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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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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79    [고향문단소식] - 요즘, 우리 조선족문단에서는... 댓글:  조회:2576  추천:0  2020-11-14
제39회 《연변문학》문학상 수상자는 누구? (ZOGLO) 2020년10월30일  조선족문단의 정통성과 권위성을 자랑하는 제39회 《연변문학》문학상 시상식이 10월 30일, 코로나 여파로 연변인민출판사에서 간소하게 치러졌다.   수상자들, 좌로부터 김창영,김성희(대리수상), 김순희, 리혜선, 리태복, 김영수. 2019년 《연변문학》잡지에 실린 소설, 시, 수필, 평론, 문학칼럼  등 여러 쟝르의 작품중에서 편집부의 추천과 심사위원들의 공정한 심사를 거쳐 소설부문에 김성희의 중편소설
7778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인공조명문제",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2849  추천:0  2020-11-13
뉴스홈   최신기사 "인공조명도 하나의 오염 물질" 2020-11-03   인쇄 김유아 기자 생명의 호르몬 수치, 활동 양상 등에 영향 홍콩의 한 공원에서 시민들이 보라색 조명으로 뒤덮인 나무를 지나치고 있다.[EPA=연합뉴스] (서울=연합뉴스) 김유아 기자 = LED(청색 발광다이오드)와 같은 인공조명이 자연의 섭리를 방해하기 때문에 오염 물질로 다뤄져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영국 엑서터대학교 생물학 연구팀은 인공조명이 생명체의 호르몬 수치, 번식 주기, 생존력에 영향을 주는 등 생태계에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고 주장했다고 영국 일간 가디언이 2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이번 논문은 학술지 '네이처 이콜로지 앤드 이볼루션'에 게재됐다.   연구진이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인공조명은 식물부터 곤충과 동물 등 넓은 범위에 걸쳐 영향을 미친다.   먼저 인공조명으로 인해 수면 주기를 조절하는 호르몬인 멜라토닌 수치가 감소하고 있다고 연구진은 지적했다. 또 야행성 동물뿐만 아니라 낮에 활동하는 생명체의 활동 양상도 영향을 받는다. 주로 밤에 활동하는 쥐와 같은 설치류의 활동 시간은 줄어들고, 새들은 먹이를 찾기 위해 더 이른 시간에 활동을 시작하고 있다고 전했다. 연구진은 이 외에도 일부 식물이 예정보다 이른 봄에 싹을 틔우고, 바닷새들은 빛이 밝은 건물로 진입하며, 바다 거북이는 조명을 일출로 착각해 건물로 들어갔다가 길을 헤맨다고 설명했다. 전구 램프와 주행하는 자동차의 불빛으로 향했다가 죽음을 맞은 벌레들도 조명의 부정적 영향 중 하나로 지목됐다. 일부 식물과 박쥐 종은 인공조명 덕분에 좀 더 빠르게 성장하는 등 긍정적인 부분도 있으나 전반적으로는 부정적인 영향이 크다는 것이 연구진의 결론이다. 논문의 주요 집필진인 엑서터대 환경 및 지속가능성 연구협회의 케빈 개스턴 교수는 "인공조명의 영향이 매우 만연하다는 점이 놀랍다"며 "인공조명은 또 다른 오염 물질이다. 기후 변화와 유사한 관점에서 인공조명을 생각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개스턴 교수는 인공조명이 설치되는 범위와 그 빛의 강도가 매해 2%씩 증가하고 있다면서 지난 5∼10년간 전 세계 인공조명이 증가함에 따라 이의 영향을 입증할 증거도 함께 늘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어 "인류는 본능적으로 어둠을 두려워하지만, 밤을 낮처럼 바꿔버리는 것은 필요 이상의 일"이라며 "적시적기에만 조명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지난달 25일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에서 화려한 조명이 도시를 감싸고 있다.[신화=연합뉴스]
7777    [세상만사] - 240 = 300 = 8 댓글:  조회:2780  추천:0  2020-11-13
국제 화상강의 들으려 8m 나무 올라요” 코로나로 고향간 러시아 대학생의 호소 서유근 기자  2020.11.13  대학 화상강의를 듣기 위해 나무를 오르는 러시아 대학생 알렉세이 두돌라도프(21) /인스타그램 코로나바이러스 사태로 고향에 간 러시아 대학생이 농촌의 열악한 인터넷 환경 때문에 화상 강의를 들을 때마다 8m 높이의 자작나무에 올라야만 한다고 호소했다. 12일(현지 시각) 러시아 리아노보스티통신 등 현지 언론에 따르면 대학생 알렉세이 두돌라도프(21)는 고향 나즈바예프스키 지역 스탄케비치에서 화상 강의를 듣고 있다. 스탄케비치는 39명이 사는 농촌 마을이다. 두돌라도프가 재학 중인 고향에서 약 240km 떨어진 옴스크주(州) 수상교통대는 코로나 여파로 지난 9일부터 모든 강의를 화상 강의로 전환했다. 두돌라도프는 강의를 들을 때마다 마을에서 300m 떨어진 곳까지 이동한 뒤 8m 높이에 자작나무에 올라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인터넷을 이용해 화상강의를 수강할 수 있을 정도로 무선 통신 상태가 원활하지 않기 때문이다. 겨울이 다가오자 추위 속에서 더는 수업을 들을 수 없다고 판단한 그는 자신의 상황이 담긴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올렸다. 해당 게시물이 퍼지고 현지 언론보도까지 이어지며 이 대학생의 사연은 화제가 됐다.   이후 지방정부의 대응을 촉구하는 목소리도 높아졌다. 두돌라도프도 주지사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옴스크주 지방정부는 “우리는 반드시 두돌라도프를 도울 것”이라면서 그에게 알맞은 개별 교육 과정을 세우겠다고 밝혔다. 옴스크주 정부 교육부서는 두돌라도프와 같은 처지에 놓인 학생이 영상뿐만 아니라 메신저, 전화, 이메일 등 다른 수단도 원격 학습에 사용될 수 있도록 하겠다고 했다. 다만 농촌 지역의 열악한 인터넷 시설 개선에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내놨다. 알렉산드르 부르코프 주지사는 통신 회사들이 빠른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곧바로 개선되기는 힘들다고 밝혔다.
7776    [세상만사] - 180 = 120 = 270 댓글:  조회:2681  추천:0  2020-11-11
  180cm · 120kg '전설의 심해어', 여수에서 잡혔다  2020.11.11.    좋아요 슬퍼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120㎏짜리 심해어 돗돔 부산공동어시장서 270만 원 낙찰 부산공동어시장에서 '전설의 심해어'로 알려진 대형 돗돔 1마리가 270만 원에 낙찰됐습니다. 부산공동어시장은 11일 새벽 여수 지역 한 어선이 거문도 앞바다에서 조업해 차량으로 싣고 위판한 돗돔 1마리가 270만 원에 낙찰됐다고 밝혔습니다. 이날 위판된 돗돔은 몸길이 약 1.8m로 무게는 120㎏에 달합니다. 이 돗돔은 부산공동어시장 한 중도매인에게 낙찰됐고 부산 서구 한 선어 전문 횟집으로 판매됩니다. 부산공동어시장에서 돗돔이 위판된 것은 2017년 6월 몸길이 1.75m짜리 돗돔이 280만 원에 거래된 이후 처음입니다. (사진=부산공동어시장 제공, 연합뉴스)   /권태훈 기자
7775    [세상은 지금]- 그들은 쉽지 않았다... 미래의 세대를 위하여... 댓글:  조회:2808  추천:0  2020-11-11
한국계 의원 4명으로... 2020.11.16.    좋아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美 바이든 시대]“한국서 이민 와 시민대표” 당선인사미국 대선과 함께 실시된 연방 하원의원 선거에서 공화당 영 김(김영옥·58) 후보가 2년 전 패했던 민주당 현역 길 시스네로스 의원을 꺾고 당선됐다. 김 당선인의 입성으로 미국 연방 하원의원 중 한국계는 4명으로 늘게 됐다. 13일(현지 시간) AP통신에 따르면 캘리포니아주(제39선거구)에 출마한 김 당선인은 50.6%를 얻어 시스네로스 의원(49.4%)을 약 4000표 차로 물리쳤다.  1962년 인천에서 태어난 김 당선인은 1975년 가족들과 함께 괌으로 이주한 뒤 하와이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서던캘리포니아대(USC)에서 경영학을 전공하고 의류사업으로 자수성가했다. 선거 컨설턴트인 남편 찰스 김 전 한미연합회장의 권유로 공화당 중진 에드 로이스 의원의 보좌관으로 21년간 일했고, 2014∼2016년 캘리포니아주 하원의원을 지냈다. 김 당선인은 트위터에 올린 당선 인사에서 “미국은 한국에서 이민 온 소녀도 시민의 대표로 의회에서 일할 수 있는 나라다.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김 당선인이 당선되면서 한국계 하원의원은 기존 1명에서 4명으로 늘어나게 됐다. 이에 따라 180만 교민의 영향력도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김 당선인과 미셸 박 스틸 당선인(공화), 메릴린 스트리클런드 당선인(민주)은 최초의 한인 여성 연방 하원의원이라는 기록을 동시에 세웠다. 서울 출생인 스틸 당선인은 대학 시절 도미해 1992년 ‘로스앤젤레스 폭동’을 계기로 정치에 발을 들였다. 한국인 어머니와 흑인 미군 부친 사이에서 태어난 스트리클런드 당선인은 ‘순자’라는 한국 이름을 갖고 있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이 총애한 ‘오바마 키즈’로 2018년 처음 하원에 입성한 앤디 김 의원은 재선에 성공했다. /조유라 기자  ========================================/// 현역 꺾고 하원 입성… 한국계 4명 미 하원 동반 당선 2020.11.14.    좋아요 화나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앵커] 순자, 영옥, 은주. 이 친숙한 이름의 주인공들이 미국 하원의원에 당선됐습니다.  미국 대통령 선거 날에 함께 치뤄진 연방 하원의원 선거에서 한국계 인물 총 4명이 미국 연방 의회에 입성하게 됐는데요.  미주 한인 역사상 처음입니다.  로스엔젤레스 이영현 특파원입니다.  [리포트] 한국이름 김영옥, 미국명 영 김 공화당 후보가 캘리포니아주 오렌지 카운티를 포함한 제39 선거구에서 득표율 50.6%로 당선이 확정됐습니다. 2년 전 중간 선거 때 민주당 의원에게 역전패 당했지만 이번에는 4천여 표 차이로 따돌리며 설욕에 성공했습니다. [영 김/김영옥/美 하원의원 당선인/공화 : "대한민국에서 이민온 소녀가 하원의원이 될 수 있는 나라가 미국입니다. 저는 그 약속이 계속 유지될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인천에서 태어나 1975년 미국으로 이민 온 김 당선인은 13선을 한 에드로이스 전 하원의원 보좌관으로 21년 간 근무하며 정치적 역량을 키웠습니다. 1975년 미국으로 건너와 캘리포니아주에서 4선의 선출직 공무원을 지낸 박은주, 미셸 박 스틸 후보도 나흘 전 당선 소식을 전해왔습니다. 스틸 후보도 캘리포니아주 48 선거구에서 역시 민주당 소속 현역 의원을 누르고 하원 의원에 당선됐습니다. [미셸 박 스틸/박은주/美 하원의원 당선인/공화 : "여러분과 모습도, 말투도 다른 소수 인종이 보잘것 없는 시작에서 나올 수 있듯이 오렌지 카운티는 아메리칸 드림이 살아있는 곳입니다."] 민주당 소속으로는 한국이름 순자로 알려진 메릴린 스트릭랜드 후보가 워싱턴주에서 일찌감치 당선 소식을 알렸고 뉴저지주 앤디 김 의원도 잇따라 재선을 확정했습니다. 미국 한인사회에서 한국계 여성 연방 하원의원이 나온 것은 처음인데다 미국 주류 정치권에 4명이 한꺼번에 진출한 것도 이번이 처음입니다. 로스엔젤레스에서 KBS 뉴스 이영현입니다. 영상편집:안영아  /이영현  ==================================/// 한국계 3명 미 연방하원 입성  2020.11.11.    좋아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 미 연방 하원의원 한국계 당선자 미셸 스틸 박-메릴린 스트릭랜드-앤디 김 한국계 여성 미셸 박 스틸(한국명 박은주·65) 미국 공화당 후보가 연방 하원의원에 당선됐습니다. 스틸 후보는 10일(현지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 제48선거구에서 접전 끝에 민주당 현역인 할리 루다 의원을 누르고 승리했습니다. 앞서 한국이름 '순자'로 알려진 메릴린 스트릭랜드(민주·워싱턴주) 후보 당선과 앤디 김(민주·뉴저지주) 의원 재선 성공에 이어 한국계 당선자는 모두 3명으로 늘었습니다. 이와 함께 캘리포니아주 39선거구에서는 한국계 영 김(한국명 김영옥·57) 공화당 후보가 민주당 길 시스네로스 의원을 1% 포인트 차로 앞서고 있습니다. 연방 하원의원 선거에 출마한 영 김 후보 따라서 추가로 김 후보의 당선이 확정되면 '순자·은주·영옥'이라는 친숙한 한국이름을 가진 한국계 여성의원 트리오가 탄생하며, 미국 연방하원에 모두 4명의 한국계 의원이 자리잡게 됩니다. 뉴욕타임스(NYT) 개표 집계에 따르면 스틸 후보는 50.9% 득표율을 기록해 루다 의원을 1.8% 포인트 차로 제쳤습니다. 두 후보의 표 차는 7천300여 표로, 스틸 후보는 접전 끝에 승리를 거머쥐었습니다. 스틸 당선인은 트위터에 "힘든 싸움을 했고, 어렵게 승리했다"며 "유권자들의 지지에 더욱 겸손해지겠다. 우리의 공동체를 위해 의회에서 봉사할 수 있게 돼 더없는 영광이다. 이제 일하러 가자"는 당선 소감을 올렸습니다. 패배한 루다 의원도 트위터에 글을 올려 "우리는 이번 선거에서 승리하지 못했다"며 "바라던 결과는 아니지만, 국민의 판단을 받아들이는 것이 어느 때보다 중요한 일"이라며 결과에 승복했습니다. 캘리포니아주는 민주당 안방이나 다름없지만, 스틸 후보가 출마한 48선거구는 보수 유권자가 많은 오렌지카운티에 속해 있어 공화당 강세지역으로 분류됩니다. 서울 출생인 스틸 후보는 1975년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해 페퍼다인 대학을 졸업하고 서던캘리포니아대학(USC) 경영학 석사 학위를 취득한 뒤 평범한 주부로 살았습니다. 그의 인생을 바꾼 것은 1992년 로스앤젤레스(LA) 폭동 사태입니다. 흑백 갈등 속에서 한인들의 삶의 터전이 송두리째 무너져내리고 한인타운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총을 든 한인들이 주류 언론에 폭도로 매도되는 현실을 접하고, 그는 한인사회의 정치적 역량을 키우는 것이 절실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이후 캘리포니아주 공화당 의장을 지낸 남편 숀 스틸 변호사의 도움을 받아 정치권에 입문했습니다. 1993년 LA 시장에 출마한 리처드 리오단 후보 캠프에 참여했고, 리오단 후보가 당선된 뒤 LA시 소방국장, LA 카운티 아동 가족 위원장 등을 역임했습니다. 스틸 후보는 한인 사회에서 '선거의 여왕'으로 통합니다. 이번 하원의원 선거까지 합치면 5전 연승입니다. 2006년 한인 최초로 캘리포니아주 조세형평국 위원에 당선되며 선출직 공직자로 첫발을 내디뎠고, 연임에 성공했습니다. 이어 2014년 오렌지카운티 2지구 수퍼바이저(행정책임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됐고, 2018년 재선 고지에 올랐습니다. 스틸 후보는 선거 홈페이지를 통해 "우리 가족은 더 나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고 기회를 찾아 미국에 왔다"며 "내가 아메리칸드림을 이루는 축복을 받았듯이 미래 세대가 더 나은 번영의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하겠다"고 포부를 밝혔습니다. 한편, LA 한인타운이 위치한 캘리포니아주 34선거구에는 한국계 데이비드 김 후보가 출마했습니다. 개표율 98% 상황에서 46.9%를 득표한 김 후보는 53.1%를 득표한 현역 데이비드 고메스 의원에게 뒤지고 있으나 정치 신인으로서는 상당히 선전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사진=미셸 스틸 박 페이스북 캡처, 앤디 김 홈페이지 캡처, 영김 후보 페이스북 캡처, 연합뉴스) /유영규 기자 ===================================/// 은주, 순자, 영옥씨… 120년 美이민사 아픔이 만든 '아메리칸 드림' 2020.11.12.    좋아요 화나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美 연방 하원의원에 한국계 최대 4명 유력 스틸, 스트릭랜드 이어 영 김도 당선 가능성 꿈 좇아 이민 후 소수인종 고난 겪은 공통점 "목소리 못 내는 이들 위해 목소리 내겠다" 앤디 김, 재선 확정…'샛별' 데이비드 김 주목 "파워 커지면 한·미 의회 교류 수월해질 것" (왼쪽부터) 미국 캘리포니아주 제48선거구에서 하원의원에 당선된 공화당 소속 미셸 박 스틸(한국명 박은주), 워싱턴주 하원의원에 당선된 한국이름 ‘순자’로 알려진 민주당 소속 메릴린 스트릭랜드, 캘리포니아주 제39선거구에서 당선이 유력시되는 한국계 영 김(한국명 김영옥) 공화당 후보.(사진=연합뉴스) [뉴욕=이데일리 김정남 특파원] “우리 가족도 여느 가족과 마찬가지로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미국으로 건너왔지요. 홀로 조그만 가게를 하시던 어머니가 부당한 세금 고지서에 힘겨워 하시는 걸 보면서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올해 미국 연방 하원의원을 뽑는 캘리포니아주 제48선거구 선거에 출마해 승리한 공화당 소속의 미셸 박 스틸(한국명 박은주·65) 당선인. 그는 50.9% 득표율로 민주당 현역인 할리 루다 의원을 1.8%포인트 차이로 누르고 승리했다. 전체 435개 하원 지역구 중 가장 치열한 접전 지역으로 꼽힌 곳에서 ‘아메리카 드림’을 이룬 것이다.  ‘은주씨’ 스틸 후보가 하원의원에 도전장을 던지며 선거팀 홈페이지를 통해 털어놓은 이야기는 120년 한국 이민사의 아픔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는 “청소년기 때 어머니, 두 여동생과 희망을 안고 한국에서 미국으로 건너왔다”고 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의 생각과는 달랐다. 스틸 후보는 “어머니는 홀로 일하는 이민자로서 주(州)에서 요구하는 부당한 세금을 어쩔 수 없이 냈다”며 “어머니가 힘겨워하는 걸 본 후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이들을 위해서는 누군가는 큰 목소리로 얘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회고했다. 스틸 후보의 1호 공약은 ‘모든 캘리포니아 주민들을 위해 세금을 낮추는 것’이다. .  1992년 한인 상점들이 습격당하는 등 한인사회가 큰 피해를 입었던 로스앤젤레스(LA) 폭동 사태도 그가 정치에 뛰어들 결심을 하는데 한 몫을 했다. 미국 내 소수계인 한인사회의 정치적 역량을 키우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한국계 美 연방 하원의원 최대 4명 예상 스틸 당선인뿐만 아니다. 올해 미국 연방 하원선거에서 최대 4명의 한국계 당선인이 배출될 전망이다. 사실상 한국계가 미국 주류 정치에 입성하는 원년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스틸 당선인에 앞서 230년 미국 의회 역사상 한국계 여성으로는 처음 하원행(行)이 결정된 이가 있다. 워싱턴주 제10선거구에 출마해 당선된 ‘순자씨’ 메릴린 스트릭랜드(58·민주당)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흑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돌이 지난 직후 미국으로 건너가 한국에 대한 기억은 없지만, 자신의 뿌리가 한국이라는 정체성은 확고하다고 한다.  스트릭랜드 당선인은 “나는 서울에서 태어났다”며 “(내가 어렸을 적 미국에서) 부모님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큰 차별과 고난을 견뎌내셨다”고 돌이켰다. 그는 “부모님은 나에게 옳은 것을 위해 싸우고 공동체에 봉사하고 약자를 위해 일어서라고 가르치셨다”며 “그 가치관은 (정치의 꿈을 이룬) 오늘날 나에게 영감을 준다”고 강조했다.  그가 어머니 김인민(90) 여사에 대한 존경과 사랑을 공개적으로 표하는 이유다. 스트릭랜드 당선인은 2007년부터 워싱턴주 타코마 시의원으로 일했으며, 2010년~2017년 타코마 시장을 역임했다. 캘리포니아주 제39선거구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는 공화당 소속 영 김(한국명 김영옥·57) 후보도 있다. 그 역시 기회를 찾아 미국으로 넘어온 이민자다. 그는 “이민자, 작은 가게 주인, 그리고 어머니로서 투쟁하며 살았다”며 “(당선된다면) 워싱턴 정가에서 사리사욕을 버리고 초당적인 해결책을 제시할 것”이라고 말했다. ‘영옥씨’ 김 후보까지 당선되면 3명의 한국계 여성이 미국 하원에 진출하게 된다. 미국 뉴저지주 제3선거구에서 재선에 성공한 민주당 소속 앤디 김 하원의원.(사진=연합뉴스) “목소리 못 내는 이들 위해 목소리 낼 것” 지난 의회에서 435명의 연방 하원의원 중 유일한 한국계였던 민주당 소속 앤디 김(38) 의원은 재선에 성공했다. 뉴저지주 제3선거구에서다. 그는 1993~2000년 연방 하원의원을 지낸 김창준(81) 전 의원 이후 첫 한국계였으며, 이번에 또다시 워싱턴행을 확정했다.  올해 미국 대선과 함께 치러진 연방 하원선거에 나선 한국계 후보는 총 5명이었다. 최대 4명이 당선되는 건 예상 밖 성과라는 게 한인사회 안팎의 평가다. 30년 가까이 미국 정치를 지근거리에서 지켜본 김동석 미주한인유권자연대(KAGC) 대표는 이데일리와 통화에서 “한인사회를 기반으로 성장한 연방 하원의원이 4명 나오는 건 엄청난 쾌거”라며 “한국계가 주류 정치권으로 진입하는 원년으로 기록될 것”이라고 말했다.  인도계, 일본계, 중국계와 함께 아시안계의 한 축으로서 미국에서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그는 “(이번에 낙선한) 민주당 소속 데이비드 김(35·캘리포니아주 제34선거구) 역시 주목해야 한다”며 “그는 아시안계의 ‘라이징 스타(떠오르는 샛별)’로 평가 받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민주당 대선 경선 주자였던 앤드루 양의 공식 지지를 받기도 했다. 워싱턴에서 ‘코리안 파워’가 세지면 한국 정치권도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김 대표는 “지난 의회에서 앤디 김 의원이 한미간에 중요한 가교역할을 많이 했다”며 “한국계 4명이 움직이면 한·미 의회 교류가 수월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 /김정남  =============================///   좋아요 확대하기이전  
7774    [세상만사]: 30 = 14 댓글:  조회:2626  추천:0  2020-11-07
  '태어나보니 오빠만 14명'… 30년 만에 첫 딸 얻은 미국 부부  2020.11.07.    좋아요 훈훈해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14명 아들의 부모인 제이·카테리 슈반트 부부가 지난 5일 낳은 딸 매기 제인. [AP=연합뉴스] (서울=연합뉴스) 김유아 기자 = 미국에서 열네 명의 아들을 낳은 한 부부가 처음으로 딸을 얻어 주목을 받고 있다. 미시간주에 사는 아들 열넷의 엄마 카테리 슈반트(45)는 지난 5일(현지시간) 그랜드래피즈시 한 병원에서 3.4㎏의 건강한 딸을 낳았다고 AP통신이 보도했다.  첫 딸의 이름은 매기 제인.  남편 제이 슈반트(45)는 "매기는 상상도 못 했던 가장 큰 선물이다. 이번 해는 여러 가지로 정말 기쁜 해"라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아들만 14명이던 슈반트 가족은 그간 지역 사회의 주목을 받으며 여러 차례 언론에 보도됐다.  슈반트 부부는 '14명의 아웃도어스맨'이라는 제목으로 아들들의 성장기를 보여주곤 했으나 이번에 딸이 태어남에 따라 새로운 제목이 필요해질 참이다. 장남인 타일러(28)는 "14번째 출산에서도 남동생이 태어나자 부모님은 '딸을 낳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면서 "집에 핑크색 같은 여자아이 옷도 없다"고 말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처음 만나 연애를 시작한 슈반트 부부는 미시간주 페리스주립대학교에 입학하기 직전인 1993년 결혼식을 올렸다.  이들이 대학을 졸업할 때는 이미 아들 3명의 어엿한 부모가 돼 있었다. 이들 부부는 양육하는 동안에도 학업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카테리는 연이은 임신과 출산에도 꾸준히 공부해 그랜드밸리 주립대학원에서 사회복지학 석사 학위를 땄다. 제이는 변호사 시험에 통과하고 토지측량 분야의 사업을 운영하고 있다.  2018년 제이·카테리 슈반트 부부가 14명의 아들과 함께 찍은 가족사진 [AP=연합뉴스]
7773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기후변화 주범",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2948  추천:0  2020-11-05
한경 경제용어사전 파리기후변화협약   [ Paris Climate Change Accord ] 2015년 12월 12일 파리에서 열린 21차 유엔 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1) 본회의에서 195개 당사국이 채택한 협정.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 주도로 체결된 협정이다. 산업화 이전 수준 대비 지구 평균온도가 2℃ 이상 상승하지 않도록 온실가스 배출량을 단계적으로 감축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21차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 협정'이나 `파리기후변화협정'이라고도 부른다. 2020년 이후 적용할 새로운 기후협약으로 1997년 채택한 교토의정서를 대체하는 것이다. 교토의정서에서는 선진국만 온실가스 감축 의무가 있었지만 파리 협정에서는 참여하는 195개 당사국 모두가 감축 목표를 지켜야 한다. 195개 당사국은 세계 온실가스 배출량의 90% 이상을 차지한다.  협정은 보다 많은 국가들의 참여를 유도하고 급변하는 기후 상황에 대응하기 위해 온실가스 감축 목표를 각 국가가 자발적으로 정하는 '국가결정기여(NDC)'을 제출하도록 하고 있다.  미국은 NDC로 2030년까지 26~28% 절대량 감축을 약속했고, 유럽연합은 2030년까지 절대량 40% 감축을 목표로 한다.  중국은 2030년까지 국내총생산(GDP) 대비 배출량 기준 60~65% 감축, 한국은 2030년의 목표연도 배출전망치 대비(BAU) 37% 감축 목표를 제출했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은 2016년 일본에서 열린 G7정상회담에서 파리협정 이행을 약속하면서 같은해 9월 행정명령을 통해 파리협정을 비준했다. 반면 트럼프 대통령은 대선후보시절부터 파리협정 파기를 공공연하게 주장했다. 트럼프는 “지구 온난화 주장은 사기이며 파리기후변화협약에 따른 미국 규제가 중국 인도 등에 비해 너무 강하다”고 주장해왔다.  그는 2017년 6월 1일에는 파리협정 탈퇴를 선언해 미국의 파리협약 탈퇴가 기정사실이었으나, 2016년 11월 4일 발효된 협약은 3년간 탈퇴를 금지하고 있어 2019년 11월 3일까지는 탈퇴 통보가 불가능했다. 이에 따라 미국은 다음 날인 11월 4일 유엔에 협약 탈퇴를 통보했다. 탈퇴는 통보일로부터 1년이 지난 뒤인 2020년 11월 4일 이뤄진다. 미국이 파리 협정에서 최종 탈퇴한다면 미국은 전 세계에서 이 협정을 지지하지 않는 유일한 국가가 된다. ====================================/// 시사상식사전 파리기후변화협약      2020년 만료 예정인 교토의정서를 대체, 2021년 1월부터 적용될 기후변화 대응을 담은 기후변화협약으로 2016년 11월 발효됐다. 파리협약은 선진국에만 온실가스 감축 의무를 부여했던 교토의정서와 달리 195개 당사국 모두에게 구속력 있는 보편적 첫 기후합의라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미가 있다.             외국어 표기     Paris Climate Change Accord(영어)   2015년 12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21차 유엔기후변화협약(UNFCCC) 당사국총회(COP21)에서 채택된 것으로, 2020년 이후의 새 기후변화 체제 수립을 위한 최종 합의문이다. 즉 2020년 만료 예정인 교토의정서를 대체해 2020년 이후의 기후변화 대응을 담은 국제협약이다.  파리협약은 선진국만 온실가스 감축 의무가 있었던 1997년 교토의정서와는 달리 195개 당사국 모두에게 구속력 있는 보편적인 첫 기후합의라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미가 있다. 다만 각국이 제출한 INDC(자발적 감축목표)에 부여하려던 국제법상의 구속력은 결국 제외됐다는 한계는 있다.  한편, 파리협약은 '55개국 이상', '글로벌 배출량의 총합 비중이 55% 이상에 해당하는 국가가 비준'이란 두 가지 기준이 충족되면서 2016년 11월 발효됐다.      파리협약 주요 내용 파리협약은 2020년 만료되는 교토의정서를 대체할 신(新) 기후체제로, 오는 2020년 말 교토의정서가 만료되는 직후인 2021년 1월부터 적용된다. 파리협약에는 ▷장기목표 ▷감축 ▷시장 메커니즘 도입 ▷적응 ▷이행점검 ▷재원 ▷기술 등이 주요 내용으로 담겨 있다.  협약은 장기목표로는 산업화 이전 대비 지구 평균기온 상승을 '2℃보다 상당히 낮은 수준으로 유지'키로 하고, '1.5℃ 이하로 제한하기 위한 노력을 추구'하기로 했다. 또 국가별 온실가스 감축량은 각국이 제출한 자발적 감축목표(INDC)를 그대로 인정하되 2020년부터 5년마다 상향된 목표를 제출하도록 했다. 이와 함께 정기적인 이행 상황 및 달성 경과 보고를 의무화하고, 이를 점검하기 위한 국제사회의 종합적 이행 점검 시스템을 도입해 2023년에 최초로 실시한다는 원칙에 합의했다.  아울러 차별적인 책임 원칙에 따라 감축목표 유형은 선진국은 절대량 방식을 유지하며, 개도국은 자국 여건을 감안해 절대량 방식과 배출 전망치 대비 방식 중 채택하도록 했다. 이에 온실가스 감축목표의 효과적인 달성을 위해 UN 기후변화협약 중심의 시장 이외에도 당사국 간의 자발적인 협력도 인정하는 등 다양한 형태의 국제 탄소시장 매커니즘 설립에 합의했다. 이 밖에 온실가스 배출량을 꾸준히 감소시켜 이번 세기 후반 이산화탄소 순배출량을 0으로 만드는 내용에도 합의했다. 또 선진국들은 오는 2020년부터 개발도상국 등의 기후변화 대처를 돕는 데 매년 최소 1000억 달러(약 118조 원)를 지원하기로 했다.   교토의정서를 대체하는 신기후체제 마련 파리협약은 선진국에만 감축 의무를 부과했던 교토의정서와 달리 195개 당사국 모두가 지켜야 하는 첫 합의이면서, 교토의정서를 대체하는 신(新)기후변화 체제를 마련했다는 데서 그 의의가 있다. 또 파리협약이 기존 교토의정서와 다른 특징은 ▷지구온난화 억제 목표 강화(2도 이내에서 1.5도 이내 노력) ▷온실가스 감축 행동을 선진국ㆍ개도국ㆍ극빈국 등 모든 국가로 확대 ▷5년마다 상향된 감축목표 제출(진전 원칙) 및 이행 여부 검증(5년마다) ▷2025년 이후 개도국에 대한 자금 지원 확대 ▷상향식 감축목표 방식 등이다. 다만 각국의 기여방안 제출은 의무로 하되, 이행은 각국이 국내적으로 노력키로 합의함에 따라 국제법적 구속력은 결국 부여하지 못했다. 한편, 1997년 일본 교토 당사국 총회에서 채택돼 2005년부터 발효된 온실가스 감축과 관련한 첫 국제협약인 교토의정서는 선진국(38개국)들에만 온실가스 감축 책임을 지우고 있다. 그러나 미국이 애초부터 의정서 참여를 거부하고 일본ㆍ캐나다ㆍ러시아 등이 잇따라 교토의정서를 탈퇴한 데 이어, 세계 최대 온실가스 배출국인 중국과 인도(3위) 등 개도국에는 감축 의무가 부과되지 않으면서 실효성이 없다는 지적이 계속돼 왔다. 반면 이번 파리 총회에서 결정된 2020년 이후의 신기후체제는 선진국ㆍ개도국ㆍ극빈국 등 전 세계 모든 국가에 적용된다.   각국의 온실가스 감축목표는? 2015년 파리총회를 앞두고 한국을 포함해 187개국은 2025년 또는 2030년까지 온실가스 감축목표(기여방안ㆍINDC)를 유엔에 전달했다. 중국과 미국, 인도, 러시아, 일본, 유럽연합(EU) 등 주요 배출국들은 오는 2030년까지 온실가스 배출량을 25~65%까지 감축하겠다고 공언했고, 우리나라도 2030년 배출전망치(BAU, 특별한 감축 노력을 하지 않을 경우 예상되는 미래의 배출량) 대비 37%를 줄이겠다는 내용의 감축목표를 2015년 6월 제출했다. 한편, 파리협약에서는 국가별 INDC에 대해 스스로 정하는 방식을 채택하고 모든 국가가 차기 감축목표 제출 시 이전 수준보다 진전된 목표를 제시하고, 최고 의욕 수준을 반영해야 한다는 진전원칙을 규정했다. 이에 따라 협약국들은 2020년부터 5년에 한 번씩 전 목표치보다 높은 수치를 제시한 온실가스 감축목표서를 제출해야 한다.    국가     감축 목표     중국     2005년 1인당GDP 대비 60~65%     미국     2005년 배출량 대비 26~28%(2025년까지)     EU(28개국)     1990년 배출량 대비 40%     인도     2005년 1인당 GDP 대비 33~35%     러시아     1990년 배출량 대비 25~30%     일본     2013년 배출량 대비 26%     캐나다     2005년 배출량 대비 30%     멕시코     2030년 배출전망치 대비 25~40%     한국     2030년 배출전망치 대비 37%     미국, 파리기후변화협약 탈퇴 유엔에 통보(2019. 11.)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2019년 11월 4일 파리기후변화협약 탈퇴를 유엔에 공식 통보했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은 이날 성명을 내고 미국이 파리협약에서 탈퇴하기 위한 공식 절차를 개시했다고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은 앞서 2017년 6월 미국이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며 파리협약 탈퇴를 선언했으나, 발효(2016년 11월 4일) 이후 3년간 탈퇴를 금지한 규정에 따라 2019년 11월 3일까지는 탈퇴 통보를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 기간이 끝나자 바로 유엔에 통보했는데, 다만 규정에 따라 탈퇴 통보 1년 뒤 최종적으로 탈퇴가 이뤄지게 된다. 이처럼 미국이 파리협약 탈퇴 절차에 착수하면서 지구온난화 방지를 위한 지구촌의 온실가스 감축 노력에 차질이 빚어질 가능성이 크다는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 “파리기후협약 탈퇴는 트럼프 과오”트럼프 행정부가 탈퇴한 파리협정(파리기후변화협약)에 복귀하겠다고 선언한 조 바이든 미국 민주당 대선후보 트위터.바이든 후보는 트럼프 정부가 탈퇴한 파리협정(파리기후변화협약) 복귀를 선언하기도 했다. 바이든 후보는 이날 트위터에 ‘파리협정 공식 탈퇴’와 관련한 ABC 방송 보도를 공유하며 ‘정확히 77일 안에 바이든 행정부는 파리기후협약에 다시 가입하겠다“고 글을 올렸다. 그가 ‘시한’으로 스스로 정한 77일은 이날부터 미국 대통령 취임식이 열리는 1월 20일까지 기간이다. 파리협정 복귀는 기후 변화를 음모론으로 치부하는 듯한 발언을 종종 해온 트럼프 대통령의 ‘과오’를 되돌려 놓겠다며 바이든 후보가 상징적으로 내세운 공약이다. 미국은 트럼프 대통령이 2017년 6월 협정 탈퇴를 선언한 후 지난해 11월 4일 탈퇴 절차를 시작했다. 2015년 21차 유엔 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1) 본회의에서 195개 당사국이 채택해 이듬해 발효된 파리협정은 지구 평균온도가 산업혁명 이전보다 2℃ 이상 상승하지 않도록 온실가스 배출량을 줄이는 것을 목표로 한다. 협약 규정에 따라 절차 개시 후 1년이 지난 4일 미국의 탈퇴가 공식 발효됐다. 협약 서명국 중 탈퇴한 국가는 현재까지 미국이 유일하다. ====================================/// ...반기문 전 유엔총장에 대해서는 “부탁을 거절하기 어려운 착한 모범생(nerdy kid) 같았다”고 했다. 2009년 12월 코펜하겐에서 예정된 유엔 기후변화 정상회의를 앞두고 상원에 발목이 잡혀 있던 그는 국제회의에서 구속력 있는 온실가스 감축 합의를 하기가 어려워 참석을 고민했다고 한다. 이런 오바마에게 반 전 총장은 끈질기게 설득했다고 한다. “(그때 나는) 대통령에 취임한 지 두 달도 안 돼 반 전 총장을 백악관에서 처음 만났다. (그때부터) 기후변화 회의 참석을 약속하라고 압박했다. 그는 화려하진 않았지만, 나는 그를 좋아하고 존경하게 됐다. 그는 정직했고 대단히 긍정적이었다. 특히 최우선 과제로 정한 기후변화 문제에선 대단히 끈질겼다.”          ㅡ  "약속의 땅" 버락 오바마 회고록에서.
