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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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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39    [고향소식] - 화룡에서 대형 가무극 선보인다 댓글:  조회:3541  추천:0  2020-07-18
화룡 대형 원작가무극〈붉은 해 변강 비추네〉펴낸다 편집/기자: [ 김영화 김가혜 ] [ 길림신문 ] [ 2020-07-16 ]  화룡에서 대형 원작가무극 를 펴내게 된다. 그 프로젝트 가동식이 7월 15일, 화룡시진달래국제포럼중심에서 있었다. 는 1966년 화룡에서 생겨난 노래로 40년이 지난 2006년에‘화룡시가'로 지정되였다. 2019년말 중국음악가협회 에 입선된 이 노래는 가장 아름다운 도시음악명함 우수가요로도 선정되였다. 알아본 데 따르면 가무극 의 총 투자가 980만원에 달하고 총길이는 60분, 연변가무단 박광춘선생이 가무극 총감독을 맡았다. 이 가무극은 중국조선족특색이 선명한 무용, 노래, 연극, 곡예 등 다양한 문예종목으로 이루어지게 되는데 서곡 를 시작으로 제1막‘천년일욕(千年一峪), 제2막 , 제3막 , 제4막 , 종성 6개 편막으로 구성되였다. 연변가무단 가수 임향숙이 이날 가무극 가동식에 참가해 축하 노래를 선물하였다. 궁전, 경전, 물동이춤, 지게춤, 모내기춤 이외에도 항일전쟁시기 투쟁정경을 배경으로 다룬 이 가무극은 현대화 무대설비와 멀티미디어 효과를 활용해 화룡의 각 력사시기의 정신면모와 인문풍경을 구현하고 예술적 시각으로 화룡의‘관광도시, 개방도시’건설진척을 보여주게 된다. 소개에 따르면 가무극을 위해 올해 4월부터 화룡시에서는 자원봉사자팀을 무어 100여명의 가무극 출연자들을 모집하였는데 교육, 림업과 소방대 등 부문의 군중출연자들로 구성되였다. 그들은 약 두달간의 련습을 거쳐 지금까지 가무극의 40%를 완수했다. 가무극은 올해 9월에 첫 선을 보이게 된다. /길림신문 김영화 김가혜 기자
7738    토템과 남영전 시인 10 댓글:  조회:2667  추천:0  2020-07-18
        지상토론(10)토템시인 남영전이 보는 문화 편집/기자: [ 리철수 ] [ 길림신문 ] [ 2020-07-16 ] 지상토론(10)토템시인 남영전이 보는 문화 ㅡ대형구술시리즈 (남영전편)을 읽고     (저자 김수영) «길림신문»에서는 지난해부터 중화인민공화국 창건70주년을 기념하여 를 펼치고 우리 조선족 문예계의 저명인사들의 사적을 소개하거나 문화에 대한 그들의 진술을 련속 소개하고 있는바 애독자들의 깊은 관심을 받고 있다. 나는 구술시리즈들을 읽으면서 많은 감동을 받았으며 많은 것을 배웠다. 특히 토템시인 남영전선생의 여섯편의 주옥같은 글들을 반복적으로 읽으면서 많은 지식을 새롭게 배웠으며 많은 일들이 련상되기도 하였다. ㅡ1ㅡ 남영전 시인은 이 글에서 우선 우리가 흔히 쓰고 있는 문화와 민족의 개념에 대하여, 그리고 많은 사람들에게는 아직 그리 익숙하지 않은 토템의 개념에 대하여 아주 명석한 해석을 내렸다. 문화란 무엇인가? 우리가 매일이다싶이 쓰고 있는 말이지만 이 단어의 개념은 똑똑하지 않으며 국내외의 사전들에서의 해석은 대동소이하지만 무슨 뜻인지는 리해하기 쉽지 않다. 한 사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정의를 내렸다. «인류가 사회의 력사발전중에서 창조한 물질재부와 정신재부의 총화, 특히는 문학, 예술, 교육, 과학 등 정신재부를 가리킴.» 물질재부와 정신재부의 총화라, 그렇다면 물질재부는 무엇이고 정신재부는 또 무엇인가? 그리고 그 량자의 총화는 또 무엇인가? 과연 따분하고 아리숭하다. 그런데 남영전 시인은 문화의 정의를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문화란 개인과 군체를 식별하는 의식주행어의 표지이다.» «‘의’는 복식문화를 가리키며 ‘식’ 은 음식문화, ‘주’는 주거문화, ‘행’은 사람들의 사상과 행위도덕과 풍속습관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어’는 언어를 말합니다. 이런 ‘자대’를 가지고 민족과 개인을 ‘감별’할 수 있다고 봅니다. 인간에 관한 모든 문제는 의식주행어가 표준으로 될 수 있고 자대라고 봅니다.» 남영전 시인의 문화에 대한 정의를 다른 말로 바꾸어 말하면 ‘의식주행어’는 문화의 표지이고 문화의 본질이며 문화의 핵심내용이라는 것이다. 아울러 ‘의식주행어’는 인류사회의 모든 문제의 표준으로 될수 있고 모든 개인과 군체를 감별하는 라는 것이다. 그의 정의는 아주 명석하며 아주 리해하기 쉽다. 따라서 민족의 개념을 리해하는데도 큰 도움이 된다. 민족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일상생활에서도 민족문화, 민족단결, 민족의식, 민족정신, 민족정책, 민족주의 등등 민족이란 단어를 많이 듣고 많이 말하고 있지만 도대체 이란 무엇이냐 묻는다면 누구나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며 국내외의 사전들을 들추어봐도 그 개념이 명석하지 못하다. 례를 들면 한국의 한 사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민족의 정의를 내리고있다. «동일한 지역· 언어· 생활양식· 심리적습관· 문화· 력사 등을 갖는 인간집단.» 이러한 해석은 중국의 사전들의 해석과 대동소이하며 민족에 대한 쓰딸린의 명제와도 거의 일치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정의는 명석하지 못할 뿐만아니라 어떤 경우에는 실제 상황과 부합되지 않는다. 그런데 남영전 시인은 문화의 본질적 요소인 ‘의식주행어’가 민족과 민족을 구별하는 주요한 표지이며 민족은 혈통의 개념이 아니라 문화의 개념이라고 명시하였다. 쉽게 말하면 민족이란 ‘의식주행어’로 구별되는 인간집단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아주 간단명료하고 누구나 리해하기 어렵지 않다. 남영전 시인의 글의 주제는 ‘문화를 말하다’인데 첫편을 제외한 다섯편의 소제목을 보면 시종 토템과 토템문화를 떠나지 않았다. , , , , 그리고 진술의 내용을 보더라도 토템과 토템문화에 대한 론술과 재미나는 토템이야기로 관통되여 있다. 그것은 무엇때문일가? 이에 대한 남영전 시인의 답복은 십분 명확하다.«인류의 문화는 토템문화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토템문화는 인류문화의 원천문화라고 볼 수 있습니다. 토템의 출현은 인류문화 발단의 징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토템으로 인해서 우리 인류는 문화가 생겼고 토템으로 인해서 사람들의 성씨가 생겼으며 또 토템씨족으로부터 민족이 형성되였고 토템숭배로부터 민족의 전통문화와 전통풍속이 형성되였습니다.» 그렇다면 토템이란 무엇인가? 우리 말의 토템이란 외래어(totem)를 한어에서도  图腾이란 외래어로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토템이란 원시사회의 사람들이 자기네 씨족과 혈연적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는 어떤 종류의 동식물 또는 자연물이라는 뜻인데 일반적으로 자기네 씨족의 표지로 삼았다. 례를 들면 어떤 씨족은 룡을 자기네 조상이라고 숭배했고 어떤 씨족은 곰을 자기네 조상이라고 숭배했다. 남영전 시인에 따르면 씨족마다 토템이 있기 때문에 우리 나라에는 토템이 있는 성씨가 300개, 씨족토템이 300개 정도 된다고 한다. 남영전 시인은 중국의 전통문화를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중국의 전통문화란 무엇인가? 실상은 토템숭배로 중국의 전통문화가 형성되였다.» «토템이란 무엇인가? 파고 들면 토템은 사람과 자연은 혈연관계라는 것을 말한다.» «사람은 자연에서 왔다. 사람은 자연의 후예다. 이것을 말하는게 토템문화이다.» «전통문화의 핵심은 사람과 자연은 친척관계라는 것이다.» 천인합일은 전통문화의 핵으로서 사람은 자연의 법칙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토템문화라는 것은 결론적으로 얘기하자면 우리는 어디에서 왔고 우리는 누구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를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론술들은 우리가 토템이 무엇이며 토템문화가 무엇인가를 리해하는데 도움을 주는 명언들이다. ㅡ2ㅡ 남영전 시인의 글에는 문화, 민족, 토템과 관계되는 개념들이 명철할 뿐만 아니라 새롭거나 독자적인 견해와 론단들이 많아 지식성이 아주 풍부하고 구술 또한 통속적이고 생동하다. 그 구체적인 실례들을 아래와 같이 제강식으로 렬거할 수 있겠다. 에서: 21세기는 문화의 세기 21세기는 중국의 세기 세계적으로 제일 답복하기 어려운 단어가 두개 있는데 하나는 문화, 다른 하나는 민족. 에서: 왜 토템과 인류의 문화를 련결시켰는가? 인류의 문화는 토템문화로부터 시작. 토템문화는 인류문화의 원천문화. 토템의 출현은 인류문화 발단의 징표. 세상의 모든 물체는 다 생명체. 문화가 산생한 원인 두가지, 하나는 토템제의, 다른 하나는 토템금기. 에서: 성씨는 어디에서 온 것일가? 바로 조상들의 토템숭배에서 온 것. 친족, 친척이란 말이 토템이란 말. 조선민족의 성씨: 왕씨의 조상은 단군 왕검, 왕씨의 토템은 곰. 박씨의 조상은 박혁거세, 토템은 태양. 고씨의 조상은 고주몽, 토템은 태양. 김해 김씨의 조상은 김수로, 경주 김씨의 조상은 김알지, 토템은 역시 태양. 석씨의 조상은 석탈해, 성씨와 이름 모두 토템표지. 최씨의 조상은 최치원, 토템은 금돼지. ※토템과 성씨의 기원을 아주 재미나는 이야기로 구술하고 있는데 조선민족의 시조의 탄생이야기들은 거의 모두 일연의 «삼국유사»에서 온것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신화 또는 전설이라고 규명해온 조상들의 시생설을 토템신화로 명명한것은 남영전 시인이 처음이다. 에서: 토템성씨를 가진 씨족들이 한데 모여서 민족을 형성. 인류는 아프리카에서 탄생. 인류가 중국에 발자욱을 들여놓은것은 5만년 전, 조선민족은 2만년 전. 중화민족의 시조는 염제, 황제, 치우. 중국에 토템이 있는 성씨가 300개, 300개의 성씨가 실상은 300개의 토템. 에서: 하늘의 일곱 신: 해, 달, 별, 바람, 구름, 비, 우뢰. 땅의 일곱 신: 흙, 돌, 산, 불, 물, 식물, 동물. 동성불동혼. 한족토템은 300개 정도, 그 300개중에 우리 민족의 248개 모두 포함. 에서: 중국 전통문화의 핵심은 «천도», «하늘의 뜻을 따른다», «자연의 법칙을 따른다». 고대 4대문명: 애급문명 7500년 전. 토템은 태양, 바빌론문명 7200년 전, 토템은 승냥이, 중국문명 6500년 전, 토템은 룡과 봉황, 인도문명은 중국보다 500년 후, 토템은 코끼리, 사자 등. 토템문화라는 것은 결론적으로 얘기하자면 우리는 어디에서 왔고 우리는 누구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를 말하는 것이다. ㅡ3ㅡ 남영전 시인의 구술시리즈를 읽으면서 나는 남영전 시인이 무엇때문에 토템시인이라 자칭했는가를 한층 더 깊이 생각하게 되였다. 남영전 시인이 처음 위챗에 토템시인이라 자칭한 것을 보았을 때 나는 한편으로는 시인되기도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잘 리해되지 않는 점도 있었다. 왜 토템시인이라 보는가? 우선 남영전 시인은 토템시를 창작하고 탐색하는 시인이니까 토템시인인건 분명하다. 남영전 시인이 출판한 시집으로는 «상사집», «신혼», «백의녃», «신단수», «원융», «꽃이 없는 이 봄날에», «남영전토템시집» 등 많이 있지만 대표작을 꼽으라면 토템시가 첫번째로 꼽힌다. 남영전 시인이 중국조선족문단뿐만 아니라 우리 나라의 주류문단, 더 나아가서는 세계시인대회에까지 명성을 떨치고 또 중국문단에 «남영전의 문화현상»까지 불러일으킬 수 있었던 것도 국내외를 막론하고 그가 처음으로 토템시를 창작하고 탐색한 시인이기 때문이다. 그러길래 «토템시의 창작자이며 명명자»라는 호칭이 아주 지당한한 것 같다. 다음으로, 남영전 시인은 또한 토템과 토템문화를 탐구하는 학자이자 시인인건 틀림없다. 그는 30여년 동안 줄곧 토템문화를 연구해왔다. 우리 민족의 토템문화와 중국의 토템문화뿐만아니라 모든 인류의 토템문화에 이르기까지 그의 연구는 범위가 아주 넓고 심도가 아주 깊다. 때문에 나는 남영전 시인이야말로 명실공히 토템시인이라고 처음부터 시인했다. 하지만 근 30년간 «장백산»잡지사에서 그와 함께 일하면서 그의 고상한 인품을 잘 알고있는 나는 그처럼 겸손하고 도량이 넓으신 분이 왜 «토템시인»이라 자칭하는지 미처 리해하지 못했다. 남들이 자기가 토템시인이라는걸 모를가봐, 인정해주지 않을가봐 념려한 때문은 결코 아닐텐데 말이다. 나는 의 그의 여섯편의 글을 읽고나서야 비로소 남영전 시인이 토템시인이라 자칭한 두가지 리유를 알 것 같다. 첫째, 토템시의 창작과 탐색을 통해 우리 민족의 백의혼을 구가할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는 토템의 영원한 가치, 천지인의 조화, 세계의 평화와 원융을 호소하는 시인으로서의 책임감과 사명감의 선언서, 토템문화에 대한 자기의 인식과 주장을 확신하는 시인으로서의 책임감과 사명감의 선언서가 아닐가. 우리 민족 력사의 많지 않은 보귀한 문헌의 하나인 «삼국유사»의 건국신화들을 토템이라 명명하고 «우리 조상들의 토템이야기»를 시화한 것 또한 그의 또 하나의 창거이다. 둘째, 남영전 시인이 언제나 안타까와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 특히는 우리의 지식인들이 토템문화에 대해 너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 함께 토템문화를 관심하고 리해하며 공동히 탐구하자는 절절한 기대와 강력한 호소가 아닐가. ㅡ4ㅡ 남영전 시인은 에서 토템이 나타나면서 인류는 성씨를 가지게 되였다면서 우리 조선민족의 성씨가운데서 왕씨의 토템은 곰, 고씨와 박씨, 김씨와 석씨의 토템은 태양, 최씨의 토템은 금돼지라고 례를 들어 성씨의 유래를 밝혔다. 그리고 진술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자기의 성씨도 어디에서 왔는지 모르고 산다면 그 것은 좀 문제가 된다고 봅니다.» 나는 이 말을 읽을 때마다 자기를 반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우리 김씨의 본이 연안이라는 것만은 어릴 때부터 알고 있었지만 연안 김씨의 조상은 누구이며 이 성씨가 어디에서 왔는지는 1989년 한국에 친척방문을 갔을 때 김건영이라는 사촌형님한테서 받은 족보를 보고서야 비로소 퍽 늦게 알게 되였다. 그때 내 나이 이미 53세였으니 나는 반평생을 조상도 모르고 헛살아온 셈이다. «연안김씨 대동계보»라는 족보에는 김씨의 유래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되여 있다. «우리 나라의 김씨는 가락국 수로왕계와 신라의 대보공 알지계로 대별된다. 신화문헌에는 신라의 왕계, 박, 석, 김 3성에 대한 이야기가 있는데 그중 김씨의 원조 알지의 시생설은 다음과 같다. 신라 4대 탈해왕 9년(65) 봄 어느날 서라벌(현재 경주) 서쪽 시림 숲 속에 서기가 있음을 그 마을 촌장 포공이 발견하고 이상히 여겨 가보니 금빛 찬란한 궤가 나무에 걸려있고 그 아래에 흰 수탉이 있으므로 이를 왕에게 보고한즉 왕이 나아가 그 궤를 열어보니 그 속에 용모가 비범한 사내아이가 있는지라 왕은 하늘이 주신 사람이라 하여 키우고 이름을 알지(아기라는 뜻)라 하고 금궤 속에서 나왔다 하여 성을 이라고 태자를 삼았으나 왕위는 받지 아니하고 파사에게 양보하였다. 閼智는 热汉을, 热汉은 阿道를, 阿道는 首留를, 首留는 郁部를, 郁部는 味邹를 낳았으니 이 분이 신라 13대 미추왕으로 김씨로는 최초의 임금이다. 그후 알지를 대보공으로 추존하고 발상지 시림을 닭이 나왔다 하여 계림으로 고쳤다. » 김씨는 조선민족의 성씨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성씨이다. 김씨는 시조가 뚜렷이 밝혀진 본만 해도 100여 본이라고 하지만 족보에서 말한 것처럼 원 시조는 김해 김씨와 경주 김씨 두 갈래이다. 김해 김씨계의 시조는 옛날 가락국의 수로왕이고 경주 김씨계의 시조는 신라의 김알지이다. 족보에서 말하는 경주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의 시생설은 신화문헌에 나오는 건국신화와 대동소이하다. 경주 김씨는 김알지계에서도 대종이다. 연안 김씨처럼 많은 본들이 경주 김씨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니 원조는 모두 김알지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많은 학자들은 우리 조상들의 이야기를 신화 또는 전설이라고 인정해왔지만 남영전 시인은 다년간 토템문화를 탐구한 결과 신화문헌의 이야기들은 분명 우리 조상들의 토템이야기이며 우리의 성씨는 바로 조상들의 토템숭배에서 왔다고 단언하였다. «김수로의 토템탄생은 하늘이 내린 알에서 나왔으니 그는 태양토템이고 그의 탄생에 사자역할을 한 수호신, 하늘이 내린 자주색 줄은 무지개(토템)로 보여진다.» «김알지는 하늘에서 내린 금궤에서 나왔으니 그도 태양토템이고 그의 탄생에 사자역할을 한 자주및 기운, 흰 수탉, 즐겁게 춤을 추는 새와 짐승들 모두 그의 친척(토템)이다.» 족보에서는 연안 김씨의 유래를 다음과 같이 명백히 밝혔다. «우리 연안 김씨는 고려 명종조(1171--1198)의 사문박사공을 시조로 모시고 있다. 신라 천년의 력사상 56왕중 대보공의 후손인 김씨가 38왕(박씨 10왕, 석씨 8왕)인데 우리 선조는 왕가의 후손으로 처음에 형제 2인이 당시의 왕에게 직간하다가 미움을 받아 먼곳으로 류배되여 형은 북빈경(현재 강원도 강릉)에 살았고 제는 고염성(현재 황해도 연안)에서 각각 일가를 이루고 살았는데 고염성이 연안으로 고쳐짐에 따라 연안을 본관으로 정한 것이다.» «길림신문»에 실린 을 읽고나서 장춘애청자애독자클럽에서는 심득교류회를 조직할 타산으로 지금 준비중이다. 이번 심득교류회를 계획한 주요한 취지는 아래와 같이 세가지이다. 첫째, «길림신문»에서 펼치고 있는 대형구술시리즈 는 독자들에게 민족문화의 전통을 알리는 면에서 교육교양적 의의가 깊다. 우리 회원들은 우리의 신문을 사랑하는 애독자들인만큼 응당 앞장서서 열심히 읽고 참답게 배우며 널리 선전해야 한다. 둘째, 문화, 민족, 토템의 개념을 투철히 리해하고 우리 민족이 어디에서 왔고 우리는 누구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를 똑똑히 알아야 할 것이다. 셋째, 장춘애청자애독자클럽의 종지를 진일보 명확히 인식하고 특히는 민족문화와 중화문화의 관계를 정확히 리해함으로써 민족문화의 번영과 중화문화의 번영을 위해 다소나마 기여하자는 클럽의 구호를 실천에 옮겨야 한다. 습근평 총서기는 소수민족문화와 중화문화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중화문화는 여러 민족 문화의 집대성이다. 한족문화를 중화문화와 동등시하면서 소수민족문화를 홀시하거나 본 민족의 문화를 중화문화와 구별시하면서 중화문화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모두 그릇된 것이니 견결히 극복하여야 한다.» 저자 김수영 프로필: 1937년 서울에서 출생 1960년 연변대학 조문학부 졸업 1960~1983년 통화시조선족중학교 고중부 어문교원, 교원실주임 1984~2006년 «장백산»잡지사 편집, 부편심, 편심 중편소설 «무쇠바우»(1977), 장편인물실화 «중한우호의 전기인물 한성호»(2007) 외 장편소설 등 번역작품 6권 출판. 길림성우수편집1등상, 전국소수민족문학 , 중국번역협회 등 수상.
7737    토템과 남영전 시인 9 댓글:  조회:2882  추천:0  2020-07-18
지상토론(9)문화 그리고 남영전 토템시가 민족문화산업발전에 주는 계시 편집/기자: [ 리철수 ]  [ 길림신문 ]  [ 2020-07-13 ]  김성우 우선 《길림신문》에서‘문화를 말하다’ 지상토론을 전개한데 대하여 참으로 의의있는 일을 하고 있다고 중국조선족 독자의 일원으로서 말하고 싶고 또 남영전 시인의 ‘문화를 말하다’에 현춘산, 김동훈,박일 등 작가와 교수들을 망라한 많은 지성인들이 문화에 대하여 여러 측면에서 좋은 글을 발표해서 많은 것을 배우게 되였다. 모두들 21세기는 문화의 세기라고 입을 모으지만 사실 문화라는 개념자체가 범위가 넓어 광의적인 뜻에서나 또는 협의적인 뜻에서나를 막론하고 토론의 장으로 펼치기에는 너무 벅차고 크다는 감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길림신문》에서 이 토론을 조직하고 집중적으로 문화의 개념부터 시작하여 인류 원시문화인 토템에 이르기까지 특히 남영전 시인의 토템시에 이르기까지 비교적 자세하게 지론을 펼치고 각자 나름대로 ‘문화’를 토론하게 한 것은 《길림신문》이 민족문화의 진흥을 위해 고심하고 있는 것으로 느껴진다. 문화에 대해 말한다면《조선말사전》을 보면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 ① 력사발전의 행정에서 인류가 창조한 물질적 및 정신적 부의 총체. ② ‘일반지식과 기술지식’을 통털어 이르는 말. ③ 현대적 요구에 맞는 문명한 생활양식.” 《현대한어사전》(제7판)에서는 문화를 “ ① 인류가 사회력사발전과정 중에서 창조한 물질재부와 정신재부의 총체. 특히는 문학, 예술, 교육, 과학 등과 같은 정신재부를 가리킴. ② 문자를 운용하는 능력 및 일반적인 지식을 가리킴. ③ 고고학 용어. 같은 력사시기에 있어서 분포지점에 따라 전이하지 않은 유적, 유물의 종합체를 가리킴.”이라고 하였다. 상기 두 사전의 풀이에서 보다싶이 의미항이 약간 다르지만 내용으로 봐서는 앞서 김동훈교수가 말한 광의적인 해석과 협의적인 해석이 다 들어있다고 볼 수 있겠다. 중국의 문화명인 여추우(余秋雨)는 문화에 대한 긴 정의가 아마도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나름대로 자기가 내린 정의가 전세계에서 가장 간단한 정의일 것이라면서 이렇게 문화를 말하였다. “문화란, 정신가치와 생활방식을 포함한 일종 생태공동체이다. 그것은 축적과 인도를 통하여 집단인격을 창건한다.”(余秋雨 《何为文化》)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생태공동체’와 ‘집단인격’이라는 키포인트다. 사실 이보다 더 간단한 정의는 문화인류학에서 일찍 이렇게 정의한 것이 있다. 한상복 등이 쓴 《문화인류학개론》에서는 “‘문화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 우리가 가장 간단히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마도 ‘문화는 한 인간집단의 생활양식이다.’라는 대답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해석은 ‘총체론적인 전망(관념론적인 전망이 아닌) ’으로 문화를 해석한 것인데 이 정의는 아마도 영국의 인류학자 타일러(Tylor)가 1871년에 저서《원시문화》에서 말한 문화란 “지식, 신앙, 예술, 도덕, 관습, 그리고 사회의 각 구성원으로서의 인간에 의해 얻어진 다른 모든 능력이나 관습들을 포함하는 복합적 총체”라고 한 것이 원조일 것이다. 후에 미국 인류학자 위슬러(Wissler)가 보다 간단하게 정의하였는데 그는 문화란 “인류의 습관과 사상의 전부의 복합물(total complex)이며 그런 습관과 사상은 그가 출생한 그 군체에서 얻어진다.”라고 하면서 더 간단하게 말하면 “생활형식(mode of life)”라고 하였다. “생활양식”과 같은 뜻이라고 볼 수 있겠다. 중국의 문화인류학의 정초자인 림혜상(林慧祥)도 타일러와 위슬러의 상기관점을 소개하면서 “문화란 인류행위의 총화”라고 정의하고 인간 본체와 문화의 밀접한 관계를 천명하였다. 내가 이처럼 장황하게 ‘문화’에 대한 대표적인 선철들의 정의와 사전의 해석을 소개하는 것은 다름아니라 이번 토론에서의 ‘주역’역할을 한 남영전 시인의 ‘문화’에 대한 정의에 좀 더 학술적으로 쉽게 접근하는데 도움이 되였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시인 남영전은 문화의 개념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문화란 개인이나 군체를 감별하는 의식주행어 표지이다.” 여기서 말하는 ‘표지’에 대하여 시인 남영전은 그것을 ‘공동부호’로 대체할 수도 있다고 하였다. 여기서 키워드는 ‘의식주행어’와 ‘표지’가 되겠다. 이 정의를 우에서 렬거한 정의들과 비교해보면 이것이 정의가 좀 더 직설적이고 간추려졌다고 생각된다. 물론 사전 해석에서 몇가지 의미항을 갈라놓은 것은 사전의 리해에서의 평이성과 지도성도 고려하였을 것이다. 이를테면 ‘저 사람은 문화수준이 높다’, ‘문화가 없다’. ‘문화교원’, ‘문화주택’ , ‘문화생활’, ‘홍산문화’ … 등등의 ‘문화’는 앞에 든 례의 사전에서의 ②나 ③에 해당된다고 하겠다. 이로보아 문화인류학 각도에서 ①, ②, ③을 아우르는 개괄적인 정의로 “개인이나 군체의 의식주행어를 감별하는 표지(또는 공동부호)”라고 정의하는 것은 대단히 함축적이고 개괄적이라고 할 수 있다. 시인 남영전은 문화를 이렇게 정의하였고 그것을 전개하여 그 연장선에서 바로 민족을 특징짓는 첫째가는 것이 문화라는 것을 설명하였으며 또 이런 견지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민족이란 부동한 토템 성씨들이 장기간 한지역에서 공동생활을 하면서 점차 형성된 의식주행어의 문화공동체”라고 정의하면서 그 문화의 뿌리가 바로 원시문화인 토템원형에 있다는 것을 밝히였다. 시인 남영전은 토템원형은 애니미즘으로부터 원초의 숭배대상에서 생겨났고 이것이 조상숭배, 자연숭배, 제신숭배 등으로 발전하여 원시예술로 신화, 전설, 토템시 등을 낳았다고 하였다. 이러한 것들은 한 민족의 민족정신에 ‘집단잠재의식’으로 깊이 뿌리내려 후날의 ‘의식주행어’에 잔재로 퇴화되였거나 또는 발전된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는 어느 민족이나 례외가 아니다. 독일 예술학자 그로세(Ernst Grosse)는 저서 《예술의 기원》에서 “예술이 없는 민족은 없다. 우리가 알건대 가장 거칠고 곤궁한 부락 사람들도 그들의 많은 시간과 정력을 예술에 쓰고 있었다.”라고 말하였다. 사실 인류의 기원이나 인종학적으로 보는 민족의 기원이나 딱히 이렇다 증명하기가 쉽지 않다. 하나의 가설이 제기되였다가는 새로운 발견에 의해 무너지고 또 다른 가설이 제기되였다가는 무너지고 그치지 않고 계속되고 있는 현재진행형이다. 그럼에도 지금은 과학적인 유전자분석이 도입되여 고고학적 발견, 문헌학적 고증과 결합되여 이 방면의 연구가 상당히 진척되였고 새로운 성과들이 륙속 나타나 세인을 놀래우고 있다. 이를테면 우리 민족의 인종학적인 유래도 원래는 그 제기설이 대체로 북방기원설, 북방과 남방 혼합설, 본토기원설 등 세가지 학설이 있었는데 유전자과학의 도입과 고고학 분석, 문헌학 고증으로 새로운 발견들을 과학적으로 분석, 연구한 결과 점점 그 차이가 좁혀지고 있다. 여기서 유전자분석은 인체 자체에 대한 직접조사를 내놓고 고고학 발굴에 나오는 문물과 고대문헌 연구는 다가 문화를 상대로 하는 조사연구다. 그런데 고고학문물은 직관적인데 반해 문헌에 나오는 신화, 전설 따위들은 모두 인간의 정신적인, 관념적인 것들이며 그나마도 희소하고 산재적이며 파편적이여서 리해하는데 견강부회하는 무리가 따를 수도 있으나 토템 원형들을 찾아내고 그것으로 다시 합리적으로 리해하고 재구한다면 연구결론을 내리는데 크게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유전자분석으로 인종적 차원에서 군체를 분류할 수 있었고 민족은 인종적인 것보다 사회적인 개념이 우선 순위이기 바로 문화에 의해 식별할 수 있었다. 이러한 ‘문화’ 개념이기에 나는 민족문화자체가 바로 민족이라고도 말하고 싶다. 바로 시인 남영전이 내놓은 ‘민족이란 부동한 토템 성씨들이 장기간 한지역에서 공동생활을 하면서 점차 형성된 의식주행어의 문화공동체’이기 때문이다. 민족문화를 떠나서 그 민족은 그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지난날 일본제국주의자들은 파쑈적인 “조선민족말살정책’을 내놓고 조선민족에 대한 야수적인 탄압과 더불어 민족언어를 없애려했고 지어는 성씨마저 갈아치우려고 발광하였다. 바로 민족의 가장 중요한 특징인 문화를 없애여 조선민족이란 고유명사가 지구에서 사라지게 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간교하고 흉악하기 이를데 없는 일제 만행이였다. 습근평 주석은“문화는 한 나라와 한 민족의 령혼이다. 력사와 현실이 말해주다싶이 자신의 력사와 문화를 포기하거나 배신하는 민족은 발전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력사적 비극을 초래할 수 있다. 문화에 대한 자신감은 보다 기초적이고 보다 광범위하고 보다 심도있는 자신감이며 보다 기본적이고 보다 무게있고 지구적인 힘이다.”( 습근평 《높은 문화적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라고 문화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해서 지적했다. 중화민족의 한 성원인 우리는 자기 민족의 문화에 대해 높은 문화적 자신감을 가지고 민족문화를 구축하고 발전시키며 꽃 피워나가야 한다. 문화에 대한 자신감을 가지고 전통문화를 다루며 정수를 발휘, 발전시켜 새로운 력사시기에 맞는 문화자원으로 승화시키는데서 남영전 토템시가 우리 민족문화산업발전에 주는 계시도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방면이다. 여지껏 남영전 토템시에 대한 연구나 토론에서 이를 현실에 맞게 우리민족 현 상황에 맞게 리론적으로 제시한 문장은 없었다. 오늘날 문화경쟁은 세계적으로도 새로운 양상을 보이고 있다. 그중 중점이 바로 지식경쟁이고 문화산업경쟁이 그 초점이고 그중에 문화가치경쟁이 기저에 깔려있는 동력원인이 되고 있다. 이를 둘러싸고 중심문화와 변연문화, 현대문화와 전통문화, 동방문화와 서방문화 등의 서로간 문화경쟁이 날로 우심해지고 있다. 문화의 침투와 흡수, 견지와 배제 이를 두고 영국의 저명한 력사학자 피터 버크(Burke, P)는 《문화 혼종성(文化杂交)》란 저서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갈수록 더 잦아지고 거세지는 다양한 문화의 만남으로 특징지을 수 있는 우리 시대에 문화의 혼종성이란 주제에 대한 몰두는 자연스럽다. 문화적 전지구화의 결과는 론란의 여지가 있으며 여전히 론쟁 중이다. 뒤에서 론의할 가능한 한가지 방안은 문화 동질화이지만 또 어떤 학자들은 이와 반대로 문화 이질화를 제안하기도 한다. 이러한 주장이 (특히 장기적인 결과를 분석할 경우에) 갖는 장점이 무엇이든지간에 단기적으로 보았을 때는 우리가 보고 듣고 경험하는 것들이 어떤 종류의 혼합체 즉 경제적 전지구화에 의해 촉진되는 동시에 그 전지구화를 촉진하는 혼종화의 과정이라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는 문화의 발전을 이렇게 내다 보았다.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의 문화들에 대한 분석은 새로운 질서의 탄생과 새로운 지역류형의 형성, 새로운 형태의 결정화, 문화의 재배치, ‘세계의 크레올화(creol)’를 예견하고 있다. ” 여기서 말하는 크레올화는 각이한 문화가 오랜 시간을 경과하면서 다양한 모습으로 변하거나 또 다른 문화가 생기는 현상이다. 시인 남영전의 토템시와 토템시에 대한 평론들을 읽고 나서 이런 크레올화가 되는 기저에는 가장 강력한 불멸의 문화요소인 원시 토템관념이 작용한다고 생각한다. 중화민족은 56개 민족으로 이루어진 사회주의 민족대가정이다. 현대에 우리가 말하는 ‘중화민족’은 우선 사회ㅡ정치적 개념이고 중국특색의 사회주의 민족문화를 꽃피워가는 문화적 개념이다. 여기서 키포인트는 중국특색사회주의 민족문화다. 남영전 시인의 토템시는 원시문화 ‘집단잠재의식’이 민족문화심리의 기저에 잔여로 즉 문화요소로 자리잡고 있는 것을 발굴해내여 시화한 것이다. 이런 시들은 민족적인 동시에 전 인류적인 것으로서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 관계가 날로 악화되여 가는 현시대에 토템물의 형상과 정신경지의 미적표현’으로 인류의 원시 “집단잠재의식”을 환기시켜 ‘인간과 자연의 불가분리의 혈연관계를 다시금 확인하고 인간 대 자연, 인간 대 인간의 대등하고 조화로운 구도’를 만들어가려는 평화의 호소문인 것이다. 이러한 남영전 토템시의 성공적으로 부각된 시적 형상들은 민족문화의 소중한 씨앗이며 풍요한 문화자원으로서 이를 시초로 다종다양한 문화재부를 창조해낼 수 있는바 문화경쟁력을 갖추고 우리 민족문화산업을 발전시키는데 있어서도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비근한 실례로 영국 영화 《반지의 녀왕》은 판타지소설을 영화화한 것으로 세계적인 인기를 모았으며 먼 실례로는 중외의 수많은 명작들이 신화의 원형들을 발굴하여 활용한 것들이 많다.《봉신연의》, 《서유기》, 《고독의 백년》...등등. 얼마전 우리나라에서 창작된 애니메이션 《대어해당(大鱼海棠)》도 세계적인 인기를 누렸다. 바로 신화와 토템 형상들이 대거 등장한 그야말로 신들의 대출동이다. 《대어해당》은 영어권은 물론 우리 말로도 번역되여 표제를 《나의 붉은 고래》라고 달고서 한국에 소개되였다. 《장자(庄子)》에 나오는 곤붕(鯤鵬)신화에다 여러 신화이야기를 전개시키면서 창작된 이 작품은 중국신화에 나오는 별의별 신적, 령적 인물들이 종횡무진으로 거의 다 나오며 마감에 가서는 이 세상에 한쌍의 남녀가 새롭게 등장하는 걸로 끝난다. 대일통으로도 분석되는 의미심장한 결말이다. 이 영화는 2017년에 제15차 부다페스트 국제 애니메이션 영화제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일본 애니메이션을 누르고 직접 신화를 소재로 문화경쟁에서 성공한 실례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21세기 문화시대로 접어들면서 《문화경쟁력연구》라는 책이 나왔는데 거기에 따르면 ‘문화경쟁력’을 이루는 요소로 문화생산력, 문화소비력, 문화전파력, 문화창조력, 문화지속력 이 다섯가지를 들고 있다. 이것이 구전하고 강력할수록 경쟁력이 강해진다. 반대로 이것 중에 어느 하나라도 흠결이 가면 경쟁력을 잃게 된다. 그런데 바로 남영전 토템시의 문화콘텐츠가 이 점에서 경쟁력을 갖출 수 있게끔 해주는 민족문화의 저력을 우리에게 시사해주고 있는 것이다. 토템과 그 잔재로 된 문화요소는 아무리 가져다 써도 다 쓸 수 없는 무진장한 문화보물고다. 우리도 문화의 각 분야에서 개별적으로 또는 종합적으로 이러한 자원을 잘 개발한다면 우리민족 경제문화진흥에 크게 이바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문화의 시대, 문화 경쟁의 시대에 시인 남영전의 토템시들과 그의 토템시학은 우리에게 실로 다방면적인 계시를 주는바 그중에 홀시 할수 없는 것이 바로 민족문화산업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다는 점이다. ‘집단인격’ 또는 ‘부호’로 ‘조선족’하면 떠오르는 것이 ‘아리랑’, ‘진달래, 등 근대에 굳어진 개념들이다. 우리가 문화자신감을 가지고 남영전 시인의 토템시들 및 그 연구성과에 기초하여 민족문화산업에서 어떤 중대한 돌파를 시도해보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을가 생각해본다. 남영전 시인의 토템시가 주는 이러한 계시는 우리 민족이 자신의 문화경쟁력을 높이고 나아가서는 전반 중화민족이 위대한 부흥을 이루며 세계의 평화와 대동을 이루는데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2020년 여름 진황도에서) 김성우(金声宇) 프로필: 흑룡강성 목단강 출생. 연변대학 조선언어문학학부 77학급 졸업. 원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은하수》잡지 주필 력임. 원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편심. 조선족민속학회 명예회장. 도서《남영전토템시감상》,《남영전토템시학》 책임편집. 시집: 《지평선 사나이》, 《계절의 소리를 새기며》 등. 편저:《조선민족성씨와 본》, 《조선족거주문화》, 《조선족명절문화》(공저) 등 고전문학번역:《초사》,《주역》,《시경》,《산해경》,《중국신화》, 《론어》,《맹자》,《한비자》,《선진산문선》, 《사기선》,《모란정》,《료재지이선》 등 다수. 당대문학번역: 장편소설《검은 십자가》,《로마의 밤》 등 다수. 시 작품 번역: 중국당대문학 시작품 다수. 《중한대사전》, 《조선말소사전》,《조선말대사전》등 사전편찬의 주요 성원.   
