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영남 시인 篇
한폭의 작은 우주를 손바닥우에 올려놓으려는 시/허인
2014년 05월 28일 작성자: 허창렬
한폭의 작은 우주를 손바닥우에 올려놓으려는 시
한영남 근작시에서 살펴본 관념적 의식의 새로운 탈출
허인
[시인은 시인으로서의 인격이 있고 또한 독특한 개성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한 시인의 인격은 시에서 주로 튼튼한 골격을 이루며 남달리 독특한 개성은 또한 피와 살과도 같은 시적인 언어들을 창출해내기도 한다.] 일찍 미셀 푸코는 이라는 저서에서 고 설파한적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살펴볼때 우리 이 시대의 시인들은 들임이 틀림없다 .어찌보면 지극히 단순한 자신의 은밀한 아픔마저도 가끔 시대적인 아픔으로, 영위되여 가고 있는 삶의 지혜와 그러한 끊임없는 모험, 자아해탈과 자아 모순속에서도 악착스레 갈구해가는 영구불멸적인 정신적 해탈, 어쩌면 한낱 허무와 공허의 불안함, 그러한 요소마저도 시인자체의것만이 아닌 시대적인 것으로 가끔 승화시켜놓고 거기에 쟁쟁한 공명을 이끌어내여 치유의 엔돌핀으로 증오와 사랑을 나름대로 담담하게 노래 부르고 서슴없이 고백하여가는 ㅡ 솔직히 한영남시인의 근작시들을 십여일전 이메일로 받아놓고 무엇을 쓸가? 어떻게 쓸가? 여러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중 오늘에야 비로소 필을 든다. 그럼 여기서 우리 함께 한영남시인의 탈변을 시도로 굵직한 몸부림이 돋보이는 근작시들을 차례대로 하나하나씩 읽어보기로 하자
절충을 강요하는 무형(无形)속의 새로운 이중관념
묻지 않으리
상처를 찢는 또 다른 상처가 될가봐
바라만 보리
그저 말없이 이 세상 가장 아름다운 눈빛으로
전문이다
일찍 프로이드는 해결되지 못한 상처를 꺼내 승화하여 치유하는 과정을 문학창작의 전반 과정으로 보았다. 등등 주옥같은 작품들을 륙속 출품시켜 한때 조선족시단을 나름대로 풍미했고 심플하게 러시 아워까지 이끌어 냈던 한영남시인의 전반 시적 풍격을 꼼꼼히 살펴보면 리드미컬하게, 혹은 한결같이ㅡ 세찬 파도나 거친 풍랑, 외재적인 그러한 바다와는 거리가 멀게 항상 내재적인 미가 더욱 돋보이도록 돌돌돌 맑고 깨끗한 시내물 과도 같이 잔잔하게 흘러오다가도 불쑥 시적 공명을 크게 울리는 그런 특징이 있었다 . 그런 한시인이 요즘 들어 근작시에서 절충에 절충을 강요해가면서 이중관념적인 여러가지 단시들로 지금 필자를 깜짝 놀래우고 있다. 도합 2련으로 나뉘여진 이 시의 제1련 /묻지 않으리/상처를 찢는 또 다른 상처가 될가봐/ 에서 볼수 있다싶이 누구나 쉽게 직시할수 있는 피크(顶峰)된 시인의 상처, 즉 유형(有形)과 무형(无形)의 비좁은 삶의 공간을 비집고 나와 어마어마한 전률로 독자들에게 다가서려 하는 클로즈업된 시인의 아픔과 그러한 상처자국들ㅡ어쩌면 필자나 독자들로써는 감히 그 깊이나 너비마저 예측할수 없는 삶속의 희노애락과 애환이 절절히 느껴지게끔 하며 특히 제 2련은 객관적인 태도로 /바라만 보리/그저 말없이 이 세상 가장 아름다운 눈빛으로/ 결속되여 이 시는 곱씹어 읽을수록 꼭 무엇이라 이름할수는 없지만 잔잔한 울림이 변두에서서부터 시작되여 점차 중심으로 모아지는 그런 특징이 있는것 같다. 그럼 아래에 어쩌면 모험을 시도로 하는 다른 두수의 단시도 조심스레 더 살펴보고 가도록 하자
저녁 황혼
놀
타네
늘
붉네
인생
울어라 바다가 넘쳐나도록
웃어라 하늘이 흔들리도록
여기서 은 도합 여섯글자로 그나마 1, 2련으로 나뉘여졌지만 은 고작 두개 련뿐이다. 꼼꼼히 살펴보면 은 보다싶이 제목자체가 그냥 이여도 무방하려만 특별히 앞에 을 덧붙여 시간적인 개념이나 강조의 뜻을 강하게 크게 나타내려고 하였음이 엿보이고 은 어쩌면 아무렇치도 않게ㅡ 혹은 대수롭지도 않게 쉽게 씌여진듯 하지만 자세히 따져보면 과 , 와 , 그리고 재치있게 형용사 이 존속적인 결속어로 붙어있어 곱씹을수록 만만찮은 이미지즘을 이루고 있음을 알수가 있다. 어쩌면 한영남시인이 자신의 한계라고 느껴지는 시적탈출구를 이번 근작시들에서 절충과 이률배반적인 모험으로 새롭게 헤쳐나가가려 하는 그런 과감한 행보가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일찍 을 보여주고저 철학가이며 정치가였던 폴 미셀 푸코는 전생을 끊임없는 노력을 통하여 결국 이라는 온갖 비난과 모욕까지 다 들어가면서도 끝까지 아주 겸손한 하나의 사고방식만을 우리들에게 제시하여 준적이 있다. 그러한 장인정신이 돋보이는 까닭은 오늘도 개혁의 행보는 매 한발자국마저 조심스럽다는 그런 이야기로도 될수 있을것 같다 . 예술의 소외는 억압이 아닌 승화라고 말한 학자가 있다. 이렇듯 한영남시인의 새로운 행보, 즉 새로운 시도는 지속적일지 아니면 계획적인 잠시적 은페일지는 우리모두 조금 더 시간을 두고 조심스레 지켜보아야 할것만 같다.