7772    [이런 저런]- "낭" 댓글:  조회:2628  추천:0  2020-10-31
  하루에만 30만개 '낭' 생산... '낭' 종류 126가지... 2020-10-27       신강에 가면 밥상에 빠지지 않는 음식이 바로 '낭(위구르족 전통 빵)'이다. 많은 살마들은 '낭'이 발효한 후 구워낸 밀가루 빵인줄로만 알지만 신강 가스현(伽师县) 낭문화산업단지에 가면 들깨낭, 밀크비스켓낭, 백낭, 장미낭, 매운낭 등 다양한 종류의 빵을 맛볼 수 있다.    산업단지 책임자 마군(馬軍)의 소개에 따르면 단지에서 생산하는 낭의 종류는 총 126가지, 낭을 굽는 화덕만 402개에 달하며 하루 생산량이 30만개에 달한다. 이 가운데 가스현에만 매일 20만개 팔리고 광동성 불산(佛山), 섬서성 서안(西安)의 직영점에서 하루 4만 장 주문하며 온라인 판매량이 3~5만 장 된다고 한다.      낭문화산업단지는 가스현에서 낭문화 전시, 생산과 가공, 제품 판매를 목적으로 중점 운영하는 산업단지다. 단지는 "낭산업+기능 양성+탈빈곤 취업+관광"의 발전 모식에 따라 낭산업단지 건설을 다그치고 특색 산업과 관광업 발전을 추진함으로써 노동력 취업의 길을 넓히고 군중들을 부유에로 이끌고 있다.    이 곳에서는 취직한 사원들은 정부에서 기능 양성 지원금을 대주며 숙소도 제공한다. 마군은 "단지 내 1200명의 사원 중 696명은 빈곤가정 출신이었으나 현재 모두 가난에서 벗어났다"며 "1인당 월급이 3500위안(한화로 약 59만원)에 달한다"고 밝혔다.     
7771    방언을 살려야... 댓글:  조회:2598  추천:0  2020-10-28
방언과 지역문화 전승 /안성호 /2020년 10월 28일      근래에 음악, 영화, 문학, 예술 등 창작에서 지방방언요소를 내포한 작품들이 독특한 풍격과 창의성으로 인하여 각광을 받고 있다. 심지어 너무 많은 방언요소들로 인하여 거품현상이 일어나지 않느냐 하는 의문이 생길 정도이다. 조선족가수들이 전국적인 무대에 나설 때도 조선족문화의 독특성을 내포함으로 하여 특색적인 작품으로 전국 관중들의 인기를 모으고 있다. 지역특색이 농후한 방언과 지역문화배경은 특색 있는 작품 창작의 원천이 되고 있다. 중국어에 “일반수토양일방인(一方水土养一方人)”이라는 말이 있다. 즉 한 지방의 풍토가 한 지방의 특색 있는 문화와 생활습관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방언도 이러한 지역의 풍토에 의하여 형성된 언어문화이다. 인류의 력사적인 이동과 집거, 재이동으로 인하여 지역에 따라 부동한 언어가 형성되였다. 력사적인 언어 전승과 보존의 차이로 인하여 여러 지방의 언어들에는 많은 고대언어가 전승되여 보존되여있다. 일본어가 당음으로 불리우고 우리말에 절강 오월, 복건 민남방언과 비슷한 발음의 단어들이 많은 것은 고대의 언어들이 보존되여왔기 때문이다. 개개의 방언은 모두 그 지방의 독특한 문화를 내포하고 있는바 문화를 전승하는 매체이다. 중국 전역에는 북방방언, 산서(晋)방언, 오(吴)방언, 민(闽)방언 등 10대 방언 외에도 또 100여가지 방언이 있다고 한다. 복건성의 경우, 민남방언, 객가(客家)방언이 주류를 이루면서도 크고작은 방언 지역이 형성되여 산 하나를 넘으면 소통이 어려울 정도로 방언의 차이가 심하다. 또한 인구의 이동에 의하여 특수한 방언섬들이 형성되였다. 즉 한 마을 혹은 소수 마을들이 주변 방언과 완전히 다른 방언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반도에도 경상도방언, 전라도방언, 충청도방언, 경기도방언, 강원도방언, 황해도방언, 평안도방언, 함경도방언 팔도방언에 제주도방언까지 더하여 9대 방언이 있다. 조선족사회의 경우, 주로 팔도방언이 이주민들과 함께 전하여왔지만 이주인구 수와 집거 여부에 따라 주로 함경도방언, 경상도방언과 평안도방언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방언섬들도 두루 만날 수 있다. 즉 연변지역의 충청도마을, 경상도마을 등 집단이주에 의하여 형성된 마을들에서 주변의 함경도방언과는 다른 방언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흔히 사투리라고 표현하는 방언은 지역문화를 여실히 반영하고 있다. 1940년대에 같은 조선족마을 내부에서도 남부 출신과 북부 출신 이주민들 사이에서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았다고 하면 밎기 어려워하는 분들이 많으리라 생각한다. 필자도 현지조사에서 이러한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 너무나도 의외적이여서 “진짜입니까?” 하고 다시 확인하여 보았었다. 그 만큼 조선반도에서 중국으로 이주하여온 사람들이 같은 조선사람이라고 한 마을에 모여살았지만 그 만큼 지역적 문화적 차이가 컸던 것이다. 일본식민주의세력에 의하여 ‘남선사람’, ‘북선사람’ 등 차별적인 용어가 사용되였고 이를 받아들였던 것은 그 만큼 남북 출신간의 차이가 컸음을 설명한다. 하지만 광복 이후 벼농사의 보급과 공동로동에 의하여 새로운 지역 민족공동체가 형성되고 지역언어 또한 교류와 융합을 거쳐 새로운 지역방언으로 탈바꿈하게 되였다. 목단강지역 같은 경우, 함경도출신이 다수이지만 경산도출신도 많음으로 하여 경산도방언요소가 다분히 포함된 함경도방언으로 정착하게 되였다. 중국이라는 대환경 속에서 한어의 문화요소도 다분히 포함시킴으로 하여 조선족사회에서 사용되는 우리말은 우리만의 정서와 고향의 정을 느낄 수 있는 문화적 상징이 되였다. 지금도 간혹 위챗그룹들에서 드문드문 요즘 접하기 드문 이러한 사투리 언어들을 고의적으로 사용하면 그룹 성원들이 고향 향수애에 흠뻑 젖어있고 지나간 고향 생활시절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득 차곤 한다. 이는 이러한 방언이 우리만의 정서, 우리만의 문화, 우리만의 고향의 정을 듬뿍 담고 있기 때문이다. 방언이 지역적 정서, 지역만의 문화특색을 나타냄으로 하여 국가적 차원에서의 교류에 저애가 된다. 이로 인하여 일찍 진시황시대부터 문자통일을 통하여 문자를 통한 교류를 추진하였고 명나라, 청나라 시기에는 관방용어와 더불어 음운서를 편찬하여 널리 표준어를 사용하도록 권장하였다. 명나라시기에 제정한 남경지역 언어를 표준으로 하는 남경 관용어가 표준어로 되여 조선반도에까지 보급되였었다. 오늘날 우리말 한자음 발음의 일부가 명나라시기의 남경음이 그대로 남아있다는 지적도 있다. 근대 이후 서방의 국민국가체제가 보편적인 국가건설체제로 자리잡으면서 표준어는 국가의 강력한 추진하에 더욱 추진되였다. 학교교육을 통하여 표준어의 교육이 일관적으로 추진되였고 지방방언의 사용이 금지되였다. 표준어사용의 중요성 또한 높아가고 있다. 글로벌화, 도시화 시대의 급격한 인구이동과 도시인구의 급속한 팽창으로 인하여 표준어는 더는 선택적인 언어, 외부인과 만났을 때만 사용하는 언어가 아닌 여러 지역 출신 사람들 사이의 소통에 꼭 필요한 언어로 부상하였다. 이에 따라 방언의 사용환경은 날로 위축되여가고 있으며 중국 전역에서 방언은 전례없는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상해말을 지역자존심으로 여기기로 이름난 상해에서 토배기 상해출신 자녀들마저 상해말을 아예 알아듣지 못하는 현상이 보편화되고 있다. 필자가 있는 항주도 소학생들 가운데 일부 항주말을 알아듣는 학생들은 있어도 항주말을 할 줄 아는 학생은 이미 찾아보기 어렵게 되였다. 가족의 련대를 굉장히 중시하는 객가의 방언도 소실되기 쉬운 위태로운 언어로 지정되였다. 방언전승위기를 극복하려고 여러 지역들에서 지역특색이 있는 방언을 살리기 위한 캠페인들이 진행되고 있다. 2015년, 중국 언어자원보호프로젝트가 실시되여 지역 방언과 소수민족언어에 대한 조사를 실시하고 있다. 상해, 복건, 항주, 소주 등 여러 지역들에서는 지방방언 텔레비죤프로그람 개설, 공공뻐스 지역 언어 안내방송, 유치원 지방 언어교류 행사, 지방 언어 이야기시합 등 다양한 행사들을 진행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들이 큰 효과를 가져오고 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실용성과 인문성, 지역성의 선택에서 대다수 사람들이 실용성을 선택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연변을 포함한 조선족집거지 학생들의 일상용어도 이미 한어로 변하여가고 있다. 이는 민족적인 차원의 문제임과 동시에 상해와 같은 대도시와 마찬가지로 도시화 시대, 다매체 시대에 실용성에 대한 추구라고도 볼 수 있다. 민족적 정서와 고향의 정이 넘쳐나는 고향 방언 환경에서 자라난 우리 세대조차 한국과의 교류가 심화됨에 따라 고향의 말을 점차 멀리하고 있지 않는가 반문하고 싶다. 지역문화 보존 차원에서 방언과 민족언어 보존과 발전을 역설하고 싶지만 커다란 력사적 흐름 속에서 이는 쉬운 일이 아니다. 방언의 형성, 발전이 지역의 풍토에 의하여 형성되였듯이 현시대의 빠른 인구류동과 교류의 풍토가 지역적 특색과 지역발전에 불리한 요소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글로벌로 인한 균일화, 표준화가 추진되면서 서두에서 언급하였던 지역적 특색, 지역문화가 특색 있는 문화창작의 원천이 되고 지역살리기의 든든한 기초가 되고 있다. 지방언어를 지역 특색문화의 중요한 구성부분으로 중시하고 지역 활성화와 특색문화 창출에 활용하면서 지속적인 발전의 길을 함께 힘을 모아 모색하여야 하지 않을가 생각한다.     /안성호(安成浩) /절강대학 한국연구소
7770    그가 그런 사람이라고?!... "살아서 죽었고, 죽어서 살았다" 댓글:  조회:2907  추천:0  2020-10-15
  추모수필;  허창렬이 죽었다고? 20-09-29          /살춘각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이걸 지금 나보고 믿으라고? 구제비 스무고개 같은 소리를??       부고:     (재한동포그룹)의 췬주님이신 허창렬시인님이 어제(9일) 불상사로 타계하셨습니다. 지금 사인 해명중입니다.     부고 작성자: 정동(장경률)       9일이면 어제가 아닌가? 나는 변사또한테 전화를 넣었다. 변사또라면 잘 알 터이다. 창렬이가 한국에 도착해서부터 곁에서 도와준 사람이 그였으니까. 그러나 신호음이 떨어지기 바쁘게 끊는다. 다시 넣었으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생각해보다가 이번에는 배사장한테 넣었다. 받는다.     “야, 사실이냐?”     “응.”     “상세히 좀 말해봐.”     “나도 금방 들었어야. 잘 몰라.”     녀석의 목소리는 잔뜩 꺼져 있었다. 우리 셋은 동갑이였다. 그럴 만도 할 것이다.     “너 지금 어디야?”     “어디긴. 진천이지.”     “충주? 아직도 거기냐?”     “아니면 어떡해? 일자리가 없는데... 지난 달 와이프가 중국서 돌아왔잖아? 한 번밖에 못 봤어야.”     그러는데 변사또한테서 문자가 왔다. 창렬이 갔다?     문턱 하나 넘는 게 그렇게도 간단한지?     내가 창렬이를 본 것은 아마도 1998년도였을 것이다. 년말이였고, 작가협회 “문학의 밤” 행사모임때였을 것이다. 저녁식사자리에 우리 또래들 일여덟명이 빙 둘러앉아 있는데 어떤 두억시니 같은 놈이 우리 상으로 뚜벅뚜벅 걸어왔다. 와서는 다짜고짜,     “여기 혹시 량영철이라고 있소?”     묻는다. 김현순이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내 앞의 잔에다 들고 온 술을 철철 넘치게 붓는다.     “량영철이야말로 진짜 소설가지! 나머진 다 쓰레기들이야.”     그리고는 되돌아서 가는 것이였다.     현순이랑 발끈했다. 두억시니의 뒤통수에 대고 한 마디씩 꼬아 던졌다.     “저 놈 누구야?”     “어디서 온 새낀데 시건방지네.”     “우리한텐 붓지도 않고... 인사도 안하고 갔잖아.”     “허창렬이 아니야? 시를 쓰는.”     “몰라. 처음 보는 놈이야.”     그때 나는 처음 들었다, 허창렬이란 이름을. 그 해박한 두억시니처럼 생긴 놈이 허창렬이라는 것도 그날 알 게 되였다. 감히 문인들을 앞에서 쓰레기라 말할 수 있는 간이 크고 배짱이 둑실한 놈이라는 것을 모르던 데로부터 알 게 된 것이다. 하루 강아지 같은 놈! 귀여운 놈!! 어쩌면 나는 그때 속으로 그렇게 웃었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나는 놈을 잊어버렸다.     20년이 지났다. 이번에 나는 놈을 한국에서 만났다. 놈은 나보다 석 달 먼저 와 있었는데, 방문취업제 H-2 비자였다. 어떻게 알고 내 위챗을 먼저 추가해왔다.     “살춘각?1언, 2언, 3언을 읽었다. 글 안 쓰니까 죽었는가 했더니 죽진 않았더구나.”     녀석은 신대방의 한 개장집에다 료리를 시켜놓고 있었다. 그런데 두 사람이 더 있다는 것이였다. 나는 가던 길을 틀어 사촌동생 조은경네로 향했다.     창렬이가 헐레벌떡 쫓아왔다.     “야, 이놈아. 이 형 면목도 좀 봐줘야지. 대갈통도 안 디밀구 가뻐리ams 나는 뭐가 되냐? 암튼 난 이미 샀으니까 나중에라도 군소리하기 없기다?”     그때부터 나와 창렬이는 자주 만났다. 집 떠나기 딱 싫어하는 령감님 성질 때문에 주로 창렬네 집에서 만났다. 대신 술과 안주는 허령감이 갖췄다. 하기 쉬운 닭이나 오리 따위였다.     마주 앉으면 우리는 티각태각했다. 나는 창렬의 시를 시도 아닌 가사도 아닌 짬뽕이라고 놀렸고, 창렬이는 내 소설을 삼류라고 비하했다. 창렬이는 시도 쓰고 평론도 쓰는 재간둥이였다. 처음 한국에 왔을 때 창렬이는 돈이 없다보니 평론을 돈 받고 퍼그나 써 줬는 모양이였다. 그것을 창렬이는 한면으론 부끄러워 하면서도 두면으론 자랑스러워도 하는 것이였다. 부끄럽다는 것은 돈을 받았다는 것이였고 자랑스러웠다는 것은 그 사람이 시인으로 떠올랐기 때문이였다.     창렬이는 노래도 많이 만들었다. 시도 가사에 시를 접목시키는 작업을 꾸준히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마음에 들지 않는 문단행태를 보면 가차없이 필을 날렸다. 그런 칼럼이 나간 뒤면 모두들 뒤에서 욕했다. 그러면서도 계속 썼다. 그래서 창렬이는 친구가 별로 없다. 한때 중국조선족문단을 욕해놓고 스스로 왕따 당하기도 했다. 입이 걸싸서 욕이 심한 건 둘째 치고 눈에 거슬리는 것을 참지 못하는 것이 더 문제였다. 본인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생겨먹기를 그렇게 생겨먹은 걸 어쩌겠느냐고 지사 왼고개를 치는 걸 어찌하겠는가.     알아본즉, 창렬이는 리혼을 하고 한국에 나온 터였다. 말로는 사업이 망하는 바람에 그리 됐다는데 진실여부는 알바 없다. 하지만 창렬이는 리혼한 마누라를 몹시 사랑했다. 돈지갑에 마누라사진을 항상 넣고 다녔는데 어느 날 창렬이 취한 틈을 타 억지로 구경했다. 미인이였다. 가히 미인이라 할 수 있는 한 미모를 지닌 녀인이였다. 사진이여서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남자라면 이쯤 되는 여자를 데리고 살아야지 않겠냐? 나 이제 돈 벌어서 꼭 마누라를 데려오고야 말거다. 절대 다른 놈한테 안 뺏겨!”     창렬이한테는 효정이라는 딸이 하나 있는데 연변대학에 다녔다. 어느 여름방학 때에는 한국에 와서 놀았는데 계산해보니 한화로 500만원이나 썼더라는 것이다. 기집애, 돈 쓰는 건 지 애비 닮아갖고, 잔뜩 헤퍼서 어쩌겠는지 몰라. 혀를 툭툭 차는 것이였다.     남들은 창렬이를 속이 좁아 터졌다, 남자란게 잘 삐진다... 말하지만, 의외로 나한테만은 수월했다. 나는 창렬이네 집에 가면 가지고 싶은 건 다 가지고 나온다. 피우는 거, 마시는 거, 신는 거, 입는 거... 그래도 창렬은 더 주지 못해 헤맨다. 그만큼 창렬은 의리파인 것이다.     창렬은 웬만한 사람들의 시는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창렬의 말대로라면 세상에서 허창렬만큼 시를 잘 쓰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창렬의 눈에 드는 시가 별로 없었다. 그러니 욕이 나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오합지졸 같은 시를 놓고 창렬은 한바탕 훈계까지 서슴치 않는 것이였다. 그러니 옆에 사람이 있겠는가. 창렬이를 따르던 녀자들마저 다 떨어져나가고 마는 것이였다. 해도 창렬은 꿈쩍도 안했다. 널린 게 녀자인데 뭐.     창렬은 부지런했다. 눈만 뜨면 시를 썼다. 밥 먹다가도 쓰고, 화장실 가면서도 쓰고, 지하철은 물론, 일을 하면서도 썼다. 하도 핸드폰을 들고 끄적이고 있어서 나한테 핀잔을 들은 적도 있다. 니가 토끼냐.     한국에서 살아본 사람은 알겠지만 노가다일이란게 보통일이 아니다. 노가다일을 십년만 하면 온몸이 다 노달이 나서 절거덕거리는 것이다. 그런데도 창렬이는 노가다에 붙었다. 돈이 되기 때문이다. 8남매의 막내로 자라난 창렬이가, 그것도 별 고생 모르고 성장한 창렬이가 노가다를 하면서 시를 쓴다는 걸 한 번 상상해보라. 그림이 안 나올 것이다. 어느 한 번 창렬이는 나한테 손을 내보여줬다.     “아침이면 손이 펴지지를 않는다. 싹 꼬부라들어서 반시간씩 주물러줘야 그날 일을 할 수가 있다.”     작년 12월 말이였다. 중국에 들어왔던 나는 사회통합프로그램시험 보러 한국에 들어갔다. 창렬한테 전화를 넣었더니 수원에 있단다. 일자리가 줄어들어서 지방으로 밀려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언제까지 있느냐 시간 맞춰 올라오겠노라고 했다. 나는 배부른 소리를 했다. 힘들게 올라오느라 바쁘게 내려가느라 하지 말고 새해에 다시 만나는 걸로. 그런데 놈이 내가 귀국하기전 밤도와 올라왔다. 역시 은경네다.     “니눔 하나 보구 싶어서 왔지. 아직까지 이 세상엔 나를 미친 눔, 꺼질 눔, 싸가지 없는 눔이라고 욕할 수 있는 놈은 너밖에 없다. 나는 남을 욕할 수 있어도.”     그게 놈과의 마지막 자리였음을 그때의 내가 어찌 알았으랴. 그때까지만도 나는 태평스레 래년 일이월에 다시 보자, 벚꽃축제때 보고 무궁화머리때 또 보자 했다. 정말이지 나는 그럴 수 있을 줄로 알고 있었고 또 믿고 있었다. 코로나씹구인지 코로나씹팔인지 하는 것이 전 지구를 휩쓸지 누가 꿈엔들 알았겠는가.     구정 쇠고 나간다던 것이 못나갔고, 꽃이 필 무렵이 되자 하늘길이 완전 막혀버렸다. 좀 잠잠해질 것 같더니 이번에는 광화문집회요 사랑교회요 하더니 아주 트위데믹으로 터져버렸다. 녀석과 마지막으로 통화를 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보니 8월 1일 저녁 8시 20분으로 나와 있었다.     그날 녀석은 무슨 말을 했던가. 그렇지. 딸 허효정에 대해 얘기했었지.     “야, 내 딸 대학 졸업하고 얼마 전 광주에서 취직했다”     “그래? 잘 됐다. 시름 놨구나. 이제 집어주기만 하면 되겠네? 제발 너 같은 밴댕이만 만나지 말기를.”     “이런, 코풀레기. 그나저나 우리 딸내미 돈이 필요하다는데 나 지금 돈이 얼마 없어. 한 이천소시 있을가. 광주에서 세집 맡고 생활비 쓰고 하자면 적어도 만원은 있어야겠는데 말이다. 너도 알다시피 내가 요 몇 달 일을 전혀 못했잖니.”     “효정 외가집에다 말해봐.”     “아무래도 그래야겠지? 햐~ 그나저나 개 쪽팔린다야. 이 허창렬이 언제부터 이런 신세가 됐다냐...”     이게 마지막 통화였다. 그리고서 녀석은 9월 7일 일요일 서울시간으로 오전 11시 27분 에서 이런 말을 한다.     ?강원도 철원에 하루 일당 8만원 받고 감자 캐러 가는 친구를 지켜보며 내가 왜 눈물이 날가?     ?그놈은 그래도 친구인 내가 생각이 났는지 전화가 와서 좀 힘들긴 하지만 한 번 해볼래 하길래 하루 일당 15만원씩 받던 내가 그것까지 해야 되나 잠간 망설여지다가도 너무 갑갑한 현실에 모든 걸 훌훌 털어버리고 어느 강원도 깊은 산골에라도 들어가 감자라도 캐야 하나도 싶고? 내 인생이 진짜 드라마 ㅋㅋ.     그리고 월요일 오전 9시 42분에는 “새끼 손가락”이라는 신작 시를 올린다.       산으로 간 애인은     다섯 손가락 중 어느 것이 제일 예쁜가고 묻는다     이 세상의 수많은 것을 움켜쥐였다가     남자의 심장을 꽈악 움켜쥔 그 손에서는     맑은 피방울이 아침 미소로 곱게 피여 오른다     살고 싶은가 순종하라     태여나면서 내 것이였던 것은 결국 아무 것도 없다     태양이 지구를 팽이 돌리듯이     지구가 우리를 끌어당기는 그 힘,     우리가 매일 산으로 가는 원인은     숨가쁜 하루 일상에서 잠간 벗어나고 싶기 때문일뿐이다     수컷들이 암내를 맡고 매일 암컷들의 주변을 맴도는 것은     암컷들에 대한 일종의 존중일뿐이다     암컷들이 매일 수컷들의 눈치를 살피고     수컷들이 암컷들에게 선뜻이 고기 한 점 내여주는 것은     사랑이 아닌 본능일뿐이다     기실 난 내 애인의 다섯 손가락 중에서     가냘픈 새끼 손가락을 제일 좋아할지도 모를 일이다       창렬이는 그렇게 강원도 산골로 감자 캐러 떠났다. 화요일 오후에 올라가서 이튿날 9일 새벽에 잠자는 모습 그대로 시체로 발견됐다.     창렬이는 현재 경기도 파주 의료원에 있다고 리동렬이 전했다. 한국에 있는 큰누나가 경찰서에서 상담 받고 있고, 사인은 심근경색으로 잠정 결정됐다 한다. 경찰서에서는 부검까지 갈 모양이다. 따라서 장례시간은 정해지지 않았다. 설사 정해졌더라도 나는 갈 수가 없다. 멀리서 명복만 빌뿐이다.     창렬은 소신이 있다. 우리 둘은 마주 앉으면 풍란화 같은 지조에 대해 자주 얘기했다. 작가에게서 지조를 빼면 무엇이 남을 것인가.     소신이 있는 만큼 창렬은 외로웠다. 어디 술 마실 친구조차도 변변찮았다. 창렬은 생활에서도 외로웠다. 말로는 널린 게 녀자라고 큰소리쳤지만 정작 마음먹고 만날 녀자는 없었던 모양이다.     창렬은 본처를 기다렸다. 그리고 사랑했다. 어느 날 창렬은 본처에게 남자가 생긴 것 같다며 눈가에 물기를 번들거리는 것이였다. 그 이후로 창렬은 본처에 관한 말은 일절 꺼내지 않았다.     창렬의 사인 심근경색에 대해서는 나름 짚이는 데가 있다. 창렬이는 마흔이 넘으면서부터 양위에 시달렸다. 그 처방으로 비아그라를 복용한 것이다. 한 번은 나한테 비아그라 한 알을 주면서 하얀 병 두개를 주는 것이였다.     “심장에 관여하는 약이다. 비약 먹을 땐 꼭 함께 먹어줘야 돼. 안 그럼 위험해.”     “너 혹시...?”     “응. 별로 좋진 않아. ㅎㅎ.”     그 노란색의 비아그라를 나는 지금까지도 가지고 있다. 그 속에서 창렬이가 방불히 웃고 있는 것 같다.     살려고 애썼던 친구.     시를 목숨처럼 여기고 일가를 이루려고 했던 친구여.     너 알고 있니? 니가 죽자 그룹마다에서 너의 시로 도배되고 있다는 걸. 살아서는 개싸가지였다가 죽으니까 천재로 칭송되는 너라는 걸. 너 알고 있니?     살아서 술 마실 적에도 우린 롱담처럼 그런 말을 주고받았었지. 천재가 되고 싶거든 일찍 죽어라.     하지만 창렬아, 넌 너무 일찍 죽었다. 뭐가 그리 급해서 그리도 서두른 것이냐. 그리도 천재가 되고 싶었던 것이냐. 나는 지금도 네가 죽었다는 게 믿어지지가 않는다.     창렬이가 죽었다고?     죽지 않고 영원히 살 것처럼 하던 창렬이가 죽었다고!     “우리는 ”이라고 웨치던 풍란화 같은 삶을 신봉하던 그 창렬이가 죽었다고?!       1     나는 살아 죽어야 하리     이 나라 이 땅에     개구쟁이처럼 쑥부쟁이처럼     가난에 목 메인 웃음     신들메로 꼬옥 조이고     구름처럼 바람처럼     들로 산으로 그렇게 떠나 가리!     구려하 칠백리 료동벌은     삼학사의 통곡소리련가?     백암성 오홀골성 소쩍새 울음소리는     뼈에서 짜낸 휘파람소리련가?     선친들이 일궈놓은     밭고랑 떠나 나는 구름으로     먼 곳을 떠나간다       2     한치의 제땅도 없는 내 인생에     진달래꽃이 활짝 핀다     아리랑꽃이 활짝 핀다     눈물은 사치한것,     뒤돌아 보면     위나암성 성벽에는     류혈이 랑자하구나! 누가     우리를 쪽박 차고     두만강 건너 압록강 건너     살길 찾아 떠나온     월강 민족이라 하였던가?     어디에 살던 우리네     가락에 덩실덩실     우리네 정서에 훈민정음이     뼈속까지 법글로     새겨진 중국조선족       3     어디에서 어떻게 살던     내 이름 석자에 조상의     얼이 깃들어 있으면 그만     어디에서 무얼하며 살던     만나면 반가워     서로 어깨 부둥켜 안고     김치에 막걸이에     진한 정 짠하게 나누면 그만     생성사멸의 인생     두만강 기슭의 자갈돌이면     어떠하리 압록강 기슭의     이름 모를 물새면 또 어떠하리?     봄이 오면 새 울음소리에     씨앗 뿌리고     가을이면 도리깨 높이     쳐들어 하늘을 타작하던     우리는 중국조선족       4     너무 멀리는 가지마라     갔던 길 되돌아 올수 있게끔     길섶에 봉선화며     진달래꽃 뿌리며 가자     백합이 만개할 무렵     고향이 그리워     친구가 그리워     인정이 그리워     엄마가 그리워     아빠가 그리워     고향으로 되돌아 올적에     갔던 길에 꽃내음     맡으며 길 잃지 않게끔       5     올망졸망 강기슭 따라     오손도손 모여앉았던     하얀 초가집이 쓰러진다     아버님의 연자방아     디딤돌위에 잡초가 무성하다     내 고향은 컴퓨터 마우스로     이제 말끔히 지워야 하나?     품생품사 품두논족     난 이제 내 이름에     금빛 도금해야 떠떳이     살수가 있나?       6     남에 가면 조선족     북에 가면 동포     이률배반의 어설픈 명작ㅡ     동질의 이질감에     상처만 깊게 패인다     백년도 채 못 사는 인생     뭘 바라고 네것 내것     그렇게 알뜰히 따져왔던가?     돌아서면 언제나     슬며시 따라와 내곁에 서는     너는 나의 그림자     나는 너의 구름     한송이ㅡ       7     연변에 살아도 좋다     료녕에 살아도 좋다     흑룡강에 살아도 좋다     이 세상 그 어디에 살아도 좋다     만나면 반갑게 두 손     덥썩 잡고 알싸한 된장국에     술 한잔씩 털어 넣고     아리랑에 쓰리랑     눈물 딲으면 너는 조선족     이 나라 이 땅에     무궁화 꽃이 아닌     개나리 천지꽃이라도 좋다     북경에서 만나도     상해에서 만나도     서울에서 만나도     뉴욕에서 만나도     품생품사 품두논족     우리는 중국 조선족?       그렇다. 창렬이는 살아서 죽었고, 죽어서 살았다.     “중국조선족”, 창렬아. 너야말로 진짜 프로다.     잘 가라, 친구야.     부디? ===============================================/// [편집후기] 「허창렬시문집」을 펴내면서 (ZOGLO) 2020년11월25일  이동렬 재한동포문인협회 대표 고 허창렬(필명 허인) 시인이 심근경색으로 불시에 세상을 하직한 것은 지난 9월 9일 저녁이었다. 1968년생인 그는 만 52세의 아까운 나이에 유명을 달리해서 재한조선족문단에 큰 충격을 주었다. 멘붕이 왔었다! 그래도 가슴 떨림과 함께 고 허창렬 시인의 파란만장한 삶의 기록과도 같은, 그 속에서 응축되고 점화되어 피어난 불꽃같은 생각이며 사상이며 감성들을 그린 시편들을 모으고 선정하여 기어이 '먼 훗날'이란 시문집으로 내놓게 되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그 과정은 너무나 힘들고 버금찼었다. 거의 두 달간, 나는 허창렬 시인의 시적 세계에서 그가 아파하고, 외치고, 갈구해온 시들을 보면서, 시도 때도 없이 하염없는 눈물을 흘려온 것 같다. 사람이 어떻게 그리 외롭게, 하루아침의 이슬마냥 허무하게 갈 수가 있을까? 삶이란, 목숨이란, 바람 앞의 촛불처럼 누군가 훅 불면 쉽게 꺼져 버리고마는 그런 존재일까? 재한동포문인협회 회원들은 물론, 그를 알고 그의 시를 아끼던 모든 독자들도 허 시인의 불행에 대해 가슴 아파했고 애석해 했으며 깊은 조의를 표했다. 또 허 시인이 생전에 내지 못한 '시문집'을 출판해주자는 데 함께 뜻을 모았다. 맨 처음에 고인의 지기인 변창렬 시인이 찾아와서 "가슴이 먹먹하다"면서 "허창렬 시문집을 내는 게 어떻겠느냐?"고 해서 같이 고민을 하다가 나는 "그러는 게 좋겠다"고 바로 결단을 내리고 '추진위원회'를 설립했다. 그의 시문집을 내는 것이 바로 고인에 대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예우라는 생각을 했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시문집을 편집하면서 갑자기 이런 생각을 했다. 허창렬 시인이 생각하고 아파하고 사랑해왔던 것이 바로 우리 회원들이 지금 겪고 있는 디아스포라 삶의 복사본이 아니겠는가! 그의 문학이 바로 우리 동포들의 문학이요, 그가 거둔 성취가 바로 우리 동포문인들의 성취인 것이다! 삶과 죽음의 터널에서 그가 주조해낸 시문학의 주춧돌들을 가져다가 마땅히 우리 동포문학의 성전을 쌓아가는 데 써야 바람직할 것이다. 이에 변창렬 시인이 '허창렬 시인 시문집' 출판 추진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장경률, 김경애 재한동포문인협회 공동회장과 리춘화 수필가가 부위원장을 맡았으며, 총괄은 내가 담당하기로 했다. 변창렬 시인이 100만 원의 후원금을 내고 유족이 50만 원 후원금을 내자 중국과 한국의 지인들이 십시일반으로 후원금들을 내서 바로 출판 자금을 마련할 수가 있었다. 전광옥, 리춘화, 변창렬, 리다연, 리성철, 차영화 등 추진위원들이 위챗이나 조글로 등에서 허창렬 시와 평론을 앞다투어 수집해서 제공해주었다. 그 과정에서 특히 리춘화 선생과 리다연씨의 노고가 컸다. 교정은 김경애 시인과 강성봉 동북아신문 편집인이 책임을 지고 했고, 책 편집 및 출판 등은 '도서출판 바닷바람(발행인 이동렬)'에서 진행을 했다. 마침내 '허창렬시문집'에는 허창렬 시인의 130수의 시와 8편의 평론, 김철호 시인과 장경률 칼럼니스트의 추모글 2편을 선정해서 수록하게 되었다. 많은 분들이 추모글을 보내오셨지만, 작품을 한편이라도 더 싣자는데 의견이 모아져 아쉽게 이렇게 마무리를 했다. 