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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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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99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미인평화",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2875  추천:0  2021-05-16
“반격의 시간이 왔다”...    정지섭 기자 입력 2021.05.12      미얀마 사태가 쿠데타를 일으킨 군부에 저항해 민주진영과 소수민족 등이 연합하면서 내전 양상으로 치닫고 있는 가운데 미스 미얀마 출신 30대 여성이 군부에 맞서 무장 투쟁 의지를 밝혔다. 12일 AFP 통신에 따르면 2013년 태국에서 열린 미스 그랜드인터내셔널 대회 미얀마 대표였던 타 텟 텟(32)은 지난 11일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검은 셔츠에 총을 든 사진을 올렸다.   타 텟 텟은 사진과 함께 “반격해야 할 때가 왔다. 무기나 펜 또는 키보드를 잡건 아니면 민주주의 운동에 돈을 기부하건, 모든 이들은 이 혁명이 승리할 수 있도록 자기 몫을 다해야 한다”는 글을 올렸다. 이날은 군부 쿠데타로 아웅산 수지가 이끄는 민간 정부가 축출된지 100일째 되는 날이었다. 그러면서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싸울 것이다. 모든 것을 내려놓을 준비도 돼있다. 내 목숨도 내놓을 준비가 돼있다.”고 썼다.   2013년 미스 그랜드 인터내셔널에 자국 대표로 참가했던 시절의 타 텟 텟. /AFP 연합뉴스 그는 현재 체조 강사로 활동중이라고 통신은 전했다. 미얀마의 ‘미의 여왕'이 공개적으로 군부 저항 의지를 밝힌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앞서 지난 3월에는 역시 방콕에서 열린 올해 ‘미스 그랜드 인터내셔널’에 참가한 미얀마 여대생 한 레이(양곤대 심리학과)가 눈물을 글썽이며 자국민들에 대한 국제사회의 관심을 호소해 큰 주목을 받았다.   지난 3월 열린 미스 그랜드 인터내셔널에 참가한 미얀마 대표 한 레이가 눈물을 글썽이며 자국에 대한 국제사회의 관심을 호소하고 있다. /연합뉴스 쿠데타에 반발하는 시민들을 향한 군부의 무차별 발포와 잔학 행위로 사망자가 급증하던 시점이었다. 당시 한 레이는 “미얀마에서 사람들이 민주주의를 외치기 위해 거리에 나설 때, 저는 이 무대에서 제 시간을 이용해 똑같이 민주주의를 외치고 있다”고 말했다. 한 레이는 연설 말미 마이클 잭슨의 ‘힐 더 월드’를 수화와 함께 불렀다. 그는 상위에 입상하지는 못했지만 많은 박수를 받았다.
7898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평화와 미인"... 댓글:  조회:3004  추천:0  2021-05-16
“미얀마 위해 ... 장근욱 기자 입력 2021.05.16        미국 플로리다주(州)에서 진행 중인 미스 유니버스 대회에 참가 중인 미얀마 대표 투자 윈 륀(22)이 본선에 앞서 지난 13일에 현지 하드록 호텔에서 열린 전통의상 경연 도중 관객들에게 '미얀마를 위해 기도를'이라는 글이 적힌 팻말을 펼치며 세계의 관심을 촉구했다./페이스북 “미얀마를 위해 기도해 주세요”(Pray For Myanmar)” 미국 플로리다에서 열리는 미인 대회 ‘미스 유니버스'에 미얀마 대표로 나선 투자 윈 륀(22)이 지난 13일(현지 시각) 민족 의상 경연에서 이 같은 메시지를 전했다고 뉴욕타임스가 보도했다. 경연 순서가 오자 그는 미얀마 전통 의상을 입고 오른손에 두루말이를 들고 무대에 올랐다. 천천히 무대 맨앞으로 걸어가더니 두 손을 모아 합장하며 미얀마식으로 인사했다. 이어 두루말이 양끝을 펼쳐 하늘 높이 들어 보였다.   팻말 미스 미얀마/페이스북 앞서 지난 2월 1일 미얀마 군부는 아웅산 수치가 이끄는 국민민주연맹(NLD) 정권을 뒤엎는 쿠데타를 일으켰다. 문민정부가 들어선 지 5년 만에 무너진 것이다. 이에 미얀마 곳곳에서 반(反)쿠데타 시위가 벌어졌고 수백 명 이상 시민이 사망했다. 지난달 1일 군부에 반발하는 민주진영과 소수진영이 통합 정부를 구성해 사태는 내전으로 치달았다.   지난 3월 5일(한국 시각) '미스 유니버스 미얀마' 투자 윈 륀이 검은 마스크를 쓴 차림으로 미얀마 군부 쿠데타를 반대하는 시위에 참석해 있다. /인스타그램 쿠데타 이후 투자 윈 륀은 자신의 SNS를 통해 미얀마에 대한 국제적인 지원을 호소하면서 반군부 시위에도 직접 참석해 왔다. 이 때문에 그는 미국으로 출국하기 위해 찾은 미얀마 양곤 공항에서 후드티와 안경을 착용하며 변장해야 했다고 전했다. “출입국심사대를 통과하면서 너무 무서웠다”고 했다.   지난 8일 미국 플로리다에 무사히 도착한 투자 윈 륀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저는 ‘미스 유니버스 미얀마 2020′ 투자 윈 륀입니다”라고 소개하면서 미얀마에서 벌어진 시위를 군경이 무력으로 진압하는 장면 등을 담은 동영상을 올렸다. 그러면서 “누구나 민주주의를 누릴 권리가 있다. 미얀마도 마찬가지”라고 덧붙였다. 최근 다른 미얀마 유명인사들도 미얀마 군부 쿠데타 사태에 대한 국제 사회의 지원을 호소하고 있다. 미스 그랜드인터내셔널 2013년 대회에 미얀마 대표로 참가했던 타 텟 텟(32)은 지난 11일 자신의 소셜미디어 계정에 검은 셔츠에 총을 든 사진을 올리면서 “반격해야 할 때가 왔다. 무기나 펜 또는 키보드를 잡건, 민주주의 운동에 돈을 기부하건, 모든 이들은 이 혁명이 승리할 수 있도록 자기 몫을 다해야 한다”고 했다.   2013년 미스 그랜드인터내셔널 미얀마 대표 타 텟 텟이 자신의 SNS에 올린 사진  
7897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평화와 시인의 죽음"... 댓글:  조회:2997  추천:0  2021-05-16
미얀마 저항 시인의 죽음... 이기우 기자 입력 2021.05.16      미얀마 군부 정권 반대 활동을 해왔던 시인이자 민주화 운동가가 지난 14일 테러를 당해 사망했다. 범인은 피해자에게 휘발유를 붓고 불을 질러 살해했다.   지난 14일 미얀마 북서부 사가잉 지역 몽유와시에서 휘발유 테러를 받아 사망한 시인 세인 윈 /연합뉴스 미얀마 언론 미얀마 나우는 미얀마 북서부 사가잉 지역 몽유와시에 거주하던 세인 윈(60)이 14일 이유 없이 공격당해 사망했다고 16일 보도했다. 윈의 친구 타잉 아웅은 이날 오전 윈과 대화를 나누던 도중, 누군가가 다가오더니 윈에게 휘발유를 붓고 몸에 불을 붙였다고 진술했다. 그는 “범인이 띤잔 축제(미얀마에서 명절 ‘띤잔’을 맞아 서로에게 물을 뿌려대는 축제) 때처럼 윈에게 휘발유를 뿌렸다”고 했다. 윈은 곧바로 몽유와 종합병원에 이송됐지만 14일 밤 사망했다. 아웅은 “(윈이) 다리, 손, 머리를 비롯해 거의 전신에 화상을 입었다”며 “얼굴은 새까맣게 탔고 손과 발의 피부는 벗겨져 있었다”고 했다. 테러를 가한 범인은 인근 지역 주민으로 밝혀졌지만 경찰은 아직까지 그를 체포하지 못했다.   윈은 아웅산 수치 전 미얀마 국가고문이 이끌던 정당 국민민주주의연맹의 오랜 지지자였다고 한다. 1988년 미얀마 군부 독재를 타도하기 위한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을 때부터 정치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고, 1990년에는 당을 위해 선거운동에 나서기도 했다. 지난 2월 1일 미얀마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키자 윈은 몽유와에서 열린 반정부 시위에도 참가했다. 윈의 지인은 “윈은 정직하고 적극적인 활동가였다”며 “이번 공격은 개인적인 동기에 의한 것이 아닌 것 같다”고 했다. 미얀마에서는 군부 쿠데타에 저항하는 저명 인사들이 사망하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시인 크 자 윈과 찌 린 아이는 지난 3월 거리 시위 도중 총격으로 사망했다. “혁명은 심장에 있다”는 시를 써 군부를 비판한 시인 켓 띠는 지난 9일 군경에 끌려간 후 하루 만에 장기가 제거된 시신으로 돌아왔다.  
7896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쥐 떼와의 전쟁",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3011  추천:0  2021-05-15
호주 하늘에 ‘쥐 비' 내렸다… ‘쥐 떼와의 전쟁' 나선 농민들 곡물농사 풍년에 쥐떼 몰려  주정부에 쥐 박멸 재정지원 요청 장근욱 기자 입력 2021.05.14      최근 호주에 쥐가 급증하면서 농민들이 ‘쥐떼와의 전쟁'에 나섰다. 호주 농민들은 쥐떼를 ‘자연 재앙'이라면서 주 정부에 재정지원을 요청했다. 지난 12일(현지 시각) 더선과 인디펜던트 등 외신은 호주 뉴사우스웨일스주(州)의 농촌에서 쥐떼가 출몰한 영상들을 보도했다. /트위터 호주 ABC 기자 루시 태크레이는 이날 자신의 트위터에 하늘에서 비가 내리듯 무수히 많은 쥐가 떨어지는 모습을 담은 영상을 올렸다. 농부가 추수를 마치고 곡물창고를 청소하던 중 곡물을 저장하는 사일로(silo)에서 곡물 사이에 숨어있던 쥐떼가 튀어나온 것이다.   /트위터 태크레이가 올린 또 다른 영상에서도 창고에 빛을 비추니 수많은 쥐들이 놀라 우왕좌왕하는 장면이 담겼다. 다른 영상에서는 고양이가 머리 위에 쥐를 놓고도 신경도 안 쓰는 모습이 나타난다. 영상에서 고양이 주인으로 보이는 남녀가 다급하게 “쥐 어딨어! 쥐 어딨어! 잡아!”라고 말하지만, 고양이는 별 반응이 없다. 농부 론 맥케이는 호주 ABC 방송에 “밤에는 쥐 수천 마리가 바닥을 우글우글 뒤덮는다”고 했다.   /트위터 호주 연방과학산업연구기구 소속 연구원 스티브 헨리는 영국 가디언지와 인터뷰에서 “곡물 농사가 평년보다 크게 풍년이 들면서, 쥐들이 일반적인 시기보다 일찍 농장 근처로 몰린 것이 원인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보통 농장에서 한번 곡식을 심고 수확하는 동안, 쥐 암수 한 쌍이 약 500마리로 번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인근 상인들은 쥐 배설물을 치우는 데만 하루 6시간은 할애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한 식료품점 사장은 ”실내에서 죽은 쥐들 때문에 가게에 악취가 진동한다”면서 “식료품 사려는 주민들은 다른 동네를 찾는다”고 했다. 이처럼 쥐떼가 급증하면서 뉴사우스웨일스 농민들은 주 정부에 쥐 박멸에 필요한 재정 지원을 요청했다. 쥐약을 살 비용으로 일인당 2만 5000달러를 달라는 것이다. 뉴사우스웨일스 주정부는 쥐로 인한 경제적·공공보건적 위기를 막기 위해 3900만 달러(440억원)의 예산을 연방 정부에 요구한 상태다. 주정부는 또 브로마디올론(bromadiolone)이라고 하는 고독성 쥐약에 대한 허가도 요구했다. 이 약물은 독성이 강해 기존에는 사용이 금지됐다. 뉴사스우스웨일스주 농업부 장관은 “쥐떼를 24시간 안에 박멸할 수 있는 지구상에서 가장 강한 쥐약”이라고 설명했다.
7895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시인평화",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2162  추천:0  2021-05-10
...미얀마 시인... 남지현 기자 입력 2021.05.10      미얀마 군부 정권에 비판적인 시를 써왔던 저항 시인이 경찰에 끌려갔다가 장기가 제거된 채 싸늘한 시신으로 돌아왔다.   미얀마 저항 시인 켓 띠(45)가 지난 9일 장기가 도려내진 채 싸늘한 시신이 돼 돌아왔다./이라와디뉴스 로이터통신은 미얀마 시인 켓 띠(45)가 지난 9일(현지 시각) 군경에 끌려가 심문당한 지 하루 만에 장기가 제거된 시신으로 돌아왔다고 10일 보도했다. 켓 띠와 그의 아내는 지난 8일 미얀마 중부 사가잉 지역 쉐보에서 무장 군인과 경찰에 붙잡혔다. 부부는 나란히 끌려가 심문을 당했다. 켓 띠의 부인은 BBC 인터뷰에서 눈물을 흘리며 “나도 심문을 당했고, 남편도 마찬가지였다”며 “그들은 남편이 심문 센터에 있다고 했지만 결국 그는 돌아오지 못했다. 그의 시신만 돌아왔다”고 말했다. 켓 띠의 아내는 9일 오전 군으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사가잉으로부터 100㎞ 떨어진 몽유와 지역의 한 병원으로 와 남편을 데려가라는 내용이었다. 그는 “처음에는 남편이 팔이 부러졌거나 다친 정도라고 생각했다”며 “도착해보니 남편은 영안실에 누워 있었고 장기가 모두 제거된 상태였다”고 했다. 병원 측은 “남편의 심장에 문제가 있었다”고 설명했지만, 아내는 이 말을 믿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사망 증명서에 있는 내용이 사실이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에 보지도 않았다”고 했다. 아내는 당초 미얀마 군은 남편의 시신을 매장하려했지만 그녀가 시신을 돌려달라고 요청했다고 말했다.   미얀마 인권단체 미얀마정치범지원협회(AAPP)는 “켓 띠가 심문 센터에서 고문을 당하고 병원에서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이 단체는 군부 쿠데타 이후 780명이 군부 무력 진압으로 사망했다고 밝혔다. 켓 띠는 군부 쿠데타 이후 사망한 세 번째 저항 시인이다. 그는 “그들은 머리를 겨누지만, 혁명은 심장에 있단 걸 모른다”라는 문장을 쓴 것으로 유명하다. 켓 띠는 2012년 전업 시인이 되기 위해 엔지니어 일을 그만두고 아이스크림과 케이크를 팔아 생계를 이어왔다. 쿠데타가 벌어지고 2주가 지났을 땐 “나는 영웅이 되고 싶지 않다. 나는 순교자가 되고 싶지 않다. 나는 약골이 되고 싶지 않다. 나는 바보가 되고 싶진 않다. 불의를 지지하고 싶진 않다. 단 1분만 살 수 있다면, 그 1분간 깨끗한 양심으로 살고 싶다”는 시를 썼다. 최근엔 “사람들이 총에 맞고 쓰러지지만 나는 오로지 시로 저항할 수 있을 뿐”이라며 “그러나 나의 목소리가 충분하지 않을 땐 신중히 총을 집어 들어야 한다. 나는 총을 쏠 것이다”라는 시를 통해 심경의 변화를 드러내기도 했다. 앞서 지난 3월엔 켓 띠의 친구였던 시인 크 자윈(39)이 몽유와 지역에서 일어난 시위에 참여했다가 총에 맞아 숨졌다.
7894    [세상만사] - 심봤다... 억... 댓글:  조회:2669  추천:0  2021-05-10
"심봤다" 벌초 나선 50대, 1억원대 천종산삼 21뿌리 발견 안소영 기자 입력 2019.06.06      조상 묘를 벌초하기 위해 산에 오르던 50대 남성이 1억원 상당의 천종 산삼 21뿌리를 발견했다.   고씨가 발견한 천종산삼. 6일 한국전통심마니협회에 따르면, 지난 2일 낮 12시쯤 벌초를 위해 전남 담양군 무등산에 오르던 고모(50)씨가 수풀 사이에서 천종산삼 21뿌리를 발견했다. 10여년 전부터 산을 오르며 취미로 약초를 캐 온 고씨는 삼잎을 알아봤다. 그는 총 15뿌리의 어미산삼(모삼)과 6뿌리의 아들산삼(자삼) 등 가족 천종산삼을 조심스레 캐냈다. 감정 결과 모두 1억원 상당으로 알려졌다. 한국전통심마니협회 관계자는 "천종산삼이 대량으로 나오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며 "모삼은 70년 이상, 자삼은 20~30년 정도로 무게도 두냥(75g) 정도라 1억원의 감정액도 무리가 없다"고 했다. 천종산삼은 사람의 손이 닿지 않는 산 속에서 자연 상태로 자란 산삼을 말한다. 천종산삼은 조선시대 인삼값 기준, 동일 무게 금값의 20배 이상으로 알려졌다.
7893    [세상만사] - 천종산삼... 억... 댓글:  조회:2462  추천:2  2021-05-10
경남 거창서 천종산삼 발견...감정가 1억2000만원 안소영 기자 입력 2019.05.07     경남 거창군 일원에서 50대 약초꾼이 100년 넘는 천종산삼(天種山蔘) 5뿌리를 발견했다. 천종산삼은 인적이 닿지 않는 깊은 산속에서 자연 상태로 자란 산삼이다.   경남 거창군 일원에서 50대 약초꾼이 발견한 천종산삼(天種山蔘) 5뿌리. 한국전통심마니협회에 따르면, 약초꾼 이모(51)씨는 6일 오전 7시쯤 거창군에서 약초를 캐다가 천종산삼 5뿌리를 찾아 캐냈다. 발견된 천종산삼은 짙은 황색에 뇌두 길이가 10cm를 넘었으며 무게는 성인 두사람 복용량 정도인 75g 이상이었다. 뿌리 길이만 90cm에 달했다. 한국산삼감정평가협회는 이 산삼이 110년 이상 됐다며 감정가를 1억2000만원으로 평가했다. 서상록 한국전통심마니협회 상임 감정위원장은 "형태나 색상이 뛰어나 약성이 매우 기대되며 희소가치가 높은 것으로 판단된다"고 말했다.
7892    [세상만사] - 100년 산삼 한뿌리... 억... 댓글:  조회:2650  추천:0  2021-05-10
“심봤다” 100년 된 천종산삼 캤다, 감정가는? 김준호 기자 입력 2021.05.10        경남 함양 덕유산 자락에서 발견된 100년 이상 추정되는 천종산삼. /한국심마니협회 세계산삼엑스포가 열리는 경남 함양에서 100년 넘은 천종산삼이 발견됐다. 20여년 간 산삼 감정을 한 베테랑 심마니도 “모삼 한 뿌리로만 이정도 길이의 초대형 산삼은 처음본다”고 혀를 내둘렀다. 한국전통심마니협회는 지난 7일 함양에서 약초를 채집하는 이모(여·62)씨가 의뢰한 천종산삼 감정 결과 100년 이상된 것으로 확인됐다고 10일 밝혔다. 천종산삼은 50년 이상 자연적으로 자란 삼으로, 한번도 사람 손을 거치지 않은 자연 산삼을 말한다. 하늘이 내린 삼이라고 천종산삼(天種山蔘)이라고 불린다. 협회에 따르면 이 천종산삼은 함양 덕유산 자락 해발 700m 지점에서 발견됐다. 미네랄 성분이 풍부한 암반과 암반 사이에서 자랐다. 뿌리 무게만 68g, 뿌리 길이 63㎝에 이른다.   경남 함양 덕유산 자락에서 발견된 100년 이상 추정되는 천종산삼. /한국심마니협회 정형범 한국전통심마니협회장은 “이번에 발견된 천종산삼은 자삼 없이 모삼 한 뿌리로만 발견된 것으로 초대형”이라며 “뿌리를 거둘 때 나타나는 옥주의 흔적과 짙은 황색의 색상, 무게 등을 고려해 수령이 최소 100년 이상된 것으로 추정했다”고 말했다. 정 회장은 대법원에서 특수분야 감정인(전문가)으로 산삼, 산양삼, 기타약초의 감정을 수행하는 전문가다.   정 회장은 200여년 전 조선 말 인삼 시세가 금 시세의 20배 정도된다는 점을 고려해 최초 이 천종산삼의 감정가를 9000만원으로 책정했다. 정 회장은 “감정을 한지 23년 간 한 뿌리로 이정도 크기의 천종산삼은 처음”이라며 “과거 이보다 색이 옅고 여러 뿌리가 있는 천종산삼 가격이 수억원을 호가한 점을 고려하면 이번에 최초 감정가 9000만원은 제가 봐도 적게 책정된 것이다. 이보다 3배 정도(3억원)의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 한편, 경남 함양에서는 오는 9월10일부터 10월10일까지 한달 간 ‘천년의 산삼, 생명 연장의 꿈'을 주제로 2021 함양산삼항노화엑스포가 열린다. 함양은 전국 최대 산양삼 생산지다. 500여 농가가 730ha에서 산양삼을 재배하고 있다. 지리산과 덕유산을 끼고 있어 삼이 자라기 좋은 환경을 갖추고 있다. 함양에서는 오래 전 영원불멸의 꿈을 꾼 중국 진시황의 명을 받은 서복이 불로초를 찾아 왔다는 전설이 구전되고 있다.
7891    [그것이 알고싶다] - "민성보" 댓글:  조회:2932  추천:2  2021-05-10
민중의 소리- 《민성보》     2015-08-05      민성보 옛터. 룡정에는 민성가라는 거리가 있다. 지난 세기 20년대에 그 거리에 민성보라는 신문을 꾸리는 신문사가 있었고 거리의 이름은 그에서 연유되였다. 그 신문사 옛터는 조선말로 된 간행물의 탄생지로서만이 아니라 “중공룡정촌지부”유적지로도 유서가 깊다. 1919년 중국 5·4운동은 문화운동의 영향하에 연변의 진보인사들은 반일무장투쟁을 배합하여 어려움을 이겨나가며 많은 간행물을 꾸렸다. 1919년 3월, 연변지역에서 발행한 조선문신문들로는 《일민보》, 《신국보》, 《중외통신》, 《구국일보》, 《조선민보》가 있었다. 그러던중 1928년 1월, 《민성보》가 룡정에서 고고성을 올렸다. 신문사는 룡정촌 신안거리(현 민성거리)에 세워졌다. 《민성보》의 최고지도기구는 40명으로 구성된 “보무위원회”였다. 강위청(연길 현상회 회장)이 위원장으로, 관준언(화룡현교육국 국장)이 신문사 사장으로, 방지함(룡정촌 전화국 국장)이 경리로 추대되였다. 《민성보》는 한문과 조선문으로 된 4절지 4개 면으로 된 일간신문이였다. 그중 1, 2면과 3면의 전반부는 한문판이고 3면 후반부와 4면은 조선문판이였다. 한문판 총편집은 안회음이 겸했고 조선문판 총편집은 윤화수였다. 일발행량은 2000부, 연변에서 그 영향이 컸다. 신문은 민중의 목소리를 대변한다는 취지에서 《민성보》라고 이름을 달았다. 그 취지에 걸맞게 《민성보》는 신학제, 신문풍, 백화문을 구사하였으며 혼인자유, 남녀평등을 제창하는 등 진보적인 언론의 구실을 톡톡히 하였다. 1928년 2월 주동교가 신문사 편집일군으로 초빙되여 왔다. 주동교는 겉으로는 편집일군의 명색을 띠였으나 실제로는 중공만주성위의 파견으로 민중의 토대와 혁명적극성이 높은 연변에 공산당조직을 건립하고 발전시키는 사업을 하러 온것이였다. 하여 1928년 2월 연변에서의 첫 공산당조직인 중공룡정촌지부가 민성보사를 거점으로 건립되였다. 주동교가 당지부 서기를 맡았다. 《민성보》의 한문판 주필 안회음은 신문사내의 진보세력들앞에서 자신의 주장을 세우지 못하게 되자 1928년 여름 사직하고 천진으로 돌아갔다. 이를 기회라 생각한 주동교는 중공만주성위에 청시하여 당간부를 증파해줄것을 요구했다. 곧 공산당원 손좌민, 리별천이 파견되여 와 신문사에 취직했다. 이리하여 《민성보》의 주필로부터 책임편집에 이르기까지 모두 공산당원들이 필을 잡게 되였고 《민성보》는 실제상 중공룡정촌지부의 전투보루로 되였다. 중공룡정촌지부가 건립된후 중공북방국에서는 지방교육부문에서 북평의 해당 당국에 교원을 파견해달라고 요구를 제기하는 기회를 빌어 1928년 3월부터 6월까지 연변에 파견되여오는 북평 향산자유원(香山慈幼院)의 졸업생속에 17명의 공산당원과 공청단원을 함께 파견하였다. 연변에 도착한 17명 당원, 단원은 인차 주동교와 련락을 맺고 중공룡정촌지부의 령도밑에서 지하건당사업을 전개하였다. 불과 몇달이 못되여 그해 7,8월에 국자가, 동불사,로투구, 광개욕, 팔도하자, 옹성라자, 삼도구, 화룡, 훈춘 등 9개 지역에 당지부가 설립되였다. 8월에는 중공만주성위의 지시정신에 따라 중공동만구위가 건립되였다. 동만구위를 민성보사에 두었다. 주동교가 서기를 맡고 조직위원을 류건장, 선전위원을 조지강이 맡았다. 이들은 《민성보》를 하나의 선전도구로 삼고 용감하게 일제의 침략행위를 폭로, 규탄하였으며 피압박자들이 일떠나 침략자들과 용감히 싸우라고 호소하였다. 1929년 1월 15일 중공동만구위 서기 주동교가 룡정의 국민당특무들에게 체포되고 2월에는 서기대리인 류건장도 체포되였다. 손좌문, 리별천 등 북평에서 온 당원들도 선후로 피신하여 연변을 떠나는바람에 중공동만구위는 실제상 와해되고말았다. 국공합작의 분렬, 국민당의 간섭, 지방관원들의 무능 등 원인으로 1931년 “9.18”사변후 민성보는 부득불 정간되였다. 지금 룡정시연수학교 정원에는 기념석 하나가 세워져있다. 2010년 룡정시 당위와 정부에서 건립한 기념석에는 조, 한 두가지 문자로 룡정촌당지부 건립상황이 주홍빛 글자로 음각되여있다. 기념석의 건립을 주도했던 룡정시로혁명근거지건설추진회 박호만회장은 “민성보는 푸른 벽돌로 지은 불과 240여평방메터 되는 단층집이였습니다. 하지만 이곳에 룡정촌의 당지부가 들어서면서 이로써 항일투쟁은 새로운 단계에로 들어서게 되였고 연변의 당사에 빛나는 한페지를 적어내려갔습니다”고 말했다. 또 “《민성보》의 옛터는 이곳에서 남으로 수십메터 떨어진 곳에 위치해있었으나 그곳에 민가가 밀집하기에 룡정시연수학교내에 세우게 되였다”고 소개했다. 《민성보》는 20세기 20년대 동북에서 중문과 조선문으로 꾸린 유일한 신문이였다. 또한 《민성보》는 예봉을 직접 일제와 국내통치계급에 돌렸고 인민대중들에게 각성하고 단합하여 다같이 대적하며 외환을 막아나서라고 호소한 진보적 신문이였다. 글 김혁/사진 리련화 기자 =======================================/// 민중의 목소리 『민성보』 한자 1920年代 間島에서 한글과 中國語로 刊行된 民衆의 목소리 『民聲報』 영문 Min Sung Bo, the newspaper published in both Korean and Chinese in Gando in 1920s 중문 1920年代在间岛用汉语和朝鲜语出版的报纸民声报 분야 역사/근현대|문화유산/기록 유산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용정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전체보기 민중의 목소리 『민성보』의 탄생 『민성보』는 1928년 1월 연길현 용정에서 당시 연길현·혼춘현·화룡현·왕청현 등의 연변 지역 교육계와 공상계 상류층 인사들이 공동 출자하는 형식으로 창간된 신문이다. 『민성보』는 1920년대 간도 용정에서 간행된 대표적인 진보 신문의 하나였다. 중국어와 한국어로 간행된 『민성보』는 “언론을 빌어 동포를 깨우친다.”는 취지로 창간된 이래 언론을 통한 활발한 항일 구국 활동을 전개하다가, 1932년 초 중견 편집진들이 일제에 체포되면서 부득이하게 폐간되었다. 『민성보』는 연변 지역 한인 사회를 대상으로 이 시기 활약하였던 한인 사회 단체의 활동, 사상과 이념 문제, 향토 역사 등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아래는 이를 알 수 있는 한인 사회에 관련한 기사 목록이다. 「연변 시사 만평(중)(延邊時事漫評(中))」[民國 17.05.05], 「동만운동의 종횡관(팔):방화산(東滿運動의 縱橫觀(八):方火山)」[民國 17.05.27], 「혁신단 사건 발생지 용암동 실사기(革新團事件發生地龍岩洞實查記)」[民國 17.06.03; 17.06.10; 17.06.14; 17.06.21; 17.06.29], 「집회일속(集會一束)」[民國 17.06.21], 「레닌주의에 대한 민족 문제 개요(6)(레닌主義 對한 民族問題概要(六))」(民國 17.06.10), 「일본 제국주의 재동북지전도(속)(日本帝國主義在東北之前途(續))」[民國 17.10.07], 「논한민공당지기인급중일아국제지관계:천수(論韓民共黨之起因及中日俄國際之關係:天水)」[民國 19.09.18], 「화룡현 조사지(1):박창한(和龍縣調查志(一):朴昌翰)」[民國 19.09.06]. 『민성보』가 탄생하기까지 『민성보』는 일본 제국주의가 연변에 대하여 정치·경제·문화·군사적으로 전반적인 침략을 감행하던 시기에 탄생했다. 일제는 1907년 8월 통감부 간도 파출소를 세웠고, 1909년에는 청나라 정부와 간도 협약을 체결하였다. 이로써 일제는 용정·국자가 등지를 일본인에게 거주와 무역을 허용하는 상부지(商埠地)로 만든 동시에 길회(길림-회령) 철도 부설권과 한인 영사 재판권을 얻었다. 또한 그들은 통감부 간도 파출소를 철수하는 대신에 간도 일본 총영사관을 설립한 후 연길·화룡·혼춘·왕청·안도현 등을 관할하였다. 일제는 용정의 민족 교육을 말살하기 위해 1906년 개교 1년 만에 폐교된 서전 서숙의 교사(校舍)를 매입하여 1908년 한인 자녀를 상대로 만주 경내에서 처음으로 식민주의 교육의 거점인 간도 보통학교를 설립했다. 1921년 7월에는 중국 동북 지역 침략의 중요한 발판 가운데 하나였던 연길현 용정에서 『간도 신보(間島新報)』를 창간하였다. 창간 당시 『간도 신보』는 일본어판과 한글판 두 가지가 발행되었다. 『간도 신보』에는 일본 거류민회의 내용뿐만 아니라 연변 지역 한인 사회와 관련한 정치·경제·문화·사회 전반에 관한 내용, 조선 총독부 관리들이 연변 지역을 방문한 내용, 소련연해주 지역 한인 사회와 관련한 내용 등이 실렸다. 1927년 7월, 일제는 일본 상인들을 선동하여 중국 정부가 부과하는 수입 물자에 대한 부가세 납부를 반대하고, 중국 해관 창고 문을 부수고 공공연히 물품을 약탈하기도 했다. 중국 정부의 법령을 무시한 불법적 행위는 연길 도윤(延吉道尹)과 각 현 인민들의 지대한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각 현의 인민들은 일본 제국주의를 반대하는 시위 행진을 전개하며, “길회 철도 부설을 반대한다!”, “연변에서의 일제의 각종 특권을 취소하라!”, “관세 자주를 쟁취하자!” 등의 구호를 외치면서 일본 측에 강력히 항의했다. 결국 일본 측은 일본 상인들로 하여금 잘못을 승인하고 사과하게 하며, 세금을 보충하여 납부하고 일체 손실을 배상하도록 하였다. 그 뒤 연변의 애국적 진보 인사들은 자발적으로 민중을 각성시켜 일본 제국주의를 몰아내고 주권을 수호하며 정의를 주장하고 압박과 착취에 반항하기 위하여 『민성보』의 창간을 준비했다. 『민성보』는 1927년 여름, 연길·화룡 2개 현의 저명인사들인 화룡현 교육국 국장 관준언(關俊彥), 용정촌 전화국 국장 방지함(方芷涵) 등이 발의하고, 연길·혼춘·화룡·왕청, 용정촌의 교육계·공상계의 애국 인사들이 마음을 합쳐 성금을 모금하여 인쇄기를 구입한 후 용정촌 신안 거리[지금의 민성 거리]에 신문사를 꾸림으로써 역사에 등장한 것이다. 『민성보』의 조직과 편집 방향 민성보사의 최고 집행 기구는 4개 현과 용정촌에서 선출된 40여 명의 보무 위원회(報務委員會)였다. 그리고 신문사 내의 조직기구로는 사장과 경리를 두고 그 아래에 편집부·영업부·인쇄소를 두었다. 『민성보』의 중국어면 총편집은 안회음이 맡았다. 그는 국내외 주요 신문 편집을 책임지고 주관하였다. 안회음은 국민당의 중간파 인물로써 신문사내의 진보 세력들 때문에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지 못하게 되자 얼마 후 사퇴하고 1928년 여름에 용정을 떠나 천진으로 돌아갔다. 『민성보』의 지방 신문과 문예면은 주동교가 주관하였다. 중국어면 편집에는 손좌민이, 교정은 이별천이 맡았다. 한국어면 총편집은 윤화수(尹和洙)였다. 민성보사에는 60여 명의 직원이 있었는데 조선족과 한족이 각기 절반씩을 차지하였다. 『민성보』는 매주 6회 발행했는데, 총 4면으로 1면부터 3면 전반부까지는 중국어면이고, 3면 후반부터 4면은 한국어면이었다. 당시 『민성보』의 주요 영업 수입은 광고비였다. 4면 중의 한 면은 광고가 차지했다. 『민성보』의 하루 발행량은 2,000부 정도로 비록 발행량이 많지는 않았으나 영향력은 매우 컸다. 특히 한인 주민들에게 그 영향이 컸는데, 『민성보』의 출간으로 일본인 신문 『간도 신보』가 독점했던 용정촌 여론의 동향이 변화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민성보』는 밖으로는 외세의 침략을 막고 안으로는 봉건 세력을 공격하는 것에 편집 방향을 맞추었다. 『민성보』는 투쟁의 예봉을 직접 일본 제국주의와 중국 통치 계급에게 돌리고 압박을 당하고 있는 민중에게 각성과 단합을 촉구하면서, 민족 평등을 주장하고 문화와 인종이 같은 중국인과 한인들에게 환난을 함께 이겨나갈 것을 호소했다. 『민성보』는 한인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출병한 일제의 야만적 행위를 적발 및 폭로했고, 일제가 설치한 경찰 조직, 경제계와 문화계 등에서 활동하는 간첩[특무] 활동의 실태를 적나라하게 폭로하며 규탄했다. 한편, 『민성보』가 탄생되던 시기를 전후하여 지방의 중소 민족 공상업은 이미 생기를 띄고 있었다. 용정 한 곳만 하더라도 사영 발전소·제분소·양조소·사탕 공장·제재 공장, 벌목 회사·은행 등이 연이어 세워졌다. 그러나 당시 값싼 일본 상품과 박리다매를 추구하는 일본 담배들이 홍수처럼 밀려들어오는 바람에 민족 공상업은 더이상 발전할 수 없었다. 이에 『민성보』는 "외국 상품을 배척하고 이권을 만회하자!", "관세 장벽을 높이 쌓자!"라고 강력히 설파함과 동시에 세금을 감면 혹은 면제받을 수 있는 좋은 방법들을 건의 제출했다. 그러나 지방 관원들이 자기 이익만 채우고 관세권을 무시하는 바람에 결국 이권이 외국인의 수중에 들어가 버려 그 어떤 방안을 제시해도 무용지물이 될 뿐이었다. 『민성보』는 이러한 암울한 현실을 만화로 묘사했다. 만화의 내용은 닭[중국 상품] 한 마리가 노끈[세금]에 얽매여 있는데 독수리[외국 상품]가 덮쳐들어 닭의 깃털을 쪼아 닭이 죽어가는 형상이었다. 『민성보』가 교육, 문화 생활에 끼친 영향 교육 방면에 있어서 『민성보』는 새로운 학제를 도입할 것과 백화문을 쓸 것을 주장했다. 이로 인해 연변 지역은 한문(漢文)이라고 불리는 문언문(文言文)을 쓰던 것에서 현대 한어(現代漢語)인 백화문(白話文)을 쓰게 되었고, 지방 정부의 공문, 포고문마저 차츰 백화문으로 쓰게 되었다. 한인에 대해서는 형식에 구애되지 말고 스스로 학교를 꾸릴 것을 제시함으로써 한인이 꾸린 학교가 일본 사람이 꾸린 소학교나 영국, 독일 사람들이 꾸린 교회 학교보다 훨씬 많아지게 되었다. 동시에 신문화·신사상을 전파하기 위하여 『민성보』는 문예, 노동자 원지, 여성, 아동 등 전문란을 설치하여 새로운 격조로 대량의 새로운 작품을 발표했으며, 농업 집단화 운동이 일어나고 있는 새로운 러시아 농촌을 소개하고 「들끓는 새 로씨야 농촌」, 「철의 흐름」 등 새로운 러시아 작품을 전재하였다. 연변 문단이 활기를 띤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민성보』는 또한 문화 생활면에서도 사회 변화를 가져왔다. 1930년 봄, 수구파인 장창일과 주광일 등은 ‘예의염치(禮義廉恥)’를 제창하고 ‘이풍이속(移風移俗)’을 반대한 반면 화룡현 삼도구 제6 소학교 교장 주소성 등은 공가점(孔家店)을 타도하고 낡은 예교를 반대하며 신문화를 받아 들이고 백화문을 사용할 것을 주창했다. 이들은 『민성보』를 통해 3개월 남짓한 기간 동안 논쟁하였는데, 이는 결국 존공파(尊孔派)의 실패로 끝났다. 이 3개월의 필전(筆戰)은 여성들의 단발부터 남녀 합교(男女合敎), 남녀 동학(男女同學), 혼인 자유, 남녀 평등과 여성 참정 등의 새로운 기풍을 진작시켰고 잠잠하던 연변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처럼 『민성보』는 한 자루의 비수가 되어 일제와 낡은 통치 계급을 위협했고, 이들은 『민성보』를 눈엣가시처럼 여기면서도 두려워하였다. 일제는 한국어면 총편집자인 윤화수를 위협하며 압박했지만 윤화수는 추호도 두려워하지 않고 투쟁을 이어나갔다. 『민성보』, 역사가 되다 1924년에 시작된 제1차 국공 합작은 1927년 마무리되었고, 『민성보』의 간행에도 그 영향이 미치게 되었다. 1929년 1월 손좌민·이별천 등 신문사 내의 공산당원들이 용정을 떠났고, 1930년 말에 이르러서는 『민성보』의 주요 편집진이 공산당원에서 국민당원으로 바뀌게 되었다. 항일이라는 대의에는 변화가 없었으나, 1930년 말 국민당 우파의 원로인 호한민(胡漢民)이 ‘민성보’라고 신문의 제호를 친필로 쓴 뒤부터 『민성보』는 우파적인 성향을 담기 시작했다. 특히 문예 전문란의 좌파적인 성향이 크게 약화되었다. 그러나 『민성보』의 창간 주역인 방지함은 직접 편집을 맡고 의연히 일제를 비판했다. 1931년 9월 18일, ‘만주 사변’으로 불리는 ‘9·18 사변’-유조호(柳條湖)만주 철도 폭발 사건-의 발발로 일본 관동군이 만주를 중국 침략을 위한 전쟁의 병참기지로 만들고 식민지화하기 시작하자 『민성보』는 마침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일제가 『민성보』의 주요 지도자들을 갖은 수단을 동원해 탄압했고, 외교에 무능했던 지방의 중화민국 관리들은 끝내 신문사를 보호하지 못했던 것이다. 『민성보』는 곧 '나라를 위해 몸 바친 투사'라고 할 만하다. 다음의 글은 『민성보』의 창간인이자 사장인 관준언이 서명했던 비장한 정간사이다. "동인들은 엎어진 둥지에 성한 알이 없음을 번연히 알면서도 원쑤들의 온갖 위협과 유인을 물리치면서 몇 달 동안 출판을 견지해왔다. 꺾어질지언정 휘여 들지 않으려는 의지로써 원쑤를 섬기지 않겠다고 결심하였다."