지성의 씨앗, 그리고 균열의 사고속에서 건져보는 자연과 삶의 찡한 감동
는 말이 있다. 비범한 자질은 시인으로 하여금 몸담그고 있는 사회나 어떤 현상에대하여 가끔 강렬하게 반응하게 하고 또한 기대 이상으로 자신만의 새로운 세계를 꿈꾸게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공상들은 시인으로 하여금 불쑥 사회로부터 완전히 소외시되는듯한 그러한 고통을 안겨주기도 하며 가끔 병적인 상태로 몰아가기도 한다. 여기에서부터 해방되기 위하여 시인들은 작품을 창조하고 산고(产苦)하는 세월을 보내야 하는 그런 운명이기도 하다. 예술분야에서, 특히 언어예술부문에서 시인의 경우 그런 비극적인 음영은 더욱 짙으며, 그러한 비극의 중심에는 항상 광기의 그림자가 손을 드리우고 있다…p 브르노의 말 한마디를 개조하여 인용해본다. 한영남시인의 이번 근작시를 살펴보면 한마디로 이라고 하여도 아마도 무방할것 같다. 조금 더 진부하게 첨부되였고 나름대로 더욱 깊이 있게 느껴지는것은 삶과 자연속의 새로운 마찰속에서 느껴지는 시인의 그 애절하고도 가슴이 찡한 감동, 즉 뼈에 맺혀 아픔으로 여린 가슴에 되 돌아 울려오는 그런 공명감이 더욱 커진듯한 느낌이 든다. ㅡ 그럼 아래에 잔잔한 서정을 배경으로 하여 인문적 휴머니즘품격을 고차원으로 승화시켜 놓은 한영남시인의 시 몇수를 우리 함께 더 살펴보고 가도록 하자
오월
오후
해가 줄 볕 다 주며
느릿느릿 서산가 머물고
멀리
저리
하느작이는 풀잎들은
연초록 아니라도 좋으련만
하필
하얀
구름들이 또
푸른 하늘 걸려 시름없고
휘이
휘이
바람 부드런 손
내 땀이마 쓸어주는데
이일
저일
고향 옛일들 떠올라
울어버리고 싶네
전문이다
이 시의 제1련에서 텍스트의 모티브로 추정이 되는 /오월/오후/해가 줄 볕 다 주며/느릿느릿 서산가 머물고/는 재치있고 간결하게 설정한 환경묘사가 남달리 돋보이며 이 시적화자로 대두된 이 시의 잔잔한 흐름을 따라가노라면 제2련에서 별로 큰 소망도 아닌 어쩌면 너무나도 소박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하느작이는 풀잎은/연초록이 아니여도 좋으련만/에서는 여리고 깨끗한 시인의 고백이 읽는이들의 가슴을 뭉클하게도 하며 특히 3련에서 /하필/ 하얀/ 구름들이 또/푸른 하늘에 걸려 시름없고/에서 은 잠시 전략적으로 굴절되여 있고 /구름들이 또/푸른 하늘에 걸려 시름없고/로 다시금 이미지를 집중시키였다가 마침내 제 4련에서는 벌써 눈물이 보이기 시작하는 /휘이/휘이/바람 부드러운 손/내 땀이마 쓸어주는데/로 단단히 초점을 모아놓고서 마침내 제5련에서 /이일/저일/고향 옛일들 떠올라/울어버리고 싶네/로 을 극대화시킨다. 모두 알다싶이 제목자체가 이고보니 시적화자가 견인해낸 은 시인을 울리기에 너무나도 충족하며 더불어 읽는이들의 가슴까지도 툭툭 건드려 공명감을 생성해가는 그런 효과음이 큰것 같다. 부킹된 휴먼드라마는 아니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군더더기 하나없이 간결하면서도 운치가 철철 넘쳐 흐르는 이 시는 아마도 필자로써는 오랜간만에 읽어보는 좋은 시라는 생각이 든다. 1967년도생인 한영남시인은 양띠, 필자보다는 한살 이상 , 한영남시인에게는 아마도 남들이 아직 알지못하고 있는ㅡ 어쩌면 시인 혼자 평생을 울어도 결국 다 울어버릴수 없는 그런 가슴 아픈 옛이야기들과 아직도 굴벰이 죽죽하도록 아리고 쓰린 상처가 고스란히 남아있는듯한 그런 느낌이 들기도 한다.
어느날 흐르는 눈물이 말라
내 앞에 놓인 접시에
한줌의 소금으로 고스란히 놓인다면
아직은 짠맛 모르는 당신에게 공짜로 드리겠습니다
상처의 이름뿐이 아닌
사랑의 이름뿐이 아닌
긴 세월 그 이름으로 모두 드리겠습니다
살아가면서 이제 더는 바보처럼 울지 아니하도록
혼자 아프지도 아니하도록
두 손 모아 매일 기도하며
내 앞에 놓인 소금 한접시
내 눈물이 말라비틀어진 소금 한접시를 당신께 그냥 드리겠습니다
하얀 소금으로 당신곁에 남겠습니다
전문이다
눈물이 말라 한접시의 소금을 완성하려면 얼마만큼의 시간이 소요되고 또한 얼마만큼 애간장을 태워야 할지 필자로서는 알수조차 없지만 그렇게 완성이 된 눈물의 소금 한접시를 시인은 결국 /아직은 짠맛 모르는 당신에게 꽁짜로 그냥 드리겠다/고 고백한다. 특히 5행과 11행사이에서 /상처의 이름뿐이 아닌/사랑의 이름뿐이 아닌/긴 세월 그 이름으로 모두 드리겠습니다/로 재강조하여놓고 /살아가면서 더는 바보처럼 울지 아니하도록/환자처럼 /아프지도 아니하도록/두 손 모아 기도하며/내앞에 놓인 소금 한접시/를 /결속구인 제일 마지막 두련에서 /내 눈물이 말라비틀어진 소금 한접시를 당신께 다 드리겠습니다/하얀 소금으로 그냥 당신곁에 남겠습니다/고담담히 마무리한다. 여기서 하얀 소금은 말그대로 쓰나미처럼 하얗게 가슴에 다가와 읽는이의 가슴마저 너무 쓰리고 아프게 한다. 한수의 시에 왜 이처럼 많은 독자들이 웃고 또 우는지 한영남시인의 이번 시를 읽으면서 조금 알것도 같다는 그런 느낌이 들기도 한다.
가면
세상 열리나
오면
세상 닫히나
열흘
열사흘
한해
두세해
맨날
그리다
행여
만나도
말도
못하고
손도
못잡고
그냥
그리움밖에
끝내
서글픔밖에
가면
세상 깨지나
오면
세상 터지나
전문이다
간다고 허망 열릴 세상이 아니고 온다고 쉽게 닫힐 그런 세상이 아님을 번연히 알면서도 시인의 각도로 살펴보는 허무와 공허의 불안한 요소들, 즉 가상적인 현실속에서 어찌보면 어젯날 이룰수 없었던 열련과의 뜻깊은 상봉, 혹은 그러한 갈구를 특히 3,4,5련에서 /맨날/그리다/행여/만나도/말도/ 못하고/손도/못잡고/그냥 /그리움밖에/끝내/서긑픔밖에/에서 시인의 특수한 애증표달을 표면만이 아닌 내면속의 진지한 감정으로 곧바로 승화시켜놓고서 제목자체에서 이미 독자들의 머리속에 미리 각인시켜놓은 을 자연스럽게 떠올려가면서 결국 /세상이 깨지나/세상이 터지나/로 이미지 총집합을 시도한듯한 그런 느낌이 들기도 한다.