솔직히 지난날, 고 허창렬 시에 대해 나는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었다. 시를 너무 쉽게 쓰지 않느냐는 생각에서다. 성격도 어지간이 과격해서 주위 사람들에게 쉽게 상처를 주었다. 재한동포문인협회에서 부회장을 역임했고, 동포문학 대상도 받은 사람이라서 더욱이 그의 언행을 못마땅하게 생각할 때가 있었다. 그러나 얼마후 나는 곧 그가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고 절대 독한 사람이 아니란 것을 깨닫게 됐다. 협회 행사를 할 때 초청을 하면 꼭꼭 참석을 했다. 자존심이 강한 그는 항상 형님이 불러서 할 수 없이 왔다고 말했다. 사석에서 가끔 술잔을 나눌 때면 "형님, 형님" 하면서 몹시 친근하게 굴었다. 우리 협회가 금방 설립됐을 당시 그는 "형님, 이래가지고 될 것 같아요? 다들 이런 수준을 갖고 무슨 문학을 한다고 그래요?" 하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는 개별적으로 협회 회원들한테 간혹 인정 사정없이 비평을 하면서 "시가 시 같지 않다. 그렇게 쓸 바에는 아예 절필해라"고 화를 내기도 했었다. 물론 몇 년 후 협회가 발전하는 모습을 보자 그도 어느 정도 인정을 했지만… 어떻게 보면 그가 지적한 것이 옳았었다. 그가 추구하고자 하는 문학의 경지에 대해 이해를 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협회의 화목도 중요하지만 문학다운 문학을 해야 진정한 문학 단체로 거듭날 수가 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는 선비였다. 아주 꿋꿋한, 문학에서만은 자신의 소신을 끝까지 지켜온 올곧은 선비였다. 일찍 중국 요녕일보 문학편집 및 기자로 재직했던 그는 오직 문학으로 살고 문학으로 죽은 선비다운 시인이었다. 그의 시를 선정, 편집하면서 느낀 점은 먼저 우리가 너무도 허 시인을 몰랐다는 점이었다. 그의 시를 읽어보면 이미 허창렬다운 시풍이 형성되어 있음을 알 수가 있다. 그의 시문학의 기조는 역시 디아스포라문학에 기반을 둔 것이다. 가족과 친인들이 고향을 떠나 각자 산지사방으로 흩어져 살아가는, 고국이라지만 낯선, 자식 대학공부를 시키기 위해 부득불 돈 많이 받는 건설현장에서 뛰어야 했던, 고속도로 발전하는 자본주의 현대문명과 접목점을 찾을 수 없었던…! 아무튼, 신문사 기자 출신이었던 자존심을 한국 생활에 녹여 내기 정말 힘들었던 것은 분명했다.  그런 자존심은 그대로 그의 시문학에서 표출됐다. 그의 시는 방황하고 아파하고, 그러면서도 진실한 사랑을 갈구하는 내용들로 채워져 있었다. 시 '춤추는 왜긍하倭肯河'는 첫 구절부터 '나는 왜 아버님을 그곳에 묻고 여기 왔을까?'로 시작을 해서 가족의 아픈 역사를 써 내려가다가 이미 고향을 떠난 자신한테 '왜긍하는 내 삶의 하나의 인생 정거장이다'라고 고백한다. 떠나면서 고뇌하며 사는 것이 운명이란 말이다. '밥 한끼' 시 첫머리를 보자. "내 늘그막에/얼마나 큰 금덩이 안고 살려고/이 밥 한 끼/게걸스레 삼키고/목이 콰악 메이는가?"라고 토로했다. 디아스포라 현장에서 먹고 살기 위해,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뛰어온 중국동포들이라면 이 한 마디 시구에 누구나 가슴이 울컥해 날 것이다. 시 '산다는 것1' 마지막 연에서 그는 "산다는 건/눈물이 나는 일/산다는 건/미어지는 앞가슴을/햇볕에 깨끗이 말리워야 하는 일/웃으면 하얗게 소금이 내 돋는 일"이라고 쓰고 있다. 그렇게 밥 한끼를 위해 뛰면서도, 밥 한끼에 "목이 콱악 메이"면서도, 그는 눈물을 "햇빛에 깨끗이 말리워" 웃으면서 "하얗게 소금"을 빚고 있었다. 시 '용쓰는 날'을 보면 그가 심장병과 당뇨병을 앓으면서도 가장의 책임을 다하고 있는 모습을 엿볼 수가 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고향에 두고/떠나 온 사람들은 모두 죄인이다/사랑하는 딸애의 학비를 부치며/먹고 살기 힘들다보다/그래 조금만 힘내자/눈물로 술 한 잔 삼키는 것이/이 세상 아버지들의/가장 쓰라린 마음일 뿐이다"라고 읊고 있다. 시인의 양심고백이다. 이런 시들이 그의 시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한편, 그는 아파했기에 물욕으로 꽉 차서 넘치는 현실을 비판하고 자기만의 아름다운 세계와 사랑을 추구했었다. 그의 시구속에는 유난히 '별'에 대한 애착과 사랑을 많이 표현한 것 같다. 시 '먼 훗날'을 보면 "어느 하늘 어느 별/아래에서/그대가 내 이름을/불러 준다면/내 평생 부르고 싶어도/못 다 불렀던 그대 이름을/목이 메여 불러 주리라"고 쓰고 있다. 이 시구에는 사람간에 삭막해지는 현실의 '非情'을 빗대고 비판하면서 서로가 나누고 싶어하는 정과 사랑에 대한 갈구를 눈물겹게 보여주고 있다. 묻노니 과연, 그게 "어느 하늘/ 어느 별/아래서"만 가능한 일일까? 그의 시구는 소박하고 간결하고 직설적이면서도 은유적인 수법을 많이 쓰고 있는 것 같다. 절대 미사여구가 없다. 강직하고 타협을 모르는 선비의 기질로 점철되어 있다. 어쩌면 그는 김소월이나 윤동주 시인의 시를 많이 보고 답습하면서 그들의 시풍을 배우는 과정에서 자기의 시풍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평론가가 아니다. 또, 여기서 허창렬 시인의 시를 다 평한다는 것도 무리다. 말타고 꽃구경하는 식으로 편집하면서 느꼈던 점들을 간략하게 적을 뿐이다. 앞으로 문학세미나 등을 통해 고 허창렬 시인의 시에 대해 제대로 되는 평가를 내려주는 기회가 주어졌으면 하는 바람을 가질 뿐이다. 마지막으로, 허창렬 시인의 딸 허효정씨와 연락이 되어 그가 보내온 글을 책의 머리글로 대신할 수가 있어 한결 마음의 위안이 된다. 고 허창렬 시인도 하늘나라에서 고마워할 것이다. 이미 대학을 졸업해서 중국 광주 모회사에 출근하고 있는 허효정씨는 글을 통해 아빠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을 너무나 절절하게 보여주었다. 이 세상에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리움은 항상 남아있을 것이다! 허 시인의 시 '먼 훗날'에서 읊었듯이 "그대가 내 이름을/불러 준다면/내 평생 부르고 싶어도/못 다 불렀던 그대 이름을/목이 메어 불러 주리라". 서로가 부르면서 이해하고 생각하고 사랑해준다면 이 세상은 그래도 살맛이 나지 않을까? 허창렬 시인이 꿈꾸며 바란 것도 바로 그런 세상이 아니었을까!? 이 책을, 이 사랑을, 고 허창렬 시인의 영전에 바치며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2020년 11월 20일
7769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동물보호",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1619  추천:0  2020-10-14
  전나무 끌어안은 호랑이의 ‘황홀경’ 2020.10.14.    슬퍼요 좋아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애니멀피플] 2020 올해의 야생동물 사진가 공모전 대상작은 연해주 호랑이…무인카메라로 촬영연해주 표범의 땅 국립공원에 설치한 무인카메라로 촬영한 암컷 아무르호랑이의 냄새 표지 모습. 올해의 야생동물 사진가 공모전 대상으로 뽑혔다. 세르게이 고르쉬코프, 2020 올해의 야생동물 사진가 공모전 제공 비스듬한 겨울 해를 받아 황금빛으로 물든 오랜 전나무숲에서 암컷 호랑이 한 마리가 굵은 전나무를 부둥켜안았다. 코를 나무에 들이대고 눈을 지그시 감은 표정은 황홀경에 빠진 모습이다. 이 모습을 촬영한 러시아의 야생동물 사진가 세르게이 고르쉬코프의 작품 ‘포옹’이 런던 자연사박물관에서 전시되는 2020 올해의 야생동물 사진가 공모전의 대상작으로 뽑혔다. 세계적 권위를 인정받는 이 공모전에는 4만9000여 점의 작품이 출품됐다. 고르쉬코프는 이 극적인 장면을 포착하기 위해 오랜 기다림과 함께 사람의 흔적을 지워야 했다. 그는 지난해 1월 두만강에 인접한 러시아 연해주의 ‘표범의 땅 국립공원’에서 아무르호랑이(시베리아호랑이, 한국호랑이)가 나무를 발톱으로 긁거나 오줌으로 냄새 표시를 한 나무 주변에 무인카메라를 설치했다. 이 사진을 얻은 것은 11개월 뒤였다. 낙엽 쌓인 암벽 위에 선 아무르호랑이를 담은 세르게이 고르쉬코프의 다른 출품작. 세르게이 고르쉬코프, 2020 올해의 야생동물 사진가 공모전 제공 심사위원장인 로스 키드먼 코크스는 “마법의 숲 깊숙이 숨겨진 내밀한 순간을 독창적으로 엿본 작품”이라고 평했다. 그는 “전나무를 끌어안은 거대한 암호랑이는 수피에 남겨진 다른 호랑이의 냄새를 맡고 자신의 메시지를 남기고 있다”고 덧붙였다. 아무르호랑이는 한때 한반도 전역을 물론 카스피해까지 유라시아에 널리 분포했지만 남획과 서식지 파괴로 1930년대 20∼30마리로 멸종 직전에 몰렸지만 보호조처에 힘입어 현재 러시아 연해주를 중심으로 중국 북동부와 북한에 550마리가 살아남아 있다. 심사위원인 팀 리틀우드 박사는 “사진의 독특한 감성적 전달력으로 우리는 자연의 아름다움과 그것을 지켜야 할 책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고 말했다. 올해의 젊은 야생동물 사진가 대상작 ‘기러기를 잡은 여우’. 리이나 헤이키넨, 2020 올해의 야생동물 사진가 공모전 제공 올해의 젊은 야생동물 사진가 대상작은 핀란드의 리이나 헤이키넨의 작품 ‘기러기를 잡은 여우’에게 돌아갔다. 이 작품은 사냥한 흰뺨기러기를 먹던 여우가 사진가를 향해 으르렁거리는 모습을 담았다. 수상작으로 뽑힌 덴마크 사진가 모겐스 트롤레의 ‘포즈’는 명상에 잠긴 듯한 코주부원숭이를 담았다. 모겐스 트롤레, 2020 올해의 야생동물 사진가 공모전 제공 스페인의 호세 루이스 지메네스는 엄마 뿔논병아리 가족을 담아 수상작으로 뽑혔다. 품속에서 아빠가 건네준 물고기를 새끼가 먹으려는 순간이다. 호세 루이스 지메네스, 2020 올해의 야생동물 사진가 공모전 제공 프랑스 사진가 프랑크 디샨돌의 수상작인 ‘두 마리 말벌’. 기생벌의 일종인 나나니(왼쪽)와 다른 말벌에 탁란하는 뻐꾸기말벌을 담았다. 프랑크 디샨돌, 2020 올해의 야생동물 사진가 공모전 제공 영국 사진가 폴 힐튼의 수상작은 중국 광시족자치구 놀이공원에서 찍은 눈먼 반달곰을 이용한 관광을 담았다. 곰에 대한 고문이 분명하다. 폴 힐턴, 2020 올해의 야생동물 사진가 공모전 제공 공모전의 출품작과 수상작은 런던 자연사박물관 누리집에서 볼 수 있다. /조홍섭 기자
7768    토템시/ 범= 남영전, 해설= 현춘산(8) 댓글:  조회:2531  추천:0  2020-10-10
8. 범, 불선과 사악을 증오하는 산신령 2020년 09월 15일 /현춘산
7767    토템시/ 사슴= 남영전, 해설= 현춘산(7) 댓글:  조회:2266  추천:0  2020-10-10
7.사슴, 하늘 땅을 이어놓는 신비한 정령(精灵) 2020년 09월 10일 /현춘산
7766    토템시/ 물= 남영전, 해설= 현춘산(6) 댓글:  조회:2186  추천:0  2020-10-10
6.물, 인류와 만물 창조의 영구한 생령 2020년 08월 24일 /현춘산  
7765    토템시/ 흙= 남영전, 해설= 현춘산(5) 댓글:  조회:2194  추천:0  2020-10-10
5.흙, 인간을 포함한 만물의 어머니 2020년 08월 24일 /현춘산  
7764    [그것이 알고싶다] - "노벨상 상금" 댓글:  조회:3297  추천:0  2020-10-09
지난 10월5일부터 12일까지 노벨위원회가 제120회 노벨상 수상자를 발표한다. 수상자는 노벨의 기일인 매년 12월 10일 스웨덴 스톡홀름 콘서트홀에서 열리는 시상식에서 상을 받는다. 올해는 코로나19로 시상식을 생략해 수상자들이 시상식을 즐길 수 없다. 대신 수상자 나라에서 수여하는 모습을 화상 중계하는 형식으로 진행한다. 오슬로 시청(1000명 수용 가능)에서 따로 진행했던 노벨평화상 시상식만 오슬로 대학 강당(100명)으로 옮겨 진행할 예정이다. 아쉬움을 달랠 점은 작년보다 수상자 상금 혜택은 커졌다는 것. 노벨상 수상자는 어떤 혜택을 받을까. 혜택을 정리해봤다.   지난 10월5일부터 12일까지 스웨덴의 발명가 알프레드 노벨이 만든 노벨상 수상자를 발표하고 있다./노벨상 공식 홈페이지 기금운용 상황에 맞게 상금 유동적, 올해는 증액 노벨상 수상자가 받는 혜택 중 하나는 상금이다. 2020 노벨상 수상자는 작년보다 상금 약 1억3000만원을 더 받을 수 있다. 노벨재단은 지난달 24일(현지시각) 올해 각 부문의 노벨상 상금을 작년 900만스웨덴크로네(약 11억6700만원)에서 1000만크로네(약 12억9700만원)로 인상한다고 발표했다. 증액 이유는 재단 재정 상황이 개선됐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간 상금액은 변화가 많았다. 예를 들어 2000년 한국인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받은 고 김대중 대통령은 상금으로 900만스웨덴크로네를 받아 당시 역대 최고 금액을 받았다. 전년도 790만크로네에서 크게 오른 금액이었다. 이듬해인 2001년 노벨재단은 상금을 추가로 증액해 수상자에게 1000만크로네를 지급해왔다. 그러나 금융위기 여파로 기금운용에 어려움을 겪은 노벨재단은 2012년 63년 만에 상금을 삭감했다. 상금액은 1000만크로네에서 800만크로네가 됐다. 장기적 운용에 위기가 올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5년 뒤인 2017년 재정 확충 상황이 어느 정도 안정돼 900만크로네로 인상, 3년 뒤인 올해 1000만크로네로 추가 인상했다.    상금 받으려면 조건 있어 상금은 노벨재단이 한 해 동안 운영한 기금 이자 수입의 60% 이상을 5개 부문으로 나눠서 준다. 다만 1968년 스웨덴 중앙은행 설립 300주년 기념으로 만든 노벨 경제학상 부문 상금은 노벨재단이 아니라 스웨덴 중앙은행 300주년 기념 기금에서 지급하고 있다. 노벨상은 한 부문당 최대 3명에게까지만 시상한다. 복수의 수상자가 나오면 상금을 나눠 갖는다. 만약 3명이 수상자일 경우 3명의 공적이 같으면 3등분을 한다. 3명 중 2명이 한 팀일 때는 팀을 이루는 이들에게 절반 그리고 나머지 한 명에게 절반을 지급한다.     상금을 받으려면 조건이 있다. 수상자는 6개월 이내 수락 강연을 해야 한다. 노벨상 시상식인 12월10일을 기준으로 6개월인 다음 해 6월 10일까지다. 강연하지 않으면 상금을 받을 수 없다. 일반적인 강연 형태뿐 아니라 동영상, 녹음, 공연 등 다양한 형식으로도 가능하다.     2016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됐지만 시상식에 불참한 미국 싱어송라이터 밥 딜런은 2017년 4월 스톡홀름에서 콘서트를 열어 뒤늦게 메달과 증서를 받을 수 있었다. 근처 호텔에서 따로 받은 것이다. 하지만 당시 강연을 하지 않아 상금은 받지 못했다. 결국 두 달 뒤인 6월 녹음물 형태로 강연을 진행하고 나서야 상금을 받을 수 있었다. 한국에서는 노벨상 상금에 비과세 혜택을 제공함으로써 수상자를 대우한다. 소득세법 18조 2항에 노벨상을 명시해 비과세되는 기타소득으로 노벨상 수상금을 지정했다.   수상과 함께 얻는 각종 영예 수상자는 상금과 더불어 메달과 증서를 받는다. 노벨상 메달은 1980년까지 지름 66mm에 무게 200g에 달하는 23K 금으로 제작됐다. 그러나 이후 18K 금에 24K 도금을 하는 방식으로 바뀌고 무게도 175g으로 가벼워졌다. 메달에 쓰이는 금 비용은 약 1만 달러로 추정된다. 한화로 약 1160만원이다.     올해는 시상식이 취소됐지만 12월10일 노벨상 시상식 후 수상자들은 스웨덴 왕과 왕비와 함께 만찬을 할 수 있는 자리를 갖는다. 다음 날인 11일은 수상자들끼리 한데 모여 연구 성과와 향후 발전 방향을 논의하는 ‘Nobel Minds’ 토론회에 참석하게 된다. 해당 연도 수상자들이 함께 모여 토론할 수 있는 유일한 자리다.     무엇보다도 노벨상을 받으면 세계적 위상이 달라지는 것이 가장 큰 혜택이다. 특히 과학 분야 노벨상을 받는 연구자의 경우 대개 교수인 경우가 많아 전 세계 명문대에서 정교수로 모시려고 하는 러브콜을 많이 받는다. 또한 수상자들 사이에는 “비용 걱정 없이 연구에 매진할 수 있는 것이 가장 좋은 점이다”라는 말도 있다. 노벨상을 받으면 정부와 대학, 기업 등 각종 기관에서 연구비를 지원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글 와이낫 공이 
7763    "진달래문예상" 주인들은 들러리... 댓글:  조회:2894  추천:0  2020-10-09
제9회 “진달래문예상” 시상식, 35편 작품 수상 편집/기자: [ 김영화 ]  [ 길림신문 ]  [ 2020-09-30 ]    29일, 연변주당위 선전부에서 주최하고 연변라지오텔레비죤방송국에서 주관한 제9회 “진달래문예상”시상식이 룡정시해란강극장에서 있었다. 다년간 연변주당위와 연변주정부는 줄곧 문화사업에 높은 중시를 돌리고 문화강주전략 실시를 견지했다. 특히 2017년에 열린 연변주 문화사업회의는 연변의 여러 민족 문예사업일군들로 하여금 문예정품을 창출하여 문예의 고봉에 톺아오르도록 크게 고무격려했다.   이날 시상식에는 지난 4년간 창작된 35편의 문학예술작품이 이름을 올렸다. 문학부문은 소설, 아동문학, 평론집, 번역작품, 시집, 수필집 등으로 나뉘였는데 김혁, 김호웅, 박장길, 김승종, 김인덕 등 15명이 수상했다. 예술부문은 무용, 노래, 민족악기, 화극, 소품, 곡예, 민간예술, 문예평론집, 미술, 서법, 촬영 등으로 나뉘였는데 무극 ‘아리랑꽃’, 노래 ‘엄마의 아리랑’, 화극 ‘제1서기’ 등 16개 작품이 영예란에 이름을 올렸다. 영상류에는 다큐멘터리 ‘연변의 맛’, ‘2016년연변음력설야회’, 라지오극장‘탈옥’, 미니영화 ‘정 깃든 땅’등이 수상했다. 시상식에서는 또 ‘준마상’수상자인 허련순과 번역성과상 수상자 주하를 표창했다.     알아본데 따르면 올해로 제9회를 맞은 진달래문예상은 연변주당위와 주정부가 설립한 연변문학예술계의 최고의 상으로, 1987년에 고고성을 울려서부터 지금까지 33년간 선후하여 365편의 우수 문예작품과 134명의 우수문예창작일군들을 표창했다. 이 우수한 문예작품과 창작일군들은 선후로 국가 ' 5개1공정'상, 전국소수민족문학상 준마상, 길림성 장백산문예상 등 수상의 영예를 누렸으며 진달래문예상은 문학예술인들이 지향하는 영예의 전당으로 자리매김했다. /길림신문 김영화 기자
7762    시=흥취 댓글:  조회:2136  추천:0  2020-10-09
시를 쓰는 10가지 흥취 2020년 10월 09일  /리문호 리문호: 제11회 연변 지용제 정지용 문학상 수상, KBS성립 45주년과 50주년 기념행사에서 망향시 우수상 두 차례 수상. 연변작가협회 회원, 료녕성 작가협회 회원, 심양조선족문학회 부회장 역임. 심양 시조문학회 부회장. 재한동포문인협회 이사. 시집 '달밤의 기타소리' '징검다리' '자야의 골목길' '팔공산 단풍잎(한국 학술정보(주)에서 출판. 시를 쓰는 것은 시인의 정감과 정서의 심리적 현상이다. 물론 시인의 정감과 정서는 시인이 축적한 체험, 지식, 감각에서 오는 것이 당연하다. 시인의 심리학을 연구하려면 지각과 감각, 형상 사유와 이미지, 사유와 언어, 운율과 정서, 정감과 의지, 체험과 기억, 관념과 지향 등을 떠날 수 없다. 시를 쓴다는 것은 이런 종합적 심리활동인 것이라 본다. 이런 이론을 체계적으로 연구하는 것은 이론적으로 깊은 작업으로서 이론에 종사하는 분이나 시인들이 연구해야할 과제이다. 물론 이미 연구하고 있는 분들이 계시리라 생각된다. 나는 나의 시 창작 경험에서 체득한 를 정리함으로서 시인 심리학을 연구하는데 혹시 참고적 재료가 될까하고 제공하는 바이며 시를 쓰는 초학자들에게 조금의 도움이 된다면 좋겠다. 통속적으로 말해서 시를 씀에 흥취가 없다면 시인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시를 쓰는 것은 다른 심리활동과 구별되는 심리 상태로서 사회의 직업이나 명령, 임무의 속박을 벗어난 자유형이나 자발적인 심리현상이다. 또한 시간과 공간에서 자유로워지는 미적 향수의 심리 현상이다. 이런 향수를 간단하게 로 귀결하여 본다. (1) 상상하는 흥취 시인은 상상하는 흥취가 있다. 몸은 비록 좁은 공간이나, 노동현장이나 술좌석이나 회의실에나 혹은 커피점에 있지만 마음은 그 장소를 벗어나 대자연의 절경에나, 누구와의 만남이나, 추억이나, 과거이나, 미래에나 혹은 동화나 신화 속으로 가있다. 정신분석학에서 단순이 말하는 이른바 이 부족한 류의 사람에 속하는 사람들인지도 모른다. 시인은 현실, 역사, 미래, 추억, 혹은 동화, 환상, 공상. 잠재의식, 등 무한한 상상이나 연상 속에서 시상이 발견된다. 시인의 정감활동의 무대는 상상이다. 그 무대(시인의 시적 세계)가 얼마나 큰 가에 따라 상상의 깊이와 폭이 결정된다. 시인은 자기의 시적 세계가 있어야한다 이 시적 세계는 자기만의 독특한 사유방식, 개성, 표현 능력, 풍격, 정서 등으로 구성된다. 상상은 미의 정신활동이다. 누구나 아름다움을 상상하려 하지 추한 것과 악한 것을 상상하려 하지 않는다. 특히 시인은 상상 사유, 즉 형상 사유가 발달되었으며 형상 사유의 기본 요소는 언어와 운율이다. 어떤 시적발견이 나타날 때 그것은 시로 나타난다. 즉 한수의 시가 머릿속에 생긴 것이다. 혼자 고요히 상상하는 것은 아름다움에 잠기는 좋은 일이다. (2) 고독의 향수를 즐기는 흥취 현대인은 고독을 즐길 줄 모르는 것이 탈이다. 고독하면 안절부절 한다. 심지어는 고독을 참지 못해 우울증을 가지게 된다. 많은 예술가와 연예인들은 고독에 취약해 우울증이 쉽게 나타나는데 원인의 하나는 고독과 허무이다. 무대에서 수천 사람들의 박수갈채를 받다가 일단 막이 내리게 되면 고독이 밀려온다. 공허하고 허무해진다. 즉 고독이다. 그들이 고독을 극복하려면 공명심과 허영심을 최소한 억제하는 심리적 자질을 가져야한다. 그러나 시인은 원초로 고독한 사람이며 고독에 습관 된 사람이다. 고독 속에 사유를 하며 고독을 합리하게 즐길 줄 안다. 시인에게 있어서 고독은 상상과 작시의 좋은 환경이다. 혼자 적막하고 외롭다고 생각될 때 책을 본다. 시를 본다. 그리고 조용히 상상의 여행이나 시정의 여행을 한다. 그러면 새로운 시가 생각난다. 이것이 바로 심리를 자아 조절하는 고독을 즐기며 향수하는 흥취이다. 다른 시인은 몰라도 나 만은 고독할 때 시를 쓴다. (3) 자작시를 감상하는 흥취 자기가 쓴 시를, 특히 오래된 시를 가끔 읽어 보게 되는데 향수를 느끼곤 한다. 그 시를 쓸 때의 감정 정서 속에 잠기는 일은 즐겁다. 또한 부족 점을 찾는 일도 즐겁다. 시란 감정저서의 기록이며 자국이다. 또한 인생행로의 자취이다. 자기의 시를 감상하는 것은 감정과 상상의 기억에 대한 새로운 감수이다. 서안의 진시황릉을 밟는 향수, 무한의 황학루에 올라 장강을 굽어보는 향수, 황산에 올라 운해의 해돋이를 감상하는 향수, 백두산에서 천지를 내려다보는 향수, 역사의 유적지에서 수천 년의 역사 속으로 여행하는 향수, 어떤 시정에 잠기는 등등 자기의 시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한 장 한 장의 사진을 보는 것처럼 새로운 감수를 느낀다. 그리고 이를 통해 자기의 시 창작 개성을 다시 발견하고 발양한다. (4) 시를 쓰고 다듬는 흥취 시 초고를 써놓았지만 설익은 때가 많다. 꼭지가 떨어지지 않고 풋내 나는 때가 많다. 그러면 푹 익게 나둬야 한다. 즉 상상의 사유를 익게 하는 것이다. 몇일 후, 혹은 몇 년 후 혹은 몇 십 년 후에 다시 보면 그 시의 수개 가치가 나타난다. 시인의 사유 속에는 무수한 시적 소재들을 축적하고 시로 완성 시켜야한다, 그러야만 다산 시인이 될 수 있다. 그러기에 생활경력이 풍부해야하며 부단히 관찰하고 모색하는 습관으로 시적 소재들을 발견해야한다. 모든 시가 다 발표되는 것은 아니다. 반복의 수개가 있어야한다. 어떤 시는 수개하다 보면 원래의 감정정서와 완전히 달라질 때가 있다. 변화됨이 초고보다 못해 졌다고 생각될 때는 다시 원초로 돌아가 다시 수개하게 된다. 어떤 시는 즉흥으로 써 놓고 만족 되여 급급히 발표하였지만 후회할 때가 많다. 이것은 과정과 시간이 부족한 탓으로 잘 다듬지 않은 결과이다. 한수의 시는 진물이 나도록 잘 익어야 한다. 반복 다듬는 과정을 거쳐 푹 익어 극치의 향기가 날 때의 향수. 이를 다듬는 재미라 하겠다. (5) 시적 발견에 흥분하는 흥취 시인에게 있어서 창의력(創意力)은 중요하다. 창의력은 부지런한 학습과 관찰과 사고에서 이루어진다. 시인에게 있어서 이 창의력을 발상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며 동등한 의미를 갖고 있다고 보아야겠다. 관찰과 사유를 통해 습관 된 사물이나 반복되는 생활 속에서 문뜩 새로운 시적 발견이 나타날 때가 있다. 어떤 일에 몰입하다가 문뜩, 잠을 자다가도 문뜩 영감이 떠오른다. 이럴 때는 적어 놓아야 한다. 게으르면 잊어버리게 된다. 그때의 정서를 놓치고 만다. 시적 발견은 나만의 것 이여야 한다. 다른 시인의 시와 유사하면 시적 발견이라 말할 수 없다. 시적 유사성이나 일반화, 도식화, 보편화는 작시의 실패다. 다른 시인이 발견하지 못한 나만의 발견이 나만의 시를 완성시킨다. 물론 나만의 풍격과 나만의 개성도 뒤따라야 한다. 개성이란 시인의 몸에 배어있는 특성이다. 이런 특성은 장기적인 시 창작 활동을 통해 수립되며 또한 발전하고 개변한다. 시적 발견도 시인의 개성을 떠날 수 없다. 시인에게 있어서 시적발견 보다 흥분되는 일은 없다. 시인은 이런 흥분이 있기에 시를 쓰는 모양이다. (6) 대상을 위해 시를 쓰는 흥취 친구나, 동료나, 가족이나, 연인이나 그 어떤 대상의 마음을 이끌어 잡기 위하여 자기의 감정을 표백하거나 토로할 때 시를 쓰는 흥취가 있다. 특히 애정시가 그런 경우이다. 애정 시는 여러 가지 감정 정서로 나타나는데 실연, 열연, 초연, 미련(迷戀), 추련(追戀) 등이 있다. 심지어 거리나 상가에서 스쳐간 전혀 모르는 대상을 위해 쓰는 시도 있다. 중국 송나라 때의 시인 륙유는 평생 당완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으로 쓴 애상 시로 유명하다. 그의 사랑 시는 애상으로 나타난다. 이를 귀납한다면 현실적으로 실존하는 사랑에 입각한 시와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거나 실현할 수 없는 이상적 사랑에 대해 쓰는 시가 있다. 사랑은 많은 시인들이 시인으로 된 원동력의 하나이다. 만약 한수의 시가 읽는 독자와 공명을 일으킨다면 기쁜 일이다. 기실 시는 혼자서 쓰지만 혼자서 감상하는 것은 시로서의 의미가 없는 것이다. 자기의 감정을 세상에 퍼뜨리는 표현주의 문학이다. 하기에 독자를 사랑하는 것은 시인의 기본이다. 여기서 이란 독자에 대한 시인의 감정의 진실성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시인이 시를 쓰는 동기는 언제까지나 시인 본인의 감정 에너지의 발로이지 독자의 구미에 맞게 쓰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사회구조가 복잡하고 독자층도 복잡한 만큼 어느 독자층의 공명을 일으키는가 하는 문제일 뿐이다. 시를 써놓고 란 말을 들으면 불쾌한 것은 당연하다. 시는 언제나 객관 사물에 대한 주관 심리 활동인 것이다. 추상시라도 기실 객관사물이 우리의 두되에 반영된 결과이다. 이 심리 활동이 잘 되고 못 됨은, 공명을 일으키건 안 일으키건 하는 것은 독자들의 판단에 달렸다. 한수의 시를 잘 썼다고 자기는 흥미진진해 하지만 독자의 냉대를 받을 때가있다. 하기에 우리 시는 어떠한 독자층을 공명할 수 있는가를 막론하고 숨결이 담겨있어야 하며 살아 있는 시를 써야한다. 대상을 위해 쓰는 시는 반드시 순정이여야 한며 진정이여야 한다. 슬프더라도, 기쁘더라도, 간절하더라도, 감정의 진실성이 있어야한다. 위선이나 가식이나 언어 장난의 시는 그 효과에 손색이 간다. 죽은 시는 독자가 없다. 옛날의 좋은 시가 지금도 애독되는 원인은 그들의 시가 수 천 년이 지난 지금에도 죽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수의 시를 대상이 애독하고 사랑할 때 시인에게 즐거움이 있는 것은 당연하며 시 창작 욕구가 생기는 것도 당연하다. (7) 사물을 감수하는 흥취 시인도 모든 보편적 심리활동과 마찬가지로 지각과 감각으로 사물을 관찰하여 감수를 얻는다. 또한 정신세계의 그 어떤 추상적 사고를 통해서도 감수를 얻는다. 그러나 추상적 사고도 객관의 활동에서 축적된 결과이다. 감수는 시적 발상의 기초이다. 인간의 사회활동속의 한 성원으로 감수를 할 줄 모르는 둔감으로는 시인이 될 수 없다. 시인은 모든 사물과 마음을 교감하게 할 수 있는 특수한 사유의 교류방식이 있어야한다. 예를 들어 꽃을 대면하였을 때 향기와 모양만을 감상할 것이 아니라 음운을 감상해야하며 향, 빛, 색, 모양의 움직임 등에서 언어로 대화가 통해야한다 이것이 교감이다. 마음으로 사물과 이야기하는 것을 미적 향수를 얻는 시인에게 있는 특수한 능력이라 말해야할까. 흥미 있는 것은 어느 대학의 저명한 교수 수묵화 화가는 학생들에게 미술을 가르칠 때 학생들더러 시를 많이 읽으라고 강조한다. 즉 시정이 있어야 그림도 잘 그릴 수 있다는 것이다. 한 폭의 수묵화가 시정이 없으면 죽은 그림이기 때문이다. 시의 매력은 사물과의 교감을 언어로 표현한 시정, 혹은 음운이라 말할 수 있다. 한 폭의 그림을 감상하는 것은 시각적 감각을 언어적 감각으로 두뇌에 전환하여 감상하는 것이요 한수의 시를 감상하는 것은 언어적 감각을 시각으로 두뇌에 전환시켜 감상하는 것이다. 즉 언어는 인류 사유의 가장 중요한 공구이다. 시인이 사물과 교감함에서도 언어는 감정교류의 매체이다. 언어가 풍부하면 교감도 풍부해진다. 한수의 시를 구상하거나 감상할 때 기실은 묵독의 과정이다. 즉 시각적으로 글을 보지만 두뇌에 반영되어 혀로 반사시킨다. 낭독은 없지만 언어들이 혀에 와 닫는다. 왜냐하면 목젖과 혀에 언어의 기억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또한 시각, 청각, 미각, 피부 등의 감각 기능을 자극한다. 한수의 시를 감상하는 것은 종합적 감각 기능의 활동 과정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시인에게 있어서 사물을 감수한다는 것은 종합적 감각 기능의 언어적 활동이라고 생각된다. (8) 운율과 감정이 율동하는 흥취 시는 운율의 문학이다. 언어를 조직함에 있어서 감정 정서의 율동과 유기적으로 배합되어야 한다. 쉬운 말로 말해서 언어 조직은 외재율이라 한다면 감정 정서의 흐름은 내재율이다. 언어로 감정정서를 어떻게 표현하는가는 시인의 수련과 리듬의 미적 관념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시인은 감정 정서의 흐름을 시적 언어로 잘 다듬어야 한다. 그러나 시인의 정감이 진실해야한다 시를 쓰면서 이런 것에 유의 한다면 리듬에 감정을 실어 움직이는 미적 감수를 느낄 수 있다. (9) 마음과 언어가 통하는 흥취 시인에게 있어서 언어는 형상 사유의 기본 원소이다. 언어가 결핍하면 감수도 결핍해진다. 유람하면서 어떤 절경을 본 감수를 언어가 부족하면 하고 감탄할 뿐이지 표현해 낼 수가 없다. 다만 시각적 기억으로 밖에 남지 않는다. 그러나 언어가 풍부하면 시로 잘 묘사할 수 있다. 언어로 이미지를 그려 낼 수 있다. 시 창작을 하면서 적당한 언어를 찾지 못해 고민할 때가 많다. 수개란 기실 언어의 수개이며 감정 정서를 언어로 다듬는 수개이다. 알맞은 언어를 찾지 못해 사전을 찾아보아도 생각나지 않다가 문뜩 며칠이 지나 생각 날 때가 있다. 기실 시인에게 있어서 언어가 중요한 것은 언어는 감정정서의 표기이기 때문이다. 언어의 수련은 시인에게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것이며 가장 간고한 것이며 경상적으로 탐구해야하는 것이다. 그것은 시인의 감정정서를 언어 외에 다른 어떤 수단으로는 표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10) 심리적 효과의 흥취 시를 쓰는 것은 미적 향수이다. 직업과는 관련이 없이 각 분야의 직업에서 시인들이 배출된다. 그것은 자기의 정감을 시란 쟝르로 누구나 표현하고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를 쓰는 것은 객관사물이 혼잡하게 반영된 심리를 추리고 정화하는 과정이다. 시를 쓰기를 몰입하면 다른 불미한 인상들이 담박해지거나 사라져 마음이 가벼워진다. 청정해진다. 밝아진다. 아름다움 속에 머물게 한다. 분노할 때 시를 쓰면 마음이 후련해질 것이고 슬플 때 시를 쓰면 마음을 달랠 것이고 우울할 때 시를 쓰면 경물에 마음을 의탁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심리적 효과의 반응이다. 이상 시를 쓰는 열 가지 재미를 나의 경험에 근거하여 생각나는 대로 정리하여 보았다. 물론 아직 이론적으로 승화하지 않은 나 자신의 경험인 것이라 생각된다. 시인이 되여 부자가 되려는 것은 망상이다. 그러나 시인은 가난하더라도 고생하더라도 마음에 넉넉한 여유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다. 자유롭게 살아가는 사람이다. 자유로운 심리활동에는 언제나 경쾌함, 건강함, 명쾌함, 진실함, 순수함, 후련함이 뒤 따르는 것이다. 상상은 힘겨운 생활에서 평온을 찾고 희망을 구상하고 미를 그리며 시정에 머무는 정신생활이기도 하다. 거기에는 아름다운 영상과 시인이 그리는 지향 펼쳐져 있다. 시인이 되는 것은 고군분투하는 일이지만 일반인이 감수할 수 없는 정신적 행복이 있다. 이런 의미에서 저명한 시인이 되는 목적이기 보다는 누구나 다 시를 쓸 수 있는 혹은 시를 감상할 수 있는 시대가 열리면 좋겠다.  -끝-​ /동북아신문 
