 민족에게나 다 독특한 설창예술형식이 있다는것을 알게 되면서 조선족특색을 띤 새로운 설창형식을 창제할 결의를 다지게 되였다. 최수봉선생은 “연변창담”의 창제과정을 이렇게 서술하였다. “1973년초, 견학을 마친후 나는 1년간 왕청현 왕청촌에 내려가 낮이면 농민들과 함께 밭일에 참가하고 밤이면 청년농민들의 예술활동을 지도하면서 ‘연변창담’의 구체적인 설계를 무르익혔다. ‘연변창담’극본은 ‘본보기극’의 하나인 ‘두견산’의 토막을 각색하였다. 나는 농민작곡가 전승길과 손잡고 기본곡조, 창법, 표현방법 등에 이르기까지 반복적으로 연구하였다. 이듬해 봄에 전 주 농민과외연예경연대회에 ‘연변창담’ ‘두견산편단’을 내놓았는데 전문가들로부터 충분한 긍정을 받았다.” 1975년에 최수봉선생은 “백계연에서의 회사”를 “연변창담”으로 각색하였는데 이듬해 6월에 있은 전국구연예술경연에서 공연되였다. 전문가들은 언어가 통속적이며 곡조가 경쾌하고 인물형상이 선명하며 표정동작이 생동하다고 높이 평가하였으며《인민일보》, 《광명일보》 등 국가급매체에서는 조선족구연예술 새 형식의 창제를 축하하는 글을 실었다. “평고엮음”도 1974년부터 고안, 설계하기 시작한 새로운 설창형식으로 노래를 위주로 하고 대화를 섞어서 이야기를 엮어나간다. 막이 열리면 연창자들은 손에 쥔 소평고를 손가락으로 치며 주선률전주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며 춤추며 등장한다. 이야기의 흐름에 따라 연창자는 이야기중의 어느 한 인물로 되였다가 또 연창자로 되돌아오기도 한다. 1975년 여름, 최수봉 집필, 김남호 작곡으로 된 “평고엮음” “양돈어머니가” 관중들과 처음으로 대면하여서부터 잇달아 “약초 캐는 처녀”, “애나 죽겠어” 등 많은 작품들이 창작, 공연되였다. 1979년에 연변구연예술극단 창립기념공연에서 최수봉선생이 집필하고 안계린선생이 작곡한 “북타령” “영길이와 행복의 만유기”가 처음으로 관중들과 대면하면서 또 하나의 설창형식 신고식이 치러졌다. 막이 열리면 2명의 연창자가 북을 메고 장단절주를 치며 반주에 맞추어 노래하며 등장한다. 말을 주고받을 때나 동작을 할 때에는 북을 뒤로 돌려놓기도 하고 또 그것을 이야기줄거리의 흐름에 필요한 도구로도 리용했다. 공연이 시작되면서 관중들은 대번에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으며 이 종목은 실제 200여차나 공연되는 기록을 세웠다. 후에 창작된 북타령 , “영길이와 행복이의 장마당구경”(김창봉 집필, 안계린 작곡)도 200여차 공연되면서 북타령의 생명력을 과시하였다. 필자 역시 1990년대 도문시문화관에서 근무하던 시절에 2편의 북타령을 창작하여 무대에 올린바 있다. 20세기 90년대말까지만 해도 “연변창담”, “평고엮음”, “북타령” 등 설창형식을 무대에서 자주 만날수 있었으나 지금은 깜쪽같이 그 자취를 감추고말았다. 내적원인, 외적원인이 모두 작용한 결과이겠지만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하고 진화시키면 얼마든지 명맥을 이어갈수 있는 설창형식인것만은 틀림없다. 때문에 관련 부문에서는 전문가를 조직하여 중국조선족특색의 설창형식에 대한 연구 및 창작을 병행하여 먼저 주급 무형문화재로 지정하는것이 급선무라 생각한다. 연변일보
20    호화야회 금지령과 공연계의 리성 회귀 댓글:  조회:1882  추천:1  2013-12-20