마무리하면서
력사는 련속적이면서 동시에 불련속적인 특성을 띤다 . 이번 한영남시인의 근작시중에는 이외에도 > 등등 여러수의 시가 더 있지만 시간상 관계로 여기서 필자는 더 언급하지 않겠다. 이상 몇수의 시에서 살펴볼수 있는바 한영남시인의 근작시는 어쩌면 모험을 시도로 점층법과 겹쳐그리기 기법으로 완성 된것이 많으며 대부분 시들이 또한 한폭의 작은 우주를 손바닥우에 올려놓고 오래도록 음미와 감상의 긴 여운으로 길게 남기려하는 시인의 대담한 시도가 엿보이기도 한다. 더불어 오래도록 지속되여 온 구조주의적 모더니즘 사색에서 새롭게 탈출해보려는 시인의 굵직한 몸부림을 읽을수가 있어 무척 고무적이라는 그런 생각이 든다. 그럼 우리 다 함께 여기서 모더니즘 특성과 그 일곱가지 개념을 조심스럽게 잠깐 살펴보도록 하자.
첫째, 모더니즘은 도시주의를 지향한다. 보들레르의 파리, 조이스의 더블린, 엘리어트의 런던, 도스패소스의 뉴욕 등등은 대체로 모든 모더니스트들은 자연이 아닌 도시적 삶의 문제를 형상화로 하였다.
둘째, 모더니즘은 공업기술주의를 지향한다. 기술세계란 도시적 삶의 토대라고도 할수 있다. 특히 립체파, 미래파, 다다이스트들이 무엇보다 강조한것이 기술성이다.
셋째, 모더니즘은 기술세계가 보여주는 그런 특성과 관계가 있는 비인간화를 지향한다. 비인간화는 오르테가 익가세트에 의해 현대예술의 기본개념으로 리론화된적이 있다.
넷째, 모더니즘은 원시주의를 지향한다. 원시주의란 추상화 된 삶, 현대시의 기본원리로 나타나는 은유나 상징 등도 이런 맥락우에 서 있다.
다섯째, 모더니즘은 에로티시즘을 지향한다. 따라서 모더니스트들의 과제는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갈등을 해결함에 있었다
여섯째, 모더니즘에서 읽을수 있는것으로는 반도덕성을 들수 있다. 이른바 도덕률을 페기하는것은 현대미학이 삶의 도덕적 기초의 와해에서 출발하기때문이다.
일곱째, 모더니즘은 실험주의를 지향한다. 시간적 질서에 대한 회의, 따라서 모든 시간성을 공간으로 인식하려는 동시성의 개념이기도 하다.
시는 엄격히 말해서 독백의 양식에 속한다. 따라서 시에 대화의 양식을 활용하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필자로서는 궁금하기도 하다. 시에서 이중적구조법과 다성적 언어를 사용하면 곧바로 전통적인 시 쟝르의 해체라는 문제와 우리는 맞닥뜨리게 된다.아무튼 한영남시인의 실험적이고 모험적인 이번 시적 행로가 좋은 결실을 맺기를 두 손 모아 기원해 본다.
심양에서 2014년4월26일
发表于黑龙江新闻 7月11日第2版
전체 [ 9 ]
9 작성자 : 철리
날자:2014-06-10 09:58:33
창렬선생님의 진정 어린 에 감사합니다
님이 거론하신 시인들, 특히는 중년시인들, 조선족시단에서는 다 이름 있는 분들이 맞습니다, 저도 그들의 재능을 인정합니다.
사실 저는 근년에 나이 들어 시공부를 다시 좀 하면서도 문학에 정진하지는 못하고 취미로 좀 써보는 시애호자로서, 그저 그런 수준에 누구를 어떻다 말할 자격도 없으며 남들이 다 보는 댓글에다 남을 내리깎는 그런 못난 짓은 안합니다.
아무리 익명으로 쓰는 댓글이지만 누구를 마음 아프게 비하하거나 헐뜯고 인신공격하는 못된 짓을 말입니다...
나중에 허선생님에게 꼭 련계를 하겠습니다. 건강하시고 좋은 하루 되세요
8 작성자 : 허창렬
날자:2014-06-09 13:04:07
두분께먼저감사하다는말씀올려야할것같습니다.제가보건대중국조선족제1대로시인들로는(해방전을포함하지않음)아마도김성휘,조룡남,리상각,리삼월등이런시인분들인것같습니다.특정된시대의아주특징적인오묘한시들을써오신분들ㅡ허나개혁개방과더불어제일먼저개혁에앞장섰던분들로는김정호한춘최룡관시인님-이들중에서특히최룡관시인님은을완성시켜적잖은센세이숀을불러일으켰으며개혁파거장으로우뚝자리매김을한것같습니다.제2대시인(여기서는 주로 개혁개방이후 가장 영향력이 있는 시인들을 말하려 합니다)들로는 아마도 석화, 김학송, 리임원, 리성비 등등 시인들인것 같습니다 . 석화시인의 감학송시인의 그리고 리임원시인의 리성비시인의 이 이 모든것을 충분히 설명하여 준다고 생각합니다. 제3대 시인들로는 김영건 , 김승종, 한영남, 조광명, 등등 이런 시인들이 아닐가 생각됩니다. 김영건시인의 경우 시를 아우르는 령역이 넓고 거창하며 김승종시인의 경우 실험적인 모험정신이 누구보다 돋보이며 한영남시인의 경우 한과 상처문학을 계승 발전시켜 대표작이 제일 많으며 조광명시인의 경우 불교문화를 시속에 접목시켜 시적인 령역을 넓혔다고 할가요 . 허나 이들의 근작시들을 살펴보면 한결같이 한계가 느껴집니다. 왜 그럴가요? 그 답안을 저는 김철호시인의 포스트모더니즘 접목에서 찾을수 있을것 같다고 확신합니다. 즉 하이퍼텍스트ㅡ아직 허다한 학자, 시인들이 하이퍼시하면 반대하는 양상이 있는듯 하신데 그럼 여기서 노벨상 수상자인 토마스 트란스 트뢰메르의 와 조향의 를 잠간 살펴 봅시다
기상도
시월 바다가 신기루 등지느러미를 달고
차갑게 반짝인다.