7761    시적 개성 목소리의 적임자 - 글릭; 노벨문학상 문턱 넘다... 댓글:  조회:2917  추천:0  2020-10-09
노벨문학상 美시인 루이즈 글릭… 개인 존재를 시적 목소리로 승화 2020년10월9일  한림원은 수상자로 루이즈 글릭을 발표하며 “개인의 존재를 보편화시키는 아름답고 분명한 시적 목소리를 내 온 작가”라고 평했다. 사진은 글릭(왼쪽)이 2016년 백악관에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내셔널휴머니티 메달을 받는 장면. AP 뉴시스   시집 ‘야생 붓꽃’ 표지 미국의 녀성 시인 루이즈 글릭(77)이 2020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스웨덴 한림원은 8일 “꾸밈없는 아름다움으로 개인의 존재를 보편화하는, 분명한 시적 목소리를 내온 작가”라고 선정리유를 밝혔다. 력대 노벨문학상 수상자 117명 가운데 녀성작가로는 16번째 수상자이며 시인으로는 2011년 이후 처음이다. 루이즈 글릭은 1943년 미국 뉴욕에서 태어나 롱아일랜드에서 자랐다. 1968년 ‘퍼스트본(Firstborn)’으로 데뷔했으며 이와 동시에 “미국 현대문학에서 가장 뛰어난 시인 중 한명”으로 호평받았다. 한림원은 “보편성을 추구하면서도 대부분의 작품에서 신화와 고전적 모티브로부터 령감을 얻는 시인”이라고 말했다. 시인이자 수필가로서 12권의 시집과 다수의 수필집을 출판했다. 자전적 경험을 바탕으로 강렬한 감정을 드러낸 작품 뿐만 아니라 신화, 력사, 자연을 바탕으로 현대적 삶을 관조하는 작품들을 써왔다. 가장 높이 평가되는 대표작 중 하나는 퓰리처상을 받은 시집 ‘야생 붓꽃’(The Wild Iris·1992년)이다. 수록작 ‘눈풀꽃’에서는 겨울이 지나면 돌아오는 삶의 신비로운 순환을 그려냈다.   시인 류시화는 해외 시인들의 작품을 모은 시집 ‘시로 랍치하다’(2018년)에서 글릭의 시 ‘애도’를 소개하며 시적 기교와 감수성이 풍부하고 고독과 죽음, 인간관계에 대한 통찰이 뛰어난 시인이라고 해설했다. 50대 초, 갑작스러운 발병으로 생사를 오갔던 글릭은 그때의 경험을 담아 이 시를 썼다. 지금 이 순간 살아있는 것만큼 운 좋은 일이 없고, 그 운 좋은 순간들을 제대로 즐기지 못하면 애도를 받아 마땅하다는 뜻을 담고 있다. 주요기사   시집 ‘아베르노’(Averno·2006년)는 죽음의 신 하데스에게 납치돼 페르세포네가 지옥으로 내려간 신화에 대한 통찰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뉴욕타임스는 “시작(詩作)의 힘이 최고조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걸작”이라고 평했다. 최근 내놓은 ‘성실하고 덕망 있는 밤’(Faithful and Virtuous Night·2014년)도 “눈부신 성취”라는 호평을 받았다.   시인의 작품 세계는 또한 ‘선명성’ ‘명쾌함을 위한 노력’으로 특징지어진다. 유년기와 가족생활, 부모, 형제자매와의 친밀한 관계는 작품세계의 중요한 주제로 꼽힌다. 현재 매사추세츠주 케임브리지에서 거주 중이며 예일대 영문학과 초빙교수이자 로젠크란츠 상주작가로 있다. 전미도서상, 전국도서평론가상 등 다수의 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자국의 대표 시인임을 뜻하는 미국 계관시인에 2003∼2004년 선정됐다. 올해 노벨문학상측은 정치적 리념적으로 론난이 없는 비교적 ‘안전한 작가’를 선택할 것으로 점쳐졌다. 2017년 ‘미투’ 론난에 수상자 사전 류출 스캔들이 이어졌고 지난해 수상자 중 페터 한트케가 유고슬라비아내전 당시 인종청소를 자행한 슬로보단 밀로셰비치에게 동조한 사실이 드러나 거센 비난을 받았기 때문. 글릭의 수상은 해외 언론이나 비평가, 베팅 사이트 나이서오즈 등의 유망 수상작가 목록에는 없던 깜짝 수상이다. 국내에는 아직 번역돼 소개된 시집이 없다.   수상자는 1000만 크로나(약 13억 원)의 상금을 받는다. 매년 노벨의 기일인 12월 10일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렸던 시상식은 올해 코로나19 영향으로 열리지 않는다. 그 대신 수상자들이 자국에서 상을 받는 장면이 중계될 예정이다. ○ 루이즈 글릭 년표… ―1943년 미국 뉴욕 출생 ―1963년 미국 컬럼비아대 입학후 1965년 중퇴 ―1968년 첫 시집 ‘Firstborn’ 발표 ―1985년 ‘The Triumph of Achilles’ 미국비평가협회상 수상 ―1990년 ‘Ararat’ 발표. 뉴욕타임스, “최근 25년 미국 시 력사상 가장 혹독하고 슬픈 작품” ―1993년 ‘The Wild Iris’ 퓰리처상 수상 ―2003-2004년 미국 계관시인 ―2004년 9·11테러에 관한 시 ‘October’ 발표 ―2008년 월러스스티븐스상 수상 ―2014년 ‘Faithful and Virtuous Night’ 전미 도서상 수상 ―2015년 내셔널휴머니티상 수상 ―2020년 노벨문학상 수상     미국 시인 루이즈 글릭, 2020년 노벨 문학상 수상 2020.10.08.    좋아요 화나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2020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루이즈 글릭의 2016년 모습. 워싱턴/EPA 연합뉴스 2020년 노벨 문학상은 미국 시인 루이즈 글릭(77)에게 돌아갔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 선정과 시상식을 주관하는 스웨덴 한림원은 8일(현지시각) 의 작가 루이즈 글릭을 2020년 수상자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한림원은 “글릭은 꾸밈없는 아름다움을 갖춘 확고한 시적 목소리로 개인의 실존을 보편적으로 나타냈다”고 수상 이유를 밝혔다. 1943년 미국 뉴욕에서 태어난 글릭은 현재 예일대 영문학과 교수다. 그는 1968년 시집 로 문단에 등단한 뒤 미국 현대문학에서 가장 저명한 시인의 하나로 명성을 얻어왔다. 지금까지 12권의 시집과 시론을 출간했다. 한림원은 “그의 시는 명징함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며 “어린 시절과 가정생활, 부모와 남매들과의 친밀한 관계에 초점을 맞추곤 했다”며 이번 수상으로 이어진 중심 주제를 설명했다. “고통스러운 가족관계를 잔인할 정도로 정면으로 다뤄, 시적인 장식이 없이 솔직하고 비타협적인 묘사가 돋보인다”는 평가다. 아울러 “그는 시 속에서 자신의 꿈과 환상에 스스로 귀를 기울이면서, 누구보다도 자신의 환상과 정면으로 대응해왔다”고 한림원은 논평했다. 글릭은 자전적 배경의 중요성을 부인하지 않으면서도 자기고백적인 시인으로 평가되지 않는다고 한림원은 지적했다. 그가 보편성을 추구한 작품 세계는 신화와 고전작품들의 모티브에서 얻은 영감으로 장식되어 있다. 대표 시집의 하나인 (2006)는 그리스 신화에서 죽음의 신인 하데스에게 붙잡혀 그의 지옥으로 떨어진 페르세포네 신화에 대한 시각적 해석으로 유명하다. 최근 시집인 역시 시각적으로 장대한 업적으로 평가받는다. 1993년 (The Wild Iris)으로 퓰리처상을 받았다. 노벨 문학상은 2018년 수상자를 내지 못하고, 지난해 폴란드 작가 올가 토카르추크(58)를 2018년 수상자로, 오스트리아의 소설가이자 극작가 페터 한트케(78)를 2019년 수상자로 선정한 바 있다. 2018년 5월 한림원의 지원을 받은 사진작가가 여성 18명을 성폭행했다는 폭로가 나온 뒤 종신위원들이 대거 사퇴했고, 한림원이 종신위원과 수상위원회를 새로 꾸리는 데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수상자는 전년까지 900만크로나의 상금을 받았으나, 올해부터는 1000만크로나(약 12억9900만원)를 받는다. 코로나19의 세계적 대유행으로, 평화상을 제외한 노벨상 수상자들은 고국에서 메달과 상장을 받게 되며, 이 모습이 텔레비전으로 중계될 예정이다.  /정의길 선임기자  노벨문학상 수상 글릭, 퓰리처상·전미도서상 휩쓴 미 대표 시인 2020노벨문학상 수상자 루이즈 글릭  신화와 역사·고전 소재로  개인 경험과 상처 보편 문제로 확장 2020노벨 문학상 수상자 르이즈 글릭. 노벨 문학상이 여성과 시인, 미국 작가에게 야박했다는 평을 의식했던 것일까. 올해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미국의 여성 시인 루이즈 글릭은 스웨덴 한림원이 자신들을 향한 여러 따가운 시선을 두루 고려한 선택처럼 보인다. 소설에 비해 상대적으로 대중성이 떨어지기 때문이겠지만, 루이즈 글릭은 적어도 한국 독자들에게는 생소한 이름이다. 그러나 그는 2003~2004년 미국 계관시인을 지냈으며 퓰리처상과 전미도서상 등 유수의 문학상을 수상한 미국 시단의 대표적 인물이다. 그는 (1985)나 (1990) 같은 시집 제목에서 보다시피 그리스 신화와 성서를 비롯한 신화와 역사, 고전 등에서 소재를 취해 개인적 상실과 욕망을 명료하게 표현하는 시를 쓰는 시인이다. 그리고 그의 시에 동원된 개인적 경험과 상처는 인간 보편의 문제로 확장되고는 한다. 글릭은 1943년 미국 뉴욕시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그가 어릴 적부터 그리스 신화와 잔다르크 이야기 같은 고전들을 가르쳤고 그는 어린 나이에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는 고교 시절에 거식증을 앓았으며 그 때문에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정신분석 요법을 통한 치료에 집중했다. 그는 세라로런스대학과 컬럼비아대학의 시 창작반에 등록해 수업을 들었으며, 학교를 떠나서는 비서 업무로 생계를 해결했다. 글릭은 1968년에 첫 시집 를 출간했고 이 책은 몇몇 긍정적인 평을 듣기도 했지만, 글릭 자신은 그 뒤 한동안 집필 불능 상태에 빠졌다가 1971년 버몬트의 고더드대학에서 시를 가르치는 일을 맡으면서 슬럼프에서 벗어났다. 1975년에 두번째 시집 를 펴냈고, 이 작품은 많은 비평가들로부터 “뚜렷한 목소리의 발견”이라는 호평을 받았다. 그는 1992년에 낸 시집 으로 이듬해 퓰리처상을 받았고, 2014년에 낸 시집 으로 전미도서상을 받았다. 2004년에는 2001년 9월11일 세계무역센터 테러를 다룬 장시 을 펴냈다. 이 작품에서 그는 고대 그리스 신화를 동원해 트라우마와 고통의 양상들을 탐구했다. 이해에 그는 예일대 상주 작가로 임명되었다. 2016년 미국 워싱턴 백악관에서 열린 전미 인문학 메달 수여식에 앞서 버락 오바마 당시 미국 대통령이 수상자인 루이즈 글릭을 감싸안고 있다. 워싱턴/AP 연합뉴스 글릭은 언어적 정확성과 엄정한 어조를 지닌 서정시를 쓰는 시인으로 평가된다. 그는 거의 각운을 사용하지 않는 대신 반복과 구 걸치기(enjambment) 등의 기법으로 리듬을 확보한다. 그의 시는 자주 일인칭 화자를 동원하고 시인 자신의 개인사에서 촉발된 내면적인 주제를 다루기 때문에 자전적이며 고백적인 시로 분류되기도 하지만, 그것들은 어디까지나 허구적 장치라는 해석도 만만찮다. 주제 측면에서 글릭의 시는 죽음과 상실, 거절, 관계의 실패 같은 아픔과 치유 및 회복을 향한 시도를 노래한다. 그와 함께 사랑과 관심, 통찰, 그리고 진실을 전달하는 능력을 향한 갈망 역시 표현한다. 그의 시는 또한 자연에 대한 관심을 표나게 드러내는데, 가령 시집 에서는 정원의 꽃들이 지능과 감정을 지닌 주체들로 등장하기도 한다. 양균원 대진대학교 교수는 2009년 가을호에 실은 논문 ‘자아의 부재에서 목소리를 내다―루이스 그릭’에서 “그릭(글릭)의 목소리는 가장 개인적인 고통의 순간을 표현하면서도 그것이 보다 포괄적인 인간의 문제에로 확장하도록 하는 언어에 의해 종래의 서정시에 새 가능성을 제시한다”고 평가했다.  /최재봉 선임기자
7760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식량평화백신",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2831  추천:0  2020-10-09
노벨평화상 세계식량계획… "혼란 극복할 최고의 백신은 식량" 2020.10.09.    좋아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코로나19 백신이 나오기 전 대혼란을 극복할 최고의 백신은 식량이다”  전세계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로 고통받는 가운데 올해 노벨평화상이 유엔 산하 세계식량계획(WFP)에 돌아갔다. 심각한 기아 문제뿐 아니라 코로나19가 불러온 빈부 양극화 심화, 국제 연대의 약화에 경종을 울리는 의미가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노르웨이 노벨위원회는 9일(현지시간) 유엔 세계식량계획(WFP)이 올해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됐다고 발표했다. 사진은 2014년 아프리카 수단의 난민 여성들이 다르푸르 인근의 실향민을 위한 킬마 캠프에서 WFP가 제공하는 구호 식량을 받는 모습. [AFP=연합뉴스] 9일(현지시간) 노르웨이 노벨위원회는 WFP를 2020년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위원회는 “기아 퇴치에 노력하고 , 분쟁 지역에 평화를 가져오기 위한 여건 마련에 기여했으며, 굶주림이 전쟁과 갈등의 무기로 사용되는 것을 방지했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또 WFP가 “코로나19 대유행에 대항하는 노력을 강화하는 인상적인 능력을 보여줬다”고 평가했다.  WFP는 1963년 기아 퇴치와 개발도상국의 발전을 돕기 위해 설립된 유엔 산하 식량 지원 기구다. 이탈리아 로마에 본부를 두고 지구촌에 굶주리는 사람이 전혀 없는 '제로 헝거(Zero Hunger)'를 목표로 활동하고 있다. 한국도 2011년부터 집행이사회 이사국으로 참여하고 있다. 지난해 기준 전세계 83개국 1억 3400만명 이상이 WFP의 원조를 받았다.  노벨위원회의 언급대로 코로나19 이후 식량 부족으로 고통을 겪는 빈곤층의 삶은 더욱 팍팍해졌다. 전세계에 봉쇄령이 내려진 상황에서 가뭄과 홍수 등 이상기후, 전염병과 분쟁까지 덩달아 늘면서다. 특히 예멘과 콩고민주공화국, 나이지리아, 남수단 등에서는 아사 직전까지 내몰린 주민들이 급증했다. 최근 세계은행(WB)는 전세계 인구의 4분의1이 하루 3.2달러 이하로 생활하는 극빈층이란 보고서를 내기도 했다.  WFP도 올해 말까지 2억 6500만 명이 기아에 가까운 상태에 처하게 될 것이라고 보고 있다. 4월에는 유엔 안전보장 이사회(안보리)에서 각국 정부에 대응책을 촉구하기도 했다. 데이비드 비즐리 WFP 사무총장은 “2020년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식량 위기에 있어) 최악의 해가 될 것”이라며 추가 지원과 함께 식량 공급망에 타격을 줄 수 있는 행위를 중단해달라고 요구했다.  WFP도 악전고투를 벌였다. 하늘길이 끊기고 이동이 중지된 상황에서 코로나19 감염 위험을 피해 가며 식량을 전달해야 했기 때문이다. 학교 등 기존의 주요 배급 거점이 문을 닫은 것도 큰 문제였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WFP는 자체 운영하는 인도적 지원 항공 서비스(UNHAS)를 확대해 물자를 날랐다. UNHAS는 공항이 지어지기 어려운 오지나 고립된 지역에도 착륙할 수 있는 경비행기, 헬리콥터, 화물기 등을 운영해 물자를 나르는 방식이다. 손광균 WFP 한국사무소 공보팀장은 "UNHAS를 확대하는 것과 함께 감염 예방을 위해 배급 일정을 세분화하고 중간 거점을 마련해 많은 사람이 모이는 상황을 방지하며 배급을 했다"고 소개했다.  이렇게 해서 올해 WFP의 도움을 받은 식량 취약계층은 전세계에 1억명이 넘는다. 우리 외교부도 UNHAS 사업에 3년간 500만달러(약 57억원) 지원을 약속했다.  아미르 압둘라 세계식량계획(WFP) 사무차장이 9일 노벨평화상 수상 발표 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WFP측은 수상 직후 “매우 자랑스러운 순간”이라고 소감을 밝혔다. 톰슨 피리 대변인은 9일(현지시간)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유행으로 (각국서) 봉쇄조치가 시행되고 교통이 제한된 상황에서 WFP는 주어진 의무 이상을 수행했다”면서 “거의 모든 민항기 운항이 중단되면서 한때는 WFP가 세계에서 가장 큰 ‘항공사’이기도 했다”고 말했다.  올해 노벨평화상 후보는 개인 211명, 단체 107곳 등 318명으로 역대 4번째로 많았다. 이런 가운데 노벨위원회가 WFP를 수상자로 선정한 것은 희미해져 가는 국제연대의 정신의 되살리자는 메시지를 전하려는 뜻도 담긴 것으로 보인다. 위원회는 “지구촌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다자적 국제 협력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때"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WFP란 단체가 갖는 상징성도 크다. 미국에서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들어서며 유엔 등 다자기구에 대한 노골적 반감을 드러내고 있지만 WFP는 국제주의 신조가 넘쳐나던 시절 미국이 사실상 주도해 만든 기구이기도 하다. 최근 외부 지원을 일절 안 받겠다고 선언한 북한조차도 WFP의 지원은 받는 것으로 보인다.  노벨평화상은 알프레드 노벨의 유지에 따라 국가 간 친선, 군대 폐지와 감축, 평화회의 설립과 증진에 기여한 사람에게 수여된다. 현직 국가원수 등 일정 자격을 충족하는 개인과 단체라면 자유롭게 추천할 수 있다. 다만 추천자와 후보 명단은 50년 동안 공개되지 않는다.  역대 주요 수상자로는 미국 인종 차별에 맞선 마틴 루서 킹, 아파르트헤이트 폐지를 이끈 넬슨 만델라 등이 있다. WFP가 올해 평화상을 받게 되면서 평화상을 받은 단체는 모두 25곳으로 늘었다. 국제적십자위원회(ICRC)와 유엔난민기구(UNHCR)가 각각 3차례와 2차례 수상했다.  노벨평화상 수상자는 메달과 증서, 1000만크로나(약 13억원)의 상금을 받는다. 시상식은 12월 노르웨이 오슬로대 강당에서 열릴 예정이다.  /이민정·정은혜 기자 
7759    [그것이 알고싶다] - "삼정검" 댓글:  조회:2850  추천:0  2020-09-24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문재인 대통령은 23일 청와대에서 열린 군 장성 진급 및 보직신고식에서 원인철 합동참모본부의장으로부터 보직신고를 받고 원 합참의장의 삼정검(三精劍)에 수치(綬幟·끈으로 된 깃발)를 수여했다.  문 대통령은 또 남영신 육군참모총장, 이성용 공군참모총장, 김승겸 연합사 부사령관, 김정수 육군 2작전사령관, 안준석 지상작전사령관으로부터도 보직신고를 받고 수치를 매달아줬다. 특히 남영신 총장은 학군(ROTC) 출신이며, 비육사 출신으로는 최초로 육군참모총장에 올랐다.  문재인 대통령이 23일 오전 청와대에서 열린 군 장성 진급 및 보직 신고식에서 남영신 육군참모총장에게 삼정검 수치 수여를 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국방력, 전쟁 안전판 역할 해야” 문 대통령은 진급자들과의 환담에서 “군의 가장 기본적인 사명은 강한 국방을 갖추는 것”이라며 “국방력은 전쟁으로 돌아가지 않도록 하는 안전판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강민석 청와대 대변인이 서면브리핑으로 전했다.  문 대통령은 강한 국방력을 만드는 정부의 전략으로 ▶새로운 기술·장비 도입과 달라지는 전쟁 개념 선도 ▶굳건한 한ㆍ미 동맹 ▶전시작전권 전환을 언급했다고 한다. 문 대통령은 그러면서 “서욱 국방부 장관이나 원인철 합참의장 임명 등 이번 인사가 아주 파격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 이 세 가지 발전전략 아래 능력의 관점에서 인사를 했음을 유념해 달라”고 말했다.  원 합참의장은 “막중한 사명이 있기 때문에 ‘봉산개도 우수가교(逢山開道 遇水架橋·산을 만나면 길을 내고, 물을 만나면 다리를 놓다)’하면서 국군통수권자인 대통령님의 의지와 정부 정책을 강력한 힘으로 뒷받침하겠다”고 각오를 밝혔다고 한다. 남영신 총장은 “특전사 첫 부임 받아 공수훈련 받을 때 첫 강하를 위해 비행기 문에 선 기분”이라고 소회를 밝혔다.  지난 1월 29일 청와대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준장 진급자들에게 수여했던 삼정검이 놓여 있다. [연합뉴스] 호국·통일·번영을 상징하는 삼정검 삼정검은 조선시대 임금이 병마를 지휘하는 장수에게 하사하는 사인검(四寅劍)에서 유래했다. 삼정검이라는 이름에는 ‘육군, 해군, 공군 3군이 일치해 호국, 통일, 번영의 3가지 정신을 달성하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삼정검은 전두환 정권 시절인 1983년 처음 제작됐다. 당시엔 삼정도(三精刀)로 불렸다. 1983년 연재된 중앙일보 ‘청와대 비서실’ 기사에 따르면, 장세동 당시 청와대 경호실장이 도검 장인 전용하씨에게 “칼에 대한 전두환 대통령 각하의 관심과 기대가 각별하십니다”라며 제작을 의뢰했다고 한다.  삼정도가 공식 수여된 것은 1983년 8월이다. 1호는 통수권자인 전두환 전 대통령이 받았다. 2호는 윤성민 당시 국방부 장관이 받았다. 1985년까지 대통령이 재가한 장성 직위자 또는 기관장에게만 수여했다가 1986년부터는 전체 군 장성에게, 그 이듬해부터는 준장 진급자에게만 수여했다.  삼정도가 삼정검으로 바뀐 것은 노무현 정부 때다. 국방부는 2006년 “외날인 기존의 삼정도는 서양식 칼과 흡사해 한국 전통에 맞는 양날의 삼정검으로 바꾸기로 했다”고 밝혔다. 2007년부터 현재 모습과 같은 삼정도가 수여됐다.  지난 6월 2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중장 진급자 16명에 대한 문재인 대통령의 삼정검 수치 수여식. 수치들이 선반에 나란히 놓여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삼정도는 길이 100㎝, 무게 2.5㎏이다. 피나무에 상어가죽을 입힌 칼집에는 대통령 휘장과 무궁화가 조각돼 있다. 칼날엔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때 병사들에게 내세운 임전훈(臨戰訓)으로 알려져 있는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則生 必生則死)’이 새겨있다고 한다.  이전 정부에서는 과거에는 국방부 장관이 준장 진급자에게 삼정검을 주는 게 관행이었으나, 문 대통령은 2018년부터 삼정검 또는 수치를 직접 수여했다. 군 사기를 높이자는 취지에서다. 수치엔 장성의 보직과 이름, 임명 날짜, 수여 당시 대통령 이름이 수놓아져 있다.  /윤성민 기자
7758    [그것이 알고싶다] - 세계 최대의 불교학원 댓글:  조회:1761  추천:0  2020-09-10
세계 최대의 불교학원… 사천 신비로운 ‘써다 불교학원’                  (흑룡강신문=하얼빈) ‘써다(色達) 우밍(五明) 불교학원’이라 불리기도 하는 써다 불교학원은 1980년에 창립되었다. 1993년 프랑스 ‘르몽드(Le Monde)’에 의해 ‘세계 최대의 불교학원’이라 불리게 되었다.   써다 우밍 불교학원은 사천(四川)성 간쯔(甘孜) 장족(藏族)자치주 써다현 경내에서 동남쪽으로 약 20km 떨어진 곳의 해발 4,000m 높이에 위치해 있다. 겹겹의 산들로 둘러싸인 골짜기에 자리잡은 이 사찰은 불교학원의 대경당을 중심으로 사방이 모두 산비탈들로 빼곡히 연결되어 있다.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붉은 오두막집이 끊임없이 펼쳐져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이다. 계곡 밑과 산등성이에 자리잡고 있는 몇몇 사찰과 불당은 그 건축 규모가 그리 크지는 않지만, 장식만큼은 정교하고 휘황찬란하다. 붉은 승포(僧袍)를 몸에 걸친 라마(喇嘛)와 여승이 오가는 모습을 보노라면 생기가 넘치고 상서로운 분위기가 가득함을 느낄 수 있다.   웅대한 산들 사이에 자리잡은 이곳은 가장 순수한 불국(佛國)의 천당이자, 오래된 닝마(寧瑪) 홍교(紅教, 8-9세기에 성행했던 라마교의 한 분파)가 라마불교의 풍부하고 넓은 문화와 세상을 구하는 마음을 전수, 계승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인민망 한국어판                                    
7757    30여년 = 조선족민속유물 만여점 댓글:  조회:3046  추천:0  2020-09-10
김인국, 30년 동안 조선족민속유물 만여점 수집 편집/기자: [ 리철수 ] [ 길림신문 ]  [ 2020-09-10 ]    연변천지조선족민속문화연구원 김인국 원장. 연변천지조선족민속문화연구원 김인국 원장이 과거 우리 조상들이 써오던 민속유물에 남다른 애착을 가지고 수집을 시작한지도 어언 30년이 다가온다. 그동안 그가 각고의 노력을 들이면서 한점, 두점 수집한 민속유물은 저그만치 만여점으로서 조선족민속유물 수집대가라고 해도 전혀 과언이 아니다. “이 만여점의 민속유물을 수집하느라 연변의 8개 현, 시는 물론 선색을 따라 길림성의 기타 조선족집거지와 료녕성, 흑룡강성 내몽고자치구에까지 갔다오기도 했습니다. 물론 전부 개인 돈을 팔면서 수집해 왔지요.” 멀리로는 수백년전에 만들어진 조선시대의 동거울로부터 가까이로는 수십년전에 조선족부녀들이 물동이를 머리에 이기 위하여 옥수수껍질로 만든 똬리... 이런 것들을 마주하고 있노라면 저도 모르게 조상들이 돌아와 우리에게 호랑이가 담배 피울 때의 이야기를 들려주기라고 하는 것 같다고 말하는 김인국 원장, 조선족민속유물 수집에 처음에는 그저 애호와 애착으로 시동을 걸었으나 후에는 우리 세대에서 수집해 놓지 않으면 영영 사라져버려 다시는 보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사명감으로 좀처럼 제동을 멈출 수가 없게 되였다고 한다. “매 한점의 민속유물마다에는 과거 조상들의 이주사와 이 땅을 개척하면서 흘린 피와 땀의 력사가 슴배여 있고 또 한 가족의 생활사가 얽히여 있습니다. 민족의 혼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그런 물건들이라고 할 수 있지요.” 김인국 원장은 전시관에 진렬한 물건들을 가리키면서 이렇게 말한다.     몇세대에 거치는 가족이야기가 담겨져 있을 법한 끝이 다 닳고 모지라진 밥주걱.   조선족의 진귀한 민속유물을 대중들에게 널리 소개하고 우리 민족의 우수한 전통문화를 자라나는 후대들에게 알려 민족전통을 이어가는데 힘을 보태기 위하여 2017년 5월 18일 국가박물관일을 맞으며 김인국 원장은 연길시박물관과 합작하여 박물관 내에 조선족민속전시실을 개설했다. 소학교에 다니는 어린 학생들이 가끔 박물관을 찾아와 민속유물들을 신기해서 만져보면서 민족의 력사와 전통을 알아가는 시간을 가질 때 김인국 원장은 고생한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장백산풍경구에서 민속박물관을 세울 때 조선족민속유물이 한점도 없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한겨울에 폭설을 무릅쓰면서 장백산관리위원회를 직접 찾아가 일푼의 대가도 없이 자신이 어렵게 수집한 물품들을 가져다 전시하라고 했다. 지금 장백산풍경구 민속박물관에 전시된 70여점의 조선족민속유물은 전부 김인국 원장이 제공한 물품들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그는 룡정조선족민속박물관에 약상자가 없다는 것을 알고 기억해 두었다가 수집에 나설 때마다 잊지 않고 알아봤다. 이렇게 수소문한 끝에 드디여 선색을 알게 된 그는 박물관에 소식을 알려 문물수집일군들이 내려가서 수집해 들이도록 했다. 현재 룡정조선족민속박물관에 진렬되여 있는 공예가 정교한 약상자는 바로 김인국 원장이 선색을 제공해 구한 물품이다. “현대공업과 과학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오늘 많은 것이 얼마 못가서 도태되고 있지만 우리 조상들이 써오던 민속물품들은 오래될 수록 그 가치가 더 소중해지지요. 앞으로 연변에서 관광업이 발전할수록 이런 물건들은 더욱 빛을 발산할거라고 생각합니다.” 김인국 원장은 30년 동안 조선족민속유물들을 수집하느라 거기에 판 발품은 말할 것도 없고 북경에 있던 집까지 팔아버릴 정도였지만 종래로 후회한 적이 없다면서 자신의 힘으로 조상들이 써내려오던 진귀한 유물들을 얼마라도 지켜낼 수 있다는 것으로 만족한다고 말했다.                   /길림신문 리철수기자