7890    [별의별] - 코끼리와 새둥지 새끼새 댓글:  조회:2851  추천:0  2021-05-10
인도에서 야생 코끼리가 바나나 숲을 습격했지만 새둥지의 새끼만은 공격하지 않아 화제다. [10TV News Telugu 캡처] [헤럴드경제=천예선 기자] 인도에서 야생 코끼리떼가 바나나 300그루 이상을 쓰러뜨리며 쑥대밭을 만들었지만 새둥지만은 건드리지 않아 훈훈함을 자아내고 있다. 인디안 익스프레스 등 현지언론에 따르면, 인도 남부 타밀 나두 주(州) 엘로드 지역의 바나나 숲은 지난 8일(현지시간) 야생 코끼리 5마리의 습격을 받았다. [10TV News Telugu 캡처]바나나 나무 300그루 이상이 초토화된 모습. [Aju's Colours of Life 캡처] 분노에 찬 코끼리들은 바나나 나무를 차례로 쓰러뜨리면서 300개 이상의 나무를 전복시켰다. 그러나 부근 일대가 초토화됐지만 단 1그루만이 멀쩡하게 서있는 것이 발견됐다. 이상하게 여긴 바나나 숲 주인 크리쉬나사미 씨는 보존된 나무에 접근했고 그 안에 새둥지가 있는 것을 확인했다. 새둥지는 바나나 열매 위에 만들어져 있었으며 그 안에는 갓 태어난 4~5마리의 새끼새가 있었다. 현지 언론은 크리쉬나사미 씨를 인용해 “코끼리 습격이 끝나고 주민들과 함께 피해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숲으로 갔다”며 “300개 이상의 나무를 쓰러뜨린 코끼리가 ‘우연히’ 새둥지가 있는 나무만 공격하지 않은 것은 상상하기 힘들다. 새끼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의도적으로 배려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전했다. 바나나 열매 위에 만들어진 새둥지. 새끼 새 5마리가 생존해 있다. [Aju's Colours of Life 캡처] 해당 영상은 인도 산림 관리국의 파빈 카스완씨가 트위터에 공유하면 빠르게 확산됐다. 현재 40만 조회수를 돌파했다. 이를 본 네티즌들은 “코끼리가 생명의 소중함을 알고 있네” “멋진 대자연의 단면이다” “동물은 인간보다 섬세한 생명체다” 등의 감동 섞인 반응을 보였다. 인명 피해 역시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7889    [그것이 알고싶다] - 중국 영화 황제 김염과 제주도 댓글:  조회:2432  추천:0  2021-05-08
윤여정보다 앞섰다… 中 영화계 휩쓴 한국 배우가 있었다고? [아무튼, 주말-김두규의 國運風水] 저우언라이·모옌도 극찬한 서울 출신 배우 김염 김두규 우석대 교양학부 교수  2021.05.08        김염기념관을 짓기 위해 20년째 조성 중인 제주 조촌읍 정원. 외곽으로 나무와 꽃을 심어 바람을 막고, 가운데에 연못을 만들었다. / 김두규 교수 봉준호 감독과 윤여정 배우로 대표되는 한국 영화는 이제 세계적이다. 그러나 일찍이 1930년대 중국 영화계를 제패한 한국 출신의 영화배우가 있었다. 김염(1910~1983)이 그 주인공이다. 박규원 작가의 ‘상하이 올드 데이스’(2003·민음사)를 통해 처음 알려지게 되었다. 김염은 1910년 한성(서울)에서 양의사 면허를 최초로 받은 김필순의 3남으로 태어났다. 김필순은 독립운동으로 수배를 당하자 만주로 이주한다. 의사 활동을 하던 중 그가 의문의 독살을 당하자 아들 김염의 삶은 힘들어졌다. 고생 끝에 1927년 상하이로 가서 영화계에 발을 디딘다. 1930년 ‘야초한화(野草閑花)’에서 주연을 맡으면서 일약 스타가 되었다. 1934년 상하이 영화잡지 ‘전성’에서 실시한 인기투표에서 ‘영화 황제'로 뽑혔다. 배우 김염과 그의 아내 친이를 담은 책표지. 훗날 중국 수상 저우언라이(周恩來)는 김염과 아내 친이(秦怡)를 베이징으로 초청한 자리에서 “김염, 당신은 영화 황제이면서 동시에 우리 중국의 부마요”라고 칭찬하였다. 중국의 실력자 정치가만이 김염을 높게 평가한 것이 아니다. 2012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모옌(莫言)의 김염 평이다. “한마디로 김염은 전기적인 인물이다. 어린 시절 독립운동의 선구자였던 부친과 친척을 따라 사해를 내 집 삼아 떠돌아다녔다. 그의 천부적 재능·경험·정의감·혁명성·진보적 면모만으로 된 것은 아니라고 본다. 어떤 신비한 힘 같은 것이 그를 도운 것이고 그 신비한 힘이란 바로 부친과 형, 독립지사들의 영혼이 아닌가 한다.”(박규원, ‘아주 특별한 올드 상하이’). 모옌은 “신비한 힘”이라고 하였지만, 박규원 작가는 그 성공 배경을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중국의 장래를 위한 사상을 대표했고, 억압받는 사람들의 고통을 대변했으며, 외세를 배척하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는 진보적인 젊은이상을 보여주어 1930년대 중국을 대표하는 최고 배우가 된 것이다.”   박규원 작가는 글을 통해서뿐만 아니라 김염의 위대함을 세상에 알리고자, 제주시 조천읍에 정원 ‘OLD SHANGHAI(올드 상하이)’를 조성하고 그 안에 김염 기념관을 계획하고 있다. 정원은 ‘까끄래기 오름’이란 산기슭에서 아래로 조용히 흘러내리는 지면의 흐름을 따라 천미천 냇가 쪽으로 경사를 이루고 있다. 지세는 좋으나 바람 많고 돌 많은 제주도 환경은 어쩔 수 없다. 또 제주에서도 가장 추운 동북쪽이고, 땅밑은 용암이 굳은 바위투성이고, 땅 위는 화산재가 퇴적된 푸석거리는 땅이라 초목이 자라지 않는 환경이다. 박규원 부부는 우선 주변에 높게 자라는 낙우송(메타세쿼이아와 비슷)·대나무·소나무를 외곽에 심어 높은 바람을 막았다. 그 안쪽에는 동백·철쭉·수국을 심어 잔바람을 막고, 땅에서 캐낸 바위들로 담장을 쌓아 낮은 바람을 막았다. 그리하여 “안으로는 생명이 자라게 하고, 밖으로는 아름다운 경관이 생기게 하였다[내기맹생외기성형·內氣萌生外氣成形]”(‘청오경’). 그리고 정원 한가운데는 연못을 조성하였다. 사방을 감싸는 산(‘오름’)→교목→관목·돌담→연못 순의 동심원 정원이다. 연못의 물[水]은 정원의 생명이다. 열악한 땅을 좋은 땅으로 만들어가는 비보(裨補) 풍수의 지혜가 돋보인다. 최근 필자가 방문한 이곳은 20년째 ‘정원 만들기’를 진행 중이란다. “사람은 40년을 살아야 그럴듯한 얼굴을 가질 수 있지만, 정원은 100년이 지나야 겨우 제 모습을 드러낸다”는 영국 격언을 인용하면서 ’100년의 정원'을 꿈꾼다고 한다. ‘정원 만들기’ 과정에서 김염의 아내 친이와 모옌이 이곳을 방문해 기념 식수를 하였다.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영화 황제 김염이 봉준호·윤여정과 함께 기억되기를 희망한다.
7888    [별의별] - 국경과 농부 댓글:  조회:2585  추천:0  2021-05-07
농부가 돌 하나 치웠는데… 프랑스-벨기에 국경이 바뀌었다 정채빈 인턴 기자 2021.05.07        5일(현지 시각) CNN·BBC 등에 따르면 벨기에 국경 지역 도시 에르클린에 사는 한 농부가 트랙터를 운전하는 데 방해가 된다며 330파운드(약 150kg)에 달하는 한 비석을 프랑스의 부지니 쉬르 록 쪽으로 2.29m 정도 옮겼다. 이 때문에 벨기에 영토가 약 1000㎡ 가량 넓어졌다. /페이스북 벨기에의 한 농부가 무심코 트랙터의 진로를 방해하는 돌을 옮겼다가 프랑스와 벨기에 두 나라의 국경을 바꿔 버렸다. 5일(현지 시각) CNN·BBC 등에 따르면 벨기에 국경 지역 도시 에르클린에 사는 한 농부가 트랙터를 운전하는 데 방해가 된다며 330파운드(약 150kg)에 달하는 한 비석을 프랑스의 부지니 쉬르 록 쪽으로 2.29m 정도 옮겼다.   5일(현지 시각) CNN·BBC 등에 따르면 벨기에 국경 지역 도시 에르클린에 사는 한 농부가 트랙터를 운전하는 데 방해가 된다며 330파운드(약 150kg)에 달하는 한 비석을 프랑스의 부지니 쉬르 록 쪽으로 2.29m 정도 옮겼다. 국경을 표시하는 이 비석이 옮겨지면서 두 나라의 국경도 바뀌었다. /페이스북 그런데 이 농부가 옮긴 돌은 다름 아닌 프랑스와 벨기에의 국경을 표시하는 비석이었다. 이 비석은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이 패배한 후 1819년에 세워져 200년 동안 프랑스와 벨기에의 국경을 표시하고 있었다. 농부의 무심한 행동 때문에 벨기에의 영토가 약 1000㎡ 넓어졌다고 한다. 이 비석이 옮겨졌다는 사실은 이 지역 아마추어 역사가가 숲속을 걷다가 우연히 발견해 세상에 알려졌다. 국경이 바뀌었지만 두 나라에선 심각한 외교 분쟁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두 도시의 시장은 오히려 재미있는 사건이라며 웃음으로 반응했다.   데이비드 라보 에르클린 시장은 프랑스 TV채널 TF1과 인터뷰에서 웃으며 “우리 영토가 넓어져 행복하지만 프랑스 시장은 동의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우리 의도는 벨기에를 더 크게 만들고 프랑스를 더 작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라며 “원래 국경으로 되돌릴 것”이라고 했다.   프랑스 부지니 쉬르 록 시장도 “우리는 새로운 국경 전쟁을 막아야 한다”는 재치 있는 농담으로 받아넘겼다. 벨기에 당국은 국경의 원상회복을 위해 농부에게 원래 위치로 돌려놓으라고 요청할 계획이다. 농부가 이에 응하지 않으면 1930년 이후 한 번도 열리지 않았던 프랑코-벨기에 국경위원회가 열릴 수 있고, 농부는 형사 고발을 당할 수 있다고 BBC는 전했다.
7887    시인 최기자/ 소설가 허련순 댓글:  조회:1929  추천:0  2021-05-03
라는 이름으로 죽음을 살아낸 시인 (ZOGLO) 2021년4월16일    - 시인 최기자선생님을 만나다   허련순   그때는 그랬다. 기회만 있으면 최기자선생님을 졸졸 따라 다녔다. 문학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작가가 되고 싶었던 철없던 시절이였다. 고중을 졸업하고 귀향하여 신풍촌에 내려왔던 1972년 그해,  나는 대대 문예선전대에서 문자창작을 전담하시는 최기자선생님을 알게 되였다. 당시 그가 창작한 노래“공사벌에 풍년이 왔네”,“풍년 모를 어서 내세”가 연변인민방송국 매주일가로 불리워지면서 전 주 농민들의 애창가곡으로 되였다. 그 이후로 선생님은 신풍대대의 전설적인 인물이  되였다.     시인 최기자 작가지망생이였던 내가 글쓰는 사람을 마주한 것은 최기자선생님이 처음이였으니 그가 최초의 나의 문학선생이였던 셈이다. 그리고 최기자선생님과 합작으로  재담 와 를  연변문예에 발표하게 되였는데  이는  거의 기적이였다.  당시 나의 상황으로 볼 때 혼자의 힘으로 작품을 내기에는 너무 미숙했기 때문이다. 두 작품 모두  선생님께서 혼자 쓰다싶이 하고 나는 고작 아이디어 몇개 보탠것 뿐인데 선생님은 워낙 스케일이 크고 통이 크신 분이라 아낌없이 옆자리를  내여준 것이다.   신풍이란 곳은 선생님과 나에게 최초로 문학의 열정을 발원하고 유지시켜준 문학의 메카였다.  우리는 사제관계로 몇년을  신풍에 있다가 1976년  대학을 가면서 헤여졌고  그후 선생님은 시와 수필을 쓰시고 나는 소설을 쓰면서  서로 다른 길을 가게 되였고 다른 공간에서 자신의 문학창작에  열중하면서 같은 시간을 많이 공유하지  못했다. 많은 세월을 한번도 잊은 적은 없지만  잊은 듯이  살아왔다.  늦었지만 이렇게나마 선생님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할 수 있게 되여  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는 누구인가.   선생님은 1947년에 연길에서 태여나 1966년 연변제1고중을 졸업하고 지식청년으로 연집공사에 하향하여 이삼년간 농사일을 하다가 24세에 신풍촌 박씨 총각과 결혼하였다. 이미 칠십이 넘었지만 여전히 소녀처럼 순수하고 흥이 많고  뜨거우신 분이다. 시도 잘 쓰지만 수필이나 소품 등 연극쪽에도 일가견이 있다. 그런데다 노래도 잘하고 춤도 잘추고  북이나 새장구도 잘 친다. 그리고 주패나 화투 마작도 잘 놀고 지어 낚시도 잘한다. 낚시시합에서 남자들을 젖히고 일등을 하여  상을  받은 적도 있다. 술도 잘 마시고 돈도 잘써 한량 같지만 비리를 보면 참지 못하고 어려운 사람을 보면 베풀 줄 아는 문단의 의리파 왕 언니다.     갓 태여난 아기를 업고 문학쎄미나에 다녔던 열혈 문학녀성이였고 아이 둘을 낳은 후에  대학공부를 한 배짱있는 에너지 메이커였다. 나는 가끔씩 선생님께서 조선시대에 태여났더라면 황진이 못지 않은 절세가인이 되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군 했다. 물론 그러고도 남았을 것이다.    늘 밝고 유쾌하셔서 가슴이 파랗게 멍들고 구들장처럼 새까맣게 타들어갔던 힘든 시간이 있었으리라고 상상하는 사람은 드물다. 마흔다섯의 젊은 나이에 선생님은 너무 갑작스럽게 남편을 잃었다. 아프다며 걸어서 병원에 들어갔던 남편이 이틀만에 죽음으로 돌아왔다. 미처 손써볼 새도 없이 무방비상태에서 너무  맥없이 무력하게 죽음을 떠안게 된 것이다. 영원처럼 살것 같았는데 죽음이 이렇게 시시하게 도래할 줄을 미처 몰랐다. 그야말로 에 참담할 뿐이였다.    남편과 함께 남편이 그에게 남겨준 유산은 스물여섯에 청상과부가 된 시어머니와 아직 어섯눈도 뜨지 못한 어린 두 자식이였다. 거짓말 같은 이 갑작스러운 죽음을 그는 감히 믿을 수 없었고 현실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하여  남편이 입었던 를 지금도 옷장의 깊은 곳에 보관함으로서 그의 존재를 잊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코트 한자락으로 남편의 췌취를 느끼고저 한 것인지, 아니면 그렇게 해서라도 남편의 죽음을 부정하고 싶었던 것인지 모를 일이다.    죽음의 미학에 대한 역설   인간에게 피할 수 없는 근원적 공포는 바로 죽음이다. 죽음의 부정을 쓴 아니스트 베커의 주장에 따르면 ‘인생의 의미’라는 가치는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인간이 만들어낸 자의식에 불과하다. 그것은 혼신을 다해 다른 사람이 되려는 욕망을 가지게 한다. 이는 살아남기 위한 뇌의 꼼수가 아니면 자아기만일지 모른다.         선생님이 그랬다. 불행하고 슬펐던 자신의 삶을 시에 의존한 채 자신은 완벽한 타인이 되여 자신을 닮은 슬픈 시들을 태연하게 바라보군 하였다. 시가 오히려 그의 진실이였고 그는 그저 시의 피조물일 뿐이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간신히 길게 휘여진 자신의 시간들을 빠져나올 수 있었고 비로소 숨을 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고보면 자기 자신을 리해하기 위해 다른 타자를 지어낸다는 행위가 전혀 이상하거나 모순되여 보이지 않는다.    선생님은 가을에 마른 꽃에서 씨를 받듯 슬픔을 시로 담아내면서 빛을  얻어냈다고 말한다. 그에게 시가 있은 것은 다행이였다. 그의 시는  죽음 역시 하나의 생명현상이고 생명의 또 다른 이름으로 불리워지는 삶의 과정일 뿐이라는 어떤 역설로 읽힌다. 그리하여 죽음은 한낮의 그림자처럼 늘 그의 삶과 동행하고 그의  삶과  밀착되여 함께 자고 함께 깨여나군 하였다. 죽음과 삶이 한 공간에서 함께 공존한 셈이다.    바로 시 는 죽음이란 삶의 한가운데 있다는 역설로서 인간의 실존을 증명해낸 철두철미한 죽음의 미학이다.      차마 티없이 말끔히 버릴수 없어/ 남몰래 살려둔 주인 잃은 코트/ 님의 코트/옷궤 깊은 곳에서/ 이십여년을 자고 있습니다./ 너무 쉽게 췌취가 날아 날것 같아 /무시로 깨워보고 싶지만/ 함부로 건드릴수 없는 코트/ 잠자는 코트는 나를 깨여나라 하고/ 깨여있는 나는 이십여년을 자고있습니다./    잠자는 코트가 살아있는 자를 깨여나라 하고 깨여있는 자가 오히려 자고 있었으니 코트가 산자인지 살아있는 사람이 죽은 것인지, 산자와 죽은자의 구별이 없다.  인간의 존재조건인 고독과 죽음의 문제, 삶의 본질에 대한 신랄한 풍자이며 소스라치는 역설이다. 이 시는 시인이 자신의 삶으로 시란 무엇인지를 보여준 대표적 작품이다.     시어머니(왼쪽)와 친정엄마를 모시고~ 선생님은 남편의 이야기를 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항상 밝고 씩씩하던 분의 이런 모습에 저으기 놀랬다. 울컥하면서도 한편 낯설고 당황했다. 잊을 만큼 긴 시간이 지났는데도 무엇이 여전히 선생님을 이리 서럽게 하는 것일가. 당해보지 못한 사람이  그 마음을 어찌 알랴만  짐작으로 류추해 보았다. 남편이 없다는 사실 때문에서가 아니라 세월이 지날수록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남편의 그 뜨겁던  온기를 다시 만질 수도 느낄 수도 없다는 사실이 안타깝고 허무했을 것이고  남편의 죽음으로 바뀌여버린  자신의  외롭고 괴로웠던  그 지난 삶이 너무 억울하고 한스러웠을 것이다.  이 먹먹하고 아릿한 낯선 감정에 망설이다가 나도 그예 고개를 숙이며 눈물을 훔쳤다. 너무 고생하셨구나, 그런 말이 목구멍으로 꾸역꾸역 올라왔지만 토설하지 않고 꾹꾹 내리 눌렀다. 오래될수록 잊을 수 없는 이런 슬픔이야말로 문학을 하고 있는 우리가 영원히 간직해야 할 슬픔일 것 같았다.       언젠가는 자식들을 불러 그들이 보는 앞에서 남편의 를 태우겠다고 선생님은 선언처럼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이제 남편을 옷장에서 영영 떠나보내려고 준비하는 것 같기도 하고 오히려 이미 떠나가신 남편의 존재를 자식들에게 더욱 각인시켜 영영 붙잡고 있고 싶어하는 것 같기도 하였다. 죽음이란 결국 쉽게 놓을 수도 없고 잡을 수도 없는 우리의 영원한 아쉬움인 것을 선생님을 통하여 나는 더 깊이 절감하였다.     기다림의 미학에 대한 역설    그의 시는 늘 무언가 기다리고 있는듯 아련하다. 그리고 목마름의 갈증과 겨불내나는 안타까움이 있다. 대체 그의 시는 무엇을 기다리며 무엇을 기다려내려고 하는 것일가? 일찍 잃어버린 사랑과 그로하여 채워지지 않는 영원한 결핍이 채워지기를 기다리는 것일가? 아니면 또다른 사랑이 환수 되기를 기다리는 것일가? 기다림이란 인간 삶의 영원한 본질이다. 세상의 인연을 다 놓으면 기다리는 일도 하지 않게 된다. 삶이란 그렇게 무엇인가 기다리는 일이다. 시간이 지나면 아픔도 잊혀지겠지, 그리고 래일이면 오늘보다 형편이 더 나아지고 행복해지겠지, 그런 기다림으로  우리는 힘들어도 래일을 기다린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우리가 미래라고 희망이라고 생각하는 그것들을 기다리고 있는 동안 우리는 결국 매일매일 지나가는 시간속에서 삶과 멀어진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을  살만하니 죽는다고 애달파한다. 삶 자체가 이처럼 기만적이다. 이 대체 불가능한 기다림이야말로 세월을 거슬릴 수 없는 인간의 운명에 대한 역설이다. 이런 역설 때문에 선생님의 은 보는 사람들을 숙연해지게 한다. 그의 이야말로 상처받은 삶에서 나온 깊은 성찰 이며  사랑받고 싶고 위로받고 싶고 녀성이고 싶은 선생님의 강렬한 의지와 소원이 아닐가 싶다.   2019년  '시향만리'문학상 본상 수상 그의 시에는 남편을 잃은 젊은 녀인의 외로운 기다림이 있는가 하면 손녀를 업고 가마솥뚜껑을 안고 졸면서 며느리를 기다리는 시어머니의 기다림이 있고 기저귀를 바꿔주기를 기다리는 친정어머니의 기다림이 있다. 그리고 죽은자의 코트가 기다리고 있다. 기막힌 일이다. 도대체 죽어서도 기다려야 하는 이들의 기다림은 무엇일가? 영원한 결핍이라고 하면 어떨가? 결핍이란 죽을 때까지 채워지지 않는 욕망이다.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 것을 기다릴 수 밖에 없는 우리의 인생은 역설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인간의 문학은 반복되고 그속에서  인간의 력사는  살아남는 것이다.    그래서 우직하게 다시 기다림이란 무엇인지 묻고 싶어진다. 니체의 말을 빈다면 가만히 있는 것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열매를 기다리는 사람은 씨앗을 심는 것이고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사람은 문을 두드리는 것이라고 한다. 즉 기다림이란 다가오지 않는 것에 다가가기 위한 노력이다. 선생님께서 강가에서 낚시대를 드리우고 있는 것은 고기를 낚기 위해서만이 아니였다. 확실하다고 믿어오던 것들이 확실치 않는 불안한 존재였음을 알고나서  선생님은 내적인 문을 열어보고 싶었을 것이다. 그렇게 그는 서서히 자신으로 다가가고 있었을 것이다. 결국 기다린다는 것은  자아에 의해 왜곡되고 굴절된 자신의 내면을  살펴보는 시간이며 자신의 상처를 다독이는 시간이고  새로운 자신을  찾아떠나는  시간임을 선생님은 시로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      자유로움의 미학과 역설   플라톤이 지향했던 자유는 각자가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이다. 즉 타인의 가치에 휘말리지  않고 스스로의 가치를 말할 수 있을 때 인간은  능동적일 수 있고 자유롭다.  선생님은 그렇게 사신다. 그래서 자유로운 사람이다. 그의 주장은 기존의 세계에 존재하는 제도나 틀에 묶여있지 않고 스스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것이다. 그의 시적 경향은 순수한 전통시도 아니요 절대적인 현대시도 아니다. 그는 있는 자신만의 독특한 시세계를 구축했다.    그는 한곳에 머물고자 하지 않는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그냥 지나가고 싶어한다. 그런 자유로움이 그의 시와 수필을 만들어냈다. 그래서 그의 시는 다른 사람들의 시와 다르다. 운명을 다 삭여낸, 먹걸리나 잘 삭은 감주처럼 달콤새콤하고 소름끼치는 소스라침이 있다. 그리고  바람의 냄새가 난다. 그는 새처럼 멀리 날고 싶어한다. 그래서 그는 가벼워지고 싶어한다. 거치장스러운 포장이나 장식따위에 관심이 없다. 그의 시는 녀성의 삶 자체다.     등 시들이 대표적이다. 이것이 그가 추구하는 자유로움의 미학이다.   세상이 아무리 심란하더라도 부평초처럼 떠도는 자신에게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신보다 더 심란한 일은 있을 수 없다. 그는 자신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끊임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천기를 루설하듯 시로 수필로 끊임없이 발설해왔다. 거치장스러운 외피는 스스로 실격되고  들리지 않는 침묵의  단단한 설득력이  삶의 처소를 뚫고 불쑥 튀여나오듯 독자들을 강하게 휘여잡는다. 그는 죽음과 존재 사이의 무한한 심연의 바닥을 박박  긁어내여  자신의 삶을 증명해왔다.     모든 삶엔 상처가 있고 아쉬움이 있고 한계가 있고, 남에게 드러내고 싶지 않은 치부도 있다. 완전하지 않은 자기 삶을 드러내는 순간, 남들로부터 동정의 대상이 되거나 최악의 경우 가십거리가 될 수 있음을 잘 알고 있기에 그래서 선생님은 슬픈 내색 없이 그렇게 유쾌하게 사시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슬픔 뒤에 숨지 않았다.  시인은  자신의 삶과 오롯이 대면하는 순간을 겪고 난 이후, 작품의 여기저기서  자신의 아픔을 감추지 않고 보여주었다. 어두웠던 삶의 기억을 회피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대면한 그의 글쓰기에는 삶의 무게와 깊이를 담은 진심이 있다.  그리고 살갗을 후벼파는 예리함과  떨림이 있고 소름이 돋는 감동이 있다. 그동안 선생님은 시집 , , 수필집 < 기다림의 아름다움> 등 작품집을 출간하였으며 연변일보해란강문학상, 연변 “두만강여울소리” 시탐구회 우수상 4차, 연변 “시향만리”문학상, 전국가요콩쿠르상, 한국 대성약품주식회사 “대성상” 등을 수상하였으며 중국조선어문잡지사에서 “공로패”, 연변단풍수필회에서 “감사패”를 받았다. 선생님께서는 연변대학을 졸업하고 연길시5중에서 근무하다가 중국조선어문잡지사에 전근한 뒤 부주필, 편십으로 일하셨으며 퇴직후 연변대학 조선어한국학 학원에서 10년간 초빙교수로 한국어 강의를 하였다.   혼자의 힘으로 아들딸을 대학생으로 반듯하게 키웠고 남편 없이 시어머니를 9년이나 모셨다. 시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자기손으로 시어머니의 염을 다 하였고  손수 명정의 글을 써 올렸다. 무슨 힘으로 이런 일들을 할 수 있었을가? 듣는 사람이 가슴이 떨렸다. 아들 하나만 믿고 청춘과부로 의절하고 외롭게 사시다 그 아들마저 앞세우고  살아있는 것을 죄스럽게 생각하며 고독하게 사시다가 이제 사랑하는 아들을 만나려 가는 시어머니를 곱게 보내드리고 싶었다고 했다. 그리고 같은 녀인으로서 같은 삶을 살아온 시어머니의 삶을 리해하고 싶었고 그래서 자신의 손으로 모든 것을 직접 해드리고 싶었다.  그저 그뿐이라고 하였다.    무슨 말을 더 하랴. 선생님은 젊어서도 그랬지만 나이를 드셔도 여전히 사랑이 넘치는 향기로운 녀인이였다. 잡생각으로 마음이 흔들릴 때면 시를 쓰는 것이야말로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는 일이라며 다잡군 한다고 하였다. 그 말이 유효하는 시간 동안 선생님은 시쓰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 살아 온 날들로  살아갈 날들에게 꾸준히 새로운 질문을 해갈 것이며 선생님의 무늬를 닮은 시를 한수 한수 적어갈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선생님에게 봄날 같은 따뜻한 사랑이 찾아오기를 빌면서 이 글을 맺는다.                                  2021. 2. 3  (연길에서) 글 2021년 2호/사진 제공 
7886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고구마혁명",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2378  추천:0  2021-04-28
“기후변화·식량부족 대안은 고구마”... 사막화 경계지역에 심었더니... 신2021.04.28.    좋아요 훈훈해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한국생명공학연구원 곽상수 박사팀 환경 스트레스에 강한 구황작물 주목 생산성 탁월·오염된 토양 복원효과도 네이멍구서 유전자변형 고구마 재배 성공곽상수 박사 연구팀이 실험실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한국생명공학연구원 제공] “앞으로 기후변화와 식량부족이 코로나19보다 더 심각하게 인류를 위협할 것으로 전망되는 가운데, 고구마가 유력한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곽상수 한국생명공학연구원 박사는 환경오염과 식량부족 문제 관련, 대표적 식용작물 중 하나인 ‘고구마’가 해답을 제시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현재 전 세계 육지 가운데 약 3600㎢가 사막 또는 사막화 지역으로 분류된다. 또한 매년 5~7만㎢의 땅이 추가로 사막화가 진행되고 있다. 이 같은 사막화는 경작지 감소, 생태계 붕괴, 그리고 황사 같은 대기오염을 유발하는 인류 공통의 과제다. 특히 UN 식량농업기구에 따르면 오는 2050년 세계 인구는 약 97억명에 도달, 전 세계적 인구과잉 현상으로 인해 발생하게 될 식량부족 현상도 매우 심각해질 것으로 전망된다. 국내도 안심하지 못할 상황이다. 국내 곡물자급률은 1960년대 90%에서 현재 21%로 급락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상황에 고구마가 어떻게 해결책이 될 수 있을까. 고구마는 사막과 같은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면서 식용은 물론 판매를 통한 부가가치 창출이 가능하다. 특히 옥수수, 감자 등 다른 작물보다 단위면적 당 탄수화물 생산성이 탁월하며, 항산화 물질과 식이섬유가 풍부한 구황작물이다. 곽 박사는 기후변화로 발생하는 사막화와 식량 위기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한 뒤 지난 1995년부터 28년 동안 환경 스트레스에 강한 고구마 연구에만 매달려 왔다. 이 같은 이유에서 일명 ‘고구마 박사’로 불린다. 곽 박사 연구팀은 현재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면서 식용은 물론 판매를 통해 부가가치 창출까지 가능한 고구마를 무기로 사막화 방지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고구마를 사막화 경계지역에 심으면 주민들의 빈곤을 개선하면서 사막화 진행도 차단하는 일거양득의 효과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연구팀은 최근 기존 고구마에 들어있는 단백질보다 기능이 월등히 향상된 신규 오렌지 단백질(IbOr-R96H) 개발에도 성공했다. 연구팀은 고구마 오렌지 단백질 유전자를 고구마, 감자, 알팔파(콩과 사료작물)에 도입, 카로티노이드를 많이 생산하고 건조, 고염분 등 스트레스에도 강하다는 사실을 재확인했다. 연구팀은 중국 네이멍구(내몽고) 쿠부치 사막과 카자흐스탄 남부지역 알마티 등 척박한 토양에 유전자 변형 고구마를 심어 재배에 성공해 타당성과 효용성을 입증하기도 했다. 알마티 지역에서는 국내 생산량(20t) 보다 많은 1헥타르(ha) 당 약 38t의 고구마를 생산했다. 특히 알마티 지역에는 중금속인 납에 오염된 토양이 많다. 산화스트레스를 잘 견디는 고구마를 심으면 중금속오염 확산을 막아주고 10~20년 지나면 오염된 토양이 옥토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점도 주목해볼 만하다. 곽 박사는 “고구마는 모든 부위를 이용할 수 있고 항산화성분, 식이섬유, 칼륨 등이 많아 최고의 건강식품으로 평가된다”며 “유전자 변형을 통해 건조지역, 고 염분 지역, 환경 오염 지역 등 재배지의 환경에 최적화시키면 그 효과가 극대화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연구팀은 고구마 대량재배의 걸림돌로 작용했던 기존 25㎝의 종묘를 5㎝로 줄인 뒤 꽃이 피면 전용 이양기로 밭에 바로 심을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해냈다. 이 방법을 활용하면 노동력 투입을 줄이고 생산효율을 극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 연구팀의 설명이다. 곽 박사는 “중국 카자흐스탄 중동 북아프리카 등 환경조건이 열악한 사막화 지역에 유전자 변형 고구마를 대량 재배하는 것이 최종 목표”라면서 “현지 농업회사와 협력을 진행하고 있으며 국내 기업과 합자회사를 만들어서 고구마 대량생산에 나설 계획”이라고 말했다. 한편 곽 박사는 환경 스트레스에 내성을 갖도록 형질을 전환해 방풍림(防風林)으로 최적화시킨 포플러나무의 효용성에도 주목하고 있다. 강한 환경재해 내성에 더해 물이 희박한 곳에서도 매년 40~100㎝ 성장할 수 있는 품종 개발을 마쳤다. 곽 박사는 “고구마와 포플러를 사막화 경계지역에 심으면 사막화와 황사 예방효과가 클 것”이라고 전했다. /구본혁 기자
7885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문화유산모으기",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2561  추천:0  2021-04-28
이건희 회장 유언 뭐였길래…  2021.04.28.    좋아요 훈훈해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서울=뉴시스]박주성 기자 =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25일 별세했다. 향년 78세. 이건희 회장은 1942년 1월9일 대구에서 고 호암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이병철 회장이 타계한 이후 1987년 12월 삼성그룹 회장 자리에 올랐다. 이후 반도체 사업 등을 잇달아 성공시키며 글로벌 무대에선 다소 뒤처지던 삼성전자를 명실상부한 세계 초일류 기업으로 키워냈다. 사진은 1993년 신경영 선언 당시 사진. (사진=삼성전자 제공). 2020.10.25. photo@newsis.com[서울=뉴시스] 최희정 기자 = 고(故)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유족들이 사상 최고 수준의 상속세를 납부하는 동시에 의료 공헌과 미술품 기증 등의 사회환원을 실천하기로 했다. 28일 재계에 따르면 이재용 부회장을 비롯해 유족들은 이 회장이 남긴 삼성생명, 삼성전자, 삼성물산 등 계열사 지분과 부동산 등 12조원 이상을 상속세로 납부할 계획이다. 유족들은 미술품 기증, 상속세 납부와 별도로 감염병 극복과 소아암·희귀질환 치료에 사용해 달라며 1조원을 기부하기로 결정했다. 다음은 이건희 회장의 생전 주요 어록. [사회공헌 관련] ◇취임사 (1987년) "국가경제 발전에 기여함은 물론 지금 사회가 우리에게 기대하고 있는 이상으로 봉사와 헌신을 적극 전개할 것입니다." ◇언론 인터뷰 (1988년5월) "상속세는 정직하게 계산을 해야지요. 선친께서는 '살아 생전에는 절세도 하고 낭비를 줄여 부를 축적해야 하나, 사람의 최종 마무리는 상속세로 나타난다'고 말했습니다. 국민이 납득할 세금을 내라고 했습니다." ◇이병철 선대회장 10주기 추모식 (1997년) "유가족은 앞으로 선친의 철학과 이념을 계승 발전시켜 나가는데 한 뜻으로 힘을 합쳐 나갈 것입니다. 기업이 국민경제에 공헌하고 사회발전에 기여해야 한다는 선친의 염원대로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데 앞장서겠습니다." ◇언론 인터뷰 (2000년7월) "항상 남과 더불어 살고 있음을 잊지 않으려고 합니다. 자신과 가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사회와 더불어 함께 사는 상생의 정신으로 기업을 꾸려 나가야 될 것입니다." [서울=뉴시스]박주성 기자 =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25일 별세했다. 향년 78세. 이건희 회장은 1942년 1월9일 대구에서 고 호암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이병철 회장이 타계한 이후 1987년 12월 삼성그룹 회장 자리에 올랐다. 이후 반도체 사업 등을 잇달아 성공시키며 글로벌 무대에선 다소 뒤처지던 삼성전자를 명실상부한 세계 초일류 기업으로 키워냈다. 사진은 1987년 회장 취임식 사진. (사진=삼성전자 제공). 2020.10.25. photo@newsis.com◇신년사 (2001년1월) "우리 삼성은 사회와 함께 하는 기업시민으로서 더불어 사는 상생의 기업상을 구현해야 합니다. 소외된 이웃에 눈을 돌리고 따뜻한 정과 믿음이 흐르는 건강한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것은 선도기업인 우리의 책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언론 인터뷰 (2001년7월) "사회적 요구에 관심을 갖고 사회와 더불어 발전하는 것이 기업의 또 다른 책임입니다. 저는 이것을 기업의 '보이지 않는 책임'이라고 여기고,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습니다." ◇신년사 (2004년1월) "한층 무거워진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어려운 이웃을 돕고 그늘진 곳을 보살피는 데 우리의 정성과 노력을 기울이는 한편 협력업체와는 한 배를 탄 공동체의 관계를 더욱 발전시켜 나가야 하겠습니다." ◇신년사 (2005년1월) "삼성의 성과는 고객과 사회의 도움이 있기에 가능했음을 인식하고 화합과 상생의 시대를 맞아 이웃과 함께 성과를 누리는 나눔 경영을 확대해 나가야 합니다. 어려운 이웃을 돕고 그늘진 곳을 보살피는 데 우리의 정성과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신년사 (2013년1월) "어려운 이웃, 그늘진 곳의 이웃들이 희망과 용기를 가질 수 있도록 사회공헌 사업을 더 활발하게 추진해야 합니다." [의료 공헌 관련] [서울=뉴시스]박주성 기자 =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25일 별세했다. 향년 78세. 이건희 회장은 1942년 1월9일 대구에서 고 호암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이병철 회장이 타계한 이후 1987년 12월 삼성그룹 회장 자리에 올랐다. 이후 반도체 사업 등을 잇달아 성공시키며 글로벌 무대에선 다소 뒤처지던 삼성전자를 명실상부한 세계 초일류 기업으로 키워냈다. 사진은 2011년 선진제품 비교전시회 참관 사진. (사진=삼성전자 제공). 2020.10.25. photo@newsis.com◇어린이집 건설 현장 방문 시(1989년) "5살, 6살 어린이들이 생활할 텐데 가구 모서리가 각이 져서는 안된다. 하루 급식의 칼로리가 얼마나 되느냐?" ◇독일 프랑크푸르트 임원회의 특강 (1993년6월) "우리나라 병원의 문제는 한사람이 입원하면 40명까지 위문객이 몰려오는 데 있습니다. 여기에 대한 해결방안은 병원을 복합화하는데 있습니다. 병원 내에 간호학교는 물론 슈퍼, 대형 주차장, 양로원이 모두 들어서는 복합단지를 구성해야 합니다." ◇삼성의료원 설립에 즈음해 (1994년 11월, 의료원 출입구 벽면) "병들어 고통받는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건강한 마음과 몸으로 기쁨을 찾을 때 삼성은 국민기업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게 될 것입니다." ◇이건희 에세이 中 (1997년) "이제는 더 실질적인 어린이 교육에 소매 걷고 나서야 한다. 어린 자녀들이 더 이상 길거리에서 배회하거나 시간을 때우러 이곳저곳을 전전하지 않도록 좋은 교육 프로그램을 많이 개발하고 여가 시설도 다양하게 만들어줘야 한다." ◇국내 출장 (2003년3월, 보광 휘닉스파크) "국내 암퇴치 활동 현황을 한번 살펴 보자. 돈이 없어 치료도 못 받고, 건강진단을 안하니 암을 조기발견 못하는 경우도 허다할 것이다. 우리가 매년 조금만 내도 많은 사람을 구할 수 있지 않겠는가?" ◇사장단 회의(2010년5월) [서울=뉴시스]박주성 기자 =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25일 별세했다. 향년 78세. 이건희 회장은 1942년 1월9일 대구에서 고 호암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이병철 회장이 타계한 이후 1987년 12월 삼성그룹 회장 자리에 올랐다. 이후 반도체 사업 등을 잇달아 성공시키며 글로벌 무대에선 다소 뒤처지던 삼성전자를 명실상부한 세계 초일류 기업으로 키워냈다. 사진은 2010년 CES 2010 참관 사진. (사진=삼성전자 제공). 2020.10.25. photo@newsis.com"인류의 건강과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은 기업의 사명이다." [미술품 기증 관련] ◇창립 50주년 기념사 (1998년3월) "삼성은 우리 국민, 우리 문화 속에서 성장해 왔기 때문에 우리가 이룬 성과를 우리 사회에 환원하는 일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신년사 (1991년1월) "국가적으로도 전통문화의 계승·발전과 건전한 사회 분위기 조성을 위한 그룹 차원의 노력을 더욱 확대해 나갈 것입니다." ◇프랑크푸르트 회의 (1993년6월) "대한민국의 문화재다, 골동품이다 하는 것은 한데 모아야 가치가 있는 거다. 모든 물건이라 하는 것은 한데 모아야 힘이 나는 거다. 골동품도 10만 명이 10점씩 갖고 있어 봐야 아무 가치가 없는 거다. 철기, 자기, 사화 이런 질 좋은 것들이 1억 점 이상 모여있는 곳이 루브르 박물관이고 대영박물관이고, 미국의 스미소니언이다. 만일 이들 박물관 물건을 전 국민이 서너 점씩 나눠가지고 있다고 생각해보자.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신년 하례식 (1994년1월) "이익을 내고, 배당을 해주고, 남는 자금은 사회환원 및 문화사업을 해야 하는 것이 기업 본연의 자세입니다." [서울=뉴시스]박주성 기자 =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25일 별세했다. 향년 78세. 이건희 회장은 1942년 1월9일 대구에서 고 호암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이병철 회장이 타계한 이후 1987년 12월 삼성그룹 회장 자리에 올랐다. 이후 반도체 사업 등을 잇달아 성공시키며 글로벌 무대에선 다소 뒤처지던 삼성전자를 명실상부한 세계 초일류 기업으로 키워냈다. 사진은 1996년 IOC 위원 선서 사진. (사진=삼성전자 제공). 2020.10.25. photo@newsis.com◇도쿄 출장 (1994년4월) "이제는 문화사업 등으로 국민에게 차원 높은 삼성의 이미지를 심어주는 전략을 써야 한다. 국민에게 좋은 일도 하고 대국민 삼성 이미지도 제고시킬 수 있는 대책을 용역을 의뢰해서라도 마스터 플랜을 수립해야 한다." ◇신년사 (1996년1월) "다가 올 21세기는 문화의 시대이자 지적 자산이 기업의 가치를 결정짓는 시대입니다. 기업도 단순히 제품을 파는 시대를 지나 기업의 철학과 문화를 팔아야만 하는 시대라는 뜻입니다." ◇호암미술관 명품도록 서문 (1996년) "우리나라는 자연과의 친화와 본질적인 미의 추구를 바탕으로 독특한 예술관을 지녀오면서 중국이나 일본 등 주변국가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독창적이고 아름다운 미술품을 남겨 놓았습니다." ◇이건희 에세이 中 (1997년) "상당한 양의 빛나는 우리 문화재가 아직도 국내외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실정인데, 이것들을 어떻게든 모아서 국립박물관의 위상을 높이려는 노력이 부족하다는 느낌이 든다. 보통 사람들의 일상적인 생활에서 문화적인 소양이 자라나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선진국들처럼 박물관, 전시관, 음악당 등 문화 시설을 충분히 갖춰야 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 문화의 우수성, 민족의 잠재력을 재인식해야 한다. 한국인 중에 세계적으로 두각을 나타내는 예술가가 많은 것은, 그들이 한국의 전통에 세계적인 것을 보탰기 때문이다.  기업들은 거창하게 '메세나 운동' 같은 것만 찾을 게 아니라 사회 전체의 문화적 인프라를 향상시키는 데 한몫을 해야 한다. 기업 자체가 사회의 일원이고 21세기는 문화 경쟁의 시대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사장단 회의 (2001년8월) "대기업으로서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각 사가 총력을 기울이고 경제회복기에 대비해 성장잠재력을 키우는데 주력하라. 삼성이 손대는 업종은 세계적으로 선진화를 시키는 것은 물론 문화를 바꾸는 정도의 역할을 해야 한다." ◇리움 개관식 연설문 (2004년10월) "문화유산을 모으고 보존하는 일에 막대한 비용과 시간이 들어갈지라도 이는 인류 문화의 미래를 위한 것으로서 우리 모두의 시대적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저와 삼성은 이곳 리움이 전통과 현대, 한국과 세계의 예술이 함께 숨쉬는 열린 문화의 공간이 되도록 정성을 다할 것입니다." /공감언론 뉴시스