아무것도 요트경기의
백색 현기증을 기억하지 않는다
어슴프레한 호박빛이 마을위를 비추고
온갖 음향들이 천천히 날아다닌다
개가 짖는 소리는 정원위의
대기중에 그려진 상형문자다
정원에는 노란 과일이 나무를
바보 만들며 제 멋대로 떨어진다.
바다의 층계
낡은 아코오뎡은 대화를 관뒀습니다
--여보세요!
왜 그러십니까?
모래밭에서
手话机
녀인의 허벅지
낚지 까만 눈동자
비둘기와 소녀들의 랑데부우
그우에 손을 흔드는 하얀 기폭들
나비는
기중기의
허리끝에서
푸른 바다의 층계를 헤아린다
이것이 시가 아니라면 토마스 트란스 트뢰메르가 어떻게 노벨상까지 받았을가요 ? 이번 평론에서 저는 한영남시인의 모험정신을 긍정적으로 보았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평론중에 고 하였고 은 좋다 나쁘다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합시다. 여기 댓글에서는 여러모로 이야기하기가 불편한듯 합니다.> 저의 qq입니다. 앞으로 우편함에 두 분의 고귀한 의견 엽서로 보내주시면 더욱 고맙겠습니다. 그때 가서 저의 전화번호도 알려 드리겠습니다. 선배들로서ㅡ 형다운 형들로서ㅡ 따끔한 귀띔을 자주 부탁 드리겠습니다. 그럼 내내 행복하시고 오래오래 건필하세요 심양에서 허창렬 올림
7 작성자 : 힘내세요
날자:2014-06-08 13:27:49
6번님의 말이 좋은 같습니다. 우리 의 견해를 동감해주니 기분 또한 좋습니다.허창렬님은 아주 대바르고 정직한 면이 있어보여서 호감이 많습니다.보건대 허창렬님은 시를 아주 사랑하고 시에 아주 집착하고 있는 같습니다. 연변에 이런 분 아주 드물지요. 두루두루 보니 시에 집착하는 분을 헤여보니 거퍼 10명두 되나마나합니다.어떤 분들을 시에 집착한다고 하는가 하면 십몇년 수십년 하루도 빠짐없이 시만 생각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입니다.이런 분들을 제가 직접목격해봤으니깐요 ㅎㅎㅎ .허창렬님은 앞으로 위대한 시인은 되지 못할지라도 저명한 시인정도는 될같습니다(절대 풍자가 아닙니다).왜냐하면 마음 바르고 시에 아주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시에 끈질긴노력에 집착하면 이제 아무때건 하느님의 보살핌을 꼭 받을겁니다.허창렬님! 발전하려면 고집은 금물이란걸 미리 귀띔해주고 싶습니다(물론 님은 고집부릴사람 같지 않구요 ㅎㅎㅎ)힘을 내십시오!
6 작성자 : 철리
날자:2014-06-08 09:40:53
저 역시 조글로 글까페에서 허창렬선생님의 글을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시에 대한 연구가 깊고 사람이 대바르고 베짱이 있어보여 좋은 인상을 갖고 있습니다(저와는 일면식도 없는 분이지만)
아래 분과, 두분의 시에 대한 토론분위기가 좋습니다
저는 그 누구와 시에 대한 쟁론에는 참여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나의 관점을 말할뿐.
저는 전통시와 현대시 그 중간을 좋아합니다.
그 중간을 일컬어 문학적으로 무어라 명명하는지는 몰라도. (어느 분이 알려주시죠)
그래서 두분의 주장에 다 수긍이 갑니다.
저는 너무 난해한 시는 거부합니다.
시는 그래도 읽고서 그 뜻을 감지할수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하지만 최룡관선생의 사람신체에 대한 시를 읽고는 탄복하였습니다...)
저는 철학이 깔려있는 시를 좋아합니다.
시속에 철리가 있다는 말 역시 시적발견이라는 말과도 통하겠지요
그래서 저 역시 리삼월의 시를 좋아합니다.
손 쉽게 리삼월의 단시 한수를 올립니다.
그녀는 라체조각상/ 말썽 많은 세상/
호수가에 큰 엉덩이 내놓고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녀는 머리가 있었지만/ 얼굴은 없었다.
5 작성자 : ㅎㅎㅎ
날자:2014-06-08 06:48:06
리상각선생님의 시 리삼월선생님의 시 등 좋은 시들이 많다봅니다. 그리고 리욱의 시 등 저는 이런 분들의 시를 좋아합니다.
발견이란 한마디로 일반사람들이 미처생각해내지 못한 생각을 해내는것이 발견이 아니겠습니까?
일반사람들이 다 아는 상식적인 생각을 시로 적는다면 시를 쓰나마나합니다. 그리고 발견없이 시를 쓰는 이들의 대채적인 공통점은 자기시를 암송하지못한다는것입니다.심지어 자기가 어떤 구절을 어떻게 되여 썼던지 도무지 기억도 안되는이들이 수두룩합니다. 이상각선생님은 저기의 수많은 시들을 왕왕 암송내여 읊습니다.그래서 탄복하는겁니다.발견도 없이 황당하게 쓰는 이 뚱단지말로 홍두깨를 내미는 이 몽롱하게만 쓰는이 이런분들께 한번 시험해보시라요 , 자기시를 암송할수 있는지 ? 남의 시라면 더더욱 암송하지도 않거니와 기억도 안 될겁니다.그러길래 발견이 중요하거니와 발견이란 신성시해보이기 합니다. 발견은 하늘이 주시는 겁니다.우리 시인들 발견없이 시쓰기에 습관된 이들 불알떼여놓고 장가드는격이 아닐가요?ㅎㅎㅎ
4 작성자 : 허창렬
날자:2014-06-07 14:02:59
선생님이이야기하시려는뜻은알만합니다만무엇이이고무엇이이 있고 을 넘어서려 하는 시인지 무척 궁금하고 감상하고 싶어집니다. 그럼 부탁 드릴게요. 기다리겠습니다 허창렬 올림
3 작성자 : 태산이 험난해도
날자:2014-06-06 21:17:47
우의 시들을 비롯해서 한해에 조선족시인들이 발표하는 시들을 죽 보십시오.거이 99%가 발견이 없거나 발견이 미미한 작품들입니다.우리 조선족시인들의 앞에는 발견이란 이런 태산이 앞을 가로 막고있습니다.그 태산이 험난해도 톺아 넘아가야 합니다. 넘어가자면 몇년 혹은 몇십년 혹은 한평생 의 시간이 걸릴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허다한 시인들은 그 태산을 넘기 싫으니깐 에돌아 갑니다.에돌아 간다는것이 왕왕 왜지밭으로 가기가 일쑤입니다. 례하면 황당한 비유라든가 몽롱한 표현들이거나 아니면 뚱단지같은 말로 불쑥 홍두깨를 내민다든가 하여튼 벼라별 지랄을 다 쓰고 있습니다.그래서 읽어보면 기억이 안되고 읽고난후엔 마음이 개운하지도 않고 오히려 왁작 스트레스가 오기까지 합니다.시를 써서 독자들을 흥분시키기는 커녕 작자자신마저도 슴슴해하는 시는 아예 쓰지 않는게 좋을 같습니다.