7756    인민음악가 - 정률성 친필 원고 할빈으로... 댓글:  조회:2976  추천:0  2020-09-10
정률성 친필 기증식 할빈에서 편집/기자: [ 정현관 ] [ 길림신문 ]  [ 2020-09-10 ]  지난 7일, 정률성 친필 원고 《팔로군행진곡》, 《팔로군군가》 악보 기증식이 할빈에서 있었다. 저명한 인민음악가 정률성의 독녀인 정소제녀사가 이날 기증식에 직접 참석해 부친 정률성의 친필 원고  《팔로군행진곡》, 《팔로군군가》 등 8부의 악보와 모친 정설송 녀사의 서예작품 및 유품을 할빈시조선민족예술관 인민음악가 정률성기념관에 기증했다.     할빈시 손철 시장(우) 정소제에 기증 영예서 발급   기증식에서 정소제는 “지난해 년말에 새로 발견 된 아버지의 친필 원고를 어디에 기증해야 할지 생각이 많았다.고민 끝에 할빈 정률성기념관에 기증하기로 마음 먹었다. 기념관이 성립 당시에 기증을 못해 많은 아쉬움이 남았다. 오늘에 와서야 아버지의 친필 원고를 기증 하게 되면서 나의 오래 소원을 이루게 되였다.”고 기증 원인을 밝혔다. 이어 정소제는 정률성기념관에 대한 할빈시의 다년간의 관심과 보호에 감사를 전했고 정률성기념관이 앞으로 국방교육의 기지 및 국제문화교류의 플랫폼으로 발전하기를 희망하면서 기념관의 향후 발전에 자기의 노력을 아끼지 않겠다고 밝혔다.     정소제(우) 할빈시조선민족예술관에‘팔로군행진곡’,‘팔로군군가’ 친필원고 기증   ‘팔로군행진곡’, ‘팔로군군가’ 친필원고 료해에 따르면 지난 2009년 7월, 정률성기념관이 할빈시경비구에 개관 할 당시 정소제는 이미 소장해두었던 부친 정률성의 유품 400여점을 기념관에 기부하면서 기념관의 설립에 적극적인 공헌을 했다. 올해 년초에 인민음악가정률성기념관이 할빈시경비구에서 할빈시조선민족예술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정률성은 1914년 7월7일, 한국 전라남도 광주에서 태여났고 어릴적부터 음악에 남다른 끼를 보였다. 1933년, 중국 남경에서 조선민족혁명당에 가입하면서 항일 활동을 시작했다. 성악 공부를 시작하면서 정률성은 음악이 혁명역할에 주는 영향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게 됐다.     기증식 관련 참석자 단체 사진   정률성은 40여년의 음악생애에서 각종 음악작품 400여수 창작했다. 그중 ‘연안송’과 같은 작품들은 애국청년들의 항일 열정을 불러일으켰고 또 중국혁명에 마멸할 수 없는 기여를 하였다. 특히 항일전쟁 승리 이후 정률성이 창작한 ‘팔로군행진곡’은 ‘중국인민해방군행진곡’으로 명명됐고 이어 1988년 당중앙의 피준에 의해 ‘중국인민해방군군가’로 지정되면서 인민군대의 필승불패의 영원한 상징으로 지금도 억만인민의 심금을 울려주고 있다.     정률성 독녀 정소제   이외 정률성은 해군, 륙군, 공군  삼군 모두를 위해 창작한 바가 있다. 뿐만 아니라 그가 창작한 군악은 항일전쟁, 해방전쟁, 항미원조, 사회주의 건설 등 여러 시대를 넘나들면서 빛나는 한페지를 남겼으며 중국에서 유일하게 여러 시대를 모두 거친 혁명 음악가로 기록되였다. 중국 최고의 3대 음악가로 섭이, 선성해와 나란히《새중국 창건 특수기여 영웅모범인물》에 오른 정률성은 중국현대음악사상 무산계급혁명음악사업의 개척자의 한사람으로,영원한 《인민음악가》로 추앙받고 있다. /길림신문 정현관기자 ====================///   정률성 딸, 아버지 친필원고 정률성기념관에 기증   2020-09-10                  정률성 독녀 정소제, 아버지 친필원고 기증... 할빈시 손철 시장 친히 접견   중국 최고 3대 음악가로 섭이, 선성해와 이름을 나란히 하는 중국 무산계급혁명음악사업의 개척자, 걸출한 음악가 정률성의 친필원고가 할빈시조선족예술관에 입주한 인민음악가 정률성기념관에 기증돼 요즘 태풍으로 인해 침침했던 할빈 날씨에 한가닥 해빛을 비쳐주었다.   지난 7일, 정률성 독녀, 저명한 인민음악가 정소제가 정률성 친필원고 '팔로군행진곡', ‘팔로군군가’등 8부 곡보와 정률성 부인 정설송(丁雪松)의 유품 및 서예작품을 기증하는 기증식이 할빈시인민정부에서 진행됐다.   손철 시장(우)이 정소제녀사에게 기증 영예서를 발급하고 있다.   손철 시장이 정소제녀사와 환담을 나누고 있다.   기증식에 참가한 관계자들이 기념사진을 남겼다.   이날 기증식에 할빈시 시위 부서기, 시장 손철(孙喆)을 비롯한 시위시정부 령도와 할빈시조선민족예술관, 시문화광전관광국, 연예그룹 등 부서 령도 및 관계자들이 참석했다.   기증식에 앞서 손철 시장이 정소제를 친히 접견하고 할빈에 대한 사랑 및 신임, 그리고 정률성기념관이 성립할때 기여한 적극적인 노력과 공헌에 대해 깊은 감사를 드리고나서 할빈시는 계속해서 정률성기념관을 잘 건설하고 국내외 영향력을 넓히는 동시에 할빈시의 특색명함으로 부상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소제도 정률성기념관에 대한 할빈시정부의 관심과 지지에 깊은 감사를 드리고 앞으로도 정률성기념관의 향후 발전을 위해 노력을 다할것이며 정률성기념관이 국방교육의 기지, 국제문화교류의 교두보 역할을 다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팔로군행진곡’, ‘팔로군군가’ 친필원고.   한편 중국인민해방군군가로 시작된 기증식에서 정소제는 할빈시조선민족예술관 박춘희 관장에게 손수 정률성‘팔로군행진곡’과 ‘팔로군군가’친필원고를 넘겼고 손철 시장이 정소제에게 기증 영예서를 발급했다.   기증식에서 정소제는 “정률성기념관이 성립될때 아버지의 친필원고를 찾지 못해 오늘에 와서야 기증할 수 있어 오래된 소원을 이루게 되였다”면서 “얼마전 아버지가 창작한 ‘팔로군행진곡’ 등 곡보 친필원고를 발견하고 격동된 나머지 국가박물관 혹은 국가도서관 아니면 중국인민항일전쟁기념관 그 어디에 기증하면 의미가 더 깊을지 많은 고민도 했지만 결국은 할빈에 있는 정률성기념관에 기증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할빈에 정률성기념관을 세울때 할빈시 관련령도들이 팔보산혁명묘지에 가서 아버지를 추모했고 어머니께서도 기념관을 할빈에 세울것을 동의하셨기에 아버지의 유품은 응당 할빈에 있는 정률성기념관에 기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이번 기증 원인을 밝혔다.   정률성기념관이 지난 2009년 7월 할빈시경비구에 최초로 개관했을때 정소제가 다년간 소장해두었던 아버지의 유품 400여점을 기부해 기념관의 설립에 적극적인 공헌을 했다. 이는 할빈시의 특색문화관광자원으로 활용되 보귀한 정신문화재부로 남았다. 올해 년초 인민음악가정률성기념관이 할빈시경비구로부터 할빈시조선민족예술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정소제(우)가 할빈시조선민족예술관 박춘희 관장에게 ‘팔로군행진곡’, ‘팔로군군가’ 친필원고를 기증하는 장면.   할빈시조선민족예술관 박춘희 관장은 “정률성의 ‘팔로군행진곡’, ‘팔로군군가’ 등 친필원고는 관내 수많은 소장품 가운데서 가장 진귀한 소장품으로 전시될 것이며 우리는 유족의 뜻을 받들어 정률성 유품을 잘 보관할 의무가 있다”고 말했다.   1914년 7월7일, 한국전라남도에서 태여난 정률성은 어릴적부터 음악에 남다른 장끼를 보였고 1933년에 셋째형을 따라 중국남경에서 조선민족혁명당에 가입했으며 항일활동을 하는 동시에 성악을 배우기 시작했고 음악이 가지는 혁명역할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게 됐다.   그는 일생에 400여수 각종 음악작품을 창작했는데 ‘연안송’ 등 우수작품들은 애국청년들의 항일 열정을 불러일으켜 중국형명력사에서 중요한 작용을 하였다. 특히 그가 창작한 오늘도 억만 인민의 심금을 울려주는 ‘팔로군진행곡’은 1988년 등소평에 의해 ‘중국인민해방군진행곡’으로 채택되여 인민군대의 필승불패의 영원한 상징으로 부상됐다.   정률성은 중국 해, 륙, 공 삼군의 모든 병종을 위해 악곡을 창작했고 항일전쟁시기, 해방전쟁시기, 항미원조시기, 사회주의 건설시기 등 여러시기에 모두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훌륭한 작품을 남겨 중국 력사에 빛나는 한페지를 기록했다.   2009년 정률성은 ‘새중국창건특수기여영웅모범인물’에 올라 영원한 ‘인민음악가’로 추앙받고 있다.   /흑룡강신문 리흔 기자  
7755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기후문제",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3295  추천:0  2020-09-10
기후변화로 자연재해 점점 더 심각  2020.09.10.  슬퍼요  화나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동영상 뉴스 [앵커]  코로나19 대유행 속에 자연재해까지 겹치면서 올해 전 세계가 유난히 힘든 한 해를 보내고 있는데요.  기후학자들은 기후변화로 인해 앞으로의 상황이 더 심각해질 것이라며 올해가 그리워질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박혜준 PD입니다. [리포터] 햇빛 한줌 들어오지 않는 오렌지 빛 하늘이 재난 영화를 방불케 합니다. 대형 산불로 연기가 시내 깊숙이 들어오면서 하늘을 뒤덮은 겁니다. "지금이 몇시인지 궁금해서 밖에 나와 봤는데 최후의 날 같습니다. 뭔가 끔찍하게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세상의 종말처럼 느껴집니다. 꽤 무섭습니다. 우리가 가난했을 때 한 일이 나를 울게 합니다.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미국 캘리포니아주를 덮친 가뭄과 대형 화재, 54℃가 넘는 데스밸리의 이상 고온, 한국과 일본을 잇따라 강타한 태풍.  코로나19 대유행 속에 전 세계가 연이은 재난을 맞이하고 있는 가운데 기후학자들은 앞으로 이를 뛰어넘는 자연재해가 발생할 거라고 경고합니다. "우리는 10년, 20년, 아마도 50년 후에 '2020년은 말도 안 되는 해였어. 하지만 그때가 그립다'고 말하게 될 겁니다." 기후학자들은 "화석연료의 연소가 기후변화나 재해를 악화시킨다는 건 자명한 사실"이라며 이런 자연재해는 10~20년 전부터 예견된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기후변화 변수로 인해 세계 경제라는 발등 위에도 불똥이 떨어졌습니다. 미국 상품선물거래위원회는 기후변화의 물리적 여파가 이미 미국에 영향을 주고 있고 '배출가스 제로' 사회로의 체질 개선도 경제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며 금융당국의 대응을 촉구했습니다. 연합뉴스TV 박혜준입니다.
7754    백년 박바가지와 백년고목 댓글:  조회:3061  추천:0  2020-09-08
백년 박바가지 백년고목의 품에 안기다 (ZOGLO) 2020년8월9일  반남박씨일가와 함께 두만강을 건어온 바가지가 민족력사의 견증물로 백년고목의 품속에 안겼다. 안개비가 자욱이 내리던 그 날 7월 28일, 중국조선족생태문화원(룡가미원) 민속박물관에서 열리는 ‘반남박씨 바가지 전시회’에 참가하고저 수심 깊은 호수 우에 보기 좋게 걸린 나무다리에 올라섰다. 다리 량 켠으로 련꽃이 화사하게 피여있고 그 꽃을 받들어 푸르른 련잎들에는 수정 같은 은방울들이 내려앉아 진주처럼 빛나고 있었다. 룡가미원에 핀 련꽃 다리끝자락에서 외로 꺾어서니 솔이 푸른 사이에 운치 있는 한옥 한채가 마주하고 있었다. ‘반남박씨 바가지 전시회’라는 프랑카드가 한옥 바람벽에 걸려있고 그것을 배경으로 온갖 색상의 한복을 떨쳐 입은 참가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었다. 새하얀 머리발에 연한 한복을 받쳐입은 녀사가 바로 100년을 넘어 가족의 대물림으로 전해지던 바가지를 이 민속박물관에 기증한 덕림장학회 회장 박민자 녀사이고 함께 한 이들은 우리 민족 후대양성에 뜻을 같이 해오는 덕림장학회 멤버들이였다.   이민사 100년 시리즈 반남박씨 바가지 전시회를 찾은 덕림장학회 회원들 민속박물관에 들어서니 바로 정면 한 가운데 100년 박바가지를 한 백년 엉킨 나무옹지로 받쳐 올리고 오랜 세월의 년륜으로 굵어지고 다져진 고목 속에 넣어 자연과 생명, 문화와 력사가 어우러지게 한 생태문화예술작품이 우뚝 솟아있었다. 이 바가지는 박민자녀사의 증조할머니 김근애가 1917년 아들 딸을 거느리고 살길을 찾아 중국의 북간도로 이주할 때 시댁 외삼촌이 박을 켜서 바가지를 만들어서는 쏘련 연해주일대로 들어가는 시형네와 각기 한짝씩 나눠주며 나중에 이 바가지를 징표로 한 가족임을 확인하라고 주신 것이였다. 반남박씨 일가와 함께 두만강을 건너온 이 바가지는 한세기가 지나는 동안 갈라진 친지들과 만나지 못한 채 조손 3대를 이어 보관되여 오면서 한 가족 나아가 우리 민족의 이주와 정착의 견증물로 되였다 . 이 바가지 표면에는 ‘년년등풍 일일생재’(年年登丰 日日生财) 라는 한문번체자가 씌여있고 바가지 안쪽에는 ‘황금존비’(黄金存备)라는 한문번체자가 씌여있다. 100년이라는 파란 많은 세월 속에 바가지 안쪽 글자는 좀이 먹어 희미해졌을 뿐 형체는 그대로 남아있다. 한가족 확인 징표로 100년을 넘게 간직했던 바가지는 혈육 확인 의식을 올리지 못했지만 한 일가의 이주와 정착을 동반한 견증물로 되였다. 박민자녀사는 2017년 4월 "증조할머니께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담고 친지에 대한 애정을 담았던 바가지, 어머니께서 시할머니의 유지를 지키기 위해 앉으나 서나 바가지의 안위를 걱정하시며 가족의 애환을 고스란히 담았던 바가지, 이 바가지를 민족의 사명감을 담아 연변룡가미원 민속박물관(필충극 원장)에 정중히 기증한다."고 밝혔다. 그 뒤로 필충극 원장은 사가(史家)의 사명감에 따른 예술가의 안목으로 "이 100년 력사를 그 누구도 견주어 볼 수 없는 독특한 방법으로 전시하려고 언녕부터 준비를 하여” 그에 어울리는 100년 고목으로 틀을 세워 민속박물관에 전시하였던 것이다. 필충극 원장은 “우리 조선족은 ‘쪽박 차고 두만강을 건너 온 민족'이라고들 하는데 이 바가지는 동냥 쪽바가지이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도 씨앗을 담아온 바가지이며 복을 담아주는 바가지로 이민사의 주선률을 이룬다."고 하였다. 지극정성 일솜씨만 통하는 필충극 원장. 필충극 원장은 중국조선족생태문화원을 건설하면서 화강암으로 된 돌바가지를 조각하여‘살아 천년 죽어 천년’이라는 적목(红豆杉)기둥을 세워 지키고 있으며 그것으로 우리 민족의 천만년 행복과 영생발전을 상징하였다. 여기에 100년 실물 박바가지까지 기증받아 전시하게 되였으니 이 바가지 하나만으로도 민족사의 유구한 징표로 의미가 크다고 하였다. 필충극 원장은 이 민속박물관을 서민박물관으로 꾸며오고 있다. 그는 중국조선족의 이주와 함께 이루어진 중국 동북에서의 벼농사개척사를 높이 구가하여 벼농사에 관련한 로동도구와 생활용품들을 구전하게 전시하면서 중국조선족의 이주와 정착, 개척, 발전, 번영의 력사를 고스란히 읽게 하고 있다. 그 속에 ‘반남박씨 바가지'가 한자리를 차지하면서 그 의미를 더욱 확실하게 견증하고 있는 것이다. 백년 바기지를 옹위하고 조상들의 넋과 지혜를 우러르는 전시회 참가자들. ‘반남박씨 바가지’전시회가 진행되는 속에 민속박물관을 둘러 조상들의 혼이 서려있고 체취와 정감이 슴배여있는 손때 묻은 기물과 도구들을 마주하면서 매 하나의 민속품은 매 하나의 력사이고 문화이며 민속박물관은 그야말로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무궁한 가치를 품어안은 보물고임을 절감하게 되였다. /길림신문 김청수 기자 
7753    조선족문단 우화시 개척자 - 허두남 댓글:  조회:2322  추천:0  2020-09-08
                                  글/최룡관(원 연변작가협회 부주석, 시인)                                   세계적으로도 일생동안 심혈을 몰부어 우화와 우화시를 연구하는 작가는 아마 많지 않을것이다. 그런데 우리 연변에 그런 사람이 있다. 그가 바로 일찍 이십대에 자신의 첫 우화시집이자 중국조선족문단의 첫 우화책을 펴내서부터 40년동안 우화와 우화시 창작에 몸을 담그어온 허두남이다.     1979년  첫 우화시집 “개미와 코끼리”로 우화책이 없던 우리 문단의 공백을 메꾼 허두남은 지금까지 8권의 우화책을 출판했는데 산문으로 쓴것이 2권, 시로 쓴것이 6권이다. 허두남은 산문으로 된 우화보다 우화시 창작에 더 많은 심혈을 쏟아붓고 있다. 이 글에서 필자는 허두남이 창작한 6권의 우화시집을 개략적으로 살펴보고저 한다. 일찍 맏형님의 영양을 받아 소학교시절부터 우화시를 습작해오던 허두남은 1979년 처녀작 우화시집《개미와 코끼리》를 세상에 내놓았다. 우화시 25수가 수록되여있는 이 책은 정영석의 중편소설 “제2호순라선에서”와 더불어 문화대혁명후 제일 먼저 출판된 개인아동문학서적이다. 책장을 열면 집채만한 코끼리로부터 입쌀알만한 개미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동물들이 살아움직이는데 대뜸 아이들의 눈길을 자석처럼 끌어당긴다. 작품집중의 “잣새의 계획”은 국경30돐창작상을 받아안는 영예를 지녔고  소학교교과서에도 번듯이 올랐다. 작품집에 호구를 올린 우화시들은 거개 이야기가 흥미롭고 주제가 뚜렷하다. “잣새의 계획”은 조건타령을 하며 일을 미루다간 랑패볼수 있다는 도리 ,”사슴의 후회”는 작은 흠집도 제때에 고치지 않으면 큰 흠집이 될수 있다는 도리, “고양이건축기사”는 일을 첫시작부터 착실히 하지 않다간 망쳐버릴수 있다는 도리, “알깔줄 모르는 소쩍새”는 부질없는 자존심을 부려서는 배울것도 못배우게 된다는 도리를 재미있는 이야기속에 재치있게 집어넣었다. 그밖에 우화시 “뽐내던 원숭이”, “퇴박맞은 담비”, “여우의 선물” 같은 작품들은  풍자성과 유머감이 아주 짙다. 책에는 많은 장점이 있는 반면 부족점도 적지 않다. 첫째: 산문화경향이 심한것이다. 우화시에선 산문화를 허용한다고는 하나 허용한다는 것은 좋다는 말과는 다르다. 이야기를 담자면 산문화를 피면하기 어려운 점도 있겠지만 너무나 산문화되는 것은 피해야 한다. 이 작품집의 많은 우화시들은 시행을 붙여놓으면 산문이 된다. 둘째: 편폭이 너무 길다. 우화시라면 무조건 꼭 짧아야 한다는 도리는 없지만 어느 작품이나 다 기니 문제인것이다. 우화시 “민들레씨의 이사”는 주견 없는 민들레씨가 좋은 고장으로 이사가려다가 가지 못하는 이야기를 생동하게 그려낸 작품인데 내용은 매우 좋으나  산문화되고 편폭이 너무 길다. 무려 58행이나 된다. 주인공 민들레씨가 네 인물-동풍, 서풍, 남 풍,북풍과 대화를 주고받은것을  직접담화법의 수법으로 옮겼으니 그렇게 길어질수 밖에 없는것이다. 전반 시도 길고 시행도 늘차니 좀 숨이 찬감이 난다. 허두남의 우화시집《승냥이와 범》은 첫 작품집이 출판되여서부터 5년뒤인 1984 년에 료녕인민출판사에서 출판되였다. 이 책엔 31수의 신작이 수록되여있는데 책을 읽어보면 작자가 첫 작품집에서 나 타난 약점을 미봉하려고 모대긴 흔적을 “함축”이라는 두 글자로 함축할수 있다. 이 책에도 좋은 우화시들이 적잖게 있다. 첫 작품집에서 나타났던 시가 너무 긴  페단을 극복하고 완정한 이야기를 담으면서도 간결하게 쓴 우화시들이 여러편이다. “범나비”, “도마뱀의 재간”, “대충의 대화””후회만 하는 염소” 등은 아주 풍자적이고 재미 있다. 우화시 “범나비”를 살펴보기로 하자.   풀이슬에 날개 젖은 친 범나비/큰길에 앉아 볕쪼임하는데/ 꼬꼬수탉 한마리/모 이 찾아 기웃기웃 다가왔다// “거기 오는 수탉놈아/ 냉큼 제자리에 서지 못할가?/ 내가 누구라고 / 감히 내앞으로 지나가려하는거냐?/ 그 말 들었는지 말았는지/ 그냥 다가오는 꼬꼬수탉// 범나비는 가장 위엄있게/ 목청을 가다듬어 꾸짖었다./ “이 버릇 없는 수탉놈아/ 내가 누군지 알기나 하느냐?/ 내 이름을 들으면 넌 기절할게다./ 이 어른이 바로 범나비란말이다.// 여진히 못들은듯/ 기웃기웃 다가오는 꼬꼬수탉// 범 나비는 날개를 퍼덕이며/ 고래고래 욕설 퍼부었다./ “이 되지 못한 수탉놈아/ 하루강 아지 범 부서운줄 모른다더니/  내 이름 듣고도 그냥 다가와?/ 범나비란 나는 범이란 말이다./ 네놈이 뛰는 범 무서운줄 알면서/ 나는 범 무서운줄 모르다니…”// 그제야 범나비를 발견한 꼬꼬수탉/ 씽 달려가 뚝 찍어먹었다. 이 우화시를 보면 웃음을 금할수 없다. 범나비야말로 풍자의 대상이고 우습광스 러운 우화적 인물이다. 이름보다 실속이 중요하고 형식보다 내용이 중요하다는것을 반면적으로 일러주고있다. 그런데 작품은 내용은 재미 있지만 표현수법은 별루인감이 든다. 전반 시는 29 행으로 첫번째 우화집에 실렸던 대다수의 우화시들보다 절반가량의 편폭이다. 그런데 도 여전히 함축미가 결여한 느낌이 드는것은 무엇때문인가? 그 원인은  작품구상이 산문적으로 되였기 때문이다. 이 우화시는 비록 편폭은 많이 줄어들었으나 첫번째 책 에 수록된 우화시들과 똑 같은 수법으로 창작되였다. 사건발전의 과정을 따라가면서 서술했는바 붙여놓으면 산문이 된다. 이 작품집에 실린 많은 우화시들이 이런 공통적인 단점을 갖고있다. 편폭은 줄이 려고 애썼으나 다양한 수법을 동원하여 재치 있게 예술적으로 표현하지 못했기에 단 조롭고 딱딱하며 매력이 모자란다. 우화시를 보다 짧고 감칠맛 있게 쓰려면 고운 시어를 고르고 조화롭게 다듬는것 도 중요하지만  구상할때 “시적”으로 구상하는것이 자못 중요하다. 줄글의 구성과 시 의 구성은 서로 다른 특점을 갖고있는것이다.  우화제재를 찾기가 그처럼 어려운데 마음 드는 제재를 손에 넣었다면 매 한편의 작품마다 제재를 찾는것만큼 그 형식에도 고심해야 할것이다. 1995년에 출판된 세번째우화시집 《춰주는 바람에》(우화시 64수)에서는 작자가 시도한 개혁이 보다 폭이 크다 앞의 두책에서는 이야기과정을 전개했지면 세번째책에서는 과정을 전개하지 않고있다. 따라서  산문적이던 구성도 시적으로 해결되였다    우화시 “떨어져버린 록용”을 살펴보기로 하자. 따스한 새 봄/ 꽃사슴 머리에 돋아났어요/ 솜털 보시시한 “록용나무”가// 귀한 보약이라/ 만나는 짐승마다/ 간청 했어요, 록용 팔라고// (어쩔가, 팔가?/ 안야/ 두고 두고 자랑거리 삼을테야!)// 꽃사슴 고개 건뜩/ 어깨를 으쓱/ ㅡ나의 보밴 한평생 안 판다 안 팔아// 가을 되니 보배 록용/ 뼈처럼 땅땅/ 이듬해 봄 되자 떨어져버렸어요   이왕에 쓴 우화시같으면 또 독자가 다 내다본 과정을 지루하게 서술했을것이다. 례컨대 곰할아버지가 록용을 팔라고 청들었지만 도리머리를 저으며 안 팔았다, 노루아저씨가 사정했지만 또 밀막아버렸다, 토끼아우가 간청했지만 그것도 외면해버렸다….그렇게 전개했더라면 그 편폭이 “민들레씨의 이사”와 거의 비슷하게 되였을것이다. 하지만 작자는 이 작품에서 과정을 일일이 기록하지 않고 내용을 집중,개괄하여 표현했기에 편폭이 절반나마 줄어들었다. 이 작품집에 수록된 대다수의 우화시가 이 우화시처럼 이야기를 씀에 있어서  사건을 따라가며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한 시점에 서서 그려냈다.  역시 우화시 64수가 수록된 네번째 우화시집《세수해선 뭘해, 또 때가 낄텐데》 (동북3성교육출판사,2002년년)는 많은 새로운 특점이 있다. 첫째: 동식물을 쓰던데로부터 아이들을 쓰는것으로 개혁을 가져왔다.   64수가운데56편이 아이들을 쓰고있다. 이른바 “랑만주의우화시”로부터  “사실주의우 화시”로 바뀐것이다. 둘째: 시어가 한층 세련된 것이다  우화시 곤충채집은 다음과 같이 쓰고있다.   돌쇠하고 누나하고/ 곤충채집 간다야// 누나는야 맨손이지만/ 돌쇠에겐 포충망// 나풀나풀 꽃나비/ 또로록또로록 베짱이// 나무잎우에 앉아/ 그네뛰는 매미// 쑥초리끝에서 파르르/ 발레추는 잠자리// 누나는야 살금살금/ 발꿈치 살짝 매미 한놈// 돌쇠는야 우쭐우쭐/ 포충망 휙 잠자리 한놈// 누나는야 한나절에/ 열마리 잡았는데// 돌쇠는야 웬 일일가/ 살펴보면 빈 포충망// 포충망에 포충망에/ 구멍난줄 몰랐네.   이 우화시는 허두남에게서 늘 나타나는 산문화가 가장 잘 극복된 작품이다.  이 작품은 주제를 볼 때 전혀 새롭지 않다 가능하게 “구멍난 독에 물 퍼붓기”란 속담에서부터 구상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시어가 아주 잘 짜였다.  “그네 뛰는 매미”,  “발레추는  잠자리” 등 구절들은 매우 생동하며 운률도 성공적이다.  전반 작품이 이른바 산문적으로가 아니라 시적으로 언어구사가 이루어졌다. 셋째: 유머감이 한층 진해졌다.  우화시 우화시 “약 먹을 때”를 살펴보자.   파리가 썰매 탈지경/ 윤기 반들 대머리 만지며/ 의사 선생님/ 한 눈 찡긋 일러준 말//ㅡ꼬마아가씨/ 이 약 먹을때/ 물 마시면 절대 안돼/ 물 마시는 날엔/ 이 할아버지처럼 대머리가 돼// 의사 선생님의 대머리/ 참기름이라도 칠했나/ 내 눈길도 미끄러져 떨어지는듯/ 몸이 오싹// (어마나! 롱구공 같네요/ 내 머리가 대머리 되면/ 작은 배구공 같을거야!)/ 머리가 대머리 될가봐/ 작은 배구공 될가봐/ 갈증이 나도/ 물 한모금 마시지 않았어요//해님이라도 삼킨듯/ 너무너무 목이 탈때면/ 한꺼번에/ 얼음과자 열대 먹었을뿐   이 작품은 풍자와 유머가 강할뿐 아니라 표현도 아주 훌륭하다. “파리가 썰매탈지경 윤기 반들 대머리”, “의사선생님의 대머리 참기름이라도 칠했나 내 눈길로 미끌어떨어지는듯”, “어마나! 롱구공 같네요. 내 머리가 대머리 되는 날엔 작은 배구공 같을거야!”. 해님이라도 삼킨듯 너무너무 목이 탈때면” 등 표현들은  극히 성공적이다. 이렇듯 작품의 언어가 갓난아기처럼 귀한 주요원인은 아이들의 시각으로 사물을 보고 천진란만한 동심에 비쳐진 사물의 모습을 그대로 그려냈기때문이다.     춰주면 좋아하는 아이/ 코흘리개는/ 숱한 애들이 앞다투어/ 너 참 힘세다 춰주니/ 너무 좋아 코를 풀쩍풀쩍/ -그래 너희들 말이 맞다/ 나 진짜 힘장사야/ 얼마나 센지 보련?/ 커다란 돌 척 들고서/ 다들 보라는듯 우쭐우쭐/ 국수오리 같은 코물이/ 발등까지 드리운줄도 몰랐대요   이는 우화시 “코흘리개”의 전문이다. 이 글의 주제는 “칭찬받기 좋아하는 사람은 나쁜놈에게 쉽게 리용된다.”로 될것이다. 이 주제를 표현하자면 “큰 인물”의 “큰 사건”을 가지고 “큰소리”를 치는 페단이 생길수 있을것이다. 그런데 작자는 그와는 정반대로 코를 많이 흘리는 한 아이를 통해 그것을 생동한 만화처럼 잘 보여줬다. 자칫 꽛꽛하게 만들수 있는 문제를  작고 재미있는 해학으로 원만히 표현하였다   앞으로 이러루한 제재가 더 많았으면 좋겠다. 작자는 이 책에서 학교생활과 공부에 대한 내용을 많이 취급했다.  흔히 아이들을 쓴 작품들에 학굫생활, 특히 공부에 대해 쓴것이 적다 그만큼 중요하고 가장 일반적인 것일수록 쓰기 힘들다는 말이 되겠다 그런데 이 책에는 학교생활, 공부를 두고 쓴 우화시가 상당한 수를 차지한다.  “성급한 아이”, “사내애가 그럼 못써”, “구멍난 책장”,   “”그런 로봇”, “락제생된 사연”, “두고보자”, “책을 많이 읽을테야”,  “빵점”,  “꾀보→“울보”,  “지각대장” 등이다  작자의 다섯번째 우화시집 《사탕을 좋아하는 애》(우화시 80수)는 2006년 한국에서 출판되였다. 이 책에는 네번째 책의 우화가 절반 넘게 들어있다 하지만 그대로 실은 우화는 기본상 없고 다시 손본것들이다 작자는 이 책에서 우화시의 언어를 많이 “미용”했을뿐만 아니라 다양한 형식을 창조하려고 품을 넣었다. 우화시 “뚝쇠의 자존심”을 보기로 하자   아이참, 저 뚝쇠/ 머리는 뚝 막혀가지고/ 자존심은 쇠처럼 강해서/ 이름도/ 뚝/ 쇠// 저보세요/ 상우에 숙제책 펼쳐놓고/ 책장우에 연필장단 똑똑/ 귀불만 만지작만지작// 녀동생 꽃분이 들여다보더니/ 오빠, 내 알려줄가?// 힐끗 동생을 지릅떠본 뚝쇠/ 까불지 마/ 쥐방울같은게 뭘 알아서…// 연필장단에/ 애꿎은 책장은 벌집 되여도/ 뚝쇠와 숨바꼭질하는/ 답안// 시계소리 재깍재깍/ 텔레비죤아동프로 이제 곧 시작한다/ 뚝쇠를 재촉하며 재깍재깍’’ 바빠 난 뚝쇠/ 궁둥이 들썩들썩/ 솥뚜껑우의 개미인가/ 안절부절/ (이 뚝쇠를 구해줄 사람은 없나?)// 이제 다시 동생에게/ 묻지도 못하고/ 묻지도 못하고   이 작품도 인물에게 꼭 맞는 어휘를 사금 일듯 골라서 주인공의 행동을 잘 묘사했다. 하나도 능하게 없으면서 녀동생앞에서 으시대는 이웃집의 코흘리개와 비슷한 뚝쇠의 모습이 눈앞에 다가온다. “연필장단 똑쪽”, “귀불만 만지작만지작”, “힐끗 녀동생을 지릅떠본 뚝쇠”, “쥐방울같은게”, “”연필장단에 책장은 벌집 되여도”, “뚝쇠와 숨박곡질하는 답안”, “솥뚜껑우의 개미인가 안절부절”, 등 구절들은 머리는 뚝 막혀가지고 동생앞에서 오빠의 자존심을 세우려는 웃기는 아이의 성격을 표현하는데 아주 적격이다. 