  2013년 8월, 중앙선전부, 재정부, 문화부 등 5개 부문에서 련합으로 “호화스럽고 겉치레를 조장하는 야회를 금지할데 관한 통지”를 반포하였다. 호화야회금지령이 반포된지 5개월이 지나 전문가들은 “금지령은 공연시장에 한차례의 대수술을 함으로써 시장의 건전한 발전에 영향을 주는 종양을 제거하고 공연시장의 거품을 걷어냄으로써 공연업이 리성으로 회귀하고 건전하고도 지속적인 발전궤도에서 운행되도록 담보하고있다”고 높이 평가하고있다. 호화야회금지령이 반포된후 일부 문예표현단체, 극장, 공연기획사의 공연차수와 공연수입이 대폭 하강하는 현상이 나타나면서 진통을 겪고있다. 호화야회는 관중의 선택이 아니라 일부 지도자들의 선택이였다. 호화야회의 렌즈는 스타와 관원 사이로 오가는것이 관례였다. 지난날 대부분 호화야회는 준비과정이 짧고 정품이 적어 공연하고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스타들의 배를 불려주는 반면 신예들의 성장에 걸림돌이 되고 많은 재능이 있는 창작가, 연출, 배우, 무대미술가들이 저도 모르게 호화야회의 리익사슬에 얽매이는 등 후유증이 만만치 않았다. 공리라는 블랙홀에 빠진 창작자들은 공을 들여 예술작품을 창작하는것을 기피하였기에 패스푸트 문예종목이 예술표준과 예술함량을 대폭 삭감시키는 악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국가문화부의 발표에 따르면 호화야회금지령이 발표된 이래 모든 공연시장이 위축된것은 아니며 일부 공연단체의 매표수입은 오히려 상승하고있다고 한다. 우리 연변의 경우에도 연변가무단에서는 대형창작가무 “노래하노라 장백산”을 전국 22개 성에서 100여차 공연함으로써 시장경영발전기능의 저력을 여실하게 보여주었다. 준엄한 시련에서도 일부 공연단체들이 승전고를 올릴수 있었던 까닭은 그들이 적극적으로 시장과 관중에게 낯을 돌리고 실속있게 내공을 쌓고 봉사수준을 높임과 동시에 시장수요를 만족시킬수 있는 브랜드종목을 개발함으로써 지명도를 확대하고 경쟁력을 업그레이드시켜 시장에서 기선을 잡았기때문이다. 현재 일부 공연단체들의 공연활동이 상승과 하강 두개 극으로 분화된것은 호화야회금지령이 공연시장의 정곡을 건드렸기때문이다. 우리의 공연단체들이 시장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예술본체를 특출하게 하고 사상내포를 풍부히 하며 문화저력을 증강하는데 공력을 들이는것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다. 연변일보
19    “시만들기프로그램”과 현대시 곤혹 댓글:  조회:2272  추천:2  2013-12-13
문학적인 천부가 전혀 없이 한글자 한구절을 신중히 다듬을 필요도 없이 사람마다 “시인”이 될수 있다. 만약 당신이 자판기에 몇개의 관건적인 단어를 입력하면 1분 안에 자동적으로 한수의 시가 생성된다. 이것은 천방야담이 아니라 인터넷에서 류행하고있는 “시만들기프로그램”(“写诗软件”)이 제공하는 “편리”에 의해서이다. 바이두(百度)에 “시만들기프로그램”(“写诗软件”)을 검색하면 몇십개에 달하는 “시만들기프로그램”이 화면에 뜬다. 사용자가 “시만들기프로그램”에 내키는대로 생각한 명사나 형용사 및 단락수(段数), 행수(行数) 등 지시어를 입력하면 프로그램은 자동적으로 1분내에 한수의 “현대파풍격”의 시를 생성한다.  필자가 이 프로그램에 한어로 몇개 낱말들을 입력하니 “10월”이라는 그럴듯한 현대시가 탄생되였다. “중신(众神)이 사망한 사막을 바라보니/ 멀고도 먼 곳의 바람은 먼 곳보다 더 멀어라/ 나의 북소리엔 흐느낌과 눈물은 전혀 없구나/ 먼 곳은 다만 사막에서 한쪼각으로 응결되고/ 거울 같은 보름달은 높이 떠서 천년세월 비추네/ 나의 북소리엔 흐느낌과 눈물 전혀 없구나/ 홀몸으로 말을 채찍질하며 사막을 지나가네.” 