7736    토템과 남영전 시인 8 댓글:  조회:2701  추천:0  2020-07-18
  지상토론(8)자연과 인류의 화합을 이루기 위해 편집/기자: [ 리철수 ] [ 길림신문 ] [ 2020-07-07 ]  -- 《토템과 문화의 기원》을 읽고서 8년전 남영전 시인의 시집 《백의 넋》을 읽어본 적이 있다. 그땐 토템에 관한 시인 줄을 모르고 그냥 재미로 읽었었다. 솔직히 토템에 대해 잘 모르고 있을 때였다. 그러던 얼마전 《길림신문》을 통해 남영전의 구술문화 《토템과 문화의 기원》을 읽게 되면서 토템에 대해 알아가는 시간을 가져보게 되였다. 글줄마다에서 남영전 시인의 민족에 대한 사명감과 애착심을 엿볼 수 있었고 더 나아가 인류와 자연의 관계에 대한 깊은 사고로부터 인류문명에 대한 추구와 인류의 운명에 대한 애달픈 마음을 절실히 보여주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토템은 사람과 자연은 ‘혈연관계’라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은 자연에서 왔다. 사람은 자연의 후예다.’ 이런 것이 토템문화입니다.”라고 해설한 구절구절마다 나의 마음 속에 와닿았다. 사회가 비약적인 변화를 가져오면서 무리한 자연개발, 인간의 편리와 리익의 추구로 우리의 자연은 막대한 재난을 겪고 있다. 인류가 자연을 마구 파괴하면서 ‘자연을 보호하자’는 말이 한낱 선전구호로 그치고 실제 행동으로 별로 옮기지 못하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번 코로나사태를 놓고 보더라도 우리에게 큰 경종을 울려주고 있다. 세계보건기구(WHO)에서는 이번 사태는 자연계에서 온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어떠한 사물의 발생이든지 모두 그 규칙을 따르는 법이다. 우리는 대자연을 개발하기에 앞서 반드시 대자연을 존중하고 보호해야 한다. 우리를 낳아주고 길러준 토지와 물과 산에 감사함을 알아야 하고 곰, 백학, 사슴 등 동물을 사랑해야 하며 우리가 늘 소유하고 있는 달, 바람, 비와 같은 자연의 모든 것을 소중히 여길 줄 알아야 한다. 이런 것을 남영전 시인은 토템시로 표현하였다. 20년 넘게 피타는 노력으로 공을 쌓은 거창한 작업이 개가를 올리여 후세대들에게 어제와 오늘, 래일을 이어주고 있다. 좋은 글을 읽게 되여 깊이 감사를 드리고 초학자로서 미흡한 소감을 털어놓을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여 더없는 영광을 느낀다.  /김봉금 (1979년8월, 흑룡강성 림구현 출생. 흑룡강성 할빈조선족사범학교졸업. 중앙방송통신대학 본과 연수 수료. 현재 해림시조선족실험소학교 교원. 수필, 서평, 평론 등을 《연변문학》, 《중국민족》, 《흑룡강신문》 등 잡지, 신문에 발표.)
7735    토템과 남영전 시인 7 댓글:  조회:3225  추천:0  2020-07-18
지상토론(7)작가들의 큰 박수를 받은 민족개념 편집/기자: [ 리철수 ] [ 길림신문 ]  [ 2020-07-02 ]  《길림신문》이 펼친 구술시리즈 남영전편의 토템이야기를 들으면서 15년전 내몽고사범대학에서 그의 연설을 듣던 장면이 생생하게 살아나 감회가 깊었다. 2005년 9월15일, 내몽고사범대학에서 중국소수민족작가연구중심 개원식 및 문학세미나가 있었다. 필자가 이 큰 행사에 참석하는 행운을 가졌다.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그날, 전국에서 100여명의 소수민족작가들이 모였었다. 내가 책 속에서 보아오던, 꿈에도 흠모했던 유명한 작가들이 대거 참석하여 나를 흥분하게 하였다. 이번 세미나에서의 중점 발언은 중국소수민족작가연구중심 주임, 몽고족작가 터싸인 바야얼 (特•赛音巴雅尔), 현대문학관 관장, 만족작가 서을(舒乙), 길림신문사와 장백산잡지사 사장이며 조선족시인인 남영전 등 5명의 작가들이였다. 남시인의 발언고는 였다. 남시인의 발언 서두는 특이하였다. “여러분, 오늘 이자리에 모인 분들은 자기 민족의 문화를 다 잘 알고 있는 작가들입니다. 고정관념은 민족을 왕왕 혈통으로 보는데 오늘 나는 이자리에서 반기를 들겠습니다. 저의 견해를 점검해 주시고 틀리면 비판하십시오.” 참석자들은 다들 긴장해서 남시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남시인은 자신이 토템문화를 관심하게 된 경우와 토템문화가 현대생활에서의 표현 등을 이야기 하고 나서 민족개념에 대한 결론을 내렸다. “인류의 발전사, 민족의 형성사를 보면 민족은 여러 부동한 토템성씨들이 장기간 한 지역에서 공동생활을 하면서 점차 형성된 의식주행어(衣食住行语)의 문화공동체입니다. 이 문화공동체가 곧 민족의 탄생이고 민족의 표지입니다. 때문에 민족은 문화의 개념이지 혈통의 개념이 아닙니다. 혈통으로 말하면 각 민족은 모두 형제관계입니다. 저의 결론이 틀리면 여러분들이 비평하십시오.” 장내는 삽시에 열렬한 박수가 지속되였다. 그날 오찬 때 중국소수민족작가 대표인물인 몽고족 로작가 마라친부(원 중국작가협회 서기처 서기, 《민족문학》 주필)는 특이한 제의를 하였다. “오늘 오찬은 남영전 시인의 발언을 축하하는 토템연회입니다. 모두들 토템술을 기쁘게 듭시다.” 옆에 앉은 현대문학관 서을 관장도 술잔을 들고 “남영전 시인이 말하는 민족개념은 확실히 도리가 있습니다. 저도 대찬성입니다.”라고 하면서 건배를 제의하였다. 그때 행사에 참석한 조선족은 남시인 외 심양의 소설가 박성군, 그리고 연변의 김승종 시인 세명이였다. 8년 후인 2013년 6월, 전국작가 내몽고견학방문단 일원으로 나는 새롭게 건립된 중국소수민족문학관을 참관하는 기회를 가졌다. 그때 아래의 사연을 알게 되였다. 중국소수민족문학관을 건립하는 데는 남영전시인의 공로도 한몫 있었다. 2005년, 그번 행사가 있은 다음 몽고족작가 터싸인바야얼, 조선족시인 남영전 등 소수민족작가 10명이 련명으로 온가보 총리에게 청원서를 올렸다. 온가보 총리는 이에 중시를 돌려 일주일안에 2,500만원의 경비를 비준하였다. 이리하여 4년 후인 2009년 9월, 내몽고사범대학 교정내의 100무의 부지에 5,500평방메터 되는 현대화한 중국소수민족문학관이 건립되였다. 문학관 공원에는 다섯개 정자, 다섯개 대리석다리가 있는데 련명으로 청원서를 써올렸던 소수민족작가들이 정자와 다리에 한개씩 이름을 짓도록 했었다. 남영전 시인은 그중 한개 다리의 이름을 원융교(圆融桥)라고 지어 그가 쓴 세글자가 다리기둥에 음각되여 있었다. 그리고 문학관 공원에는 만족작가 조설금(《홍루몽》저자), 로사(老舍)를 비롯한 10명의 소수민족 유명한 작가들의 동상이 새겨져 있었는데 남영전 시인의 제의로 조선족의 대표작가 김학철선생의 동상도 이 10명의 유명한 작가들 속에 의젓이 세워져 있었다. 남영전 시인은 토템원융의 기치를 든 시인이다. 그는 토템원융사회를 위해 어제도, 오늘도 한 시인의 책임과 사명을 다하고 있다. /김승종(1963년 출생, 화룡시작가협회 전임주석, 연변작가협회 리사. 《천하루밤과 시작노트와 시지기 삶》, 《우물 일곱개였던 마을》 등 시집 3부 출판. 두만강여울소리, 연변작가협회 인터넷 문학상, 《연변일보》 해란강 문학상, 제20회 연변정지용문학상 등 다수 수상)
7734    토템과 남영전 시인 6 댓글:  조회:3044  추천:0  2020-07-18
지상토론(6)인간 존재의 근원 의식의 뿌리를 더듬어 편집/기자: [ 리철수 ]  [ 길림신문 ] [ 2020-07-02 ]  맑게 개인 밤하늘에서는 수많은 별들이 각자 자기 길을 가면서 서로 인사를 나누며 밤새 이야기꽃을 피운다. 아침이면 사계절에 따라 진달래, 개나리, 라일락, 백일홍, 들국화…들이 다투어 피여서 이 지구의 모퉁이들을 환히 밝혀주고 있다. 그런가 하면 양, 소, 말, 닭, 개 등 가축가금들이 뒤뚱거리며 생명활동을 이어가고 있으며 정글에서는 코뿔소, 표범, 이리 등 야생동물들이 그 신성한 존재를 알리고 있으며 하다 못해 발아래를 잘 살펴보면 개미들도 부지런히 움직이면서 생명의 노래를 힘차게 부르고 있다. 그렇다. 지구라는 이 푸른 별에서는 왕성한 생명활동들이 벌어지고 있으며 그런 생명들은 각자 나름대로의 존재의 리유를 가지고 이 지구촌에 더욱 생기를 북돋아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문명시대에 접어들면서 인류를 계속 괴롭혀오는 명제가 있다. 그것이 바로 저 유명한 라는 질문이다. 인간이라면, 지성적인 인간이라면 누구라도 한번쯤 고민해봤을 법한 이 질문은 바로 인간 존재의 근원이자 의식의 뿌리를 찾아보려는 인류의 모지름에 다름아닌 것이다. 문학의 아버지로서 시 역시 이와 같은 질문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와 고민을 숙명적인 숙제로 떠안고 그것을 풀어나가기 위해 어제도 오늘도 앞으로도 계속 탐구에 탐구를 거듭해왔고 하고 있으며 해나가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토템문화에 대한 연구는 매우 필요하며 어쩌면 상기 원색적인 질문에 가장 근접하는 접근법이 아닐가 싶다. 개혁개방과 더불어 신주의 대지에 세차게 불어쳤던 상처문학, 뿌리찾기, 의식의 흐름 등 사조들도 나름 인류의 존재 근원과 의식의 뿌리를 찾기 위한 몸부림이였을 것이고 자아성찰을 위한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출현은 굉장히 자연스러운 일이라 해야겠다. 그러나 남들이 모두 큰 흐름을 따라갈 때 조선족 저명한 시인인 남영전선생은 토템문화연구를 평생의 연구테마로 삼고 토템문화를 연구하는 한편 그에 걸맞는 토템시들을 륙속 펴내 장안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남시인의 토템문화연구는 마침내 중국문단을 놀래웠고 학계를 놀래웠다. 그리하여 남영전현상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였고 각종 연구서적들이 출판되였으며 전문세미나들도 줄기차게 열려왔었다. 그렇다. 우리(인류)는 과연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고 있으며 우리는 누구란 말인가? 이 명제는 시가 탐구해야 할 영원한 주제일 뿐만 아니라 문학에서도 광범위하게 론의되여야 할 과제이며 문명사회에서는 더욱 보편적으로 거론되고 연구되여야 할 테마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남영전 시인의 토템시 및 토템문화연구는 일독을 권장할만한 연구성과라 할 수 있다. /한영남(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편집, 《민족문학》상, 연변작가협회 진달래문학상 수상)
7733    토템과 남영전 시인 5 댓글:  조회:3028  추천:0  2020-07-18
지상토론(5) 뿌리 깊은 나무가 무성하리 편집/기자: [ 리철수 ] [ 길림신문 ]  [ 2020-06-23 ]  일전 《길림신문》 대형구술시리즈 ‘문화를 말하다’에서 남영전 시인의 토템문화에 대한 구술을, 옛날 아버지가 해주는 주몽의 이야기를 듣듯이 처음부터 마지막가지 흥미진진하게 들었다. 남영전 시인은 한어와 조선어로 동시에 시창작을 할 수 있는 유능한 시인으로서 장장 30년이란 긴 시간을 들여서 토템시에 대해 깊이 연구하고 많은 토템시를 써서 중국의 시단에 한획을 그은 우리 민족의 자랑스런 시인이다. 그리고 조개가 아픔으로 진주를 품듯이 한생의 피타는 노력으로 “토템문화” 연구에서 일가견을 보여주면서 중국의 시문학에 큰 기여를 한 존경스러운 시백이다. 내가 남영전 시인의 토템문화에 대한 구술을 끝까지 재미있게 들은 것은, 남영전시인과의 스치는 인연도 한몫 한 것 같다. 20여년전에 “장백산”잡지사 사장으로 몸 담그고 계시던 남영전 시인이 사업차 목단강에 오신 적이 있는데 김성룡 시인이 저녁을 대접하면서 한자리에 앉게 되였다. 그때도 남영전 시인은 술잔을 기울이면서도 문화에 대해, 시에 대해, 주로는 토템시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하였는데 그 당시 나의 짧은 식견으로는 아리송하기만 하고 무엇이 무엇인지 잘 리해되지 않았다. 다만 정말 시에 대해 깊이 연구하시는 분이라는 인상이 짙었다. 그리고 우연히 남영전 시인에 대한 뒤담 칭찬을 여런번 들으면서 시인님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갖게 되였다. 그런 계기로 남영전 시인의 토템문화에 대한 구술을 아주 진지하게 잘 들은 것 같다. 남영전 시인의 토템문화에 대한 구술을 통해 토템에 대한 광범위한 많은 지식을 얻게 되였다. 인류의 문화의 형성 근원을 파헤친 문화의 원천에 대해, 우리 민족의 기원, 우리 민족의 성씨, 중국의 토템, 중국 성씨의 근원에 대해 알게 되였다. 시인의 알아듣기 쉽고 간단명료한 구술에서 일생의 피타는 탐구와 뼈를 녹이는 로고가 고스란히 녹아있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시인의 문화에 대한 불타는 열정, 시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의 정신은 우리들의 귀감이 되기에 충분했다. 무엇보다 토템문화에서 시인이 자연과 인류는 동일체라는 인식을 환기시켜 보다 조화로운 세계를 만들어 문화의 전승과 발전을 바라는 념원을 엿볼 수 있었다. 문학을 하는 사람이라면 토템문화에 대해 알고 문학의 기원을 료해하고 우리 민족의 문화를 계승 발전시킨다면 뿌리 깊은 나무가 병들지 않고 천년만년 풍성하듯이 우리 민족의 문화도 오래오래 륭성발전하리라 믿어마지 않는다. 릴레이 경주를 하듯 남영전시백의 뒤를 이어 출중한 시인과 문학인이 대대손손 이어지기를 두손 모아 기원한다. /한경애(목단강시조선족소학교 교원. 수필, 소설, 시 등 신문과 잡지에 발표. 전국녀성수필백일장 대상, 전국교원수필응모 대상 등 수상)
7732    두만강은 알리라... 댓글:  조회:2776  추천:0  2020-07-17
투혼의 작가 령혼의 메시지 (ZOGLO) 2020년7월17일  중화인민공화국 창립 70돐 기념 특별기획 대형구술시리즈-[문화를 말하다-58](김학철편7)   김학철의 문학작품은 주요하게 두가지 종류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몸소 겪은 항일전쟁력사와 피 흘려 싸우고 희생된 전우들에 대한 기록이며 다른 하나는 항전승리 후 사회주의혁명과 인민민주주의를 위해 쓴 작품들입니다. 항일전쟁에 관한 작품으로는 《격정시대》와 《항전별곡(抗战别曲)》이 대표작인데, 《항전별곡》은 한국에서 '빨찌산문학의 시조(始祖)'라고 공인합니다. 력사학자들은 《항전별곡》에 대한 많은 론문으로써 중국에서의 의렬단과 조선의용대의 력사를 재조명하였습니다. 또한 중문으로 된 《김학철문집》제1권이 출판되여 주목을 끌었습니다. 심혼을 몰부어. 김학철은 돌아가시기 며칠전 그 힘든 나날에 유일하게 남은 조선의용대 성립 사진 속 인물들을 확대경으로 일일이 확인하고 황포군관학교 시절에 바뀐 이름과 본명 그리고 본적을 밝혀 저에게 기록하도록 하였습니다. 다시는 있을 수 없는 력사의 중요한 증언이였지요. 사실 따져보면 김학철의 작가로서의 문학창작활동은 혁명에 참가할 때의 목적과 동일합니다. 하나는 민족해방과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몸바쳐 싸우는 것이고 또 하나는 피압박계급의 해방 즉 인민의 해방과 자유를 위해 싸우는 것이였지요. 한번은 밀양에 가서 김학철강연회를 하는데 대회장에 큰 프랑카드가 걸려 있었어요. '항일투사 김학철강연회'라고 쓴 그 표어를 가리키며 “사실 저 앞에 있는‘항일투사'라는 규제어는 삭제해도 됩니다. 나는 지금도 현역이예요.”라고 하는 것이였지요. 즉 인민의 해방과 자유를 위하여 계속 열심히 일하고 있다는 말씀이지요. ‘붓을 총으로 삼고 항전에 투신'한 김학철 작가에게 항일전쟁승리 50돐을 맞으며 중국작가협회에서 증정한 기념장. 그리고 여기서 김학철 문학창작의 방법과 과정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김학철이 쓰던 책상은 지금도 원상 그대로 소중히 보존되여 있습니다. 그 책상모서리는 작가의 팔꿈치에 닳아 반질반질 각이 사라지고 칠이 벗겨졌어요. 이 책상에서 《격정시대》, 《항절별곡》, 《최후의 분대장》 등 수많은 작품들이 ‘탄생’하였습니다. 김학철은 평소 창작할 때 중요한 단어나 어구는 꼭 어원을 찾아 내여 확인합니다. 김학철의 창작언어의 기준이 되는 중요한 사전들로는 첫째로 평양에서 출판된 여섯권으로 된 《조선말대사전》이였어요. 그리고 한국에서 출판된 이희승의《국어대사전》이 있고 일본에서 출판한 《광사림(广辞林)》과 《광사원(广辞苑)》이 있습니다. 그 중 일본어 사전은 그 가격이 당시 우리에게 부담이 되였지만 이런 사전들의 새 판본이 나오면 어김없이 교체하였습니다. 김학철은 또 “이 사전들은 아령처럼 나의 육신을 건강하게 지켜줬다.”고 롱담하셨습니다. 시시로 그 무거운 사전들을 외다리로 일어서서 꺼냈다 넣었다 하는 것이 좋은 신체 단련이 되였다는 것이지요. 김학철 작가의 부분적 저작들. 김학철에게 또 하나의 중요한 사전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홍명희의 (장편소설)《림꺽정》이였어요. 김학철은 《림꺽정》을 거의 외우다 싶이 하였는데 출판사 편집선생들이 련락이 와서 “선생님, 이 단어는 조선말대사전에도 없고 한국어사전에도 없으니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 가요?”라고 하면 김학철은 “〈림꺽정〉의 제 몇권 몇페이지를 보세요.”라고 회답을 보내지요. 이렇게 김학철은 창작가운데서 언어에 대하여 엄격하였고 출판사 편집분들도 김학철의 문장은 한 구절을 고쳐도 꼭 저자에게 문의하였습니다. 김학철문학의 원천은 평생의 꾸준한 독서에서 온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김학철의 일생은 끊임없는 열광적인 책 읽기로 연장되였어요. 소학시절 일본어로 세계문학전집을 통독하는 것이 인생의 시작이였습니다. 김학철은 일어를 모국어처럼 쓸 수 있었어요. 조선어와 마찬가지로 일본어로도 사고할 수 있었지요. 김학철은 책상머리 손이 닿을 수 있는 책장에 《로신전집》 10권과 홍명희의 《림꺽정》 6권(평양출판)을 두고 닳도록 읽었으며 《홍루몽》도 외울 정도로 자주 읽었습니다. 《홍루몽》은 중국사회의‘백과사전'이라고 하였어요. 그리고 신기하게도 그 읽기 힘든 중국의 《사기(史记)》를 그렇게 좋아하셔서 손쉽게 펼쳐들고 자주 읽었습니다. 그리고 숄로호브와 똘스또이의 작품도 당연히 좋아하셨지요. 전에도 말씀 드렸지만 서울에서 평양 그리고 북경, 연길까지 가지고 온 유일한 물품이 바로 숄로호브의 일본어판 《고요한 돈》이였습니다. 독서에 대한 분에 넘치는 열정과 문학에 대한 사랑이 없으면 작품을 쓸 수 없는 것입니다. 글은 쓴다고 작품이 나오는 것은 아니예요. 그 밑바탕에는 미친듯한 독서 열정과 신념, 문학에 대한 사랑, 인민에 대한 애정, 력사에 대한 책임감 이런 것들이 문학의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것이 아닐가요? 1994년 제2기 한국 KBS해외동포상(특별상)을 수상한 김학철과 부인 김혜원. 김학철은 여름이면 이른 새벽 세시나 네시에 일어나 집 부근 강뚝에 나가 아침운동을 합니다. 일생을 동반한 쌍지팽이를 짚고 산책도 하고 체조도 하고 그리고 돌아와서는 글을 썼어요. 점심에는 잠간 낮잠을 자고 오후에 다시 글 쓰기를 다그치는데 생명의 제한된 시간이 아까운 것입니다. 저녁에는 주로 독서와 신문(〈인민일보〉,〈다이제스트신문〉) 읽기로 시간이 흘러갑니다. 그의 독서 취향은 다방면이였어요. 중국의 《유림외사(儒林外史)》, 《관장현형기(官场现形记)》도 너무나 좋아하였지요. 《유림외사(儒林外史)》가 너무 좋아 우리 말로 번역까지 하여 출판사에 교부하였는데 문화대혁명기간 원고가 분실되여 출판이 안되였습니다. 참 너무나 아쉽고 안타까운 것이지요. 물론 똘스또이, 숄로호브, 발자크, 유고도 너무나 사랑했는데 식구들이 함께 식사할 때면 자주 소설 속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하면서 동석합니다. 특히 프랑스대혁명에 관한 력사책과 소설들이 인기였어요. 《고요한 돈》은 숄로호브가 교조주의(教条主义)적 수법이 아닌 사실주의로 쏘베트혁명을 묘사하였어요. 이 책에서 주인공은 당시 쏘련 홍군부대와 백군사이를 들락날락하는 농민계급의 량면 본성을 그대로 드러냈어요. 그리고 그 밑바탕에는 사람에 대한, 인간에 대한 사랑이 흐릅니다. 그것이 사람들의 가슴을 치는 것이지요. 이것이 김학철이 이 책을 유난히 좋아하는 리유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피 흘려 싸운 전우들을 세상에 기록해놓고 시름없이 떠나가는 '최후의 분대장' 김학철. 정령이 저의 집에 와서 김학철과 이야기를 나눌 때 저도 옆에서 들었는데 문학은 인간을 쓰는 것이라고 말씀했어요. 정령과 숄로호브 작품의 공통점이 바로 밑바탕에 인간에 대한 사랑이 깔려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또한 김학철이 문학후배들에게 알려주고 싶어한 시그널(signal,신호)이지요. 후날 KBS 해외동포상 제2기 수상식에 김학철부부가 동반참석으로 서울을 방문하였는데 그 때로부터 중, 한, 일 그리고 미국의 우리 동포(민족) 작가들과의 교류가 꾸준히 이루어졌습니다. 김학철은 마지막으로 한국 밀양 조선의용대 지도자 김원봉, 석정의 고향을 방문하고 조선의용대연구 한중세미나에 참석하여 단독강연을 하셨습니다. 그런 와중에 건강에 문제가 좀 생겨 밀양강연을 마치고 서울 적십자병원에서 몇달 동안 입원 치료를 받고 귀국하였습니다. 그러나 건강상태는 계속 악화되여 도저히 창작을 할 수 없게 되였지요. 본인은 갈 때가 되였다고 생각했습니다. 병원에 모시고 가려 해도 거절하셨고 병원치료 뿐만 아니라 지어 집에서 약물을 복용하는 것도 금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작품을 더는 쓸 수 없다면 나의 인생은 끝난 것이다.”, “한명(限命)을 아는 것이 영웅이다.”라고 하셨어요. 두만강에 꽃을 뿌리며 고인을 바래는 유족과 후배작가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식사도 중단하신다고 결단을 내리니 누구도 막지 못했지요. 금식을 해서 스무 하루만에 아주 존엄있게 죽음을 맞이한 것입니다. 그렇게 뒤도 돌아 보지 않고  떠나가셨습니다. 돌아가실 때 김학철은 유언을 남기셨습니다. 부고를 내지 말고 조용히 장례를 치러라. 고향 원산으로 가고 싶다. 화장을 하여 우편박스에 담아 두만강에서 원산 앞바다로 보내다오. 그리고 두만강으로 가는 길에 듣고 싶은 노래들이 있으니 지정해주는 노래들로 음악테이프를 만들라고 하셨어요. 〈조선의용군추도가〉, 〈황포군관학교교가〉, 〈가거라 38선〉 외 우리 민요 10곡을 선정해 주셨어요. 영혼이 떠나가는 길에서 들을 노래를 생전에 미리 듣고 가신 분은 아마 김학철 한사람 뿐일 것입니다. 2001년 9월 25일 오후 3시 39분에 김학철은 조용히 세상과 영영 리별하였습니다. 다음 날 김학철이 지정한 열두분의 친우들과 가족은 두만강하류의 폭 넓은 곳까지 그의 골회와 함께 쌍지팽이도 모시고 갔어요. 기념비로 솟은 김학철의 유언. 해가 너울너울 질 무렵 일부 골회는 두만강에 뿌렸어요. 남은 골회를 우편박스에 잘 봉해 두만강 물결에 띄웠습니다. 쌍지팽이 목발도 떠나보냈지요. 참 멀리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바랬어요. 중,한 TV방송국 기자들이 안 보일 때까지 촬영을 계속하였습니다. 두만강 물결 따라 세차게 흘러간 우편박스에는 다음과 같은 주소가 적혀 있었습니다. 〈원산 앞바다 김학철의 고향〉그리고 아래에는 〈김학철 가족 친우 보내드림〉이라고요. 돌아가실 때 김학철은 또 친필 유언을 남겼습니다. 편안하게 살려거든 불의에 외면을 하라. 그러나 사람답게 살려거든 그에 도전을 하라〉 길림신문 글 구성: 김청수 기자 영상 사진: 김성걸 안상근 김파 기자
7731    [문단시단] - 詩碑와 是非는 계속 되고.../최룡관시비 댓글:  조회:3337  추천:0  2020-07-17
최룡관시비 중국조선족민속원서 제막 (ZOGLO) 2020년7월13일  조선족문단의 중견시인 최룡관선생이 창작한 애향시 가 덩실한 시비로 태여나 중국조선족민속원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잔잔한 향수를 선물하게 되였다. 7월 11일 오전에 개최된 최룡관시비제막식에서 연변동북아문학예술연구회 방순애 회장은 “연변동북아문학연구회 회장단은 최룡관시인의 문학창작생애 50주년을 계기로 시비를 세우기로 결정, 유관 부문의 적극적인 지지와 관심하에 모아산자락에 자리잡은 중국조선족민속원에 설립지를 마련하였다.”고 소개하였다. 답사를 하고 있는 최룡관시인. 제막식에서 연변작가협회 부주석 김영건, 전임 길림공상학원 당위서기, 단군문학상 리사회 리사장 신봉철, 연변시인협회 회장 전병칠 등과 시인의 제자, 고중동창, 대학동창대표가 축사를 하고 《장백산》, 《도라지》, 《송화강》 등 문학지 대표들의 축하메시지가 대독되였다. 부분적 참가자들이 시인과 함께 시비앞에서 기념촬영을 하였다. 연변작가협회 회원, 중국작가협회 회원인 최룡관시인은 연변사범학원 조문학부를 졸업하고 연변일보 문예부주임, 연변작가협회 부주석을 력임하면서 50여년간의 문학인생에《이미지창작론》, 《하이퍼시창작론》, 《동시창작론》 등 론문집과 시집, 문집 등 여러가지 작품집 총17권을 출간하였으며 준마상, 길림성소수민족문학상, 주인민정부진달래문예상, 연변작가협회문학상, 단국문학상, 제1회 중국조선족시가절 공로상 등 다수를 수상하였으며 40여명의 문학후배를 양성해냈다. /길림신문 김태국 기자 
7730    [고향소식] - 고향 화룡에 비행장 선다... 댓글:  조회:3682  추천:0  2020-07-02
화룡진달래통용비행장 건설 첫 삽 편집/기자: [ 안상근 ]  [ 길림신문 ] [ 2020-06-10 ]  화룡진달래통용비행장 정초의식이 6월 10일 오전 펼쳐지면서 화룡시는 통용비행장 건설의 첫삽을 떴다. 화룡진달래통용비행장은 국가발전개혁위원회와 국가민항국에서 확정한 단거리운수 시범공정이며 전성적으로 처음 비준받은 A일류 통용비행장 대상이다. 이 대상은 화룡시에서 국가의 내수확대정책의 기회를 다잡고 “3성”건설을 깊이있게 추진하는 중대한 조치인바 립체교통 네트워크를 완벽화하고 투자환경을 개선하고 관광자원을 종합하고 대외개방을 확대하는 데 중요한 작용을 놀게 될 전망이다. 료해에 따르면 새로 건설되는 화룡진달래통용비행장은 화룡시 룡성진 흥서촌에 자리잡고 있는데 총투자가 9.89억원에 달한다. 비행장의 총 부지면적은 97헥타르에 달하며 길이가 1200메터, 너비가 30메터에 달하는 활주로와 비행구 등급 2B로 건설되며 운-12통용비행기와 각종 직승비행기 및 기타 소형비행기들이 비행할수 있다. 이 대상은 3년내에 건설되는데 완공후 전성적으로 규모가 가장 큰 A1류 통용비행장으로 될 전망이다. 통용항공산업은 현재 우리 나라에서 갓 흥기하기 시작한 전망밝은 산업인바 국가에서 통용항공산업의 발전을 고도로 중시하고 통용비행장 건설을 크게 지지하고 있다. 연변주당위 상무위원이며 화룡시당위서기인 김렬은 축사에서 화룡진달래통용비행장은 개통된 후 장춘, 장백산, 로씨야 울라지보스또크, 조선 청진 등 국내, 국제 항공로선이 개통되면서 화룡을 중추로 중조로 3국 공중통로를 구축하게 되여 화룡시의 기초시설이 락후한 면모와 교통물류가 박약한 현황을 철저히 개변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화룡시에서는 진달래통용비행장을 지탱점으로 공항경제구와 항공산업건설을 함께 추진시키면서 항공강습, 물류운수, 가공제조 등 기능이 일체화한 종합성적인 항공산업군을 창출하며 아울러 공로, 철로, 항구합작개발 등 기초시설건설을 다그치는것으로 점차 륙해공 립체교통망을 형성하며 두만강 출해구를 열고 해양경제를 발전시키며 동북아 지역의 상호 련락과 소통을 적극 실현할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화룡시에 통용비행장이 들어선 후 변경합작구건설과 전면적인 대외개방 확대 및 지역경제발전의 추진으로 빈곤부축개발이 큰 탄력을 받게 될것이며 길림성 항공운수사업에 적극적인 네트워크 지지를 주게 된다. 이외에도 장백산비행장과 연길비행장의 지선보충 작용을 하게 되여 우리 성 동부지역관광의 전역 련동도 실현하게 되며 지역경제발전과 변경안정, 생태환경보호에도 중요한 작용을 놀것으로 전망된다. /사진 화룡시당위 선전부제공
7729    작가들의 큰 박수를 받은 민족개념/ "길림신문"/ 김승종 댓글:  조회:3055  추천:0  2020-07-02
지상토론(7)작가들의 큰 박수를 받은 민족개념/김승종 편집/기자: [ 리철수 ]  [ 길림신문 ]  [ 2020-07-02 ]  《길림신문》이 펼친 구술시리즈 남영전편의 토템이야기를 들으면서 15년전 내몽고사범대학에서 그의 연설을 듣던 장면이 생생하게 살아나 감회가 깊었다. 2005년 9월15일, 내몽고사범대학에서 중국소수민족작가연구중심 개원식 및 문학세미나가 있었다. 필자가 이 큰 행사에 참석하는 행운을 가졌다.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그날, 전국에서 100여명의 소수민족작가들이 모였었다. 내가 책 속에서 보아오던, 꿈에도 흠모했던 유명한 작가들이 대거 참석하여 나를 흥분하게 하였다. 이번 세미나에서의 중점 발언은 중국소수민족작가연구중심 주임, 몽고족작가 터싸인 바야얼 (特•赛音巴雅尔), 현대문학관 관장, 만족작가 서을(舒乙), 길림신문사와 장백산잡지사 사장이며 조선족시인인 남영전 등 5명의 작가들이였다. 남시인의 발언고는 였다. 남시인의 발언 서두는 특이하였다. “여러분, 오늘 이자리에 모인 분들은 자기 민족의 문화를 다 잘 알고 있는 작가들입니다. 고정관념은 민족을 왕왕 혈통으로 보는데 오늘 나는 이자리에서 반기를 들겠습니다. 저의 견해를 점검해 주시고 틀리면 비판하십시오.” 참석자들은 다들 긴장해서 남시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남시인은 자신이 토템문화를 관심하게 된 경우와 토템문화가 현대생활에서의 표현 등을 이야기 하고 나서 민족개념에 대한 결론을 내렸다. “인류의 발전사, 민족의 형성사를 보면 민족은 여러 부동한 토템성씨들이 장기간 한 지역에서 공동생활을 하면서 점차 형성된 의식주행어(衣食住行语)의 문화공동체입니다. 이 문화공동체가 곧 민족의 탄생이고 민족의 표지입니다. 때문에 민족은 문화의 개념이지 혈통의 개념이 아닙니다. 혈통으로 말하면 각 민족은 모두 형제관계입니다. 저의 결론이 틀리면 여러분들이 비평하십시오.” 장내는 삽시에 열렬한 박수가 지속되였다. 그날 오찬 때 중국소수민족작가 대표인물인 몽고족 로작가 마라친부(원 중국작가협회 서기처 서기, 《민족문학》 주필)는 특이한 제의를 하였다. “오늘 오찬은 남영전 시인의 발언을 축하하는 토템연회입니다. 모두들 토템술을 기쁘게 듭시다.” 옆에 앉은 현대문학관 서을 관장도 술잔을 들고 “남영전 시인이 말하는 민족개념은 확실히 도리가 있습니다. 저도 대찬성입니다.”라고 하면서 건배를 제의하였다. 그때 행사에 참석한 조선족은 남시인 외 심양의 소설가 박성군, 그리고 연변의 김승종 시인 세명이였다. 8년 후인 2013년 6월, 전국작가 내몽고견학방문단 일원으로 나는 새롭게 건립된 중국소수민족문학관을 참관하는 기회를 가졌다. 그때 아래의 사연을 알게 되였다. 중국소수민족문학관을 건립하는 데는 남영전시인의 공로도 한몫 있었다. 2005년, 그번 행사가 있은 다음 몽고족작가 터싸인바야얼, 조선족시인 남영전 등 소수민족작가 10명이 련명으로 온가보 총리에게 청원서를 올렸다. 온가보 총리는 이에 중시를 돌려 일주일안에 2,500만원의 경비를 비준하였다. 이리하여 4년 후인 2009년 9월, 내몽고사범대학 교정내의 100무의 부지에 5,500평방메터 되는 현대화한 중국소수민족문학관이 건립되였다. 문학관 공원에는 다섯개 정자, 다섯개 대리석다리가 있는데 련명으로 청원서를 써올렸던 소수민족작가들이 정자와 다리에 한개씩 이름을 짓도록 했었다. 남영전 시인은 그중 한개 다리의 이름을 원융교(圆融桥)라고 지어 그가 쓴 세글자가 다리기둥에 음각되여 있었다. 그리고 문학관 공원에는 만족작가 조설금(《홍루몽》저자), 로사(老舍)를 비롯한 10명의 소수민족 유명한 작가들의 동상이 새겨져 있었는데 남영전 시인의 제의로 조선족의 대표작가 김학철선생의 동상도 이 10명의 유명한 작가들 속에 의젓이 세워져 있었다. 남영전 시인은 토템원융의 기치를 든 시인이다. 그는 토템원융사회를 위해 어제도, 오늘도 한 시인의 책임과 사명을 다하고 있다. /김승종 (1963년 출생, 화룡시작가협회 전임주석,  연변작가협회 리사. 《천하루밤과 시작노트와 시지기 삶》, 《우물 일곱개였던 마을》 등 시집 3부 출판. 두만강여울소리, 연변작가협회 인터넷 문학상, 《연변일보》 해란강 문학상, 제20회 연변정지용문학상 등 다수 수상)
7728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문화재보호",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4182  추천:0  2020-07-02