마지막 련에서 “묻지도 못하고”를 반복한것도 주제을 강조하는면에서도 좋거니와 문체론적효과도 충분히 나타냈다. 마지막련도 잘 처리했지만 이 작품이서 특히 훌륭하게 쓴 부분은 첫련이다. 첫행에서  “아이참, 저 뚝쇠”-이렇게 “문을 열자 산이 보이는” 수법으로 시작한것부터 좋다. 편폭이 짧은 우화시에서 “짧은 밤에 긴 노래 부를”것 없이 글줄을 아낀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첫 련에서도 가장 첱금싸게 잘된 점은 이름도 뚝 쇠 이렇게 세개행에다 갈라놓은 것이다. 이것은 형태이미지이다. 종이를 랑비하면서 굳이 그래야 할 필요가 어디에 있는가? 뚝쇠라는 이름이 바로 주제이기 때문에 강조한것이다. 서로 상반되는 모순의 성격을 이 두 글자로 잘 표현했지 않은가? 그러니 두 글자에게 당당하고 분명한 자리를 드린것이다. 다른 사람이 시행을 한글자씩 뜯어서 내리배렬하니 자기도 한번쯤 그렇게 해본 그런 언어장난과는 전혀 다른 좋은 착상이고 설정이다.  “뚝쇠의 자존심”이 이름 두글자를 두행에 나눠놓은것이 형식상 성공적이라면 전반 우화시를 새로운 형식으로 쓴것도 있다.  우화시 “착한 일”이 그렇게 씌여졌다.   일과에서 빠짐없는/ 일기 적기/ 착한 일 적기// 보배둥이 일기책에/ 또박또박/ 연필도 신이났나/ 미끄럼질 쭉쭉// ㅡ오늘은 뜻깊은 날/ 낯선 할머니 도와/ 짐 들어다 드린 날/ 착한 일 찾아하니/ 칭찬받은것보다 더 기쁘다// 귓가에 속삭이는/ 자애로운 목소리/ 일기란 진실하게 써야 해!//! 뒤머리 썩썩/ 덧붙이는 몇줄// 아래 학급 돌이/ 자기가 할머니 돕겠다/ 짐 붙잡고 놓지 않았다/ 달래여도 듣지 않아/ 겁을 줘도 듣지 않아/ 빵! 한주먹 먹이고/ 제꺽 짐 빼앗았지 헤헤   웃지도 울지도 못할 사연, 그러면서도 너무 진실하게 아이의 성격을 그려낸 성공작이다. 내용도 새롭고 형식도 새롭다. 작자는 천진란만한 아이의 성격을 잘 그려냈을뿐 만 아니라 그 그림을 일기라는 액틀에다 정히 넣어서 걸었는데 형식이 아주 맘에 쏙 든다     형식이 생신하고 독특한 우화시로는 또 “친구사귀기”가 있다. “친구사귀기는 인터넷사이트를 리용해서 친구를 사귀는 형식을 빌어 웃음거울에 비친듯 우습광스러운 주인공의 형상을 보여주고있다.   인터넷 사이트로/ 친구나 사귀여 볼가/ 아무렴!/ 나처럼 훌륭한 애에겐/ 친구도 많아야지// 제 자랑한다 말아/ 나하고 사귀고 싶은 애들은/ 검색 창에 내 간력 쳐보렴/ 내가 허풍 쳤나// 나는나는/ 장점은 하늘만큼/ 단점은 손톱눈만큼// 내 또래중 키도 껑충/ 학급에서 힘도 으뜸/ 성미 활달한 사내대장부// 밥은 아빠보다 더 먹고/ (애들은 잘 먹어야 잘 큰대)/ 잠은 하루 열시간/ (애들은 잘 자야 건강하대)/ 늘 토끼처럼 뛰놀지/ (애들은 잘 놀아야 밝게 자란대)// 장점은 무지무지/ 많고 많지만/ 단점은 딱 하나 공부싫어증   “친구사귀기”나 “착한 일”같은 형식은 아주 좋은 추구이다. 앞으로 이런 추구들이 많아져 허두남이 독자친구들을 더 많이 사귈수 있기를 바란다. 우화시집 “사탕을 좋아하는 애”도 생동성, 형상성면에서 약간 아쉬운 점을 남긴 다. 2015년에 출판된 여섯번째 우화시집 《빵순이 다이어트》(연변인민출판사)에는 보다 세련된 우화시가 무려137나 수록되여있다. 이 책에서 작자는 우화시를 보다 동시처럼 개조하는데 모를 박았고 많은 성과를 올리고있다. 작자는 아예 책의 쟝르를 우화동시집이라고 밝혔다. 이 책은 이전의 책들보다 질이 한 차원 높아졌다. 우선 우화시들이 재미 있어졌다. 다음 편폭이 한층 짧아졌다. 편폭은 짧아졌지만 작품을 인위적으로 줄여놓은 느 낌이 들지 않고 생동한 세부와 형상적인 구절들이 눈을 즐겁게 해준다. 간결하고 재 치로우며 깜찍하다. 많은 우화시들은 형식상 완전히 일반적인 동시의 모습을 갖추었다.     일반 동시처럼 쓰여진 몇편의 우화시를  살펴보자     내 가슴속에 피여난 꿈/  아롱다롱 칠색무지개/ 저 하늘의 무지개보다 더 고운 고운 꿈/ 목화송이 흰구름 말끔히 닦은/ 파란 저 하늘보다 더 고운 꽃꿈//나의 고운 꿈 멋진 꿈은/ 아롱다롱 칠색무지개 베여다가/ 색동저고리 지어 입고/ 파란 하늘 한 자락 살짝 베여다가/  파란 치마 곱게 지어 입는거야!// 너무 너무 소중한 꿈이기에/ 맘속으로만 고이 키우며/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아/ 다른 사람 내 꿈 훔쳐갈가봐//저 높은 곳에 있는 무지개를/  어떻게 베여올가?/ 누가 저 높은 곳에 올라가서/  파란 하늘을 베여온담?/ 그리 큰 가위는 또 어데서 구하나?        이는 우화시 “고운 꿈”이다. 이 작품은 이야기를 전개하는 기존의 우화들과 완전히 다르게 일반 동시처럼 썼 다. 아주 감칠맛 난다. 작자는 한 녀자애의 아롱다롱 고운 무지개꿈을 그리고있다. 파란하늘을 베여다가 치마를 지어입고 칠색무지개를 베여다가 색동저고리를 지어입 었으면 하는 천진란만한 어린아이의 꿈은 그야말로 “목화송이 흰 구름이 말끔히 닦은 파란 저 하늘보다 더 곱고 아롱다롱 칠색무지개보다도 더 고운 꽃꿈인것이다. 좋기는 파란 하늘을 베여올  때 해까지 함께 베여다가 옷을 지어입는다면 더 리상적이겠지. 하늘색 파란 바탕에 황금빛 해를 수놓은 옷, 얼마나 아름답겠는가? 옷이 아름다운걸 물론 해까지 있으니 겨울에 춥지도 않고 그처럼 좋은 옷이 더 없을것이다. 친구들이 모두 부러워서 눈이 비뚤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파란 하늘을 누가 베여오고 어떻게 베여오는가 하는 것이다.       이는 우화시는 이소프의 우화 “쥐들의 회의”와 비슷하다. 쥐들이 모여서 어떻게 고양이를 대처할가를 토론하는 회의에서 모두 고양이목에 방울을 달자고 한다. 어떤 방울을 달고 어떤 끈으로 달 것인지를 열렬하게 토론했지만 누가 가서 그 무서운 고 양이목에 방울을 달겠는가 하자 아무도 나서지 못한다. 고양이가 무서워서 방울을 못 달듯이 하늘은 너무 높아서 팔이 자라지 않으니 베여올수 없다. “분선이가 미워요”도 일반 동시처럼 쓴 우화시이다.   속눈섭 긴 쌍가풀눈도 미워요/ 오똑한 코도 미워요/ 볼우물 파며 생글생글/사과 같은 얼굴도 미워요// 선생님 물음에/ 남먼저 대답하는 입/ 남먼저 쳐드는 손도 미워 요/ 이름도 미워요// 남학생들 눈길 혼자 끌어가는/ 욕심쟁이 분선이/ 얄미운분선이// 미운 분선이/ 요즘 더 미운 짓 해요/ 밤마다 내 머리속에 찾아와/ 단잠 들지 못하게/  막 휘저어놓군 해요// 분선이를 미워하다가/잃어버린 잠       이렇게 써도 우화가 되는가고 반문할 사람이 있을수도 있다. 이런 사람들은 기 존의 우화형식에 길들어있는 사람들이다. 꼭 “토끼와 거부기”처럼 보자마자 그 뜻이 다 알리게 써야만 하는가? 일정한 심도를 심어주고 사색을 거쳐야 그 뜻이 알리게 쓰는것이 더 예술적효과가 있고 현대적 미감에 맞는다고 생각된다. 풍자속에 교훈을 담으면 우화시는 다양한 형식으로 쓸수 있다고 본다. 아니, 다양한 형식으로 써야 한다고 주장하고싶다. 그럼 이 작품이 왜서 우화로 될수 있는가? 이 작품의 주제는 무엇인가? 이 작품 의 주제는 친구를 미워하고 미워하다가 밤잠까지 잃게 되였다는것이다. 남을 너무 미 워하다가 결국 자신을 해쳤다는 뜻이니 풍자가 성립되는것이며 풍자속에 분명한 따끔 한 교훈도 담긴것이다. 지금껏 그 누구도 우화시를 이런 형식으로 쓴적이 없는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이렇게 써서는 안된다는 도리는 없다. 우화시를 “이야기→교훈” “교훈→이야기”의 낡은 도식으로 가두지 말고 다양한 새 형식으로 써서 작품의 매력을 올렸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번에는 우화시 “바람”을 살펴보자   살구나무가지끝에서 /바람이 앵앵 울고있어요 /여기저기 쏘다니면서 /못된 장난 재미삼던 개구쟁이 바람 /빨래줄에 걸린 옷 팽개치고 /장독뚜껑 허공중에 날려버리더 니 /나무가지 부러뜨리려 심술 부리다가 /가지끝에 옷자락 걸렸나봐요/도와줘요!/도 와줘요 /애처롭게 구원 청하는데 /아무도 내다보지 않네요 /저러다 옷자락이 찢어지 면 어쩐담? /아이참, 그러게 /고약한 미운 짓 일삼지 말게지   얼핏 봐도 훌륭한 동시이다. 내용으로 보면 이는 또한 교훈과 풍자를 두루 갖춘 완미한 우화이기도 하다. 잘 짜인 동시안에 “남잡이 제잡이”라는 철리와 나쁜 일을 일삼는 자는 도와주는 이가 없다는 철리를 담고있다.     완전한 동시형태로 쓰여진 우화시로는 또 “파란 호수”를 들수 있다.       아빠 함께 뽀트 타던 날/파란 호수물 처음 보았다/노랑병아리빛 치마에 파란 물 튕길가/가슴에 두손 포개고 조심히 서있는데/심술쟁이 파도가 처절썩/치마자락에 물방 울 튕겨놓겠지/난 몰라/난 몰라/내 옷 어쩌나 발 동동 굴렀는데/참말 신기했다/옷에 한 점도 옮지 않은 파란 물감    이 작품을 보고 한수의 매력적인 동시라고 말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것이다. 파란 호수물을 눈에 보는듯이 그려낸 한폭의 수채화이다. 물방울이 튕기면 옷에 파란 물이 옮으리라고 생각하는 아이의 마음은 진실하게 과장 없이 표현된것이다. 이 작품은 시어도 참 아름답게 씌여졌다. “노랑병아리빛 치마” “가슴에 두손 포개 고” “심술쟁이 파도”  “난 몰라! 난 몰라!” “발 동동 굴렀는데” 등 구절들은 말이 고우 면서도 어린 소녀의 성격을 잘 표현했다. 그럼 이처럼 아름다운 동시가 어떻게 우화시로 될수 있는가? 무엇을 풍자했고 어 떤 교훈을 던져주고있는가? 사물의 현상과 본질을 가려볼줄 모른다는 천진란만한 생 각에 가벼운 웃음이 생기는 풍자적인 요소가 살짝 깃들어있는것이다. 파란 물감을 풀 어놓아 파란 물과 해빛이 반사되여 파랗게 보이는 물은 얼핏 보면 비슷한 면이 있지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물방울이 튕기면 옷에 파란 물이 옮으리라고 생각하는건 서 산마루에 물든 빨간 저녁노을을 보고 서산에 불이 났다고 소방대에다 전화를거는것과 같은것이라 하겠다. 우화시 “내 만약 미용마술사라면”도 일반 동시의 형태로 씌여졌다.   내 만약 미용마술사라면/ /엄마를 다시 젊어지게 하고싶다/더 예쁘게 만들고싶다 // 눈귀와 입귀 잔주름/  /다리미질한듯 곱게 펴드리고 세월의 그늘 비낀 볼도/싱싱한 사과처럼/ 반들반들 윤기 돌게 만들련다// 군데군데 나이살/  날씬한 곡선 잃어가는 엄마에게/ 그제날의 몸매 돌려드리고/ 날아갈듯 사뿐사뿐/ 예쁜 걸음걸이도 되찾아드 리련다// 하지만 하지만/ 너무 아름답게는 안 만들거야/  선녀처럼 변한 엄마/옷자락  이 날개로 변하여/ /훨훨 하늘로 날아가면 안되니깐!/ 옛말에 나오는 선녀처럼/아빠와 날 버리고 가버리면 안되니깐!    이 작품의 주제에 대해선 더 말하지 않겠다 이외에도 벨, 시계바늘 날 닮았어, 무지개, 세배 등 동시처럼 쓴 우화시들이 여 러편이다. 이 책에서 작자는 주인공들의 이름을 짓는데도 정성을 쏟아부었다. 하는 짓이 망태기인 개차반 망택이, 옹졸한 옹남이, 얼핏하면 앵돌아지는 앵나, 노래 잘 부르는 여울이, 큰소리 잘 치는 왕구, 남의 흠 잘 잡는 “짹짹2인방”, 그외에 도 꽃분이, 초롱이, 영재, 망칠이, 뚝쇠, 대식이, 미숙이, 울남이, 떼돌이, 빵순이, 달 인이, 으뜸이, 우승이, 진수, 보석이, 금이, 구슬이, 똘똘이, “배살공주” 등 이름들은 주인공의 성격을 보여주고 작품의 주제를 반영하는데 한몫 담당하고있다. 이상으로 우화작가 허두남이 40여년간 땀으로 가꾸어온 6권의 우화시집에 대해 살펴보았다. 모두어보면 허두남은 크릴로브우화시와 조선의 우화시 등 재래의 우화시로부터 양을 섭취하였으나 그의 우화시는 재래의 우화시들보다 많은 다른 개성적특점이 있다. 제일 중요한 특점은 이야기 과정을 전개하지 않고 일반 동시와 비슷한 형태로 쓴것이다. 허두남은 초기에는 동화시 비슷하게 이야기 과정을 전개했지만 거기에서 벗어나서 일반 동시형태를 만들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다하였다. 재래의 우화시를 “풍자시. 철리시. 이야기시”로 정의를 내린다면 허두남 우화시는 “풍자시, 철리시. 동시”로 정의를 내릴수 있다. 비뚠 인물의 비뚠 행동을 빌어 작고 깜찍한 도리를 귀띔해주는 우며동시-이것이 허두남이 수십년의 탐구로 만들어낸 우화시이다. 허두남우화시의 다른 특점은 동식물을 주로 쓰던 전통에서 벗어나 아이들을 주인 공으로 한것이다. 허두남은 끈질긴 노력으로  우화시창작에서 많은 결실을 맺었지만 그의 우화시에 는 미숙한 점이 적지 않다. 여섯권의 책에 공동으로 존재하는 부족점은 생동성과 형상성이 부족한것이다. 많은 우화시들은 형상이 론리에 묻히고있다. 우화작품은 론리정연해야할것이 자명하 지만 우화도 문학인이상 생동하고 형상적이여야 하며 재미있어야 한다.     갱신을 위해 공을 들이는데 린색하지 않은 작자가 이제 꼭 자신의 단점을 장점으 로 돌려놓을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우리 조선족문단에 한떨기 이색적인 꽃을 피운 우화작가 허두남, 재능 있는 구연 작가인 그가 앞으로 구연작품의 특점을 우화시에 배합하여 완정하고 독특한 자신만의 스찔을 갖춘 우화작가로 거듭나기를 기대해본다.  
7752    [고향문단소식] - "두루미" 시인을 기리다... 댓글:  조회:3071  추천:0  2020-09-08
리상각시인 3년제 기념세미나 (ZOGLO) 2020년8월23일  지난 7월 25일에 시작된 연변작가협회 시가창작위원회와 대목산청생물과학(길림)유한회사가 손잡고 진행하는 ‘대목산청 시의 려행'은 8월 22일, 다섯번째 코스로 도문시 장안진에 자리잡은 룡가미원을 찾아 ‘리상각시인 3년제 기념쎄미나르’를 개최하여 고 리상각(1938-2018)시인의 창작성과와 문학업적을 기리였다. 연변작가협회 부주석 김영건시인은 개막사에서 “우리 전통시가의 한 봉우리를 이루고 일찍 주필, 연변작가협회 부주석을 력임하면서 많은 문학인재들을 발굴하고 양성하고 그들에게 활무대를 제공하면서 중국조선족시문학의 오늘을 이끌어오신 탁원한 리더의 한분이다.”, “시인은 갔어도 (그가 남긴 시와 노래를 통해 전해지는) 시인의 숨결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할 것이다.”고 하면서 이같은 행사를 후원한 연변작가협회와 대목산청생물과학(길림)유한회사에 감사를 표시하였다. 세미나에서 연변인민출판사 《연변문학》 시편집 김창희시인이 《연변문학》에서 사업한 경력을 위주로 리상각시인의 략력을 소개하고 연변대학 리해연박사가 평론 을 발표하였으며 연변인민출판사 《문화시대》편집 림은화가 고 김경훈 교수의 평론 를 랑독하였다. 소설가 림원춘, 정세봉, 시인 최룡관, 김동진, 리임원 등이 자유발언을 통해 시인을 추모하고 리상각시인의 차남 리동혁이 답사를 하였다. 세미나에서는 또 연변인민방송국의 아나운서 서태문과 윤련순이 리상각시인의 시 와 를 각각 랑송하였고 연변가무단의 가수 임향숙, 황매화, 리상길이 리상각시인이 작사한 노래 , , 를 각각 열창하여 시인이 남긴 문화재산을 다시 확인하였다. 김학철문학비 앞에서.     한편 이번 행사를 위해 연길, 화룡, 룡정, 도문, 훈춘 등지에서 모여온 40여명 문화예술인들은 필충극화백이 26년의 시간을 들여 건설한 룡가미원에서 한락연기념비, 김학철문학비, 미술관, 박물관 등을 참관하면서 중국조선족의 력사문화를 견학하였다. /길림신문 김태국 기자 =======================================/// 추모글 시백님 가시는 길에                                   김동진   먼 곳에서 전해오는 비보는 언제 보아도 뜻밖의 비통한 소식이다. 그래서 청천벽력에 비유하거나 태풍이 폭우를 몰아온다고 한다. 이번에 리상각 시백님이 작고하셨다는 소식도 그러하였다. 8월 18일(2018년도) 아침 6시경, 평시의 습관대로 스마트폰을 열고 위쳇을 돌아보는데 내두산작가촌 김춘택 촌장이 올린 메시지가 있었다. “2018년 8월 17일 21시 45분, 원로시인 리상각시인이 청도에서 작고”라는 슬픈 내용의 소식이였다. 아니, 얼마 전에도 텔레비죤 앞에서 딴스를 추시던 선생님의 모습을 보았는데. 그리고 그 동영상을 나의 서류함에 저장해놓았는데 이렇게 가시다니… 그 안타까운 글자를 한자씩 다시 확인하는 순간, 나의 눈 앞에는 나의 마음 속에 각인된 고인의 생전의 인자하신 모습과 마지막으로 찾아가보았던 그날의 만남이 하나의 생생한 화면으로 떠올랐다. 재작년(2016년) 여름이였다. 연변시인협회의 현지창작모임이 있어 연길에 갔었는데 김응준 회장님이 하시는 말씀이 리상각선생이 엘리 베이터가 있는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고 그런데 거동이 전보다 더 못하다고 하시는 것이였다. 활동이 끝나 돌아오는 날, 김영능, 최기자와 나는 집을 안다는 김철학 이를 앞세우고 선생님댁으로 병문안을 갔었다. 그날 선생님은 병환에 계시면서도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아주시였다. 그날 우리는 받지 않겠다고 뒤걸음치는 선생님의 손에 우리의 작은 마음을 억지로 떠맡기였다. 선생님 은 1층 문어구에서 나의 손을 꼭 잡고 “고맙소”를 반복하시였다. 우리가 돌아올 때 선생님은 불편한 몸으로 큰길까지 나와서 차를 타고 떠나는 우리를 손저어 바래주시였다. 왜소한 체구, 창백한 안색, 다듬지 않아 헝클어진 하얀 머리, 불편하신 걸음걸이 이것이 내가 본 그 날의 리상각선생님의 모습이였다. 이 모습이 이제 와서 내가 본 리상각선생님의 마지막 모습으로 된 것이다. 그후 들려온 소식은 청도에 있는 딸이 선생님을 모셔갔다고 하였다. 돌이켜보면 나도 리상각선생님의 보살핌 속에서 자라난 수많은 후배들 중의 한 사람이다. 황장석선생이 생전에(1997년 5월 2일) 훈춘에 왔을 때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1979년 년말의 어느날, 리주필이 내 사무실로 건너와 ‘장석동무 좋은 글이 올라왔다니까. 이 원고를 한번 보오.’ 하기에 하던 일을 밀어놓고 그 원고부터 보았다니까. 문혁이 쓴 서정서사시 였소. 단숨에 끝까지 읽었는데 속이 찡해 나더구만. 내가 아주 좋다고 채용하겠 다고 하니 리주필이 즉석에서 동의하였소. 이렇게 이 시가 이듬 해 2월에 잡지에 실리고 민의조사와 평심을 거쳐 그 해에 처음 설치한 제1회 문학상 수상작이 된 거라오.” 뜻인즉 내가 수상자로 된 데는 시편집인 황선생의 수고도 있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리상각 주필님이 나의 작품에 관건적인 찬성표를 놓았기에 그런 결과를 보았다는 이야기였다. 옳은 말이였다. 아무리 시편집이 좋다고 해도 주필이 반대한다면 그 작품은 ‘사형선고’를 받아야 하니까… 그 덕을 입어 나는 하늘의 별따기로 생각하던 연변작가협회 회원이 되였고 정식으로 시인들의 행렬에 들어서게 되였다. 그러니 문학의 풋내기 에게 시운이 트이게 길을 열어주신 선생님의 그 은혜를 어찌 작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 나는 처음으로 리상각선생님을 만나게 되였다. 시상식 때  선생님은 나의 손을 잡고 자기도 흑룡강사람이니 우리는 한 고향사람이라 하시면서 기뻐하시였다. 이렇게 시작된 인연의 세월 속에서 초기에는 거리와 지역 관계로 자주 만날 수 없었지만 훈춘으로 이사를 와서부터는 문단의 여러가지 모임에서 종종 만나뵐 수 있었다. 선생님을 만날 때마다 먼저 떠오르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선생님댁 에서 하루밤을 묵은 이야기다. 지난 세기 90년대 초였다. 한번은 문단행사가 있어 연길에 갔다가 저녁만찬까지 참가하고 보니 밤이 되였었다. 촌바우인 내가 잠자리 때문에  근심하는데 선생님께서 나를 끌어당기는 것이였다. “가기오. 우리 집으로 가기오.” 선생님은 나를 데리고 자기 집으로 가시였다. 정작 따라가 보고서야 나는 손님을 재울 만한 집이 못된다는 것을 알았다. 판자로 만든 쪽대문 안에 초라하게 들어앉은, 고작 20평방미터가 되나마나한 헐망한 단층집 이였다. 부엌이 딸린 정주칸에 사이문을 단 웃방이 하나 있었는데 웃방은 리주필 내외의 거처이고 정주칸은 로모님께서 손군들을 데리고 자는 자리였다. 내가 웃방에 들어가 리선생님과 나란히 누울 때까지 사모님께서는  (원잡지사 주필, 김세영선생님) 아직 퇴근하지 않았었다. 체면을 무릅쓰고 잠이 들었다가 새벽녘에 깨여나보니 로모님께서 부엌마루 우에 담요를 펴고 새우잠을 쉬고 있었다. 나는 지금도 그 때의 난감했던 심정을 정확히 표현할 수 있는 적당한 말을 찾을 수가 없다. 한마디로 이 어리숙한 손님 때문에 리주필네 하루밤 수면질서가 마구 헝클어졌던 것이다. 그래도 로모님과 사모님은 안쪽 시골에서 온 나를 귀한 손님처럼 뜨겁게 대해주시였다. 이튿날 아침, 나는 미안한 대로 사모님이 지어주신 밥을 먹고 귀로에 올랐다. 그 때까지만 해도 나는 이름 있는 잡지사의 주필님이 어찌하여 둘이 누우면 돌아누울 자리도 없는 그런 코구멍 같은 집에서 살아야 하는지 도무지 리해할 수 없었다.   지금도 가끔 그 일을 생각하면 그 때 내가 너무나 철이 없었다는 가책을 받군 한다. 한편 손님을 데리고 갈 형편이 아니 되는데도 데리고 가서 재워주신 선생님의  그 날의 처사가 나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지워 버릴 수 없는 감동을 심어주었다. 내가 리상각선생님을 존경하는 것은 결코 이런 저런 신세를 졌기 때문만이 아니다. 나는 리상각선생님의 너그러운 품성과 뛰여난 문학재능 을 존경하는 동시에 또한 참되고 정직한 인격을 존경한다. 나에게는 28년전 내가 녕안현문련에 있을 때 리상각선생님이 보내 주신 한통의 편지가 있다. 다른 문안편지는 다 버리면서 이 한통의 편지를 지금까지 소중하게 보관해두고 있는 것은 그것이 나에게  한 선배님의 지극히 순결한 마음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월간사의 사무용 종이에 쓴 그 편지의 원문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김동진동무 안녕하오? 바삐 보낼 줄로 아오. 작년에 연변에서 만든 록음대에 , 등 노래가 나의 작사로 발행되였으므로 내가 에 글을 써서 빨리 시정하라고 한 일이 있었소. 그런데 요즘 노래 원고비가 나에게로 왔소. 다시 텔레비방송국에 의견을 제출하니 그들 말이 한사코 내가 쓴 거라고 했소. 그래서 작곡가 리정옥을 찾아가서 원고를 뒤적여 보았더니 김동진 작사더군. 이제야 작사자를 찾아냈소. 얼마나 서운하겠소. 나에게로 온 원고료를 동진동무에게 보내니 받아두오. 좋은 원고를 계속 보내오. 안녕히   90.2.27 상각 ”   보다싶이 리상각선생님은 이런 분이시였다. 작사자의 이름이 바뀐 노래가사 때문에 그리고 그 한수의 가사 원고비 때문에 신문사와 텔레비죤 방송국에 시정을 요구하는 글을 쓰고 의견을 제기하고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작곡자를 찾아가서 끝내 가사의 임자를 찾아내신 선생님! 그리고 고작해야 10원 밖에 안되는 원고비를 편지와 함께 보내주신 선생님! 참대처럼 곧은 마음 하나로 사업하고 생활하신 선생님의 정직한 인격은 내가 따라배워야 할 하나의 귀감을 보여주시였다. 선생님은 인생만년에 마음고생을 많이 하시였다. 망각증이 와서 손목에 시계를 차고서 시계를 찾는 사모님, 밖에 나가면 방향감각을 잃고 계속 다른 곳으로 가는 사모님, 치매에 걸린 사모님 때문에 늘 마음을 놓지 못하시였다. 중요한 회의나 모임 같은 데는 부득불 사모님을 데리고 다녀야 했다. 자기 몸 하나도 건사하기 힘든 년세에 치매가 온 부인을 밤낮으로 돌보아야 했으니 그 고생인들 오죽했으랴. 선생님은 연변시인협회의 고문으로 있는 동안 처음에는 모든 활동에 꼭꼭 참가하시였는데 사모님께서 돌아가신 후로 자신의 건강에까지 문제가 생기여 더는 활동장소에 나오시지 못하였다. 그나마 다행히도 스마트폰에 위쳇이 활개치는 세월이여서 사이버라는 가상공간을 통하여 선생님의 모습을 두번 볼 수 있었다. 한번은 선생님의 생신날, 식모의 도움을 받으면서 식사하는 사진에서 선생님의 모습을 보았고 다른 한번은 판문점 평화의 집에서 남북정상 회담이 이루어진 다음 날 즉 4월 28일, 석문주시인이 연변시인협회췬에 올린 사진과 동영상에서 다시 한번 선생님의 모습을 만나게 되였다. 선생님은 객실에 놓인 액정텔레비죤 앞에서 병환을 털고 일어난 사람처럼 웃음이 넘치는 얼굴로 딴스를 추시는 것이였다. 이전처럼 무릎을 꺾고 두 다리를 들었다 놓았다 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두 손으로 무릎을 치고 좌우로, 앞뒤로 바꿔치기를 하면서 즐거워하시였다. 사실 선생님의 로씨야딴스 실력이 프로급이라는 것은 동시대를 함께 살아온 우리 문단의 문인들 치고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경쾌하면서 날렵한 동작과 멋스럽고 세련된 기교로 하여 어느 오락장소에서나 한몫을 단단히 했으니 말이다. 그 날 선생님의 자제분은 아버지께서 남북 두 정상이 악수하는 장면 에서  조선반도의 통일서광을 보시였고 그것이 너무 기뻐서 옛날의 딴스 동작이 절로 나오신 것 같다고 하였다. 비록 젊은 날의 고급동작에는 미치지 못하였지만 운신을 제대로 할 수 없는 80고령 로인의 몸에서 딴스가 나온다는 것은 분명 하나의 기적이 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인생황혼의 남아있는 기력을 모아 여생의 한 순간을 장식한, 꽃보다 향기롭고 시보다 아름다운 선생님의 마지막 걸작이였다. 동작은 헝클어졌어도 환히 웃으시면서 딴스를 추시는 선생님을 보면서 나도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였다. 나는 선생님의 몸과 정신상태가 많이 좋아졌다고 생각하였다. 저런 상태에서 조금만 더 회복이 된다면 얼마든지 연변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고 또 만나볼 수 있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히 잘못된 나의 판단과 바램이였다. 선생님은 그 때로부터 3개월이 조금 지나 영별의 길, 영면의 길에 오르시였다. 인연의 갈피에 새겨진 하많은 이왕지사와 운명을 앞두고 남북통일에 대한 소원을 담아 추신 선생님의 딴스를 그려보는 나의 마음의 하늘에서는 지금 존경과 슬픔으로 반죽된 애도의 비가 내리고 있다. ‘백설’이라는 필명으로 하얗게 살다가 가신 선생님! 처럼 하얀 날개를 저으면서 가신 선생님! 선배님이면서 은사님이신 리상각 시백님이시여! 부족함이 많은 이 후배가 시백님이 가시는 길에 눈물에 젖은 하얀 국화꽃 한송이를 드리옵니다. 옷깃을 여미고 두 손을 모아쥐고 머언 청도의 하늘을 우러러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면서…   2018.8.20.        
7751    토템시/ 백학= 남영전, 해설= 현춘산(4) 댓글:  조회:2162  추천:0  2020-09-08
토템문화와 토템시(4) (ZOGLO) 2020년7월30일      백학(흰 두루미), 백의 민족의 혼   현춘산   백설같은 두루미, 하얀 두루미. 목과 다리가 훤칠하게 생긴 흰 두루미가, 그 백학(白鹤)이 푸른 하늘을 가르며 높이 솟아오른다. 너울너울 춤추는 날개짓은 푸른 바다를 유유히 헤염치는 듯, 하늘하늘 창공에 뜬 모습은 흡사 어여쁜 천사의 모습이런 듯, 그 기품 있고 정결하고 도고한 자세는 또한 얼마나 우아하고 아름다운가.   고대의 동이족(东夷族)은 각별히 조류를 숭배했었다. 동이족의 조류숭배는 그가 처했던 자연지리적 조건에서 비롯되였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태양이 솟는 동쪽나라, 첩첩 뭇산과 천리 림해와 만경창파를 안고 사시절이 분명한 자연지리적 조건에서 말이다. 일년치고 사시절이 바뀜에 따라 철새들이 날아오고 날아간다. 동이족의 천신(天神)숭배는 바로 태양숭배였다. 그들은 하늘높이 비상(飞翔)하는 새들이 태양으로 날아갔다가 태양에서 대지로 돌아온다고 믿었다. 그중 가장 높이 날아오르는 새가 백학이다. 그래서 신선들이 하늘에 오를 때면 백학을 타고 오른다고 했다. 동이족은 태양의 밝은 빛을 흰색으로 간주했다. 그래서 태양이 비추는 낮을 "백천"(白天)이라고 불렀다. 태양이 비치는 "백천"과 백설 같이 흰 백학. 과연 우리 선조들의 시각으로 보는 백학은 어떤 새였을가. 태양숭배에서 비롯된 흰 색에 대한 숭상, 흰 색에 대한 숭상으로 옷도 흰 색만을 고집했던 백의민족(白衣民族). 그 백의민족에게 있어서 백학은 과연 어떤 새였을가. 백학은 또한 성인(圣人)의 화신으로 되기도 한다. 옛날 고기붙이 아니면 식사를 못하는 모친을 위해 사냥을 하던 신효거사가 마땅한 사냥감이 없어 하늘 높이 날아가는 다섯 마리의 학을 바라고 화살을 날린다. 그러자 그중의 학 한마리가 깃털 한대를 떨어뜨린다. 거사가 그 깃털을 눈에 대고 보니 사람들이 모두 짐승으로 보였다. 훗날 거사를 만난 오류성중(五类圣众)의 하나가 자기의 깃털을 돌려달라고 해서 그 깃털을 주니 떨어진 옷자락에 갖다대는데 그 깃털이 삼베쪼박으로 변하여 꼭 들어맞는 것이였다. 그 다섯 도사가 바로 신효거사가 활로 쏜 다섯 마리의 학이였다. 백학은 그 도사들의 토템이였다. 토템과  인간의 호상전환을 보여준 사례다. 백학은 소나무, 사슴, 불로초 등과 마찬가지로 우리 민족 십장생(十长生)의 하나로 간주되였다. 백학은 천지간에 아름다운 것만 취하여 그 몸을 보양하고 사기(死气)가 없는 가운데 살므로 장수한다고 한다. 백학은 다른 조류에 비하여 높이 나는 새로서 비상과 높이를 상징하는 동물. 억센 날개로 하늘높이 나는 새, 풍운(风云)을 헤가르며 풍랑을 맞받아 하늘높이 날아오르는 새, 그는 피와 불의 세례속에서 신음하던 이 땅의 인간들에게 있어서 희망이였고 간난신고로 자기의  운명을 개척하던 백의민족의 귀감이였고 힘이 아니였을가. 시인 남영전의 토템시 "백학"은 백학의 성격을 백의 민족의 혼으로 표현하고 있다.   백의 혼이여 천만년 깊이 묻힌 피비린 내음에 절고 천만년 검붉은 질식속에 몸부림치고 천만년 무거운 층암속을 뚫고 나오며 검은 삿갓 검은 두루마기 검은 적삼 불살라버리고 천지간에 하얗게 다듬어진 넋   백의 혼은 바로 이렇게 유구한 세월 험악한 환경과 엄혹한 시련속에서 련마된 것이다. 이렇게 련마된 백의민족의 넋이였기에 "결백속의 붉은 피방울/백두의 얼음속에 스며든데도 애탄하지 않고/더욱 더 많고 많은 백의 혼 낳아키웠"던 것이다! 남영전시인의 토템시에서 표현된 백학의 토템이미지는 광명과 자유와 행복을 위하여 풍랑을 헤쳐온 백의 민족의 억센 투지와 생명력이며 백의민족의 깨끗한 지조와 굴함없는 령혼이다.