2 작성자 : 허창렬
날자:2014-06-06 15:57:44
선생님의날카로운지적에감사드립니다.이평론은한달전에조글로창작마당에올렸다가삭제했던글입니다.해빛도채못본채그냥방구석에쌓아두기엔너무아까워한영남시인의동의를얻은후다시조글로에올렸음을이야기하고싶습니다.오늘은울고싶어라마른눈물한접시특히마른눈물한접시는조금만더섬세한수개가있었더라면좋은시였으리라생각합니다.저녁황혼인생은모험적인것같습니다.특히저녁황혼의경우전통시각도에서살펴보면완성된작품이라고하기에는거리가있을것같습니다.허나파편문체특징으로재조명해볼때가능한시도라고하여도무방하지않을가요?어쩌면계륵일지도모를일이지만ㅡ매번시인들이내여놓는매수의시마다모두성공작일수는없다고봅니다.한마디로발표를념두에두지않은철저한실험적인시ㅡ한영남시인은제가좋아하는중청년시인입니다.솔직히선생님의허심탄회한조언을듣고싶습니다.그럼내내건강하시고항상건필하세요허창렬올림
1 작성자 : 평론에 대하여
날자:2014-06-05 19:45:43
우선 허창렬님의 끈질긴 시 탐구정신에 탐복합니다.우에서 여러 시들을 평했는데 필자가 보건대 잘 된작품이라 말하기엔 좀 그렇습니다. 시란 몇십초사이에 읽어보고 그 짧은 순간에 그 형상이 독자의 머리속에 남아야합니다. 이러길래 시를 성곡시키는데 어려움이 있다는겁니다.허창렬님한테 묻겠지만 우의 시들을 보자마자 돌아서서 암송은 말고 그 내용이 도무지 앚혀지지않은 형상으로 기억할수 있는지요? 그저 수수한 사유에 머물면 그것이 관습니돼버려서 돌파적사유를 하지 못한다봅니다.짧은시의 단점장점을 보면 단점이란 바로 꼬리대가리없은 시로 되기 십상입니다.시의 성공의 여부는 그 시가 독자더러 기억하지 말래도 자연히 기억되게하는데 그 성곡의 비결이 있습니다. 우의 시들은 그 셩지에 미치는지? 우주 크나큰 의문부호를 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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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틀거리는 욕망 꿈틀거리는 몸짓 깨여나는 심상
한영남 근작시에서 살펴본 미래 지향적인 새로운 탐구정신
[ 평론 ] 허인
이니셜 내가 본 한영남ㅡ해학의 달인 통속언어창출의 놀라운 괴재
6월, 파겁을 시작한 뭇꽃이 앞 다투어 조잔한 열매를 두 손에 받아들고 어느새 초하(初夏)의 문턱- 높은 담너머로 고개를 기웃거리는 계절, 필자는 며칠전 할빈에서 이메일로 보내온 한영남시인의 근작시 10여수를 앞에 놓고 흥분으로 읽는다. 범상찮은 조짐 ㅡ 사실주의를 기초로 모더니즘의 싱싱한 점토우에 새롭게 포스트모더니즘을 접목시켜 탈변을 목적으로 하려는 굵직한 몸부림 ㅡ 어찌보면 너무나도 익숙하고도 생소한 비유(比拟)와 은유(隐喻)를 단순히 형식적인 모험만이 아닌 형이상학적으로 변이ㅡ 변형시켜 이미지와 이미지사이를 직결로 링크, 꿀맛나는 이미지확장(扩张)을 하이브리드로 완성해보려 하는 대담한 착상, 그리고 언제봐도 심성이 항상 맑고 깨끗한 ㅡ 오직 한영남시인만이 완성시킬수 있는 독특한 시적인 질서와 그러한 조밀한 언어구조속에서 항상 가슴 따뜻하게 느낄수 있는 풋풋한 휴머니즘과 인문정신을 ㅡ추상적, 계기적, 구체적, 병치적ㅡ즉 리성보다는 본능, 질서보다는 충동, 의식보다는 무의식의 더욱 폭 넓은 세계로 이어가려 하는 과감한 도전ㅡ 한마디로 꿈틀거리는 욕망, 꿈틀거리는 맥박, 깨여나는 심상(心象)을 함께 읽을수가 있어 무척 고무적이라고 총괄하고 싶다.
길림성 안도현 태생인 한영남시인은 일찍 초, 고중시절부터 벌써 신문잡지에 주옥같은 시작품들을 튝속 발표, 현재까지 '갈대는 저렇게 싱거워가지고', '환절기에 건강을 주문받습니다', ‘굳이 네가 불러주지 않아도 수선화는 꽃으로 아름답다’, '무깍지동네', '우리 서로 얘기 좀 합시다', '보리밭은 바람 아니더라도 설레이는것을' 등 시, 수필, 소설, 평론 등을 무려 300여만자 발표, 연변일보 제일제당상, 두만강여울소리 시탐구상, 연변문학 윤동주문학상, 중국조선족동시탐구상, 중국조선족수필상, 도라지장락주문학상, 연변일보 해란강문학상 다수 수상, 2006년 시집 를 출간ㅡ현재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에서 편집으로 사업중인것으로 알고 있다 . 필자가 알건대 한영남시인이 오늘날 개성이 뚜렷하고 유망한 문인으로 성장하기까지는 적잖은 아픔과 홀로서기의 나날이 있었던줄로 안다. 시를 써야하는 백공한번째 리유에서 한영남시인은 철없었던 문학도시절 량친부모를 잃고 억이 막혀 혼자 쿨쩍일 힘마저 없었을때 가슴 따뜻한 긍정적인 말 한마디 하여준 고마운 선배문인과 인정에 너무나도 시린 손발을 늘쌍 친동기처럼 어루만져주고 다독여주었던 고마운 동우시인들이 있었기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늦게야 늙은 총각딱지를 마침내 떼고 늦장가 들어 득남까지 한줄로 알고 있는데 여기서 늦게나마 행복의 메신저로 축하의 박수를 열심히 보내드린다.