‘천년의 빛’ 고려 나전칠기 돌아왔다 기사입력 2020.07.02.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앵커] 고려시대 예술의 정수로 꼽히는 나전칠기는 전 세계에 20여 점만 전해질 만큼 귀중한 유물인데요. 이 중에서도 전 세계에 단 3점밖에 안 남은 독특한 형태의 나전칠기 유물 한 점이 일본에서 돌아왔습니다. 안다영 기자가 보도합니다. [리포트] 작디작은 국화 꽃잎과 넝쿨무늬가 영롱하게 빛납니다. 2~3mm 정도로 아주 작게 자른 자개와 얇게 갈아, 투명하게 만든 바다거북 등껍질을 붙인 기법이 세밀함과 정교함의 극치를 보여줍니다. 청자, 불화와 함께 고려시대 예술의 백미로 꼽히는 12세기 나전칠기 유물 한 점이 일본에서 돌아왔습니다. [김동현/국외소재문화재재단 유통조사부장 : "다양한 문양과 기법이 총망라된 우수한 작품입니다. 오랜 시간 보존하면서도 수리가 거의 되지 않아서 원형이 잘 남아있고."] 길이 10cm, 무게 50g의 작은 크기로, 뚜껑이 있는 '나전합' 형태입니다. 향이나 화장품 등을 담는 데 쓰였을 걸로 추정됩니다. 이 유물은 특히 큰 원형 합 속에 들어있는 작은 합 중 하나인데, 나머지 합들은 행방을 알 수 없습니다. 온전한 형태로 남아 있는 이런 모양의 작은 합은 이 유물을 비롯해 전 세계에 단 석 점뿐. 미국에 1점, 일본에 2점이 있었는데, 이 가운데 일본의 한 개인이 소장해오던 한 점을 되찾아 왔습니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2년간의 협상 끝에 구매에 성공해 지난해 12월, 환수했습니다. [최응천/국외소재문화재재단 이사장 : "가치가 충분한 유물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아마 우리가 어느 시점에 환수하지 않으면 다시 일본의 국유문화재로 바뀔 수 있는 아주 긴박한 상황이었습니다."] 이로써 우리나라는 2018년 보물로 지정된 나전경함 등 모두 3점의 나전칠기 유물을 소장하게 됐습니다. 이번에 환수된 나전합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관돼 올해 12월 특별전을 통해 관람객과 만납니다. KBS 뉴스 안다영입니다. /안다영 기자  ======================================///   세계에서 단 3점 뿐인 나전칠기, 800년만의 귀환… 1.5~3mm의 '극초정밀' 예술 2020.07.02.  좋아요  화나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beta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경향신문]  일본의 한 소장가가 갖고있던 고려 나전국화넝쿨무늬합(그릇)이 구입 환수되어 2일 언론에 공개됐다. 전세계에 단 3점 남아있던 온전한 형태의 나전합 중 1점이 환수된 것이다. 유일하게 매입가능했던 유물이었다는 점에서 더욱 뜻깊은 환수라 할 수 있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제공 ‘세밀가귀(細密可貴)’라는 말이 있다. 고려시대 극한의 정밀한 공예품을 가리켜 ‘세밀하여 귀하다’는 뜻으로 사용됐다. 그러나 이 ‘세밀가귀’란 말은 본디 고려시대 공예품 중 나전칠기 기술을 콕 찝어 표현한 것이다. 즉 1123년(인종 재위 1122~1146) 고려를 방문한 송나라 사신 서긍이 에 “고려의 나전솜씨는 세밀하여 귀하다고 할 만하다(螺鈿之工 細密可貴)”고 언급했다. 현존하는 고려나전 제품을 보면 중국인들이 감탄사를 연발할만 하다. 고려 나전에는 대모(玳瑁·거북등껍질)와 전복껍질을 얇게 갈아 재료로 사용했다. 이 껍질을 일일이 곡선으로 오려내는 줄음질 기법으로 꽃잎과 이파리 등의 무늬를 표현했다.  그런데 꽃잎과 이파리의 한조각 크기는 1㎝를 넘지않는다. 작은 것은 2~3㎜에 불과하다. 꽃송이를 이은 넝쿨은 금속선으로 만드는데 그 두께가 불과 0.3㎜였다. 금속은 옻칠을 한 나무표면에 야교를 묻힌 이 작디작은 꽃잎과 이파리 조각을 일일이 붙이는 일은 극한의 인내력과 정교함을 요하는 작업이 아닐 수 없었다. 이렇게 작은 단위를 오리고 갈아내어 원하는 문양을 맞추는 일은 가히 극한직업이 아닐 수 없었다. 나전으로 만든 경전함의 경우 2만5000개의 나전 조각이 사용되었으니까…. 이렇게 만든 고려나전은 중국에서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구입 환수된 ‘나전합’의 용도는 확실치는 않지만 화장용기 등으로 쓰인 것으로 보인다. 국화와 넝쿨무늬가 빈틈없이 빼곡히 새겨져 있다.|국외소재문화재재단 제공 심지어 1080년(문종 34년)에는 나전으로 장식한 수레(나전장차·螺鈿裝車)까지 송나라에 진상한 일이 에 등장한다. 지금으로 치면 나전칠기로 장식한 최고급 승용차를 송나라 조정에 선물한 것이다. 또 인종 연간에 요나라 사신으로 떠난 문신 문공인(?~1137)은 요나라 관리들에게 고려나전제품을 개인적으로 선물했다는 기록이 에 등장한다. 는 고려 나전제품에 반한 요나라 관리들이 고려사신이 갈 때마다 ‘선물 안주냐’고 요구하는 바람에 큰 폐단이 됐다고 꼬집었다. 또 무신정권의 최고실력자인 최이가 “1244년(고종 32년) 연회를 베풀 때는 은테를 두르고 나전으로 장식한 화분 4개에 얼음산을 쌓았다”( ‘열전’)는 기록도 있다.  이밖에 몽골 간섭기인 1272년(원종 13년)에는 “대장경을 보관할 함(경전함)을 만들라”는 원나라 황후의 요구에 따라 고려에 나전제품을 제작하는 임시관청인 전함조성도감이 설치되기도 했다. 이뿐이 아니다. 중국의 칠기서인 에는 “나전 필갑(필통)은 고려국에서 생산되어 들어온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그만큼 고려 나전은 중국인들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울 정도로 최고의 기술력을 자랑한 예술품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경전함, 염주함, 향합(향을 넣는 그릇), 불자(먼지 터는 총채와 같은 불교의식용 도구) 등 고려 나전제품은 지금까지 파악한 것만 전세계를 통틀어 22점 뿐이다. 그것도 대부분은 일본과 미국, 영국, 네덜란드 등의 주요박물관에 흩어져있다. 고려 예술을 대표하는 ‘세밀가귀’ 제품이 왜 이렇게 적은 숫자만 남았을까.  환수된 나전합의 세부무늬. 고려나전은 ‘세밀가귀’라는 칭송을 들을만큼 세밀하고 정교한 문양 구현으로 정평이 나있다. 거북등껍질과 전복 껍질을 얇게 갈아 3~8㎜ 정도의 크기로 일일이 오린 뒤 문양에 따라 붙여넣었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제공 우선 조선개국과 함께 화려함을 배격하고 청빈함을 강조하는 분위기가 강조되면서 급속도로 쇠퇴했다. 단적인 예로 1448년(세종 30년) 6월3일 세종은 “속절(俗節·철이 바뀔 때마다 사당이나 조상의 묘에 차례를 지내던 날)에 진상하는 함을 나전으로 꾸미지 말라”는 명을 내린다. 그렇게 공이 많이 들어가는 화려한 제품을 왕실에서 사용하지 않는다면 어디서 쓰겠는가. 쇠퇴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나전제품은 옻칠한 나무에 1㎝도 안되는 수백 수천 수만개의 문양을 아교로 일일이 붙여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세월이 지나면 떨어지기 쉽다.  이러니 고려나전이 남아있기가 힘들 수밖에 없었다. 국내에는 불자(拂子·먼지 터는 총채처럼 생긴 불교의식용 도구) 1점 뿐이었다가 2014년 일본인 소장가에게서 나전경전함을 구입함으로써 2점이 되었다. 이 나전경전함은 2018년 보물(제1975호)이 됐다. 그런데 문화재청의 위임을 받은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지난해 12월 전 세계에 단 3점 뿐인 고려시대 나전국화넝쿨무늬합(그릇·이하 나전합)을 일본소장가로부터 구입했다”고 2일 밝혔다. 이로써 국내의 고려나전 유물은 온전한 것을 기준으로 총 3점으로 늘어났다. 이번에 구입환수된 나전합은 이미 14년 전인 2006년 국내에 공개된 바 있는 유물이다. 당시 국립중앙박물관이 준비한 ‘나전칠기-천년을 이어온 빛’에 출품됐다. 이후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오랜 시간 일본의 개인 소장자와 협상 끝에 나전합을 구입하는데 성공했다.  구입환수된 ‘나전합’에는 떨어져나간 부분이 더러 보인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이것이 오히려 후대에 수리한 흔적이 없는, 원형 그대로의 12세기 고려나전이라고 입을 모은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 환수한 나전합의 용도는 확실치는 않지만 향 혹은 화장용기로 쓰인 것으로 추정된다. 하나의 큰 합(그릇)에 여러 개의 작은 합이 들어간 일종의 ‘모자합(母子盒)’이다. 김동현 국외소재문화재재단 부장은 “전 세계 단 3점 만이 온전한 형태로 남아있는데, 그 중 유일하게 매입할 수 있었던 나전합이었다”고 의미를 두었다. 이 나전합의 길이는 10㎝ 남짓이며, 무게는 50g 정도된다. 영롱하게 빛나는 전복패와 온화한 색감의 대모, 금속선을 이용한 치밀한 장식 등 고려 나전칠기 특유의 격조가 고스란히 반영된 수작이다. 뚜껑과 몸체에 반복되는 주요 무늬는 국화와 넝쿨무늬다. 손끝으로 집기 어려울 정도로 매우 작게 오려진 나전이 빈틈없이 빼곡하게 배치되며 유려한 무늬를 만들어내고 있다. 국화 꽃은 지름이 10㎜였고, 꽃잎 길이는 3㎜, 폭은 1.5㎜ 정도에 불과했다. 큰 꽃무늬와 국화의 꽃술에는 고려 나전칠기의 대표특징 중 하나인 대모복채법(玳瑁伏彩法)이 사용됐다. 대모복채법은 바다거북의 등껍질(대모)를 얇게 갈아 투명하게 만든 판 안쪽에 안료를 칠해 앞면에 비쳐보이게 하는 기법이다. 뚜껑 테두리는 점 혹은 작은 원을 구슬 꿰매듯 연결시켜 만든 연주문(連珠文)으로 촘촘히 장식되었다. 또한 금속선으로 넝쿨 줄기를 표현하고 두 줄을 꼬아 기물의 외곽선을 장식했다.  최응천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이사장은 “꽃잎과 이파리를 표현한 대모(거북등껍질)와 전복껍질, 넝쿨을 표현한 금속(구리)선이 이토록 조화롭게 구현된 고려나전 제품은 보기 드물다”면서 “고려 나전의 전성기인 12세기를 대표하는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지난 2014년 구입환수된 나전경전함. 무려 2만5000조각으로 구성되어 있다. 2018년 보물제 1975호로 지정됐다.|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이 합에는 꽃잎과 이파리가 떨어져 나간 곳이 더러 보인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이 또한 나전합의 가치를 높이는 요소라고 입을 모은다. 김미라 문화재청 감정관실 감정위원은 “수리 흔적이 있는 다른 고려나전과 달리 이 나전합은 원형 변형 없이 그대로 전해져 내려왔다는 뜻”이라면서 “그런 점에서 문화재적 가치가 더 높을 수 있다”고 전했다. 한편 국립문화재연구소의 비파괴 분석 결과 나전합은 전형적인 고려 나전칠기의 제작기법과 재료를 사용한 것으로 나타났다. 즉 나무로 모양을 잡은 뒤 그 위에 천을 바르고 옻칠을 한 목심칠기이고, 판재 안쪽 면에 일정한 간격으로 칼집을 넣고 부드럽게 꺾어 곡선형의 몸체를 만들었으며, 몸체는 바닥판과 상판을 만든 후에 측벽을 붙여 제작된 점 등이 확인됐다. 환수된 나전합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관되며, 오는 12월22일부터 열릴 특별전(‘고대의 빛깔, 옻칠)’에 출품될 예정이다. /이기환 선임기자
7727    [그것이 알고싶다] - 송진속 곤충 = 호박 댓글:  조회:4437  추천:0  2020-07-01
송진에 갇힌 곤충서 찾아낸 9천900만년 전 공룡시대 색깔 2020.07.01.  좋아요  훈훈해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beta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청벌·딱정벌레 몸체 청록색 등 생생하게 보존…"백악기 색깔" 구조색이 생생하게 보존된 백악기 중기 호박 속 곤충 화석[NIGPAS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연합뉴스) 엄남석 기자 = 화석 속 생물은 대부분 살아있을 때 가졌던 색을 잃고 탈색된 상태로 발견된다. 생전의 색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표면의 미세 구조가 보존되는 일이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국의 고생물학자들이 송진이 굳으면서 만들어진 호박(琥珀) 속에서 약 9천900만년 전 공룡과 같이 살았던 작은 곤충들의 '살아있는' 색깔을 찾아내 학계의 관심을 받고있다. 중국과학원에 따르면 난징 지질·고생물학연구소(NIGPAS)의 차이천양 부교수가 이끄는 연구팀은 미얀마 북부 호박 광산에서 곤충이 정교하게 보존된 호박 35개를 모아 분석한 결과를 영국 '왕립학회보 B'(Proceedings of the Royal Society B) 최신호에 발표했다.  열대우림 환경에서 자란 고대 침엽수에서 나온 수지가 주성분인 이 호박들은 공룡시대 황금기인 약 9천900만년 전 백악기 중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됐다.  이 호박들에 갇혀 화석이 된 곤충 중에는 머리와 흉부, 복부, 다리 등이 청록색과 황록색 등의 색깔을 가진 '청벌'(cuckoo wasp)이 포함돼 있다. 이런 색깔은 현재의 청벌과 거의 비슷한 것으로 지적됐다.  청벌 이외에 청색과 보라색을 가진 딱정벌레 종(種)과 암녹색을 띤 등에 등도 포함돼 있다.  논문 공동저자인 황디잉 교수는 "수천개의 호박 화석을 봐왔지만 이번 호박 화석처럼 색깔이 잘 보존된 것은 극히 드물다"고 했다.  고생물 색 복원 전문가인 NIGPAS의 판양훙 교수는 "생물 표면의 나노구조가 특정 파장의 빛을 분산하고 매우 강렬한 색을 만들어내는데, 호박 속 화석에 보존된 색도 이런 '구조색'(structural color)"이라고 설명했다.  물질 고유의 색소에 의한 것이 아니라 표면 구조에 의해 빛이 회절하거나 간섭하면서 나타나는 색으로, 공작의 날개를 비롯해 일상에서 접하는 많은 색이 이런 구조색이다.  연구팀은 호박 속 보존된 곤충의 색이 9천900만년 전 실제 색과 같은지 등을 분석하기 위해 다이아몬드칼을 이용해 색깔이 남은 청벌의 겉껍질과 탈색된 각피(殼皮) 샘플을 절개해 전자 현미경으로 분석했다.  호박 속에서 색깔이 보존된 화석과 탈색된 화석 비교 [NIGPAS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그 결과, 색깔을 가진 청벌 화석의 겉껍질은 빛을 분산하는 나노구조가 잘 보존돼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호박 속의 색깔이 백악기 때 갖고있던 것과 같은 색일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색깔이 보존되지 않은 화석에서는 각피 구조가 크게 손상된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팀은 현재의 청벌이 '뻐꾸기 벌'이라는 별명처럼 알을 다른 벌집에 낳는 습성을 갖고있다면서 화석 속의 백악기 청벌도 다른 벌집에 몰래 알을 낳는데 구조색을 이용했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차이 부교수는 이와관련 "현재로서는 구조색이 위장용 이외에 체온조절 등과 같은 다른 용도로 사용됐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고 했다. 
7726    토템과 남영전 시인 댓글:  조회:3326  추천:0  2020-06-27
[구술 ] 토템문화와 인류운명공동체 편집/기자: [ 정현관 ]  [ 길림신문 ] [ 2020-05-12 ]    —중화인민공화국 창립 70돐 기념 특별기획-[문화를 말하다-51](남영전편-6) 토템으로 인해서 우리 인류는 문화가 생겼고 토템으로 인해서 사람들의 성씨가 생겼으며또 토템씨족으로부터 민족이 형성되였고 토템숭배로부터 민족의 전통문화와 전통풍속이형성되였습니다. 중국의 전통문화가 무엇인가, 실상은 토템숭배로 중국의 전통문화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토템이 무엇인가, 파고들면 토템은 사람과 자연은 ‘혈연관계’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연에서 왔다. 사람은 자연의 후예다.’ 이것을 말하는게 토템문화입니다. 사람과 사람 지간의 관계도 혈연관계로 되여 있는 것입니다. 중국의 전통문화가 5천년 전부터 황제가 “우리 세 부락의 사람들은 룡과 봉황이 토템이다.”라고 하자 사람들은 맞는 말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때로부터 중국의 전통문화가 형성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전통문화의 핵심은 사람과 자연은 친척관계라는 것입니다. 천인합일은 전통문화의 핵으로서 사람은 자연의 법칙을 지켜야 된다는 것입니다.   길림성 민족중학교 교장들과 함께 인성교육에 대하여 담론하는 남영전 선생 그래서 중국의 전통문화를 보게 되면 황제가 룡토템, 봉황토템 기치를 든 다음부터 중국사람들의 전통문화가 형성되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언제 와서 공고히 되였는가 하면 기원전 5세기, 6세기 후부터입니다. 왜서 그런가 하면 기원전 5, 6세기 세계적으로 인류력사발전을 보게 되면 굉장히 중요한 시기입니다. 이때 다섯명의 성인이 출현했습니다. 로자, 장자, 공자, 맹자, 그리고 인도의 석가모니 이렇게 다섯명의 성인이 나타났습니다. 로자와 장자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깨우쳐주는가 하면 ‘세계의 진상은 천인합일이다. 사람도자연의 일원이다. 그래서 사람은 반드시 자연의 법칙을 따라야 한다.’ 이것이 로자와 장자의 사상입니다.  그리고 공자와 맹자의 사상은 ‘사람은 반드시 인, 의, 례, 지, 신의 오덕을 지켜야 한다. 오덕을 지켜야만이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석가모니의 사상은 ‘사람은 자연을사랑하여야 한다. 사람은 사람을 사랑하여야 한다. 오직 자비로 마음을 채워야만이 최고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실상 이 세 성인의 말은 다 같은 뜻인데 이것이중국 전통문화의 핵심입니다. 이 세가지를 한마디로 개괄한다면 ‘천도(天道)’입니다.   서남 소수민족지구를 찾아 토템문화를 답사하는 남영전 (오른쪽) 천도란 무엇인가, ‘하늘의 뜻을 따른다’는 뜻이며 ‘자연의 법칙을 따른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천도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세계 4대 문명고국입니다. 사전에서 보게 되면 첫번째는 중국이 아니라 고대애급문명입니다. 지금으로부터 7,500년 전입니다. 중국은 삼황오제를 따져봐야 6,500년이 됩니다. 그렇지만 고대애급문명은 7,500년이 됩니다. 고대애급의 토템은 태양입니다. 애급의 금자탑을 보게 되면 태양숭배물입니다. 그리고 애급에사람 얼굴에 사자 몸뚱이를 한 스핑크스 조각상이 있는데 사자가 뭔가 하면 태양의 화신입니다. 고대바빌론문명은 한 7,200년이 됩니다.  그 다음에 6,500년 전의 중국문명입니다. 그리고 인도문명은 중국문명보다 한 천오백년 뒤의 일입니다. 그런데 이 세개 문명이 왜서 없어졌는가. 외국의 침략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외국의 침략을 받아서 원래 있던 사람들이비록 다 없어지진 않았지만 원래 가지고 있었던 풍속들이 다 없어진 것입니다. 풍속들이다 없어지니 문명이 사라진 것입니다.  그러나 중국은 다행스럽게 외세의 침략을 당하지 않았습니다. 고대 중국에서 염제, 황제와 치우 이 세개 부락이 있을 때 강대하였습니다. 지금 봐서 알겠지만 그때 5천년 전에치우가 전문 군대를 길렀기 때문에 중국이 옛날에 강대하였습니다. 그때 중국은 이미 철과 동으로 예리한 병기를 만들었습니다. 치우가 멸망하였지만 치우의 문명이 중국을 강대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나라들에서는 범접을 못했습니다.      사천 문천대지진 현장을 찾아 고대바빌론의 토템은 승냥이입니다. 몽골족, 위글족, 까자흐족, 돌궐족들은 전부 승냥이토템입니다. 왜서 승냥이토템인가, 서아시아가 지금은 평지이고 사막지대이지만 원래는초원입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승냥이들이 출몰하던 곳이였지요. 인도도 역시 외세 침략, 영국의 침략을 받았지요. 그래서 인도의 문명은 날아갔지요. 특히 중요한 것은 5세기에와서 5명의 성인이 나타난 다음에 중국의 전통문화가 아주 공고히 된 것입니다. 21세기에 들어와서 사람과 자연의 관계가 점점 더 긴장해지고 있습니다. 왜서 긴장해지는가? 인류의 력사를 보게 되면 농경문화 때에는 사람이 자연에 대한 파괴가 극히 적었습니다. 그렇지만 인류가 자연과 긴장한 상태는 1780년 영국에서 증기기관을 발명한 다음부터, 공업문명이 시작된 다음부터 사람과 자연과의 관계가 긴장되기 시작했습니다. 증기기관이 발명되고 공업문명이 발달하면서 공업이 제일 으뜸으로 자연을 파괴하였습니다. 공업페기물, 자동차 배기가스, 공장에서 뽑는 연기 이렇게 공업문명이 발달하면 발달할수록자연과의 관계는 긴장해집니다. 240년 동안 세계의 인구가 불어났고 공업문명이 발전했습니다.  21세기에 들어와서 사람과 자연 관계는 긴장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지금 말하자면 자연규칙이라는 것은 대자연은 사람을 사랑합니다. 자연은 사람을 해치려는 생각이 없습니다. 그런데 인구가 늘고 공업문명이 자연을 파괴하기 때문에 이 자연이 병이 든 것입니다. 자연도 생명체입니다. 자연도 병이 들었으니 사람과 똑같은 생명체인데 ‘기침’을 하고 ‘열’이 오르는 것입니다. 자연의 몸이 찌뿌둥하고 못견디는 것입니다. 그래서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자연재해가 들어옵니다. 다음 병독이 날아오는 것입니다. 실상은 자연이 일부러 사람을죽이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연이 병든 상태입니다. 제가 이에 관해 시를 썼습니다.   2012년 대만에서 48년 전에 영국의 톰인비라는 력사학자가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선견지명이 있습니다. 인류가 21세기에 들어가면 사람과 자연의 관계는 점점 긴장해진다고 예측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를 해결하려면 오직 하나 바로 중국의 전통문화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십년 후인 1982년 유엔에서 노벨수상자 70명을 불러다가 21세기에 대비해서 인류의 재난을 어떻게 해결하여야 하는가라고 물으니 노벨수상자들이 그 학술회에서 이구동성으로 2,500년전 중국의 문명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노벨수상자들이 중국의 전통문화에서 해법을 찾아야 한다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있습니다.  2011년 일본에 9급 지진과 함께 쓰나미가 발생했습니다. 그때 일본천황이 중국에 련락이 왔습니다. 우리가 지금 이렇게 큰 자연재해를 입었는데 그 해법이 무엇인가? 그 해법은 당연히 사람과 자연의 긴장 상태를 어떻게 푸느냐 하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이번에 일어난 이 코로나19 바이러스 사건도 우리한테 답을 주는 것이 아닙니까. 왜서 그런가면 지금 21세기는 글로벌시대가 아닙니까, 경제의 글로벌이라는 것은 실상은사람의 글로벌이 아니겠습니까, 사람 류동의 글로벌인 것이지요. 지금 21세기에 사람과사람은 모두 련계가 되여 있습니다. 한사람이 문제가 있다 하면 전세계에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류는 좋든 나쁘든 실상은 인류공동체가 된 것입니다. 좋아도 공동체고나빠도 공동체고 인류의 운명은 누구도 빠질 수 없습니다. 다 련결되여 있는 것입니다.   한국에서 열린 문화행사에서   인류가 직면한 이번의 재난도 어디에서 왔던지간에 인류와 자연의 관계가 긴장하기 때문에일어난 일입니다. 미국에서 매년마다 독감이 류행하는데 그게 왜서 그런가, 자연에서 다 오는 것입니다. 사람과 자연과의 관계를 개선하지 않으면 인류는 앞으로 살길이 없습니다. 그 해법은 사람과 자연과의 관계를 완화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응당 자연을 회복시키는 데힘을 써야 근본상에서 문제가 해결됩니다. 쉽지가 않습니다. 지구가 생명체인데 점점 더엄중해지고 있습니다. 아프리카에 밤나무가 있는데 수명이 천년 이상 됩니다. 이 나무가 천년을 사는데 지금 죽어가고 있습니다. 기후가 변해가기 때문입니다. 세계 온난기후가 1도만 변해도 많은 식물과 동물들이 죽습니다. 자연의 상태가 심각합니다. 지금은 원자탄을 가지고 론하는 전쟁문제가 아니고 자연과의 문제입니다. 이번 문제가 지나고 몇달 후에 또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지금 자연과의 관계가 매우 심각하기 때문에 중국의 전통문화가 점점 빛이 나는 것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우리 지식인들이 토템문화에 대해 너무 모른다는 것입니다. 남영전이 왜서 이상하게 토템을 가지고 자꾸 론하는가? 이것은 사람을 놓고 보면 근본입니다. 인류가 어디서 왔는가, 토템을 캐려면 인류가 어디서부터 왔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남영전 토템예술 쎄미나 옛날부터 지금까지 토템과 전통문화는 련결되여 있습니다. 이를 알게 되면 인류가 어떻게된 걸 알게 되고 자기가 누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제가 최근에 중국어로 시 3수를 썼습니다. 자연과 사람 관계인데 총 450행 됩니다.  사람과 자연과의 관계를 다룬 탕록, 중국의 세 조상이 어떻게 되여 있는가. 그리고 또 치우를 썼습니다. 치우가 어떻게 되여 있는가. 그리고 전문 천도를 썼습니다. 천도를 따르면하늘이 돕고 천도를 어기면 하늘이 벌을 내린다는 내용입니다. 토템문화라는 것은 결론적으로 얘기하자면 우리가 어디에서 왔고 우리가 누구며 우리가어디로 가야 하는가를 얘기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류는 자기가 어디에서 왔고 자기가 누구이고 어디로 가야 하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 조선민족으로 말한다면 조선민족이 어디에서 왔고 개개인이 어디에서 왔으며 솔직히 구체적으로 말해서 당신의 성씨가 이건데당신의 성씨가 어디에서 왔다는 것은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우리가 자기의 성씨도 어디에서 왔는지 모르고 산다면 그것은 좀 문제가 된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알아야 어디로 가는 것이 명확해집니다. /글 구성: 리철수기자 /영상: 정현관 최승호 기자
7725    토템과 남영전 시인 댓글:  조회:2991  추천:0  2020-06-27
[구술 ] 토템과 민족전통풍속 편집/기자: [ 정현관 ] [ 길림신문 ] [ 2020-05-07 ]    —중화인민공화국 창립 70돐 기념 특별기획-[문화를 말하다-50](남영전편-5) 옛날 토템으로부터 성씨가 오고 민족이 형성되고 했잖아요. 그래서 토템숭배가 풍속으로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서 풍속이 되였는가를 한번 보기로 하겠습니다. 중국을 보면 5천년 전에 황제가 룡 기발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북경을 한번 봐요. 북경의 자금성은 명나라 때에 세운 것이 아닙니까. 지금으로부터 650년 전이였습니다. 북경 천안문 앞에 화표가 뭔가 한번 주의해서 보았습니까? 천안문 앞의 문을 지키는 화표가 룡의 토템주입니다. 전하는 데 의하면 화표는 씨족부락 시대의 토템 표지라고 합니다. 화표 자료를 찾아보면 화표의 기둥에는 룡과 구름이 조각되여 있습니다. 룡과 구름은 같은 의미로 통하는바 옛날에는 룡이 날아가면 구름이 된다고도 하였습니다. 북경 천안문 앞의 화표가 자금성을 지키는 수호신인 것입니다. 그래서 650년 전에 제왕들이 룡 토템을 새긴 화표를 천안문 앞에 세워놓은 것입니다. 중국의 전통에 룡이 우리를 보호해주는 토템 수호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금성에 장수궁이라는 건물이 있습니다. 장수궁에 구룡벽이 있는데 아홉마리의 룡을 새겨놓았습니다. 아주 유명한 곳입니다. 자금성은 앞에 있는 대문은 토템주인 룡을 새긴 화표가 문을 지키고 옆에서는 아홉마리의 룡이 보호하고 있습니다.     천안문광장의 화표에는 룡과 구름무늬가 조각돼 있는데 자금성을 지키는 토템주다   신화문 앞에 사자 두마리가 있습니다. 중국에는 사자가 없는데 왜 사자가 나왔는가. 사자는 인도에서 나왔는데 말입니다. 우리 조선민족도 그렇고 사자가 수호신이기 때문입니다. 중국에서 왜서 사자를 중히 여기는가 하면 사자가 태양의 화신이기 때문입니다. 사자를 광명의 화신이라 하지요. 장춘에도 많습니다. 새집을 짓게 되면 앞에 사자를 갖다 놓는 것입니다. 북경대학 도서관에도 사자 두마리가 있고 북경대학 정문에도 사자 두마리가 있습니다. 중국의 많은 곳에서 새로 건물이 나오게 되면 사자를 놓는데 왜냐하면 사자가 태양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광명신이며 문지기 수호신이지요. 토템 숭배의 표현이지요. 그다음 북경 천단이 무슨 곳이냐 하면 하늘신을 숭배하는 곳입니다. 하늘이 뭔가 하면 일곱신이 있는데 해, 달, 별, 바람, 구름, 비, 우뢰 이렇게 일곱신입니다. 무엇이 천신인가 하면 이를 가리켜 천신이라고 합니다. 천단은 바로 이 일곱신을 일년에 한번씩 제를 지내는 곳입니다. 이는 토템 숭배입니다. 그리고 북경에는 또 지단이 있습니다. 일년중 황제의 가장 중요한 행사중의 하나가 바로 하늘에 제를 지내는 것과 땅에 제를 지내는 일입니다. 땅에도 역시 일곱신이 있는데 흙, 돌, 산, 불, 물, 식물, 동물 이렇게 일곱가지가 있습니다. 하늘에 천신제를 지내고 땅에 지신제를 지내지요. 청나라 광서황제 때 한번은 오래동안 비가 한번도 내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광서황제는 음식을 전페하고 천단에 가서 하늘에 기도를 드렸습니다. 결과 돌아올 때에는 비를 맞으며 왔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토템문화는 자연과 조화하는 것으로서 내용이 깊습니다.     조선민족의 장승은 토템신화에서 기원하였다   우리 민족과 토템이 어떻게 련결되여 있는가? 조선민족은 옛날에 부락마다 장승을 세웠습니다. 이 장승이 뭔가 하면 하나는 처룡의 얼굴입니다. 다른 하나는 비형의 얼굴입니다. 처룡은 룡왕의 아들입니다. 처룡이 인간세상에 나와서 미모의 안해를 삼았는데 역신(疫神)이 그 아름다움을 탐하여 사람의 모습으로 변신해 밤에 처룡의 집에 가서 처룡의 안해와 몰래 잠을 잤습니다. 처룡이 밖에서 돌아와 잠자리를 보니 두 사람이 누워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처룡은 춤을 추면서 이런 노래를 부르고 사라졌습니다. “밝은 달에 밤들어 노니다 들어와 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로다. 둘은 나의 것인데 둘은 누구의 것인고? 본래 나의 것이지만 빼앗긴 것을 어찌하리.” 역신은 처룡이 화를 내지 않고 사라져버린 것을 알고 처룡 앞에 꿇어앉아 말했습니다. “내가 당신 안해 미모를 탐내 잘못을 저질렀으나 그대는 화내지 않으니 그 마음에 감동하였습니다. 맹세하건대 앞으로는 당신의 얼굴이 있는 그림만 봐도 그 문안에는 들어가지 않겠습니다.” 이렇게 후에 처룡의 모습을 그려 문에 봍이기만 해도 역신이 얼씬거리지 못했다는 풍속이 생겨났습니다. 처룡의 얼굴을 집 주위에만 붙이던 것이 그 후에 장승이 되였습니다.   운남 소수민족지구를 찾아서 비형은 귀신을 막는 토템입니다. 신라시대 진지왕 이야기에 나옵니다. 비형은 귀신을 전문 다루는 귀신의 ‘왕’입니다. 귀신들은 비형의 말만 들어도 놀라서 달아납니다. 이렇게 하나는 처룡의 얼굴을 만들어 역신을 막고 하나는 비형의 얼굴을 만들어 귀신을 막았습니다. 이것이 마을어귀신의 토템입니다. 그리고 솟대를 세우는 풍속이 있는데 솟대는 집어귀에 세웁니다. 마을 앞에는 장승을 세우고 집마당에는 솟대를 세웠지요. 솟대의 끝에는 새(까마귀)를 조각해 달았습니다. 여기에는 까마귀에 관한 전설이 있는데 신라시대 비처왕 이야기에 나옵니다. 까마귀가 왕을 도와 왕을 해치려는 것을 피하도록 하여 왕은 이에 보답하려는 뜻으로 정월 열엿새날을 까마귀한테 제를 지내는 날(오기일)로 정하고 찰밥을 해서 까마귀에게 먹였는데 후에 풍속으로 되였지요. 후에 집집마다 액을 막기 위해서 까마귀가 달린 솟대를 세웠습니다. 중요한 풍속이지요. 그리고 민족풍속에 ‘동성불동혼'이라는 것이 있는데 왜서 동성불동혼인가 하면 같은 토템은 혼인이 허락 안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조선족도 그렇지요. 토템이 같다는 것은 조상이 같다는 말이지요. 같은 조상 끼리는 결혼이 안되지요.     조선족들의 모임에 참가한 남영전   한개 민족의 풍속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혼례풍속과 장례풍속입니다. 조선민족의 결혼풍속을 보게 되면 수탉을 큰상에 올립니다. 그리고 닭 주둥이에 붉은 고추를 물립니다. 이는 무슨 뜻인가 하면 닭은 광명을 상징하고 액운을 쫓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고추를 물리는 것은 아들을 낳으라고 하는 뜻입니다. 그리고 밥에다는 닭알을 묻는데 이는 무슨 풍속인가 하면 그것 역시 아들을 낳으라는 의미입니다. 간적(简狄)이 제비알을 먹고 설(契)을 낳았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닭알을 먹게 되면 아들을 낳는다는 풍속이지요. 장례풍속에서 왜서 조선민족은 석장을 하고 토장을 하는가? 금와왕이 돌 밑에서 나왔습니다. 인간은 어디에서 왔으면 어디로 가게 되여 있습니다. 흙과 돌은 토템으로서 어디에서 왔으면 어디로 가기 때문에 흙으로 가고 돌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2011년 길림성문련, 길림성작가협회, 길림성사회과학원과 길림일보그룹의 주최로 남영전 토템시 세미나가 장춘에서 열렸다 문씨가 어떻게 왔는가 하면 섬(련못)이 하나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련못 가운데에 있는 큰 바위 우에 석함이 나타났고 그 안에서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래서 왕은 이는 하늘이 나한테 보내준 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아이가 나온 석함에 문(文)자라는 글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문씨가 된 겁니다. 돌(석관)로 들어가는 풍속은 거기에서 왔으니까 거기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고구려를 보게 되면 석장이 아닙니까. 고구려 때에 석장이 많습니다. 우리 민족 248개 성씨 가운데 토템이야기가 서책에 있는 것만 해도 여라문개 됩니다. 왕씨, 전씨, 옥씨, 금씨, 김씨, 고씨, 석씨, 박씨, 리씨, 최씨, 문씨…     장춘공업대학에서 남영전선생이 학생들에게 토템문화에 대해 강의하고 있다   윤씨는 토템이 잉어입니다. 련못가에서 잉어가 함을 지고 있었는데 그 안에서 윤씨 조상이 나왔다고 하여 토템이 잉어입니다. (파평 윤씨의 시조는 윤신달인데, 태조 왕건을 도와 후삼국을 통일하고 고려를 세우는 데 공을 세워 삼한벽상공신에 올랐다. 《조선씨족통보》와 《용연보감》 등 문헌의 기록에 따르면 윤신달은 한국 경기도 파주 파평산 기슭에 있는 용연지라는 련못 가운데에 잉어떼가 함을 지고 있었는데 그 옥함 속에서 출생했다고 한다. 그가 태여날 때 겨드랑이에 81개의 비늘과 발에는 7개의 검은 점이 있었고 손바닥에는 윤(尹)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서 성을 윤으로 하게 되였다고 전하고 있다. 그리고 다른 한 조상이 적군에게 쫓길 때 잉어의 도움으로 탈출했다는 전설도 있다. 이렇게 윤씨 성의 토템이 잉어이기 때문에 그 후대들은 잉어고기를 먹지 않는 전통이 있기도 하다.) 한족은 토템이 한 300개 정도 되는데 이 300개 중에 우리 민족의 248개가 모두 포함되여 있습니다. 이때는 씨족사회였기 때문에 무슨 민족이라는 말이 없었습니다. 후에 와서 민족이라는 것이 나왔지요. 그전에는 토템, 씨족, 부락 이런 것들이 있었을 뿐입니다. 글 구성: 리철수기자 영상: 정현관 최승호 기자
7724    토템과 남영전 시인 댓글:  조회:3263  추천:0  2020-06-27