7750    토템시/ 신단수= 남영전, 해설= 현춘산(3) 댓글:  조회:2155  추천:0  2020-09-08
토템문화와 토템시(3) (ZOGLO) 2020년7월30일  신단수, 조선민족의 세계수   현춘산   아득히 멀고 먼 옛날, 아아하게 솟은 산마루에 거목인 박달나무 한그루가 서있었다. 그 나무는 아찔하게 높이 솟아 하늘에 닿았고 가지와 잎이 무성했다. 그 박달나무는 저 멀리 지중해연안으로부터 이란문화권을 거치고 인도를 포괄하면서 아세아대륙의 북부를 총망라하다시피 하면서 솟아오르던 우주의 나무 즉 세계수중의 한그루였다. 고대인들은 우주의 질서가 천계와 지계 그리고 지하계로 이루어졌다고 여겼고, 이러한 우주구조의 수직관념에 따라 하늘과 대지와 지하세계를 하나로 얽매여 련결시킬 수 있는 매개물이  즉 우주의 축이 수요되였다. 그런 매개물로 나무이상이 없다고 여긴 선조들은 어떤 한그루의 나무를 선택하여 그것을 우주의 나무 즉 세계수로 삼았던 것이다.이처럼 세계수는 인간의 의지가 심고 가꾼 나무였다. 그런 나무들은 뿌리로 지하의 샘을 빨아올리고 초리로는 하늘의 샘을 자아내리기에 영원한 생명의 원천과 하늘과 땅을 잇는 사다리, 하늘과 땅을 비티고 있는 기둥으로 되고 있었다. 씨비리야 각 민족의 세계수가 한그루의 봇나무나 락엽송 혹은 참나무였다면 우리 민족의 세계수는 박달나무였다. 하늘에 닿은 그 신기한 박달나무를 통해 천신 환웅이 내려서 그 아래에다 신시를 열고 인간세상을 다스리자 곰과 범이 사람이 될 소원을 신단수에게 빈다. 결국 금기를 지켜낸 곰만이 성공하여 웅녀로 된다. 웅녀가 자식소원을 신단수에 빌자 환웅이 잠시 사람의 형체를 빌어 웅녀와 더불어 아들을 보았으니 그가 바로 조선민족의 시조 단군임금이였다. 여기서 주목할 바는  사실 신단수가 단군의 부친토템이 된다는 점이다. 신단수는 천신 환웅이 깃든 나무이기에 환웅과 동심일체를 이룬다. 게다가 단군의 단(檀)자는 신단수의 단(檀)자이다. 이것은 단군(檀君)이 사실상에서는 신단수의 아들임을 증명한다.   단군신화는 한폭의 장엄하고도 아름다운 민족서사시다. 단군신화는 천신 환웅과 신단수, 곰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선조들의 우주관과 민족의 생명력에 대하여 알게 하였다. 남영전시인은 토템시"신단수"에서 웅위롭고 호방하며 장엄한 신단수의 형상을 다음과 같은 시구로 묘사하고 있다.   창천을 쪼각쪼각 떠받들고 대지를 뙈기뙈기 거머쥐고 (중략) 하늘의 구름 몰아오고 딸의 물 빨아올리며 (중략) 소탈하고 영특한 웅신으로 변신하여 웅녀와 천지개벽의 연분 맺었네 (중략) 막강한 기백으로 빙산의 두개골 열어젖히고 화애로운 락원 일떠세웠네.   시인은 신단수의 형상묘사를 통하여 영구불멸의 생명력과 하늘에 닿는 기개, 굽힘없는 굳센 의지와  천지개벽의  기백과 슬기를 지닌 민족의 상징인 신단수의 토템이미지를 표현하고 있다.
7749    토템시/ 곰= 남영전, 해설= 현춘산(2) 댓글:  조회:2018  추천:0  2020-09-08
토템문화와 토템시(2) 조글로미디어 2020년7월30일      곰, 우리 민족의 시조모   현춘산   "엉기적 엉기적 엉기적" "우람한 산악을 끄는 그림자"가 가고 있다."덩쿨풀 우거진 어두운 수풀을 뚫고, 물풀이 우거진 황량한 수렁창을 지나" 산악을 끄는 우람진 그림자가 가고 있다. 산악마냥 우람진 몸집, 기둥 같은 네다리, 쟁쟁 쇠소리날 듯 탄탄한 발톱, 오직 앞을 향하여 엉기적거리며 가고 있는 그는 과연 누구일가. 아득히 멀고 먼 태고의 시절, 우리의 조상들의 생존환경도 그러했다. 가시덤불 우거진 원시림속, 잡초가 무성한 크고 작은 수렁창들, 해빛을 모르는 컴컴한 동굴속... 자연계와 채 분리되기 전의 인류의 시야에 안겨온 그 우람한 그림자의 임자는 과연 무엇이였을가. 그것은 험악한 생존환경에서도 태연하고 침착하며 난관을 두려워함이 없이 역경을 헤치며 끈기있고 용감하게 앞날을 개척해가는 초자연적인 힘이였다. 그는 인간들처럼 두발로 일어서서 걷기도 하고 앞발로 적수와 싸우고 로획물을 거머쥐기도 하는 동물이였다 그는 인간들과 육체적 동질성외에 생리상의 동질성도 지니고 있었다. 그는 포유동물이였고 암컷의 생식기나 자웅의 교배방식이 인간의 그것과 흡사했다. 그는 인류에게서 아바이나 할배로 불리우는 존재였다. 인간들이 그가 듣는 데서 경칭으로 부르면 화를 자아낼 수도 있다고 우려할 만큼 그는 경외의 대상이였다. 고대에 그의 분포망은 지구의 북반구 대다수의 지역이였다. 미국의 인류학자 호로웰의 조사에 의하면 동유럽과 서유럽의 일부, 로씨야내륙, 동아시아일대, 에스키모 및 북아메리카 인디언에 이르기까지 그의 서식처였고 그를 위한 인류의 제의(의례)가 치러지던 그의 문화대였다. 그는 추운 겨울 내내 인간들의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가 눈이 녹고 얼음이 풀리고 나무잎이 파랗게 돋아나는 따뜻한 봄이 오면 엉기적엉기적 나타났다. 죽음을 극복하고 영구한 삶을 꿈꾸는 고대인들의 관념세계에서 그는 달처럼 죽음과 부활의 원리를 지닌 신비한 동물이였고 영생불멸의 신령 그 자체였다. 시인 남영전은 토템시 "곰"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쓰고 떫은 쑥맛 볼대로 보았고 창자 끊는 마늘맛 씹고 또 씹었다 별을 눈으로 달을 볼로 이슬을 피로 삼아 련꽃처럼 예쁘장한 웅녀로 변하여 이 세상 정령의 시조모 되였더라   육체나 생리상에서 동질성을 가진 동물들이 서로 전화하는 것은 원시적 신화가 즐겨 표현하는 모티프였다. 단군신화에 그는 범과 한 굴에 살았고 범과 함께 인간으로의 전환을 시도했다는데 왜 범은 실패하고 그만 성공했을가. 그의 성공비결은, 끈질긴 인내성에도 있겠지만 그와 인간들과의 동질성이 범보다 우월한 조건이였으리라. 그가 사람이 되는 조건은 인간과의 그런 동질성외에도   신기한 쑥과 마늘을 먹고 백날동안 금기를 지키는 것이였다. 말하자면 그가  인간으로 변하려면 꼭 어떤 "수속"같은 의례를  통과해야야 했던 것이다. 그것은 훗날의 성인식 같은 그런 것이였다. 인류가 유구한 모계씨족사회를 경과하던 고대에 성인식은 녀인들에게 많이 치러졌다. 소녀가 녀성으로서의 첫 성숙징조(초경)를 나타내면 일정기간 외계와의 접촉을 끊고 독특한 금기와 단련기간을 보내며 피를 정화시켜야 했다. 쑥과 마늘은 바로 피를 정화하는 식물이다.그가 하필이면 녀인으로 태여난 리유가 바로 인간들이 녀인에게 행하는 것과 흡사한 독특한 금기와 단련이라는 의례를  통과했기 때문이였다고 생각된다. 금기를 지켜낸 그는 마침내 아름다운 용모와 이슬과 같은 맑은 피를 지닌 녀인으로 변신한다. 녀인이 된 그는 모성을 지니고 아기를 가지려는 소원까지를 성취한다. 달과 같은 죽음과 재생의 원리를 지닌 그에게 달이 지닌 녀인의 생산적이미지가 적용되여  민족의 시조모로 된 것이다. 이것은 고대인의 신화적 사고로 보면 자연적이고 합리적이였다. 남영전시인은 토템시 "곰"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더운 피와 열물 젖삼아 마셨기에 어진 성미에 너그러운 풍채 갖추고 억센 의지와 의력은 근골이 되고 발톱은 쟁쟁 소리나는 도끼와 활촉이 되여 애탄이 무어랴 구걸이 무어랴 길 아닌 길을 거쳐 죽음길도 뚫고 나갔더라 .......   태고의 전설속에 엉기적 백의의 넋속에 엉기적 요원한 미래속에 엉기적   곰의 형상은 그 산악처럼 우람한 그림자에서만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주요하게 그의 내재적 성격에서 표현되고 있다. 억센 의지와 의력, 애탄과 구걸을 모르고 난관을 두려워하지 않고 용왕매진하는 그 랑만성이 곰의 내재적 성격이다. 시인은 이 시구들을 통하여 순박하고 근로하며 굴함없이 역경을 헤치고 영원히 미래를 개척하는 조선족의 상징인 곰의 토템이미지를 표현하고 있다.  
7748    토템시/ 달= 남영전, 해설= 현춘산(1) 댓글:  조회:2088  추천:0  2020-09-08
토템문화와 토템시(1) 조글로미디어 2020년7월30일  1.달, 영구한 생명력의 상징   현춘산   인간에겐 환상과 상상이라는 꿈이 있다. 꿈이 있는 인간들만이 삶과 죽음이란 이 심각하고 원천적인 과제를 가지고 있다. 밤하늘에 높이 솟아 휘영청 빛 뿌리는 달, 해처럼 뜨겁지 않고 별처럼 차지도 않으며 너무 밝지도 어둡지도 않고 둥글었다가 기울어지고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는 달은 몽롱하고 신비한 베일에 가리워있다. 삶과 죽음이란 무거운 과제를 안고 있는 인간이 달을 바라보는 시각은 어떠하였을가. 달은 둥글었다가 기울어지고 때로는 인간들의 가시권에서 완전히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난다. 우리의 선조들은 그것을 달의 죽음과 재생으로 보았다. 삶과 죽음의 문제를 두고 고민하던 인간들은 달의 반복되는 삶과 영구한 삶이 부러웠을 것이다.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는 달에다 초라하기 짝이 없을 자기의 "1회용"삶을 비추어보았을 것이다. 그리고는 달과 같이 살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달을 두고 "천년만년 살고지고"라는 노래도 나왔고 원을 이루었다가 풀어지고 풀어졌다간 다시 원을 그리는 흥겨운 "강강수월래"춤도 생겼다. 휘영청 밝은 달빛 아래 부드러운 잔디밭에서 벌어지는 흰옷차림 녀인들의  "강강수월래", 그것은 정녕 달의 원리를 상징하는 춤이 아니였던가. 고대인류의 관념세계에서 우주는 무생물들의 물리적, 기하학적 공간이 아니라 살아 숨쉬는 천체들의 생명공간이였다. 우리의 조상들은 해와 달에, 저 무수한 별들에 생명을 부여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달이 우선 숭배의 대상으로 된 것은 바로 달의 신비한 삶 때문이였으리라. 둥근 달이 점차 이지러지다가 마침내 조각을 이루고 그 조각이 조금씩 줄어들다가 사라져 버리고 다시 조각달로 소생하여 점차 커지다가 둥그러지는  달의 삶이야말로 영구한 삶이였을 것이다. 죽음을 초월하려고 모지름을 쓰는 인간에게 있어서 달이 지닌 신비한 생명의 원리와 생명의 힘은 무엇보다 친절하게 안겨왔을 것이다. 이 달의 원리에 의해 원초의 물인 바다에 밀물과 썰물이 생기고 이 달의 원리에 따라 녀인들에게 생리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달과 인간의 관계를 더욱 밀착시켰고 그래서 달은 지상만물과 인간의 운명을 주재하는 토템으로 되여왔던 것이다. 이같은 인류의 신화적 사고는 달의  죽음과 부활을 상징한 이집트의 오리시스신화나 우리 민족의 세오녀신화를 낳기도 했다. 이 두 신화에서 달의 정령인 주인공들이 사라지자 달도 빛을 잃고 주인공이 돌아오자 달이 다시 빛을 내고 있다. 이는 달의 주기적 운행을 죽음과 재생이라고 본 고대인류의 신화적 사고가 동서양을 막론하고 일치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이 바로 인류가 영원히 동경하는 달의 정령의 매력이자 토템으로서의 달에 대한 숭배였다. 남영전시인의 토템시 "달"에서의 달의 이미지도 바로 달의 원리에서 비롯돤다. "둥그러짐은 이지러지기 위함이요/이지러짐은 둥글어지기 위함이라/둥그러지고 이지러짐은 영생으로 통한 산길이다-"에서는 달의 둥글음과 이지럼에다 생명의 반복과 영생이라는 철리성을 부여하고 있으며 "강강수월래"를 묘사한 시구"풍요의 원리는 이에 따라 밀물이 되고/모성의 원리는 이에 따라 회전이 되고/생명의 원리는 이에 따라 연장이 된다"에서는 달과 물, 인간(녀인)의 일치한 원리를 천명하므로써 영구한 생명을 지닌 달은 결국 만물과 인류의 위대한 어머니라는 토템이미지를 표현하고 있다.  
7747    [세상만사] - "미술을 모르는 거 같더라"... 댓글:  조회:3173  추천:0  2020-09-08
  조영남 "국가가 지난 5년 동안 나를 화가로 키웠다, 고맙다" 2020.09.08.    화나요 좋아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11월까지 서울서 '아트 하트 화투'전 8일 서울 피카프로젝트 갤러리에서 열린 기자 간담회에 참석한 조영남. [이은주 기자] "너 소리도 안나오고 늙었으니까 (앞으로) 그림 그려서 먹고 살아라 한 거다. 국가가 나를 5년 동안 화가로 키운 거 같다. 안고마울 수가 없다."  가수 조영남(75)의 말이다. 조영남은 8일 서울 청담동 피카프로젝트에서 열린 자신의 개인전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앞으로 더 열심히 그림을 그릴 것"이라고 포부를 밝히며 이렇게 말했다. 그는 "국가가 엄청난 비용을 들여 내 선전을 해줬다. 그 일(대법원까지 간 재판)이 아니면 지금처럼 내가 호화롭게 전시를 했겠느냐"고 반문했다. 자신의 그림 대작과 관련해 2016년 사기 혐의로 기소돼 지난 6월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사안을 두고 한 말이다.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후 지난 지난달 12일부터 천안 아산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어온 그는 서울에서도 1일부터 개인전을 시작했다. 현재 천안과 서울에서 두 개의 개인전을 동시에 열고 있는 것. 이번 서울 전시에서 그는 1960년대에 그린 추상화를 비롯해, 최신작까지 약 50점의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화투, 바둑알, 소쿠리, 태극기 등을 활용한 작품들이 전시장에 걸렸다.  이날 자신을 "가수이자 현대미술 애호가"라고 소개한 그는 "지난 5년 유배생활 하는 동안 그림에 더욱 집중했고, 책을 두 권이나 썼다. 6월에 나온 책에 이어 곧이어 『시인 이상과 5인의 아이들』이 나온다"고 말했다. 그가 오랫동안 사랑해온 이상, 말러, 피카소, 아인슈타인, 니체와 가상밴드를 결성해 공연하기까지의 과정을 그들의 가상 문답과 대화로 풀어낸 이야기책이다.  이번 전시에 선보인 조영남의 신작. [피카프로젝트] 화투를 소재로 한 조연남 작품. [피카프로젝트] 지난 6월에 무죄 판결에 대한 소감을 묻는 말에 " 주변에서 1심 판결(집행유예)에 승복하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고 말한 그는 "그러면 내가 평생 사기꾼이 되는 거다. 그건 아닌 거 같아서 대법원까지 갈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이어 "(법정에 서보니) 검찰도 미술을 모르고, 변호사도, 판사도 다 모르는 거 같더라"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조영남은 또 "지난 5월 대법원에서 공청회를 열었는데, 그게 굉장히 드문 일이라고 하더라. 그때 법원에서 내게 5분간의 최후 진술 기회를 줬다. 미리 준비해간 원고를 읽는데도 막바지에 결국 내가 울먹이기까지 했다. 여자 때문에도 울어 본 적 없는데 울먹울먹하게 되더라. 지금 생각해보니 5년 동안 쌓인 설움이 북받쳤다"고 말했다.  조영남의 1980년 대 작품. 화투를 가지고 꼴라주 작업을 했다. [이은주 기자] 조영남의 1960년대 회화 작품. [이은주 기자] "고등학교 때 미술부장을 했고, 대학 3학년 때부터 그림을 그려왔다"는 그는 자신을 가리켜 "그때도 지금도 나는 아마추어 화가다. 그림은 계속 그릴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전시와 간담회를 이어가고 책을 내는 데 대해서는 "내 안티가 많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것은 내가 견뎌야 하는 것"이라면서도 "단지 오해가 풀렸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고 덧붙였다. 전시는 11월 30일까지.  /이은주 문화선임기자
7746    토템과 남영전시인 11 댓글:  조회:2489  추천:0  2020-09-03
지상토론(11)남영전 시인은 문화의 폭과 깊이를 확실히 하였다   편집/기자: [ 리철수 ] [ 길림신문 ]  [ 2020-08-06 ]          저자 오기활   《길림신문》에서 펴낸 대형구술시리즈 에서 남영전 시인은 여섯편의 구술로 토템과 성씨, 민족, 민족전통풍속, 인류운명공동체 등 관계를 체계적으로 서술하였다. 필자는 남영전 시인의 에서 문화에 대한 정의, 문화내용의 폭과 깊이를 확실히 하였다고 생각한다. 2006년 3월 20일, 필자는 길림신문사의 “귀하를 길림신문사‘연변25시'의 대외사업/기획부장으로 정식 초빙합니다”란 초빙서를 받고 ‘연변25시'의 창간, 기획, 발행 등 사업에 열성을 다했다. 그러던 와중에 3년 후인 2009년 3월 28일에 필자는 길림신문사 남영전 사장이 내준 초빙서를 받고 신문칼럼을 쓰는 일에 몰두하였다. 2019년 2월, 남영전 시인은 일본에 머물고 있는 나에게 위챗으로 자신이 집필한 라는 글을 보내면서 “오선생님, 시간이 날 때 한번 봐주시고 조언을 부탁드립니다.”라고 했다. 나는 한면으로 기쁘기도 하고 또 한면으로는 큰 압력을 느끼기도 했다. 기쁨은 중국의 이름난 시인의 한분인 남영전선생이 필자에 대한 믿음에 고마웠고 압력은 시에 대해 물에 연돌인 내가 어떻게 명시인이 내준 숙제를 완성할 수 있겠는가는 우려 때문이였다. 고민 끝에 나는 를 통독한 후 는 제목으로 남영전선생에게 답장을 올리는 형식으로 숙제를 완성하기로 했다. “남사장님, 나는 시와는 거리가 아주 멉니다. 단 소학교에 다닐 때 조선어문에서 배웠던 동요시 몇 수는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때는 고리끼의 산문시 을 암송하고 농촌오락장에서 읊기도 했고 술상에서 모주석의 시사도 몇수 쯤은 읇었으며 20대에 농촌에서 농사일을 하면서 도 사서 보면서 도깨비가 기와장을 번지듯 책장을 번졌답니다. 공자에 따르면 말(言)이 시(詩)가 되고 시가 노래로 되고 노래가 춤으로 되였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사람은 시, 노래, 춤이라는 흥으로 살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나는 지난해 일본에서 개최한 시인 윤동주연구 국제포럼에 참가하여 시의 생명력과 인류에 남겨주는 공헌을 절실히 감수하게 되였습니다. 이 기회가 밑받침이 되여 최근에는 김학송, 석화 등 몇몇 시인들의 시를 읽으면서 한층 시인을 우러러 보고 숭배하며 짤막한 시구에 슴배여 있는 시인들의 로고를 얼마라도 짐작할 수 있게 되고 감명 깊은 몇구절의 시구가 시인들의 머리에서 짜낸 고귀한 뇌즙임을 알게 되였습니다. 저는 이번 기회에 덕분으로 를 공부했고 순간이나마 일연(一然)을 만나게 되였습니다. 기실 저는 토템에 대한 개념이 없고 몇년전부터 남영전이란 성함과 더불어 토템이란 명사를 듣게 되였습니다. 저는 를 읽으면서 믿겨지기도 하고 또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어리둥절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이전에 수로왕에 대한 전설이나 이야기를 약간은 들은 바가 있었고 특히 근년에 김수철교수님의 전기를 쓰면서 김교수님의 시조가 수로왕의 여섯째 동생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수로왕을 김수철교수님의 전기에 언급하였습니다. 저는 남사장님이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는 물음과 답안을 조상들의 토템이야기에서 찾았다는 것, 절강 호주사범학원에서 남영전토템시연구를 공공과목으로 설치했고 남영전 토템시 연구가 국내 일부 대학 석사와 박사 연구생의 졸업론문제목이 되였으며 2011년에는 남영전 토템시 내용이 대학입시 모의작문시험 제목으로도 선정되였다는 등등의 점에서 남사장님이 중국시문화발전에 남긴 거족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었습니다. 썩 몇년전에 읽었던 기사가 생각납니다. 2002년 3월에 프랑스 전역에서‘시는 령혼의 갈증을 달래는 물'이라는 주제로 시인의 봄이라는 축제가 열렸습니다. 그 때 도시의 공공기념물에는 현대의 명시를 담은 기발을 걸었고 지하철과 뻐스안에는 시민들이 접하기 쉽게 짧은 시들을 비치했습니다. 축제기간에 학교 교실에서 매일 시를 읽고 음미하는 시간을 가졌으며 영화관에서도 영화상영전에 시를 랑송했습니다. 방송은 물론 연극배우와 가수들도 시의 대중화에 나섰습니다. ‘시인의 봄’포스터는 ‘시는 자연적이다. 그것은 제2의 갈증을 달래는 물'이라고 적었습니다. 우리가 시를 읽는 것 역시 시가 삶의 열정을 채워주는 령혼의 샘물이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해봅니다.” 남영전 시인은 에서 “문화란 개인과 군체를 식별하는 의식주행어의 표지이다.”라고 정의했다. 그러면서 시인은 “인간생활은 이 다섯가지를 벗어나지 못한다. 의는 복식문화를 가리키며 식은 음식문화, 주는 주거문화, 행은 사람들의 사상과 행위도덕과 풍속습관, 어는 언어를 말한다.”고 세분화 하면서 바로 이런‘5가지 자대'를 가지고 민족과 개인을 감별할 수 있다고 간결하고 통속적으로 귀납하였다. 필자는 남영전 시인의 이런 문화정의에 머리가 숙여지며 기립박수를 보낸다. 오기활 프로필: 1947년 5월 9일, 왕청현 석현진 달라자 출생.1974년, 연변농학원 축목수의학부 졸업.1986년, 연변대학 정치학부(통신학부) 졸업.연변일보사 도문주재기자, 연변일보사 해외부 기자, 대외사업부 부장, 《중국저널(月刊中國)》(한국), 《중앙경제신문》(한국) 연변지사장, 길림신문사 초빙기자, 특별기고인 《성공을 위하여》, 《부자로 가는 길》, 《일하는 멋 베푸는 삶》(정경락공저), 《시대의 맥박과 더불어 숨 쉬는 사람들》,《기업가의 인격》, 《연변축구의 발자취를 찾아서》공저,《21세기의 ‘리시진’김수철 전》, 《기자는 사회의 병을 진맥하는 의사이다》등 여러 편. 