현대시의 일부 류파는 현대시란 바로 현실세계의 상식을 초과하는 정신적, 언어적 운동으로 초월세계, 련속세계를 추구하며 새로운 이미지를 창출하기 위해 이질적인 강압조합(폭력조합), 파편문체를 사용하여 낯설게 하는것이 그 처방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필자가 “시만들기프로그램”의 힘을 빌어 만들어낸 시 “10월”도 성공작이라고 할수도 있겠다. “사냥군”이라는 익명을 가진 “시만들기프로그램”의 개발자는 최초에는 호기심에 의해 이 프로그램을 만들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현대파풍격의 시가 전통시에 비해 모방하기 쉽다는것을 발견하였다고 한다. 그는 “현대시의 창작사유가 기계적사유에 더 가까우며 현대파풍격의 시의 내재론리가 더욱 도약하는것이 특징이다. 현대파풍격의 시는 바로 어문(语文) 상식중의 명사, 형용사, 부사의 결합을 엉망으로 만들고 주어와 술어의 관계를 제멋대로 헝클어놓는것이다”라는 사람을 놀래우는 메가톤급의 언론을 던졌다. 한 유명한 “시만들기사이트”의 홈페이지에는 “무슨 말인지 모를 현대시를 많이 읽고서야 우리는 보고도 모르는것이 현대시의 본질이고 제멋대로 결합시키는것이 현대시의 보배임을 알게 되였다. 대사(大师)가 없는 년대에 시인들은 썩 물러가라, 지금은 우리도 시를 쓸수 있다”라는 선언문을 버젓이 내걸었다. “시만들기프로그램”의 출현은 시단에 진동을 가져왔다. 문학계에서는 “허튼 소리로 매우 황당하다. 이는 문학창작의 패스트푸드화이며 경박한 문화의 표현이다”라고 질타했다. 중국의 저명한 시인이며 북경사범대학 문학원 담오창교수는 “현재 시문학은 전면적으로 쇠퇴하는 국면에 접어들었다. 각종 문학쟝르중 문자와 의경에 대한 요구에서 제일 높은것이 시이다. 시는 인류의 정감을 표달하는 제일 훌륭한 담체이다. 시인은 높은 문학수양을 가져야 할뿐만아니라 내심의 체험과 감수 및 진실한 감정으로 창작해야 한다. 이것은 기계가 할수 없는것이다. ‘시만들기프로그램’으로 만들어낸 작품은 예술에 상처를 줄것이며 시를 훼멸시킬것이다”는 문장을 발표하였다. “시만들기프로그램”의 성행은 시인들에게 시의 본질이 무엇인가 하는 엄숙한 문제를 다시 제기하고있다. 자연이나 인생에 대하여 일어나는 감흥과 사상따위를 함축적이고 운률적인 언어로 표현한 글이 바로 시이다. 우리의 시인들은 시는 만드는것이 아니라 쓰는것임을 명기해야 할것이다. 연변일보
18    "문화상"과 "군성상"의 의미 댓글:  조회:2225  추천:2  2013-12-05
  일전에 연변가무단과 연변주군중예술관에서 쌍으로 희소식을 전해왔다. 연변가무단의 원작가무 “노래하노라 장백산”이 제10차 중국예술절 제14차 문화상평의에서 우수프로그램상을 수상하고 연변군중예술관의 “성세장고”가 제10차 중국예술절 제16차 군성상평의에서 군성상(群星奖)을 수상함으로써 연변의 문화예술실력을 만천하에 자랑했다는 소식이였다. 국가문화부에서 주최하는 중국예술절은 우리 나라에서 품위나 규모, 영향력이 제일 큰 국가급예술행사로 불리운다. 문화상평의와 군성상평의는 모두 중국예술절행사기간 펼쳐지는 두가지 평의인데 문화상은 전문무대예술분야의 정부최고상이고 군성상은 문화부가 군중문예창작을 번영시키고 사회문화사업의 번영과 발전을 추동하기 위해 설치한 사회문화예술분야의 정부최고상이다. 