[구술 ] 토템씨족과 민족의 기원 편집/기자: [ 정현관 ] [ 길림신문 ]  [ 2020-04-27 ]  —중화인민공화국 창립 70돐 기념 특별기획-[문화를 말하다-49](남영전편-4)   사람은 원래 성씨가 없었습니다. 토템씨족이라는 말은 실상은 토템성씨라는 말입니다. 사람의 성씨는 처음에 토템에서 온 것입니다. 토템씨족이라는 말은 토템성씨를 가진 족속을 말하는 것입니다. 토템성씨를 가진 씨족들이 한데 모여서 민족을 형성하였습니다. 민족의 기원이라는 것은 민족이 어떻게 형성되였는가를 말하는 것입니다. 인류가 탄생해서 어떻게 발전하여 왔는지, 먼저 중화민족이 어떻게 형성되였는지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인류가 아프리카에서 탄생했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입니다. 인류의 기원설을 보게 되면 구파라설, 아시아설, 호주설 등이 있는데 이는 아프리카에서 탄생한 인류가 구라파에 언제 도착했고 아시아에 언제 도착했는지를 말하는 것이지 완전히 구라파와 아시아, 호주에서 인류가 탄생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토템시인 남영전   사람은 원인에서 진화하였습니다. 사람과 원인의 제일 큰 구별점은 사람은 직립하고 원인은 네발로 기여다녔다는 것입니다. 원인이 두발로 서게 되고 공구를 만들고 공구를 사용해서 채집하며 수렵활동에 종사하면서 사람은 점차 기타 동물들과 구별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것이 인류의 진화과정에서 핵심적인 것들입니다. 구라파로 넘어간 사람들은 백인이 되였고 아프리카에 남은 사람들은 흑인이 되였으며 아시아로 간 사람들은 황종인이 되였습니다. 이것은 기후, 먹는 음식 그리고 유전자의 변이 때문입니다. 중국에 인류가 발자욱을 들여놓은 것은 5만년 전입니다. 조선민족은 2만년 전입니다. 상고시대의 중국 력사를 보게 되면 삼황오제가 등장합니다. 삼황은 불을 발명한 수인씨를 천황이라 하며 그리고 지황, 인황을 말하는데 제일 처음 나타난 곳은 지금의 황하 상류입니다. 복희씨와 녀와씨의 후대들이 황하류역을 따라서 번식하였습니다. 황하 상류가 염제부락이였고 중류가 황제부락이였으며 하류에 치우부락이 살았습니다. 농업을 제일 먼저 시작한 부락이 염제부락이였습니다. 염제는 땅을 파서 곡식을 심었지요. 치우는 병기의 신이였습니다. 황제집단의 토템은 범, 표범, 곰 등 날카로운 맹수들이지요. 치우집단의 토템은 소인데 염제집단과 같습니다.     중화민족의 시조 염제, 황제, 치우   토템을 보게 되면 모두 머리에 뿔을 하고 있습니다. 염제는 치우의 형인데 둘이 마음이 안 맞아서 치우가 갈라져 나왔습니다. 후에 치우는 황제부락에 와서 소호라는 사람을 만나게 되며 두 사람은 뜻과 마음이 맞았습니다. 둘은 황하 하류에 와서 삶의 터전을 개척하였습니다. 이때 황하류역을 보게 되면 하류로 내려갈수록 강대하였는데 그것은 원래 가지고 있던 것들을 습득하고 하류로 내려오면서 발전시켰기 때문입니다. 세개 부락 가운데서 제일 약한 부락은 염제부락이였습니다. 그리고 황제부락이 중간 수준이였고 제일 강대한 부락은 치우부락이였습니다. 치우부락이 얼마나 강대하였느냐 하면 그때 당시에 염제와 황제 부락에서 꿈도 못 꿨던 동으로 무기를 만들었습니다. 치우가 그때 당시에 군대를 키웠습니다. 염제와 황제 부락은 군대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전쟁이 일어나게 되면 그냥 무기를 들고 나가서 싸우는 정도였지요.     중화민족의 토템인 룡과 봉황   치우에게는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군대가 있었지요. 솔직히 말해서 염제와 황제 부락이 상대가 안되였지요. 그 당시 세개 부락을 둘러볼 때 치우부락이 지금의 산동반도 하남성 동쪽 탁록이라는 곳에다 수도를 정하기도 하였지요. 치우의 수도는 산동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령토 확장을 하려는 야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말리질 못했지요. 염제집단과 황제집단은 치우집단을 두려워하였습니다. 염제와 황제의 혼자 힘으로서는 치우의 상대가 안되였습니다. 그래서 둘이 힘을 합쳐서 치자고 했습니다. 아니면 방법이 없었지요. 치우집단이 탕록에 치우성을 만들었는데 지금 말하면 수도인 셈이지요. 염제, 황제 집단이 련합해서 치우성를 쳤는데 아홉번을 쳐 모두 실패하였습니다. 치우가 너무 강대하였기 때문입니다. 승승장구로 나가던 치우는 전쟁판에서 소홀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창에 찔려 죽었습니다. 소홀한 거지요. 죽을 때 나이가 41살이였습니다.     남영전 시가창작 세미나에서 참가자들이 남영전 토템시에 대해 담론하고 있다   황제가 대단한 것은 류비와 같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치우성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두령이 죽으니 대성통곡할 것이고 염황의 군대들은 좋다고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때 황제가 군기를 하나 들었는데 치우의 화상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전쟁영웅이라는 뜻이지요. 치우의 군대들이나 염황의 군대들이나 다 존경하라, 모든 군대들은 치우를 영웅으로 숭배하라는 거지요. 량측의 군대들은 모두 놀랐지요. 황제가 통이 큰 사람이 아닙니까. 흉금이 넓고 시야가 넓고 큰 지혜를 가진 인물이지요. 그 당시 사람들은 황제가 이런 사람이였구나 하면서 놀랐지요. 치우가 죽은 후 치우 군대는 몰락되고 황제는 당연히 수령으로 되였습니다. 제일 큰 인물로 된 거지요. 세개 부락에서는 황제가 저희들을 령도하는 인물이라고 받들면서 세개 부락의 공동 수령으로 추대되였습니다.     1980년 남영전 선생은 통화에서 《장백산》 잡지를 창간하고 사장 겸 주필을 담임했다   공동 수령으로 된 다음 황제는 또 기발 하나를 내들었습니다. 무슨 기발인가 하면 룡과 봉황을 그린 기발을 든 것입니다. 그러면서 왜서 룡과 봉황인가를 설명한 거지요. “왜서 룡과 봉황이냐? 룡을 보라, 우리의 조상 복희씨와 녀와씨, 실상은 우리 세개 부락의 조상이다. ” 염제도 그렇고 황제도 그렇고 치우도 그렇고, 치우 이름부터 실상은 세 사람 중에서 제일 정통입니다. 황제는 녀와씨의 후손으로서 외손입니다. 그다음 염제가 복희씨 아버지의 계통입니다. 그래서 황제가 우리는 다 복희씨와 녀와씨의 후손들이라고 말하니 모두 동의했지요. 그리고 황하를 보면 황색의 룡과 같습니다. 황제가 대단한 게 그때 룡을 그렸는데 치우의 토템인 소의 머리를 룡의 머리로 한 것입니다. 지금도 룡의 머리를 보게 되면 소의 머리입니다. 룡의 몸뚱이는 뱀의 몸뚱입니다. 복희, 녀와씨 토템인 뱀 몸뚱이를 룡의 몸뚱이로, 염제와 치우의 토템인 소의 머리를 룡의 머리로 그다음 염제집단의 토템인 악어 잔등의 비늘을 룡 몸뚱이의 비늘로 하였습니다.     2011년 10월 복건성 하문에서 열린 제3회 중국시가제 포럼에 참석하여 대회에서 발언하는 남영전 시인   그리고 황제집단의 곰, 범, 표범 이런 맹수들의 날카로운 발톱을 룡의 발톱으로, 치우의 새 토템의 날개를 룡의 날개로 하였습니다. 이렇게 세 부락의 토템을 합쳐서 만들어진 게 룡이 되니 세 부락에서는 룡이 확실히 세 부락의 공동 토템이 맞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때 룡 토템이 나온 것입니다. 5천년 전 일이지요. 중국의 룡 토템이 이렇게 되여 나오게 된 겁니다. 룡이 상상 동물이 아닙니까. 이 상상 동물을 누가 만들었는가 하면 황제가 만들어낸 겁니다. 이걸 보게 되면 황제가 정말 대단한 거지요. 치우부락의 봉황 토템이 뭔가 하면 천도(天道)를 가리키는 토템입니다. 봉황은 천도를 밝혀줍니다. 황제는 치우집단의 천도를 가리키는 봉황 토템을 공동 토템으로 정하였습니다. 사람은 자연을 따라야 한다는 이는 봉황 토템에서 나타난 것입니다. 그때로부터 중국에서는 룡과 봉황을 세개 부락의 공동 토템으로 하였습니다. 세개 부락이 합쳐서 점차 중화민족을 형성한 겁니다. 이렇게 토템에 대해서 간단하게 례를 들었는데 매개 씨족마다 토템이 있기 때문에 씨족 토템이 실상은 한 300개 정도 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토템이 있는 성씨가 한 300개 됩니다. 그러니깐 300개 성씨가 실상은 300개의 토템인 거지요. 이렇게 중화민족이 점차 형성되였습니다. 글 구성: 리철수기자 영상: 정현관 최승호 기자
7723    토템과 남영전 시인 댓글:  조회:3109  추천:0  2020-06-27
[구술 ] 토템과 성씨의 기원 편집/기자: [ 정현관 ] [ 길림신문 ]  [ 2020-04-24 ]      —중화인민공화국 창립 70돐 기념 특별기획-[문화를 말하다-48](남영전편-3) 옛날에 우리 인류는 성씨가 없었습니다. 원시공동체사회에서 성씨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토템이 나타나면서 인류는 성씨를 가지게 되였지요. 그래서 인류가 성씨를 가지게 된 것은 대단히 진보적인 것이였으며 인류문명사회에서 획기적인 사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성씨가 있기 때문에 사람과 사람을 구분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럼 성씨는 어디에서 온 것일가요? 바로 조상들의 토템숭배에서 온 것입니다. 옛날 사람들은 반드시 어떤 물체와 관계가 있어서 조상이 탄생하였다고 생각했습니다. 관계가 있는 물체를 친척처럼 생각한 것이지요. 친척이라는 말이 토템이라는 말입니다. 1903년 중국의 엄복이라는 학자가 번역을 하면서 토템이라는 말이 나오게 되였습니다. 지금 따져보면 토템이라는 말은 외국에서 들어온 것이 아니고 실상은 묘족들의 방언입니다. 조선민족의 제일(第一) 성씨가 뭔가 하면 왕씨입니다. 왜냐하면 조선민족은 단군 왕검을 시조로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일 성씨는 바로 왕씨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계산해 보면 왕씨는 지금으로부터 4353년 전에 탄생했습니다. 그것은 왜냐하면 단군신화가 기원전 2333년에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옛날에 하늘나라에 천제 환인이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아들이 환웅이였는데 하늘나라에서 인간세상을 동경해 내려가 보고 싶어했습니다.   2007년 길림신문사 《창업의 길》 도서출판좌담회에서 발언하는 남영전(왼쪽 두번째). 그래서 아버지가 아들의 뜻을 알고 천부인(天符印) 세개를 주면서 땅에 내려가 인간세상을 다스리라고 하였습니다. 환웅은 신단수를 타고 내려왔습니다. 환웅이 풍백, 우사, 운사 등 세 사람과 함께 인간세상을 다스릴 무렵 그때 한 동굴에 범과 곰이 살고 있었습니다. 범과 곰이 인간세상을 동경했습니다. 자기네들도 사람이 되고 싶은 것이였습니다. 그래서 신단수 앞에서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빌었지요. 환웅이 곰과 호랑이에게 쑥 한줌과 마늘 20개를 주면서 “너희가 이것을 먹고 동굴 안에서 백일 동안 금기를 지키면 사람으로 변할 수 있으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곰은 쑥과 마늘을 먹고 착실하게 금기를 지켜 예쁜 녀자로 변했지요. 웅녀로 된겁니다. 그러나 성질이 급한 호람이는 금기를 지키지 못해 사람으로 화신하지 못했습니다. 사람으로 화신한 웅녀는 혼인상대가 없어 신단수 아래서 아이를 갖게 해달라고 빌었습니다. 그리하여 환웅이 사람으로 변하여 웅녀와 혼인을 맺아 아들을 보았으니 그가 바로 단군 왕검(檀君王俭)이였습니다. 단군이 바로 조선민족의 조상인 것입니다. 이는 기원전 2333년의 이야기입니다. 그럼 단군의 성씨가 왜서 왕씨였을가요. 제가 한번 분석을 해봤습니다. 일반적으로 호랑이를 산중의 왕이라고 하는데 단군의 가족들은 산중의 왕은 호랑이 아니라 곰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곰은 금기를 지켜 사람으로 변했지만 호랑이는 사람으로 변하지 못했으므로 곰보다 한수 떨어진다고 생각해서 곰을 산중의 왕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그래서 왕씨를 곰의 대변인이라고 여기고 성씨를 왕씨라고 한 것입니다.   2007년 재한화교협회 한성호 회장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남영전(왼쪽). 그럼 왕씨가 조선민족의 제일 성씨인데 왜서 지금 왕씨 성이 거의 없을가요? 력사적으로 보면 왕씨 성을 가진 사람이 많았습니다. 고려왕조 5백년 력사에서 성씨가 가장 많은 사람이 왕씨였습니다. 그런데 1392년에 고려가 망하고 리씨 조선으로 바뀌면서 왕씨 성들은 피해를 면하기 위해 자신의 성을 바꾸어버린 것입니다. 왕(王)자 우에 인(人)자를 붙여 온전할 전(全)씨로 바꾸거나 량쪽에 내리금 하나씩 그어 밭 전(田)씨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또 옥(玉), 마(馬), 금(琴),김(金) 등 성씨로 고친 것입니다. 이렇게 왕씨 성은 하루아침 사이에 없어져버렸습니다. 지금의 전씨, 마씨, 옥씨 등 성들은 전부 다 왕씨에서 온 성들입니다. 이렇게 왕씨의 토템은 곰인 것입니다. 리씨 성의 토템은 범입니다. 왕씨가 조선민족의 첫번째 성씨라면 두번째 성은 바로 박씨입니다. 박씨의 조상은 박혁거세입니다. 기원전 69년에 박씨 성의 조상인 박혁거세가 세상에 탄생했습니다. 혁거세는 하늘이 내린 알에서 나왔습니다. 그 시대 선인들은 아침에 뜨고 저녁에 지는 해를 날개 달린 태양새로 보았습니다. 이 자주색 알은 곧 하늘이 내린 태양새의 알이지요. 때문에 혁거세는 태양의 아들, 태양은 그의 어머니 토템입니다. 무릎 꿇고 절하는 백마, 어쩌면 이 백마가 하늘에서 알을 실어왔고 또 알을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땅에 닿는 기운은 소식을 알리는 번개, 혁거세의 탄생을 알리는 토템수호신입니다.   토템문화 답사를 하고 있는 남영전.  알에서 나온 동자를 동천에서 목욕시키니 몸에서 광채가 일어났습니다. 빛이 인간세상에 왔다 하여 그의 이름을 혁거세(赫居世)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알은 박처럼 둥글다 하여 성을 박씨로 하였습니다. 세번째 성씨는 고씨입니다. 고주몽이라는 고씨이지요. 여기에는 이런 신화가 있습니다. 동부여 금와왕이 하루는 태백산 우발수에서 우연하게 귀양살이 신세인 하백의 딸 류화를 만났습니다. 그녀를 가엾게 여겨 궁중에 (데려다) 보살펴주었더니 이상하게도 해빛이 쫓아와서 규방의 그녀를 비추었습니다. 류화가 몸을 피했지만 해빛은 그녀를 따라 다녔습니다. 이로 인해 류화는 임신하여 몸을 풀었는데 놀랍게도 아이가 아니라 알이였습니다. 그 알 크기는 다섯되나 되였습니다. 왕은 상서롭지 못하다 여겨 그 알을 개, 돼지우리에 버렸더니 개와 돼지는 먹지 않았고 돼지는 핥아주었으며 마구간에 버렸더니 소가 젖을 먹여주었고 길에 버렸더니 소나 말이 피해가고 들판에 버렸더니 새와 짐승들이 덮어주었습니다. 왕이 깨뜨리려 해도 깨여지지 않으니 다시 류화에게 돌려주었습니다. 류화가 알을 싸서 따뜻한 곳에 두었더니 동자가 껍질을 깨고 나왔는데 기골이 영특하고 기이하였습니다. 나이 7세에 벌써 스스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면 백발백중이였습니다. 풍속에 활 잘 쏘는 사람을 주몽이라 하였으므로 동자의 이름을 주몽이라 불렀습니다.   2014년 길림시조선족예술관에서 토템문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남영전. 금와왕에게는 아들 일곱이 있었는데 재주가 주몽을 따르지 못하니 맏이 대소가 왕에게 “주몽은 사람이 낳은 것이 아니니 만약 일찍 도모하지 않으면 후환이 있을가 두렵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금와왕이 받아들이지 않자 왕자는 다른 장수들과 주몽을 해치려고 음모를 꾸몄습니다. 이를 알아차린 어머니 류화는 아들 주몽에게 “그들이 너를 해치려 하니 너의 재주와 지략이라면 어디 간들 못살겠니, 속히 떠나거라.”라고 말합니다. 주몽이 도망가는데 큰 강이 앞을 가로막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천제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자다. 오늘 도망가는 길인데 뒤쫓는 자가 있으니 어찌하면 좋겠느냐?”라고 말하자 물고기와 자라들이 나타나 다리를 놓아 주몽을 건너게 한 다음 사라졌으므로 뒤쫓아오던 기병들은 못 쫓아오게 되였습니다. 이것은 토템이야기입니다. 졸본부에 이른 주몽은 비류수가에 초막을 짓고 도읍지를 정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천제의 아들이므로 성을 고씨로 하였습니다. 왜서 고씨라고 하였는가 하면 아버지 천제가 고신씨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고주몽의 외할아버지 하백도 중국의 황하류역에서 황하를 다스린 실존한 사람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다음 네번째 성은 김씨입니다. 조선민족의 김씨는 김해 김씨와 경주 김씨가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김해 김씨의 조상은 김수로입니다. 김수로에 대해 간단히 이야기하자면 사람들이 하늘에서 자주색 줄이 늘어져 땅에까지 닿은 것을 발견하고 거기에 동여있는 붉은 보자기로 싼 금함(金盒)이 있어 그것을 열어보니 안에 태양처럼 둥근 황금알 여섯개가 들어있었습니다. 그 여섯개 알 중에서 제일 먼저 알을 까고 나왔다고 하여 이름을 수로(首露)로 하고 금함, 황금알에서 나왔다고 해서 성씨를 김씨(金氏)라고 부르게 되였습니다.   2011년 중국작가협회와 인민일보사에서 조직한 성세민족정응모에서 수상한 남영전 시인(오른쪽 세번째). 그리고 허씨 성은 인도에서 건너왔다고 합니다. 김수로가 왕위에 오른 뒤 인도 공주를 왕후로 맞이하였는데 성은 허씨요 이름은 황옥이라고 불렀습니다. 김수로와 허왕후 사이에 자식 열명이 태여났는데 큰아들은 김수로의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하고 둘째와 셋째 아들은 어머니의 성씨를 따라 성을 허씨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아들들은 삭발하고 절에 들어가서 중이 되였습니다. 여섯번째 성씨, 석씨 성의 조상은 석탈해입니다. 신화를 보게 되면 주몽의 탄생과 비슷합니다. 어머니로부터의 란생(卵生)입니다. 주몽의 그 알은 짐승먹이로 버려졌지만 탈해는 배에 실려 바다에 버려졌습니다. 홍룡의 호위로 탈해가 실린 배는 신라 아진포까지 왔는데 또 까치들의 보호를 받았고 까치들이 사람들에게 소식을 알렸으니 룡과 까치는 탈해의 충실한 토템 수호신이였습니다. 탈해라는 이름은 궤를 열(解) 때, 알을 깨(脱)고 나왔다 하여 이름을 탈해(脱解)라 하였고 까치의 보호를 받았다 하여 까치 작(鹊)자에서 석(昔)자를 떼여서 성을 석(昔)씨로 하였으니 성씨와 이름 모두 토템 표지입니다. 일곱번째 성씨는 남평 문씨입니다. 옛날 조선반도의 남평이라는 곳에 련못이 하나 있었는데 그 련못의 한가운데에는 큰 바위가 있었습니다. 어느 하루 바위 우에 석함이 나타났는데 왕이 신하를 시켜 가보게 하니 그 석함 안에서 어린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습니다. 신하가 석함을 열어보니 안에는 어린 동자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왕이 속으로 이는 하늘이 내려보낸 은혜라고 생각하고 동자를 궁궐에 데려다가 키우도록 하였습니다. 그 아이는 다섯살이 되자 세상물정을 다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아이의 이름을 다성이라고 지었습니다. 성씨는 아이가 나온 석함에 글월 문(文)자가 새겨져 있었으므로 문씨로 정했습니다.   단군 왕검(자료사진), 조선민족의 제일 성씨인 왕씨성의 시조이자 역시 조선민족의 조상으로 전해내려오고 있다. 최씨 성의 토템은 금돼지입니다. 돼지는 복의 상징입니다. 옛날 한 고을이 있었는데 부임되여 오는 원님마다 부인이 감쪽같이 사라져 아무리 찾아도 찾을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원님들은 누구도 이곳에 오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때 한 담대한 사람이 자처해 오겠다고 하였습니다. 새로 부임한 원님은 명주실을 가만히 부인의 치마에 매놓았습니다. 이번에도 원님 부인이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부인의 치마에 매놓은 명주실을 따라갔습니다. 그렇게 찾아갔더니 한 심심산중에 큰 바위가 있는데 명주실이 돌밑으로 들어갔습니다. 바위 밑으로 들어가 보니 글쎄 부인이 금돼지한테 갇혀있는 것이였습니다. 원님은 가지고 간 노루가죽으로 금돼지를 처치하고 자기 부인을 구출해서 데리고 왔습니다. 금돼지가 노루가죽을 제일 무서워하였던 연고로 그다음부터는 감히 범접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온 부인이 임신하였는데 후에 아이를 낳았습니다. 금돼지의 아이라고 생각한 원님이 화가 나서 벌판에 아이를 버렸는데 이때 학이 나타나서 그 아이를 보살펴주는 것이였습니다. 후에 한 로파가  나타나서 아이를 데려다가 키웠는데 일곱살이 되니 글 읽는 소리가 장안성(지금의 경주)까지 들렸습니다. 그 아이가 바로 최치원입니다. 우리는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성씨가 어떻게 유래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글 구성: 리철수기자 영상: 정현관 최승호기자
7722    토템과 남영전 시인 댓글:  조회:3091  추천:0  2020-06-27
[구술 ]토템과 문화의 기원 편집/기자: [ 정현관 ]  [ 길림신문 ] [ 2020-04-17 ]      —중화인민공화국 창립 70돐 기념 특별기획-[문화를 말하다-47](남영전편-2) 인류의 문화기원은 아주 재미있는 화제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면 동물과 사람의 구분은무엇인가 하면 동물은 문화가 없습니다. 동물과 사람의 공통점은 모두 본능이 있는 것입니다. 동물도 노래를 한다거나 구애를 한다거나 둥지를 튼다거나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생존본능이지 문화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사람과 동물의 구분은 사람은 문화를 창조하고 발전시킨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문화를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동물과 점점 차이를 보입니다. 동물은 태여나서 동물의 본능으로 성장하고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지요.   2007년 11월 《도라지》발전연구회 설립대회에 참가한 남영전 시인 왜서 토템과 인류의 문화를 련결시켰는가? 인류의 문화는 토템문화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토템문화가 인류문화의 원천문화라고 볼 수 있습니다. 토템의 출현은 인류문화발단의 징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토템은 어떻게 산생되였을가요? 사람과 동물의 또 하나의 구별이 있는데 바로 만물유령입니다. 만물은 모두 령혼이 있다는 옛날 사람들의 생각이 토템을 산생시킨 계기가 되였지요. 만약 이것이 없었다면 토템이 산생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중국의 이족 시인이며 작가협회부주석인 지디마가(吉狄马加)는 창작담에서 “내가 글을 쓰는 것은 만물유령을 믿기 때문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만물유령이라는 것은 세상의 만물은 모두 령혼이 있다는 얘기입니다. 피뜩 생각하면 미신 같은 소리일 수도 있지만 현대과학이 발전할수록 증명되고 있는 것입니다. 동물과 식물은 그래도 리해하기 쉽지만 생명이 없는 물건 례를 들면 걸상, 돌, 자갈 이런것도 령혼이 있는가에 대해서는 납득되지 않는 말이라고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지금 과학가들은 세상의 모든 물체는 다 생명체라고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명체라는근거는 진동한다는 것이 실험에서 증명된 겁니다. 《물은 답을 알고 있다》는 책에서 이런사실들을 상세히 소개하고 있습니다.    토템과 문화의 기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남영전 선생   토템을 인류문화의 기원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언제 나타났을가요. 시간적으로 따져보면 구석기시대 말엽에 나타 났습니다. 즉 1.3만년 전에 나타났습니다. 무슨 근거로 그렇게 말하는가?  1.3만년 전 구석기시대에 사람들은 동물을 사냥하여 먹은 후에 그 동물들의 뼈를 그냥버리지 않고  동굴 안에 아주 정교하게 배렬해 놓았습니다. 그래서 토템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그 당시 사람들이 동물을 잡아먹은 후 무슨 제사의식활동 같은 것이 있었다고 인정했습니다. 이를 토템제의(图腾祭仪)라고 합니다. 그후에 와서또 증명된 것이 암벽화입니다. 바위에다 동물그림을 그리고 색칠까지 했습니다. 시간적으로 봤을 때 지금으로부터 3천년 이상 됩니다. 이것이 바로 토템숭배의 증거입니다. 암벽화를 그린 장소가 바로 토템제의의 장소였습니다. 토템제의를 례를 들어서 설명한다면 곰숭배를 할 경우 사람들은 곰을 자신들의 조상이라고 숭배합니다. 하지만 또 곰을 사냥하여 먹기도 하지요. 사람들은 곰을 사냥하여 먹으면곰의 힘을 가지게 된다고 인정하지요. 옛날 사람들도 자신이 힘이 있고 잘 되기를 바란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런 과정에 토템제의 활동을 가졌습니다.   2006년 3월 저명한 시가 평론가이며 수도사범대학 중국시가연구쎈터 주임인 오사경(오른쪽 첫번째)과함께 있는 남영전 시인 그후 토템숭배를 통해 원시공동사회인 모계사회가 형성됩니다. 당시 인간은 동물과 마찬가지로 무리를 지어 살았습니다. 동물들의 피해를 막기 위해서 무리를 지어 살았지요. 그러다가 토템문화가 점차 발전하면서 모계사회를 형성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렇게 모계사회로부터 부계사회로 또 노예사회로 그리고 봉건사회로 발전해 왔습니다. 모계사회는 말그대로 어머니 중심의 사회이지요. 우리 나라 귀주성과 운남성에 아직도 모계사회의 흔적을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후에 수렵활동이 중시되면서 남자들의 위치가 점점 올라가기 시작합니다. 녀자들은 집안에서의 활동이 위주로 되였구요. 이렇게 부계사회로 바뀌게 되지요. 부계사회 후기에 들어서서 재산으로 인해 노예사회가 출현하게 됩니다. 그리고 후에는 또봉건사회로 발전하게 됩니다. 문화가 산생한 원인은 두가지인데 하나는 토템제의 그리고다른 하나는 토템금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2006년 수도사범대학에서 열린 남영전시가연구세미나 곰을 숭배하는 씨족들이 곰을 잡아서 먹은 후 곰뼈를 가죽과 함께 제의를 지내는 장소의한가운데에 놓습니다. 그런 후 사람들이 빙 둘러서 앉거나 서서 제의(祭仪) 행사를 벌였습니다. 제의 내용은 주요하게 참회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일부러 해치려고 하는 것이아니니 용서를 빕니다. 당신의 용기와 힘과 지혜를 주시오. 그럼 제가 잘하겠습니다.’ 이렇게 여러 사람들이 모여서 말하다 보니 점점 노래로 되는 것이였습니다. 그리고 또 토템제의 행사를 할 때 사람들은 동물의 동작을 모방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곰이면 곰의 동작 그리고 학일 경우는 학의 동작을 모방하였지요. 이것이 바로 무용의 원초가 된 거지요. 지금 무대에서 공연하는 공작새춤을 보게 되면 하나하나의 움직임들이 전부 다 공작새의 동작을 모방한 것들입니다. 지금도 어떤 곳에서는 원주민들이 가지고 있는 동작들 중 많은 것들이 토템동물의 동작을모방한 것임을 볼 수 있습니다. 올림픽운동회를 열 때 세계 각 나라들에서는 자기 나라의문화가 유구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원시사회나 아주 오래전의 문화를 전시하군 합니다.  그것은 바로 이 민족은 력사가 유구하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지요.   2014년 길림시조선족군중예술관에서 남영전시인의 토템과 민속문화 관련행사가 열렸다   수천년 전에 고대인들이 암벽에 그린 채색벽화는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그 색갈이 지워지지않고 있습니다. 지금 상상해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지금은 작업 도구가 발전하여 아무렇지도 않지만 수천년 전에 이렇게 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 울산에암벽에 고래그림을 그린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박물관 해설원의 소개에 의하면 3천년 전의것이라고 합니다. 중국의 암벽화는 귀주, 사천, 운남, 호남 등 지역에 많습니다. 토템제의의장소로 리용된 곳이였습니다. 이렇게 고대 씨족들의 토템제의를 통해 노래가 나왔고 춤이 나왔으며 그림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암벽화 등 그림을 그리는 것을 통해 오랜 세월을 흐르면서 상형문자가 나오게 된것입니다. 중국의 상형문자를 보게 되면 실상은 그림이라고 할 수 있지요. 곰 하면 상형문자가 곰그림과 같습니다. 상형문자가 토템그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2007년 연변민들레생태원에서 발언하는 남영전선생 문자가 나온 후 사람들은 성씨가 점차적으로 있게 됩니다. 동물들은 성씨가 없지요. 사람은 성씨가 있음으로 하여 쉽게 구분할 수 있습니다. 현대사회에서 사람은 매개인으로 분류되는데 매개인마다 하나의 대단한 기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아주 오랜 성씨 력사를 가지고 있으며 변함이 없이 이어서 내려오고 있습니다. 노래, 춤, 그림, 문자그리고 성씨에 이르기까지 토템에서 기원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토템금기에 대해 말하자면 유명한 정신심리학자 프로이더의 《토템금기》라는 책이 있습니다. 옛날에 사람들은 토템을 숭배했기 때문에 이와 관련한 금기가 많았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규칙들이였지요. 례를 들면 같은 토템 끼리는 ‘동성불동혼’ 즉 수천년 전부터 같은 토템 사이에 결혼하면 안되다는 금기 같은 것을 세운 것입니다. 이는 후대 번식에도 좋은 작용을 놀았지요. 그리고 부동한 토템 끼리 결혼을 함으로써 씨족과 씨족 사이에 친척관계가 형성돼 화목을 유지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힘을 키울수 있었습니다. 토템금기로 인하여 많은 풍속들이 형성되였습니다. 이렇게 인류문화가 한발자욱씩 발전돼온 것입니다. 노래와 무용, 그림, 문자와 성씨 그리고 많은 풍속습관들이문화의 한개 내용들이지요.   2008년 토템시학술세미나에 참석한 남영전시인(왼쪽) 이런 토템신화가 있습니다. 옛날 신라 때 비처왕이 행차를 하였는데 까마귀가쥐를 데리고 비처왕 앞에 나타나서 울었습니다.쥐는 왕더러 까마귀를 따라가라고 하였습니다.왕은 쥐의 말대로 까마귀를 따라갔습니다.한참 따라가다가 돼지두마리가 싸우는 것을 보고 그것이 신기해 구경을 하다가 그만 까마귀가 가는 방향을 잃었습니다.한참 방황하는데 이 때 한 로인이 련못에서 나와 편지 한통을 주었습니다. 편지 겉봉에는 이렇게 씌여있었습니다.“이것을 뜯어보면 두사람이 죽고 뜯지 않으면 한사람이 죽는다.” 한사람이란 왕 자신인 것을 알고 편지를 뜯으니 안에서 “射琴匣(거문고 갑을 쏘라!)” 세글자가 나왔습니다. 왕이 급하게 궁으로 돌아와 거문고 갑을 발견하고 쏘았더니 그 속에 내전의 분수승(焚修僧)이 궁주(왕비)와 간통하고 있었습니다.그래서 두사람은 처형을 받았지요. 그때부터 정월 16일을 오기일 즉 까마귀 제사날로 정하여 찰밥으로 까마귀를 대접하는 풍속이 민간에서 행하게 되였습니다.이렇게 토템으로 인해 많은 풍속들이 형성되였으며 우리의 문화가 출현했습니다. 글 구성: 리철수기자  영상:정현관 최승호 기자
7721    토템과 남영전 시인 4 댓글:  조회:2732  추천:0  2020-06-27
  지상토론(4) 토템문화, 생존개척을 위한 디딤돌 편집/기자: [ 리철수 ] [ 길림신문 ]  [ 2020-06-23 ]  남영전선생의 토템문화를 접하면서 저도 모르게 문화와 민족이란 명사에 대해 다시금 더듬어보게 되였다. 확실히 우리는 문화와 민족이란 말을 자주 입에 올리기는 하지만 그것들이 내포하고 있는 함의가 너무 방대하고 추상적이여서 단마디명칭으로 정의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해하면서도 몽롱한 뜻을 리해하고 인식하려면 토템문화를 접해야 하고 그로 인해 토템에 대한 연구로부터 인류문화의 형성과 발전 그리고 민족의 생성과 그 발전 려정을 투철하게 더듬어볼 수 있음을 서서히 느끼게 된다. 필자를 포함한 적지 않은 사람들이 뿌리 깊은 심오한 토템문화에 대하여 나름대로 일종의 미신적인 옛말로 가볍게 여겨온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럼 과연 토템이란 무엇인가? 토템은 “사람과 자연은 ‘혈연관계'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사람은 자연에서 왔다. 사람은 자연의 후예다. 이것을 말하는 게 토템문화다.”라고 남영전선생은 피력하였다. 글을 읽어내려가다 보면 토템문화는 인류문화의 원천문화라는 것, 다시 말해서 토템으로 인해서 우리 인류문화가 생겼고 사람의 성씨가 생겼으며 토템 씨족으로부터 민족이 형성되였고 토템숭배로부터 민족의 전통문화와 전통풍속이 형성되였다는 상세하면서도 설복력있는 관점과 해설이 일목료연하게 안겨온다. 문화는 “개인과 군체를 식별하는 의식주행어의 표지”라는 것, 전통문화의 핵심은 “사람과 자연은 친척”이라는 것과 같은 관점 혹은 정의는 너무 새롭고 창의적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특히 조선민족의 제일(第一) 성씨가 김씨가 아닌 왕씨(​王氏)라는 놀라운 사실을 비롯해서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성씨의 유래를 알 수 있어서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한 기분이였다. 남영전선생이 얘기하는 토템문화는 문화와 민족, 인간과 자연지간의 내재적 상관 관계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게 한다. 특히 글에 빠지다 보면 인간과 자연의 공존에 대해 다시 곰곰히 사색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은 반드시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야 하고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는 길을 찾아야 한다. 어쩌면 그 길을 찾기 위한 과제가 궁극적으로 토템에 대한 연구와 인식이 아닌가 나름대로 생각해본다. 자신의 삶을 객관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며 죽음과 삶의 시간 속에서 자신을 전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을 때 인간은 종착역을 향한 힘든 려정에서 방황함이 없이 꿋꿋이 걸어갈 수 있지 않을가! 굽어보면 인류는 확실히 ‘인간, 기계, 자연 ’이 지혜롭게 공존해야 하는 새로운 문명을 맞고 있다. 공존의 지혜를 찾지 못하면 파멸은 예정돼 있다. 물질적 풍요로움을 위한, 자연을 착취하는 급류에 속절없이 떠내려가고 있는 인류, 비극을 잠재울 수 있는 열쇠는 오직 인간에게 있다. 오늘날 인간은 있는 그대로의 자연과 공존하기보다는 자신의 필요와 욕구에 따라 자연의 존재방식을 변형시킴으로써 자연과의 관계를 인위적으로 왜곡하고 있다. 자연법칙에 종속되여 있는, 자연의 일부분으로서의 인간은 하루빨리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는 어디에서 왔고 누구이며 어떤 모습으로 어느 모퉁이에 머물고 있으며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지에 대한 성찰, 그것이 기울어진 삶의 운동장을 바로잡는 급선무인지도 모른다. 토템에서 론하고 탐구하는 리론적 시도는 끊임없이 물질에 종속 당하고 물질의 노예로 전락하는 현대인에게 정신적 오아시스를 제공할 수 있다는 필자 나름대로의 생각이다. 모종의 의미에서 토템문화에 대한 탐구, 어쩌면 그것이 생존개척을 위한 희망의 설계도가 아닐가! /주해봉(1963년생, 흑룡강성 탕원현조선족고급중학교 교사 출신, 연변대학 조선언어학과 통신학부 본과 졸업, 여러 잡지와 신문에 소설, 수필, 시 다수 발표. 현재 한국 서울에 거주)