7884    [그것이 알고싶다] - 오스카상... 댓글:  조회:2592  추천:0  2021-04-27
사물의 민낯 아카데미 상(오스카 상)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   요약 미국 영화예술과학 아카데미가 수여하는 상으로 전년도에 발표된 미국 영화 및 미국에서 상영된 외국 영화를 대상으로 한다. 오스카 상으로도 불린다.   목차 1927년, 영화 아카데미 협회를 설립하다 아카데미, 명실상부한 세계 최대이자 최고의 영화제 중 하나로 성장하다 아카데미 상, 사실상 미국 영화인들의 집안 잔치이다 할리우드의 자본과 기술력으로 만든 미국 영화의 힘이 곧 아카데미의 영향력 오스카 상, 손에 칼을 쥐고 필름 릴 위에 올라앉은 기사의 형상을 하다 값으로 따질 수 없는 고귀한 상이 된 오스카 상 오스카, 베티 데이비스의 남편을 닮았다는 설 캐서린 햅번 기사 쓰다가 ‘오스카’라 명명했다는 설 신빙성 있는 ‘오스카 삼촌설’ 아카데미, 상업성과 거대 자본으로 비난받지만 진정한 영화인의 축제 영화계 사람들의 냉정하고 공정한 평가로 얻는 아카데미 상의 권위 영화인들의 축제, 아카데미 상의 의미 1927년, 영화 아카데미 협회를 설립하다 1927년 영화사 메트로 골드윈 메이어(MGM, Metro-Goldwyn-Mayer's) 사의 사장인 루이스 메이어는 자택에서 파티를 개최했다. 그리고 이 파티에서 영화 협회의 필요성과 영화인 상을 만들어야 하는 이유를 설파했다. 파티에 참석한 영화인들은 그해 여름 영화예술과학 아카데미를 설립한다. 그리고 이 역사적인 첫 회합에서 36명의 회원들은 아카데미 협회의 설립 취지를 선언하게 된다. 1929년 1회 아카데미 상 시상식 장면 그리고 2년 뒤인 1929년 5월 16일, 할리우드의 루즈벨트 호텔에서 270여 명의 영화 관계자들이 모였다. 제1회 아카데미 상 수상식이 시작된 것이다. 첫 번째 시상식은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아카데미, 명실상부한 세계 최대이자 최고의 영화제 중 하나로 성장하다 그러나 현재의 아카데미 상은 전 세계인이 주목하는 별들의 잔치가 됐다. 전 세계로 생중계되고 할리우드의 코닥 극장은 매년 봄, 전 세계에서 날아온 언론인들과 영화 관계자들로 북새통을 이룬다(2001년부터 코닥 극장은 아카데미 상 전용 시상식장이 됐다). 아카데미 상 전용 시상식장이 된 코닥 극장 처음 20여 명으로 시작한 심사 위원회는 2011년을 기준으로 3천여 명으로 늘어났고, 수상 부문도 25개로 늘어나게 됐다(아카데미 회원들의 전원 투표로 수상작이 결정된다). 아카데미는 명실상부한 세계 최대, 최고의 영화제 중 하나로 성장한 것이다. 아카데미 상, 사실상 미국 영화인들의 집안 잔치이다 엄밀히 말하면 아카데미 상은 미국 영화인들의 집안 잔치일 뿐이다. 미국 영화사에서 만든 상이기도 하지만 아카데미 상 수상 조건을 보면 이는 더 확실해진다. 전년도 1월 1일부터 12월 31일 사이에 LA 지역의 극장에서 1주일 이상 연속 상영된 70밀리 및 35밀리의 미국 및 외국의 장편ㆍ단편 영화를 대상으로 한다. LA 극장 즉, 아카데미 상에 도전하고 싶다면 LA에 극장을 잡고 1주일 이상 상영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칸이나 베를린 영화제에서 이름을 날리더라도 LA에서 상영이 안됐다면 후보군에도 이름을 올리기 힘들다. 할리우드의 자본과 기술력으로 만든 미국 영화의 힘이 곧 아카데미의 영향력 전 세계 영화시장을 쥐락펴락 하는 할리우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상이 전 세계인의 주목을 받는 이유는 뭘까?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바로 할리우드의 힘 때문이다. 전 세계 영화시장을 쥐락펴락 하는 할리우드의 자본과 기술력은 곧 ‘외국 영화는 미국 영화’라는 공식을 만들 정도다. 이런 미국 영화의 힘이 곧 아카데미의 영향력이 된 것이다. 오스카 상, 손에 칼을 쥐고 필름 릴 위에 올라앉은 기사의 형상을 하다 그리고 이 영향력의 정점에 서 있는 것이 오스카 상이다. 오스카 트로피는 1928년에 처음 고안되었는데 디자인은 당시 MGM 사의 미술 감독 세드릭 기본즈가 담당했다(기본즈는 자신이 디자인한 상을 후에 11개나 타게 된다). 그는 몇몇 미술가들에게 디자인을 제출하게 했고 그 중 가장 나은 작품을 선정했다. 그 결과로 나온 것이 LA에 사는 조각가 조지 스탠리의 트로피였다. 조각가 조지 스탠리와 트로피 손에 칼을 쥐고 필름 릴 위에 올라앉은 기사의 형상(이 필름 릴 다섯 개는 초창기 시상 분야였던 배우, 감독, 제작, 기술, 각본의 다섯 개 분야를 상징한다)인 아카데미 상은 기본즈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곧바로 조지 스탠리의 오스카 트로피가 채택됐고 원형에서 거의 변하지 않고 이제껏 계속 사용되게 된다(중간에 필름 통을 높이는 정도의 변화만 있었다). 값으로 따질 수 없는 고귀한 상이 된 오스카 상 그러나 재료의 변화는 있었다. 초창기에는 청동으로 제작했다가(청동의 단단함을 고려했던 것이다) 석고로 제작하기도 했다. 그러던 것이 지금은 금칠을 한 합금을 사용한다. 주석과 구리 등이 들어간 합금에 24K로 도금한 높이 34.5cm, 무게 3.4kg인 오스카 상의 가격은 얼마일까? 아카데미 측은 지금도 원가를 공개하지 않고 있다. 그저 “값으로 따질 수 없는 고귀한 상이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2016년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은 브리 라슨 그러나 오스카 상의 경제적 효과는 분석할 수 있다. 일단 이 상의 후보로만 지명돼도 2,000만 달러의 추가 수입을 얻을 수 있고 작품상 트로피의 가격은 2,700만 달러, 주연상 트로피는 500만 달러의 경제적 가치가 있다는 주장이 있다. 오스카, 베티 데이비스의 남편을 닮았다는 설 왜 아카데미 상을 오스카(Oscar) 상이라고도 부를까? 오스카라는 사람이 이 상을 만들어서? 오스카라는 배우가 이 상을 최초로 수상해서? 그 어느 것도 정답이 아니다. 솔직히 말하면 오스카 상이란 이름이 어떻게 붙었는지에 대한 명확한 설명은 어렵다. 그 누구도 오스카라는  이름이 어떻게 붙었는지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다만 유력한 설은 있다. 두 차례나 아카데미 상을 탄 명배우 베티 데이비스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스칼렛 오하라 역을 맡을 뻔했다. 다양한 로맨스 영화에 출현했던 그녀로부터 오스카 상이라는 이름이 시작되었다는 설이 있다. [출처 : The Petrified Forest trailer] 오스카의 명명(命名)을 둘러싼 이야기 중 가장 신빙성 있는 것은  세 가지 정도로 압축할 수 있다. 첫번째 설은 베티 데이비스의 남편설이다. 두 차례나 아카데미 상을 탄 명배우 베티 데이비스(영화 에서 스칼렛 오하라 역을 맡을 뻔했다)가 트로피를 뒤에서 바라보니 첫번째 남편이었던 해먼 오스카 넬슨과 꼭 닮아서 오스카라고 말한 게 시초가 되었다는 설이다. 캐서린 햅번 기사 쓰다가 ‘오스카’라 명명했다는 설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4번 수상한 캐서린 헵번오스카 상의 이름을 만든 또 다른 설의 계기가 되었다. [출처 : Metro-Goldwyn-Mayer] 두번째는 할리우드의 칼럼니스트인 시드니 스콜스키와 관련된 설이다. 1934년, 제6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으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캐서린 헵번에 관한 기사를 쓰던 중 아카데미 상을 계속 ‘그 상’이라고 쓰는 것에 염증을 느낀 스콜스키가 ‘오스카’라고 명명했다는 것이다. 신빙성 있는 ‘오스카 삼촌설’ 세번째는 가장 널리 알려져 있고 앞의 두 가지 설보다 훨씬 더 신빙성이 있는 것으로 인정받고 있는 ‘오스카 삼촌설’이다. 아카데미 협회의 도서관 직원이던 마거리트 헤릭 여사가 도서관 책상 위에 놓인 황금 상을 보면서 이렇게 외쳤다. “오스카 삼촌이랑 어쩜 이렇게 꼭 닮았을까?” 마침 이 외침을 지나가던 신문기자가 듣고 다음 날 칼럼에 언급하면서 오스카라는 명칭이 굳어졌다는 것이다. 아카데미, 상업성과 거대 자본으로 비난받지만 진정한 영화인의 축제 보통 영화제를 표현할 때 “영화인의 축제”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 그러나 전 세계를 통틀어 이 영화인의 축제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영화제를 꼽으라면 주저 없이 아카데미를 말할 수밖에 없다. 혹자들은 아카데미의 지나친 상업성과 할리우드 자본력의 영화산업 잠식 등을 말하며 불편한 속내를 내비치고는 하지만, 진정한 영화인의 축제라는 대목에서는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것이다. 영화계 사람들의 냉정하고 공정한 평가로 얻는 아카데미 상의 권위 왜 그럴까? 이유는 간단하다. 아카데미 회원의 선출 방식이 모든 이유를 대변한다. 아카데미 상은 아카데미 회원들의 투표에 의해 뽑힌다. 그러니 아카데미 회원의 면면을 보면 그 상의 성격이 나오는 것이다. 아카데미 회원은 ‘영화 제작에 직접 관여한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다. 할리우드에는 영화 제작에 참여하는 각 직업별 단체가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이런 단체들을 살펴보면 감독협회, 배우조합, 촬영감독협회 등 영화 제작의 주체들이 모인, 영화에 있어서 필수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사람들로 구성돼 있다. 이들 단체에서 나름의 실력을 발휘한 사람들이 아카데미 회원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말 그대로 영화인의 축제란 말이 딱 들어맞는 것이다. 같은 동종 업계 사람들의 냉정하고 공정한 평가가 뒷받침되는 것이 바로 아카데미 상이다. 영화인들의 축제, 아카데미 상의 의미 작게 보면 미국이란 나라만의 잔치일 수도 있는 아카데미 시상식이지만 그 역사와 영향력을 본다면 전 세계 어떤 영화제와 견주어도 전혀 밀릴게 없는 것이(오히려 압도한다는 표현이 더 적합할 것이다) 또한 아카데미 영화제이다. 가장 상업적이라는 비아냥거림을 받지만 영화인의 축제란 수사에 가장 적합한 영화제. 그것이 바로 아카데미 상의 의미다. 관련이미지 25 이미지목록 이전             포스터" data-="" height="60" src="https://dbscthumb-phinf.pstatic.net/4634_000_1/20161103183456888_T5RXRATBM.bmp/ef7_2_5_i2.bmp?type=r100&wm=N" style="border: 0px; max-width: 80px; height: auto; vertical-align: middle;" width="42" />    포스터" data-="" height="60" src="https://dbscthumb-phinf.pstatic.net/4634_000_1/20161103183457187_6KBAWOUQS.jpg/ef7_2_5_i3.jpg?type=r100&wm=N" style="border: 0px; max-width: 80px; height: auto; vertical-align: middle;" width="37" />    포스터" data-="" height="60" src="https://dbscthumb-phinf.pstatic.net/4634_000_1/20161103183457488_ADGLT1OIJ.jpg/ef7_2_5_i4.jpg?type=r100&wm=N" style="border: 0px; max-width: 80px; height: auto; vertical-align: middle;" width="41" />                      이미지목록 다음 이미지 이전 아카데미 시상식 이미지 갤러리 출처: 네이버 영화 [네이버 지식백과]아카데미 상 -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 (사물의 민낯)  
7883    [그것이 알고싶다] - 윤여정과 "선물가방" 댓글:  조회:4305  추천:0  2021-04-27
공식적으론 제작비용 48만원짜리 트로피뿐 마케팅 회사에서 '스웨그 백' 선물로 받아 리조트 숙박·비타민 테라피·지방흡입시술 등 건강 관련 서비스 담겨…'NFT 카드'도 포함 viewer 한국 배우 최초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받은 배우 윤여정이 25일(현지시간) 오스카상 시상식이 끝난 뒤 주로스앤젤레스(LA) 총영사관에서 특파원단과 기자 간담회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윤여정이 오스카상 여우조연상 수상으로 2억여 원 가치의 축하 물품을 받게 된다. 배우 윤여정은 26일 오전 열린 제73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오스카상)에서 한국인 최초로 연기상을 수상했다. 그의 여우조연상 수상은 아시아 배우로는 두 번째다. 그가 이번 수상으로 공식적으로 받게 되는 것은 제작 비용 48만원 수준인 오스카 트로피 뿐이며 상금도 없다. 하지만 윤여정은 감독상, 남우 주조연상, 여우 주조연상 등의 후보들과 함께 선물 가방인 ‘스웨그 백(Oscar Swagbag)’을 받게 된다. 내용물은 수억대의 가치를 지녔으며 구성은 해마다 바뀌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가방은 오스카에서 제공하는 선물은 아니다. 오스카상과 무관한 단체인 엔터테인먼트 마케팅 회사 디스팅크티브 애셋(Distinctive Assets)이 마케팅 차원에서 2000년부터 이 선물 가방을 제공해 왔다. 다수의 매체에 따르면 올해 제공될 '스웨그 백'의 가치는 20만5,000 달러(약 2억2,800만원)로 추정된다. viewer 25일(현지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LA) 유니언 스테이션에서 열린 제93회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여우조연상을 받은 배우 윤여정(74)이 트로피를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연합뉴스 디스팅크티브 애셋 측은 올해 '스웨그 백'과 구성과 관련해 "올해는 '걱정스러운 팬데믹(코로나19) 해'라는 주제로 가방을 구성했다. 우리는 올해 스웨그 백이 단순히 '무료 물품들로 가득찬 가방'이라기보다 더 큰 목적을 갖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길 원했다"고 말했다. 지난해 제공된 '스웨그 백'에는 8만 달러(약 8,900만원) 짜리 럭셔리 크루즈 여행권을 비롯해 순금 펜, 다이아몬드 목걸이, 현관문 제작 이용권, 소변 검사권, 인생 코치 전화 통화권 등이 포함됐다. 지난해 이 시상식에서 '기생충'으로 감독상을 수상한 봉준호 감독도 이 가방을 받았을 것으로 예상된다. 올해에는 건강 관련 용품과 서비스가 다수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구체적으로 숙취를 위한 비타민 테라피(관리), 순금 전자담배, 수면 상태를 기록하는 헤어밴드, 무료 퍼스널 트레이닝(PT), 무료 지방흡입 시술 등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스웨덴의 값비싼 호텔인 '페이터 노스터 호텔' 리조트의 숙박권도 이름을 올렸다. 이 호텔은 섬에 위치한 등대를 9개의 객실을 갖춘 호텔로 탈바꿈한 곳이다. viewer 한국의 배우 윤여정이 25일(현지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LA)의 유니언 스테이션에서 열린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 참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또 지난해 고인이 된 채드윅 보스만을 기리기 위한 NFT카드도 포함됐다. NFT는 비트코인처럼 블록체인 기술을 활용해 디지털 콘텐츠에 별도의 고유한 인식 값을 부여한 것이다. 영상, 그림, 음악 등을 복제 불가능한 디지털 세계의 원작으로 만들 수 있다. 최근 예술가들이 제작에 활발히 참여하고 있으며 거래도 이뤄지기 시작했다. 오스카 수상자로써 윤여정이 받을 부차적인 기회까지 고려하면 혜택은 엄청나게 불어난다고 볼 수 있다. 상을 받은 영화의 높아진 인지도는 엄청난 광고 효과와 함께 극장 수익으로 직결된다. 한 조사 결과 작품상을 받은 영화의 박스오피스 흥행 수입은 평균 1,500만 달러(약 179억원) 늘어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례로 지난해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은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에 이어 아카데미 작품상까지 타면서 전 세계 총 202개국에 수출됐다. 이후 한국 영화에 대한 할리우드 인지도 상승을 비롯해 경제적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를 창출했다. '미나리'는 여우조연상 외에도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남우주연상(스티븐 연)까지 6개 부문 후보에 올랐다. /박신원 인턴기자 =========================/// 조영남 /윤여정  야민 ・ 2021. 4. 20.        조영남 윤여정은 과거 친구로 지내다 결혼을 하고 자녀도 둘이나 두었던 부부사이였습니다. ​ 조영남 외도라던지 조영남 여자 관계 복잡하다는 이야기는 이미 너무 공공연한 사실이기도한데요 둘의 첫만남은 70년대 음악다방에서였다고 합니다. 조영남 노래부르는 모습을 보게된 윤여정은 한국에도 저렇게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있구나 하고 그의 재능에 감탄했었다고 하네요 윤여정 조영남에게 첫눈에 반한건 아니었다고 하죠 뭐 윤여정 결혼을 결심한건 내가 재능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재능이 있는 사람과 결혼했다고는 하지만 사실상 윤여정 미국행을 선택하고 연기를 버릴 정도로 조영남을 사랑했었다고 해요 아는 사람도 없는 미국에서 아들 둘 키워내며 가정에 충실했던 윤여정에 반해 조영남 외도는 결혼 생활동안 두번이나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그 중에서도 조영남 여대생 백모씨와의 외도는 유명하죠 ​ 조영남 백모씨와의 외도는 그냥 지나가는 정도의 외도가 아니었던듯 합니다. 윤여정 외모를 비하하면서 니가 못생겨서 데리고 잘수 없다라는 말을 하는가 하면 조영남 운전기사가 윤여정에게 조영남의 외도에 대해 눈치를 줬고 윤여정이 조영남을 추궁하자 처음에는 다시는 만나지 않겠다고 하고 뭐 여전히 만남은 유지했다고 하네요 윤여정이 이도 눈치를 채자 그래 나 바람피웠다 라고 적반하장으로 나오면서 내가 아빠 남편노릇 다 할테니 사랑방하나만 내달라고 어마어마한 제안을 해왔다고 하네요 ​ 윤여정은 당연히 그럴수 없었고 윤여정 조영남 이혼을 하게 됩니다. 조영남 내연녀와 같이 살자는 제안은 지금같은 세상에서도 충격적인 제안이잖아요 당시 윤여정을 어떻게 생각했던건지 느껴지는 대목 ​   조영남 위자료는 실질적으로 5000만원 아들 둘까지 키워야하는 사람에게 공연다니며 돈 쓸어 모았던 조영남이 준 전부였습니다. 아파트 전세값이 5500만원이라 윤여정 어머니가 부족한 500만원까지 보태줘야하는 상황이었다고 하네요 윤여정 이혼한 뒤 생활은 여러 인터뷰들에서 많이 밝혀오셨었죠 참 힘드셨을거에요 지금이야 인식이 이혼한게 무슨 흠이냐 하지만 당시만해도 이혼한 여자가 아이 둘을 키우면서 그것도 방송생활을 하기란 녹녹치 않았습니다. 게다가 윤여정 위자료도 사실 그 당시 그렇게 돈 많이 벌고 미국에서도 운전기사랑 같이 다녔던 사람에게 받은것 치고 게다가 양육까지 윤여정이 하는 상황에 짜도 너무 짰었던것 같네요 당시 언론에는 조영남에게 위자료를 엄청나게 받았다고 알려졌었는데 현실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였네요 이후 여러 방송에서 조영남 이혼 후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죠 조영남 바람핀것 같은 경우는 지금와서 후회한다지만 최근 방송들의 모습을 봐도 쉽게 절제하고 하실수 없는;;; 부분이 아닐까 싶더라고요 ​ 윤여정 미나리 영화 찍은게 여기저기서 상도 많이 받으시고 하는데 조영남 미나리 영화를 개봉하고 첫날에 보셨다네요 윤여정 리즈 시절 미모입니다. 이 당시 패션감각도 엄청 좋으시고 미모도 뛰어나셨던 분인데 늦은 나이에라도 연기력으로 전세계적으로 인정 받으신건 참 너무나 다행이고 자랑스러운 일이지만 조영남과의 만남이 없었다면 더 빨리 피시지 않았을까 하는 안타까움도 같이 드네요 ㅎㅎ   =======================================///     뉴욕타임스 등 미국 언론,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수상 소감 “재미와 감동 줬다” “우리는 각자 다른 역을 연기했고, 서로 경쟁 상대가 될 수 없다” 발언 등도 화제 윤여정 배우가 25일(현지시각)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조연상 수상 소감을 밝히고 있다. 로스앤젤레스/로이터 연합뉴스   윤여정 배우의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수상 소감을 미국 가 최고의 수상 소감으로 꼽는 등 미국 언론과 온라인에서 그의 아카데미 시상식 발언이 큰 화제가 됐다.     는 26일(현지시각) ‘오스카 최고와 최악의 순간들’을 꼽는 기사에서 “윤여정은 앞서 영국 아카데미상 시상식 수상 소감에서 보여준 것과 비슷하면서도 더 익살스러운 활력을 시상식에 불어넣었다”고 평했다. 신문은 그가 영화 제작자이자 자신을 수상자로 호명한 브래드 피트에게 “드디어 브래드 피트를 만났다. 우리가 영화를 찍을 때 당신은 어디 있었냐”고 한 말을 대표적인 익살로 꼽았다.   윤여정은 또 자신의 두 아들을 거론하며 “(여우조연상 수상이) 다 엄마가 열심히 일했기 때문”이라고 말해, 감명도 줬다고 신문은 평했다. 신문은 그가 “내가 운이 더 좋아 오늘 밤 이 자리에 섰다. 아마도 한국 배우에 대한 미국식 환대일지도 모르겠다”고 말함으로써, 보는 사람들에게 재미까지 선사했다고 전했다.   는 윤여정이 앞서 열린 영국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매우 고상한 체하는” 영국인들로부터 받은 상이어서 더욱 뜻깊다고 말해, 이미 최고의 수상 소감을 보여준 바 있다고 전했다.   시사 잡지 은 “윤여정은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또 하나의 트로피를 챙기면서, 왜 자신이 계속 수상을 이어가는지 모두에게 그 이유를 보여줬다”며 “이 배우의 매력적인 수상 소감은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의 하이라이트였다”고 평했다. (CNN) 방송도 윤여정의 수상 소감 주요 대목을 편집한 영상을 홈페이지에 게재하면서 윤여정이 “쇼를 훔친다”고 했고, 도 “윤여정이 최고의 수상 소감을 보여줬다”고 전했다.   트위터 등 온라인에서도 윤여정 배우의 수상 소감 영상은 큰 화제가 됐다. 많은 이용자들은, 그가 글렌 클로스 등 여우조연상 후보에 함께 오른 여배우들에게 “우리는 각자 다른 역을 연기했고, 서로 경쟁 상대가 될 수 없다”고 말하는 영상 등을 공유했다. 한 트위터 이용자는 “윤여정은 수상 소감으로 오스카상을 한 번 더 수상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신기섭 선임기자 =====================/// [앵커] 배우 윤여정 씨가 올해 아카데미에서 여우조연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뤘습니다. 아카데미 연기상을 받은 건 한국 배우로는 처음, 아시아 여성 배우로는 두 번짼데요. 솔직하고 재치 있는 윤여정 씨의 매력에 시상식장은 활기를 띄었고, 미 유력 일간지 뉴욕타임스는 윤여정씨의 수상 소감을 최고의 수상 소감으로 꼽았습니다. 워싱턴에서 금철영 특파원이 보도합니다. [리포트] ["93회 오스카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코로나19 속에서도 이례적으로 배우들이 직접 참석해 진행된 93회 아카데미 시상식. 영화 '미나리'가 6개 부문 후보로 오른 가운데 수상자들의 이름이 호명될 때마다 탄성과 탄식이 동시에 흐르고, ["오스카 수상자는 바로..."] 마침내 여우조연상 수상자의 이름이 불리는 순간. ["여우조연상 수상자! 여정 윤!"] 소녀처럼 얼굴을 붉힌 것도 잠시, 윤여정 씨는 시상자이자 영화 '미나리'의 제작사 대표인 배우 브래드 피트에게 농담을 던지며 순식간에 분위기를 장악했습니다. [윤여정/배우/미나리 '순자' : "브래드 피트, 마침내 만났네요. 내가 털사에서 영화 찍을 때 어디 있었어요?"] 함께 여우조연상 후보로 경쟁한 배우들의 이름을 거론하며 자신은 다만 운이 좋았을 뿐이라고 인사해 이들을 눈물짓게 하더니 브래드 피트의 냄새가 어땠냐고 묻는 한 미국 기자의 질문에는, ["(브래드 피트 냄새는 어땠어요?) 저는 냄새를 맡지 않았어요. 저는 개가 아니거든요."] 재치 있으면서도 뼈 있는 답변으로 응수해 미국 시청자들까지 휘어잡았습니다. [윤여정/배우/미나리 '순자' : "(오스카 수상은) 한순간에 이뤄진 게 아니에요. 저는 오랜 경력이 있고, 한 걸음 한 걸음 제 경력을 쌓아 오려고 노력했거든요. 세상에 펑! 하고 일어나는 일은 없습니다."] 윤여정 씨는 한국 배우로는 처음으로 아카데미 연기상 후보로 지명된 데 이어 수상까지 이뤄냈고, 아카데미 역시 64년 만에 아시아 여배우에게 상을 안기며 새 역사를 썼습니다. 뉴욕타임스는 2021 오스카 최고와 최악의 순간들이란 제목의 기사에서 여우조연상을 받은 윤여정씨를 최고의 수상 소감을 남긴 수상자로 선정했습니다. 제작자 브래드 피트를 향한 재치 있고 뼈있는 농담, 함께 후보에 올랐던 배우들에 대한 예우, 그리고 가족들을 향해 "이게 다 엄마가 열심히 했기 때문이야"라고 언급한 내용들을 일일히 소개하면서 몹시도 건조한 시상식에서 윤여정 씨는 뜻밖의 선물이었다고 평가했습니다. 워싱턴에서 KBS 뉴스 금철영입니다. =============================/// 배우 윤여정이 25일(현지시간)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의 유니언 스테이션에서 열린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서 여우 조연상 트로피를 들고 있다. © AFP=뉴스1 © News1 우동명 기자 (서울=뉴스1) 최서영 기자 = 영화 '미나리'로 제 9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윤여정의 레드카펫 패션이 연일 화제다. 74세의 노장 배우 윤여정의 패션 센스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지난 2013년 SBS 예능프로그램 '힐링캠프'에 출연한 윤여정은 당시에도 남다른 패션 센스를 자랑했다. 이에 MC 이경규는 "윤여정씨가 옷으로 많이 스트레스를 풀고 있다더라"라고 말했다. 당시 최신 유행이었던 데님 스키니진을 입은 윤여정을 본 한혜진 역시 "이 연세에 누가 스키니진을 입겠느냐, 아무나 소화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며 감탄했다.  그러자 윤여정은 "입고 우기고 다니면 소화가 다 돼"라고 말해 폭소케 했다. 윤여정은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김민희가 옷을 잘 입는다. 패셔니스타니까, 김민희에게 '너 먼저 쇼핑을 해라, 너가 먼저 (쇼핑몰을) 돌고 나에게 연락을 해라'라고 말한 뒤 같은 곳에서 똑같은 옷을 (구입한다) 같은 옷 다른 느낌으로 소화한다"고 말했다. 과거 한 방송에 출연해 자신만의 쇼핑 노하우를 전한 윤여정. (SBS 예능프로그램 '힐링캠프') © 뉴스1 1982년생인 배우 김민희와 1947년생인 윤여정의 나이 차는 무려 35세지만, 두 사람은 패션이라는 공통의 관심사를 나누는 사이로 유명하다.  MC 한혜진은 "예전부터 패셔니스타셨다. 핫팬츠가 가장 잘 어울리는 연예인 1위셨다"며 윤여정의 패션에 대한 애정에 감탄했다.  "엣지있는 패션의 비결이 명품이냐, 저렴한 옷들의 앙상블 조합이냐"고 묻는 이경규의 질문에 윤여정은 "(앙상블은) 젊었을 때, 늙으면 좀 아무래도 같은 옷을 입더라도 싸구려를 입으면 사람들이 '저 여자는 저 꼴이야'라고 손가락질한다"며 "명품을 싫어한다고 하는 것도 가식"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나를 위로하는 방법은 명품을 사서 10년 동안 입는다. 그리고 한 번 통 크게 사고 오랫동안 쇼핑을 하지 않는다"고 말해 웃음을 자아냈다. 한편 윤여정은 25일(현지시간) 오후 미국 LA에서 열린 제 93회 아카데미 시상식 레드카펫에서 이집트 출신의 맞춤복 전문 디자이너 마마르 할림의 긴 드레스를 입어 화제를 모았다. 드레스는 검은색에 가까웠지만 빛을 받으면 푸른 빛이 도는 짙은 암청색을 띠며 '다양성'을 상징했다. ========================///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수상 뒤 재치 있는 수상 소감으로 화제를 모은 윤여정 씨가 이번엔 유쾌한 상황극으로 시선을 모았습니다. 오스카 트로피도 내팽개치고 꾸벅꾸벅 조는 영상이 올라왔는데요. 화면 보시죠. 아카데미 시상식이 끝난 후 객석에서 졸고 있는 사람, 윤여정 씨죠. 너무 피곤했던 걸까요? 객석을 청소하던 직원이 바닥에 떨어진 트로피를 찾아 주워들고 윤여정 씨를 조심스레 깨우죠. 윤여정 씨가 비몽사몽 얼굴로 트로피를 들고 다시 잠에 빠져드는데요. 이 영상은 아카데미 공식 인스타그램에 올라온 일종의 상황극 영상입니다. "당신의 오스카를 잃어버리지 말아요, 윤여정(Don't lose your Oscar, Yuh-JungYoun)"이라는 글과 함께 상황극 영상이 올라와 네티즌들의 웃음을 자아냈습니다. 재치 있는 수상 소감에 이어, 코믹한 상황극까지. 윤여정의 유쾌함이 관객들에게 또 하나의 선물이 된 것 같습니다. /YTN  =================/// 가수 조영남이 이혼한 전처 윤여정의 아카데미상 수상 후 언론 인터뷰에서 “바람 핀 남자들에 대한 최고의 복수”라고 한 발언이 거센 후폭풍을 맞고 있다. /KBS1 ‘아침마당’ ‘화요초대석’ 그룹 ‘언니네 이발관’ 멤버이자 작가 이석원은 26일 블로그를 통해 “나이 들면 낄끼빠빠(낄 때 끼고 빠질 때 빠지라는 뜻)해야 한다”며 “무려 34년 전 이혼한 전 남편에게 소감을 묻는 기자들도 이해가 안 가지만 그렇다고 거기에 냉큼 말을 얹는 사람은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고 했다. 이석원은 “그나마 했다는 말도 기가 막힌 게 ‘윤여정의 아카데미 수상이 자기처럼 바람핀 사람에게 최고의 한 방’이라니. 이 사람의 이 태평양보다 더 큰 자아를 어쩌면 좋을까”라며 “복수란 상대가 내 안에서 여전히 의미라는 게 손톱만큼이나마 있을 때의 얘기다. 왜 이 나이 먹은 남자의 한심한 자아를 이 좋은 날 대중들이 견뎌야 하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고 했다. 장성철 공감과논쟁 정책센터 소장은 27일 채널A 방송에 나와 “듣기에 상당히 불쾌했다”면서 “본인의 외도 얘기를 우리가 흥미롭게 들을 필요도 없는 문제였다. 외도를 한 자신을 향한 복수였다고 폄훼하는 것은 경솔하고 부적절한 발언”이라고 했다. 네티즌들도 조영남의 발언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을 쏟아냈다. 조영남 발언이 실린 포털 뉴스 댓글란에는 “윤여정은 당신같은 사람에게 복수하는데 에너지 쓸 사람으로 보이진 않는다” “잔칫날 소금을 뿌리시네” “이혼한 사이면 굳이 언급하지 않는 게 좋아보인다” 같은 글이 올라왔다. 조영남은 전날 윤여정의 아카데미상 수상 소식이 전해진 뒤 언론 인터뷰를 통해 “내 일처럼 기쁜 소식이고, 엄청 축하할 일”이라며 “남들이 보기에 내가 (윤여정을) 언급하는 게 안 좋다고 하고, 부정적으로 보기도 해 조심스러운 것도 사실”이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이 일(윤여정의 수상)이 바람 피우는 남자들에 대한 최고의 멋진 한 방, 복수 아니겠나. 바람 피운 당사자인 나는 앞으로 더 조심(자중)해야지” 등의 발언을 했다. 조영남은 윤여정과 1974년에 결혼해 슬하에 아들 2명을 두고, 1987년 이혼했다. 조영남은 지난 20일 KBS1TV ‘아침마당’의 ‘화요초대석’에 출연해 윤여정과의 이혼에 대해 “내가 바람을 피워 이혼한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조영남은 당시 “왜 애들을 두고 바람을 피웠는지 이해가 안 된다”며 미안한 마음과 사죄할 용의가 있다고 했다. /김명진 기자  =====================/// [앵커] 한국 배우 최초로 아카데미상 여우조연상을 받은 윤여정 씨의 수상 소감에 외신들의 찬사가 이어졌습니다. 소셜 미디어 등 온라인에서도 화제입니다. 이 내용은 로스앤젤레스 이영현 특파원이 전해드립니다. [리포트] ["브래드 피트 씨, 마침내 만났네요. 반가워요, 우리가 영화 찍을 때 당신은 어디 있었나요?"] ["이게 다 엄마가 열심히 일했기 때문이야."] ["오늘 밤 내가 당신들보다 운이 더 좋네요. 아마도 한국 배우에 대한 미국식 환대인 것 같아요."] 뉴욕 타임스는 오스카 최고의 순간 가운데 하나로 윤여정 씨의 수상 소감을 꼽았습니다. 신문은 "매우 딱딱했던 시상식에서 윤 씨는 뜻밖의 선물이었다" 고 전했습니다. CNN은 윤여정 씨를 쇼를 훔치는 사람으로 시사잡지 애틀랜틱도 올해 쇼의 스타는 윤여정 씨였다고 전했습니다. 언론들만의 평가는 아니었습니다. 트위터 등에는 오늘 밤 최고 수상 소감의 우승자, 우아한 겸손과 가벼운 유머를 기발하게 섞었다, 너무 매력적인 소감 등 일반인들의 찬사와 호평이 잇따랐습니다. 수상 직후 기자들과 인터뷰도 화제였습니다. ["(브래드 피트 냄새는 어땠어요?) 난 냄새를 맡지 않았어요. 난 개가 아니거든요."] 다소 무례해 보였던 질문에 비판의 목소리가 나왔고 재치있게 답한 그녀에게는 응원 글이 쏟아졌습니다. 트위터는 시상식 날 하루에 윤여정 관련 트윗이 66만 건 기록됐다고 밝혔습니다. 세계인을 사로잡은 수상 소감은 어디서 나오는지 묻는 말에 윤 씨의 대답은 너무나 평범하고 간결했습니다. [윤여정/여우조연상 수상자 : "입담은 오래 살았잖아요. 제가. 오래 살고 제가 그냥 좋은 친구들 하고 수다 잘 떨어요. 수다에서 입담이 나왔나 보죠 뭐."] 로스앤젤레스에서 KBS 뉴스 이영현입니다. ==================================/// 한국 배우 최초로 오스카상 받은 윤여정 배우에 대해 관심이 이어지는 가운데, 재치 있고 진솔한 수상 소감에 대해 해외에서도 찬사가 쏟아졌습니다. 수상 소감 상을 따로 줘야 한다는 반응과 함께, 많은 언론들이 올해 아카데미 최고 스타로 윤여정 배우를 꼽았습니다. 김영아 기자가 전해드립니다. 미국 뉴욕타임스는 아카데미 기사 대표 사진으로 윤여정 배우를 걸었습니다. [윤여정/배우 (어제,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 브래드 피트, 드디어 만났네요. 우리가 털사에서 촬영할 때 어디 계셨나요?] 몹시 딱딱했던 시상식에서 윤여정은 뜻밖의 선물이었다며 윤 배우의 수상 소감을 시상식 최고 순간 중 하나로 꼽았습니다. CNN은 유머와 감동으로 객석을 쥐락펴락한 윤여정 배우가 시상식의 '쇼 스틸러'였다고 평가했습니다. 영국 언론의 반응도 폭발적입니다. [윤여정/배우 (지난 12일, 영국 아카데미 수상 소감) : 특히, '고상한 척하는' 영국 분들이 알아주셔서….] 더타임즈는 윤 배우가 '고상한 척한다'는 직설 유머에 이어 "이번에도 최고의 연설을 했다"며 "올해 시상식 시즌의 공식 챔피언"이라고 평가했습니다. 해외 영화 시상식 수상 소감은 늘 관심의 초점입니다. 지난해 영국 아카데미에서는 브래드 피트가 영국의 EU 탈퇴를 유머로 표현한 수상 소감으로 큰 화제를 모았습니다. 2015년 미국 아카데미에서는 사회자가 "가장 하얀 밤"이라는 오프닝 멘트로 백인 후보 일색인 상황을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윤여정 배우의 수상 소감에 세계가 열광하는 것은, [(얘들아) 이건 엄마가 열심히 일한 결과란다.] 정곡을 찌르면서도 밉지 않은 독설과 솔직 담백한 유머 뒤에 진심과 배려가 담겨 있기 때문이라는 평가입니다. [윤여정/배우 : 각자 다른 역할을 연기했으니 서로 경쟁 상대가 될 수 없습니다. 오늘은 제가 운이 더 좋은 것뿐입니다.] /sbs 김영아 기자 ==================/// [뉴스데스크] ◀ 앵커 ▶ '미나리'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윤여정 배우는 뛰어난 연기력뿐 아니라 수상 소감으로도 단연 최고였다는 해외 언론들의 찬사가 잇따르고 있습니다. 그녀의 진심 어리면서도 유쾌한 입담에 동료 배우와 전 세계 영화팬들도 뜨거운 반응을 보였는데요. 먼저 박성호 특파원이 취재했습니다. ◀ 리포트 ▶ [윤여정/아카데미 여우조연상 수상] "브래드 피트씨, 마침내 만나서 반가워요. 우리가 털사에서 영화찍고 있을 때 어디 있었어요?" 톱스타이자 '미나리' 제작자인 브래드 피트를 들었다놨다한 유머 감각이 미국에선 연일 화제입니다. 손에 쥔 트로피는 여우조연상이었지만 수상 소감으론 여우주연상급입니다. 뉴욕타임스는 윤여정 배우의 소감을 '뜻밖의 선물'이라며 최고의 수상 소감으로 꼽았고, 시사잡지 애틀랜틱은 그의 수상을 보는 게 왜 그리 즐거운지 보여줬다며 올해 시상식의 스타는 윤여정이라고 콕 집었습니다. 재밌기만 한 게 아니라 진심어린 소감이란 평가도 받습니다. 함께 후보에 오른 동료 배우들에 경외감과 정중함을 표시했다는 겁니다. [윤여정/아카데미 여우조연상 수상] "내가 어떻게 글렌 클로즈를 이기겠어요? 우리 5명의 후보는 서로 다른 영화의 수상자입니다. 서로 다른 역할을 연기했습니다." 그러자 여우조연상 경쟁자인 아만다 사이프리드가 감격한 표정으로 "I love her", '그녀를 사랑해'라고 말하는 입모양이 포착됐고 배우 글렌 클로즈의 팬클럽도 트위터에 "그녀를 사랑해"라고 적어 윤여정 배우에게 찬사를 보냈습니다. 미국 기자의 엉뚱한 질문을 받아친 대목도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윤여정/아카데미 여우조연상 수상] "(브래드 피트와 무슨 대화를 나눴고, 그에게서 어떤 냄새가 났습니까?) 나는 그의 냄새를 맡지 않아요. 나는 개가 아닙니다." 누리꾼들은 '불필요한 질문에 훌륭한 답변'이었다며 이른바 사이다 발언에 열광했고, 영국 BBC방송은 이번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최고의 발언'이었다고 했습니다.  윤여정 배우의 명성이 해외에서 새로울뿐 그녀의 재능까지 새로운 것은 아니라며 연기 경력을 되짚는 기사도 잇따르고 있습니다. 헐리우드라는 저 이름과 한국 영화인의 거리는 확 좁혀졌습니다. 기생충의 쾌거가 정점이 아니라 이제 한국 영화인의 진면목을 세계가 더 눈 크게 뜨고 지켜보게 됐습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MBC뉴스 박성호입니다. ====================================/// [앵커] 윤여정 씨의 당당한 일침에도 환호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시상식에선 윤여정 씨와 브래드 피트의 조합이 유독 주목을 받았는데요. 그러자 윤여정 씨는 "나는 개가 아니다"라는 따끔한 말로 여배우로서의 존재감을 보여줬습니다. 여기에 "오스카 최고의 멘트"란 찬사가 쏟아졌습니다. 그 순간을 김혜미 기자가 전해드립니다. [기자] 수상 직후의 외신 기자회견장, 한 기자가 윤씨에게 트로피를 넘겨준 브래드 피트에 대해 물었습니다. [기자 : 브래드 피트가 시상을 했죠. 세상에! 그와 어떤 대화를 나눴나요? 그에게서 어떤 냄새를 맡았나요? (어떤 느낌을 받았나요?)] 수상자를 앞에 두고, 시상자가 어땠는지 더 큰 관심을 보인 겁니다. 윤여정 씨는 차분하고 유머 있게 받아넘깁니다. [윤여정/배우 : 나는 브래드 피트의 냄새를 맡지 않았어요. 나는 개가 아니에요.] 당당하지만 겸손함도 잊지 않습니다. [윤여정/배우 : 그는 내게도 스타죠. 그가 나를 에스코트 해주고, 내 이름을 불렀다는 걸 믿을 수 없어요.] 전 세계 네티즌들은 "격이 떨어지는 질문에 대한 멋진 한 방"이었다며 환호했습니다. 해당 질문을 한 매체도 이 영상을 유튜브 계정에서 지웠습니다. BBC는 이 순간을 오스카 막후의 결정적 순간으로 꼽으며 "이날 밤, 최고의 멘트였다"고 썼습니다. 뉴욕타임스가 뽑은 '최고의 수상 소감'도 윤여정 씨의 차지였습니다. [윤여정/배우 : 브래드 피트, 드디어 만났군요. 반가워요. 우리가 영화를 찍을 때 어디 있었어요? (수상은) 엄마가 열심히 일한 결과란다.] 몇 주 전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의 수상 소감도 다시 소환됐습니다. [윤여정/배우 (현지시간 12일 /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 : 고상한 척하는 것으로 알려진 영국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았다는 점에서 특히 의미가 있습니다.] 영국 더 타임스는 윤씨를 "올해 시상식 시즌의 공식 연설 챔피언"이라고 극찬했습니다. /김혜미 기자 ==============================/// 올해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는 중국인 감독이 만든 영화 '노매드랜드'가 작품상과 감독상, 여우주연상까지 휩쓸었습니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환호하기는커녕 수상 소식이 제대로 전해지지도 않고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인지, 베이징 김지성 특파원이 보도합니다. [봉준호 감독/지난해 수상자 : 클로이 자오 '노매드랜드', 축하합니다.] 중국 국적의 클로이 자오 감독은 비백인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아카데미상 감독상을 수상한 데 이어, 최고 영예인 작품상까지 거머쥐었습니다. 여우주연상도 자오 감독의 영화가 차지했습니다. 하지만 중국 포털사이트에서는 윤여정 배우의 여우조연상 수상 소식은 찾을 수 있지만, 정작 자오 감독의 수상 뉴스는 검색이 안 됩니다. 소셜미디어에는 관련 게시물이 삭제되기도 했습니다.