전문무대예술분야와 사회문화예술분야의 정부최고상을 우리 주에서 모두 획득했다는것은 우리 주가 문화예술의 보급과 제고에서 쌍풍수를 거두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일찍 70년전에 있은 “연안문예좌담회강화”에서 모택동주석은 보급과 제고에 관한 문제를 제기하였다. “강화”에서 모댁동주석은 “보급사업과 제고사업은 갈라놓을수 없는것이다. 우리의 제고는 보급을 토대로 한 제고이며 우리의 보급은 제고를 지도로 하는 보급이다. 완전한 ‘양춘백설’과 완전한 ‘하리파인’은 모두 문제를 야기하기에 변증법적인 분석을 요구한다”고 지적했다. 문화예술의 보급과 제고의 내용은 시대에 따라 변하고 승급한다. 례를 들면 건국초기 보급의 직능을 담당한 문화관에서는 당의 중심사업을 둘러싸고 시사교육, 식자교육 등 낮은 차원의 문화보급에 중점을 두었다. 11기 3중전회이후 문화관의 주요기능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문화관은 풍부하고 다채로운 문화행사를 마련하고 대중적인 과외문예단체를 건설하고 군중문예골간을 양성하며 무형문화재를 수집, 정리, 연구하는 등 그 기능과 역할이 대폭 승격되였다. 현재 우리 주의 군중문화사업은 그 어느때보다 활발한 양상을 띠고있다. 각 현시마다 군중문예단체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광장문화가 흥행하고있으며 각 문화관마다 여러개의 무형문화재종목을 보유하고있어 시민들에게 문화적향수를 듬뿍 안겨주고있다. 이번에 연변군중예술관의 “군성상” 수상은 우리 주 군중문화사업일군들의 소질이 높고 과외문예골간대오의 저변이 두터우며 군중문화사업이 높은 차원에서 운행되고있음을 다시한번 립증해주었다. 예술표현단체는 문화예술제고기능을 수행하는 기구로서 문화전승기능, 예술생산기능과 시장경영발전기능을 갖고있다. 이번에 연변가무단의 문화상 수상작품 “노래하노라 장백산”은 바로 중국조선족의 무형문화재원소를 집대성하여 창작된 작품으로 문화전승기능과 예술생산기능을 톡톡히 수행하였다. 그외 이 작품은 높은 예술성으로 전국 22개 성에서 100여차 공연됨으로써 연변가무단의 시장경영발전기능도 여실히 보여주었다. 높은 소질의 시민이 없고 문화명인이나 높은 수준을 갖춘 문예단체가 없다면 연변조선족자치주를 문화강주로 건설한다는것은 공담에 불과하다. 어떠한 시기나 보급과 제고의 과정이 있다. 보급가운데서 제고를 가져오게 되며 제고의 기초에서 다시 보급하는 동태적인 과정이 반복되면서 우리의 문화예술은 발전하게 된다. 때문에 문화관과 전문예술표현단체가 상부상조할 때 문화예술이라는 쌍두마차는 무탈하게 운행될것이다. 건국이래 우리 주 문화예술사업의 보급과 제고에 막대한 공헌을 한 문화관과 예술단체들에 격려의 박수를 아끼지 않는바이다. 연변일보
17    중국조선족TV드라마 이젠 우리의 힘으로 댓글:  조회:2756  추천:13  2013-11-05
1977년 12월에 연변TV방송국이 개국하고 1983년 양력설에 중국조선족의 첫 TV드라마 《어머니 시름놓으세요》(김훈 씨나리오, 김일 연출)가 방송되면서 중국조선족 TV드라마(TV극)의 기원이 열리게 되였다. 1983년부터 지난 세기 90년대말까지 연변TV방송국에서는 선후로 《세배《(1985년), 《낳은 정 키운 정》(1985년), 《민들레꽃》(상, 하, 1986년), 《우리 선생님》(1987년), 《사랑의 품》(1995년, 8집), 《가족사진》(1999년, 16집) 등 도합 25부의 TV드라마를 제작하였다. 