문여기인(文如其人)이라는 말이 있다. 즉 는 뜻 ㅡ어쩌면 요즘처럼 독지층이 얇아져 가는 조선족 시단에서 읽어볼만한 시가 없기로는 시인이나 독자나 매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시기에 한영남시인의 이번 해학, 독백, 역설을 위주로 포스트모더니즘을 접목시킨 근작시들은 독자들로 하여금 오랜간만에 가슴 설레도록 할것이며 또한 오래도록 긴 여운을 가슴속에 깊이 아로새기게 되리라 필자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 그럼 아래에 우리 함께 한영남시인의 이번에 보내온 주옥같은 근작시 12수를 차례대로 살펴보기로 하자
질서와 의식ㅡ그리고 무의식속에서 이끌어낸 해학의 즐거운 잔치 한 마당
시의 혁신은 곧 사유의 혁신이며 또한 언어의 혁신이기도 하다. 시인은 시를 쓸때 우선 먼저 미학적인 고려를 하여야 하며 또한 감수성의 노예가 되지 말아야 한다. 한마디로 누구에게나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말이라 해야겠다 . 일찍 리요다르는 총체성에 대한 갈망이 이 시대에 오면 곧 하나의 환상이거나 지적인 테러에 지나지 않는다고도 말한적이 있다. 총체성에 대한 갈망이란 현실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들의 모순을 하나의 지적인 체계로 종합하려는 그러한 태도를 말하는것이다.그런 갈망이 환상이거나 테러에 지나지 않는다고 함은 결국 모든 종합주의적 사고가 허구라는 사실이기때문이다. 이렇듯 탈구성적인 리념은 형식주의적인 이데올리기의 억압에 대한 미적인 저항이며 또한 구성이 아니라 충동을 강조하는 태도이기도 하다. 구성의 파괴가 아닌 구성속의 자연 분만된 여러가지 복잡성, 그리고 얽히고 섥힌 여러가지 겹치기 구조, 이런 태도는 시 ,소설ㅡ 더 나아가서는 세계가 하나의 구속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인식론을 전제로 하기도 한다. 특히 포스트모더니즘 시대, 해체시의 경우 주체적인 생산을 위해서는 탈구성 혹은 해체 개념에 대한 정확한 리해가 따라가야 한다고 생각된다. 그럼 여기서 우리 함께 한영남시인의 이번 근작시 중ㅡ 질서와 해학의 즐거운 잔치마당중에서도 수작으로 꼽을 수 있는 부터 다 함께 잠깐 살펴보도록 하자
발가락 하나 감기 걸렸소
머리카락 한오리 발기불능증이오
귀지 한숟가락 당뇨병이라오
눈썹 한 대 좌골신경통을 앓는다오
이빨 한 대 정신분렬증을 치르오
코털 한 대 페암인 듯 하오
손톱 하나 에이즈와 사귀었다오
배꼽 절반이 알콜중독쯤이라오
자지 가운데가 중풍을 맞았다오
겨드랑이털 서너이랑이 백전풍과 담판중이라오
발가락사이 때 한줌이 배 두드리며 만포식이라오
이상 간추린 소식이였습니다
거울속의 나는 싱싱하기만 했다
전문이다.
시는 구조적 통일성보다 오히려 단편적인 앙상블로 인식되기도 한다. 앞서 평론에서도 이미 여러번 말한적이 있지만 시는 엄격히 따지면 독백의 양식에 속한다. 을 읽고나면 시인의 놀라운 재치에 저도몰래 즐거운 탄성이 터져 나오는것을 어쩔수 없다 . 즉 인체의 각 기관들로 온갖 병적인 현상들을 직결시켜 완성시킨 이 한 수의 시는 읽을수록 쿡쿡 저도몰래 웃음이 나오기도 하고 또한 시인의 기이한 발상과 착상이 새롭고 신선한 충격으로 와닿아 그야말로 가관이라 해야 할것 같다. 꼭마치 라캉식 행동, 칸트식 발언 , 미셜 푸코식 사유인것처럼 ㅡ/발가락과 감기/, 머리카락 한오리와 발기불능증/, 귀지 한숟가락과 당뇨병/, /눈썹 한대와 좌골신경통/, 이빨 한대와 정신분렬증/, 코털 한대와 페암/, 손톱 하나와 에이즈/, 배꼽 절반이 올콜중독/, 자지 가운데와 중풍/, /겨드랑이털 서너이랑과 백전풍/, 발가락 사이 때 한줌과 만포식/은 어찌보면 단순하면서도 시인의 의도적인 변이, 변형을 통하여 우리 이 사회의 여러가지 병페적인 현상들을 아이러니컬하게 해학적으로ㅡ 즉 유머 있게 풍자 비판하고 있으며 더우기 시인은 줄곧 작자가 아닌 편집자의 립장에 서서 어쩌면 앵커다운 앵커가 되여 차분한 목소리로 뉴스를 진행하듯이 패러독스를 펼쳐가고 있지만 그 효과음은 분명 공명이라는 전환 리듬을 타고서 읽는 이의 가슴에서 가슴으로 전파와도 같이 ㅡ둥둥 웅굴진 북소리가 되여 오래도록 메아리치고 있는듯 싶다. 특히 제일 마지막 련ㅡ /이상 간추린소식이였습니다/ 거울속의 나는 싱싱하기만 했다/에서 살펴볼수 있듯이 시인은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결코 는 그런 병적인 현상에는 쉽사리 끌려가지 않으리라는 강한 의지를 비추어 보여주기도 하면서 참된 인간의 성실한 모습을 조심스레 독자들에게 펼쳐 보이는듯 싶다. 필자는 웬만하면 누구를 함부로 칭찬하는 스타일이 아닌데 여기서는 꼭 한마디 해야 겠다 . 한영남시인은 우리 이 시대의 해학의 달인임이 틀림없으며 통속언어창출의 괴재(怪才)임이 분명하다. 여기서 귀지, 자지, 그리고 /겨드랑이털 서너이랑이 백전풍과 담판중이라오/라는 표현은 지방적인 방언색채마저 다분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더없이 친근감을 느끼게 하며 또한 이라는 익숙하고 지성적인 간결한 사유를 통하여 독자들은 이 시의 매력에 저도몰래 푹 빠지게도 된다. 그럼 아래에 해학의 또다른 작품을 살펴보기로 하자
개구리 주저앉는 뜻은
멀리 뛰기 위한데 있다고 하오
개구리도 너무 오래 주저앉아있으면
오금 저려 더 멀리 뛰지 못한다 하오
그런건 아무래도 좋소
뛰기 위한 개구리는
눈은 없어도 좋소
다리가 부러져도 좋소
허리가 부러져도 좋소
몸뚱이가 부러져도 좋소
밸은 없는게 낫소
뛰기로 작정한 놈 뛰기만 하면 그만이오
배꼽은 뛰기에 차라리 거추장스럽다 하오
허리 부러진 개구리는
마침내 뛰지 않아도 좋소
-이상의 ‘오감도’에 부쳐ㅡ전문이다.