7720    토템과 남영전 시인 3 댓글:  조회:3121  추천:0  2020-06-27
지상토론(3)재미 있고 알기 쉽게 엮은 토템이야기 편집/기자: [ 리철수 ]  [ 길림신문 ] [ 2020-06-18 ]  ㅡ남영전선생의 를 읽고 남영전선생은 중국 조선족사회에서 널리 알려진 걸출한 시인이고 언론인이고 학자이다. 그는 우리 글은 물론 중문도 아주 능란하게 구사하여 중국의 주류사회, 주류문단에서도 ‘중국 신시 100년 100인’에, ‘중국의 10대 걸출한 민족시인’에 떳떳이 이름을 올린 자랑스러운 민족시인이고 문화인이다. 뿐만 아니라 수십년을 꾸준히 인류문화의 원천이고 뿌리인 토템문화를 깊이 있게 연구하고 또 널리 전파하는데 큰 업적을 쌓고 있는 존경스럽고 돋보이는 공헌자이기도 하다. 최근 남영전선생이 《길림신문》에 펴낸 는 글 역시 무게 있고 폭이 넓으면서도 아주 재미나게 엮어 애독자들의 큰 흥취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글은 원시 인류문명의 발단인 토템의 출현, 토템숭배로부터 인류, 민족, 력사, 문화, 종교 등 넓은 령역을 고루 살펴보면서 원시문명과 현대문명이 의존하고 발전하게 된 토템이란 원초적 문명의 씨앗을 생동하고 체계적으로 엮어서 보여주고 있다. 특히 돋보이는 것은 아츨하게 먼 옛날 우리 조상들이 만들어내고 조상들이 물려준 것이여서 퍼그나 어렵다면 어렵고 난해하다면 난해하기도 한 전통적인 뿌리문화인 토템 명제를 우리 독자들이 알아듣기 쉽고 또 흥미를 가지도록 재미나게 엮어 이야기해주고 있다는 그것이다. 남영전선생이 엮은 이야기를 따라가 보면 인간 생활의 기본인 의,식,주,행,어 문화개념을 풀이도 해주고 인간과 자연, 인간과 동물을(문화가 있냐 없냐) 비교도 해보면서 만물은 모두 령혼이 있다는 옛 사람들의 생각이 바로 토템을 산생시킨 계기임을 알려주면서 우리 민족의 성씨, 우리 민족의 혼례, 장례풍속…지어는 결혼식 때 왜 큰상에 수탉이 오르고 수탉의 주둥이에 고추를 물리우느냐는 등 구체적인 세절에 이르기까지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곁들며 형상적으로 생동하게 설명해주고 또 구경을 시켜주고 있다. 그럴듯 퍼그나 엄숙하고 퍼그나 딱딱하게 안겨올 수도 있는 토템이란 문화지식을 독에서 푹 익어 나오는 김치처럼 대가 다운 목소리로 “친족, 친척이란 말이 토템이란 말”이라며 진지하게 이야기하는가 하면 또 누구나 알아듣기 쉽게 풀어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토템문화에 접촉이 없어 생소하게 느껴지는 사람들마저도 가슴에 와 닿고 실물을 보듯이 그 륜곽과 모습이 머리에 그려지도록 한다. 이는 글을 다루고 주무르는 필자를 포함한 우리 문인, 학자들이 따라 배울바라고 본다. 이 또한 덕망높은 남영전선생이 우리 독자들을 배려하는 어진 성품이고 덕량이 아닐가 생각한다. /박일( 소설가, 흑룡강신문사 고급편집, 부총편집, 현재 흑룡강신문사 론설위원)
7719    토템과 남영전 시인 2 댓글:  조회:2989  추천:0  2020-06-27
지상토론(2): 우리가 우리를 알기 위한 필수적인 과제 편집/기자: [ 리철수 ] [ 길림신문 ]  [ 2020-06-16 ]    저자 현춘산 현춘산 프로필: 1950년 흑룡강성 수화시 북성촌에서 출생 다년간 중소학교 교사로 근무 연변대학 통신학부 조문전업 졸업 중국소수민족작가학회, 흑룡강작가협회, 연변작가협회 회원 장편소설 1부, 수필집 3부 출판 《흑룡강신문》 신춘문예상, 흑룡강소수민족문학상 등 다수 수상 ㅡ1ㅡ 2018년 여름, 나는 위챗그룹에서 우연히 남영전선생을 알게 되였다. ‘토템시인 남영전'이라 하면 국내외에 명성을 떨친 분이고 그의 토템시도 신문이나 잡지에서 보아왔지만 한번도 만나뵙지 못한 처지였다. 서로 만나보지 못한 상황에서도 자유롭게 소통이 이루어졌으니 그것은 중국고대력사를 제재로 쓴 나의 소설 몇편이 계기로 되여서였다. 둘 사이에 소통이 이루어지고 위챗으로나마 자유롭게 말이 오가자 나는 토템에 대해 문의하게 되였다.그때까지 나는 토템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던 것이다. 남영전선생은 내가 중국고대사를 제재로 소설을 쓰는지라 고전(古典)을 많이 읽을 텐데 중문으로 읽고 있는가고 물었다. 나는 20년전부터 북경과 광주에서 생활하였기에 많은 자료를 중문으로 볼 수밖에 없다고 대답했다.그것은 사실이였다.그렇다고 내 중문수준이 높은 것은 아니였다. 대도시의 주류문화권이 나를 그렇게 하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핍박에 의해 량산에 오른 것’이 오히려 다행이였다 할가. 중문서적들과 중문자료들이 나의 시야를 넓혀준 것이다. 선생은 중문으로 고전을 읽는 수준이면 학술저작을 볼 수 있을테니 중국당대의 토템문화학자 하성량(何星亮)의 저서《토템과 중국문화(图腾与中国文化)》를 읽어보라고 권고했다. 그래서 나는 토템문화와 접촉하게 되였다. 나는 《토템과 중국문화》를 몇십페지 읽은 후 선생에게 글이 잘 읽혀진다고 전했다. 선생은  기뻐하면서 지금 우리의 조선족지식인들중 중문으로 학술서적을 읽는 사람이 적다면서 그래서야 어떻게 많은 정보를 접수하고 많은 지식을 얻을 수 있겠는가고 개탄하였다. 하성량의 《토템과 중국문화》를 사서 여럿에게 보냈으나 끝까지 읽은 사람이 없다는 것이였다. 더구나 토템문화 유관 자료는 중문으로 출판된 것밖에는 없는 상황에서 말이다. 고급지식인으로서 중문학술서적을 읽지 않는다는 것은 조선족의 비애가 아닐 수 없다고 선생은 안타까와 했다. 필자는 하성량의 《토템과 중국문화》를 세번 읽고 요점은 필기도 했다. 《토템과 중국문화》는 나에게 적어도 토템문화는 세계적 범위에서 보편적으로 존재한다는 문화현상이라는 사실과 토템문화를 연구해야 할 필요성을 알게 하였다. 그러나 남영전선생이 지적한바와 같이 이 책에는 결함이 있었다. 어떻게 토템을 판단하고 식별할 것인가 하는 표준이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남영전 시인은 토템시 창작과정에 우리 민족의 신화문헌(神话文献)에 근거하여 토템을 감별하고 식별하였다고 하면서 토템을 알려면 신화문헌을 꼭 연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토템문화를 터득한 후 토템문화수필을 쓰는게 어떻겠는가고 제의하였다. 선생은 내가 수필로 문단에 데뷔를 했고 수필집 세부를 출판한 일을 념두에 두고 있었다. 토템시가 나왔으니 토템수필도 토템소설도 나올 수 있지 않을가. 사회가 발전하고 문학이 발전할 수록 쟝르도 더 세분화되는 것이니까 말이다. 주류문단에서는 이미 《승냥이토템(狼图腾)》이란 장편소설이 나와 국내외에서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우리 조선족작가들중에서도 응당 우리 민족의  토템문화를 반영하는 '황소토템'이나 '백학토템' 같은 토템수필 혹은 토템소설이 나와야 하지 않을가. 그런데 토템의 정의조차 제대로 모르는 내가 어떻게 토템수필을 쓴단 말인가. 그러나 나는 선생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그러잖아도 내가 력사소설을 쓰는 리유도 남다른 작품을 내놓기 위해서였다. 내 나이도 일흔을 바라보고 있었다. 선생이 내게 여추우(余秋雨)의 작품을 봤는가고 하면서 여추우는 한족의 저명한 문화수필대가인데 조선족에서도 그런 사람이 나타나야 한다고 했다. ㅡ2ㅡ 그로부터 석달 후, 나는 광주에서 삼아로 날아가 료양중에 있는 남영전선생을 방문하였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국내외에 명성을 날리고 영향을 끼친 토템시인의 건강상황이 그 정도일줄 알지 못했다. 나도 장기간 심장질환으로 시달리는 처지지만 말이다. 휠체어에 앉았던 선생이 나를 맞아주었다. 몇년전 뇌출혈로 쓰러졌었다는 것이였다. 민족문화와 문학을 위한 몇십년의 로심초사가 선생을 쓰러뜨렸던 것이다. 나는 삼아에서 3일 묵었다. 그러면서 선생의 가르침을 받았다. 선생은 사흘낮 동안 휠체어에 앉아 한번에 일여덟시간씩 나와 담화를 나누었다. 그때 삼아에 있던 전승기 시인이 나를 배동했다. 선생이 전승기에게 물었다. 당신의 전(全)씨 성이 어떻게 온 것인지 아는가고. 전승기가 대답하지 못하자 선생은 흥미진진하게 단군신화를 들려주면서 우리 민족의 왕씨는 단군왕검의 후대라고 하였다. 왕씨는 우리민족의 제일성씨로서 원래는 큰 성씨였는데 후에는 변을 당하여 왕씨들은 하루아침에 자기의 성을 전(全)씨, 전(田)씨, 옥(玉)씨, 금(琴)씨, 마(马)씨 등으로 바꾸었다고 하였다. 왕씨의 토템이 곰이였으니까왕씨의 후예들인 이들의 토템 역시 곰으로 보아야 한다고 하였다. 선생은 또 나의 현(玄)씨는 황제의 후손이기에 황제의 토템 곰이 현씨의 토템이라고 알려주었다. 이야기는 열렬한 분위기속에서 이어졌고 우리는 천진한 소학생마냥 진지하게 들었다.전혀 앓는 분같지 않게 활기찬 모습의 선생은 토템문화에 대한 화제를 담론할라치면 두눈에서 광채를 뿌렸고 목소리도 청아했다. 선생은 우리 민족의 지성인들부터 민족의 뿌리문화인 토템을 모르고 있다고 하면서 우리가 누구인가를 알려면 우리 민족의 문화, 우리 민족의 성씨, 우리 민족의 전통풍속 그리고 민족이 어떻게 형성되였는지를 알아야 한다고 하였다. 최근에 《길림신문》에서 펼친 ‘문화를 말하다' 계렬보도의 남영전편을 보면서 새삼스레 그때의 담화가 떠오른다. 선생이 그때 우리에게 전수한 것이 바로 문화와 민족에 관한 오늘의 그 화제였다. 그번 만남이 있은 후 전승기시인은 삼아와 해구의 서점을 돌면서 10여부의 토템 유관 서적들을 구입했는데 그중 한책에 남영전선생의 토템시와 토템관에 대한 평론들이 실려있었다고 한다. 나는 그번 만남 후 전혀 계획에 없던 서울행을 했다. 국내에서는 도무지 구할 수 없는 우리 민족의 신화문헌들 때문이였다. 문화와 민족에 대한 선생의 독특한 정의는 일찍 국내의 반향을 일으켰다. 선생의 문화에 대한 정의는 "개인과 군체(群体)를 식별하는 의식주행어의 공동 부호"였고 민족 형성에 대한 선생의 정의는 "혈통에 의해서가 아니라 문화에 의해서이다"라는 것이였다. 말이 난 김에 문화에 대한 정의를 더 언급하고 넘어가겠다. 중국당대의 저명한 문화학자 여추우선생은 저서 《문화란 무엇인가(何谓文化)》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지금 세계적으로 문화에 대한 정의가 수백개나 되는데 모두 번쇄적이고 너무 길어 터득하기 힘들다. 여추우선생의 문화에 관한 정의는 "정신가치와 생활방식의 일종 생태공동체로서 루적과 인도를 통하여 집단인격을 창건하는 것"이다. ㅡ3ㅡ 필자 역시 문화의 정의를 두고 오래 동안 골치아파했었다. 몇년전 《흑룡강신문》에 문화에 관한 칼럼들을 써내면서부터였다. 조선과학백과사전출판사와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에서 2003년에 펴낸 《현대조선말사전》의 풀이는 이러하다. (1) 력사발전의 행정에서 인류가 창조한 물질적 및 정신적 재부의 총체 (2) 일반지식과 기술지식을 통털어 이르는 말 (3) 현대적요구에 맞는 문명한 생활양식 《엣센스국어사전》의 풀이는 이러하다. (1) 인지가 깨고 세상이 열리여 밝게 됨 (2) 권력보다 인덕으로 백성을 가르쳐 이끔 (3) 인간이 자연상태에서 벗어나 일정한 목적 또는 생활리상을 실현하려는 활동의 과정 및 그 과정에서 이룩해낸 물질적, 정신적 소득의 총칭(특히 학문, 예술, 종교, 도덕 등의  정신적 소득을 가리킴) 지금까지 중국에서 권위사전으로 꼽히는 《대사해》의 정치학, 사회학권(2010년판)의 풀이는 이러하다. 광의적 의미로 말하면 인류가 사회실천과정에서 획득한 물질, 정신적 재부와 생산능력과 창조한 물질, 정신재부의 총화이고 협의적 의미로 말하면 정신생산능력과 정신산품을 가리키는데 일체 사회의식형식,자연과학,기술과학,사회의식형태가 포함되며 때로는 전문 교육, 과학, 문학을 가리킨다. 조선족 토템시인 남영전선생은 다년간 토템문화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문화의 정의를 이렇게 내리고 있다. "문화란 개인과 군체를 식별하는 의식주행어의 공동부호이다." 얼마나 간명하고 구체적인가! 맑스는 《자본론》에서 사람들이 매일 보고 만지는 상품에 대한 분석을 통해 자본주의의 본질을 폭로하였다. 의식주행어, 이렇게 사람들의 생존활동에서 가장 필수적인 요소들을 틀어쥐여야 문화의 진정한 함의를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닐가. 세계의 그 어느 민족이나 다 자기의 문화가 있다. 세계의 어느 민족이나 의식주행어문화를 떠나서 존재할 수 없다. 복식문화, 음식문화, 주거문화, 행위문화, 언어문화 여기에 인류의 물질적재부와 정신적재부가 포함 되여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문화에 대한 남영전선생의 정의는 토템이란 문화뿌리로부터 나온 것으로서 인류와 민족의 력사와 현재와 미래를 관통하고 있다. 이는 문화정의에 대한 중대한 공헌이 아닐수 없다. ㅡ4ㅡ 토템수필, 토템소설은 우리 문단에 아직 없지만 토템시는 있다. 중문으로 창작된 남영전의 토템시는 42종의 조선민족 씨족토템을 쓴 것으로서 문창남, 박화, 김응준 등 조선족 시인들에 의하여 우리 글로 번역되였다. 그러나 우리 민족의 토템을 쓴 이 토템시들이 조선족문단에서보다 주류문단에서 더 각광을 받았고 국내외에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조선족문단에서도 일부 문인들이 ‘남시(南诗)'에 대해 긍정하고 찬양하고 있었지만 주류문단처럼 성세를 일으키지 못했다. 나는 토템시를 연구하고 분석하는 실천이 우리 문화를 알아가는 작업이라고 느꼈다. 왜냐하면 토템시는 민족의 뿌리문화(토템문화)에 기반을 둔 것이기에 토템시에 대한 연구는 바로 토템문화를 습득하는 기회로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우리 민족의 신화문헌과 토템 유관 자료들을 얻은 후 나는 남영전선생의 토템시를 하나하나 분석해 보기 시작했다. 잘하면 ‘남시'에 대한 매 한편의 해석이 괜찮은 토템수필이 될상 싶었다. 그러나 ‘남시'를 분석한다는 그 자체가 정말 쉽지 않았다. 이미지(意像)조합이 복잡하고 주제가 심오하여 난해한 점이 많은게 토템시의 특점이였다. 이미지란 영상(映像)이미지와 심상(心像)이미지로 나뉘는데 ‘남시'에는 이 두가지 이미지가 매편에 관통되여 있었다. 례하면 토템시 에서 웅녀로 변하여 단군을 낳은 곰토템을 민족의 시조모(始祖母)로 보는 것은 영상이미지이고 끈기있고 용감하며 애탄과 구걸을 모르고 앞으로만 나아가는 곰토템의 성격을 우리 민족의 상징으로 삼는 것은 심상이미지이다. 만약 내가 ‘남시'의 이런 토템이미지를 파악하지 못한다면 토템수필을 쓰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토템시를 해부하는 것은 우리 민족의 문화를 알기 위한 과제라고 나는 생각했다. 내가 우리 민족의 신화문헌에 근거하여 토템시 몇수를 분석한 것을 보고 남영전선생은 자기가 소장한 《문화상징사전(文化象征辞典)》을 부쳐주었다. 선생이 구태여 설명하지 않아도 그 뜻을 알만했다. 토템시에 대한 나의 분석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이다. 선생은 《문화상징사전》은 우리 민족의 토템숭배와 토템금기로부터 점차 형성된 민족전통풍속, 전통문화에서 왔다고 말하였다. 선생의 체험으로부터 내린 결론이였다. 선생은 42수의 토템시를 다 발표한 후에야 상징사전을 구입했다. 상징사전이 없을 때 선생은 우리 민족의 신화문헌에 의해서 토템시를 창작하였다. 토템시를 발표한 뒤에야 구입한 상징사전을 펼친 선생은 흥분을 금치 못했다. 토템시에 상징이미지를 제대로 도입한 것이였다. 그것이 우연한 일치였을가, 아니였다. 상징사전의 편찬자들도 알게 모르게 토템문화를 수록한 것은 우리민족의 전통문화의 풍속, 습관이 기실 토템문화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상징은 민족문화의 기본이라는 말이 있다. 문학에서 상징이미지가 없는 작품이 어디 있는가.더구나 현대시의 상징이미지들은 풍부하고 복잡하다. 우리의 《문화상징사전》은 사회와 시대가 발전할수록 더욱 보완되고 풍부해지고 완미화되여야 할 것이다. 우리의 학자, 작가, 시인들은 민족의 상징문화보물고를 부단히 풍부하게 만들어야 한다. 매 하나의 상징물들이 새롭게 태여나고  매 한가지 상징이미지들이 새롭게 빛을 뿌려야 한다. 《문화상징사전》이 아니였더라면 내가 남영전선생의 토템시 42수의 토템이미지를 발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과정은 내가 우리 민족의 문화를 알아가는 과정이였다. 지금 《료녕신문》에 련재되고 있는 필자의 남영전 토템시 이미지해설문들은 기실 실습중에 있는 토템문화수필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들도 아직 미숙한 점들이 있어 부단히 수정하고 보충하고 보완하여야 할 것이다. 이 역시 우리의 문화상징보물고에 대한 저그마한 기여로 될 수 있으므로 필자 하나의 일이 아니다. 우리의 학자, 작가, 교수, 시인들을 포함한 광대한 독자층의 참여를 기대한다. ㅡ5ㅡ 우리가 우리를 알기 위해서는 토템문화를 꼭 알아야 한다. 토템은 문화의 시원(始源)이고 문화의 뿌리이다. 인간의 최초의 노래나 무용은 토템제의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토템숭배로 인한 제의(祭仪)는 풍속습관으로 되였고 토템숭배를 표현한 암벽화가 점차 문자로 발전해왔다.성씨도 토템에서 기원되였고 여러 토템씨족이 모여서 민족이 형성되였다. 토템문화는 우리에게 인간은 자연에서 왔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우리는 자연에서 온 인간들이다. 우리의 작가들이 토템문화를 알게 되면 우리자신을 알게 되여 더욱 특색있고 정채로운 작품을 창작해낼 수 있다. 아쉬운 것은 우리 조선족들 가운데 토템문화를 아는 사람이 쌀의 뉘만치도 없는 상황이다. 토템문화를 모른다는 것은 자기를 모른다는 말이 된다. 뿌리 없는 나무가 없고 수원(水源)이 없는 강이 없다. 자기의 성씨가 어떻게 온 것인 줄도 모르는 사람들이, 자기 민족이 어떻게 형성되였는 것도 모르는 사람이 민족문화를 위해 일한다면 어떻게 믿어줄가. 2006년 3월에 수도사범대학 중국시가연구중심에서 남영전토템시연구회가 있은 후 중앙민족대학에서 남영전 시인을 초청해 학생들에게 토템문화 강의를 조직했다. 첫날에 조선족학생들을 상대로 강의했는데 토템이란 말이 나오니 다들 어리둥절한 표정들이였고  례의적으로 자리를 지킬뿐이였다. 다음날은 한족과 기타 소수민족학생들 차례였다. 사전에 공고에서 토템시인의 토템문화강의가 있다는 소식을 본 학생들이 필기장과 볼펜을 갖추고 밀물처럼 강당에 모여들어 초만원을 이루었다. 다들 눈이 초롱초롱해서 한마디라도 놓쳐버릴세라 빨리 메모를 하느라고 바빴다. 조선족학생들과 판이한 풍경이였다. 이 얘기를 듣는 필자는 마음이 무거웠다. 우리 학생들이 한족이나 다른 소수민족학생들보다 선천적으로 몽매하고 무지할가. 결코 그것이 아니였다. 우리의 민족교육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의 조선족대학생들은 토템이란 말도 들어보지 못하고 자라났다. 팔자의 부모는 각기 1910년과 1911년에 탄생했다. 그로부터  35년 동안 식민지 치하에서 살아왔다. 일제는 조선반도에서 36년이란 세월 우리 민족의 문화를 유린하고 박멸했으며 우리 민족은 말과 글과 성과 이름마저 빼앗겼다. 일제는 민족의 시조 단군의 력사가 기록된 문헌들을 불살랐고 우리 민족의 토템신화문헌들을 없애버렸다. 우리 민족의 뿌리를 뽑아버리고 조선민족을 영원히 저들의 노예로 만들려고 광분했던 것이다. 중국조선족 제3세대에 속하는 우리도 선배들에게서 토템문화를  전수받을 수 없었다. 우리 민족의  력사와 원생태문화(原生态文化)는 단절된 상태이다. 어찌 지금의 우리 대학생들 탓이라고 하랴! 남영전선생의 ‘구술문화 6강'은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에로 가야 하는가하는 물음에 답을 하고 있다. 우리는 문화정의와 민족개념 이 핵심을 분명히 알고 장악해야 우리의 민족문화를 전승하고 발전시킬 수 있다고 필자는 생각하고 있다. /현춘산
7718    토템과 남영전 시인 1 댓글:  조회:2891  추천:0  2020-06-27
지상토론(1): 토템·문화·민족·미래 편집/기자: [ 리철수 ]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20-06-10 ]       김동훈   김동훈 프로필: 1942년 4월 길림성 화룡현 출생. 1965년 중앙민족학원 어문학부 졸업 후 중앙민족학원 조선어번역학과 강사, 연변대학 조선어문학부 교수, 연변조선족자치주정부 비서, 연변문학예술연구소 부소장, 연변대학출판사 총편집, 연변대학 조선언어문학연구소 소장, 상해공상외국어대학 학술위원겸 한국어학부장, 북경대학 조선문화연구소 고문, 중국소수민족문학학회 리사, 동아시아비교민속학회 리사, 길림성민간문예가협회 부주석, 연변민간문예가협회 주석 력임. ≪조선족문화≫, ≪중국조선족구전설화연구≫, ≪조한민담비교연구≫, ≪중국조선족문화사대계≫(전11권, 주필), ≪중국조선족문학대계≫(전30권, 주필), ≪간명한국백과사전≫(주필), ≪중조고전시가비교연구≫(주필), ≪조선고전시화연구≫(주필) 등 저서 외 백여편의 론문이 있음. 중국출판정부상 도서상, 길림성 장백산문예상, 연변대학 및 한국고등교육재단 와룡학술상 등 수상. 《길림신문》에서 펴낸 대형구술시리즈 에서는 시인, 작가, 예술가와 문화학자들을 초청하여 열띤 토론을 벌리였다. 각계 저명 인사들이 여러가지 고견을 내놓아 민족문화전통의 계승과 민족융합, 문화강국의 위대한 목표를 실현하는데 큰힘을 모으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구술이 시사하는바가 매우 크다. 특히 남영전 시인의 여섯편의 구술을 읽고(듣고)나서 여러모로 감회가 깊었다. 그는 문화와 관련된 여러가지 큰 테마들을 한달음에 거침없이 풀어나갔다. 후생이 가외란 성인의 말이 생각나서 기뻤다. 나도 덧붙여 몇마디 말하고싶은 충동이 생겼다. 그래서 이 녹쓴 필을 다시 들었다.     조선족문화와 번역에 대해 강의하는 김동훈(중간).   1. 남영전 시인이 보는 문화의 시각이 독특했다. 그는 문화의 핵심내용을 의식주행어로 개괄했다. 내가 재래로 인식해온 문화란, 여전히 맑스가 백여년전에 말한 ≪인류가 창조한 물직적 재부와 정신적 재부의 총화≫였다. 서구의 문화학자들의 해석은 사상과 행위, 정신능력과 가치표준을 강조하고 있는데 음미하면 할수록 난해스러운 점이 많아진다. 25년전에 북경대학의 계흠림교수가 연변대학에 와서 교원들을 상대로 문화특강을 하였는데 그때까지 세계의 중요한 사전과 저서에 나오는 문화에 대한 정의는 무려 800종이 넘는다고 했다. 그것들을 분류해보면 대체로 광의적 개념과 협의적 개념 두가지로 정리해볼 수 있었다. 광의적 문화는 물질문화와 정신문화 량자를 다 포괄한 것이고 협의적 문화는 정신문화 하나만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남영전 시인이 내놓은 문화의 개념은 매우 간단하고 명철했다. 문화의 표지는 ‘의식주행어'란 것이다. 이와 비슷한 견해는 인터넷에도 가끔 등장하지만 남영전 시인처럼 그렇게 확고하진 않았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그의 견해에는 상당한 도리가 있었다. 그가 말하는 의식주행어를 하나하나 풀이해보면 문화의 본질과 부합되는 점이 매우 많았다. 남영전 시인이 말하는 의는 복식문화, 식은 음식문화, 주는 주거문화, 행은 행위도덕, 어는 언어문자를 대칭한다. 그 개념들을 다시 풀이해보면 물질생활, 사회제도, 의식형태 등 문화의 정체가 모두 드러난다. 마치 감자의 줄기를 잡아당기면 감자알들이 뿌리채 통채로 묻어나오는 것과 같다. 례를 들어보자. 인류의 음식문화는 천가만호의 생존과 직결되여있다. 식물의 채집, 동물의 수렵, 농작물의 재배, 가축의 사양, 음식의 가공 등 다양한 물질생산활동과 더불어 그에 따르는 제의, 금기, 례절과 같은 다양한 사회제도가 산생되며 또한 사회제도와 관련된 생존의식, 계급의식이 산생된다. 복식문화도 인류의 생존과 직결되여 있다. 옷을 만들기 위해서는 삼을 심고 누에를 기른다. 베를 짜고 염색하고 복잡한 가공을 거쳐 옷이 생산된다. 민족, 성별, 년령, 직종, 신분의 요구에 따라 옷모양도 천태만상이다. 민족, 계급에 따라 각이한 복식제도가 생기고 각이한 가치관, 심미관이 발달한다. 주거문화도 마찬가지다. 비바람과 추위를 막기 위해 동굴에서 움집으로, 움집에서 초가집, 벽돌집으로 끊임없이 주거환경을 개진한다. 궁궐, 성당, 사찰, 민가 등 각이한 건축물들의 축조와 더불어 신분적 차별에 따른 사회제도와 귀족의식, 평민의식, 종교의식이 산생한다. ‘행'의 본뜻은 길을 걷는다는 것인데 여기서는 행위도덕, 풍속습관을 대칭한다고 했다. 민간신앙과 종교신앙, 세시풍속, 통과의례 등이 모두 여기에 포함될 수 있다. ‘어'는 언어문자를 뜻하는데, 언어문자는 곧 사상의 직접적인 현실이므로 의식형태를 여기에 포함시킬 수 있다. 그밖에도 더러 루락된 문화현상이 있을 수 있으나 물질적, 제도적, 정신적 측면에서 잘 살펴보면 상호간의 그 어떤 련관성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2. 남영전 시인은 문화의 기원을 토템의 탄생과 련결시켜보았다. 문화는 언제나 우리의 몸 가까이에 있다. 처음에는 뜨거운 가스에 불과했던 지구가 차츰 식어지며 암석과 흙의 형태로 변질된다. 땅과 물에는 거대한 생물이 생성하여 마침내 원인이 출현한다. 원인이 두다리로 걷게 되면서 구석기시대가 탄생되고 수렵채집시대(BC 3만년경)에 들어서면서 씨족집단과 맹수들의 싸움이 치렬해진다.     연변대학 김병민(오른쪽) 전임 교장과 함께.   맹수들의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 인간에게는 구명의식과 동물숭배의식이 산생한다. 동물에 대한 경외심과 사과의 마음으로 동물의 량해를 구하고 그들과 친족같이 지내고 싶어한다. 스스로 동물에 대한 제의와 금기를 만든다. 하지만 문화를 모르는 동물이 인류와 친족으로 지낼 수 있을까? 인간은 동물을 토템으로 숭배하고 수호신으로 믿으며 짝사랑을 한다. 토템수호신의식의 탄생원인을 남영전 시인은 만물유령설에서 찾았다. 세상만물이 다 령혼이 있다는 믿음은 자연의 모든 신비한 현상을 해석할 수 있는 가장 편리한 의식구조였다.  포유동물의 피와 사람의 피의 동질성 및 생명의 원천에 대한 표상적 인식, 임신부의 출산이 동물 혹은 자연물의 감응에 의한 결과라는 믿음, 꿈속에서 자주 보는 동물의 변신, 죽은 사람의 회귀 등 신비한 체험들은 동물과 인간이 상호전환할 수 있다는 진화인지의 승화를 촉진하는 계기가 되였다. 즉 원시인의 진화인지가 자연과 인간이란 2원적 사유방식에서 자연, 인간, 정령이라는 3원적 사유방식에로 발전하고 승화된 것이다. 령혼관념의 출현과 만물유령설의 탄생은 토템문화의 새로운 시대를 열어놓았다. 정령이란 제3 존재의 출현으로 모든 자연물은 신적 성격을 부여받게 된다. 하늘에는 해, 달, 별, 바람, 구름, 비, 우뢰 일곱가지 신이 있고 땅에는 흙, 돌, 산, 불, 물, 식물, 동물 일곱가지 신이 있다고 믿는다. 물활론, 정령설을 바탕으로 태여난 숱한 자연신은 토템친족, 토템조상, 토템수호신들에게 무한한 선택가능성을 제공했다. 토템의식은 인류의 가장 이른 시기에 출현된 사회의식 형태이며, 가장 이른 시기에 출현된 종교신앙형식이다. 토템제도는 가장 이른 시기에 자발적으로 형성된 체계적인 사회제도였다. 그 제도안에는 토템표지, 토템명칭, 토템제의, 토템금기 등 일련의 내용이 포함된다. 토템족외혼은 원시적인 혼인법이였으며 동일한 토템남녀 사이의 근친혼을 방지함으로써 생육의 질을 높이고 인류사회의 건강한 발전을 보증했다. 독일문화학자 퐁트는 “토템제도는 인류력사에 나타난 4,5개 주요한 문화시대중의 하나였다.”라고 지적했다. 특히 토템조직제도의 건립은 지역의 평화를 수호하는 진보적인 사회제도였으며 여러 부족들 사이의 안전적인 메커니즘을 형성하는데 적극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므로 수만년을 이어온 선사시대를 풍미했던 토템문화는 원시시대의 가장 주요한 주류문화로 자리매김을 했다. 3. 성씨의 기원은 남영전 시인이 관심하고 있는 하나의 중요한 테마이다. 구석기시대 말기전까지 원시인들에게는 성씨가 존재하지 않았다. 만물유령설과 토템의식이 나타나면서 인류가 비로서 성씨를 가지게 되였으며 성씨의 출현으로 사회적 분공이 발달하게 되였다. 집단과 집단을 구분하기 위한 필요성은 동물에게도 가끔 나타난다고 한다. 프랑스의 동물학가 드발은 이란 글에서 총명한 돌고래가 각자 고유한 억양을 가진 고주파음의 서명 휘파람소리로 자기의 특정한 동료를 부르며 또 그 소리를 들은 특정한 돌고래도 자기의 특징적 고주파음으로 곧 응답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 ‘특징적 고주파음'이 곧 이름역할을 했다. 인류가 토템의 도움으로 성씨를 가지게 되였다는 것은 역시 거대한 진보였다. 삼황의 첫사람인 수인씨는 지상만물이 바람에 의해 생긴 것이라 하여 바람‘풍'자를 성씨로 삼았는데‘풍'은 곧 중국에서 첫번째로 명명한 성씨라고 한다.     조선족문화를 둘러싸고 발언하고 있는 김동훈.   토템에서 기원한 우리 민족의 성씨는 남영전 시인이 렬거한 단군왕검의 왕씨, 박혁거세의 박씨, 고주몽의 고씨, 해금와의 해씨, 김수로의 김씨, 김알지의 김씨, 수로부인 허황옥의 허씨, 석탈해의 석씨, 남평문씨, 경주최씨, 파평윤씨 외에도 내가 알고있는 토템성씨가 또 여러 개 더 있다. 평강 채(蔡)씨의 시조 채보한은 오색이 령롱한 거북이 평강이란 강에서 나와 사람으로 화하였으므로 채씨성을 하사받았다고 한다. 충주 어(魚)씨의 시조 어중익은 태여날 때 겨드랑이에 물고기비늘이 있었다고 하여 어씨성을 하사받았다. 운(云)씨의 시조는 290년전에 륙지에서 강화도로 이주할 때 벽공에 백운이 뭉게뭉게 피여오르는 것을 보고 성을 운씨라고 했다. 부여시대에 임금이 말, 소, 개, 돼지를 사양하는 관리들에게 가축들의 이름을 따서 마씨, 우씨, 구씨, 저씨 등 성을 하사했다고 하며 그 토템성씨가 우리 민속의 윷놀이에 반영되여 말, 슝, 개, 도와 같은 속칭들이 생겨났다고 한다. 중국에서 조선반도로 건너간 토템성씨도 수두룩하다. 3천년전에 기자(한씨, 선우씨, 기씨의 시조)가 5천명의 주나라 백성을 이끌고 조선으로 이주했고 진(秦)나라 때는 3-4만명의 연나라 난민들이 진한(辰韩) 땅에 피난가서 정착했다고 하며 수당시대에도 전란과 무역, 정치 등 원인으로 숱한 중국인들이 조선반도에 이주해 가서 살았다. 그들은 대부분 자기의 토템성씨를 그대로 조선에 가지고 갔으므로 토템이 성씨에 준 영향은 그야말로 크다 하지 않을 수 없다. 말그대로 토템은 성씨의 뿌리이며 성씨문화의 숲을 거창하게 가꾸어온 무명의 원예사이며 유공자이다. 4. 토템과 민족의 기원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 토템씨족이 모여 부족이 되고 부족련맹의 결과로 더 큰 민족이 탄생한다. 염제, 황제, 치우 세 부족련맹이 합쳐 하나의 중화민족이 형성되였다는 력사사실에서 우리는 토템의 중대한 역할을 실감하게 된다. 워낙 황제부락의 토템은 범과 곰이였고, 염제부락의 토템은 소와 악어였으며, 치우부락의 토템은 소와 새였다고 한다. 황제는 복희녀와씨의 후예라는 뜻에서 뱀의 몸뚱이를 중심으로 소의 머리, 맹수의 발톱, 새의 날개, 악어의 비늘을 본따서 룡이라는 통합적인 토템을 만들어 중화민족의 기틀을 잡았다고 한다. 룡토템은 씨족과 부족의 개념을 뛰여넘어 민족의 상징으로 승화되였다. 중국에는 6,000개의 성씨가 있다 하니 6,000개의 혈통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6,000개의 성씨가 모여 56개의 민족을 구성하고 또 56개의 민족이 융합되여 중화대민족을 구성한다. 그러므로 중화민족은 혈통의 개념이 아니라 문화의 개념이며 서로가 서로를 포용하는 원융의 개념이다. 문화는 민족의 령혼과 표지이며, 민족의 정신적 고향이며, 민족의 동질감과 응집력을 강화하는 기본 토대이다. 문화의 본질적 요소를 의식주행어라고 한다면 의식주행어가 또한 민족과 민족을 구별하는 주요한 표지가 된다. 그런 의미에서 민족을 문화의 개념이라고 한 남영전 시인의 말은 앞뒤가 맞아떨어진다. 5. 토템은 민족의 풍속습관속에 융해되여 오늘도 살아숨쉬고 있다. 거대한 룡이 새겨진 천안문앞의 화표, 룡이 활개치며 춤추는 자금성의 구룡벽, 천단 앞에서 올리는 천신제, 지단에서 올리는 지신제… 그런 풍속들은 모두 토템숭배에서 연변되여온 것이다. 지난날 조선족마을 동구에 세워졌던 장승과 솟대에 그려진 처룡, 비형과 새의 형상은 각각 룡토템, 구름토템과 까마귀토템의 상징이였다. 정월보름날의 오곡제와 윷놀이, 오월단오절의 산신제와 수신제, 삼국시대에 성행했던 영고, 동맹, 무천 등 제천의례는 모두 토템숭배와 밀접히 련계되여 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조선족마을의 장승에 새겨져있는 룡토템과 구름토템의 조합이 천안문광장의 화표에 부각된 룡토템, 구름토템의 조화와 매우 일치하다는 것이다. 이는 길상물에 대한 조선족과 한족의 토템의식이 오래전부터 밀접히 련결되여 있었다는 산 증거이다. 민족풍속은 의식주행, 관혼상제, 세시풍속, 정신신앙 등 내용으로 구성되여있으며 그 것들이 모여 민족의 문화전통을 이룬다. 선사시대에 산생된 장구한 토템문화는 여러 민족의 풍속습관에 깊이 침투하여 아름다운 문화전통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6. 남영전 시인은 제나름대로 인류 4대문명의 광범한 시각에서 중국토템문화의 우세를 발견하였고 토템문화의 긍정적 시각에서 미래지향적인 문화발전전략을 구상해보았다. 티그리스 유프라테스강류역의 고바빌론문명, 나일강류역의 애급문명, 인더스 갠지스강류역의 인도문명이 오래전에 조락되여간 현실세계에서 오로지 황하류역의 중국문명이 서구문화학자들의 특별한 각광을 받고 있다. 그 원인중의 하나는 중국인들이 룡토템을 기치로 평화, 원융, 천일합일의 문화전통을 세세대대로 끊임없이 이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토템문화가 내포하고 있는 자연과 인간의 조화, 인간과 인간의 평등관계의 추구는 현시대 민족공동체, 인류운명공동체의 구축에 긍정적인 정신력으로 작용할 것이며 지구상의 자연재해를 감소하고 인류의 평화와 세계의 원융을 도모하는 새로운 문화생산력으로 발돋움할 것이다. 문화의 개념, 민족의 개념에 대한 투철한 리해는 다민족국가인 우리 나라의 매개 공민에게 있어 특별히 중요한 의의가 있다. ≪길림신문≫에서 이번 문화칼럼의 성공을 계기로 토템, 문화, 민족, 미래라는 주제의 토론을 지속적으로 깊이 있게 전개함으로써 신문매체의 향도적 기능을 충분히 발휘하고 중화전통문화와 조선족문화의 우세를 널리 선전하며 조선족과 기타 민족의 토템식 형제관계의 구축에서 계속 선도적 역할을 담당하기를 충심으로 기대하는바이다. /길림신문   