그중 《낳은 정 키운 정》은 중앙TV방송국을 비롯한 전국 150개 텔레비죤방송국에서 방송되였으며 《민들레꽃》은 동북3성 TV드라마 《금호상》평의에서 극본 3등상을 수상하고 《우리 선생님》은 제2차 소수민족소재TV드라마평의에서 《준마상》 2등상을 수상하였다. 이 시기 중국조선족 TV드라마는 씨나리오, 감독, 배우 등 제작진 멤버 전체가 일색 조선족들이였다. 이들은 만강의 열정과 충만한 사명감으로 중국조선족의 피어린 혁명투쟁사와 현실생활을 반영한 TV드라마를 다수 제작함으로써 중국조선족들의 인심을 고무시키고 중국조선족을 전국에 홍보하는데 마멸할수 없는 기여를 하였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중국조선족 TV드라마제작은 두갈래 길을 걸어왔다. 하나는 정부의 강력한 지지로 중앙TV방송국에서 《풍설속의 진달래《와 《장백산아래 나의 집》 등 2부의 대하 TV드라마를 제작한것이다. 이 2부의 TV드라마는 투입이 많고 스케일이 크며 중앙TV방송국에서 황금시간대에 방송함으로써 그 파급효과가 전례없이 컸다. 하지만 모든 제작과정을 타민족이 주도하다보니 중국조선족의 생활을 반영함에 있어서 미흡한 점도 없지 않다는 지적이다. 다음 하나는 중국조선족들이 주도한 TV드라마창작이 미약하게나마 그 명맥을 유지해온것이다. 이 시기 13년간 연변TV방송국에서는 《반지》(2006년, 김광호감독), 《부모》(2011년, 주금파감독, 제5회 소수민족소재TV드라마평의 《금붕상》 수상), 《자전거》(2012년, 주금파감독, 길림성라지오TV방송국 《두루미상》 1등상 수상) 등 모두 3부의 TV드라마밖에 제작하지 못했다. 이는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중국조선족 TV드라마제작이 매우 위축되여있음을 설명해준다. 근 150여년에 달하는 이민사를 갖고있는 중국조선족은 드라마 같은 파란만장한 발전력사를 겪어왔다. 이는 중국조선족이 자기의 훌륭한 TV드라마를 창작할수 있는 큰 밑천으로 된다. 근 30년의 발전을 거쳐 중국조선족은 작가, 감독, 배우 등 TV드라마를 단독으로 제작할수 있는 기반을 튼실하게 갖췄다. 하지만 씨나리오를 전문으로 쓰는 작가, 연극배우와 구분되는 탤런트는 거의 전무한 상황이다. 구슬도 꿰여야 보배라는 말도 있다. 지금부터라도 관련 부문에서는 자금을 투입하여 널려있는 TV드라마 제작인재를 모음과 동시에 젊은 씨나리오작가, 탤런트, 감독, 촬영사, 특수분장사 등 TV드라마 제작 후비인재들을 양성함으로써 새로운 도약을 위한 준비에 만전을 기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16    백년부락 댓글:  조회:2167  추천:3  2013-10-31
도문시 월청진에 위치한 백년부락을 찾아가던 그날, 나의 마음은 설레이기만 했다. 백년부락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백년 세월을 간직한 고향마을 일초일목이 파노라마처럼 떠오른다. 이 길을 따라 두만강을 거슬러 곧추 올라가면 고향마을일텐데… 몸집이 웅장한 돌에 새겨진 백년부락 입구에 들어서니 고향에 찾아온듯 맥박이 빨라진다. 입구에 위치한 한옥 앞마당에서는 함초롬한 청보리가 세풍에 수줍은듯 설레인다. 퍽 낯 익은 모습이다. 청보리처럼 풋풋한 나의 첫사랑 숙이는 고향마을 한복판 백년 넘는 고택에 살고있었다. 숙이네 집앞을 지날 때면 언제나 발뒤꿈치를 들어 돌담너머 백년고택을 기웃거렸다. 오얏나무아래에서 책을 읽고있는 노을처럼 고운 숙이를 볼 때면 얼마나 가슴이 콩닥거렸던가. 