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자오 감독의 수상에 대한 질문에 1분 가까이 뜸을 들이더니 결국 답을 피했습니다. [왕원빈/중국 외교부 대변인 : 이 질문은 외교 관련 질문이 아닙니다.] 자오 감독이 8년 전 한 영화 잡지와 인터뷰한 것이 발단이었습니다. 베이징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활동하던 자오 감독은 인터뷰에서 "중국은 거짓말이 도처에 널려 있는 곳"이라고 했습니다. 이 발언이 뒤늦게 알려지면서 중국 내 반발이 커졌고, 자오 감독도 이를 의식한 듯 중국어를 섞어 수상 소감을 밝히기도 했습니다. [클로이 자오/중국 국적 영화감독 : 깊이 기억하고 있는 중국 고전이 있습니다. '삼자경'이라고 불리는데, '사람이 태어날 때 성품은 본래 착하다'….] 중국은 본토는 물론 홍콩에서까지 아카데미상 시상식 중계를 막았는데, 일부 중국 네티즌은 숨을 쉴 수 없다, 중국에서 자오 감독의 영화를 보고 싶다는 글을 올리기도 했습니다. /김지성 기자 ==========================、、、 미국 방송 인터뷰서 또 솔직한 입담 윤여정은 28일 미국 NBC 방송 인터뷰에서 "한국인들은 내가 할리우드를 동경한다고 생각하겠지만, 나는 할리우드를 동경하지 않는다"고 말했다./NBC 캡처 ‘미나리’의 할머니 연기로 아카데미 유리 천장을 뚫은 배우 윤여정(74)이 “할리우드를 동경하지 않는다(I don’t admire Hollywood)”고 말했다. 윤여정은 28일(현지 시각) 미국 NBC 방송 인터뷰에서 “미국에서 작업(project)을 제안 받고는 하는데 한국인들은 내가 할리우드를 동경할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라며 “그러나 나는 할리우드를 동경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이어 “내가 (미국에) 계속 오는 이유는 아마도 내가 미국에 와서 일하게 되면 (미국에 거주하는) 아들을 한 번 더 볼 수 있기 때문일 것”라며 “이것이 내 진심(from the bottom of my heart)”이라고 했다. NBC 방송은 윤여정에게 ‘K그랜드마’(한국 할머니)라는 수식어를 붙이면서 “윤여정은 글렌 클로스와 브래드 피트를 존경한다고 했지만, 작은 경고를 하자면 그는 할리우드에 그렇게까지 관심이 없다”고 전했다. 윤여정은 지난 25일 시상식 당일 한국 특파원단과의 기자 간담회에서도 농담으로 “나는 미국 사람들 말 잘 안 믿는다. 단어가 화려하지 않나”라며 “내 퍼포먼스를 존경한다는데 내가 너무 늙어서 그런지 남의 말에 잘 안 넘어간다”고 말했다. 이날 NBC 인터뷰에서 윤여정은 “나는 집으로 돌아갈 것이고 다시 일을 시작할 것”이라며 연기에 대한 열정을 드러냈다. 그는 “일이 없으면 따분해진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느냐”며 “직업은 당신의 한 부분이고, 당신의 이름, 그리고 당신 자신을 대변한다”고 했다. 이어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수상의 순간은 매우 행복했지만, 그것이 내 인생을 바꾸지는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조선일보 이벌찬 기자  =========================/// LA 마케팅업체 수상자, 후보자 25명에 선물..주류, 시술권, 대마초도 들어있어배우 윤여정이 지난 25일(현지시간) 미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의 돌비 극장에서 열린 제93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영화 '미나리'로 최우수 여우 조연상을 받고 기자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사진=AP뉴시스[파이낸셜뉴스] 아카데미상 수상 후보들에게 전해질 것으로 알려진 선물 가방에 대마초 성분 제품들이 포함된 가운데, 여우조연상을 거머쥔 윤여정 등에게도 해당 가방이 지급될 지 이목이 쏠린다. 현재까지는 받지 않을 거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며, 수령하더라도 국내 반입 시 세심한 주의가 필요해 보인다.  27일(현지시간) 뉴욕타임스(NYT) 등에 따르면, 로스앤젤레스(LA) 마케팅 업체 ‘디스팅크티브 애셋’은 오스카 연기상과 감독상 후보자 등 25명에게 사은품으로 지급하겠다면서 ‘스웨그 백’을 준비했다.  이 선물은 오스카상 주관 단체 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와 무관하다. 디스팅크티브 애셋이 오스카 후광에 힘입어 홍보하기를 원하는 업체들의 제품을 모아 만들었을 뿐이다.  해당 선물 가방에는 리조트 숙박권, 지방흡입 시술권, 주류와 과자, 카드 게임 등 다양한 제품이 포함됐다.  문제는 각종 대마초 성분 제품도 들어있다는 점이다. 24캐럿 금박을 입혔다는 대마 용액 카트리지, 희석한 대마 용액과 멜라토닌을 섞은 수면 유도제, 대마 성분이 들어간 고약 등이 이에 해당한다.  디스팅크티브 애셋 설립자 래시 패리는 “공짜 물건이 가득한 가방이라는 의미보다는 더 큰 목적이 있는 것으로 느껴지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 가방은 마냥 ‘공짜’로 받을 수 없다. 20만5000달러(약 2억2천000만원) 가치라고 알려진 이 선물 가방에 대해 미국 국세청(IRS)이 연예인 소득으로 분류해 세금을 부과하기 때문이다. 포브스는 연방세와 캘리포니아 주세 등 50%를 세금으로 내야 한다고 분석했다. 이 가방을 받아들면 세금으로 1억원 정도를 토해내야 한다는 뜻이다.  디스팅크티브 애셋이 영화 '미나리'로 오스카 연기상과 감독상 후보에 오른 윤여정과 스티븐 연, 리 이아작 정(정이삭) 감독에게 해당 가방을 전달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들이 대마 제품까지 포함된 이 가방을 받을 이유는 없어 보인다는 관측이 우세하다.  앞서 아카데미는 2001년부터 업체 협찬을 받아 선물 가방을 후보자와 시상자에게 나눠주다 미 세무당국 조사를 받고 2006년에 전면 없앴다.  이후 디스팅크티브 애셋이 오스카 가방이라고 선전하며 판촉 활동을 이어갔고, 아카데미 측은 2016년 소송을 내 오스카와 무관함을 명시하도록 했다. 이 업체가 마리화나용 흡입기와 각종 선정적인 제품을 넣어 오스카 이미지를 훼손했다는 게 아카데미 측 지적이다.  ===========================/// 엑스트라TV에서 윤여정 씨에게 질문을 하는 레이철 린지. [엑스트라TV 트위터 캡처] 배우 윤여정 씨에게 “브래드 피트에게 어떤 냄새가 났느냐”는 질문을 했던 이는 방송인 레이철 린지라고 미국의 복수 매체들이 보도했다. 본지 취재 결과 린지는 변호사 출신 방송인으로, ABC방송에서 선풍적 인기를 끌었던 일반인 대상 데이트 방송 ‘배철러(TheBachelor)’에 출연했던 이력이 있다.  외모 준수하고 재력을 갖춘 싱글 남성의 마음을 얻기 위해 다수의 여성이 경쟁하는 프로그램으로, 국내에서도 방영됐다. 중앙일보는 린지의 e메일 주소를 찾아 “왜 그 질문을 했는지” 지난 27일 물었으나 답변은 28일 정오 현재까지 오지 않은 상태다.  린지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 1985년 생이다. ‘배철러’에서 톡톡 튀는 화법과 외모로 인기를 끈 그는 이 프로그램에서 파생된 스핀오프, ‘배철러레트(The Bachelorette)’에 주인공으로 캐스팅됐다. 린지의 마음을 얻기 위해 다수의 남성 후보들이 경쟁하는 방식이었다. 그는 이후 방송인으로 커리어를 쌓아왔으며 지난해 8월부터는 엑스트라TV의 연예 전문 리포터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번 윤여정 씨와의 인터뷰 역시 엑스트라TV리포터 자격으로 한 것이다.  윤여정에게 브래드 피트 냄새 질문을 했던 이가 레이철 린지라고 보도한 미국 연예 매체 쇼비즈 치트 시트. [쇼비즈 치트 시트 캡처] 린지는 변호사 출신이다. 텍사스대에서 스포츠 관련 전공을 한 뒤 위스콘신 주 밀워키 소재 마르퀘트 대학교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아버지 샘 린지가 연방 판사 출신이다. 그는 이후 로펌에서 일하다 방송계로 뛰어들었다.  '배철러레트' 주인공으로 출연했던 린지. 그런데 하필 린지는 왜 한국에서 온 74세 여배우에게 브래드 피트의 냄새에 대해 질문을 해야 했을까. 린지가 윤여정 씨에게 던진 전체 질문은 이랬다.  “먼저 축하의 뜻을 전합니다. (‘미나리’는) 당신의 첫 미국 영화인데, 이 영화로 오스카상을 타셨네요. 브래드 피트가 시상자였죠. 두 분이 무대 위로 올라가면서 대화를 나누는 걸 봤는데요, 무슨 얘기를 나누셨는지요. 그리고 그에게 어떤 냄새가 났는지도(whatdid he smell like) 물어봐야겠습니다.” 사실 브래드 피트의 냄새에 관한 질문은 할리우드 연예 매체들의 짓궂은 단골 질문이다. 이 질문을 특히 많이 다뤄온 매체가 엑스트라TV이기도 하다. 지난해 엑스트라TV는 할리우드 스타들만을 전문으로 인터뷰해온 산드로 모네티를 인터뷰한 기사에서 아예 제목을 “브래드 피트에겐 어떤 냄새가 났나? 이밖에도 ‘할리우드 인사더의 고백’에서 캐낸 셀럽들의 비밀들(What Does Brad Pitt Smell Like? And More Celeb Secrets from‘Confessions of a Hollywood Insider’”이라고 달았을 정도다.  연예전문 매체인 쇼비즈 치트시트는 ‘브래드 피트에겐 어떤 냄새가 나는가’는 바이럴 되는 질문(viral question, 온라인에서 화제가 되는 질문)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지난해 9월16일자 엑스트라TV 웹사이트의 기사. 제목 자체가 '브래드 피트에겐 어떤 냄새가 났냐'다. [엑스트라TV 캡처] 물론 그렇다고 해서 오스카 사상 첫 한국인 여우조연상 수상자인 윤여정 씨에게 이 질문을 했다는 것엔 논란의 여지가 크다. 영미권 매체와 온라인에서도 비판이 일었다. 미국 벌처(Vulture)는 27일(현지시간) “여우조연상 수상자에게 ‘브래드 피트 만나니 좋더냐’는 질문 따위를 하다니 말도 안 된다”며 “이건 마치 새우에게 바다 나오니 좋냐는 식 아니냐”고 적었다.  오스카 트로피를 받고 환히 웃는 윤여정씨. 로이터=연합뉴스 코리아 중앙데일리의 짐 불리 에디터는 28일 “레이철 린지는 할리우드 스타나 셀럽들과 재미있고 가벼운 내용의 인터뷰를 하는 방송인”이라며 “브래드 피트에 대한 질문은 할리우드 연예 매체들이 되풀이해온 그저 바보 같고 무의미한(inane) 질문을 그대로 던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불리는 이어 “바보 같고 게으른 방식의 인터뷰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악의를 갖고 윤여정 씨를 깎아내리기 위해 한 질문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중앙일보 전수진 기자 =====================/// [서울경제 짤롱뉴스]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한국 배우 최초로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윤여정이 아카데미 깜짝 영상에 출연해 연기를 하고 있다. 아카데미는 이 영상과 함께 “당신의 오스카상을 잃어버리지 말아요, 윤여정”이라는 문구를 남겨 윤여정의 수상소감을 연상케 했다. /출처=아카데미 인스타그램 [서울경제]  미국 아카데미 주최 측이 제93회 시상식 다음 날인 지난 26일(현지시간) 영화 '미나리'로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윤여정의 깜짝 상황극을 공개했다. “당신의 오스카상을 잃어버리지 말아요. 윤여정”(Don’t lose your Oscar, Yuh-jung Youn!)이라는 문구와 함께 공개된 영상은 윤여정의 수상소감을 연상케 한다. 아카데미는 이날 공식 인스타그램 계정을 통해 30초 짜리 영상을 공개했다. 이 영상에서 윤여정은 시상식 이후 텅빈 극장에서 꾸벅꾸벅 조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는 시상식 드레스 차림 그대로 얼굴을 괸 채 눈을 감고 있다.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한국 배우 최초로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윤여정이 아카데미 깜짝 영상에 출연한 모습./출처=아카데미 인스타그램 이 때 극장 직원이 객석 청소를 하다 윤여정 뒷쪽에서 오스카 트로피가 떨어진 것을 발견한다. 직원은 조심스레 트로피를 들고 윤여정을 깨워 트로피를 다시 건네준다. 윤여정은 잠결에 대수롭지 않다는 듯 트로피를 받아들고 다시 잠이 들어 버린다. 앞서 윤여정은 전날 한국 배우 최초로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 윤여정은 트로피를 받은 후 “한국에서 온 윤여정이다. 유럽분들은 내 이름을 여영이라고 하거나 그냥 정이라고 부르는데 오늘만은 모두 용서해주겠다”며 유쾌한 수상소감을 남겼다. 이는 뉴욕타임스 등 현지 언론들이 극찬한 최고의 수상소감으로 꼽혔다.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한국 배우 최초로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윤여정이 아카데미 깜짝 영상에 출연한 모습./출처=아카데미 인스타그램 /이지윤 기자 ==========================/// 드레스에 항공 점퍼를 입은 윤여정. 25일 아카데미시상식 날 프레스룸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은 프랜시스 맥도먼드와 함께 기념촬영./로이터 연합뉴스 “세계적인 브랜드가 윤여정 선생님에게 ‘입어달라’ 매달렸다. 돈을 들여서라도 비싼 비용을 기꺼이 내가며 윤여정이 선택해주길 바랐다. 하지만 이 멋진 ‘대배우’는 화려한 것들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26일(한국시각) 미 아카데미 시상식 여우조연상을 받으며 역사를 새롭게 쓴 윤여정의 스타일을 책임진 앨빈 고(Alvin Goh)의 말이다. 그는 미국 뉴욕포스트 페이지 식스와의 인터뷰에서 “이번 아카데미 시상식을 위해 전 세계에서 몰려든 초고가 의상만 250벌이 넘는다”면서 “화려한 장식의 의상도 많았지만 윤여정 선생님은 ‘난 공주가 아니다. 난 나답고 싶다’며 물리쳤다”고 말했다. 앨빈 고 패션뷰티 스타일링 전문가 싱가포르 출신으로 현재 홍콩에서 활동하고 있는 앨빈 고는 그동안 엠마 왓슨, 틸다 스윈턴, 우마 서먼, 다코타 존슨, 마고 로비 등 유명 할리우드 스타들의 의상, 메이크업 등 전체적인 스타일과 패션 전략을 담당해왔다. 윤여정과는 이달 초 열린 미국배우조합상(SAG) 때부터 호흡을 맞췄다. 윤여정을 ‘YJ’라고 부른다는 그는 “내가 만나 본 사람 중 세상에서 가장 유쾌하며, 모두가 꿈꾸는 그런 할머니”라고 말했다. 한 달 정도 윤여정과 쉴새 없이 대화를 나눴지만 직접 만나보진 못했다. 코로나 감염증 때문에 모든 작업이 줌(zoom) 화상회의로 이뤄졌다. 홍콩-서울-뉴욕-LA를 동시에 연결하느라 새벽 3시에 자고 오전 6시에 일어나기 일쑤였다고. 협찬이 쇄도해 전화통이 불이 날 지경이었다. 그럴 때마다 윤여정은 “앨빈이 피곤할까 봐 걱정된다. 한국에 꼭 오라. 내가 맛있는 밥을 해주겠다”고 위로했다. 줌으로 화상 대화하며 피팅(fitting) 점검하는 윤여정과 앨빈 고/페이지 식스 그는 “스타들이라면 더 돋보이고 싶을 텐데, 윤여정은 아니었다”면서 “그녀가 한 말을 절대 잊을 수 없을 것”이라며 이렇게 전했다. “난 눈에 띄지 않아도 된다. 커다란 보석도 필요없다. 너무 화려한(crazy) 스타일은 싫다.” 초고가 거대 보석들 협찬도 줄을 이었는데 윤여정이 ‘너무 무겁다. 손을 들 수가 없다’고 거절했다고 한다. 이집트 출신 디자이너 마마르 할림의 짙은 남색 드레스에 검은 벨벳 벨트로 포인트를 준 윤여정. 검은색 실크 새틴에 스와로브스키 보석으로 버클을 단 로저 비비에의 브로치 클러치(손가방)로 벨트 포인트와 색상을 맞췄다. 또 푸른 빛이 도는 쇼파드 하이주얼리 반지 등으로 남색 빛 드레스와 톤을 같이 했다. / Shane McCauley 앨빈 고가 선보인 윤여정 오스카 의상과 액세서리. 마마르 할림 드레스, 쇼파드 쇼파드 하이주얼리 컬렉션(Haute Joaillerie) 이어링&링&브레이슬릿, 로저 비비에 버클 클러치 보테가 베네타 아몬드 펌프스 /뉴욕포스트 페이지 식스 윤여정이 착용한 쇼파드 주얼리 윤여정이 착용한 보테가 베네타 슈즈 로저 비비에 버클 클러치 이날 의상 역시 세계적인 명성의 초호화 브랜드가 아니었는데도 윤여정은 “내 스타일”이라며 선택했다고 했다. 구김이 생기지 않는 편안한 원단이었다. 이날 원래 의상도 화려한 천이 덧대 있었는데 모두 떼어냈다. 윤여정은 “난 공주처럼 보이기 싫다. 그냥 내 나이답고 싶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새벽잠을 설치며 일하는 앨빈을 향해 “이제 그만 입어봐도 될 것 같다. 너무 피곤해 보인다. 이걸로 충분하다”고 말했다고 한다. 여기에 쇼파드 하이주얼리 제품과 보테가 베네타 슈즈, 로저 비비에 클러치를 곁들였다. 이들 브랜드는 적지않은 가격의 제품이긴지만, 윤여정이 평소에 추구하는 간결한 디자인에 포인트를 주는 스타일로 격조를 더했다. 단아한 스타일로 미국 패션지 보그 등으로부터 ‘베스트 드레서'로 선정된 윤여정은 이날 시상식 무대 뒤에서 드레스 위에 카키색 항공점퍼를 입어 일명 ‘코리안 할머니 시크’를 연출했다 다. 항공 점퍼로 유명한 미국 알파인더스트리와 패션 브랜드 꼼데가르송이 협업한 제품이다. /조선일보 최보윤 기자 ======================/// 아카데미 영화제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배우 윤여정은 시상식에서 시종 위트 넘치는 발언으로 아카데미를 열광시켰다. 윤여정은 다른 영화제 시상식에서도 재치있는 말솜씨를 뽐냈다. 이는 일시적으로 꾸며낸 말이 아니라 윤여정의 50년 연기 인생이 고스란히 묻어난 자연스런 대사였다.   배우 윤여정(왼쪽)과 전도연이 13일 오전 서울 성동구 메가박스 성수점에서 열린 영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 제작보고회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윤여정은 영화 ‘하녀’에서 부자집의 모든 살림을 관장하는 나이든 하녀로 나온다. 윤여정은 새로 들어온 하녀 전도연에게 돌연 ‘아더매치’라고 말한다. 어리둥절한 전도연이 “아더매치가 뭐예요?”라고 묻는다. 윤여정은 “아니꼽고 더럽고 매스꼽고 치사하다”고 말한다. 하녀로 남의 비위 맞추면서 사는 게 힘들다는 뜻이었다. 영어라는 착각을 일으키는 이 줄임말은 이후 상당한 유행을 탔다. 윤여정 특유의 까탈스러우면서도 위트 넘치는 연기가 빛을 발한 대목이다. 윤여정은 데뷔작 ‘화녀’나 ‘장희빈’ 등에서 악녀 역할을 했다. 1980년대 후반 브라운관에 복귀했을 때는 작가 ‘김수현 사단’의 일원으로 TV 가족 드라마에 단골 출연했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새로운 연기 도전을 시작한다. 임상수·홍상수 감독과 만나면서 벗는 배역 등 파격적인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60살이 되면서부터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내가 하고 싶은 사람과 하고 싶어졌다”고 했다. 윤여정은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세 자매의 맏이로 어렵게 자랐다. 민관식 전 문교부 장관이 주는 장학금을 받아 어렵게 공부했다. 민 전 장관은 항상 “우리 똑똑한 여정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한양대 국문과를 다니다 TBC방송의 보조역 알바로 일을 시작했다. 자신이 생계형 배우라고 한 것도 이 때문이다.   미국 배우 브래드 피트는 왜 하필 한국인 이민가족을 소재로 한 영화 미나리를 제작하게 된 것일까? 브래드 피트가 설립한 제작사인 ‘플랜B’의 프로듀서인 크리스티나 오(한국명 오진실)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한다. 한인2세인 크리스티나 오는 같은 한인2세인 정이삭 감독이 쓴 ‘미나리’ 각본을 플랜B로 가져 온 사람이다. 여기에 또 다른 한인2세인 배우 스티븐 연이 주연과 책임 제작을 맡았다. 한인2세 삼총사의 합작품이었던 것이다. 사실 브래드 피트는 영화 제작 현장에 한번도 오지 않았다. 제작비도 20억원대인 사실상의 저비용 독립영화였다. 그만큼 그는 미나리에 큰 관심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윤여정이 “200억 짜리 영화 찍는 줄 알았더니 20억 짜리였다” “브래드 피트, 당신은 어디 있었느냐”고 뼈 있는 농담을 던진 것도 이 때문이다. 윤여정은 이번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대부분 영어로 소감을 밝혔다. 수상소감은 미리 준비할 수 있었지만 무대 뒤에서 이어진 기자들과 질의응답은 즉흥적이었다. 미국 기자가 “브래드 피트의 냄새가 어땠느냐”며 짖꿎고 무례한 질문을 하자 윤여정은 “나는 그의 냄새를 맡지 않았다. 나는 개가 아니다”고 받아쳤다. 윤여정의 영어는 간결하면서도 위트가 넘친다. 1974년 가수 조영남과 결혼해 미국으로 건너간 뒤 1987년 이혼할 때까지 10여년간 미국 생활을 한 것이 영어 실력의 토대가 됐다고 한다. 그래서 미국 언론에서 내년 아카데미 시상식 진행자로까지 거론되는 것이다. /배성규 영화평론가 ===================/// 조영남(왼쪽)-윤여정. 사진|스타투데이 DB[매일경제 스타투데이 진향희 기자] 가수 조영남이 전 아내 윤여정의 오스카 수상 관련 축하 인터뷰를 하면서 두 아들을 언급했다. 유튜브 채널 ‘연예 뒤통령 이진호’가 지난 26일 공개한 인터뷰에서 조영남은 “봉준호 윤여정을 통해서 일본 중국을 완전히 넘어섰다. 엄청 축하할 수 밖에 없는데 내놓고 축하 못하는 내 입장이 참 씁쓸하다”며 “이런 질문이 올 때마다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하나, 아직 결정을 못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시상 과정을) 다 봤다. 난 그 친구하는 걸 늘 봐왔으니까 당연히 전부 이해가 되고 저랬을 거란 걸 다 아니까”라며 “애들 잘 키운 것에 대해 고맙고”라고 덧붙였다.  또, 윤여정의 영어 실력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 “나보다 훨씬 잘해. 난 다 까먹었고 그 친구는 배우지도 않았는데 그렇게 잘 하더라고. 머리가 워낙 똑똑했었다”고 전했다.  조영남 인터뷰. 사진ㅣ유튜브 채널 ‘연예뒤통령 이진호’ 캡처  특히 조영남은 “자제분들과 이 일로 연락해 보셨냐”는 질문에 “전혀, 걔네들은 아버지를, 날 아버지로 생각 안하니까…뭐 그러려니 하고. 살아왔고. 내가 자격을 잃은 거지”라고 털어놨다.  이어 “어느 인터뷰에서 등록금을 가끔 내줬다고 하던데”라고 묻자 “가끔 내줬지”하고 답했다.  조영남은 윤여정이 수상 소감에서 “두 아들이 날 일하러 보냈다”며 생계형 워킹맘의 고충을 고백한 부분에 대해서도 소회를 밝혔다. “내가 바람 피우는 바람에 남자 노릇을 못하고 그 친구가 혼자서 고군분투해서 성공한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최근 윤여정과의 이혼을 자주 언급하는 것과 관련 “후회 하는 것이냐”는 질문엔 “후회 반대. 내 성격이 후회하는 성격이 아니라서"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결과가 이렇게 멋있게 나오니 그냥 고마울 따름이다. 난 그걸 언급할 자격이 없다. 신기하게도 만난 적도 없고 스친 적도 없고”라고 뒷이야기 덧붙였다.  조영남은 마지막으로 “내가 상 탄 것 같다. 두근두근하다”고 기쁜 마음을 재차 밝히면서도 “내가 이렇게 답변하는 것도 내가 못나서다. 더 이상 그 친구에게 못난 꼴 보이기 싫다”도 얘기했다.  조영남과 윤여정은 20대 초중반 첫 만남 이후 6년여간 친구로 지내다 1975년 미국 시카고에서 결혼했다. 이후 조영남의 외도로 결혼 13년 만에 파경을 맞았다. 슬하엔 두 아들이 있다. 조영남은 재혼 후 다시 이혼했다.  ==================、、、 오스카 트로피 들고 금의환향..."폐 끼치고 싶지 않아" 윤여정. 제공|후크엔터테인먼트[매일경제 스타투데이 박세연 기자] 배우 윤여정이 한국 배우 최초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트로피를 들고 8일 입국한다.  소속사 후크엔터테인먼트에 따르면 윤여정은 8일 비공개 입국한다. 소속사 측은 "코로나19로 상황이 엄중하다는 점으로 인해 윤여정 배우와 의논 끝에 비공개하기로 결정했다"며 "폐를 끼치지 않고 조용히 진행하고 싶다는 윤여정의 의중을 살펴주길 부탁드린다"고 당부했다.  소속사는 "윤여정 배우 귀국 후 배우의 컨디션 회복을 최우선으로 지원할 예정"이라며 "스케줄을 정리하고 추스를 것이 많아서 바로 새로운 모습을 보여드릴 수 없을 것 같지만 빠른 시간 안에 다시 여러분 앞에 설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전했다. 윤여정의 귀국 소감도 전했다. 윤여정은 소속사를 통해 “여우조연상 수상 순간이 아직도 생생하고, 여전히 설레고 떨린다. 무엇보다 같이 기뻐해주고 응원해준 많은 분들로부터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아, 몸 둘 바를 모를 정도로 감사하고 또 감사하다. 덕분에 수상의 기쁨이 배가 되고, 하루하루 정말 행복했다”고 전했다.  이어 “정이삭 감독, 스티븐 연, 한예리, 앨런 김, 노엘 조를 비롯한 모든 ‘미나리’ 팀과 함께해서 반갑고 좋은 시간이었다. 미국에서의 한 장면 한 장면을 잊지 못할 거 같다. 다시 한 번 많은 분들에게 감사하다는 말씀드리고 싶다”라고 밝혔다.  윤여정은 “코로나 19라는 엄중한 상황에 피해가 가는 것을 바라지 않는 마음으로 부득이하게 비공개를 부탁드리는 점, 많은 응원을 보내주신 국내 언론 매체들에 죄송한 마음이다”며 “일단 컨디션을 회복한 후 다시 이야기 나눌 수 있기를 희망한다. 너무 감사하다”고 인사했다. 윤여정은 지난 4월 26일(한국시간) 미국 LA에서 열린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영화 '미나리'로 한국 배우 최초로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 ==================、、、 [앵커] 한국 배우 최초로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윤여정 씨가 오늘(8일) 새벽 조용히 입국했습니다. 윤여정 배우 과거 출연작을 보러 나온 관객 발걸음이 잇따르는 가운데, 차기작에 대한 기대도 커지고 있습니다. 최민기 기자가 보도합니다. [기자] 이른 새벽 인천국제공항 입국장. 카메라 플래시 세례를 받으며 윤여정 씨가 들어섭니다. 아카데미상 시상식 직후 드레스 위에 걸쳐 화제가 된 항공점퍼와 청바지를 입었습니다. 윤여정 씨는 취재진을 향해 짧게 손을 흔든 뒤 간단한 눈인사만 전했습니다. 윤 씨는 코로나 19 상황에서 최대한 피해를 끼치고 싶지 않다며 인터뷰나 환영 행사 없이 바로 2주 자가 격리에 들어갔습니다. 귀국 전 소속사를 통해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아 몸 둘 바를 모를 정도로 감사하고 또 감사하다고 소감을 전했습니다. 극장에서는 '미나리'와 함께 50년 전 윤 씨를 스타덤에 올린 작품에도 관객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한국영상자료원이 마련한 윤여정 특별전에는 '화녀''천사여 악녀가 되라''충녀' 등 고 김기영 감독과 함께한 작품을 중심으로 온라인 예매분이 잇따라 매진됐습니다. [김요나단 / 관객 : 아름다운 여자의 느낌이 아닌 매번 새로운 느낌을 보여주는 감각적인 배우라는 느낌이 들어서 젊은 층에도 어필하는 것 같습니다.] [백은하 / 관객 : 떳떳하고 굴하지 않고 엄마라고, 나이 먹었다고 맨날 엄마 역할만 하는 게 아니라, 깔끔하잖아요.] 올해 하반기 공개될 예정인 차기작에도 관심이 쏠리고 있습니다. 미국 애플TV플러스의 드라마 '파친코'입니다. 재미동포 이민진 작가가 쓴 재일동포 가족사를 담은 소설을 바탕으로 했습니다. 2017년 뉴욕타임스가 꼽은 10대 도서에 뽑혔고, 2019년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추천하기도 한 수작입니다. 화녀의 '명자'에서 미나리의 '순자', 차기작의 '선자'에 이르기까지, 윤여정 신드롬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YTN 최민기입니다.  
7882    [그것이 알고싶다] - "인도 소똥 축제" 댓글:  조회:1488  추천:0  2021-04-17
       [출처] 아이들을 소똥에 굴리는 인도의 축제     인도에서 사두(힌두교 성자)와 신도들이 목욕 의식을 위해 갠지스강으로 행렬을 지어 가고 있다. /연합뉴스                   남부 연쿠르눌 지구 카이루팔라 마을에서는 현지 힌두력 새해 축제인 우가디(13일)를 맞아 소똥싸움이 열렸다. /연합뉴스       소똥싸움 축제를 벌이는 인도 안드라프라데시주의 한 시골  
7881    [그것이 알고싶다] - "팔도 김치" 댓글:  조회:2888  추천:0  2021-04-16
7880    [고향소식] - 화룡 길지 "돌"로 뜨다... 댓글:  조회:2800  추천:0  2021-04-01
화룡서 발견된 석엽석핵, 구경 무엇인가 편집/기자: [ 안상근 ]  [ 중국신문넷 ] [ 2021-03-26 ]  전문가: 길림에서 출토된 거형 석엽석핵 유적지에 가능하게 여러기 문화유적 존재할듯 3월 23일, 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 전문가는 중국신문넷 기자의 취재를 접수할때, 길림성 화룡시에서 최신 발견된 흑요암 원료로 된 거형 석엽석핵은 석엽기술이 동아시아지역에서의 출현과 발전연구에 많은 새로운 과제를 가져다 주었다고 소개했다. 전문가는 현재 이 거형 석엽석핵이 발견된 지점이 고인류 활동유적임을 이미 확인했다고 밝혔다. 석엽은 구석기시대 인류가 돌을 쪼아 잎형태로 만든 돌쪼각인데 주요하게 공구로 사용되였으며 석핵은 바로 석엽의 모체라고도 할수 있다. 화룡에서 발견된 흑요암 거형 석엽석핵은 시공과정에서 발견되였는데 현재 화룡시박물관에 잠시 보관되여 있다. 이 문물은 높이가 53센치메터이고 직경이 16센치메터, 쫗은 자리가 14개인 종관핵체(纵贯核体)인데 무게가 16.3키그람에 달한다. 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 업무판공실 부주임 서정의 소개에 따르면 이는 목전 중국에서 발견된 가장 큰 석엽석핵인데 세계적으로도 보기 드물다. 문물이 출토된 곳은 화룡시 남평진 길지촌 동쪽, 두만강 왼쪽 강언덕의 동쪽으로 돌출된 기지 단층에서 발견되였다. 서정은, 올해 3월 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에서 문물 발견지점과 주변에 대하여 조사를 진행했는데 문물수집점 30여개를 발견했다고 소개, 주요하게 단층의 서쪽과 동쪽의 완연한 언덕, 그리고 부분적으로 로출된 지표의 지층 표면이다. 중부는 시공때문에 파괴되였는데 지표에서는 관련 유물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서정은 지표조사와 절단면에서 발견된 동물화석정황으로 놓고 볼때 이 거형 석엽석핵의 발견지점은 응당 고인류가 활동한 유적임을 확인할수 있는바 유적의 분포면적은 약 1평방키로메터라고 소개했다. 또 원생층 위치에서 발견된 화석으로 볼때 두번째층의 황갈색 점토질 분사층은 응당 돌제품과 화석의 원생 지층이다. 이외 지표에서 발견된 흑요암 돌화살촉을 보면 이 유적에 가능하게 여러기의 문화유물이 남아있을것이 라는 분석이다. 소개에 따르면 길림성 관련 문물부문에서는 후속적으로 이 거형 석엽석핵발견지와 동물화석 매장지점에 대해 구급성적인 고고발굴을 진행하게 되며 유적지의 년대와 성질에 대해 진일보 확인하게 된다. 기사출처:  중국신문넷 / 편역 안상근 ==============================   화룡서 2만년 전 초대형 석엽석핵 출토 편집/기자: [ 유경봉 ] [ 학습강국 ]  [ 2021-03-15 ]  최근, 2만년 전의 문물인 초대형 석엽석핵(石叶石核)이 화룡시에서 출토되였다. 고고학 전문가는 해당 문물은 구석기시대 장백산 일대 인류의 석기 제조방식 등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가치가 있다고 지적했다.   석엽석핵  지난 3일, 화룡시문물관리소는 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 주임 서정의 전화를 받았다. “누군가 미니영상 플래트홈인 쾌수(快手)에 포탄 모양의 초대형 석핵에 관한 영상을 올렸는데 이 영상이 국가급과 성급 전문가들의 주목을 받고 있으니 해당 문물을 회수할 것을 즉시 화룡시에 위탁한다”는 내용이였다. 화룡시문물관리소는 문물을 순조롭게 회수하기 위해 화룡시공안국 치안대대에 련계하여 이번 행동에 동행했다. 4일, 화룡시문화라지오텔레비죤방송관광국과 화룡시공안국의 일행 5명은 훈춘시에 가서 문물 발견자와 만났다. 그들은 문물 발견자에게 〈중화인민공화국 문물보호법〉을 선전하고 인내성 있고 세심하게 설복작업을 했고 문물 발견자는 최종적으로 문물을 국가에 바치는 데 동의했다. 회수해온 석핵은 높이가 53센치메터, 무게가 33근이였다. 전문가의 초보적인 인증에 따르면 해당 문물은 지금으로부터 약 2만년 전의 것이며 지금까지 발견된 가장 정교한 초대형 석핵이다. 구석기시대 흑요석 가공기술의 최고작으로서 아주 진귀한 문물이다. 화룡시 경내에서 이 같이 정교한 문물이 발견됨으로 하여 화룡시가 자고로 인류가 집거해 활동했던 중요한 장소이고 동북아 인류활동의 중심지였음을 더한층 립증해주었다. ============================///   연변에서 2만년전의 초대형 석엽석핵 출토! 2021년03월15일  출처: ​중국조선어방송넷      최근, 인류 선조가 남겨놓은 세계적으로도 보기드문 초대형 석엽석핵이 길림성 화룡시에서 출토되였다. 해당 문물은 화룡 국가급 국경경제협력구의 시공 현장에서 한 수석애호가에 의해 발견되였다. 고고전문가는 해당 문물은 지금으로부터 약 2만년전의 것으로 구석기시대 장백산일대 인류의 석기 제조방식 등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     한 젊은이에 의해 발견된 기석 올해 34세인 류가룡은 대형 덤프트럭 기사로 어릴 때부터 특이하게 생긴 돌을 모으기 좋아했다. 틈만 나면 그는 기석을 찾아다녔고 마음에 드는 기석을 만나면 재가공해 정성스레 소장했다. 2020년 7월 14일, 류가룡은 화룡 국가급 국경경제협력구의 한 시공현장에서 덤프트럭으로 흙을 실어날랐다. 점심식사를 마친 그는 동료들과 낮잠을 자려다 갑갑해나 시공현장을 둘러보기로 했다. 이러저리 다니다 작은 흙더미를 발견한 그는 생각없이 발로 찼다. 이때 누런 흙에 둘러쌓인 검은색 물체가 눈앞에 나타났다. 류가룡은 딱딱한 돌에 마쳐 아픈 발에 신경 쓸 사이도 없이 급급히 물을 가져다 쏟아부었다. 그랬더니 반질반질한 이쁜 물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들어보았더니 무게도 꽤 나가는 물체였다. “보물”을 발견한 그는 한걸음에 동료들한테 달려가 자랑했다. 그 물체의 정체를 두고 이견이 갈렸다. 유리공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고 흑요석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누구도 그의 정확한 정체를 밝혀내지 못했다. 류가룡이 측량한데 따르면 물체는 길이 53센치메터, 무게 16.3킬로그람이며 원추형 모양을 하고 있었다. 평소 미니영상을 올리기 좋아했던 류가룡은 호기심에 의해 해당 물체 영상을 한 미니영상 플랫폼에 공유해 많은 관심을 모았다. 그러나 역시 물체의 정체에 대해 정확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문화재관리인원 “국보” 보호 책임 다해야 한다고 3월 3일 화룡시문물관리소는 길림성고고소업무 판공실 서정 주임의 전화를 받았다. 미니영상 플랫폼에 올린 초대형 석핵 영상이 국가급, 성급 전문가들의 주목을 받았고 화룡시에 위탁해 해당 문물을 회수하라는 내용의 전화였다. 화룡시문화방송관광국은 이에 중시를 돌리고 문물 주관 인원을 파견해 직접 해당 업무를 처리하게 했다. 문물이 순조롭게 회수되도록 보장하기 위해 화룡시문화방송관광국은 또 화룡시 공안국 치안대대에 도움을 요청했다. 3월 4일, 화룡시문화방송관광국과 화룡시 공안국의 관계자 5명이 훈춘시를 방문해 직접 류가룡과 대면했다. 그들은 류가룡에게 중화인민공화국문물보호법을 선전하며 인내성 있고 섬세한 대화로 그의 마음을 돌려세웠다. 관계자들의 말을 듣고 나서 류가룡은 흔쾌히 문물을 국가에 바치기로 했다.        화룡시문물관리소 조옥봉 소장은 상급 부문 전문가의 초보적 인증에 따르면 해당 문물은 지금으로부터 약 2만년전의 물체로 지금까지 발견된 가장 정교한 초대형 석핵이다. 이는 구석기시대 흑요석 가공기술의 걸작으로 아주 진귀한 문물이다. 화룡시 경내에서 이 같이 정교한 문화재가 발견되면서 화룡시는 자고로 인류가 집거해 활동했던 중요한 장소이고 동북아 인류활동의 중심지였음을 한층 더 깊이 립증해주었다.  /연변뉴스, 연변조간신문    
7879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바다환경문제",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2661  추천:0  2021-03-30
수에즈 운하 선박 좌초부터 부양까지... 2021년 03월 30일  글자크기 조정하기   인쇄하기   공유하기   [앵커] 초대형 컨테이너선의 좌초로 막혔던 아시아-유럽 간 최단 거리 뱃길인 수에즈 운하가 7일 만에 다시 열렸습니다.   만조 시간에 맞춰 컨테이너선을 완전히 부양시키는 데 성공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취재 기자 연결합니다. 이여진 기자! 드디어 수에즈 운하 통행이 재개됐군요? [기자] 수에즈 운하 관리청은 현지 시간 29일 오후 '에버기븐호' 선체가 완전히 물에 떠올라 운하 통행을 재개했다고 밝혔습니다. 앞서 선미 부분을 물에 떠오르게 한 데 이어 선박을 완전히 부양시키는 데 성공한 것입니다. [오사마 라비 / 이집트 수에즈운하관리청장 : 사고는 지난주 화요일 오전 8시에 났고 월요일 오후 3시에 우리가 끝냈습니다. 6일 정도 걸렸는데 시간이 이렇게 오래 걸리지 않길 바랐습니다.] 이집트 현지 TV는 물에 떠오른 에버기븐호가 자체 동력을 이용해 수에즈 운하 한가운데 있는 넓은 공간인 그레이트 비터 호수로 천천히 이동하고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에버기븐호는 호수에서 상태를 점검한 뒤, 당초 목적지인 네덜란드 로테르담으로 향할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에 따라 현지 시간으로 오후 6시, 우리 시간으로 오늘 새벽 1시 수에즈 운항이 재개됐습니다. 오사마 라비 수에즈운하관리청장은 대기 중이던 420척의 선박 가운데 적어도 113척이 화요일 오전까지 운하를 건널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습니다. 수에즈운하관리청은 앞서 그동안 대기 중이던 선박을 통과시키는 데 사흘 반이 걸릴 것으로 전망했습니다. [앵커] 선박 좌초부터 완전 부양까지 이번 사고를 다시 한번 정리해주실까요? [기자] 지난 23일 아시아와 유럽을 오가는 통로인 수에즈 운하가 막혔습니다. 중국에서 출발해 네덜란드로 향하던 길이 400m의 초대형 컨테이너선 에버기븐호가 비스듬히 좌초하면서 양뱡향 길목을 막아버린 겁니다. 길이 400m는 세로로 세우면 높이가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 맞먹습니다. 사고 직후 예인선 여덟 척을 투입했고 다음 날 선박 일부가 물에 떴지만, 선박 이동은 불가했습니다. 수에즈운하관리청은 지난 25일 네덜란드 '스미트 샐비지'와 일본의 '니폰 샐비지'를 구난 업체로 지정하고 인양에 나섰습니다. 작업팀은 선박의 부양 작업을 위해 뱃머리가 박힌 제방에서 모래와 흙을 2만7천m³가량 퍼내고 18m 깊이까지 굴착했습니다. 당국은 총톤수 22만4천t에 달하는 엄청난 배의 무게를 줄이기 위해 9천t가량의 평형수도 뺐습니다. 현지 시간 29일 수위가 평소보다 45cm 높은 만조 시간에 맞춰 예인선 14척을 동원해 선체 이동을 시도했습니다. 오전에 선미 부분 부양에 성공했고 오후 만조 최고 시점에 운하 동쪽 제방에 박혀있던 뱃머리가 서서히 떠오르면서 완전히 부양했습니다. [앵커] 사고 원인은 밝혀졌습니까? [기자] 선박이 좌초한 이유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일단 강풍이나 기계 고장, 사람의 실수 등 여러 설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사고 당시 40노트로 불어닥친 강풍과 모래 폭풍 때문이란 설에 대해 한 항해사는 "강풍으로 큰 화물선이 쉽게 움직일 수 있다"며 "바람이 30~40노트, 초속 15~21m로 불면 선박이 좌초할 수 있다"고 워싱턴포스트에 말했습니다. 반면 오사마 라비 이집트 수에즈운하관리청장은 "강한 바람이 주요 원인은 아니고 기계 또는 사람의 실수가 사고의 원인이 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진단했습니다. 수에즈 운하를 운영하는 이집트 정부는 사고 책임을 선장에게 돌렸다고 러시아 언론이 보도했습니다. 마하브 마미시 이집트 대통령 수에즈운하 담당 보좌관은 운하는 안전하고 모든 선박이 사고 없이 지난다며 "사고가 발생하는 건 아주 드문 일"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조사 결과에 따라 막대한 배상금 소송이 벌어질 것으로 전망됩니다. 에버기븐호는 대만 에버그린이 선사, 일본 쇼에이기센이 선주입니다. [앵커] 다행히 운항이 재개됐지만 일주일간 피해 액수가 만만치 않을 것 같은데요? [기자] 길이 190km에 달하는 수에즈 운하는 전 세계 교역량의 12%를 담당합니다. 연평균 만8천여 척, 하루 50척이 이 운하를 통과합니다. 이번 사고로 전 세계 해운 산업 전체가 입은 피해는 매일 약 10조2천억 원으로 추산됩니다. 또, 앞서 해운정보업체 '로이드 리스트'는 수에즈 운하의 평소 하루 물동량을 토대로 경제적 손실 규모를 추산해봤는데요. 이번 사고로 시간당 4억 달러, 우리 돈으로 4천5백억 원. 하루에는 약 100억 달러, 우리 돈 11조3천150억 원의 물류 운송이 지체되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이집트 정부는 이번 사고로 발생한 손실과 비용을 선주인 일본 쇼에이 기센에 청구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앞서 라비 수에즈운하 관리청장은 선박 사고로 이집트 측에서 하루 천400만 달러, 우리 돈 약 158억 원의 손실이 발생한 것으로 추정됐다고 밝혔습니다. 지금까지 YTN 이여진입니다.