의인화 수법으로 씌여진 이 시속의 주인공, 즉 ㅡ개구리는 멀리 뛰기 위하여 의 형상으로부터 시작하여 결국 안일한 삶속의 리유ㅡ 즉 무승자박(无绳自搏) 이라는 단단한 포승에 꽁꽁 묶이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인간상을 마치 두눈에 생생히 보이는듯이 그려놓은듯 싶다 . 제1련에서부터 력설적인 어투로 시작된 이 시는 거의 아무런 휘핑도 없이 오직 헤드라인과 초감각적으로 /개구리 주저앉는 뜻은 /멀리 뛰기 위한데 있다고 하오/개구리도 너무 오래 주저앉아있으면 /오금 저려 더 멀리 뛰지 못한다 하오/로 최저한도의 상황제시를 하여놓고서 다시금 제2련에서 /그런건 아무래도 좋소 /뛰기 위한 개구리는/눈은 없어도 좋소…/로 >, , 마저 부려져도 무작정 뛰여야만 하는 강한 충동을 야유적으로 고조시켜놓은듯 싶으며 특히 제3련에서는 아예/밸은 없는게 낫소/뛰기로 작정한 놈 뛰기만 하면 그만이오/배꼽은 뛰기에 차라리 거추장스럽다 하오/로 한술 더 푸욱 떠서 이 없고 이 없어야 어쩌면 살아가는데 적응할수도 있으며 결국 제 4련에서는 /허리 부러진 개구리는 /마침내 뛰지 않아도 좋소/로 깔끔하게 마무리한다. 부제에서부터 이미 살펴 볼수 있다싶이 편지이고보니 아무리 어찌해 보아도 넘을수 없는 장벽같은것을 마주선 인간의 여러가지 형태를 적라라하게 풍자적으로 그려놓은듯 싶다. 그럼 아래에 포스트모더니즘을 접목하여 완성시킨 몇수의 시를 더 살펴보기로 하자
별이 차마 섬뜩했다
걸음마 익히지 못한 포플러
다행히 속으로 울 권리 있었고
언제나 다정한 얼음조각
팔불출이어서 싱거웁다
깊은 재채기는
차라리 갈대의 웃음파편
끝내 누가 고운 비자루로 쓸어놓은
서슬푸른 밤하늘이
조용히 발정한다
/별이 차마 섬뜩했다/로 멋지게 캐릭터를 시작한 이 시에서 필자는 마치 파트 타임이 아닌 터닝 포인트, 어쩌면 긴 타월로 철철 흐르고 있는 식은 땀을 홀로 게면쩍게 슬쩍슬쩍 딲고 있는 이상하게 관심이 쏠리는 별 하나를 만나게 된다. 그 별이 시인에게 주는 섬뜩함이란 도대체 무엇이였을가ㅡ시제가 인것만큼 시인이 말하는 별이 도대체 무엇일가 하는 핀트는 독자 나름대로 설정하여도 무방하다고 생각이 된다. 특히 제2련 /걸음마 익히지 못한 포플러/에서 포플러ㅡ 즉 백양나무는 모두 다 잘 알다싶이 포플러나무는 이 세상에 태여난 그 순간부터 오직 한 자리에만 서 있어야 할 운명임이 분명한데도 시인은 여기서 /걸음마 익히지 못하였다/고 재치있게 표현하여 인생의 허다한 막무가내와 그러한 속박에 저항해보려는 역반심리, 즉 어디론가다 툭툭 털어내치고 훨훨 떠나버리고 싶어지는 그러한 강한 충동, 즉 된 령혼의 가슴 시린 간절한 바램을 은유적으로 표현한듯 하며 그 다음 자연스럽게 줄 지어 다가서는 /다행히 속으로 울 권리/는 또한 과 이라는 재밌고도 어깨 단단한 이지미를 멋스럽게 견인해 내여 단 한마디 / 싱거웁다/로 현실에 대한 불안, 혹은 그러한 불만정서를 담담하게 토로하고 있는듯 하며 특히 제6련에서 /깊은 재채기/는 시인의 세심한 배려와 지성적인 사유끝에 변이, 변형을 통하여 /차라리 갈대의 웃음파편/이라는 너무나도 궁색하고 허무한 결과ㅡ 즉 자다가도 다시금 벌떡 일어나 초불을 켜들고 찾아 읽고 싶어지도록 간결함의 극치로 보여주고 있으며 또한 그러한 결과마저도 시린 가슴에 포옹으로 끌어안으려는 시인의 각근한 태도에 읽는 이마저 가슴이 뭉클해지기도 하며 특히 제 8련에서 10련까지 /끝내 누군가가 고운 비자루로 쓸어놓은/서슬푸른 하늘이/조용히 발정한다/는 그물에 걸지리 않는 바람처럼 리상적인 자유와 지향을 향하여 달려가려 하는 끊임없는 추구와 변함없는 생명운동을 지성적인 사유를 통하여 실천해보려는 시인의 소박하고도 간절한 소망을 암시해주는듯 싶다. 여기서 걸음마 익히지 못한 포플러, 다정한 얼음쪼각, 갈대의 웃음파편은 폭력적조합을 이루면서도 전혀 이상하거나 낯선 감이 없어 한영남시인이 언어련금술을 얼마나 자유자재로 잘 다루고 있는지를 아낌없이 잘 보여주는 좋은 증거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분명한 질서와 구조속에서 생명운동이 진행중이다. 그럼 아래에 수학 매트르식이 아닌 속사로 생명구조와 분명한 질서속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생명운동을 마치 눈앞에 생생히 보이는듯이 그려놓은 을 잠간 함께 살펴보기로 하자
마당에 전차 버스 트럭 차들이 서있다
곤하게 전차 버스 트럭 차들이 서있다
새벽같이 전차가 빠져나간다
마당에 버스 트럭 차들이 서있다
곤하게 버스 트럭 차들이 서있다
아침이면 버스도 빠져나간다
마당에 트럭 차들이 서있다
아직도 트럭 차들이 서있다
여보게 시작들 합세
마당에 차들이 없다
마당에 차들이 없다
하루가 도르르 말려 저쪽으로 사라지고
하루일에 지친 차들이 다시 들어온다
마당에 전차 버스 트럭 차들이 서있다
곤하게 전차 버스 트럭 차들이 잠잔다
전문이다