7745    [그것이 알고싶다] - "조선어학회" 댓글:  조회:3474  추천:0  2020-09-03
한국근현대사사전 조선어학회   [ 朝鮮語學會 ] 시대명 근대/일제강점기 1931년 12월 3일, 우리말과 글의 연구를 목적으로 조직된 단체. 현재의 한글학회. 처음의 명칭은 였으며, 장지영(張志暎)·김윤경(金允經)·이윤재·이극로·최현배·이병기 등을 회원으로 하여 연구발표회와 강연회를 갖고 한글의 우수성을 선전하는 한편, 27년 2월부터 기관지 을 발간했다. 29년에는 편찬사업에 착수했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출판하지 못했다. 31년 학회 이름을 조선어학회로 바꾸고, 33년에 을 발표했다. 이는 오늘날까지도 한글표기의 기준이 되고 있다. 42년 10월 이른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회원 30여 명이 일제에 의해 검거, 투옥되었다. 해방 후 49년 한글학회로 다시 개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한글학회는 29년의 편찬사업을 이어받아 1957년 6권의 을 완간했다. 관련이미지 ① 우리의 말과 글을 지키기 위해 조선어 학회에 참여한 학자들. 이들 중 상당수는 조선어 학회 사건으로 인해 모진 고문을 받거나 감옥 생활을 하는 등 고통을 겪었다. ② 조선어 학회 사건으로 감옥 생활을 했던 국어 운동가 최현배가 쓴 글씨.우리 글사랑의 마음이 담겨 있다. ③ 8 · 15 광복 후에 조선어 학회가 만들고 미군정청의 학무국이 펴낸 첫 교과서인 《한글 첫 걸음》.출처: 한국사 사전 3 - 나라와 민족·기구와 단체·역사 인물 (촬영: ) [네이버 지식백과] 조선어학회 [朝鮮語學會] (한국근현대사사전, 한국사사전편찬회)   =================================/// 한국사 사전 3 - 나라와 민족 · 기구와 단체 · 역사 인물 조선어 학회 일제의 민족 문화 말살 정책에 맞서 우리말과 글을 연구한 학술 단체   요약 1921년에 우리말과 글을 연구하기 위해 만든 단체이다. 장지영, 이윤재, 최현배 등이 중심이 되어 활동했으며, 잡지인 《한글》을 만들고 《조선어 사전》 편찬을 시작했다. 1942년에는 일제의 탄압으로 인해 해체될 위기를 맞기도 했으며, 8 · 15 광복 후에는 ‘한글 학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시대 일제 강점기 목차 풀이 심화 풀이 우리의 말과 글을 지키기 위해 조선어 학회에 참여한 학자들. 이들 중 상당수는 조선어 학회 사건으로 인해 모진 고문을 받거나 감옥 생활을 하는 등 고통을 겪었다. ② 조선어 학회 사건으로 감옥 생활을 했던 국어 운동가 최현배가 쓴 글씨. 우리 글사랑의 마음이 담겨 있다. ③ 8 · 15 광복 후에 조선어 학회가 만들고 미군정청의 학무국이 펴낸 첫 교과서인 《한글 첫 걸음》. ① 우리의 말과 글을 지키기 위해 조선어 학회에 참여한 학자들. 이들 중 상당수는 조선어 학회 사건으로 인해 모진 고문을 받거나 감옥 생활을 하는 등 고통을 겪었다. ② 조선어 학회 사건으로 감옥 생활을 했던 국어 운동가 최현배가 쓴 글씨. 우리 글사랑의 마음이 담겨 있다. ③ 8 · 15 광복 후에 조선어 학회가 만들고 미군정청의 학무국이 펴낸 첫 교과서인 《한글 첫 걸음》. 3 · 1 운동으로 터져 나온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에 놀란 일제는 1920년대부터 우리 문화를 말살하려는 정책을 폈다. 이에 장지영, 이윤재, 최현배 등은 우리말과 글을 연구하기 위한 학회를 만들었다. 여기서 ‘학회’란 학문을 깊이 있게 연구하기 위해 만든 모임을 뜻한다. 장지영을 비롯한 국어학자들은 일제의 정책을 그대로 따르면 우리 고유의 말과 글마저 잃어버릴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들은 처음에는 ‘조선어 연구회’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 국어에 대한 연구와 강연 활동을 주로 했으며, 1927년부터 《한글》이라는 잡지를 펴냈다. 1929년에는 《조선어 사전》을 편찬하기 시작했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인해 끝을 맺지는 못했다. 1931년에는 학회의 이름을 ‘조선어 학회’로 고쳤고, 1933년에는 오늘날에도 한글 표기의 기준이 되고 있는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발표했다. 조선어 학회는 1942년에 일어난 조선어 학회 사건으로 위기를 맞았다. 일제는 1937년부터 모든 관공서에서 일본어만 쓰게 했고, 1940년부터는 학교에서 우리말을 아예 못 쓰게 했다. 우리의 말과 글은 물론 역사와 민족 정신을 말살하기 위해서였다. 그런 다음 작은 사건을 꼬투리 잡아 조선어 학회를 무너뜨리려고 했다. 몇몇 사람들을 모질게 고문해 조선어 학회가 학술 단체를 가장한 독립운동 단체라는 거짓 자백을 받아냈고, 이를 구실로 회원 33명을 잡아간 뒤 28명을 감옥에 가둔 것이다. 결국 모진 고문과 고통스러운 감옥 생활 끝에 이윤재, 한징 등은 목숨을 잃었다. 심화 일제가 조작한 조선어 학회 사건 이후 조선어 학회는 큰 타격을 입고 위축되었으나 8 · 15 광복 후에는 다시 활동을 시작했다. 1949년에는 학회의 이름을 한글 학회로 바꾸고 현재까지 활동하고 있다. 한글 학회는 1929년에 시작한 《조선어 사전》 편찬 사업을 이어받아, 1957년에 6권의 《큰사전》을 펴냈다. 조선어 학회는 국어를 연구하는 것은 물론이고 강연과 잡지 출간, 사전 편찬 등의 활동을 벌였다. 특히 조선어 학회의 학자들은 《조선어 사전》을 편찬하는 일에 힘을 쏟았는데, 일제의 탄압으로 끝을 맺지는 못했다. 사전은 해방 후 한글 학회로 이름을 바꾼 뒤에 완성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조선어 학회 - 일제의 민족 문화 말살 정책에 맞서 우리말과 글을 연구한 학술 단체 (한국사 사전 3 - 나라와 민족·기구와 단체·역사 인물)   ===========================/// 통합논술 개념어 사전 > 언어영역 조선어학회(한글학회)     교과단원 국어(상), Ⅱ. 짜임새 있는 말과 글, Ⅱ-보충 가람일기 목차 1. 교과서 속 주개념 조선어학회 2. 확장 개념 조선어학회 사건 3. 관련 지식 1) 한글맞춤법통일안 2) 외래어표기법통일안 1. 교과서 속 주개념 조선어학회 주시경 등을 중심으로 일제 강점기 전에 창립되어 식민지 기간을 거쳐 오면서 한글의 연구와 보급을 위해 앞장섰던 학술단체이다. 1908년 8월에 〈국어연구학회〉라는 이름으로 창립되었다가 이후 〈배달말글 몰음〉, 〈한글모〉, 〈조선어강습원〉 등으로 그 명칭을 바꾸면서 1931년 1월에 잘 알려진 〈조선어학회〉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일제의 조선어 말살정책에 맞서 한글을 지키고 연구하는 데 앞장섰다. 해방 이후 1949년에는 〈한글학회〉로 그 명칭을 바꾸고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조선어학회의 활동은 일제 강점기 당시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한글의 연구와 보급에 앞장 섰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개화기부터 본격적으로 사용된 한글이지만 실제로 보급되어 매체 등을 통해 대중화 된 기간이 짧은데다, 곧바로 일제의 식민지배하에 들어가게 된 상황에서 한글을 제대로 연구할 수 있는 여건은 열악한 편이었다. 이에 따라 조선어학회에서는 한글의 우수성을 알리면서 한편으로는 올바른 한글 사용을 위한 맞춤법 통일안 마련에 힘을 기울인다. 그 결과 1933년 10월에 우리 나라 최초의 ‘한글맞춤법통일안’이 발표되고 1936년 10월에는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이 나오게 된다. 학회의 활동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외래어와 외국 인명 및 지명에 관한 표기를 통일하기 위해 1941년 ‘외래어표기법통일안’을 발표한다. 여기에는 교과서에 실려 있는 〈가람일기〉의 저자 이병기 선생도 함께 참여해 국어 연구와 발전에 있어서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맞춤법과 표기법을 정비한 조선어학회는 이와 함께 우리말 사전 제작에도 박차를 가한다. 1929년부터 시작된 조선어사전 편찬 작업은 1942년 봄에 이르러 조판을 앞두고 있었으나 그 해 가을 ‘조선어학회사건’이 터지고 구성원 대다수가 검거되고 투옥되는 바람에 빛을 보지 못하고 말았다. 해방 후에는 일제 말기 조선어 말살 정책으로 인해 흐름이 끊겼던 국어교육을 되살리기 위해 〈한글첫걸음〉, 〈초등국어교본〉, 〈중등국어독본〉 등의 교과서를 편찬하여 우리말 되살리기를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또한 1945년 10월에는 10월 9일을 한글날로 바꾸어 이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일제 시대에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중단되었던 사전 편찬 사업도 다시 시작하여 1947년과 1949년 그리고 1950년에는 〈조선말 큰사전〉 1권부터 4권까지를 내고 한국전쟁 이후 1957년에 6권을 마지막으로 사전 편찬 사업을 완결지었다. 한글학회의 활동은 이후로도 계속 이어져 현재까지 수많은 사전과 고문서의 한글본을 펴내는가 하면 북한의 언어 연구와 디지털시대에 맞는 한글 연구에도 큰 기여를 하고 있다. 2. 확장 개념 조선어학회 사건 1942년 10월 일제에 의해 조선어학회 회원과 그 관련 인물들이 ‘치안유지법’의 내란죄를 적용받아 대규모로 검거되어 투옥된 사건이다. 이는 일제 말기 우리 민족의 정체성 및 언어를 완전히 말살하고자 한 일제의 발악이 빚어낸 일이라 할 수 있다. 일제는 한글 연구와 보급에 앞장섰던 조선어학회를 일찍부터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아왔는데 특히 1929년부터 시작된 〈큰사전〉 편찬 작업이 어느 정도 결실을 맺기 시작한 1940년대 초에 이르러 이 사업에 소속된 조선어학회 회원 모두를 강제해산하기 위한 술책을 꾸민다. 조선어학회 사건이 일어나기 전 일제는 먼저 함흥학생 사건을 꾸민다. 이 사건의 핵심 인물인 함흥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 박영옥이 조선어학회 사전 편찬을 맡고 있던 정태진과 관련이 있다고 보고 그해 9월 5일 그를 검거한다. 일제는 정태진이 조선어학회가 민족주의 단체로서 독립운동을 위해 활동하고 있다고 거짓 자백을 하게 만들어 10월에는 이중화, 장지영, 최현배, 이희승 등 조선어학회의 핵심 인물 11명을 검거한다. 이후 1943년 4월까지 모두 33명을 검거하여 고문을 가한다. 이들은 모두 ‘치안유지법’의 내란죄로 기소되는데 이 중 16명은 기소되고 12명은 석방된다. 기소되어 수감되었던 회원들 가운데 이윤재와 한징이 옥중에서 사망하였고, 나머지는 수감되었다가 해방으로 풀려나게 되었다. 이들은 오로지 조선의 국어인 한글을 사랑하고 이를 연구·보존하기 위해 헌신하였을 뿐이나 일제는 이들 순수 연구자들까지 민족주의 운동가로 몰아 무고한 죽음을 당하게 만든 것이다. 이 사건으로 조선어학회는 강제로 해산당했다가 해방 후 조직을 정비한 뒤 1949년 9월 ‘한글학회’로 이름을 바꾸어 재결성되었다. 3. 관련 지식 1) 한글맞춤법통일안 1933년 조선어학회가 제정 공표한 것으로 1948년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채택했다. 개화기에 우리 나라는 한글을 공용문으로 채택하였으나, 통일된 맞춤법이 없어 그 사용이 제각각이었다. 조선어학회는 1930년 12월13일 맞춤법통일안을 제정할 것을 결의하고, 이병기, 이윤재, 이희승, 최현배 등 12명이 참여하여 3년에 걸쳐 이 통일안을 만들었다. 이 통일안의 대원칙은 ① 표준말은 소리대로 적되 어법(語法)에 맞도록 하고, ② 표준말은 현재 중류사회의 서울말로 하며, ③ 각 단어는 띄어 쓰되 토는 그 앞 단어에 붙여 쓴다는 내용이었다. 이는 1988년에 〈한글맞춤법〉이 새로 나오기 전까지 우리 나라 국어 문법의 중요한 기준이었다. 2) 외래어표기법통일안 1941년에 제정된 것으로 외래어를 한국어로 적을 때는 국제음성기호를 표준으로 하지만 외래어의 원음을 완전히 나타내기 힘들 시에는 우리 나라 말에 존재하는 자모와 자형으로 바꾸어 적는다는 것이 주요 골자이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라는 시대적 한계와 외래어에 대한 생소함이 이 표기안이 널리 알려지는데 큰 장애가 되었다. 관련이미지 ① 우리의 말과 글을 지키기 위해 조선어 학회에 참여한 학자들. 이들 중 상당수는 조선어 학회 사건으로 인해 모진 고문을 받거나 감옥 생활을 하는 등 고통을 겪었다. ② 조선어 학회 사건으로 감옥 생활을 했던 국어 운동가 최현배가 쓴 글씨.우리 글사랑의 마음이 담겨 있다. ③ 8 · 15 광복 후에 조선어 학회가 만들고 미군정청의 학무국이 펴낸 첫 교과서인 《한글 첫 걸음》.출처: 한국사 사전 3 - 나라와 민족·기구와 단체·역사 인물 (촬영: ) [네이버 지식백과] 조선어학회(한글학회) (통합논술 개념어 사전, 한림학사)
7744    우아하게 삽시다 / 우상렬 댓글:  조회:2778  추천:0  2020-08-24
우리 좀 우아하게 삽시다 2020년 08월 24일 /우상렬 연길은 현재 전국문명도시를 건설하기 위해 너도나도 떨쳐나서 분발하고 있다. 일시에 새로운 면모가 펼쳐지는 듯하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도 촌티를 많이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적어도 우리는 돈에 너무 연연하는 것 같다. 천민자본주의적 냄새가 많이 풍긴다. 연길은 먹을거리가 풍성한 미식의 도시다. 조선족음식에 조선음식, 한국음식, 한족음식〜 찍고 박기다. 그런데 제법 그럴듯한 식당에 들어갔다가도 메스꺼울 때가 있다. 입구 카운트 한 귀퉁이에 황금색 구리로 실물보다 몇 배 크기로 주조한 두꺼비가 입을 쩍 벌리고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입에는 중국 돈 제일 큰 액면인 백 원짜리를 선두주자로 많은 돈을 물고 말이다. 분명 나보고 돈 달라는 메시지를 보내는 것 같다. 돈도 돈이겠지만 두꺼비 몸뚱아리에 난 특유의 우둘투둘 옴 모양이 몸서리치게 한다. 그 옴 모양이 당장 내게로 옮겨 붙을 것 같으니 말이다. 나는 이 두꺼비가 눈에 띄일 때는 자기도 모르게 몸서리치며 빠른 걸음으로 피해 달아난다. 그럼 왜 이 을씨년스러운 두꺼비를 카운트에 모셔놓았지?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두꺼비는 조선족이나 한족이나를 막론하고 민속학적으로 복두꺼비라 식당 주인이 돈을 많이 벌게 해달라는 기원을 담아 모셔놓았다고 한다. 또 어떤 식당은 보면 두꺼비보다는 좀 점잖게, 그래도 무슨 귀신딱지 같은 財神爺-재물을 가져다준다는 관우상을 모시고 있다. 그 멋진 관우님이 어찌 이렇게 속되게 변해버렸는지, 참! 그래 '잘 모셨다'. 연변대학교, 우리 조선족 교육, 문화의 메카-성지. 나는 우리 대학교 주위가 먹자골목이 되는 것도 아니꼽지만 돈 냄새를 확 풍기는 것은 더구나 꼴 볼견이다. 우리 연변대학교 정문 앞 길을 건너 좀 오른 쪽으로 치우쳐 우뚝 선 건물 꼭대기를 한 번 보라. 거기에 돈이 박혀있지 않은가. 옛 날의 구리엽전 모양을 크게 주조하여 말이다. 물론 구리엽전 모양이되 변형을 주고 있다. '상평통보' 같은 글자가 박혀있을 주변에 태극무늬를 박아 넣은 것이 다르다. 그러나 전반적인 이미지는 분명 구리엽전을 연상시킨다. 그 태극무늬는 세상이 아무리 변화무쌍해도 돈만 많이 벌게 해달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 같다. 이 구리엽전이 전반 건물의 중간지점 꼭대기에 척 붙어있으니 돈, 돈, 돈을 부르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 세상의 모든 돈은 우리 건물 안으로 말이다. 그래 건물주의 '포부'도 참 야무져! 요새 우리 중국도 좋은 일이 많은 것 같다. 쩍 하면 시상식이 아니더냐. 무슨, 무슨 상이 어쩌면 그렇게도 많은지! 사실 이상할 것도 없지. 좋은 일, 좋은 사람이 있으면 표창하고 상을 주고 해야지. 좋은 일, 좋은 사람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 않은가. 그런데 문제는 상에 따르는 상금이로다. 요새 시장경제니 맨 입으로 표창만 하고 상장만 줘서는 안 통한다. 상응한 상금을 주는 것도 정상적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굳이 이 상금액수를 큰 간판에 큰 수자로 달달달 써서 사회자가 큰 소리로 돈 수자를 또박또박 외우면 수상자는 두 손으로 그 큰 간판을 높이 들어 흔들어대며 거들먹거리니 말이다. 그래 정말 '잘 났다'! 이 세상 돈 참 좋지. 이 세상 돈 싫어할 놈 있나 말이다. 그래도 우리는 사람 먼저 있고 돈이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 돈을 좀 우습게 볼 줄 알아야 한다. 물론 돈 없으면 살기 힘든 세상이니깐 정당하게 돈을 벌어야 할 뿐만 아니라 챙겨야 한다. 그렇다하여 돈 욕심을 내는 것은 꼴불견이다. 위의 행태들은 바로 돈 욕심을 너무 속되게 노골적으로 격에 안 맞게 드러낸데 문제점이 있다. 돈에 있어서 우리는 양반정신, 귀족정신을 좀 갖출 필요가 있다. 옛날 우리의 진정한 양반들은 돈과 거리가 멀었다. 청빈함을 생활의 지조로 삼았다. 아예 돈에 대한 욕심을 버렸다. 정신  적인 우아함을 많이 추구했다. 나는 그래도 한국에 아직 이런 양반정신이 좀 남아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중국 사람들은 돈을 직설적으로 말하고 직접 만지기 좋아하는 것 같은데 한국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다음 디테일을 보자. 돈, 돈, 돈... 한국 사람들은 치사한 감이 들어 직접 거론하기를 좀 난감해하고 월급봉투는 더 말할 것도 없고 경조사나 남에게 큰 돈을 줄 때도 봉투에 넣어 건네는 것이 일반적인 관습으로 되어 있지 않은가. 우리가 지금도 너도나도 이전에 양반이었다고 하는 데는 적어도 이런 정신적인 우아함을 많이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돈을 둘러싼 유렵의 귀족정신이란 것도 그렇다. 귀족들은 돈에 그리 연연하지 않고 우습게 보아오기도 했다. 정신적인 우아함 내지 도고함을 추구했다. 이에 반해 귀족들을 치고 올라오는 초기 자산계급들은 돈이라 하면 눈에 벌개서 설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이에 19세기 비판적 사실주의대가 발자크는 멸망해가는 귀족에 대해 지대한 동정을 보냈고 욱일승천하는 돈의 구린내가 나는 천민자본주의에 대해 질타했던 것이다. 그래 우리는 양반정신과 귀족정신에서 분명 본받을 것이 있다. 적어도 이 욕망시대 돈에서 초탈하는 우아한 모습을 배우야 한다. 양반과 귀족은 돈이 많아서 그럴 수 있다고? 물론 돈이 많아서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우아한 모습은 돈이 많고 적고를 떠나 하나의 마인드고 삶의 자세다. 연길시를 전국문명도시로 건설하고 우리 매개 시민이 문명시민으로 되는 데는 바로 이런 우아한 모습이 필요하다. 우리 좀 우아하게 삽시다!        2020.8.23 /동북아신문
7743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쥐문제",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3566  추천:0  2020-08-24
  쥐들의 천국 된 홍콩... 코로나가 쥐떼를 불러냈다  2020.08.24.    화나요 슬퍼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홍콩에 악명 높은 그들이 나타났다. 홍콩 점령한 쥐떼에 관한 보도 이미지/동방일보 홍콩에서 테이크 아웃한 음식을 야외 공간인 공원에서 먹는 이들이 많아지면서 쥐떼가 도심에 출몰하기 시작했다. 24일 홍콩 동방일보(東方日報)는 “홍콩 정부가 지난달 코로나 확산 대응을 위해 저녁 시간 식당 내 식사를 금지하자 사람들이 야외에서 포장 음식을 먹고 있다”며 “주변에 쓰레기통이 부족한데다 제대로 치우는 사람도 적어 음식물 쓰레기가 도심 곳곳에 넘쳐나기 시작했다”고 보도했다. 홍콩에서 테이크아웃이 늘면서 길거리 휴지통이 부족해졌다/동방일보 음식물이 널부러진 벤치나 휴지통 주변은 쥐들에게 최고의 뷔페 식당이 된다. 밤이 되면 쥐떼가 몰려와 음식물 포장지를 핥고 쓰레기 더미 속에서 남은 음식을 찾아 헤멘다. 코로나로 인해 오래 굶주렸던 쥐들은 겁도 없어 사람들 신발 사이를 뛰어다니거나, 공원 벤치에 올라타는 과감함을 보여준다. 홍콩의 환경단체들은 정부가 식당 내 식사를 금지하면서 그에 따른 대책을 세우지 않아 도시 위생이 위협받고 있다고 지적한다. 청소부들은 이미 손을 놓은 상태다. 워낙 많은 쓰레기가 버려지고 있지만 충원은 제대로 이뤄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벌찬 기자
7742    [세상만사] - 가위 바위 보 댓글:  조회:4015  추천:0  2020-08-16
‘가위바위보 43연승’ 전문가가 밝힌 이기는 비법은? 2020.08.16.  화나요  좋아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서울신문 나우뉴스] ‘가위바위보 43연승’ 전문가가 밝힌 이기는 비법은?(사진=123rf)살면서 가위바위보 한 번 안 해본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이는 준비물도 필요 없고 규칙도 간단해 승자를 정해야 할 때 비교적 공정하게 할 수 있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가위바위보도 행운보다 요령이 크게 작용하는 모양이다. 가위바위보로 세계 대회까지 열고 있는 ‘세계가위바위보협회’(WRPSA)의 와이어트 볼드윈 회장은 최근 미국 과학매체 ‘인버스’와의 인터뷰에서 ‘가위바위보를 행운에 의지하지 않고 이기는 법’에 대해 밝혔다.‘세계가위바위보협회’(WRPSA)의 홈페이지 화면(사진=WRPSA)5년 전인 2015년 설립된 WRPSA는 가위바위보를 경기 수준으로 하기 위한 협회다. 이 협회는 가위바위보가 매력적인 이유로 “나이 제한이 존재하지 않는다”, “근력 운동이 필요 없다”, “타고난 재능에 좌우되지 않는다”, “사전 준비가 필요 없다”, “시합 종료 뒤 뒷처리가 필요 없다”, “나이나 성별에 결과가 좌우되지 않는다” 등의 장점을 들며, 가위바위보가 지닌 공정성과 편리성 등을 강조한다. 그런 WRPSA의 수장인 볼드윈 회장은 43연승이라는 대기록을 지닌 확고한 가위바위보 마니아다. 이 협회를 운영하면서도 동서양의 가위바위보 규칙이나 전략에 대해 망라한 ‘가위바위보 핸드북’(The Rock Paper Scissors Handbook과 가위·바위·보를 의인화해 그 우정을 그린 가위바위보 학습용 그림책 ‘가위바위보 이야기’(The Rock PaperScissors Story)를 출판하는 등 가위바위보 보급에 힘써 왔다.2006년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가위바위보 대회의 한 장면(사진=유튜브)볼드윈 회장은 “경쟁할 수 있는 것은 스포츠이므로, 가위바위보 역시 스포츠”라고 단언했다. 그런 그가 가위바위보에서 이기기 위한 요령으로 “먼저 내지 않는다”, “무작위로 낸다”, “상대를 읽어라”라는 세 가지 팁이 가장 중요하다고 밝혔다. 그에 따르면, 가위바위보에 능숙해지려면 가장 먼저 승부 전 무언가를 내려고 생각할 때 드러나는 일종의 준비 동작을 하지 않는 것이다. 초보자는 주먹을 내기 직전 손을 너무 꽉 쥐고 있거나 가위를 내기 직전 검지를 조금 벌리는 경향이 있어 앞으로 내놓을 손을 상대에게 알려주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볼드윈 회장은 “준비 동작은 가장 좋지 못한 습관으로 이를 하면 심리적인 함정에 빠질 가능성이 큰 초보임을 들키게 된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가위바위보를 할 때는 타이밍에 맞춰 손을 내밀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특히 가위바위보의 핵심은 무작위로 내는 것이 최고라고 그는 말했다. 가위바위보를 각각 3분의 1의 확률로 내는 전략은 상대로 하여금 다음 수를 예측할 수 없게 해 내쉬 균형이라는 게임 이론이 적용된다. 하지만 사람에게 있어 무작위로 손을 내는 것이 극히 어렵다는 것이 연구에서도 밝혀진 바 있다. 참가자 354명에게 각각 300회 가위바위보를 하게 한 중국 저장대의 실험 연구에 따르면 이들 참가자가 내는 손에는 두 가지 경향이 인정됐다. 첫 번째 경향은 이기고 있는 손을 바꾸지 않는다는 것. 참가자는 이기고 있을 경우 그 손을 고집하며 지고 있으면 손을 바꾸는 경향을 보였다. 두 번째 경향은 일정한 법칙으로 손을 바꾼다는 것. 손을 바꾸는 경우에는 바위에서 보, 보에서 가위, 가위에서 바위로 손을 바꾸는 데 반대 방향으로는 그다지 손을 바꾸지 않았다. 또 WRPSA의 조사에 따르면, 통계적으로는 바위을 낼 확률이 35.4%, 보를 낼 확률은 35%, 가위를 낼 확률은 29.6%이다. 볼드윈 회장은 “최고의 가위바위보 선수는 이런 차이를 이해하고 있다”고 말했다. ‘상대를 읽어라’는 팁에 대해서는 ‘가위바위보계의 마이클·조던’으로 불리며 2002년과 2003년 세계 대회를 제패한 팀에 소속해 있던 켄 왓슨의 전략에 대해 그는 설명했다. 예를 들어 왓슨은 강한 남자로 보이는 상대에게 “당신을 보면 마초 같아서 당신은 바위를 낼 것 같다”고 말한다. 그러면 상대가 “심리학자냐?”고 되묻는데 그러면 “TV에서는 그렇게 보였다”와 같은 이유를 댄다. 그러고 나서 그는 상대가 바위를 내지 않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가위를 낸다. 만일 상대가 보가 아니라 가위를 냈다고 해도 그는 그다음에도 가위를 낸다. 이때도 상대는 바위 대신 보를 내기 때문이다. 물론 그의 이런 추측이 항상 맞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볼드윈 회장은 이런 전략은 상당히 중요하다고 말했다. 경험이 풍부한 선수 중에는 상대의 심리 공격을 피하기 위해 눈을 감거나 무작위로 내기 위해 3~5수 뒤까지 정해두는 사람도 있다. 볼드윈 회장은 경기로서 가위바위보에 도전할 때 중요하게 평가하는 점은 “상대가 인간적인 편견을 갖게 하면서도 자신은 편견을 갖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승리의 관건에 대해 “가위바위보 전략을 잘 알고 있는 선수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다 알고 있어 가위바위보에 강하다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윤태희 기자 
7741    [세상만사] - 개와 모성애... 댓글:  조회:3864  추천:0  2020-08-14
새끼 구하려 강물에 뛰어든 어미 개 모성애...    2020.08.14.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중국 쓰촨성 메이산의 한 남성이 폭우에 휩쓸려간 어미 개와 강아지 4마리를 구조하고 있다. 신랑망 등 중국 매체 캡쳐. 【베이징=정지우 특파원】집중 호우에 떠내려간 강아지를 구하기 위해 강물로 뛰어든 어미 개의 모성애가 중국 네티즌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 한국에서도 집중 호우로 흙더미에 파묻혔던 강아지 4마리가 어미 개의 필사적인 노력에 극적으로 구조됐었다.  14일 신랑망 등 중국 매체에 따르면 지난 12일 쓰촨성 메이산의 폭우로 떠돌이 어미 개와 강아지 4마리의 보금자리가 물에 잠겼고 이를 발견한 주민들 중 한 남성이 물속에 들어가 이들을 구해냈다.  하지만 불어난 물속에는 다른 강아지 1마리가 아직 남아 있었다. 이 남성이 다시 강아지를 구하려 했지만 안전을 염려한 경찰이 막아섰다.  중국 쓰촨성 메이산의 폭우에 강아지가 휩쓸려가자, 어미 개가 경찰을 피해 물속으로 뛰어들고 있다. 신랑망 등 중국 매체 캡쳐. 그러나 어미 개는 경찰의 제지에 아랑곳 하지 않고 물속으로 뛰어 들었다. 맹렬한 기세의 물살에도 이 어미 개는 강아지에게 헤엄쳐 접근한 뒤 입으로 물고 겨우 물 밖으로 벗어났다.  현장에서 이를 지켜본 주민들은 어미 개를 향해 환호하며 박수를 쳤다. 네티즌들도 ‘모성애는 위대하다’ 등의 댓글을 달며 찬사를 보냈다. 어미 개와 강아지는 현장에 있던 주민이 입양해 보살피고 있다고 중국 매체는 전했다.  중국 쓰촨성 메이산의 폭우에 강아지가 휩쓸려가자, 어미 개가 입에 물고 물 밖으로 헤엄치고 있다. 신랑망 등 중국 매체 캡쳐. /정지우 기자
7740    [별의별] - "..." 댓글:  조회:4010  추천:0  2020-07-19
  구두 날아들고... 달걀에 맞고... 2020.07.19.  화나요  좋아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beta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물병과 달걀과 신발...정치인의 투척 수난史] 文, 대선 후보시절 물병 날아와..."처벌 안원해" 노무현 계란 봉변만 4번..."맞아줘야 국민 화풀려" 힐러리 클린턴 전 미 국무장관이 2014년 4월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에서 연설하는 도중 한 여성이 무대 쪽으로 신발을 집어던지자 움찔하며 피하고 있다. /조선DB 일반인이 국회 경내에서 대통령에게 접근해 신발을 던지며 위협을 가하는 일이 벌어졌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2년 대선 후보 시절에도 ‘물병 투척’ 봉변을 당한 적이 있다. 당시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는 포용적 차원에서 처벌을 원치 않는단 입장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청와대는 신발 투척 사건에 대한 공식 입장을 내지 않고 있다. 국내·외 유력 정치인은 이처럼 ‘정치적 항의’ 표시로 이런 공격을 심심찮게 받는다. 투척 소재는 신발과 물병, 계란 등 다양하다. ‘투척 공격’을 받은 정치인들의 반응도 엇갈린다. 지난 16일 오후 정모씨가 국회 본청 인근 계단 앞에서 21대 국회 개원식을 마치고 돌아가는 문재인 대통령을 향해 신발을 던지고 "북한인권 무시" 등의 구호를 외쳤다가 제지 당하고 있다. /조선DB 국회 신발 투척에 경찰 체포 후 구속영장 신청…이날 밤 기각 국회를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에게 신발을 벗어 던진 정모(57)씨는 19일 구속을 면했다. 정씨는 지난 16일 오후 3시30분쯤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본관 앞 계단에서 차량에 탑승하려던 문 대통령을 향해 자신의 검은색 구두 한 짝을 벗어 던지며 "가짜 평화 위선자 문재인은 당장 자유 대한민국을 떠나라!"고 외쳤다. 당시 문 대통령은 국회 개원 연설을 마치구 국회를 나서는 길이었다. 이 신발은 문 대통령 몇m 앞에 떨어졌다. 현장에 있던 경찰이 정씨를 곧바로 둘러싸고 제압했다. 이 과정에서 정씨는 "빨갱이 문재인을 당장 끌어내야 한다" "가짜 인권주의자, 가짜 평화주의자 문재인"이라고 외쳤다. 정씨는 일부러 문 대통령에게 신발을 던지기 위해 국회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그는 경찰에 연행되면서도 "(신발을) 문재인을 향해 던졌으니 그 사람(문 대통령) 보고 고소하라고 하라"고 소리쳤다. 경찰은 17일 정씨에게 공무집행방해 및 건조물침입 혐의를 적용해 구속영장을 신청했고 이날 오후 2시부터 서울남부지법은 정씨에 대한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을 진행했다. 정씨에 대한 구속 영장은 이날 오후 11시쯤 기각됐다. 지난 16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본청 인근 계단 앞에서 21대 국회 개원식을 마치고 돌아가는 문재인 대통령을 향해 던진 정모씨의 신발이 본청 계단 앞에 떨어져 있다. /뉴시스 날아드는 신발 피하고… 대수롭지 않게 웃어넘긴 외국 정치권 존 하워드 전 호주 총리는 2010년 10월 호주 공영 방송 ABC 채널 시사 프로그램에 나와 Q&A(질의·응답) 시간을 가지던 도중 신발 투척 봉변을 당했다. 방청객 중 한 남성이 "이라크의 죽은 사람과 산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며 하워드 전 총리를 향해 신발 두 짝을 던진 것이다. 그러나 신발은 하워드 전 총리를 비켜갔고 신발을 던진 남성은 스튜디오 밖으로 끌려나갔다. 당황한 사회자의 사과에 하워드 전 총리는 "괜찮다"며 웃어넘겼다. 존 하워드 전 호주 총리가 생방송 도중 한 방청객으로부터 신발투척의 봉변을 당했다. /ABC Q&A 방송 캡쳐 2008년 12월 이라크를 깜짝 방문한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도 기자회견 도중 날아오는 신발과 마주해야 했다. 알 바그다디아 방송의 기자 문타다르 알자이디는 신발을 내던지며 "이라크의 과부와 고아, 미국에 살해당한 이라크 사람들의 몫"이라고 외쳤다. 부시 대통령이 재빨리 피해 맞지는 않았다. 부시 전 대통령은 사건 직후 “이런 일도 일어나는 것이 자유로운 사회”라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알자이디는 현지에서 외국 원수를 모독한 죄로 기소돼 1년형을 선고받았으나 9개월 만에 가석방됐고 사건 10년 뒤 이라크 총선에 출마해 당선됐다. 알자이디 기자가 던진 신발(점선)이 날아들자 조지 부시(왼쪽) 미 대통령이 고개를 숙이며 피하고 있다. /유튜브 힐러리 클린턴 전 미 국무장관이 날아오는 구두를 피하고 농담까지 던지는 재치를 발휘한 일화도 유명하다. 클린턴 전 장관은 2014년 4월 라스베이거스에서 연설을 하다 한 여성이 집어던진 구두 한 짝을 피한 후 이렇게 말했다. "누군가 저에게 뭘 던진 건가요? 설마 '태양의 서커스' 공연 일부는 아니겠죠? 신발을 던진 사람이 과거 나처럼 소프트볼을 하지 않아서 다행이네요." 연설 도중 날아든 신발을 피한 힐러리 클린턴 전 미 국무장관의 모습. /조선DB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은 2012년 2월 차량을 타고 팔레스타인 가자지구를 지나다가 시위대가 던진 신발에 맞는 봉변을 당했다. 반 전 총장이 탄 차량은 당시 도로에서 이스라엘 교도소에 수감 중인 팔레스타인 재소자의 친척 40여 명에게 둘러싸였다. 시위대는 영어와 아랍어로 '반기문, 이스라엘을 지나치게 편애한다'고 적힌 피켓을 들고 인간띠를 만들어 반 총장의 차량 행렬 이동을 저지하려 했다. 팔레스타인 시위대 중 2명은 반 총장이 탑승한 차량을 향해 신발을 던졌다. 이후 반 총장은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 보안요원의 도움을 받아 가자지구에 들어갈 수 있었다. ’계란 봉변’ 盧 “정치인 한번씩 맞아줘야 국민 화 풀려” 2002년 11월 13일 서울에서 열린 전국농민대회에 참석한 민주당 노무현 후보가 연설하다 한.칠레 자유무역협정에 반대하는 사람이 던진 달걀에 턱을 맞고 입을 감싸고 있다. 노 후보 옷에도 달걀이 튀었다. /조선DB 문 대통령의 평생 동지였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 계란 봉변을 받은 것은 알려진 것만 모두 4번이다. 노 전 대통령이 처음으로 계란과 ‘인연’을 맺은 것은 지난 1990년. 당시 3당 합당에 반대했던 노 전 대통령은 부산역 앞 시민집회에서 계란을 맞았다. 이어 민주당 고문시절인 2001년 5월에도 대우자동차 부평공장을 방문했다가 계란세례를 받았고, 민주당 대선후보 시절인 지난 2002년 11월 13일 서울 여의도에서 열린 ‘우리 쌀 지키기 전국농민대회’에 연설을 하는 도중 참석자가 던진 계란에 얼굴을 맞았다. 계란을 닦아낸 뒤 연설을 마친 노 전 대통령은 “달걀을 맞아 일이 풀리면 얼마든 맞겠다”는 명언을 남겼다. 노 전 대통령은 이튿날 ‘계란 봉변’에 대한 기자들의 질문이 이어지자 “정치하는 사람들이 한번씩 맞아줘야 국민들 화가 좀 안 풀리겠냐. 계란을 맞고 나면 문제가 잘 풀렸다”고 웃어넘겼다. 이후 노 전 대통령은 2009년 4월 리무진 버스를 타고 대검청사 정문을 통과하다가 보수단체 회원들이 버스 쪽으로 던진 신발 한 짝과 날계란 5~6개를 맞았다. YS·MB도 계란 봉변…이회창은 “계란마사지 받아 예뻐졌다” 농담 김영삼 전 대통령이 1999년 6월 3일 일본 출국을 위해 김포공항에 나갔다가 왼쪽 얼굴애 붉은 페인트 세례를 받았다. 부인 손명순씨가 놀라 걱정스런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다. /조선DB 노 전 대통령뿐만 아니라 김영삼·전두환 전 대통령도 퇴임 이후 계란봉변을 당했다. 지난 1999년 6월 3일 퇴임 후 일본으로 첫 외국출장을 가기 위해 김포공항에 나왔던 김 전 대통령은 재미교포 박의정(당시 71세)가 던진 계란에 이마에 맞았다. 계란에는 빨간색 유성페인트가 들어 있었다. 김 전 대통령은 얼굴과 상의에 빨간색 페인트가 가득 묻은 채 황급히 자리를 피했다. 김 전 대통령은 이후 기자회견을 통해 “계획적이고 살인적인 행위”라며 정치테러설을 주장했다. 경찰은 박씨를 구속하고 배후에 대해 조사했으나 결국 단독범행으로 결론지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지난 1998년 11월 17일 전남 순천 선암사에서 거행된 ‘국난극복 참회 대법회’에 참석하기 위해 부인 이순자 여사 등 일행과 함께 광주공항에 도착해 차량을 타고 정문을 빠져나가다 20~30대 청년 5~6명에게 날계란 세례를 받았다. 이회창 전 총재는 무소속으로 출마했던 지난 2007년 11월 13일 대구 서문시장을 방문했다 이모(당시 32세)씨가 던진 달걀 두개에 이마와 볼을 맞았다. /조선DB 이회창 전 자유선진당 총재와 이명박 전 대통령도 대선 후보 시절 계란 때문에 수난을 당했다. 이 전 총재는 무소속으로 출마했던 지난 2007년 11월 13일 대구 서문시장을 방문했다가 이모(당시 32세)씨가 던진 달걀 두 개에 이마와 볼을 맞았다. 이씨는 현장에서 지지자들에게 붙잡혀 경찰에 넘겨졌다. 이 후보는 이후 “계란 마사지를 받아 얼굴이 예뻐졌다”는 농담으로 웃어넘겼다. 경찰은 이틀 뒤 이씨를 공직선거 및 선거부정방지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 입건하고 석방했다. 2007년 12월 3일에는 당시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가 경기 의정부 중앙로 앞 거리 유세에 들어가기 위해 차량 연단에 오르던 중 왼쪽 허리 부근에 계란을 맞았다. 달걀을 던진 사람은 스님 복장을 한 50~60대 남성이었다. 이 후보는 코트의 가슴 및 왼쪽 허리 부분에 계란이 묻은 채 곧바로 바로 연설에 들어갔다. 계란을 던진 남성은 현장에서 체포돼 경찰서로 연행됐다. 2007년 12월 당시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가 경기 의정부 중앙로에서 허리에 계란을 맞고 옷을 갈아입지 못한 채 유세를 하고 있다. /조선DB 주한 미국 대사관에도 신발 날아들었으나…경찰 현행범 체포는 0명 작년 11월 30일 민노총·민중당 등 좌파 또는 친북 성향 단체 50여개로 구성된 '민중공동행동' 소속 수천~1만여명은 서울 광화문광장에 모여 '전국민중대회'를 열었다. 이들은 집회 도중 "미국의 방위비분담금 인상 요구에 반대한다"며 주한 미국 대사관을 향해 신발과 물병 등을 던졌다. 경찰의 제지에도 신발이 계속 날아들자 경찰은 대사관 주변의 경찰 버스 위에 그물망을 설치해 신발이 대사관 담장을 넘지 못하도록 막았다. 집회 참가자들은 오후 5시쯤엔 청와대 사랑채로 행진하면서, 미리 준비해온 횃불 30여개를 꺼내 들고 불을 붙였다. 경찰은 당시 이들중 단 한 명도 현행범으로 체포하지 않았다. 2019년 11월 30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2019 전국민중대회'에서 참가자들이 던진 신발이 주한 미국 대사관을 향해 날아가고 있다. /오종찬 기자 문 대통령, 후보 시절 물병 투척사건 땐 “처벌 원하지 않아” 2012년 10월 14일 문재인 당시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는 서울 효창운동장에서 열린 ‘제30회 대통령기 이북도민체육대회’에 참석했다. 이때 김모씨 등 참석자 10여명은 문 후보를 향해 500㎖ 물병 10여개를 던졌고, 문 후보 주변에 있던 여기자가 물병에 맞아 이마에 타박상을 입고 병원 치료를 받기도 했다. 물병을 투척한 이들은 ‘친북 종북세력 물러가라’ ‘햇볕 정책 폐기하라’ 같은 구호가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문 후보를 향해 “빨리 지나가라, 개××” “밥맛 떨어진다” 등의 욕설을 하기도 했다. 당시 경찰은 공직선거법상 선거의 자유방해 등 혐의로 수사에 나섰으나, 문 후보는 물병 투척사건에 대해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입장이었다. 문 후보 주변에 날아온 물병과 문 대통령 근처에 떨어진 신발이 다르게 느껴지는 이유다.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가 2012년 10월 서울 용산구 효창운동장에서 열린 이북도민 체육대회에서 참가자들에게 인사하고 있는 가운데 관중석에서 물병(빨간 점선 안)이 날아들고 있다. 문 후보는 경호원들이 에워싸 물병 공격을 피했지만 일부 수행원과 기자가 물병에 맞아 얼굴을 다쳤다. /사진공동취재단 /이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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