7878    [그것이 알고싶다] - 수에즈 운하 댓글:  조회:3421  추천:0  2021-03-30
실크로드 사전 수에즈 운하   [ Suez Canal음성듣기 ] 해상실크로드의 연결 운하. 지중해와 홍해, 인도양을 연결하는 수에즈 운하는 유라시아의 해상실크로드를 연결하고 거리를 단축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항로의 단축을 위해 수에즈 지협(地峽)을 운하로 항해하려는 시도는 오래 전부터 있었다. 기원전 1380년경 나일강과 홍해를 잇는 운하가 개굴(開掘)된 후 운하는 천재와 전쟁 등으로 인해 매몰되었지만, 로마시대에 항해가 재개되었다. 그러나 아직은 수에즈 지협을 항해하는 운하는 아니어서 불편이 많았다. 대항해시대에 접어든 16세기에 지중해 연안에서 베네치아 상인들은 수에즈 지협에 운하를 파 포르투갈이나 스페인의 해상 패권에 대응하려고 했으며, 17~18세기에는 프랑스의 루이 14세와 독일 황제 라이프니츠는 수에즈 운하를 만들어 네덜란드나 영국의 아시아 무역을 제지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아직은 토목기술의 부족으로 성사될 수가 없었다. 이집트에 진출한 나폴레옹도 영국의 인도 무역에 타격을 안기기 위해 운하 개설을 위한 조사를 했으나 지중해와 홍해의 수심차가 10m나 되었기 때문에 개설 계획을 포기하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 1846년 프랑스의 시몬주의자(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의 주도로 프랑스와 영국 · 오스트리아의 지식인들이 참여한 이른바 ‘수에즈운하연구협회’가 결성되고 국제적 기업에 의한 운하 개설 계획이 세워졌다. 영국은 자국 이익에 배치된다는 구실하에 이 계획을 반대하였다. 1854년 이집트의 아미르(통치자, 수장)가 된 무함마드 사이드 파샤(Sa’id Pasha)는 프랑스인 페르디낭 마리 드 레셉스에게 운하개설 특허권과 수에즈 지협 조차권(租借權)을 양도했으며, 1856년 이집트의 종주국인 오스만 투르크도 이를 승인하였다. 레셉스는 2억 프랑(800만 파운드)의 자본금으로 1858년에 ‘만국수에즈해양운하회사’(Compagnie Universelle du CanalMaritime de Suez)를 이집트 법인으로 설립하였다. 자본금 중 20만 7천주는 프랑스가, 17만 7천주는 이집트 아미르가 소유하게 되었다. 공사는 1859년 4월에 시작해 10년 만인 1869년 11월 17일에 마쳤다. 이 총 길이 162.5km 운하의 개통으로 런던과 싱가포르 간의 항로는 케이프타운 경유의 2만 4,500km에서 1만 5,025km로 줄어들고, 런던과 봄베이 간은 2만 1,400km에서 1만 1,472km로 단축되었다. 1964년의 확장공사를 거쳐 수심은 원래의 7.9m에서 14.5m로, 수면의 폭은 60~100m에서 160~200m로 확장되었다. 통과 소요시간은 15시간으로 단축되었다. 영국은 1875년에 이집트의 주를 매입하고 1914년에는 이집트를 보호국으로 만들었다. 따라서 수에즈 운하의 실질적 소유권은 프랑스와 영국이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1956년 7월 이집트 대통령 나세르가 운하의 국유화를 선포함으로써 운하의 소유권은 이집트로 넘어갔다. 지중해와 홍해, 인도양을 연결하는 수에즈 운하 모형 수에즈 운하 위치   수에즈 운하 300km © NAVER Corp. /OpenStreetMap 관련이미지 7                           이미지 이전 수에즈 운하 개통 [네이버 지식백과]수에즈 운하 [Suez Canal] (실크로드 사전)   대단한 바다여행 수에즈 운하 기원전에 계획한 국제 수로   최초의 운하는 기원전 7~6세기에 활동한 이집트 제26왕조의 왕인 네코 2세에 의해 시도되었다.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Herodotos)에 따르면, 네코는 이집트 삼각주 유역에서 교역이 늘어나자 나일 강과 홍해를 잇는 운하 건설을 시작했지만 예언자들의 반대로 중단하고 말았다고 한다. 그 후 기원전 500년경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세가 홍해를 거쳐 나일 강 인근의 도시인 부바스티스(Bubastis)까지 수로를 연결하는 데 성공했다. 이 수로는 한때 이집트의 농산물을 실어 나르는 중요한 교통로였으나 이슬람교 내분으로 폐쇄되었다. 그러다가 1798년 나폴레옹에 의해 유적이 발견되었고, 통상로로 이용하기 위하여 개발 공사가 이루어졌지만 얼마 되지 않아 계산 착오로 중단되고 말았다. 프랑스는 1859년 카이로 주재 프랑스 외교관이었던 레셉스(Ferdinand Marie de Lesseps)에게 수에즈 운하 건설의 임무를 맡겼다. 레셉스는 토목 기사로서 정식 교육은 받지는 않았지만 젊었을 때부터 운하 건설에 대한 집념을 불태워 온 사람이었다. 그로부터 10년 뒤인 1869년 우여곡절 끝에 운하가 완성되었다. 그러므로 수에즈 운하는 결국 프랑스에 의해 탄생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수에즈 운하는 인도에서 영국으로 가는 뱃길을 무려 6,400㎞나 단축시켰으며, 1888년 콘스탄티노플 조약에 의해 국제화되었다. 수에즈 운하 수에즈 운하의 서쪽에는 저지대인 나일 강 삼각주가 있고, 동쪽에는 지대가 높고 지형이 험난한 불모지인 시나이 반도가 자리 잡고 있다. 운하는 개통 당시 수심 약 8m, 폭은 약 22m였으나, 공사를 계속하여 1967년에는 수심 12m, 폭 54m로 일정하게 확장되어 그 길이가 168㎞나 되었다. 운하의 건설로 인해 사람이 거의 살지 않던 이 지역에 촌락들도 생겨났다. 수에즈 운하는 1967년 6월 아랍과 이스라엘 간의 전쟁으로 일시 폐쇄되었으나 1975년 다시 개통되었으며, 1975~1980년에 다시 확장하여 지금은 흘수 16m의 선박까지도 운항할 수 있다. 공해와 공해를 연결하는 뱃길을 국제 운하 또는 국제 수로라고 한다. 국제 운하는 조약에 의해 모든 외국 선박에게 개방되어 있다. 그러므로 군함을 포함하여 세계 어떤 나라의 선박도 자유로이 통행할 수 있다. 이러한 운하는 전쟁 동안에도 자유로운 통행이 보장되며, 어떤 경우에도 폐쇄되지 않는다. 또한 운하의 양쪽 출입항으로부터 4.8㎞ 이내의 구역에서는 어떠한 적대 행위도 금지되어 있으며, 시설물 일체는 불가침 구역이다. 수에즈 운하 위치   수에즈 운하 300km © NAVER Corp. /OpenStreetMap 관련이미지 7                           이미지 이전 지중해와 홍해, 인도양을 연결하는 수에즈 운하 모형   [네이버 지식백과]수에즈 운하 - 기원전에 계획한 국제 수로 (대단한 바다여행)   두산백과 수에즈 운하   [ Suez Canal음성듣기 ] 요약 지중해와 홍해 ·인도양을 잇는 운하. 이미지 크게보기 수에즈운하 아시아와 아프리카 두 대륙의 경계인 이집트의 시나이 반도 서쪽에 건설된 세계 최대의 운하로 지중해의 포트 사이드(Port Said) 항구와 홍해의 수에즈(Suez) 항구를 연결하고 있다. 수에즈 운하는 무엇보다도 아프리카 대륙을 우회하지 않고 곧바로 아시아와 유럽이 연결되는 통로라는 점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수에즈 지협에 운하를 파서 항행할 수 있게 되면 지중해와 홍해의 교통 발달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착상은 고대부터 있었다. 운하를 건설하려는 최초의 시도는 이집트 파라오 왕조 제 12왕조의 세누스레트 3세(Senusret III : 재위 1878 BC~1839 BC)가 홍해 연안의 투밀라트 계곡(Wadi Tumilat)을 통해 나일강과 홍해를 연결하고자 착공했던 공사로 추정된다. 그러나 공사 결과 내륙의 푼트(Punt) 지방 까지만 나일강이 연결되었을 뿐 홍해와는 연결되지 못했다. 파라오 제 18왕조의 하셉수트 여왕(Hatshepsut : 재위 1479 BC~1458BC)이 푼트 지방에서부터 홍해로 이어지는 운하 공사를 시도했다는 흔적도 남아있으나 성공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후에도 BC 1380년 경에 나일강과 홍해를 잇는 운하가 개착(開鑿)되었다. 그 후 이 운하는 천재(天災)와 전재(戰災)로 메워졌으나 여러 차례에 걸친 개수(改修)로 로마 시대와 아랍 지배하에서 중요한 수로로 존속하였다.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의 기록에 따르면, BC 600년 경 제 26왕조의 파라오 네카우 2세(Nekau II : 재위 610 BC~595 BC)에 의해 운하가 다시 개착되었으며, 그 후 이집트를 정복한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세(Darius I  : 재위 522BC~486BC)에 의해 완성되었다고도 한다. 계속해서 헤로도토스는 이집트의 프톨레미 2세(Ptolemy II)가 BC 250년경 운하를 정비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후 아바스조 칼리프 알 만수르(al-Mansur)가 AD 767년 델타 지역으로 침입하는 반란군을 막기 위해 운하를 폐쇄할 때까지 약 1000년간 파괴와 보수가 반복되었다고 전해진다. 16세기에는 베네치아의 상인이 수에즈 지협에 해양 운하를 개착하여 포르투갈·에스파냐의 해운 무역에 대항하려고 했고, 17∼18세기에는 프랑스의 루이 14세와 독일의 라이프니츠가 수에즈 운하를 건설하여 영국·네덜란드의 아시아 무역에 대항하려고 했으나 모두 토목기술이 발달하지 않아서 실현하지 못하였다. 18세기 말에 이르러 나폴레옹이 이집트를 정복한 뒤 지중해와 홍해를 연결하는 운하를 완공하고자 시도했다. 나폴레옹은 1799년에 찰스 르 페레(Charles Le Pere)에게 운하 프로젝트를 위임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홍해와 지중해의 수위 차가 10미터에 달하며, 운하 중간에 거대한 바위들이 많다는 사전조사 결과를 보고 계획을 포기했다. 그러나 이 보고서는 당시의 전쟁 상황으로 미루어 볼 때 정확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1833년, 생-시몽주의자(Saint-Simoniens, 공상적 사회주의자) 로 알려진 프랑스 지식인 그룹이 카이로에 도착하여 운하 착공에 관심을 보였으나, 당시 이집트 태수 무하마드 알리(Muhammad Ali)는 이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운하를 개착하면 이집트의 독립유지가 불가능해진다는 이유로 프랑스인 푸르네의 신청(1834)과 오스트리아 메테르니히의 출원(1838, 1841)을 각하하였다. 이후에도 생-시몽주의자들은 1846년에 프랑스·영국·오스트리아 등의 지식인의 협력을 얻어 수에즈 운하 연구협회를 설립하고, 국제 기업에 의한 운하 개착을 구체적으로 계획하였으나 영국의 자본가와 정계는 자기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강경히 반대하였다. 1854년 이집트의 태수가 된 무함마드 사이드 파샤(Muhammad Said Pasha)는 무함마드 알리와 달리 유럽의 영향력에 개방적이었다. 그는 프랑스인 페르디낭 드 레셉스(Ferdinand deLesseps)에게 운하 개착 특허권과 수에즈 지협 조차권(租借權)을 주었고, 1856년에는 이집트의 종주국(宗主國)이던 오스만투르크제국도 이를 승인하였다. 레셉스는 1858년 ‘만국 수에즈 해양운하회사(Universal Company of the Maritime Suez Canal)’를 이집트 법인(法人)으로서 설립하였으며, 2억 프랑(800만 파운드)의 자본금에 주식(株式)을 국제적으로 공개하였다. 주식은 1주 500프랑이었으며, 프랑스인이 20만 7000주를 소화하고, 이집트 태수가 17만 7000주를 인수하였으며, 운하 개통 후 99년간 소유권을 법인이 보유했다가 그 후 이집트 정부에 소유권을 이양하는 데에 합의하였다. 이리하여 레셉스는 1859년 4월 25일 지중해안의 포트사이드에서 기공식을 거행하고 공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고대의 운하를 개수(改修)하여 음료수의 공급과 수송로가 확보된 단계에서 영국이 수만 명의 이집트인을 강제 노동에 동원했다는 점과 6만 ha에 이르는 농경지 조차를 이유로 들어 이집트 정부에 항의했기 때문에 운하의 개착 공사가 일시적으로 중지되었다. 영국의 계속되는 방해로 공사가 늦어지고 이에 따른 경제적 손실이 불어나자 만국 수에즈 해양운하회사는 영국 및 오스만투르크제국과 대립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사태는 1864년 나폴레옹 3세의 중재로 해결되었으며, 1866년 ‘만국 수에즈 해양운하회사는 이집트의 회사이며, 이집트의 법과 관습에 따른다’는 내용이 포함된 새로운 협정이 조인되었고, 같은 해에 오스만투르크제국 황제의 최종공사허가서가 나왔다. 이리하여 운하는 개통되었고, 1869년 11월 17일 세계 각국의 국가원수·귀빈·명사가 초대된 성대한 개통식을 가졌다. 이 개통으로 런던-싱가포르 항로는 케이프타운 경유로 2만 4500km인 것이 1만 5027km로 줄어들고, 런던-뭄바이는 2만 1400km인 것이 1만 1472km로 단축되었다. 개착공사에는 35hp의 증기기관을 가진 버킷 준설기(浚渫機) 60대를 비롯하여 새로운 토목용 기계가 1863년부터 투입되었으며 그 후 세계 각지의 하천 공사나 운하 개착에 획기적인 영향을 주었다. 운하의 단면은 수심 7.9m, 저부(底部)의 폭원(幅員) 22m, 수면의 폭원 60∼100m의 얕은 대형(臺形)이었다. 1964년의 확장 공사 착수(미완성) 때까지에 수심 14.5m, 저부의 폭원 90m, 수면폭 160∼200m로 이미 확장되어 있었으며, 운하의 남북 3개소에 바이패스가 만들어져 5만 5000t급 선박이 지나갈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선단(船團)이 운하를 통과하는 평균 시간은 약 15시간이었다. 수에즈 운하 위치   수에즈 운하 300km © NAVER Corp. /OpenStreetMap   [네이버 지식백과] 수에즈 운하 [Suez Canal] (두산백과)
7877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치마 시위" 댓글:  조회:2954  추천:0  2021-03-30
군경 막는데 여성 치마가 효과?… 미얀마 '타메인 시위' 확산 2021-03-08   글자크기조정  
7876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다 잘 될거야"... 댓글:  조회:2864  추천:0  2021-03-30
태권도·춤 사랑한 19세 미얀마 소녀, 군 총탄에 스러져   국민일보     2021.03.04     “다 잘 될거야” 티셔츠 문구, 저항의 상징으로 연합뉴스, 페이스북 캡처 미얀마에서 군경이 시위대를 향해 또다시 무차별 총격을 가해 유혈사태가 또 발생한 가운데 군경의 총을 맞고 사망한 19세 여성이 입었던 티셔츠 문구가 SNS를 중심으로 퍼지면서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4일(현지시간) 로이터통신은 ‘에인절’(Angel) 또는 ‘치알 신’(Kyal Sin)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여성의 사연을 보도했다. 에인절은 전날 미얀마 제2도시인 만달레이에서 열린 쿠데타 반대 시위에 참가하기 위해 거리에 나갔다가 머리에 총탄을 맞고 숨졌다. 에인절과 함께 시위에 나갔다는 미얏 뚜는 로이터에 “경찰이 총을 쏘기 시작했을 때 에인절은 ‘총알에 맞을 수 있으니 앉으라’고 말했다”며 “다른 사람들을 챙기고 보호해줬던 친구였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시위대가 평화적으로 모여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경찰이 최루탄에 이어 총격을 가하자 시위대가 흩어졌고, 나중에 ‘한 소녀가 사망했다’는 메시지를 받았다고 한다. 미얏 뚜는 “그 소녀가 에인절인지는 몰랐다”면서 하지만 페이스북에서 에인절이 다른 희생자와 함께 숨진 채 누워있는 사진을 보고 알게 됐다고 말했다. 3일(현지시간) 오전 미얀마 군사 쿠데타 반대 시위에 나선 19세 에인절의 모습과 그의 목에 걸려 있던 혈액형과 ‘죽으면 장기를 기증해달라’고 적힌 목걸이. SNS 캡처 숨진 에인절이 입었던 검은색 티셔츠에는 하얀 글씨로 ‘모든 것이 다 잘 될거야’(Everything will be OK)라는 글귀가 쓰여 있었다. 시위대는 이 문구를 찍어 SNS에 올렸고 사람들 사이에서 빠르게 퍼졌다. 아이들의 태권도 선생이자 댄서였던 에인절은 시위에 나서기 전 죽음까지 각오한 듯 페이스북에 자신의 혈액 정보와 연락처, 시신 기증 요청서를 남겼다. SNS에는 그녀를 추모하는 글들이 넘쳐나고 있다. 특히 페이스북에 그녀가 생전 춤을 추는 모습이 담긴 영상에 많은 사람이 댓글을 달며 애도를 표하고 있다. 페북에는 에인절이 태권도복을 입은 사진도 있었다. KBS에 따르면 그녀는 학생들에게 태권도를 가르친 적이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에인절의 생전 모습. SNS 캡처 지난해 11월 총선 투표 날 그녀가 입었던 붉은 옷은 그녀의 수의가 됐다. 붉은색은 아웅 산 수 치의 민주주의민족동맹(NLD)을 상징하는 색이다. 미얏 뚜는 “에인절은 가족을 사랑하는 행복한 소녀였다”며 “우리는 전쟁을 하는 게 아니다. 시민을 향해 총탄을 쏠 이유가 없다. 그들이 인간이라면, 이럴 수는 없다”고 말했다고 통신은 전했다. 네티즌들이 3일(현지시간) 미얀마 군사 쿠데타 반대 시위에 참여했다가 군경의 총탄에 숨진 에인젤을 추모하는 그림을 올리고 있다. SNS 캡처 이날 크리스틴 슈래너 버기너 유엔 미얀마 특사는 기자회견을 열고 “미얀마에서 쿠데타 발발 이후 가장 많은 38명이 숨졌다. 2월 1일 쿠데타 발생 이후 가장 많은 피를 흘린 날”이라면서 “이제 쿠데타 이후 총 사망자가 50명을 넘었다”고 말했다. 그는 평화적 사태 해결을 촉구하며 “미얀마에서 진짜 전쟁이 벌어질 수도 있다”고 염려했다. /최민우 기자
7875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차라리 날 쏴라"... 댓글:  조회:2520  추천:0  2021-03-30
  “차라리 날 쏴라” 미얀마 무장경찰 맨몸으로 막은 수녀의 절규 김은경 기자 2021.03.03    미얀마의 군부 퇴진을 요구하며 벌어진 시위에서 방패와 곤봉으로 무장한 경찰병력을 맨몸으로 막아선 수녀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 전 세계인의 마음을 울리고 있다.   /찰스 마웅 보 추기경 트위터 미얀마 주교회의 의장이자 양곤 대교구 대주교인 찰스 마웅 보 추기경은 지난달 28일(현지 시각) 트위터에 시위 현장을 담은 사진을 여러 장 올렸다. 이날은 미얀마 전역에서 벌어진 시위에서 군경의 발포로 18명이 사망하고 30명이 다친 ‘피의 일요일’이었다. 여러 사진 가운데, 헬멧을 쓴 채 곤봉과 플라스틱 방패를 든 수십 명의 경찰 앞에서 무릎을 꿇은 수녀의 모습을 찍은 것도 있었다. 경찰 뒤편에는 군복을 입고 소총을 든 군인도 있다. 마웅 보 추기경은 “이 수녀는 자유와 인권을 위해 저항하는 민간인을 쏘지 말라고 경찰에 애원하고 있다”고 적었다.   /찰스 마웅 보 추기경 트위터 사진 속 수녀는 미얀마의 성 프란시스 자비에르 교구 소속 앤 로사 누 따웅(45)이다. 이날 앤 수녀가 사는 미얀마 북부 미치나에서도 쿠데타 반대 시위대 수십 명이 모였다. 수녀들도 시민들과 연대하는 플래카드를 들고 교회와 수녀원 앞으로 나섰다. 군경이 시위대를 해산하고 체포하는 과정에서 수십 명의 시민들이 진압을 피하기 위해 수녀원으로 몰려들었다. 앤 수녀도 이 과정에서 다리와 가슴을 맞아 부상을 입었다고 한다.     지난 달 28일 미얀마의 유혈 시위현장에서 온 몸으로 군경의 진압을 막아섰던 미얀마의 성 프란시스 자비에르 교구 소속 앤 로사 누 따웅수녀는 1일 "“여정이 힘들고 더 많은 유혈 사태에 직면 했음에도 불구하고 인내를 통해 우리의 목표를 달성 할 것이라고 믿는다.”고 말했다./ RVA 교황청 기관지 로세르바토레 로마노(L’osservatore Romano)에 따르면 앤 수녀는 총알과 최루탄 연기, 울음소리가 가득한 도로 한복판에 뛰어들어 무릎을 꿇고 외쳤다. 제발 쏘지 마세요. 죄 없는 사람을 죽이지 마세요. 원한다면 저를 쏘세요. 신도들이 위험하다며 말렸지만 앤 수녀는 주저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녀의 진심어린 호소가 통했을까, 군경은 행군을 중단했고 진압을 멈췄다. 무장한 경찰 중 일부는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앤 수녀는 잠시 뒤 부상자들을 치료하기 위해 다시 수녀원으로 달려 들어갔다고 한다. 로세르바토레 로마노는 “앤 수녀의 용기 덕분에 100명의 시위자들이 수녀원으로 피난했고, 40여명의 부상자가 인근 병원으로 이송돼 응급 처치를 받을 수 있었다”고 했다. 그녀는 UCA뉴스에 “나는 가톨릭 수녀이지만, 미얀마 시민이기도 하다”며 “민주주의를 향한 여정이 험난하고 앞으로 더 많은 유혈 사태에 직면할지라도, 인내로써 반드시 도달할 것이라고 믿는다”고 했다.