은유에 기대여 직조된 이미지 그 자체를 통해 많은 자유련상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이 한수의 시는 없이도 매일 진행되는 생명과정에 대한 한차례의 미적감수를 경유했다는데서 그 의미가 더욱 크다고 보여진다. 어쩌면 삶과 분리된 구성물이 아닌 진행속에 있는 구성물, 즉 제1련에서 볼수 있다싶이 을 바라는 시인의 시선은 정지된것이 아니라 인간의 창조물인 전차, 버스, 차, 트럭을 따라 움직이는것, 또한 혼자서는 절대로 저절로 움직일수조차 없는 피창조물들의 기계적인 움직임속에서 창조자인 인간이 기계에 기계적으로 매달려 살아가는 곤한 모습을 머리속에 떠올리게 하는듯 싶다. 꼼꼼히 살펴보면 새벽같이 전차가 빠져 나가고 나면 그 자리는 잠시 비게 되며 다음은 버스ㅡ 차들 ㅡ여기서 시인은 분명 원유의 질서를 해체하려는것이 아니라 새로운 질서들을 재발견, 즉 차들의 움직임을 통하여 현대인의 바쁜 일상과 희노애락을 엿볼수 있게끔 하고 있는듯 싶다. 시의 언어는 의미전달의 언어구조가 아닌 의미형성의 새로운 이미지구조여야 한다. 특히 문체는 작품 자체가 가지고있는 세부의 기능이기때문에 결국 세계를 바라보는 특별한 태도라고 해야 할것 같다.그럼 아래에 남달리 시각 효과가 뛰여난 와,를 살펴보기로 하자
탐미주의적 경향 시대적 발현의 새로운 심상
나비
풀-
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
나
풀
나도 한수의 시로 남을수 있다면
나는 나를 위해 나의 누드를 버린다
나는 나를 위해 나의 정조를 버린다
나는 나를 위해 나의 사랑을 버린다
나는 나를 위해 나의 아픔을 버린다
나는 나를 위해 나의 행복을 버린다
나는 나를 위해 나의 심장을 버린다
나는 나를 위해 나의 령혼을 버린다
나는 나를 위해 나의 무덤을 버린다
나는 나를 위해 나의 의미를 버린다
나는 나를 위해 나의 이름을 버린다
나는 나를 위해 나의 용서를 버린다
나는 나를 위해 나의 가나다라마바사아자차카타파하...를 버린다
나를 위해 나의 모든것을 버린 나는
내가 모든것을 버려서 비여버린 나는
드디여 한수의 시로 남는다
길은 길에 미안하오
길은 어디로 어떻게 뚫린거라도 괜찮소
길은 걸어주는것이 도리요
길은 자주 걸어줄수록 길이요
길은 혼자만의 길이 있듯이
길은 여러 사람의 길도 있소
길은 혼자만 걷고 싶은 길임에도
길은 여러 사람이 자꾸 기웃거리오
길은 혼자 걸어도 길이요
길은 여럿이 걸어도 길이요
길은 길이기에 길들었다고 생각하면 위험하오
길은 아무렇게나 밟아도 된다고 생각하면 더욱 위험하오
길은 저만치 길다운데
길은 길일뿐이오
시인이 굳이 언어의 질서를 파괴하려 하지 않고 지극히 일상적인 시어로 접근하려는 것은 어쩌면 어떤 사물에 대한 인습적인 사고를 단단히 긍정하면서도 또한 끊임없이 전복해보려는 시인의 각근한 노력과도 관계되는상 싶다. 이러한 각근한 노력끝에 한영남시인이 를 바라본 시각현상은 과연 어떤 모습일가? 필자가 보건대 그건 아마도 단순히 한 사물을 바라보기 위한 수단인것이 아니라 사물의 전체적인 내용을 좀 더 구체적으로 즉 한가지 측면만 통하여 깊이 료해하고 결정해보려는 심리를 폭죽효과로 삶의 공간에 터뜨리려 한것 같다.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여기서 은 어쩌면 바람앞에 흔들리는 일수도 있고 또한 의 줄임자일수도 있으며 무려 500여개의 은 마치 수천 수만마리의 나비가 동시에 하늘을 날아오르는듯한 환각을 주어 시각효과가 뛰여나며 다음 결속어 은 시인의 생명에 대한 무한한 열애와 환희를 나타내려 한것 같다. 반복구사법, 겹치기기법, 절충법으로 씌여진 ,역시 같은 실례라고 생각이 된다./ 나는 나를 위해 나의 누드를 버린다/로 시작하여 정조, 사랑, 아픔, 행복, 심장 ,령혼 , 무덤, 의미 , 이름 , 용서, 훈민정음 ㅡ 그리고 무려 13차례나 되는 라는 고도로 집중이 되는 비움속에서 평생을 한수의 시로만 남고싶은 시인의 간절한 욕망, 그리고 동업자가 일수도 혹은 일수도 있기에 거기에서 오는 미안함을 길로 간결히 표현한 는 첫째, 시각효과가 뛰여나며 둘째, 군더더기 하나없이 주체의식이 명확하며 셋째, 시의 또다른 가능성마저 제시해주는듯 싶다. 다만 프로의 경우 탐미주의적 경향, 즉 시대적 발현의 새로운 심상으로 받아들여 지겠지만 아마추어의 경우 자칫하면 문자유희에 빠질 그런 우려가 있음을 모두 류의해야 할것 같다.
물덩이들의 반란
물들이
물덩이들이
왈칵왈칵 내 목구멍을 헤집는다
내 목의 겨불내를 닦아주기 위해서
얼마쯤 머뭇거리거나 서성거려주어야 하는데
녀석들은 추호의 주저도 없이
살겠다는듯이 내 위장속으로 란폭하게 쓸려들어간다
내 목구멍을 한껏 벌려버리고는
잘 줴기진 물덩이들이
제법 단단해가지고
한사코 아우성치며 빨리듯 들어간다
물은
물들은 이런것이 아니겠는데
부드러운 물들이여야 하는데
물덩이들이 서로 손을 잡고 힘을 자랑한다
분명 나를 아프게 한 물덩이들이
사랑스럽다
리얼리즘이 세계성을 강조하고 모더니즘이 자율성을 강조한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은 상호 텍스트성을 강조로 한다 . 무릇 이 시대의 모든 문화현상과 사회현상은 지극히 단순한 상호 반영의 관계가 아니라 서로 동일시되며 더 나아가서는 가끔 사회현상이 문화현상으로 둔갑하기도 한다. 더불어 문화현상이 사회현상을 시의 심층 구조속으로 끌어들이기도 한다는 말이라고 해야 할것 같다 . 은 제목자체에서부터 이미 엿볼수가 있다싶이 지극히 익숙하고 자연스럽고 단순하였던것들이 가 되여 잘 줴기지고 때론 제법 이 단단해져 간혹 할수도 있지만 결국 사랑스럽다는 표현으로 상호 의존된 력학관계와 애잔한 관용의 미학을 섬세하게 그림으로 그려낸듯 싶다. 여기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