7717    [우리의 것] - 하찮은 벼짚이 문화재 벼짚공예 되다... 댓글:  조회:3527  추천:0  2020-06-27
벼짚공예의 장인 고원건, 전통문화 보존과 선양에 힘써 (ZOGLO) 2020년6월25일    벼짚공예전승인 고원건, 리려 부부   “짚신이나 방석이나 망태기를 만들 때 사용되는 벼짚은 반드시 낫으로 잘라야지 기계를 들이대서는 절대로 안됩니다. 그리고 반드시 벼줄기가 편평한 것으로 골라야 합니다. 이런 벼짚은 새끼줄을 꼬는데 최고죠.” 태여나서 줄곧 연변조선족자치주 화룡땅에서 살아온 한족 사나이 고원건(54세)은 손에 들고 있는 평범한 새끼줄을 흔들어 보이며 전문가적인 분석을 내놓았다. 조선족 전통문화가 깃들어 있는 새끼줄과 벼짚공예품을 여느 조선족 못지 않게 잘 알고 있는 그는 비범하고 남달라 보였다. 새끼줄을 서두로 필자는 고원건과 담소를 나누었다.    고원건이 벼짚공예에 깊은 애착을 갖게 된 계기는 무엇이든 손으로 엮어보기를 즐기던 그의 어릴적 취미에서 비롯됐다. 부모가 버드나무가지로 광주리를 엮거나 옥수수 잎으로 물건을 담아두는 작은 바구니를 엮으면 그는 무조건 동참해 일손을 거들었다. 현재 보면 조금 따분해 보이는 중복작업이였으나 그에게는 둘도 없는 취미생활이였다. 부모옆에서 열심히 배우던 그는 어느새 홀로 원자재를 장만해 광주리도 엮고 바구니도 엮으면서 기술적으로 막히는 곳이 있으면 부모님으로부터 약간의 귀띔을 받으면 금방 해결할수 있었다. 현재의 시간대에서 고원건의 유년시절을 바라보면 사실 그는 후날 벼짚공예에 필요한 기본기능을 련마하고 있었던 것이다.        2008년, 고원건의 남다른 손재주를 알게 된  화룡시부련회에서는 신민촌 민간공예조사를 떠나면서 그를 동참시켰다. 조선족 마을인 신민촌은 편벽한 시골이지만 손재주의 장인들이 대거 운집해 있다는 부련회 책임자의 소개에 고원건은 호기심이 잔뜩 동해 걸음마저 빨라졌다. 그가 만난 장인들은 대부분 70~80대의 조선족 로인들로서 신민촌이란 이 동네를 손수 일구었거나 혹은 신민촌에서 평생을 살아오면서 벼짚 엮기에 탄탄한 실력을 쌓은 분들이였다. 로인들은 여유롭게 올방자를 틀고 앉아 벼짚으로 새끼줄을 꼬아 이리꿰고 저리 돌리고 하더니 금방 짚신을 만들었고 모양새가 그럴듯한 새초롱도 선보였다. 고원건은 새끼줄의 신통함에 놀랐고 로인들의 손재주에 마음이 끌렸다. 그는 저도 모르게 로인들과 함께 벼짚을 주어 새끼줄을 꼬고 있었다. 유년시절에 갈고 닦은 실력덕에 벼짚공예 입문이 신속했다. 로인들은 허우대가 좋은 한족 청년이 비록 말은 잘 통하지 않지만 “척하면 척”하는 눈썰미에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사실 대부분 고희를 넘긴 로인들은 조선족 전통문화인 벼짚공예가 후계무인인 상황에 근심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였다. 벼짚공예의 “전성시대”는 건국 초기 때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벼짚으로 엮은 짚신, 망태기, 올방자 등은 가정집의 필수 생활용품이였다. 신민촌 촌민들은 생각을 넓혀 겨울 농한기가 오면 따뜻한 구들에 앉아 바구니, 멍석, 삼태기 등을 양산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신민촌” 표 벼짚 생활용품들은 원양선박을 타고 동남아로 수출되며 외화를 벌어들이는 상품으로 거듭났다. 촌민들도 새끼줄 덕에 약간의 부를 축적했다. 그러나 호황기를 누리던 벼짚 상품들은 플라스틱 제품이 출현하면서 수출길이 점차 좁혀졌고 가정집에서도 자취를 감추었다. 품이 많이 드는 대신 내구성과 실용성에서 현저한 차이가 나는 것은 어쩔수 없는 일이였다.    그러나 현재 벼짚공예에 관한 이야기가 새롭게 펼쳐지고 있다. 한동안 력사더미에 묻혀 있던 벼짚 상품이 다시 각광을 받고 있다. 그 시점을 딱히 꼭 집어 얘기할 수는 없으나 사람들의 생활질이 대폭 상승하면서 벼짚공예를 전통문화의 차원으로 끌어올리고 실용보다는 수장과 관상용으로 수요가 급증하는 추세가 형성되고 있다는 것이다. 고원건은 마침 시대의 물결에 편승했다.        현재의 고원건은 벼짚공예를 리용해 주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는 화룡시부련회직업기능학원의 책임자이자 벼짚공예 과목의 강사이다. 2016년부터 시작한 일을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다. 매기 학생 등록수가 40~50여명 되면 한달 간의 수업을 진행한다고 한다. 학생들은 처음에는 강사의 도움을 받아 간단한 작품을 제작하다 차차 련습이 깊어지면서 기술력도 좋아지고 숙련도도 현저하게 제고되는데 눈썰미가 좋고 손재주가 야무진 학생들은 독립적으로 꽤나 근사한 작품을 만들어 낸다.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고원건은 학생들이 만든 작품을 대신 판매하며 판로까지 해결해 준다. 가장 간단한 짚신, 새초롱은 시장에서 40~50원에 판매되고 항아리 같은 부피가 큰 공예품은 한개당 700~800원에 팔린다고 한다. 수업에 등록한 학생들은 대부분 화룡시 현지의 50~60대 농민들이다. 그들은 벼짚 공예기술을 배워 여름철과 겨울철 농한기에 공예품을 제작해 짭잘한 수입을 올려 살림에 보탬한다. 고원건은 화룡시장애인련합회와도 이미 여러번 합작을 했다. 현재까지 총 3기를 거쳐 150여명의 장애인들에게 기술을 가르쳤다. 그중 18기 학생인 50대 녀성 리화방은 연변기능경진대회에 참가해 벼짚 새초롱으로 2등상을 수상하며 실력을 인정받았다. 장애인들이 만든 제품을 고원건은 우선 자기돈으로 “선불”해 사서 두었다가 시장에 판매한다. 그들을 돕기 위한 차원에서 고안해낸 방법이다.    벼짚공예품은 생각밖으로 판로가 넓고 사람들의 환영을 받고 있다. 화룡시 현지와 연변주에서 진행되는 여러 전시회에서는 고원건을 귀빈으로 모셔갈 정도다. 고원건이 만든 제품들을 전부 전시할 수 있도록 아예 커다란 부스 한칸을 무료로 내어주기도 한다. 직접 보고 만질 수 있는 전통문화이다 보니 언론들도 앞다투어 사진을 찍고 취재를 하는 덕에 벼짚공예품을 넘어 전시회까지 덩달아 홍보가 된다. 전통 산장, 수장 애호가, 어린이들이 벼짚 공예품을 사가는 주요 고객이다. 산장 주인들은 벼짚 공예품들을 산장 이곳저곳에 걸어두거나 배치해 전통 느낌을 살리고 수장 애호가들은 전통문화 보존과 감상을 위해 사간다. 간혹 부스를 찾는 어린이들은 호기심에 못이겨 부모를 졸라 하나씩 산다. 부모들은 아이들이 자신들의 어릴적 물품에 관심을 갖는 것에 흐뭇해하며 기꺼이 장바구니에 담는다. 전시회에 나갈 때면 하루에 적어도 3000원 이상의 수입을 올린다며 고원건은 만족해 하였다.      2008년을 기점으로 벼짚공예를 접한지 어언 12년이란 세월이 흘렀으나 고원건은 여전히 자신을 가르쳤던 신민촌의 스승들을 기억하고 있다. 신민촌 생산대 대장을 지냈던 전용철 로인과 그의 부인 최순자, 그리고 최영희, 림윤호, 림영금……이중 일부 로인은 이미 세상을 떴다. 이 로인들은 저마다 능한 한가지 제품들이 있었는데 고원건은 하나씩 배워나가며 1년도 안되는 사이 모든 “학과 과정”을 수료했다. 그리고 자체의 생각을 넣어 새로운 제품들도 창작해 냈다. 기술을 배우며 로인들과 두터운 정을 쌓은 그는 현재도 짬짬이 시간을 내어 로인들을 뵈러 간다. 명절 때면 과일과 채소를 듬뿍 사서 방문한다. 로인들이 남김없이 배워주었기에 오늘날의 자신이 가능했다며 고원건은 감격해 하였다.  2018년, 고원건은 연변조선족자치주정부로부터 벼짚공예 무형문화재 전승인으로 추천됐다. 향후의 계획에 대해 고원건은 전통문화의 지속적인 보존과 발양에 중점을 두었다. 그는 더욱 많은 사람들이 벼짚공예에 관심을 갖고 직접 체험해보며 흥취를 가지고 재미를 느꼈으면 하기를 바랐다. “산업화시대에 들어섰다고 하지만 전통문화를 보존하고 널리 선양해야 합니다. 전통문화인 벼짚공예가 사회경제활동에서 더욱 빛을 뿌리고 립지를 굳히기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고원건의 목소리에는 희망과 신심이 가득차 있었다. ▣(출처:《중국민족》조선문판  글/한동준  편집/리호남  조판/ 한동준)
7716    [그때 그시절] - 전쟁은 싫다 싫어... 댓글:  조회:3941  추천:0  2020-06-27
'6·25전쟁으로 빼앗긴 삶' 달래준 그 시절 그 노래들 2020.06.27.  슬퍼요  후속기사원해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동영상 뉴스   [앵커] 1950년대 전쟁으로 삶이 뿌리째 뽑혀버린 사람들은 함께 울어주는 노래에, 혹은 발랄한 리듬에 위로를 받곤 했는데요. 김나한 기자가 들려드립니다. [기자]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 '전우야 잘 자라' (1950년) : 1990년대까지도 소녀들이 고무줄을 넘으며 무심하게 불렀던 이 노래, 70년 전 포화 속에서 병사들을 달랜 군가입니다. 남편을, 아들을 전쟁터로 떠나보낸 이들은 애끊는 마음을 담은 노래들을 기도처럼 흥얼거렸습니다. "지금은 어느 전선 어느 곳에서 용감하게 싸우시나" - '님 계신 전선' (1953년) 전쟁의 폐허 속에도 삶은 계속돼, 사람들은 화려한 영화를 통해 남루한 일상을 잠시나마 잊었습니다. "돌아오는 토요일은 분홍치마에…" - 영화 '자유부인' (1956년) 스스로 살아남아야 했던 피란민 소년의 고단함은 경쾌한 리듬으로 살아났습니다. "아무리 피란통에 허덕거려도 구두 하나 못 닦아 신는 도련님은요" - '슈샤인 보이' (1954년) : 피란 도시의 판잣집에도 사랑은 있어서, 마침내 전쟁이 끝나고 상경하는 기차 안에서 마냥 웃을 수만은 없었던 청년의 마음도 그렸습니다. "경상도 사투리의 아가씨가 슬피 우네" - '이별의 부산정거장' (1954년) 식민 지배부터 전쟁과 분단의 아픔까지, 곡절 많은 삶을 달랜 우리 가요 2만 6000여 곡을 조사해 보니 가장 많이 쓰인 단어는 '사랑'이었습니다. (영상그래픽 : 박경민) /김나한 기자 /[영상취재: 김재식 / 영상편집: 유형도]
7715    [타산지석] - 우리 연변 미술계에도 이런 "현상" 없는지?... 댓글:  조회:4024  추천:0  2020-06-25
미술계 논란 계속... 법적 분쟁 2라운드 가나? 2020.06.25.  좋아요  좋아요 평가하기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동영상 뉴스 [앵커] 조수에게 아이디어를 주고 그림을 그리게 한 이른바 '대작'으로 재판에 넘겨진 가수 조영남 씨에 대해 사기죄가 아니라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습니다. 미술계 반응은 엇갈립니다. 한국미술협회 측은 법적 분쟁 2라운드를 예고했습니다. 이승은 기자가 보도합니다. [기자] 조수 도움으로 완성한 그림을 자신의 이름으로 팔았다가 사기 혐의로 기소된 조영남 씨, 무죄 판결은 한국에도 현대미술이 살아있다는 걸 알린 것이라며 대한민국이 이제부터는 공식적으로 화가 노릇을 하라고 한 느낌이 든다고 밝혔습니다. 국내외 거장들이 조수를 두고 많이 작업하고 있는 요즘, 조영남 씨라고 남달리 비판 받아서는 안된다고 밝혀온 미술계 인사들은 이번 판결이 당연하다는 입장입니다. [반이정 / 미술 평론가 : 자기 브랜드가 생긴 미술가가 조수를 고용해서 작업을 시키는, 그래서 어떤 부분을 그걸 더 잘하는 사람을 불러서 작업의 완성도를 더 높이는 것은 미술계의 일종의 공식으로 굳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결과에 울분을 드러내는 작가들도 많습니다. 화폭에 자신의 아이디어를 구현하기 위해 수십 년 정진하는 작가들의 노력을 쓸데없는 것으로 만드는 격이라고 말합니다. [김순지 / 화가 : (대학 입시) 실기시험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생각해요. 내 생각으로 누구한테 시켜서 그 작가가 가져온 게 죄가 되지 않는다면 이렇게 힘들게 피땀 흘리면서 어려운 작업을 누가 하려고 하겠어요? 또 당장 공모전에도….] 한국미술협회는 이번 재판은 사기죄 여부를 물은 것이라며 조영남 씨 작품의 저작권이 누구에게 있는지 법적인 판단을 다시 한 번 물을 계획이라고 밝혔습니다. 조수의 역할은 그야말로 도움에 그쳐야 하며, 형상화에 깊숙이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양성모 / 한국미술협회 이사장 직무대행 : 작가적인 양심에 얼마나 진정성 있게 해나갔느냐가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봅니다. 저작권법에 대한 그 부분은 저희가 다시 제소할 계획입니다.] 미술계에 숱한 논쟁을 낳은 이번 재판의 파장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YTN 이승은 입니다.   ===================================/// "조영남이 꼴보기 싫은가? 적어도 사기꾼은 아니다" 2020.06.25.    화나요 좋아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beta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그림 대작 사건 무죄 판결 本紙 조영남 자택 인터뷰 "유명인에 대한 질투도 한 몫 …논란 억울해도 얻은 것 많아" 25일 서울 청담동 자택에서 만난 조영남이 자신의 그림을 들어보이고 있다. "지난달 공개 변론 당시 대법관에게 보여주기 위해 법정에 가져갔지만 너무 오버하는 것처럼 보일까봐 차마 그러지 못했다"고 말했다. /정상혁 기자 “나는 사기꾼이 아니다.” 가수 겸 화가 조영남(75)씨는 ‘그림 대작(代作) 사건’에 휘말렸다가 25일 최종 무죄를 선고받았다. 이날 서울 청담동 자택에서 만난 조씨는 “지난달 공개 변론 분위기가 일방적으로 내게 유리해 무죄를 예상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4년만의 승소 통보를 받아든 조씨는 본지 인터뷰 도중에도 빗발치는 지인들의 전화를 응대하느라 분주했다. ―큰 풍파를 겪었다. “사는게 만만치 않다는 걸 절감한다. 이 일로 수모를 치렀지만 언젠가는 내가 그렇게 비도덕적인 사람이 아니라는 걸 사람들이 알아주리라 믿었다. 이번 사건으로 얻은 게 많다. 자연히 친구와 적을 구분할 수 있었고, 시간이 많아져 그림을 열심히 그리게 됐다. 그리고 내 하나 뿐인 딸과의 결속이 단단해졌다.” 조씨는 2011년부터 2016년까지 송모(63)씨 등 화가 2명을 고용해 화투 그림 26점을 그리고, 자기 작품이라고 속인 혐의로 재판을 받아왔다. 송씨 등이 거의 대부분을 완성한 그림에 조씨가 가벼운 덧칠과 서명만 한 뒤 전시·판매한 것은 사기 행위에 해당한다는 주장이었다. 대법원은 그러나 미술품 제작에 제3자의 도움이 있었는지 여부가 구매자에게 꼭 필요한 정보로 확정하기 어렵다는 판단을 내리며 조씨의 손을 들어줬다. ―억울한가? “억울한 면이 왜 없겠나. 검찰이 나를 사기꾼으로 몰았다. 그렇게 자꾸 내가 사기꾼으로 인식되는게 너무 억울했다. 나도 모르게 한(恨)이 쌓였던 것 같다. 그래도 그간 내가 사회로부터 받은 게 컸으니 그걸로 퉁 쳤다.” ―이 사건에 선입견이 작용했다고 보나? “그게 거의 전부 아니었을까. 돈 잘 버는 유명 대중가수가 그림까지 그린다니 못마땅했을 것이다. 잘 나가는 사람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은 자연 현상이다. 이건 무죄가 나왔어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 기 죽어서 할 일 못할 필요는 없다. 미술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취미다. 별 볼 일 없던 그림 그리는 가수한테 ‘너 그림 제대로 그려라’고 본격적인 사명감을 줬다. 대한민국 법이 나를 화가로 만들었다.” 대체로 미술계에서는 이번 사건이 애초에 사법 판단에 기댈 성격이 아니라는 데 의견이 모인다. 저작권 측면에서는 다툼의 여지가 없고, 조수를 쓰는 것도 이미 널리 퍼진 관행이기 때문이다. 특히 열성적으로 조씨의 편에 섰던 평론가 진중권은 “현대미술에서 중요한 것은 아이디어인데, 아이디어는 조영남이 냈고, 시장에 예술적 논리를 관철시킨 것도 조영남이고, 화투 그림을 그리라고 지시한 것도 조영남이고, 마지막으로 작품을 확인하고 사인을 한 것도 조영남”이라며 옹호했다. 하지만 일반 대중의 시각은 싸늘했다. 고가(高價)의 그림값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은 송씨의 작업 보수가 알려지자 인터넷에는 조씨를 비판하는 게시글이 빗발쳤다. ―일각에선 “조영남은 화가가 아니다”라고 한다. “지난달 공개 변론 당시 검찰 측 증인으로 나온 신제남 화가가 ‘조영남은 캔버스를 액자에 끼운 채로 그림을 손본다’고 뭐라고 하는데, 그건 내 취향이다. 나는 액자도 그림의 일부로 생각한다. 미술에 얽매여야 할 규칙 같은 건 없다. 규칙과 연마가 중요한 음악과 달리, 미술은 거의 100% 자유다. 그게 미술의 매력이다. 내가 좋으면 좋은 거고 싫으면 아닌 거다.” ―법정에선 이겼지만 도덕적 차원의 비판은 여전하다. “작품 대부분을 조수에게 맡기고 관리·감독이 미진했다고 하는데, 송씨가 우리 집에서 3개월간 같이 살았다. 서로 이미 원하는 걸 다 아는데 관리·감독 할 이유가 어디 있나. 그냥 ‘이대로 똑같이 그려오라’고 하는건데. 돈 문제도 그렇다. 만약 제대로 안줬다면 그가 가만히 있었겠나.” ―이후 송씨와 연락 안했나? “2018년 2심에서 무죄 판결 나온 날, 전화가 왔다. 다시 같이 일 할 수 없겠느냐고 묻더라. ‘지금은 내가 너 보기 서먹하니 시간을 두고 생각하자’고 말했다. 그게 마지막이다.” 그는 현재 다른 조수를 한 명 두고 있다. 조영남 자택 현관 입구에 놓여 있는 화투 그림. /정상혁 기자 그는 집에 1000점의 그림을 보관하고 있다. “매일 아침 일어나 그림을 그린다”고 했다. 지난 4년간 완성한 그림만 수백점이다. 싸리 바구니 등을 활용해 초가집을 형상화 한 콜라주 작품 등이 방 곳곳에 널려있었다. 이날도 조씨는 시인 이상(1910~1937)에 대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정신병자 소리까지 들었던 사람인데 지금은 누구보다 추종자가 많다. 내 처지에 빗댄 건 아니다.” ―승소하자마자 책도 냈는데. “법정 싸움을 하면서 사람들이 현대미술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4년 전부터 쓴 책이다.” 현대미술의 계보와 자신의 지향을 담은 책 제목은 ‘이 망할 놈의 현대미술―현대미술에 관한 조영남의 자포자기 100문100답’이다. 그는 이 책에서 실제 똥을 통조림 통에 담아 봉인한 뒤 ‘예술가의 똥’이라 이름 붙인 이탈리아 작가 피에로 만초니를 인용하며 “우리가 얻어야 할 교훈은 모든 예술이 다 아름답지는 않다는 것, 똥조차 훌륭한 예술이라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올해 전시도 여나? “서울 윤갤러리, 경기도 이천의 한 미술관에서 전시가 예정돼 있다. 앞으로도 화투 그림은 계속 그릴 것이다. 잘 팔리니까. 내 그림은 어렵지 않다. 어떤 화가들은 그림 위에 서명하는 것조차 조심스러워 하지만 나는 아예 그림 위에 제목을 적어버린다. 영어제목, 한글제목, 거기에 낙관까지 찍는다. 나는 말하자면 트로트파(派)다. 누구나 봐도 쉽게 알 수 있고 느낄 수 있으니까. 트로트파가 많아져야 한다고 본다. 사람들이 그림에 조금 더 가깝게 다가갈 수 있는 그림을 그리고 싶다.” /정상혁 기자  ====================================/// “이것 때문에 욕 많이 먹어” 진중권이 ‘조영남 무죄 확정’에 한 말 2020.06.25.  화나요  좋아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beta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대법원, 조영남 ‘그림 대작’ 사건 무죄 선고 / “대한민국 전문가 집단의 민낯을 드러낸 사건… 대법원이 ‘사법자제’ 명확한 표현으로 하나의 판례 세워” / “우리 미술계 이제야 1917년 맞아, 그것도 대법원의 힘으로… 그냥 지나쳐선 안 돼” 가수 조영남(왼쪽)과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 연합뉴스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가 가수 조영남씨의 ‘그림 대작’ 사건 ‘무죄’ 선고와 관련해 “이것 때문에 욕 많이 먹었는데 이제 끝났다”라며 환영의 뜻을 밝혔다. 진 전 교수는 25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같이 적고 “거의 집단린치 수준이었다. 그 분야의 전문가가 얘기하면 좀 들어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라고 씁쓸한 심정을 전했다. 이어 “하긴 이 소동(조영남 사건)에서 몇몇 사람 빼고 수많은 전문가가 엉뚱하게 검찰 편을 들어줬으니”라며 “대한민국 전문가 집단의 민낯을 드러낸 사건이었다”고 했다. 진 전 교수는 “대중이야 몰라서 그런다 쳐도, 그걸 알아야 할 전문가 집단마저 현대미술이 탄생한 지 100년이 넘었건만, 예술에 대한 이해 수준이 19세기 인상주의 시절에 가 있으니. 부끄러운 줄을 알아야지”라고 일갈했다. 그는 또 다른 글에서 “2심 재판부의 판결이 명판결”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진 전 교수는 “사안의 본질을 정확히 꿰뚫고, 검찰의 기소논리를 하나하나 명확하게 반박하고 있다”라며 “대법원 판결이 그저 2심 판결에 손을 들어준 데에 그친 것은 아니다. 주목할 것은 ‘사법 자제’라는 표현이다. 이런 문제는 사법부에서 함부로 개입할 사안이 아니라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사법 자제’라는 명확한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앞으로 이와 유사한 사례가 발생하지 않도록 대법원에서 하나의 ‘판례’를 세웠다”면서 “대한민국 미술계는 이제야 1917년을 맞았다. 그것도 대법원의 힘으로. 현대미술의 개념적 혁명이 시작된 지 무려 103년 만”이라고 했다. 진 전 교수는 “이 사건,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된다”라면서 “무엇이 대중과 전문가들을 모두 19세기적 예술관념에 빠뜨렸는지, 이 가공할 시대착오의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성찰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진중권 페이스북 갈무리. 조씨는 2011년 9월부터 2015년 1월까지 화가 송모씨 등이 그린 그림에 가벼운 덧칠 작업만 한 작품 21점을 17명에게 팔아 1억5300여만 원을 받은 혐의로 2016년 6월 불구속기소 됐다. 이후 1심 재판부는 조씨의 사기 혐의를 ‘유죄’로 판단,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그러나 2018년 8월 열린 항소심에서 재판부는 “(문제가 된 화투 소재) 미술작품은 조씨 고유의 아이디어”라며 조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이후 판결 결과에 불복한 검찰이 상고했고, 대법원 1부(주심 권순일 대법관)는 25일 오전 사기 혐의로 기소된 조씨 상고심에서 무죄를 선고한 원심판결을 확정했다.  이날 재판부는 조씨 사건처럼 미술작품 거래 시 발생하는 다툼은 전문가 의견을 존중하는 ‘사법 자제 원칙’을 지켜야 한다고 판시했다.  /현화영 기자  /사진=연합뉴스, 페이스북   =============================================///   조영남의 대작이 무죄라면, 인공지능 작품도 예술일까 2020.06.27.  좋아요  화나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beta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사진=픽사베이 가수 겸 작가 조영남(75) 씨의 화투 작품 대작 논란에 대해 대법원이 최종 무죄 판결을 냈다. 2016년부터 약 4년여에 걸쳐 세상을 시끄럽게 한 사건의 소송이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조 씨는 2011~2015년 무명 화가 A씨를 시켜 화투 작품들을 만들었고, 사람들에겐 대작 사실을 알리지 않은 채 20여 점을 팔아 1억5000만원을 벌었다. 사기죄에 몰린 조 씨는 소송에서 ‘작가가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조수가 작품을 만드는 건 현대 예술의 관행’이라 항변했다. 법원은 조 씨가 작품을 팔 때 조수의 존재를 알릴 필요가 없다고 봤다. 나아가 작가 스스로 작품을 만드는 행위가 현대 예술에서 중요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예술 작품의 탄생에서 ‘주체의 물리적 행위 여부’는, 최소한 우리나라에선 중요하지 않다고 법적으로 선언된 것이다. 예술의 정의를 뒤흔든 조영남 씨 대작 사건 대작 논란으로 대법원까지 간 조영남 씨의 화투 작품. 조 씨 판결에 대해 세간의 의견이 분분하나, 적어도 대중 일반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반응이 대부분이다. 요컨대 그림에서 미세한 붓 터치 하나만으로도 결과가 바뀌는데, 물리적 행위를 거의 하지 않은 채 아이디어만 제공한 사람을 작품의 주인으로 봐야 하느냐는 것이다. 다만 조 씨가 감상자들을 ‘기만’했는지와 별개로, 미술계의 입장은 ‘예술이 맞다’는 쪽으로 보는 듯하다. 현대 ‘개념미술’의 탄생 이후 예술 작품에서 중요한 건 그걸 만들게 된 아이디어이며, 이에 조영남 씨를 창작자로 보는 게 타당하다는 것이다. 마르셀 뒤샹의 ‘샘’ 개념미술의 아버지 격인 마르셀 뒤샹의 레디메이드 아트 작품 ‘샘’을 예로 들어보자. 물리적 작품을 만든 주체(즉 소변기 공장 제조업자 ‘R.MUTT’)를 작가로 보는 이는 아무도 없다. 중요한 것은 그걸 작품으로 격상시킨 아이디어(뒤샹의 의식)다. 실제로 적지 않은 현대 예술가들은 스스로 작품을 만들지 않고 있다. 조 씨가 재판에서 예로 든 앤디 워홀은 조수를 고용해 작품을 ‘대량생산’했다. 물론 워홀의 경우 작품 생산방식 그 자체가 창작 철학과 직결된다는 점에서 조 씨 사례와 다르게 봐야 하는 것도 사실이다. 데미안 허스트 무라카미 다카시의 애니메이션 작품 창작 과정에선 조수 35명이 투입된다. 심지어 데미안 허스트는 뉴욕 가고시안 갤러리에서 열린 전시 오프닝에서 “여기 전시된 그림 중 내가 그린 건 단 한 점도 없다”고 말했을 정도다. 창작에서의 필요성 여부와 별개로, 이제 현대미술에서 조수를 기용하는 건 일반적이라는 게 업계 시각이다. 미술평론가 진중권 씨는 그의 페이스북에 “(조영남 씨에 대한 비판은) 거의 집단 린치수준이었다”라며 “대중이야 몰라서 그런다 쳐도, 그걸 알아야 할 전문가 집단마저 현대미술이 탄생한 지 100년이 넘었건만 예술에 대한 이해 수준이 19세기 인상주의 시절에 가 있다”라고 지적했다. 이 같은 논란의 요지는 결국 현대 예술에 대한 정의가 불분명함으로 귀결된다. 19세기 낭만주의 사조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예술과 미학 개념의 잣대가 현대 예술을 해석하는 데 맞지 않음에도 통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조영남 씨 대작 논란은 이 같은 문제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인공지능이 만든 작품은 예술일까 현대 예술을 어떻게 정의하느냐가 중요한 이유는 인공지능(AI)이 만든 작품을 둘러싼 논란에서도 나타난다. 넥스트 렘브란트는 마이크로소프트와 네덜란드 연구진이 함께 만들었다. 딥러닝을 통해 렘브란트의 작품 346점을 분석했는데, 3D 기술을 통해 심지어 질감과 붓 터치까지 따라 했다. 심지어 미술 전문가들조차 진위를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정교하다. ‘넥스트 렘브란트’는 3D 프린팅 기술을 활용해 질감과 붓터치까지 비슷한 렘브란트 풍 작품을 만들었다. 럿거스 대학에서 만든 ‘AICAN’은 예술 작품의 ‘새로움’이란 측면을 충족하면서도 기존 예술의 평가 범주에도 머무르도록 학습됐다. AICAN은 인공지능의 지적 능력을 평가하는 튜링 테스트를 통과했고, 오히려 사람의 창작물보다 더 좋다는 평을 받기도 했다. 조영남 씨가 물리적 행위 없이 작품을 만들었듯, 인공지능 작가들도 별도의 물리적 행위 없이 창작한다. 인공지능에 대해 대중은 보통 주체적으로 활동하는 ‘로봇’을 떠올리기 마련이지만 사실 인공지능은 소프트웨어다. 물리적 작품을 만드는 건 그걸 이어받는 프린터 등의 출력장치다. 이 같은 점에서 현대 개념미술과 인공지능 창작은 비슷하다. 다만 전문가들은 현대 예술의 관점에서도 대체적으로 인공지능이 만든 작품을 오늘날의 창작 범주로 보기 어렵다고 말한다. 인간의 창작 활동은 ‘의식’의 결과지만, 인공지능은 그 자체로 지각이나 의식이 없이 작품을 만들기 때문이다. 물리학과 철학을 함께 수학한 이상욱 한양대 철학과 교수는 인공지능의 핵심적 특징으로 ‘지각 없는 수행’을 꼽는다. 작품의 완성도와 별개로 인공지능은 창작과정에서 의식적 경험을 하지 않으며, 현존하는 인공지능의 창작에는 인간이나 다른 인과적 대상과 결합해야 한다는 것이다. 를 쓴 김재인 경희대 교수는 ‘에이전트(주체)’를 강조한다. 인간의 경우 창작 활동에서 그 스스로 주체가 돼 판단하는 반면 인공지능은 수행 기준이 주체 바깥에 있어 고유 의지가 없다는 것이다. 이에 김 교수는 인공지능 작가를 창작의 ‘유용한 도구’로 본다. 김 교수는 “(인공지능 작품을) 예술 작품으로 취급은 가능하나 창작은 아니라는 게 제 입장이며, 이는 인공지능이 무작위적 결과물을 내놓기 때문”이라며 “미적 가치 평가가 없이 평가 기준이 밖에 있기 때문으로, 평가작업을 못 한다는 점에서 창작 주체가 아닌 도구이자 획기적 매체로 봐야 한다”라고 말했다. 인공지능 창작의 탄생, 예술 개념을 바꾼다 로봇 경감 ‘게지히트’는 특정 사건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고도화된, 감정을 가진 로봇의 존재를 알게 된다. ‘로봇은 인간을 상해하거나 죽일 수 없다’는 로봇법 13조를 어기고 인간을 멸망시키려는 로봇들. 이 시도를 막는 게지히트는 수사 과정에서 소중한 존재를 잃고 눈물을 흘리며, 자신도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을 지각한다. 데쓰카 오사무의 원작 만화 을 리메이크한 우라사와 나오키의 만화 속 이야기다. 에선 로봇이 보편화 된 세계에서 지각과 감정을 가지는 로봇들이 등장한다. 전투 로봇 ‘노스 2호’는 피아노를 치며 스스로 음악 창작을 시도하기도 한다. 우라사와 나오키 작 속 로봇 경감 ‘게지히트’ 다만 전문가들은 이 같은 세상이 오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 본다. 현생 인류의 두뇌 속 의식이 어떤 물질적 인과 작용을 거치는지도 잘 모르는 상황에서, 인공지능에 이를 심는 건 그 방법조차 찾기 어렵다는 것이다. 인공신경망이 갖는 결함도 문제다. 요컨대 고도의 수학적 계산을 순식간에 처리하는 인공지능도 인간이라면 당연히 할 수 있는 걷기나 장애물 피하기를 잘 해내지 못한다. 이미지 판독 인공지능은 때때로 토끼를 고양이라 하는 실수를 저지르기도 한다. 바둑 기사 이세돌과 구글 알파고 간 대국에서 역사적 ‘78수’ 이후 알파고가 저지른 터무니 없는 실수도 그러하다. 이에 대해 이상욱 한양대 교수는 ‘이해하기 어려운 실패’를 인공지능의 특징 중 하나로 정의하며, 이를 극복하기 위한 고도의 인공지각망을 개발하는 데 엄청난 시간이 소요될 것이라 강조했다. 인공지능 작가 ‘이메진AI’와 협업한 ‘Commune with...’을 만든 두민 작가는 “인공지능이 사람과 같은 자율적 사고와 물리적 움직임이 있어 창작한다면 창작자로 봐야겠지만, 인간과 정말 같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며 “인공지능도 지금은 하나의 새로운 기술이고 결국 예술가는 이 기술을 이용한 새로운 미술사조나 미술 장르를 만들어 낼 거라 확신한다”라고 말했다. 두민(오른쪽 상단) 작가는 펄스나인 사의 인공지능작가 ‘이메진AI’와 협업해  ‘Commune with…’을 만들었다. 만약 인공지능이 인간의 사고 수준에 범접해 작품을 만든다면 창작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이 경우 창작물에 대한 저작권이나 소유권 문제도 생길 수 있다. 예를 들어 인공지능 작품에 대해 저작권을 알고리즘 개발자나 이용자, 혹은 인공지능 그 자체 중 누구에게 줘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 등이 그것이다. 학계에서도 인공지능 작품을 두고 다양한 논의가 나온다. 지난 26일 서울 웨스틴조선호텔에서 열린 ‘유네스코 문화다양성 협약 전문가 토론회’가 열렸다. 이날 토론자 8명은 인공지능의 창작에 대해 법적, 문화적, 예술적 관점에서 열띤 논쟁을 벌였다. 이날 토론회 좌장을 맡은 한경구 서울대 교수는 “우리가 21세기에 살고 있는데 예술의 기준을 19세기에 둘 필요는 없을 것”이라며 “20세기 들어 기술 발전과 함께 성찰과 반성 고민을 거쳐 업데이트된 개념을 갖고 예술에 대해 이야기해야 앞으로 진보된 논의를 할 수 있을 것”이라 말했다. /이일호 기자
7714    토템과 남영전 시인 댓글:  조회:3065  추천:0  2020-06-20