7874    조선족 시단과 시인들...6 댓글:  조회:1982  추천:0  2021-03-02
현대와 전통의 결합에서 길 찾다/김학송편6 편집/기자: [ 김청수 ]  [ 길림신문 ] [ 2021-02-24 ]   —중화인민공화국 창립 70돐 기념 특별기획 대형구술시리즈[문화를 말하다-109](김학송편6) 아래에 저의 창작경위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저는 도문시 곡수라는 곳에서 태여났습니다. 아버지는 소학교 교원이였고 어머니는 농민이였습니다. 어린 시절 쭉 시골에서 살아왔고 1968년도에 중학을 졸업하고 고향마을로 돌아왔습니다. 저는 7년간 농사일에 종사하면서 당시의 사회환경, 주변환경의 영향으로 문학이 무엇인지 모르고 살아왔습니다. 사실 처녀작을 발표하기 전까지도 문학경력은 물론이고 문학을 하기 위한 준비조차 제로상태였습니다. 부모님을 모시고 형제자매들과 함께. 1975년도에 빈하중농의 추천을 받아서 장춘야금학교에 갔습니다. 그러나 저는 지질학과에 흥미가 없었어요. 그 일을 하고 싶지도 않았어요. 앞으로 무얼 해야 하는가? 청춘기에 많이 곤혹스러웠습니다. 지질학과를 졸업하고 훈춘광산에 배치 받아 약 일년간 근무하다가 도문시 상업계통에도 몸을 담갔지만 차례지는 일마다 하고 싶지 않은 일들이여서 많이 힘들었습니다. 그럭저럭 세월만 축내고 있었지만 심적고충과 갈등이 대단했지요. 제가 도문 석유공사에 있을 때 일입니다. 하루는 친구와 같이 업무를 보러 도문시 신농공사에 갔습니다. 시골에 가서 조사를 하고 돌아와서 함께 간 친구와 단둘이 술을 몇잔 나누게 되였어요. 그 때는 술을 마실 줄을 몰랐는데 배갈을 둬잔 마시고나니 알딸딸해났어요. 붕- 뜬 것 같은 기분 속에서 평소에 늘 생각하던 삶에 대한 곤혹, 내가 이렇게 살아도 좋은가 하는 의문이 극대화되더라구요. 그러면서 그 순간에 나도 살아 있다고 소리치고 싶더라구요. 그리하여 노트에다 라고 제목을 쓰고 시골에 갔다 온 경험을, 그 때의 생각을 그대로 쫙 썼습니다.   청년시절의 김학송. 이튿날 친구한테 보여 주니까 문화대혁명 전에 고중을 졸업한 그 친구가 “당신이 이걸 참 잘 썼소. 어디에다 투고를 하오.”라고 말하는 것이였어요. “투고?” 투고라는 개념도 모르는 나는 어디에다 어떻게 투고를 하느냐고 물었어요. 길 건너 진정부 당직실에 가면 《연변문예》라는 잡지가 있다고 알려주었어요. 그래서 가보니 정말《연변문예》가 있었어요. 당직실 경비를 서는 분이 성격이 자상하여 저를 도와 봉투에 주소를 적어 주고 8전짜리 우표까지 붙여주었어요. 그리하여 어설픈 ‘시’를 들고 석현우체국의 길옆에 있는 파란 우체통앞에 마주섰어요. 정작 우체통안에 넣으려고 하니 손이 떨렸어요. 넣을가 말가 하고 한창 고민하다가 “어차피 편집들은 나를 모른다.”고 생각하고 툭 떨궈 넣고 돌아왔어요. 그런데 누가 도왔는지 모르겠지만 《연변문예》(《연변문학》의 전신)에 제가 쓴 글이 실려 저는 몹시 흥분했고 너무 기뻐서 문학적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제멋대로 시를 막 썼습니다. 운 좋게 저의 시들이 륙속 《연변문예》에 실렸습니다. 1984년도에 추천받아 연변대학 작가반에 가게 되고 4년 본과공부를 마치고 졸업 후 도문시창작실에 몇해 있으면서 시를 부지런히 썼고 가사도 많이 썼습니다. 저의 문학생애에서 전환점이 왔습니다. 어느날 연변작가협회에 배치받은 동창생 한분이 도문에 놀러왔어요. 그분은 저더러 연길에 오면 한국책을 갖다 보라는 것이였어요. 나는 그 때까지 한국책 한권조차 만져 본 적 없었어요. 그래서 하루는 연길에 갔던 걸음에 그 동창분 숙소에서 구석에 차고 넘치는 한국책 가운데서 딱 한권만 뽑아 갖고 돌아왔어요. 집에 가 딱 펼쳐보는 찰나에 책이 너무 좋더라구요. 열심히 두세번 읽어보고 뒤면에 있는 주소로 독후감을 써서 서울에 보냈어요. 그것이 인연이 되여 한국 작가와의 편지래왕이 시작되였지요. 그분이 바로 한국에서 너무나 유명한 리해인시인이였어요. 리해인시인과 함께. 그분은 이름없는 저한테 회답도 보내주고 시집도 보내주고 했어요. 반년 동안 편지거래를 하면서 그분한테서 받기만 하는 것이 미안하여 저의 창작노트에 썼던 시를 모아 육필시집을 만들어 보냈어요. 《김학송시집》이라 해놓고 미래의 언제가는 출판할 것이라는 뜻에서 그랬는지는 모르나 ‘미래출판사’라고 쓰고 제목은 《님을 찾는 비소리》라고 했어요. 지금 봐도 제목 하나는 괜찮은 것 같아요. 리해인시인은 내가 보낸 창작노트를 숙소에 가지고 가 있다가 부산대학에 특강을 온 한국의 근대시단을 대표하는 구상시인에게 보였다고 했어요. 구상시인은 큰 어르신인데 그 어설픈 시를 바쁜 와중에 다 보고 “허허 내용이 참 좋은데…”라고 하더라는 것이였어요. 그리고 서울에 갖고 가서 미래출판사에서 출판하도록 소개를 해줬어요. 그분은 한국시인협회를 대표하는 분이라 이듬해 한국세계시인대회에 저를 초청했어요. 그러면서 극적인 변화가 막 오더라구요. 그 때 리상각선생님이랑 김철시인이랑 모시고 서울로 간 다음 한국의 많은 우수한 시인들을 만났어요. 구상시인을 모시고. 저는 1년 8개월 그 곳에 머물며 전문 시창작만 하였어요. 적당히 현대수법도 배웠지요. 하지만 저는 애초부터 현대수법 쪽으로 넘어가지 않고 전통시에다 현대수법을 접목하는 데로 나아갔어요. 어떻게 하면 우리 시의 전통에다 현대수법을, 우리에게 모자라는 것을 보충하여 나다운 시를 만들 것인가를 많이 고민했지요. 운 좋게 1년 8개월 사이에 10여권의 시집을 련속 출판하고 귀국하였습니다. 지금까지도 저는 드팀없이 사실주의수법에 바탕을 두고 적당한 상징, 은유, 이미지화를 접목하여 우리 연변식의 전통시, 례컨대 김철, 리상각, 김성휘, 조룡남, 설인선생님들이 개척한 연변식의 시풍을 보완해가지고 저의 체질에 맞게 (어떻게 하면) 더 아름답게 가꾸겠는가를 많이 연구합니다. 저의 시학관은 “우선 진실해야 한다. 다음 표현이 재미있고 여운이 있어야 한다. 시행은 될수록 짧으면 좋다. 시는 한마디로 사람들의 마음에 다가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같은 관념을 가지고 꾸준히 시를 썼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을 가꾸는 일이라는 것, 시인은 마음의 순수를 지켜야 지속적인 발전이 가능하다는 것을 저는 실천을 통해 깨달았습니다. 지금까지 거의 30권의 시집을 출판했고 ‘전국소수민족준마상’과 ‘단군문학상’이라는 영예도 저한테 차례졌습니다. 서울 아시아 시인대회에 참가한 김학송(오른쪽 첫사람). 최근에는 연변사랑의 주제로 된 시를 많이 씁니다. 2017년에는 《내사랑 연변》이라는 시화집을 냈습니다. 저의 시 180수에다 (연변)촬영가협회 주석이 사진을 배합하여 번역까지 하여 자치주의 이름으로 출판하였습니다. 주제가 몽땅 민족사랑, 연변사랑입니다. 거기에는 우리 민족의 력사, 문화, 향토, 관광지, 민속이 다 들어갔어요. 그리하여 어느 평론가는 “민족얼의 교향곡”이라고 평가하였습니다. 저는 이에 자부심을 느낍니다. 저도 우리 민족을 위하여, 우리 서정시를 위하여 일 같은 일을 좀 했구나 하고 위안을 느끼고 있습니다. 하여 저는 지금도 이런 시를 쓰고 있습니다. 오라지 않아 연변조선족자치주 성립 70돐이 됩니다. 이번에는 ‘사랑스런 연변’이라는 한가지 주제로 자치주의 70년의 력사, 우리 문화의 우월성, 우리 민족의 정체성, 우리 민족 풍속을 포함하여 150여 수의 시를 썼는데 이미 번역에 교부하였습니다. 저는 마침 연변조선족자치주와 동갑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늘상 연변의 력사이자 내가 살아온 력사였고 연변의 아픔이자 나의 아픔이였고 연변의 수난사이자 나의 수난사였고 연변의 미래이자 나의 미래이기에 연변과 나는 한몸이 되고 우리 조선족과 나는 한몸이라는 시각에서 시창작에 임하고 있습니다. ‘윤동주문학상’을 수상하면서. 그리하여 어느 독자는 “선생님의 시는 조선족들 가운데 랑송이 제일 많이 됩니다. 이는 우연한 것이 아닙니다. 그토록 민족을 사랑하고 민족에 대한 시를 가슴으로, 피로 쓰기 때문에 조선족독자들이 제일 좋아하고 랑송가들이 제일 애송합니다. 때문에 제1차, 2차, 3차 조선족랑송대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앞다투어 랑송했고 우수상, 대상이 모두 김학송의 시에서 나왔지 않습니까.” 이런 내용이 담긴 팬레터를 보내왔어요. 그러나 저의 시는 아직 시작이고 모자라는 것이 많습니다. 다만 소실되여 가고 있는 우리 문화, 우리 서정의 뜰을 우리가 가꾸지 않고 누가 가꾸겠는가 하는 생각이 저를 떠밀어 줄 뿐입니다. 우리 서정시에는 우리만의 얼이 담겨있습니다. 그냥 시가 아닙니다. 우리 서정시는 사실 문학보다 더 큰 의미를 지닙니다. 그냥 문학이라고 보면 안돼요. 그건 나의 정체성을 증명하고 나를 지키고 우리 글을 지키고 내 령혼을 지키는 작업이예요. 이런 아름다운 본보기를 후손만대에 넘겨 주어야 하는 것이지요. 사실 우리는 정서적인 기록자입니다. 그 시대 발자취를 시인들은 기록합니다. 제가 가장 경계하고 싫어하는 것은 무병신음하고 난해하게 쓰고 독자들이 리해할 수 없게 쓴 시들입니다. 이 시대에 왜 시가 필요합니까?! 공감대가 극대화되여야 합니다. 누군가 많이 호응해 주고 많은 사람을 위해 시가 리용되여야 합니다. 시 하면 많은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 되여야 하고 독자들에게 가까이 다가가 독자를 위해 복무해야 됩니다. 이런 공능도 같이 지녀야 합니다. 물론 예술성도 있어야 되겠지요. 산악회 멤버들과 함께. 저의 시가운데서 독자들이 비교적 좋아하는 짧은 시 한수로는 1993년도에 쓴 〈사람이 그립다〉는 시인데 이 시는 대학입시에도 출제되였다고 하더군요. 사람의 숲에서 사람이 그립다 도시가 무너지게 밀려드는 사람… 사람… 사람의 숲에서 사람이 그립다 아주 짧은 시입니다. 시장경제의 도래와 함께 인간성이 점점 상실되여 가고 도시가 팽창하는 가운데 문화가 약화되고 우리 언어가 소실되고 우리 가장 귀중한 부분이 없어지고 있습니다. 소박하고 아름답고 향기로운 인정은 사라져가고 있어요. 그래서 저는 이 도시라는 사람의 숲에서 외로움을 느낍니다. 존재의 고독을 느끼고 고립감을 느낍니다. 하기에 〈사람이 그립다〉는 이 시는 한 시대의 생활상에 대한 역설적인 풍속도입니다. 그래서 짧은 몇줄의 시행에다 개혁개방 후 특히 시장경제가 대두한 후에 도시화되면서 나타난 인정의 빈곤, 문화의 빈곤에서 느끼는 단절감, 소외감, 현대인의 곤혹과 정신적 빈곤을 다룬 것입니다. 그밖에도 저는 〈나는 조선민족이다〉는 시를 썼습니다. 이 시는 제가 1983년도에 썼습니다. 그 해에 《도라지》잡지에 실렸고 문창남시인이 내줬는데 ‘도라지문학상’까지 탔어요. 발표된 후 영향력이 컸다고 하더라고요. 한국에도 소개되였고 1990년도 세계제1회한민족대회에서 랑송되였다고 합니다. 그렇게 알려지면서 독일, 일본, 카나다, 미국, 한국, 조선 등 여러 나라에 소개되였지요. 저는 그런 줄도 몰랐어요. 그 시가 그렇게 세계 여러 나라에 알려진 줄은 전혀 몰랐어요. 그러다가 한 때는 잠잠하던 이 시가 몇해전부터 다시 부활하였습니다. 어떻게 부활했는가 하면 길림시에 있는 권영철이라는 조선족랑송가가 이 시를 어떻게 찾아가지고 랑송계정에 올렸습니다. 불과 1년이 안 되여 1만 7000차 방문수가 오르면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은 것이였어요. 댓글이 비발치고 하면서 란리가 난 것이였어요. 조선족모임에서 이 시가 랑송되였을 때 서로 부둥켜 안고 울기까지 했대요. 그러니 이 시가 30여년 만에 어느 랑송가가 랑송하면서 부활한 것이였어요. 사랑하는 안해와 딸과 함께 새봄을 맞으며. 권영철씨가 랑송한 다음 연변랑송가협회에서 너도나도 랑송하였어요. 송미자 회장이 랑송한 뒤로 또 방문자수가 1만 2000차 오르면서 방문자가 3만차를 훨씬 넘겼고 계속 인기가 올라가고 있어요. 올해는 랑송가 박인석이 조선족시랑송대회에서 이 시를 랑송하여 대상을 거머쥐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시도 때가 되면 부활한다는 재미있는 현상을 발견하였어요. 시도 생명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지요. 제가 그 시를 다시 살펴 보니 직설적인 수법으로 썼고 사실 예술수준이 높은 것은 아닙니다. 이미지화도 잘된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이 시의 우점은 진실성입니다. 솔직담백하게 조선민족의 자부심을 아주 솔직하게 썼어요. 진실이 묻어나는 겁니다. 중국의 유명한 시평가 리경택은 어느 평론에서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문학의 중심가치는 진실이다.”고 하였습니다. 이건 큰 종소리처럼 우리한테 계발을 줍니다. 〈나는 조선민족이다〉에서 내 마음을 진실하게 표출하였습니다. 그러니까 40년이 지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애송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 세상 그 어디를 가나오나 나는 정녕 자랑하고 싶노라 내가 배운 가장 무거운 말로 나는 조선민족이다 … … 조선민족 마음과 마음을 혈맥처럼 이어주는 그 친절한 부름 속에서 넘어지면 달려가 부축하고 싶고 앓으면 약이 되고 싶고 슬프면 꽃다발로 안기고픈 그 마음 그 정성 샘물처럼 말갛고 박꽃처럼 깨끗하고 진달래처럼 붉어라 이런 식으로 풀어나갑니다. 그리고 아래에 가서는 중화의 대가정 속에 살아가는 조선민족만의 긍지, 조선민족만의 특수성, 우리 민족이 버리지 말아야 할 소중한 것, 그 모든 것을 담았기에 한국의 연세대 도서관 큰 잡지표지에도 실렸더군요. 마지막 부분을 저는 이렇게 썼습니다. … 가령 내가 이 세상 막끝 이름없는 계곡에서 한오리 연기로 사라진다 하더라도 나는 정녕 잊지를 않으리라 내가 이 세상에서 조선민족으로 살았다는 것을 지금도 광주나 북경에서 큰 대회가 있을 때면 조선족들이 이 시를 랑송한대요. 그런 소문을 제가 많이 듣고 있어요. 시 한수의 선동력, 호소력이 저의 상상을 초월하고 있어요. 그밖에도 2010년에 쓴 〈혼의 노래〉라는 시가 있습니다. ‘해란강문학상’을 수상한 시인데 그 시가 발표되면서 계정에 올랐고 연변랑송가협회 제1차, 제2차 랑송대회에서 대상을 수상하였으며 랑송가들이 제일 좋아하는 시로 되였어요. 이 시는 고급중학교 열독참고서에도 등재되였습니다. 〈혼의 노래〉의 주제는 우리 조선족의 발자취를 쓴 것입니다. 연변의 과거, 현재, 미래를 쓴 장시로서 호흡이 꽤나 긴 시입니다. 새 천년에 들어서면서 조선족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의 하나로 되였고 지금도 랑송가들이 애송하고 적지 않은 시평가들이 조선족 서정시에서의 대표적 시라고 저를 치켜세웁니다. 이럴 때 제가 시를 쓰는 가치를 느끼고 의미를 느낍니다. 앞으로도 독자들의 수요에 부응하여 독자들이 좋아하는 시 또 저의 마음이 닿는 시들을 계속 꾸준히 쓰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글 구성/ 김청수 기자 영상 사진/김성걸 김파 정현관 기자
7873    조선족 시단과 시인들...5 댓글:  조회:2123  추천:0  2021-03-02
감각적 언어파 계렬의 시인들/김학송편5 (ZOGLO) 2021년2월24일    —중화인민공화국 창립 70돐 기념 특별기획 대형구술시리즈[문화를 말하다-108](김학송편5) 한춘시인은 본명이 림국웅입니다. 그는 흑룡강성 연수현에서 태여났습니다. 흑룡강신문사에서 오래동안 편집사업을 하였고 문예부 주임, 《진달래》부간 책임을 맡고 흑룡강에서 문학신인을 양성하는데 많은 공헌을 하였습니다. 또 그는 시평가로서 자기 시만 많이 쓴 것이 아니고 시평을 통해서 우리 시단을 (많이 익혔습니다). 시집으로는 《무지개는 뿌리내릴 곳을 찾는다》 등이 있고 시론집도 냈습니다. 시인 한춘. 한춘시인은 1963년도에 벌써 처녀작을 발표하였고 후에 현대시에 대해 연구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현대시 곤혼과 선택》이라는 시론집도 내고 특히 20세기 80년대에 불어친 주류문단의 몽롱시를 번역하여 조선족 시단에 소개하였습니다. 또한 자기의 재래식의 시를 검토하고 거기서 차이점을 찾고 새로운 시풍을 만들기 위해 많이 노력하였습니다. 한춘시인의 시가운데 〈겨울살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잠간 살펴보도록 합시다. 밤새도록 클라이네트 독주소리가 귀를 저몄다 갓 퍼진 소문을 쓰러뜨린 도회지 뒤골목의 한 세상 바람이 무엇인지 사람들은 알게 될 것이다 추운 겨울을 이겨내는 감탕나무의 형상을 썼지만 실지는 인간을 쓴 것입니다. 인간의 실존적인 상황을 상징적으로 표현했어요. 비교적 구성도 짜이고 현대시로서는 성공한 시라고 봐야지요. 직설적이지 않고 감탕나무의 겨울살이를 시적 대상물로 삼아 묘하게 인간의 모습으로 상징해 버렸어요. 여기서는 어떤 숨은 뜻을 넌지시 비켜서 내비치는 기교를 발휘했습니다. 한춘시인의 작품집. 이 시뿐만 아니고 이와 류사한 시들을 많이 썼고 특히는 (지난 세기) 70년대 말, 80년대 초 그 무렵에 〈그때 우리는 어찌하여〉라는 시를 썼습니다. 이 시는 상처문학의 계렬에 속해요. 문화대혁명을 반성하고 내가 젊어서 어찌하여 토마토만 붉은 줄을 알고 세상을 온통 붉은 바다로 만들려고 그렇게 날뛰였는가? 이런 개인적인 참회, 시대에 대한 반성을 다루었습니다. 시대감이 있게 아주 설득력 있게 표현을 잘했기 때문에 그 시가 나오면서부터 사람들은 “어머, 한춘이라는 시인이 괜찮네.”라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한춘선생님의〈그때 우리는 어찌하여〉라는 시가 너무 생동하여 저의 가슴을 울려주던 인상이 지금도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지난 세기) 80년대 중기에 들어서면서 이런 직설적인 시에 대한 회의를 느끼게 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현대시에 대한 개척에 몸부림칩니다. 서구적인 시풍을 받아들이고 자기 시를 이미지화시키고 립체적으로 다양성을 기하면서 시의 여운을 남기려고 현대적 수법에 관심을 가집니다. 이분의 주요 공로는 물론 창작에도 있겠지만 《흑룡강신문》을 무대로 하여 많은 신인들을 양성하고 또 주류문단의 앞선 시의 바람을 조선족 문단에 전파시키고 우리 조선족 문단, 특히 시단에서 관념갱신을 하고 새로운 시풍을 개척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고 봅니다. 제3회 ‘윤동주문학상’을 수상한 김파시인. 다음은 김파시인을 소개하고저 합니다. 김파시인은 흑룡강성 해림현에서 태여났습니다. 이분은 장기간 학교에서 교편을 잡았고 도문시 문화국 창작실에서 근무하였습니다. 시집으로는 《흰돛》, 시론집《립체시론》등 많은 책을 냈고 장편서사시도 썼습니다. 김파시인은 (지난 세기) 70년대 초반부터 시를 썼는데 초기에는 아주 향토색이 짙은 사실주의시풍으로 재미있게 시를 썼습니다. 언어감각도 재미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지난 세기) 80년대 중반 시각관념에 대한 갱신의 바람이 불자 1986년도부터는 립체시론에 관심을 갖고 립체시론이라는 실험을 시작하였습니다. 립체시론의 주요관점은 한수의 시에서 주제가 다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후 립체시론을 체계화한 론문집까지 냈습니다. 그렇지만 이같은 시론은 이미 프랑스에서도 미래주의 립체파들이 시도한 바가 있었기에 이분이 개척했다고 보기에는 어렵습니다. 고전시가에서도 시의 다의성은 다 있는 것입니다. 시의 암시성, 모호성, 다의성은 시가자체의 생리적인 특점이예요. 그렇기 때문에 김파선생님이 특별하게 주제의 다의성을 들고 나왔지만 설득력을 얻기에는 역부족이였어요.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립체시보다는 오히려 생활에 발을 붙이고 소박하게 쓴 시 가운데서 좋은 시가 나왔습니다. 례컨대〈욕망〉이라는 시인데 사상성, 예술성이 아주 높아요. 그러니 립체시에 대한 시도는 많이 했어도 좋은 시를 많이 못 쓰고 오히려 전통에 발을 붙이고 감각적으로 재미있게 쓴 시가 좋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욕망〉을 잠간 살펴봅시다. 도심의 어물전에 놓인 숱한 어물들 조기 칼치 붕어 잉어 번쩍이는 갑옷에 죽어서도 뻣뻣한 자존심 헌데 눈 감는 놈은 한놈도 없다 이 세상 끝날 때까지 영원히 한끝을 보겠다는 고집스러운 욕망때문이리라 참 재미있게 썼습니다.〈욕망〉의 시적 대상은 어물전에 놓인 고기들입니다. 고기들은 죽어도 눈을 번쩍번쩍 뜨고 죽어요. 그런 현상을 묘하게 집어내가지고 시장경제가 대두하면서 사람들의 욕망이 팽배해지는 그런 인간상이나 사회상을 어물전에 놓인 조기, 칼치, 잉어, 붕어의 죽은 눈에 빗대여 아주 아이러니하게, 유머적으로 시적 암시를 잘한 것입니다. 시인 김파선생의 시집들. “오, 이 시야말로 참된 서정시구나.” 풍격 여하를 떠나 정말 설득력이 있고 여운이 있는 시의 진면모를 잘 보여주었어요. 이 시는 시의 이미지화도 잘 되였고 사상예술성이 아주 높아요. 그리하여 ‘김파’하면 시론은 둘째치고 〈욕망〉부터 떠오릅니다. “아,〈욕망〉을 쓴 시인, 이런 성숙된 시를 쓴 분이구나!” 한마디로 이분은 평생 시의 개혁에 몸부림치고 서양의 상징주의, 초현실주의를 받아들이며 자기 시풍을 개척하느라고 노력했지만 그런 실험시들로는 성공하였다고 보기 어렵고 오히려 전통시로 소박하게 썼을 때 좋은 시를 뽑아 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김파선생님은 우리 시단에서 시의 관념갱신을 위해 몸부림쳤고 또 좋은 시를 뽑기 위해 노력을 많이 한, 또 좋은 시도 남긴 우수한 서정시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음 박화선생님을 소개하겠습니다. 박화시인은 1938년도에 출생했고 료녕출판사에서 장기간 문예편집으로 지냈으며 간행물 부주필로도 지낸 분입니다. 박화선생님은 문예편집을 지내면서 많은 시를 창작하였습니다. 1958년도에 벌써 처녀작을 발표하였습니다. 대학시절부터 시를 썼다고 합니다. 시집으로는《푸른 종소리》등 많은 시집을 출판하였습니다. 박화시인. 이분의 가장 큰 특점이 (지난 세기) 80년대 중반으로부터 주지시 실험을 한 것입니다. 초기에는 사실주의기법으로 랑만주의 시를 많이 썼습니다. 박화선생님은 시론도 많이 쓰고 시에 대해 자기 주관과 시관을 갖고 계신 분입니다. 장백산 폭포 분신쇄골 어떠랴 하얗게 소리치며 하나로 향한 마음 절벽처럼 꿋꿋하게 천지간에 우뚝 섰다 아주 감각적으로 주지적으로 사물을 형상화하였습니다. 표현방법상 폭포가 흐르는듯한 형태로 시의 행을 라렬했습니다. 이분만의 소위의 주지시 실험인 것이지요. 사실 이 시는 프랑스의 미래주의 립체파의 선구자 아폴르네르의 도상시를 모방한 것이라고 할 수 있어요. 아폴르네르는 도상시로 시의 형태미, 조형미를 구축한 시인입니다. 그는 비가 내린다 하면 언어라렬을 비가 떨어지듯이, 산을 쓸 땐 시어를 산처럼, 강은 강처럼 길게 시어를 배치합니다. 이런 도상시 실험은 아폴르네르가 이미 시도한 것으로서 박화시인의 실험은 어찌하면 일종 모방이라 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초기시에는 좋은 시가 많습니다. 그중 사실주의수법으로 어떤 대상물을 빌어 청춘남녀의 애정심리를 아주 재미있게 표현한 시가 있습니다.〈빨간 들창〉이란 시인데 이 시를 잠간 살펴봅시다. 활짝 열린 창가에 나란히 서서 해빛밝은 세상에 웃음을 날릴 아 그날의 푸른 꿈이 날개 돋히여 나는 야 오늘도 휘바람 분다   노래 좀 멈추고 들어보렴아 들창 열고 방긋 웃어주렴아 절절한 내 마음 불새가 되여 빨간 들창 두드린다 휘파람소리 7.5조의 리듬을 타고 울리는 아름다운 절창입니다. 빨간 들창에 녀자의 그림자가 언뜰언뜰 할 때마다 남자의 마음이 싱숭생숭해지고 쿵쾅쿵쾅 뛰놉니다. 총각의 그 마음, 애꿎은 휘파람만 불며 지나가면서 녀자의 그림자가 나타나면 멍하니 보다가고 그림자가 사라지면 휘파람 불며 애간장을 태웁니다. 이런 어떤 특정시대, 순박한 년대의 총각의 마음을 빨간 들창이라는 시적 대상물을 빌어, 그리고 우리 시의 전통가락을 묘하게 리용하여 아주 생동하게 그려냅니다. 박화시인의 시집 《봇나무》. "박화라는 시인은 대단한데. 박화야 말로 시인이구나!”“정말로 생동하고 박진감이 있는 시, 조선족만의 삶의 정취가 묻어나는, 우리에게만 속하는 우리 서정을 뽑아냈구나!” 그래서 저는 한국과 다르고 조선과도 다르고 구라파와도 다른 연변식의 〈빨간 들창〉, 이렇게 칭하고 싶습니다. 이런 시들은 우리가 연구하고 발전시켜야 할 조선족식, 연변식의 시풍이라고 생각합니다. 박화선생님의 시가운데 또 한줄짜리 시가 있습니다. 이건 주지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재미있는 시인데 제목이 〈행복〉입니다. 아차 하면 깨여지는 비여있는 유리잔! 아주 쌈박합니다. 감각적인 언어로, 단 한마디의 말로 행복이라는 거대한 주제를 녹여냈습니다. 피끗 보면 간단한 것 같지만 말속에 말이 있고 철리가 있고 재미있지 않습니까? 박화는 〈빨간 들창〉같은 아름다운 민요풍의 시도 잘 썼지만 이렇게 주지시, 감각시도 삼빡하게 너무 잘 풀어냈구나. 역시 이분은 우수한 시인이야! 이렇게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박화시인은 료녕은 물론 조선족시단에서도 한자리 차지하는, 뚜렷한 족적을 남긴 우수한 서정시인이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시인 최룡관선생님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최룡관시인은 1944년도에 태여났습니다. 연변일보사 기자, 문예부 주임, 연변작가협회 부주석을 력임하면서 지금까지 쭉 창작활동을 해온 분입니다. 《반쪽은 다른 얼굴이다》,《금단의 열매》, 《이미지 시론》등 많은 시집과 시론집을 펼쳐냈습니다. 최룡관시인. 최룡관선생님은 (지난 세기) 60년대 초반부터 시를 썼습니다. 개혁개방이 시작된 후 자신의 20여년의 시창작을 총화, 반성하면서 우리 시는 때벗이를 해야 하고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몸부림치면서 한국이나 구라파의 현대시류파 포스터모더니즘, 초현실주의, 상징주의 기법을 수용하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쓴 시집 《금단의 열매》 등이 있는데 이런 시들은 실험정신이 넘칩니다. 이분은 서양의 어떤 립체파, 초현실주의에 관심을 갖고 실험시를 많이 쓰는데 정작 가장 문학적 완성도가 높은 시는 오히려 파편문체에서 리탈했을 때, 폭력적인 이미지조합에서 벗어났을 때 완성되군 합니다. 최룡관선생님이 쓴 〈새벽은 살인자〉라는 시를 살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찬란한 별들이 죽어가는 소리를 향기로운 달빛이 죽어가는 소리를 죽어가는 것들이 뿌린 피는 동천을 붉게 물들입니다 워낙 ‘새벽’ 하면 희망적인 이미지이고 황혼하면 쓸쓸한 이미지 아닙니까? 그런데 이분은 교묘하게 전도법을 사용하여 새벽을 아주 피가 물든 살인자라 하고 오히려 황혼을 희망적으로 묘사했습니다. 이미지화를 잘하였습니다. 아주 역설적 기법으로 수준 높게 새벽이라는 이미지, 황혼이라는 이미지를 대조적으로 쓰면서 하나의 특이한 시적 풍경을 그려냈습니다. 이런 시는 상징시이고 수준 높고 성공적인 시라고 저는 봅니다. 시인 최룡관선생의 시집들. 최룡관선생님은 2000년대에 이르러 아폴르네르처럼 형태미 실험도 하고 산처럼 시행을 배치하거나 비줄기처럼 뚝뚝 떨어지게 하는 도상시 실험도 하였습니다. 후에는 하이퍼시에도 관심을 가졌습니다만 그러나 이런 실험시는 사실 공감대를 이루기 어렵습니다. 기성시론에 대한 오독이 있고 편면성이 있고 모방성이 있기에 이런 시론은 실천을 통해서도 아직까지는 보편적가치로 검증받지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공한 실험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시단에 좋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따분한 시풍에서 해탈하려는 몸부림, 새로운 시를 창출하기 위한 그의 노력은 시단에 대한 기여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시단에서는 이러한 그의 노력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한마디로 〈새벽은 살인자〉와 같은 탁월한 시를 쓴 최룡관시인도 우리 조선족시의 발전사에 있어서 영향력이 있고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 우수한 시인 중의 한분이라고 저는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지난 세기 50년대부터 개혁개방 전까지는 민요풍에 바탕을 둔 생활을 직설적 화법으로 묘사한 사실주의, 랑만주의 시들이 많았다면 개혁개방 이후 특히 새 천년에 들어선 후에는 주로 인간의 생명체험과 감수를 쓰면서 예술화수준이 높아진 시들이 나타났고, 또 다른 일각에서는 탈현실, 탈정치, 탈이데올로기, 비공리의 탐미주의적 시관이 대두하면서 현학적이고 난해한 시들이 많이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선배들이 조선민족의 오랜 시가전통에 새로운 예술수법을 적당하게 접목하여 개척한 조선족 서정시의 계보를 이어가며 우리 민족의 정서와 심미관에 맞는 신선하고 아름다운 연변식 시풍을 일궈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최룡관시비 제막식. 문학에서 형식보다 내용이 중요하고 언어기교보다 독자와의 소통과 공감이 중요하다는 것을 재삼 강조하고 싶습니다. 문학을 위한 문학보다는 대중을 위한 문학, 사회적 가치가 있는 문학이 되여 우리의 시문학이 민족의 정신적 현주소를 대변할 수 있었으면 좋겠고 력사 속에 흔적을 남길 수 있었으면 좋겠고 민족의 정서적 등불이 되였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면에서 시인들의 사명감과 각성이 어느 때보다 더 절실하다고 생각됩니다. 총적으로 건국초기부터 개혁개방전까지는 시인수자는 적었지만 진정으로 피로 쓴 감동적인 시작들이 많았고 독자들의 기억에 오래 남는 걸작들이 적잖게 출현했습니다. 리욱의〈할아버지 마음〉, 김철의〈지경돌〉,〈꽃방석〉, 임효원의〈길장구〉, 리상각의〈수박밭에서〉, 송정환의〈풀피리〉, 황옥금의 〈고향의 봄〉, 강호혁의 〈나의 노래〉, 황상박의 〈꽃피는 공소부〉등 시들은 해당 시대가 낳은, 브랜드적 가치가 높은 명시들입니다. 이 시기의 시들은 지극히 진실하고 생활적이고 독자친화적이지만 사유의 깊이가 약하고 표현이 단조로운 약점이 있습니다. 개혁개방 후에는 시인수자는 크게 증가되고 작품수량도 많아졌지만 지나치게 기교주의에 편승한 원인인지는 몰라도 진정으로 공감대를 형성한 시들, 독자들의 기억에 오래 남는 수작이 별로 많지 못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언어의 성숙도나 표현기교는 높아졌지만 난삽하고 난해하고 자연스럽지 못하고 공감대가 약한 것이 단점입니다. 20세기 90년대 두만강반에서 열린 ‘두만강여울소리’ 시가탐구회 기념. 김성휘의 〈흰옷입은 사람아〉,〈시내물〉, 조룡남의 〈옥을 파간 자리〉, 리삼월의 〈꽃병〉,〈해몽〉, 남영전의〈곰〉, 김파의 〈욕망〉, 김동진의 〈온성다리〉, 석화의〈연변1-천지꽃과 장백산〉, 김학송의 〈혼의 노래〉등이 개혁개방 후에 나타난 걸작들입니다. 시간이 시를 선택합니다. 시대의 락인이 찍히지 않은 시는 언어의 거품이 되여 금세 사라지고 맙니다. 현실을 리탈한 시어들은 불통의 함정에 빠지기 마련입니다. 20세기 90년대 이후부터 시가 점차 독자와 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현재 우리의 시는 시의 가장 큰 본질인 서정성을 잃고 감동성을 잃고 결국 독자마저 잃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시인들이 반드시 풀어야 할 숙제임이 분명합니다. 조선족의 특수한 삶의 환경과 삶의 정서에 바탕을 둔, 시대감이 풍기고 리듬감이 있고 향토색이 짙은, 소박하고 아름다운 서정시를 일컬어 연변식 서정시라고 칭해봅니다. 우리만의 특유의 서정이 후손만대에 전해지고 더 아름답게 꽃펴나기를 두손 모아 기원합니다. 길림신문 글 구성/ 김청수 기자 영상 사진/ 김성걸 김파 정현관 기자
7872    조선족 시단과 시인들...4 댓글:  조회:1870  추천:0  2021-03-02
전통적 사실주의 계렬의 시인들/김학송편4 (ZOGLO) 2021년2월22일    —중화인민공화국 창립 70돐 기념 특별기획 대형구술시리즈[문화를 말하다-107](김학송편4) 강효삼시인은 흑룡강성 출생입니다. 지금도 흑룡강성에 살고 계십니다. 평생 교사로 지냈고 향문화소에서 사업하였고 지금은 은퇴를 하여 자기 창작을 하고 계십니다. 시집 《먼 후날 저 하늘너머》 그리고 동시집도 출간했습니다. 강효삼시인의 시적 개성은 뚜렷합니다. 평생 사실주의기법을 고수했습니다. 지금도 사실주의기법을 기본상 고집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향토냄새가 풍기고 생활에 발을 붙이고 백성들, 서민들의 정감을 리얼하게 드러낸, 설득력이 있는 아름다운 시풍을 개척했습니다. 시인 강효삼. 강효삼시인의 대표적 시 〈오솔길〉을 살펴보기로 합시다. 아침에 떠나간 이들이 저녁이면 꼭꼭 돌아왔다 하지만 한번 가곤 다시 돌아오지 않은 사람도 있거니 한번 가곤 안 오시는 누군가를 찾아서 기를 쓰고 령을 넘는 오솔길 가다가 지쳐서 할머니 꼬부랑 허리처럼 꼬여버린 오솔길 이 시를 보게 되면 시골의 오솔길이라는 시적 대상물을 빌어 인생을 쓰고, 사회상을 그려냈습니다. 사람들은 출세하여 대학 가고 군대 가고 하며 고향을 떠나갑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여기서 오솔길은 고향의 상징이자 고향을 지키는, 고향을 떠난 사람들이 돌아오기를 바라는 어머니의 상징입니다. ‘오솔길’이라는 이 대상물은 떠난 사람이 오기를 기다리고 그 사람을 찾아서 령을 넘어갑니다. 떠나간 아들 딸들이 돌아오지 않으니까 안타까와서 똑 마치 머리 흰 할머니처럼, 허리 굽은 어머니처럼 령을 넘어가요. 정말 재미있지 않아요? 강효삼 시인은 이런 재미있는 시적형상을 통하여 서정시가 지니는 본질을 가장 아름답게 드러냈습니다. 그리고 얼마전 2000년대에 들어 와 쓴 〈자물통〉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이 시는 《료녕조선문보(료녕신문)》에서 금상까지 탔습니다. 우리 조선족사회가 어느 날부터 한국 가고 연해지구로 뻗어나가면서 리산으로 인해 고향마을은 텅 비고 자물쇠가 빈집을 지킵니다. 자물통이라는 시적 대상물을 빌어 강효삼시인은 시를 재미있게 썼습니다. 자물통이자 고향의 상징이고 고향을 건사하고픈 마음의 은유지요. 그리하여 도적이 와서 막 두드려도 입을 열지 않지요. 기어이 고향을 지킵니다. 그러다가도 바람이 스윽 불면 과거가 그리워 작은 구멍을 통하여 쒹 하고 고향에 대한 사랑노래를 부르지요. 자물쇠를 아주 형상화 잘했습니다. 그래서 자물쇠거나 오솔길을 통하여, 사실주의기법으로 공감대가 있고 설득력이 있는 시들을 내놓았습니다. 이런 대표작이 있기 때문에 강효삼은 역시 북방시단의 유명한 시인이 맞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강효삼시인은 물론 이런 저런 조건의 제한으로 많은 시를 쓴 시인은 아니지만 뚜렷한 자기만의 풍격을 갖고 고향에 발을 붙이고 고향에 사시며 고향을 지킵니다. 시인은 몸소 언행일치로 고향사람들과 함께 마지막까지 고향을 사랑하는 고향의 슬픈 노래를 빚어내고 있어요. 이런 시인들이야말로 우리의 진정한 고향시인이고 우리 조선족 서정시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준 시인이고 우리가 따라배워야 할 시인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시인 김동진. 다음은 김동진시인을 소개하여 드리겠습니다. 김동진시인은 1944년 흑룡강성 녕안시에서 출생하였습니다. 이분은 흑룡강에서 살다가 연변에 나오시여 훈춘문화국 창작실에서 근무하다가 은퇴를 하였습니다. 김동진시인은 평생 시를 사랑하였고 지금도 계속 쓰고 있는 현재 진행형의 시인입니다. 많은 시집을 남긴 다산 시인입니다. 시집도 수십권 냈고 가사도 많이 쓰셨습니다. 윤행성가수가 부른 노래 〈눈이 내리네〉라는 유명한 가요가 있지요. 이분이 작사했습니다. 요즘도 미니수필도 많이 쓰고 계십니다. 아주 재간있는 시인입니다. 김동진시인의 시에서 가장 주목할 부분이 무엇인가 하면 민족사랑입니다. 주제도 대개 민족애, 고향애를 씁니다. 민족에 대한 뜨거운 사랑, 이분도 지금까지도 고향을 지키며 사시는 분 아닙니까. 언행일치입니다. 그러면서 연변에 대한 사랑, 조선족에 대한 사랑을 자기 시를 통해 쏟아내고 있습니다. 2003년에 쓴 시 〈영원, 조상의 산〉을 살펴봅시다. 인간이 만든 그 많은 영원이 비일비재로 무너져 내릴 때 누구냐고 물어볼 것도 없이 누구라고 소개할 것도 없이 나는 당신의 성스러운 령혼에서 영원이라는 존재를 보았습니다 하늘 숨결의 영원을 보았습니다 세상의 귀중한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릴 때 시인은 뭘 보았는가. 모든 것의 가치가 무너지고 우리가 존중하던 모든것, 귀중한 사랑도 무너지고 고향도 무너지고 막 흩어져가고 민족이 흔들릴 때 동진시인은 성스러운 장백산에 가서 민족의 얼을 본 것이예요. 우리의 영원을 본거예요. 우리 공동체가 흔들리는 모습앞에서 피눈물을 흘리는거예요. 그래도 나는 나의 령혼을 지키고 우리 존엄을 지키겠다는 이런 의지를 은근히 내비칩니다. 지금까지도 계속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을 시를 통해 표출하고 있습니다.     시인 김동진선생의 시집들. 또 김동진시인이 2003년도에 쓴 〈온성다리〉라는 시를 보겠습니다. 디아스포라로서의 조선족의 실존을, 그 아픔을 잘 드러냅니다. 온성다리는 끊어진 다리 끊어진 다리 아래로 끓어지지 않은 두만강이 흐르고 있다 온성다리는 끊어진 다리 성한 다리로는 찾아볼 수 없는 슬프도록 아름다운 풍경이 좋다 온성다리를 보면서 우리 민족의 력사를 보고 미래를 보고 현실적인 아픔을 봤어요. 역설적인 기법이지요. 끊어진 다리를 통하여 아주 간접적으로 시인의 감정을, 끊어진 다리밑으로 끊어지지 않은 두만강이 흐르는 것으로 우리 민족의 끈질긴 생존, 영원, 그 다음 우리 민족의 막을 수 없는 미래, 이것을 환기시키면서 시상을 점진적으로 승화시켜 나아가고 있는거예요. 김동진시인의 시에서 가장 귀중한 부분이 바로 민족을 사랑하는 확고한 시정신입니다. 시에서는 어떻게 말했는가 보다는 무엇을 말했는가가 더 중요합니다. 이분은 확고부동하게 흔들림이 없이 민족주제의 시, 민족애, 고향애를 쓰고 있습니다. 계속 지금까지도 하나의 시맥으로 흐릅니다. “김동진시인은 정말로 우리 민족을 대표하는 서정을 풀어내는구나. 그렇기 때문에 역시 김동진이구나!” 하는 생각이 자주 듭니다. 한마디로 김동진시인은 우리 민족과 우리 민족의 시를 생명처럼 사랑하는, 조선족서정시의 발전에 커다란 공헌을 한, 빼여난 서정시인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겠습니다. 시인 석화. 계속하여 석화시인을 소개하겠습니다. 석화시인은 비교적 나이가 젊은 편입니다. 1958년도에 출생하였고 연변대학을 졸업한 후 연변인민방송국에서, 《연변문학》잡지사에서, 연변인민출판사에서 근무하였고 지금도 계속 시를 쓰고 있습니다. 석화시인은 가사도 많이 쓰셨는데 이분의 시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31수로 되는 〈연변〉이라는 련작시가 있습니다. 짧막짧막한 시를 련속 쓴 장편련작입니다. 이걸 통하여 조선족의 정체성을 표현했고 현실적인 우환의식도 드러냈고 다양한 각도로 조선족의 실존에 대해 투시합니다. 그래서 비교적 (강한)설득력을 얻고 많은 사람들이 공인합니다. 여기서 잠간 〈연변〉이라는 련작시의 머리시 〈천지꽃과 장백산〉을 살펴봅시다. 이른 봄이면 진달래가 천지꽃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피여나는 곳이다 사래긴 밭을 갈면 가끔씩 오랜 옛말이 기와쪼각에 묻어나오고 룡두레우물가에 키 높은 버드나무가 늘 푸르다 (중략) 장백산 이마가 높고 두만강 천리를 흘러 내가 지금 자랑스러운 여기가 연변이다 1련에서는 과거를 말하고 2련에서는 현재를 말했고 3련에서는 로인과 아이를 등장시키면서 미래를 말합니다. 짧은 한수의 시에다 연변의 과거, 현재, 미래를 응축시켜 놓았습니다. 그래서 난해하지도 않고 비교적 설득력이 있게 디아스포라로서의 조선족의, 연변의 현존을 한수의 시에 함축해 놓았습니다. 보다 싶이 비교적 이미지화가 잘된 재미있는 서정시입니다. 시인 석화선생의 작품집. 그리고 또 〈기적소리와 바람〉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연변 련작시의 두번째입니다. 아주 유머감각을 갖고 시를 재미있게 쓰고 있습니다. 기차도 여기 와서는 조선말로 붕 한족말로 우 기적 울고 지나가는 바람도 한족바람은 펑 불고 조선바람은 말 그대로 바람바람 분다 …… 아주 유머스럽게 재미있게 쓰지 않았습니까. 바람이거나 기적소리를 통하여 한족과 조선족이 오손도손 살아가는 특이한 풍속도를 그려냈습니다. 조선족의 실존에 대해 바람과 기적소리, 장백산을 빌어 아주 유머러스하게 재미있게 그렸습니다. 이런 시는 공감대가 큽니다. 이런 시가 석화를 석화답게 만들고 석화시의 문학적 품위를 높혔을 뿐만 아니라 우리 조선족 전체 문학의 내용을 보충하고 풍부히 하는데 일정한 기여를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연변련작 31수, 석화는 역시 내용면에서 뚜렷하게 자기 주관이 있고 또 대표작도 있기 때문에 조선족시문학의 력사에서 한자리를 차지하는 우수한 서정시인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시인 김응준. 다음은 김응준시인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이분은 1934년 훈춘시 밀강향에서 출생했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후 교사로 근무하다가 훈춘시외사사무실에 계셨고 후에는 연변인민출판사에 전근하여 장기간 문예부 편집을 하면서 연변시인협회도 창설하고 후배양성에 진력하는 한편 많은 시를 창작하였습니다. 김응준시인은 특히 다산시인으로서 생전에 시집 20여부를 남겼습니다. 그의 시집으로 보면 《김응준시선집》도 있고 그 밖에 근자에는 자서전적 장편서사시도 한권 출판하였습니다. 김응준 시인의 시에서 사랑시가 주종을 이룹니다. 어쩌면 사랑시인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많은 사랑 시집을 냈습니다. “사랑은 이승의 천국, 죽음의 바다도 건네주는 천국이다” 이렇게 사랑을 극찬했습니다. 이는 이분의 경력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1984년도에 〈원앙침〉이라는 시를 씁니다. 이것이 《연변문학》에 발표됩니다. 여러 수로 구성된 시초인데 〈원앙침〉은 그중의 하나입니다. 아주 잉꼬부부인데 돌연히 조강지처를 잃고 하늘이 무너지지 않습니까. 님을 그리는 마음을 〈원앙침〉이라는 시에 담아 아주 절실하고 진실하게 잘 썼습니다. 시인 김응준선생의 시집들. 김응준시인은 80년대 중반에〈중년의 노래〉라는 장시를 썼습니다. 자기의 경력을 썼어요. 50세, 60세 중년의 솔직한 감회를 직설적으로 쓴 시입니다. 그렇지만 내용이 진실하고 폭이 넓고 그 때 시점에서 보면 시가 무게가 있고 아주 장엄합니다. 과거의 어려운 정치질곡의 시대를 살아온 그 년대 사람들의 공동한 마음을 〈중년의 노래〉라는 시에 담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감대가 크고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였습니다. 그것은 개인경력을 벗어난 그 시대를 살아온 모든 사람들의 공동의 정감이였습니다. 개인의 감수를 공동의 정감으로 승화시켜 공명을 얻는다는 것은 정말 어렵습니다. 김응준시인의 시에서는 〈령을 넘으며〉,〈중년의 노래〉,〈사랑의 애가〉등을 통해 가장 김응준다운 면모를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후기에는 장편서사시 〈희비의 쌍곡선〉이라는 대작도 쓰셨습니다. 그러나 이분의 시인적 능력을 가장 잘 보여준 시로는 초기에 발표한 〈령을 넘으며〉, 중기에 발표한 〈중년의 노래〉입니다. 연변시인협회를 창립한 김응준선생(왼쪽 두번째). 시 〈령을 넘으며〉는 50년대 초반에 쓴 시인데요. 시에서는 참군하는 젊은 병사가 마을사람들의 환송을 받으며 고향의 령을 넘는 장면을 그려냈습니다. 초기시인데, 그 장면을 아주 리얼하게 재미있게 그렸습니다. 한폭의 그림 같아요. 이 시는 청년 김응준의 무한한 가능성을 엿볼 수 있게 합니다. 그만큼 시가 공감대가 있고 아름답고 서정미가 있습니다. 조금도 거짓이 없어요. 그러면서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자아냅니다. 이듬해 작가협회 상까지 받았습니다. 이 때로부터 청년 김응준이가 시단에 알려지고 이분을 시인답게 한 서정시가 탄생합니다. 지금 봐도 가장 시인다운 면모를 읽을 수가 있는 시가 오히려 초기시입니다. 김응준선생님은 시창작은 물론 시인협회를 꾸리며 시인 발굴에 힘썼고 연변서정시를 발전시켜 나아가는데 뚜렷한 공헌을 하였고 큰 발자국을 남긴 우수한 서정시인 중의 한분이였습니다. 길림신문 글 구성/ 김청수 기자 영상 사진/ 김성걸 김파 정현관 기자