초중 1학년때 숙이네는 내몽골로 이사했다. 하필이면 수천리나 떨어진 그 먼 곳에 이사했을가. 그후로 나는 숙이를 한번도 보지 못했고 소식마저도 모르고 살아왔다. 언제나 여한을 안고 사는것이 인생인가부다. 청보리밭 가장자리에서는 잠자리가 장다리끝에서 요리조리 옮겨앉으며 오후의 따스한 해볕을 즐기고있었다. 어릴 때에는 늘 고향집 앞마당 굽바자에 붙어서서 코등에 땀을 벌벌 흘리며 《소곰재 꽁꽁 앉은 자리에 앉아라. 먼데 가면 죽는다.》는 동요를 부르며 잠자리를 나꿔채기에 여념이 없었다. 인간은 왜 《먼데 가면 죽는다.》는 동요를 부르면서도 너도나도 고향을 떠나 먼데로 가지 못해 아득바득 애쓰기만 하는가. 백년부락은 백년 넘는 고택 한채와 풍격과 용도가 서로 다른 조선족전통한옥 20여채로 조성되였다. 고혹적인 매력의 룡마루기와집과 노란 벼짚으로 이영을 얹은 소박한 초가집이 서로 어울린 백년부락은 세월의 흐름속에서 뒤안길로 사라져버린 우리네 전통부락을 재현한것이다. 옹기종기 둘러앉은 초가집들은 낮은 돌담으로 둘러져있다. 돌담우에 줄느런히 무져져있는 고색창연한 기와장들은 년대에 따라 크기, 무늬, 색상이 서로 다르다. 이런 기와장들은 어찌나 단단한지 지붕에서 내려뜨려도 잘 깨지지 않는다고 한다. 질그릇들도 어떻게 구웠는지 오래된것일수록 가볍고 단단하고 자연스럽고 예뻐 조상들의 지혜에 혀를 차게 한다. 초가집 돌담너머 디딜방아가 눈길을 끈다. 몰강스러운 할머니는 우리 집을 떠나 큰집으로 갈 때까지 어머니를 심하게 족대겼다고 한다. 어머니가 나를 임신하고 만삭일 때 정월 엄동에 할머니가 어머니더러 동네에 가서 매돌을 빌려오라고 불호령을 내렸다고 한다. 무거운 몸에 매돌을 머리에 이고 강바람을 맞으며 집으로 돌아올제 어머니는 눈물이 앞을 가려 죽고싶은 생각이 굴뚝처럼 일었다고 한다. 내가 어릴적 할머니는 늘 사소한 일로 어머니에게 가탈을 부렸는데 구정물을 통채로 어머니의 머리에 퍼붓기가 일쑤였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우악스러운 할머니와 가래지 않고 묵묵히 곡식자루를 머리에 이고 무거운 걸음으로 방아간을 찾았다. 어머니는 방아를 찧으며 시름과 설음도 함께 찧으셨을것이다. 골목길을 따라 몇걸음 걸으니 자그마한 공터에 큰 석마가 놓여있다. 오랜 세월의 여울에 이끼 낀 석마, 우리네 겪은 력사만큼 묵중함이 느껴진다. 우리 마을에도 이와 비슷한 큰 석마가 있었다. 마을 북쪽 빈 자리에 버려져있었는데 몇년전에 마을사람들이 얼마 되지 않는 돈을 받고 외지사람에게 그 석마를 팔아버려 떡심이 풀리기도 했다. 백년부락의 으뜸은 당연히 100여년의 풍우를 끄떡없이 이겨낸 전통한옥이다. 이 전통한옥은 조선이민 박여근이라는 상인이 3년간의 시간을 들여 1893년에 준공한것이라고 한다. 가옥의 주인은 이 집에서 50년 살다가 해방후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한다. 백년고택은 면적이 크고 조선족건축특색이 선명한데 토목과 기와구조로 대못 하나 박지 않고 자귀와 도끼 등 도구를 사용해 건축했다. 고택은 마루와 온돌이 결합되고 퇴마루가 있다. 내부구조는 정지, 웃방, 고방, 한웃방, 한웃고방, 사랑채로 구성되였다. 집을 짓는데 필요한 목재는 장백산의 량질원목을 떼목으로 운반해다 사용하고 기와는 조선에서 배를 리용해 운반해다 사용한것으로 알려졌다. 백년고택 뜨락에 들어서니 제일 먼저 눈에 띄는것이 샘이 깊은 드레박우물이다. 우물가에는 수양버들이 머리를 풀고 바람에 하느작거린다. 고향마을 우물가에도 마을의 년륜만큼 수령이 오랜 버드나무 한그루가 있었다. 