토템시인 남영전이 보는 문화 (ZOGLO) 2020년4월11일        중화인민공화국 창립 70돐 기념 특별기획-[문화를 말하다-46](남영전편-1)   시인 남영전은 1948년 3월 3일, 길림성 휘남현의 소의산이라는 한 농촌마을에서 유복자로 태여났습니다. 아버지와 삼촌은 모두 해방전쟁에서 희생되였고 어머니마저 모진 정신타격으로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남영전은 어릴 때부터 할머니와 서로 의지하면서 생활하였습니다. 시인은 후날 , , , 등 시를 통해 혈육들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을 표현했습니다. 남영전은 중국문단에서 한어와 조선어로 동시에 자유자재로 창작을 할 수 있는 보기드문 조선족 시인입니다. 특히 1986년부터 시작하여 남영전은 토템시라는 새로운 시가 령역을 개척하여 중국문단을 장식했으며 30여년 동안 토템시와 토템문화 연구에서 일가견을 보여주면서 중국 시문학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습니다.     남영전 프로필: 략력: 1948년 3월 3일, 길림성 휘남현 소의산에서 출생. 길림성작가연수학원 졸업, 문학영예박사, 길림성 고급전문가. 1980년 《장백산》잡지를 창간하고 사장, 주필 담임. 2005년 《장백산》잡지사 사장 겸 길림신문사 사장. 중국작가협회 소수민족문학위원회 위원, 중국소수민족작가협회 명예부회장, 중국당대소수민족문학연구회 부회장, 전국소수민족문학창작 '준마상' 평심위원 주요작품: 1971년 한문시작품으로 주류문단 데뷔. 1987년부터 시집 《상사집》, 《산혼》, 《백의 넋》, 《신단수》, 《원융》, 《남영전토템시집》 등 18권 출판. 중국고전작품《당송전기선》, 《봉선연의》와 《파금단편소설》 등 번역 출판. 수상과 영예: 전국소수민족문학 창작준마상,전국당대소수민족문학연구상 , 중국작가협회 민족문학상 등 50여개 수상, 국무원 특수수당자, 2010년 중국당대 10명 걸출한 민족시인. 2017년 중국 신시 100년 100인으로 당선.      걸출한 민족시인 남영전. 금년은 21세기 세번째 십년을 맞는 첫해입니다. 21세기 세번째 십년을 맞이하는 새해 벽두에 문화 화제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아주 의의가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문화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지난 세기 말에 21세기를 전망하면서 많은 이야기가 오갔어요. 그중의 중요한 화제가 21세기는 문화의 세기라는 것이였어요. 21세기를 문화의 세기라고 하는 그 의견에 저도 동감입니다. 20세기를 보면 1차세계대전, 2차세계대전 이렇게 두번의 세계대전이 있었고 그 후에는 복구시기와 새로운 경제건설, 산업혁명을 경과했습니다. 20세기 말에 들어와서는 세계경제의 산업화 즉 경제 글로벌이 형성되였습니다. 21세기를 전망할 때 많은 사람들은 20세기를 경제건설의 세기라면 21세기는 문화의 세기라고 전망하였습니다. 문화의 세기란 무엇일가요? 문화의 세기란 21세기에 와서 문화 이 두 글자가 돌출된다는 말이지요. 문화의 세기란 뜻은 민족이나 국가가 문화의 힘을 키워야 한다는 뜻이지요. 문화의 대결 즉 한마디로 말해서 문화실력의 대결이란 것이지요. 그래서 21세기는 문화를 말해야 한다는 그런 말이 되겠어요. 1989년에 제가 카나다 토론토대학 교수의 초청으로 카나다를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카나다에는 한인(조민족)들이 15만명 좌우 살고 있습니다. 1980년대는 중국이 한창 개혁개방을 힘있게 추진하던 시기였습니다. 당지의 한인들은 중국의 개혁개방에 대해 상당한 흥취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중국의 주류문화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중국조선족문화에 대해서도 흥취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문제를 둘러싸고 많은 대화를 가졌지요. 카나다에서는 한인들의 문화활동이 상당히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2007년 8월, 연변민들레생태원에서(오른쪽 여섯번째). 카나다에서 한 일주일간 활동하고 있을 때 미국에서도 교류를 하자는 초청이 왔습니다. 당시 미국에는 120만명에 달하는 우리민족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200만명이 더 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1989년 당시 이들도 중국의 개혁개방에 대하여 굉장히 흥취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중국의 주류문화에 흥취를 가지고 중국조선족문화에 대해 궁금해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사람들의 요청으로 3주 동안 미국에 있으면서 중국의 개혁개방, 중국의 주류문화 그리고 중국조선족문화를 가지고 밤낮을 이어가면서 강의를 하였습니다. 그 당시 저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것이 있습니다. 1989년, 11년만 있으면 21세기에 진입하는 시기에 미국에 살고 있는 한국인들은 21세기에 가서 중국은 아침의 해, 미국은 점심의 해라고 말하는 것이였습니다. 중국을 아침의 뜨는 해에 비유한 것입니다. 당시 저에게는 상당히 충격적인 말이였습니다. 미국 사람들이 중국의 21세기를 이렇게 높게 전망하고 있는 데에 대해 상당히 고무적이면서도 또 충격적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자부감을 느끼면서 (마음이) 뿌듯했습니다. 그리고 더욱 충격적인 일이 있습니다. 영국의 저명한 력사학자인 토인비가 《21세기를 여는 대화》(1973년)에서 21세기는 중국의 세기일 것이라고 전망한 것입니다. 토인비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력사학자입니다. (주: 토인비(1889년~ 1975년), 토인비의 력작 《력사의 연구》는 독일 슈펭글러의 《서방의 몰락》, 《로마제국의 흥망》과 함께 세계 사학계에서‘거형의 력사박물관'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19세기 이후의 전통 사학에 맞서 새로운 력사학을 개척한 사람으로 평가받는다.)     2005년 11월, 길림성당위 전임 부서기 전철수(왼쪽 두번째)가 사업조사로 길림신문사에 왔을 때 신문사 상황을 회보하고 있는 당시 길림신문사 사장 남영전(왼쪽 세번째).   그 책의 주요 관점이 21세기는 중국의 세기라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서방세계를 놀래웠습니다. 특히 미국을 놀라게 했습니다. 많은 학자와 기자들이 영국에 가서 토인비를 만났지요. 왜서 21세기를 중국의 세기라고 하는가? 무슨 근거라도 있는가? 토인비는 21세기는 상당히 복잡한 세기가 될 것이며 중국의 유교사상, 즉 중국의 전통문화가 21세기의 세계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로 될 것이라고 전망한 것입니다. 세계력사를 둘러보면 바빌론, 애급, 인도, 중국 등 4대 문명고국이 있었습니다. 왜서 문명고국이라 했느냐면 그 당시 문화가 고도로 발달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빌론, 애급, 인도 등 3개 문명고국의 문화는 소실되고 말았습니다. 전쟁 등 여러 가지 원인으로 파괴되고 전승을 못한겁니다. 그러나 중국의 전통문화는 이어져 내려왔지요. 4개 고대 문명국가중 3개는 아시아에 위치해 있습니다. 고대 바빌론은 지금의 이라크지요. 고대 바빌론은 서아시아, 인도는 남아시아 그리고 중국은 동아시아, 북아프리카에는 고대 애급 이렇게 4개 문명고국가운데서 다른 세개(바빌론,인도,애급)의 문명은 소실되고 끊어졌지만 유독 중국만이 5천년을 내려오면서 자기의 전통문화를 지킨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문화의 중요성이지요.     2006년 3월, 북경 수도사범대학 중국시가연구쎈터에서 남영전 시가 세미나가 열렸다.   문화의 정의를 (내리자면) 솔직히 말하면 쉽지 않지요. 문화는 다루기 어려운 단어입니다. 누구나 문화를 입에 담고 있고 알고 있는 듯하지만 정작 딱 찍어서 말하자면 어려운 것입니다. 사전에는 문화는 인류 정신활동의 산품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맞는 말인데 또한 난해한 해석이지요. 그래서 저는 지난 세기 80년대로부터 토템문화 공부를 하면서 여러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름대로 문화의 정의에 대해서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문화와 민족에 대해 많이 생각을 해왔습니다. 제가 느끼건대 세계적으로 제일 답복하기 어려운 단어가 두개가 있는데 하나는 문화 그리고 다른 하나는 민족입니다. 문화는 우리가 매일 쓰고 있는 단어지만 딱 집어서 말하는 사람이 없으며 사전과 인터넷에서도 딱 찍어서 말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서 그럴가요? 그것은 바로 문화의 함의가 너무 방대하기 때문에 한마디로 개괄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민족을 말할라 치면 세계에는 200개에 달하는 나라가 있으며 거기에 2000여개 민족이 살고 있습니다. 한개 나라에 평균 열개 민족이 있는 셈이지요. 중국에는 56개 민족이 있으며 세계에서 민족이 가장 많은 국가의 하나입니다. 민족이란 무엇인가? 세계에 2000개 민족이 살고 있지만 각자의 결론이 다 다릅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창립된 후 우리는 민족 획분 문제에 봉착하게 됩니다. 민족 획분 문제와 관련해 쓰딸린이 정의를 내린 적이 있습니다. 쓰딸린은 공동한 언어, 공동한 지역, 공동한 경제생활, 공동한 민족문화 특징으로 표현되는 공동한 심리소질 이렇게 4가지 공동한 특징으로 민족을 구분한다는 정의를 내놓았습니다. 그래서 중국에서 쓰딸린의 민족 정의에 근거하여 민족을 구분하려고 했으나 힘들었습니다. 로씨야는 중국과 상황이 다르기 때문이였습니다. 그곳은 대부분 한개 지역에 한개 민족이 집중해 살고 있었습니다. 쓰딸린의 민족 정의는 로씨야(쏘련)에 한해서는 맞는 정의였습니다. 그런데 중국은 한개 지역에 여러 민족이 섞여서 생활하다 보니 이 정의가 통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민족 획분에서 애를 먹었습니다. 민족 획분 문제가 1958년까지 지적되여 왔습니다.     2015년 4월에 열린 남영전 토템시 랑송회.   토템공부를 하면서 민족과 문화가 도대체 무엇인가에 대해 파고들면서 많은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토템은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에 대해 다루기 때문에 문화와 민족 이런 것이 포괄되여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문제를 연구하면서 저의 나름대로 문화와 민족에 대해 정의를 내려보았습니다. 2004년에 장춘에서 중국 소수민족 번역가 회의가 있었습니다. 그해에 저의 토템시집 《원융》이 출판되였을 때입니다. 저는 회의에서 토템에 대해 설명하면서 문화와 민족의 개념에 대한 발언을 했습니다. 전국 각지에서 온 회의 참가자들은 저의 발언에 동감을 표했습니다. 당시 회의에 참석한 마라친부(소설가, 중국작가협회 서기처 서기, 《민족문학》 주필 력임)는 저의 의견에 찬성을 표하면서 글을 써서 발표할 것을 건의했습니다. 마라친부는 금년에 90세가 되는데 신체가 아주 건강합니다. 그래서 저는 〈토템문화가 현대인들에게 주는 게시〉라는 글을 써서 마라친부에게 보여주었더니 좋다면서 빨리 발표하라고 해서 《문예보》에 발표했습니다. 그후 《민족보》에서 인츰 전재했으며 길림성 《새장정》,《민족종교》잡지를 포함해 남방까지 열몇개 잡지에서 이 문장을 전재했습니다. 제가 이야기하는 문화와 민족에 관한 문제는 제 나름대로 깨달은 느낌입니다. 이 두 문제는 반드시 명확히 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래야만이 앞길이 명확해집니다. 우리가 무얼 해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할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개념부터 명확하지 못하면 곤난하지요. 여기에 대한 탐구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래서 제 나름대로 정의를 한번 해보았습니다. (구경) 맞는지 틀리는지는 사회 실천의 검증을 받아야 하겠지요.     한어와 조선어로 출판된 남영전선생의 토템시 작품집.   그럼 문화란 무엇인가? 저는 30여년 동안 토템문화에 대한 연구를 통해‘문화란 개인과 군체를 식별하는 의식주행어의 표지이다'라고 정의를 내려보았습니다. 인간생활은 이 다섯가지를 벗어나지 못합니다.‘의’는 복식문화를 가리키며‘식'은 음식문화,‘주'는 주거문화,‘행'은 사람들의 사상과 행위도덕과 풍속습관을 가리킵니다. 그리고‘어'는 언어를 말합니다. 이런‘자대'를 가지고 민족과 개인을‘감별'할 수 있다고 봅니다. 인간에 관한 모든 문제는 의식주행어가 표준으로 될 수 있고 자대라고 봅니다. 중국의 56개 민족을 보면‘의'라는 전통복식문화를 통해 구분할 수 있습니다. 56개 민족의 56개 전통민족복식을 주제로 하는 우표도 있습니다. 복장이 모두 부동하지요. 조선족이 입은 전통복장을 보고 바로 조선족임을 알 수 있지요. ‘식'ㅡ음식문화도 민족마다 부동하지요. 그리고‘주'ㅡ주거문화도 민족마다 다르지요. 지금은 아빠트에 살아서 주거문화가 잘 알리지 않지만 그러나 실내의 꾸밈새는 약간씩 다를 수 있습니다. 민족이 다름에 따라서 차이가 나기 마련입니다.‘행'ㅡ사상과 행위도덕과 풍속습관에 대해 나중에 더 말하겠지만 범위가 굉장히 방대한 문제입니다. 그리고‘어'는 언어문자를 말합니다. 곰곰히 따져보면 이 다섯가지‘자대'를 갖고 재여보면 다 가능합니다. /길림신문 글 구성: 리철수기자/영상:정현관 최승호 기자  
7713    친족, 친척 = 토템 댓글:  조회:2828  추천:0  2020-06-20
재미 있고 알기 쉽게 엮은 토템이야기 /박일 2020년 06월 19일 작성자: 박일 재미 있고 알기 쉽게 엮은 토템이야기 남영전선생의 를 읽고     남영전선생은 중국 조선족사회에서 널리 알려진 걸출한 시인이고 언론인이고 학자이다. 그는 우리 글은 물론 중문도 아주 능란하게 구사하여 중국의 주류사회, 주류문단에서도 ‘중국 신시 100년 100인’에, ‘중국의 10대 걸출한 민족시인’에 떳떳이 이름을 올린 자랑스러운 민족시인이고 문화인이다. 뿐만 아니라 수십년을 꾸준히 인류문화의 원천이고 뿌리인 토템문화를 깊이 있게 연구하고 또 널리 전파하는데 큰 업적을 쌓고 있는 존경스럽고 돋보이는 공헌자이기도 하다.   최근 남영전선생이 《길림신문》에 펴낸 는 글 역시 무게 있고 폭이 넓으면서도 아주 재미나게 엮어 애독자들의 큰 흥취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글은 원시 인류문명의 발단인 토템의 출현, 토템숭배로부터 인류, 민족, 력사, 문화, 종교 등 넓은 령역을 고루 살펴보면서 원시문명과 현대문명이 의존하고 발전하게 된 토템이란 원초적 문명의 씨앗을 생동하고 체계적으로 엮어서 보여주고 있다.   특히 돋보이는 것은 아츨하게 먼 옛날 우리 조상들이 만들어내고 조상들이 물려준 것이여서 퍼그나 어렵다면 어렵고 난해하다면 난해하기도 한 전통적인 뿌리문화인 토템 명제를 우리 독자들이 알아듣기 쉽고 또 흥미를 가지도록 재미나게 엮어 이야기해주고 있다는 그것이다.   남영전선생이 엮은 이야기를 따라가 보면 인간 생활의 기본인 의,식,주,행,어 문화개념을 풀이도 해주고 인간과 자연, 인간과 동물을(문화가 있냐 없냐) 비교도 해보면서 만물은 모두 령혼이 있다는 옛 사람들의 생각이 바로 토템을 산생시킨 계기임을 알려주면서 우리 민족의 성씨, 우리 민족의 혼례, 장례풍속…지어는 결혼식 때 왜 큰상에 수탉이 오르고 수탉의 주둥이에 고추를 물리우느냐는 등 구체적인 세절에 이르기까지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곁들며 형상적으로 생동하게 설명해주고 또 구경을 시켜주고 있다.   그럴듯 퍼그나 엄숙하고 퍼그나 딱딱하게 안겨올 수도 있는 토템이란 문화지식을 독에서 푹 익어 나오는 김치처럼 대가 다운 목소리로 “친족, 친척이란 말이 토템이란 말”이라며 진지하게 이야기하는가 하면 또 누구나 알아듣기 쉽게 풀어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토템문화에 접촉이 없어 생소하게 느껴지는 사람들마저도 가슴에 와 닿고 실물을 보듯이 그 륜곽과 모습이 머리에 그려지도록 한다. 이는 글을 다루고 주무르는 필자를 포함한 우리 문인, 학자들이 따라 배울바라고 본다. 이 또한 덕망높은 남영전선생이 우리 독자들을 배려하는 어진 성품이고 덕량이 아닐가 생각한다.   /길림신문    
7712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축구선수평화",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2606  추천:0  2020-06-15
국제 ‘세손가락 경례’ 미얀마 축구선수의 26시간 대탈출 작전 임규민 기자 입력 2021.06.17 21:31       미얀마 축구 국가 대표팀 선수 피리앤 아웅(왼쪽)이 지난달 28일 일본 지바현에서 열린 일본과의 월드컵 예선 경기에서 미얀마 군부에 저항하는 의미로 '세 손가락 경례'를 하고 있다. /당시 경기 방송 장면을 캡처해 올린 트위터 일본에서 열린 월드컵 축구 예선 경기에서 군부 쿠데타 저항의 의미로 ‘세 손가락 경례’를 한 미얀마 축구 국가 대표팀 선수가 출국 전 극적으로 귀국행 비행기 탑승을 모면했다. 그가 조력자들과 기획한 약 26시간 3차례에 걸친 탈출 작전은 수포로 돌아가기 직전 성공했다. 이후 그는 일본 정부에 난민 지위를 신청할 계획이다. 17일 아사히신문은 월드컵 아시아 2차 예선 경기에 참가하기 위해 일본에 머물고 있던 미얀마 대표팀 골키퍼 피리앤 아웅(27) 선수가 전날 밤 귀국 비행기에 오르기 전 오사카 간사이(關西) 국제공항에서 일본 정부에 보호를 요청했다고 보도했다. 앞서 그는 지난달 28일 일본 지바현에서 열린 일본과의 경기에서 국가 제창 때, 지난 2월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군부에 항의 차원에서 세 손가락 경례를 했다. 이 경례는 미 할리우드 영화 ‘헝거 게임’에서 독재에 맞서는 주인공 등이 저항의 상징으로 하는 동작이다. 미얀마 현지 시위 현장에서도 시민들은 이 동작을 하며 반대 투쟁을 이어갔다. 그의 경례 장면은 중계 화면에 잡혔고 소셜미디어 등을 통해 급속히 퍼져나갔다.   미얀마 축구 국가 대표팀 선수 피리앤 아웅이 17일 일본 오사카 간사이 국제공항에서 미얀마 군부에 항의하는 차원에서 '세 손가락 경례'를 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이대로 귀국하면 그의 목숨이 위험한 상황이었다. 이때 오사카에서 음식점을 운영하는 미얀마인이 피리앤 아웅를 돕겠다고 나섰다. 그 역시 1988년 미얀마 민주화 운동에 가담했다가 일본에 망명한 난민 신분으로 피리앤 아웅의 처지를 십분 이해하고 있었다. 이들은 화상 통화 등 수단으로 은밀히 연락을 주고 받은 끝에 1차 탈출 작전을 세웠다. 15일 미얀마-타지키스탄 경기 후 선수 숙소에서의 저녁 식사 동안 빈틈을 노려 탈출하는 계획이었다. 피리앤 아웅은 이날 오후 10시15분쯤 동료들과 숙소로 돌아와 저녁을 먹는 도중 작전대로 몰래 자리를 빠져나와 주차장으로 향했다. 그곳엔 그를 데리러 온 조력자의 차량이 있었다. 그러나 그를 호시탐탐 감시하던 대표팀 스태프가 그를 제지했고 1차 작전은 수포로 돌아갔다.   2차 작전은 새로운 조력자가 가담한 후 세워졌다. 16일 오전 1시 난민법 전문 변호사인 소라노 요시히로가 피리앤 아웅에게 연락을 취해 새로운 탈출 작전을 짰다. 우선 소라노 변호사는 피리앤 아웅의 발을 묶는 대표팀 스태프를 오사카 경찰 본부에 감금 혐의 등으로 고발 조치했다. 이후 오후 7시 피리앤 아웅은 다시 한번 저녁 식사 중 숙소를 빠져나오려고 했으나 또 실패했다.   피리앤 아웅(왼쪽에서 두 번째)이 17일 일본 오사카 간사이 국제공항에서 기자들 앞에서 발언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16일 오후 8시 그는 결국 동료들과 버스를 타고 오사카 간사이 국제공항으로 갔다. 오후 9시20분 이들은 국제선 출국장에 들어갔다. 모든 것이 끝난 듯한 순간, 피리앤 아웅만 일본 당국자에 의해 별실로 인도됐다. 그는 거기서 일본 정부에 보호를 요청했고 3시간쯤 지난 17일 0시10분쯤 공항 로비에서 자신의 조력자들과 합류했다. 피리앤 아웅 측은 다음날 기자들에게 “이달 말 일본에서 난민 지위를 신청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군부가 다스리는 미얀마는 평화 국가가 아니기 때문에 다음달 도쿄 올림픽에 참가해서는 안 된다”고도 했다. 교도통신과의 인터뷰에서는 “민주 정부가 집권하면 귀국하고 싶다”고 말했다. 가토 가쓰노부 관방장관은 “그의 바람을 적절히 청취해 대응할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2월 쿠데타 이후 미얀마는 국민적 파업 사태와 시위가 여전히 이어지면서 현재까지 860명이 넘게 숨지고 4900 명 이상이 구금됐다. 시민들은 저항을 지속하기 위해 북부 카친주 등 소수 민족 반군 진영에 속속 합류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7711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축구선수평화",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2488  추천:0  2020-06-15
국제 ‘세손가락 경례’ ... 임규민 기자 입력 2021.06.17      미얀마 축구 국가 대표팀 선수 피리앤 아웅(왼쪽)이 지난달 28일 일본 지바현에서 열린 일본과의 월드컵 예선 경기에서 미얀마 군부에 저항하는 의미로 '세 손가락 경례'를 하고 있다. /당시 경기 방송 장면을 캡처해 올린 트위터 일본에서 열린 월드컵 축구 예선 경기에서 군부 쿠데타 저항의 의미로 ‘세 손가락 경례’를 한 미얀마 축구 국가 대표팀 선수가 출국 전 극적으로 귀국행 비행기 탑승을 모면했다. 그가 조력자들과 기획한 약 26시간 3차례에 걸친 탈출 작전은 수포로 돌아가기 직전 성공했다. 이후 그는 일본 정부에 난민 지위를 신청할 계획이다. 17일 아사히신문은 월드컵 아시아 2차 예선 경기에 참가하기 위해 일본에 머물고 있던 미얀마 대표팀 골키퍼 피리앤 아웅(27) 선수가 전날 밤 귀국 비행기에 오르기 전 오사카 간사이(關西) 국제공항에서 일본 정부에 보호를 요청했다고 보도했다. 앞서 그는 지난달 28일 일본 지바현에서 열린 일본과의 경기에서 국가 제창 때, 지난 2월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군부에 항의 차원에서 세 손가락 경례를 했다. 이 경례는 미 할리우드 영화 ‘헝거 게임’에서 독재에 맞서는 주인공 등이 저항의 상징으로 하는 동작이다. 미얀마 현지 시위 현장에서도 시민들은 이 동작을 하며 반대 투쟁을 이어갔다. 그의 경례 장면은 중계 화면에 잡혔고 소셜미디어 등을 통해 급속히 퍼져나갔다.   미얀마 축구 국가 대표팀 선수 피리앤 아웅이 17일 일본 오사카 간사이 국제공항에서 미얀마 군부에 항의하는 차원에서 '세 손가락 경례'를 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이대로 귀국하면 그의 목숨이 위험한 상황이었다. 이때 오사카에서 음식점을 운영하는 미얀마인이 피리앤 아웅를 돕겠다고 나섰다. 그 역시 1988년 미얀마 민주화 운동에 가담했다가 일본에 망명한 난민 신분으로 피리앤 아웅의 처지를 십분 이해하고 있었다. 이들은 화상 통화 등 수단으로 은밀히 연락을 주고 받은 끝에 1차 탈출 작전을 세웠다. 15일 미얀마-타지키스탄 경기 후 선수 숙소에서의 저녁 식사 동안 빈틈을 노려 탈출하는 계획이었다. 피리앤 아웅은 이날 오후 10시15분쯤 동료들과 숙소로 돌아와 저녁을 먹는 도중 작전대로 몰래 자리를 빠져나와 주차장으로 향했다. 그곳엔 그를 데리러 온 조력자의 차량이 있었다. 그러나 그를 호시탐탐 감시하던 대표팀 스태프가 그를 제지했고 1차 작전은 수포로 돌아갔다.   2차 작전은 새로운 조력자가 가담한 후 세워졌다. 16일 오전 1시 난민법 전문 변호사인 소라노 요시히로가 피리앤 아웅에게 연락을 취해 새로운 탈출 작전을 짰다. 우선 소라노 변호사는 피리앤 아웅의 발을 묶는 대표팀 스태프를 오사카 경찰 본부에 감금 혐의 등으로 고발 조치했다. 이후 오후 7시 피리앤 아웅은 다시 한번 저녁 식사 중 숙소를 빠져나오려고 했으나 또 실패했다.   피리앤 아웅(왼쪽에서 두 번째)이 17일 일본 오사카 간사이 국제공항에서 기자들 앞에서 발언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16일 오후 8시 그는 결국 동료들과 버스를 타고 오사카 간사이 국제공항으로 갔다. 오후 9시20분 이들은 국제선 출국장에 들어갔다. 모든 것이 끝난 듯한 순간, 피리앤 아웅만 일본 당국자에 의해 별실로 인도됐다. 그는 거기서 일본 정부에 보호를 요청했고 3시간쯤 지난 17일 0시10분쯤 공항 로비에서 자신의 조력자들과 합류했다. 피리앤 아웅 측은 다음날 기자들에게 “이달 말 일본에서 난민 지위를 신청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군부가 다스리는 미얀마는 평화 국가가 아니기 때문에 다음달 도쿄 올림픽에 참가해서는 안 된다”고도 했다. 교도통신과의 인터뷰에서는 “민주 정부가 집권하면 귀국하고 싶다”고 말했다. 가토 가쓰노부 관방장관은 “그의 바람을 적절히 청취해 대응할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2월 쿠데타 이후 미얀마는 국민적 파업 사태와 시위가 여전히 이어지면서 현재까지 860명이 넘게 숨지고 4900 명 이상이 구금됐다. 시민들은 저항을 지속하기 위해 북부 카친주 등 소수 민족 반군 진영에 속속 합류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7710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축구선수평화",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2252  추천:0  2020-06-15
국제 ‘세손가락 경례’ 미얀마 축구선수의 26시간 대탈출 작전 임규민 기자 입력 2021.06.17 21:31       미얀마 축구 국가 대표팀 선수 피리앤 아웅(왼쪽)이 지난달 28일 일본 지바현에서 열린 일본과의 월드컵 예선 경기에서 미얀마 군부에 저항하는 의미로 '세 손가락 경례'를 하고 있다. /당시 경기 방송 장면을 캡처해 올린 트위터 일본에서 열린 월드컵 축구 예선 경기에서 군부 쿠데타 저항의 의미로 ‘세 손가락 경례’를 한 미얀마 축구 국가 대표팀 선수가 출국 전 극적으로 귀국행 비행기 탑승을 모면했다. 그가 조력자들과 기획한 약 26시간 3차례에 걸친 탈출 작전은 수포로 돌아가기 직전 성공했다. 이후 그는 일본 정부에 난민 지위를 신청할 계획이다. 17일 아사히신문은 월드컵 아시아 2차 예선 경기에 참가하기 위해 일본에 머물고 있던 미얀마 대표팀 골키퍼 피리앤 아웅(27) 선수가 전날 밤 귀국 비행기에 오르기 전 오사카 간사이(關西) 국제공항에서 일본 정부에 보호를 요청했다고 보도했다. 앞서 그는 지난달 28일 일본 지바현에서 열린 일본과의 경기에서 국가 제창 때, 지난 2월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군부에 항의 차원에서 세 손가락 경례를 했다. 이 경례는 미 할리우드 영화 ‘헝거 게임’에서 독재에 맞서는 주인공 등이 저항의 상징으로 하는 동작이다. 미얀마 현지 시위 현장에서도 시민들은 이 동작을 하며 반대 투쟁을 이어갔다. 그의 경례 장면은 중계 화면에 잡혔고 소셜미디어 등을 통해 급속히 퍼져나갔다.   미얀마 축구 국가 대표팀 선수 피리앤 아웅이 17일 일본 오사카 간사이 국제공항에서 미얀마 군부에 항의하는 차원에서 '세 손가락 경례'를 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이대로 귀국하면 그의 목숨이 위험한 상황이었다. 이때 오사카에서 음식점을 운영하는 미얀마인이 피리앤 아웅를 돕겠다고 나섰다. 그 역시 1988년 미얀마 민주화 운동에 가담했다가 일본에 망명한 난민 신분으로 피리앤 아웅의 처지를 십분 이해하고 있었다. 이들은 화상 통화 등 수단으로 은밀히 연락을 주고 받은 끝에 1차 탈출 작전을 세웠다. 15일 미얀마-타지키스탄 경기 후 선수 숙소에서의 저녁 식사 동안 빈틈을 노려 탈출하는 계획이었다. 피리앤 아웅은 이날 오후 10시15분쯤 동료들과 숙소로 돌아와 저녁을 먹는 도중 작전대로 몰래 자리를 빠져나와 주차장으로 향했다. 그곳엔 그를 데리러 온 조력자의 차량이 있었다. 그러나 그를 호시탐탐 감시하던 대표팀 스태프가 그를 제지했고 1차 작전은 수포로 돌아갔다.   2차 작전은 새로운 조력자가 가담한 후 세워졌다. 16일 오전 1시 난민법 전문 변호사인 소라노 요시히로가 피리앤 아웅에게 연락을 취해 새로운 탈출 작전을 짰다. 우선 소라노 변호사는 피리앤 아웅의 발을 묶는 대표팀 스태프를 오사카 경찰 본부에 감금 혐의 등으로 고발 조치했다. 이후 오후 7시 피리앤 아웅은 다시 한번 저녁 식사 중 숙소를 빠져나오려고 했으나 또 실패했다.   피리앤 아웅(왼쪽에서 두 번째)이 17일 일본 오사카 간사이 국제공항에서 기자들 앞에서 발언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16일 오후 8시 그는 결국 동료들과 버스를 타고 오사카 간사이 국제공항으로 갔다. 오후 9시20분 이들은 국제선 출국장에 들어갔다. 모든 것이 끝난 듯한 순간, 피리앤 아웅만 일본 당국자에 의해 별실로 인도됐다. 그는 거기서 일본 정부에 보호를 요청했고 3시간쯤 지난 17일 0시10분쯤 공항 로비에서 자신의 조력자들과 합류했다. 피리앤 아웅 측은 다음날 기자들에게 “이달 말 일본에서 난민 지위를 신청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군부가 다스리는 미얀마는 평화 국가가 아니기 때문에 다음달 도쿄 올림픽에 참가해서는 안 된다”고도 했다. 교도통신과의 인터뷰에서는 “민주 정부가 집권하면 귀국하고 싶다”고 말했다. 가토 가쓰노부 관방장관은 “그의 바람을 적절히 청취해 대응할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2월 쿠데타 이후 미얀마는 국민적 파업 사태와 시위가 여전히 이어지면서 현재까지 860명이 넘게 숨지고 4900 명 이상이 구금됐다. 시민들은 저항을 지속하기 위해 북부 카친주 등 소수 민족 반군 진영에 속속 합류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7709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축구선수평화",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2303  추천:0  2020-06-15
국제 ‘세손가락 경례’ ... 임규민 기자  2021.06.17      미얀마 축구 국가 대표팀 선수 피리앤 아웅(왼쪽)이 지난달 28일 일본 지바현에서 열린 일본과의 월드컵 예선 경기에서 미얀마 군부에 저항하는 의미로 '세 손가락 경례'를 하고 있다. /당시 경기 방송 장면을 캡처해 올린 트위터 일본에서 열린 월드컵 축구 예선 경기에서 군부 쿠데타 저항의 의미로 ‘세 손가락 경례’를 한 미얀마 축구 국가 대표팀 선수가 출국 전 극적으로 귀국행 비행기 탑승을 모면했다. 그가 조력자들과 기획한 약 26시간 3차례에 걸친 탈출 작전은 수포로 돌아가기 직전 성공했다. 이후 그는 일본 정부에 난민 지위를 신청할 계획이다. 17일 아사히신문은 월드컵 아시아 2차 예선 경기에 참가하기 위해 일본에 머물고 있던 미얀마 대표팀 골키퍼 피리앤 아웅(27) 선수가 전날 밤 귀국 비행기에 오르기 전 오사카 간사이(關西) 국제공항에서 일본 정부에 보호를 요청했다고 보도했다. 앞서 그는 지난달 28일 일본 지바현에서 열린 일본과의 경기에서 국가 제창 때, 지난 2월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군부에 항의 차원에서 세 손가락 경례를 했다. 이 경례는 미 할리우드 영화 ‘헝거 게임’에서 독재에 맞서는 주인공 등이 저항의 상징으로 하는 동작이다. 미얀마 현지 시위 현장에서도 시민들은 이 동작을 하며 반대 투쟁을 이어갔다. 그의 경례 장면은 중계 화면에 잡혔고 소셜미디어 등을 통해 급속히 퍼져나갔다.   미얀마 축구 국가 대표팀 선수 피리앤 아웅이 17일 일본 오사카 간사이 국제공항에서 미얀마 군부에 항의하는 차원에서 '세 손가락 경례'를 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이대로 귀국하면 그의 목숨이 위험한 상황이었다. 이때 오사카에서 음식점을 운영하는 미얀마인이 피리앤 아웅를 돕겠다고 나섰다. 그 역시 1988년 미얀마 민주화 운동에 가담했다가 일본에 망명한 난민 신분으로 피리앤 아웅의 처지를 십분 이해하고 있었다. 이들은 화상 통화 등 수단으로 은밀히 연락을 주고 받은 끝에 1차 탈출 작전을 세웠다. 15일 미얀마-타지키스탄 경기 후 선수 숙소에서의 저녁 식사 동안 빈틈을 노려 탈출하는 계획이었다. 피리앤 아웅은 이날 오후 10시15분쯤 동료들과 숙소로 돌아와 저녁을 먹는 도중 작전대로 몰래 자리를 빠져나와 주차장으로 향했다. 그곳엔 그를 데리러 온 조력자의 차량이 있었다. 그러나 그를 호시탐탐 감시하던 대표팀 스태프가 그를 제지했고 1차 작전은 수포로 돌아갔다.   2차 작전은 새로운 조력자가 가담한 후 세워졌다. 16일 오전 1시 난민법 전문 변호사인 소라노 요시히로가 피리앤 아웅에게 연락을 취해 새로운 탈출 작전을 짰다. 우선 소라노 변호사는 피리앤 아웅의 발을 묶는 대표팀 스태프를 오사카 경찰 본부에 감금 혐의 등으로 고발 조치했다. 이후 오후 7시 피리앤 아웅은 다시 한번 저녁 식사 중 숙소를 빠져나오려고 했으나 또 실패했다.   피리앤 아웅(왼쪽에서 두 번째)이 17일 일본 오사카 간사이 국제공항에서 기자들 앞에서 발언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16일 오후 8시 그는 결국 동료들과 버스를 타고 오사카 간사이 국제공항으로 갔다. 오후 9시20분 이들은 국제선 출국장에 들어갔다. 모든 것이 끝난 듯한 순간, 피리앤 아웅만 일본 당국자에 의해 별실로 인도됐다. 그는 거기서 일본 정부에 보호를 요청했고 3시간쯤 지난 17일 0시10분쯤 공항 로비에서 자신의 조력자들과 합류했다. 피리앤 아웅 측은 다음날 기자들에게 “이달 말 일본에서 난민 지위를 신청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군부가 다스리는 미얀마는 평화 국가가 아니기 때문에 다음달 도쿄 올림픽에 참가해서는 안 된다”고도 했다. 교도통신과의 인터뷰에서는 “민주 정부가 집권하면 귀국하고 싶다”고 말했다. 가토 가쓰노부 관방장관은 “그의 바람을 적절히 청취해 대응할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2월 쿠데타 이후 미얀마는 국민적 파업 사태와 시위가 여전히 이어지면서 현재까지 860명이 넘게 숨지고 4900 명 이상이 구금됐다. 시민들은 저항을 지속하기 위해 북부 카친주 등 소수 민족 반군 진영에 속속 합류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7708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축구선수평화",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2420  추천:0  2020-06-15