7871    조선족 시단과 시인들...3 댓글:  조회:2251  추천:0  2021-03-02
순수시와 랑만시 계렬의 시인들/김학송편3 (ZOGLO) 2021년2월22일    —중화인민공화국 창립 70돐 기념 특별기획 대형구술시리즈[문화를 말하다-106](김학송편3) 송정환시인은 1937년에 연변의 개산툰에서 출생하였습니다. 1957년에 벌써 처녀작을 냈습니다. 그는 료녕대학 력사학부를 졸업하고 길림성사회과학원에서 근무하셨고 《풀피리》등 많은 시집을 남겼는가 하면 력사연구에 대한 책도 10권 냈습니다. 이분한테는 1978년에 쓴〈원혼이 된 시인에게〉라는 시가 있습니다. 1976년, ‘4인방’이 거꾸러진 후에 쓴 시입니다. 문화대혁명시기에 억울하게 죽은 시인도 있지 않습니까. 이걸 통해서 ‘4인방’의 죄악을 성토했습니다. 중국에서 말하는 상처문학에 속하는 시입니다. 그러니 (이 작품은) 우리 연변에서 상처문학의 대표적인 작품의 하나입니다. 시인 송정환. 그리고 1962년에 쓴 〈밤차〉라는 시가 있습니다. 지금 봐도 이 시는 아주 잘 쓴 시입니다. 밤차를 빌어서 시인이 고향을 사랑하는 마음을 표달한 시입니다. 이〈밤차〉의 마지막 부분을 보십시오. … 오 밤차여 밤차 너는 이 밤도 천리길 단숨에 뛰여 가려니 고향에 부치노라 이 아들의 심정을 내 이렇게 멀리 와 있음도 다름 아닌 고향을 위해서라고 이렇게 고향을 사랑하는 아들의 심정을 정말 잘 드러냈습니다. 아주 절박하며 진실감이 넘칩니다. 인간의 내심을 아름답게 그려냈습니다. 문화대혁명전인 1962년에 이렇게 진솔하게 내심을 표출한 시는 많지 않아요. 그런데 〈밤차〉를 보게 되면 밤차라는 시적 상관물에 직접 시인의 개인감수를 솔직하게 얹었습니다. 진정성과 아름다움을 얻고 시적 률동감이 넘쳐흘러 마치 한폭의 그림과도 같습니다. 이분이 1979년에 지은 〈풀피리〉라는 시가 있습니다. 이 시를 저는 아주 대단히 높이 평가합니다. 어찌 보면 연변식 서정시에서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시의 일부만 간단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밭머리에 누워서 잔디밭에 누워서 잘도 부는구나 저총각 풀피리 잘 분다고 손벽치는 총각들 더 불라고 소리치는 처녀들   오늘 따라 피리 피리 풀피리 부는 사람 듣는 사람 풀피리 총각은 부나니 풀피리 노래 한곡 시인은 쓰나니 풀피리 시 한수   아 노래 한곡 시 한수 추억의 흰돛배 가슴에 떠있네 송정환시인의 작품집. 송정환시인은 풀피리를 부는 총각을 보고 자기의 잃어버린 사랑을 추억하며 애잔하게 내심을 토로합니다. 여기엔 가장 민족적이고 가장 향토적이고 가장 우리만의 서정이 담겨있습니다. “풀밭에 누워서 잔디밭에 누워서 /잘도 부는구나 저총각 풀피리” 민요풍을 타고 벽계수 흐르듯이 아름답게 흘러갑니다. 그 시절에는 처녀총각들이 향촌에 운집하고 문화가 꽃펴나고 우리 민족 공동체가 번영할 때입니다. 정말 아름답게도 시골에 우리의 모든 것이 다 있었습니다. 우리의 풍속, 민속, 전설, 사랑 모두가 오롯하게 다 남아있었어요. 그때야말로 우리 조선족의 삶의 가장 눈부신 전성기입니다. 지금도 그립지요? 이럴 때 이분이 생활의 어떤 한 단면을, 잃어버린 사랑에 대한 감회를 풀피리 부는 총각한테 기탁해 자기의 정서를 너무 솔직하게, 너무 아름답게 드러냈습니다. 저는 이 시가 사실은 연변식 서정시에서 최고 걸작중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높게 봐도 결코 과분하지 않지요. 한마디로 송정환시인은 〈밤차〉거나〈풀피리〉를 통해서 뛰여난 서정시인임을 보여주었고 우리 문학사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겼습니다. 다음은 리상각시인을 소개해 올리겠습니다. 이분은 1936년에 한국 강원도에서 출생했습니다. 1938년, 어린 나이에 부모를 따라 중국의 동북으로 이주합니다. 대학을 졸업한 다음 《연변문학》 총편집을 지냈고 연변작가협회 부주석을 지내면서 연변의 시문학 발전을 위해 큰 공헌을 합니다. 시인 리상각. 1956년에 쓴 〈수박밭에서〉라는 시는 발표되자마자 인기를 얻었고 번역되여 《인민문학》에 실렸습니다. 이 시는 수박밭에서 펼쳐지는 정겨운 스토리를 통해서 인간의 사랑심리를 아름답게 표출한 시입니다. 이 시를 조금만 살펴봅시다. 밭머리 오솔길을 천천히 에돌면서 내 조용히 나직이 사랑의 노래 불렀네 그러나 처녀는 보고도 못 본척 가볍게 돌아앉아 수박만 튕기네 저의 아름다움을 뽑내는 셈이지 시원 슬슬 달콤한 수박이 무척 좋은지 속으로 붉게 익은 수박은 잘도 고른다만 붉게 붉게 타번지는 내 마음은 몰라주네 수박밭에서 수박을 고르는 처녀의 뒤모습을 봅니다. 내가 좋아하는 그 처녀는 수박의 향기는 좋아하는데 남자의 향기는 느끼지 못하는거예요. 그래서 그 안타까움, 청춘남녀의 야릇한 사랑의 마음을 수박밭과 수박이라는 대상물을 빌어서 아주 아름답게 표현합니다. 그 때 그 시절의 시대상을 보는듯 하지 않습니까. 그 시대는 아주 순박하고 희망적인 시대입니다. 아주 정직한 시대입니다. 어디 가나 웃음이 넘치고 어디 가나 서로 도와주는 모습이였습니다. 전야에는 오곡백과 무르익고, 마을에는 문화가 꽃펴나는 한폭의 그림과도 같은 아름다운 사회환경에서 수박밭은 그중에서도 더 아름다운 이미지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처녀가 등장할 뿐만 아니라 먹기 좋은 수박이 또 등장합니다. 색갈도 곱고 모양도 고운 수박입니다. 청춘남녀의 사랑심리를 수박밭이라는 특정한 대상물에 이입시켜 그 정서를 간접적으로 묘하게, 아름답게 표출합니다. 민요풍의 아름다운 정서를 타고 시심이 나래를 펼칩니다. 그때 처녀작이나 다름없는 이 시는 시인의 천재성을 드러냈습니다. 지금 봐도 이 시는 우리 조선족의 전체 시중에서 가장 생명력이 있고 가장 아름다운 연변시의 하나입니다. 누가 뭐래도 저는 그렇게 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생활화폭이 진실하고 그림 같고 공감대가 극대화되였습니다. 공감대를 어느만큼 극대화시켰는가에 따라, 시대상을 어느만큼 담았는가에 따라 시의 가치성, 예술적 함금량이 결정됩니다. 기법이 새롭다고 하여 시의 질감이 높은 것은 절대 아닙니다. 시인 리상각선생의 시전집. 〈수박밭에서〉 이 시는 리상각시인의 시재를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가장 아름다운 연변시의 한 단면을 보여주었습니다. 후기에 와서 〈파도〉라는 시를 씁니다. 이 시는 더 원숙한 경지를 보여줍니다. 물론 초기 시가 장점이 있는 반면에 표현수법이 단순하여 약점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약점과 우점이 때론 공존해요. 그런 풍격이 약점이자 우점인 경우가 많아요. 대립통일물로서의 어떤 풍격을 좋게 보면 좋고 또 약점도 나름대로 있는거예요. 〈수박밭에서〉는 장면묘사를 통하여 자기의 정서를 직설적으로 드러냈습니다. 그러나 〈파도〉라는 시에서는 파도라는 대상물을 빌어가지고 거기에다 자기 정서를 기탁합니다. 예술수법에서 진화해 좀 다양해졌습니다. 마지막 부분을 봅시다. …… 소리 소리 웨친 뒤 남는 게 뭐던가 내 삶의 파도여 가련한 발자취여 오늘도 만들고 마스고 솟구치다 무너진다 “파도가 와와 하고 벼랑을 치고 무너졌다가 일어서고”, 이를 통해 인생의 역경, 큰 수난을 암시한 겁니다. 그걸 자기 인생에 비유한 겁니다.“내 인생의 파도여/가련한 발자취여/오늘도 만들고 마스고/솟구치다 무너진다”하지 않아요! 정말 재미있게 파도라는 대상물에 기대여 시인의 깊이 있는 생각, 느낌과 감수를 아주 형상적으로 표출한 수작입니다. 이렇게 절묘할 수가 없습니다. 이분은 여기서 〈수박밭에서〉보다도 기량이 성숙된 것이 알립니다. (20세기) 80년대 초까지는 단순한 시들, 아름다운 민요풍의 시를 많이 썼습니다. (20세기) 90년대 초부터는 시조도 많이 쓰고 예술적으로 이미지화한 시를 많이 썼습니다. 리상각시인은 〈수박밭에서〉,〈파도〉,〈봄비〉,〈두루미〉이런 시를 통해 가장 아름다운 연변시를 가장 많이 쓴 시인중의 한분입니다. 우선 향토적이고 소박하고 음악적 리듬감이 있고 그러면서 여운이 있고 해독하기 쉽고 생활냄새가 물씬 풍기기 때문에 독자들이 좋아합니다. 한폭의 그림 같이 아름다워요. 이것이 연변을 대표하는 연변식 서정시의 모델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우리가 계승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한마디로 리상각시인은 우리 중국조선족의 대표적 서정시인의 한분이였고 많은 우수한 작품을 창작해 우리 연변의 서정시의 보물고를 풍부히 하고 발전시키는데 큰 공헌을 한 뛰여난 시인이였습니다. 시인 조룡남선생. 다음 조룡남시인을 소개해 올립니다. 조룡남시인은 1935년에 훈춘에서 출생했습니다. 1951년에 일찌기 처녀작을 발표합니다. 이분은 아주 신동에 가까와요. 연변사범학교에 서 있는 시비에 새겨진〈반디불〉, 이 동시는 17세에 사범학교를 다닐 때 썼다고 합니다. 이분은 시집 《그 언덕에 묻고 온 이름》, 《그리며 사는 마음》 이런 시집들을 여러부 남겼습니다. 1957년에 젊은 나이에 우파로 지목되여 가지고 20여년간 추방생활을 합니다. 인간의 권리, 창작의 권리를 다 박탈당하고 20여년 옥살이, 정배살이를 하다가 1979년에 뒤늦게야 풀려나옵니다. 후에 모든 루명을 벗고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장기간 문예편집으로 근무하면서 창작의 붓대를 다시 들고 좋은 시를 많이 씁니다. 조룡남시인은 생활토대가 있습니다. 20여년간 압제를 받고 청춘을 잃었기 때문에 그동안 억눌렸던 령감이 일시에 폭발합니다. 자기의 아픔, 청춘을 잃은 부분이 너무 아쉬워서 시로 그 에너지를 강렬하게 뿜어냅니다. 조룡남시인의 시가운데서 가장 대표적인 시의 하나가 〈해빙기의 강변에서〉입니다. 이 시는 시대적인 주소가 뚜렷합니다. 금방 ‘4인방’이 분쇄되고 시인이 1979년에 풀려나온 그 때에 썼기에 제목을〈해빙기의 강변에서〉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시대적인 주소와 락인이 뚜렷합니다. 아주 격정이 넘치고 서정이 넘칩니다. 진실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시가 나온 다음 많은 사람들이 감동하고 눈물을 흘립니다. 억울한 루명을 쓰고 20여년간 수난을 겪다가 풀려난 시각의 시인의 독득한 감수를 ‘해빙기의 강’이라는 시적 상관물에 기대여 거침없이 토로하고 있습니다.이 시의 마무리 부분만 잠깐 살펴봅시다. 나는 안다 풀려내리는 해빙기의 강아 너는 정녕 반짝이는 무수한 눈물방울! 지금 내 가슴속에 흘러들어 가슴벽 세차게 때리며 너는 우는구나 강아 너는 웃는구나 강아! 이 시는 감정이 진실하고 자연스럽고 격정이 파도칩니다. 펜이 아닌 쓰디쓴 눈물과 생명의 뜨거운 피로 쓴 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옥을 파간 자리〉도 대표작의 하나입니다. 내 가슴에는 웅뎅이 하나 그것은 오래전에 옥을 파간 자리 오랜 세월이 흘러갔건만 오늘도 웅뎅이엔 허연 소금 돋치여 마를 줄 모르는 비물이 눈물이 고여있다 1986년에 지은 이 시는 흘러간 수난의 력사를 읊조린 상처문학에 속하는 시입니다. 시인은 상징과 이미지 수법으로 자기의 잃어버린 청춘을 옥을 파간 자리로 비유하고 아물 수 없는 상처의 아픔을 깊이있게 파헤쳤습니다. 감정이 진실하고 비유가 생동하고 여운도 있고 이미지화가 잘된 우수한 시편입니다. 시인 조룡남선생의 작품집. 〈옥을 파간 자리〉,〈꿀벌이의 죽음〉,〈황소〉등 상처문학 계렬의 시들이 조룡남시인을 저명한 시인의 반렬에 올려 놓았습니다. 역시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문학의 중심가치는 진실이다”라고 한 중국당대 시평가 리경택의 말이 아주 정확하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조룡남시인에게는〈눈물의 시인〉이라는 별칭이 있습니다. 자기가 당한 상처, 아픔을 시로 토해냅니다. 정말로 피로 시를 쓰고 눈물로 시를 적었습니다. 그러기에 눈물의 시고 그 눈물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적셔주었어요. 그래서 이분이 쓴〈꿀벌의 죽음〉,〈황소〉,〈해빙기의 강변〉, 〈두만강〉이런 시들은 참으로 격정이 넘치고 진실감이 넘치고 아주 격동적입니다. 청춘을 잃은 끊없는 아픔에 대한 그걸 시로 토해냅니다. 그리하여 우리 시단에서 상처문학의 또 다른 면모를 남겼습니다. 대개는 아픔을 썼기에 상처문학의 계렬에 속합니다. 그리고 서정시로서도 랑만주의 계렬, 사실주의 수법에 속합니다. 그렇게 진실하고 아름답고 조룡남다운, 피와 눈물로 쓴 시로 우리 시를 풍부하게 했고 우리 시단의 황금기를 아름답게 장식한 분입니다. 그래서 조룡남시인도 우리 시문학의 발전에 큰 공헌을 한, 뚜렷한 족적을 남긴 중요한 시인중의 한분입니다. 이번에는 리삼월선생님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리삼월선생은 1933년에 장춘시에서 출생하였습니다. 이분은 항미원조전쟁에도 참가한 분입니다. 시집 《황금가을》,《두사람의 풍경》,《리삼월 작품집》등 많은 시집을 남겼습니다. 현실생활에서 받아안은 주관적 감수를 아주 솔직하게 재미있게 쓴 사실주의계렬의 시를 초기에는 많이 창작하셨습니다.  시인 리삼월. 그런데 중기와 후기에는 시의 패턴이 확 바뀝니다. 이분은 또 할빈에서 《송화강》잡지사 주필을 지내면서 많은 후학들을 양성했습니다. 후기 시들은 아주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어떤 쪽으로 가닥을 잡는가 하면 아주 리삼월식으로 단순하면서도 이미지화시켜 사물을 오묘하게 표현하는 방법을 개척합니다. 그 시풍은 오직 리삼월에게만 있는 그런 시풍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잠간 〈꽃병〉이라는 시를 살펴봅시다. 꽃병으로 생겨서 지금까지 명색이 꽃병일 뿐 그 꽃병에는 아름다운 꽃이라곤 꽂혀 본 적이 별로 없다 아무리 고운 꽃을 꽂는다 해도 꽃병은 크게 손색이 간다 여기서는 아주 묘하게 꽃병이라는 대상물을 빌어서 모종 사회현상을 암시, 풍자한 것입니다. 사회에는 명분과 실리가 모순되는 것이 많습니다. 그 사람은 말은 화려한데, 우뢰처럼 소문은 큰데 하는 일은 별로 없어요. 빈 통이 꽝꽝 울리지 않습니까. 꽃병이라는 대상물을 빌어 개혁개방 후에 나타난 실질보다 명분을 중요시하는 이런 현상을 꼬집습니다. 이런 면에서는 〈꽃병〉은 대단한 사회 암시적 기능을 지닙니다. 꽃병을 빌어서 어떤 허위를, 인간적인 위선, 실속없는 명분 이런 것들을 폭로한 시입니다. 이 시는 단순한 영물시를 뛰여넘어 아주 잘된 이미지시입니다. 이런 시는 사실 우리 시에서 나타난 이미지화 수준이 가장 높은 시중의 하나입니다. 담백하면서도 아주 예술화가 고도로 잘된 시입니다. 시인 리삼월선생의 시집들. 또 2000년대에 쓴 〈해몽〉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시〈해몽〉을 잠간 살펴봅시다. 세상밖으로 새여나온 꿈은 나비가 되여 훨훨 나는데 나비의 날개에 적힌 꿈을 어떻게 해독할지 몰라 따라갈가 말가 바장이는 사이에 나비는 날아가고 나비 없는 벌에 나 홀로 남는다 사실 나비를 쓴 것이 아니라 어떤 허상을 쫓아가다가, 어떤 사랑을 쫓아가다가 헛탕을 치고마는 인간의 실존적인 고독, 이걸 표출한 거예요. 이 시에서는 나비의 어여쁜 형상을 빌어서 사랑의 본질에 다가선 생동한 풍경을 엮어냈습니다. 사랑의 대상은 서정적 주인공이 망설이는 사이에 훨훨 도망칩니다. 나 홀로 남아 빈 하늘만 멍하니 바라봅니다. 인간은 실존에서 만만치 않은 현실의 벽에 부딪쳐 한숨만 폴폴 쉬군 하지요. 그래서 이 사람은 외로움에 빠지고 고뇌에 빠집니다. 존재의 어떤 상처나 곤혹을 아주 이미지적으로 잘 다룬 우수한 시입니다. 이 〈해몽〉같은 시는 짧고도 여운이 깊고 시화가 잘 되였기 때문에 우리 조선족 서정시(수준)를 한단계 높이는데 크게 기여한 시입니다. 리삼월시인은 선비처럼 살았고 명예도 화려하지 못했습니다. 시집도 많이 출간하지 못했고 큰상도 거의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이번에 공부를 하면서 느낀 것은 “대단히 시다운 시를 남기셨구나!”하는 것입니다. 우리 후배들이 깊이 연구해야 하고 따라배울 것이 너무 많구나 하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꼈습니다. 길림신문 글 구성/ 김청수 기자 영상 사진/ 김성걸 김파 정현관 기자
7870    조선족 시단과 시인들...2 댓글:  조회:2174  추천:0  2021-03-02
서정시 탐구의 선구자들/김학송편2 (ZOGLO) 2021년2월20일    —중화인민공화국 창립 70돐 기념 특별기획 대형구술시리즈[문화를 말하다-105](김학송편 2) 임효원선생님은 조선 함경북도 출생입니다. 여러 신문사에 계시다가 《연변문학》 주필도 지냈고 연변작가협회 주석도 력임한 분입니다. 그는 1945년도에 처녀작을 발표합니다. 시인 임효원선생. 시집 《진달래》, 《어머니 품이여》 등을 펴냅니다. 이 분의 초기 시 〈이 총에 총을 주소〉는 조선전쟁시기 작품입니다. 그리고 1956년도에 쓴 시〈길장구〉가 아주 유명합니다. 지금 봐도 대단한 시입니다. 한평생 이름없이 살아도 좋다 넓은 땅 지심 깊이 내 뜨거운 량심 묻었노라 돌이 타면 삼복이지 풍설인들 두려울가 고난을 겪은 대지여, 내 넋이여 생활은 언제나 무성하여 가리 〈길장구〉를 쓰면서 인간을 그려낸 것입니다. 고난을 겪으며 대지에 충성하는 인간상을 그렸습니다. 임효원시인의 시는 비교적 간결하면서 선이 굵고 사물이 지닌 상징적 의미를 많이 끌어냅니다. “한평생 이름없이 살아도 좋다” 길장구는 항상 길에서 남에게 짓밟힙니다. 자연의 작은 미물인 길장구는 여기서 인간의 어떤 대명사입니다. ‘길장구’라는 대상물을 통해 인간의 어떤 굳은 신념, 역경에 굴하지 않는 꿋꿋한 정신, 거기서 생활의 희망감을 도출해낸 것입니다. 이런 시는 객관적 상관물을 빌어서 시인의 내면정서를 토로한, 지금의 시단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해방 후 중국조선족이 빚어낸 가장 우수한 서정시의 하나입니다. 임효원선생님은 후기에 와서 〈아, 오월은 노랑저고리〉라는 시를 썼습니다. 남국에서 태여난 노랑저고리 만리길 눈석이에 울면서 오던 너    검은 땅 넓은 품이 하도나 좋아서 머리 얹고 살련다던 노랑 저고리   마음씨 부드러운  노랑저고리 산과 들에 수림에 초록을 심던 너   즐거운 세계를 인간에 안겨주곤 어디론가 사라졌네 노랑저고리   아, 오월은 오월은 노랑 저고리 조선족녀성들이 노랑저고리를 즐겨 입었습니다. 〈노랑저고리〉는 사실 민족혼의 상징입니다. 〈노랑저고리〉가 중간부분에 울면서 가버립니다. 임효원선생님은 우리의 민족 얼이 쇠퇴해가고 점점 지쳐가는 그 모습을 슬퍼한 것입니다. 그래도 슬퍼만 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에는 "아,오월은 노랑저고리" 로 끝을 맺습니다. 오월은 희망차고 밝은 이미지 아닙니까? 오월이라는 계절감각에다 조선족녀성의 상징인 노랑저고리를 등장시켜 우리 민족 력사를 말하고 우리 민족이 나아갈 미래까지 말해봅니다. 임효원 시인의 작품들. 〈아, 오월은 노랑저고리〉라는 이 시는 1985년에 지은 시인데 새로운 시적 성숙을 보여주었습니다. 우리 시가 이룩한 하나의 성과작으로 평가됩니다. 그 밖에도 이분은 또 〈거칠은 수림에〉라는 시를 썼습니다. ‘4인방’이 분쇄된 직후에 썼습니다. 수림이 불에 타고 나무가 쓰러져 거칠어졌지만 봄이 오고, 장마가 끝나니 쓰러진 나무에서 새싹이 돋습니다. 그걸 통해〈거치른 수림〉이라는 시적대상물을 빌어 십년동란시기에 인민이 받은 커다란 고통, 그렇지만 날이 개이고 정치동란이 풀리니까 쓰러진 나무에 새싹이 돋듯이 인민은 희망을 가지고 새롭게 일어선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이렇게 〈거칠은 수림에〉라는 시는 임효원다운 거창한 서정을 토해냅니다. 한마디로 임효원선생님은 남성적인 굵직한 서정으로 한 시대 시단을 장식한 그분만의 개성미를 갖춘 우수한 서정시인이였습니다. 다음은 김철선생님을 소개하겠습니다. 너무나 유명한 분인데 1932년에 일본에서 출생했습니다. 항미원조전쟁에도 참가했습니다. 1953년도에 벌써 시〈지경돌〉을 들고 문단에 등단합니다. 처음부터 천재성을 띠였습니다. 시 〈지경돌〉은 발표되자마자 시단의 큰 주목을 받았고 그 때의 시단을 놀래웁니다.   시인 김철선생. 너무도 시가 함축되고 예술화가 잘 되였습니다. 짧은 몇행에다 그 시대의 사회변혁을 담아냈습니다. 한 시대를 개괄한 것입니다. 한부의 장편소설에도 다 담아낼 수 없는 내용이였습니다. 그래서 기성시단이 놀란 것입니다. 그때 김철선생이 20세도 되나마나 약관의 나이입니다.〈지경돌〉이라는 놀라운 시를 들고 나옵니다.〈지경돌〉을 잠간 살펴봅시다. 해토무렵 두 령감 지경돌을 뽑는다 물싸움에 삽자루 동강나던 지난 일 생각하며 얼굴이 붉었는가 지경없는 넓은 이 밭을 임경소의 뜨락또르 척 척 갈아 엎으리니 오늘부턴 한집 식구 두령감 오, 행복의 노을이 비꼈노라! 단 몇줄짜리 시로 그 시대의 농민들이 농업합작화를 맞이하는 커다란 희열을 표현합니다. 농민들이 자기 이름자를 새긴 지경돌을 뽑습니다. 그러니까 한시대의 변혁을 가장 함축된 언어로 표현하고 그 시대의 대표적 풍경을 그려냈습니다. 지금 와서 살펴봐도 김철시인의 전부의 시에서 가장 대표적인 시의 하나라고 저는 봅니다. 왜 그런가 하면 공감대가 크고 시대의 모습을 잘 담아냈고 아름답게 함축됐고 정말로 서정적이기 때문입니다. 이분은 벌써 1957년도에 첫 시집을 냅니다. 그 때 시집의 제목이 《변강의 마음》입니다. 이듬해에 《동풍만리》를 련이어 냅니다. 그 때 시점에서 시집을 출판한다는 것은 정말 하늘의 별따기입니다. 그런 와중에 젊은 시인이 련속 시집 두권을 출간하여 시단을 깜짝 놀래웁니다. 천재성에 놀라지요. 지금 봐도 생기발랄합니다. 생명력이 넘쳐요. 청춘의 생기가 막 넘칩니다. 지금의 예술자대로 뭐라고 하는 것은 무리가 따릅니다. 그 때 그런 시점에서 그런 생기발랄한 시집을 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다가 문화혁명이 터져 김철선생님은 억울한 루명을 쓰고 5년 감옥살이를 합니다. 1975년도에 풀려나옵니다. 원직인  《연변문학 》 편집으로 다시 복직합니다. 이분은 시인이기 때문에 감옥에서도 시를 계속 썼다고 합니다. 《동틀무렵 》이라는 장편서사시는 옥중에서 구상하고 신문쪼각에 적어가면서 초고를 썼다고 합니다. 1978년도에 장편서사시 《동틀무렵》이 고고성을 울립니다. 그 다음해인 1980년도에 련달아 장편서사시 《새별전》을 세상에 내놓습니다. 그러면서 시인 김철열풍이 불기 시작합니다. 김철 시인의 부분적 시집들. 김철선생님의 시는 전체적으로 개혁개방전의 시가운데서는 〈꽃방석〉이나 〈지경돌〉이 대표작이겠지요. 개혁개방 후에도 계속 시를 씁니다. 80년대 90년대초까지 전성기를 이룹니다. 그런데 시의 모습은 많이 변합니다. 초기에는 직설적이고 격정적인 랑만주의 시들을 많이 썼다면 중기, 후기에 와서는 이미지시를 많이 씁니다. 자신의 내면감수를 에둘러서 은유적으로 씁니다. 후기 시 가운데서 비교적 잘된 것이〈대장간 모루우에서〉인데 교과서에 들어갔습니다. 그럼 〈지경돌〉과 〈대장간 모루우에서〉 두수의 시를 잠간 대조해봅시다. 대장간 모루우에서 나는 늘 매를 맞아 사람이 된다 벌겋게 달아오른 나의 정열 뜨거울 때 나는 매를 청한다 맞을 때는 미처 몰라도 맞고나면 나 매값을 안다 그래서 나 내 몸이 식을 때 노상 주르르 눈물을 흘린다 보십시오. 잘 썼지요? 대장간 모루우에 벌겋게 달아오른 쇠덩이를 올려놓고 야장들이 메로 칩니다. 그러면 칼도 되고 호미도 됩니다. 그러나 강철이 되게 하자면 뜨거울 때 물에 넣어야 단단한 강철로 칼날이 서지요. 이런 현상을 통해 인간도 역경을 겪어야, 매를 맞아봐야 참된 인간이 된다는 철리를 끄집어낸 것입니다.   1993년 서울 아시아시인대회에 참석한 김철시인(오른쪽 두번째). 김철선생님의 족적은 우리 조선족시단이 걸어온 력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초기에 대표적 시를 내놓았고 우리 시단에 좋은 영향을 남겼고 문화대혁명 후에도 꾸준하게 시창작을 하여 두부의 장편대작도 내놓았고 서정시집 수십권을 상재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조선족만이 가지는 연변식 시풍을 개척하는데, 조선족의 서정시의 밭을 일구는데 무수한 땀을 흘렸고 후손들에게 좋은 귀감이 되였습니다. 후배시인들은 김철선생님을 가장 따라배우고 싶은 분으로 꼽고 있습니다. 이런 분이 롤모델이 되였기에 우리 시단은 전망이 밝으며 이런 분들의 영향은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다음 김성휘선생님을 소개하겠습니다. 이분은 해방 후 중국에서 대학교육을 받고 시인으로 성장한 시인입니다. 1933년 룡정시 백금향에서 출생했습니다. 1954년 심양외국어학원을 졸업한 후 로어교원, 연변인민출판사 문예편집, 작가협회 상무부주석 등을 지냈습니다. 1955년 처녀작〈첫 괭이〉를 발표한 후 륙속〈고동하시초〉등 수많은 시를 발표합니다. 문화대혁명시기 간첩으로 몰려 곡경을 치르기도 했고 나중에는 시골에 추방되기도 했습니다. ‘4인방’이 꺼꾸러지고 문화대혁명이 결속되자 루명을 벗고 다시 연변인민출판사로 돌아와 편집사업에 종사하면서 창작의 붓대를 들고 시창작에 몰입합니다. 1978년 시집 《나리꽃 피였네》를 출판한 뒤를 이어 1980년엔 장편서사시 《장백산아 이야기하라》를 출판하고 잇달아 《들국화》,《금잔디》등 서정시집을 륙속 출판합니다. 1958년도에〈고동하시초〉를 발표하면서 시인적 재질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명성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건 첫 시집 《나리꽃 피였네》를 발표하면서부터입니다.《나리꽃 피였네》는 1955년부터 1979년 사이에 창작한 작품 중 52수를 골라 묶은 서정시집입니다. 이 시집은 여러 가지 사회력사적 원인과 자신의 문학관념의 제약성으로 하여 좌적사조의 영향에서 해탈되지 못했습니다. 시인 김성휘선생. 객관진실반영이 지나치에 강조되고 반대로 내심진실반영이 극단적으로 홀시되였다고 시인 자신도 어느 글에서 반성하고 있습니다. 이런 반성에 기초하여 그는 새로운 력사시기에 진입한 다음 솔직, 성실, 진실을 자기 시학관의 가장 주되는 원칙으로 내세웠습니다. 개성 있는 나를 강조하면서 진실한 내심체험을 표현하고 현실생활과 인간의 미를 표현하는 데 중점을 두어야 한다는 점을 깨닫고 그 후의 시창작에서 이런 인식의 전환을 실천에 옮겼습니다. 김성휘선생님의 시집 《들국화》와 《금잔디》에서는 개혁개방 이후 그의 새로운 미학원칙을 구체적으로 구현하고 있습니다. 이 시집의 주제는 주로 흘러간 력사에 대한 반성을 다룬 작품입니다. 그의 력사에 대한 반성은 미래에 대한 드팀없는 신념과 련결되여 있습니다. 그의 시에는 고향과 조국에 바치는 송가들이 주요한 자리를 차지합니다. 대표적 작품으로는 〈조국 나의 영원한 보모〉,〈고향의 언덕 마음의 탑〉등이 있습니다. 개혁개방 이후 창작의 성숙기에 이른 그는 독창적인 예술풍격으로 조선족시단을 장식했습니다. 그의 서정시는 우선 정감표현의 진실성과 진지함으로 독자들을 감동시킵니다. 시인은 뜨거운 마음으로 생활을 포옹했습니다. 그의 서정시에 흐르는 진실한 시적 정서는 생활과 인간에 대한 열렬한 사랑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자연감각을 순수하게 노래한 시들도 적지 않습니다. 시내물의 흐름을 찬히 보아라 천리만리 먼먼 길도 자신만만타 흐르고 흐르고 내처 흐르며 한평생 말쑥하게 가는 나그네 -〈시내물〉 전문 룡정고중의 시비에 새겨진 〈시내물〉은 김성휘선생님의 대표적 서정시의 하나입니다. 1980년에 지은 이 시는 시내물이라는 시적 상관물을 빌어 시내물처럼 맑고 깨끗하게 살려는 시인 자신의 내면의 결의를 내비치고 있습니다. 여기서 시내물은 시인의 정신적 추구의 거울이며 자화상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3.4조로 된 이 시는 깊은 뜻을 전통적 운률에 맞춰 깔끔하고 아름답게 표현했습니다. 연변식 서정시의 하나의 표본, 생활적이고 한마디 군더더기 없이 인간의 정서를 암시적으로 표현하는 이런 시는 수준이 있고 영원히 력사에 남을 시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시인 김성휘선생의 시집들 1979년에 김성휘선생님이 창작한 장편서사시 《장백산아 이야기하라》는 머리시와 맺음시 그리고 13장으로 구성되였는데 무려 7000행에 달합니다. 이 서사시는 민족적특색이 짙은 대작인데 조선족 인민들이 겪은 고난의 생활과 피어린 투쟁사를 진실하게 그려냈습니다. 이 작품은 내용뿐만 아니고 시의 언어와 운률, 예술수법 등 형식 면에서도 농후한 민족특색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 시에서 시인은 비유, 과장, 반복과 대조, 수사학적 질문과 호소, 동의어 반복, 의인법 등 수사법의 능수능란한 사용으로 시어의 표현성을 높이고 있습니다. 이 서사시는 김철의 《새별전》과 더불어 중국조선족 시문학사에 길이 남을 영웅서사시입니다. 김성휘선생님의 시는 강렬한 서정과 랑만으로 조선족 시단의 독특한 풍경으로 떠오릅니다. 김성휘시인은 연변식 서정시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한 랑만주의색채가 아주 짙은 뛰여난 서정시인입니다. 길림신문 글 구성/ 김청수 기자 영상 사진/ 김성걸 김파 정현관 기자
7869    조선족 시단과 시인들...1 댓글:  조회:2259  추천:0  2021-02-19
조선족 시단의 형성과 정초자들/(김학송편1) (ZOGLO) 2021년2월19일        시인 김학송   김학송 프로필: 1952년 길림성 도문시 곡수촌에서 출생 장춘야금지질학교, 연변대학 조선어문학부 졸업 시집 《고향에는 고향이 없다》를 비롯하여 문학저서 30여부 출판 일부 시는 영어로 번역되여 《세계시인선집》에 수록 수필〈태산에 오르며〉가 중학교 교과서에 등재 1993년 서울 아시아시인대회 중국측 대표로 참석 2008년 전국소수민족문학창작 ‘준마상’을 수상 2020년 단군문학상 수상    조선족들의 초기 시를 보면 대개 조선 시인 조기천, 김소월의 영향, 로씨야의 뿌쉬낀의 영향, 쉬빠쵸프의 영향, 마야꼽쓰기의 영향 등 이런 분들의 시풍의 영향을 많이 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여 해방초기의 시들을 보면 전통적인 사실주의에 바탕을 둔 조기천, 뿌쉬낀 식의 랑만주의 시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사회정치환경의 영향으로 송가풍의 시들도 적지 않았는데 대체로 이런 시풍이 문화대혁명시기까지 지속됩니다. 그리고 개혁개방이 시작되고 바깥세상의 문이 열리면서 한국의 시도 들어오고 서구의 시도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우리 연변도 봉페된 환경이 무너지면서 시인들이 새롭게 공부하며 관념갱신을 하기 시작합니다. 자기 기존의 시에 대해 의문을 품고 새로운 어떤 시적 개혁을 위해 몸부림칩니다. ‘두만강 여울소리’ 시가창작연구회 참가자 일동. 옛날 50년대, 60년대에는 사물을 직설적으로 썼습니다. 그러나 개혁개방 후부터는 서구의 새로운 풍격 특히 모더니즘, 초현실주의 이런 상징주의 시들의 영향을 받아가지고 사물을 은유적으로, 비유적으로, 굴곡적으로 묘사하는 기교들을 배우기 시작합니다. 언어도 50년대, 60년대에는 비교적 단순하고 따분하던 데로부터 사상해방이 되여 자기 내심의 정서를 마음껏 표출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아나갑니다. 그러나 우리 시들이 개혁개방 후부터 새로운 몸부림을 통해 변모하고 혁신한 건 사실이지만 또 다른 그림자도 드리웁니다. 난삽해지고 난해해지고 점점 기교적이 되다 보니 저도 모르게 독자와 멀어집니다. 즉 독자를 리탈하기 시작합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50년대, 60년대의 초기 시들은 생활에 밀착하여 인민대중의 생활정서를 담고 그 시대의 정감을 담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중 속에서 신임도, 호응도가 높았습니다. 례를 들면 김철시인의〈지경돌〉,〈꽃방석〉그리고 송정환시인의〈풀피리〉, 강호혁 시인의 〈나의 노래〉등이 자못 인상적입니다. 특히 황옥금 녀류시인의 〈고향의 봄〉은 아주 잘 썼어요. 50년대 조선족의 삶의 정서, 사는 모습을 아주 그림처럼 생동하게 그렸습니다만 그는 시단에서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습니다. 하여튼 그녀의 일부 시는 지금 봐도 가슴이 뛰고 그 시대를 보는것 같아요. 그 시대는 물론 지금까지도 생명력을 갖고 있습니다. 공감대를 극대화시켰습니다. 그러니까 대체로 옛날시가 좋았느냐 아니면 오늘의 시가 좋으냐 하고 묻는다면 저는 한마디로 뭐라 말하기 어렵습니다. 옛날 시도 장점이 있고 오늘 시도 장점이 있습니다. 옛날 시의 단점은 사색이 비교적 얕고 표현수법이 단순한 것입니다. 이것이 약점이겠지요? 그러나 공감대가 컸고 대중들의 사랑을 받았고 정말로 피로, 가슴으로 시를 썼습니다. 그 시대의 독자들과 밀착하여 그 시대와 숨결을 같이 나누었습니다. 그래서 시인의 심장과 시대의 심장이 함께 뛰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저명한 조선족시인 리욱선생의 시선집. 때문에 대중들이 시를 믿고 시를 숭배하고 시를 대단하게 생각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시인들의 시에는 그 시대의 모습이 담기고 그 시대의 정서가 담기고 시인의 마음 뿐만 아니라 그 시대를 산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함께 담겨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 시대의 시를 한마디로 뭐라고 낮게 보기에는 무리가 따른다고 봅니다. 오히려 심장으로 쓰고 절실하게 쓰고 사람의 가슴에 흘러들게 쓴데는 개혁개방후기의 시보다 품격이 한수 높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개혁개방이후의 시들은 서구의 영향을 받아서 기교적인 면에서, 언어구사나 표현기법에서 새로운 방법을 인용했다는 점에서 장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모호성, 난해성을 잘 소화하면 좋은데 소화를 못한 채 쓰다 보니 난삽해집니다. 시가 난삽해지니 자연스럽게 대중들이 싫어합니다. 연변 뿐만이 아니고 중국내지의 시들도 전체적으로 90년대 초반부터 대중들과 멀어지기 시작했다고 봅니다. 총적으로 보면 개혁개방전에는 시인들의 수자가 상대적으로 적었습니다. 그렇지만 정말로 심장으로 쓴 시, 대중들의 기억에 오래오래 남는 시들이 꽤나 많습니다. 개혁개방 후에는 시인수자가 많아지고 시도 많아지고 여러가지 상도 많아집니다. 그렇지만 진정으로 대중들의 마음에 충격을 주고 령혼을 진감하는 시들이 적습니다. 이건 우리 차세대 시인들이 (금후) 풀어야 할 하나의 과제이겠지요? 우리 조선족 시인들은 근 100년래, 특히 공화국 창립 후 시인의 사명에 충성하면서 그 시대가 수요하는 정신적 식량, 서정적 식량을 많이 창출해 가지고 력사 속에서 우리 시인들의 위상을 높이고 우리 문학을 가꾸고 꽃피우는 데 많은 기여를 했습니다. 한마디로 시는 그 시대의 노래이고 대중들과 언제나 같이 걷게 되여 있습니다. 앞으로 우리의 오랜 전통에 뿌리를 두면서 새로운 수법을 적당히 수용해가지고 정말로 소박하면서도 아름다운, 음악미도 있고 난삽하지 않는 연변만의 독특한 시풍을 꽃피우는 데 우리 시가 나아갈 길이 있지 않겠는가고 저는 개인적으로 생각해 봅니다. 우리 시단의 정초자들 해방 후 우리 조선족 시단의 정초자의 한 분으로 리욱선생을 꼽을 수 있습니다. 리욱선생님은 로씨야에서 태여났습니다. 조선족 시단의 정초자의 한 분인 리욱선생. 그는 1924년도에〈생명의 례물〉이라는 시를 들고 문단에 데뷔합니다. 전체적으로 이분의 시는 대단합니다. 우리 시단의 정초자이고 선구자입니다. 이 분의 시중 광복전의 시가 오히려 예술수준이 더 높은 편입니다. 해방 후에도 활발한 창작활동을 하셨습니다. 연변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계셨고 한 때는 신문사에서 기자로 계시기도 한 분입니다. 학문이 박식하여 문화대혁명전에 벌써 중문으로 시집을 냈습니다. 해방전의 시에서 대표적인 시는〈북두성〉이라는 시가 있고 〈금붕어〉라는 시가 있습니다. 어째서 리욱선생님의 전체 시중에서 광복전의 시가 예술성이 더 높다고 보는가? 그 때의 시들은 이미지화를 잘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대상물을 빌어가지고 시인의 내면적 감수를 토로하다 보니 예술화가 잘되여 있습니다. 여기에〈금붕어〉라는 시가 있는데 이 시는 초기의 시입니다.  백공작이 날개 펴는 바다가 그립고 그리워 항시 칠색무지개 그리며 련꽃 항아리에서 까무러친 상념에 툭툭 꼬리를 친다 안타까운 운명에 애가 타고 타서 까만 안공에 불을 켜고 자주 황금갑옷을 떨치나니 붉은 산호림속에서 맘대로 진주를 굴리고 싶어 줄곧 창 너머로 푸른 남청에 희망의 기폭을 날린다 〈금붕어〉라는 대상물을 빌어 시적화자의 내면감수를 토로한 시입니다. 금붕어는 항아리속에서 사니까 자유가 없습니다. 1936년도에 이 시를 썼습니다. 일제치하의 암담한 사회현실 속에서 시인을 포함한 인민들의 상황을 어항속에 갇힌 금붕어에 은유한 것입니다. 상징적으로 어떤 정서를 표달하였는가 하면 그 사회의 정말로 갑갑하고 암담한 현실을 고발했고 나아가서는 돌아 올 광명에 대해서 찬미합니다. … 줄곧 창 너머로/ 푸른 남천에/ 희망의 기폭을 날린다 금붕어가 꼬리를 탁 치며 유리항아리를 뚫고 광명을 찾자는, 금붕어를 빌어서 그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정서, 참담한 마음을 토로한 것입니다. 예술화가 잘되였지요. 그러고 보면 아주 세련미도 있고 함축되고 여운도 있습니다. 예술적 향기도 물씬 풍깁니다. 이 시는 1936년도에 쓴 시인데 지금 시점으로 봐도 시가 아주 흠뻑 익었습니다. 익은 참외가 어떻습니까. 향기가 풍기지요. 달콤하지요. 예술적으로 흠뻑 익고 향기가 풍기는 시를 벌써 초년에 썼습니다. 리욱시인의 천재성, 시인으로서의 어떤 능력을 여기서 읽어냅니다. 리욱시인은 해방 후에도 활발하게 시창작활동을 합니다. 그러나 시의 패턴이 많이 바뀝니다. 사회정치환경의 영향으로 선동적이고 직설적인 화법으로 바뀝니다. 이분의 시는 대개 굵은 톤으로, 남성적인 기백을 토로하는데 아주 웅숭깊습니다. 선이 굵습니다. 주요한 시들로는 〈어머니와 아기〉, 〈할아버지의 마음〉등 이런 시들이 있습니다. 〈할아버지의 마음〉이라는 시는 이분의 고향에 세워진 시비에 새겨져 있습니다.   화룡시 로과에 세워진 리욱시비. 〈할아버지의 마음〉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칠순할아버지 나무를 심으며 어린 손자를 보고 싱그레 웃는 그 마음 그 마음… 몇 줄이 안 됩니다. 그러나 이 시를 보면 아주 담담하고 간결하게 할아버지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할아버지의 마음이자 시인의 마음이겠지요. 정말로 미래를, 그리고 리타적인 삶을 사는 그 시대의 인간상을 그려냈습니다. 그때 분들은 리기적이기보다는 우선 리타적입니다. 할아버지도 자기를 위해 나무를 심는 것이 아니라 어린 손자를 위해 땀을 흘리며 힘들게 나무를 심습니다. 그냥 어린 손자를 바라보며 싱그레 웃는 그 마음 그 마음 하니까 말 속에 말이 있지요. 그게 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단에서 화룡 로과에 시비를 세울 때 이 시를 올린 것입니다. 이 시는 예술화도 잘 되였지만 그 시대의 시대상이 담겨 있습니다. 좋은 시란 무엇입니까. 언어기교가 높아 되는 것도 아닙니다. 한 시대의 체취나 흔적이 담기면 더 좋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문학은 시대의 혼불이고 거울이기 때문입니다. 그 시대에 왜 시가 필요한가 하는 리유를 그분들은 알았습니다. 요즘 (부분적) 시인들은 그걸 잘 모르는 것 같아요. 이 시대에 왜 시가 필요한가를, 이것은 심사숙고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리욱선생님은 이렇게〈금붕어〉,〈할아버지의 마음〉과 같은 명작을 남기셨습니다. 정말로 웅훈하고 격정적인 시풍으로 시를 다루었습니다. 또 어쩌면 이는 그분만의 시풍입니다. 아주 기백이 높습니다. 이런 시풍으로 우리 조선족 시단의 초년기를 장식했고 우리 시단에 큰 족적을 남긴 우리 조선족 시문학의 정초자이시며 선구자입니다. 다음으로 조선족 시문학의 정초자의 한분이신 설인(원명 리성휘)선생님을 소개하겠습니다. 설인선생은 연길에서 출생하였고 잡지사 편집, 연변대학 교사로 오래 지내셨습니다.   조선족 시문학의 정초자의 한분인 설인선생. 시집으로 《봄은 어디에》, 《설인소시집》, 《설인시선집》등 여러권 남겼습니다. 이분은 광복전에도〈설야〉,〈소식〉,〈5월에〉등 시들을 창작했고 해방 후에도 줄곧 활발한 시활동을 하였습니다. 설인선생의 시는 아주 섬세하고 개성미가 강합니다. 누구보다 다른 부드럽고 결이 고운 향토적인 언어, 그러면서도 그 시대 상황을 핍진하고 재미있게 그려내는 분입니다. 그분의 시가운데서 〈콩〉,〈아침〉이런 시들은 참 생활맛이 나고 삼빡합니다. 여기서 〈아침〉이라는 시의 뒤부분만 보기로 합시다. … 시원 상쾌 생생 록음방송 싱그럽다 힘이 분수처럼 솟구치는 찬란한 아침은 여울목 뛰여넘는 반짝 금붕어 아침을 여울목 뛰여 넘는 반짝 금붕어로 형상화하였습니다. 시인은 아침을 빌어 평화롭고 아름다운 환경에서 희망이 솟구치는 자신의 심경을 토로한 것입니다. 얼마나 생동합니까?! 자기만의 언어입니다. 정말로 묘하게 쓰고 있습니다. 설인시집. 〈콩〉이라는 시에서도 이런 특징이 계속 드러납니다. 입은 종내 안 연다노 그래도 봉긋봉긋 배만 부르다고 노랗게 달이든 잎 아름답기만 하다고… 게다가 때가 되면 아이, 튀여나오기 전에 어서 걷어줘요! 잘랑잘랑 꼬마 종까지 울리는 거룩한 습성 지니였다노! 여기서 콩을 의인화하여 말도 하고 꼬마종까지 잘랑잘랑 울립니다. 실지는 콩에 기대여 소박하고 아름다운 인간의 내심을 그려낸 것입니다. 설인선생은 이렇게 시어의 사용에서 치밀하면서도 자기만의 언어를 사용합니다. 그리하여 조선족 서정시의 기틀을 잡고 개척하는데 선구자의 역할을 하였고 우리 조선족 시단에서 자기만의 뚜렷한 족적을 남긴 분입니다. 길림신문 글 구성/ 김청수 기자 사진 영상/ 김성걸 김파 정현관 기자