마을사람들은 매년 10월 초하루날이면 버드나무아래에서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비는 당산제를 지냈다. 부모님들은 당산나무의 령험을 받기 위해 가족중에 누가 아프거나 멀리 떠난 자식들이 무사하기를 기원해 당산나무에 정성껏 치성을 드렸다. 여름밤이면 마을사람들은 버드나무아래에 모여들어 밤이 깊어가는줄도 모르고 몸이 날짝지근해질 때까지 세상만사를 노닥이면서 잠시나마 각다분한 인생사를 잊군 했다. 긴긴 겨울밤이면 군것질이 구쁜 아이들은 우물에 얼어붙은 얼음을 까다가 얼음과자처럼 맛있게 먹으면서 주린 배를 달랬다. 그야말로 우물은 마을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풍성하게 살찌워준 젖줄이였다. 백년고택 앞으로는 작은 개울이 흘러간다. 바로 이 개울가에서 아낙네들은 빨래를 하면서 시집살이의 설음과 고달픔을 헹구고 남정네들은 흙 묻은 호미를 씻고 낫을 갈면서 풍년을 기원했으리라. 마당 북쪽에는 마을의 견증자인 물레방아가 삐꺼덕삐꺼덕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데 적막한 마을에 생기를 더해준다. 백년고택 문턱에 서서 집안을 들여다보니 구들에 오랜만에 보는 까래가 깔려있다. 부뚜막은 먼지 한점 없이 깔끔하다. 반지르르 윤기가 도는 가마가 걸린 부뚜막우 빨래줄에서는 세마리의 새끼 제비가 한가롭게 낮잠을 자고있다. 내 고향집 내부모습과 꼭 닮은 꼴이다. 가마목에서 밥을 짓던 어머니가 《바가지가 엎어지더니 네가 기별도 없이 집에 돌아오려고 그랬구나.》라고 말씀하시며 맨발바람으로 봉당에 내려서서 나를 반기실것만 같다. 우리 마을에도 세월의 모진 풍우를 이겨낸 백년고택이 세채나 있었다. 1990년대초, 마을사람들은 셈평이 펴이면서 마을의 력사를 고이 간직한 고택을 흉물로 여기고 가차없이 톡탁 쳐버리고 새 벽돌집을 지었다. 이젠 고향마을은 집도 골목길도 어디라 없이 설면한 모습으로 변해버렸다. 숙연한 마음으로 백년부락 구석구석을 갈마보고나니 그립던 고향에 다녀온듯 마음은 홀가분해지고 타향살이에 찌들었던 삶이 치유된다. 첫사랑처럼 영원히 잊을수 없는것이 고향이고 가시처럼 내 살점에 박혀있는것이 고향이다. 점점 사라지고있는 백년부락이 우리의 전통마을을 재현시켜 고향이 그리울 때면 언제든지 달려갈수 있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르겠다. /김인덕
15    교하 “단풍계곡”이 주는 계시 댓글:  조회:1999  추천:2  2013-10-23
  국경절련휴기간 필자는 교하에 위치한 “단풍계곡(红叶谷)”을 찾아갔다.  “단풍계곡”이 유명한 풍경구인것은 익히 알고는있었지만 풍경구에 도착한 순간 넓은 주차장에 정차한 수많은 차량과 실북처럼 나들고있는 차량, 북적이는 인파에 필자는 적이 놀랐다. 무려 50킬로메터나 이어지는“단풍계곡”은 어디로 가나 자가용의 행렬로 장사진을 이루고 인파들로 물샐 틈이 없었다. 차량번호판을 보면 장춘, 길림 지역이 많았고 북경지역, 연변지역의 차량들도 적지 않았다. “단풍계곡”은 4개 풍경구로 나뉘였는데 입장료는 각기 120원과 60원이였다. 어림잡아도 하루 다녀가는 유람객이 몇만명을 웃돌고 단풍이 지속되는 시간을 15일로 치면 단풍철기간 교하시에서는 웬만한 한개 현, 시 재정수입의 절반에 해당하는 관광수입을 올린다고 할수 있다. “단풍계곡”은 장백산산맥의 한갈래 산골짜기로 라법산(拉法山)국가삼림공원의 경령(庆岭)풍경구에 위치해있는데 연길과는 서쪽으로 약 300킬로메터 상거해있다. 