국제 ‘세손가락 경례’ ... 임규민 기자 입력 2021.06.17      미얀마 축구 국가 대표팀 선수 피리앤 아웅(왼쪽)이 지난달 28일 일본 지바현에서 열린 일본과의 월드컵 예선 경기에서 미얀마 군부에 저항하는 의미로 '세 손가락 경례'를 하고 있다. /당시 경기 방송 장면을 캡처해 올린 트위터 일본에서 열린 월드컵 축구 예선 경기에서 군부 쿠데타 저항의 의미로 ‘세 손가락 경례’를 한 미얀마 축구 국가 대표팀 선수가 출국 전 극적으로 귀국행 비행기 탑승을 모면했다. 그가 조력자들과 기획한 약 26시간 3차례에 걸친 탈출 작전은 수포로 돌아가기 직전 성공했다. 이후 그는 일본 정부에 난민 지위를 신청할 계획이다. 17일 아사히신문은 월드컵 아시아 2차 예선 경기에 참가하기 위해 일본에 머물고 있던 미얀마 대표팀 골키퍼 피리앤 아웅(27) 선수가 전날 밤 귀국 비행기에 오르기 전 오사카 간사이(關西) 국제공항에서 일본 정부에 보호를 요청했다고 보도했다. 앞서 그는 지난달 28일 일본 지바현에서 열린 일본과의 경기에서 국가 제창 때, 지난 2월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군부에 항의 차원에서 세 손가락 경례를 했다. 이 경례는 미 할리우드 영화 ‘헝거 게임’에서 독재에 맞서는 주인공 등이 저항의 상징으로 하는 동작이다. 미얀마 현지 시위 현장에서도 시민들은 이 동작을 하며 반대 투쟁을 이어갔다. 그의 경례 장면은 중계 화면에 잡혔고 소셜미디어 등을 통해 급속히 퍼져나갔다.   미얀마 축구 국가 대표팀 선수 피리앤 아웅이 17일 일본 오사카 간사이 국제공항에서 미얀마 군부에 항의하는 차원에서 '세 손가락 경례'를 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이대로 귀국하면 그의 목숨이 위험한 상황이었다. 이때 오사카에서 음식점을 운영하는 미얀마인이 피리앤 아웅를 돕겠다고 나섰다. 그 역시 1988년 미얀마 민주화 운동에 가담했다가 일본에 망명한 난민 신분으로 피리앤 아웅의 처지를 십분 이해하고 있었다. 이들은 화상 통화 등 수단으로 은밀히 연락을 주고 받은 끝에 1차 탈출 작전을 세웠다. 15일 미얀마-타지키스탄 경기 후 선수 숙소에서의 저녁 식사 동안 빈틈을 노려 탈출하는 계획이었다. 피리앤 아웅은 이날 오후 10시15분쯤 동료들과 숙소로 돌아와 저녁을 먹는 도중 작전대로 몰래 자리를 빠져나와 주차장으로 향했다. 그곳엔 그를 데리러 온 조력자의 차량이 있었다. 그러나 그를 호시탐탐 감시하던 대표팀 스태프가 그를 제지했고 1차 작전은 수포로 돌아갔다.   2차 작전은 새로운 조력자가 가담한 후 세워졌다. 16일 오전 1시 난민법 전문 변호사인 소라노 요시히로가 피리앤 아웅에게 연락을 취해 새로운 탈출 작전을 짰다. 우선 소라노 변호사는 피리앤 아웅의 발을 묶는 대표팀 스태프를 오사카 경찰 본부에 감금 혐의 등으로 고발 조치했다. 이후 오후 7시 피리앤 아웅은 다시 한번 저녁 식사 중 숙소를 빠져나오려고 했으나 또 실패했다.   피리앤 아웅(왼쪽에서 두 번째)이 17일 일본 오사카 간사이 국제공항에서 기자들 앞에서 발언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16일 오후 8시 그는 결국 동료들과 버스를 타고 오사카 간사이 국제공항으로 갔다. 오후 9시20분 이들은 국제선 출국장에 들어갔다. 모든 것이 끝난 듯한 순간, 피리앤 아웅만 일본 당국자에 의해 별실로 인도됐다. 그는 거기서 일본 정부에 보호를 요청했고 3시간쯤 지난 17일 0시10분쯤 공항 로비에서 자신의 조력자들과 합류했다. 피리앤 아웅 측은 다음날 기자들에게 “이달 말 일본에서 난민 지위를 신청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군부가 다스리는 미얀마는 평화 국가가 아니기 때문에 다음달 도쿄 올림픽에 참가해서는 안 된다”고도 했다. 교도통신과의 인터뷰에서는 “민주 정부가 집권하면 귀국하고 싶다”고 말했다. 가토 가쓰노부 관방장관은 “그의 바람을 적절히 청취해 대응할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2월 쿠데타 이후 미얀마는 국민적 파업 사태와 시위가 여전히 이어지면서 현재까지 860명이 넘게 숨지고 4900 명 이상이 구금됐다. 시민들은 저항을 지속하기 위해 북부 카친주 등 소수 민족 반군 진영에 속속 합류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7707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축구선수평화",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2340  추천:0  2020-06-15
국제 ‘세손가락 경례’... 임규민 기자 입력 2021.06.17      미얀마 축구 국가 대표팀 선수 피리앤 아웅(왼쪽)이 지난달 28일 일본 지바현에서 열린 일본과의 월드컵 예선 경기에서 미얀마 군부에 저항하는 의미로 '세 손가락 경례'를 하고 있다. /당시 경기 방송 장면을 캡처해 올린 트위터 일본에서 열린 월드컵 축구 예선 경기에서 군부 쿠데타 저항의 의미로 ‘세 손가락 경례’를 한 미얀마 축구 국가 대표팀 선수가 출국 전 극적으로 귀국행 비행기 탑승을 모면했다. 그가 조력자들과 기획한 약 26시간 3차례에 걸친 탈출 작전은 수포로 돌아가기 직전 성공했다. 이후 그는 일본 정부에 난민 지위를 신청할 계획이다. 17일 아사히신문은 월드컵 아시아 2차 예선 경기에 참가하기 위해 일본에 머물고 있던 미얀마 대표팀 골키퍼 피리앤 아웅(27) 선수가 전날 밤 귀국 비행기에 오르기 전 오사카 간사이(關西) 국제공항에서 일본 정부에 보호를 요청했다고 보도했다. 앞서 그는 지난달 28일 일본 지바현에서 열린 일본과의 경기에서 국가 제창 때, 지난 2월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군부에 항의 차원에서 세 손가락 경례를 했다. 이 경례는 미 할리우드 영화 ‘헝거 게임’에서 독재에 맞서는 주인공 등이 저항의 상징으로 하는 동작이다. 미얀마 현지 시위 현장에서도 시민들은 이 동작을 하며 반대 투쟁을 이어갔다. 그의 경례 장면은 중계 화면에 잡혔고 소셜미디어 등을 통해 급속히 퍼져나갔다.   미얀마 축구 국가 대표팀 선수 피리앤 아웅이 17일 일본 오사카 간사이 국제공항에서 미얀마 군부에 항의하는 차원에서 '세 손가락 경례'를 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이대로 귀국하면 그의 목숨이 위험한 상황이었다. 이때 오사카에서 음식점을 운영하는 미얀마인이 피리앤 아웅를 돕겠다고 나섰다. 그 역시 1988년 미얀마 민주화 운동에 가담했다가 일본에 망명한 난민 신분으로 피리앤 아웅의 처지를 십분 이해하고 있었다. 이들은 화상 통화 등 수단으로 은밀히 연락을 주고 받은 끝에 1차 탈출 작전을 세웠다. 15일 미얀마-타지키스탄 경기 후 선수 숙소에서의 저녁 식사 동안 빈틈을 노려 탈출하는 계획이었다. 피리앤 아웅은 이날 오후 10시15분쯤 동료들과 숙소로 돌아와 저녁을 먹는 도중 작전대로 몰래 자리를 빠져나와 주차장으로 향했다. 그곳엔 그를 데리러 온 조력자의 차량이 있었다. 그러나 그를 호시탐탐 감시하던 대표팀 스태프가 그를 제지했고 1차 작전은 수포로 돌아갔다.   2차 작전은 새로운 조력자가 가담한 후 세워졌다. 16일 오전 1시 난민법 전문 변호사인 소라노 요시히로가 피리앤 아웅에게 연락을 취해 새로운 탈출 작전을 짰다. 우선 소라노 변호사는 피리앤 아웅의 발을 묶는 대표팀 스태프를 오사카 경찰 본부에 감금 혐의 등으로 고발 조치했다. 이후 오후 7시 피리앤 아웅은 다시 한번 저녁 식사 중 숙소를 빠져나오려고 했으나 또 실패했다.   피리앤 아웅(왼쪽에서 두 번째)이 17일 일본 오사카 간사이 국제공항에서 기자들 앞에서 발언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16일 오후 8시 그는 결국 동료들과 버스를 타고 오사카 간사이 국제공항으로 갔다. 오후 9시20분 이들은 국제선 출국장에 들어갔다. 모든 것이 끝난 듯한 순간, 피리앤 아웅만 일본 당국자에 의해 별실로 인도됐다. 그는 거기서 일본 정부에 보호를 요청했고 3시간쯤 지난 17일 0시10분쯤 공항 로비에서 자신의 조력자들과 합류했다. 피리앤 아웅 측은 다음날 기자들에게 “이달 말 일본에서 난민 지위를 신청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군부가 다스리는 미얀마는 평화 국가가 아니기 때문에 다음달 도쿄 올림픽에 참가해서는 안 된다”고도 했다. 교도통신과의 인터뷰에서는 “민주 정부가 집권하면 귀국하고 싶다”고 말했다. 가토 가쓰노부 관방장관은 “그의 바람을 적절히 청취해 대응할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2월 쿠데타 이후 미얀마는 국민적 파업 사태와 시위가 여전히 이어지면서 현재까지 860명이 넘게 숨지고 4900 명 이상이 구금됐다. 시민들은 저항을 지속하기 위해 북부 카친주 등 소수 민족 반군 진영에 속속 합류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7706    ... 댓글:  조회:2018  추천:0  2020-06-15
7705    ... 댓글:  조회:2325  추천:0  2020-06-15
7704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축구선수평화",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2211  추천:0  2020-06-15
국제 ‘세손가락 경례’... 임규민 기자 2021.06.17      미얀마 축구 국가 대표팀 선수 피리앤 아웅(왼쪽)이 지난달 28일 일본 지바현에서 열린 일본과의 월드컵 예선 경기에서 미얀마 군부에 저항하는 의미로 '세 손가락 경례'를 하고 있다. /당시 경기 방송 장면을 캡처해 올린 트위터 일본에서 열린 월드컵 축구 예선 경기에서 군부 쿠데타 저항의 의미로 ‘세 손가락 경례’를 한 미얀마 축구 국가 대표팀 선수가 출국 전 극적으로 귀국행 비행기 탑승을 모면했다. 그가 조력자들과 기획한 약 26시간 3차례에 걸친 탈출 작전은 수포로 돌아가기 직전 성공했다. 이후 그는 일본 정부에 난민 지위를 신청할 계획이다. 17일 아사히신문은 월드컵 아시아 2차 예선 경기에 참가하기 위해 일본에 머물고 있던 미얀마 대표팀 골키퍼 피리앤 아웅(27) 선수가 전날 밤 귀국 비행기에 오르기 전 오사카 간사이(關西) 국제공항에서 일본 정부에 보호를 요청했다고 보도했다. 앞서 그는 지난달 28일 일본 지바현에서 열린 일본과의 경기에서 국가 제창 때, 지난 2월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군부에 항의 차원에서 세 손가락 경례를 했다. 이 경례는 미 할리우드 영화 ‘헝거 게임’에서 독재에 맞서는 주인공 등이 저항의 상징으로 하는 동작이다. 미얀마 현지 시위 현장에서도 시민들은 이 동작을 하며 반대 투쟁을 이어갔다. 그의 경례 장면은 중계 화면에 잡혔고 소셜미디어 등을 통해 급속히 퍼져나갔다.   미얀마 축구 국가 대표팀 선수 피리앤 아웅이 17일 일본 오사카 간사이 국제공항에서 미얀마 군부에 항의하는 차원에서 '세 손가락 경례'를 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이대로 귀국하면 그의 목숨이 위험한 상황이었다. 이때 오사카에서 음식점을 운영하는 미얀마인이 피리앤 아웅를 돕겠다고 나섰다. 그 역시 1988년 미얀마 민주화 운동에 가담했다가 일본에 망명한 난민 신분으로 피리앤 아웅의 처지를 십분 이해하고 있었다. 이들은 화상 통화 등 수단으로 은밀히 연락을 주고 받은 끝에 1차 탈출 작전을 세웠다. 15일 미얀마-타지키스탄 경기 후 선수 숙소에서의 저녁 식사 동안 빈틈을 노려 탈출하는 계획이었다. 피리앤 아웅은 이날 오후 10시15분쯤 동료들과 숙소로 돌아와 저녁을 먹는 도중 작전대로 몰래 자리를 빠져나와 주차장으로 향했다. 그곳엔 그를 데리러 온 조력자의 차량이 있었다. 그러나 그를 호시탐탐 감시하던 대표팀 스태프가 그를 제지했고 1차 작전은 수포로 돌아갔다.   2차 작전은 새로운 조력자가 가담한 후 세워졌다. 16일 오전 1시 난민법 전문 변호사인 소라노 요시히로가 피리앤 아웅에게 연락을 취해 새로운 탈출 작전을 짰다. 우선 소라노 변호사는 피리앤 아웅의 발을 묶는 대표팀 스태프를 오사카 경찰 본부에 감금 혐의 등으로 고발 조치했다. 이후 오후 7시 피리앤 아웅은 다시 한번 저녁 식사 중 숙소를 빠져나오려고 했으나 또 실패했다.   피리앤 아웅(왼쪽에서 두 번째)이 17일 일본 오사카 간사이 국제공항에서 기자들 앞에서 발언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16일 오후 8시 그는 결국 동료들과 버스를 타고 오사카 간사이 국제공항으로 갔다. 오후 9시20분 이들은 국제선 출국장에 들어갔다. 모든 것이 끝난 듯한 순간, 피리앤 아웅만 일본 당국자에 의해 별실로 인도됐다. 그는 거기서 일본 정부에 보호를 요청했고 3시간쯤 지난 17일 0시10분쯤 공항 로비에서 자신의 조력자들과 합류했다. 피리앤 아웅 측은 다음날 기자들에게 “이달 말 일본에서 난민 지위를 신청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군부가 다스리는 미얀마는 평화 국가가 아니기 때문에 다음달 도쿄 올림픽에 참가해서는 안 된다”고도 했다. 교도통신과의 인터뷰에서는 “민주 정부가 집권하면 귀국하고 싶다”고 말했다. 가토 가쓰노부 관방장관은 “그의 바람을 적절히 청취해 대응할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2월 쿠데타 이후 미얀마는 국민적 파업 사태와 시위가 여전히 이어지면서 현재까지 860명이 넘게 숨지고 4900 명 이상이 구금됐다. 시민들은 저항을 지속하기 위해 북부 카친주 등 소수 민족 반군 진영에 속속 합류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7703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축구선수평화",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2116  추천:0  2020-06-15
국제 ‘세손가락 경례’... 임규민 기자  2021.06.17.     미얀마 축구 국가 대표팀 선수 피리앤 아웅(왼쪽)이 지난달 28일 일본 지바현에서 열린 일본과의 월드컵 예선 경기에서 미얀마 군부에 저항하는 의미로 '세 손가락 경례'를 하고 있다. /당시 경기 방송 장면을 캡처해 올린 트위터 일본에서 열린 월드컵 축구 예선 경기에서 군부 쿠데타 저항의 의미로 ‘세 손가락 경례’를 한 미얀마 축구 국가 대표팀 선수가 출국 전 극적으로 귀국행 비행기 탑승을 모면했다. 그가 조력자들과 기획한 약 26시간 3차례에 걸친 탈출 작전은 수포로 돌아가기 직전 성공했다. 이후 그는 일본 정부에 난민 지위를 신청할 계획이다. 17일 아사히신문은 월드컵 아시아 2차 예선 경기에 참가하기 위해 일본에 머물고 있던 미얀마 대표팀 골키퍼 피리앤 아웅(27) 선수가 전날 밤 귀국 비행기에 오르기 전 오사카 간사이(關西) 국제공항에서 일본 정부에 보호를 요청했다고 보도했다. 앞서 그는 지난달 28일 일본 지바현에서 열린 일본과의 경기에서 국가 제창 때, 지난 2월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군부에 항의 차원에서 세 손가락 경례를 했다. 이 경례는 미 할리우드 영화 ‘헝거 게임’에서 독재에 맞서는 주인공 등이 저항의 상징으로 하는 동작이다. 미얀마 현지 시위 현장에서도 시민들은 이 동작을 하며 반대 투쟁을 이어갔다. 그의 경례 장면은 중계 화면에 잡혔고 소셜미디어 등을 통해 급속히 퍼져나갔다.   미얀마 축구 국가 대표팀 선수 피리앤 아웅이 17일 일본 오사카 간사이 국제공항에서 미얀마 군부에 항의하는 차원에서 '세 손가락 경례'를 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이대로 귀국하면 그의 목숨이 위험한 상황이었다. 이때 오사카에서 음식점을 운영하는 미얀마인이 피리앤 아웅를 돕겠다고 나섰다. 그 역시 1988년 미얀마 민주화 운동에 가담했다가 일본에 망명한 난민 신분으로 피리앤 아웅의 처지를 십분 이해하고 있었다. 이들은 화상 통화 등 수단으로 은밀히 연락을 주고 받은 끝에 1차 탈출 작전을 세웠다. 15일 미얀마-타지키스탄 경기 후 선수 숙소에서의 저녁 식사 동안 빈틈을 노려 탈출하는 계획이었다. 피리앤 아웅은 이날 오후 10시15분쯤 동료들과 숙소로 돌아와 저녁을 먹는 도중 작전대로 몰래 자리를 빠져나와 주차장으로 향했다. 그곳엔 그를 데리러 온 조력자의 차량이 있었다. 그러나 그를 호시탐탐 감시하던 대표팀 스태프가 그를 제지했고 1차 작전은 수포로 돌아갔다.   2차 작전은 새로운 조력자가 가담한 후 세워졌다. 16일 오전 1시 난민법 전문 변호사인 소라노 요시히로가 피리앤 아웅에게 연락을 취해 새로운 탈출 작전을 짰다. 우선 소라노 변호사는 피리앤 아웅의 발을 묶는 대표팀 스태프를 오사카 경찰 본부에 감금 혐의 등으로 고발 조치했다. 이후 오후 7시 피리앤 아웅은 다시 한번 저녁 식사 중 숙소를 빠져나오려고 했으나 또 실패했다.   피리앤 아웅(왼쪽에서 두 번째)이 17일 일본 오사카 간사이 국제공항에서 기자들 앞에서 발언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16일 오후 8시 그는 결국 동료들과 버스를 타고 오사카 간사이 국제공항으로 갔다. 오후 9시20분 이들은 국제선 출국장에 들어갔다. 모든 것이 끝난 듯한 순간, 피리앤 아웅만 일본 당국자에 의해 별실로 인도됐다. 그는 거기서 일본 정부에 보호를 요청했고 3시간쯤 지난 17일 0시10분쯤 공항 로비에서 자신의 조력자들과 합류했다. 피리앤 아웅 측은 다음날 기자들에게 “이달 말 일본에서 난민 지위를 신청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군부가 다스리는 미얀마는 평화 국가가 아니기 때문에 다음달 도쿄 올림픽에 참가해서는 안 된다”고도 했다. 교도통신과의 인터뷰에서는 “민주 정부가 집권하면 귀국하고 싶다”고 말했다. 가토 가쓰노부 관방장관은 “그의 바람을 적절히 청취해 대응할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2월 쿠데타 이후 미얀마는 국민적 파업 사태와 시위가 여전히 이어지면서 현재까지 860명이 넘게 숨지고 4900 명 이상이 구금됐다. 시민들은 저항을 지속하기 위해 북부 카친주 등 소수 민족 반군 진영에 속속 합류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7702    [세상만사] - 연주는 계속 되고지고... 댓글:  조회:3960  추천:0  2020-06-01
네 줄짜리 악보 840번 친 괴짜 피아니스트… 15시간 연주 도전 2020.06.01.  좋아요  좋아요 평가하기 beta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이고르 레비트의 에릭사티 '짜증' 연주. [유튜브 캡처] 1분도 안 되는 소절을 피아노로 840번 반복해서 연주하기. 독일 피아니스트 이고르 레비트(30)가 15시간 30분 동안 한 일이다. 레비트는 베를린의 한 스튜디오에서 지난달 30일(현지시간) 오후 2시부터 다음 날 오전 5시 30분까지 총 15시간 30분 동안 에릭 사티의 ‘짜증(Vexations)’을 연주하고 유튜브, 인스타그램으로 중계했다.  이 작품은 괴짜 작곡가였던 사티가 1890년대에 작곡한 곡이다. 악보는 단 네 줄. 사티는 악보의 맨 위에 ‘840번을 연이어 연주하기 위해서는 움직이지 않고 깊은 침묵을 할 수 있어야 한다’라고 썼다. 사티는 다른 작품에서도 ‘주머니에 송곳을 넣고’ ‘과식하지 말고’ ‘의문을 가지고’ ‘구멍을 파듯’이라는 미스터리한 지시어를 남겼던 작곡가다. 사티는 이런 식으로 기존의 음악과 작곡법, 그중에서도 엄숙주의에 반대했다.  미스터리한 작품 ‘짜증’의 공연 시도가 처음은 아니다. 20세기의 대표적 괴짜 아티스트 존 케이지는 1963년 뉴욕에서 피아니스트 10명과 함께 18시간 동안 이 곡을 연주했다. 1970년엔 피터 에반스가 혼자 완주에 도전했지만 595번 반복 후 포기했다.  레비트는 뒤로 갈수록 지치고 피로해 보였지만 연주 중간중간 물을 마셔가며 완주에 성공했다. 느리게 시작했던 연주는 중간중간 속도를 올렸다가 다시 평온한 템포로 돌아오곤 했다. 피아노 옆의 사이드 테이블에는 바나나와 칩 등이 놓여있었지만 먹지는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한숨을 내쉬거나 이마를 짚어가며 괴로워했던 레비트는 연주가 모두 끝난 후엔 피아노 뚜껑을 덮고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휴대전화를 집어든 채 무대를 떠났다. 7시간대와 11시간대에 휴식 시간을 가졌다.  이고르 레비트. 연주 후 뉴욕타임스와 인터뷰에서 레비트는 “연주 중간에 화가 나고, 공포스럽고, 슬프고 황폐한 감정이 들었다”며 “하지만 계속 연주하도록 나 자신을 내버려 뒀다”고 했다. 그는 또 “연주하며 물 5리터 반을 마셨기 때문에 두 번 화장실에 다녀와야 했다”고 말했다.  러시아 태생으로 8세에 독일에 이민 온 레비트는 21세기의 사티라 불릴 수 있는 독특한 피아니스트다. 유럽과 북미의 중요한 무대에서 각광받는 연주자이지만 정치적 발언, 소신있는 행보를 계속해왔다. 2017년 7월엔 런던의 BBC 프롬스 무대에서 브렉시트를 비판하며 EU찬가를 앙코르곡을 연주하기도 했다.  이번 ‘짜증’ 마라톤 연주는 코로나 19로 인한 예술인들의 피해를 돕기 위해 기획했다. 레비트는 사티의 한장짜리 악보를 840장 복사해 한장 한장 바닥에 던져가며 완주했고, 이 악보들을 경매에 부칠 예정이다. 경매 수익금은 코로나 19 팬데믹으로 연주 기회를 잃은 예술인들을 위해 쓴다.  /김호정 기자
7701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농사문제",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3712  추천:0  2020-05-31
코로나19 여파 마늘·감자 축제 취소... 농가 '울상'  2020.05.31.  화나요  좋아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동영상 뉴스 [앵커] 코로나19 여파로 올해 많은 지역 축제들이 취소됐죠. 어쩔 수 없는 상황이지만, 축제를 통해 농산물 홍보도 하고 판매 수익도 올렸던 농가엔 큰 타격이 예상됩니다. LG헬로비전 충남방송 정선영 기자입니다. [기자] 서산 인지면에 있는 6쪽마늘 농가. 다음 달 수확을 앞두고 마늘쫑을 제거하는 막바지 작업이 한창입니다. 결실의 기쁨을 누려야 하지만 농민의 마음은 무겁기만 합니다. 평년 같으면 물량이 벌써 동날 시기인데 올해는 코로나19 여파로 거래 문의가 거의 끊겼기 때문입니다. 기대를 걸었던 서산 6쪽마늘 축제마저 취소되면서 당장 내다 팔 곳도 없습니다. [한복구 / 서산시 인지면 농민 : 작년 같은 경우 해미읍성에서 마늘축제가 열려서 서산뿐만 아니라 지역 외지에 있는 주민들도 많이 와서 관광차 오셨다가 필요한 마늘들을 사가고 그랬었는데 얼마를 사겠다고 하는 분들이 작년에 비해서 거의 없다고 보시면 될 거 같습니다.] 서산 6쪽마늘 축제 추진위원회는 최근 코로나19 확산세가 진정되지 않아 7월 개최 예정이던 축제를 결국 취소했습니다. 지난해 축제에선 사흘 동안 2만 7천여 명이 다녀가 3억2천만 원의 상당의 마늘이 판매된 만큼 농가에 타격이 있을 것으로 우려됩니다. [유기영 / 서산태안6쪽마늘조합공동사업법인 대표 : 홍보도 아무래도 덜 될 테고요. 방문객이 없으니까 방문 판매도 안 될 테고, 축제를 안 함으로써 많이 판매가 안 될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마늘축제를 비롯해 다음 달 열릴 예정이던 서산팔봉산감자축제 등 지역의 대표 농산물 축제가 잇따라 취소되면서 지자체도 대책 마련에 나섰습니다. 서산시는 홈쇼핑과 온라인 등 비대면 판로를 확보하고 대도시 농협유통센터와 연계해 특판전을 추진할 계획입니다. [임종근 / 서산시 농식품유통과장 : 지역 농산물 팔아주기 운동도 대대적으로 실시하고 TV 홈쇼핑이라든지 온라인 마켓 등을 통한 판매에 더욱 저희가 지원을 해나갈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농민들의 시름이 깊어지고 있는 가운데 이번 코로나19 사태를 계기로 온라인 홍보와 판매를 통해 위기를 기회로 극복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습니다. 헬로TV뉴스 정선영입니다.
7700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력사문제",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4014  추천:0  2020-05-28
  ‘만삭의 위안부’ 담긴 희귀 영상 공개… 연합군에 구출되자 “만세” 2020.05.28.  슬퍼요  화나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beta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KBS, 미 국립기록관리청서 우연히 발굴 태평양전쟁 중인 1944년 중국 윈난성 쑹산 연합군이 일본군 위안부 구출하는 장면 ‘만삭의 위안부’ 고 박영심 할머니 모습도 “기존에 알려진 사진 속 박 할머니와 동일인 조선인 위안부 영상 드물어 사료적 가치 커”고 박영심 할머니가 미-중 연합군에 발견된 뒤 그들을 따라 만세를 부르는 장면. 한국방송 제공(KBS)이 태평양전쟁이 진행 중이던 1944년 9월 중국 윈난성 쑹산에서 조선인 일본군 위안부가 미-중 연합군에게 구출되는 장면을 담은 희귀 영상을 발굴해 28일 공개했다. 이 영상 속에는 ‘만삭의 위안부’로 알려진 고 박영심 할머니의 모습도 담겨 있다. 그간 조선인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문서와 사진은 다소 있었지만 영상은 희귀한 편이라 사료로서의 가치가 크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날 한국방송이 발굴·공개한 영상은 박영심 할머니 등 일행이 미-중 연합군에게 발견되는 상황을 담고 있는 54초 분량이다. 한국방송 쪽은 “영상이 촬영된 날은 1944년 9월7일로 추정된다”며 “미-중 연합군이 중국 윈난성 쑹산에서 100일 동안의 전투 끝에 일본군 진지를 함락하던 날”이라고 말했다. 당시 진지에 남았던 일본군이 대부분 자결한 뒤, 위안소에 남아 있던 조선인 일본군 위안부들이 탈출했다가 연합군에게 발견된 상황이라는 설명이다. 한국방송 제공영상에는 ‘만삭의 위안부 사진’으로 알려진 고 박영심 할머니도 등장한다. 박 할머니는 앞서 2000년 이 사진 속 인물이 자신임을 밝히고, 북한에서 일본군의 만행을 고발하는 데 앞장서다 2006년 평양에서 돌아가셨다. 영상 속 박 할머니는 당시 22살로 추정되며, 배는 만삭으로 불러 있는 상태다. 할머니는 연합군이 “만세”를 외치며 즐거워하자, 어리둥절하던 표정을 걷고 이내 “만세”라고 따라 외치고 있다. 영상에는 박영심 할머니 외에 다른 위안부들도 눈에 띈다. 국적을 알 수 없는 위안부 여성은 전투 중 크게 다쳤는지 한쪽 눈이 심하게 부어 있는 모습이다.  ‘만삭의 위안부’로 기존에 알려진 사진(왼쪽)과 한국방송이 이번에 발굴한 영상 속 만삭의 위안부(오른쪽)는 동일인으로, 고 박영심 할머니로 확인됐다고 한국방송이 밝혔다. 한국방송 제공한국방송 쪽은 “이번 영상은 우리 방송의 제작팀이 미국 국립기록관리청(NARA)에서 발굴한 자료로, 한국전쟁 70주년을 맞아 과거 한국사 자료를 찾는 과정에서 우연히 발굴한 것”이라며 “권위 있는 전문가들에게 고증을 받아 영상 속 인물들이 박 할머니 일행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문현숙 선임기자 ===================================/// 한겨레신문 2019년 8월 7일 17살 여고생 올가, 민주화 시위 나서 방탄조끼 입고 헌법 낭독 사진 큰 반향 30년 전 중국 천안문 ‘탱크맨’과 비견돼 “시민 시위는 헌법적 권리 지키려는 것” 독서 즐겨…“대학서 저널리즘 공부할 터” 한 트위터 사용자가 공유한 ‘올가 미시크’ 해시태그(#OlgaMisik). “17살 올가의 믿기지 않는 사진… 올가에서부터 그레타, 말랄라, 또 많은 젊은 여성들이 그들의 용기를 통해 변화의 영감을 준다”고 썼다. 중국 천안문 시위에 ‘탱크맨’이 있었다면, 러시아 시위엔 ‘헌법 소녀’가 있다.     러시아 선거관리위원회가 다음달 모스크바 시의회 선거에 야권 정치인들의 입후보를 거부한 데서 촉발한 민주화 시위가 이어지는 가운데 10대 청소년 올가 미시크(17)가 ‘헌법 낭독 시위’를 벌이는 사진이 온라인에서 급속히 확산되면서 시민들에게 큰 울림을 주고 있다고 영국 (BBC) 방송이 7일 보도했다. 야당 정치인 류보피 소볼(31) 변호사가 3주째 단식투쟁을 벌이며 민주화 시위의 상징적 구심이 된 데 이어, 올가는 평범한 고등학생이 헌법의 가치와 시민의 당연한 권리를 깨우친 상징으로 떠오른 것이다. ▶관련기사=‘러시아 시위’ 상징, 류보피 소볼…3주째 단식투쟁   올가는 지난달 27일 모스크바에서 수천명이 거리에 나선 ‘불법 시위’에 참여했다. 그는 중무장한 시위 진압 경찰에게 에워싸인 채, 도로 한복판에서 방탄조끼 차림으로 다리를 포개고 앉아 1993년 개정된 러시아 헌법 책을 낭독했다. “4개 조문을 읽었어요. 평화적 시위의 권리에 관한 조항, 누구나 선거에 참여할 수 있다는 조항, 언론과 표현의 자유에 관한 조항, 그리고 이 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민의 뜻과 권력이라고 천명한 조항이지요.”   올가는 헌법적 권리의 낭독을 마친 뒤 자리에서 일어섰으나 지하철역으로 가는 도중 경찰에게 체포됐다. 최근 석달 새에만 벌써 네번째 체포였다. 12시간 만에 별 이상 없이 풀려났지만 ‘불법 시위’ 가담 혐의로 벌금 2만루블(약 37만원)이 부과됐다. 그러나 올가가 헌법 낭독 시위를 벌이는 사진은 소셜미디어에서 수천번이나 공유되며 급속히 퍼지고 있다. 트위터에도 ‘올가 미시크’라는 해시태그(#OlgaMisik)가 만들어져 수많은 이용자가 올가를 응원하고 나섰다. 해당 트위터에는 올가가 헌법을 읽는 사진, 경찰에게 체포되는 동영상, 언론과 인터뷰하는 모습, 관련 보도 등이 계속 올라오고 있다.   1989년 6월 중국 베이징 천안문 광장에서 벌어진 민주화 시위 당시 한 남성이 맨몸으로 탱크 행렬을 막아서고 있다. 플리커 올가는 단숨에 러시아 민주화 운동의 상징으로 떠올랐고, 일부 사람들은 그의 헌법 낭독 사진을 1989년 중국 민주화 시위인 천안문 사태 당시 맨몸으로 전차 행렬을 막아섰던 ‘탱크맨’과 비견하기도 한다고 방송은 전했다. 두 사건은 꼬박 30년의 시차가 있지만 이들이 전하는 메시지와 이를 받아들이는 시민들의 공감은 하나도 다를 게 없는 셈이다.   현재 고등학교 졸업반인 올가는 모스크바 교외에서 나고 자랐으며 어려서부터 책 읽기를 즐겼다고 한다. 등을 쓴 조지 오웰, 로 유명한 올더스 헉슬리 등 전체주의가 지배하는 미래의 디스토피아를 경고한 작가들을 특히 좋아했다고 한다. 학업 성적이 ‘올 에이(A)’를 맞을 만큼 뛰어난 그는 9월 모스크바국립대에 진학해 저널리즘을 공부하고 싶다고 밝혔다.   한 트위터 사용자가 공유한 ‘올가 미시크’ 해시태그(#OlgaMisik). “올가 미시크의 용기가 나에게 유럽의 미래에 대한 희망을 준다”고 썼다. 그는 평소 사회 현안에도 관심이 컸지만, 특히 현실정치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지난해 푸틴 정부가 공약을 어기고 연금 지급을 늦추기 위해 은퇴연령을 일방적으로 5년 연장한 데 대한 대규모 온라인 시위를 지켜보면서다. 올가는 “나는 아직 은퇴연령까진 멀었지만, 푸틴 대통령이 은퇴연령을 연장하지 않겠다고 약속해놓고도 2018년 10월 시행법에 서명하는 걸 보고 정치인들에게 화가 났다”고 말했다.   올가는 방송에 “나는 알렉세이 나발니를 비롯한 야권 정치인들에 대해 중립적 시각을 갖고 있지만 그들이 하려는 것을 지지한다”고 말했다. 그는 앞서 지난 2일 영국 온라인 매체 에 “모스크바 시민들의 시위가 단지 자유선거나 후보 등록 허용만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바보”라며 “이건 민주 국가에서라면 의심의 여지가 없을 기본적인 헌법적 권리를 지키기 위한 시위”라고 말했다.   /한겨레신문 조일준 기자  ============================///                                   "력사는 력사이다... 력사를 알아야 미래가 보인다..." 사진=연합뉴스 [아시아타임즈=윤진석 기자] 1989년 6월 4일. 중국 천안문 광장에서 펼쳐진 대규모 민주화 운동을 중국 정권이 유혈진압합니다.   중국 정부는 '1989년 춘하계 정치 풍파'라고 지칭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천안문 사태', '천안문 항쟁'이라고 더 잘 알려져 있죠. 또는 '중국의 피의 일요일', 베이징 대학살', '천안문 민주화 운동', '1989년 톈안먼 광장 저항' 등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당시 중국에서는 개혁개방이 추진됐으나 자본주의 체제가 도입되면서 관료의 부패와, 인플레이션, 실업 등의 문제가 발생했고, 이전 문화대혁명의 사회적 분위기가 완화되면서 범죄가 증가합니다. 이에 당시 중국 정부 당국은 범죄를 엄정하게 처벌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부정부패는 오히려 날이 갈수록 심해졌죠.     이에 당시 당시 중국의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이었던 덩샤오핑의 심복인 후야오방 당총서기는 민주화 요구와 부정부패 척결에 동조적으로 나왔죠. 그러나 후야오방은 1989년 정치국 회의 도중 심장마비를 일으켰고, 4월 15일 숨지게 됩니다. 이를 계기로 베이징에서는 지식인들과 대학생, 노동자들을 주축으로 민주화 요구 시위가 벌어졌죠.   시위가 점차 격렬해지자 당시 덩샤오핑은 4월 26일 북경의 시위를 통제하라고 지시했죠. 그러나 시위는 누그러들지 않았습니다. 5월 15일 당시 소련의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베이징을 방중하기로 했으나, 천안문에는 시위대가 가득했죠. 이에 5월 20일 정부는 베이징에 계엄령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6월 3일 밤 시위대를 무력을 진압하라는 명령이 떨어집니다. 이날 밤 10시 베이징 동서에서 진입한 중국군 제 38집단군과 공군 제 15 공수부대, 육군 제 39집단군 등 중국 군은 전차와 총기를 동원한 무차별 발포로 군중을 강제해산시켰죠.   이윽고 4일 광장에 남은 시위대에게 정부 측은 협상을 제시합니다. 시민들에게 목숨을 담보로, 시위 지도층에게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조건을 내걸자 시위대는 결국 해산하죠. 그렇게 1989년 시위는 마무리됩니다.    이어 5일 시위가 마무리되고, 천안문 광장에서 59식 전차 18대가 전개됩니다. 이때 이 전차를 막아서는 한명이 사람이 있었습니다. 흔히 '탱크맨'이라고 불리며 6.4 항쟁의 상징이 된 이 사람은 흰셔츠에 검은 바지를 입고, 양손에 검은 비닐봉투와 옷가지를 든 채 전차 앞을 막아섭니다.    이에 전차가 방향을 바꿔 옆으로 지나가려고 하자, 그는 다시 그 앞을 가로막죠. 이후 시민들이 그를 대려갑니다. 이 사람에 대해 알려진 바는 없습니다. 당시 영국의 언론 선데이타임스는 탱크맨을 왕웨이린이라고 보도했지만 이조차 확실하진 않죠.   1990년 장..중국 공산당 총서기는 ABC방송과 기자회견에서 앵커의 질문에 "그가 사형 당하거나, 탱크가 그를 깔아뭉개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답하기도 했습니다. 이외에도 그가 대만으로 망명했다는 설과, 이름을 바꾼 채 중국에서 살고 있다는 설, 혹은 당시 처형을 당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절록... 톈안먼 사태는 1989년 4월부터 베이징의 톈안먼 광장에 모여 개혁과 민주화를 요구하던 학생과 시민들을 6월 4일 중국 당국이 유혈진압한 사건이다. 공식사망자는 319명이지만 훗날 공개된 미국과 영국의 기밀 문서에 따르면 당시 사망자는 1만명까지 보고됐다.   1989년 톈안먼 사태때 사망한 민간인의 유해. 미국의 소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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