7868    [세상만사] - 눈사람과 환경미화원 댓글:  조회:2445  추천:0  2021-01-30
  아이들 눈사람 부쉈다가… 환경미화원 결국 ‘해고’ (영상)  2021.01.30.    화나요 좋아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한 미화원이 아이들이 만든 눈사람을 발로 차고 있다. 사진출처=폐쇄회로(CC)TV아이들이 열심히 만든 눈사람을 발로 차 망가뜨린 환경미화원들이 해고됐다. 28일(현지시간) 더선에 따르면 지난 24일 영국 헤리퍼드의 3살 소년 조셉 테일러는 누나 아멜리아와 함께 2m 높이의 거대한 눈사람을 집 앞에 만들었다. 그러나 이틀 뒤인 26일, 눈사람은 환경미화원 두 명에 의해 처참히 부서졌다. 쓰레기통을 비우면서 눈사람을 감상하는 듯했던 미화원들은 작업이 끝나자 돌변했다. 한 명이 먼저 돌려차기로 눈사람의 얼굴을 날렸고, 다른 한 명은 눈사람의 몸통을 발로 차 기울게 했다. 이어 연속적인 발차기로 몸통마저 날려버린 이 미화원은 작업차를 타고 유유히 떠났다. 조셉과 아멜리아는 이 광경을 직접 목격했다. 아이들은 울면서 엄마 소피에게 달려가 알렸다. 집 앞에 설치한 폐쇄회로(CC)TV를 확인한 소피도 미화원들의 만행에 적지 않게 놀랐다. 환경미화원들이 눈사람을 망가뜨리고 있다. 사진출처=폐쇄회로(CC)TV 소피는 “아이들은 평소 환경미화원들에게 인사하는 걸 좋아했다”면서 “아이들 앞에서 그런 짓을 하다니 매정하다”고 비난했다. 아이들의 아빠 톰도 “아이들이 열심히 만든 눈사람을 샌드백처럼 사용하다니 무섭다”고 말했다. 톰은 환경미화원들이 소속된 회사와 헤리퍼드셔 의회에 이메일을 보냈다. 회사 측은 해당 미화원들을 징계 조치했으며 수거 작업에서 제외했다고 답했다. 이후 그들은 해고된 것으로 알려졌다. 헤리퍼드셔 의회 대변인은 두 미화원이 의회가 하청을 맡긴 용역업체 소속임을 밝히며 업체 측으로부터 ‘다시는 이들을 고용하지 않겠다’는 통지를 받았다고 전했다. 이어 “모든 업체에 이 사건을 알려 직원들이 전문적 기준을 갖추도록 하겠다”고 덧붙였다. 톰은 “이번 기회에 미화원들이 자신의 행동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김소영 동아닷컴 기자
7867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폐의약품문제",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2481  추천:0  2021-01-28
소각 폐기해야 하는 폐의약품... 현실은 쓰레기통 직행 2021.01.29.    슬퍼요 좋아요 평가하기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약국·보건소에 폐의약품 반납 국민 26% 불과 제도 공백·운영 부실로 폐의약품 여전히 ‘처치곤란’ 약국 “폐의약품 받지만 지자체 관리 소홀해” 폐의약품 매립 시 토양오염·생태계 교란 부작용 우려경기도 고양시에 거주하는 허진숙(52·여)씨는 폐의약품을 버릴 때마다 약국을 찾는다.  허 씨는 알약은 알약끼리, 물약은 물약끼리 분류해 약사에게 가져간다. 폐의약품을 건넬 때면 종종 싫은 티를 내는 약사도 있다. 적은 양을 버릴 땐 약국까지 가기가 귀찮기도 하지만 꼭 약국을 찾는다. 그는 “폐의약품을 음식물과 버리면 동물 사료에 섞여 결국 우리에게 돌아올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일반 쓰레기로 버려도 흙과 섞여 결국 우리 몸에 좋지 않을 것”이라며 “환경에 미칠 영향을 우려해서 꼭 약국에 가져다 준다”고 덧붙였다. 환경보호에 대한 중요성이 커지는 가운데 폐의약품 처리가 허술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관련 규정도 부실할뿐만 아니라 규정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아서다. (사진=이미지투데이) 지자체 33%만 폐의약품 처리 관련 조례 있어 폐의약품은 질병 및 신체손상 등 인간의 건강과 주변 환경에 피해를 유발 할 수 있는 폐기물인 ‘생활계 유해폐기물’이다. 일반 쓰레기로 버려선 안 되고 약국이나 보건소에 따로 배출해야 하는 이유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을 아는 이들은 많지 않다. 국민권익위원회가 2019년 11월 20일부터 12월 3일까지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폐의약품을 약국이나 보건소에 배출한다고 응답한 사람은 26%에 불과했다. 심지어는 허 씨처럼 약국에 폐의약품을 배출해도 일반 쓰레기로 버려지는 경우도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폐의약품 관리에 관한 규정이 없다는 것. 현행 폐기물관리법 제14조의4에 따르면 지자체장은 생활계 유해폐기물의 적정 처리를 위한 기술적, 재정적 지원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하지만 현장에서는 이같은 조치가 미비한 상황이다. 2019년 11월 국민권익위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전국 228개 기초지방자치단체 가운데 폐의약품 수거와 관련해 조례가 있는 지자체는 32.7%인 74곳에 불과했다. 서울시 종로구에서 약국을 운영하는 A씨는 “주민들이 폐의약품을 약국에 가져오면 받아준다"면서도 "우리도 일반쓰레기로 버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어 "폐의약품을 모아 보건소에 가져가도 잘 받아주지 않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종로구 보건소 관계자는 이에 대해 "(폐의약품) 관리 주체를 보건소라고 보긴 어렵다”며 "보건소도 약국처럼 폐의약품을 모았다가 배출하는 곳"이라고 일축했다. 그는 "주민들이 가져오는 폐의약품은 받는다"며 "폐의약품은 폐기물 중 하나이기 때문에 구청 차원에서 관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어 "구청으로 폐의약품을 보내 처리하느냐는 질문엔 “자체적으로 소각한다”고 했다. 종로구청 관계자는 “지역 약사회나 보건소에서 폐의약품 처리를 의뢰할 경우 수거해 소각한다"면서도 "수시로 수거·소각하는 게 아니다보니 약국에서는 폐의약품 처리에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조례 있어도 문제...“지자체 수거 의지 부족해” 약국에서 수거해 보관하고 있는 폐의약품, 약사는 악취가 심해 실외에서 보관한다고 말했다. (사진=권보경 기자) 관련 규정이 있더라도 실효성 있게 운영되지 않는 경우도 많다. 1차적으로 폐의약품을 수거해 보건당국에 전달해야 할 약국들이 일반쓰레기로 폐기하더라도 이를 제재할 수 있는 수단이 없어서다. 서울시 마포구에서는 구청이 구 보건소에 모아놓은 폐의약품을 수거해 소각한다. 하지만 약국에 쌓이는 폐의약품을 보건소에 가져다 주느냐는 약국 자율이다. 마포구에서 약국을 운영하는 B씨는 “보건소에서 폐의약품을 받는 시간이 정해져 있다”며 “우리가 직접 그 시간에 폐의약품을 보건소에 가져가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혼자 약국을 하다 보니 약국을 비우기가 힘든 게 문제”라며 “다른 사람에게 부탁해야 하는데 양이 많아 부탁하기도 곤란한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이어 "환경보호를 위해 폐의약품 관리가 중요하다면 지자체가 좀 더 적극적으로 관리해야 한다고 본다"고 강조했다. 마포구의 다른 약국 약사 C씨도 “폐의약품을 모아 보건소에 가져다주는 일이 번거로운 게 사실"이라며 "폐의약품을 모아두면 썩어 냄새가 심하다. 동네 소형 약국의 경우 관리가 더 쉽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대한약사회 관계자는 “조례에는 ‘분기별 1회 이상’, ‘월 1회 이상’ 수거한다고 명시했지만 정확히 언제 어떤 방식으로 수거하는지는 구체적인 내용이 없다"며 "조례가 애매해 임의적으로 운영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약국에서 폐의약품을 수거하더라도 관할 지자체가 이 문제에 소홀한 경우가 많아 부담이 크다"고 토로했다. 생태계 교란 등 초래...건강에도 악영향 (사진=이미지투데이) 폐의약품은 일반 쓰레기나 하수도에 버려질 경우 토양, 수질 오염을 유발한다고 알려져 있다. 한국소비자원이 작년 12월 발표한 ‘폐의약품 안전실태조사’ 자료에 따르면 폐의약품이 버려질 경우 생태계 교란과 슈퍼박테리아로도 불리는 ‘다제내성균(다양한 항생제에 대해 내성을 가진 병균)’의 확산을 초래할 수 있다. 이외에도 피임약 성분이 호수에 노출된 후 물고기가 정상적으로 번식하지 못해 멸종했고, 항불안제가 어류의 행동 변화를 초래한 결과 등 오염된 의약물질이 생태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 연구결과가 지속적으로 보고되고 있다. 환경부 관계자는 "약국이 폐의약품을 수거토록 한 것은 국민들의 약물 오남용을 예방하려는 취지"라면서도 "폐의약품 수거 및 처리에 대한 약국의 애로사항은 파악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정기적으로 수거해 소각하는 지자체의 역할을 명확하게 하는 등의 더 나은 폐의약품 수거 및 처리 대책을 수립할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스냅타임 권보경 기자  
7866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철조망문제",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2798  추천:0  2021-01-28
차단 철제 울타리에 멸종위기종까지 수난! 2021.01.29.    화나요 슬퍼요 좋아요 평가하기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KBS 강릉] [앵커] 아프리카돼지열병, 이른바 ASF가 확산되면서 정부는 야생멧돼지 차단을 위해 1,000킬로미터가 넘는 울타리를 설치했습니다. 문제는 이 울타리가 멧돼지뿐만 아니라 다른 야생동물 이동까지 막고 있다는 점인데요. 산양 같은 멸종위기종도 수난을 겪고 있습니다. 정면구 기자가 보도합니다. [리포트] 강원도 고성과 인제를 잇는 고갯길, 야생동물이 울타리를 연신 들이받습니다. 천연기념물이자, 멸종 위기 1급인 산양입니다.  [박광용/목격자 : "(산양이) 철망하고 그 (울타리) 사이에 껴서 그쪽으로 넘어가려고 바둥바둥 대는 게 안쓰러워서."] 산양과 대치하던 개가 갑자기 공격합니다. ["하지마. 야! 야!"] 다급하게 소리치며 울타리를 넘어갔지만, 산양은 이미 개에 물려 죽어있었습니다. 정부와 지자체는 2천19년부터 아프리카돼지열병을 막고 야생 멧돼지를 차단하기 위해 천 848킬로미터 규모의 울타리를 설치했습니다. 이런 울타리는 시군 경계를 넘어 2중, 3중으로 돼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 철제 그물망이 촘촘해서 웬만한 야생동물은 빠져나가기 어렵습니다.  이 때문에 야생동물들은 자유롭게 이동할 수 없게 됐고, 도로로 내몰리기 일쑤입니다.  [조범준/야생동물연합 국장 : "(야생동물 이동은) 번식과 먹이를 찾기 위함인데, 그렇게 되면(울타리가 막으면) 번식에 문제가 생기고 결국에는 멸종에 이를 수가 있죠. 그래서 이 펜스 치는 문제만큼은 신중을 고려해야 할 부분 중에 하나에요."] 환경부는 생태적 부작용을 예상했지만, 돼지열병 차단이 시급해 불가피하게 울타리를 설치했으며 보완책을 마련하겠다고 밝혔습니다. KBS 뉴스 정면구입니다. 촬영기자:최진호  
7865    프랑스 시인 - 기욤 아폴리네르 댓글:  조회:4049  추천:0  2021-01-27
시리즈뜻밖의 미술교양   ●시인의 그림을 본 적이 있나요?-기욤 아폴리네르의 캘리그램   아트메신저빅쏘이소영 3만 팔로워 2018.03.13. 23:314,927 읽음         오늘은 시가 그림 같고, 그림이 시 같은 아리송한 작품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바로 프랑스의 초현실주의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1880-1918) 의 ‘캘리그램[calligram] ’입니다.  아폴리네르는 피카소와 같은 예술가와 친하게 교류하며 시가 회화와 같은 이미지로도 그려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시, 회화, 음악의 세 가지를 요소를 표현을 결합시켜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인 1918년 ‘그림 같은 시’인 ‘캘리그램’을 창조했습니다. 라틴어인 ‘아름답다’라는 뜻의 ‘Calli'와 글자 ’Gramme'을 결합해 ‘아름다운 상형 그림’이라는 장르를 만든 것이지요. 기욤 아폴리네르(Guillaume-Apollinaire)의 사진 나 역시 화가이다. 기욤 아폴리네르가 남긴 말입니다. 그의 이런 도전은 정형적인 글줄 위주의 형태에서 자유시로의 이행을 시도하여 글자들을 이미지화합니다. ▶그림1 기욤 아폴리네르/ Il Pleut/ (It’s Raining) 1916년 ‘글자 비’입니다. 후드득 후드득 쏟아지는 글자들이 빗방울이 되어 종이 위에서 흩어집니다. 글자의 배열만으로도 쏟아지는 빗줄기가 이미지화될 수 있는 것이지요. 이 시에서 아폴리네르는 비가 내리는 것이 자신의 삶에서 놀라운 만남이라고 말하며 빗방울 하나하나가 삶의 많은 순간과 인연임을 암시합니다. 사선으로 흘러가는 글자들의 모습이 비가 내리는 장면을 더욱 상상하게 해주면서 우리를 비 내리는 날 어느 한적한 거리로 순식간에 이동하게 합니다. ▶그림2 기욤 아폴리네르/ 에펠탑 나는 모든 것을 프랑스에 빚지고 있다. 프랑스를 위해 싸우는 것은 나의 최소의 봉사다. 기욤 아폴리네르는 프랑스를 사랑했습니다. 그는 이탈리아 로마 태생이지만 파리로 이주해 살았죠. 늘 제2의 조국을 프랑스라고 생각한 그는 1916년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프랑스 병으로 자원하여 출전한 후 전장에서 부상을 입고, 삼십 대 후반의 젊은 나이로 1918년에 세상을 떠납니다. 그가 그린 에펠탑이 더 소중해 보이는 이유는 이미지와 글자에 그의 마음이 담겨서가 아닐까요?     시인이었지만, 그 어떤 화가보다 시각적인 것들을 사랑했던 기욤 아폴리네르의 말은 이미지를 보고, 읽고, 표현하는 것이 그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와닿게 합니다. 기욤 아폴리네르 /꽃 Fleurs/ 1916   ◆여러 화가들이 그린 기욤 아폴리네르의 초상 예술가 친구들이 많았던 기욤 아폴리네르는 감사하게도 그 예술가들이 남긴 초상화들이 많은 편입니다. 이미 세상을 떠난 그를 초상화로 만나면서 그는 여러 예술가들의 눈에 비친 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추측해보게 됩니다. ▶그림3 모리스 드 블라맹크/1904-05/기욤 아폴리네르의 초상/캔버스에 유채 야수파 화가인 블라맹크는 그의 담대한 화풍만큼 비교적 큰 터치로 과감하게 아폴리네르를 표현했습니다. 우리를 비스듬하게 바라보고 있는 시인의 눈빛에서, 왠지 모를 고독함이 느껴집니다. ▶그림4 피카소/ 기욤 아폴리네르의 초상화 습작/1905 기욤 아폴리네르를 그린 그림 중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입니다. 파블로 피카소의 드로잉이자 습작인데, 이 작품 속의 아폴리네르는 그 어떤 화가가 그린 초상화들보다 경쾌해 보입니다. 양손 가득 책을 안고, 우산을 들고 강아지를 끌며 그는 오늘도 자신이 꿈꾸는 세계에 대해 논할 예술가들을 찾아 거리를 나서고 있습니다. 훗날 아폴리네르는 사망 후 그가 사랑했던 파리의 페르라셰즈 공동묘지에 안장되었고 그의 무덤 위에는 피카소가 구상한 기념비가 지금도 서있습니다. 피카소가 그린 아폴리네르 풍자화 /1967 -디즈니 애니메이션 의 찻잔 모자가 떠오르네요. 피카소 눈에는 통통한 편이었던 기욤 아폴리네르가 주전자처럼 보였을까요? 위트가 가득한 크로키라 좋습니다.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Apollinaire in Profile with Bandaged Head/1916/ graphite pencil and conté crayon on thick vellum paper/31.3 x 23.1 cm 파리의 페르라셰즈 공동묘지/피카소가 구상한 아폴리네르의 기념비   ◆영원히 잊히지 않는 아폴리네르의 연인, 화가 마리 로랑생    샤넬의 초상화를 그리고, 서정적인 화풍으로 큰 사랑을 받고 있는 화가 마리 로랑생(Marie Laurencin/1883-1956) 은 기욤 아폴리네르가 가장 사랑했던 여인이었습니다. 5년간 뜨겁게 사랑했던 마리 로랑생과의 이별을 직감한 아폴리네르의 애절한 마음을 표현한 그의 시 는 여전히 사랑을 대표하는 유명한 시입니다. 미라보 다리 끝에는 아폴리네르의 시구를 적은 기념비가 있습니다. 앙리 루소(Henri Rousseau)는 이 두 사람의 초상화를 그려주었습니다. ▶그림5 앙리 루소 The Muse Inspiring the Poet(시인에게 영감을 주는 뮤즈) 서로가 서로에게 딱 붙어있는 아폴리네르와 로랑생의 모습이 영원할 것 같지만, 둘은 헤어지고 로랑생은 다른 남자와 결혼합니다. 하지만 그녀는 아폴리네르의 시를 가슴에 안고 세상을 떠납니다. 가장 슬픈 여인은 잊힌 여인이라고 말했던 마리 로랑생의 시가 떠오릅니다. 그녀의 염려와는 달리 아폴리네르에게 그녀는 영원히 잊을 수 없고 잊어서는 안 되는 여인이었을 것입니다. ▶그림6 마리 로랑생/1908/초대받은 예술가들/캔버스에 유채 마리 로랑생이 1908년에 그린 작품입니다. 꽃을 들고 있는 여인이 마리 로랑생이고 눈이 약간 부엉이 같은 제일 왼쪽 청년이 피카소입니다. 그리고 가운데 청년이 그녀의 연인인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 제일 오른쪽 여인이 피카소의 첫 애인이었던 올리비에입니다.  그림의 장소는 몽마르트에 있던 피카소의 하숙집 ‘세탁선’이었습니다. 화가 같은 시인이 되고자 했던 아폴리네르, 그런 아폴리네르를 사랑했던 친구들이 그린 초상화, 연인이었던 마리 로랑생과 함께 했던 시간…꼬리에 꼬리를 물고 그들의 이야기를 쫓아가다 보면 예술가들의 꿈과 작품, 사랑 이야기에 마음이 뜨거워지다가, 먹먹해지다가를 반복합니다.  글자는 그림이 되고, 그림은 글자가 되었던 기욤 아폴리네르의 캘리그램을 다시 바라봅니다. 올 한해 우리도 이렇게 지내면 좋겠어요. 무엇이든 연결될 수 있다는 융통성 있는 마음으로 말입니다. 마리 로랑생과 기욤 아폴리네르   색채의 마술사, 마르크 샤갈이 그린 기욤 아폴리네르에 대한 경의 마르크 샤갈(Marc Chagall)/아폴리네르에 대한 경의( Homage to Apollinaire)/ 1912-14 긴 얼굴의 독보적인 초상화를 남기고 떠난 모딜리아니가 기욤 그린 아폴리네르 모딜리아니가 그린 아폴리네르 프랑스 입체파 화가였던 장 매쳉체가 그린 기욤 아폴리네르 장 매쳉체(Jean Metzinger)/1911/ Etude pour le portrait de Guillaume Apollinaire, graphite on paper/48 × 31.2 cm, Musée National d'Art Moderne, Centre Georges Pompidou, Paris    
7864    미국 시인 -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 댓글:  조회:2720  추천:0  2021-01-26
미국의 문학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WilliamCarlos Williams, 1883년~1963년)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는 평생 소아과 의사로 일했다. 그는 2천 명이 넘는 아이들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을 도와주었고 처방전에 시를 적기도 했다. 윌리엄스의 초기 시들은 이미지즘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후에 구어체 사용을 강조하게 되었는데, 미국 영어의 자연스러운 리듬에 대한 타고난 감각을 활용해 미국 시가 르네상스 시기부터 영국 시를 주도하고 있던 단장격(短長格) 형식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는 현대 도시에 살고 있는 노동자와 아이들, 그리고 도시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상적인 사건들에 대한 애정을 지니고 있었으며, 이러한 애정 때문에 독자는 그의 시에 더욱 매력을 느끼고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된다. 네덜란드 정물화와 같은 〈빨간 손수레(The Red Wheelbarrow)〉(1923)는 일상적인 사물에서 흥미와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있다. 많은 게 놓여 있다 빨간 바퀴 손수레에 빗물에 젖어 빛나는데 그 곁에 흰 병아리들 윌리엄스는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시를 개발했다. 그에게 시는 스티븐스처럼 완벽한 예술품을 만드는 것도 아니었고, 프로스트처럼 워즈워스적인 사건들을 조심스럽게 재창조하는 것도 아니었다. 윌리엄스에게 시는 포즈를 취하지 않고 찍은 스냅 사진처럼 순간을 포착하는 것인데, 이 개념은 윌리엄스가 뉴욕 시의 스티글리츠 살롱 같은 갤러리에서 만난 사진가들과 예술가들로부터 배운 것이다. 시 〈젊은 주부(The Young Housewife)〉(1917)에서 보이듯이 그의 시는 종종 숨겨진 가능성이나 유혹 등을 스냅 사진처럼 포착해내고 있다. 오전 10시 젊은 주부가 남편의 집 나무 벽 뒤쪽으로 평상복을 입고 움직이고 있다. 나는 내 차를 타고 쓸쓸히 지나간다. 그리고 그녀는 다시 얼음장수, 생선장수를 만나러 길모퉁이에 가서 수줍어하며 코르셋도 입지 않은 채로 흩어진 머릿결을 쓸어 올리며 서 있다, 그리고 나는 그녀를 낙엽에 비유한다. 내 차의 소리 없는 바퀴들은 마른 잎사귀들 위로 바스락 소리를 내며 지나간다, 내가 인사하고 미소 지으며 지나갈 때. 그는 구체적이고 시각적인 사물들의 중요성을 제시하는 자신의 작품을 '사물주의(objectivist)'라고 불렀다. 그의 작품은 경험의 즉각적이고 감정적인 면을 포착하고 있으며, 1950년대 초반 '비트' 작가들의 작품에 영향을 주었다. 엘리엇과 파운드처럼 윌리엄스 또한 서사시 형식에 도전했는데, 엘리엇과 파운드의 서사시가 문학적인 인유를 사용하며 교육 수준이 높은 소수의 독자들을 대상으로 한 반면, 윌리엄스는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한 서사시를 창작했다. 엘리엇이나 파운드와 달리 윌리엄스는 해외에서 수학했지만 미국에서의 삶을 선택한 시인이다. 그의 5권짜리 서정시집 《패터슨(Paterson)》(1946~58)은 자전적인 인물 패터슨 박사의 눈으로 바라본 그의 고향 뉴저지 주 패터슨을 찬미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윌리엄스는 서정적인 문구, 산문, 편지, 자서전, 신문 기사, 역사적 사실들을 병치시키고 있다. 그의 시에서 사용하고 있는 넓은 여백은 미국 문학에 나타나고 있는 주제이기도 한 '열린 길'을 내포하며, 동시에 일요일 공원에 소풍 나온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열려 있는 새로운 장소의 느낌을 전달하고 있다. 휘트먼의 《풀잎》에 나오는 등장인물처럼 패터슨 박사 또한 노동자들 사이를 자유롭게 움직인다. - 늦봄, 일요일 오후! - 벼랑으로 가는 오솔길을 따라 간다 (숫자를 세며 : 증명)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 그들이 개와 발을 맞춰 오르다가 밟고 미끄러진 그 돌멩이를 이어 밟으며! 웃으며 서로에게 소리치며 - 기다려! (Ⅱ, i, 14-23) [네이버 지식백과]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William Carlos Williams, 1883년~1963년)  
7863    미국 시인 - 월러스 스티븐스 댓글:  조회:2624  추천:0  2021-01-26
미국의 문학 월러스 스티븐스(Wallace Stevens,1879년~1955년)     이미지 크게보기 월러스 스티븐스 펜실베이니아 주에서 태어난 월러스 스티븐스는 하버드 대학과 뉴욕 대학 법대를 졸업했다. 그는 1904년부터 1916년까지 법률 활동을 하면서 왕성한 창작 활동을 겸했다. 1916년 보험회사의 간부가 되기 위해 코네티컷의 하트퍼드로 이사를 가서도 시를 계속 창작했다. 그의 삶은 놀랍게도 시인으로서의 생활과 직장인으로서의 생활로 철저하게 분리되어 있었는데, 보험회사 관계자들은 그가 당시 유명한 시인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그는 《풍금(Harmonium)》(1931년 개정판), 《질서의 관념들(Ideas of Order)》(1935), 《세계의 부분들(Parts of a World)》(1942) 등과 같은 적절하게 이름 지어진 시집에서 보이듯이 평생 미학적인 질서에 대한 매우 복잡한 생각들을 개발하는 데 매진했다. 그의 유명한 시들 중에는 〈일요일 아침(Sunday Morning)〉, 〈건반 앞의 피터 퀸스(Peter Quince atthe Clavier)〉, 〈아이스크림의 황제(The Emperor of Ice-Cream)〉, 〈검은새를 보는 13가지 방법(Thirteen Ways of Looking at a Blackbird)〉, 〈키웨스트에서 질서의 관념(The Idea ofOrder at Key West)〉 등이 있다. 스티븐스의 시는 상상력, 미학적 형식의 필요성, 예술의 질서는 자연의 질서와 호응해야 한다는 믿음 등의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그가 사용한 시어는 풍부하고 다양하다. 그는 울창한 열대 지방의 장면들뿐만 아니라, 유머 넘치고 아이러니한 삽화 같은 장면들 또한 그려내고 있다. 그의 시 일부는 대중문화를 다루고 있으며 어떤 시들은 복잡한 사회에 대해 조롱하거나 지나치게 지적인 경향을 띠고 있다. 그는 "이윽고 탬버린 같은 소음을 내며 / 그녀를 시중드는 비잔틴 사람들이 왔다(Soon, with a noise like tambourines / Came her attendantByzantines)"는 표현에서처럼 풍부한 언어 유희로 유명하다. 스티븐스의 작품은 놀라운 통찰력으로 가득하다. 그는 때로 다음의 〈10시의 환멸(Disillusionment of Ten O'Clock)〉(1931)이라는 시처럼 독자들에게 장난을 친다. 그 집들에는 흰색 잠옷들이 출몰한다. 어떤 것도 초록색이 아니다. 초록색 링이 달린 자주색도 노란색 링이 달린 초록색도 파란색 링이 달린 노란색도 아니다. 아무것도 이상하지 않다, 레이스와 작은 구슬 달린 띠가 있는 양말을 신는다고 해도. 사람들은 비비와 고둥을 꿈꾸지 않을 것이다. 여기저기 늙은 선원만이 술에 취해 장화를 신은 채 잠들어 호랑이를 잡는다, 붉은 날씨 속에서. 이 시는 상상력이 없는 삶(평범한 흰 잠옷)을 불평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이 시는 독자들의 마음속에 생생한 이미지를 불러일으킨다. 끝에서 재산에는 관심 없는 술 취한 선원이 비록 꿈에서지만 '호랑이를 잡는다'. 이 시는 인간의 상상력이 항상 창조적인 출구를 찾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네이버 지식백과] 월러스 스티븐스(Wallace Stevens, 1879년~1955년)  
7862    미국 시인 - 로버트 프로스트 댓글:  조회:2624  추천:0  2021-01-26
미국의 문학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Frost, 1874년~1963년)     이미지 크게보기 로버트 프로스트 로버트 리 프로스트는 캘리포니아에서 태어났지만 10살 때까지 미국 북동부에 있는 농장에서 성장했다. 엘리엇과 파운드처럼 그도 영국으로 건너갔고 새로운 시운동에 이끌렸다. 카리스마적인 시 낭송가였던 그는 순회공연으로 명성을 날렸고, 1961년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취임식 때는 자작시를 낭송해, 시에 대한 전 국민적 관심을 촉발하기도 했다. 그의 인기는 쉽게 설명되는데, 전통적인 농장 생활에 관한 시를 씀으로써 옛것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프로스트의 소재는 사과 따기, 돌담, 울타리, 시골길 등으로 보편적인 것들이었다. 그는 명쾌하고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시를 창작했다. 그는 인유나 생략법 등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그가 자주 사용하는 각운(脚韻) 또한 일반 독자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프로스트의 작품은 종종 단순해 보이지만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예를 들어 거의 최면적인 각운을 지닌 〈눈 오는 저녁 숲가에 서서(Stopping by Woods on a Snowy Evening)〉(1923)라는 시에서 배경이 되는 조용히 눈 내리는 저녁은 죽음에 대한 차분한 태도를 의미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게 누구의 숲인지 알 듯하다. 그 사람 집은 마을에 있지만 그는 보지 못할 것이다, 내가 여기 멈춰 서서 자신의 숲에 눈 쌓이는 모습을 지켜보는 걸. 내 조랑말은 나를 기이하게 여길 것이다, 근처에 농가라곤 하나 없는데 숲과 얼어붙은 호수 사이에서 연중 가장 캄캄한 이 저녁에 길을 멈추었으니. 말은 방울을 흔들어댄다, 뭐가 잘못됐느냐고 묻기라도 하듯. 그밖의 소리는 오직 가볍게 스쳐가는 바람소리, 부드러운 눈송이뿐. 숲은 아름답고, 어둡고, 깊다, 하지만 난 지켜야 할 약속이 있고, 잠들기 전에 갈 길이 멀다, 잠들기 전에 갈 길이 멀다. 관련이미지 프로스트출처: 세계문학사 작은사전 (촬영: ) [네이버 지식백과]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Frost, 1874년~1963년)  
7861    미국 시인 - 엘리엇 댓글:  조회:2989  추천:0  2021-01-26
미국의 문학 T. S. 엘리엇(Thomas Stearns Eliot,1888년~1965년)     이미지 크게보기 T. S. 엘리엇 토머스 스턴스 엘리엇은 미주리 주 세인트루이스에서 부유한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하버드 대학, 소르본 대학, 옥스퍼드 대학의 머튼 칼리지 등에서 공부한 그는 동시대 주요 미국 작가들 중 가장 훌륭한 교육을 받은 작가였다. 그가 공부했던 산스크리트 어와 동양 철학은 그의 작품에 영향을 미쳤다. 파운드처럼 그도 일찍 영국으로 건너가 문학계에서 거대한 인물이 되었다. 당시 가장 존경받는 시인 중 한 명이었던 엘리엇의 모더니즘적이고 보기에 비논리적이거나 추상적인 새로운 시들은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또한 영향력 있는 수필과 희곡을 집필해 현대 시인들에게 문성을 역설했다. 비평가로서 엘리엇은 '객관적 상관물'을 공식화시킨 것으로 가장 유명하다. 그는 《신성한 숲(The Sacred Wood)》에서 객관적 상관물을 어떤 특별한 정서를 나타낼 '공식'이 되는 "한 무리의 사물, 정황, 일련의 사건"으로 정서를 표현하는 수단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J. 앨프레드 프루프록의 연가(The Love Song of J. Alfred Prufrock)〉(1915)는 이런 접근법을 구체화한 것으로, 이 시에서 나이든 화자 프루프록은 스스로 '커피 스푼으로 내 삶을 쟀다'고 생각하는데, 이 구절에서는 단조로운 존재와 낭비된 인생의 반영으로 커피 스푼이라는 상관물이 사용되었다. 〈프루프록의 연가〉의 유명한 서두는 현대적인 삶처럼, 인생이 던지는 질문에 답변하지 않는 천박한 골목길로 독자를 초대하고 있다. 자 우리 갑시다, 당신과 나 수술대 위에 누운 마취된 환자처럼 저녁이 하늘을 배경으로 사지를 뻗고 있는 지금 우리 갑시다, 반쯤 인적 끊긴 어느 거리를 통해 싸구려 일박 여인숙에서의 불안한 밤이 중얼거리며 숨어드는 곳, 굴 껍질 흩어져 있는 톱밥 깔린 레스토랑을 지나 위압적인 질문으로 당신을 인도할 음흉한 의도의 지루한 논쟁처럼 이어진 거리들을 지나 오, 묻지는 마세요, "무엇이냐?"라고. 일단 가서 방문해봅시다. 제1차 세계대전 즈음 런던의 분주한 거리를 환기시키기 위해 단테의 지옥을 반영하는 《황무지》(1922)에서도 비슷한 이미지가 가득 배어 있다. 현실감 없는 도시, 겨울 새벽의 갈색 안개 밑으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런던 다리 위로 흘러갔다. 그처럼 많은 사람들을 죽음이 망쳤으리라고는 나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I, 60 - 63) 《황무지》의 비전은 궁극적으로 묵시록과 같은 보편성을 지닌 것이다. 보랏빛 허공 속에 있는 깨어짐 재건 그리고 다시 터짐 무너지는 탑들 예루살렘 아테네 알렉산드리아 비엔나 런던 현실감이 없는 (V, 373 - 377) 엘리엇의 다른 주요 작품 중에는 서구 사회의 노쇠함을 상징하기 위해 노인 이미지를 사용하고 있는 〈작은 노인〉(1920), 인간성 상실에 대한 감동적인 만가인 〈텅 빈 사람들(TheHollow Men)〉(1925),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영국 국교회로 마음을 돌리고 있는 《재의 수요일(Ash-Wednesday)》(1930), 시간과 자아의 본질, 영적인 각성 등 초월적인 주제에 대한 복잡하고 실험적인 명상시 《4개의 4중주(Four Quartets)》(1943) 등이 있다. 그의 시, 특히 과감하고 새로운 초기 작품들은 몇 세대에 걸쳐 큰 영향을 미쳤다. 관련이미지 7                           이미지 이전 토머스 스턴스 엘리엇 이미지 갤러리 출처: 서양의 고전을 읽는다   [네이버 지식백과]T. S. 엘리엇(Thomas Stearns Eliot, 1888년~1965년) 
7860    미국 시인 - 에즈라 파운드 댓글:  조회:2861  추천:0  2021-01-26
미국의 문학 에즈라 파운드(Ezra Pound, 1885년~1972년)     에즈라 파운드는 가장 영향력 있는 20세기 미국 시인 중 한 명이다. 파운드는 1908년부터 1920년까지 런던에 거주하면서 많은 작가들과 친분을 쌓았는데, 그중에는 자신이 비서로 일했던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와, 자신이 과감하게 편집하고 수정했던 시 《황무지》의 시인 T. S.엘리엇이 있었다. 파운드는 미국과 영국을 잇는 가교 역할을 했으며 해리엇 먼로의 중요한 시카고 잡지 《포이트리》에서 공헌도 높은 편집자로 일했다. 그는 또한 매우 시각적이고 명료한 표현을 옹호하는 '이미지즘'이라는 새로운 시 운동의 선봉에 섰다. 이미지즘에 따라 다양한 시적 접근을 시도하던 파운드는 이탈리아로 가서 파시즘에 빠지게 되었다. 파운드는 편지, 수필, 시선집 등을 통해 이미지즘을 진전시켰다. 1915년 먼로에게 쓴 편지에서 그는 '상투어나 관용구' 등을 피하며 현대적인 음성을 지닌 시각적 시를 옹호한다고 했다. 그는 〈이미지즘 시인으로서 하지 말아야 할 몇 가지(A Few Don'ts of an Imagiste)〉 (1913)라는 글에서 이미지를 "순간에 지적이고 감성적인 복잡성을 전달하는 무엇"이라고 정의했다. 1914년 파운드가 시인 10인의 시를 모은 선집 《이미지즘 시인들(Des Imagistes)》은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 힐다 두리틀, 에이미 로웰 등을 비롯한 뛰어난 작가들의 이미지즘 실례를 수록하고 있다. 파운드의 관심과 독서는 세계적이었다. 그의 번안물과, 더러 틀린 점도 있지만 대체로 훌륭했던 번역물들은 다양한 문화로부터의 새로운 문학적 가능성을 미국의 현대 작가들에게 소개했다. 그의 역작은 《캔토스(The Cantos)》로, 눈을 감는 날까지 집필하고 출간했던 시들이다. 훌륭한 시구를 담고 있는 《캔토스》는 다양한 시대 및 문화로부터 온 문학과 예술 작품을 인유하고 있어 난해하다. 파운드의 시는 명백한 시각 이미지, 신선한 운율, 남성적이고 지적이며 평범하지 않은 글귀로 유명하다. 이러한 특성은 〈캔토 81〉에 나오는 "용의 세계에서 개미는 켄타우루스다"라는 표현과 다음의 〈지하철역에서(In a Station of the Metro)〉(1916) 같은 일본 하이쿠로부터 영감을 받은 시들에 나타나 있다. 군중 속에서 유령처럼 나타난 얼굴들 ; 축축한 검은 나뭇가지의 꽃잎들. 관련이미지 파운드출처: 세계문학사 작은사전 (촬영: ) [네이버 지식백과] 에즈라 파운드(Ezra Pound, 1885년~197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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