필자는 긴 려정을 달려오면서 “단풍계곡”은 계곡과 산 전체가 온통 빨갛고 노란 단풍들로 가관일것이라고 생각했는데 풍경구를 전부 유람하고나서야 연변의 여느 깊은 산골짜기의 가을풍경과 별반 다를바가 없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붉은 단풍나무가 많지 않았고 노란 단풍은 전혀 볼수 없어 색채의 조화가 단조롭고 대비가 두드러지지 않아 서운한감도 없지 않았다. 그런데 왜 수많은 유람객들은 이렇듯 “단풍계곡”에 열광하는것일가. 현대도시인들은 평소 빠른 생활절주에 몸과 마음이 모두 지쳐있다. 하여 사람들은 주말이나 련휴기간이면 도심을 벗어나 자연에 발길을 돌리기를 즐겨한다. 한때 유명했던 웰빙시대는 현재 힐링시대로 대체될만큼 현대인은 힐링에 집착하고있는것이다.  힐링(Hilling)은 “산에 오르다”를 뜻하는 영어이다. 삼림은 경관, 화초, 야생동식물 등 영상시각으로부터의 위안효과, 고요함, 새소리, 벌레소리, 바람소리, 계곡물소리 등 청각으로부터의 진정효과, 산채맛, 버섯맛, 열매맛 등 미각으로부터의 먹거리효과, 나무촉감, 락엽촉감, 삼림내 바람 등 촉감으로부터의 감촉효과, 초록향기, 꽃향기 등 후각으로부터의 상쾌효과 등 여러가지 탁월한 기능으로 인간의 오감을 만족시키면서 지친 몸과 마음을 한꺼번에 힐링해줌과 동시에 암, 천식, 결핵, 피부질환 등 질병을 치유해주기도 한다. 우리는 지금껏 도시내에서 위락시설이나 민속촌을 건설하는것으로 외지의 유람객을 유치하려 했고 자연을 개발할 때 골프장이나 스키장을 건설하여 한몫 잡으려 했다. 하지만 힐링시대에 위락시설이나 민속촌은 유람객들의 발길을 잡기에는 역부족이고 골프장이나 스키장은 소비층의 제한으로 리윤을 창출하는데 한계가 있음을 우리는 이미 경험해왔다. 주지하다싶이 연변의 삼림피복률은 80%를 웃돌고 유람객들의 발길을 끌만한 단풍유람구도 한두개가 아니다. 연변에서 가장 대표적인 단풍유람구는 안도현 량강진의 설산비호풍경구, 돈화시에 위치한 한총령(寒葱岭)단풍풍경유람구, 화룡 선봉풍경유람구 등이 있다. 그외 외부에 잘 알려지지 않은 숨은 비경―단풍풍경구가 적지 않을것이라 짐작한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까지 이런 관광자원을 홀대하면서 홍보 및 단풍풍경구 개발에 등한시해왔다. 우리는 이제 지친 몸과 마음을 힐링해주는 삼림에 눈길을 돌려야 한다. 단풍계곡을 건설함에 있어서 사계절 모두 유람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도록 종합적으로 개발하는것에 모를 박아야 한다. 봄에는 여러가지 색갈의 꽃이 만발한 꽃동산으로, 여름에는 오감을 만족시키는 체험장으로, 가을에는 노란 단풍, 빨간 단풍이 조화를 이룬 단풍계곡으로, 겨울에는 스키를 즐길수 있는 운동장소로 건설하는것이 바람직한 대안일것이다. 장춘으로부터 훈춘까지의 고속철도가 개통되면 장춘, 길림 등 지역과 연변은 1일 생활권에 들게 된다. 이때면 많은 유람객들이 연변에 찾아올것이다. 힐링시대에 삼림자원은 최대의 관광자원으로 부상할것임은 추호도 의심할나위가 없다. 이런 시점에서 담력이 있는 사업가나 원견성이 있는 행정가라면 단풍계곡에 대한 개발을 두고 한번 진지하게 고민하고 검토해볼 때라고 생각한다. 연변일보 10월 2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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